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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daum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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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의 가는 길
2. 길
3. 내가 너를 도우리라
4. 주께 맡기라
5. 기적의 하나님



6. 정금처럼 나아오리
7. 주가 높임을 받으리라
8.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9. 나 무엇과도
10.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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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덜 충만히 임재할 수 있는지요?


[질문]

말씀단상 사이트의 글 중에 "죽은 자를 살리는 법"이란 글을 읽다가 평소 궁금했던 점이 있어 문의드립니다. 전 평소 성령의 '충만함'이란 것에 대해  이해가 부족했었습니다. (충만함? 덜 충만함? 안  충만함?..뭐 그런 데 대한 의문입니다)

글 중에 “성령의 충만한 임재”, 또 '성령의 인도가 아주 세밀하고도 강하게'등의 표현을 보며 글 중에서 말씀하시듯이 성령의 권능자체는 줄어들 리 없는데 성령의 덜 임재로, 또는 성령의 인도가 둔하고도 약하게 다가와 성령의 권능이 덜 강력하게 역사하신다는 말씀엔 제가 쉽게 이해가 안갑니다.

성령하나님이 그 어떤 에너지도 아니신데 충만, 덜 충만, 둔하고, 세밀하고, 강하고 약한 개념이 우선 용납이 안 됩니다. 더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기껏 한 인간의 염려의 유무에 따라 역사하시는 능력이 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 분의 뜻에 의해 있고 없고가 분명하지 덜 고치시고 덜 살리시는 것은 아니지 싶습니다. 내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도 계시고 안 계시고의 문제지 덜 계시고, 온전히(충만히) 계시고의 결과는 과연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지요?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과 다르시니 너무 이해하려고 고민하는 것도 불경스럽게 여겨집니다만 여전히 궁금한 것은 사실입니다.

[답변] 박신목사

흔히 생각지 못하는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해주셨습니다. 이 주제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선 몇 가지 신학적 전제를 살펴야 합니다. 거창하게 신학적 전제라고 했지만 실은 질문자께서 이미 알고 계시고 또 해답으로 거의 다 말씀하신 것을 다시 부연해 설명하는 것뿐입니다.

다 알고 있는 두 가지 전제

우선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그 속성이나 능력에 있어서 하등의 우열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단지 그 위격만(person) 다를 뿐입니다. 요컨대 성령님의 품성과 역사하시는 방식은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진술을 간략하게 일부 인용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스스로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과 복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본질에 있어서, 그리고 자기에 대하여 홀로 완전히 자족하신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만드신 피조물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그들에게서 아무 영광도 얻으려 하지 않으시고, 다만 자신의 영광을 피조물 안에서, 그것들에 의해서, 그것들에게, 그것들 위에 나타내실 뿐이다. 그는 홀로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오, 모든 만물은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간다. 그는 가장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며, 그것들에 의하여, 그것들을 위하여, 또는 그것들 위에 자신이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신다.”

한마디로 삼위 하나님은 피조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완전 별개로 영원히 자존(自存)하시며 오직 자신의 주권에 따라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피조물 안에서, 혹은 위에서 그것들을 위하시고 자신의 뜻을 “자유롭고도 기쁘게”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질문자님께서 지적하신대로 성령이 “한 인간의 염려의 유무에 따라 역사하시는 능력이 제약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오직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인간에게 간섭 역사 하십니다. 예컨대 신자가 아무리 방언 같은 은사를 갖고 싶어서 간절히 기도까지 해도 오직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고전12:11) 주시지 않으면 받을 수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이신 성령의 존재하시는 양태(樣態)가 “덜, 혹은 더” 충만하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은 천국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이 땅에서 실제로 인류역사와 신자의 삶을 이끄는 이는 성령 하나님인 셈입니다. 물론 삼위 하나님이 합동으로 사역해도 그 실체가 이 땅에 실재하는 분은 성령이라는 뜻입니다.

성령의 속성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으시며 권능도 늘거나 줄지 않습니다. 영으로서 이 땅에 계시지 않은 곳이 없으며, 또 신자 개인은(고전6:19) 물론, 신자들의 모임에는(고전3:16)  항상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도 마지막 승천 직전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고 신자가 가는 땅 끝까지, 또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는데 당신의 실체가 아니라 바로 성령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실 때에는 당연히 온전한 하나님으로서 임하는 것이지 일부러 강하거나 약한 모습으로 위장, 가장, 과장하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결코 그럴 수가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특성과 능력에 주변 상황에 따라서 조금이라도 가감(加減)이 있다면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신자에게 영으로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분명 하나님 그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덜 충만한 성령님이 내주하시다가 신자가 어떻게든 마음에 드는 모습을 보여야 다시 충만해지시는 그런 분도 또 그런 내주의 모습도 아닙니다. 이 또한 질문자님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미처 모르고 있는 두 가지 전제

그런데 미처 모르고 있거나 알아도 자주 잊어버리는 두 가지 전제가 더 있습니다. 우선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졌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삼위 하나님끼리 교통하실 때에 어떤 경로나 수단을 사용하는지 우리로선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과 교통할 때는 인간의 언어를 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러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서 당신을 낮추셨다는 뜻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을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보여 주셔야만 알 수 있고 또 그 보여주신 부분만큼 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또 인간이 알도록 하려면 인간의 지정의 수준에 맞추어줄 수밖에 없기에 인간의 언어를 통해 교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모든 이가 갖고 있는 도덕성)이나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자연의 경이로움)(롬1:19,20)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분의 실재성(實在性)을 확인하고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자기 인식일 뿐입니다. 그 둘만으로 그분의 품성과 인간과 역사를 이끄시는 뜻은 결코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당신의 피조물에 대한 계획과 뜻을 정확하고도 구체적으로 밝히려면 인간 언어를 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언어는 둘인데 당신의 절대적 진리를 글로 기록한 성경과 태초부터 함께 하셨던 말씀이 성육신하신 예수님입니다. 실제로 골고다 십자가야말로 인간의 육안에 훤히 보도록, 말하자면 그 이해수준에 맞춘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가장 극적인 표현이지 않습니까?  

바꿔 말해 하나님에 대해 온전히 알 수 있는 길은 성경과 예수님 말고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 외의 경로를 이용했다면, 예컨대 개인의 체험이나 명상이나 학술적 접근 등,  그분에 대한 아무리 심오하고 경건한 진술일지라도 성경과 예수님에 계시된 내용과 다르면 틀린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계시하다보니 성경에는 하나님을 인간과 동일한 모습이나 속성을 가진 것 같은 형식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불같이 진노하거나, 크게 애통해 하거나, 기뻐서 춤을 추거나, 깊은 탄식을 한다는 등의 표현입니다. 이를 두고 전문 용어로 신인동형법(神人同形法, anthropomorphism)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천국보좌에 계시며 그 거룩한(다른 어떤 것과도 구별되었다는 뜻으로) 실존에는 하등 변함이 없습니다. 실제로 보좌에 일어나서 콧노래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추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분의 마음이 그렇게 기쁘다는 뜻을 인간에게 정확하게 또 강조하면서 알게 해주려는 시도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표현뿐만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신학적 혹은 영적 진술에도 당연히 그런 양식이 채택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간과하기 쉬운 전제는, 실은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모른다는 것이 더 정확함, 그분은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완전히 자유롭게 사역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우주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유일한 분입니다. 어떤 경우에나 절대로 당신 뜻대로만 행하십니다.

다른 말로 그분의 능력과 품성에는 전혀 변함없지만 당신께서 인간과 세상에 행하시는 사역에는 강약(强弱)과 가감(加減)이 개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설명한 전제와 연결시키면 그분의 실체에는 하등 변함없지만 그분이 인간에게 계시하는 양태에는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쉬운 예로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실체가 신약시대의 그것보다 약하거나 적었던 것은 전혀 아니며 또 이 땅에 무소부재(無所不在)하게 임재하셨음도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실제로 인류 역사에 간섭하여 사역하시는 모습은 제한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여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뜻과 계획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 그분이 이스라엘과 함께 할 때에 덜 충만하게 임재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이 이해하는 수준으로는 제한적으로 역사하셨기에 마치 구약시대에는 덜 충만하게 임재하고 또 역사하신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런 차이를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임재와 사역의 차이  

위에서 설명 드린 네 가지 전제를 종합하면 질문에 대한 답변이 간단하게 도출 됩니다. 성령님의 실체는 피조물의 상태에 전혀 영향 받지 않으며 영원토록 자존하시는 분으로 인간에게 덜 혹은 더 충만히 임재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분의 실존은 전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사역은 오직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완전히 자유롭게 행해지며 또 그 자유로운 모습을 인간에게 온전히 이해시키기 위해 성경은 인간의 인식 수준에 맞추어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성령의 실존(實存)과 사역(使役)을 구별하지 않고 함께 이해하려다 보면 질문하신 것과 같은 혼동이 생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흔히들 성령이 충만하지 (혹은 임재하지) 않다고 말하는 뜻은 그분이 신자에게 간섭하여 행하시는 사역에서 자유로운 변화가 있을 수 있으며 나아가 그것을 인지하는 인간의 이해도 그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성령님이 방언 같은 외적 은사를 성도들에게 당신의 임의로 나눠주시거나, 독생자 예수님이 인간의 비천한 모습으로 오신 것이 바로 삼위 하나님이 완벽하게 자유롭게 역사하는 대표적 예입니다. 이 두 경우 다 인간이 느끼기에는 시간과 장소와 상황과 사람에  따라 하나님의 임재가 더 혹은 덜 충만으로 느껴질 수 있지 않습니까?

비유컨대 아들이 아비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졸라대지만 아비는 더 좋은 뜻과 계획을 가지고 아들의 변화부터 유도하려고 지켜보면서 침묵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비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본인의 품성과 능력과 실체에는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여전히 완전한 아비일 뿐입니다. 아들을 다루는 방식이 이전과 조금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느끼기에는 마치 자기에겐 아버지가 없거나, 아예 귀를 막고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대표인 다윗마저 시편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얼마나 자주 불평을 쏟아 놓았습니까?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신인동형법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이 얼마나 엄청난 진술입니까? 성령이 우리 대신에 우리를 위하여 친히 기도해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성령이 우리의 비참한 영적 상태를 두고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시면서 말입니다.

이런 경우에 그분은 분명히 충만히 신자에게 임하고 계시며 대신 기도까지 해주시니까 그 역사마저 충만히 행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막상 신자는 그분의 임재와 역사를 아주 약하게, 덜 충만하게 인식하고 있을 것입니다. 신자의 영적인 상태가 충만하다면 즉, 성삼위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이어지고 있다면 성령이 탄식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같은 맥락에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어떻게 통탄해, 이 또한 인간 이해 수준에 맞춘 계시이지만, 하셨습니까?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50:2) 당신의 품성, 능력, 임재에는 전혀 가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라 내가 꾸짖은즉 바다가 마르며 하수가 광야가 될 것이며 거기 물이 없으졌으므로 어족이 갈하여 죽어 악취를 발하게 되느니라. 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2,3절)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를 바로 앞에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내가 너희 어미를 내어보낸 이혼서가 어디 있느냐 내가 어느 채주에게 너희를 팔았느냐 오직 너희는 너희의 죄악을 인하여 팔렸고 너희 어미는 너희의 허물을 인하여 내어 보냄을 입었느니라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찜이뇨“(1,2절) 하나님은 전혀 이스라엘을 외면한 적이 없는데 그들 스스로 영적 간음을 저질렀고 바로 그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역사를 보류했다고 합니다.

선지자는 재차 그런 뜻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1,2) 이스라엘에 충만히 임재는 하시지만 당신의 역사는 약하게 하거나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히 임하는 이유?

마지막으로 정말로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인간의 죄나 영적무지로 인해 당신의 역사를 약하게 하는 것 자체도 그분의 완전한 자유함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분의 거룩한 품성에 따라 그렇게 하지 않을 수밖에 없지만, 질문자도 비슷한 염려를 하셨는데 이런 표현도 사실은 모순이 있고 엄밀히 따지면 불경스러울 수 있음, 그 역시 당신의 절대적 주권일 뿐입니다.

이런 완벽한 자유함으로 인해서 성령님은 때로는 정말로 더 충만히 임재하여서 능력도 더 충만하게 나타내실 수도 있습니다.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2:1-4)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방언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에게 그전에 성령이 충만히 임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제자들은 이미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 성령이 절대로 덜 충만하게 임하지 않았고 또 약하게 역사하신 것도 아닙니다.

반면에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성령의 역사하시는 모습이 당신의 자유로운 뜻에 따라 달라진 것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정말로 성령께서 스스로 더 충만히 임재하여 더 충만한 모습으로 드러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예수님마저 성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에 성령이 함께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성부와 성령이 함께 하지 않을 리는 절대 없지만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려고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임재가 아님)하는 목적은 오직 신자더러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일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6:29)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성령의 가장 신령한 은사는 바로 불신자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신자에게 “성령이 임재”하면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신자가 불신자로 십자가 복음에 초대하여 그 진리를 가르쳐 그분의 제자로 변화시킨 후에, 그 제자들이 다시 땅 끝까지 가서 사단에 미혹된 영을 복음으로 초대하여 새로운 제자들을 만들게 하려고 “성령의 권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은 성령의 권능을 충만히 받았습니다. 방언을 하게 하려는 것보다, 그럼으로써 그날 하루에 예수 믿는 자를 삼천 명이나 되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오순절에 순례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로 자기 살던 곳으로 돌아가 초대교회의 초석을 심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를 이 땅에 드러내고 또 교회의 덕을 세우게 하려고 성령의 권능이 더 충만하게끔 역사하는 것입니다.  

WHY JESUS ONLY?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이것이 "희망" 입니다 

내 손에 펜이 한 자루 있다면 
그것은 희망입니다.
그 펜으로 글을 쓸 수 있고 
그림을 그릴 수 있고 
편지도 쓸수 있으니까요. 

내 입에 따뜻한 말 한마디 담겨 있다면 
그것은 희망입니다.
그 말로 남을 위로 할 수 있고 
격려할 수 있고 
기쁘게 할수 있으니까요. 

내 발에 신발 한 켤레가 신겨져 있다면 
그것은 희망입니다.
그 발로 집으로 갈 수 있고 
일터로 갈 수 있고
여행도 떠날 수 있으니까요.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다면 
그것은 희망입니다.
그 눈물로 가난과 슬픔으로 지친 이들의
아픔을 씻어 낼 수 있으니까요.  

- 옮긴 글입니다 - 

 

 

These pictures show an enormous frozen castle - built entirely from ice -

created for the 30th Harbin Ice and Snow Festival.

 

The remarkable tower, which is at least 26 metres high and measures around

20 storeys, is one of the main attractions at the festival - which sees

thousands of tourists flock to the city of Harbin, near the China and

Russian border, every year.

In this series of photographs, workers can be seen chipping blocks of

ice from the nearby Songhua River for the tower, before dragging the

551lb blocks towards the site.

Frozen palace: This is an enormous 26-metre ice castle built for the Harbin Ice and Snow Festival out of ice from the nearby Songhua River

Frozen palace: This is an enormous 26-metre ice castle built for the Harbin Ice and Snow

Festival out of ice from the nearby Songhua River

 

Looks like hard work: Employees stab iron pikes into the frozen Songhua River as they extract giant ice cubes to make sculptures for the festival

Looks like hard work: Employees stab iron pikes into the frozen Songhua River

as they extract giant ice cubes to make sculptures for the festival

 

An arduous task: Workers pull a giant ice cube out of the river and drag it towards the main festival site. Each ice cube weighs about 551lb

An arduous task: Workers pull a giant ice cube out of the river and drag

it towards the main festival site. Each ice cube weighs about 551lb

 

One worker is then pictured putting the blocks in place, before pouring

water on them to freeze them together. Another can then be seen polishing

the work to give it an amazing, crystal-like finish.

 

More...

According to event organisers, 10,000 people were employed to complete

hundreds of ice and snow sculptures at the event - some areas of which

are already open to the public.

Stake out: A worker stabs a pike made from iron into the frozen water. 10,000 were employed to complete the structures and 180,000 sq metres of ice will be used

Stake out: A worker stabs a pike made from iron into the frozen water.

10,000 were employed to complete the structures and 180,000 sq metres

of ice will be used

 

Building blocks: One worker polishes an ice sculpture - made from thousands of blocks frozen together, pictured - ahead of the start of festivities in January

Building blocks: One worker polishes an ice sculpture - made from thousands

of blocks frozen together, pictured - ahead of the start of festivities in January

 

Technique: To secure the structure, a worker pours water onto ice cubes to make them stick to one another before leveling them off and polishing

Technique: To secure the structure, a worker pours water onto ice cubes

to make them stick to one another before leveling them off and polishing.

 

Some of the pieces measure more than 26 metres tall and 117 metres wide.

Overall, the whole site is well over 600,000 sq metres. All in all, about

180,000 sq metres of ice and 150,000 sq metres of snow will be used to

complete all the works.

In the evening, some of the structures are lit up in a beautiful light-show display.

 

Quite the spectacle: Early visitors have a look around a smaller ice castle at the ice festival - which officially opens at the beginning of next year

Quite the spectacle: Early visitors have a look around a smaller ice castle

at the ice festival - which officially opens at the beginning of next year

 

Not quite finished: Workers and scaffolding next to one of the newly-built ice sculptures illuminated by hundreds of coloured lights

Not quite finished: Workers and scaffolding next to one of the newly-built

ice sculptures illuminated by hundreds of coloured lights

 

 

Bright: Visitors gather next to an ice gate sculpture in one of the open areas of the festival last night. Weather depending, it will stay open until February next year

Bright: Visitors gather next to an ice gate sculpture in one of the open areas

of the festival last night. Weather depending, it will stay open until February

next year

 

Some of these pictures show the spectacle - with numerous palaces, towers and

monuments in the festival lit up in every colour of the rainbow.

In the New Year, tourists can enjoy the artwork for themselves in addition

to the Ice Lantern Garden Party, skiing, figure skating and theatre performances.

 

Visitors may also wish to visit the event's Siberian Tiger Park or perhaps

watch fishing, swimming and diving performances on the frozen river.

Others may wish to enjoy a tipple in the event's ice bar.

 

How unusual: A giant carving of a childhood cartoon character, complete with ear muffs, looms over some early visitors to the festival

How unusual: A giant carving of a childhood cartoon character, complete

with ear muffs, looms over some early visitors to the festival

 

Dwarfed: Skilled craftsmen carve a 117-metre-long snow sculpture, featuring a horse and a woman, in one area of the park last week

Dwarfed: Skilled craftsmen carve a 117-metre-long snow sculpture, featuring

a horse and a woman, in one area of the park last week

Attention to detail: Workers carve a large snow sculpture that features a rather cross looking dinosaur for the festival

Attention to detail: Workers carve a large snow sculpture that features

a rather cross looking dinosaur for the festival.

Some visitors to the area have already been enjoying horse-drawn carriage

rides across the frozen river.

Harbin's festival is one of world's four largest international ice

festivals, along with Japan's Sapporo Snow Festival, Canada's Quebec

Winter Carnival, and Norway's Ski Festival.

 

It officially starts on January 5 and usually lasts to the end of

February, weather permitting.

 

Chip off the old block: One enormous horse-head structure at the event - which in total covers 600,000 sq metres festival

Chip off the old block: One enormous horse-head structure at the event -

which in total covers 600,000 sq metres festival

 

Whittling away: The expo displays many artworks as well as offering fishing and diving displays as well as an ice bar and food stalls from around the world

Whittling away: The expo displays many artworks as well as offering

fishing and diving displays as well as an ice bar and food stalls

from around the world.

 

 

 

 

 

 

 

 

 

 

 

 

 

 

 

 

 

 

 

 

 

 

 

 

 

 

 

 

 

 

 

 

 

 

 

 

 

 

 

 

 

 

 

 

 

 

 

 

 

 

 

 

 

 

 

 

 




 






그대 가슴에/최송연

 



그대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
믿음이기를 나 바랐지
진실하지 못한 웃음은
결국 우리의 가슴을 찢으니까
그대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
소망이기를 나 바랐지
절망으로 인한 어둠은
우리 삶을 차츰 시들게 하니까
그대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
사랑이기를  나 바랐지
미움으로 인한 아픔은
우리 영혼을 온전히 병들게 하니까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에스더
2014-01-16 00:20
96.232.32.201

우리의 가슴 속에 믿음, 소망, 사랑이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 마음...
그 마음은 바로 우리 주님의 마음이지요~^^
주님의 마음을 담아 아름다운 시를 선물해주셨네요!

<< 진실하지 못한 웃음은 우리의 가슴을 찢는다...>>

맞습니다. 거짓된 웃음 내면에는 전쟁을 위한 칼이 감추어져 있을 수 있기에

그것을 아는 우리의 가슴은 찢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시 55:21)

<< 절망으로 인한 어둠은 우리 삶을 차츰 시들게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한 마디로 '절망'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그 '절망'이라는 상태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상태가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음을 알지 못하는 절망’이라고 합니다.

'절망'이라는 것은 어둠에 빠져있다는 신호이므로
우리의 삶이 점점 시들어 파리해져갈 수밖에 없겠지요...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마 9:18)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성경구절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 42:5)

<< 미움으로 인한 어둠은 우리 영혼을 온전히 병들게 한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밝은 일도, 자랑할 일도 아닙니다.
이는 감추어야 한다는 말이므로 결국 어둠에 속한 것이라는 것이겠지요...

미움은 대체로 마음 속 깊이 감출 때가 많이 있어서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의 눈이 멀어버리는 것조차 감지하지 못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시 34:2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요일 2:11)

우리 한 번 다음과 같이 힘차게 외쳐보면 어떨까요?

"우리의 가슴을 찢고, 우리의 삶을 차츰 시들게 하고, 또
우리의 영혼을 온전히 병들게 하는 어둠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우리에게서 떠나갈지어다!
떠나가고 다시는 돌아오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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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jpg

학자요, 정치가요, 목사요, 주한 미국대사(1993-1997)였던 <제임스 레이니>는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여 에모리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건강을 위해서 매일 걸어서 출퇴근하던 어느 날 쓸쓸하게 혼자 앉아 있는 한 노인을 만났다.
<레이니>교수는 노인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고 말벗이 되어 주었다. 그 후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노인을 찾아가 잔디를 깎아주거나 커피를 함께 마시면서 2년여 동안 교제를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길에서 노인을 만나지 못하자 그는 노인의 집을 방문하였고 노인이 전날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곧바로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하면서 노인이 바로 <코카콜라 회장>을 지낸 분임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그때 한 사람이 다가와 “회장님께서 당신에게 남긴 유서가 있습니다.” 라며 봉투를 건넸다.
유서의 내용을 보고 그는 너무나 놀랐다.

“당신은 2년여 동안 내 집앞을 지나면서 나의 <말벗>이 되어 준 친구였소. 우리 집 뜰의 잔디도 함께 깎아 주고, 커피도 나누어 마셨던 나의 친구 <레이니>에게……고마웠어요. 나는 당신에게 25억 달러와 <코카콜라> 주식 5%를 유산으로 남깁니다.”

너무 뜻밖의 유산을 받은 <레이니>교수는 3가지 점에서 놀랐다.

첫째는) 전 세계적인 부자가 그렇게 검소하게 살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이 <코카콜라> 회장이었음에도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
셋째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 지나가는 사람에게 그렇게 큰돈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레이니>교수는 받은 유산을 에모리대학 발전기금으로 내놓았다.
<제임스 레이니>가 노인에게 베푼 따뜻한 마음으로 엄청난 부가 굴러 들어왔지만, 그는 그 부(富)에 도취되어 정신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부(富)를 학생과 학교를 위한 발전기금으로 내놓았을 때, 그에게는 <에모리대학의 총장>이라는 명예가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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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들이 목회자에게 해선 안될 말 1위는?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무엇일까?

교회 성장 전문가인 톰 레이너 박사(라이프웨이 리서치)가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절대 해서는 안될 말’ 10가지를 꼽은 칼럼을 발표해 눈길을 모은다.

“세상에 일주일에 하루만 일하는 직업이 어딨어요?”

톰 레이너 박사가 발표한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절대 해서는 안될 말’ 1위는 ‘세상에 일주일에 하루만 일하는 직업이 어디 있어요? 저도 목사님 같은 직업을 갖고 싶어요’다. 뒤이은 2위 역시 ‘그 많은 쉬는 시간이 뭐하세요?’로, 1위와 비슷한 말이다.

교인들이 보기에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목회자는 주일만 일하는 아주 ‘편한’(?) 직업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목회자는 주중에 주일 설교를 꼬박 준비하며, 이외 교인 심방과 상담, 전도를 비롯해 교회 행정을 돌보고 때로는 교회 차량 운전까지 한다는 점에서 목회자들은 억울할 수밖에 없다.

목회자들에게 절대 해서는 안될 말 3위는 설교 시간 직전에 찾아와 ‘잠깐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묻는 것이다. 예배 준비를 방해하는 성도는 목회자에게 달갑지 않은 손님인 것이다.

또 목회자들이 교인들로부터 듣기 싫어하는 말 4위는 ‘전 목사님이 참 좋아요. 그런데…’라는 말이다. 5위 역시 이와 비슷한데, ‘전 목사님의 설교가 참 좋아요. 그런데 그 분 설교가 더 좋네요’ 라는 말이다.

‘그런데’ 뒤에 들어가는 말은 대부분 목회자의 단점을 들추거나 부정적인 내용일 경우가 많다. 특히 교인들로부터 설교와 인격의 부족함을 지적받는 것이 목회자에게는 ‘듣기 싫은 말’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어 6위와 7위는 목회자 가족들에 대한 내용이다. ‘사모님이 피아노를 연주할 줄 아시나요?’, ‘목사님 자녀들이 그렇게 행동하면 안되죠. 목회자 자녀잖아요.’ 하는 말들이다.

사모에 대한, 자녀들을 향한 기대 심리와 문제를 꼬집는 교인들의 발언은 목회자 자신 뿐 아니라 가족에게 상처와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8위는 ‘목사님은 사례비를 적게 받는 게 좋아요. 그래야 좀 겸손히 주님께 의지하지 않겠어요?’라는 말이다. 또 9위와 10위는 ‘설교 준비하는 데 공을 좀 들이세요’, ‘사람들이 전에 계시던 목사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라는 말이다.

이외에도 ‘목사님은 신학교에 갔으니 공부를 제대로 안하셨겠네요’, ‘얼마나 이 교회에 더 있을 것 같으세요’라며 목회자를 은근히 무시하는 발언이 순위에 올랐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기는 일이 많은 목회자이기에, 보이는 부분만 판단해 목회자의 역량을 과소평가하고 비하하는 말은 실망과 상처를 안겨줄 수밖에 없다.

레이너 박사는 “거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이런 말을 들어봤을텐데, 교인들은 재미있게 읽되 절대로 다시는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윤화미 ⓒ 뉴스미션
출처: USA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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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은사" (성령의 은사)

 

'송병호와 블로그'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영적이고 신령한 은사는
참으로 감격스럽고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은사의 축복은
귀하고 소중하기에 더욱 아름답게 사용되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 속에 있는 교만함은
마치 은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듯하면서
그 은사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치 못하고
도리어 자신을 위해 사용함으로

다른이의 상처와 아픔을 주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신령한 은사는 귀하고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을 받은 인간 모두는 누구라 할지라도 연약하기에
그 은사의 사용은 늘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엘리바스라는 욥기에 나오는 한 지혜자는
그가 겸허한 영적인 체험에 근거하여 욥과 대화를 나눕니다.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떨이 주뻣하였었느니라"
그는 분명한 영적인 체험과 경험을 가졌고 누렸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영적인 체험으로 인해
자녀를 잃고 아내마저 버린 괴로움에 처한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더 큰 상처와 아픔을 주는

자리에 서 있음을 보게 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어떤 영적인 경험이나 은사라 할지라도
진심으로 사랑으로 표현되지 못하고 나타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진리인 듯합니다.
 
진정한 영성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드러내는 것인데
종종 영성을 강조하면서 스스로를
신령한 경험과 은사로 인해 드러내는 자들을 봅니다.
목사의 명성과 기복적 복을 위해
영적 은사를 사용하는 인간의 연약함은
깊지 못한 영성의 잘못된 표현임을 보게 됩니다.
 
정말 깊은 영성을 소유한 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령한 은사를 가지고서 연약한 자를 세우며
자신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만이 드러나길 바라면서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께 충성하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시대인 것 같습니다.
 
신령한 은사보다  은사를 귀하고 값지게 사용할 수 있는
깊은 인격 바른 영성을  위해 기도합시다.
아니 보잘 없는 참으로 부끄러운 소질이나 은사라도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값지게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순전하고 진실 된 그리스도인으로 사용되길 기도합시다.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만을 위해
연약함을 인정하며 그분의 손을 의지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은 깊은 영성의 사람으로 우리를
다듬어 가실 것입니다. 주의 나라를 위해..
그리스도를 닮은 그분의 제자로서
이 땅에서 참된 영성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싶습니다. 간절히..
 
저희로 주의 은사를 귀하게 사용할 수 있는
깊은 영성의 소유자를 만들어 주십시오.


출처: 개혁주의마을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성경해석학 포이드레스 교수 인터뷰

2014/01/15 (수) 19:18 ㆍ추천: 0    

미국의 대표적인 개혁주의신학의 전당인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성경해석학 교수인 포이드레스(Poythress) 박사가 한국을 방문했다. 방학 중 한국과 타이완을 방문하며 강의와 세미나를 인도하는 자비량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다. 자비량 사역에는 결혼 전 타이완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했던 부인도 동행했다. 부인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종교개혁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았고, 함께 강의사역을 한다.

하버드대에서 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목회학석사(M.Div.)와 신학석사(Th.M)을 마치고, 영국 캠브리지대학교에서 신약학을 연구하고 남아공 스렐렌보쉬에서 신학박사(Th.D.) 학위를 받았다. 1976년부터 모교에서 성경해석학을 강의하고 있는 포이드레스 박사는 ‘종교와 과학’, ‘기독교 세계관’, ‘계시’, ‘모세의 율법’, ‘젊은이들에게 성경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등 다양한 강의와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다.

한국 방문도 처음이고, 한국의 언론과 인터뷰도 처음이라고 밝힌 포이드레스 박사는 인터뷰에서 기도를 강조했고, 인터뷰를 마칠 때 함께 기도하자고 할 만큼 기도의 사람이었다. 인터뷰는 13일 오후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두 시간 동안 진행됐다.

이날 통역을 한 총신대 전 총장 김인환 박사는 포이드레스 박사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교수사역을 시작한 1976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유학을 해 그의 강의를 들었던 제자다. 김인환 박사는 지난 해 5월, 1929년 개교 이래 해외 거주자로는 처음으로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재단이사로 선임됐다. 지난해 11월 재단이사회에 참석하고 돌아왔다고 밝혔다.

김 박사는 “포이드레스 교수는 수업 중에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는 내용을 강의할 때는 강의를 멈추고 함께 기도하자고 제안할만큼 기도의 사람”이라며 “실력도 있고,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분”이라고 포이드레스 박사를 소개했다.


▲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성경해석학 포이드레스(Poythress) 교수의 인터뷰를 통역하는 총신대 전 총장 김인환 박사(우) ⓒ 뉴스파워

포이드레스 박사는 인터뷰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게토화 되어서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세상에 휩쓸려 그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심지어는 교회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보여주고 실천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들의 본질을 잘 유지하면서도 세상과 소통하여 그들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그 모든 능력이 성령과 하나님 말씀 안에서 나온다. 이 능력 안에서 세상에 사랑을 보여야 한다. 그런 가운데 성경의 진리를 좀 더 담대하게 나누고 소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포이드레스 박사는 동성애문제에 대해서는 “동성애 문제는 깊은 의미에서 볼 때, 가장 파괴적일 수 있다.”면서도 “우리가 사랑의 마음으로 동성애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에게로 돌아서고, 모든 동성애적 유혹을 거부하고 저항할 수 있도록 호소해야 한다.”며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는데, 동성애에 유혹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유혹들을 받았지만, 이를 이겨낸 이야기들을 안다. 이런 글들이 동일한 유혹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 믿는다.”며 『하나님이 게이들을 미워하시는가?』라는 책의 저자도 동성애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성령의 은사와 품성의 변화의 균형도 강조했다. 포이드레스 박사는 “은사도 강조해야 하고, 성령에 의한 인격의 변화도 강조해야 한다. 어떤 경우이든 과거에 한쪽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 쪽을 강조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다시금 강조해야 할 필요가 대두된다.”고 말했다.

그는 “교회의 역사를 보면 한 쪽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으로 부터 문제점이 발견하게 되는 경우를 본다.”며 “성령을 강조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벗어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성령의 역사를 말할 때, 감정적인 느낌들을 강조할 때가 많다. 성령은 아주 강력한 능력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우리의 내적인 마음에서도 역사하신다.”고 말했다.

그는 “성경은 성령의 능력과 성경의 진리에 관련된 지적인 이해와 적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전혀 긴장을 주지 않는다.”며 “양쪽 모두가 다 우리에게 필요하고, 연합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Q. 하버드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해 현재 신약과 성경해석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성경과 과학을 포함한 기독교세계관 확립에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첫 한국방문에 대한 기대를 나눠달라.

A. 한국에는 제자들도 참 많고, 옆에 있는 김인환 전 총장도 제자이기도 하다. 한국을 참 좋아한다. 한국 학생들도 많이 만나 오면서 축복도 많이 받았다. 이번 한국방문을 통해서 그동안 받았던 축복을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강의사역이 기본이지만, 한국교회를 더욱 알고 싶고, 한국교회가 필요로 하는 부분에 대해 함께 기도하면서 기여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한국교회의 통일사역과 한국의 젊은이들이 더 이상 교회를 찾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도 기도하고 싶다. 아울러 한국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듣고, 그것에 대해 강의하고 싶다. 아내는 결혼 전 타이완에서 선교사로 사역했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종교개혁사를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아내와 함께 한국교회가 필요로 하는 부분에 대해서 강의하고 싶다. 이런 일들을 통해 오로지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한국교회도 주님의 영광을 받으시길 간절히 소망한다.

Q. 한국교회가 굉장한 위기 속에 전환기를 맞고 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개혁주의 신학의 퇴보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이로 인해 이단문제에 대한 관대함, 교회의 세속화, 바른 신앙에서의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A. 우리는 한국교회가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를 얻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어떤 점에서는 미국교회도 같은 위기를 겪고 있다. 미국 기독교도 넌크리스천들에 의해서 굉장한 멸시를 받고 있다. 과학이 기독교를 무시하고, 기독교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의 스캔들, 기독교의 진리를 제대로 전하고 있지 않는 것도 위기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미국의 문화 전체가 인간 중심적인 경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초래됐다. 사람들은 언제, 어떻게 인간의 행복만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세속화가 가속화됐다. 이 모든 것들이 서구교회의 상황이지만 역시 한국교회도 이와 비슷한 상황에 직면했다고 듣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기독교인들은 근본적인 진리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창조주 하나님의 존엄과 그 위엄, 장엄하심의 진리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도 더 잘 알고 계신다는 걸 믿어야 한다. 무엇이 인간의 삶을 풍성하게 할지 하나님이 더 잘 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 그분과 개인적인 교제를 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왜 우리를 만드셨는지를 잊어버렸다. 요즘 현대인들은 이 하나님을 배신해서 다른 것들을 취하며 따르고 있다. 150년 전에는 록펠러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다. 누군가 그에게 얼마나 많은 돈이면 충분한 지 물었는데 그는 ‘조금 더 있어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바로 그 말은, 그 마음속에는 그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질은 결코 사람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것이 최선이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에서 머물러서도 안 된다. 기도함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이 위기를 이길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체득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Q. 미국의 경우도 동성애 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한국도 최근에 동성애 몸살을 안고 있다. 현재 동성애 결혼도 합법화될 수 있는 길목에서 한국교회가 대처하고 있는 중이다. 반성경적인 세속화의 물결이 굉장히 강하게 흐르고 있다. 한국교회는 무감각하기도 하고, 이 문제에 대해 평신도 지도자들이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A. 미국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새로운 사고가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극단적인 평등주의와 상대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가 됐다. 사람들이 각자 좋을 대로 하고자 하는 생각이 문제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입장이 주로 언론을 통해서 노출이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 굉장히 적대감을 가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교회들조차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 발언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주요 미디어도 기독교의 전통적인 입장에 대해 굉장한 거부감과 혐오감을 가지고 대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이 변하도록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성경이 가리키는 창조의 원리, 성경적인 신관이 결국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보다도 어떻게 하면 인간의 삶이 보다 풍성해지고 번창할 것인지를 더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호소하고 의지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동성애 문제는 깊은 의미에서 볼 때, 가장 파괴적일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사랑의 마음으로 동성애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또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에게로 돌아서고, 모든 동성애적 유혹을 거부하고 저항할 수 있도록 호소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는데, 동성애에 유혹을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유혹들을 받았지만, 이를 이겨낸 이야기들을 안다. 이런 글들이 동일한 유혹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 믿는다. <하나님이 게이들을 미워하시는가?>라는 책의 저자도 동성애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이다.

Q. 미국교회나 한국교회도 세상으로부터 거부를 당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다른 말로는 교회가 점점 게토화(Ghetto)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뛰어넘는 유일한 대안은 이들과 현재의 문화 속에서 계속 대화하고, 이 안에서 어떻게 기독교세계관을 구현하는지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세계관의 전문가이신데, 세계관 구축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나.

A. 우리 모두가 하나님 말씀에 따라 이 문제에 대해서 배워가야 하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 되시고, 하나님이 온 세계의 설계자이시다. 모든 성도들은 이런 확신 안에 있으면서 세상과도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최선의 길이다. 요한복음 10장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살게 했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는 않게 하셨다고 했다.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게토화 되어서 사회로부터 완전히 격리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세상에 휩쓸려 그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도 문제이다. 심지어는 교회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보여주고 실천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들의 본질을 잘 유지하면서도 세상과 소통하여 그들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해야 한다. 또한 그 모든 능력이 성령과 하나님 말씀 안에서 나온다. 이 능력 안에서 세상에 사랑을 보여야 한다. 그런 가운데 성경의 진리를 좀 더 담대하게 나누고 소통해야 한다.

Q. 최근 한국교회가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해오다가 현재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성령의 은사를 강조해왔던 것을 성품의 변화 쪽으로 성령의 능력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A. 은사도 강조해야 하고, 성령에 의한 인격의 변화도 강조해야 한다. 어떤 경우이든 과거에 한쪽을 강조하면서 다른 한 쪽을 강조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다시금 강조해야 할 필요가 대두된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한 쪽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으로 부터 문제점이 발견하게 되는 경우를 본다. 성령을 강조하면서 하나님 말씀을 벗어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성령의 역사를 말할 때, 감정적인 느낌들을 강조할 때가 많다. 성령은 아주 강력한 능력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우리의 내적인 마음에서도 역사하신다. 성경은 성령의 능력과 성경의 진리에 관련된 지적인 이해와 적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전혀 긴장을 주지 않는다. 양쪽 모두가 다 우리에게 필요하고, 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Q. 한국교회의 성령론은 은사 강조, 특별계시의 연속성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분들도 많다. 여기에서 오는 혼란들이 방언과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은사로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고 있지는 않나 생각한다.

A. 성경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사도들이 다 가르치고 난 다음에는 더 이상 성경에 무엇을 더하지 않으셨다. 성경에는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다. 성경은 오류가 없는 최상의 하나님의 계시인 것이다.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우리에게 성경의 진리를 늘 가르치면서, 우리로 하여금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올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을 때 이것이 성경에 더 더해야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계시를 올바로 이해하고 적용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령을 통한 어떤 경험을 체험 했을 때 그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하는 상황이 되어야 하며, 시편 94편 11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성도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아는 것이 절대로 무오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하시고 우리들의 실제 생활에 올바르게 적용하게 만들어 주신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알고 깨닫는 것과 이것이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탄도 성령의 역사를 모방하고 성도들을 속일 수 있다. 진리의 작은 부분을 취해서 이를 성경보다 우위에 두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들 모두가 사탄이 우리를 속이는 일을 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가 늘 성경을 붙들고, 성경을 통해서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Q. 한국교회가 QT를 통해 개인적 성경묵상이 확산되고 있다. 구약의 내용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보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성경해석학자로서 견해는 어떤가.

A.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을 ‘양의 문’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어느 누구도 이 구절을 보고 예수님이 문짝이고 나무로 만든 문이 아닌 것을 다 안다. 사람들이 이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도들이 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알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비유나 유추를 활용해 당신의 백성들을 가르치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해야 하고, 하나님이 우리들을 가르치시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문맥에 따라서 주어진 모든 가르침들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문제는 단순히 그 구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장에도 해당된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말씀할 때에도 사람들은 그 비유를 보면서 그 상황 자체를 문자 그대로 취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이러한 비유를 읽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와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이야기이지 진짜 있었던 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가 물론, 하나님께 이 모든 뜻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지만 이를 즉각적으로 이해할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넓은 문맥을 통해 읽기도 해야 하지만,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선생님을 찾아 듣고, 배우는 일도 필요하다.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볼 때 하나님의 계시가 점진적으로 발전해 가다가 최종적으로 예수님께 귀결되며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 성경을 이해해야 하며 구약의 내용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약을 읽고 그 뜻을 이해해야 한다. 한국 사람들이 선생님을 존경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현대의 모든 선생들이 다 옳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Q. 신구약의 통일성 문제, 일제강점기와 같이 한국교회의 특수한 상황 등으로 인해 성경을 알레고리적으로 이해하는 경향도 있다. 666과 베리칩과 같은 성경을 잘못 해석해 종말론적으로만 보려는 시도도 있다. 특히 이런 부분에 대해 어떤 조치가 가능할지 알려 달라.

A. 다니엘서,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해야 하며, 우리가 이 말씀을 읽고 즉각적으로 그 뜻을 이해할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요한계시록과 다니엘서와 에스겔서의 일부에서 나오는 환상에 대해 현대인들은 익숙하지 않다. 환상은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5장을 보면 사도 요한이 바라본 환상 속에서 예수님이 어린 양으로 서 있고, 그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한 것으로 묘사된다. 우리는 이것이 환상일 뿐이지 예수님을 실제로 동물로 보지 않는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왜 예수님이 양으로 대표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성경의 다른 본문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어린 양으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바는, 양은 유월절에 죄를 대신하는 제물로 잡힌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유월절의 성취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성경과 성경해석의 원리가 나온다. 우리 머리에서 떠오르는 대로 성경 속으로 들어가 해석하다보면 잘못 이해하기 쉽다. 요한계시록을 볼 때도 우리가 지금 보는 뉴스와도 연관될 때도 있다. 적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짐승은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로 대표된다. 이런 핍박은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을 하여금 이런 핍박을 대비하도록 하게 한다. 짐승의 정체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들은 로마제국, 종교개혁 시대의 교황, 무슬림 등등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핍박이 결코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이다. 북한에서 자행되는 모든 핍박도 이런 것 중에 하나로 보는 것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란이나 아라비아에서 집중적으로 가해지는 박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Q. 일부 신학자들을 중심으로 지옥이 없다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런 경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미국에도 이런 주장을 하지 않는가.

A. 하나님은 아주 현명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 시대 사람들이 가장 이해 잘할 수 있도록 하나님 말씀을 기록하셨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어떤 문화 속에 있는 거짓을 지지한다거나 인정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계시의 점진성의 원리와도 관련이 있는데, 하나님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구체적으로 밝혀 나가시다가 신약에 와서 완전하게 계시하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죽음에 관한 구약의 표현만으로 성경은 죽음에 대해 상세히 말하고 있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신약으로 가야만 한다. 이렇게 해야만 성경 본문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14장 11절을 보면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와 쉼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옥의 고통은 끝이 없다. 물론 미국에서도 지옥이 없다가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책도 출간된 것으로 안다.

Q. 한국창조과학회를 포함해서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창조의 연대, 인류역사의 연대를 6천년으로 봤는데, 일부에서는 창조격변설을 주장하고 있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유신론적 진화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A.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는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심으로 나타낸 통치는 확실히 일관성이 있다. 물론, 성경과 과학 양 영역의 가르침에 대한 조화는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지식은 유한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분명하게 보이는 것도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올바르게 말해주는 것과 과학자들이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히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항상 우선이 된다. 또 우리가 성경의 진리를 잘못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이런 구분을 했으면 좋겠다. 영어에서 ‘진화’라는 단어도 여러 다른 의미와 문맥에서 사용될 수 있다. 작은 범위에서는 진화는 단순한 적용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좀 더 큰 의미에서 종의 변화를 말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굉장히 질문의 여지가 많다. 개는 개일 뿐이지 시간이 지난다고 다른 종이 될 수는 없다. 다윈이 말하는 진화론은 목적 없이 변화만을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모든 생물들이 하나님의 개입 없이, 또한 아무 목적 없이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철학적인 가설이 개입한 것이다. 화석을 보면서 목적이 있는지, 없는지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세우고 창조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현대인은 심지어 이 문제에 대해서까지도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은 과학의 원리나 이론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얼마든지 예외적인 방식으로 일하실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방식으로 다른 것에도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구의 나이와도 연관이 있는 것이다. 지구의 나이가 젊다면, 하나님이 특별한 방식으로 피조물을 창조해 이곳을 채우셨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는 지구의 나이를 젊게 보나 늙게 보는 입장들을 심각하게 고려해보고, 다 들어볼 필요가 있다. 지구의 나이가 많다고 할 때에도 하나님이 어떻게 여기시는지가 중요하고, 하나님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행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진화론의 입장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진화론은 하나님의 창조의 활동에 관한 목적을 배제하고서 관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제외하고는 과학자의 말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나님은 당신이 어떻게 창조하셨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가지시는 지능적인 설계에 의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설사, 아담과 하와의 창조를 제외하고는 다른 피조물의 창조에 있어서 유신론적 진화론이 적용될 수 있다고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결코 안정된 입장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한 쪽의 예외적인 상황을 인정한다면 유신론적 진화론자의 논박도 대처할 수 없게 된다. 과학자들의 오류는 한 주장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도 과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고 본다. 많은 불신자 과학자들도 다윈의 주장에 만족하지 않는다. 과학자들 사이에도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 많다.

Q. 6일 창조에 관한 날 개념에 대해서 이를 24시간이라고 하지 않는다고 할 때, 969살까지 살았던 므두셀라의 나이의 이해 및 다른 족보들의 이해와 관련하여 혼란의 여지가 많이 생길 것 같다.

A. 내 생각에는 창조의 날을 얼마라고 적용하든지 간에 그것이 반드시 아담과 하와나 므두셀라의 나이에 상관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한 쪽만을 보고서 다른 것은 틀리다고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창조의 날과 족보에서 나오는 날의 개념을 다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창조에 나오는 날에 대해서, 특별히 7일째 날은 영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창조의 날과 족보의 날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째 안식했다는 방식이 반드시 우리 인간이 6일을 일하고 하루 쉬는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에서 유추됐다는 것이다. 족보에 나오는 날과 연도는 우리가 계산하는 날과 일치하지만, 창조의 날에 대해서 이것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이 기록한 족보와 일반 국가에서 기록한 족보에는 차이가 있다. 족보를 활용해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설명하신다. 구약학자들 가운데서도 성경의 족보를 하나의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은 무오하신 분이지만 우리는 무오한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과 하나님의 섭리적인 통치를 다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에 따라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시편 121편 2절이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 구절은 두 시적인 구절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들을 도우신다는 사실을 앞에 두고 하늘과 땅을 창조한 사실을 뒤에 두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모든 사실에 입각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김준수 ⓒ 뉴스파워/USA아멘넷


☆ 록펠러 어머니의 10가지 교훈 ☆

1. 하나님을 친아버지 이상으로 섬겨라.
친 아버지가 생계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지만
더 중요한 공급자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2.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겨라.
목사님과 좋은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축복된 길이기 때문이다.

3. 주일예배는 본 교회에서 드려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에 충성해야 하며 가능한 주일예배 만큼은
본 교회에 참석하여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4. 오른쪽 주머니는 항상 십일조 주머니로 하라.
이 말은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구별한 후 나머지를 가지고
필요하면 사용해야 함을 표현 한 말이다.

5. 아무도 원수로 만들지 말라.
다른 사람들에게 관계가 좋지않으면 사람들이 거리를 두기 때문에
일마다 장애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6. 아침에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하루를 시작하기 전 오늘 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이 모든 일에 함께 하여
주실 것을 온전히 믿는 기도가 필요하다.

7. 잠자리 들기 전에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하라.
알게 모르게 계속적으로 짓는 죄를 가능한 빨리 회개하여
죄로 인한 어려움과 고통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

8. 아침에 꼭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려는 시간이 필요하다.

9. 남을 도울 수 있으면 힘껏 도우라. 그리고 도와준 일에 대해
절대로 나팔을 불면 안 된다.

10. 예배 시간에 항상 앞에 앉으라.
예배 드리고 말씀 듣는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 서서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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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가 용서 받았다는 여부를 어떤 식으로 알 수 있습니까?(리차드 십스)

내 죄가 용서받았다는 여부를 어떤 식으로 알 수 있습니까?
(다음에 나오는 두 가지 기준을 시금석으로 삼으면 여러분의 죄가 용서받았는지 그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1) 죄사함을 받기 전에 일어나는 일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2) 죄사함을 받은 후에 일어나는 일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만일 여러분이 겸손하고 진실하게 죄를 고백한다면 여러분의 죄는 용서받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그러므로 내가 죄 용서받았다는 것을 느낌으로 경험하든 그렇지 못하든 만일 내가 진심으로 철저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죄를 고백했다면, 내 죄는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만일 죄 용서 받았다는 느낌을 우리가 손쉽게 경험하게 된다면 우리는 사탄의 유혹에 대해서 지나치게 자신만만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긍휼 가운데 우리가 그런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잠시 보류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우리 죄를 고백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 죄를 사하셨다는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만일, 내가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시인해 놓고서도 하나님께서 차용증서를 소각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죄를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 사람의 죄는 틀림없이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면 그와 동시에 (죄에 반기를 들 수 있는)능력도 그 사람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마 9:2,6).
하나님께로 돌이킬 힘이 있다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순종할 힘이 있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계속 영위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 사람의 죄는 용서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항상 그를 앞으로 인도하는 믿음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능력이 자신 안에 발휘되고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정말 죄사함을 받았는지 그 여부에 대해서 의심을 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죄를 제해 주시고 용서 해 주시게 되면, 불의를 모두 제해 달라는 기도를 들으신 후에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증거는 (죄사함을 받으면) 양심에서 어느 정도 평안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은 사람도 어쩌면 양심의 평안을 많이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절망하지 않을 정도만큼의 평안은 틀림없이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사면되었으니,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정도의 화평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 있는 하나님을 감히 바라볼 수 있는 담대함이 어느 정도 있다면, 이것은 그 사람의 차용증서가 소각되고 그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시금석입니다.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이나, 아히도벨 같은 사람이나, 사울과 같은 사람은 그 마음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정도의 담대함을 가지고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넷째로, 죄를 용서받으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많이 넓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머리에 향유를 붓고 눈물을 뿌리며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어주는) 여인을 향해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눅 7:47).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뜨거울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영혼 위에 빛나셨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죄사함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 사랑의 분량에 비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죄사함의 확신을 더욱 더 많이 얻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더욱 불타오르도록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분노하시고 성이 나 있고 진노가 가라앉지 않은 하나님을 영혼이 사랑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니, 그런 경우에 오히려 영혼은 아예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이 사람의 경우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로, 또 죄를 용서받으면, 그것은 그 사람을 적당하게, 즉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인자하고 용서를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대개의 경우 자기 자신의 양심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온화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했다는 것을 증거 합니다.
반면에 잔인하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의 경우, 바로 그런 됨됨이가 그 사람의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인식으로 뜨거워지거나 녹아내린 적이 전혀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자비로운 태도를 취하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지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입증합니다.

가장 시급한 일은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애쓰도록 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의 권세를 제거하시고 굴복시키시도록 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와 그에 따르는 모든 심판을 완전히 제하시도록 합시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이 세상의 모든 쾌락을 한 몸에 누리며 산다 해도, 우리는 단지 비참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사람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모든 쾌락을 한 몸에 누리며 사는 것은 사형 선고를 받은 역적(逆賊)이 감옥 안에서 누리는 자유에 불과합니다. 비록 이 사람이 원하는 모든 것이 완벽한 서비스와 함께 하나도 빠짐없이 조달된다 해도, 그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게 되면 그의 마음은 얼어붙게 되고 그의 용기는 꺾여집니다. 그리고 그는 감옥밖에 있는 가장 미천한 짐마차의 마부나 맥주 잔을 나르는 사람(tankard bearer)이 자신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고 그리고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처지를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자신의 죄를 사면(赦免) 받지 못하고, 하나님과 화해하지 못한 사람의 형편도 이와 똑같습니다.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장부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자신을 대적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을 무장시켜서 자신을 대적하여 복수를 감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이상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위안도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영혼 사이에 있는 분쟁을 멈추지 않는다면(take up) 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재인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죄사함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경우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얻기까지 한 시간도 편안한 마음으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의 삶은 불확실하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지옥이나 파멸과 우리 사이에는 한 걸음 차이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간구하여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쉴 새 없이 간구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렸을 때 지은 죄와 성인이 된 후에 지은 죄,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무슨 죄든지 다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모든 불의를 제하소서'라고 말입니다.

-돌아오는 배역자 중에서-

 

포도나무 선교회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예레미야 버로우즈)
 
“먼저 "땅의 일"이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아름다움, 이 세상의 영광, 이 세상의 화려함, 이 세상의 유익, 이 세상의 쾌락과 명예 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지나치게 좋아하거나 즐거워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용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 관하여 그들을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무조건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악한 사람의 특징으로 지적된 "땅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소유하는 것도 아니요, 자신에게 마땅히 돌아와야 할 몫을 정당하게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이러이러한 것들을 가지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마음대로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넓고 큰 집을 여러 채 가지고 있고, 화려한 고급 가구를 마음대로 집안에 들여놓을 수 있으며,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일까! 아, 나도 그런 것들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것들은 참으로 귀중한 것들이다. 그런 것들은 참으로 기쁨을 주는 것들이다. 인생의 기쁨과 행복이 무엇이랴? 그런 것들을 마음껏 많이 누리는 것이 인생의 기쁨이요 행복 아닌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에 자신의 행복을 거는 사람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을 그토록 높이 평가하고 있다면, 틀림없이 그 사람은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어디에 마음을 쏟으며 살고 있는지를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다음 한 가지 질문에 스스로 답해 보십시오.
"나는 무엇을 나의 탁월함으로 여기고 있는가?"
우리 자신의 탁월함이 달려 있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이든, 바로 그것에 우리의 마음도 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것과 어울리는 상태에 있기 마련입니다."
창세기 27:28-39절까지 보면, 이삭이 야곱과 에서에게 각각 축복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특별히 야곱에 대한 축복의 내용과 에서에 대한 축복의 세부 내용이 순서적으로 어떻게 다르게 배치되어 있는지를 주목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야곱의 경우
: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로 너에게 주시기를 원하노라"(28절)
에서의 경우: “네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멀 것이며..”(39절)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도 현세적인 것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경건한 마음이 최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늘 이슬입니다. 땅의 기름짐은 언제나 그 다음입니다.
반면에 육적인 마음은 어떻습니까? 육적인 마음도 자신이 하늘에 속한 것들을 어느 정도 필요로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육적인 마음은 그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육적인 마음이 우선적으로 갈망하는 것은 땅의 기름짐입니다. 하늘 이슬은 언제나 그 다음입니다. 세속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땅의 일을 가장 중요하고 가장 고귀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세속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속한 것들에 마음을 쏟으며 사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세상일을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고 바쁘다면, 그 사람은 죄악된 방식으로 땅의 일을 생각하는 생각입니다. 본래 생각이란 마음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분출되거나 솟아오르는 무엇입니다. 다시 말해 생각이란 마음으로부터 직접 일어나는 거품과도 같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의 말과 행동을 살펴보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생각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으로부터 직접 솟아나는 것은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무릇 어떤 사람의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사람의 사람 됨됨이도 그러합니다. 사람의 생각은 곧 그 사람의 됨됨이를 그대로 말해 준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이 곧 그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입술을 통해 나오는 말과 외적인 행동의 경우는 사정이 다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별로 내키지 않는 약속을 지키거나 품행을 단정하게 꾸밀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입술을 통해 나오는 말과 외적인 행동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일 여러분이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은밀히 마음에 자주 떠오르는 생각들이 무엇인지를 조사해볼 수 있다면, 그것을 토대로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거느리고 있는 부하 직원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인사고가를 잘 받고 싶은 욕심 때문에 여러분 앞에서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단정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싶다면, 그들이 개인적으로 자주 다니는 장소에 혼자 있을 때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의 진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여러분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며 어떻게 처신하는지를 잣대로 삼아 여러분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평가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이 방안에 혼자 있을 때 여러분의 마음이 어떤지, 내면의 생각 속에서 여러분의 마음이 어떤지를 잣대로 삼아 여러분의 마음을 자세히 평가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여러분의 마음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 여실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불현듯" 떠오르는 모든 생각까지
무조건 다 잣대로 삼아 여러분의 마음을 평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때로 마귀는 가장 경건한 사람의 마음에도 사악한 생각들을 주입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마음에 불현듯 떠오르는 모든 생각까지 다 평가 기준으로 삼는다면 낭패를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마음을 판단하는 잣대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는 생각은 우리가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생각이요, 우리가 감미로움과 만족을 얻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혼자 있을 때 가장 자연스럽게 행동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혼자 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까?
"아,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 내 마음은 얼마나 좋은지! 나는 주야로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노라."
품행이 악하고 더러운 사람은 혼자 있을 때 불결한 생각에 빠지며 거기에서 감미로움을 느낍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가운데 감미로움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야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자신의 성공을 생각하며 거기에서 감미로움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그런 생각에 잠겨 두세 시간도 거뜬히 보낼 수 있으며 거기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땅의 일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포도나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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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제임스 성경의 권위와 문제점 / 류호준 교수

 
*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질문자의 신원을 알려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질문: 킹제임스 성경의 권위와 문제점

(1) 질문자의 질문은 한국어판 킹제임스 번역 성경을 염두에 둔 것 같군요. 모든 번역이(한글 번역성경이든 외국어 번역 성경이든) 그렇듯이 한계와 제한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완변학 번역이란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번역은 반역"이 될수 있다고 하였겠습니까?

(2) 일부 영어권 독자들(대부분 평신도들)이 킹제임스 번역 성경에 너무나 익숙하였기때문에, 그 성경번역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나, 마치 한국 신자들이 너무나도 오랬동안 '개역성경' 번역본에 익숙하였기 때문에, 이 번역본에 대한 미련을 쉽게 떨구지 못하는 것과 비슷한 양상입니다.

(3) 번역본의 번역자들이 그들 앞에 놓고 사용했던 원어(히브리어, 아람어, 희랍어)가 원본이 아니라 사본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잇을 것입니다. 문제는그러한 사본이 질에 있어서, 연대에 있어서 얼마나 원본에 가까운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것이 사본 비평학입니다. 이러한 학문적 노력은 가능한한 성경원본(이 세상에는 원본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에 가깝게 복원하여 번역하자는 노력들입니다.

(3) 일반적으로 말씀드리면,  킹제임스 번역본(1611년의 영어번역본)이 앞에 놓고 번역해낸 그 사본들은 일반적으로 그 질이나 지방성, 그리고 연대에 있어서 현대의 번역본(예들들어, NRSV NIV, NASB, NJB 등)들이 의존하고 있는 사본들 보다 열등하거나 후대인 것으로 추정하고 잇습니다.

(4) 그러므로 영어 킹제임스판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한글 킹제임스판이 완벽하거나 최종적 권위를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로 무지한 소치라고 해도 과언을 아닐 것입니다. 물론 영어 킹제임스판의 문체가 매우 고양되고 격조높은 것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바로 그 번역의 무오성이나 탁월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5) 킹제임스 번역본에 대한 문제를 다룬, 최근에 나온 책 한권을 소개해 드립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D.A. 카슨, [킹 제임스 버전 성경의 오류], 송병현/박대영 옮김 (184면) (도서출판 이레서원, 2000년).

마지막 부탁으로는, 이러한 논쟁에 깊이 들어갈 여유잇는 '시간'이 있다면, 나는 오히려 그 시간에 '성경'을 자세히 읽고 그 말씀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 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시간이 있다면, 중요한 번역본들을 함께 놓고 비교해 보면서 읽어보면 더욱 좋을 것입니다.

 

 

출처: 류호준 교수의 무지개 성서교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식초와 생강이 만나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놀라운 효능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화제다. 최근 일본에서는 일명 생강식초의 효능에 푹 빠져 있다.

신비한 약효 때문이다.당뇨병, 고혈압은 물론 변비, 냉증 등 다양한 효능을 나타내는것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비밀을 소개한다.

중국의 성인 공자가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식사 때마다 반드시 챙겨먹었다는 음식이 바로 생강이다. 향신료지만 효능 면에서 보면 어떤 식재료 못지않게 뛰어난 생강에 대해 살펴본다.


#1. 알면 알수록 놀라운 생강의 효능
<동의보감>에는 생강은 몸의 냉증을 없애고 소화를 도와주며 구토를 없앤다고 기록돼 있다. 이는 생강이 위를 자극해 소화를 촉진시키고 몸에서 열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생강은 몸을 따뜻하게 한다.

 

생강 특유의 매운맛을 내는 진저롤과 쇼가올 성분이 몸의 찬 기운을 밖으로 내보내고 따뜻함을 유지시켜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강을 먹으면 기침, 감기, 몸살, 목의 통증 등이 완화된다. 생강의 진저롤은 메스꺼움을 예방한다.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은 의학저널 <란셋>을 인용해 생강이 멀미약보다 멀미 억제 효과가 2배 이상 뛰어나다고 보도했다. 런던의 세인트·바솔로뮤병원에서는 수술 후 마취에서 깬 환자의 심한 메스꺼움을 억제할 때 화학 약물보다 생강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생강은 혈중 콜레스테롤을 없애기도 한다. 일본 교토대학교의 야마하라 조지 박사는 생강의 진저롤이 담즙을 촉진시켜 피 속의 콜레스테롤을 없앤다고 밝혔다. 생강의 매운맛 성분은 혈액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막는다.

 

덴마크 오덴스대학 스리바스타바 박사는 생강이 혈소판의 응집을 억제해 혈전을 막고, 뇌경색과 심근경색, 고혈압을 예방 및 개선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똑같이 매운맛을 내는 마늘이나 양파보다 생강이 혈액응고를 막고 혈액순환을 돕는 효과가 크다.

 

생강은 해열 작용도 한다. 이탈리아 나폴리대학교의 마스콜로 박사는 생강이 프로스타글란딘(Prostaglandin, 인체 내에서 합성된 생리 활성 물질로 장기나 체액 속에 분포해 있으면서 생리 작용을 촉진시키는 물질)의 생성을 억제해 해열을 촉진시킨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생강은 화학 소염·진통제와 비슷한 효과도 낸다. 화학 약제를 복용하면 위염이나 위궤양이 발생할 수 있지만 생강은 위벽을 보호하므로 건강에 이롭다.

 

생강은 산화 방지에도 효과적이다. 사람은 몸 안에서 발생하는 활성산소가 신체에 깊이 관여하면서 노화가 일어난다. 항산화 작용이 뛰어난 생강을 먹으면 노화뿐 아니라 각종 질병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생강을 많이 먹으면 위액이 지나치게 분비돼 위 점막이 손상될 수 있다. 생강은 익혀 먹어도 효능에 큰 차이가 없으므로 위가 약한 사람은 익혀서 먹는 게 적당하다.

 

또한 생강은 혈관을 확장시키는 작용을 하므로 치질이 있거나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같은 내장기관의 출혈이 염려되는 사람은 너무 많이 섭취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2. 여성의 건강에 특히 좋은 생강
생강은 특히 여성에게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성미한의원 조선화 원장은 “생강은 속이 냉해 소화가 안 되고 잘 붓는 여성, 비위가 약한 임산부의 입덧에 도움이 된다.

 

생강은 몸이 차고 속이 냉해서 유발되는 각종 여성질환과 자궁질환 치료에 많이 이용된다”고 말했다.

 

생강은 먹는 것 외에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다. 생강 반식욕과 생강 족욕이 그것이다. 생강 반신욕은 생강 1개를 강판에 갈아 헝겊주머니에 넣은 상태로 욕조에 담그면 된다.

 

생강 족욕은 강판에 간 생강 1개를 냄비에 넣고 물 2ℓ를 부은 뒤 가열하다 팔팔 끓기 직전 불을 줄여 중불에서 20~30분 정도 졸인 것을 사용한다.

 

이것을 차게 해 세숫대야에 넣고 10~15분간 발을 담근다. 처음에는 조금 따갑지만 곧 사라지니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생강은 편안한 수면에도 도움이 된다. 얇게 썬 생강 1~2개를 그릇에 담아 머리맡에 두고 자면 생강의 정유 성분과 방향 성분, 매운맛 성분이 후각을 자극해 뇌신경을 진정시켜 잠을 잘 잘 수 있게 한다.

 

생강은 보통 4월에 심어 9월에 수확한다. 가을에 수확한 생강은 햇생강이고 보관해둔 생강을 묵은 생강이다. 우리가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생강은 묵은 생강이다.

 

묵은 생강을 구입할 때는 통통하고 상처나 주름이 없는 것으로 고른다. 생강은 랩에 싸서 냉장고에 넣으면 오래 사용할 수 있다.


◈ 혈당치 낮추는 생강의 놀라운 약효 ◈

생강은 예로부터 약처럼 먹던 식품 중 하나다. 많은 효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감기의 특효약으로 생강차를 마셨으며, 항균효과나 위를 건강하게 하는 작용, 냉증 개선 작용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그 비밀....., 우선 생강의 성분은, 생강의 매운 성분 중 하나인 진게롤(ginggerol)이라는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

진게롤은 지방세포의 분화를 촉진하고, 작은 지방세포를 만드는 작용을 한다. 지방새포란 에너지를 지방으로 축적한다든지, 그 에너지를 방출하는 세포다.

이러한 지방세포에는 대소가 있다.큰 지방세포와 작은 지방세포의 구별을 말한다. 그런데 이들의 활동은 전혀 다르다.

큰 지방세포는 비만의 원인이 되고, 고혈압과 당뇨병과 같은 생활습관 병의 발단이 된다.

그런 반면 작은 지방세포는 그 반대의 활동을 한다. 당뇨병에 한정해서 말하면, 작은 지방세포는 혈당치를 낮추는 호르몬인 인슐린의 감수성을 높이고, 포도당을 세포 내로 끌어 들이기 쉽게 만들기 때문에 당뇨병 개선에 도움을 준다.

즉 생강의 매운 성분인 진게롤은 작은 지방세포를 잇달아 만들어 내고, 큰 지방세포를 배제함으로써 혈당치를 낮추는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생강의 진게롤은 염증에 관여하는 효소의 작용을 방해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우리 몸에 염증이 퍼지는 것을 억제하고 알레르기 반응을 막는 것이다.


찬 몸은 만병의 근원...노화 막으려면 몸을 따뜻하게...

생강은 다양한 효능을 지닌 뛰어난 식품이다. 특히 우리 몸을 따뜻하게 하는 작용은 크게 주목 받고 있다. 찬 몸은 만병의 근원이라는 말도 있다. 몸을 차게 한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몸에 큰 부담을 주어 심각한 피해를 낳는다.

그렇다면 우리 몸이 찰 경우 과연 내 몸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그것은 크게 5가지 증상으로 나누어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내 몸의 기초대사율이 저하 된다.
둘째, 면역력이 저하 된다.
셋째, 자율신경의 활동이 흐트러진다.
넷째, 내장의 기능 저하가 발생한다.
다섯째, 우울증에 걸리기 쉽다.

위의 다섯 가지 증상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바로 ‘노화’.

다시 말해 우리 몸을 차게 만든다는 것은, 내 몸의 노화로 이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노화를 막기 위해서는 늘 우리 몸을 따뜻하게 할 필요가 있다.

생강은 그런 효과를 나타네는 대표적인 식품의 하나다.

생강은 방향성분인 진기베롤과 매운 성분 진게롤, 생강오일 등의 작용으로 우리 몸의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하고, 체온을 높여 혈행을 좋게 만드는 중요한 작용을 한다. 또한 생강에는 미네랄의 일종인 아연이 풍부하게 함유돼 있기도 하다.

이러한 아연은 목구멍에서 호르몬을 생산하는 갑상선에 작용해, 신진대사를 좋게 하여 혈행을 좋게 하는 작용을 한다.

이렇게 다양한 유효성분을 풍부하게 함유한 생강은, 내 몸의 냉증을 해소하기 위한 최고의 식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신비한 작용을 나타내는 생강...어떻게든 우리 생활 속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좋다.

생강을 식초에 담가서 먹는 생강식초는, 식초의 약효까지 더해진 최고의 건강식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누구나 손쉽게 만들 수 있고, 먹기도 간편해,그 진가를 배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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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되어야 했던 이유 / 로이드존스

 

 

“저는 제 개인적인 문제를 강단에서 언급하는 것을 되도록이면 삼갑니다. 그러나 오늘 이 아침에 저는 바로 이 주제와 연관되는 한 체험을 말씀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여기 올 때 사람들은 저더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째서 그 좋은 일 - 좋은 직업, 아니 모든 의학적인 전문직을 포기하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만일 자네가 잠시 경마권을 파는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이해하였을 것이고, 참 장한 일을 한다고 말하였을 걸세, 그러나 의료계의 일 - 환자를 치료하고 고통을 멈추게 하는 일을 마다하고 가는 일에 대해서야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어느 분은 심지어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만일 자네가 시무 변호사 일을 보다가 그 일을 포기하고 나섰다면 격려를 하겠네, 그러나 의사의 일을 버리고 나서다니!’ 저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네 좋습니다. 당신네들이 의사의 일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면, 저를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로 돌아가기에 합당한 자가 되게 하는데 우리의 거의 모든 시간을 써왔습니다!’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불멸의 영혼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거대한 일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나아서 건강을 회복하자 그들은 옛 죄로 다시 돌아가 버렸습니다! 저는 이 사람들의 죄짓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을 뿐임을 알고, 더 이상 그 일을 하지 않을 작정을 하였습니다. 저는 영혼을 치료하기를 원합니다. 사람이 몸의 질병을 가지고 있으면서 영혼이 잘되어 있으면 그는 정말 잘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몸이 건강하고 영혼이 병들어 있는 채 60여년을 지내다가 영원한 지옥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 그렇습니다! 때로 우리는 가장 좋은 것을 위하여 좋은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 구원의 즐거움과 새 생명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의 설교 중에서>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사단의 공격

                                     이현숙 목사

사단은

우리의 약한 부분을

더 약하게 공격 하여

소망을 잃게 한다오

 

 

사단은

우리의 괴로운 부분

더 괴롭게 만들어

절망하게 만든다오

 

 

사단은

우리의 죄를 보이며

마음을 찔리게 하고

주님과의 사랑을 방해한다오

 

 

사단은

사람마다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잘 알아

그 매력에 빠지게 한다오

 

 

사단은

놓지 못하는 오래된 것에

자연스레 무감각하게 하여

우상으로 만든다오

 

 

사단은

칭찬하는 소리를 통해

교만으로 자라게 하고

자신이 최고라고 믿게 한다오

 

 

사단은

세상의 유혹을 보이며

자신에게 절하게 하고

천국을 포기하게 한다오

 

눅4: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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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확신 (1)
 
박혜근
다음 글은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박혜근 교수의 조직신학 과목인 <구원의 확신>에 대한 강의 내용을 녹취하여 편집하였다. <리폼드뉴스 편집부>
 
구원의 확신은 우리의 구원의 경험 중의 하나이다. 구원의 확신은 평신도 사이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었지만 통일된 가르침 없이 흘러왔다. 그런 면에서 어떤 점에서는 생소하고 과목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확신에 대한 책이 없다. 유일하게 있는 책이 R. Ryle 정도의 책이다. 평신도용이다. 그러나 신학적 지평을 알기에는 부족하다. 신학적인 논의는 훨씬 더 광범위하고 복잡한 이슈들을 담고 있다. Joel Beeke 박사학위 논문이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학교에서 지향하는 목회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교육적 목회이다. 개혁파는 칼빈 사후에 한번이라도 다른 목회를 시도한 적이 없었다. 그 점을 꼭 기억하라. 하나님 말씀을 잘 가르치는 것이 목회의 처음이고 마지막이다. 목사의 사명이다. 밥 퍼는 집사들이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도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선교도 가르치는 것이다. 선교가 나귀타고 들판에 다니면서 성경책 나눠주는 게 선교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사람들이 말도 타고, 나귀도 타고 밀림도 헤치는 궁극적 목적은 가르치려는 것이다. 병원을 짓고, 학교를 만드는 것은 복지국가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선교사라면 복음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잘 가르치는 것이다.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이끌어 가는 사람이 선교사이고 목사이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목사를 세우는 것이고, 교회 안에 교사를 만드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직업을 갖기 위해서 소명을 가지고 이 자리에 온 것이다. 부단하게 노력해야 한다. 그 노력 없이는 절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다.
 
과거에 솔로몬 성전에서 대제사장들이 안식일에 바톤 터치하였다. 안식일에 바꿀 때까지는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잠을 자는데, 누워서 자는 사람은 선임들이고, 나머지는 벽에 기댄 채로 밤을 새웠다. 그러니까 한번이라도 그 거추장스러운 절차를 멈춘 적이 없었다. 과거 유대인들이 제사장의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서 동트는 시간을 맞추어서 지평선에 해가 오르는지를 보았다. 해가 오를 때 제사를 집행하고 해가 질 때 집행을 멈추었다.
 
향 피우는 것도 복잡한 절차이지만 그들은 수백 년간 그것을 반복하였다. 그런데 서기관들이 있는데 성전에서 말씀을 날마다 연구하고 가르쳤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말씀 연구하고 가르치다가 인생 마쳐야 한다. 그렇게 할 생각이 없으면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 말씀을 공부하고 그 공부한 지식으로 사람들을 깨우쳐야 한다. 그것이 여러분의 사명이다. 그러니까 공부를 하고 깨우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한다.

1. 구원의 확신에 대한 논쟁

한국교회가 이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가볍게 다룬 점이 없지 않다. 사경회나 부흥회에 가면 구원받은 줄 믿습니까? 아멘! 이 말로 구원의 확신을 종결지었다. 그런데 사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이번 학기는 구원의 확신을 다루면서 구원의 확신과 관련된 성경적 근거하든지 신학적인 것을 다룰 것이다.

책을 찾아보니까 루이스 벌코프나 후크마의 책에도 구원의 확신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다. 그래서 이 구원의 확신은 많이 다루는 주제인데 거기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아서 안타까운 게 현실이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에 관련된 신학에 대하여 전반적인 소개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확신-확신이라고 말하면 이렇게 알아들어야 한다. 구원에 대한 확신이다-이 세상에 사는 동안 과연 가능한가에 대한 논쟁은 종교개혁시대를 가장 뜨겁게 달구었던 논쟁점 중의 하나이다. 500년 전 종교개혁시대로 돌아가서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와 무엇을 가지고 논쟁했는지 들여다보면 논쟁점 중의 하나가 바로 구원의 확신에 대한 논쟁이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이 논쟁은 또 다른 양상으로 번져나갔다. 종교개혁시대에도 그랬고, 종교개혁 후 시대에도 그랬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구원의 확신에 관련된 논쟁은 종교개혁시점부터 오늘까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논쟁이 되고 있는 핵심 논쟁 중의 하나라고 보면 된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구원에 대한 확신에 대한 논쟁이 없었다. 왜냐하면 어거스틴 죽고 난 뒤 종교개혁이 있기까지 약 1000년, 중세시대에는 구원에 대한 확신에 대한 논쟁은 없었다. 왜냐하면 교회의 일관된 입장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교회의 구원에 대한 입장이 무엇이냐, 구원의 확신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만약에 구원의 확신에 관한 어떤 개인적인 시도를 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1600년대 트렌트 종교회의에 가면 뭐라고 하냐면, 그것은 사악하고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정죄하였다. 그러니까 로마교회는 중세 1000년 동안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트렌트 종교회의에서는 정의하면 그런 구원의 확신을 얻고자 하는 시도 자체는 단순하게 바람직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 사람은 그레고리 대제이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에 마침내 구원의 확신의 문제가 논쟁점이 되기 시작하면서-반격했던 이유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한다- 터져나온 로마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은 과거 중세시대의 교회에서 가졌던 것보다 더 강경한 것이었다. 어떤 것이냐면 만약 구원의 확신을 얻고자 시도하는 것은 저주를 받을 짓이라고 정죄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종교개혁 이전에는 구원의 확신을 둘러싼 논쟁은 없었다.
 
그러면 구원의 확신에 대한 논의가 있었느냐면 있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히포의 어거스틴이었다. 또 한 사람은 Duns Scotus였다. 어거스틴이나 둔스 스커타스의 입장은 이런 것이었다. 구원에 대한 확실성은 논의하기는 어려워도 구원을 받으리라는 어느 정도의 추정은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구원의 확신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구원에 대한 대략의 추정은 이 땅에 사는 동안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들의 입장은 100% 확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단지 개연성 정도에서 구원의 확신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다.

자, 이렇게 기껏해봐야 구원의 확신은 개연성 정도에 머문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중세의 로마교회의 고해성사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해성사제도는 죄 용서를 베풀기 위한 교회적 절차이다. 지금도 고해성사를 한다. 죄 용서 받기 위해서는 사제를 찾아가서 자신의 죄를 개인적으로 자백을 하게 되면 그 죄의 고백을 들은 사제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선포하는데 반드시 거기에 따르는 징벌적인 명령을 내린다. 그것이 헌금이든, 금식기도든 혹은 고행이든 무엇이든 간에 교회가 부과하는 소위 말하는 죄값을 치러야 한다. 그것을 얼마나 철저하게 얼마나 진실하게 수행하느냐에 따라 죄의 용서가 주어질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어쨌든 고해성사와 관계가 있다.

어거스틴은 견인의 교리를 가르치면서-구원의 확신은 견인 교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견인을 어거스틴이 가르칠 때 무엇이라고 했냐면 어거스틴은 그의 생애 초기와 후기는 중기와는 다르다. 그의 사상이 절정에 이른 중기 시대에는 견인을 인정하였다. 견인의 교리를 발전시킬 때는 어디에서 근거를 찾았느냐면 예정의 교리에서 가져왔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세전 예정하시는 무궁하신 사랑 위에서 성도는 구원받는 날까지 구원받는 믿음을 간직하게 된다고 자기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런데 후기에 접어들면서 무슨 말을 하면, 어거스틴이 비록 신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말하면서 견인의 입장에서 한 발짝 물러서는 입장을 후기에 보였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견인의 교리의 부정이다. 견인이란 하나님이 창세전에 예정하신,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대로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까지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정하실 때에는 구원이라는 결과만 예정하시는 것이 아니다.
 
구원 받게 하시되 그 사이 과정은 역사적 우연에 맡겨 놓고 어떻게 하든지 간에 구원에 이르도록 예정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예정행위는 목적도 결과도 과정도 구체적으로 예정하셔서 그것을 역사의 우연에 맡겨 놓지 않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과정에 따라 진행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의 속성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마침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영광의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그 전체 일생은 하나님이 예정하신대로 된다는 것이 예정론의 중요한 원리이다. 그러니까 예정을 믿는 신자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우여곡절을 입고, 천신만고를 당하고 정말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좌절을 경험한다.
 
그것을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 신자들은 그것을 우연의 바다에 던져진 운명의 슬픔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구원의 과정이라고 보았다. 그것이 우리 개인의 기대에는 벗어나는 사고이기도 하고 사건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계획한대로 되는 것이다. 그런 확신 안에서 자신의 삶을 낙관적으로 보았다. 정말 여러분들이 긍정적 사고를 말하려면 예정론을 믿어야 한다. 인생의 낙관적 입장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창세전 예정을 믿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절대로 구원의 확신이 없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나중에 후기에 가서 뭐라고 하냐면, 신자가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만약에 그렇게 해서 끝났다면 어거스틴의 명예에 누가 될 뻔했다. 그런데 뭐라고 했느냐, 은혜에서 떨어진 신자들이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였다. 은혜에서 떨어진 신자가 어떻게 회복 하냐면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은혜에서 떨어진 신자가 회복된다고 말하면서 성찬에 막강한 권능을 부여하였다. 그러니까 성찬에 참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은혜를 주시는 것으로 가르쳤다. 그렇게 됨으로써 성찬은 어떻게 되는가? 한마디로 은혜의 주입이라는 기계적인 은혜의 주입이 이루어지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중세 로마교회가 성찬에 구원론적인 의미를 성경이 의도한 것 보다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한 것에는 이러한 어거스틴의 공헌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찬제도, 고해성사 같은 로마교회의 시스템의 일정한 공로자가 누구냐? 사실 어거스틴이다. 지금도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찬이 사람들에게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거나 혹은 하나님의 은혜가 절박하게 필요한 자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통로가 성찬이라고 보는 것이다. 미사의 중심이 성찬이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예배에 언제나 성찬을 행한다. 왜냐하면 그것이야 말로 은혜의 수단이다.

자,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고해성사를 통한 죄의 용서라는 로마교회의 교리적인 시스템은 궁극적인 확신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죄를 지으면 고해성사를 하고, 그리고는 은혜의 회복을 위해서는 성찬에 참여한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회복하고 용서를 받는다. 이것이 로마교회의 시스템이다. 죄를 지으면 고해성사해야 하고, 고해성사하면 성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받아 누리는 것이다. 상찬을 하게 되면 무엇이 일어나느냐? 은혜의 주입이 일어난다.
 
여러분, 은혜의 주입의 강조점은 개인의 어떠한 믿음의 여부보다 무엇이 중요하냐면, 교회의 권능을 강조하는 말이다. 교회가 성찬을 집행하면 집행하는 그 성찬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찬을 유효하게 만드는 것은 개인의 믿음이 아니고 교회의 권위라는 것이다. 교회가 시혜(은혜를 베품)하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에서 과연 확신은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죄를 지으면 고해성사해야 되고 성찬을 통해 회복하기는 하지만 사람에게는 중생한 이후에도 죄의 본성이 남아 있다. 그래서 죄가 끊임없이 활동한다.
 
그래서 문제는 이러한 고해성사를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는 한계가 하나 있고, 두 번째는 저런 시스템에서 용서는 어떤 것이냐면, 용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선행에 상응하는 조건적 은혜이다. 용서란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선행이 있어야 한다. 그 선행이 무엇이냐면 기도, 참회, 고행, 헌신 등을 통해서 용서를 받을 만한 선행을 먼저 해야 한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기도문에 잘 나온다. 로마 카톨릭의 기도문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참회에 합당한 열매로서 나의 죄에 대한 만족을 이룰 수 있는 은혜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기도문을 이렇게 시작한다. 고해성사의 합당한 열매로 인해서, 고해성사의 합당한 열매가 무엇인가? 그것이 뭐냐 하면 고통을 겪는다든지, 십자가를 진다든지 혹은 어떤 징벌을 받는다든지 이런 것을 통해서, 그런 것들을 뭐라고 하냐면 고해성사의 합당한 열매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 열매를 통해서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죄에 대한 보상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변상을 해야 하는 고해성사의 합당한 열매로 내 지은 죄값을 충분히 치룰 수 있도록 은혜를 달라. 그런데 이 은혜는 어떤 은혜인가? 그것은 고해성사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돕는 은혜이다.
 
그리고 뭐라고 하냐면 “나는 기꺼이 하나님의 눈으로부터 그것이 고통이든, 십자가든, 환난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사오니 그것을 통하여 내 남은 날을 지나게 하여 주옵소서. 철저하게 죄값을 치룰 각오를 해야 한다. 용서 받으려면. 그것이 사는 것이든 죽는 것이든 나의 죄책에 대한 형벌로서 기꺼이 받아들인 준비가 되었나이다. 간절히 구하옵나니.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통에 내가 연합하게 하사 그것에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수난에, 십자가에 합한다는 것은 죄값을 치루기 위한 고통을 감내하는 기꺼이 감내하는 일체의 과정을 그와 같이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무엇이 주어지느냐, 마침내 용서가 선포되는 것이다. 이 때 용서는 전적 은혜가 아니다. 개신교에서 말하는 전적 은혜가 아니다. 이 은혜는 한마디로 하면 그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선행에 상응하는 조건적 은혜이다. 좋은 예로 미션이란 영화가 있다. 완전히 카톨릭적인 관점이 반영된 영화이다. 형과 동생이 여자 하나를 두고 형이 동생을 죽인다.
 
그리고는 양심의 고통 때문에 폐인처럼 방안에 갇혀 있는 그 남자가 신부의 권면에 따라 어느 날 자신의 등에 노예생활을 하다가 썼던 갑옷이며 투구를 그물에 싸서 벼랑 위를 기어 올라간다. 그것이 바로 고해성사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 그것을 지나고 마침내 용서가 선포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기준에 합할 때 마침내 용서는 선포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용서는 누구에게 달려 있느냐면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정말 나의 죄값을 지불하고자 했던 일체의 과정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에 도달했는지는 모른다. 그것을 모르겠는 것이다. 아까 말했듯이 중세 시대에 로마교회가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고해성사 때문이다. 고해성사의 과정이 단순하게 내가 이런저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면 신부가 건너편 방에서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하노라, 그러면 죄를 다 용서받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거기에 합당한 선행을 하도록 요구되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에 도달하는지는 다른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절벽을 올라가면서 빙벽 타는 마음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동기는 여러 가지 일 수 있다. 겉으로 볼 때에 처절하게 용서를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절벽을 기어 올라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마음 중심에는 그 죄를 뉘우치는, 그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정말 절절하게 있는지, 아니면 과거에 등산하던 마음으로 스릴 있다고 생각하고,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아드레날린을 분비하기 위해서 하는 무모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까 그 동기가 어떤 것인지는 모른다. 그런데 그 동기가 하나님이 보실 때 합당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면 그 과정을 거쳤다 할지라도 온전한 용서의 선포는 유보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고해성사 시스템 안에서는 사죄의 확신(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사람이 자기의 의로는 절대로 사죄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히브리서에서도 가르친다.

여러분, 예술가들이 겪는 가장 고뇌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 도자기 굽는 가마에 가면 가마 옆에 도자기 무덤이 있다. 도자기를 망치로 그렇게 좋은 것을 깬다. 망치로 탁 옆구리를 깬다. 계속 깬다. 예술가가 겪는 가장 큰 고뇌는 자기 작품에 대한 불만이다. 그 작품에 대한 불만이, 예술의 경지에 오를수록 줄어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술적 경지에 오르면 오를수록 자신의 작품에 대한 오점이나 결점을 보는 눈은 더 날카로워지고 기대치는 더 높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가는 늘 좌절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만약 자신의 선행으로 이런 죄용서를 받고자 한다면 좌절감은 훨씬 더 커진다. 따라서 이런 시스템에서는 교회가 죄 용서를 선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최종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로마교회도 사실 그것을 인정한다. 최종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언제나 의심과 의혹 속에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성도의 마땅한 삶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지금도 로마교회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개념이 없다. 묻지도 않고 묻는 그 자체가 사탄적이고 정죄받을 짓이다. 지옥에 떨어질 짓이다.

결과적으로 중세시대에는 확신에 대해 언급할지라도 어떤 오류없는 확신에 이른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따라서 트렌트 종교회의에서는 아까 말했듯 어떤 특별계시-하나님께서 나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해 주고 너는 천국에 들어올 자다라는 것-을 주시지 않는 한 구원의 확신을 논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고, 그와 같은 논의를 하는 것 자체가 중대한 범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마디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의 성경의 무오성, 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한 믿음, 종교개혁자들은 이 세상에서 다른 어떠한 것도 진리의 기준의 될 수 없다고 보았다. 교회도 아니고, 교회의 수단인 교황도 진리의 준거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만약 진리를 논하는 유일한 기준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계시, 성경 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니까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경에 대한 믿음 때문에, 소위 로마교회의 성직자들에 의한 중재 역할을 부정하게 되었다.
 
무슨 말이냐면 전부 다 고해성사, 성찬. 그중에서도 고해성사를 부정하게 되었다. Father가 중재자, 중보자인데 그래서 기도할 때도 고해성사하는 사람이 중재자에게 고백하면 중보자가 아버지께 그들의 죄를 사해주기를 구한다. 그래서 이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교회란 무엇이냐면 조직으로서의 교회이다. 특별히 조직의 핵심은 성직자단이다. 성직주의가 교회의 핵심이다. 결국에는 이런 성직주의를 버리게 된다. 부정하게 된다. 칼빈이나 루터, 쯔빙글리, 부처 등등의 종교개혁 1세대들은 구원의 확신을 무엇이라고 봤냐면 구원의 확신은 구원하는 믿음의 규범적인, 본질적인 요소라고 하였다. 꼭 기억해야 한다. 시험에 나온다. 이것에 대한 어떤 학자들도 이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The Saving faith(구원하는 믿음), 이것은 assurance와 같다. 한마디로 말하면 구원하는 믿음을 누군가 가지고 있다면 동시에 그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구원받는 믿음은 곧 구원의 확신이라는 확고부동한 믿음이 있었다. 그것을 가르쳤다. 여기에는 이견이 없다. 아까 칼빈주의자 안에서 많다고 하였다. 그 논쟁도 일단 여기에서 다 동의한다.
 
그러니까 루터든, 칼빈이든 종교개혁 1세대에서는 구원하는 믿음이 구원의 확신과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무슨 말이냐면 구원받는 믿음과 구원의 확신은 동시적이고, 그런 점에서 구원의 확신은 구원하는 믿음의 규범적이고 본질적인 요소라고 본 것이다. 구원받는 믿음을 갖는 순간 그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된다는 점에서 구원의 확신은 결정적이다. 그러니까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이런 것이다. 구원의 확신은 중생한 신자라면 마땅히 가져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굳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분, 개가 새끼를 낳으면 강아지가 되고 코끼리가 새끼를 낳으면 코끼리 새끼가 되고, 사람이 아기를 낳으면 사람이 된다. 그것은 결정적이다.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고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결정적이다. 마찬가지로 구원받는 믿음을 가지는 순간에 구원의 확신은 자동적으로, 동시적으로 주어진다는 의미에서 결정적이라고 보았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 입장하고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런 입장을 가지게 된 신학적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종교개혁자들이 가졌던 믿음에 대한 이해가 달랐기 때문이다. 이 믿음에 대한 이해, 루터나 칼빈이 가졌던 믿음에 대한 이해와 교리가 로마 카톨릭 교회하고는 달랐다. 더 나아가서는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지에 대한 이해가 달랐다. 그런 종교개혁자들의 칭의의 이해를 우리는 이신칭의라고 말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움. 잘 보시라. 이신칭의라는 것은 사실, 믿음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달라졌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나라 말로 이신칭의가 justificatio by Faith. 이때 믿음은 수단의 원리. 그러니까 칭의는 일차적으로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하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의를 우리가 받아야 한다. 무죄의 상태에서 의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 칭의이다. 그런 죄용서, 의로움의 상태에까지 나아가는 일체의 모든 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느냐?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때 이 믿음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종교개혁자들은 그들이 가르치고 있는 그들의 이해가 로마 카톨릭과는 확연히 달랐다. 믿음을 무엇으로 보았느냐?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고, 고해성사하는 것 필요 없는 것이다. 성찬 필요 없고, 의롭게 되는 일의 수단으로서 성찬이나 고해성사를 말하지 않았다. 왜냐, 성경에 보아도 고해성사나 성찬이 사람으로 하여금 의롭게 한다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할례도 아니고, 선행도 아니고 그 어느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유일한, 그래서 by faith only, ‘오직’이라는 말을 붙이기를 좋아했다. 그러니까 오직 믿음으로 이렇게 말할 때 액센트는 어디 있느냐, 사실은 그들의 의식 속에는 무엇이 있냐면 로마 카톨릭의 고해성사도 아니고, 공로주의도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 이 말이 only 안에 있다. 그러니까 그것을 다 배제하는 말이다. 굉장히 부정적은 접근이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 구원받는 믿음으로 사람이 의롭게 된다고 말할 때, 믿음에 대한 정의와 교리는 로마 카톨릭 그것과는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고, 동시에 믿음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전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가 있는 것이다.
 
그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종교개혁자들이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고해성사에 근거한 죄용서를 가르친 로마 카톨릭 교회하고는 근본적으로 다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문제가 나중에 교회론으로까지 번진다. 그러니까 칭의를 다룰 때 로마 카톨릭은 제일 먼저 무엇을 다루고 싶었느냐? 교회가 무엇인지 다루고 싶었다. 교회가 무엇인지 다루고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지를 다루고자 하였다. 순서가 다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지를 먼저 다루고 교회가 무엇인지 다루고자 하였다.
 
그러니까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이다. 사실 교회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종교개혁자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그 사람들이 교회이다. 그러니까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 지를 먼저 대답하여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 반대였다. 교회가 규범적인 것이고, 칭의론은 그에 따른 결과로 보았다. 어쨌든 이런 이신칭의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믿음에 대한 새로운 성경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히 로마 카톨릭 교회하고는 극한의 논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자, 이렇게 초기의 종교개혁자들, 특별히 칼빈은 구원의 확신을 어디에 기초했느냐면, 그리스도 위에, 그리스도 공로 위에 놓았다. 이 믿음은 누구를 향한 믿음이냐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성경에서 믿음은 어떤 서술적 형용사가 붙지 않은 개인 신념으로서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사람과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성경적 용어가 믿음이다. 어쨌든 믿음의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것을 성경은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라고 말한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결국 그리스도의 은혜 위에다가 무엇을 두었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므로 구원의 확신을 그리스도 위에 두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고 세례받고, 교회의 일원이 되면 누구든지 구원의 확신은 마땅히 가진다고 보았다. 가지려고 노력할 것도 없고 가진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구원의 확신은 개인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주관적인 체험이 아니고 믿을 때 주어지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하였다. “아! 나는 이제 구원 받았구나 하나님의 자녀이다. 천국의 영광이 내 것이다. 나는 이제 이리 가나 저리 가나 하나님 나라 간다. 아무리 고난당해도 마침내 하나님 영광의 나라에 이른다.” 그런 확신이 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 후 시대, 탈 종교개혁시대에 접어들면서-그러니까 종교개혁 1세대가 세상을 떠나고 종교개혁 후 시대에 접어들면서 구원의 확신은 믿음과 결부되어 있는 구원의 확신이 무엇과 같이 논의되기 시작하냐면, 중요하다, 논쟁점의 핵심이다. 후기에 접어들면서 이 구원의 확신이 성화와 관련되어 논의되기 시작한다. 무슨 말이냐면 순종, 헌신, 도덕적인 개선은 점진적 성화. 성화에는 확정적 성화가 있고 점진적 성화가 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게 될 때 그들은 이미 거룩하게 된다. 확정적이다. 그러나 확정적 성화 이후에 점진적인, 윤리적인 변화, 개선으로서 점진적 성화가 있다. 그러니까 점진적 성화와 함께 구원의 확신을 같이 다루기 시작하였다. 후대에 들어서.

그것이 무슨 변화냐고 말할 사람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큰 변화이다. 칼빈은 믿음과 확신이 동시적이라고 가르쳤다. 나중에 가면 성화하고 확신 이렇게 되면서 성화하고 확신을 다루어지면 무드는 확실히 달라진다. 아까는 결정적으로 주어진다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실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몸부림쳐야 한다. 잠자고 놀고, 기도 안하면 구원의 확신은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또 이 상태에서는 구원의 확신을 확고부동하게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왔다 갔다고 할 수 있다고 잔 오웬이 나중에 주장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구원의 확신도 그 사람의 성화의 정도에 따라 그 수준과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가 성화와 확신 쪽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산기도 가야겠구나, 잘먹고 편안했더니 이렇게 되었구나, 나를 스스로 채찍질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교회 안에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주식시세만 보고 집 값 올라갔는지 본다. 슬픈 일이다. 한국교회에 여기에 고민이 없다. 과거에는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 성화가 있느냐고 고민했는데 한국교회가 잠든 지 오래 되어서 그런 것으로 고민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자신의 점진적 성화를 위해서 구원의 확신을 위해서, 죄를 끊어 버리기 위해서 기도원에 올라오는지 살펴보면 놀랄 것이다. 하나같이 기도제목이 실용적이다. 굉장히 실천적인 동기가 기도의 동기라고 말한다. 이것은 신앙의 순도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영적인 관심사보다 현세적인 관심사가 너무 지배적이라고 말해도 절대로 틀리지 않는다. 어쨌든 성화가 확신과 결부되면서 매우 실천적인 내용이 확신과 함께 논의되기 시작한다. 어떻게 하면 확신을 찾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확신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릴 수 있겠는지, 어떻게 하면 잃었던 확신을 다시 회복하게 되는지, 우리는 매우 목회적이고 실천적인 장르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다루게 되었다. 종교개혁 후 시대에는.

따라서 후대에 가면 구원의 확신은 구원하는 믿음의 불가피한 요소로 인식되기보다는 신자 각자의 성숙에 따른 개별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이해하는가? 이렇게 변화되었다.

자! 이런 변화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안에서도 그대로 감지된다. 1647년에 작성된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보면 두 가지를 확실히 나누고 있다. 거기에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하나 있다. 믿음 다루고, 믿음 다룰 때 확신을 같이 안 다루고 확신을 따로 다룬다. 분리했다. 후대의 발전적 경향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초기 칼빈의 사상보다는 칼빈의 후예들의 사상과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일체성을 강조했다. 믿음과 확신의 일체성을 강조했는데 후대에는 개별적인 것으로 따로 다룬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겠는가? 1647년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소위 말하면 칼빈의 원래적 사상보다는 후대의 발전된 칼빈주의자들의 사상을 더 많이 받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실제로 신앙고백서를 보면 믿음과 구원의 확신을 분리해서 서로 다른 장을 각각 할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을 비연속적인 관계 안에서 다룬다. 둘이 마치 아무 관계없는 것처럼 따로 다른 장에서 다루고 있다. 이렇게 됨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다룰 때 성화를 토대로 다루는 것이 칼빈 신학에서 허용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칼빈 신학에 없던 것을 후대가 새롭게 고안한 것인지? 문제가 되고 있다.
 
만약 칼빈이 살아있다면 이런 식의 구원의 확신에 대한 접근을 두고 동의하겠는지? 반대할 것인지? 그것을 두고 칼빈주의자들 안에서 양분되어 다투고 있다. 그래서 이런 발전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긍정적으로 보는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냐면 벨카우어, 칼 바르트 이런 사람들은 그런 발전을 칼빈 신학에서 암시되고 있던 것을 자연스럽게 계승해 낸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후대의 변화에 대해서 칼빈의 신학을 제대로 계승했다고 보는 사상을 가장 최초로 표명했던 사람이 하나 있다. 가장 먼저 들고 나온 사람이 윌리엄 커닝햄이다. 로버트 댐리, 찰스 하지. 우리가 알고 있는 정통 칼빈주의 신학자들은 하나같이 후대의 발전은 칼빈의 사상의 계승이라고 본다. 그런데 그것을 칼빈의 신학사상의 계승이라기보다는 칼빈의 신학사상으로부터의 이탈이다. 그것은 칼빈이 승인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신학적인 개조라고 보는 사람이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로버트 켄달(R. Kendall), 윌리엄 리즐이다. 그래서 지금도 칼빈주의 안에서 지금도 논쟁중이다. 최근에는 누가 다수냐. 이게 다수다. 후대 칼빈주의자들의 개별적인 분리 믿음과 구원의 확신을 쉽게 말하자면 믿는다고 꼭 구원의 확신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그런 입장이 칼빈이 가르쳤던 사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칼빈주의의 발전이라는 것은 결국 칼빈주의의 사상의 이탈이라고 보는 입장이 일반적인 학계의 주류이다. 이것이 구원의 확신에 관해서 학문적 경향이 어디로 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을 발전이라 보지 않고 개조라고 보는 사람들이 주류이다. 결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칼빈의 사상과 달라진 것으로 본다. 그런 사람들이 학계를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이 논쟁 안에 뛰어 들면, 만약에 이런 논쟁 안에 뛰어들게 되면 구원의 확신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원래 논쟁을 통하면 사상이 분명해진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의 성경적인 이해를 제시할 생각이다. 일단 이런 큰 그림을 이해하고 수업에 들어오도록 그렇게 하시길 바란다.

자! 그렇다면 이런 논쟁이 왜 벌어졌는가? 근데 이런 논쟁이 벌어지게 된 사실, 어떤 단초는 칼빈신학 안에 내재되어있다. 가만 보면, 칼빈신학이 그만한 여지를, 이런 식의 논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도록 어느 정도 여지를 준 면이 없지 않아 있다. 칼빈신학을 보면, 왜냐하면 칼빈은 두 가지 사실을 다 가르쳤기 때문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믿음의 수동성을 가르쳤다. 믿음은 주어지는 것이다. 그 주어지는 믿음 안에 구원의 확신도 같이 필연적으로 주어진다고 가르쳤다. 그렇게 끝나면 좋은데 칼빈은 동시에 무엇을 가르쳤느냐? 어떤 사실로부터 정당하게 유추된 지식으로서의 믿음의 능동성도 가르쳤다. 어떤 사실로부터 즉 어떤 A라는 사실로부터, 어떤 사실 하나를 유추, 지극히 정당한 지식의 유추라고 한다면 유추된 지식도 믿음의 내용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해하는가? 이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

이방 여인이 자신 아들이 병 낫기를 위해서 기도할 때 뭐라고 했는가? 구할 때 내가 이방인을 위해 보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보냄을 받았다라고 할 때 그 여자가 뭐라고 했는가?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얻어먹지 않습니까? 그러니 은혜의 부스러기라도 내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그 여자의 믿음을 보시고 은혜를 베풀었다. 그것이 사실이란 말이다. 근데 그 사실로부터 정당한 유추를 가능하게 한다. 누구든지 나가서 주님께 구하면 주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예도 있다. 상에 들림 받아 가지고 내려온 중풍병자가 나음 받았다. 그런데 그때 낫게 하실 때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낫게 하신 것이 아니고, 침상을 지붕을 뜯어서까지 내렸던 네 명의 친구들의 믿음을 보고 침상에 누워있는 중풍병자를 고쳐 주신 것을 잘 안다. 우린 이 사실을 놓고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가?
 
비록 어떤 이유든 그가 그리스도를 의식적으로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있을 때 그의 친구나 그의 부모나 형제의 믿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면 성경적인 하나의 근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완전히 교리로 굳히기는 어렵다고 할지라도. 꼭 주의하셔야 된다. 교리화하는 것과 정당한 유추는 다른 것이다. 예를 들면 그 침상에서 내려온 중풍병자의 나음을 근거로 해서 본인이 믿지 않아도 부모나 형제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곤란하다. 그것을 교리화하는 것은 안 된다. 그러나 정당한 유추는 가능하다.
 
예를 들면 불가피한 상황 즉 어린아이, 자녀들, 아직 자녀들은 스스로 믿거나 결단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 그럴 때 부모님 믿음에 의탁하고 유아세례를 주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하게 하는 이것은 성경적 근거가 있고 지지받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믿을 수 있는데도 믿지 않고 다른 사람의 믿음에 의탁해 구원 받는 것조차도 거기 다 포함시켜 교리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어쨌든 이런 어떤 하나의 사실로부터 정당한 유추를 함으로써 그 유추를 지식의 내용물로 가지데 되는 것. 그것도 믿음이라고 칼빈이 말함으로써 믿음의 능동성을 이야기 하였다.

좀 더 쉽게 실천적 삼단논법을 보면,
1. 어떤 사람이 X를 행함으로써 구원을 받는다.
2. 하나님의 은혜로 X를 행하였다.
3. 그러므로 나는 구원에 이른다.

이것이 실천적인 삼단논법이다. 이런 식의 접근을 칼빈이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신학 안에 이런 요소가 있다. 단순하게 예를 들면 위의 첫 번째 요소만 믿고 끝내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 그것으로부터 유추된 어떤 사실들을 믿음의 내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식의, 소위 말하면 믿음의 능동성, 단순하게 믿음을 지식으로 생각하고, 칼빈이 제일 먼저 강조했던 믿음의 요소가 무엇인가하면 지식이었다.
 
그 지식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내가 받음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받는다고 수동성도 강조했고, 동시에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함으로써 그 순종을 통해 내가 성화되어가고 성화를 통해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고 가르친 적도 있다. 그런데 그 행함이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함으로써 일종의 신인협동설을 닮은 듯이 보이지만 아직 믿음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측면도 있었다.

칼빈의 신학 안에, 그러니까 후대의 칼빈주의자들이 바로 이런 믿음의 능동성을 더욱 더 체계화하고 그것을 광범위하게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찰스 하지 같은 긍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켄달 같은 사람들은 이런 식의 발전은 칼빈이 모르는 것이었다고 보는 것, 한마디로 말한다면 칼빈은 믿음의 능동성은 가르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믿음과 확신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할 때 구약에서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진술들을 보면 지금 우리가 규명하려고 하는 믿음과 확신 사이의 관계를 구약에 있는 내용만 가지고는 제대로 충분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명확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예를 들면 그의 믿음이 여호와와 그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수반하는 것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믿음을 가지고 가나안 땅을 향해 출발할 때 그의 믿음 안에 확신이 있었냐고 물으면 확신이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니까 성경이 구체적으로 명시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 안에 확신이 있다고 가르쳐 주는 것은 아닌데 그의 믿음을 보면 확신이 있었다고 추정할만한 충분한 근거는 있다.

또 구약성경의 시편을 보면 시편의 저자들이 비록 불안이나 회의를 품고 있기는 해도 아브라함과 유사한 어떤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피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침내 내가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라는 확신은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시편 22편, 40편, 130편을 보라. 거기에 보면 처음에 굉장히 불안해한다.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언제까지 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이렇게 회의로 시작한다. 시편의 1/3이 회의이다. 낙심, 좌절, 이런 슬픔이다. 그러나 언제나 공통점은 끝날 때는 언제나 확신으로 끝낸다. 나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찬양하리이다. 이런 확신들이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만해도 다르다. 신약성경에는 좀 더 명시적으로 딱 말한다. ‘믿음이 곧 확신이다’라고 말한다. 대표적인 성경구절이 히 11:1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니” 이것이 본문이 의도한 신학적인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왜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이것이 무슨 말인가? 사실 실상이라는 말이 문자적인 번역이긴 한데 그것이 정확하게 정곡을 못 찌르는 것이다. ?π?στασι?(휘포스타시스), ‘실상’이란 원래에 영어성경에 보면 ‘Now faith is the assurance of things hoped for...’, ‘실상’이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했냐면 영어<NASV>는 ‘assurance’라고 이렇게 번역했다. ‘믿음은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에 대한 확신이다’라고 했는데 왜 ‘실상이다’라는 말이 왜 나왔느냐 하면 이 ‘assurance’의 헬라어가 ‘?π?στασι?’, ‘?π?’는 ‘under', ‘아래’라는 말이고 'στασι?'는 'to stand' '서다'라는 말이다. '무엇 무엇 아래 서다'라는 말이다.

이 ‘?π?στασι?’의 일반적인 고대 헬라어에서의 용법이 무엇인가 하면 ‘권리증서’, ‘보증서’ 혹은 ‘매매계약서’이다. 어쨌든 일단 겉으로 봐도 분명히 신약성경이 가르치고 있다. ‘믿음은 확신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니”라고 하는데 이 ‘증거’가 영어 성경에는 무엇이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the conviction of things not seen’, ‘the conviction’ ‘확신’, ‘of things not seen’,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확신이다’라고 한다. 어째든 확정성을 말한다. 그러니까 두 번씩이나 반복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확신이고 그건 확정이다. 그럼, 믿음이 무엇이냐? 확신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칼빈은 믿음을 구원의 확신이라고 본 것은 이 성경이 가리키고 있는 믿음의 속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고 성경적인 가르침을 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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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싸움 규칙 

 

    아내와 나는 어렵던 시절 숱한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면서도 부부 

 의 인연을 맺을 만큼 각별한 사이였지만,우리도 결혼해서 6개월 동안

 정말 치열하게 싸웠다. 거의 핵폭탄 수준이었다. 마치 싸우기 위해 결

 혼한 것 같았다. 결혼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그러다

 가 서로 쓸데없는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절이 반성하게 되었다. 그후 35년은 싸우지 않고 지낸다.              

 

    부부는 서로 다른 생각과 환경 속에서 성장해서 같은 생활공간에서

  함께 살아간다. 똑같은 사람이 아닌데 갈등이 없을 수 없다. 그러기에

 다투는 것을 겁낼 필요는 없다. 상처가 두려워 부딪치지 않으려 애쓰

는 부부가 있는데, 그러면 안으로 쌓이고 쌓여 더 크게 폭발할 수 있

 다. 오히려 현명하게 부딪치고 그 갈등을 해결해 가는 과정이 서로를

이해하는 큰 자산이 될 수 있다.                                                

 

   부부치료의 세계적 권위자인  존 가트맨 박사도 싸우지 않으려는

부부가 더 위험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서로의 문제를 회피

  하고 미루다가 더 깊은 감정의 골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잉꼬부부'라고 하는 부부들이라고 해서 조금도 갈등이 없고 싸

우지 않는 것이 아니다.                                                           

물론 아무리 치열하게 싸워도 꼭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첫째, 막말은 하지 말자, 가령 '이혼하자'같은 말이다. 

둘째, 집안에서 끝내자.                                         

셋째, 따로 자지 말자.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독일 작센 공의 차남인 알버트 공과 결혼

했다. 이들 부부는 금술이 좋기로 유명했는데,처음부터 부부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신혼초에 부부싸움을 했는데,알버트 공이 크게 화가 나서 방문을

잠그고 들어가 버렸다.한참 뒤에 빅토리아 여왕이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요?"                                                                      

"여왕입니다."                                                               

      알버트 공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여왕은 다시문을 두드렸다.

"누구요?"                                                                    

"여왕입니다."                                                               

   이번에도 알버트 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빅토리아 여왕이 다시 문을 두드렸다.                              

"누구요?"                                                                    

"당신의 아내입니다."                                                     

 

그제야 알버트 공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문을 열었다.         

    부부는 갈등이 생겼을 때도 지위나 체면, 자존심 따위의 외적인

 포장을 벗어던지고 만나야 한다. 오로지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남편

 과 아내로 만날 때, 불필요한 오해 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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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면 사람이 달라져야 합니다.

'사랑의 사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오히려 사람을 더 미워하고, 더 속 좁아지고,

더 이기적이 되면, 그 사랑은 잘못된 것입니다.

 

한 사람과의 사랑이 나를 '좀더 나은' 사람으로 진화시켜,

만인(萬人)을 사랑할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이 사랑을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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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은 옳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틀렸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이 
    틀렸다는명백한 증거다
                      -톨스토이

    하나님은 몇 사람에게만 깨닫게 하시지 않는다 특히 자기만 특별하게 깨달은 성경의 신비라고 말하면 거의 이단이다
    올바른 신학은 오랫동안 성령의 조명과 지성적 검증된 것이어야 한다. 역사적 정통신학을 무시하지 말라 특히 자신의 체험을 절대화시키면 그때부터 잘못되기 쉽다
    진짜 보이고 들리더라도 확신하면 안된다 주님께서 성경 안에서 말씀 안에서만 계시하시는 이유는 인간의 연약함 때문이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은혜의 단비"중에서

     

     

     

    ♬ 흐르는곡 /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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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70은 종심(從心)이라 부른다

 

나이를 말할 때 공자의 논어 위정(爲政) 4장을 보면,
15세는 학문에 뜻을 둔다 하여 지학(志學)
20세는 비교적 젊은 나이라 하여 약관(弱冠)
30세는 뜻을 세우는 나이라 하여 이립(而立)
40세는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고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라 하여 불혹(不惑)
50세는 하늘의 뜻을 안다 하여 지천명(知天命),
60세는 천지만물의 이치에 통달하고 듣는대로 모두 이해한다 하여 이순(耳順)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70은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70은 흔히 고희(古稀)라고 부르는데 이는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곡강시(曲江詩)에서 유래된 말이다.
 
조정에서 돌아와 하루하루 춘의를 잡혀 [朝回日日典春衣],매일 강두에서 취하여 돌아오네[每日江頭盡醉歸].술빚이야 가는 곳마다 흔히 있지만[酒債尋常行處有], 인생 칠십은 고래로 드물도다[人生七十古來稀]. 그러나 논어에서는70은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 하여 종심소욕불유구 (從心所慾不踰矩)라고 한다. 이를 줄여 나이 70은 종심(從心)이라고 부른다.
 
공자가 천하를 주유할 때 채나라 국경을 지나다 뽕을 따는 두 여인을 보았는데, 동쪽에서 뽕 따는 여인은 얼굴이 구슬처럼 예뻤고, 서쪽에서 뽕 따는 여인은 곰보처럼 얽었다.
 
공자가 농을 하기를 "동지박 서지박(東枝璞 西枝縛)"이로고. 즉 동쪽 가지는 구슬박이고 서쪽 가지는 얽을 박이라. 그런데
서쪽 여인이 공자를 힐끗 보더니 이렇게 대꾸한다. "건순노치 칠일절양지상 이백어면 천하명문지상" (乾脣露齒 七日絶糧之相 耳白於面 天下名文之相) “입술이 바짝 마르고 이빨이 톡 튀어나온 게 7일간 굶은 상인데, 귀가 얼굴색보다 흰걸 보니 문장만은 천하에 알려질 만 하겠군.“ 공자의 인물 면면을 자세히도 몽타주한 최초 인물일지도 모르겠는데, 무안을 당한 공자가 서둘러 길을 떠나는데 '乾脣露齒 七日絶糧之相' 때문에 채나라 국경에서 포졸에게 잡힌다.
 
천하의 석학 공자를 몰라보는 포졸이 묘한 숙제를 던지는데... 당신이 노나라 성현 공자라면 보통사람과
다른 비범함이 있을터,,, 구멍이 9개 뚤린 구슬들을 명주실로 한번에 꿰어보라고 한다.
 
공자가 명주실을 잡고 구슬을 꿰는데 연나흘을 끙끙댔지만 실패의 연속이라, 할수없이 자신을 '건순노치 칠일절양지상'이라 했던 여인에게 제자를 보낸다. 제자가 가보니 여인은 간데없고 짚신만이 거꾸로 뽕나무에 걸려있었던 바, 소식을 접한 공자가 무릎을 탁치며 제자에게 이르되 "계혜촌(繫鞋)을 찾아가 보아라"라고 한다.

 

제자가 우여곡절 끝에 계혜촌에서 그 여인을 찾아 구슬꿰는 가르침을 청하자 여인은 말없이 양피지에 글자를 적어준다. '밀의사(蜜蟻絲)'. 글귀를 받은 공자가 탄복하며 꿀과 실과 개미 한 마리를 잡아오게 하여, 개미 뒷다리에 명주실을 묶어 놓고 구슬구멍에 꿀을 발라 뒀더니  하룻밤 새 개미가 구슬을 다 꿰어 놓았는지라 그날은 공자가 밥 한 끼 못 먹고 굶은 지 바로 칠일째 되는 날이었더라.
 
옥문을 나서는 공자가 혼자 말을 중얼거린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인 것을...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참 지식에 통달되도다. 자신의 오만방자함과 어리석음을 깊이 뉘우친 孔子(공자)는 또 다른 의문을 가진다. 왜? 구멍이 다섯도 일곱도 아닌,  아홉 개 뚤린 구슬을 나에게 주었을까?
 
공자는 70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이치를 깨달았다는데, 인생이란 아홉개의 구멍을 가지고 태어나서 두 눈으로 바로보고, 두 귀로 바로 듣고, 두 코로 향내를 감지하고, 입으로는 정갈하게 먹고 진실되게 말하며, 두 구멍으로는 배설하는데 막힘이 없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이 무리 없이 삶을 이어가는 기본이요,  하늘의 도리(道理)가 아닐까 하는, 즉, 나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이 천하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깨달음이었다.
 
나이 70에 그 이치를 비로소 통달하니, 이후 공자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을 해도 규범(規範)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하여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라는 것이다.
 
Tip;
이러한 나이별 별칭은 유교권인 한국.중국.일본에만 있다. 미국.유럽 등에는 없다. 단지 4세미만은 배이비(Baby) , 그 이상은 보이(Boy)이고, 15세이상이면(High Teen), 18세이상이면 성인으로 대접하므로(Youth) 또는(Guy)라 한다. 60세가 넘으면 Senior Citizen이라고 부른데 우리나라에서 65세가 되면 경로우대하듯 여러 면에서 우대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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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 오류에 대한 것과 당부

김정한

기성교단과 교회에서 받아들일수 없는 신학적인 논란을 가져오는 글은 바로 조치합니다.
만약 글쓰기를 계속하려면 실명확인을 받아야 합니다

이글은 필자가 한국교회 목사들과 성도와 신천지 인들을 향해 쓴 것입니다.

 

한국교회 성도 여러분,

신천지 이만희 씨의 미혹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만희는 너무나 명백한 미혹자입니다. 이만희는 계시록 해석을 정말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천지인 여러분,

여러분들을 이단 사이비로 부르는 것은 이만희가 계시록 해석을 자신에 맞추어 해석함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반복된 비유풀이를 통해 점차 미혹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무슨 근거로 필자가 신천지 집단을 이단사이비 집단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그의 계시록해석을 들어보면 명백하게 들어납니다. 계시록해석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해석자의 신학적 배경에서 나왔기 때문에 해석자의 신학이 이단과 사이비가 아닌 경우 계시록해석 차이를 견해의 차이점으로 보고 이단사이비란 말로 정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천지 이만희의 계시록 해석은 해석상의 상이가 아니라 계시록 해석을 자신의 해석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유일한 목자’요, ‘유일한 이긴 자’로 거짓주장을 하기 때문에 미혹자요, 거짓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천지 강사들의 강론이나 이만희의 강론을 들어 본들과 혹시 들어 볼 분들은 그들이 어떻게 계시록을 해석하는지를 주목하여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대부분 이단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의 강론은 처음 도입부에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에 말하면서 서서히 말세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異端(이단) 끝이 다르다고 해서 이단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구약 - 신약 - 말세계시, 이 구조로 모든 것을 말하면서 구약의 예언이 신약에 성취되고 신약의 말씀이 말세에 계시된 말씀들이 實狀(실상)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지금 나타나고 있지 않느냐고 하면서 계시록 사건을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계시록 사건을 이만희에 맞추어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7교회들에게 성령이 하시는 말씀서 ‘이기는 자’는 이런 이런 것들을 모든 교회 성도들 복수에게 주겠다는 말씀이 분명한 것인 대도 이만희집단은 ‘이기는 자’ 오직 한 사람으로 단수로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또 한 가지는 이기는 자에게 라는 미래형의 말씀을 이미 ‘이긴 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만희가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환란의 때’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자기를 ‘이긴 자’로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고급반에서 장막성전에서 일어난 사건- 유x구 등 7사람과 얽힌 주도권 싸움에서 이긴 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이만희의 거짓된 허구에 대해 이탈자가 생길까 그걸 쉬쉬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해하지 못할 것은 자기가 말세의 나타날 진리를 가진 목자라고 하면서 12지파를 모세가, 12제자를 예수님이 진리를 주듯, 이만희는 말세에 자기 말을 듣는 자들이 시온성 14만 사천이 된다고 하면서 전 세계 수십억 기독교인은 안중에 두지 않고. 한국 땅 남한의 지역을 12지파로 자기 맘대로 나누고, 12지파 장을 임명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는 비싼 돈 들여 여러 나라에 다니며 신천지교회가 해외로 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을 자랑삼아 선전놀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니면서 해외에 추종자들이 생기면 그들을 어떤 지파라고 나눌 지? 그 때 어떤 말을 할까 궁금합니다.

 

신천지 교우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제발 이만희에 거짓 미혹에서 벗어나십시오. 여러분이 다녔던 교회가 혹은 그 교회 목사님이 말세 때의 진리를 전하지 않고, 흠결이 많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만희 말은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경계하라고 했던 미혹자요, 거짓된 자입니다.

여러분의 강사에게 “7교회 사자들이 누구며, 누구를 이겼느냐?” 고 물어보십시오. 그렇게 실상, 실상 그러면서 이만희가 ’이긴 자‘라고 했으니 이만희가 ’언제 어디서……. 누구를? 이겼냐고 6하 원칙으로 알려달라고 그래보십시오. 제발 미혹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 목사님들이여,

제발 진리의 말씀에 목말라 하는 성도들을 위하여 때에 따른 말씀을 전하십시오. 교회성장 지상주의와 미국제 번영복음 그것이 한국교회를 이렇게 만든 주범 아닙니까? 언제까지 어린아이 신자만 양산하시렵니까? 그래서 저들 미혹 자들에게 미혹되도록 하시렵니까? 우리 목사들이 언제까지 주님대신 세상을 사랑하려고 하십니까? 엎드려 기도합니다. 제발, 머리를 들고 성도들을 깨우며 성도들을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도록 하십시다.





성령의 은사를 나타내는 단어들
 

 

성경에서 성령의 은사는 고린도전서, 로마서, 에베소서에서 많이 다루고 있고, 신약성경 상에는 100여 군데 기록되었다. 각개의 성령의 은사를 설명하기 전에 그 뜻(정의)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에서 은사에 대하여 사용되어진 말들은 다음과 같이 불렀다.



첫째, 성령의 은사는 단순히 은사(카리스마)로 표현된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 12:4)에서 은사(카리스마)는 은혜(카리스: 받을 가치 없는 자에 베푸는 호의)에서 유래 되었다. 그러므로 은사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인간에게 주시는 복이며, 재능이며, 능력이다. 인간의 공로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 그 기원을 둔 것이다. 이 은사들은 성령 충만한 사람들에 의하여 행사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적인 의미에서 보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부여된 선물인 것이다(고전 12:12∼27).


둘째, 성령의 은사는 신령한 것(프뉴마티카)이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고전 12:1)라고 은사를 신령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고 은사를 복수로서 “신령한 것들”로 구분해 놓았다. “신령한 것”은 어떤 의미로는 “은사”이지만, 때로는 그것이 은사 이상의 것으로 표현이 된다. 즉 성령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전반적인 것들을 신령한 것들이라고 쓰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구원에 있어 의화, 성화, 영화와 성령의 열매 같은 것들이 있다.



셋째, 성령의 은사는 직분(디아코니아)이다.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고전 12:4)에서 직분은 봉사라고 볼 수 있다. 교회에서 집사(deacon)라는 직분이 이 말에서 유래 되었다. 성령의 은사가 기원적인 측면에서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적용면에는 “직분”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영적인 이득과 덕을 세우도록 섬기는 능력에서 드러난다.



넷째, 성령의 은사는 사역(에너지마타)이다.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고전 14:6)에서 사역에 대한 말의 원래 의미는 “능동적인 원칙” 또는 “영향”인데 영어의 에너지(energy)도 이와 동일한 어원에서 유래 되었다. 성령에 의하여 힘을 얻어 그리스도의 몸 안에 어떤 결과를 산출해 내는 사역이다. 사역하지 않고, 섬기지 않고, 어떤 결과를 산출해 내지 못하는 은사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다섯째, 성령의 은사는 나타내심(파네로시스)이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에서 “나타나심”은 “외적인 증거”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남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 하심을 인식하게 하여,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게 한다. 따라서 은사의 활용은 은사 받은 자와는 관계없이 성령께서 전적으로 나타나신 결과인 것이며, 나타심의 순수성은 그 은사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유익을 주는가에 달려있다.



여섯째, 성령의 은사는 다양성(디아이레시스)이다. 고린도전서 12장 4∼6절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라는 단어의 바탕에 깔려있는 사상은 분배사상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두 사람을 통하여 단지 몇 가지 은사가 나타나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린도전서 12장에 나타난 9가지 은사이외에도 많은 다양한 은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교회에 유용한 기능이 많이 있는 만큼 은사도 다양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신령한 것이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성령의 나타나심과 사역 가운데 역사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과 한 성령이신 것이다.

 

출처: 창골산봉서방

구원의 확신(2)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란 반드시 복음의 진리를 먼저 아는 것이 선행돼야
 
박혜근
다음 글은 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박혜근 교수의 조직신학 과목인 <구원의 확신>에 대한 강의 내용을 녹취하여 편집하였다. <리폼드뉴스 편집부>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양자의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주의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오늘 이 시간도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여 배움의 장으로 이끌어 주시니 주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소원으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그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우리 신앙의 책임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고, 죄를 경계하며, 죄짓지 않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하시고, 죄와 싸우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알고 그것을 나의 신앙과 합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일에 훌륭히 쓰임받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이 자리에 있는 주의 종들이 한국 교회의 미래가 되게 하시고, 한국교회의 부흥을 일으키는 역군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형제들의 각 가정마다 평안을 주시고, 그들의 몸에 건강을 주시고, 그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여러 가지 고민과 좌절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더욱 주님을 의지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학문하는 주의 종들에게 함께 하시고 학자의 영을 더하시고, 지성을 조명해 주시고 그것을 능숙하게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우리들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1. 칼빈의 믿음 이해

지난주에는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개괄을 하였다. 오늘은 칼빈의 믿음에 대한 이해를 하겠다. 지난주에 확신에 대한 두 가지 흐름이 있다고 소개하였다. 첫째는 칼빈과 칼빈의 후예들, 말하자면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확신에 관한 한 통일성과 연속성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그래서 예를 들면 확신의 문제를 다룰 때 대표적인 인물, 칼빈이 믿음에 대해 가르치고 난 뒤 세상을 떠났는데 능동적이고 객관적인 측면을 강조한 그것, 예를 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보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믿음의 능동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런 믿음의 능동적인 측면에 대한 강조는 과연 어떤 것인지, 조금 있다가 소개하는데 칼빈이 믿음의 정의를 할 때 수동적이고 지적인 것으로 소개했다. 그런데 이것이 후대에 가면 칼빈주의자들이 이것을 조금 더 능동적이고 의지적인 것으로 가르치게 되는데 이런 의지적이고 능동적인 측면에서의 믿음의 이해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강조되어 있다.

그래서 이런 믿음에 대한 강조점의 차이냐, 아니면 이것이 본질적인 차이냐를 두고 신학적인 입장이 갈렸다는 것이 지난주에 설명한 핵심이다. 그래서 이것을 단지 강조점의 차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고 이런 믿음에 대한 수동적인 측면을 강조하다가 그것이 나중에 능동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으로 흘러가는 것은 결국 칼빈의 전통적인 신앙에서부터 벗어난 탈선적인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찰스 하지, 커닝햄, 로버트 댐리와 같은 사람들은 이것이 강조점이 차이라고 본다. 그런데 리젤이나 캔달 같은 사람들은 이런 차이는 실제로는 칼빈신학에서부터 이탈한, 말하자면 신학적인 변질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냐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사실 칼빈의 신학을 대변하기보다는 칼빈의 신학으로부터 이탈한 것을 드러낸다고 봐야 한다.
 
이런 흐름 본질적인 차이를 대변한다고 보는 입장이 최근 학계에 일반적인 흐름이다. 다수이다. 강조점의 차이라고 보는 것은 고전적이고 보면 된다. 자, 이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그럼 칼빈이 믿음을 어떻게 이해했는지가 관건이다. 칼빈의 믿음의 이해를 전반적으로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1.1. 믿음의 세 가지 속성

칼빈은 원칙적으로는 믿음의 본질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루터나 쯔빙글리의 신학적 입장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무슨 말이냐면 칼빈, 루터, 쯔빙글리 이 세 사람은 믿음을 정의할 때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Assensus(동의)이다. 그러니까 루터나 쯔빙글리는 믿음이 무엇이라고 하냐면 믿음의 본질은 동의라고 보는 것이다. 구원론을 배우지 않은 사람은 동의를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조금 있다가 설명할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칼빈이나 루터나 쯔빙글리는 믿음의 본질을 동의라고 받아들이다. 그런데 칼빈은 여기에 두 가지를 더 강조하였다. 무엇이냐면, Cognitio(지식, 앎)을 강조하고, 또 Fiducia(신뢰)를 더 강조하였다. 이것이 지금 칼빈이 루터나 쯔빙글리와 믿음에 대해서 어떤 점에서 입장을 같이 하고 어떤 점에서는 입장을 달리했다고 할 때 달리한 점의 핵심은 지식과 신뢰를 믿음의 본질로 간주하였다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믿음을 강조할 때 이 세 가지를 강조하였다. 지식, 동의, 신뢰를 강조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믿음을 세 가지 속성으로 강조한 것은 전적으로 칼빈주의적 전통 안에서만 발견된다. 루터주의에서는 한마디로 믿음을 동의라고 본다.

자, 여기에서 그러면 동의가 무엇이냐, 동의라고 하는 것은 구약적 의미에서는 ‘아멘’에 해당한다. 문자적으로 말하면 진심에서 우러난 찬동을 말한다. 따라서 동의란 자신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지적이고, 윤리적인 동의로서 개인적인 확신을 표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확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칼빈이 동의를 다룰 때 확신이라는 요소가 있다.

벌코프는 동의를 이렇게 설명했다. 참조할 필요가 있다. 동의를 매우 정서적인 요소라고 하였다. 지적인 요소가 아니고 정서적인 요소가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정서는 단순하게 감정적인 차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간의 직관을 포함하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단순하게 합리적인 사고에 근거한 동의라기보다는 정말 마음에 말할 수 없는 끌림을 내포하는 요소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벌코프는 동의란 진리와 자신이 믿는 대상이 자신의 삶의 필요를 채울 것이라는 것과 그것에 관한 깊은 관심과 더불어 흥미에 이끌리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서적인 요소도 설명했는데 동의는 자신의 필요를 채울 것이라는 것과 그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것에 대한 관심, 흥미에 자신이 이끌리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이렇게 이해하면 좋다. 자신의 필요를 채울 것이라고 할 때 필요는 무엇이냐, 인간의 가장 큰 필요는 구원이다.
 
구원, 죄사함, 구속이다. 욥이 고난 받을 때 가장 간절히 바란 것은 나의 구속자를 만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자기의 구원의 필요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채어질 것이라는 그것, 아 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질 것이라는 것에 대한 강력한 확신, 또 그것에 자신이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동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매우 주관적이다. 이 동의는 자신에게 구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먼저이다.
 
내가 정말 구원이 필요하구나, 나에게는 양심의 무거운 짐을 벗어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그런 구원에 대한 필요를 먼저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때, 그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을 채울 것이라는 개인적인 확신을 가지고 거기에 끌려 들어가는 것,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동의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의는 객관적인 진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관적인 반응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약을 보약이라고 소개받아도 약에 대한 개인적인 확신과 효능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약을 손에 쥐고 있어도 이 약을 먹어서 효과를 볼 것이라는 개인적인 확신이 없으면 그 약은 별로 유발하지 못한다. 그런데 동의는 어떤 것이냐면, 그 약의 효능에 대한 의문을 품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그 약이 내가 당면하고 있는 건강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확신하고 그 약을 내 손에 넣고자 하는 강력한 동인이 발생해야 한다. 그 약에 대한 객관적인 인증서보다 인증서와는 매우 다른 주관적인 문제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주관적인 이끌림, 주관적인 확신의 상태, 그런 것을 동의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러니까 루터나 쯔빙글리는 믿음을 이해할 때 이런 동의라는 측면에서 이해하였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가 된다는 사실을 그 마음으로 주관적인 실존적인 상황 안에서 수용하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믿음이란 단순하게 그런 동의만이 아니라 지식과 신뢰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동의에 대해서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서 21문을 참조하라. 잘 설명하고 있다. “믿음이란 성령이 내 마음 속에서 믿음으로 역사하신 까닭에 주어진 죄 용서, 영원한 의로움 그리고 구원이 그리스도 공로 덕택에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거저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깊은 확신”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동의를 말할 때 언제나 나의 필요와 마땅한 관계가 있다.
 
내게 주어질 것이라는 개인적인 확신,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있는데, 거기에도 무엇이라고 하냐면 개인적인 필요를 전제하고 있는 속성을 설명한다. 그런 점에서 동의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된다. 칼빈은 믿음을 설명하면서 믿음의 속성을 세분화하였고 세분화하면서도 강조점을 달리 하였다. 그렇게 된 것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다. 칼빈신학에서는 매우 연속적인 성격에 따른 결과이다.

그 다음에 지식과 신뢰를 말하였는데, 우리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것이 바로 지식이다. 지식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다. 신뢰는 무엇이냐, 신뢰는 지식과는 조금 다르게 자신이 지금까지 의지하고 있었던 모든 것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자기 확신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뢰는 제임스 보이스 같은 경우에 무엇이라고 설명했냐면, 이것을 제자도와 관련지었다. 일반적으로 신뢰는 어떤 개념이냐면, 향유이다. 실제 누리는 것을 말한다. 그 은택을 실제로 누리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구원론 설명할 때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게 비유니까 비유의 한계가 있다. 그대로 될 수는 없다. 이렇게 보면 된다. 의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다리가 몹시 아픈데 의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그래야 의자가 있는 곳으로 갈 것이다. 이것이 지식이다.
 
그 다음에 그 의자가 내가 앉았을 때에 튼튼하고 나의 피곤한 몸을 얼마든지 떠받들어 주면서 안락함을 줄 것이라는 의자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심각한 오물이 있으면 앉을 수 없다. 그러면 못쓰게 된다. 어쨌든 그 의자가 내가 앉기에 딱 맞는다, 그것이 구원이다. 신뢰는 무엇이냐면, 실제로 거기에 주저앉는 것이다. 앉아가지고 그 의자의 유익을 누리는 것이다. 향유이다.

그러니까 칼빈은 근본적으로 구원을 받으려면 누가 구원자인지를 먼저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구원을 받을 여지가 아예 없는 것이다. 구원의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차단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온다. “전하는 자가 없는데 누가 들으리요 듣지 못하는데 어찌 구원받으리요”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지식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특별히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다.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 없는 마당에는 구원의 가능성은 아예 없는 것이다. 전도가 없는 곳에 구원의 역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말하기를 강단에 서서 설교자가 말씀을 전하는 시간부터 구원의 역사는 시작되고, 그가 말씀을 마치고 강단을 내려올 동안에는 구원의 역사가 휴지, 정지한다고 하였다. 다시 말씀을 가르치고자 한다면 다시 구원의 역사가 시작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것을 구원의 역사를 열고 닫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너에게 천국열쇠를 주노니 네가 열면 열 것이고 닫으면 닫혀서 누구라도 다시 열지 못한다고 하였다. 무슨 말이냐면 사도들이 말씀을 증거하면, 증거하는 그곳에 구원의 문이 열리고, 그들이 말씀의 문을 닫고 떠나면 구원은 그 문을 영원히 닫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식은 무엇이냐면 복음에 대한 근본적인 지식이다. 가르치는 자가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말씀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치기를 의도하는 대로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누구도 구원받지 못한다. 그렇게 말씀을 증거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느냐 물으면 원칙적으로 그렇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보편적인 방법은 언제나 말씀을 전하는 것을 통해서 그가 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느냐?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있을 수는 있으나 하나님이 정하신 일반적이고 그가 기뻐하시는 보편적인 원리는 말씀을 가르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말씀을 가르치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받지 못한다. 매우 중요하다.

첫째는 지식이다. 둘째는 아까 소개했던 것처럼 동의이다. 그 말씀을 듣고 그리고 그 말씀 안에는 무엇이 있느냐면, 사실 복음을 증거할 때, 신약성경에서 이 복음이라고 나오면, 복음, 은혜, 예수 그리스도는 신학적으로 동의어이다. 신약성경에서는 복음이나 은혜나 예수 그리스도는 신학적으로 같은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있는 말씀이다. 그가 살아계시는 말씀이다. 히브리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라고 하는데 살아 있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다.
 
그 말씀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가르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살아계시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성경에 보면 ‘예’와 ‘아멘’이 된다고 하였다. 성취되었다는 말이다. 모든 약속은 그 안에서 다 성취된다. 그를 떠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없다. 그래서 복음을 증거하게 되면 이 복음의 전체이자 그 복음은 본질은 무엇이냐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니까 복음을 증거하게 되면 복음을 듣는 죄인들이 복음을 듣는 순간에 성령의 내적인 사역으로 인해서 무엇을 듣느냐면 부르심을 듣는다. Calling. 부르심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 복음 안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인지 알고-이것이 동의이다. 아! 정말 저 복음은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 준비하신 은혜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것을 힘껏 붙잡는다. 붙잡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다.

그래서 복음이 증거되어야 하고 복음이 증거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열매 맺는 것은 아니다. 복음이 증거되면 반드시 복음과 함께 성령이 그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역사해야 한다. 그래서 사실은 예배할 때 설교자를 위해서 먼저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으로는 듣는 이들을 위해서 먼저 기도해야 한다. 루디아는 사도 바울이 복음 전하는 것을 들을 때 성령이 그 여인의 마음을 열어 청종케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이 증거될 때 누구에게 집중적으로 역사하느냐면 듣는 사람에게 역사하고 부르심을 주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 복음을 증거하는 일, 설교하는 일을 구약적인 선지자가 엑시터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경험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설교는 무엇이 핵심이냐면 설교는 말씀을 듣는 자들의 마음이 열리게 하는 성령의 부르심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성령의 부르심이 말씀을 증거되는 곳에 함께 하게 되면 듣는 사람들 마음의 문이 열리고 그리고는 그 말씀이 마침내 하나님께서 의도한 열매를 맺는다. 복음의 수용이 일어난다. 중생하고 그리고는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고 그들이 의롭게 된다. 한 순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는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구원의 열매를 받아 누리는 것이다. 신뢰.

그래서 칼빈은 동의만이 아니고 제일 먼저 지식을 강조하였고, 그리고는 신뢰도 믿음으로 가르쳤다. 그래서 칼빈은 믿음에 있어서 단순한 지적인 동의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지식과 신뢰를 강조하였다고 말하면 정확하다. 칼빈에게 지식이란 언제나 믿음의 기초이다. 지식은 언제나 믿음의 기초이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믿음이 절대로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칼빈은 무엇이라고 예를 들었냐면 씨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뿌리를 내려야 한다.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부드러운 땅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돌 위에 떨어진 반반한 것, 바위에 떨어진 씨앗은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칼빈은 뭐라고 설명했나면 무지 위에서는 절대로 뿌리 내리고 열매 맺지 못하는 씨와 같다고 하였다. 무지해서는 안 된다.

칼빈은 ‘믿음은 말씀의 지식을 통해 주어지고 그 지식 위에 세워진다’고 하였다. 칼빈이 목회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칼빈이 신학만 한 사람이 아니다. 실제로 제네바교회에서 목회하였다. 자신이 교인들을 양육하고 상담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던 목회자였다. 자신의 경험도 반영된 것이다. 자신이 직접 해 본 것이다. 교인들이 믿음을 가지고 믿음이 점점 성장하는 전체 과정은 결국 말씀을 가르치는 일과 비례한다는 경험하였다. 저 역시도 경험했다. 목회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의 교육이다. 프로그램이 아니다. 오늘날 목사님들이 목회에 대한 관념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무슨 프로그램이면 되는 줄 안다.

우리가 진정으로 칼빈의 신학이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잘 반영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개혁주의자라면 그의 가르침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믿음은 말씀의 지식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교인들이 되기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목사님들이 말씀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그것 외에 다른 프로그램이 말씀의 가르침을 대신해주지 못한다. 여기에 확고부동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바른 방향이다.
 
성령충만이 뭐냐, 바른 방향이다. 성령충만이 컵에 물이 가득 채워지는 것으로 보는 것은 물리적인 것이다.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고 있는 상태가 성령충만이다. 서풍이 불면 동쪽으로 가야 배가 빨리 가는 것이다. 바람의 방향과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성령충만이란 바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 방향을 정하는 것이다. 목회에도 바른 방향이 있어야 한다. 그 방향만 옳으면 실천이 서툴러서 당장은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혹은 결과를 보는 일이 조금 늦어도 방향이 옳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본다.
 
그러나 방향이 잘못되면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해도 결국 제대로 된 열매를 맺지 못한다.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바른 방향이 무엇이냐, 목사의 사명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것을 바르게 가르치는 일이라는 확고부동한 의식이 있어야 한다. 젊은 신학도들이 말씀을 강조하면 언제나 의구심을 품고 내 말을 듣는다. 그것만 가지고 될 것인가 의구심이 있다.
 
그러나 된다!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데 부흥도 있고 성장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자기가 안 해보면 확신이 가지 않는다. 이것은 사실 어렵고 수고로운 것이다. 미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보다 더 나은 길이 없다. 앞으로 목회를 잘하려거든 절대로 딴 데 한 눈 팔 것 없다. 평생 연구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는 일에 늘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다. 말씀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나의 일생을 온전히 바치겠다고 결심하면 그것은 바른 방향이다.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에 대해서 강론할 때 아는 것이 믿는 것보다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한다. 아는 것이 믿는 것보다 먼저이다. 전제 되어야 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먼저 지식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자기를 찾는 자 그들에게 상 주신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래야 믿음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참된 믿음이란 무엇이냐, 참된 믿음은 실존적 결단이 아니다. 실존적 결단은 자신의 신념, 혹은 덕목으로서의 믿음이다. 우리가 보통 긍정적인 사고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믿음을 말할 때 대개 이쪽에 가깝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구원하는 믿음, 참된 믿음은 언제나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개인의 신념이 아니다. 키에르케골은 ‘믿음의 도약’에 대해 말했다. 믿음의 도약은 지식이나 어떤 사실에 대한 확신 혹은 증거 없는 믿음을 말한다. 그것은 어떤 객관적인 근거도 없는 믿음을 말한다. 개인의 신념일 뿐이다. 그것이 실존적인 결단으로서의 믿음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란 반드시 복음의 진리를 먼저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고전 15:3-6에서 바울은 이 점을 반드시 가르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선교를 통해서 이방인 교회가 믿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강조한다. 자신의 선교를 통해서 이방인 교회가 믿음에 이르렀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바울의 선교와 전도의 핵심이 뭐냐, 복음의 교육이다.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결국에는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선교를 통해서 이방인 교회가 믿음에 이르렀다고 말할 때
 
 강조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복음의 교육이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 결국에는 믿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선교라고 말하는 것이다. 병원 짓고 빵 나눠주고 치료하는 것은 선교를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다. 선교의 마지막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무슨 선교인가, NGO이지. 요즈음 영화나 TV에서 많이 나오지 않는가.
 
외국에 선교사로 가서 희생했던 사람들을 보여주고 눈물 질질 짜는 것, 그것은 좋은 것이지만 잘 보아야 한다. 복음을 가르치는 행위가 아니고서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른 선교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 사람들을 폄하할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그러한 열정은 반드시 복음을 가르치는 목표의식 안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면 선교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의미에서 믿음을 말할 때 반드시 Cognitio(지식, 앎)을 말해야 한다.

자, 이와 같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세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와 분가분리의 관계를 가진다. 이제부터는 잘 들어야 한다. 칼빈의 논리이다.

자, 믿음은 언제나 지식 위에 세워진다. 그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믿음과 지식은 언제나 불가분리의 관계 안에 있다. 그렇죠? 지식이 없으면 믿음이 없다며. 그러면 믿음과 지식은 분가분리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참된 믿음이 저기에 있다면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지금 칼빈의 신학의 논리이다.
 
어떤 논리인가 하면 왜 사람이 바로 믿기만 하면, 바로 믿음만 가지면 필연적으로 확신을 가지게 되느냐 하는 것에 대한 칼빈의 논리가 믿음의 교리 안에 나타난다. 칼빈은 이렇게 가르쳤다. 칼빈은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지기만 하면 필연적으로 불가피하게 확신을 가지게 된다고 보면서 확신을 구원의 필연적인 귀결로 본다. 믿음의 속성은 세 가지라고 하였다. 지식, 동의, 신뢰.
 
그런데 이러한 믿음이 필연적으로 낳는 결과가 있다는 것이다. 필연적인 결과가 무엇이냐, 바로 확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이 믿기만 하면 필연적으로 확신에 이르냐고 할 때 칼빈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이 주장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금방 이해가 되지 않는다. 조금 생각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논리에 약하다. 우리 민족은 선천적으로 직관적인 기질, 도가 통하면 되는 민족이다. 그래서 한 단계씩 생각하는 것이 잘 안 된다. 조금 낯설지 모른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은 이것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1.1.1. 믿음과 지식은 언제나 필연적인 관계 안에 있다.

지식 없는 믿음 없고,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있어야 가능했다. 그러므로 믿음과 지식은 분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기록된 말씀의 전체이자 본질은 살아계시는 말씀인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분 안에서 예와 아멘이 되시기 때문에 믿음은 그 다음에 언제나 그리스도와 관계하고 그를 붙잡는 것이다.

1.1.2.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무엇과 관계있느냐,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말씀 안에 있는 모든 약속이 ‘예’와 ‘아멘’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믿음이 지식과 관계를 갖는다는 말은 믿음은 곧 그리스도와 관계를 갖는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의 말씀의 전부는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그러므로 성경 66권 전체를 하나로 압축하면 무엇이냐면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니까 결국 믿음과 지식의 분가분리의 관계를 말한다는 것은 곧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붙잡는 것이다. 결국 복음의 진리를 통해 사람들이 어디로 가느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그분이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결국에는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믿음은 복음으로 옷입은 그리스도를 맞는 것이다.

1.1.3. 따라서 믿음은 반드시 그리고 언제나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

믿음은 언제나 반드시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 이것 매우 중요하다. 현대신학 공부할 때 현대신학자들이 믿음을 재해석한다. 그것을 비판할 때 반드시 이것을 알아야 한다. 개혁파 신학에서는 믿음은 언제나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는 믿음 없다. 믿음이란 막연한 어떤 것에 대한 확신, 신념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아닌 이유는 무엇이냐,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믿음은 언제나 그리스도와 관계하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하는지, 기독론적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참된 믿음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믿음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고,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와 관계하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믿음이란 개인의 신념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하는 믿음과 아무 상관이 없다. 자신 개인의 덕일 뿐이다. 개인의 선택일 뿐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하는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무엇을 위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주신 은혜로운 선물이 무엇이냐? 구원하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구원하는 믿음을 받았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믿음은 단순한 신념도 아니고, 긍정적인 사고의 일환으로 간주될 수 없다. 여기까지 이해되는가? 꼭 이것 세 가지를 이해해야 된다.

그리스도를 기반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믿음, 이것을 한마디로 하면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하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구원하는 믿음, 이 말 이해되는가? 칼빈은 이 말을 쓰고 있다.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하고 그리스도를 중심하는 구원하는 믿음 그것은 전체 기독교 신앙이 세워지는 근본적 토대라고 하였다. 구원하는 믿음이 간단하게 말하면 우리 전체 개혁주의 신학의 일종의 기초, 믿음이 없이는 기독교 신앙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를 아는가?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는 유일한 통로는 믿음이다.
 
그런데 그 믿음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다. 그래서 구원은 오직 은혜일뿐이다. 구원이라고 하면 무엇을 포함하는가? 하나님의 예정, 부르심, 중생, 믿음 회개, 칭의, 성화, 영화, 양자 다 포함하는 것이다. 그것 전부 다 구원이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이는 기독교 신앙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구원하는 믿음이 기독교 신앙 전체가 다 서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믿음을 때로는 복음의 진리 전체를 말하기도 하고, 이 믿음이 구원을 말하기도 한다. ‘저가 믿음의 도를 저버렸도다’라고 말하면 구원을 저버렸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믿음이 구원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복음의 진리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 전체가 저 믿음 위에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 없는 어떤 기독교 신앙이라도 있을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이란 오로지 믿음 위에 서는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에 서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권위에 서는 것도 아니다. 이것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교회를 반대하고 나온 것이다.

자, 그러므로 확신을 포함해서 구원의 서정에 속하는 그 무엇이든지 믿음 없이 혹은 믿음의 적극적인 사용과 무관하게 주어지는 것은 없다.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회개하고, 믿음으로 믿음의 은혜를 받는다. 굉장히 역설적이다. 믿음의 시동도 성령이고, 믿음을 통한 정말 큰 믿음의 수용도 성령의 은혜이다. 그래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이 주어진다.
 
로마서 10:10을 이것을 간단하게 말한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입으로 시인하여 부르심 받고 회개하고 의롭게 되고 성화되고 확신에 이르게 되고 영화되는 것이다. 믿음 없이는 아무것도 없다.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아멘이라고 하는 것임으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변하는 보증을 확보하게 되고, 그 결과 믿음은 필연적으로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칼빈의 논리이다.

다시 한 번 간단하게 설명하자.

기독교 신앙 전체는 전적으로 믿음과 관련된다. 믿음 위에 신앙이 선다. 믿음 없이 어떠한 구원도 없다. 반드시 구원에 이르려면 언제나 믿음과 함께 해야 한다. 그런데 이 믿음은 아까 무엇이라고 했는가? 믿음은 말씀에 대한 지식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아멘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멘 아까 무엇이라고 했는가? 동의라고 했다.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멘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에 대해 아멘이라고 하는 것임으로 무엇이라고 하는가, 이 말씀이 결국 확실하지 않는가. 여러분, 아멘은 무엇인가? 참되다. 예, 진실로 그러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이 없고 참되고 또 그 말씀을 내가 의심 없이 아멘이라고 하기 때문에 확신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믿으면 확신하게 된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다.

그래서 이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일단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칼빈이 이렇게 생각을 정리해 내려가고 있다는 흐름을 정리하고 시작해야 한다.

그러니까 중요한 핵심은 무엇인가?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는 것이다. 모든 기독교 신앙과 구원은 언제나 믿음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아멘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고 또 그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라는 것을 성령이 내 마음에서 확정해 주신다. 따라서 구원받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 필연적으로 확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칼빈의 기본적인 논리이다. 상당히 분석적이다. 루터의 신학에는 이런 특징이 없다. 칼빈은 아주 정말 세분해서 분석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칼빈은 믿음과 확신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확신이 믿음의 필연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확신을 믿음의 필연적인 귀결로 만드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였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믿음과 확신을 한 짝으로 만들어 놓으셨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과 인간의 타락 때문이다. 다른 어떠한 방법으로는 확신을 얻게 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믿음으로만 확신에 이르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과 인간의 타락 때문이다. 설명하면 이렇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어떠한 공로이든지간에 그것 위에 자신의 약속을 두기를 원치 않으셨다. 인간의 공로 위에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세우고자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간의 공로는 불완전하고 그 공로를 세운 사람에게 무익함으로 하나님은 그것을 조건으로 삼거나 기반으로 삼아 약속하지 않으신다. 사 57:12 “네 공의를 내가 보이리라 네가 행한 일이 네게 무익하니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인간 자신에게도 무익하고 구원을 이루지도 못할 만큼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인간의 공로를 조건으로 삼아 인간에게 약속을 주신 것이 아니다. 결코 인간의 공로가 구원이 될 수 없는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혜 안에서 구원을 확실하게 보장하기 위해서 믿음과 확신을 결부시키셨다고 설명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는데, 약속을 예를 들면 인간의 공로 위에 약속을 두게 되면 그 공로가 언제나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다. 이런 면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은 옳다. 인간의 공로는 언제나 확신할 수 없다고 하였다. 지난주에 말했듯이 로마 카톨릭 교회가 확신의 교리를 부정하는 이유는 그들이 확신을 인간의 공로 위에다가 결부시키고 있다. 그 말은 맞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구원을 우리의 공로와 결부시켰다면 우리는 절대로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공로가 절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지금 칼빈이 이렇게 말한 이유가 무엇이냐면, 왜 구원의 확신이 구원받는 믿음과 결부되어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로마 카톨릭 교회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공로 위에다가 구원의 약속을 두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간의 공로는 불안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을 확실하게 사람들에게 보장하기 위해서는 자기 은혜 안에 두셔야 한다. 이 공로를 지우고 하나님의 은혜 즉 예수 그리스도 위에다가 약속을 두기를 원하셨다. 왜냐면 인간의 공로가 무익하고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위에 약속을 두시기를 원하셨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은 믿음으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먼저 하실 일이 있다. 은혜 위에 하나님께서 약속을 두셨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더 하셔야 한다. 우리에게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을 주셔야 한다. 구원 얻는 믿음을 주셔야 한다. 구원 얻는 믿음을 주시게 되면 그 믿음이 이 은혜와 관계하게 된다.
 
그리스도를 붙잡음으로써 마침내 그 약속이 내게 주어진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이 은혜로 인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라고 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나의 모든 것을 바치게 되고 그를 붙들게 된다. 그렇게 됨으로써 은혜 위에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이 내게 주어졌다는 것을 확실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은혜 위에 자신의 구원을 두셨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다른 말로 하면 무슨 말이 되냐면 결국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확신을 갖게 하셨다는 말로 대신할 수 있다.

더욱이 확신하는 믿음, 확신은 하나님께서 택자들에게 주신 성령이 그들 안에서 사역하신 결과이다. 그러니까 확신이 믿음의 귀결인 까닭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을 자기의 은혜 안에 두셨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믿기만 하면 확신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설명이다. 두 번째 설명은 하나님께서 더 나아가서 믿기만 하면 그 결과 확신하게 되는 이유는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 까닭에 사람이 믿기 때문이라고 성령의 사역과 관련해서 설명한다. 성령께서 복음을 들을 때 아까 설명했듯이 그들을 부르신다. 그런데 부르심의 기원은 아버지에게 있다.
 
에베소서 1:4-5에 보면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예정하셨다는 말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 안에서 우리가 부름 받을 때는 그 부르심의 기원은 아버지에게 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부르시기로 작정하신 그 사람들만을 개별적으로 성령이 부르신다. 개별적으로 하나 하나 부른다. 부르실 때 그 성령이 부르심을 받는 그 사람 속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그 복음을 자기를 위한 선물로 받아들이도록 역사하신다. 그 결과 그들 속에 믿음이 들어오게 된다. 성령께서 말씀을 들을 때 그 사람으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고 복음을 아는 지식 위에 믿음이 생기고 그러면 그 믿음은 필연적으로 확신을 낳는다. 따라서 모든 확신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하는 믿음과 확신은 필연적인 귀결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을 보장하시기 위한 은혜로운 조치이고 성령의 사역의 결과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정리해 보자.

이와 같이 칼빈은 확신하는 믿음을 무엇과 관련시키냐면 구원의 지식, 성령,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약속, 성령의 사역, 하나님의 선택 이런 것들과 연관 지어 놓았다. 한마디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은 그 자신이 택한 자들의 확신이 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확신은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운 사역의 결과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과의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게 하시는 결과이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에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계시하시고 보증하신바 된 그리스도 한 분 안에서 공로 없이 거저 주신 약속의 진리 위에 근거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움에 대한 분명하고 확고한 지식을 믿음이라고 정의한다면 우리는 믿음에 올바른 정의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이 이렇게 어렵게 말하는 것은 그 시대적 한계 때문이다. 그 시대에는 모든 것이 논쟁적이다. 왜냐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를 깨고 나왔기 때문에 그리고 칼빈 자신의 신학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많은 논쟁을 거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정교하게 말을 하려고 보니까 말이 길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익숙해져야 한다.

성령이 보증하신 바 된 바로 그것,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복음을 듣게 하고 복음을 들을 때 우리 마음에 확신케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모든 약속이 다 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공로 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로 그것,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고 그 결과 우리 마음에 들어오신 그리스도 예수,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공로 없이 거저주시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분명하고 확고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면 우리는 바른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믿음의 어떤 속성을 강조하냐면 지식을 강조한다. 들어야 한다. 들을 때 성령이 우리의 마음을 내어주시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나에게 자비로운 분이시구나,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구나, 이런 개인적인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바른 믿음을 가진 것이라는 말이다.

칼빈은 여기에서 두 가지를 구분한다. 객관적인 확신과 주관적인 확신으로 나눈다.

객관적인 확신은 무엇이냐면 객관적은 확신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Certainty).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이 객관적인 확신이다. 주관적인 확신은 하나님께서 내게 대해서는 은혜롭고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칼빈은 두개로 나누었다.

자, 칼빈의 믿음의 정의에 따르면 한 가지는 분명하다. 누구든지 믿는 사람이라면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게 되고 그렇지 않다면 신자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이거 중요한 말이다. 과격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누구든지 믿는 사람이라면 그는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고,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니다.”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 된다. 그런데 확신이 없다면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니라고 말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이라면 확신이 있어야 한다.

실제로 이렇게 말한다. “구원의 확신을 붙들음으로써 사탄과 죽음에 대해서 대담하게 승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그 사람이 신자가 아니라고 본다.” 확신이 없으면 그 사람은 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반드시 확신이라는 열매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확신이 없으면 무엇이 없느냐면 하나님이 내게 대해서 선하신 분이다, 내게 대해서 은혜로운 분이라는 것을 결코 알 수 없게 된다. 주관적인 확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칼빈은 확신을 가지지 않으면 저 사람은 신자가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런 칼빈의 주장이 논쟁의 빌미가 된다. 왜냐하면 칼빈은 믿음은 언제나 확신을 수반한다고 했지만 동시에 확신이 없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논쟁이 벌어진다. 같은 방향으로만 말했다면 논쟁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 말은 이것이다. 믿는다면 확신이 있어야 하고, 확신은 믿음의 필연적인 귀결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잘 나가다가 잘 믿는 사람이라도 확신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요 20:3 주석에 있다. 예수님의 부활 아침에 제자들과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다. 여러분 20:3을 실제로 본다면 그들이 믿음이 있었는가? 없었다. 그냥 간 것이다. 믿음이 없었다. 그래서 주석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자들과 여인들에게는 믿음이 있다고 해도 극히 미미하거나 혹은 믿음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고 이렇게 말하다.
 
“그러므로 믿음의 씨가 그들의 마음에 있다고 해도 그것은 한동안 소멸되었고 그런 까닭에 그들 자신은 믿음이 있는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확신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령은 때로 신자들 속에서 비밀스럽게 일하신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열매를 맺음으로써만 인지할 수 있게 되는 약간의 숨겨진 씨가 있었다고 믿어야 한다.”
 
무슨 말이냐면 제자들이 무덤으로 갈 때는 자신들 속에 믿음이 있긴 있었다는 것이다. 있긴 있었는데 그 믿음은 마치 화초가 관리를 못해서 죽었다. 남은 것이 뿌리만 남았다. 그런데 뿌리만 있으면 산다. 지금 칼빈이 그 말을 하는 것이다. 이들에게도 믿음이 있었다고 해도 그 믿음은 마치 뿌리만 남아 있는 것과 같아서 본인들도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뭐라고 하냐면 그런 정도의 믿음이라도 없었다면 그들은 절대로 무덤으로 달려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열정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보이지 않는 성령의 비밀스런 사역의 결과로 숨겨진 믿음이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라고 하냐면 거기에 대한 의식이 없다는 것은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 확신이라는 것은 자신이 믿음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 않은가. 결국 믿음과 확신은 같이 간다고 해 놓고 요 20:3 주석을 보면 무엇이라고 하냐면 확신이 수반하지 않는 믿음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칼빈의 신학에서 믿음과 확신의 관계를 다룰 때 겪는 어려움이다. 도대체 어쩌라고. 모순되는 듯한 주장을 하느냐는 것이다.

칼빈은 모순되는 듯한 두 주장을 어쨌든 간에 믿음의 교리에서 다루고 있다. 어떻게 이 모순인 듯이 보이는 두 주장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칼빈은 믿음의 성장, 혹은 단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칼빈에게는 믿음의 성장, 단계라는 개념이라는 것이 있다. 그래서 칼빈은 종종 이런 말을 한다. 유아적 믿음, 믿음의 초보, 약한 믿음을 종종 언급한다. 왜냐하면 칼빈은 실제로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믿음이 펼쳐지는 현장에서 그 믿음을 시험하는 도전과 불안과 의심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시험을 받아 때로는 그루터기만 남고 위의 모든 나무와 가지가 다 잘라진 듯 보이는 상태가 될 수 도 있다는 사실을 자신은 인정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확신은 없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아까 뭐라고 했냐면 확신이 없는 사람은 믿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고 했다. 결국에는 이 두 주장을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관건이다. 설명하는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두 부류로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칼빈은 믿음에 있어서 여러 가지 다양한 발전 단계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확신이란 믿음과 정확하게 비례관계에 있으므로 믿음의 발전과 성숙의 정도에 따라 지배를 받게 된다고 본다. 그런데 믿음이 시험을 받아 뒷걸음질 치게 되면 제일 먼저 무엇이 없어지게 되냐면 확신이 소멸된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보면 된다. 확신은 믿음이라는 화초에 열매 맺는 잎으로 본다.
 
만약에 믿음이라는 나무가 병들게 되면 제일 먼저 위에 있는 잎이나 열매가 떨어진다. 그러나 믿음은 뿌리가 있어서 살아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는 확신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 칼빈이 확신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 확신이란 사실은 잠정적인 믿음, 뿌리만 남기고 지금 겨울잠을 자는 것처럼 쇠약해진 믿음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계속 수업하면서 말할 것이다.

일단 오늘 칼빈이 믿음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또 칼빈에게는 확신이 결국 믿음의 필연적인 귀결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전체적인 흐림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른 조직신학 책에서 “믿음”에 대해서 읽어보라. 안토니 후크마, 루이스 벌코프, 바빙크의 책을 읽든지 구원하는 믿음이 무엇인지 반드시 정리하고 오라.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물로 그와 같이 인식하게 하시고, 사모하게 하시고, 붙들게 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이땅에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함으로 성령을 근심케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가 받은 구원이 크고 놀라운 것임을 깨닫게 하시고, 눈으로 보는 것이나 귀로 듣는 것에 사로잡혀 보이지 않는 세상을 망각하고 사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않도록 주여, 은혜를 주옵소서. 오늘도 이 수업에 참석한 주의 종들을 기억하시고 이 구원의 진리를 분명히 깨닫고 잘 정리해서 가르침에 있어 아무런 막힘이 없도록 주님 이들을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도구로 준비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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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각 계절마다

그 계절을 대표하는 과일이 있지요.

 

예컨대

봄에는 체리와 딸기,

여름에는 수박과 참외와 포도,

  

그리고 가을에는

사과와 배와 대추와 감,

  

겨울에는

귤, 오렌지, 오로브랑코 등

  

물론 요즘에는

농사법과 재배법이 발달하여

웬만한 과일은 계절에 관계없이 출하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도

정겨운 우리네 고향을

대표하는 과일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감이죠.

  

예전에

집집마다, 혹은 동네 어귀에

높다란 감나무가 한그루씩 있었지요.

  

그리고 가을이 되면

빨갛게 익어가는 감나무는

보기에도 먹음직했을 뿐만 아니라

 

깊어가는 가을의

고향 마을을 더욱 정겹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높다랗게 달린

감을 따기 위해 장대를 들고

감을 따려다가 고개가 빠질 뻔한 일들,

  

떨어지는 감을

두 손으로 잡으려다 놓쳐서

땅바닥에 떨어진 감을 바라보고 아깝게 입맛 다시던 일,

  

까치나 까마귀가 날아와서

감을 쪼아 먹던 것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일,

  

초겨울,

아직도 달려있는 감에

눈이라도 내리면 신기하게 바라보던 일은

시골에 살던 사람에게는 눈익은 풍경일 것입니다.

  

그런데 LA근교에서

감나무를 보신 적이 있나요?

  

그것도

그냥 감나무가 아닌

대규모의 감나무 과수원을.

 

 LA 인근,

바로 리버사이드에

우리가 몰랐던 근사하고 멋진

감나무 과수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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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14일

“당신은 어디에” 님이

“초겨울에 감따러 가세”라는

아주 멋진 포스팅을 올려 주셨습니다.

 

당신은 어디에님의 감따러 가세 바로가기 ⇒

http://blog.koreadaily.com/media.asp?action=POST&med_usrid=PrinceTech&pos_no=740336

 

 

아, 그리고

이번에 2013년 베스트 블로거가 되신

중블의 유명한 사진작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은향님도 “환상의 맛을 지닌 꿀감밭”이라는 포스팅을 올렸더군요 

 

은향님의 환상의 맛을 지닌 꿀감밭 바로가기 ⇒

http://blog.koreadaily.com/media.asp?action=POST&med_usrid=ngqueen&pos_no=742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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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두분이

포스팅을 했기에

또다시 포스팅하기가 조심스러웠지만

 

블로그 뉴스에

소개되지 않아서

제가 다시 소개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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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님의

그 포스팅을 본 이틀 뒤,

사진 촬영겸 감을 따러 감과수원으로 갔습니다.

 

이곳 과수원은,

감은 높은 감나무에서만 열린다는

저의 수십 년의 고정관념을 일거에 무너뜨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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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 포도처럼

아래로 주렁주렁 열릴 수도 있다는

뜻하지 않은 사실에 그저 놀랍기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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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는 지금까지

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감을 먹고 나면

다음날 아침 화장실에서

힘든 밀어내기 한판 승부를 벌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이유는

감에 있는 태닌(tannin, 탄닌)

성분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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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곳에서 감을 맛본 후에

저는 하루 아침에 감매니아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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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감을 찍으면서,

 

그리고 감을 따먹으면서

세상에 이렇게 맛잇는 감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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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이 아닌 아래 사진이

저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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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 한 마리가

감맛에 취해 떠날 줄을 모르더군요.

 

이곳 감이

꿀만큼 달다는 사실을

저 벌이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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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까지

이곳 감과수원에 네 번을 갔다 왔습니다.

 

사진을 찍는 것도 좋았지만

그 꿀같은 감맛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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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때마다

감을 몇 버킷씩 가지고 와서

이웃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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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은

아침을 먹은 직후에

후식으로만 감을 6개씩 먹었지요.

 

그동안은 1년에

감을 6개 먹을까 말까할 정도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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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감이

이렇게 맛있는 이유는

유기농으로 재배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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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익은 감을 직접

바로 따서 먹기 때문에

 

시중에서 판매되는

딴지 여러날이 지난 감과는

맛이 질적으로 확연히 차이가 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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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떨어진 감이

저절로 퇴비가 되어서

해마다 맛있는 감을 맺게 해줍니다.

 

저 떨어진 감가운데는

지금 당장 먹어도 되는

아까운 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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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속의 처자는

감을 따다가 더웠는지

겉옷을 벗고 본격적으로 따더니

 

순식간에

감을 두 버킷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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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갔던 날이

12월의 마지막 주말이었는데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딸 수 있는 감들이 남아 있었고

세 버킷, 약 600개의 감을 따가지고 왔습니다.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만

이곳이 아니면 유기농 감을

이렇게 저렴하게 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세 번이나 갔더니

네 번째 갈 때는 주인장께서

엄청난 양의 감을 추가로....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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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 우리 몸에 얼마나 좋은지

인터넷을 검색하여 감의 효능을 알아 보았습니다.

 

먼저 감(persimmon)은

피로회복에 뛰어난 효과를 지닌

비타민 C가 귤의 2배, 사과의 10배쯤 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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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

칼로리가 낮은 대신에

수분, 식이섬유, 칼륨 등이 풍부하여

다이어트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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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에는

탄닌 성분이 있는데

이것은 변비를 유발하기도 하지만

역으로 말하면 설사를 멈추게 하기도 하지요.

 

참고로

정장로님댁 과수원의 감나무는

개량된 종자라서 변비를 유발하지 않는 감나무입니다.

 

게다가

씨도 없어서

한 번 먹기 시작하면

절대로 멈출 수 없는(Never stop)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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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의 효능이

이것 밖에 없나구요?

아니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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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에는 탄닌외에도

펙틴(pectin) 이라는 성분이 있는데

이것이 술을 마신 후의 숙취 해소에 도움을 줍니다.

 

술 좋아하는 분들은

술 드신 후에 감을 드시면

콩나물 해장국보다 좋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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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에는 또한

비타민 A가 풍부하다고 합니다.

성인이 하루 섭취할 비타민 A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비타민 A는

간에 좋은 영양소입니다.

간이 피로하면 몸도 쉽게 피로해지죠.

 

간에 좋다는 말은

곧 눈에 좋다는 말과 같습니다.

블루베리와 비슷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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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고 감에는

칼슘 성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칼슘은

다들 아시는대로

뼈를 튼튼하게 만들어 주지요.

 

폐경기 이후의

여성들에게 나타나는

골다공증에도 도움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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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감은

칼륨이 풍부하다고 했는데

칼륨은 소금기인 나트륨을 배출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혈압을 낮추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죠.

 

감의 효능은

이외에도 몇 가지 더 있지만

이 정도만 해도 가을 먹을 이유가 충분해졌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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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본업으로 돌아와서...

 

어떻게 하면

감사진을 잘 찍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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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안

    
    






우리의 이성은 온갖 형태의 속임수에 넘어가며, 그렇게도 많은 오류에 빠지고, 무수한 장애에 부딪히며, 온갖 난관에 휩싸이기 때문에, 도저히 우리를 올바로 인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고후3:5).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시며”(고전3:20). “그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창6:5).

 

우리의 이성이 어디로 향하든 언제나 허망함에 굴복하는 비참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이 이처럼 연약한 상태임을 알고, 여호와의 계명을 올바로 배울 수 있는 깨달음을 달라고 기도하였다(시119:34). 새로이 깨달음을 얻기를 소원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깨달음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바울은 교회 전체를 위해 간구하고 있다.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 자라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1:9-12). 이것을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로 말할 때마다 동시에 그것이 사람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일들을 깨달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서, 햇빛이 있어야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조명하심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그는 육체의 눈은 우리 스스로 떠서 빛을 바라보지만, 마음의 눈은 주께서 뜨게 해 주지 않으시면 감겨진 상태 그대로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성경도, 우리 마음이 어느날 한 번만 조명을 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스스로 볼 수 있다는 식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계속되는 과정이요 성장을 뜻하는 것이다.

 

다윗은 말한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니자 말게 하소서”(시119:10). 이미 거듭나서 참된 경건에서 적지 않게 성장해 있는 그였으나, 자기에게 주어진 그 지식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매 순간마다 계속적인 인도하심이 필요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곳에서, 지신의 허물로 인하여 잃어버린 정직한 영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시51:10). 처음에 우리에게 주셨으나 우리가 잠시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344-345

 

가져온 곳 : 
카페 >청교도 아카데미(P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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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1. 이스탄불 탁심 광장의 젊은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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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버즈피드]


2. 아시아나 항공기 사고 직후, 승객들을 돌보며 기진맥진한 승무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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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앤서니 라]


3.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 시위 중 고무총에 맞은 시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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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


4. 배트맨이 되고 싶은 백혈병 투병 5살 소년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나선 샌프란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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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Wish]


5. 이스탄불 시위 중 최루액을 맞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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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6. 동성애 혐오자들에게 폭행당한 러시아 동성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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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7. 인간 파트너였던 경찰 제이슨 엘리스의 장례식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경찰견 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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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ald-Leader]


8. 중국 황하 저수지에서 쏟아지는 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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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 Stringer Network]


9.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 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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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글로브]


10. 장난감 총을 갖고 놀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소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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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즈피드]


11. 미국 정부 셧다운으로 문을 닫은 워싱턴 국립동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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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딧]


12. 그리스 아테네 홍수 중 구조되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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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즈피드]


13. 병으로 피부가 일그러진 이를 껴안고 기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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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A]


14. 하늘로 치솟는 화산재를 지켜보는 인도네시아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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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즈피드]


15. 중국 우한 지역 양쯔강 다리에서 투신한 한 젊은 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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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


16. 파리 이슬람 모스크 앞에서 토플리스 시위를 벌이는 여성을 노인이 걷어 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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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


17. 갠지즈강 홍수로 솟아오르는 물을 피해 전선에 매달린 인도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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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


18. 카이로 시위 도중 이집트군 불도저가 밀고 들어오자, 한 중년 여성이 이를 멈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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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


19. 자기 애완견을 등에 지고 물을 건너는 필리핀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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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즈피드]


20. 포르투갈에서 가장 높은 파도를 탄 서퍼 기네스북 기록에 도전하는 개럿 맥나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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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dov]


21. 브라질의 한 아동 병원에서 슈퍼맨 복장을 하고 창문를 닦는 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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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즈피드]


22. 호주 산불을 피해 물 아래로 피신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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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홈스]


23. 미국 애리조나 콜로라도 강 위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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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24. 공군 T-50 추락사고 영결식에서 순직한 남편의 관에 입을 맞추는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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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5. 세상을 떠난 캄보디아 왕을 추모하기 위해 머리를 삭발하는 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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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26. 바레인 시위 중 경찰이 쏜 총에 가스통이 터지자 화염에 휩싸인 시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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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27. 중국 쓰촨성 지진으로 집이 무너지자 울고 있는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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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즈피드]


28. 의정부 IC 9중 추돌 사고로 불타는 차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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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9. 수백만 노예가 신대륙으로 팔려갔던 세네갈 해변에 서 있는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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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30. 행진하며 기도하는 필리핀 태풍 하이옌 생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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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





     



 
/  돈 버는 60가지의 지혜  /

1. 부자 옆에 줄을 서라. 산삼 밭에 가야 산삼을 캘 수 있다.
2. 부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자가 되어있다.
3. 항상 기뻐하라. 그래야 기뻐할 일들이 줄줄이 따라온다.
4. 남의 잘됨을 축복하라. 그 축복이 메아리처럼 나를 향해 돌아온다.
5. 써야할 곳 안 써도 좋을 곳을 분간하라. 판단이 흐리면 낭패가 따른다.
6. 자꾸 막히는 것은 우선 멈춤 신호다. 멈춘 다음 정비하고 출발하라.
7. 힘들어도 웃어라. 절대자도 웃는 사람을 좋아한다 .
8. 들어온 떡만 먹으려 말라. 떡이 없으면 나가서 떡을 만들라.
9. 기도하고 행동하라. 기도와 행동은 앞바퀴와 뒷바퀴다.
10. 자신의 영혼을 위해 투자하라. 투명한 영혼은 천년 앞을 내다본다




11. 마음의 무게를 가볍게 하라. 마음이 무거우면 세상이 무겁다.
12. 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돈 앞에서 진실하라.
13. 씨돈은 쓰지 말고 아껴둬라. 씨돈은 새kki 를 치는 종자돈이다.
14. 샘물은 퍼낼수록 맑은 물이 솟아난다. 아낌없이 베풀어라.
15. 헌 돈은 새 돈으로 바꿔 사용하라. 새 돈은 충성심을 보여준다.
16. 적극적인 언어를 사용하라. 부정적인 언어는 복 나가는 언어다.
17. 깨진 독에 물 붓지 말라. 새는 구멍을 막은 다음 물을 부어라.
18. 요행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 요행은 불행의 안내자다.
19. 검약에 앞장서라. 약 중에 제일 좋은 보약은 검약이다.
20. 자신감을 높여라. 기가 살아야 운이 산다




21. 장사꾼이 되지 말라. 경영자가 되면 보이는 것이 다르다.
22. 서두르지 말라. 급히 먹은 밥에 체하게 마련이다.
23. 세상에 우연은 없다.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하라.
24.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 말라. 그가 사는 법을 배우도록 하라.
25. 본전 생각을 하지 말라. 손해가 이익을 끌고 온다.
26. 돈을 내 맘대로 쓰지 말라. 돈에게 물어보고 사용하라.
27. 느낌을 소중히 하라. 느낌은 신의 목소리다.
28. 돈을 애인처럼 사랑하라. 사랑은 기적을 보여준다.
29. 기회는 눈 깜박하는 사이에 지나간다. 순발력을 키워라.
30. 말이 씨앗이다. 좋은 종자를 골라서 심어라.




31. 작은 것 탐내다가 큰 것을 잃는다. 무엇이 큰 것인가를 판단하라.
32. 돌다리만 두드리지 말라. 그 사이에 남들은 결승점에 가 있다.
33. 돈의 노예로 살지 말라. 돈의 주인으로 기쁘게 살아가라.
34.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라. 희망만이 희망을 싹 틔운다.
35. 기쁨 넘치는 노래를 불러라. 그 소리를 듣고 사방팔방에서 몰려든다.
36. 지갑은 돈이 사는 아파트다. 나의 돈을 좋은 아파트에 입주시켜라.
37. 불경기에도 돈은 살아서 숨쉰다. 돈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38. 값진 곳에 돈을 써라. 돈도 신이 나면 떼지어 몰려온다.
39. 돈 벌려고 애쓰지 말라. 돈을 사랑하기 위해 애를 써라.
40. 인색하지 말라. 인색한 사람에게는 돈도 야박하게 대한다.




41. 더운 밥 찬밥 가리지 말라. 뱃속에 들어가면 찬밥도 더운 밥된다.
42. 좋은 만남이 좋은 운을 만든다. 좋은 인연을 소중히 하라.
43. 효도하고 또 효도하라. 그래야 하늘과 조상이 협조한다.
44. 돈을 편하게 하라. 아무 데나 구겨 넣으면 돈도 비명을 지른다.
45. 느낌을 소중히 하라. 느낌은 하늘의 목소리다.
46. 한발만 앞서라. 모든 승부는 한 발자국 차이다.
47. 돈은 보물이다. 조심조심 다루어라.
48. 있을 때는 겸손하라. 그러나 없을 때는 당당하라.
49. 부지런 하라. 부지런은 절반의 복을 보장한다.
50. 돈은 돈을 좋아한다. 생기는 즉시 은행에 입금시켜라.




51. 돈은 잠자는 사이에도 쉬지 않고 새kki 친다. 기뻐하라.
52. 티끌 모아 태산이 된다. 작은 돈에도 감사하라.
53. 돈을 값진 곳에 써라. 돈도 자신의 명예를 소중히 안다.
54. 돈에 낙서하지 말라. 당신의 얼굴에 문신하면 어떻겠나를 생각하라.
55. 찢어진 돈은 때워서 사용하라. 돈도 치료해준 사람에게 감사한다.
56. 여자와 개와 돈은 같다. 쫓아가면 도망가고 기다리면 쫓아온다.
57. 돈과 대화를 나눠라. 돈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58. 안달하지 말라. 돈은 안달하는 사람을 증오한다.
59. 마음이 가난하면 가난을 못 벗는다. 마음에 풍요를 심어라.
60. 돈이 가는 길이 따로 있다. 그 길목을 지키며 미소를 지어라.


출처: 목양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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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연구가들 "홍재철 목사는 이단 해제 전과자" 비판



한기총의 무분별한 이단 해제 행보와 관련해, 한국교회 대표적인 이단연구가 최삼경 목사가 “연합체에 불과한 한기총이 교단들이 이단으로 규정한 대상을 해제할 수 없다”며 제동을 걸고 나섰다. 최 목사는 이단연구가들의 신년모임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홍재철 목사가 제대로된 연구 없이 단기간에 류광수, 박윤식 등 굵직한 이단자들을 풀어준 것에 대해 강도 높게 비난했다.

 
▲최삼경 목사가 9일 기자회견을 열고 한기총 홍재철 목사의 이단 해제 행보와 관련,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뉴스미션

"홍재철 목사의 이단해제, 과거 한기총 이단 연구와는 대조적"

최삼경 목사(예장통합 전 이단사이비대책위원장)가 9일 오전 서울 대림동 대림감리교회에서 ‘홍재철 목사의 박윤식 이단 해제’와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과거 한기총 이단대책위원회에서 주축을 담당한 바 있는 최 목사는, 한기총 홍재철 목사가 3년도 채 안된 기간동안 보여준 과감한 행보에 대해 “홍재철 목사는 이단 해제를 계획적으로 했고, 일종의 이단해제 전과자”라고 단언했다. 특히 “연합체에 불과한 한기총이 교단들이 이단으로 규정한 대상을 해제할 수 없다"며, 연합체 역할의 분명한 선을 그었다.

최 목사는 먼저 “작금의 한기총의 무분별한 이단 해제 및 이단 규정이 있기 전에는 연합정신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단연구를 했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이어 최 목사는 “교단의 이단 연구를 받는 수준에서 연구하고 대처했지 한기총 자체가 누구를 이단으로 규정한 것은 몇 개 되지 않는다"면서 "그 중에도 단독으로 규정한 것은 오직 이현래 하나 밖에 없었다. 현재 홍재철 목사의 이단연구는 이전과 확연히 대조적이다”고 말했다.

또한 한기총이 한편으로 이단들과 교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교계 이단연구가들을 '이단자' 내지 '이단옹호자'로 규정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날세게 비난했다.

최 목사는 “이단연구가들을 낙인 찍은 상황들을 보면 한기총의 수준을 알게 된다”며 “통합측 총회장 박위근, 손달익, 조성기 목사를 이단연루자로 규정하고 합동측 진용식, 신현욱 목사를 교단에 파직 요청했었다”고 전했다.

그는 “홍재철 목사는 이단은 해제하고 반대로 이단연구가들은 죽이는 일을 병행하고 있다”며 “홍 목사 행동을 조금만 살펴봐도 한기총이 이단 해제와 규정을 얼마나 무책임하게 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한기총의 무분별한 이단 해제 속에서 조금이나마 한국교회가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은 없는 걸까. 최삼경 목사는 이단문제로 한기총을 나온 한국교회연합과 각 교단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제시했다. 이들이 한기총과 차별된 신뢰성 있는 이단연구를 함으로써 한기총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에 앞서서는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대표회장 박형택 목사, 이하 세이연) 주관으로 ‘이단연구단체 신년하례 예배’가 드려졌다. 또한 이단 연구가들이 낸 2014년도 논문집 <아레오바고 사람들>을 토대로, 발표회도 열렸다.

박형택 목사는 신년예배에서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목사가 자신의 역할을 잃어버릴 때, 지금과 같이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며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한국교회의 타락, 세속화, 부정부패가 넘치는 상황에서 한 모퉁이에서 그 것을 정화하는 일을 감당해야한다”고 피력했다.

한연희 ⓒ 뉴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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