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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먼저 人間(인간)이 되라. 좋은 인맥을 만들려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인간성부터 살펴라. 이해타산에 젖지 않았는지, 계산적인 만남에 물들지 않았는지 살펴보고 고쳐라. 유유상종이라 했으니 좋은 인간을 만나고 싶으면 너부터 먼저 좋은 인간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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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敵(적)을 만들지 말라. 친구는 성공을 가져오나, 적은 위기를 가져오고 성공을 무너뜨린다. 조직이 무너지는 것은 3%의 반대자 때문이며, 10명의 친구가 한 명의 적을 당하지 못한다. 쓸데없이 남을 비난하지 말고, 항상 악연을 피하여 적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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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스승부터 찾아라. 인맥에는 지도자, 협력자, 추종자가 있으며 가장 먼저 필요한 인맥은 지도자, 스승이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 것은 인생에 있어 50% 이상을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유비도 삼고초려 했으니 좋은 스승을 찾아 삼고초려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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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生命의 恩人(은인)처럼 만나라. 만나는 사람마다 생명의 은인처럼 대하라. 항상 감사하고 어떻게 보답할 것인지 고민하라. 그 사람으로 인하여 운명이 바뀌었고 또 앞으로도 바뀔 것이라 생각하고 대하라. 언젠가 그럴 순간이 생기면 기꺼이 너의 생명을 구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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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첫 사랑보다 강렬한 印象을 남겨라. 첫 만남에서는 첫사랑보다도 강렬한 이미지를 남겨라. 길거리에서 발길에 차인 돌처럼 잊혀 지지 말고 애써 얻은 보석처럼 가슴에 남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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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헤어질 때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라.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 함께 하면 유익한 사람이 되라. 든 사람, 난 사람, 된 사람, 그도 아니면 웃기는 사람이라도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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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하루에 3번 참고, 3번 웃고, 3번 칭찬하라. 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 미소는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 메이킹이며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3번에 10배라도 참고 웃고 칭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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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내 일처럼 기뻐하고 내 일처럼 슬퍼하라. 애경사가 생기면 진심으로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라. 네 일이 내 일 같아야 내 일도 네 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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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Give & Give& Forget 하라. 먼저 주고, 조건 없이 주고, 더 많이 주고, 그리고 모두 잊어버려라. Give & Take 하지 마라. 받을 거 생각하고 주면 정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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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한 번 人脈(인맥)은 永遠(영원)한 인맥으로 만나라. 잘 나간다고 가까이 하고 어렵다고 멀리 하지 마라. 한 번 인맥으로 만났으면 영원한 인맥으로 만나라. 100년을 넘어서, 대를 이어서 만나라.
크기변환_[wallcoo_com]_vista%20view%20of%20blue%20sky%20and%20island.jpg (Bilitis / Richard Clayde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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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는 우연인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확산될 수 있을까?

메르스는 중동 지역의 호흡기 질환이다.
낙타의 숙주를 통해 감염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한국은 낙타를 타고 다니는 사람도 없고 낙타 고기를 먹지도 않는다.

동물원에 가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첫 메르스 환자가

확인된지 2주만에 수십 명의 감염자에, 천 명이 넘는 격리 수용자에...
이미 여러 명이 사망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중동 지역에 비하면 한국에서의 메르스 감염은 거의 초자연적으로 확산되는 느낌이다.
이것이 우연일까?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나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런데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사람의 생명이 메르스의 위협 아래 죽어가고 있다.
과연 이것이 우연일까?

지난 번 네팔에 지진이 일어났을 당시 네팔에는
두 가지 법안이 상정되어 있었다.

아시아 최초로 동성애 결혼을 허용하는 법안과 힌두교를 국교로 만들자는 법안이 상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네팔의 지진으로인해 취소되었다.

이것이 네팔 지진을 우연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이다.

메르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

전 대통령인 이명박 대통령은 장로이다.
그 분은 영적으로 깊은 분은 아니지만 순박한 믿음의 소유자이다.

경제성장을 목적으로
대통령 재임 당시 중동의 부를 끌어 들이기 위해 이슬람 은행을 들여오려고 했다.
이슬람 은행은 샤리아법에 근간을 두고 운영되고 있다.
이슬람 은행이 들어오면 이슬람의 관습법인 샤리아법이 들어올 수 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광범위하게 이슬람 문화와 이슬람 교인들이 유입될 수 밖에 없다.
이런 위험한 상황이 숨겨진사실을 몰랐을것이다.

감사하게도 당시 교계 지도자들과 교회연합기구들에서
이 일을 반대했다.

특히 조용기 목사님은 이명박 대통령이 이슬람 은행을 들여오면 탁핵운동을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중단되었다.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 아시아의 대한민국에서도 두안건이 상정되고 있었다.

1> 박근혜 대통령이 길어지는 경기 침체를 회복하기 위해 중동을 순회한 후,
인구 17억 이슬람의 음식인 할랄을 만드는 허브 국가로 한국을 만들자고 했다. 유대인들에게 코셔가 있듯이 할랄은 이슬람 신도들의 율법에 의거한 정결음식들이다.

예) 양 염소 닭 소 생선등으로 가공한 음식을 할랄이라함.

그러므로 율법에따라 정결한 음식을 만들때 반드시 짐승을 죽이기 전에 먼저 알라를위해 기도와 의식을 거친후 죽여서 요리를 해야 할랄 로 인정된다.

그런데 아무리 정결한 음식이라 할지라도 이런 의식를 갖추지않고 가공한것은
할랄로인정하지않는다.>

이러한 룰을 지키기위해서
가공에 참여하는 모든사람 들은 저들의 율법을따라 의식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문제가 아닌것이다
대한민국이 온통 이슬람화되는것은 시간문제라는 결론이다.

그런데 한국을 할랄의 허브 국가로 만들려고 한다.
뿐만아니라 할랄을 검인해 주는 수많은 이슬람 지도자인 이맘들이 유입될 수 밖에 없다.

거기에다 할랄을 생산하기 위해 수많은 이슬람 신도 들이 들어올 수 밖에 없다.

이미 전통적 기독교 국가인 영국마져 이슬람화 시킨 저들이 이제 아시아의 허브로 한국을 노리고 있는 와중에

박근혜 정부는 할랄의 허브 국가가 되자고 선언해 버린것이다.

두번째는
동성애 평등법 법안상정을앞두고...
동성애자 찬양 축제 퍼레이드를 6월9일 시청앞광장에서 펼치도록 서울시가 허가한 사건이다.
이미 4만명의 찬성 서명까지 받은상태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이 2014년도에이어 두번째 허가를 한 상태였다.

세계각국의 동성애자들과 찬성론자들이 대거몰려와 기자들과 언론인들까지

취재경쟁을 벌이는가운데 퍼레이드를 펼치는 광경이
유트브를 통해 전세계에 방영될 위기를 앞두고...

절박한 상황임을 알리기위해 퍼레이드집회 철회를 요구해왔으며..

급기야 6월1일(월)에는 시청앞광장에모여 구국기도회를 감행했고..

이를 기록에 남기기위해 전광판에 동성애 평등법 반대 문자띄우기운동과..

구국을위한 간절한 기도회가 계속되는동안..

중동 지역의 호흡기 질환인 메르스가 소리없이 한국에 들어와 단1명이 충남아산으로부터 출발...

평택모병원..
서울모병원으로.. 초스피드로 확산되고 있었다.

순식간에 많은 중동
국가들을 제치고 세계3위 국가가 되었다.

온세계도 놀라고 온나라도 놀라 공포의 현장이되면서

급기야 6월4일오후 박원순 서울시장의 기자회견을통해 준전시 상황이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메르스 확산방지를 위해 모든행사를 취소한다는 발표였다.

그리하여 오늘 6월9일 동성애 찬양집회 퍼레이드는 취소되었다.

이것이 우연인가?

성경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되 특별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한다.

이런 엄청난 사실을 깊히 이해하지 못한
박근혜 대통령과 정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자.

동성애 평등법을 찬성하는 박원순 서울시장을위해 기도하자

그들의 무지로 인한 범죄를 우리의 죄로 인식하고 대리적으로 회개하자.

그리고 이 땅의 교회들이 이슬람을 향해 깨어있는 교회들이 되자고 기도하자.

 이슬람과 알 카에다, IS 등을 두려워하는 교회가 아닌,
이슬람이 두려워하는 교회로 일어나자고 기도하자.

다시는 동성애 평등법이라는 창조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가
다시는 일지못하도록 기도하자!
대한민국은 양자의영으로 택함받은 선민들의 나라이다.

강하고담대하게 오직기도로 승리하자!
세상엔 우연히 일어난일은없다.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하고 감사하자!

위기에처한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 엘리사에게
갑절의 영감이 필요했던것처럼 ...
구국을위한 갑절의 영감을 사모합시다!

☞동성에의 실체
http://sign.khtv.org/

      17세기에 프랜시스 페넬론은 "유일하게 불완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이의 불완전함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내게 필요한 말임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온전함의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렇게 하고자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며, 하나님께로 달려가는 것은 곧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옳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온전함을 측정하는 잣대는 우리가 다른 이의 불완전함을 얼마나 참아내고 용서하고 있는지에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결점을 참지 못할 때마다 나는 내 단점을 생각하고 다시 인내합니다. 당신이 불완전하다고 해서 스스로 비하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결점으로 인해 인내심을 잃을 때, 유일한 불완전함은 "참지 못하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단순함이 주는 기쁨/조이스 마이어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

★아내란누구인가? -


아내란
바가지를 긁으면서도
그 바가지로
가족을 위해 밥을 해주는 사람..

아내란
아이들을 혼내고
뒤돌아
아이들 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

아내란
친정엔 남편의 편이 되어
모든 물건 훔쳐다가
남편을 위한 남편의 편인 사람...

아내란
남편과 아이들만 보고 울고 웃다가
결국엔 이세상을 떠나는 사람...

아내란
사랑을 주면 줄수록
얼굴이 수줍어지고 예뻐지는 사람...

아내란
살이 찌고 뚱뚱해도
엄마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운 사람...

아내란
남편이 저세상 가는 길에도
끝까지 홀로남아
못다한 정 아파하며 울어주는 사람...

아내란
가족이 먹다 남은 밥을 먹으면서도
행복해 하는사람...

아내란
드라마 보다가 홧병이 나도
남편과 아이들 잘못은
금세 잊어버리는 사람...

아내란
당장 잃어버린1000원에 안절부절
해도
남편과 자식위해 아낌없이 희생하는사람...

아내란
밥 한끼보다
"수고했네. 사랑해" 한마디로
더 행복을 느끼는 사람...

아내는
이세상에서 가장 의리 있고 착하며
늙어서까지도
남편에게 만큼은 여자이고픈
소녀같은 친구 입니다.

때로는
엄마로
아내로
며느리로
맏벌이 주부로

1인 4역을 끄떡없이 해내고 있는
무한한 에너지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지칠수 없고 지칠것 같지 않던 아내에게도
주름진 얼굴과 흰머리에 에너지가 고갈되며
나약하고 힘없는 시기가 오게 됩니다.

이세상에서
이와 같은 만능 아내에게
에너지를 충전해 줄수있는 사람은
오직 남편 한사람 뿐입니다.

남편의
따뜻한포옹,
"고마워""사랑해"라는 말한마디에도
아내는
이세상을 들었다 내려놓을수 있을 만큼의
큰 에너지를 충전 받습니다.

아주 작은것에

 

 

출처: 사모님사모님/달빛

- 한학자가 집례한 합동결혼식도 부정

▲ 한학자 총재의 주례로 통일교의 국제합동축복결혼식이 열렸다.(출처:「연합뉴스」)

문선명씨 직계 통일교는 어디인가.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한학자씨의 통일교와 공식 후계자였던 7남 문형진씨의 갈등이 깊어질 전망이다.

문씨가 후계 정통성을 들고 일어나 한학자씨의 통일교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선친의 권위를 빌어 통일교 공직자의 파면, 한학자씨의 권한의 박탈을 선언하더니 이번엔 모친의 신격화를 부정하고 독자적인 합동결혼식을 집행했다.

참어머님은 사탄의 주관 아래 있다

“나는 어머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머님은 나에게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당신은 승리하신 참어머님, 재림주의 아내,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인간입니다’라고 말했다.

어머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다,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너무 놀라 ‘어머님, 그것은 다릅니다. 어머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만약 어머님께서 그런 것을 말하시면 부정될 것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이것은 완전히 사탄의 주관을 받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은 영적 타락과 같다.”

문씨는 지난 4월 12일 생츄어리교회 설교에서 한학자씨에 대한 신격화를 “영적 타락”으로 일갈했다.

문씨는 모친이 “완전히 사탄의 주관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통일교는 한학자씨를 어머니 하나님으로 믿고 있다.

문씨가 한씨를 신에서 사탄 아래로 ‘격하’시켰다. 문씨는 어머니가 “회개해야 한다”,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올해 2월부터 한학자씨의 통일교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한 문씨가 고삐를 점점 강하게 죄고 있다.

문씨에게 통일교는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어 문선명씨의 본뜻을 이어가야할 개혁의 대상이다.

한학자씨가 집례한 합동결혼식은 무효?

문씨가 직접 집례한 ‘합동결혼식’은 더는 한씨의 통일교를 통일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문씨는 지난 4월 21일 축복결혼식, 일명 합동결혼식을 본인 주도하에 거행했다. 행사이름은 ‘참아버님의 권위로 돌아가기 위한 축복결혼식’이었다.

문씨는 이전 설교에서 “(공직자들이) 참아버님의 주요예식들을 겨낭하여 지우고 바꾸기 시작했다”면서, 문선명씨 사후의 합동결혼식은 효력이 없다고 주장했었다.

이는 통일교의 구원론을 완전히 부정하는 일이다. 통일교는 한학자씨가 집례한 합동결혼식을 치러야만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한씨 쪽에서 반발을 살 만하다. 지난 3월 통일교는 문씨를 세계회장직에서 면직시켰다. 미국 통일교 공문으로 알려진 글에는 문씨의 움직임에 대한 입장이 담겨있다.

통일교는 “참아버님만이 메시아이며 구세주라는 생츄어리교회의 오만하고 거짓된 주장이다. 참부모님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참아버님과 참어머님, 두 분에 의해서만 성취된다고 명확히 하셨다”고 밝혔다.

문씨의 합동결혼식에 대해서는 “참부모님의 신성한 권한을 직접적이고 계획적으로 부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따져보면 한씨의 통일교가 다수이지만 그래서 손실이 더 크다. 문선명씨가 사망한지 어림잡아 3년이 다 되어 가는데 후계자 문제로 아직도 잡음이 발생하고 있다.

또한 후계자 권위를 위시한 문씨가 통일교의 주요 포교지인 일본교회를 회유하고 있다. 일부 통일교 교회는 개혁을 외치는 문씨 지지에 나섰다.

여파가 얼마나 클지는 미지수다. 어느 쪽 통일교가 문선명씨의 유지를 잇는 정통이든, 어디도 단칼에 다른 한편을 위축시킬 방법은 없다. 싸움은 길어질 분위기다.

이용규 기자 aftereli@naver.com

<저작권자 © 월간현대종교

언제나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사나이가 있었다.
사나이는 자신을 늘 ´재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번은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서 멀리 있는
곳으로 짐을 옮기게 되었다.
사나이도 다른 사람들처럼 짐을 짊어지고
나섰다.

한참 가다보니 사나이는 다른 이들보다
자신의 짐이 더 무겁고 커 보여 몹시
기분이 나빴다.
˝난 역시 재수가 없어!˝
그는 갑자기 힘이 빠져 가장 뒤쳐져 걸었다.

길이 너무 멀어 마을 사람들은 중간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게되었다.
이때다 싶어, 사나이는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 몰래 일어나 짐을 쌓아둔 곳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사나이는 어둠 속에서 짐을 하나하나 들어
보았다.
그리고는 그 중 가장 작고 가벼운 짐에다
자기만 아는 표시를 해두었다.

날이 밝자 그는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어젯밤에 몰래 표시해 둔 짐을 찾았다.
그런데 그 짐은 바로 어제 온종일 자신이
불평하고 지고 온 그 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중에서

가져온 곳: 사모님사모님/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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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줄다리기 ♣


옷장에
옷이 늘어납니다.

찬장에
그릇이 쌓입니다.

신발장에
신발이 많아집니다.

채우기만 하고
비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근심이 늘어갑니다.

머리에
생각이 많아집니다.

몸무게가
자꾸 무거워집니다.

채우기만 하고
비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지 않는
신발은 버려서 꽉 찬
신발장을 비워야겠습니다.

입지 않는
옷은 버려서, 꽉 찬
옷장을 비워야겠습니다.

쓰지 않는
그릇도 버려서 꽉 찬
찬장을 비워야겠습니다.

인생은
이렇게 채우기와 비우기의
치열한 줄다리기입니다.

수많은 생각,
수많은 목표 가운데,

정말
가치 있는 것만 남기고
몽땅 비워야겠습니다.

옷장도, 찬장도,
미련도, 후회도 비우세요.

명예도,
욕심도 모두 비우세요.

비우면
더 좋은 것으로
다시 채워집니다.

혹, 다시
차지 않더라도
버린 만큼 시원해집니다.

 

 옮긴 글

출처: 사모님사모님/민들레홀씨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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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 로키산맥 해발 3,000미터 높이에 수목 한계선인 지대가 있습니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으로 인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한 채 있어야 합니다. 이 나무들은 열악한 조건이지만 생존을 위해 무서운 인내를 발휘하며 지냅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무릎을 꿇고 있는 나무' 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인생의 절묘한 선율을 내는 사람은 아무런 고난 없이 좋은 조건에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온갖 역경과 아픔을 겪어온 사람, 역경 속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이웃 블로그에서 좋은 글을 모셔다 신앙면으로 조금 수정보완 하였습니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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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보다 그리스도를! / 윤석준 목사

 

 

 

마르틴 루터가 ‘모든 성자들의 날’(만성절)을 코앞에 두고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려고 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루터가 비록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우리에게는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중세야말로 ‘기념일들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달력에 빈틈이 없을 정도의 기념일들이 가득했던 시대였는데, 그 대부분이 성자숭배와 관련되어 있었고 루터의 종교개혁은 사실 이 ‘기념일들의 시대’를 종식시키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개혁된 교회들은 갈라디아서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10-11).

 

퍼포먼스가 중심이 된 교회는 언제나 ‘의미’를 생각하기보다는 ‘외형적 보임’에 치중합니다. 그래서 날, 혹은 절기와 관하여도, 실제 그 날과 절기가 가지는 진정한 의미를 살피기보다는 그 날이 주는 파워, 그 날이 주는 선동(煽動)성에 더 가치를 두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가 이러한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는지 늘 유의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성령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의 절기에 대해 “너희가 이전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거니와”(8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아신 바도 된 입장에서,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느냐?”(9절)라고 말씀하시면서 “날과 달과 절기를 삼가 지키는 것의 무익함”(10-11절)을 이야기합니다. 말하자면 날의 선동성에 치중하는 것, 퍼포먼스적 교회가 되는 것은 복음을 배반하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11절에서 성령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라고 말씀했는데, 이 말은 성령님께서 바울 선생님을 통해 전한 복음들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는 것 때문에 망쳐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들이 대단히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말씀을 따라 올곧은 교회의 풍토를 세우기를 원했던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점에서 성탄절에 관하여도 아주 신중한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루터는 단번에 모든 축일들을 없애버리기를 원했습니다. 이는 주일을 제외한 다른 모든 기념일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칼빈 역시 이 ‘날들을 폐지하려는 시도’에 동의했습니다. 칼빈은 성탄절에 특별히 모여 예배하는 것보다 그저 12월 25일 이전 ‘주일에’ 성탄에 관해 설교했습니다. 진정한 성탄의 의미는 특별한 어떤 날보다 ‘주일’에 진정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1574년 도르트총회는 성탄절을 전면적으로 폐지하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총회는 사람들이 주일로 만족하기를 원했고, 특별한 날 대신 12월 25일 이전 주일에 성탄에 관해 설교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우리는 성탄을 크게 경축하는 것이 성경적 배경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종교개혁 시기에 성탄절을 없애려는 시도가 실패하고 그것이 존속된 이유는 목사들의 권고와는 달리 도시 내의 권력자들이 시민들을 위해 축제일을 공휴일로 유지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이 제일 처음 제정되게 된 역사적 내력을 보아도,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가 성탄절을 기념했던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된 4세기가 되어서야 교회 안에 축제일로서 이 성탄절이 성대하게 기념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비록 역사 속에서 흘러 떠내려가듯이 풍조의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의 풍조가 올곧은 것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날과 달과 절기를 삼가 지키는 것’이 복음을 훼방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절기에 대한 강조는 그 자체에 치명적일 수 있는 몇 가지 맹점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로, 절기를 강조하는 것은 ‘마치 그 날에만 그 일이 일어난 것처럼’ 사람들을 희롱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개혁된 교회들에서 절기란 항상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비록 한국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전혀 관계없는 절기들(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 추수감사주일 등)이 절기로써 지켜지고 있는 실정이지만, 사실상 절기라는 것은 일 년의 달력 전체에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점진적으로 그려나가는 추상화(抽象畵)입니다.

 

그러므로 이 절기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전 교회를 사로잡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편이 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성탄절’에만 태어나신 것이 아니고 늘 태어나시며, ‘부활절’에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늘 부활하십니다. 신자들의 삶 속, 교회의 구체화된 현장 속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구속사역을 계속해서 펼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절기이며, 따라서 절기는 일 년 전체, 교회의 삶 전체에 스며들어 있어야지, 그것이 특정 날에만 기념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절기에 대한 특별한 강조’는 이 사실을 망쳐버립니다. 성탄절에만 그리스도의 나심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 얼마나 비성경적입니까! 그리스도의 탄생은 신자의 삶 매일에서 묵상되어야 하며, 매 주일 설교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역시 고난주간에 눈물을 흘리면서 금식할 때만 나타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매일의 삶 속에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은 부활절 주일예배의 칸타타 속에서만 나타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매 시마다 신자들의 삶을 주관하는 근본적인 힘과 태동이 되어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15주일 37문답에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을 설명할 때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사셨던 모든 기간에”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주간에만 고난 받으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사신 모든 기간에 고난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마치 십자가에 매달리는 그 시점에만 있었던 것처럼 여겨, 특정 날들에, 특정 시기들에만 국한하여 바라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전 구속사역이 교회 전체를 사로잡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성탄, 즉 성육신 역시 특정한 시기, 특정한 시점에만 기억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모든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성탄은 기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절기에 대한 강조가 비본질적인 것을 향한 치중을 강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언젠가 주일학교 아이들과 중고등부, 대학부 아이들에게 부활절하면 뭐가 떠오르냐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일관된 대답은 ‘계란’이 생각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스개로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가르치면서 그 부활의 정수(精髓)를 내면적, 본질적으로 가르치지 못하고 외양으로 드러나는 것으로만 가르쳤기 때문에, 부활절에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을 이기셨다’는 것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께서 지금 나를 죄로부터 구속하고 계시다는 사실, 곧 나의 삶이 새로운 국면, 죄를 극복한 삶이 되었다는 사실보다, 계란이 더 각인된 것입니다.

 

성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심지어 교회에서도 성탄절에 산타복장을 하고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줍니다. 큰 교회건 작은 교회건 너나 할 것 없이 성탄절이 되면 예배당 바깥쪽에 빛나는 전구들로 치장을 하는 것, 예배당 안에는 트리로 장식을 하는 것, 도시마다 광장에 교회들이 연합하여 대형 조명트리를 세우는 것을 마치 무슨 사명인양 치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부활절이 ‘계란의 날’이 되는 것보다 성탄절이 ‘산타’와 ‘트리’의 날이 되는 것을 덜 조장하고 있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 성탄에 그리스도께서 성육하신 의미를 깊이 있게 가르치고 묵상하고 있으며, 단지 퍼포먼스로가 아니라 진정으로 성도들의 마음속에 성탄에 대한 깊은 의미들에 대한 이해가 자리하도록 애쓰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의 성탄은 시끌벅적한 전야제 행사들(춤, 노래, 연극과 공연들)과 중고대 학생들의 밤샘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대형 쇼핑센터들이 뜬금없이 그리스도를 축하하는 세속화의 현장 속에서, 교회라도 쇼핑센터 같지 않을 수는 없겠습니까?

 

절기의 외면적 강조는 항상 본질적인 것(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치중을 약화시키고, 비본질적인 것들에 대한 치중을 강화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껍데기를 자꾸 세우는 것에서 탈출하여 조금 더 그리스도의 본연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탄절이라는 절기가 교회 안에 존재한다는 자체가 근본적인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날에만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을 기억한다는 것과, 이 날을 복음의 본질이 아닌, 행사와 트리와 밤샘의 날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탄절을 교회가 기념하는 것을 없애버리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절기보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바꿀 수는 없더라도, 한 걸음씩만이라도 전진합시다. 비록 지금 우리의 성탄절 모습이 중세 성자들의 축일을 기념하는 것들과 닮아 있다고 할지라도, 한 목사, 한 성도, 한 회중이 변화를 취하려고 할 때 ‘우리’가 변할 것입니다. ‘화려하고 거창한’ 성탄을 만들지 맙시다. ‘소박하고 절제된’ 성탄을 보내도록 합시다. 주님은 왕궁이 아니라 구유에 태어나셨으며, 초라한 옷을 입었던 어부 베드로에게 금으로 된 왕관을 씌우고 금홀을 들리고 비단 옷을 입힌 것은 타락한 교회였습니다.

 

성탄은 그리스도의 날입니다. 절기보다 그리스도가 드러나야 합니다. 퍼포먼스보다 성육신이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들 속에 이런 일치된 보편적 의식들이 뿌리내리기만 한다면, 고신교회들은 다른 교회들과는 참 다른 성탄을 보낸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글·윤석준 목사 /부산에서 유은교회를 개척해 5년째 이상적 개혁교회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http://www.knews.or.kr/news/view.html?section=79&category=86&page=2&no=5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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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적인 대자연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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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한국교회가 선교 130주년을 넘으면서 최근 10년 사이 담임목사 세대교체가 부쩍 늘었습니다. 하지만 원로와 후임 목사간의 갈등 문제가 여기저기서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원로 목사와 후임 목사간의 갈등의 원인과 해결방법을 모색해 보는 기획순서, 오늘은 갈등이 왜 생겨나는지 알아봤습니다.

이승규 기자의 보돕니다.

[기자]

원로 목사와 후임 목사 간의 갈등은 비단 한국교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미국장로교 PCUSA는 담임 목사가 물러날 경우 후임 목사를 위해 교회가 있는 도시에서 떠나야 한다는 조항이 있을 정돕니다.

원로 목사와 후임 목사 관계는 필연적으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좁니다.

원로 목사를 지지하는 그룹과 후임 목사를 지지하는 그룹이 나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이권희 목사 / 신일교회 2대 담임
"제일 중요한 건 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회적으로 교회 소식을 원로 목사가 듣는 것보다 교회의 여러가지 현안들을 담임목사로부터 직접 들으면 오해도 없고, 소외 당한다는 생각도 안 들기 때문입니다."

은퇴한 뒤 아예 교회를 떠나는 원로 목사도 있지만, 그러한 예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은퇴는 했지만 교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원로 목사들이 더 많은 상황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유교적 사고방식이 강한 곳이라면 후임 목사 입장에서 원로 목사에게 함부로 대하기 쉽지 않습니다.

[인터뷰] 이문식 목사 / 광교산울교회
"우리는 아직 가부장적 문화거든요. 원로 목사는 아버지처럼 섬겨야 된다고 하는데 그런 것들이 교회 분위기나 문화 속에서 리더십 교체에 역기능 하는 부분이 있는 거죠. "

교회를 개척하고 성장을 이끌었던 원로 목사와 새롭게 목회를 해 나가야 하는 후임 목사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으로 한동안 혼란을 겪었던 충현교회와 최근에는 두레교회 김진홍 원로 목사와 이문장 담임 목사 간의 갈등도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크고 작은 많은 교회들이 원로 목사와 후임 목사 간의 갈등으로 분쟁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알아야 할 것은 원로 목사와 후임 목사 간의 갈등으로 피해를 입는 건 교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승규 기자 ⓒ CBS 크리스천노컷뉴스

USA아멘넷







      샘이 깊지 못한 물을 건수라고 합니다.

      비가 많이오면 물 맛도 변하고 색깔도 달라집니다.
      그러나 깊은 곳에서 솟는 샘물은
      바깥 날씨나 기후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뜨거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합니다.
      장마가 오든, 가뭄이 오든 상관없이
      언제나 같은 양의 맑은 물을 냅니다.

      안에서 솟는 물은 장마가 와도 변함이 없고
      가뭄이 와도 끄떡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뭄이 오고 장마가 있을 때 진가를 발휘합니다.

      깊은 샘에서 나오는 성령의 생수를 마시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깊은 샘물과 같습니다.

      변화가 없고, 일정합니다. 요동치 않습니다.
      외부의 환경과 영향력에 따라
      쉽게 그 마음의 태도가 바뀌지 않습니다.

      뜨거운 여름에는 남을 시원하게 하고,
      추운 겨울에는 남을 따뜻하게 합니다.

      영성 깊은 사람의 진가는 시련과 역경이 찾아왔을 때
      더욱 빛을 발합니다.

      환경을 초월하고, 환경을 능가하는 삶을 삽니다.
      환경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변화시킵니다.



누가 너를 소유하고 있는가? / 박신 목사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신자들이 성경을 볼 때에 자기 마음에 드는 구절만 골라보거나 하나님의 관점 대신에 자기 생각으로만 해석하는 잘못을 자주 범합니다. 그러나 그런 오류들은 스스로 잘못하고 있다고 어느 정도 인식하고 또 고치려 노력합니다. 반면에 잘못인줄 알지도 못하고 많이 범하는 잘못은 꼭 보아야 할 구절을 간과해 정작 깊이 새겨야 할 의미마저 놓친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신자가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으면 그 즉시로 성령이 내주하여 본문 표현대로 “성령의 전”이 됩니다. 그러나 그 뜻을 단순히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 제한 시켜 버립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신자를 어떤 어려움에서도 구해주고 앞으로 더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치웁니다.

돈에 심히 궁핍했던 올라브슨이라는 스웨덴 사람이 있었습니다. 쪼들리다 못해 1910년 스톡홀롬의 카를린스카 연구소에 자기 몸을 의료 연구에 쓰도록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일 년 후 그는 많은 재산을 상속 받게 되어 돈을 물려주고 팔았던 몸을 다시 사려 했습니다. 그러나 연구소는 이미 그 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팔기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동안 허락도 받지 않고 이빨 두 개를 뽑았다고 손해 배상을 청구했습니다.

성경은 분명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세상에서 통용되는 돈이 아니라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 합니다. 신자의 영육 간 존재 전부의 절대적인 소유권이 영원토록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신자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물리지도 못합니다. 예수님께 정말 자기의 모든 것 심지어 생명을 바쳐서라도 순종하며 그분 뜻대로만 살아야 합니다.

비유컨대 신자는 예수님 허락 없이는 이빨도 뽑지 말아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살전 5:18)입니다. 신자더러 계속 좋은 것을 받아내기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그분 뜻대로만 살기 위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나아가 신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분이 행하신 것이므로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은 하나님의 동행이라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서 그분의 신자에 대한 절대적 소유권을 뜻합니다. 그럼에도 신자가 그런 실감을 잘 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구원 이후에도 자유의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임의로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 자신에 대한 소유권이 여전히 자기에게 있는 양 착각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청지기일 뿐입니다. 주인의 재산을 임의로 사용할 수 있어서 이식도 남기지만 그 이식은 전부 주인의 소유일 뿐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대신 행하기만 하는 심부름꾼과는 다릅니다. 심부름꾼은 절대로 주인이 시킨 일의 범위를 넘어서면 안 됩니다. 또 당장에 돌아올 벌이 두려워 넘어설 생각도 아예 못합니다.

반면에 청지기는 재량껏 무엇이든 할 수 있어도 소유권만은 절대로 주인에게 귀속시켜야 합니다. 임의로 할 수 있기에 더더욱 주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행위는 해선 안 됩니다. 심부름꾼은 시킨 일이 우선이지만 청지기는 그 일을 시킨 주인의 뜻이 우선입니다.

그럼 신자가 된 특권은 따로 없고 의무만 더 늘어난 셈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 받기 전 불신자 시절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우리 인생에 대한 소유권과 사용권 모두가 사단에게 속해 있었습니다. 완전히 사단의 노예가 되어 죄악을 즐기도록 조종되어졌습니다. 참 빛에는 절대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훼방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흥미롭게도 불신자는 도리어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큰소리치며 삽니다.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고 믿습니다. 소유권과 사용권 모두 자기가 쥐고 있는 양 믿지만 사실은 거짓의 아비 사단에게 속아서 영과 육 모두 사단의 농간 아래 있는 줄 눈치도 못 채고 있습니다. 아담이 범한 원죄가 바로 “내 인생을 나의 것”으로 삼으려는 데서 발단되었고 또 모든 인간이 그 원죄 하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내 인생의 소유권을 원래 주인이신, 원죄 이전의 선악과가 뜻하는바 그대로, 하나님께 온전히 되돌려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단과는 달리 사용권은 계속 허용해 주었습니다. 사용권은 어디까지나 소유권에 귀속되는 것이지 사용권을 가졌다고 소유권까지 확보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신자의 인생은 불신자 시절에 임의로 행사했던 그 사용권을 소유권자인 예수님의 뜻에 맞추어 나가는 여정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청지기적 소명이란 외부 피조 세계를 그분의 뜻에 맞추어 다스리는 것을 넘어 자기의 존재, 삶, 인생부터 거룩하게 다스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신자니까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자기의 소유권은 오직 예수님에게 있고 단지 사용권만 부여 받았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여 신자의 영육 간 전부를 사단으로부터 빼앗아 오셨지 않습니까? 작은 예수인 신자가 궁극적으로 살아야 하는 삶은 당연히 예수님 당신의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신자가 사용권을 주인의 뜻에 맞지 않게 행하면 때로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소유권과 사용권 둘 다 사단에게만 있는 불신자의 인생이 아무 징계 없이 형통해 보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단은 불신자를 간섭할 이유나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자기 인생을 마음대로 하는 것만을 목표로 평생을 살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버려두어도 하나님께로는 절대 가지 않고 사단이 원하는 대로 멸망으로 치닫게 됩니다.

지금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음행 사건을 인간 윤리나 종교 계명을 범한 죄로 취급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신자가 자기 인생의 사용권을 잘못 행사해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되찾은 자기 소유권을 침범한 사건으로 해석했습니다. 신자가 자기 인생의 사용권을 제대로 행사하는 길은 같이 피 값을 치르는 수뿐입니다. 피 흘리기까지 죄악과 그 배후의 사단과 싸워서 자기 삶을 통해 주인 되는 예수님의 이름만 불신자와 세상 앞에 높여드려야 합니다.

“이제는 너희가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2,23) 지금 누가 당신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예수입니까? 당신입니까? 다른 말로 당신은 이미 예수가 주신 영생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소유하려고 추구하고 있는 중입니까?

8/14/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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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론이 인봉된 진리인가?
정명석의 30개론 비판①

 

진용식 목사 webmaster@jesus114.net

 

정명석의 30개론이란?

정명석 씨는 자신이 만든 30개론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직통계시로 이루어졌으며 수천 년 동안 아무도 몰랐던 진리라고 주장한다. 정 씨의 30개론 입문편에서는 소개하기를 “(선생님은) 오직 예수님과 같은 설교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항상 예수님처럼 설교하고 싶다고 기도했다. 예수님 때  외쳤던 원본 말씀을 깨닫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수천 년 동안 아무도 몰랐던 진리를 깨닫고 아무도 모르는 보화를 발견했는데 그것이 바로 30개론 말씀이다”(30개론, 입문편 p.5)라고 하였다.

또 이들은 교주 정 씨를 이 시대의 그리스도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계시를 받고 성경을 통달했음을 주장하였다. 위의 책에 있는 정 씨의 간증 의하면 21년 동안 산에서 성경을 1.000독 이상 정독했으며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과 진리들을 예수님에게 직접 배웠다고 주장한다.(입문편 1장) 어떤 때는 한 가지 교리를 배우기 위해서 이틀 동안 예수님에게 5,000번씩 세세히 물어보았다고 주장하였다(입문편 7장).
 
정 씨의 신도들은 정 씨가 그리스도인 증거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성경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다만 정 씨가 예수님에게 직통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정 씨는 하나님의 직통계시를 받았는가? 직통계시의 증거는 자신의 주장만으로는 입증할 수 없다. 그가 받은 직통계시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의 주장이 성경적으로, 논리적으로 맞아야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정 씨가 직통계시를 받아 만들었다고 하는 30개론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비판해 본다.

정 씨의 30개론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성경을 해석할 때 문자로 보지 말고 비유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문자로 해석하는 기성교회는 잘못되었다는 것이 30개론의 요지다.

이러한 정 씨의 30개론의 첫 번째 내용은 “태양아 멈추어라”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아모리 족속과의 전투에서 태양이 멈추어 여호수아가 승리한 사건에 대한 내용이다. 정 씨는 성경 본문에 태양이 멈추었다고 되어 있으나 당시에는 천동설 시대에 과학을 모르고 한 말이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과학문명이 발전되어 지금은 지동설 시대이므로 문자적으로 보지 말고 시대급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다(정명석,입문편 제 2장). 정명석의 이러한 엉터리 주장을 반증해 본다.

이스라엘의 400년 고역살이의 탕감이 40년인가?
정 씨는 30개론에서 “태양아 멈추어라”를 설명하면서 성경의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 정 씨는 주장하기를 “이와 같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고역살이를 하고 신 광야에서 40년간 탕감을 받은 후 모세도 가보지 못했고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만 들었던 본래의 원했던 가나안 복지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정명석, 30개론 입문편 제2장)라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 맞지 않는 것이다. 탕감이란 죄를 제하여서 준다는 것을 말한다. 빚을 탕감하여 준다고 할 때(눅 7:41~42) 탕감된 빚에 대하여는 더 이상 묻지 않아야 탕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십년 광야 생활은 사십일 동안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불신한 죄의 대가를 받는 것이었다. 탕감이 아니라 징벌이었다. 1일을 1년으로 벌을 받은 것이다. 즉 사십년 동안 지은 죄를 사십일 동안 탕감 받은 내용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죄악 때문에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이다(민14:34~35). 이스라엘 백성들과 정탐꾼의 죄악을 40일을 40년으로 탕감 했다는 정명석의 주장은 엉터리이다. 성경을 1000독하고 직통계시를 받았다는 자의 성경의 무지는 그 주장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신광야에서 40년 방황했나?
정 씨는 신 광야에서 40년을 탕감받았다고 했는데 이는 엉터리 성경해석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여정을 보면 여러 광야를 통과하였다. 수르 광야, 바란 광야, 시내광야, 신 광야 등이 있다. 신(sin)광야는 애굽에서 출발하여 엘림과 시내산 사이에 있는 광야이다(출16:1). 두 번째 성경에 신(Zin)광야로 표기된 곳은 팔레스틴의 남쪽 아라비아 사막의 서쪽 사해와 아가바만 사이에 있는 광야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표류하는 중 이곳에 이르렀을 때에 미리암이 죽었던 곳이다(민13:21,20:1). 이 두 곳 신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방황하던 곳이라고 할 수 없다. 두 곳 다 통과 지역에 불과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38년을 방황했던 곳은 신 광야가 아닌 가데스 바네아에서 세렛 시내 사이였다. 성경을 1000독을 하고 예수님께 계시를 받아 만들었다는 30개론의 강의에서 성경의 지리에 무지한 해석을 하고 있다. 이러한 오류를 볼 때 정명석의 30개론은 오류임이 분명하다.

가나안 땅이 조상들이 버려둔 땅인가?
정명석 씨의 글을 읽어보면 성경에 대하여 무지한 것을 여기저기에서 발견 할 수가 있다. 정 씨는 30개론 “태양아 멈추어라”는 내용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성경에 무식한 엉터리 주장을 하였다. 확인해보자

 

“그러면 어찌하여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복지 땅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과 싸우게 되었는가? 이 문제는 역사적으로 과거를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다. 지금은 자기 땅이 아닌 것 같지만 400년 전 아브라함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원래 가나안 땅은 그들의 조상들이 살던 곳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땅이었다. 그런데 400년만에 돌아와 보니 자기 조상들이 살다가 내버려둔 땅에 낯선 원주민들이 들어와서 우상을 섬기면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비유컨대 영창에 갔다가 돌아와 보니 자기 집과 땅에 남이 들어와서 주인행세를 하며 살고 있는 입장이다”(정명석, 30개론 입문편 제2장 p.17).

 

정 씨는 가나안 땅은 원래 아브라함의 땅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400여 년 동안 애굽에서 생활하는 동안에 원주민들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에 무지한 주장이다. 

원래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민족의 땅이 아니었다. 그리고 400년 전에도 아브라함의 땅도 아니었다. 가나안 땅은 가나안 족속의 11부족의 땅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가나안에서 원주민을  쫓아내라고 하셨다. 그러나 아브라함 당시 가나안 족속들의 죄가 관영치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을 400년 동안 애굽으로 보내셔서 기다리신 것이다.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라 하시더니”(창 15:16) 이러한 성경의 지식에 무지한 정 씨는 엉터리 주장을 하였다. 정명석의 30개론은 오류투성이다.

정명석의 엉터리 시대급 해석
정명석 씨는 여호수아 시대에는 천동설 시대이므로 지동설을 몰랐던 여호수아는 태양아 멈추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문자로만 보아서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 때 당시 여호수아가 천동설이라는 시대성의 주관권 속에서 태양이 가는 것으로 알고 <태양아 멈추어라>고 기도했던 것이다”(정명석, 입문편 p.20).

정명석의 주장대로라면 지동설을 모르던 시대에는 태양을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면 지동설을 다 알고 있는 이 시대에는 해가 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지구가 돌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는 말이 된다. 정말 엉터리 주장이다.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21세기에는 초등학생들까지 지동설을 다 알고 있다. 그러면 지금은 “해가 뜬다”고 하지 않고 지구가 돈다고 말하고 있는가? 그렇지가 않다. 지금도 누구나 해가 뜨고 진다고 말하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지동설을 잘 아는 정명석 씨는 동해에 가면 “일출”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지구가 도는 현상”이라고 유식하게 말하는가? 해가 뜨고 지고 멈춘다는 표현은 천동설 시대나 지동설시대나 여호수아 시대나 지금이나 다 동일한 것이다.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어야 진리인가?
정명석 씨는 성경에 있는 기적들을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도 과학적인 법칙을 어기지 않으시기 때문에 하나님도 못하시는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기에 어려울 것이 없어 자연을 초월하여 기적을 일으킨다고 말하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도 못하시는 것이 있다. 그것은 태초에 정하신 천륜의 법칙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에게는 법칙 벗어나는 일은 있을 수 없다”(정명석, 입문편 p.22).

이러한 엉터리 주장은 반증할 가치도 없는 것이나 정명석의 엉터리 교리에 미혹된 그 신도들을 위하여 다음 몇 가지로 반증한다.

 

첫째, 과학이란 유한한 인간의 짧은 지식이다. 과학은 진리가 아니다. 과학은 새로운 지식이 개발되면 언제든지 과거의 지식은 거짓이 되고 마는 것이다. 천동설 시대에는 천동설이 가장 바른 과학적 법칙이었으나 지동설이 나오면서 천동설은 거짓이 되고 말았다. 이러한 과학의 법칙에 하나님도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정명석의 주장은 엉터리이다.

정명석은 과학적인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지금은 신앙과 이성, 종교와 과학, 믿음과 실체를 연결시키고, 상호 수수작용 속에 하나로 만드는 시대성 적인 성경해석, 모순없는 새로운 진리가 선포되어야 한다.”(위의책 p.28)

 

그렇다면 정명석이 가르치는 교리는 과학적이며 시대급적인 교리인가? 정명석의 교리를 살펴보기 위해  정명석의 간증을 소개해 본다.

“삼위일체론은 선생님이 직접 하늘나라에 가서 배웠다. 선생님은 하나님은 어떻게 생기셨는가? 하나님은 얼마나 클까? 등 하나님에 대하여 알기 위하여 이틀 동안 5.000번씩 세세히 물어보셨다. 그러던 중 선생님이 영계에 갔는데 한번은 예수님 찾아왔다고 하니까 예수님  집으로 안내를 해 주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침 필리핀으로 심방가시고 없으셨다. 그 때 흰옷 입은 사람들이 밀려왔다.

그 사람들이 성령님이 나오셨다고 했다. 그때 성령을 똑똑히 보았다. 처음으로 성령님을 보았는데 모나리자형의 아름답고 예쁜 미인으로 젊게 생기신 어른이었다. 성령님이 오셔서 ‘명석이가 왔구나!’하시면서 나를(내 영인 체를)안아주셨는데 성령을 보는 순간 백만분의 일도 어색함이 없이 ‘엄마,엄마’ 하면서 무릎 위에서 놀았다.

 

그런데 성령님이 나에게 ‘세상에서 옷이 이게 뭐냐? 네가 서울로 올라가면 얘들 시켜서 옷한 벌 사줄께’ 라고 하셨다. 하늘에서는 깨끗하고 형형 색색의 세마포 옷 같은 밝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시골에서 입던 옷을 입고 그대로 갔다. 너무 초라해서 벗을 수도 없고 창피했었다”(정명석, 입문편p94)

 

정명석의 이러한 주장이 과학적이며 합리적이라는 말인가? 비과학적이며 과학적 법칙에 맞는다는 말인가? 자신의 교리자체가 비과학적 모순된 주장을 믿게 하고 있는 것이다.

 

정명석의 30개론은 비성경적이며 엉터리 교리이다.
정명석의 30개론을 읽어보면 그 성경의 해석들과 주장들이 성경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비과학적인 것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신도들은 “선생님은(정명석)신앙, 문학, 철학, 역사, 음악, 미술, 스포츠 등 다방면에 걸쳐서 초인의 경지를 드러내며 전문가를 놀라게 하고 계신다”(위의 책 P.3)라고 믿고 있다. 금번 정명석의 30개론을 차근차근 비판함으로 그 오류들을 밝혀나갈 것이다.

 

입력 : 2007년 02월 06일 11:50:20 / 조회수 : 6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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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이른 아침, 촉촉한 숲으로 간다.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는 영혼 깊숙이 파고들어 일상에서 얻은 상처를 말끔히 씻어주는 힘이 있기에 피곤하고 지칠 때면 나무가 울창한 뒷산을 곧잘 찾게 된다. 숲은 언제나 은은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흐른다. 나무는 나무대로, 꽃은 꽃대로, 작은 풀잎 하나에까지 저마다 독특한 향이 있어 한데 어우러지지만, 그 향기가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정감과 행복감을 안겨주기에 좋다. 살아 있는 산 생명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는 정말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흔히들 말한다. 사람에게서도 저마다의 향이 있다고…정말 그런 것 같다. 사람도 산 생명일진데 어찌 고유의 향이 없겠는가? 어떤 사람은 가까이 있기만 해도 편안함을 선사해 준다. 어떤 이는 멀리 있어도 진실함과 든든한 느낌을 향기로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주위에 많은 사람이 모여든다
.

반대로 가까이하기에 너무도 먼 당신, 안타깝게도 유행가 가사처럼 실제로 가까이해서는 안 될 무서운 사람이 비단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성도라 불리우는 사람들 중에서도 많이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런 사람은 멀리서만 바라보아야지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서 사귀다 보면 실망을 넘어 허탈감을 갖게 된다. 대개는 여의롭지 못한 삶에서 받은 상처가 해결되지 못한 채앙금으로 마음속 깊숙이 가라앉았다가 조금만 불이익을 당한다 생각될 때 거품처럼 독을 뿜어내는 것이다. 성도라고 하는 사람의 입에서 상상을 불허하는 거칠고 독한 언사가 거침없이 솟아남을 보고 아연실색할 때도 있다. 이런 이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것도 향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다 같은 사람에게서 나는 향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다른 것일까
?

1. 새로운 피조물에서만 뿜어져 나오는 생명의 향기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고후 2: 16) 그렇다면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을 마음에 믿음으로 영접한 상태이다. 아는(knowledge)것이 아닌, 믿는(Faith)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8: 9) 그리스도가 내 개인의 구세주로 믿어지는 그 순간이 바로 거듭나는 순간이요, 새 사람을 입게 되는 중생(αναγέννηση)의 순간이다, 흔히들 말하는 종교인, 표면적 유대인과 참 그리스도인, 진실로 거듭난 성도의 갈림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 말씀은 아무리 강조한다고 하여도 넘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기독교인은 거듭난다는 말을 도덕적, 윤리적 변화로 보는 견해가 있다. 거듭난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구원에 대한 진단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믿음은 이성의 고백이 아닌 성령의 감동 하심을 입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회복을 의미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로 이 땅에 태어난다
.

하나님과 단절된 심령은 뿌리가 뽑힌 나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뿌리가 생명의 본체인 땅에서 뽑힌 상태라면 형태는 나무이지만 그 나무는 생명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땅에서 뽑힌 후 얼마 동안은 입이 푸르고 청청한 듯이 보이기는 하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시들시들하다가 곧 말라서 죽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로마서 3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라고 했다. 존재론적인 인간의 죗값은 죽음이다( 6:23).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잘 살아보려고 노력을 한다고 해서 제대로 된 삶을 살아낼 수 없다. 어느 한순간, 극한 상황을 만나면 속에 감추어두었던 죄 성이 그대로 드러나게 됨을 알 수가 있다
.

이렇게 속 사람이 물(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 산 생명이신 성령님을 마음속에 모시지 못한 사람은 겉 사람은 다 같은 사람이나 그 속에 생명이 없다.(1 5: 12 참조) 그리스도의 영, 산 생명이 없는 사람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죽은 영일 뿐이다. 이런 사람이 겉 사람, 외면을 아무리 잘 치장하고 지성으로 포장한다고 하여도, 그 속 사람이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는 결국 사망의 냄새가 난다면 너무 무리한 말일까
?

죽은 생명에서는 결코 산 생명의 향기를 발산해 낼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고후 2: 15- 16 참조) 이런 상태를 가리켜서 “회칠한 무덤”, 그러니까, 겉은 하얗게 회칠을 했으나, 그 속은 죽은 상태이기에 썩은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믿노라고 착각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한 우리 주님의 무서운 질책이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

2. 속 사람을 강건히 하라

거듭난 것을 믿는가? 그렇다면, 그대로 내버려두지 말고 새 사람으로 태어난 속 사람, 영으로 거듭난 새 생명을 강건하게 해야 한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3: 16) 사람들이 대개는 거듭남의 축복만 자랑하고 그 거듭난 상태가 어떠한 상태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라, 성도라고 이름 하는 사람들의 삶이 그야말로 시궁창에서보다 더한 악취를 뿜어내고 이로말미암아 현 기독교계가 이방인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속 사람은 나무의 뿌리와 같은 것이다. 뿌리가 강건해야 나무가 건강하다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렇다, 나무의 생명은 뿌리의 건강함에 달려 있는 것이다
!

필자는 난(
)을 무척 사랑한다. 무엇보다 그 우아한 자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 지니고 있는 고상한 품격이 그리스도를 닮은 듯하여, 많이 흠모하는 것이고, 내가 그리스도의 고상한 품격을 흠모하는 만큼, ()을 가꾸면서 자신도 가꾸어야겠다고 하는, 어떤 고상한 도전의식 같은 것을 고취시켜 주기 때문이다. 하여, 손바닥만 한 필자의 아파트 작은 창가, 햇볕이 잘 드는 곳에는 언제나 난()이 자라고 있다. ()은 그 아름다운 모습만큼, 가꾸는 것 또한 여간 정성을 요하는 것이 아니다. 물을 너무 자주 주어도 안 되고 물을 너무 주지 않아도 탈이다. 늘 적당한 온도와 적당한 햇볕, 그리고 적당한 필수영양을 공급해 주면서, 온갖 정성을 다 쏟아야 한다. 사람의 영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한 세상 살다가 사라져 가야 하는 뿌리 뽑힌 나무 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온갖 노력과 정성을 다 기울이지만, 정작 자신의 영혼 건강을 위해서는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일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 같다.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대신, 이적과 기사에만 정신이 쏠려 있는 사람도 많다. 다른 이, 자칭 신령하다는 어떤 인사들의 감언이설, 주워들은 풍월로 신앙생활 하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신생아가 태어난 그대로 그 자리에서 머문다면 어찌 건강한 인간으로 성숙해 질 수가 있겠는가…난(
)을 가꾸는 마음으로 자신의 속 사람을 가꾼다면 그 속 사람이 얼마나 아름답고 튼튼하게 잘 자랄 수 있을 것인가?

2. 속 사람이 강건해지는 비례만큼, 죄의 습성은 약하게 된다.

칼빈은 의지(意志-the will)의 노예 성을 주장한다. 즉 인간이 그리스도에게 지배받기 전에는 사탄의 지배를 필연적으로 받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관한 설명을 어거스틴의 표현을 빌어 서술하는데, 인간의 의지(意志-the will)를 말(horse)에 비교하여 기수가 하나님일 경우 바른 길을 가게 되고 내 의지(意志-the will)를 사단이 기수가 되어 조종할 경우 결국 절벽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의 은총의 도움을 받지 않는 한, 인간은 선행을 위한 자유 의지를 소유하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이것이 곧 의지(意志-the will)의 노예 성이며, 인간 의지(意志-the will)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을 때,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죄를 지을 수 없는 의지"(non posse peccare)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여기서 필연성(necessitas)과 강제성(coactio)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펠라기우스의 "만약 죄를 필연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죄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이 자발적으로 행한 것이라면, 그것을 피할 수 있다."라는 말에, 칼빈은 인간이 죄를 진 것은 의지를 반대해서 된 것도, 강제로 한 것도 아니라고 전제하고, 인간은 마음의 가장 커다란 열정을 갖고서 죄를 범했으며, 또 인간의 본질은 너무나 부패한 나머지 악을 향하여서만 움직인다고 반박하고, 인간의 의지는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에 매여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인간 의지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으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질 때 "죄를 지을 수 없는 의지"(non posse peccare)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요일 5:18) 이 구절들은 이단들이 악용하는 구절이기도 한데, 이 두 구절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거듭난 사람은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 그런 뜻이다
.

이것이 거듭난 성도의 특징이다. 그러니까 거듭나기만 하면 그 이후에는 단 하나의 죄도 범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이 거듭났다고 해서 타락한 본성이 갑자기 완전히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거듭난 후에도 그 안에 찌끼처럼 남아 있는 육신의 정과 욕심 때문에 죄로 기울기 쉬운 성향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옛사람의 행습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무엇보다 죄의 실체와 해악을 깨닫게 되며, 죄가 얼마나 자신의 존재와 삶을 망가뜨리고 하나님에게서 내려오는 선한 복들을 가로막는지 알게 되고, 또 하나님께서 그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고 혐오하시는 지를 깨닫게 된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증오하시는가 깨닫게 되면, 그 사람은 아직 죄의 영향력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하드라도, 죄에 대하여 싸우려는 의지가 새롭게 생기게 되는 것이다. 거듭남을 통해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이전과는 달리 얼마든지 죄에 대해서 대항할 수 있고 또 그 죄를 이길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바로 신학상 술어로 성화(sanctification), 그 나라에 가기까지 견인(perseverence)해 나가시는 성령님의 은혜(grace)라고 말하는 것이다
.

마음속에서부터 변화된 상태가 거듭난 상태라면, 그는 날마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되며, 날마다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품성을 마음속에 품지 않으면, 표면만 부드럽고 고요하여 마치 가슴에 가스와 마그마 같은 불필요한 것을 품고 있는 화산 같다. 화산은 터지기 전까지는, 표면적으로 더없이 고요한 것 같으나 그 속에 엄청난
가스, 마그마 따위가 있어서 그것들이 지각의 터진 틈을 통하여 지표로 분출하면 그렇게 무서운 화력을 발하는 것이라고 한다. 산속이나 바다 속에서 불필요한 가스, 마그마 같은 이물질이 부글거리고 있는 한, 어느 시점에 가서 틈새가 보이면 그만 뢀화산으로 폭발하게 된다. 그런 날에는 자신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 모두, 그 불길 반경에 있는 사람을 태워서 죽일 수도 있다.

서기 79 824일 아침. 지체 높은 로마 시민들의 여름철 휴양도시인 폼페이는 바쁘고 활기에 넘쳤다. 나폴리로부터 12㎞ 떨어진 ‘베수비오’ 산 기슭에서 ‘사루누스’ 강 어귀에 세워진 항구도시 ‘폼페이’는 로마제국의 화려함을 잘 나타내는 사치스러운 도시였다. ‘베수비오’ 산은 이따금 연기를 내뿜었지만 16년 전 폭발한 뒤로는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사람들은 가끔 연기를 뿜는 모습이 오히려 폼페이의 경관을 더 멋지게 꾸며주고 있다고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산과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이다
.

정오쯤, 며칠째 계속되던 땅의 흔들림이 갑자기 거세지더니 곧 ‘베수비오’로부터 하늘을 뒤덮는 버섯구름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사람들이 미처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산꼭대기가 갈라지면서 뜨거운 화산재와 용암이 비가 오듯 쏟아져 내렸다. 새들은 날다가 나뭇잎처럼 떨어졌고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짐승들도 숨을 곳을 찾아 갈팡질팡했다. 화산은 쉴 새 없이 터졌고 검은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완전히 가렸다그 무서운 불길은 끝내 모든 생명을 집어삼키고 말았던 것이다. - 네이버 백과 사전 참조


오늘 아침, 주께서 내게 주신 깨달음은, 성도는 과거 폼페이시의 멸망을 항상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베수비오’ 산은, 영적으로 각종 죄악의 불, 시기, 질투, 음란, 사기, 협박, 공갈, 이런 온갖 악독으로 가득채운 마음재앙을 가슴 속에 품은 표면적 유대인의 멸망을 예고해 주는 본보기란 것이다. 폼페이시의 멸망, 그것은, 언제가는 폭발할 수밖에 없는 너무 많은 가스와 마그마 같은 것을 ‘베수비오’산 땅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베수비오’ 산이 대폭발을 일으키기 전까지, 표면적으로는 더없는 고요를 누리는 것 같았고 평안하다 안전하다 노래했었다. 이처럼,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 혹은 거듭났다고 하여도 그
속 사람을 강건하게 성장시키지 못하여 죄의 속성, 멸망할 지옥 불을 가슴 속에 품고서야 어찌 안전하겠는가…

그런고로, 우리는 거듭난 것만 자랑할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난 속 사람(inner person) 이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갈 수 있도록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읽은 말씀이 내 속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그 말씀에 내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
)에 물을 주듯, 날마다 기도로 내 영혼의 메마름을 적셔주어야 하고, 햇빛 같은 그리스도 사랑의 빛이 내 영혼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것이다.

오래 전 저를 아껴주 목사님께서 올려주신 댓글 중, "
人香百里, 茶香千里, 蘭香萬里"라는 아름다운 말씀이 눈에 띈다사람의 향기는 백리, 차의 향기는 천리, 난의 향기는 만리...라는 뜻이겠는데...생각해보면, "人香"이란 하나님 나라에까지 올라갈 것이니, "人香"의 퍼지는 길이는 가히 짐작하기 어려울 것 같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3: 17-19) 오늘 이 바울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고후
2: 15- 16)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

 



인간(人間)의 수명(壽命)이 얼마나 되는가하는

논의는 예로부터 있어왔다, 성경(聖經)에는 수명

(壽命)이 120세(歲)로 나온다, (창세기(創世記)

 6장(章) 3절:), 현대 의학자(現代 醫學者)들도

비슷하게 125歲까지로  보고 있는 것 같다.


 

통계청(統計廳)에서도 현제(現在) 65歲를 넘은

사람의 평균 수명(平均 壽命)이 91歲라고 발표

(發表)한 것을 보면, 인생 칠십(人生 七十)은 옛

말이고 인생 백세 시대(人生 百歲 時代)가 온 것

만은 분명해 보인다.


 

요즘은 또 인생 백년 사계절(人生 百年 四季節)

()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25歲까지가 ''

50歲까지가 '여름'

75歲까지가 '가을'

100歲 까지가 '겨울'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른다면 70歲 노인(老人)은,

단풍(丹楓)이 가장 아름다운 만추(晩秋)

쯤 되는 것이오, 80歲 老人은 이제 막

초겨울에 접어든 셈이 되는 것이다.


 

동양(東洋)에서와 같은 회갑계념(回甲槪念)

이 없는 서양(西洋)에서는 대체로 老人의

기준(基準)을 75歲로 보는 것 같다, 그들은

65歲에서 75歲까지를young old 또는

active retirement(활동적 은퇴기:活動的 隱退期)

라고 부른다.


 

비록 隱退는 했지만 아직도 사회 활동(社會 活動)

하기에 충분(充分)한 년령(年齡)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적 년령(肉體的 年齡)보다도더

중요(重要)한 것이 정신적(精神的)인 젊음일 것이다.


유대계 미국 시인(美國 詩人)인 사무엘 울만은

일찍이 그의 유명(有名)한 시 청춘(詩 靑春) 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청춘(靑春)이란 人生의 어떤 기간(期間)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狀態)를 말한다,때로는 20歲 청년(靑年)

보다도 70歲 노년(老年)에게 靑春이 있다,나이를 더

해가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과 열정

(熱情)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96歲로 타계(他界)한 세계적(世界的)인 경영학자

(經營學者) 피터 드러커는 타계 직전(他界 直前)까

지 강연(講演)과  집필(執筆)을 계속(繼續)했다.


 

페루의 민속사(民俗史)를 읽고 있으면서,아직도

공부(工夫)하 시냐 고 묻는 젊은이들에게 호기심

(好奇心)을 잃는 순간(瞬間) 늙는다는 유명(有名)

한 말을 했다, 1973年에 96歲로 타계(他界)한

금세기 최고(今世紀 最高)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는 93歲때 UN에서 조국(祖國) 카탈루냐의

민요인 '새의 노래' 를 연주(演奏)하고 평화(平和)

에 대한 연설(演說)을 하여 세계인(世界人)들을

감격(感激)케 했다.


이들보다 나이는 적지만 금년(今年)도 70歲인

세계 제일(世界 第一)의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는

최근(最近) 이제 쉴 때가 되지 않았느냐 는 질문

(質問)에 쉬면 늙는다, 라며 바쁜 마음 이야말로

건강(健康)한 마음 이라며 젊음을 과시(誇示)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젊은이보다  더 젊은 꿈과

열정(熱情)을 가지고 살았다,정신과 의사(精神科

醫師)들은 말한다, 마음이 靑春이면 몸도 靑春이

된다,이 나이에 무슨…이라는 소극적(消極的)인

생각(生覺)은 절대 금물(絶對 禁物)이다.


 

노령(老齡)에도 뇌세포(腦細胞)는 증식(增殖)한다,

타계(他界) 할 때까지 공부(工夫)하라, 확실히 늙음

은 나이보다도 마음의 문제인 것 같다, 물론 생사

(勿論 生死)는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때 까지 살 수 있다면 감사(感謝)한 人生이 되지

않겠는가………


 

항상(恒常) 젊은 마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새로운

일에 도전 하면서 바쁘게 사는 것이 젊음과 장수

(長壽)의 비결(秘訣)인 것 같다.

            [黃昏의美學 中에서

 

 



 




Mossbrae Falls는

LA에서 약 600마일 떨어진

Dunsmuir 지역에 있는 폭포로서

 

높이 50ft(15m), 넓이 150ft(46m)의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폭포 가운데 하나이며

새크라멘토 강(Sacramento River)으로 흘러 들어가는 폭포입니다.

 

Dunsmuir는

Lake Shasta의 북쪽 40마일 지점에,

그리고 Mt. Shasta의 7마일 남쪽 지점에 있는 인구 1,650명의 소도시입니다.

 

Mossbrae 폭포는

Dunsmuir에 있기 때문에

Dunsmuir 폭포로 불리워지기도 하는데

실제의 정확한 명칭은 Mossbrae 폭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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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sbrae란

이끼(moss)와 언덕(brae)의 합성어인데

이 폭포 주변에 이끼가 많은데다 폭포의 위치가

언덕의 경사면에 위치해 있어서 Mossbrae 폭포란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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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는

크게 왼쪽 폭포와 오른쪽 폭포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모두 옆으로 퍼져서 흘러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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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강으로 떨어지는 부분은

가느다란 물줄기를 이루기 때문에

폭포가 떨어지는 소리가 요세미티의 폭포들처럼 요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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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말 이후에는

폭포의 수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풍부한 수량의 폭포를 찍기 원한다면

늦어도 6월 이전에 가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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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sbrae 폭포는 보는 이에 따라

폭포의 모양이 사워기의 물줄기 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이는 가늘고 길다란 국수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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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폭포의 모습이

아름다운 여인의 머릿결처럼 보이는데

이 블로그를 보시는 당신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보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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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주안(power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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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을 빼앗기면

 

인간의 삶과 짐승의 삶을 구별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말(言語)입니다.
동물의 의사소통을 위한 소리도 일종의 말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 말입니다.
성경은 “말이 곧 영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삶이 동물의 삶과 다른 것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사람도 짐승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지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 율법책을 주야로 묵상하라, 그러면 네가 형통하리라. 네가 밟는 땅을 다 주리라.” 하십니다.
주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고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계명을 지킨다는 것,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내 안에 지킨다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성경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계명을 지키려 노력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칼과 총 앞에서 지켜 목숨을 버렸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이 왜 사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에게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뱀이 하와를 유혹하였습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계명, 곧 “선악과를 먹지 말라.” 하신 계명을 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떨어지게 하려고 무슨 짓이든 합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계명을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빼앗으려는 자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하여는 단단하고 견고한 믿음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공동체에서 떨어져 홀로 있는 것도 위험한 일입니다.
주님의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는 밖에 버려져 마를 수밖에 없고 사단의 공격목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견고하지 못 했던 하와는 신앙공동체인 아담으로부터도 떨어져 있었으므로 쉽게 선악과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네 눈이 밝아 하나님 같이 되리라.”는 꼬드김에 넘어갔습니다.
뱀의 말을 듣고 보니 그 선악과는 얼마나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던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정말 멋집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되면 더욱 신이 날 것입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얼마나 자유롭겠습니까?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멋지게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고기가 물을 떠나는 것이요, 나무가 땅을 떠나는 것입니다. 죽음의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달고 멋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달콤한 선악과, 하나님 없는 멋진 삶을 맛 본 하와의 꼬드김에 믿음 약한 하와를 권면하고 지켜주어야 할 아담마저 넘어가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자,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두 사람은 이제 사람일까요, 아니면 머리 좋은 짐승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인간은 짐승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아니, 사단의 조종을 받으며 사니 짐승보다도 못 한 게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여기고 뱀의 말을 좇은 아담과 하와는 곧 타락이라는 절망에 부닥치게 됩니다.
눈이 밝아져 스스로를 돌아보니, 하나님의 사랑의 굴레인 말씀, 곧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그 간단한 계명을 버리고 나니, 얼마나 부끄럽고 두려운 존재로 변했습니까?
그들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두르고 숲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러나 죄와 죽음의 문제가 무화과 잎 같은 걸로 해결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버린 결과가 이처럼 비참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시 주신 말씀, 곧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말입니다.
주님 다시 주신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하신 계명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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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매 어매 우리 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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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매 
 
 
어매 어매.. 우리 어매
뭣할라고 날 낳았던가
날라거든 잘 낳거나..
못날라면 못 낳거나..
살자허니 고생이요. 
죽자허니 청춘이라
요놈 신세 말이 아니네
 
어매 어매.. 우리 어매
뭣할라고 날 낳았던가
 
님아 님아.. 우리 님아
속알머리 없는 님아..
겉이 타야 님이 알제 
속만 타면 누가 아나
어떤친구 팔짜 좋아..
장가한번 잘도 가는데
몹쓸 놈의 이내 팔짜..
 
어매 어매.. 우리 어매
뭣할라고 날 낳았던가(x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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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의 나팔소리(23)

가짜 기독교인들은 가장 뜨거운 지옥의 풀무 불에 들어간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농부가 밭에 곡식을 뿌렸는데 곡식은 보이지 않고 가라지만 가득하다고 하셨다.(마13장)  종들이 말하길 가라지를 뽑겠다고 하니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을 다칠까 염려되니 추수 때까지 뽑지 말라하고는 농부가 잠 잘 때 원수가 가라지 씨앗을 뿌렸다고 했다. 주인이 종들에게 말하길 가라지는 불사르게 먼저 단으로 묶고 알곡은 모아 곡간 안에 넣겠다고 하시고 추수 때는 세상 끝이라 예수님은 말씀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가라지는 가짜기독교인들을 말한다. 유대교와 회교도는 구약성경의 여호와 또는 알라신이라 칭하며 구약의 하나님말씀의 법을 따르고 지키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원수를 미워하고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주라는 하나님의 법에 의거하여 중동지역에서 끊임없이 살인과 전쟁을 하며 순교와 성전으로 미화하고 독려하며 실천하고 있다. 하지만 4복음 예수말씀의 법은 원수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라고 했다. 아버지의 법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은 아들예수의 법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하나님이 독생자인 예수를 사랑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줬다고 하셨다.(마28:18)(요3:16) 그러나 기독교의 구교와 신교는 하나님의 법도 아니요 예수의법도 아닌 웨슬레, 칼뱅, 루터등이 신종 교리와 율법을 만들어 지키라 말하지만 이는 모두가 지옥 가는 가라지의 법이요 가짜 기독교인들인 것이다. 

 

이 시대 기독교는 수백개의 교단으로 분화하고 있다. 가라지 단으로 형성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의 법을 지키는 종교이다.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는 예수의 교훈과 너무나 멀다. 국화빵에 국화가 없고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기독교)예수교 속에 예수의 교훈과 예수의 법이 없다는 점이다. 예수의 법과 예수의 교훈을 잘못 가르치는 자는 이 땅에도 사함이 없고 내세에도 사함이 없는 성령훼방죄를 지어 영원한 지옥의 풀무 불에 떨어진다는 점을 전혀 모르고 있으므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예를 들어보면 교회재정은 예배 차 온 성도들을 대접하는데 지출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예수께 속한 자라하여 물 한 그릇만 줘도 상을 받을 것이라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만나러 온 수천의 군중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대접했다. 당시 물고기가 첨부된 식사는 최고의 식사이다.거기 온 군중들이 천국에 갔다는 말은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음식으로 귀한 대접을 했다. 그러나 이 시 대 대형교회들은 거의 모두가 주일날 성도들에게 물 한 그릇도 대접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목자들은 하나님을 대신한 종들을 대접해야 복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대접할 때 더 기뻐하시며 이를 위해 헌금한 자들에게 상과 복을 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도 특이하게 예수말씀실천교회는 주일 날 모든 성도들에게 진수성찬을 대접하고 있다. 가라지는 겉으로 보면 곡식과 똑같이 보인다. 그러나 가을에 이삭이 나올때에 보면 벼와 가라지인 피가 확연히 드러난다. 지금은 가짜와 진짜가 구분되는 추수 때가 다가오고 있다. 왜냐하면 오직 4복음 예수말씀의 법을 제대로 가르치고 지키는 교회가 생겨 알곡을 모으고 있기 때문이다.

  예실선(예수말씀실천선교회)대표회장 이  만  선 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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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소명을 발견할 것인가?  (0) 2015.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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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장에서 일하던 두 사람이 그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두 사람은 곧 기차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한 사람은 뉴욕으로 가는 표를 사고,
      다른 한 사람은 보스턴으로 가는 표를 샀다.

      표를 산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아 기차를 기다리다가
      우연히 이런 말을 듣게 되었다.

      "뉴욕 사람들은 인정이 메말라서 길을 가르쳐 주고도 돈을 받는데,
      보스턴 사람들은 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한테도 인심을 후하게 베푼대요."

      뉴욕으로 가는 표를 산 남자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보스턴으로 가는 게 낫겠어.

      일자리를 못 구해도 굶어죽을 일은 없을 거야.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아.'

      하지만 보스턴으로 가는 표를 산 남자의 생각은 달랐다.
      '그래, 뉴욕으로 가는 거야!

      길을 가르쳐 주고도 돈을 받는다면 금방 부자가 될 수 있을 거야.
      하마터면 부자가 되는 기회를 놓칠 뻔했잖아.'

      두 사람은 상의 끝에 표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뉴욕으로 가려던 사람은 보스턴으로,

      보스턴으로 가려던 남자는 뉴욕으로 가게 되었다.
      보스턴에 도착한 남자는 금세 그곳 생활에 적응해나갔다.

      한 달 가까이 일을 하지 않고도 사람들이 던져 주는 빵으로
      놀고 먹을 수 있었다.
      그는 그곳이 천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뉴욕으로 간 남자는 돈을 벌 기회가
      곳곳에 숨어 있다는 생각에 매우 들떠 있었다.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도시 사람들이 흙에 대한 특별한 향수와 애착이 있을 거라고
      판단한 그는 그 날로 공사장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흙과 나무 잎을 비닐에 담아 포장해서

      '화분흙'이라는 이름으로 팔기 시작했다.
      과연 그의 판단은 적중했다.

      꽃과 나무를 좋아 하지만 흙을 가까이서 본 적 없는
      뉴욕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그는 화분흙으로 꽤 많은 돈을 벌었고,
      일 년 뒤에는 작은 방 한 칸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우연히 불빛이 꺼진 상점 간판을 발견했다.
      화려한 불빛으로 거리를 밝혀야 할 간판들이 하나같이 때가 끼고

      먼지가 쌓여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러한 간판이 뉴욕 시내에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는 청소업체들이 건물만 청소할 뿐,
      간판까지 청소해야 할 책임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당장 사다리와 물통을 사들여 간판만 전문으로 청소
      해 주는 간판청소 대행업체를 차렸다.

      그의 아이디어는 과연 성공으로 이어졌다.
      그는 어느덧 직원 150명을 거느린 기업의 사장이 되었고,
      다른 도시에서도 청소를 의뢰할 만큼 유명해졌다.
      얼마 후, 그는 휴식을 취할 겸 보스턴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기차역에서 나오자마자 꾀죄죄한 모습을 한 거지가
      다가와 돈을 달라며 구걸을 했다.

      그런데 거지의 얼굴을 본 그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그 거지는 바로 5년 전에 자신과 기차표를 바꾼 친구였던 것이다!

      특별한 인생을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용감하게 모험을 즐겨라.

      두 장의 기차표는 각기 다른 인생을 뜻한다.
      당신의 마음가짐이 곧 선택을 좌우하며,

      당신이 어떤 선택을 내리느냐에 따라서 당신의 운명이 달라진다.
      부자로 사는 인생과 거지로 사는 인생 중 당신은 어떤 것을
      선택하겠는가?

      운명의 절반은 환경 적인 조건으로 정해지지만 나머지 절반은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설계하고 계획할 수 있다.

      만약 당신에게 주위 환경을 변화시킬 힘이 없다면,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가짐을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인생이란 새로운 희망을 찾아 항해하는 과정이다.
      용감한 사람만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자신만의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이 세상 최고의 평등은 신이 모든 사람에게 단 한 번 뿐인
      인생을 준 것이다.

      이토록 소중한 당신의 인생을 자신의 능력으로 설계하고
      다스려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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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발버둥 치고 살아봤자!

사람 사는 일 다 거기서 거기고 다 그렇더란 말입니다.

能力 있다고 해서 하루 밥 네 끼 먹는 것도 아니고

많이 배웠다고 해서

남들 쓰는 말과 다른 말 쓰던가요?

백원 버는 사람이 천원 버는 사람 모르고,

백원이 최고 인줄 알고 살면 그 사람이 잘 사는 것입니다.

길에 돈 다발을 떨어뜨려 보면 개도 안 물어 갑니다.

돈이란 돌고 돌아서 돈이 랍니다.


많이 벌자고 남 울리고 자기 속상하게 살아야 한다면

벌지 않는 것이훨씬 낳은 인생 이지요.

남에 눈에 눈물 흘리게 하면,

내 눈에 피 눈물 난다는 말 그 말 정말 입니다.

내꺼 소중한줄 알면 남의 꺼 소중한 줄도 알아야 하고,

니꺼 내꺼 악 쓰며 따져 봤자!

관속에 넣어 가는 것은 똑같습니다.

남 녀 간에 예쁘네 못났네 따져 봤자!

컴컴한 어둠 속에선 다 똑같습니다.

네자식 내 자식 따지지 말고 그저 다 같은

내 새끼로 알고 품어 키워내면

이 세상 왔다간 임무 완수 하고 가는 것이지요.

주변에 노인이 계시거든 정성껏 보살피며 내 앞날 준비 합시다!

나도 세월 흐르면 늙습니다.

어차피 내 맘 대로 안 되는 세상!

그 세상 원망 하며 세상과 싸워 봤자

자기만 상처 받고 사는 것.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자기 속 편하고 남 안 울리고 살면,

그 사람이 잘 사는 것이지요.

욕심?

그거 조금 버리고 살면 그 순간부터 행복해집니다.

뭐 그리 부러운 게 많고 왜 그렇게 알고 싶은 게 많은지?

좋은 침대에서 잔다고 좋은 꿈 꾼답니까?

아닙디다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요.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들 가는데,

내 인생 남 신경 쓰다보면 내 인생이 없어집니다.

어떻게 살면 잘 사는 건지?

잘 살아 가는 사람들은

그걸 어디서 배웠는지 생각하지 마십시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다가 언제 인지 기억도 안 나고,

정말로 기쁘고 유쾌해서 크게 웃어본지가?

그런 때가 있기는 했는지 궁금해지십니까?

알수록 복잡해지는 게 세상 아닙니까?

자기 무덤 자기가 판다고 어련히 알아 지는 세상

미리 알려고 버둥거렸지 뭡니까?

내가 만든 세상에 내가 묶여 버린 것이지요.

알아야 할 건 왜 끝이 없는지?

눈에 핏대 세우며 배우고 또 배워도 왜 점점 모르겠는지!

남보다 좀 잘 살려고 몸부림 치다 돌아보니 주위에 아무도 없더군요.

왜 그렇게 바쁘고 내 시간이 없었는지?

태어나 사는 게 죄 란걸 뼈에 사무치게 알려 주더군요

엄마가 밥 먹고 "어여가자"하면

어딘지 모르면서 물 말은 밥 빨리 삼키던

그때가 그리워집니다.

남들과 좀 틀리게 살아보자고 바둥거려 보았자

남들도 나와 똑같습니다.

모두가 남들 따라 바둥거리며

제살 깍아 먹고 살 필요 있나요?

잘산다는 사람 들여다보니 별로 잘난데 없이 늙어가는 모습은

그저 그렇게 서로 같더라구요.

많이 안 배웠어도 자기 할 말다하고 삽니다.

인생을 산다는 것이 다 거기서 거기지요.

그저 허물이 보이거들랑

슬그머니 덮어주고 토닥거리며 다독이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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