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이것을 아시나요? (제6계명의 위력) 우리의 심령을 피폐하게 만들고 가정생활, 교회생활, 사회생활, 신앙생활을 헤치는 요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제6계명의 위력을 알지 못한 때문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우리 중 얼마나 될까요? 둘러보건대, 안타깝게도 저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이 제6계명을 그들의 삶에 적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기에 걸려 넘어지고 자빠지고... 인간과 인간의 소중한 관계가 금이 가고 깨어지기도 하며 회복할 수 없는 데까지 악화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믿을 수 없지만, 사실이 그러합니다. 소중한 관계성이 깨어지는 것은 큰 사건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뜻밖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사소한 말의 실수 때문에 시험에 들기도 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내가 받아 아프다고 비명지르며 고통 받기도 합니다. 가장 사랑하고 행복해야 할 가정이 깨어지기도 하고 아름답고 다정하던 이웃과 친지의 관계성이 어이없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 놀라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보다 행복한 개인, 가정, 사회생활, 그리고 신앙생활을 성공적으로 잘 가꾸어 나갈 수 있을까? 십계명 중 제6계명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한 방법, 핵심 key word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제6계명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살인하지 말라" 하는 것입니다. 에이, 우리 별님도, 우리가 살인을 어떻게 한다고 그런 말쌈을? 궁금하신가요? 우선, 살인에도 여러 가지 다른 종류가 있음을 우리 함께 잠시만 생각해 보실까요? 필살(筆殺): 조진은 공명에게 필살 된다.(삼국지 중) 글로써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극단적 예가 되겠습니다. (口殺): 말은 무서운 힘이 있어서 심하면 사람도 죽인다. 입(口)으로 사람을 죽(殺)인다는 뜻이랍니다. 구살(構殺): 허구(虛構)의 사실(事實)을 날조하여 죄로 몰아 죽이는 것, 말로는 성도라고 하나 마음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을 당하면(시기, 질투) 상대를 적으로 간주, 그에게 위해를 가하기 위해서, 없는 말을 꾸미기도 하고 모함하기도 하는 말을 일삼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많이 안타깝지만 사실인 것을요. 촌철살인(寸鐵殺人): '한마디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 라는 뜻 말로서 다른 사람을 해하는 것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경계하라는 의미이겠습니다. 禍自口出 이고 病子口入이라 "화는 스스로 입으로부터 나오고 병은 스스로 입으로부터 들어온다" 라는 말이라네요. 말은 무서운 힘이 있어서 자칫하면 사람도 죽이는 것입니다. 작은 입에서 이렇게 무서운 살인을 저지를 수 있으니, 옛날 성현이나 선지식들이 늘 강조하는 것이 입조심이었겠지요. 입으로 나오는 나쁜 말 몇 가지, 악담, 거짓말, 이중 말, 모함하는 말, 그리고 쓸데없는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하면, 그 무엇보다도 입조심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 조심하고 나보다 남을 먼저 존경하는 마음, 무엇보다 말을 정말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잘못이 있으면 솔직하게 시인하고 물러설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상대가 내게 잘못 했을 때, 그가 미안하다고 말하면, 용서해 줄 수 있는 cool 한 마음도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오해가 생겼을 때에는 상대가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그대로 믿어 주고 받아주는 넓은 아량마저 갖춘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 것이니까요...^^ 오늘날, 성도들의 살인이라고 하는 것은 흉기를 사용한 직접살인, 물리적인 살인을 실행하기는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대개는 구살이 이에 적용되는 살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들이 양심에 따른다는 말을 종종 사용하는데, 사람의 양심이란 것도 이미 병이 든 상태이기에, 온전한 판단이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삶의 기준, 신앙의 잣대(Canon)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내 마음과 생각을 비추어 보고 날마다 성령의 조명 하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약 3:2)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약 3:6)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느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물을 내겠느뇨." (약 3: 8-11) 바른말, 정직한 판단으로 권고하는 것은 용기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기 위해서 없는 말을 꾸미거나 자기 생각으로 상대의 마음을 저울질해서 함부로 헐뜯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는 말씀하셨지요,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하리라." ( 마 5:26) 글: 별똥별/최송연,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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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다고 주장하는 어느 예언자

 

 

직통계시자들의 특징

충청도 어느 기도원에서 만난 예언사역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직접 신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했다. 자신이 사람을 대하면 두 개의 상(image)이 보인다고 했다. 하나는 육의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영의 사람이라고 했다. 영의 이미지에는 죄, 악, 숨겨온 과거사가 보인다고 했다. 그 말을 한 뒤에 호소하듯 기도원에 필요한 후원금을 달라고 했다. 나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 예언사역자가 어느날 내게 특별기도를 부탁했다. 기도원에서 함께 3년 쯤 알고 지낸 뒤에 비로소 나의 신분을 알았을 때였다.  "무엇을 위해 기도해 드릴까요?" 하자 남몰래 무슨 일을 하다가 들킨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예, 저는 예언사역자입니다. 근래에 예언의 적중도가 점점 낮아집니다. 적중도가 높아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기독교 세계의 예언사역은 하나님이 알려 주시는 말씀을 대언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계시한 예언은 100% 완전한 적중도를 가지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0차 총회가 항도 부산에서 개최되기 직전, 대구에 소재한 어느 기도원 원장이라는 분이 찾아왔다. 정중히 사무실로 모신 뒤 말을 하라고 하자 명함을 꺼냈다. "선지자 000 목사, 00기도원 원장"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WCC 부산총회 반대 운동 단체의 수장이 회개하지 않은 죄를 마져 참회하고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해야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왔다고 했다. 하나님이 자신을 선지자로 보내어 말을 하라고 하여 자비량하여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했다. 그 당시 반대운동의 수장의 나이는 85세였다. 며칠만 금식을 해도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연세였다.


내가 아는 어느 분은 가정배경, 재능, 성격, 학력, 경력이 모두 빼어나게 우수하다. 언어 감각이 탁월하고, 한국어와 영어에 탁월하다. 함께 주님을 섬기자고 말하고 싶은 분이다. 그러나 함께 교회를 섬기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는 자주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한다. 꿈에서 본 것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한다.


직통계시자들이나 기독교 점쟁이들은 산앙공동체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부조화를 겪는다. 자기가 받은 계시와 본 꿈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긴다. 영으로 보고 들은 '하나님의 계시'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에게나 강요하고 또 설득하려고 한다. 신학자의 조언을 들으려하지 않는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거나 본 것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의 조언, 지적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타인이 자기의 말에 거절하지 않아야 한다는 태도를 보인다. 절제, 겸손, 염치가 결여되어 있다..


홍 아무개라는 분은 2014년 12월에 한국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예언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자, 하나님이 시간을 미루었다고 둘러댔다. 하나님이 직접 자기에게 말씀을 한다는 식으로 변명을 쏟아냈다. 그는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신학을 수학했다고 했다. 잘 알려진 학교 때문이기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 예언자는 4년 동안 1500회 입신을 하여 하늘에 다녀왔다고 한다. 바울이 갔던 삼층천에도 다녀왔다고 한다. 


참으로 가소롭다. 구약시대였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거짓예언자라는 이유로 돌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감히 말하지만 나는 매일 하늘 지성소에 들어간다. 하늘 아버지의 보좌 오른편을 거처로 삼아 거기에 거하면서 기도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 자들은 죽고 부활한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힌 바 되었기 때문이다(엡 2:6). 나는 매일 하늘의 임금님을 알현하고, 그의 용안을 바라보며 그 분과 대화하고, 그의 음성을 듣는다. 나의 육신은 이 땅에 머물러있지만 영은 천상에 거한다. 하늘 임금님의 어전과 그분의 품은 기독인이 거하는 영혼의 집이다.

 

나는 직통계시자들,  예언사역자들, 기독교점쟁이들이나 무당들의 모습에서 아련히 자신을 드러나는 미혹의 영의 얼굴을 본다. 그런데도  자칭 선지자, 직통계시자, 예언사역자들이 버젓이 활개치고 다닌다.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불러 공포감을 주는 예언을 말하기도 하고, 여러 사람들을 모아놓고 강의를 한다. 종말론 강의를 하기도 하고,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기도 한다. 이 교회 저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한다. 자기의 주관적 생각을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말한다.


성령 하나님은 기독신자 안에 거하면서 삶을 지도한다. 성경은 성령내주의 진리를 말한다. 성령님은 기독인에게 필요한 영적인 메시지를 주고 깨닫게 하고 확신하게 하고 그것에 따라 살게 한다. 성령님은 “성경 말씀을 사용하셔서”(cum verbo) 우리를 통치하시며 인도하시며 이끄신다. 기독인은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되고, 강단에서 선포되는 메시지를 들을 때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된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는 꿈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성령님의 인도에 따르는 일에 민감하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 기도하고 또 여러 방면에서 심사숙고한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시간, 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늘보좌에 계신 임금님의 용안을 보며 또 영의 눈으로 영적인 세계를 간파한다고 함은 직통계시자, 거짓예언자, 기독교 점쟁이나 무당들이 연출하는 그런 종류의 무엇이 아니다. 


오순절 날에 임한 성령님은 지금도 역사한다. 여러 가지 형태의 은사를 주고 교회를 섬기도록 특별한 일을 하게 한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계시와 성령의 인도가 무당이 사단의 말을 받아 말하는 것 같은 형태가 아니라고 믿는다.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 계시, 예언은 사도들과 함께 종결되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기록된 말씀에서, 그것과 더불어 성령님이 내게 말씀하는 '음성'을 들으려 한다. 이 음성은 하나님께 물어보고 답을 하거나,  "하나님이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내게 이렇게 말씀합니다"고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소리가 아니다. 영적 감각과 지-정-의 기관을 거쳐 전달되거나 느껴지거나 확신하게 되는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직통계시자, 예언사역자, 자칭 선지자들의 공통의 특징은 아래와 같다. 페이스북에 올려진 <교회와 신앙> 정윤영 기자(unique44@paran. com)의 글을 참고한 것이다.

 

 

1. 직통계시자는 직접 하나님을 만나서 특정 내용이나 사건에 대해 무엇을 직접 보고, 들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받은 직통계시의 내용에는 어느 시점에 한국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는 등의 예언만이 아니라 타인의 경조사, 생로병사·생사화복 등도 포함된다.

2. 직통계시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전달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신도들에게 그 내용에 대해 절대 복종을 하도록 몰고간다. 그 밖의 선택을 허용하지 않는다.


3. 같은 사안에 대한 성경적이고 합리적인 충고나 경건하고 신앙적인 권면을 받아들이려하지 않는다. 계시사역, 예언사역, 선지자 사역의 문제점을 말해 주어도 수용하지 않는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생각하여 화를 낸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직접 음성을 들려준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4. 직통계시자는 자신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를 거절하거나 그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성령을 훼방하는 사람으로 단정한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 공포감과 두려움을 신도들에게 심어준다.
 

5. 직통계시자가 초기에는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는 ‘계시의 전달자’로 여기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스스로 ‘계시자’로 여긴다.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을 직접 만나주고, 하나님의 뜻과 음성을 들려준다는 착각에 빠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계시의 전달자’와 ‘계시자’의 경계를 허물어 뜨린다. 교만해 지고, 절대적 독선에 빠진다.

 
6. 직통계시자는 조용히 자신 안에 말씀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성경에서 구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눈을 감고 하나님께 물어보기도 한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직접 음성을 들려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신들린 무당이 말을 하듯이 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계시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7. 직통계시자는 대부분 성경을 자신이 받은 계시를 합리화하고 수단화하는 방법으로 이용한다. 자기에게 유리하게 성경을 해석하고 이용한다.

 

8. 직통계시자는 하나님이 그분의 음성을 항상 직접 들려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진지하고 지속적으로 성경을 연구하지 않으면, 진지하게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려 하지도 않는다. 설교 사역을 맡고서도 설교 준비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성령이 직접 할 말을 지도하므로 미리 공부를 하거나 사전에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착각에 빠진다.


9. 직통계시자의 최종 목적이 자기 뱃속 채우기인 경우가 허다하다. 늘 추종자들에게 거액의 헌금을 요구한다. 무당이 복채를 요구하듯이 은밀히 돈을 요구한다. 상대의 부요함이나 가난한 사정은 고려하지 않는다. 만약 헌금을 바치지 않으면 더 큰 불화, 재앙, 저주가 내릴 것이라고 협박하기도 한다.

 

10. 자칭 직통계시자, 예언자, 선지자는 자신의 신적 권위 또는 영적 권위를 절대시한다. 타인을 지배하려고 하고, 가르치려고 하지, 겸허히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11. 자칭 직통계시자, 예언사역자,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을 선호하는 신자들이 있다. 처음에 “하나님이 저 사람을 통해 말씀하는가 보다"라고 생각한다. 방어할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소위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얽매이고 눈치를 살피게 된다. 그러다가 점차 심리적으로 그들에게 예속된다.


12. 직통계시자, 예언사역자, 선지자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더 독자적이지 못하고, 결단력이 약해진다. 종국에는 노예처럼 끌려다닌다. 잘못된 신앙생활로 빠진다.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예언을 하게 하고 방언 형태로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한다고 믿는 것은 완성된 특별계시의 기록인 성경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 거부하는 일이다. 성경만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의 표준임을 부정하며, 성경과 더불어 역사하는 성령님의 사역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는 발상이다.



최덕성 교수 (브니엘신학교 총장)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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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팝 시장이 루시퍼를 숭배하는 일루미나티에 의해 장악되었고, 매년마다 이 팝시장의 가장 큰 행사인 그래미 어워드가 저들의 믿음을 표현하는 제전으로 꾸며져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2015년 그래미 어워드에도 음악행사를 핑계로 변함없이 사탄을 찬양하고, 사탄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의식이 진행되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두 개의 무대를 소개하고자 한다.

 

1. "Highway to Hell" - 지옥으로 가는 고속도로


유명한 락밴드 AC/DC가 "Highway to Hell"(지옥으로 가는 고속도로)이라는 노래를 열창하며 머리에 사탄의 뿔 장식을 단 군중들과 열창을 하고 있다. 그 가운데는 슈퍼볼 하프타임에서 역시 일루미나티를 위한 공연을 펼친 케이티 페리의 모습도 보인다.




밴드가 노래하는 동안 머리에 사탄의 뿔 장식을 한 군중이 "사탄을 사랑한다"는 손 모양을 보여주고 있다.


공연이 계속되는 동안 피라미드 모양의 조명을 계속 비춰주고 있다.


슈퍼볼 하프 타임 공연을 맡았던 케이티 페리의 모습이다.



 

 

2. 마돈나의 "Living For Love"


그래미 어워드의 마지막은 붉은색 투우사 옷을 입은 마돈나가 최근 발표한 "Living For Love"라는 노래를 부르며 뿔달린 남자들과 음란한 무대를 꾸미고 있다.

퍼포먼스의 마지막은 마돈나가 황소의 신으로 묘사되는 바알(사탄)의 제물로 바쳐지는 모습이 연출되고 있다.  마돈나가 바알의 제단에서 희생제물로 들려 올라갈 때, 위에선 프리메이슨의 상징인 붉은 장미가  내려온다.  일루미나티(프리메이슨)가 마돈나의 제사를 받았다는 상징적인 표현인 것이다.

 

흡사 회심한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담은 듯한 가사를 가진 노래 "Living For Love"를 성가대원들과 함께 부르면서, 실제로는 뿔달린 사탄에게 자신을 인신제사로 드리는 가증한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마돈나가 끌어 올려지면서,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의 상징인 붉은 장미가 내려오고 있다.  일루미나티(루시퍼)가 이 제사를 받았다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 아래는 "Living For Love"의 노랫말과 이 노래로 펼친 공연 모습이다. "사랑을 위해 살자"는 가스펠 송을 연상시키는 노래를 가지고 성가대원들과 함께 뿔달린 사탄에게 인신제사를 드리는 음란하고 가증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다.  


성전 기명으로 술을 따라 마시고 이것을 가지고 우상에게 영광을 돌리다가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단 5:25)의 심판을 받았던 바벨론 왕 벨사살에게 내려진 심판이 임할 것이다. 


(아래 소개된 노랫말이 언뜻 보기엔 하나님께 대한 간증같지만, 실제로는 그녀(일루미나티)가 숭배하는 신 루시퍼에게 바친 노래임을 알 수 있다.)


 

Madonna "Living For Love" lyrics(1절만 소개한다.)

 

First you love me and I let you in

당신이 나를 처음 사랑했을 때, 나는 당신을 허락했습니다.

Made me feel like I was born again

당신은 나로 하여금 다시금 태어난 것처럼(중생한 것처럼) 느끼게 했습니다.

You empowered me, you made me strong

당신은 내게 능력을 주었고, 당신은 나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Built me up and I can do no wrong

나를 세워 나는 잘못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I let down my guard, I fell into your arms

나는 무장을 풀고 당신의 팔에 안겼습니다.

Forgot who I was, I didn't hear the alarms

내가 누군지를 잊었고,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Now I'm down on my knees, alone in the dark

이제 나는 무릎을 꿇고, 어둠속에 홀로 있습니다.

I was blind to your game

당신이 하시는 일(game)에 대해 무지했습니다.

You fired a shot in my heart

당신은 내 심장에 화살을 쏘았습니다.

 

Took me to heaven and let me fall down

나를 하늘로 데려가시고 나를 떨어뜨렸습니다.

Now that it's over

이제는 이 일도 끝입니다.

I'm gonna carry on

나는 이 일을 감당할 겁니다.

Lifted me up, and watched me stumble

나를 높혔고 내가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After the heartache, I'm gonna carry on

마음의 상처를 받았지만, 나는 이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Living for love

사랑을 위해 사는 일

Living for love

사랑을 위해 사는 일

I'm not giving up

나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I'm gonna carry on

나는 이 일을 계속할 겁니다.

Living for love

I'm Living for love

Not gonna stop

Love's gonna lift me up

사랑은 나를 높힐 것입니다.

 

Love's gonna lift me up


 

 

출처>> Madonna "Living For Love" lyrics














사탄에게 바쳐지는 이 음란하고 가증한 무대를 성가대와 함께 꾸미고 있다.






- 예레미야 -


1. 2015년 10월까지 모든 신용카드가 RFID 칩이 들어간 카드로 바뀔 것이다. 


미국에 있는 모든 신용카드들이 오는 10월까지 (RFID)칩이 내장된 새로운 카드로 대체될 것이며, 다른 나라에서는 이에 대한 몇 년 간의 유예기간을 줄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현재 비자와 마스터카드가 이 교체 작업을 진행중이다.

물건을 결제할 때, 더 이상 검은색 자기장 줄무늬가 새겨진 카드를 긁거나 사인을 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뜻이다.



 

기사원문>> October 2015: The End of the Swipe-and-Sign Credit Card



2. 미국 교통 관리국이 2016년부터 모든 내국인들에게 여행시 칩이 내장된 신분증을 요구할 것이다.

 

미국 교통 관리국(TSA)이 2016년부터 국내 항공기를 이용하는 승객들에게 특별한 면허증(신분증)을 요구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Real IDs’라고 알려진 이 신분증엔 별 표시와 또 다른 표시들로 소지자가 ‘문제없는(good behavior) 사람’임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 증명서에 신체정보와 RFID 칩도 내장 될 것이라 말하고 있다.



 

기사원문>> TSA: Microchipped ID For All Domestic U.S. Travel In 2016



* 위의 기사대로라면 미국에서 RFID 칩이 내장된 카드와 RFID 칩이 내장된 신분증이 없으면, 물건을 살 수도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도 없는 때가 조만간 도래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RFID 칩이 신분증과 신용카드로 나뉘어 사용되고 있지만, 이것이 결국엔 이 둘의 기능을 합친 베리칩으로 통합될 것이다.   그리고나면 저들은 보안과 편리함을 내세워 모든 기능이 통합된 베리칩을  몸속에 이식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될 것이다.

 

베리칩을 받지 않으면, 물건을 사고 팔 수도, 여행을 할 수도 없는 시대가 눈앞에 다가와 있다는 뜻이다.




 

- 예레미야 -

김남준 교수 "구약 안식일과 신약 주일의 (불)연속성"



워싱턴한인목회연구원(원장 김범수 목사)은 2015년 신년 목회자 세미나와 부흥성회를 "이민 목회와 치유"라는 주제로 1월 26일부터 28일까지 메시야장로교회에서 열었다. 주강사인 김남준 목사(열린교회, 총신대학교 교수)는 "주일성수"에 대해 강의를 이어나갔다. 김남준 교수는 강의를 통해 주일성수에 대한 흥미있는 몇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1.
몇 해 전에 1920년 새문안교회 당회록을 보았다. 재미있는 것은 주일성수를 안하는 교인들을 치리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주일성수에 대해 수차례 경고했으나 말을 듣지 않아 수찬정지등 매주 치리가 이루어진다. 그것을 보면서 교회가 기강을 세우려고 노력했구나 하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한편으로는 치리만을 가지고 안된다는 것이 보였다. 새문안교회도 너무 많은 사람들을 치리해야 하니 어느 시점에 와서 치리를 포기한다.

2.
오래 전 제가 전도사로 봉사하던 교회에서는 주일에 무엇이 필요하게 되어 목사님이 당장 가져오라고 하자, 저는 주일에 교회에서 돈을 안 쓰는데 어떻게 하는가를 물었다. 그러자 담임목사는 "너는 왜 이렇게 머리가 안돌아 가는가. 물건을 지금 가져오고 돈을 내일주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말이 되는 것 같기도 안되는 것 같기도 해서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담임목사가 하라고 하니 하던 시절도 기억난다.

주일성수의 중요성은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지만, 개인의 성향에 따라 혼란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박용규 교수 같은 경우 "주일성수가 흐려지면 위기가 온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김남준 교수는 2014년 합동총회에서 총회의 요청에 따라 준비한 "주일성수"에 대한 논문을 중심으로 강의를 해 나갔다. 김남준 교수는 주일성수에 대한 3가지 이슈 △과연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이 옳은 것인가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이 신학적으로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그러면 주일을 어떻게 지켜져야 거룩하게 지키는 것인가를 중심으로 수차례 강의를 인도했다. 특히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의 불연속성을 강조한 종교개혁자들의 시각과 연속성을 강조한 청교도들의 입장을 설명하며 주일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그러면 결론은 무엇인가? 김남준 교수는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 탁월하지만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상황과 고민하면서 우리의 입술로 고백해 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주일의 의미를 교인들에게 제대로 가르쳐야 하며, 주일성수를 강제하기 보다는 영혼의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때 주일이 주일되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의 원리를 따르고 주일에 대한 세부적인 고백들을 개인규범화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멘넷은 두차례에 걸쳐 강의 내용을 소개한다. 다음은 첫 번째 강의 내용이다.


▲김남준 총신대학교 교수

교회마다 조금 차이는 있지만 특히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교회에서 연로하시고 신앙의 연륜이 오래된 장로를 비롯한 어른들이 '주일에 뭐 사먹지 말라' '돈을 쓰지 말라'라고 하는 주일성수에 개념과 젊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주일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교회에서 충돌하는 양상을 보게 된다.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한번쯤은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이고, 우리의 태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것들이 명확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야 교회를 잘 이끌어 갈 수 있다.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이 옳은 것인가?

주일이라는 말이 성경에 4번 나온다. 주일이라는 것이 영어로 'Lord's day'이다. 문자 그대로 '주님의 날'이다.  성경에는 여러가지 표현을 사용하는데 '주님의 날', '그 주님의 그 날', '그 주님께 속한 날'이라는 표현으로 나오는데, 3번은 종말론적인 심판과 관련해서 나타나고 한번은 그리스도의 날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그 주님께 속한 날"이다. 그 날은 무엇인가? 초대교회 학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로 초대교회가 하나님을 예배하기로 정한 날이라고 본다. 이미 초대교회 안에 주일을 지키는 전통이 확고하게 수립되어 있다는 암시를 준다.

안식교 등은 일요일을 주일로 삼는 것 자체가 기독교 배교의 역사와 관련 있다고 해석한다. 그 이유는 당시에 일요일이 태양신 숭배의 날이었기에 그러한 로마의 정책에 굴복해서, 말하자면 기독교가 토요일을 안식을 지키던 신앙의 정절을 꺾고 그 정책에 순응해 버린 것이 주일의 유례라고 본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그 이야기가 맞지 않다. 그 당시에 일요일은 태양의 날인 것은 맞다. 하지만 태양신을 섬기는 날이 아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전부 다 신과 관련이 있는 날이었다. 월요일은 달과 관계있고, 다 관련이 되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구약의 안식일인 토요일을 지키는 것 역시 신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정당한 근거가 있는 비판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3세기경 로마제국 전체에 태양신을 포교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제국 안에 있는 수많은 종교들을 획일적으로 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국민을 통일하려는, 우리나라도 단군을 통해 정신적으로 통일하려고 했던 정도로 어떤 정서적인 국민적인 정서를 통합하려고 하는 시도가 있었지 하나의 종교적인 운동은 아니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은 문제가 없다.

실제로 교회역사에서도 이미 근거를 가지고 있는데, 수많은 초대교회의 문헌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부 활하신 날을 기념해서 모이는 것들이 나타나고 있고, 오히려 그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구속사역이 신약과 구약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의미심장한 신학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에 무게중심을 두었기에, 사실은 안식일이 바라보았던 그림자들이 주일에서 성취가 되었다고 보았기에 그들은 주일이 신구약 역사 전체에 중심이 된다고 보았다.

예수님은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당신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에 의해 그 의미가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인간에 의해 실패하게 된 것을 구속을 통해 하나님이 되돌리신다고 한다면, 사실은 구속의 사건은 창조를 계승하는 위대한 역사이기에 얼마든지 새로운 안식일이 도입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보여진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까지 말씀하셨다.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와 마리아가 주님을 뵈온 날도 주일이었고, 뵙게 되는 모임도 안식후 첫날이었고, 사도 요한이 계시를 본 것도 주일이었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청교도들은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에 대해 아주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성경과 교회역사에 전통에 입각해 볼 때 결코 그것은 우상숭배의 제도에 굴복한 그런 사건이 아니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질문을 하나 한다. 지금은 일요일을 주일로 지킨다. 그런데 정부에서 일요일을 월요일로 옮겼다고 치자. 그렇다면 주일을 어떻게 할것인가? 정부하고 싸워서라도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거나, 정부의 결정과 상관없이 교회가 결정하면 월요일로 옮기면 된다 중 답이 무엇인가? 루터와 칼빈등 종교개혁자들은 공교회가 결정하면 상관없는 것이라고 본다. 교회의 공동의회에서 다른 요일을 주일로 지키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공교회가 결정을 하면 되는 것이라고 루터와 칼빈은 보았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육일 창조하시고 마지막 쉬시는 날이 안식일이다. 주일은 그것이 아니라 첫날이다. 한주일의 시작이다. 의미가 다르다. 그러면 안식일의 개념을 가지고 우리들이 주일을 정한다고 보면 어떻게 설명할것인가? 한국에서 비해기를 타고 미동부로 날라오면 하루종일 날아왔는데도 시간이 뒤로 갔다. 어떻게 날짜를 정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북반구로 올가가면 6개월이 낮이고 6개월이 밤이다. 이런것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렇기에 계량적인 날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다만 무질서하게 내버려 두면 교회의 질서가 흩어지니 공교회의 결정에 의해서 그렇게 해서 이루어 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일에 대해 여러 견해를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이것은 믿음의 강함과 연약함의 차이였다.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은 6일 창조후에 안식을, 주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지만 계기적인 한주간의 나중과 처음을 완벽하게 확정하기 어렵다. 계기적인 그날이기 보다는 교회결정에 의해 정해진 주일의 날을 지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만약 주일로 지키는 날을 개인이나 개교회가 함부러 바꿀 수 있다면 혼란과 무질서가 뒤따르기에 하나님의 섭리와 교회의 결정를 따라 역사적으로 지켜온 그날을 그날로 삼을 뿐이다.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종교개혁자들의 입장-불연속성 강조


안식일과 주일의 신학적인 연속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두가지로 견해가 나뉘게 된다. 구약의 안식일 제도와 신약의 주일제도가 완전히 다른 것이며, 두개가 단절된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없다. 강조점의 차이이다. 연속에다 강조를 두는가 아니면 불연속에다 강조를 두는가에 따라서 의견이 둘로 나뉘어진다.

먼저 우리 개신교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종교개혁자인 루터나 칼빈같은 사람들은 불연속성을 강조했다. 그래서 구약의 안식일 제도가 있고 신약에 주일제도가 있는데 이 두 제도가 신학적인 연결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구약의 안식일 제도가 가지고 있는 그림자가 구속사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구약의 안식일 제도와 신약의 사이에는 신학적인 점진적인 계시, 모형과 실체의 완성이라는 관계에 연속성은 있지만 그것이 율법적인 연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분명히 그었다. 이것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했던 사람은 루터이다. 루터는 만약에 구약에 안식일의 계명에 나왔기에 우리가 그 유대인들이 지키는 구약의 안식일을 지키는 것 같은 방식을 주일도 지켜야 한다면 나는 주일에 춤도 추고, 술도 마시고, 노래도 하고 모든 일을 다 해서 결코 이 주일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못하게 하겠다 라고 까지 발언한다.

칼빈은 그 입장을 기본적으로 계승한다. 그러면서 몇 가지 사실을 강조한다. 첫째 주일을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기위해 시간을 떼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노동의 의무로 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것들은 충분히 인정을 하면서 루터의 입장을 따른다. 이 입장이 역사적으로 더듬어 보면 어디하고 맞닿는가 하면 특별히 초대교구들과 맞닿는다. 뒤에 4세기로 넘어가면서 엄격주의가 도입되고 엄격한 주일의 규례들이 도입된다.

여기에도 역사적으로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라. 처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었고, 성령강림사건이 있었고, 많은 유대인들이 회개하며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이신 것을 알게 되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유대인이었다. 그런데 주일에 대해 누가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는데 이들이 당연히 주일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처음에는 안식일도 지키고 주일도 모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안식일을 점차 버리면서 주일을 지켰는데 그 방식이 누가 와서 가르쳐 준 것도 아니다. 이들은 평생을 유대인으로 살아왔던 사람인데, 그러니 율법과 복음에 대한 의미는 알았겠고 의식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도 사도행전 15장에 와서 공의회를 해서 결정할 정도였으니, 그러니 2장에서 성령강림 사건이 나고 15장 올 때까지 정리되지 않았던 신학적인 문제들이 있었다.

평생을 안식일을 지켜오면서 살아온 사람들이니, 구약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방식을 따라서 주일을 지켰던 것이다. 성경에 보면 신약시대에는 선지자가 필요가 없었지만 성경이 완성이 되기 전까지 선지자들이 여전히 존재했다. 그렇게 신약과 구약의 과도기적인 성격 속에서 선지자들이 존재했다. 그러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그런 역사적인 전개의 과정을 밟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엄격하게 안식일을 평생준수하면서 살았던 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주일을 지켰다. 문제는 성령강림사건이 있고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켰던 것, 속사도 교구들과 초대교구들에 오면서 안식일을 지켰던 것, 중세로 넘어오는 것, 종교개혁자들 이후에 개혁파 정통주의자들과 이후의 계승자들 그렇게 각각 구간이 나누어지는데, 처음에 성령강림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안식일을 지킬때에 그것을 청교도들은 모델로 본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은 초대교회에서 모델을 찾지 않고 초대교구들에서 모델을 찾는다. 초대교구들의 주일에 대한 생각이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의 뿌리였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자유, 그리고 율법에서 정한 안식일이 계승이 아니라 안식일이 바라보았던 그림자 같은 예고들이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통해 성취되는 것, 그리고 그 주일은 종말이 이루어질 위대한 하나님 나라가 앞당겨져서 맛보기로 우리에게 주어진 날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구속사적으로 주일을 이해했다. 여기서 역사적으로 많은 오해들이 생기면서 견해 차이들이 일어난다. 안식일 제도의 불연속성을 강조한 이들이 루터와 칼빈들이다. 반대편에서 영국 청교도들, 찰스 하치(개혁신학의 초석을 많이 놓은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드 들이 안식일의 연속성을 강조했던 사람들이다.

칼빌은 주일을 거룩히 지킴에 있어서 안식일의 율법을 준수하는 태도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지만, 안식일의 종말론적인 의미와 현실적 실천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래서 주일은 마지막 날에 있을 영원한 안식의 완성을 바라보는 것이고 주일을 지킴으로서 신자는 전 생애에 걸쳐 완전을 향해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안식일 규례들이 나오는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정신은 계승은 하되 그 구체적인 규정사항은 의식법에 속한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취가 되었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칼빈은 안식일 제도가 가지고 있는 모든 신학적인 의미가 다 폐지되었다고 보지는 않았다. 여기서 우리들이 조심스럽게 이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

칼빈은 안식일 제도의 각종 규정들은 의식법이라고 보고 폐지가 되었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정신들은 계승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이 안식일 개념을 두신 것이 3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보았다.

첫째, 안식일을 정해서 영적이고 영원한 안식이 앞으로 올 것이라는 것을 표로 삼았다. 그래서 주일은 하나님 앞에 율법적으로 얶매어서 무엇을 못한다는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 아니라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 그곳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받으며 한없이 하나님의 복락을 누리며 즐거워하는 날이며 그것을 미리 맛보기로 보여줄 것이 주일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가능하면 아이들 용돈도 주일에 주고, 선물도 주일에 주고, 뭔가 주안에서 기뻐하고 좋아할 일이 있으면 주일에 하라고 했다. 그 대신 그것이 다음에 있는 것을 침범하면 안된다고 했다.

둘째, 믿음의 백성이 정해진 날에 모여 하나님의 법도를 깨닫고 예배하기 위함이었다. 이 신학적인 정신은 계승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유는 칼빈은 우리의 육체의 연약함 때문이라고 말했다. 만약에 제약이 없이 내버려 두면 하루라도 더 일하려 한다. 그런 연약성 때문에 공동체 전체를 묶어서 하나님게 집중적으로 말씀을 교육받고 집중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함으로 영혼과 정신을 신령한 은혜와 하나님의 법도로 도향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것들은 율법의 신학적인 정신이 주일에 계승되었다고 본 것이다.

셋째, 사람들을 노동으로 부터 쉬게 하시게 위함이었다. 노동에서 쉬어야지 두 가지 목적이 성취된다. 일반적인 차원에서는 그렇게 휴식을 함으로 재창조가 가능해지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신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 영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노동의 의미에 억매이지 않고 자기의 신앙심을 고양시킬 수 있었다.

칼빈은 이제 구약에서 영적인 표로 바라보고 그림자로 제사했던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성취가 되어서 그것을 조항적인 규정으로 지킬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이 주일은 미래에 이루어질 천국을 미리 맛보는 것이기에 주일에 우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천국의 복락을 누려야 한다고 했다. 주일에 육체적인 환락으로 기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주일을 즐거워하라고 하니 파티하고 댄스를 하는 것은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는 의와 희락과 화평이라고 이야기했지, 먹고 마시는 즐거움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하늘나라의 즐거움이 그런 영적인 즐거움이 주일에 충만해 지는 날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그것이 주일로 돌아가는 정신에 가장 중요한 것이다.

주일성수 문제에 대해 중세시대까지 전통은 굉장히 엄격했다. 그런데 엄격한 것이 다 지켜졌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데 루터나 칼빈 같은 사람이 파격적으로 안식일과 주일사이에 신학적인 불연속성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이야기했던 것은 당시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그것은 중세후기에 가서는 아주 신비주의적이고 미신적인 요소들이 많이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수없는 이름을 붙여서 절기를 만든다. 365일 가운데 거의 200일 이상이 성인의 이름을 가진 날이다. 그것을 다 미신적으로 지키고 준수함으로서 그 공덕이 쌓이고 그러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오직 은총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로 라는 종교개혁의 지침에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약에 루터와 칼빈이 주일을 계량적으로 몇 번째 날, 이 날은 매우 중요하다고 지정을 해버리면 중세에 만들어 놓았던 그 미신적은 수많은 날들 가운데 하나가 더 늘어가거나 강조되는 것으로 사람들이 이해한다면 주일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그 많은 관습적이고 미신적인 절기 중에 하나와 어깨를 겨루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이런 루터와 칼빈 같은 1-2세대의 종교개혁자들은 안식일과 주일의 전통에 대한 이해를 성령강림 직후에 유대교적인 안식일 준수에 대한 방식에서 가져오지도 않았고, 중세시대의 바리새적인 엄격주의와 후기의 신비주의에서도 가져오지 않았고, 초대교회 교구들에게서 정통성을 가져왔다.

칼빈은 주일성수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상당부분을 '아디아프로'에 속하는 것으로 돌렸다. 그렇다고 칼빈이 주일성수와 예배참석의 의무, 형식과 예전의 시행 등에 있어 규모없이 목회한 것은 아니다. 1537년에 작성된 제네바교회의 법규인 교회조직과 예배에 대한 규정에서도 나타난다. 칼빈은 예배나 주일성수에 대해 언약적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포용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문제를 다루는 것이 다른 개혁자들과 함께 중시했던 양심의 자유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양심의 자유문제를 '아디아포라'와 관련지었는데, '아디아포라'는 말씀에 명백히 규정된 바가 없고 종교적으로 행동을 규정할 타당한 근거가 없는 중립적인 것이어서 때에 따라 작위와 부작위가 허용되기에 양심이 가르치는 바에 따라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상황에 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은 안식일 준수에 있어 안식일은 신약시대에 있어 주일이라는 정한 날에만 실천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일생의 삶의 과정을 통해 계속되어야 한다고 했다. 안식일이 폐지되기는 하였지만 추출되는 원리를 따라 우리가 여전히 지켜야 할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첫째로 정해진 날에 성도들이 모여 말씀을 들어야 하며 성찬의 떡을 떼고 공적으로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 둘째 노동으로 부터 자유로워져서 하루를 쉬는데 자기뿐 아니라 식솔과 일꾼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주일성수에 대한 칼빈의 이런 견해는 제네바교회 신앙문답서에 잘 나타나 있다. 두개의 문답에서 신약의 교인들이 노동을 금하는 것이 안식일에 주신 금지명령이 의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칼빈이 주일에 노동을 쉬라고 이야기했지만 율법에 기록되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이 연약하기에 하루를 떼어놓아서 영적으로 하나님을 말씀을 배우고 경배할 때 영적인 생명이 고양될 수 있기에 한 것이지 안식일을 지키라 했기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은 청교도들과 생각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 명령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폐지된 제사에 대한 율법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일에도 노동을 중지하고 휴식을 취해야 하는데 율법에 정한 노동금지 명령이 아니라 육체의 쉼속에서 주님께서 우리 안에 충분히 쉴 수 있는 날로 삼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함으로 노동에서 해방된 가운데 말씀과 은혜, 성도의 교제와 같은 영혼의 필요를 채우는 일에 마음과 뜻을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지만, 율법을 지키지 못했고 십계명을 어겼기 때문에 정죄를 받는 것이라는 식으로 접근하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일성수에 대해 종교개혁자 칼빈이 가지고 있던 생각은 기존에 있었던 중세시대에 통용되었던 주일에 대한 기준은 엄격하게 정해놓고 실제적으로 방종하게 지키던 그 날에 대한 도입된 미신들을 제거하면서 순수한 개혁신앙으로서 주일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들이 주일을 바라보면서 빠지는 오류가 주일은 이미 다 율법적으로 끝났기에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인데 주일을 안 지키면 어때하는 방종주의, 주일에 대해 마치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 십계명 율법을 위반한 것 같은 바리새주의등 양쪽 극단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것들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 칼빈의 입장은 분명하다. 안식일에 대한 것은 제사에 관한 것으로 해서 종식되었다. 그 대신 그것에서 항구적인 신학적인 원리들을 추출해 낼 수 있다. 그것들이 추출해 낸 원리가 두 가지인데 노동으로 부터 육체가 쉬어야 하고, 우리가 연약하기에 하나님과 예배하고 말씀을 배우는 집중된 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안식일의 계명을 연장시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만 확실히 붙잡으면 된다. 교인들을 가르칠 때도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바리새주의적인 방법으로 주일성수를 생각하는 것, 자유주의적으로 주일성수를 생각하는 것을 둘 다 하지 못하게 타일러야 한다.

요점은 안식일에 강조된 육체의 안식은 주일 안에 강조되어야 할 영혼의 안식을 바라 본 것이었다. 물론 안식일 제도에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혼의 유익을 누리는 영적 안식에 대한 신적 배려가 있고 주일제도에는 육체노동을 쉬게 하려는 안식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강조점의 문제이다. 주일성수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강조점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이루어질 종말의 안식을 바라보며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적 안식을 강조했다면, 청교도들은 구약의 안식일 제도의 성취가 그리스도 구속 안에 이루어졌고 이것은 종말 안에 누릴 영원한 안식을 이행하는 과정으로 보아 육체의 안식을 보다 강조함으로 종교개혁자들의 균형추에서 다소 이동했다.

(다음은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의 연속성을 강조한 청교도들의 입장, 그리고 주일을 어떻게 지켜져야 거룩하게 지키는 것인가 하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성령의 은사 오늘날에도 지속…단, 사도시대와는 구별해야”
김영한 박사, 기독교학술원 성령은사연구 첫 시리즈 <영적 분별> 펴내

2015/02/12 (목) 13:38 ㆍ추천: 0      

지난해 12월 한 여전도사가 퍼뜨린 ‘한국전쟁설’은 기독교인의 영적 분별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교회 안팎으로 영적 전쟁이 날로 치열해지는 이때, 축사와 은사, 방언, 예언, 신유 등 다양한 영적 현상에 대한 성경적 기준과 통찰력을 제시한 책이 출간돼 관심을 모은다. 김영한 박사가 펴낸 <영적 분별>이 그것이다.

성령과 사탄에 의한 영적 현상, 공통점과 차이점은?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장 1절).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는 최근 기자들과의 자리에서 “2천 년 전 사도요한은 초대교회를 향해 ‘영들을 분별하라’고 교훈했다. 이는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상황”이라며 “각종 이단의 득세와 사이비 종파들의 발호는 교회와 사회의 영적 건강에 심각한 적신호다. 이러한 한국교회 상황에 도움이 되고자 책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기독교학술원의 성령은사연구 첫 번째 시리즈로 출간된 <영적 분별>은 영분별ㆍ귀신추방ㆍ은사ㆍ방언ㆍ예언ㆍ신유 등 영적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분별해야 할지를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심도 있게 풀어내고 있다.

성경적, 역사신학적, 종교현상학적, 조직신학적, 영성신학적 측면에서 영적 현상들의 의미를 차근차근 짚어나간 그는 성령과 사탄에 의한 영적 현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올바른 영분별을 위해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구체적 기준을 제시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 △공교회를 인정 △사도신경의 내용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5가지 기준은 또한 △일상생활에서의 성결 △인격적인 삶과 믿음 △이웃을 위한 헌신 △선행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김 박사는 “어떤 기적이나 신비 현상, 직통계시, 입신, 방언, 예언기도, 축사(귀신축출), 신유 그리고 교주의 카리스마나 열광적 종교행사가 진리의 영적 현상을 담보하는 기준이 결코 될 수 없다”며 “신구약 66권만이 유일한 기준”이라고 역설했다.

이러한 논지의 연장선에서 그는 피터 와그너를 중심으로 제기되는 신사도운동에 대해 “건전한 성경적 은사 현상과 다르다”며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은사운동 대부분이 초기에는 교회 갱신을 가져왔으나 그 결과는 좋지 못했다. 성령의 역사에 사용된 은사자들이 초창기에는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욕심과 교만이 들어가서 성령의 역사를 인본적으로 사유화했던 것”이라며 “성령 운동의 핵심은 표적 추구가 아니라 열매”라고 강조했다.

성령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지속…사도시대와는 구별해야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성령의 역사에 동반하는 은사와 기사(奇事)와 이적(異蹟)들은 과연 지금도 있는 것인가? 있다면 거기에 나타나는 현상이 성령의 역사의 외적 증거인가 아니면 신비주의에 빠진 것인가?

김 박사는 은사와 기사와 이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은사지속설’을 지지한다. 이와 관련 18세기 영국의 버틀러 감독(Bishop Butler)과 기브슨 감독(Bishop Gibson), 이후 미국 구프린스턴학파의 워필드(B. B. Warfield), 웨스트민스터신학교 리차드 개핀(Richard Gaffin) 등은 은사와 기사, 이적이 사도시대에서 끝났다는 ‘은사중지설’을 주장했다.

그는 “성령께서 오늘날에도 오셔서 성경의 증언을 깨닫게 하시고 교회를 지속적으로 설립하도록 도우신다는 은사지속설을 믿는다”며 “다만 오늘날의 은사는 사도시대와 동일시될 수는 없다. 만일 그렇다면 열광주의적이고 비성경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58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영적 분별>은 매 순간 치열한 영적 싸움의 현장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과 한국교회에 유익한 교훈을 제공한다.

방지일 목사(영등포교회 원로)를 비롯해 림인식 목사(노량진교회 원로), 조종남 목사(서울신대 명예총장),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손인웅 목사(덕수교회 원로), 박종화 목사(경동교회), 김중은 교수(장신대 총장 역임), 정일웅 교수(전 총신대 총장), 이정익 목사(신촌성결교회) 등이 추천사를 썼다.

김민정 ⓒ 뉴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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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evin Kern - Water Lil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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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대한 그릇된 이해, 한국교회의 오류 중 하나 (1/2)]

 

한국교회의 치명적인 문제 중의 하나는 구원론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무율법주의의 문제요 다른 하나는 율법주의의 문제입니다. 무율법주의는 대부분의 한국교회에서 나타나는 문제로 칭의(稱義), 곧 죄용서는 강조하나 거룩한 삶이 없는 문제요, 율법주의는 이런 한국교회의 갱신과 개혁을 강조하는 그룹에서 종종 나타나는 문제로 성화(聖化)와 제자도를 강조하나 그것을 전적으로 우리 인간의 책임으로 돌리는 문제입니다.

무율법주의가 복음을 값싼 복음으로 전락시키고 삶이 없는 공짜 은혜를 남발하는 것이 문제라면, 율법주의는 윤리적 갱신과 도덕적 책임을 인간에게 지우고 스스로 윤리적 도덕적 삶을 추구하도록 강요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

하지만 이것들은 둘다 구원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그게 뭘까요? 바로 <믿음에 대한 통전적 이해의 결여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이신칭의(以信稱義)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죄용서와 상관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믿음이 회개를 결과한다는 것은 종종 놓칩니다. 다시 말해 죄용서와 회개, 칭의와 성화는 둘 모두 믿음과 상관있다는 얘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믿음은 우리에게 값없이 주는 은혜의 선물인 죄용서를 결과하고 동시에 우리 안에 거룩을 향한 마음을 일으킵니다. 바로 회개입니다. 칼빈은 회개를 중생, 그리고 지속적인 성화와 관련시켜 이해했습니다. 믿음의 문제를 죄용서로만 국한시킨 것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교회의 구원론적 문제를 교정할 단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한국교회의 대부분은 믿음의 문제를 칭의에만 국한시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이후의 거룩한 삶을 간과했습니다. 결국 불의와 부패가 난무한 윤리부재의 현실을 초래하고 만 것입니다. 이에 대한 극단적 반동으로 다른 한편의 그룹 역시 믿음의 문제를 칭의에 국한시킨 것은 마찬가집니다. 이들은 믿음을 죄용서, 곧 칭의에만 국한시킨 나머지, 성화의 삶, 곧 그리스도인의 제자도는 구원받은 자의 책임의 영역으로 분리시켰습니다.

 

하지만 <죄용서와 회개는 둘 다 믿음과 관계>있습니다. 죄용서와 회개는 둘 모두 믿음의 결과입니다. 죄용서함을 받은 자에게 회개는 필연적입니다. 칼빈은 회개를 중생과 연결하여 이해했고 그가 말하는 중생은 바로 성화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새 사람을 입는 것", 바로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성화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평생에 걸쳐 일어나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의 문제였습니다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인간이 과연 영생할 수 있었을까?
- 선악과에 대한 셋째 의문 / 박신 목사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네가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5-17)


선악과 금령에 대해 대표적으로 품는 세 가지 의문 중에 마지막을 알아볼 차례다. 아담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과연 영생했고 또 그 후손인 우리도 불로장생할 수 있었을지 여부다. 그 답을 따져보기 전에 사실은 이 질문자체가 아무 의미 없다는 사실부터 먼저 깨달아야 한다.

예컨대 가난한 집에 태어나 학비가 없어서 학업을 중단해야 하는 고학생은 이왕이면 재벌가에 태어났더라면 이런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미국 유학생들은 좀 더 일찍 미국에 왔더라면 영어를 훨씬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여기다가 이왕이면 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이 두 소원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미 자기 소원과는 정반대의 상황에 처해졌고 도무지 되돌릴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아담은 이미 하나님을 거역해 선악과를 따먹었고 하나님도 생명나무를 에덴에서 옮겼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이전 상태로는 도저히 돌아갈 수 없다. 아담이 하나님의 벌을 받은 원죄 상태로 태어난 인간의 수명도 한정되어졌다. 과학과 영양의 발전으로 조금은 늘릴 수 있을지 몰라도 육체적 죽음 자체를 없앨 수는 결코 없다.  

그럼에도 이 질문의 답을 한번 추적해보려는 이유는 불신자들에게 변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앞선 두 질문과는 달리 오히려 믿는 자의 의구심을 씻어주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 신자의 의구심보다는 미련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질문의 저변에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진하게 깔려 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이 주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과는 관련이 없지만 더 성숙하게 자라기 위해선 한번쯤은 정리해둘 필요는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인가?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2,24)

아담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이 가장 염려한 것은 혹시 그 타락한 상태에서 생명 나무 실과도 따먹어 영생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럼 만약 타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실과를 먹었다 해도 분명 영생했다는 뜻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 나무 중에 어느 쪽을 먼저 먹어야 할지 그 순서는 고려 대상에서 일단 제쳐두더라도 말이다.

어쨌든 하나님은 아담이 당신의 명을 위반하자 생명 나무 과실을 옮겨서 영생을 누리지 못하는 벌을 확실하게 내렸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육체적 영생도 누렸을 것이라는 전통적인 가르침은 분명히 옳다.

그래서 그 원죄 하에 태어나는 후손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신령한 몸을 언젠가는 덧입고자 하는 소원과 기대만 가지게 되었다. 아담으로 인해 실패했던 영생의 길이 마지막 때의 부활 가능성으로 대치 또는 연기되었다. 단 아담에게 물려받은 원죄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완전히 씻음 받은 자에 한해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4-57)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모든 눈물은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1,4)

마지막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뀔 때에는 다시 사망이 없다고 했다. 마땅히 육신의 사망도 없지만 무엇보다 이젠 인간을 통해 악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죄와 그 근원인 사탄과는 영원히 결별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라.”(계22:1,2,5)

대신에 에덴동산에서 새 예루살렘으로 옮겨진 생명 나무가 열두 실과 즉,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먹고 남을 만큼 달마다 열매를 맺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진정으로 부르는 자는 마지막 때에 온전하고도 영화로운 육신의 몸을 다시 입는다. 그분과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된다. .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아담의 배역으로 육신적 영생은 물거품이 되었고 마지막 때에나 누릴 수 있는 소망으로 대치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죄의 삯이 사망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과연 선악과 금령을 어겼을 때에 정녕 죽게 된다는 뜻이 그것이 전부일까, 아니 진짜 육체적으로 죽게 된다는 뜻일지 조금 더 음미해볼 여지는 있다.

기독교 교리를 듣고 온전히 납득이 안 되면 반드시 곰곰이 따져 봐야 한다. 수학공식 암기하듯이 받아들여선 안 된다. 수학 공식이야 시험 점수를 잘 받느냐 못 받느냐만 좌우하지만, 성경 말씀은 영원한 운명을 비롯해 인생의 모든 면에 결정적이고도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데 어찌 이해도 되지 않는 교리를 무조건 수용만 하고 치울 수 있겠는가?

교리로 정리될 수 있는 성경의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들을 교회에서 열심히 배운다. 그러나 그 교리가 실제로 역사하여 은혜와 권능을 드러내는 것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오직 일대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만 사랑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객관적 교리라도 신자는 반드시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통해 그분과의 온전한 언약으로 변화시켜 자기 몸에다 새겨두어야 한다. 은사, 체험, 신비주의를 강조하려는 뜻이 아니다. 교리를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온전히 이해하여서 자신의 삶에 실현하는 것이 바로 개인적 신앙 체험이라는 뜻이다.    

성경말씀이 난해(難解)하다는 것은 본문 그대로 읽었더니 뜻을 잘 모르거나 완전한 실감을 하지 못하는 경우다. 문자적 신학적 해석만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살아 있는 생생한 신앙으로 다가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는 아무리 목사님에게 문의하거나, 혼자 계속 묵상해도 여전할 때가 많다. 지금 다루는 주제가 그런 대표적인 경우다.

그럴 경우는 역(逆)으로 가정해 따져보면 의외로 쉽게 문제 해결의 키를 발견할 수 있다.  수학에서 3+4=7이라는 해답이 맞는지 틀렸는지 의심날 때는 어떻게 하는가? 7-4=3으로 검산해보지 않는가? 어떤 사안이 확실히 그렇게 되려면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 둘 다 만족시켜야 하듯이, 본문대로 해석한 내용을 역으로 따져보는 것이 신앙성숙에 큰 도움이 된다.

아담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먼저 현실적으로 가정해보라. 모두가 영생을 얻었을까? 그러면 지구상에 발 디딜 틈도 없는 인구폭발이 되었지 않겠는가? 또 이 땅에 악은 드러나지 않고 선만 실행했다면 그래서 모두 육체적으로 영생했다면 이 땅에는 인간보다 천사 내지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들만 남아 있지 않겠는가?

먹지 않았다면 육체적으로 영생했을 것이라는 가정 자체를 다시 역으로 따지면 먹었으면 당장 죽었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바로 죽지는 않았다. 대신 얼마간의 수명을 허락받고는 죽었다. 또 초기의 인간은 지금보다 수배나 오래 살았으며 거의 천년이나 살기도 했다. 번성하여 생육하려면 당연히 장수하며 자식을 많이 낳았어야 했다.

그러나 수백 년의 수명을 허락한 후에 죽일 양이었다면 하나님이 꼭 먹지 말라는 절대부정 형식으로 당신의 의지를 강조하지 말았어야 했거나,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거기다 정녕 죽는다고 재차 강조할 필요는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근 천년이나 살 수 있다면 오늘날의 수명과 비교하면 사실상 육신적 영생이나 다름없다. 또 실제 그렇게 오래 살면 인생에 더 이상 미련도 남지 않고, 어쩌면 계속되는 수고와 환난 때문에 오히려 빨리 죽었으면 바라기도 할 것이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지금 타락하지 않았다면 육체적 영생을 누릴 수 있었다는 성경 진리를  부인코자 하는 뜻이 아니다. 서두에 말한 대로 이 질문 자체는 아무 의미와 소용이 없다.  단지 신앙을 견고히 세우기 위해 죽음에 대한 의미를 좀 더 깊이 따져 보자는 뜻일 뿐이다.

죄와 죽음의 연관관계

무엇보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음에도 즉사(卽死)하지 않았다는 것이 의미심장하지 않는가? 죄와 육신적 수명 내지 죽음과는 직접적 연관이 없다는 뜻이지 않는가 말이다. 물론 죽음이 죄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연관 관계는 더 폭넓은 차원의 고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악과 금령에서 강조하려는 초점이 육신적 죽음보다 다른 데에 있다는 것이다.

앞 장에서 배운 선악의 본질이 무엇이었는가? 선은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종교적으로 경건한 것을 떠나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붙어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분의 품 안에서 그분께 순종하면 모든 선한 것의 궁극적 근원이신 그분으로부터 선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행할 선의 근거, 기준, 판단, 분별 등을 오직 절대적이고 완전한 선이신 하나님께만 두어야 한다. 궁극적 구원과 심판도 당연히 오직 그분의 몫이다. 나아가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는 소망, 열정, 능력, 기회, 여유마저도 그분만이 공급해주신다. 신자가 그분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해야만 선을 올바르게 분별할 수 있고 실천할 힘도 그분께 얻을 수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땅의 모든 악은 그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근원인 사탄으로부터 온다. 인간이 적극적으로 그를 따르려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벗어나면 자동적 즉각적으로 사탄의 노예가 된다. 그 결과는 무엇보다 선과 악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다. 나아가 악을 행할 힘을 사탄에서 직접 공급받기 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을 행할 소망, 열정, 능력, 기회 전부에서 차단된다. 자연히 그 일생이 악의 편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그런 선악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그 과실을 따먹는 순간 사단의 종이 되었다. 정확하게 말해 하나님을 배역하는 순간 이미 사단에게 넘어갔고 그 결과로 선악과를 따먹었다. 그런 상태에서 생명나무 과실도 먹으면 영영 구원할 길이 없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옮기시고 대신에 사단의 머리를 밟을 여자의 후손을 예비해 놓으셨다. 비록 아담과 그 후손들이 사단의 종이 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로 구원할 길을 에덴동산에서부터 활짝 열어 놓으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아담이 순종하였다면 그 후손의 구원 방안은 어떻게 되겠는가? 참으로 미묘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앞에서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과실을 따먹는 “순서”가 문제될 수 있다고 언급한 이유다. 두 가지 경우, 구체적으로는 세 경우를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선악과를 먹기 전에 생명나무과실부터 먹는 경우다. 그럼 도덕적으로 완전 중립인 상태에서 즉, 진정한 선악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육체적으로 영생해버린다. 인간이 선악을 모르면 그 실현도 전혀 불가능하다. 이는 하나님이 바라셨던 바가 전혀 아닐 것이다.  

창세기 3:22에 따르면 육체적으로 영생한다는 것은 어떤 특성이 그대로 굳어져서 아무 변함없이 끝까지 이어진다는 의미이지 않는가? 또 그래서 생명나무를 먼저 먹고 선악과를 그 후에 먹는 경우는 아무 의미가 없기에 검토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미 도덕적 중립 상태로 굳어진 후인지라 변화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 반대의 경우는 현재 성경이 기록된 그대로다. 하나님을 배역하여 선악과를 먼저 먹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생명나무를 먹느냐 마느냐의 두 가지 경우를 가정해볼 수 있다. 만약 먹게 되면 3:22대로 구원이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타락한 아담이 생명나무 과실을 먹지 못하게 아예 하나님 쪽에서 먼저 옮겨버렸다.    

창3:22에 드러난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어디에 가있었는가? 아담과 그 후손의 구원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지는 것만은 어떡하든 막으려 했지 않는가? 다른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반드시 실현시키시려는 뜻이었다.

만약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상태라면, 생명나무 과실을 먹든 안 먹든 간에, 그 후손에 대한 구원 기준도 여전히 선악과 금령이 되지 않겠는가? 지금껏 모두가 영생하고 선악과나무도 남아있다면 선악과 금령 또한 전 인류에게 여전히 유효한 계명이 되지 않겠는가?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필요 없게 된다.

또 혹시 누군가 그 열매를 따먹으면 남과 비해 너무나 짧은 수명으로 죽는 것을 목격할 텐데 누가 그 금령을 어길 생각을 하겠는가? 그럼 단지 오래 살고 싶다는 이유로, 또 하나님이 무섭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을 믿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십자가는 무용지물이다.

초점은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더라도 인간이 선악과 금령을 잘 지켜냄으로써 구원 가능성이 없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데에 있지 않다. 그 정반대로 인간은 절망의 나락에서 여전히 흑암 가운데 헤매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 없이는 죄가 처리되지 않고 그럼 그 삯인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 엉터리 같은 가정을 하여서 이왕의 교리를 고치자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또 아담이 받은 벌로 인간 육체의 수명이 얼마로 바뀌었는지 혹은 영원했을 가능성을 따지자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역으로 따져 봐도 선악과를 따먹어서 받은 벌인 죽음이 인간 수명의 길이에 좌우되기보다는 예수님과 연관되어서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육체적 죽음보다 더 중한 일

선악과 금령은 사실상 최초 인간 아담과 이브에게만 유효했던 계명이었다. 그 일차적 이유는 하나님으로선 그들이 위반할 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아들 대(代)부터 사실상 무효하게 될 줄도 그분은 아셨다. 그 무엇보다도 앞에서 살펴본 대로 만약 계속 선악과 계명으로만 인간 구원이 가능하다면 주님이 오실 이유가 전혀 없었다.

따라서 선악과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궁극적이고도 절대적인 계획으로 가는 첫 관문이었다. 이를 또 역으로 따지면 골고다 십자가가 예비되어 있지 않았다면 도무지 인간에게 명할 수 없는 계명이었다. 그것도 순종과 불순종을 책임지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주었기에 비로소 성립되는 계명이었다.    

누차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최초 인간 부부에게 “절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먹으면 진짜로 죽는다.”고 간절히 호소했다. 따먹기만 하면 당장 죽일 것이다가 절대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여서 다른 모든 것은 다 해도 좋은데 당신이 그들을 비롯해 우주만물의 주인이자 통치자라는 그 진리만은 절대 잊지 말라고 읍소한 셈이다.  

하나님의 이런 본심에만 비추어보아도 계명을 어기는 것과 죽음의 직접적 관련성은 훨씬 감소되지 않는가? 그리고 따 먹었음에도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이지 않은 것도 진짜 죽음이 따로 있다는 뜻이지 않는가?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비록 육체적 죽음이 임할지라도 당신과의 온전한 교제를 더 중히 여기셨다는 뜻이지 않는가? 비유컨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외동아들에게 큰 고생이 될 줄 빤히 알아도 온전한 성인으로 자라게 하려고 면제가 이미 확정되었음에도 일부러 군대에 보내는 부모 심정과 같은 셈이다.

그래서 아담이 타락하여 그 벌로 육신적 영생을 잃어버릴지라도 자유의지를 주셨지 않는가? 그분은 인간이 당신을 진정으로 기꺼이 스스로 찾아주기를 가장 원하셨던 것이다. 당신의 독생자 예수가 인간의 모든 수치와 고통과 죄책을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게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죄인을 살리셨던 뜻도 바로 그것이지 않는가?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후에 심히 좋아하셨다. 창조의 최종 목적을 인간과의 아름다운 교제에 두었다는 뜻이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인간이 정말로 참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의 장중에 붙들려 있는 것뿐이다. 그 외의 길로는 절대 온전한 인생이 되지 못한다.  

요컨대 하나님 형상을 닮게 지어진 인간에게만은 육신적 죽음이 진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꿔 말해 선악과 금령을 어겨 그 벌로 육신적 죽음을 입게 된 것 또한 하나님이 주신 진짜 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아담이 선악과 계명을 어김으로써 원죄를 범하게 된 결과로 모든 인간이 얻게 된 진짜 죽음은 무엇이며, 또 진짜로 받은 벌은 무엇인가?

진짜 죽음은 무엇인가?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葬事)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8:21,22)

당신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부친이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고 오겠다고 하자 예수님은 그러지 말고 즉시 따르라고 대답했다. 신자는 장례 같은 사회 관습을 완전히 무시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 아님은 물론이다. 죽음의 본질을 가르치려는 말씀이었다.  

예수님은 돌아가신 부친도, 그 장례를 치를 자도 죽은 자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전자는 육신적으로 죽은 자였고 후자는 살아 있었다. 그럼 예수님은 전자는 육신적으로 죽은 자를, 후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라는 두 가지 의미로 나눈 것인가?  

언뜻 그렇게 보이긴 한다. 그렇다면 두 종류의 죽음을 나누는 기준이 단지 육신적으로 죽었는지 아닌지의 차이뿐이다. 그러나 장례 치를 자가 육신적으로 죽지 않았다고 해서 영적으로는 살았다고 아무도 말 못한다.

그보다는 둘 다 예수를 따르지 않은 자임은 분명하다. 예수를 따를 자는 이 제자뿐이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 말씀의 본의(本意)가 있다. 당신을 따르지 않으면 육신적으로 살아있든 죽어있든 간에 둘 다 영적으로는 죽은 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죽음이 육신적 죽음과 영적 죽음의 두 가지가 있는 것은 분명 맞는데 그것을 나누는 기준은 오직 예수님을 따랐느냐에 따라 나눠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더러 두 죽음 중에서 어떤 죽음의 길을 택할지 확실히 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심지어 육체적으로 영생을 해도 영적으로 죽긴 마찬가지다. 요컨대 진짜 죽음은 예수를 모르는 것이다. 그 결과 진짜로 받는 벌도 하나님 대신에 사탄과 짝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신자는 창조에 대한 새롭고도 확고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선악과 금령에 대해 온전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면 그 계명은 아무 의미가 없고 한갓 하나님의 독단적 명령에 불과했을 것이다. 또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한 것도 하나님이 인간이 타락하여 실패할 것을 무릅쓰고 감행한 도박이 되는 셈이다. 나아가 타락으로 받은 인간의 육신적 죽음도 그야말로 긍정적인 측면이라곤 하나 없이 저주에 가득 찬 벌로만 그칠 것이다.

절대 그렇지 않다. 태초부터 성자 예수님이 계셨기에 우리 눈에는 미처 이해되지 못한 일들이 오직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시행되었다. 너무나 크고 놀라운 은혜가 그런 외형적 모순들 안에 숨겨져 있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에 이미 부여하신 자유의지를 전제로 당신의 모든 역사를 진행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으로선 쉽게 순종하기 힘든 계명들도 줄 수 있었고 또 주셔야만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비록 아담의 원죄 때문에 인간이 육체적 죽음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십자가의 완벽한 은혜를 통해 육신적 영생과는 도무지 비교도 안 되는 너무나 좋은 진짜 영생이 예비 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원죄의 잔재가 펄펄 살아있는 신자들  

그럼에도 신자들마저 자꾸만 아담이 순종했더라면 우리도 육체적 영생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심과 미련을 품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님의 십자가 구원을 얻고도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하는 것보다는 육체적 영생이 더 나은 것 같다는 마음이 깔려 있지 않는가?

만약 모든 인간이 진짜 육체적으로 영생한다면 하나님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 자체로 이미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 내지, 아예 하나님이 되는 셈이다. 하나님을 전혀 찾지 않을 것이다. 지금 실제로 죽음을 벌로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알려고도 않고 찾지도 않으니 말이다.  

이 질문의 배경에는 원죄로 타락한 악의 잔재가 도사리고 있다. 육체적으로 영생하여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소원 말이다. 사탄이 아담에게 어떻게 유혹했는가? “너는 선악과를 먹어도 절대 죽지 않는다. 하나님과 같은 존재, 아니 더 뛰어난 존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괜히 너를 시기 질투하여 먹지 못하게 하려고 겁을 준 것뿐이다. 이제 네가 선악과까지 먹으면 육체적으로 영생도 하고 하나님 대신에 네가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다. 이보다 꿩 먹고 알 먹는 일이 어디 있겠니?”

바꿔 말해 오늘날의 신자에게도 믿음으로 일석이조를 누리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잘 믿어 영적으로도 충만하고 또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현실적으로도 크게 형통할 것을 소원하고 믿는다. 이왕이면 신자도 무병장수(無病長壽)하면 좋지 않는가라는 뜻이다.  

물론 신자가 영육 간에 형통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소원하는 바다. 그러나 그분은 일차적으로 당신과의 온전한 교제를 더 원하신다. 신자가 십자가 은혜를 통해 당신을 진정으로 찾고, 알고, 믿고, 감사하고, 찬양하며, 경배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당신의 뜻대로 기꺼이 순종하며 그 뜻을 실제로 삶에 드러낸다면 나머지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풍요하고 안일하게 해주신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풍요나 궁핍이든 당신께서 주권적으로 나눠주신다. 그보다는 당신과 온전한 교제와 동행을 유지하는 신자라면 이미 세상의 안일이나 핍박은, 심지어 육체적 죽음을 당하는 순교까지 아무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기쁨과 감사함으로 감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진짜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속에 소지하게 되었고 그분의 은혜로만 이미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주는 어떤 안일과 풍요보다 더 충만한 하늘의 신령한 것에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담이 선악과 금령을 위배하는 바람에 그 후손들의 육신적 영생은 물 건너갔다. 그러나 그 영생은 천국에서, 특별히 마지막 부활 때에 육신의 몸을 입음으로써 더 완전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맛보게 될 것이다. 또 그 전에 이 땅에서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나감으로써 영생을 미리 소지하게 될 것이다.

서두에서 말한 대로 신자는 아담이 선악과 금령을 위반하는 바람에 모든 인간이 육신적 죽음을 맞게 되었다는 기독교 교리를 실제 삶에서 철두철미 깨달아 적용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이전에 불신자 시절에는 하나님과 그분을 따르는 삶보다 육신적 죽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사실은 하나님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든 현실에서 육신적으로 죽지 않은 일에만 매달렸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알고 난 후에는 육신적 죽음과 현실에서의 궁핍함보다는 하나님을 알아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함을 깨달아 그렇게 실천하며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신자마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아담이 죽지 않았을 것 아니냐는 질문과 의구심은 가질 필요도 의미도 전혀 없다. 엄밀히 따지면 하나님보다 육신적 안일을 더 바라는 불신앙이자 죄다.

그보다는 선악과 금령의 배경에 우뚝 서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 전부터 예수님의 십자가를 먼저 마련해 놓으셨다. 온 세상을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실 만큼 사랑하신 그 은혜 위에 만드셨다. 그리고 아담에게 제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즉, 그 사랑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간절히 호소하셨다.

예수님만이 알파요 오메가이자,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인간의 창조 때에 예수님이 계셨고, 그 타락의 현장에도 눈물지으셨고, 십자가에 죽으시어 구원을 다 이루셨으며, 마지막 때에 하늘 보좌에서 내려와 심판과 구원을 이루려 다시 오실 것이다. 그 때에 끝까지 그분을 따르는 자는 영생을 입을 것이요, 그렇지 못한 자는 둘째 사망을 맞을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5,16)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5-8)  

4/27/2010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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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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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a Peng Fang - A Water L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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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권위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게 하기 위해서 사명을 수행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셨다. 그것은 교회 그 자체을 위한 권위부여가 아니라 교회에 맡겨진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권위 이해의 요점이다. 이 점을 통해서도 권위의 부여가 교회의 기능과  어떻게 관련되는가를 분명하게 알수 있다. 즉 교회에 주신 권위는 가르치는 사명과 교회를 다스리는 사명을 위한것이다.

 

   가르치는 권위라는 말의 의미는 구원을 위해 위로부터 받은 가르치는 교리를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가르치는 사람이 취사선택의 권한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가르침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르치는 사람에게 권위가 있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다. 또한 가르침에 권위가 있다는 것은 가르치는 자의 도덕의 문제가 아니며,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 받는 자의 약속도 아니다. 그것은 교회가 교회이기 위해 확정된 한 가지 사항일 뿐이다. 교회를 다스리는 권능에 있어서도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교회에 바른 질서가 확립되지 않으면 직무를 완수할 수 없다. 가르치는 권위에 복종하지 않으면 교회의 일치와 질서는 유지되지 않는다. 여기서도 다스리는 사람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위임받은 직무에 권위가 부여되는 것이지, 사람에게 권위가 주어진 것은 아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교회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 아래 사회의 기존 질서 유지를 주장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신중하게 피해야 할 부분이다. 또 한 가지는 질서라고 할 때, 교회에서는 말씀의 직무와 연결되지 않은 질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질서가 잘 지켜지는 교회는 평온하거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교회가 아니라, 선교와 봉사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교회라는 의미이다. 앞에서 교회의 표식에 대해 말했지만, 교회의 표식이 분명한 교회가 바로 질서 있는 교회이다.

  

   그리스도의 권능은 본래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모임을 통해서 행사된다. 이러한 권능을 실수 없이 대행한다는 것은 어렵다. 아무리 영적인 은사를 풍부하게 받은 개인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단체라 해도 실수가 없을 수는 없다. 다른 단체를 통해 인간의 잘못이 확인되기 때문에, 잘못이 비교적 적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교회가 행사하는 권위는 무엇보다도 교리 또는 신앙의 조항들을 결정하는 권위이다. 이것이 결정되지 않을 때, 교회는 이른바 방향 잃은 배와 같아서 목적지인 구원의 항구에 도달할 수 없게 된다. 교리가 교회적으로 확정되지 않고 각각의 설교자의 재량에 맡겨진다면, 교회의 일치도 없게 된다. 하지만 교회의 결정은 성경에 입각한 결정이어야 한다. 이는 교회의 결정권이 성경의 권위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교리의 결정은 이미 확인된 것이다. 교회는 질서를 지켜야 하는데, 각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수행한다고 저절로 질서가 서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결정하고, 각 개인은 그 결정에 따라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법이 바른 양심을 구속해서는 안된다. 한편, 이런 권위의 행사는 회의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회의가 바른 기능을 하지 못할 때는 한사람 혹은 소수의 사람에게 권위가 집중되거나, 혹은 권위가 확산되어 어떤 것도 확정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모든 회의가 항상 올바른 것만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준다고 말씀하신 것을 가톨릭 교회는 교회가 행사하는 재판권 또는 치리권이라고 해석했다. 이에 반해 개신교는 이 열쇠를 복음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면 과연 교회의 권위를 대표하고, 또 집행하는 것은 누구일까? 이러한 교회정치 문제에 대하여 『기독교강요는』 그다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때문에 교회정치의 여러 형태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칼빈을 연구해 왔는데, 결과적으로 칼빈은 장로제 교회 운영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여하튼 교회정치 형태에 있어서 문제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됨을 가장 잘 드러내는 제도를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출처 양무리 마을/아바다


100달러로 피아노를 산 선생님
미국의 한 시골학교 선생님이
당시 갑부였던 포드 자동차 회사의
포드 회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회장님,
아이들의 음악교육을 위해
저희 학교에 피아노 한 대가 필요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얼마 후 답장이 왔다.
그런데 열어보니 단 돈 100달러가 들어 있는 게 아닌가.

그러나 선생님은 실망하지 않고
100달러로 땅콩을 사왔다.
그리고 선생님은 사온 땅콩을 학교부지에 심은 뒤,
그 해 땅콩을 수확하여 팔았다.

몇 년을 그렇게 했더니
피아노를 살 수 있는 돈이 모아졌다.

선생님은 포드 회장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
"회장님의 도움으로 피아노 살 돈이 모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포드회장으로부터
답장과 함께 만 달러가 송금되어 오는 게 아닌가.

답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선생님 같은 분이 미국에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선생님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했지만
기부금을 주면 금액이 적다고 투덜대거나 모르는 척 하더군요.

그런데 선생님은 작은 기부금에 대해서도 감사해하셨고,
이익까지 들려주시니 오히려 제가 감동받았습니다.
앞으로 도움을 청하시면 액수와 상관없이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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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을 받았을 때,
혹시 내 기준에 부족하다고
그 사람을 탓하거나 불평하지는 않았던가요?

감사할 일은 오늘도 일어났습니다.


# 오늘의 명언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라.
- 잠언 -


           

 

 



                     



                 선택권에 대한 나의 헌장
                                       최송연       

                

                주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선과 악을 분별하여

                택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선택의 능력을
                부여해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나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그 아름다운 선택권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부요한 자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악을

               택해야만 한다면.

               나는 결코 그 길을 택하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가난하여 배고플지라도

               진실하게 살 수만 있다면

               나는 진실한 가난을 택하는 그 길에

               기꺼이 내 선택권을 사용하겠습니다.

 

               나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그 아름다운 선택권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유익한 삶을 남기겠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남을 아프게 해야 한다면

               나는 결코 그 길을 택하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좀 어렵고 힘이 들어도

               그리스도가 영광 받으시는 길이라면

               내 자신이 아픈 것을 택하는 그 길에

               기꺼이 내 선택권을 사용하겠습니다.

 

              나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그 아름다운 선택권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많은 것을 배우며 행하는

              지식인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교만을 위한 지식을 쌓고

              그 지식으로 남을 짓밟아야 한다면

              나는 결코 그 길을 택하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조금 못나고 부족해도

             겸손으로 남을 도와줄 수 있다면

             겸손의 풍성함을 택하는 그 길에

             기꺼이 내 선택권을 사용하겠습니다.

 

             나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그 아름다운 선택권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안락한 삶을 누리겠습니다.


             그러나,

             세상 향락의 넓은 길을 가는 것이

             안락이라면,

             나는 결코 그 길을 택하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좁고 협착하여 눈물 없이는 갈 수 없는

            십자가의 쓰라린 길 일지라도,

            우리 주님께서 먼저 가신 그 길을 따르는 일에

            기꺼이 내 선택권을 사용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선택권 저 너머에는

            사망과 생명, 두 곳이.

            결과로 놓여 있음도

            나는 분명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신명기 30:19)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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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이상의 것들을 볼 수 없는 것, "교만"

    5학년 딸 아이가 매우 즐겁고 흥분된 상태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유인즉, 자기 반에서 가장 예쁜 아이로 선정되었다는 것이죠. 그 다음 날 역시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가장 성공할 것 같은 학생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역시, 딸아이는 세번째 투표 즉, "가장 인기있는 학생"으로 선정되었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딸아이는 매우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냐며 엄마가 물었습니다. 오늘은 투표에서 졌냐고 물었더니, 투표에서 이겨 선정되긴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투표냐고 물었더니, "가장 잘난체 하는 학생"이었다는 것이죠.

    누가복음 18장,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그는 "나는 (I)"라는 단어를 5번(영어성경) 사용합니다. 그는 두가지 문제, 과장과 축소로부터 고통을 당하였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지나친 과대평가를, 하나님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과소평가를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크게 평가한 것입니다. C.S.루이스는, "교만한 사람은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아래로 낮춰 봅니다. 그렇게 아래만 내려다 보니까, 교만한 자들은 자기 이상의 것들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I heard about a fifth grader that came home from school so excited. She had been voted "prettiest girl in the class." The next day she was even more excited when she came home, for the class had voted her "the most likely to succeed." The next day she came home and told her mother she had won a third contest, being voted "the most popular."

    But the next day she came home extremely upset. The mother said, "What happened, did you lose this time?" She said, "Oh no, I won the vote again." The mother said, "What were you voted this time?" She said, "most stuck up."

    Well this Pharisee would have won that contest hands down. He had an "i" problem. Five times you will read the little pronoun "i" in these two verses. He was stoned on the drug of self. He suffered from two problems: inflation and deflation. He had an inflated view of who he was, and a deflated view of who God was.

    His pride had made him too big for his spiritual britches. C. S. Lewis once said, "A proud man is always looking down on things and people; and of course, as long as you are looking down, you can't see something that's above you."

    James Merritt, Collected Sermons, Christian Globe Networks, Inc.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짧은 글 긴 여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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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술쟁이 하나님? - 선악과에 대한 첫째 의문 / 박신 목사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네가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5-17)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어 에덴동산을 다스리는 일을 맡겼다. 그리고 그 동산 안의 모든 나무 실과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되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고 엄하게 금했다. 이 금령(禁令)은 인류가 지금 이런 상태로 있게 된 시발점이었다.

    성경은 최초 인간이 그 명령을 어김으로써 현재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지금은 그 배역에 대한 하나님의 벌을 받은 이후다. 만약 그가 명령을 어기지 않았더라면 지금과는 어느 모로나 훨씬 좋은 상황으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불신자뿐 아니라 신자들마저 이 선악과 금령에 대해 크게 세 가지의 의문을 가진다. 1) 하나님은 아담이 명령을 어길 줄 미리 알았으면서도 왜 그런 명령을 하셨는가?, 2) 선악을 알게 하는 즉, 좋은 분별력이 생기게 하는 열매를 먹었는데도 왜 벌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도 죽음이라는 치명적인 벌을 말이다, 3) 만약 아담이 그 명령을 어기지 않고 지켰다면 인류는 육체적으로 영원히 살 수 있었을까? 세부적으로는 더 많은 의심들이 생길 수 있겠지만 가장 많이 제기되는 질문이므로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그래도 잘못은 개구쟁이들에게 있다.

    우선 첫째 질문은 자칫 신학적으로 복잡한 논쟁을 야기 시킬 수 있다. 예지(豫知)와 예정(豫定) 중에 어떤 것이 옳은가, 아니면 둘 다 동일하게 적용되되 어느 쪽에 더 무게 중심이 실리는지 등등이다. 지금은 그것을 일일이 논할 계제가 안 될 뿐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다. 첫 질문의 초점은 그 쪽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담이 명령을 어길 줄 하나님이 미리 아셨다는 데는 아무도 이의가 없다. 전지전능하신 그분이 아담이 어떻게 반응할지 전혀 감도 잡지 못한 채 도박하듯이 그 금령을 제정하셨을 리는 만무하지 않는가? 정작 지금 궁금한 것은 미리 알고도 그런 금령을 주었던 이유다.  

    제기된 질문 그대로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할 줄 알고도 금령을 제정했다. 그렇다면 일차적 답변은 간단히 얻을 수 있다. 아담이 타락하리라는 위험 부담을 안고서도 그렇게 했으니 당연히 타락하더라도 타락 전보다 더 좋거나, 최소한 같거나, 아니면 뭔가 회복될 만한 후속 조치가 있기에 그렇게 하셨다는 뜻이 된다. 바꿔 말해 하나님이 최초 인간에게 아무 사후대책 없이 무조건 망할 수밖에 없는 명령을 내렸을 리는 만무하다는 것이다.  

    그 질문 안에 이미 그 답변이 내포된 셈이다. 다른 말로 질문 자체가 질문다운 질문으로 성립할 만한 내용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왜 별다른 의미가 없는 질문인지는 이 질문을 하게 된 저변에 어떤 생각이 깔려 있는지 따져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 질문의 근본적인 뜻은 지키지 못할 명령이라면 차라리 내리지 말았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비난이다. 또 그랬더라면 아담은 당신의 벌을 받지 않았을 것이며 인류도 영생복락을 누리거나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형편이었을 것 아니냐는 불만이다. 한마디로 현재의 인류의 고난을 야기한 아담의 범죄의 궁극적 원인은 오히려 하나님 쪽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너무나 잘못된, 아니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그들의 생각을 비유하자면, 아래에 들 다른 예들과 함께 완벽한 비유는 아니지만, 이와 같다. 부자 집의 큰 감나무가 담장을 넘어 골목길에까지 뻗쳤는데 잘 익은 홍시가 주렁주렁 달렸다. 동네 꼬마들이 목말을 타거나 장대를 이용해 따먹을 수 있었다. 마당쇠 영감이 틀림없이 아이들이 감을 따먹을 줄 미리 알고선 담벼락 밑에 가만히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범행을 저지른 아이를 현장에서 잡아 혼쭐을 내주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심술궂은 영감 같지 않느냐는 것이다.  

    선악과가 이와 비슷한 상황인 것은 맞다. 그렇다 해도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가? 단연코 남의 집 감을 따먹은 동네 악동들이다. 야단을 친 마당쇠는 자기 할 바를 다했다. 비록 숨어서 기다린 것이 좀 치사해 보이긴 해도 그 자체를 두고 잘못했다고 말할 수 없다. 어쨌든 잘못은 남의 감을 따먹은 아이들에게 귀속되지 감나무를 심은 집주인과 하인에게는 없다.

    마당쇠 영감으로선 도적이 오리라 예측하고 잡으려 미리 대비한 것뿐이다. 선악과와 비슷한 느낌을 줄려고 감나무를 예로 들었지만 만약 집안 금고의 보석이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괴도 루팡을 잡으려고 경찰이 매복하고 있는데 경찰과 루팡 중에 누가 잘못한 것인가 말이다.

    이런 식의 의문과 반발을 갖는다는 자체가 사실 인간의 도덕성이 얼마나 철저하게 왜곡, 파괴 되어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자신의 단점, 허물, 잘못, 죄에 대해선 완전히 시야가 가려져 있다. 백일하에 들어났어도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도 많다.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은 어김없이 지적해내는 것이 모든 인간이 가진 가장 보편적 특성이다.  

    그런 성향을 심지어 하나님에게까지 적용한다. 지금도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보다 그것을 심은 하나님에게 탓을 돌리지 않는가? 다른 모든 과실은 다 따먹도록 허락한 은혜에는 전혀 관심을 돌리지 않는다. 사실은 하나님을 배반하여 타락하자 무엇이든 남의 탓으로 돌리는 성향이 생겼다. 자기만이 세상과 인생의 주인이기에 자신을 나무라거나 강요하는 자는, 하나님이라 해도, 크게 잘못한 것이다.    

    신자가 되어서도 별반 나아진 것이 없다. 조금만 현실이 잘못 풀리면 자신의 태만, 부주의, 판단착오, 오류 등에는 전혀 눈을 돌리지 않고 하나님 탓만 한다. 그것도 자신의 정성과 열심으로 이룬 종교적 실적에 걸맞은 보상을 반드시 해주어야 한다고 떼를 쓰면서 말이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었던 원죄의 본성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선악과 금령의 가장 본질적인 뜻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벌 줄 것이라는 문자적 진술에만 매달린다. 초점은 하나님이 벌준다는 데에만 가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하나님이 스스로 가학성(加虐性)에 빠지거나 즐길 분이 절대 아니지 않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아담더러 제발, 나아가 절대 따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히브리 어법상 “먹지 말라”는 절대 부정문으로서 결코 먹어서는 안 된다는 그분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또 “정녕” 죽는다고 말함으로써 한 번 더 그 의지를 강조했다. 요컨대 진짜로 죽으니까 절대 먹지 말라는 것이다.

    냉장고의 Hot 소스 병을 보이며 어린 자녀에게 “절대 먹으면 안 된다. 먹으면 진짜 큰 일 난다.”라고 누차 강조할 때에, 그것을 어기기만 하면 부모 말 안 들었으니 곧장 크게 야단쳐야지 하고 야무지게 다짐하는 부모는 단 한 명도 없지 않는가?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가 제발 먹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방금 창조되어 에덴동산 사정에 전혀 낯선 아담에게 하나님이 과연 어떤 마음을 가졌을지 조금만 헤아려 보아도 그런 질문은 아예 발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미국 목사님이 선악과 금령을 쇼핑몰에 간 엄마와 아이로 비유했다. 이제 아장아장 걷는 아이의 손목에 줄을 묶어서 엄마가 조정하고 있는 모습으로 말이다. 그 줄은 아이가 가는대로 자동으로 풀리게 되어 있다. 엄마는 아이가 제 멋대로 가도록 버려두다가 위험한 상황에 빠지려 하면 곧바로 줄을 당겨서 막아준다.  

    그 줄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엄마의 무한하고도 진정한 사랑이다. 아이가 위험한 상황을 빼고는 제 마음대로 놀 수 있게 해주기에 무한한 사랑이다. 또 줄을 당겨 위험한 상황을 막아 준다는 데서 진정한 사랑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둘 중 하나만 있다면 결코 온전한 사랑이 되지 못한다. 반드시 둘이 합쳐져야만 그렇게 된다.

    바로 그런 사랑을 아이에게 말로는 어떻게 표현하는가? “줄을 절대 스스로 풀지 말라. 풀면 진짜 큰 위험에 빠진다.” 이것 외에는 표현할 방도가 없다. 또 아무리 잘 설명해주어야 제대로 이해도 못한다. 그 아이 수준에선 엄마가 왜 줄을 묶어가면서 엄하게 금했는지 온전히 깨달으려면 줄을 풀어버리고 혼자 다니다 위험에 빠진 후라야 가능하다.

    갓난아이가 볼 때는 쇼핑몰 안에는 너무나 재미있고 신나는 것들로만 가득 차 있다.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라 어떤 것이 위험하지 전혀 모른다. 다양한 색깔의 캔디를 담은 온갖 신기한 모양의 유리병도 있다. 아이 눈에는 여전히 영롱하고 아름다운 무지개로만 비취지, 잘못 만져 병이 깨어지면  어떤 일이 생길지는 전혀 모른다.

    이 정도로만 비유해 봐도 아담이 위반할 줄 알고도 선악과 금령을 주신 이유의 반(半)은 풀렸다. 무엇보다 부모 같은 사랑에 바탕을 둔 계명이지 않는가? 하나님은 아담이 절대로 당신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엄마가 갓난아이와 항상 줄로 서로 묶여 있길 바란 것과 똑 같은 심정이었다. 혹시라도 아이가 엄마가 당기는 것이 싫고 귀찮아서 스스로 줄을 벗는 일이 생기더라도, 또 엄마를 어떻게 오해하든 간에 엄마로선 반드시 줄로 묶었어야만 했다. 아이 입장에선 조금 귀찮다고 줄을 풀었다간 순식간에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지경에 빠지지 않는가?

    범할 줄 알고도 명하신 까닭은?

    이제 쇼핑 몰에서 아이를 줄로 묶은 엄마의 뜻은 십분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진한 부분이 다 해소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엄마 쪽에서 쇼핑몰에 아예 가지 말든지, 혹은 유리병 가게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는 반발이다.

    또 다른 비유를 들어보자. 고급 자동차를 열 대나 갖고 있는 엄청난 갑부가 있었다. 그가 여행을 떠나면서 갓 운전면허를 딴 틴에이저 아들에게 자동차 열쇠 열 개 전부를 맡겼다. 그리고 다른 모든 차는 마음대로 운전해도 되는데 아빠가 가장 아끼는, 예컨대 벤즈 600만은 타지 말라고 당부하고 떠난 경우와 같다.  

    만약 차고 문을 다 잠그고 열 개의 열쇠를 아예 주지도 않았다면 아들의 운전 솜씨를 전혀 믿지 못한 것이다. 또 아들이 임의로 행할 수 있는 자유도 완전히 막은 것이다. 아예 위험한 쇼핑몰 근처에 데리고 가지도 않은 것이다. 그럼 아이는 평생 쇼핑몰은 구경도 못하게 된다.
      
    반면에 열쇠도 다 주고 차도 다 타게 하면 어떻게 되는가? 아빠가 눈에 안 보이는지라. 아빠가 있다는 인식이 점점 무디어질 것이다. 벤즈 600도 마음껏 탈 수 있으니 차츰 아빠가 가장 아끼는 차라고 미처 생각지 못한다. 나중에는 마치 처음부터 자기 것이었던 양 여길 것이다. 결국은 그 집 주인은 바로 그 아들이 될 것이다. 친구들을 불러다 놀면서 집안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 것이다.  

    그렇다고 벤즈 600의 차고만 잠그고 그 열쇠를 아버지가 갖고 나머지는 다 주고 여행 갔다면 어떠한가? 아예 처음부터 벤즈 600은 없었던 양 치부할 것이다. 그 주인 아빠도 잊어버릴 것이다. 열쇠를 주고 가도 타지 말라고 말만하면 얼마든지 타지 않을 자신이 있는 데라고 순진하고도(?) 시건방진 생각을 할 것이다. 당연히 자기를 믿지 못해 열쇠를 주지 않았다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 경우, 아버지는 독재자요 아들은 그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부자간에 진정한 사랑과 신뢰는 실종되었다. 아들로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벤즈를 타볼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원천 봉쇄한 것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아들이 자발적으로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기회를 아빠가 주지 않은 것이 더 큰 문제가 된다.

    선악과 금령은 다시 말하지만 쇼핑몰의 엄마 예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인간더러 제발 당신의 품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간절한 호소였다. 그분의 울타리 안에서 진정한 기쁨과 감사와 함께 그분께 자발적으로 순종할 때에만 세상을 살아갈 참 된 능력과 은혜가 그분으로부터 인간에게 임한다는 것이다. 또 자동차 열쇠 전부를 맡기고 여행하는 것처럼 그분과 온전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이 참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이다.

    아빠가 여행을 떠나면서 열쇠를 다 주고 가면 철없는 틴에이저 아들이 틀림없이 벤즈 600도 타리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열쇠를 다 안 주면 아이는 당장에 자기를 못 믿는다고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반발할 것이 빤하다. 그렇다고 아이가 탈 수 있는 차의 열쇠만 주면 아이더러 임의로 집안을 관리하라는 의미가 전혀 없어진다. 아이가 어떤 짓을 해도 사고가 안 나게끔 미연에 다 방지해 놓은 셈이다. 아이는 그저 아빠 명령만 따르면 되는 로봇이 되어버린다.  

    아들의 성숙을 바라고 또 그렇게 키우려는 아빠라면 벤즈를 타리라 빤히 알지만 열쇠를 다 주고 떠나야만 한다. 혹시 운전미숙이나 사고로 벤즈가 고장 나고 부셔져도 아빠로선 문제 삼을 것 하나 없다. 돌아와서 일단은 엄하게 야단쳐도 진정한 사랑으로 용서해줄 것이니까 말이다. 또 갑부인지라 그 수리 비용쯤은 아무 부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들을 용서하고 차 수리비를 감당할 능력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는 아빠라면, 나아가 아들을 온전히 사랑하여 스스로 성숙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아빠가 아니라면, 도저히 벤즈 열쇠까지 주지는 못한다. 선악과를 따먹든지 안 먹든지 아담의 임의에 맡긴, 그것도 따먹을 줄 알고서도 그렇게 한 하나님의 심정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 명령의 특성

    신자마저 이 금령을 하나님의 사랑의 호소라기보다는 단순히 인간에게 명한 종교적 계명이라고 여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성경에 드러난 계명의 특성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글에서도 이미 몇 번 든 예를 다시 들어보자.

    시청에서 “일요일 OO 공원으로 오전 열시까지 오면 Free Hotdog를 주겠다.”는 광고를 했다 치자. 그럼 공짜로 핫도그를 먹게 되는 근거는 오직 공원에 열시까지 간 것 때문이다. 열시 넘어서 도착하면 자격 미달로 절대 먹을 수 없다.  

    반면에 회사에서 일요일에 야유회를 가면서 철자 하나 틀리지 않고 똑 같은 광고를 했다 치자. 이 경우에는 공짜로 핫도그를 먹을 수 있는 근거는 공원에 열시까지 도착한 것 때문이 아니다. 그 이전에 그 회사의 직원이기 때문이다. 다른 회사 직원이라면 아무리 일찍 공원에 가도 먹지 못한다. 반면에 직원이라면 혹시 열시 넘어서 도착해도 남아있는 핫도그를 먹을 수 있다.

    어쨌든 두 경우 다 열시까지 공원에 가기는 가야 먹을 수 있다. 그 표현은 동일하지만 내용은 이처럼 두 가지로 나뉜다. 전자의 광고는 반드시 광고대로 따라야 하는 행위가 상을 받는 전제 조건이 된다. 후자는 직원이라는 이미 확보된 신분을 전제하고 공짜 핫도그를 먹고 못 먹고는 순전히 본인의 자유의사에 맡겨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네가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계명도 사람에 따라 그 해석이 두 가지로 나뉜다. 먼저 군대처럼 상관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명령으로 해석하면 자연히 어기면 벌 받는다는 생각부터 앞선다. 반면에 인간의 유익을 위한 권면으로 받아들인 자는 자발적으로 기꺼이 순종하기만 하면 그 예비 된 복을 찾아 누릴 수 있다.

    이 계명은 하나님이 방금 창조하여 심히 좋았던 당신의 첫 자녀에게 명한 것이다. 이미 그분의 백성이 된 신분을 전제하고 주신 권면이다. 지키고 안 지키고는 순전히 아담의 자유의지에 맡겨졌다. 그러나 그가 지키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장중에 붙잡혀 있게 되는 반면에 어기면 그 은혜에서 벗어나게 된다.

    계명의 성격상 분명 아담이 지켜야 했고 하나님도 지키길 간절히 원했다. 그럼에도 최종 결정권은 아담에게 있었다. 회사 직원으로 야유회는 가야 했지만 정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 단지 공짜 핫도그를 먹을 수는 결코 없다. 벤즈 600을 탈지 말지 여부도 아들의 재량에 달렸다. 그러나 타지 않았다면 아버지와 진정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는 변함없이 이어질 수 있다. 반면에 타면 그 관계에 일단 금이 가고 부자간에 해결 할 일는 용서와 치유와 회복과 회복 후의 성숙이 남을 뿐이다.  

    성경의 계명은 당연히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명령이다. 그러나 “안 되면 되게 하라”면서 무조건 굴종을 요구하는 군대식 명령이 절대 아니다. 이미 당신의 백성이 되었음을 전제로 한 사랑의 권면이다. 불신자에겐 전혀 해당 사항이 없다. 그들로선 하나님의 실존도 믿지 않는데 그분의 계명을 지킬 이유는 더더욱 없다.  

    반면에 신자라면 그분의 계명을 당연히 전부 지켜야 한다. 그러나 따라오는 상벌을 기대하거나 두려워서 그래선 안 된다. 아무리 포현 방식이 명령형이라 해도 하나님이 진정 바라는 바가 아니다. 신자는 이미 그분의 자녀가 되었기에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듯이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자가 순종 혹은 불순종했다는 그 행위를 보고 상벌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럼 더 많이 순종하면 더 많은 상을 주어야 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이미 순종하는 마음을 먹을 때부터 신자에게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신다. 말하자면 계명을 실천으로 옮기기도 전에 그분과 영적 관계만 바로 되어 있어도 세상의 것으로는 전혀 맛볼 수 없는 너무나 큰 기쁨과 충만함이 넘치게 된다.

    또 순종하여서 실천하면 자연히 따라오는 축복이 벌써부터 예비 되어 있다. 순종 후에 그 실적을 심사해서 상 주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벌도 마찬가지다. 한 마디로 순종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 자체가 상이다. 반대로 불순종 즉, 그 관계가 굽어지고 끊기는 것 자체가 벌이라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상벌에 대한 원칙은 선악과 계명에서 더 확고하게 드러난다. 인간에게 주신 첫 계명으로 자유의지를 주신 바탕에서 하신 명령이다. 순종 여부는 전적으로 아담에게 달렸다. 다른 모든 과실을 먹게 했다. 또 선악과 금령을 순종하는 것 자체와 그 따라오는 결과는 엄청난 축복이었다. 하나님으로선 인간에게 해 줄 바는 전부 다하셨다. 그분에게 인간 타락의 책임은 정녕 전혀 없다.

    그럼에도 신자들마저 군대식의 명령과 복종의 관계로만 이 금령을 이해하니까, 지키지 못할 명령을 한 상관이 잘못되었다고 반발하는 것이다. 지킬 수 없는 명령을 주었다면 분명히 상관의 잘못이다. 그러나 선악과 계명은 얼마든지 지킬 수 있는 명령이었다. 틴에이저 아들이 벤즈를 얼마든지 안 탈 수도 있듯이 말이다.

    이처럼 성경의 모든 계명은, 첫 계명이 자유의지를 전제했기에, 절대적 명령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권면이자 호소다. 그럼에도 지키거나 안 지킨 결과는 영생과 죽음처럼 극과 극의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엄청난 차이로 나눠진다.  

    하나님과 인간의 너무나 큰 격차

    마지막으로 앞에서 열거할 예들이 다 완벽하지는 않다고 말한 이유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인간의 경우는 아무리 참 사랑과 진정한 신뢰를 앞세워서 자식을 줄로 묶거나 또 자동차 열쇠를 다 주어도 때로는 부모로서의 개인적인 욕심이 앞설 수 있다. 자식과 동일한 죄인 된 처지에서 아무리 자식을 사랑하고 신뢰하려 해도 불순물이 조금은 개입될 수 있다. 나아가 부모가 자녀에게 베풀 수 있는 보호와 인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갑부라도 아들이 모든 차를 다 고장 내놓으면 화부터 낼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나님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그분은 인간 갑부와는 도무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분이다. 단순히 전지전능하여 우주만물을 다스리고 인간만사를 섭리한다고 이해해선 안 된다. 모든 진실 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은 그분으로부터만 나온다. 그분의 인간을 향한 사랑과 신뢰에는 어떤 불순물도 개입되지 않는다. 나아가 인간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어도 그 용서와 치유의 능력에는 부족함이 없다. 심지어 자신을 미워하며 원수 된 자가, 그것도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고 있어도 용서해 주실 수 있다.

    또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 금령을 어길 줄을 미리 알았어도 처음부터 그를 얕보거나, 무시하거나, 야단쳐서 고쳐야지라는 마음이 앞선 것이 절대 아니다. 진정한 사랑으로 이 금령을 제정했다. 당신의 품을 벗어나선 절대 인간답게 살 수 없으니 제발 내 품에서 벗어나지만 말라는 오직 한 가지 소원뿐이었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 사랑의 뜻은 모르고 지키지 못할 명령을 했다고 그저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만큼 인간과 그분의 격차는 너무나 커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선악과 금령을 인간이 제대로 이해하든 못하든 그 명령 그대로 하나님을 배역한 인간은 진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한 치의 하자 없이 너무나 명료한 진리라는 것이다.

    아들이 틀림없이 벤즈를 타리라 예상하고도 열쇠를 준 아빠가 여행에서 돌아왔다고 치자. 아들을 다시 만나면서 어떤 기대를 품었을까? 틀림없이 스스로 회개하여 이실직고 하며 용서를 구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들은 어떻게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가? 그 집의 하인과 놀러온 친구들이 자꾸만 벤즈를 타보라고 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탔다고 다른 이의 탓으로 돌렸다. 또 아버지가 열쇠를 주고 가지 않았다면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심지어 아빠에게서 궁극적 원인을 찾았다. 아빠로선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겠는가?  

    아담은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는 하나님의 추궁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하나님이 이브만 제게 붙여주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 아니냐는 항변이다. 바로 “아담이 거역할 줄 미리 알고도 선악과 금령을 준 하나님이 나쁘지 않느냐? 차라리 그런 금령을 주지 않았다면 아무 문제없었을 것 아닌가?”라는 지금 논의하고 있는 첫째 질문과 그 내용이 똑 같지 않는가? 아담의 원죄를 물려받은 인간인지라 같은 내용의 의심과 반발을 할 수밖에 없다.

    이브도 하나님의 같은 추궁에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핑계를 대었다. 친구들이 놀러 와서 자꾸 벤즈 600을 몰아보라고 꾀므로 어쩔 수 없이 탔으니 친구가 잘못이지 자기에게 책임이 없다는 철없는 아들 모습 그대로다. 아버지는 이웃집 아이들에겐 관심이 없다. 문제는 자기 아들이 정말 아들다운 모습으로 성숙하기만 바랄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기껏 그런 정도의 핑계밖에 못 댄다는 사실조차도 미리 아셨다 또 그러니까 더더욱 선악과 금령을 주신 것이다. 금령의 뜻을 풀어서 말해보자. “제발 나의 품에서 벗어나지 말라. 나와 온전한 영적 교제를 이어가지 못하면 매사에 겨우 이런 정도의 수준 즉, 왜 거역할 줄 미리 알고도 선악과 금령을 주었는지 따지고 반발하는 수준 밖에 안 된다. 그러니 정말 참 인간답게 살려면 나의 말을 순종해라.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탈만 썼지 전혀 인간답지 못하게 된다. 바로 그것이 죽음이지 않느냐?”

    다시 말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결코 인간을 우습게보고 경멸한 것이 아니다. 지구상의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뛰어나며 천사보다 약간 못한 존재인 인간이, 그래서 당신 대신에 이 땅을 다스릴 자로 삼은 인간조차도 죄악의 너무나 큰 힘 앞에는 맥을 못 쓸 수 있다는 것을 그분께서 진정 염려한 것이다. “제발 내 품을 벗어나지 말라. 그러면 곧 바로 사단의 장막으로 넘어간다. 그 중간 회색 지대는 결코 없다. 그러니 절대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

    또 다시 말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은 타락을 손을 놓고서 마냥 두고 보지 않으셨다. 서두에서 말한 대로 타락할 줄 미리 알았다는 것은 그 대비책이 다 마련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당신의 독생자를 매달 십자가가 이미 골고다 언덕에 예비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당신의 뜻 가운데 있었기에 자유의지도 허락하고 선악과 금령도 주신 것이다. 당신의 독생자의 생명과 맞바꿀 만큼 우리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또 선악과 금령이야말로 그분의 지고(至高)의 사랑과 긍휼에서 나온 것이지 않는가?
      
    4/19/2010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a1.jpg
    볼리비아, 살라르 데 우유니 (우기의 소금평원)
    우기가 오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소금평원은 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이 됩니다.
    선사시대부터 여러 호수들이 모여 이루어진 이 거대한 소금평원은 살라르 데 우유니라 부르며, 이 곳의 높은 반사율은

    인공 위성들이 지구와의 거리 측정을 할 때 이용되기도 합니다.
    (아마도, 반사율이 높아 위성의 위치나 고도를 조절할때 레이저 거리측정등으로 위성자체의 각종 조정에 쓰이는 듯 합니다.)


    a2.jpg
    중국, 텐즈산(천자산)
    물과 바람에 깎여나간 바위들이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는 풍경이 장관을 이룬는 곳입니다.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영화 '아바타'에서 공중에 떠있는 바위들의 배경이 된 장소로 유명하기도 합니다.
    해발 1200m까지 솟아있는 바위산은 운무에 쌓이면 마치 하늘위에 신선들이 사는 듯한 별천지로 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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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런 멋진 풍경을 아바타에 가져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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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핀란드, 북극의 감시병
    이 이상한 물체들은 사실 거대한 나무들이 눈과 얼음에 뒤덮혀 있는 모습입니다.
    영하 15~40도에 이르는 혹한속에 벌어지는 광경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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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루디옌 동굴
    중국에서 유명한 관광명소로 오랫동안 사랑받은 루디옌 동굴입니다.
    길이는 240m에 달하며 내부에 다양한 색상의 조명으로 종유석과 석순등을 비추어 더욱 환상적인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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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슬란드, 스카프타펠 얼음동굴
    빙하 속의 물이 흐르면서 생긴 얼음동굴입니다.
    단단한 얼음들이 기포를 내뿜으며 대부분의 빛을 차단하고 파란색 빛만 남겨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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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앤텔로프 캐니언
    미국 애리조나주에 있는 앤텔로프 캐니언은 암벽틈새로 물이 흐르면서 깊고 좁은 협곡이 되었습니다.
    깊은 곳으로 내려갈 수 록 빛의 세기가 줄어들면서 아름다운 빛깔을 내는 것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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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마니아, 비가 폭포
    루마니아 사람들은 이 폭포를 "작은 협곡의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이끼들 사이에서 흘러내린 물이 떨어져 8미터 짜리 호수가 되는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폭포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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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디브, 별의 바다 (바드후 섬)
    낮동안에는 평범한 해변처럼 보이지만, 밤이 되면 빛을 내는 식물성 플랑크톤들이 해변으로 몰려들면서 은하수같은

    광경이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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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그랜드 프리즈매틱 온천
    그랜드 프리즈매틱 온천은 미국에서 가장 큰 온천입니다.
    미네랄이 풍부한 온천의 가장 자리에 미생물들이 자라면서 선명하고 화려한 색상을 자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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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미비아, 데드블레이(Deadvlei)
    이 사진은 초현실주의 회화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모래언덕 아래 '죽음의 계곡'에서 죽은 나무들을 찍은 사진입니다.
    이곳에 한 때 번성했던 숲은 사막이 넓어지면서 사라져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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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바이칼 호수의 청록색 얼음들
    바이칼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민물 호수입니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호수이기도 합니다.
    바이칼 호수는 수심 40m깊이 까지 훤히 보일 정도로 매우 깨끗한 호수인데, 겨울에 얼어붙은 호수에는 태양빛과

    깨끗한 수질로 인해 마치 터키석 같은 청록색 빛깔의 얼음들이 생긴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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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멘, 소코트라 섬
    소코트라 섬에 사는 식물 중 3분의 1은 지구상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는 종들입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부채꼴 모양의 우산같은 용피나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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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단샤지형 (간쑤성 장예시)
    붉은 사암과 여러 광물이 2천 4백만년에 걸쳐 풍화되어 다채로운 색깔을 입었습니다.
    자연이 바람으로 색칠해놓은 산들이 정말 멋진 광경을 선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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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이나, 사랑의 터널(클레반)
    이 기찻길을 하루에 세 번 기차가 운행하면서 수 년간 주변의 나무들이 기차모양으로 형성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운행이 중단된 구간인데, 사랑의 터널이라는 이름으로 명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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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질랜드, 반딧불 동굴
    수천 마리의 반딧불이 동굴 천장에 붙어 공상과학 영화에 나올 법한 광경이 만들어 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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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계단식 논 (허난성 위안양시)
    계단식 논법은 하늘위에서 보면 놀라운 풍경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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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 힐리어 호수
    물속에 많은 박테리아와 조류에 의해 핑크빛으로 변한 호수입니다. 하지만 주변 생태계에 영향을 주진 않는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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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 파묵칼레 온천
    수백만 년에 걸쳐 만들어진 온천은 얼핏보기에는 눈과 얼음으로 뒤덮힌 것 같습니다.

    하지만 터키는 일년 내내 온난한 기후입니다.
    사실 흰 눈과 얼음같은 주변 경관은 석회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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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롬비아, 까뇨 크리스탈레스 강
    광범위한 동식물의 서식지인 카뇨 크리스탈레스 강은 노란색과 빨간색, 녹색과 검은색으로 치장을 하고 세계에서

    가장 예쁜 강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바위는 무려 12억 년 전에 생성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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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레, 파타고니아 대리석 동굴
    부서지는 파도에 탄산 칼슘이 부서지면서 아름다운 소용돌이 모양의 벽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래 푸른 물과 어우러져 멋진 동굴 호수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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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 아일랜드, 거인의 방죽길
    6천~5천 만년 전에 용암으로 인하여 형성된 지형입니다.
    뜨거웠던 용암이 바닷물에 냉각되면서 완벽한 기둥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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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플라이 간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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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셔스, 수중 폭포
    강한 해류가 바닷속으로 모래를 실어 내려가면서 특이한 '수중폭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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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 아메리카, 로라이마 산
    브라질, 베네수엘라, 가이아나 3국의 국경에 걸쳐있는 높이 2772m의 바위산입니다.
    산 정상이 넓은 평지이고 측면은 등반이 불가능한 수직이라는 점이 매우 특이한데요.
    무려 20억 년 전에 지층이 지각활동으로 밀려 올라온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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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아오가 섬 (아오가시마)
    아오가 섬은 일본에서 최남단 유인섬입니다.
    화산섬 안에 또 화산이 있는 특이한 칼데라 지형인데, 상당히 특이한 지형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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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코틀랜드, 핑갈의 동굴
    거인의 방죽길처럼 핑갈의 동굴 외벽도 용암이 냉각하고 부서지면서 만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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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 바닷속에 흐르는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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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 나이카 광산
    광산이라 부르지만 자연적으로 형성된 수정동굴 입니다.
    전 세계의 많은 동굴 애호가들의 버킷리스트에 았는 동굴인데, 15미터짜리 수정이 불규칙하게 바닥이나 벽, 천장에서

    솟아나 있는 것이 장관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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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 히든 비치
    이 숨겨진 해변은 20세기 초 군사 실험으로 형성된 곳이라고 합니다.
    외부에서 15미터 길이의 해저 동굴을 통해서 들어올 수 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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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자니아, 나르톤 호수
    소금 함량이 높은 호수인데, 소금을 먹고 사는 붉은 미생물들에 의해 붉은 빛이 강렬해졌다고 합니다.
    보통 다른 동물들은 소금을 많이 섭취하면 석회화되어 돌처럼 변하는데 반해 이 호수의 미생물들은 그렇지 않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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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타니, 아프리카의 눈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에 난 모래 침식 지형입니다.
    과학자들은 이곳을 오랫동안 운석 구덩이로 생각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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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슬란드, 고원의 오로라
    아이슬란드의 고원은 낮에는 간헐천과 빙하, 분화구로 가혹한 환경을 보여주지만 밤이되면 멋진 오로라 현상으로

    놀라움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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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호수
    동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호수로 수천 년 동안 석회암 위로 물이 흐르며 자연적인 댐과 폭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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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한마디가 긴 인생을 만듭니다

     

    말 한마디가 긴 인생을 만듭니다

    짧은 말 한 마디가 긴 인생을 만듭니다

    무심코 들은 비난의 말 한마디가

    잠 못 이루게 하고

    정 담아 들려쥬는 칭찬의 말 한마디가

    하루를 기쁘게 합니다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파괴의 씨가 되어 절망에 기름을 붓고

    사랑의 말 한마디가 소망의 뿌리가 되어

    열정에 불씨를 담깁니다

    진실한 말 한마디가 상한 마음 아물게 하며

    전하지 못한 말 힌마디가

    평생 후회하는  삶을 만들기도 합니다

    말 한마디는

    마음에서 태어나 마음에서 씨를 뿌리고

    생활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짧은 말 한 마디가 긴 인생을 만들고

    말 한마디에 마음은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지만

    그러나 긴 여행이 짧은 말 한마디의

    철조망에 갇혀서는 아니 됩니다.

     

    /좋은글 중에서

     

     

     

     

     

     

     

     


     

    내 삶의 힌트!

    짧은 글 긴 생각 - 스크래치
















































































     
    

    어머니는 그런 세상을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두살 동생을 등에 업으시고' 다섯살 내 손잡으시며 머리에는 떡 광주리를 이셨습니다 시장 동네 돌며 떡 장사를 했었지요 지독한 가난이라 이고 지고 잡고 걸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고생을 새벽잠 눈비비며 칭얼대는 아이 업고 철부지 내 손잡고 떡 광주리를 이고 사셨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세상을 사셨습니다 젊음 한때를 이고 잡고 업고 그것이 사는것이라 생각 했습니다 <詩庭박 태훈의 해학이있는 아침중에서>


    14.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외치는 자
    세례요한의 서원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를 전파하니
    마가복음 1:4]

    서원의 시초는
    야곱이 벧엘에서 꿈에 하나님을 뵙고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고 천국의 문이  임을 알고
    옛 이름인 루스(Luz)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벧엘(bethel)이 되어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And Jacob vowed a vow, saying,
    If God will be with me, and will keep me in this way that I go,
    and will give me bread to eat, and raiment to put on,
    창세기 28:20]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모시고
    돌베개가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기둥이 되고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
    서원했고 그 후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어
    이스라엘의 민족의 이름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언약의 확인이 되었다.
    야곱에게 꿈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은
    [And he dreamed, and behold a ladder set up on the earth,
    and the top of it reached to heaven :12]
    야곱이 잠을 잤던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고 천국의 문이 되었듯
    우리가 찾은 봐 되신 하나님이 아니시라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이셨고
    우리가 꿈을 꾸었던 소망이 있는 이 자리가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집이고
    천국의 문으로 향하는
    양의 문(Gate for the sheep)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천국 문의 자리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한복음10:7]
    진실로 진실로(verily)
    참으로 확실하게 말하노니,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시고 선한 목자시니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고
    너희가 양이라면 음성을 들으라,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라 하심은
    오늘날 현대판 장로의 유전에서 떠나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기 때문에 그 멍에를 메고 배우시라 하셨고
    멍에(Yoke)는
    나귀나 소의 등에 쟁기나 수레를 끌기 위하여 두 마리의 동물의 목에 얹는 막대를 말하며
    성도의 사랑, 서로 사랑하라는 공동체의 공의를 의미하였고
    현대의 하늘나라의 상징적인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는
    공동체 신앙을 잃어버리고 있고
    서로 멍에를 메는 교제가 사라진 허울만 남은 교회로 이마져 건물만 남고
    성도가 사라지는 슬럼화가 이미 시작 되었는데
    가라지 삯꾼과 함께 멘 멍에는 그 시대나 다름없다.
    이를 바울은 불신자와 명에를 같이 하지 말라 경고했고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Be ye not unequally yoked together with unbelievers:
    for what fellowship hath righteousness with unrighteousness?
    and what communion hath light with darkness?
    and what concord hath Christ with Belial?
    or what part hath he that believeth with an infidel?
    고린도후서 6:14-15]
    공의(righteousness)와 불법(unrighteousness)이 교제(fellowship)할 수 없으며
    친구가 될 수 없으며,
    친교 할 수 없으며,
    공동체를 이룰 수 없으며
    빛과 어둠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infidel), 이교도가,
    그리스도와 벨리알(Belial)이 조화(concord), 일치할 수 없다 단언(斷言)한다.
    이를 사무엘서는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Now the sons of Eli were sons of Belial; they knew not the LORD
    사무엘상 2:12]
    엘리의 아들들이 행실이 나쁨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다 기록되어 있다.
    엘리는 실로의 대제사장으로 사사로 사무엘을 교육시킨 인물이라
    그를 아비로 둔 아들들이 이를 보고 배웠을 텐데
    아들들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고
    회막 문에서 수종 두는 여인들과 동침하였다.
    회막 문(the door of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목제로 드리는 희생제물을 잡는 곳 으로,
    회막 문은 예수님의 ‘양의 문’ 과 같은 의미로
    [이스라엘 집의 모든 사람이 소나 여린 양이나 염소를 진영 안에서 잡든지
    진영 밖에서 잡든지 먼저 회막 문으로 끌고 가서 여호와의 성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를 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러 즉 이스라엘 자손이 들에서 잡던 그들의 제물을 회막 문 여호와께로 끌고 가서
    제사장에게 주어 화목제로 여호와께 드려야 할 것이요 레위기 17:3-5]
    엘리의 아들들은 제사장이며 사사인 아버지를 둔 자식들로
    태어나서부터 불레셋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할 때 까지 이스라엘의 족속으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알 수 없어
    엘리의 자식에서 벨리알의 자식(sons of Eli were sons of Belial)이 되었다.

    전통적인 혈육적인 가치로부터 신앙의 정통성을 찾는 이들에게
    바울은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로마서 2:2]
    주님께서는 서나머 교회에 보내는 말씀에서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요한계시록 2:9]
    주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하신다.
    들을 귀가 있는 자가 복이 있는 자고, 들을 귀가 없는 자는 성도가 아니고
    성령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자는 주여, 주여 부루 짓더라도 성도가 아니고
    종교인 이거나 삯꾼 이라는 말씀이고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발람의 교훈’ 이고
    베드로 후서의 ‘발람의 길’ 이라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 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베드로후서 2:15]
    유다서의 ‘발람의 어그러진 길’ 이라
    [화 있을 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유다서 1:11]
    발람이 누구인가
    발람은 모압 왕의 요청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했지만
    하나님의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축복하도록 하셨고
    그가 여러 번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할 때 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셨기에
    발람은 다른 길을 택하여
    발락에게 모압 여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유혹하고 음행과
    우상숭배에 빠지도록 하였기에
    발람은 돈을 위해 은혜를 팔아버린 자의 상징이 되었고
    하나님의 축복을 제외 버리고 본질적인 하나님의 뜻(공의)에서 멀어지게
    기복신앙의 심어주고 하나님의 중재자로 중보자로 나서는 자들
    이들이 교회를 변절시키고 관행과 전통에 의하여 개혁(회복)을 방해하는 자들,
    이것이 니골라당의 교훈이기도 하다.
    성령님의 말씀을 듣는 귀는
    신학으로 지식으로 얻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갖게 되는 선물이라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된다.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심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음은
    그 시대의 종교적인 사상이 경향이 신학이 대중(大衆)을 선동하여
    이를 따르는 자가 많지만 이는 하나님의 공의에 반하였고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한 무리들이다.
    이들이 신앙을 가장한 종교적 세력임은
    좁은 문, 양의 문으로 들어가는 순수한 신앙을 지키려는 자들을 막아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이라
    오늘날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여전히 유효함은
    오늘날, 유전과 전통과 관습으로 외식하는 교만과 자랑과 위선에서 떠나
    회개하고 순수한 믿음으로 연단된 신앙인이 되지못함은
    성경으로 그 시대와 이 시대의 실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허황으로 도배된 진리로 가장한,
    사치한 종교적인 무희(舞姬)에 놀아나는
    신의 대리자로 자처하는 사제자인 무당으로 복채를 받고 복을 빌어주는
    기복종교의 무당의 굿이 됨을.

    사두개인처럼 제사장과 산헤드린의 자리를 차지하고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는 집단과
    바리새인처럼 율법을 지키려다 도리어 그 율법으로 외적인 규칙에 얽매여
    변절된 율법학자 들과 지도자들의 집단과
    이를 따르는 무지한 종교적인 군상들과
    성전에서 제사장들은 수입의 십일조를 성전세로 내게 하고 이를 못 내면
    토지를 뺏어버리거나 채무로 문서화 하여 채권자가 된 제사장,
    로마제국의 세금징수와 이를 집행하는 세리들을 향한 불만으로
    세리를 죄인 취급을 했음은
    열심당원의 지지가 되었을 것이다.
    성전에서 회당에서 사회에서 피지배계층으로 소외된 억압받는 백성들은
    그들은 선지자(메시아)를 기다렸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루살렘의 성전이 아닌, 회당이 아닌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었다.
    [그 때에 세례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In those days came John the Baptist, preaching in the wilderness of Judaea,
    And saying, Repent ye: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마태복음 3:12]
    그리고 그 후에 예수님은 같은 복음의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From that time Jesus began to preach, and to say,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마태복음 4:17]

    서원(Vow)은
    인간이 하나님을 상대로 한 약속이다.
    서원은 하던 하지 않던 선택이나 서원하면 지켜야 했다.
    만약에 서원을 지키지 못했을 경우에는 속죄제를 드려야 했다.
    속죄제(Sin offering)의 번제는
    모든 내장 기름을 번제위에 불사르고 가죽을 포함한 나머지 부분은 진 밖에서 불살라야 했는데 진 밖에 불사른 것은 저주받은 자라 버려진다는 의미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저주받은 희생 제물로 성문 밖 갈보리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저주를 대신 속죄한 희생제물이 되셨다.
    서원을 이루었을 때는 서원 제를 드렸다.
    서원 제는
    흠이 없는 수컷으로 소나 양 염소로 흠이 없어야 했고
    하나님께서 택하실 한 지파 중에 번제를 드리고
    제물은 다음날 끼지 먹을 수 있었고 삼일까지 남아 있으면 불살라야 했고
    자녀와 노비와 함께 여호와 앞에 즐거워 할 것을 요구하셨음은
    화목제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상징적 의미가 있다.

    구약의 서원은 제사제도와 함께 유효하지 못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인정한 후의 고백이며 감사라
    자발적인 결심이지 하나님과 흥정(dealing)도 아니고 더구나 단판이 아니다.
    이 서원적인 고백을 결심을 감사를 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뒤돌아보면 밥 먹듯이 결심했고 잠시 지나면  소홀 한 적도 많다.
    궁핍에 처했을 땐 풍족한 물질을 주시면 가나한 형제자매를 돕겠다고 했고
    어려움에 처하여 이 사건을 해결해 주시면 뭐하겠다 수없이 기도를 했고
    그런 기도가 본의 아닌 일종의 서원적인 기도였고
    아니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하나님과의 교만한 담판이라
    거래(deal)였고 지키지 못한 기만이 되었지만 딴에는 하소연 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서원이 필요한가?
    신약의 서원은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 과작별하고 배타고 수리아로 떠나갈 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사도행전18:18]
    이를 구약의 나실인으로서 서원이 끝나 머리를 깍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복음을 위하여 율법을 행하였듯 복음을 위한 덕을 위한 행위였을 것이다.
    사도행전21:23절의 서원은 결례(Purification 부정한 것을 제거하는 정결예식)와 더불어
    행한 율법이었다.
    따라서 구약의 나실인은 신약의 결신(潔身)자 성도로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공의를 배우고 간직한 삶을 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시인한 자로, 기쁜 소식 복음을 간직한 소망을 가진 자로
    복음에 녹아있는 공의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과 능력으로
    공의가 이 세상에 이루어지도록
    빛으로 오신 분으로 말미암아 빛의 자녀로 세상의 소금이 되어
    정의로우시고 공평하시고 평등하신 의로우신 하나님의 공의를
    선하신 분의 경륜을 이어받으려는
    성도의 자발적인 결단이 서원이 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13]

     

    예수 시신 덮었던 수건의 피에서 모계유전 23개 염색체만 나와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방영... 과학자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기적'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됐다는 것은 사실인가? 아니면 꾸며낸 얘기인가?' 

     

    성경에 많은 기적들이 기술돼 있지만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됐다는 구절에 대해 많은 과학자들은 '예수를 신성시 하기 위해 꾸며낸 얘기'라는 평가를 내려왔다. 과학적으로 남성의 도움 없이 여성이 잉태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져왔기 때문이다.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할때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마리아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는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라.'(마태복음 1장 18~21절) 

     

    예수의 동정녀 출산은 누가복음에도 비슷하게 기술돼 있다. 또 예수가 탄생하기에 700여년 전에 이사야도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예언한 바 있다. 

      

    하지만 성령 잉태라는 성경의 기록은 인류 역사에 사례가 단 한 건도 없는 사건이기에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역사적 사실'이라기 보다는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인식돼왔다. 과학은 여러차례의 실험을 거쳐 동일한 결과가 반복적으로 나타났을 때 '과학적 입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다.  

     

    통상 사람의 유전체(genome)는 46개의 염색체로 구성된다. 46개의 염색체는 22쌍의 상염색체와 1쌍의 성 염색체로 구성된다. 성 염색체는 XY(남성), XX(여성) 등 성을 구별하는 염색체이다.  이같은 염색체의 결합이 있어야 아이가 탄생한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과학적 상식으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방송매체인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National Geographic Channel)이 최근 스페인 오비에도 성당에 보관돼 있는 '예수의 얼굴 수건' (Sudarium of Oviedo. 사진 위)이 묻어 있는 피를 전문연구소에 의뢰해 DNA를 분석한 결과 혈액형이 AB형이라는 것과 함께 모친 쪽으로부터 이어받은 22개 염색체와 남성(XY) 염색체 1개 등 23개만이 추출된 것으로 밝혀졌다. 부친 쪽으로부터 받게 돼 있는 23개 염색체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피 속에 모계의 유전자만 발견됐다는 것은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됐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예수의 피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이다. 유전자 검사는 백혈구가 살아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 때문에 사람이 사망한 후에는 유전자 염색체 검사를 할 수 없다. 사후 2천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피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요, 피 속 유전자 검사에서 모계쪽 염색체만 발견됐다는 것 또한 기적이라는게 과학자들의 평가다. 

     

    '예수의 수건'은 요한복음에 처음 기술돼 있으며, 현재 오비에도 성당에 보관돼 있는 손수건이 2천년 전 그 손수건이라는 것에 이견을 다는 학자는 없다.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서 돌이 옮겨진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고 제자들이 와 보니 머리를 쌌던 수건(Sudarium)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요한복음 20장 1~8절 발췌) 

     

    당시 유태인들은 시체를 세마포로 감싸기 전에 얼굴을 별도의 수건으로 가지런하게 묶은 후 다시 수의로 감싸는 풍습이 있었다. 죽은 사람의 좋지않은 표정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84*53cm)에는 선명한 핏자국과 함께 머리에 씌여졌던 가시관을 서둘러 빼내고 수건으로 동여 매는 과정에서 가시관의 조각들이 같이 묶이면서 수건이 가시에 뚫린 자국도 남아 있다. 

      

    예수의 무덤에서 발견된 이 수건은 이탈리아 투린성당에 보관돼 있는 세마포(수의)와 별도의 행로를 밟게 된다.              

     

    이 수건은 예루살렘에 보관돼오다가 1100년대 스페인 오비에도의 주교 페라요가 입수해 북아프리카를 거쳐 스페인으로 옮겨왔다. 당시 수건은 다른 성물들과 함께 은 상자에 담겨 안전하게 이동됐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최근  연구에서 투린의 세마포(성의)와 오비에도 수건의 혈흔을 정밀 분석한 결과 동일한 시신에 사용됐던 것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한편 투린의 세마포는 한 때 중세 때 조작된 수의로 발표됐었지만, (중세 때 성당이 화재로 타면서 세마포의 훼손된 부분을 수녀들이 원본과 짜깁기한 부분을) 잘못 검사했다는 정황이 드러났었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최송연
     
    비록,
    삶의 고통이 흑암처럼 
    나를 둘러 진을 쳐도 
    당신의 그 사랑
    별빛이 되어 
    나의 가는 길 인도하시고
    
    바싹 
    메마른 광주리 같은 생(生)
    변변한 알갱이 없어 부끄러우나
    당신의 그 사랑
    이슬이 되어
    새벽마다 내 영혼 적셔 흐르니
    
    이 생명 다하기까지 
    당신께 드릴 나의 고백은 
    오직 하나
    
    "사랑합니다, 당신을...."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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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시한 오병이어 말고

    다음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붙잡아 임금 삼으려던 그들은 다시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섰습니다.
    전날 예수님이 그들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시고 제자들만 배를 타고 떠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배를 저어 오병이어의 잔치가 벌어졌던 곳으로 다시 찾아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허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도로 배를 저어 가버나움으로 왔더니 거기에 예수님이 와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랍비님, 언제 여기로 오셨습니까?”
    예수님이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이 괴로히 노젓고 있던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오신 걸 알 턱이 없었으니까요.
    갈릴리 바다를 가로질러 아침부터 12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왕복했으니 그들은 땀깨나 흘렸을 것이고 약도 올랐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는 “짐승처럼 처먹고 배때기가 부른 까닭이로다.”라는 뉘앙스입니다.
    생명은 찾지 아니하고 썩을 양식만 찾아다니니 짐승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경을 잘 아는 유대인들이 ‘인자’라는 소리를 들으면 땅에 납작 엎드려야 옳습니다.
    구약성경이 말하는 ‘인자’는 육신을 입고 오실 메시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을 보면 사도요한은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인자 같은 이 앞에서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은 말세의 환상 가운데 인자를 봅니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그러나 예수님을 붙잡아 임금 삼으려는 유대인들은 “인자”라는 소리를 듣고도 끄떡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에게 요구합니다.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당신이 인자라면 시시하게 오병이어 기적 같은 거 말고 모세처럼 만나를 내려 보시오.'라는 뜻입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오병이어 같은 거 말고 아예 날마다 만나를 내려달라고 요구하는 이 무리를 보면서 여러분은 혹시 “저런 악한 사람들 같으니라구.” 하는 생각이 들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예수님을 믿었을 것 같습니까?
    그들 요구대로 시시한 오병이어 기적 말고 만나를 주님께서 내리셨더라면
    그들이 믿었을까요?

    그 악한 무리들, 유대인 뿐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안 믿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 그 때도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조차 안 믿었는데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었다 해서 예수님을 믿었을 것 같으냐 말입니다.
    제자들이 온전히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성령님이 오신 다음이었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믿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눈앞에 오셨다 해도 스스로 믿어서 구원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자기가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가서 ‘내가 믿어서, 나의 공로로’ 구원을 받았노라고 자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자랑할 수 없느니라."
    왜 그럴까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Total Depravity)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죽어있기 때문입니다.
    죽어있기 때문에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깨달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령님의 하시는 일은 죄로 죽어있는 자의 눈을 열어 보게 하고 귀를 열어 듣게 하는 일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던 그 때, 천지가 죽어있던 그 때, 수면 위를 운행하심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음성이 메아리쳐 울릴 수 있게 하신 성령님, 그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 위를 운행하심으로 닫힌 눈을 열어 보게 하시고 귀로 들어 깨닫게 하시고 믿음으로 이끌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먹게 하지 않으셨다면 어느 누구,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을 알지 못 하였고 영생을 얻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십자가에서 일어났는데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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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이란 늘 조심해야 한다
    
         
     마땅히 말을 해야 할 때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반대로 말하지 않아야 할 때 
     그것을 참지 못하고 
     털어놓는 사람은 화를 당하기 쉽다.
     
     말을 잘하면 유익하나 
     잘못하면 화가 크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 스마일스(영국의 저술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짧은 글 긴 여운" 중에서
    

    var articleno = "15723545";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역사의 선물

     

    Westminster222.jpg


    웨스트민스터교회당(런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역사의 선물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1647년 무렵에 창의적으로 만들어진 고백문서이다. 기독교 역사에 등장한 여러 가지 신조문과 신앙고백서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아직도 여전히 그 탁월성을 인정받고 있다. 여러 장로교회들이 이를 신앙고백서로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다. 21세기에도 유익한 신앙고백문서이다.


    신앙고백[서]는 개인, 단체, 교회, 종교회의 등이 교리와 신념을 공적으로 선언할 의도로 작성한 것이다. 신조(Creed, Symbol)와 신앙고백(Confession)은 비슷한 말이지만 후자가 전자보다 더 포괄적이다. ‘언약’(Covenant)이라는 고백문서도 있다. 이것은 특정 신앙공동체가 맹약(盟約) 형태로 수납한 고백문이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분량은 방대하다. 이 고백문서는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과 더불어 장로교 권에서 널리 수납되어왔다. 스코틀랜드교회와 미국장로교회는 이것을 3백년 이상 유일한 교리표준으로 사용해 왔다. 전자는 1647년에, 후자는 1729년에 이를 채택했다. 미국 동북부에 자리 잡고 있는 회중교회들은 1748년에 이 신앙고백서의 교회 정치에 관한 조항만을 바꾸어 채택하여 사용해 했다. 이것은 침례교회의 신앙고백서 작성에 영향을 주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1640년대의 영국이라고 하는 시대의 정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제시하는 구원의 기본 교리들을 그 어떤 신앙고백서보다 더 잘 설명하고 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소용돌이 가운데서 영적 갈급함을 가진 청교도―장로회 목회자들이 성경적 기독교를 정착시킬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에 여러 해 동안 기도하면서 애써 만든 것이다.


    모든 신앙고백서들이 그러하듯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도 역사적 콘텍스트에서 만든 신앙고백문헌이다. 그러므로 다른 지역, 다른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당면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완전한 답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제시하는 점에서 그 가치는 다른 신앙고백서들과 견줄 수 없을 만큼 탁월하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개혁주의 교회들의 연합과 일치의 기초이다. 신앙고백의 기능에 대한 검토와 함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만들어진 역사와 정치적 배경과 그 내용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교회, 특히 에큐메니칼 시대의 교회에 시사(示唆)하는 바와 가치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1. 신조·신앙고백서


    신앙고백서의 특징은 “심령의 넘침으로 말미암아 나의 입은 말을 한다.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고백한다”(credo, ergo confiteor)는 고전적인 문구에 표현되어 있다. 신앙고백서는 교회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을 교인으로 받아들일 때 신앙을 고백해야 할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 신조·신앙고백은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는가?”라는 예수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답변에서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 위에 세워져 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신앙고백이 있다.


    ‘사도신경’은 영지주의에 대해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니케아신조에서 칼케돈신조까지의 ‘에큐메니칼 공의회’들이 만들어낸 신조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을 가진 분이며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밝혔다. 간단하던 신조가 점차 확대되어 전체적인 체계를 갖추었다.


    신조·신앙고백서는 고백문헌들은 이단들의 도전이나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 교회가 신앙하는 바를 조리 있게 체계화 한 것이다. 교리에 관한 모든 것을 포함하려는 의도로 작성된 것도 있고, 고백문서가 만들어지는 당시의 특별한 문제에 제한하여 작성한 것도 있다. 독일교회의 ‘바르멘신학선언’(1934), 한국교회의 ‘장로교인 언약’(1940) 등은 당시의 교회가 직면하고 논란이 되고 있는 문제를 중심으로 작성된 것이다. 논쟁이나 갈등이라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도 있고 그렇지 않는 것도 있다. 신학적인 형식을 잘 갖춘 신조문·신앙고백서도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교회의 일반적인 처지에서 만들어진 것이 있는가 하면, 교회의 전체 회의가 만든 것도 있다. 특정 교회의 공의회가 만든 고백문도 있고, 신학자들이 교회의 위탁을 받아 만든 것도 있다.


    신조·신앙고백서는 교회의 이정표 또는 지계석(地界石) 기능을 갖고 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게 하며,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의 신앙고백적인 일치를 도모하려고, 거짓 교훈을 막아내는 ‘신앙의 규범’으로, 공적인 표준문서로 만들어졌다. 단일 고백을 표방하여 교회의 일치성을 높이는 역할도 한다. 신조·신앙고백서의 이러한 신앙규제 기능은 가끔 신학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신앙과 생활의 순결을 지키고, 신자들을 연합시키며 강건하게 하기도 한다.


    신조·신앙고백은 ‘신앙의 규범’이며 기독교 교육을 위한 것이다.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공적인 교육에 적용시키고 그것을 가지고 이단과 그릇된 사상과 오류를 막아냈다.


    신조·신앙고백은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갖고 있지 않다. 성경만이 기독교 신앙과 생활의 최종 규범이다. 신조·신앙고백은 성경에 종속된다. 성경과 일치할 때만 권위를 가진다. 신조·신앙고백에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 발견되면 언제든지 수정할 수 있다.


    신조나 신앙고백서는 무슨 유래를 갖고 있든지 간에 그것이 생겨난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신조나 신앙고백서가 성경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거나 절대화하면 신앙고백주의(Confessionalism)와 교조주의(Dogmatism)에 빠진다.


    소시니언과 퀘이커와 유니테리언 그리고 신학적 합리주의자들은 신조·신앙고백문의 권위와 용도를 부정한다. 신조·신앙고백이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와 신앙을 구속하고 개인의 판단을 방해하며 독선, 위선, 고집을 조장하며, 분란과 혼란을 야기한다고 본다. 종교적인 증오심을 조장하고 역작용을 일으켜 서로 험담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척운동의 근거가 되고, 신자들을 그것에 종속시킨다고 본다.


    성경을 해석하는 데는 어떤 지침(clue)이 필요하다. 그것이 없이는 신자 개인과 교회에 의미 있는 안내를 제공하기에는 방대하다. 신앙고백이나 공식화 된 신조·신앙고백이 없이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허황된 생각이다. 근본주의 성격을 지닌 독립파 교인들, 오순절파 신자들, 일부 침례교인들만이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 가운데도 신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조·신앙고백문을 배격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형식화된 신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지만 나름대로 어떤 전통이나 신념체계나 지도자의 가르침을 추앙하고 있다. 신조 공식과 신앙고백을 담은 서술문을 소유하고 있다.


    스위스종교개혁에서 출발한 개혁교회는 여러 개의 신조·신앙고백서들을 가지고 있다. 제네바신앙고백서(1536). 스코틀랜드신앙고백서(1560), 벨기에신앙고백서(1561),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1563), 제1스위스신앙고백서(헬베틱신앙고백서), 제2스위스신앙고백서(1566), 도르트신경(1619),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1646),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1648) 등은 전통적인 개혁주의 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이다.


    그밖에도 장로교회들과 개혁교회들이 채택한 여러 가지 신앙고백서들이 있다. 미국, 인도네시아, 일본, 대만,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교회들이 채택한 것들이다. 미국연합장로교회가 채택한 ‘새신앙고백서’(1967)와 미국장로교회의 ‘신앙선언’(1976) 그리고 미국개혁교회(RCA)의 ‘우리의 희망의 노래’(Our Song of Hope, 1978)라는 신앙고백서도 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독자적인 ‘우리의 신앙고백’(1976)을 가지고 있고, 예장 통합 교단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1986)라는 독자적인 고백문서를 가지고 있다. 이 독자적인 신앙고백서와 더불어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수납하여 사용하고 있다. 기독교장로회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수납, 고백하지 않는다. 예장 고신교단과 합동교단과 한국의 여러 군소 장로교단들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신앙고백서로 사용하고 있다.


    2. 웨스트민스터 총회


    런던 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웨스트민스터교회당은 중세기에 처음 건축되었다. 참회왕 에드워드(Edward the Confessor)가 1045-1050년에 건축했다. 1065년 12월 28일에 봉헌되었다. 교황은 에드워드에게 참회의 표로 교회당을 건축하도록 했다. 국왕이 건축한 본래의 건물은 로마네스크 양식이었다. 현재의 고딕 교회당 건물은 1245-1517년에 재건되었다. 헨리 8세가 에드와드를 추모하는 동시에 그곳에 자신의 묘소로 만들고자 재건했다. 이 교회당에 붙은 두 개의 서편 종탑은 1722-1745년에 건축되었다. 이 교회당에서 킹 제임스 판 구약성경 4분의 3이 번역되었고, 신약성경의 뒷부분 절반이 번역되었다.


    역사적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도 바로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이 고백문은 본래 영국국교회의 신앙고백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1642년부터 3년여 동안의 수고를 거쳐 작성되었고, 1646년 12월에 영국 국회로 넘겼다. 영국 상원은 1647년 2월에 이를 통과시켰고, 하원에게도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하원은 이 고백문의 문장을 따지고 성경 참고본문을 추가하면서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성직자들이 첨가한 성경 근거 구절들의 정확도를 문제 삼았다.


    스코틀랜드교회 대표자들은 완성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스코틀랜드교회 총회는 1647년 8월 27일에 이를 자신의 신앙고백서로 채택했다. 기존의 스코틀랜드신앙고백서(1560)를 대체한 것이다.


    하원이 이 고백문서를 즉각 통과시키지 않고 시간을 끄는 동안에 올리버 크롬웰 장군과 그의 군대는 국회가 그 거친 숨결을 느낄 정도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과시했다. 그 영향력은 국회로 하여금 장로교인들을 숙청하고 독립파 회중교도들을 대체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로 하원의원의 숫자는 10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들조차 크롬웰의 영향을 받는 독립파 신자들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장로회 특징을 가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영국교회와 무관하게 되었고, 영국국교회는 감독주의 교회 정치체제로 정착되었다.


    헨리 8세의 사생활은 영국국교회라고 하는 정치 기형아를 낳았다. 그가 죽은 뒤에 로마가톨릭교회 신자인 메리가 왕좌에 등극하여 청교도들을 핍박했다. 몇 년 뒤에 메리가 죽고 엘리자베스가 등극하여 영국국교회를 오늘날의 형태로 정착시켰다. 엘리자베스 여왕시대(1558-1603)는 군주의 권리가 하나님의 율법의 정하심에 따라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는 형식으로 주어진다고 믿었다. 군주는 오로지 한 분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왕에 대한 그 어떤 종류의 반항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대죄라고 했다.


    17세기 초에 이르러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통치자를 절대 군주로 여기지 않았다. 왕권이 하나님의 뜻과 자연법에 따라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국회의 권한을 확대했다. 그러나 국회는 왕권보다 우위에 있지 않았다. 국왕이 국회를 소집했다. 국회는 세금부과, 법률제정 등의 업무만을 다루었다. 외교, 종교, 국가기밀은 군주의 영역이었다. 영국은 이러한 제도로 정치적인 힘의 균형을 유지했다.


    엘리자베스 l세는 프로테스탄트 신자이면서도 청교도들을 핍박했다. 그가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영국은 스코틀랜드 슈트워드 왕가의 메리 여왕의 독자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그는 1603년에 제임스 1세라는 이름으로 왕좌에 올랐다. 이 일을 계기로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정치적으로 합병되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제임스를 외국인으로 여겼다. 스코틀랜드인이 국왕으로 등극하자 영국 국회 안의 장로회주의 사상을 가진 청교도들 다수가 왕에게 기대를 걸고 영국국교회가 감독 정치를 지양(止揚)하고 장로교 정치를 도입하고 또 개혁주의 신학을 대폭 수용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제임스는 왕권을 돈독히 하는 데는 장로회 정치보다는 감독주의 교회정치가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신의 왕권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자기가 유일한 법 제정자이며, 따라서 국회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칼빈주의에 바탕을 둔 장로회 제도가 왕권 신장에 거침돌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청교도들의 청원을 거절했다.


    제임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양육을 받았다. 엄격한 칼빈주의 전통 아래서 자랐다. 그는 칼빈주의 교회관이 왕정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시대에 확립된 교회 안의 왕권을 확고히 붙잡고자 했다. 문예부흥, 종교개혁, 새 시대의 흐름은 옛날의 권력 구조의 문제점을 일깨워 주었다. 그 무렵 영국인들은 배를 타고 세계 이곳저곳으로 탐험하면서 상업을 발달시켰다. 상권(商權)을 쥔 중간계층이 두각을 나타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정치제도를 개혁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헨리 8세는 수장권(The Act of Supremacy)을 선언하고 국왕이 교회의 우두머리라고 선포했다. 이 때 영국교회는 국가교회가 되었다. 그 무렵에 등장한 청교도들은 교회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교황의 잔재들’을 제거하고 교회를 깨끗하게 만들고자 했다. 스코틀랜드 출신 제임스가 국왕이 되자 의기양양 청교도적인 개혁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했다. 그들은 영국이 장로회 정치와 개혁신학을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 칼빈주의와 장로회가 왕성한 스코틀랜드 출신인 국왕 제임스가 자기들의 말을 들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제임스는 교회의 개혁이나 교회가 요구하는 것보다 자신의 왕권 확보에 여념이 없었다. 장로회 정치와 왕정제도가 불일치하다는 것을 알고 조만간 갈등을 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국국교회가 감독 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감독 없이는 왕도 없다’(No Bishop, No King!)고 생각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국회의 기능을 과소평가했고, 자신이 필요한 경우에만 그것을 소집했다.


    1625년에 국왕으로 등극한 찰스 1세는 아버지 제임스 1세보다 훨씬 더 강경하게 감독주의 교회정치 제도에 연연했다. 청교도―장로교회주의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국회를 과소평가했다. 그는 국회의 권한에 맞서서 자신의 독립성을 과시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펼쳤다. 정치동맹 관계를 구실로 로마가톨릭교회 신자인 프랑스의 마르 드 메디치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영국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를 걱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찰스는 귀족들에게 과도한 대출을 요구했고, 이를 거절하는 귀족 70명을 수감했다. 국회는 이에 항의했다. 이런 일로 왕권과 국회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왕의 의사는 국회에서 번번이 거절당했다.


    이에 격노한 국왕은 국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했다. 국회는 상원에 속한 영국국교회 소속 감독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맞섰다. 찰스는 국회를 해산하고, 10년 이상 혼자서 영국을 통치했다. 독재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왕의 신적(神的) 권리를 행사하고자 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후덕했던 반면에 고위 공직자들의 부패에 대해서는 엄격했다. 그러나 국회가 없는 이 나라에는 점차 정치 불균형이 나타나고, 청교도들과 의회주의자들의 분노가 커 갔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로부터 영국 프로테스탄트들의 자유의 상징이 된 국회가 유명무실하게 된 것에 분노했다.


    국왕 찰스의 독주는 결국 재정 결핍을 초래했다. 국민은 극도의 내핍 생활을 피할 수 없었다. 왕실의 활동도 최소한으로 제한되었다. 군대는 축소되어 일부만 남았다. 1633년에 대주교가 된 윌리엄 라우드(William Laud)는 영국인이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영국국교회에 출석하라고 강요했다. 제도를 강화하여 불만을 가지고 교회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을 시장 앞에 붙들어 놓고 교회 공예배에 한 번 불참한 데 1실링의 벌금을 부과했다.


    그러자 청교도들은 즉각 라우드의 조치를 공개적인 신앙박해로 간주했다. 의회주의자들은 군주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선동하기 시작했다. 대주교 라우드는 스코틀랜드교회가 예배의식서인 영국국교회의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를 채택해야 한다고 선포했다. 같은 예전을 사용하여 왕국의 통일성을 추구한다는 이름 아래서 그는 스코틀랜드에 장로회주의가 일방적으로 정착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기도서를 반대했다. 그것이 처음 낭독된 교회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신앙 탄압에 반대하는 내란도 발생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참된 개혁신앙’을 추구한다고 하는 내용을 담은 국가 차원의 ‘언약’(Covenant)에 서명했다.


    이렇게 되자 찰스는 스코틀랜드 의회의 해산을 명했다. 그러나 그 명령은 효력이 없었다. 명령이 거부당하자 왕은 군대를 보냈다. 그 동안 왕에게 충성을 바쳐오던 스코틀랜드인들은 이때 ‘그리스도의 면류관과 언약을 위하여’라는 구호를 외치며 영국군과 맞붙어 싸웠고, 영국군대를 완전히 괴멸시켰다. 국왕은 항복하고 국회를 다시 소집한다는 조문을 담은 항복서에 서명했다. 전쟁 관례에 따라 국왕은 영국 땅에 남아있는 스코틀랜드 군대에게 막대한 전비(戰費)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돈을 지불하자면 국회를 열어야 했다. 국왕은 그 동안 소집을 거부해 오던 국회를 소집했다. 전비를 보상하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1640년에 ‘장기국회’(Long Parliament)로 알려진 국회가 소집되었다. 의원들은 11년 동안이나 회집하지 않은 국회가 다시 열리자 누적된 불만을 가지고 임했다. 감독주의 국교회파, 의회주의 장로회파, 회중주의 독립파로 나뉘어졌다. 정치권력을 쥐고 있던 올리버 크롬웰은 독립파 회중주의 지지자였다. 다수를 차지한 청교도 장로회주의자들은 감독주의 지지자들과 제휴를 하고 왕을 움직여 영국국교회가 장로회 정치를 도입하고 개혁주의 신학을 수용하도록 일을 추진했다. 국회가 왕의 신하를 재판 없이 처형할 수 있도록 했다. 찰스에게 영국국교회를 개혁하는 총회 소집을 청원했다.


    그 무렵 스코틀랜드 대표는 영국 국회를 설득하여 모든 의원들이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신앙적으로 통일시키기 위한 신앙고백과 교회정치와 예배모범과 교리문답에 바탕을 둔 ‘동맹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에 서명하게 했다. 그러나 크롬웰은 이를 강력히 거부했다. 장로회 제도가 양심에 따른 개인 예배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하여 반대했다. 독립파 회중주의자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개인의 신앙과 그것에 대한 관용이 국가의 통일을 위해 희생될 위기에 처하자, 크롬웰은 왕에 대한 군사적인 승리만이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고 자유로운 기독교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왕정파는 감독주의 제도를 수용하는 영국국교회를 지지했다. 군주의 신적인 통치권과 감독주의 교회 형태가 왕정에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크롬웰이 이끄는 독립당에 대항하여 신앙을 위해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장로회주의를 따르는 청교도들은 중립을 유지했다. 국회의원 다수를 차지하던 그들은 그 동안 수난을 당해온 찰스를 동정하면서 왕과 국회와 교회가 나라의 개혁을 위해 함께 일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국회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런던의 웨스트민스터교회당에서 총회를 소집했다. 영국국교회를 보다 더 장로회다운 치리 형태로 바꾸고 신학을 개혁하고 교회를 정화하기 위한 교회 개혁 법안을 제정하자는 안을 결의했다. 국회는 1642년 6월부터 1643년 5월까지 성직자 총회를 소집하려고 다섯 번이나 그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찰스는 번번이 서명을 거부했다. 하원은 여섯 번째 그 법안을 통과시키고 발표했다. 상원도 1643년 6월 12일에 그것을 통과시켜 하원에 동조했다. 종교회의인 총회는 왕의 동의 없이 상원과 하원에 의해 1642년 7월 1일에 소집되었다.


    국회는 총회를 국회를 돕는 자문기구로 여겼다. 그래서 국회가 총회의 회원을 선임하고, 책임자를 임명하고 토론의 주제를 제시하고 활동범위를 제약했다. 이른바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121명의 영국국교회의 청교도 목사들과 약간 명의 회중 교회 목사 그리고 두세 명의 감독제 선호자들로 구성되었다. 총대 대다수는 장로회를 선호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총회에는 30명의 평신도 국회의원이 참석했다. 3명의 에라스티안(Erastian: 교회가 국가권력에 종속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과 스코틀랜드교회가 파송한 여섯 명의 대표(Commissioners)가 자문으로 참석했다.


    국회는 총회를 소집하면서 영국국교회가 로마가톨릭교회 식의 예배가 아닌 단순한 예배모범을, 감독제도가 아닌 장로회 정치를, 로마교 신조가 아닌 개혁주의 신조를 채택하여 모든 국민을 포용하는 국가교회로 개편될 것을 희망했다. 그러나 퀘이커와 재세례파 신자 등 과격한 사람들을 배제하고, 무정부주의를 야기하려는 자들이나 영국국교회를 갈라놓으려는 로마가톨릭교회를 배격하기를 바랐다.


    총회는 국회의 요청에 따라 먼저 영국국교회의 헌장인 ‘39개 신조’를 개정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 신조가 개혁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잘못된 해석을 일부 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니케아신조와 아타나시우스신조를 참고하여 그 교리가 철저히 성경에 바탕을 두게 했다. 난해하고 이론적인 것은 배제했다.


    그런데 16번째 신조를 개정하는 작업을 할 즈음에 정치 상황이 급변했다. 국회와 찰스 l세가 정면으로 충돌한 시민전쟁이 발생한 것이다. 국회군은 퇴각해야 했고, 스코틀랜드의 지원이 필요했다. 스코틀랜드는 지원군 파병의 대가로 엄숙한 동맹관계를 맺고자 했다. 그리하여 국회에서 스코틀랜드 대표자들의 발언권이 강화되었다. 스코틀랜드 대표자이며 영국국회에서 스코틀랜드 자문으로 일하던 사람들은 토론의 권한은 있지만 투표권이 없는 상태로 총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이들 6명 가운데 4명의 장로교 목사들은 신앙고백 초안 작성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이때부터 신앙고백서 작성의 방향이 달라졌다.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종교(기독교) 통일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 방향으로 전향했다. 스코틀랜드 대표자들은 영국 측의 4명의 의원들과 함께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작성 기초 위원으로 활약했다. 이 신앙고백서는 강력한 개혁주의 신학과 장로교 전통 아래서 만들어졌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경건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5년 6개월 22일 동안 1,163차례의 회의와 수많은 소위원회로 모여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작성하는 데는 별 논란이 없었으나, 장로회 정치가 과연 신적인 권위를 갖는가에 대해서는 장장 한 달 동안 논의했다. 총회는 기도, 예배, 금식으로 이어졌다. 중단 없이 여덟 시간이나 예배를 계속 드린 일도 있었다. 한 시간의 설교, 두 시간의 기도는 예사로운 일이었다. 1647년 11월, 회의를 마칠 무렵에 신앙고백서는 교리 지침서로, 나중에 완성한 소교리문답은 젊은이들의 교육교재로, 대교리문답은 설교자들의 지침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예배모범, 장로회 정치, 시편찬송도 만들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참석하여 신앙고백서 작성에 심혈을 기울인 스코틀랜드교회 대표자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람은 1647년 11월에 총회를 떠났다. 그들의 주도로 스코틀랜드교회는 기존의 신앙고백서를 버리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채택했다. 이 신앙고백서는 그것이 만들어진 영국에서는 오히려 그 빛을 보지 못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영국 하원은 고백서를 즉각 승인을 하지 않고 서술을 뒷받침하는 성경구절을 첨가하라고 요구했다. 성경 참고본문을 찾아 기입하는 일로 시간이 자꾸 흘러가고 있었다. 그 무렵 크롬웰 군대는 국회의 하수인이 아닌 독립적인 정치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는 국왕 찰스를 체포했고, ‘양심의 자유, 신앙의 관용’을 외쳤다. 크롬웰도 장로회 제도와 그러한 방향으로 교회가 개혁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그는 개혁주의 신학을 추종했다. 그러나 독립파 사람들이 그를 옹립하고 점차 국회를 차지했다. 군주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쇠사슬에 묶였고, 교회는 혼돈상태에 빠졌다. 그러한 상황에서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신앙고백서 작성을 완성했다. 그러나 그것은 즉각 받아들여지지 않고 지연되고 있었다.


    하원은 상원이 이미 승인한 신앙고백서를 1648년 6월 2일에 이르러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흘러 가버린 탓으로 장로회주의자들의 꿈은 무산되었다. 장로회주의자들은 독립교회주의자들을 따돌리고 감독주의자들과 제휴하여 왕을 인정하면서 영국국교회에 장로회 제도를 정착시키려고 했으나 장로회 제도의 꿈은 무산되고, 총회가 수고하여 만든 신앙고백서는 영국국교회의 것이 되지 못했다. 그것들이 자리를 잡도록 만들기에는 그들의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다.


    크롬웰은 국회를 해산했다. 1653년에서 1658년까지 호민관으로 통치했다. 자신이 펼치는 공화정부를 지지하지 않는 장로회주의자들은 교구에서 추방당했다. 크롬웰은 장로회 정치가 아니라 회중교회 치리체제를 원했다. 1658년에 크롬웰이 죽자 국회가 복구되었다. 국회는 1660년 3월 14일에 장로회 제도를 영국국교회 정치제도로 공인한다고 하는 법을 선포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다시 채택하고, 그것을 인쇄하도록 했다. 그러나 장로회 제도와 감독제도가 갈등을 겪는 가운데서 찰스의 아들 찰스 2세가 감독주의 체제를 재정비하자, 장로회주자들의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국회는 왕정 복귀를 공포하고 스스로 해산했다. 득세한 감독주의 감독들은 복수심에 가득 찬 상태로 통일법(The Act of Uniformity)을 통과시켰고,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교구 밖으로 추방했다. 청교도들이 지금까지 추구하던 장로회와 개혁신학은 변두리로 밀려났다. 교구에서 축출된 비국교도 다수는 독립 침례교도로 자리를 잡았다.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던 일부 장로회주의 회원들은 영국국교회와 손을 잡았다.

     

    3.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사상


    16세기의 종교개혁 직후 유럽 대륙에는 두 가지 흐름이 나타났다. 한 편에서는 정통주의가 등장했고, 다른 한 편에서는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경건주의가 나타났다. 기독교 신앙이 이성의 역할에 강조를 둘 것인가, 경험에 강조를 둘 것인가 하는 것이 새로운 주제로 대두되었다. 신학자들은 성경 진리를 새롭고 단순하게 이해하던 종교개혁 당시의 분위기와는 달리 ‘객관적’인 교리 체계를 세우는 일에 몰두했다. 정통주의 시대의 특징은 신학 이론을 합리적으로 체계화하는 경향을 지녔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정통주의 시대를 주도한 개혁주의 정통신학, 개혁파 정통신학(Reformed Orthodoxy)의 영향 아래서 만들어졌다. 하나님의 창조, 작정, 섭리에 대한 합리적 서술에 상당부분을 할애한다. 성령과 선교는 다루지 않는다. 성령은 영국국교회의 ‘39개 신조’에도 포함되어 있는데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그것을 다루지 않은 것은 특기할 만하다. 프로테스탄트 선교는 경건주의가 왕성하던 시기부터 부각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이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을 갖지 못한 것은 특기할 만하지 않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종교개혁운동 사건 이후 125년 동안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집대성했다. 17세기의 신학과 신앙 명제들을 포함시켰다. 조리 있고 엄숙하며 명확한 언어로 서술했다. 완결성과 포괄성을 지녔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유서 깊은 기독교 진리를 변호했다.


    이 신앙고백서는 총 3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진리의 원천인 성경을 다룬다. 제2장에서 제5장까지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전체 개요를 논리적으로 배열한다. 하나님의 작정, 섭리를 다룬다. 제6장에서 제20장까지는 인간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설명한다. 제21장에서 제26장까지는 기독교 삶의 윤리 차원을 다룬다. 하나님의 율법, 양심의 자유, 교회와 국가, 결혼과 이혼 등을 서술한다. 마지막 부분인 제27장에서 제33장까지는 교회, 성례, 마지막 일들을 담고 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작성자들(The Westminster Divines)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역사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주권과 돌보심 아래에 있다고 확신했다. 자연의 인과응보 법칙에 따르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칼빈주의적 확신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칼빈이나 도르트총회(1619)가 확정한 교회법보다는 훨씬 더 부드러운 용어를 사용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탁월성과 중요성은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예정론, 하나님의 미리 아심 등에 대한 서술은 당시에 유행하던 연역 사고를 반영하지만, 동시에 성경에서 진리를 도출하는 귀납 방법을 따른 것이기도 하다. 신구약 성경 66권이 어떻게 정경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며, 교회에 의해 그것이 권위를 갖게 된다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주장을 부정한다. 성경의 진실성과 신자의 마음속에 있는 성령의 내적 증거야말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최종적인 설득력을 갖는 토대라고 본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성경에 관한 교리 다음으로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에 무게를 둔다. 청교도들의 영향을 받아 언약신학을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작정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언약을 인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표현이라고 본다. 제7장은 ‘사람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논한다.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나눈다. 이러한 구분을 두는 언약사상을 연방신학(Federal Theology)이라고 한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은 두 가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한 가지 언약만 존재한다고 본다. 행위언약이 은혜언약 안에 포함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작성자들은 신학이 이론으로 그치지 않고 실천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의 3분의 2 가량을 개인과 사회 차원의 기독교 삶과 관계된 실천적 주제에 할애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기독교인의 삶과 건덕(Edification)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칼빈주의자들에게 신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인 학문이다. 신학의 목적은 하나님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순종의 삶이다.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인간의 자랑이나 권세나 섬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삶과 기독교 신앙의 구현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신앙고백서보다 분량이 더 많은 대교리문답을 작성했다. 묻고 답하는 형식의 이 고백문서는 설교자들을 위한 길라잡이이다. 신앙고백서를 만든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것을 요약한 것이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한 소교리문답이다. 제1문에서 제38문까지는 기독교인이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를 다루고, 제39문부터 제107문까지는 기독인의 삶의 의무를 다룬다. 성경이 가장 요긴하게 가르치는 두 가지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무엇을 믿어야 할 것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본분(duties)이 무엇인가로 나눈다.


    4.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한국장로교회


    웨스트민스터교회당에서 열린 총회는 종교개혁의 완성을 목표로 삼아 교회정치 제도와 정화(淨化)에 초점을 맞추었다. 청교도 정신을 반영하여 교회나 국가가 개인의 양심을 구속할 권리가 없다는 등의 주제를 다루었다. 개혁신앙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성직주의를 배격한다. 바울, 어거스틴, 위클리프로 이어지고 칼빈이 강화한 칼빈주의 신학을 담고 있다.


    잎서 언급했듯이 신앙고백서는 역사적인 산물이며,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 사회, 정치, 정신, 신앙을 반영한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다른 고백서들과 마찬가지로 제한성을 지니고 있다. 인종차별, 도시화, 산업화, 직장, 민주화, 남녀평등, 매스 커뮤니케이션, 복잡한 인간관계, 환경, 핵무기, 자본주의의 횡포 등은 당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 주제가 아니었다. 그 당시의 교회는 사회 문제, 경제 문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책임을 오늘날처럼 자각하지 못했다. 영국교회는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사회개혁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 신앙고백서는 법률조문 또는 헌장이라는 인상을 준다. 어떤 문제에 대한 정답은 단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보는 경향도 엿보인다. 하나님의 ‘구속’을 강조한 반면에 ‘이웃’에 대한 그다지 큰 관심은 표명하지 않는다.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당에서 조직된 한국장로교회 첫 노회는 인도장로교회의 신조문을 본 떠 만든 신앙고백문을 채택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신조’는 흔히 ‘12신조’라고 불린다.


    이 신조문은 다음과 같은 서술로 시작한다. “대한예수교회에서 이 아래에 기록한 몇 가지 조목으로 신경을 삼아 목사 및 인허 강도인과 장로와 집사로 하여금 청종하게 하는 것은 대한교회를 설립한 본 교회의 가르친바 취지와 표준을 버림이 아니라 오히려 찬성함이니 특별히 웨스트민스터신조와 성경요리문답 대소 책자는 성경을 밝혀 해석한 책인즉 우리 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 그 중에 성경요리문답을 적은 책을 더욱 교회문답으로 삼느니라.” 한국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교리의 표준으로 삼았다. 배위량 선교사가 1925년에 처음으로 한글로 번역했다.


    이 고백문서가 한국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로 채택된 것은 상당한 세월이 흐른 뒤였다. 예장 통합교단 제52회 총회(1967)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기존의 신조에 첨가하기로 결의했고, 제56회 총회(1971)가 이를 공포했다. 제58회 총회가 결의한 교회 정치와 권징조례 수정안은 통과시켜 1974년 6월에 출간한 헌법 수정판에 그것을 수록했다. 수록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1903년 미국장로교회가 수정하고 보충한 제35장 ‘성령에 관하여,’ 제35장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과 선교에 관하여’를 포함시켰다.


    예장 고신교단 제22회 총회(1972)는 노회 수의(隨意) 결과를 보고 받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공식 신조문으로 채택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원본을 채택하여 사용하다가 ‘성령에 관하여’(제34장)와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에 관하여’(제35장)를 보완하여 사용하고 있다.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출범한 학생신앙운동(Student for Christ)의 초기 지도자들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을 신조로 수납했다.


    한국장로교회는 아빙돈단권주석 문제(1935), 창세기 저자 문제와 교회 안의 여권 문제(1934), 신사참배 문제(1938-1945), 조선신학교 문제, 김재준 교수의 자유주의 신학 문제 등으로 장로교는 갈등을 겪었고, 신앙이 위협을 받고 있었다.


    고신교단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출범하면서 “현 대한예수교장로회 가설(假說) 총회가 본[래의] 장로회 정신을 떠나서 이교파적으로 흐르므로 이를 바로 잡아 예수교장로회로 계승한다”는 취지를 표방했다. 장로교 정신, 원리, 예배, 신앙고백에 충실한 ‘정통신학운동’을 천명했다.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역사적인 신앙고백서로 여길뿐 자신의 신앙고백서로 수납하지 않는다. 독자적인 신앙고백서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개혁신앙을 고백하는 신앙공동체의 연합과 일치의 기초이다. 이것을 고백하는 교회들은 인간적인 문제들을 뒤로 하고 조속히 기구적으로도 하나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앙고백서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회의 시대적 반응을 담은 고백서라는 사실은 신앙공동체가 다양한 고백서들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새로 만든 것이라고 하여 반드시 과거에 만들어진 것보다 더 탁월한 고백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만들어진 뒤에 나타난 여러 가지 신앙고백서들을 보라. 그 어느 것도 이를 능가할만한 신앙고백서가 못된다.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며 영적으로 깨어 있던 그 시대의 교회의 경건과 견줄만한 풍토가 쉽게 조성되지 않는다. 오늘날의 교회는 옛날보다 훨씬 더 세상의 지혜와 세속주의와 인본주의에 오염되어 있다. 신학사조는 기독교의 절대성과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다른 종교에도 성령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성령의 열매가 있다고 선언한다.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는 1983년에 미국북장로교회(UPCUSA)와 미국남장로교회(PCUS)가 통합된 교단이다. 바르트주의(신신학)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새신앙고백서’(1967)를 수용하고 있다. 바르트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성경관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고 말하지 않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주관적 차원으로 격하시킨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가 겉으로 보기에는 미미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크다.


    미합중국장로교회는 이러한 고백서를 가진 이 교회의 성경관은 목사·장로·집사 임직 때 임직자가 피임직자에게 묻는 질문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여러분은 신구약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된 책이며, 전체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독특하고도 권위 있는 증언이며, 당신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받아들이십니까?”


    위 질문은 유서 깊은 기독교를 지향하는 장로교단들, 예컨대 한국의 예장 고신, 개혁, 합동 교단과 미국장로교회(PCA), 미국정통장로교회(OPC) 등이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생활의 최종적 규범이라고 믿습니까?”라고 묻는 것과 대조적이다.


    성경의 무오성은 신학의 마지막 보루이다. 예장 통합의 자매교단인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는 성경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하지 않는다. 성경이 “전체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독특하고도 권위 있는 증언이며, 당신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가”고 묻는다. 성경을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말씀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는 바르트주의 성경관을 반영하고 있다.


    새로운 신앙고백의 필요성은 항상 존재한다. 새롭게 등장하는 이단들과 이데올로기들은 고풍스럽고 부적절한 논쟁적 외침을 내뱉는 것으로는 결코 효과적으로 극복될 수 없다. 그러나 새 신앙고백서를 만든다고 하여 새 것이 옛 것보다 더 탁월하고 창의적인 것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현대 신앙고백서들은 대체로 핵심 교리들를 지나치게 일방적이거나 빈약하게 다룬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만들어진 신앙고백서들은 개혁주의 공동체들의 시도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최덕성, <개혁신학과 창의적 목회> (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5)에서 옮김


    웨스트민스신앙고백 전문 http://reformanda.co.kr/xe/index.php?mid=Archive&document_srl=46520

    출처: 리포르만다

    가져온 곳 : 
    카페 >말씀의 교회와 새빛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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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상록수| 원글보기

    노 젓는 제자들

    < 요한복음 6:16-21>
    16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 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유대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그 때 큰 무리는 병자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려고 예수님께로 몰려왔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이신 주님은 그 무리를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죄인을 살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의 예표였습니다.
    그런데 무리는 오병이어의 참뜻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임금 삼으려 했고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여 홀로 산으로 가셨습니다.

    모르기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은 것을 열 두 광주리 가득 거두고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 말씀을 배불리 먹어도 주님을 알지 못 한다면 우리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쓸쓸히 산으로 아니, 천국으로 홀로 떠나가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은 산으로 들어가신 주님을 버려두고 가버나움으로 돌아가려고 배를 저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두운 바다 거친 물결이었습니다.
    밤새도록 괴롭게 노 저어도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지 못 하는 흑암과 고통의 거친 바다였습니다.
    주님 없는 인생은 일생동안 방황하며 수고하고 두려움과 절망 속에 고통 하다가 결국은 멸망당하는 암흑의 세상바다입니다.
    그들은 밤 사경까지 괴롭게 노 젓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바다 위를 걸어 다시 오셨습니다.
    제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돌아오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삼년 동안 데리고 다니며 가르쳐보고 쓸모없다 싶으면 버리려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미 제자들을 부르셨고 세우셨고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주고 이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괴롭게 노 젓는 제자들에게 다시 돌아오셔야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오병이어의 참뜻을 깨닫고 주님을 진실로 알게 된 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후였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님이 오신 다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제야 주님의 생명, 곧 그들에게 주어진 오병이어 열 두 광주리를 들고 나섰고 온 세상에 나누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괴롭게 노 젓던 제자들이 주님을 기쁨으로 영접하자 배는 곧 그들이 가려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주님 없는 인생, 하나님 모르는 인생길은 방황과 저주와 멸망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타신 배는 방황이 없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은 분명한 소망과 목표를 가집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소 모든 고통이 끝나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오늘 말씀 속에서 또 중요한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또 바다 위를 걸으신 기적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누구신가 하는 정체에 관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창조주가 아니시라면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어야 비로소 구원이 가능하며 영원한 생명이 가능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주만유를 지으신 분이요 주인이시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만일 이 말씀이 거짓이라면 구원도 헛것이요 성경전체가 거짓말 덩어리가 될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바다 위를 걸으신 기적은 만물이 주님께 복종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뻥튀기 마술이나 무리에게 배부름의 환각을 일으킨 최면술이 아닙니다.
    "있으라" 말씀에 빛이 있었던 것처럼, "나누이라" 말씀에 나누어졌던 것 처럼 그것은 없는 것을 있게 하는 창조주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다 위를 걸으신 것은 주님의 명령에 주님의 발이 닿는 바다가 단단해지는, 만물이 그 발 아래 복종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쓰시겠다 하시면 어떠한 피조물도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도 오천명을 배불리 먹이시는데 쓰신 주님께서 어찌 작고 미약하다 하여 우리를 그렇게 사용하지 못 하시겠습니까?
    파도 치는 바닷물도 단단하라 하시고 그 위를 걸으신 주님이 어찌 우리를 강하게 하지 못 하시며 우리의 앞길을 예비하지 못 하시겠습니까?

    성경과 기독교는 관념과 교리가 아닙니다. 사실과 진실입니다.
    예수님이 주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손에 들려진 만인을 살릴 생명의 오병이어요 주님과 함께 절망과 죽음으로 파도치는 온 세상을 잠잠하게 만들 희망의 제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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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믿은 후에 짓는 죄와 구원의 관계 / 박신 목사 


    성경문답 사이트를 개설한 이래로, 또 개인적으로 이메일로 질문을 가장 많이 받은 주제는 “예수를 믿은 후에 죄를 지으면 구원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였습니다.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신앙경륜이 오래되고 믿음이 좋아(?) 보이는데도, 구원에 대해 제대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칭의, 성화, 영화를 구분할 줄은 아는데 각각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그 셋을 연결하여 종합적으로 판단, 적용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를 믿으면 미래에 지을 죄까지 이미 다 용서 받았기에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는 구원파 식의 한쪽 극단이 있습니다. 그 반대쪽 극단은 엄격한 도덕주의 율법주의에 치우쳐서 사소한 죄를 지어도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염려합니다.

    성경문답 사이트에서 이 주제를 직간접으로 이미 여러 번 다뤘지만 각기 조금씩 다른 질문내용에 각도를 맞추어 답변 드리다보니 그 전체를 연결해서 이해하는데 곤란을 겪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유사한 의문을 가지실 분들이 쉽게 참조하고 오해의 소지를 줄이도록 구원과 죄의 관계를 최대한 간단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죄의 본질과 구원

    구원은 하나님이 죄에서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그럼 죄가 무엇인지부터 먼저 규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행동으로 범하는 잘못에다 말로 남에게 상처 주는 죄(마5:22)와 마음으로 짓는 죄(마5:28)까지 죄의 범주에 포함시켰습니다. 말로 범한 잘못은 당연히 그러하지만 생각 또한 사고 활동이기에 인간이 작심하고 지은 행동의 죄로 봐야합니다. 주님의 뜻은 다른 이에게 직접적 피해를 주는 행동만이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이는 자기를 몰라도 자기는 알기에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의롭게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그 모든 죄들이 외부 여건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인간의 속에서부터 나온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마15:17-19) 행동과 말과 생각을 조종하는 인간의 마음이 따로 있는데 그 자체가 이미 타락 오염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이 타락된 것은 아담의 원죄 하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타락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께  불순종한 행위를 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서 배제한 데서 기인합니다.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높이 세우고 마음의 중심에 두었기에 그분을 망각하게 되었고 그 결과 선악과를 따먹는 범법행위를 저지른 것입니다.

    따라서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분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채 인간이 세상의 주인이 되고, 특별히 자기를 최고로 높이려 드니까 인간 사회에서의 경쟁 분쟁 원수가 되는 온갖 윤리적 죄가 발생합니다. 모든 인간이 원죄 하에 태어난다는 근본 의미도 하나님을 스스로 절대 찾지 않으며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에서 인간 특별히 자기만 높이는 마음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마음에서부터 죄(생각, 말, 행동)가 나온다면 결국 인간 존재 전체가 죄로 찌든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그 존재 전체가 구원의 대상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천국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요3:5) 존재 전체가 타락되어 있기에 스스로 그 타락된 마음에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그 심령 안에서 역사해야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철저한 죄인임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죄를 생각, 말, 행동 즉 자신의 의지적 행위로 인한 잘못으로만 정의한다면 논리적으로 의지를 동원해 스스로 깨끗케 되려는 선행 구원이 타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 전체(한 인격체)가 타락되었다면 그 사람을 깨끗케 해야만 구원이 가능해집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는 하나님의 역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 구원의 진정한 의미

    원죄 하의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기에 그분의 진노 아래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자연인이 태어난 이후에 하나님께 범과한 그 모든 결과를 보면 죄의 삯인 사망의 형벌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법정에선 모든 세대, 모든 인간은 사형에 처해져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킬 자 단 한 명도 없기에 그분의 공의대로 하자면 단 한 명도 구원을 입을만한 조건, 자격, 공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자하심이 너무 크신 그분은 우리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않으며 우리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동과 서는 먼 정도가 아니라 영원히 만나지 못함)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습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당신을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겨주십니다.(시103:8-12) 구약 시대 다윗의 고백이지만 바로 십자가 복음을 예표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선  타락한 아담이나 그 이후의 인간들이 당신에게와 같은 인간에게 지은 죄과로 치면 사형에 처해 마땅하나, 그러면 단 한 명도 살아날 자가 없기에 그 죄는 철저하게 응징하되(공의) 그 죄인은 살려주는(사랑) 구원의 길을 태초 전부터 정했습니다.(창3:15, 요1:1, 엡1:3-14)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할 죽음의 형벌을 대신 당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담이 허물어졌습니다.  죄인과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을 활짝 여셨습니다.(엡2:11-18, 히10:10-20)

    따라서 예수 믿어 구원 얻었다는 정확한 뜻은 우리의 죄과는 주님이 다 짊어지셨기에 한 죄인의 인격체 전부가 하나님에게 용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어떤 죄를 지었어도(사실상 모든 인간이 죽어 마땅한 죄를 범했어도) 그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이 용납해주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준 것입니다. 집 나간 둘째 아들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온 것(눅15:11-32)으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고(갈4:6), 그분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벧전2:9,10).

    이런 예수 십자가의 구원은 다윗 시편의 고백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만 베풀어집니다. 그 경외는 단순한 행동으로 지은 죄를 반성하고 고치는 도덕적 종교적 회개(悔改)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의 영만이 아시기에(고전2:6-16)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가르친 대로 성령의 간섭과 역사가 전제 되어서 한 존재 전체가 거듭나는 영적인 회개를 수반합니다. 타락한 마음 전체를 완전히 새롭게 하는 것으로 회심(回心)이 더 적합한 표현입니다.

    지난날에 지은 죄 된 행동들만 반성해서 고친다면 여전히 선행구원에 머무릅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신을 중심에 둔 자기 존재 전체가 너무나 추하고 더러워서 썩어 없어졌어야만 했다는 철저한 자각입니다. 자기만 높이려고 살았던 지난 모든 삶이 최악의 실패와 절망뿐이었음을 너무나 깊이 깨달았기에 다시는 그런 상태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인생의 완전한 유턴입니다. 앞으로는 주님만 중심에 모시고 그분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과 헌신이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이 간섭하여 거듭나는 순간 이런 회심이 일어나며,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만은 그 죄인의 회심한 중심을 아시며 본인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구원과 미래의 죄

    예수님이 죄인의 죄 값을 다 지불하신 대신에 그 죄인은 하나님께 완전히 용납 받고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의 보혈로 맺어진 혈연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 관계는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끊기는커녕 훼방도 하지 못합니다.(롬8:31-39) 인간의 부모 자식 관계도 절대 끊어지지 않는데,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된 신자에게서 그분의 사랑을 빼앗아 갈 수 있는 존재나 사건은 우주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거듭나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권능과 은혜 안에 들어온 자에게는 절대로 구원의 취소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죄인을 용납하고 자기 자녀로 삼아주었기에 구원이 취소된다는 생각은 하나님 그분을 왜곡 부인하는 짓입니다. 인간 부모도  그것도 자기 몸에서 난 자식이 아니라 입양한 자녀가 잘못했어도 내치는 법은 없습니다. 평생을 두고 자기 자식처럼 키울 확고한 결단과 헌신이 따르지 않으면 아예 입양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롬8:1) 자녀로 받아들인 그 관계를 취소하고 다시 쫓아내지는 않습니다. 탕자였던 둘째 아들이 그렇게 잘못을 했어도 아버지가 다시 아들로 받아들여주고 다시 쫓아내는 법은 없듯이 말입니다. 이를 죄와 연관해서 말하면 죄로 인해 받을 지옥형벌이 완전히 면제(free from the penalty of sin)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 가는 입장권을 준 것이며 그 준 것을 다시 회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영광스런 완성은 이미 보장된 것입니다.  

    이를 두고 신학적 용어로 칭의(稱義-Justification)라고 합니다. 전혀 의롭지 않은 자를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었기에 하나님이 그 주님의 의를 덧입혀서 의롭다고 칭해준, 자녀로 삼아준 것입니다. 이는 단회적으로 과거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전부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을 처음 믿은 때입니다. 죄인 그 상태로 그 신분과 소속과 위치만 흑암 사망 사탄의 미혹 아래에서 빛 생명 하나님의 품 안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성령의 간섭으로 일어난 일로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요 선물입니다.  

    한 죄인 전체가 이미 용납되었기에 그 후로 죄(생각, 말, 행동의)를 지어도 절대 다시는 지옥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뜻에서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의 죄까지 모두 용서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은 후에 죄 지었다고 다시 심판하지 않으니까 미래의 죄도 당연히 용서 받은 것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십자가 구원은 하나님이 한 죄인(여전히 죄에 찌들어 있는)을 있는 그대로 당신 자녀로 품어주시고 완전히 용서해준 것입니다. 이런 확고한 이해가 없으면 자꾸 구체적 사소한 죄들과 연결해서 구원을 의심하거나 혼란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성화와 징계

    문제는 구원이 한 죄인 전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준 것이기에 그 내면에 있는 죄로 찌든 본성은 그대로 생생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치사하고 추하거나 흉악한 행동을 짓고 싶은  생각이나 습관을 죄의 본성이라고 곡해 하면 안 됩니다. 서두에서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기만 높이려는 고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를 믿어 회심할 때에 하나님을 멀리했던 지난 삶을 철저한 실패로 인식하고 마음의 전체 방향은 분명히 하나님 쪽으로 돌렸지만 자기를 높이려는 옛 자아의 흔적이 너무나 강하게 남아 있어서 수시로 하나님을 망각 외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짓는 구체적인 죄도 결국 자기중심성에서 발현된 것이므로 죄와 싸워 이기려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 붙들어야만 가능합니다.(눅9:23, 롬7:17-25) 이는 바로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과정입니다. 죄의 본성과 그 힘에서 자유로워지려는 씨름으로 믿은 후 일생 동안 신자가 성령의 인도를 받되 자신이 책임지고 계속적으로 행해야 할 일입니다.(free from the power of sin)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고 말한 까닭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믿거나 선행을 쌓아서 천국 가는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구원 얻은 신자가 성화를 충실히 이루라는 것입니다.  

    주의할 것은 성화와 칭의가 시간적 혹은 수준적으로 구분되는 두 단계가 아닙니다. 칭의가 되는 순간 성화도 자연스레 필연적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죄의 행동을 다 없애고 뜯어 고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을 부인했던 타락한 마음은 확실하고도 완전하게 버렸습니다. 죄의 본질은 씻어졌고 하나님과 화해되었으며 앞으로는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면서 지난 인생으로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완전한 방향전환을 했습니다. 그럼 그분과 동행하는 삶, 성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단지 자기를 높이려는 타성은 아직 강하게 남아 있어서 신자가 그 타성을 얼마나 죽이느냐에 따라서 성화의 정도와 수준만 달라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미래에 지은 죄까지 다 용서 받았다고(심판이 면제되었다고) 해서 계속 죄에 더 거할 수는 없습니다. 꾸준히 피 흘리기까지 죄와 맞서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런데 신자가 습관적, 의도적, 죄를 짓고도 회개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심판이 아니라 징계는 합니다. 자식이 죄를 지으면 부자관계는 결코 끊지(심판) 않지만, 자녀를 바르게 키우려고 매는 드는 것(징계)과 같습니다.(히12:4-13)

    그런데 징계는, 하나님만의 특별한 계획이 있는 아주 비상한 경우를 빼고는, 죄를 지을 때마다 혹은 회개치 않는 죄마다 일대일 대칭으로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무서운 독선적 하나님이 되어서 신자는 물론 불신자들도 공포심으로 믿는 척만 할 수 있습니다. 부모도 자식이 계속 돌이키지 않고 잘못을 범해 도저히 그대로 두어선 안 되겠다 싶을 때에 매를 드는 것과 같습니다.

    징계의 시기와 방식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렸습니다. 신자가 미래의 죄까지 용서 받았다고(단지 심판의 면제이지 징계는 하신다는 사실도 모른 채) 죄를 짓고도 무심해선 안 됩니다. 혹시 회개를 못하고 지나친 죄에 대해선 너무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모도 자식의 사소한 잘못은 눈 감아 주시지 않습니까? 진정으로 거듭나서 성령이 그 영혼에 내주하는 신자라면 죄에 대해 아주 민감해집니다. 제대로 회개하지 않은 경우라면 정말 죄로 인식하지 못한 아주 사소한 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런 것까지 징계는 않습니다.

    대신에 신자가 죄에 대해 이전보다 아주 민감해졌고 때로는 성령마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하시기에 습관적 고의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는 사실상 없습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언젠가는 반드시 회개를 하게 되거나 최소한 본인의 죄의식이나 내면의 영적 눌림은 있는 법입니다. 그런 경우는 반드시 회개해야 하며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징계가 임할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결론적으로,

    다시 요약하면, 죄의 본질은 하나님과 분리 되어 자기를 대신 높이는 것입니다. 구체적 행동(생각, 말, 행동)으로 범하는 잘못은 그 결과입니다. 처음 예수 믿어 얻는 구원도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에 힘입어 한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 된 것입니다. 그 사람 자체가 용납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서 자신의 이미 바뀐 신분, 위치, 소속, 특권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성화의 과정에서 아무 두려움과 주저함 없이 죄와 당당하게 싸워 이길 수 있으며 최소한 그렇게 되도록 노력은 합니다.  

    죄인 한 사람이 하나님께 용납되었기에 구원 후 짓는 죄도 다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이며 구원이 취소되는 법도 결코 없습니다. 나아가 천국에서 예수님처럼 영광스런 존재로 바뀌는 영화(榮化- Glorification)도 이미 확보된 것입니다. 그 영화를 죄와 연관시키면 더 이상 죄의 형벌과 능력은 물론이며 죄 자체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죄가 더 이상 실존하지 않는 곳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free from the presence of sin)

    그 때까지는 이 땅에서 죄의 세력과 맞서 싸우며 날마다 조금씩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이 싸움을 잘하고 못하고에 따라 천국에서의 상급만 달라지지 구원 자체가 변경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회심으로서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 받았지만, 그 형벌(심판)에서 면제된 것이지 구체적 죄를 계속 지으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때와 방식으로 징계는 받습니다.

    1/28/2015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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