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 이걸로 횡설수설 좀 해볼까 합니다. ‘일천번제’ 바로 다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솔로몬의 지혜가 솔로몬이 원래 가졌던 지혜가 아니라 일천번제를 드린 다음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였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열왕기 저자의 의도일 것입니다.
창기 두 여자가 한 집에서 각각 아들을 낳았는데 한 여자가 잠자다가 자기 아들을 깔아서 죽이고 다른 여자의 아들과 바꿔치기 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다투다가 솔로몬 왕 앞에 나와 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으로 다스려지는 이스라엘에서 창기라면 가장 비천한 죄인의 신분인데 감히(?) 왕 앞에 나와 재판을 받습니다. 우리도 신분의 고하나 귀천과 관계없이 이와 같이 누구든지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요즘 세상 같으면 DNA검사로 간단히 판별할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게 있었을 리 만무하지요. 그런데 우리 잘 아는 바와 같이 솔로몬은 칼을 가져오게 한 다음 아기를 둘로 갈라서 두 여자에게 나누어주라는 판결로 진짜 어머니를 알아내는 재판을 합니다. 그리고 이 지혜로운 판결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솔로몬에게 있는 하나님의 지혜에 두려워 떨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다음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는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그리고 그가 누린 막강한 권세와 평화와 부귀영화가 부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솔로몬의 재판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메시지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1. 솔로몬을 통하여 전지하신 심판의 하나님을 보여 주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끔찍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주가 되려면 전지(全知)하셔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넓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다 아시고 판단하시지 못 한다면 하나님은 심판주가 될 수 없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악(惡)이 지배하고 악행(evil doing)과 범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매우 유용한 도구와 무기가 될 것입니다. 착한 자는 당하기만 할 것이고 나쁘고 교활하고 못 된 자들은 항상 도덕질하고 빼앗아서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억울한 일은 보상받지 못 하고 악한 자들은 처벌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합니다. 이사야서 40장 27절은 말씀합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하나님이 너의 사정을 모르시고 너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 하실 거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명철은 한이 없으시다.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신다.”

2. 심판은 칼로 나누어 하는 것이다.
솔로몬 왕은 칼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심판은 칼로 하는 것입니다. 칼로 쪼개고 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합니다(히 4:12). 주님의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옵니다(계1:16).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 그 터럭의 3분의 1은 성 안에서 불태우고 3분의 1은 성 밖에서 칼로 치고, 3분의 1은 공중에 뿌려 흩어라, 내가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마지막 날에는 악인과 선인이 나누어질 것입니다. 좌편과 우편으로 나뉘어질 것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와 그렇지 못 한 자들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은 피할 자가 없습니다.

3.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지혜와 다르다.
솔로몬이 칼로 아기를 나누라고 명령하였을 때 주변의 신하들이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였을까요? 혹시 왕이 미쳤다고,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요?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이 세상의 지혜로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우고 어린아이들에게는 열려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4. 사랑이 이긴다.
솔로몬의 재판에서 아기의 진짜 어머니는 사랑으로 이겼습니다(승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이깁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믿음, 소망, 사랑, 세 가지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 말씀합니다. 주님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 없는 자는 이기지 못 할 것이며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 할 것입니다.

5. 참된 사랑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자신의 좋아하는 감정과 착각합니다. 좋아해서 만나고 결혼했다가 싫어지면 갈라서고 병이 들거나 화상이라도 입어 모습이 달라지면 떠나갑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신의 필요에 따라 상대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자기를 위한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를 위한 사랑, 상대중심의 사랑입니다.
진짜 어머니인 여자는 칼로 아기를 쪼개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닌 여자에게는 자기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아기가 살든지 죽든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진짜 어머니의 사랑은 아기를 향한 사랑이었고, 거짓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 아니 이기심이었던 것입니다.

6. 하나님의 사랑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하여 인간을 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또 말씀하기를 우리는 사나 죽으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우리 인간을 지으셨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중심이거나 이기심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을 위한 사랑, 하나님 중심의 사랑이었다면 인간이 범죄하여 죄인이 되고 진노의 자녀가 된 순간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에게서 돌아섰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대로 죄인들을 싹 쓸어버리고 다시 지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이 된 인간을 포기하거나 내버리지 못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긍휼로 불타는 듯 하였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사랑입니다.

7. 진퇴양난, 절체절명의 갈림길,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
자, 오늘 말씀은 솔로몬왕이 칼로 아기를 자르라 하였지만, 좀 바꾸어서 그 창기 두 여자가 아들을 놓고 양쪽에서 잡아당기기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서로가 죽어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진짜 어머니는 압니다. 자기가 아들을 놓아버린다면 저 무지한 여자가 오늘밤에 그 아들을 깔아뭉개서 죽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어도 뺏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 여자는 아기가 찢어져도 안 놓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손을 놓는다면 아들은 저 여자에게 깔려죽을 것이고, 안 놓는다면 이 자리에서 찢겨서 죽을 것입니다. 아들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이라면 이 경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아들은 죽는 수밖에 아무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을 절망이라고 합니다.
우리 죄인들이 그랬습니다. 사단의 손아귀, 사망의 권세에 붙잡혀 끄집어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그 죽음의 자리에, 십자가에 대신 내어주셨습니다.
십자가, 그것은 솔로몬의 칼 보다도 더욱 기이한, 천사도 경악한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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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별처럼요? 말도 안 돼. 못 믿겠어요.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라고 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증거는 쪼갠 고기, 곧 십자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입니다.
그 어린양은 쪼개어지고 그의 살과 피는 하나님이 가리키신 밤하늘별처럼 흩뿌려질 것입니다. 밤하늘 별은 독생자의 살과 피, 그리고 구원받은 모래알 보다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 아브람의 수많은 영적후손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리키신 밤하늘별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 원대한 우주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광활한 우주를 가리키신 것입니다. 우리 사는 이 지구, 우리 태양은 우주 한 구석 티끌일 뿐입니다. 우리 태양계가 속한 은하계만 해도 지름이 10만 광년이나 되는 거대한 별무리이고 은하계에는 태양과 같은 별들이 2천억 개나 됩니다. 그런데 우주 안에는 은하계와 같은 갤럭시(Galaxy)들이 또 천억 개나 됩니다.

그럼 우주공간에 태양과 같은 항성만 해도 몇 개나 될까요? 1천억 곱하기 2천억 하면 얼마나 되지요? 어떤 우주과학자가 관측 가능한 우주의 별을 계산해 보았답니다. 700해. 지구상의 모든 해변, 강, 사막의 모래 알갱이 수 보다 많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끝 간 곳 없이 드넓은 우주를 티끌같이 작은 이 지구에 살면서 쳐다나 보라고 밤하늘 장식용으로 만드셨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그 후사들에게 상속재산으로 나눠주시려고 만드셨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열 므나를 남겼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라. 너는 다섯 므나를 남겼으니 다섯 고을을 다스리라.” 아니, 세상의 마지막 때 이 땅 위에 고을이 어디 남아있어 고을을 다스린단 말입니까?

그 고을들은 어쩌면 은하계, 안드로메다 성운 같은 거대한 갤럭시들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드넓은 우주공간의 1,000억 개, 2,000억 개 은하계, 성운 가운데 열 개, 다섯 개씩을 받아 다스리는 것이지도 모릅니다. 그 날이 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 우주를 상속받아 다스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스릴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날 그 날을 고통 가운데에서 탄식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로마서 8장). 그리하여 끝 간 데 없는 광활한 우주공간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나님의 찬송과 영광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가리키며 보여주신 밤하늘별은 하나님의 그 꿈이었을 것입니다.
당신은 십자가 너머의 그 꿈, 하나님의 원대한 그 꿈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우주공간 가운데 티끌처럼 작은 이 지구별에서 100년도 못 살고 안개처럼 사라지는 허망한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할 영광의 자녀들입니다.
당신의 가슴 속에 그 꿈이 있습니까?
황당한 상상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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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셨으면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고 증거를 요구합니다. 참 당돌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도 믿지 못 하는 악하고 약한 존재인가 봅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도 눈에 보이는 증거, 예언, 계시 같은 것들을 구하고 찾아다닙니다. ‘나는 여호와로라.’ 하시면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신 하나님께는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의 믿음 없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화도 안 내시고 아브람에서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아브람이 그것들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갭니다. 비둘기는 쪼개지 않습니다. 솔개가 내릴 때 아브람이 쫓습니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들고 캄캄함이 임한 가운데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브람의 자손들이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하고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은 자빠져 자고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리고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고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납니다. 그리고 그 날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그 후손이 애굽 강에서 유브라데 강까지의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증거를 요구하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증거는 ‘쪼갠 고기’였던 것입니다.

우리 알다시피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의 이야기요 약속입니다. 예표입니다. 성경 전체가 예수님께 관한 책입니다. 그렇다면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삼년 간 공생애를 마치시고 십자가에 달리실 하나님의 아들 아니겠습니까? 아브람이 그 손으로 삼년 된 암소, 삼년 된 암염소, 삼년 된 수양을 쪼갠 것처럼 아브람의 후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쪼갤 것입니다. 횃불이 그 쪼갠 고기 사이를 지났습니다. 쪼갠 고기가 하나님이 횃불로 통과하신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쪼갠 고기’가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 오직 그 한 길이 될 것입니다.
Jesus answered,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No one comes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John 14:6)
하나님은 그렇게 아들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복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아들을 그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밤하늘별을 가리키신 것처럼 십자가에서 쪼개진 아들의 몸, 그 살과 피, 그 생명은 온 땅에 밤하늘별처럼 산산이 부서져 흩뿌려질 것입니다. 그렇게 온 세상 모든 죄인들을 구원할 것입니다. 또한 밤하늘별은 그 살과 피, 생명을 받아먹고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 아브람의 후손일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밤하늘별을 보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내어주사 십자가 위에서 산산이 부서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입니다.

밤하늘별을 가리키실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브람은 밤하늘별처럼 오실 후손을 보고 기뻐하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가슴은 십자가의 고통과 산산이 부서져 흩뿌려질 아들의 살과 피로 찢어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그 고통 너머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구원받을 백성들,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고 계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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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가리켜 보여주신 그 밤하늘 별은 아브람의 무수한 육신의 후손들이 아니었습니다. 밤하늘 별은 아브람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이를 정확히 지적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후손’이라고 말씀하신 그 ‘후손’은 복수명사 ‘후손들’이 아닌 단수명사 ‘한 후손’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실 때 아브람도 이상하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아니, 하나님, 왜 ‘후손들’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후손’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기초문법도 모르십니까?” 하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하신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러니 아브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 곧 ‘오실 예수’를 믿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속으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믿었는지는 기록이 없으니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아, 내게서 날 후손들 가운데 언젠가 오실 메시아, 그 메시아가 저렇게 밤하늘 별처럼 되는 거로구나.” 그렇게 믿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의”로 여기실(인정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만일 아브람이 따져서 ‘후손’이 아닌 ‘후손들’의 약속을 받아내었더라면 절대로 의로 여기심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로 여기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브람이 ‘후손’의 약속, 곧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자 하나님께서는 “나는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낸 여호와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냐?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여호와란 말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내실 때 아브람에게 하신 '가나안 땅을 주시고 후손이 번성하며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실' 이 약속은 하나님의 이름을 건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었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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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5장 1절) “너는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람이 왜, 무엇을 두려워했단 말입니까? 아브람이 얼마나 두려워했으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셔야 했을까요? 아브람이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은 하나님께 자신에게 후사가 없다고 대답합니다. 아브람이 두려워한 것은 후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후사가 없는 것이 왜 그렇게 큰 두려움이 되는 것일까요? 인간은 누구나 죽습니다. 인간 뿐 아니라 짐승도, 물고기도, 벌레도, 나무도, 꽃도, 모든 동식물...., 산 것들은 다 죽습니다. 그런데 씨를 퍼뜨리고 새끼를 낳습니다. 그렇게 자신은 죽지만 생명은 이어져 내려갑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때 모든 사람들은 사람도 그렇게 후손을 남기는 것이 생명을 이어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후사가 없는 것, 대가 끊어지는 것이 죽음 보다 더 두려웠는지도 모릅니다. 아브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로부터 자신을 불러내셨고 함께 하시는데도, 그 하나님이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데도 후사 없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브람에게 하나님은 화를 내시지도 아니하시고 꾸지람도 아니하십니다. “아브람아, 다메섹 엘리에셀이 네 후사가 아니다. 네 몸에서 나는 자가 네 후사가 될 것이다.” 말씀하시고 아브람을 이끌어 밖으로 나가 밤하늘의 별을 보여주십니다. “저 별들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밤하늘의 별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의 가슴속엔 아직도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라면서 여름날 밤 쳐다보던 밤하늘, 모래알처럼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밤하늘 별들이 꿈처럼 남아 있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그 약속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믿으매 이를 그의 의로 여겨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좀 따져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네 후손이 저 별과 같을 것이다.”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이 어째서 의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따져봐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후손이 별처럼 많아지는 것이 복입니까?
물론 복이겠지요. 특히 아들 낳기 원하고 자손이 번성하기 원하는 한국인들에겐 정말 큰 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천의 입장에서 본다면, 만일 그 자손들이 예수님을 모르는 육신의 자손이라면, 진노의 자녀, 멸망의 자식들이라면 번성한 자손은 외려 끔찍한 화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라면, 구원받은 후손이 아니라면,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면 후손이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많아진다 해도 그것은 결코 복이 아닐 것입니다. 그 후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죽고 결국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참 된 복은 영원한 생명으로만 가능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불러내시면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신 그 복은 후손이 번성하는 그런 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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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영생해야 한다. 반드시 영생하는 존재여야 한다.
왜 인간은 영생하는 존재여야 하는가? 하나님 때문이다.
우주만유, 끝없이 광활한 우주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주만유를 인식하는 존재가 없다면 광활한 우주가 무슨 소용인가?
하나님을 인식하는 존재가 없다면 하나님 자신은 또 무슨 존재의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이 잠시 생겼다 사라진 다음 하나님 홀로 수백억년 수천억년..., 영원히 혼자 우주만유를 즐기시겠는가?

하나님에겐 하나님을 아는 존재가 필요하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지으셨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이사야 43:21)”
그러므로 또한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과 함께 영생하는 존재여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으로’ 지으셨다. 그러나 인간은 뱀에게 속아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인이 되었으며 그 생명은 멸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할 수 없었고 원수 사단마귀에게 헌납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사랑을 버리지 아니하셨고 포기하지 아니하셨고 사랑하는 그의 피조물을 구원하고 회복시키기 위하여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엄청난 희생과 대가를 치르셨다.

이제 인간은 죄를 벗고 울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 사랑에 감사하며 영원히 찬양하는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울며 돌아오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고 면류관을 씌워 아름답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이 오면 하나님의 나라가 온 우주에 펼쳐질 것이다.
하나님의 후사에게 어찌 상속재산이 없겠는가?
하나님은 우주만유를, 1천억 개의 항성을 가진 은하계, 2천억 개의 갤럭시, 끝없이 광활한 우주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나누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주셔서 우주를 다스리게 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우주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웅장한 찬양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사야서 43장 21절 말씀은 영원히 성취될 것이다.

해피 뉴이어! 할렐루야!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참 된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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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속이기 2  (0) 2021.07.14

저는 ‘거듭남’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대뜸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대답하십니다. 영어성경은 'born again‘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말 성경이 번역한‘거듭’은 중복의 의미를 가집니다. 처음 것을 그냥 둔 채 또다시 거듭하여 더 하는 것입니다. 거듭 나면 목숨이 두 개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게 아닙니다. ‘네가 다시 나지 않으면’, 또는 ‘네가 새로 나지 않으면‘입니다. 처음 것은 없애고, 무효로 하고, 다시,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거듭남‘이 아니라 ’다시 남‘, ’새로 남‘입니다.

니고데모가 놀라서 되묻습니다. “제가 늙었는데 어떻게 다시 납니까? 어머니의 태에 도로 들어갔다 나올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신은 땅에 속하고 영은 하늘에 속하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영이어야 하고, 그래서 너는 영으로 다시 나야 한다. 이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라. 바람이 불어도 눈에 보이지 않듯이 영으로 다시 나는 것도 그렇단다.”

니고데모가 다시 묻습니다. 도대체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 그것도 모르느냐? 너도 알듯이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았고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놋뱀을 쳐다보면 살았지 않느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죽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죽어가던 사람이 장대 위의 놋뱀을 쳐다보면 살았듯이 멸망하는 사람이 십자가 위의 독생자를 쳐다보면 산다는 것입니다, 그게 영으로 다시 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대로 광야의 놋뱀처럼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죄악 가운데서 죽어가던 죄인들이 누구든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면 영적존재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영생을 얻어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를 위하여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이 거듭남, 아니 ‘다시 남’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시 남’은 바람이 보이지 않듯 눈에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성령과 물로 다시 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 그렇습니다. 다시 나는 것은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단과 결심으로, 혹은 노력으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물로'는 죄를 씻고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성령과 물로 다시 나는 것은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나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거듭, 아니 다시 나려고 애쓰지도 마십시오. 그저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당신을 영으로 다시 나게 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거듭'이 아니고 '다시' 말입니다. 육신의 생명이 아니고 영의 생명으로 말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새 생명을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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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유월절 명절이 다가오는 그 때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다.
한 아이가 가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다.
사람들은 이 굉장한 사람을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 하였고 예수님은 피하여 산으로 올라가셨다. 예수님이 산에서 돌아오시지 않자 기다리던 제자들은 밤에 배를 저어 갈릴리바다를 건너려다 풍랑을 만나 고생하였고 그 때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어오셨다.

다음날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푼 굉장한 사람인 예수님을 찾아다니다 바다 이 편 건너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또다시 놀란다. “아니. 언제 바다를 건너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향하여 “너희는 먹고 배때기가 부르니 나를 찾는구나.” 하셨다.
그러고는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누구든지 나를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이라는 것을, 수많은 사람을 살게 하는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먹어도 다 함이 없는 하늘의 떡,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나누어 먹으며 하나님과 화목하는 화목제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 하였다. “자기 살을 먹으라고? 어렵도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중에도 여럿이 이해하지 못 하고 예수님을 떠나갔다.
“너희도 가려느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생명의 말씀이 여기 계신데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해하지 못 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베드로는 그래도 떠나지 않고 예수님을 붙좇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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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두 아들이 있었으나 야곱에게는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요셉만이 진짜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아주 대놓고 요셉을 편애하여 요셉에게만 멋진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요셉은 또 꿈 이야기를 해서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사건이 터지고 맙니다.
멀리 가서 양을 치는 아들들이 무사한지 궁금하여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보냅니다.
그런데 형들은 요셉의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가 지나가는 이스마엘 족속 무역상들에게 은 20개를 받고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종이 되어 애굽으로 끌려갑니다.

나중에 맏형 르우벤이 돌아와 보니 구덩이에 요셉이 없습니다. “아이가 없다, 아이가 없어졌다. 어이할꼬? 이제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큰일 났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아버지 야곱이 그들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들은 꾀를 내었습니다. 염소를 때려죽이고 요셉의 채색옷을 찢어서 그 염소피를 묻혀서 들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 우리가 길에서 이 옷을 주웠는데 아버지의 아들의 옷이 아닌가 보소서.”
야곱이 대성통곡을 합니다. “아이고, 내 아들이 악한 짐승에게 잡아먹혔구나. 요셉아, 요셉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식음을 전폐하고 옷을 찢고 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아들을 따라 죽겠다고, 흰 머리를 날리며 음부에 내려가리라고 몇날며칠 밤낮을 새우며 슬피 애곡합니다. 자녀들이 아무리 위로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그렇게 아버지를 속이고 아버지의 집에 무사히 들어갔습니다.

우리 죄인들도 그렇습니다.
아들의 피와 아들의 옷을 가지고 아버지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야곱은 까맣게 모르고 속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다 아시면서 속아주시려고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아들아, 내 아들아....." 통곡하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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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럴 수가 있었을까?
가슴을 찢고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십자가에 몸을 찢으신 주님은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어느 누가 이런 사랑을 베풀 수 있단 말인가?
어느 누가 이런 희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보다 더 큰 희생이 어디 있고,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선물은 제쳐두고 산타클로스 선물에 검댕 묻은 사람들아.

하나님의 아들이 아기로 오셨다.
하나님의 선물로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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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인이 되자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다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되었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실 ‘여자의 후손’을 보내겠다고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그 구원자가 올 때까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한 길을 열어두셨지요. 그것이 제사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오실 때까지는 애꿎은 짐승을 잡아, 그 죄 없는 생명의 희생의 효력으로 잠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었지요.

짐승의 희생은 가죽이 벗겨지고 사지가 절단되고 내장이 모조리 꺼내지고 태워지는 참혹한 것이었지요. 그렇게 인간은,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벌벌 떨면서 나아갔지요.
그것은 인간의 죄는 참혹한 죽음의 대가 지불 없이는 절대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대속자(代贖者)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豫表)였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가죽이 벗겨지고 사지가 절단되고 내장이 모조리 꺼내지고 태워지는 듯 하는 참혹한 고통을 당하며 죽으심으로 그 대속자는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역사상 인간이 고안해낸 최악의 형틀이라는 십자가에 매달려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당하시며 죄인들이 치러야 할 혹독한 죽음의 대가를 치르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단 한 번의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를 믿는 모든 자는, 그 십자가 아래 엎드려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구하는 자는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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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가장 시급한 문제.......
믿으세요. 믿으면 됩니다. 너무 쉽고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냥 믿고 구원자로 받아들이세요. 입으로 “예수님 내 구주”, 그 이름을 부르세요.

그런데 안 믿어진다고요? 아직 믿고 싶지 않다고요?
할 수 없지요.
그러나 한 가지만 기억하세요.
마지막 날에, 죽음이 당신을 덮쳐 캄캄한 무저갱으로 끌어갈 때, 그 때는
주의 이름을 부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세요. 구원자는 그 분밖에 없어요.
당신이 한 평생 하나님 떠나 살고 예수를 거부하였다 해도
당신의 마지막 순간에 부르는 소리를 그 분은 들으시고 손을 내미실 것입니다.
성경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셨거든요.

그러나 또한 기억하세요.
모든 죽음이 주의 이름을 기억해내고 부를 만큼 그렇게 여유 있게 오는 건 아니거든요.
그 절박한 순간에 주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고, 기억이고 뭐고 즉사할 수도 있거든요.
그러니 일평생 불안 속에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아슬아슬 주님을 찾겠다는 생각일랑 마시고,
당신의 은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기 전에, 당신의 시간이 다 하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세요.
오늘 이 시간 무릎을 꿇고 주님을 당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이세요.
그리고 죄의 짐, 죽음의 짐을 내려놓고 영혼의 평안을 누리세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놀라운 안식과 기쁨과 축복을 누리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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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죄 값을 치르시려면 사람이 되어 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면 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생명을 주시려면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쪼개 생명을 쏟아내고 죽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하여 여자의 몸을 통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사람이 되려면 그 방법이어야 했고 생명을 쏟아 내어주고 죽으시려면 그 길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구원의 길이 있었다면 하나님은 절대로 아들을 내어주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처녀가 어떻게 아이를 낳느냐고요? 과학적이 아니라고요?
그럼 전능하신 하나님이 과학 때문에 피조물을 사용하실 수도 없고,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실 길도 없어야 하나요? 그래서 우리를 구원할 아무 방법 없어 손 놓고 바라만 보아야 하는 무능력한 하나님이어야 하나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이사야 7:14)
이미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은 처녀의 몸을 통하여 오셨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예수님 나신 날을 기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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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에서의 옷을 입고 염소털로 손등을 덮고 염소고기를 손에 들고 떨면서 아버지 이삭에게 나아갔어요. 에서가 아니고 야곱이라는 게 들통나면 축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은 야곱의 손을 만져보고 옷 냄새를 맡아보고 완전히 속아 넘어갔어요.
“목소리는 야곱인데 손 만져보고 냄새 맡아보니 에서로구나.” 그리고 염소고기를 먹고 야곱을 축복하였어요.

우리가 천국 가는 것도 하나님 속이기예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어린양의 그 피를 들고 두려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은 속아주실 거예요.
속아주시기로 작정하고 아들을 내어 주셨으니까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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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안 보입니다. 전기(電氣)도 안 보이고, 자력(磁力)도 안 보이고, 전파도 안 보이고, 힘, 에너지, 중력, 인력(引力)도 안 보입니다. 우리는 그 안 보이는 것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생명도 안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안 보이는 생명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가장 작은 바이러스로부터 모든 동식물, 거대한 고래까지 생명으로 삽니다. 이 지구, 온 세상이 생명으로 가득합니다. 
생명이 무엇일까요? 전기작용? 물리학적 현상? 화학작용?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생명이 무엇인지, 그 정체가 무엇인지 밝혀낼 수 없고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생명 한 조각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생명 또한 영적세계에 속한 것일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생명이 무엇일까, 내가 죽으면 이 생명은 어디로 가는 걸까, 오늘밤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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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두려운 것이 죽음입니다.
죽음 이후를 알 수도 없고 죽음에서 다시 돌아올 수도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죽음 앞에 두려워 떨며 일평생 매여 종노릇하다가 결국 죽습니다.
오직 한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죽을 생명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오셔서 십자가에 몸을 깨뜨려 흘려주신 영원한 새 생명으로 바꾸는 것, 그 길 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예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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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죄와 심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브리서 9장 27절)

인간은 본능적으로 죄와 심판을 두려워한다. 죽어서 지옥 갈까봐 무서워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인간의 심령 속에 하나님이 두신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죄와 심판에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 

첫째, 인간의 죄를 다스릴 절대자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절대자가 없다면 죄나 벌을 무서워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둘째, 그 절대자는 인간에 대한 소유권과 통치권을 보유해야 한다. 그러자면 절대자는 창조주이어야 한다. 인간을 만들고 생명을 주지 않았다면 소유권이나 통치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창조주도 아니면서 인간을 심판하고 지옥에 보낸다면 그것은 부당한 횡포일 것이다.
“네가 뭔데? 네가 내게 무슨 권리가 있는데? 힘세면 다냐? 너 깡패냐?” 이렇게 되겠다.

셋째, 심판이나 처벌을 할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절대자가 인간에게 이성과 사리판단 능력을 부여하고 죄를 짓지 아니해야 할 이유를 알게 하고, 임무를 부여하고, 명령을 하고.....

넷째, 그 절대자 자신이 죄가 없고 거룩해야 한다. 자신이 거룩하지 않으면서 인간에게 거룩을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미돼지가 새끼돼지더러 목욕하라 하는 거 보았는가? “아가, 우리 함께 뒹굴자꾸나...”

다섯째, 절대자가 인간에게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고 또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할 것이다. 관심이 없고 함께 할 생각이 없다면 인간이 죄의 구렁텅이에 빠져 더러워지든지, 죽든지 말든지, 냄새가 나든지 말든지 무슨 상관이겠는가?

여섯째, 절대자는 전지전능하여 모든 인간의 심령과 폐부를 감찰하고 모든 행위와 죄를 알고, 그 죄인을 빠짐없이 체포, 구금, 재판, 처벌할 수 있는 실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절대자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면 수십억 인구 속에서 죄를 짓고 시치미를 뚝 떼면 속아서 어물쩍 넘어갈 테고, 혀를 날름 내밀고 도망하는 개구쟁이를 못 따라 잡는 꼬부랑 할머니 꼴이 될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아무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으며 아무도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그런데 세상 많은 사람들이 죄와 벌을 두려워하면서 창조주 하나님 아닌 다른  존재들, 우상들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자신에 대한 소유권과 통치권을 맡겨버리니 참 이상한 일이다.
부처? 두려워 마라, 그는 사람이다. 시바신, 크리슈나신? 무서워 마라. 그것들은 세상신, 우상들일 뿐이다. 오직 참신,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불에 멸하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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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성경을 시작하는 첫 단어 ‘태초’라는 말을 생각해 보자.
‘히브리어로 ‘브 레싯’, 헬라어로 ‘엔 아르케’
한글로 ‘태초에’, ‘아주 처음에’라고 번역된 게 좀 그렇다.
영어성경은 “In the beginning', ‘시작’으로 번역하고 있다.
‘태초’와 ‘시작’에는 약간의 차이가 느껴진다.
‘태초’ 보다는 ‘시작’이 좀 더 적절한 단어가 아닐까?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고 원래부터 있었던 것일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속도에 따라 시간이 달라진다. 우주공간 여기저기의 시간이 다르다. 우주에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웜홀(worm hole)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이론도 있다. ‘인터스텔라’라는 영화는 그런 이야기다. 
시간과 공간은 모든 존재의 전제조건이며 바탕이다. 시간이 없으면 공간도 없고 공간이 없으면 시간도 성립되지 않으며 존재도 없다.
그렇다면 시간과 공간은 무엇일까? 시간과 공간도 피조물은 아닐까?
우리는 시간과 공간 안에 갇힌 존재이므로 시간과 공간이 피조물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내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빅뱅이론을 생각해보라. 시간과 공간이 원래 있었다면 우주만유가 한 점에서 폭발하는 빅뱅이 가능할까?
빅뱅은 시간과 공간이 없는 상태이어야 가능하다.
시간과 공간이 원래 있었다면 한 점에서 우주만유가 압축되어 있다가 폭발하는 빅뱅은 불가능하다.
빅뱅이란 시간과 공간이 처음으로 생기는 순간이다. 그리고 모든 물질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 때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물질과 존재를 시작시키신 것이다.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원래부터 있던 시간과 공간일 것이고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의 피조물일 것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 때에 모든 것이 시작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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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내가 제일 싫은 말은 “기독교가 종교”라는 말이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사실이다.
기독교가 종교라면 원자력발전소 건설하던 놈이 목사가 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인간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이 아니라면 미쳤다고 기독교를 믿고 목사까지 되냐?
평생을 믿었는데 죽고 보니 하나님도 없고 예수도 없고 천국과 지옥도 없다면 이 보다 억울하고 분하고 기가 막히고 미치고 환장할 노릇 없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실컷 마시고 즐기고 놀기나 할 걸, 속았다고, 잘못 살았다고 가슴을 쳐봐야 소용없는 일일 것이다. 하기야 죽고 난 다음에야 칠 가슴도 없겠지만...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다. 사실이다.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셨고 우리를 만드셨다. 믿고 안 믿고 우리에게 선택권 없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는 살 것이요 하나님을 떠나는 자는 영원히 죽을 뿐이다.
믿지 않는 자는 진노의 심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속에서 하나님 주신 생명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여겼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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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26~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6절을 보니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히브리어 원어는 ‘그들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에 주목을 하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우리’라고 자신을 가리키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반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27절에 가서는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영어로 “His own image”, 단수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복수로 말씀하셨다가 단수로 다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토씨하나 안 빼고, 일점일획도 가감하지 않고 다 기록해야 했던 모세나, 또 성경을 필사했던 유대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라 하셨다가 ‘나’라고 하시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라고 하신 것은 여기 뿐 아닙니다. 창세기 3장 22절, 11장 7절, 이사야서 6장 8절에서도 ‘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단수이면서도 복수이시고 복수이시면서도 단수이시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심을 거듭거듭 암시하고 계시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이라고 하십니다. 영어성경은 '형상'을 “our image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의 모양대로”, 영어성경은 '모양'을 ‘our likeness’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면 하나님은 우리처럼 생기셨을까요?
하나님도 눈, 코, 입, 귀가 있고, 수염이 나고 우리처럼 생기셨을까요?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신다 했는데, 하나님은 영이시라 했는데, 우리와 똑같이 생기셨을까요?
하나님의 형상이 무슨 뜻인가? 학자들 간에는 논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품을 말한다, 그 성품을 말한다, 만물을 통치하시는 위엄을 말한다, 영원불멸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말한다, 등등........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세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갔을 때 하나님이 전혀 낯설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하나님 자신의 모습,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고 계실 것이란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실 때마다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스럽게 여기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우리의 형상이 하나님과 같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만일 우리의 형상이 하나님과 달랐다면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실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사람에게로 돌아가 봅시다.
26절에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는 히브리어 원어로는 ‘우리가 아담을 만들고’입니다. 단수,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는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 복수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말 성경은 단수 ‘그’로 되어 있음)
왜 금방 단수로 말씀하셨다가 금방 복수로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지금은 하나님은 아담, 한 사람만을 만드시지만 그 아담은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와는 갈비뼈로 아담 속에 들어있습니다.
즉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고 갈비뼈를 꺼내어 하와를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제야 비로소 아, 여자를 안 만들었네, 생각이 나서 하와가 필요하겠다 싶으셔서 갈비뼈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을 지으시고 그들이라고 부르신 하나님은 이미 그 속에 하와를 하나로, 한 몸으로 만드신 것이고,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하와를 끄집어내신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즉흥적으로 아이디어를 내셔서 행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창세전에 모든 것을 미리 아시고 우리까지도 택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허리 속에는 이미 후손들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을 통하여 수가 늘어나 생육하고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미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는 그를 지으시지만 그는 그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이면서 여럿, 즉 한 분이면서 세 분, 세 분이시면서 한 분이신 형상입니다.
유대인이 생각하는 유일신 여호와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이슬람의 알라신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주장하는 하나 뿐인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혼자 군림하는 유일신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 없으신 하나님, 성령님 없으신 독불장군 하나님의 형상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삼위일체, 곧 세 분이면서 한 분, 한 분이면서 세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많은 오해와 잘못된 교리들이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 하여 생겨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십니다.
삼위일체 아닌 신(神)은 아무 신이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홀로 있는 독불장군 같은 인간도 하나님 형상이 아닙니다.
독처하는 것이 선하지 못 합니다.
기독교는 수양이나 도 닦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너와 내가 연합하여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혼자서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누르고 여자가 남자를 밟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저 잘 났다고 혼자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짓지만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 하신 것 같이 그가 그들이 될 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어
제자삼아 복음으로 자녀를 낳고 생육하고 번성해 나갈 때
우리는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가 되어 자기 혼자 중심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찢어지고 갈라지고 부서져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된 것입니다.

죄는 모든 관계를 갈라버리는 것입니다.
분열시킴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니고 저 여자입니다. 아닙니다, 뱀입니다. 뱀이 그랬습니다.”
혼자가 되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비겁한 죄인의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전쟁과 다툼과 폭력과 추악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저절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고 믿으십니까?
아닙니다.
예수 믿어도 여전히 이전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순종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데는 하나님의 형상보다는 마귀의 형상이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되면 손해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는 힘써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산상수훈으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 믿기만 하면 저절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면 뭣 하러 이렇게 가르치셨겠습니까?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입니까?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얼마나 이 말씀을 하시는지 보십시오.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다가 형제와 불화한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그대로 두고 가서 그 형제와 먼저 화해하고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때리거든 왼 편도 돌려대며
-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거든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며
-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을 닮는 것은 관계로 이루어집니다.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을 닮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악인에게도 불의한 자에게도 골고루 똑같이 해를 비취시고 비를 내리시는 속없는 하나님,
할 줄 아는 게 사랑밖에 없어서 사랑밖에는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찾아오셔서 원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사 생명을 주신 예수님
그 하나님을 닮기 위해, 그 예수님을 닮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축복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누리도록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만 이러한 축복을 회복할 게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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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한발 코로나 팬데믹이 온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에 걸려 목숨을 잃었고 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경제침체와 실업증가는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고, 우리의 삶과 생명은 앞날을 알 수 없고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과연 백신과 치료약이 개발되어 나오고 이 질병이 퇴치될 수 있을지, 이 코로나 팬데믹이 끝날 수 있을지, 언제 끝날지, 우리의 생활이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 마스크를 쓰고 사람을 피하며 이 죽음의 코로나를 피해 살아야 할지도 알 수 없는 암담한 상황입니다. 과연 이 세상을, 인류를 코로나로부터 구해낼 구세주는 없는 것일까요?

이천년 전 유대인들은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강력하여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로마제국의 지배와 통치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유일한 희망,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 때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가죽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세례요한이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도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에게로 나아와 회개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회개하고 회개의 표로 세례를 받아야 메시아가 로마를 쳐부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때 거기에 속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대로 로마를 쳐부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그들을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로마군병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이 외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그것이 온 인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건져내어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로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였다는 것을 알지 못 하였습니다. 참으로 그들을 누르고 결박한 것은 로마의 통치와 압제가 아니라 그들을 영원한 멸망으로 끌어갈 죄와 사망의 족쇄와 사슬이었다는 것도 그들은 깨닫지 못 했던 것입니다.

당신도 이천년 전 로마통치에 압박 받던 그들처럼 코로나 팬데믹에 짓눌려 있습니까? 당신의 관심은 이 팬데믹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입니까? 코로나 팬데믹은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할 수 있을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영원한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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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16일, NASA는 태양의 극지방을 탐사하는 궤도 탐사선 '솔라 오비터'(Solar Orbiter)가 인류 역사상 태양에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촬영한 사진을 공개하였습니다. 이 사진은 2020년 5월 말 솔라 오비터가 태양과 지구의 거리 1억 5천만 km의 절반 가령 거리인 약 7,700만 km 거리에 근접해 비행하면서 찍은 사진으로 태양 표면에서 수많은 작은 태양폭발(solar flares)현상이 활발하게 일어나 밝은 점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점들이 작다고는 하지만 한국의 한 도(道)나 미국의 한 카운티(County) 만큼 큽니다. 연구진들은 이 작은 규모의 태양폭발 현상에 '캠프파이어', ‘나노 플레어’(nanoflares) 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태양표면에서 무수히 일어나는 이러한 작은 폭발들은 태양의 외부 대기나 코로나를 가열시켜 약 6000도의 주변의 태양 표면보다 300 배나 더 높은 수천 만도의 온도로 매우 밝게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고 있는 태양 표면에서 또다시 수많은 작은 폭발들이 불꽃놀이처럼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태양은 수소를 핵융합하여 빛과 에너지를 발산하는데 크기가 지구의 130만 배에 달하고 질량이 30만 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수소폭탄인 셈입니다. (태양이 공 크기라면 목성은 콩만 하고 지구는 좁쌀만 합니다.) 공개된 사진에서도 나타나듯이 태양은 정적이지 않으며 매우 격렬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양의 내부는 거대한 수소핵융합반응으로 소용돌이치며 표면에서 또 수없는 작은 폭발들이 일어나고 거대한 플레어와 흑점들이 솟구쳐 오릅니다. 그런 태양이 수십억 년 동안 지구에 빛과 에너지를 공급하며 생명의 근원이요 어머니의 젖줄이 되어와 주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수십억 년 동안 활동을 계속할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재래식 화약 폭탄이나 또 우라늄이나 플루토늄 핵폭탄, 그리고 수소폭탄은 한꺼번에 순간적으로 폭발하여 모든 것을 날려버립니다. 속도조절이 안 됩니다. 그런데 거대한 수소 덩어리인 태양에서는 수소가 한꺼번에 폭발하지 않고 수십억 년을 두고 조금씩 수소핵융합반응이 일어나며 헬륨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정말 신기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장작 같은 땔감이나 석탄, 기름 같은 것이, 더구나 화약같은 것이 스스로 타는 속도를 조절하면서 일정한 속도로 타는 것을 보신 적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한꺼번에 폭발하거나 화르르 타오른 다음 사그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태양은 어째서 한꺼번에 폭발해버리거나 사그라지지 않고 수십억 년을 한결같이 활동해 오고 있는 것일까요? 만일 태양의 활동이 점점 왕성하게 일어나는 도중이거나 아니면 점점 사그라지는 도중이었다면 지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고생대나 중생대, 신생대를 거치면서 오늘날과 같은 지구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요? 태양이 뜨거워지는 중이거나 식어가는 중이라면 우리가 마음놓고 살아갈 수나 있을까요?

변함없이 활동하는 태양,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으셨고, 그렇게 명하셨고, 지금도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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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길이를 고층빌딩 높이와 비교하면 얼마나 될까?
뉴욕 맨해튼, 1931년 준공된 102층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안테나 탑을 포함하면 443 미터로 오랫동안 세계최고 높이를 자랑했다.
그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높이 443 미터를 지구나이 45억 년이라고 쳐 보자.
1억년의 시간이 10 미터, 건물높이가 102층이니까, 2층 반 정도 된다.
지구에 생명체가 처음 나타난 고생대가 약 5억 년 전부터 2억 5천만 년 전까지라니까
대략 90층쯤 되었을 때 처음으로 원시생명체가 생겨난 셈이다.
 
인간이 나타난 몇 층쯤일까?
인간이 나타난 때를 1만 년 전이라고 치면
1만년은 1 밀리미터가 된다.
층은 무슨? 옥상에 발라진 페인트 두께 1 밀리미터. 그게 인류역사의 두께다.

인류역사가 페인트 두께 1mm라면 우리 인생은 얼마나 될까?
100년을 산다면 100분의 1 밀리미터,
마이크로미터로나 잴 수 있는 100분의 1 밀리미터가 우리 인생이다.

고층건물을 보거든 생각하라.
저 고층건물의 높이가 지구의 역사라면
인간의 역사는 페인트 두께 1 밀리미터이고
우리 인생은 100분의 1 밀리미터라는 것을.
100분의 1 밀리미터를 웃고 울다 가는 인생들이 무슨 주인이겠는가?

한순간에 불과한 인간들이 그러나
100년, 200년, 100분의 1, 100분의 2밀리미터 사이에
기관차, 자동차, 비행기, 대포, 전함, 핵무기, 온갖 무기 만들고
참혹한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일으키고
지하자원, 석유 마구 캐내어 공해물질로 지구를 뒤덮고,
언제 지구를 파괴할지도 모르는 불장난을 하고 있다.

인류가 바이러스다.
100분의 1 밀리미터 살짝 발라졌는데
45억 살 지구를 병들어 죽게 하는 독성세균(毒性細菌) 바이러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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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제.....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화목제물로 드렸다.
화목제가 무엇인가?
구약시대 성막 또는 성전에서 드리던 제사는 크게 5 가지가 있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이 중 화목제는 흠 없고 티 없는 소나 양으로 제사를 드린 다음 그 제물을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과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함께 둘러앉아 나누어 먹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사람들과 화목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산 떡이다. 너희 조상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고도 죽었지만 나를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잡히시기 전 마지막 저녁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은 내 살이다.’,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은 내 피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잡히셔서 십자가에 매달려 화목제물이 되시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영원히 죽을 사람들을 살리려면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넣어주어야 했고 그러려면 예수님께서 그 생명을 가지고 오셔서 자신의 살과 피를 찢고 흘려서 사람들의 입에 넣어주는 방법 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죄악의 무거운 짐 지고 수고하는 사람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모두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나아와 값없이 받아 먹으라, 돈 없이 받아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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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창조주 하나님이 없고 우주가 원래 있었고 우리가 우연히 생겨난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아메바 같은 생명체가 점차 진화한 것이라면 우리는 원시생명체 아메바, 박테리아, 바이러스나 다름없는 존재이며 지구에 잠시 생겨나 기생하다가 곧 소멸될 허망한 존재일 것이다. 우리는 다만 우주 나이가 137억년 그 기나긴 시간 속에 겨우 몇 천 년, 몇 만 년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 인류라는 생명체일 뿐일 것이다.

또다시 기나긴 시간이 흘러 지구도 죽고 태양도 소멸되고 수백억 년, 수천억 년 다시 지난 다음 어느 누가 있어 우리를 기억이라도 해줄까? “엊그제 저기 저 조그만 지구라는 별에 인간이란 생물이 잠깐 생겨났다가 사라졌단다.”라고....

모든 생명은 하나님이 근원이다. 하나님이 지으셨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도 하나님께 있다.
만일 하나님께 영생이 없다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업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죽어 없어질 허망하고 가련한 인간에게 예배를 받으시겠는가?
수억년 고생하여 진화한 인간에게 살며시 다가와 자기가 우리를 지은 하나님이라고 거짓말하며 죽고 썩어 없어질 우리에게 예배 받으며 하나님 노릇 하는 하나님이 하나님이겠는가?
하나님은 진실하시며 인간은 허망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영생하도록 지음 받은 존재, 생령(生靈)이다.(창세기 2장 7절)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죽은(는)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마가복음 12장 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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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유쾌하지 않은, 좀 심각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한 사람의 크리스천으로서 이런 뉴스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너무 안타깝고 너무 불쌍하다.
"잘 나가는 연예인에서 돌연, 무속인의 삶을 선택한 스타들. 이들은 한 목소리로 "신병을 거부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자신과 주변에 일어나는 기괴한 현상들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내림굿을 받고 무당이 됐다."(여성조선 기사 인용)

이 기사 뿐 아니다. 올림픽 레슬링 메달리스트인 유명선수도 신병에 시달리다 무속인이 된 일이 있고 그 날 궁정동에서 노래 불렀던 유명 가수분도 오랜 시간 신병에 시달리다 지금은 그리스도인으로 평안을 누리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유명인들이 무속인이 되었단다.
왜 그들은 마귀와 귀신들의 손에 잡혀 무당이 되어야 했는가?
그들은 과연 무속인이 되기 원했고 무속인이 되어서 행복한가?
왜 그 분들은 천지를 지으시고 우리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아니하고 우리를 구원하려 십자가 지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손을 내밀지 아니하였는가?
왜 그들의 주변에는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그리스도인이 없었을까?
그대들이여, 지금이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르라.
우리의 구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라.
그리하면 악한 자의 손아귀에서 놓여나고 그 족쇄에서 풀려나리라.
......
시퍼런 작두 사다리에 올라서 춤추던 단군교 무당, 신통력으로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던 한 분이 귀신의 손아귀를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와 "주여, 사탄의 왕관을 벗었나이다."라는 책을 쓴 적 있다.
무당이 작두에 올라서 신내림 굿을 하던 중 멀찍이 서서 구경하던 크리스천 한 사람이 나즈막한 소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하고 중얼거렸더니 예수 이름에 놀라 역사하던 귀신이 혼비백산 도망하고 작두에 올라섰던 무당의 발이 쫙 갈라지며 쓰러지더라는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나 자신 어린 시절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을 당한 적이 있고 귀신놀음에 직접 참여해 본 경험도 있다.

이러한 일들이 21세기 문명세계에서도 계속되는 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이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수많은 악한 영들이 출몰하는 살벌한 영적전쟁터라는 것을 의미한다.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만이 진짜 세계가 아니다.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
마귀와 귀신은 있다.
그리고 그 보다 훨씬 강하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

(아, 그리고, 점 보러 가지 마라. 운수 보러 무당에게 찾아가지 마라.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시는 일이다.)

링크기사(조선일보에 게재된 여성조선 기사): http://woman.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1&mcate=M1001&nNewsNumb=20200163466&fbclid=IwAR3vn-f5g7z66vNmJinJ3TNLbmMQbwt9jmiXtiNwcGWdJ3DvVfjaruzej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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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던 것처럼 성자 하나님,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빛으로 이 땅에 오셨다. 모든 사람, 모든 죄인들을 살릴 생명을 가지고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 가운데 계셨다. 마치 광야에서 하나님의 성막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하셨던 것 같이.......

그러나 사람들은 그 빛을 깨닫지 못 하였고 어두움을 더 사랑하였고 그를 배척하였다.
그러나 그 빛을 영접하는 자,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기록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왜 성경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낳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시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비참한 십자가에 내어주사 찢어 죽이시는 처절한 고통을 통하여 당신에게 새 생명을 주시며 새로운 생명을 낳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결코 기억이 희미해지거나 잊어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다. 하나님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 영어로는 “I am", 즉 현재형(現在型)으로 언제나 어디에나 영원히 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께는 모든 시간, 과거나 현재, 미래가 항상 현재이다. 하나님은 2천년 전 십자가 처형 단 한 번으로 모든 인류를 도매금으로 구원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예수님을 믿어 영접할 때 하나님은 다시금 2천년 전 그 십자가 고통을 그대로 기억하시며 그 끔찍한 고통을 다시 겪으시며 당신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당신에게 새 생명을 주셔서 당신을 다시 낳으실 것이다. 인류를 한꺼번에 구원해치우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렇게 낳으시는 것이다.

그것은 여자가 아이를 낳는 산고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것은 수천년 성경에 기록된 예언과 약속 끝에 마침내 고통의 십자가에 아들을 보내어 그 몸을 찢어 나누어 주시는,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이 고통 중에 낳으시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나는 당신이 이 새 생명 얻기를, 하나님의 자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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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예수님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면 어찌 되었을까? 예수님은 절대로 다시 살아나시지 못 하였을 것이며 하나님은 여전히 진노상태이시고 우리 모든 인간들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기뻐하시는 아들의 제사를 받지 않으실 수가 없었고, 그 아들을 다시 살리지 않으실 수가 없었고, 또 그 아들의 제사에 담긴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수가 없으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온전히 받으셨음과 모든 죄인들, 인류의 죄가 사해졌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계신 동안 3년이나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 하고 믿지 못 하였으며 예수님이 잡히시고 십자가에 처형될 때 모조리 도망쳤고(어렸던 요한 하나 빼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도 다락방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사순절 성령임재 사건이 있은 다음 제자들은 죽음을 두려워 않는 증인들이 되었고 모두 순교하였다. 목이 잘린다 해도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기름 가마솥에 튀겨져 죽는다 해도 그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사와 부할,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으셨다는 것, 그리하여 모든 인류의 죄가 사함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좋은 소식(Good News)이요 복음(福音, Gospel)이다.
"누구든지 이를 믿고 그 앞에 엎드리면, 그 제사대열에 엎드리면 죄사함을 받는다!"
제자들은 이 소식을 전하였고 이 소식을 전하다 모두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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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동산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죄인이 되자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다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한 가지 길을 열어두셨다. 그것이 제사다.
제사는 애꿎은 짐승을 잡아, 그 죄 없는 짐승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 죄 없는 생명의 희생의 효력으로 잠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짐승의 희생은 가죽이 벗겨지고 사지가 절단되고 내장이 모조리 꺼내지고 태워지는 참혹한 것이었다. 그 애꿎은 생명의 참혹한 희생을 치르면서 인간은,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벌벌 떨면서 나아갔다.

그 제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죄가 대가의 지불 없이는 절대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진정한 대속자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豫表)였다.
죄인 된 인간들이 수천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치르는 임시방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셨다.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인류역사상 인간이 고안해낸 최악의 고통의 형틀이라는 십자가에 매달려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을 당하시며 죄인들이 치러야 할 혹독한 죽음의 대가를 치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자신의 죄 없는 몸을 제물로 드린 것이었다.
성경은 이를 단 한 번의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이를 믿는 모든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거리낌 없이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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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 아닌 사람이 있을까?
성경은 말씀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인간의 양심이 말한다, ‘양심 깊은 곳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자 단 하나도 없다.’고.
모든 인간이 죄인이다. 죄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그 값은 죽음뿐이다.
죄인은 심판을 피하고 죽음을 면할 길이 없다.
단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누군가가 자신의 죄 값을 치르고 대신 죽어주는 것....
우리는 그를 대속자(代贖者)라고 부른다.
성경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속자의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우리 인간들을 구해낼 대속자가 될 수 있을까?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사람이어야 한다.
짐승을 아무리 많이 잡아도 사람 하나 대신할 수 없다.
사람은 오직 사람만이 대신할 수 있다.

둘째는 사람이로되 죄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죄가 있으면 자신의 죄 때문에 죽어야 하기 때문에 남의 죄를 대신 갚아줄 수가 없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셋째는 죄 없는 사람이면서 모든 인간들을 합친 것 보다 고귀한 분이어야 한다.
설혹 죄 없는 인간이 있다 해도 그 사람이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뿐이다.
그래서 대속자는 이 세상 모든 인간들 보다 고귀한 존재이어야 한다.

그런 존재가 어디 있는가?
있다, 단 한 가지.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모든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시는 길.....
그래서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어(성육신) 이 땅에 오셨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죄인을 살게 하시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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