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드릴게요.... 아무 것도 가지지 말고 가벼운 걸음으로 오세요 무거운 마음을 둘 곳이 없다면 가지고 오셔도 좋습니다 값비싼 차는 없지만 인생처럼 쓰디 쓴, 그러나 그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향기를 가진 커피를 드리겠어요 어쩌면 숭늉같은 커피 일지도 모릅니다 탈 줄도 모르는 커피지만, 마음으로 타기에..... 맛이 없어도 향기만은 으뜸이랍니다 허름한 차림으로 오셔도 좋아요 어차피 인생이란 산뜻한 양복처럼 세련된 생활만 있는 게 아니니까요...... 벙거지에 다 헤어진 옷이라 해도 그대가 마실 커피는 있답니다 나는 그대의 피로를 풀어 줄..... 향기 있는 커피만 타드리겠어요 맛있는 커피나 차가 생각나시면 안 오셔도 좋습니다 오셔서 맛없다고 향기만 맡고 가셔도 좋구요 돈은 받지 않는답니다 그렇다고 공짜는 아니에요 그대의 무거운 마음의 빚을 내게 놓고 가세요.. 내려놓기 힘드시거든 울고 가셔도 좋습니다 삶이 힘드시거든 언제든 오세요 맛이 없더라도 향기 있는 커피를 타 드리지요 마시기 힘드시거든 마음으로 드세요 나도 마음으로 .... 커피를 드리겠습니다 [좋은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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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 통합측(총회장 지용수 목사)이 2009년 9월 21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소망교회에서 개최한 제94회 총회에서 큰믿음교회 변승우 목사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통합측 이대위는 보고서에서 “큰믿음교회 변승우 씨는 기성교회를 심하게 비판하여 교인들을 자신의 교회로 인도하는 부도덕한 목회행위, 직통계시에 근거하여 성경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잘못된 성경관과 계시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정통 구원관과 다른 구원론, 입신·예언·방언 등 극단적인 신비주의 신앙형태 등을 갖고 있는 비성경적 기독교 이단이다”라고 밝혔다.

통합측은 “본 교단 교인들은 변 씨의 집회에 참석을 엄히 금하는 것은 물론 그가 운영하는 인터넷 동영상이나 카페에 참여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라는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이대위, 위원장 최영환 목사)의 보고를 그대로 받았다.

다음은 변승우 씨에 대한 통합측 연구 보고서 전문이다.

큰믿음교회(변승우 목사)에 대한 연구보고서

1. 연구 경위
큰믿음교회(변승우 목사)의 이단성 여부에 대한 서울강남노회의 질의가(서강남, 제 43-112호) 총회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로 이첩(예장총 제 93-287호)됨에 따라 연구에 착수하게 되었다.

2. 연구 보고
1) 변승우씨 문제의 개요
변승우씨의 신학적 배경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울산에서 큰믿음교회를 목회하다가 현재는 서울 강남구 논현동 111-13 노벨 빌딩에 큰믿음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울산을 비롯하여 대전, 대구, 창원, 부산은 물론 해외까지 지교회를 세우고 무서운 속도로 교세가 성장하고 있다. 특히 그는 인터넷 카페와 인터넷 방송을 이용하여 자신의 사상을 유포시키고 자신들의 추종자들의 댓글을 확대 재생산화여 젊은이들에게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나아가 자신의 주장에 권위를 더하기 위해 많은 외국인 강사들을 초청하여 집회를 인도한다. 이들 외국 강사들의 메시지는 변승우씨에 대한 예언과 찬양 일색으로 이루어져 있다(가령,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의 토마스 주남의 “추천의 글”과『정통의 탈을 쓴 짝퉁 기독교』의 밥 존스의 “추천의 글”을 보라).

변승우씨는 최근 물의를 많이 일으키는 소위 <신사도 운동>의 영향을 받은 자로 직통계시를 강조한다. 또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는 입신, 예언과 방언 등 신비적인 사상을 강조하고 심지어 이를 훈련시키는 학교까지 운영하고 있다. 그에게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다.

2) 교회론의 문제점
변승우씨는 기성교회를 비판하고 그 반사적 이득을 통해 자신의 교회를 성장시킨다. 그는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이란 저서를 시작으로 『진짜 구원받은 사람도 진짜 버림받을 수 있다』『하늘에서 온 이메일』등 많은 저서에서 기성교회를 비판하고 역으로 자신의 교회는 온전한 교회임을 암시한다.
변승우씨는 ‘크리스천이 지옥에 가며,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나아가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에 대하여 “이단 사냥꾼”, “정통의 탈을 쓴 짝퉁 기독교”, “바리새파 사람들” 심지어 “영적 기생충”이라고 공격한다.
반면, 자기 자신은 존 웨슬레, 조나난 에드워드, 찰스 피니, 등 부흥을 이끈 교회의 위대한 목회자들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는다(『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p. 103-111).

“저는 찰스 피니의 이러한 고백을 읽으면서 감동으로 몸을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임할 때의 저의 체험과 너무나도 유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피니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지옥에 〈� 크리스천들』, p. 107)

이처럼 변승우씨가 기성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자신을 정당화시키려는 의도, 기성교회 교인들을 자신의 교회로 오게 하려는 의도, 그리고 다른 이단들과 같이 본인이 목회하는 교회만이 참 교회라고 주장하려는 의도이다.

3) 계시론과 성경론의 문제점
변승우씨는 자신의 저서 여러 곳에서 성령이 직접 자신에게 책을 저술하라든지 또 어떠어떠한 내용으로 설교하라고 지시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듣지 않으면 설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 설교의 좌우명입니다”(『계시와 지혜의 영』, p. 9). 이러한 그의 주장은 세 가지 효과를 겨냥한 것이다.

첫째, 자신의 저서나 설교에 대해 초월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효과이다. 즉 자신의 책을 마치 직접 계시를 받아 저술한 것처럼 오도하기 위함이다(가령, 그는 『명목상의 교인인가? 미성숙한 신자인가?』p. 11에서도 “저는 성령께서 저에게 설교하라고 레마로 주시는 말씀들을 설교합니다. 제가 설교의 주제나 내용을 자의로 선택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또한 외국의 사역자들의 추천사를 책 앞에 배치시키는데, 그 추천사에는 거의 예외 없이 변승우씨가 받은 계시가 성령의 계시라고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둘째, 그의 직접 계시성은 기성 교회에 대한 강한 비판과 자기 교회를 특수화하는 효과가 있다. 변 씨가 성령의 계시를 받았음을 선전하는 것은 기성교회는 성령의 계시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기성교회는 잘못 내지 무능하다는 암시를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주고 있다.

셋째, 변 씨의 직접계시 주장은 결과적으로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자신이 받은 직접 계시나 꿈을 위해 성경 말씀을 인용하고 재편하여 자신의 설교나 성경해석에 적용함으로 성경을 자신의 계시나 꿈을 제시하고 해석하기 위한 보조물로 전락시킨다. 또한 그는 자신이 받은 직접 계시를 성경과 동일하거나 혹은 성경의 권위 위에 둔다. 나아가 변 씨는 자신이 사도들과 똑같은 영감을 받았으며 따라서 자신의 성경해석이나 설교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는 식으로 암시한다. 심지어 변 씨는 자신이 성경을 바로 해석하는 “다림줄”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그의 저서『다림줄』을 보라).

변 씨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위해 충분한 계시 내용을 담고 있어 성경 이외 더 이상 직접적인 계시는 없다는 우리 교단의 교리에 반하는 것임은<본 교단 『헌법』 제 1편, 교리의 4부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 제 1장 “성경에 관하여”를 보라. 1조“....그러나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자기 백성에게 계시해 주시던 이전 방법은 현재 중지되어 버렸다(히 1:1­2)." 또 6조. ”...이 성경에 대하여 어느 때를 막론하고 성령의 새로운 계시로서나, 인간의 전통으로서도 더 첨가할 수 없다(딤후 3:15­17, 갈 1:8­9, 살후 2:2)>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처럼 변 씨의 성경관과 계시관은, 비 성경적임은 물론 본 교단의 계시관과 성경관과 배치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훼손시킨다.

4) 구원론의 문제점
변 씨의 기성교회 비판과 자신의 차별화 또는 우상화는 그의 구원론에서도 잘 나타난다. 『지옥에 가는 크리스찬들』,『진짜 구원받은 사람도 진짜 버림받을 수 있다』란 그의 핵심적인 저서들을 살펴볼 때, 그의 모순점들이 잘 나타난다.

“그래서 ‘예수 믿고’ 지옥 가지 말고 ‘제대로 예수 믿고’ 꼭 천국에 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지옥에 가는 크리스찬들』p.9).
“예수를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본래 이단 사설입니다”(변승우 설교.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 2006.5.26).
“많은 사람들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죽기 직전 하나님이 억지로라도 회개시켜서 천국에 데리고 간다’는 맹신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이중으로 속는 것입니다”(변승우.『주여』, pp. 152-156).
“‘구약시대 때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았는데,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면 구원 못 받았는데, 신약시대 때는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받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이렇게 설교하는 목사들이 많았습니다. 무지하게 무식한 이야기입니다”(변승우. 설교,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2009, 5월 14일 설교).
“신약시대에도 90%이상이 거짓선지자들은 목사들입니다”(변승우. 설교,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 2006.5.26 설교).

변 씨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성경의 주장과(엡2: 8) 정통 교회의 주장과 달리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한다.

“보통 사람들은 십자가 외에 다른 소리를 하면 모두 잘못된 것인 양 얘기합니다. 구원에 대해서 말할 때 오직 십자가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생각이 얼마나 편협하고 비성경적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변승우, 『주 달려 죽은 십자가』, pp.54-55).
“…마치 십자가를 신뢰하기만 하면 죄에서 돌아서는 회개나 행함이 따르는 참 믿음이나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로 지음 받는 거듭남이 없이도 죄 용서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는 양 가르치고, 자신들만이 정통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변승우. 『주 달려 죽은 십자가』, p.59).

이렇게 변 씨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외에도 회개와 선한 일을 행해야 한다고 하며, 구원받은 사람도 헌신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 성령의 선물로 인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반대하고 행위와 공덕에 의한 구원을 강조한다. 이러한 구원관은 성경적 구원관이나 우리 개혁교회의 구원관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으로, 본 교단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위험한 구원론이다.

5) 신비주의적인 사역의 문제점
변승우는『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등의 저서와 설교들 통하여 천국을 갔다 온 입신의 경험, 개인의 미래에 대한 예언, 방언, 쓰러지는 현상 등 신비주의 형태의 목회를 활발히 펼치고 있다. 그의 저서에는 천국을 갔다 온 사람들의 간증이 많이 실려 있다. (가령, 『정통의 탈을 쓴 짝퉁 기독교』pp.223-289를 보라.). 그는 집회 시간에 방언을 훈련시키고 있으며, <큰믿음교회> 내에는 예언 사역 팀, 방언 통변 팀, 신유 축사 팀 등 신비주의를 조장하는 목회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가 지난 2009년 7월 23일 150명의 죽은 자를 살렸다는 조세프 과지마의 집회광고 게재 문제로 국민일보, CBS를 비난한 것도 한 예이다.

이러한 변 씨의 신비주의적인 사역은 우리 주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 16:4)고 하신 말씀과 배치된다. 또한 본 교단에서 엄히 경계하는 극단적인 신비주의 사역이라는 점에서 마땅히 배척되어야 한다.

3. 연구 결론
이상에서 보듯이 <큰믿음교회> 변승우씨는 기성교회를 심하게 비판하여 교인들을 자신의 교회로 인도하는 부도덕한 목회행위, 직통계시에 근거하여 성경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잘못된 성경관과 계시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정통 구원관과 다른 구원론, 입신, 예언, 방언 등 극단적인 신비주의 신앙 형태 등을 갖고 있는 비성경적 기독교 이단이다. 따라서 본 교단 교인들은 변 씨의 집회에 참석을 엄히 금하는 것은 물론 그가 운영하는 인터넷 동영상이나 카페에 참여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4. 참고 자료
변승우, 『지옥에 가는 크리스천들』.
______, 『진짜 구원받은 사람도 진짜 버림받을 수 있다』.
______,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______,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______, 『다림줄』.
______, 『구원에 이르는 지혜』.
______, 『정통의 탈을 쓴 짝퉁 기독교』.
기타, 변승우 설교 동영상, 인터넷 방송 http://www.gfctv.org/ 및
큰믿음교회 인터넷 카페, http://cafe.daum.net/Bigchurch .


출처: 양무리마을

서울 아내: "자기야... 저 별이 이뻐 내가 더 이뻐?"

서울 남자: "물론 자기가 더 이쁘지..."

 

경상도 아내: "보소 저 별이 더 이쁜교 내가 더 이쁜교?"

경상도 남자: "와 저별이 니한테 모라카드나?"

.

.

 

 

서울 아내: "자기... 나 팔베게 해도 돼?"

서울 남자: "그으럼!"

 

경상도 아내: "보소 내 팔베게 해도 됨니꺼?"

경상도 남자: "퍼뜩 디비 자거라,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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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내: "자기 나 잡아봐"

서울 남자: "알았어어"

 

경상도 아내: "보소 내 잡아보소"

경상도 남자: "니 잡으마 칵 지기삔다"

.

.

 

 

 

서울 아내: "자기 저 달 참 밝지?"

서울 남자: "자기 얼굴이 더 밝은데?"

 

경상도 아내: "보소 저 달 참 밝지예?"

경상도 남자: "대글빡 치와봐라 달 쫌 보자"

.

.

 

 

서울 아내: "자기 나부터 목욕해도 돼?"

서울 남자: "그러엄"

 

경상도 아내: "보소 지부터 목욕해도 될까예?"

경상도 남자: "와 니 때많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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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내: (절벽에 핀 꽃을 보고) "자기 저 꽃 따줄수 있어?"

서울 남자: "그럼 난 자기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경상도 아내: "보소 저 꽃 쪼매 따줄랑교~~"

경상도 남자: "저게 니끼가?"

.

.

 

 

서울 아내: (출근하는 남자를 잡으며) "자기 뭐 잊은거 없어?"

서울 남자: "아~ 뽀뽀 안했네 (쭈~~얍)"

 

경상도 아내: "보소 뭐 잊은거 엄능교?"

경상도 남자: "있다..용돈~내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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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 전서 13

 

내가 시어머니에게 애교있는 말로 안부전화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됩니다.

 

내가 세상 지식과 지혜로 교회의 집사가 됐을지라도

시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게 있는 재물로 시어머니에게 용돈을 드려도

그속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엇습니다.

 

사랑은 시어머니가 무리한 요구를 할지라도 참고

시어머니가 심한 말을 할지라도 온유하며

남편이 시어머니 앞에서 재롱을 부려도 투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시어머니 앞에서 교만하지 않으며

시어머니에게 무례히 행치 아니합니다.

 

사랑은 화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지라도 참으며

가사가 힘겨울지라도 끝가지 견딥니다.

 


 


승려생활에서 개종한 목사로서 목사 안수를 받고 한 선배 목사님께서 저에게 목사에게는 3가지(설교, 이사, 죽음) 준비가 항상 필요하다는 권면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면서, 현대교회의 목회 현실의 여러 문제점을 바라보면서 지금은 천국으로 이사하신 선배 목사님의 권면하신 말씀을 회상해봅니다.

첫째는 설교 준비라는 것입니다.

저에게 설교 준비를 깨달음을 준 것은 15년간 남서울중앙교회 부목사 사표 후 서울대현교회를 개척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개척 후 4년 동안 부흥회를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즉 부흥회란 말 그대로 교회를 부흥 시키는 부흥회입니다. 개척 시무하는 교회를 부흥시키지 못하면서 부흥회를 인도한다는 것이 저의 마음에서 허락하지 아니 했습니다.

남서울중앙교회(피종진목사시무) 15동안 부교육자 생활은 주일 1번 설교하고 수천교회 부흥회 집회만 다녔습니다. 그러나 개척교회를 하면서 한국교회 목사님들께서는 한 주간의 공식적인 설교만 11번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새벽기도 설교 7번, 주일날 오전, 밤 설교 2번, 수요일 밤 설교 1번, 금요설교1번, 그러므로 설교가 많은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아무리 잠을 자면서 설교를 들어도 3년 정도는 기억한다고 하고, 예화 같은 설교는 5년까지 기억한다고 합니다.  

불교의 승려들은 설법에 부담을 갖지 않습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불자들은 존경하고 듣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목사의 설교가 예화를 들면 성경에 없는 설교를 한다고 하고, 성경강해 설교만 하면 어렵고 딱딱하다고 하고, 은혜롭게 하면 신비주의로 미신적이라고 하고, 학문적인 것을 소개하면 자기들을 무시한다고 하고, 이런 것 없이 하면 무식하게 설교한다고 하고, 노트를 보고 설교를 하면 은혜가 없다하고, 원고 없이 하면 즉흥으로 설교하는 목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스님은 예불과 시식의 의례하는 염불만 한 번 외우면 평생을 승려생활 할 수 있습니다. 불자들은 스님이 염불하면 염불하는 것인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이사 갈 준비라는 것입니다.

선배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의하면 꼭 목사님이 좋다고 청빙한 교인이 목사 이사 가게 하는데 제일 앞장선다고 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글에 의하면 목사가 너무 젊으면 경험이 부족하다고 하고, 목사가 머리가 희면 너무 늙어서 희망이 없다하고, 목사가 자녀가 3명 이상이면 무절제하게 많이 나서 교육비가 많이 들어간다고 하고, 목사가 자녀가 없으면 무슨 저주나 받은 것 같이 생각한다고 합니다.

사모님이 성가대에 앉으면 사모가 너무 설친다고 하고, 부자 집에 심방가면 가난한 사람 무시하는 돈만 아는 목사라고 하고, 가난한 집에 가면 인기운동 한다고 하고. 목사가 과감하고 단호하면 독재한다고 하고 한다는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절충하면 무능한 목사라고 하고, 성도들의 잘못을 책망하면 사랑 없고 냉정하다고 하고, 헌금이 부족하면 목사가 밥값도 못한다고 하고, 일 처리를 잘하면 수단꾼이라 하고, 일 처리를 잘 못하면 무능력하다고 합니다.

목회자가 교회직무도 감당하기 힘든데 자기들이 못하는 세상 모든 일들까지 처리 해주기를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대가 무너지면 목회자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온지 3년만 지나면 여러 병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말도 갈아 타봐야지”, “신도 바꾸어 신어 봐야지", “머슴도 바꾸어 봐야지"하고 목회자를 쫓아낸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는 언제나 이사 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국 교회집회 인도 하면서 선배 목사님께서 왜 이사 갈 준비를 해야 하는 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 교회에서 이사 문제로 세상법정까지 가면서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웬지 쓸쓸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사 문제는 성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목회자에게도 있다고 봅니다. 유임(평생목회)한지 얼마 되지도 아니 했는데도 더 좋은 교회가 있으면 주저 하지 않고 이사를 가고 있는 것이 현실 목회 현장입니다. 또한 이사를 함으로서 교회가 평안을 가져 올수 있는데 이사 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서로 싸우는 모습이 하나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개종한 목사로서 승려생활을 회상해보면 불자들이 승려를 절에서 “염불 못 했어”, “설법 못 했어”하며 내쫓았다는 소리를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불교 종단에서 주지 임명 때문에 승려들끼리 싸움은 있어도 불자들이 주지 승려를 내어 보낸다는 것은 한국 불교사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승려 생활에서는 이사 갈 준비는 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는 죽음 준비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한번 왔다가 죽음으로 가는 나그네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한 아이가 세상에 태어남으로 나그네 인생길이 시작되어 한 평생 살다가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죽음은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로는 육적인 죽음-일반적 죽음으로 육에서 영혼이 분리되는 영혼이 잠시 육에 붙어살았던 몸에서 떠나는 것을 말합니다.(요 11:11~14) 둘째로는 영적인 죽음-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범죄로 영적 죽음이 생겼습니다(엡 2:1) 그러므로 사람이 창조된 이후 하나님이 엘리야처럼 직접 데려가셔서 죽음을 피한 사람은 있어도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빈부귀천을 떠나 만민 앞에 유일하게 평등한 법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나 죽음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죽음(저승)보다 죽음이 없는 세상(이승)이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의 임종을 죽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잠잔다(고전15;20)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죽음은 이별이 아닌 긴 수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성도의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부활체에 대해서 세세하게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한 몸은 썩어 없어지는 몸이 아니며(고전15:42), 다시는 죽지 않는(눅20:36), 완전히 변화된[고전15;52], 신령한 몸(고전15:44),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부활체는 이 세상처럼 육체적 삶이 아니라 영혼을 중심으로 한 영체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성도의 부활은 최후 심판의 교리와 바로 연결됩니다. 최후 심판은 곧 세상의 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에는 기독교에서 구원을 받은 자의 마지막 표상인 천국과는 참으로 다른 세계인 열반(무생 무사)의 세계는 존재가 없으면서 존재가 있는 것으로 말하는 점에서 역설적인 면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진정한 실재성이란 모든 것은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유전의 원리에 의하여 모든 현상 세계는 어디로 가나 생사의 고통으로 충만하다고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생사가 반복 되는 고해와 같은 사바의 세계를 벗어나 열반적정(생사가 없는 무, 공의 존재)의 세계로 구원 받고자 하는 것이 불교가 지향하는 사상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바울은“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5;8) 하였으니 주님 계신 곳에 들어가는 기쁨이 그렇게도 영광스럽고 즐거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 그 이후의 삶이 기쁘고 즐거운 나라이기에 바울은 그 집에 가기를 심히 원하였던 것입니다.

나그네 삶음을 베드로는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하였으니 세상에 사는 동안 삼욕(물질, 이성, 감투)의 죄 짓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타종교나 기독교나 성직자에게 있어 삼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건들이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져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재생목사 (서울대현교회)

출처: USA 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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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 던지기
    (Laying Down Our Lives for Our Friends)
    선한 목자에게는 양을 위하여 생명을 내던질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0:11 참조)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영적 지도자는 양들을 위하여 생명을 내던져야 하는 소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을 내던지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경우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죽음은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생애, 즉 우리의 슬픔과 기쁨, 우리의 절망과 희망, 우리의 외로움과 친밀함의 경험을 새 생명의 원천이 될 수 있도록 다른 사람에게 제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중의 하나는 우리 자신입니다 특히 어려운 때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내가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위로와 위안을 줍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상대방의 거친
말투가 당신을 화나게 할 땐
부드러운 말씨로 되갚아 주세요.

상대방의 오만불손함이
당신을 화나게 할 땐
예의바른 공손함으로 되갚아 주세요.

당신을 화나게 한 상대방은
하나 더 미움을 얻고 가련함이 더 해지고

당신은 하나 더 미움을 지우고
사랑이 더 해집니다.

미움은 단지 순간의 실수일 뿐
지니고 있어야 할 의미는 없습니다.

용서함으로써
우리들은 성숙해져 갑니다.
미움은 늘
어딘가에 서성이고 있습니다.

미움에 지배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용서가 만든 지우개가 필요합니다.

용서함으로써
지우개를 만드신 당신
당신 가슴 속에 채워진 것들 중
만약 미움을 지운다면

그 만큼 당신은
무엇을 채우시렵니까?


- 좋은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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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노년의 그대 ...



"아름답게 나이들게 하소서
수많은 멋진 것들이 그러하듯이

레이스와 상아와 황금,그리고 비단도
꼭 새것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오래된 나무에 치유력이 있고
오래된 거리에 영화가 깃들듯 이들처럼
저도 나이 들수록 더욱 아름다워질 수 없나요"
                         
'칼 윌슨 베이커'의 詩는 단조로운 듯하면서도
우리의 가슴속 깊이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일으키죠

그것은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단순하고도
흔하디흔한 일상을 소재로 한,
그럼에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가 반짝이고
우리 모두 공감할 수 있는 간절함이 배어 있기 때문이겠지요.

구태여, 이런 시인들의 노래를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두 태어난 그 순간부터 늙어간다는 사실에 직면해야 하고
때로는 그 사실이 싫다며 도망가고파 불로초를 찾아헤매기도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일, 인간이 나이 먹고 늙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하면 좀 더 아름답고 우아하게
나이를 먹어갈 수 있을까 그 대안을 생각해 보는 것도
현명한 방법일 것이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가능할는지 알 수 없지만...ㅋㅋ)

그렇다면, 나이가 든다는 것, 그 진실은 무엇일까?
흔히들 나이가 들면 약병의 숫자가 늘어난다고들  말합니다.
또 노인이 되면, 젊은 날 감기 몸살로 심하게 앓듯
노년에게만 찾아오는 여러 가지 질병들이 매일 같이

심신을 공격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뿐만 아니죠, 육체의 힘이 쇠약해짐에 따라서
경제 능력마저 약화할 현실은 생각만 하여도 두려운 일일 것만 같습니다.
우리네 여인들에게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퇴색되어가는 아픔이

가장 클 것 같아요. 왜냐고요?
각국에서 정형외과가 그토록 많은데 모두 다 호황을 누리고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잘 먹고 잘사는 것을 보니까

그렇다는 것이죠. ㅋㅋㅋ

늙으면 병마가 찾아와 괴롭히 것, 이런 현상은
노인들에게만 찾아오는 현상이거든요.

비록 그가 젊은 나이라고 하여도 이 중 한 가지만이라도 덮치게 된다면,

닉 부이치님 같은 분이 아니고는
어느 젊은이가 위축되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육신이 병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젊은이,
경제 능력을 상실한 젊은이,
어떤 연유에서건 자신의 아름다움을 빼앗긴 젊은 여인...
그 무엇 하나 고통스럽지 않은 것이 없겠고
위축되지 않을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당당하고 아름답게 늙어갈 수 없는 것은
이런 물리적 현상으로 오는 여러 가지 두려움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이 위축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죽음에 대한 공포,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감 뭐 이런 것들이 한몫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거든요,
자신이 소멸하고 없어져야만 한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겠는데
죽으면 어디로 가야하는 것인지 모른다는 것은 큰 두려움이죠.
인간은 누구에게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떠나야 하는 데 가야할 곳을
전혀 알 수 없다고 한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식은땀을 흘리게 될 것 같습니다.
다른 이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럴 것 같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드는 것은 자연 현상이니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병이 들지 않게 관리를 잘 할 수는 있습니다.
그보다 더욱 확실한 처방전을 가르켜 드릴까요?
무엇이냐고요? 음~ 그것은,
모세의 일생을 배우고 모세처럼 살면 될 것 같아요.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 34: 7) 정말 멋지죠?

모세는 경제적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배 고프면 만나를 먹었고, 고기가 먹고 싶으면
메추라기를 먹으면 되었거든요.
먹을 것 염려없으니 경제 걱정 해결되고,
120세 되기까지 눈이 밝고 기력이 쇠하지 않으니
두려운 병에서 놓임을 받게 되고,
주님과 늘 동행하고 있으니 그분이 계신 곳을 사모하게 될 것이고
인생의 마지막 종착점이 뚜렷하게 보이니 죽음이 두렵잖고...^^

모세는 그 마음에 악을 품지 아니하고 은혜의 주님과 동행하였기에
모세의 노안(老顔)은 하늘의 광채로 빛났습니다.

물론, 선행조건은, 반드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니,
쉽진 않겠지만... 그래도...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멋질 것 같지 않나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늙어도 쇠하지 않고
배고프지 않게 먹여주시니 경제 때문에 위축될 이유가 없어 든든합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세 할아버지처럼 오늘도 그분의 공급해주시는 능력을 힘입고
살아간다면 위축되지 않고 당당해 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당당하지만, 교만하거나 우악스럽지 않은...은은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대,
하늘의 광채로 말미암아 천사처럼 환하게 빛나는 얼굴이 사랑스러운 그대,
품위 있고 멋스런 노년을 맞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

"사람은 나이가 든다고 해서 존경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타인을 얼마나 포용하는지에 의해 평가됩니다.

인격적으로 잘 성숙이 된 사람은 멋 집니다.
강자에게 당당하고 약자에게 부드러운 당신은 멋진 사람입니다.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따뜻함을 지닌 당신은 멋진 사람입니다.
누군가의 상처를 돌볼 줄 아는 당신은 멋진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칭찬할 줄 아는 당신은 멋진 사람입니다.
‘사람은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좋은 포도주처럼 익는 것이다.’ - 필립스


오늘은 조금 다른 소재로 꾸며보았습니다. 사랑해요, 여러분 모두를!^^
글:별똥별/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Anne Vada, Dance Mot Var(Dance towards Sp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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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존스 교리집

제2권

성령毬ご蹈� 놀라운 구원

제2강

성령의 신성

 

웨신, 웨신소요리문답, 하델요리문답 첨부

 

 

첨부파일 2.성령의 신성.hwp

 

 

 

2.성령의 신성

우리는 지난 시간에 성령을 인격으로 간주해야하는 이유에 대해 공부하였다. 첫째 성령과 관련하여 인칭대명사가

사용되었으며, 둘째 성령이 성부 및 성자와 동일시 된다는점, 셋째 성령이 그리스도인들과 연결됨으로서 인격성을

보여주며 넷째, 성경이 지식, 의지, 주권, 마음, 사랑, 근심등의 인격적 속성들이 성령께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배웠다.

 

1)성령의 인격성(1장의 내용에 계속하여)

(1)성령의 인격성의 증거

a)인격적 존재만이 할수 있는 일을 성령이 행하신다.

성령이 인격적 존재라고 주장하는 다섯 번째 이유는 인격적 존재만이 행동할수 있는 행위를 성령이 행하셨다고 성경이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래에 빨간색을 표시된 행위는 모두 인격적 존재만이 행할수 있는것들이다.

ㄱ)"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0)

ㄴ)"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7)

ㄷ)"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ㄹ)"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15:26)

ㅁ)"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13)

ㅂ)"주의 선한 영을 주사 그들을 가르치시며"(느9:20)

ㅅ)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16:6-7)

 

b)성령의 직무는 인격적 직무이다.

성령은 보혜사(comforter)로 묘사된다. 이 단어의 의미는 우리 옆에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 또는 우리를 위해 대언해주시는

분을 말한다.

"내가 떠나가는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것이요"(요16:7)

=>주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는것이 아니고 성령을 주님 대신 보내셔서 우리를 지도하고 인도하고 가르치시고

성령을 우리안에 거하게 하셨다. 이는 분명 인격적인 직무이다.

 

c)성령은 인격적인 대우에 반응하신다.

성경은 성령이 인격적인 대우에 굉장히 민감하시다고 말씀하신다. 즉 성경은 우리가 성령께 어떤 일을 행할수 있으며 여기에

대해 성령도 인격만이 반응할수 있는 방법으로 반응하신다고 가르친다.

ㄱ)첫째 우리는 성령께 거짓말을 할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5:3)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들이 전부를 드렸다고 말했지만 베드로는 그들이 성령을 속였다고 꾸짖었다. 그러므로 성령은 영향력이나 막연한 능력이

아니라 인격이시다.

 

ㄴ)둘째 우리가 성령을 모독할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12:31-32)

 

ㄷ)우리는 성령을 욕되게 할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자"

(히10:29)

 

ㄹ)우리는 성령을 근심하게 할수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 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2)성령의 신성

지금까지 살펴본것은 성령의 인격이었다. 이제부터는 성령의 인격성뿐 아니라 신성 역시 설명해야 한다.

이것은 위대한 삼위일체 교리의 일부분이며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이 교리를 믿는다. 모든 오류와 이단들과

타 종교인들은 이것을 믿을수 없다. 삼위일체는 모든 진리를 여는 열쇠이다.

(1)성령의 신성의 증거

a)성경이 성령의 신성을 명확하게 주장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끔찍한 사건을 다시 되돌아 보자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5:3-4)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속였다고 말하고 있다. 성령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성령 하나님인 것이다.

 

b)성령의 이름이 하나님과 결부되어 있다.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성령의 이름은 하나님과 결부되어 있는데 이것은 성령의 인격성을 증명하는 동시에 신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지난장에서 살펴본 세례신조와 사도적 축도에서도 볼수있으며 고린도전서

12장에서도 볼수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12:4-6)

이일을 하시는 분이 한번은 성령님으로 한번은 하나님이라고 나온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 인것이 증명된것이다.

 

c)하나님의 속성이 성령께 돌려진다.

ㄱ)성령은 영원하시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히9:14)

=>성령이 영원하시다라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인것을 증명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ㄴ)성령은 편재하시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139:7)

성령은 어디에나 계시다. 편재성은 하나님의 속성이다.

ㄷ)성령은 전능하시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눅1:35)

=>성모 마리아를 덮으신것은 성령의 능력이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지극히 높으신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다.

ㄹ)성령은 전지하시다.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2:10)

=>하나님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수 없다.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그분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과 동일하시다.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요14:26)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13)

그분은 전지하시기에 우리를 가르치시고 모든 진리를 다 아시기에 우리를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실수 있다.

 

d)성령은 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는 일을 하신다.

네 번째 증거는 성령이 신적인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ㄱ)성령은 창조사역을 행하신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위를 운행하시니라"(창1:2)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욥33:4)

ㄴ)중생(거듭남)은 성령의 사역이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3:7)

거듭남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일어난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중생은 성령의 활동이다. 성령은 거듭남을 주신다. 원 창조와 새로운 창조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사역의 결과이다.

우리 주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요6;63) 이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ㄷ)영감을 주시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것이 아니니....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벧후1:20-21)

모든 성경은 성령에 의해 영감되고 무오하게 통제된 자들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이 때문에 성경의 무오성 교리가

존재하는것이다. 이것은 성령이 하나님이라는 증거이다.

ㄹ)부활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다.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시니라"(롬1:4)

=>사람들이 이말을 들으면 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다. 주님의 부활, 장차 있을 우리 모두의 부활은 모두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성령과 다른 위격들의 관계

a)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영원히 동등하시고 공존하시는 세 위격이 존재한다.

우리는 지난 제1권의 삼위일체 교리를 다룰 때 이부분을 다루었기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다.

하지만 두 가지 중대한 사실은 반복해서 다루도록 하겠다.

ㄱ)첫째,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ㄴ)둘째, 신성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존재하며 이 세 위격(인격)은 본질은 동일하나 위격만 구분될

뿐이다.

=>성부하나님은 온전한 하나님이시다. 또한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도 모두 온전한 하나님이시고 이 세위격은

영원히 동등하시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온전히 이해할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단지 성경의

권위앞에 엎드리고 그 권위를 인정해야 할뿐 이해할수는 없다.

 

b)성자는 성부에게서 낳았으며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온다.

성자와 성령에 대한 표현에 차이가 있음을 주의하자. 성자는 성부에게서 "낳았다"(요3:16,18)라고 했지만 성령은 이 표현을

쓰지 않고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신다"란 용어를 사용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15:26)

=>수많은 신학자들이 '발생'이냐 '발출'이냐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이 문제를 고찰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겠다. 이런 시도는

처음부터 하지 말았어야 한다.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깨달을수 없는 일이 아닌가!

 

c)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

그 다음에 또 한가지를 상기해야 한다. 성령은 성부 뿐 아니라 성자로부터도 나온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15:26)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을 보내실 분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씀하셨고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자신도 성령을 통해 일하시겠다고

말씀하셨으며 성령이 계신곳에는 성부와 성자도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11세기에 성령이 성자로부터 나온다는것이 교회에 논쟁이 되었고 성부에게서만 나온다고 주장하는 동방교회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하는 서방교회로 나뉘었다. 서방교회에는 로마카톨릭과 개신교도 포함된다.

동방정교는 교황의 무오성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을 분열시킨 것은 바로 이 성령에 대한 문제때문이었다.

 

d)성령은 언제나 성부와 성자에게 스스로 종속되신다.

우리가 성자에 대한 교리(기독론)을 공부할 때 성자가 성부께 스스로 복종시킨다는 것을 잘 살펴보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안에서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14:10) 성부가

성자에게 할 일을 주시고 무엇을 할것인지 말씀해주시고 성부는 순종하셨다. 이제 우리는 성령이 스스로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된다

는것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것을 말하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요16:13-14)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성령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성자와 마찬가지로 할말을 받아서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것이다라고 기록되어있다. 놀랍지 않는가? 이것이 사역의 분담이며

경륜적 삼위일체의 교리가 된다. 성자는 자신이 성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시고 성령의 사역은 성자를

영화롭게 하는것이다. 서로가 상대의 영광을 반영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놀라운 복되신 삼위일체의 교리를 마주하게 된다.

성령은 언제나 자신을 숨기시는것 처럼 보인다. 언제나 모든 초점을 성자에게 맞추신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나 자기

자신이 성령을 받았는지 시험해 보는 좋은 기준은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다고 하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으며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일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문해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이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는가???

 

이것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때문에 성령에게 너무 과도하게, 비성경적 방법으로 집중한다면 이것은 이단으로

빠지는 지름길이 됨을 명심하여야 할것이다.

 

e)세 위격의 관계에 대한 결론

성경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 있는 이와 같은 역할분담, 즉 우리의 구속을 위한 종속의 관계에서 성부는 형체가 없으시고

보이지 않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라고 가르친다.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수도 없는 이" 이분이 바로 성부이시다. 성자는 볼수있게 나타난 신성의 모든 충만이시다.

"그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이분이 바로 성자시다. 그리고 성령은 피조물에게 즉시 작용하시는 신성의

충만,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성령이 그의 능력으로 아들의 형상 가운데 아버지를 나타내 보이셨다고 말할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도 볼수 없는 분인데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가? 있다 바로 성자 안에 있다. 그분은 눈에 보이는

분이 되셨고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실제가 되셨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부께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나갈수 있다.

성자하나님은 계시된 하나님이시다. 성령하나님은 나에게 직접적으로 능력을 행사하시는 분이시다.

 

 

3)성령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

우리는 복되신 성령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떠나서는 성경의 어떠한 복음도 의미가 없게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2:8)

 

우리는 하나님이 정말로 오셨다는 것을, 그리스도안에 신성이 충만하다는것을, 그리스도가 우리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그 죄를 지워 없에 버리셨으며 죄의 형벌을 담당하셨다는것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의로우며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었다는것을 알고있다.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아는가????

당신이 이것을 아는것은 복되신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이신 성령께서 당신안에 거하시고

,조명하시며, 깨닫게 하시고, 기름부으시기 때문에 가능했다.

 

성자가 베들레헴에서 아기로 태어나셨을때 겸손히 마굿간의 말구유위에 오신것처럼 성령님은 겸손히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안에 오셨다. 성령 하나님이 당신 안에 오신것이 얼마나 놀라운 낮아지심과 겸손의

행동인지 이제 깨닫겠는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에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

당신은 그분을 근심하게 할수 있다. 그분을 근심하게 하는것이 얼마나 끔직한 일인가??

 

성육신과 더불어 이 사실을 통해 당신과 내가 구원받고, 들림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기 위해 일어난 성령의

낮아지심과 겸손을 기억하도록 하라!!

 

복되도다!!! 성부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시여!!!

 

아멘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장 1항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오직 한분 뿐이시다. 그의 존재는 무한하시고 완전하시다. 그는 가장 순결하신

영이시오, 불 수 없고, 몸과 지체가 없으시며, 성정(成情)도 없으시고, 변치않으시며, 광대하시고, 영원하시고,

측량 할 수 없으시고, 전능하시며, 가장 지혜로우시고, 가장 거룩하시고, 가장 자유로우시고, 가장 절대적이시고

모든 일을 자신의 변함없으시고 가장 의로운 뜻과 계획을 따라 행하시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하시고, 가장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선하심과 진리로 가득하시고, 죄악과 죄과와 죄를

용서하시고, 자기를 부지런히 찾는 자들에게는 상을 주시는 이시오, 동시에 그의 심판은 가장 공의롭고 무서우

며, 죄를 미워하시고, 결단코 면죄치 않으신다.

제2장 2항

하나님은 자신 안에 자신에게 속한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과, 복을 가지고 계신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만드

신 피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그들에게서 아무 영광도 얻어내지 않으시고, 다만 자신의 영광을 피조물

안에서, 그것들에 의해서, 그것들에게, 그것을 위에 나타나신다. 그는 홀로 모든 존재의 유일한 근원이시오,

모든 만물은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간다. 그는 가장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모든

만물을 통치 하시며, 그것들에 의해서, 그것들을 위하여, 또는 그것들 위해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을 무엇이든지

행하신다. 그의 앞에서는 모든 만물이 드러나며 나타난다. 그의 지식은 무한하시고, 무오하시며, 피조물에 의존

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앞에는 아무것도 우연하거나 불확실한것이 없다. 그는 그의 모든 계획과 그의

모든 사역과 그의 모든 명령에 있어서 가장 거룩하시다.

천사들과 사람들과 기타 다른 피조물이 무슨 경배나 봉사나 순종이든 그에게 드리는것이 마땅하며, 그는 그런 것들을 즐거이 요구하신다.

제2장 3항

단일한 신격 안에서 본체와 능력과 영원성이 하나인 세 격위가 있으니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과 성령하나님

이시다.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나오지 않으시고 출생하지도 않으시고 발출하지도 않으시나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출생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발출(發出)하신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29문>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값주고 사신 구속에 참여하는 사람이 됩니까?

답)그리스도의 성령께서 그 구속을 우리에게 효력있게 적용하여 주심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값주고 사신 구속에 참여하는 사람이 됩니다.

<제30문>

그리스도의 값주고 사신 구속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하십니까?

답)성령께서는 우리를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부르셔서 우리안에 믿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값주고 사신 구속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주십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답)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는 나의것이 아니요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완전히 치르시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그러하므로 그의 성령으로 그분은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 이제 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즐거이 그리고 신속히 그를 위해 살도록 하십니다.

<제53문>

성령에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첫째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그분은 또한 나에게도 주어져서 나로 하여금 참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게 하며 나를 위로하고 영원히 나와 함께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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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무리마을/요단강건너는 사람
오래 전에 아멘넷에 올렸다가 자삭한 글입니다.  John MacArthur 목사님의 Extreme Tolerance를 번역하였습니다. 잘못 번역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얼마나 아멘넷에서 버틸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참고 자료로 남깁니다.

전에는 교리(doctrine)에 세심하고 성경적이었던 많은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이, 교인이 아닌 사람들(unchurched people)의 마음에 들기 위하여, 빠르게 교리에 문외한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적어도 30여년 간 전에는 건전하였던 교회들이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끌어 들이기 위하여, 진리로 부터 벗어난 가장 최악의 급조한 교리 조차 분간 못하는 사람들로 채워졌습니다. 복음주의의 교회가  광신자(cultists), 정통파가 아닌 미디어 설교자(media preacher), 또한 다른 유(other sources)의 거릇된 교리의 가장 심각한 오류(the most profound errors)조차도 답변에 응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점차로 어떤 이슈(issue)에도 명확한 입장을 취하기를 꺼리고 있습니다. 우리 세대의 문화는 분별력(discernment)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사실 후기근대의 배경(the postmodern perspective)은 분별력에 대하여 단순히 적대적인 이상으로, 실제적으로 극과 극의 정반대입니다(polar opposite). 어떤 것을 "진리(true)"로 그리고 그 대조(antithesis)를 "오류(error)"라고 선언하는 것은 후기근대의 최후의 난공불락의 교의(one last impregnable dogma)에 대한 침해(breach)입니다. 그 이유는 영적(spiritual), 도덕적(moral), 또는 윤리적인 일(ethical matters)에 강경한 의견을 말하는 것은 후기근대주의자에게는 가장 세련되지 못한 일(uncouth)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판결(most important convictions)은 가능하다면 늦추기를 기대합니다. 어떤 것을 확신(certainty)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고, 그리고 원리나 교리의 어떤 것(any point of principle or doctrine)에 대하여 얼버무리지 않는(refuse to equivocate) 사람은 그러므로 자동적으로 가장 옹졸하다고 낙인이 찍힙니다. 진리에 대한 열심(zeal for the truth)은 정치적으로 틀린 것(politically incorrect)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만사를 "허용(tolerance)"하는 분위기에서는 성경적인 분별력(biblical discernment)은 실제로 조금도 허용이 되지 않습니다.

세속의 영역에서, 후기근대의 지나친 허용(extreme tolerance)을 수 십년간 엔터테인먼트 미디아(entertainment media)에 의하여 의심하지 않는 대중에게 슬그머니 속여 팔았습니다(foisted). 날마다 텔레비전의 넘치는 토크 쇼(a plethora of talk shows)가 그 길을 열었습니다. Phil Donahue가 그 형태(format)를 수립하였습니다. Jerry Springer는 어이 없는 과격한 상태(ridiculous extremes)로 몰고 갔습니다. Oprah는 그래도 다소 고상하고 세련되어 있습니다. 이런 쇼들은 날마다 보는 자들로 하여금 지나치게 자신의 의견에 사로잡히지 않토록 상기시키고 , 그리고 가장 기괴하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여러가지 급진적인 "평범하지 않은 대체적인 삶(alternative life)"의 극단적인 지지를 청중들의 코 앞에서 과시합니다. 여러가지 정도에서 벗어난 주변문화(aberrant subcultures)의 명백한 자기 파괴의 충동에 충격을 받거나 인지하지 않도록 만듭니다. 핵심은 마음의 영역을 넓히고 허용의 정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가치관을 비판하는 것은, 성경적인 분야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삶의 방식을 거부하기 위하여 종교적인 신념을 인용하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철저히 종교적 이단자에게 퍼 붓던 그런 경멸의 대상이 됩니다. 이러한 문화가 모든 성경적인 표준에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

소수의 크리스찬들이 의식없이 이러한 일들을 몇 년전에 따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으로 교회 안의 온 세대가 후기근대의 상대주의(postmodern relativism)를 공개적이고 고의적으로 받아 들이도록 문을 열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진리를 순수한 흑백의 명백함으로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옳고 그른 것, 진리와 오류, 좋고 나쁜 것을 고의적으로 회색으로 칠하기를 더 좋아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조차도 진리를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바른 것이라고 생각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어떤 명확함도 후기근대의 사람들의 귀에는 공격적인 소리로 들립니다.

한 젊은 교역자는 "설교한다"는 말의 권위적인 암시를 싫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설교사역을 사람들과 "의견을 나눈다(sharing)"는 것으로 말하였습니다. 물론 그 사역은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평(comments)이 아마 오늘날 교회 안의 보편적인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D. Martyn Lloyd-Jones는 수십년 전에 이러한 경향을 지적했습니다. 그의 놀랄만한 저서 "Preaching and Preachers"는 설교한다는 자체가 현대사회에서는 불편한 일이 되어 간다는 것을 언급하며 시작합니다.

설교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조금씩 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가지 형식을 취합니다. 그중의 중요한 하나는 예배에 있어서 설교(sermon)라는 말 대신에 "강연(address)"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자체가 아주 미묘한 변화를 암시합니다. "강연(address)."  더 이상 설교가 아니라 "강연" 이나 강의(lecture).....한담(chat), 화롯가의 한담, 조용한 대화(quiet talks)등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Lloyd- Jones는 단순히 후기근대주의의 명확성과 권위에 대한 경멸의 미묘한 전조의 하나를 지적하였습니다. 그 시대에는 싹이었던 것이 지금은 아주 큰 괴물이 되었습니다.

2004년의 "Emergent Convention"에서, Emerging Church 운동에 관여하는 약 1100명의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Doug Pagitt는 회중에게 "설교가 무너졌다(preaching is brocken)."고 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참가자들에게 동등한 완전히 열린 대화(open conversation)의 광장이 후기근대의 문화에 적합하다고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왜 나는 30분간 말을 하는데 당신은 듣기만 하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는 "설교는 하나의 난폭한 행동이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는 "설교가 그 자리에 않아서 들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의지에 거스르는 폭행이다."고 하였습니다.

Rudy Carrasco는 설교를 단순히 후기근대의 시기에 걸맞지 않는 일방적이고, 너무 권위적이고, 너무 딱딱한 것이라고 동의하였습니다. "매일, 매주, 살면서 자질구레한 일들이 생긴다, 그리고 해결이 되지않아, 미칠 것 같고 혼동이 되고 괴롭다. 사람들이 세가지 답변을 뜻밖에 찿았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고(they know everying), 그들은 그것을 강경하고 권위적으로 말한다(they have this iron sheen about them), 나는 들을 수가 없다(I'm turned off) .....정말 나는 들을 수가 없다. 나 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오래된 시대사조(in the spirit of the age)에 붙잡혀서 크리스찬은 어떤 강경한 입장을 취하여서는 안되고, 아무 것도 논쟁하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떤 논쟁도 하지(engage in polemics)않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왜 진리의 긍정적인 면만 말하고 당신이 동의할 수 없는 의견은 버리지 않느냐? "고 따지며, " 부정적인 것은 잊어버리고 모든것을 긍적적으로 생각하라, 왜 맑은 물에 돌을 던져 흙탕물로 만드느냐?(why not steer clear of controversy)"고 말합니다.

이런 풍조로 인하여 더 이상 성경적인 이슈들을 직접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방법으로 다루지 않게 되었습니다. 명확한 방법으로 진리를 선포하는 자는 왕따를 당하게 됩니다. 최악의 경우로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잘못되었다고 하면 불평분자로 낙인이 찍힙니다. 타협(compromise)하는 것이 미덕이 되었고 진리에 대한 전념(devotion to truth)은 남을 공격하는 것이다(offensive)고 말합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운동의 많은 이슈들이 타협되어가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명백하게 동성연애(homosexuality)를 거절합니다. 간음(adultery)에 대한 크리스찬의 입장은 전혀 모호한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할 것인가란 질문은 명백히 설명되었습니다. 성경은 어느 크리스찬이 다른 크리스찬을 세상의 법정에 서게하는 것을 아주 명료하게 금하였습니다. 이기심(selfishness)과 자만(pride)은 명백히 죄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이것은 회색의 영역이 아닙니다. 타협할 틈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슈들까지도 크리스찬 방송, 크리스찬 텔레비젼, 그리고 크리스찬 서적에서 회색 영역으로 다루는 것을 계속적으로 듣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협상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많은 크리스찬 지도자들이 기꺼이 호의를 보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명확한 일들도 권위있게 말하는 것을 주저합니다. 진리와 오류, 지혜와 우둔, 교회와 세상을 구별하는 선이 이런 방법에 의하여 제도적으로 말살되었습니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크리스찬은 오히려 세상과 대조적인 견해(antithetical worldview)를 받들고, 진리와 윤리에 대하여 흑백의 명확함으로 대답할 수 있는 성경적인 올바른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왜냐하면 절대적이고 부동적인 진리가 없으면 구원(salvation)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타협하고, 변하고, 묵인하는 여론(tolerant opinion)은 Carrasco가 날마다 겪게되는 " 미치고 혼동이 되고 괴로운" 이슈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진리만이 구원(save)하고 죄를 씻어주고(sanctifies) 희망(hope)을 줍니다.

오늘날 필요한 것은 성경적인 진리를 옹호하는 이 세대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을 두려워 하고, 사람을 두려워 하지 않으며, 그리고 지나친 허용의 세대에 주님의 진리를 높이 들 수 있도록 주님께로 부터 오는 능력과 용기를 구하는 자들입니다.


출처: USA 아멘넷/ 번역: 김준익

아들에게 자신이 목회하던 교회를 물려주었던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교회를 대물림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한 것이 언론에 기사화 된 적이 있습니다. 자녀에게 교회를 대물림 하는 것의 시초가 되었던 그 목사님 이후로 많은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앞 다투어 자녀들에게 교회를 물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의 대물림현상에 대하여 많은 지탄과 비판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자녀가 부모님이 평생을 섬기던 교회를 물려받아서 섬기며 사역하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왕왕 있는 일입니다. 또한 그러한 일들을 과거에는 아름답고 감동적 본이 되는 미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미담이 되어야 할 이런 대물림이 왜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요?

사실 목사가 그 자녀를 다시 목회자로 키우기란 쉽지 않습니다. 부모나 자녀모두 희생하고 양보하고 손해보아야하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가난과 자신의 뜻대로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나하나 성도들에게 노출되어 있어서 평가받는 삶이 얼마니 힘들고 버거운지 목회자 자녀들은 절대 부모를 따라 목회자가 되는 것을 대부분 싫어합니다. 대부분의 목회자 자녀들이 그러하고 과거의 목회자 자녀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혹 자녀들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헌신하더라고 자신의 사명과 사역의 인도하심을 따라 다른 교회에서 사역하기도 하고 때론 부모가 사역하였던 교회를 맡아서 열심히 사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부 성공한(?) 대형교회의 자녀들은 왕자와 공주님이 되어 성도들로부터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황태자로 대우를 받는 경우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부족함 없이 살고 모든 삶이 안정되게 보장받는 삶을 살아온 그들에게 은퇴를 앞둔 목사들이 자신이 평생에 이루어 놓은 기업과 같은 교회를 통째로 아들에게 물려주어 안정된(?) 삶을 대물림하려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교회의 묵인과 비호, 검증되지 않은 소명과 영성에도 불구하고 당사자 스스로 편한 그 길을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교회의 목회사역을 대물림 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목사의 자녀가 대를 이어 목사가 되는 것은 매우 성경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 어렵고 힘든 희생과 봉사의 길을 가길 원하겠습니까?  

당연히 분명한 부르심의 소명이 있고 주님의 종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고 돌보는 투철한 사명감과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헌신의 각오가 있어야 하는 목회자의 길을 선택하였을 때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크건 작건 대물림 자체가 비난받아선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히려 존경 받고 인정 받아야할  모습입니다.

성경을 묵상해 보면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각 지파별로 기업을 분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론과 모세가 속한 지파인 레위지파는 가나안에서 기업이 없었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대대로 하나님의 성전을 섬기도록 명령하셨기에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 레위지파에게는 각 지파에서 구별한 도피성과 제물로 쓰일 짐승을 먹일 목초지와 하나님의 성막을 섬기는 일과 제사하는 일에 쓰일 포도주 생산을 위한 포도원과 떡을 위한 토지(생산지)들을 떼어서 하나님께 돌리게 하였고 각 지파에서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린 그 성과 토지와 포도원과 목장을 돌보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레위지파의 자손들에게 그 하나님께 드린 것을 기업으로 분배하였던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아론의 자손들은 대를 이어 제사장으로, 다른 이들은 교회를 돌보고 성막에서 각자 섬기도록 하였으며 포도주 생산과 짐승을 기르는 일과 농사짓는 일과 도피성을 지키는 일 등 각기 기업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어디 한 군데에도 모세의 두 아들이 기업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오늘의 대형 교회는 그 사역의 폭도 넓고 다양하기에 각자의 달란트와 사역에 따라 교회를 섬기며 봉사하는 일이 여러 가지입니다. 목회자의 자녀들이 어떤 사역과 일을 하는가는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느 목사님의 자녀들 중에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기관이나 기업을 물려받아서 운영하기도 하고 또는 교회를 대물림한 것에 대하여 지탄을 받고 비난과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작 당사자들인 목사님들과 그 자녀들이 문제의 본질과 이유를 모르고 있거나 무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수백만을 이끌고 출애굽 하여 하나님의 능력의 종으로써 가나안으로 인도하였던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위대한 지도자 모세,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 독대하였고 가장 온유한 지도자, 강력한 카리스마와 능력의 소유자인 모세. 그런데 그의 자녀들, 애굽에서 도망하여 미디안에서 그 이방신의 제사장인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여 낳은 게르솜과 엘리에셀이 성경의 역사에서 어떻게 기록되는 지를 살펴보면 목회자의 자녀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 르비딤의 광야에 있을 때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딸과 손자들, 즉 모세의 처 십보라와 두 아들인 게르솜과 엘리에셀을 데리고 모세에게로 나옵니다. 아마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애굽으로 돌아가던 중에 천사를 만나 죽임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 급히 십보라가 그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를 살린 그 일과 관련하여 아내와 아들들을 처갓집으로 돌려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8장 이후로 이 모세의 두 아들의 기록은 성경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하나님의 교회의 지도자였던 모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비록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죽었다고는 하나 그 아들들이 가나안에서 특별한 기업을 얻지 못하였고 특히 레위족속에게 분배하여 하나님의 기업을 맡길 때에도 그들의 이름이 언급이 없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후손들에게 어떤 특혜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아론의 아들들은 대를 이어 대 제사장이 될 수 있었지만 모세의 후손들에게는 그러한 특혜(?)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그 후손들에게서는 선지자들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삿 18:장에 단 지파가 라이스 땅을 정복하고 그 땅에 사는 미가가 만든 신상을 빼앗아 가져가서 미가가 제사장으로 세웠던 게르솜의 후손들을 데려다가 그가 레위인 인줄 알고  단지파의 제사장으로 삼은 기록이 있습니다.

또 다른 성경에는 대상 15:7절에 보면 다윗이 자기 성을 짓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올 때에 레위지파에서 장정들을 모을 때 “게르솜 자손 중에 지도자 요엘과 그의 형제가 백 이십명이었더라”고 기록 된 것을 보게 됩니다. 당연히 레위인으로써 성막(성전)에서 섬기는 일과 또한 그와 관련된 직업을 가지고 살았겠지만 모세의 아들이라는 신분상의 특혜는 없었다는 것이지요.

대상 23장에는 레위자손들이 성전의 보살피는 일에 각각 세움 받은 기록이 나오는데 특히 그 직분이 아론의 자손(제사장)을 도와서 여호와의 성전과 뜰과 골방에서 섬기고 모든 성물을 정결케 하는 일과 제물과 및 모든 제반 업무와 찬양과 예배하는 모든 일들을 섬기는 일이었으며 모세의 두 아들인 게르솜과 엘리에셀의 아들들은 단지 레위사람들의 가문을 계수하는데 들어 있을 뿐입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그 이후로 그들과 그들의 후손의 기록은 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다시피 문제의 본질은 욕심과 믿음, 두 가지입니다. 모세의 두 아들과 그 후손은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그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었지만 전혀 특별한 대접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세상의 욕심조차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본분인 레위 인으로써 성전을 섬기는 소임에 충실했을 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어진 삶을 성실히 살았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죽기 전에 인간적인 생각으로 두 아들에 대하여 특별이 어떤 대우나 기업을 줄 것을 유언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유대인의 관습을 보더라도 충분히 축복하고 기업을 남길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그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게르솜과 엘리에셀 두 아들의 신앙 역시 남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요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테지만  심지어 모세의 처남들에게조차 기업을 주었는데도 그들은 욕심을 갖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광야의 훈련을 통해서, 그리고 아비 모세의 신앙과 그 믿음을 본받아 절대 순종의 신앙을 배운 그들은 겸손히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구별된 자로써 묵묵히 섬김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모든 사역자들과 그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그 여호와 하나님이 주가 되심을 믿는다면 교회를 자기 것인 양,  마치 자기의 능력으로 키우고 이루어 낸 자신의 소유인양 생각할 수 없겠지요. 교회와 성도들을 속이고 하나님을 능멸하고 자신의 배와 자식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어리석은 우상숭배의 길을 걷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지도 않을 뿐 더러 하나님의 살아계심도 알지 못하거나 혹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가증하고 무서운 죄를 짓고 있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어려운 개척교회의 목사님들이나 가난한 시골과 낙도를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모두가 꺼리는 힘들고 어려운 오지의 사역을 이어받아서 목회를 한다고 한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존경할 만한지요. 또한 도시의 커다란 대형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분명한 소명의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주의 종의 길을 가려고 헌신한 많은 목사님들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서 아버지가 섬기던 교회의 청빙과 부름을 받아서 얼마 던지 사역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싸잡아 욕할 순 없으며 욕해서도 안 됩니다.

단지 동기가 무엇인지, 어떤 의도함이 있는지, 그 마음이 어떠한지의 문제인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시며 동기를 판단하십니다. 그 과정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자격도 안 되거나 혹 목사나 그 자녀의 개인의 욕심이나 다수의 이권과 관련된 또한 적법한 정식 절차를 밟지 않고 위법한 일로 문제가 되었다면 교회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요 세상에 비웃음꺼리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범죄행위이므로 마땅히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신 8장은 모세를 통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염려하시며 경고로 말씀하시는 대목입니다. 11절부터 20절에 특별히 경계의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 8:12-14)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니라”(신 8:17-20)

오늘날 세상 매스컴과 온라인상의 뉴스 1면을 장식하고 있는 목회자들과 그 가족들과 관련된 아름답지 못한 뉴스들을 보면서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써 부끄러움과 반성의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세상은 교회와 성도들의 삶에서 희망을 찾기를 원합니다. 어두움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그나마 교회에서 한줄기 빛을 보기를 원합니다. 교회세서 진리를 찾고 교회에서 소망의 불씨를 얻으려 합니다. 더러운 오물투성이 세상에서 깨끗한 생명수를 얻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언제 주님이 우리들에게(목회자) 세상에서 영광을 취하고 편안함과 부귀영화와 명예를 취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세상에서 위로를 받으라고 하셨습니까? 귀신같이(?) 스며들어온 번영신학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정직한 것처럼 합리화하려 하지만 세상은 속아주질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목사도 사람입니다" 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맞습니다. 목사도 사람이지만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시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분부하셨습니다. 분명 우리는 사람대접받으며,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되는 존재들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처럼, 주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살아야 사명이 있지 않습니까? 사도들과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모두 그길을 걸었고 그 삶을 기꺼이 사랑했으며 삶으로 살아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 삶의 길로 부르시고 택하셨습니다. 왜냐면 우리들 사역자들의 기업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 그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기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부름을 받고 택함을 받아 사역자로 종으로 세움 받음을 믿고 인정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합시다. 성도들 앞에서 정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깨끗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이 실제가 되는 그런 삶을, 적어도 우리 목회자들만이라도 살아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출처: USA아멘넷/ 교회는 하나 님

 

    권위와 복종(Authority and Obedience) 어떤 사람은 전적으로 권위만 가지고 있고 또 다른 사람은 오직 순종만 하는 것과 같이, 권위와 복종은 결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권위와 복종이 떨어져 있으면 한 사람은 독재적인 행동만을 하고 다른 사람은 현관에서 남의 신발에 묻은 흙을 터는 일만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권위와 복종이 모두 쓸모 없게 됩니다 복종해야 할 상대는 한 사람도 없이 큰 권위만 가진 사람은 영적으로 커다란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도 아무런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고 오직 복종만 하는 사람 또한 영적으로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전생애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복종의 생애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게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마태복음 26: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8:18) 우리는 복종하는 가운데 권위를 사용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또 권위를 지닌 채 복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옮기는 글

     

    출처: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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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병든 사랑은 추합니다. 가정을 가진 남 녀는 서로 사랑하되 주 안에서 형제 자매로, 동역자로, 일절 깨끗함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날, 이런 사실을 망각한 목회자, 직분자들이 늘어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주일 성수도 마찬가지입니다. 1주일에 하루, 온전히 주일을 지키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주일을 습관적으로 지킨다면 그것만으로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일은 주님을 사랑하는 날, 내 영혼이 주와 함께 안식하는 천국에서 주님과 나눌 사랑의 예행 연습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루터"는 주일 지키는 것을 천국 가는 훈련이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글: 최송연/그림 영혼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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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지도자를 사랑하기 (Loving Our Religious Leaders) 종교 지도자, 랍비, 성경공부 지도자, 목회자 등은 칭찬과 존경을 받기도 하지만 또한 미움과 멸시를 받기도 합니다 우리는 종교 지도자들이 기도와 가르침 그리고 지도를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가까이 인도해 줄 것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행동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관찰하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듣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그것을 완전히 인식하지도 못하면서 그들로부터 무엇인가 초인간적이 것을 기대하기 때문에,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점이 증명되는 때면 쉽게 실망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배신감을 느끼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순진했던 존경심은 재빨리 억제할 수 없는 분노로 탈바꿈합니다 우리의 종교 지도자를 사랑하고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며, 그들을 우리의 형제 자매로 인정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깨어짐 속에서도 우리를 하나님의 심장으로

    더욱 가까이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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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USA 아멘넷/ JuNick 님



    출처: USA 아멘넷/ JuNick 님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름

    마틴 로이드 존스

     

    마태복음 5:38-42

     

    여러분은 자아(自我)가 여러분의 삶을 어느 정도 지배하는지 그 "범위"를 알고자 시도해 본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의 일상의 일, 여러분이 행하는 것과 필히 접하게 되는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들을 살펴보십시오. 잠시 동안 이러한 모든 것 안에 침투해 들어온 자아의 범위를 숙고해 보십시오. 심지어 복음 선포에 까지 자기 이익과 이기적 관심이 영향을 끼친 것을 볼 때 놀랍고 두렵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끔찍한 발견입니다. 우리는 일이 잘되어 가는지에 관심을 갖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까? 우리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과 우연히 사람들을 만날 때 주는 인상 등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무엇입니까?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행동과 행위 뿐 아니라 복장, 외모, 모든 것에서 여러분의 삶 전체를 분석해 본다면, 자아에 대한 이 불건전한 태도가 차지한 범위를 발견하고 몹시 놀랄 것입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갑시다. 과연 우리는 삶 가운데서 단 한 가지, 자아로 말미암는 비참과 불행과 실패와 괴로움의 범위를 깨달은 적이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지난 주(週)로 돌이켜서, 불행과 긴장과 성급함과 언짢음, 말하고 행동한 것들 가운데 지금 진정으로 부끄러워하는 것들, 여러분을 혼란케 하고 균형을 잃게 한 순간들을 마음으로 상고하며 회상해 보십시오. 하나씩 하나씩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 모든 것이 거의 이 자아의 문제, 이 자아의 민감성, 이 자아에 대한 집착으로 귀착되는 것을 발견하고 놀랄 것입니다. 이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자아는 삶 가운데 있는 모든 불행의 주된 원인입니다. 여러분은 "아, 그것은 나의 허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저지른 일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좋습니다. 여러분 자신과 다른 사람을 분석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사람도 자아 때문에 그렇게 행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여러분도 동일한 이유로 그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음 구절에서 가르치시는 바와 같이, 만일 여러분만이 다른 사람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갖고 있다면,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비난을 받아야만 할 사람은 여러분 자신인 것입니다. 자아를 정직하게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실제적인 수준에서 매우 바람직합니다. 대부분의 불행과 슬픔, 삶과 체험에서의 대부분의 고통들은 그들의 궁극적인 근원이자 출처인 이 자아에서 비롯됩니다.

     이제 보다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서 자아를 교리적으로 바라봅시다. 자아를 교리적인 방법과 신학적 방법으로 바라보는 것이 매우 바람직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타락의 원인은 자아였습니다. 자아가 없었더라면 죄가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귀는 매우 교활해서 죄의 권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아의 관점에서 죄의 권능을 발휘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은 너에게 공평하지 않아. 너는 당연한 원한과 불평을 갖고 있는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이 말에 동의했습니다. 이것이 타락의 전(全) 원인이었습니다. 타락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세계 각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국제 회의가 열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본질은 바로 자아이며, 자기 과시입니다. 이것이 교리적으로 본 자아입니다. 자아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도전을 의미합니다. 자아는 내가 항상 하나님 대신에 자신을 왕좌에 앉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자아는 항상 나를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삶 가운데 모든 불행한 순간들은 궁극적으로 이 분리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과 및 주 예수 그리스도와 참된 교제를 가지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가 지하 감옥에 있든지, 발이 차꼬에 매여 있든지, 또는 화형을 당하고 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있다면,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합니다. 이것이 수세기에 걸친 성도들의 체험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어떤 비참이나 불행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과의 분리이며, 하나님과의 분리의 유일한 원인은 자아입니다. 우리가 불행할 때는 언제나 우리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대신 자신을 보고 자신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 때를 의미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의도되었습니다. 사람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의도되었습니다. 사람의 온 존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의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아를 영화롭게 하거나 자아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어떠한 욕망도 필연코 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영예와 영광을 구하는 대신에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정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바로는, 거룩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자아 중심의 생활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거룩을 반드시 행동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자아에 대한 태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거룩은 본질적으로 내가 어떤 일들은 행하고 어떤 일들은 시도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죄로 여겨지는 것들은 일절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아의 교만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자아의 관점에서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하며, 거룩의 본질은 우리의 삶과 체험에서 수많은 파멸을 일으켜 온 이 자아에 대하여 죠지 뮬러와 같이 우리가 죽었으되 완전히 죽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임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수준으로 자아의 문제를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보기로 합시다.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세상에 오셨습니까? 그분은 궁극적으로 인류를 자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자아를 돌아보지 않는 이러한 삶을 그분 안에서 완전하게 봅니다. 주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베들레헴의 말구유로 오셨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왜 오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오직 한 가지 답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중히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빌립보 2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의 본질입니다. 주님은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원부터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중히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신분과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실 권리를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낮추시고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아를 부인하지 않으셨다면, 결코 성육신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사신 그분의 자아를 부인한 삶을 바라보십시오. 그분께서는 자주 자기가 한 말은 자기 스스로 한 말이 아니며, 자기가 행한 일은 "내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제가 이해하는 십자가의 자기 비하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오셔서,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시고, 자신을 전혀 중히 여기지 않으셨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 하나님, 보시옵소서, 내가 주의 뜻을 행하러 오나이다." 주님은 모든 일에서, 곧 그분이 하신 모든 말씀과 그분이 행하신 모든 것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같이 친히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주님은 조금도 자기를 위하여, 자기 스스로 사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우리에게 그 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마음이니".

     우리는 당연히 이러한 삶의 극치를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보게 됩니다 그분은 순결하고 결백하며, 결코 죄를 범하시거나 누구에게 해를 입히신 적이 없었지만, 오히려 "욕을 받으시되 되받아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자신을 맡기셨습니다"(벧전2:23).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최고의 예입니다. 신약성경이 주장하는 바는, 만일 우리가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음을 믿는다고 고백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최대의 갈망이 자아에 대하여 죽어야 하는 것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의 최종 목적은 단지 우리가 용서를 받거나 지옥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새 백성, 새 인류, 새 창조를 이루고, 그분을 닮은 백성들로 구성된 새 왕국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많은 형제 중에서 처음 나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본(本)이십니다. 바울은 에베소인들에게 보낸 서신서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셨으며,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피조된 그분의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여러분과 제가 구원을 받고 자아의 삶에서 분리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고린도후서 5장에서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며,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을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은 그 이유에 대하여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이제 후로는 자신들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신들을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삶입니다. 이 삶은 자아 방어나 자아 민감성의 삶이 아니라, 모욕을 당하더라도 복수하지 아니하고,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그에게 다른 쪽도 돌려대며, 또 누가 너를 법에 고소하여 네 덧옷을 뺏으려 하면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하여금 억지로 일 마일을 가게 하거든 그와 이 마일을 동행하고,"어떤 사람이 와서 나의 것을 요구하더라도 "이것은 내 것이요"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이 사람이 어렵다면, 내가 도울 수 있으며, 기꺼이 돕겠노라"라고 말하는 삶입니다. 나는 이미 자아를 처리했고, 자아에 대하여 죽었으며, 이제 나의 유일한 관심사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영예입니다.       

    이것이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신 삶이며, 그분께서 죽으심으로 여러분과 저로 하여금 살도록 하신 삶입니다. 감사하옵게도 복음서는 계속해서 그분께서 다시 사셨으며 성령님의 새롭게 하며 강건케 하는 권능과 함께 성령님을 교회에게 그리고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셨다고 증거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힘으로 이러한 삶을 살려고 애쓴다면 반드시 실패할 것입니다. 우리는 시작도 하기 전에 반드시 실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보내주실 것이며,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것이라는 복된 약속과 선물이 있기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삶이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죠지 뮬러가 죠지 뮬러에 대하여 죽을 수 있었다면, 어째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심히 악하고, 엄청난 비참과 불행에 이르게 하며, 최종적으로는 갈보리 언덕 십자가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아들의 복된 사역을 부인하게 하는 자아에 대해 죽을 수 없단 말입니까.


    출처: 양무리 마을/바로미 님





    Emerging Church Play List
    http://www.youtube.com/view_play_list?p=ACDF44D5C7EFA284
    Apostasy is spreading throughout Christian churches that were once staunchly fundamental. These apostate churches are suppressing the gospel that they once declared faithfully and openly. Caryl Matrisciana details how pastors are intentionally deceiving their congregations and leading them into eternal error.



    출처: USA 아멘넷 게시판/ JuNick



        걱정을 버리는 6가지 방법 문제를 보는 시각을 바꾸라 문제를 두고 걱정부터 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이 아니라, 나쁜 습관에 불과하다. 걱정하는 습관을 버리기 위해서는 먼저, 문제를 보는 시각을 바꿔야 한다. 내게 생긴 문제들이 골칫거리가 아니라, 해결점을 찾기 위해 도전하는 힘을 주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하자. 기분 좋은 잠, 상쾌한 아침을! 매일 잠 잠자리에 들면서 그 날의 걱정거리들을 되뇌이는 것은 내일까지 걱정하는 하루로 만들어 버린다. 잠자리에 들 때 마음을 편안히 하고,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자. 아침에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나면, 어제의 문제들을 냉철하고 객관적인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라 오늘 해결해야 할 산더미 같은 쌓인 일과 문제들을 헤아려 보느라 마음을 무겁게 하지 말라. 긍정적인 말을 하라 생각을 말로 하지만, 말에 따라서 생각이 바뀌기도 한다. "난 못해", "큰일이야!", "어떻게 하지?" 이런 식의 부정적인 말들을 모두 버리자 긍정적이고 확신에 찬 말들로 생활을 채우라. 말하는 습관을 바꾸는 것은 매순간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자. 도움을 주는 글귀들을 외우자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고, 힘을 내게 하는 좋은 말들을 외워 두자. 마음에 와 닿는 구절, 명언, 책에서 읽은 아름다운 말들이 나를 성장시켜 주는 한마디가 될 수 있다. 그런 말들이 무의식중에 창조적인 생각으로 바뀌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한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만남을 가지라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좋은 대화를 나누는 것은 마음과 생각을 풍요롭고 새롭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 내 모습을 반성해 보고, 서로를 격려함으로써 약한 의지를 다시 세울 수 있다. 성경공부 모임이나, 자원봉사단체에 참여하는 것도 좋은 사람들과 좋은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기회다. - 좋은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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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까이에서 함께 사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큰 고통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선택하셨을 때, 
    유다도 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다는 배반자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배반자라는 말은 문자상의 의미로 보면
    희랍어의 "배반(betraying)" 이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서 
    다른 사람을 고통 가운데로 떠넘기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조금씩은 배반자의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본의 아니게 혹은 무의식적으로, 
    서로를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고통 가운데로 떠넘기려고 합니다
    많은 아이들은, 심지어는 성장한 아이들마저도 부모들이 과잉 보호했거나 
    또는 충분히 들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모들에게 
    몹시 화를 낸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선한 의도와는 반대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고통으로 떠넘기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고백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들의 의사에 반하여 우리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보다 쉽게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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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판에서 용서로(Fron Blaming to Forgiving)
     
    우리가  당하는 가장 큰 고통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오기도 하고,
    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오기도 합니다
     
    남편과 부인 간의 관계, 부모와 아이들 간의 관계,
    형제 자매 간의 관계, 교사와 학생간의 관계,
    목회자와 신자 간의 관계, 이러한 관계에서
    우리는 큰 상처를 받습니다
     
    심지어는 우리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서도,
    그리고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이 죽은 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우리는 아직도 이런 관계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가려내는 데 도움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우리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에게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그들을 계속 비판하려는 충동이 우리들에게는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당신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어.
    나는 현재의 내 모습이 너무나 싫어"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상처를 인정하고 또 우리 진정한 자아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취한 태도의 결과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큰 도전입니다
     
    오직 우리가 하나님이 만드신 우리 자신을
    우리 존재의 참된 근원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들을
    자유로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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