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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은  LA에서 약 140마일 정도 되는 거리이다. I-10 Fwy. 동쪽으로 달리다 모롱고 카~지노를 지나서 SR 62번 북쪽으로 갈아탄다.

 

높은 산길이 이어지자 약간 걱정이 앞선다. 주유소도 보이지 않는데 내 차의 개스로 온전히 갈 수 있을까?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약 10마일 정도 가면 Yucca Valley가 나오고 그곳에는 주유소뿐만이 아니라 큰 마켙도 보이고 심지어는 맥도날드도 있다. 휴식을 취하면서 먹을 것도 준비하고 개스도 충분히 채운 후 다시 약 7마일 정도 더 가면 공원 입구가 나온다.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Joshua Tree National Park)은 입구가 3곳이다. 62번 선상으로 서쪽 입구와 북쪽 입구가 있다. 서쪽 입구는 Park Blvd.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되고 북쪽 입구는 62번(Twentynine Palms)을 계속 타고 Park Blvd.에서 약 14마일 정도 더 가서 National Park Dr.나 Utah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된다.

 

모든 여행소개서나 안내 사이트가 이점을 확실하게 기록하지 않아 초행자는 헤매게 되어 있는데 비싼 값을 톡톡히 치르고 얻은 결과이다. 남쪽 입구는 62번으로 갈아타지 않고 10번을 계속 타고 가면 168번에서 내려서 안내표지판을 따라가면 쉽게 찾는다.

 

각각의 입구마다 비지터센터가 있으니 들러서 지도나 가이드 북을 얻어도 되고 직접 비지터센터에 들르지 않아도 입구에서 계산할 때 지도도 받을 수 있다. 차 한 대당 $15이고 일주일 동안 사용 가능하다. 그러나 일몰 시각이 지나면 입구에 사람이 없어 당황할 수 있으나 걱정할 필요 없다. 나올 때 계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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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은 캠핑시설이 잘되어 있고 아홉 군데가 있는데 만약 캠핑을 계획하려면 예약을 하는 것이 좋다. 선착순이라 하여도 금방 차버려서 쉽게 장소를 구하기가 어렵다. ☎ (800) 365-CAMP (2267)

테이블과 화장실, 불을 피울 수 있는 시설이 완비되었지만 물을 구할 수 없는 곳도 있어 미리 확인하여야 한다. 가장 시설이 좋은 블랙 락의 경우 $15이고 다른 곳은 $10, 예전에는 무료인 곳도 있었다는데 이 부분은 확인을 해봐야 할 것이다.

 

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은 로스앤젤레스 동쪽의 샌버다니노 카운티와 리버사이드 카운티에 걸쳐 있는 국립공원으로 특이한 풍광을 자랑한다. 황량한 벌판과 아주 독특하게 생긴 조슈아 나무가 공원 여기저기에서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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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에서 자라는 조슈아 나무는 거친 사막 기후에 꿋꿋하게 적응해 살아가는 강인한 식물이다. 이름의 유래는 옛날 모르몬교도 여행가가 나무의 모양이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하여 여호수아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옛이야기가 있다. 오래전에 여행객들이 근처 사막에서 길을 잃었다. 해가 저물도록 계속 걷다가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을 때 문득 달빛에 비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것은 바로 조슈아 트리의 그림자였다. 그들은 조슈아 트리의 그림자를 따라  결국, 마을을 찾을 수 있었다. 조슈아 트리가 긿 잃은 자의 이정표가 되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막성 식물들은 간간이 쏟아지는 빗물을 빨아들이기 위해 되도록 넓고 깊게 뿌리를 뻗고 있다. 특히 조슈아 트리는 주로 3천 피트의 고 지역에서 자란다. 나무의 높이는 40피트까지 자라는데 어떤 종의 나무는 1,000년까지도 산다고 한다. 봄철이면 가시가 돋친 나뭇가지에 10인치 안팎의 꽃송이 군단이 아름답게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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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 트리는 척박한 사막 땅에 깊고 넓게 뿌리를 내리고 사는데 어떤 나무는 뿌리가 11미터까지도 뻗는다고 한다. 비록 1년에 3.8센티 정도밖에는 자라지 못하지만 수백 년이나 특별한 종은 천 년까지도 생존하니 특별한 나무임은 틀림없다. 

 

반면에 텀블위즈(Tumbleweeds)는 축축한 습기 있는 곳을 만나면 실뿌리를 내리고 살다가 습기가 없어지면 뿌리를 포기하고는 바람에 이리저리 몸을 굴려 습기 있는 곳을 찾아 돌아다니니 두 종류가 쉽게 비교가 된다. 마치 세상의 사람 사는 일처럼. 예전에 텀블위즈라는 영화도 있었다. 떠돌아다니는 모녀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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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입구로 올라가다 보면 마치 맨살을 드러내고 있는 듯한 신비한 모습의 바위들이 보이는데 사실 이 지역은 크리오소트 부시(Creosote Bush)들의 집단 군락지이다. 또한, 바위들은 특히 사람의 해골 형상을 하고 있어서 스컬 락(Skull Rock)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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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의 남동부 지역에 희귀한 선인장 지역이 있다. 모래가 많은 곳으로 모래 언덕들이 형성돼 있으며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선인장들이 자라고 있다. 그러나 독성이 있는 선인장이라 만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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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전망대인 키즈 뷰 (Keys View)에서는 팜스프링스 전경이 시원하게 보인다. 앞쪽으로 샌 하신토(San Jacinto) 산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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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 트리 국립공원은 1994년에 국립 공원으로 정식 편입됐다. 정부는 이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관리하며 공원은 서로 다른 특징이 뚜렷한 2개의 사막으로 이뤄져 있다. 해발 고도가 높은 쪽이 모하비 사막(Mojave Desert)이고, 낮은 쪽이 콜로라도 사막(Colorado Desert)이다. 공원은 1천 피트에서 6천 피트에 달하는 지역에 있어서 저지대의 여름기온은 꽤 높으나 지대가 높을수록 서늘하여 봄과 가을철 기온은 하이킹을 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온통 야생 꽃으로 뒤덮이는 봄철에는 많은 관광객이 몰려오며 매우 특이한 모양의 바위산과 조슈아 트리가 함께 어우러진 풍경은 장관이다. 사막성 황무지는 캘리포니아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광활한 지역으로 겉으로 보아서 아무런 쓸모가 없어 보이나 실제로는 다양한 종류의 사막성 식물과 동물이 살고 있어 자연 생태계의 균형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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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원제공 YouTube : Susan Jacks - Evergre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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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나 본인 하기 나름입니다.
카투사 신분이긴 하지만, 훈련 성적 좋고 모범복무를 했다면,
사령관 추천으로 미공군 조종사 입대 기회를 주지 않습니까?

미국은 기회의 나라 맞습니다.






어느주부의 감동글/울고 있습니다..슬퍼서....








 

 

 

 

 


안녕하세요 33살 먹은 주부에요.. 32살때 시집와서 남편이랑 분가해서 살았구요 남편이 어머님 돌아가시고 혼자계신 아버님 모시자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어느누가 좋다고 할수있겠어요.. 그일로 남편이랑 많이 싸웠어요.. 위에 형님도 있으신데 왜 우리가 모시냐고.. 아주버님이 대기업 다니셔서 형편이 정말 좋아요...
그일로 남편과 싸우고 볶고 거의 매일을 싸웠어요.. 하루는 남편이 술먹고 울면서 말을 하더군요...
뭐든 다른거는 하자는 대로 다 할테니까 제발 이번만은 부탁좀 들어 달라구..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남편이 어릴적 엄청 개구쟁이였데요.. 매일 사고 치고 다니고 해서 아버님께서 매번 뒷 수습하로 다니셨다고 하더라구요.. 남편이 어릴때 골목에서 놀고 있는데 지나 가던 트럭에 (큰트럭 말고 중간크기트럭)받힐뻔 한걸 아버님이 보시고 남편 대신 부딪히셨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도 오른쪽 어깨를 잘못 쓰신데요.. 그리고 아버님 하시던 일이 노가다 였는데 남편이 군 제대 하고도 26살때쯤 까지 놀고 먹었더랍니다..
아버님이 남편을 늦게 낳으셔서 지금 아버님 연세가 68세되세요.. 남편은 33살이구요.. 60세 넘으셨을 때도 노가다 (막노동) 하시면서 가족들 먹여 살리고 고생만 하셨다네요... 노가다를 오래 하면 시멘트 독이라고 하나... 하여튼 그거 때문에 손도 쩍쩍 갈라 지셔서 겨울만 되면 많이 아파 하신다고 하더라구요.. 평생 모아 오신 재산으로 마련하셨던 조그만한 집도 아주버님이랑 남편 결혼 할때 집 장만 해 주신다고 팔으시고 지금 전세 사신다고 하구요...

 

그런데 어머님 까지 돌아 가시고 혼자 계신거 보니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자주 난다고 하더라구요... 저희요..전 살림하고 남편 혼자 버는데 한달에 150정도 벌어 와요.. 근데 그걸로 아버님 오시면 아무래도 반찬도 신경써야 하고 여러가지로 힘들거 같더라구요.. 그때 임신도 해서 애가 3개월인데... 형님은 절대 못 모신다고 못 박으셨고 아주버님도 그럴 생각이 없다라고 남편이 말을 하더라구요..
어떡 합니까..저렇게 까지 남편이 말 하는데... 그래서 넉달전 부터 모시기로 하고 아버님 모셔 왔습니다.. 첨에 아버님 오지 않으시려고 자꾸 거절 하시 더라구요.. 늙은이 가 봐야 짐만 되고 눈치 보인 다면서요.. 남편이 우겨서 모셔 왔습니다.. 모셔온 첫날부터 여러 모로 정말 신경이 쓰이더라구요... 그런데 우리 아버님... 매번 반찬 신경써서 정성껏 차려 드리면... 그걸 드시면서도 엄청 미안해 하십니다... 가끔씩 고기반찬이나 맛있는 거 해 드리면 안 먹고 두셨다가 남편 오면 먹이더라구요...
그리고 저 먹으라고 일부로 드시지도 않구요.. 거기다가 하루는 장보고 집에 왔는데 걸레질을 하고 있으신거 보고 놀라서 걸레 뺐으려고 했더니 괜찮다고 하시면서 끝까지 다 청소 하시더라구요.. 그리고 식사 하시면 바로 들고 가셔서 설겆이도 하십니다... 아버님께 하지 말라고 몇번 말씀 드리고 뺏어도 보지만 그게 편하시답니다..아버님은...
제가 왜 모르겠어요... 이못난 며느리 눈치 보이시니 그렇게 행동하시는거 압니다..저도...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픕니다... 남편이 몰래 아버님 용돈을 드려도 그거 안 쓰고 모아 두었다가 제 용돈하라고 주십니다... 어제는 정말 슬퍼서 펑펑 울었어요... 아버님께 죄인이라도 된듯해서 눈물이 왈칵 나오는데 참을 수가 없더라구요... 한달전 쯤 부터 아버님께서 아침에 나가시면 저녁때 쯤 들어 오시더라구요..
어디 놀러라도 가시는 거 같아서 용돈을 드려도 받으시지도 않고 웃으면서 다녀 올게 하시면서 매일 나가셨습니다..
어제 아래층 주인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시더라구요.. "오다가 이집 할아버지 봤는데 유모차에 박스 실어서 가던데~ 이말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네..그래요..아버님 아들집에 살면서 돈 한푼 못버시는 게 마음에 걸리셨는지 불편한 몸 이끌고 하루 하루 그렇게 박스 주우 시면서 돈 버셨더라구요.. 그 이야기 듣고 밖으로 뛰쳐 나갔습니다... 아버님 찾으려고 이리저리 돌아 다녀도 안 보이시더라구요... 너무 죄송해서 엉엉 울었습니다... 남편한테 전화해서 상황 말하니 남편도 아무 말이 없더군요.. 저녁 5시조금 넘어서 남편이 평소보다 일찍 들어 왔어요.. 남편도 마음이 정말 안 좋은지 아버님 찾으로 나간다고 하곤 바로 나갔어요... 제가 바보였어요..진작 알았어야 하는데.. 몇일 전 부터 아버님께서 저 먹으라고 봉지에 들려 주시던 과일과 과자들이 아버님께서 어떻게 일해서 사 오신 것인지를... 못난 며느리 눈치 안 보셔도 되는데
그게 불편 하셨던지 아들집 오셔서도 편하게 못 지내시고 눈치만 보시 다가 불편하신 몸 이끌고 그렇게 일하고 있으셨다니... 친정에 우리 아빠도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 가셨는데... 돌아가신 아빠 생각도 나고 해서 한참을 펑펑 울었습니다... 우리 아빠도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 가셨는데... 그날 따라 아버님 웃으실 때 얼굴에 많은 주름과 손목에서 갈라진 피부가 자꾸 생각나면서 너무 죄송해서 남편이 아버님이랑 들어올 때까지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남편 나가고 한 시간 좀 넘어서 남편이 아버님이랑 들어오더라구요...
아버님 오시면서도 제 눈치 보시면서 뒤에 끌고 오던 유모차를 숨기시는 모습이 왜 그리 마음이 아플까요... 오히려 죄송해야 할건 저인데요... 왜 그렇게 아버님의 그런 모습이 가슴에 남아서 지금도 이렇게 마음이 아플까요... 달려 가서 아버님께 죄송 하다며 손 꼭잡고 또 엉엉 울었습니다... 아버님께서 매일 나 때문에 내가 미안 하다면서 제 얼굴을 보면서 말씀 하시는 데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아버님 손 첨 만져 봤지만요... 심하게 갈라지신 손등과 굳은살 베인 손에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방안에 모시고 가서도 죄송하다며 그렇게 펑펑 울었습니다... 아버님 식사 챙겨 드리려고 부엌에 와서도 눈물이 왜그리 그치지 않던지... 남편이 아버님께 그런일 하지 말라고.. 제가 더 열심히 일해서 벌면 되니까 그런일 하지 말라고 아버님께 확답을 받아 낸 후 세 명 모여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밥먹는 데도 아버님 손을 보면서 자꾸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오늘 남편이 노는 날이라 아버님 모시고 시내 나가서 날이 좀 쌀쌀 해져서 아버님 잠바 하나랑 신발을 샀습니다..
한사코 괜찮다고 하시던 아버님께 제가 말씀 드렸어요..
"자꾸 그러시면 제가 아버님 눈치 보여서 힘 들어요!!" 이렇게 말씀 드렸더니 고맙다고 하시며서 받으시더라구요.. 그리고 집에 아버님 심심하실까 봐 케이블TV도 신청 했구요... 아버님께서 스포츠를 좋아 하시는 데 오늘 야구방송이랑 낚시 방송 보시면서 너무 즐거워 하시더라구요... 조용히 다가가서 아버님 어깨를 만져 드리는데... 보기 보다 정말 왜소 하시더라구요... 제가 꽉 잡아도 부서 질것만 같은 그런 아버님의 어깨... 지금까지 고생만 하시고.. 자식들 뒷 바라지 하시느라 평생 헌신 하시며서 살아 오셨던 아버님의 그런 자취들이 느껴지면서 마음이 또 아팠네요.. 남편한테 말했어요.. 저 평생 아버님 정말 친아버지 처럼 생각하고 모신 다구요... 비록 지금은 아버님께서 불편해 하시지만.. 언젠가는 친딸 처럼 생각 하시면서 대해 주실 때까지 정말 잘 할거라구요..

 

마지막으로 아버님... 저 눈치 안 보셔도 되요... 제가 그렇게 나쁜 며느리 아니 잖아요 ㅠㅠ 아버님의 힘드신 희생이 없으셨다면 지금의 남편도 없잖아요.. 그랬다면 지금의 저와 뱃속의 사랑스러운 손자도 없을거에요.. 저 아버님 싫어 하지 않고 정말 사랑해요 아버님... 그러니 항상 건강 하시고 오래 오래 사셔야 되요.. 그리고 두번 다시 그렇게 일 안하셔도 되요...

 

저 허리띠 쫄라 매고

알뜰하게 살께요... 사랑해요 아버님 ...........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많이 슬펐습니다. 수기글 쓰신 주부님께 정말 축복을 드리고 싶네요. 시아버님과 행복하게 사시길 기원합니다...

 

 

 



      숫자에 관심 없으신 하나님 / 로이드존스


      하나님께서는 거대한 군대를 동원하여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숫자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정결함과 거룩함,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숫자에 관심을 두어서는 안되며,
      ...
      교리와 거듭남과 거룩, 그
      리고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며

      하나님의 거하시는 장소임을 깨닫는 일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지난 28일(금) KBS 음악홀에서는

        제3회 국방부장관상 군가합창대회가 열렸습니다. 

        이날 오후 7시30부터 실시된 합창대회는 민간부분과 장병부분에서

        각각 6개팀씩 선을 통과한 총 12팀이 출전해 치열한 경합을 펼쳤습니다.


        특히, 지난해 대상과 최우수상 수상팀이 예선에서 탈락하는 등

        대회수준이 한층 높아짐으로서 더욱 치열했던 이번 대회에는

        우리 해병대 제2사단팀이 장병부분 예선을 통과하여

        당당하게 본선에 진출했습니다. 

         

        "영상으로 본 국방부장관상 '군가합창대회' 최우수상 해병대2사단" 

        [군가합창대회] '나가자 해병대' - 해병대 제2사단최우수상 수상  

         

         

        [군가합창대회] '귀신잡는 해병대' - 해병대 제2사단최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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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장병부분 2번째 공연을 한

        해병대 2사단팀은 지정곡 '나가자해병대'

        자유곡 '귀신잡는 해병'을 절도있는 동작과 함께 

        강하면서도 아름다운 하모니로 표현함으로서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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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절도있는 동작과 행동 그리고 해병대 다운 율동을 하면서

        해병대 군가를 신명나게 합창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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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 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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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간부분과 장병부분 12팀의 경합이 모두 끝나고

        연합합창이 이어진후 드디어 결과발표와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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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재를 하며 전 참가티팀들의 공연을 지켜본 제 생각에는

        대상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최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최우수상은 국방부장관상과 상금 500만원이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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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해병대 제2사단의

        이번 군가합창대회 취우수상 수상은 그 의미가 더 합니다.

        그것은 합창을 전문으로 하지 않는 대대장병들이 모여

        전문적인 합창단들 속에서 경합을 펼치며 최우수상을 수상했다는 건

        정말이지 아주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해병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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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가는 총성, 함성과 더불어

        군의 기상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소리로

        군대의 사기를 북돋워 주는 군인들의 노래이며

        특히 일치된 제식동작과 조화를 이루면서

        구성원의 단결력을 높여 전승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무형전력의 한 요소입니다.

         

        이번 군가합창대회는

        장병들에게는 군가가창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군인다운 패기로 충만하는 계기가 되고

        국민 여러분들은 나라사랑의 정신과

        군가의 추억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해병대 제2사단 정비대대장병들의 최우수상수상을 축하합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한 해병대 제2사단 정비대대 장병여러분~~~! 수고했습니다.

         

        글/사진 임영식기자


        저희 사모님사모님 카페 들어갔다 공감이 되서 퍼왔어요.^^



         

        구원이란 무엇인가?

         

         

        박일민  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의 구원에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도 구원을 받는 데 있다. 그러면 이 구원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리고 이 구원은 누구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인가. 또 이 구원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근거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이제 이 문제들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자.

         

        구원의 의미

        구원이라는 용어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는 매우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의미는 오직 하나 뿐이다. 그 의미는 예수님의 이름에서 잘 나타난다. 가리브엘 천사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장차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다(마 1:21). 그리고 그 예수는 자기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할 자일 것이라고 밝혀 주었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그리고 죄의 결과에서부터 해방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죄의 결과인 죄책과 죄의 오염에서부터 해방되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죄는 사람들에게 죄책과 오염을 안겨 주었다. 여기서 죄책은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사람이 육체적이고 영적인 죽음과 더불어서 영원한 지옥의 저주에 이르게 된 것을 말한다.

         

        죄책과 오염은 서로 구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죄책은 법률적인 것이고, 오염은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죄책은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이 감옥에서 형을 사는 것과 같다. 형기가 끝나면 그 죄에 대해서 더이상 법률적인 책임이 부과되지 않는다. 하지만 감옥에서 형을 사는 사람은 선하게 교화되기 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오염이 되어지기가 더 쉽다. 그래서 형기를 마치고 난 이후에는 그 삶이 더욱 간교한 죄를 가중시키기 쉬운 상태가 되어지는 일이 많다. 오염은 이러한 상태에 비교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이러한 죄책과 오염으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즉 구원은 죄의 책임인 죽음에서부터 해방이 되어 생명으로 옮겨지고, '의롭다' 칭함을 받고, 하나님의 후사가 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죄로 오염된 옛사람에서 해방되어 날마다 새사람을 입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고, 모든 육체의 연약함과 유혹을 견디어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의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위험이나 재난, 또는 육체의 질병이나 경제적인 가난 등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구원의 모든 것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큰 오해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현실적이고 육체적인 것에만 치중한 나머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에녹만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에는 에녹보다도 형에게 죽임을 당한 아벨을 먼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난이나 죽음에서 기이한 방법으로 살아난 사람만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는 안된다. 성경은 오히려 주를 위해 굶주리고 헐벗음을 당한 자나 목베임을 당한 순교자들을 더 높이 찬양한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죄와 관련이 되어있다.

         

        구원의 의미에 대한 세 가지 구분

        죄와 죄의 결과들로부터의 해방은 한 순간에 모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법률적인 해방은 법률적 선언이 주어지는 순간에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실제적인 해방은 오랜 시간, 또는 일평생을 두고 점차적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구원은 그 시간적 적용에 있어서 다음 세 가지 의미로 구별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성취된 구원

        성경에는 구원을 이미 성취된 것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구원을 과거형으로 말한다. 사도 요한은 구원의 결과인 영생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였다(요 5:24). 그리고 사도 바울도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엡 2:8).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에 그 즉시로 거듭나게 된다(엡 2:1).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롬 3:30).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사람에게 즉시로 양자의 영을 주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해주신다(롬 8:15). 성경은 이러한 중생과 칭의와 양자됨을 가리켜서 과거형의 구원으로 말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이미 성취된 구원이다.

         

        현재 진행중인 구원

        성경에는 구원을 현재에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을 과거형과 함께, 현재진행형으로도 말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히브리서의 저자도 현재진행형의 의미를 사용해서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고 하였다(히 10:39).

         

        중생한 사람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의 모든 생활이 순간적으로 다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다. 후폐한 옛사람의 구습을 없애고 거룩한 새사람의 모습을 가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싸움이 필요하다. 이 세상 사는 동안에는 이 싸움이 날마다 계속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싸움과 관련하여 말씀하기를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다(고전 15:31). 성경은 성도가 걷는 이 성화와 견인의 과정을 현재진행형의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진행중인 구원이다.

         

        장차 완성될 구원

        성경에는 구원을 미래에 완성되어질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사도 야고보는 이미 믿음 가운데 있는 성도를 향하여 말씀하기를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했다(약 1:21). 과거와 현재진행형의 구원을 말했던 사도 바울은 또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기를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다(빌 2:12).

         

        예수를 믿는 사람이 죄의 모든 결과들과 사탄의 유혹에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는 것은 육체의 장막을 벗을 때이다. 그것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진다. 성경은 성도가 장차 누리게 될 영화로운 상태를 미래형의 구원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이 장차 완성될 구원이다.

         

        구원을 현재 진행중이거나 장차 완성될 의미에서 본다면,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지금 받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하거나, "장차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진행중인 구원이나 장차 완성될 구원은 과거에 성취된 구원의 기초 위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에 성취된 구원을 받은 사람은 현재와 미래의 구원도 받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믿음의 확신 속에서 어느 경우의 질문에 대해서도 분명한 대답을 할 수가 있다. "예, 나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적용 사역으로서의 구원

        구원은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어낸 결과가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값없는 은혜로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다(엡 2:8). 여기서 하나님이라 함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가장 막중한 일인 구원은 삼위 하나님의 공통된 관심사이다.

         

        삼위 하나님은 일체가 되시기 때문에, 그 존재나 사역에서 서로 분리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삼위의 인격은 각각 독립이 되어 있으므로 그 존재나 사역에서 일정한 순서가 구분이 있다. 성부께서는 창세전에 구원을 계획하셨다. 성자께서는 이 땅에 성육신을 하시어, 성부의 구원 계획에 따른 내용들을 객관적으로 단번에 성취하셨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성자에 의해서 성취된 구원을 그를 믿는 각 개인에게 현실적으로 적용을 시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 예수룰 믿을 때에 우리 속에서 주관적으로 일어나는 구원은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의 사역은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하지만 그 대상과 목적에 따라서 둘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없이 임하여 그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는 사역이다. 우리는 흔히 이것을 보통사역과 특별사역이라고 부른다.

         

        보통사역

        성령의 보통사역으로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 생명을 잉태케 하시고, 유지하게 하신다(마 1:18). 생명은 우연하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힘만으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생명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 생명을 유지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존중히 해야 한다. 그리고 생명을 주신 성령께서 근심을 하지 않으시도록 근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삶을 포기하거나 스스로 생명을 버리는 것은 성령 하나님을 거스리는 죄가 되어진다.

         

        ?. 각종의 재능들을 부여해 주신다(추 31:2)-성경구절 확인. 어떤 사람에게는 노래를 잘 하는 재능을 주신다. 다른 사람에게는 운동을 잘 하는 재능을 주신다. 또 바느질, 무용, 그림, 글씨 등을 잘 하는 재능도 주신다. 그래서 이 재능들이 서로 어울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도록 하신다. 모든 사람은 성령께서 부여해 주신 바 자기 나름대로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게 주어진 남다른 재능이 무엇인지를 가급적 빨리 알아내야 한다. 그래서 그 재능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무시를 해버린다면, 한 달란트를 땅 속에 감추어 놓았던 사람처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불려지고 말 것이다.

         

        ?. 도덕질서를 유지케 하신다(롬 2:14-15). 사람의 양심이나 역사의 교훈이나 행정관리의 힘이나 특별하신 섭리 등을 방편으로 사용하여서 선을 증진케 하고 악을 억제케 하신다. 그리고 종교성을 자극하여 종교적 활동이 가능하게도 하신다(행 17:22). 이러한 성령의 사역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는 죄가 관영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나마 윤리와 도덕이 지켜지고 있다.

         

        특별사역

        특별사역으로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 그리스도를 자기의 참 구주로 믿을 수 있도록 세례를 베풀어주신다(마 3:11). 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에는 반드시 성령께서 속사람에게 베푸시는 불세례가 있어야 한다. 물세례는 성령의 세례, 즉 불세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음에 대한 외면적인 표로 행해지는 것이다. 이 성령의 세례는 여러 차례 또는 수시로 반복되는 것이 아니다. 물세례의 경우처럼 일생에 단 한 번 받는다. 성령께서 주시는 세례는 그 효력이 약해지거나 취소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 믿는 사람들의 심령을 충만케 하신다. 구원함을 받는 사람은 그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런데 구원에 합당한 열매인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깨어 죄를 대적하면서 날마다 더욱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 성령께서는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이 일이 가능하도록 충만함을 주신다. 성경은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고 하신 일이 없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것은 명령한다(엡 5:18). 왜냐하면 성령의 충만은 믿음의 간구와 회개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성령의 충만은 약화 또는 소멸이 되어질 수가 있다(살전 5:19).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기도가 필요하다.

         

        ?. 충만함과 함께 각종 영적 은사들을 주신다(고전 12장).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는 일반적으로 예언, 방언, 통역, 영분별, 병고침 등의 신령한 은사가 수반될 수 있다. 이 은사들은 사람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게, 그리고 다양한 수준으로 주어진다. 어떤 경우에는 둘 이상의 은사가 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은사가 전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가진 은사만을 높게 보고 다른 사람이 가진 은사를 소홀하게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영적인 은사가 있어야만 성령충만에 이르거나 성령충만을 유지하게 된다고 하는 것도 역시 잘못이다.

         

        ?. 믿는 사람 안에서 내주(內住)를 하신다. 믿는 사람의 몸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다(고전 6:19). 성령께서는 믿는 사람 안에서 내주 하시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치고 보증하신다(고후 1:22). 힘들고 어려워 할 때에는 도움을 주시고 새 힘을 얻게 하신다(롬 8:26). 어찌해야 좋을지를 모를 때나 오묘한 것을 만날 때는 깨달음을 주사 하나님의 신비함이라도 통달케 하신다(고전 2:10).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기도 하신다(롬 8:16).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혜사라고 부르셨다(요 15:26). 보혜사란 옆에서 속삭여 주는 자를 의미한다. 이 때문에 믿음의 사람은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을 행함은 주의 손이 나를 안보함이요,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고 찬송을 하게 되는 것이다.

         

        ?. 믿는 사람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하신다(롬 8:27). 믿는 사람이 연약해 있을 때나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신다(롬 8:28).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셨다(롬 8:28).

         

        구원의 기초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기초로 하여 이루어진다. 선행, 기도, 예물, 공로 등 그 무엇이라도 구원의 기초가 되지 못한다. 이것들은 구원을 받았기에 생겨나는 결과이다. 심지어는 믿음마저도 구원의 기초가 되지 못한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시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엡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요 15:5).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의 기초가 되심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 그는 우리를 가리켜서, 선한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했다(엡 2:10). 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이나 말이나 지식의 풍성함을 누린다고 했다(고전 1:5). 그리스도 안에서 죽기도 하고 부활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살전 4:16, 고전 15:22). 또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도 받는다고 했다(롬 8:17).

         

        구원이란 마귀의 자식이었던 자가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지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의 죽으심과 함께 의를 위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그의 부활과 함께 새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그의 고난과 함께 의를 위한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그의 영광과 함께 영원한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그의 순종과 함께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는 것이다. 그의 승리와 함께 율법의 노예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같아져야 한다. 생각, 목표, 취미, 관심, 생활방식, 등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와 같아야 한다. 그러기에 구원을 받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모습을 갖추어 가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제도와 조직에 가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개개인의 심령과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제도나 생활방식의 변화보다는 심령 즉 인격의 변화가 우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서는 어떤 사이비 주장자들이 내세우는 것처럼 어떤 특정한 행동양식을 보여야 하거나 특이한 신비체험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특정 집단에 가담하거나 관계를 맺어야 할 필요도 없다. 제도나 생활의 개혁보다는 심령의 변화에 집중해야 한다. 심령이 변화되면 그 생각이나 취미가 예수님과 같아지게 되고, 따라서 육신을 즐겁게 하는 술을 자연스럽게 멀리하게 되는 경우가 이를 잘 입증해준다.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우리의 구원의 기초가 되시는 사실이 성경에는 여러 가지 비유들로 설명되어 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요(요 17:21), 아담과 그 후손(롬 5:12), 남편과 아내(엡 5:22), 머리와 지체(고전 12:12), 목자와 양(요 10:14), 포도나무와 그 가지(요 15:5), 건물과 모퉁이의 머리들(엡 2:20) 등이다. 이 모두가 서로 분리가 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구원은 우리의 모든 인격과 생활이 죄와 죄의 결과들로부터 완전하게 해방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기초로 하여서 선물로 주어진다. 그리고 이 선물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여서, 이 엄청난 선물을 값없이 주신 하나님께서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동시에 그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온전한 모습을 갖추도록 정성을 다해야 한다.

         

        출처: 행복충전소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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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산상수훈 : 팔복 (The Beatitudes) / 로이드존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5:3)

        [다른 성경버전] “With less of you there is more of God and his rule.” [The Message]
        “Those who know there is nothing good in themselves are happy” [NLV]

        [Amplified 뜻풀이] Blessed: happy, spiritually prosperous with life-joy and satisfaction in God's favor and salvation, especially conditioned by the revelation of His grace, regardless of their outward conditions / the poor in spirit: the humble, who rate themselves insignificant

        [로이드존스 강해] “‘심령이 가난하다’ 그것은 교만이 완전히 사라져있고 자긍심이나 자기를 의지하는 자세가 완전히 사라져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 “심령이 가난해지는 길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4)

        [애통함의 예]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로마서 7:15)

        [애통함의 이유] 1) '죄'에 대한 참다운 인식으로 인하여 (나 자신의, 다른 사람의, 세상의, 그리고 죄의 본질 자체 때문에), 2) 뿌린 것에 대한 결과를 보지 못하는 일로 인하여 (사람의 인식과 주님의 인식의 차이..?)

        [로이드존스 강해] “그리스도인은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삶을 영적으로 생각하며 그 속에서 죄와 죄의 영향들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가진 그런 생각과 진리에 대한 깨달음 때문에 그에게는 또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도 바울처럼 탄식합니다만, 동시에 그리스도와 장차 올 영광을 체험하기 때문에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5)

        [Amplified 뜻풀이] the meek: the mild, patient, long-suffering (게으름/나태함, 유약함, 친절함, 또는 타협주의와의 차이점은?)

        [관련 성경구절]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시편 37:11)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 6:10)

        [로이드존스 강해] “온유란 두 가지입니다.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자세요, 또한 그런 나의 자세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그를 아무리 나쁘게 말해도 그것에서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사람이 그를 그렇게 좋게 생각해주며 잘 대해주는 사실에 깜짝 놀라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또한 인내하며 오래 참는다는 것을 뜻하고, 특히 부당하게 고통을 받을 경우에 그러한 것을 뜻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이미 만족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5:6)

        [관련 성경구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한복음 1:16)

        [로이드존스 강해] “‘행복과 복된 상태’를 위해서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절대로 행복해지지 못합니다. 오직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만족을 얻을(행복해질) 것입니다……
        의를 향한 열망은 바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요, 죄를 없이 하고자하는 열망 입니다. 그것은 죄를 짓고싶은 나 자신의 욕망에서 자유를 얻고싶은 열망을 의미합니다. 거룩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것, 그분과 동행하는 것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지닌 최고의 소원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면, 영적으로 나쁘고 해로운 것들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영적의욕을 무디게 만들어 결국에는 영적침체를 일으키는 그런 것들까지도 피할 것입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이것은 참으로 굉장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리고 목마르면서도 동시에 채움을 입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채움을 받으면 더 주리고 목마릅니다만 다시 채움을 얻고 만족을 얻습니다. 은혜에 은혜가 더해집니다. 이 일은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축복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5:7)

        [관련 성경구절]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8:12)

        [로이드존스 강해]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특별히 하나님 자신에게 적용되는 형용사입니다……
        ‘은혜’는 죄 자체에 대한 것인 반면 ‘긍휼’은 죄로 인하여 생긴 비참한 결과들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측은히 여기는 감정에 행동이 합해진 것입니다......
        그들은 한때 내가 처했던 그런 어두움의 자리에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계속해서 그런 형편에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참 애처롭게 느껴집니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을 긍휼히 여길 수밖에 없게 됩니다. 죄는 미워도 죄인은 불쌍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용서함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체험했다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5:8)

        [관련 성경구절]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브리서 12:14)
        [청결한 마음의 예]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 주시고 내 안에 정직한 새 영을 넣어 주십시오.” (시편 51:10) / “주님, 주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주의 진실하심을 본받아서 살겠습니다. 내가 한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겠습니다.” (시편 86:11)

        [로이드존스 강해] “청결한 마음이란 곧 나뉘어지지 않은 마음입니다…… 우리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하며 또한 그것이 우리 삶의 최고의 소망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은, 오직 그러한 자만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성경에서 가장 우리를 엄숙하게 만드는 말씀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5:9)

        [관련 성경구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 2:14)

        [로이드존스 강해] “인간의 모든 문제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죄 때문입니다. 개인들 사이이든, 여러 그룹들 사이이든, 나라들 사이이든, 인간의 탐욕, 이기심, 자기 중심성이 모든 문제와 불화의 원인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에 크게 필요한 것은 바로 ‘화평케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낮추셔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의 모든 것이 여기에 담겨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평케 하는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바로 하나님 자신과 그의 아들이 하신 일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먼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관심으로부터, 자기 주장으로부터 완전히 구원함을 받음을 뜻합니다. 그는 자신을 기꺼이 낮추는 사람이요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므로 필요하다면 고난마저도 감수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5:10)

        [로이드존스 강해] “성경은, 까다롭고 불쾌하게 행동하거나 자기 의 또는 어리석음 때문에 불필요한 핍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합니다……
        의롭다는 것, 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곧 주님을 닮은 것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 복있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의인은 정죄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모습과 삶 자체가 사실상 그들을 정죄하고 있으므로 그것 때문에 그들은 완전히 쪼그라드는 느낌을 갖게 되고 기분이 나빠져서 의인을 미워하게 됩니다. 의인이 핍박을 받는 것은, 그들이 나머지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5:11-12)

        [로이드존스 강해]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권세자들에게 핍박을 받을 때 자기들이 드디어 주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할 가치있는 존재로 인정을 받은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http://freeindeed.tistory.com/62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생명의 향기.../ 최 송 연
          
        훌훌
        털어버리는 거야
        공기처럼
        
        잠시 머물다 가는 生,
        아웅다웅 욕심낸들
        죽음 저 편 영원의 세계로
        가져갈 수 있는 것 무엇인가
        
        목련의 화사함도
        자작나무의 웅장함도 
        한순간일 뿐 
        곧추세워 자랑할 것 없네
        
        늘 허허로와
        독함이나 해함 없이
        대지를 품어 살리는 공기처럼
        
        그렇게 한 세상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향기로
        허허롭게 살다 떠날 수 있기를...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생명의 향기.../ 최 송 연

         

        훌훌

        털어버리는 거야

        공기처럼

         

        잠시 머물다 가는 生,

        아웅다웅 욕심낸들

        죽음 저 편 영원의 세계로

        가져갈 수 있는 것 무엇인가

         

         목련의 화사함도

        자작나무의 웅장함도

        한순간일 뿐

        곧추세워 자랑할 것 없네

         

        늘 허허로와

        독함이나 해함 없이

        대지를 품어 살리는 공기처럼

         

        그렇게 한 세상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향기로

        허허롭게 살다 떠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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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의 위력

        부시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서 최초의 흑인 국무장관이 된

        뉴욕빈민가 출신 콜린파월 장관의 이야기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공장에서 어느날

        그는 다른 인부들과 함께 도랑을 파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때 한 사람이 삽에 몸을 기댄 채

        회사가 충분한 임금을 주지 않는다며 불평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한 사람은 묵묵히 열심히 도랑을 파고 있었다.

        몇 해가 지난 후 다시 그 공장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을 때

        여전히 그 사람은 삽에 몸을 기댄 채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지만

         열심히 일하던 사람은 지게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또 여러 해가 흘러 그곳에 다시 갔을 때

        삽에 기댄 채 불평만 하던 그 사람은 원인을 모르는 병으로

        장애인이 되어 회사에서 쭟겨났지만 열심히 일하던

        그 사람은 그 회사 사장이 되어 있었다.

        이 일화는 파월의 인생에 큰 교훈이 되었다고 한다.

        불평을 일삼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 그 불평의 열매를 따먹게 마련이다.

        반면 감사는 그에 상응하는 열매를 가져올 뿐 아니라,

        그 자체로 행복을 증가시켜준다.


        행복은 결국 감사에 비례한다.
        서양 속담중에 이런 명언이 있다.

        "행복은 언제나 감사의 문으로 들어와서 불평의 문으로 나간다. "

        조심하라. 불평의 문으로 행복이 새나간다."
        기억하라 감사의 문으로 행복이 들어온다.

        이것이 감사의 힘이다. 일본 마츠시타 전기의 창업자

        마츠시타 고노스케 사장은 일찍이 감사의 마력을 간파했던 사람이다.

        "감옥과 수도원의 공통점은 세상과 고립돼 있다는 점 이다.

        다른게 있다면 불평하느냐, 감사하느냐의 차이 뿐이다.

        감옥이라도 감사하면 수도원이 될 수 있다.

        감사는 희망의 언어다.
        감사는 역경을 벗어나는 인생의 출구다.

        그저 감사하면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다

        건강하고 즐겁게 잘보내시길바랍니다.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교리에 대한 로이드존스의 설명

          

         

        사도행전을 읽고 초대 기독교 전도자들의 설교를 관찰해 보십시오. 그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이 본문 하나를 택하여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정확한 의미를 말하고 분석하는 모습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설교 방법은 교리들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메시지가 있었고 그들은 그 메시지를 제시하며 교리들을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메시지가 교리라는 사실을 증명하였습니다.  물론 설교가 의도하는 바가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교리는 설교의 목적과 기능입니다. 교리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기회가 아닙니다. 교리의 목적은 진리를 회중에게 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리를 공부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면 위험합니다. 우리는 나무들 때문에 숲을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말로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시대에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실제적인 문제들은 그들이 문자에 멈춰서 영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야기해서 그들은 전혀 교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고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문자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않고 심지어 우리를 그릇되게 인도하기까지 합니다. 문자는 우리 영혼을 지옥에 떨어뜨리는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한 다음에 교리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그 공부가 전혀 유익이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공부가 매우 지적일지 모르지만 시간을 낭비하는 훌륭한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성경을 글자 맞추기 놀이처럼 또는 조각 그림 맞추기 놀이처럼 서로 맞추는데 사용하면서 전혀 교리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성경공부는 아무 가치가 없고 유익이 없습니다.

         

        ...

         

        이단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이 틀린 말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매우 순수하고 성실한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말과 해로운 말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물론 이런 이설을 말하는 거짓 교사들은 교회 안에서 혼란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내에서 이단이 발생함으로 초대교회는 우리가 보통 신조 또는 신경이라고 칭하는 것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

         

        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참고서에 접근하는 식으로 성경에 접근합니다. 그들은 너무나 자주 성경의 중요한 교리들에 마치 인간의 생각과 사상들처럼 접근합니다. 그들은 예배와 경외의 분위기로 성경의 교리로 나아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해석과 지적에 흥미를 가집니다. 해석과 지적인 지식도 없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성경의 교리는 연구 주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간절히 교리를 알고 싶어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리를 알아서 우쭐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경배와 찬양을 하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교리를 알고 싶어해야 합니다.

         

         

        출처: 양무리마을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교회는 영적인 기관이다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교회는 우주적인 기관이며 살아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유기적인 기관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영적인 기관이다.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결코 그 누구도 교회를 다스릴 수 없다.


        이처럼 주님만이 전능하신 능력으로 교회를 다스리신다. 따라서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지 아니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교회를 운영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바울은 교회를 주장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오직 한 분, 주님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오직 세우시는 이도 주님이시며 이제 세워진 교회를 다스리시는 분도 주님이시다. 그리고 주님이 아니고는 어떤 사람도 교회를 다스리고 인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때문에 바울은 자기가 세운 교회라 할지라도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운영되게 하기 위하여 각 교회마다 장로를 택하여 교회를 인도해 나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함으로써 주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여 주실 것을 위탁하였다.


        바울이 이방인 선교를 위해 보냄을 받았던 것도 바울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 시대에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을 인식한 안디옥 교회가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바울을 파송했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의 권능에 입각하여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은혜를 내려 주셨음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다.


        이처럼 바울은 교회의 부름에 쓰임 받은 일꾼이었을 뿐이다. 물론 일꾼이 누리는 기쁨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먼저 그 일꾼은 누구에 의해 보냄을 받았는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사용하실 때에도 그에게 영광을 입혀주기 위함이 아니라 교회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복음이 전파되게 하는 일을 통하여 교회도 역시 이 기쁨을 함께 누려야 한다.


        오늘의 한국 교회가 당면한 문제 중 가장 심각한 면이 바로 이 점이기도 하다. 교회는 하늘의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지혜와 권위를 가지고 다스려 보겠다고 날뛰는 직분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무엇인지 바로 알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무지의 소치이다.


        이 점을 명심하여 오직 주님에 의해 세워지고 다스려지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우리는 직분에 따라 모든 노력을 다하여 주님의 교회를 섬겨야 할 것이다.

         

        http://rpress.or.kr/xe/index.php?mid=wildfield&document_srl=367389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당신은 아직 불행하다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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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팔 없이 태어난 여자아이가 있었다.
         
        이름은 Jessica Cox, 제시카 콕스
         
        올해 나이 28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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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팔 없이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기 보다..
         
        남들이 자신은 못할거라 생각했던 수많은 것들이
        사실은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삶을 통해 보여주는 것을 인생의 도전이며,
        한편으로는 즐거움으로 삼았다.
         
        세수나 화장도 손수하지만..
         
        더 놀라운건.. 두 발만으로 콘택트렌즈까지 착용하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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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에게 일상생활의 불편함은 그리 크지 않다.
         
        타자는 1분에 25 단어 정도가 가능하며,
         
        그 작은 핸드폰 자판으로도 문자 메세지를
        큰 불편없이 친구들과 주고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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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향한 도전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작은 아가씨의 놀라운 도전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14 살에 태권도 공인 2 단을 땄다고 한다.
         
        팔이 없다고 얕봤다간.. 큰코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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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팔이 없지만.. 수영도 한다.
         
        더 놀라운 건.. 이 아가씨는 서핑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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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운전도 한다.
         
        장애인이 운전하는건 별로 놀랍지 않은 일이다.
         
        장애에 맞춰 일부 개조한 차량으로 장애인이 운전하는 길은 언제나 가능하다.
        그러나 ! 그녀가 모는 것은 개조되지 않은 일반 승용차다.

         

        그녀는 장애인 면허가 아니라 일반 운전 면허를 취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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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라운 도전은 계속되었다.
        "불가능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무조건 한다 라고 말하곤 했죠 !"
         
        "하늘을 난다는 것은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환상적인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일반인이라면 통상 6개월 정도면 마칠 수 있는 비행 교습이
         
        제시카 콕스에게는 3 년이라는 시간을 필요로 했다.
        지난 5 월 그가 처음 단독 비행에 성공했을 때,
        하늘도 더 이상 그의 장애물이 될 수 없게 되었다.
         
        그녀가 두 팔 없이 태어난 지 25 년 만에
         
        두 팔을 가진 사람도 날기 어려운 하늘을 정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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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로 핸들을 조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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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로 문을 닫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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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 난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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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어때요? 팔이 조금 짦은가?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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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로 글씨도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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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란 무엇인가? 신학 이야기

        2006/06/26 13:22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개혁주의 교회의 연합과 일치의 조건

        최덕성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역사신학)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1647년 무렵에 창의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기독교 역사에 등장한 여러 가지 신조문과 신앙고백서 가운데 하나이지만 여전히 그 탁월성을 인정받고 있다. 여러 장로교회들이 신앙고백서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다.

        신앙고백[서]는 개인, 단체, 교회, 종교회의 등이 교리와 신념을 공적으로 선언할 의도로 작성한 것이다. 신조(Creed, Symbol)와 신앙고백(Confession)은 비슷한 말이지만 후자가 전자보다 더 포괄적이다. ‘언약’(Covenant)이라는 것은 특정 신앙공동체가 맹약(盟約) 형태로 수납한 고백문이다.

        방대한 분량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과 더불어 장로교 권에서 널리 수납되어왔다. 스코틀랜드교회와 미국장로교회는 이것을 3백년 이상 유일한 교리표준으로 사용해 왔다. 전자는 1647년에, 후자는 1729년에 이것을 채택했다. 미국 동북부에 자리 잡고 있는 회중교회들은 1748년에 이 신앙고백서의 교회 정치에 관한 조항만을 바꾸어 채택하여 사용해 했다. 이것은 침례교회의 신앙고백서 작성에 영향을 주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1640년대의 영국이라고 하는 시대의 정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제시하는 구원의 기본 교리들을 그 어떤 신앙고백서보다 더 잘 설명하고 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소용돌이 가운데서 영적 갈급함을 가진 청교도―장로회 목회자들이 성경적 기독교를 정착시킬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에 여러 해 동안 기도하면서 애써 만든 것이다.

        모든 신앙고백서들이 그러하듯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도 역사적 콘텍스트에서 만든 신앙고백문헌이므로 다른 지역, 다른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당면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답을 완전히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것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제시하는 점에서 그것의 가치는 다른 고백서와 견줄 수 없을 만큼 탁월하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개혁주의 교회들의 연합과 일치의 기초이다. 신앙고백의 기능에 대한 검토와 함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만들어진 역사와 정치적 배경과 그 내용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교회, 특히 에큐메니칼 시대의 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 등을 살펴보자.

        1. 신조·신앙고백서

        신앙고백서의 특징은 “심령의 넘침으로 말미암아 나의 입은 말을 한다.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고백한다”(credo, ergo confiteor)는 고전적인 문구에 표현되어 있다. 신앙고백서는 교회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을 교인으로 받아들일 때 신앙을 고백해야 할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 신조·신앙고백은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는가?”라는 그리스도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답변에서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 위에 세워져 있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신앙고백이 있다.

        ‘사도신경’은 영지주의에 대해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니케아신조에서 칼케돈신조까지의 ‘에큐메니칼 공의회’가 만들어낸 신조문들은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가진 분이며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밝혔다. 간단하던 신조가 점차 확대되어 마침내 전체적인 체계를 갖추었다.

        신조·신앙고백서는 고백문헌들은 이단들의 도전이나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 교회가 신앙하는 바를 조리 있게 체계화 한 것이다. 교리에 관한 모든 것을 포함하려는 의도로 작성된 것도 있고, 고백문서가 만들어지는 당시의 특별한 문제에 제한하여 작성한 것도 있다. ‘바르멘신학선언’(1934), ‘장로교인 언약’(1940) 등은 당시의 교회가 직면하고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를 중심으로 작성된 것이다. 논쟁이나 갈등이라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도 있고 그렇지 않는 것도 있다. 신학적인 형식을 잘 갖춘 신조문·신앙고백서도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교회의 일반적인 처지에서 만들어진 것이 있는가 하면, 교회의 전체 회의가 만든 것도 있다. 특정 교회의 공의회가 만든 것도 있고, 교회의 위탁을 받아 신학자들이 만든 것도 있다.

        신조·신앙고백서는 교회의 이정표, 지계석(地界石) 기능을 갖고 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게 하며,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신앙고백적인 일치를 도모하기 위해, 거짓 교훈을 막아내는 ‘신앙의 규범’으로, 공적인 표준문서로 만든 것이다. 단일 고백을 표방하여 교회의 일치성을 높이는 역할도 한다. 신조·신앙고백서의 이러한 신앙규제 기능은 가끔 신학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신앙과 생활의 순결을 지키고, 신자들을 연합시키며 강건하게 하기도 한다.

        신조·신앙고백은 ‘신앙의 규범’이며 기독교 교육을 위한 것이다.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공적인 교육에 적용시키고 그것을 가지고 이단과 그릇된 사상과 오류를 막아냈다.

        신조·신앙고백은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갖고 있지는 않다. 성경만이 기독교 신앙과 생활의 최종 규범이다. 신조·신앙고백은 성경에 종속된다. 성경과 일치할 때만 권위를 가진다. 신조·신앙고백에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발견되면 언제든지 수정할 수 있다.

        신조나 신앙고백서는 어떤 유래를 갖고 있든지 간에 신조가 생겨난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다. 신조가 성경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거나 그것을 절대화하면 신앙고백주의(Confessionalism)와 조주의(Dogmatism)에 빠진다.

        소시니언과 퀘이커와 유니테리언 그리고 합리주의자들은 신조·신앙고백문의 권위와 용도를 부정한다. 신조·신앙고백이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와 신앙을 구속하고 개인의 판단을 방해하며 독선, 위선, 고집을 조장하며, 분란과 혼란을 야기한다고 본다. 종교적인 증오심을 조장하고 역작용을 일으켜 서로 험담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척운동의 근거가 되고, 신자들을 그것에 종속시킨다고 본다.

        성경은 그것을 해석하는데 필요한 어떤 지침(clue)이 없이는 신자 개인과 교회에 의미 있는 안내를 제공하기에는 방대하다. 신앙고백이나 공식화 된 신조·신앙고백이 없이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허황된 생각이다. 근본주의 성격을 지닌 독립파 교인들, 오순절파 신자들, 침례교인들만이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 가운데도 신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조·신앙고백문을 배격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형식화된 신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지만 나름대로 어떤 전통이나 신념체계나 지도자의 가르침을 추앙하고 있다. 신조 공식과 신앙고백을 담은 서술문을 소유하고 있다.

        스위스종교개혁에서 출발한 개혁교회는 여러 개의 신조·신앙고백서들을 가지고 있다. 제네바신앙고백서(1536). 스코틀랜드신앙고백서(1560), 벨기에신앙고백서(1561),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1563), 제1스위스신앙고백서(헬베틱신앙고백서), 제2스위스신앙고백서(1566), 도르트신경(1619),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1646),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1648) 등은 전통적인 개혁주의 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이다.

        그밖에도 장로교회들과 개혁교회들이 채택한 여러 가지 신앙고백서들이 있다. 미국, 인도네시아, 일본, 대만,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교회들이 채택한 것들이다. 미국연합장로교회가 채택한 ‘새신앙고백서’(1967)와 미국장로교회의 ‘신앙선언’(1976) 그리고 미국개혁교회(RCA)의 ‘우리의 희망의 노래’(Our Song of Hope, 1978)라는 신앙고백서도 있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우리의 신앙고백’(1976), 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의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1986) 등이 있다. 예수교장로회 고신교단과 합동교단과 한국의 여러 군소 장로교단들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신앙고백서로 사용하고 있다.

        2. 웨스트민스터 총회

        런던 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웨스트민스터교회당은 중세기에 처음 건축되었다. 참회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가 1045-1050년에 건축했다. 1065년 12월 28일에 봉헌되었다. 교황은 에드워드에게 참회의 표로 교회당을 건축하도록 했다. 국왕이 건축한 본래의 건물은 로마네스크 양식이었다. 현재의 고딕 교회당 건물은 1245-1517년에 재건된 것이다. 헨리 8세가 에드와드를 추모하는 동시에 자신의 묘소로 만들고자 재건을 했다. 이 교회당에 붙은 두 개의 서편 종탑은 1722-1745년에 건축되었다. 이곳에서 킹 제임스 판 구약성경 4분의 3이 번역되었고, 신약성경의 뒷부분 절반이 번역되었다.

        역사적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이 고백문은 본래 영국국교회의 신앙고백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1642년부터 3년여 동안의 수고 끝에 작성하여 1646년 12월에 영국 국회로 넘겼다. 영국 상원은 1647년 2월에 통과시켰고, 하원도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하원은 이 고백문의 문장을 따지고 성경참고문을 추가하면서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성직자들이 첨가한 성경 근거 구절들을 문제 삼았다.

        스코틀랜드교회 대표자들은 이것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스코틀랜드교회 총회는 1647년 8월 27일에 이것을 신앙고백서로 채택했다. 기존의 스코틀랜드신앙고백서(1560)를 대체했다.

        하원이 이것을 즉각 통과시키지 않고 시간을 끄는 동안에 올리버 크롬웰 장군과 그의 군대는 국회가 숨결을 느낄 정도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과시했다. 그 영향력은 국회가 장로교인들을 숙청하고 독립파 회중교도들을 대체하도록 만들었다. 하원의 숫자는 100여 명으로 줄어들었고, 그들조차 크롬웰의 영향을 받는 독립파 신자들이었다. 장로회 특징을 가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영국교회와 무관하게 되고 영국국교회는 오늘날의 감독주의 교회 정치체제로 정착되었다.

        헨리 8세의 사생활은 영국국교회라고 하는 정치 기형아를 낳았다. 그가 죽은 뒤에 로마가톨릭교회 신자인 메리가 왕좌에 등극하여 청교도들을 핍박했다. 몇 년 뒤에 메리가 죽고 엘리자베스가 등극하여 영국국교회를 오늘날의 형태로 정착시켰다. 엘리자베스 여왕시대(1558-1603)는 군주의 권리가 하나님의 율법의 정하심에 따라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는 형식으로 주어진다고 믿었다. 군주는 오로지 한 분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왕에 대한 그 어떤 종류의 반항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대죄라고 했다.

        17세기 초에 이르러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통치자를 절대 군주로 여기지 않았다. 왕권이 하나님의 뜻과 자연법에 따라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국회의 권한을 확대했다. 그러나 국회는 왕권보다 우위에 있지 않았다. 국왕이 국회를 소집했다. 국회는 세금부과, 법률제정 등의 업무만을 다루었다. 외교, 종교, 국가기밀은 군주의 영역이었다. 영국은 이러한 제도로 정치적인 힘의 균형을 유지했다.

        엘리자베스 l세는 프로테스탄트 신자이면서도 청교도들을 핍박했다. 그가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영국은 스코틀랜드 슈트워드 왕가의 메리 여왕의 독자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그는 1603년에 제임스 1세라는 이름으로 왕좌에 올랐다. 이 일을 계기로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정치적으로 합병되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제임스를 외국인으로 여겼다. 스코틀랜드인이 국왕으로 등극하자 영국 국회 안의 장로회주의 사상을 가진 다수의 청교도들은 왕에게 기대를 걸고 영국국교회가 감독 정치를 지양(止揚)하고 장로교 정치를 도입하고 개혁신학을 대폭 수용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제임스는 왕권을 돈독히 하는 데는 장로회 정치보다는 감독주의 교회정치가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신의 왕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자기가 유일한 법 제정자이며, 따라서 국회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칼빈주의에 바탕을 둔 장로회 제도가 왕권 신장에 거침돌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청교도들의 청원을 거절했다.

        제임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양육을 받았다. 엄격한 칼빈주의 전통 아래서 자랐다. 그는 칼빈주의 교회관이 왕정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시대에 확립된 교회 안의 왕권을 확고히 붙잡고자 했다. 문예부흥, 종교개혁, 새 시대의 흐름은 옛날의 권력 구조의 문제점을 일깨워 주었다. 그 무렵 영국인들은 배를 타고 세계 이곳저곳으로 탐험하면서 상업을 발달시켰다. 상권(商權)을 쥔 중간계층이 두각을 나타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정치제도를 개혁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헨리 8세는 수장권(The Act of Supremacy)을 선언하고 국왕이 교회의 우두머리라고 선포했다. 이 때 영국교회는 국가교회가 되었다. 그 무렵에 등장한 청교도들은 교회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교황의 잔재들’을 제거하고 교회를 깨끗하게 만들고자 했다. 스코틀랜드 출신 제임스가 국왕이 되자 의기양양 청교도적인 개혁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했다. 그들은 영국이 장로회 정치와 개혁신학을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 칼빈주의와 장로회가 왕성한 스코틀랜드 출신인 국왕 제임스가 자기들의 말을 들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제임스는 교회의 개혁이나 교회가 요구하는 것보다 자신의 왕권 확보에 여념이 없었다. 장로회 정치와 왕정제도가 불일치하다는 것을 알고 조만간 갈등을 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국국교회가 감독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감독 없이는 왕도 없다’(No Bishop, No King!)고 생각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국회의 기능을 과소평가했고, 자신이 필요한 경우에만 그것을 소집했다.

        1625년에 국왕으로 등극한 찰스 1세는 아버지 제임스 1세보다 훨씬 더 강경하게 감독주의 교회정치 제도에 연연했고 청교도―장로교회주의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국회를 과소평가했다. 그는 국회의 권한에 맞서서 자신의 독립성을 과시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펼쳤다. 정치동맹 관계를 구실로 로마가톨릭교회 신자인 프랑스의 마르 드 메디치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영국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를 우려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찰스는 귀족들에게 과도한 대출을 요구했고, 이를 거절하는 귀족 70명을 수감했다. 국회는 이에 항의했다. 이런 일로 왕권과 국회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왕의 의사는 국회에서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에 격노한 국왕은 국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했다. 국회는 상원에 속한 영국국교회 소속 감독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맞섰다. 찰스는 국회를 해산하고, 10년 이상 혼자서 영국을 통치했다. 독재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왕의 신적(神的) 권리를 행사하고자 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후덕했던 반면에 고위 공직자들의 부패에 대해서는 엄격했다. 그러나 국회가 없는 이 나라에는 점차 정치 불균형이 나타나고, 청교도들과 의회주의자들의 분노가 커 갔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로부터 영국 프로테스탄트들의 자유의 상징이 된 국회가 유명무실하게 된 것에 분노했다.

        찰스의 독주는 결국 재정 결핍을 초래했다. 국민은 극도의 내핍 생활을 피할 수 없었다. 왕실의 활동도 최소한으로 제한되었다. 군대는 축소되어 일부만 남았다. 1633년에 대주교가 된 윌리엄 라우드(William Laud)는 영국인이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영국국교회에 출석하라고 강요했다. 제도를 강화하여 불만을 가지고 교회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을 시장 앞에 붙들어 놓고 교회 공예배에 한 번 불참한 데 l실링의 벌금을 부과했다.

        그러자 청교도들은 즉각 라우드의 조치를 공개적인 신앙박해로 간주했다. 의회주의자들은 군주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선동하기 시작했다. 대주교 라우드는 스코틀랜드교회가 예배의식서인 영국국교회의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채택해야 한다고 선포했다. 같은 예전을 사용하여 왕국의 통일성을 추구한다는 이름 아래서 그는 스코틀랜드에 장로회주의가 일방적으로 정착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기도서를 반대했다. 그것이 처음 낭독된 교회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신앙 탄압에 반대하는 내란도 발생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참된 개혁신앙’을 추구한다고 하는 내용을 담은 국가 차원의 ‘언약’(Covenant)에 서명했다.

        이렇게 되자 찰스는 스코틀랜드 의회의 해산을 명했다. 그러나 그 명령은 효력이 없었다. 명령이 거부당하자 왕은 군대를 보냈다. 그 동안 왕에게 충성을 바쳐오던 스코틀랜드인들은 이때 ‘그리스도의 면류관과 언약을 위하여’라는 구호를 외치며 영국군과 맞붙어 싸웠고, 영국군대를 완전히 괴멸시켰다. 국왕은 항복하고 국회를 다시 소집한다는 조문을 담은 항복서에 서명했다. 전쟁 관례에 따라 국왕은 영국 땅에 남아있는 스코틀랜드 군대에게 막대한 전비(戰費)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돈을 지불하자면 국회를 열어야 했다. 국왕은 그 동안 소집을 거부해 오던 국회를 소집했다. 전비를 보상하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다.

        이렇게 하여 1640년에 ‘장기국회’(Long Parliament)로 알려진 국회가 다시 소집되었다. 의원들은 11년 동안이나 회집하지 않은 국회가 다시 열리자 누적된 불만을 가지고 임했다. 감독주의 국교회파, 의회주의 장로회파, 회중주의 독립파로 나뉘어졌다. 정치권력을 쥐고 있던 올리버 크롬웰은 독립파 회중주의 지지자였다. 다수를 차지한 청교도 장로회주의자들은 감독주의 지지자들과 제휴를 하고 왕을 움직여 영국국교회가 장로회 정치를 도입하고 개혁신학을 수용하도록 일을 추진했다. 국회가 왕의 신하를 재판 없이 처형할 수 있도록 했다. 찰스에게 영국국교회를 개혁하는 총회 소집을 청원했다.

        그 무렵 스코틀랜드 대표는 영국 국회를 설득하여 모든 의원들이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신앙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신앙고백과 교회정치와 예배모범과 교리문답에 바탕을 둔 ‘동맹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에 서명하게 했다. 그러나 크롬웰은 이를 강력히 거부했다. 장로회 제도가 양심에 따른 개인 예배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여 반대했다. 독립파 회중주의자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개인의 신앙과 그것에 대한 관용이 국가의 통일을 위해 희생될 위기에 처하자, 크롬웰은 왕에 대한 군사적인 승리만이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고 자유로운 기독교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왕정파는 영국국교회가 감독주의 제도를 수용하는 것을 지지했다. 군주의 신적인 통치권과 감독주의 교회 형태가 왕정에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크롬웰이 이끄는 독립당에 대항하여 신앙을 위해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장로회주의를 따르는 청교도들은 중립을 유지했다. 국회의원 다수를 차지하던 그들은 그 동안 수난을 당해온 찰스를 동정하면서 왕과 국회와 교회가 나라의 개혁을 위해 함께 일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국회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런던의 웨스트민스터교회당에서 총회를 소집했다. 영국국교회를 보다 더 장로회다운 치리 형태로 바꾸고 신학을 개혁하고 교회를 정화하기 위한 교회 개혁 법안을 제정하자는 안을 결의했다. 국회는 1642년 6월부터 1643년 5월까지 성직자 총회를 소집하기 위해 다섯 번이나 그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찰스는 번번이 서명을 거부했다. 하원은 여섯 번째 그 법안을 통과시키고 발표했다. 상원도 1643년 6월 12일에 그것을 통과시켜 하원에 동조했다. 종교회의인 총회는 왕의 동의 없이 상원과 하원에 의해 1642년 7월 1일에 소집되었다.

        국회는 총회를 국회 자문기구로 여겼다. 그래서 국회가 총회의 회원을 선임하고, 책임자를 임명하고 토론의 주제를 제시하고 활동범위를 제약했다. 이른바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121명의 영국국교회의 청교도 목사들과 약간 명의 회중 교회 목사 그리고 두세 명의 감독제 선호자들로 구성되었다. 총대 대다수는 장로회를 선호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총회에는 30명의 평신도 국회의원이 참석했다. 3명의 에라스티안(Erastian: 교회가 국가권력에 종속해야 한다고 보는 사람)과 스코틀랜드교회가 파송한 여섯 명의 대표(Commissioners)가 자문으로 참석했다.

        국회는 총회를 소집하면서 영국국교회가 로마가톨릭교회 식의 예배가 아닌 단순한 예배모범을, 감독제도가 아닌 장로회 정치를, 로마교 신조가 아닌 개혁주의 신조를 채택하여 모든 국민을 포용하는 국가교회로 개편될 것을 희망했다. 그러나 퀘이커와 재세례파 신자 등 과격한 사람들을 배제하고, 무정부주의를 야기하려는 자들이나 영국국교회를 갈라놓으려는 로마가톨릭교회를 배격하기를 바랐다.

        총회는 국회의 요청에 따라 먼저 영국국교회의 헌장인 ‘39개 신조’를 개정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신조가 개혁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잘못된 해석을 일부 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니케아신조와 아타나시우스신조를 참고하여 그 교리가 철저히 성경에 바탕을 두게 했다. 난해하고 이론적인 것은 배제했다.

        그런데 16번째 신조를 개정하는 작업을 할 즈음에 정치 상황이 급변했다. 국회와 찰스 l세가 정면으로 충돌한 시민전쟁이 발생한 것이다. 국회군은 퇴각해야 했고, 스코틀랜드의 지원이 필요했다. 스코틀랜드는 지원군 파병의 대가로 엄숙한 동맹관계를 맺고자 했다. 그리하여 국회에서 스코틀랜드 대표자들의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스코틀랜드 대표자이며 영국국회에서 스코틀랜드 자문으로 일하던 사람들은 토론의 권한은 있지만 투표권이 없는 상태로 총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들 6명 가운데 4명의 장로교 목사들은 신앙고백 초안 작성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그때부터 신앙고백서 작성의 방향이 달라졌다.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종교 통일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 것으로 전향했다. 스코틀랜드 대표자들은 영국 측의 4명의 의원들과 함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작성 기초 위원으로 활약했다. 이 신앙고백서는 강력한 개혁신학과 장로교 전통 아래서 만들어졌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경건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5년 6개월 22일 동안 1,163차례의 회의와 수많은 소위원회로 모여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작성하는 데는 별 논란이 없었으나, 장로회 정치가 과연 신적인 권위를 갖는가에 대해서는 장장 한 달 동안 논의했다. 총회는 기도, 예배, 금식으로 이어졌다. 중단 없이 여덟 시간이나 예배를 계속 드린 일도 있었다. 한 시간의 설교, 두 시간의 기도는 예사로운 일이었다. 1647년 11월, 회의를 마칠 무렵에 신앙고백서는 교리 지침서로, 나중에 완성한 소교리문답은 젊은이들의 교육교재로, 대교리문답은 설교자들의 지침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예배모범, 장로회 정치, 시편찬송도 만들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하여 신앙고백서 작성에 심혈을 기울인 스코틀랜드교회 대표자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람은 1647년 11월에 총회를 떠났다. 그들의 주도로 스코틀랜드교회는 기존의 신앙고백서를 버리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채택했다. 이 신앙고백서는 그것이 만들어진 영국에서는 오히려 그 빛을 보지 못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영국 하원은 고백서를 즉각 승인을 하지 않고 서술을 뒷받침하는 성경구절을 첨가하라고 요구했다. 성경참고문을 찾아 기입하는 일로 시간이 자꾸 흘러가고 있었다. 그 무렵 크롬웰 군대는 국회의 하수인이 아닌 독립적인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는 국왕 찰스를 체포했고, ‘양심의 자유, 신앙의 관용’을 외쳤다. 크롬웰도 장로회 제도와 그러한 방향으로 교회가 개혁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는 개혁신학을 추종했다. 그러나 독립파 사람들이 그를 옹립하고 점차 국회를 차지했다. 군주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쇠사슬에 묶였고, 교회는 혼돈상태에 빠졌다. 그러한 상황에서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신앙고백서 작성을 완성했다. 그러나 그것은 즉각 받아들여지지 않고 지연되고 있었다.

        하원은 상원이 이미 승인한 신앙고백서를 1648년 6월 2일에 이르러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흘러 가버린 탓으로 그러나 장로회주의자들의 꿈은 무산되었다. 장로회주의자들은 독립교회주의자들을 따돌리고 감독주의자들과 제휴하여 왕을 인정하면서 영국국교회에 장로회 제도를 정착시키려고 했으나 장로회 제도의 꿈은 무산되고, 총회가 수고하여 만든 신앙고백서는 영국국교회의 것이 되지 못했다. 그것들이 자리를 잡도록 만들기에는 그들의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다.

        크롬웰은 국회를 해산했다. 1653년에서 1658년까지 호민관으로 통치했다. 자신이 펼치는 공화정부를 지지하지 않는 장로회주의자들은 교구에서 추방당했다. 크롬웰은 장로회 정치가 아니라 회중교회 치리체제를 원했다. 1658년에 크롬웰이 죽자 국회가 복구되었다. 국회는 1660년 3월 14일에 장로회 제도를 영국국교회 정치제도로 공인한다고 하는 법을 선포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다시 채택하고, 그것을 인쇄하도록 했다. 그러나 장로회 제도와 감독제도가 갈등을 겪는 가운데서 찰스의 아들 찰스 2세가 감독주의 체제를 재정비하자 장로회주자들의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국회는 왕정 복귀를 공포하고 스스로 해산했다. 득세한 감독주의 감독들은 복수심에 가득 찬 상태로 통일법(The Act of Uniformity)을 통과시켰고,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교구 밖으로 추방했다. 청교도들이 지금까지 추구하던 장로회와 개혁신학은 변두리로 밀려났다. 교구에서 축출된 비국교도 다수는 독립 침례교도로 자리를 잡았다.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던 일부 장로회주의 회원들은 영국국교회와 손을 잡았다.

        3.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사상

        16세기의 종교개혁 직후 유럽 대륙에는 두 가지 흐름이 나타났다. 한편에서는 정통주의가 등장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경건주의가 나타났다. 기독교 신앙이 이성의 역할에 강조를 둘 것인가, 경험에 강조를 둘 것인가 하는 것이 새로운 주제로 대두되었다. 신학자들은 성경 진리를 새롭고 단순하게 이해하던 종교개혁 당시의 분위기와는 달리 ‘객관적’인 교리 체계를 세우는 일에 몰두했다. 정통주의 시대의 특징은 신학이론을 합리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이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정통주의 시대를 주도한 개혁주의 정통신학(Reformed Orthodoxy)의 영향 아래서 만들어졌다. 하나님의 창조, 작정, 섭리에 대한 합리적 서술에 상당부분을 할애한다. 성령과 선교는 다루지 않는다. 성령은 영국국교회의 ‘39개 신조’에도 포함되어 있는데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그것을 다루지 않은 것은 특기할 만하다. 프로테스탄트 선교는 경건주의가 왕성하던 시기부터 부각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종교개혁 이후 125년 동안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집대성했다. 17세기의 신학과 신앙 명제들을 포함시켰다. 조리 있고 엄숙하며 명확한 언어로 서술했다. 완결성과 포괄성을 가졌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유서 깊은 기독교 진리를 변호했다.

        이 신앙고백서는 총 3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진리의 원천인 성경을 다룬다. 제2장에서 제5장까지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전체 개요를 논리적으로 배열한다. 하나님의 작정, 섭리를 다룬다. 제6장에서 제20장까지는 인간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설명한다. 제21장에서 제26장까지는 기독교 삶의 윤리 차원을 다룬다. 하나님의 율법, 양심의 자유, 교회와 국가, 결혼과 이혼 등을 서술한다. 마지막 부분인 제27장에서 제33장까지는 교회, 성례, 마지막 일들을 담고 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작성자들(The Westminster Divines)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역사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주권과 돌보심 아래에 있다고 확신했다. 자연의 인과응보 법칙에 따르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칼빈주의적 확신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칼빈이나 도르트총회(1619)가 확정한 교회법보다는 훨씬 더 부드러운 용어를 사용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탁월성과 중요성은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예정론, 하나님의 미리 아심 등에 대한 서술은 당시에 유행하던 연역 사고를 반영하지만, 동시에 성경에서 진리를 도출하는 귀납 방법을 따른 것이기도 하다. 신구약 성경 66권이 어떻게 정경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며, 교회에 의해 그것이 권위를 갖게 된다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주장을 부정한다. 성경의 진실성과 신자의 마음속에 있는 성령의 내적 증거야말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최종적인 설득력을 갖는 토대라고 본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성경에 관한 교리 다음으로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에 무게를 둔다. 청교도들의 영향을 받아 언약신학을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작정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언약을 인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의 첫째가는 표현이라고 본다. 제7장은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논한다.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나눈다. 이러한 구분을 두는 언약사상을 연방신학(Federal Theology)이라고 한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은 두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한 가지 언약만 있다고 본다. 행위언약이 은혜언약 안에 포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작성자들은 신학이 이론으로 그치지 않고 실천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의 3분의 2 가량을 개인과 사회 차원의 기독교 삶과 관계된 실천적 주제에 할애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기독교인의 삶과 건덕(Edification)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칼빈주의자들에게 신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인 학문이다. 신학의 목적은 하나님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순종의 삶이다.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인간의 자랑이나 권세나 섬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삶과 기독교 신앙의 구현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신앙고백서보다 분량이 더 많은 대교리문답을 작성했다. 묻고 답하는 형식의 이 고백문서는 설교자들을 위한 길라잡이이다. 신앙고백서를 만든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것을 요약한 것이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소교리문답이다. 제1문에서 제38문까지는 기독교인이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를 다루고, 제39문부터 제107문까지는 기독인의 삶의 의무를 다룬다. 성경이 가장 요긴하게 가르치는 두 가지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무엇을 믿어야 할 것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본분(duties)이 무엇인가로 나눈다.

        4.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한국장로교회

        웨스트민스터교회당에서 열린 총회는 종교개혁의 완성을 목표로 삼아 교회정치 제도와 정화(淨化)에 초점을 맞추었다. 청교도 정신을 반영하여 교회나 국가가 개인의 양심을 구속할 권리가 없다는 등의 주제를 다루었다. 개혁신앙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성직주의를 배격한다. 바울, 어거스틴, 위클리프로 이어지고 칼빈이 강화한 칼빈주의 신학을 담고 있다.

        잎서 언급했듯이 신앙고백서는 역사적인 산물이며,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 사회, 정치, 정신, 신앙을 반영한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다른 고백서들과 마찬가지로 제한성을 지니고 있다. 인종차별, 도시화, 산업화, 직장, 민주화, 남녀평등, 매스 커뮤니케이션, 복잡한 인간관계 등은 당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주제가 아니었다. 그 당시의 교회는 사회 문제, 경제 문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책임을 오늘날처럼 자각하지 못했다. 영국교회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사회개혁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 신앙고백서는 법률조문 또는 헌장이라는 인상을 준다. 어떤 문제에 대한 정답은 단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보는 경향도 엿보인다. 하나님의 ‘구속’을 강조한 반면에 ‘이웃’에 대한 그다지 큰 관심은 표명하지 않는다.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당에서 조직된 한국장로교회 첫 노회는 인도장로교회의 신조문을 본 떠 만든 신앙고백문을 채택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신조’는 흔히 ‘12신조’라고 불린다.

        이 신조문은 다음과 같은 서술로 시작한다. “대한예수교회에서 이 아래에 기록한 몇 가지 조목으로 신경을 삼아 목사 및 인허 강도인과 장로와 집사로 하여금 청종하게 하는 것은 대한교회를 설립한 본 교회의 가르친바 취지와 표준을 버림이 아니라 오히려 찬성함이니 특별히 웨스트민스터신조와 성경요리문답 대소 책자는 성경을 밝혀 해석한 책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 그 중에 성경요리문답을 적은 책을 더욱 교회문답으로 삼느니라.” 한국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교리의 표준으로 삼았다. 배위량 선교사가 1925년에 처음으로 한글로 번역했다.

        이 고백문서가 한국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로 채택된 것은 상당한 세월이 흐른 뒤였다. 장로교 통합교단 제52회 총회(1967)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기존의 신조에 첨가하기로 결의했고, 제56회 총회(1971)가 이를 공포했다. 제58회 총회가 결의한 교회 정치와 권징조례 수정안은 통과시켜 1974년 6월에 출간한 헌법 수정판에 그것을 수록했다. 수록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1903년 미국장로교회가 수정하고 보충한 제35장 ‘성령에 관하여,’ 제35장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과 선교에 관하여’를 포함시켰다.

        고신교단 제22회 총회(1972)는 노회 수의(隨意) 결과를 보고받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공식 신조문으로 채택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원본을 채택하여 사용하다가 ‘성령에 관하여’(제34장)와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하여’(제35장)을 보완하여 사용하고 있다.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출범한 학생신앙운동(Student for Christ)의 초기 지도자들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을 신조로 수납했다.

        한국장로교회는 아빙돈단권주석 문제(1935), 창세기 저자 문제와 교회 안의 여권 문제(1934), 신사참배 문제(1938-1945), 조선신학교 문제, 김재준 교수의 자유주의 신학 문제 등으로 장로교는 갈등을 겪었고, 신앙이 위협을 받고 있었다.

        고신교단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출범하면서 “현 대한예수교장로회 가설(假說) 총회가 본[래의] 장로회 정신을 떠나서 이교파적으로 흐르므로 이를 바로 잡아 예수교장로회로 계승한다”는 취지를 표방했다. 장로교 정신, 원리, 예배, 신앙고백에 충실한 ‘정통신학운동’을 천명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역사적인 신앙고백서로 여기지만 공식 고백문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독자적인 신앙고백서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신앙공동체의 연합과 일치의 기초이다. 이것을 고백하는 교회들은 인간적인 문제들을 뒤로 하고 조속히 기구적으로도 하나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것은 신앙고백서로 수용하는 교회들과 그렇게 하지 않는 교회들의 연합과 일치는 하나의 난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신앙고백서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회의 시대적 반응을 담은 고백서라는 사실은 신앙공동체가 다양한 고백서들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새로 만든 것이라고 하여 반드시 과거에 만들어진 것보다 더 탁월한 고백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만들어진 뒤에 나타난 여러 가지 신앙고백서들을 보라. 그 어느 것도 이를 능가할만한 신앙고백서가 못된다.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며 영적으로 깨어 있던 그 시대의 교회의 경건과 견줄만한 풍토가 쉽게 조성되지 않는다. 오늘날의 교회는 옛날보다 훨씬 더 세상의 지혜와 세속주의와 인본주의에 오염되어 있다. 신학사조는 기독교의 절대성과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다른 종교에도 성령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성령의 열매가 있다고 선언한다.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는 1983년에 미국북장로교회(UPCUSA)와 미국남장로교회(PCUS)가 통합된 교단이다. 바르트주의(신신학)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새신앙고백서’(1967)를 수용하고 있다. 바르트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성경관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고 말하지 않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말한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가 겉으로 보기에는 미미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크다.

        미합중국장로교회는 이러한 고백서를 가진 이 교회의 성경관은 목사·장로·집사 임직 때 임직자가 피임직자에게 묻는 질문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여러분은 신구약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책이며, 전체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독특하고도 권위 있는 증언이며, 당신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받아들이십니까?”

        위 질문은 유서 깊은 기독교를 지향하는 장로교단들, 예컨대 한국의 장로교 고신, 개혁, 합동 교단과 미국장로교회(PCA), 미국정통장로교회(OPC) 등이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생활의 최종적 규범이라고 믿습니까?”라고 묻는 것과 대조적이다.

        성경의 무오성은 신학의 마지막 보루이다. 미합중국장로교회는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지 않는다. 성경이 “전체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독특하고도 권위 있는 증언이며, 당신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가”고 묻는다. 성경을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말씀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는 바르트주의 성경관을 반영하고 있다.

        새로운 신앙고백의 필요성은 항상 존재한다. 새롭게 등장하는 이단들과 이데올로기들은 고풍스럽고 부적절한 논쟁적 외침을 내뱉는 것으로는 결코 효과적으로 극복될 수 없다. 그러나 새 신앙고백서를 만든다고 하여 새 것이 옛 것보다 더 탁월하고 창의적인 것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현대 신앙고백서들은 대체로 핵심 교리들를 지나치게 일방적이거나 빈약하게 다룬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만들어진 신앙고백서들은 개혁주의 공동체들의 시도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 글은 최덕성 지음 [개혁신학과 창의적 목회] (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5)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온 것입니다. 사이버신학저널 '리포르만다'(www.reformanda.co.kr)에도 실려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작성된 웨스트민스터교회당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사이버신학저널 '리포르만다'를 방문하시면 여러 가지 신학논문과 삶의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위 책이 다루는 핵심 주제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사도신경은 로마가톨릭교회의 잔재인가?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운동, 이대로 좋은가?
        사도신경은 교회 연합과 일치의 충분조건인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개혁교회 일치의 조건인가?
        단군상 철폐운동, 불필요한가?
        굶주린 동족, 외면할 것인가?
        과거사, 무엇을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
        죄 고백은 공개적으로 해야 하는가?
        교회사 지식은 목회에 필수적인가?
        예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인가?
        예수를 믿으면 저절로 신앙인격이 성숙하는가?
        계급적인 직분개념, 이대로 좋은가?
        교회개척의 용기, 아직도 필요한가?
        21세기의 이상적인 목회자 모델은 무엇인가?
        신학, 목회, 창의성은 어떤 관계인가?
        개혁교회의 특징은 무엇인가?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교회를 슬프게 하는 신학논리"

         

        - 계시종결론과 은사중지론

            나용화 목사(전 개신대학원대학교총장)

                      

        1. 한국교회의 신학적 비극

         

        기독교 세계화를 선도하고자 하는 한 대학교의 설립자이자 총장인 분이 말하기를,

        “신학교와 신학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교회 성장은 멈추고 오히려 교회가 죽어간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 분의 대학교는 생명신학을 주제로 논문발표를 매년 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신학은 신앙의 종으로서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을 튼튼하게 만들어 주는 학문으로서,

        교회를 살리고 부흥시켜야 한다.

        교회를 부흥하지 못하게 하는 신학은 이론상으로는 건전하게 보일지라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신학교 교수들의 경우 거의 대부분 목회 경험이 없고 목회를 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개인적인 말씀 묵상과 집중적인 기도와 성령의 은사 체험이 없고,

        말씀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한다.

         

        의학을 전공하는 의학자들은 의료 현장과 의학 강의실을 연계하여

        의료 현장의 자료들을 가지고 의학 이론을 발전시킨다.

        그래서 의학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질병을 예방하며 제거하여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한다.

         

        이에 반하여, 신학자들은 목회 현장과 신학 강의실을 연계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가 제도적으로 신학교 교수들에게 목회할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

         

        보수 정통 신학을 자랑하는 한 신학대학교에서 10여 년간 교수를 하다가

        목회를 하게 된 한 목사가 어떤 신학회에서 개회 설교를 하는 가운데,

        말씀 묵상과 기도하는 일에 매일 세 시간을 바치라고

        신학자들에게 간곡하게 부탁한 바 있었다.

         

        그러면서 고백하기를 목회 현장을 모르고 한 신학 교수 사역은

        생명과 능력이 없는 공허한 이론으로서 교회를 죽이는 신학을 가르칠 뿐이라고 하였다.

         

        최근에 한국의 개신교 교회들의 성장과 부흥이 멈춘 이유 중의 중요한 것이

        바로 이론에 치우친 신학 때문이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신학 교수가 아니라 목회자 곧 목사로 살았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나는 본래 목사이다. 내가 신학을 하는 것은 더 좋은 목사가 되고,

        목회를 더 잘 하기 위해서이다”

         

        고 했다. 그가 신학을 연구하는 목적은 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하는데 있었고,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가지고 성령으로 구원의 비밀을 계시하여

        교회와 성도들의 믿음을 튼튼하게 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끊임없이 성경을 가지고,

        진리와 계시의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하고

        또 예수님만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계시하고 있으며,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적 은사들(예: 신유, 방언, 축사 등)이 나타나게 하고 계신다.

         

        한국의 보수 정통 신학을 자랑하는 신학대학교와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성경을 가지고 성령으로 지금도 계시하고 계신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8장 8항; 대요리 43문답; 소요리 24문답)

        는 사실을 알지 못하여 계시종결론만을 주장한다.

         

        그리고 은사중지론 즉 성령의 계시적 은사(예언)와 방언의 은사 및

        신유와 축사의 은사가 사도시대 이후로는 중지되었다고 가르친다.

         

        뿐만 아니라, 이같은 계시종결론과 은사중지론을 가지고 이단 시비를 하여

        이단 아닌 이단을 만들어 정죄한다. 한국교회의 비극을 만들어낸다.

         

        2. 배척되어야 할 계시종결론

         

        기독교는 우상숭배의 이방종교와는 달리 말씀계시의 종교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결코 변명할 수 없게 인간의 본성과 자연계와 섭리를 통해서

        항상 계시하고 있다(롬 1:19-20; 시 19:1-6; 참고,

        칼빈, 「기독교강요」 1권 5장 1-3, 8절;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1장 1항).

         

        이 일반계시는 그 자체로서는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주기에 불충분한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말씀계시를 안경과 같은 방편으로 마련해 주신 것이다(「기독교강요」 1권 6장 1,3절).

         

        그런데, 어떤 신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고,

        또 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된 이후로는 계시가 종결되었다고 한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시요(요 1:1, 18; 20:28)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 무오 절대적 권위의 계시이시므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과 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가 종결되어, 이제는 하나님의 조명 사역만 있고 계시 행위가 아예 없으며,

        따라서 계시의 중요한 수단들인 꿈, 환상, 음성, 이적(방언, 축사, 치유 등)이 필요없게 되어

        이제는 중지 되었다고 강조한다.

         

        칼빈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이 말하는 바 성령의 조명이란 성경의 진리성

        곧,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증

        (참고, 벌코프,「조직신학」 상, 크리스챤다이제스트, p.196)일 뿐 아니라,

        성경에 말씀으로 계시되어 있는 바 모든 구원의 진리들을 깨닫게 하는 사역이다

        (칼빈, 「기독교강요」 1권 7장 4절; 1권 9장 3절;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1장 5,6).

         

        이로 보건대, 성령의 조명 사역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들을 깨닫게 하는 바 계시 행위인 것이다.

         

        성령의 조명 사역이 계시 행위라는 사실은 첫째, 성경이 밝히 말한다.

        지혜와 계시의 성령이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18),

        진리의 성령이 우리 안에 영원히 계셔 예수님을 증거하여 알게 하시며

        그의 말씀들을 깨닫게 하신다(요 14:16-17,26; 15:26; 16:13).

         

        둘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에서 성령의 조명과 관련된 성경구절들이 밝히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2장 10-13절,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계시하셨다”

        (참고, 요 16:13; 엡 1:7), 성령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하여 믿게 한다

        (참고, 고전 12:3).

         

        셋째,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분이 밝히 말한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선지자로서 사도들과 교회의 말씀 사역자들을 통해서

        성경을 가지고 계시와 진리의 성령으로 계시 사역을 항상 하고 계신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8장 8항; 대요리 43; 소요리 24문답; 참고,

        벌코프, 「조직신학」하, p.596).

         

        넷째,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공적 사역에서 항상 하나님의 완성된 계시인 성경을 가지고

        계시하신 사실(참고, 눅 4:16-21; 24:13-35)과,

        사도들도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시 자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계시 활동을 한 사실 (행 2:14-36; 28:23-31)이 밝히 말한다.

         

        다섯째, 일반계시가 지금도 있다는 사실이 밝히 말한다.

        일반계시가 구원의 비밀을 알리기에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안경 노릇할 특별계시가 늘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참고, 시 19편).

         

        여섯째, 예수님이 항상 살아계시고(히 13:8; 계 1:18), 성경도 항상 있고

        살아 있다는 사실 (벧전 1:23)과, 성경의 각 책이 본래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기에

        교회에 의해 완성된 것이 아니라 단지 공인되었다는 사실이 계시 종결론을 배척한다.

         

        이로 보건대, 계시종결론은 예수그리스도의 영원한 선지직 뿐 아니라

        성령의 계시 행위를 부정함으로써 성령의 역동적인 계시 활동을 제한하기 때문에,

        사실상 그리스도의 교회를 죽이는 것이다.

         

        3. 비성경적 반목회적 은사중지론

         

        계시종결론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은 계시의 으뜸가는 목적(end)이 무엇인가를 먼저 묻는다.

        물론 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밝히는 것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으뜸가는 목적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이 말세에 사람의 몸으로 친히 이 땅에 오시어

        자신을 나타내셨을 뿐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하고 충만하게 계시함으로

        계시의 목적이 성취되었고(참고, 요 1:18; 히 1:2),

        사도들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의 비밀들을 계시하였으며,

        그 계시들이 성경에 충분하게 기록되어 (계 22:18-19)

        계시의 과정이 종결됨으로써 더 이상의 특별계시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별 계시를 위한 수단(신현, 예언, 이적)도 필요 없게 되어 중지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신학자들의 주장은 특별히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1장에서 가르쳐진 바,

        성경의 절대필요성과 충분성과 성령의 내적 증거(조명) 등에 근거하되,

        1장 1항에 언급된 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의 뜻을 직접 계시해 주시던

        과거의 방식들은 이제 중단되었다”는 진술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신학자들의 주장을 보면, 우선 계시의 목적(end)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처음부터 종결(end)을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1장 1항의 “과거의 방식들이 이제 중단되었다”는

        말을 계시의 수단의 중단으로 주장한다.

         

        편, 이들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과 자연계 그리고 섭리 사역을 통해 지속적으로

        계시하는 것(일반계시의 지속성)을 인정하는가 하면,

        성령님께서 성경을 가지고 구원의 비밀을 개닫게 하는 바 조명 사역을 인정한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1장 1항에서 진술하는 바 중단된 것은

        계시의 수단들(means)인 신현(하나님의 나타나심과 관련된 꿈, 환상, 음성)과

        예언(하나님의 말씀 맡음)과 이적(치유, 축사, 방언)등이 아니고,

        8장 6항에 진술되어 있는 바 구약에서 사용된 방식(ways)

        곧, 약속과 예표와 희생제사 등이다 (참고, 히 1:1; 8:5; 9:1, 9-10, 23-24; 10:1,8).

         

        사도행전 2장에 인용된 요엘서 2:28-32에 의하면 마지막 날들

        곧, 예수님의 초림 이후의 말세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언과 환상과 꿈이

        모든 성도들에게 있게 되고, 하나님께서 많은 이적과 표적들을 행하시게 되어 있다.

         

        이 예언은 사도행전에서 종결되는 것이 결코 아니고,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이르러서야 완결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8장 8항과 대요리 43-45문답과

        소요리 24-26문답 등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이 성취한 구속을 성도들에게 효과적으로 적용하시고 중보 기도하시며,

         

        대선지자로서는 말씀으로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구원의 비밀들을

        여러 가지의 시행 방법으로 계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믿어 순종케 하고,

        대왕으로서 모든 원수 마귀들을 물리치신다.

         

        예수님께서 계시의 성령을 통하여 계시해 주지 않으면 어느 시대나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예배할 수도 없고,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도 깨달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마 11:27; 고전 2:10-13).

         

        계시가 없으면 사람들이 방자하게 되고 결국은 멸망 한다(잠 29:18).

         

        이로 보건대, 성경을 가지고 계시와 진리의 성령을 통해 선지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구원의 비밀들을 계시하는 일은

        사실상 주님의 재림 때까지 지속되어 마땅하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성령의 계시 사역을 자세하게 말하는가 하면

        (고전 2:10-16), “너희가 모일 때에는 각각 찬송도 있고 가르침도 있고 계시도 있고

        방언도 있고 통역도 있으나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여라”(고전 14:26)

        하고

         

        예언과 방언을 덕스럽게 하는 방법을 제시하면서 (고전 14:27-40),

        여자들의 경우 방언할 때 조용하게 하라고 하였다(고전 14:34).

         

        계시종결론자들은 계시의 목적에 초점을 맞추어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계시의 과정이 완성되고,

        사도들에 의하여 예수의 그리스도이심과 그의 구속 성취 사역이

        온전하게 증거되어 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 외에는 다른 계시가 없으며,

        결론적으로 지금은 계시가 없고 단지 조명만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계시의 정의에 초점을 맞추어 논리를 전개하되

        그리스도 예수님의 선지자 직분과 성령의 계시 사역 및 성경에 있는 바

         

        계시와 관련된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

        (마 11:27; 요 15:26; 16:13; 고전 2:10-13; 엡 1:17-18)과

        역(행 2:14-41; 3:11-26; 4:8-12; 5:29-32; 9:22; 28:31)에

        근거하여 살펴보면,

        계시의 주체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은 계시의 수단들을

        여전히 지금도 사용하여 참고, (행 5:12-16; 8:4-8; 9:4,10; 10:3,46)

        성경을 통해서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신학이 말하는 바 계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사역(작정, 성취, 적용) 및

        장래에 되어질 일들을 알리고 깨닫게 하는 행위와,

        그 행위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지식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불신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 회개하고 구원 얻으려면

        성령의 계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참고, 고전 12:3).

        이로 보건대, 계시의 목적에 초점을 맞추면 계시가 종결되어

        이제는 없다고 결론 짓게 되지만, 계시의 정의에 초점을 맞추면

        계시가 여전히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있고 살아 있기에(벧전 1:23) 하나님의 계시도

         항상 있고 살아 있는 것이다.

         

        예수님 이외에 새로운 다른 특별계시는 없지만,

        그 특별계시는 항상 있고 살아 있으며,

        말씀의 사역자들을 통하여 성령으로 증거되고 가르쳐짐으로써 늘 계시된다.

         

        계시종결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계시의 수단들(신현, 예언, 이적)이

        이제는 필요없다고 보기 때문에 은사중지론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신현(하나님의 나타나심)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

        최고의 신현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신현이 필요 없으며,

        따라서 꿈이나 환상이나 음성 등이 이제는 없다고 말한다.

         

        예언(하나님의 말씀을 맡음)과 관련해서는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하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예언이 필요 없으며, 따라서 예언의 은사가 없다고 말한다.

         

        이 같은 주장에 의하면 오늘날의 말씀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는 일이 없는 셈이요 (참고, 고전 4:1-2),

        그 말씀을 가지고 장래의 일들에 대하여 예언하는 일이 불가능하다(참고, 요 16:13).

         

        그리고 이적(또는, 표적)과 관련하여서는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이 최고의 표적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표적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

         

        또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과, 성경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요

        특별 계시임을 확증할 목적으로 표적들이 주어졌던 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이 사도들에 의해 확실하게 선포 되었고,

        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된 이후로는 사실상 이적이 필요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은사중지론자들에 의하면,

        치유와 방언과 축사와 같은 표적이 중지되고 없는 것이다.

         

        이 같은 계시종결론과 은사중지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계시의 수단들과 관련하여

        꿈과 환상과 음성이 지금도 성도들에게서 체험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뿐 아니라

        이단으로 정죄한다.

         

        그리고 예언의 은사와 방언의 은사는

        물론 치유 사역과 축사 사역도 부정하고 이단으로 정죄한다.

        이 같은 이단 정죄 행위로 말미암아 한국교회를 죽이는 죄와 악을 범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적을 행하시는 목적은 성경 계시를 확증하는 데만 있지 않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출 7:5)과,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막 5:25-34; 요 20:30-31)과

        성령님의 능력(행 10:38)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들의 신적 권세를 세워주고 (고후 12:12),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도 살아 운동하는 것을 보여 주며(행 19:11-12,20),

         

        궁핍한 중에 있는자들에 급한 도움을 주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행 16:25-34) 등 여러 가지이다.

         

        하나님은 과거 뿐 아니라 언제라도 이적을 행하신다

        (참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5장 3항).

         

        나용화 교수(개신대학원대학교 총장, 총회신학위원회 위원장)

        출처 : http://chtimes.co.kr/lib/37896

                개신대학원대학교 홈페이지에 게재하였던 글을 재인용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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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신앙고백이 중요한가?

         

         

        교회 세속화의 원인과 대안

         

         

        기독교가 전파된 후 120여년 동안 한국 교회는 세계 선교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괄목할만한 성장을 거듭하였습니다. 규모와 외형에 있어서 엄청난 발전을 했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 교회는 안팎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가 발산해 오던 매력은 찾아볼 수 없고, 한국 사회에서 동네북 신세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최근의 모 종교기관에서 실시한 갤럽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0퍼센트 이상이 한국 교회를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개혁해야 할 대상으로 지목하였다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한국인 세 명중 두 사람은 한국 교회를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종교집단쯤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럴때일수록 좀 더 냉철한 반성과 지성이 요청됩니다. 사실 한국 교회의 위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전후 50년대 이후로 한국 교회의 고도(高度) 성장의 그늘 아래에는 늘 교회의 세속화라는 복병이 숨어 있었습니다. 생사를 걸고 신자를 모으고 교회의 지경을 넓히는 일에 몰두하는 사이, 거룩성과 순수성이라는 교회의 교회됨을 지탱할만한 내공을 키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온갖 유행성 프로그램에 매달려 그나마 신앙을 유지해 보려고 안간힘을 쓰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단기적인 대안으로는 교회 세속화의 흐름을 막기는커녕 교회의 본질로부터 더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뿐이었습니다.

         

         

        혹자는 오늘날 한국 교회를 머리카락 잘린 삼손에 비유합니다. 덩치는 큰 데, 다른 이는 고사하고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건사하지 못할 만큼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가 세속화의 물결 속에 이처럼 나약해진 데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겠습니다만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 그동안 한국 교회는 성경을 올바르게 가르치고 배우는 일 보다는 성경을 이용(?)하여 다른 목적을 추구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거나 성경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정작 성경을 강조하면서도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본의(本意)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사고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풍토가 만연합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자들도 성경 전체의 내용을 균형있게 강조하기 보다는 자신의 이해와 경험을 근거로 한 부분적인 가르침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인간의 행복과 번영과 성공을 위한 ‘그 무엇’으로 강조하는 ‘솜사탕’ 복음이 한 예입니다.

         

        둘째, 많은 교회들이 역사적인 신앙고백을 가르치거나 배우지 일에 무관심합니다. 교회 역사상 오늘날처럼 교회안에서 신앙고백이 푸대접을 받는 시대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신앙고백을 말하면 손사래부터 칩니다. 교리를 말하면 온갖 인상을 씁니다. 신비한 체험이나 은사라면 모를까 신앙고백을 배워서 무엇에 쓸 것이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이나 교리에 무관심한 교회와 성도일수록 성경으로부터 멀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교회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교훈 중의 하나입니다. 신앙고백과 교리는 신앙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담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을 바르게 깨닫고 실천하게 되는 기본 틀이 됩니다. 다시 말해, 바른 신앙고백과 교리는 성경 전체 내용을 성경의 원 저자가 되시는 성령 하나님의 시각으로 가늠하게 하는 일종의 이해의 척도(尺度) 역할을 합니다.

         

         

        19세기 탁월한 개혁주의 신학자 중 한 사람인 핫지(C. Hodge)는 앞서 말씀드린 내용을 간명하면서도 핵심적으로 이렇게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단들이 모든 기회에 나타나서, 성경을 곡해하며, 말씀의 어떤 부분을 과장하고 다른 중요한 부분을 버리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켜 거짓으로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성도를 보호하기 위해서 성경의 모든 중요한 교리를 정확히 정리해서 잘못된 것을 밝히고, 모든 거짓된 것을 제거하기 위해 성경 전체를 깨달을 수 있도록 했다. 이와 같이 성경 말씀의 전체 내용을 그 중요성에 따라서 잘 정리함으로써 말씀의 어떤 부분이 부당하게 축소되거나 또는 제거되거나 과장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했던 것이다”

         

         

        신앙고백의 성경적, 역사적 근거

         

         

        유명한 교회사가인 필립샤프(P. Schaff)는 “성경은 하나님의 것이지만,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대답이다. 또한 성경은 신앙의 규범이요, 신앙고백은 교리의 규범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앙 고백이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성도의 답변인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인 표현입니다. 따라서 신앙고백이란 모든 성도의 선택이 아닌 필수사항이며, 이 고백이 바르게 유지되고 전수되기 위해서 교회는 신앙의 내용을 언어 형태로 표현한 이 신앙고백을 보전해야할 중대한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신앙고백의 중요성을 가장 잘 인식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성경 기자들이었습니다.

         

        모세의 경우를 보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았을 때, 그 내용이 성도들에게는 신앙고백의 형태로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출 19:7-9) 뿐만 아니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앙 고백을 그들의 자손들에게 끊임없이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로 듣게 할찌니 곧 백성의 남녀와 유치와 네 성안에 우거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로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 거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로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찌니라”(신 31:11-13) 이것은 구약 시대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신앙고백’ 곧 ‘교리문답’이라는 방식이 사용되었음을 말해 줍니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예수님께서는 신앙고백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물으셨을 때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5-16)라고 고백하는 것을 근거로 주님의 교회는 그와 같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엡 2:20)고 한 말씀도 같은 내용과 같은 이해로서 고백되어지는 신앙고백이 교회 세움의 기초가 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성경적 이해를 바탕으로 정통 교회는 초대 시대부터 교회의 신앙을 공적으로 대변할만한 신앙고백을 작성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 만들어진 가장 대표적인 신앙고백이 ‘사도신경’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신앙고백들이 있지만 무엇보다 16,7세기의 종교개혁 시대에 만들어진 신앙고백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기는 역사상 성경의 본의가 가장 바르게 회복되어 가장 참되게 증거되었던 때였습니다. ‘오직 말씀’에 사로잡힌 종교개혁자들은 거짓 신앙과 거짓 확신의 도전과 오류로부터 성경의 참된 정신을 보전하고, 후대에 온전하게 계승하기 위해 매우 체계적이고 정밀한 형태의 신앙고백을 작성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말씀으로 개혁된 교회의 3대 신앙고백서라고 일컬어지는 벨직 신앙고백(The Belgic Confession of Faith, A.D156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 A.D 1563) 그리고 도르트 신조(The Canons of Dort, A.D 1619)와 종교개혁의 역사적 성격을 가장 선명하고 원숙하게 드러내는 장로교회의 결정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A.D 1647)는 그 시대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성경적 신앙고백서들입니다.

         

         

        교회와 신앙의 기준으로서의 신앙고백

         

         

        종교개혁의 대전제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앙'(Coram Deo)과 ‘오직 믿음'(Sola Fide)은 신앙의 대상에 대한 바르고 참된 믿음과 지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종교 개혁에 기초한 신앙이란 ‘순수한 신앙고백을 철저하게 추구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의 비성경적 가르침과 세상과 결탁한 변질된 기독교 사상에 맞서 종교 개혁의 횃불을 치켜들었던 종교 개혁자들이 모진 박해와 고난속에서도 성경에 충실한 신앙 고백을 만드는 일에 결코 좌절하지 않았으며, 이것으로 진리의 나침반을 삼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던 이유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교회가 완전히 부패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앙고백은 결코 포기된 적이 없는 기독교의 전통”이라고 했습니다. 신앙고백은 성도의 신앙을 하나로 묶어 주는 진정한 교회 일치의 첨병이며, 세상과 이단과 거짓 복음으로부터 참된 신앙과 참된 교회의 영역을 표시하는 지계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고백을 부지런히 배움으로써 성경의 본의를 바르게 해석하며 또한 성경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적용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참된 신앙고백을 통해 우리의 교회와 신앙을 바르게 세워나가는 일은 변화하는 시대가운세도 변하지 않는 진리를 추구하는 진실한 교회와 성도에게 주어진 숭고한 책임이며, 사명입니다. 

         

        [출처] 왜 신앙고백이 중요한가? (비공개 카페)

         

         

         




        우리는 요일 4:6이 말하는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영의 이름을 토대로 영들을 판단하는 또 다른 방법을 배울 수 있다. 6절은 한 영을 "진리의 영"이라 칭하고 있고 다른 영을 "미혹의 영"이라 일컫고 있다.

         

        이 용어들은 성령의 사역을 흉내내는 다른 영들과 성령 그분의 본질적인 차이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어떤 영이 역사하여 사람들을 진리로 이끌고, 사람들에게 진리에 속한 것들을 일깨워 준다면, 우리는 그 영이 바로 성령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면,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권능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의식하게 되었다면, 인간의 삶이란 것이 극히 짧고 일순간에 끝나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면, 내세가 틀림없이 존재하고 자신들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면, 바로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신다고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장차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해명해야 할 날이 온다는 사실을 자각한다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요, 그 행위 또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인간은 그 본성이 무기력하여 자신을 구원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건전하고 올바른 교리가 그들을 인도하고 있다면, 바로 그 때, 우리는 성령께서 그들 심령 속에서 역사하신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는 것은 흑암의 영이 아니라 성령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이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신다. 사단의 왕국을 일컬어 흑암의 왕국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단의 왕국은 흑암과 거짓으로 지탱되고 있다. 성경은 사단이 자기 나라를 흑암으로 지배하고 있으며, 자기 나라 백성들을 흑암으로 통치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눅22:53, 골1:13). 성경은 귀신들을 가리켜 "이 세상에서 흑암의 권세 잡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인간들을 진리의 빛으로 인도하고 우리의 어둠을 제거하시는 분은 오로지 한 분, 하나님뿐이시다.

         

         

        - [부흥을 원하면 고정관념을 버리라],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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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한 당신


        철학 용어에 존재(存在, being)란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총괄이라고 나온다.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비존재자)’도 어떤 뜻에서는 존재자의 일종이라고 한다. 그 말뜻과는 별개(別個)의 문제지만, 필자의 생각에 지금 있는 것은 무엇이든 미래에도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더 나은 모습일 수도 있고 더 못한 모습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죽은 후에도 미지의 어떤 양상으로든 존재는 존속하리라고 보는 것이다.

        지금 있다(존재)는 것이 어느 한순간 영과 육의 분리(죽음)로 인해, 우리의 육안으로 보이지 않게 사라진다고 하여도 그 자체가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인간의 영(spirit)은 불멸한다고(전 12:7하 참조) 말씀하고 있고, 다른 사물도 천국 혹은 지옥에서 존재할 것을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특히,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해 주셨음을 보아 확증할 수 있다. ( 마 26:29절 참조)

        해 아래 새것은 없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도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 전 1:9-10절 말씀).”

        우리가 늘 새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 새해라기보다는 또 다른 한해의 시작일 뿐이다. 어제도 오늘도 같은 하루고 내일도 같은 하루일 뿐이다. 하지만, 여기에 숫자를 부여하여 셈을 하고 무언가 큰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쓰는 건 만물 중, 오직 인간뿐이다. 끝이면 다시 시작하고 시작은 또 다른 끝을 기약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1916년 이후 상대성이론을 일반상대성이론으로 확장시킨 아인슈타인은 그의 상대성이론에서 공간과 시간을 합쳐 단일 개념으로 말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아인슈타인’ 이전의 사람들은 공간과 시간이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우리 예수님께서 시공(時空)은 단일개념임을 우리에게 이미 말씀해 주셨다는 것이다. 역시, 우리 주님은 시공(時空)을 초월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대목이 아니고 무엇이랴. “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눅 20:38절 말씀).”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만 영존(永存)하시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은 바 된 우리 인간도 영존(永存)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영원부터 영원으로 영존(永存)하시지만, 우리 인간은 시작한 날이 있고 그 시작한 날부터, 영존(永存)한다는 차이가 분명히 있음을 밝혀둔다.)

        잠시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시간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고, 인간이 생각하는 죽음이란 것도 결국, 주님의 눈앞에서는, 영혼과 육체가 잠시 분리된 상태일 뿐, 모두 살아 있는 자들이란 것이다. 주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살아 있다….이 얼마나 멋진 하나님의 말씀인가? 그러니까, 우리의 눈높이를 좀 더 높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새해란 새것이 아니라,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어느 한 간점선(間點線),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란 생각을 가져야 더 멀리, 더 높이 바라볼 수 있는 영적 차원의 세계, 하나님의 계획 하심마저 바라볼 수 있는 시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헛된 행복을 잡으려는 인간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 12: 8절 말씀).” 이 고백이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가? 세계에서 가장 부귀영화를 누린 대왕 솔로몬이다! 그는 글자 그대로 부. 귀. 영화를 다 누린 사람이다.“저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다섯이며 저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했다고 했다. 현대판 학위로 치면, 그는 문학 박사, 정치학 박사, 철학 박사, 종교학 박사, 식물학 박사, 생물학 박사, 광물학 박사…등등… 재물 또한 엄청났고, 모든 남성의 꿈인 (나의 의견이 아닌, 통속적인 관념) 아름다운 여인들, 왕후가 육십, 후비가 칠백, 비빈이 팔십, 빈장이 삼백인, 그 외에도 무수한 시녀들( 왕상 11:3절, 아 6:8절 참조) 이런 그였으니, 인간으로서 무엇을 더 소원하며 무엇을 더 소유할 수 있겠는가?

        그런 그가 내린 결론은,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될 뿐이다.” 라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볼 때, 이생에서 바라고 소원하는 그 모든 것들은 헛되기가 바람을 잡으려는 것 같고, 사막의 신기루요, 무지개를 좇는 것과 같다고 하는 데는 더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사막의 신기루란 어떤 것인가? 신기루란, 광학(光學)에서, 빛의 밀도가 서로 다른 공기층에서 굴절함으로써 멀리 있는 물체가 거짓으로 보이는 현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찌해서 우리 인간에게 이런 거짓 현상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창세기로 되돌아가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창 3장 참조). 저 에덴동산에서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고 그 대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였기 때문이다. (요 3:36절 참조) 결국,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인생, 저주받은 인생이 저주받은 땅 위에서 행복을 잡으려고 달음박질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헛된 것으로서, 우리의 병든 안목, 굴절된 안목으로 보이는 무지개 같고, 사막에서 신기루를 좇는 것과 같을 뿐이다. 행복을 좇아가지만, 안타깝게도 행복은 점점 더 멀리 달아나고 목마르고 지친 인생, 결국은 파멸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죄지은 인간이 가야 할 the last destination이요, 숙명이다.

        행복한 당신: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행복해 질 수 없는가? 새해에 우리가 지녀야 할 최대의 목표, 진정한 행복을 소유하는 길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아낼 수 있는가? 앞에서 잠시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행복을 잃어버렸고 대신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였던 사람들이다. 그 속박된 굴레를 벗어던지고 병든 영혼과 육신을 회복시키기 전에는 결코 진정한 행복이란 없다. 먼저 인간 본질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말씀을 통해서 살펴본 필자의 생각이다.

        이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 오셨고 저주의 십자가를 지셨다. 죄 없으신 하나님이 죄인 대신 죽어주셨기에 그 피는 효력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는 그 사람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고, 굴절되고 어그러진 신분, 죄인 되었던 신분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너무 간단해서 사람들이 오히려 믿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불변하는 진리다. 진리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다. 수학도 아무리 간단한 공식이라 해도 그 공식을 무시하면 안 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엔 자신의 환경과 삶의 조건이 부족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가난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불행하게 사는 부자들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이들은 몸이 건강하지 않아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 중에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불행의 원인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행복의 조건이다.

        죄가 빼앗아가 버린, 하나님이 주셨던 좋은 선물을 되찾아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안에서만 인간 본질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 그분이 행복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만 해결해 주신 것이 아니라 죄가 가져다주었던 모든 불행으로부터도 구원해 주셨다.

        따라서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은 그 순간부터 영원까지 행복한 사람이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죄가 가져다준 본성과 죄가 만들어 놓은 환경과 죄가 준 삶의 무게 때문에 불행하게 살았지만, 예수를 믿고 나서는 다르다.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불행의 조건이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환경에 지배되어 불행하게 살던 나 자신이 변하는 것이다. 더는 환경에 눌려 살지 않고 오히려 믿음으로 불행을 이기면서 환경을 지배하며 살게 된다.

        결론적으로,
        존재(being)는 그 자체가 육신이 죽은 후에도 영(spirit)으로서 존재하며 그 영(spirit)이 갈 곳은, 천국이든 지옥이든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결정지어진다. 천국 백성도 영원하고, 지옥 백성 또한 그 영과 육이 부활한 후에는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불 못에 던지우되 영원히 후회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계 19:20 절 참조).

        해마다 새해가 되면, 계획이라는 명분 아래 이것저것 높이 쌓아 올리던 공중누각, 제대로 한 번 성취한 적 없다. 이제 더 이상 그런 어리석은 짓에 시간과 마음 빼앗기지 말자. 새해라고 달라질 것이 무엇인가? 근본이 바뀌어야 한다. 차라리, 인간이 무엇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제대로 된 고민을 한 번 해볼 필요가 있고, 구원의 기초부터 확실하게 다져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인간 본질이 변화되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무엇무엇을 가지지 못해 불행하다는 낮은 생각에서,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삶으로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뀐다면 그 인생이야말로 한 점 후회 없는 멋진 인생을 남기게 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가 절망뿐인 인생,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인생에게 이 영원한 행복을 소유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면, 그 인생이야말로 보석보다 값진 인생이 될 것이다. 내가 먼저,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전하는 일, 그 일만이 헛되지 않은 일, 영존(永存)하는 당신의 존재(存在)가 영원토록 빛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최상급의 멋진 일이 될 것이다.

        고로, 행복한 당신, 그대는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한 사람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전 12:13-14절 말씀).”


        글: 별똥별/최송연


          하나님의 관심 표명 [150131 시편으로 여는 하루]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니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 (시편 119편 67,71,73절)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이유는 자신이 처한 현재의 모습을 말씀을 통하여 바로 볼 수 있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사람이 사람을 향하여 갑질을 행하는 이유도 사람이 사람에게 을이 되어야 하는 사연만큼이나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니이다" 사람이 갑질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갑질이 가진 자의 특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갑이신 주님께서 이제는 스스로 을이 되셨습니다.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하나님의 섭리속에서의 고난은 하나님의 관심표명입니다. 고난은 하나님과의 교감속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하심을 깨닫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큰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고난이 더욱 말씀과 가까이 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말씀때문에 스스로 을이 되어가는 나의 모습을 통하여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미소짓기를 원하시기 때문니다.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 짐승이 하나님을 미소짓게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사람에게만 허락하신 하늘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특권도 깨닫고 알아야만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 주께서 오늘의 저를 있게 하심은 저를 통하여 미소짓기 위함임을 아나이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아멘.

            글: 아이테오 님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은혜의 단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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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혜 받았습니다." "은혜가 됩니다." "은혜스롭습니다." 등등에 사용하는 "은혜"라는 단어...

           그리고 카페에서의 글이나 크리스마스 카드 등에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샬롬" 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았다. 필자도 가끔 댓글 말미에 사용하는 "카리스"라는 단어가 "은혜"라는 뜻이다.

           

          찾아보니 "은혜"라는 단어는 신약에만도 155번이나 나온다. 그래서 그런지 이 단어는 교회에서 대단히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설교에 감흥을 받으면 "은혜 받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좋은 성도를 볼 때면...

           "집사님만 보면 은혜가 됩니다!" 심지어는 뚱뚱하고 건강미 넘치는 아이를 보면 "너 참 은혜롭게 생겼다."

          라고 하는 사람도 보았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은혜"는 "구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대표적인 말씀이 로마서 3장 24절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기서의 "은혜"란 하나님이 베푸신 "호의"를 말함이며 우리가 받은 은혜는 바로 "구원"이다.

           이렇듯 은혜는 구원과 관련이 깊다. 그리고 로마서 5장 20절을 주의깊게 보자...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과 “죄가 왕노릇하던 곳에서 은혜가 왕노릇하게 되었다”라는 

          말에서 은혜가 과연 무슨 뜻으로 사용됐을까를 생각해 보라. 먼저 은혜는 죄의 반대어로 사용되고 있다. 


          다시말해 은혜는 죄를 이기고 물리치는 것으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그러면 무엇이 죄를 이기는가? 

          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새생명 즉, "구원"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은혜라는 말은 ‘구원’이라는 말과 상통한다. 

          그러나 고린도후서 9장28절을 보면 좀 다른 뜻으로 "은혜"를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느낌인가? 은헤가 "모든 일에 넉넉하고...착하고 선한 일에 넉넉한..." 우리의 행실에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착한일을 넘치게 하는 원인을 무어라 했나?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행을 하기전에 먼저 받은 것이

           "은혜"라는 말이다. 그것은 "구원"이다. 원래 "카리스"라는 "은혜"라는 말의 의미는...

          어떤 존재로 부터의 "선물" "호의"라는 뜻이다. 

          바로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이 그 선물인 것이다. 

          어제 송구영신예배를 마치고 한 전도사님이 필자에게 "새헤에도 은혜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다정하게 

          말했다. 그 분은 그저 인사로 한 말이겠지만 사실 이 말은 "당신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새해에도 변함없이

          늘 임하십시오!" 라는 의미이다. ^^ 


          그러므로 성경에 "은혜"라는 말이 나오면 그 말 대신해 "구원"이나 "선물"을 대입하여 읽어보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좀 더 구체적으로 좀 더 은혜스럽게(? ^^)  느낄 수 있다 하겠다. 

          그리고 "샬롬"이라 흔히 말하는 "평안""평강""평화""화평"의 의미가 있다. 

          우리가 글을 쓸 때 같은 뜻으로 "에이레네" 라고 쓰면 좀 더 있어 보이는데...^^  

          샬롬은 히브리말이고 에이레네는 같은 뜻의 헬라말이다. 


          그러면 이 단어가 성경에서는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보자. 샬롬은 화평의 의미이지만 "질서"의 의미도 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고전14:33) 

          말 그대로 "어지러움"의 반대어로 "화평"을 말하고 있다. 

          이미 창세기 1장에 어지러운 혼돈의 상태로 부터 세상을 조화롭고 질서있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다스림이 

          "샬롬"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대표적인 구절이 요한복음 14장 27절이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기서의 "평안"이란 어떠한 것일까? 

          분명한건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다른 것이라 했다. 그러면 세상이 주는 평안은 무언가? 

          그것은 넉넉하고 평탄한 삶이나 삶의 위기가 왔다가 다시 극복했을 때의 휴~ 라고 안도하는 안전감...

          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세상것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란 무언가? 정반대라 하겠다. 


          평탄한 삶이 세상이 주는 평안이라 한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평탄과는 반대로 극도의 불안과 

          풍랑속에서의 "평안"을 말함이다. 그래야 세상이 절대로 줄 수 없다는 말이 성립이 되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샬롬"이란 우리 육신의 안정이나 평안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도 충분히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이다. 

          하나님의 평안은 우리의 궁극적인 평안 즉, 영혼의 평안이다. 다른 말로 "구원이 가져다주는 평안"이다. 

          이것은 세상이 알지도 못한다. 성도만이 경험하는 평안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평안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우리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평안은 고사하고 다 죽어야만 한다. 

          저번 게시글에 언급했듯이 "피의 보수자"의 살기등등한 칼날에 우리 모두는 피를 흘리며 죽어가야 

          마땅하다. 구약에선 그 피를 짐승들이 대신 흘렸다. 

          피비린내나는 짐승살육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평강을 이룬 것이다. 


          더 끔찍한 평강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의 진노가운데 놓여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아내어 이룬 

          처참한 평강이다. 죄로 인하여 죽어야하는 우리가 희생제물로 대신 피를 쏟아낸 예수로 인하여 얻게된 

          평강이 샬롬이다. 우리의 끔직한 죄악이 씻어짐으로 가능케 된 평강이 샬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샬롬"이라고 글의 맺음을 할 때 그 의미는 첫째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영혼의 평안를 말함이요 그 평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죄로 인한 죽음의 멸망 

          가운데 거할 필요가 없음을 말해 주는 "평안"이란 뜻이다. 결국 "샬롬"의 진정한 의미 역시 '구원"이다.


          우리가 별 생각없이 많이 사용하는 "은혜"와 "샬롬"... 

          모두 하나님이 우리 성도에게 베푸신 "구원"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 많히 받으세요!" 라고 인사하는 것은 단순한 원함이나 기원이 아니다. 

          그리고 "샬롬"이라고 끝맺음하는 인사 역시 단지 "평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라는 소망이나 인사치레가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그 은혜와 평강이란 구원받은 성도만이 받을 수 있는 특권으로써의 실질적인 

          하늘의 "복"을 말 함이다. 

           

          성도는 그 복을 반드시 누리는 존재이다. 
          실제로 사도바울은 각 서신서에 "은혜와 평강"을 편지의 서두로 시작함을 우리는 쉽게 본다. 
          실제로 찾아보니... 고린도전서, 로마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베드로전후서...거의 서신서 전체에서 이와같은 인사로 시작을 하고 있음에 놀라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인사 정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의 원하는 기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원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이다. 

          우리는 정말 이러한 의미로써의 "은혜"와 "샬롬"이 넘치는 형제 자매되기를 원하는 바이다.               


           

           

           출처: 물과피와성령/essence

          교회 개혁의 출발점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문제가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 다시 말해 야고보 사도가 말한 행함이 있는 참된 믿음이 결여된 믿음의 문제라고 한다면 오늘날의 교회 개혁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부분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거듭나게 하는 복음으로서의 근원적 개혁이 없다면 그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며, 오히려 교회 안에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사실상의 위선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부패는 교리의 부패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부패이다. 곧 구원에 이르는 참된 신앙의 도리가 강단에서 증거되지 않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중생자의 삶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죄와 비참을 깨달은 사람이 인생의 유일한 위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한다면 필연적으로 감사의 삶을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죄와 그 비참을 깨닫지도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요 삶의 주권자로 고백하지도 못한 채 형식적인 종교인으로 살고 있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고자 하는 윤리적인 삶만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것이 비록 부패에 점철되며 가증스런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보다는 나을지 모르나 본질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의 도덕과 윤리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만을 쌓는 도구가 될 뿐이다. 나아가 바로 그 도덕과 윤리는 유일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걸림돌이 되고 말 뿐이다.


          그러므로 복음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교회 개혁은 소리만 요란한 꽹과리일 뿐 결국에는 정죄와 판단, 그리고 또 다른 자기 의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그런 식의 교회 개혁은 사랑의 회복보다는 분노와 증오가 앞설 뿐이다.


          교회의 회복을 소망한다면 근원적인 말씀의 개혁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강단에서 성공과 번영의 거짓 복음이 사라지고, 간증이나 윤리 또는 목회자의 개인 취향에 물든 철학과 같은 인간적인 교훈이 사라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개혁에의 여명이 비춰올 것이다.


          교회의 개혁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개혁에 앞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의 개혁, 강단에서의 개혁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의 회복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회 개혁을 이끌기 때문이다.


          복음만이 생명을 제공하며, 참되고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들을 거듭나게 한다. 그러한 생명을 가진 신자만이 참 생명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로써 사랑으로 역사하는 참된 믿음을 가진 신자만이 참된 신앙고백과 더불어 신자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교회 개혁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http://rpress.or.kr/xe/367391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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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두 소녀가 봤다는 ‘천국과 지옥’
          유명세 탄 천국체험간증들 ‘뉴에이지적 근사체험’ 공통점 가져
          2015년 01월 27일 (화) 11:58:23 김정언 기자 truthnluv@gmail.com

          ‘천국체험간증’들은 사실일까? 최근 거짓이라고 밝힌 앨릭스 멀라키 소년, 그리고 콜튼 버포 소년의 간증은 책 출판을 넘어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이번에는 <천국방문기>를 낸 소녀 2명의 이야기다.

          스스로 ‘천국에 갔다 오지 않았다’고 밝힌 앨릭스 멀라키 외에도, 인기 ‘천국체험간증’ 소년으로 콜튼 버포 군이 있다. 앨릭스 멀라키 소년 측의 책은 출판과 일부 판매가 중단된 상태이지만, 콜튼 버포 소년의 책은 계속 팔고 있다. 두 소년 모두 아버지가 책 대부분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관련 기사 보기 )

          두 소녀는 아키아네 크라마릭 양과 앙헬리카 삼브라노 양이다. 역시 어릴 적에 천국과 지옥을 ‘방문’했다고 주장한다.

          영적 아티스트로 묘사되는 아키아네 크라마릭 양

             
          ▲ 아키아네 크라마릭 양

          아키아네 크라마릭(Akiane Kramarik) 양은 버포 군의 책과 영화를 통해 초록빛 눈을 가진 서구적 미남으로 묘사된 ‘예수님’의 그림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으며 ‘신동’ 화가이자 시인이며 피아니스트이다. ‘아키아나’로 더 널리 알려진 크라마릭 양은 원래 리투아니아계의 무신론자 가정 출신이다.

          4살 때부터 갑자기 신과의 개인적 소통이 이루어지기 시작해서 ‘천국’을 방문한 이래 비상한 예술적 재질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9살 때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리는 천재소녀 화가로 활약하면서 현재까지 수백여점의 그림을 인터넷 등을 통해 판매해 거액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또 800여 편의 시나 글을 썼고, 2권의 베스트셀러를 써 출판했으며, 그의 웹사이트 akiane.com은 연3억회 넘는 접속회수를 올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프라 윈프리 쇼, 굳모닝 아메리카 등 수많은 텔레비전과 라디오 쇼에 출연했고, 세계 각국의 언론에도 소개되었다. 아키아네를 소개하는 글을 보면 ‘비저너리, 영적인 아티스트, 저널리스트 아티스트’로 극찬되면서 모든 시대를 통해 가장 만능으로 성취한 예술인의 한 명 등으로 묘사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정작 아키아네의 그림을 보면 초록색 눈동자의 서구 미남 ‘예수님’의 형상도 황당하거니와 그림 대부분이 놀랍게 뉴에이지적이다. 콜튼 버포 소년이 천국과 지옥을 갓 보고 왔다고 주장하던 때 이 초상화를 본 순간 “바로 내가 봤던 예수님!”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과연 우리 주님은 초록 눈동자의 서구 미남이실까? 아키아네가 묘사하는 하나님은 “크고 멋지고 한없이 아름다운 눈을 가진” 분이란다. 어떻게 어린 소녀가 스스로 뉴에이지성을 획득했을까? 소녀를 천국으로 이끌었다는 존재가 과연 성경의 하나님일까, 아니면 뉴에이지 악령일까? 생각 있는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을 갖게 되기가 쉽다.

          15일 금식 후 체험했다는 앙헬리카 삼브라노 양

          또 다른 ‘천국’ 및 ‘지옥’ 방문 소녀인 앙헬리카 엘리사벳 삼브라노 모라(Angelica Zambraon) 양의 출생 배경은 비교적 더 복음적이어서 더욱 혼동을 자아낸다. 어머니 막시마와 함께 에콰도르의 엘 엠팔메의 카사 데 오라시온 교회에 출석하는 그녀는 교회 캠프에 참가해 15일간 금식한 결과 과거에 보지 못한 초자연세계를 봤다고 한다. 마침내 두 모녀의 간구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예레미야 33:3을 주셨다고 한다. 현재는 엘 칸톤에 있는 호세 마리아 벨라스코 이바라 대학에 재학 중이다.

             
          ▲ 앙헬리카 삼브라노 양의 간증 포스터

          앙헬리카 양은 12살 때 예수님을 처음 영접했지만 대부분 천주교인인 친구들과 어울리기가 힘들어 다시 타락 생활로 접어들었다가 15살 생일 때 ‘주님과 다시 화해’ 했지만 여전히 이중생활을 하다가 17살 생일 때는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갔다고 한다. 그날 4월 28일 “주님, 기분이 아주 안 좋아요. 제가 죄인임을 알아요.”라고 고백했고, “저를 용서하시고 제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시며 주님의 딸로서 받아주셔요. 저를 변화시켜 주세요.”라고 간구하면서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는데도 단지 교회출석과 성경 읽기, 기도를 재개한 것밖에는 변화 받은 실감이 가지 않았단다. 그러다 8월에 캠프에서 금식을 하면서 “여기서 저를 다루어주세요.”라고 부탁드렸는데 자기를 뺀 나머지 대다수 참가자들에게만 주님이 ‘음성’을 들려주셨다는 것이다. 바로 그때 주님이 육성과 글씨로 직접 쓴 비전으로 렘 33:3을 주셨다고 한다.

          그 후 앙헬리카 양의 눈에 ‘성령’이 보이기 시작했고 서로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면서. 성령을 ‘투명하고 아주 밝은 분’이라고 묘사한다. 그해 11월에는 한 주님의 종(천사?)이 집에 나타나 축복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전하러 왔으니 준비하라며 렘 33:3 그대로 크고 놀라운 비밀 ‘곧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전하고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녀가 기도하기 시작했고 교회의 여성과 가족친척들도 와서 함께 기도를 하는데, 시작하자마자 하늘이 열리면서 두 천사들이 내려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종’이 “천사들이 여기 있을 동안 간구하라.”고 말했는데, 천사들은 키가 매우 크고 아름다운 거인이고 투명하며 황금빛으로 빛났다고 한다. 그들은 수정으로 된 샌들을 신고 거룩한 옷을 입었는데 소녀가 “왜 오셨어요?”라고 묻자 천사들은 미소를 지으며 “넌 천국과 지옥을 방문해야 한다. 그러기까지 우리는 안 떠날 것이다.”라고 답했고, “좋아요. 하지만 저는 지옥은 싫고 천국만 갈래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후 천사들은 앙헬리카 양을 따라 심지어 학교와 교실에도 나타나기 때문에 직접 그들을 볼 수 있다는 게 너무나 행복하고 기쁘다고 한다.

          앙헬리카 양이 추가로 묘사하는 그녀의 ‘가장 좋은 친구 성령님’은 투명하시지만 천사들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늘 미소를 띠면서 사랑의 응시를 하고 계신다고 한다. 이러한 묘사는 듣기야 좋을지 모르지만 뭔가 미심쩍고 수상쩍은 냄새가 난다. 단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이런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었을까? 더 나아가 성령은 “들리는 음성으로 말씀하시는데 사랑으로 가득 찬, 그러나 열정적이고 번개와 벼락같은 목소리”란다. 때로는 큰 소리로 강압적으로 말하곤 하여 앙헬리카 양의 복종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과연 성령이 큰 목청을 내고 강압적일까? 성경은 성령이 비둘기 같은 모습의 온유한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전에 앙헬리카 양의 집을 방문했던 그 ‘종’은 그날 천국과 지옥을 볼 준비를 하라며 “너는 곧 죽게 될 것이다.”라고 예고했다고 한다. “제가 어린 데 어떻게 죽어요?”라고 대뜸 묻자, 그 종은 “아무 것도 묻지 마라 하나님은 하시는 모든 일은 완전하니 너를 다시 살리실 것이고 우리들 모두에게 알려줄 천국과 지옥을 간증하게 하실 것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11월 6일 방과 후 귀가했을 때 천사들이 여전히 있으면서 “거룩, 거룩, 거룩 할렐루야.”라고 찬양하는데 곁에는 성령이 함께 계시면서 함께 놀아주고 말을 주고받았는데 천사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고 한다. 이튿날 “넌 곧 죽을 테니 준비해라.”라는 ‘성령’의 음성이 들려 “주님 저는 오늘 죽기 싫어요.”라고 답했는데도 그 음성은 더 큰 소리로 힘을 주며 “준비해라, 넌 오늘 죽는다!”라고 재차 강조했다고 한다. “그래서 제가 항복할 테니 주님 뜻대로 되게 해 주세요.”라고 순복했다는 것이다.

          이어서 앙헬리카 양은 밥을 먹었고 기분이 좋아 노래와 춤을 추다가 오후 3시 30분에는 어머니 막시마와 파티마 나바레테라는 교회 자매가 앙헬리카 양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의 온몸에다 기름을 붓고 발랐다. 그러자 앙헬리카 양은 30cm 두께의 유리 갑옷 같은 것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느꼈고 주위 사람들은 더 이상 그녀를 만질 수 없었다고 한다. 4시가 되자 앙헬리카 양은 바닥에 쓰러졌고 가슴과 아랫배에 이어서 전신에 큰 통증을 느끼면서 온몸의 힘을 잃은 데 이어 하늘이 활짝 열리고 수백만의 천사를 봤는데 그 위에서는 태양의 1만배 되는 빛이 비췄단다. 이런 과정들이 성경적이기보다 뭔가 비성경적임을 느끼게 해 준다.

          이어서 앙헬리카 양은 황금 샌들을 신은 금빛 머리털에다 키 크고 잘 생기고 우아한 근육남을 만났는데 그 가슴엔 ‘왕의 왕 주의 주’라고 쓰인 황금 띠를 두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어떻게 되는 건가요?”라고 묻자 그 분은 “너에게 지옥을 보여주겠다 돌아가면 사람들에게 지옥이 진짜 존재한다고 전해라.”고 말했단다. 앙헬리카 양은 대뜸 천국에 가고 싶지 지옥은 끔찍하여 보고 싶지 않다고 하자 “내가 함께 하고 거기서도 널 떠나지 않고 보여주겠다.”고 답하면서 눈물을 흘리더란다. 그 후 그녀의 간증은 지옥을 묘사하고 있다.

          다른 ‘천국지옥간증’과 유사한 뉴에이지적 근사체험

          앙헬리카 양의 이 모든 말을 어머니 막시마도 곁에서 함께 겪었고 목격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과연 모녀의 말을 진리라고 믿어야 할까? 그러기엔 수상쩍은 점들이 더 많다. 인터넷의 다른 블로거들은 앙헬리카 양의 이런 간증 내용들이 메리 백스터 여사의 또 다른 ‘천국지옥간증’과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앙헬리카 양은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 초청을 받아 이 ‘천국지옥간증’을 하고 다니고 있으며 수많은 성도들이 지금도 미혹 받고 있다. 이 간증들 대부분은 성경을 비슷하게 카피하면서도 본질상 뉴에이지적인 근사체험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이들이 묘사하는 천국과 지옥은 성경의 것과 판이하게 차이가 있다는 데서 역시 공통점이 엿보인다. 성경은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을 봤다는 기록과 요한계시록에 일부 내세의 광경이 비친 것 외에는 상세한 정경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 그 이상은 신비로 남겨두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출처: 교회와 신앙


          신 기 한   희 귀  조 류

           

          Strange Bi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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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의 글은 존 맥아더 목사님의 오디오 Q and A 를 번역한 것입니다.

           

          웬디: 많은 사람이 시련이나 자신에게 닥친 좋지 않은 문제들을 악령의 공격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존맥아더: 둘째로, 그들의 견해 속에는무책임함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나는 내삶의 문제들에 대하여 별 책임이 없어. 왜냐하면, 그것들은 악령들의 소행이기 때문이야.” 라고 말을하며 책임을 회피합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는그런 삶의 여러문제를 악령에게 돌리지 않으십니다. 저는 악령에게 사로 잡히게 되는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악령에게 제압 당하는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저의 사역의 특성상 악령들이 저를 제압하려고 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정말 그렇게 믿습니다. 악령들이 제 삶을 제압하려고 했다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여인이 저의 정강이를 피가 흐를 때까지 차며 소리를 지르던 일이 기억납니다. 그녀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저에게 비명을 지르며 “저 사람 밖으로 보내!  다른 사람들은 괜찮지만, 저 사람은 안돼! 저 사람은 안돼!”라고 소리쳤습니다.  악령은 제가 누구의 편에 있는지 알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막기 원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것들이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악령들이 제 삶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의 목적은 여기 저기 돌아 다니면서 구덩이에 보낼 악령들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책임은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내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내 삶에 일어나는 좋지 않은 모든 일이 악령의 공격이라고 믿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며 지혜롭지 않은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문제가 되는 자신의 죄를 제외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에 일어나는 모든 좋지 않은 일들을 악령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것은 이렇게 취약한 것입니다.

           

          제가 기독교라는 이름 하에 펼쳐지고 있는 비참하고 끔찍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수 많은것 중에 제가 참지 못하는 것은 교회에서 쓰레기 같은 것들을 가르치는 것을 들을 때입니다. 그러한 거짓을 듣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그런 것들을 허용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그러한 가증스러운 일들이 너무나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라디오의 좋은 영향을 감사해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방송은 잘못된 가르침을 퍼트리는 가장 큰 무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기독교방송에서 들은 내용이 신학의 하나로 전해 진다는 것을 믿을수 없었습니다. 그가 방송을 통해서 한 말은 완전히 무책임한 말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말했습니다. “저는 지금 기적들에 대해서 그다지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 않는 요한복음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말도 안되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은 그 복음서 전체가 기적들을 시리즈로 담은 기록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그러한 사람이  말씀 전문가로 통하고있고 풀러 신학교에서 ‘신유’ 라는 과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탄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사탄은 기독교를 공격하는 대신 기독교와 합류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광명의 천사로 둔갑하여 아주 미묘하게 사람들에게 다가옵니다.

           

          본  Q and A는 다음을 클릭하면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www.gty.org/resources/questions/QA006/how-should-a-christian-handle-demonic-attack?term=qa006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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