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신자의 모습 / 마틴 로이드존스

 

 

참된 신자는 산상설교의 교훈 전체를 대면한다. 그는 이것이나 저것을 골라 그것만을 지키려는 자세를 가지지 않는다. 그는 성경의 모든 부분의 가르침을 들으려는 사람이다. 그는 인내심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성경의 모든 부분을 읽는 시간을 충분히 갖는다.

 

몇 편의 시편을 읽어 치우는 것만으로 족하게 생각한다든지, 그런 것을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에 수면제로 사용하는 것 같은 일을 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전체 말씀으로 자신을 재어보고 자신을 탐사해 본다. 이 탐사를 거절하기는커녕 환영한다. 그는 그것이 자신에게 유익함을 안다. 그래서 그런 탐사로 오는 고통을 반대하지 않는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말씀 아래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다. 성경이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 진리라고 인정한다. 실로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그 말씀도 내 자신에 관해 다 말하지 않았다.’ 그는 말씀의 비난을 싫어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비난도 감수한다. 오히려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내게 반도 말하지 못했다. 그들은 나를 알지도 못한다.’ 그는 즉시 그를 향한 말씀이 감동 때문에 팔복을 따라 간다. 그 때문에 그는 자기에게 제시된 타입과 본을 따르고 싶은 소원을 가진다.

 

여기에 매우 훌륭한 시금석이 있다. 당신은 산상설교대로 삶을 영위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매우 선하고 건전한 증표이다. 이러한 유의 삶을 영위할 것을 소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의를 추구하는 것이 그의 삶에 있어서 큰 일이다. 그는 자기의 현재 모습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 나는 내가 책에서 읽었던 성도들같이 되고 싶다. 허드슨테일러, 브레이너드, 칼빈 등과 같은 성도들처럼 되고 싶다. 만일 감옥과 굴에서 살며 희생을 당하며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당하였던 이 사람들처럼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바울과 같이 되기만 한다면, 오, 내가 나의 복되신 주님 자신과 같이 된다면” 이라는 소원의 말을 한다.

 

그것을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팔복의 말씀을 따라서 행하고 있는 사람이다. 시금석의 본질을 관찰해 보라. 그것은 네가 죄가 없거나 완전한 사람이냐를 따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네가 어떻게 되었으면 하느냐, 네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느냐를 묻고 있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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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사, 변호사, 검사 이 단어들을 한자로 쓰면 셋 다 '사'자가 다르다


의사(醫師), 변호사(辯護士), 검사(檢事)

 

 

 

2. 겨울철 스웨터를 입을 때 느끼는 정전기는 3만 5천 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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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비단에는 자외선을 튕겨내는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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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통계를 내보면 뉴욕시의 사망률이

쿠바전쟁 당시의 미군 사망률보다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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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500원짜리 두개를 주는것 보다

천원짜리 한장을 줄때 사람들은 더 큰 호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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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스페인 국가에는 가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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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혹한의 땅에서 물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해야 될 일은 눈밭에 뛰어 드는 것.
( 눈으로 젖은 옷과 공기 사이에 벽을 만들어 옷이 얼지 않게 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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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설산 등지에서 조난되어 동사한 시체 중에는

 반라나 완전히 옷을 벗은 상태로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이건 지나친 추위에 뇌가 오작동을 일으켜, 지금 너무 덥다고 느끼게 하기 때문이라고.


9. 아이스크림을 콘에 올려 주는 이유는,

차가워진 혀를 정상 온도로 올려

다 맛을 느낄 수 있게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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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쥐는 사실 치즈를 좋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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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팬더는 사실 육식이다. ( 침팬치도 육식 함 )
덧붙여 팬더의 울음소리는
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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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코끼리는 실제로 쥐를 무서워한다

(Mithbuster 에서 실제로 실험한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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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집에 문을 열어 둘 시, 절반만 열어두는게 바람이 잘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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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금붕어는 사실 엄청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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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잠이 안올때 양을 세는 이유는 영어의 Sheep이 sleep이랑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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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구소련에서는 한때 뺨때리기가 스포츠였다. 

 

17. 탁구에서 라켓 크기에는 제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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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세상에서 제일 긴 영단어는 진폐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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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모노울트라마이크로스코픽실리코볼케이노코니오시스 )


19. 필리핀은 한때 요요가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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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나폴레옹의 키는 167이다.

 그 시대의 남자들의 키는 평균 163이었으니 평균 이상이었다.

(근데 170대라는 설도 있음. 어쨌거나 평균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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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육식동물은 사냥감의 위를 먼저 먹어

 식이섬유를 섭취한다. 

22. 휴대폰 011, 016, 019 번호를 고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통신사들은 아직도 2세대 기종을 끊임없이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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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미국에선 당나귀 때문에 죽는 사람이 비행기 사고로 죽는 사람보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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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낙타는 혹이 있지만 척추는 곧바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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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부임하여 교회를 소란케하는 목사

장달윤 목사 ㆍ 2014-01-24 (금) 07:14 IP: 124.xxx.154    

처음 부임하여 교회를 소란케 하는 목사

1.부임하자마자 교회를 자기마음대로 지배하려는 목사
2.장로를 굴종 시키려는 목사
3.기존 교회 시설과 제도를 확 뜯어 고치려는 목사
4.자기 말 잘 듣고 따르는 성도와 짝하여 파당을 만드는 목사
5.교회 재정을 관장 하려는 목사이다.

이상의 다섯 가지를 초월하여 목회하는 목사는 신 바람나는 평안한 교회를 만들고 생동하는 교회를 만들고 날마다 부흥하는 교회를 만든다. 이가 참 목사이다. 이런 목사 찾기가 쉽지않다.

2014,1,24. 서울에서 장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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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선정한 세계의 낙원 BEST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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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위. 토레스델파이네(Torres del paine) - 칠레

지구의 땅끝에 위치한 곳으로 야생의 황무지 라고 불리우는 곳입니다.
빙하와 팜파스(남아메리카 대초원)의 조화가 정말 아름답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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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위. 태평양 제도(Pacific Island)

아이투타키(Aitutaki)로도 유명한 태평양 제도입니다.
수많은 작은 섬들이 붙어있고 청록색 바다위에 펼쳐진 암초들이 장관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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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위. 케랄라(Backwaters of Kerala) - 인도

인도의 남부에 위치한 지역입니다.
남부 연안에 위치하여 수로와 초호가 만든 자연미로라고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더러운 오염도시에 2군데가 선정되었지만
이런 곳도 있으니 대단(?)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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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위. 정원여관(Japanese Ryokan) - 일본

300년 이상의 전통을 이어내려온 일본식 전통여관입니다.
전통적인 일본식 설계로 지어져 일본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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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위. 라디겔 섬(La Digue Islands) - 세이셸로

인도양에 떠있는 아주 작은 섬 입니다.
115개의 섬을 영토로 가지고 있는 세이셸로의 한 섬으로
이미 유럽에서는 대부호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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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위. 하와이(Hawaiian Islands) - 미국

19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열도입니다.
그 중 가장 큰 섬이 하와이로 검은 용암재로 이루어진 사막과 밀림이 공존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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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위. 버진 아일랜드(British Virgin Islands) - 영국

역시 6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로 작은 섬이 나열되어 있는 장면을
하늘에서 바라보면 그 자체가 장관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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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위. 그리스 제도(Greek Island) - 그리스

그리스 본토와 크레타섬에 둘러쌓인 지역을 일컫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산토리니로 한국에서도 이미 유명한 곳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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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위. 바운더리 워터스(Boundary Waters) - 미국

미국 미네소타주에 위치한 곳으로 수천개의 호수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아직 사람의 흔적이 없는 원시지역으로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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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위. 아말피 해변(Amalfi Coast) - 이탈리아

이탈리아 나폴리의 남쪽 해변으로 수직으로 깎아지른 절벽과
지중해가아름답게 어우러지는 천해의 지상낙원이라고 합니다.



Colorful Exotic Bi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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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가 60년 만에 꽃이 피었다
대나무도 꽃이 ?
이렇게 예쁜 꽃이....

 

 

60년만에 피는 대나무 꽃이라고 합니다.
보는 사람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전설의 꽃입니다.

 

오늘
이 메일을 받는 모든분에게
행운이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받은메일 중에서 -

 

메일을 받는 즉시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들에게 이 메일을 보내세요~
이 꽃을 받는 분은 행운이 찾아올겁니다 !

 

 

 

 

받은 글입니다!^^ 



 

 



지인이 보내어 주신 동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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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하루는 이런 마음으로... 

     

    보다 더 낮은 사랑으로 보다 더 깊고 넓은 사랑을

    오늘 이 하루에 기도한다.

     

    다스릴수 없는 분노를 삭키고

    다스리지 못한 억제를 잠재우며

    넓은 가슴으로 이해하고

    나 보다 먼저 상대를 헤아려 주려한다.

    나팔꽃 같은 마음으로..

    비난보다 칭찬을

    미움보다 사랑을

    찾아 내어 하늘 향해 외친다.

    많은 사람들이 이젠 고운 말로
    이쁜소리를 만들어

    나팔꽃에 담아서 외쳐주기를...

    사랑은 사랑으로 울려펴지고

    비난은 비난으로 번져가고

    세상은 내가 뱉어내는 소리로 한바탕 축제가 된다.


    하루는즐거울 수도

    슬플수도 힘들 수도..

    내가 속삭이는 소리로내가 만들어가는 축제다.

     

    이쁜 마음들이 모여서

     이쁜 생각들이 품어내는 소리는 곱다.

    한 번 두 번 생각으로 걸러내어 나오는 소리는 섬세하다.

    다칠까 상처받을까..

    남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소리는

    오늘 하루도 부딪침이 없을 순조로운 흐름이다.

    낮은 사랑으로...

    깊은생각으로...

    넓은 마음만 만들어 준다면...

     

    (옮긴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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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더 핑크의 회심과 회심 후의 초기의 영적인 삶 (이얀 머레이) 

 

 

아더 핑크가 강신술에 발을 깊이 들여놓은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입문 과정에서 중도 하차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불과 20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속한 주의 가장 두드러진 연설자 중의 하나였다. 
사실 그는 자신을 강신술계의 주도적 역할을 맡은 떠오르는 별들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그의 부모님이 이런 사실을 알고 나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매일 아들이 집에 들어와서 자신의 이층방으로 올라갈 때마다 성경 구절 하나씩을 일러주는 것이었다. 
대개 그런 모습은 핑크가 급히 자기 침실로 들어가려고 아버지를 지나칠 때 핑크의 귀에 그냥 성경말씀이 들리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평소 때와 다름없이 핑크는 아들의 귀가를 기다리는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그를 지나쳐 자신의 침실로 올라가려던 중 늘 그렇듯이 그의 부친이 일러주는 성경 말씀을 듣게 되었다. 
그 말씀은 잠언 14:12 말씀인,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이었다. 
그는 바로 그 주간의 모임에서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이 말씀이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급기야 연설 준비를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머리를 식히고자 욕실에 들어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다. 
그러나 그래도 이 성경 말씀은 떠나지 않았다. 무슨 일을, 무슨 생각을 하든 "어떤 길은..."의 말씀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급기야 무릎을 꿇어 거의 3일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하나님께 울부짖기 시작하였다. 아래층에서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그의 부모도 함께 기도하였다. 3일 후 핑크는 자신의 침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구원이 없으며, 참 만족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아들이 나오자마자 아버지는 외쳤다.
"하나님께 찬양을! 내 아들이 구원받았으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의 직접적인 역사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핑크가 그 주간에 해야 할 연설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강신술 사교 모임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곳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유일성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여기 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고, 사람들은 핑크가 미치기 시작했다고 요동하였다. 급기야 갑작스런 휴식시간을 갖게 되었고, 핑크는 그 후로 강신술과 결별을 선언하였다. 강신술 모임의 사람들도 그를 멀리 하였다.

 

핑크는 훗날 이렇게 고백하였다. 
"영들과 교류한 메시지는 상당수가 진짜이다. 그러나 그 영들은 실제로 죽은 자들의 영이 아니라 그런 것처럼 가장한 악한 영들이다. 또 나는 강신술을 떠나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왔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했다." 
그러나 핑크는 언제나 자신의 회심 체험을 말하기를 주저하였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의 체험을 기준으로 삼아서 "회심의 체험은 반드시 이런 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까봐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회심과 동시에 목회로의 소명을 받았다. 이런 강신술로 인한 위기 후, 2년 동안 핑크는 직장을 계속 다녔다. 그러나 이제 그의 침대에는 늘 성경이 펼쳐져 있게 되었다.

 

매일 성경을 열장씩 읽었고, 열장씩 읽는 성경에 한 주간을 지내면서 ‘10분이나 10분 이상’ 그가 특별히 연구하려는 한 개의 특정 본문을 추가하였다. 
이에 덧붙여 그는 매일의 묵상을 위하여 책갈피 같은 종이에 특정 구절을 지니고 다니면서 휴식시간에는 하나님께 ‘이 말씀의 영적인 뜻을 알게 해주시고 이 말씀이 나의 마음에 새겨지기를’ 간구하면서 보려고 힘썼다.

 

이런 훈련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하면서 그는 훗날, ‘필자는 시내 전차에서 에베소서의 전체 내용을 한 번에 한 구절로 요약하였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직장을 쉬는 날이면, 새로운 기쁨으로 성경을 보는데 10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성경 연구의 의도는 그의 일생이 복음 전하는 것에 있다는 확신과 맞물려 있었다.

 

그의 초기 생애 가운데 1934년 기록된 것을 짧게 요약하여 소개해본다. 그는 다음과 같이 하였다. 
‘나는 1886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16살에 직장에 들어갔고 그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주목할 만한 성공을 허락하셨다. 1908년은, 하나님께서 나를 나의 침실에서 구원하신 해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나는 그분이 나를 당신의 종으로 부르셨음을 알게 되었다.’ 
같은 해, 그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에서 처음으로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 
그는 그 해(1908년)를 1948년에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필자가 첫 번째 설교를 한지도 40년이 되었다. 그 때 처음 전한 본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롬 1:16)였다. 그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700명이 넘었다. 우리가 공석에서 처음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그 때는 아주 진땀을 흘렸었다. 특별하게는 노팅엄의 우리집에서 그러하였다.’ 

 

이언 머레이의 "아더 핑크의 생애", 회심과 회심 후 초기의 영적생활 중에서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생명나무 쉼터

 


 
    나는 압니다 최송연
    지금 내가 당하는 이 모진 고난이 어디로부터인지 나의 작은 머리로 이해되지 않아 그대로 땅에 주저앉아 펑펑 소리를 내어 울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나는 압니다 비가 온 후의 햇빛이 더 찬란하고 꽃샘추위가 지나간 후에야 새싹은 언 땅을 뚫을 수 있다는 것을...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이 억울한 말들이 어디로부터인지 나의 작은 가슴으로 이해되지 않아 앞에서 뛰고 뒤에서 달리며 열 배로 되돌려 갚아주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나는 압니다 그 모진 말들 속에는 주님 사랑의 음성도 섞여 있어 어리석은 나를 좀 더 성장하라 재촉하고 계신다는 것을... 고난과 역경이 올 때 이해 못 할 일이 생길 때 억울한 말을 들을 때 낙심하거나 미워하거나 원망하기 보다 그 속에 숨겨진 주의 뜻을 부지런히 찾고 구하는 자 되기를 원하는 것은... 나는 압니다 이해 못 할 흑암 중에서도 주의 기이한 사랑이 나를 덮어 빛을 볼 수 있도록 도우신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눈물 없이는 성숙의 길도 없다시며 연약한 나를 순간순간 다독이며 이끌어 주고 계신다는 것을...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욥 23 :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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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인간론  

                                                               - 박일민(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사람은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또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좋은 사람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매우 적다. 왜 우리는 기대와 현실에는 이처럼 많은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죄가 사람의 본성과 운명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과 관련하여서, 죄와 죄의 해결 문제에 최대의 관심을 보인다. 이제 성경의 최대 관심사인 죄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죄의 개념
죄는 특정한 사람들만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죄에 대한 관심사가 있다. 그러나 동일한 사안을 두고 어떤 사람은 심각한 죄라고 강력하게 비난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죄가 아니라고 태연해 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는 누가 보기에도 분명한 죄를 범하고도 태연해 하거나, 더 큰 악을 막기 위해 부득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죄를 정당화하려는 경우까지도 있다. 각자의 처한 상황이나 이해 관계에 따라서 다양하게 죄를 이해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결과다. 그러나 죄에 대한 성경의 기준은 단 하나다. 그 기준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내용이 고려된다.  
  
죄는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 성경은 죄를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죄로 여겨지지 않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로 간주되는 일이 많다. 그래서 시인은 고백하기를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상대적인 관점에서만 죄를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죄"라고 한다(롬 14:23).
  
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위반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생각이나 하시는 일은 다 선하다. 죄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르지 않거나, 하나님의 뜻의 표현인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래서 죄는 불법 또는 반역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죄는 도덕적인 것이다. 죄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재난이나 육체의 질병과 다르다. 자연적인 재난이나 육체적인 질병에는 의지가 개입되지 않는다. 그러나 죄는 의지와 연관이 되어 있다. 넓게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죄의 악한 영향을 입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무의식적이고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들에는 죄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거센 비바람에 집이 무너지거나, 어둠 속에서 돌에 걸려 넘어져 무릎에 상처가 난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부실공사로 집이 무너지는 것이나, 고의로 상대방을 밀어 뜨려 다치게 하는 것은 죄이다.
  
죄는 의지와 관련되어 있기에 책임을 수반한다. 의지에 따른 행동의 결과는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 사업을 게을리 하면 부도의 책임져야 한다. 공부를 게을리 하면 낙제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울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라도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죄가 져야 할 책임은 죽음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여기서 죄로 말미암은 사망이란 육체적인 사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망에는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육체적인 사망,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두절되는 영적인 사망,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내어 쫓겨나 지옥의 고통 속에서 슬피울며 이를 가는 영원한 사망이 그것이다. 죄의 책임으로서의 사망은 이 세가지 사망을 모두 포함한다.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은 생명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그러기에 다만 죄만을 생각한다. 죄에로만 더욱 깊어진다.


죄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경은 사람이 속으로 품은 생각까지도 죄로 지적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죄를 범한 것으로 여긴다(마 5:28). 겉으로 형제를 해하는 자만이 아니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한다(마 5:22). 마음으로 악한 생각을 품었지만, 실제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고 하여서 죄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악한 행동을 하기 이전의 동기부터 죄로 여겨진다. 또 아무리 선해 보이는 업적을 이루었거나 그 동기가 선했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이 잘못되어 있으면 역시 죄로 취급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사람이 가진 악한 성향마저도 죄로 여긴다. 사도 바울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고 했다. 이 말씀 속에는 사람의 감정과 육체의 기질도 죄로 취급되어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죄는 중간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죄이면서 동시에 죄가 아닌 것, 또한 죄도 선도 아닌 중간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죄이면 죄이고, 죄가 아니면 선이다. 이것은 마치 천국과 지옥 사이에 중립 지역이 없는 것과 같다. 죄인이 가야 할 곳은 오직 지옥이다. 의인이 가는 곳은 천국뿐이다. 또 다른 장소는 없다. 또 빛과 어두움 사이에 중간자가 있을 수 없는 것과도 같다. 빛이 없는 것이 어두움이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사라지고 만다.
  
2. 죄의 종류
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죄를 종류별로 나누어 보는 것이 좋다. 죄는 먼저 원죄와 자범죄(본죄)로 나누어진다.
  
1) 원죄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12)고 했다.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말이다. 이는 모두가 실제로 경험을 통해서 확인하고 있는 바다. 왜 한 사람 예외 없이 모두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사람들에게 본성적으로 죄의 쓴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쓴뿌리를 원죄라고 부른다. 이 죄를 원죄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죄는 우리들 각자가 범한 죄가 아니라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범한 죄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요, 대표자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는 온 인류에게 악영향을 미쳐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만든다. 둘째, 이 죄는 우리가 나기 전부터 선천적으로 가진 죄이기 때문이다. 원죄는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죄가 아니다. 셋째, 모든 자범죄의 원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2) 자범죄
성경에서 각 개인이 실제적으로 범한 자범죄와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는 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죄인 줄 알면서도 범한 죄가 있다(知識罪). 이 죄는 죄인 줄 모르고 범한 죄보다 죄책이 훨씬 더 가중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눅 12:47∼ 48)고 했다.
  
죄인 것을 알지 못했기에 범한 죄가 있다(無識罪). 그러나 죄인 것을 몰랐다고 해서 죄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모르고 행했다 하더라도 죄는 죄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몰랐다는 핑계가 소용없음을 깨닫고, 무엇이 죄인지를 알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
  
사람이 실수하거나 연약해서 범한 죄가 있다(過失罪, 軟弱罪). 죄인 것을 알면서도 연약하고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범한 죄이다. 연약죄도 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하고 담대하기를 힘써야 한다. 믿음의 장성한 분량은 연약죄를 얼마든지 감소시킬 수 있다.
  
죄인 것을 알면서도 고의로 범하는 죄가 있다(故犯罪).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민 15:30)고 한 말씀 중에서, 짐짓 범한 죄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 죄는 고범죄라고 불려진다. 고범죄는 연약죄에 비해서 죄책이 훨씬 더 가중된다. 사도 바울께서는 이러한 죄를 범한 사람은 그 죄가 드러날 때, 먼저 심판에 들어간다고 했다(딤전 5:24). 그러므로 다윗 임금은 고범죄를 범치 않음으로써, 큰 죄과에서 벗어나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시 19:1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속죄제물이 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용서함을 받는다. 그 용서에는 예외가 없다. 무식죄만 아니라 지식죄도 용서를 받는다. 연약죄만 아니라 고범죄도 용서를 받는다. 제아무리 주홍 같은 죄라도 다 양털같이 사함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무리 막중한 죄라도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성경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고 하는 말씀이 있다. 그래서 요한 사도께서는 그러한 죄를 범한 자를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그러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란 과연 무엇인가?
  
3) 용서받지 못할 죄(不可赦罪)
성경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말씀하고 있는 곳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보임이라"(히 6:4∼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한 자를 소멸할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한 것을 보거든 구하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이 구절들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성령훼방죄, 다시 타락한 죄, 짐짓 범한 죄, 사망에 이르는 죄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표현들을 잘 비교해 보면 무엇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지가 밝혀진다.
  
"한 번 비췸을 얻고 …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라는 표현과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전혀 기독교 밖에 있는 자들의 죄가 아니다. 상당한 체험과 지식을 가진 자들이 범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또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는 표현과 "성령을 거역하면"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성령의 역사와 관련이 되어 있다. 또 "짐짓 죄를 범한 즉"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고의적인 죄이다. 그리고 "구하라 하지 않노라"하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회개와 무관한 죄이다. 따라서 용서받지 못할 죄란, 실상은 구원을 받지 못했으면서도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인 줄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그 역사를 방해하면서,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죄라고 할 수가 있다.
  
대부분의 경건한 성도들에게는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상당히 심각하다고 여겨지는 죄를 범하고 나면, 이것이 바로 혹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닌가 하여서 고민을 한다. 경건의 성숙도가 더한 사람일수록 작은 죄에도 불구하고 그 고민은 더 심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용서받아지지 못할 죄가 없다. 그러므로 죄가 생각나거든 고민하지 말고 즉시 회개를 해야 한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함부로 어떤 특정한 행위를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정죄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성급한 생각 때문에 죄인을 회개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방해하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주님을 맹세코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도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셨다. 뿐만 아니라 회개한 베드로는 범죄하기 이전보다 더 신중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졌다.
  
3. 죄의 판단기준과 율법
성경은 죄를 불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법이 없으면 불법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죄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설명은 죄를 가능하게 하는 법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1) 율법의 개념
나라들마다 법을 가지고 있다. 날이 갈수록 그 법은 더 많아지고 있다. 또 국제간에도 법이 생겨난다. 그런데 법은 그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강제력을 부여하여서 그 의지를 반드시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삼고 있다. 하나님의 법도 이와 같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반드시 그 의지가 반영되도록 요구한다. 따라서 율법의 요구에 대한 불순종은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불순종이 된다. 이 불순종이 바로 죄다. 성경은 빈번하게 죄를 불법, 법에 어긋남, 빗나감 등으로 표현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2) 율법의 종류
하나님의 율법에는 문서의 형태로 기록되지 않은 불문법(不文法)과 문서의 형태로 기록되어진 성문법(成文法)이 있다.
  
불문법에는 자연법과 도덕법이 있다. 자연법이란 자연계나 사람의 본성 속에 주어져 있는 자연의 법칙을 말한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은 기쁨의 단을 거둔다. 좀더 졸고 자자고 하는 사람에게는 빈궁이 찾아든다. 열심히 연구하고 지능을 개발한 사람은 많은 지식을 깨닫게 된다. 이 모두가 자연법에 해당된다. 도덕법이란 사람의 양심에 새겨진 법을 가르킨다. 사람의 양심에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잘 반영되어 있다. 자연이나 양심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죄가 된다.
  
성문법은 문서, 즉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법을 가리킨다. 성경은 그 전체가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율법 형식을 가진 부분만을 제한해서 본다면, 하나님의 법은 세 가지로 구분이 되어진다. 기본법과 의식법과 시민법이다. 기본법은 십계명을 가리킨다. 십계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이다. 십계명은 그 공포나 보관 방법이 다른 법들과는 달리 매우 독특했다. 그래서 황금률이라고도 부르게 된다. 우리는 십계명을 대할 때, 단지 문자적으로만 대할 것이 아니라 최소한 다음 몇 가지 원리들에 더 유의를 해야 한다.
  
순서의 원리: 먼저 주신 계명은 나중에 주신 계명보다 우선해서 지켜져야 한다. 만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지만, 이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 장애가 되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일은 당연히 없어야 한다. 그러나 죄악된 세상에서는 가끔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때 고려되는 것이 순서의 원리이다.
  
대표의 원리: 십계명은 문자대로 지켜야 한다. 그러나 그 문자 안에는 대표의 원리가 들어 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아버지와 어머니만을 공경하라는 말이 아니다. 부모라는 말에는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삼촌, 고모, 이모 등 웃어른을 대표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도 살인의 결과만 금한 것이 아니다. 살인 계획이나 분노, 미움, 모욕 등의 감정, 그리고 살인의 수단이나 과정까지 금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칭의 원리: 십계명은 그 문자적인 내용과 대칭 되는 의미까지를 고려해서 지켜야 한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은 안식일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에는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라는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네 이웃을 해하지 말라는 계명에도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칭적 의미인 네 이웃을 내몸 같이 사랑하라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살인이나 거짓 증거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거나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된다.
  
성문법에는 십계명 이외에도 의식법이 있다. 의식법은 제사의 종류, 절차, 재료, 방식, 출애굽 당시의 진행 방식, 위치, 역할, 할례와 유월절 의식, 절기를 지키는 시기나 절차 등에 관한 법이다. 이 모든 의식법들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의식법을 지키지 않으면 죄가 된다. 의식법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말미암는 사건들을 예표한다. 따라서 의식법은 실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되어졌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금의 우리는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이 법을 지키고 있다(히 8:6∼7).
  
시민법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회 생활에서 지켜야 했던 법, 즉 재산의 분배나 가정 생활이나 범죄의 형량, 또는 병든 자의 격리와 회복자의 수용 절차 등에 관한 법이다. 시민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법에도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법의 위반도 역시 죄가 된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이 다른 형편에까지 시민법을 문자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따라서 그 원리만을 살리는 것으로도 족할 것이다.
  
3) 율법의 기능과 역할
율법은 은혜 아래 있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종교 개혁자들 이후로 다음 세 가지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
  
첫째,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보여준다.
율법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또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 가시는지 하는 것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 원하면, 그리고 하나님의 솜씨인 피조물들 또는 하나님이 일하신 흔적인 역사를 바로 알기 원하면, 율법을 깊이 연구해야 한다.
  
둘째,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준다.
율법은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된다. 그리고 죄의 결과가 죽음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해준다. 또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의 어리석음도 보여준다. 동시에 율법은 무엇이 우리의 살 길인지를 찾게 해준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인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부른다(갈 3:24).
  

셋째, 율법은 구원받는 자의 삶의 표준이 되어 준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이제 사나 죽으나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인가. 율법은 바로 그 방법을 제시해 준다. 그러므로 율법은 은혜를 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은혜의 완성이 된다.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자원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여서, 율법과 상관이 없이 우리의 마음대로 살아도 무방하다고 하는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심령을 찾으신다. 상한 심령이 되기 위해서는 죄를 알아야 한다. 죄를 알기 위해서는 율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 앎은 단순히 지식적인 이해나 암기가 아니다. 가슴을 찢는 앎이다. 우리에게는 늘 다윗과 같은 기도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은 찢어진 가슴을 싸 메시고, 애통하는 마음을 복되게 여겨서 위로와 평안의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마 5:4).  

 

출처: 개혁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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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견인은 우리의 순종과 위로와 관련되어 있다/ 존 오웬


성경이 성도의 견인과 관련하여 말하는 것은 우리의 순종과 위로와 관련되어 있다. 물론 위로보다는 순종과 더 깊은 관련이 있는데, 이는 순종이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계시된 모든 진리를 믿음과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과 은총의 계시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디도서 1:1에서 바울은 우리를 경건함으로 인도하는 진리의 지식에 대하여 말한다. 경건에 따른 말씀 곧 계시된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거룩함으로 인도한다(살전4:3-5). 예수님이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요17:1)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성경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모든 복음 진리는 고후 3:18이 말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런 변화가 삶 속에 없다면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였다고 할 수 없다. 바울은 인간이 뭐라고 주장할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딛2:11-12) 살게 한다고 밝혔다.

 

어떤 진리는 다른 진리들보다 우리를 더 깊은 거룩함에 이르게 하는데,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렇다. 고후 5:14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고 했다. 다른 진리들도 우리를 효과적으로 설득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강권한다.

 

성경은 마음의 거룩함을 가져다주는 믿음, 사랑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 이르게 하는 교리에 큰 중점을 둔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인간의 지혜에 의존하기보다는 경건에 이르게 하는 성경의 진리들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인간의 견해는 쉽게 달라지므로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윗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40:8)라고 선포하며 복음에 대한 순종을 인지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연습하기를 권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12:1-2).

 

- 존 오웬, 『성도의 견인』, pp 128-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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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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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10:1-3]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엘람 자손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에스라 일행은 겨우 1,700명 남짓 되는 숫자였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1차 귀환 때의 약 5만명에 비하여 훨씬 적은 수였지만 그들이 운반해 온 금, 은 기명, 하나님의 전에 드릴 금은보화는 훨씬 더 많았습니다. 스룹바벨 때에 비하여 가치로 따져 6~7 배나, 많았습니다. 따라서 수개월이 걸리는 노정에서 그들이 가진 금은보화를 노리는 도적과 대적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호위군대를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능히 그들을 지켜주실 전능하신 구원자 하나님의 손을 두고 사왕에게 그러한 요청을 하는 것을 부끄러운 일이라 하였습니다. 에스라는 금식을 선포하고 겸비하여 하나님의 보호를 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세한 이야기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노중에서 도적들과 대적들로부터 그들을 보호하여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토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금은보화를 하나님의 전 제사장들에게 인계하고 하나님께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고 난 다음 심각한 문제가 대두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유대 땅의 이방족속의 풍습을 따르고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과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를 삼아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 족속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에스라는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았다가 저녁제사 드릴 때가 되어 하나님 앞에 손을 들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고 기도하며, 또 엎드려 울며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많은 무리가 이 모습을 보고 함께 통곡합니다.

우리는 이 일을 놓고 단순히 에스라와 백성들이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기도했다고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던 것은 가나안 족속의 풍속을 따르고 혼합하여 우상숭배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를 베푸시어 그들의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부터 시작하여 백성들이 통째로 혼합되었습니다. 이방여인과 혼합하였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부패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패는 하나님의 버리심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부패되면 아무 방법이 없고 더 이상 긍휼도 자비도 소망도 없습니다. 절망입니다. 그들은 절망과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 때 스가냐가 일어나 말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 ‘오히려’라는 번역이 좀 이상합니다. ‘오히려’가 아니라 ‘아직’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아직 이스라엘에게 살아날 길이 남아있다. 그것은 지금이라도 이방여인 아내와 소생을 다 내보내고 하나님의 율법대로 하는 것이다.” 살아날 방법은 전체가 썩기 전에 부패부위를 과감히 도려내는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쫓은 것처럼, 범죄한 한쪽 눈과 한쪽 발을 뽑고 찍어버리는 것 같은 처절한 고통의 단절만이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몇 달 동안 조사를 하고 112명에 달하는 이방여인과 혼인한 자들의 명단을 발표하고 기록하게 됩니다. 그렇게 그들은 모든 이방여인들과 그 소생을 내보내는 결단을 행하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는다면, 오늘날의 시각으로 본다면 에스라서에 기록된 이방여인들을 쫓아내는 기사는 어처구니없는 인권유린이요 무책임한 가족방기행위입니다. 특히 여성권익운동가들이 용납 못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무서운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십자가 아래로 불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것만으로 확고한 구원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돌아온 것만으로 끝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아래로 돌아와 엎드려 울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해도 그 믿음이 혼합되고 부패하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혹 우리에게는 과감히 도려내어야 할 죄악과 혼합과 타협의 부패부위는 없을까요?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신부 된 우리에게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부패하게 만들려는 너무나 무섭고 두려운 미혹과 혼합과 타협과 불순종이 소용돌이치는 어둡고 악한 세대입니다. 부패하면 안 됩니다! 부패하면 죽음입니다. 고통스럽더라도 도려내어야 할 것은 도려내어야 합니다.

믿을 때부터 성령 인도함 받는다  

박영돈 교수 / 고신대학교

남포교회(박영선 목사) 설립 20주년 기념 학술 축제가 ‘구원 그 이후: 성화의 은혜’라는 주제로 지난 3월 7일 남포교회에서 열렸다. 박영선 목사의 ‘나의 목회에서 구원과 성화’를 비롯해서 Bryan Chapell 카버넌트신학교 총장, 김영재 교수, 김정우 교수, 변종길 교수, 박영실 교수, 이수영 목사, 오덕교 교수, 김병훈 교수, 박영돈 교수 등이 발제자로 참석했다. 이중 박영돈 교수의 ‘오늘의 구원과 성화’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성화의 성령론적 다이내믹

1) ‘제 2의 축복’ 성화론
개신교 안에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얻는 것을 성령충만과 함께 회심 이후의 획기적인 체험으로 강조하는 가르침이 널리 퍼져있다. 이러한 획기적 성화에 대한 견해는 웨슬리의 가르침으로부터 그 일차적인 영감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웨슬리는 칭의와 회심 후에 성화를 획기적으로 체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를 즉각적, 또는 온전한 성화라고 칭했다.

웨슬리의 뒤를 이어 일어난 성결운동과 ‘더 풍성한 삶 운동’에서도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여 성화를 이차적이고 획기적인 경험으로 보았다. 그들은 대개 죄책과 형벌에서의 구원과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구분했다. 신자는 칭의를 통해서 죄 용서함을 받고 죄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지만, 그 후에 획기적인 성화의 은혜를 체험해야만 실제적인 죄의 세력과 오염에서 자유하게 되어 거룩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 사이에는 사람에 따라 길거나 아니면 짧은 시간적인 간격이 존재한다. 모든 신자는 믿을 때 칭의의 은혜에 참여하나, 성화의 은혜는 대개 나중에 가서야 이차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 성화의 은혜를 받는 순간부터 신자의 삶과 사역은 그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다. 마치 물이 포도주로 변하듯이, 신자의 삶이 실패와 좌절과 신음으로 점철된 곤고한 삶에서 능력과 기쁨과 평강이 충만한 승리의 삶으로 급전환한다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의 맥을 이어온 케직 사경회(Keswick movement)에서는 이 획기적인 성화의 은혜 체험을 자주 제 2의 축복이라고 불렀다. 케직 사경회를 인도했던 마이어, 앤드류 머레이, 알 에이 토레이 같은 이들의 사역과 그들이 남긴 대중적인 경건서적을 통하여 이러한 성화론은 지금까지 많은 교인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또한 디엘 무디 같은 부흥사, 에이 비 심슨, 이에 제이 고든, 모울 같은 이들도 케직 사경회의 성화론을 전파한 이들이라고 볼 수 있다.

2) 성경적 대안
신학적인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르침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은 거룩한 삶과 능력 있는 사역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할 때만 가능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오순절 성령충만의 축복이 성화의 원동력을 제공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한다. 그리하여 성화와 오순절에 임한 성령충만 사이에 중요한 관련성이 있다는 점에 대한 신학적인 반성을 간접적으로 자극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정통신학은 성화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뿐 아니라, 성령충만이 주어진 오순절 사건과도 연결시킴으로써, 성화는 기독론적인 바탕뿐만 아니라 성령론적인 토대 위에 세워져 있으며, 예수의 은혜뿐만 아니라 성령의 다이내믹한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명료하게 밝혀주어야 한다.

리차드 개핀(Richard B. Gaffin, Jr)도 정통교회에서는 중생에 있어서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나 그 후 신자의 삶속에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실제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신자의 삶의 출발점에서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그 이후 성령은 거의 그리스도인의 체험으로부터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런 극단은 개혁주의 전통에서 가장 자주 나타났던 병폐로서 체험의 진공상태를 야기했고, 이는 결국 또 다른 극단, 즉 ‘두 번째 축복’을 주장하는 오류를 불러오게 한 것이다”(Richard B. Gaffin, Jr. “The Holy Spirit”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43:1(fall 1980): 76)

이러한 양극단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의 사역은 신앙생활의 전 과정에 걸쳐 역동적으로 계속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령으로 계속 인도함을 받는 이’, 즉 ‘성령충만한 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롬8:9, 갈5:16, 엡5:18). 에베소서 5:18에서 성령이라는 단어는 성령의 강력한 영향력과 지배 아래 산다는 비유적인 의미로 쓰였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성령의 지배와 인도함을 받는 삶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갈 5:16),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갈 5:17), “성령으로 산다”(갈 5:25)는 표현들은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말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고든 피가 지적했듯이, 성령충만이라는 용어는 이러한 말들이 의미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더욱 강렬하고 부요한 은유적 표현이다.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그 충만한 은혜와 능력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처음 믿을 때부터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이러한 성화의 기독론적-성화론적인 바탕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죄와 분리된 성결한 삶, 성령으로 충만한 삶은 회심 후 제 2의 축복을 체험할 때까지 유보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처음 믿을 때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밝혀줌으로써 웨슬리-오순절 운동의 가르침에 대한 적절한 성경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동시에 신자의 삶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 과정에 걸쳐 계속적으로 성령충만을 누리는 삶으로 봄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주어졌다는 것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로 인해 새로운 은혜체험에 대한 추구를 위축시키는 전통적인 성화론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

 

 포도나무 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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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열매 맺는 가지에도 타락의 잔재가 있는가? / 토마스 굿윈

 

 

1) 칭의의 은혜를 분명히 알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부패한 습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비록 육신을 입고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성령을 따라 행하는 그들에게는 결코 정죄가 없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은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동시에 이 놀라운 은혜를 찬양하게 만드는 것이다. 처음에 회심하여 모든 죄짐을 그리스도에게 내놓을 때 임하는 용서는 물론 그 후에 다시 타락하여 넘어질 때마다 일으켜 세우고 새롭게 회복시키시는 무한한 은혜를 찬양하게 만드는 것이다. 날마다 빚진 삶을 사는 우리가 언제나 손을 내밀어 용서하시는 은혜와 사랑,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영원히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를 향해 끝없이 베푸시는 그 은혜와 한없는 사랑을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 견인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하여이다.

우리의 견인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달려 있다. 벧전1:5은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으로 철통같은 보호하심을 받는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이렇게 강력한 보호막이 필요한 것은 곁길로 빠질 수 있는 중대하고도 분명한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위험에 빠지게 하는 것이 바로 ‘타락의 잔재’이다. 그 타락의 잔재가 아직도 우리의 영과 싸워 우리를 넘어 뜨리려고 기를 쓰고 달려드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완전하지 않고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그분의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무리 자주 좌절하고 넘어질지라도 여전히 그들 안에는 ‘하나님의 씨’(요일3:9)가 거한다. 그것이 복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3) 더욱 영광스럽고도 진정한 성도의 승리를 위하여이다.

만일 우리가 회심하는 순간에 즉시 모든 죄가 제거된다면, 마지막 날에 마귀도 크게 당황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승리도 그처럼 극적이거나 영광스럽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상에 존재하는 그분의 교회를 세워 나가실 때 그것을 대적하는 외부의 세력이 훨씬 더 크고 집요하더라도 교회를 굳게 세우시고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시는 것같이’(시110:2), 동일하게 신자들의 마음을 다스리신다. 비록 그들 안에서 은혜는 희미한 불빛처럼 흔적만 남아 있는 반면 부패성은 그것을 가득히 둘러싸고 있는 연기와 습기 같을지라도, 세찬 비바람 속에서도 소켓 속의 전등처럼 은혜가 마침내 환한 빛을 비추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승리이다.

  4) 성도를 거룩하고도 겸손하게 만드시기 위하여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아 있는 부패성을 통해 더욱 큰 은혜를 주시고 마귀를 부끄럽게 만드실 뿐만 아니라 성도를 향한 거룩한 목적을 이루어가신다. 첫째, 하나님은 남아 있는 부패성을 통해 성도들을 영적 자만으로부터 지키신다. 처음부터 풍성하고도 온전한 은혜를 받은 천사들도 타락하고 말았다. 성경은 그들에 대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났으며’(유1:6), 교만으로 인하여 정죄를 받았다고 말한다(딤전3:6). 하물며 죄로 가득했다가 이제야 온전하게 된 인생에게 교만의 문제는 얼마나 심각한 것이겠는가?

  우리에게 전가된 의는 우리를 온전히 의롭게 하셨기 때문에 그 안에는 그러한 위험이 없다. 이 의는 전적으로 우리 밖에서 들어온 것이므로 쉽게 자만할 수도 없다. 문제는, 내부에서 진행되는 역사와 관련하여 우리에게는 자신을 과대평가하며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습성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부패성이야말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적절한 수단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 사람들을 모두 좇아내지 않고 남겨 두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겸손하게 만드셨다. 이 땅에서 죄로 말미암아 철저하게 겸손해진다면, 성도가 천국으로 가는 길에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다. 죄만큼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내재적 은혜를 위해 그분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신다. 우리는 받은 은혜를 얼마나 빨리 잊어버리는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본성에는 선한 것이 없다.

  셋째, 하나님은 남아 있는 부패성을 통해 우리를 낮추심으로써 자기 부인의 기회를 얻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러한 경험 없이 지극히 많은 일을 하는 사람들보다는 자신을 부인하는 사람을 더욱 기쁘게 받으신다. 그들에게 이러한 은혜에 대한 ‘백배의 축복’의 위대한 약속이 주어진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은혜이다.

  자신의 부패성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범죄한 자들에 대해 관용과 자비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6:1).

  하나님은 참열매 맺는 가지를 결코 제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열매를 맺는 참된 가지가 비록 여전히 부패성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결코 그것들을 제거하거나 자르지 않으신다. 깨끗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결국 열매 맺지 않는 가지를 제거하신다.

그들은 버림받고 마르고 모아서 불에 던져 사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성도 여러분, 참으로 열매 맺는 자기가 되시라.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꺽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11:20). 그러므로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한다. 하나님을 위해 모든 일을 하며, 그분을 여러분의 목적으로 삼고서 날마다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리고 여러분의 열매가 더욱 신령하게 자라야 한다. 외적인 고백을 통해 위를 향해 자라는 만큼 내적인 거룩을 통해 아래로 더욱 깊이 뿌리내리고, 계속해서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 토마스 굿윈, 『그리스도인의 성장』, pp 48-74

 

 

출처: 청교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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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동의 마귀론은 왜 이단인가?

제Ⅰ장
계시론에 나타난 베뢰아의 이단사상

 필자는 이단논쟁을 계시론에서 시작해서 계시론에서 끝내고 싶다. 신앙생활 자체가 말씀에서 시작하고 말씀에서 완성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Ⅰ. 성경은 문틈으로 들어오는 불빛에 불과하다는 베뢰아.
 이단이 성경을 보는 자세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성경계시만 충분한 계시로 인정하는 이단이요, 둘째는 성경계시 외에 이와 대등한 또는 이상의 자기계시를 가진 이단이다. 전자는 오직 성경을 그릇되게 해석함으로 이단이 된 자들인데, 세분하자면 표면적으로는 성경만 계시로 인정하면서 실질적으로 다른 계시를 가지고 있는 이단은 이에서 구별되어야 한다. 그런데 분명히 자기계시를 가지고 있는 이단들마저도 가능한 성경만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려한다.

 실례를 들어보자. 통일교인에게 원리강론은 성경 외의 계시오, 성경 위의 계시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표면적으로 성경을 경전으로 받고 있으며 원리강론은 성경에 대한 주석서라고 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이단은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다.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있고 다른 손에는 또 다른 계시를 들고 있다. 또한 한 손으로는 성경으로 강조하고 또 다른 손으로는 성경을 경시하고 부정한다.

 이제 베뢰아의 계시론이 위의 사상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자.
 김기동 씨는 한편으로는 성경을 대단히 강조한다. 1년에 성경을 42번 통독했다고 하고 61년에는 75독, 72년에는 108독 했다고 한다. 그가 성경을 강조하는 면을 먼저 살펴보자.

 "성경은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을 충분히 갖게해주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가 우리에게 있음을 뚜렷이 확신시켜 주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압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많은 우리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사망 권세로부터 구원했음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우리에게 믿음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치며 믿음의 모든 능력을 보증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김기동, 영원한 삶, 서울, 1982년, p.125).

 성경은 믿음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친다고 했다. 성경을 모르면 예수를 모른다고까지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알고 성령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알아야 한다. 누구든지 성경을 모르면 예수를 모르고, 예수를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며, 하나님을 모르면 성령 또한 모른다"(김기동, 성령을 알자, 서울, 1986, 서문에서).

 이제 김씨의 다른 손을 보자. 한 손으로 강조한 성경이 무엇에 의해 무너지는지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이제 성경으로는 예수님을 다 알지 못한다는 말과 성경은 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과 같다는 말에 유의하자.

 "성경도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는 이들이 느낀 글들을 모은 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보고 과거에 이런 일들이 있었구나하고 깨닫게 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성경대로 살리라 하고 성경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성경기록의 좁은 그릇 안에서만 머물고 있기에 이보다 더 큰 많은 능력들을 경험하지 못하고 지나갑니다. 성령의 역사는 이보다도 더욱 많습니다. 성경에도 이미 밝혔듯이(요 21:25) 성령의 역사를 다 기록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록되었으나 성도들의 부활은 아직 남았습니다. 현대의학의 고민이고 큰 문제인 암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없으나 이에 대한 성령의 역사는 성경의 제한을 받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성경보다 풍부하고 풍성합니다. …성령의 활동은 성경의 테두리를 초월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 성경이란 아침 햇살이 문틈으로 새어 들어옴 같이 하나님의 모든 성품과 그 능력과 역사 가운데서 지극히 적은 부분이 비추인 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 성경으로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 알지 못합니다. 성령으로 더욱 알고 그 날에 가서 그를 더욱 알고 영원히 살면서 영원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심히 따지기보다 성령을 제한하지 않는 것이 더욱 옳습니다."(김기동, 영원한 관계, 서울, 1983, pp.68-69).

 성경에 대하여 말할 때는 성경이 강조되나 성령의 역사에 대해 말할 때는 성령을 강조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성경의 가치를 경시하고 있다. 성경의 좁은 그릇 안에 머물면 더 큰 능력들을(성경을 넘어서는) 경험하지 못한다는 말이 그렇고, 성령의 역사는 성경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 그렇고, 성경이란 아침 햇살이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것 같다는 말이 그렇고, 현재 성경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 알지 못한다는 말이 그렇다.

 이같은 말은 사실 성경과 성령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며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사역까지 오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말처럼 성령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자신의 체험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김씨는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을 표면적으로는 인정하는 것 같이 보인다. 즉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이 자신이 체험한 성령의 역사와 모순될 수 없고 성경과 다른 성령의 역사가 있을 수 없음을 원칙론적으로 인정하는 것같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현재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는 성경을 통해 역사하신 성령의 역사보다는 그 폭이 넓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구태여 그의 말로 꼬집자면 성경을 통한 성령의 역사는 문틈으로 들어오는 불빛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성경에만 매여 있으면 문틈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성령의 빛밖에 경험할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성경이 믿음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과는 완전히 모순되는 말이다.

 왜 이런 주장을 하게 되는가? 한마디로 그의 체험 때문이다. 그의 체험과 성경의 관계를 찾지 못해서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강조하는 것 같으나 경험의 문제를 말할 때는(자신의 경험이 성령의 역사라고 믿고있기 때문에) 성경의 능력과 가치를 제한해야 하고 심지어 성경으로 성경을 폐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경험주의요 신비주의의 길이다.

 성경을 66권으로 제한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러나 성경 기자들이 성경을 기록해서 성경이 아니요 영감으로 기록된 것만 성경이다. 바울은 고린도서 외에 개인적인 편지를 고린도에 써 보낸 일이 있으나 영감된 글이 아니었다(고전 5:9).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성경을 66권으로 제한하셨을까? 왜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 사복음서는 침묵하고 있을까? 왜 세상에 둘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예수님의 행적(요 21:25)을 기록하지 않으셨을까? 왜 사복음서는 헤아릴 수 없을 예수님의 기적들을 35건으로 제한하여 기록했을까? 더욱이 왜 성경은 귀신에 대해 많은 부분을 침묵하고 있을까?

 김씨의 말처럼 마귀를 모르면 예수를 모른다면 정녕 성경은 마귀에 대해 더 정확하고 확실한 지식들을 전해 주었어야 했을 터인데 왜 그렇지 않을까? 김기동 씨의 말처럼 66권 성경으로조차 어떤 경험을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따지게 되면 성령을 제한하는 것이 된다(영원한 관계, p.69)면 어떻게 우리는 성경 속에서 예수를 알고 예수를 믿을 수 있을까?

 더욱이 김씨의 귀신론과 같은 교리는 교회사에 없었고 예수를 아는데 마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구원론을 주장한 초대교회 교부는 한 사람도 없었는데 그들은 어떻게 예수를 알고 믿었을까? 김씨의 말처럼 기독교 2,000년 역사에 이 새로운 역사인 베뢰아 운동은 왜 이제 나타났어야 했을까? 그렇다면 김씨의 마귀론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불빛보다 더 밝은 성경 밖의 계시로 보아야 할까? 베뢰아의 가르침은 과연 성령을 제한하지 않는 성경 위의 계시일까?

 예컨대 성경은 천국과 지옥의 존재는 확실히 밝히고 있지만 우리가 더 알고 싶은 많은 부분을 침묵하고 있다. 그렇다면 천국지옥 계시를 위해 누구의 경험을 첨가시켜야 할까? 「내가 본 천국」의 저자 펄시 콜레의 경험일까? 「다가오는 미레의 저자 이장림 씨의 경험일까?

 김씨가 계시론에서 이단의 뚜껑을 열게된 것은 자기 경험을 성경과 일치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이다. 그는 성경은 해석을 하면 안된다고 하는 기상천외의 자가당착적 말을 하고 있지만(마귀론 상, p.10) 그는 자기경험의 합리화를 위해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그릇 해석하게 된 것이다. 그가 성서란 가늠자를 통해 경험이란 가늠쇠와 맞추어 총을 쏘면 목표물에  맞는다는 도식(Ibid., p.10)은 얼핏 보기에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그릇된 도식이다. 성서는 모든 경험을 비판할 수 있는 완전한 진리이다. 경험을 통해서만 진리를 보여주는 불완전한 진리가 아니다. 성서는 그것 자체가 진리임은 하나님은 우리가 경험하지 않아도 하나님이심과같은 이치이다.

 여기까지에 김씨가 계시론에서 보인 이단사상은 그를 옹호하는 다른 신학적 기준에 의해 반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경험을 나타내고 그것을 성경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그의 시도는 피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이단사상을 낳게 되었다.

Ⅱ. 김씨의 설교도 성서적 가치를 지닌다는 베뢰아

 김씨는 성경과 성서를 구분하다. 성경은 가감할 수 없는 것인데 이는 계시이기 때문이요, 성서는 가감할 수 있는데 이는 증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경은 율법과 복음인데 율법은 모세오경이요 복음은 공관복음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즉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이기, 민수기, 신명기)과 공관복음(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의 여덟 권은 성경으로 가감할 수 없으나 나머지 58권은 가감할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우리의 간증이나 설교도 먼 훗날 증거로서 성서가 될 수 있다는 망령된 말을 한다. 이는 그의 테이프 24-1에 잘 나타나 있다. 직접 인용해 보자. 말로된 것을 그대로 옮기면 불필요한 말이 많기 때문에 수식어는 생략했으며 줄인 말은 괄호 속에 넣었다.

 "신의 계획을 가리켜 경륜이라고 합니다. 이는 피조물과 의논없이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신적 작정이라 합니다. 이는 피조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요? 율법을 가리켜 성경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인간에게 계시하시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기록한 책을 율법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직접 돌판에다 이렇게 쓰셨지요? 율법 대개 구약에서는 모세오경이라고 하지요. 오경 자체가 모세가 고의적으로 성경을 위해서 기록했지요?"

 "아주 좀 냉정하게 율법을 성경이라고 말하고 그 다음에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의 생애가 누가복음까지 삼복음, 공관복음을 가리켜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외에는 성경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욥기가 있다고 합시다. 또는 열왕기나, 역대기나, 다니엘서나 또는 많은 이런 책들이 있는데 욥기를 말하면 하나의 어떤 가정 이야기인데 그러나 이런 가정의 이야기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율법을 증거합니다. 율법을 시인합니다."

 "율법을 시인해 주는, 율법을 증거하는, 율법을 보호하는 그러한 글을 가리켜 성서하고 합니다. 어느 역사 이야기를 기록했는데 그 역사 이야기가 그런 역사를 통해서, 그 기록한 글이 이 내용 중에 아주 다분히 율법을 지지하는 면이 있을 때 이는 거룩한 글이 될 수 있어요. 그를 성서(라 해요)."

 "오늘날 설교집이나 간증집, 이런 것도 수백 년 후에는 성서적 가치를 가지고 있을 수 있어요. 지금도 이런 소리를 하면 욕을 먹으니까 말 못해서 그렇지요. 그것도 성서와 같은 수준에 도달할 수 있어요. 다 여러분의 설교도 마찬가지로 (그렇습니다) 이렇게 그들의 증거나 그들의 글이 성경을 지지할 수 있는, 다분히 지지하는 그러한 내용의 글을 가리켜 성서라 합니다."

 "신약에 있어서 예를 들면 사도행전이나 기타 그런 편지들이 그것은 증인들에 의해서 그 예수님의 생애를 지지하는, 시인하는 다분한 내용이 들어있다 이거야. 이를 성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이 성경은 가감할 수 없는 것이 성경이예요. 가감할 수 없어요. 예수님의 생애도 가감할 수 없어요. 영원히 가감할 수 없지요. 그것 뿐이니까."

 "그러나 성서는 확대할 수 있고 얼마든지 책을 더 늘려갈 수도 있다 이거야. 줄일 수도 있고 더 많은 책이 막 추가될 수 있다 이말이야. 성경이라고 하는 부분은 결코 가감할 수 없는 절대적인 부분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가감할 수도 있다 이거야. 책을 그보다 더 추가할 수도 있고 또는 그것을 줄여버릴 수도 있고 하는 부분을 가리키고. 그것은 인간들이 신앙으로 우리 신앙으로 증거한 것이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이야기 듣고도 더 생각하면 성경이 얼마나 간결하고도 얼마나 뚜렷한가를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비판할 필요가 있겠는가? 없다고 여긴다. 소개하는 것만으로 앞에서 보인 계시론의 숨은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자신의 체험을 강조하기 위해 성경을 약화시켰듯이, 성경과 성서를 구분하는 이단적 교리체계를 세운 것은 자신의 글을 성경적인 수준에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에서 나왔음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종교개혁자의 말을 결론으로 삼자.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멎는 곳에서 멎자.


제Ⅱ장
신론에 나타난 베뢰아의 이단사상

 김씨는 이 신론에서 이단이 되기에 필요충분한 모든 조건을 가지고 있다.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나누어 이를 증명하겠다. 베뢰아의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이다. 둘째, 베뢰아는 예수님의 양성을 모두 부인한다. 셋째, 베뢰아의 성령은 허수아비다.

Ⅰ. 베뢰아의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이다.
 그동안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김씨를 따르는 추종자들과 그를 옹호하는 자들은 삼위일체론 문제에 대단한 반발을 보였다. 워낙 김씨가 삼위일체를 강조하고 삼위일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그가 정통적인 삼위일체를 믿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김씨가 강조하고 믿는 삼위일체는 이단으로 정죄된, 시베리우스가 "동일한 본체인 세 형태"라고 주장하던 사역적 양태론인 것이다. 즉 세 분 하나님은 세 인격이 아니라 한 인격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살펴보자.

 "성부는 하나님의 본질이요, 성자는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성령은 하나님의 본영입니다. 그러니까 본질로서는 아버지요, 본체 곧 형상으로서는 아들이라 하고 영으로는 성령이라는 것입니다."(베뢰아 사람 제7권, 1988년 7월호, p.40).

 성령을 알자(베뢰아 도서출판, 1986)란 책에서, 또는 강의 테이프마다 같은 말이 수없이 반복된다.
 "성부는 하나님의 본질이시며 성자는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성령은 하나님의 본영이십니다. 본질이란, 영이라는 말이 아니고 누가 하나님이시냐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도 볼 수 없는 본질로서는 아버지 되시고, 보이는 곳에 나타나신 분, 곧 피조물들이 그를 확인하여 그의 존재가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는 본체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형상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고 영이십니다. 그래서 본영으로서 성령이 되십니다. "

 "이는 질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냐? 할 때 그 하나님은 본질을 말하는 것이기에 아버지이시며 이 분이 나타나셨을 때는 본체이시며 영으로 오셨을 때에는 본영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나 영들이 많기에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주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실 때는 아버지이시고 우리 안에 계실 때는 성령이십니다."(성령을 알자, pp. 72-74).

 위의 말은 비교적 무슨 소리인지 선명하게 이해가 안될 것이다. 단지 인격이 하나요 나타난 모양에 따라 다르다는 사역적 양태론에 그 초점을 맞추며 다음 글을 보라.

 "하나님은 곧 성령이십니다. 성령이 예수 안에 있을 때 아버지가 되십니다(요 14:8). 아버지가 성도 안에 있으면 성령이 되십니다. 예수 안에 있을 때는 성령은 아버지가 되십니다. 삼위의 각각 개체의 인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장소에 따라 불리워지는 이름이 다릅니다. 이는 곧 세모꼴을 어디서 보나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서로 각각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은 오직 하나입니다. 각각 개체의 인격으로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얼굴을 보는 방향에서 다르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과 성령이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곧 성령님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자기가 자기 안에 있는 아버지에게 기도한 것입니다."(T.P.9-2)

 이보다 완벽한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은 없다. 김씨를 옹호하는 어떤 자의 글을 보아도 김씨의 위의 주장을 양태론적 삼위일체가 아니라고 하지는 않았다. 오직 자료의 신빙성 문제에 대한 시비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테이프를 들어보면 더욱 선명한 양태론주의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하신 기도는 예수님과 하나님은 인격이 하나이기 때문에 결국 자기가 자기에게 기도한 것이라는 말은 이 때문에 나온 말이다. 절대로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은 예수님이시고 성령은 성령이시다. 김씨의 말처럼 아버지가 성도 안에 있을 때 성령이 아니라 성령은 성도 안에 있든지 성도 밖에 있든지 성령이시며, 또한 성령이 아들 안에 있을 때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든지 아버지이시다.

 그의 삼위일체론이 양태론임을 보여주는 자료는 너무나도 많다(T.P.9-2, 29-2, 성령을 알자 등). 김씨는 삼위일체를 부정하면 이단이라 하며 여호와 증인을 실례로 들어 설명했다. 김씨가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자에게 쏜 이단 정죄의 화살이 결국 자신의 심장에 박히고 만 것이다.
 
Ⅱ. 베뢰아는 예수님의 양성을 모두 부인한다.

 김씨는 표면적이고 이론적으로는 인성을 인정한다. 아니 인성만 인정할 뿐이다. 그런데 그 인성마저도 정통교회 사상과는 다르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시고 이 땅에 오신 후에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신이라고 하면 오히려 이단이라는 것이다. 정통교회는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고 사람을 살리시는 등의 기적을 통해 신성을 주장하는 반면, 김씨는 그것은 우리 인간도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김씨가 예수님을 인간으로만 주장하는 성경적 증거는 바로 요한 2서 1:7이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 그리스도니"(요이 1:7).
 먼저 김씨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신성을 살펴보자.
 테이프 9-2번의 내용을 가능한 그대로 적되 불필요한 수식어 는 생략했으며 줄임말은 괄호 속에 넣었다. 이어지는 29-2번이나 19-2번도 같은 방법으로 기록했다.

 "육체가 영이니까 영이 육체가 된 것이니까 썩지 않는 몸이니까 예수는 부활했더라도 그 상처, 못자국을 그대로 가지고 오지만 인간은 부활 때 상처(가 즉) 얼굴이 얽었든간에, 무슨 못으로 찔렸든, 칼로 긁혔든간에 상처가 없지요. 그것은 상처는 흙으로 돌아갈, 그것은 흙이 상처를 가지신 것이지 영이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오직 영원히 상처를 가지신 이는 한 분 밖에 없어요. 그분 한 분 밖에 (없어요). 영원히 영원히 한 분밖에 없다, 이 말이예요."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이 그가 바로 성령이예요. 그래서 성령이 예수 안에 있을 때는 아버지가 되시지요.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 같이 내가 너희 안에 있다. 그가 우리 안에 있을 때 또는 성령을 우리 안에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의 영은 내가 너희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 같이 '내가 너의 안에 (있다)' 할 때 바로 이 육신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이가 바로 우리 안에 있을 때,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가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내 말이 생명이요 영이라고 했는데 생명이 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와 있을 때는 이는 보혜사예요. 증거하시는 이란 말이예요. 보혜사, 변호사라. 변호사, 증거하시는 자라. 그러나 우리가 사는 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서 사는 것이예요(계 5:11)."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라고 했습니다). 내 살을 먹어 너희가 영생이 있고 내 피를 마시는 너희에게 생명이니라. 예수의 피가 성령이 아니예요. 예수의 살이 성령이 아니예요. 영신(영의 몸이란 뜻: 필자 주)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피를 흘린 것입니다. 영신입니다. 곧 예수님의 우리 안에 있는 그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곧 예수의 몸이요 말씀이시며 영이시란 말이예요. 그리스도 영, 여기에서 대개 많은 사람들이 혼돈하는 것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누구시냐? 성령이시다. 성령이 누구시냐?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에서 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되는고 하니 사람이 하나님이다.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말임 : 필자 주)."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곧 그 안에 있는 이가 하나님 아버지시다. 우리 안에 있는 이가 곧 성령이시다. 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자꾸 인격을 따로 보고 있기 때문에 성경이 아주 복잡하게 되고 (있습니다)."

 위의 "예수님은 영이 육신이 된 영신이라고 한 점과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하면 사람이 하나님이시라"는 항에 주의하며 다음 내용을 보자.
 이는 테이프 29-2의 내용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다. 하나님의 아들. 그러나 그가 육신으로 오시기 전에는 아버지 안에 있지요. 우리 어린아이가 엄마 품 속에 있는 것과 똑같지요. 똑같애요. 그래서 우리가 아들 할 때는 영적 존재로 생각하는데요(영적으로 생각지 말라는 뜻 : 필자 주) 아들 할 때는 반드시 사람으로 오신 이를 말해야 되지. 그래야 인격이 되니까. 하나님의 아들 할 때요? 육신으로 오신 이가, 사람으로 오신 이가, 사람이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사람이신 그가 육신으로 오심으로 아들의 인격이 세상에 현현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아들이신데, 성령이 아들 안에 있을 때 아버지라고,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할 때 영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반드시 사람으로 오신 이를 말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며 끝으로 다음의 결정적인 내용을 들어보자. 이는 테이프 19-2번이다.
 "예수의 생애는 신의 생애가 아니고 사람의 생애입니다. 물 위를 걸은 것은 사람이신 예수가 걸은 것입니다. 사람이 걷는 것이니 보편적인 것입니다. 무덤이 열리기 전까지 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어느 한 부분이 신이라고 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의 보편성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김씨가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면을 책으로부터 살펴보자.
 김씨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이 성령에게 존칭어를 쓰셨는데 이는 예수님은 사람 인자가 되셨기 때문에 성령을 자기와 같은 수준에서 말씀하실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성령을 말씀하실 때마다 '내가 가면 그가 오시리니' '오실 때에' '오시면' '너희와 함께 계시면'하여 존칭을 쓰셨습니다. 이처럼 주님도 성령에 대해 함부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존칭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자신보다 더 높이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기에, 곧 피조물과 함께 하시어 피조물이 수태되는 것같이 사람 몸에서 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땅에서 식물을 먹고 피곤하여 저녁에는 주무시며, 죽임을 당할 때에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 곧 인자로 계셨기에 그 동안은 성령을 자기와 같은 수준에서 말씀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일체 되시지만 인자 예수가 받은 영광보다 성령은 더 크신 영광을 받아야 할 분입니다."(성령을 알자, p.13)

 예수님이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신이 아니라는 말은 결국 신성을 부정한다는 말인데 정통신학을 한 자라면 이것만으로도 이단이 되고도 남음을 알 것이다. 교회사적 변증은 인성문제까지 취급한 후에 하도록 하고 간단한 성경적 변증을 먼저 해보자.
 도마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김씨의 말에 의하면 도마는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했으니 이단이 될 것이다. 또한 김씨에 의하면 바울도 이단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바울도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3).

 마찬가지로 사도 요한도 이단이 되어야 한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요일 5:20).

 그러면 이제 그가 그렇게 강조하는 예수님의 인성 속에 나타난 이단사상을 정리해 보자.
 요한2서 1:7에 의해 예수님은 인간이심을 주장해야 한다고 하지만 신성을 부정하는 것만으로도 이단이다. 그런데 그가 주장하는 예수님의 인성마저도 역사적 기독교와 다르다는 점이다. 그는 요한복음 1:1,14에 근거하여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는데 이 말씀은 요한복음 6:63에 의해 곧 영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을 영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로서 영은 항구적 존재이니 예수님의 육체는 우리의 영과 같은 수준으로서 인격이 아닌 항구적 존재"라는 것입니다(T.P.9-2).

 이같은 사상의 맥락에서 다음 책들의 글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말씀이며 이는 진리요 생명이며 세상에 비치는 빛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과 말씀은 동격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생명과 빛도 동격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내가 빛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라 말한 것입니다"(요 1:14).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하는 일은 말씀으로 하는 일입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패배를 당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인 생명 곧 빛 때문인 것입니다. 귀신도 이 진리와 생명과 빛 때문에 쫓겨나는 것입니다"(마귀론 상, p.23).

 "그러므로 사람은 생령이 아담이며 예수는 육신이 아담인 것입니다. 같은 아담인데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을 때 아담이 된 것이며 사람은 영이 생령이 되었을 때 아담이 된 것입니다. 곧 사람은 올라갔고 주님은 내려오신 것입니다. 사람은 항구적인 가치가 부여됨으로써 생령인 아담이 되었고 예수는 종의 형상을 입음으로써 아담이 된 것입니다. 같은 아담이지만 예수님의 육신과 우리의 영의 수준이 같기에 예수님의 육신의 죽음은 사람의 영의 죽음을 대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은 신령한 것이기에 썩지 않을 것이 순간에 몸으로 부활하여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화장하지 마라' 부활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육체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기에 화장을 하든지 않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이 영이시기에 그 육신의 상처가 그대로 영원해지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져 절름발이가 되어 살다가 죽었다 할지라도 영이 절름발이가 아닌 이상 온전한 상태로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Ibid., pp.90-91).

 "예수님의 말씀은 영입니다. 예수님의 육체는 영입니다. 그의 흘리신 피는 영입니다"(베뢰아 사람 9권, 1989년 3월호, p.44).

 이제 비판해 보자.
 먼저 김씨는 요한2서 1:7의 내용을 오해하고 있다. 이 본문은 예수님의 인성만 인정하면 이단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오직 그 당시 예수님의 인성을 부정하고 신성만 인정하던 가현설주의자(도케티즘)에 대해서 요한이 한 말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시지 않고 영으로 오셨고 영으로 죽으셨고 영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인성을 qwjd해도 이단이지만 반면에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해도 이단인 것이다. 바로 아리우스가 예수님의 신성을 제한하다가 니캐아 종교회의 때 이단이 된 것이다.

 예수님의 양성문제는 중요하다. 초대교회 종교회의 대부분은 바로 이 예수님의 양성문제를 중심한 이단논쟁이었음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유사하나 하나님이 아리라고 주장하던 아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된 때가 니캐아회의였으며(325년), 그리스도의 인성을 제한하던 아볼리나리스가 이단으로 정죄되던 때가 콘스탄티노플회의요(381 년), 그리스도의 양성이 완전히 독립되었으나 승천할 때 합해진다는 네스토리우스가 정죄된 때가 에베소회의요(431년), 그리스도의 양성을 부정하던 유디게가 정죄던 회의가 칼케돈회의(451)였다.

 그렇게 보면 이 양성 중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져 어느 하나만 주장하든지, 어느 하나를 제한하든지, 아니면 둘 다 부정하든지, 둘을 혼합시키든지, 둘을 분리하든지 하면 이단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비혼합적이요, 비분할적이요, 비준리적이요, 비변질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김씨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있는데 그나마 주장하는 인성도 잘못된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육체는 항구적 존재로서 인격이 아니라고 하니 그리스도의 인성은 분명 우리와 같은 인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의 인성은 죄성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우리와 같은 인간인 것이다(고후 5:21; 히 4:15).

 이 점에 대한 신조들의 내용을 직접 살펴보자.
 먼저 니캐아 신조의 내용이다.
 "…유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온 우주 앞에 나셨고, 참 신이시며, 참 빛이시며, 참신 가운데 신이시며, 하나님에게서 나셨고,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고, 성부 하나님과 같은 본질이시며 그로 말미암아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고…"
 다음은 콘스탄티노플 신조이다.

 "또 오직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독생자이시며, 모든 세대에 앞서서 아버지에게서 나신 분이며,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나님이시며, 피조자가 아니고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시고, 그 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된 것을 믿으며…"

 예수님의 양성문제에 있어서 특히 신성문제에 있어서 더욱 선명해지고 분명해진 것은 아다나시우스 신조이다. 살펴보자.
 "…바른 신앙이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이시며, 인간이신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부의 본질에서 나신 신이시며, 온 우주에 앞서 나셨으며, 인간으로서는 성모 마리아의 본질로부터 나셔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칼케돈 신조에서 조금만 더 살펴보자.
 "그는 하나님으로서 또한 사람으로서 완전하시며, 그는 실제로 하나님이시며 또 실제로 사람이시며, 합리적인 영혼과 몸을 가지고 계신다. 그의 신성에 관한한 그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타고 나셨고 또 그의 인성에 관한한 그는 다만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시다. …우리는 이 한 분의 유일한신 그리스도-성자, 주, 두 가지 본성을 타고 나신 독생자를 인정하며, 이두 가지 본성이 혼성되거나, 한 본성이 다른 본성으로 변하거나, 두 다른 분리된 범주로 갈라지거나, 양성의 영역과 기능에 따라 각각 대립되지 않는 것을 인정한다."

 김씨가 예수님의 양성문제에 있어서 이단의 화살을 피해 갈 역사적 성경적 길이 있는가? 한마디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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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삼경 목사가 쓴 <베뢰아 귀신론을 비판한다>(기독교문화협회刊, 1990년 9월10일 발행)를 전재했습니다.

출처: 교회와신앙


서론

김기동의 마귀론이 한국교회에 일으킨 문제점은 무엇인가?

Ⅰ. 김기동은 누구이며 베뢰아 아카데미는 무엇인가?

이단연구에는 두 가지 자세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현상학적 연구요, 또 다른 하나는 신학적 연구 내지 성경해석학적 연구이다. 신학적 성경해석학적 연구가 이단논쟁의 핵심이지만 현상학적 연구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현상과 사상은 밀접한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김기동 씨가 누구인지 살피려는 것은 그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가 목적이 아니요, 그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영등포 소재 성락침례교회의 담임목사요, 베뢰아 아카데미 원장인 김기동 씨를 귀신 쫓는 목사로 비교적 잘 알고 있다. 그는 1938년 6월 25일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64년 봄에 서울로 오기까지 주로 예산에서 살았다. 고등학교 때까지 교회에 다니지 않았고 1957년 10월에 예산 감리교회에 처음 등록하였다고 한다. 그의 학력은 1970년 명지대학을 졸업하고, 1972년 대한신학교를 졸업했고, 1979년에 대한신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가 말하는 자신의 신앙경력은 다음과 같다.
 교회에 등록한 다음 날, 이웃 장로교회 부흥회에 참석하여 개구리 소리 같은 방언을 했으며, 처음으로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독특한 귀신체험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 1981년 충남 예산군 광시면에 사는 최병묵 씨의 부인이 심장병으로 죽었을 때 염을 마친 시신의 엉덩이를 사정없이 때려 살렸던 것을 시작으로 수십 명의 죽은 자를 살렸다고 하며(1979년 6월 1일까지 10명을 살렸다고 함), 또한 수십 만 명의 귀신을 쫓아 질병을 고쳤다고 하며(85년 당시 40만 명이었음), 현재 성락교회의 교세는 4만 명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베뢰아 아카데미란 무엇인지 살펴보자.

 그가 1979년에 12명을 중심으로 자신이 깨달은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한 모임이 베뢰아 아카데미가 되었는데(베뢰아란 이름은 사도행전 17:11에서 따온 이름임) 현재는 수십기의 졸업생까지 배출시켰다고 한다. 베뢰아 아카데미는 주 1회 2시간씩 2년간 공부를 하는데 김씨의 말에 의하면 통일교인들도 더러 와서 배운다고 자랑하고 있으며 한국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는 이 베뢰아 운동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자랑하였는데(85, 11) 그가 속했던 기독교 한국 침례회 총회에서 1987년 11월 16일에 이단으로 규정받고 자기를 지지하던 자들을 중심으로, 미국 남침례회 총회와는 관계가 없는 기독교 남침례회란 이름으로 새로운 교단을 만들게 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베뢰아 아카데미 학생들은 생각밖에 많다. 문제는 그 교단에 속한자 뿐만 아니라 기성교회에 속한 자들이다. 김씨의 마귀론에 근거하여 기성교회에 목회하는 목회자들도 반드시 경계되어야 한다. 그들이 스스로 돌이키기를 촉구하며, 참고로 그와 같은 사상의 사람들 몇과 단체를 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우선 신사동 소재 그레이스 아카데미의 서울대 국악과 교수인 한만영 씨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김씨와 내용상 아무런 차이가 없는 다른 단체이다. 또한 인천 소재의 한국 예루살렘교회 이초석(본명 이춘석)씨와, 마산 소재의 산해원 부활의교회 이태화 씨, 미국 로스앤젤레스 소재 벧엘교회 김요한 씨, 은혜한인교회의 김광신 씨도 똑같이 경계해야 할 사람들임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Ⅱ. 본 글의 취지와 방향

 이단을 정죄하는 일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개인의 감정이 개입되어서는 안되며, 자료는 분명하고도 객관적이어야 하며, 비판기준은 반드시 역사적이요 정통적인 교리에서 나와야 한다.

 이단자들은 정통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완전히 정죄되기까지는 정통교회와 다른 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통교회와 교리상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여 표면적으로는 정통교회 속에 있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이단으로 정죄되면 교리적인 면이 아닌 자신들의 부흥을 시기하여 생긴 감정적인 조치였다는 주장을 하면서 그 화살을 피할 수 있는 한 피하려 하는 것이 상례이다. 예컨데 구원파란 이단(기독교복음침례회)의 교주 권신찬 씨의 경우 초기에는 정통교회와 교리적인 차이가 없는데 감정적인 문제로 인해 이단으로 정죄된 것으로 주장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지금까지 김기동 씨가 내적으로는 기성교회나 기성신학자나 기성교회 목회자들을 공격한 흔적은 수도 없이 많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내 놓고 베뢰아의 마귀론을 정통교회 교리와는 다른 복음임을 천명하며 가르치지는 않았다. 이 점은 현재 김씨를 이단이 아니라고 옹호하고 있는 자들도 그 교리의 기준을 어느 정도는 정통교리에 의존하고 있는 점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어떤 형태로 나올지 그 귀추를 지켜보아야 한다. 김기동 씨의 교리체계로 보면 정통교회가 오히려 이단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단을 정죄할 수 있는가? 어떤 권위로 이단을 규정할 수 있는가? 혹자는 교단만이 이단을 정죄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교단적으로 이단을 정죄하는 것은 개인적인 감정이 배제될 수 있고 권위가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고 옳은 일이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종교회의를 통해 이단을 정죄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교단도 얼마든지 감정적으로 이단을 정죄했음을 알아야 한다. 단체의 감정도 개인의 감정범위를 못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회의에서 이단을 규정하기 전에 개인적인 이단논쟁이 앞선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개인이냐 단체냐라기 보다는 그 비판기준이 성경적이냐 또는 역사적인 기독교에 근거하고 있느냐 아니냐가 그 권위가 핵심이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필자가 개인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한 것을 총회적으로 연구보고한 내용과 일치시켰다. 가능한 한 필자 개인의 주관적인 입장을 피하려 하나 피할 수 없을 때는 그 점을 명시하여 글의 객관성을 유지토록 하겠다.

 비판의 기준만 객관적이어도 안 된다. 비판의 근거도 객관적이어야 한다. 아니 객관적이어야 한다기 보다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 때로 사실이지만 객관적인 증거가 약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필자는 객관적으로 확실한 증거만 사용하겠다. 왜냐하면 그를 옹호하고 싶은 사람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논쟁거리를 주지 않기 위해서 이다.

 우선 일차적인 자료는 책이다. 김기동 씨가 쓴 책들이 무려 스물 다섯 권 정도된다. 그 중에서 그의 마귀론을 분명히 알 수 있는 책 네 가지가 있는데 마귀론 상, 중, 하와 '성령을 알자'이다. 그는 마귀론 상권을 '마귀론'이라 칭하고, 중권에는 '미혹의 영이란' 부제를 붙였으며, 하권에는 '귀신이란' 부제를 붙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권발행연도가 85년 10월 15일로 제일 먼저요, 상권은 85년 11월 27일 발행되었으며, 하권은 86년 9월 25일에 발행되었다. 발행처는 모두 도서출판 베뢰아로 되어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피할 수 없는 결정적인 자료가 하나 더 잇다. 그가 가르친 베뢰아 강의 테이프이다. 물론 테이프는 말로 했다는 점에서 글만큼의 책임성이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단들은 이단성을 교묘하게 숨기는 명수들이기에 글보다 테이프는 더욱 더 정직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예컨데 후론하겠지만 김기동 씨의 삼위일체론은 이단으로 정죄된 완벽한 양태론이다. 그런데 그 점이 책보다 테이프에 더 분명하고 확실하다는 점이다. 본인이 입수한 벽여 개가 넘는 테이프는 83년 봄부터 85년 봄까지 2년간 강의한 베뢰아 아카데미 9기생 테이프이다(앞으로 테이프의 고유번호와 함께 T.P.라는 약자를 사용하겠다). 필자는 먼저 가능한 일차적 자료인 책에 의존하고 그리고 보충적인 자료로 테이프를 사용하도록 하겠다.

 이단의 교주가 회개하고 돌이킨 경우는 한국교회 역사에 없다. 전략적이요, 형식적인 거짓된 회개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회개의 문이 있다. 김씨가 하나님과 성경과 교회를 참으로 사랑한다면 자신의 잘못이 성경적으로 바르게 지적될 때 회개하고 돌이키리라 믿는다. 그런 점에서 그를 정죄하고 비판하기 위해서만 이글이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원하며 글을 쓴다.

 먼저 밝히고 가야할 점이 있다. 김기동 씨는 사탄이라는 말과 마귀라는 말과 귀신이라는 말을 각각 의미로 사용한다. 타락한 천사가 하나님을 대적할 때 사탄이요,  인간을 대적할 때 마귀라는 것이며, 귀신은 제 명에 죽지 못한 불신자 사후의 영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넓은 의미에서 이를 묶어 마귀론이라 한다는 것을 밝혀둔다.

 본 글의 진행은 다음과 같이 하겠다. 본론에서 김씨의 마귀론을 소개 비판하고 결론에서 성경적으로 마귀가 무엇인지 밝히도록 하겠다. 본론은 네 가지로 나누어 소개 비판하려 하는데 제1장, 계시론에 나타난 베뢰아의 이단사상. 제2장, 신론에 나타난 베뢰아의 이단사상. 제3장, 창조론에 나타난 베뢰아의 이단사상. 제4장, 마귀론에 나타난 베뢰아의 이단사상이다.

Ⅲ. 성경적 마귀론을 자극하는 베뢰아의 마귀론

 진리는 힘과 비례한다고 믿는 자들에게 4만여 명의 교세와, 수천 명의 베뢰아 졸업생과, 축사현상으로 질병을 고쳤다는 수 십만명의 사람들은 김기동 시를 진리의 사람으로 인정하기에 충분한 수치이다. 김기동 씨와 그의 제자들로 인하여 일어난 한국교회의 혼란은 상상보다 큰 것이었으며, 그리하여 오래 전부터 복음적인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성경적 마귀론이 정립되기를 강력히 호소해온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지금도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신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사용하고 계시는 것이다. 오직 긍정적인 면으로 사용되느냐, 부정적인 면으로 사용되느냐가 다를 뿐이다. 구약의 바로도 하나님께 사용되었고, 신약의 가룟 유다도 사용되었다. 단지 부정적인 면에서 사용되었을 뿐이다. 그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김기동 씨를 통해 성서적 마귀론을 연구하도록 자극하게 된 것은 분명 부정적인 면에서의 그의 공로이다. 그동안 교계나 학계에서 마귀론을 정립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있으며 이제라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을 다행한 일로 여김이 공통적인 목소리이다.

 교회사를 돌이켜 볼 때 언제나 이단에 대한 변증의 필요가 신학을 낳게 하였다. 그러기에 아리우스의 반삼위일체론이 아다나시우스의 삼위일체론을 낳게 했고, 어거스틴의 신학은 펠라기우스에 의해 자극되었다. 이처럼 이단은 정통교회의 신앙적 교리적 약점을 자극하고 보완 수정하고 견고히 하는데 공헌하게 된다.

 그렇게 볼 때 정통교회는 마귀론에 있어서 성서적 정립을 하지 못했음을 솔직히 시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000년 동안 꾸준히 발전하고 보완되어 온 신학의 진보가 엄청난데 마귀론이나 종말론에 있어서는 아직 어린아이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마귀론에 대한 바른 정립이 안된 것은 한국교회 만이 아니라 세계교회가 동일한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는 성경이 마귀론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요, 둘째는 정통교회는 성경 앞에서 비교적 겸손하고 신중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교회사적으로 볼 때 이 점에 대한 이단의 자극이 정통교회에 없었던지, 있었다면 그 자극을 피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단은 진리를 말하나 진리는 목적이 아니요, 수단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부분을 오히려 확대하고 적은 가능성을 과장하여 교리체계를 세우는 것이 상례이다. 한마디로 성경 앞에 겸손하지도 신중하지도 않은 자들이 이단이다.

 사실 김씨의 마귀론이 비성경적이라는 생각은 한국교회에 오래전부터 싹터왔다. 72년부터 시작한 베뢰아 아카데미에 대하여 이단으로 규정하기까지 무려 15년이나 걸린데는 정통교회가 성경에 대하여 겸손하고 신중했던 덕을 그가 본 셈이다.

 어쨌든 김씨의 마귀론이 일으킨 한국교회의 피해는 표면적으로 나타난 것보다 내적으로 더 심각하다. 한국교회는 김씨에 의해 자극되어 시작된 마귀연구에 더욱 적극적 관심을 기울여 성경적인 마귀론이 정립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Ⅳ. 김기동 씨의 마귀론에 대한 개괄적 이해

 상상 밖으로 김씨의 마귀론을 중심한 교리체계는 복잡하고 방대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은 일관성이 없는 부분이 많아서 그것을 선명하게 캐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그의 방대한 사상을 함축적으로 집약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단이란 그 사상을 정확히 이해하여 분석해 줄 때 구체적인 비판을 하지 않아도 그것 만으로 이단논쟁의 임무를 대부분 완성한다고 본다. 그가 주로 사용하고 있는 몇 가지 언어들의 개념이 개괄적으로 파악되지 않으면 그의 사상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언어는 같아도 그 언어가 내포하고 있는 사상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본 장에서 김 씨의 마귀론을 먼저 개괄적으로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

 본 장은 김씨의 마귀론을 간결하게 요약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비록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본론에서 구체적으로 소개됨을 기억하여 개괄적 이해에 도움을 얻기 바란다.

 김씨는 자신의 마귀론을 이해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니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으로 여긴다. 마귀를 모르면 예수를 모른다고 한다. 이를 직접 살펴보자. "그러기에 누구든지 예수를 아는 사람은 마귀를 알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알려면 마귀를 알아야 되며 그래야만 예수의 하신 일이 어떠한 일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모른다면 마귀를 모르고 마귀를 모른다면 예수도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는 많이 아는데 마귀를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이는 예수를 모른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목적 없이 혼자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아는 분량만큼 인간을 알고 마귀를 알며 그리고 죄악이 무엇인가를 잘 알게 될 때 성경을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마귀론 상 pp. 14~15).

 구체적인 비판은 후에 하겠지만 오늘날 예수는 많이 알고 있으나 마귀를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는데 이는 예수를 모른다는 말과 같다는 그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이겠는가? 기성교인을 지칭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정통교리와 다른가? 김씨의 마귀론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마치는가? 표면적인 목적과 실질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이단논쟁이 시작되었는가? 왜 이단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는가? 다음에 이어지는 본론에서 더욱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가며 더욱 세밀한 비판을 가하겠으나 먼저 본장에서 바른 문제의식을 가지도록 하자.

 김씨의 예수를 알려면 마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말은 비성경적인 것이지만 분명 김씨를 알려면 그의 마귀론을 알아야 함에는 틀림이 없다. 필자가 보기에 비성경적이요 비정통적인 교리를 가지고도 그를 추종하는 사람이 많은 점은 그에게 두가지 주관적 장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틀린 교리체계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주관적인 면에서의 장점은 있는 법이다. 그 첫째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그 둘째는 그의 축사현상으로부터오는 신비적인 힘 때문이다. 어쩌면 후자가 전자보다 그의 추종자들에게 더욱 영향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김씨의 마귀론은 넓은 의미에서 신비주의 범주에서도 분석 비판해야 한다. 경험을 강조하고 주관적 체험을 강조하는 자들은 전형적인 신비주의자이다. 이 점을 다시 비판하겠으나 또한 그가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님마저도 정통교리와는 전혀 다르다. 교회사적으로 가장 많은 이단논쟁을 불러 일으킨 양성(신성과 인성) 문제에 있어서 어느 하나도 정통교회의 교리와 같지 않다.

 그럼 먼저 창조론을 살펴보자.
 김씨의 창조론에 있어서 이단사상을 보여주는 내용은 여러 가지인데 그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절대창조와 선한창조가 무너진다는 점이요, 인간타락의 책임이 하나님께로 돌려진다는 점이다.

 그가 말한 "만물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이미 천사가 타락했기 때문에 이 타락한 천사를 멸하기 위해 만든 곳이 바로 이 우주입니다"(김기동의 마귀론 상 p.64)라는 이 말을 살펴보면 창세기의 만물 창조 전에 사탄이 타락했으며 이 우주는 곧 마귀가 지배하는 음부로서 그 마귀를 멸하기 위해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

 김씨가 우주라고 할 때는 새가 나는 공중하늘과 별들의 하늘, 즉 궁창을 합한 것으로서 원래 그는 하늘을 지구의 하늘(sky)과 둘째, 우주공간의 하늘, 즉 궁창(space)과 셋째, 하나님의 하늘(heaven)로 나누고 있다. 그런데 마귀가 처음 셋째 하늘에서 쫓겨날 때가 요한계시록 12:7~10이요, 둘째 하늘에 갇힌 때가 창세기 1:8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천지창조 둘째 날 궁창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없는 것은 그곳은 사탄마귀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아도 이 우주는 마귀를 멸망시키기 위해 창조된 것을 알게 한다고 하는데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이 둘째 날 궁창창조 문제로부터 많은 교인들이 미혹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 창조론에서 창세기 1:27,28의 인간과 창세기 2:7의 인간이 다르다는 이중아담론은 간과할 수 없는 그의 이단사상이다(이 점은 본론 3장에서 구체적으로 취급했다).

 이제 그의 신론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간단히 살펴보자.

 김씨의 신론은 삼위일체론에서부터 정통교회와 다르다. 한마디로 그가 그토록 강조하는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론이다. 김씨는 삼위일체를 가리켜 "성부는 하나님의 본질이시오, 성자는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성령은 하나님의 본영이십니다. 그러니까 본질로서는 아버지라 하고 본체는 곧 형상으로서는 아들이라하고 영으로는 성령이라 하는 것입니다."(성락교회 베뢰아 사람 7권, 88년 7월호, p.40)라고 하였는데 본질, 본체, 본영이란 말이 이해되는가?

 또한 후론하겠으나 김씨는 예수님의 신성도 인성도 모두 부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김씨는 성경론에서도 완전한 이단이다. 그는 성령충만을 천사충만으로 본다. 그리고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은 모두 천사로서(마귀론 상 p.62) 창세기 1:2의 "하나님의 신"도 성령이 아니라 천사를 가리킨다고 한다(Ibid., pp.61~62). 그렇기 때문에 구약시대에는 천사에 의해 이끌림을 받았기에 양자의 영이 없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Ibid., p.57).

 사도생전의 오순절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천사가 임한 것이라 하며(Ibid., p.133), 그러니 우리는 천사를 잘 부릴 줄 알아야 한다(Ibid., p.129)고 한다. 정통교인들에게는 참으로 낯선 이론일 것이다. 김씨에 의하면 성령은 완전히 허수아비 신이 되어버리는데 김씨는 성령론에서도 피할 수 없는 이단자가 되고 만다.

 이제 끝으로 그의 사탄, 마귀, 그리고 미혹의 영에 대해 알아보자.
 천사가 타락하여 사탄과 마귀가 되었다는 말은 정통교회와 같다. 그런데 문제는 귀신과 미혹의 영에서 집단적으로 발생한다. 베뢰아의 마귀론은 사실상 그 초점이 이 귀신에 있고 귀신 쫓는 축사현상에 있다. 귀신은 제 명에 죽지 못한 불신자의 사후의 영으로서 제 명의 남은 기간동안 공중에 돌아다니며 인간을 괴롭혀 질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귀신은 모든 질병의 원인이요, 모든 사고의 원인이요, 모든 중독의 원인이요, 모든 범죄의 원인이요, 모든 자살의 원인이라고 한다(마귀론 하, pp.170~174). 그 중에도 특히 귀신을 질병과 연결시켜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운동으로만 질병이 나을 뿐이지 약으로는 결코 질병을 고치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대표적인 주장이요 교리이다. 그동안 이것이 그의 장점으로 나타났지만 이것이 그의 모든 이단사상이 집약된 보루가 된다.

 그런데 이보다 정통교회 교인들에게 더 생소한 점이 있다. 소위 미혹의 영이란 것이다. 대부분 처음에 이 "미혹의 영" 문제에 개념이 파악되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이 미혹의 영이란 가변된 천사를 가리키는데, 즉 가변된 천사 미혹의 영의 도움이 없이는 귀신이 단독으로는 우리 몸에 못들어 온다는 것이다(마귀론 하, pp.54~61).

 그런 점에서 미혹의 영은 그의 교리체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에게 가변된 천사란 말이 더욱 생소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신자에게 천사를 파송했는데 그 천사들이 자기의 우두머리를 통해 가변되기도 하고 하나님에 의해 가변되기도 한다(마귀론 상, p.137)는 것이다. 이 하나님에 의해 가변된 천사는 성도 가 불의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할 때 가변시켜 미혹의 영이 되게 하는데(Ibid., p.139) 한 번 가변된 천사는 절대 다시 환원되지 않는다고 한다(마귀론 하, p.61). 그런데 마귀론 상권에서는(p.137)하나님에 의해 가변된 천사는 성도의 불의를 따라 가변된다고 했는데(왕상 22:19~23; 사 66:4,5; 겔 14:9,10) 하권에서는(p.61) 하나님께 과잉충성할 때 가변되어 미혹의 영이 된다고도 하였다.

 그렇게 볼 때 필자가 이를 분류해 보자면 천사가 가변되는 경우는 자기 우두머리를 따라 가변되는 경우와 하나님에 의해 가변되는 경우가 있는데 하나님에 의해 가변되는 경우는 하나님께 과잉 충성할 때, 그리고 지키고 있는 인간이 불의할 때(예컨대 신자가 혈기를 자꾸 부리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할 때) 가변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데는 김씨가 이론을 점차 수정보완한 것으로 보인다. 이 가변된 천사인 미혹의 영은 우리 인격을 지배하는데(마귀론 중, p.70)이를 이기려면 미혹의 영의 숫자보다 돕는 천사의 숫자가 많아야 한다는 것이다(마귀론 상 p.141). 그래서 성락교회 교인들은 천사를 많이 보내 달라고 결사적으로 기도하고 있다.

 끝으로 알고가야 할 것이 있다. "인격"이란 말과 "항구적 존재"란 말의 개념이 파악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마귀론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 부분은 우리에게 너무나 생소하고 자기 주관적인 체계를 복잡하게 세워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무슨 소리인지 알 길이 없다. 이 부분을 모르면 앞의 말과 뒤의 말이 달라지고 모순되더라도 그것을 발견하기가 불가능하게 된다. 필자가 본장을 기록하는 실질적인 목적이 이 사상을 이해시키고자 함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베뢰아 졸업생도 이 부분을 객관적으로 선병하게 이해하는 자가 별로 없었다.

 김씨는 영은 항구적 존재라고 한다. 그는 영을 항구적 존재라고 함은 영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면에서 이런 자기만의 용어를 만들어 쓰는 것이다. 직접 인용해 보자.
 "사람들은 죽음이라 할 때 육체가 없어지기에 아주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영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영원한 항구적인 존재가 바로 영입니다. 천사를 사는 영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과 같이 항구적으로 살 수 있다는 데에 기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이면 빛으로 살도록 되어있는 것입니다"(마귀론 상, pp.30~31).

 그는 영은 오직 내세가 더 있다는 점만 다를 뿐이라고 한다.
 "몸과 혼 할 때, 여기에 영이 있다고 하여 더 이상의 다른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내세가 더 있다는 것뿐입니다. 영원한 존재라는 것은 항구적 가치가 있다는 것 이상 다른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영적인 요소를 앎으로 '내가 항구적 가치를 지니고 있구나! 그러면 죽은 후 내세가 있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하여 영생에 들어가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격에 영적인 요소가 더 첨가됨으로 영원한 존재 가치를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Ibid., p.83).

 그러면서 그는 인간의 영 자체가 신이요, 신은 천사를 말하는데 사람의 영은 천사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라고 했다(T.P.35-1). 그는 인간 삼분설을 주장하는데 영은 항구적 존재요, 혼은 인격이요, 몸은 육체인데 사람은 기능적으로 혼이 인격인데 실제로는 몸과 합해져야만 인격이 된다는 것이다(마귀론 상, p.80; 마귀론 하, p.62).

 그러나 사람이 죽을 때 육체가 깨어지면 혼은 영에 잠재되어 버리므로 항구적 존재가 되어 인격이 아닌 것이다. 혼은 몸과 함께 있을 때만 인격이 될 수 있고 몸이 없으면 인격이 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짐승의 경우 인격이 있는가? 라고 할 때 짐승은 혼과 몸이 있지만 그 혼은 각혼을 가졌기 때문에 인격이 못된다고 하는데 독자들은 각혼이란 말에 이해가 잘 안될 것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천사는 인격이 아닌가란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그는 이 점에 대해 천사는 육체가 없어도 완전한 인격을 나타낼 수 있다고 마귀론 하권에서 말했는데(p.62) 상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모순되는 말을 했다.

 "천사는 몸은 있으나 보이지 않는 형상으로서 인격이며 사람은 몸을 가진 인격입니다"(p.80).
 "천사는 몸은 있으나"란 말은 천사가 몸을 입고 나타나는 경우를 말하는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 형상으로 인격이며"란 말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천사의 인격이나 사람의 인격은 같으며 또 하나님의 인격도 마찬가지입니다"(마귀론 상, p.80)라 하고 있다. 그리고 귀신, 즉 제 명에 죽지 못한 불신자, 사후의 영은 오직 몸에만 들어와 질병을 일으킬 뿐이지 영에는 절대로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리송한 점을 하나 더 지적해 보자.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며(요 1:1) 말씀은 영이기 때문에(요 6:63) 예수님의 육체는 곧 영과 같은 존재로 예수님의 육체는 우리의 영과 같은 것으로 예수님의 육체는 인격이 아니라고 한다.

 "내 말이 영이라 할 때 영은 인격이 아닙니다. '영이 육신이 되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는 똑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인격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영으로서 항구적 존재입니다"(T.P.9-2).

 이 얼마나 사탄적이요 기독교의 이름은 가졌으나 기독교가 아닌 반 기독교적인 소리인지 다음에 비판하겠다.
---------------------------
최삼경 목사가 쓴 <베뢰아 귀신론을 비판한다>(기독교문화협회刊, 1990년 9월10일 발행)를 전재했습니다.

출처: 교회와신앙

입력 : 2014.01.21 12:07

	최악의 비밀번호 1위
최악의 비밀번호 1위

 

 

악의 비밀번호 1위, ‘123456’?…“털리는 건 한 순간? ‘충격!’”

지난해 개인정보가 유출된 사용자들이 가장 많이 썼던 비밀번호가 ‘123456’이라는 조사 결과가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비밀번호 관리 솔루션 전문회사 스플래시데이터(splashdata)는 20일 ‘2013년 최악의 비밀번호 25개 목록’을 공개했다.

실제로 ‘12345678’이 3위를 기록했고, ‘qwerty’가 4위, ‘abc123’가 5위에 올랐다. 이 밖에 ‘123456789’( 6위), ‘111111’ (7위), ‘1234567 (8위), ‘123123’ (11위), ‘1234567890’ (13위), ‘1234’ (16위), ‘12345’ (20위), ‘000000’ (25위)도 비슷한 사례로 최악의 비밀번호 순위를 나타냈다.

슬레인 대표는 “안전한 비밀번호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숫자나 문자를 조합하거나 본인이 기억하기 쉬운 문장으로 설정하는 것이 좋다”며 “비밀번호를 기억해내는 데 애를 먹는 이용자라면 비밀번호 관리 애플리케이션(응용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는 것을 추천한다”고 말했다.

최악의 비밀번호 1위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은 “최악의 비밀번호 1위, 조심해야지”,“최악의 비밀번호 1위, 이게 무슨 비밀번호라고”,“최악의 비밀번호 1위, 이러는 사람들이 많아?”등의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개혁주의마을/주안에서겸손 

공항면세점에서 명품가방을 고를 때
각나라별 고객들의 반응을 알아봤습니다.

 

 1. 프랑스인 : 이거 최신 유행하는 가방인가요?

 2.독일인 : 이거 알마나 오래 쓸 수 있나요?

 3.미국인 : 이거 세계에서 제일 좋은 물건인가요?

 4.영국인 : 이거 신사(숙녀)들이 사용하는건가요?

 5.중국인 : 이거 사다가 팔면 얼마정도 남을까요?

 6.일본인 : 이거 얼마나 깎아주실건가요?

 7.한국인 : (뭐라고 했을까요 ?   맞춰 보세요.)

 아시는 분은 관제엽서에 정답을 적으셔서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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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 마시고 그냥 답글에 적어 주셔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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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찬의 비상 연락망

      1.위험에 처했을 땐
      시편 91편으로 가세요
      2.외롭거나 두려울 때
      시편 23편으로 가세요
      3.신앙인으로써 확신 필요할 때
      로마서 8장 1-30절로 가세요.
      4. 평안과 휴식을 원하시면
      마태복음 11장 25-30절로 가세요
      5. 죄를 지었을 때는
      시편 51편으로 가세요
      6. 근심이 있을 때에는
      마태복음 6장 19-34절로 가세요
      7. 괴로움과 위기안에 있을 때
      고린도전서 13장으로 가세요

      8. 풀이 죽어 있거나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을 때는
      로마서 8장 31-37절로 가세요
      9. 일이나 여행으로 집 떠나 있을 때
      시편 121편으로 가세요

      10. 믿음의 발동이 필요할 때는
      히브리서 11장으로 가세요
      11. 좁고 이기적인 맘으로
      기도할 때는
      시편 67편으로 가세요
      12. 슬플 때에는
      요한복음 14장으로 가세요
      13. 사람이 실망시킬 때는
      시편 27편으로 가세요
      14. 하나님이 멀게 느껴질 때는
      시편 139편으로 가세요
      15. 세상이 위대하게 보일 때는
      시편 90편으로 가세요
      16. 열매를 많이 맺고 싶으면
      요한복음 15장을 가세요
      17. 의기소침할 때는
      시편 27편으로 가세요
      18. 세상이 작아 보이고
      자신은 커 보일 때
      시편 19편으로 가세요
      19. 돈이 없을 때에는
      시편 37편으로 가세요
      20. 사람들이 불친절해 보이면
      요한복음 15장으로 가세요
      21. 내가 한 일에 낙심될 때
      시편 126편으로 가세요
      22. 아주 좋은 기회가 있으면
      이사야 55장으로 가세요
      23. 다른 사람과 잘 지내려면
      로마서 12장으로 가세요


      이렇게 동기부여 해줄수 있는 조력자,
      성경이 있어 감사해요.^^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은혜의 단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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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을 위한 아름다운 글  ♣



▶ 삶이 버거울 때..

뒤를 돌아보는 지혜를 가지세요.
두려움이 앞서 망설였던 지난 시간을 생각해 보세요.

자신을 믿었잖아요, 그래서 여기까지 왔고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먼저 한 걸음 나아가 보는거예요.

무엇이 앞에 있는지 모르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예요.
중요한 것은 발을 내딛는 그 순간이 자신을 믿는 그 순간에
이미 두려움은 사라진다는 거잖아요.



▶ 힘들 때는 ..

하늘을 보세요
같은 하늘아래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세요.

어떤 오해속에서도 따뜻하게 믿으며 바라봐 줄거예요.
오해가 사실이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상황을 이해해 줄거예요.
너무 무겁게 느껴질 때는 그 짐을 하늘에 날려 보세요.

분명히 받아줄거예요.
항상 그래 왔듯이 말없이 지켜봐 줄거예요.
우리 서로 믿을 수 있잖아요.



▶ 슬플 때는 ..

비를 맞으며 걸어보세요.
어깨위에 내리는 빗방울처럼 모두 씻어버리세요.

하늘도 울어주잖아요. 함께 잊어버리는 거예요.
젖은 몸을 말리며 다시 웃을 수 있을거예요.

외롭다 느껴질 때 저녁 노을을 바라보아요.
아쉬움을 남기며 가장 화려하게 지는 저 태양처럼

아쉽지만 모두 버리는거예요.
우리 그럴 수 있잖아요.

 

 



▶ 기쁠 때는 ..

사람들의 행복을 조금씩
나누어 가졌다 생각이 되면
그냥 웃어주세요.
나를 생각하지않아도 괜찮아요.

맑은 웃음으로
모두에게 웃음이 묻어날 수 있도록
그냥 웃는거예요.
세상의 중심은 자신이잖아요.

소중한 자신을 위해 누구보다 기쁜 마음으로
행복한 표정으로 웃어 버려요.
그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잖아요.


-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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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하늘로 난 유일한 길”

 

 

광야에서 울려 퍼졌던 하나님의 말씀(출 19:3~6; 23:20~33),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언된 하나님의 말씀(히 1:1~3)은 스쳐가는 바람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동적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살피며 감찰하십니다. 세상의 그 어느 것 하나라도 하나님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임의적이지 않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선포하신 말씀, 궁극적으로는 그의 마지막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비하여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회계(會計)해야 할 바로 그분 앞에서 그분은 이미 선포되고 전해진 말씀을 기준 삼아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의 불신앙입니다(히 4:1).

 

우리는 믿음과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십시오. 광야의 길고도 먼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분만이 진정한 ‘길’이 될 것이며 그 길만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그 길은 천성의 본향 집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길 위의 순례자인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길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 길이 끝나는 목적지를 우리에게 약속으로 남겨 주셨을 뿐만 아니라 친히 걸어 가셨습니다. 이제 그 길의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분의 약속을 붙잡고 그분이 걸어가셨던 길로만 가는 것입니다. 비록 그 길이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그 길 너머에는 ‘영광의 길’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앞을 향해, 천성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주의 말씀을 내 발의 등불로 내 길에 빛으로”(시 119:105) 삼는 자들에게, “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를 나의 노래로 삼고”(시 11:54) 즐거이 순례의 길을 떠나는 ‘하늘 나그네’(天客)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안식’은 반드시 주어질 것입니다.

 

 

- 류호준, 「우리와 같은 그분이 있기에」중에서

 

 

출처: 류호준 교수의 무지개 성서교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치매 환자가 마지막으로 부른 찬송가

허참 ㆍ 2014-01-20 (월) 11:51 IP: 69.xxx.32    

치매가 심해지면, 환자는 점차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잃는다. 초기에는 간단한 문구를 말할 수 있지만, 심해지면 단어만 말하게 되고, 마지막엔 말을 전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기억은 남아서, 뇌가 퇴화되어도 설명할 수 없는 능력으로 이 기억을 간직한다.

지난 2월 업로드된 이 유튜브 동영상의 마벨 캐논은 말기의 치매환자이다. 그녀는 이 영상을 만들 때 대화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아들이 "예수 사랑하심은"이라는 노래를 불러주었을 때, 그녀의 마음이 열리고 이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2주후에 하늘 나라에 갔다.

이 영상을 올린 린다 캐논은 이런 일을 "사람이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그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아름다운 증거"라고 기술하였다.




출처: USA 게시판: 허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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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또한 그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하루하루 살게 하시고

순간순간 누리게 하시며

고통을 평화에 이르는 길로 받아들이게 하옵시고

 

죄로 물든 세상을 내 원대로 아니라

예수님처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옵시며

 

당신의 뜻에 순종할 때

당신께서 모든 것을 바로 세우실 것을 믿게 하셔서

 

이 땅에서는 사리에 맞는 행복을

천국에서는 다함이 없는 행복을

영원히 누리게 하옵소서

 

아멘


[기독교 달력: 대림절]


기독교의 달력(Christian Calendar)이라는 것이 있다. 기독교의 절기에 맞추어 기독교적 신앙의 의미를 배우고 교육시키고 설교하고 기념하는 예배 의례(儀禮)적 절기를 가리키는 용어다. 기독교달력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순서를 따른다.  

대림절 - 성탄절 - 주현절 - 성회(聖灰) 수요일 - 사순절 - 종려주일 - 성금요일 - 부활절 - 승천절 - 오순절(성령강림절) - 삼위일체 주일

기독교달력은 대림절(待臨節) 혹은 대강절(待降節)로 불리는 절기로 부터 시작한다. 영어권에서는 라틴어(Adventus)에서 유래한 Advent를 그대로 사용한다. 뜻은 '오심'(coming)이다. 문자 그대로 창조자 하나님의 ‘임재’, 구세주 하나님의 ‘강림’, 회복자 하나님의 ‘오심’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절기다. 이 절기는 성탄절 이전 4주 동안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11월 마지막 주일이나 12월 첫 주부터 시작하여 성탄절 직전 주일에 마친다. 기독교 신앙공동체는 전통적으로 네 번 주일에 걸쳐 ‘주님의 오심’이라는 주제를 갖고 묵상하고 교육하고 설교하였다.

4번에 걸쳐 묵상하고 설교하게 될 소주제들은 “하나님의 오심을 기다림”이란 대주제에 대한 다양한 변주곡 형태를 띤다.



                                                     대주제: 하나님의 오심을 기다림

(1) 대림절 첫 번째 주일 (2006년 12월  3일)  소주제: “정신차리시오, 주님이 오십니다!”
    설교하기에 적합한 본문들:
        예레미야 33:14-16; 시편 25:1-10; 살전 3:9-13; 누가 21:25-36
(2) 대림절 두 번째 주일 (2006년 12월 10일)  소주제: “주님의 길을 예비하라!”
    설교하기에 적합한 본문들:
        말라기 3:1-4; 누가 1:68-79; 빌립보서 1:3-11; 누가 3:1-6
(3) 대림절 세 번째 주일 (2006년 12월 17일)  소주제: “주안에서 기뻐하라!”:
    설교하기에 적합한 본문들:
        스가랴 3:14-20; 이사야 12: 2-6; 빌립보서 4:4-7; 누가 3:7-18
(4) 대림절 네 번째 주일 (2006년 12월 24일)  소주제: “두려워 말라!”
    설교하기에 적합한 본문들:
        미가 5:2-5a; 시80:1-7; 히브리서 10:5-10; 누가 1:39-45


참고로, 대림절의 유래를 살펴보면,
- 주후 4세기경에 시작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대림절은 그 다음에 오는 절기인 주현절(Epiphany,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나타나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로 1월 첫주 정도이다)에 시행되는 세례식을 준비하기 위한 참회의 기간으로 삼았다고 한다.  
- 주후 8세기경에 와서, 대림절은 성탄절 이전 4주간으로 옮겨졌으며, 대림절 기간동안 특별한 예배의식이 첨부되었다고 한다.
- 주후 9세기와 10세기에 이르러서, 대림절의 의미는 확대되었는데,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는 것을 대림절의 의미 속에 포함하게 되었다(마태 24, 25장; 마가 13장; 누가 12, 17, 21장, 요한 14,16장을 보라)  
- 대림절때 4개의 촛불을 밝히는 전통이 있는데, 매 주일마다 하나씩 불을 밝힌다. 세개의 자주색 초와 한개의 흰색 초를 사용한다. 자주색은 기다림을, 흰색은 기쁨을 상징하는데, 첫 세 주간의 자주색 촛불을, 마지막 주일에는 흰색을 밝혀 기쁨이 대림절의 절정임을 가리킨다.  

                                         [각 본문들에 대한 해설은 시간이 되는 대로 써 볼 작정이다.]

 

 

출처: 류호준 교수의 무지개 성서교실


“맨몸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

 

 

기도는 상당히 힘든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가 힘든 이유는 기도는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일이고……자기 자신을 그대로,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움켜쥔 손바닥을 펴는 일이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내어놓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께 나올 때 우리는 그분에게 내드리고 싶지 않은 것들을 그대로 간직한 채로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오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기도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손을 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손을 움켜쥐게 하는 긴박한 긴장을 푼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애지중지하며 붙잡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 내놓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삶은 우리가 보호해야 할 소유물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받아야 할 선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움켜쥔 손을 펴고 마지막 동전을 내놓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누가 자신의 마지막 ‘안전장치’라고 생각하는 것을 놓으려 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악착같이 붙잡으려 합니다. “그것 없이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말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옛날의 영적 지도자들은 우리에게 충고합니다. “천천히 기도하라!” “조심해서 기도하라!” 왜냐하면 기도한다는 것은, 레바논의 전나무를 산산조각내시는 하나님의 면전에 들어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레바논의 암소처럼 뛰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앞에 들어가는 일이며, 시온에서 사자처럼 부르짖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일은 목소리로 사막과 광야를 흔드시고 상수리나무들을 비틀고 산림을 벌거벗기시는 분 앞에 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류호준,「영혼의 겨울에 부르는 희망 교향곡」중에서

 

 

 

Praying.jpg

 

 

 

출처: 류호준 교수의 무지개 성서교실 

 


그리스도인의 자족 2 (제레미야 버로우즈)

 

 

제 2장 쉽게 이해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자족
 
바울은 자족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문제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이 장(章)은 그리스도인의 자족이 불신자의 눈에 이해하기 어렵게 보이는 여러 가지 측면을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사항들을 숙고해 보면 영적인 이해가 더욱 증진될 것이다.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것, 곧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일이기 때문에 불신자들의 눈에는 어리둥절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1. 그리스도인들은 한편으로는 아주 만족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만족하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 신자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든 늘 자족한다. 그들은 언제 어느 때든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심을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항상 불만족한 상태에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자신이 여전히 죄인이라는 사실을 겸손하게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들은 오직 천국에서만 죄의 방해를 받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일들로는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아무리 부요할지라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들은 불행하다. 불신자들에게 그토록 큰 기쁨을 주는 듯이 보이는 것들도 신자들은 만족시킬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들은 불행할 것이다.
“하늘에서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시 73:25)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기를 원하는 신자들의 소망을 완벽하게 묘사해 주고 있다. 가장 암담한 형편 가운데 살고 있는 신자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은혜롭게 자각하게 된다면 기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빌 4:7)을 체험한다. 일단 이러한 평강을 체험하고 나면, 그것이 없이는 결코 행복을 못 느낀다. 그들은 평강의 왕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서는 이러한 평강을 체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할 때에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가장 강력하게 느껴진다.(요일 3:6)
세상 사람들도 평화를 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평강의 왕께 순복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공장에서, 사무실에서, 또는 학교에서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가장 만족하고 평화스러운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불신자가 신자에게 “당신은 왜 그토록 만족해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평강을 알기 때문이다』라는 대답을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2. 그리스도인이 자족하는 것은 그들의 소원이 모두 충족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 기대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많은 소유를 확보함으로써 불만족함을 경감시키려고 한다. “이 새 것을 사자, 밖에 나가서 외식하자. 한잔하러 나가자”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러한 것들이 불만을 잠시 감소시켜 줄지 모르나 불만을 없애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처하게 하신 환경에 알맞도록 자신의 욕망을 줄여야 한다. 자족하는 사람들은 영화배우처럼 항상 부유하고 매력적인 사람들은 아니다.
자족이란 얼마나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느냐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자족은 교만한가 겸손한가의 문제이며, 또 어떤 기대를 갖고 있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한 다리는 길고 한 다리는 짧은 사람보다 두 다리가 다 짧은 사람이 더 잘 걸을 수 있다. 많은 소유물을 가지고 있지만 기대가 그것보다 더 크다면 항상 불만을 느낄 것이다. 반대로, 가진 것은 적지만 기대 또한 적다면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이교도 철학자는 오래 전에 이런 말을 했다.
“가장 훌륭한 부자는 욕망이 없는 사람이다.”
 
요즈음처럼 물질에 대한 기대가 끊임없이 증대되고 있는 때에 그리스도인은 좀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욕망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도록 다른 사람들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소유를 더하기보다 덜어냄으로써 자족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3. 그리스도인은 또 하나의 짐을 짐으로써 자족을 얻을 수 있다.
또 다른 짐을 더 짐으로써 자족을 얻는다는 것은 사실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많은 환난을 겪은 그리스도인은 환난이 끝나야만 행복이 다시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염려해야 할 또 하나의 짐이 있으니, 바로 죄의 짐이다. 이 죄의 짐에 대하여 더 많이 생각한다면 다른 환난들을 훨씬 가볍게 보일 것이다.
환난을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마땅히 공경해야 할 만큼 공경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마땅히 공경해야 할 만큼 공경하지 못하는 것은 죄이다. 우리는 자신의 모든 재산, 건강, 힘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복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은 죄이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에 대하여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하나님을 탓한다면 그것 또한 범죄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좋은 선물들을 남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죄이다. 자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선물들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절감할수록 그리스도인은 환난의 때에도 더욱 자족하게 될 것이다.
 
여기 한 예(例)가 있다. 어떤 한 가정이 소중하게 생각해 오던 계획이 좌절되어 매우 실망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 일로 서로를 비판하며 다투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가정이 믿는 가정이라면, 남편과 아내는 함께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손해야 한다. 다시 한 번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좋은 일에 대하여 그분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도 여전히 슬플지 모르지만, 곧 감사와 자족이 분노와 불만을 몰아낼 것이다.
 
4. 고난이 복으로 바뀐다.

자족을 체험하기 위해 문제점을 먼저 해결할 필요는 없다. 문제점 그 자체가 복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암브로스(Ambrose/339-397년 밀라노의 감독)는 이렇게 말했다.

“가난 그 자체도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부요가 된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영적인 문제를 다루노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내면에 있는 갈등을 묘사해 주는 말씀이다. 마르틴 루터는 이 구절을 이렇게 주석한다.
“그리스도인은 능력 있는 일꾼이요 놀라운 창조자가 된다. 즉, 우울함으로부터 기쁨을, 두려움으로부터 위로를, 죄로부터 의(義)를,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육체의 소욕”을 가진 사람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도 “성령의 소욕”을 가진 사람에게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방편으로 사용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어두움 가운데서 빛을 창조하시며 그리스도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환난을 복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5. 자족이란 염려함으로써가 아니라 섬김으로써 온다.

자족은 소유하지 못한 것을 얻으려고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얻을 수 있다. 신령하지 못한 사람들은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면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신령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나의 환경을 변화시키셨다. 나는 지금은 부유(건강 또는 행복)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겠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생각을 통제하는 법을 배워야 하며 불평이 자신을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한 예(例)로, 구름을 잡기 위해 산꼭대기로 올라가는 어린이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이 꼭대기에 도착해보면 구름은 여전히 더 먼 곳에 있다. 그들은 또 다른 산을 보고 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결코 그들은 구름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환경에 만족해야 하며 자기가 소유하지 못한 것을 얻으려고 계속 손을 뻗치지 말아야 한다.
 
6. 그리스도인의 뜻과 하나님의 뜻은 일치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그의 소욕을 변화시키시어 그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되게 하실 때에 자족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그가 갖기를 소망했던 바를 항상 얻는 것이 아니라, 그 소망 자체가 없어져 버린다. 그리스도인은 기꺼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욕(所欲)을 변화시켜 주시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소원하시는 바를 소원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바를 사랑해야 하며, 그분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면, 하나님께서 부요하게 되신다면, 하나님께서 만족하신다면, 나는 만족한다. 하나님의 지혜와 거룩함이 바로 나의 지혜와 거룩함이며,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고, 나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나는 만족한다.”
 
7. 자족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내면에서 덜 소유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약 4:1).
그리스도인은 경건과 반대되는 내면적인 모든 생각들을 버려야 한다. 자족이란 외부에서보다는 한 사람의 성품 내면에서 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불신자들이 전혀 생각하지 않는 부분들 가운데 하나이다.
 
8. 자족은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는 모든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으로 “양육받는” 신자들이 체험하는 행복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주 유명한 사람이 당신에게 선물을 보냈다면 당신은 그것을 자신이 직접 구입했을 때보다도 훨씬 소중하게 생각할 것이다. 멀리 떠나 있는 남편이나 아내가 선물을 보내왔다면 당신은 그것을 이미 가지고 있는 다른 것들보다 더 소중하게 여길 것이다. 이러한 선물들이 귀중한 것은 그것을 보내준 사람들 때문이다. 그 선물들은 누군가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증표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들, 즉 건강, 집, 음식, 의복, 친구, 가정, 직장, 기회 그리고 오락 등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로 생각한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실들 속에서 기쁨을 얻는다. 다른 사람들이 침울해 있을 때 그들은 기뻐한다. 다른 사람들이 불평할 때 그들은 만족한다. 신자들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든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 세상의 재물은 불신자들이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질 만한 자격이 없는 것들을 은혜로써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다. 그러나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소유하고 거기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조금만 소유하는 것이 더 낫다.
그리스도인은 가진 것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그에게 약속된 영원한 부(富)의 보증 또는 작은 일부분에 불과함을 기억해야 한다. 이생에서 누리는 모든 위로는 하늘나라에서 누릴 기쁨을 조금 맛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9. 능력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님 안에 있다.
고난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복음서 기사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동일한 고난을 겪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위로를 받는다. 그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고통스럽든지 그분은 그의 기분이 어떠한지 알고 계시다. 예수께서는 모든 육신적, 물질적, 감정적 또는 영적 고통을 이해하신다. 예수께서는 가나하셨으므로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실 수 있다. 예수께서는 학대를 받으셨으므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자들을 위로하실 수 있다. 예수께서도 혹독한 고통을 겪으셨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당할 때 힘을 주실 것을 예수께 요청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약속을 기억해야 한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사 43:2).
그리스도인도 죽음을 두려워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자신도 그렇게 부활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나아감으로써 자신의 모든 짐을 감당한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을 심판에서 건지며 그들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전능한 능력을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모든 환난에서 그들을 붙드실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계신다. 바울은 골로새인들이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골 1:11)될 것을 기도했다. 이것이 그들이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이 말씀에는 그들이 견뎌내야 할 시련에 직면해 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견뎌내야 한다.
 
10.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물질적인 것에서 얻었던 행복을 이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얻는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예레미야애가의 기자는 실의에 빠질 만한 모든 일을 다 겪고 있었다.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으로 만족해야 할 필요성을 자신에게 말하고 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애 3:24).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기쁘게 만드는 많은 일들을 베풀어 주신다. 그 일들은 우리에게 물을 공급해 주는 송수관과 같은 것이다. 그 일들은 행복을 안겨준다. 간혹 송수관으로 공급되던 것들이 중단될 때마다 우리는 샘에서 직접 물을 퍼 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생활에서도 그들의 기쁨과 빛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점점 더 깨달을 수 있다. 사도 요한은 하늘의 환상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성(城)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
하늘나라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행복이 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 위에서도 이 행복을 체험하기 시작할 수 있다.

11.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가 그들 안에 있으므로 항상 자족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에 속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이미 하늘나라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의 내용들을 체험하는 사람들만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영적 체험은 그들을 완전하게 만족시킬 수 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한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다시 말해 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채워질 수 없는 영적 필요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속에 있는 평안으로 말미암아 자족을 누릴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집에 있을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들에게는 함께 있으면 즐거운 가족들이 있다. 그들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쾌적한 환경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평안을 얻기 위하여 밖으로 나가야 할 경우가 있다. 가족들이 항상 시끄럽게 서로 다투거나, 아니면 환경이 불결하고 불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늘 다른 곳으로 도피하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신자들은 그들끼리 있을 때에는 별로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그들의 영혼은 그들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즐거움을 줄 만한 일을 찾는다. 그들은 “평안”을 찾기 위해서는 스스로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그러나 선한 양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 안에서 행복하다.
 
땅 위에 있을 때 하나님 나라를 체험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의 영광을 누리리라는 것을 절대 확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믿음은 영원한 세상의 기쁨을 현재의 확실한 사실로 만든다. 어떤 그리스도인 순교자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비록 형편없는 아침 식사를 할지라도 저녁은 훌륭하게 먹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곧 하늘나라에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도 고린도인 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이러한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6-18)
바울은 또 이 편지의 그 다음 부분에서 계속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확신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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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족 1 (제레마이어 버로우즈)

 

 

제 1장 그리스도인의 자족이란 무엇인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행복하기를 원한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自足)한다는 것은 사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안락하고 안전하기를 구한다. 그런데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라고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자족”이란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이나 다른 어떤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성삼위의 하나님은 완벽하게 복된 교제를 나누고 계셨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도 이러한 자족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들 속에서는 자족을 찾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렇게 자족하기에 충분한 선(善)이나 능력이 없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 3:5)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신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신자들은 이러한 영적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만족할 수 있다. 신자들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후 6:10).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지족(知足)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富)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6-9).
히브리서 기자도 동일한 권면을 하고 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그리스도인의 자족은 내적이며 묵묵히 순종하는 고고한 태도이다. 이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지혜와 아버지로서의 염려에 무조건 순복하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을 말한다.
 
1. 자족이란 내적인 것이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시 62:1)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내적인 평안을 찾는 법을 배웠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5절).
이 말씀은 “나의 마음이여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 나의 영혼아 평안을 누리라”고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압박을 받는다면 혀를 억제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또 소리를 지르거나 불평하지 않는다면 참고 만족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영혼까지도 잠잠해져야 한다. 겉으로는 아주 평온하게 행동하지만 마음속에는 반항심이 용솟음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 상태를 판단하신다. 겉모습의 침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윗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태에 있고 또 고백하지 않은 죄를 가지고 있을 때에도 잠잠하였다(시 32:3).
 
자족이란 전인(全人)에 영향을 끼치는 어떤 것이다. 자족은 지적(知的)인 면에서 한정되지 않는다. 시편 42편에서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장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묻는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5절).
우리는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내적인 안식을 얻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외부적인 도움을 받아 그 결과로 자족하는 것은 추운 겨울날 불을 쪼임으로 몸을 따뜻하게 하려는 것과 같다. 건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몸에서 열을 발산하여 자기 옷을 덥힌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족이란 변함이 없는 내면의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일시적인 유쾌한 기분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항구적인 태도이다.
 
2. 자족이란 묵묵히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현실적인 비극을 겪는다.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이러한 비극이 닥칠 때는 슬픔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한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님과 함께 슬픔을 나누어야 한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문제에 관하여 친구들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묵묵히 순종하는 자족이 곧 침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묵묵한 자족이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것은 짜증을 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을 통제하여 혼란되거나 반항적인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문제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방해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소홀히 할 정도로 자신의 문제에 관하여 많이 생각하고 많이 말해서는 안 된다. 또한 너무 깊은 실의에 빠져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대항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묵묵히 순종한다는 것은 위의 모든 일들과 반대되는 것이다.
 
3. 자족이란 고고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족은 천성적으로 갖는 평온한 기질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족은 외부적인 일들에 의해 동요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는 것과는 다르다. 또한 그것은 단순히 걱정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일종의 자족을 얻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족이란 “어떤 일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는 상태”처럼 단순히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족은 참으로 적극적인 것이다. 자족하는 그리스도인은 환난의 때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자족의 가장 고고한 부분이다.
 
4. 자족이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억지로, 마지못해서 자족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기꺼이 하나님께 순복하며 거리낌 없이 자족을 얻는다. 인간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 이것은 곧 그들이 행할 바를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멍에를 진다(마 11:29).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영혼의 안식을 찾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멍에가 쉽고 가볍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계획에 순복한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이 스스로 세운 계획과 전혀 다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의 자족이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정말로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들보다도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하여 더 잘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것을 계획하셨음을 믿는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운명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어서 자기 자신이 한 번만 잘못하면 파멸로 갈 수도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모든 길을 하나님께 맡기며, 그런 후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인도하시는 방법 안에서 기쁨을 찾는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그리스도인은 환난을 겪고 나가서 아니라 환난 중에도 주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한다. 바울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 6:10)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렇게 자족하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장 아래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5. 자족이란 어떤 형편에서든지 기뻐하는 것이다.
자족하는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첫째, 어떠한 환난을 당하든지 흔들리지 않는다.
둘째, 그 환난이 아무리 오래 갈지라도 흔들리지 않는다.
셋째, 그 환난이 어떻게 변화되든지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환난의 때에도 하나님께 순복하겠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자신의 소유를 잃어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또한 그들은 건강이 나빠지거나 죽음으로 인해 이별해야 하는 상황에도 순복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데 만일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다면 그들은 자족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참된 자족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당하는 환난이 어떠한 것이든지 하나님께 순복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어려움이 얼마나 계속되든지 간에 하나님께 순복해야 한다. 노아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밖으로 나오라고 하실 때까지 방주 안에 있어야 했다.
 
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직면한 어려움이 얼마나 다양하든, 자신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순복해야 한다. 간혹 한 그리스도인이 생활의 모든 국면, 즉 가정, 건강, 사업 등 모든 면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한 가지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그리스도인이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도 변치 않는 믿음을 가진다면 하나님은 크게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포도나무선교회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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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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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and are justified freely by his grace
through the redemption that came by Christ Jesus.

롬 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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