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도시 네덜란드의 유명한 관광코스 히트호른 수로로 이어진 동화속 분위기가
풍기는 Overijssel 에 Giethoorn 마을의 풍경들. 겨울에는 수로가 얼어붙으면서
자연스럽게 스케이트를 즐기는 놀이시설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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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유쾌한 발견, 캐나다 밴쿠버

세련된 도시미와 광활한 대자연의 완벽한 조화, 밴쿠버(Vancouver).
오랜 세월 이 지역을 터전으로 삼아온 이들은 코스트 살리시(Coast Salish) 사람들로, 자연을 존중하는 이들의 전통 위에 다양한 민족의 문화가 어우러져 밴쿠버는 특유의 아름다운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매력은 예술과 음식, 도시 경관 등에 촘촘히 스며들어 여행하는 이의 마음을 곳곳에서 풍요롭게 하고, 태평양의 푸른 바다와 병풍처럼 드리워진 코스트 마운틴은 휴양의 여유로움까지 선사한다. 상상하는 모든 것이 현실이 되는 곳,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의 밴쿠버로 떠나보자.


	밴쿠버 전경 / 클리프 위크
(좌부터) 밴쿠버 전경 / 클리프 위크
축복받은 자연환경, 밴쿠버

1792년 조지 밴쿠버 선장은 밴쿠버의 해안인 버라드 만(Burrard Inlet)을 탐험 후 ‘수없이 많은 유쾌한 풍경’이라고 기록했다.

밴쿠버는 브리티시컬럼비아(British Columbia)에 속한다. 캐나다에서 유일하게 태평양과 접해 있는 브리티시컬럼비아는 장엄한 산과 울창한 숲, 맑은 호수와 아름다운 태평양 해안 그리고 만년설 등 대자연의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이러한 천혜의 자연을 배경으로 550개의 국립• 주립공원과 골프, 스키, 하이킹, 인라인스케이팅, 캠핑 등의 다양한 즐길 거리가 가득하다.

주의 남서부 끝자락에 위치한 밴쿠버는 주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캐나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다. 삼면이 수계에 접해 있으며, 도시의 북쪽 버라드 만이 밴쿠버를 노스 밴쿠버(North Vancouver)와 웨스트 밴쿠버(West Vancouver)로 나눈다. 서쪽 경계에는 태평양의 조지아 해협(Strait of Georgia)이 있고, 남쪽으로는 프레이저 강이 밴쿠버를 더 작은 위성 지역들로 나눈다. 1천500여 미터 높이의 코스트 산맥은 도시에 웅장한 멋을 더한다.


	스탠리 공원 마차 / 밴쿠버 아트갤러리
(좌부터) 스탠리 공원 마차 / 밴쿠버 아트갤러리
밴쿠버, 이렇게 즐겨라

스탠리 공원을 선회하는 방파제를 따라 산책을 해보자. 자전거를 타도 좋다. 너무 빨리 가다가 도중에 해녀상을 지나치지는 말자. 공원 내의 멜킨볼에서는 별빛 아래에서 멋진 라이브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밴쿠버 아쿠아리움에서 이 지역 해양 생물과 인사하자. 흰돌고래 벨루가를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다. 그라우스 산으로 가는 스카이 라이드를 타고 야간 스키도 즐겨보고, 다운타운의 잉글리시 베이에서 윈드서핑을 배워보자.

휴식이 필요하다면 밴쿠버 아트갤러리의 테라스에서 유기농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자. 단, 미술관에서 캐나다가 자랑하는 화가 에밀리 카의 영구 컬렉션 감상은 놓치지 말자. 수상 버스를 타고 예술가들의 스튜디오를 가봐도 좋다. 밴쿠버 인류학박물관은 실물 크기로 재현한 원주민들의 토템 10가지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랜빌 아일랜드
그랜빌 아일랜드
허기가 진다면 키칠라노 또는 커머셜 드라이브로 가자. 국수, 초밥, 이탈리아 요리 등 다양한 요리를 만날 수 있다. 수제 치즈, 오리 기름으로 튀긴 프렌치 프라이를 맛보고 싶다면 그랜빌 아일랜드 마켓이 제격이다. 세련미가 넘쳐나는 예일타운에는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유명 레스토랑도 있다. 패션에 관심이 있다면 메인 거리의 부티크에서 현지 디자이너의 독특한 패션 상품도 감상해보자.

밴쿠버 명소 자세히 들여다보기, 밴쿠버 BEST 7!


	스탠리 공원 전경
스탠리 공원 전경
1. 스탠리 공원
울창한 숲과 해안을 따라 산책로와 자전거 길이 마련되어 있고 수족관, 미니어처 철도, 토템폴 공원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캐나다에서 가장 긴 1천500미터의 라이온스 게이트 다리(Lion’s Gate Bridge)가 공원 북쪽 끝에서 노스 밴쿠버 쪽으로 이어진다. 10킬로미터가량 되는 해안도로(Sea wall)를 따라 자전거나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다니는 것이 스탠리 공원을 두루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공원 진입 전 덴먼 스트리트(Denman Street)에는 자전거와 인라인 스케이트 대여점이 많다.

2. 그랜빌 아일랜드
다운타운 남쪽의 그랜빌 다리 아래에 있는 섬 아닌 섬(실제로는 반도와 연결 돼 있다). 1970년대까지 지저분한 공장지대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깔끔하게 정비된 매력적인 상업지구다. 마켓, 소규모 갤러리와 공방, 아트 클럽 극장, 에밀리카 미술대학교, 맥주 양조장, 어린이를 위한 공원과 마켓 등 볼거리, 즐길거리가 가득하다. 독특한 수공예품이나 정원용품, 아트 상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꼭 들러볼 명소. 관광 안내소에서 무료 지도도 챙기도록 하자.

3. 잉글리시 베이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애완견과 산책하는 사람, 잔디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로 평화로운 오후의 풍경을 이루는 곳. 아이스크림과 음료를 판매하는 잉글리시 베이 비치 카페 뒤편으로 줄지어 늘어선 야자수들이 이채롭다. 캐나다에도 야자수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카약 렌털 숍에서는 카약 강습도 진행한다.


	밴쿠버-그라우스 그라인드
밴쿠버-그라우스 그라인드
4. 그라우스 마운틴
15분에 한 대씩 운행하는 스카이라이드 곤돌라를 타고 정상에 오르면 밴쿠버 시내와 태평양까지 광대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사계절 언제나 신나는 레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한 곳. 여름에는 헬리콥터 투어와 하이킹, 겨울에는 스키와 스노보드를 즐길 수 있다. 귀여운 그리즐리 곰 세 마리가 살고 있고, 정상에는 미국 워싱턴 주의 올림픽 산까지 보이는 멋진 레스토랑과 풍차 전망대, 카페, 숍 등 편의시설도 있다. 캐필라노 서스펜션 브리지에서 자동차로 5분거리.


	캐필라노 서스펜션 브리지
캐필라노 서스펜션 브리지
5. 캐필라노 서스펜션 브리지
스탠리 공원에서 라이온스 게이트 다리를 건너 노스 밴쿠버 쪽으로 가면 울창한 숲과 계곡이 펼쳐지고,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110년 전에 만든 높이 70미터, 길이 140미터의 구름다리, 캐필라노 서스펜션 브리지 (Capilano Suspension Bridge)가 나온다. 아찔한 계곡에 매달린 아슬아슬한 다리를 중심으로 오리지널 캐나다 상품을 판매하는 기념품 가게, 아담한 정원 원주민 문화센터 등이 조성돼 있다. 특히 최근에 오픈한 클리프 워크는 캐필라노 절벽을 따라 지어진 좁은 산책로로 아찔한 체험을 제공한다.


	개스타운
개스타운
6. 개스타운
밴쿠버의 발상지. 개스타운이라는 지명을 있게 한 존 데이튼 (John Deighton)의 동상과 15분에 한번씩 증기를 내뿜는 귀여운 시계가 이곳의 명물이다.



	캐나다 플레이스
캐나다 플레이스
7. 캐나다 플레이스
날아갈 듯한 다섯 개의 흰 돛을 달고 바다 위에 떠 있는 호화 유람선형상의 복합시설. 1986년 엑스포 당시 세워져 캐나다관으로 사용했던 곳이다. 세계 무역센터, 컨벤션 센터, 팬퍼시픽 호텔, 아이맥스 영화관, 푸드코트 등이 들어서 있다. 건물 주위로 먼진 산책로가 조성돼 있고, 알래스카 크루즈가 출발하는 터미널도 있다.


 

 

 그리스 중북부 메테오라 메테오른 수도원.. 

 

메테오라는 '공중에 떠 있는 수도원' 이라는 뜻으로,

바다속의 기암군이 형성되어 만들어진 지역이다.

11세기 이후로 중세의 수도사들은일반인이 쉽게 접근할수 없는

깎아지른 듯 솟아 있는 이곳 메테오라의 바위산 정상에 터를 잡았다.

 

그들은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15세기에 은둔의 극치를 보여주며

고립된 암벽위에 24개나 되는 수도원을 세웠다.

속세와의 차단을 위해물자 보급과 사람들의 출입은

도르레를 이용해 끌어 올리는 방법 뿐이었다..

 

메테오라의 고립된 수도원들은 그리스 정교가 중세의

오트만 투르크의 그리스 점령(1453-1829)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종교적 전통과헬레니즘 문화를 살아 있게 한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이곳의 16세기 프레스코화들은  비잔틴 후기 회화의

발전상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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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설교의 형식

 

설교자는 설교를 듣는 신도들을 감동시켜 생활영역 전체에 영향을 주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분명코 이 모든 원리를 밝히 드러내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고대역사나 고대문명 또는 그와 유사한 어떤 것에 대한 강좌를 하는 골동품 연구가가 아닙니다. 설교자는 오늘날 생존하여 생의 문제에 직면한 신도들에게 대해 무언가를 말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들에게 사활을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이며, 사람들이 그들의 모든 존재를 걸고 들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메시지가 그들이 사는 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98p) 

 

제5장 설교행위

 

설교를 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점들이 있습니다.

첫째, 설교자의 전인적 품격(Whole Personality)이 반드시 수반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강조하려는 두 번째 요소는, 권위로서 청중을 압도하고 진행해 나가는 지각력(知覺力)입니다. 설교자는 결코 변명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설교자는 마치 회중들의 양해를 얻어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추측이나 생각을 실험삼아 말하는 것이 되어도 안됩니다. 그것은 정말로 설교자가 취할 자세가 아닙니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확실한 일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명을 띠고 권위로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언제나 자기는 보냄받은 사자(使者)로서 회중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이것은 자기 확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설교자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입니다.....(108p)

내가 중요성을 부여하고 싶은 또 다른 요소는 설교자가 말하는 동안 어느 의미에서는 회중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끌어내고 있어야 합니다. 회중 가운데는 영적인 사람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그 기회에 어떤

공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설교에는 상호 교환의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이 점은 수필과 강좌가 설교와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길입니다. 자기의 수필을 낭독하는 사람은 자기의 청중들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 사람 앞에 있는 것은 쓰여진 것이 전부입니다. 거기에는 새롭거나 창조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어떤 주고받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설교자가-비록 아주 조심스럽게 준비를 하였다 할지라도-

이 영적 자유의 요소 때문에 아직 회중으로부터 어떤 것을 받을 수 있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상호작용과 행동, 반응이 있게 되고, 종종 이것은 아주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기도 합니다.....(109p)

 

비록 여러분이 설교를 아주 조심스럽고 철저하게 준비했다할지라도 그것을 가지고 강단에 서서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는 무엇이 일어날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은 발생한 것에 자기도 모르게 놀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요소들이 가입할 수도, 앞뒤 없는 얘기일 수도, 불완전한 문장일 수도 있습니다. 학자연(學者然)하는 자들이 비웃는 것들이 많을 수도 있고 문학 평론가들이 평론에서 신랄하게 비평할 것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점은 설교를 전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설교한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가 심중에 그 점을 간직하고 있고 다른 요소들에게 너무 과도한 의미를 부가하지 않는 한,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자유로움의 요소는 정말 중요합니다. 설교는 언제나 성령-그의 능력과 지배-아래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또한 설교자는 무엇이 일어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유로우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준비하라, 그것도 주의깊게 준비하라”는 말과 모순되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바울이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2~13)라고 말했다고 해서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거기에도 전혀 어떠한 모순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준비할 때 도우셨던 성령께서 설교를 행하는 동안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도우시며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열어 보여 주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음의 요소는 진지함의 요소입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진지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설교자가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에 관해서 그들의 조건과 그들의 영혼상태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 사람들이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다른 이들처럼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과 그들이 영위하고 있는 생의 특징은 하나님에게 범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을 일러주며 그들 앞에 놓인 가공할 만한 영벌에 대한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어느 경우에서든지 설교자는 이 생의 허무함을 모든 사람들보다 가장 잘 인식해야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 일과 사업과 세상 열락과 허망한 자랑에 너무 깊이 빠져있어서 그들이 부단히 생각하는 일은 덧없는 생의 성격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설교자란 항상 그가 강단에 나타나는 순간에도 거기서 행하는 일에 대한 심각함의 인상을 창조하고 풍겨햐 합니다.....(111p)

 

나는 ‘박력’의 요소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는 심각함이 진지한 체하는 것을 뜻하지도, 슬픈 기색을 뜻하지도, 침울한 것을 뜻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설교자는 반드시 생기에 넘쳐있어야 합니다. 박력이 있으면서 동시에 진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점을 다른 말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설교자는 결코 흐리멍텅하거나 지루해서는 안됩니다.....(112p)

 

그러나 우리는 더 나아가십시다. 그 다음은 열심, 열정감입니다. 이들 진행의 요소들은 모두 친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내가 열심이라 말할 때 그 의미는 설교자는 반드시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에 자기 스스로 붙잡힘을 당했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가 그것에 붙잡히지 못하였으면 아무도 그 진리에 붙잡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점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113p)

 

그 점은 필연적으로 “뜨거움”의 요소에 우리를 인도합니다. 설교자는 결코 냉담해서는 안됩니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이 거의 옳고 정말 거의 완벽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상적이지 않고 살아있지 못하며 차갑고 감동이 없는 것은 자기 스스로 감동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만일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것으로 감동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안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뜨거움”을 유발합니다.....(116p)

 

설교자는 이런 이유와 위와 같은 방식으로 해서 그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과 접촉하는 사람입니다. 이탈되지 말고 일치되어야 합니다. 이는 그의 음성, 그의 태도, 그의 모든 접근방식에서 풍겨 나오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설교자와 회중 사이의 친밀한 접촉 여부를 결정합니다.

 

그래서 나는 “긴박감”의 요소를 생각해야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저 단순히 지식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영혼들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으로 가고 있는 순례자들을 다루고 있으며 이 생에서의 생과 사의 문제 뿐 아니라 영원한 운명을 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이보다 더 절실하고 급한 것이 없습니다....(118p)

 

우리는 생의 한가운데서 죽음에 맞부딪혀 있습니다. 만일 설교자가 이 긴박감, 즉 자기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시간과 영원 사이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면 그는 설교단에 서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에는 종요하고 냉정하고 과학적이고 초연한 척 여유를 부릴 수 없습니다. 철학자의 경우에는 그런 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설교자에게는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전체적인 상황 때문에 그런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똑같은 이유로 해서 설교는 언제나 “설득력”에 의해 특징지어 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담대함으로 권하노니 하나님께 대해 화해하십시오.” 분명히 이 설교행위의 전체 목적은 청중들을 설득시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그것을 취하라 또는 저것을 버리라“는 식의 태도로만 말하지 않습니다. 설교자는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진리를 그들에게 설득시키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이 그것을 알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해주려고 노력하며 그들에게 감화를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한 본문에 대한 수준 높은 논문을 제시하고 있지 않으며 자기 자신이 아는 것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살아 있는 영혼들을 다루고 있고 그 영혼들을 움직여 진리로 그들을 이끌어 주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그의 모든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이 요소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이 모든 요소들은 강의하는 것과 설교하는 것 사이의 차이 또는

수필과 설교문 사이의 차이를 구분지어 줍니다.....(119p)

 

우리는 순전히 지적이거나 논증적이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 정념의 요소가 반드시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은 이 정념을 산출할 뿐 아니라 그 일 자체가 그 일을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닫는 것보다 더 감동적인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 점을 숙고하고 이해하기 위해 어떤 사도도 우리들을 사무치도록 감동시켜 줍니다.....(120p)

 

이 정념(情念)과 감격의 요소는 내게 있어서 아주 사활적으로 중대한 것입니다. 현세기에 있어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결핍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특별히 개혁파(Reformed)를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 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균형을 잃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도하게 지적이 되어 정말 감정과 느낌의 요소를 거의 경멸하는 추세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이 배운 사람들이고, 진리를 너무 많이 포착하여 가지고 있다보니까 감정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일반인들은 대부분 감정적이고 감상적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이해를 못 가졌습니다!

 

이는 위험한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거기 모아 놓은 사람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느낌을 혐오하다니 이것은 위험한 경향이 아닙니까? 우리는 도취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설교자로서의 우리에게 맡겨진 이 영광스런 진리들을 아무런 감동도 없이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영적 시안이 무엇인가로 가리워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말한 바처럼 이러한 것들을 바라볼 때마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감동되지 않고 지나치는 수가 결코 없었습니다. 나는 내 말을 입증하는 한 가지 예를 들어야겠습니다. 여러분은 로마서 9, 10, 11장에서 바울이 어떻게 유대인의 특정 문제를 다루어 나가는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차지할 곳은 어디인가.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나 기타 그가 말해온....(122p)

끝으로 나는 말씀의 능력에 대해 언급해야겠습니다. 나는 이 점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한 가지만으로도 한 부분을 차지할 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능력(권능)이 없으면 그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결국 참된 설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설교의 주요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그의 존전에 있다는 생각을

주는 것입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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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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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이란 무엇인가 / 이스데반

말랭이 2013.01.18    http://blog.daum.net/plus8291/2158

 대부분의 한국 교회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결코 부인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 진리를 부인하는 사람이 한국 교회 안에 등장했다고 합시다. 아마도 많은 신자들은 혀를 차거나, 고개를 좌우로 흔들 것입니다. 좀 성미가 급한 사람들은 이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을 목청을 높여 이단으로 낙인 찍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을 적용하는 일에 주권적으로 일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외면당하시는 경우에도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을까요? 성령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하셔서 우리의 도움을 받으셔야만 구원의 은혜를 적용하실까요?

  저는 근래 어느 한 매체에 중생에 대한 간단한 칼럼을 기고하면서, 두 가지를 질문했습니다.

 첫째는 거듭나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고,

 둘째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한번 얻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한 인터넷 매체가 이 질문에 대해 “크리스천에게 물었습니다.

알쏭달쏭 ‘거듭남’이란?”이라는 제목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결과가 다음과 같았습니다.

  첫째 질문에 대해 46%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답했고,

 둘째 질문에 대해서는 무려 71%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대답했던 것입니다.1)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중생과 관련된 이 두 질문에 대한 이런 결과는 제게 충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도 변할 수 없다는 참된 신학의 기초가 이 시대에는 붕괴되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둘째 질문은 차치하고, 첫째 질문에 대한 설문 결과대로라면 우리는 교회 안의 약 절반의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시대를 살고 있는 셈입니다. 아마도 그 이유 중 하나는 중생이 무엇인지 교회에서 올바로 들어본 사람이 점점 줄고,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점점 증가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중생’은 잊힌 교리가 되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던 중 그동안 나누었던 내용들을 다듬고 새 글을 첨부해서 책을 내야겠다고 결단했습니다. 이 책의 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중생에 대해 간략하면서도 핵심적인 내용을 짚고, 그 교리적 가치를 드러내어

다시금 교회에서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진리로 가르치고 이해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중생 교리가 잊혀진 몇 가지 원인을 제시하여

자신도 모르게 잘못된 길에 들어선 신자들의 모습을 살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중생 교리를 회복하기 위해 고쳐야 할 실천적인 부분들과 진행 가능한 개혁의 일부분을 소개함으로 이런 개혁에 동참할 수 있도록 작은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소그룹 나눔이나 또는 개인적인 고찰을 위해 각 주제별로 마지막 부분에 ‘토의를 위한 질문’을 제시했습니다.

  중생에 대한 교리적 지식이 우리의 구원을 결정해 주는 것이 아니므로 여기에 기록된 모든 내용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동일한 수준의 반응을 불러일으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이 책은 구원받는 믿음이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인 중생에서 비롯된다는 옛 신앙을 다시 고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특별히 전도와 설교에서 분명히 드러난 잘못들을 고쳐 나가는 일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3부에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대안들을 제시했습니다.

 이 책에서 제안하거나 비평하는 부분들은 먼저 제 자신을 향한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서 자주 다루고 있는 ‘영접 기도’에 대한 문제점은, 과거에 이런 전도 방법을 사용했던 제 자신에 대한 성찰임을 고백합니다. 비록 중생한 이후일지라도 자신에게 일어난 중생의 역사가 얼마나 장엄하고 귀한 은혜인지를 계속해서 듣고 고찰하는 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 마땅한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이 책이,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옛 복음’이 무엇을 말해 왔는지를 탐구하고, 잘못된 것을 개혁해 나가는 일에 작은 촉매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면을 빌어 제게 복음의 빛을 반사해 준 분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2011년에 은퇴하신 양규식 목사님은 제게 처음으로 ‘옛 복음’을 설교와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이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보도록 안내해 주신 문점득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열방 사람들에게 열정으로 가르쳐 오신 스프로울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일일이 거명하지는 못했지만 부족한 자를 언제나 분에 넘치도록 아끼고 사랑으로 품어 주시는 여러 목사님과 지체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옛 유형의 복음 서적’ 출판에 최선을 다하시는 부흥과개혁사의 백금산 목사님과 직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위와 같은 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통일을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진정한 부흥과 개혁에 대한 기대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끝으로, 구원 사역에 있어서 아주 긴밀하고도 충만한 사랑 가운데 협력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성령의 역할을 올바로 이해하고 가르칠 때 성부와 성자께서도 성령과 함께 기뻐하실 것입니다.

  2012년 11월 이스데반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믿음으로 얻는 칭의 / R.C. 스프롤

 

마르틴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얻는 칭의야말로 교회가 사활을 걸 만큼 중요한 문제라고 선언했다. 종교개혁의 이 중요한 교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바로 복음 자체가 달린 문제였다.

칭의란 “불의한 죄인이,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롭다고 여김받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불의한 사람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의로움이다. 그리스도께서 믿는 죄인에게 공급해 주시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의로움이다. 오직 믿음으로 얻는 칭의란 우리의 선이나 선행에 의한 칭의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선하심과 공로에 의한 칭의이다.

 

칭의의 문제는 공로와 은혜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진다. 믿음으로 얻는 칭의는 우리가 하는 일이 칭의를 얻기에 충분히 선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의 말처럼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롬 3:20). 칭의는 법정적인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실 때 우리가 의롭다고 선포되고, 간주되고, 여겨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조건은 믿음이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는 믿음이 칭의의 도구적 근거이며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공로가 우리에게 전가된다고 확언한다. 로마 카톨릭 신학은 세례가 칭의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적 근거가 되며 고해 성사는 이차적이며 회복시키는 근거가 된다고 가르친다(로마 카톨릭은 소해 성사를 영혼이 파선된 사람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범함으로 인해 칭의의 은혜를 잃어버린 자들- 의 칭의를 위한 두 번째 항목으로 본다). 고해 성사는 인간이 칭의에 합당한 일을 성취하여 만족시키는 일을 하도록 요구한다. 로마 카톨릭의 견해는, 믿음에 의한 칭의는 인정하지만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며 필요조건으로서 선행이 첨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칭의를 위한 믿음은 공허한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이다. 믿음은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에게만 붙어 있는 인격적 신뢰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또한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로 받아들이는 회개하는 신앙이다.

 

성경은 우리가 선행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해 우리에게 더해지는 것, 즉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말한다. 종합적으로 보면, 기본적인 어떤 것에 새로운 어떤 것이 더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더해졌으므로 종합적인 것이다. 우리의 칭의는 전가에 의한 것이다. 믿음에 의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금 속하여 있는 분, 즉 그리스도가 가지신 실제적 공로를 우리에게 돌리셨기 때문에 이것은 “법적 의제”가 아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전가이다.

 

[참조 성구] 롬3:21-28, 롬5:12-19, 고후5:16-21, 갈2:11-21, 엡2:1-10, 빌3:7-11

 

<요약>

1. 칭의는 하나님께서 하신 행위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불의한 죄인에게 전가시키신 후에 그들을 의롭다고 선포하셨다.

2. 그 누구도 선행으로 칭의를 얻을 수는 없다.

3. 믿음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가받는 데 필요한 조건이다.

4. 칭의는 단지 신앙의 고백뿐 아니라 살아 있고 실제적인 믿음을 요구한다.

 

 

하나님 ->> 그리스도의 공로 ->> 믿음 ->> 불의한 인간

 

 

기독교의 핵심 진리 102가지(R.C. 스프롤) 중에서 발췌(226-227p)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님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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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 국가와의 수많은 전쟁을 통하여 스페인, 영국과 함께 스웨덴을 세계 3

         강국 반열에 올려, 대왕의 칭호를 받는 구스타프 2(1594 – 1632)발틱해의

         패권을 장악하고자 세계에서 제일 크고 강력한 전함을 건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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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이 69미터, 12 미터, 높이 53 미터, 배수량이 1200톤에 이르는 전함은,

               아무도 지은 적이 없었기에, 당시 선박 제조 기술이 제일 발달한 덴마크의

          장인들을 불러, 천그루의 참나무를 베어 내어, 3 동안 공들여, 발틱해에서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전함, 바사호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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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스타프 2세는 스웨덴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기술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 좌우에 16문씩 설치할  대포의 수를 늘려, 2 구조로 올려

 

       64문의  11kg짜리 포탄을 장진할 있는 대포를 설치,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한  위험천만한 바사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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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8,  주변국들의 귀빈들을 초대하여 성대한 진수식을 마치고,

     출항한지  20분도 안되어, 1,200미터 정도 전진하다가 갑자기 불어닥친

         돌풍에 중심을 잃고 맥없이 바다 속으로 침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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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스타프 2세의 욕심으로 잉태한 과욕의 죄가 30여명의 젊은이들을 사망으로

      이르게 하고, 스웨덴 바사 왕조의 위상에 손상을 주었다.

 

      구스타프 2 자신도 4 독일과의 전투에서 38 나이로 전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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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사호는 333 동안 수심 300미터 바다밑 6미터 갯벌 속에 묻혀 있다가 

  2년간의 인양 작업 끝에, 처음 건조되었던 조선소 자리로 옯겨졌다.

 

17년간의 복원 작업과 위에 6 높이의  건물을 지어,

건물 중심에  배가 세워져 있고, 층별로 돌아가면서 전시장이 있어,

17세기의 스웨덴 사람들의 생활상과 수장품들을 있는 흥미로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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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  박물관으로 개관된 이래 매년 백만명 이상, 지금까지 3천만명 이상의

     방문객들을 맞이하여 발틱해안에 있는 수많은 박물관 가장 많은 방문객을

     맞이하는 명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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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톡홀름 항구를 지나  구시가지 감라스탄에 있는 왕궁으로 갔다.

      젊고 생긴 근위대의 절도 있는 모습과 우렁찬 밴드 소리는,

    자연스레 관광객들을 불러 모아   디딜 틈이 없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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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군중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제대로 구도도 잡지 못한 채,

     그저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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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마차가 다니던 좁은 골목길, 우여곡절이 많았던 스웨덴의

역사를 보여 주는  스토르토리에트 광장으로...

 

                17세기초, 덴마크 통치하에 있던 스웨덴에 독립의 기운이 감지되자,

            덴마크왕은 스톡홀름으로 출병,  감라스탄 지역의 스토르토리에트  광장에 있는,

          호텔에 머무는 동안, 스웨덴 독립군들에 의해 피습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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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탄의 불발로 암살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한 덴마크왕은, 음모에 가담한

       스웨덴 귀족 82명을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참수하여, 머리들을 광장

           중앙에 있는 우물에 던져 넣었다.

 

       때는 1520년, 스웨덴 사람들은 위에 탑을 세워 피의 우물이라고 부른다

 

              붉은 벽돌 건물의 하얀 점들은 이곳에서 학살 당한 82명의 숫자만큼

          건물에 박아 넣은 하얀 벽돌들로, 날을 잊지 말자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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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덴마크에 유학 중이었던 구스타프 1 (1496- 1560), 스웨덴 원로원 의원이며,

             스웨덴 독립을 주장했던 아버지와 삼촌들이 처형 당한 , 

 

             스웨덴으로  비밀리에   귀국, 독립군의 유능한 장군으로서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승리 1523 17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바사 왕조를  창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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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시가지의 아름다운 건축물들과 거리의 악사들이 어울려,

     다른 세계에 있는 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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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토르토리에트 광장에는 세계 각국에서 모여 관광객들이 인산 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각기 다른 나라말로 설명을 하고 있는 가이드들과,

    열심히 듣고 받아 적는 여행 메니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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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장  정면에는 노벨 박물관이 있었지만,

              여행 일정 때문에 내부에 들어갈 없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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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곳에도 어김없이 자전거 대여소가 있어 시민들이나 방문객들이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건강에도 좋고, 대기 오염도 시키고 돈도 절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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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틱해와 마라렌(Malaren) 호수가 만나는 , 14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

         북구의 베니스라고 불리우는 인구 천만의 스웨덴, 위의 도시라고 불리우는

         스톡홀름에 도착, 매년 12 10, 노벨상의 잔치가 벌어지는 시청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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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위적인 시청이 아니라 시민들과 함께 하는 공간, 시청사 광장은

            주변의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 매우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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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장이 덩굴 마저 몫하는, 붉은 벽돌의 멋진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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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 교환 학생으로 다녀온 생긴 청년이 현지 가이드로 배정되어,

                시청사의 역사와 소개를 영어로성의껏 설명을 잘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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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으로 들어가니 블루홀이라 불리우는 넓은 홀이 나왔다.

                  곳에서는 노벨시상식의 만찬이 열리는 곳으로,

                  평소에는 음악 콘서트같은 많은 행사가 열린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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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주는 아래 홀에서 하고, 소리는 천정에 있는 곳으로 부터

                청명한 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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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층 발코니에서 내려다 아름답고 평온한 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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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단 시설의 시의회실, 곳에서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경제학

                 5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를 선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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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유의 디자인과 단단함으로 센스있는 자동차의 대명사로 한때  호황을 누렸던

              Volvo  Saab 만들고 있는 나라의 시청 답게 실내 장식이 우아하고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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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든 ,  노벨상 시상식과 만찬 무도회가 열리는 .

         시민들이 기증한 금으로 만든 1800만개의 금박으로  실내를 도금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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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20, 덴마크왕을 겨냥한 포탄이 불발로 끝나, 스웨덴의 독립도 불발로

               끝날 보였으나, 82명의 애국지사가 참수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3 뒤인 1523 마침내 독립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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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톡홀름 관광을 끝내고, 우리는 비행기 삯과 호텔비를 절약할 있는

           헬싱키행 실자라인 페리에 올랐다.

                자고 나면 15시간만에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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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 둥지에서
글과 사진 : 들꽃 사랑



수채화처럼 고운 生... / 최송연 마음이란 물감을 뿌리는 대로 그림을 그리는 대로 그려지는 하얀 도화지 꿈을 품게 되면 오색 찬란한 무지갯빛 사랑을 품게 되면 은빛으로 반짝이는 별빛 원망과 불평 시기 질투 미움은 먹구름 칙칙한 하늘빛 주의 말씀을 붓으로 삼아 날이면 날마다 수채화처럼 고운 生을 그려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시 19: 7-11)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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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로서의 바빙크는 어느 학교에서도 빛날 학문적 선생이었다. 박학하였고, 독서량은 엄청났지만, 잰체하지 않는 화법으로 전달하였다.

문제를 파악하는 예리한 감각을 지녔으며, 터놓고 표현하였다. 성급하지 않고, 깊은 성찰을 통해서 해결책을 알게 되면, 스스럼없이 이를 알렸다. 불필요한 논쟁을 야기하는 위장 해결책을 항상 경계하였다.

논리학을 철저하게 공부했기 때문에알지 못하고서는 말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요인의 의미도 잘 알았다. 교의학자로서 그는 개혁신학이 칼빈신학과 동일하다는 자세로 캄펀과 암스테르담에서 사역하였다.

단순히 칼빈에게로의 회귀는 아니며, 그 이후의 발전을 고려하면서 비판도 하고, 유보적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

1750년부터 경직되기 시작하던 개혁신학을 그는 이런 자세로 활성화하였다. 레이던에서 철학도 공부했기 때문에 종교와 철학의 고유성과 차이를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기독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의 사상을 공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삶과 세계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서 이성과 감정을 충족시키는 '계시 철학'을 추구하였다.

그는 칼빈처럼 개혁파 사상 뿐 아니라, 개혁파 생활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아름다움의 감동을 봉쇄하는 경건주의적 폐쇄주의를 폭로하고 비판하였다.

그는 일반은혜의 관점에서 예술과 과학 기술 분야의 위대한 발견과 유익한 발명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재세례파를 거부하는 칼빈주의 정신의 발로였다.

연구와 교수에 지장을 받지 않는 한, 교육과 사회 문제, 교회와 국가의관계 등 실제적인 문제들을 설명하고 가르치기 위해서 전국을 여행하였다. 이 모든 사역의 기초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특별 계시였다.
바빙크는 반대자에 대해서는 항상 포용성을 가지고 상대방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당대의 기라성과 같은많은 신학자와 기독교 사상가들을 존경하였다. 이들보다 어려운 시기에 칼빈주의의 기치를 올린 흐룬을 더 존경한다고 말하였다.

캄펀과 같은 소도시에서 활동하였으나, 그는 폭넓은 공교회적 정신을 지녔다. 이런 자세는, 그가 1888년 12월 18일에 행한 특강 '기독교와 교회의 보편성'에서 이미 잘 나타난다.

“복음은 개인 뿐 아니라, 인류 전체, 가정과 사회와 국가, 예술과 학문,전 우주, 바로 신음하고 있는 모든 창조물을 향한 복음이다. 신앙이 받은 약속은 세상을 이김이다.

이 신앙은 보편적이어서 때와 장소, 어느 국가와 민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 신앙은 모든 상황에 적합하며, 본연적인 삶의 모든 형편과 연관되고, 모든 시대에 합당하며, 유익하며, 모든 환경에 적당하다.

오직 죄에만 대항하면서, 십자가의 보혈로 정화되는 것 외에는 어느 것과도 충돌되지 않는다.” 그는 자연과 은혜의 균형 있는 관계를 제시하면서, 분리측 교회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분리주의의 흔적을 경고하였다.
이처럼 온건한 바빙크였으나, 신학교육기관의 통합 문제에 있어서는 카이퍼와 큰 상처를 입었다. 카이퍼와도 갈등 관계에 빠졌고, 옛 분리측 인사들과도 등을 지고 말았다.

개혁파원리를 확고하게 따랐던 그가 이 과정에서 그 원리를 비판하는 지경에까지 나아갔다.

그는 교회 정치의 현실을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개혁파원리에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부패도 들어있는데, 교회정치는 종종 이 진리를 철저하게 체험하고 고백하도록 강요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이렇게 그는 죄와 은혜, 죄과와 사죄, 중생과 회개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세태를 비판하였다.

이런 표현은 온건한 바빙크가 가장 신랄하게 표현한 예라고 볼 수 있다.
교회의 분리와 합동이라는 교회적인 문제뿐 아니라, 세기가 바뀌어서 새로운 문제들이 제기되는 시대에 살면서, 신앙으로 헤쳐나간 바빙크가 임종시에 한 말은 그의 일생을 잘 요약한다:

“내 학문이 내게 준 유익은 무엇인가. 내 교의학 또한 나에게 무슨소용이 있는가. 오직 신앙만이 나를 구원한다.”


출처:
보혈의피 | 2013.09.30. 10:08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D0VS/2632 

 

♣ 남은 여생(餘生)을 알려주는 시계(時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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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하게 물음에 답해 주세요.

 

성실도와 정확도가 정비례합니다.
(예:성실도가 100%면 100%정확 합니다)
점쟁이도 아니고 관상,수상도 아니고 철학도 아닙니다.

정확한 통계에 의한 자료이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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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줄 몰랐던 이상한 동물들○

 

  

Red-lipped Batfish 빨간입술의 박쥐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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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nd on the Galapagos Islands, this fish is actually a pretty bad swimmer, and uses its pectoral fins to walk on the bottom of the ocean. 갈라파고 섬에서 발견된  이물고기는 사실 수영을 모르는 고기인데 대양바닥을 가슴지느러미를 써서 걸어 다닌다. (Image credits: imgur 저작권: 임거르)

 

 

Goblin Shark 도깨비 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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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rare shark is sometimes even called a “living fossil”, “is the only extant representative of the family Mitsukurinidae, a lineage some 125 million years old.”  희기한 상어는 가끔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불리워 지는

 

 

거의 125백만년된 미추큐리니대 가족의  유일한 현존하는 물고기다.

 

 

Goblin sharks inhabit around the world at depths greater than 100 m (330 ft), with adults found deeper than juveniles. Given the depths at which it lives, the goblin shark poses no danger to humans.  도깨비상어들은 세계각지에서

 

 

100미터 깊이에 살고있으며 성년의 상어들은 어린 상어들 보더 깊은 곳에서 발견된다

 

 

그들이 사는 깊이를 고려할 도깨비 상어들은 인간들에게 위험을 주지 않는 .(Image credits: imgur)

 

 

The Panda Ant 판다 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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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utillidae are a family of more than 3,000 species of wasps (despite the names) whose wingless females resemble large, hairy ants. 

 

 

개미벌과는 날개 없는 암놈들은 커다란 머리털난 개미와 흡사한 3000 종이나 넘는 말벌(이름이 그렇지만) 일종이다.

 

 

Found in Chile, they are known for their extremely painful stings, hence the common name cow killer or cow ant. 

 

 

칠레에서 발견된 이놈들은 아주 아픈 침으로 알려졌기에 보통 암소죽이는 놈이나 암소개미 /SPAN> 불려진다.

 

 

Black and white specimens are sometimes known as panda ants due to their hair coloration resembling that of the Chinese giant panda.

 

 

흑백종류는 종종 중국의 거대한 판다와 털색갈이 비슷하여 판다개미로 알려졌다.  (Image credits: Chris Lukhaup)

 

 

Penis Snake 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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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uhm… peculiar eyeless animal is actually called Atretochoana eiselti. It is a large,

 

 

presumably aquatic, caecilian amphibian with a broad, flat head and a fleshy dorsal fin on the body. 

 

 

특이한 놈은.... 특히 눈이 없는 이짐승은 매레토초아나 다이실티 불리운다.

 

 

이놈은 필시 물에서 사는 놈으로  다리가 없으며 양서류족으로 넙죽하고 평편한 머리에다

 

 

몸에 살같은 등지러미가 있는 놈이다.  (Image credits: fotos.noticias.bol.uol.com.br)

 

 

Umbonia Spinosa 움보니아 스피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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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se thorn bugs are related to cicadas, and use their beaks to pierce plant stems to feed upon their sap.

 

 

Their strange appearance still poses many questions to scientists. 

 

 

가시달린 곤충은 매미 종류로서 주둥이를 써서 나무 가지을 뚫어파고들어 나무의  수액을 빨아 먹고 산다.

 

 

이들의 기묘한 모양은 과학자들에게 많은 의문을 남겨주고 있다.  (Image credits: Colin Hutton)

 

 

Lowland Streaked Tenr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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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nd in Madagascar, Africa, this small tenrec is the only mammal known to use stridulation for generating sound

 

 

something that’s usually associated with snakes and insects. (Image credits: hakoar | telegraph.co.uk)

 

 

Hummingbird Hawk-Mo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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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this hawk-moth feeds on flowers and makes a similar humming sound, it looks a lot like a hummingbird.

 

 

What’s interesting is that it is surprisingly good at learning colors. (Image credits: Jerzy Strzelecki | unknown)

 

 

Glaucus Atlanti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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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so known as the blue dragon, this creature is a is a species of blue sea slug.

 

 

You could find it in warm waters of the oceans, as it floats on the surface because of a gas-filled sac in its stomach.

 

 

(Image credits: unknown | unknown | paulhypnos)

 

 

Mantis Shri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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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so called the “sea locusts“, “prawn killers” and even “thumb splitters”,

 

 

this is one of the most common predators in tropical and sub-tropical waters; little is known about them, however,

 

 

because of how much time they spend hiding in their burrows. (Image credits:Alexander Safonov)

 

 

Venezuelan Poodle Mo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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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overed in Venezuela in 2009, this new species of alien-looking moth is still poorly explored.

 

 

Waiting for more info about them! (Image credits: Arthur Anker | imgur)

 

 

The Pacu F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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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probably don’t need much explanation as to why the residents of Papua New Guinea call this fish a “ball cutter.”

 

 

The local fishermen were really worried about the safety of their testicles when they had to get in the water!

 

 

(Image credits: imgur |evolvingcomplexityii)

 

 

Giant Isop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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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one is the largest of the existing isopods.

 

 

“The enormous size of the giant isopod is a result of a phenomenon known as deep sea gigantism.

 

 

This is the tendency of deep sea crustaceans and other animals to grow to a much larger size than similar species

 

 

in shallower waters.” (Image credits: Littoraria)

 

 

The Saiga Antel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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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saiga, spread around the Eurasian steppe, is known for its an extremely unusual,

 

 

over-sized, flexible nose structure, the proboscis. (Image credits:enews.fergananews.com)

 

 

The Blue Parrotf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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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bright blue fish can be found in the waters of the Atlantic Ocean,

 

 

and spends 80% of its time searching for food. (Image credits: imgur | depalmadise)

 

 

Indian Purple Fr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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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nd in India, this species of frog have bloated body and an unusually pointy snout;

 

 

it only spends two weeks a year on the surface of earth, leaving the underground for mating. (Image credits: wikipedia.org)

 

 

Shoeb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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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large stork-like bird gets its name because of the shape of its beak.

 

 

Even though it was already known to ancient Egyptians and Arabs, the bird was only classified in 19th century.

 

 

(Image credits: David Li | shoebill.info)

 

 

Oka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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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mammal is native to the 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in Central Africa. Despite the zebra-like stripes,

 

 

it is actually more closely related to giraffes. (Image credits:marylandzoo.org | baynews9.com)

 

 

Narwh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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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toothed whale, found in the arctic, has been valued for over 1000 years by the Inuit people for its meat and ivory.

 

 

The narwhal, however, is especially sensitive to the climate change. (Image credits:

 

 

 gowild.wwf.org.uk | Richard Thomas)

 

 

Thorny Drag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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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ured in camouflaging shades of desert browns, this lizard has a “false” head,

 

 

which he presents to his predators by dipping the real one. (Image credits: imgur | Christopher Watson)

 

 

Sea P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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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절의 능력

대장쟁이 ㆍ 2013-10-01 (화) 03:31 IP: 173.xxx.141 ㆍ조회: 82      

<열왕기하 2장>

이 마지막 시대에 주를 믿는 자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더욱 핍박받고 교회를 세우는 일도 더욱 힘들어져 갑니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도 엘리야 같은 능력, 그것을 곱절로 받은 엘리사 같이 굉장한 능력을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지금은 구약시대가 아니라 신약시대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모든 약속이 예수님께 이르러 성취되었음을 믿습니다. 구약의 모든 사건들이 예수님을 나타내고 예표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을 읽으며 구약시대의 능력을 구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완성하신 구원과 복음의 능력을 깨달아 알아야 할 것이며, 엘리야, 엘리사 같은 능력이 아니라 한 번에 오천 명을 주께 돌아오게 베드로와 핍박을 이기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사도바울이 가졌던 말씀의 능력을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상속법에 의하면 장자는 두 몫을 받습니다. 엘리야는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구나.’ 하면서 ‘그러나 네가 하나님께서 너에게서 나를 취하여 올리시는 그 일을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엘리야가 예수님, 엘리사가 제자를 예표한다고 보면 이 말은 “네가 나의 승천(부활)을 목격하고 나의 증인이 되면 그 일이 너에게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하는 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이를 신약에서의 성취로 연결시켜 본다면 결국 주님의 부활의 증인, 곧 복음을 전하는 제자에게 곱절의 능력이 주어질 것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 보다 더 큰일을 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의 3년 공생애 기간 동안 주님께서 많은 기적과 표적을 행하셨고 수많은 무리가 따랐지만 구원에 이르는 자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기적과 표적은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 하였습니다. 인간을 변화시키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기적과 표적이 아니라 복음이요 생명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대로 베드로가 한 번 설교하였을 때 오천 명이 한꺼번에 주께 돌아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고 부활의 증인들이 외치는 복음은 세상을 뒤집어 놓고 수많은 생명을 살렸습니다.

엘리야가 승천한 다음 엘리사에게 가장 먼저 나타난 표적은 소금으로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생명을 살리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 한 다음 모세가 광야에서 가장 먼저 행한 표적이 마라의 쓴물에 나뭇가지를 던져 넣어 단물로 바꾸는 것이었지요. 복음의 능력은 생명입니다. 부활의 증인,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생명을 살리고 이 땅을 고치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엘리사에게 ‘대머리여.’ 하고 조롱하는 젊은 아이들 42명이 곰 두 마리에게 죽임 당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사를 놀렸다는 이유로 42 명이나 죽임 당하는 사건이 너무 잔혹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엘리사를 건드리는 악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나타내신 것이라 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조롱하고 비웃던 무리들, 복음을 거부하고 조롱하는 자들에게 내려지는 심판을 의미한다고도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을 들고 나아가는 주님의 제자들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며 악한 자가 손도 대지 못 하게 보호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증인이 되십시오.
엘리야의 승천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승천의 증인이 되는 것이 더욱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엘리사보다 더 큰 말씀의 능력이 갑절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키실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바로 곱절을 받는 장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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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 - 제 1 장 성령으로서의 세례 / 고재수지음(N.H Gootjes)

김완수 | 조회 23 |추천 0 |2012.10.02. 10:20 http://cafe.daum.net/wansu63/Ihqp/963 

 

 

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  

고재수지음(N.H Gootjes)

 

 

제 1 장 성령으로서의 세례

 

1. 머리말

 

교회는 언제나 오순절날의 사건에 관심이 있었지만 이 사실이 교회가 “성령으로서의 세례” 란 문제에 관심이 많았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주석가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다.”라는 말이 나오는 본문을 다룰 때 그 표현을 설명했지만 교의학자들이 그들의 조직 신학적인 책에서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많이 언급하지 않았던 것 같다. 또 필자가 아는 범위에서는 개혁주의의 고백문에서도 그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약 150년 전부터는 ‘성령으로서의 세례’ 라는 말 그 자체도 신학적 토론에서 핵심적인 것이 되어 왔다. 신성 운동, 오순절 운동과 신오순절 운동에서 그 표현은 그들의 신앙의 핵심적인 체험을 묘사하는 말이 되고 있다. 그 결과로 그 체험뿐만 아니라 그 표현도 이 운동의 안과 밖에서 관심이 대상이 되었다. ‘성령으로서의 세례’ 라는 주제로 쓰여진 책도 많이 출판되었고, 그 중 광범위하게 성령론을 다루는 책도 있다.

 

이 글은 오순절이나 신오순절의 성령의로의 세례에 대한 견해를 완전하게 다루고자 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이 표현이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되는가 하는 것에 근거하여 여러 견해를 살펴보고 거기에서 나오는 문제점들을 다루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그것으로부터 성경적인, 그리고 구체적인 교리를 찾고자 한다.

 

2. 칼빈의 견해

 

먼저 칼빈으로부터 시작해 보자. 우리가 칼빈을 읽을 때 기억해야 할 것은 그가 오순절파나 신오순절파와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 카톨릭과 성례전의 의미에 대하여 논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 3:11,12 주석에서 칼빈은, 교회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를 일치시키고, 요한의 세례가 교회의 세례와 다르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공격한다. 그런 가르침의 결과는 오늘날 목사가 성령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칼빈에 의하면 세레 요한의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가 긴밀히 연결된 것으로서 요한은 신호를 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신호가 제시하는 내용을 주신다는 것이다. “주된 일은 그(세례 요한)가 그리스도를 영적 세례의 주체로 만들면서, 그 자신을 단지 외적(세례) 수종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요한의 세례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세례에도 적용된다. “이것으로부터 세례에 있어서 사람의 역할이 무엇이며 또 하나님의 아들에게 특이한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일반 교훈이 생겨난다. 사람에게는 외적이고 가시적인 신호의 집행이 맡겨져 있을 뿐이고 진리 자체는 그리스도에게만 있다.” 마 3:11 이하에 대한 주석에서 한 구절 더 인용해 보자. “그 의미는 분명한데, 곧 그리스도만이 외적 세례가 나타내고자 하는 어떠한 은혜라도 베푸신다는 것인데 이는 그가 그 자신의 피로써 양심을 깨끗케 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 옛 사람을 죽게 하고 중생의 영을 주신다.”

 

그래서 칼빈에게 있어서는 성령으로서의 세례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통하여 인간에게 행하시는 전체 구원 사역, 곧 죄를 씻음, 옛 사람의 죽임, 중생 등을 의미한다. 그때 중생은 믿음의 시작 순간이나 또는 사람이 거듭나는 그 순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신자를 변화시켜 가는 그리스도의 영이 계속적 사역이라는 의미이다.

 

칼빈은 행 1:5을 따라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오순절날에 성령의 오심과 연관된다는 반대를 답해야만 한다. 오순절 이전에는 진정한 회개가 없었겠는가? 칼빈은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회개와 중생의 영을 주심을 의미한다는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는다. “나의 대답은 그리스도께서 불러 혀 모양으로 그 자신을 주시던 바로 그때에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이 일 이전에 사도들에게 이 세례를 주셨고 또 그는 모든 택한 자를 매일 그같이 세례 주신다.”

 

그러면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오순절에 주어졌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칼빈은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하는 것 같다.

 

첫째, 오순절 사건은 매일 일어나는 일을 장엄한 방식으로 가시화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장엄한 방식으로 성령을 보내심이 주께서 그의 택한 자들을 끊임없이 감동시키는 감추어진 은혜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그분께서 요한의 증거를 그것에다 결착시킨 것은 마땅한 일이다.

 

둘째, 성령 선물은 오순절날에 완전해졌다. “사도들이 그 자신들만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모든 신자의 유익을 위하여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 외에도 거기에는 그가 그의 성령 선물들을 충만한 정도로 부어 주심으로써 그의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우주적 은혜의 반영되었다.”

 

 칼빈의 견해는 그 직후의 시대의 매우 영향력이 있었지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스쿨데투스(A. Scultetus, 1566-1625) 라는 신학자는 당대의 일반적 인식이, 세례 요한이 자신과 다른 교사들의 외적 세례나 사역을 그리스도의 내적 사역과 구분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스쿨데투스(A. Scultetus, 1566-1625)는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두 종류의 세례, 즉 물세례와 불세례가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세례는 사람이 물 속에 담가지고 또 건져내어짐으로써 성령을 통하여 죽음과 살아남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불세례는 성령의 불같은 은사들이 사람들 속에 기적적으로 부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 세례는 오순절에 있었던 특별한 은사들을 설명해 주고 이후로도 여러 번 되풀이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 세례는 복음의 권위가 충분히 확정되었을 때 멈추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스쿨테투스 자신도 그가 대다수의 견해를 거슬러 가고 있음을 알았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칼빈과 같이 요한의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성령으로서의 세례 사이에 대조를 두는 신학자들이 있다. 예를 들면 둔(J.D.G.Dunn)은 이렇게 말한다. “그 두 세례 사이의 대조는 요한과 예수 사이의 대조, 예비와 완성, 또는 그림자와 실체 사이의 반명제이다.

 

그러나 우리는 둔과 칼빈 사이의 견해차에도 주목해야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성령으로서의 세례” 란 표현 속에 지시되고 있는 성령의 사역은 믿음의 시작에서부터 계속적인 성화 사역에 이르기까지 전체 사역을 포함하는 것이지만, 둔의 견해는 이 세례가 특별히 믿음 생활의 시작을 의미한다. “성령의 선물 즉 성령 세례는 회심의 도입 단계의 특징적 요소인데, 실상 신약에서는 그것이 회심 돌입의 가장 의미 깊은 요소이며 그 핵심점이다. 이것은 사람이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인 경험과 생활에, 또 새 언약 속으로, 또 교회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구원하는 은혜의 선물이다. 그것은 가장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한 사람을 그리스도인되게 만드는 요소이다.

 

3. 오순절파의 견해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오순절파의 견해쪽으로 차츰 기울어져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그들의 입장의 배경에는 청교도적 사상이 깔려 있다. 구원을 두 단계로 체험하게 된다는 사상이다. 첫째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단계이고 후에 두 번째 단계가 따라오는데, 이는 보통 확신의 단계로 여겨지고 있다. 토마스 굳윈(Thomas Goodwin)은 이같은 확신을 받는 것을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받는 것과 일치시켰다. 그러나 성령으로서의 세례란 표현의 확신의 체험 대신 자주 사용되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오순절파 견해로서의 그다음의 발전 단계가 웨슬리에 의해 이루어졌다. 물론 칼빈주의자들이었던 청교도들과 알미니안적인 웨슬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웨슬리도 신자의 생활에 있어서 두 단계로 구분한다. 하나는 칭의의 단계로서 성화는 이 단계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 뒤에 완전의 단계가 오는데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전적인 성화가 주어진다.

 

웨슬리 계열인 플랫처(John Fletcher)는 종종 성령으로서의 세례란 말을 사용한다.

 

이 두 단계의 구분은 신성 운동에도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성화를 이끌어 오는 둘째 체험을 보통 성령 세례로 지칭하였다.

 

이어서 오순절파 운동이 뒤따라온다. 여기서 다시 신자의 삶에 있어서 두 가지 단계가 구분되어진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제 2 단계는 청교도들의 경우와 같이 확신의 단계가 아니며, 또 웨슬리의 추종자들의 경우처럼 성화의 단계도 아니다. 그들에게 와서 성령으로서의 세례란 말은 이전보다 더 자신감 있게 사용되어진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이 성령으로의 세례에 대한 언급은 능력의 약속과 짝을 이루며, 또 사도들이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던 오순절을 지적하기 때문이다(행 1:5-8, 2:4).

 

이렇게 성령을 통한 성화란 개념으로부터, 성령을 통한 능력이란 개념으로 옮겨가는데 중요한 통로가 되었던 사람은 특히 토레이(R. A. Torrey) 였다. 그의 세 번째 제안을 인용해 보자. “성령으로의 세례”는 성령의 중생케 하는 사역과는 구분되며 그것에 뒤따라오며 또 첨가적인 성령의 작용이다. ...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나더라도 아직 성령으로 세례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중생에는 생명의 부여가 있고 그것을 받는 사람은 사역을 위한 자격을 갖추게 된다.

 

오순절파 그룹에서는 성령으로의 세례에 대한 이런 가르침이 그들의 교리적 기초에 속한 디 기(D. Gee)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신약은 확실한 역사적 사실로서 중생시에 성령이 처음 들어온 이후 신자들이 성령을 그 분의 원래적이고 유일한 인격으로서 특별하고도 인격적으로 받을 수 있고 또 받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지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체험을 ‘성령으로의 세례’라 부르며 그 목적은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부여하는 데 있다. 그것에 특징적으로 수반되는 것은 열매가 아니라 은사들이다.”

 

이 두 단계를 때로는 용어상 구별해서 “성령의 세례”와 “성령으로의 세례”로 나누기도 한다. “중생에서는 성령이 주체요 대속의 피가 수단이며 중생이 그 결과”이다. 성령으로서의 세례에서는 그리스도가 주체요(“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줄 것이다.”) 성령의 수단이며 능력의 부여가 그 결과이다.

 

칼빈과 이들 오순절파 신학자들 사이에 너무나 큰 차이가 있음이 분명하다. 칼빈에게는 성령으로의 세례란 말이 신자의 마음과 생활을 새롭게 하는 성령의 지속적 사역을 의미하는데 반해, 기(Gee) 와 윌리암스(Williams)에 있어서는 이 세례가 신자의 생활에 나타나는 두 번째 체험으로서 이를 통해 능력을 받고 보통 방언을 수반하는 체험인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4. 바빙크의 견해

 

그러면 개혁 신학에서는 20세기 초반 이후로 되살아난 성령의 부음에 대한 관심에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우리는 이것을 자세히 논의할 계획은 없고 다만 한 신학자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는 화란 신학자인 바빙크(H. Bavinck)이다. 재미있는 점은 바빙크가 웨슬리 신학의 전개와 오순절과 신학의 시발에 대하여 매우 앞서 있는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것을 우리는 그의 책의 몇몇 긴 각주에서 볼 수 있다.

 

바빙크는 성령으로서의 세례란 표현이 갖게 된 새로운 의미를 다루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핵심이 어떤 것이냐는 점은 감리교식으로 성화의 둘째 단계에 대한 강조와 오순절 사건의 성도에 대한 논의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바빙크는 전통에 따라 인간의 신분을 네 단계로 구분한다. 무흠 상태, 부패 상태, 은혜 상태, 그리고 영광 상태이다. 이 마지막 영광 상태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재림날에 무덤으로부터 일어난 후의 상황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바빙크가 말하는 은혜의 상태에는 두 부분이 있어서, 그 중 하나는 신자가 바빙크가 말하는 의롭다 함을 받을 때 주어지고, 다른 하나는 성화에서 주어지는 것인가하는 것이다. 바빙크의 대답은 매우 강조적으로 “아니오”이다. “칭의와 성화는 서로 다른 것이지만 그러나 한 순간도 분리된 것은 아니다.” 성화는 윤리적 행위로서 전 삶을 통하여 지속되며 그리스도의 의를 성령의 새롭게 하는 사역을 통해 점차적으로 우리의 인격적, 윤리적 자질이 되도록 만든다.

 

우리가 이것을 신분 이론과 맞추기 원한다면이 세 번째 단계 곧 은혜의 단계는 “칭의와 성화의 단계”라 해야만 할 것이다. 이 단계에서 신자는 의롭게 되었고 계속 성화되어 간다.

 

조금 뒤에서 바빙크는 감리교 이론을 매우 강하게 비판한다. “감리교가 성화와 인침을, 칭의와 믿음과 분리하고 앞의 것을 받지 않고서도 뒤의 것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통일성과 불가분리성이라는 이 중요한 진리를 간과하는 주장이다.” “이 감리교 이론은 그 분리된 선물이 칭의 이후 조만감에 특별한 믿음의 행동을 통하여 갑자기, 그리고 충만히 나눌 수 있고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더욱 실수를 범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감리교 교리는 성화의 성격뿐만 아니라, 믿음의 본질도 오해하기 때문이다.” 바빙크의 생각에는 감리교도와 오순절파가 믿는 대로의 둘째 단계가 차지할 자리가 없다.

 

그러면 바빙크는 오순절 사건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Magnalia Dei〕 제 19장은 성령 선물에 관한 장인에 이 장을 분해 해 볼 때 우리는 그것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을 보게 된다.

 

첫째로, 바빙크는 성령을 부어 주신 사건을 논의하고(p 368-372).

둘째로, 그는 이 성령의 부음에 수반된 특별한 능력과 사역들을 논의하며(p. 372-377).

셋째로, 그는 이 성령이 회중 속에서 지속적으로 행하시는 정상적이고 종교적이며 도덕적인 사역에 대해서 말한다(p. 377-385). 이 마지막 부분은 현재로서는 우리의 관심 밖이다.

 

성령의 특수한 사역에 대한 두 번째 부분에서 바빙크는 사도행전 2장의 방언에 관해 논의하고, 나아가서 사도행전에 기록된 다른 특수 사건들, 가령 사도들이 담대히 말하는 일이나, 믿음의 특별한 힘, 기쁨, 지혜, 방언, 예언, 신유 등을 논의한다. 그러나 바빙크는 이 모든 특수 사역들의 그 첫 사도 시대에 제한된 것으로 본다. “성령을 부으심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 첫 시대에 있었던 것으로서 모든 종류의 특수한 능력과 사역들을 수반하였다.

 

그런데 우리의 주된 관심은 바빙크가 오순절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다. 차영배 교수에 따르면 바빙크는 오순절 사건을 구원 순서의 한 부분으로 제시했다고 한다. 차 교수의 결론은 이런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바빙크가 Magnalia Dei에서나 G.D. (교의학)에서 한결같이 말한 것처럼 구원 서정의 첫사역이라고 함이 정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주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이유는 바빙크가 19장에 이 구절을 “첫째의 사역”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표현 자체는 무엇을 말하는지 확실치 않다. 그 문장 자체를 보자면 이렇다. “높아지신 후에 성부의 우편에서 그리스도가 행하신 사역은 성령을 보내신 일이다. ” 이 문장 자체로서는 바빙크가 여기서 구원 순서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전혀 명시하지는 못한다.

 

차 교수는 Ger. Dog에서 성령의 부으심에 대한 논의가 구원의 순서라는 장의 한 부분이 되고 있는 것을 들어서 그의 견해의 더 굳은 기반을 다지고 있는 거으로 보인다. 이것을 볼 때 바빙크가 성령 선물을 구원의 첫째 부분으로 생각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차 교수는 벌써 바빙크가 오순절을 유일한 사실로 보았다는 인상을 주는 몇 가지 표현들을 인용한 바 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문단 전체를 인용해 보자. “오순절날에 일어난 이 성령을 보내심은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상 유일한 사건이다. 창조와 성육신이 그러한 것처럼 이 일은 단 한 번만 일어났다. 중요성에 있어서 이 사건과 동일하게 성령을 주신 일이 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에도 결코 반복되어질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잉태시에 인간성을 취하시고 그것을 다시 벗어 놓을 수 없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성령도 오순절날에 교회를 그의 거처와 성전으로 택하였고 결코 다시 그것과 분리되지 못한다. 성경은 오순절에 일어난 이 사건들과 특유한 의미를 명백하게 지적하기 위하여 그 사건을 성령의 부으심이라고 말한다(행 2:17, 18, 33, 10:45, 딛 3:6).

 

우리는 여기 나오는 “유일한” 그리고 “단 한 번만” 이란 말을 창조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 그러함과 연결시켜서 이해해야만 한다. 창조와 성육신이 되풀이 될 수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성령의 오심도 반복될 수 없다. 동시에 창조물 자체가 지속적으로 조속하고(이 점은 바빙크가 여기서 강조하지는 않는다.) 또 그리스도가 지속적으로 사람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성령께서 오순절날에 특유하게 오신 일의 결과도 그러하다. 곧 그는 회중 속에 지속적으로 거하신다는 것이다.

 

바빙크에게 있어서 이 성령의 첫 번 오심은 구원 순서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 일은 구원과 적용에 큰 영향을 준다. 이제 우리는 왜 바빙크가 그의 Ger. Dog에서 오순절에 성령 부어 주심을 구원의 순서를 다루는 단락 속에서 논의하고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 사실이 신약의 구원 순서에 있어서는 기본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5 방법론적 요점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관한 사상들의 발전에 대해 이렇게 간략하고도 불완전하게나마 살펴보았으므로 이제 그 교리 자체에로 돌아가보도록 하겠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아야 하겠다. 성경만이 우리의 신앙을 위한 확실한 규법이다.

 

몇 가지 논점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방법론적 문제를 이야기하겠다. 성령으로의 세례의 의미를 논하고자 할 때 특히 사도행전에 나오는 네 가지 사건이 특별한 자리를 가진다. 오순절 사건과 8장에 나오는 사마리아에서 성령을 부어 주신 사실과, 10, 11장에 나오는 고넬료 집안에 성령이 오신 사건, 그리고 19장에 에베소에 있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신 사건 이 네 가지이다. 이어서 따라오는 논의의 핵심은 그 각각의 경우에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이미 믿는 사람들이었느냐, 아니면 그때에 성령의 오심과 함께 그들의 믿음이 시작되었느냐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 사건들에 대한 논의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성령으로서의 세례란 표현의 의미를 결정함에 있어서는 단지 2차적일 뿐이다. 왜냐하면 대부분 사건들이 성령으로서의 세례라고 불리우지 않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언급들은(마 3:11 등) 어떤 특별한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세례가 미래의 어떤 일임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행 1:5에는 오순절 사건을 가리킴이 확실하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전 8장에서 그 세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고넬료 집안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서는, 종종 간과되는 점이지만, 베드로가 한 말은 고넬료와 그 집안이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받았다는 말이 아니라 다만 베드로 자신이 그 집안에 일어난 사건을 보고서, 주님께서 오순절에 임할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관하여 하셨던 말씀을 기억했다는 말이다. 행 11: 16은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고 되어 있다. 이 사건이 바로 동일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지, 그 사건을 가리켜서 성령으로서의 세례라 부른 것은 아니다. 다음으로 행 19장에서도 성령으로서의 세례는 언급되지 않는다. 사실 행 11:16 이후에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구절은 고전 12:13인데 여기서의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표현은 오순절과 같은 구체적인 하나의 사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으로서의 세례란 표현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그것이 쓰여진 문맥과 그리고 오순절 사건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하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것을 행전에 기록되 다른 사건들과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6. 성령으로서의 세례는 중생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성령으로서 세례가 두 가지 방식으로 중생과 동일시된 것을 보았다. 칼빈은 이를 회심의 첫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회개의 전 삶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오늘날에 중생이란 말은 한 사람의 믿음의 시작을 의미하고, 이것은 또 성령의 세례라 불리워지는 형편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생이란 말을 보다 현대적 의미로 사용하겠다. 이때 우리가 대답해야 할 문제는 성경에 나타난 성령으로서의 세례는 과연 중생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을 공관복음과 요한복음, 그리고 사도행전을 통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둔은 Ch.1에서 밝힌 대로 성령으로서의 세례와 중생사역(믿음 생활의 시작)이 같다고 주장한다. 그가 이 주장의 근거로서 다루는 세례의 요한의 세례와 메시야 세례를 비교하는 데서부터 시작해 보자. 이 두 세례 사이의 관계는 무엇일까? 둔((Dunn)은 요한의 세례가 보다 크신 이의 세례를 위한 준비라고 말한다. 그런데 뒤에 가서 그는 아무 이유도 제시하지 않고 표현을 다르게 바꾸고 있다. 요한의 세례는 그리스도의 세례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몇 가지 구절들을 논의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요한 세례의 목적은 예수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고자 함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준비일 뿐이다(1:31). 그리스도의 세례는 물로써가 아니라 성령으로써일 것이다(1:33). 여기에 의도된 뜻은 요한의 물세례가 그리스도의 성령 세례의 그림자요 상징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요한의 세례가 그리스도의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대한 준비이며 상징이라고 하는 표현도 가끔 그의 책에서 찿아볼 수 있다.

 

하지만 준비와 상징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요한의 세례를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대한 준비라 부른다면 이 두 세례의 내용은 다른 것이 된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를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대한 상징이라 할 때, 그 때 두 세례의 내용은 동일한 것이 된다. 그때에는 성령으로서의 세례의 내용이 물세례 속에 미리 제시되었다는 말이 된다.

 

첫째 이유는, 요한 자신이 물로 세례를 주는 세례의 내용이 무엇인지 확실히 밝혔기 때문이다. 이것은 막 1:4이 말하는 것처럼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 였다. 이는 그 세례가 요한이 선도한 회개에 속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리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임을 의미한다.

 

둘째로, 요한의 세례가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대한 상징이라고 말하면 오순절날에 성령이 오시기전까지는 요한의 세례는 다만 공허한 외적 형식일 뿐이라는 말이 된다.

 

칼빈은 이런 반론이 나올 것을 미리 예견한 것 같고, 그래서 오순절 전에 벌써 성령이 사도들에게 주어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오순절날에 성령을 보내심은 그 전에 이미 숨겨진 채로 행해진 일을 시각화하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구약의 택한 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들은 중생의 은혜를 받지 못했을까? 또 이 주석은 행 1:5-8과도 분명히 대치된다. 거기서 성령님의 오심은 교회에의 새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지 이미 일어날 일을 단순히 가시화한 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물로의 세례와 성령으로의 세례는 연관성이 있음은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 관계가 상징과 실체의 관계가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성령으로의 세례가 중생을 의미한다는 견해는 공관 복음서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예언에 근거될 수 없다.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중생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신학자 플루르는 그 근거로서 성령으로서 세례에 죄 사함의 요소가 포함된다는 사실을 든다. 그에 의하면, 세례라는 말 자체가, 성령으로서 세례에 죄 사함의 깨끗케 함이란 요소를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도록 말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 주다” 라는 말 자체가 깨끗케 함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말은 “담그다” 라는 뜻이고, 요한의 의식과 그리스도인 성례에 사용되긴 했지만 비유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었다(막 10:39, 눅 12:50, 고전 15:29). 깨끗케 함의 사상이 있느냐 없느냐는 문맥이 결정할 일이다.

 

플르르(Floor)는 자신의 견해를 논증하기 위해 요한복음으로부터 두 구절을 인용해서 성령으로서의 세례와 깨끗케 함 사이에 연관성을 세울 수 있겠다고 한다. 그 하나는 요 1:29-34인데, 여기서 구조 분석 방법을 사용하여 이런 결론을 도출해 낸다. “이 본문의 교차 대칭 구조로부터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어린양과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 모두가 서로 상통한다는 것과, 또한 그리스도의 이중적 사역, 곧 죄를 제거함과 성령으로 세례 주심 사이에 연관이 있음을 동시에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평이하게 읽어볼 때에, 하나님의 어린양이란 예수님의 이름과 죄의 제거 사이에 관계가 있음은 분명하다(29절). 또한 요한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 사이에도 관계가 있다(33절). 그러나 죄의 제거와 성령으로서의 세례 사이에는 연관성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 물론 두 가지 동일 인물의 사역이기 때문에 서로 관련된 것임은 틀임없다. 그러나 그 관계는 죄의 용서가 성령으로서의 세례의 한 부분이 되게 하는 그런 관계는 결코 아니다.

 

플루르가 제시하는 다른 본문은 요 20:22이다. 여기서 ‘성령으로서의 세례’ 란 말이 나오지 않고 오순절 사건도 언급되지 않는다. 또 본문은 성령을 받는 것이 죄 사함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그 결과로 죄를 사하거나 그대로 둘 권위를 갖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제 행전 1-2장에 기록된 성령으로서의 세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본문이 중생과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동일시하고 있을까? 오순절날에 성령이 그리스도의 제자들 위에 부어졌다는 사실은 오순절파의 편에서는 하나의 강한 논증의 무기가 되어 왔다. 물론 제자들이 이 경험 이전에도 중생한 신자들이었음은 틀림없다. 그런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면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적어도 중생과 같은 것일 수는 없음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Dunn은 이런 오순절파의 논증을 반박하면서 그는 오순절 사건이 다른 차원의 사건에 속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많은 이유들을 제시한다. 그 사건이 그리스도의 사역의 클라이막스이며, 새 시대의 계시이며, 새 언약의 시작이며, 교회 시대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Dunn은 여기서 갑자기 그의 어조를 바꾼다. 행 11:17,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를 인용하면서 결론짓기를 오순절에 가서야 제자들이 정말로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말한다. “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믿음의 위탁의 순간에 그들의 신앙이 그리스도인의 위탁의 수준에 이르게 된 오순절에야, 그들이 신약의 의미 그대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에야 이루어졌다.”

 

이 본문의 주석적 문제도 있다. ‘믿을 때에’ 란 분사가 어떤 단어와 관련시키면 되겠느냐는 문제이다. 문법적으로 볼 때 ‘믿을 때에’ 란 ‘우리’나 ‘그들’과 연관될 수 있다. 보통 주석서들에는 그 분사가 ‘그들’과 ‘우리’ 모두에 걸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동의하지 못한다. 여기서 이 말은 ‘그들’에만 관계된다고 생각한다. 설혹 우리가 행 11:17이 오순절에 가서야 제자들이 믿었다는 사실을 말한다고 인정하더라도 성령의 오심은 그들의 믿음과 결과이지 그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사역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제 전체적으로 우리가 결론 지을 수 있는 것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 즉 믿음과 성령으로서의 세례 사이에 연관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신약에 사용된 대로의 성령으로서의 세례, 사람을 믿도록 중생시키는 성령 사역과 동일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7.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제 2 단계의 시작인 가?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둘째 국면의 시작이라는 주장은 오순절파가 믿고 있는 생각이다. 그 파의 신학자 중 한 사람인 자르비스(E J Jarvis)를 인용해 보면, “때로 그것(성령으로서의 세례)을 기다림 후에 받았다. 때로는 안수하는 중에 받았다. 때로는 완전히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항상 그 일은 회심 후에 일어났는데 이는 그것이 독특하고 분리된 경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것이 성경에 언급되고 있는 성령으로서의 세례에도 적용되는 것일까?

 

복음서들을 볼 때는 이 세례와 믿음의 순간 사이에 아무 직접적인 언급도 없다. 행전 2장의 사건에서는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회심 후에 얼마 지나서 따라온 일임이 일반적으로 지적된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몇 날이 못 되어 너희가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당시에 믿는 자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마 16:16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이 그들의 믿음을 증거해 줄 뿐만 아니라 특별히 부활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그들에게 보이시고 자신의 삶과 고난에 관하여 성경을 설명하시고 그들로 이해하게 하셨다(눅 24:36-47). 또한 행 1:15-26에 나오는 베드로와 120 문도들의 행동도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보여 준다(22, 24절).

 

이것들을 볼 때 쉽게 이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겠다. 곧 제자들의 경우에 있어서 그들의 회심 후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 세례가 따라 왔다면 이는 어느 곳에서나 신자들을 위한 일반 규칙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오순절 사건이 특별한 사건임은 부정하지 못할 일이다.

 

① 구약에서 오순절 성령 부어 주심은 결정적 사건으로 미리 예언 되었다(예, 사 44:3, 겔 39:29, 2:28 이하).

 

② 베드로는 이 사건을 설명하면서 이 일이 마지막 날에 있는 일임을 덧붙인다(행 2:170. 즉 교회의 마지막 시대가 오순절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③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더 이상 그들과 함께 못할 줄 알았을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약속되었다(요 14, 16장). 그래서 성령의 오심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기간에 속한 것이다.

 

④ 이 사건이 얼마나 결정적인 사건이었던지 누가는 바로 이를 기점으로 그의 두 책을 나누었다. 행 1:1,2에서 그가 그의 앞의 책을 말하면서,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고 했다. 여기서 그는 그의 두 번째 책이 예수님께서 계속적으로 행하신 일에 대한 것임을 나타낸다. 그 중에 그의 성령 보내심은 가장 첫 번째의 일이다.

 

오순절은 베드로가 행전 2장의 그의 설교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점진적인 구속 역사에 속하는 사건이다. 그가 설명하는 것은 그들이 중생한 사람으로서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지금 어떻게 둘째 축복을 받게 되었느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집중된 것으로서 그 분이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시고(22절), 죽임을 당하시고(23절), 하나님에 의해 부활하신 것을(23-32절) 말한다. 그 후에 그는 하나님에 의해 높여지고 성령을 받아(33절) 마침내 이 성령을 부어 주셨다. 이것을 볼 때 오순절 사건은 구속사적 사건들의 계열에 속하며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고난, 죽음, 부활, 성령을 부어 주심이 중심이다.

 

물론 이 말은 성령을 부어 주심이 개별적 신자의 신앙과 생활에 무관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모든 사건들이 다 개별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다시 죽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은 바로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결정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물론 되풀이 될 필요는 없다. 오순절에 성령을 부으심도 우리 신앙과 생활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오순절의 이 사건이 되풀이 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행 2:1-4에 묘사된 일들을 오늘날 성령의 반복적인 부으심의 모델로 삼을 권리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순절의 사건을 오늘날 신자들이 생활에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 행 1:5에 따르면 오순절날에 성령을 부으심은 성령으로서의 세례와 동일한 것이다. 그래서 앞에 제시한 질문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도 있다. 즉 어떻게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오늘날 신자들의 생활에 연결시킬 수 있겠는가?

 

이 질문은 베드로 자신이 그 사이의 연관성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쉽게 대답할 수 있다. 오순절날에 그의 말을 듣는 무리들에게 베드로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8). 바로 다음 절에서 베드로는 이것이 약속이라 하고 그 약속은 유대인들과 그 자녀들과 하나님이 부르시는 모든 먼데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라 한다.

 

때때로 이 본문은 무리들이 성령을 그리스도께로부터 회심 후에 두 번째 단계로 받을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처럼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기서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말한다.

 

그렇다면 신자 한 사람이 그 약속된 성령을 받고 다른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다는 견해는 비성경적이다.

 

하지만 그 약속이 예수님을 믿게 된 후에 따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는가? 그런 주석은 행 2:38과 잘 맞지 않는다. 베드로는 회개와 세례를 명령했다가 성령을 약속했다. 그래서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 성령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행 2:17, 18에서 인용된 요엘의 에언서에서도 표현되고 있다. 예언의 말씀대로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성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행 2:38, 39은 오순절날부터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성령을 받는다는 것을 일반적인 규칙으로 제시한다.

 

이렇게 우리는 행전 2장의 동일한 본문 속에서 성령의 처음 오심이라는 구속적 사건과(2:1-4) 더불어 그 사건의 결과로서 개개인의 개별적 구원 역사에 대해 동시에 말하는 것을(2:38, 39) 보게 된다.

 

우리는 이를 고전 12:13과 연관시킬 수 있다. “우리가 ...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제시하는 것의 근거로서 회중 속에 있는 동일성, 곧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이 본문이 주는 의미처럼 모든 성도들은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과거에 받았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을 회피하기 위하여 몇 가지 시도들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토레이(R. A. Torrey)는 이런 일이 교회의 가장 정상적 상태이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교회가 이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잊어버린 이후로는 이 일이 더 이상 당연한 일로 여겨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그 온갖 분열과 약점이 있었서 모델 교회로 불리워질 수 없다. 또 성경은 성령의 이런 사역이 신자의 과실 때문에 없어지리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

 

또 다른 회피의 방식은 여기서 의미하는 세례가 성령으로서의 세례인 반면, 행전의 ‘세례는 성령의 세례’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문법적 근거가 없다. 여기 사용된 표현은 행 1:5에 사용된 것과 똑같다. 만일 구분이 있다면 행 1:5의 말이 첫 번째요 결정적이며 구속사적인 성령을 부으심에 적용된 반면, 고전 12:13에서는 그 동일한 성령을 구원사적으로 받음을 말한다.

 

모든 신자가 성령을 가진다는 사실은 롬 8:9, 15이하, 고전 12:13, 엡 2:22 등과 같은 본문에서 확실해진다. 그리고 이 성령이 믿음의 순간에 온다는 사실이 행 11:17, 갈 3:14, 엡 1:13 등에 나타난다.

 

이제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성령으로서의 세례는 성경 어느 곳에서도 개개인 신자가 그의 신앙과 생활의 제 2 단계를 시작하는 표시적 체험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세례의 결과로서 교회가 능력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 행 1:5-8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 세례는 사람 속에 믿음이 생기는 것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그러나 그 말이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그가 복음의 부름에 부응하도록 하는 그런 성령의 사역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세례 주다란 말은 오순절날부터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의 교회를 위한 선물로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령님을 거주시켜 주심을 의미한다. 이 일은 믿음의 즉각적인 결과인 것이다.

 

8. 성령으로서의 세례와 능력

 

이 성령이 오신 결과가 여러 가지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예를 들면 성령의 내주를 말할 수 있고, 그때 구약에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 사이에 거하시던 방법과는 다름을 지적할 수 있다. 또는 성령을 보증, 곧 미래의 선물들에 대한 보증이라 강조할 수도 있다(고전 1:22, 5:5, 엡 1:14). 아브라함에게 대해서는 그의 아들로, 또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는 그 땅으로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는 성령이, 그들이 장차 받을 유업에 대한 보증이 된다. 또는 성령 사역의 결과로서 일어나는 공동체를 강조할 수 있겠다. 이러한 통일에 대한 강조는 고전 12-14장에서 볼 수 있는데 거기서 성령으로서의 세례는 바로 이 통일의 근거로 작용한다(고전 12:13, 참고, 엡 4:3).

 

또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계명 중 많은 부분이 신약 시대에는 폐하여졌다. 여러 나라에서 사는 교회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고 성령님의 인도 아래서 살아야 한다(롬 14:17, 18; 엡 5:18). 위에서 언급된 주제들은 사실 깊은 연구를 필요로 한다. 다만 여기서는 성령 오심의 결과로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능력을 받을 것이라는 행 1:5-8의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때때로 오늘날의 교회가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나약하다고 주장하는 일이 있다. 성경은 이 세례가 능력을 준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만일 교회가 그 신앙이나 활동에서 나약해 있는 것을 보게 된다면 이는 교회가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받지 못함 때문이 아닌가? 그러므로 교회는 그것을 받기 위하여 온 힘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생각할 때 두 가지 실수가 생긴다. 첫째는 오순절 사건을 하나님의 점진적 구속 사역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개인적 차원의 사건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행전 1, 2장을 올바로 주석하면, 오순절 이후로 교회는 단 한 순간도 성령으로서의 세례가 없이 존재했던 적이 없음을 보여 준다.

 

두 번째 실수는 위와 같은 추론의 전제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교회가 오순절 전에는 약한 교회요 무질서하고 능력도 없고 방향도 잃어 버린 교회였다고 생각하는데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승천 후 오순절이 되기까지 교회의 사정을 보여 주는 본문들을 읽어 보면 우리는 이런 연약함을 찾아보지 못한다. 눅 24:52, 53을 보면, 그리스도의 승천을 보고 제자들이 돌아올 때 기쁨이 충만했다고 한다. 또 그들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한다. 기쁨이나 찬양은 약함의 증거들이 아니다. 행 1:14은 또 그들이 그동안에 기도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러는 사이에 제자들이 취한 한 행동을 기록한다. 곧 유다를 대신할 한 사람을 뽑는 일이다. 이 일은 사도들의 지도 아래 이루어졌고 성경을 좇아 행해졌다. 그 사건은 행전 1장의 교회가 미래를 위해 준비하였음을 나타낸다. 그 어디에도 신앙이나 활동의 면에서 연약함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성령이 왜 능력을 주는 사역과 함께 보내어졌을까? 본문 자체가 이 점을 분명히 해 준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루살렘에과 모든 유대와 사마리아와 세상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행 1:8). 선교의 범위가 넓혀져야 하고, 교회는 이스라엘 민족의 한계를 깨고 나와야 했다. 이는 아브라함 이래로 한 나라에 제한 되어 왔던 교회로서는 완전히 새로운 단계인 것이다. 민족 교회로부터 온 세상 나라들에서 모인 교회로의 전이(轉移)가 바로 행전에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실수를 지적할 것이 있다. 본문은 제자들의 말이 능력있게 될 것을 말하지 않는다. 또 그들 자신이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리라는 의미도 아니다. 행 1:5-8에 나타난 성령으로의 세례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성령으로 능력을 줌이 교회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증인이 되도록 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 점은 요엘의 예언에도 강조되었고 오순절에서 성취되었다. 그 예언의 내용은 여러 권능의 사람이 일어나고 모든 사람이 그의 말을 듣고 또 그가 많은 사람들을 확신시킬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 예언의 의미는 교회 안의 모든 사람이 나이나 성별이나 사회적 신분에 관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 점은 우연히도 요 7:38, 39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생수의 강이 그의 속에서 흘러나리라.”는 말씀과 일치한다. 이 말씀은 생수가 신자의 속에 있을 것을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흘러 나올 것을 강조한다. 오순절 이후로는 믿는 자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생수의 근원이 된다.

 

행전 1, 2장에 강조된 대로 오순절 사건의 새로운 면은 그 때 이후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구약 시대처럼 예언자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능력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공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교회가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받은 결과로서 복음은 구라파와 미국과 아시아에 전달되었다. 한국에서는 선교사들이 100년 전부터 복음을 전해 왔던 사실도 교회가 성령으로서의 세례를 받은 일의 구체적 증명이다.

 

9. 몇 가지의 구체적 결과

 

이상의 이론적 논리에 이어서 이에 따른 몇 가지 실체적 결과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1. 한국 교회는 크리스마스를 통해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고, 또 고난 주간과 부활절에는 그의 고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념한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오순절날에 성령을 부으심에 대해서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한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오순절날이 부활절 후 제 50일 되는 날에 기념되고 있다. 한국의 교회도 이 성령의 부으심을 특별한 기념 행사와 함께 지킨다면 좋은 발전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할 수 있는 일은, 오순절이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 사건과 같은 계열에 속하고 이 모든 사건들이 오늘날 교회를 위하여서 결정적인 사건들임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2. 성령을 받기 위하여 특별한 모임을 실행해야 하느냐는 문제이다. 성경에서 단 한 번만 성령의 오심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찾아보게 된다(눅 24:48, 행 1:4).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성령을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장소에서 주시기 원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때와 장소에 대한 지시를 주었고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몇 날을 기다려야 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오심을 신자들이 기다려야 한다는 명령을 일반화 한다면 우리가 신자들을 예루살렘에 가도록 재촉해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행전 1장에서 오순절파가 실행하는 것과 같은 기다리는 모임을 찾아보지 못한다. 또는 그리스도께서 그런 기도를 명하신 사실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120문도)은 물론 기도했다(행 1:14). 하지만 자신을 비우라든지 안수하라는 명령은 행전 1장엔 전혀 없다. 행전 1장 이후에도 기다리는 모임과 같은 것을 찾아보지 못한다. 8:16이나 19:에서 안수하는 일을 볼 수는 있지만 기다리는 모임의 특성과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오히려 행전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성령이 모든 신자들에게 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때에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어떤 준비 모임을 주장하는 자들은 사도들과 오늘날 목사들과의 사이에 있는 근본적 차이를 무시한다. 그러므로 기다리는 모임과 같은 것에는 쐐기를 박아야 한다.

 

3. 개혁 운동은 그리스도가 그의 신약 교회를 세우실 때 고려하였던 수준에 맞추어 살아가도록 격려해야 하겠다. 그 수준은 곧 성령을 받은 회중이다.

 

물론 성령의 보다 많은 사역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배제하지는 않는다. 바울은 엡 1:17에서 이미 성령을 받은(1:13)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도록 기도한다. 또 그는 엡 3:16에서 에베소 교인들이 성령으로 인해 강건해지도록 기도한다. 또 오순절이 있기 전에 그리스도는 성령을 구하는 기도를 말씀하신다(눅 11:13).

 

기도뿐만 아니라 행위도 필요한데 이는 성령의 사역이 계속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일은 살전 5:19에 금지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 이 말은 뒷 구절과 연결되는데, 그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을 받아야만 한다는 말이다. 엡 4:30에서도 금지가 나온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이는 에베소 교인들의 언어 생활(29절 : 무릇 더러운 말, 31절 :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과 관계된 말씀이다. 즉 신자는 나쁜 말을 통해서 성령을 근심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또 성령의 지속적 사역에 대하여 적극적인 명령도 찾을 수 있다. 갈 5:16에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하였는데 이 말은 22절 이하에서 보여진 대로 성령의 열매를 실제상으로 의미한다. 엡 5:18은 “성령으로 충만되라” 고 명한다. 이 명령이 실제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5:22-23), 부모와 자녀 관계(6:1-4),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6:5-9) 등을 들어서 바울이 설명한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우리는 능력을 주는 성령을 제 2 차적 단계로 받들고 준비하라는 명령을 찾아보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가 살펴본 금지와 명령들을 회중이 성령으로 채워진 회중의 수준에서 살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엡 1:17처럼 지식에서 자라가야 함을 의미하며 엡 3:17처럼 그리스도가 그들의 마음속에 거하게 하고, 하나님이 주신바 하나님과 서로를 향한 사랑의 계명에 순종해야 할 것을 의미한다. 성경이 강조하는, 성령의 회중 속에서의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이야기하고 또 그 분과 그의 사역을 이해하는 일에 자라가고, 그리고 구체적으로 순종하는 일을 강조하고 있다.

 

4. 요사이 한국에서 교회가 약화되었다는 불평이 많이 들리고 있다. 그 이유로서 성령님이 없거나 성령님이 주시는 특별한 힘이 없다는 것들이 지적되고 있다. 그래서 그 해결책은 한국 교회가 잃어버린 성령의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신자 개인으로서, 그리고 신자 모두가 교회로서 성령을 다시 받기 위하여 기도하고 금식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연구한 결과는 그 해결책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고백하는 모든 신자는 성령을 받았고 성령님의 힘으로 복음을 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성령이 완전히 안 계신다면 교회는 교회의 이름을 갖지 못한 죽은 교회일 뿐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문제 해결을 위한 이러한 해결책은 비성경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너무 쉬운 것이다. 문제의 해결책은 성령의 힘이 없기 때문에 성령을 다시 기다려야 할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이미 계시므로 신자로서, 또 교회로서 성령으로 살아가는 데 있다. 계시록에 나오는 약한 교회들에게 예수께서는 그들이 다시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회개하고 완전한 사랑과 순종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계 2:5-16, 24-25, 3:3,19).

 

기독교 생활은 다른 사람들과 살아가는 일상 생활에다가 그저 성경 읽고 예배 드리는 것만 첨가한 그런 생활이 아니다. 기독교 생활은 성경을 읽는 것과 예배가 생활의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키는 생활이다. 엡 5,6장에 나오는 예를 든다면, 기독교인 부부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서로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들은 엡 5:18의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또 기독교 회사가 다나지 일요일의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고용주나 근로자 사이에서 또 근로자 상호간에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들 역시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약화된다면 그 이유는 교회가 교회답게 살지 않고 세속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세상적인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사는 것을 다시 배워야 한다. 한국 신자들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령을 받았고 굳이 표현하자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도 사용할 수 있다. 이제 온 세계의 신자와 마찬가지로 한국 신자의 책임은 그 성령님의 인도 아래 일상 생활에서 말과 행동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 아래 살 때 직면하는 사회의 많은 반대 속에서도 이렇게 기독교적 말과 행동이 진실되게 나타난다면 성령님의 능력은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개혁 운동의 전망은 우리 태도에 따라서 여러 가지가 될 수 있다. 한국 교회는 오순절파가 닦아 놓은 길을 따라 발전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소위 말하는 제 2 의 축복을 강조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받도록 독촉하며 기대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교회는 개혁적 방향으로 발전해 나아갈 수도 있다. 그때에는 강조점이 제 2 의 축복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자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에 강조가 주어질 것이다. 그때에 회중은 성령으로 채워진 회중의 수준에 근거하여 믿음과 기도와 전도와 행동안에 살도록 독려를 받을 것이다.

 

나는 한국의 개혁 운동이 이 후자의 지향점을 택하도록 간절히 바라고 기도한다.

 

 

 

첨부파일 성령으로의 세례와 신자의 체험(고재수 지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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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로이드존스 (Martyn Lloyd-Jones)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 한글판 제1권 1장을 새로 번역한 것입니다. 복음주의 개혁신앙의 진수를 설파하는 최고의 설교라고 믿습니다. 기독교문서선교회에서 출판한 한글판의 번역에 많은 오류가 있어서 다시 한글로 옮겨보았습니다. 졸역이지만 한글 번역판 보다는 원래 뜻을 바르게 전한다고 생각합니다. 최대한 직역을 했고 번역원칙을 끝에 밝혔습니다. 번역이라는 것이 번역자의 언어에 담긴 뜻으로 왜곡될 가능성이 많으므로, 혹 잘못된 뜻으로 전달되는 내용은 저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해한 뜻을 밝히기 위해 주를 달았습니다. 웹상에 돌아다니는 동일한 내용은 원래 제가 번역하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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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초 다지기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이 율법 아래 사는 사람에게 말한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려는(1)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2) 뿐입니다.
(롬3:19,20 새번역)

바울이 로마에 사는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인 로마서는 성서의 어떤 책이나 단락보다도 기독교 교회의 역사와 그 지도자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위대한 성 어거스틴(Saint Augustine)이 회심하게된 것도 로마서 13장의 마지막 몇 구절들을 읽으면서였습니다. 어거스틴은 5세기 이래 교회의 역사 속에 우뚝 솟아 있는 인물입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자신을 얽어매던 속박과 굴레에서 해방되어 종교 개혁의 지도자가 된 것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가르친 로마서 1장 17절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 진리의 조명을 받으면서부터였습니다. 루터가 해석한 바로 그 교리는 ‘베드포드의 불후의 땜장이’ 존 번연(John Bunyan)을 회심케 했고, 그 결과 번연은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과 <넘치는 은혜(Grace Abounding)>를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마찬 가지로 1738년 5월 24일 밤에, 존 웨슬리(John Wesley)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게’된 것도 한 남자가 읽는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들으면서였습니다. 그 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증언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 서신서의 내용을 면밀히 연구해야 하는 이유를 더 이상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로마서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바울 사도는 1장 16,17절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도에 대한 기쁜 소식(3)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서(4) 전체의 대 주제이기도 하지만, 로마서에서 만큼 분명하게 진술되고 완벽한 방식으로 논의된 곳은 없습니다. 바로 이곳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함’(5)이라는 결정적이고도 필수불가결한 교리가, 성경 전체를 통털어서 가장 철저하고 광범위하게 다루어져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3장 19절부터 5장 11절까지 자세히 설명하는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함’이 우리가 알아보게 될 주제입니다.

   이것이 가르치는 바는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함’은 무엇을 뜻합니까? 우리가 상세한 주해(註解)를 해나감에 따라 그것에 대한 해답이 점차 분명해질 것입니다만, 우선 간단한 정의(定義)로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이 교리는 인간의 구원과, 하나님과 화목(和睦 롬5:10)하는 방도(方道)를 하나님께서 고안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그가 행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복된 주님이시요 구세주이신 그의 아들 안에서 당신께서 행하신 일을 기초로 해서, 복음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기꺼이 용서하시며 면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서, 신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혀서”(6) 하나님의 목전에서(7) 올바르고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전가(轉嫁)”(8)되어 “우리 앞으로 달아놓여진”(9)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혀졌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허용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19절에서 표현한 바대로, 우리는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존전에서 의로운 백성으로 “판정”(10)을 받았습니다.

   자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함’의 핵심 교리입니다. 이제는 이것이 오직 성경으로부터만 나온 것임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성경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교리는 사람의 이론이나 사상이 아니고, 인간의 어떤 철학과도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성경 안에서 ‘발견하는’ 그 무엇입니다. 기독교 내의 어떤 분파들이 - 적당한 때 그 이름들을 밝히겠지만 - 가르치는 교리들은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에 이것을 분명히 강조해야 합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 교리들은 전통[전승(傳乘)]으로부터 유도되었거나,(11) 그들에게만 주어진 추가적인 계시로부터 나왔다고 말합니다.(12)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인 우리의 입장은 가르침과 교리들을 하나하나 모두 말씀으로 테스트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점이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가 오직 성경으로부터만 나온 것임을 보여야 하는 필수적인 이유입니다.

   그러나 당장 야기되는 또 다른 문제점이 있습니다. 만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단지 교회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성경 그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교리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의 위치가 바로 그러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의해 인도함을 받거나 성경에 자신을 굴복시키지 않고, 인간의 사고나 사상, 즉 철학의 가르침에 지배를 받습니다. 요즘의 대다수 사람들이 그런 입장을 취하며, 불행하게도 그리스도인의 교회라 불리는 곳 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는 궁극적인 구속력을 갖는 것이 하나님과 진리에 대한 인간의 사상인 철학이지 계시된 (말씀인) 성경이 아닙니다.

     또 다른 반대 의견을 다루어 봅시다. 이 ‘이신칭의’의 교리가 단지 전형적 바리새인인 바울의 교리라고 하며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러므로 로마서는 전형적인 랍비류의(13) 가르침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요즘은 이러한 반대가 그렇게 많이 들리지 않습니다만, 20세기 초반에는 ‘역사적 예수’(14)의가르침을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신학에 상반적으로 대조시키는 아이디어가 유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견해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단순한 ‘예수의 복음’과 ‘사랑의 복음’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무적이고 법률적인 유대인 바울이 등장해서 - 그가  법률적인 사고를 가진 것은 분명합니다만 -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이 복음에 그의 법률적인 사상과 견해를 슬그머니 써 넣은 것은 엄청난 재난이었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그들은 바울이 기독교 메세지의 본질를 변조하여 무언가 다른 것으로 바꾸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논란에 대한 간단한 대답은, 이 칭의에 관한 메시지가 성경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발견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사도 자신이 아주 명료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3:21) 다른 말로 하면, 바울은 이신칭의의 교리가 구약 전체에 걸쳐 예시되었고 암시와 싹으로 발견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교리는 실로 성서 전체의 줄기찬 메세지로서, 구약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어거스틴의 말에 동의할 것입니다: “신약은 구약 속에 감추어져 있으며, 구약은 신약 속에서 만개(滿開)되어 분명히 드러났다.” 또는 “신약은 구약 속에 잠재(潛在)해 있고, 구약은 신약에서 명백(明白)하게 나타났다.” 이는 물론 위의 사실에 대한 간단명료한 진술입니다.

   동일한 관점이 우리 주님 자신의 가르침에서도 발견됩니다. 주님이 왜 세상에 오셨습니까? 그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눅19:10) 주님이 오신 이유가 바로 이러합니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에 관한 비유(눅18:9-14)가 전하는 주님의 가르침은, 다른 많은 비유들과 가르침 속에서도 그랬듯이, 바로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당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 이점은 특히 더 분명해집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20:28)

   그러므로 이 교리가 랍비적이고 법률적인 유대인인 바울에게서만 나오는 특이한 것으로 치부한다면 그것은 한가한 공상에 불과합니다. 그 공상은 사실들의 테스트에 견뎌낼 재간이 없습니다. 히브리서에서도 동일한 가르침을 대하게 됩니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 그리고 계시록 등 성경의 많은 곳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의 공통된 메세지입니다. 서문에서 이유를 밝혔듯이(15) 로마서 1장16절에서 시작하여 3장 20절에서 끝나는 위대한 진술들을 여기서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지만, 그 논지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거기서 사도는 3장 21절의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고백과 뒤따라 나오는 영광스러운 일들의 기초를 다지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의 논증(論證)을 요약해 봅시다. 그는 대담하고 강한 어조로 단언하며 시작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물론 그 말은 그가 복음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사도는 말하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부정적인 표현법을 빌리는 곡언법(曲言法 litotes)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법은 강조점을 부각시키는 데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특별히 아주 영국적인 방식이기도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합니다.”라는 말은 “나는 그 안에서 자랑스럽습니다” “나는 그 안에서 크게 기뻐합니다” “나는 생각만 해도 오싹해질 정도로 자랑스럽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로마에 가서 황제에게든 노예에게든 그 누구에게든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롬1:14). 그는 왜 그렇게 느꼈습니까? 왜냐하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6,17)

   이것이 바울서신 전체의 주제이자, 특히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교리를 길고 상세하게 설명한 본 단원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복음이 자랑스럽습니다. 왜냐구요?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확실하며 실패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사람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언제나 바울의 표현기술에 흥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접근방식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바울서신의 구조에는 변하지 않는 매력이 있습니다. 저는 그의 서신을 읽을 때마다 항상 음악 작품, 예를 들어 교향악을 생각해 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보통 교향악의 서두에는 서곡이 있는데, 여기에 시도동기(示導動機)(16)들이 암시적으로 던져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다음에 작곡자는 그것들을 하나 하나 풀며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다 끝낸 다음에는 전체를 하나의 장엄한 대단원과 클라이맥스 안으로 응집시킵니다.

   바울이 여기서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이 두 구절에서 그가 왜 그렇게 복음이 자랑스러우며 로마에 가서 전도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말함으로써 중심 테마에 대한 실마리를 던집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다른 철학 이론을 제시하고자 로마에 가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철학자가 아닙니다. 또한 유토피아에 대한 청사진을 가지고 가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의 메세지는 사람에게서 비롯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포괄적인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1:16) 더구나, 바로 이것이, 오직 이것만이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확실하고 안전한 구원의 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즉시 이런 질문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럼 그런 것이 도대체 왜 필요하단 말인가?” 바로 이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1장18절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1장18절에서부터 3장 20절까지 다루려고 하는 주제를 대하게 됩니다. 바울은 인간의 구원과 관련하여 두겹으로 된(17) 문제가 하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오직 이 복음만이 인간의 그 두겹으로 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사실이 그를 그렇게 자랑스럽고 전율케 한다고 말합니다. 그 두겹의 한 쪽은,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하여 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 쪽은, “인간이 실재로 불경건하고 불의한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사도가 이 두겹의 문제를 제시한 순서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이 순서가 지켜지지 않고 위반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도 고의적으로 자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불경건’을 먼저 놓은 것에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불의’는 단지 불경건에 따라오는 것일 뿐이라는 그의 생각에 주목하십시오. 그에게 있어 크고 중요한 것은 바로 ‘불경건’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관점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교회 내에서의 현대적 접근방식이, 물론 세상에서도 그렇지만, 진짜 문제는 불의(不義)함이며 오직 그것 뿐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불경건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중차대한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며, 특히 사회 속에서의 인간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가장 큰 필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해의 문제이며, 이것이 교회가 담당해야할 과업이라고 합니다. 세계는 인종 문제, 이념 문제, 정치 문제로 갈기갈기 찢어지고 나누어져 있습니다. 세계는 여러 장막, 즉 철의 장막, 죽의 장막 등으로 나누어져 있으니 인간 사이의 화해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들은 교회가 담당해야 할 위대한 과업이 바로 이것이라고 합니다. 거기서 그들은 시작하며 거기서 끝납니다. 어떤 이는 인간의 가장  큰 필요는(18) ‘자비로운 이웃’을 발견하는 것이며,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바로 그것이라고 요약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바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질병과 연약함을 치료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죄를 치료받아야할 필요가 있는 아픔, 즉 질병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인간에 관한,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가 첫째로 놓았던 불경건, 즉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태도의 본질입니다. 저는 한 두해 전 이에 관한 주목할 만한 실례를 접했습니다. 스코틀랜드 글라스고우(Glasgow)시에서 종교회의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종교회의를 개최할 때마다 늘 그렇듯이, 어떤 알 수 없는 이유 때문에 개회식에 시장이 참석하도록 초청되었습니다. 고위 인사들을, 그들이 크리스챤이든 아니든, 항상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례대로 글라스고우의 시장은 회의에서 연설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는 전형적인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참으로 학식있는 신학자들입니다.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입니다. 나는 공무에 종사하는 사람이며, 당신들의 신학이나 그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실 나는 신학에는 흥미도 없으며, 당신들이 신학을 하느라고 시간을 엄청나게 낭비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고는 계속 말했습니다. “내가 알고 싶어하는 바는 어떻게 하면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들로부터 바로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위대한 신학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알고 싶고, 또 보통사람들이 알고자 하는 바는 어떻게 하면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시고 바울 사도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구원에 관한 교리 전체에 대한 완전한 무지(19)를 드러냈습니다. 루터가 ‘은혜로운 하나님’이라고 했지 ‘은혜로운 이웃’이라고 하지 않은 바와 같이, 인간의 첫번째 필요는 하나님을 알며 은혜로운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필요이자 요청입니다. 불경건은 불의보다 우선합니다. 왜냐하면 불의는 불경건의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의 모든 비극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세상은 병의 증상들만을 약으로 처방하고 있으며, 질병 자체는 잊고 있습니다. 특별히 나타난 증상들만을 취급할 뿐이지, 문제의 근본적인 뿌리 자체는 다루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그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는 것입니다. 모든 정치적, 사회적, 교육적 활동들을 하면서 진짜 본질적인 문제는 회피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일 가는 계명이 무엇이냐는 서기관의 물음에, “첫째는 이것이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다음 ‘둘째는’ (글라스고우의 시장이 첫 번째로 놓았던) “네 이웃을 네 자신과(20) 같이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막12:28-31).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결코 ‘그의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그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이 당신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하는 한, 당신은 당신 자신처럼 당신의 이웃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이유로 미루어 ‘불경건’이라는 사실에 대한 세상의 철저한 무관심은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기만을 초래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도가 출발한 지점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제일로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문제입니다. 그곳이 출발점입니다. 이점을 자주 진술한다고 해서 지나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복음 전도는 결코 주 예수 그리스도에서 시작되지 않고, 하나님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복음 전도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노를 떠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외에는 어떤 다른 의미나 뜻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예수께 나오라고’ 초대할 때, 예수를 친구로서나 몸을 치료하는 자로서나 약간의 평안을 주는 자 등으로 소개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구세주’이십니다. 그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구원을 필요로 합니까? 정답은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들의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하여” 내리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것이 이미 나타난 바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나타난 바 된 사실로 인해서 바울은 그가 믿게된 그 복음을 기뻐하며, 또한 그 복음을 선포할 특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에게는 이 교리가 혐오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현대인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모든 개념을 마음으로부터 싫어합니다. 그는 규율을 싫어하고 법률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요즘 세상이 이모양인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현대인의 비극입니다. 현대인은 이러한 기본적인 원리로부터 떠났으며, 그래서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을 그는 거부합니다.
           
 현대인은 공의(公義)와 의로움, 그리고 심판과 같은 사상을 거부합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가정과 학교와 대학과 거리, 그리고 자기가 속한 여러 사회 영역이 무법천지임을 보고 놀랍니다. 그것은 현대인이 전반적 법률 개념을 유기(遺棄)하고 미워하며 혐오한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기인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임무는 이 점을 설파하는 것이며, 바로 우리의 메세지에서 핵심되는 부분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진노’라고 해서 변덕스럽거나 절제되지 않은 감정을 뜻한다든지, 제멋대로 성을 내거나 자제력을 상실함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바로 죄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혐오를 뜻합니다.

 이 점은 성경의 어느 곳에나 나타나 있습니다. 십계명의 의미가 이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십계명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나타내는 한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21)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룩해야 할 이유는 죄가 우리를 해하기 때문이거나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거룩해야 할 이유는, 죄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며,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지 않고는 못 배기십니다. 만일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박국이 말한 대로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십니다.”(22)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십니다.”(23) 하나님은 거룩하시며,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도 거룩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교회가 - 때로는 복음주의 진영에 속한 교회 까지도 - 잘못된 길로 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잊혀져 버렸습니다. 그것이 현 상황의 비극입니다. 그들은 ‘예수’에게 기도하며, ‘예수’로 시작하여 ‘예수’로 끝납니다. 그들은 결코 하나님 아버지, 즉 우리와 관련된 거룩한 하나님이요, 온전한 의와 절대적 거룩함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 당신 자신과 당신의 거룩한 성품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나타내셨던 하나님, 그 아버지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구약 전체를 통해서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위대한 메세지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복되신 주님 자신의 가르침 속에서도 동일한 강조점을 발견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에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이 주님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24)하고 물었을 때, 그래 좋다.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 가르쳐 주리라. 너희가 기도할 때에 이렇게 말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누군가 하나님을 ‘아빠(Dad)’ 또는 ‘사랑하는 아빠(Dear Dad)’로 부르며 기도를 시작하지 않게 하기 위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아는 모든 아버지들과는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십니다. 요즘 슬며시 침투해 유행하는 듯한 가볍고 친숙한 하나님의 이미지는  우리 주님이 직접 가르치신 것과는 아주 이질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그와 다른 타자(他者)(25)이십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인간에게 어떻게 기도할 것인지 가르쳐 주신 기도 방법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인 그 자신이 - 기도하실 때에 하나님을 부르신 방식은 “거룩하신 아버지”(26)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성육신(成肉身)한 사랑의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참 표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주님은 이런 방도와 태도로써 하나님을 대하셨습니다.

 사도의 전체적인 입장은 이러합니다. 그는 그가 전파한 이 복음을 자랑스러워 하는데, 그 이유는 이 복음만이 유일하게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문제를 다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복음이 이것을 할 수 없으면 복음이 아니며, 그 속에는 기쁜 소식을 담은 메세지도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일차적인 목적이며 의도입니다. 복음의 목적은 우리에게 어떤 것을 주체적으로 하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의 자리에 놓아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하여 이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의 진노는 어디에서 나타났습니까? 구약에서 입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진노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에덴 동산에서 나타났습니다. 여기 완전하게 창조된 사람이 있고, 똑같이 완전한 배필이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완벽한 창조의 최고 절정이었으며, 하나님은 그 남자와 그 여자를 낙원에 두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고, 그에게 반역하였으며, 유혹하는 자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죄에 대한 진노를 품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동산에서 그들을 쫓아내셨으며, 그들이 죄의 대가로 받을 결과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놀랍게 표명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거기에서 시작되고, 거기서부터 계속하여 나타납니다. 구약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총애하시는 자’로 보이는 듯하거나 또는 실제로 좋아하신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범죄하였을 때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징계하셨는가를 관찰하시기 바랍니다. 모세 같은 사람을 보십시오. 모세는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런데도 모세의 불순종함으로 인해 그는 끝내 약속된 땅에 들어갈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표명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27)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점을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변명도 할 여지가 없습니다. 몰랐다고 핑계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인간이 죄를 범하면 그는 반드시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며 응분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특히 현 시점에서 다드(C.H. Dodd) 교수와 같은 학자가 자신의 로마서 주석에서(28) 이 점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합니다. 다드 교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믿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노’의 진정한 의미가, 죄는 항상 스스로 자기 징계를 동반함을 뜻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만일 당신의 손가락을 불 속에 집어 넣으면 당신은 고통을 느낄 것이고 또한 당신 자신을 태우게 될 것입니다. 다드 교수는 죄의 즉각적인 결과에 덧붙여서, 하나님께서 ‘닥쳐올 징벌’(29)로써 징계할 것을 할당해 놓으셨음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어떤 경우에는 이미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이며, 그것은 표명(表明)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로마서의 다음 부분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그 방도(方道)에 대하여 한가지 특별한 진술을 합니다. 그것은 1장 24절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타락한](30)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1:24-28) 그러고나서 사도는 사람들이 범하고 있는 그 가공할 죄목들을 열거합니다.(31) 그러나 우리는 사도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있는 가를 조심스럽게 주목해야 합니다. 사도는 그 가공할 죄목들이 바로 인간의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증거이자 계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지 고대의 역사에 불과할까요? 아닙니다. 현대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기 현대사회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실감합니까? 사람들이 흔히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네들은 20세기 두 차례의 가공할 세계 대전을 어떻게 설명할 것입니까? 오늘날 부도덕과 악덕이 얼마나 만연하고 있습니까? 또한 성적 타락과 끔찍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자행되고 있습니까? 20세기와 오늘날의 생활상에 대한 설명은, 상실한 심령대로 인간을 내버려 두신 하나님의 진노의 또 다른 양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사도는 역사 속에서 이 일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그의 세대 이전에도 그랬었다고 말합니다. 역사에 대한 참된 관점을 취했을 때 발견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귀 기울이기를 거부하며 하나님의 법을 반대하고, 하나님 없이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호소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예언자들(messengers)을 보내어 그들을 억제하려고 시도하십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여전히 그들의 악한 길을 고수하고 반역을 계속하면, 사도가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어 자기들 스스로 맘대로 하도록 간섭치 않을 때가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 좋다. 만일 너희가 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장담한다면 그렇게 해 보아라. 네가 어떻게 사는가 보자.”하고 사실상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세상의 도덕적 상태에 대한 설명은 단순합니다. 지난 백년 이상 영리하고 고도의 지적 교양을 갖춘 인류는 하나님을 등져 왔는데, 이는 ‘불경건’의 죄목에 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까지도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좁은 소견을 따라 그들 나름의 한 신(神)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일차적으로 불경건의 죄를 지었고, 불의가 자동적으로 뒤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런 상태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세상 형편에 대한 유일한 설명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간섭을 접으시고 인간들이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신 것입니다.

 성서적인 가르침은, 인간이 죄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 대해 어떤 한계를(32) 설정하고 그것을 금지시키셨습니다.(33) 만일 하나님께서 통치체제나 다른 제도로써 죄를 억제시키지 않으셨다면, 세상은 오래 전에 곪아 터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에 관한 금지 명령을 내려 놓으시고,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주기적으로, 죄를 향한 당신의 진노를 표명하시려고, 당신께서 그 모든 죄를 미워하고 혐오한다는 것을 나타내시려고, 당신의 제지(制止)를 철회하시고 인간을 그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도록 내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없는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 당신은 그 결과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는 교리를 소개하는 사도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 ‘타락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시는데, 그가 벽에다 자신의 머리를 부딪히게 하여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겸손해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사도의 위대한 주장입니다. 이것이 소위 우리가 말하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제가 이미 강조하였지만, 다시 한번 강조할 것은 ‘불경건’과 ‘불의’의 순서, 즉 불경건이 불의보다 우선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망각하지 맙시다. 소요리 문답(Shorter Catechism) 제1문을 보면,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을 등지고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 좋아합니다. 인간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금 바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피조물인 인간의 산물인 과학과 기술을 “영원히 찬양을 받으실 조물주보다 더” 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실한 마음대로 버림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그 원래적(原來的) 질병(34)으로부터 나오는 증상에 불과합니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이 문제를 자세하게 풀어가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방인에 관한 모든 것, 즉 그들의 실패와 비참한 몰락에 대해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방인에게 궁극적으로 유죄 판결이 내렸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물론 이방인 모두가 이 모든 죄에 대해 유죄는 아닙니다. 이방인 가운데는 선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그리스 철학자들은 삶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했고, 가르침을 통해 인간성을 고양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런 일에까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건 아니겠지요?”라고 묻기도 합니다. 이에 대한 답변은, 그 목적이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순종의 자리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닌 이상,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은 로마서 2장 4절에서 이런 식으로 대답했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을 멸시하느뇨?” 그 사람이 얼마나 도덕적이고 이상적이며 자비심이 많은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죄악과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의미로서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의 도덕성은 하나님의 고려 대상에 들지 못하는 무용지물(無用之物)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알도록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데 사용해야 할 것을 자신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는 데 오용(誤用)한 것입니다. 이런 상세한 논쟁을 계속할 필요는 없지만, 1장에서 이미 사도는 자연(自然)에 ‘분명히 보여 알려진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20절)이 인간을 하나님께로 되돌아오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흔적과 자국을 자연에 남겨 놓으셨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롬1:20) 그러므로 인간이 무엇을 발견하든지, 얼마나 많은 진보를 하든지, 또 아무리 사회복지가 향상되고 불법과 부정이 줄어들어도, 그 모든 것이 그를 회개케 하여 하나님을 떠난 그의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자백케 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 앞에서는 전혀 가치가 없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에 대해 그렇게 언급하고 나서 이제 유대인들에게로 시선을 돌립니다. 이것이 로마서 2장의 주요 주제입니다. 어쨋든 유대인은 특별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그것을 알았는데, 그의 비극은 자신의 특별한 위치에만 전적으로 의존한 데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고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천사의 전갈을 통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명시적고 외형적인 형태의 율법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거기에 더해서 유대인은 할례의 표(標)를 가졌습니다. 유대인들의 모든 문제는 율법과 할례가 자기들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준다고 생각한 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단순히 율법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대인들의 생각은 완전한 비극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바울은 2장 25-29절에서 그들에게 그런 생각이 어리석음을 보여줍니다.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다시 말하자면,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35)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고 나서 아주 명쾌하게,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하며 그의 주된 사상 가운데 하나를 진술합니다. 바울은 계속 말합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35)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바울은 이런 식으로 할례에 의존하는 유대인의 모든 사례를 뒤엎었습니다. 동시에 바울은 자기가 영국이나 미국에서 태어났으므로 그리스도인이고, 일본이나 인도같은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은 이교도라고 생각하는 모든 견해를 뒤엎었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할례에 대한 논증에 근거하여 뒤엎어졌습니다. “나의 부모가 그리스도인이었으니 나도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국적이나 인간적 공동체에 대한 모든 의존은 이 할례에 관한 논증에 의하여 완전히 배제됩니다.

 그러면 율법에 관해서는 어떻습니까? 바울은 율법도 논합니다. 결정적인 진술은 2장 13절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바울은 로마서 10장 5절에서 다시 율법으로 돌아옵니다. “모세는 율법에 근거한 의를 두고 기록하기를”(36) “율법을 행한 사람은 그것으로 살 것이다”(37)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뜻하는 바는, 율법이 모세를 통해 주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만일 네가 율법을 지킬 수 있다면 그것이 너를 구원할 것이다. 율법의 조항들을 행하는 자는 그것들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율법을 소유하거나, 듣거나, 익히 알고 있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유대인은 그러한 허울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율법이 주어지지 않아서 율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들은 무법(無法)하고 개들이며, 하나님이 없고 언약과는 무관해서 아무 것도 아니며 소망이 없는 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을 가졌으며 율법과 친숙해 있다.” 유대인들은 그것이 자기들을 구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도는 여기서 그게 아니라고 그들에게 증명해 보입니다. 2장 17절에서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 줍니다. 또한 오늘날 자신의 도덕성에 의지하는 모든 비기독교인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이는 그들이 스스로를 대변(代辯)할 때 말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보혈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것을 반대하며 조롱합니다. 왜냐구요?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선을 행하고 있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들은 착하고 고상한 사람들이며,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선생들입니다. 그러나 사도의 질문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38)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39)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저는 이렇게 요약해 보겠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특히 그들의 종교적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의 문제점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도 자신도 회심하기 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율법에 대한 전문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들이 그 율법에 대해 무지하다는(19) 데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렇습니까? 여기 몇가지 예를 나열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단순히 율법을 소유하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은 자기가 속한 도(都)나 지방의 법률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 법률을 위반해서 법정에 서게 되면, 법률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벌을 면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소유하며 안다는 것에 의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준행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둘째로 유대인들은 율법 조문의 대부분, 즉 주요 부분을 지키는 이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관점을 가진 자들을 향해 지적합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2:10) 율법의 99%를 지켰다고 말하는 것은 소용없는 짓입니다. 만일 1%를 지키지 못했다면 당신은 전 율법을 어긴 것이며, 또한 율법을 범한 자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율법 조문에는 전문가이고 정확하지만 성령을 따르는 데는 그렇지 못하다는 데 있습니다.(39) 바로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산상 설교에서 아주 예리하게 지적하셨던 내용입니다. 자부심 많은 바리새인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겠지요. “저는 한번도 살인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잠깐!” 그 때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는 바울이 로마서 2장에서 제시한 질문들에 대한 실제적 주해(註解)이기도 합니다. “네가 결코 살인죄를 범한 적이 없다고 말하는데, 나는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유없이(40) 자기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 아래 놓이게 되고, 누구든지 자기 형제를 ‘라가’(41)라고 부르는 자는 공회에 서게 되고, 누구든지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42) 만일 당신이 당신의 형제를 얼간이라고 욕한다면 당신은 마음에 그 형제를 살인한 것이고, 율법의 판단으로는(43)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주님은 간통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은 간통과 같은 특정한 혐의에 대해 무고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여기에도 동일한 탐조등을 비추며 말씀하십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44) 바리새인은 “나는 간음한 적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 조문과 드러난 행동만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45)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라고 바울이 호응합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46) 율법 조문과 성령의 차이가(35) 여기에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성령 안에서 죄책감을 느낀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간통죄를 범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점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모든 난제는 바울이 여기서 보여주는 바로 이 점에서 발생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나중에 지적하지만, 또 다른 가장 중요한 주안점은 ‘탐심(貪心)’이라는 가공할 문제입니다. 탐심은 7장에서 충분히 다루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바울이나 바리새인들은 그때까지 탐심의 의미를 깨달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7:7) 유대인의 비극은 그가 어떤 일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한 자기는 무고(無辜)하다고 생각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여주셨듯이, 그리고 바울이 깨닫게 되었듯이, 이런 류의 영역에서는 탐심이란 실제로 범하는 것만큼 고약하고 괘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 그 (탐심의) 욕정은 행위만큼이나 저주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유대인은 율법의 참된 의미를 결코 깨달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율법을 소유했다는 것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로마서 3장에서 바울은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묻는 것을 상상합니다. “그러면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아무런 득이 없고 할례도 전혀 유익(47)이 없다는 말인가요?” 바울은 여기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다.”(48) 유대인은 특별한 위치에 놓여 있었고, 그러한 사실로부터 유익을 얻었음이 분명합니다. 이방인들과는 달리 그에게는 명확히 쓰여진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바울이 2장 14,15절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방인들은 명백히 쓰여진 율법을 받지 못하였지만, 이 율법은 인간인 그들의 마음 안에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 논거(論據)는 다음과 같습니다. 온 인류는 하나님의 법을 인식(認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모든 인류의 마음 속에 새겨져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졌던 유리한 점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율법을 외형적으로 주셨으며, 금상첨화격으로 그것을 명확한 글로써 기록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큰 잇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잇점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었습니까? 3장 20절까지의 나머지 부분은, 인간의 본래적(本來的) 타락(49)으로 인해서 그 잇점이 그들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음을 증명합니다.

 이제 우리는 3장 19, 20절의 놀라운 결론과 요약에 도달했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함’이라는 교리의 핵심되는 서두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서론이 도입된다는 면에서 이 구절은 다른 어떤 구절 보다 중요합니다.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이 율법 아래 사는 사람에게 말한 것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려는(1)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2) 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논증 전체의 위대한 요약입니다. 바울은 1장 16절에서 시작한 말을 여기에서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왜냐구요?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1:16) 그는 복음이 모든 이에게 해당된다고 말함으로써 시작해서, 여기에서(50) “온 세상”이라는 말로 결말을 맺습니다. 그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법 아래 있다는 것을 내내 주장해 왔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이는, 이방인은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있고, 유대인에게는 분명하게 쓰여져서 주어졌다는 사실뿐입니다. 이 차이는 여러가지 면에서 볼 때 크고 중요한 차이이지만, 이것이 궁극적인 차이를 만들지는 전혀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전부 이해한다고 생각했고 그들의 지식을 뽐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율법이 너에게 실제로 말하는 것을 네가 깨달을 때, 그 결과가 너의 모든 입을 막게 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당신은 침묵하게 됩니다. 침묵하게 되지 않는 한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당신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당신이 입을 다물고 있는지를 보면 압니다. 비그리스도인의 문제는 그가 계속 떠든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것도 모르고 저것도 몰라. 어쨋든 나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지.” 그는 여전히 지껄이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그가 입을 다물고 있는가 아닌가 보면 됩니다. 저는 복음의 이런 솔직성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입을 재갈물려서 침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해 쉬지 않고 떠들며, 하나님을 비평하며, 하나님이 이것을 해야하고 저것은 하면 안 된다고 거드름을 피우며, “왜 하나님은 이러저러한 일들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셨는가?”라고 질문합니다. 당신이 입을 다물고, 말하기를 중단하며, 말문이 막혀서 아무 할 말이 없어지기 전에는, 당신은 아직 그리스도인으로서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주장을 내걸고 당신의 모든 의를 내보이십시오. 그러나 율법이 말을 하면 그 모든 것은 시들어져 사라져 버리고, ‘더러운 옷’(51)과 ‘배설물’(52)이 되어, 당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이 하는 일입니다.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나중에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 한사람의 예외도 없이 -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3:23) 스스로 옳다는 당신 안의 바리새인, 속죄(Atonement)가 필요하지 않다는 현대적 도덕인(道德人)은 앞으로 나와서, 당신이 행한 것과 행하지 않은 것을 말해 보십시오. 그러면 율법은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렀느뇨?” 당신은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영광에 이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come short)”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나 있습니다.” 당신은 이런 사실들을 행위의 관점을 위주로 해서 평가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당신의 관계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당신의 처지라는 관점에서 평가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결론은 이렇습니다. 모든 문제는 율법의 기능과 목적에 대한 착오 때문에 일어납니다. 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던 것입니까? 제가 말하는 율법은 우리들 마음에 쓰여진 법과 모세를 통해 주어진 명시적인 율법을 뜻합니다. 첫번째 답은,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그릇된 가정(假定)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잘못된 가정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며 “이제 너희가 해야 할 일은 율법을 지키는 것 뿐이고, 그러면 너희는 내 앞에서 구원을 받는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그런 연유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죄 안에 있는 인간이 그것을 지키기란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8장 3,4절에서 왜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없는지 말합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완벽하게 진술된 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율법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려고 율법을 주신게 결코 아닙니다.

 또 다른 오류는, 복음주의 진영에서 유행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이 구원 문제를 두고 우선적으로 율법을 시도해 보셨지만 율법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음을 발견하셨고, 그래서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으로 십자가에 관한 전체 개념을 도입하셨다는 것입니다. 뒷궁리 끝에 나온 것이 십자가라니! 얼마나 비성경적인 착상입니까! 이것이 성서를 여러 조각들과 처방들로 나누어서, 성서 모든 부분들의 본질적 통일성을 파악하는 데는 실패한 가르침의 전형적 특성입니다.

 “아닙니다” 사도는 여기서 왜 율법이 주어졌나를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롬3:20 새번역)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2)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의 가공할 성격을 인식하게 하려 함입니다.

 사도는 이 점을 여러 곳에서 다시 언급합니다. 가장 명백한 진술들 중 하나는 5장 20절 입니다. “율법이 끼어 들어온 것은”(53) - 이것이 사도가 쓴 바로 그 문구입니다. 왜 율법이 들어왔습니까? “범죄를 더하게 하려고” 왔습니다. 율법은 범죄에 대항하려고 오지 않았고 범죄를 ‘풍부하게’하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더하여 말하기를, “하나님 감사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습니다”라고 합니다. 또 7장 7절에서 다시 말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사도는 7장 5절부터 율법의 주된 효용(效用)이 죄를 더욱 많게 하는 것이라고 말해 오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the motions of sin; 이는 ‘율법에 의해서 활성화 된’(54)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바울은 말하기를, 죄에 대해 경고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 많이 짓게 하는 그런 비참한 상태에 우리가 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7장 7절에서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이것이 바로 율법의 기능입니다.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롬7:8,9) 다시 말해서 율법의 온 기능은 죄를 정의(定義)하며 죄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우리 마음에 있으나 그것이 충분히 분명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명시적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정의(定義)하시고(55), 율법에다 밑줄 쳐서 분명히 강조하시고, 기록된 법으로서 명백하게 나타내셔서 유대인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율법에는 또 다른 기능이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위대한 진술 중의 하나인데, 7장 13절에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바로 이것이 율법이 수행하는 바입니다. 율법은 죄를 정확히 지적하고, 정의하고, 죄가 숨어있던 곳에서 끄집어 내어 그 엄청난 죄된 성질을 들추어내기 위하여 주어졌습니다. 사람 안에 숨겨진 죄가 어느 정도 깊은가 하면, 인간에게 도움을 주어야 할 바로 그 하나님의 법이 그 사람을 더 나쁘게 만들어 그를 죄악으로 몰아넣어 버리는 죽음의 도구로 전락하게 할 정도로 깊습니다. 율법 자체가 수행하는 그 작용 만큼 죄의 엄청난 죄성(罪性)을 그런 식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한번 율법의 참 뜻을 이해하고 나면, 그는 자기의 본성이 더럽고(56) 부끄러움(57)을 알게 됩니다. 그는 자기가 ‘악한 불신앙의 마음’, 탐욕하는 마음, 더럽고 수치스러운 마음을 가졌음을 깨닫습니다. “나는 부끄럽고 죄로 가득찼노라!” 율법 이외에 어떤 것도 인간에게 이것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결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주어지지 않았고, 다만 구세주에게로 데려다 주는 ‘몽학선생’(58)으로서 주어졌습니다. 율법의 전체 목적과 의도는 인간이 결코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가 율법을 한번 이해해서 율법의 영적인 의미와 내용을 알게 되면, 그는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아직 미완성입니다. 우리 주님은 율법이 가르치는 것이 단지 술 먹지 말고, 담배 피우지 말고, 간통하지 말고, 이것저것을 하지 말라는 것만이 아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율법의 요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20) 사랑하라”(막12:30,31) 입니다. 어느 누가 그렇게 행해서 율법을 지켰습니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 말하는 바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우리의 철저한 무능력과 완전한 절망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고 해방하며,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고 영원토록 보호하는, 오직 유일하신[獨生하신] 그분이십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이렇게 선포하는 복음을 바울은 기뻐하고 자랑스러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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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이드 존스가 사용한 <KJV>에는 “and all the world may become guilty before God.”으로 쓰였다. <개역한글>과 <개역개정>에서는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로 쓰였고, <새번역>에는 “유죄로 드러내시려는 것”으로 하였다.

2. <한글>과 <개정>에서는 “죄를 깨달음”, <NRSV>에서는 “for through the law comes the knowledge of sin”, <NIV> 에서는 “we become conscious of sin”, 로이드 존스가 사용하는 <KJV>에서는 “Therefore by the deeds of the law there shall no flesh be justified in his sight: for by the law [is] the knowledge of sin.”으로 되어 있다. 참고로 [is]는 KJV의 번역자가 원문에 대응되는 단어나 구가 없지만 해석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할 경우 써 넣은 것이다. 보통 이탤릭체로 쓰여있다.

3. 복음 the good news; the gospel; ευαγγελιον (evangelion)

4. Bible 성서; Scripture 성경

5. ‘Justification by faith’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함’으로서 動詞的으로 번역하였고, 특히 by를 ‘말미암는’으로 옮겼다. 로마서 강해 한글판 제7권 20-23장에서 저자가 로마서 1장 16, 17절을 강해한 내용의 뜻을 존중하였고, 특히 제1권 9장에 나온 ‘말미암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따랐다. 1권 4장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있다. 우리말의 고어체를 사용해서 원문이 갖는 심오한 뜻을 독자가 스스로 탐구할 여지를 남기고 싶었다.

동사 δικαιοω는 ‘to make righteous’를 뜻한다 (IB, p394). 마지막의 σ가 형용사형으로부터 제거되었다. 바울이 말하는 'Justification'는 죄의 권세로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는 역사이고, 우리를 죄의 심판에서 변제하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다. 하나님이 "의로운 자"를 변호하는(vindicate) 행위를 하시는 것이지, 그들을 의로운 행위자 또는 성품의 소유자로 만드셨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칭의'라고 할 때, ‘赦免 또는 放免(acquittal)’을 말하는 것이지 ‘實際로 義로움really righteous’을 뜻하지 않는다. 칭의는 새로운 性質[性品 character]이 주어짐을 뜻하지 않고, 우선적으로 하나의 새로운 신분(status)을 받게됨을 뜻한다. 칭의는 그 사람을 하나님과 한 새로운 관계에 들어서게 하는 법적인 절차이다.

6. 롬13:14; 욥29:14

7. in the sight of God 신12:28; 갈3:11 “하나님 앞에서”

8. Impute - to reckon or count 롬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시32:1 인용

9. put to our account 몬1:18  <새번역>

10. <새번역>에는 로이드 존스의 어휘 ‘constituted (καθιστημι)’가 잘 반영되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11. 교부들의 傳乘; 카톨릭 교회의 전통적 해석

12. 예를 들자면, 몰몬교의 교주 Joseph Smith가 받았다는 계시가 이에 해당한다.

13. Rabbi - 유대인 율법학자

14. 가장 중요한 저서로는, Albert Schweitzer著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A Critical Study of its Progress from Reimarus to Wrede (1906년 독일어 원저 출간) 참조.

15. 로이드 존스는 롬3:20절부터 첫 강해를 시작하는 이유를 이 책의 서문에서 밝혔다.

16. Leitmotifs - 악곡의 중심 테마

17. Twofold - 단일한 대상이 하나 이상의 결정적으로 상이한 개념이나 성질을 갖음. "The office of a clergyman is twofold; public preaching and private influence"- R. W. Emerson; 수학과 물리학의 manifold 참조.

18. Need; 요청 postulat - 칸트의 용어로서, 신의 존재와 인간의 도덕적 행위의 근원을 이야기할 때 사용했다. 로이드 존스는 ‘필요’라는 뜻으로 격하시키면서 사용한 듯 하다.

19. Ignorant; 레4:2, 13, 22, 27; 레5:15, 18등에서 율법[토라;말씀]에 대한 몰이해를 지칭할 때 사용되는 중요한 신학용어이다.

20. <한글>에서 ‘몸’이라고 번역된 yourself가 <개정>에서 올바로 고쳐졌다.

21. 레11:45

22. 합1:13

23. 요일1:5

24. 눅11:1

25. Other; 全的他者 das numinose - Rudolf Otto가 The Idea of the Holly에서 말한 것을 연상시킨다.

26. 요17:11에서 “Holy Father”로서 한 번 사용되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27. 겔18:4

28. C.H. Dodd, The Epistle of Paul to the Romans (MNTC; 8th ed. 1941)

29. 마3:7 <새번역>; <한글> <개정>의 “임박한 진노”는 미래 시제로 쓰여진 원문과 어감상 차이가 있다.

30. 타락한, reprobate mind <새번역, KJV>

31. 롬1:29-31에 열거된 죄악들을 지칭한다.

32. Boundary; ‘에덴 동산’의 ‘동산 garden’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gan은 ‘that is fenced; boundaries; hedge’라는 뜻이 있다.

33. 창2:16, 17

34. that original disease ‘원죄’를 암시하는 듯 하다.

35. the letter 율법 조문; 롬2:29 <한글>은 ‘의문(儀文)’으로 번역했으나 <개정>과 <새번역>에서는 ‘율법 조문’이라 옮겼다. the spirit은 각각 ‘신령’ <한글> ‘영’ <개정> ‘성령’ <새번역>이라 하였다.

36. 롬10:5上 <새번역>; <한글> <개정>은 문장이 혼합되어 있다. 저자는 KJV에서와 같이 전반부와 후반부를 각각 인용하는데, 그 이유는 하반부가 레위기에서 인용된 말씀이기 때문이다.

37. 레18:5

38. 사52:5 LXX(칠십인역)에서 인용되었다.; 겔36:22

39. 롬2:21-24

40. without a cause; KJV에만 들어있는 표현으로 한글 번역이나 영역판에 없다.

41. 유대인들의 욕설. 아람어로서 ‘얼간이’라는 뜻

42. 마5:22

43. in the sight of the Law; in the sight of God 하나님의 목전에, 하나님 앞에

44. 마5:27; 출20:14이나 신5:18에서 인용하였다.

45. 마5:28

46. 롬2:21,22

47. 유익 profit ωφελεω; 막8:36, 요6:63, 롬2:25, 고전13:3, 고전14:6, 히4:2, 히13:9 등에서 쓰이는 바와 같이, 흔히 통용되는 한자 ‘有益’의 뜻과는 다소 어감과 뜻이 다른 듯하다.

48. 롬3:2 They were committed the oracles of God. <KJV>

49. innate depravity

50. 롬3:19

51. 사64: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52. dung 빌3:8

53. <새번역> came in by the side; 로이드 존스가 원문 παρεισηλθεν을 풀이했다. ‘가입한’ <개역 한글>

54. energized by the Law

55. 定罪라는 용어는 ‘Condemn’에 해당함

56. Foulness <KJV>; 막9:25 the foul spirit ‘더러운 귀신’ <개정> ‘악한 귀신’ <새번역> 서로 다른 원문으로부터 번역된 듯 하다. 계18:2 foul spirit ‘더러운 영’

57. Vileness 수치스러움 <KJV>; 롬1:26 vile affection ‘부끄러운 욕심’; 빌3:21 vile body ‘낮은 몸’ <개정> ‘비천한 몸’ <새번역>; 약2:2 vile raiment ‘남루한 옷’

58. Schoolmaster; 갈3:24 ‘가정교사’<새번역>; Disciplinarian <NRSV> 어린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그 아이의 행동에 대해 심하게 벌하기도 하는 노예 신분의 가정교사 <NOAB>


((번역 원칙))

*문자적 번역을 통해 형식의 동등성을 유지하며 직역하려고 최대한 노력했고, 의미를 살려 번역할 때는 말투나 어감을 가감하기 위하여 의역했습니다.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강해는 “강해” 즉 설교라는 형식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한 문장 한 문장, 단어 하나 하나를 음미해 볼 만한 “책”이기도 합니다.
*한글 성서 인용은 <개역 개정>을 사용했습니다. 저자가 사용하는 흠정역(King James Version)과 <개역 한글>이 현저히 다를 경우, <개정>과 <새번역>을 동시에 참고했습니다.
*저자가 인용표 ‘ ’를 사용한 단어나 구의 경우, 성서(KJV)에서 인용된 것은 한글 <개정>의 어휘로 옮겼습니다. 어떤 인용구는 저자가 출처를 밝혔지만 그렇지 아니한 경우도 많은데, 명백한 인용문의 경우는 번역자의 주를 달았습니다.
*‘justification by faith’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함’으로서 동사적으로 번역하였고, 특히 by를 ‘말미암는’으로 옮겼습니다. 로마서 강해 한글판 제7권 제20-23장에서 로이드 존스가 로마서 1장 16,17절을 강해한 뜻을 존중하였고, 특히 제1권 9장의 ‘말미암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따랐습니다. 1권 4장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우리말의 고어체를 사용해서 원문이 갖는 심오한 뜻을 독자가 스스로 탐구할 여지를 남기고 싶었습니다.
*로이드 존스가 사용한 말이 넓은 의미에서 관용구를 따온 것이거나 신학적 개념을 함축하고 있는 경우라고 판단될 때, 번역자의 주를  달았습니다.
*‘바울’, ‘사도’ 또는 ‘사도 바울’의 경우, 영문 원서를 따라 그대로 옮겼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사도’를 흔히 사용했는데, 사도 바울의 권위를 강조하는 적절한 호칭입니다. 그는 제7권 4장에 ‘사도’란 말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Bible은 ‘성서’, Scripture는 ‘성경’으로 옮겼습니다.
*로이드 존스가 man, men을 혼합해서 사용한 경우, ‘사람’ ‘사람들’ ‘인간’을 문맥에 따라 혼합하여 옮겼습니다.
*인물의 이름 표기는 통용되는 발음을 따랐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존칭을 한글로 표시할 때, 원래 로마서 강해가 설교였다는 것을 고려하였습니다.


번역/Thomas

신앙과 행위 - 제네바교회 교리문답>

[참된 신앙]
[18주일]
111문: 이제 우리는 신앙이 설 수 있는 기초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이로부터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겠군요?
답: 그렇습니다. 참된 신앙이란 성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구원자 되심을 그분의 복음으로 친히 가르쳐 주신 대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성령의 은혜를 통해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아는 것입니다.

112문: 우리는 이 신앙을 우리 자신의 힘을 통해서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얻는 것입니까?
답: 성경에서는 이 신앙이 오직 성령님의 특별한 선물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분명한 것입니...다.

113문: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십시오.
답: 우리의 이해력은 너무도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적 지혜를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의심에 빠지거나 자기 자신이나 여러 가지 피조물에 대한 잘못된 신뢰에로 완전히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밝히셔서(조명) 우리가 그 어떤 방법으로 도무지 깨달을 수 없는 이 신앙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즉 성령님께서는 구원의 약속들을 우리의 마음속에 확증해 주시고 인쳐주심으로써 우리를 강한 확신 속에 굳게 새워 주십니다. (엡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 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14문: 우리가 이런 신앙을 소유하게 될 때 이 신앙으로부터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답: 이 신앙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해 줌으로써 우리로 영생을 얻게 해 줍니다.

115문: 뭐라고요? 인간은 거룩한 삶과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때 이런 선행을 통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답: 만일 어떤 완벽한 사람이 발견된다면 우리는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가련한 죄인들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대답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 외의 다른 곳에 우리의 의로움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롬3:10-11)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19주일]
116문: 우리의 모든 행위들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 혜택을 입힐 수 있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정죄를 받았다는 것입니까?
답: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행하는 모든 일들은 죄악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들을 모두 정죄하십니다.
(시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117문: 당신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혜로 우리를 받아주시기 전에는 마치 악한 나무가 악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가 죄만 지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답: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의 행위들이 외적으로 볼 때에는 아름다운 모습을 띠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들은 정녕 악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감찰하고 계시는 우리의 마음이 부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18문: 그러면 당신은 우리가 우리의 공로와 노력을 통해서 하나님의 호감을 사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도록 할 수가 없고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하나님의 진노를 부추기는 일밖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답: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는 전혀 고려해 넣지 않으시고 오직 당신의 순전한 긍휼과 자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기쁘게 용납하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돌리시며, 우리의 죄악을 조금도 우리에게 돌리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딛3:5-7)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19문: 그러면 당신은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답: 우리가 복음의 약속들을 믿고, 이를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신뢰로써 받아들일 때 이 ‘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20문: 당신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서 이 '의'를 우리에게 제시한 것처럼 이 '의'를 받는 수단까지(도구)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즉 우리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 이 '의'를 받는다고 말입니다.
답: 그렇습니다.

[행위]
[20주일]
121문: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받아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에 의하여 행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답: 맞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행위들 자체가 지니고 있는 가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관대하심으로 이 행위들을 용납해 주시는 것입니다.

122문: 뭐라고요? 이 행위들이 성령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용납되어질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까?
답: 그렇습니다. 우리의 육신 가운데에는 언제나 어떤 결함이 항상 있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들은 이것에 더럽혀 지는 것입니다.

123문: 그러면 이 행위들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게 만드는 수단은 무엇입니까?
답: 그것은 신앙 안에서 행해질 때 그렇게 됩니다. 즉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엄격하게 심사치 않으시고 모든 불완전함과 오점을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을 가지고 덮어 주시며 그 행위를 온전한 것으로 간주하시며 받아들여 주신다는 것을 마음에 확실히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124문: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이후에는 그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말입니까? 또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게 되어 구원이나 은혜를 얻는다는 말입니까?
답: 아닙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입니다. 성경에는 살아 있는 사람은 어떤 자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시도록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진 빚을 계산하지 않으시도록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시143:2)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125문: 그러면 성도들의 모든 선한 행위는 무익하다는 말입니까.
답: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천국에서 이 선행들에 대해 보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무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보답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써 사랑해 주신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어 두시되 기억하지 아니하신다는 전적인 자비와 은총으로 되는 것이지 우리의 공로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126문: 그러나 선한 행위를 하지 않고도 의롭게 인정받는다고 믿을 수 있습니까?
답: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요 그분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단순히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시키고 자기의 무죄하신 공로를 통하여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구출해 내시고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해 주시겠다고만 약속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도록 해서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가도록 해주시겠다고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127문: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선행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게을러지지 않게 해 줄 뿐만 아니라, 선행들이 만들어지는 근원이 되기도 한다는 말입니까?
답: 그렇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복음의 교리는 신앙과 회개의 두 가지가 모두 포함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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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개혁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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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바울의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의 이신칭의에 대한 비판 - 톰 라이트(Tom Wright)와 존 칼빈(John Calvin)의 비교를 중심으로 이은선 교수(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원장)

I. 들어가는 말

바울의 새 관점은 1960년대 스텐달(Krister Stendahl)의 연구에 의해 시작되어 점차로 동조자들이 확대되어 왔다. 1970년대에 샌더스(E. P. Sanders)에 의해 언약적 율법주의가 주장되어 종교개혁자들의 바울 서신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 이후 제임스 던(James Dunn)과 헤이스(Richard B. Hays)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에 의해 수용되었으며,1) 그와 함께 개혁주의자이며 복음주의자인 톰 라이트가 수용하...여 대중적인 전파자가 되었다.

특히 영국 성공회에서 개혁주의자이며 복음주의자로 알려진 톰 라이트가 바울의 새 관점을 수용하여 다양한 저술들을 출판하면서 이 견해는 개신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인 이신칭의 교리를 위태롭게 만들어 왔다. 학문 활동에 그치고 있는 다른 학자들과 달리 톰 라이트는 목회자로서 자신의 견해에 대해 규범성을 주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2) 미국의 개혁주의 교단들 안에서도 지지자들을 확보해 가고 있다.3) 그래서 미국에서는 존 파이퍼가 목회자의 입장에서 톰 라이트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비판하였고,4) 미국의 정통장로교회5)와 미장로교회(PCA)6) 등에서 적극적으로 바울의 새관점을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새 관점이 개신교회에 미치는 영향력의 심각성을 자각한 한국교회도 2010년에 접어들어 톰 라이트의 견해를 중심으로 바울의 새 관점에 대한 다양한 학술대회가 개최되어 학문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7)

지금까지의 바울의 새관점에 대한 논의는 신약학자들을 중심으로 주경학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본인은 바울의 새관점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에 대한 이해에 대해 제기하는 질문들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물론 바울의 새관점에 대한 논의는 신약본문을 토대로 하는 주경적인 연구를 통해 전개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한 주경작업을 통한 논의와 함께 바울의 새관점이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를 중심으로 한 논의들을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비판이 정당한 것인지 검토하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제일 먼저 바울의 새관점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고, 그러한 학자들이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에 대해 제기하는 문제들을 분석하고자 한다. 그 후에 그러한 문제 제기에 대한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의 견해를 제시하면서 그러한 비판의 타당성을 검토하고자 한다.

II.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의 형성 과정

스텐달은 1961년에 미국 심리학회(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에서 강연을 했다. 그는 이 강연에서 처음으로 20세기에 이루어진 바울 해석이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해석학적 유산에 의해 부당하게 지배당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바울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해석은 믿음과 행위, 율법과 복음, 유대인과 이방인들에 대한 바울의 서술들이 중세 후기 경건의 구조 속에서 읽혀지는 추론(analogism)에 의존하고 있다. 스텐달의 전체적인 비판은 신약학자들이 루터가 아마도 16세기에 그를 읽었던 바와 같이 개인의 죄와의 싸움의 관점에서 바울을 읽어 왔다는 것이었다.9) 스텐달에 따르면 루터는 1세기 맥락에서 바울을 읽기보다는 바울의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시대착오적으로 공로에 대한 중세의 질문의 관점으로 읽었다.

샌더스는 바울 해석의 분수령을 이루는 작품인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인』(Paul and Palestinian Judaism)에서 주로 제2성전 시대 유대교 문헌들을 분석하여 유대교를 율법주의 혹은 행위 의의 종교라는 기독교의 일반적인 해석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샌더스는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해 구원을 받는데 관심이 있었다는 기독교의 통념을 반박하고자 하였다. 샌더스의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은혜 혹은 선택을 통해 언약 안으로 들어가서, 순종으로 언약에서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며, 속죄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래서 샌더스는 1세기 유대교를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묘사했는데, 언약적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계획에서 한 사람의 위치는 언약의 토대에서 결정되고 언약은 범죄에 대한 속죄의 수단을 제공하는 동안에 사람들의 올바른 반응으로서 계명에 대한 순종을 요구”10)하는 것이다. 샌더스는 제2성전시대 유대교 문헌을 연구하여 유대교에서 율법의 기능이 언약으로 들어가는 수단이 아니라 언약 안에 머무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언약 안에 들어가는 것은 율법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 혹은 은혜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교는 율법종교가 아니라 은혜의 종교라는 것이다.

샌더스는 바울 시대의 유대교의 전반적인 특성을 여덟 가지로 확인한다. 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2) 그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는데, 3) 이 율법은 선택을 유지하려는 하나님의 약속과 4) 순종하라는 요구를 함의하며 5) 하나님은 순종을 보상하고 위반을 처벌하며 6) 율법은 속죄의 수단을 제공하는데 7) 이 수단들은 언약 관계의 유지 혹은 재확립의 결과를 가져오며 순종, 속죄,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언약 안에 머무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받은 집단에 속한다.11)

많은 신약학자들에게 있어서, 샌더스의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이러한 재평가는 바울 서신들의 역사적이고 문맥적인 배경을 더 훌륭하게 이해할 수 있는 해석학적인 틀을 제공하는 조명으로 수용되었다.

스텐달과 샌더스의 작품이 나온 직후에 톰 라이트는 루터의 시각으로 해석된 바울을 비판하는 진영에 합류하였다. 물론 톰 라이트 자신은 바울에 대한 자신의 독특한 관점이 이 문제에 대한 샌더스의 중요한 저서인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출판 이전에 자신의 옥스퍼드에서의 박사 학위 논문 탐구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12) 톰 라이트가 개인적으로 이미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글을 통한 의견의 발표는 샌더스의 저술 직후인 1978년에 나온 논문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는 이 논문에서 게르하르트 에벨링(Gerhard Ebeling)같은 루터파 해석자들은 이신칭의의 교리를 말씀의 신학과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으로서 루터파의 순수성 속에서 보존하기 위하여 신앙을 역사로부터 분리시켜야만 했다고 주장했다.13) 덧붙여서 라이트는 또한 “바울 해석의 전통은 그가 반대하는 거짓된 유대교를 만들어내서 거짓된 바울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하였다.14) 다시 스텐달과 같이 라이트는 유대인들이 율법주의적이라는 묘사는 로마가톨릭과의 전투 속에서 16세기에 루터가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15) 그러므로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간단히 말해, 바울의 세계 속으로 종교개혁과 현대의 이념들을 투사한 결과로 역사의 바울보다 그의 발명자들이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신앙의 사도, 적어도 상상의 사도인 바울을 가지고 있다.”16) 라이트는 계속해서 주장한다. “우리가 바울을 이해하는 범주들, 그 문제에 대하여 신약 전체는 루터파 논쟁의 얇고, 피곤하며 시대착오적인 것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역사의 바울 자신이 우리에게 준 것들이다.”17)

제임스 던은 스텐달의 토대를 구축하는 논문에 의존하면서 라이트와 같이, 바울은 루터의 로마가톨릭과의 전투의 관점에서 해석되었다고 믿는다. 샌더스의 연구, 특히 제2성전 시대 문헌 연구의 견지에서 해석자들은 마침내 “바울을 올바르게 그 자신의 맥락 안에서 볼 수 있고, 그 자신의 시대의 관점에서 바울을 들을 수 있으며, 바울이 자신이 되도록 만들어 줄 수 있었다.”18) 샌더스가 제2성전 시대의 유대교 문헌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것과는 달리 이후에 라이트와 던은 바울 자신의 작품들,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하면서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을 발표하였다. 물론 바울에 대해 새 관점을 가진 학자들이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들마다 고유한 주장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샌더스가 제기한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라이트도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해 동조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소개하고 있다.

바울 시대의 유대교는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바와 같이, 율법주의적인 행위 의의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유대교가 행위-의의 종교이고, 바울이 마치 유대교가 그런 것 같다고 공격하고 있다고 상상한다면, 우리는 유대교와 그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개신교 주석가들은 바울과 유대교를 마치 유대교가 오래된 이단인 펠라기우스주의의 형태인 것같이 해석한다. 펠라기우스주의에 따르면 인간들은 그들의 도덕적 수준을 끌어올리고 그것을 통해 칭의, 의, 그리고 구원을 획득한다. 샌더스는 아니라고 말한다. 유대교 안에서 율법을 준수하는 것은 언제나 언약적인 구조 안에서 작용한다. 하나님께서 유대교와 언약을 맺으실 때 주도권을 잡으신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백성들 (특히) 유대인들이 반응하는 것보다 앞서 간다. 유대인들은 은혜에 대한 올바른 반응으로 감사로부터 율법을 지킨다. 다시 말해서 언약 백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약 안에 머무는 것이다. 첫째 자리에 자리잡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19)

톰 라이트는 개신교의 정통적인 바울 해석을 루터와 칼빈 등의 16세기 개혁자들의 해석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거부하면서, 오히려 그의 역사적 맥락, 즉 제2성전 시대 유대교의 관점에서 바울을 해석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할 때 바울 서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포함된 교리들, 특히 이신칭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III. 톰 라이트가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를 비판하는 내용들

바울의 새 관점을 주장하는 학자들마다 그 주장하는 내용에서 약간씩의 차이가 있으나 라이트가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에 대해 비판하는 중요한 내용들은 다음의 몇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톰 라이트가 이신칭의와 관련하여 집중적으로 제기하는 질문들은 위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 서신들을 해석하는 틀로서의 1세기 유대주의에 대한 이해, 그리고 거기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의 의, 율법의 행위, 그리고 이신칭의의 새로운 이...해이다.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톰 라이트의 견해는 개혁파와 폭넓게 복음주의 공동체에 충격을 주었고 그러한 공동체 안에 있는 일부 학자들의 칭의 교리의 해석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철저한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판단된다.

1. 하나님의 의

톰 라이트는 종교개혁자들의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가 형성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로마서 1장 17절에 있는 하나님의 의에 새로운 이해였다. 루터가 중세 말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속성이라고 이해했던 것을 비판하고 하나님께서 전가시키는 의라고 해석하면서 그의 종교개혁적인 이신칭의 사상이 탄생하였다.20) 이러한 전가된 의라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는 칼빈에게도 그대로 수용되었다.

그런데 라이트는 이러한 종교개혁의 전통을 비판하면서 1세기 유대교 배경에서 하나님의 의를 이해할 것을 주장하고 그러한 1세기 유대교 배경에 근거하여 지금까지의 전통적인 해석의 오류들을 지적한 후에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다. 그는 먼저 1세기 유대교 배경에서 하나님의 의를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필요한 세 가지 배경이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70인 역의 독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는 자신의 약속, 즉 언약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신실성이라는 하나의 분명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21) 라이트는 이사야 40-55장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이스라엘의 사악함과 방황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구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다니엘서 9장서 민족을 구원해 달라는 다니엘의 기도도 역시 하나님의 이러한 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라이트는 두 번째 배경으로 유대 법정의 구조를 제시한다. 유대법정에는 검사는 없고 원고와 피고와 함께 그들을 판결하는 재판관만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판관은 법에 따라 공정하게 판결할 때에 의롭게 된다.22) 원고와 피고는 법정의 결정의 결과로 의로운 신분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법정의 상황에서 의롭다는 것은 도덕적 자질이 아니라 법정 결정의 결과일 뿐이다. 라이트는 의롭다는 단어를 이렇게 이해하면 재판관이 자신의 의를 전가한다거나 나누어준다는 종교개혁시기의 개신교와 로마가톨릭의 논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악한 이방인들이 자신들을 억압할 때 재판관이신 언약의 하나님께 언약에 충실하셔서 자신들을 의로 변호해 달라고 호소하게 된다는 것이다.

라이트는 이러한 두 가지 배경 하에서 하나님의 의를 이해할 때 세 번째 요소로서 미래의 심판이 요청되는데, 이것은 그들의 언약의 의무에 충실함을 반영하는 행위-의의 심판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칭의 부분에서 좀 더 살펴보겠다.23)

라이트는 이러한 유대교 배경을 검토한 후에 교회사적으로 등장했던 하나님의 의의 다층적인 의미의 가능성에 대하여 검토한다. 그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 자신의 의로 이해하는 가능성(A)과 인간에게 주어진 의로 이해하는 가능성(B)으로 나눈다. 그 후에 A를 도덕적 특성으로서의 의(소유격 속격으로서의 ‘하나님의’ 의, A1)와 구원을 이루시는 능력으로서의 의(주격 소유격으로서의 ‘하나님의 의’, A2)로 나눈다. A1을 다시 ‘분배적인 의’(A1a)와 ‘언약적 신실성(A1b)’으로, A2는 언약적 신실성의 행동들(A2a)과 비언약적 세계를 패배시키는 행동들(A2b)로 분류한다. B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로운 신분으로서의 의(기원의 속격으로서의 하나님의 의, B1)와 ‘하나님 앞에서 간주되는’ 특성으로서의 의(목적격 속격으로서의 ‘하나님의 의,’ B2)로 분류한다. 그리고 B1은 전가된 의(B1a)와 분배된 의(B1b)로, B2는 하나님에 의해 인정된 자연적인 특성(B2a)과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그 후에 그 자체로 인정되는 특별한 은총(B2b)으로 나눈다.24) 루터 이후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신앙의 토대 위에서 복음의 결과로서 사람들이 가지는 신분을 표시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B1a와 B1b는 종교개혁 당시에 개혁자들과 로마가톨릭의 견해를 나타낸다. 그리고 A1a는 루터가 종교개혁 이전에 가졌던 견해이다. B2a와 B2b는 중세 말기의 유명론자들이 주장했던 견해인 것으로 보인다.25) 그는 A2b는 구원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석한 케제만의 견해인데,26) 언약을 배제하고 우주의 구원을 말하기 때문에 유대적인 배경과 맞지 않아 배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27) 이러한 여러 견해를 검토한 후에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는 주격적 속격 혹은 소유의 속격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 신자들에게 전가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는 특성이다. 라이트는 로마서 1장 17절을 “바울은 복음이 하나님 자신의 의, 그의 언약적 신실함을 드러낸다 혹은 계시한다고 말한다. 이 신실함은 차례로 신실한 모든 사람들의 은총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통하여 역사한다”고 설명한다.28) 그는 로마서 주석의 하나님의 의와 관련된 구절들을 주석한 후에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성이란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물론 이 의는 공의의 한 형태이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언약에 속박되셔서 이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우주를 갱신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나 이 언약의 신실성, 이 언약의 공의는 구원 활동일 뿐만 아니라 다니엘 9장이 분명하게 증명하는 바와 같이 언약을 파기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 후에 회개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구원의 활동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주님이라는 복음이 그 자체 안에 바울이 로마서 2장 16절에서 강조하는 바와 같이 구원의 소식뿐만 아니라 미래 심판의 메시지를 포함하는 이유이다.29) 하나님의 의는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성이다. 그는 루터 종교개혁의 가장 비극적인 부분이 이러한 하나님의 의의 성격이 은폐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2. 율법과 율법의 행위

톰 라이트가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에서 두 번째로 문제를 삼는 것은 율법과 율법의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 하는 것이다. 바울이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롬3:20)고 쓸 때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역사적으로 루터와 함께 칼빈을 비롯한 개혁파 학자들은 “율법의 행위들”을 의를 얻으려는 유대인들의 시도를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다시 말해서 이것의 지시대상은 구원을 얻으려고 율법을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율법주의적이다.30)

톰 라이트는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율법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얻으려는 유대인들의 율법 준수 행위로 이해한 것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전체적인 맥락을 잘못 해석한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라이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개인적인 죄와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편지가 아니라 민족적 집단으로서의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가장 큰 관심사는 누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는가?를 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 서신을 하나님의 백성의 성격에 대한 책이라기보다 개인적인 구원에 관한 책으로 읽어온 교회가 얼마나 바울의 생각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판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31) 그러므로 라이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1세기 유대주의의 배경에서 읽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32) 둘째로 이 두 서신은 율법주의를 반대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두 서신에서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전통적 개신교 신학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해 온 같은 ‘형식주의’가 아니라 유대인이 되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느냐?”하는 것이었다.33) 갈라디아서에서 논의되는 핵심적인 문제는 이방인 기독교인이 할례를 받아서 유대 기독교인과 같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참다운 유대인으로서 바울은 이러한 행위를 통해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34) 로마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역사의 마지막에 이스라엘을 위해 무엇을 하실 것이며, 역사의 중간에 예수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가를 생각하면서 유대 민족과 이방인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35)

그러므로 라이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율법을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법이 아니라, 유대민족에게 주어진 토라라고 지적한다. 두 서신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었던 언약의 배경 하에서 읽어야 하기 때문에 이 서신서들에게 사용되는 율법은 일반적인 법이 아니라 구약의 율법이라는 것이다. 그는 로마서 4장의 행위가 일반적인 행위가 토라의 행위라고 지적한다.36)

그러므로 이러한 서신서들에서 언급되는 율법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었던 언약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구원을 얻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다. 그는 “율법의 행위에 반대하는 바울의 논쟁은 유대인의 율법을 지킴으로 언약의 회원권을 획득하려 시도했던 사람들이 아니라(1세기에는 그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같다) 유대인들의 율법을 순종함으로 그들의 언약의 회원권을 입증하려는 사람들을 겨냥하였다”고 주장한다.37) 라이트는 이러한 입장에 따라 율법의 행위는 공로나 구원을 얻기 위한 율법주의적인 행위가 아니라 언약에 속한다는 회원권의 증거를 제시하려는 유대 민족의 뱃지, 그리고 ‘이방인들로부터 유대인들을 구별하려고’ 지키는 율법의 국면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율법의 행위들 혹은 뱃지에는 안식일, 음식법, 그리고 할례 등이 포함되어 있다.38)

그는 갈라디아서 2장에 있는 율법의 행위를 당시 삶의 정황을 고려하여 유대 민족의 뱃지로 해석한다. 바울이 여기서 할례의 문제를 논하는 것은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혹은 루터나 에라스무스가 직면했던 질문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1세기 맥락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정의하는 방식의 질문과 아주 분명하게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할례는 ‘도덕적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도덕적 노력이나 선행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과 관련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39)

3. 칭의

톰 라이트는 율법의 행위를 이와 같이 유대민족을 특징짓는 민족적인 뱃지로 해석하기 때문에, 칭의에 대해서도 전통적인 견해를 비판하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그는 전통적인 칭의관이 5세기의 어거스틴-펠라기우스 논쟁과 16세기의 에라스무스-루터 논쟁을 배경으로 형성된 것으로 바울의 성경 본문이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신칭의가 “성경 본문과는 아주 독립적인 의미를 발견시켜 왔다”는 맥그래스의 지적40)을 인용하면서 전통적인 “이러한 방식으로 로마서를... 해석하는 것이 수백 년 동안 그 본문에 조직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였다”고 평가한다.41)

따라서 라이트는 칭의에 대해 전통적인 견해와 달리 다음의 세 가지 내용을 집중적으로 설명한다. 첫째로 칭의는 언약의 언어인데, 16-7세기의 언약신학의 관점이 아니라 1세기 유대교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의 약속의 견지에서 해석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바울이 칭의를 말할 때, 그는 당시 로마 제국의 지배 하에서 직면했던 정치적인 곤경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에 매달리던 1세기 유대교의 관점에서 사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라이트는 종교개혁 이후의 칭의에 대한 정의는 1세기 팔레스타인에 있었던 역사적 배경 안에서 이해된 바울의 교훈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16-7세기 교의학과 더 많은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었던 언약에서 약속했던 구원에 관심이 있었는데, 죽은 후의 영혼의 상태나 행위 의를 통한 무시간적 구원이 아니라 당시 민족적인 재난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변호를 통한 구원에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라이트는 1세기의 칭의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1세기의 칭의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수립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현재와 미래의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정의, 즉 사실상 누가 그의 백성의 구성원이냐에 대한 것이었다. 샌더스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이것은 ‘들어가는 것’ 혹은 ‘머무는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누가 그 안에 있는지를 말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표준적인 기독교 신학적인 용어로, 이것은 구원론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교회론에 대한 것이었다. 구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것이었다.42)

둘째로 그는 이 칭의가 유대 법정을 배경으로 한 용어라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이것은 아담의 죄를 교정하시고 세상을 올바른 길로 돌이키는 하나님의 방식이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그의 백성들은 세상 앞에서 변호 받고 올바른 길에 있다고 판결을 받을 것이다.43) 라이트는 칭의에서도 하나님의 의에서 설명했던 유대 법정의 비유를 통해 누군가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법정적 선언이라고 해석한다.

셋째로 라이트는 바울이 종말론의 견지에서 칭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칭의는 사람들이 구원받는 교리의 어떤 추상적인 체계의 일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굴복시키면서 성령을 통해 죄로부터 우주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동에 뿌리를 박고 있다.

라이트는 이러한 세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는 칭의를 이중적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칭의의 현재적인 측면이다. 현재의 칭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과거의 성취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미래의 변호를 기대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앞서 현재 예수를 메시아와 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을 변호하신다. 라이트는 말씀과 성령을 통한 소명을 사람의 심령이나 특성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행동이라고 부르고, 칭의는 그 사람이 지금 올바른 길에 있다는 하나님의 선언으로 그들에게 올바르다는 신분을 수여한다고 이해한다.44)

둘째는 최종적인 혹은 미래의 칭의는 심판 날에 세상 앞에서 어떤 사람이 옳다는 사실에 대한 실질적인 선언이다.45) 그러나 라이트에게 있어서 칭의의 근거는 현재로부터 최종적인 칭의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분명해질 것이라는 것이 주목되어야만 한다. 로마서 8장 3-4절을 주석하면서 라이트는 여기서 언급되는 것은 미래 변호, 마지막 날의 변호, 바울이 로마서 2:1-16절에 묘사하는 날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선언은 현재의 선언과 일치할 것이고,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성령에 의해 인도받는 생활로부터 따라올 것이다.46)

바울은 제2성전 시대 주류 유대교와 공동으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은 삶의 전체와 일치하여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행위와 일치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그는 로마서 14:10-2과 고후 5:10절에서 아주 분명하게 이것을 말하고 있다. 그는 고린도 전서 3장에서 교회 건축자에 대해 말하는 그 두려운 문단에서 이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설명하는 주요문단은 로마서 2장 16절이다.

로마서에서 칭의에 대한 첫 번째 서술은 2장 13절에 있는 행위에 따른 심판인데, 로마서 8장과 10장에서 이것을 정의하고 있고, 빌립보서 1장 8절에서 가장 간결하게 지적하고 있다.47) 기독교인들이 마지막 날에 그것과 일치하여 변호 받을 행위는 성령의 내주와 역사의 결과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들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로마서 8장 17절은 로마서 2장 16절에 대한 실질적인 답변이다. 지금 정죄함이 없는 이유는 한 편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서 죄를 정죄하시고, 다른 한 편에서 성령께서 신자 안에서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인 생명을 주는 일을 수행하려고 활동하시기 때문이다.48) 이러한 면에서 라이트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행위에 의한 최종적인 심판을 말하고 있다.

데살로니가와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다가오는 심판 날을 미리 바라보는데 그리스도의 공적과 죽음의 토대 위에서가 아니라, 그의 사도의 사역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의 호의적인 변호를 바라보고 있다.(살전3:19; 빌2:16) 그는 도덕적이고 물리적인 노력으로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일들이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성령이 그 안에 역사하고 계신다는 효과적인 표지이기 때문에 마지막 날에 그의 공적(credit)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매우 분명하게 밝힌다.49) 올바른 행동을 한 사람은 마지막 날에 의롭다고 선언될 것이다.

라이트가 제시하는 바울의 칭의교리는 교회론의 축 위에서 회전하고 있다. 칭의는 현재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선언이자 할례, 음식법, 그리고 안식일같은 율법의 행위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표출되는 언약의 의로운 구성원인 사람들에 대한 선언이다. 이것은 또한 마지막 날 미래에 일어날 것에 대한 현재의 예기이다. 현재의 칭의는 신자들의 성령에 의해 인도받는 행위들에 근거하여 미래 칭의를 기대하는 신실한 순종으로 이해되는 신앙에 근거한다.

이러한 라이트의 칭의론에서 과연 믿음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인간의 죄를 위해 죽은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언약의 저주를 짊어지고 죽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갈라디아서 3장 13절의 의미는 그리스도가 율법을 어긴 민족적인 죄악의 결과로 저주의 추방의 저주를 당하고 있는 ‘우리’ 유대인들을 구속했다고 해석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유대인들의 추방이라는 저주가 끝나고 이제 그 축복이 이방인에게 흘러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부활은 이러한 그의 죽음을 하나님께서 올바르다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라이트는 전통적인 의미의 칭의를 거부하기 때문에 칭의의 수단이란 의미의 믿음도 반대한다. 그는 믿음을 칭의의 수단으로 이해하게 되면 칭의와 속죄를 통합하여 믿음을 사치품으로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50) 그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이미 언약 구성원의 자격의 표시로 보며 이것으로 사람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것이다. 현재 칭의에서 믿음은 “언약 구성원의 뱃지”이며, 언약에 들어가려는 시험으로 수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51) 그는 믿음을 신실함으로 이해하며, 결국은 순종이라고 말한다. 그는 믿음은 (다른 주들을 부인하며)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을 믿는 것이다. 이 신앙은 하나님의 신실함에 대한 인간의 신실함이다.52)

이와 같이 라이트는 믿음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내용을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부활이란 자신의 복음에 대한 고백이라 정의한다. IV. 칼빈의 칭의교리

라이트의 견해와 비교하기 위하여 먼저 칼빈이 하나님의 의, 율법의 행위, 그리고 칭의에 대하여 어떠한 견해를 제시했는지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1. 하나님의 의
...
칼빈은 루터의 하나님의 의의 전가 사상을 수용하여 로마서 1장 17절을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법정에서 인정받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이것은 사람들의 의견에 의로 평가받고 간주되는 것이, 그것이 비록 사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사람의 의라고 언급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하게 성령께서 미래 그리스도의 왕국에서도 있을 하나님의 의를 계속하여 제시하는 많은 예언들을 암시하고 있다. 일부 주석자들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라는 의미로 설명한다. 나는 틀림없이 이 단어들이 하나님께서 그의 복음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그리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내가 이 문제에 많은 시간을 소비할 수는 없지만, 그렇지만 전자의 의미가 나에게는 훨씬 더 적합한 것같다. 일부 학자들이 이 의가 값없이 주시는 죄의 용서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중생의 은혜에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자신을 우리에게 화해시키시므로 생명으로 회복된다고 주장한다.53)

칼빈은 여기서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보는 견해를 구분하고 자신은 전자의 의미가 본 구절에 더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전자의 입장은 루터의 개혁활동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밝혀진 것으로, 법정에서 선고를 통하여 의롭다고 간주되는 것으로 결국 하나님의 의가 전가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복음 외에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우리에게 계시하지 않으셨으며,” “하나님께서 그의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보화 즉 그의 의의 전달”을 통해 불의한 우리가 의롭게 되어 구원받는다고 서술한다.54) 그러므로 칼빈은 주격 속격 혹은 소유의 속격으로 해석하는 라이트와 달리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의 속격을 기원의 목적격 혹은 속격으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전가되는 의라고 해석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으로서 중생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자신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인정받는 것이라는 의미를 선호한다고 밝힌다. 칼빈은 여기서 중생이 칭의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으로 보고 칭의와는 구별하고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의 것으로 간주된다고 이해한다.55)

칼빈은 하나님의 의를 “중생의 은혜요 아무 자격이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신 까닭에 이 은혜는 값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어거스틴의 견해를 거부한다. 칼빈은 바울이 구원에서 인간의 행위를 완전히 배제하는데, 심지어는 “주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열매 맺힌 행위 일체”까지도 배제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인간의 칭의를 말할 때 “타고난 본능으로 행하는 도덕적 행위뿐만 아니라 신자들이 행할 수 있는 모든 선한 행위들까지도 일체 배제한다.” 그리고 “저희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않으셔서,” 즉 하나님의 의의 전가를 통해서만 의롭다고 하신다.56) 칼빈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배제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의의 전가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그러면 칼빈은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속성으로 이해하는 측면은 없는가? 칼빈은 로마서 3장 22절의 “하나님의 의”를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속성으로의 의와 우리에게 주시는 의의 양면성을 설명하고 있다.57) 그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칭의가 무엇과 같은지를 간략하게 밝힌다. 이 칭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고 믿음으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이름을 다시 소개하여 하나님을 자신이 말하는 있는 의의 단순한 승인자일 뿐만 아니라 장본인으로 만드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마치 바울이 의가 하나님에게서만 흘러나오고, 혹은 그 기원이 하늘에 있는데,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나게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58)

칼빈은 여기서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바울이 말하는 성도들에게 전가된 의를 단순하게 승인하시는 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의의 장본인이라고 말한다. 이 의는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며, 결국 그 기원이 하늘에 있다고 말한다. 결국 이 의는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이 하나님의 의는 단순하게 전가되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본래 가지고 계셔서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모든 의의 근원”이라고 말한다.59)

칼빈은 하나님의 의의 양면성을 로마서 3장 26절 주석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의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째는 “자신 안에 홀로 의의 모든 충만함을 포함하고 계신 분으로서 의로우시다는 것이다.”60) 따라서 “전체 인류는 불의하다고 정죄받는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홀로 의롭다는 이름과 영광을 얻으시므로 그에 합당한 충만하고 완전한 찬양을 받아야 한다.” 둘째 부분은 “의의 전달”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그의 의의 부요함을 자신 안에 가두어 두지 않으시고 인류 위에 쏟아 부으시므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는 한에서 우리 안에서 빛나신다.”61)

이와 함께 칼빈은 로마서 4장 11절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을 충분하게 설명하고 있다. 칼빈은 할례를 비롯한 “성례들이, 바울이 증거 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들이 우리의 가슴에 새겨지고 은혜에 대한 확실성이 확증되는 표징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할례의 표에 의해 이중적인 은혜가 나타났다는 점이 특별히 기술되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씨를 약속해 주셨다. 이 씨에게서 온 세상을 위한 구원이 기대되도록 되어 있었다 --- 그리고 값없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그 표에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62)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할례를 통해 자신의 언약의 약속이 성취된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자신이 하신 약속을 할례를 통해 확실하다는 것을 나타내셨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속성으로 자신의 언약에 신실함과 동시에 타인에게 전가되는 의의 두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로마서에서 인간이 의를 얻는 방법이 인간의 전적인 타락으로 하나님의 의의 전가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의의 전가를 강조하였다.

2. 율법의 행위

칼빈은 갈라디아서 주석을 쓰면서 이 교회의 문제가 “거짓 사도들이 의식의 준수가 필요하다고 가르쳐” 발생하였고, 바울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갈라디아서를 쓴 것으로 이해하였다.63)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지켜온 관습들을 가는 곳마다 어디서나 지키도록 의도했다면 이들은 상당한 잘못을 과오를 범하는 것”이었고, “관습적인 의식을 지키는데서 의를 얻는다고 생각하여” “사람의 양심을 종교의식에 얽어매어 놓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칼빈은 “의식에는 사람을 의롭게 할 힘이 없다”는 것을 논증하면서 이신칭의를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64) 그러므로 칼빈은 갈라디아 교회에서 문제가 된 율법의 행위는 바로 의식법의 준수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그러한 의식법 준수를 통한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갈라디아서 2장 11절을 주석하면서 베드로의 이러한 행위는 사도행전 15장 이전에 일어난 행위라고 해석한다. 그리고 베드로의 이 행위는 제롬이 공개적인 책망이 아니라고 해석한 바와 달리 “이방인들에게 굴종을 강요하는 것같이 유대화하고 있었다”고 해석하여 공개적으로 책망한 것으로 해석한다.65) 그래서 칼빈은 갈라디아서 2장 16절을 주석하면서 “거짓 사도들이 그리스도나 믿음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의식을 믿음과 결합하려고 했기 때문에” 바울은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써만” 구원받는다는 배타적 명제를 제시하였다.66) 그는 갈라디아서 5장 3절의 할례는 거짓 사도들이 의식을 통해 구원얻기 위해 할례를 시행하도록 하는 것은 행위 의를 얻으려는 율법의 행위에 해당된다고 이해하면서 비판하고 있다. 이들은 “율법과 그리스도를 혼합하고자” 하였다.67) 칼빈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는 바로 할례와 같은 의식법을 준수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행위-의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여 철저하게 비판하였다.

칼빈은 율법의 행위에 대하여 로마서 1-4장까지의 주석에서 여러 가지를 설명하고 있다. 먼저 칼빈은 로마서 3장 27절 주석에서 행위의 자랑의 무익함을 설명하면서 당시 스콜라주의자들의 논의를 먼저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공적이 자랑의 문제라면, 합당한 공로(meritum de congruo) 혹은 사람이 이러한 공로를 가지고 자신을 하나님과 화목케 할 수도 있다는 당연한 공로(meritum de condigno)라고 부르든지 간에, 우리는 이러한 양자가 여기서 파괴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68)

라이트가 비판하는 바와 같이 칼빈은 행위의 공로를 다루면서 중세 후기 스콜라주의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이것은 칼빈이 시대의 아들인 이상 당연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오히려 그 시대의 잘못된 문제들을 지적하면서 올바른 논의를 전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율법의 행위에 대해 당시의 여러 가지 논의들을 충분하게 잘 숙지하면서 로마서가 제시하는 칭의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견해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칼빈은 율법의 행위가 라이트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할례를 중심으로 한 의식법을 가리킨다는 견해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로마서 3장 20절을 주석하면서 “율법의 행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박식한 학자들 가운데서도 율법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약간의 의심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 말씀을 확대하여 전체 율법의 준수를 포함시키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의식법에만 국한시킨다. 크리스소돔, 오리겐, 그리고 제롬은 율법이란 단어의 첨가 때문에 후자의 의견을 수용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율법이란 단어가 첨가된 것은 이 문단이 모든 행위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특별한 함축을 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을 쉽게 해결될 수 있다. 행위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정도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모든 행위로부터 칭의의 능력을 분명하게 제거하려고, 의롭게 해주는 최고의 능력을 가진 그러한 행위들에 대하여 그 용어를 사용하였다.69)

칼빈은 이미 크리소스돔, 오리겐, 그리고 제롬과 같은 초대 교부들이 이미 로마서 3장 20절의 율법의 행위를 의식법에만 국한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 교부들은 행위가 아니라 율법의 행위이기 때문에 의식법을 통해 의롭게 되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율법의 행위가 모든 행위라고 해석하고 있다. 칼빈은 “율법은 약속들을 가지고 있고 이 약속이 없으면 우리의 행위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바울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그의 논의의 주제인 율법의 준수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하게 언급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70)

칼빈은 이 율법의 행위를 의식법에 제한하면서 인용한 논증들은 의식법에 대한 한 가지 실례로 할례를 제시하여 생각보다 약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당시에 율법의 행위에 대해 율법 전체를 포함한 행위를 말하는지 아니면 의식법만을 포함하는 행위를 말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서, 이 율법의 행위는 바로 율법의 전체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다시 로마서 3장 27절 “행위로냐”를 주석하면서 “여기서 의가 행위의 법에 존재한다면, 우리의 자랑은 배제되지 않을 것”이나 “의가 믿음 만에 의한 것이라면, 우리가 자신을 위해 주장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신앙과 행위 사이에 이러한 대조는 주의깊게 주목되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행위들은 아무런 첨가 없이 보편적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의식의 준수, 구체적으로 외적인 행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할 수 있는 행위의 모든 공적을 포함하고 있다”고 해석한다.71)

그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라는 4장 6절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율법의 행위를 의식에만 제한하는 사람들이 단지 트집을 잡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앞서 율법의 행위로 지칭하였던 것을 이제는 단순히 그리고 아무런 형식적인 단어를 첨가하지 않고 행위라고 칭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본문에서 발견하는 이 간략하고 수식이 없는 행위가 모든 행위에 구별 없이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면, 이것은 전체 논증에 일관해서 유효한 것임에 틀림없다. 바울이 구별없이 모든 행위를 배제하기 때문에 칭의의 능력을 단지 의식들에서만 배제하는 것만큼 모순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72)

칼빈은 로마서 주석에서 율법의 행위를 인간의 모든 행위들이라고 이해하는 반면에, 라이트는 율법의 행위를 안식일 준수와 할례와 같은 문화적인 경계표지들을 언급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3. 칼빈의 칭의

칼빈은 율법의 행위를 인간이 구원받기 위하여 행하는 모든 행위들이라고 정의하고, 이러한 행위들의 구원론적인 가치를 박탈하므로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의의 전가만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칼빈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주석들을 통해서 칭의는 오로지 의의 전가를 통해서만 일어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 외에” 라는 로마서 3장 21절을 주석하며 이신칭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바울이 우리가 믿음으로 얻는 의를 하나님의 의라고 부르는 이유가 우리가 그 의로서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주께서 긍휼로서 우리에게 그 의를 주시는 까닭인지 확실하지 않다. 우리는 두 가지 해석 모두 적합하므로 어느 한쪽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달하시는 의와 하나님께서 의로 받아서 인정하는 바로 그 의가 율법 외에, 다시 말해 율법의 도움 없이 계시되었다고 바울은 말한다.73)

칼빈은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통한 칭의는 어거스틴이 말하는 중생의 행위로 인한 칭의도 배제한다고 설명한다. 칼빈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과 사람이 영적 중생으로부터 행위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는 두 명제가 충분히 일치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칼빈은 “그러나 바울은 인간의 양심이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할 때까지 평화를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완전히 다른 원리를 제시한다”고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 칭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고 가르치는 다른 문단에서(고후5:16) 그는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않으시는” 그의 칭의의 방식을 설명한다. 동일한 방식으로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칭의의 효과와 관련하여 율법을 신앙과 대립시켜 놓고 있다. 율법은 명령한 것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약속하고(갈2:16) 외적으로 나타나는 행위의 열매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위의 공로가 믿음에서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74)(71)

그러므로 칼빈은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자신의 의로운 사람으로 받아주시는 것인데, 그 방식은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고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고 용서해주시는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동일하게 칭의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주시며 은혜 베풀어 주시는 것”이라 설명하고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한다.75) 칼빈은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이 법정적인 용어로서 행위와 관계없는 죄의 용서라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무죄방면과 용서로 우리를 의롭다 하지 않으신다면,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한 것은(고후5:19)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21절) 맨 먼저 나는 하나님과 화목된 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으로써 의롭게 하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다른 문단에서 칭의가 고발과 대조되어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반제는 이 표현이 법률 용법으로부터 취해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히브리어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은, 그가 어느 정도 건전한 머리를 가지고 있다면, 이 어구가 이러한 근원에서부터 왔으며 여기서부터 경향과 암시를 끌어낸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거기서 바울은 행위없는 의가 다윗에 의해 다음과 같은 말들로 묘사된다고 말한다. “허물의 사함을 얻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76)

칼빈은 칭의에서 율법의 행위를 통한 죄용서의 가능성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의의 전가와 죄의 용서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러므로 그의 칭의 개념에서는 하나님의 의의 전가와 율법의 행위와 칭의가 인간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론을 중심을 밀접하게 연계되어 전개되고 있다.

4. 칼빈은 1세기 유대주의 성격에 대해여 어떻게 이해하였는가?

칼빈은 이러한 이신칭의를 주장할 때에 1세기 유대주의가 은혜의 종교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오로지 행위로 종교로만 이해하였는가? 칼빈의 여러 가지 언급들을 살펴볼 때, 그는 이미 1세기 유대교 안에 은혜종교로서의 유대교와 행위종교로서의 유대교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라이트는 칼빈이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 그리고 중세 말기의 공적 논쟁에 영향을 받아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개인의 이신칭의의 구원의 서신으로 이해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칼빈의 그 이전의 주석전통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는가? 칼빈 자신이 로마서 주석에서 율법의 행위를 의식법으로 제한하는 사람들로 크리소스돔, 오리겐, 그리고 제롬을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언급으로 볼 때 칼빈은 이미 어거스틴 이전의 교부들의 저술들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고, 그들의 주석전통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스타인메츠도 칼빈이 로마서를 주석할 때 당시의 학자들의 주석들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주석전통에서도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잘 설명하고 있다.77)

물론 칼빈을 포함한 개혁자들이 새관점의 학자들만큼 1세기 유대교 문헌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 못한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들이 그러한 흐름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다. 칼빈은 로마가톨릭이 인정하여 사용하고 있던 외경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고, 외경에 기록된 어떤 행동들에 대해서는 미신적인 행위로 간주한 반면에 어떤 내용들에 대해서는 타당한 것으로 수용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마카비서에 기록된 유다가 죽은 자들을 위해 예물을 드린 행동을 미신적인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유다의 경건은 죽은 자들을 위한 헌물을 예루살렘에 보냈을 때 최후 부활의 굳건한 소망을 가졌던 특성에 대하여 칭찬을 받았다. 그 역사의 기록자는 유다가 행한 것을 구속의 값을 지불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조국과 종교를 위해서 죽었던 다른 성도들과 함께 영생에 참여하도록 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 행위는 참으로 미신과 오도된 열정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당시에 사용되었던 희생물들이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중단되었다는 것을 확신하므로 율법의 희생을 우리에게조차 확대하는 것은 완전히 어리석은 것이다.78)

칼빈은 제2성전 시대 유대교가 최소한 외경을 통해서 오는 한에서 미신적인 요소를 포함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렇지만 주기도문을 해설하는 가운데 외경인 바룩서의 내용을 참된 것으로 인용하고 있다.

예언자 바룩의 말이라고 하는 것은 저자가 누구였든지 간에, 그의 말은 참되고 거룩하다. “자기의 악이 큰 것을 슬퍼하여 고독하고 머리를 숙이고 기운이 없는 영혼 --- 굶주린 영혼, 그리고 힘이 없는 눈이 주여 당신에게 영광을 돌리나이다. 오 주 우리 하나님, 주님 앞에 우리 기도를 쏟아놓으며 주님 앞에서 자비를 비는 것은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 왕들의 어떤 의로운 행위 때문이 아닙니다.”(바룩2:18-9) 그렇지 않고 당신께서 자비하시므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는 당신 앞에 죄를 지었나이다.”(바룩3:22)79)

그는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하는 바룩서의 기도의 말을 참되다고 하여 인용하고 있다.80) 그러므로 칼빈은 최소한 암시적으로 자신의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는 1세기 유대교에 정통적인 신학의 흐름들이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반면에 칼빈은 사람들이 펠라기안주의라고 불렀던 그러한 흐름들과 친숙했다. 칼빈은 집회서의 “만약에 당신이 선택한다면, 당신은 명령들을 지킬 수 있고 신실하게 행동하는 것은 당신의 선택의 문제이다. 그는 당신 앞에 불과 물을 놓을 수 있고, 당신이 선택하는 무엇을 향하여 당신을 손을 뻗칠 수 있다. 각자의 사람 앞에 생명과 사망이 있으며, 사람이 어느 것을 선택하든지 간에 제공될 것이다”라는 문단을 인용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창조시에 생명 혹은 사망을 취할 능력을 받았다고 인정하자. 우리가 다른 측면에서 사람이 이러한 능력을 상실했다고 대답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라”고 선언하는 솔로몬을 반박하려는 것은 확실하게 나의 의도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해서 자신과 모든 소유물을 파산시켰기 때문에, 원래의 창조에 무엇을 귀속시킨다하더라도 필연적으로 그의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에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반대자들뿐만 아니라 그가 누구였든지간에 집회서 저자에게도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구원을 얻을 능력을 자신 안에서 찾으라고 사람에게 가르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여러분의 권위를 높이 평가해서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에 대항하여 어떤 편견을 일으키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81)

칼빈은 집회서가 정경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이 로마서 3장과 같은 성경의 증언과 모순되기 때문에 외경으로부터의 이러한 문단을 거부한다. 펠라기우스나 에라스무스는 이미 당시 논쟁과정에서 이 문단에 관심을 기울였다. 칼빈 당시에 개혁자들은 로마가톨릭교회의 외경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어도 16세기 신학토론은 1세기 유대교의 문헌인 외경과는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칼빈은 외경 가운데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문서들의 권위는 부인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는 문서들은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칼빈의 언급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외경 가운데 인간의 자유의지를 주장하며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글이 이미 알려져 있었다.V. 칼빈과 라이트의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비교

1. 1세기 유대교 문헌에 대한 이해

톰 라이트는 1세기 유대교 문헌들에 근거하여 언약적 율법주의를 만들어 냈던 샌더스의 견해에 동조하여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비롯한 바울 서신의 해석학적인 틀을 구성한다. 그리하여 1세기 유대교를 은혜의 종교라는 언약적 율법주의의 하나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해석한다. 그렇지만 오늘날 샌더스의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연구에 대해 많은 비판들이 제기되고 있다. 적어도 유대교 안에 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톰 라이트 자신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1세기 유대교는 언약에 들어갈 때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은혜나 언약을 유지하는 데는 행위가 필요하였다. 또한 샌더스 자신도 의의 종교라고 인정한 에스라4서의 견해도 있다.82) 그러므로 1세기 유대교를 은혜의 종교라고만 규정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른다고 보여진다.

칼빈은 당시 로마가톨릭과의 성경관의 차이로 외경의 내용에 대해 논쟁하면서 적어도 1세기 유대교 문헌 안에 바룩서와 같이 은혜에 의존하는 흐름과 함께 집회서와 같이 행위에 의존하는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칼빈은 이러한 흐름 가운데 행위에 의존하는 문서들을 거부하고 은혜에 의존하는 문서들은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이해의 관점에서 톰 라이트보다는 칼빈의 관점이 그 다양성을 파악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새관점의 가장 중요한 기여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맥락으로 율법적 언약주의를 고려해야 한다는 이해의 폭의 확장인 반면에, 그들의 가장 큰 단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하나의 관점으로만 모든 것을 다 해석하려 한다는 점이다.83) 새관점이 등장한 이후에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연구에서 밝혀지는 사실들이 1세기 유대주의에 다양한 흐름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칼빈이 암시적으로나마 유대교의 은혜 중심의 흐름과 행위 중심의 흐름을 파악하면서, 은혜중심의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교리를 수립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로마가톨릭의 은혜와 함께 행위를 인정하는 교리가 그러한 외경의 흐름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아 외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칼빈의 외경에 대한 거부의 입장이 행위-의의 내용과 관련되어 있는지의 여부가 좀 더 깊이 연구되어지면 칼빈의 1세기 유대주의의 관점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

하나님의 의에 대한 이해에서 톰 라이트는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속성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성으로 해석한다. 반면에 칼빈은 하나님의 의의 양면성을 함께 파악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계신 속성으로서의 의와 하나님의 의의 전가로서의 은혜의 측면이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속성으로서의 하나님의 의의 측면은 하나님의 전가되는 의가 그 자신의 의의 속성에서 유래한다는 언급에서 확인된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의는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에 대한 신실성이 할례의 성례로 시행되는 측면을 설명한다. 그렇지만 인간의 모든 행위의 타락성 때문에 행위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의의 전가를 통한 구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하나님의 속성으로의 의와 전가되는 의의 통일성을 인식하고 있고, 오히려 인간의 죄에 대한 해결책은 오히려 의의 전가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속성인 의로서 언약의 신실성만 강조하는 라이트의 견해는 인간의 죄의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약점을 않고 있다. 라이트는 언약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면서 개인과 하나님의 의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다. 그는 아브라함의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당시 유대 민족의 고통을 추방이란 측면에서 이해하고, 그 언약적 대표자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칼빈은 하나님의 의의 전가를 통한 인간 죄의 분명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하나님의 아브라함에 대한 언약을 유대교와의 연속성에서 이해하였는지 아니면 오히려 이방인들을 포함한 인류 전체의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새언약의 성취로서 이해했는지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중요하다고 보여진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포함하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성취라는 구원론에서 언약의 신실성을 이해한다면, 교회론과 사회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라이트의 이해보다는 훨씬 더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의 양면성을 파악하는 칼빈의 이해가 더 타당한 것을 보인다.

3. 율법의 행위에 대한 이해

라이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이 대부분 일반적인 법이 아니라 토라이며. 이러한 법은 분리될 수 없는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84) 그리고 이러한 그의 연구 성과들은 수용될 부분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라이트는 율법의 행위를 할례, 음식법, 그리고 안식일 준수 같은 유대인들의 민족적인 표지로 이해하는 반면에, 칼빈은 율법의 행위를 그러한 의식법에 제한하는 사람들의 견해를 알고 있었으나, 바울의 논의에 문맥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아 거부하고 오히려 율법의 모든 행위라고 해석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율법의 모든 행위를 통해서는 정죄를 당하므로 행위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된다고 말한다.

오늘날의 학자들도 칼빈의 견해에 동조하여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 특히 로마서 3장과 4장에서의 행위는 선한 행동을 의미하고 결국 바울은 그러한 선한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지적한다고 해석하고 있다.85) 실바도 갈라디아서 3장 6-14절을 분석한 후에 루터의 믿음과 행위의 대조를 지지하는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린다.86) 던의 제자인 개더콜(Simon Gathercole)도 로마서 3장 20절의 “율법의 행위”에 대해 라이트를 비롯한 새관점의 학자들이 할례와 음식법같은 민족적 표지로 해석하나 바울은 이 구절에서 토라에 순종하여 그것을 통해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의 무능력(cf. 롬8:3)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주장한다.87)

4. 이신칭의에 대한 이해

톰 라이트는 이신칭의에 대해 현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행위에 따른 최종적인 심판에서의 하나님의 변호라는 이중적인 구조를 말한다.88) 톰 라이트의 이신칭의는 죄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없이 누가 교회에 속했느냐는 것을 결정하는 교회론의 차원과 동시에 당시에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구별했다는 사회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고, 마지막의 하나님의 변호행위라는 종말론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톰 라이트는 전통적인 이신칭의의 주장이 초대교회가 아니라 5세기 펠라기우스-어거스틴의 시기에 등장했다고 주장하나, 이미 2세기 속사도 교부들인 로마의 클레멘트와 터툴리안 등도 이미 그러한 견해를 가르쳤다는 주장도 있다.89)

반면에 칼빈은 이신칭의는 우리가 믿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아 현재에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하므로 양심의 평안을 누리게 된다고 말한다. 칼빈의 이신칭의는 현재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고 죄를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구원론이다. 이렇게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은 죄를 전가받아 의롭다 칭함을 받으면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동시적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러면서 이렇게 구원받은 성도들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따른 구원에 대한 확신과 함께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상급을 기대하는 종말론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물론 칼빈은 이신칭의에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와 함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하고 있는데,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종말론적인 측면을 제시하고 있다.90) 칼빈은 이신칭의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람은 동시에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신비로운 연합을 이루게 되고, 이러한 신비로운 연합을 통해 성령의 역사와 함께 이신칭의와 함께 동시에 성화를 이루어 가게 된다.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는 종말론적인 구원의 확신과 상급을 받는 소망의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VI. 나가는 말

톰 라이트는 샌더스 이후의 바울의 새 관점의 언약적 율법주의를 공유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연구결과들을 통하여 새로운 이신칭의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새로운 이신칭의를 제공하는 배경인 1세기 유대교를 언약적 율법주의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언약적 율법주의를 바울서신들,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이해하는 배경으로 삼으면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언약적 율법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하나님의 자신의 특성이다. 그리고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율법의 행위는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분리시키는 민족적 경계표들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율법의 행위들은 안식일 준수, 할례, 음식법준수이다. 톰 라이트는 이러한 율법의 행위들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유대인들의 민족적 우월감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것을 믿는 복음을 통해 구원받는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선언하면서 그의 행위에 대한 종말론적인 변호를 기다리는 것을 칭의의 의미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라이트의 연구는 기여한 측면도 없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죄의 심각성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전가를 통해 죄를 용서받아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 구원론이 약화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행위에 기초한 최종적인 심판은 인간이 구원을 확신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이신칭의를 통한 구원의 확신과 함께 평화를 누리면서 동시에 성화의 길을 걸어가고,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의 확신을 누리는 건전한 칼빈의 구원론을 더욱 확고하게 정립시켜 나가야 하겠다.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의 관점들 가운데 새로운 연구 성과들을 통하여 새로운 이해가 필요한 부분들을 잘 정립시켜 나가면서 동시에 보존해야할 전통적인 이신칭의의 교리를 확고하게 파수해 나가야할 것이다.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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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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