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의 주제

p.26

서신 전체가 아주 체계적이기 때문에 서두 자체마저도 기술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바울은 그의 사도권을 입증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이것으로부터 복음을 소개하는 데로 방향을 바꾼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이 소개는 불가피하게 믿음에 관한 논쟁을 수반한다. 그래서 복음에 대한 소개는 불가피하게 믿음에 관한 논쟁을 수반한다. 그래서 그는 전체 서신의 주요한 주제를 다룬다. 그 주제는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그가 5장까지 해서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장들(1-5장)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유일한 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임. 그 은혜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제공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수납됨”.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죄 가운데서 졸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자만심이 깨져 그들이 낭패당하기까지는, 그들은 믿음의 의가 그들에게 필요없다고 생각하게 하는 거짓된 의의 개념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추어 주며 속이고 있다. 한편,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그들이 강하게 느끼기까지는(p.27), 그들은 욕정의 쾌락에 아주 도취되고, 무사 안일한 생활에 깊이 잠겨 있기 때문에, 금방 잠에서 꺠어나 의를 구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두 가지 것을 하고 있다. 하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사악함을 확신시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해 가지고 그들을 졸음에서 깨워 일으키는 것이다.

첫쨰로 그는 세계 창조때부터 온 인류를 그들의 배은망덕을 인하여 정죄한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탁월한 창조 사역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었는데도 창조주이신 그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들이 어쩔 수 없이 그를 인정하게 되는 때에도, 그들은 합당한 존경심을 가지고 그의 위엄을 높여 드리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허망하여져 그의 위엄을 더럽히고 손상시킨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을 이 불경건죄로 비난한다. 그런데 이 불경건은 모든 죄악들 중에 가장 가증스런 죄이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떠나 있다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입증하기 위해서, 인간들이 어디서나 범하기 쉬운 더럽고 가동할 죄행들을 바울은 기록한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상실했다는 분명한 논증이다. 왜냐하면 이 죄행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증거들이요, 불경건한 사람들에게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어떤 이방인들은 그들의 내면의 사악함을 외형적인 거룩의 외투를 가지고 가리웠다. 그리고 이 죄행들을 인하여서는 결코 정죄 받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정죄는 면제된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것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 위장된 성결에 대해 비난의 화살을 쏘아댄다. 이 거룩의 가면이 자칭 성자들로 행세하는 사람들에게서 제거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일깨워 준다. 하나님의 눈은 인간의 숨은 욕망까지도 보실 수가 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사도는 그의 강화에 구분을 짓는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유대인과 이방인을 따로따로 세운다. 이방인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무지를 핑계로 삼지 못하게 한다. 그들의 양심이 그들의 율법이었다는 것과 그것은 그들을 고발했고도 남는다고 그는 말한다. 유대인들에 관하여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는 데 사용했던 바로 그것인 성경을 받아들일 것을 그들에게 바울 사도가 강력하게 탄원한 악함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이는 하나님이 그의 입으로 이미 그들에 대해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동시에 바울은 그들이 만들어 낼 수도 있었던 예(p.28)상된 반대를 미리 막고 있다. 그 반대는, 만일 그들과 다른 이방인들 간에 아무런 구별도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들과 다른 이방인들 간에 아무런 구별도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그들에게 거룩의 표시이었던 하나님의 언약이 깨뜨려졌으리라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먼저, 그들이 언약을 소유한 것이 그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게 해 준 것이 없음을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들의 불충실로 인하여 그것을 상실해버렸기 떄문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이 제거될까 염려하여, 그는 또한 그 언약으로 인하여 그들이 약간의 특권을 누리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며, 그들 자신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특권을 들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모두 죄인들임을 증명한다. 그는 또한 여기서 율법의 효용을 약간 언급한다.

사도는 인류에게서 그들 자신의 선과 그들이 우쭐대는 자기 의에 대한 신뢰를 분명하게 박탈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준엄성을 들어 그들을 낭패시킨 연후에,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그의 이전의 명제에로 이제 되돌아 온다. 그 믿음이란 어떤 것이며,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의를 얻게 되는 가를 그는 설명한다.

그는 3장의 끝 부분에서 이것에다 훌륭한 결론을 덧붙인다. 이는 인간의 자만심의 만행을 진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히 거스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 큰 은총을 그들 자신의 민족에게만 국한시키지 않도록, 그는 그것이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4장에서 그가 아주 분명한 것으로 단언하고, 그러기에 논쟁거리가 될 수 없는 한 실례를 들어 그는 논증한다. 아브라함이 믿는 자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는 한 유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한 연후에, 우리가 바로 그 길을 좇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바울은 정반대 되는 것들을 대조하여, 우리가 좇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바울은 정반대되는 것들을 대조하여, 우리가 믿음의 칭의에 자리를 양보하는 경우 행위의 의가 물러나게 된다는 것을 여기서 덧붙인다. 다윗은 인간의 축복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까닭에, 인간의 행위에게서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능력을(p.29) 그는 뺴앗아버리고 있다. 즉, 인간이 그 자신의 행위로는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고 다윗이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앞에서 그가 간단하게 다루었었던 주제를 보다 충분하게 다룬다. 즉, 유대인들에게는 자신들을 이방인들보다 높일 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으니, 이것은 이 축복이 둘 다에게 공통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그 주제를 보다 충분히 다룬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 그가 의를 얻었다고 증거한다. 바울은 이 문구에서 할례의 효용에 관해 몇마디를 언급할 기회를 갖는다. 이렇게 한 연후에 구원의 약속이 하나님의 선(善)에만 달려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양심에 평화를 가져다 주지 않을 것이며, 그 약속은 성취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도록 하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만을 생각해야 하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 자신들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점에 있어서 자기의 시선을 자신으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에로 돌렸던 아브라함의 본을 우리는 따라야 한다. 4장의 끝 부분에서 유사점을 가진 두 가지 것들을 비교한다. 이는 그가 인용한 실례를 보다 넓게 적용시키기 위함이다.

 
첨부

로마서성경주석. 존 칼빈. 성서원. 존 칼빈 성경주석 출판위원회:편역. 1998.

p.21

범사에 존경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신 시몬 그리네우스에게 드리는 헌사

......우리 모두는 간단 명료한 것이 주석가의 특별한 미덕이라고 여겼습니다. 주석가가 주해하기 시작한 그 저자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그의 유일한 과업이기 때문에, 만일 그가 그의 독자들을 저자의 뜻하는 바에서 벗어나게 한다면, 그는 그의 표적을 놓친 것이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자기의 한계를 벗어나 길을 잃은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원은 현재 신학의 대의를 이 종류의 과업으로 신장시키고자 계획한 많은 사람들 중에서 몇 사람만이라도 알기 쉬운 주석을 할뿐만 아니라, 길고 瀁꽁� 주석을 피함으로써 그의 독자들이 머무 지루하지 않도록 연구하고 노력해 주는 것입니다......저 자신은 간략한 것을 좋아하오며, 이 점에 있어서는 조금도 동요될 수가 없습니다......반면에 우리가 너무도 짧고 간략하다고 그들이 생각할지라도, 그들 또한 우리를 용서해 줄 것입니다.

p.22

.......이 서신을 다루고 있는 많은 고대 주석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의 저자들에 의한 것도 많이 있습니다. 저들은 그들의 수고를 아낌없이 바치기에 가장 적합한 대상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만일 우리가 이 서신을 이해하게 되면 성경 정체를 이해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멜랑톤은.....그의 유일한 목표는, 그러나 특별히 주의할 만한 가치가 있었던 요점들만을 다루는 데 있었던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러한 점들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다루지만, 보통의 이해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줄 수 있는 많은 문제들을 일부러 지나쳐 버리고 있습니다.

메랑톤의 뒤를 이어불링거가 나왔습니다. 그는 크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불링거는 교리를 쉽게 표현하여 이해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는 널리 칭송을 받았습니다.

끝으로 (p.23)뷰우처가 있습니다. 그가 그의 저서들을 출판함으로써 로마서 주석 문제에 관해 최종적인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의 심오한 학문, 풍부한 지식, 예리한 지성, 광범한 독서, 그리고 현금의 아무 사람도 거의 능가하지 못하는 다른 많은 여러 가지 뛰어난 점들 외에도, 이 학자는, 우리가 아는대로,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을 만큼 월등합니다. 우리 세대에 아무 사람도 그 분만큼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정확하거나 근면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에게 특별한 명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바라옵기는, 지금 사람들이 한 일 중에 완벽하게 되어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기에 후대의 사람들이 이전 사람들의 업적을 다시 가다듬고, 치장하고 또는 보충해야 할 여지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멜랑톤은 주요한 요점들만을 설명함으로써 그가 의도했던 바를 달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주요한 과제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연구를 요하는 많은 문제점들을 등한시 했습니다......

뷰우청의 주석은 너무나 장황하여서 일에 쫓기는 사람들은 읽어 볼 염두도 못냅니다. 또한 너무도 심오하기 때문에 이해력과 주의력이 뒤진 독자들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한편으로 멜랑톤은 세부적인 것을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하고자 계획한 주석은 전혀 경쟁적인 성격을 갖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p.24)하지만, 이 저자들 상호간에 흔히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단순한 마음을 가진 독자들에게는 큰 어려움을 안겨 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견해를 받아들여야 할지 망설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가장 좋은 해석을 가리켜 줌으로써, 독자들에게 판단을 내리는 고통을 덜어 주게 된다면, 저는 이 과업을 착수했던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들 자신의 판단은 다소 산만하다고 저는 믿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특별히 모든 문제점을 아주 간략하게 다룸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다른 저서들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본서에서 읽는데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게 하고자 결심했었습니다......저는 때때로 다른 저자들과 견해를 달리합니다. 아니면 적어도 몇가지 점에서 그들과 다릅니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해서는 저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단히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성경해석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단히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성경 해석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단한 분별력을 가지고 적절하게 주해하지 않는다면, 말씀의 위엄이 다소 손상됩니다......

그러므로, 장난하듯이 하여 합당한 주의를 기울임이 없이 성경의 뜻을 변질시키는 것은 외람되고 참람한 짓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학자들이 일찍이 이것을 행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을 논함에 있어서 경건과 절제를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였던 사람들 중에서도 결코 만일 공통의 의견 일치가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계속적으로 보아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이 그들의 주제의 모든 부분에 대한 충분하고 완전한 지식을 각기 소유할 만큼 그들을 결코 축복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p.25) 우리의 지식을 그렇게 제한하신 목적은 첫째로 우리를 계속하여 겸허하게 하기 위함이요, 또한 우리의 동료들과 교제하기를 계속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목적만 아니라고 한다면, 완전한 지식을 갖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경 구절들의 해석에 관해 영구불변의 일치된 견해를 우리 가운데서 금세에 기대하여서는 안됩니다......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기 백성들의 마음이 일치되는 것을 소원하신 경건에 대한 교훈들에 있어서는 우리가 함부로 하여서는 안됩니다. 저의 독자들께서는 제가 이 양편을 다 연구하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539,10,18

스트라스 부르그에서

존 칼빈.

 
첨부

 

우리는 모두 실수를 저지르고 일을 크게 그르친다.
많은 관계가 실수라는 산에 걸려서 영원히 깨지고 만다.
우리는 다른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으로 상처를 입는다.
관계에서 상처를 입으면 자기를 무장하고
더 이상은 관계를 발전시키려 하지 않는다.
다시 실망하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


캐리와 크리스 슉의

‘후회 없는 삶을 위한 30일 새벽기도’ 에서



우리 삶에 들어온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이 관계의 험산들을 극복하고 실수를 통해서 일하는 법과
자신의 작은 이해들을 밀쳐버리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와 함께하는 등반로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십시오.


또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을 때도
끝까지 살아남도록 마음을 써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피차
실수의 상처를 극복하는 길입니다.

새벽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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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을 잃는 것과 얻는 것

(Losing and Gaining Our Lives) 


생명에 관한 큰 역설은 생명을 잃은 자는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설은 바로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친구에게 매달리면, 그 친구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소유하려 들지 않으면, 많은 친구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명성을 구하고 원한다면, 흔히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손에 넣는 순간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남에게 알려지려고 하지 않는데도 오히려 우리가 죽은 후에까지 오래 기억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가 중심에 있기를 원할 때, 우리는 쉽게 가장자리로 밀려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면 어디에 있든 마음이 자유로울 때, 우리는 흔히 자신이 중앙에 있음을 발견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생명을 내던지는 것은 인간의 행위 중에서 가장 고귀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옮긴 글/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로마서 9장 13-26]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왜 누구는 택하시고 왜 누구는 버리시느냐고요?
왜 하나님은 모두를 구원하지 않으시느냐고요?
하나님이 불공평하시다고요?

그럼, 산더미같이 많은 진흙을 몽땅 파서 지고 와야 옳다는 겁니까?
자기 죄악으로 죽은 자들을 한 사람도 빼지 않고 모두 구원해 주어야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 되는 것입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택하신 대로 구원하신다 하여 나쁜 하나님이 되고, 저녁 다섯 시에 포도원에 들어와 겨우 한 시간만 일한 품군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다 하여 악한 주인이 되는 것입니까?
토기장이가 자기 쓸만큼 진흙을 가져다 자기 맘대로 어떤 것은 귀한 그릇으로 만들고 어떤 것은 천히 쓰는 그릇으로 드는 게 잘못입니까?
또 가져왔다 해서 모든 진흙을 공평하게 모조리 고려청자로 만들어 주어야 진흙들이 불평을 않도록 공평하게 되는 겁니까?
토기장이가 진흙 일부를 가지고 도자기 구울 가마를 만든들 진흙이 할 말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왜 에서는 미워하시고 야곱은 사랑하셨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에서나 야곱이나 다를 바 전혀 없으나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셨을 뿐입니다.
그들을 그렇게 쓰셨을 뿐입니다.
야곱을 그렇게 택하시고 에서를 그렇게 사용하시고 성경에 기록케 하셔서 오늘날 성경을 읽는 저와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푸시려 한 것입니다.
먼 훗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렇게 그들을 각기 사용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 하고 애굽 백성이 되어 혼나고, 애굽군대가 되어 바다에 수장되고, 가나안 족속이 되어 진멸 당하였습니까?
또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다 구원 받았습니까?
광야에서 죽고,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하고 앗수르에 멸망당하고
바벨론에 침공당하여 죽고,
겨우 얼마, 남은 자만이 구원 받지 않았습니까?
인류역사를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하’자, 예수님 ‘예’자도 못 들어보고 죽어갔습니까?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선택되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여러분의 선택으로 여러분의 공로로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어서 영생과 천국을 약속 받았습니까?
인류역사 수 천 년에 오늘날 자유세계에 태어나서 복음을 듣고 예수 믿을 수 있게 된 것이 여러분의 공로이며 여러분의 선택입니까?

하나님이 불공평하신가 할 것이 아니라 그 엄청난 구원의 축복이 어떻게 내게 왔는가를 생각하십시오.
너도 나도 다 받는 축복이 아닙니다.
너도 나도 다 받는 구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값싼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흔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 엄청난 구원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어찌 나 같은 것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기 되는 구원의 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는가? 생각할수록 그것이 귀하고, 그것이 감사하고, 그것이 말할 수 없이 큰 은혜가 아닙니까?

.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를 놓고 어느 한 편에 치우친 주장과 주의를 만드는 것은 옳지 못 하다고 믿습니다. 성경을 읽을수록, 그 구원의 신비를 알수록 우리는 입을 막을 뿐입니다. 3년 전 설교문의 일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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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腦)에 힘을 키우자

 

뇌(腦)에 힘을 키우자

KAIST의 이수영교수는
뇌가 강해지는 비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비법이 어떤건� 알아 보겠습니다.

 
01. 연결시켜 기억하라
정보를 얻고 저장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조합이다.
학습능력과 기억력을 좋게 하려면
배우는 것들 사이의 연관성을 만들어주면 된다.
넘쳐나는 정보의 바다속에서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아 한쪽 뇌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03. 잠자기 직전에 공부하라
꿈은 아직까지 그 본질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동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꿈이 우리가 전에
경험하거나 배운 것이나, 남겨 둔 문제들을
다시 기억하는 과정을 반복하도록 만든다는 것이

알려졌다 

 잠자기 전 꿈꾸기 전에 외운 것이 더 잘

기억되는 이유다.

04. 외우지 말고 이해하라
인간의 뇌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주변환경에
적응해 살아가기 위해 진화해왔다.
주변 환경을 분석하고 이해하면서

작용하도록 되어있다.

뇌는 그래서 단순히 암기한 것보다는
이해한 것에 대해 특히 잘 기억한다.
뭔가를 배운다면 이것을 왜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지
뇌에게 잘 '설명'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05. 오래 사귈수록 나쁜게 TV
텔레비전을 오래 시청하면 뇌에 좋지 않다
텔레비전은 한꺼번에 방대한 양의 정보를 줘

뇌가 그 정보를 스스로 처리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텔레비전을 오랫동안 보게 되면

뇌가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 들이게 된다

문제는 이것이 반복되다보면

나중에 뇌가 새로운 정보를 능동적으로

얻고 처리 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 2~3 일 동안만이라도 텔레비전을

켜지 말고 생활해보라
처음에는 견디기 힘들겠지만 얼마 지나면
전과는 다르게 머리가 맑아진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06 일상적인 것을 반대로 하라
우리의 뇌는 변화를 즐긴다. 틀에 박힌 것은 싫어한다
단조롭고 변화가 없다는 것은 뇌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는 얘기다.

여행은 뇌의 환경이 결정되는 12세 전후가

 지나기 전에 할 수록 좋다.
새로운 장소나 다양한 인종,이국적인 음식들을 접하면

 뇌의 활동에 도움이 된다.

08. 새로운 것을 먹어라
늘 먹던 음식보다 한번도 먹지 못했던 음식,
예를 들어 인도나 태국음식 등에 도전해보자.
새로운 음식은 뇌에 새로운 자극을 줘
일상생활에 지쳐 있는 머릿속을 상쾌하게 만들어 준다.

09. 도전하고 배워라
뇌는 도전을 즐긴다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거나

글을 써보거나 모형비행기를 조립하는 것

무엇이라도 좋다.

10. 남들 따라 하지 말라
뇌는 도전을 좋아하는 동시에 다른 것을 잘 따라

하는 특성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뇌가 배우고 기억하는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같아지려 하는 뇌의 명령을

 거부해야 한다.

 

은퇴 후의 30여년 동안 무슨 일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할 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리고 정말로 하고 싶은 그 일을 하라

즐기면서 하는 일은 보상도 따른다.


: 카이스트 이수영 교수




다른 사람을 위해 우리의 삶을 내어 주기
(Making Our Lives Available to Others)

 
우리는 흔히 우리가 글을 쓰지 않는 이유를 말할 때,
 "나에게는 그다지 새로운 얘기 거리가 없어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것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얘기 한 것들이야
그것도 내가 얘기할 수 있는 것보다는
훨씬 훌륭하게..."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글을 쓰지 않는
적당한 핑계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각자가 독특한 그리고 고유한 존재로서,
그 어느 누구도 우리와 똑같은 인생을 산 사람은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살아온 삶은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온 것이 아니라, 또한 남을 위해서도 살아온 것입니다

글을 쓰는 것은 우리의 생애를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남을 위해서도 이롭게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창조적이며
용기를 주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얘기가 다른 사람들이 들을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잘하면 잘할수록 우리는
보다 잘 살아 보려고 노력하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누가 영원한 감사를 드리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세상의 악함을 탓하기보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붙잡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에

자신을 드리는 성도들을 그분은 지금도 찾습니다.

악한 인생의 틈새에서 드리는

참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감사를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동원의 [내 영혼의 내비게이션] 중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드린다는 것은

마음의 문제이며, 믿음의 결단입니다.

있기 때문에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없기 때문에 못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깨뜨린

마리아의 향유옥합을 생각하면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감사한 마음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감사는 오늘을 살면서

내일을 품고 살아가는 원동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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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교, ‘한기총 임의탈퇴’ 통보
2012년 07월 17일 (화) 10:43:41 표성중 기자 kodesh21@igoodnews.net

기독교한국침례회(총회장:배재인 목사, 이하 침례교)가 ‘한기총 임의탈퇴’를 통보했다. 침례교는 최근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홍재철 목사)에 임의탈퇴를 두 차례에 걸쳐 통보構�, 한기총이 정상화될 때까지 대의원 파송 및 교단 명칭 사용 등을 제외해줄 것을 요청했다.

침례교는 “한국 교회 대표적인 연합기관으로 알려진 한기총이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는 가운데 우리 교단은 ‘정상화’라는 대의명분을 따를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최근 임의탈퇴를 통보한 교단 입장에 대해 ‘이탈자’ 및 ‘사이비 단체에 현혹됐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 깊은 유감의 뜻을 표한다”며 “한국 교회가 연합과 일치된 모습으로 본연의 사명을 회복할 수 있도록 기도할 것”이라고 밝혔다.

 

 


1. 병아리가 되어라!
   스스로 껍질을 깨고 나오면 생명(병아리)으로 부활하지만,
   남이 깰 때까지 기다리면 계란 후라이밖에 안 된다.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없다"

2. 해바라기가 되어라!
   돼지는 하늘을 쳐다보지 못한다.
   넘어져야 비로소 하늘을 쳐다 볼 수 있다.
   하지만 해바라기는 늘 하늘을 향해 있다.
   해바라기가 아름다운 것은,
   아무리 흐린 빛도 찾아내 그 쪽을 향하는데 있다.
   비록 흐린 날이라도 하루에 한 번,
   별을 관찰하는 소년의 심정으로 하늘을 쳐다보아라.

3. 생각하며 살아라!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산다.
   그렇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고 만다.
   생각의 게으름이야말로 가장 비참한 일이다.
   나이로 보다 생각으로 세상을 들여다보아라.

4. 오뚜기가 되어라!
   신(神)은 실패자는 쓰셔도 포기자는 안 쓰신다.
   너는 쓰러지지 않는 게 꿈이 아니라,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게 꿈이 되도록 하여라.
   한번 넘어지면 누군가가 뒤집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거북이 보다
   넘어져도 우뚝 서고야 마는 오뚜기로 살아라.

5. 매니저로 살아라!
   종업원이 아닌 매니저로 살아라
   종업원과 매니저의 차이는 딱 한가지다.
   종업원은 시키는 일만 하지만 매니저는 프로젝트가 있다.
   네 인생의 프로젝트를 세워 매니저로 살아라.
   너는 너를 즐겁게 하는 일에 마음을 쏟아라.

6.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라!
   사막을 건너는 건, 용맹한 사자가 아니라 못생긴 낙타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키듯,
   우리의 식탁을 가득 채우는 것은 고래가 아니라 새우다.
   사랑 받는 존재가 되려면
   누군가의 삶에 필요한 존재가 되어 살아라.

 
7. 다른 사람을 해치려 하지 마라
    내가 한 모든 말이나 행동은 '부메랑'이 되어
    내게로 되돌아 온다. 남을 해치려 하던 '하만'이
    어떻게 되었나를 늘 기억하면서 
정직하게 살아라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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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디냉국

"제철을 맞은 오디는 아이스크림을 만들거나 갈아서 주스로 즐겨 마십니다.

또한 여름의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냉국에 오디즙을 넣으면 색도 곱고 향긋한 맛이 일품이지요.

달달한 배즙을 더해 천연의 단맛을 내고 새콤한 사과식초로 입맛을 돋워보세요."

조리시간
10분 / 재료분량: 4인분 / 난이도: 하

재료
오디 12개, 배·오이 적당량씩, 물 200ml, 사과식초 120ml, 배즙 30ml

1 배와 오이는 4cm 길이로 자른 뒤 가늘게 채 썬다.

2 오디는 잘게 다진다.

3 시원한 물에 다진 오디, 식초, 배즙을 섞은 뒤 배와 오이를 넣는다.


지인이 보내어 온 글입니다.^^



 

글쓰기, 깊은 우물을 파기

(Writing, Opening a Deep Well)

 

글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생각나는 것을
몇 자 적어 내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어
글로 쓸 만한 것이 생각나지 않아"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좋은 글은 글을 쓰는 과정
그 자체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단순히 종이를 앞에 놓고 앉아서
우리의 생각 또는 마음속에 있는 것을
글로 표현하기 시작할 때,
우리를 놀라게 하며
우리가 미처 그 존재를 알지 못했던
내면의 장소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글을 쓰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는
보물과도 같은 우물을 열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글쓰기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만족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당신이 참 좋습니다 어느 날 꽃 바람 되어 내 안에 찾아든 당신이 참 좋습니다 당신을 떠올리면 미소가 그려지고 내 안에 행복이 가득해집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 주고 받은것도 없는데 난 많은 사랑을 받은 것처럼 마냥 행복함에 빠져듭니다 내 안에 찾아온 참 고마운 당신 지금처럼만 내 곁에 머물려 주세요 나 당신 바라보며 행복의 미소 지을 수 있게 나에게 웃는 모습 보여주시고 고운 사랑 빛으로 함께해주세요 모셔온글

 

 


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

 

공중정원은 실제로 공중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로 된 노대에 풀� 꽃, 수목을 심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마치 삼림으로 뒤덮인 작은 산과 같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계단식 아파트의 발코니에 꽃과 커다란 나무들을 심은 것과 유사하다. 공중정원이 있었다는 바빌론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수도다. 바빌론은 수많은 정복자들에 의해 정복을 당했는데 그것은 이 지역을 차지하는 민족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지나간 유명한 왕들은 수없이 많으며, 그 중에서도 바빌론을 재건하고 공중정원을 직접 건설했다는 아시리아의 정복자 세미라미스가 매우 유명하다.

놀랍게도 세미라미스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세미라미스에 대한 전설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학자들은 세미라미스를 기원전 8백23년에서 8백10년까지 바빌론을 통치했던 삼시 아다드 5세의 왕비인 ‘사무-라마’로 여긴다. 삼시 아다드 5세는 유명한 아슈르나시르팔왕(기원전 883-859)의 손자다. 세미라미스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 중 한명으로 거론되는 것은 바빌론을 재건축했기 때문이다. 당시까지는 님루드가 수도였는데 그녀는 수도를 바빌론으로 옮겼다. 수도를 옮기기 위해 재건한 바빌론은 고대의 바빌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성곽을 가진 도시였다.

고대에서 가장 넓은 성곽이라고 해도 폭이 8m에 지나지 않았으나 바빌론의 성곽은 무려 17.7m가 됐다는 것이 근래의 발굴에 의해 알려졌다. 외부 성곽은 11.3km이며, 내부 성곽은 6km다. 성곽 옆으로 흐르는 유프라테스강을 건널 수 있는 커다란 기둥으로 된 다리가 놓여졌는데, 기둥들의 간격은 3.6m, 다리의 폭은 9m였으며 4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폭이 넓었다. 이 성채는 1백개의 문을 갖고 있었다. 성벽이 어찌나 거대하고 방문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 현재의 세계 7대 불가사의가 확정되기 전부터 세계의 불가사의에 단골로 들어간 기념물이었다. 사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명명자라고도 볼 수 있는 필론도 자신이 선정한 세계 7대 불가사의에 파로스섬의 등대 대신 바빌론의 성벽을 선정했다. 바빌론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거대한 성벽과 공중정원 등 두개가 포함됐다는 뜻이다.
  

 설계자는 누구인가

한편 공중정원은 기원전 5백년경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 아미타스를 위해 수도인 바빌론에 건설한 정원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성경에서는 느브갓셀 2세라고도 함)는 바빌론의 왕이 되자 메디아왕국 키약사레스왕의 딸 아미티스를 왕비로 맞았다. 산이 많아 과일과 꽃이 풍성한 메디아에서 자란 왕비는 평탄하고 비가 잘 오지 않는 바빌론에 마음을 두지 못한 채 항상 아름다운 고향의 푸른 언덕을 그리워했다. 이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여긴 왕은 왕비를 위해 메디아에 있는 어떤 정원보다도 아름다운 정원을 바빌론에 만들라고 명령했다. 왕의 명령을 받은 건축가는 곧장 작업에 들어가 왕궁의 광장 중앙에 가로·세로 4백m, 폭 15m의 토대를 세우고 그 위에 계단식 건물을 세웠다. 한층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 기름진 흙을 옮겨 놓고 넓은 발코니에 잘 다듬은 화단을 일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진짜 공중정원을 건설한 사람은 누구일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경우 공식적인 이름은 ‘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공중정원을 건설한 장본인으로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도 거론되기 때문이다. 결국 두사람 모두 공중정원을 건설했다고 보면 의문점이 해결된다. 사실 테라스에 나무나 풀을 심는 것은 메소포타미아의 강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매우 보편적인 것이었다. 즉 도시 주위를 흐르는 강물을 이용해 식물을 재배하는 정원은 매우 오래전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된 니니브의 소위 ‘나무로 꽉 채워진 장소 아래에서의 향연’으로 유명한 아수르바니팔왕과 왕비가 나무 그늘 아래에서 향연을 베푸는 그림으로도 알 수 있다.

디디오르가 기록한 공중정원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인공정원은 한변이 거의 1백20m의 사각형으로 마치 극장과 같이 계단으로 한단씩 올라가게 설계됐다. 테라스 또는 플랫폼에 재배되는 모든 식물의 무게는 높낮이가 있는 기둥으로 지지되도록 했다. 가장 높은 기둥은 약 25m로, 정원 최상부를 지지하며 벽체의 두께는 6.6m나 된다. 테라스는 돌출부분을 포함해 16×4피에(1 피에 = 0.3m)의 크기로 아스팔트로 많이 칠해진 벽돌(갈대를 포함)로 주의를 구분한 후 다시 구운 벽돌로 치장했다. 이곳에 얇은 납판을 붙여 물이 기초 부분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테라스에서 거대한 나무들의 뿌리가 충분히 자랄 수 있도록 해 준 장치인 것이다. 테라스에는 각종 종류의 크고 작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그 규모나 아름다움이 빼어나다. 기둥의 높낮이도 다르게 만들어 강도가 다른 빛이 들어오도록 유도함으로써 호화롭게 장식된 궁전의 내부 공간에 신비감을 주도록 했다. 단 하나의 기둥이 천장부터 기초까지 내려져 있는데, 이 안에 다량의 강물을 테라스까지 올릴 수 있도록 만드는 수력기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 기계는 밖에서 볼 수 없다.”
  
  

 물을 공급하는 두가지 방법

비가 거의 오지 않아 사막과 같은 기후를 갖고 있는 바빌론에서 약 4천3백64평이라는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수력기계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 방법은 정원의 맨 위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강의 물을 펌프로 길어 올렸다는 것. 체인에 물통을 연속적으로 매달아 상부로 물을 올린 다음 물탱크에 저장했다가 필요한 곳에 물을 흘려주거나 물뿌리개를 이용해 물을 공급했다는 매우 단순한 방법이다. 두번째 방법은 디오도르와 스트라본이 기록한 것으로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수력기계 방식이다. 아르키메데스의 수력기계란 물레방아를 타고 올라온 물을 아르키메데스의 나사에 연결해 꼭대기까지 퍼올리는 구조다. 특히 이 방식의 장점은 물레방아가 도는 힘으로 아르키메데스 나사가 돌면 물이 달팽이식 나선형 홈을 타고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 방식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중세시대의 기술자들이 실현시키려고 했던 기술이기도 하며, 광산의 지하에서 물을 퍼올리거나 고층 건물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사용됐다.

첫번째 방식의 경우 물을 상부로 올리는 체인이 밖에서 보일 수밖에 없다는 단점(일설에는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물레방아를 각 층마다 설치했다고 함)을 갖고 있다. 두번째 방식은 디디오르가 지붕에서 기초까지 내려져 있는 기둥으로 물이 올라갔다는 설명에 부합된다. 하지만 이 경우 각층에 수많은 아르키메데스의 나사, 즉 기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상층부까지 물을 길어 올리는 방법은 이 두가지 방식을 병용하거나, 방문자들이 잘 볼 수 없는 곳에서 사람들이 직접 물을 상부로 길어 올렸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공중정원 발굴

학자들은 아직 공중정원의 위치를 확정한 상태는 아니지만, 비교적 예전부터 공중정원의 위치로 알려진 아무란의 언덕으로 추정한다. 바빌론은 내외 이중성벽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공중정원은 내성에 위치하며, ‘텔 아무란 이븐 알리’(Tel-Amuran-ibn-Ali, 추장의 언덕)라고도 불렸다.

바빌론의 폐허는 오늘날까지도 그 모습이 남아 있는데, 이라크 정부는 특히 공중정원을 집중적으로 복원할 계획을 갖고 있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다른 불가사의보다 더 유명해진 것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켰던 바벨탑과 로맨틱한 분위기를 갖고 있는 공중정원의 신화가 혼합됐기 때문이다. 또한 공중정원은 다른 불가사의처럼 인간을 압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으로 이뤄진 건물이라는데 더욱 매력이 있다. 천하의 영웅 알렉산더가 자신이 죽을 장소로 바빌론을 지목한 것도 이해가 될 법하다. 

준비: 주의머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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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에 숨겨진 큰 것 경영 리포트】시스템의 공유가 큰 힘을 발휘한다!

-같은 업종의 작은 기업들이 저마다

각자의 시스템으로 회사를 운영할 경우

 국가적으로 볼 때 인력과 기계설비와 운영비가

 필요 이상으로 과다하게 지출된다. 기업은 별개지만 공통적인 시스템 운영으로

 비용절감을 통하여 충분히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 동주(東周) 출신인 소진(蘇秦)은 귀곡(鬼谷) 선생에게서

학문을 익힌 후 각 나라를 전전하며

자신이 대단한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혀끝 하나로 연(燕)․조(趙)․한(韓)․위(魏)․제(齊)․초(楚) 등의

제후국을 설득하여 당시 강국이었던 진(秦)나라에 대항토록 하였다.

이것이 바로 소진의 6국합종(六國合從)이다.

 

소진은 6국동맹을 성취시켜 그 스스로 6국의 재상을 지내는 영예를 안았다.

미국 석유시장에 위기가 왔을 때 록펠러가 선택한 것은

기업의 연합, 즉 트러스트였다.

그것이 나중에 기업독점이라는 비난의 화살이 되기도 하였지만,

 위기 극복의 방법으로서는 소진의 합종책에

버금가는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이디어 뱅크】‘1+1+1…’은 ‘2’나 ‘3’이 아니라 ‘무한대’다.

 숫자의 폭발력을 활용하라!

-무슨 일이든 언제나 시작은 미미하다.

가장 적은 숫자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높은 산에서 굴러 내린 주먹만한 눈덩이가 점점 구르면서

 집 채 만한 크기로 변하듯이 불어나는

숫자의 폭발력은 상상을 초월하다.



숫자 계산을 잘하는 사람이 성공한다.

바로 그 숫자 속의 숨은 비밀을 캐내는 것이 아이디어다.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듯,

숫자 속에서 찾아낸 아이디어는 기하급수적인 폭발력을 발휘한다.

록펠러의 성공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그가 평생 신봉해온 ‘

10센트의 경제철학’이었다고 한다.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들어 있다.

 

씨앗은 비록 작지만 그것이 싹이 트면 천 개의 사과가 열리는

과일나무가 된다는 사실을 알라!

아이디어는 결코 작은 것을 간과하지 않는 데서 나온다.

 

옮긴글

.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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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것은 영적인 훈련입니다
글을 씀으로서 우리는 주의력을 집중할 수 있으며,
용솟음치는 우리의 마음과 접할 수 있으며,
우리의 생각을 정화할 수 있으며,
혼란스런 감정을 정리할 수 있으며,
과거의 경험을 되새길 수 있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을
정교하게 표현할 수 있으며,
그리고 주요한 일들을 우리의 기억 속에
간직할 수 있습니다

글쓰는 것은 또한 우리가 쓴 글을 읽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입니다

어렵고 고통스러운 또한 절망적인 하루도
그것을 글로 씀으로써
우리는 그날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글을 씀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상기할 수 있으며, 그리고 그것을
앞으로의 우리의 인생 여정에
보다 완전히 통합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글을 쓰는 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생명을 구하는 것이 될 수 있으며,
때로는 다른 사람의 생명도 구할 수 있습니다

-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최근에 인터넷 상에 올라온 글들과 필자의 경험으로 미루어 우리 아멘넷 독자님들도 주의를 요망하는 사건들이 계속이어지기에 그동안의 연구를 바탕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여러 독자님들은 읽어보시고 믿음에 굳건히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고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1. 이단들은 기성 교회, 기독싸이트에 파고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불신자들보다 교회를 다니고는 있지만 말씀에 뿌리내리지 못한 이들은 이단들의 목표물이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진짜가 어느 쪽인지 확인해 보자며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고른 성경 구절을 가지고 달려들기가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이단들 중 최근에 가장 두드러진 곳은 신천지입니다. 상당히 많은 교회들이 신천지로 인해 피해를 입었으며 기성 교인들 중에 신천지로 넘어간 사람들을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신천지는 처음에 무료성경공부를 시켜준다는 것으로 많은 교인들을 미혹하였습니다. 체계적으로 성경을 배우지 못해 목말라하는 사람들을 무료성경공부로 끌어들인 신천지는 모여든 사람들을 미혹하여 신천지 교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신천지의 기성 교회 침투 작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동영상의 공개로 유명해진 “산 옮기기 작전”은 작은 교회를 통째로 삼키기 위한 전략인데, 교회에 신천지 교인이 파고들고 세력을 확보한 후 담임 목회자를 쫓아내고 신천지쪽 사람을 리더로 세워 교회를 차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얼마나 소름끼치는 내용인지 모르겠습니다.

최근 교회들에서는 새신자들이 오는 것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반가워할 수만도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정말 새신자가 온 것이 아니라 신천지에서 목적을 가지고 찾아들어온 사람들도 있을 수 있기에 경계의 눈초리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신천지의 활동은 이제 인터넷을 향해서까지 그 활동폭이 넓혀지고 있습니다. 여러 토론방에서 신천지 교리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가 있는데 그 속에는 기성 교회에 대한 비판의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래에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들은 조선일보 토론마당에 올라 있는 신천지 쪽의 글인데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들이 무엇인지 잘 담겨 있습니다.

신천지에서 올린 글의 제목은 “신천지, 칼빈교와 예수교와의 비교”입니다. 또 "칼비니즘과 알미니즘"의 비교로 혼란을 야기시킵니다. 그들은 신천지와 기성 교회 가운데 어느 것이 이단인지를 판별하는 기준이 성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땅 위에서 영원히 산다고 합니다. 유대교에서 나온 예수교는 가톨릭교이고 가톨릭에서 칼빈교를 이단이라 규정한 이유는 계시록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절대 예정론을 믿지 않는 자와 칼빈교로 개종하지 않는 자들을 무차별 학살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글에는 또한 칼빈이 세운 장로교가 칼빈같이 자기 교리와 교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여, 또 개종하지 않는다 하여 성도를 정신병원에 감금하였으며, 심지어 가족으로 하여금 성도를 때려죽이게까지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장로교는 이방 신에게 절했던 솔로몬같이 일정(日政) 때 이방 신(일본의 천황 신)에게 절한 후 예배를 드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한 장로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며 장로교로부터 갈라져 나온 고신파가 그것을 증거해 준다고 하는 대목까지 나옵니다.

이런 식으로 기성교회, 특히 장로교를 비판하는 내용의 주장을 하다가 결국 신천지만이 정통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 말세에 정통은 없으며, 있다면 계시록에 약속한 대로 다시 창조된 신천지예수교의 12지파뿐이라는 것입니다. 신천지에서는 성경을 통달하고 육하원칙에 의해 증거하는 계시 신학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입니다. 계시록을 부인하거나 알지 못하거나 그 뜻대로 창조되지 못한 자는 정통(正統)이 아니며 전통(傳統)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처음 글을 시작하면서 이단 소리를 듣는 신천지에서 어느 쪽이 이단인지를 판별하는 기준은 오직 성경이라고 하더니 그 성경에 의하면 기성교회가 이단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단들이 하늘이 정한 12지파를 이단이라 하나, 신천지 12지파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성경적 정통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결론은 다음의 내용입니다. “성경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신천지예수교를 이단이라고 하는 자마다 이단이며, 성경을 부인하는 자이다.”

이곳에서는 교묘하게 빼놓고 있지만 신천지에서 주장하는 모든 내용의 최정점엔 신천지의 교주인 이만희씨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이 자리잡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안상홍증인회에서 안상홍씨가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최근에 접한 신천지 교인 하나는 이만희씨가 죽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만희씨도 죽을 것이라고, 나이가 워낙 많아서 별다른 변수가 없는 한 나보다 빨리 죽을 것이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길길이 뛰면서 화를 냈었습니다.

인간을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사람을 속이는 이단이 오히려 기성교회를 이단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상합니다. 각 가정을 방문하거나 기성교회로 파고드는 것으로 모자라 이젠 인터넷 공간마저 교회를 허물고 이단 사상을 전파하고 있으니 신천지의 열정에 소름이 끼치기도 합니다.

필자는 오래 전, 그들 중 몇 사람과 일대일의 대담을 가지는 동안, 정작 그 자신은 지식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별로 아는 것이 없다고 고백했으며, 사실, 왠만하면 다 알 수 있는 '개론'이란 단어조차 알지 못한다고 얼버무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더 이상의 자기 변론이 없었다면, 그는 개인의 갈등을 표출한 한 사람의 순수한 성도로 간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필자는 그의 다음 행보를 주의 깊게 관찰하게 된 것입니다.

예견한 대로, 다음 날 아침, 그가 다시 올린 글의 수준은 여전히 다른 댓글들과 같은 내용으로서, 유대교, 천주교, 개신교를 총 망라해 설렵한 듯. 어느 신학박사의 개론도 그만큼 화려하기 어려울 것 같은 내용과 상당히 높은 지식을 소유한 자만이 설파할 수 있는 수준의 글, 역사에서부터 과학까지...대단한 미문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가만히 분석해 보니까, 다른 곳에 단 댓글과 거의 같은 내용, 흡사한 내용을 마치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올리는 모든 글, 댓글과 게시판의 글들은, 곧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개인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지식인들을 타겟으로 작성된 고도의 전도용 문구일 뿐이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신천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유대교, 천주교 개신교등 비교를 하면서 자신이 새롭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2. 그들, 교회에 시험든 길잃은 양으로 가장한 신천지 요원의 공략 목표:

a.기존교회와 목회자를 신랄하게 비난함
b. 기독교의 방언관 구원관이 틀렸다고 주장함
c. 예수님의 피공로를 흐리게 함
d. 유대교에서 나온 예수교는 가톨릭교이고 가톨릭에서 칼빈교를 이단이라 규정한 이유는 계시록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절대 예정론을 믿지 않는 자와 칼빈교로 개종하지 않는 자들을 무차별 학살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을 이용하여 장로교나 모든 기성교회를 이단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e. 방언하는 사람이 있으면 더 크게 랄랄랄 따라 하라
f. 기독교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간증들을 모방해서 사람들의 환심을 사라
g. 수없이 많은 아이피와 아이디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h. 교회는 수없이 많이 옮겨다닌다. (정체가 탄로날만하면 옮겨 간다. 일명 철새교인)
i. 이단 성이 들통이 나면 지원 사격자가 즉각 출동해서 위험해 처한 동료를 옹호한다

3. 다음은 우리가 알아야 할 교회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중요합니다.(골1:18절) 교회(성도)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주시고 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20:28절 말씀)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언제 한 번 피를 흘리신 적이 있는 데, 그 이유는 교회(성도)를 사기 위해서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언제 피를 흘리셨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성도를 사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동일성. 성부 하나님은 육신이 없으신 분으로써 피를 흘리실 수가 없고,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토록 존귀한 주님의 몸인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은 그 어떤 말을 할지라도 양의 탈을 쓴 이리요, 고뇌하는 지성인척 가장하는 야누스임을 명심해야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시대임을 깨닫고 기도로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교인들이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들지 않도록 철저한 말씀 훈련을 시켜야 할 것입니다. 교회 속에 이단들이 파고들 여지를 만들지 않도록 방비해야 할 것입니다. 갈수록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인터넷 분야를 이단들이 장악하지 못하도록 대비하는 일도 필요할 것입니다. 내외적으로 많은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는 엉뚱한 곳에서 소모전을 펼 것이 아니라 진리를 지키고 전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지난 6 년여 간의 댓글과 게시글을 유추해 볼 때 신천지의 요원이 우리 아멘넷에도 집중적으로 침투해 들어오고 있음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고, 더욱 놀라운 것은 요즘 들어 고뇌하는 지성인, 교회에 시험이 들어서 탈퇴한 지성인의 대표인듯, 이곳저곳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열심을 내던 그들과 유사한 댓글객들의 수가 더욱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길잃은 한 마리의 양은 불쌍히 여겨야 하지만, 교회를 헤치고 성도들의 영혼을 유린하기 위해 가만히 들어온 야누스의 얼굴을 결코 관망하거나 용납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1요 4: 1-2절 말씀).”

글: 별똥별/최송연 선교사 
 

흐르는 곡은 2008년도에 심혈을 기우려 편집을 끝낸 BEST 복음
성가 모음 곡 입니다.
CD 한장 분량 1시간20분에 걸쳐 19곡의
복음송이 연속 Play 됩니다.
저의 신앙고백과 같은 곡들 입니다.
 - 윤기 장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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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님이 댓글에 대한 답글들로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대하여 제게 질문을 하셨네요.
- 칼비니즘과 알미니즘
- 예수님에 대한 유대교와 기독교의 다른 해석
- 창세기 1장 26, 27절에서 피조된 인간
- 심판과 정죄 (judgement &Condemn)  

부족한 제가 만족스러운 대답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부족하더라도 대답을 드려 보겠습니다.

1. 칼비니즘과 알미니즘에 대하여
칼비니즘과 알미니즘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전지전능"에 대한 논쟁이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미리 정하신 자들만 구원을 받게 될까요,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될까요?

예정(Predestination)론은 ‘하나님이 창세전에 구원 받을 자들을 이미 정하셨다’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절대적 주권을 주장합니다.
반면에 자유의지(Free Will)론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고 주장합니다.

알미니즘의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칼비니즘은 "뭐? 인간이 구원을 받을 것인지, 아닐 것인지 하나님이 모르셨다고? 그렇다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 않단 말이냐?"고 반박합니다.
이에 대하여 알미니즘은 다시 "아니, 당신들 주장대로라면 이미 다 정해져 있는데 뭣 하러 전도하라 하십니까? 모든 것이 창세전에 정해져 있었다면 그것은 톱니바퀴같이 돌아가는 운명론이 아니던가요?"라고 다시 반문합니다.
쳇바퀴처럼 질문과 반박이 이어지는 모순(창과 방패)과도 같은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의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논쟁은 1618년, 독일에서 열린 도트종교회의(Synod of Dort)에서 예정론을 신봉하는 칼빈주의자들이 자유의지론을 주장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을 정죄하고 Van Oldenbarnevelt에게 사형, Hugo Grotius에게는 종신형 판결을 내리고, 자유의지론을 주장하는 100여명의 교역자를 파직, 독일로부터 추방하고, 자유의지론을 주장하는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들에게는 무거운 벌금을 부과함으로써 자유의지론은 이단으로 정죄하여 처단하는 극단적 조치를 야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도트종교회의에서 캘빈장로교파(Calvinist)에 의하여 “튤립-TULIP"이라고 알려진 예정론교리가 선언되는데, TULIP이라 함은 T: Total Depravity (인간의 전적타락), U: Unconditional Election (하나님의 일방적 무조건적 선택), L: Limited Atonement (예정된 사람만을 위한 예수님의 속죄), I: Irresistible Grace (하나님의 전적인, 거부할 수 없는 은혜), P: Perseverance of the Saints (성도들의 견인, 성도들을 이끌어 마침내 구원이 이루게 하고야 마시는 하나님), 다섯 개의 머리글자입니다.

특히 이 장로교의 TULIP 교리 중 “L", 곧 제한속죄론은 예수님이 구원받기로 정해진 사람들만을 위하여 피를 흘려주셨다는, 구원의 범위와 심지어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 같이 보이는 극단적인 교리입니다.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의 논쟁은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 맞으면 뭘 하겠다는 것입니까?
진리를 해치는 적그리스도의 미혹과 거짓가르침이라면 목숨을 걸고 진리를 지키며 이단을 배격해야 하겠지만 사실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의 논쟁은 사실 구원과는 별 상관없는 논쟁입니다.
사도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언제나 ‘나 같은 죄인의 괴수 바울이 창세전에 택하심을 입어 복음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예정론과 ‘그러므로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는 자유의지론에 입각한 사명선언이 함께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만일 예정론이 극단적 예정론(Supra-Labsarian)으로 치닫는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이미 창세전에 모든 것을 정해 놓으시고, 심지어 언제 어디에서 일어날 교통사고까지, 오늘 내가 무엇을 먹고 무슨 옷을 입고 누굴 만나 무슨 말을 할 것인가까지 다 아시고 예정해 놓으셨다, 어차피 구원받을 자는 구원 받을 것이고 구원 받지 못 할 자들은 아무리 전도해봐야 소용없다, 모세오경의 히브리어 글자들을 가로, 세로 또는 대각선으로 맞춰보면 언제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인가도 이미 예언되어 있다는 등의 황당한 주장까지도 가능하게 되고,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하고 전심으로 사랑할 수조차 없는, 이미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운명에 따라 수 천 년 인류역사의 드라마를 정교하게 펼쳐가는 조작된 인공지능을 갖춘 로봇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삼위일체(하나님은 한 분이시면서 세 분)가 진리인 것처럼 예정론도 옳고 자유의지론도 옳습니다.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의 논쟁은 인간의 좁은 머리로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구원의 역사를 놓고 서로 옳다고 다투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동시에 세 분이신 삼위일체의 신비를 우리 인간의 머리로 풀어내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예정이냐, 자유의지냐를 어느 한 편으로 해석,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장로교에서 칼비니즘을 절대적인 진리로 놓고 알미니즘을 이단으로 몰아붙이는 듯 한 행태를 보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정론이 옳습니다.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진노의 자식이던 우리를, 전적으로 타락하여 스스로는 절대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예정하시지 아니하셨더라면, 그리고 강권적으로 이끌지 아니하셨다면, 저나 여러분이나 제 발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구원에 이르렀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유의지론도 옳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회개와 사랑이 이미 정해진 각본이나 프로그램된 운명에 의한 것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와 사랑이 미리 정해진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도 값진 참 사랑도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조작된 사랑을 받으시려고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귀한 것은 우리에게서 자발적으로 솟아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참된 믿음과 진실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그 한없는 사랑(예정)에 응답하여 울며(자유의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한 분이시면서 세 분이실 때 참 하나님, 우리의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듯, 예정론과 자유의지론이 조화될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진정한 구원과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도 옮길 수 없는 돌을 만드실 수 있느냐?"라는 문제처럼, 예정이냐, 자유의지냐 하는 이 문제는 처음부터 정답과 정답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구원님께 답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족한 대답이더라도 책망하지는 마세요옹.  ^^

어쿠,
1번 질문만으로도 이렇게 길어졌군요. 다음 질문은 다른 글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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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정론자다.

그것도 많은 기독 지성인들이 혐오하는 이중예정론자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을 믿되 한 사람이 선택 받을 때 다른 한 사람은 버림 받는 다는 것을 믿는다.

이런 믿음은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가르침과도 부합하는 것이라 용감하게 주장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도 이렇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인자가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에는 남자든 여자든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물론 성경학자들은 이 본문이 예정관는 무관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감안하여 곰곰히 생각해보면 모종의 관계를 지을 수 있다고 본다. 어떤 사람을 데려사시고 어떤 사람을 내버려두실지 성경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깨어 있으라!"라고말 권면할 뿐이다.

...는 예수님의 예언에 나타난 하나님과 인자의 행위를 '불공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의 믿음이 내게 성경을 통해 '하나님보다 더 공평한 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나는 합리를 추구하는 우리의 이성도 죄에 물들어 있음을 믿는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정도 합리적일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절대적으로 합리적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이성은 마치 100% 정확하지 않은, 아주 근소한 오차를 가진 기계와 같다. 이 기계가 작은 단위를 측정할 때는 유용하겠지만 매우 정밀한 것을 측정하거나 엄청나게 큰 단위를 측정할 때는 무용지물이 될 수 밖에 없다. 나는 합리를 추구하는 우리의 이성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사역을 모조리 설명한다거나, 그분의 선하신 뜻에 의해 이루어진 그분의 작정을 인간의 이성으로 측정하고 이해하려는 것 자체가 무모하고 황당한 시도라 생각한다.

나는 또한 우리의 이성적 이해와 합리성을 선거 때의 여론조사나 출구조사와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론조사는 매우 합리적이고 뭔가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으로 뭔가의 결정적인 결론을 도출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이성이 가진 이해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하심을 모조리(?) 측정하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무례하고 황당한 것인지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Barth에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그도 하나님의 선택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버리심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선택은 그 반대인 버림을 늘 동반하고 있음을 바르트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유기'에 대한 그의 부정은 '버림'의 행위 자체가 사랑의 하나님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정말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이유 때문이다.

나는 이중예정론을 믿는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것을 믿지 않을 자유도 있고 그런 자신의 믿음에 대한 합당한 이유도 제시할 수 있다. 나는 그런 사람과 함께 진지한 토론과 고민을 나눌 용의가 있다. 오직 상대방을 비난할 무기로만 완전무장한 사람이 아니라면!

칼빈은 이중예정론자였다면 그의 절친이었던 멜랑흐톤은 이중예정론자가 아니었다. 칼빈은 멜랑흐톤이 이중예정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자신의 소신을 굽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의절할 정도로 미워하지는 않았다. 둘 사이에 이견으로 인한 긴장이 없지 않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좋은 친구로 남아 서로를 정말 아끼고 존중했다. 물론 그렇다고 칼빈이 어거스틴 시대의 이단인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까지 교제권에 넣을 만큼 관용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이런 불관용은 단지 칼빈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개혁가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점이다. 이것은 공통점은 초대교회의 교부들에게서도 발견되는 공통점이기도 하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
예정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단지 그 하나의 차이 때문에 적으로 만들고 싶지는 안다. 그들과도 충분히, 그리고 진지하게 신앙의 문제를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하고싶다. 하지만 나의 신학적인 관용도 분명 한계는 있다. 그 한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자유 영혼이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누구와 함께 교제할 수 있고 교제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항상 진중할 필요가 있다.

나는 궁극적으로 예정론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에 관심이 있다. 그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으로 더 풍성하게 수용될 수 있다면 그것을 환영하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 예정이 얼마나 오해되고 있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황대우목사의 페이스북 



    성령의 9가지 열매~충성[신실] 양선[선행]...즉 양선이란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사전에는 " 국가나 임금, 윗사람 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함 ,정성을 바치는 마음이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충성'은 믿음 또는 신실성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다 '충성'스러워야 합니다. 하나님께는 믿음으로 충성해야 하고 인간에게는 신실성으로 충성해야 합니다. 믿음과 신실성은 '진실','불변','의지'등의 개념을 포함합니다. 충성은 그리스도인의 기본 자세이며 추진력입니다.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잠28:20]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마24:45]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16:10]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잠25:13] 예닮이 님 방에서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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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질문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위로부터의 질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여쭌 질문은
대부분 밑으로부터의 질문이었습니다

일곱 남편을 가진 여인이 부활 때에
어느 남편과 결혼할 것인가라고
물은 질문이 한 예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질문은 아래로부터의 질문, 세상적인 마음가짐에서
나오는 질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질문을 바꿈으로써 대답을 대신하셨습니다
일곱 남편을 둔 여인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은 "부활하면 장가도 시집도 안 가고....
너희는 하나님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라고 하신 말씀을
읽어 보지 못했느냐?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23~30)

우리가 영적인 대답을 원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영적인 질문을 추구해야만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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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를 위해 죽으셨다 하시는가?>

지금 생각해보면 좀 유치하고 우습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경험으로 볼 때 초신자들에게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의문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나이 들어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처음 예수 믿고 나서 제게 두 가지 의문이 생겼더랬습니다.
그 한 가지는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다 지시고 죽으셨다면 계속 죽어 계셔야지 어째서 부활하셨는가? 예수님이 도로 살아나셨다면 죄인들이 도로 죽어야 하는 거 아닌가?”였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죽으셨는데 어째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하시는가?”였습니다.
존귀하신 성자하나님이신 예수님 한 분의 죽으심이 만인의 죄를 대속하였다는 것은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수 십 억 인구 중 하나일 뿐인 나를 위하여 그것도 2,000년 전에 죽어 주셨다는 것은 도무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의문에 대하여 혼자서 참 많이 생각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저는 그렇게 깨달았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첫 번째 의문에 관하여는 그렇습니다.
우리가 용서 받으려면 예수님이 계속 죽어 계셔야 한다는 생각은 수학적 사고였습니다.
이를테면 “맞바꾸기, 가감셈법”인 셈이지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어주셨다는 단순한 셈법 말입니다.

그 단순한 수학적 생각이 잘못 된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이 계속 죽어계셔야만 우리가 그 대가로 안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은 죄와 사망, 저주의 권세가 계속되는 경우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죄와 사망, 저주를 깨부수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박살이 난 죄와 사망의 권세가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 붙잡아둘 수가 없는 것이고, 예수님의 부활은 당연한 것이지요.

또한 예수님의 화목제물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과 저주를 무마하거나 사단에게 제공되는 제물이 아니라(사단에게 제공된 제물이라고 주장하고 가르치는 이단도 있더이다만), 죄인이 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요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화목제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계속 진노하고 계셨다면 우리의 죄도 해결될 수 없고, 예수님도 살아나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제물을 받으시고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시고 진노를 거두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실 수밖에 없고 예수님의 부활은 그 제사가 완전히 이루어졌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의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위에 말씀드린 대로 두 번째 의문은 주님은 이천년 전에 한 번 죽으셨는데, 어째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역시 납득하기 어려운 의문이었습니다.
어떻게 단 한 번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수십억 인류를 도매금으로 한꺼번에 통째로 구원하신다는 거냐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초월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아니, 시간과 공간을 지으신 창조주이요 주관하시는 전능자이십니다.
주님께는 시간과 공간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기보다 시간과 공간이 다 그 손 안에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지요. 인간의 역사는 기껏 수 천 년인데 하나님은 텅 빈 우주공간에서 수 백 억년 동안 어떻게 기다리셨을까?
그러나 이 역시 하나님을 시간의 틀 안에 집어넣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는 시간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백억년의 풍성한 시간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지요.
태양을 만드시고 지구를 만드시고 고생대, 중생대, 감브리아기, 쥬라기, 신생대........,
그 아득한 시간을 하나님은 필요하신대로 사용하신 거지요.

하나님은 시공을 초월하십니다.
그것은 아무리 긴 시간이나 짧은 시간, 아무리 크거나 작은 공간이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동시에 지구상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 수 있고 응답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나 현재, 미래가 주님께는 다 “현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 현재형 시제로 “I am"이라고 스스로를 밝히신 것입니다.

주님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어버리거나 기억이 희미해질 수 없습니다.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 결코 되돌아갈 수 없지만 주님은 언제나 되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어느 때이든지 모든 시간이 주님께는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항상 현재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의 십자가 아래 엎드려 나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였을 때 주님은 다시금 생생하게 2000년 전의 ‘현재’로 돌아가 그 십자가의 고통을, 하나도 줄이거나 빼지 아니하고, 기억하셨을 것입니다. 현재형이신 주님은 그 때로 다시 돌아가 그 쓰라린 고통을 다시금 경험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산고(産苦)보다도 더 혹독한 고통일 것입니다.
매번 한 사람의 죄인이 돌아올 때마다 가슴을 찢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그 고통과 그 거친 십자가의 못에 살을 찢는 참혹한 주님의 고통은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너를 위하여 죽었노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더기로 한꺼번에 구원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십자가의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낳으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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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깅스 무늬가 바닥무늬하고 많이 비슷하긴하지만
다리 실루엣을 못구분할정도는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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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명을 완수하기
    (Fufiling a Mission) 우리의 인생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살면
    우리는 우리에게 떠나 온 집이 있으며,
    그리고 그 떠나 온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않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또는 어떤 사업을 완성하기 위하여
    한동안 먼 나라에 가 있는 우리 자신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메시지가 전달되고 사업이 완수되면,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서 우리가 수행한 사명을
    설명하고 고된 일에서 벗어나 쉬기를 원합니다
    가장 중요한 영적 훈련의 하나는
    우리 삶의 시간들이
     '사명을 수행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점점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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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ank you dear my) Old Partner...라는 타이틀로

      선댄스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이충렬 감독의 다큐 영화

      ‘워낭소리’가 요즘 장안의 화제다.

       

      선댄스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세상의 주목을 받게된 이 감독은

      이렇게 관객들의 사랑을 받을지 상상도 못했다며

       

      자신이 영화를 만들면서 스스로 던졌던

      <과연 우리가 부모님의 노고와 헌신을 제대로 기억하고 사는지>

      라는 화두를 관객들도 함께 느껴서

      이런 반응을 보내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경북 봉화에 사는 최원균(80) 할아버지와

      40년을 동고동락한 소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소를 몰고 일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가장 멋져보였다는

      이 감독의 기억을 바탕으로

      나이 든 소와 무엇인가 핸디켑을 가진 주인공을 찾기 위해

      5년 이라는 긴 시간을 찾아 헤매인 끝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감독이 소문을 듣고 봉화마을을 찾아갔을 때...

      심란하게 생긴 소와 할아버지가

      달구지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는데

      그렇게 어렵사리 찾은 주인공을

      40년된 소가 죽을 때까지 3년에 걸쳐 촬영했다고 한다.

       

      이 감독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물으니

      "소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와 같이

      나무를 하러 가던 장면" 이라고 했다.

       

      평생 일을 마치면 달구지를 타고 오던 할아버지가

      소가 힘들어하자 달구지에서 내려

      짐을 덜어주던 장면인데

      그때 할아버지의 모습은 마치 성자와도 같았다고 한다.

       

       

      특별할 것 없는 촌부의 일상을

      덤덤히 그려내 잔잔한 감동을 만들어낸 영화 워낭소리...

       

      기대만큼의 어떤 울림은 내게 전해져오지 않았지만

      감독이 오래동안 그들과 함께 하며 담아낸

      스크린 속 장면들을 보면서...

       

      이 영화를 통해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다던

      '관계'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았다.

       

      우리가 목마르게 그리워하는

      우정이, 배려가, 말없는 사랑이...

      또 다른 우정과 사랑을 마음 아프게 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는 안되지 않을까...라는

       

      부족하고 이기적인 인간이기에

      그런 삶을 살아가기가 힘들 수도 있을테지만

      ‘관계의 하모니’ 속에서 인간은 보다 더 성숙한 존재로

      성장해갈 수 있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때는 영상편집에 미쳐

      비디오 카메라를 끼고 살았던 때가 있었는데...

      오랫동안 책장 속에서 잠자고 있는 녀석을 쳐다보며

       

      언젠가 나도

      멋진 다큐 한편 찍어보리라 야무진 다짐을 해본다.

       꼬모가든님의 방에서

       

      ---------------------------------------------------------------

       

       

      (아래 글은 공감이 갔던 리뷰중 일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출처; http://movie.naver.com/movie/bi/mi/reviewread.nhn?code=50869&nid=1661703

       

       

      -----------중략

       

      모두가 힘든 새해를 맞았다.

      광속의 시대에 속도전의 최전선에 내몰리는 일상이지만,

      모든 것을 압도하는 위기의 시대에 패닉 상태를 경험하는 마음이지만,

      크고 작은 폭력앞에 너무도 무기력한 인간이지만,

      우리에게는 끝내 지켜내고 싶은 삶의 원형이라는 게 있다.

       

      살아가고 일하고 늙어가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격려와 위로가 되는 관계 맺음...

       

      혹시라도 소가 먹을까, 독한 제초제를 뿌리지 않는 할아버지의 마음,

      한평생 신세한탄을 하면서도 아픈 할아버지의 이마에 손을 얹어보는 할머니의 마음,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다리를 끌며 땔감을 옮기는 소의 마음...

      그리고 함께 걷는 자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려는 마음...

       

      이 모든 것이 굳이 잠자리 날고 개구리 우는

      그 곳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걸

      사실 우리는 너무 잘 알기에, 울컥 잠시 숙연해지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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