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Valley of Flowers National Park, India


2. Five Flower Lake, China

3. Hitsujiyama Park, Japan



4. The Great Barrier Reef, Australia

5. Yuanyang County, China

6. Lavender fields in France

7. Lake Hillier in Australia

8. Braunwald, Switzerland

9. Red Sea Beach, China

10. Tulip fields in the Netherlands



11. Grand Prismatic Hot Spring, Wyoming

12. Cornwall, England

13. Alberta, Canada


      14. Luoping, China

14. Luoping, China

15. Shark Bay, Australia

16. Pamukkale, Turkey

17. Kawachi Fuji Gardens, Japan

18. Hokkaido, Japan

19. Vermont in Autumn

20. Cano Cristales River, Columbia



21. Namaqualand, Namibia 



22. Juneau, Alaska



거짓된 체험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결과가 일반적으로 교만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체험을 끊임없이 말하자고 그것을 떠벌리고 또한 현상적인 국면에만 강조를 하게 합니다. 재잘거리며 거짓된 안전감을 가지고 삶에 있어서 게으름을 가져옵니다.

 

그 거짓된 체험에 말려 든 사람들이 그것을 추구함이 없이 또한 거룩을 위해서 애쓰는 것 없이 이러한 체험을 가지게 될 때 어째서 그들이 이제 와서 거룩을 좇아가려고 진력하겠습니까? 그들은 그것을 가졌고 그것이 그들에게 일어났으며 그들은 완벽합니다. 언제나 입심 좋게 재잘거리고 완고한 정신을 버리지 않습니다. 그 거짓된 체험에 있어서 겸손이란 없으며 온유함도 없고 체험을 받을 때나 받은 후에도 언제나 완고합니다. 다만 육신적인 자기 만족과 이러한 자기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벌리기를 좋아하여 야단법석을 떱니다.

 


참된 체험의 결과들은 전적으로 다릅니다. 디엘 무디는 뉴욕시의 윌 스트리트가를 걷고 있을 때에 성령이 자기에게 임했는데 그때에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언제나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너무 거룩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거의 무서웠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다같이 그것이 말로 묘사되기에는 너무 어렵다는데 의견을 같이 합니다.


 

그것이 너무나 초월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참으로 묘사해 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압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는 그의 사랑을 받아본 자 밖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거짓된 체험을 하게 될 때에 그 사람은 그러한 어려움이 없습니다.


마귀의 가공품인 그러한 체험은 과장으로 인도하고 또한 기만을 당한 사람은 불덩어리를 묘사할 수도 있고 전류나 뜨거운 기운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정의상 참된 체험은 묘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돌아다니면서 자기의 체험을 떠벌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감추어진 만나요 흰 돌입니다.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글쓴이 : 전상범|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성경과 세상 / 아더 핑크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일 5:4)

신약 성경은 세상과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해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세상의 참된 본질에 대해서도 분명히 규정하고 있고, 신자들에게 세상에 대하여 근엄하게 경고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은 이 “어두운 곳”(벧후 1:19)을 비추는 하늘로부터 온 빛이다. 말씀의 거룩한 광선은 만물의 진정한 색채를 드러내며, 수많은 물체를 가리고 있는 거짓된 외관과 신비한 매력을 꿰뚫고 그 실상을 드러낸다. 성경에서는 많은 수고가 필요하고, 많은 돈이 소비되며, 눈이 먼 얼뜨기들에 의해 지나치게 높은 찬양과 경탄을 받는 세상이 ‘하나님의 적’으로 선포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따르거나 사랑하는 일은 금지된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주제는 지금까지 다뤄 온 주제들에 비해 그 중요성이 결코 작지 않다. 그리고 진지한 독자라면 그것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헤아려 보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하시는 권면들 중 하나는 이렇다.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 각자가 자신이 이와 같은 경우에 해당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정직하고 성실하게 자신을 살펴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우리는 성경에 대해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 늘어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우리의 실제적 성장, 즉 그리스도의 형상을 실제로 닮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점검할 수 있는 한 가지 요점은 이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일이 나를 보다 덜 세상적으로 만들고 있는가?”

 

1. 세상의 참된 본질을 알게 된다

어느 시인은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옳다”고 노래한 바 있다. 이것은 어떤 관점에서는 옳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잘못이다. 왜냐하면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요일 5:19) 처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초자연적인 가르침을 주실 때에만 사람 중에서 높임을 받는 것이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눅 16:15)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세상은 언젠가는 안개처럼 없어질 것이 분명한 거대한 속임수, 속 빈 강정, 더러운 물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것은 크게 감사할 일이다.

논의를 더 진행하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해서는 안 되는 '세상‘에 대해 정의를 내려 보자. 성경에서 이보다 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 단어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런 문맥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대개 그 의미가 드러난다.

세상은 그 자체로 완벽한 사물의 체계나 질서다. 어떤 외부적인 요인도 그 속을 침투하지 못하며,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신속하게 세상에 순응하거나 동화된다. 세상은 동료 인간들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또한 자신의 성향에 따라 인간사회의 틀을 형성하고 있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육신의 생각”이라는 견고한 왕국을 건설한다(롬 8:7). 육신의 생각이 있는 곳에 세상이 있다. 그러므로 세속성이란 곧 하나님이 없는 세상을 의미한다.

 

2. 세상이 우리가 맞서야 할 대적임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딤전 6:12)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대적하고 정복해야 할 원수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부, 성자, 성령의 ‘거룩한 삼위일체’가 있듯이, 육신, 세상, 마귀의 ‘악한 삼위일체’도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들과 치명적으로 싸우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여기에서 ‘치명적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 싸움에서 마귀가 우리를 파멸시키든가. 아니며 우리가 마귀를 물리치든지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치명적인 적‘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또한 마음으로부터 세상을 쳐부수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왜냐하면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기” 때문이다(요일 5:4).

우리가 세상을 이겨야만 하는 이유들 중 몇 가지를 꼽아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세상적인 유혹들은 우리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소원하게 만든다. 이것은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박에 없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로부터 마음이 멀어지게 하는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세상의 영은 그리스도의 성령을 철저히 반대한다. 그런 까닭에 사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고전 2:12).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왔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요 1:10). 그러므로 이세상의 관원들과 지배자들은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전 2:8).

셋째, 세상적인 관심과 염려는 경건하고 천성적인 삶을 살지 못하도록 만든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1주일에 6일 동안 열심히 일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일하는 동안 그들은 계속해서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탐욕스런 관심사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에 의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영원한 존재로 가득 차 있을 때, 그것은 세상적인 것들의 부패한 영향력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다. 믿음의 눈은 만물의 진정한 색깔을 분별할 수 있으며, 그것들의 공허하고 헛될 뿐 아니라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영원한 것들과 비교할 가치조차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임재에 대한 체험은 세상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셔서 성도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중보하시며 성도의 최종적인 구원을 위해 만물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거룩한 구주를 바라볼 때, 그들은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 "주님 외엔 이 세상에서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당신은 앞에서 논의된 내용들에 진심으로 동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도 그러한가?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높에 평가하는 것들이 마음을 사로잡고 매혹하지는 않는가? 그들이 즐거워하는 또한 그 안에서 불행해지는 세상적인 것들로부터 떠나라. 당신도 그런 것들로 인해 울고 웃는가? 아니면, 당신의 기쁨과 만족은 아무도 당신으로부터 빼앗아 갈 수 없는 것들 안에 있는가?

바라건대 이런 질문들을 가볍게 취급하지 마라.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이것들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 이에 대한 정직한 대답은 당신의 영혼이 진정으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알려 주는 지표가 될 것이고, 또한 당신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여기면서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의 여부를 알려 줄 것이다.

 

3. 세상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모든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기 위해서(마 5:17).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요일 3:8),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지 위해서(살전 1:10),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마 1:21)뿐 아니라, 이 세상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세상의 미혹케 하는 영향력으로부터 우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오래 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루실 때 이미 예고되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노예였고, 이집트는 세상의 모형이었다. 그들은 바로를 위하여 벽돌을 만드는 일로 시간을 보내면서 모진 종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종살이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분의 전능하신 손길로 그들을 해방시키시고 쇠로 만든 화덕으로부터 끌어내셨다.

그리스도 역시 자신의 백성들에게 같은 일을 하신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의 마음을 짓누르는 세상의 권세를 깨부수신다. 그분은 자기 백성들이 세상의 호의를 얻기 위해 안달하지도 세상의 협박을 두려워하지도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독립시키신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대속물로 주셨다. 그 결과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악한 것들의 정죄하는 힘과 지배하는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왕죄를 차지하고 있는 사탄으로부터,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허탄한 욕망으로부터,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공허한 대화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도 이 복된 사역에 그리스도와 함께 동역하신다. 성령께서는 그들의 생각과 애정을 세상적인 것들이 아니라 천상의 것들로 향하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그 권능의 역사를 통해 그들을 주변의 비도덕적인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늘의 기준을 따르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이 은혜 안에서 성숙해지면, 그는 기준을 깨닫고 그것에 따라 행동한다. 그는 이 험악한 세상으로부터 완전한 구원을 바라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해주시기를 간구한다. 그는 한때 그를 매혹시켰던 것들에 대해 험오감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복되신 주님이 너무나 비참하게 수모를 당하신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고대한다.

 

4. 우리의 마음이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요일 2:15). “걸림돌이 행인에게, 몸무게가 육상선수에게, 올가미가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 문제가 되듯이, 세상에 대한 사랑은 삶의 여정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제가 된다. 그 사랑이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게 하든, 그 속으로 깊이 꼬여 들이든, 혹은 억지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던 간에 말이다”(나다나엘 하디, 1660)

우리는 마음이 이러한 부패로부터 깨끗해지기 전에는 하나님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 우리가 시간과 감각에 속한 것들을 초월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순종에 이르지 못한다. 마치 둥근 물체 위에서 물이 미끄러지듯이, 하늘의 진리 역시 세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서 미끄러져 내린다.

세상은 그리스도에게 등을 돌렸다. 비록 많은 곳에서 그분의 이름이 불리기는 하나, 세상은 사실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세상적인 것들이 의도하는 모든 것은 자기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세상의 목표와 추구는 댜양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자기를 만족케 하는 것이 종속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살고 그곳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동안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그들은 세상에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고, 세속적인 일들에 참여한다. 하지만, 세상이 그들을 행복하게 할지라도, 그들은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보화와 몫은 다를 곳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타락한 사람들의 모든 본능에 호소한다. 세상에는 그들을 유혹하는 온갖 것들로 넘쳐난다. 그것들은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그 눈길은 그것들을 향한 욕망과 사랑을 부추기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람k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심어 놓는다. 세상은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똑같이 치명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아무리 매력적이고 호소력이 있는 유혹거리가 많다고 하더라도, 세상의 모든 기쁨과 추구 오직 이 세상에서의 행복만을 증진시킬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 16:26), 막 8:36, 눅 9:25).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에 그리스도가 나타나심으로써 세상에 대한 생각을 바꾼다. 마치 어린 아이들이 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나타나면 아주 쉽게 이전 것을 집어던지듯이,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심령은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8)자 함이라고 고백하게 된다.

 

5. 세상과 구별된 길을 걷게 된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4:4). 이런 구절은 우리 모두룰 철저히 파고들어 우리를 전율하게 할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님께서 정죄하신 것들과 친하게 지내고 그 안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되는 동시에 나는 그리스도와 원수가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실수하지 말기를 바란다. 성경은 권고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구역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 이렇게 적혀 있다.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민 23:9). 거듭난 사람은 그 성품과 행실과 소원과 추구하는 바에 있어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과 분명한 차이가 있어야 한다. 다른 나라의 시민권을 가졌고, 다른 영의 인도를 받고, 다른 지배자의 통치를 받고, 다른 행선지로 여행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우리가 그 모든 것들을 멸시하는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특징을 잘 드러내도록 하자.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지 않기 때문에(롬 12:2)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기이히 여기게 되기를...(슥 3:8).

 

6. 세상을 미워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세상에 겉모습을 보존하고 그 모습을 그럴듯하고 훌륭한 상태로 유지하기는 얼마나 힘이 드는가! 세상의 관습과 예의, 호의와 관용 등은 세상에 점잖은 분위기를 주기 위해 고안된 장치들이다. 세상의 이면에서 들끓고 있는 타락상을 그럴듯하게 얼버무리기 위해서는 교회와 성당, 사제들과 고위 성직자들도 필요하다. 세상에 중요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기독교가 추가되고, 그리스도의 멍에를 한 번도 메어본 적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입술에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이 읊조려진다. 그들에 대해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

그렇다면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것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성경의 대답은 분명하다.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후 6:17). 그렇다면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좋할 때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당연히,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말씀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여기에서 말하는 세상이란 구제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가? 비로 앞 구절이 해답을 제공해 준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어떤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그분을 죽음에까지 내몰았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l하여 가장 열심을 내는체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종교적인 세상’이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기독교에 등을 돌리게 해보자,. 그러면 그들의 가장 격렬하고 가장 무자비하고 파렴치한 원수는 스스로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들어날 것이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리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

종교적인 세상이 당신을 미워하라 때 그것은 당신이 말씀으로부터 유익을 얻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이자 건강한 표시다. 그러나 당신이 교회나 회중들 사아에서 좋은 지위를 갖고 있다면, 당신이 하나님의 칭찬보다 사람들의 찬양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봐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7. 세상을 초월하게 된다

첫째, 우리는 세상의 관행이나 유행을 초월해야 한다. 세상적인 사람들은 그 시대에 만연하고 있는 관행이나 유행의 노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것이다(엡 4:13).

둘째, 세상의 염려와 슬픔을 초월해야 한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앓이라”(히 10:34).

셋째, 세상의 유혹을 초월해야 한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자들에게 세상의 화려한 빛과 현란함은 무슨 매력이 있겠는가? 아무것도 매력적이지 않다.

넷째, 세상의 견해와 인정은 초월해야 한다. 당신은 세상을 초월하고 그것에 맞서는 것을 배워 본적이 있는가? 만약 당신의 온 마음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에 맞추어져 있다면, 당신은 불경건한 이들의 비난에 전혀 마을 두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이 장에서 다룬 내용으로 자신을 헤아려 보기를 참으로 원하는가?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해 보라.

첫째, 여가 시간에 당신의 마을을 사로잡는 대상은 무엇인가? 당신의 생각이 가장 많이 머무는 대상은 무엇인가?

둘째, 당신이 선택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평일 저녁이나 주일 저녁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경절할 때,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는가?

셋째, 당신은 어떤 경우에 가장 슬퍼하는가? 세상적인 것을 상실했을 때인가, 아니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갖지 못할 때인가? 당신은 어떤 일에 더욱 크게 애통(혹은 분통)하는가? 당신의 계획이 망쳐졌을 때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향한 당신의 마음이 냉랭해졌을 때인가?

넷째, 당신이 즐겨하는 대화의 주제는 무엇인가? 당신은 그날의 뉴스에 매달리는가, 아니면 모두가 깊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가?

다섯째, 당신은 선한 의도를 실천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런 것들이 단지 공허한 망상에 지나지 않는가?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는 시간이 더 많아지고 있는가, 아니면 적어지고 있는가? 말씀이 꿀보다도 더 달콤한가, 아니면 말씀의 맛을 잃어버렸는가?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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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설교

황상하 

“유세통 졌나?”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력만 믿고 남에게 함부로 못되게 굶을 이르는 말입니다. 유서(諭書)는 임금이 신임하는 무장에게만 내리는 병력 동원 위임장입니다. 무장이 유서를 받는 것은 최고의 명예입니다. 유서를 전달할 때는 통에 넣어 짊어졌는데, 그 통을 짊어진 사람이 임금의 편지를 지고 가는 것으로 마치 자기가 큰 권세나 얻은 것처럼 오만 방자하게 구는 것을 빗대어 “유세통(有勢筒) 졌나?”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와 설교에 대한 묵상에서 “유세통 졌나?”라는 말이 떠올라, 내가 설교자로서 유세를 떨지나 않았나 해서 두렵고 한 편 부끄럽기도 합니다. 요즘은 ‘설교’라는 용어 대신에 ‘말씀 선포’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여기서 말씀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설교는 하나님, 말씀, 선포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설교자의 행위입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자부심이 무의식 가운데 하나님의 권위에 편승하는 태도로 바뀔 위험이 있습니다. 설교자는 단순히 유서(諭書)의 전달자와 다릅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려면 우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설교자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무리 인식 능력이 뛰어난 설교자라고 해도 인식해야 할 대상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자신의 인식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자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과 뜻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설교가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실제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설교자가 설교하는 내용을 알고는 있을까, 모르면서 설교해도 되는 걸까,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청중이 이해하지 못해도 설교해야 할까, 설교하는 내용을 확신하고 있을까, 혹시 자신의 경험을 진리라고 확신하는 것은 아닐까, 설교자가 잘못된 확신으로 설교하고 청중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은혜(?)를 받는 경우는 없을까, 피할 수 없이 제기되는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명쾌한 답을 찾지 못하는 것 역시 피조물의 한계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지만 선포해야 하는 딜레마를 안고,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해야만 하는 자입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합리적인 인간의 생각에 비해 독단적임에도 불구하고 독단적인 태도로 설교해서는 안 됩니다. 설교자의 역량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수행해야만 하는 것이 설교라면 그 설교는 정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아쉬움과 여운을 남기게 되는 설교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좋은 시가 여운을 남기고, 좋은 사람과의 만남이 여운을 남기듯이 좋은 설교는 여운을 남기는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청중들은 독단적인 설교에 은혜(?)를 받고 설교자는 청중들의 반응에 도취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독단적인 설교자는 자기가 은혜를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은혜를 끼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게 됩니다.

아무리 탁월한 설교라도 설교자가 교만하면 여운을 남길 수 없습니다. 설교자의 모든 행위는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이지만, 그 전제 하에 설교자의 역할과 성령님의 역할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성령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설교자가 인위적으로 은혜를 끼치려고 하는 것은 성령님의 하실 일에 월권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독단으로 빠지게 됩니다. 설교자가 바르고 겸손하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설교했다면 무엇인가 끝나지 않은 것 같아 아쉬운 여운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좋은 설교는 청중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지게 하는 설교입니다. 마음에 질문이 생기면서도 평안하고 안정되고 들레지 않고 다음 설교를 기대하게 하는 설교가 좋은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설교의 필요성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교회 자체가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장애가 된다는 생각이 점점 확산되고 있으니 설교나 설교자의 필요성에 대해 문제가 제기 되는 것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비판을 겸손하고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옛날에 비해 사람들의 교육 수준은 높아졌습니다. 과거에 스스로 독서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지만 오늘날은 거의 모든 사람이 책을 읽을 수 있고 특히 인터넷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이 방대하고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환경의 변화는 설교의 필요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충분한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의 필요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심층적으로 분석해보면 그 원인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권위가 상실되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설교자들에게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설교는 거의 예외 없이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게 됩니다. 에드윈 햇취(Edwin Hatch)는 ‘철학이 악하게 전락해 버리고 희랍인의 생활 속에서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미사여구로 꾸미려는 지나친 수사학의 구사 결과다.’라고 하였습니다. 수사학이 철학을 죽였다는 지적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일이 기독교에도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설교의 형식이 내용보다 중요시 되어 설교가 오락거리가 되었습니다. 설교 내용에 대한 결핍은 청중들로 하여금 형식과 표현과 감성에 집착하게 하였습니다, 그러한 청중의 취향은 설교뿐 아니라 예배까지 흥미 본위로 변질시켰습니다. 예배에 들어 온 지나친 노래와 간증은 말씀의 결핍에 대한 반증입니다. 가수, 운동선수, 연예인, 정치인, 학자, 성공한 기업인, 성공한 직장인, 그 외에 대중에게 잘 알려진 유명인들이 교회 강단에 서게 되는 것을 청중들은 설교보다 선호하게 되었고 심지어 설교보다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말씀의 권위가 떨어지면 사람들이 지향하게 되는 것은 오락입니다. 현대 교회의 간증과 노래는 거의 오락 수준입니다.

이렇게 되어가는 데도 비판자들은 설교 무용론과 청중의 필요를 말씀의 권위보다 앞세웁니다. 설교보다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하나가 되고 그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삶을 함께 나누는 것이 효과적인 복음 전파의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중요성의 우선순위에서 차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 우선이고 실천하고 본을 보이는 것은 차선입니다. 이 순서를 바꾸는 것은 매우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설교하는 것은 그것을 감당하기에 역량이 안 되는 일을 하도록 받은 소명이지만 절대로 양보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을 만큼 중요한 일입니다. 목사에게 여러 가지 중요한 일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일은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설교를 해서는 안 됩니다. 현대 교회의 설교는 누구나 연습만 하면 할 수 있는 수준의 설교가 태반입니다. 목사는 장로나 집사나 기타 노래를 인도하거나 간증 하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수준의 설교를 하면 안 됩니다. 원칙적으로는 목사가 아닌 사람도 목사보다 더 훌륭한 설교를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아마추어는 전문가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의 전문가(?)입니다. 아마추어도 덕담이나 경험이나 성공비결이나 복 받는 비결이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태도 등을 소개하거나 기도만능 믿음만능 식으로 강조하면 훌륭한(?) 설교가 됩니다. 이런 설교는 어는 정도 말재간이 있는 사람이 조금만 연습하면 훌륭히 해 낼 수 있습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면에서는 일반인들과 다르지 않지만 일반 청중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한 전문가로서 역량을 발휘하는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철학을 비웃을 수 있는 철학 이해, 성경적 안목으로 정치와 경제와 문화 일반에 대해 수준 있는 문제 제기를 할 수 있고, 보수와 진보를 아울러 비판할 수 있는 실력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은 좋은 설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프라입니다. 교회의 역사와 더불어 교리와 신학의 역사를 늘 공부해야 하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목사는 선지자와 같이 일반인들이 상상도 못한 예언자적 앞서감이 있어야 하는 데,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그것은 신탁(神託)에 의한 것이었지만, 오늘날 설교자에게 그것은 끊임없는 연구와 경건의 연습을 통해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 내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 딤전 4:11-13 -

출처: USA아멘넷/ 칼럼니스트

정이철 목사에게 드리는 사랑의 권고문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13:6)

 지금의 한국 교계는 참으로 암담합니다. 희망이 없단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젊은 세대에게 기대를 걸고 희망을 품어야 합니다. 따라서 아래와 같이 타협안을 제시함은 젊은 세대를 아끼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세대는 얼마 있지 않아 은퇴합니다. 그러나 다음 세대의 목사님들은 정말 바른 방법의 기조인 정직(Honest)으로 목회, 이단대처 등등을 잘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후배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회, 이단대처 등등을 할 때에 바르게/정직하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오히려 비난 받고 복음의 진보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드리오니 정이철 목사님은 잘 읽으시고, 우리의 제의를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혹시 의문사항이 있다면, 리플 달아주시면 되겠습니다.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잘 설명 드리겠습니다.  


우리의 제의는 아래와 같습니다.

1. 그 동안 허위 동조/서명자 이름을 올렸던 것에 대한 사과문을 여기 자유게시판에 올리십시요.
물론 진짜로 찬성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허위로 올려진 목사님들의 존함이 있기에 사과문 올리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합니다. 동시에 앞으론 그런 우를 범치 않겠단 약속을 하십시요.  

2. 그 동안 여기 저기 싸이트에 올린 “허위 동조/서명자 이름”을 낱낱이 삭제하겠단 약속을 하십시요. 제가 지적하는 분들은 모두 빼겠다는 약속도 하십시요.

3. 앞으론 진목연이란 명칭을 인터콥 대처에만 사용하겠단 약속을 하십시요.
처음 창립될 때의 목적이 오로지 인터콥 대처였습니다. 정이철 목사 자신도 그리 말하였습니다. 즉 “진목연이란 이름은 인터콥에 한하여 사용될 수 있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십시요

따라서 진목연 이란 명칭을 원래 목적이 아닌
 (1) 교황/ 천주교 대처에 사용하지 않겠다.  
 (2)  손기철 장로 비판, 등등에 둘러리로 세우지 않겠다.
 (3)  진목연이란 이름으로 어떤 세미나도 갖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십시요.
 (4)  진목연이란 이름을 정이철 목사의 개인의 글을 발표하는 데에 사용치 않겠단 약속을 하십시요.  

 이 것은 비단 저 뿐만이 아닌 많은 분들, 님에 의해 강제로 퇴출 당한 분들, 혹은 님의 단독 play가 정당하지 못하다고 판단, 스스로 자원하여 나간 분들, 처음 시작할 때에 참여했던 모든 분들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초기에 가졌던 원래의 목적과
약속이 그대로 이행되어야 합니다.

 정이철 목사 한 사람의 결정을 따라, 마음 먹기에 따라 그 목적이 바뀔 수 없습니다. 정이철 목사의 유익을 따라 그 단체의 목적이 이현령 비현령 식으로 바뀐다는 것은 옳지도 않고, 바람직 하지도 않습니다. 정이철 목사를 위해서 모인 것도 아니고, 정이철 목사의 신학을 위해 모인 진목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목연이란 이름을 인터콥 외에 다른 용도로 절대 사용치 않을 것을 약속하십시요. 오직 한인교회로 침투하려는 인터콥 대처에만 사용하는 것이 원래의 목적임을 유념하십시요.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싫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4. 만약 3번 항이 싫으시다면 새로운 단체를 만드십시요.
새로운 단체의 이름도 만들고 진목연이란 이름은 하나님의 역사 속에 묻어 두십시요. 아니 하나님께 돌려 드리십시요.  이유는 하나님의 종들인 목사들이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으로 만든 단체는 어느 일(1)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목사님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단체와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마친 후에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하고, 단체의 이름 등등도 모두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어느 일(1) 개인이 주도적으로 하였다고 해서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을 가로 챌 수 없습니다. 어느 한 개인이 더 많은 일을 했다고 하여서 하나님의 것을 가로챌순 없습니다. 가로채거나 자기의 것으로 삼으려고 한다면 그 것은 삯군이요 거짓 목사 입니다.

따라서 정이철 목사님은 새로운 단체를 만드십시요. 새로운 단체의 이름을 지으십시요. 그리하여 새로운 단체 이름으로 하고 픈 일들을 마음껏 하십시요. 새로운 단체 이름으로 세미나도 하고,  천주교 대처도 하고, 신사도운동 대처 … 등등도 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하면 정이철 목사님을 Blame, Complain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5. 참고로 정이철 목사님이 진목연 이름을 사용해선 안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이 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면상 밝히진 않겠습니다. 필요하다면 밝힐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상이 진실로 순수했던 진목연과 정이철 목사님을 사랑하는 목사님들의 제의입니다.  부디 받아들이셔서 우리와의 사이에 있었던 불화의 장벽이 무너지고, 화해의 장이 열리길 기도합니다.  앞으로 어떤 중요 사항이 있을 땐 서로 돕고 협력하는 관계가 되길 소망합니다.

11/10/2014

In Christ,

정홍기 목사(OK),  박진하 목사(NY), 김한길 목사(TX)  
외에 여러 목사들 (이상 연장자 순)
.


 
      ★ 한 번 인연을 맺으면 영원하라 ★ 오늘 목마르지 않다 하여 우물물에 돌 던지지 마라. 오늘 필요하지 않다 하여 친구를 팔꿈치로 떼밀지 마라. 오늘 배신하면 내일은 배신당한다. 사람의 우수한 지능은 개구리 지능과 동률을 이룰 때가 많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시절을 까맣게 잊듯 사람들도 자신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도움 주었던 사람들을 까맣게 잊고 산다. 그러다가 다시 어려움에 처하면 까맣게 잊고 있던 그를 찾아가 낯 뜨거운 도움을 청한다. 개구리와 다를 것이 뭐가 있는가? 비 올 때만 이용하는 우산처럼 사람을 필요할 때만 이용하고 배신해 버리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 우물물을 언제고 먹기 위해서는 먹지 않는 동안에도 깨끗이 관리해 놓아야 하듯이, 필요할 때 언제고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필요없는 동안에도 인맥을 유지시켜 놓아야 한다. 지금 당장 도움을 주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관심하거나 배신하면 그가 진정으로 필요하게 되었을 때 그의 앞에 나타날 수가 없게 된다. 포도 알맹이 빼먹듯 필요할 때만 이용해 먹고 배신해 버리면 상대방도 그와 똑같은 태도로 맞선다. 한번 맺은 인연은 소중히 간직하여 오래도록 필요한 사람으로 남겨 두는 것이 좋다 -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짧은 글 긴 여운"중에서
      I. O. U - Carry & 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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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사막의 아름다운 꽃잔치 모하비` 사막에 깔린 환상적인 카페트 - Califor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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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께서는 사막 그러면 어떤 모습으로 머리속에 그려지나요?설마 위의 그림과 같은 모습으로 그려 지리라고는 상상 도 못 하시겠지요?오늘은 여러분을 모시고 환상의 세계로 모시고 갈까해요.위에 보시는 것은 캘리포니아 의모하비 사막 에 있는 야생양귀비 보호구역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찍은 거예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이아니예요 ~~~라고 외쳐대는 물건 파는 사람들의 말처럼 날이면 날마다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 랍니다.

일년에 길어야 한 달,그것도 그 해의 비의 양과 기온에 따라서 거의 아무것도 볼 수 없는 해가 있는가 하면 정말로 현란한 광경을 보고황홀해 질 수도 있는.... 정말로 예측할 수 없는 곳이랍니다.한참 전에 갔었던 때보다는 아 주 못해서 첨에는 실망을 햇지만, 그래도 두번재 방문인 올해는 피크는 아니었지만,그런대로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야생화를 보고 탄성을 지르느라 목이 다 쉬어 버렸지 뭐예요.  자 그럼 지금부터 함께 가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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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제가 색칠한 게 아니냐고요?아무리 미술을 전공했어도 이렇게 자연에 칠하는 방법은 배우질 못햇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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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 파란 잔디 군데군데 피어있는 노란 꽃들의 무리가 마치 물감을 쏟아 놓은 거 같이 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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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면 말라 비틀어져서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황량한 사막의 덤풀로 덮일 곳이 지금은 이렇게 야생화로 덮여 있네요멀리 보이는 다른 색깔이 바로 야생 양귀비....점점 가까워 지니.... 와 ~~ 가슴 설레네요.

올해는 얼마나 예쁠까?일단은 공원의 주차장에 주차료를 내고 걸어 들어가니 바람이 여간 부는 게 아니었어요. 날라갈 정도라고 하면 좀 과장이 된걸까요하여간 상당히 거센 바람 사이로 머리칼 휘날리며 걷는 사람들이 꽤나 있었지 요.

앞으로 보여 드릴 사진에서 보시면 아시겠지만,이 정도면 여기서는 사람이 많다고 표현하거든요.
눈앞에 펼쳐진 이 광경을 보고 탄성을 안 지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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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양귀비로 주를 이루고 있는 곳에 하이킹 코스가 이곳 저곳에 있어서 몇 시간을 꽃 속을 거닐 수 있답니다.함께 꽃바람에 마음을 실어 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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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흙길에 바람이 부니, 눈에 입속은 먼지로 하나 가득..
카메라가 뿌옇게 보여서 이상하다 보니, 먼지가 순식간에 하나 가득 덮여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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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왔을때는 양귀비의 색깔이 좀 더 연하고 꽃도 키가 더 컸었는데, 올해는 키는 작지만, 색깔은 상당히 진하게 피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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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가다 보면 양귀비 사이로 이렇게 보라색 꽃도 섞여서 피어 있어요.그리고, 언덕위를 올려다 보면... 한 폭의 그림 같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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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느낌이세요?그냥 그 속에 푹 파 묻히고 싶지요?그런 유혹을 물리치고, 언덕에 올라 계곡을 내려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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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비구비 얽혀 잇는 길과는 대조를 이루는 꽃의 무리가 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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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으로 돌아 다른 쪽을 보면 이쪽은 또 다른 색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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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노련한 정원사가 정원을 가꾸면 이 만큼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해 낼 수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자연은 건드리지 않고 그냥 놔 뒀을때 가장 아름다운 거 같아요.그렇지 생각지 않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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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속에 파 묻히면 누구나 예뻐보이고, 또 마음마저도 꽃처럼 아름다워 지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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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이 눈에 들어 오면 걷느라 , 피곤한 다리도 매케한 콧구명도, 지금지금 무언가 씹히는 입도 다 잊을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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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거칠게만 보이는 오토바이족도 자연의 아름다움에는 그냥 한 없이 여려지는 모양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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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곳을 걷다 보면 천국이 따로 없을 거라는 생각이 다 들정도 였지요.
아름다움에 취해서 걷다 보니, 몇시간을 걸었는데도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나질 않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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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같으면 이런 곳을 쉽게 떠날 수 있을 거 같으세요?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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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탄자가 깔렸다 해도 좋고, 불이 났다고 해도 좋고...
하여간 표현을 어찌하든. 이 아름다움은 말로는 표현을 할 수 가 없었어요.
사실 카메라라도 그 아름다움을 100% 나타낼 수 는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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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꽤나 많지요?
모네의 그림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 셔터를 눌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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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양귀비보다는 키 작은 야생화가 더 많이 피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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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서 한 번 보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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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저 위를 굴러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더군요.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이렇게 흐드러지게 핀 양귀비도 말라 버릴거예요.주위의 마른 풀들처럼,,,,, 그렇게 내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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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풍경을 보여 드리면서 제가 말이 필요 없을 거 같네요. 그쵸?
지금서 부터는 제가 입을 다물고 조용히.....여러분 감상하시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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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고난’의 설교자 본회퍼Ⅲ
영혼을 움직인 설교자 11
출처: 교회와신앙
2008년 10월 02일 (목) 00:00:00 권영삼 032kwon@naver.com

   

 

본회퍼 설교는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 그는 철저하게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했다. 지나치리만큼 본문에 집중했기에, 예화나 적용도 없다. 그의 설교는 또한, 시대와 무관하지 않았다. 나치의 철권통치 아래에서도 본회퍼는 성경에 입각해 올바른 진리 선포를 포기하지 않았다.

본회퍼 설교에서는 대부분 시가 등장한다. 그는 시를 통해 기도의 제목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있다. 더불어 그의 설교 중심에는 항상 그리스도가 있었다. 본회퍼는 항상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설교했고, 고난에 대한 깊은 묵상을 통해 청중들을 감동시켰다. 그리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진정한 제자도의 삶을 강조하는 설교를 강단에서 거침없이 전한 설교자였다. 그 밖에도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서론을 생략하거나 짧게 언급한다.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고 있다.

 

본문 중심의 설교
본회퍼의 설교의 가장 큰 특징은, 그의 설교관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본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는 점이다. 그 실례로, 1937년 3월 마태복음 26:45-50절(『십자가의 부활의 명상』, pp.63-77) 본문의 설교에서, 본회퍼는 본문 한 절 한 절을 구체적으로 강해하고 있다. 특히, 47절 “말씀하실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라는 말씀과 50절 상반절의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그리고 50절 하반절의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등의 본문을 읽고 난 후, 그는 각각의 구절들을 전체 말씀의 문맥 안에서 풀어 설명하고 있다.

또한, 1938년 3월에 로마서 5:1-5절(『십자가의 부활의 명상』, pp.80-93)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도 구절에 집중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특별히, 3-5절까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을 순차적으로 설명하면서, 그 의미를 매우 구체적으로 설교하고 있다. 그뿐 아니다. 본회퍼의 시편 설교에서는 성경 구절을 정확하게 인용하되, 그 구절에 집중하여 설교를 전개하고 있다. 이처럼 본회퍼는, 그가 교수시절 학생들에게 가르친 내용을 그대로 설교에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다. 이것은 진리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가장 기본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그리고 본문에 대한 깊은 묵상과 주해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내용을 청중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본회퍼는 그 누구보다 본문에 충실한 설교자였다.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설교
본회퍼가 생존할 당시는, 나치 정권의 정치적 종교 탄압이 극에 달한 시대였다. 그런 억압과 모순의 시대를 살았던 설교자로서, 본회퍼는 설교를 통해 시대에 대한 비판과 성도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본회퍼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얼마 전인 1932년 6월, 골로새서 3:1-4을 본문으로 설교를 했다. 그는 이 설교를 통해, 이 세상의 부정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강력하게 저항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저항은 말씀과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들은 꿈꾸는 자도, 구름 너머에 있는 자도 아닌 것을,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 대해 충분히 증언할 수 있는지 그것이 문제이다. 우리들의 신앙은 결코 부정이 충만한 이 세상에서 마음 편안히 있게 하는 아편이 아니다. 우리들은 위엣 것을 생각하여야 하는 바로 그것 때문에 이 지상에서는 더욱 강력하게 부정에 대해 저항해야 하는 것이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씀과 행동으로 하는 저항에 앞장서야 하는 것이다. 처음엔 그처럼 혁명적인 기독교가, 어찌해서 오늘날에는 언제나 보수적인 입장에만 서야 되는 것인가?”(『기다리는 사람들』, pp.75-76).

그는 또한,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직후인 1933년 2월 사사기 7:2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강력하게 설교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처럼, 이 시대에 교회를 부르셔서 이 땅의 불의와 공포와 악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해방시키기를 원하시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무거운 책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상 속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본회퍼는 나치 정권의 교회 탄압이 극에 달했던 1937년을 전후로, 시편 58편을 본문으로 삼아 설교했다. 이 설교에는 시대적 상황과 이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본회퍼의 시편명상』, pp.99-115). 그는 시편 58편은 ‘복수의 시편’으로서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가능한 기도문임을 전제하면서, 그 본문을 통해 시대의 불의와 고통당하는 자들의 울부짖음 그리고 압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기대 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적용과 예화가 없는 설교
본회퍼 설교의 또 다른 특징은, 예화나 적용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가끔 나치 정권이라는 시대적 환경 속에서 회중의 행동을 촉구하는 적용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본회퍼가 설교관에서 밝히고 있듯이, 유일한 적용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설교에 있어서 적용은 불필요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본회퍼는 설교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로지 본문을 중심으로 한 강해뿐이었다. 예화 역시 마찬가지다. 본회퍼에게 있어, 예화 또한 말씀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게 하는 위험 요소였다. 그는 예화를 설교에서 피해야 할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설교에서 적용은 반드시 필요하다. 설교의 목적은 ‘청중의 변화’이기에, 설교는 적용을 통해 사람의 변화를 촉구할 수 있어야 한다. 적용이란 설교 끝에 덧붙여진 하나의 결론 같은 것이 아니다. 있어도 괜찮고 없어도 무방한 선택의 문제도 아니다. 거룩한 변화의 목적 없이 설교할 수 없듯이, 적용을 향한 촉구 없는 진정한 기독교적 설교 역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시적 감흥이 있는 설교
본회퍼와 관련된 서적들을 보면, 그의 삶 속에서 시가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본회퍼는 감옥에 있을 때에도 시를 통하여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곤 하였다. 이런 정서는 그의 설교에도 자주 등장한다. 본회퍼는 설교 중간이나 마무리 부분에서 시와 같은 기도문들을 자주 사용한다.

“하나님이시여, 우리들의 기다림 속으로 걸어와 주옵소서.
하나님이여 우리들은 당신의 구속을 기다리며
당신의 심판을, 당신의 사랑을, 당신의 평화를 기다리고 있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라’(계 3:20).
그러므로 우리도 말씀드립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아멘”(1931년 11월, 누가복음 12:35-40을 본문으로 한 설교, 『기다리는 사람들』, p.25).

그 밖에 시편 42편 설교를 보면, 각 구절에 대한 설교가 끝날 때마다 그 구절에 맞는 기도문을 기록하고 있다. 이 처럼 본회퍼의 설교에 본문을 잘 요약하는 시구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그가 한편의 설교를 완성할 때 얼마나 많은 묵상과 연구를 거듭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
본회퍼 설교의 또 다른 특징은, 설교의 결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고난을 넘어선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회퍼는 암울한 나치 정권 하의 고난과 핍박 속에 있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설교를 통하여 위로와 희망을 전했다. 그는 또한,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해오던 옥중에서도 동료들에게 말씀을 통해 위로와 소망을 전했다.

지나친 낙관주의나 근거 없는 희망은 우리가 분명하게 경계해야 부분이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운 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통한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는 설교자가 간직해야 할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일 것이다.

 

본회퍼 설교의 단점
본회퍼는 매우 많은 장점을 지닌 설교자였으나, 몇 가지 점에서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는 당시의 독일 기독교가 사변적 형이상학에 머무르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종교성이 배제된 기독교’(Religionless Christianity)를 주장했다. 그리고 비종교화를 통해 기독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현존하는 이 세상에서 그 역할을 다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같은 신학적 이론은 세속화 신학을 통한 급진적 제자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의 신학은 1960년대에 급진적 세속 신학자들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본회퍼 설교의 또 다른 문제점 중 하나는 그의 성경관에서 찾을 수 있다. 에버하르트 베트게는 본회퍼가 개신교의 ‘하나님 말씀론’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축자영감설에 예민하게 반응했다고 비판했다. 본회퍼는 말씀을 정치적 관점에서 깊이 이해했고, 그러한 말씀 이해는 오늘날까지 교회에 커다란 도전이 되었다. 본회퍼에게는 그만큼 축자영감설이 불편했고 말씀의 정치적 이해가 절실했다.

본회퍼의 정치 편향적인 설교도 문제다. 암울한 시대 속에서 실천적 신앙을 강조하며 정치적 행동을 촉구하는 그의 설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같이 정치 성향으로 크게 치우친 설교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본질을 흐리게 할 염려가 있다.

 

본회퍼가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
본회퍼 설교는 철저히 성경 본문을 근거로 한 강해설교라는 점이다. 이런 그의 설교관은 말씀은 사라진 채, 일상의 삶과 예화만이 가득한 한국교회 강단에 커다란 도전이 된다. 그는 또, 설교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둔 설교자였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 강단의 설교는 어떠한가? 보편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한국교회 설교가 지나치게 기복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성경이 성도의 복된 생활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핵심은 성도들이 얼마나 복 받는 삶을 살고, 또 얼마나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면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핵심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이다. 그 구원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와 그 고난이다. 그러기에 설교의 중심도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

본회퍼는 강단에서 행한 설교와 삶이 철저하게 일치되도록 살다간 설교자였다. 그는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것을 선포했다. 나치 정권의 암울한 환경 속에서도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실천적인 믿음을 촉구했다. 그리고 강단에서 선포한 대로,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이 땅 가운데 진정한 평화를 이루고자 몸부림치다가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실천적 방법들이 옳았는가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본회퍼는 신학자요 설교자이기 이전에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 가운데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뇌했고, 거기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요 설교자였다는 사실이다. 삶이 곧 거룩한 한 편의 설교가 되는 설교자, 그런 설교자가 차고 넘치는 한국교회 강단을 소망해 본다.

한창덕 목사 / 한국교회연합 바른신앙수호위원회 전문위원

<글 싣는 순서>
1. 다락방의 이단성
2. 다락방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
  1) 삼위일체의 양태론
  2) 다락방의 기독론
3. ‘비밀’이란 단어로 구성된 다락방의 교리들
  1) 베뢰아 귀신론과 동일한 사탄신학
  2) 다른 복음
  3) 다른 그리스도
  4) 번영신학
  5) 신화사상
4. 결론












류광수 다락방은 고신(1995/45, 1997/47/이단), 통합(1996/81/사이비성), 합동(1996/81/이단), 합신(1996/81/위험한 사상, 참여금지), 기성(1997/52/사이비운동), 기감(1998/23/이단), 고려(1995/45/유사기독교운동, 사이비기독교운동), 개혁, 기침 등 9개 교단에서 이단 및 사이비 단체 등으로 규정하였다.

다락방에서는 김기동 베뢰아 귀신론과 같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불행, 질병, 가난, 사건·사고, 재앙 등이 다 사단 때문이라고 하며, 사단만 멸망시켜버리면 그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한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단을 멸해버리셨으니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하면서 구원파와 같은 논리를 전개하고 ‘그리스도의 비밀’, ‘복음의 비밀’, ‘언약의 비밀’, ‘영접의 비밀’, ‘삼위일체의 비밀’, 그리고 ‘임마누엘의 비밀’ 등 비밀시리즈로 이어지는 핵심적인 교리들을 통하여 ‘사람이 하나님 된다’는 지방교회의 ‘신화사상’을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다락방이 베뢰아와 흡사하다는 말을 듣게 된 이유이며, ‘천사 동원권’과 ‘사단 결박권’ 등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것을 자기들의 주장과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사람이 하게 된다고 한 이유이다. 그러므로 다락방은 과거에도 그렇지만 지금도 확실히 이단이다.

1. 다락방의 이단성

다락방은 확실한 이단성을 가지고 있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에 관한 양태론적 이해나 성자의 인격으로 오셔서 한 분이시지만 온전한 인성을 취하셔서 참 하나님과 동시에 참 사람이 되신 예수님에 관해 “영은 하나님이시고 몸만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신 분”(류광수, <복음편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이라고 하면서 주님의 인성을 반쪽만 인정해서 결국 그분의 온전한 인성을 부인한 것 등이다.

전자는 흔히 한국교회의 많은 분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 또한 오해였다고 하며 변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는 381년에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아폴리나리우스와 같은 사상이기 때문에 변명하기 어렵다.

물론, 어떻게 생각하면 그와 같은 것들은 단편적인 것으로써 실수나 무지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그와 같은 정도의 실수는 털어서 먼지 안 날 사람이 없는 것과 같이 어떤 목회자라도 할 수 있는 정도인데 그것을 가지고 이단이라 정죄 한다면 거기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하면서 그것은 지나친 처사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단편적인 실수나 무지로 인한 문제에 대해서는 함부로 이단으로 정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다락방의 문제는 그와 같은 것들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는 그들의 전체적인 교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들의 그 교리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이는 베뢰아와 비슷한 사탄신학과 지방교회의 신화사상 등에 핵심적인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다락방의 또 다른 문제점은 대부분의 이단이나 불건전 사이비 단체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은 그들의 교회론적인 특징, 즉 교주가 실제적으로는 교인들과 직접적으로 관계되어 있어서 목회자는 다만 관리자에 불과한 것과 같은 체제로 되어 있는가 하면 불건전한 번영신학 등도 문제점이라 할 수가 있다.

2. 다락방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

류광수 목사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을 바로 알아야 그의 ‘신화사상’을 바로 알 수 있고, 그의 전체적인 주장이 어떻게 지방교회와 연관되는지 알 수 있다.

1) 삼위일체의 양태론
류광수 목사는 삼위일체에 있어서 양태론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 한다.

“더 확실한 것은 고린도전서 3장 16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우리 속에 성령이 계신다. 우리 안에 누가 계신단 말이지요. 하나님이 계신다. 이것 보고 삼위일체, 그래 삼위일체 교리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단들은 전부 삼위일체를 부인하지요”(EBS 양육 테이프 2).

이 내용은 고려 측에서 류광수 목사의 잘못된 삼위일체론을 통하여 지방교회와의 관련성을 지적하고 나아가서는 인간의 신격화, 즉 지방교회에서 ‘사람이 하나님 된다’라고 하는 신화사상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을 밝히기 위하여 인용하며 비판한 것이다.

지방교회에서는 하나님이 본질이 하나이지만 구별된 세 인격으로 존재 하신다는 정통 삼위일체와는 다르게 본질도 인격도 하나라는 삼일론을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의 신관은 양태론일 수밖에 없는데, 류광수 목사 또한 그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개혁측 나용화 교수는 “성자는 성부와 함께 같은 성령을 가지고 계시므로 성부와 함께 한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전체로 성자 안에 내주하고, 성자는 전체로 성부 안에 상호 내주하신다”는 ‘상호내주’를 통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하나님이 교회 안에 함께 동시에 항상 계신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성경적 진리이므로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이라고 하면서 고려 총회 신학부의 지적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며 다락방을 옹호 하였다.

그러나 나용화 교수의 옹호는 정당하지 못하다. 하나님은 신격, 혹은 본질이 하나이시기 때문에 삼위일체 중 삼위의 하나님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을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며, 위격들이 상호내재 해서 소위 ‘페리코레시스’라 불리는 상호교류와 상호순환이 있어 신성이 분할된 위격들 안에 분할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여 세 위격은 각각 자신 안에 동일실체 전부를 갖기 때문에 성부 안에는 성자와 성령이 있고, 성자 안에 성부와 성령이 있으며, 성령 안에 성부와 성자가 있으므로 각 위격은 실체에 관한한 다른 위격들을 완전히 포괄하고 관통한다.

그러므로 이것만 보면 나용화 교수의 옹호가 어느 정도 옳은 것 같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는 갑바도키아의 바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 닛사의 그레고리 등 세 교부들의 연구에 의해 상호내주뿐만 아니라 상호구별에 가서야 비로소 정리가 되게 되었으며 오늘의 신앙고백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삼위간의 상호내재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는 서로 다른 위격들과 공유할 수 없는 특성이 있어서 상호 구별되기 때문에 성부는 성자와 성령이 아니고, 성자는 성부나 성령이 아니며, 성령 또한 성부나 성자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내주를 가리켜 삼위일체라고 하면 안 되는데, 나용화 교수는 그것을 무시하고 각 사람의 심령에 임한 성령의 내주를 양태론적 입장에서 삼위일체라고 한 것을 가리켜 정통 개혁주의 삼위일체라 하며 옹호하고 만 것이다.

물론, 각 사람의 심령에 임하는 성령의 내주를 하나님이 거룩한 영이시다라는 측면에서 성령이라 하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며, 이런 측면에서 성경에는 하나님의 영이나 여호와의 신,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을 성령이라 하기도 하고, 또한 삼위 하나님을 본질이 하나요 분리할 수 없는 같은 하나님이란 측면에서 여호와가 예수님으로 인용되기도 하며, 예수의 영을 성령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호 구별된 인격으로서의 삼위를 말할 때에는 성령을 삼위일체라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성육신 하신 분이 성자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이 되기도 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성부라는 ‘성부 수난설’을 주장하게 되기도 하는데, 류광수 목사는 그것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류광수 목사의 삼위일체에 관한 양태론적인 입장은 이 외에도 많이 있다.

다음은 류광수 목사의 <현장복음 메시지>에 있는 것으로, 필자가 보기에는 여기에만 봐도 그의 양태론적 입장이 바글바글한데 이와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리고 그의 주장을 양태론이 아니며 정통 개혁주의 삼위일체라고 했던 나용화 교수가 이 글을 보면 뭐라고 변명할지 궁금하다.

{ △ 이 예수님께서 지금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3가지 치료가 나타나는 것이다. 요 16:4~24절에 주님 재림 오시는 날까지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성령을 보내사 너희와 영원히 같이 있겠다고 하였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성부 하나님,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성자 하나님, 지금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 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시다.
△ 베드로가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완전히 힘이 생겨서 바뀌어 버렸다. 바리새인들이 모인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담대히 말했다. “내가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과 사람의 말을 듣는것 중에서 어느 것이 옳은지 생각해 보라.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노라!”고 담대히 말했다.

△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위협하니까,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다.
△ 이러고 나서 기도하는데, 행 4:29~39절에 성령이 그대로 임하신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이것이 안 되어지면 여러분의 일이 안되어진다.
△ 행 2:1~13절에 보니까, 마가 다락방에서 기도하는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거기 역사하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힘을 얻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면서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말했는데, 앉은뱅이가 일어나 버렸다. 너무너무 놀라운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계속 터집니다. 겁도 없이 예수 믿는 사람 잡아 죽이려고 설치는 사울 앞에 주님이 나타나신 것이다. 그 일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 어떤 사람은 큰 실수를 한다. 행 1:8절을 유언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죽었는가? 유언을 하시게? 부활하신 주님의 첫 번째 명령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힘하시면…” 이 말은, ‘나의 영이 너희에게 역사하면’ 이란 말이다.
△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살아계신 증거로 역사하시겠다는 뜻이다. 이 역사가 지금 그대로 일어나고 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

류광수 목사의 이와 같은 주장에는 그의 양태론적 주장들이 그대로 녹아 있는데, 간추려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그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재림 때까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실 것이라 하면서 성령으로 너희와 영원히 같이 함께 있을 것이라 하셨는데, 그와 같이 모순처럼 보이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같은 하나님’이라는 것, 즉 ‘성부 = 성자 = 성령’이기 때문에 그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라 하였고,

둘째, 베드로가 그 사실을 깨닫고 바리새인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한 다음 기도 했더니 성령이 임하셨는데 그것을 부활하신 주님의 역사라고 하였으며,

셋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다른 보혜사를 약속 하시고(요 14:16~17), 승천하시기 직전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4~5)고 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이 박해를 피해 도망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아 기도하였고, 오순절 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여 제자들이 방언을 하고 각 사람의 위에 불의 혀 같은 것이 갈라지는 모습이 보이게 되었는데 그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부활하신 주님의 역사라고 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이라 하였으며,

넷째,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라고 하신 다음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 가셨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어떤 사람들이 그분이 이 세상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이란 뜻에서 유언이라고 한 것에 대해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비판 하면서 성령의 예고를 “나의 영이 너희에게 역사하면”이란 뜻으로 바꾸어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제 2위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영과 성령을 같은 분으로 본 것 등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16~17절에서 제자들에게 분명히 당신이 떠나가서 ‘다른 보혜사’를 보낼 것이라 하셨고, 그 다른 보혜사가 제자들의 ‘속에 거하실 것’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오순절 때 다른 보혜사로 오셔서 성도들의 속에 계신 성령과 그분은 분명히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분이시다. 그런데도 류광수 목사는 그것을 정면에서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하나님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된 세 인격으로 존재하시지만 본질(본체)이 하나라는 하나님의 존재양식에 대한 표현이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하나님이시지만 성부는 성자나 성령이 아니며, 성자 또한 성부나 성령이 아니고, 성령은 성부나 성자가 아니다. 그런데 류광수 목사는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가 양태론자가 아니며, 그의 주장을 정통 개혁주의 삼위일체라 할 수가 있겠는가!

2) 다락방의 기독론
류광수 목사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성도 부인한다. 그는 <복음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 하였다.

① 영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요 1:14).
△ 우리가 만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길을 여셨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② 그러므로 그분은 죄가 없고 그 영은 하나님이십니다(고전 15:45).
△ 고전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③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④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가진 분입니다(마 16:16~19). -영은 하나님이시고 몸만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다.

류광수 목사는 성육신의 목적을 설명하는 가운데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고 하며, “그 영이 하나님이므로 죄가 없다”는 주장을 하다가 “영은 하나님이고 몸만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신 분이 예수”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인성의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였다. 즉, 사람이라면 영혼과 육체가 있어야 온전한 사람이라 할 수가 있는데, 그는 예수님에게 있어서 인성의 영혼이 없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영이 있다고 함으로 그분이 참 사람도 되신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의 인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단이다.

그러면 류광수 목사는 양태론 뿐만 아니라 왜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일까?

3. ‘비밀’이란 단어로 구성된 다락방의 교리들

다락방의 교리는 주로 ‘비밀’이란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복음의 비밀’, ‘그리스도의 비밀’, ‘영접의 비밀’, ‘언약의 비밀’, ‘삼위일체의 비밀’, ‘임마누엘의 비밀’ 등이 곧 그것인데, 이것들은 상호간에 깊은 관계가 있다.

다락방에서 말하는 ‘복음’과 ‘복음의 비밀’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도는 예수님이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직을 가지고 있다는 그분의 삼중직을 의미하고, 영접의 비밀은 그 삼중직을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임마누엘의 비밀은 그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분이 우리와 임마누엘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락방의 이와 같은 주장들은 겉으로 보기엔 정통교회의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게 보인다. 그러나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핵심적인 것에서 서로 의미가 다른 것을 알 수가 있다.

다락방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핵심 교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다. 그들은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다 하면서 사람들은 이리 저리 얘기하지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칭찬하시고 그에게 천국 열쇠를 주었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고, 그것을 증거 하는 것이 다락방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런 것만 보면 다락방의 주장은 정통교회와 같아 보인다.

그리스도란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세 가지 직분 자를 세울 때 기름을 부었으니 곧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였다. 다락방에서는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강조하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강조한다.

사실, 이와 같은 주장도 정통교회의 주장과 같아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 삼중직의 의미가 정통교회에서 말하는 의미와 다르기 때문에 다락방에서 주장한 그리스도는 정통교회에서 말한 그리스도가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국 정통 교회와 다른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제 그들의 ‘비밀 시리즈’가 무엇이 문제인지 류광수 목사의 신학사상을 통하여 차근차근 살펴보자.

1) 베뢰아 귀신론과 동일한 사탄신학
다락방에서는 베뢰아 귀신론과 같이 귀신이 자신의 수명을 다 하지 못하고 죽은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한사코 자신들이 베뢰아 귀신론이 아니라고 항변 한다. 그러나 그들의 기본적인 주장은 베뢰아 귀신론과 동일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인류의 모든 불행이 창세기 3장에 나타난 사건 때문이며, 인간의 타락의 원인은 사단의 유혹 때문이고,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인류는 사단의 종이 되어 그의 영향아래 있으므로 헤어 나오지 못할 운명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각종 사고나 질병, 실패 등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해 모든 문제는 사탄 때문에 일어난다고 하면서 사탄을 멸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하며, 사탄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 하기도 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논리 형식은 베뢰아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락방의 교주라 할 수 있는 류광수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축복이 회복되었습니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기도 한다.

“창세기 1장 27~28절에 원래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는데, 창세기 3장 1~6절을 보니 마귀에게 이 축복을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3장 8절에 예수님께서 이것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래서 회복이 되었는데 옛날과는 다릅니다. 복음을 통해서 회복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예수님 없이 바로 누렸는데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후부터는 복음을 통해서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 찾아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비밀입니다”(류광수, <파급단계>, p.95).

인간은 마귀 때문에 축복을 빼앗긴 것이지 마귀에게 빼앗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마귀에게 축복을 빼앗겼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 그렇다면 마귀는 인간이 가지고 있던 축복까지 가져갔으니 축복받은 존재가 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류광수 목사는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는 요한일서 3장 8절에 있는 성경 구절의 내용까지는 쓰지 않았지만 그는 그 구절을 이용하여 예수님께서 그것을 회복시키셨다고 한다.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다 찾아냈는데 그것이 비밀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비밀이라고 한 이 주장부터가 그의 비밀이라고 하는 주장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궁극적으로는 타락하기 이전보다 더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죽음도, 고통도, 눈물도, 한숨도, 질병도 없는 영원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재림 이후에 최종적으로 구원이 완성되어 영화로운 몸이 되었을 때에 그렇게 된다는 것이지 지금 현실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해 구원받아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더라도 ‘아직’ 최종적인 구원의 상태인 영화로운 몸이 되지 않았고, 천국 또한 어떤 의미로 보면 ‘이미’ 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아직’ 임하지 않아 완성된 천국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이후에 변해버린 가시나무와 엉겅퀴가 있는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타락하기 이전과는 다르게 죽기도 하고 병들기도 하며, 또 때론 자연의 재해를 통해 고통을 당하며 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락방에서는 이 차이를 무시하고 주님의 복음을 통하여 창세기 3장에서 타락하기 이전의 복을 다 찾아 누리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락방의 비밀 교리들은 이미 여기에서부터 잘못된 것이다.

2) 다른 복음
다락방에서는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그리스도의 비밀’이라 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을 ‘영접의 비밀’이라 하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을 ‘복음의 비밀’이라 하고, 성령의 내주를 ‘임마누엘의 비밀’이라고 하는데, 이 임마누엘의 비밀로 이끌어가는 것이 양태론인 ‘삼위일체의 비밀’과 아폴리나리우스 사상과 같은 예수님의 성육신이며, 그들이 성육신과 성령의 내주를 같은 것으로 보는 이유이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하나님의 자녀에게 임하신 성령의 내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성육신은 삼위일체 중 제 이 위의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당신의 인격으로 우리와 같은 마리아의 살과 피를 취하여 참 하나님으로써 참 사람이 되신 사건이다. 그러나 그분이 비록 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되기는 하셨지만 성자 하나님의 인격으로 오셨기 때문에 두 분이 아니라 한 분 그리스도시요 주로써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써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되신다. 그분은 하나님으로써의 중단됨이 없이 인성을 취하여 신·인이 되신 사건이 바로 성육신인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에게 임한 성령의 내주는 성육신과 다르다.

성령의 내주는 성자 하나님과는 구별되신 성령께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을 기억나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시며(요 14: 26), 그분을 믿고(요 16:7~11),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보증하시고 인치신 것으로(엡 1:13), 거듭나게 하기 위하여 성도들의 심령에 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내주는 성육신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 되는 것은 결코 아니며, 성령이 임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다락방에서는 이 둘을 같은 의미로 보기 때문에 각종 ‘비밀’이라 칭하는 교리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며, 인간이 성령의 내주를 통하여 마치 하나님이 되기나 한 것처럼 ‘천사 동원권’, ‘사탄 결박권’ 등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세를 사람도 행한다 하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들은 우리가 믿는 복음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복음이다.

3) 다른 그리스도
다락방에서 정통교회와 다른 복음을 주장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그리스도라는 개념이 정통교회에서 믿고 있는 그리스도란 개념과 다르기 때문이다. 다락방의 류광수 목사는 다음과 같은 주장들을 한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세 가지로 압축이 되며 그것도 한가지로 압축됩니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창 3:1~20). 그것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났습니다(롬 3:23). 그 배후에는 사단이 미혹하여 인간을 실패시킨 것입니다(요 8:44). 이 문제를 해결한 분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실제로 발견해야 합니다”(류광수, <성경적인 다락방 전도>, p.49).

“근본 문제 해결 - 그리스도다.
근본 원인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서 간단하게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말은,
① 사단을 꺽은 왕이다. 기름부음 받은 자 이런 말은 할 필요가 없어요. 전도하는데…그렇죠. 그리스도란 말은 사단을 꺽은 왕이라 그 말입니다.
② 그리스도라는 말은 하나님의 성령이 임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소개하는 선지자라는 그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죠? 말씀을 따라 성령이 임하니까. 선지자가 말씀을 전하지 않습니까?
③ 그리스도 이 말은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와 실패를 전부 해방시켜 버리신 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지금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고 정말 내가 마음에 믿고 기도하면 그 날부터 성령이 내게 역사하는 것인데 그것을 보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류광수, <기본 메시지>, 1집).

“그리스도를 바르게 아는 자는 어떤 것을 알고 있는 자입니까?
① 그리스도는 창 3:1~20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참 선지자).
② 그리스도는 롬 3:23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참 제사장).
③ 그리스도는 요 8:44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참 왕).
이 사실을 아는 자는 모든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류광수, <성경적인 다락방 전도>, p.17).

“‘그리스도’라는 증거에서 초대교회의 모든 문제해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란 말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글자의 의미는 알아도 사실을 몰랐습니다. 여기서 유대인은 구원을 얻지 못하는 실패에 빠졌고, 초대교회는 이 의미의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세상을 살렸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선지자, 제사장, 왕에게만 기름을 붓는데 바로 예수는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되는 참선지자라는 말입니다(요 14:6). 죄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가는 참 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세상과 사단을 이긴 참된 왕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을 구원 혹은 성령의 내주(요 1:12, 요 14:16~17, 고전 3:16)라는 것입니다. 구원과 평안의 증거가 실제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분을 구주로 영접할 때 참 제사장의 증거인 해방(미신, 점, 죄, 지옥, 모든 악한 것)되는 증거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증거했습니다”(류광수, <성경적인 다락방 전도>, p.11)>

“그렇다면 전도는 무엇입니까?
①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마4:19, 막3:14~15, 마28:18~20
② 응답하시는 그리스도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엄청난 비밀을 계속 고백 했습니다.
△ 최고의 지식이 그리스도를 얻는 것입니다(빌 3:1~7).
그리스도의 비밀을 발견하면 모든 것을 얻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발견되기를 소원했습니다(빌 3:7~8)”(류광수, <성경적인 다락방 전도>, p.30).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정말로 정말로 모든 일의 원인이 되는 사단의 세력을 꺽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 구주로 영접하면 거기에서 해방됩니다”(류광수, <기본메시지>, p.2).

진정으로 한 분만 알면 당신 모든 문제가 해결이 다 된다. 진짜 진실하게 얘기했습니다. 당신이 한분만 알면 다 해결된다”(류광수, <기본메시지>, p.3).

이 주장들만 보아도 류광수 목사가 얼마나 베뢰아 사상에 찌들어 있는지 알 수가 있다. 그런데 그는 베뢰아 사상과 같은 주장을 하면서 귀신을 쫓아내는 성락교회의 김기동 목사와 같은 축사를 하는 대신에 그 자리에 ‘그리스도’를 넣고 그리스도가 현실적인 모든 문제를 해결했으므로 그런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다락방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사단을 꺽은 왕’으로서의 왕이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로서의 선지자이며, ‘인생의 모든 저주와 실패를 전부 해방시켜버리신 분’으로서의 제사장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인생의 모든 문제는 창세기 3장 사건 때문에 생긴 것인데, 인간의 타락의 원인은 사단의 유혹 때문이며,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인류는 사단의 종이 되어 그의 영향아래 있기 때문에 헤어 나오지 못할 운명 속에 살고 있고, 사단은 각종 사고나 질병, 실패 등 모든 문제가 발생하게 하는데 예수님께서 사단을 멸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사단을 꺾고 모든 문제의 원인을 해결했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라 하며, 그것을 ‘그리스도의 비밀’이라 하고, 그런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을 ‘영접의 비밀’이라 하며, 그것을 ‘복음의 비밀’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락방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와 정통교회에서 믿는 그리스도는 다르다. 왜냐하면 정통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서 상의 그리스도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문 31 : 왜 그를 그리스도, 즉 기름 부음 받은 이라고 부릅니까?
답 :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성령으로 기름 부어 우리의 대선지자요, 선생으로 세우셨습니다. 선지자로서 그는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숨은 결정과 뜻을 완전하게 계시하십니다. 그는 또한 우리의 유일한 대제사장으로 세우심을 받으셔서 자신의 몸을 단번에 제물로 드려 우리를 구속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늘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영원한 왕으로 세우심을 받으셔서 말씀과 영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며 다 이루신 구속으로 우리를 보호하시며 보존하십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문 42 : 우리의 중보자를 왜 그리스도라고 부릅니까?
답 : 우리의 중보자를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분이 성령으로 한량없이 기름 부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구별되셨으며, 자신을 낮추신 가운데서나 높이 들림을 받으신 가운데서, 모든 권위와 능력을 충만히 부여 받으셔서 당신의 교회의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의 직능을 다하십니다.

문 43 :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선지자의 직능을 다하십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는 시대마다 여러 가지 달리 경영하심으로써 사람들을 교훈하고 구원하는 모든 일에 관한 하나님의 온 뜻을 나타내 보이심으로 선지자의 직능을 다하십니다.

문 44 :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제사장의 직능을 다하십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고자 자신을 하나님께 흠 없는 희생 제물로 단번에 드리심으로써,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계속 중보의 일을 하심으로써 제사장의 직능을 다하십니다.

문 45 :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왕의 직능을 다하십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세상으로부터 자신에게로 불러내시고 그들에게 직분과 법을 주시고 책망하심으로써 왕의 직능을 다하십니다. 이를 통하여 주께서는 그들을 눈에 보이게 다스리십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택함을 받은 이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부여하십니다. 그들이 순종하면 상을 주시고, 그들이 죄를 범하면 징계하시며, 그들이 시험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거나 원수를 제압하고 정복할 때 그들을 보전하시고 도우십니다. 주께서는 당신의 영광과 백성들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사물을 능력 있게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복음을 순종치 않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으심으로써 왕의 직능을 다하십니다.

‘그리스도’란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구약시대에는 세 종류의 직분 자를 세울 때 기름을 부었다. 세 직분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었는데, 선지자는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며 메시야를 증거 하는 자로써 말씀이 육신이 되어 참된 선지자로 말씀을 가르쳐주실 예수님을 예표 하는 자였고,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써 제사를 집전하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역할을 함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하신 중보자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던 자였으며, 왕은 이방의 왕처럼 절대 권력을 누리며 자신의 뜻대로 통치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인 율법으로 다스리며 그 말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백성들을 보호하고 다스림으로써 우리의 왕이 되셔서 말씀으로 다스리시고 보호하실 예수님을 예표 하는 자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란 말,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세움을 입은 자란 뜻이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라는 말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이며 그리스도란 말이 기름이라는 상징을 통하여 그것을 부음으로 그 특별한 직분을 수행하게 했듯이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세우신 자로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고백서에서도 그분이 우리의 선지자로써 우리를 교훈하시고, 제사장으로써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지금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중보의 일을 하시며, 왕으로써 순종하면 상을 주시고 죄를 범하면 징계하시며 책망하고 다스리시며 보호하심으로 왕의 직을 수행하고 계신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다락방에서는 이와 같이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고백서 상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4) 번영신학
‘사단을 꺾은 왕’,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한 그리스도’와 같은 다락방의 그리스도관은 병의 원인이 되는 병원균을 없애버리면 병의 증상도 사라지고 병에 아예 걸리지도 않게 된다고 하면서 병과 죄를 같이 보고 예수님께서 죄를 도말하여버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가 없고 죄를 지을 수도 없다고 하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내용이 들어있는 주기도문을 암송조차 하지 않는 구원파의 논리와 같이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번영신학으로 이끌어 간다. 그러나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5) 신화사상
다락방에서는 자기들만의 독특한 그리스도의 삼중직인 ‘그리스도의 비밀’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을 ‘복음의 비밀’이라 하며, 그런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영접의 비밀’이라 하고, 성령의 내주를 성육신과 같은 의미에서 ‘임마누엘의 비밀’이라 하기 때문에 다락방의 이와 같은 주장은 ‘사람이 하나님 된다’라고 하는 지방교회의 ‘신화사상’과 같은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다락방의 류광수 목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리스도’라는 증거에서 초대교회의 모든 문제해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란 말은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글자의 의미는 알아도 사실을 몰랐습니다. 여기서 유대인은 구원을 얻지 못하는 실패에 빠졌고, 초대교회는 이 의미의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세상을 살렸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선지자, 제사장, 왕에게만 기름을 붓는데 바로 예수는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되는 참선지자라는 말입니다(요 14:6). 죄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가는 참 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세상과 사단을 이긴 참된 왕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을 구원 혹은 성령의 내주(요 1:12, 요 14:16~17, 고전 3:16)라는 것입니다. 구원과 평안의 증거가 실제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분을 구주로 영접할 때 참 제사장의 증거인 해방(미신, 점, 죄, 지옥, 모든 악한 것)되는 증거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증거했습니다”(류광수, <성경적인 다락방 전도>, p.11).

“영접 ― 이 말은 성령께서 우리 속에 내주한다. 그러니까 이 말을 이해해야만 영접이란 말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영접시킨다는 말이 보통 말이 아니지요. 신약에서는 영접이라는 말을 요한복음 1장에서 썼는데 구약에서는 쓰지 않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구약에서는 전부 예언이고, 그림자인데 신약에 와서 썼습니다.
구약에는 성령이 임했다. 동행했다. 이 말은 썼지만 성령의 내주란 말은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시고 난 뒤에 쓴 단어가 성령의 내주입니다. 그렇지요? 이 말을 이해해야만 성령이 우리 속에 오셨다는 이 말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오셨다. 말씀이 육신을 입어 오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뭐라고 말하느냐? → 성령의 내주!
이것을 이해해야 이해되는 말입니다. 주님이 여러분 속에 오셨다는 그 말이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뭘 주셨으니? ― 권세를 주셨으니…그러니까 창 3:1~20의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버렸어요.
성령의 내주 ― 이 말은 모든 것을 다 회복해 버렸다는 말입니다. 보통 사건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영접해 버리면 몰라서 그렇지 모든 것을 다 회복해 버린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멸망 받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다 회복했어요”(류광수, <기본메시지> 기초 M 모음).

“한 가지 발견 ― 모든 것 발견
2.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골 1:26, 골 2~3 이 사실을 믿는 자, 확인한 자, 이 비밀을 가지고 누리는 자는 모든 것을 다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을 다 포함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만 만나면 모든 것을 다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빌3:1~6)”(류광수, <성경적인 다락방 전도>, p.90).

“그리스도를 누리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해결하셨고,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류광수, <성경적인 다락방 전도>, p.50).

“전도는 모든 문제 해결
전도는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누리는 말씀운동이다.
1. 전도
(2) 성도의 가장 축복된 하나님의 비밀을 누리는 것입니다(막 3:14~15)”(류광수, <성경적인 다락방 전도>, p.36).

“육체, 사회, 환경, 가정에 병들기 시작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 해 주는 것이 전도입니다. 순서는 영혼구원 → 마음치유 → 환경치유 → 육신치유입니다. 이 순서를 어기면 또 다시 재발합니다(요삼 1;2, 행 8:4~8, 마 8:15~17)”(류광수, <성경적인 다락방 전도>, p.47).

류광수 목사는 정통교회와 다른 그리스도를 주장하면서 성령의 내주로 인한 성도들의 거듭남을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 1:23)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같은 개념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지방교회와 같은 신화사상이 되어 ‘천사 동원권’ 등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각종 권세를 사람이 하게 된다는 그릇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4. 결 론

다락방은 예수님께서 사탄을 멸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는 잘못된 베뢰아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양태론과 아폴리나리우스와 같은 주장을 하였고, 아폴리나리우스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다 결과적으로 그분의 인성을 부인하게 되었지만 다락방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잘못된 그리스도관을 가지고 구원파와 같은 논리 전개를 하여 번영의 신학이 되었으며, 성령의 내주를 성육신과 같은 것이라 함으로 지방교회의 신화사상과 같은 주장을 하게 되어 인간이 마치 하나님이나 되는 것처럼 천사 동원권 등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각종 권세도 주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다락방은 베뢰아 귀신론을 바탕으로 하여 구원파와 같은 논리전개를 하여 불건전한 번영의 신학으로 나아갔으며, 그 핵심은 지방교회와 같은 신화사상이기 때문에 비복음적이며 반성경적인 가르침이라 할 수가 있다.

충처: 교회와신앙


요세미티 국립공원 안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호수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요세미티의 호수들은

테나야 호수나 미러 호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호수들은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

다소 어려운 장소에 위치해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호수를 제외하면

그나마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쉬운 호수는

엘리자베스 호수, Dog Lake, May Lake 등일 것입니다.

 

타이오가 호수나

엘러리 호수는 접근하기 쉽지만

이 호수들은 국립공원 바깥에 위치해 있지요.

 

일반적으로

호수가 아름답다는 것은

호수 자체가 아름답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호수 자체는

볼품이 없다 할지라도

호수가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서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할 때도

호수가 아름답다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요세미티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는

이론의 여지없이 단연 Cathedral Lake일 것입니다.

 

 

커씨드럴 호수는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게다가

가는 길도 만만치 않아서

선뜻 쉽게 갈 수 있는 호수는 아닙니다.

 

 

 

하지만 커씨드럴 호수는

주변의 멋진 풍경과 어우러져서

독특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는 호수입니다.

 

 

 

커씨드럴 호수는

Upper 호수와 Lower 호수가 있습니다.

 

 

Lower든 Upper든

어느 곳에서 바라 보더라도

Cathedral Peak이 보이기 때문에

 

이 호수의 이름이

커씨드럴 호수로 명명되어 졌습니다.

 

참고로

커씨드럴 봉우리는

해발 10,912ft(약 3,326m)입니다.

 

 

커씨드럴 봉우리는

끝부분이 대성당의 첨탑처럼

뾰족하여서 커씨드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커씨드럴 호수로 가는 길은

쟌 뮤어 트레일(JMT)선상에 있기 때문에

JMT 주자는 반드시 거쳐가게 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커씨드럴 호수로 가는 길은

트알르미 메도우즈 부근에서 시작되는데

 

이 길(Tioga Road)은

겨울부터 봄까지는 close 되기 때문에

5월 중순 이후부터 10월 중순 사이에만 갈 수 있습니다.

 

 

트레일헤드는

트알르미 메도우즈의

방문자 센터에서 서쪽 약 1마일 지점에 있는데

 

이곳에서 Lower까지 3.5마일,

Upper까지도 약 3.5마일입니다.

 

 

Upper와 Lower를 동시에 볼 경우

먼저 Lower까지 갔다가 돌아 나와서

Upper까지 약 1마일을 다시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트레일헤드에서 출발하여

두 군데를 모두 다 볼 경우에

약 8마일 정도의 거리를 걷게 됩니다.

 

 

커씨드럴 호수의

Lower는 9,288ft(약 2,831m),

Upper는 9,585ft(약 2,922m)의 높이에 있습니다.

 

 

커씨드럴 호수는

석양이 매우 아름다운 곳입니다.

 

여름의 경우

석양을 촬영하고 나온다면

아무리 빨라도 밤 11시가 되어야

트레일헤드까지 다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석양을 촬영한 후에

커씨드럴 호수 주변에서 자는 것이 좋은데

 

이곳은

월더니스 지역이라서

하룻밤 캠핑을 하기 위해서는

레인저 스테이션에서 퍼밋을 받아야만 합니다.

 

 

캠핑할 경우에는

곰이 서식하는 지역이라서

음식은 반드시 곰통에 보관해야 합니다.

 

 

요세미티에 가신다면

시간을 내어 커씨드럴 호수에 가보세요.

 

그러면

당신은 요세티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를 보게 될 것입니다.

 

 

사진과 글 : 미서부 사진여행 오지여행 전문가 주안(POWER 21)



 
 


 
 
이란...   
 
 
 행복 작습니다.
거창하고 큰 것에서 찾지 마세요. 
멀리 힘들게 헤매지 마세요. 
비록 작지만, 항상 당신 눈앞에 있답니다. 
 
 행복 이기적입니다.
자신을 돌보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남의 시선 따위는 무시해 버려요. 
스스로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도 도울 수 없답니다. 
 
 행복 연습입니다
그냥 주어지는 행운의 복권이 아닙니다. 
부지런히 노력하고 연습해야 얻을 수 있는 열매입니다. 
가는 길은 만 갈래지만 방법은 하나랍니다. 
 
 행복 투자입니다
미래가 아닌 현실을 위해 남김없이 투자하세요.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내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을 온전하게 쓸 수 있어야 한답니다. 
 
 행복 공기입니다.
때로는 바람이고 어쩌면 구름입니다. 
잡히지 않아도 느낄 수 있고.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답니다.
 
 행복 선물입니다. 
어렵지 않게 전달할 수 있는 미소이기도 하고.  
소리없이 건네 줄 수 있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가장 달콤한 포옹이랍니다. 
  
 행복 소망입니다. 
끝없이 전달하고픈 욕망입니다.  
하염없이 주고 싶은 열망입니다. 
결국엔 건네주는 축복입니다. 
 
 행복 당신입니다.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당신입니다.  
변함없이 사랑하는 당신입니다. 
이미 당신입니다. 
 

 - 좋은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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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관련말씀: 로마서 10장 9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NIV 영어성경을 보면 "If you confess with your mouth, "Jesus is Lord"

성도 여러분, '주'가 무슨 뜻일까요?
"주'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절대적 배타적 지배권리를 가진 주인 말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은 주시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구원의 출발점이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왜 사는 것일까요?
어떠한 학문과 철학과 연구로도 그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인간이 왜 사는가? ‘주’를 위해 삽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골1:15-16)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하나님께서 우주만유를 지으시되 예수 그리스도, 아들을 위하여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창조물과 보이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 만물이 그를 위하여 지어졌고 그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들이 바로 만유의 주(主)인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우리 인간도 주(主)를 위하여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주를 위하여 살도록, 주를 섬기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 살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자기를 위해 살 재주도, 능력도, 방법도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 산다고 착각할 뿐입니다.

죽도록 자기를 위해 산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자기를 위하여 산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해 돈을 벌고 출세를 하고 죽도록 노력했는데, 그 결과를 보면 자기를 위하여 산 것이 아니라 돈, 출세, 명예, 지위를 주(主)로 삼아 그것들을 위하여 목숨 바쳐 산 것이 됩니다.
사랑도, 예술도, 이념도, 그 무엇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무엇인가를 위하고 무엇인가를 섬겨야 하는 존재입니다.
위하고 섬길 것이 없으면 허무해 합니다. 견딜 수 없어 합니다.
내가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절망합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 이 보다 더 모욕적이고 비참한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야말로 자기만을 위한 상태 아닙니까?
그런데 인간은 왜 ‘쓸모 있는’ 인간이 되려고 발버둥치는 것일까요?
그것은 주를 위해 살도록 지음 받은 인간의 본질, 본성 때문입니다.

참된 주를 만나 섬기지 못 하면 절대로 행복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며
참된 주를 만나지 못 하면 거짓 주를 섬기다가 일평생 방황하다 불행하고 비참한 멸망길로 가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는 얼마나 한 맺힌 말씀입니까?

만유의 주가 주라는 인정을 받지 못 했습니다.
주를 섬기라고 지음 받은 인간들이 주를 떠나서 원수 마귀 도둑놈들, 사단 귀신들, 우상들을 주로 섬기고 그들에게 복을 달라고 빌었습니다.
진화론을 만들어내고, 하나님이 창조주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려고 80억 달러짜리 강입자가속기까지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이십니다.
오늘 말씀은 이것을 입으로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피맺힌 하나님의 외치심입니까?
당연히 받아야 할 이 고백을 받으시려고,
주 예수님은 고통의 십자가를 지시고 피를 흘리시고 죽음을 넘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배반하고 더러워진 죄인들을 던져버려도 그만일텐데
사랑의 우리 주님은
자기 목숨을 버리고
살을 찢고 피를 흘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다.
Jesus is Lord!

예수님이 만유의 주이시며 우리의 주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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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위안 교수.

난 어떻게 동성애.마약중독을 극복하고 거듭났나

미국 남침례회 윤리와종교자유위원회(Ethics and Religious Liberty Commission)가 10월 28일(이하 현지시각) 개최한 전국 컨퍼런스에서, 강사로 나선 무디성경학교(Moody Bible School) 크리스토퍼 위안(Christopher Yuan) 교수가 “기독교인 부모가 성소수자 자녀를 사랑하고 복음으로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을 전했다.

이날 위안 교수는 “복음은 관계성 안에서 최고의 유일한 소통 수단”이라고 강조하면서 “동성애 경향을 지닌 자녀를 둔 부모들이여, 여러분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값진 삶에 대해 알려주라”고 권면했다.

위안 교수는 자신이 동성애자에서 기독교인으로 거듭난 간증을 나눴다. 그는 커밍아웃 당시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부모에게 배척당했다. 그런데 그 후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차례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됐고, 그에게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의 마음의 눈을 열어주셨고, 어머니는 죄인인 자신을 영접하고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들인 나를 사랑하실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쉽게 변화될 수 없었다. 위안은 위험한 동성 간 성행위에 더욱 많이 노출되었고, 치과학 박사과정 공부를 위해 마약을 팔기 시작했다. 그러다 치과대학에서 쫓겨난 후에는, 마약에 더 깊이 중독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모는 계속적으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에게 성경을 건네주고, 그를 위해 기도해주었다. 그가 성경에서 멀어진 이후에도 그의 부모는 기도를 계속했고, 교회에도 중보기도를 요청했다. 어머니는 7년이나 매주 월요일마다 아들을 위한 금식기도를 했다.

이에 대해 위안 교수는 “나의 부모님은 절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다”면서 “기독교인 부모의 역할은 ‘거룩한 자녀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부모가 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분노의 말이 아닌 온유한 말로 이기셨다”며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 4절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를 회개로 이끄신다’고 했다. 우리를 회개로 이끄시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가 아닌 선하심”이라고 했다.

결국 마약복용 혐의로 체포되고 수감됐던 그는, 당시에도 변함없었던 어머니의 사랑 덕분에 말씀에 마음을 열 수 있었다고. 그는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 생각하니 집에 전화를 걸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전화를 받자마자 ‘아들아, 괜찮니?’라고 물었다. 이는 정죄나 질책이 아닌, 단지 조건없는 사랑과 은혜의 말이었다”고 했다. 그는 “그 순간, 어머니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다. 그렇게 불행한 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의 말씀을 통해 내게 저항할 수  없는 사랑을 부어주시고 당신께로 이끌어주셨다”고 간증했다.

위안 교수는 결과적으로 교도소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며, 무디성경학교·휘튼대학원·베다니신학교에서 성경을 공부했다. 그는 또한 어머니와 함께 책 ‘Out of a Far Country: A Gay Son's Journey to God, A Broken Mother's Search for Hope’를 저술하면서, 동성애에서 치유받은 자신의 삶을 간증했다.

한편 테네시 내슈빌에서 지난 10월 27일부터 29일까지 열린 이 컨퍼런스에서는 위안 목사의 간증을 비롯해 복음, 동성애, 결혼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토론이 진행됐다.

출처: 크리스천투데이
http://m.chtoday.co.kr/view.html?id=276044

9.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자녀라는 공의의 공동체 (교회)’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But what went ye out for to see?
A man clothed in soft raiment? Behold, they which are gorgeously apparelled,

and live delicately, are in kings' courts.
누가복음7:25]

80년 초 로 기억된다.
그날은 더 마음이 무거웠었다.
몇 일전 들은 큰누님 같고 어머니 같은 분의 가정 우환 소식으로 마음을 태우다
전에 읽은 최자실 전도사의 금식에 관하여 읽은 내용이 떠올랐다.
금식은 하나님과의 직통전화이고 금식을 어떻게 하여야

육과 영에 유익한 금식의 방법에 대하여 써놓은 책의 내용이 떠올라
일주일간의 휴가를 금식하며 그분을 위하여 기도하기로 결정하고
일주일을 금식준비 기간과, 금식 후 일주일을 음식을 조절하기로 하였는데
우선 일주일간 금식 준비를 하느라 첫날은 세 끼의 음식을 줄이고
둘째 셋째 날은 세 끼의 양을 더 줄이고 매일 이렇게 음식을 줄이다
금식 이틀 전에는 소량의 쌀로 미음을 만들어 두어 숟가락 먹고
금식 전날에는 쌀을 끓인 물만 몇 숟가락 마시고 허기질 때 마다 물만 마시고
일주일의 준비가 끝나 두 번째로 오산리 순복음교회의 기도원으로 갔다.

첫 번째 갔을 때에는 벌판에 건물을 짓기 위하여 기초공사를 하고 있었던 모습으로
커다란 천막을 쳐서 사람들을 수용했던 것 같으나
많은 사람들이 천막의 예배시간 이외는 언덕의 나무아래서
혹은 바위아래나 위에서 통성으로 기도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소리를 치며 ‘주십시오!’ ‘할렐루야’ 등 큰소리로 외치듯
기도하는 건지 부르짖던 건지 어느 곳이든 때든 조용한 시간이 없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의 심정은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좋고 못 듣더라도

성경의 맥(?)을 찾아야 갰다는 심정으로 도착했지만
마음은 심란하고 주위 분위기도 뒤숭숭하여
동산으로 올라가 밤을 맞으며 침묵으로 기도하다 작은 소리를 내여 기도하고
이내 하나님과 대면하듯 대화하듯이 기도를 하고 지치면 묵상하고

그렇게 밤을 새웠지만 날 이새면 기도의 기억마저도 희미하여 힘이 빠졌고
육체적인 배고픔과 갈증으로 고통스러웠으나 삼일이 지나고 사일이 되었을 쯤
배고픔과 갈증이 사라지고 맑은 정신이 난 후 땅바닥에 자다 기도하다
바위위에 앉아 성경을 읽다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볼 때면
주님의 형상을 구름으로 나마 만나고 싶었고 음성을 듣고 싶었으나
흔히들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던 음성은커녕
성경을 읽을 때 그 뜻의 더 자세한 설명을 깨달게 되거나
구절이 떠올라
어느 구절이 내게 특별히 주시는 말씀이 되기를 원했으니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한 실망한 마음에 몸은 힘이 다 빠져도 눈을 감을 때 마다
꿈속에서 나마 주님을 만나길 바랐으나 그 기대는 바램 일 뿐이었다.
어느 날 눈을 감으면 잠에 취하고 비몽사몽의 상태가 되어
눈을 뜨면 힘이 없어도 억지로 기도를 했었는데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하늘은 높아서 푸르고 그윽하여 심오하고 깊어 깊이 마음을 감싸고
솔솔 부는 바람은 미풍(微風)이 되어 시원하고 상쾌하여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하고
눈에 찬 하늘의 모습은 세상을 떠나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낯설 으나
언젠가 보았던 경치가 되어 하늘에서는 별들이 닿아오고 있었다.
아니 별들뿐만 아니라 커다란 하늘이 닿아오고 있어 꿈인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바라보아도
하늘이 천천히 닿아오고 있어
너무나 웅장한 광경에 숨을 쉬는 것도 잊고
놀라 몸이 움직일 수도 없이 굳어버렸다.
이것이 무슨 조화(造化) 인가?
내가 죽었나? 생각이 들기 까지 했을 때 알게 되었다.
아! 하늘나라구나!
내가 닿아오는 하늘나라를 잊었을 뿐
이렇게 닿아 오고 있었구나!
하늘나라를 보는 나의 몸가짐과 과 마음가짐 이런 모든 것들이...
아! 이것이 은총이구나!
내 영혼은 이미 노래를 하고 있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찬송가의 제목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이고
원 제목은 ‘놀라운 평화’ ‘Wonderful Peace’ 이다.
작사 코넬(W. D. Cornell)은 전도사 이었다 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와 영혼의 참된 쉼을
자신의 고백과 체험에 머물지 않고 다른 이를 예수께 인도하여
그 참 평화를 맛볼 것을 담은 전도의 메시지다.
그가 1889년 가을 감리교 캠프 집회에서 묵상중 하나님의 참 평화를 체험하고
참 평화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평화 이외는 참 평화가 없음을 체험하여
그 내용을 옮겨 시로 지었으나 그가 쓴 종이를 잃어버리고 잊었고
작곡가 조지 쿠퍼(W. George Cooper)가 캠프에서 우연히 이 종이의 시를 발견하고
감명 받아 즉시 오르간 앞에서 곡을 만들었고
코넬과 쿠퍼는 서로 모르는 사이에서 이 찬송이 만들어 졌다 전해진다.)

이는 내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꼈고 영혼이 찬양한 놀란 일이지만
작사자 코넬를 통해 가사를 들었고 작곡가 쿠퍼를 통해 음을 들었으니
그들과 내가 같은 하나님을 찬양했고
그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평화를 보았듯이 내가 그랬고
우리가 주님의 축복을 받고 누려야 할 평화 아니 이미 받은 축복
이를 성경으로 확인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기 전에
이미 말씀은 내게 와 있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The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
마태복음 6:10]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The Kingdom coming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as it is in heaven'
하늘에서 이루워진 것 처럼
재림... 닿아오고 있는 현실 ...

Second Coming (그리스도의 재림)은
신약의 헬라어의 파루시아(Parousia)로 사용하였고
‘파루시아’ 라는 뜻은 일상적인 대화에서

중요한 방문객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의미하며
주의 재림이 갑작스럽게 올 것을 의미하며,
이곳에서 많은 글을 쓰지 않았지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이라는 표현을 수없이 하였고 그 말씀을 거의 완벽할 정도로 이해한다 하면서도
내 신앙에 큰 걸림돌이 된 구절이 이 구절이고
내가 잘난 믿음이라서 환상을 보았던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내 믿음의 능력 밖의 은총을 입었기에 그것이 문제였고
그로인해 감당 못하는 의무감 같고 아니 내 적은 믿음으로 인해
그 후 신앙생활은 수많은 갈등을 하고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으며
왜? 왜? 제게 감당치 못할 것을 보여 주셨습니까?
주님께 원망도 많이 했었다.

성경에 첫 환상이라는 단어는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울 때이다.
[이 후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After these things the word of the LORD came unto Abram in a vision ,
saying, Fear not, Abram: I am thy shield, and thy exceeding great reward.
창세기15:1]
비전(vision)은
계시(환상)을 뜻하지 일반적인 소망, 꿈, 목표 목적을 뜻하지 아니하고
또 야망이나 도전도 아닐뿐더러 전혀 욕망을 뜻하지 아니한다.
이는 계시(Revelation)을 뜻하는 헬라어의 아포칼립시스(apokalypsis)는
감추어있고 덮어져 있던 것을 열어보는 의미로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복음을 의미하셨고
바울은 비밀이라는 말로 복음을 의미하여 설명했듯이
성경은 계시를 전달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쓰여 졌다 할 수 있고
계시의 목적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구원과 교제를 위함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20:31]

(그때부터 ‘Vision' 이라는 단어를
아버지께서 ‘감사’ 라는 단어를 성경과 찬송가의 첫 장에 써놓았듯이
나도 ‘Vision' 이라는 단어를 써놓았고 ’샬롬‘ 이라는 단어도 오랫동안 애용하였지만
훗날 그 두 단어가 뜻이 왜곡되어 쓰이게 되고 남발이 되는걸 보면서
변변하지 아니한 마음에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더하여 계시나 환상 이런 체험적인 것을 자랑하기커녕 조심하고
그런 체험의 간증을 듣고 싶지도 않았고 이제라도 궁금하지도 않다.
이런 간증도 이곳에서 글을 쓰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나름 전개하기 위한 수단일 뿐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으나 글을 읽는 사람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으로
쓰는 자의 형편을 이해하여 편의를 위할 뿐 체험에 대한 토론은 사양하고 싶다.
나는 신비주의자도 아니고 은사 타령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다만 부족하나마 하나님의 의(공의)를 성경에서 보아 나누고 싶을 따름이고
자신을 지킬 만큼의 믿음의 분량을 가졌다 짐작하나 문제 많은 사람이고
특별하여 어떠한 특별한 은사를 가진 사람도 아니나
우선 나를 지키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위하여 성경을 많이 읽었고
미련한 사람이라 더 읽었고 성경공부를 많이 했지만 진전이 더딘 사람이다.
그래도 만약에 누군가 계시를 받고 싶다면 성경을 읽으라 추천하고 싶다.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인도하시는 성령님께 간구하고
지금까지 알고 있던 지식이나 경험, 선입감이나 전통적인 버릇 등을 내려놓고
중요하다 생각되는 구절을 외우며 처음 성경을 읽듯이 읽고
구약과 신약을 연결되고 구약에서 구약이, 신약에서 신약이 연결되려면
성경을 읽는 버릇이 되어야 한다.
성경이 이미 우리를 향한 계시이기에 특별한 계시는 없다고 보지만
은사란
우리가 성경의 특별하고 대단하게 여기는 은사뿐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분량대로, 분량을 위하여
결국은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 은사를 주신다고 믿는다. )

그 후 내 가슴에는 한동안 불이 있었다.
불의 할 때는 신앙의 양심으로 가슴이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고
교회에 가면 목사의 설교가 공동체를 잘못 설명 하는지 이내 알게 되었고
교회가 십자가 무늬만 남은 공동체로 보였고 교인 중 그중 몇 사람은 신자로 보이는데
많은 사람들은 웃는 얼굴이지만 온갖 인상은 쓴 사나운 모습으로
욕심이 가득한 얼굴로 보여 괴로워했고
이 구절로 그 당시 위로를 많이 받았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지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나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4:12-13]

닿아오는 하늘나라를 본 것은 틀림없는 은총을 체험했으나
이 일로 인하여 감당 못할 믿음의 분량으로
내 신앙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며 인생마저 송두리째 흔들릴지 미처 몰랐다.
물론 그 고통만큼 적은 믿음의 성장을 주셨지만...
하늘나라는 무엇인가
우리가 육신이 죽어 돌아가야 할 곳을 본향을 하늘나라라 하고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며 믿음의 실상을 언급하면서 본향을 설명한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11:16]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
(wherefore God is not ashamed to be called their God ...)
에비하신 곳, 천국이다.
천국(Heaven)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이 “회개 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는
이루어질 천국
이루어진 천국(예수님의 부활)과
심판으로 돌연히 임할 천국은 하나의 천국이다.
오늘날의 천국이 하늘에서 이루어졌고(‘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지상에 있는 교회(건물이 아닌 성도)에서 이루어지는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래서 교회는 천국의 모형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천국)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려는 하나님의 통치의 연장을 이르며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도리 즉 공의를 이 땅에 이루려는 교회를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라 한다.

주님의 몸 된 교회라 하는 교회는
주님이 머리가 되시며 우리는 각 지체인
각지체이기에 한 지체가 한 지체를 일컬어 자랑하고

중해지고 높아지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인 같은 자녀로
공평하며 평등한 (하나님의 공의처럼)관계이며
교회의 직책은 일하고 섬기려는 지체(肢體)의 기능이고
활동 역할이다.

믿음이란
어렸을 적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아
성경을 부분적으로 알아
나의 믿음을 자랑하고
믿음을 더하기 위하여 기적과 이적을 보기위하여
치유집회를, 성령부흥회 등을 찾아다니며
자기 유익을 위하여 육신의 병을 혹은 영혼의 평안을 위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육과 영혼에 완전함이 아닌 반쪽의 치우침 이고
그런 집회에서 은사를 받기를 원했더라도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듯이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어
(Beareth all things, believeth all things, hopeth all things, endureth all things.)
이 땅에 하나님의 자녀의 공동체 교회가 천국의 모형이 되기를 원하며
온전한 것이 올 때 까지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셨듯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공동체에서 부족한 사람이더라도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서로 사랑하여 공동체를 세우라는 말씀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요한복음13:34]
계명(Commandment)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믿는 자를 향한 명령이고
이것이 우리의 믿음을 보시는 척도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말씀을
믿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
우리가 지켜야할 하나님의 공의라
그래서 공동체의 뿌리며 줄기인 근본이라
그래서 믿음의 분량이란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의 분량
같은 몸의 지체로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만큼의 분량
그 만큼의 분량이고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 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12:30]
이웃사랑(그것이 전도든 무엇이든)은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이루는
우리의 근본적인 삶의 태도이며 우리가 향하는 생명의 길이다.
그래서 그 사랑이신 주 우리 그리스도와 동행하면
교회라는 공동체는 천국의 모형이 되어 지고
진리는 사랑과 함께 하고
사랑은 진리와 함께 하여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되어 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늘나라...
오늘날 천국의 모형이 되어야 할 교회를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말씀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화려한 옷을 입고
화려한 광야의 교회에 나갔더냐?
화려한 교회냐?
화려한 가운을 입고 사치스런 말을 하는 자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대답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우리 각자 믿음의 분량의 몫이다.
그러나 공동체를 세우는 만큼의 분량은
그 믿음만큼의 분량이다.





존 라일-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지식으로 무장하라

거짓 교리에 미혹되지 않으려면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지식으로 우리의 생각을 단단히 무장해야 한다. 기도로 성령의 가르침을 구하며 날마다 부지런히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나가라. 성경의 내용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라. 성경에 무지한 것이 모든 오류의 근원이다. 오늘날 진리를 왜곡하고 참믿음을 버리는 사태가 빚어지는 이유는 대부분 성경에 대한 지식이 얕기 때문이다.

 

철도와 전신의 발달로 인해 생활이 한층 분주해진 탓인지는 몰라도, 요즘 많은 신자들이 홀로 성경을 읽는 일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지를 못한다. 200년 전에 살았던 영국 국민이 지금의 영국 국민들보다 성경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 결과 요즘 사람들은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할 뿐만 아니라(4:14), 그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려고 애쓰는 간교한 거짓 교사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고 있다.

 

독자들이여, 이 조언을 기억하고 자신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라. 늘 그랬듯이, 지금도 성경에 정통한 사람만이 훌륭한 신학자가 될 수 있다.

 

또한 주님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보여 주신 대로, 중요한 성경 말씀을 잘 알고 있는 것이 오류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책 가운데 하나이다. 성령의 검으로 무장하고, 그 검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하라.

 

성경 지식을 쌓는 데는 왕도가 없다. 부지런히 힘써 공을 들이지 않으면 누구도 성경에 능통할 수 없다(18:24). 찰스 시므온은 그만의 특유한 말투로 칭의는 믿음으로 얻지만, 성경 지식은 행위로 얻는다라고 말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성실하게 읽는 수고보다 더 풍성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은 없다.

 

- 존 라일, 거짓에 속고 있는 교회에게, pp 216-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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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청 교 도 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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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vergreen / Susan Jackson

 

Sometimes love will burn in the spring time

봄이면 가끔씩 사랑이 움트고

Then like flowers in summer it will grow

여름이면 내 사랑의 꽃이 피어납니다

Then fade away in the winter

겨울이 살며시 다가와

When the cold wind begins to blow but when

꽃잎이 시들면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지요

It's evergreen, evergreen it will last through the summer and winter too

그래도 제 사랑이 푸르고 푸르면 여름 겨울이 와도 언제나 싱그럽게 피어 있을거에요..

 

When love is evergreen, evergreen

언제나 푸르름을 간직했던 사랑.. 변치않을거에요

Like my love for you

제 사랑은 당신만을 위해 존재해요..

 

So hold my hand and tell me you'd be mine

내 손을 잡고 말해 주어요

Through laughter and through the tears

어떤 경우에서라도

We let the whole world see our love will be

나의 사랑으로 남겠다고

Evergreen through all the years

시간이 흘러도

For when its evergreen, evergreen

푸르름을 간직한 우리 사랑이

It will last through the summer and winter too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고 영원할거예요..

 

 

 

 

[ 캐나다 출신의 포크가수 ‘수잔잭슨의 1980년작품.]

 

폴 윌리엄스 작사와 바브라스트라이잰드 작곡의1977년 작품이며 팝계와 영화계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는 여걸 바브라스트라이잰드가 제작한 영화 [스타탄생]에서바브라가 직접 불러 1977년 빌보드지에서 1위에 올랐고,그 해 아카데미 주제가 상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에겐 1990년대 초 MBC - TV [아들과 딸]에서 삽입곡으로 더욱 귀에 익은 곡입니다.

캐나다 출신의 여성가수 Susan jackson(현지에서는 jacks로 쓰임)이 부른 Evergreen은사랑을 상록수에 비유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을 이야기하는 사랑스러운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북중미 대륙에서 방송CM송으로 널리 애창된 곡입니다. 수잔 잭슨의 노래로는 최고의 히트곡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국내에서는 주말 드라마에서 배경음악으로 사용한 후에 인기를 모았습니다. 이후 상당기간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올드 팝부문에서 상위권을 지킨 노래입니다.

1980년도 컬럼비아에서 출시된 앨범의 타이틀인 Evergreen은당시 Poopy Family에서 솔로로 독립한 그녀의 성공을 확인 시켜 준 노래이기도 합니다. 이 노래가 실린 앨범 'Ghosts'의 프로듀싱을 맡은 그녀의 첫번째 남편 Terry jacks와의 인연으로도 화제를 불러 일으킨 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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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빛을 받고 배도할 가능성



한 페친이 히브리서 6:4-6절에 대해 문의했는데 그 성경구절에 대한 대표적인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의 견해를 소개합니다. 모두가 다 그의 주장에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참고는 될 것입니다.


오웬은 배도를 다룬 책에서 끝내 구원에 이르지 못할 사람들도 히6:4-6절의 말씀처럼,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교회생활을 잘 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John Owen, On the Nature and Causes of Apostasy, and the Punishment of Apostacy, the Works of John Owen, v.7(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8-31).


히6:4-6절 말씀은 매우 난해하며 논란의 여지가 많은 구절이다. 이 말씀을 구원의 은혜를 받은 이들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할 수 있다는 알미니안적인 교리를 지원하는 성경적인 근거로 삼기도 한다. 반면에 이 본문을 한 번 믿은 사람은 영원히 버림받지 않는다는 교리에 꿰어 맞추어 해석하기도 한다. 곧 이 말씀은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가상적인 위험을 경고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들은 특정 교리적 입장을 본문에 투사해서 해석한 것이다.


이 본문을 진정으로 거듭난 이들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주장의 증거 구절로 삼는 것은 성경 전체의 진리와 상충되는 해석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역으로 이 말씀을 정통 구원론의 틀에 무리하게 뜯어 맞추려는 시도는 이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왜곡시켜 단순히 가상적인 위험만을 언급한 것으로 보는 우를 범하고 만다.


오웬의 견해는 이런 오류들을 지혜롭게 피해간다. 오웬은 구원에 이르지 못할 사람도 성령의 은사에 참여할 수 있다고 봄으로 성령에 참여하고도 타락할 자가 있다는 히브리서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게 하였다. 


그는 이 문제를 이중적인 선택의 관점에서 풀려고 하였다. 오웬에 의하면 교회에는 궁극적인 구원을 위해 선택된 이들이 있는 반면 일시적인 교회 사역을 위해 선택된 이들이 있다. 결국 버림받을 사람은 구원을 위한 선택(the election for salvation)이 아니라 사역을 위한 선택(the election for function)만을 받은 것이다. 곧 그들은 심령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은혜 없이 사역을 위한 은사만을 받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은혜체험은 그들을 진정으로 회심하게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어떤 이가 한 때 성령의 감동을 받고 사역에 은사가 나타나면 그는 당연히 중생하고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쉽게 생각해왔다. 그러나 오웬을 비롯한 청교도 신학자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런 은혜체험이 반드시 회심을 동반하지 않으며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곧 그런 은혜를 체험하고 한 동안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다가도 타락하여 영원히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Ibid, v. 7, 24).


-박영돈 목사-

가져온 곳 : 
카페 >물과피와성령(water and blood and the Holy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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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새언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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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예배 ◇☆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예배, 하나님 만나는 예배를 체험해야 성도와 교회가 영광스러워질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만나는 체험이 없고 종교 껍데기만 남고 영광이 사라지니까 썩어 문드러진 과일처럼 되었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 이제라도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예배가 살면 교회가 싱싱해진다. 살아 있는 예배를 통해 믿음을 회복하라. - 지금 미래를 결정하라- 교회다운 교회가 나오면 하나님께서 참된 힘을 주십니다. 화려한 헤롯 성전이 아닌, 연약한 마가 다락방에 불같은, 바람 같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처럼 교회다운 교회가 회복된다면 불과 바람처럼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전 지역에 응답과 전도의 문이 열릴 것이며, 예배 때마다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또한 초대교회에 3천 제자가 일어난 것처럼 교회다운 교회 현장에 숨겨진 제자들이 일어날 것이며, 현장을 변화시키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 선교할 만큼 힘을 주시고, 전 세계의 문화를 정복하도록 Oneness를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교회다운 교회가 하나만 나와도 모두를 살리게 됩니다. 복음 없는 교회 때문에 국가와 후대까지 망하게 됩니다. 초대교회와 같은 역사와 왕 같은 제사장, 그리스도의 빛을 선전하는 선지자의 사명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참된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는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서로 도와주는 길목의 등불이어야 합니다 선화 (전채옥)^*^* [오늘의 만나]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한복음6 : 63절
 



 

 

 

 

 

 

 

 

 

 

 

 

 

 

 

 

 

 

 

 

                  

지금도 불편하십니까?

우리는 필요한것 보다 더 많이 갖고 있기때문에

현재의 행복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사람보다 귀한 것이 없으며,
사람 보다 아름다운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는 말도 있지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 는 일,
사람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일 ,
사람이 사람답게 살게 하는 일을 돌아 보게 하는

그러 삶을 나누고 싶습니다. 

 

 

 

-옮긴 글

 

 

영혼의 빛, 미소... 최송연 그대여, 오늘을 슬퍼하지 말고 사랑 가득 행복한 미소로 그대 영혼에 불을 밝혀보세요 영혼의 빛, 그대 고운 미소는 캄캄한 밤하늘의 별이 되어 온 세상을 행복한 보석으로 바꾸고 사랑의 빛으로 반짝이게 할 것입니다 힘들고 지친 이들의 영혼에 소망과 꿈을 줄 수 있는 신비한 묘약은 오직 하나 영혼의 빛, 그대 고운 미소뿐이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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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영원히 계신 당신
                          최송연

자욱한 안개가 피어오르듯
내 마음속에 회의심 일어날 때면
당신은 찬란한 아침 빛 되시사
내 가슴속의 안개를 거두어 주소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물처럼
내 마음에 슬픔이 일어날 때면
당신은 하얀 손수건 되시사
내 가슴속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소서

시커먼 먹구름 몰아치듯
내 마음에 절망감 몰려들 때면
당신은 무지갯빛 고운 꿈 되시사
찬란한 소망으로 내 가슴을 채우소서

망망한 바다 위를 떠도는 조각배처럼
내 갈 길 알지 못해 유리방황 할 때면
당신은 밝은 빛 등대 되시사
내 가슴에 구원의 항구를 밝히 보여주소서

당신이 계심으로 내가 있고
당신 아니 계시면 나 또한 無存인 것을...
내 가슴에 영원히 계신 당신,
당신은 나의 생명, 나의 완전입니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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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ble We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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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ociable weaver, native to South Africa, Namibia and Botswana,

weaves huge communal nests that can hosts hundreds of birds across

multiple generations.

 

These nests, woven from sticks and grass, are permanent. The deeper

inner chambers maintain a higher temperature at night, allowing the

birds to stay warm.


Australian Weaver 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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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aver ants, which live in Central Africa and South-East Asia, pull together live leaves and use larval silk to glue them together. These nests can vary in size from a single leave to bunches of glued leaves up to half a meter in length.

Vogelkop Bower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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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le Vogelkop bowerbird creates bowers, or small huts, out of grass

and sticks to attract females to mate with. The consummate interior

designers of the animal world, these birds arrange berries, beetles,

flowers and other colorful and eye-catching ornaments into artistic

arrangements to attract their mates. Ironically, the females do not

actually use these bowers to raise their young.


Compass Term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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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mpass termite builds large wedge-shaped mounds for nests.

These wedges are roughly oriented in a north-south orientation, which

gives them their name. It is believed that this shape helps their mounds

stay thermoregulated.


Honeyb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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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eybees’ entire lives revolve around their nests. It is in these nests, w

hich they construct out of secreted wax, that they process their food

and raise their young.


European Red Wood 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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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ropean red wood ants build large mounds on the forest floor to house

their nests. Several of these mounds can be linked as mother-daughter

mounds for the ants to switch between in the event of a catastrophic

event at one o the mounds.



Red Oven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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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d ovenbird builds its nest out of clay and mud. These strong

nests help prevent predation and, once abandoned, can provide other

birds with a relatively secure place to live.


Baya We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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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ya weavers often build their elegant hanging woven nests in thorny

palm and acacia trees or above bodies of water, where predators may

have difficulty reaching them. The nests can often be found in colonies,

although isolated ones do exist as well.


W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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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jority of wasps actually do not actually build nests, preferring

solitary or even parasitic arrangements. Social wasps, on the other

hand, build elegant paper nests out of plant pulp, spit, resin and other

materials.

 

These consist of internal paper honeycomb tiers (similar to a honey bee’s

comb in appearance but not material) surrounded by a paper wrapping.


Bea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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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vers build damn to flood woodland areas to a certain depth. They

then build submerged entrances that allow them to avoid predators

and to hunt for food in the winter.

 

Their dams can be truly massive – the largest known beaver damn, in

Canada’s Wood Buffalo National Park, is roughly 850m, or 2790 ft,

in length. When the water is deep enough, they may sometimes live

in burrows instead.


Montezuma Oropendo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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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ntezuma oropendola weaves its nests out of small vines and grass.

They usually live in colonies of roughly 30 birds, which include a dominant

male that mates with the females.


Swal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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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allows build nests out of various materials, and some don’t even build

any at all, choosing instead to nest in found or abandoned cavities. Certain

species of swallow, however, create their nests primarily out of their own

saliva. These nests are edible, and are considered a delicacy by some.


Caddis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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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it’s time for the caddisfly to pupate, it spins a tough cocoon out of

pebbles, sand, shells, and other lake- and river-bed detritus. It weaves t

hese elements together with strands of its own silk to safely grow to

adulthood.



 




우리는 마리아 숭배를 반대한다(송영찬 교수)

교회에서 예배의 대상은 언제나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 사실은 불변의 진리이다. 그런데 천주교에서 최고의 예배 대상은 성 삼위 하나님이 아닌 ‘성모 마리아’라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를 엄격하게 경계하며 반대하는 바이다.

 처음부터 천주교에서 마리아 숭배 사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먼저 나타난 현상은 AD 3세기경에 동로마 교회 신자들 사이에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神母)라고 부르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이 이단 교리는 교회의 반대를 받았고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러다가 마리아의 영원 동정성(童貞性)이 대두 되었다. 이것은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후 일생을 동정녀로 살았고 다른 죄 있는 자녀들을 생산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 역시 당시 교회에 의해 금지되었다. 터틀리안과 오리겐은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후에도 다른 자녀들을 생산했으며 마리아 역시 한 사람의 죄 있는 인간이었음을 증명했다.

 하지만 오래 지 않아 마리아의 영원 동정성이 교리로 체계화 되었다. 그것은 AD 387년에 제롬이 ‘영원한 동정녀’라는 책을 통해 주장했다. 그리고 AD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이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AD 553년 제2차 콘스탄틴회의에서 마리아의 동정성을 선언했다.

 이 거짓 교리를 바탕으로 AD 7세기경에는 마리아 승천설이 주장되었다. 이 거짓 주장은 '마리아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인성을 취하셨기에 하나님께서는 마리아의 육체가 썩음을 원치 아니하여 그녀를 승천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1850년에 마리아 승천설이 선포되었다. 이 마리아 승천설에 근거하여 “성모는 천당에서 모든 천신과 성인의 모후가 되시며 우리의 중보가 되신다'는 마리아 중보설이 가공되었다.

 그러다가 1858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마리아의 무원죄설’(Immaculate Conception)이 주장되었다. 이것은 마리아가 모든 아담의 자손들이 가지고 있는 원죄와 전연 관계가 없는 분으로 그리스도를 잉태하였다는 주장이다. 즉 마리아는 원죄의 오염을 받지 않는 유일한 인류가 된 것이다.

 이윽고 1954년 10월 11일, 교황 비오 12세는 이러한 주장들을 더욱 확장하였다. 그는 마리아를 '하늘 여왕‘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1954년 12월 8일, 교황의 칙령에 의해 마리아 숭배 교리가 천주교의 정식 신조로 인정되었다. 그 이후 매년 5월 31일을 마리아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하늘 여왕’이라는 칭호의 기원은 '시돈 사람의 가증한 것'이라고 불리는 페니키아의 여신 아스도렛을 가리켜서 '하늘 황후' 또는 '하늘의 여신'에서 찾을 수 있다(렘 7:18, 44:17-19, 25). 이로써 천주교는 완전히 우상숭배 집단으로 변모되고 말았다.

 

‘하늘 여왕’ 사상은 세속적 우상 숭배의 대표적인 사상이다. 바벨론의 세미라미스, 앗수르의 아스다롯, 애굽의 이시스, 헬라의 아프로디테, 로마의 베누스(비너스) 등이 그 맥을 같이한다. 이러한 여신 숭배 사상은 인간이 조작해 낸 가장 추악하고도 부도덕한 우상이다.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다. 그리고 바울은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님 한 분임을 분명하게 밝혔다(딤전 2:5). 따라서 예수 외에 마리아가 인류의 중보자라는 주장은 거짓 교리일 따름이다.

 

이에 우리는 마리아를 숭배하는 그 어떤 주의 주장이든 반대하며, 이를 엄히 경계하는 바이다.

 

 

- 기독교개혁신보, 제681호(2014년 10월 25일)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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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신천지를 비롯한 이단 대처 관련 논의가 교계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단 시비 논란이 있는 신사도 운동도 이에 포함된다. 특히 신사도 운동은 한국교회에서 그 영향력이 암암리에 확산되고 있는 데 반해, 체계적인 자료나 연구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에 교계 차원의 냉철한 평가와 대처 방안이 모색돼야 한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신사도 운동의 ‘두 날개’, 보편 기독교회의 권위 전면 부정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은 지난 7일 오후 ‘신사도 영성과 개혁주의’라는 주제로 발표회를 개최했다.
 

 
이날 주제와 동일한 제목으로 발제한 최윤배 교수(장신대 조직신학)는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신사도 영성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먼저 그는 신사도 운동과 관련해 가장 논란이 되는 ‘두 날개’ 개념, 즉 사도직과 선지자직의 역사적 반복 및 계승은 개혁신학적 입장과 정면충돌함을 재차 강조했다.
 
최 교수는 “신사도 운동은 그동안 교회사 속에서 없어졌던 사도직과 선지자직으로 부름 받아 임명된 사람들을 통해 이룩될 신사도 개혁교회를 주장하고 있다”며 “이는 역사상의 보편 기독교회의 권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피터 와그너가 결성한 ‘국제사도연맹’에는 500명 이상의 사도들이 소속돼 있는데, 신사도 운동은 이들이 신사도 개혁교회를 지휘하는 하나님의 엘리트 일꾼들로, 강력한 영적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한다.
 
두 날개 개념이 야기하는 또다른 문제는 ‘직통계시’를 인정한다는 점이다. 신사도 운동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계시를 받아 예언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최 교수는 “기독교는 물론 개혁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고백하는 ‘오직 성경만’의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할 뿐 아니라, 그 원리를 뿌리째 뽑아버리게 된다”며 “직통계시 사상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로서의 정경의 절대적 권위를 훼손하고 파괴하는 사상”이라고 비난했다.
 
비성경적ㆍ비윤리적 성령론…지도자들 인격도 ‘문제’
 
신사도 운동이 주창하는 성령론과 은사론이 비성경적이며 비윤리적이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그에 따르면, 성령론 특히 성령의 은사론과 관련 신사도 운동에서는 방언 현상, 우울증 등의 치유 현상, 예언 현상, 이적과 기적 현상이 강력하게 나타난다. 여기에는 괴이한 소리, 쓰러짐, 금이빨과 금가루 현상, 입신 현상, 심리학이나 최면술 등의 효과 현상 등이 포함된다.
 
최 교수는 “미국이나 캐나다 등 해외에서 신사도 운동을 주도하는 지도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집회 도중에 수많은 거짓 예언을 하고, 심리술이나 최면술을 사용해 속이고, 성적으로 타락했고, 많은 추종자들은 정상적인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힘들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들이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파괴적이면서도 비윤리적인 비정상인으로 변화됐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며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아야’ 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최 교수는 신사도 운동의 지도자들이 ‘신학과 성경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부족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신사도 운동이 ‘다윗의 장막’에 근거해 24시간 365일 연속으로 진행하는 중보기도 운동의 경우,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삶을 완전히 제쳐 놓고, 특정 장소에서 기도와 예배에만 며칠씩, 몇 달씩, 몇 년씩 몰두하는 것은 중보기도 개념을 크게 잘못 이해한 결과라는 것.
 
최 교수는 또 “신사도 운동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사회에서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기존 교회와 정상적인 신학 교육기관에서 신앙훈련과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며 “지도자가 되려면 직위와 분야에 걸맞은 인격성과 전문성을 구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사도 운동, 한국교회의 취약점 역이용할 수 있다”
 
이밖에도 최 교수는 신사도 운동의 신비주의적 구원론, 전투적인 신앙운동, 미신적이고 세대주의적 종말론에 근거한 선교 방법 등을 문제 삼았다.
 
그는 “신사도 운동은 지나치게 ‘새 포도주’, ‘성령의 술’, ‘군화 신은 신부’ 등의 개념을 사용해 신비주의적 구원론을 띠는가 하면, 매우 전투적인 신앙운동을 추구한다”며 “물론 지상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지만, 신사도 운동이 사용하는 ‘군대’(요엘의 군대, 예수의 군대 등) 개념은 근본주의적 종교에서 발견되는 전투적 개념이 지나치게 강하다”고 주장했다.
 
선교 방법과 관련해서는 ‘영적 도해’, ‘땅 밟기 중보기도’, ‘백투예루살렘’ 운동 등은 미신적이거나 이원론적인 방법과 세대주의적 종말론에 근거한 선교 방법으로,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론적으로 최 교수는 “신사도 운동의 영성과 신학이 개혁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위협하는 심각한 수준임은 분명한 사실”이라며 “최근 한국교회에서 다른 다양한 프로그램들은 증가하는 데 비해 기초 교리 공부 훈련이나 성경공부 훈련은 태반으로 부족한 현상이 나타난다. 신사도 운동은 한국교회의 이 같은 취약점을 역이용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http://www.newsmission.com/news/news_view.asp?seq=5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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