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자유(Jesus' Freedom)  

예수님은 진실로 자유로우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유로우셨던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사실을
영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하나님께 속해 있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보내어졌으며,
그리고 이 사명이 끝나면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상을 즐겁게 하는 일과는 관계없이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와 또한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사랑으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복음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큰 능력으로 모든 사람을 고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저마다 그분을 만지려고 하였다"(누가복음6:19)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뇌와 컴퓨터가 같은 구조의 언어를 사용

 - 두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뇌 - 컴퓨터 인터페이스」(BCI - Brain Computer Interface)

 - 미래의 사이보그가 걸어온다

 

 

 

Bionic Arms are Real

 

 

 

 

 

Jesse Sullivan Operates a Bionic Arm with his Brain at RIC (no sound)

 

 

 

 

 

 

What's Next: The Future of Prosthetics & Orthotics

 

 

 

 

 

 

 

Robotic Prosthetic Arm

 

 

 

 

 

 

Demonstration of Prosthetic Hand from Advanced Arm Dynamics

 

 

 

 

 

■ 뇌파로 ‘인공팔’ 마음대로 움직여요     

 

 해병대 출신의 용감한 미국 여인 클라우디아 미첼(26).

 2년 전 오토바이 사고로 왼쪽 팔을 잃은 그는 13일(현지시간) 처음으로 스테이크를 잘라 먹고는 감격했다.

 여느 사람에겐 아무 것도 아닌 일이지만 그로선 2년 동안 꿈에 그리던 일이었다.
 시카고 재활연구소 토드 쿠이켄 박사팀이 개발한 ‘바이오닉(생체공학) 팔’ 덕분이었다.

 

 이것은 이미 개발된 인공팔들과 달리, 그의 뇌에서 내린 지시를 근육에 전달해 팔꿈치와 손을 미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

 몸속의 신호를 전달할 수 있게 어깨쪽 신경 여러 군데를 자르고 전선으로 다시 잇는 수술 끝에 이같은 동작이 가능해졌다.

 인체와 기계가 완벽하게 결합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바이오닉 팔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세계 처음이라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14일 전했다.

 미첼은 이날 워싱턴에서 쿠이켄 박사, 신경 재결합 수술을 집도한 노스웨스턴 메모리얼 병원 성형외과 그레고리 두마니안 박사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직접 팔 동작을 시연했다.

 

 미첼이 전에 쓰던 인공팔은 한번에 한 동작밖에 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팔꿈치를 펴거나 손을 펴거나 둘 중 하나만을 하기 위해 어떤 근육을 움직일까를 고민해야 했다.

 또 너무 커서 어깨에 두르느라 낑낑대야 했지만 그런 수고를 들일 만큼 다양한 동작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쿠이켄 박사가 ‘탱크’라고 애칭을 붙인 바이오닉 팔은 모두 7개의 전동모터가 들어가고 전선, 기계장치들이 들어갔는데도 무게가 4㎏밖에 되지 않아 어깨에 간편하게 두를 수 있다.

 미첼은 “이제 생각만으로도 (팔과 손을) 움직일 수 있다.”고 밝혔다.

 부서지기 쉽고 아직은 연구 공간에서만 쓸 수 있는 것이 약점으로 꼽히지만 곧 보완해 나갈 계획이다.

 

 현재 신경 재결합 수술을 위해 5명이 대기 중이며 손가락에서 뇌로 신호를 되돌려 압력이나 열(熱), 모서리 등을 감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다음 과제라고 쿠이켄 박사는 밝혔다.

 다른 연구팀은 신경을 떼내고 다시 연결하는 수술이 필요없는 바이오닉 팔을 연구하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서울신문 2006-09-15 19:45]

 

『현재 신경 재결합 수술을 위해 5명이 대기 중이며 손가락에서 뇌로 신호를 되돌려 압력이나 열(熱), 모서리 등을 감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다음 과제라고 쿠이켄 박사는 밝혔다.

 다른 연구팀은 신경을 떼내고 다시 연결하는 수술이 필요없는 바이오닉 팔을 연구하고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 여기서 손가락에서 뇌로 신호를 되돌려 보낸다고 했는데.. 뇌에서 기계 팔로 신경 신호가 나간 것은 다운로드, 기계팔에서 뇌로 신경 신호가 올라가는 것은 업로드가 됩니다.

 기계 팔을 통해 인식된 압력이나 열등의 감각을 뇌가 인지하기 위해서는 기계 팔에서 인지된 컴퓨터 신호가 뇌로 올려 보내지게 되는데, 이 과정은 인간의 뇌인 생각과 감정이 컴퓨터에 의해 컨트롤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영화 매트릭스에 나온 것처럼.. 실재가 아니더라도 컴퓨터 신호에 의해 인간의 뇌가 실재인 것처럼 오감각이 다 느껴지는 것이 가능하며, 이것은 컴퓨터 신호에 의해 인간의 뇌, 생각과 감정이 전부 다 컨트롤 당하는 것이 가능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는 신경 재결합 수술을 통해 이러한 일들(컴퓨터와 뇌의 연결)이 가능했지만, 특별한 수술이 필요없는 바이오닉 팔을 연구하고 있다는 말은, 복잡한 신경재결합 수술이 없이도 컴퓨터와 인간의 뇌의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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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의 사이보그가 걸어온다   [한겨레]

 두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BCI 연구, 바이오 로봇으로 결실 맺을 수 있을까…
 신축성이 뛰어나고 전원 연결장치 없이 움직이는 인공근육 개발도 무르익어
  

 

 만일 생쥐의 움직임을 조절할 수 있다면….

 한국과학기술원 바이오시스템학과 정재승 교수는 ‘사이보그’ 와 ‘바이오 로봇’ 등을 설명할 때 곧잘 ‘생쥐의 길찾기’ 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생쥐가 계단을 올라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목적지에 도달할 방법을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는 없다.”

      척추 손상을 입은 전신마비 환자 매튜 네이글(작은 사진)은 두뇌에 (큰 사진)을 이식해 마음먹은 대로 동작을 취했다.

 

 여기에서 주파수를 이용해 원격지에서 제어한다거나 자극기로 뇌에 충격을 준다는 대답을 한다면 해답에 가까이 다가선 셈이다.

 일부 연구자는 생쥐의 콧수염 자리에 자극기를 달아 쾌락중추를 자극하는 식의 ‘보상 학습’으로 원하는 길로 유도하는 실험에 성공한 바 있다.

 이 실험은 뇌의 정보처리 능력을 분석해 모델링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데 곧잘 등장한다.

 

 

 뇌와 컴퓨터가 같은 구조의 언어 사용
 이런 쥐의 길찾기 실험은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당장 군사적인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다.

 예컨대 적의 진지나 극한 환경을 탐색하도록 하거나 움직이는 폭약으로 이용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사람의 두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Brain Computer Interface) 연구에 적용할 게 틀림없다.

 생쥐의 신경처리 시스템을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재승 교수는 뇌와 컴퓨터가 같은 구조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시냅스와 뉴런이 뇌 기능을 수행하는 과정은 컴퓨터의 연산처리 기능과 유사하다” 면서 “뇌로부터 신호를 받아서 분석하고 소통하는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만들 수 있다” 고 말한다.

 

 그렇다면 BCI 기술이 꿈꾸는 세상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생명현상을 재현하는 기계장치의 개발을 기대할 수 있다.

 현대판 노아의 방주로 불리던 줄기세포의 자리를 BCI 기술이 대신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로봇공학이 기계와 생명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이보그를 잉태할 토대를 만들기도 한다.

 전남대 기계시스템공학부 박종오 교수는 “미래 과학기술의 강력한 원동력으로 꼽히는 컴퓨터와 생명공학, 나노기술 등이 융합된 로봇공학을 통해 사이보그가 탄생될 것”을 예견하며 “인체조직과 유사한 고분자 재료 등의 유기물이 로봇 재료로 쓰이면서 인체에 집적되는 로봇이 대세를 이룰 것”이라고 덧붙였다.

 

 

 

△ 브레인게이트 전극

 

 그동안 사람과 동물을 대상으로 하는 뇌와 컴퓨터 사이의 인터페이스가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됐다.

 쥐의 길찾기 실험만 해도 뇌와 연결된 컴퓨터를 통해 생각만으로 소형 휠체어를 운전하는 실험으로 이어졌다.

 한림대 의대 신형철 교수팀은 쥐의 수염이 감지한 정보가 들어오는 체감각피질에 전극을 꽂은 뒤 컴퓨터에 연결해 뇌에서 나오는 신호로 모터를 작동시키는 실험에 성공했다.

 뇌의 신경세포에서 나오는 미세한 신호를 컴퓨터가 분석해 모터를 조작하도록 설계한 것이다.

 이런 실험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인이 생각만으로 휠체어나 인공 손발을 움직이게 하는 데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뇌와 연결한 컴퓨터를 미세한 신경칩으로 만들어 인체에 삽입하기는 쉽지 않았다.

 컴퓨터를 제어하기 위해 인체에 전극을 삽입하는 기술에 대한 거부감이 높았기 때문이다.

 지난 1998년 미국 에모리대학 신경의학자 필립 케네디가 죽어가는 전신마비 환자의 운동피질에 원추형의 전극장치를 이식했다.

 당시 연구진은 환자의 다리에서 뽑아낸 신경조직을 삽입물에 넣어 뇌 조직과 융합하는 데 성공했지만 의사표시를 돕는 데는 실패했다.

 뇌의 정보처리 알고리즘을 알아내더라도 완전한 형태에 이르기 어렵고, 이를 마이크로칩에 구현하는 데도 크기의 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연구자들은 컴퓨터와 인간의 뇌 사이의 직접 통신을 시도하기 이전 단계로 영장류 실험에 나섰다.

 원숭이의 몸에 특정 물질을 삽입해 원숭이의 생각을 읽고 생동의지를 파악하려는 것이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듀크대 신경생물학자 미구엘 니콜렐리스가 주인공이다.

 그는 2000년에 붉은털 원숭이의 뇌에 이식한 전극물질로 로봇팔을 움직이는 데 성공한 데 이어 2003년에는 뇌 일부에 미세한 탐침을 이식해 원숭이가 비디오 스크린을 보면서 조이스틱을 움직여 로봇팔을 뻗고 물건을 움켜쥐도록 했다.

 탐침에 연결된 컴퓨터 화면에 나타나는 원숭이 뇌의 전기적 패턴을 분석해 마음을 읽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브레인게이트, 성서의 기적을
 이처럼 두뇌에서 발생하는 전지활동을 측정하는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하고 있다.

 지난 3월 독일 하노버에서 열린 ‘세빗 전자쇼’에서는 ‘정신적인 타자기’(Mental Typewriter)가 전시되기도 했다.

 독일 베를린의 브라운호퍼연구소와 훔볼트대학 의과대 연구진이 공동으로 개발한 이 장치는 컴퓨터의 커서를 마음으로 조정해 메시지를 컴퓨터 화면에 타이핑할 수 있도록 한다.

 놀랍게도 전극을 인체에 이식하지 않고도 두뇌에서 발생하는 전지활동을 측정하는 모자를 쓰기만 하면 된다.

 사용자가 좌우 팔을 움직이는 것을 상상만 해도 커서가 이리저리 움직인다.

 이 장치는 전신마비 환자들이 인공관절을 제어하는 데 쓰일 전망이다.

 

 정말로 전신마비 환자가 생각만으로 인터넷 서핑을 하고 물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을까.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성서의 이적에 버금가는 의학적 진보를 기대할 수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에 거주하는 척수마비 20대 청년 매튜 네이글은 BCI 기술의 미래를 예측하게 하고 있다.

 

 

 

 

 

△ 브레인게이트의 개념도


 그는 5년 전 칼에 찔려 척수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해 전신이 마비됐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러다가 2004년에 로드아일랜드 병원에서 BCI 전문기업 사이버키네틱스 뉴로테크놀로지 시스템스사가 개발한 신경 인터페이스 시스템 ‘브레인게이트’(BrainGate)를 이식받았다.

 

 처음 이식한 기기는 1년 뒤 오작동을 일으켜 제거했다.

 곧바로 매튜 네이글은 시스템을 보완한 브레인게이트를 재이식받아 재활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그의 브레인게이트는 과학저널 <네이처> 표지(7월12일치)에 등장하는 등 생체공학의 절정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히고 있다.

 사이버키네틱스의 연구개발 최고책임자인 브라운대학 뇌과학자 존 도나휴가 개발을 주도한 브레인게이트는 마이크로미터 단위의 100개의 미소 전극을 포함한 4mm 정도의 알약 크기 센서로 이뤄졌다.

 이 장치는 뇌에서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운동을 담당하는 운동피질 표면에 이식됐다.

 여기에서 전극은 주위의 뉴런으로부터 전기신호를 포착해 환자의 두피에 1인치 정도 돌출한 티타늄 받침대로 전송한다.

 전송된 신호는 복잡한 케이블을 타고 컴퓨터에 연결돼 원하는 동작을 이끌어낸다.

 

 이때 브레인게이트를 이식한 매튜 네이글은 원하는 움직임을 상상만 하면 된다.

 예컨대 ‘허리를 펴라, 굽혀라’ ‘두 손을 벌려라, 모아라’ ‘팔꿈치를 펴라, 굽혀라’ 등 16가지 동작을 상상만으로 취할 수 있다.

 BCI 전문가들은 시술에 앞서 척수마비 부상을 당하고 수년이 지나도 뇌에서 팔다리 제어 신호를 찾을 수 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그런데 매튜 네이글을 비롯한 세 명의 브레인게이트 이식 환자들은 생각할 때마다 다른 패턴을 보이는 뉴런 신호를 내놓아 컴퓨터가 동작에 관련된 데이터를 모으도록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96개의 채널에서 나오는 대량의 뇌세포 신호를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요즘 브레인게이트는 팔다리의 기능을 잃어버린 전신마비 환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기기의 안정성이 확보되지 않아 신호처리 능력이 환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시간이 지나면서 센서의 효용성이 떨어지는 등의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브레인게이트가 전신마비 환자들의 도우미 노릇을 할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이 기기에 대해 정재승 교수는 “600만불의 사나이 같은 ‘바이오닉맨’을 실현할 획기적인 개발”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이전까지 뇌-컴퓨터 연결 장치는 좌우 이동만 하는 데 그쳤고, 수개월의 훈련 기간이 필요했다. 이에 견줘 브레인게이트는 좌우에 상하까지 운동하며 별도의 훈련이 없어도 시술 직후 동작을 취할 수 있다.”

 


 로봇팔은 팔씨름에서 이길 수 있나
 이렇듯 BCI 기술이 획기적인 진전을 이루면서 사이보그형 바이오 로봇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인간과 기계가 직접 연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공근육’(Artificial Muscles)을 이용한 로봇 팔이 개발되기도 했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 제트추진연구소(JPL)의 물리학자 요세프 바코헨은 적은 양의 전기에 재빠르게 반응해 인체 근육처럼 늘었다 줄어드는 인공 근육을 개발해 구동장치가 없는 로봇에 적용했다.

 신축성이 뛰어나면서도 가벼운 재질의 ‘전기활성 고분자’(EAPs·Electroactive Polymers)를 이용한 것이었다.

 이 로봇팔은 진짜 근육처럼 탄성을 지녀 자연스럽게 이동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하지만 인공 근육이 진짜 근육을 흉내내기는 쉽지 않다.

 지난해 3월 미국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의 한 무도장에서 열린 전기활성 고분자 로봇팔은 17살의 여고생 파나 펠센과 세 차례 팔씨름을 벌였지만 짧게는 3초를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무엇보다 전기활성 폴리머가 너무 무거워 힘을 쓰는 데 필요한 전원을 양껏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미 국방부 산하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의 지원을 받는 텍사스대학 나노테크연구소에서 인공 근육 개발 프로젝트를 이끄는 레이 바우만이 에너지 밀도가 높은 알코올이나 수소를 동력원으로 삼아 진짜 근육보다 최대 100배나 강한 인공 근육을 만들었다.

 

 만일 새로운 형태의 인공 근육으로 로봇팔을 만든다면 장기간 활동하면서 진짜 근육처럼 격렬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탄소 나노튜브 전극으로 화학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바꾼 뒤 기계적 에너지로 변환하면 인공 근육이 연료전지와 근육의 기능을 동시에 취할 수 있다.

 별도의 전원 연결장치 없이 구동하는 셈이다.

 이 탄소 나노튜브형 로봇팔은 팔씨름을 연습해 다시 인간에 도전하는 게 목표다. 언젠가는 구동장치가 필요 없는 로봇으로 팔과 다리를 절단한 장애인에게 이식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 “생각을 하면 커서가 움직인다.”

      독일에서 개발된 ‘정신적인 타자기’는 머리에 모자형 장치를 장착하면 연결선을 통해 컴퓨터로 생각이 전달된다.


 보행로봇 기능을 하는 미국 오서사의 ‘파워 니’(Power Knee)보다 훨씬 인간적인 발걸음을 흉내낼 수 있기에 말이다.

 이런 인체를 대신하는 로봇 장치가 ‘바이오 로봇’으로 거듭나려면 완벽한 BCI가 뒷받침돼야 한다.

 지금까지 뇌의 정보처리 알고리즘을 알아내 마이크로칩에 이를 구현하는 연구가 활발히 이뤄졌다.

 하지만 뇌의 알고리즘에 대한 연구는 완전한 단계에 진입하지 못했고, 마이크로칩의 크기도 획기적으로 개선되지 않았다.

 여기에 시제품 수준의 로봇 손과 발도 우리가 기대하는 장치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이런 까닭에 전신마비 환자들이 컴퓨터 앞에 앉히는 것마저도 버거운 게 사실이다.

 인간과 로봇이 한 몸을 이루는 생체공학적 인간의 동작도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최초의 바이오닉맨으로 불리는 제시 설리번이 로봇팔을 항상 착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리 추구한 연구로 장애인 외면
 그동안 바이오 로봇을 향한 획기적인 진전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부분적인 기술들이 융합되지 못하면서 장애인들의 바람을 희망사항에 머물게 하고 있다.

 연구자들이 지나치게 영리를 추구하거나 군사적 활용도가 높은 곳에 치우치는 탓이라는 지적도 있다.

 예컨대 탄소 나노튜브형 인공 근육만 해도 각종 탐사활동에 적용하는 연구가 활발할 뿐, 생체공학적 적용 방법을 찾는 것은 뒷전에 밀려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정재승 교수의 지적은 시사적이다.

 “BCI 기술은 전신마비 환자들의 움직임과 의사소통 능력을 크게 높일 수 있다. 하지만 엄청난 예산을 지원하는 집단은 전투기 조종사들이 순간적으로 쇼크를 받았을 때의 사고를 방지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해도 마음으로 움직이는 인공 근육 이식 로봇팔이나 다리가 사람에 장착될 게 틀림없다.

 그것이 머나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브레인게이트가 보여주고 있다.

 물론 현재의 연구성과에는 한계가 많다.

 브레인게이트만 해도 팔과 다리가 어느 공간에 있는지를 뇌에서 파악하지 못한다.

 이에 따라 한 번 동작을 취한 뒤에 다음 동작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 “내게도 진짜를 닮은 팔이 생겼어요.”

      본격적인 의미의 바이오닉맨으로 불리는 제시 설리번이 로봇팔을 장착한 뒤 환하게 웃고 있다.

 

 바이오 로봇을 개발하려는 생체공학 연구자들이 뇌의 다양한 신호를 추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 진화의 다음 단계는 사이보그일까.

 그것은 자연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뇌과학의 결실에 의한 비자연적 선택이 될 수밖에 없다.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한겨레

 (도움말 주신 분: 한국과학기술원 바이오시스템학과 정재승 교수. 참고 자료: <네이처, 7월12일치>, <뉴사이언티스트, 8월12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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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음으로 로봇 팔을 제어할 수 있는 생체공학적 인간
 
 최근 세계 언론을 통해 목이 부러져 마비가 된 한 남자가 생각만으로 전자메일을 열고, 텔레비전을 조종하고, 로봇 팔을 이용하여 물체를 이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5세의 미국 환자인 매튜 네이글(Matthew Nagle)은 뇌에 컴퓨터와 연결되는 장치를 이식하여 단지 생각만으로 이러한 기능들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본 내용에서는 이러한 일을 가능케 한 로봇기술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생각에 의해 제어되는 로봇 팔의 현실화

 이전에 사람이나 동물을 대상으로 뇌와 컴퓨터 사이의 인터페이스가 시연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보여준 결과는 팔다리에 대한 제어기능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운동기능을 회복시킬 수 있는 생체공학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있어 현재까지 보여준 가장 큰 진일보에 해당된다.
 1970년대의 텔레비전 시리즈인 ‘육백만불의 사나이(The Six Million Dollar Man)’에서 과학자들은 비행훈련 도중 불의의 사고로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했던 스티브 오스틴(Steve Austin)의 몸을 마음에 의해 조정되는 생체공학적 인공기구로 재생하였다.

 그 당시에 이러한 개념은 단지 순수한 공상에 불과했지만, 미래에 생각에 의해 제어되는 대체 의수족은 현실화될 가망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2개의 로봇 팔을 가진 제시 설리번… 민감한 동작도 숙달하여 자연스럼 움직임 가능

 59세의 제시 설리번(Jesse Sullivan)은 2개의 로봇 팔을 가지고 있지만 집에서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고, 새로운 페인트칠을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제초기도 잘 다루는데, 팔꿈치를 굽히고 전완(Forearm)을 회전시켜 제초기를 안내할 수 있다.

 그는 심지어 좀 더 민감한 동작인 그의 손자들을 안아주는 것을 숙달했다.
 이러한 동작은 부드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왼팔이 그의 두뇌에 의해 제어되는 생체공학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가 주먹을 쥔다고 생각하면, 전기신호가 수술로 경로가 변경된 신경을 통해 보내진 전기신호가 이를 가능하게 한다.
 의사들은 제시 설리번이 생각에 의해 제어되는 로봇 팔을 가진 최초의 사지절단 수술을 받은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신체와 마음을 연결하는 인공 팔다리를 정교화하기 위한 미국 정부 이니셔티브의 일부로서, 미국 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은 이 연구를 지원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미국 국방부 산하의 군사기술연구 개발기구인 국방첨단연구 계획청(DARPA)이 합류했다.
 미 육군 의무사령부(U.S. Army Medical Command)는 이라크에서 411명, 아프가니스탄에서 37명 정도의 군인이 부상을 입어 팔다리 가운데 최소한 하나를 잃었다고 밝힌바 있다.

 

 하이테크 과학이 낳은 로봇 팔의 발달

 제시 설리번의 경우 팔과 가슴 근육으로 지나갔던 어깨신경을 이식 수술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이 이식조직은 생각에 의해 생성된 충동을 수신하며, 근육활동은 전극에 의해 획득된다.

 이것들은 신호를 팔에 있는 컴퓨터에 중계한다.

 이 컴퓨터는 정상적인 사람의 팔을 흉내내기 위해 모터를 작동시켜 팔꿈치와 손을 움직이게 한다.
 또한 어깨신경은 가슴근육으로 발전하여 환자가 주먹 쥐라고 생각하면, 가슴근육의 일부가 수축한다.

 기본적으로 이식수술은 점들을 연결하는 것으로, 신경을 찾아서 이것이 얼마나 멀리 도달하는 것을 관찰한 후 근육에 연결하는 것이다.
 수술 3개월 후에 제시 설리번은 절단된 팔꿈치를 굽히려고 노력했을 때 그의 가슴근육에서 수의적 근육경련(Voluntary Twitch)이 발생하는 것을 최초로 인식했다.

 5개월경에 그는 그의 중요한 가슴근육에서 4개의 다른 영역을 활성화시킬 수 있었다.
 그가 절단된 팔꿈치를 구부리려고 노력하는 것은 가슴 쇄골(Clavicle) 바로 아래의 근육에 강한 수축을 야기했다.

 그가 마음속으로 주먹을 쥐려고 할 때, 가슴 쇄골 아래의 가슴영역에서 한 신호가 탐지될 수 있었고, 주먹을 펴고자 했을 때에는 별도의 신호가 발생했다.

 주먹과 팔꿈치를 펴는 것은 가슴근육 하부에 수축을 야기했다.

 

 1) 미국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주 매튜 네이글
 2001년에 척수가 절단되었으며, 2004년에 로드아일랜드 병원(Rhode Island Hospital)에서 브레인게이트 신경 인터페이스 시스템(BrainGate Neural Interface System)을 이식받았다.

 그는 시뮬레이션 된 전자메일을 열고, 컴퓨터 스크린 상에서 원 모양을 그리고, 간단한 비디오 게임을 하고, 텔레비전에서 채널을 변경하고 볼륨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궁극적으로 그는 인공 손에 있는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고, 물체를 잡고 이동시키기 위해 로봇 팔을 사용할 수 있었다.

 

 2) 익명 55세의 환자
 나이가 55세였던 두 번째 환자는 2005년 4월에 시카고 대학교(University of Chicago)에서 의사들에 의해 센서가 이식되었으며, 이 센서가 고장 나기 전까지 3개월 동안 컴퓨터 커서를 이용할 수 있었다.
 현재까지 특히 초당 20~200번의 신호를 함께 보내고 있는 대량의 뇌세포 그룹으로부터 신호를 받는 문제와 같이 엄청난 도전과제들이 이미 극복되었다.

 그러나 이식된 장치의 응답이 개인에 따라 크게 변동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센서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경향을 보이는 것 등과 같은 아직도 해결해야 할 주요한 기술적 장애물들이 남아있다.


 전문가들은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고 강조

 지난 7월 12일에 출판된 ‘네이처(Nature)’에서는 지난 수십 년 간 수행된 생체공학 연구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네이처(Nature)’에는 원숭이를 대상으로 뇌와 기계 사이의 인터페이스 속도를 가속화하는 연구에 대한 내용이 함께 출판된 것이다.
 여기에서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스탠퍼드 대학교(Stanford University)의 크리쉬나 세노이(Krishna Shenoy) 박사와 그의 동료 연구자들은 키보드 상에서 분당 15단어를 타이핑하는 속도와 동등하게 정보를 교환할 수 있음을 보였다.
 그러나 이 연구에 관여한 과학자들은 이 기술이 아직도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대한민국대표 산업포탈사이트 Copyrights 여기에)

 

 

 6백만불 사나이 제시 설리반 (Jesse Sullivan) - 1st Bionic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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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체장애인들의 희망, 생체공학 인공 팔

 

 DAYTON, Tennessee (AP) --

 제시 설리반의 양팔은 생체공학으로 만들어진 바이오닉 팔이다.

 그는 집에서 사다리를 오르고 페이트 칠을 하며 잔디도 깎는다.

 팔꿈치를 구부리고 팔뚝을 휘돌리기도 한다.

 손자들을 껴안기도 하는 등 보다 민감한 동작도 잘 해낸다.

 왜냐하면 그의 뇌가 생체 공학 인공팔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손을 접어"라고 생각하면 전자 신호가 신경을 통해 명령을 전달하여 동작이 일어난다.

 

 의사들은 설리반이 생각으로 움직이는 인공팔을 단 최초의 지체장애인이라고 말한다.

 연구원들은 산업재해로 양팔을 잃은 설리반에게 너무 실험적 인공팔에 의존하지 말것을 강조했다.

 올해 59세인 설리반은 돌리우드 놀이 공원모자를 쓰고서 이마에 땀을 흘리고 웃으며 "내가 양팔을 잃었을 때 그들은 새 팔이 잃어버린 팔과 같을 수 없다고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인공팔을 다루는 데 능숙치 않아서 부러뜨리기도 했는데, 한번은 잔디깎는 기계를 다루다 그렇게 된 적도 있다.
 

 연구원들은 즉각 인공팔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미국정부는 인공 지체 기술 발전 계획에 따라 이들을 후원했다.

 국립보건원이 연구를 지원하고 있고 최근에는 미군 R&D 부문의 Defe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가 연구에 가세했다.

 이라크에서 약 411명, 아프카니스탄에서 37명의 미군이 부상을 입고 팔이나 다리를 잃었다고 미 육군 의료대가 전한다.

 

 설리반의 인공 팔이 DARPA 연구에 앞선 것이지만 그는 언젠가 군인들이 사할 생체공학 팔을 시험하게 된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그 친구들은 제 책에서 영웅들이다 그들은 최고의 인공팔을 가져한다"고 말했다.

 

 설리반의 인공 팔을 개발한 토드 퀴켄 박사는 "미군과 공동으로 연구하게 되어 매우 흥미롭다"고 말했다.

 그는 시카고 재활 연구소의 인공지체 센터 신경공학 국장이다.

 또한 그가 일하는 재활연구소는 정교한 인공팔을 개발하는 DARPA 프로젝트에 참여한 35개 협력업체 중 한 곳이다.

 

 설리반의 생체 공학 팔은 기존의 인조 팔보다 훨씬 진일보한 것이다.

 마치 그의 오른 쪽 보철 팔처럼 휘어잡고 연속적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살색의 플래스틱으로 만들어진 왼팔은 눈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동작 멈춤 현상없다.

 사실 이제까지 인간의 팔이 보여주는 미묘하고 복잡한 동작을 재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퀴켄 박사는 "사람 팔처럼 부드럽지는 않지만 그대로 보철 팔보다 훨씬 부드럽게 작동한다"고 말한다.

 
 설리반은 2001년 5월 전력선 수리공으로 일하다 양팔을 잃었다.

 전기 누전 사고였다.

 부상이 너무 심해서 의사는 어깨 아래로 양팔을 절단해야 했다.

 수술 7주후 가장 적절한 때 그에게 가장 도움이 될만한 곳인 시카고 연구원들을 만나러 갔다.

 퀴켄 박사는 "제시는 부상에 상관없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설리반은 그의 생체 인공팔이 70년대 인기 TV 시리즈였던 600만불의 사나이 스티브 오스틴의 팔과 같은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은 슈퍼맨 같은 느낌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4살난 손자 루크 웨스트레이크는 이건 마술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설리반의 손에 견과열매를 주고 파파야 열매를 깨는데 도전했다.


 "생체공학 팔"이란 무엇인가?
 마술이 아니라 하이테크 첨단 과학이 생체공학 인공 팔을 만든다.

'근육 재신경자극전달"이라고 불리우는 과정은 퀴켄 박사에 의해 개발되어 지금까지 5명의 환자들에게 사용되었는데, 이것이 핵심기술이다.

 설리반의 경우 어깨 신경을 흉부 근육에 이식시켜 팔을 사용하도록 했다.

 이식된 부분은 생각으로 자극 신호을 받고 전극에 의해 근육동작이 일어난다.

 이것이 팔에 있는 컴퓨터의 신호를 전달하여 팔꿈치와 손이 움직이도록 모터가 작동하고 사람 팔으로 그대로 흉내내게 된다.

 

 연구서의 보고서에 따르면 "신경이 흉부 근육에서 자라서 환자가 "손을 접는다"라고 생각을 하면 흉부 근육의 한부부이 이를 전달해 준다"고 한다.

 퀴켄 박사는 덧붙이기를 "기본적으로 이는 도트와 연결되어 있어서 신경을 발견해서 신경을 자유롭게 해야하고 얼마나 멀리 전달되는지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수술한 지 석달이 지나서, 설리반은 처음으로 이미 잃어버린 팔꿈치를 구부리려 하자 흉부 근육의 자발적으로 경련이 일어난 것을 느꼈다고 연구소측이 밝혔다.

 5개월이 지나면서, 그는 흉부 근육의 4개의 다른 부위들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없어져 버린 팔꿈치를 구부리려고 하면 쇄골 바로 아랫부분에 근육이 강하게 수축되었다.

 그가 마음속으로 잃어버린 손을 접으면 역시 전극 신호가 쇄골 밑 흉부부분에 감지되고 손을 펴려고 하면 다른 신호가 흉부 쪽에 잡힌다.

 팔꿈치와 손을 펴는 것은 이보다 더 낮은 흉부 근육의수축을 일으킨다.

 

"설리반의 가슴을 만지자 그가 손과 팔의 만지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고 연구소 측이 전했다.

 연구소는 "환자가 촉각, 악력의 정도, 예민하고 둔감한 정도, 온도 감각등을 대체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설리반은 생각으로 통제하는 자신의 팔에 대해 "보철팔을 가졌다면 그냥 일하면 된다. 팔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차이를 설명했다.
  

 기존 보철 팔보다 기능 훨씬 향상
 퀴켄 박사는 이식을 통해 인공 지체를 움직이도록 한 것은 설리번이 최초라고 설명했다.

 유타 대학 생체공학 및 보철기술개발과 부교수인 그레고리 클락은 기존의 보철 팔은 움직임의 형태에 제한이 있다고 덧붙였다.

 게다가 기존 보철팔은 특정한 순간에 여러가지 동작 중 한가지만 되는 단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클락 교수는 사람의 팔은 22개의 분리 동작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설리반의 인공 팔은 현재 4가지 동작만을 하지만 연구원들이 그 기능을 향상시키기위해 노력 중이다.


 그러나 클락 교수는 "4가지 동작도 매우 훌륭하다"고 말했다.

 설리반은 자신의 인공팔로  팔을 회전시키고 팔꿈치를 구부리고, 손목을 돌리고, 손을 폈다 접었다 할 수 있는데, 어떤 때는 동시에 이 동작을 할 수 있다.
  

  설리반, 최초의 바이오닉 여성과 만나다 
 설리반과 퀴켄 박사가 지난 목요일 클라우디아 미셀 양과 함께 워싱턴 D.C. 기자회견장에 참석했다.

 미셀 양은 생체공학 인공팔을 이식받은 최초의 여성이다.

 26세의 미셀은 2004년 해군에서 제대한 후 로 끔찍한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다.

 
 점차 그의 인공 팔의 사용을 시험하고 있는 설리반은 좋은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때도 있었다고 시인했다.

 22년의 세월을 같이해 온 설리반의 아내 캐롤린은 "처음에 남편이 이 물건을 움직이려는 걸 볼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사고후 남편이 곧 죽는 줄만 알았다면서 당시의 끔찍함을 떠올렸다.

 그녀는 하루종일 남편을 시중들기 위해 출장 요리 사업을 포기했다.

 

 

 

설리반이 새로 생체공학 인공팔을 이식받은 미셀 양과 인사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설리반은 일부러 부인을 심부름 보냈고 혼자 남았다.

 그녀는 남편이 거의 정신이 나간 듯 소리를 지르면서 가게에 갔다오라고 했다며 웃었다.

 그녀는 부상과 재활 과정에서 어쩔 수없이 나타나는 엄청난 삶의 변화는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았다고 말한다.

 
 그녀는 "몇가지 이유에서 우리는 점점 그일에 빠져들었고, 남편이 결코 쉽게 꺾기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캐롤린은 약물치료가 남편의 고통을 덜어주었고 때로는 스스로 자기 최면을 걸었다고 말했다.

 "그들이 이것을 남편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말하면서 캐롤린은 스스로를 간호 조무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제시 설리반은 "마당에서 하늘 일은 자기가 다하고 쓰레기 처리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음식을 들 때 포크를 집을 수 있다.

 이제 생체 공학 인공 팔을 가진 할아버지가 숙달해야 할 다음 번 임무는 '낚시줄 던지기'다.

 

 

 

미셀 양이 이식 받은 인공 팔을 시험해 보고 있다

 Updated 9/16/2006  출처: CNN News September 14.  기사번역: 박화중

 

 

 

‘생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로봇 팔’을 갖게 된 클라우디아 미첼이 1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로봇 팔을 이용해 그림자 놀이를 하고 있다.

 

 

 

 

 

 

 

 

 

 손가락에서 뇌로 신호를 되돌려 압력이나 열(熱), 모서리 등을 감지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다음 과제라고 했는데, 오른쪽의 자료에서는 이미 「클라우디아 미첼의 Bionic Arm 은 단지 생각만으로 움직여지며, 열과 악수할 때의 압력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뇌에서 기계손으로 신호가 가는 것은 다운로드지만, 기계손에서 뇌로 신호가 가는 것은 업로드가 되며, 이것은 컴퓨터에 의해 인간의 뇌가 컨트롤 당할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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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공팔 가지게 된 첫번째 여성   2007/11/29 14:53

 

 

 

 

 

 

High five: the world's first "bionic" man and woman, Jesse Sullivan and Claudia Mitchell, come to grips with their prostheses in a public display in Washington.  - Photo: AFP

하이 파이브: 처음 인공팔 시술은 한 남자와 여자, 제시 술리반과 클라우디아 미첼이 워싱턴에서 공개적으로 그들의 인공팔로 물건을 잡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CLAUDIA Mitchell cried the first time she peeled a banana one-handed. Several months after losing her left arm at the shoulder in a motorcycle accident, she used her feet to hold the banana and peeled it with her right hand ? she felt like a monkey.

클라우디아 미첼은 처음 한 손으로 바나나껍질을 벗겼을 때 울었다고 한다.

오토바이사고로 왼팔을 잃고 몇 개월 동안 그녀는 발과 오른손을 이용하여 바나나 껍질을 벗겼다고 한다.

마치 그녀는 자신이 원숭이같이 느껴졌다고 한다.

 

"It was not a good day," the 26-year-old said. "Although I accomplished the mission, emotionally it was something to be reckoned with."

“좋은 날이 아니죠.” 26세의 그녀는 말했다.

“내가 그것(손으로 바나나껍질 벗기기)을 완전히 해내었다고 해도 그것은 감정적으로 고려할만한 일일 뿐이죠.” 

 

Now she can peel a banana in a less simian posture, placing her prosthetic left arm next to the banana and then thinking about grabbing it. The mechanical hand closes around the fruit and she's ready to peel.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원숭이 같은 자세를 취하지 않고도 바나나를 벗길 수 있다.

인공(보철) 왼손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쥐고 싶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그 기계로 만든 왼손은 과일 가까이 다가가서 그녀가 그것을 벗길 수 있게 한다. 

 

Ms Mitchell, from Maryland in the US, is the fourth person, and the first woman, to receive a "bionic" arm that allows her to control parts of the device by thought alone. Designed by physicians and engineers at the Rehabilitation Institute of Chicago, the device works by using the brain's ghost memory of the missing limb, translating commands to move muscles in the missing limb to movements in the bionic arm.

미국 매리랜드 출신의 미첼양은“인공 팔(bionic arm)”을 가지게 된 4번째 사람이며 여성으로서는 첫 번째이다.

그 팔은 생각만으로 각 부분을 조정할 수 있다.

그 장치는 시카고 부흥기관(Rehabilitation Institute of Chicago) 의 의사들과 과학자들이 만든 것으로 잃어버린 팔, 다리의 대한 뇌의 기억(ghost memory)을 이용한 것인데, 이 기억은 이미 잃은 팔, 다리에 명령을 내리고 그 명령은 인공 팔을 움직이게 한다. 
 
The first person to get a bionic arm ? powerline technician Jesse Sullivan who lost both arms in a severe electric shock ? and Ms Mitchell demonstrated their prostheses publicly on Thursday in Washington.
인공 팔을 처음 받은 사람은 전력기관 기술자, 제시 술리반인데 그는 전기충격으로 양팔을 잃었다.

그리고 미첼양은 이번 목요일 워싱턴에서 공개적으로 그 인공 팔을 사용하는 것을 대중들에게 보여주었다.

 

The rehabilitation institute's Todd Kuiken, a physician and biomedical engineer who led the medical team that developed the technology, said the brain's commands sent messages to a computer in the five-kilogram limb, which in turn is controlled by six small motors.
부흥기관의 토드 쿠이켄은 의사이자 생명공학 기술자인데, 그 인공 팔을 만드는 메디컬 팀의 대표였다.

그가 설명하길  뇌의 명령이 5킬로 짜리 팔에 메시지를 보내는데 그것은 여섯 개의 모터에 의해서 순서대로 조종된다고 한다.

 

Ms Mitchell hopes some day to upgrade to a prosthesis, still under development, that will allow her also to "feel" with an artificial hand.
미첼양은 기술이 더 발전하여 언젠가는 이 인공팔로도 “감각”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Future arms will also be able to perform more complicated motions, but even the first-generation device "has changed my life dramatically", she said. "I use it to help with cooking, for holding a laundry basket, for folding clothes ? all kinds of daily tasks."
미래에 나올 인공 팔은 좀 더 복잡한 움직임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세기 장치(그녀가 하고 있는 인공 팔) 는 제 인생을 극적으로 바꾸어 놓았어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난 이 팔로 요리도 도울 수 있고, 빨래 바구니도 들 수 있고, 옷도 들 수 있으며 모든 일상생활의 일들을 할 수 있어요,”

 

The bionic arm makes use of several features of the human body that would be impossible to create from scratch.

Luckily, a person still has them even after losing a limb. One feature is the "motor cortex" of the brain, where neurons that control muscles reside.
그 인공 팔은 인체의 여러 부분(신경)을 이용한 것인데 그것은 사람이 감히 그려내기도 어려운 것이다.

운이 좋게도 팔, 다리를 잃어도 사람은 사지를 조종하는 부분(신경)은 잃지 않는다.

그 중 하나가 뇌에 있는 “모터 코텍스”라는 것인데 근육을 총괄하는 뉴런이 있는 부분이다.

 

Neurons that control the arm and hand remain active after amputation, and when the amputee pretends to move the missing hand an electrical signal is sent down the spinal cord and out to nerves that terminate at the stump.
뉴런은 사지가 절단된 후에도 활발히 팔, 다리를 조종하려고 한다.

그리고 절단수술을 받은 환자는 절단된 팔을 움직이려 들고 그 전자신호가 척추신경에 보내진다.

그리고 절단된 부위에서 종결된다.

 

The nerves are huge electrical conduits filled with tens of thousands of fibres carrying a wide assortment of information. Some tell muscles to move. Some carry signals back from the hand to the brain, where the information is interpreted as touch, temperature, pressure and pain.
그 신경은 거대한 신경관으로서 거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수 만개의 섬유질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몇 개의 신경이 근육을 움직이게 하고 몇 개는 손에서 뇌로 신호를 다시 보내는데, 손에서 느낀 촉감이나 온도, 압력 고통 따위를 전달하는 것이다.   

 

For the bionic arm, a biological "control panel" is created in muscles in the amputee's chest. The nerves leading to the missing arm are attached to different muscles, sacrificing ? or, more precisely, hijacking ? the chest muscles so that they signal neural commands to move the missing arm.
인공 팔의 경우, “조종 패널”이 절단수술을 받은 환자의 가슴속 근육에서 생겨난다.

그 신경은 절단 된 팔, 다리를 조종하는데 다른 근육에 붙게 되고 희생되거나 혹은 더 정확히 강탈(신경이 딴 곳으로 이전된다는 뜻)되어 그 가슴 근육에 있는 뉴런이 잃은 팔을 움직이도록 명령을 내린다.

 

Over several months, the arm nerves attach to the muscles and, if all goes well, a person is left with chest muscles that twitch in different places in response to such thoughts as "bend the wrist back", "move the thumb" and "clench the fingers". The person also ends up with a patch of skin about the width of a baseball that, when stroked, warmed or pricked, feels like a hand rather than part of the chest.
수개월 정도 지나면, 그 팔의 신경은 근육에 붙게 되고, 만약 잘 진행이 되면 그 사람은 “손목을 반대로 접어” “엄지를 움직여” “손가락을 오므려”와 같은 생각만으로 가슴근육을 움직이게 할 수 있게 된다.

그 사람은 또한 결국 야구 공 만한 피부조직으로 가슴보다 더 예민하게 마치 손처럼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된다. 

 

The bionic arm makes use of this feat of anatomical alchemy. The prosthesis is strapped to the shoulder stump and torso in a way that positions electrodes over the regions of the chest muscles that are responding to neural "hand instructions". Those electrodes, in turn, are wired to a computer and then on to motors in the forearm and hand of the device.
그 인공 팔은 해부학상의 연금술(비법, 마력)의 기술을 이용한 것이다.

이 인공장치는 어깨와 몸에 고정되어 있는데, 가슴근육 부근의 전극(신경이 보내는 신호)을 잡아서 손에 명령을 내리는 뉴런에 반응을 보낸다.

그 전극은 순서대로 컴퓨터에 연결되어 인공 팔과 손의 모터에 보내지게 된다.

 

When the amputee tells the fingersclose, the designated muscle twitches and the electrode over it detects the signal, activating the appropriate motor in the bionic arm.
절단 수술을 받은 환자가 손가락을 움직이려 들면, 그 지정된 근육이 씰룩거리고 그 전극이 신호를 보내고 그 인공팔의 적절한 모터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In the future, electrodes in the hand will send touch signals up the arm to the chest skin, which will send them on to the brain, where they will be perceived as sensation.
미래에는 손의 전극(신경신호)이 촉감까지도 가슴피부에 전달하여 다시 뇌로 전달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센세이션을 일으킬 것이다.

 

WASHINGTON POST, TELEGRAPH

워싱턴 포스트, 전보


번역: 달과 바람

(http://www.theage.com.au/news/world/bionic-arms-turn-science-fiction-to-fact/2006/09/15/1157827157936.html  원문보기)

 

 

 

 

 


 

 

 

 

 

 출처: 빛과 흑암의 역사


 

신앙의 버티고(Vertigo) 현상

버티고(Vertigo)란 항공기 조종사의 착시현상을 말 합니다.

비행 중 조종사는 인체평형기관의 감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어 비행 시 작용하는 여러 가속도로 인하여 일상생활 중 경험할 수 없는 착각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늘이 바다 같고 바다가 하늘같게 보이거나 아니면 같은 고도에서 회전을 하는데 속도를 높이면 비행기가 상승하는 것처럼 속도를 낮추면 비행기가 하강하는 것처럼 느끼는 등의 많은 착각이 일어납니다.

특히 해상 초계비행은 육상 비행과는 달리 항공기의 위치를 참고할 수 있는 지형지물 등의 참조점이 없는데다 야간 비행 시는 밤하늘의 별빛과 해상의 선박 불빛이 동일하게 보이는 비행착각이 발생하기 쉽습니다.

여객기나 수송기의 경우 저속인데다 계기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부조종사가 있어 쉽게 회복하지만, 전투기의 경우 혼자 초음속 고속 시계비행을 하는 경우가 많아 사고가 그치지 않습니다.

착시현상은 지하철을 탈 때도 경험합니다.
오른 쪽으로 가야할 것 같은데 표지판은 왼쪽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때 우리의 느낌을 따라가면 어려움을 당하게 되지요. 내 느낌이야 어떻든 표시판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 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착시 현상이 많이 나타납니다.
초 신자일 때는 교역자의 가르침을 잘 따릅니다.
신앙의 연조가 많아지면 말씀보다 자기 느낌을 더 따르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씀을 제 멋대로 해석하고 곁길로 가기도 합니다.

문제는 영적으로 깊은 체험을 하게 될 때 버티고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많은 신령하다는 성도가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해지는가. 했더니 완전히 잘못되는 경우를 보개 됩니다.

제가 전도사로 있을 때 성령의 강력한 임제를 체험하고픈 욕망이 간절했습니다.
강력한 성령의 임재체험을 위하여 본격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1978년 음력 8월 14일 밤에 방언을 체험하게 되고, 환상을 보게 되고, 음성을 듣고 꿈을 꾸면 이 꿈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믿음 생활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어태까지의 신앙생활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이때부터 영적 교만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담임 목사님까지도 우습게 여겼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충고를 했습니다.
‘성경 말씀 보다 신비체험을 더 중히 여기면 결정적인 순간에 사탄의 유혹에 빠진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습니다.
성령체험이라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고잔(지금의 안산시)에 있는 누이동생 집에 가셨습니다.
그 때 새벽기도를 마치고 방에 들어가려고 방문을 여는데 방의 벽 전체가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환상을 보개 되었습니다.
환상의 내용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내용입니다.
교회에 알리고 교인들과 같이 고잔에 초상 치려러 가야하는데 어쩐지 마음에 내키지가 않았습니다. 혹시 내가 환상을 잘못 본 것이나 아닐까?
그런데 다음날 아침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어제와 꼭같은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환상을 잘못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환상의 내용(어머니 사망)이 사실이라면 어제 그 사망 소식이 왔을 텐데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3일째 되는 날에도 꼭 같은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환상은 사탄이 보여준 가 짜 환상이었습니다.
만약에 내가 그 환상을 믿고 목사님과 교인들이 함께 고잔에 초상치려러 갔다고 하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렇게 신령한 체험을 하게 되면 사탄이 넣어주는 버티고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때는 환상을 믿지 말고 말씀에 바로서야 합니다.

원로 Essay 중에서
성도교회 원로목사 예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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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USA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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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긴 여행

인생은 긴 여행과도 같습니다. 
생명이 탄생하여 죽음으로 끝이 나는 
약 7-80년의 유한한 여행,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나의 영원한 집이 아닙니다. 
얼마동안 머무르다가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한 때의 여인숙입니다. 

내가 쓰고 있는 이 육체의 장막은 
나의 영원한 몸이 아닙니다. 
얼마 후에는 벗어 놓아야 할 일시의 육의 옷이요 
죽으면 썩어버리는 물질의 그릇에 불과 합니다. 

우리는 지상의 나그네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죽음 앞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죽음에서 도피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순례의 길에 어떤 이는 고독한 여행을 하고, 
어떤 이는 행복한 여행을 하고, 
어떤 이는 괴로운 여행을 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즐거운 여행을 하기도 합니다. 

산다는 것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이 가는 길이 있습니다. 
짐승은 사람의 길을 갈 수 없고, 
사람은 짐승의 길을 가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인간의 양심과 체면과 도리를 저버리고 
짐승처럼 추잡하고 잔악한 행동을 할 때 
그는 짐승의 차원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춘하추동의 네 계절의 순서는 
절대로 착오가 없고 거짓이 없습니다. 
봄 다음에 갑자기 겨울이오고 
겨울 다음에 갑자기 여름이 오는 일은 없습니다. 
우주의 대 법칙, 대자연의 질서에는 
추호도 거짓이 없고 부조리가 없습니다. 

옷이 나의 몸에 맞듯이 
인(仁)이 나의 몸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인(仁)은 덕(德) 중에 덕(德)이요, 
남을 사랑하는 것이며, 
참되고 거짓이 없는 것이요 
진실무망 한 것이며 
사리사욕을 버리고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며 
꾸밈이 없이 소박하며 굳센 것입니다.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나의 설자리를 알고, 
나의 나아갈 길을 알고, 
나의 분수를 알며, 
나의 실력을 알고, 
나의 형편과 처지를 알고, 
나의 책임과 본분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 옮긴 글 -





끝나지 않은 일: 용서
(The Unfinished Business of Forgiveness)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인데도 무엇이 우리를 삶에 매달리게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끝내지 않은 일이 있어서일까요?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그리고 당신도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삶에 매달려 있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한 사람을 용서하고, 또 우리가 마음의 상처를 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할 때, 
새로운 자유가 생깁니다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자유입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3:34)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를 통하여 예수님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누가복음 23:46)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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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6:1-11> 

오늘은 사무엘하로 들어가서 좀 건너뛰어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오던 사건을 살펴봅시다. 하나님께 불순종한 왕 사울이 길보아산에서 세 아들과 함께 죽은 다음부터 다윗은 더 이상 사울왕에게 쫓길 필요는 없었지만, 사울왕의 군장 아브넬이 사울왕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옹립하고, 유대족속은 헤브론에서 다윗을 왕으로 세워 다시 수년간 사울과 다윗 집안간의 싸움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다윗으로 사울집안을 이기게 하시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고, 또한 침략해온 블레셋을 패퇴시키셨으며, 다윗은 또한 여부스족속으로부터 시온산성을 빼앗아 다윗성이라 하고 예루살렘에서 다스리게 됩니다.

이 때 다윗의 나이가 38세 때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윗은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 20여 년간 모셔져 있던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오기로 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뺀 삼만의 무리를 데리고 가서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그 앞에서 여러 가지 악기, 비파와 수금과 소고와 양금과 제금 등으로 주악을 울리며 모셔옵니다. 3만의 인파와 천지를 울리는 주악, 팡파레 속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오는 행사는 그 규모가 대단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뜁니다.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잡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웃사를 치셔서 죽이십니다. 놀란 다윗은 법궤 모셔오기를 중단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가드의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겨놓고 철수합니다.

하나님은 왜 법궤를 붙잡은 웃사를 죽이시고 다윗의 ‘법궤 모셔가기’ 행사를 매몰차게 거부하셨을까요? 그것은 다윗의 ‘하나님 모셔가기’ 행사가 잘못 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4장을 보면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동할 때 하나님은 법궤와 성막기구를 움직이는 상세한 법도를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궤와 장막을 옮기는 일은 레위지파 자손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 곧 대제사장들이 법궤를 장과 해달가죽, 그리고 순청색 푸른 보자기로 덮고 채를 뀁니다. 그리고 성소의 모든 거룩한 기구를 덮습니다. 그러면 레위지파 중 고핫자손들이 메고 갑니다. 이 때 고핫자손들도 함부로 법궤나 성물에 손을 대면 죽임을 당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게르손 자손들은 성막의 앙장들과 덮개 같은 것을 메고 갑니다. 므라리 자손들은 장막의 널판들과 기둥들을 메고 갑니다. 하나님의 장막을 옮겨가는 것은 이렇게 엄숙하고 두려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렇게 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도 범람하던 요단강에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들어갔었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레위인들로 하여금 메게 하지 않고 소가 끄는 수레에 실었습니다. 수레에 싣다니, 아니, 하나님이 무슨 물건이나 곡식입니까? 하나님의 법궤를 수레에 실은 것은 홉니와 비느하스를 죽이고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아갔던 블레셋이 재앙으로 혼이 난 다음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낼 때 사용한 방법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야 모르니까 그럴 수 있었겠지만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소가 왜 날뛰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잘못을 깨닫지 못 하였고 웃사는 하나님의 법궤를 붙잡았던 것입니다. “하나님, 가만히 좀 못 계시겠어요?” 

우리는 하나님을 함부로 취급하고 하나님의 음성, 의사표시까지 짓눌러버리는 웃사의 잘못을 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못 대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버릇없이 구는가 하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과 경고를 무하고 자기 마음대로 해버립니다. 심지어 성령하나님을 무슨 물건이나 기운처럼 “성령 받아랏!” 하고 뿌려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좋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대하고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되는 것입니까? 아무리 격의 없는 친구사이나, 사랑하는 부부사이나, 부모자식간이라도 서로를 존중하는 예절은 있는 법입니다. 무시당하고서야 마음이 좋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한없이 좋으신 분이지만 동시에 한없이 거룩하시고 엄위하시며 두려운 분이십니다. 우리는 한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복주시기 원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또한 엄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길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로부터 석 달 뒤, 뒤늦게 다윗이 이를 깨닫고 다시금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올 때는 제대로 했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물론 레위지파 제사장들이겠지요) 여섯 걸음을 행할 때 희생으로 제사를 드렸고 다윗은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어린아이처럼 그 앞에서 춤을 춥니다.
"좋으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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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버는 사람들의 단순한 6가지 습관]


부자가 되려면 횡재수를 노리기보다는 평소 생활 속에서 돈을 모을 수 있는 습관을 실천하는 게 순리다.

 
①정리정돈을 잘하라
 
필요없는 것을 없앤다는 행위는 매우 중요하다. 돈을 버는 사람들은 필요한 것에만 관심을 두므로 쓸데없는 일과 물건에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②새로운 사람을 만나라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인재를 확보할 수 있으며 유용한 정보도 취득할 수 있다. 다만 음주가무 등 말초적인 요소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은 돈버는 기회을 갉아먹는다.
 
③쓸 데는 써라
 
유용한 소비는 기회 상승으로 이어진다. 지나치게 아끼다 보면 오히려 더 큰돈이 빠져나갈 수 있다. 돈버는 사람들은 써야 할 때는 과감하게 쓴다.
 
④지갑을 비우지 말라
 
지갑은 돈을 모아두는 저장고와 같은 역할을 한다. 지갑이 비었다면 돈이 모이지 않는다. 반면 신용카드를 여 러개 갖고 다니는 것은 좋지 않다.
 
⑤가방을 들고 다녀라
 
새로운 재물을 취득했을 때 이를 담을 수 있는 도구가 있다는 점에서 축적에 대한 준비가 된다. 또 재산의 취득에 필요한 책이나 메모지 등을 지닐 수 있다.
 
⑥문화와 스포츠를 즐겨라
 
성공한 사람들을 자연스레 만날 수 있고 문화의 이면에 숨어 있는 기회를 만날 수 있게 된다. 인간적 교류를 넓힐 수 있고, 비즈니스의 장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출처:허브브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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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1690


거짓의 영, 아르뱅주의(Arvinism)를 분별하라!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굳이 살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직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그것은 윤리의 문제 때문이다. 그리고 나아가 한국교회의 위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위기의 중심에는 윤리 실종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윤리 실종의 주범이 개신교 구원론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구원에 관한 복된 소식이 살인 면허로 타락해 버렸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 '밀양'이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사실 '밀양'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도덕적인 질문을 넘어서 매우 근본적이고 심오한 신학적 질문을 포함하고 있다). '밀양'은 오늘날 개신교의 구원론이 봉착해 있는 심각한 딜레마를 정확히 폭로하고 있다.

이건 단순히 영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언젠가 자신의 두 아이를 한강에 빠뜨려 죽인 아이들 아빠가 인터뷰하는 장면이 방송을 탔다. 앵커는 왜 그런 짓을 했느냐 물었다. 살인범은 살길이 막막해서 그랬다고 답했다. 여기까지는 예상되는 답변이었다. 앵커는 그럼 왜 같이 죽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때 그이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기독교인이라서 자살은 못했습니다." 이에 당황한 앵커는 기독교인이라면 살인은 해도 괜찮으냐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살인범은 더욱 기가 막힌 답변을 한다. "(살인)죄는 씻을 수 있습니다."

허무 개그가 아니다. 이건 9년 전 겨울에 있었던 실제 상황이다. 우리는 이 엽기적인 인터뷰에서 기독교 구원론이 진짜로 살인 면허로 전락한 실상을 보게 된다. 물론 이 경우는 다소 극단적이기도 하고 또 살인범이 정신질환도 앓고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사례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의 논리 속에서 우리는 놀랍게도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 (살인)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어느 크리스천이 이 살인범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쉽게 반박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살인범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한 듯하다. 그는 이미 자신이 용서받은 자라고 생각하나 보다. 그리고 그가 받은 구원, 혹은 죄 사함은 살인죄에 의해서 상실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참으로 어이없는 주장이다. 문제는 이런 유의 살인 면허가 한국교회 내에서 공공연히 발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칼뱅주의 논쟁을 촉발시킨 전병욱 목사 건도 마찬가지다. 전 목사나 그가 개척한 교회로 모인 무리들은 전 목사의 범죄가 해결되었다는 담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들도 그 살인범과 같은 논리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죄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전 목사가 행한 죄가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 별로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악행의 전모가 드러나지도 않았고, 피해자가 몇 명이며, 그들이 겪은 충격과 상처가 얼마나 큰지 제대로 밝혀지지도 않았다. 또한 전 목사는 한 번도 피해자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한 적도 없고, 자신의 잘못에 대한 보상을 하지도 않았다. 피해자도 충분한 위로와 회복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런데 전 목사와 그의 추종자들은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보는 모양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복음을 살인 면허로 전락시킨 또 하나의 명백한 사례를 보게 된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복음을 살인 면허라고 착각하고 있는 이들이 붙들고 있는 확신이다. 대체 그들은 어디서 그런 황당하고 기이한 확신을 얻게 된 것일까? 모르긴 해도 그건 분명 통속적이고, 저급한 신학이 제공하는 확신일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신학은 무엇일까? 칼뱅주의일까, 아니면 아르미니우스주의일까?

필자가 볼 때 둘 다 아니다. 앞글서 필자는 칼뱅주의가 되었든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되었든 그 두 체계 내의 논리를 충실히 따른다면 윤리적 실패를 정당화하는 결과가 도출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살인 면허를 발급해 준 신학의 정체는 무엇인가?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아마도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편의적으로 조합시켜서 만든 혼합물임이 분명하다. 여기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칼미니즘(Calminism) 아니면 아르뱅주의(Arvinism)쯤 될 것이다. 그런데 크레이그 블룸버그(Craig Blomberg) 교수가 벌써 칼미니즘이라는 말을 다소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 아르뱅주의라고 이름 하는 것이 낫겠다 싶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타락을 부추기며, 그러한 타락을 정당화하고 있는 개신교 구원론은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최악의 조합, 곧 아르뱅주의이다. 아르뱅주의라는 신학이 있는가? 물론 그런 신학은 없다. 누구도 그런 신학을 정리해서 발표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아르뱅주의는 한국교회 저변에 상당히 뚜렷하고 잘 정리된 형태로 유포되어 있다.

여기서 필자가 생각하는 아르뱅주의를 앞에서와 같이 5가지 원리에 따라 정리해 보겠다.

1) 타락에 대해 : 하나님께서 은총으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력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간의 전적 무능력이 인간이 복음을 믿어야 할 책임을 무효화한다는 데까지 진지하게 나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타락에 관해서는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중간 정도 된다.

2) 선택에 대해 : 나도 알지 못하는 때에 나를 위해 구원을 준비하시고, 나로 하여금 믿음에 이르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을 믿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택자와 비택자를 이중 예정하셨다는 지점까지 진지하게 사유하지 않는다. 선택에 관해서도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중간 정도 된다고 봐야 한다.

3) 속죄에 대해 : 속죄에 대해서는 아르미니우스주의 쪽으로 기우는 듯하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하시며,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차별 없이 십자가에서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4) 은총에 대해: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도 역시 아르미니우스주의 입장을 선호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구원의 모든 조건을 충족시켜 주셨다. 이제 남은 건 인간의 선택이다.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믿으면 천국, 안 믿으면 지옥. 그대가 선택하라. 이들이 인간의 반응과 책임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인 분이시라고 믿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 구원 초청이나 영접 기도가 가능하다.

5) 견인에 대해 :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견인에 있어서는 칼뱅주의식 견인 교리를 확실히 붙든다. 하나님의 구원 손길은 마치 로마인의 악수와도 비슷하다. 내가 손을 놓아도 하나님은 내 손을 놓지 않는 악수다. 로마서 8장 37~39절을 읽어보라. 그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의 구원을 앗아 갈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이상이 거칠게 묘사해 본 아르뱅주의의 스케치다. 보시면 알겠지만 이 신학의 특징은 무엇보다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나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나의 연약함을 다 받아 주시고, 나의 죄도 다 용서해 주시고… 하여간에 나의 복지가 최고의 존재 목표인 분이시다. 하나님은 나를 위하시는 분이며, 나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해 주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자기중심성은 결국, 하나님을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로 만들고 하나님의 은총을 값싼 은총으로 변질시킨다.

아르뱅주의의 두 번째 특징은 편의주의다.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나름대로 치열한 논리적, 신학적, 성서해석학적, 윤리적 고민의 산물이다. 두 신학은 오랜 사유와 피 튀기는 논쟁으로 엄격하게 사고하고, 성서에 충실하며, 논리적으로 일관성을 갖추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어느 정도 완성된 형태를 갖출 수 있었다. 하지만 아르뱅주의는 실용적 목적으로 상식과 자신의 감성에 기초해서 마음에 드는 것들만을 편리하게 조합해 만든 것이다. 성서에서 아무 구절이나 마음에 맞는 구절이 있으면 가져다 인용하고, 칼뱅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도 아무렇게나 가져다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어 버렸다. 논리적으로나 성서적으로 '그럴듯함'이라는 기준만 통과하면 그것을 진리라고 받아들여 버리는 것이다. 지독한 편의주의의 산물, 이것이 아르뱅주의다.

이러한 편의주의는 당연히 반지성주의적 특성을 띄고 있다. 그것은 진지한 사유를 결여하고 있다. 편의주의가 초래하는 논리적 모순 같은 것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명백한 논리적 오류임에도 이것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있는 건 사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한다. 어차피 신학으로, 논리로, 교리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십자가의 보혈!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논리적인 것은 적그리스도적인 것이다. 해서 아르뱅주의자들은 지성을 공격하는 대범함마저 보인다. 사고하기를 멈추라! 사고는 먹물들의 허영이요, 책상 신학자들의 지적 유희다. 앉아서 책 읽을 시간 있으면 성경이나 한 줄 더 읽어라. 복음은 단순한 것이다. 자, 단순한 복음을 믿어라. 명백한 진리 안에 거하라. 토론하고, 생각하고, 논쟁할 시간 있으면 나가서 한 영혼이라도 복음을 전하라. 편의주의, 감성주의, 행동주의, 자기중심주의… 바로 이런 것들이 아르뱅주의 신학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힘이다.

아르뱅주의의 교리적 특징을 들자면 아르미니우스주의식 '구원의 확신'과 칼뱅주의식 '성도의 견인'을 제멋대로 결합해 버렸다는 데 있다. 자신의 구원을 확실히 알 수 있다는 가르침과 그 구원이 영원히 보장된다는 가르침의 결합은 그야말로 끔찍한 재앙을 초래한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살인 면허로 전락시키는 범죄 행위다. 생각해 보라.

가. '나는 구원받았다.'
나. '어떠한 상황에도 나의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이 두 문장의 결합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는지 말이다. 그야말로 천하무적 구원론이 아닌가? 이러한 아르뱅주의는 먼저 기독교 신앙에서 긴장을 제거해 버린다. 자끄 엘륄의 말대로 기독교 신앙은 변증법적 긴장으로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많은 내용들이 있다. 예컨대 확실과 불확실성, 이미 받은 구원과 아직 완성되지 못한 구원, 하나님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은총과 행위, 복음과 율법 등. 루터는 이러한 기독교 신앙의 변증법적 긴장을 '용서받은 죄인(simul justus er peccator)'이라는 근사한 표현으로 잘 압축해서 보여 주었다. 루터를 오해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용서를 받기는 했으나 본성상 죄인이었다는 사실, 즉 모순된 자기 실존을 외면할 수 없으리라.

앞글에서 필자가 밝혔던 것처럼 (서로 다른 논리적 장치를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역시 이러한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예컨대, 칼뱅주의는 예정의 신비라는 구멍이 성도의 견인 교리와 변증법적 긴장을 이루고 있고,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구원의 확신이 배교 가능성과 함께 긴장을 이룬다. 그런데 아르뱅주의는 바로 이 긴장을 제거해 버렸다. 루터 식으로 표현해 보자면 '용서'에만 방점을 찍어 버린 것이다. 그러자 "담대하게 죄를 지으라"는 루터의 역설적 복음 선포가 진짜로 죄 지어도 된다는 식의 범죄 허가증이 되어 버리고 만다.

긴장이 사라진 기독교 신앙은 나태와 방종을 향한 고속도로를 만들어 낸다. 그 고속도로의 종착지는 이름 하여 '무율법주의'다. 아르뱅주의는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용서하실 것이고, 나의 구원은 안전하다는 식의 거짓된 복음을 가르침으로써 죄 짓기에 담대하게 만든다. 물론 아르뱅주의자들도 소위 '성화'에 대해서 들어 보기는 했다. 하지만 성화는 시간적으로 차후의 문제며, 나아가 그것은 필수라기보다는 선택의 문제라고 여긴다. 생각해 보라. 하나님 앞에서 누가 완전히 성화되었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결국 도찐개찐이다. 우리는 성화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그저 다만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을 묵상해야 한다. 정말로 성화가 필요하다면 언젠가,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나를 성화시키시겠지. 그러니 성화는 일단은 신경 쓰지 말라.

구원의 확신과 성도의 견인의 결합을 우리는 구원파의 구원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실 구원파의 구원론은 이 글에서 필자가 아르뱅주의라고 부르는 것과는 미세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구원파가 구원에 대해서는 아르뱅주의보다 훨씬 더 진지하다는 것이고, 그들은 교리보다는 '모종의 종교적 체험'을 무척 강조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구원파는 기본적으로 내가 나의 구원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신앙과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신앙을 동시에 붙잡고 있다는 점에서 아르뱅주의와 별 차이가 없다.

그 때문에 구원파도 긴장의 제거와 무율법주의라는 특징을 동시에 드러낸다. 구원파에서는 모종의 종교 체험의 순간에, 즉 자신의 죄가 눈처럼 하얗게 씻어지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는 그 어떤 순간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모두 제거되는 것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신자는 바로 그 순간에 단 한 번의 회개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회개하게 된다. 하여 구원파는 한 번 회개한 이후 다시 회개하는 것을 불신앙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그건 아직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했음을 뜻한다고 말한다. 한 번 회개한 죄를 또 회개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그들은 묻는다. 구원파는 한마디로 회개 기도 없는 기독교며, 복음을 살인 면허로 바꿔 버린 기독교다.

문제는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는 아르뱅주의가 내용상으로는 구원파와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오늘날 아르뱅주의에 물든 한국교회는 허황된 약속을 남발하고 있다.

가. 형제/자매님은 구원받았습니다.
나. 하나님께서 형제/자매님의 구원을 영원히 지키실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합쳐서 만든 거짓 복음은 요한이 말한 거짓의 영이고, 적그리스도의 영이다. 요한은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거짓말하는 자가 누군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21)."

요한은 형제(자매) 사랑이라는 열매로 영을 분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유의 가르침은 성서가 일관되게 가르쳐 주는 바다. 침례 요한은 자신에게 침례 받으러 나오는 유대인을 향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눅 3:8)"고 했고, 산상설교에서 예수께서는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0~21)"고 하셨다. 바울은 복음을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롬 8:4)"고 설명했으며,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약 2:17)"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거니와 성서는 기독교 구원과 선한 열매 사이의 그 어떠한 분리도 결코 가르친 바가 없다. 물론 2000년 신학의 역사가 말해 주듯 이 둘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기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죄 용서의 복음과 선한 열매를 맺음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니다. 하지만 금은 반짝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선한 열매를 맺는다 해서 다 진리는 아니다. 하지만 진리는 선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원리에 기초해서 우리는 참영과 거짓 영을 분별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원리에 기초해서 구원의 확신과 성도의 견인을 결합시켜 탐욕의 복음을 만들어 낸 아르뱅주의는 교회를 더럽히고, 신자를 사탄에게 내어주는 거짓 영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대체 언제부터 이런 아르뱅주의가 한국교회에 판을 치게 된 것일까?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인 면허로 만들어 왔던 역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제사와 성전을 살인 면허로 만들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침례 요한은 침례를 범죄 허가증으로 여기는 유대인들을 탄핵했으며, 예수께서는 말만 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 당대 유대인들을 위선자라 책망하셨다. 또 바울과 베드로는 자유를 빙자한 무율법주의자들을 비난했고, 밧모 섬에서 계시를 받은 요한은 '니골라당의 교훈'을 은밀하게 받아들인 버가모교회를 책망했다.

교회사를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그릇된 신학과 전통으로 면죄부 같은 실제 살인 면허를 발급했으며, 본회퍼의 말대로 "대담하게 죄를 지으라"는 루터의 말을 오해한 루터주의자들 역시 복음을 범죄 허가증으로 바꾸어 버렸다. 즉 우리는 인간의 죄악 된 본성이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색욕거리로 바꾸고, 복음을 살인 면허로 바꾸려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기회를 봐서 주인 몰래 밭에 가라지 씨를 뿌리는 기획이라고 말씀하셨다. 옳다! 아르뱅주의는 사탄이 은밀하게 가라지의 씨를 뿌려 맺은 악한 열매요, 죄악 된 인간 본성이 완연하게 그 열매를 맺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이것이 영 분별의 원칙이다.

필자가 추정컨대 아르뱅주의의 씨는 1970년대 이후 미국식 복음주의가 한국에 들어오면서부터 한국교회에 뿌려지기 시작하지 않았나 싶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1970년대는 미국식 신복음주의가 한국에 소개되어 들어오던 때였다. 사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미국식 복음주의에 영향을 받아 생겨났다. 하지만 초기 한국교회의 역사를 보면 신학적으로 칼뱅주의, 그것도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교회가 초기 한국 선교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칼뱅주의가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칼뱅주의 전통은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고 말해 주기 어려운 경향이 있다. 그런데 1970년대를 전후로 빌리 그래함식 복음주의가 한국에 직수입되면서 이러한 전통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때마침 대학 캠퍼스를 중심으로 확산되는 학생 선교 운동 역시 빌리 그래함식 복음주의와 비슷한 가르침을 전해 주기 시작했다. 그건 다름 아닌 '십자가의 복음'의 강조다. 70년대를 전후로 한국에 직수입된 미국식 신복음주의는 구원을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 두고,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자신이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빌리 그래함은 침례교 출신으로 복음 전도에 있어서 다분히 아르미니우스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그가 복음 전도 집회 말미에 '결단의 시간'을 가지고 구원 초청을 할 수 있었던 이유다. 또한 4영리로 대표되는 학생 선교 단체의 복음 전도 역시 '영접 기도'로 마감된다. 이 역시 아르미니우스 신학 체계 내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복음주의의 가르침은 칼뱅주의 전통에서 신앙생활을 해 왔던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칼뱅주의 전통 안에서 자신의 영혼의 구원 문제를 별로 많이 생각을 해 보지 않은 신자들에게 이것은 혁명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신복음주의는 구원에 대한 실제적 체험을 제공해 주었으니 말이다. 이것은 70년대를 전후로 신복음주의가 한국교회에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큰 이유였다.

이후 이러한 형태의 신복음주의는 두 가지 루트로 한국교회에 파고든다. 하나는 수련회, 전도 집회, 찬양 집회, 선교 대회 같은 집회의 형태다. 참석자들은 주로 청소년들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집회에서는 집회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말미에 자주 초청의 시간을 가진다. 그러면서 한국교회는 점차 초청(calling)을 하나의 문화처럼 여기게 된다. 다른 하나는 소위 제자 훈련이라는 형태로 지역 교회 속으로 파고든 것을 들 수 있다. 지역 교회에서는 점차 지성화되고, 계층적으로 중산층으로 변화되고 있는 당시의 교회 고객들을 교회로 모셔 들여서 그들에게 맞는 콘텐츠를 제공해 주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제자 훈련 프로그램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아울러서 이러한 제자 훈련 프로그램은 교회 성장이라는 목회자의 실제적인 필요와도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전부는 아니겠지만, 제자 훈련을 시행했던 다수 교회는 구원의 확신을 매우 비중 있게 가르치곤 했다.

한마디로 1970년대를 전후로 한국에 수입된 미국식 신복음주의는 일종의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범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구원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거나 다루더라도 확신 있는 약속을 해 주지 못했던 칼뱅주의 전통에 신선한 충격을 가하며 빠르게 영향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하지만 앞글에서도 살폈듯이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잘 어울리기 어려운 논리 체계다. 그러나 1970년대를 전후로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사이의 실용적, 편의주의적 조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필자는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근본주의, 혹은 복음주의자들의 고질병, 즉 지성적 태만이 부른 재앙이 아닐까 싶다.

하여튼 1970년대를 전후로 한국 내에 아르미니우스주의식 구원의 확신이 광범위하게 가르쳐지기 시작했는데 이에 대한 충분한 신학적 검토 작업 없이 실용적이고, 편의주의적 차원에서 이를 무분별하게 수입함으로써 한국교회에는 아르뱅주의의 씨가 뿌려지기 시작했다. 아르뱅주의라 해서 기존의 신자들보다 더 도덕적으로 악하다고 할 만한 통계 수치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영화 '밀양'이 잘 보여 주듯 자신의 범죄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함은 아르뱅주의의 공로가 분명하다. 복음으로 자신의 범죄를 합리화하고, 성서로 자신의 죄를 아무렇지도 않은 양 변명하는 후안무치는 아르뱅주의에서 논리적 기초 위에 서 있는 것이다.

필자가 새삼스럽게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에 관한 글을 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지금 이 시점에서 한국교회는 영분별의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사실 꽤 많은 목회자와 신자들이 신학적으로는 자신을 칼뱅주의라 소개하면서 실천적으로는 아르미니우스적 매뉴얼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인다. 물론 그 반대도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교회를 더럽히고, 한국교회 신자들을 사탄에게 내주게 만드는 거짓된 영을 분별하고, 이를 대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목회자와 신학자의, 혹은 기독 지성인의 과업일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전 목사 건으로 촉발된 칼뱅주의 논쟁을 보면서 황당함을 넘어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전 목사는 한국교회의 차세대 지도자로 여겨졌으며, 수많은 신자와 목사 후보생의 멘토 노릇을 해 왔다. 그런 그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성범죄를 자기 교회 신자에게 버젓이 자행했다. 그런데도 그와 삼일교회는 그런 죄에 대해서 전혀 모범이 될 만한 조치를 보여 주지 못했다. 복음은 죄를 지어도 회복될 수 있는 은총의 길이 열려 있다는 것인데 전 목사와 삼일교회는 그 은총의 길을 가기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전 목사나 교회나 상식적인 수준의 조치마저 외면함으로써 한국교회를 소위 '멘붕' 상태로 몰아갔다. 사태의 진상은 충분히 드러나지도 않았고, 가해자의 회개는 턱없이 부족했으며, 피해자에 대한 배려와 회복, 위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저 여론에 밀려 전 목사는 교회를 그만두고, 교회는 어쩔 수 없이 전 목사를 사임시켰다. 그 뒤로도 이어지는 실망의 연속….

그렇게 잠잠해지나 싶었는데 고작 17개월 만에 그가 새로운 교회를 개척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 교회로 신자들이 몰려간다는 것이다. 다시 멘붕이다. 이 시점에서 교계 책임 있는 중진들의 반응이 나올 법도 했다. 물론 소수의 양식 있는 목회자들의 움직임이 포착되기는 했으나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던 중 김동호 목사님이 페이스북에 전 목사의 개척에 대해서 다소 비판적인 발언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페이스북은 칼뱅주의와 예정론 논쟁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이게 무슨 코미딘가?

필자의 판단으로도 김동호 목사님의 칼뱅주의 발언은 다소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사료된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이 그 같은 칼뱅주의 논쟁을 할 시점인가? 진짜로 논쟁이 필요한 사안은 필자가 여기서 아르뱅주의라고 불렀던 그것이 아닌가? 대체 어째서 한국교회를 오염시키고 신자들의 타락을 조장하는 신학적 오류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전 목사의 개척에 대해서 부정적인 발언을 소신 있게 내놓은 김동호 목사님의 한마디 말에 대해 그토록 열띤 논쟁을 벌인단 말인가. 한국교회가 아래로부터 붕괴되어 가는 것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냉정을 지키면서 자신의 신학적 전통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그토록 열정을 불살라도 된단 말인가? 이렇게 불공평하게 열정을 배분해도 되는 것인가?

필자는 이 시점에서 전선을 분명하게 다시 짜자고 제안하는 바이다. 지금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칼뱅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아니다(필자는 차후에 기회가 주어질 때 이 두 신학에 대한 소견을 내놓을 계획이다). 우리의 적은 혈과 육이 아니라 거짓 영과 공중 권세 잡은 자다. 도무지 자신의 범죄 행위에 대해서 부끄러울 줄 모르는 뻔뻔스러움과 버젓함, 그것을 방조하고 조장하는 거짓 영. 이것이 우리가 분별하여 색출하고 탄핵해야 하는 우리의 적이 아닌가.

한국교회여, 거짓의 영, 아르뱅주의를 대적하라!

신광은 / 대전 열음터교회 담임목사·<메가처치 논박> 저자

출처: USA 아멘넷 게시판/기다림 님
 


 

그대 이것을 아시나요?
(제6계명의 위력)


우리의 심령을 피폐하게 만들고 가정생활, 교회생활,
사회생활, 신앙생활을 헤치는 요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제6계명의 위력을 알지 못한 때문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우리 중 얼마나 될까요?

둘러보건대, 안타깝게도 저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이 제6계명을 그들의 삶에 적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기에 걸려 넘어지고 자빠지고...
인간과 인간의 소중한 관계가 금이 가고 깨어지기도 하며

회복할 수 없는 데까지 악화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믿을 수 없지만, 사실이 그러합니다.
소중한 관계성이 깨어지는 것은 큰 사건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뜻밖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사소한 말의 실수 때문에
시험에 들기도 하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내가 받아 아프다고 비명지르며 고통 받기도 합니다.


가장 사랑하고 행복해야 할 가정이 깨어지기도 하고
아름답고 다정하던 이웃과 친지의 관계성이
어이없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면서 놀라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보다 행복한 개인, 가정, 사회생활,
그리고 신앙생활을 성공적으로 잘 가꾸어 나갈 수 있을까?
십계명 중 제6계명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도 한 방법, 
핵심 key word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제6계명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살인하지 말라" 하는 것입니다.
에이, 우리 별님도,
우리가 살인을 어떻게 한다고 그런 말쌈을?
궁금하신가요?

우선, 살인에도 여러 가지
다른 종류가 있음을 우리 함께 잠시만 생각해 보실까요?

필살(筆殺): 조진은 공명에게 필살 된다.(삼국지 중)
글로써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극단적 예가 되겠습니다.

(口殺): 말은 무서운 힘이 있어서 심하면 사람도 죽인다.
입(口)으로 사람을 죽(殺)인다는 뜻이랍니다.

구살(構殺):
허구()의 사실()을 날조하여 죄로 몰아 죽이는 것,
 말
로는 성도라고 하나 마음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을 당하면(시기, 질투)
상대를 적으로 간주, 그에게 위해를 가하기 위해서,
없는 말을 꾸미기도 하고 모함하기도 하는 말을
일삼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많이 안타깝지만 사실인 것을요.

촌철살인(寸鐵殺人):
'한마디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 라는 뜻

말로서 다른 사람을 해하는 것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경계하라는 의미이겠습니다.

禍自口出 이고 病子口入이라
"화는 스스로 입으로부터 나오고
병은 스스로 입으로부터 들어온다" 라는 말이라네요.
말은 무서운 힘이 있어서 자칫하면 사람도 죽이는 것입니다.

작은 입에서 이렇게 무서운 살인을 저지를 수 있으니,
옛날 성현이나 선지식들이 늘 강조하는 것이 입조심이었겠지요.

입으로 나오는 나쁜 말 몇 가지,
악담, 거짓말, 이중 말, 모함하는 말, 그리고 쓸데없는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고 하면,
그 무엇보다도 입조심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  조심하고 나보다 남을 먼저 존경하는 마음,
무엇보다 말을 정말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잘못이 있으면 솔직하게  시인하고 물러설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상대가 내게 잘못 했을 때, 그가 미안하다고 말하면,
용서해 줄 수 있는 cool 한 마음도 지녔으면 좋겠습니다.

오해가 생겼을 때에는 상대가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그대로 믿어 주고 받아주는 넓은 아량마저 갖춘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 것이니까요...^^

오늘날,
성도들의 살인이라고 하는 것은 흉기를 사용한 직접살인,
물리적인 살인을 실행하기는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대개는 구살이 이에 적용되는 살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들이 양심에 따른다는 말을 종종 사용하는데,
사람의 양심이란 것도 이미 병이 든 상태이기에,  
온전한 판단이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삶의 기준, 신앙의 잣대(Canon)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내 마음과 생각을 비추어 보고
날마다 성령의 조명 하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약 3:2)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약 3:6)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느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물을 내겠느뇨." (약 3: 8-11)

바른말, 정직한 판단으로 권고하는 것은 용기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기 위해서 없는 말을 꾸미거나
자기 생각으로 상대의 마음을 저울질해서
함부로 헐뜯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는 말씀하셨지요,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하리라." ( 마 5:26)

글: 별똥별/최송연,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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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남아 있을 것이다(Love will Remain)

    우리가 죽으면 희망과 믿음도 끝이 납니다
    그러나 사랑은 남아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에게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죽을 때, 우리는 사랑 이외에 생명이
    우리에게 준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온 사랑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사랑은 신성한 그리고 파괴할 수 없는
    우리 존재의 핵심입니다

     이 사랑은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대에서 대를 이어가며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이 임박했을 때,
    두고 떠나는 사람들에게 
    "너무 괴로워 하지 마세요
    나의 가슴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에게로 가서 당신을 위로하고 힘을 줄 것입니다" 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이렇게 살게 하소서

     

    나이가 들어 쇠약하여질 때도
    삶을 허무나 후회나 고통으로 생각하지 않게 하시고
    나이가 들면서 찾아오는
    지혜와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을 좋아하게 하소서

    삶을 잔잔하게 하소서
    그러나 폭풍이 몰려와도 쓰러지지 않게 하시고
    고난을 통해 성숙하게 하소서

    건강을 주소서
    그러나 내 삶과 생각이 건강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소서
    질서를 지키고 원칙과 기준이 확실하며
    균형과 조화를 잃지 않도록 하시고
    성공한 사람보다 소중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언제 어디서나 사랑만큼 쉬운 길이 없고
    사랑만큼 아름다운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늘 그 길을 택하게 하소서

     

    (작자 미상)

     

     

     

         

     

    

     

     

     

        느낌표를 잃어버린 사람
        가장 좋고 아름다운 경이로움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잘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가슴 안에 느낌표를 잊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가슴안에 잠들어 있는 느낌표를 깨우십시요. 따스한 햇살 한줌에, 길가에서 우연히 본 아이들의 미소에, TV나 신문에서 본 감동적인 삶의 이야기들에 감동하는 가슴이 되십시요. 이 세상 전부를 얻는다 해도 자신의 영혼에 느낌표가 잠들어 있다면 아무런 행복도 얻을수 없습니다. 소중한 것은 언제나 우리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내 주위에 있는 모든것들에 애정의 숨결을 불어넣어 "아!" 하는 감탄사를 연발할 수 있는 당신이 되기를 바랍니다. - '행복 비타민' 중에서 -

    작은자님 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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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연가(戀歌)
                    최송연

     

    풀냄새가 전해 주는
    싱그러운 향기인 듯

    빗방울이 들려주는
    맑고 청량한 음악인 듯

    당신의 그 사랑
    어느 날 은총으로
    내 영혼 깊숙이 내리셨네

    사랑한다, 내 딸아
    불러주시는 그 음성은

    내 영혼을 살리는 핏빛
    당신의 연가(戀歌)...

    이제부터 영원토록 내가
    부르고 또 부를 사랑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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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죽음을 선물로 만들기
          (Making Our Deaths Gifts)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죽음을 다른 사람을 위해
          주는 선물로 만들 수 있을까요?

          흔히 친척이나 친구의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의 생명이 파괴되기도 하고, 손상을 입기도 하며,
          영구적으로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죽음이 임박했을 때, 직접 말로써,
          혹은 글을 써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우리의 의사를 표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감사함을 표시하고,
          우리의 부족했던 것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며,
          동시에 그들의 부족함에 대하여 그들을 용서하고,

          그리고 그들이 후회함 없이 삶을 살아가되,
          우리 생명의 우아함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우리의 진실된 소망을 표현할 때,
          우리의 죽음은 진정한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정현경교수 성령의 氣,무속 접목한 신학자 

          1997년 유니온신학대학의 종신교수가 된 정현경교수는 1978년 이화여대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을 거친 다음 1981년 도미, 유학길에 올라 유니온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통적으로 내려왔던 학문적 금기를 깨는 논란의 신학자로 정평이 난 정교수는 89년부터 96년까지 7년동안 모교인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신학교수답지 않은 외모와 차림새로 어디서나 화제를 모으는 ‘튀는’ 교수였다.


          97년부터 모교인 유니온의 부름으로 다시 뉴욕으로 돌아간 그가 세계적인 신학자로 부상한 계기는 지난 91년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 WCC 총회 사상 처음으로 1세계 신학자가 아닌 아시아 출신 여성으로 주제강연을 맡았던 정교수는 당시 전 세계 종교계에 충격파를 던지며 총회가 열리는 대회장을 혁명적인 이벤트장으로 변화시켰다.

          “당시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의 김명곤씨와 사물놀이패를 대동하고 호주의 원주민 무용수들, 록뮤지션 들과 함께 아시아여성의 토속적인 영성을 기독교 신학과 접목시키고자 했다. 우리의 고유 개념인 ‘기’와 성령 그리고 우리의 전통제례인 무속의 ‘초혼제’와 기독교의 예배형식을 접목시켜 신학의 장르를 바꿔보려 한것이다.”

          하룻밤새에 세계 각지에서 강연요청이 오는 세계적인 신학자로 자리잡은 그는 이후 ‘아시아의 여성신학과 제3세계 여성의 영성’을 주제로 브라질 원주민동네에서 샌프란시스코 정신과의사들의 모임·더블린의 여성운동가들의 모임으로, 남아프리카 수웨이토빈민촌에서 니카라과 혁명정부로, 인도의 언터처블마을에서 아프리카 케냐의 무당집으로, 필리핀의 창녀촌에서 인도네시아의 난민촌으로, 베이징의 세계여성대회에서 유럽의 많은 대학들로 문자그대로 오대양 육대주를 돌아다니며 종교강연을 하고 있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1101301010538099004

          제6차 WCC총회: 1983 뱅쿠버 (Vancouver, Canada)

          제6차 WCC 총회에서는 개회식 때 카나다 원주민(Red Indian: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종교행사도 곁들였다. 그들의 종교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우상인 토템기둥(totem pole)을 총회장소에 세웠고(JS Malan), 개회식 때 그들의 종교주문도 암송하며, 북과 노래와 춤에 맞추어 그들의 정결의식도 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WCC 총회역사상 최초로 무신론자(theological atheist)를 초청하여 총회에서 멧세지를 전하게 하였다(www.wheaton.edu). WCC의 "종교간 대화프로그램(Interfaith Dialogue Program)의 의장인 뮬더(Dirk Mulder)가 카나다 원주민에 관하여 기자와 인터뷰 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Mulder: "저들이 복음화 되지 않았다고 해서 영원히 버림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자: "그렇다면 불교신자나 힌두교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어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요?"
          Mulder: "그럼은요, 그렇구 말구요! (Sure, sure!)"
          다른 WCC 리더: "저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라고 경고하는가?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하지 못하리라"(고전10:21).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하며 . . . ."(고후6:14-16).

          제7차 WCC총회: 1991 캔버라 (Canberra, Australia)

          호주 캔버라에서 모인 제7차 WCC총회는 그 주제가 "오소서, 성령이여! 모든 창조를 새롭게 하소서!(Come, Holy Spirit - Renew the whole creation)"였는데 이방 종교를 본격적으로 포용하고 연대하는 모습을 드러냈다. 4,000여명의 참가자 가운데는 이방 종교대표자들, 점술가, 심령술사, 마술사, 무당 등 세계 15개 종교 대표자들이 초청받았으며 그 총회는 대규모 종교혼합 집회였다. 개회식에 호주 원주민의 전통종교의식을 행하였다. 호주 원주민 마법사들(Witchdoctors)이 젖은 고무나무 잎새를 태우면서 짙은 검은 연기를 하늘로 올리고 참가자들은 조상들의 영들로부터 축복받기 위하여 그 연기 사이로 걸으라고 요청받기도 했다(JS Malan). 한국의 신학자 정현경교수(teaches at 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New York)는 주제 강연에서 흰 치마 저고리를 입고 창호지에 쓴 초혼문을 가지고 나와서 낭독하며 죽은 영혼들을 불러내고 아래와 같이 기원하였다.

          "오소서, 우리들의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에 의하여 이용당하고 버림받은 이집트 여인 하갈의 영이여. . . 다윗 왕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우리야의 영이여 오소서 . . . . 나치에 죽음 당한 영이여, 2차 대전 중 창녀로 끌려간 한국 여인의 영이여, 십자가의 고통으로 죽은 우리의 형제 예수의 영이여 오소서 . . ." 라고 읽고난 다음 그 종이를 불에 태워 공중에 날렸다.


          정현경
          은 그 신분으로 볼 때 WCC에서 신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중에 속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분노를 일르키는 방향으로 WCC의 영계를 현저하게 이끌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영혼을 불러내는 초혼자(one who invokes spirits of the dead)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행위"이며, 그같이 행하는 자는 살려둘 자가 아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신18:9-11).

          "너는 무당을 살려두지 말지니라"(출22:18).

          1993년 11월 미국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서 모인 WCC 컨퍼런스에서 정현경은 성령(the Holy Spirit)을 고대 아시아의 신들(ancient Asian deities)과 동일시 하였으며, 2000여명의 여성 청중들에게 "나의 내장(bowel)은 불교의 내장이요, 나의 심장(heart)도 불교도의 심장이며, 나의 오른쪽 두뇌(brain)는 유교도의 두뇌이고, 나의 왼쪽 두뇌는 크리스챤의 두뇌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여성 청중들에게 만일 에너지가 필요하다면 나무에게 가서 기도하라고 하였다. "우리가 프라닉 치료(pranic healing: 생명 에너지로 마음과 몸을 치료한다는 사상)를 할 때, 우리는 생명 에너지가 태양이나, 바다나, 땅이나, 나무 등에 임재하는 신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형제 자매들이 필요로 할 때 그 생명 에너지를 허락해 달라고 신에게 기도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심히 피곤하여 지친다면, 큰 나무 밑에 가서 '생명 에너지를 나에게 주소서'라고 그 나무에게 기도하면 됩니다" 라고 하였다. 그녀는 또 "성경은 원래 개방된 책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글을 성경에 추가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AFA Journal, Feb. 1994)

          정현경은 1998년,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열린 제8차 WCC총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요한복음 14:6의 내용으로 "그리스도가 천국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가?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녀는 대답하기를 "예수님이 실수한 것입니다(Jesus was mistaken)"라고 대답하였다(Ralph G. Colas). 이러한 사건들은 오늘날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현장들 이다.


          출처: 내사랑중국/익명회원

          큐티 Quite Time 이라는 용어는 이전에 없던 것인데 “영성운동” 이라는 이름으로
          1970년을 전후하여 등장한 새로운 훈련입니다.

          고요한 시간에 혼자서 조용히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보다는 늘 성경을 읽고 그 말씀대로 실천해 나가는 일이 더욱 중요하겠지요. 책방에 가면 QT를 장려하는 책들, QT 성경구절 책들이 줄비하지만 그 보다는 기독교 교리에 관한 책들 이를테면 Heidelberg Catechism 이나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을 읽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고 본인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기독교가 타락하는 이유, 이단들이 생겨나는 주요한 이유는 성도들이 기독교 기본 교리에 너무 무식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의 문제는 무슨 무슨 영성운동이니 영적각성운동이니 하여 Tres Dias 니 Alpha Course 니 G12 니 옛날에는 들어보지 못하던 이상한 운동이 교회를 침투하지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이런 운동을 주관하는 목사들은 자기 교회 교인들이 영적으로 성숙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권장하겠지만 혼자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제멋대로 해석하여 생활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바로 해석하여 실생활에 적용할 일이 급선무인데 실제에 있어서는 성경 해석의 원칙에 익숙치 못한 일반 성도들이 성경을 QT 를 한다면서 성경구절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실생활에 잘못 적용하고 심지어는 다른 교리를 따라가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이단들은 성경 해석의 원칙 즉 Grammatico-Historical-Theological Interpretation의 원칙을 무시하고 Biblical Theological Method 나 Perspectivalism 에 빠져서 성경을 해석하는데서 기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QT 보다는 성경을 체게적으로 공부하는 교리 공부가 좋은데 그런 공부는 역사적 신앙고백서 (1560년의 Scots Confession, 1561년의 Belgic Confession, 1563년의 Heidelberg Catechism, 1599년의 프랑스 Huguenot 성도들의 French Confession, 1619 년의 Canons of  Dordt, 1647년의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및 그 대소 요리문답, 1996년의 Cambridge Declaration (켐부릿지 선언) 등과 같은 역사적 신앙고백서를 공부시키는 일이 훨씬 권장할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QT 는 잘못하며 성경을 읽지 않고 명상만 하면 이는 가장 위험한 일이고 (성경이 없는 명상은 있을 수 없으며 곧 사탄을 불러 옵니다. 묵상에는 반드시 성경말씀의 봉독이 있어야 함), 성경을 읽고 묵상한다고 해도 가령 예를 들어 마태복음 7장 1절 말씀 같은 것을 오해하여 어떤 이단 사설도 용납하고 남의 비판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으면 이는 가장 비성경 적인 일이 됩니다. 지금 인터넷에 글을 올린 사람들중에서 QT 을 권장하는 사람들은 누가복음을 7:1을 잘 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QT 를 바로 하려면 개혁주의 목사님 밑에서 성경의 교리를 바로 배우면서 올바른 교리에 근거하여 방금 읽고 묵상한 말씀을 생활에 적용하여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행동철학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요컨대 우리 모든 성직자들은 이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때에 양떼들을 바로 인도할 막중한 책임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QT 가 없는 한국교회가 거의 없습니다만 한국에는 유달리 새로운 신앙형태가 늘 새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개혁주의를 신실히 믿는 미국의 교단에는 QT 가 없습니다. 개혁주의들 믿는 교회 성도들은 매일 항상 성경을 읽으면서 교리 공부에 중점을 둡니다. 교리를 확실히 알고 그대로 실생활에서 그 교리대로 살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이것이 청교도들의 생활양식이었고 저 자신도 오늘까지 그렇게 목회해 왔습니다.  QT 에는 성도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지금 블로그에서 얼마나 많은 사역자들이 QT 을 장려하면서 예로 누가 복음 7:1을 들면서 남이 아무리 잘못해도 (교리 잘못을 포함해서) 용서 해주자고 말합니까? 이는 오늘 Postmodernism 시대에 풍미하고 있는 “Rapprochment (라프로쉬망)” 사상으로 성경적으로 용납되지 않습니다.  모두 다 덮어주고 용서하면 십자가의 군병으로 “전투적교회 Church Militant" 의 구성원인 우리들의 싸울 대상은 무엇입니까? 저와 동기 동창으로 지금 대학교를 운영하는 Robert Morey 박사의 책 “When Is It Right to Fight?“ 라는 책 (P&R 1980) 을 읽어 보십시오.

          목회자들은 목사 안수를 받을 때, 목자장 되시는 주님으로부터 양떼를 바른 말씀으로 양육할 사명과 의무와 책임을 받은 종으로 하나님과 성스러운 계약을 맺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직자들의 책임이 막중합니다. 항상 하나님에게 계산할 때가 온다는 심정으로 목회해야 합니다. 만일 실수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면 하나님과의 계약을 위약한 것이니 하나님에게 심한 문책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1:8-9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고 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원어는 헬라어인데, 헬라어에는 “다른” 이란 말이 두 개 있습니다. <동질적인 것>으로 다른 것을 말할 때는 “allellos" 란 단어를 쓰는 반면, <이질적인 것>으로 다른 것을 말할 때는 전혀 다른 헬라어 인 “heteros" 를 씁니다. 본문 갈라디아 1:8-9 에서는 ”to heteron euangelion" 이니 <이질적 복음> 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질이 다른”, 즉 “주님이 말씀 하시지 않으신” 또 <주님이 명령하지 아니한,  전혀 다른 복음> 이라는 말이고 그런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농담이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가감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저주를 받는다“란 말은 헬라어에서 ”anathema" 인데 두 단어 즉 “ana 위에” 와 “tithemi 놓이다“ 의 합성어 (compound word)입니다. 이 말은 <위에 (하나님에게) 바쳐졌다, 하나님의 심판대에 놓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심판해서 잘못이 들어나면 다시 소생할 기회가 없이 지옥으로 멸망한다> 라는 뜻입니다. 이는 무서운 말로 그냥 지나칠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옛날 Scotland 의 목사님들은 잔인하고 악독한 Charles II 와 싸우면서 이 말씀을 목숨보다 중요시 하여 성경대로 살다가  Edinburgh 시내, 지금의 Scottish Reformation Society 건물 바로 앞에 있는 Grass Market에서 1638년 120여명의 Covenanters (언약파) 들이  모두 목에 밧줄을 받고 교수형으로 순교한 것입니다.

          주의 종들은 죽음이 와도 바른 신앙을 지키며 양떼들을 바른 믿음으로 인도할 막중한 책임이 있는데  후에 주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를 문책할 때가 온다는 사실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상과 같이 답변 드립니다. 감사 합니다.

          김명도 교수
          튤립 교육 선교회
          튤립 신학 연구원
          칼빈 신학교 대학원
          1/7/09

          http://blog.daum.net/kkho1105/565

          USA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JuNick님

          배교자 빌리 그래함의 어제와 오늘

           

          <박재권 / 캐나다 주재 기자>

           

           

           

          ▲ 빌리 그래함은 한때 수많은 집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지만 결국 배교의 길로 들어섰다.

           

          성경은 유명하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후한 점수를 주시지 않는다. 사도 바울 역시도 당시 교계에 잘 알려진 사람들의 그 유명세에 대해서 이처럼 냉소적인 말로 그들에 대한 칭송을 일축하고 만다.

           

          “무언가 되는 것같이 보이는 그 사람들 가운데 (그들이 전에 어떤 사람이었든지 내게는 아무 상관도 없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받아들이지 아니하시며) 무언가 되는 것같이 보이는 그 사람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조언으로 더해 준 것이 없느니라”(갈 2:6)

           

          이 세상 사람들도 어떠한 연유로든 유명한 사람들의 실제적인 내면을 대하게 되면 그 사람에 대한 환상은 여지없이 깨지고 만다. 그렇듯이 유명한 하나님의 사람이 언제부터인가 그 유명세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면서 그 입에서 비성경적인 가르침이 튀어나오기 시작한다면 참으로 황당할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인물이 현 교회시대에 존재하고 있는데 그가 바로 교계에 유명한 사람으로 잘 알려진 미국 목사 빌리 그래함이다.

           

          오늘날 유명한 복음전도자를 꼽으라 하면 주저하지 않고 빌리 그래함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민망하게도 그에 대한 평가는 과거에서 멈추어야 하고, 그 과거도 유심히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철저하게 양다리를 걸치고 살다가 말년에는 대놓고 범신론자임을 드러내고 말았고, 그로 인해 많은 순진한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으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실망시키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드러난 배교로 인해 오히려 그의 가면을 제대로 보게 되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빌리 그래함 그는 한때 수많은 집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 미국은 물론이요 전 세계적인 굵직굵직한 집회들을 인도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고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가는 곳마다 칭송이 자자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는가? 그는 배교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여기에서 배교란 간단히 말해서 “확고한 기존의 입장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의 배교에 대한 증거는 무척이나 많아서 일일이 셀 수도 없는 지경이다. 그는 배교의 길로 들어서기 전 구원받는 방법을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복된 자들이여 하늘나라 가는 길은 오직 하나이며, 다른 길은 없으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이렇게 외쳤던 그는 배교의 길로 들어서면서 구원받는 방법을 다르게 말하기 시작했는데 “성경에는 이해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어서 꼭 문자적으로 믿을 필요는 없다.”고 했고,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일점일획을 다 믿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실토하기도 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성경은 “상징적”이라는 입장으로 바뀌었고,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무오하다는 사실을 믿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계에서 교황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는 두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현재 파산신청을 한 수정교회 담임 목사였던 로버트 슐러와 빌리 그래함이다. 로버트 슐러는 수정교회를 짓기 전에 복을 빌어 달라고 교황청을 방문했다. (그가 교황을 방문해서 받은 복이 어떤 복이었기에 지금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빌리 그래함은 교황청을 방문해 그를 현 시대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고 극존칭을 붙이고 칭송해 마지않았고,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나 그리스도인들이 전하는 복음이나 같은 복음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이 두 사람은 교황을 떠받들고 선전함으로 자신들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을 완전히 혼란스럽게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 두 사람이 짜고 벌인 쇼의 압권은 1997년 5월 31일 TV프로그램 “능력의 시간”에 “긍정적 사고에 ‘예’ 하고 말하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는데 참으로 가관이 아니었다. 먼저 로버트 슐러가 거창한 가운을 입고 거드름을 피우며 “목사님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기독교의 미래는 어떠할까요?”라고 빌리 그래함에게 질문을 한다. 그때 그의 답변은 배교자, 또는 범신론자로서 거침이 없었다. “글쎄요, 당신이 알다시피, 기독교의 참된 신자가 되는 것에는, 내 생각에 전 세계적인 모든 크리스천 집단으로부터 오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있겠고, 혹은 크리스천 집단 밖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그리스도의 지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거나 그리스도를 아는 각 개인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그분의 이름을 위해서 전 세계에서 백성들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슬람세계에서 온 백성이든, 불교 세계에서 온 백성이든, 기독교 세계에서 온 백성이든, 아니면 믿지 않는 세계에서 온 백성이든 간에 그들 모두는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지체의 일원인 겁니다. 그들은 비록 예수의 이름을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지 않은 그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그들의 심령 안에서 알고 있으며 그들이 갖고 있는 유일한 빛으로 그들이 돌이킬 것이라는 사실도 그들은 그들 심령 안에서 알고 있습니다. 난 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며 천국에서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거침없이 반성경적 사설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로버트 슐러 목사는 “당신이 말한 바에 따르면 어둠 가운데 태어나서 성경 말씀을 한 번도 접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과 혼과 생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거군요. 제가 당신의 말한 바를 제대로 해석한 것인가요?”라고 거들었다. 그의 질문에 빌리 그래함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예, 맞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라고 했다. 이 말은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부를 쌓은 로버트 슐러 목사에게는 그야말로 긍정적인 해답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감격해 마지않는다. “목사님 이건 놀라운 말이군요. 당신의 말을 들으니 정말 전율이 느껴지네요. 하나님의 자비의 광대함이 있다는 말이군요.” “그럼요. 있습니다. 있고 말구요.”

           

          참으로 역겨운 삼류 쇼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지 않는가? 우리가 잘 알기로 사탄의 주요 목적은 교회 안에 항상 마귀적인 교리들을 퍼뜨려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이다. 사탄은 거짓 선지자, 거짓 교사, 거짓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가장 활발히 일을 하며 사람들을 멸망 길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지상에서 가장 사악하고 교활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인 체하는 거짓말쟁이들인 것이다. 이들은 배교했으면서도 겉으로는 거룩한 척 가장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한다. 빌리가 배교의 길로 들어선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그것은 “킹제임스성경”을 버리고 “리빙바이블”과 “NIV”을 추천할 때부터였으며,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도록 “파킨슨씨병”으로 치신 다음에도 그는 여전히 이 가짜 성경을 추천하고 만용을 부리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한 장면이 생각나지 않는가?

           

          “자신들의 고통과 헌데로 인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모독하되 자기들의 행위는 회개치 아니하더라”(계 16:11)





              흔히 우리는 죽음이 어떻게 우리에게
              찾아올 것인가를 알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병 들어서 죽게 될 것인지,
              사고로 죽을 것인지, 전쟁에서 죽을 것인지,
              또는 자연의 재앙 때문에 죽을 것인지
              궁금해 합니다
              우리는 또한 갑자기 죽게 될 것인지,
              아니면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될 것인지를
              궁금해 합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문제를 걱정하면서
              시간을 보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이 어떻게 끝날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모르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을 때 살아 남은 사람들이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고 죽을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수치감이나 죄책감에 빠지게 하고
              죽을 것인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어떠한 상태에 두고
              죽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우리가
              우리의 죽음을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도 감사하고
              가족들에게도 감사하며,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으면,
              우리의 죽음은 다른 사람을 위한
              생명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내 삶에 휴식을 주는 이야기 사랑은 자신에게 무엇이 남아서 주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나누는 마음에서 생겨 납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편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영혼의 순수함에서 시작됩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오히려 주는 것에 더욱 인색한 세상입니다. 하나를 가지면 다른 하나를 더 가지고 싶고 그 하나를 더 가지면 또 다른 하나를 더 가지고 싶은 사람의 헛된 욕망 고장난 세상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뿐이라고 나는 굳게 믿습니다. 우리 시대를 못 믿게 될수록, 인간이 일그러지고 메말랐다는 생각이 들수록, 나는 그러한 비극을 극복하는데 그만큼 더 사랑의 마력을 믿는다는 헤르만 헤세의 말을 하나의 신앙처럼 믿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아직 사랑이 살아 숨쉬고 있기에 그래도 살아 볼 만한 곳이라고... - 좋은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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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기도 - 최송연 
             
            
            밤이 늦도록 당신 곁에서
            하늘 노래를 들을 순 없겠나요
            
            힘들고 지친 내 영혼
            찾아갈 곳 없을 때면
            당신 발 앞에 엎드립니다
            
            세상의 무거운 짐
            당신께서 모두 짊어지셨거늘...
            
            이 멍에를 내려놓지 못해
            날마다 
            고통하며 고뇌하며
            
            삶의 한숨
            사랑...
            아픔
            기쁨조차도
            모두 당신께 바치오니...
            
            때때로 솟아나는 의심의 안개
            올올이 거두어 내시고 
            당신 안에서
            온전한 쉼을 누릴 수 있게 하소서


             

            은혜로운 찬양 준비해 주신 윤기님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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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죽기 위하여 기도하기(Praing to Die Well)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아.
            그렇지만 죽어 가는 과정은 두려워"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흔히 병들며, 고통을 당하며,
            남에게 의지하며, 그리고 외로움을
            의미하게 때문입니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부끄러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두려움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두려움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두려움에 빠져 들었습니다
            고뇌 속에서 예수님이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
            땅에 떨어졌습니다" (누가복음 22:44)

            죽는 것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예수님이 하신 것과 같이 우리는 새 생명에 이르는
            통로를 만들어 내는 특별한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예수님께 천사를 보내신 것과 같이
            우리를 위로하기 위하여 천사를 보내실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게 될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있다.

              꽃이 아무리 길어봐야 열흘이면 시 든다는 말이다.

              권력이 제아무리 길어봤자 10년을 견디지 못한다는

              권불십년( 權不十年)과 어울려 자주 오르내린다.

               

              화무십일홍이 반드시 정치권력에만

              해당하는 되는 것은 아니다.

              수십년 동안 1위를 지키는 기업이나

              제품 브랜드가 경쟁사의 도전,

              시장 트렌드를 놓치면서 1위 자리를 뺏기거나

              흔들리는 일이 빈번하다.

              하이트 맥주와 OB의 경우가 대표적 사례다.

              최근 우리 주변에서도

              포장두부와 MP3, 생리대 등

              시장에서 영원히 1위를 할 것 같은 제품들이

              대기업의 시장 참 여와 외국산의 침투 등에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일을 볼 수 있다.

              과거에는 라이 벌 기업이 아니었지만

              새로운 라이벌로 등장하는 시장도 있다.

              2005년은 한국 드링크류 시장에서

              변화의 해로 지목받을 가능성이 높다.

              비타5 00이 박카스의 40년 아성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박카스는 1963 년 시장에 첫 선을 보인 후,

              이듬해인 64년부터 41년 동안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준 적이 없는

              장수 브랜드. 박카스 단일제품으로

              한 해 매출액만 2000억원을 넘긴 적도 있었다.

               

              그 동안 영진구론산바몬드,

              영비천 등 수많은 드링크제품이 잇따라 도전했지만

              끝내 추월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박카스 불패신화를 비타500이

              단 4년 만에 깨버리는 이변을 연출한 채비다.

              비타500의 성공은 마시는 비타민 음료라는

              틈새시장 개척과 유통 채널의 다양 화에 있다.

              지난 2000년 비타민C 원료가 뜨면서

              광동제약은 마시는 비타민 음료를 개발했다.

              이 제품은 젊은 층을 의식한 맛과 광고로

              순식간에 젊은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여기에 유통채널 다양화도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박카스는 일반의약품이라

              약국에서만 판매 가능하지만 비타500은

              약국, 편의점, 자판기 등 판매경로가 다양하다.

              또한 박카스는 광고 등 마케팅 수단이 제한,

              제품보다는 공익 광고에 치중해왔다.

              이에 비해 비타500은 마케팅 수단이 자유 롭다.

              이러한 요인들이 겹치면서 박카스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매출액을 비교하더 라도 격차는 해마다 줄어들었다

              실제로 박카스 매출은 2002년 2158억원, 2003 년 1830억원,

              지난해 1672억원으로 줄어드는데 비해

              비타500은 같은 기간 각각 98억원,

              280억원, 854억원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올해 목표는 1650억원. 이대로 가면 역전도 노려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동아제약은

              지난해 타우린 함량을 2배 늘린 박카스D를 내놨지만

              시장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 했다.


              하지만 단정은 아직 무리다.

              8월 8일 내놓은 카페인이 없는

              신제품 박카스디카 페가 얼만큼

              선전할 수 있느냐 하는 변수가 남았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올해가 지나야

              완전히 판가름 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유대선 광동제약 홍보팀 차장은

              “공시자료를 보면 4월 월 매출액에서

              역전에 성공한 이후 현재까지

              박카스를 앞서고 있다”고 말했다.

               

              출처 : 매경이코노미 2005-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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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충만 받은 사람의 17가지 변화

                           

                          1. 나쁜 버릇이 고쳐집니다.
                          2. 자기를 조정할 줄 압니다.
                          3. 창조적 생각을 갖습니다.
                          4. 영적 가치를 소중히 여깁니다.
                          5. 화평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6. 문제를 해답으로 바꾸는 사람이 됩니다.
                          7. 영적 설득력이 생깁니다.
                          8. 반대 의견도 수용할 수 있습니다.
                          9. 믿음의 삶에 동반자들이 생깁니다.
                          10. 하나님이 섭리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노력합니다.
                          11. 주위 사람들에게 평안을 줍니다.
                          12. 이웃에게 진정으로 관심을 갖게 됩니다.
                          13. 자기의 모든 재능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사용됩니다.
                          14. 강력한 끈기가 생깁니다.
                          15. 마음에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16. 모든 면에 믿음을 근거로 한 낙관주의자가 됩니다.
                          17. 남을 위하여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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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이 정도면  (0) 2012.07.27


                            비어 있는 것과 꽉 차 있는 것
                            (Emptiness and Fullness)

                             

                            비어 있는 것과 꽉 차 있는 것은

                            처음 보기에는 정반대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마음을 비움으로써 우리의 커다란 욕망을 채우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충만함을 받기 위하여

                            우리의 생명의 잔을 완전히 비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생명의 잔을

                            완전히 비우셨습니다
                            완전히 비어 있는 순간과

                            완전히 꽉 차 있는 순간은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에게 맡기셨을 때,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올려진 예수님은

                            또한 부활하셔서 승천하셨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낮춘 예수님은 들어올려져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을 받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7~9 참조)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겠느냐?" 고 하신

                            예수님의 물음을 끊임없이 듣도록 하십시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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