별똥별의 노래
                    최송연 

반짝이는 별이라 
착각하던 한 영혼이 
새벽별  되신 그분을 만났다네 

그분을 만난 후 
난 내 실체를 알게 되었지 

나는 별이 아니라 
황량한 들판에 떨어져 뒹구는 
한 조각 운석(隕石)일 뿐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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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절망과 소망의 두 얼굴 요나서 1장 1절-2장 10절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이제라도 하나님 한 분 붙잡고 제대로 해보는 수밖에 없어”

 

작금 한국교회가 처해 있는 현실은 “비난 받는 한국교회”라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사회도, 여론도, 각종의 반기독교 단체들도 교회에 대하여는 욕설 섞인 막말 비난을 쏟아내기를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계의 어른이라 일컬어지는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도 어떤 이들은 하나 같이 한국교회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난의 화살들은 대부분 목회현장의 지도자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비난과 비판들은 대부분 그럴만한 이유와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이 지경으로 모욕적인 비난을 받게 된 현실에 대하여 부끄럽고 면목이 없어 하며 깊은 시름에 잠겨 지내고 있습니다.

 

물론 어느 기독교연합단체는 자기들의 처신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20여개의 신학교와 200명 가까운 신학자들에게 업무를 방해하고 명예를 훼손했으니 10억씩의 손해배상을 하라며 소송을 제기하는 기괴한 행태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실정법 위반으로 옥살이를 하거나 그보다 더 치욕적인 지탄을 받으면서도 예수의 이름을 들먹이며 꿋꿋이 자기의 길을 가겠다고 결의를 다지는 뻔뻔스러운 몇몇 대형 교회 목회자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반면에 한국교회의 절대다수의 목회자들은 모욕당하는 기독교가 되어버린 현실에 대하여 공동의 책임과 죄책을 느끼며 좌절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 기독교는 이제 헤어 나올 수 없는 좌절과 절망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전과 같은 교세의 확장과 재정적 풍요를 누리는 세상은 앞으로 상당기간 동안, 아니면 영영 다시 오지 않을 것이란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목 좋은 곳에 건물을 세워놓아도 교인이 저절로 몰려오는 세상은 이미 지나갔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잃어버린 공적인 신뢰나 영향력의 실추를 만회하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도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많은 신학교들은 닥쳐오는 생존의 위기를 의식하며 돌파구를 찾기 위하여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우리의 안목을 조금만 바꾸어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눈으로 이 현실을 들여다본다면 이 절망이 그 자체로 끝장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한국교회의 이러한 절망스러운 상황은 우연히 일어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히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서 저절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도 아닙니다. 마치 반역한 선지자 요나를 폭풍으로부터 물고기 뱃속까지 몰아가시고, 다시 마른 박넝쿨 앞까지 몰아가셔서 결국 하나님께서 의도한 곳에 그가 이르도록 요나에게 집착하셨던 것처럼 지금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한국교회를 막다른 길로 내몰고 계시는 것이 분명해보입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막다른 길로 내몰리면서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은 매우 중요한 사실들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단시일에 대형교회가 될 수 있는 세상도 아니거니와, 대형교회라는 사실로 아무데서나 모든 일에 대하여 위세가 통하는 세상도 아니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지난 세월 얼마동안은 대형교회라는 이유만으로도, 혹은 대형교회로 교회를 성장시켰다는 이유만으로도 영웅이 되고 모든 것이 정당화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 대형교회들이 무너지고 있고, 대형교회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비난을 받는 세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가 특별한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주특기를 개발하여 그것을 특성화함으로써 부각이 되어 위세를 떨치는 것도 이제는 더 이상 먹히지 않는 세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회는 그것이 교회라는 사실 자체로 교회를 비난하는 세상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몰리는 현실 속에서 이러한 사실들을 실감하는 교회는 결국 한 가지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 한 분 붙잡고 제대로나 해보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한국교회가 이 결론에 이르도록 우리를 몰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는 이런 야심 저런 욕구 다 내려놓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신자다운 신자, 교회다운 교회가 되는 일에 모든 것을 걸겠다는 결론으로 우리는 내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우리는 훨씬 더 가난하게 살고, 훨씬 더 소외와 배척과 모욕을 당하면서 힘들고 고단한 삶을 살기로 작정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절망의 긴 터널의 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한국교회의 새 역사의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그 후에야 이 사회는 다시 한국교회를 신뢰하고 교회에게 영향을 받고자 할 것입니다. 아니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흡족해 하실 것입니다.

 

신자의 목적은 어떻게든 살아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가를 치르면서라도 신자가 되는 데 있습니다. 교회의 목적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부흥하고 또 살아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문을 닫고 망하는 한이 있어도 교회가 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길에 들어서라는 하나님의 요구에 직면하고 있으며, 그것이 절망적인 우리의 현실이 담고 있는 놀라운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http://rpress.or.kr/xe/337620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차가워진 당신의 체온 

체온이 1도 상승하면 
면역력은 삼십몇 퍼센트나 증가한다.
거꾸로 체온이 저하하면 면역력은 떨어진다.
암세포도 35도의 체온에서 가장 빨리 증가하고 
39.3도 체온에서 사멸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야생 동물들은 의사도 간호사도 병원도 없지만 
병이 나거나 상처를 입었을 때 절식을 하거나 
몸에 열을 내어 몸 상태를 원상 복구한다. 
이처럼 체온은 건강에 매우 중요하다. 

- 이시하라 유미의《체온 혁명》중에서 -

* 몸의 체온에 더해 마음의 체온도 중요합니다.
마음이 차가운 사람은 그 주변도 싸늘합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어야 그의 얼굴도
그의 주변도 화사해집니다. -(옮긴 글)

위선으로 포장된 얼굴은 어둡고 칙칙합니다...
거짓을 버리고 진실함을 택하십시오

한 번 가면 두 번 찾지 않는 시간들 따스하고 진솔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세요 주께서 그대 편이 되어주시면 따스한 사랑의 빛이 그대 눈동자의 별꽃으로 피어날 테니까요.

  -사랑의 배달부 별똥별/최송연 드림^^

 


    부유한 사회 라오디게아의 교만은 전염성이 있어 그리스도인들은 그 몹쓸 병에 걸렸다. 자랑의 영이 교회로 스며들어 독을 뿜어댔고, 교인들은 은근히 뻐기며 자기만족에 빠졌다. 예수 그리스도는 직설적으로 그들의 속을 들추어내셔야만 했고, 그래서 그분은 말을 빙빙 돌리지 않으셨다. 그들은 자기들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눈멀고 벌거벗은 거지로 표현하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했고 과연 황제의 보조금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였다. -존 스토트의 [내가 사랑하는 교회에게] 중에서- 신앙은 자기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나님을 겸손하게 찾는 것입니다. 자신을 자랑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살고, 그분의 사랑으로 새로워지는 우리입니다. 지혜로운 인생의 건축자는 나의 자랑을 내려놓고 주님을 바라봅니다. [새벽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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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윤리·도덕보다 파격적 ‘교리 개혁’ 필요”

 

[인터뷰] 「교황 신드롬」 펴낸 최덕성 박사

▲최덕성 박사.


“신학자는 자기 시대에 필요한 신학적 과제에 답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힘든 작업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이것만은 인정해 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최덕성 박사(브니엘신학교 총장)는 자신의 말처럼, 교계와 사회의 주요 이슈에 대해 적극 연구해왔다. 2013년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부산총회와 관련해 <신학충돌 Ⅰ: 기독교와 세계교회협의회>와 <신학충돌 Ⅱ: 한국교회와 세계교회협의회>를 잇따라 펴내며 경고했다. 이전에도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일본 기독교의 양심선언>, <종교개혁 전야>, <쌍두마차 시대> 등과 영(英)서 ‘Korean Christianity’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런 최 박사는 지난해 종교계 최대 이슈였던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열풍’과 관련, 최근 <교황 신드롬: 로마가톨릭교회와 세계교회협의회>를 발간했다. 교황 방한에 즈음해 본지에 연재되면서 많은 클릭수를 기록한 ‘교황 프란치스코께 묻는다’ 시리즈를 비롯, WCC가 추구하는 교회일치운동과 로마가톨릭교회와의 관계를 파헤치고 있다.


최덕성 박사는 고신대와 노스캐롤라이나대(B.A.), 리폼드신학교(M.Div., M.Ed.), 예일대학교(S.T.M.), 에모리대학교(Ph.D.) 등에서 수학한 후 하버드대 객원교수(1997-1998), 고려신학대학원·고신대 교수(1989-2009) 등을 거쳐 현재 기독교사상연구원 원장과 브니엘신학교 총장을 맡고 있다. 다음은 최 박사와의 일문일답.


-이번 책을 발간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방한 이후 그야말로 ‘신드롬(syndrome)’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교황 신드롬’이 한국교회에 미치는 영향도 지대합니다. 그러므로, 교황과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해 정확히 아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황 방한 당시 기독교인들의 반응을 봤을 때,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로마가톨릭에 대해 한쪽에서는 ‘적그리스도’나 ‘이단’이라 정죄하고 다른 쪽에서는 ‘형제’라고 하니, 성도들은 혼돈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가톨릭에 대해 감정을 섞어 ‘이단’이라며 타도만 할 것이 아니라, 차분하게 로마가톨릭교회가 무엇인지, 기독교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지, 주장과 근거를 명확히 일치시켜서 한국교회에 분명히 알리고 싶었습니다.


제목에 들어간 ‘신드롬’이란, 실체 없는 각자의 소망들이 모여 만들어진 일시적 현상 또는 허상을 말합니다.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신기루(mirage) 같은 것 말입니다. 사막의 모래에 열이 가해져 만들어진 신기루를 물인 줄 알고 마셨다가 죽는 것처럼, 교황의 매력을 보고 따라갔다가 자칫 재앙을 만날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로마가톨릭의 부흥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교황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지만, 이것이 신기루일 수 있음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지난해 본지 칼럼 ‘교황 프란치스코께 묻는다’가 높은 클릭수를 기록하는 등 화제였습니다.
“최근에도 교황이 ‘모든 현대판 노예제도에 저항하겠다’고 한 뉴스를 봤습니다. 좋은 의견이지만, 교황의 말이 자칫 ‘자본주의 타도’를 말하는 것 아닌지 의구심이 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해방신학을 배웠는데, 해방신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자본주의를 ‘현대판 노예제도’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도 개선할 점이 있고 절대 선(善)도 아니지만, 그 주장 자체가 근본적으로 해방신학에 기초하고 있음을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이 파격적 행보와 도덕적 개혁으로 정체성을 알리고 있지만, 로마가톨릭 역사에서 그 정도의 개혁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정말로 바라는 것은 ‘교리의 개혁’입니다. 사도들이 전한 순수한 복음으로 교리를 바꾸는 개혁이 필요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자신의 파격성을 ‘교리 개혁’에 쏟아, 역사에 길이 남을 교황으로 명성을 얻지 않겠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로마가톨릭교회가 개혁해야 할 교리는 무엇인가요.
“먼저 ‘예수 없이도 구원을 받는다’는 만인보편구원주의입니다. 성경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역사적 기독교는, 결코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 사상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서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맺은 언약을 저버리지 않으신다면서 유대인에게도 구원이 있다고 하고,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때문에 무슬림도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심지어 미지의 신을 믿거나 양심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까지도요. 그렇다면, 굳이 예수님을 믿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둘째로는 ‘성모 마리아’를 신격화하고 우상화하는 교리입니다. (마리아에게는) 원죄도 자범죄도 없다고 하고, 예수님 대신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로마가톨릭의 행위에, 마리아도 굉장히 분노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손상시키는 행위이며, 성경적 근거도 없습니다.
셋째로는 ‘교황좌(敎皇座·The See)’를 절대시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교회 조직과 법적 권력을 지배하는 교황의 권한을 말하는데, 로마가톨릭은 베드로가 최초로 그 권한을 받고 현 교황이 그것을 계승했다고 여깁니다. 교회가 종교 권력과 세속 권력까지 장악하려는 탐욕의 상징으로, 중세 때는 실제로 황제를 지배하기도 했습니다.
넷째로는 ‘교황 무오(류)설’입니다. 교황이 공식 발표한 신앙·교리·도덕 관련 내용이 무오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성경적·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역사를 보면 교황은 굉장히 많은 오류를 범했고, 지난 2000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회의 과오들을 묶어 100쪽 정도의 참회고백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신학자 한스 큉이 이 교황무오설을 공박하다 교수직을 파면당했는데, 그 주요 내용이 책에 담겨 있습니다.”

 

▲<교황 신드롬>.
-가톨릭과 기독교가 ‘형제교회’ 관계라는 의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교황 방한 당시 장신대와 한신대 신학대학원장이 인터뷰에서 이러한 의견을 표명했습니다. ‘신학이나 교리가 다르다 해서 이단으로 여기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예수 없이도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를 가진 집단을 형제라 할 수 있습니까?


이처럼 기독교계의 ‘교황(가톨릭) 짝사랑’이 도를 넘었지만, 정작 가톨릭은 기독교를 형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직전 교황인 베네딕토 16세는 지난 2007년 ‘개신교회는 교회가 아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이유는 유효한 성례가 없다는 것으로, 가톨릭에서는 교황이 인정하는 사제들만 유효한 성례를 집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WCC에 참여한 신학자들이 가톨릭과의 ‘일치와 연합’에 적극적이지만, 가톨릭은 결코 WCC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교황좌 아래 귀정(歸正)시키려 할 것입니다. 부산총회를 통해 WCC가 복음적으로 바뀌리라던 일부 교수들과 목회자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지 않았습니까?


WCC 부산총회 후 백서에는 ‘부산 정신’을 계승하자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거미줄이 쳐진 유럽 교회들처럼 쇠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 없는 기독교, 종교다원주의를 계승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특히 WCC 운동은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특히 제 책에서는 WCC 전에 나온 ‘WCC 바로 알자’라는 책자가 한국교회를 기만했음을 명료하게 정리해, 후학들이 거짓 증거에 대해 똑바로 알도록 했습니다. ”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그럼, 로마가톨릭교회는 이단인가요?
“교황에 대한 한국 사회의 열광적인 반응은, 우리 사회가 종교를 향해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게 해 줬습니다. 교황 방한 당시, 손봉호 박사(고신대 석좌교수)가 그를 격찬하며 ‘한국 종교계가 교황을 본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윤리적으로 모범을 보이고, 검소하며 겸허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손봉호 박사님께 묻고 싶습니다. 기독교가 예수를 본받는 종교입니까?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 종교이지, 본받기만 하는 종교는 결코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은 믿음의 열매이지, 그 자체가 기독교의 핵심이 아닙니다.
또 묻고 싶은 것은, 손 박사님께 기독교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윤리가 기독교일까요? 윤리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지만, 그 윤리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고 죄를 용서받고 중생하고 의롭다 칭함을 받아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저는 손봉호 박사님 밑에서 배우기도 했고 40여년간 그분을 지켜봤지만, 그분의 입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먼저이고, 그게 사도의 직무 아닐까요?


교황에게서 복음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가톨릭이 이단이냐고 물으셨지요? 저는 도리어 묻고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들을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최덕성 박사는 “이 책으로 다른 이들을 ‘비판’하는 일은 마무리하고, 이제 기독교의 핵심인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단순하게 전하는 ‘단순한 기독교 운동’, 즉 ‘사도행전 30장(ACTS 30) 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https://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77545

 

개혁주의 마을/Grace


데쓰 밸리는

캐나다를 포함한 북미에서

가장 낮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데쓰 밸리(Death Valley)를 단순히

낮은 곳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지요.


하지만 데쓰 밸리는

미본토에서 가장 크고 넓은 국립공원입니다.

그런 만큼 데쓰 밸리에는 다양한 지역들이 존재합니다.


북미에서

가장 낮은 지역이 있는가 하면

남가주의 명산 볼디(3,062m)보다 높은 산도 있습니다.


Bad Water Basin이

북미 대륙에서 뿐만 아니라

데쓰 밸리에서 해발이 가장 낮은 곳이라면


Telescope Peak은

11,043ft(3,366m)로서

데쓰 밸리에서 가장 높은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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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스콥 픽은 높은 만큼

좀처럼 오르기 쉽지 않은 곳입니다.


그래서

남가주의 높은 산을

웬만큼 다 올라본 사람들 중에서도

텔레스콥 픽을 오른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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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봉우리의 이름이

Telescope Peak으로 명명된 이유는


이곳 정상에 서면

마치 망원경으로 보듯이

상당히 먼 거리까지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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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

이곳 정상에서는

본토의 최고봉 위트니를 비롯한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데

그 가시거리가 약 100마일에 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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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스콥 픽(이하 TP)이

지질학자들에게 주목받는

커다란 이유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이 봉우리의 수직 높이가

미국에서 최고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Top 10 안에 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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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레스트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긴 하지만

티벳 고원에서부터의 수직 높이는 약 13,000ft(4,000m)입니다.


그런데 TP는

Bad Water Basin(BWB)에서부터

수직 높이가 11,331ft(약 3,454m)에 달합니다.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와의 차이가

불과 약 550m 밖에 나지 않을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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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P는 BWB와

엄청난 기온차를

보이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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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WB는 공식적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기온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1913년 7월 10일에

134°F(56.7°C)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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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4월에

TP 정상에 오른적이 있었는데

그 날 BWB의 기온이 94도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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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날,

TP정상에 오르는데

시베리아 벌판처럼 세찬 바람과

강추위가 몰아쳐서 엄청나게 추웠습니다.


아마 적어도

영하 10-20는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영하 10도가 화씨로 14도라면 적어도 80도의 기온차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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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P에 오르는 길은

크게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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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일반적인 루트는

마호가니 플랫에서 올라가는 길인데


Mahogany Flat에서

TP까지는 왕복 약 14마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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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에 걸리는 시간은

사람과 컨디션에 따라 다르지만


눈이 있을 경우, 

볼디에 오르는 시간의 약 두배쯤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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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길은

BWB에서 올라가는 길인데

extreme sports를 즐기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방법이죠.


거리상으로

약 34마일쯤 되는데

Whitney를 오르는 등산로의 두 배쯤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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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3, 4월에

이 루트(BWB에서 TP까지)를 통해 오른다면

하루 아침에 적도에서 북극까지의 기온대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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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가린 Telescope Peak,

텔레스콥 픽은 구름도 쉬어갈 정도로 높은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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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미서부 사진여행, 오지여행 전문 가이드 주안(POWER 21)



    믿음의 모험 믿음의 모험을 하는 인생은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라 두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진하는 인생이다. 수치와 두려움이 끊임없이 우리의 발목을 잡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수치와 두려움을 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모험을 하는 인생이다. 우리는 그렇게 전능자 안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십자가 앞에 서면 과거의 수치와 아픔과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길갈에 서서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안종혁의[인생, 거룩한 모험에 던져라] 중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 보내실 때, 이미 은혜의 모험을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주의 길을 갈 것을 믿는 은혜의 모험입니다. 우리 역시 지금 믿음의 모험, 은혜의 모험을 합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믿음으로 가는 인생입니다. 두려움을 벗어버리고 은혜의 옷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우리 인생을 세웁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돌아가지 않고, 관통하는 인생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믿기 때문입니다. [새벽 종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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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성경 중, 도대체 난 뭘 믿어야 하는 걸까요?”

"성경의 창조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것을 과학이 밝혔는데 왜 믿나요?",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과 교회에서 배우는 성경이 맞지 않아요. 그런데도 하나님을 계속 믿어야 할까요?"

기독교인이라면 한번쯤 질문 받거나 학창시절 고민해 봤을 법한 내용들이다.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이런 질문들엔 근거들이 더해져 더욱 날카롭게 우리를 찌른다.

게다가 현대과학은 발달 속도가 너무 빨라 지난 몇 백 년 동안의 업적과 최근 몇 년 동안의 업적이 맞먹을 정도다. 이런 과학의 발전과 도전 앞에 기독교는 어떤 응답을 내놓을 수 있을까. 크리스천이자 과학자에게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을까.

 
▲기독연구원 느헤미야가 26일 저녁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하나의교회에서 '과학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을 주제로 겨울방학 신학특강을 진행했다.ⓒ뉴스미션

느헤미야 겨울방학 특강으로 ‘과학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기독연구원 느헤미야가 26일 저녁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하나의교회에서 '과학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을 주제로 겨울방학 신학특강을 진행했다.

강사는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우종학 교수로, 그는 밤까지 이어진 강연에서 빅뱅이론과 은하, 별과 별 사이 거리 등 궁금한 우주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설명해 귀를 쫑긋하게 했다.

우종학 교수는 "우리은하에 2천억 개의 별이 존재하고, 우주에는 천억 개의 은하가 존재한다. 엄청나게 거대한 우주 공간이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시간에 따라 더욱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 과학계의 정론이다. 이 이론이 나오기 전에 인류 역사 안에서 우주는 항상 정적이고 변하지 않는 존재였다. 그런 우주가 동적이고 시간에 따라 변한다고 여겨진 게 불과 지난 20세기 였다. 그리고 이것을 의심하는 과학자는 이제 없다"며 빅뱅이론을 설명했다.

이어서 “그렇지만 과학은 우주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며 “다만 질서 있게 움직인다는 차원에서 우주보다 더 위대한 분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며 기독교인이자 과학자로서 자신의 입장을 피력했다.

또한 "기독교신앙인들이 과학과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과 무신론자들이 바라보는 시각은 분명 다르다"고 전제한 뒤 "어떤 기독교인들은 과학이 성경과 다르다는 이유로 무조건 과학자들의 설명을 거부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바른 자세가 아니다. 전문가로서의 그들의 연구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위의 두 질문처럼, 과학 때문에 힘들어하는 기독교인들이 앞으로 취해야 하는 자세에 대해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를 중심으로 조언했다.

우 교수는 “과학은 자연이라는 책을 읽는 방식(일반계시)이고, 신학은 성경이라는 책을 읽는 방식(특별계시)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계시는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렇기에 서로 우위를 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인간의 지성을 통해 과학을 읽어내는 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고 했다.

과학은 초월적 신의 존재 증명할 수 없다

그러면서 “초월적 신의 존재에 대해 과학이 사실 판단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신의 존재를 증명하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과학 자체가 유신론 무신론을 증명해 줄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와 함께 과학과 가장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는 성경 창세기에 대해서도 입장을 전했다.

우 교수는 “창조의 순서가 기록된 창세기 1장과 2장은 서로 모순된다. 창조의 순서가 다르기 때문이다. 창조의 방법에 대한 설명도 없다.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설명일 뿐”이라며 “하나님이 창조를 하실 때 어떤 방법으로 창조 하셨는지 인간 빼고는 거의 나와 있지 않다. 지금 21세기 과학은 누가 무엇을 만들었다고 했을 때 ‘어떻게’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를 제일 궁금해 하지만 그 당시에는 ‘역할’과 ‘기능’에 대해 관심이 높았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을 보면 기능적 이야기가 쭉 나온다. 성경은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기록됐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우주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성경을 과학적 입장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멈춰야 한다. 무오한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언어로 주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인간의 모든 언어로 담을 수는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 이해할 때도 이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과학이 보여주는 새로운 내용들을 기독교 신앙의 틀에서 즉 하나님 창조의 틀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라고 말했다.

한편 느헤미야는 우종학 교수의 '과학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은 오늘인 27일까지 강연되며, 내달 2일부터 안용성 교수(서울여대 기독교학과)의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과 로마 제국'이 열린다고 전했다.

한연희 ⓒ 뉴스미션
가져온 곳: USA아멘넷






그대 가슴에/최송연

 



그대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
믿음이기를 나 바랐지
진실하지 못한 웃음은
결국 우리의 가슴을 찢으니까
그대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
소망이기를 나 바랐지
절망으로 인한 어둠은
우리 삶을 차츰 시들게 하니까
그대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
사랑이기를  나 바랐지
미움으로 인한 아픔은
우리 영혼을 온전히 병들게 하니까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에스더
2014-01-16 00:20
96.232.32.201

우리의 가슴 속에 믿음, 소망, 사랑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 마음...
그 마음은 바로 우리 주님의 마음이지요~^^
주님의 마음을 담아 아름다운 시를 선물해주셨네요!

<< 진실하지 못한 웃음은 우리의 가슴을 찢는다...>>

맞습니다. 거짓된 웃음 내면에는 전쟁을 위한 칼이 감추어져 있을 수 있기에

그것을 아는 우리의 가슴은 찢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시 55:21)

<< 절망으로 인한 어둠은 우리 삶을 차츰 시들게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한 마디로 '절망'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 '절망'이라는 상태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상태가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음을 알지 못하는 절망’이라고 합니다.

'절망'이라는 것은 어둠에 빠져있다는 신호이므로
우리의 삶이 점점 시들어 파리해져갈 수밖에 없겠지요...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마 9:18)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성경구절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 42:5)

<< 미움으로 인한 어둠은 우리 영혼을 온전히 병들게 한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밝은 일도, 자랑할 일도 아닙니다.
이는 감추어야 한다는 말이므로 결국 어둠에 속한 것이라는 것이겠지요...

미움은 대체로 마음 속 깊이 감출 때가 많이 있어서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의 눈이 멀어버리는 것조차 감지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시 34:2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일 2:11)

우리 한 번 다음과 같이 힘차게 외쳐보면 어떨까요?

"우리의 가슴을 찢고, 우리의 삶을 차츰 시들게 하고, 또
우리의 영혼을 온전히 병들게 하는 어둠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우리에게서 떠나갈지어다!
떠나가고 다시는 돌아오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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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돌연변이

하나님의 역사에는 영적인 돌연변이가 자주 일어납니다. 경건한 부모세대 밑에서 그들의 거룩한 신앙의 본을 보며 온갖 영적인 혜택을 누리며 자랐음에도 아주 악하고 불경한 이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기서 인간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가 밝히 드러납니다. 반면에 매우 악한 세대로부터 신실하고 거룩한 후손이 일어나는 돌연변이가 발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본이 없고 악한 영향에 에워싸여 살 수 밖에 없는 암울한 시대에도 악에 물들지 않은 순결한 주의 청년들을 일으키십니다. 짙은 어두움을 밝히는 새벽빛 같은 주의 청년들이 나오게 하십니다.

따를 스승이 없는 시대,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는 시대를 맞이했다고 너무 한탄하지 마십시오. 성령님은 종종 좋은 선생들보다 나쁜 선생들과 기성세대들을 통해 더 많은 깨달음과 유익을 얻게 하십니다. 그들과 같이 되지 말아야겠다는 개혁의 의지와 열정이 불타오르게 하십니다. 이 개혁의 열정이 우리 내면에서 개혁과 부흥을 위한 에너지로 승화되게 하십니다. 못난 기성세대를 욕하고 정죄하는데 열을 올리며 에너지를 소진하기보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며 개혁의 때를 기다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기성세대의 실패를 극복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십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하나님은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에 영적인 거인들이 등장하게 하십니다.

뻔뻔한 말인지는 모르나 우리 젊은이들, 기성세대의 열매 없는 모습을 보면서 도전을 받고 그들을 반면교사로 삼으시라. 저렇게는 살지 않으리라는 개혁의 정신과 의지가 투철한 젊은이들이 일어나야 한국교회의 미래에 희망이 있습니다. 부끄러운 교회와 나라를 후손들에게 남긴 부패하고 무능한 우리 기성세대 같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젊어서 인격과 영성과 실력을 함양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전국 SFC 대학생 대회 설교 중에서)"

출처: 개혁주의 마을/Grace

☞어느성당 수도자가 올린 글! 몇번을 읽어도 참 좋습니다 죽을만큼 사랑했던 사람과 모른체 지나가게 되는 날이 오고... 한때는 비밀을 공유하던 가까운 친구가

전화 한통 하지 않을만큼 멀어지는 날이 오고, 또 한때는 죽이고 싶을만큼 미웠던 사람과 웃으며 볼 수 있듯이... 시간이 지나면 이것 또한 아무것도 아니다. 변해버린 사람을 탓하지 않고.. 떠나버린 사람을 붙잡지 말고.. 그냥 그렇게 봄날이 가고 여름이 오듯 내가 의도적으로 멀리하지 않아도 스치고 떠날 사람은 자연히 멀어지게 되고... 내가 아둥바둥 매달리지 않더라도 내 옆에 남을 사람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알아서 내 옆에 남아준다. 나를 존중하고 사랑해 주고 아껴주지 않는 사람에게 내 시간 내 마음 다 쏟고 상처 받으면서 다시 오지 않을 꽃 같은 시간을 힘들게 보낼 필요는 없다. 비 바람 불어 흙탕물을 뒤집어 썻다고 꽃이 아니더냐 다음에 내릴 비가 씻어준다. 실수들은 누구나 하는거다. 아기가 걸어 다니기까지 3000번은 넘어지고야 겨우 걷는 법을 배운다. 나는 3000번을 이미 넘어졌다가 일어난 사람인데

별것도 아닌 일에 좌절하나..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은 너무 일찍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고.. 가장 불행한 것은 너무 늦게 사랑을 깨우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잘났다고 뻐긴다 해도 결국 하늘 아래에 놓인 건 마찬가지인 것을... 높고 높은 하늘에서 보면 다 똑같이 하찮은 생물일 뿐인 것을... 아무리 키가 크다 해도 하찮은 나무보다도 크지 않으며.. 아무리 달리기를 잘한다 해도 하찮은 동물보다도 느리다. 나보다 못난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려 하지 말고... 나보다 잘난 사람을 시기하여 질투하지도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하늘 아래 있는 것은 다 마찬가지 이니까. 최송연의 목양연가 "짧은 글 긴 여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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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무시한 부자도둑"


 

  
어느 날 한 부자가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하는 
무명 화가를 알게 되었다. 

화가의 그림 솜씨를 알아본 부자는 
그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주면 
1천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화가는 
일주일 뒤 그림을 찾으러 오라고 부자에게 말했다. 

한 주가 지나고 부자는 화가를 찾아갔다. 
예상대로 화가는 온 정성을 기울여 
부자의 얼굴을 화폭에 그려놓았다. 

그런데 막상 화가에게 큰돈을 주는 게 아까워진 
부자가 말했다. 
“초상화 값으로 3백 달러만 받게. 
이 그림을 살 사람은 나밖에 없잖은가? 
더구나 무명 화가의 그림을 누가 그렇게
 비싼 돈을 주고 사겠는가?”

그러자 자존심이 상한 화가가 말했다. 
“내 그림을 하찮게 여기는 당신에게 
초상화를 팔지 않겠소! 
두고 보시오. 나중에 당신은 분명 그 초상화를
 20배의 값을 내고 사게 될 것이오.”

화가는 밤낮으로 그림 그리는 데 더욱 몰두한 끝에 
십 년 뒤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어느 날이었다. 
한 미술 전시회에 다녀온 친구가 부자에게 말했다. 
“자네 얼굴과 똑같은 초상화를 보고 왔는데 
그림 값이 무려 2만 달러나 한다네! 
그런데 웃긴 건 그림 제목이 ‘무시무시한 부자도둑 ’일세. 

하하하하.” 화가는 친구 말을 듣는 즉시 무명 화가의 얼굴이 퍼뜩 떠올랐다.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 부자는 전시회장으로 달려가 2만 달러를 주고 ‘무시무시한 부자 도둑’ 그림을 사 부리나케 전시장을 빠져 나왔다.“

  

                                                                    출처: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우리의 밤이 곧 낯으로 바뀌리라 - 파울 게르하르트 - 네 두려움은 바람에 맡겨라. 소망을 가지고 겁내지 말라. 하나님은 네 한숨을 들으시고 네 눈물을 헤아리시니 네 머리를 드시리라. 물결과 구름과 폭풍을 뚫고 그가 네 길을 내시리니 그의 때를 기다려라. 이 밤이 끝나고 기쁨의 날 곧 오리라. 네 생각보다 높고도 높게 그의 뜻이 나타나리라. 그가 온전히 이루실 때 너는 괜한 두려움으로 바라보리라. 선택과 명령을 그분의 주권에 맡겨라. 네가 의심하나 그 길 인정하리니 이 손길 얼마나 지혜롭고 강한고 출처: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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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의 화교계 최고 갑부인
      홍콩 이가성회장의 운전수는 30여년간
      그의 차를 몰다가 마침내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이가성회장은
      운전수의 노고를 위로하고 노년을 편히 보내게하기 위해,
      200만위엔(3억 6천만원)의 수표를 건냈습니다.

      그랬더니,
      운전수는 필요없다고 사양하며,
      저도 이천만위엔(36억) 정도는
      모아 놓았습니다,,, 하더랍니다.

      이가성회장은
      기이하게 여겨 물었습니다.

      "월급이 5-6천위엔
      (100만원) 밖에 안되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거액의 돈을 저축해
      놓았지? "

      운전수는 "제가 차를 몰때,
      회장님이 뒷자리에서 전화하는 것을 듣고,
      땅 사실때마다 저도 조금씩 사놓았고요,

      주식을 살때, 저도 따라서 약간씩 구입해 놓아,
      지금 자산이 이천만위엔(36억) 이상에
      이르고 있어요 !"

      인생에 누구를 만났느냐는 어쩌면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파리의 뒤를 쫓으면
      변소 주위만 돌아다닐 것이고,
      꿀벌의 뒤를 쫓으면
      꽃밭을 함께 노닐게 될 것이다."

      "물은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서 모양이 달라지지만
      사람은 어떤 사람을
      사귀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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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제품 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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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에는 "침묵" 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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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은 "감사"입니다~^o^v



가져온 곳 : 
카페 >★☆사모님 사모님 ☆★
|
글쓴이 : 민들레홀씨되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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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털 구름/ 최송연

긴 치마자락 몽실몽실 푸른 하늘 도르르 건너가는 저 새털 구름 저 흰구름 붙잡으면 사랑하는 내 님 계신 곳으로 날 데려다 주려나... 다시 오마 약속 주고 떠나신 우리 님 그리워 그리워 못내 그리워 흐르는 저 새털 구름에 내 마음 한자락도 실어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 20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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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 부터 2년전,

그러니까 2012년 10월경 이었습니다.


웨이브 촬영이

평생의 꿈이었던

한국의 어느 여류 사진작가가


남편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웨이브 촬영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 왔습니다.


10월의 어느 화요일 오전,

우리는 웨이브 퍼밋을 받기 위해

추첨 장소가 있는 커납(Kanab)에 도착했지요.


아침식사를 마친 후에

우리는 8시 30분쯤 추첨 장소로 갔습니다.


파킹랏에는

이미 주차할 곳이 없을 만큼

먼저 온 차량들로 가득했습니다.


신청서를 작성한 다음

빈자리를 찾으려고 했지만


빈자리는 고사하고

서있기조차 힘들만큼

실내는 물론이거니와 전시실도

신청자들로 초만원을 이루었습니다.


약 50그룹이 신청했는데

전체 신청자는 대략 170명쯤 되었지요.


9시 정각,

사람들의 긴장된

숨소리가 고함으로 들릴만큼

실내는 쥐죽은 듯이 고요했습니다.


드디어

레인저가 라러리를 돌렸습니다.

우리 일행은 긴장된 모습으로 라러리를 지켜 보았지요.


라러리의 구슬이

하나씩 밖으로 빠져 나올 때마다

우리의 번호와 일치되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간절한 염원은

곧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실망과 아쉬움을 뒤로한 채

우리는 브라이스 캐년으로 갔지요.


그 날 밤,

우리는 다시 커납으로 돌아와서

다음날 아침에 다시 신청서를 냈습니다.


이번에는 신청자가

전날보다 조금 적은 150명 정도였죠.

경쟁률이 17대 1에서 15대 1로 줄었습니다.


하지만 둘째날에도

우리는 실망스런 발걸음을 해야만 했습니다.


셋째날 아침,

우리는 또 다시 신청서를 썼지요.

하지만 ‘혹시나’는 이번에도 ‘역시나’가 되었습니다.


이제 추첨 기회는

일정상 내일 오전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드디어 4일째 아침,

우리는 마지막 희망을 안고

신청서를 작성하고 기다렸습니다.


레인저가

라러리를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눈은 라러리에 고정되어 있었고,


레인저가

당첨된 번호를 부를 때마다

떨어진 사람들의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10장의 퍼밋 가운데

이미 7장이 결정되었습니다.

퍼밋은 이제 마지막 남은 3장이 전부였지요.


우리 세명이

붙느냐 떨어지느냐는

이번 추첨으로 결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번 추첨에 떨어지면

보따리를 싸야할 판이었습니다.


레인저가

잠시 뜸을 들인 다음

다시 마지막 라러리를 돌렸습니다.


잠시 뒤 레인저는

빠져 나온 구슬의 번호를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구슬의 번호는

우리의 간절한 염원과는 아랑곳없이

우리를 실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번호였습니다.


우리는 추첨에 떨어질 때마다

브라이스 캐년이나, 그랜드 캐년,

그리고 앤털롭 캐년에 가곤 했지만


오직 웨이브만을

가슴에 품고왔던 여류 사진작가에게

웨이브 외의 다른 모든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여류 사진 작가 부부는

깊고 깊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무거운 맘으로 고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18182832_1.jpg


눈물을 머금고

고국으로 돌아간 여류 작가에게

웨이브는 잊을 수 없는 흠모의 대상이었습니다.


잠을 자도,

깨어 있어도


웨이브가 아른거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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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다시

웨이브를 가슴에 품고 지낸지

2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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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 사진작가는

남편에게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웨이브에 다시 한 번 갈 수 없겠느냐고.


선량하고

마음씨 좋은 남편은

비록 거금이 들더라도

아내의 소원을 들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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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부부는 다시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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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9일,

숙소에서 아침을 먹고


2년 전과 같이 

오전 8시 30분쯤 추첨 장소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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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초에

한국에서 온 사진 작가와 함께

이곳에 왔었는데 그 때는 사람이 적게와서

추첨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퍼밋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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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의 그 때를 생각하면서

“파킹랏엔 아마 차가 2, 3대쯤 와 있겠지”


라고 생각하며 도착해보니 

이게 웬일, 차가 10대쯤 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에,

아! 뭔가 잘못되었구나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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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차량당

2명이 타고 와도 벌써 20명에

앞으로 9시 전까지 올 사람들을 예상하면

적어도 수십 명이 될텐데 그러면 또 다시 2년 전의 악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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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첨장소로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벌써 수십 명이 몰려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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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 59분에

마지막 신청서가 접수되었는데

모두 18그룹에 50명이 넘는 인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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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 떨어지는 소리와

숨소리도 들릴만큼 고요한 가운데

레인저가 드디어 라러리를 돌렸습니다.


첫 번째 번호는 1번,

신청자는 다행히 1명이었고

남은 퍼밋은 모두 9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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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저가 두 번째로

라러리를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에 나온 구슬은

공교롭게도 2번에 2명의 신청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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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모두는

월요일에 왔다가 떨어져서

화요일에 다시 신청한 사람들이었는데

화요일에 모두 붙는 행운이 주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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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퍼밋은 7장,

레인저가 세 번째로 라러리를 돌렸습니다.

이번엔 7번이 당첨되었고, 3명의 신청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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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퍼밋은 4장,

이번에 우리가 당첨되지 않으면


우리는 또 고배를 마시거나, 

되더라도 한 두 명은 빠질 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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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추첨에서

2명이 당첨된다고 하면

남은 퍼밋은 모두 2장인데


우리 일행이 되더라도

3명 가운데 1명은 갈 수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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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레인저가

라러리를 돌리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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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올 때마다

간절히 수도 없이 기도를 드리곤 했습니다.

“하나님, 이번에 우리가 꼭 퍼밋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세요.” 라고


이번에 우리가 받은 번호는 8번이었습니다.

“하나님, 이번에 나오는 저 구슬은 8번이 되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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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져나온 구슬을

레인저가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Number eight.


마침내 

여류 사진작가의 꿈이 

2년 만에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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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미서부 사진여행, 오지여행 전문가이드 주안(POWER 21)


사도신경 일부의 비성경성에 대한 연구

 

 

이상욱, 최태영

 

 

I. 서언

  

사도신경의 비성경성이란 용어는, 비록 일부라고는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교회에 충격을 줄 수 있다.

 

대부분의 교인과 교회 지도자들이 그런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전통에 대한 신뢰로 인하여 사도신경은 정확무오한 신앙고백문으로 인정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신경의 비성경성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진지하게 토론해 보자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베뢰아 사람들처럼(행 17:11) 신사적으로 응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한 차원에서 이 논문은 사도신경의 비성경성에 대하여 진지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신사적인 토론을 기대하는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사도신경은 중세시대에는 서방교회 곧 로마가톨릭교회(이하 ‘로마교회’)에서만 사용되었다. 동방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을 알지 못했다. 동방과 서방 교회가 화해를 모색하였던 플로렌스회의(1438-1445)에서 동방교회 대표들은 사도들의 신조를 갖고 있지 않으며 보지도 못하였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현재 로마교회와 그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교회들, 예를 들면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성공회에서만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있다. 서방교회 이외에 동방교회, 즉 처음부터 로마교회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던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다. 아나뱁티스트(재세례파)의 후예들, 즉 현재 미국의 많은 침례교회들도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다.

 

 

  

II. 사도신경의 역사

  

사도신경은 12사도들이 모여서 만들었다는 전통이 있으나 역사적 신빙성은 거의 없다. 교회의 역사가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사도신경은 단 번에 작성된 것이 아니라 수백 년의 기간을 통하여 서서히 만들어졌다. 대략 3단계가 있는데 곧 로마의 세례문답, 로마신경, 그리고 사도신경으로 발전된 것이다.

 

 

1. 로마의 세례문답

 

사도신경은 로마의 세례문답에 그 기원을 둔다. 로마에서는 믿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기 전에 세례문답을 하였는데, 그것은 다음의 질문으로 구성되었다.

 

“당신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당신은 성령을 믿습니까?”

 

이 세 번의 질문에 세례후보자는 각각 “믿습니다(credo)”라고 대답하면 되었다.

 

 

로마의 세례문답의 내용이 통일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지역에 따라서 다양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배양서박사는 다음과 같은 세례문답을 소개한다.

 

 

장로: (형제, 자매) 그대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입교자: 예, 믿습니다(Credo).

 

장로: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 빌라도 통치하에 못 박혀 돌아가 묻히시고, 셋째 날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하늘에 오르시어 아버지 우편에 않으시고,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습니까?

 

입교자: 예. 믿습니다.

 

장로: 그대는 거룩한 교회와 성령과 육신의 부활을 믿습니까?

 

입교자: 예, 믿습니다.

 

 

2. 로마신경

 

 초대교회 시대 때 나타난 많은 이단들과 싸우면서 교회는 많은 신조 혹은 신경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로마신경이다. 그것은 로마의 세례문답을 서술형으로 고친 것이다. 390년에 루피누스(Rufinus)에 의해 소개된 로마신경은 다음과 같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며,

 

그의 유일하신 아들이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묻히셨으며,

 

사흘 날에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올라 아버지의 오른편에 좌정하셨고,

 

거기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입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교회와 죄의 사함과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3. 사도신경

 

 로마신경은 다시 사도신경으로 발전했는데, 이형기에 의하면 사도신경이라는 이름이 맨 처음 사용된 것은 AD 390년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글에서였다. 손봉호에 의하면 주후 340년에 마르셀루스라는 사람의 신앙고백이 유행했는데, 그것에는 “거룩한 교회”가 “거룩한 공교회”로 바뀌었고,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라는 구절은 없다. 나채운은 그 관계를 다음과 같이 자세히 분석하였다.

 

 

 하나님에 관한 고백이 처음에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이었으나, 그 후 7세기에 “천지를 만드신”이란 말이 첨가 되었다. 다음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고백내용에 “잉태하사”, “고난을 받으사”, “죽으사”, “음부에 내려가사”, “전능하신 하나님” 이란 말 등도 처음에는 없었던 것들로서 후에 첨가된 것이다. 그 다음 성령에 관해서는 첨가되지 아니하였으나, 교회에 관해서는 처음의 “거룩한 교회”가 4세기 경에 “거룩한 공회(공교회)”로 바뀌고, 다음 성도에 언급하여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 첨가되었다. 마지막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도 처음에 없었던 것이 첨가되었다.

 

 

 세계적인 교회사가인 필립 샤프(Philip Schaff, 1818-1893)는 “로마 카톨릭교회가 여러 차례의 첨가를 한 뒤 750년경 현재와 같은 사도신경으로 완성하였다”고 주장했다. 또 정홍열은 사도신경이 오늘날의 형태로 최종 확정된 시기를 9세기 중엽인 867-872년으로 추정한다.

 

정리하면, 현재의 사도신경은 로마의 세례문답형식에서 시작하여 2세기에 로마신경이 만들어지고, 그 후 9세기까지 약 700년 동안 시대의 상황과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다가, 마침내 사도신경으로 이름이 바뀌고, 내용도 여러 차례 수정되고 첨가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신구약 정경과는 달리 영감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교회의 필요에 의해서 교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비성경적인 부분도 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거기에 비성경적인 부분이 있다면 우리는 그 부분을 밝혀내어 삭제하거나 수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현재의 사도신경에서 비성경적인 부분으로 의심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III. 비성경적인 것으로 의심할 수 있는 부분

 

  

현재의 사도신경에서 비성경적인 것으로 의심받을 수 있는 부분은 대략 3가지이다. 곧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거룩한 공교회”, 그리고 “성도의 교제”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에 대하여 차례대로 살펴보자.

 

  

1.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이 구절은 로마의 세례문답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로마신경에 나타나지만, 거기에는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라고 되어있다.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라는 말은 2세기 당시에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역사적으로 실존한 빌라도라는 인물을 언급함으로써, 실제로 존재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구절로 보여 진다. 영지주의적 이단으로부터 신앙을 수호하기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라는 역사적 인물이 언급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그런데 유의할 것은 로마신경에는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라고 되어있었으나, 어느 사이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라고 바뀌었다는 것이다. 더욱 의아한 것은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특히 장로교에서 그렇게 번역되어 있다는 것이다. 라틴어, 영어, 독일어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로마교회, 성공회 등의 사도신경에서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번역되어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1864년에 한국천주교에서 나온 ‘천주교 종도신경(宗徒信經)’에는 “본시오 빌라도 벼슬에 잇살 때에 난을 밧으샤”로 되어 있다. 그러나 1894년에 발간한 우리나라 장로교 최초의 찬양가에 실린 사도신경에는 “본듸오 빌나도 손에 고난을 밧으샤”로 되어 있다. 1905년에 발간된 대한장로교공의회가 편집한 찬셩시에 실린 사도신경에는 “본듸오 빌라도의게 고난을 밧으샤”로 되어 있다. 1930년에 발간된 동양성경교회출판부의 부흥성가에 실린 사도신경에도 “본듸오 빌나도의게 고난을 밧으샤”로 동일하게 되어 있다. 우리나라 장로교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공회는 ‘본디오 빌라도 때에 고난을 받으사’이며, 천주교도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로 되어 있다. 라틴어 사도신경에는 Passus sub Pontio Pilato 로서 ‘sub’는 아래라는 뜻이다. 본디오 빌라도의 치하에서 라는 의미이다. 대부분의 영어에도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로 되어 있다.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감리교와 함께 장로교의 사도신경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는 것과 본디오 빌라도 때에 고난을 받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예수님의 고난이 빌라도 때문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므로 빌라도에게 모든 것을 덮어씌우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완전히 어긋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곧 빌라도 때에 고난을 받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이 역사적 사실임을 증언하는 것이기 때문에 긍정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의 이유가 이런 표현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고난 받고 죽임 당하신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죄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을 간략하게 고백한 신경이라면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도신경에는 그것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고백되어야만 제대로 된 신경이라 할 것이 아닌가?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도 적절하지 않을뿐더러,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는 것은 더욱 더 적절하지 않는 고백일 뿐이다.

 

빌라도에게 고난 받아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우리의 죄, 나의 죄 때문에 나대신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어야 죄용서와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우리 죄 때문에 고난 받고 죽으셨다는 것을 성경이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의 이 부분은 빌라도를 삭제하고 “우리 죄를 인하여 고난 받아”로 고치는 것이 성경적일 것이다.

 

 

2. “거룩한 공교회를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는 “the Holy Catholic Church”를 번역한 것이다. ‘Catholic’이란 보편적, 공(公)적인, 보통의,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적인, 우주적인 등의 뜻이 있다. 어떤 영어 사도신경을 보면, 로마교회와의 관련을 피하기 위해 “Universal”로 번역해 놓은 것도 있다. 한국 교회에서는 이것을 “거룩한 공회” 또는 “거룩한 공교회”로 번역하여 그 난관을 얼버무리고 있지만, 한영 찬송가 등에서는 여전히 the holy catholic church 라고 적혀 있다.

 

‘Catholic’이 무슨 뜻인지는, 이것을 사도신경에 직접 첨가한 로마교회의 교리사전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박도식 신부는 자기의 책에서 이렇게 밝혀 놓았다. “공번된 교회란 서양 사람이나, 동양 사람이나,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믿을 수 있는 천주교회를 말한다.” ‘공번된 교회’는 우리나라 기독교 초기에 사도신경 번역본에 사용된 용어로서 지금의 공회 또는 공교회를 뜻한다. 그런데 천주교는 그것을 자기들의 교회 곧 천주교회, 로마교회를 뜻한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신경에 ‘거룩한 공회’가 삽입된 이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 로마의 황제는 기독교를 이용하여 제국의 평화를 도모하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요구되는 한 가지는 제국의 모든 종교를 기독교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기독교 이전의 로마제국의 가장 큰 종교였던 태양신교를 기독교와 통합시키고, 또 세미라스 여신 숭배를 기독교와 통합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통합의 과정에서 통합의 원리는 순수한 성경적 교리라기보다는 정치적 힘의 원리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통합의 과정에서 가장 불편한 존재는 다른 종교와의 교리적 통합을 용납하지 않고 순수한 성경적 교리만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이들이 통합에 방해요소로 작용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배격하는 장치로서 2세기에 이단들을 규정하던 로마신경에다가 “우리는 연합된 종교를 믿는다”라는 말을 삽입하여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였던 것이다. “일반화된, 즉 연합된 종교를 믿는다”라고 주장한 것은 “연합된 종교 즉 가톨릭 이외에는 모두가 이단이라는 것을 믿는다.” 라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리하여 순수한 기독교인들은 지하로 숨었다.

 

 

312년 이후에 기독교가 다른 이방종교와 야합하는 데에 반대한 많은 교회들이 지하로 숨었다. 그들은 야합되어 혼합된 가톨릭을 반대하다가, 암흑시대라 불리었던 1200년 동안에 5000만 명이 학살당했다. 그들은 바울파, 아놀드파, 헨릭파, 베드로-부르시안파, 알비겐스파, 웰던스파, 그리고 재침례파들이었다.

 

 

사도신경에서 거룩한 공교회를 고백할 때 로마 가톨릭은 오직 자기들만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교황직을 물러난 베네딕토 16세는 교회는 로마가톨릭 외에는 없다고 선언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우리 장로교나 감리교 등 개신교회는 거룩한 공교회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이들은 그들의 눈에는 이단일 뿐이다. 로마 황제가 주도하여 만든 모든 종교의 연합, 즉 세미라스도 인정하고, 다곤도 인정하고, 태양신도 인정하는 혼합교회인 공교회는 장로교도 아니고, 감리교도 아니고, 오직 로마교회뿐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외면해도 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3. “성도의 교제”

 

‘성도의 교제’는 영어로 “the Communion of Saints”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교제한다는 뜻으로 보통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신앙 고백의 내용으로 삼을 수 있을까? 그것은 아무래도 우리의 신앙의 대상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원래 이 말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성도(saints)라는 낱말을 생각해 보자. 성경적인 의미에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고전 1:2). 그러나 로마교회에서 말하는 성도는 매우 다른 뜻을 가진다. “카톨릭 교회에서 말하는 ‘saints’는 ‘성자’, 즉 죽은 지 오랜 세월이 경과한 뒤에야 특별 심의를 거쳐 서품되는 특별한 사람을 가리키는 비성경적인 개념이다”

 

교제(Communion)란 무슨 의미인가? 이것 역시 그것을 사도신경에 직접 삽입한 로마교회에서 어떤 뜻으로 사용하고 있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그들은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라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성인의 통공’은 무슨 뜻인가? 박도식 신부는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통공은 공이 서로서로 통한다는 말이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이는, 공이 많은 자가 공이 적은 자를 공으로 도와줄 수 있고, 힘이 모자라 공이 적은 자는 힘 있는 자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교회, 즉 모임은 넓은 뜻으로 천당, 연옥, 세상 이 세 가지 모임을 말한다. 그러니까, 천당에 있는 영혼은 불쌍한 세상 사람들을 위해 하느님께 빌어주고, 연옥에서 보속하는 영혼들을 위해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한다. 이리하여 이 세 모임은 서로서로 도와주고 있는데, 이것을 모든 성인의 통공이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

 

 

박도식 신부는 예를 들어 이것을 설명하였다. 즉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지상교회가 기도와 희생을 바치면 그 공으로 빨리 승천하게 되고, 이러한 공으로 승천한 영혼은 천국에서 이 지상교회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한다는 것이다. 스테펀 벵코(Stephen Benko)는 이렇게 말한다.

 

 

사도신경에서의 ‘성도들과의 교통’은 죽은 성인들과의 교통을 말한다. 이 말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를 정확히 드러내는 말이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교제’라는 것을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죽은 성도들에까지 확대한다. 따라서 그들은 사도신경을 성자숭배와 죽은 사람에게 기도하는 그들의 교리적 근거로 오용하고 있는 것이다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라는 말을 좀 더 쉽게 설명해보자. 예를 들면, 죽은 부모가 연옥에서 천국에 가려고 하니, 기도나 선행 같은 하나님에 대한 공적이 적다고 하자. 달리 말하자면 천국 갈 차비가 부족하다고 하자. 이 때 지상에 있는 아들이 연옥에 있는 부모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하고 선행을 많이 하면, 그 부모는 이 지상에 있는 아들의 공적으로 천국에 간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지상에 있는 아들이 연옥에 있는 아버지에게 천국 갈 여비를 마련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교리를 근거로 로마교회는 십자군 원정이나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 건축(줄리어스 2세, 레오 10세)에 필요한 재원을 충당하기 위하여 면죄부를 판매하였다. 1476년 교황 식스투스 4세는 이미 죽은 사람들의 면죄부까지 만들었는데, 이 세상에서 자식이 면죄부를 사는 순간, 죽은 부모가 연옥에서 천당으로 이동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마리아 숭배, 성인숭배는 바로 이 교리를 근거로 하고 있다.

 

개신교의 많은 사람들은 “the Communion of Saints”를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살아있는 사람과의 교제”가 아니고, “죽은 자와의 교제”를 의미하기 위하여 사도신경에 첨가된 것이다. 이것은 비성경적인 교리로서 우리는 결코 이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디모데전서 2:5(“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이 잘 보여주는 것처럼, 예수님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그리고 죽은 자와 교통하는 일은 사단의 속임수로, 성경에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산 자(지상교회의 사람들)를 위하여 죽은 자(마리아, 바울, 베드로, 김대건신부 등등)에게 기도하고 부탁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죽은 자에게 기도하지 말라고 분명히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인의 통공’은 비성서적이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성도의 교제’의 원뜻은 ‘성인의 통공’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것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IV. 의심스러운 고백문의 배경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칙령에 의하여 기독교가 공인되고 뒤이어 로마의 제국종교가 되었을 때부터 16세기 종교개혁 이전의 서방 교회는 기독교와 이방 종교의 혼합에 의해서 이루어진 혼합종교가 아닌가 하고 의심받고 있다. 기독교는 4세기에 태양신교와 혼합한 결과 태양신 숭배의 축제일인 12월 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결정하였고, 주의 날을 태양의 날(Sun-day)로 일치시켰다. 예수님을 그릴 때에 예수님의 머리 뒤에는 태양신이 그려졌다. 곧 둥근 태양의 모습 속에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 넣음으로써 예수님과 태양신의 멋진 통합을 이루어내었다. 또 니므롯의 아내인 여신 세미라스와 기독교의 통합을 위하여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의 자리에 아들 담무스를 안고 있는 세미라스를 앉힘으로써 마리아와 세미라스를 통합시켰다.

 

성모 마리아는 4세기 이전에는 기도의 대상, 예배의 대상이 되기는커녕 거의 언급도 되지 않았지만, 세미라스 여신 종교와의 통합의 과정에서 아기 예수를 안고 나와 그 지위가 갑자기 크게 격상되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제자를 양성하며, 기적을 일으키고, 고난 받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엄청난 구속 사역을 감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지금까지도 언제나 젖먹이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남으로써 로마교회는 예수교라기 보다는 오히려 마리아교에 더 가깝다고 여겨질 정도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이 세상의 모든 종교는 기독교와 통합되어, 통합종교인 로마교회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온 것이다.

 

기독교의 종교통합 과정에 가장 장애물이 되는 것은 성경 말씀이었고, 특히 디모데 전서 2:5 같은 말씀이었다. 이런 말씀에도 불구하고 종교통합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 보다 더 권위 있고, 더 영향력 있는 신경을 만들어야했고, 그 신경에다가 “거룩한 공회”와 “성인의 통공”을 첨가해야만 종교통합이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두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더 높은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종교통합의 과정과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종교통합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던 AD 390년, ‘로마신경’이라는 평범한 이름을 무시무시한 ‘사도신경’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버금가는, 아니 더 높은 권위를 부여하였다.

 

보통의 경우에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이렇게 믿을 것을 결의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니케아 신경)라든지, “칼케돈 회의에서 이렇게 믿기로 결정했는데,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칼케돈 신경)라고 하여, 어떤 종교회의 이름을 넣어서 자신이 그렇게 믿는다고 주장하였다. 또 어떤 경우에는 “루피누스 신경”이나 “아타나시우스 신경”처럼, 사람의 이름을 넣어서 “루피누스가 이렇게 믿었는데, 나도 그렇게 믿는다”, “아타나시우스가 이렇게 믿었는데, 우리도 그렇게 믿는다” 라고 하여 자신들의 믿음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사도들이 이렇게 믿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 라는 뜻으로 “사도신경”이라는 이름을 취한 것이다. “사도들이 이렇게 믿었다”고 주장하면 누가 감히 이의를 달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과연 사도들의 신앙이었을까?

 

 

둘째, 거짓말을 해서라도, 사도신경의 권위를 성경보다 높이려 하였다. 사도들이 한 구절씩 말하여 사도신경을 만들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거짓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잭 로저스(Jack Rogers)에 의하면, 사도들이 한 구절씩 만들었다는 사도신경의 사도적 기원을 뒤집어 그것은 단순한 전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한 사람이 있었다.

 

문예부흥시기의 학자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는 영국의 감독 레지날드 피콕(Reginald Pecock)과 함께 문서의 사도적 기원을 뒤집어엎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압박에 의해서 발라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피콕은 1458년 감독직을 사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카톨릭은 그들의 입을 막고자 핍박을 가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철회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어도 갈릴레이의 입만 막으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로호만(J. M. Lochmann)의 책에서도 사도들의 저작은 간단히 부인되고 있다.

 

 

동방교회의 에베소 대주교는 “우리는 이 사도신경을 가지고 있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했다. 만일 그것이 이전에도 존재했었다면,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의 첫 사도들의 모임을 서술할 때, 그것에 대해서도 보고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배양서 박사도 사도신경의 열 두 사도 저작설을 다음과 같이 부인했다. “사도신경은 12사도가 만들었는가? 5세기에서 15세기까지 열두 사도가 작성했다는 전설이 유포되었으나, 16세기에 이르러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지금에 와서는 그 전설을 믿지 않습니다. 2-3세기 초대교회의 세례문답 본문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는 뚜렷한 증거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열 두 사도 저작설을 지금은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로마교회는 오랫동안 그런 거짓말을 지어내어 유포시켰다. 그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거짓말을 동원해서라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높은 권위를 사도신경에 부여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할 필요가 무엇이었을까? 로마교회를 모든 종교를 통합한 유일한 종교권력으로 내세우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중세에는 사도신경 안에서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 가장 핵심구절이었다. 다른 구절은 들러리에 불과하였다. 이단을 구분하는데 역사적으로 상당히 공로가 있는 기존의 로마신경이라는 유명한 신경의 끝부분에, 이 두 구절이 끼어 들어가 가장 중요한 주인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름을 사도신경으로 바꾸었다. 로마교회는 이 두 구절이 필요하였고, 이 두 구절을 위하여 로마신경의 명성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인,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내용은 처음부터 들어가지 못했다. 영지주의가 없어진지 수백 년이 지났지만, 2세기에 사용하던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라는 말을 그대로 두었다. 우리 믿음의 핵심인 복음을 살짝 가려놓은 채로 말이다.

 

원래의 의미에서 사도신경은 ‘거룩한 공회’ 곧 ‘로마 가톨릭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로마 가톨릭만이 유일한 교회이며 다른 교파는 참된 교회가 아니라 이단인 셈이고, 우리 장로교도 이단에 속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가 따른다. ‘성인의 통공’ 즉 ‘죽은 자와의 교제’, 혹은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는 것은 마리아숭배, 성인 숭배, 면죄부를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 원래의 의미에 따르면, 현재의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을 정죄한 예수회의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처럼 로마교회로 회귀해야 할 것을 요청하는 결과가 된다.

 

혹자는 ‘거룩한 카톨릭교회’를 ‘거룩한 공교회’로 바꾸었으니 괜찮지 않느냐 한다. 또 ‘성인의 통공’을 ‘성도의 교제’로 바꾸었으니 괜찮다고 한다. 그러나 라틴어 원문을 그대로 둔 채 우리 말만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지 의문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대 때 루터와 칼뱅은 사도신경의 권위를 인정한 나머지 그것이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를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정수영에 의하면 현재 전세계 개신교 신앙을 가진 신자들의 절반가량이 사도신경을 사용하지 않는다. 교파별로 보면 다음과 같은 교단들이 사도신경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미국: 장로교, 연합감리교, 침례교, 성공회, 복음주의 루터교, 하나님의 성회, 개혁교, 커뮤니티교회, 형제교회

 

캐나다: 연합교회, 침례교, 성공회, 하나님의 성회, 형제교회

 

독일: 복음주의루터교회, 개혁교회

 

이탈리아: 침례교연맹, 복음감리교

 

네덜란드: 복음 개혁교, 복음감리교

 

스위스: 구 가톨릭

 

영국: 침례교연맹, 영국감리교, 연합 개혁교

 

오스트레일리아: 성공회, 연합교회, 그리스도교

 

뉴질랜드: 침례교연맹, 감리교, 장로교

 

V. 평가 및 대안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믿은 것을 요약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름만 ‘사도’신경이다. 사도들은 절대로 그렇게 믿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복음이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성경에 간결하게 요약된 복음을 고린도전서 15:3,4,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에서 찾는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신경에는 “우리 죄” 즉 “나의 죄”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빌라도에게 고난 받아 죽으셨다고 한다. 나를 사랑하사, 나의 죄 때문에, 나의 죄를 사하시려고 내 대신 사형을 당하신 것이 아니고, 빌라도에게 고난 받아 죽으셨다면, 나의 죄는 결코 해결되지 않았고, 예수님은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다. 예수님이 만약 유대인들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면, 우리의 죄는 해결되지 않았고, 그 소식이 우리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니고,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일 것이다. 하물며 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죽으신 것으로 끝이라면 우리 죄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다른 한 편으로 내 죄 때문에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돌아가셨다고도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은 억측이다 -한광기-).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지가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 그래야만 그 해당자에게 기쁜 소식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신경에는 “빌라도에게 고난 받았다.”는 역사적인 사실로써, 복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누락되었다. 그러므로 현재의 사도신경 대로라면 거기에는 복음이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복음 없는 사도신경의 고백은 신앙고백이 아니고, 그저 역사일 뿐이다. “정몽주는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말하면 역사적 사실을 말한 것이지만 신앙의 고백은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신앙을 고백하거나, 예수님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신경 중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는 내용은, 그리스도인이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역사적 사실일 뿐이다. 그것은 신앙고백으로서는 너무 모자라는 것이다.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 이다.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 빌라도라는 엉뚱한 사람이 들어가 복음을 흐려놓고 역사공부를 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도들의 신앙고백이라고 말하기에는 결정적인 결함을 가진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고린도후서 11:4에서 바울은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있다. 또 갈라디아서 1:8에서는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라는 무서운 말을 하였다.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대목에 빌라도 때문에 돌아가셨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다른 예수요 다른 복음이 아닐까?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면, 부활하신 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심판하러 오신다면 우리는 완전 절망상태에 이를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 죄 때문이 아니라 빌라도 때문에 죽으신 것이라면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은 있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되는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 사도신경 속에 들어가 있다. 복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빌라도로 대체되고,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종교혼합주의가 사도신경에 들어와서, 복음을 변개하여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마비시키고 있다. 그러고도 (천주교는) “이 신앙고백을 반대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찌어다.”라는 말을 덧붙였었다. 사도신경 보다 훨씬 이전의 신조인 니케아신조(325년)나, 콘스탄티노플신조(381년) 속에는 “거룩한 공회(The Holy Catholic Church)”라는 말이나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란 구절이 없다. 세계적인 교회사가인 샤프(Shaff)에 의하면, “거룩한 카톨릭교회”는 650년경에,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그 이후에 첨가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초대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고대의 보편적 교회에서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교리가 로마교회에 의하여 첨가되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대신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죽으신 예수님이 고백되고 있는 것은 복음의 핵심을 빠뜨린 것이다. 그러므로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대신에 ‘우리 죄를 인하여 고난을 받아’로 바꾸어야 진실로 사도들의 이름에 걸 맞는 신앙고백이라 할 것이다.

 

둘째, ‘거룩한 공교회’는 원래 이방 종교를 혼합시킨 로마교회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혼합종교인 로마교회를 믿는다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순수한 교회를 믿는다는 것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순수한 교회를 부정하는 고백이 되고 만다. 설령 오늘날 그 의미를 재규정하여 로마교회가 아니라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보편적 교회를 의미한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은 우리만의 해석일 뿐이다. 로마교회는 여전히 자기들의 교회만을 의미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공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바뀌어야 사도들의 이름에 합당한 신앙이라 할 것이다.

 

셋째, ‘성도의 교제’는 원래 죽은 성자들과의 교제를 가리키는 것이다. 특히 죽은 성인들의 공덕을 나누어 가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교회의 존폐가 걸린 이신칭의의 교리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종교개혁자 루터가 목숨을 걸고 반대했던 로마교회의 면죄부 신학일 뿐이다. 그것을 오늘날 살아있는 신자들의 교제라고 재해석하는 것은 위 둘째와 마찬가지 이유로 배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는 삭제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바꿀 필요도 없다. 살아 있는 신자들 사이의 사랑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믿는다는 고백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루터와 칼뱅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사도신경 속에 들어 있는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도신경에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 명시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인식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리쓰(J. Leith)에 의하면, 그들은 “고대 가톨릭 교회의 위대한 신조들, 다시 말해서 사도신조, 니케아 신조,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칼케돈 정의를 거의 수정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 이후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이 하나님이고, 동정녀의 몸을 통해 탄생하셨고, 부활하셨고, 승천, 심판하신다 하더라도, 우리 죄를 위하여 대속적 죽음을 죽으시지 않았다면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 왜 그동안 감쪽같이 간과되고 말았을까? 사도신경이 진짜 사도들이 만든 것이었다면 그와 같은 복음의 핵심이 빠졌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를 재해석해서 사용하면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궤변에 이를 뿐이다. 그것은 기본적인 해석의 원칙에도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은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원래의 의미를 찾아내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원어를 공부하고 역사적 배경을 공부하는 것이다. 원래의 의미에 무관하게 독자의 임의로 좋을 대로 해석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가 하는 일이 아니고 이단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도신경을 처음 만들기 시작해서 최종 완성한 주체인 로마교회가 그것을 어떻게해석하고 있는지 유념하지 않을 수 없다. 정수영은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마카톨릭교회가 자체 교회의 교리 보호를 위해 만든 내용을, 만든 사람들의 의도와 다르게 개신교가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本末顚倒)된 현상이다.”

 

그러므로 위 두 가지의 원래의 의미가 필자가 조사한 대로가 맞다면 오늘 우리는 사도신경의 해당부분을 확실하게 수정해서 사용해야 할 것이다. 다음에 하나의 대안으로서의 사도신경을 예시해 본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의 몸에서 나셨으며, 우리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장사되어 음부에 내리신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

 

 

 

이 논문의 원저자는 이상욱이다.

 

그는 대구신명여고를 명예퇴직한 영어교사이며 대구삼덕교회(예수교 장로회 통합) 집사이다.

 

최태영(영남신학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은 이상욱과의 협의를 거쳐 그의 글을 논문형식으로 바꾸었으며, 그 과정에 상당부분은 삭제하고 나머지는 보완하였으나 원저자의 의도를 최대한 살리고자 하였다.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
글쓴이 : Ezra| 원글보기

아주 특별한 실험


 

 

첫째날,
집집마다 들러서 만원씩 놓고 나오는 그를 보고
사람들이 제정신으로 하는 행동인지 의아해하면서도
멈칫멈칫 나와서 그 돈을 집어 갔습니다.
둘째날도 거의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셋째날, 네째날이 되자
그 동네는 만원씩을 선물로 주고가는
사람의 이야기로 떠들썩 했습니다
신기하기도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두번째주쯤 되었을때
동네 사람들은 현관 입구에 까지나와
돈을 나눠주는 사람이 오는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언제쯤 올것인가 기다리게 되었고,
그 소문은 이웃마을까지 퍼졌습니다

 

 

세번째주쯤 되자
 이 마을 사람들은 더이상
그 이상한 사람이 와서 돈을 주는 것을
신기해하거나 고맙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주 쯤이 되었을때는
매일 만원씩 돈을 받는 것이
마치 세끼 밥을 먹고 세수하고
출근하는 것 같은
일상사가
되어버렸습니다

 


드디어
실험기간이 끝나는 한달의 맨 마지막날
그 실험을 계획했던 사람은
평소와는 달리 그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지않고
그냥 그 골목을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반응들이 터져나왔습니다
여기저기서 투덜대고 화를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돈은 어디 있습니까?"
"오늘은 왜 내 돈 만원을 안 줍니까?" 라고
따져 묻기까지 했습니다
마을사람들이 매일 만원을 받는 일은
어느새 당연한 권리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일 공짜로 만원을 받는 것처럼
공기가 있어 숨을 쉴 수 있는 것도,
물을 마실 수 있는 것도,
흙이 있어 딛고 설 수 있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직장에 처음 입사했을 때는
적은 보수도 낮은 직책도,
부족한 근무환경도 개의치 않고
고마움을 느끼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받는 것이 익숙해지고,
고마운 것들이 당연한 것이 되고,
더 잘 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들이 쌓이게 됩니다



부모님만 찾던 아이도 성장하면
부모님의 사랑을 당연시하거나
귀찮게 여기다가 결국 돌아가신 후에야
그 사랑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느끼고 후회하곤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왜 일까요?
모든것이 늘 곁에 그렇게 있으리라는 착각,
당연히 내가 가져야하는 권리라는 착각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계약서를쓰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내 심장이 70년동안 아무 탈 없이
뛰어주리라는 보장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가 댓가를 지불하고 구입한 물건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몸조차도
온전히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 입니다


 


따라서
내가 가진 내가 누리는 모든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하는 맘을 가져야합니다.
감사하는 풍요로운 마음이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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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를 방해하는 것 사람들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고, 하나님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기도를 세어보라. 그러면 그런 기도들이 너무 많다는 것에 매우 놀랄 것이다. 우리가 올바른 기도를 드리려면 기도를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기도를 방해하는가?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기도를 방해한다. 우리에게 어떤 형태로든 잘못한 사람들을 향해 보복의 마음, 모진 마음, 참지 못하는 마음, 무자비한 마음을 갖고 있다면, 기도는 방해를 받는다.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것은 기도의 사망을 선포하는 것이다. 마음에 분노를 품고 기도하면 기도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 용서하는 마음은 복음의 마음인데, 이 복음의 마음이 지배해야 비로소 입술에서 진정한 기도가 나온다. 세상적인 마음은 기도를 막는다. 우리가 기도해도 응답 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 안의 세상이 매번 응답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나아가 영적 유익을 얻으려면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어야 한다. 세상이 조금이라도 침투한 마음, 세상에 조금이라도 물든 마음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가정 안의 불화 또한 기도를 방해한다. 사도는 남편들과 아내들에게 지극히 순수한 사랑과 지극히 아름다운 연합 가운데 살아야 기도가 막히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그 외에 거룩하지 못한 생활, 하나님의 마음을 원하지 않는 것, 화를 내는 것, 그분의 마음과 어긋나는 온갖 생각과 감정과 행동, 이런 것들이 기도를 방해한다. 우리는 기도를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야 한다. 그럴 때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고 최후 승리의 깃발을 들게 될 것이다. - E. M. 바운즈의 《기도하지 않으면 죽는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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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사랑은... 

최송연 나 어렸을 적에 당신 사랑은 별빛 찬란한 꿈이었고 나 젊었을 적에 당신 사랑은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이었네 나 늙고 병들 때 당신 사랑은 든든한 바위 산성 되시며 내 여정 다할 때 당신 사랑은 그 나라로 이끄는 매개체이네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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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신, 그래서 뭐?>

 

천국 한 번 보고, 입신에 빠져들고, 방언과 예언의 깊은 세계에 심취하고.... 좋습니다. 좋은데.. 초월의 세계에 접촉한 그 경험이 일상의 삶을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게하는 경우는 참으로 드문 것 같습니다.

오히려 사람을 망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부연하면, 남들이 ...보거나 가보지 못한 세계를 자신의 오감으로 확인했다는 그 사실이 그 사람안에 건방짐을 새기는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 신비한 체험을 한 사람중에는 따뜻하거나 온유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남다른 은혜와 체험이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진정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이라면, 그 체험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지요. 그 놀라운 체험으로 일상의 모질고 고단한 삶을 짊어지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그 엑스타시의 세계를 계속해서 갈망하고, 그것을 맛 보는 횟수로 자기 신앙을 증명하려고 하니 어찌 참된 신앙의 표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마음만 먹으면 입신할 수 있어" 이런 말 보다 더 무지막지한 신앙의 표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소 비아냥 되는 말이긴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저는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뭐?"

신자는 자신의 신앙적 체험을 증거하고 증명하는 자리로 부름받은 자들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복음의 증인으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체험하고 맛 본 그 초월의 은혜가 그 아무리 강렬하다고 해도 우리의 입에서 나 자신의 이야기보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하시고 이루신 그 일을 더 많이 강조하고 외쳐야 하지 않을까요?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외치는 자의 소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요한은 나실인(Nazarite)이었다.
나실인은 일정기간 또는 평생 하나님께 특별한 서원을 하는 자로
남자나 여자나 서원자로 구별된 삶을 원하는 자원한자로
누구나 헌신하고자 하는 자는 나실인이 될 수 있었으며
삼손이나 요한처럼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나실인이 있고
사무엘처럼 어머니 한나에 의해 나실인이 된 경우도 있고
헌신 기간 동안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고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았으며
시체를 만지지 않았고
나실인의 몸을 구별하는 표가 머리에 있음은 제사장의 머리 관 위에 표한 성패와
일치하고 이는 신약의 만인제사장인 헌신과 소명으로 성도가 된 예표가 된다
할 수 있고 그는 유대교의 제사장의 신분이 아니면서 권위를 인정받는
예언자도 아니며  스스로의 권위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베풀었다.
나실인(Nazarite)은  
‘헌신하다’ ‘구별하다’ 라 는 나자르(nazar)에서 파생된 말로
자기 몸을 ‘구별’ 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사람을 일컫는다.
세례요한은 나실인으로서 세상과 구별된 삶으로 낙타가죽의 옷을 입고
메뚜기 석청을 먹었고 전통적이고 형식적인 변절된 율법에 벗어나
변절된 유대교의 종교적인 개종을 권유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자들을
‘독사의 자식들’ 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말하지 말라’ 비판했고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한 벌을 나누어줄 것을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을
세리들도 부과된 세금 이외에 거두지 말 것을
군인들에게 급료로 족하고 강탈하지 말고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 것을 외치자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 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누가복음 3:15]
그는 그리스도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는 자 라 고백한다.

이 시대 종교적인 위선과 교만에 물 들은 오만에 빠진 종교지도자과
비교가 되지 않는가?
이 시대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를 어떠한 대상으로 바라보고 고백하는가?
우리의 의식주를 해결해줄 분으로,
우리에게 은혜만 주셔서 우리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시는 분으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부르심을 받은 신자, 성도를 말한다.
세상에 사나 세상과 구별된 나실인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의 사상과 전통과 의식주의 풍속에 구별된,
종교적인 의식과 전통에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이를테면
장로의 유전은
기원을 모세시대로 두고 모세가 기록한(성문율법 -토라-)
이외에 율법의 정결에 대한 해설로
모세오경을 해석하거나 상황에 적용시킨 구전 율법이나
실제는 포로시대 이후에 율법 전문가인 서기관 랍비들에 의해
B. C 300년경부터 구전과 고전을 모아서 집대성하기 시작하였고
B. C 70-66년경에 총 정리가 되어 약 6천여 항목으로
백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상세히 규제하는 내용으로
그중 중요한 유전 613 개항 중 248개 항은 ‘하라’
365개항은 ‘하지 말라’로 되었다 하며
예루살렘 탈무드가 완성되고 A. D500년경에 바벨론 탈무드가 완성되었고
탈무드는 장로의 유전과 미쉬나 게마라를 합쳐서 만들어졌다는데
이 장로의 유전이 하나님의 계명 같은 위치가 되어
예수님을 핍박하고 백성들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등은 율법을 무시하는 법 위의 법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행위를 탓하지만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것은 율법에 없었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을
장로의 유전에서는 부모님보다 하나님이 더 높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렸다는 ‘고르반 Corban)적인 변절은,
고르반은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린 용도를 다른 용도로 쓸 수 없던 맹세의 말로 사용되었는데
장로의 유전으로 악용되어
‘고르반(하나님께 드렸다)’ 하면서 부모를 봉양을 기피하는 수단으로 악용돼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않는 죄를 범했다.
종교적인 신분의 직책으로 종교적인 지배자로서 그들이 정한 전통이 모세의 율법과
동등한 권위로 백성들에게 안식일등 각종 모세의 율법을 임의대로 세분화하여
백성들의 행동을 규제하고 금식과 헌금을 강요했고
더하여 각종 성전 세를 비롯하여 종교적인 의무로 백성들은 고달픈 생활을 해야 했고
그들은 율법을 준수하는 열정을 보이려고
백성들에게 옷자락 끝에 술을 만들라 하였고
그것을 백성들보다 크게 만들어 자기 신앙이 더 좋은 것처럼 보이려 했고
성구함의 폭을 넓게 하여 손에 감고 이마에 붙이고 자신의 자랑으로 삼았기에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순종과 사랑을 버리고 위선과 교만과 자랑으로
율법의 형식적인 규정의 준수를 하나님의 계시와 동일한 수준으로 생각하였기에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 ‘회칠한 무덤’ 꾸짖으셨다.
외식(Hypocrisy)은
외형적인 태도와 내면적인 태도의 모순, 위선을 뜻하며
하나님의 뜻보다도 그들이 가진 목적의 기도 등 인간의 욕구를 좇는 것 을,  
쿰란의 에세네파는 바리새파를 비난했다 전해진다.

우리의 현실과 비교하여 어떠한가... ?
전에 한국의 어느 대형교회의 유명한 목사가 집회 설교에서
‘성경을 너무 많이 가르칠 필요가 없다’ 는 기사를 읽고 황당했다
이어 ‘목사가 설명해 주는 만큼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니
그런 그를 ‘설교의 달인’ 이라니 누군가 대단히 미쳤다.
‘설교의 달인’ 이라 불러주는 사람이나 기사를 쓴 사람이나
‘달인’ 이라니 달통(達通)한 사람이라는 표현인데 왜 하필이면 ‘달인’ 이라는
한국사회의 유행적인 단어를 쓰는지 이도 답답하지만
그의 설교를 들어보면, 무지한 사람인 내가 들어도 영 아닌데
이런 사람의 교인이나 이런 사람을 불러서 집회를 갖는 사람이나 교회나
그런 교회에서 대통령과 국무위원이 나왔으니 개탄스럽고
(정치적인 논쟁은 사양 함)
한국 교계도 마찬가지 이지만 이곳에서 그를 불러 집회를 가진 교회와
교계를 보면서 뭐라 해야 하는지 난감했다.
그는 또 ‘제자 훈련으로 성경공부를 많이 하면 교회가 망한다.
교회에서 말썽피우고 교회를 그만두는 사람은 제자 훈련을 한 사람들이다 , 라니
이는 자기 저주의 말로 들렸다.
믿음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So then faith cometh by hearing, and hearing by the word of God
로마서 10:17]
어떻게 나며 성경을 기록한 목적을 요한은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20:31] 라고 기록했다.
성경을 알아야 하는데 모르고 어떻게 믿음으로 자신을 시험하고
어떻게 확증할 것인가?
그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줄 알지 못하면 그는 버림받은 자 이다.

그는 평신도와 성직자를 가르는 분리주의자요 이원론자라
막무가내(莫無可奈) 자기 본위의 신학으로 성경을 바라보고 설교하는 자라
‘세상은 악’ 이고 ‘교회는 선’ 이 된 이원론적 흑백논리와 분리적인 신학을 갖고 있기에
이분법적 세계관에 갇혀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대형교회의 유지를 위한 자기 식 회유(誨諭)로
성경 구절 선택에 익숙해 있기 때문인데 자세히 들어보면 한국이나 이곳의 대형교회
목사들과 그들을 따르는 목사들의 설교가 그런 스타일이라 무언가 커다란 사회적인
사건이나 이슈에 망언을 서슴없이 하여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는 일은
우연이 아니다.
사실 오래전부터 ‘평신도들이 신학을 많이 알면 목사가 피곤하다’'는
말을 목회자들의 모임에, 그것도 신학교 교수라는 목회자들의 모임에 들었다.
그러면서 신학교를 운영하다니, 외식(Hypocrisy)도 이런 외식이 없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고 악한 날에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니
진리로 허리띠를 둘 루고 의의 호경심을 붙여 공의로서 마음의 중심을 삼고 보호하여
평안의 복음으로 준비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서 어둠의 악한 불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And take the helmet of salvation, ande the sword of the Spirit,
which is the word of God:  에베소서 6:17]

돌아가서
오늘날의 코셔(kosher)음식은
정결 예식에 관한 음식 법으로 처음에는 신명기 14:21절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스스로 죽은 모든 것을 먹지 말 것이나 그것을 성중에 거류하는 객에게 주어
먹게 하거나 파는 것은 가하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
을 확대 해석하여 육류와 유제품을 함께 먹지 않는 법을 만들었다.
원래는 짐승이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짐승이라 어미와 새끼 염소를 함께
죽이지 말라는 적용을 ‘먹지 말라’ 로 해석하였고
이후 유대교 의식에 따라 도살된 육류가 코셔가 되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넌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전도서 1:9-10]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깨치지 못하는 허무,
이 허무한 시대에 누가 외칠 것인가?
하나님의 의(공의)를 거치는 자들이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



 

 
 
삶이란 그런 것...
              최송연



마음에 준비함 없는데
불쑥 찾아온 지난겨울
내겐 너무 혹독했었네
 
밤낮없이 쏟아져 내리는
진눈깨비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알고 있지
만사가 그러하듯
제아무리 모진 겨울일지라도
절대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꽁꽁 얼어붙은 저 창가에도
언젠가는 반드시 봄 햇살이
화사한 미소로 찾아든다는 것도...
 
봄 여름 가을 겨울, 
희노애락(喜怒哀樂),
삶이란 언제나 그런 것이니까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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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3편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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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불륜,그리고 거기서 잉태된 불의한 성도> 누가복음 16장 '불의한 청지기비유'

김성수 목사 설교에 대한 소감문.

 

1.김성수 목사가 주장하듯이 눅 16:8의 ‘칭찬’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줄곧 하나님을 찬양 하는 데만 사용되어진 단어일까? 성경에서 ‘칭찬’의 원어로 쓰인 용례를 찾아보았다.

고전11:2,11:22에서 사용된 ‘칭찬’의 원어가 눅16:8에 사용된 “칭찬‘과 같은 원어이지만

고린도 전서에 사용된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고린도교회 성도다.

 

2. 김성수 목사가 주장하듯이 눅16:8 에 사용된 ‘지혜’ 가 예수님을 함의하는 것일까 생각 해 보았다.

   보통 성경에서 지혜라고 하면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사용된 모든 ‘지혜’가 다 예수님을 함의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들의 두뇌회전에서 비롯되는 기발한 착상이나 좋은 생각도 지혜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굳이 원어를 동원해가면서 까지 눅16:8절의 지혜를 예수님에 비견하는 것은 견강부회적인 성격이 강하다 하겠다.

   오히려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는 세상적인 삶에서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된 약삭빠른 처세술에 가까운 것이다.

 

3.김성수목사의 설교처럼 불의한 청지기가 자기부인을 해서 주인의 은혜만을 바라는 동기로 장부조작을 하면서 죄를

뒤집어 쓴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된다.

불의한 청지기는 자기 살 궁리를 한 끝에 주인에게 해고당한 뒤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횡령과 뇌물의 성격으로서의 장부조작을 한 것이다. 이러한 범죄적인 행위를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비유라고 하는 것은 정말 넌센스의 극치다.

불의한 청지기는 삶의 기조가 범죄인 사람이 마지막까지 범죄로 발악을 한 경우이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 대신 죄를 짊어지신 것인데 예수님이 불의한 청지기라니

가도 너무 멀리 갔다.

 

4.‘하나님의 불륜’ 이라는 단어 사용에 대하여.

김성수목사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발적 불륜의 자리이며,자발적 불의의 자리입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잉태되었고 출산되었습니다.“ 라고 설파한다. 그래서 설교제목도 <하나님의 불륜, 그리고 거기서 잉태된 불의한 성도>다.

굉장히 독특하고 멋있지만 한편으로 자극적이고 현란하게 튀는 어휘들이 난무한다.

그러나 불의한 청지기는 죄를 스스로 뒤집어 쓴 것이 아니라 끝까지 죄를 범한 것이고, 예수님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대신 책임지시고 죽은 것이다. 예수님에게 불의라는 단어를 붙일 수 없는 이유다.

 

또한 “하나님의 자발적 불륜”이라는 표현을 정당화하기 위헤서 다말의 예를 들고 있다.

그런데 다말이 창녀는 아니고, 또한 불륜을 행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말은 단지 하나님의 씨에 의한 그리스도의 언약성취를 위해 ‘씨의 연속’이라는 측면에서 1회적으로 시아버지의 씨를 받는 행위로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어졌을 뿐이다.

다말은 창녀도 아니고 유다에게 씨를 받기 위해 1회적으로 창녀로 변장했을 뿐이고 그후로도 창녀짓을 하지는 않았다. 단지 그 행위가 세상적으로는 근친상간으로 보일 뿐이지만 유다와 다말이 그후로도 계속 근친상간을 하지는 않았고

둘다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를 인정하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다말의 사건을 ‘하나님의 자발적 불륜’으로 몰아가는 논리는 참으로 현혹적이고 억지스러운 견강부회로 보인다.

 

결국 김성수 목사는 <모든 성경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대전제에 모든 성경을 억지로 꿰어 맞추고 있는 것이다.

대전제가 틀린 것은 아니고 진리라고 해도 성경의 모든 말씀을 <예수그리스도의 예표>로 해석하는 것은 상당히 자의적이고 억지스럽다.

 

그래서 ‘칭찬’이라는 단어가 하나님에게만 쓰였다거나, 지혜가 예수를 상징하니 불의한 청지기 속에 있는 것도 예수의 지혜라거나, 불의한 청지기는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고 장부조작을 한것이라거나, 하나님이 자발적으로 불륜과 불의의 자리로 내려갔다거나 하는 멋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닌 잘못된 해석을 하고 말았다.

 

김성수목사는 현대교회를 향하여 <양복입은 무당>이라는 포효로 등장하여 부패한 작금의 교회에서 유리방황하고 있는 많은 성도들에게 정통적인 진리의 말씀을 소개하는 중대한 역할을 하였지만 그 자신은 개혁주의를 넘어서서 최고의 진리를 전하는 목사가 되겠다는 목적에 과도하게 사로잡혀 스스로는 현대목사제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함정에 깊숙이 빠져드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보여진다. 참으로 안타깝고 착잡한 심정이다.

 

출처: 개혁주의마을/Faithful


    과거는 미래로 가는 에너지원 과거에 대한 우리의 감사가 부분적으로 그치면,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도 결코 온전할 수 없다. 없었으면 좋았을 일들, 다르게 풀리기를 바란 관계들,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들, 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 싶은 실수들 때문에 원망이 남아 있는 한, 우리 마음 한 부분은 여전히 고립되어 새로운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과거 전체를 되찾는다는 것은 더 이상 좋은 일만 기억하고 궂은일은 잊는 것이 아니라 내 과거를 마음이 계속 변화될 기회로 대한다는 뜻이다. 마음이 변화되면 과거를 즐거이 기억할 수 있다. 과거 전체가 우리를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원이 된다. -헨리 나우웬의 [두려움에서 사랑으로] 중에서- 사람들은 과거에 매여서 미래로 나가지 못합니다. 과거가 있기에 미래가 있습니다. 내 삶의 존재는 과거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과거의 아픔과 상처, 실패와 실수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그것이 회복이며, 자유입니다. 과거는 우리를 과거에 매어놓지 않습니다. 다만 과거에 우리가 매여서 사는 것입니다. 과거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가 있을 때 믿음도 온전해집니다. 과거는 내 인생의 한 부분이었기에, 남겨진 미래를 잘 가꾸면 아름다운 전체가 됩니다. 복음은 과거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부터 내 인생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새벽 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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