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기다림으로써 우리는 주권자가 누구인지를 상기하게 된다. 주도권을 쥐고 계시며 만사의 때를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늘 아래 있는 모든 목적에는 다 때가 있으며 하나님을 기다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때야말로 가장 결정적이며 최선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된다. 하나님을 기다림으로써 우리는 안정감 있는 성품을 개발하게 된다. 인간적인 압력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좀더 평온하고 평화롭게 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리며 그분께만 관심을 고정시키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레베카 피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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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큐메니칼 운동과 교황의 [유일한 교회]의 발언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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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글은 지난 2007년 7월 10일 라칭거 교황의 “유일한 교회” 발언을 듣고 기록했던 글이다.

     

    교황청은 현재도 똑같은 것을 주장하고 있음을 있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 글을 올린다.

    지난 2007년 7월 10일 교황청의 신앙 교리 발표는 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가톨릭교회를 유일한 ‘그리스도의 교회’로 규정한 교서를 교황청 신앙교리부를 통해 냈다.

    개신교, 정교, 성공회 등 그리스도교 비(非)가톨릭 종파들은 교회에 필수적인 요소들을 갖추지 못해 ‘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는 지구상에 오직 하나의 교회를 세웠고, 이는 가톨릭교회로 존재한다.”, “다른 종파들(정교회, 영국 성공회, 개신교)에게 과연 교회의 자격이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에 따라 특히 교회 일치 운동 (소위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이번 발표는 참 슬픈 일이다”

    또는

    "배타적인 주장이다”

    "개신교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할 기회 역시 놓치고 있다” 등의 말로 섭섭해 하고 있다.

    성공회 김광준 신부는 “가톨릭교회만 유일하고 합법적인 교회”이며,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교회들’이라고 불릴 수 없다”는 주장으로 한국 그리스도교의 일치 노력에 어려움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감신대 신학 교수인 박종천 목사는 이번 교황청 문서를 통해 “현 교황이 보수적이라는 것과 교회일치 대화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고 지적했다.


    이런 많은 염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가톨릭 성명은 현 교황의 승인아래 발표되었다.

    모두 5가지의 질의 답변형식이었다.

    첫째는 제2 바티칸 회의는 교회에 대한 가톨릭 교리를 절대 변경시킨 적이 없다는 내용이다.

    둘째, 셋째는 그리스도 교회가 가톨릭교회에 존속한다는 내용이다.

    즉 그리스도가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고 그 교회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 이 교회는 곧 가톨릭교회라고 답하고 있다.

    넷째는 동방교회를 ‘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가?의 문제다.

    다섯째는 16세기 개혁 때 나온 개신교에게는 ‘교회’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신교를 ‘교회’ 대신 ‘공동체(Communities)’로 명명하면서 개신교는 사도의 전승을 따르지 않고, 성사의 제사장이 없으며, 성체가 없으므로 ’교회‘라 부르기에 부적합하다고 말한다.


    이 성명에 대해 일부 개신교 지도자들의 우려는 세계 교회일치 운동에 있다.

    개신교는 개혁 때 가톨릭이 성경에서 벗어났음으로 인하여 갈라졌다.

    칼빈은 개혁은 계속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지금 일부에서는 가톨릭과 하나가 되자고 부르짖고 있다.


    지도자들은 이 일치운동이 어디서 주도되고 있는지 올바로 알아야한다.

    이것을 올바로 안다면 현재와 같은 인권에 근거한(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닌) 에큐메니칼 운동에 앞장설 수는 없다.

    결과적으로 이 운동의 근거를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가톨릭을 바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가톨릭의 겉모습만을 알아서는 그 근거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긴 설명은 추후에 하겠지만 그 근거가 되는 것을 일부만 소개해보도록 한다.


    가톨릭교회는 두 번째의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1992년에 출간했다.

    이는 요한 바오로 2세가 이룬 중요한 사역중의 하나이었다.

    이 출판을 총지휘한 사람이 바로 라칭거 교황, 현 베네딕토 16세이었다.

    그리고 에큐메니칼 운동은 요한 바오로 2세가 온 세계를 여행하며 이끈 끈질기고 집요한 운동이요, 또한 현재 베네딕토 16세가 계속해서 추진하고 실천에 옮기고 있는 운동이다.


    가톨릭은 제2바티칸회의 이후 교회 일치 운동을 그들의 사업 중 최우선순위의 하나로 두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왜 교황청은 이 세계 일치운동을 중시하고 있으면서 이런 성명서를 발표했는가?

    그것은 제2바디칸 문서를 보면 누구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제2바티칸 회의는 일치 운동(에큐메니칼 운동)에 관해 24개 교령을 만들었다.

    그중 교령4는 가톨릭 신자들이 선익에 이바지하며 일치운동을 촉진해야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목해야 할 교령24는 “온전히 또 순수하게 가톨릭 적이 아닌 일치 활동은 있을 수 없다”고 명시되어있다.

    이 말은 교회일치가 반드시 ‘가톨릭 적이어야 한다’는 말이고 또한 “가톨릭교회가 언제나 고백하는 신앙과 합치”하는 신앙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보면 일부 개신교에서 “세계 평화”를 캐치플레이로 걸고 일치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 초점이 가톨릭에서 말하는 일치 운동과 얼마나 다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성경이 말하는 일치, 즉 같은 믿음으로 일치해야 하는 것과 얼마나 다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진정으로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바로 알아야함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가톨릭 교리에 충실한 베네딕트 교황이 이런 성명서를 낸 것은 가톨릭 쪽에서의 일치운동의 방향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일치운동의 궁극적 목표에 대해 지난해(2006) 한국을 방문한 카스퍼 추기경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선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그 다음에는 같은 성사를 거행하며, 마지막으로 주교직에 대해 같은 이해를 공유하는 것이 교회 일치의 궁극 목표이다."

    지난해(2006) 감리교와 루터교와 가톨릭이 의화(Justification) 교리에 서명했다.

    이것은 가톨릭이 제2바티칸 회의 이후 지난 40년간 세계평화와 교회 일치를 내세워 물밑작업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가톨릭 쪽에서의 다음단계는 무엇일까?

    가톨릭의 한 관계자는 “여러 가지 학술 행사를 통하여, 어떻게 하든지 ‘성사의 일치’에 대한 개신교 측과의 진지한 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하여, 위의 본문을 화두로 개신교 측에 던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는 아주 심도 있는 올바른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원문은 의화에 관한 것보다 성화(sanctification)라는 단어를 2번씩이나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톨릭의 물밑작업은 이제 겉으로 드러나는 작업이 시작된 것임을 인식해야한다.

    개신교의 교계 지도자들이나 세계일치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가톨릭의 근본을 잘 알아야겠다.

    500년 전에 갈라진 것을 다시 합한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 흘림이 물거품이 된다?

    가톨릭의 근본 교리가 완전히 성경적으로 변경되기 전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개신교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

    성경의 진리를 고수하고 초대 교회의 믿음으로 돌아가기 위해 수많은 피를 흘렸던 믿음이다.

    그러므로 개신교 지도자들은 가톨릭의 신앙교리가 무엇인지 바로 알고 주님이 주신 양떼들을 이 영적 전쟁에서 잘 돌봐야 할 것이다.


    (가톨릭에 대해 전체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책을 추천한다. 제목은 “가톨릭에도 복음이 있는가?”이다. 이 책은 가톨릭교회 교리서를 근거로 기록한 책으로 일반 성도들이 읽기 쉽게 기록되어 있고, 아주 잘 기록되고 편히 읽을 수 있는 책으로 가톨릭을 잘 이해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읽어야 할 책이다. 한인성경선교회에서는 이를 선교를 목적으로 출판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 가톨릭의 움직임을 항상 한 눈에 알 수 있는 분별력을 쉽게 갖게 될 것이다.)

     

     




     

     

    
    
    내 마음 당신께... 
                                최송연
                    
    내가 당신을 알기도 전
    당신이 날 먼저 사랑하셨으니
    뒤늦게나마 내 마음 
    당신을 향해 나아갑니다
    
    내가 당신을 거부할 때도
    당신은 내 곁에서
    묵묵히 날 지켜봐 주셨으니
    내 영혼 한가득 
    감사의 눈물로 채웁니다 
    
    현란한 달빛 날 유혹하고
    안개 짙어 길 잃었을 때에도
    주께서 늘 내 손잡아주시니
    이젠, 내 마음 
    당신께 바칩니다, 온전히...
    
    
     
    
    
    
    
     
    
    
    
    

     

     

     

     내 마음 당신께...
                                최송연
                   
    내가 당신을 알기도 전
    당신이 날 먼저 사랑하셨으니
    뒤늦게나마 내 마음
    당신을 향해 나아갑니다

    내가 당신을 거부할 때도
    당신은 내 곁에서
    묵묵히 날 지켜봐 주셨으니
    내 영혼 한가득
    감사의 눈물로 채웁니다

    현란한 달빛 날 유혹하고
    안개 짙어 길 잃었을 때에도
    주께서 늘 내 손잡아주시니
    이젠, 내 마음
    당신께 바칩니다, 온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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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장 가장 좋은 친구

     

    이는 나의 친구이다”(5:16)

    친구가 있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이다. 이 세상은 죄로 가득 찬 연고로 근심이 넘치고 있고, 어두운 곳이며, 외로운 곳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가장 밝은 빛이란 곧 친구이다. 참다운 친구는 귀하고 드물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혼을 염려해 줄 자는 거의 없다. 당신이 알아야 하는 친구가 있으니, 그는 형제보다 친밀하신”(18:24)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1. 당신은 곤고할 때의 친구를 원하는가? 그러한 친구가 있으니 그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에서 가장 결핍된 것이 많은 피조물이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1) 우리는 모두 본래 죽어가는 가엾은 피조물이다. - 우리는 매일 죽어가고 있다. 자신을 치유할 수도 없다. 주 예수께서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시러”(딤후1:10) 오셨다.

     

    2) 우리는 모두 본래 감금된 채무자이다. - 우리는 하나님께 참으로 큰 빚을 지고 있으며 더구나 갚을 가망이 없는 무일푼의 파산자이다. 주 예수께서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러”(61:1) 오셨다.

     

    3) 우리는 모두 본래 난파하여 버려진 자들이다. - 우리는 자신의 죄의 사슬에 묶여 속박된 채 그 죄의 무게에 짓눌려 침몰하고 있었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시려”(33:24) 오셨다.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다면 우리가 구원될 수 있었는가? 그리스도와의 우정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모두 영원한 지옥으로 잃어버려졌을 것이다. 그가 내려오신 것은 그의 값없이 주시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긍휼 때문이었다. 그는 은혜로우신 고로 우리가 찾지도 않고 부탁하지도 아니하였는데 오신 것이다. 세상의 역사를 다 훑어보고, 당신이 알고 사랑하고 있는 이 둥근 세상을 전부 둘러보라. 그러한 친구가 있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2. 당신은 행위로 보여주는 진실한 친구를 원하는가? 그러한 친구가 있으니 그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인간의 우정의 참된 본질은 그 행위를 보아 알 수 있다. ‘벗다움은 벗답게 행하는 데 있다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해 행하신 행위들이야말로 그가 인간을 향해 품고 있는 친구의 감정을 보여주는 큰 증거이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수행하신 행위들은 지극히 친절하고 자기 부정적인 행위들이었다.

     

    하나님이신 그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친히 인간의 본성을 입으시고 여자에게서 나셨다. 모든 것을 만드신 전능하신 창조주께서 우리들과 똑같이 어린 아기가 되셨고, 우리의 육체적인 모든 약함과 허물을 몸소 체험하셨다. 그는 왕 중 왕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머리 둘 곳이 없으셨고, 피곤하시고 배고프셨으며 목마르시고 가난하셨다. 흠이 없으셨던 그 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 죽음을 죽으셨다. 그는 한 마디 말로써 원수들을 흩어놓을 수도 있었지만, 우리를 살게 하려고 죽으셨고, 우리로 영광을 얻게 하시려고 수치를 겪으셨다. 이와 같은 우정은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한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사람이 과연 있었는가? 그분처럼 자기 우정을 위해 가장 값비싼 대가를 치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렇게 진실한 친구는 결코 없다.

     

    3. 당신은 강하고 능력 있는 친구를 원하는가? 그러한 친구가 있으니 그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들은 남의 근심과 고통을 위해 근심하며 더불어 울 수도 있지만 그 근심과 고통을 없애 줄 수는 없다. 자기 친구된 자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만큼 그렇게 많은 것을 행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사람은 벗을 위해 이 세상에서 적은 도움만을 줄 수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영원의 세계에서 친구가 되실 수 있다.

     

    1) 그리스께서는 죄인 중의 괴수까지도 용서하시고 구원하실 수 있다. - 그는 사악한자의 지극히 더러운 얼룩까지도 씻어 주실 수 있으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눈보다 더 희게 만드실 수 있다.

     

    2)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강퍅한 마음을 가진 자도 회심시킬 수 있으시며 그 안에 새로운 영을 창조하실 수 있다. - 그는 옛것을 지나가게 하시고 새로운 마음을 주실 수 있다.

     

    3)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믿고 제자가 된 모든 사람들을 끝까지 보전하실 수 있다. -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세상과 육체와 마귀를 이기고 끝까지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는 은혜를 주실 수 있다. 그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여 본향에 이르게 하실 수 있다.

     

    4)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장 유익한 은사들을 주실 수 있다. - 돈으로 살 수 없는 내적 위로, 즉 가난 중에 평안을, 근심 중에 기쁨을, 고난 중에 인내를 주실 수 있다. 또한 죽어 있는 그들에게 소망을 주시어 어두운 골짜기라도 두려움 없이 걷게 하실 수 있다.

     

    이것이 곧 진정한 능력이다. 이것이 곧 참된 위대함이다. 인간의 두려움은 대단히 크고 이 악한 세상의 반대는 강력하며, 육체의 욕망은 지독히도 날뛰고 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또한 끔찍하며 마귀는 굶주려 포효하는 사자처럼 먹어 치울 자를 찾아 해매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모든 것보다 더 강하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강한 친구는 결코 없다.

     

    4. 당신은 사랑과 다정함이 넘치는 친구를 원하는가? 그러한 친구가 있으니 그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친절은 참된 우정의 정수이다. 주 예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은 지식에 넘치는 사랑”(3:19)이라 불린다.

     

    1) 그 사랑은 죄인들을 받아들이심 안에서 밝게 빛난다. - 그의 연민은 끝이 없으시며, 그의 긍휼은 한량이 없으시다. 그는 어떤 죄인에게든지 기꺼이 친구가 되신다.

     

    2) 그 사랑은 그를 믿고 그의 친구가 된 후의 죄인들을 다루시는 데에서 빛난다. - 예수께서는 그들을 인내로 대하시고 그들의 모든 근심을 깊이 동정하신다. 그들이 견디어낼 수 없는 시험을 겪게 하지는 아니하신다. 그날에 합당한 그날의 은혜를 주시고, 그들의 봉사가 제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일지라도 그것을 받으시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신다.

     

    우리는 사랑을 받을 만한 것을 가진 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안에 선한 것이 전혀 없는 죄인들을 사랑하신다. 우리는 대가를 돌려받을 수 있을 만한 것을 가진 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들을 사랑한다.

     

    5. 당신은 지혜롭고 신중한 친구를 원하는가? 그러한 친구가 있으니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인간의 우정은 맹목적이어서 지각없는 친절로 사랑하는 자들을 해친다. 친구를 돕고자 하면서도 때로 잘못된 조언과 나쁜 충고로 그들을 곤란에 빠뜨린다.

     

    1) 주 예수께서는 과도한 은혜를 베풂으로써 친구들을 결코 망치지 아니하신다. -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모두 주신다. 그러나 그들에게 매일의 자기 십자기를 지고 그를 따르라고 요구하신다. 그들은 그 당시에는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하나 그들이 천국에 이르면 그 모든 것이 잘한 것임을 보게 될 것이다.

     

    2) 주 예수께서는 친구의 일을 처리하는 데 실수가 없으시다. - 그는 지혜로운 의사처럼 가장 쓴 잔을 배합하시고, 그들이 한 방울이라도 더 마시거나 덜 마시지 못하도록 돌보신다. 그들은 종종 그런 다루심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부활의 날에 그들은 자기의 뜻대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대로 이루어진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이다.

     

    세상을 둘러보면 사람들은 서로의 영혼이 천국에 가도록 소생시켜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에 대하여 서로 확증을 주고받기 위해서 만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동행하시며 완전한 지혜로써 위로하고 책망하시며 권고하시는 것을 본다.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랑하는 자들을 적절한 시기에 방문도 하시고, 갈릴리 바닷가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21:16)하고 대화도 하신다. 주님의 무리들은 항상 거룩한 상태에 있다. 주님이 주시는 은사들은 항상 우리 영혼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그의 우정은 항상 교화를 시켜준다. 인자와의 하루가 세속적인 친구들과의 천 번의 만남보다 더 유익하다. 그와 은밀히 교제하며 보내는 한 시간이 왕의 궁전에서 보내는 일 년보다 더 유익하다 . 예수 그리스도처럼 그렇게 지혜로운 친구는 결코 없다.

     

    6. 당신은 믿음직하고 확실한 친구를 원하는가? 그러한 친구가 있으니 그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1)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모든 지위, 모든 신분의 사람들과 친구가 되셨다. - 왕들과 부자들도 있었지만, 반면에 베들레헴의 목자들이나 야고보 요한 안드레와 같은 가난한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다같이 그리스도의 친구였다.

     

    2)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연령층의 사람들과 친구가 되셨다. - 므낫세, 삭개오, 구스인 내시와 같이 나이가 들어서야 그리스도를 안 자도 있었지만, 반면에 요셉, 사무엘, 요시야, 디모데처럼 어린 시절부터 그를 알고 있던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다같이 그리스도의 친구였다.

     

    3) 그리스도께서는 온갖 성품, 온갖 기질의 소유자들과 친구가 되셨다. - 이삭과 같이 단순하고 꾸임없는 사람도 있었고 모세처럼 언행이 뛰어난 사람도 있었으며, 베드로처럼 열정적인 사람도 있었고 요한처럼 온유한 기질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마르다와 같이 분주하게 일하는 자도 있었고 마리아처럼 발아래 앉아 귀 기울이던 자도 있었다. 수넴 여인처럼 알려지지 않은 자도 있었고 바울처럼 세상을 온통 뒤흔들었던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다 같이 그리스도의 친구였다.

     

    4) 그리스도께서는 거의 모든 민족, 모든 백성, 모든 언어를 말하는 자들과 친구가 되셨다. - 그는 덥고 추운 지방에 다 친구를 두셨다. 그의 생명책에는 노예와 자유인을 불문하고 헬라인과 로마인, 유대인과 애굽인 등 모든 백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 목록에는 수줍어하는 영국인과 신중한 스코틀랜드인, 충동적인 아일랜드인들과 격렬한 웨일즈인들이 다 들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다 같이 그리스도의 친구들이다.

     

    그리스도의 우정은 이 모든 조건들에 구애됨 없이 적용되었다. 그들은 모두 우정을 맺기 시작할 때 부족함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매일 그리스도에게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그렇게 온전히 믿을 만하고 확실한 친구는 결코 없다.

     

    7. 당신은 영원히 배반하지 않는 친구를 원하는가? 그러한 친구가 있으니 그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슬프게도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은 항구적이지 못하다. 재물도, 젊음과 아름다움도, 마음과 지성도 오래지 않아 파멸되고 시들어 버린다. 그러나 이 일반적인 규칙에 놀라운 예외가 있으니 예수 그리스도의 우정이 바로 그것이다.

     

    1)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변치 아니하시는 친구이시다. -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인간의 맹세와 언약은 충실히 지켜지지 못할 때가 허다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자기 친구에 대한 감정은 결코 변함이 없으시다.

     

    2) 주 예수께서는 자기 친구들을 결코 떠나가지 아니하신다. 그와 그 백성 사이에는 작별과 헤어짐은 없다. - 예수께서는 죄인의 마음 안에 그 거처를 정하실 때부터 거기에 영원토록 거하신다. 이 세상에는 작별과 헤어짐이 가득 있다. 죽음과 시간은 가족들조차도 갈라놓는다. 애통하며 무덤까지 따라갔다가 썰렁하고 고적하며 텅 빈 방으로 돌아오는 경험을 하지 않을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그분께서는 결코 친구를 떠나시는 일이 없다.(13:5)

     

    3)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친구들이 어디로 가든지 함께 가신다. - 그와 그의 사랑하는 자들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 그 어떤 곳일지라도, 그 어떤 일 가운데서라도 그들과 그들의 위대하신 친구를 갈라놓을 수는 없다. 그들의 병상과 그들의 맹렬한 환란의 불길 속에도 함께 계시며, 그들이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갈 때도 그는 그들 곁에 동행해 주신다.(28:20) 아무도 실망치 아니하는 단 한 분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다행이고 특권인지 생각해 보라.

     

    8. 맺는 말

     

    1) 당신은 그리스도가 당신의 친구이시고 당신도 그의 친구인지를 엄중하게 살펴보라. - 외적으로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친구로 보이나, 그리스도의 친구가 아닐 수 있다. 죄를 미워하는가? 구세주를 사랑하는가? 귀중한 영혼들을 돌보고 있는가? 화해의 말을 기뻐하는가? 당신은 그리스도의 친구인가? 아니면 친구가 아닌가?

     

    2) 당신이 그리스도의 친구가 아니라면 당신은 가련하고 비참한 존재이다. - 당신에게는 피난처가 없으며,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이다. 당신은 하나님을 뵈올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당신은 그리스도보다는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있다. 당신은 죄인들의 위대하신 친구를 거절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늘에 당신을 변호해줄 친구가 없다. 그리스도와 친교가 없으면 당신의 수입이 얼마이든 당신은 참으로 가난한 자이다.

     

    3) 당신이 진정으로 친구를 원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친구가 되어 주실 것이다. - 그는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을 초대하고 계신다. 그는 당신을 기꺼이 받아들이셔서 그의 친구의 목록에 당신 이름을 기록하신다. 그가 당신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에게 오는 것, 바로 그것뿐이다. 당신이 전혀 무가치하기 때문에 그는 당신에게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그저 와서 친구가 되라고 명하신다. 그러니 와서 지혜롭게 되자. 와서 안전하게 되자. 와서 행복하게 되자.

     

    4) 그리스도가 당신의 친구라면 당신은 큰 특권을 가진 것이며, 그 특권을 가진 자답게 살아야 한다. - 참된 기독교는 살아 있는 인격,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매일 개인적으로 교제하는 가운데 사는 것이다.(1:21) 모든 일에서 당신의 주시요, 구세주이신 분을 영광스럽게 해드리도록 애쓰자. 그 분처럼 그렇게 큰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신의 주님을 슬프시게 하는 일이라면 모두 피하라. 당신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게 시험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말하자. “내 영혼아, 이것이 너의 친구 되시는 분께 기쁨이 되는 일이냐?”

     

    무엇보다도 당신에게 보여주신 자비를 생각하고 당신의 친구 안에서 기뻐하기를 매일 힘써 배우자. 당신의 육체가 병들어 있다 해도, 당신의 가난과 시험이 제아무리 크다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한다면 당신은 지혜롭고 강한, 결코 배반할 리가 없는 친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잠시 후면 당신의 친구께서 당신을 본향으로 데려가 영원히 그와 더불어 살 것이다. 당신은 그가 당신을 아셨던 것처럼 그렇게 그를 보게 될 것이며, 그때 당신은 온 세상에서 모여든 자들이 그리스도를 친구로 둔 자는 부요하고 행복하다고 고백하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출처: 청교도의 길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

     

     

     


    <악기의 전래>

    이 악기는 중부 유럽이나, 태평양 연안의 여러 지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발견되고 있다. 현존하는 것으로서, 유럽 최초의 대표적인 팬플룻은 기원전 5-6세기경 북동 이탈리아의 일리리안 할스타트(Illyrian Halstatt) 유적지에서 발견된 3개의 청대 봉건주의 귀족 문명의 현장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시링크스(Syrinx)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던 그리스에서는 이 악기가 조잡한 의미가 내포된 서민 계급의 것이었다. 추측컨데, 일리리안과 그리스의 이 두 악기는 다뉴브 유역의 인도-유럽 철기 시대 문명에서 공통된 조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날에는 팬플룻이 루마니아의 민속 음악의 특징을 잘 살려주는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루마니아 출신의 팬플루티스트인 게오르그 잠피르에 의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면서부터였다. 동방에서는 이 악기가 파이샤오(p'ai-hsiao)라는 이름으로, 중국에서는 매우 일찍부터 출현되었다. 파이샤오는 양쪽의 각 날개에 같이 반분된 반음계의 12임을 지닌 피치 파이프(Pitch Pipe)로서 사용되었다. 또한 이 악기는 양쪽에서 온음계를 만들어내는 오르간 파이프의 배열과 흡사하였다. 배열의 기초가 되는 우주 철학적인 개념에 의하면, 파이샤오의 한 쪽은 남성을 나타내는 양과 다른 쪽은 여성을 나타내는 음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팬플룻은 한국('생황' 이나 '소'), 미얀마, 혹은 중부 태평양 도서 지역과 서부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팬플룻계에 속하는 악기는 동서양에 걸쳐 널리 분포되어 있으며 나라마다 각각 독특한 모습을 지닌 채 오랜 세월동안 전래되어 오고 있다. 또한 악기 자체가 특별히 변화된 점도 없고, 원시적인 형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답고 환상적인 소리는 듣는 이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있으며 '파이프 악기의 어머니'로 까지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소리연습>

    팬플룻의 소리내기는 여러가지 이유로서 플룻의 소리내기 와 비슷하다. 연주하기 위한 자세도 그러하지만 입술의 모양 그리고 혀놀림(텅잉)을 행하는것 등, 여러가지가 비슷한데 이는 두 악기가 소리내기 위한 '앙부슈어 (embouchure :프랑스어로서 원래는 관악기의 취구를 뜻하는 말이지만 대개는 금관악기 나 플루트 등을 연주할 때 주자의 입술, 이, 혀 등은 어떤 특수한 기능을 가진 상태 로 되는데, 이 상태를 앙부슈어라 한다)'의 응용법이 거의 같기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앙부슈어는 그것을 얼마나 올바르고, 정확하게 익혔느냐, 아니냐에 따 라서 소리를 얼마나 잘 낼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지을 만큼 중요한 것으로 그것을 자연스러운 상태까지 익히기에 오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지만, 그것이 매우 귀찮고 하기 싫은 일 일지라도 참고 익혀야 한다.

    처음에는 악기를 들고 거울 앞에 서서 연습하는 것이 좋다. 그것은 바 른 자세를 위해서도, 그리고 입술이 관의 중심을 정확하게 찾을 수 있도록 해주기 때 문이다.

    1. 양쪽 잇몸에 뺨을 붙이고 입술은 웃음 짖듯이 양 옆으로 당겨 준다.

    2. 그리고 아래의 이를 조금 벌리고 위 아래 입술의 중심 부분에 가능한한 작은 동 그란 바람 구멍을 만든다. 이상적인 입술모양'이란 공기구멍이 가로 8mm-12mm 정도의 폭, 상하의 틈은 종이한장 정도 이다.

    3. 1과2의 모양으로 팬플루트의 불 구멍을 아랫 입술 끝선에 댄다. 이 상태는 입술 이 불 구멍의 1/4정도를 막은 상태가 된다. 상하의 입술을 말아넣어서 거칠어져 있는 입술의 바깥부분으로 불게되면 잡음이 대단히 많이나고 좋은 음색이 나지 않으므로 피 해야 한다.

    4. 그런 후 투또는 두를 발음하기 위한 혀의 동작으로 투하며 입바람을 내 보낸 다. 이때 최초의 입바람이 너무 강하면 "피유"하는 금속성 소리가 나므로 혀에 힘을 주지 말고 가볍게 투를 발음하기 위한 혀동작으로 바람을 내 보낸다. 이때 투로 인하여 입술이 움직이면 틀린 방법이다.

    5. 소리가 잘 나지 않을 때는 팬플룻을 몸쪽이나 앞쪽으로 조금씩 당기거나 밀어 서 각도를 달리주며 불어본다.그러면 어느 위치에선가 소리가 날 것이다. 바로 그 각 의 위치를 잘 기억했다가 팬플룻을 입에서 떼었다가 원위치 시키는 연습을 몇번이고 반복한다. 그 연습은 가능한한 지루함을 느낄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그것이 적당한 위치와 입술 모양을 숙달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연 습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술이 불 구멍을 1/4이상 막아버린 채 불게되어 음정을 떨어뜨리거나 음색을 어둡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며, 윗 입술 이 불 구멍 위를 차양처럼 덥은채 소리냄으로써 음색을 나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입술의 바른자세가 필요하 지만 입술이외의 정확한 호흡과 팔이나 목덜미에서의 불필요한 힘을 빼고 자연스러운 상태로 부는 것이 필요하다. 처음 한동안은 지겹고 힘들겠지만, 좋은 음을 내려고 노 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음이야말로 음악의 소재 바로 그 자체이므로 언제나 음색을 우선으로 생각하여 보다좋은 소리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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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일민  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떠한 어려움에도 물러서지 않는 용기가 있다.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희망이 있다. 날마다 더욱 거룩하게 살아 보려고 하는 피나는 노력이 있다. 그리고 순탄한 경우일지라도, 행여나 넘어질까 항상 깨어 조심하는 경각심이 있다. 이러한 태도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바로 이 중요성 때문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많은 오해들이 생겨나기도 한다. 이제 재림에 관한 성경의 정확한 가르침을 살펴보기로 하자.

     

    재림의 중요성

     

    신구약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언급이 매우 많다.

    구약에는 456회에 달하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예언들이 있다. 이 많은 예언들 속에는 재림이 함께 예언된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욥19:25, 26, 단7:13,14, 슥14:4, 말3:12 등에는 초림과 구별되는 재림이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신약에는 재림을 가리키는 말씀이 318회에 걸쳐 등장한다. 이것은 평균 25절마다 한 번씩 나오는 것에 해당된다. 마태복음 24, 25장과 마가복음 13장, 누가복음 21장은 그 전체가 재림에 관한 내용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전후서와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그 전체의 주제로 삼고 있다

     

    이것은 성경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그리고 얼마나 확실한 사건으로 취급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경 전체의 교훈을 이해함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열쇠와 같다. 그러기에 만일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성경 전체를 부인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세적인 축복보다도 영원한 세계와 그 곳에서 누리게 될 축복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데 그 축복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주어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소망이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께서는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모든 자들을 향하여,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말씀했다(벧후 3:11, 12). 그 때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은 오늘을 거룩하게 살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재림은 성경의 가르침으로 보나 성도들의 실제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보나 너무나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재림의 형태

     

    기독교 역사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주장들이 많았다. 오순절에는 성령이 강림한 사건이나, 예루살렘이 멸망한 사건을 재림으로 보는 주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성도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이나, 성도들이 죽어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을 재림으로 보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잘못된 추측에서 나온  것이었다.

     

    재림의 정확한 형태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통해서 밝혀질 수 있다.

     

    첫째는 성경이 재림을 말할 때 사용한 용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살피는 것이다. 성경은 세 가지의 희랍어 표현으로 재림을 말했다. 파루시아, 에피파네이아, 아포쿠에오가 그것이다. 파루시아는 그 자신의 본체가 다시 나타남을 의미한다. 에피파네이아는 영광스럽게 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표현들 속에는 재림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 즉, 그리스도 자신이 친히 영광 중에 다시 임하셔서, 지금까지 감추어져 있던 모든 것들을 밝혀 드러내시는 것을 가리켜서 재림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때의 모습을 살피는 것이다. 천사는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했다(행 1:11). 따라서 우리는 승천과 관련해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다음 몇 가지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대신해서 다른 누구를 하늘 나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친히 승천을 하셨다. 재림도 역시 성육신 하시어 십자가를 지셨고 승천을 하셨던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친히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강림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친히 오시는 것이 될 수 없다. 하물며 자기 스스로를 재림 예수라고 외쳐대는 사람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들은 적그리스도 불과할 따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육체 그대로 승천을 하셨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는 모습을 눈으로 볼 수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재림 때에도 역시 육체로 오실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누구든 자기의 눈으로 그 모습을 볼 수 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께서는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고 하셨다(계 1:7).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는 그의 재림이라고 할 수 없다. 최근 어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앉아 계신다는 자리를 만들어 놓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곳을 향하여 한국식 큰절을 하는 등 예의를 표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 눈에 보이도록 육체로 오실 그리스도를 너무나도 오해하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천사와 많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영광스럽게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다. 그의 재림도 이처럼 영광스러울 것이다. 주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모든 족속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고 하셨다(마 24:30). 그 때에는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가 들려 올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팔이 울려 퍼질 것이다. 그래서 그 영광을 더욱 장엄하게 드러낼 것이다(실전 4:16). 사도 바울께서는 그 모습을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불꽃 중에 나타나시는" 것으로 묘사했다(살후 1:7).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말씀을 나누시다가 하늘로 올라 가셨다(행 1:9). 제자들로서는 미처 예기치 못했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그리스도의 재림도 이와 같이 마치 도적과 같이 생각지 않은 때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 때가 언제인지를 알지 못한다(막 13:33).. 하늘의 천사들이라도 알지 못한다(마 24:36).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알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그 날, 또는 그 날과 연관된 휴거의 날과 시간을 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 날을 감추어 두기 원하시는 하나님보다도 더 큰 능력을 가졌거나,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보다도 더 많은 지혜를 가진 자들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재림의 징조

     

    우리는 재림의 정확한 날과 시간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하늘과 땅에서 그 징조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 때를 짐작할 수는 있다. 재림의 징조들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이 되어진다.

     

    첫째,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된다. 예수님께서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때가 세상의 끝 즉, 재림의 때일 것을 의미한다.

     

    어떤 교회에서는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직장에서 신우회가 조직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온 세상은 장소적으로 해석되는 것이 옳다. 예수님께서 재림의 때나 기한과 연관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행 1:7). 그러면 땅 끝은 어디일까. 예루살렘일까, 중동지방일까, 남미일까, 시베리아일까, 아프리카의 밀림일까. 우리는 땅 끝을 어떤 특정한 지역에 국한해서 이해할 수가 없다. 지상의 장소는 항상 상대적이어서 어느 한 곳도 세상의 끝이 되어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족속들이 복음을 듣게 될 것을 의미한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다 회개를 하게 된다는 말은 아니다. 재림의 날에도 이 세상의 향락에 빠져 있다가 버림을 당할 사람, 산과 바위 뒤에 몸을 숨길 사람, 아궁이에 던져질 가라지나 쭉정이와 같은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씀은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충분한 분위기에 이르게 될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좋다.

     

    오늘날은 거의 모든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 도회지에 사는 민족은 말할 것도 없고, 산이나 밀림에 사는 민족, 외딴 섬에는 민족, 심지어는 복음을 강력하게 배척하는 이념이나 종교를 가진 민족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재림이 매우 가까웠다는 느낌을 갖기에 충분하다.

     

    예수님께서는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때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때에 재림을 하신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속에는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강력한 교훈이 담겨져 있다. 복음전파에 게을리 하는 사람은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입으로만 중얼거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의식에 해당한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를 드리는 자들은 반드시 복음전파에 나서야 한다. 직접 전도자가 되든지 아니면 간접 전도자, 즉 복음전파를 위해 기도하고 모든 협력을 다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회심이 일어난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3:39).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회심은 재림의 징조에 해당된다. 사도 바울께서는 이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말씀하기를,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다(롬 11:25, 26).

     

    셋째, 적그리스도가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는 재림 때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하셨다(마 24:24). 사도 요한께서도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라고 말씀하셨다(요일 2:18).

     

    적그리스도에서의 '적(敵)'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대적한다는 의미와 대신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세력이나(요일 4:3),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자신이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가장을 하는 자를 가리킨다(마 24:23).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막강한 힘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적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불려졌다(요 12:30). 큰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을 훼방하고 교회와 성도를 핍박하는 짐승으로도 불려졌다(계 13:1 이하). 다니엘 11장에서는 이러한 성질의 적그리스도가 잘 그려져 있다. 반면 그리스도를 대신하기 해서는 그럴싸한 말이나 이론 또는 기이한 표적이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것들 때문에 진리를 왜곡하게 된다. 심지어는 성도들마저도 미혹을 하게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적그리스도는 종교적인 색채를 띄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이나(요일 4:3), 예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는(요이 1:7) 모두 적그리스도에 해당한다. 이러한 적그리스도는 과거 역사 속에 많이 있었다. 그래서 사도 요한께서는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 인줄 알라"고 하셨다(요일 2:18). 그러나 과거에 있었던 적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는 다르다. 재림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는 세상의 정치적인 세력과 종교적인 성질을 동시에 지닌 인격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여러 인물들이 적그리스도로 지적된 일이 있다. 초대교회의 많은 교부들은 로마의 황제 네로를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했다. 상당수의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교회들의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상품에 표시하는 바코드나 신용카드, 또는 컴퓨터나 유럽 공동체를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 모두가 어느 정도는 적그리스도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을 재림 때에 있을 적그리스도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만약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나타날 적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단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재림의 때까지도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재림 때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적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대적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넷째, 대배교와 대환란이 일어난다. 그리스도께서는 재림의 때에 각처에 전쟁, 흉년, 기근, 지진 등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해 달 별과 같은 자연계에도 징조가 생겨날 것이라고 하셨다(눅 24:25). 그러나 이러한 징조들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징조들은 마침내 창세 이후에 없었던 대환란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하셨다(마 24:21).

     

    사도 바울께서는 디모데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성도들은 이 환란 때문에 큰 고통을 당하게 된다(딤전 4:1). 그리고 이 환란에 겁을 내거나 두려워하는 많은 사람들은 배교를 하게 된다. 그 결과 그들은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적그리스도를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의 나타남과 대환란과 대배교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징조들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의 귀에는 난리와 전쟁의 소문들이 그칠 날이 없이 들려온다. 지진과 기근, 기상이변 등으로 인한 각종 대재난으로 온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사탄이 가해오는 고난과 그럴듯한 미혹 때문에, 주님을 멀리하고 돌아서거나 이방 종교에 빠지는 자가 날로 늘어가고 있다 쉽게 분별하기 어려운 이단과 사이비 주장들이 활개를 치며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러나 성도는 두려워 할 것이 없다. 이 모든 상황들은 이미 예언이 되어졌다. 사탄이 세력이 제아무리 강하고, 간교하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능력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넉넉히 마귀와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왕 되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마귀와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 오히려 성도는 이러한 징조들 때문에 더 큰 소망을 가진다. 이 징조들에 이어질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밤이 깊을수록 아침은 더욱 가까이 다가온다.

     

    재림의 목적

     

    그리스도께서는 재림을 하시는 목적은 최후의 심판을 하시기 위함이다. 최후의 심판은 의인과 악인을 가르는 것이다. 의인에게는 각자의 행함에 따른 상급이 주어진다. 악인에게는 행한 대로의 형벌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의인들에게 상급을 주고, 사탄과 악인들에게 벌을 주기 위함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신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8)고 하신 사도 바울의 말씀은 재림의 의인의 상급을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밝혀준다. 그리고 계 19:19-21에 나오는 사도 요한의 말씀은 재림이 사탄과 거짓 선지자와 악인의 형벌을 위한 것임을 확인하게 한다.

     

    최후 심판의 대상에는 이미 죽은 자들과 재림 당시까지 살아 있던 자들이 모두 포함된다. 죽은 자들은 다시 살아서 최후의 심판에 임할 것이다. 살아 있던 자들은 다시는 죽지 아니할 몸으로 변형되어 심판에 임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죽은 자들의 부활과 살아있던 자들의 변형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때가 이르리니 무덤 속에 있는 사람은 심판의 부활을 받으리라"(요 5:28, 29)고 하셨다. 또 사도 바울께서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 15:51, 52)고 하셨다.

     

    성경에 분명하게 예언된 그리스도의 재림은 모든 성도들이 가진 최대의 소망이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승천을 하셨을 때와 똑같이, 육체를 가지고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한다. 아무리 큰 환란이 닥쳐도, 소망 중에서 인내하며 이겨야 한다. 적그리스도를 날 뛸수록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에 더욱 전력을 기우려야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 모든 수고에 대한 보상과 함께 주어질 영광의 면류관은 바로 성도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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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흔한 정신질환이라 하여 "정신적 감기"로 불리는 우울증(Depression)은
    미국의 2.000만명 정도가 증세를 갖고 있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우울해지는 병"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자신은 물론 가족들에게 나타나는 조짐을 놓쳐 병을 키우는 사례가 많다.

    전문가들이 우리가 평소에 우울증에 대하여 몰랐던 내용들을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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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루 근무시간 길면 발생 가능성 높아져 -

    의학전문지 "PLos ONE"에 발표된 새로운 연구를 보면
    하루 근무 시간이 길면 길수록 우울증에 걸릴 위험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2.000명의 남,녀 중년층 공무원을 대상으로
    그들의 하루 근무시간과 우울증세를 6년에 걸쳐 연구했다.

    결과, 하루에 11시간 이상을 근무한 사람들이, 이보다 적게 일한 사람들보다
    우울증 발생 가능성이 2배로 많았다.

    연구팀은 "우울증세가 하루 일정하게 일하는 시간의 많고 적음과도
    연관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는데에 의미가 크다'고 분석했다.

    이외 우울증은 가족 병력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스트레스가 심한 일을 연속하여 많이 당했다거나
    심각한 질병도 우울증 발생 가능성을 높여 주었다.

    어떤 사람들의 케이스는 직접적으로 자신에게 발생하지 않았다 해도
    누군가의 우울한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들음으로써
    그것이 자신에게 우울증세를 유발시키는 원인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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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녀의 증세가 다르다 -
    특히 우울증은 나타나는 증세의 성별 차이가 뚜렸하다.

    여성의 대표적인 증세는,
    눈에 보기에도 슬퍼보이고  지나치게 잠을 자면서 많이 먹는다.

    그러나 남성은 화를 잘 내고 짜증을 부리고 심할 경우, 상대방을 잔혹하게 대한다.
    또 마약과 술에 빠지기도 하며, 식욕은 오히려 떨어진다.

    병을 대하는 태도도 다르다.
    여성은 어떻게 해서든지 전문가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고자 한다.

    그러나 남성들은 외부에 알리지 않고 견뎌내려고 하기 때문에
    병을 더 키울 위험성이 여성보다 높다.




    
    주의 기이한 빛 / 최송연
                                         
    지난  날,
    귀는 있으나 들리지 않고
    눈이 있어도 보이지 않아
    흑암의 길 헤매며
    비둘기처럼 슬피 울더니
    
    홀연히,
    주의 기이한 빛 비취이니
    감겼던 눈 뜨여
    그 사랑 밝히 보이고
    닫혔던 귀 열려
    하늘 노랫소리 들리니
    이 어찌 놀라운 일 아니런가
    
    주님의 
    크신 은총이네
    사랑이네, 축복이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영원토록! 
    
    
    주의 기이한 빛 / 최송연

    지난  날,
    귀는 있으나 들리지 않고
    눈이 있어도 보이지 않아
    흑암의 길 헤매며
    비둘기처럼 슬피 울더니

    홀연히,
    주의 기이한 빛 비취이니
    감겼던 눈 뜨여
    그 사랑 밝히 보이고
    닫혔던 귀 열려
    하늘 노랫소리 들리니
    이 어찌 놀라운 일 아니런가

    주님의
    크신 은총이네
    사랑이네, 축복이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영원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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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 로이드존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한일서4:13)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1. 여러분의 관심을 어디다 두고 사십니까?

    자기 영혼의 생명에 관심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까? 영원에 대해 흥미를 가집니까? 이것들이 여러분을 흥미롭게 합니까? 확신하건대, 만일 그렇다면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땅의 일을 생각”(빌립보 3:19)하기 때문입니다. 땅의 일이란 육욕적이고 육신적인 일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신문에 나는 살인 사건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왕실가족이나 소위 상류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과 화려한 허식 그리고 인생의 각종 구경거리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동일합니다. 결국 그것은 동일한 관심사입니다.

    여러분의 관심이 거기서 그칩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관심은 영적입니까? 여러분은 영혼불멸과 보이지 않고 영원한 것들에 관심을 가집니까? 만일 여러분이 이것들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2. 두 번째는 죄의식입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이 자신 속에 악한 생각이 있음을 자각한다는 뜻입니다. 단지 여러분이 하지 말아야 하며 그것으로 인해 괴로움을 느끼는 특정한 일들을 행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고, 여러분의 마음속에 죄와 악한 생각이 있으며 또한 무가치하고 추하고 더러운 것을 발하게 하는 근원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여러분이 스스로를 혐오스러워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르시기를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로마서 7:18-24)라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에 관해 그런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내가 제시한 방법에 근거하여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성령 하나님께서 그 안에 들어오시기 전까지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자신을 죄인이라고 느끼고 또 만일 여러분 안에 존재하면서 여러분을 무너뜨리는 그것을 미워한다면, 이는 여러분이 성령의 선물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3.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르기를, 그분이 오셨을 때 이 세상의 관원들이 그분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그들이 성령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받았으므로 믿습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추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린도전서 2:7-8,10)


    이 세상의 관원들, 세상의 위인들, 힘 있고 지혜로우며 귀족에 속하는 자들마저도 나사렛 예수를 보고서 한 사람, 목수, 그리고 기술자로만 알았을 뿐입니다. 그들은 그를 일종의 특출한 종교적 천재로 간주하였을 수도 있지만, 그가 영광의 주이심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은 이르기를 그들이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린도전서 2:13)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요한일서 4:1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우리로 하여금 진정으로 믿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뿐이시며,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우리가 믿을 수 없습니다.

    지성과 이해력과 큰 지혜와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곧 건전하고 균형 잡힌 사고를 하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들에게 제시된 메시지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들었지만 그 속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장 비천하고 무지하며 교육을 받지 못한 문맹인들이 그것을 듣고서 그 안에서 기뻐함과 아울러 그것으로 인해 변화받아 하나님의 교회의 성도들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설명하기를, 성령께서 이들로 하여금 보고 또 믿게 하셨다고 합니다.


    4. 여러분은 자기 안에서 육신과 성령간의 투쟁과 싸움이 진행됨을 자각합니까?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그 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갈라디아서 5:17)


    그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안에 대조적인 두 가지 성품이 있음을 자각합니까? 그것은 단지 여러분이 때때로 나쁜 일을 저지르기 원하며 그래서 마음속으로 갈등을 겪어야 한다는 의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보다 더 깊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두 사람이라는 사실을 실제로 자각합니까? 여러분 안에는 거룩하고 영적인 것들을 원하는 새로운 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무너뜨리려는 또 다른 사람이 있으며, 이 두 세력 간에 다툼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는 지를 시험하는 최선의 시금석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처럼 대조적인 세력들과 싸우고 있다면 여러분은 성령께서 자기 안에 계심을 분명히 확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계시지 않다면 그러한 다툼도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에는 ‘옛 사람’만 존재할 뿐입니다. 하지만 만일 여러분이 새 사람과 옛 사람간의 투쟁에 직면해 있다면, 성령께서 사실상 여러분 안에 계신 것입니다.


    5.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역사하고 계심을 자각합니까?

    바울은 이르기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빌립보 2:12-13)라고 합니다. 이는 크고 놀라운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일들을 행하려고 결심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주지하다시피, 도덕가들과 종교적 의무를 복종하는 자들은 그 모든 일을 행하며, 그 때문에 스스로 큰 자부심을 갖습니다. 그들은 주일 아침에 침대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일어나 교회로 갑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마음이 움직여서가 아니라 다만 그렇게 하고자 결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든 시간을 조절하며, 그런 후에는 자신의 근사하고 고상한 이상들을 내세우고 의기양양해 합니다. 얼마나 근사해 보입니까!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립보서 2:13)


    달리 말해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 안에서 일어나 여러분을 감동시키며 인도하고 있음을 자각하며, 자기 자신에 대해 감탄하고 놀라워합니다. 자만하는 것과는 달리, 여러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것은 내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시며 내 안에 계신 성령이시다. 나는 나의 한계 너머로 이끌어 올려졌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자각합니까?

    여러분은 자신 안에서 활동하며 감동시키고, 변화를 일으키며, 인도하고 설득하며, 또한 고무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자각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로부터 그분 자신의 영을 선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 거하시며, 여러분 안에서 그런 식으로 그분 자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고 계십니다.


    6. 성령은 생명이시며, 생명은 항상 어떤 형태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살아 있는 나무는 열매를 맺지만, 죽은 나무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라디아서 5:22-23)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는지를 시험하는 방법은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삶을 점검하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러한 열매가 나타나는지 혹은 그런 증거가 있는지를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으면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실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 이런 것들이 있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이것들이 입증됩니까? 만일 그러하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는 점점 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세 개씩 짝을 이룬 9개의 열매들은- 여러분이 성경 어디에서나 발견하게 될 그분에 관한 가장 완벽한 묘사라 하겠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묘사입니다. 사랑은 그분의 삶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희락은 모든 상황에도 아량곳하지 않는 거룩한 기쁨입니다. 화평은 그분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자비, 양선, 온유...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사 이러한 열매를 맺게 하심으로써, 우리는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7. 우리는 성령을 받았으며, “양자의 양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습니다”(로마서 8:15)

    하나님은 더 이상 영원 가운데 멀리 계시는 어떤 막연한 주권자가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분께로 갈 때 우리는 우리 아버지 곧 탕자의 아버지께로 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또한 우리는 두려움 없이 그분께로 갑니다. 이 점을 가리켜 요한은 본장 마지막 부분에서 “사랑은 두려움이 없고”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그분께로 나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바 아버지’를 봅니까? 여러분 자신이 그분의 자녀임을 알고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서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는 결론에 이른다면, 내가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밖에 없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1:·13)


    만일 여러분이 이 은사를 갖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이 값 없는 선물을 얻기를 바란다면, 지체 없이 하나님께로 나아가십시오. 자신의 파탄 상태를 인정하며 자신의 공허함을 자백하고서, 은총을 내려달라고 그분께 간구하며 그분 자신의 역속에 호소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그것을 받을 때까지 계속 간구하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들은 너무도 확실하며, 우리는 그분의 은혜롭고 복된 말씀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지 아니하리라”(요한복음 6:37)


    그분께 간구하십시오. 만일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여러분은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풍성함을 얻을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태복음 5:6)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 D. M. 로이드존스, ‘요한일서 강해’중에서.

     

     

     

    출처: 개혁주의마을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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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등잔대 (금촛대 :Golden Lamp Stand, Menorah)




    이 금촛대는 성령님을 뜻합니다

    양쪽에  3개씩 촛대가 있고 가운데 하나가 있어서 총 7 개의 촛대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양쪽에 3개씩 균형을 이루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이사야 11  1-2 =j2

    n Lamp Stand)

    이새 줄기에서 싹이 나며 뿌리에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러면 7개의 촛대 가운데는 예수님을 나타내고

    나머지 6개는 2개씩 짝을 이루어서 균형을 이룹니다

     

    1.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영어로는 Wisdom and Understanding 이라고 합니다

    즉 지혜도 있고 이해도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나혼자 지혜가 있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을 내 지혜를 이해하지 못하면 내 지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 지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2.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영어로는 Counsel and Mighty 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주기도 하고 카운셀링을 하더라도

    실제로 도와줄 능력이 없으면 그냥  허공에 치는 말 뿐입니다

    크리스쳔 카운셀러가 상처받은 사람을 치유하느라고 오랜기간 상담을 합니다

    하지만 상처가 나는데는 시간이 오래걸립니다.  

    카운셀링도 하지만 치유의 능력도 같이 있다면 금방 나을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도움을 청해서 방법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일을 해결해 줄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이럴때 필요한것이 능력입니다

     

    3.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

    Knowledge and Fear (Worship)

    먼저 여호와를 경외하는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 4:10)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라고 하셔지만 

    실제로는 신명기 10:20

    네 하나님 여화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 그러니까 예수님 께서는 경외를 경배라고 정의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경외 (Fear)는 신약에서는 경배 (Worship) 이라는 뜻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아는것 만큼 나올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찬양의 수준입니다

    더 많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비밀을 알수록

    더욱더 깊은 찬양을 할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이 하시는일은 여러가지 입니다

     

    전도는 성령이 하십니다

    고전 1: 22 

    대인은 표적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2: 5

    말과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분향단  (Altar of Incense)


      

    분향단이란 향을 태워 그 향기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단을 말합니다

     

    출애굽기 30 7-8

    아론이 아침마다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지며

    저녁 등불을 때에 사를지니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

     

    4:16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했고,

    10:19-20에서는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했습니다.

     

    이향은 성도들의 기도 입니다

    시편141:2을 보면,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의 해석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5:8을 보면,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1 1차씩 속죄제를 드릴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10)

    분향단을 위해서 드리는 속죄제는 기도의 효력이 인간이 가진 능력에 있지 않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기도의 근거는 하나님의 사죄은총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죄은총의 근거는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들어주지도 않은것 같은데 성도가 기도 해야 하는이유?

    (기도의 향을 하나님 앞에 피웁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예수님의 의로움을 생각하시면 그 향을 맡으십니다)

     

    마지막 최후의 심판때 여러 성도들의 기도가  사탄을 심판하는 고소장이 되고 증거가 됩니다그러니까 우리를 힘들게 하는것을 계속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출처: http://blog.daum.net/choo1567/49/

    Don Choo

    네 믿음은 네 생각이 된다 네 믿음은 네 생각이 된다. 네 생각은 네 말이 된다. 네 말은 네 행동이 된다. 네 행동은 네 습관이 된다. 네 습관은 네 가치가 된다. 네 가치는 네 운명이 된다. - 간디 -

    교회의 빈익빈 부익부

     

     

    창립 10주년을 맞은 어떤 교회는 매년 교인이 천 명씩 늘었다고 한다. 어떤 대형교회는 매년 수천 명씩 몰려온다고 한다. 그런 소식을 접하며 기쁘기보다 마음이 좀 씁쓸한 것은 왜일까? 교인수가 적은 교회를 섬기는 이로서 배가 아프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껴서일까. 솔직히 그런 것도 없지 않을게다.

     

    10년 동안 작은 교회를 섬기면서 찾는 자 없이 싸늘하게 외면당하는 작은 교회의 설음을 뼈속 깊이 체감하였다.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새 교인 한 명이라도 오면 얼마나 기쁜지, 그러나 교인 한 명이라도 교회를 떠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오랫동안 수적으로 성장하지 않는 작은 교회를 섬겨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80% 이상의 한국교회가 처한 엄연한 현실이다. 교인 한 명으로 인해 희비가 엇갈리는 작은 교회의 옹색함과 일 년에 천 명씩 몰려드는 교회의 도도함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빈익빈 부익부보다 더 심한 ... 양극화를 보는 듯하다. 그런 교회와 목사에게 천 명 속에 한 사람의 존재감이 제대로 느껴질까.

     

    그렇게 특정한 교회로 몰리는 현상은 그만큼 갈만한 교회가 없다는 반증이라고 한다. 물론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참신하고 의식 있고 설교 잘하는 것으로 알려진 스타 목사를 중심으로 몰려들어 대형교회를 이루는 것은 결코 건강한 현상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이다. 몇 만 명이 모여 이루어진 집단 속에서 어떻게 친밀한 성도의 교제와 섬김을 통해 끈끈한 하나님의 가족애를 체험할 수 있겠는가.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여러 가지 큰일을 할 수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가장 중요한 교회의 본질은 점점 구현하기 힘들어진다.

    한국교회는 하나님나라의 공동체, 성령의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면 이런 교회관을 가지고 목회하는 이들, 비록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스타목사들 못지않게 순수하고 참신하며 실력 있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대형교회에서의 럭셔리한 교회생활을 포기하고 작은 교회의 열악하고 구질구질한 여건 속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들과 부대끼면서라도 쓰러져가는 한국교회에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수고와 고난에 동참할 의향만 있다면 말이다.

     

    작은 교회 목사는 아프다. 교인들이 늘지 않는 것이 자신이 부족한 탓이라고 자책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안에 만연한 인식, 즉 목사가 능력이 없어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다는 은연중의 암시와 따가운 시선 때문에 더욱 그렇다.

     

     

    출처: 개혁주의마을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입의 십계명

    1. 이 귀한 입으로
    희망을 주는 말만 하겠습니다.

    2. 이 귀한 입으로
    용기를 주는 말만 하겠습니다.

    3. 이 귀한 입으로
    사랑의 말만 하겠습니다.

    4. 이 귀한 입으로
    칭찬하는 말만 하겠습니다.

    5. 이 귀한 입으로
    좋은 말만 하겠습니다.

    6. 이 귀한 입으로
    진실된 말만 하겠습니다.

    7. 이 귀한 입으로
    꿈을 심는 말만 하겠습니다.

    8. 이 귀한 입으로
    부드러운 말만 하겠습니다.

    9. 이 귀한 입으로
    화해의 말만 하겠습니다.

    10. 이 귀한 입으로
    향기로운 말만 하겠습니다.




    1.중국 구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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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의 40년이 넘게 세계야생생물 기금의 상징이였으며, 또 멸종 위기에 있는 모든 종의 표상이었던 자이언트 판다의 유일한 서식지가 바로 구채구와 황룡 지역이다.

    신선이 살고 있을 만큼 환상적인 풍경을 자랑하는 구채구는 당나라 때부터 장족이 거주하던 곳으로, 구채구라는 이름도 9개의 장족 마을에서 유래한 것이다.

    구채구의 볼거리는 주로 호수와 폭포, 그리고 그 주변의 경관이다. 해발 2530m에 위치한 오화해는 햇빛에 비치는 호수의 빛깔이 담황색, 녹색, 푸른색 검푸른 색 등으로 다채로운 색상을 띠며, 전체적으로 꼬리를 접은 공작 모양을 한 호수다.

    호수는 물론 주변 경관도 무척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오채지는 다섯 가지 영롱한 색깔을 뿜어내는 호수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에서 가장 작은 호수이다.

    200개에 가까운 계단을 내려가야 볼 수 있는 곳이지만, 알록달록 오묘한 색상을 보면 수고롭다는 생각이 말끔히 사라진다. 폭이 310m가 넘는 진주탄 폭포는 그야말로 거대한 커튼이 펼쳐진 것 같은 모습이다. 쏟아지는 물방울이 햇빛에 반사되는 모습이 진주 같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이곳은 또한 140여 종의 조류와 팬더 곰을 비롯한 희귀 동식물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험준한 산악이어서 사람들의 접근이 쉽지 않은 탓에 다양한 산림 생태계를 비롯해 원시적인 자연이 그대로 남아 있다.


    2.캐나다 록키 산맥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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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키산맥은 3000미터 이상의 설산과 아름다운 빙하와 호수를 비롯하여 여러 종의 침엽수림이 넓게 퍼져 있어 자연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캐나디언 로키라 불리는 이 지역에는 밴프 국립공원을 대표로한 7개의 국립공원이 모여있다. 그 중 밴프 국립공원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호수로 꼽히는 루이스 호수가 있으며, 재스퍼 국립공원은 빙하를 볼 수 있는 북아메리카 최대규모의 공원이다.

    그 중 3000미터 급의 만년설에 뒤덮인 고봉들이 주위를 병풍처럼 에워싼 보우 호수는 호수바닥의 조약돌 하나까지 셀 수 있을 정도로 맑고 깨끗하다. 이 지역의 호수 대부분이 녹아 내린 빙하가 흘러 들어 만들어진 호수이다. 밴프는 캐나디언 로키의 대표적인 관광 시로 해발 2,000미터가 넘는 고봉에 둘러싸여 있다.

    스키와 래프팅, 하이킹등 다양한 래포츠를 즐길 수 있으며 계절에 따라 환상적인 주위 풍경을 보여준다.


    3.탄자니아 세렝게티 & 응고롱고로 국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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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렝게티는 킬리만자로산 서쪽, 사바나지대의 중심에 있는 탄자니아 최대의 국립공원이다. 세계 최대의 평원 수렵지역을 중심으로 사자·코끼리·들소· 사바나얼룩말· 검은꼬리누 등 약 300만 마리의 대형 포유류가 살고 있다.

    우기가 끝난 6월 초가 되면 150만 마리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검은꼬리누 무리가 공원의 남동부에서 북서부로 이동하는 장관을 연출한다. 우기가 지나면 황새, 매, 큰물떼새 등의 조류도 모여드는데, 현재까지 조사된 종의 수가 350여 종에 이른다.

    사자는 2,000여 마리가 살고 있는데, 주로 화강암으로 된 울퉁불퉁한 바위언덕인 카피에서 머문다. 코끼리는 약 2,700마리, 사바나얼룩말은 약 6만 마리, 톰슨가젤 약 15만 마리, 마사이기린 약 8,000마리 등과 함께 6종류에 이르는 대머리독수리, 흰허리독수리 등이 서식한다.

    응고롱고로 공원은 화산 분화로 형성된 응고롱고로크레이터를 중심으로 펼쳐져있다. 기후가 온난하고 짧은 시간에 비가 많이 내려서 동·식물이 다양하게 분포한다.

    약 2만 5000마리의 야생동물이 서식하여 야생동물의 보고라고 불린다. 대표적인 종은 아프리카물소, 검은꼬리누, 사바나얼룩말, 그랜트가젤, 얼룩하이에나 등이며 코끼리, 개코원숭이, 재칼, 여우 등도 흔하다. 조류는 타조를 포함한 400여 종이 서식한다.

    크레이터 주위의 평원에서는 마사이족이 가축을 방목하면서 살고 있으며, 올두바이 계곡에서는 360∼300만 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의 뼈가 발견되었다.


    4.네팔 사가르마타(에베레스트) 국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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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팔에 속하는 히말라야 산맥의 일부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것으로, 최고봉은 8,848m인 에베레스트산이며, 이외에도 여러 개의 높은 봉우리와 빙하, 빙하의 침식으로 인한 깊은 계곡들이 웅대한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해발고도는 2,845 ~ 8,848m에 걸쳐 있으며, 7000m가 넘는 봉우리만도 7개나 있다. 또한 다양한 크기의 산악빙하를 볼 수 있는데, 제일 긴 빙하는 길이가 20㎞에 달하며, 다수의 빙하가 3㎞ 이상의 장대한 길이를 자랑한다. 이중 쿰부 빙하는 에베레스트 등반로로 활용되고 있다. 공원 이름인 '사가르마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우주의 어머니'라는 뜻으로, 네팔에서 에베레스트산을 부르는 명칭이다.

    에베레스트라는 이름은 1865년 영국인들이 조지 에베레스트 측량국장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며, 티베트인들은 이 산을 오래 전부터' 초모랑마'라고 부르고 있다. 공원에는 눈표범, 작은 팬더곰, 사향노루 등 몇몇 희귀 동물이 살고 있으며, 118종 이상의 조류가 서식하고 있다.

    사가르마타 국립공원에서는 현대 문명과는 동떨어져 척박한 환경에서 독특한 문화를 이루며 살고 있는 세르파족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5.러시아 바이칼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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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시베리아 남동쪽, 이르쿠츠크와 브랴티야 자치공화국 사이에 위치한 바이칼 호수는 여러 가지 ‘세계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2500만 년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호수요, 수심 1,742m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다.

    또한 저수량이 2만 2000㎦로 담수호 가운데 최대 규모이자, 전세계 얼지 않는 담수량의 20%, 러시아 전체 담수량의 90%를 차지한다. 남북 길이 636km, 최장 너비 79km, 최단 너비 27km이며, 둘레는 2200km에 이른다.

    수심이 깊을 뿐 아니라 물도 맑아서 물밑 가시거리가 최고 40.5m나 된다. 호수 안에는 총 22개의 섬이 있는데, 가장 큰 것은 길이 72km인 알혼 섬이다. 알혼 섬은 호수 내에 위치한 섬으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로 징기스칸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며 한민족의시원이라고도 한다.

    식물이 1080여 종, 동물은 1550여 종에 이르며, 이중 80퍼센트 이상은 이곳에만 있는 고유종으로, 이곳의 유일한 포유류인 바이칼바다 표범이 가장 대표적이다. 바이칼이라는 명칭은 몽골어로 ‘자연’을 뜻하는 바이갈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여름이면 갖가지 색상의 야생화들이 호숫가를 뒤덮는 장관이 연출되는 바이칼 호수는 가히 ‘시베리아의 진주’라 불릴 만한 가치와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다.


    6. 크로아티아 플리트비체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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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정이 살고 있다는 호수. 물에는 신화적인 가치가 부여되는데 특히 카르스트 지형에서는 복잡하게얽힌 지하수의 흐름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플리트비체 호수의 경치는 무나도 아름답기 때문에 이곳에 얽힌 초자연적 신화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츠르나강과 비엘라강의 물에 의해 16개의 호수와 92개의 폭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게 상부와 하부 호수군으로 나뉜다. 호수들은 최대 135미터 정도 높이의 간격으로 떨어져 있지만, 일련의 개울과 폭포로 서로 연결된다. 플리트비체 호수의 경치는 지금도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물속에 포함된 탄산칼슘이 석회 침전물을 만들어 자연적으로 댐이 쌓여 호수가 생기고, 댐 사이로 물줄기가 떨어져 폭포를 이룬 것이다.

    플리트비체 호수 바닥은 지금도 1년에 최대 2.5센티미터의 속도로 자란다. 공원전역에 걸쳐 126종의 조류와 유럽산 불곰, 늑대, 스라소니등의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7.베네수엘라 카나이마 국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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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가이아나와 브라질과의 국경에 연해 있는 베네수엘라 남동부의 볼리바르주에 있다.

    기아나고지의 중심부를 이루며, 전체면적의 약 65%가 테이블 마운틴으로 이루어져 있다. 테이블 마운틴이란 약 20억년 전에 형성된 지각이 융기하고, 이것이 침식에 의하여 테이블 모양으로 깎인 것인데, 절벽의 높이가 1,000m에 이르는 것도 있다.

    기아나고지에는 이런 특수한 지형의 대지가 100개 이상 존재한다. 테이블 마운틴 아래 평야부의 중심은 대초원지대이며, 그밖의 대부분이 관목과 수많은 신기한 식물이 자라는 열대우림습지대이다.

    초원지대의 연간 평균기온은 24.5℃이지만, 테이블 마운틴 정상부는 야간에 0℃를 기록한다. 우기에는 거의 매일 비가 내리며, 비가 그치면 테이블 마운틴의 여기저기에 이름도 없는 커다란 폭포들이 생긴다.

    20세기 전반 금맥을 찾던 미국인 제임스 에인절에 의하여 공중에서 발견된 ‘앙헬폭포’는 979m라는 세계 최대의 낙차를 가진 폭포인데, 너무 높은 낙차 때문에 수량이 적은 시기에는 위의 물이 아래까지 떨어지지 못하고 도중에서 안개가 되어버린다.

    수직으로 깎인 절벽에 둘러싸인 지형 때문에 테이블 마운틴의 정상은 공룡시대부터 기슭의 세계와는 단절된 환경 속에 있었다. 여기에는 몇 개의 대륙이 하나로 붙어 있던 곤드와나대륙 때부터 독자적으로 진화해온 동식물이 생식한다.

    5불생활자에서 뽑은 최고의 트래킹중 하나인 로라이마산도 이곳에 있으며 아서코난 도일은 이곳의 신비한 풍경을 바탕으로 “잃어버린 세계’를 집필했다.


    8.에콰도르 갈라파고스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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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콰도르 해안으로부터 서쪽으로 1,000km 지점에 위치하며, 대소 16개의 섬과 다수의 암초로 이루어져 있다. 이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은 이사벨라섬으로, 최고봉은 아술산(1,689m)이며, 다른 섬들은 대개 작고 평평하다.

    1535년 에스파냐의 데 베를랑가가 발견하였다. 발견 당시에는 무인도로서 큰 거북이 많이 살고 있었다. 거북을 에스파냐어로 갈라파고스라고 하는데, 이 제도의 명칭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1835년 영국의 생물학자인 다윈이 비글호로 이 제도를 탐험한 이래, 그 독특한 생물상이 널리 알려졌다. 체중 200kg에 달하는 코끼리거북, 몸길이 1.5m에 달하는 바다이구아나등의 파충류, 날개가 퇴화한 코바네우, 작은 갈라파고스펭귄, 다윈핀치등 고유 동식물 풍부하다.

    이런 생물들이 다윈에게 진화론의 착상 동기를 주었다고 하며, 오늘날 이곳을 ‘생물진화의 야외실험장’이라고도 부른다.


    9.호주 그래이트배리어 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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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적 20만 7,000km2. 길이 약 2,000km. 너비 약 500~2,000m. 북쪽은 뉴기니 남안의 플라이강 어귀에서 남쪽은 퀸즐랜드의 레이디 엘리엇까지 이어져 있다.

    대부분이 바다에 잠겨 있으나 군데군데에 무수히 많은 조그마한 산호초가 바다 위에 나와 있어 대륙의 방파제와 같은 외관을 한다. 대륙과의 사이의 초호는 수심 60m 이하의 대륙붕이며, 해저는 평탄하여 동쪽으로 약간 경사져 있을 뿐이다.

    또한 바깥쪽은 급경사를 이루어 갑자기 깊어지며, 파도가 높고 세다. 초호 안을 항행하는 것은 많은 암초 때문에 위험하나, 근래에는 관광시설이 발달하였다. 북부의 케언스 부근에는 산호초에 열대수족관을 만들고 해저에서 수중의 생태를 관찰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하였다.


    10.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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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적이 약 9,000km2 으로 미국에서 가장 큰 국립공원이다. 와이오밍주 북서부와, 몬태나주 ·아이다호주에 걸쳐 있으며, 1807년 탐험가 콜터가 답사하였다. 서부에 있는 경이로운 대자연으로서 동부 주민들의 주목을 끌었으며, 1872년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공원에는 1만 개가 넘는 간헐천 ·온천 ·이화산등이 있으며, 특히 올드페이스풀 간헐천(약 1시간에 4분씩 40∼50m 높이의 뜨거운 물이 솟아오른다)과 매머드온천(황이 부착된 거대한 계단 모양의 바위 위를 분출한 물이 흐른다.

    옐로스톤이라는 지명은 이 바위에서 비롯된 것이다)가 유명하다. 옐로스톤강은 약 38km에 걸쳐 평균 300m 깊이의 협곡(그랜드캐니언)을 만들고, 몇 군데 폭포를 이룬다.

    공원 내에서는 수렵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야생동물의 천국이며, 곰 ·여우 ·말코손바닥사슴 ·사슴 ·영양 ·들소 · 로키양등과 각종 조류 등이 서식한다. 큰 숲이 많으며, 화석이 된 채 아직도 서 있는 나무도 있다. 유황성분으로 인해 아름다운 물빛깔을 자랑하지만 깊이 250m로 사람이 들어가면 5초만에 녹아 버리는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호수로도 불린다.




     
    「배가 고프면 달라붙고 
     배가 부르면 떠나가며, 따뜻하면 모여들고 
    추우면 버리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 공통된 마음의 병이다」
     
    이른바 전국 시대라 하여 
    수십 개의 나라로 나뉘어 있던 
    중국 천하가 마침내 일곱 나라로 
    합쳐지고 있던 때의 일이다, 
     
    주(周)나라에 소진(蘇秦)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소진은 장의(張儀)와 더불어 귀곡 선생 밑에서 각국의 제후들을 
    상대로 하는 변설을 공부하고 삼 년 동안 
    유랑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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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곱 나라의 왕들을 
    찾아 다니며 변설을 하고, 
    자신들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삼 년 동안이나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지만 
    소진의 인물됨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데도 없었다,
     
    있다면 조(趙)나라 
    봉양군 조성(趙成)과 같이 
    그의 인물됨을 시기하여 오히려 
    해치려고 하는 인물이 있었을 
    정도였다, 
     
    마침내 소진은 가지고 갔던 
    노자를 다 써버리고 빈 털터리 
    거지꼴이 되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대문으로 들어서자 
    베틀 위에서 베를 짜고 있던 
    그의 형수가 콧방귀를 뀌며 
    빈정거렸다, 
     
    「 흥, 꼴좋으시구려, 
    삼년 전에는 뭐라도 곧 될 것처럼 
    집안 살림살이들을 죄다 팔아 떠나시더니, 
    그래, 뜻은 좀 이루셨소? 」
     
    「  형수님, 제가 
    지금 몹시 시장하니 
    우선 밥이나 한 그릇 주시지요」
     
    며칠 동안을 굶었던 소진이
    밥 한 그릇을 청하자 형수는 독을 
    뿜은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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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 배고픈 줄은 
    용케도 잘 아시는구려, 
    우리도 그대가 가산과 집을 다 
    팔아갔을 때 배가 안 고팠던 줄 알아요? 
     
    형수는 끝내 
    베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소진은 그 후 일 년 가까이 형수의
    눈칫밥을 먹으며 귀곡선생에게서 받은 
    책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밤에 잠이 오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렀다. 
    자신의 변설에 자신이 서자 소진은 
    다시 길을 떠났다,
     
    먼저 당시 세력이 제일 강했던 
    진(秦)나라로 가서 혜문왕을 만나 
    열심히 유세하기 시작했다, 
     
    진나라가 6개국을 
    병합할 수 있는 비책을 말했지만 
    원래 타국의 유세객을 좋아하지 않던 
    진나라 왕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다, 
     
    소진은 다시 이번에는 
    제일 세력이 약한 북쪽의 
    연(燕)나라로 가서 왕을 만났다,
     
    소진은 진나라를 도와 
    천하통일을 못할 바에야 6개국을 
    연합시켜 진나라에 대항하게 하기 
    위하여 합종책(合從策)을 
    시도하라고 권했다,
     
    그의 말을 듣고 
    난 연나라 왕은 크게 
    기뻐하여 소진에게 집과 
    황금을 하사하고,
     
    그에게 6개국을 연합해 
    달라는 전권을 위임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소진의 
    합종책이다,
     
    소진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보게 되어 
    6개국이 동맹을 맺게 되었다, 
     
    24584983.2.jpg
     
    6개국의 왕들은 제각기 
    소진의 공로를 치하하여 자기 
    나라의 정승자리와 많은 황금을 주었다, 
     
    소진이 연나라로 가기 위해 
    주나라의 고향집 앞길을 지날 때 
    그의 화려한 행차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소진이 자기 집 앞에서 
    행차를 멈추었을 때 형수와 
    동생들이 나와서 무릎을 꿇고 
    영접했다, 
     
    「소진이 그의 형수에게 말했다 
     옛날에 형수님은 베틀 위에서
     내려오지도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더니 오늘은 웬일이시오? 」
     
    그러자 형수는 
    머리를 조아린 채 대답했다. 
    「 그때는 그대가 거지였고 지금은 
    높은 지위와 많은 황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고 소진은 
    새삼스레 세상 인심을 탄식했다, 
     
    「 같은 인간인데도 
    부귀하면 친척도 어려워하고 
    빈천하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한다」 
     
    「 하물며 남이야 
    어떠할까, 내가 애당초 
    논밭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면 
    오늘날 이렇게 6개국의 정승이 
    어찌 될 수 있었으리」
     
    소진은 그의 형수와 
    동생들에게 많은 황금을 
    나누어 주었다, 
     
    이래서 
    감탄고토( 甘呑苦吐)라 해든가? 
     
     
    
    


    가나안 교인들의 귀환

     

    기존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 교인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적으로 교회와 유리된 신자의 삶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의 연합을 뜻한다. 팔과 다리가 몸통에 붙어있지 않고는 머리와 연결될 수 없듯이 신자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으로 접합되어있지 않으면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결될 수 없다. 바울 사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음을 뜻한다(Being in Christ means being in the body of Christ). 동시에 성령 안에 있다는 것은 성령의 전인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To be in the Spirit is to be in the temple of the Spirit). 바울의 가르침에서 교회와 분리된 신자의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초대교회에서부터 개혁교회까지... 계속 이어져 온 전통적인 신앙관이다. 초대 교회를 대표하는 교부 어거스틴은 태아가 모태를 떠나 생존할 수 없듯이 신자는 교회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개혁교회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칼뱅도 신자는 교회라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고 그 품안에서 젖을 빨며 양육된다고 했다.

     

    그러므로 교회를 안 나가고도 신자로 산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신앙이다. 그렇다고 가나안 교인들만 비난할 수는 없다. 과연 현실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도록 교인들을 양육하는 영적 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먼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가 형식과 외식으로 화석화되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약동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그 생명력이 소멸된 그리스도의 무덤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가나안 교인들이 자신들 안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생명이나마 부지하려고 영적으로 질식할 것 같은 교회를 탈출하는 것은 아닌지 기존 교회와 교인들(목사를 우선적으로 포함해서)의 심각한 자성이 필요하다.

    한국교회가 온유하신 성령님을 너무도 오래 거스르고 근심케 하여 성령님이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은 아닌지 심히 염려스럽다. 아마 예수님과 성령님도 가나안 교인들과 함께 기존 교회를 떠나실 지도 모른다. 그러니 가나안 교인들은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타락한 교회를 떠나 참된 교회를 찾고 있는 일종의 순례자들인지도 모른다. 비록 그들 모두가 다 그렇지 아닐지라도 말이다. 성령께서 부디 그들을 인도하사 교회로 귀환시킬 날을 고대해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속히 교회 되어야 하리라.

     

     

    출처: 개혁주의마을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가끔은 서로에게 말하고 생각할 때마다 따스함이 느껴지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이 단어가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올 때면 나는 왠지 그 사람과 한층 더 가까워진 듯한 느낌에 푸근해집니다 난로 같은 훈훈함이 느껴지는 단어 그 단어는 바로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나는나 너라고 시작되는 말에서 보다 우리로 시작되는 말에 더 많은 애정을 느낍니다 그 누구도 이 세상에서 온전히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어깨와 어깨끼리 가슴과 가슴끼리 맞대고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 세상에 나와 전혀 상관없는 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맑고 아름다워지리라 믿어 봅니다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나 너라는 삭막한 말에 비한다면 우리라는 말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눈물겨운지를 <내 삶에 휴식이 되어주는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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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 나에게 일러주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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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 나에게 일러주었네
    나에게 없는 것을 욕심내기보다는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소중히 하고
    감사히 여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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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 내게 또 일러주었네
    갖고 있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기를
    그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다 보면
    외려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
    내가 가질 수 있고
    가질 수 없는 것은 또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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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여태껏 욕심만 무겁게 짊어지고 있었네
    하지만 그 욕심을 잃을지라도
    결행하는 것은 결코 욕심이 아니라고
    내 마음이 나에게 이야기 하네

    우리는 언젠가 때가 되면
    육신마저 버리고 가야하네
    그런데 무엇이 그리 필요하랴?

    9007517082378349.jpg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노력해야 할 것은
    사실 얼마만큼 소유할 것인가가 아니라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해
    얼마만큼 감사해야 하는 것이네
    우리의 삶은 유한하고 반복할 수가 없는 것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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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착도 미련도 버려야 할 것이라면
    가지고 있는 것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해야 할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할 것은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것을 향해희망찬 행진을 해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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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행복입니다...    최송연
     
    

    햇살 고운 아침이나 

    바람 거센 밤이나 당신의 그 사랑, 나 느낄 수 있으니 행복입니다 비록 당신을 따르는 이 길 험하나 당신의 그 사랑, 별빛 되어 날 인도하시니 행복입니다 사랑 때문에 거룩한 몸 갈기갈기 찢기신 당신의 그 사랑, 내게 영원한 생명 되시니 행복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영롱한 새벽이슬 날이면 날마다, 내 영혼 소생시키시니 행복입니다

     

       
      사랑은 행복입니다...    최송연
       
      햇살 고운 아침이나
      바람 거센 밤이나
      당신의 그 사랑, 나
      느낄 수 있으니 행복입니다
       
      비록 
      당신을 따르는 이 길 험하나
      당신의 그 사랑, 별빛 되어
      날 인도하시니 행복입니다
       
      사랑 때문에
      거룩한 몸 갈기갈기 찢기신
      당신의 그 사랑, 내게
      영원한 생명 되시니 행복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영롱한 새벽이슬
      날이면 날마다, 내 영혼
      소생시키시니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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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신학이 강조하는 신본주의적 구원은 하나님 중심의 존재로 변화하는 축복의 사건
      총체적 복음 관점에서 구원의 축복 바라봐야…‘돌이킴’ 통한 삶의 결단 계속 추구해야



      1.개혁신학의 가르침을 따라 신본주의적 구원관으로 나아가야 한다.

       
      ▲ 김광열 교수(총신대·조직신학)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끊임없는 도전들 가운데 하나는, 신본주의적 신앙을 버리고 인

      본주의적 신앙으로 들어가려는 유혹들에 직면케 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나 구원의 의미를 자기 자신의 어떠한 개인적인 욕구나 세속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인본주의적(man-centered) 접근방식으로 떨어지기 쉽다. 그러나, 성경적 신앙은 우리를 자기 중심적 태도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께로 향한 삶으로 나아가게 한다.

       

      개혁신학은 바로 그 점을 강조한다. 신앙이란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서가 아니라, 그것으로 주님께 영광돌리는 삶의 원동력으로 삼게하는 신본주의적(God- centered) 접근방식이 개혁신학의 주요 가르침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우리가 신본주의적 신앙의 관점을 놓치게 될 때, 구원을 나의 욕구를 채워주는 어떤 축복이라고만 생각하게 되며, 결국 그는 인본주의적인 구원이해에 머물게 된다. 그것이 영적인 것이든, 아니면 물질적인 것이든 상관없이 나의 소원을 이뤄주는 어떤 무엇이라고만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주께서 베푸신 구원을 통해서 내 인생에 주어지는 어떤 유익들과 열매들만 관심갖는 -때로는 그 안에 세상적인 욕심들까지도 포함시키면서- ‘인본주의적’ 신자의 삶으로 전락되기 쉽다.

      이러한 점에서 개혁신학이 강조하는 신본주의적 구원관은 그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구원이란, -물론 내가 얻는 무엇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신본주의적 관점에서 근본적으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사건이다. 소위 축복이라는 용어를 굳이 붙힌다면, 그것은 하나님 중심(God-centered)의 존재로 변화되는 축복의 사건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기에 적합한 존재로 변화되는 사건인 것이다.
       
      2. 개혁신학이 가르치는 신본주의적 구원이해는 구원의 축복들을 총체적 복음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요점은, 그 구원의 역사 속에서 주어지는 변화가 하나님의 통치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변화라면, 그 변화의 범위는 전포괄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는 점이다. 일차적으로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영적 차원의 변화가 그 출발점이지만, 그것은 또한 중생자의 육적, 정신적, 사회적 삶까지도 그 분의 통치 아래 놓이게 함으로 그 모든 삶의 영역들 속에서 새로운 가치관과, 인생의 새로운 방향성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구원 안에서 주어지는 회복의 역사는 온 우주 만물까지도 그 분의 새로운 통치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변화를 경험하게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을 ‘총체적 구원’이라고,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총체적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역사 속에서 주어지는 축복들은 단지 신자의 영적 차원에서의 변화만을 가리키지 않고 좀 더 포괄적인 변화들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러한 포괄성을 놓치고, 그 축복들을 영적 차원의 변화로만 축소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럴 경우, 우리는 쉽게 이원론적인 신앙태도로 전락하게 되며, 결국 그 나머지 영역들 속에서는 여전히 과거와 다를 바 없는 세속적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 사건 안에서 주어지는 ‘영적 축복들’을 성경적으로 검토해볼 때, 그것이 좀 더 포괄적인 변화들에로까지 지향하고 있는 사건임을,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총체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해볼 수 있다.
       
      3.중생의 축복은 신자의 개인적 영적 변화일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를 가리키는 사건이다.

      중생이란 불신자가 주께로 나아올 때 경험하는 첫 번째 단계의 사건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에서 단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변화만을 가리키지 않고, 좀 더 포괄적인, 우주적인 변화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사건으로 설명된다.

       

      중생은 신약성경에서 크게 두 가지의 이미지로써 표현되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창조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의 이미지이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이미지로서 중생의 역사를 제시해주는 말씀으로는 고린도후서 5장 17절과 마태복음 19장 28절을 들 수 있다.

       

      전자의 성구에서 중생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어진 피조물로서 묘사된다. 중생이란 하나님의 처음 창조와는 구별되는, 마지막 때에 주어진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를 가리키는 사건인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왜곡되어진, 그리고 죄의 영향 아래 놓인 온 세상을 새롭게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새로운 재창조의 역사에 동참하는 사건으로서 중생이다.

      같은 관점에서 우리는 마태복음 19장 28절도 이해할 수 있다. 사실상 신약성경 안에서 중생이라는 의미를 지닌 헬라어 단어 팔링게네시아(παλινγγενεσια)가 사용된 두 구절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구절인데, 여기에서 중생의 의미는 우주적으로 새롭게하시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구원역사에 동참하는 사건으로서 설명되고 있다.

       

      (“만물이 새롭게되어”)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의 첫 열매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신자는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를 경험케 되고, 만물이 새롭게 되는 그 새로운 하나님의 창조역사의 최종적인 완성을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관점들로 바라볼 때, 중생이란 단지 신자의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변화를 넘어 더 포괄적인 문맥에서 이해되어야함을 성경이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신자의 중생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회복의 역사 속에서 주어진 변화의 한 국면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신자의 중생사건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이해되고 추구되거나 혹은 그러한 차원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되는, 좀 더 포괄적인 성격으로 접근돼야 할 사건인 것이다.
       
      4. 회심과 성화의 삶 속에서 표현되는 구원의 총체성

       그런데, 성경적 중생이 지니고 있는 이와 같은 ‘포괄성’은 또한 회심과 성화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회심이란, 중생이라는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주어진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반응이므로, 중생에서의 총체적 성격은 회심사건 속에서도, 그리고 성화의 삶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게 될 수밖에 없다.

      만일 성경이 말하는 그와 같은 총체적 성격을 놓치게 될 때, 회심에 대한 이해가 단지 자신과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죄의 용서와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의 차원에서만 머무르게 될 위험성이 높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회심이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에서의 변화가 중심적이긴 하지만, 거기에서 머물지 않고, 자신이 속한 가정과 사회 속에서의 모든 삶의 영역들 속에서의 ‘돌이킴’까지 포함한다.

       

      그것은 세속적인 관점들, 즉 세속적 가치관이나 삶의 원리 등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정신, 그리고 삶의 원리들을 받아들이는 삶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참 회개란 소위 ‘영적인’ 영역에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설정을 하게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그의 삶의 모든 영역들 속에서 새롭게 변화된 가치관과 삶의 원리를 적용하며 살아감을 의미한다. 회개자는 먼저 하나님께 대한 죄로 인해 괴로워하며 슬퍼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며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세워나간다.

       

      그러나 또한 진정한 회개자에게는 그가 새로이 들어가게 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또한 그 나라의 통치 원리를 따라, 그 나라의 삶의 가치와 원리를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사회 속에서도 구현하고 실천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에로의 전환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화의 삶이란 회심사건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므로, 회심에서 결단한 총체적 돌이킴의 삶에로의 결단은 회심자의 전 생애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추구될 것이며, 그것은 곧 “총체적 성화”의 삶으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총체적 회심의 대표적 사례는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의 회심 장면을 통해서 확인된다. 누가는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하게 되는 회개의 ‘돌이킴’에는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에서의 ‘돌이킴’ 뿐만 아니라, 이웃들과의 사회-경제적 관계에서의 ‘돌이킴’도 포함되는 것임을 강조한다.(눅 19:8)

       

      그리고, 그렇게 주님을 만나서 이뤄진 총체적 회심의 결단은 그 이후에 계속되는 신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뿐 만 아니라, 이웃과 공동체, 사회와 국가의 영역들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구현되도록 노력하는 총체적 성화의 삶으로 나아갈 것을 요청하고 있다.      

      성막을 묵상하라 2 (휘장과 전설병상)


      휘장 (Veil of Temple)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막 (커텐: curtain / veil) 입니다

        


       

      마가복음 15:  37-38

      예수께서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이 되어서

      이제 하나님앞에 담대히 나갈수가 있습니다

        

      진설병 상Table of showbread

       



      <!--[endif]-->


       

       

      출애굽기 25 29-30

       

      너는 대접 숟가락과 병과 붓는 잔을 만들되 순금으로 만들며

      위에 진설병 두어 항상 앞에 있게 할지니라

       

      <진설병 : Consecrated bread >
      고운 가루로 만든 누룩을 넣지 않은 빵으로 성소 안의 떡상에 올려놓는 떡을 말한다. 원래 뜻은 얼굴의 빵으로’, 하나님의 얼굴 앞에 놓는 빵이다( 25:30). 진설병은 열두 개의 구운 빵으로 줄에 여섯 개씩 줄로 진열하였으며( 24:6-7) 안식일마다 위에 올려놓는 일은 제사장이 맡았다(삼상 21:6). 하나님께 드리고 거두어 들인 빵은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서 먹었는데( 24:5-9), 다윗의 경우 제사장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의 부하들과 함께 진설병을 먹었다(삼상 21:1-6). 진설병을 두는 상은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 금으로 싸고 금테를 주위에 둘렀으며 상의 위치는 성소의 북쪽 등대 맞은편에 있었다( 26:35).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성만찬이 바로 이  진설병 상 (showbread table)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항상 예수님의 몸과 피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때 꼭 기억하세요 



      출처: http://blog.daum.net/choo1567/48

      Don Ch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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