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단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위시 영상으로 보는 "가상칠언"  (0) 2015.03.27
아침에 조율하라  (0) 2015.03.15
하나님의 관심 표명  (0) 2015.02.03
우리의 밤이 곧 낯으로 바뀌리라  (0) 2015.01.28
어머니의 기도  (0) 2015.01.21

 

 

 

 

 

 

 

 

 

 

 

 

 

 

 

 

 

 

 

 

 

 

 

 

 

 

 

 

                          토지사랑  http://cafe.daum.net/tozisarang/


'Amazing Na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들의 세계  (0) 2015.03.30
특이한 곤충의 세계  (0) 2015.03.11
너 네 볼일 안봐 ???  (0) 2015.02.23
지구촌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들!  (0) 2015.02.19
희귀한 식물  (0) 2015.02.18

마태복음 13장이다.

 

 

2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또 다른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심은 사람에 빗댈 수 있다

25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 원수가 와서 밀 사이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26 밀이 자라서 낟알이 익을 때에 가라지도 보였다

27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했다.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디서 이런 가라지가 나왔을까요

28 주인이 대답했다. 원수가 그랬구나종들이 주인에게 물었다

    저희가 가서 가라지를 다 뽑아 버릴까요

29 주인이 대답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를 뽑을 때에 밀도 함께 뽑힐라

30 추수할 때까지 함께 자라게 놔 두어라. 추수할 때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 

    묶어서 불에 태우고밀은 거두어 곳간에 쌓으라고 하겠다.

 

 

과거에 다니던 교회에서 어떤 여집사가 남편이 아닌 다른 유부남을 교회에 데리고 왔다

그녀의 남편은 교회를 다니지 않았고 여자 혼자 교회를 다니다 밖에서 눈이 맞은 남자를 교회에 출석시킨 것이다

 

처음엔 바람 핀 사실을 몰랐다가 나중엔 거의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는데 그 남자의 부인도 

그 사실을 알고 집안싸움이 크게 나는 바람에 그 남자의 교회출석이 불투명하게 되자 

 

담임목사가 슬쩍 그 남자의 컴백을 기대하면서 다시 교회 나올 수는 없느냐 하며 그 여집사에게 

물어보는 모습을 보았는데 "어쩜 저렇게 남의 집안 걱정은 뒤로하고 자신의 목회만 생각할까." 

하는 마음에 눈을 찌푸린 기억이 있다

 

나중에 성경을 다시 공부하면서 안 일이지만 그 목사의 행동이 얼마나 지도자로써의 큰 죄인가를 

알게 되었다

 

일전의 "간음"이란 글에도 언급했듯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간음죄란 간통죄의 성향이 있다

단지 성행위를 죄악시 한 것이 아니라 결혼을 파괴하는 성행위를 "간음"이라 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간통죄는 대단히 성경적이다.^^ 

 

그러나 한국의 헌법보다도 훨씬 성경적이지 않은 교회의 모습을 볼 때 씁쓸하다

위의 스토리가 말하듯 교회 내의 간음은 개인의 문제이다

교회가 간섭할 바가 아니라는 미국식의 법을 따르고 있다

 

사실 이러한 문제를 목사와 상담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 여기는 교인들도 많다

목사가 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괜히 끼었다가 불똥만 커지고 문제가 심각해질 것을 우려해 

쉬쉬하면서 실리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사고이다

 

이러한 교회 내의 죄를 지적했을 때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말씀이 오늘의 본문이다

완전한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는 항변이다. 우리는 모두가 죄인이며 교회 안에 알곡과 가라지는 

같이 가는 것이고 가라지는 함부러 뽑지 말고 나중에 하나님이 해결하실 것이니 우리는 조용히 

기도만 할 뿐이라는 말이다

 

사실 교회는 수 많은 죄악들을 당연시하고 있다. 간음뿐이랴... 

이혼문제, 성도간의 소송문제. 작게는 성도간의 분쟁이나 시기 질투 모함 등등.. 

 

이 모든 문제들이 생기면 무조건 조용히 해결하려 하고 상대적으로 더 참을 수 있는 사람을 

믿음 좋다고 칭찬하며 그 사람만 집중적으로 권면하여 무마시키려 하고 참지 못하는 쪽에게는 

아양을 떨며 아무 말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성경적이 아니며 교회 성장에만 주력한 철저한 이기주의의 산물이다

간음한 자를 보고도 벌하지 않은 고린도교회를 향한 사도바울의 책망은 단호하다

간음한 자를 벌하고 교회에서 내 쫒으라 고함치고 있다는 점을 상고해 보라

 

일전에도 언급했듯이 성경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죗성을 폭로하는 동시에  

"그러므로 너희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므로 그렇게 살다 죽어라!" 라고 말하지 않는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 라고  

율법앞에 선 나약한 인간의 어쩔 수 없음을 로마서에서 말하지만 곧바로 또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죄를 당연시하는 빌미를 성경은 결코 제공하지 않는다

 

가라지를 뽑지 말라는 말씀은 절대로 가라지가 뿜어내는 죄악들을 모두 묵인하라는 말씀이  

아닌 것이다교회가 가라지에 관대한 이유는 정말 알곡이 걱정되어서 인가 

아니면 없는 교회살림에 한사람의 가라지라도 아쉽기 때문인가 

성경이 가라지를 놔두는 이유는 알곡이 행여 다칠까 하는 우려이지 가라지를 위함이 아니다 

인간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이처럼 다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얼마나 위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죄를 짓는 구실로 또는 타락의 구실로  

삼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왜 주인은 가라지를 가만 두라고 했을까

 

가라지를 종들의 말처럼 보는 즉시 제거하면 어떠한 부작용이 생기는 걸까 

주인의 말 그대로이다. 그것은 종(우리)들이 가라지를 막 뽑을 때 실수로 알곡을 뽑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가라지와 알곡을 구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최종 심판자는 하나님이시지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죄를 죄라고 소리쳐야 한다. 

그러나 그 죄를 범하는 사람을 "가라지"라고 최종 심판할 수 는 없다 

우리는 구원파처럼 누가 구원을 받고 못받고를 선포할 능력이 없다. 

또 누가 진심으로 회심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진단하고 판가름하는 기준를 들이댈 능력이  

누구에게도 없다그런 의미에서 가라지를 손대지 말라는 것이지 가라지가 불쌍해서  

용서하시지도 사랑하여 용납하신다는 뜻도 아니다

 

결국 가라지의 최후는 "불살음"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가 말하는 바는... 교회든 어디든 "가라지"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 가라지를 지금 제거하시기를 원치 않으시며... 

 또 우리 스스로가 제거하기를 주님은 원치 않으신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가라지는 언제 왜 생겼는가

 

27절에 종들이..."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그런데 어디서 이런 가라지가 

나왔을까요?" 라고 묻는 것을 볼 때 씨는 좋은 씨가 밭에 뿌려졌다

 

그러나 25절에 "사람들이 잠들었을 때, 원수가 와서 밀 사이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고 했으니 

가라지는 사단이 뿌리고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37절 부터 예수님이 친절히 비유를 해석해 주시는데... 좋은 씨는 당연히 "예수님"  

뿌리셨고.. 밭은 "세상"이고(교회 뿐 아니고 세상전체이지만 오늘 글은 특별히 교회만으로  

한정했음)..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라 하였고..가라지는 "악한자의 아들들"이라 했다.

 

그러면 방정식에 대입해 보자... 예수님은 좋은 씨, 즉 천국의 아들들을 이 땅에 심어 천국을  

베푸셨는데 사단이 그 천국안에 악한 자의 아들들을 심었다는 것이다 

진리만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교회안에 사단의 아들들이 심기워졌다는 말이다 

말씀대로라면 "사단의 아들들"은 교회안에 심기워져 교회안에서 등장한다 

 

그러나 많은교회는 이러한 사단의 무리들을 교회 밖에서 찾는다. 

사단의세상이 교회를 누르고 핍박한다고 생각하나 사실 성경이 특히 신약성경이 밝히고 있는  

사단의 무리는 교회안에 있다교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 우려를 피력한 사도들의 서신서에는 

모든 사단의 무리들이 교회 안에서 나온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4:1) 

 

거짓 선지자는 교회 밖의 세상이 아니다. 세상은 선지자라는 말을 쓰지도 않는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 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2:8)  

이것은 교회안의 율법주의적 가르침을 말한 것이다 

결국 적그리스도의 정체도 교회안에서 발견된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요이7)  

 

이것 역시 교회안에 있던 영지주의를 배격하는 말씀이다 

이렇듯 성경은 사단의 하수인들의 출현을 교회 안에서 보고 있으나 교회는 반대로 사단의 

무리를 세상으로 보고 있다. 물론 세상도 사단의 지배하에 있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은 역사적으로 교회를 핍박했지만 그것으로 교회가 무너질 위기를 겪은 적은 없다 

오히려 세상의 핍박을 통해 기독교는 더욱 큰 연단을 했고 더욱 견고하고 단단해졌다 

세상은 진리 밖의 존재이다. 하나님의 교회와는 별 상관이 없는 존재이다

 

오히려 그런 세상을 변화시켜 주님의 증인으로 변모시키는 일을 하나님은 하신다 

성경은 세상을 증오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성경이 오히려 증오의 대상으로 삼는건 "헛된 경배"를 일삼는 유대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생각하였고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독사의 새끼" 

불렀다당시의 유대교는 지금의 기독교와 복사판이다

 

성경이 우려하는 사단의 아들들 역시 기독교 안에 뿌려진 가라지들이다 

교회 밖을 사단으로 보면 불교사찰 뜰을 밟으며 사단의 땅을 하나님의 땅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당연해 보인다

 

"레이디 가가"의 공연장 밖에서 피켓을 들고 사단의 공연에 항의했던 청년들이 이해도 간다 

하지만 그것들은 진리 밖에 존재하는 종교나 문화이지 정작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진 못한다 

기독교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란 성경이 밝혔듯이 교회안에 뿌려진 적그리스도들이다 

문제는 우리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에는 관대하다

 

조 아무개 목사가 돈 문제로 비리를 일으켜 법의 심판을 받는대도 그것을 보도한 추적60분을  

"마귀가 하는 짓" 이라 말하고 가라지 목사를 두둔하는 현실이 지금의 교회이다 

아니다. 사단은 지금도 교회안에 우리옆에 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여기서저희는 적그리스도임)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요일2:19)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가 원래 어디서 나갔다고 말하는가 

그러므로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단의 무리는 불교도 아니고 레이디 가가도 아니다교회를 핍박하는 세상도 아니고 미디어도 아니다. 이단교도 캐톨릭도 아니라고 성경은 말한다

 

가라지는 지금 우리의 교회 안에 생겨난 거짓선생들이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다 

다른 말로 적그리스도이다. 그런 가라지들의 최후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13;40) 

 

그들은 늘 우리가 보던 형제와 자매로 부르던 사람일수도.. 목사와 장로일수도.. 

그러나 성도는 그들을 뽑아버릴 권이 없다

유일한 재판장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필연적으로 가라지와 함께 참고 인내하며 연단되는 것이고 

재판장이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삶을 살아 내야 하는 것이다.                       

 

 

출처: 물과피와성령/essensce 

 

제13장 동성연애

남자이건여자이건 간에 동성연애 행위는 국가적인 도덕기준의 심각한 침식을 반영하는 영역이다. 동성연애자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전례없는 대담성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탈선에 연루된 것을 부인하는 다른 사람들이 이제는 이러한 사람들의 옹호자가 되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크리스찬들이 깊이 관심을 가지는 한 가지 이유는 동성연애를 국가적으로 용인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그 국가의 영적 상태의 한 표시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표류하였을 때, 그 민족은 남색(sodomy)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악을 용납하였다.(왕상14:24)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왔을 때 동성연애는 용인되지 아니하였다.(왕상15:12)

하나님의 성회는 모든 믿음과 행위는 성서에 근거하여 평가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성경은 동성연애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권위있는 법에 의하여 그 입장이 확립되도록 고려해야 한다.

동성연애는 죄이다.


때때로 인간적인 이유는 동성연애를 심리학적인 문제이거나, 육체적인 상태 혹은 생활방식의 신중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은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죄라고 한다. 이 문제에 관한 교회의 관심은 소수 그룹에 대한 차별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문제이다. 성경은 이것에 대하여 명확하게 말씀한다.


1. 동성연애는 하나님이 태초에 제정하신 성의 원리에 반대되기 때문에 죄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1:27) 하나님이 남자를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은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셨다(창2:18)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은 남자에게 적합한 배필을 창조하셨다.(창2:18) 남자의 외로움은 다른 남자를 창조함으로써 제거된 것이 아니라 여자를 창조함으로써 제거되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이 여자를 그에게 데려왔을 때 아담음 “이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 즉 여자라 칭하리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3,24)라고 하였다.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성의원리를 제정하셨는데 이 원리에 의하여 인간이 번식하게 되었다. 심리학적으로 이러한 관계는 건전하였다. 육체적으로 이 관계는 자연스러웠다. 사회학적으로 이상적인 가정 단위를 세웠다. 성경적인 개념은 인간의 성이란 이성적으로 일부일처적 관계가 이상적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동성연애를 택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성의 원리를 거부하는 것이다.그들의 탈선한 성행위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성의 특성에 대한 죄를 유발하는 것이다.(롬1:27) 그리고 그들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
라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사회적 단위를 구성하는 것이다.(창2:24) 바리새인들과의 토론에서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이 제정하신 성의 원리를 반복하셨다(마19:4-9) 그는 이성 간에 결혼을 제외한 유일한 생활방식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독신생활임을 지적하셨다.


2. 동성연애는 성경이 악하다고 하기 때문에 죄이다.


하나님이 독특한 의미로 이스라엘을 그의 나라로 부르셨을 때 하나님은 애굽의 압제로부터 기적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이상의 일을 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행동을 안내하며 지시하는 한 율법을 주셨다. 도덕에
관계되는 율법 가운데 동성연애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 있다.


레18:22에서 하나님은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 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레20:13에서는 이것을 위반한 사람에 대한 가혹한 형벌을 명령함으로써 이 하나님의 명령을 보강하고 있다. 즉 “누구든지 여인과 교합하듯 남자와 교합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금지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롬1:21-27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창조주보다 창조물을 섬기며 경배하는 사람들의 생활에서 따라오는 결과들을 기록하였다. 그들은 그들 사이에서 자기들의 몸을 부끄럽게 하였다. 그들은 성을 순리대로 쓸 것은 바꾸어 역리로 썼다. 그들은 불의, 음행, 악의, 탐욕, 악독이 가득하였다. 그들은 부정한 자요, 원통함을 풀지 않은 자요, 무자비한 자였다.


바울의 시대에 고린도는 부도덕으로 유명하였다. 이 도시는 상업 뿐만 아니라. 악폐와 부도덕의 중심지였다. 교회가 이 도시에 세워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모든 종류의 부도덕을 어떻게 보시는지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였다.
그 기록은 매우 뚜렷하다. 바울은 기록하기를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리고 계속하기를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하리라”(고전6:9,10)고 하였다. 바레트(C. K. Barrett)는 그의 주석 “고린도전서”(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에서 탐색은 미동을 상대로 하는 남색을 의미한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탐색과 남색은 남자 동성애 관계에서 하나는 소극적이고, 하나는 적극적인 상대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기록하기를 법은 “불법한 자와 순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를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하였다.(딤전1:9,10) 이 사람들은 의롭다고 묘사되는 사람과는 대조적으로 경건치 않은 자들이라고 하였다.


3. 동성연애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죄이다.


고대 소돔이라는 도시는 동성연애에 대한 동이어가 되었다.(영어로 sodom 사람은 남자 동서연애자를 의미한다:역자주) 다른 악한 것들이 이 사회에 존재하는 동안 동성연애도 현저하게 되었다. 소돔의 동성연애자들은 매우 타락하여 자기들의 동네에 찾아온 손님들을 욕보이려고 위협하였다. 역사적인 기록은 그들이 난폭해져서 롯이 손님들을 맞아들인 그 집의 문을 부수려고 하였던 것을 보여준다. 오직 하나님의 간섭으로 롯과 그의 가족은 악한 의도에서 건짐을 받았다.
이 사람들은 너무 타락하여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창19:4-11,24,25) 이 도시들에 대한 심판의 가혹한 정도는 너무 강렬하여 베드로와(벧후2:6) 유다(유7)가 하나님의 심판을 설명하는데 사용하였다.


동성연애자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


성경이 동성연애는 죄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고 있지만 또한 동성연애자도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가르친다. 동성연애는 도덕적인 문제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그 죄인을 도우실 수 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
이 없다.


고린도에 있는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권세에서 구원받는 이전의 동성연애자들이 있었다. 고전6:9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수 없는 자 중에 동성연애자를 포함시켰다. 그리고 11절에서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라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과거시제이다. 그들은 동성연애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죄로부터 구원받았다.


성경은 속죄의 효력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제한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제거할 수 없을 만큼 어두운 죄의 자국은 없다. 세례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보라”(요1:29)고 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 ”(고후5:21)고 기록했다. 요한도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요일1:9)고 기록했다.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능력을 통해 사람들은 그들의 죄의 본질과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고후5:17)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죄의 심판과 권세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는 동성연애자들도 다른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똑같은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와야 한다.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행위는 회개와 믿음 두 가지를 다 포함한다.


예수를 주시요, 구세주로서 영접해야만 한다. 이러한 회심의 개념들은 순서적이기보다는 동시적이요(회개가 먼저 오고 그 다음에 믿음이 오는 순서적인 것 보다는 회개와 믿음이 동시에 있을 때 회심의 역사가 있다는 의미이다.:역자주),이 둘이 다 포함된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한다. 예수는 그의 승천에 앞서 제자들에게 주었던 교훈 속에서 회개와 죄사함이 반드시 전파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눅24:47) 회개는 죄로부터 돌아서는 시점에서 마음이 변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를 거부했던 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에 반하는 다른 자세들과 행위들도 포함된다.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던 빌립보 감옥의 간수처럼 구원을 소원하는 사람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행16:30,31) 곧 그가 죄의 심판뿐만 아니라 죄의 권세로부터도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회개와 마찬가지로 순종하는 믿음도 구원의 조건이다.


동성연애자에 대한 크리스찬의 자세

크리스찬은 동성연애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습관에 관계된 사람들에 대해 크리스찬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떤 죄들은 타락한 자와 초신자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다른 죄보다 더 책망 받아야 한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크리스찬은 동성연애자들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는 자세를 갖도록 확인해야 한다.

그들은 이러한 행위를 용인하게 하는 감상주의적인 경솔함을 피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기를 원하는 자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간과해서도 안된다. 증언을 위한 기회가 전개될 때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정직하게 원하는 사람들과 하나의 또 다른 생활방식으로서 동성연애에 대한 동정심을 구하는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기 위해 성령의 인도를 따르도록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를 인하여(5절에 언급된 부도덕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엡5:6)라고 성경은 신자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계속해서 성경은 신자들이 열매없는 어두움의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엡5:11) 하나님께서 정죄하는 것을 교회가 너그럽게 봐줄 수 없다. 만일 동성연애자들이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제안을 거부한다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영역 밖에 놓아 둘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교회의 교제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성연애 도착증에 빠진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기는 구한다면 크리스찬은 도울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신자의 마음에 널리 뿌려진 것처럼 이 사랑이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처럼 신자들도 죄를 미워하면서 죄인을 사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신자들은 동성연애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행하는 길이 죄의 길임을 깨닫도록 돕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해 신실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 때 누리는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능력과 풍성한 생명에 대해 증거해야 한다. 그들은 동성연애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축복을 원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 모든 것을 해야 한다. 그럴때 그들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을 아는 만족을 누리게 될 것이다.(약5:20)



최상의 복수를 꾀하라

너를 모욕하는 사람의 
기분에 휩쓸리지 말아라 
그 사람이 널 끌고 가고 싶어 하는 
길로 들어서지 마라
너를 모욕하는 사람에게
복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최상의 복수는
상대가 내게 악을 행할 때
대항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악감정조차 품지 않는 것이다.- 별똥별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 19-21)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중에서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수 시대는 그렇게 지나가고  (5) 2015.03.06
배려하는 마음  (0) 2015.03.04
깨달음이란...  (0) 2015.02.25
그대, 이것을 아시나요?  (0) 2015.02.18
차가워진 당신의 체온  (0) 2015.01.30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말과 행동을
      지나치게 믿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말과 행동으로 옮긴다.

      그러나 실제로 말과 행동은
      훨씬 미묘하고 변하기 쉬운 것이다.

      인간은 말과 행동으로 어렵지 않게
      자신이 원하는 상태에 자신을 놓아둘 수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도 따지고 보면
      말이나 행동에 의해 생겨난다.

      한 사람의 상황을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만드는 말의 마력은 정말
      헤아릴 수도 없는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말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말은 생각의 발현이다.

      긍정적이고 행복한 말은
      긍정적이고 행복한 생각에서 나온다.


벧후 2: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은 후세에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위한 경고하라 말씀하십니다. 1:7 소돔과 고모라와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그리고  멸망은 영원한 불로 인한 것이라 하십니다.

 

11:8 그들의 시체가   길에 있으리니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박히신 곳이라 

 

 

소돔은 또한 계시록에도 언급이 되어 있는데  장소는 예수님이  박히신   골고다 언덕이라 일컬어 지는 세상의임금 마귀가 지배한  사망 권세가 지배하는 곳을 말합니다.위에 언급된  말씀을 연결하여   소돔과 고모라 성의멸망은 예수님이 오신 이후 마지막 때에 경고를 주시기 위함임을   있고 마지막 때의 멸망은 불로 인한 멸망이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멸망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의인인 롯은 구원하십니다그리고   사람으로 인해 그에게 속한 가족들도 구원받게 됩니다이것은 예수님  분으로 인해 그에게 속한 모든 자가 구원에 이르게 됨을 나타내기도 합니다그러나 롯의 처는 롯과 함께 소돔의 멸망으로부터 구원되지만 뒤를 돌아 봄으로써 소금기둥이 되어 구원을 완성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맙니다참으로 안타깝께도 구원의 여정 가운데 있었으면서도 세상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여 구원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이것은  시대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세상을 향한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지 못한 자들은 구원의 여정을 시작하지만  다시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함으로 구원의 최종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애굽  세상을 그리워 하며 불평 불만을 표출하게 되고 결국은 가나안에 이르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됩니다이스라엘 민족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서 아무런 교훈도 받지 못하고 구원에서 탈락했습니다현시대 성도들은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에서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에서 교훈을 얻어야만 합니다그렇지 못하면 우리도 그들과같이 구원의 최종 목적지에 이르기 못하고 실패하게 되고 유다서 1 7절의 말씀처럼 영원한 불의 형벌에 처하게 됩니다


개혁주의마을

cloudten

 

 

멀리 가는 물
- 도 종 환-
 
어떤 강물이든 처음엔 맑은 마음
가벼운 걸음으로 산골짝을 나선다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가는 물줄기는
그러나 세상 속을 지나면서
흐린 손으로 옆에 서는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미 더럽혀진 물이나
썩을 대로 썩은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 세상 그런 여러 물과 만나며
그만 거기 멈추어버리는 물은 얼마나 많은가
제 몸도 버리고 마음도 삭은 채
길을 잃은 물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물을 보라
흐린 것들까지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 가는 물을 보라
결국 다시 맑아지며
먼 길을 가지 않는가
 
때 묻은 많은 것들과 함께 섞여 흐르지만
본래의 제 심성을 이지러뜨리지 않으며
제 얼굴 제 마음을 잃지 않으며
멀리 가는 물이 있지 않은가.

 

>
"
     
    "자신은 옳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틀렸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이

    틀렸다는명백한 증거다

    -톨스토이

    하나님은 몇 사람에게만

    깨닫게 하시지 않는다

    특히 자기만 특별하게

    깨달은 성경의 신비라고 말하면

    거의 이단이다

    올바른 신학은 오랫동안 성령의 조명과

    지성적 검증된 것이어야 한다.

    역사적 정통신학을 무시하지 말라

    특히 자신의 체험을 절대화시키면

    그때부터 잘못되기 쉽다

    진짜 보이고 들리더라도 확신하면 안된다

    주님께서 성경 안에서 말씀 안에서만

    계시하시는 이유는 인간의 연약함 때문이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은혜의 단비"중에서

     

     

     

    ♬ 흐르는곡 /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 ♬



     

     

"
      수채화처럼 고운 生... 최송연 마음이란 물감을 뿌리는 대로 그림을 그리는 대로 그려지는 하얀 도화지 꿈을 품게 되면 오색 찬란한 무지갯빛 사랑을 품게 되면 은빛으로 반짝이는 별빛 원망과 불평 시기 질투 미움은 먹구름 칙칙한 하늘빛 주의 말씀을 붓으로 삼아 날이면 날마다 수채화처럼 고운 生을 그려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시 19: 7-11)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를 위하여...  (2) 2015.03.25
봄이 오려나 봐요  (0) 2015.03.16
바다가 내게 해준 충고  (0) 2015.02.20
믿음의 날개  (2) 2015.02.20
선택권에 대한 나의 헌장  (2) 2015.02.13

구원이 은혜라면 신자가 해야 할 일은 없나요? (Q&A) / 박신 목사


[질문]


은혜로 얻은 구원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가 무엇을 해서 의롭다 칭함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분을 믿는 것에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는데,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없습니까? - 즉, 신자로서의 삶을 바르게 살고자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들은 잘못된 것인가요? 이 부분이 가장 혼란스럽습니다. 의롭게 되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답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당연히 신자가 의롭게 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까닭은 구원에 칭의, 성화, 영화의 세 단계가 있는데 그 중간 단계인 성화는 신자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학적 지식이 없이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모든 인간은 의롭게 되려고 노력해야 하며 신자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의로워지지 않는 한에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절로 의로워지는 법은 결코 없으니 신자는 의로워지려고 갑절의 노력을 해야 함은 너무나 지당하지 않습니까?  

구원의 세 단계

질문자님이 말씀하신 대로 구원은 순전히 은혜로 얻습니다. 인간의 신분, 자격, 조건, 공로, 행위 등이 아무리 선하고 의롭다고 해도 하나님의 온전한 의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은혜를 믿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면 하나님은 예수님이 완전히 이루신 의에 의거하어 신자를 의롭다고 칭해주십니다. 또 성령의 간섭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해서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

다른 말로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 단계를 특별히 칭의(稱義- Justification)라고 합니다. 문자적 의미 그대로 단지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것뿐입니다. 법정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비유컨대 사형집행을 앞둔 사형수에게 왕이 아무 조건 없이 사면선언을 내린 것입니다. 이처럼 사형수였던 우리 모두가 한 일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데도, 하나님은 마땅히 죽어야 할 나의 죽음과 마땅히 살아야 할 예수님의 죽음을 맞바꾼 것입니다.  

단언컨대 신자가 거룩해져서 구원 받은 것이 전혀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은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단지 자신이 무능한 죄인임을 절감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것뿐입니다. 이제 겨우 하나님 뜻에 순종하며 거룩하게 살아보려는 결심을 한 단계에 불과합니다. 도덕적으로는 이전과 같으며, 영적으로만 앞으로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의존하겠다는 뜻입니다.

칭의는 그래서 하나님이 죄의 형벌만 면제해 준 셈입니다.(free from the penalty of sin) 이는 과거에 있었던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불신자에서 신자로의 신분과 소속의 변화만 완료되었습니다. 한 번 믿어 구원 받은 자에게 다시 칭의의 절차가 필요하거나, 취소 내지 수정 될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순전히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인간이 믿음으로 그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죄의 본성은 여전히 살아 있기에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거룩하게 자라가야 합니다. 이는 신자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에선 영원히 벗어났어나 내 속에 남아 있는 죄와 세상의 악과는 평생토록 싸워 이겨야 합니다. 이는 구원의 두 번째 단계인 성화(聖化, Sanctification)로서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싸움입니다.(free from the power of sin)

두 번째라고 해서 이 단계를 온전하게 통과하지 못하면 즉, 완전히 거룩해지지 않으면 셋째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구원은 확정되고 취소되지 않으나 반드시 통과해야할 과정이라는 뜻일 뿐입니다. 더 거룩해질수록 천국에서 주님과의 교제가 풍성해지고, 그렇지 못하면 부끄러운 구원이 되는 차이만 있습니다. 성화는 그래서 이미 바뀐 신분에 걸맞게 성품이 거룩해지려고 계속 노력하는 진행 과정입니다.

마지막으로 신자가 죽어 천국에 가면 주님과 맞대면함으로써 구원이 완성됩니다. 주님과 닮은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기에 영화(榮化 Glorification)라고 합니다. 그곳에는 눈물과 고통이 없을 뿐 아니라 아예 죄악 자체가 없습니다.(free from the presence of sin) 그리고 마지막 때엔 육신의 부활을 입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주님과 함께 강림하게 될 것입니다.    
  
죄에 더 거하겠느뇨?

구원은 인간의 공적 하나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선물로 얻습니다. 또 믿은 후에 짓는 모든 죄도 용서 받습니다. 지옥의 심판에서 면제된다는 것이지 이 땅에서 하나님이 사랑의 매로 부과하는 징계에서조차 자유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히12:1-13 참조) 죄지을 때마다 입술로 자백하고 주님의 용서를 구하고 거룩하게 자라야 합니다.(요일1:9)

이런 복음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두 종류의 극단적 반응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무도덕주의입니다.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기에 어떤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용서해주시는 은혜를 더 받으려면 죄를 더 많이 짓는 게 낫다는 생각마저 했습니다. 거기다 기독교 초기에는 육신은 악하고 영만 선하다는 이단사상까지 보태져서 죄에 대해 아주 무감각해지고 도덕이나 율법이 아무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6:1-4)

바울 사도는 그런 잘못을 크게 나무라고 있습니다. 지옥 형벌이 없어지고 믿은 후의 죄마저 용서 받는다고 해서 제 멋대로 사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깨트려버린 죄의 권세에 다시 굴복하는 너무나 어리석고도 악한 짓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 은혜로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까닭은 다시는 그런 죄에 굴복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지옥 안 가게 되었으니 마음 놓고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 신자 된 진정한 은혜이자 권세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극단은 성화를 너무 강조해서 도덕주의로만 신앙을 변질 시키는 것입니다. 심지어 믿은 후에 죄를 지으면 구원이 취소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죄의 형벌과 징계를 구분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하나님이 형벌을 면제해준 까닭은 인간 스스로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 당신의 의의 기준에 합당할 수는 도무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은 후에도 평생토록 어떤 자라도 완전한 성자는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올바른 신앙이란 매번 넘어지고 쓰러지더라도 오직 주님의 용서의 은혜에 힘입어서, 때로는 그분의 강권적 징계로 새삼 깨우쳐서, 한 걸음씩 성화를 이뤄나가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의롭고 악한지 기준으로만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신자의 잘못과 허물을 끝까지 관용해주시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성도들끼리 서로 참아주고 권면 위로하면서 함께 아름답게 자라는 것이 참 복음의 능력입니다.  

피 흘리기까지 너희 구원을 이루라.

성화가 신자의 책임이라고 해서 신자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신자가 가만히 있어도 성화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히12:4)에서 보듯이 정말로 평생을 두고 모든 의지를 다 동원해서 피 흘리기까지 죄악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피 흘린다는 것은 이어지는 구절에 설명이 나오듯이 성화의 싸움에 등한히 하거나 죄와 쾌락을 즐기다 보면 반드시 하나님의  징계(형벌이 아님)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성화의 의지가 약해지려 하거나, 징계를 받을 때도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것이 진정한 기쁨과 만족이 됨을 체험해서 주위의 불신자들 앞에 그리스도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12:11-13)

그러나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불신자들도 자신의 힘으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또 신자의 예수 믿기 전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실패했기에 예수님을 구주로 모셨습니다. 따라서 성화를 자신의 의지로 피 흘리기까지 이루려 노력은 하되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항상 말씀과 기도에 열심을 내어서 자신의 성품을 깨끗케 하고 또 끝까지 인내하며 주님 뜻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2:12-16)

‘항상’ 그리스도께 복종하여 구원(항상 해야 하므로 단회로 끝나는 칭의가 아니라 성화임) 을 이루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성화의 소원도 주님이 심어주시고 또 그분께서 행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신자는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 없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악한 세대 가운데 그리스도의 빛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화가 신자 개인만의 인격적 변화만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야 할 소명도 실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자가 맡은 일과 처한 여건에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도구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일, 내적으로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고 외적으로는 하늘의 신령한 복을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옮겨다 심는 일을 실현하기 위해서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신자의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 기도와 말씀으로 항상 또 미리 영적인 무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작금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항상 피 흘리기까지 복종하며 성화를 이루고 있기는커녕 성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못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내용이 주로 무엇입니까? 오직 자신의 형통과 안일을 위한 것뿐입니다. 주님이 자신을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하게 쓰임 받기를 소원하는 기도는커녕,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기도도 거의 하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얻게 된 새 생명 안에서 사는 일에는 전혀 관심 없고 이제 지옥 형벌은 걱정 없으니 현생에서만 잘 살면 된다는 식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꾸짖었던 “은혜를 더 받으려 죄에 더 거하는” 또 다른 행태입니다.

구원에서 칭의와 영화는 믿음으로 그대로 순응하는 것 외에 신자가 할 일이라곤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은 후에는 반드시 평생토록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자신의 성품을 거룩하게 가꾸어 가며, 세상 죄악과는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주위에 드러내고, 자신에게 맡겨주신 주님의 소명을 실현해야 합니다.

7/9/2011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名醫 납시요!~
인생의  다섯가지 복(五福)이 배우자, 건강, 돈, 일, 친구라는데, 그 중 제일은 역시 건강이겠지요?~ 아는만큼 보이고 아는게 힘 이라지만, 역시 실천이 관건.저장 해 놓고 틈틈이 읽어보세요~
진정한 명의는 병이 생기기전에 치료하는 사람이랍니다~  

평생 정상혈압 혈관 사수법 5계명 
http://m.cafe.daum.net/bcsbl/Hdyv/1372?  
암 이겨낸 60대 의사 최고의 항암 음식은
http://m.cafe.daum.net/bcsbl/Hdyv/1373?  
치매의 원인과  사전 대비책
http://m.cafe.daum.net/bcsbl/Hdyv/1374?  
감기 빨리 낫는 법~
http://m.cafe.daum.net/bcsbl/Hdyv/1375?
평생 위암,대장암에 안 걸리는 방법
http://m.cafe.daum.net/bcsbl/Hdyv/1376?  
암 수술·항암치료 하지 말라 
http://m.cafe.daum.net/bcsbl/Hdyv/1378?
누구나 암癌극복이 가능한 소식 
http://m.cafe.daum.net/bcsbl/Hdyv/1379?  
신체의 잔병 없애주는 손 마사지 
http://m.cafe.daum.net/bcsbl/Hdyv/1380  
食後 먹는과일은 당뇨와 지방간을 부른다
http://m.cafe.daum.net/bcsbl/Hdyv/1354?  
척추명의의 충격적 인터뷰
http://m.cafe.daum.net/bcsbl/Hdyv/1353?  
내 몸에 암 만드는 생활 주범들
http://m.cafe.daum.net/bcsbl/Hdyv/1352?  
체중관리 12가지 비법
http://m.cafe.daum.net/bcsbl/Hdyv/1351?  
건강을  위한 10계명 
http://m.cafe.daum.net/bcsbl/Hdyv/1349?



성화는 세속적 정의를 구축한다.

 

한국교회의 윤리부재와 도덕적 해이가 만연하고 있는 오늘날, '휴머니즘적인 사회정의'를 마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속한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일은 없어야 한다. 혹은 사회 정의를 주창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는 칭의'를 약화시키려는 경향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공동선의 추구와 신자로서 중생자의 윤리가 뒤섞여 있는 기이한 현상으로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보겠다는 과욕이거나 혹은 구원받은 신자라면 의당히 사회정의를 구현해야 한다는 사회복음주의에 지나지 않음이다.


이에 대해 성경은 명쾌하게 답변을 하고 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의를 사회의 정의 구현으로 찾지 않으면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의는 바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십자가 고난을 마다하지 않은 그리스도의 '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사회 정의 구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칭의에 기반을 둔 성화로의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것으로, 중생한 신자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살아가는 삶으로써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곧 성화의 열매 중 하나인 정의인 것이다.


이것은 신자들이 추구하는 사회 정의라는 수준이 단순히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공리적인 개념의 정의의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령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 나라의 법'에 순종하며, 이 법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신자들이 추구하는 정의는 세속적 차원이 추구하는 정의보다 월등히 고상한 공평과 공의를 수행하게 되며, 여기에서 비로소 사회적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의 의를 모호하게 사회 정의와 혼합하여 그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것은 자칫 '기독교'를 단순한 '휴머니즘'으로 전락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이신칭의를 간과하는 그릇된 휴머니즘적인 하나님 나라 운동이 종교다원주의에 문을 열어주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구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성화의 길을 가고 있는 신자들의 윤리 의식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기초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위에 서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기독교개혁신보

하나님 아들이 왜 인자라고 강조하셨나요? / 박신 목사

 

 

[질문]

성경 공부하다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인자, 즉 사람의 아들에 대해 궁금해 졌습니다. 마태 26:64에서 대제사장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묻자 예수님도 그렇다고 답하시면서 계속해서 사람의 아들임을 강조하십니다.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답변]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마26:63,64)

예수님의 대화 방식

먼저 아셔야 할 사항은 예수님은 항상 대화 상대의 즉,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게끔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상대가 품고 있는 주제, 취지, 목적에 따라 대화를 이끌어가면서도 당신이 밝혀야만 할 진리는 당신만의 방식으로 반드시 드러내셨습니다. 또 당신께서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사항이 있다면 반어법, 반복, 비유, 상징, 과장 같은 문학적 수사법도 동원하셨습니다.

예컨대 유대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죽어야 할지 물어 왔을 때에, 만약 예수님이 돌로 치라고 하면 사랑이 없다고 반박할 터이고 용서해주라고 하면 율법을 위반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 먼저 돌로 치라고 했습니다. 또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지 물었을 때도 동전에 그려진 모습을 보라고 하면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했습니다.

두 경우 다 상대가 의도한 대화 주제에 벗어나지 않고 그에 정확하게 맞추어서 대답을 하시되 당신만의 고유한 뜻을 아주 확실하게 전달했습니다. 상대로선 그 대답의 의미를 분명하고도 정확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자기들 사고체계, 가치관, 사상과 철학, 믿음, 도덕적 종교적 영적 수준과는 비교가 안 되는 전혀 다른 차원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답이 함의하는 절대적 진리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은 상대가 어떤 숨은 의도를 갖고서 당신에게서 어떤 대답을 듣고자 유도하는지 훤히 꿰뚫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요2:24,25)

요한 사도는 지금 예수님이 사람의 속을 아시는 것을 넘어서 사람에게서 증거를 받을 필요도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사람에게 자신을 증거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하나님이실 뿐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면  되지 구태여 인간의 증거와 인간에게 증거할 필요 없으셨던 분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설명하고 가르치고 또 지금 대제사장에게 맞장구(?) 쳐주듯이 대답하신 까닭은 인간에게 정말로 당신이 누구인지 알게 하려는 뜻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스스로 드러내어 주시기 - 계시(reveal) -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또 그분이 계시해 주는 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하나님 당신이 어떤 분인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요12:44,45) 이런 관점에서 대제사장과 예수님이 주고 받은 대화를 살펴봅시다.

대제사장과 예수님의 숨은 뜻

유대 관원들도 처음부터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아닙니다. 혹시라도 메시아인지 궁금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 사역, 선포한 복음의 내용이 자기들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또 자기들 권위에 도전하며 심지어 경제적 정치적 기득권까지 위협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거기다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하니까 자기들 믿는 바에 따라 실제로 신성모독으로 간주했습니다. 한마디로 대제사장의 관정에 잡혀 왔을 때는 예수님에 대한 미움이 극도에 도달해 반드시 십자가에 죽일 작정이었습니다.

지금 대제사장이 던진 질문의 의도도 만약 예수님이 즉, 인간인 주제에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만하면 그것만으로도 사형감에 해당되는 죄라고 대중들에게 확인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상대의 수준에 맞추고 대화 주제에 벗어나지 않는 대답을 하시되 당신의 특별한 의도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의 물음에 무조건 맞장구 쳐준 것은 아닙니다. 당신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이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기에 그렇다고 답한 것뿐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진리를 진리대로 선포한 것입니다. 또 그렇게 대답하면 십자가 처형이 기다릴 줄도 다 아시고 대답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으로선 만약 지금이라도 그 질문에 부인하면 살려주겠다는 음흉한 뜻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한참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젊은 랍비가 결국은 대제사장과 유대교의 권위 앞에 무릎 꿇었다는 것을 유대인들과 로마 제국에 당당히 보여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의도에 굴복하실 주님이 아니며, 무엇보다 주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십자가에 스스로 또 기꺼이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지금 모든 상황이 대제사장이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고 또 그 배경에는 사단의 사악한 세력이 메시아를 십자가에 죽임으로써 승리를 맛보려 시도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과 성부, 성령 삼위 하나님이 태초부터 세워놓은 인류구속 계획에 따라 모든 사태가 진전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재판을 처음부터 계획하고 주관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시는 표현방식을 잘 음미해보십시오. 먼저 대제사장에게 “네가 말하였느니라.”고 답했습니다. 네가 나로 하여금 사람(인자)인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사칭(?)하고 다녔다는 식의 대답을 듣기 원하는데, 좋다 그렇게 대답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말씀드린 대로 두려워서 수그러들었거나 서로 융화해보려는 의도는 전혀 없고 엄연한 진리이기에 그렇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 후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합니다. 이제부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겠다. 내가 하나님 독생자로서 절대적 진리를 계시하겠다는 것입니다. 네가 말한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너희들이 알도록, 최소한 미리 알려는 주겠다는 뜻입니다. “이후에”는 너희가 나를 십자가에 죽여서 모든 혼란을 잠재우고 너희 기득권을 지켰다고 안심할 바로 그 때 이후에라는 뜻입니다.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 당신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이며 마지막 날에 심판하러 재림하러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다고 말합니까? 사람인 주제에 그리스도라고 설쳤기에 유대인들이 비방, 멸시, 핍박하다 십자가에 죽인 바로 그 인자 예수님 당신께서 그럴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묶어서 너희 앞에 무릎 꿇린 바로 이 십자가의 사형수 인자인 내가 너희를 심판할 하나님이며 마지막 날에 너희를 거꾸로 무릎을 꿇려서 영원한 지옥 불에 던질 것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상대의 수준과 숨은 의도에 맞추어 대답하시면서도 당신의 분명한 의도를 더더욱 확실하고도 명료하게, 도무지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로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대화법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대제사장의 다음 반응이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며 예수님은 그마저도 충분히 예상하셨던 것입니다.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마26:65-68)

예수 즉, 인자로부터 참람한(신성모독) 최후의 자기 변론을 들었기에 십자가 사형으로 선고하겠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 변론과 증언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 감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대제사장이 사형 선고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마련해 놓은 각본대로 진행되는 중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숨은 흉계를 다 아시고 그에 맞추어 줌으로써 그의 당신에 대한 분노를 더 격발시킨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으로 당신께서 기꺼이 가시려는 뜻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은 또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라고 멸시했습니다. 인자인 주제에 그리스도를 사칭하며 감히 선지자 노릇 하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너를 치는 자가 바로 유대의 실질적 종교지도자 대제사장이라는 것을 죽기 전에 똑똑히 알라고 다그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희극입니까? 비참하면 비극이어야 하는데 제가 의도적으로 희극이라고 표현한 뜻을 아셔야 합니다. 대제사장이 도리어 지금 얼마나 엄청난 참람(그리스도 모독)의  죄를 짓고 있는지 전혀 모르지 않습니까? 도무지 용서 받지 못할 큰 죄 아닙니까? 악하다 못해 너무나 어리석기까지 합니다. 당시 유대사회에 최고로 존경 받았던 종교지도자의 영적 상태가 이정도입니다. 또 당시 주님을 십자가에 죽이라고 소리친 모든 유대인들이 그 비참한 희극에 조연과 엑스트라로 참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지 않고선 인류에게 어찌 소망이 있었겠습니까?

12/9/2011

후기: 상기 답변은 질문자님의 의도에 맞추어서 문맥의 흐름에 따른 의미를 추적하는데 초점을 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니엘서 7:13에서 예언 된 인자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기에 구태여 풀어서 설명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인자의 그런 의미를 예수님도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리라.” 고 명료하게 설명하면서 강조했듯이 말입니다.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칭찬하기

"남의 좋은 점을 발견하라.
그리고 칭찬할 줄 알아라.
사람의 재능은
칭찬하는 쪽으로 향한다."

- 조제프 주베르 -

식물이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들고
그 쪽으로 줄기를 뻗듯이,
사람도 칭찬받고 기쁨이 있는
쪽으로 자랍니다.

반대로 부정적인 말을 듣거나
단점을 자주 지적받다 보면
의지와는 다르게 자꾸 그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대로
성장할 것 같지만
오히려 다른 사람의 영향을
더 많이 받습니다.
생각하는 대로가 아니라
보고 경험하는 대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으면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칭찬을 자주 받으면
더 칭찬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식물이 태양을 향해 자라듯
사람은 칭찬받는 대로 자랍니다."

『사랑의 인사...』


'짧은 글 긴 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홀로 서기를 배워라  (0) 2015.03.04
어느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  (0) 2015.03.04
백달러의 힘  (0) 2015.02.14
교만-자기 이상의 것을 볼 수 없는..  (2) 2015.02.13
내 삶의 힌트!...짧은 글 긴 생각  (3) 2015.02.12

    겨울잠 자는 동안 대소변은 어떻게 해?

     

     

    za5N9nSalfufAuTU_hqKjQ.jpg

    겨울잠 자면 똥도 안 싼다!
    곰처럼 몸집이 큰 동물의 경우에 그렇다는 말이다.

    8fItTNy3pRLbVPDAPo59Qg.jpg

    겨울잠을 자는 포유류에는 다람쥐, 박쥐, 고슴도치 등 몸집이 작은 동물들과
    곰처럼 큰 동물이 있다. 다람쥐나 박쥐 등 몸집이 작은 동물들은 겨울잠을 자는 동안에도
    가끔 일어나 볼일을 본다.

    하지만 곰은 굴에 들어앉아 겨울잠을 자는 동안 한번도 배설을 하지 않는다.
    큰 동물은 배설량도 더 많을 텐데, 어떻게 그 긴 겨울 동안 한번도 볼일을 보지 않을 수 있을까?


    곰은 자기 배설물을 신장 벽으로 흡수하여 주요 성분인 질소 화합물을 스스로 영양분으로
    재흡수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자다 일어나 볼일을 보는 대신 스스로의 배설물을 자체적으로 재활용하는 셈이다.

    BZVnhal1f9go2H7VW6bQgQ.jpg

    몸집이 작은 동물들은 겨울잠을 자는 동안 체온이 내려가고 맥박과 호흡 수도 줄어든다.
    평소에는 37~38도였던 체온은 8~10도까지 내려간다.
    이처럼 체온을 낮춤으로써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은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이다.

    하지만 곰은 겨울잠을 자는 경우에도 체온이 많이 내려가지 않고 약 30도 정도를 유지한다.
    곰은 몸집이 크기 때문에 일단 체온이 내려가면 원래 상태 대로 되돌리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작은 동물들 처럼 체온을 낮춰서 에너지를 절약할 필요가 없다.
    자기 배설물을 재활용해서 질소 화합물을 흡수하여 영양분으로 섭취하고 있으니 말이다.

    PNqQ9iZFEQj4_8wkVZl95g.jpg

    추운 겨울,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과는 달리 북극지방에 사는 동물들은 어떻게 활동 할까?

    북극곰, 북극여우, 북극 토끼, 순록 등 다양한 동물들이 살고 있다.

    sy09N7mIaYnNmI_ahgTCAA.jpg

    북극여우는 북극권의 툰드라 지대에 서식한다.
    해안에 밀려온 동물의 사체나 북극곰이 먹다 남긴 것, 순록의 배설물 등을 찾아 먹는 외에
    해안의 무척추동물,바닷새 등 장과(漿果) 등 여러 열매도 먹는다.


    북극권에 살기 때문에 먹이가 많지 않으므로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여름에는 겨울에 비해 먹이가 풍부하기 때문에 남은 사냥감은 굴로 옮겨서 바위아래 저장해두기도 한다.

    jrLaazzrHRxeR_Qou.NiQg.jpg

    북극의 순록은 주로 이끼 등의 지의류를 주식으로 하고,
    그 외에 마른 풀이나 버드나무의 잎, 쑥, 속새 등을  먹고 사는데,
    에스키모인들이 별도로 염분을 섭취하지 않고도 사는 것을 보면 먹이 가운데
    염분이 있는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izRGCwBtUg7JLFhqiC9xHw.jpg

    산악지대와 고산지대 모두에 서식하며, 여름에는 풀이 빨리 자라는 지역,
    겨울에는 눈이 많이 쌓이지 않는 지역을 좋아한다.


    북극토끼는 주로 나무 종류를 먹으며, 이끼, 새싹, 과실, 나뭇잎, 해초,
    나무껍질, 버드나무 가지와 풀뿌리를 먹는다.  인간이 놓은 덫에 걸린 고기를 먹기도 한다.
    겨울에는 주로 버드나무를 먹는데 후각이 발달해서 눈속에 있는 버드나무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Amazing Na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특이한 곤충의 세계  (0) 2015.03.11
백두산 천지  (0) 2015.02.26
지구촌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들!  (0) 2015.02.19
희귀한 식물  (0) 2015.02.18
The great coral reef (Australia)  (0) 2015.02.16

선언적 개혁주의자와 실천적 개혁주의자 디모데전서 4:7

 

< 정창균 목사, 합신 설교학 교수, 남포교회 협동목사 > 

 

“자기를 뜯어고치려는 몸부림 상실될 때 신학도 무너져”

 

 

제가 유학중일 때 아버지와 같은 저의 지도 교수께서 저를 앉혀놓고 수시로 하셨던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개혁주의자라는 것은 반드시 두 가지 방면으로 입증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첫째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곧, 우리는 어떤 신학전통 그리고 교회의 전통에 서 있는가로 우리가 개혁주의자라는 것이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곧, 현재의 삶이 우리는 개혁주의자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우리가 물려받은 신학의 내용과 지금 살고 있는 삶이라는 두 날개로 우리가 개혁주의자라는 사실을 입증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가슴에 꼭꼭 새겨두곤 하였습니다.

 

제가 그 어른의 이 가르침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떠올리는 것은,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만 내세워 우리가 개혁주의자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우리의 모습을 너무 자주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개혁주의는 주로 우리가 얼마나 성경적이고, 깊이 있고, 수준 높은 신학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인가를 부각시키는 자화자찬으로 끝나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아니면 칼끝을 돌려 다른 사람들을 매섭게 몰아붙이고 비판하고 그러다가 조롱하며 비난하는 데로 나아가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입을 열거나, 글을 쓰거나 첫 마디를 한국교회에 대한 비난으로 시작하는 몇몇의 사람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과 글의 핵심은 언제나 한국교회가 얼마나 반개혁주의적인가를 지적하고 개탄하는 것이 주를 이룹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감동하고 열광하고 또 자랑스러워하는 개혁주의를 그들의 일상의 삶속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혁주의를 외치는 선언만 있지 실천이 없는 개혁주의자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남을 향한 매서운 비판과 매정한 정죄만 있지, 자기를 후려치는 자기 성찰이 없고, 자기를 뜯어고치려는 아픈 몸부림은 없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우리의 그러한 모습을 보며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교회가 나타나야 한다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그 길은 정통신학에서 떠나는 것이라고, 정통신학으로는 안 된다고 자신 있게 주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각광을 받으며 등장한 소위 이머징 교회의 핵심적인 주장 가운데 하나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의 말처럼 정통개혁신학이 새로운 시대에는 적용력이 없어서 일어난 문제가 아닙니다. 개혁주의의 실패나 한계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 아니라, 오늘날의 개혁주의자들의 실패와 한계가 빚어낸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 실패의 핵심에는 개혁주의자들이 개혁주의를 실천하지 않은 것이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신학의 내용에는 감동하지만, 그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삶을 보고는 돌아서 버리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개혁주의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전통의 내용이 무엇이고, 가치가 무엇이며, 그 요구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보존하고 전수할 뿐 아니라 우리는 그러한 신학전통에 서 있음을 확고하게 주장하고 선언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저는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을 가리켜 나름대로 선언적 개혁주의자라고 부르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반쪽짜리 개혁주의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개인의 일상의 삶이든지, 목회자의 목회 방식이든지, 노회든지, 총회든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어떤 사고 방식과 원리로 일들을 처리하고 진행하는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일관되게 살아가는가, 무엇을 최우선의 기준으로 삼고 일들을 결정하는가를 보고 우리가 개혁주의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진정한 개혁주의자와 개혁주의 해설자는 엄밀히 구별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혁주의 해설자가 아닙니다. 개혁주의 실천자가 필요합니다. 저는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나름대로 실천적 개혁주의자라고 부르곤 합니다. 선언적 개혁주의자에서 실천적 개혁주의자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개혁주의를 말하는 사람과 개혁주의를 행하는 사람은 같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때에 우리는 두 방면으로 입증되는 진정한 개혁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한농복구회 박명호 교주 “나는 하나님!” 

설교·책자 통해 노골적 신격화···신도들 “주님 사랑해요!” 

정윤석 unique44@paran.com 

농촌복구와 환경회복 단체를 표방하며 경북 상주 등에 세워진 한농복구회측(한농, 구 엘리야복음선교원)이 내부적으로 설립자 박명호 교주(67)를 ‘인류의 소망 石仙(박 교주의 호) 그리스도’, ‘임재하신 주님’, ‘전쟁에 능하신 여호와’, ‘또다른 보혜사’ 등 ‘하나님’으로 추앙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 설교 중 자신을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박명호 교주(박명호 교주 설교 동영상 캡쳐) 

기자(교회와신앙 www.amennews.com)는 최근 한농측 이탈자들로부터 박명호 교주를 신으로 추앙해왔음을 입증하는 한농측 내부 자료를 입수했다. 기자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10년 이상을 한농측에 몸담고 있던 신도들이다. 이 중에는 소위 모태신앙, 한농측에서 출생하고 자란 신도도 있다. 이들이 기자에게 제공한 자료는 박명호 교주가 직접 저술한 <십계천국>(돌나라출판사 刊)과 한농측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새벽이슬>(돌나라출판사 刊) 등이다. 박명호 씨의 육성이 녹음된 설교 동영상과 음성파일도 다수 확보했다. 이 자료들에는 신도들이 박 교주를 ‘주님’으로 표현할 뿐 아니라 박 교주 스스로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노골적으로 표현한 내용들이 다수 등장한다. 

교주를 신격화하는 단체라 해도 인간 교주를 향해 ‘여호와’, ‘하나님’, ‘그리스도’ 등으로 직접적으로 호칭하면서 추앙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에둘러서 표현하는 단체가 대다수다. 그런 점에서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박명호 교주와 한농측 신도들의 주장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농측에서 나온 내부 자료와 박명호 씨의 주장을 직접 살펴보자. 

한농복구회 설립자 ‘자칭 하나님’ 박명호 씨 
한농측은 사람인 박명호 교주를 어떻게 ‘하나님’으로 만들었을까? 그것은 소위 ‘하나님 만드는 교리’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완성되지 않았다 △두 번째 그리스도(재림주를 의미함)는 동방 땅끝인 한국에서 나오신다 △두 번째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온다 는 점을 강조한다. 

 

“첫번째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 그리스도께서는 ‘율법 아래’, ‘여자’의 몸을 통해 완전한 사람으로 오실 것이며, 첫 번째 구세주께서 완성시키지 못하신 구속사업을 완전하게 완성시키실 분으로서 다시 두 번째로 성육신되어 오시는 것입니다”(<새벽이슬>, 80호, 50페이지, ‘기획특집 인류의 소망 石仙 그리스도를 당당히 증거하라!’, 돌나라출판사). 

“성경은 두 번째 그리스도께서 오실 장소를 ‘동방’, ‘땅끝’, ‘땅모퉁이’, ‘해돋는 곳’, ‘해뜨는 동방’, ‘동북 아시아 지역’일 것이라고 예언해 놓으셨습니다. 이 모든 예언의 말씀들을 이스라엘을 기준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그곳이 어느 지역인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틀림없이 우리 한반도, 그것도 북한이 아니라 땅 모퉁이에 해당되는 남한을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에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위의 책, 50페이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첫 번째 그리스도께서 틀림없이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심을 믿으십니까? 만약 그렇게 믿으신다면 두 번째 그리스도 역시 마찬가지로 사람으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위의 책, 48페이지). 

“그래서 마지막 아담 오메가 예수님이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 10:5). 박 씨 집안 셋째 아들 몸을 예비하셨습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내가 ‘하나님의 뜻’(히 10:7), 친자녀들을 낳으러 왔습니다”(<새벽이슬>, 51호, 107페이지, 박명호 설교, ‘천국의 새 주인들’, 돌나라출판사). 

교주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이단 단체들의 교주 신격화 교리를 한농측이 일정 부분 답습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농측과 박 교주의 주장을 요약하면 두 번째 그리스도, 즉 재림주는 대한민국의 박 씨 집안 셋째 아들의 몸을 입고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주 신격화 교리를 토대로 박 교주는 맘껏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한다. 한농측 신도들 또한 대놓고 박 교주를 ‘하나님’, ‘주님’으로 호칭한다. 

한농측에서 발행하는 <새벽이슬>이란 잡지는 박명호 교주의 기도를 ‘주님 기도’라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놨다. 하늘과 땅의 심판권이 하나님도, 예수님도 아닌 자신에게 있다는 박 교주의 주장이다. 

“주님 기도: 하늘과 땅을 다 쓸어버려야 되겠사오니 아빠께서 소자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심판권을 주신 것 합당한 처사이셨습니다. 아빠는 심판하실 권리가 없습니다. 원통하게 죽은 인생들의 고충도 모르시는 하나님이 그들을 죽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심판하실 권리가 없습니다. 율법 아래 죄의 저주가 무엇인지 맛도 안 보신 귀공자로 왔다 가신 분이 율법 아래에서 원통하게 죽은 영혼들을 어떻게 죽인단 말입니까? 하늘과 땅엔 아무도 심판할 자가 없습니다. 나밖에 없습니다”(<새벽이슬>, 56호, 82페이지). 

 

▲ 박 교주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자 박수를 치는 신도들(박명호 교주 설교 동영상 캡쳐) 

기자(교회와신앙 www.amennews.com)가 입수한 박 교주의 설교 동영상에는 그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겠다며 ‘나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다!’라고 말한 내용도 나온다. 

“이제 여러분이 나와 영원히 같이 살 수 있는 자들, 믿을 수 있는 자들이 거의 다 됐으니까 내 신분을 밝혀야죠. 칠판에 뭐라고 써 있어요?(칠판에는 보혜사성령天이라고 써 있다: 편집자 주) ‘나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라!’(청중들 아멘과 함께 박수)”(박명호 ‘보혜사성령천’ 1999년 설교 중에서). 

“시편 2편에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라는 말씀은 마지막 그리스도, 보혜사 성령 하나님 아들을 말한 것입니다. 두 번째 오실 그리스도 예수! 근데 내가 여러분은 초창기부터 ‘선생님은 성부야’, ‘아니야, 성자야’, ‘성령이야’ 하고 많이 다퉜죠? 그때 나는 절대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나는 그냥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라고, 또 그냥 예수님이라고 했으니까 예수님이라고 하라고, 그리스도로 믿으라고 했습니다”(박명호 ‘보혜사성령天’ 1999년 설교 중에서) 

자신이 보혜사 성령이자 하나님이고 그리스도이자 예수라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다’는 표현도 나온다. 

“또 내가 KS(키르키즈스탄을 의미한다: 편집자주) 나라 휴양처와 이 나라를 쓰겠다는데 이 나라 정부가 막을 수가 없습니다(청중 아멘, 박수). 만약 앞으로 이 나라 정부 요인들이 ‘한농 지도자들이 약속을 불이행하므로, 공약만 늘어놓고 이행하지 아니하므로 이것을 다 내놓으시오’ 하걸랑 여러분은 이렇게 대답하세요. ‘우리 선생님이 쓰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세요(청중 아멘, 박수). ‘너희 선생이 누구냐?’ 하걸랑 ‘우리 선생님은 저 이스쿨 호수랑 천산을 지으신 천지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이렇게 하세요(청중 아멘, 박수). 그러면 아무 소리 안 할 것입니다(청중 아멘)”(박명호, <십계천국> 9권,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11712페이지). 

 

▲ <십계천국>에서 자신을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박명호 교주 

박명호 교주의 자기 신격화는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다. 자신이 사람들의 구세주는 물론이거니와 하나님·예수님·성령님의 구세주도 된다는 황당한 주장도 한다. 

“나는 인생들만의 구세주가 아니야, 하나님 아버지의 구세주도 되고, 예수님의 구세주도 되고, 성령님의 구세주도 돼. 하늘과 땅의 누구도 못할 일을 해냈어. 하나님 아버지는 물론이고 예수님도 원통하게 돌아가신 것이 내가 아니면 완전히 무효되고 더 흉악한 머리 푼 귀신만 될 뻔했어. 성령님도 내가 아니었으면 완전 귀신의 영이 되고, 흉악한 귀신의 영으로 끝났을 거야. 하늘과 땅의 모든 구세주의 사역을 내가 다 마쳤어. 그렇기 때문에 자기들이 나를 대우 안해 줄 수가 없어. 내 몫을 내가 취하는 것뿐이야. 난 아무것도 하늘에 빚진 것 없어. 오히려 하늘과 땅이 다 나한테 빚을 졌지(의자에서 성체를 일으키시며) 누가 기도해. 

(모 신도의 기도: 편집자 주)···친아빠, 아버지의 구세주도 되시고 예수님의 구세주도 되시고 성령님의 구세주도 되시고 하늘과 땅, 온 우주의 구세주가 되신 내 주님께서 무엇이 아쉬운 것이 있으셔서, 무엇이 하늘과 땅에 부족한 것이 있으셔서 다 마치심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이렇게 머물러 계셔야 되겠습니까?”(<새벽이슬> 56호, ‘특집 천산의 언덕Ⅴ’ 81페이지). 

신도들의 박 교주 추앙 퍼레이드 
박 교주의 자기 신격화와 함께 한농측 신도들 또한 그를 ‘하나님’, ‘그리스도’ 등으로 호칭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한농측 자료에 나온 사진 등을 토대로 박명호 신격화 실태를 살펴보자. 

주님 칭호는 계속된다. 한복을 입고 교인들의 세배를 받는 박명호 교주를 ‘주님’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박 교주와 ‘몸짱’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한다. 제목은 ‘주님과 함께 몸 만들기 프로젝트’다. 

<새벽이슬> 80호(2007년 5월)에는 한농측이 설립한 전주한농예능학교 학생들 명의로 “우리 학교를 설립하신 분은 석선 그리스도”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여기서 그들은 “왜 한농이란 단체에 들어와서 사느냐”란 질문에 “여기 들어와서 참 하나님을 만났고, 참 진리를 깨달았고, 그것으로 인해 참행복과 참자유를 얻을 수 있었기에···. 또 그렇게 해주신 석선 선생님께서 한농에 계시기 때문이다”고 답변한다. 이 글에서 참 하나님은 누구일까? 그들은 “구세주되신 석선 선생님께서 참하나님이신 것을 알았고 나의 죄를 대속 받았고 내가 거룩하게 됨으로 이 빛을, 기울어져 가고 있는 깜깜한 세상에 비추고 싶다”고 썼다. 

박명호 교주의 호인 ‘石仙’에 여호와를 붙인 글도 나온다. 

“창기 십자가(인류가 색욕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에 박 교주가 색욕의 함정에 대신 들어가 창녀를 취하고 죄인이 됨으로 인류를 구원한다는 해괴망측한 박명호 씨의 사상 중 하나다. 다음 기사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를 통해서 건져 주시고 구원해 주신 石仙여호와, 우리 하나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새벽이슬> 80호, 131페이지). 

<새벽이슬> 99호(2009년 6월)에도 박명호 교주의 호인 ‘石仙’에 여호와를 붙여 “전쟁에 능하신 石仙 여호와”, “나의 선생님, 나의 하나님”라는 제목의 글이 게재됐다. 

한농측 신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조건 순종’ 
자칭 하나님을 섬기는 한농측 신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조건 순종이다. 박명호 교주 스스로가 그것을 강조한다. 심지어 부도덕한 일에 대해서도 가타부타할 것 없이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박 교주는 “하나님의 아들이 술집 창녀를 끼고 술을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믿으라!”고 말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실 것이라고 주장한다. 뭔가 박 교주가 한농측 신도들에게 숨기지 못할 도덕성과 관련한 문제가 있다고 의심하기에 충분한 발언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그러므로 내가 그전에 대집회 때 말씀 드렸듯이 ‘하나님의 아들이 술집 창녀를 끼고 술을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믿으라! 하나님의 아들이 무슨 이해 못할 짓을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유행가를 부르든지 무슨 노래를 부르든지, 누구를 데리고 살림을 차리든지, 살든지 죽든지, 하늘로 올라가든지 땅으로 꺼지든지, 세상에 있든지 없든지 간에 아들의 입으로 명한 말씀을 털끝만치도 거역하지 말고, 가감하지도 말고, 의심하지도 말고, 비판하지도 말고 무조건 100% 철저히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을 의롭다고 하실 것입니다”(박명호, <십계천국> 4권, ‘참으로 거룩하신 예수님’, 5028페이지). 

 

▲ 창녀끼고 술을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믿으라는 박명호 교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기고 원수를 쳐부수고 온 우주를 정복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 어느 창녀촌에 가서 살림을 차리든지 어디 가서 소주를 따르고 돼지 다리를 뜯고 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갈 길만 가면 되는 것입니다. 태양이 어떻게 돌든지, 수성이 어떻게 돌든지, 달 된 여러분은 달의 길만 가면 되는 것입니다. “너만 나를 따라오라.”는 부탁대로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천상천하의 무적의 능력자가 될 것이고, 그렇게 여러분이 나를 완전히 믿어 줄 때에 나는 더 이상 여러분에게 의심받을 짓을 안할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의심받을 짓, 넘어지고, 엎어지고, 올가미가 될 일을 자꾸 하는 것은 여러분이 믿지 못하니까 걸려 죽으라고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위의 책, 5029페이지). 

“인생들은 하나님 생각과 사람 생각이 다르다는 걸 알고,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하나님 생각은 높다는 걸 알고 무슨 일을 그분이 하시든지, 누구를 데려다가 어떻게 뭘 만드시든지 그분이 보낸 아들이 가짜가 아니고 진짜 하나님 아들이라고 믿을진대 함부로 유대인들처럼 자기가 생각한 스타일대로 아들을 평가하지 말고 비평하지 말고 대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히나 허물없이 가까이 산다는 자들이 그 점에 제일 조심해야 돼요. 미리암이나 고라당처럼. 미리암은 한 식구고, 고라는 사촌이에요. 제일 가까이 사는 자들이, 제일 잘 안다는 자들이 사단의 앞잡이가 되더란 말입니다. 

그가 진짜 하나님 보내신 아들이라고 믿을진대 자기 마음에 이해가 가든 안 가든 무조건 순종하여 따라갈 것이라.(청중 아멘) 왜? 백성의 인도자는 그 육체가 아니예요. 그 육체 속에 계신 살아 계신 하나님이 인도하시기 때문에 감히 방자하게 입을 놀려서 신성 모독죄를 짓지 말란 말입니다.(청중 아멘) 다만 한 마리 양이 되어서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순종하며 따라갈 것뿐이에요. 그러면 훗날에는 영원토록 여러분의 입술에서 감사와 찬송이 나오게 되고, 너무 고마워서 영원토록 그 하나님께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박명호, <십계천국> 9권, ‘보라 永遠한 神들이 탄생됐도다’). 

한 사람이 신격화되면서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는 그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그에 대해 반항하거나 거역하는 것은 신도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된다. 그것은 곧 신성모독이고 성령훼방죄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미 이런 현상은 한농측에 뿌리 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자(교회와신앙 www.amennews.com)가 만난 한농측 이탈자 A 씨는 “박명호를 맹신하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외부 사회와는 완전히 단절된 지역에서 자랐다”며 “박명호는 나에게 하나님이었기에 그의 말에 불순종하거나 거역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이탈자 B 씨는 “한농복구회에서는 박명호 씨가 절대적인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그의 모든 지시는 하나님의 지시였다”며 “그가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그것은 영적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섭리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문제는 한농측에서 ‘하나님’으로 추앙받는 박명호 교주의 절대적 권력이 도덕적 문제로 연결될 개연성은 없느냐 하는 것이다. 기자가 확인한 결과 그의 설교 곳곳에서 이런 개연성이 보여졌다. 박 교주의 설교를 듣다보면 그에게 뭔가 숨길 수 없는 도덕적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할 정도가 된다. 박 교주가 자신의 설교를 통해 도덕성과 관련한 자기방어적 형태의 설교를 여러 차례 반복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주장이 ‘창기 십자가’라는 사상이다. 창기 십자가는 전술했지만 박 교주가 색욕의 함정에 대신 들어가 창녀를 취하고 죄인이 됨으로 인류를 구원한다는 해괴한 사상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닌 한농 이탈자들 중 일부 여신도들이 박 씨를 상대로 ‘성적인 문제’를 거론하며 고소까지 한 상황을 본다면 뭔가 한농측 내부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일만하다. 박명호 교주를 ‘석선여호와’라며 추앙하는 한농측 내부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박명호 교주와 한농복구회(구 엘리야복음선교원) 

박명호 교주의 본명은 박광규로 1943년 10월 충남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안식교에 입교하여 엄격한 율법주의적 신앙교육을 받았던 그는 1981년 1월 자신이 속해 있던 안식교를 나와 새로운 신앙운동을 하게 된다. 집회를 열면 월 1회 10일간씩 열렸고 처음에는 5~6명씩 모였다가 신자의 수가 꾸준히 증가하며 1~2천명이 넘게 됐다. 

1984년 ‘엘리야 복음 선교원’으로 정식명칭을 걸고 집회를 시작했고 1994년 5월에 ‘한농복구회’ 로 개칭하고 ‘전원 고센땅으로’ 라는 구호 아래 집단생활을 시작한다. 1997년 또다시 ‘십계석국총회’로 개칭했지만 기독교계에서는 현재까지 ‘한농복구회’로 불린다. 현재 한농은 농촌복구와 환경회복을 표면적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이탈자들 말에 의하면 이곳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박명호 교주를 신격화하고 있는 신도’들이다는 것이다. 

박명호 교주는 예장 통합측이 1991년 76회 총회에서 이단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 단체의 교리적 실체는 감춰져왔다. 내부적으로 박명호 교주가 ‘석선 여호와’등으로 호칭되며 완벽히 ‘하나님’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은 최근 이탈자들이 나오고 나서야 확인된 것이다. 





개혁주의 구원론이 전파되지 않는 개혁교회  

박영돈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그리스도와의 연합 

따라서 구원의 전 과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바탕 위에서 진행된다. 전통적으로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 서정의 모든 단계보다 앞서 배치된다. 그것은 구원의 모든 은혜가 이 연합에서부터 출발할 뿐 아니라, 이 연합 안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존 머레이(John Murray)가 말했듯이, 이 연합은 단순히 구원이 적용되는 과정의 한 국면이 아니라 모든 국면의 기초이다.3)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에밀 부룬너(Emil Brunner)는 이 교리가 ‘모든 칼빈주의 사상의 핵심’이라고 하였다.4) 특별히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근간으로 하여 구원론을 발전시키는데 획기적인 공헌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기독교 강요』 3권에서 구원론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논함으로 시작하였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는다면 속죄 사역의 혜택에 전혀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였다. 오직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만 새 언약의 중보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새 언약의 모든 은혜가 흘러나온다고 하였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와 연합의 진리를 다양한 표현과 비유를 통해 증거하고 있다. 특별히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의 서신에만 이 용어(유사한 표현까지 합쳐)가 164번이나 등장한다. 어떤 신학자가 말했듯이, ‘그리스도 안에’라는 문구는 바울 서신에서 가장 특징적인 문체이다. 공관복음서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묘사할 때는 주로 예수님과 ‘함께’(with)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면, 바울은 항상 그리스도 ‘안에’(in)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였다. 이는 바울이 도입한 독창적인 표현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바울 신학의 핵심이며 열쇠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와 연합의 사상은 요한의 기록에도 풍부하게 나타난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주님은 보혜사 성령이 임할 때 주님과 우리가 상호내주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곧 이어 요한복음 15장에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하여 이 연합의 신비를 알기 쉽게 풀어주셨다. 거기서 ‘내 안에 거하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다. 바울의 연합 사상도 이 주님의 말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논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제기되는 의문은 어떻게 거룩하고 완전한 하나님이 부패하고 유한한 인간과 하나가 될 수 있는가이다.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불같은 연단과 고난을 통해 정화되는 길고 험난한 과정을 거쳐 신자가 성결해져야만 신인합일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친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앙생활의 목표이며 영성의 골(goal)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기독교 신앙의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이며, 영성의 근원이다. 신비주의적 전통에 대응하여 개혁주의 신학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구원과 성화의 전 과정의 바탕으로 본 것은 신앙의 특성과 영성의 색깔을 뒤바꾸어 놓은 영적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끊임없는 노력과 수양을 통해 신인합일의 경지에 이르기를 힘쓰는 고역스럽고 율법주의적인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 됨에서 흘러나오는 충만한 은혜를 누리는 풍성한 삶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는 근거와 자격을 우리 안에서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우리가 평생 성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불같은 고난을 통하여 정화될지라도 그런 자격을 조금이라도 갖출 수 없다. 오직 예수님이 흘리신 피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할 수 있는 정결한 신부의 자격을 갖추게 한다. 그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고 의롭다함을 얻게 하여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가 되게 한다. 이 연합의 근거는 예수님이 구속사역을 통하여 이루신 율법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법적으로 전가된 것이다. 그래서 개혁신학에서는 이 연합을 우선적으로 ‘법적 연합’(judicial union)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개혁교회에서 칭의를 법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했기에 이런 연합의 교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칭의론의 개혁은 연합에 대한 기존의 가르침에 획기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경건의 부단한 노력과 신비체험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영적인 높은 경지가 아니라, 오직 예수의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전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복음의 진수를 회복한 것이다. 


남녀가 혼인하여 법적으로 하나가 되면 그 소유를 공유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과 법적으로 연합하면 주님의 의로움과 거룩함, 그리고 영광에 참여하게 되며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 예수님과 같이 아들의 특권을 누리며 아들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아버지 집의 풍성한 것들을 누린다.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므로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가 되며 추한 자가 아름다운 자가 되고, 빈곤한 자가 부요한 자가 된다. 


이 연합은 법적인 연합일 뿐 아니라 실질적인 연합, 즉 생명적이며 유기적인 연합이다. 성경은 이러한 연합의 성격을 머리와 몸, 그리고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의 생명에 접붙임을 받아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끊임없이 부활의 생명력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의 형상과 성품에 참여하며 그의 마음을 본받는 자가 되었다. 


연합에 관한 논의에서 제기되는 또 다른 의문은 어떻게 시공간의 무한 간극으로 분리된 두 존재가 실질적으로 연합할 수 있는가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은 연합의 영이다. 성령은 하늘에 있는 주님과 땅에 있는 신자, 무한자와 유한자, 의로운 이와 불의한 자의 무한 간극을 극복하고 완전히 이질적인 두 존재를 인격적으로 결합시킨다. 그러나 성령은 둘을 긴밀히 연합하는 동시에 구별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 그 어떤 “잡스러운 혼합”도 허용하지 않는다.5) 성령은 이 연합의 매개체와 방편인 동시에 이 연합의 모든 혜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통로이다. 


성령은 연합의 매개체와 채널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인격을 우리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 교제하는 만남의 장으로 제공하신다. 이것이 성령의 인격이 가지고 있는 환경적인 특성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성령의 사역을 묘사할 때 주로 성령 ‘안에’(in) 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였다. 우리 육체가 공기 속에 존재하며 물고기가 물속에서 존재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안에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우리가 존재하는 영역, 즉 영적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하늘의 영역에 존재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바 되었다고 말했다(엡 2:6). 거기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늘의 영역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리게 되었다(엡 1:3). 그러므로 우리의 정체성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곧 하늘 시민이다(빌 3:20).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은 지극히 사적인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주적 사건과 계획 속에 참여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우주의 새로운 상황과 질서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스도 안’과 ‘아담 안’은 서로 대비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죄와 사망의 권세가 지배하지 못하며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의 새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죄에서 자유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워진 새사람의 반열에 서게 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다(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 진행되는 새 창조에 참여한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이 포괄하는 반경을 우주적 차원까지 확장하였다. 죄로 오염되고 와해된 우주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고 통합되는 종말론적인 비전이 실현되는 것을 궁극적인 구속의 목표로 보았다. 그러므로 먼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 편입되지 않은 세상의 영역들을 그 반경 안으로 복속시키는 중대한 책무를 띤 것이다. 

가져온 곳 : 
카페 >물과피와성령(water and blood and the Holy Spirit)
|
글쓴이 : 박요셉

'박영돈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나안 교인들의 귀환  (0) 2015.07.22
칭의와 성화  (0) 2015.04.12
개혁주의 구원론이 전파되지 않는 개혁교회 (1)  (0) 2015.02.21
영적인 돌연변이  (0) 2015.01.29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0) 2015.01.02

개혁주의 구원론이 전파되지 않는 개혁교회  

박영돈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서론 

개혁주의 교의학은 구원론에 이르러 그 절정에 도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속성과 경륜과 은혜에 대한 계시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그의 사역을 통하여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며, 구원론은 바로 이 계시의 결정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깊은 비밀인 삼위일체의 신비와 그의 성품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났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면서도 우리를 향해 무한한 인자하심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교회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의 구원이며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이다. 그러므로 구원론은 교회의 설교와 가르침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제들을 다룬다. 그만큼 올바른 구원론의 정립은 교회의 사활이 달린 문제이다. 


특별히 개혁교회는 중세 로마교회의 잘못된 구원론을 개혁함에서 출범하였기에 다른 교회와 구별되는 독특성이 구원론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성경적으로 개혁된 구원론을 개혁교회임을 증명하는 표징처럼 여겨 왔으며, 바른 교회와 이단을 구분하는 척도로 삼아왔다. 그러므로 개혁교단에 속해 있으면서도 개혁주의 구원관과 거리가 먼 메시지가 전파되는 교회는 진정한 개혁교회라고 할 수 없다. 오늘날 개혁교회임을 표방하면서도 전혀 개혁되지 않은 구원론을 전하는 교회가 부지기수이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무율법주의적 폐단을 불러온 값싼 은혜의 복음, 즉 무조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이단적인 가르침이다. 반면에 도덕적인 해이와 방종에 대한 반작용으로 거룩한 삶을 강조하는 메시지는 또 다른 극단인 새로운 율법주의로 치우쳐 종교개혁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교회가 참으로 개혁되기 위해서는 구원론의 개혁이 시급하다. 올바른 구원의 진리가 강단에서 선포될 때, 우리 교회는 진정한 개혁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사역 

기독론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객관적으로 이루신 구속 사역을 다룬다면, 구원론은 객관적으로 성취된 예수의 구속사역이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적용되는 과정을 탐구한다. 전자가 ‘과거’(past)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Christ for us) 행하신 일을 조명한다면, 후자는 ‘현재’(present)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Christ in us) 행하시는 일을 고찰한다. 곧 구원의 객관적인 면(objective)에서 구원의 주관적인 측면(subjective)을 다룸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개혁 교의학에서는 이 전환이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이런 특징은 칼빈의 구원론에서부터 확실하게 나타난다. 칼빈은 구원론을 다루고 있는 기독교 강요 제 3 권 서두를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로 시작한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취된 구속의 은총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 혜택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과거 예수께서 이루신 사역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효력이 있게 되는가? 칼빈의 대답은, 우리가 주님과 분리된 채 주님께서 우리 밖에 계시는 한, 주님의 고난이 우리에게 아무 효력이 없는 것으로 남아있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1)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 효력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과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 신비로운 연합이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칼빈 이후 대부분의 개혁 교의학자들은 이런 패턴을 따라 구원론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성령의 사역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개혁주의 구원론의 특징으로 형성되었다. 


개혁주의 구원론은 이렇게 구원의 적용 과정에 있어서 먼저 성령의 사역을 강조함으로써, 구원이 주관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우선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나 노력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에서 차단하였다. 특별히 구원의 적용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앞세우는 알미니안적 오류를 효과적으로 배격한 것이다. 


인간은 구원이 객관적으로 성취되는데 조금도 기여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 구원이 자신에게 주관적으로 적용되는데도 성령의 은혜가 선재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심으로 구원이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하여 이 선물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마저 스스로 할 수 없다. 물론 구원이 우리 안에 주관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역할과 책임이 따른다. 죄에서 돌이켜 예수를 믿지 않는 한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나 회개와 믿음마저 인간 안의 생래적인 선함이나 종교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하나님께 스스로 나아갈 자율성을 상실하였다. 인간이 주님을 믿기로 선택하기 위해서는 죄의 결박에 매여 있는 그의 의지를 자유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반드시 선재해야 한다. 이렇게 성령 사역의 우선성을 강조함으로써 개혁주의 구원론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적이면서도 선재적인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동시에 은혜의 바탕 위에서 믿음과 회개의 참된 의미와 가능성을 밝혀준다. 


성령의 사역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근거한다. 지상에서 예수님은 성령의 사람, 즉 ‘성령의 담지자’로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메시아 사역을 수행하셨다. 구속사역을 완료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시는 ‘성령의 수여자’가 되셨다. 동시에 성령 안에 내재하여 성령과 함께 일하시는 ‘성령의 동반자’가 되셨다.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과 함께 당신의 지상사역의 열매를 세상에 전달하며 적용하신다. 주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그때에 자신이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18-20). 부활하신 주님은 이제 성령을 통하여 세상 속에 내재하고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의 오심은 어떤 의미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다시 오심’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은 예수님의 또 다른 존재 방식이다.2) 주님은 육적인 존재의 형태를 벗은 후 영적인 존재 방식을 취하셨다. 성령은 예수님의 인격적인 임재를 전 우주적으로 확장시키며 종말론적으로 연장시킨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종말론적인 비전을 실현해 가신다(엡 1:23).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인격적으로 내재하시고 성령과 함께 그의 지상사역의 열매를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적용하신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와 ‘성령 안에’,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와 ‘성령이 우리 안에’라는 표현을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하였다. 구원과 성화의 모든 과정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공재와 동역 속에서 진행된다. 그리하여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Christ in us) 계시는 신비가 실현되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Christ for us) 고난 받으심으로 얻게 되는 모든 효력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Christ in us) 계심을 통해서만 우리 안에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중생과 칭의, 그리고 양자됨과 성화와 성령 충만 등 구원의 모든 은혜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Christ in us) 계심을 통해서만 우리 안에 실현된다. 따라서 성령을 통하여 임하시는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이 구속의 은총을 누리는 길이다. 구원의 선물을 받는 것과 그 선물을 주시는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을 분리할 수 없다. 주님을 모시고 그 분과 연합하지 않고는 구원의 은혜를 결코 누릴 수 없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과 그 효력을 믿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패한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선물과 혜택은 원하지만 주님 자신의 임재는 환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이 구원의 모든 은택을 누리는 유일한 길이다. 


출처:물과피와성령/박요셉

속죄하신 구세주를(새298장) - 사랑이야기3



속죄하신 구세주를 -사랑이야기-

1절) 속죄하신 구세주를 내가 찬송하리라
      내게 자유 주시려고 주가 고난 당했네

      크신 사랑 찬양하리 나의 죄 사하려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나의 주 찬양하리

2절) 내가 구원 받은 증거 기뻐 전파하리라
      내 죄 모두 담당하신 주의 사랑 크셔라

      크신 사랑 찬양하리 나의 죄 사하려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나의 주 찬양하리

3절) 승리하신 구세주를 내가 찬송하리라
      죄와 죽음 지옥 권세 주가 모두 이겼네

      크신 사랑 찬양하리 나의 죄 사하려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나의 주 찬양하리

4절) 고마우신 구세주를 내가 찬송하리라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를 인도하셨네

     크신 사랑 찬양하리 나의 죄 사하려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나의 주 찬양하리

* 위의 가사중 '돌아가신'은 새찬송가 298장에서는 '죽임당한' 으로 불립니다.

'찬양의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Lord's Prayer - Andrea Bocelli (주기도문)  (0) 2015.08.26
팬플룻의 전래  (0) 2015.07.27
하얀 겨울  (0) 2015.01.16
찬송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승리가 있다  (0) 2015.01.08
때로는 너의 앞에  (0) 2015.01.04
 
바다가 내게 해준 충고 - 최송연

멈추지 않는 시간 속에
쉬지 않고 출렁이는 바다

새해엔 보다 큰 꿈을 품고
쉼 없이 달려가야 하리
정체 상태,
그것이 곧 퇴보이니

쏟아져 들어오는 잡동사니
원망 없이 받아주는 바다

새해엔 보다 넓은 마음 되어 
모두 끌어안고 가야 하리
좁은 마음,
그것이 곧 실패의 원흉이니



 

 

 

 

사랑하는 목양연가 식구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까치까치 설날은/윤극영 요/윤극영 곡/김치경 노래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이 오려나 봐요  (0) 2015.03.16
수채화처럼 고운 生  (0) 2015.02.24
믿음의 날개  (2) 2015.02.20
선택권에 대한 나의 헌장  (2) 2015.02.13
사랑합니다, 당신을...  (0) 2015.02.10

 

    믿음의 날개 최송연 내게 믿음의 날개 하나 달아주십시오 내가 비상할 수 있도록... ... 주께서 달아주신 믿음의 날개로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뚫고 더 높이 더 멀리 날아오를 수 있다면 골고다 언덕 그 은총의 밝은 빛을 내 작은 가슴에 그득히 채우고 담아 죽어가는 이웃에게도 나누어 줄 수 있겠습니다 이 죄악된 세상에 날개 접지 않고 날마다 주님 은총의 빛으로 올라갈 수 있기를... ....
<



<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채화처럼 고운 生  (0) 2015.02.24
    바다가 내게 해준 충고  (0) 2015.02.20
    선택권에 대한 나의 헌장  (2) 2015.02.13
    사랑합니다, 당신을...  (0) 2015.02.10
    생명의 향기  (0) 2015.02.07

    죄의 탄생에 대해 궁금합니다.(Q&A) / 박신 목사 


    [질문]

    셋째로, 죄의 탄생에 대하여 궁금합니다. 창세기의 처음부터 등장하는 죄,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던 죄 같은데 왜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죄가 있었을까요? 그 당시에는 하나님만이 존재하시던 시기인데 왜 죄란 것도 같이 공존해서 있었을까요?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죄란 것이 필요(?)했던 것인지요?

    [답변]

    많은 신자들이 궁금해 하면서도 제대로 정리하고 있지 못하는 주제를 질문해 주셨습니다.  인간이 더 강해지려면 환난을 통과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도 인간을 더 선하게 만들려고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조성한 것처럼 여기는 신자가 의외로 많습니다. 아니면 사탄이 아담을 유혹해서 범죄케 했으니 전적으로 사탄의 책임으로 떠넘기려는 경향도 보입니다.

    질문자님이 예리하게 지적한 것처럼 가장 먼저 주지해야 할 사항은 하나님은 절대 죄와 공존(共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진선미(眞善美)에서 완벽하며 온전하게 거룩합니다. 어떤 추하고 더럽고 악한 것과도 티끌만큼도 연관되지 않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독생자라도 죽이시어 인류의 죄 값을 치르게 할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죄를 저주합니다. 한마디로 죄는 그분과는 전혀 별개로 세상에 들어온 것입니다.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는 엄격히 말해 죄가 아니라 악의 세력 즉, 사탄이 존재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인간을 만드시기 전에 먼저 하늘의 영적 존재인 천사들을 창조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가장 높은 천사장이 스스로를 너무 높이고선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사14:12-20, 겔28:11-19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벌을 받아 천국에서 추방되었는데, 그 때 자기를 추종하는 악한 천사들을 데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악한 영적 세력(evil spirits)들의 우두머리가 마귀 혹은 사탄(satan)이며, 그 졸개들을 귀신 또는 악령(demons)이라 부릅니다. 참고로 억울하게 죽은 영혼이, 혹은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모든 환경을 아름답고 완벽하게 조성하신 후에, 당신의 형상을 닮도록 인간을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했습니다. 인간은 당신을 대신해서 이 땅을 다스릴 존재였습니다.(창1:28, 시편 8편)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기에 그분과 교통할 수 있는 영과, 또 그런 교통에 의거해 스스로 판단 결정 시행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심어주었습니다. 인간의 지배를 받아야 할 다른 피조물은 갖지 못한 인간만의 특성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인간을 정해진 프로그램대로만 움직이는 로봇이나, 생존과 종족보존만을 위한 한정된 지정의(본능)를 소지한 동물처럼 만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순전히 자발적으로 또 기꺼이 당신과 교제하며 그 뜻에 순종하여 이 땅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가꾸라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원래부터 하나님을 싫어하고 그분 대신에 세상을 통치하고 싶어서 안달하는 존재였습니다. 존재하는 목적 자체가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어떻게든 떼어놓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도 하나님과 즐겁게 교제하는 인간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아담에게 하나님이 선악과를 금하는 명령을 내린 까닭이 인간이 하나님처럼 될까 스스로 두렵고 싫었기 때문이라고 속삭였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좋아하는 마음을 불평하거나 의심을 품는 마음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러자 아시는 대로 선악과를 따먹고 불순종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사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영적 존재로 그 활동 영역은 영적 차원에 머뭅니다. 물질계에 직접 자기를 드러내고 악을 행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대체물을 이용합니다. 때로 기괴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같아도 사탄의 실체는 아닙니다. 인간을 속이는 짓일 뿐입니다. 에덴에서도 뱀을 이용해서 인간을 속인 것이지 뱀 자체가 사탄은 아니듯이 말입니다.

    다른 말로 사탄은 악으로만 뭉쳐진 존재로서 영계에서 활동하기에 죄가 시작된 출발지는 될 수 있을지언정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된 근본책임이 그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었기에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면서 얼마든지 사탄의 유혹을 거부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죄의 탄생은 인간에 의한 것입니다.

    흔히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어서 죄가 들어왔다고 계명을 위반한 행동 자체를 죄로 보지만 죄의 본질은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게 된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불순종하겠다는 결심이 이미 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 불순종을 죄의 본질로 보지만 여기서도 한 칸 더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지워버렸기에 불순종하겠다는 결심이 섰다는 뜻입니다. 불순종 이전에 하나님을 등진 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이런 맥락은 사탄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사탄을 비롯한 천사들 모두에게도 당연히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성경문답 사이트 #117 “왜 천사에게도 자유의지를 주었나요?”의 글을 참조 바람) 하나님은 결코 규칙을 제정해서 강제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탄이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서 지움으로써 불순종을 넘어 거역 대적하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죄의 궁극적인 본질은 하나님과의 분리(分離)라는 것입니다. 모든 윤리적 죄악도 엄밀히 따지면 바로 그분을 외면, 거부, 대적할 때에 생기는 것입니다. 아담도 사탄의 유혹에 빠져 잠시나마 의도적으로 그분을 마음에서 지워버리자 범죄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자 자신과도 분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자연인에게는 자아를 찾는 것이 평생의 과제가 되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찾아서 그 안에서 안식을 찾기 전에는 자아 발견 혹은 실현은 전혀 불가능한데도 그럽니다. 헛되고 헛된 인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죄는 또 인간으로 이웃과도(진정한 사랑의 실종), 피조세계와도(인간의 안락만 목적으로 무분별한 자연정복) 분리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너무나 명백한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의 본질이 하나님과의 분리라면 그 근원을 하나님께 돌릴 수는 절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 대신에 이 땅을 다스리게 하고 또 그런 은혜와 복락을 누린 인간의 찬양과 경배를 받기 위해 창조했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당신과 교통할 대상인 인간과의 분리란, 인간적 표현으로 하자면, 꿈에도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죄의 기원은 전적으로 사탄의 유혹에 빠진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첨언할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간혹 만약 아담이 사탄의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지금껏 죄악이 세상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어떤 세상이 되었을지 호기심을 갖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세상이 선으로만 가득 차면 아무런 재미가 없을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악이 있어야만 선을 선으로 알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서두에 잠시 언급한대로 인간의 도덕적 발전을 위해서 하나님이 고의로 악을 만들었다는 가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죄의 본질만 고찰해 보아도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음은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만약 아담이 끝까지 순종하였더라면 세상은 선으로 가득 차서 정말로 더 풍성하고 살만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선을 선으로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선을 행할수록 더 큰 선을 행하고 싶은 열정으로 가득 차게 것입니다. 절대 무료하지도 않고 날마다 더 새롭고 신나고 즐거울 것입니다. 오늘날 죄의 본성이 생생히 남아 있는 우리로선 그 아름답고 은혜로운 상태를 도무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비유컨대 천국은 분명 그러한 곳일진대 우리로선 과연 어떨지 모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의 뜻은 인간더러 이 땅을 천국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끝까지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했다면 말입니다. 다른 말로 만약 아담이 그랬다면 죄가 이 땅에 들어올 여지는 전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탄생이 과연 누구의 책임이 됩니까?

    요컨대 하나님은 스스로 인간과 분리할 뜻이 전혀 없었다는 이유로, 또 사탄은 아담이 그의 유혹을 거절했다면 죄는 얼마든지 들어오지 않을 수 있었다는 이유로, 죄에 대한 책임이 면제됩니다. 아무리 주인이 물방울 다이아몬드 반지를 철제금고가 아닌 화장대 위에 방치해 놓았다 해도 또 곁에서 자꾸 갖고 가자고 부추긴 악한 친구가 있었다 해도, 결국은 훔친 자가 죄를 지은 것이지 주인과 친구의 잘못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10/28/2011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가장 무서운 사람은?
    나의 단점을 알고 있는 사람이고,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은?
    두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며,
    가장 간사한 사람은?
    타인을 필요할 때만 이용해 먹는 사람이다.

     

    가장 나쁜 친구는?
    잘못한 일에도 꾸짖지 않는 사람이고,
    가장 해로운 사람은?
    무조건 칭찬만 해주는 사람이며,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잘못을 되풀이 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거만한 사람은?
    스스로 잘났다고 설쳐 대는 사람이고,
    가장 가치없는 사람은?
    인간성이 없는 사람이며,
    가장 큰 도둑은?
    무사 안일하여 시간을 도둑질하는 사람입니다.
     

    가장 나약한 사람은?
    약자 위에 군림하고 있는 사람이고,
    가장 불쌍한 사람은?
    만족을 모르고 욕심만 부리는 사람이며,
    가장 불행한 사람은?
    불행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가장 불안한 사람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고,
    가장 가난한 사람은?
    많이 가지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며,
    가장 게으른 사람은?
    일을 뒤로 미루는 사람입니다.

     

    가장 가치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먹기 위해 사는 사람이고,
    가장 우둔한 사람은?
    더 이상 배울것이 없다고 자만하는 사람이며,
    가장 큰 망언자는?
    부모님께 불효하는 사람이다.

     


     

    가장 어리석은 정치가는?
    물러날 때를 모르는 사람이고,
    가장 무서운 병을 앓고있는 사람은?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며,
    가장 파렴치한 사기꾼은?
    아는 사람을 사기치는 사람이다.
     

    가장 추잡한 사람은?
    양심을 팔아먹은 사람이고,
    가장 큰 배신자는?
    마음을 훔쳤다 던지는 사람이며,
    가장 나쁜 사람은?
    나쁜 일인줄 알면서 나쁜일을 하는 사람이다.

     

     


     모셔온글-

    style="CLEAR: both">




    '멜로디가 흐르는 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Evergreen-Susan Jacks  (0) 2015.03.21
    위대한 약속  (0) 2015.03.16
    당신이 아무말 하지 않아도(When You Say Nothing At All)  (0) 2015.01.15
    뉴에이지(New Age) 음악이란...?  (0) 2014.11.16
    Evergreen(Susan Jacks)  (0) 2014.11.08

    예수님의 재림시에 벌어질 상황전개에 대해서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를 먼저 풀어보고자 합니다.

    휴거에 관련된 문제의 본질에 대해서 먼저 개괄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휴거라는 단어가 성경에 직접적으로 나와 있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7절에 "들려"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헬라어 "하르파게소메타"라는 말을 라틴어로 번역할 때에 "라피에무르"로 적으면서, 그 단어에서 영어 단어 "휴거" (랩퉈)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먼저, "휴거"라는 단어와 관련해서 한국교회에는 상당히 오랫동안 하나의 개념이 퍼져있습니다.

     그것은 세대주의 종말론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두 단계로 이뤄진다고 말합니다.

    첫 단계 재림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땅에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공중의 어느 지점까지 내려온다고 합니다.

    이 때 모든 참된 신자들이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까지 살아있는 성도들도 홀연히 변화하여 영화롭게 된다고 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휴거가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즉 죽음에서 일어난 신자들과 변화된 신자들이 구름 속에 들림을 받아 강림하시는 주님을 공중에서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교회라 불리우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서 그와 함께 칠년 동안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며 기쁨을 나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늘에 남아있게 되는 7년동안에, 땅 위에서는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첫째, 다니엘서 927절에 예언된 환난이 시작되며, 그 후반부는 대환난이라고 부릅니다.

    적그리스도, 바다로부터 올라온 짐승이 경배를 요구하여 잔인한 통치가 있으리라고 합니다.

     둘째, 무서운 심판들이 그 때에 땅 위에 거하는 자들에게 임하게 되는데, 이들 중에는 자칭 교회라고 주장하는 구원받지 못할 자들도 포함됩니다.

    셋째, 수많은 이방인의 무리와 선택받은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며,

    넷째, 땅의 왕들과 짐승의 군대들 그리고 거짓 선지자가 연합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공격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세대주의자들은 이제 다시 7년기간 중에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함께 영광중에 다시 이 땅위에 오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땅 위에 서실 것이고, 아마겟돈 전쟁에서 그의 적들을 멸망시킬 것이며, 예루살렘에 그의 보좌를 세우시고, 천년동안 통치를 시작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휴거에 관련한 것은 전환난기 휴거설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이런 2단계 구조로 재림이 이루어진다고 강조된 곳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천년기설을 주장하는 다른 학자들 (죠지 래드, 로버트 건드리)은 이중재림설을 철저히 비판합니다.

    이중재림이론과 전환난기 휴거설의 문제점을 지적해 드립니다.휴거를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데살로니가전서 416-17절을 살펴봅시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쫒아 강림하시리니<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 구절에서 분명한 것은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첫째, 재림 시에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으킴을 받을 것이다. 둘째, 살아있던 모든 신자들은 변화하여 영화롭게 될 것이다. (참조 고전 15:51-52)

    그러나 이 구절에서 예수님이 재림하사, 죽음에서 일으킴을 받은 자들과 변화받은 성도들을 공중으로 이끌어서 하늘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어디에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 다른 곳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하늘에서 7년간 거하다가 다시 천년동안 주님과 함께 있으리라는 설정은 단순한 추론이지요."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라는 구절은 헬라어 원문에 "에이스 아판테시스"라는 전치사구를 사용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판테신"이라는 헬라어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습니다. 고위층 방문객이 한 도시에 도착하면 당국자들이 영접하기 위해서 그 도시 밖으로까지 마중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도 역시 부활한 자들과 변화한 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자 구름 속에 들림받아서 공중에 올라가서 기쁨의 만남을 가진 후에, 주님과 함께 지상으로 돌아올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봅니다.

     신약성경에서 "아판테시스"가 사용된 곳은 사도행전 2815절입니다. "거기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저자와 삼관까지 맞으러오니" (에이스 아판테신)라고 하였습니다

    .거기 형제들이 바울을 영접하기 위해서 로마에서 밖으로 나와서 영접하여서 다시 바울과 함께 로마로 되돌갔습니다. 마태복음 256절에서도,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에이스 아판테신)는 문구에서도 사용되었는데, 역시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신랑을 맞으러 나갑니다.

    즉 주님을 맞이하려 공중에 올라갑니다. 이 처녀들은 그 후에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갔듯이 다시 만나고 난 후에 사랑스럽고 행복한 교제를 지속하게 됩니다.

    반드시 하늘에서만 지속적으로 7년간 있어야할 필요가 있나요? 어디에도 그런 성경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두 단계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대환난 후에 일어나게 될 단일 사건입니다.

    한 차례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 구름 속으로 올리워질 것이며, 이런 만남을 가진 후에 휴거된 교회는 다시 새하늘과 새땅에 내려와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사용된 재림관련 용어는 매우 제한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현세의 인간들은 제약을 받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결코 하나님의 세계를 다 꿰뚫어 볼 수 없고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죽음 후 생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해서 극히 제한적인 이해에 그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성경을 억지로 풀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스스로 가진 언어이해나 지식으로 완전히 초월적이며, 초시간적이며, 초역사적이며, 초자연적인 재림 이후의 세계를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라고 했습니다.

     디도서 2:11-13절에는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나타나심이며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인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재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첫번째 오심은 비천한 성육신이었다면 (이사야 53:2-3, 2:7-8),

    두번째 오심은 영광스러운 영화가 함께하는 오심이 될 것입니다. 모든 인류로부터 영광의 재림시에 높임을 받을 것입니다.

    그의 백성인 우리도 그가 다시오실 때에 영광 중에 그와 함께 나타날 것입니다 (3:4). 영광스러운 정복자, 만유의 심판자, 온세상의 구속주, 만왕의 왕, 만주의 주님으로서 그리스도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국제신학대학원 부총장 김재성 박사 드림

    크리스챤QNA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종말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의 재림-박일민 교수  (4) 2015.07.27
    환난 전 휴거- Perry Stone  (2) 2015.07.09
    건전한 종말론  (0) 2015.01.18
    종말론, 죽음  (0) 2015.01.12
    종말이야기: 천국과 지옥- 유태화 교수  (0) 2014.07.27

    매일 먹기 싫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요6:48-49)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리시면서 시험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16:4)"

    무슨 시험이었습니까?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의 시험이었습니다. 믿음의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열 정탐군의 말을 듣고 ‘우리는 메뚜기다, 다 죽는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울면서 돌아섰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군사들이 40년동안 광야를 헤매다가 죽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양식 만나를 먹었으면 그 만나가 믿음이 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그 믿음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만나를 그렇게 먹고도 그 만나가 전혀 믿음이 되지 못 한 것입니다.

    왜 주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 하시며 만나와 비교하셨을까요?
    우리가 주님의 말씀, 곧 주님의 살과 피를 먹어도 그것이 믿음이 되지 못 하고 생명이 되지 못 한다면 만나를 먹고 광야에 엎드러진 이스라엘 백성과 다름 없을 것이란 말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딱 한 번 믿으면 주님의 생명을 가진 것이 되고, 그러면 천국시민이 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럴까요?
    그럴 것 같으면 만나도 일회용으로, 딱 한 번만 먹으면 평생 다시 안 먹어도 배고프지 않았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런 만나를 내려주셨으면 딱 한 번 내려주시기만 해도 되었을 것이고 그러면 백성들도 편하고 하나님도 편하셨을 텐데 말입니다.
    하나님은 왜 만나를 매일같이 가나안 들어갈 때까지 지겹도록 40년 동안이나 내리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딱 한 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실 능력이 없으셔서 그러셨을까요?

    우리는 믿음으로 거듭 납니다. 예수 믿어 새 생명 얻습니다.
    그런데 딱 한 번 믿으면 끝나는 겁니까?
    만나를 딱 한 번 먹으면 가나안 들어가는 믿음이 되고
    예수 딱 한 번 믿으면 천국 가기까지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없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 생명의 떡은 매일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내 안에서 믿음이 되고 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40년 세월 만나를 매일매일 먹은 것 처럼 매일매일 말씀을 먹고 날마다 날마다 새사람으로 변화되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날마다 날마다 말씀을 먹어 날마다 날마다 주님을 닮아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도 거룩하라,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신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말씀을 먹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매일 먹기 싫어합니다.
    40년 동안 지겹게 먹기는 더더욱 싫어합니다.
    어떻게든 일회용으로 딱 한 번 먹고 모든 것이 해결되고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다가 혹시 광야에 엎드러지는 건 아닐까 은근히 걱정이 됩니다.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태초에 하나님이  (0) 2015.05.01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0) 2015.03.14
    시시한 오병이어 말고  (0) 2015.02.10
    노 젓는 제자들  (0) 2015.02.09
    아무도 없었습니다.  (0) 2015.01.11

    지구촌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들!


    바오밥 나무 거리 , 마다가스카르


    용의 피(Dragonblood tree) , 예멘


    캘리포니아의 가을


    벚꽃 터널 , 독일


    붉은 잎 위에 흑뿌리들


    호주의 나무 터널


    일본의 등나무


    포틀랜드의 일본정원


    수중 맹그로브


    벚꽃 길


    태양 터널


    뉴욕 센트럴파크의 가을


    Ponthus beech tree , 프랑스 Broceliande숲


    캘리포니아의 나무 터널


    Charleston의 Angel Oak , 미국 사우스캐롤리나


    일본의 대나무 숲


    The Dark Hedges의 너도밤나무 터널 , 북아일랜드


    빨간 단풍나무 터널


    자카란다(Jacarandas)나무 , 남아프리카공화국 Cullinan


    무지개 유칼립투스(Rainbow Eucalyptus) , 하와이제도 카우아이


    Flamboyant Tree , 브라질




    'Amazing Na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두산 천지  (0) 2015.02.26
    너 네 볼일 안봐 ???  (0) 2015.02.23
    희귀한 식물  (0) 2015.02.18
    The great coral reef (Australia)  (0) 2015.02.16
    Vietnam 의 Halong bay  (0) 2015.02.15



     

     이번엔 희귀한 식물들을 소개합니다.

     

    이번엔 희귀한 식물들을 소개합니다.

    ♣♣♣원숭이난초.

    정말 원숭이 같지요?






    앵무새 꽃은 태국화 미얀마, 인도의 일부 열대 우림지역에서 자생하고 있는

    봉선화과, 봉선화속의 희귀식물꽃의 일종으로 학명은

    임페이시엔즈 시타시나입니다.

    이 꽃은 멸종위기 식물로 분류되어 태국에서 국외 반출을 불허하는 관계로

    일반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2005년에 인터넷에 소개되면서 이 꽃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앵무새 꽃 식물은 높이 약 2m 정도 성장하고, 잎은 녹색으로

    가장자리에 뾰족한 톱니 모양을 이루며 10~11월 사이에 꽃이 핍니다.

    이꽃이 양무새 모양으로 보이는 것은 특정 각도에서 바라볼때이고,

    특정 각도의 시각범위를 벗어나면 그냥 예쁜 꽃에 불과 하다는 군요 

    앵무새난초

    이것은 이름을 잘 모르겠군요.

    포 테크 어 토마토라는군요. 토마토가 참 특이하게 생겼어요.

    씨앗이 있다면 심어보고 싶군요

    블랙 박쥐꽃

    라플레시아

    세계에서 가장 큰 꽃으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등 열대 다우림지역에서만 서식하는 희귀종이다.

    꽃 한송이의 지름이1m 정도에 무게가 10kg 잎과 줄기가 없이 커다란

    꽃만 피우는데 나무에 기생하면 그 수액을 빨아먹으며 자란다고 합니다.

    라플레시아는 꽃이지만 향기가 아닌 고약한 냄새를 피운다고 하며,

    이 냄새로 곤충을 유혹하여 꽃가루를 옮겨 번식 한다

    Halfatty 일명 검은장미

    Sandersonia 

    쫌 망측하게 생겼군요. 콜롬비아에 많다는군요

    앵무새튤립

    아프리카 Gidnora

    프로세라

    흰색박쥐꽃

    이름이 인도파이프,시체공장,글쎄 맞는지 모르겠군요.

    번역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수정난풀이라는데....



    선인장 종류라는데 바라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것 같군요

    이것도 선인장 종류인것 같은데 잘 모르겠군요



    육식 식물

    하와이팜(Brighamia insignis)


    이름을 모르겠군요



    'Amazing Na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 네 볼일 안봐 ???  (0) 2015.02.23
    지구촌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들!  (0) 2015.02.19
    The great coral reef (Australia)  (0) 2015.02.16
    Vietnam 의 Halong bay  (0) 2015.02.15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  (0) 2015.02.0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