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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버려진 어머님의 일기*♤

 

이 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안타깝고 슬픈 현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신판 고려장인 요양원에 버려진 어느 어머니의 일기입니다.

미안하구나, 아들아.
그저 늙으면 죽어야 하는 것인데.
모진 목숨 병든 몸으로 살아 네게 짐이 되는구나.
여기(요양원) 사는 것으로도 나는 족하다.
그렇게 일찍 네 애비만 여의지 않았더라도,
땅 한평 남겨 줄 형편은 되었을 터인데...
못나고 못 배운 주변머리로
짐같은 가난만 물려 주었구나.


내 한입 덜어 네 짐이 가벼울 수 있다면,
어지러운 아파트 꼭대기에서 새처럼 갇혀 사느니
친구도 있고 흙도 있는 여기가 그래도 나는 족하단다.


내 평생 네 행복 하나만을 바라고 살았거늘
말라 비틀어진 젖꼭지 파고 들던

손주 녀석 보고픈 것쯤이야
마음 한번 삭혀 참고 말지...
혹여 에미 혼자 버려 두었다고 마음 다치지 말거라.


네 녀석 착하디 착한 심사로

에미 걱정에 마음 다칠까 걱정이다.
삼시 세끼 잘 먹고, 약도 잘 먹고 있으니
에미 걱정일랑은 아예 말고 네몸 건사 잘 하거라.

살아 생전에 네가 가난 떨치고 살아 보는 것,
한번만 볼 수 있다면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은 없다.
행복하거라, 아들아~ 네 곁에 남아서 짐이 되느니,
너 하나 행복할 수만 있다면
여기가 지옥이라도 나는 족하구나.

사랑한다 아들아!!!


어느 버려진 어머님의 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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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 어머니는 우리보다 더욱 열악한 여건에서

살아가신 우리 모두의 어머니요

나의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아니 미래의

우리들의 모습일 수 도 있습니다.

이 어머니 또한 우리와 같은 시절이 있었고

아름다운 청춘과 사랑의 시간이 있었던 한 사람이란 걸

우린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웠던 세월을 한 번 즐기지도 못하고

우리 자식들에게 빼앗긴 모진 삶의 주인공이란 걸....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음은 바로 우리들의 어머니가

계셨기에 가능하단 걸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될것 입니다

결코 낯설고 귀찮은 늙은이가 아니라는걸 생각하면서

다음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열자식을 키운부모 하나같이 키웠건만
열자식은 한부모를 귀찮스레 여긴다네

자식위해 쓰는돈은 아낌없이 쓰건만은
부모위해 쓰는돈은 하나둘씩 따져보네


자식들의 손을잡고 줄외식을 하건만은
늙은부모 위해서는 외출한번 하지않네

자식들이 장난하면 싱글벙글 웃으면서
부모님이 훈계하면 듣기싫은 표정이네


시끄러운 아이소리 잘한다고 손뼉치며
부모님의 회심소리 듣기싫어 빈정대네

과자봉지 들고와서 아이손에 쥐어주나
부모위해 고기한번 사올줄을 모르도다.

지금의 나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반성하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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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제일 슬픈 노래

엄마 엄마 우리 엄마 나 떠나면 울지마
뒷산에다 묻지말고 앞산에다 묻어주
눈이오면 쓸어주고 비가오면 덮어주
옛친구가 찾아오면 나본듯이 반겨주


엄마 엄마 우리엄마 나 떠나면 설워마
음지에다 묻지말고 양지에다 묻어주
봄이오면 꽃잎따서 가을오면 단풍따서
무덤가에 뿌려주고 내 손한번 잡아주


아가 아가 우리아가 부디부디 잘가라
고통없는 세상으로 훨훨 날아가거라
가도가도 끝없는길 어디에서 머물꼬
좋은세상 만나거든 다시태어 나거라
좋은세상 만나거든 훨훨날아 다녀라

 

 

이 노래는 언제 누가 왜 이런 가사를 붙여 만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은 장애 또는 질환이나 사고에 의하여

엄마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는 아품을 미국에 민요

클래멘타인 곡에 가사를 붇여 만든것이라

생각하여 봅니다

저 또한 그랬듯이 사람이면 누구든지

이 글과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보고도

눈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심장이 철로 되어있는 사람이면 모르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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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와 성화”

김세윤 교수님의 책, “칭의와 성화”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어, 뒤늦게나마 책을 읽고 있는데 여러 가지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과거 김 교수님의 저서를 통해 많은 유익과 통찰을 얻었던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선뜻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어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너무도 중대한 구원의 복음에 관한 것이기에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몇 가지만 지적하려고 한다.

1. 가장 아쉬운 점은 전통적인 구원론에 대한 김 교수님의 비판이 종교개혁의 입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김 교수님이 일관되게 지적하는 바는, 전통적인 구원론에서는 칭의 다음에 성화가 이 단계적으로 이어지므로 윤리 없는 구원이라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치우친다는 것이다(『칭의와 성화』, p. 81). 그러나 그것은 통상적인 오해일 뿐, 개혁교회의 구원론에서는 칭의와 성화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칭의와 성화에 대한 종교개혁자 칼빈의 가르침은 놀라울 정도로 부요하고 치밀하며 성경적이다. 칼빈은 칭의론이 믿기만 하면 어떻게 살든지 구원은 따 논 당상이라는 식으로 왜곡될 위험성을 치밀하면서도 정교하게 발전된 논증을 통하여 철저하게 봉쇄하였다. 칼빈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은혜의 두 면이다. 곧 단일하면서도 이중적인 은혜이다(One grace yet two-fold grace). 칭의와 성화가 비록 우리의 사고에서는 구별되어야 하지만, 우리의 경험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둘 중 하나만을 체험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 누구도 ‘성화 없는 칭의’나 ‘칭의 없는 성화’만을 체험할 수 없다. 만약 칭의가 참된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성화가 수반되기 마련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의롭게 하시면 동시적으로 그를 거룩하게 하신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지 않고는 결코 의롭게 하시지 않는다고 역설적으로 말하기까지 하였다. 구원의 전 과정에서 칭의와 성화는 긴밀하게 영합하여 병행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칭의와 성화는 영원히 분리될 수 없는 연합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이 둘을 서로 분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찢어버리려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관점에서 칭의와 성화가 긴밀히 연결되어있음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2.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김 교수님이 제시한 성경적인 대안이다. 김 교수님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동의어이며 같은 구조와 특성을 띠고 있다. 그는 성화를 “의인됨의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 구원의 현재 단계를 의인됨의 성장 과정으로도 말할 수 있고, 성화에 있어서의 성장 과정으로도 말할 수 있다”(『칭의와 성화』, p. 189). 또 “칭의가 최후 심판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했다(『칭의와 성화』, p. 192). 이런 논리에 따르면, 칭의는 실제 의롭게 되는 성화가 진전됨에 따라 점진적으로 진행되다가 종말에 가서야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까지 유보된 칭의이다. 이런 주장은 비록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지 않고 연합해버린 중세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과 유사한 논리적인 맥락으로 회귀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이렇게 칭의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때 목회 현장에서 부딪히는 실제적인 문제는 종교개혁 전에 신자들이 겪었던 혼란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만약 우리의 불완전한 성화에 따라 우리의 의인됨이 점진적으로 완성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과연 거룩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만큼 거룩해졌는지 자신할 수 없어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칭의가 우리가 이룬 거룩함에 어느 정도라도 근거한다면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기 위해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거룩함의 커트라인은 어느 정도인가? 우리가 성결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함의 기준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만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종교개혁 시 루터가 겪었던 영적 고뇌였다. 만약 이런 가르침을 따라서 신앙 생활한다면 교인들은 하루도 구원의 확신을 누리며 살 자신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칭의와 성화가 연합되어있지만 날카롭게 구별되지 않으면 중세 로마 가톨릭에서처럼 복음의 핵심이 심각하게 변질된다고 본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칭의와 성화는 영원한 끈으로 하나로 엮어져있지만, 이 둘은 논리적으로 구별될 필요가 있다. 칭의는 우리 안에서 이루어진 불완전한 의로움이 아니라 우리 밖에서 이루어진 외래적인 의로움, 즉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대리자로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의로움에 전적으로 근거하여 영 단번에 내려진 은혜로운 법적 선언이다. 우리는 이 칭의의 영원한 바탕 위에서만 죄사함과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이 칭의의 바탕을 떠나서 우리가 이룬 보잘 것 없는 거룩함을 의존해서는 한 순간도 주님 앞에 설 수 없다. 우리가 서 있는 영원한 칭의의 반석은 우리의 연약함과 성화의 부진으로 인해 결코 흔들릴 수 없고 변개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의 의로움으로 보완되고 강화될 수도 없다. 라일 감독(J. C. Ryle)이 말했듯이, 천국에 있는 성도들도 우리보다 더 칭의되지 않았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 칭의에서 바로 성화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칭의의 바탕 위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이다. 이 반석 위에서만 감사와 확신과 자유함과 계속되는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누리며 진정한 성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이것이 칭의의 종말론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칭의를 기독론적-종말론적 관점에서 “이미와 아직도(already and not-yet)"의 구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김 교수님이 주장하듯이 종말론적으로 유보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확정되었고 종말론적으로 최종 확증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내려진 선언과 앞으로 내려질 선언의 근본 내용은 동일하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에는 변동이 없다.

사실 성화는 실패를 통한 성화이다.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험난한 여정에서 신자는 연약하여 수없이 쓰러진다. 그 때마다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영적인 회복의 바탕과 다이내믹이 바로 칭의의 은혜이다. 비록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함 가운데 살지라도 하루도 회개할 필요가 전혀 없는 날을 살기가 어렵다. 그래서 성자는 다른 이들보다 더 자주 회개하는 죄인일 뿐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더 거룩해질수록 자신의 의로움보다는 칭의의 은혜만을 더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이 칭의의 복음이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아 애초부터 거짓된 믿음을 가진 자들, 그래서 결국 멸망할 자들에게는 악용될지 모르나, 성령으로 거듭나 죄에 대해 예민해진 신앙양심을 가짐으로 작은 죄에도 고통 받고 자괴감에 시달리는 신자들에게는 유일한 위로이며 피난처이다. 칭의론의 남용을 지나치게 우려하는 것은 그다지 지혜롭지 못하다. 진리를 악용하는 자들은 항상 존재한다. 사실 칭의의 복음이 망하는 자들에게나 방종의 라이선스로 남용되지, 성령으로 거듭나 구원받을 자들에게는 오히려 위로와 안식의 유일한 근원이며 경건의 바탕으로 순기능 하는 면이 훨씬 더 많다. 칭의론의 남용을 막으려다가 오히려 참된 신자의 위로와 성화의 원동력까지 앗아갈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결국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면 구원의 확신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뿐 아니라 진정한 성화를 가능하게 하는 수많은 위로와 유익을 유실하게 된다. 개혁주의 칭의론은 구원뿐 아니라 성화의 전 과정까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영원불변한 사랑 가운데 진행된다는 구원의 선물적인 특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교리이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의 오류에 대응하여 칭의와 성화를 날카롭게 구별하는 동시에, 성화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무율법주의 위험에 대비하여 칭의와 성화의 연결성을 강조했다. 이와 같이 칭의와 성화의 구별성과 연결성을 균형 있게 적용함으로써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 양극단을 효과적으로 물리치는 전략적인 논증이 성경에 근거한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을 이루고 있다. 이 귀한 선진들의 통찰을 영적유산으로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의 강단에서조차 이러한 가르침과 동떨어진 값싼 은혜의 복음에 가까운 메시지가 전파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전통의 틀에 갇혀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좋은 전통을 모르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신앙의 선진들로부터 전수된 역사적 신앙의 진귀한 유산을 섭렵한 바탕위에서만 참된 진보가 가능하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왜곡된 복음을 바로 잡으려는 김 교수님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겠으나 그마저 선진들의 지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칭의론에 대한 통상적인 오해 속에서 이 책을 썼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500년 개혁교회의 전통을 지탱해온 핵심교리를 뒤집는 주장을 할 때는 그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분석이 마땅히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런 신중함이 결여되었다는 것이 이 책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성경신학자들이 이런 오류를 범하기 쉽다. 어떤 주관이나 신학적인 전제가 완전히 배제된 성경해석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김 교수님이 개혁주의 구원론을 온전히 이해했다면 그의 해석의 관점은 전통적인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본다. 세부적으로 논하고 싶은 점이 많아 “칭의와 성화”에 대해 또 하나의 책을 써야 하나 고민하게 된다. 책의 제목은 “다시 전해야 할 칭의의 복음”이 어떨지.

칭의의 복음을 재발견함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500년 개혁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 복음이 바르게 전파될 때마다 교회가 부흥하고 건강하게 세워져갔다. 한국교회의 윤리적인 문제는 개혁주의 칭의론 때문이 아니라 이 교리가 바르게 전수되어 전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이 재정립한 칭의론의 부요한 함의와 풍성한 축복을 제대로 전하는 설교를 좀처럼 들을 수 없는 것이 한국교회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이 전통적인 입장을 도외시함보다 재 발굴하여 바르게 전파해야한다. 복음 사역자들이여, 개혁교회의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는 칭의의 복음을 여러 도전 앞에 주저하며 부끄러워하지 말고 담대히 전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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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개혁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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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하나님의 섭리의 교리를 혐오하는 자들은 이것이 스토아 철학자들의 운명론이라고 악의에 찬 비방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도 한때 이런 비방을 받은 적이 있다. 우리는 “운명”(fate)이란 단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바울이 피하라고 가르치는 망령되고 허탄한 단어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딤전6:20), 의도가 하나님의 진리를 억압하려 하기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연에 나타나 있는 끊임없는 연관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는 인과 관계의 필연성을 상정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물의 통치자요 주관자이심을 믿는다. 하나님이야말로 그의 지혜로 머나먼 영원 전부터 그가 행하실 바를 작정하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그 작정하신 바를 시행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이를 근거로 우리는 하늘과 땅, 그리고 생명이 없는 피조물들은 물론 사람들의 계획과 의도들까지도 하나님의 섭리의 다스림을 받아 그 정해진 목적을 곧바로 이루게 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연에 의해서나 운명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이 전혀 없다는 뜻인가?고 그들은 물을 것이다. 대 바실리우스는 말하기를, “운명”이나 “우연”이란 이교도들이 쓰는 용어로서 경건한 사람들이 마음에 그 뜻을 새겨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만일 모든 성공이 다 하나님의 축복이고, 모든 재난과 역경이 하나님의 징벌이라면, 인간사에 운명이나 우연이 끼어들 여지가 조금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도 우리는 감동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아카데미 학파에 대한 반론」에서 내가 ‘fortuna'(운명)란 단어를 너무 자주 거론했다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다만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일어나는 일들에서 겉으로 보기에 운명적인 것처럼 보이는 결과들이 일어나곤 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 것 뿐이었다. 보통 ’운명‘이라고들 부르는 것은 어떤 은밀한 질서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우연히 일어났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 이유나 원인이 비밀에 싸여 있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해야 옳을 일에 대해서 ’이것은 운명이다‘라고 이야기하는 매우 악한 관습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한 마디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늘 가르치기를, 만일 무엇이든 운명에 맡겨진다면, 세상은 목표를 잃고 소용돌이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모든 일이 일부는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일부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나, 조금 뒤에 가서 사람들이 섭리 아래 있고 섭리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을 충분하게 입증해 보이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심이 없이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것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자신의 원칙으로 취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일들이 제멋대로 일어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또한 사람들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는 우연도 일체 용납하지 않았고, 조금 뒤에 가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침으로써 이를 더 분명하게 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허락”도, 하나님의 명령이나 허락이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뜻이 모든 일의 첫째가는 최고의 원인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크리스챤다이제스트사) 상권, pp 25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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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청교도 아카데미(P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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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세상에 대한 교회의 역할의 사명과 방법은?

김정한


제가 주제넘게 세상에 대한 교회의 역할, 곧 교회가 세상나라에 대한 어디까지 참여할 것인가? 란 논제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현실 속에서 늘 부닥치는 문제이고 지금도 진보계열과 보수계열이 각종 이슈들마다의 논쟁들을 벌이고 있어 외면한다고 될 일도 아닌 것 같아 계속해서 저의 사견을 써봅니다.  


이런 논제는 먼저 주제를 선명히 해야 더욱 좋은 의견들이 나올 것 같아 필자는 먼저 세상에 대한 성경적인 진단과 정의를 살핀 뒤 교회의 사명을 논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보아 그렇게 써 보았다.

(세상에 대한 성경의 진단)
성경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하셨는데, 이때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 뜻대로 된 세상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도리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행하고 있는 세상이라서 멸망으로 가기에 안타깝기에 독생자를 보낸 것이라고 본다면,
세상은 악한 것이고 악한 사단에게 속한 것이며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과 대적하는 것이라고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음을 볼 때 세상은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소망이 없으며 어둠과 흑암에 잡혀 있다고 보아야 된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교회의 신분과 사명)
따라서 예수님의 기도에서 밝히 말씀하신 것처럼(요17:15-20) 우리 교회는 세상에로의 속화(俗化)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되고, 예수님처럼 우리 교회는 세상에 빛과 소금과 향기를 발하게 하여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구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주기 문에서 처럼)  

(교회는 세상에 파송된 빛과 소금의 사명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세상에 보내졌듯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신다고 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그냥 보내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포함한 세상이 마귀에게 속한 죄악된 세상이었음과 그래서 삼위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들을 택하고 부르심의 사명을 알게 하고 죄악된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는 말씀과 성령의 권능을 부여하신 뒤 세상에 파송시켰음을 알아야 된다.

(모형인 출애굽사건)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민족을 출애급시켜 광야에서 하나님의 법을 주시고 훈련시킨 뒤 가나안을 정복케 했던 출애굽사건과 같다고 본다.

이스라엘을 애급 바로 왕이 치하에서 종살이하던 시절은 택한 자들이 죄와 사망 권세를 잡은 마귀 하에서 살던 것을 의미하고,
광야에서 율법을 하사받고 성막에서 제사를 드리는 법을 알게 하고 제사장나라로 언약하신 것은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권세라는 약속을 받고, 예수의 주신 법을 깨우치며 알면서 하나님 경외하는 예배를 알아가는 기간임을 의미하고,
이스라엘이 여호수아 영도아래 가나안 정복전쟁을 수행하고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은 것은 오늘 우리 교회가 세상의 죄악 된 모든 문화를 그리스도의 법으로 정복하는 것만큼 자신들에게 하나님나라에서의 기업이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출애굽과 교회의 상이점)
여기서 다른 점은 이스라엘 백성에서 출애굽 사건은 땅에서 이동하는 것을 통해서 행하진 것이라면 교회는 동일한 삶의 현장에서 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인 것이다.
이것은 한 사람이 죄악된 삶을 살다가 어느 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구원사건이 이루어진 후에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해서 하나님의 구속경륜을 배우고 깨달케 한 후에 성령을 받고 자기가 살고 있는 현장에 투입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대한 현재 교회(각나라 각 지역 교회들)의 사명)
이렇게 세상이 어떤 곳인가? 와 자신들의 사명을 분명히 자각한 교회들(이것은 가견적인 지역교회들을 말한다) 특히 목사들은 자신들의 사명이 사단에게 속하여 죄와 사망의 법에서 진행되고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건져내는 일- 영혼구령이 최우선적인 1차사명이며 그 다음에는 저들에게 세상이 어떤 곳이며 그러한 세상 속에서 언약을 받은 택한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알려주는 일을 힘써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출애굽 1세대들처럼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들이 종살이 했던 세상인 애급을 그리워하며 애급으로 되돌아가게 되어 광야에서 멸절되어 버린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현대 목사들의 자기 진단)
그런데 현재의 목사들이 어떤 입장에서 목사의 일을 하고 있는 지를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에 빠져 교권주의나 인본주의로 빠지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시각으로 현재의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운동, WCC나 WEA를 비롯한 모든 운동을 봐야 한다고 필자는 주장하고 싶다.

우리 교회는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며 결코 세상에 속한 단체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세상나라를 하나님나라로 확산시키는 일에 부름을 받은 사명의 공동체인 것이다. 그래서 목사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성도들에게 이런 사명을 알게 하며, 그런 사명을 감당하는 방법을 성령님의 조명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에서 배우며 성령님의 감동을 쫓아 자신들은 세상에 물들지 않으면서도 도리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할 것인 것이다.

빛과 소금은 자신을 소진시켜가며 그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세상에 것을 탐내고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목소리를 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자신을 종으로 내어주며 밀알이 되어 세상을 위해 썩어져야만 한다. 그것은 예수님처럼 낮아지면 높아지고, 십자가 뒤에 빛나는 부활의 영광이 있다는 것을 철저히 믿는 자만이 따라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런 자들은 주님을 늘 바라보는 자들이고, 하늘의 영광을 사모하는 자들인 것이고 왕이시며 동시에 신랑이신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며 하루를 코람데오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일어나라, 하나님이 하신다.

대장쟁이

[에스라 6:11] 내가 또 조서를 내리노니 무론 누구든지 이 명령을 변개하면 그 집에서 들보를 빼어내고 저를 그 위에 매어 달게 하고 그 집은 이로 인하여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


포로생활에서 놓여나 폐허가 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전 지대를 놓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옛 성전을 보았던 노인들은 대성통곡하며, 여호와의 전을 재건하려는 역사를 시작하였지만 대적들의 훼방으로 공사는 중단되어 다리오 2년에 이르게 됩니다. 많은 시간이 흐릅니다. 이대로 성전재건은 영영 물 건너가는 것일까요? 유대 땅과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득실거리는 이방인들의 틈바구니에서 강압에 의하여 건축을 중단당한 채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유대지도자들과 백성들의 좌절감과 낙담은 어떠했을까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전은 구원이 되신 주님의 오심을 의미하고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시면 머리를 밟히고 모든 권세를 빼앗길 원수마귀의 성전을 막으려는 훼방은 결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속이고 낙담시키고 좌절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그들이 성전건축을 막고 주님의 오심을 막을 수 있을까요? 그들이 사람들의 손을 약하게 만들고 사람의 뜻을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을 막고 주님 오심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사람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그리고 기이한 섭리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낙담하고 있던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백성들에게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를 보내어 격려하고 위로하며 힘을 주시어 다시 일어서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전 역사를 계속하게 됩니다.

강 서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가 득달같이 달려와서 “너희들이 누구의 명령으로 이러한 역사를 하느냐?”고 물으며 역사를 중단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유다 장로들을 돌아보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역사는 중단되지 않았고 총독은 다리오 왕에게 보고서를 올립니다. 총독은 성전재건을 막으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이로 인하여 극적인 반전이 일어납니다. 보고를 받은 다리오 왕은 서적 곳간을 뒤져 그들의 태조격인 고레스 왕이 예루살렘 성전재건을 명령하였던 칙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고레스 왕의 칙서를 발견한 다리오 왕은 예루살렘 성전재건을 전폭적으로 돕고 지원하되 절대로 훼방하지 못 하도록 더욱 강화된 칙령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성전재건은 일사천리로 진척되어 4년 뒤인 다리오 6년에 감격적인 준공을 보게 됩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백성들은 대적들의 훼방과 억압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니 백성들은 힘을 얻고 기이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나 성전건축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를 보내어 격려하고 위로하신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들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느냐?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 일어나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금도 내 것이요 은도 내 것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다가 대적들의 훼방으로 주저앉아 낙담하고 있는 유대백성 뿐 아니라 오늘날 복음을 가진 채 이곳에 주저앉아 있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하시는 말씀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먼저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 6:33)” 하심과 같습니다.

수룹바벨과 예수아와 백성들을 꾸지람하시면서도 위로하시고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그 옛날 이세벨에게 쫓기며 두려움과 낙담으로 죽기를 구하던 엘리야를 위로하신 하나님을 기억나게 합니다. 낙담하고 곤비하여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를 그릿 시내에 숨기고 까마귀를 보내어 떡과 고기를 먹이시고 하나님의 산 호렙에 불러서 영광을 나타내시며 숨겨놓은 칠천인과 하사엘과 예후와 엘리사가 있음을 말씀하시며 새롭게 힘을 주시고 사명을 주시던 하나님. 그 하나님의 위로와 힘주심이 오늘 우리에게 임하기 원합니다. 일어섭시다.

     

 

             저 흰 눈처럼 

                           최송연

날마다

정결함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은빛 날개 순백한

저 흰 눈처럼...

가식 없는

진실한 영혼

원수가 없게 하소서

가시마저 끌어안는

저 흰 눈처럼...

사심 없이

조금 더 사랑할 수 있게

아집(我執)을 녹여주소서

자신을 녹여 상대를 살리는

저 흰 눈처럼...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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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제5장 보속설에 첨부된 면죄부와 연옥(1-5) / 존 칼빈

 

 

제5장 보속설에 첨부된 면죄부와 연옥
 
(면죄부의 교리는 오류이며 그 영향은 유해하다. 1-5)
1. 로마 교회의 면죄부와 그 해독
그런데 이 보속의 교리에서 면죄부(또는 속죄부, Indulgences)가 생겨났다. 우리의 논적들은 보속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능력이 부족한 것을 면죄부가 보충하는 듯이 말한다. 그리고 광적인 극단으로 가서, 면죄부는 그리스도와 순교자들의 공로의 분배라고 정의하며, 교황이 교서에 의해서 그 공로를 분배한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토론의 상대로 삼는 것보다 정신병 치료제로 치료하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까지 어리석은 오류는 논박하려고 애쓸 가치가 없다. 그것은 이미 많은 쇠망치의 공격을 받아 저절로 낡아가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간단한 논박이 유익할 것이므로 나는 그냥 생략하지 않겠다.
면죄부가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공격을 받지 않았으며, 무제한의 방자와 난무를 감행하면서도 이렇게 오랫동안 심판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얼마나 짙은 오류의 암흑 속에 빠져 있었는가를 잘 증명한다. 사람들은 교황과 그 교사 전달자들이 아주 노골적으로 자기들을 우롱하는 것과 자기들의 영혼의 구원을 이익이 많은 장사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과 구원의 값을 돈 몇 푼으로 계산하는 것과 값없이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았다. 이런 협잡으로 그들은 예물을 빼앗기며, 빼앗긴 것은 매춘부들과 포주들과 난취 난무에 허비되는것을 보았다. 그들은 또 면죄부의 최대 선전가들이 자기들을 가장 경멸하는 것을 보았다. 이 괴물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소란하고 음탕하게 돌아다니며 그칠 줄을 몰랐고 매일 새로운 납을 내놓고, 새로운 돈을 가져갔다. 그래도 그들은 최고의 경의를 표하여 면죄부를 받으며, 경건한 모양을 가진 사기인 줄 알면서도 속는 사람들에게 다소의 유익을 줄 것으로 생각해서 그 앞에 경배하였다. 드디어 세상이 조금 지혜롭게 되려는 용기를 내게 되자, 면죄부는 냉각하며 점점 열기가 식어가고 있으니 결국 완전히 소멸하고 말 것이다.
 
2. 면죄부는 성경에 배치된다
면죄부 상인들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 지금까지 비루한 간객과 기만 수단을 썼고 탐욕과 도둑질을 자행한 것을 지금 많은 사람들이 간과했지만, 이 불경한 죄악의 근원 자체는 아직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면죄부의 성격뿐 아니라, 그 정체를 깨끗이 드러내 보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논적들은 그리스도와 거룩한 성도들과 순교자들의 공로를 "교회의 보고"라고 부른다. 내가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 그들은 이 창고의 보관권을 로마 주교에게 위임하였으며, 로마 주교가 이 심히 위대한 혜택의 분배를 주관하여, 직접 분배하기도 하며 분배 사업을 타인에게 위임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완전한 면죄부와 일정한 연한의 면죄부는 교황이 발부하며, 백일간의 면죄부는 추기경들이, 그리고 사십일 간의 면죄부는 주교들이 발부한다고 한다.
올바르게 말한다면, 이런 짓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분리시켜 구원의 진정한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악마적 간계에 불과하다. 죄의 용서와 화해와 보속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보다 더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짓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주장은 마치 그리스도의 피가 고갈되어 없어졌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보충해야 된다는 듯한 생각이다. 베드로는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들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라고 증거한다(행 10:43). 면죄부는 베드로와 바울과 순교자들을 통해서 사죄를 부여한다. 요한은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라고 말했다.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가 죄를 씻어버린다고 한다. 바울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도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고 말했다.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가 죄에 대한 보속이 된다고 한다. 바울은 고린도의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만이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선언하며 증거한다(고전 1:13). 면죄부는 "바울과 기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고 선언한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라고 하였다.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도 교회를 사는 값이 되었다고 한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면죄부는 거룩하게 함은 순교자들에 의해 완성하며, 그렇지 않으면 불충분하다고 선언한다. 요한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고 말했다. 그러나 면죄부는, 성자들의 피로 옷을 씻는다고 가르친다.
 
3. 권위자들은 면죄부와 순교자들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다
로마 주교 레오는 팔레스틴 교인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아주 분명한 말로 이 모독 행위를 공격한다. "여러 성도들의 죽음을 주께서는 귀중하게 보시지만(시 116:15), 한 무죄한 사람이 살해된 것이 세상을 위한 화목의 제물은 되지 않았습니다. 의인들은 면류관을 받는 것이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의 용기는 인내의 모범을 보였으나, 의의 선물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의 죽음을 죽은 것이며, 그 죽음은 다른 사람의 빚을 갚는 것이 아닙니다. 주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시며,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매장되고 부활하였습니다." 그는 이 생각을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해서, 다른 곳에서도 반복하였다.
확실히 그 불경한 교리를 부수기 위해서 이보다 더 분명한 발언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어거스틴도 그에 못지 않게 적절한 말로 같은 판단을 내린다. "우리는 형제로서 다른 형제들을 위해서 죽지만 순교자가 피를 흘리는 것은 죄의 용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미 하셨다. 그가 우리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도 그를 모방하라는 것이 아니고 은혜를 기뻐하라는 뜻이다." 그는 같은 생각을 다른 곳에서도 표명하였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우리를 그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고 인자가 되셨다. 그와 같이 내놓을 만한 선함이 없고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가 그를 통해서 은혜를 얻도록 하기 위하여 죄 없는 그가 홀로 우리를 위하여 벌을 받으셨다." 그들의 모든 교리가 무서운 소독적인 생각과 말을 꿰매어 붙인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이것은 가장 놀라온 모독이다. 다음에 몇 가지 생각을 열거할 것인데 이것이 그들의 판단인지 또는 아닌지를 알아보자. 그 순교자들은 죽음으로써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렸으며 그로 인하여 필요 이상의 공로를 세웠다. 그리고 그들의 공로는 너무 많아서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넘쳐흐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은혜가 헛되이 되지 않도록, 그들은 자기의 피를 그리스도의 피와 섞었다. 그리고 죄의 용서와 배상과 보속을 위하여 이 섞인 피에서 교회의 보고가 구성되었다. 그리고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고 한 말은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된다.
이런 입장은 그리스도에게 이름만을 남기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다른 성자들과 구별할 수 없는 일개의 작은 성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스도만이 선포되며 제시되며 그 이름을 부를 가치가 있는 분이었다. 죄의 용서와 화목과 성화를 얻는 문제가 있을 때에는 그만이 소망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라고 하는지 들어 보라. 순교자들이 흘린 피가 무익하게 되지 않도록, 그 피를 교회의 공동 재산에 기증하라고 한다. 이것은 사실인가? 그들이 죽음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은 무익한 일이었는가? 그들의 피로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며, 현세 생활을 멸시함으로써 더 좋은 생명을 구한다는 것을 증거한 것이 무익하였는가? 그들의 굳센 지조로 교회의 믿음을 강화하며 원수들의 고집을 깨뜨린 것이 무익하였는가?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만이 화목의 제물이며, 그만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그만이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회생되셨다고 하면서 순교자들의 죽음에 아무 결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베드로와 바울은 평안히 죽었더라도 승리의 면류관을 받았으리라고 그들은 말한다.
사도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싸웠으므로 그들의 희생에 아무 결실도 없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부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선물의 분량에 따라 그의 종들을 통해서 자기의 영광을 더하실 줄을 모르신다고 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그들의 승리로 인해서 교회에 전투열이 일어날 때 교회는 전체적으로 큰 혜택을 입는다.
 
4. 반대자들의 성경 해석을 반박함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육체에 채운다(골 1 : 24)고한 말을 그들은 얼마나 사악하게 곡해하는가! 바울은 그 남은 것 또는 보충되는 것을 구속, 보속, 속죄와 관련시키지 않고,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즉 모든 신자들이-지상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단련을 받기 위하여 당하는 고통과 관련시킨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직 남아 있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한 번 당하신 고난을 지금은 그의 지체들을 통해서 매일 당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는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인정하셔서, 우리에게 이 특별한 영예를 주신다. 그런데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라는 말을 첨가한다. 이것은 교회의 구속이나 화해나 보속을 위해서라는 뜻이 아니고, 교회의 건설과 발전을 위해서라는 뜻이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얻게 하려고, 자기는 모든 것을 참는다고 말한다(딤후 2:10). 그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받는 모든 고난을 참는 것은 그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라고 하였다(고후 1:6).
그는 즉시 자기가 한 일의 뜻을 설명하여, 자기가 교회의 일꾼이 된것은 구속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한다(골 1:25, 롬 15:19).
만일 나의 반대자들이 다른 해석자를 요구한다면 어거스틴의 말을 들어 보라. "그리스도의 고난은 머리이신 점에서는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있으며, 몸 전체로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있다." 따라서 한 지체인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이 말을 듣는 분이 누구이든 간에-그리스도의 한 지체라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 사람들에게서 당신이 받는 고통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다.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사도들이 교회를 위해서 당한 고난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내게는 여러분에게 가는 문이십니다"(요 10:7). 이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피로 준비된 그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값을 인정하십시오. 나는 그 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전파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같이, 우리도 우리의 형제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이것은 평화를 수립하며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라고 첨부한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한 말이다. 바울이 완전하고 충실한 의와 구원과 생명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결함이 있었다고 생각했다는 관념은 버려야 한다. 또는 그가 무엇을 첨가하려고 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바울은 분명하고 웅장한 말로 그리스도께서 풍성한 은혜를 풍부하게 부어주셨기 때문에, 그 은혜가 죄의 세력 전체를 훨씬 능가했다고 전하였다(롬 5:15). 베드로가 웅적으로 증언하듯이(행 15:11), 모든 성자들도 자신의 생활이나 죽음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이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어떤 성자의 가치를 하나님의 은혜 이외에 어떤 다른 것에 의존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를 경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괴한 오류는 정체가 폭로되면 곧 정복되는 것인데, 나는 무엇 때문에 아직도 모호한 점이 있는 듯이 여기서 더 시간을 보낼 것인가?
 
5.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일성과 포괄적 활동을 방해한다
나는 이런 가증한 것들은 무시하고 이제 묻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복음의 말씀에 의해서 널리 전파하라는 것이 주의 뜻이었는데, 그 은혜를 납과 양피지에 봉인하도록 교황에게 가르친 것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복음과 면죄부 이 둘 중의 하나가 거짓인 것은 분명하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복음을 통해서 하늘의 모든 풍성한 은혜와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와 그의 모든 의와 지혜와 은총과 함께 하나도 예외 없이 우리에게 제공된다고 증언한다.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행동하도록 화해의 말씀이 사역자들에게 위탁되었는데, 이를테면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호소하신다고 바울은 말한다(고후 5:18-21)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0-21). 그리고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친교의 가치를 안다. 이 친교는 바울이 증언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받아 즐기도록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제공된다. 이와 반대로 면죄부는 교황의 창고에서 소량의 은혜를 끌어내선 납과 양피지와 일정한 장소에 붙이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은혜를 떼어버린다.
이 악폐의 근원을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전에는 참회하는 사람들에게 명령된 보속 의무가 견딜 수 없으리만큼 엄격했기 때문인 듯하다. 참회자들은 그들에게 부가된 무거운 고행에 눌려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교회가 그것을 다소 완화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런 사람들에게 허락하는 용서를 "면죄"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들이 보속을 하나님과 관련시키고 그것을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신을 구속하기 위한 상쇄 수단이라고 했을 때에, 그들은 면죄 구속 수단으로 변형시켜, 이것이 우리가 받아야 할 벌에서 우리를 석방시킨다고 했다. 그들은 이렇게 파렴치한 생각으로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짓이라고 한 저 훼방죄를 저지른 것이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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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기독교 단체 및 시민단체 28곳이 참여하는 동성애문제대책위원회가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내용 중 동성애 옹호 조항이 삭제된 것을 환영하는 한편, 서울시 의회가 개정된 학생인권조례안을 즉각 통과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동성애문제대책위원회가 7일 오후 서울시 교육청 앞에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개정안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가졌다.ⓒ뉴스미션

동성애 노골적 표현 삭제…‘개인성향’ 등 문구는 잔존

서울시 교육청이 그간 논란이 많았던 학생인권조례 내용에서 성적 지향, 성소수자, 임신 및 출산 조항을 삭제한 개정안을 지난 달 30일 입법예고했다.

이에 동성애문제대책위원회는 7일 오후 2시 서울시 교육청 앞 기자회견에서 “이번 개정안은 기존 조례안을 대폭 수정하여 노골적으로 동성애를 옹호했던 조항을 삭제했다. 개정안에 대한 지지 의사를 표명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동성애문제대책위원회는 개정안 내용 중 동성애에 대한 직접적 표현은 아니지만, 해석 여하에 따라 동성애와 관련된 조항들이 잔존함에 따라 이의 추가 삭제를 요청했다.

이들은 차별금지사유 중 ‘개인성향’, ‘가족형태 또는 가족상황’, ‘성소수자 학생’ 문구 등이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이 포함된다고 해석될 수 있고, 동성애를 옹호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단체는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옹호한다는 미명 아래 서구사회와 같이 타락한 비윤리적 성문화를 우리 사회에 조장하고 확산시키는 반사회적 일탈 행위를 반대한다”며 “개정안의 추가 삭제를 요청하며, 서울시 의회는 서울시 교육청의 개정안을 즉각 의결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동성애문제대책위원회는 이날 단체 의견을 담은 공문을 교육청에 제출했다.

서울시 교육청은 오는 19일까지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개정안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고, 1월 말에는 서울시 의회에 해당 개정안을 제출하고 의회에서 개정안에 대한 의결 과정을 거칠 예정이다.
 
기사제공(c) 뉴스미션/USA파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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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검증>


이번 주제는 성경적인 검증 다음으로 역사적인 검증이다. 론 와이어트의 법궤의 발굴은 고고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지자의 예언(기록)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일치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역사적으로도 검증되어야 만이 론 와이어트의 법궤의 발굴은 성경적으로도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론 와이어트“법궤 발굴과 예수님의 피 발견의 진실과 거짓”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언약궤가 사라진 당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였다. 그리고 언약궤의 대해 마지막으로 예언을 남긴 선지자이다. 그래서 언약궤의 내막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바벨론에 침략으로 인해 예루살렘성과 성전이 동시에 무너졌을 때, 선지자는 지성소에 있던 언약궤 행방에 대해 누구보다도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론 와이어트에 따르면, 선지자가 그토록 관심을 가졌던 언약궤는 당시 멀리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골고다 지하에 있는 바로 자신의 동굴 속비밀리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벨론이 남유다를 정복했을 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쇠사슬에 결박되포로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도중에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특별한 배려로 중간에 풀려나게 되어 자유몸이 되어 다시 예루살렘 민족의 품으로 돌아간다(렘40:1, 5). 선지자는 포로로 바벨론까지 가지 않았다. 선지자가 포로가 되어 바벨론까지 끌려가지 않았던 것은 외면적으로는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특별한 배려로 치부(置簿)될 수 있는 일이지만, 내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언약궤의 행방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역사적으로 이루어졌다. 예레미야 선지자예언 이후에 선지자 자신이나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제사장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그 누구도 언약궤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며, 생각이나 기억조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 찾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만들지도 않았다. 언약궤에 대한 성경의 역사는 이렇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언약궤의 언급(기록)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법궤라는 용어는 레위기서 1회로 끝이 나며(레16:2), 증거궤라는 출애굽기로부터 시작으로 21회 정도 나오나 여호수아에서 끝났다(출25:22; 수4:16). 언약궤는 민수기에서 시작하여 43회 정도 가장 많이 나오고 있지만 예레미야서에서 마무리되었(민10:33; 렘3:16). 그 이후에 그 누구도 언약궤(증거궤, 법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함구하고 있다. 론 신약에서 히브리서 기자와 사도 요한이 언약궤를 한 번을 언급하고 있지만, 언약궤존재나 본존 그리고 관보다는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언약궤를 온전한 천상보좌, 새 언약 안에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신약의 두 번언약궤의 언급은 예레미야 선지자에 언하고는 전혀 무하다고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성경의 기록언약궤의 모든 역사이다. 그러본 단두에서 말한 것처럼 론 와이어트의 법궤의 발견은 성경적인 역사와 너무나 불일치하고 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 이후에 언약궤가 이 세상에 존재했든 안 했든 간에 선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그 누구도 역사적으로 함구해 왔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다. 이것은 언약궤의 존재 유무를 떠나서 어떤 사람언약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선지자의 예언은 역사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대변해 준다.


그런데 2500년이 지나 뜬금없는 론 와이어트의 법궤의 발굴과 그가 말하고 또 말하는 간증 집회는 그동안 언약궤에 대해 함구해 왔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물론 선지자들뿐만이 아니라 언약의 수혜자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색하고 있다. 그고 언약궤에 대한 성경적인 역사를 알고 있는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혼동과 혼란을 주고 있는 것도 주지의 사실다. 물론 이런 역사적 사실을 전혀 모르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지어는 일부 목회자들이지만 대단한 발견이라고 찬사를 보내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벨론 포로 생활은 1-2년 정도가 아니었다. 70년이라는 사적미를 가지고 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당시 지도자급인 느헤미야, 스룹바벨, 학개, 스가랴 등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함께 재되었다. 이때 재건된 성전은 스룹바벨이 주도했다고 해서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른다.


예레미야 동굴 속에 그동안 은밀하게 보관되어 온 언약궤는 완공된 스룹바벨 성전으로 당연히 옮겨져야 한다. 왜냐하면 바벨론 군대가 언약궤약탈해 가서 보관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그것도 예루살렘과 아주 근 거리에 있는 골고다 지하 예레미야 동굴 속에 언약궤가 있었기 때문이다. 언약궤는 반드시 지성소에 있어야 하는 것이 당시 이라엘 백성들의 절대적 신앙이었다. 성전 재건이 완공되었는데도 불구하언약가 지하 동굴에 있을 하등의 이유가 없었으며, 이것은 또한 이스라엘 신앙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론 와이어트의 의하면 성전이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약궤는 여전히 예레미야 지하 동굴 속에 은밀하게 있어야 했다. 이러지 않고서는 론 와이어트는 2500년 후에 예레미야 동굴에서 역사(고고학)적으로 법궤를 발굴할 수가 없다.그러나 지자는 오히려 언궤에 대해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찾아니할 것이요’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 언은 역사적으로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뜬금없는 론 와이어트의 법궤의 발은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불일치하는 비성경적이며, 비역사적인 무지의 발상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여기서 진실로진실로 알아야 할 것은 론 와이어트의 동영상에서 말하고 있는 법궤의 견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역사적으로 사라진 언약궤에 대한 진실성 여부이다. 이 부분은 다음 단락인 신학적 검증에서 다루게 된다.



<신학적인 검증>


론 와이어트의 간증 동영상은 법궤의 발굴뿐만 아니라 발굴하는 과정서 예수님의 피까지 발견했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다시 말해서 법발굴과 예수님의 피 발견이 동영상의 주된 내용이다. 그래서 이번의 논제는 법궤와 예수님의 피에 대해신학적로 검증하려고 한다. 전자는 언약궤가 이 세상에 보관되어 있는가 하재여부와 2500년 전에 사라진 법궤를 론 와이어트가 발굴했는데 그 법궤가 그대로 보존된 진품인가에 대해 치중할 것이며, 후자는 예수님의 피의 염색체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의 관계성에 대해 치중할 것이다.


1. 론 와이어트의 법궤 발견

론 와이어트가 발굴했다는 법궤는 바벨론이 침략하여 성전이 허물어지기 전에 사라졌던 진인가? 다시 말해서 성전에서 사라진 언약궤의 진성의 문제는 신학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안고 있다. 물론 진품명품에 뢰하여 감정사에게 감정을 받아야 할 소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감정의 문제는 필자의 소관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론 와이어트가 발굴했다는 법궤의 진실성은 두 가지가 관건이다. 하나는 사라진 언약궤의 행방이며, 다른 하나는 언약궤의 진품의 문제이다. 전자신학(성경)적으로 제시할 것이며, 후자는 필자가 고고학자나 감정사가 아니기 때문에 전문성보다는 신학적 관점에서 나름대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북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남 유다까지 패망하게 되었다. 라의 패망은 포로, 파괴, 무질서 등이 현실적으로 당면하게 된다. 하나님을 섬기던 남 유다예외 없이 이러한 전철(前轍)을 그대로 밟았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백성들포로로 잡혀갔으며, 예루살렘성과 성전은 무참하게 무너졌다. 그런데 성전이 무너지전에 약궤가 사라졌다는 것은 신학자들이 거의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특히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이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언약궤가 사라졌다면 그 행방의 문제가 대두된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언약궤의 행방은 학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고 한 것이다. 여기 신학적인 과제는 것은 어떤 큰 논제 보다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언약궤에 대해 마지막으로 예언하고 있는 예레미야 3장 16절을 진정으로 해석하여 제시하는 것을 뜻한다.


성전 지성소에 안치되었던 언약궤가 성전이 허물어지기 전에 누구에 의해 어디로 옮겨졌을까? 언약궤의 행방은 이렇게 묘연하다 보니 신학자들보다는 고고학자들 사이에 더 큰 관심사가 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신학자들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언약궤를 찾으려는 시도를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고고학자들은 유적과 유물, 즉 고품(高品)에 대해 더욱 관심이 많은 분야이기 때문에 그들의 속성대로 언약궤를 찾으려는 시도해 온 것이다. 론 와이어트의 법궤의 발굴도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와이어트가 법궤를 얼마나 찾고 찾았는가를 잘 보여주는 동영상의 내용이다.


2500 여년에 긴 세월 동안 묻혀 있었으므로 탐사는 수많은 역경에 부딪쳤으나 그만 포하려고 절망할 때마다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어 격려하였고, 마침내 언약궤가 보관되어 있는 비밀 장소를 발견하게 되었다.”


론 와이어트가 발굴한 법궤는 예레미야 동굴에서 약 2500년 동안 은하게 보존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필자는 언약궤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설사 존재하더라도 성전으로 다시 옮겨질 수 없는 상황이나 형태일 것이다. 왜냐하면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에 이러한 사실이 분명하게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선지자의 예언을 확인하고 해석으로 들어가겠다.

“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만들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여기 ‘나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계시적으로 주신 예언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록하면서 개인적으로 삽입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예언은 선지자의 삽입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적으로 선지자에게 직접 주신 말씀(예언)임이 분명하다.


여기 ‘너희’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 예언의 수혜자뿐만 아니라 준행자이다. 그리고이 땅’은 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암시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전쟁(침략)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뿐만 아니라 포로로 잡혀갔다. 그리고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여기서부터 형성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인구의 감소는 당연한 것이다. 미래를 보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정확하며 놀라운 것이다. ‘이 땅’ 이 한 마디에 정치적, 사회적(특별히 인구문제)인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 ‘번성하여 많아질 때’라는 말은 나중에 포로들의 귀환과 회복으로 인한 인구 증가를 말한다. 이 역시 미래를 보시는 하나님의 안목이시다.


여기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에 대한 신앙의 견지(堅持)를 암시하고 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오늘날 우리보다 훨씬 잘 알고 있었다. 언약궤가 없는 성전(지성소), 언약궤가 없는 제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언약궤는 성전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궤에 대한 말씀을 마지막으로 남기신 것이다.


‘다시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를 다시 만들지 아니할 것으로 예언을 마무리하셨다. 여기 ‘언약궤만들지 아니할 것이며’라는 말은 이제 이후로는 ‘결코 다시는 만드는 일이 없을 것’을 뜻한 말이다. 그래필자는 여기에 주목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 언약궤의 행방여기에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는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몇 가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다.

째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언약궤는 두 번 이상 만들 필요없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십계명에 쓴 두 돌 판은 두 번 만들어졌다. 그러나 언약궤는 그런 일이 없을 것임을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린 것이다.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다시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사전에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종의 쐐기를 박은 것이다.


둘째는 ‘만들지 아니 한다’는 말은 ‘만든다.’에 대한 반대이다. 그래서 ‘무엇을 다.’은 그 물체에 대한 존재 여부를 가름할 수 있다. 그러나 언약궤개나 개 만들어서 성전 지성소에 안치할 성질이 아니다. 그러므여기 ‘언약궤 만들지 아니한’는 것은 언약궤가 없다는 당시 상황을 말한다. 만약에 언약궤가 계속 어디인가 존재하게 된다면 ‘만들지 아니할 것’이라고 예언하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는 만약에 하나님께서 언를 예레미야 동굴에 은밀하게 숨겨놓고 선지자에게 이런 예언을 하도록 계시를 주시지 않았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법궤가 예레미야 동굴로 옮길 것을 예상하고 ‘언약궤를 만들지 라’는 계시를 주시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런 예언을 주실 하나님이 아시다. 약궤가 선지자의 동굴로 옮길 것을 계획하면서 다시 만들지 말라했다면 이 예언은 모순이거나 론 와이어트가 2500년 후에 언약궤를 발견할 때까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남겨둔 것이 된다.


넷째성전은 재건되었는데 언약궤가 없다는 것은 앞에한 것처럼 당시 이라엘 성들에게용납할 수 없는 일(신앙)이다. 만약에 언약궤가 있었다면 유대도자들은 언약궤를 전으로 옮겼을 것이며, 만약에 없었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언약궤를 만들어 성전 지성소에 안치하려고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언약궤의 시공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중에 그 누구도 역사적으로 언약궤를 찾지 았고 말하지도 않았으며 새로운 것으로 만들지도 않았다. 하나님은 이런 일까지 이미 아시고 이스라백성들에게 선지자를 통해 계시적으로 전달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예언은 역사적으로 성취된 것이다.


다섯째는 ‘언약궤를 다시는 만들지 아니할 것’을 특별히 예언의 시작과 끝에 두 번씩이나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언약궤의 존재에 관한 중요한 정보로서 언약궤의 불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언약궤는 없거니와 새롭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선지자를 통해 언약궤의 시공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조점을 두며 알리신 것이다.


여섯째는 여기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언약궤가 아니라 여호와의 약궤라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이 처리하신다는 뜻이 암시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는 하나님의 의도(섭리)를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약궤의 설계자이시기 때문에 언약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언약궤의 시공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궤를 다시 만들지 말 것을 선지자를 통해 통보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언약궤의 수난사대해서도 잘 알계신다. 래서 이제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지성소에 안치한 언약궤보다는 ‘언약궤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 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겠다는 뜻, 하나님의 섭리가 여기에 담겨져 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가시상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해왔다. ‘지성소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장소)이다’ 하나님께서 지성소에 임재하신 것은 지성소라는 장소 때문아니라 지성소 안에 언약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언약궤가 전히 필요로 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언약궤의 원형예수 그리스도’가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제는 사람이 만든 언약궤는 더 이상 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궤를 더 이상 만들지 말라고 계시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성취된 것이다.


이처럼 ‘다시 만들지 말라’는 계시적 언약 속에는 이런 의미들이 함축되어 분명하게 암시되어 있다. 특별히 여기 ‘다시는라는 말은 당시 언약궤의 존재 여부에 대해 가름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궤를 ‘다시는 만들지 말라’고 계시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언약궤의 불필요성 때문만이 아니라 언궤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문이다. 만약에 언약궤가 예루살렘 성전과 근접있는 골고다 지하 예레미야 선지자의 동굴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면 하나님은 ‘다시는 만들지 말라’는 계시적 언약을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두 가지 진지한 질문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언약궤의 행방은 어디인가? 여전히 언약궤의 행방은 묘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언약궤가 성전 파괴 이후에 예례미야 선지자의 동굴속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론 와이어트가 예례미야 선지자의 동굴속에서 발견했다는 법궤가 진품이냐 아니냐는 진실성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 단락의 결론에서는 이 두 가지를 물음에 대한 견해를 밝히면서 마리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본 단락 서두에 말한 것처럼 론 와이어트가 발굴한 법궤의 진실성을 가름해 주는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1.1 법궤의 행방의 문제

예루살렘 성전 지성소에 안치되었던 언약궤는 바벨론의 침략으로 성전이 무너지기 전에 쪽같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언약궤의 행방은 어디일까? 지금까지 경적, 역사적, 신학적 검증을 통해 살펴본 같이 언약궤의 행방은 하나님의 별한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었다. 당시 상황로 보아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 의해 언약궤가 옮겨지며, 숨겨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골고다는 예루살렘 성 밖에 있지만 먼 거리가 아니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길이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어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겠다. 동굴은 당시 무덤으로 많이 사용했다. 예루살렘 근거리에 있는 선지자의 동굴은 사람들에게 쉽게 노출되십상(十常)이다. 론 와이어트가 2500년 후에 법궤를 발견하도록 은밀한 곳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법궤가 예레미야 선지자의 2500년동안 보관되었다는 설은 설득력이 전혀 없다.

그래서 필자는 특별히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이 사실은 의심에 여지가 없는 것으로 신하는 바이다. 지성소에 있던 언약궤는 바벨론이 약탈해 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두어 가실 계획을 하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이런 예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언약궤를 거두어 가시지 않았다면 언약궤는 당시에 누군가가 찾게 을 것이며, 언약궤를 발견한 사람은 언약궤에 대해 당당하게 했을 것이며, 이라엘 모든 백성들은 생각하고 생각했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에게 언약궤를 성전 지성소에 안치하도록 권유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의 예언처럼 그 누구도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선지자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론 와이어트의 법궤의 발견으로 선지자의 예언비틀어 질대로 비틀어진 것이다.


이제 선지자의 예언이 잘못된 것인지 론 와이어트의 법궤의 발견이 잘못된 것인지의를 듣는 청중들이나 이 글을 보는 독자들의 몫이라고 생한다.


예루살렘 성전 지성소에 안치되었던 언약궤가 사라진 것은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신학계나 고고학계나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별다른 이견이 없이 그대로 받아드리있다. 그러나 사라진 언약궤의 행방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래서 ‘언약궤의 행을 찾아서’라는 고고학적인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성전 지성소에서 사라진 언약궤는 사람들에 의해 피신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펴본 것같이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거두어 가신 것은 앞 단락인 ‘언약궤를 다시는 만들지 않는다.’는 의미를 설명하면서 일차적으로 설명이 되었다. 그래서 여기서는 두 가지로 요약하여 정리하여 설명하겠다.


1) 언약궤의 불필요성 때문이다. 

언약궤의 불필요성은 언약궤가 고난을 받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제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두어 가신 것이다. 


2) 하나의 뜻이 여기에 반영된 것이다.

언약궤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역사를 이루어가겠하나의 뜻이 여기에 반영된 것이다. 


이제 사람의 손으만든 그림자적인 언약궤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것은 계속되는 성전 제사에서도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이스라엘 대제사장은 언약궤가 사라진 지성소에서 매년 7월 10일 느 때별 다없이 속죄제를 계집례를 해 왔다. 다시 말해서 대제사장은 텅 비어 있는 지성소에제사를 집례를 한 것다. 이것은 이스라엘 제사법에서 있을 수 없일인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이런 제사를 드려온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이것 역시 제사의 비밀 중에 하나 일 것이다.


이것은 또한 무엇의미하고 있는가? 여기에는 세 가지 큰 의미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는 지성소에 언약궤가 없어제사를 받으셨다는 것이며, 둘째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언약궤의 불필요성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언약궤가 없는 지성소에서 하나님은 제사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는 언약궤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사를루어 가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언약궤가 불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지성소에서 사라진 언약궤는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았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론 와이어트의 법궤 발굴은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불일치하고 있으며, 그리고 신학적으로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에 신뢰성보다는 론 와이어트의 술수로 보았던 것이다.


1.2 법궤의 진품의 문제

이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론 와이어트가 예루살렘 근거리에 있는 소위 예레미야 선지자 동굴에서 발견한 법궤는 진실의 공방이 대두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2500년이라는 장고한 세월이 흘렸기 때문이다. 러나 법궤의 진품의 여부는 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필자는 ‘고고학자나 감정사아니기 때문에 전문성이 없어 논할 개제는 못되지만 여기서 세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첫째는 법궤의 행방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법궤 행방이 묘연하고 있는데 법궤를 발굴했다는 자체에 의구심이 가기 때문에 진실보다는 거짓이 더 농후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둘째는 어떤 고고학자나 아무리 고품(古品)을 전문적으로 하는 감정사라고 하더라도 법궤의 진품을 감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고고학자나 감정사도 진품을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론 와이어트가 발굴했다는 법궤는 진실을 판가름할 수 없다. 그래서 론 와이어트가 발굴한 법궤는 절때로 진짜라고 말할 수 없으며 또한 말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셋째는 론 와이어트가 발굴한 법궤는 이스라엘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이 말은 법궤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베일에 가려져 있는 법궤를 진짜라할 수 없다. 이 부분은 종합적인 평가에서 자세히 밝히겠지만, 법궤 발굴과 검사의뢰는 물론 심지어는 결과 발표 등 모든 과정을 두 사람도 아닌 론 와이어트 혼자 했다. 실상은 이것이 더 베일에 가려져 있다.


<계 속> 

 

    하나님의 법 없이는 자유도 없다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이나 우리가 행하는 그 어떤 행위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은 항상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 이 진리는 우리가 믿음을 처음 가졌을 때나 믿음을 가진 후에나 결코 변함이 없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한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의 피와 의를 의지해야만 한다. 우리의 본성이나 행위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대신하거나, 그리스도와 나란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항상 부족할 뿐이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기 싫어 하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방법, 체계, 혹은 기준을 마련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려는 허무한 노력을 계속하고자 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신이 되려 하거나, 좀더 나은 상태에 이르고자 하는 성향을 가진다.
    우리는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 무엇을 얻으려고 하거나,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려고 한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세운 업적과 공로를 잣대로 삼아 각자의 가치와 지위를 측정하려고 한다. 이 모든 일이 사회, 경제, 교욱 등과 같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은혜의 율법이 아닌 공로의 율법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하나님과 교회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공로의 율법에 따라 행동하려는 습성에 젖어 있다.
    우리는 다만 은혜의 샘에서 생수를 마심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복종의 삶을 살 수 있다.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다가 마침내 그분의 계명에 의해 인도함을 받을 때 우리는 무한한 자유를 느끼게 된다. 율법폐기론은 어둡고, 혼돈스럽고 영적으로 위험한 세상에서 아무런 안내도 해 주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안개와 같다.
    하나님의 율법은 이와 같은 율법폐기론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한다. 하나님의 계영에 순종할 때만 우리는 죄를 극복할 수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죄의 종'(로마서 6:20-22)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인간은 타락한 본성과 그릇된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속박된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을 때 우리는 분노와 야망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고, 살아 온 생을 후회하게 된다.
    믿는 자들은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율법은 믿는 자의 삶에 있어서 여전히 길잡이 역할을 한다. 이런 사실을 솔직히 인정할 때 하나님의 법 없이는 자유도 없다는 성경의 증언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벤자민 워필드, Mark. D. Baker, Bryan Chapell.   
    글/창골산 봉서방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복음, 율법" 중에서

;   


 세 종류의 그리스도인 / 아더 핑크

 

 

일반적으로 말해 소위 “그리스도”이라고 불리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설교자에 의한 그리스도인, 자아에 의한 그리스도인, 하나님에 의한 그리스도인이다.

 

‘설교자에 의한 그리스도인’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받고 교회의 정회원이 되었을 뿐 아니라(특수한 직임은 맡지 않았을지라도), 책임 연령에 이르면 전도자에게 ‘고백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러한 강요받는 형태와 정도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에서 대중최면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법을 통하여 ‘앞으로 나오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도 없이 ‘당당한 일을 하도록’,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모이도록‘, ’하나님의 백성들과 연합하여 악에 대항하여 싸우는 십자가의 군병이 되도록‘ 권유받는다. 이러한 신자들은 버섯과 같아서 밤사이에 돋아 올라 잠시 동안 지탱하나 뿌리가 없어 견디지 못한다.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소위 ’인격적인 사역‘이란 미명하에 많은 사람들이 강요받는다. 이는 마치 떠돌이 외판원들이 세일하는 방식으로 실적을 올리려는 수작과 유사하다. 

 

‘자아에 의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방금 앞서 말했던 사실들로 경고 받은 자들이며, 종교적인 협잡꾼들에게 농락당할까봐 두려워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협잡꾼들이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과 영교함으로 ‘만사형통’하다고 농간부리는 데 속지 않으려고 주의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만인을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그리스도께서 전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복음을 믿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받아 들인다. 
그들은 요한복음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과 로마서 10:16(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라는 말씀을 단지 지적으로 승인하거나 받아들인다. 요한복은 2:23-24의 말씀은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많은 사람이 그를 믿었으나 저희가 바리새인을 인하여 회당에서 쫓겨날까봐 그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께 칭찬 듣는 것보다 사람에게 칭찬듣기를 더 좋아함이라”. 여기에서 그들의 믿음이 문제가 된다. 자연인도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들은 나름대로 만사형통하게 나아갈 수가 있으며, 기뻐할 수가 있다.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흔들 수 없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놀라운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이 지적으로 승인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러한 자들은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전적으로 자기 의지에 의해 좌우된다고 생각하는 자들과 다를 바 없다. 
타락한 인생의 운명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처분에 달려 있다는 사상은 이러한 교만한 자들에게는 정말로 관심이 없다. 
그리스도께 나아온다는 자체가 영적인 활동이지 자연적인 활동은 아니다. 
중생하지 못한 자는 죄와 허물 가운데 완전히 죽어 있기 때문에 어떤 영적인 활동도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께 나아온다는 것은 주님을 절감하는 영혼의 사역이며, 잃어 버린 바 된 죄인을 영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게 된 결과이며, 그를 간절히 사모하는 애정의 발로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과 원수’된 자연인이 성자 하나님을 사모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에 의한 그리스도인’은 은혜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지으심으로 말미암는다(엡 2:10). 
그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듭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고 새로운 지각과 활동을 하게 된다. 
옛 성품으로써 신령한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없는 무언가 새로운 것으로써 교통하는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은 ‘영으로 난 자는 영이니’(요 3:6)라고 말한 분과 동일한 성품에 참예한다. 그의 거룩한 성품에 참예한다. 
그것은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 전가시킨 은혜의 원리이며, 그를 기쁘시도록 열매 맺게 하는 성향이다. 
중생은 어떤 지루한 과정이 아니라 즉각적이다. 
거기에는 다른 아무것도 추가 될 수 없고 제해버릴 수도 없다(전 3:14). 그것은 하나님의 법정적인 소산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매 그대로 되었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중생은 성직자의 마술적인 사역의 결과이거나 개인적인 체험의 결과가 아니다. 
중생받는 자는 순전히 피동적이며 무의식중에 그것을 받는다. 
성육신 하신 진리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3). 
혈통에 대해서 - 유전은 이 일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교도들의 조상들이 수세기 동안 우상을 숭배하였지만 그 후손들을 중생시켰기 때문이다. 
육정에 대해서 - 하나님의 살리시는 역사 이전에 인간의 자의지는 철저히 하나님과 반대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뜻에 대해서 - 설교자는 자신을 중생시키지 못할뿐더러 남도 중생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생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전권적인 역사로써만 가능하다.

또 다시 그리스도께서는 선포하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그 결과는 명백함)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이것의 원인과 작용은 인간으로서는 깨달을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신비한 역사임)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이러한 하나님의 선포는 마치 빛이 어둠과 구별되듯이 모든 종교적인 가르침과는 완전히 판이하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성전건축을 막아랏!

대장쟁이

[에스라 4장 1-2절]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로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구하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
..
.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레스 왕의 칙령에 의하여 바벨론에서 귀환한 약 5만 명의 사람들, 그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수에 비하면 형편없이 초라한 인원이 포로생활에서 놓여나 돌아와서 유대 각 성읍에 흩어졌다가 7월에 다시 모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열악한 형편 가운데서 목수와 석공을 사고 두로, 시돈 사람들로부터 백향목을 구해 와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지대를 놓을 때 무리는 기뻐 소리하고 노인들은 대성통곡을 하는 감격적인 성전재건 기공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곧 대적의 훼방이 시작됩니다. 그 사이에 유대땅에 들어와 살던 이방족속들이 찾아와 함께 성전을 짓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우상을 섬기는 자들과 여호와의 성전을 함께 지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수룹바벨과 예수아와 족장들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이들은 노골적으로 성전건축을 훼방하기 시작합니다. 방해와 협박, 그리고 모함과 궤계를 동원합니다.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건축을 방해하고 바벨론 통치자들에게 뇌물을 주어 일이 진척되지 못 하게 하고, 바벨론 왕에게 유대인들을 모함하는 연판장 상소를 올려 기어코 성전건축을 중단시키고야 맙니다. 그리하여 다리오 왕 제 이년이 되기까지 성전건축은 중단됩니다.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일이 왜 이렇게 훼방을 받으며 고난과 역경이 따르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성전의 의미가 무엇이기에 그러는 것일까요? 그 옛날 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며 그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왕상 8:27)”

하나님의 전이 단순히 기도하고 복을 비는 곳이라면 저들도 바알과 아세라 등 온갖 신들의 전을 가지고 있으니 굳이 훼방할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전은 세상의 우상의 전과 다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신이십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하심을 의미합니다. 성전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구원은 주님이십니다. 구약시대의 성전은 예수님의 오심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되신 예수님, 임마누엘 주님이 오실 때 사단의 권세는 뭉개어지고 모든 죄인이 죄의 사슬에서 놓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모든 권세를 빼앗기게 될 사단, 죄인이 구원 받는 것을 견딜 수 없는 원수 마귀의 훼방은 결사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헤롯은 베들레헴 지경의 두 살 아래 어린 남자아기를 다 죽였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애굽으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마귀가 광야에서 주님을 시험했습니다. 유대인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주님을 대적하고 기어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사단의 궤계로 베드로는 주님의 앞을 가로 막으려 했고 가룟 유다는 주님을 팔았습니다.

포로에서 놓여나 돌아온 남은 자들의 성전재건은 피나는 싸움과 고난의 가시밭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살펴보면 그들을 막아선 마귀의 대적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혼합과 타협, 둘째는 위협과 공갈, 셋째는 거짓과 모함의 궤계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대적은 결사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운명이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성도들에게도 같은 훼방이 있을 것입니다. 대적들은 결사적으로 훼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훼방을 필사적으로 이겨내고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성전 된 주님의 교회와 우리 몸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이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겨낼 수 있습니다. 원수마귀의 모든 훼방과 술수를 깨뜨릴 수 있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시려고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이,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반드시 이기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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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씨에라 클럽의 창시자이자

미국 자연보호의 아버지였던 John Muir는

 

그랜드 캐년의

장엄한 일몰을 바라 보면서

이런 멋드러진 말을 남겼습니다.

  

“일몰의 절정으로

타오르는 영광 안에서

온 그랜드 캐년은 아름답게 빛난다.

  

마치 바위들 속에서

수세기 동안 축적되고 쌓인

모든 생명과 빛이 지상과 하늘에서

흘러넘치는 영광스러운 원천으로부터 지금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랜드 캐년의 일몰이

얼마나 장엄하고 가슴 벅찼기에

이토로 아름다운 수사학적인 글을 남겼을까요?

  

그랜드 캐년의 일몰은

4계절 어느 때 보아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겨울 일몰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01161733_1.jpg

그랜드 캐년은

여름의 경우 Wotans Throne 방향에서

해가 떠올라 Powell Plateau 방향으로 해가 집니다.(Mather Pt. 기준)

 

겨울은

Desert Tower 방향에서 떠올라

Havasupi Point(6,635ft) 방향으로 떨어집니다.


01161733_2.jpg

위와 같은 사실 때문에

여름철과 겨울철의 일출과

일몰 포인트는 많이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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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캐년에서

일출, 혹은 일몰을 촬영할 때

 

먼저 고려할 점은,

떨어지는 해를 찍을 것인지

아니면 림(Rim)을 비추는 빛을 찍을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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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두 가지를 동시에

다 찍을 수 있는 포인트도 있지만

 

일출,

혹은 일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를 욕심내다가

어느 것 하나라도 제대로 못찍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01161733_5.jpg

사진의 가운데,

햇빛이 비취는 봉우리가 Temple Butte입니다.

 

그 바로 뒤의

오른쪽 사선으로 기울어진

Butte의 오른쪽 정상이 Chuar Butte입니다.

  

1956년 6월 30일

토요일 오전 10시 30분경,

  

UA(United Airlines)소속 DC-7과

TWA(Trans World Airlines) 소속 Flight 2가

그랜드 캐년의 약 21,000ft(약 6,400m) 상공에서 충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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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고로

UA 승무원 5명 및 승객 53명,

TWA 소속 승무원 6명 및 승객 64명 등

 

128명 전원이 목숨을 잃고

그랜드 캐년의 품에 안겼습니다.

  

사고기 잔해와

대부분의 유해는 위에 언급한

Temple Butte와 Chuar Butte 주변으로 떨어졌습니다.

 

이 사고는

미국 상업 비행 역사상

1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최초의 사건이었고,

 

 사안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Temple Butte와 Chuar Butte는

National Historic Landmark 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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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뒤쪽에 있는 골짜기는

Little Colorado River Gorge인데

이곳은 우기 때만 물이 흐르는 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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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의

맨 뒤에 보이는

희미한 작은 봉우리는

나바호 마운틴(Navajo Mountain)인데

 

사진을 찍은

Desert View 전망대에서

저곳까지의 거리는 약 87마일(약 139km)입니다.

 

 육안으로

139km의 거리까지 보인다는 것은

이 지역의 공기가 엄청나게 맑다는 것을 반증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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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가장 뒤쪽에

핑크빛으로 돌출된 부분은 Echo Cliffs입니다.

Desert View에서 약 37마일(59km)의 거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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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

가장 높이 솟은 봉우리가

코만치 포인트(Comanche Point)이며

 

해발은 7,073ft,

약 2,156m로 한라산보다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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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남아있는

왼쪽의 봉우리가

코만치 포인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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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ert View의

Watchtower에 마지막 빛이 비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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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오른쪽에

메사(Mesa)처럼 평평한 곳,

빛이 남아있는 곳은 Wotans Throne(7,633ft/2,327m)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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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맨 뒤쪽의

경사진 봉우리는 Isis Temple(7,014ft/2,138m),

 

그 바로 앞의

사람 머리 모양의 봉우리는

천사의 문인 Angel's Gate(6,761ft/1,992m)

 

 그리고

가장 오른쪽의

뒤에서 두 번째(앞에서 세 번째)는

조로아스터 템플(Zoroaster Temple 7,129ft/2,173m)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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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넘어가고

버밀리언 절벽(Vermillion Cliffs)과

콜로라도 강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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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tle Colorado Gorge와

저 멀리 메아리 절벽(Echo Cliffs)에도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일몰 후의 빛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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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umo Altar(6,519ft/1,987m)와

(사진의 왼쪽 뒤에 검게 보이는 부분)

 

빛이 사라진

코만치 포인트(앞쪽에 불쑥 솟아오른 곳)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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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tle Colorado Gorge 너머로

Painted Desert와 Navajo Nation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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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후의

Desert View의

Watchtower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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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Gabriel.S Oboe



죄와 의지의 자유

 


존 칼빈

 

1. 죄의 노예가 된 의지
선한 것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으며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가장 비참한 필연성에 포위당하여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이렇게 배워온 인간은 자기에게 결핍한 선과 잃어버린 자유를 갈망하도록 훈육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나라에 합당치 않은, 일상적이고 외부적인 것을 그들은 대체로 인간의 자유 결정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참 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영적 중생에 속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학자들이 자유의지를 취급할 때 그들의 첫째 관심은 자유의지가 사회활동과 외부적 행동해 대해서 가지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는 능력에 있었다. 후자가 주요 문제라고 나는 인정하나 전자를 완전히 무시해서도 안된다.


사람이 은총의 도움과,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중생할 때 받는 하나님의 특별 은총의 도움 없이는 선행을 위한 자유의지를 소유하지 못한다. 사람이 자기의 뜻대로 선이나 악을 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강요 당함없이 자진해서 악을 행한다는 의미에서 사람은 자유의지를 소유한다고 할 수 있다.


의지를 노예의지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어거스틴은 분명히 말하기를 인간의 의지는 성령 없이는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다. 자유의지가 은총의 결과라는 점을 지적하고서 그는 자유의지를 은총 없이 자기 자신에게 참칭(僭稱)하는 자들을 날카롭게 비난했다.


인간속에 있는 자연적 재능은 죄로 인하여 부패되었고 초자연적 재능은 전적으로 박탈되었다는 어거스틴에서 차용한 공통된 관찰을 나는 옳다고 승인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악을 구별하거나 이해하거나 판단하는 데 사용하는 자연적 재능은 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이 성이 전적으로 파손 될 수는 없다. 단지 그 일부분이 약하게 되고 부패해서 결함과 페허를 보여 주는 것 뿐이다. 가령 부패되고 퇴화(退化)한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인간의 본질 속에는 섬광이 계속해서 반짝거린다. 이것은 사람이 이성적 피조물이라는 것을 증거하며, 그것이 바로 야수와는 다른 점이다. 사람은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빛은 많은 무지로써 덮여 있으므로 그것은 아무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의지는 인간의 본질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패되고 무질서한 욕망에 속박되어 있다. 그 결과 어떤 종류의 선이라도 동경할 수 없게 되었다.


2. 인간의 전적 타락

인간은 매우 불쌍한 피조물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 그것을 증명하기도 쉽다. 주님의 논점은 사람은 육이므로 중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안에 있는 것 가운데 영적인 것 이외의 모든 것은 이 논법에 의하면 정욕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중생 이외에는 영적인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우리가 본성에서 얻은 것은 정욕적이다.


그와 동시에 마음은 "모든 것보다 더 사기적이며 극도로 사악한 것이다(행17:9절)라고 할 때 그 마음에 대한 저주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인류의 교만을 분쇄하려고 할 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는 고백으로써 했다. 그는 어느 한 시대의 타락된 행동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의 영구적 부패성을 비난한다. 상기한 구절에 나타나는 바울의 의도는 인간히 회개하도록 단순히 비난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불가피한 참화에 압도당하고 있다는것과 하나님의 자비로써 그 상태를 벗어나지 않는 한 그들은 절대로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본성의 부패 속에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총을 위한 장소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본성을 순결케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그의 활동을 제어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섭리로써 인간의 본성이 내부를 깨끗케 하지 않고 외부만 깨끗케 하려는 좋지 않은 성격을 제어하신다. 그러므로 의지가 극도로 죄의 노예가 되어 있으므로 자신의 힘으로는 분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선을 향하여 자기 자신을 바칠 수도 없다. 이것이 결정적인 차별이다. 즉 인간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부패되었으므로 억지로 원치 않으면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범죄한다. 폭력적인 강요나 외부적인 힘으로써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정열의 운동으로써 죄를 범하게 된다. 그의 본질의 타락성이 이와같으므로 악을 향하는 길 이외에는 움직일 수가 없다.


3. 인간 안에 있는 선은 하나님의 은총에 속한다.

만약 하나님이 바른 것을 추구하도록 우리를 변화시킨다면 이 변화는 돌이 육으로 변하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의지에 속한 것은 다 없어지고 그것을 대신하는 것은 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또한 어거스틴이 가르친것과 같이 은총이 모든 선행(善行)에 앞서며, 의지가 은총을 선도(先導)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추종하며, 그의 인도가 아니라 그것에 반려(伴侶)가 된다고 할 것이다. 은총이 그것을 선행하므로 그것을 수행원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까지 나는 용인한다. 그러나 개혁은 주의 활동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은총의 인도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인간의 일로 돌려서는 안된다.

모든 선의 기원은 다른 존재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만 나온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의지가 선에 향하는 경향은 선택받은 사람에게서만 발견된다. 그러나, 선택의 원인을 인간 안에서 찾아서느 안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 안에 선한 의지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한 동일한 섭리에서 나온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4.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지 않다.

인간은 죄에게 너무나 심하게 속박되어 있으므로 자기 자신의 본성으로써는 선에 향하는 노력을 할 수 없으며 영감을 받을 수도 없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의지를 기수(騎手)의 지시에 복종하는 말에 비교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과 악마를 기수에 비교하였다.


성령의 통치에 적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주(主)는 자기의 의로운 판단으로 사탄의 지배하에 내어 주신다. 사악한 자의 맹목성고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모든 극악성은 사탄의 일이라 한다. 이 일의 원인은 인간의 의지 안에서만 발견되어야 한다. 이 인간의 의지에서 모든 악의 뿌리가 나오며 그 안에 사탄의 왕국의 기초가 있다. 그것이 즉 죄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선택한 자들을 향하여 두가지 면으로 역사하신다. 내적으로는 성령을, 외적으로는 자신의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자기의 영으로는 그들의 마음을 비추시고 사랑과 의를 지향하게 하시고, 그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든다.

 

그의 말씀으로는 다 같은 혁신을 원하고 추구하고 획득하도록 그들을 자극한다. 이 두 방면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능력을 효과있게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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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이야기 하기
    더 멋진 2014년을 기약하며~~


    나에게 이야기 하기

    너무 잘하려 하지 말라 하네.
    이미 살고 있음이 이긴 것이므로~


    너무 슬퍼하지 말라 하네.
    삶은 슬픔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돌려주므로~


    너무 고집부리지 말라 하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은 늘
    변하는 것이므로~


    너무 욕심부리지 말라 하네.
    사람이 살아가는데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치 않으므로~


    너무 연연해 하지 말라 하네.
    죽을 것 같던 사람이 간 자리에
    또 소중한 사람이 오므로~


    너무 미안해 하지 말라 하네.
    우리 모두는 누구나 실수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너무 뒤돌아보지 말라 하네.
    지나간 날보다 앞으로 살날이
    더 의미 있으므로~


    너무 받으려 하지 말라 하네.
    살다보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기쁘므로~


    너무 조급해 하지 말라 하네.
    천천히 가도 얼마든지
    먼저 도착할수 있으므로~


    죽도록 온 존재로
    사랑하라하네.
    우리가 세상에 온 이유는
    사랑하기 위함이므로~


    향나무는 자기를 찍은 도끼에도 향을 묻힙니다.

    나는 내게 그리스도의 색깔을 띄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품고 있는가? ** 이어령 교수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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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덜 충만히 임재할 수 있는지요?


[질문]

말씀단상 사이트의 글 중에 "죽은 자를 살리는 법"이란 글을 읽다가 평소 궁금했던 점이 있어 문의드립니다. 전 평소 성령의 '충만함'이란 것에 대해  이해가 부족했었습니다. (충만함? 덜 충만함? 안  충만함?..뭐 그런 데 대한 의문입니다)

글 중에 “성령의 충만한 임재”, 또 '성령의 인도가 아주 세밀하고도 강하게'등의 표현을 보며 글 중에서 말씀하시듯이 성령의 권능자체는 줄어들 리 없는데 성령의 덜 임재로, 또는 성령의 인도가 둔하고도 약하게 다가와 성령의 권능이 덜 강력하게 역사하신다는 말씀엔 제가 쉽게 이해가 안갑니다.

성령하나님이 그 어떤 에너지도 아니신데 충만, 덜 충만, 둔하고, 세밀하고, 강하고 약한 개념이 우선 용납이 안 됩니다. 더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기껏 한 인간의 염려의 유무에 따라 역사하시는 능력이 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 분의 뜻에 의해 있고 없고가 분명하지 덜 고치시고 덜 살리시는 것은 아니지 싶습니다. 내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도 계시고 안 계시고의 문제지 덜 계시고, 온전히(충만히) 계시고의 결과는 과연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지요?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과 다르시니 너무 이해하려고 고민하는 것도 불경스럽게 여겨집니다만 여전히 궁금한 것은 사실입니다.

[답변] 박신목사

흔히 생각지 못하는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해주셨습니다. 이 주제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선 몇 가지 신학적 전제를 살펴야 합니다. 거창하게 신학적 전제라고 했지만 실은 질문자께서 이미 알고 계시고 또 해답으로 거의 다 말씀하신 것을 다시 부연해 설명하는 것뿐입니다.

다 알고 있는 두 가지 전제

우선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그 속성이나 능력에 있어서 하등의 우열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단지 그 위격만(person) 다를 뿐입니다. 요컨대 성령님의 품성과 역사하시는 방식은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진술을 간략하게 일부 인용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스스로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과 복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본질에 있어서, 그리고 자기에 대하여 홀로 완전히 자족하신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만드신 피조물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그들에게서 아무 영광도 얻으려 하지 않으시고, 다만 자신의 영광을 피조물 안에서, 그것들에 의해서, 그것들에게, 그것들 위에 나타내실 뿐이다. 그는 홀로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오, 모든 만물은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간다. 그는 가장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며, 그것들에 의하여, 그것들을 위하여, 또는 그것들 위에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신다.”

한마디로 삼위 하나님은 피조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완전 별개로 영원히 자존(自存)하시며 오직 자신의 주권에 따라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피조물 안에서, 혹은 위에서 그것들을 위하시고 자신의 뜻을 “자유롭고도 기쁘게”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질문자님께서 지적하신대로 성령이 “한 인간의 염려의 유무에 따라 역사하시는 능력이 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오직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인간에게 간섭 역사 하십니다. 예컨대 신자가 아무리 방언 같은 은사를 갖고 싶어서 간절히 기도까지 해도 오직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고전12:11) 주시지 않으면 받을 수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이신 성령의 존재하시는 양태(樣態)가 “덜, 혹은 더” 충만하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은 천국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이 땅에서 실제로 인류역사와 신자의 삶을 이끄는 이는 성령 하나님인 셈입니다. 물론 삼위 하나님이 합동으로 사역해도 그 실체가 이 땅에 실재하는 분은 성령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속성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시며 권능도 늘거나 줄지 않습니다. 영으로서 이 땅에 계시지 않은 곳이 없으며, 또 신자 개인은(고전6:19) 물론, 신자들의 모임에는(고전3:16)  항상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도 마지막 승천 직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고 신자가 가는 땅 끝까지, 또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는데 당신의 실체가 아니라 바로 성령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실 때에는 당연히 온전한 하나님으로서 임하는 것이지 일부러 강하거나 약한 모습으로 위장, 가장, 과장하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결코 그럴 수가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특성과 능력에 주변 상황에 따라서 조금이라도 가감(加減)이 있다면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신자에게 영으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분명 하나님 그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덜 충만한 성령님이 내주하시다가 신자가 어떻게든 마음에 드는 모습을 보여야 다시 충만해지시는 그런 분도 또 그런 내주의 모습도 아닙니다. 이 또한 질문자님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미처 모르고 있는 두 가지 전제

그런데 미처 모르고 있거나 알아도 자주 잊어버리는 두 가지 전제가 더 있습니다. 우선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삼위 하나님끼리 교통하실 때에 어떤 경로나 수단을 사용하는지 우리로선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과 교통할 때는 인간의 언어를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러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서 당신을 낮추셨다는 뜻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보여 주셔야만 알 수 있고 또 그 보여주신 부분만큼 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또 인간이 알도록 하려면 인간의 지정의 수준에 맞추어줄 수밖에 없기에 인간의 언어를 통해 교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모든 이가 갖고 있는 도덕성)이나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자연의 경이로움)(롬1:19,20)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분의 실재성(實在性)을 확인하고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자기 인식일 뿐입니다. 그 둘만으로 그분의 품성과 인간과 역사를 이끄시는 뜻은 결코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당신의 피조물에 대한 계획과 뜻을 정확하고도 구체적으로 밝히려면 인간 언어를 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언어는 둘인데 당신의 절대적 진리를 글로 기록한 성경과 태초부터 함께 하셨던 말씀이 성육신하신 예수님입니다. 실제로 골고다 십자가야말로 인간의 육안에 훤히 보도록, 말하자면 그 이해수준에 맞춘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가장 극적인 표현이지 않습니까?  

바꿔 말해 하나님에 대해 온전히 알 수 있는 길은 성경과 예수님 말고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 외의 경로를 이용했다면, 예컨대 개인의 체험이나 명상이나 학술적 접근 등,  그분에 대한 아무리 심오하고 경건한 진술일지라도 성경과 예수님에 계시된 내용과 다르면 틀린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계시하다보니 성경에는 하나님을 인간과 동일한 모습이나 속성을 가진 것 같은 형식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불같이 진노하거나, 크게 애통해 하거나, 기뻐서 춤을 추거나, 깊은 탄식을 한다는 등의 표현입니다. 이를 두고 전문 용어로 신인동형법(神人同形法, anthropomorphism)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천국보좌에 계시며 그 거룩한(다른 어떤 것과도 구별되었다는 뜻으로) 실존에는 하등 변함이 없습니다. 실제로 보좌에 일어나서 콧노래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추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분의 마음이 그렇게 기쁘다는 뜻을 인간에게 정확하게 또 강조하면서 알게 해주려는 시도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표현뿐만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신학적 혹은 영적 진술에도 당연히 그런 양식이 채택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간과하기 쉬운 전제는, 실은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모른다는 것이 더 정확함, 그분은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완전히 자유롭게 사역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우주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유일한 분입니다. 어떤 경우에나 절대로 당신 뜻대로만 행하십니다.

다른 말로 그분의 능력과 품성에는 전혀 변함없지만 당신께서 인간과 세상에 행하시는 사역에는 강약(强弱)과 가감(加減)이 개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설명한 전제와 연결시키면 그분의 실체에는 하등 변함없지만 그분이 인간에게 계시하는 양태에는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쉬운 예로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실체가 신약시대의 그것보다 약하거나 적었던 것은 전혀 아니며 또 이 땅에 무소부재(無所不在)하게 임재하셨음도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실제로 인류 역사에 간섭하여 사역하시는 모습은 제한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여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뜻과 계획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그분이 이스라엘과 함께 할 때에 덜 충만하게 임재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해하는 수준으로는 제한적으로 역사하셨기에 마치 구약시대에는 덜 충만하게 임재하고 또 역사하신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런 차이를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임재와 사역의 차이  

위에서 설명 드린 네 가지 전제를 종합하면 질문에 대한 답변이 간단하게 도출 됩니다. 성령님의 실체는 피조물의 상태에 전혀 영향 받지 않으며 영원토록 자존하시는 분으로 인간에게 덜 혹은 더 충만히 임재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분의 실존은 전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사역은 오직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완전히 자유롭게 행해지며 또 그 자유로운 모습을 인간에게 온전히 이해시키기 위해 성경은 인간의 인식 수준에 맞추어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성령의 실존(實存)과 사역(使役)을 구별하지 않고 함께 이해하려다 보면 질문하신 것과 같은 혼동이 생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흔히들 성령이 충만하지 (혹은 임재하지) 않다고 말하는 뜻은 그분이 신자에게 간섭하여 행하시는 사역에서 자유로운 변화가 있을 수 있으며 나아가 그것을 인지하는 인간의 이해도 그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성령님이 방언 같은 외적 은사를 성도들에게 당신의 임의로 나눠주시거나, 독생자 예수님이 인간의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것이 바로 삼위 하나님이 완벽하게 자유롭게 역사하는 대표적 예입니다. 이 두 경우 다 인간이 느끼기에는 시간과 장소와 상황과 사람에  따라 하나님의 임재가 더 혹은 덜 충만으로 느껴질 수 있지 않습니까?

비유컨대 아들이 아비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졸라대지만 아비는 더 좋은 뜻과 계획을 가지고 아들의 변화부터 유도하려고 지켜보면서 침묵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비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본인의 품성과 능력과 실체에는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여전히 완전한 아비일 뿐입니다. 아들을 다루는 방식이 이전과 조금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느끼기에는 마치 자기에겐 아버지가 없거나, 아예 귀를 막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대표인 다윗마저 시편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얼마나 자주 불평을 쏟아 놓았습니까?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신인동형법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이 얼마나 엄청난 진술입니까? 성령이 우리 대신에 우리를 위하여 친히 기도해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성령이 우리의 비참한 영적 상태를 두고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시면서 말입니다.

이런 경우에 그분은 분명히 충만히 신자에게 임하고 계시며 대신 기도까지 해주시니까 그 역사마저 충만히 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막상 신자는 그분의 임재와 역사를 아주 약하게, 덜 충만하게 인식하고 있을 것입니다. 신자의 영적인 상태가 충만하다면 즉, 성삼위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이어지고 있다면 성령이 탄식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같은 맥락에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어떻게 통탄해, 이 또한 인간 이해 수준에 맞춘 계시이지만, 하셨습니까?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50:2) 당신의 품성, 능력, 임재에는 전혀 가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라 내가 꾸짖은즉 바다가 마르며 하수가 광야가 될 것이며 거기 물이 없으졌으므로 어족이 갈하여 죽어 악취를 발하게 되느니라.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2,3절)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를 바로 앞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 보냄을 입었느니라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찜이뇨“(1,2절) 하나님은 전혀 이스라엘을 외면한 적이 없는데 그들 스스로 영적 간음을 저질렀고 바로 그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역사를 보류했다고 합니다.

선지자는 재차 그런 뜻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1,2) 이스라엘에 충만히 임재는 하시지만 당신의 역사는 약하게 하거나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히 임하는 이유?

마지막으로 정말로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인간의 죄나 영적무지로 인해 당신의 역사를 약하게 하는 것 자체도 그분의 완전한 자유함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분의 거룩한 품성에 따라 그렇게 하지 않을 수밖에 없지만, 질문자도 비슷한 염려를 하셨는데 이런 표현도 사실은 모순이 있고 엄밀히 따지면 불경스러울 수 있음, 그 역시 당신의 절대적 주권일 뿐입니다.

이런 완벽한 자유함으로 인해서 성령님은 때로는 정말로 더 충만히 임재하여서 능력도 더 충만하게 나타내실 수도 있습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방언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에게 그전에 성령이 충만히 임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제자들은 이미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 성령이 절대로 덜 충만하게 임하지 않았고 또 약하게 역사하신 것도 아닙니다.

반면에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성령의 역사하시는 모습이 당신의 자유로운 뜻에 따라 달라진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정말로 성령께서 스스로 더 충만히 임재하여 더 충만한 모습으로 드러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예수님마저 성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에 성령이 함께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성부와 성령이 함께 하지 않을 리는 절대 없지만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려고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임재가 아님)하는 목적은 오직 신자더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일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29)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성령의 가장 신령한 은사는 바로 불신자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신자에게 “성령이 임재”하면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신자가 불신자로 십자가 복음에 초대하여 그 진리를 가르쳐 그분의 제자로 변화시킨 후에, 그 제자들이 다시 땅 끝까지 가서 사단에 미혹된 영을 복음으로 초대하여 새로운 제자들을 만들게 하려고 “성령의 권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은 성령의 권능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방언을 하게 하려는 것보다, 그럼으로써 그날 하루에 예수 믿는 자를 삼천 명이나 되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오순절에 순례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자기 살던 곳으로 돌아가 초대교회의 초석을 심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를 이 땅에 드러내고 또 교회의 덕을 세우게 하려고 성령의 권능이 더 충만하게끔 역사하는 것입니다.  

WHY JESUS ON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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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소리와 통곡소리 뒤범벅

대장쟁이
[에스라 2장]

에스라 2장에 들어가면 예루살렘과 유다로 귀환한 사람들의 계보와 숫자가 나옵니다. 3절 ‘바로스 자손이 이천일백칠십이 명이요’부터 시작하여 많은 이름의 계보들이 나오고 64절에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이천삼백육십 명이요, 그 외에 노비가 칠천삼백삼십칠 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 명이요’로 되어 있어 전체 귀환인원이 약 5만 명이라는 숫자가 계산됩니다. 사람 수가 적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짐승들의 수도 넣었습니다, ‘말 736, 노새 245, 약대 435, 나귀 6,720 마리’, 자세히도 세었습니다. 그리고 ‘금 61,000 다릭, 은 5,000 마네, 제사장 옷 100 벌’이라는 재산내역도 나옵니다. 짐승의 수를 일일히 세어서 기록한 것도 이상하지만 그 짐승들이 정결한 짐승, 곧 제물로 쓸 수 있는 소와 양이 아니라는 것도 이상한 일입니다.

어쨌든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 귀환하는 모습이 그 옛날 애굽 종살이로부터 이끌어내어져 나오는 것과 비슷하기는 한데 인원수가 10분의 1도 안 됩니다. 금과 은의 규모, 재산의 규모도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솔로몬왕의 세입금 규모가 금 666달란트였다고 하는데 금 61,000 다릭은 그 40분의 1 정도밖에 안 됩니다. 어떤 족장들이 예물을 즐거이 드리고 역량대로 역사하는 곳간에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기는 합니다만 그 규모는 그 옛날의 영화에 비하면 얼마나 초라하고 궁색하였을까요? 그 인원, 그 재산, 그 힘으로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고향인 유대 땅 각각의 본성으로 돌아가 거합니다. 그렇지만 폐허가 되고 이방족속들이 들어와 살고 있을 본성들이 그 옛날 고향과 같겠습니까?

어쨌든 그들은 7월에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라(신 16:16, 출 23:15), 하신 말씀대로 모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성전은 무너지고 폐허만 남아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단을 그 터 위에 쌓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무리가 열국 백성들을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 그 땅 예루살렘과 유다에는 많은 이방잡족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적은 숫자의 유대인들은 그런 상황에서 무너진 성전터에 단을 쌓고 주변의 눈치를 보아가며 두려워하면서 초라하게 제사를 드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 가운데서 그들은 여호와의 전을 재건하는 작업에 착수합니다.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사람과 두로 사람들에게도 값을 주고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로 수운(水運; 물로 운반)하게 합니다. 유다자손과 레위자손을 세워 공사감독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건축자가 여호와의 전 지대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자손들은 제금을 들고 여호와를 찬송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는 지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함이로다.” 무리가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를 때 그 옛날 여호와의 성전을 보았던 노인들은 목을 놓아 대성통곡을 합니다.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로 뒤범벅이 된 감격과 눈물의 기공식입니다. 너무나 슬프고 처연한 성전기공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성전 건축은 곧 주변의 이방인들의 훼방과 모함을 받아 오랫동안 중단되게 됩니다. 한 번 잃어버린 에덴동산이 다시 돌아오지 못 하는 것처럼 한 번 무너져버린 아름다운 솔로몬성전 또한 다시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후 400 여년 동안 그렇게 유대인들은 다시는 잃어버린 옛솔로몬의 영광을 회복하지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침내 그 아들을 보내시어 우리를 성전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짜 성전은 우리 몸입니다. 그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로 뒤범벅이 되어야 할 성전기공식은 십자가 아래 엎드려 주님을 영접하는 우리의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理解
너무 기본중의 기본인 이 논제를 새해벽두(한국은 1월 1일이 시작되었음으로)에 올려본다. 이 것에 잘못되면 교회는 더욱 세속화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신학이 나오고 심지어는 사이비 이단적인 것들이 나온다고 본다.  그래서 필자는 성경을 중심하여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가져야 할지 필자의 견해를 써 보고 싶어 글을 올려 본다. 늘 그러하듯이 언제든지 다양한 견해가 있음을 인정한다. 다만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인 하는 것이냐? 란 입장에서 평가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이다.  

(예수님 평가에 대한 다양성)
마태복음 16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에 대한 평가를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제자들에게 물으신 적이 있으셨다.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자신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물으셨다. 그때 사람들의 평가에 대한 제자들의 말에는 말씀이 없으시다가 베드로의 “ (주는(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고백을 들으신 뒤 베드로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그런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적이 있으셨다.

(정확한 평가를 한 베드로)
바로 이 베드로의 고백과 교회를 반석위에 세우겠다는 것을 가지고 카토릭과 개혁교회가 갈라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에 논하기로 하고 본 글에서는 베드로의 고백 당신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만 논해보자. (참고로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말에 강조점을 두고 기록했다.)  

(그리스도의 의미)
“그리스도” 란 말은 히브리어의 ‘메시아’에서 나온 것이고 이 ‘메시아’ 란 기름 부음 받은 자란 의미로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에게 기름이 부어졌고 그러다가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란 의미로 사용되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논할 수도 있지만 생략하겠다).

(그리스도의 3중직)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메시아인 그리스도라고 제자들이 고백하였는지를 살펴보자. 이것은 보통 ‘그리스도의 3중직’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3중직’이란 예수님께서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가 해야 할 세 가지 분야, 제자장의 사역-선지자적 사역-왕적인 사역을 혼자서 다 감당하신 것을 두고 말하고 있다.

(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제사장의 사역’을 어떻게 감당했는가? 그것이 히브리서의 주제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이사야 53장에서 예고된 대로 십자가에서 우리 인생들의 죗값을 代贖(대속)하심으로 레위 지파의 제사장 직을 더 완벽하게 이루셨고,

(선지자로서의 예수님)
‘선지자의 사역’은 자신이 하는 말은 자신의 말이기도 하지만 근원적으로는 성부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선포하셨고(요12:49-50)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사역에 대해서 선지자로서는 마지막 종결자로 세우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히1:1-2)

(왕으로서의 예수님)
그리고 ‘왕으로서의 사역’은 자기 백성을 적에게서 빼앗아 해방과 자유를 주어야 하고 자기 백성에게 풍성한 삶을 영위하게 하는 것이어야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행하시되, 성경에서 중시하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먼저 해방과 자유를 주시고 세속적인 면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는 것은 재림하실 때에 하실 것임을 말씀하셨다. (마12:28-29, 롬8:1-2, 마19:28 계19:16)

이때 예수님은 의의 왕으로서 죄악된 세상을 다스리는 임금인 사단(요12:31)을 먼저 제압해야 여자의 후손의 사역(창3:15 히2:14 요일 3:8))을 감당할 자임을 들어낼 것이기에 십자가와 부활로 이 사단마귀에 잡혀 있는 인류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어 이들을 하나님나라로 옮겨놓은 사역을 감당하셨던 것이다(골1:13 행26:18)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 ‘3重職’을 완수하심으로 메시아-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다.

(그리스도서의 할 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보내어 자기백성을 죄와 사망의 법(권세 마귀에게서)에서 빼내어 (마치 출애굽역사처럼) 하나님 나라에 편입시키는 일을 하시되 하나님나라 법(마5:-7장)을 얼마나 충실하게 실행하는 정도와 그리스도의 동역 자가 되어 얼마나 충성했는지(마25:14-29)에 따라 그 신분과 예우가 하나님나라에서 주어질 것이라고 선포하시고 가르쳤던 것이었다.

(우리들이 알고 믿어야 할 것)

예수님은 이렇게 구원자이시기도 하지만 우리들의 왕인 것이며,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왕이신 예수님의 신부내지 군사 혹은 왕노릇할 자들이 될 것인가를 법을 주러 오신 분이신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구원받고 부름 받은 자’이면서 예수그리스도의 ‘파트너’인 교회공동체(이것은 장차 천국을 다스릴 공동체가 변환될 것임)에 일원들인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신앙의 자세는 자신을 위한 종교인처럼 신앙생활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오직 부름 받은 자들답게 부르신 자의 말씀을 믿고 나가야 할 자들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목사들의 직무)
목사들이여, 제발 교인들을 자기 뜻대로 신앙 생활하도록 종교인으로 전락시키지 말고 성도들을 부르신 하나님이 원하는 자들로 세워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를 그렇게 알지 않고 잘못된 구원자로서 강조하는 메시지에 대한 변질이 오면 겉잡을 수 없이 교회로 세속화 되어가는 것 뿐임을 알자


출처: USA 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 김정한 목사



하나님의 지으신 만물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거룩하게 묵상하기를 바라실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우리는 모든 피조물들 속에서 마치 거울을 보듯이 그의 지혜와 공의와 선하심과 권능의 그 광대한 풍성한 것들을 바라볼 때에, 그것들을 그저 호기심으로, 혹은 말하자면, 그저 한 번 슬쩍 보고 지나치는 그런 식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것들을 거듭거듭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저 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그렇게 아름답게 위치시키고 정리 정돈하셔서 그보다 아름다운 것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 놓으신- 그 중에 어떤 별들은 그 위치에 고정시키셔서 움직이지 않도록 해 놓으셨고, 또 다른 별들은 자유로이 움직이게 하셨으나 그 지정된 경로를 떠나 이리저리 방황하지 않도록 하셨으며, 낮과 밤, 달과 해와 계절들의 모든 움직임들을 지정하셔서 일정하게 하셨고, 항상 보는 바와 같이 낮의 길이가 균등하게 차이가 나도록 하셔서 혼란이 없도록 해 놓으신- 그 조물주의 위대하심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하나님께 모든 일을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정해 놓으셨음을 깨닫는 것이요, 동시에 우리 자신에게서는 물론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큰 자비하신 일들에게서 그의 권능과 은혜를 느끼고, 그리하여 스스로 각성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에게 간구하고, 그를 찬송하며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창조의 질서를 통해서 그가 만물을 사람을 위하여 창조하셨음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에 속한 그 모든 세세한 일들을 그렇게 점차적으로 이루시지 않고 그 모든 일을 단 한 순간에 완성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그는 그 일을 엿새로 나누어 진행하셨는데, 이는 결코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하신 것은 사람을 지으시기 전에 먼저 사람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모든 것들을 미리 아시고 예비해 놓으심으로써,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아버지다우신 배려를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부를 때마다 항상 그가 지으신 모든 만물을 운영하는 일이 그의 손과 권능에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또한 우리가 과연 하나님께서 그의 신실하신 보호하심 속으로 받아들이사 양육하시고 가르치시는 그의 자녀라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좋은 것들의 충만함을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기대하고,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것을 그가 결코 부족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임을 완전하게 신뢰하며, 그리하여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만 우리의 소망을 두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바라든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하며, 또한 우리의 몫으로 주어지는 유익한 것들을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으로 인식하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 크신 자비하심과 선하심에 이끌려서, 온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고 섬기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크리스챤다이제스트사), 상권, pp 218-220,

 

가져온 곳 : 
카페 >청교도 아카데미(PBA)
|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출처: 생명나무 쉼터

 


    
    가슴에 담아도 좋은 글 !!
    
    
    사장은 힘들어도 견디지만
    직원은 힘들면 사표낸다.
    연인은 불쾌하면 헤어지지만
    부부는 불쾌해도 참고 산다.
    
    원인은 한 가지 일에 대한 
    책임감과 압력그리고 애정이다.
    
    수영할줄 모르는 사람은
    수영장 바꾼다고 해결 안 되고,
    일하기 싫은 사람은
    직장을 바꾼다고 해결이 안 되며,
    
    건강을 모르는사람은
    비싼약을 먹는다고
    병이 낫는게 아니고, 
    
    사랑을 모르는사람은 
    상대를 바꾼다고
    행복해지는 게 아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내 자신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내 자신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내 자신이며,
    내가 싫어하는 사람도
    내 자신이다.
    내가 변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다.
    
    내인생은 내가 만든다.
    
    내가 빛이나면,
    내 인생은 화려하고,
    내가 사랑하면,
    내 인생은 행복이 넘치며,
    내가 유쾌하면,
    내 인생엔 웃음꽃이 필 것이다.
    
    매일 똑같이 
    원망하고, 시기하고, 미워하면,
    내 인생은 지옥이 될 것이다.
    내 마음이 있는곳에
    내 인생이 있고, 내 행복이 있다.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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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L>
 
 

저의 자식을 이러한 인간이 되게 하소서※.



약할 때 자기를 잘 분별할 수 있는 힘과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을 용기를 가지고,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를 요행과 안락의 길로 인도하지 마시고, 
곤란과 고통의 길에서 항거할 줄 알게 하시고, 
폭풍우 속에서도 일어설 줄 알며, 
패한 자를 불쌍히 여길 줄 알도록 해주소서. 

그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목표는 높게 하시고, 
남을 다스리기 전에 자신을 다스리게 하시며, 
미래를 지향하는 동시에 과거를 잊지 않게 하소서. 

그 위에 유머를 알게 하시어, 
인생을 엄숙히 살아가면서도 삶을 즐길 줄 아는 마음과, 
자기 자신을 너무 드러내지 않고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소서. 

그리고 참으로 위대한 것은 소박함에 있다는 것과 
참된 힘은 너그러움에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의 아버지인 저는 헛된 인생을 
살지 않았노라고 나직이 속삭이게 하소서. 


- 더글러스. 맥아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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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론에 나타난 이단 사상
 
  - 김재성 -
 (합동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한국교회의 이단문제는 그 심각성이 이미 공지된 사실이다. 그러나 심각성에 비해 대처와 처방이 미흡하고 적절하지 못했다. 이단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다각적인 방법을 통해 분석하고 또한 대처해야 할 시급한 과제이다.
이단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는 교리적인 문제의 접근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올바른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단 사상에 대한 현실 인식을 위해서는 과거에 어떤 교리에, 어떤 이단들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본지는 이단이 발생할 수 있는 전 교리를 고찰, 오늘날의 이단 사상에 대한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고자 '기독교 2처년 교리 속에 나타난 이단 사상'을 기획했다.
필자마다의 다소간의 학문적 차이점이 있고, 전문적인 용어 때문에 독자들에게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집중해서 읽어 주었으면 하는 바이다. <편집자 주>

머리말

 정통교리를 떠나서 제 나름대로의 독선에 빠진 나머지 급기야 불행한 최후를 장식하는 이단들을 보면 제 궤도를 이탈하여 사고를 낸 기차를 연상하게 된다. 어리석은 지도자들로 인하여 무지한 영혼들이 당해야만 하는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인간은 과연 초월의 세계, 특히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나라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있는가? 만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면, 여기저기서 분출되는 다양한 사상들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으며, 진정 무엇이 진리인가를 누가 보장한다는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적은 범위에서나마 깨달을 수 있음을 허용하셨다. 우리가 성경이라는 범위를 넘어서지 않으면 참된 지식과 지혜를 붙잡을 수 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 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이 글을 통해서 '이단'이란 '거짓교리'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사도적 교회가 믿어온 바를 버리고 참된 신앙을 포기한 무리들이 지닌 비성경적 신념을 의미한다. 미국 트리니티신학교의 조직신학교수인 해롤드 브라운(Harold Brown) 박사의 명저인「이단」(Heresis)라는 책을 중심으로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교리를 가르쳤던 초대교회 시대의 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단의 아버지, 시몬 마구스
 초대교부였던 이레니우스(Irenaeus)는 「이단들에 반대함」(Against Heresis)이라는 글에서 시몬 마구스(Simon Magus)를 향해 '모든 이단들의 아버지'라고 공격하였다. 이 사람이 사도행전 8장 9절에서 24절에 나오는 인물과 동일한가는 확실치 않다.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행 8:9)라고 하였다.
 이레니우스가 공박한 시몬 마구스도 사마리아에서 크게 위세를 떨쳐서 주후 150년경에는 큰 집단이 되었다.
 시몬 마구스는 자칭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하면서 초월해 계신 하나님을 부인하였다. 따라서 성경을 거부하였고, 내재하는 영의 성육신을 강조하였다.
 구원을 위해서는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천지의 근원을 고요함에서 찾고자 하였다. 마치 신비적인 안개 속을 헤매면서 마음으로 그 속에 있는 진리의 빛을 찾아간다는 것이다.
 시몬을 훗날 양태론(Modalism)으로 불려지게 될 신론을 갖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예수님은 인간의 형태를 입은 구세주가 아니요, 높으신 하나님도 아니다. 하나님과 구세주와(시몬 자신) 모두가 동격이다.

 초창기의 이단들

 말시온(Marcion)과 영지주의자들(Gnosticism)
 헬레니즘과 유대교를 혼합하여 형성된 대표적인 이단사상으로 주후 150년경까지 큰 추종세력을 형성하였던 대표적인 이단사상이다. 주후 144년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영지주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창조교리를 변조시킨 초대교회 시절의 종교 철학운동이었다. '지식'을 지나치게 숭상한 나머지, 실재에 대해서 이원론으로 치달았다. 영혼과 물질, 정신과 육체, 선과 악, 구약과 신약, 이스라엘과 교회, 하나님과 예수님, 율법과 복음, 심판과 칭의 등의 대립과 대결 속에서 만물이 형성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말시온은 크레도(Credo)라는 시리아의 영지주의자에게서 이런 이원론을 배웠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영적인 권능' 정도로 이해하였고, 물질 세계의 근원자가 될 수 없다고 격하시켰다.
 성경과는 정반대로 물질 세계란 전혀 별개의 근원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별개의 근원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펴서 창조론을 거부하였다. 물론 성경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하나님 자신과는 완전하게 별도의 세계에 위치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셨으며 영원히 창조주이시다. 그리고 세상은 그의 피조물이다. 이러한 구분을 영지주의자들은 부인하였다. 이들은 이 세상을 의미있는 곳으로 볼 수 없었다. 따라서 육체를 죄악시하고 엄격한 금욕주의에서 신앙생활의 이상을 발견하였다.
 말시온의 신론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란 높이 존경할 필요가 없다고 역설하였다. 말시온이 생각하고 있던 것은 우주란 쇠사슬과 같은 영적인 연결을 이루고 있는데,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이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 데미우르게(Demiurge)라는 것이다. 헬라의 신화 속에 나오는 대부분의 신들은 반은 신이고 반은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듯이, 일종의 그런 신이라고 본 것이다.
 이 세상이 원죄로 인해 타락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소외되었다고 생각했다. 말시온은 구약의 하나님(야훼 Yahweh)은 이때부터 화를 잘 내고, 용서할 줄 모르고, 엄격한 정의만을 고집하는 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을 헬라의 신화 속에 나오는 신으로 곡해한 것이다.
 말시온은 더 나아가서, 이 세상의 창조자는 참된 하나님으로부터도 소외당했고 영적인 사람들로부터도 소외당했으며 이로 인해서 실수도 곧 잘하고, 금방 후회도 잘 하는 거친 신이 되고 말았다고 설명하였다. 이 신이 인간의 불행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구약성경에 나오는 신이라고 보았다.
 말시온은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야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이 진노하니까,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참된 신'이 인간을 구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말시온의 극단적인 이원론은 여기서 잘 드러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러 오셨고, 신구약은 서로 내적인 지속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진리를 오해하였다. 예수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이라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의 율법을 없애고 인간을 구원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말시온은 자신의 생애에 금욕주의적으로 살아가면 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말시온의 눈에는 메시야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가 세웠던 신약시대의 교회들도 세계 역사의 일부가 아니다고 주장하였다. 세대주의의 창시자인 다비(J..N.Darby, 1800~1882)가 약 1천 8백년 뒤에 이 사상을 받아들여서 교회는 역사의 일부가 아니요, 괄호 속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말시온은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성자의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인지 바르게 알지 못하고 있다. 말시온은 성자를 '구원의 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절대로 죽거나 고난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은 성자는 성부의 다른 형태로 이해하여 양태론에 빠지고 말았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주장하는 교리의 일부가 여기서 발견되고 있다. 
 또한 말시온과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출발점은 근본적으로 이원론에서 나왔다.  하나님을 구약의 야훼의 신과 '신약의 알려지지 않는 신'이 예수를 통해 나타났다는 대립으로 곡해한 것이다.

 몬타누스
 말시온과 몬타누스는 동일시대의 인물이다. 이들은 모두 안토니우스피우스 황제(Antonius Pius, 138~161 재위) 시대에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새 예루살렘이 곧 임박했으므로 결혼은 금하고 말세를 준비해야 한다고 서둘렀다.
 몬타누스는 자신에 대해 맹종을 요구하면서, "나는 특별한 예언적 은사를 받았다"고 확신시켰다. 자기가 받은 계시에 따르면 새로운 성령이 넘쳐흐르고 있으므로 곧 말세가 온다는 것이다. 1992년 10월 재림설을 주장하다 실패한 이장림 등의 재림파들이 쓰는 용어가 이미 이때에 있었다.
 몬타누스는 자신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소개하면서, 추종자들은 기독교의 영적 엘리트로 확신을 불어넣었다. 막시밀라와 브리스가라는 두 여제자를 두었고, 소아시아 지방에서 큰 세력을 확보하였다. 막시밀라는 남편으로 하여금 몬타누스를 따르게 하고 자신은 소아시아 프리지아 지방의 페푸자라는 동네에 새 예루살렘이 임한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세속적인 일을 중지하라고 했다.
 "내 뒤에는 예언하는 자가 없을 것이며, 오직 세상의 종말이 있을 뿐이다"고 극단적인 종말론은 가르쳤던 이들의 초기사역은 재림에 대한 사도들의 교훈이 생생하게 살아있었기 때문에 잘 구별이 안되었다. 
그러나 성경의 종결과 함께 몬타누스가 받았다는 '새로운 계시'의 정체가 차츰 드러나면서 이단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몬타니스트들은 금욕주의적 생활양식과 순교에의 자발적 참여 등으로 인하여 정통교리가 체계화되지 못했던 초대교회 시대에 정통교회들의 반발을 무력화시키는 위세를 발휘하였다. 심지어 터툴리안 같은 교부마저도 관련을 가질만큼 큰 해독을 끼쳤다.

 가현설(Docetism)
 영지주의자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현설을 들고 나와서 육체적, 실제 예수의 존재를 부인하고 영적인 예수만이 있었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 사상은 시몬 마구스가 선창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 없이 그냥 외형상으로 존재하였으며,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아니요,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마술적 존재라는 것이었다.
 가현설은 당시 헬레니즘의 합리적 사고와 부합하여 예수님의 탄생, 고난, 부활 등의 객관적 역사성을 모두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트라얀 황제시대(Trajan, 98~117 재위)에 순교한 안디옥의 아그나시우스가 가현설의 오류를 간파하여 "예수님은 형상만 있던 분이 아니요, 참 사람이었다"고 강조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성부와 성자를 동일본질의 한 분 하나님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양태론(Modalism)
 일반성도들에게 양태론이라는 용어가 다소 생소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이해하는 바 많은 부분이 양태론적 삼위일체임을 발견하게 된다. 일부 교역자들이나 주일학교 선생님들의 설명이 이와 유사함을 종종 목격하기 때문이다.
 양태론이란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하나님이 자신을 각기 다른 '형태' 혹은 '양식'(Modes)으로 계시하셨다는 학설이다. 창조시에는 성부로, 구원시에는 성자로, 승천 후에는 성령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흔히 구약은 성부시대요, 신약의 초반은 성자시대요, 지금은 성령시대라는 말을 쓰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를 '단일신론적 삼위일체론'이라고 부른다.
 양태론은 그리스도의 신성은 받아들이면서도 창조부터 영원까지 성부와 함께 일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한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한 하나님 안에서 세 인격들이 상호 동등한 권위와 경륜을 하고 계심을 인정치 않는다.
 이레니우스는 그의 대전집(Magnum Opus)에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체계화하여 초대교회시대의 이단사상을 막는 데 공헌하였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다. 따라서 유일하신 하나님이다. 영지주의자들의 가현설과 말시온에 대항하여, 삼위일체의 구별된 부분에 관해 언급을 하여 줌으로써, 훗날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에 기초를 제공하였다. 
 잘못하면 3위(位) 3신(神)이라는 3신론(新論)에 빠질 우려가 있으므로, 창세전의 일이나 성육신 등에 대해서 지나친 의구심이나 상상력을 갖지 말라고 이레니우스는 충고하였다.

 삼위일체론의 오해 -아리안주의
 325년에 채택된 니케아신경(the Nicene Creel)과 451년의 칼케돈 신경(the Chalcedonian Creel)은 삼위일체의 교리를 체계화한 위대한 문서들이다. 니케아신경은 318명의 교계지도자들이 모여서 초대교회의 신론을 체계화한 것으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
 아리우스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일종의 양태론을 주장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는 다른 존재로서, 피조된 존재이기에 성부와 동일한 신성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타나시우스가 일어나서 성경에 명백히 언급된 성자와 성부의 동일 권위와 신성을 공박함으로써 삼위일체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진일보하게 되어졌다. 물론 니케아회의 때까지만 해도 성령에 관한 논쟁이 없었다. 니케아 회의를 통해서 삼위일체의 한 분 하나님을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의 논쟁이 있었다.
 무엇이 아리우스로 하여금 성자에 대한 이단적 사상을 갖게끔 하였는가? 아리우스는 지적 엘리트라는 자부심에 사로잡혀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새로운 철학적 진술들을 펴고자 하였다는 데 문제가 있다. 마치 루돌프 불트만이나 한스큉과 같은 현대 신학자들이 자꾸 새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철학적 사고에 깊이 영향을 받아 버린 결과와 같다.

 아리우스는 성부 하나님 외에 성자나 성령이나 다른 모든 여타의 존재들은 동등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성자는 성부에게서 낳았다(begotten)고 했으니, 이는 달리 표현하면 창조된 것이다(Created)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피조물(creating)의 위치에 있으므로 경배를 받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니케아 회의에서 정죄를 받았으나 금욕적 생활로 자신이 거주하던 알렉산드리아서 존경을 받았던 까닭에 자연적으로 수명이 다하여 336년에 사망하였다. 핍박이나 물리적 사형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죽기 전에는 거의 모든 명예나 지위를 회복할 정도에 이르렀다.
 아리우스와 같은 사상은 훗날 미카엘 세르베투스(Servetus, 1511~1533)가 다시 들고 나와서 요한, 칼빈을 괴롭혔고, 끝내 회개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고서 시 의회의 결정에 따라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또한 소시니안파(Socinians)로 불리우는 일단의 무리들에 의해 삼위일체가 거부되었고, 성자의 신성이 도전을 받았다. 16세기에 인간의 자기 능력 속에서 구원받을 만한 공로가 남아있다는 주장을 하였다니, 종교개혁자들이 명성을 날리던 시대에도 역시 이단들의 활동은 집요하였다. 
 19세기 초 미국의 동북부, 뉴일글랜드 지방에서 역시 단일신교(Unitarians)라는 사상이 유포되어 하버드 대학교의 신학부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대 이단들의 하나님 이해
 이 글에서는 지면관계상 중세 시대의 이단들은 간략하게 넘어가고자 한다. 중세시대는 알셀름(St. Anselm)과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등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스콜라 신학이 풍미하였다. 여전히 지성주의적 신학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체제 속에서 신을 이해하고 증명코자 시도하였다. 안셀름과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은 유명하지만 논리적 사유의 부산물일 뿐이다.
 피터 아벨라르드(Peter Abelard, 1079~1142)는 안셀름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 신학에 반대하여 다른 종류의 극단으로 치닫고 말았다. 아벨라르드도 역시 지성적인 사람들만이 종교에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교리와 정통을 강조하기도 했다. 아벨라르드의 실수는 삼위일체의 신비로움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점이다. 그는 하나님을 3신(神)으로 이해하여 이단으로 빠지고 말았다.

 여호와의 증인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은 반드시 집집마다 방문하고 그 사역결과를 본부에 보고해야 한다. 따라서 어떤 종교단체보다도 열성적으로 포교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매월 정해진 양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들은 목회자로 준비하는 동안이나, 전담 사역자로 일할 경우에 한 달에 140시간을 전도활동에 쏟아부어야 한다.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14만 4천명의 숫자를 문자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정통교회에서는 이 숫자를 상징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들의 신학 중에서 보다 심각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육체라는 옷을 입은 영의 사람'이라고 보는 데 있다. 마치 가현설과 흡사하다. 여호와의 증인의 창시자 러셀(Russel, 1852~1916)에 의하면,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천사들의 모습과 같은 일종의 현상화로 나타난 인간적 신체일 뿐이요(창18장), 예수님은 성육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 후계자인 러터포드(Rutherford) 때에 급성장하기 시작한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님을 제 2의 신으로 전락시키고 오직 여호와만이 유일한 신이라는 단일신교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게 되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보다 아래에 있는 존재이며, 영원하지 않고 창조된 존재이나 성육신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삼위일체를 완전히 부인한다. 예수는 제한적 의미에서 신이라고 보고 있으며, 성령의 인격성과 하나님으로서의 지위는 부인해 버린다. 성령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힘으로 간주한다. 아리우스가 4세기에 주장한 것과 유사하다.

  몰몬교(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 교회)
  몰몬교도들은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고 있다. 대신에 요셉스미드(Joseph Smith 1805~1844)라는 창시자와 같은 성지자들을 통해서 계시하고 있다고 믿는다.
 몰몬교에서는 성경의 하나님을 완전히 곡해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명기 4장 28절이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여 듣지도 못하여 먹지도 못하여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 육체적인 몸을 지진 하나님은 다른 신들과 구별되어서 인간들을 행동과 특징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본문의 신명기 4장 15절에서 18절은 인용치 않는다.
 "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땅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까 하노라"
 신명기의 가르침이나 성경 전체적으로 하나님은 만질 수 없는 초월자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몰몬교는 기독교의 삼위일체와는 완전히 반대에 서 있다. 
 몰몬교에서의 하나님은 '최고의 경지에 올라선 인간'이다. "인간처럼 하나님도 한때는 같은 존재였고, 하나님의 존재와 같이 인간도 변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은 최상의 회의에서 인도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이 회의에는 예수 그리스도, 에녹, 엘리야, 아브라함, 바울, 베드로, 요셉 스미드(몰몬교 창시자), 브링햄 영(몰몬교의 조직을 체계화함)이 참여하고 있다. 이런 식의 다신교의 색채로 점철된 하나님의 이해가 어떻게 나왔는지 성경을 읽는 성도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몰몬교에서는 출애굽기 20장 1절에서 6절, 이사야 40장 12절에서 31절, 45장 18절 등이 강조하는 주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지배하시는 주권자시오, 영원하신 하나님이며,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강조를 외면하는 무리들이다.
 몰몬교에서 보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분이다.
 
 결론

 이단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거나 성경을 왜곡하고 있다. 비록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해 보여주시는 부분이 어렵고 난해할지라도 우리들에게 알려 주신 바 그 자체는 명백하다. 마태복음 11장 27절에서 성부는 성자를 알고, 성자만이 성부를 아신다. 요한복음10장 33절에서 성자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여 참람하다고 공격을 받았다. 광야의 시험에서 사탄마저 "하나님의 아들"임을 가정하고 있다(마4:1-11). 예수님의 신성과 하나님 되심은 성경이 전해주는 바요, 우리의 신앙의 내용이다.
 삼위일체는 한 분 하나님 안에 세 인격의 연합을 의미한다. 한 분 하나님은 세 인격의 상호관계 속에 일하신다(약 2:19).
 삼위일체 교리를 불가해한 것으로 단정하는 사람들은, 3차원의 세계를 생각해 봄으로써 우리가 말하는 삼위일체(Trinity)교리에 대해서 과학적이고 자연적인 유추를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공간은 길이와 넓이와 높이를 필요로 한다. 세 가지가 모두 다 똑같이 중요하며 서로 없어서는 3차원이라는 공간이 세워지지 않는다. 어떤 때에는 이중에서 개별적으로 취급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체 세 가지가 다 필요하다.

 끝으로 두 가지만 첨언하여 둔다. 
 첫째로는, 삼위일체의 교리는 하나님이 자기 계시를 통하여 세우신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심어주시기 위해서 친히 계시하신 것이며, 삼위를 통해서 구원을 베푸신 사역이 총괄적으로 정리된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에 대한 학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을 대치하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의 구원과 신앙의 참된 기초를 추구하려면 삼위일체는 필수적인 신앙의 내용이 되고 만다. 이단들은 이를 버리고 인간적인 사색과 이성으로 맞추려다가 멸망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한 성령님에 의해서 아버지께 나아가느니라"(엡2:18, NIV. "Through Him We both have access to the Father by one Spirit.")
(월간 <교회와신앙> 1994년 1월호) 
가져온 곳 : 
카페 >천사가 해석한 성경
|
글쓴이 : 성충정| 원글보기

CNN선정, 世界의 놀라운 風景 31選中

 칠레 토레스 텔 파이네 國立公園

 

세상의끝,남미의 보석으로 알려진 토레스 델 파이네국립공원은 칠레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이름은 파이네의 탑이라는 뜻으로 화강암 봉우리세개를 비롯하여 2 500M이상의 설봉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빙하에서녹아내린 호수는 에미랄드빛을 띠고 있으며 호수위를 떠다니는 빙산들은 햇빛에 반사되어 신비한 사파이어색을 띤다.

 

많은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태의 산으로 꼽고 있으며 1998년에 유네스코 생물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남미대륙에서 가장 인기있는 트레킹코스로 전세계에서 먆은 관광객이 몰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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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 하십니까
 
 
                                                                                / 李錫奎
 
저는 안녕하지 못합니다
인터넷에 개독교 라는 말의 단초를 제공한 
저 고소영으로 일컫는 장로 정치인 때문에 
저는 안녕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십알단 정치 목사 때문에 안녕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추모한 자리에서
우리나라에선 독재해야 한다고 망언을 한
그 老 목사 때문에 더더욱 안녕하지 못합니다
저 서초동 유명한 교회 목사님 박사 학위가 가짜로 탈로 나
교인들이 둘로 갈라져 안녕하지 못합니다
망우리 큰 교회도 아들에게 물려주고 신림동 큰 교회도
아들에게 물려주어 
교회가 주식회사라는 말을 유행시킨
그 목사님들 때문에
저는 안녕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신천지가 기성 교인을 마구 유혹해 가고
전도는 제자리이라 주님께서도
아마 안녕하지 못할 것입니다
- 이 어지러운 믿음의 세상에서 
문득, 한경직 목사님과
유한양행 창업자이신 유일한 장로님이 그립습니다
돈과 정치에 물든 목사의 끝은
끝은 뻔할 뻔 자입니다
- 나부터라도 내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겠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말씀 안에서 이루어야 하는데
내 뜻과 내 힘으로 이루려고 해
나는 안녕하지 못한 것입니다
- 대한민국 교회가 지금 세상으로부터 욕먹고
전도의 길이 어두운 것은
실은 나 때문입니다
주님은 날 보고 이 땅의 소금이라고 했는데
내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그 까닭 때문입니다
그래 나는 안녕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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