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를 제외한

미국 본토에서 가장 큰 국립공원입니다.

 

데쓰 밸리는

천의 얼굴을 지닌 국립공원이라는 별명답게

불모지의 땅이면서도 온갖 볼거리를 가지고 있는 곳이죠.

 

요세미티를 대표하는 것이

해프돔과 엘 캐피탄(El Capitan)이라면

데쓰 밸리를 대표하는 것은 배드워터와 샌듄일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샌듄은

Mesquite Flat Sand Dunes을 말하는 것입니다.

 

데쓰 밸리 국립공원 내에는

모두 4개의 샌듄(Sand Dunes)이 있습니다.

 

북쪽부터

유레카 듄(Eureka Dunes)

메스킷 플랫 샌 듄(Mesquite Flat Sand Dunes),

파나민트 듄(Panamint Dunes), 그리고 아이벡스 듄(Ibex Dunes)입니다.

 

여기에다

데쓰 밸리 국립공원은 아니지만

인근 지역에 있는 Dumont Dune과

Big Dune을 포함하면 데쓰 밸리에는 무려 6개의 Sand Dunes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가장 잘 알려진 샌듄은

바로 Mesquite Flat에 자리잡고 있는

Mesquite Flat Sand Dunes입니다.(이하 MFSD)

 

LA에서

MFSD로 가는 길은

크게 세 갈래 길이 있습니다.

 

첫째는

14번, 395번을 지나

Olancha에서 190번으로 가는 길입니다.

 

둘째는,

15번을 이용하여

Baker에서 127번과 190번을 이용해서 가는 길이며

 

마지막으로는

14번, 178번을 이용하여

Trona와 Panamint Valley를 지나 190번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어느 길로 가든

MFSD로 가는데는

최소 5-6시간이 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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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FSD를

촬영하기에 가장 좋은 때는

일출 무렵의 여명과 해가 뜬 직후입니다.

 

석양의 경우,

해가 지는 서쪽으로

Cottonwood 산맥이 가로 놓여 있어서

빛이 좋아지기 전에 해가 넘어가기 때문에 일몰 빛은 좋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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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해가 뜨기 직전의 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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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뜨기 직전

동쪽의 맞은편의 모습입니다.

해가 질 때 서쪽의 맞은 편 역시 같은 색감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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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해가 막 떠오르려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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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떠오르는

맞은편의 산정상 부분이

일출 빛에 붉게 물들고 있습니다.

 

샌듄은 산정상보다

낮은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아직 빛이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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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듄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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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곳에 Spot으로 측광을 맞추면

어두운 곳은 더 어둡게 되어 명암이 뚜렷한 사진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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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빛의 예술입니다.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찍을 수 없지만

빛에 의해 사진은 같은 부분이라 할지라도 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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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쓰 밸리의 독특한 곡선이 빛에 의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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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드러나자 사람들도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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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가 빛을 받아 마치 사금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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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막 떠오를 때의 색온도와

해가 떠 오른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의 색온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색온도에 차이가 있다는 말은

곧 색상의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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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듄의 정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

샌듄을 오르는 것은 가파른 산을 오르는 것보다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걸음을 내딛는 만큼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래로 인해 최소한 내디딘 걸음의 3분의1, 혹은 4분의 1만큼 뒤로 밀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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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듄은

사진사들 뿐만 아니라

방문객들 또한 많이 찾기 때문에

샌듄 주변엔 언제나 발자국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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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전날 밤에 바람이 많이 불었거나

당일 새벽에 바람이 불면 발자국이 모두 지워집니다.

 

발자국이 없는

완전한 샌듄을 찍기 원한다면

바람이 많이 분 다음날 아침에 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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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듄의 빛을 찍는 사진사들의 모습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직업,

혹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 가운데 한 부류가 사진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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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면

샌듄은 바다 물결 모양처럼 변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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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듄의 높낮이, 혹은 위치에 따라

빛이 들어오는 부분과 빛이 들어오지 않는 부분의 명암이 뚜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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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아무 발자국도 없는

샌듄을 오르는 기분은 마치 처녀지를 탐험하는 것과 같은 기분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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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밀려간 나뭇가지가 남긴 흔적...

마치 Race Track의 Moving Rock을 연상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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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미국 서부 사진여행, 오지여행 최고의 전문 가이드 주안(pwer21)




 

가정 교회는 성경적인가?(변종길 박사)| 개혁 신앙 자료
박상현 조회 31 |추천 0 | 2007.11.03. 09:49

 

가정 교회는 성경적인가?

 

변 종 길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소그룹 모임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하다. 성도는 소그룹 모임을 통해 교제와 사랑을 나누고 소속감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아무리 예배를 잘 드리고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았다 할지라도 소그룹 모임을 통한 교제가 없으면 신앙생활에 만족과 기쁨을 느낄 수 없다. 나아가서 소그룹 모임은 교회 성장에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설교와 뜨거운 기도가 있다 하더라도 소그룹 모임이 활성화 되지 않으면 교회 성장에 제동이 걸리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래서 소그룹 모임을 어떻게 운영하는가 하는 것은 목회자들에게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 왔다.

한국 교회는 전통적으로 기관별 모임과 구역 모임을 통해 이러한 요구를 충족해 왔다. 그러나 남여 전도회와 청년회 등의 기관별 모임은 사업과 행사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으며, 구역 모임은 대개 예배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러다 보니 개인별 신앙 교육과 돌봄과 권면, 상담, 전도 등이 약하다는 지적이 있어 왔다. 그래서 상당 부분 형식화되고 제도화된 기존의 소그룹 모임 대신 새로운 소그룹 모임을 추구하게 되었다. 각종 성경 공부 모임, 제자 훈련, 순 모임, 셀 모임, 가정 교회 등이 그러한 예들이다. 특히 어떤 교회들에서는 지나치게 제도화된 당회 조직 외에 좀 더 유연하고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되는 대안으로 ‘가정 교회’ 모임을 선호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서 가정 교회야말로 신약 성경이 제시하는 바람직한 모델이며, 초대 교회는 다 가정 교회 형태였다고 주장한다. 그 가정 교회들이 모여서 하나의 지역 교회를 이루었으며, 가정 교회들 전체가 모이는 연합 모임은 대개 한 달에 한 번쯤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면 과연 신약 교회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신약 교회는 정말로 가정 교회 형태였을까? 그리고 과연 그러한 많은 가정 교회들이 모여서 하나의 지역 교회를 이루었을까? 그리고 소위 연합 예배는 한 달에 한 번쯤 모였을 것이라는 주장이 사실일까? 과연 신약 성경은 이러한 주장들에 어떻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신약 성경이 오늘날 침례교회의 최영기 목사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고 있는 가정 교회 운동과 이에 대해 신학적으로 동조하는 주장을 펴고 있는 신학자들의 견해에 대해 성경적으로 살펴보고, 신약 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그리고 나서 오늘날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방향은 무엇인지 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I. 가정 교회란 무엇인가?


그러면 가정 교회란 무엇인가? 오늘날 무엇보다도 ‘가정 교회’라는 용어의 혼란이 심각하다. 통일교는 지난 1997년경부터 ‘가정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교단명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에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으로 바꾸었으며. ‘참 가정’을 세운다는 것이 그들의 모토이다.1)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자 하는 주제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성도의 가정에서 모이는 성도들의 모임을 ‘가정 교회(house church)’라고 부른다. 신약 성경에 나타나는 많은 교회들이 그러하였다. 예를 들면 로마 교회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모였으며(롬 16:5), 고린도 교회는 아마도 바울과 온 교회의 식주인이었던 가이오의 집에서 모인 것으로 생각된다(고전 16:23; cf. 고전 1:14). 골로새 교회는 빌레몬의 집에서 모였으며(몬 2절), 라오디게아 교회는 눔바라는 여자의 집에서 모였다(골 4:15). 또 에베소 교회도 처음에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서 모였다(고전 16:19). 이처럼 초대 교회는 성도의 집(가정)에서 모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 경우의 ‘가정’이란 장소로서의 가정을 말한다. 즉, 교회당 건물이나 빌딩이 아니라 성도의 집에서 모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단순히 성도의 집에서 모였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가정 교회’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날 미국 휴스턴의 최영기 목사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말하는 ‘가정 교회’가 그러하다. 신약 성경에 그들이 말하는 가정 교회의 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장소로서의 가정 교회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교회당 건물이나 상가 건물이 아니라 성도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영기 목사가 주장하는 ‘가정 교회’는 그런 장소적 의미가 제일 중요한 것은 아니다. 장소적 의미보다 새로운 구조로서의 의미가 더 중요하다. 즉, 그가 말하는 ‘가정 교회’는 교회 안의 한 소그룹 모임으로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곧 ‘교회 안의 교회’로서 ‘가정 교회’가 위치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사실 어디에서 모이느냐 하는 장소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며 ‘새로운 교회 구조’가 그 핵심이다.2) 이 ‘새로운 교회 구조’는 성령의 역동적인 역사(役事)를 제한하는 ‘전통적인 교회 구조’와는 달리 ‘성령의 힘을 제한하지 않는 교회 구조’인 초대 교회를 말하는데, 그 당시에는 한 도시에 하나의 교회 안에 가정이 중심이 된 수많은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3) 그래서 최영기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어쨌든 저는 신약 교회가 성령께서 마음껏 역사하실 수 있는 조직, 즉 가정 교회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를 통하여 폭발적인 능력이 나오게 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4) 그리고 1996년에 나온 책에서 그는, 자기 교회에는 32개의 ‘가정 교회’가 있다고 말한다.5)

  

이러한 ‘가정 교회’의 핵심은 교회 안에 있는 ‘가정 교회’ 하나하나가 다 ‘독립된 교회’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6) 그래서 그것을 ‘구역’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한다. 그러면서 가정 교회와 구역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로, 구역은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을 묶어 조직되지만 가정 교회는 가정 교회 회원들의 선택에 따라 결성된다. 둘째, 구역 모임은 친교와 서로를 돕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가정 교회에서는 예배, 성경 공부, 제자 훈련, 선교, 전도, 친교 등 교회가 하는 모든 역할을 다 한다.7) 따라서 가정 교회는 자그마한 개척 교회라고 생각할 수 있다.8) 이처럼 최영기 목사가 주장하는 가정 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작은 교회이며, 그러한 가정 교회들이 모여서 하나의 전체 교회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교회 안의 교회’라는 구조가 중요하며 어디에서 모이는가 하는 장소 문제는 오히려 부차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 안의 교회’, ‘2층 구조로서의 교회’ 구조는 신약 성경에서 발견되는 가정 교회와는 거리가 멀다. 예루살렘 교회가 “집에서 떡을 떼고”(행 2:46),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였다”(행 5:42), “마리아의 집에 .... 모여 기도했다”(행 12:12)는 말은 있어도 그 각각이 완전한 교회였다는 증거는 없다. 예루살렘 교회는 수많은 가정 교회들의 연합체였다기보다도 하나의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가정에 모여서 모임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가정에서의 모임은 오늘날의 구역 모임과 비슷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로마의 교회나 고린도의 교회 등에서도 오늘날 ‘가정 교회’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은 그런 ‘새로운 교회 구조’의 증거는 없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좀 더 자세히 논할 것이다. 


II. 교회란 무엇인가?


그러나 ‘가정 교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도들의 가정에서 모이는 모임을 왜 ‘교회’라고 부를 수 없는가라고 반문한다. ‘신자들의 모임’이 교회인데 왜 그런 모임이 ‘교회’가 아니냐고 항변한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벨직 신앙고백」이 교회는 ‘참 신자들의 거룩한 모임’이라고 했을 때, 그 ‘교회’는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보편적 교회’를 말한다. “우리는 하나의 보편적 또는 일반적 교회를 믿고 고백한다. 그것은 참 신자들의 거룩한 모임이다.”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표현을 따르자면 ‘택자들의 총수’를 의미한다. “보편적 또는 우주적 교회는 불가시적인데,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였고, 모이고 있으며, 모일 택자들의 총수로 구성되어 있다.”10) 따라서 성도들 몇 명이 모였다고 해서 ‘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남아공화국의 개혁주의 교의학자인 헤인스(J. A. Heyns) 교수가 잘 표현한 대로 “참 신자들이 모여 있다고 해서 또는 그들의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다 교회는 아니다.”11) 

  

모든 성도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 있는 ‘지역 교회’12)에 속해야 하며 그 교회의 가르침과 치리를 받아야 한다(「벨직 신앙고백」 28조). 우리는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별해야 하는데, 참 교회의 표지는 복음의 순수한 전파와 성례의 순수한 거행과 권징의 시행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따라 시행되어야 한다(29조).   

  

참 교회는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운영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성례를 거행하는 수종자(목사)가 있어야 하며, 목사와 함께 교회 회의를 구성하는 장로들과 집사들이 있어야 한다(30조). 그리고 말씀의 수종자들(목사들)과 장로들과 집사들은 교회에 의해 적법한 선거를 통해 선출되어야 한다(31조).

  

따라서 이러한 선출 절차를 따르지 아니하고 목사나 당회에 의해 임명되는 ‘목자들’(가정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가정 교회’를 전통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성경적인 의미에서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무리가 있다. 가정 교회의 ‘목자들’은 대개 교회 성도들에 의해 투표에 의해 선출되지 않으며 당회를 구성하지도 않는다. 물론 장로들이 다 ‘목자들’이 된다면 이런 문제는 없어지겠지만, 가정 모임을 ‘가정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여전히 문제로 남게 된다.     


III. 초대 교회는 다 가정 교회였는가?


최영기 목사와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초대 교회는 ‘가정 교회’였다고 주장한다. 최영기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정 교회라고 하면 평신도가 지도자가 되어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를 말합니다. 신약 성경을 읽어 보면 우리는 당시의 교회 형태가 가정 교회였음을 발견합니다.”13) 신약에서의 가정 교회에 대해 깊이 연구한 홍인규 교수도 “사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교회는 모두 가정 교회이다.”라고 말한다.14) 교회 건물 형태로서의 가정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정용성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도, 신약의 교회는 가정에서 모였고, 그 이후 초대 교회도 주후 4세기 콘스탄틴 대제의 밀라노 칙령(주후 313년) 이전까지는 가정에서 모였다. .... 이는 신약 시대의 교회는 모두가 다 가정에서 모임을 가졌음을 시사하여 준다.”15) 침례신학대학교의 장동수 교수도 이와 마찬가지로 말한다. “신약 시대에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공동체들은 그야말로 어떤 개인의 집, 즉 가정에서 만나고 예배하고 활동하는 가정 교회로 모였다. .... 주후 3세기까지 교회의 모임만을 위한 교회당 건물은 없었다.”16)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조병수 교수는, 조금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다. “신약 성경(그리고 속사도 시대 문서)을 살펴보면 초기 기독교가 가정집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는 가정 교회의 시기였던 것이다.”17)

  

그렇다면 초대 교회는 다 가정 교회였는가? 신약 성경은 오직 성도의 가정에서 모이는 교회 형태 외에 다른 것은 말하지 않는가? 이에 대해 필자는, 신약 성경은 가정 교회에 대해 많이 말하지만 그것이 전부 다는 아니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신약 성경은 가정 교회 외에 다른 형태도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 예루살렘 교회


  예루살렘 교회는 처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모였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권함을 받은 3천명의 성도들이 모인 장소는 바로 성전이었다. 누가는 이 사실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6). 3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다 모일 수 있는 장소는 성전이 가장 적합하였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넓은 마당을 가지고 있었다. 절기 때에는 수십만 명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아마도 성전의 동편에 있는 솔로몬 행각이었을 것이다(행 3:11). 사도행전 5:12은 이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 솔로몬 행각은 이방인의 뜰 동쪽에 있었는데, 미문(美門, 니카노르 문)이 있는 곳과 같은 방향에 있었다. 동쪽에서 미문을 통해 들어와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거기에 솔로몬 행각이 서 있었다.18)

  

사도들은 이 성전에서 가르쳤다(행 2:42, 5:21, 25, 42). 성도들은 여기서 기도하고(행 2:42, 3:1, 4:23-31), 하나님을 찬미하고(행 2:47), 전도하였다(행 5:42).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기 전에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 후에 늘 예루살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였다(눅 24:53). 이처럼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오순절 전이나 후나 신앙생활의 중심지였다.

 

물론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집’에서도 모였다. 그들은 날마다 ‘집’에서 모여 떡을 떼며 음식을 먹었다(행 2:46). 또 성전에서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가르치고 전도하였다(행 5:42).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의 ‘전체 교회’와 많은 ‘가정 교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집에서 모인 것을 두고 ‘가정 교회’라고 말하는 것은 성급하다고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다시 논할 것이다. 어쨌든 예루살렘 교회는 처음에 ‘성전’에서 모였으며 ‘성전’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2. 에베소 교회


에베소 교회는 처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 모였다.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중에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난 그들은 바울을 따라 에베소로 왔다(행 18:18,19). 바울은 에베소에 도착한 후 곧장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였다. 그리고는 얼마 있지 않아 곧 가이사랴로 떠났다(행 18:19-22). 따라서 바울이 떠난 후에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스럽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 모였을 것이다.

  

3차 전도여행 때 바울이 다시 에베소에 들렀다. 그는 관례를 따라 회당에 들어가서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강론하였다(행 19:8). 그러자 어떤 이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비방하므로 바울은 그들을 떠나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였다. 2년 동안을 그리하니 아시아에 사는 많은 사람들 곧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행 19:9,10).

  

따라서 에베소 교회는 적어도 2년 동안 ‘두란노 서원(hJ scolh; Turavnnou)’에서 모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서원(書院)’으로 번역된 헬라어 ‘스콜레’는 원래 ‘여가(leisure)’를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강의실(lecture hall)’을 뜻한다.19) 칼빈은 이에 대해 ‘두란노(Tyrannus)’라는 사람이 비용을 대어 설립하여 시에 기증한 ‘김나지움’일 것으로 추정한다.20)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해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어쨌든 에베소 교회는 ‘두란노 서원’이라는 강의실에서 모였으며 그곳에서 말씀을 듣고 배웠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6:19에 보면 에베소 교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 모였다고 한다. ‘그들의 집에 모이는 교회(hJ kat! oi\kon aujtw'n ejkklhsiva)’라는 표현은 바울 서신에 몇 번 나타나는데(롬 16:5, 골 4:15, 몬 2절), 초대 교회가 성도의 집에서 많이 모였음을 나타내 준다.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의 경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도 모이고 두란노 서원에서도 모이고, 두 곳에서 모였다는 말인가? 주일 예배와 친교 및 기도 모임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서 가지고, 주중의 성경 강론은 두란노 서원에서 한 것일까? 우리는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두란노 서원으로 분리해서 나가기 전에 바울은 그의 관례를 따라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강론하였다. 안식일 날 드리는 회당 예배가 곧 그들의 공식 예배였다. 따라서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명확하게 구별되기 전에는 기독교 예배와 유대교 예배가 공존하고 있었다. 처음에 유대인들은 바울과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무리들을 유대교의 한 분파로 인식했으며, 따라서 유대교의 테두리 안에서 이해되었다(행 28:22). 그러한 시기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은 그리스도인들의 교제와 교육과 기도의 장소로서 역할하였을 것이다. 두란노 서원으로 분리되어 나온 후에도 그들의 집은 계속해서 교제와 교육과 기도의 장소로서 역할했을 것이다. 그런데 안식일 또는 주일 날 예배를 어느 곳에서 드렸는지, 또 성찬식을 어디서 어떻게 행했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어쨌든 오늘날 어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도의 가정에서 모이는 가정 교회만이 신약 교회의 모습이라고 하는 주장은 지나치며 사실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신약 교회는 ‘의도적으로’ 가정에서 모였다고 하는 주장도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정용성 교수는 “신약 시대에 교회는 단지 불가피한 선택으로서 가정에 모였던 것이 아니라, 상당히 의도적으로 가정에 모였음을 특히 누가-행전은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한다.21) 곧 가정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교제와 예배를 위한 가장 역동적인 무대 환경을 제공하여”22) 주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가정에서 모였다는 주장은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신약 교회가 가정에서 많이 모인 것은 자연발생적이고 현실적인 이유 때문으로 생각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생겨나는데 마땅히 모일 곳은 없고, 또 예배당을 건축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감당할 재정 마련도 쉽지 않으며, 또한 적은 무리를 위해 굳이 그렇게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성도의 가정에서 모인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가정이 가지는 따뜻함과 친밀감, 자연스러움의 장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가정에서 모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성도의 수가 많을 때는 ‘성전’에서 모이기도 하고 또한 ‘강의실’에서 모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필요에 따라 목적에 맞게 장소를 선택하였으며, 장소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다. ‘어디’에 모이느냐보다는 ‘무엇’이 전파되느냐, 그리고 ‘어떻게’ 행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였다. 즉, 외적 환경보다는 복음의 내용과 삶이 더 중요하였던 것이다.


3. 야고보서의 수신자 교회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보낸 편지로 알려져 있다. 이 편지의 수신자는 ‘디아스포라에 있는 열 두 지파’라고 되어 있다(약 1:1). 여기서 ‘열 두 지파’는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인데, 여기서는 유대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에 “디아스포라에 있는”이란 수식어가 붙어 있어서 이 전체 표현은 팔레스타인과 인근의 수리아 지역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23) 

  

그러면 이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서 모였을까? 2장 2절에 보면 ‘회당’이란 표현이 나온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 신약에서 ‘회당(sunagwghv)’은 원칙적으로 ‘건물’ 또는 ‘모임’을 뜻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들어오다’는 동사와 함께 사용되었으므로 건물적 의미라고 생각된다. 야고보서에서 ‘모임’을 뜻할 때에는 ‘교회(ejkklhsiva)’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약 5:14).24) 비록 여기의 ‘회당’이 그리스도인들의 ‘모임(assembly)’을 가리킨다고 보더라도, 거기에서 장소적 개념 또는 건물적 개념을 배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어떤 장소, 유대인의 회당처럼 예배하기 위해 정해진 장소에 모인 모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3절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는 표현이 그러한 장소성과 건물 구조를 시사하고 있다.25) 따라서 여기의 ‘회당’이란 표현은 건물로서의 ‘회당’이란 개념이 강하다고 생각된다.

  

이 ‘회당’은 물론 유대인들의 회당은 아니다. 왜냐하면 야고보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의 회당을 빌려 사용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야고보서는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의 회당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따로 사용한 건물을 뜻한다. 오늘날 용어로 말하자면 ‘예배당’ 또는 ‘교회당’이 되겠으나 당시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 사용하던 용어인 ‘회당’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초기 기독교 예배 형태가 유대인의 회당 예배 형태에서 유래했으며, 동일한 유대인들이 예배드리게 된 것을 생각해 볼 때 ‘회당’이란 용어 사용은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야고보서가 기록될 당시에 팔레스타인과 인근의 수리아 지역에 곳곳마다 교회당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로서 예수를 믿는 자들은 처음에는 유대인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이내 분란이 생겨서 분리하여 나왔을 것이다. 처음에는 믿는 자들의 가정에서 예배들 드리다가 얼마 가지 않아서 그들이 전에 예배드리는 건물인 유대교 회당을 본떠서 그들 자신의 (기독교) 회당을 마련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야고보가 이 편지를 기록할 즈음에는 유대의 마을 곳곳에, 그리고 수리아 지역의 곳곳에 기독교 회당 건물이 세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학자들은 야고보서의 기록 시기를 대개 로마서보다 이른 시기로 보는데,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대략 주후 50년대의 어느 시점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이미 유대 지역 곳곳과 수리아 지역 여러 곳에 교회당 건물이 세워져 있었으며 그곳에서 예배드렸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의 교회는 다 가정 교회였으며 콘스탄틴 대제의 밀라노 칙령(주후 313년) 이전까지는 가정에서 모임을 가졌다는 주장26)은 지나친 것이며 신약 자체의 증거에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 성경에 나타난 초대 교회는 처음에 성도의 가정에서 모임을 가진 경우가 많이 있으며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신약의 ‘모든 교회’가 다 가정 교회였다는 주장은 지나친 것임을 알 수 있다. 신약의 교회는 환경과 형편에 따라 ‘성전’에서 모이기도 하였고, ‘강의실 홀’에서 모이기도 하였고, 또한 따로 짓거나 빌린 ‘교회당 건물’에서 모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신약의 교회는 ‘의도적으로’ 가정에서 모인 것은 아니며 형편에 따라 가정에서 모이기도 하고 홀에서 모이기도 하고, 또는 별도의 건물에서 모이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초대 교회는 획일적으로 다 가정 교회 형태였으며 또 오늘날 우리가 그러한 교회 형태를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나친 것이며 사실에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IV. 한 도시에 여러 가정 교회가 있었는가?


가정 교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 도시에 여러 가정 교회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최영기 목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신약 시대에는 지금처럼 한 도시에 여러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도시에는 교회가 하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로마에는 로마 교회 하나밖에 없었고 골로새에서는 골로새 교회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그 밑에는 가정이 중심이 된 수많은 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27) 또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한다. “각 도시마다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도시에 교회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에베소에는 에베소 교회 하나, 로마에는 로마 교회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도시마다 집집에서 모이는 수많은 가정교회가 있었습니다.”28)

  

그러면 과연 신약 시대에는 한 도시에 교회가 하나밖에 없었고 그 안에 수많은 ‘가정 교회’가 있었는가? 아니면 한 도시에 여러 ‘교회들’이 있었는가? 아니면 한 도시에 ‘하나의 교회’가 있고 그 안에 여러 개의 ‘가정 모임’이 있었는가? 이 문제는 쉽사리 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각각의 경우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1. 예루살렘 교회


예루살렘 교회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도들이 ‘성전’에서 모이고 또 ‘집’에서도 모였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행 2:46) 5장 42절에서도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가 수많은 가정 교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원문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한다. 2장 46절에서 ‘집에서(kat! oi\kon)’라고 하는 것은 ‘성전에서(ejn tw'/ iJerw'/)’와 대비되고 있다.29) 따라서 누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초대 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모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집에서도’ 순전한 마음으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은혜와 기쁨이 충만하여서 ‘성전’에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순전한 마음으로 교제하고 형제 사랑을 실천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이 성도의 집에서 소그룹 모임을 가졌다거나 가정 교회 모임을 가졌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들은 각자 집에서 가족끼리 모였을 수도 있고, 몇몇 사람이 같이 모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모였다’는 것이 꼭 무슨 공식적인 순서를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모여서 함께 식사를 나누고 교제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초점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는 데 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였다. 따라서 초대 교회에 역사한 성령의 능력은 성전에서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는 것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칼빈도 “집에서 떡을 떼고”에 대한 주석에서 같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누가가 말하는 것은 그들은 참 경건의 표시를 단지 공적으로만 보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적 생활의 진행과 분위기도 동일한 것이었다는 것이다.”30)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 2장 42절과 46절의 “떡을 뗀다”31)는 표현에 대해 ‘성찬’32) 또는 ‘애찬’33)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성도의 가정에서 ‘성찬식’을 거행하였고, 따라서 ‘가정 교회’를 이루고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물론 성경에서 ‘떡을 떼다’는 표현이 성찬 또는 애찬의 의미로 사용된 곳들도 있지만(행 20:7, 고전 10:16), 이 구절의 표현을 성찬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맥에 맞지 않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42절에서 ‘떡을 떼다’는 말은 ‘교제하며’ 다음에 나오며 또한 접속사 ‘카이(kaiv)’가 없이 바로 연결되어 있다. 즉,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다음에는 ‘카이’가 나오고 ‘떡을 떼며’ 다음에도 ‘카이’가 나오지만, ‘서로 교제하며’와 ‘떡을 떼며’ 사이에는 ‘카이’가 없다. 그래서 ‘교제 하는 것’과 ‘떡을 떼는 것’은 하나의 개념으로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떡을 떼는 것’은 ‘교제하는 것’ 다음에 나오는 새로운 항목으로 볼 것이 아니라 ‘교제하는 것’에 속한 항목으로서 교제의 구체적 방법을 말한다고 보아야 한다.34) 즉,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떡을 떼는 것’ 곧 함께 식사하는 것을 통해 ‘교제’를 실천했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떡을 떼는 것’은 성도들이 교제를 실천하는 방편으로서 ‘함께 먹는 것’을 의미하며 ‘성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35)

  

46절의 “날마다 ...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도 마찬가지로 이해된다. 여기에 ‘서로 교제하며’가 따로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떡을 떼며 음식을 먹는 것’이 바로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초점은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성전에서나 집에서나 어디에서든지 다 ‘한 마음’이 되었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교제하였다는 것이다. 칼빈도 이 점을 잘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에서 떡을 떼는 것이 성찬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나의 견해로는 누가의 의미와는 매우 다른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우리에게 그들은 자주 함께 먹었으며 또 검소하게 함께 먹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36)

  

따라서 우리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공적인 모임을 성전에서 가졌으며, 집에서는 성도간의 교제와 기도와 전도를 하였다고 본다. 성도의 가정에서의 모임은 가족간의 식사였거나 또는 이웃들과 함께 하는 공동 식사였다고 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 이것은 오늘날의 구역 모임이거나 비공식적인 교제 모임 또는 사랑방 모임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 좀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 볼 수 있다. 만일 예루살렘 교회가 각각의 독립된 가정 교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면, 예루살렘 전체 교회에 대해 ‘복수’가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은 ‘지역 교회’에 대해 사용될 때 하나 이상의 여러 교회를 가리킬 때에는 ‘교회’라는 단어가 항상 ‘복수’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갈 1:2, 고전 16:1), ‘아시아의 교회들’(고전 16:19), ‘마게도냐 교회들’(고후 8:1), ‘유대의 교회들’(갈 1:22)에서처럼 여러 교회를 가리킬 때에는 복수로 사용된다.37) 그러나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교회에 대해 말할 때 항상 단수로 말한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행 5:11),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서 ...”(행 8:1),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행 8:3),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행 11:22),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행 12:1),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혀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행 12:5),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행 15:4).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에 대해 말할 때에는 항상 ‘단수’가 사용되고 있다. 이 사실은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의 단일한 교회였음을 시사한다.


2. 로마 교회


  홍인규 교수는 도시 로마에 적어도 세 개의 가정 교회들이 있었다고 본다. 첫째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서 모이는 가정 교회이고(롬 16:3,5), 둘째는 아순그리도와 블레곤와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의 교회이고(롬 16:14), 세 번째는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와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는 성도의 교회이다(롬 16:15; cf. 16:5,10).38) 

  

조병수 교수도 “로마 교회 안에는 여러 개의 작은 교회들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39)고 하면서, 그 증거로 다음 다섯 가지를 든다. 1)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가정(롬 16:5); 2) 아리스도불로의 권속(롬 16:10); 3) 나깃수의 권속 중 주 안에 있는 자들(롬 16:11); 4)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롬 16:14); 5)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와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롬 16:15).40) 이러한 사실에서 조병수 교수는 로마에는 여러 가정 교회 지도자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자신의 가족을 중심으로 ‘가족 교회(Family Church)’를 이루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가족 교회에 방문자들과 손님들이 가담하여 ‘가정 교회(House Church)’가 되었으며, 이 가족 교회들 또는 가정 교회들이 연합하여 하나의 ‘지역 교회’를 이루었다고 본다.41)   

  

이러한 주장에 대해 우리는 조심스럽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로마서에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교회’ 또는 ‘교회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라고 부르고 있을 따름이다(롬 1:7). 따라서 이 표현만으로는 로마에 하나의 교회가 있었는지 여러 개의 교회들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칼빈은 로마서 16:5의 ‘그들(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모이는 교회’라는 표현에 대해 그들의 ‘가족’을 가리킨다고 본다. 바울은 그들의 가족을 ‘교회’라고 부름으로써 그들에 대해 커다란 존경을 표하고 있다고 말한다.42)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교회’라는 표현은 신약에서 그런 개인적인 가정에 대해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43)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로마의 모든 성도들이 다 모였다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집에 로마의 성도들 중 일부가 모였다고 보는 것이다. 이 중에서 첫 번째 것은 로마 시의 크기로 보아 가능성이 커 보이지 않는다. 로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한 집에 다 모이는 것은 거리상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44) 그렇다면 로마에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모이는 교회 외에도 몇 개의 가정 교회들이 더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개혁주의 주석가들의 견해도 다르지 않은 것 같다.45) 물론 로마서 16장 14절의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tou;" su;n aujtoi'" ajdelfouv")’이 ‘교회’를 뜻하는지 그냥 말 그대로 그들과 함께 있는 ‘형제들’을 뜻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15절의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tou;" su;n aujtoi'" pavnta" aJgivou")’란 표현도 꼭 ‘교회’를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그들과 함께 지내고 있는 ‘성도들’을 뜻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우리는 로마 교회에 대해 더 이상의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실상을 알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한 태도가 될 것이다. 

 

3. 고린도 교회


어떤 사람들은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홍인규 교수는 고린도에도 여러 가정 교회들이 있었다고 본다. 곧,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행 18:1-3), 디도 유스도의 집(행 18:7), 아볼로가 머문 집(행 18:27-28), 가이오의 집(롬 16:23, 고전 1:14), 스데바나의 집(고전 1:16, 16:15-16), 그리고 에라스도의 집(롬 16:23).1) 이처럼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곳이면 거기에 ‘가정 교회’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 점은 조병수 교수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가이오가 로마서에서 ‘온 교회의 식주인’(롬 16:23)으로 소개된 사실에서, 가이오의 집이 가정 교회로 사용되었지만 때때로 전체 교회의 회집 장소로 제공되었다고 본다. “만일에 이런 추측이 옳다면 고린도에는 하나의 지역 교회와 여러 가정 교회들이 병존했으며 다양한 회집 형태가 있었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2) 여기서 우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조병수 교수가 주장하는 견해는 순전히 ‘추측’에 근거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고린도에 여러 개의 가정 교회들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다 마찬가지다. 오늘날 소위 ‘가정 교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대부분 ‘추측’에 근거해 있으며 확실한 ‘증거’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추측’이 타당한가 하는 것은 여전히 의문이며 나중에 다시 논의할 것이다. 조병수 교수는 또 사도 바울이 스데바나의 가족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전 1:16)는 사실에서 그곳에 가정 교회가 있었다고 주장한다.3) 물론 고린도전서 16:15에 보면 “스데바나의 집은 ...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고 말한다. 여기서 ‘성도들 섬기는 것’이 꼭 ‘가정 교회’를 통해 섬기는 것인지, 아니면 일반적인 의미에서 성도 대접하기를 힘쓰며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한다는 뜻인지 우리가 알기 어렵다. 미국의 고든 피(Gordon Fee)도 여기서 이 ‘섬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가르치는 것과 설교를 포함해서 많은 봉사(섬김)들을 포함할 만큼 모호하기 때문이라고 한다.4)

  

그러나 홍인규 교수나 조병수 교수는 ‘교회’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성도들이 어디에 몇 명 모여 있으면 거기에 ‘교회’가 있다고 추정하는 것 같다. 그래서 조병수 교수는 ‘가족 교회’, ‘가정 교회’, ‘지역 교회’에 대해 말하고 있다.5) 그러나 교회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교회에 대한 개혁주의적 견해를 무시하는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관에 따르면, 교회가 되려면 교회의 표지가 있어야 한다. 곧 순수한 복음의 전파, 순수한 성례의 거행, 권징의 실시, 이런 참 교회의 표지가 있어야 한다(「벨직 신앙고백」 29조). 그리고 교회에는 직분자들이 있어야 한다. 곧, 하나님 말씀의 수종자, 장로와 집사들인데 이들은 교회에 의해 적법한 선거를 통해 선출되어야 한다(제31조; 엡 4:11). 그냥 성도들이 모였다고 해서 다 교회는 아니다.6)

  

우리는 고린도 교회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2에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게 편지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교회(hJ ejkklhsiva tou' qeou')’는 단수로 되어 있다. 여기서 ‘교회’는 지역 교회(local church)의 개념이다.7) 고린도후서 1:1에서도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도 ‘교회’는 단수로 사용되었다. ‘가정 교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여러 개의 가정 교회들로 구성된 하나의 ‘지역 교회’를 가리킨다고 주장지만, 만일 고린도 교회가 각각의 독립된 완전한 교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고린도에 있는 교회들’이라고 복수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신약 성경의 용법이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인데, 수신자에 대해 ‘갈라디아의 교회들(aiJ ejkklhsivai th'" Galativa")’이라고 복수로 말하고 있다(갈 1: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라고 할 때에도 복수를 사용하였다(갈 1:22). 마게도냐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들을 말할 때에도 ‘마게도냐의 교회들’이라고 복수를 사용하고 있다(고후 8:1).8) 그리고 사도행전은 바울과 실라가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였다고 말한다(행 15:41).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교회들’이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였다고 한다(행 16:5). 이처럼 신약 성경은 여러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말할 때에는 복수로 ‘교회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이라고 말할 때에는 아주 분명하다(계 1:4, 11, 20). 이 일곱 교회에 대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분명히 복수로 말한다(계 2:7,11,17,28, 3:6,13,22, 22:16).

  

그런데 여기 고린도 교회에 대해 말할 때에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단수로 말하고 있다(고전 1:2, 고후 1:1). 이것은 고린도 교회가 하나의 지역 교회로 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가정 교회는 아마도 ‘가이오’의 집에서 모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롬 16:23). 여기서 ‘식주인(xevno")’이란 말은 원래 ‘나그네, 손님’이란 뜻인데, 여기서는 ‘손님을 대접하는 사람’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바울은 고린도의 가이오 집에 머물고 있었으며, 그 때 로마서를 기록하였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가이오는 바울뿐만 아니라 ‘온 교회(o{lh hJ ejkklhsiva)’를 대접하였다. 여기서 ‘온 교회’가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는 분명치 않다. 고린도 교회의 전체 성도를 가리킬 수도 있고, 아니면 좀 더 넓은 의미로 고린도뿐만 아니라 그밖에 당시에 존재하던 모든 교회를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다.9) 어쨌든 가이오는 예수 믿는 자로서 바울뿐만 아니라 여러 성도들을 대접하기를 힘쓴 고린도의 유력한 성도로서, 고린도 교회는 그의 집에 모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가이오의 집 외에 다른 집들에도 가정 교회가 모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예를 들면, 조병수 교수는 “사도행전에 의하면 그리스보는 회당장으로서 ‘그의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었다(행 18:8). 이것은 그가 자신의 집을 가정 교회로 제공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10)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추측에 불과하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회당장 그리스보의 온 가족이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지 그 이상은 없다. 어떤 사람이 온 가족으로 더불어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그 집에 가정 교회가 모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며 잘못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 한 300명쯤 되는 교회에 온 가족이 다 믿는 가정이 약 50 가정쯤 있다고 치자. 그러면 그 50 집이 다 ‘가정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한 사람이 온 가족으로 더불어 새로 등록했다고 치자. 그러면 “아, 거기에도 하나의 가정 교회가 모였을 것이다.” - 이렇게 추측할 수 있겠는가? 어떤 한 가정이 예수를 믿었다는 것과 거기에 가정 교회가 모였다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다. 그런데 이 둘을 묶어서 같다고 보는 오류를 오늘날 학자들이 많이 범하고 있다.

  

V. 연합 모임이 있었는가?


만일 초대 교회가 오늘날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한 도시 안에 작은 여러 가정 교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그들은 어떻게 서로 관련을 맺고 있었을까? 이에 대해 홍인규 교수는 그들 가정 교회들은 때때로 전체 모임을 가졌을 것이라고 본다. 그 증거는 고린도전서 14:23의 ‘온 교회(hJ ejkklhsiva o{lh)’가 함께 모였다는 기록이다. 그리고 로마서 16:23에도 고린도 교회에 대해 말하면서 ‘온 교회(o{lh hJ ejkklhsiva)’의 모임 장소가 가이오의 집에 있었다고 말한다. 홍 교수는 여기의 ‘온 교회’란 고린도에 있는 모든 가정 교회들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의미한다고 본다.11) 그리고 ‘온 교회’의 회합은 이교도의 모임들의 경우를 따라 한 달에 한 번 정도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12)


1. 온 교회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해석에 대해 큰 의문을 가진다. 첫째로, ‘온 교회’에 대한 이해이다. 고린도전서 14:23의 ‘온 교회’가 과연 그런 ‘연합 예배’의 의미인지는 의심스럽다. ‘온(whole)’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홀로스(o{lo")’는 ‘범위에 있어서 전체에 속하는(pertaining to being complete)’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온, 전체의, 완전한(whole, entire, complete)’으로 번역된다.13) 즉, ‘부분’에 대해 대비되는 ‘전체’의 개념이다. 따라서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는 문장에서 ‘온 교회’는 가정 교회들의 ‘연합 모임’이라기보다도 교회가 전체로, 즉 공적으로 모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모임에서 성도들이 다 방언으로 말하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말이다. 따라서 이것은 ‘가정 교회’에서는 방언을 해도 되는데 ‘연합 모임’에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지만 교회의 공적 모임에서는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것은 28절의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거기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여기서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것은 ‘연합 모임’에서 잠잠하라는 말이 아니다. 바울은 지금 “연합 모임에서는 잠잠하고 가정 교회에서는 방언해도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너희 중 누가 방언으로 말하려고 하거든 혼자서 개인적으로 하라”는 뜻으로 말한다. 꼭 교회의 모임에서 하려거든 통역자가 있는 가운데 두 세 사람이 순서를 따라 하고 통역하라”고 말한다(27절). 따라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바는 ‘가정 교회’와 대비되는 ‘연합 모임’에서 잠잠하라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기도’와 대비되는 ‘공적 모임’으로서의 교회에서는 (통역이 없으면) 잠잠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23절의 ‘온 교회’는 가정 교회 주장자들의 주장처럼 가정 교회들의 연합 모임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다 모이는 공적 모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온 교회’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 또 다른 구절들인 사도행전 5:11과 15:22을 살펴보자. 사도행전 5:11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있고 난 후에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온 교회(o{lh hJ ejkklhsiva)’란 교회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말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어서 온 교회 성도들이 두려워하였다는 뜻이다. 여기에 무슨 ‘연합 교회’의 개념이 들어갈 게재가 아니다. 이 본문 전체에서 소위 ‘가정 교회’와 ‘연합 모임’ 사이의 대비를 찾을 수 없다. 이 사실은 여기의 ‘온 교회’에 이어서 나오는 ‘듣는 사람들이 다’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다. 앞의 ‘온 교회’가 조직체로서의 교회 공동체를 말한다면,14) ‘듣는 사람들이 다’란 표현은 개별적으로 이 사건에 대해 듣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 일을 듣는 자들은 다, 예외 없이 두려워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불신자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누구든지 예외 없이 다 놀라고 두려워하였다는 뜻이다.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무슨 ‘가정 교회’나 ‘연합 모임’에 대한 시사는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여기의 ‘온 교회’는 말 그대로 온 교회이지 다른 뜻이 아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5:22의 ‘온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도들과 장로들과 온 교회”란 표현에서 ‘온 교회’란 말 그대로 ‘온 교회’이지 다른 무슨 ‘연합 교회’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 표현의 뜻은 사도들과 장로들과 온 교회가 일치단결하여 결정하였다는 것이며, 교회 안에서 의견이 나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다른 표현인 ‘온 집(o{lo" oJ oi\ko")’도 마찬가지다. 사도행전 7:10의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에서 ‘온 집’이란 바로의 집에 속한 사람들 전체와 집안 일 전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18:8의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에서 ‘온 집’도 그리스도의 집에 속한 사람들 전부 곧 그의 가족 전부를 말한다.

  

로마서 16:23의 ‘온 교회’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라는 표현은 바울뿐만 아니라 교회 성도들 전체에 대해서도 식사를 제공하고 대접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온 교회’는 고린도 교회 전체 성도들을 말할 수도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 오는 '외지인 그리스도인들(Christian strangers)’을 가리킬 수도 있다.15) 왜냐하면 여기에 ‘식주인’으로 번역된 ‘크세노스(xevno")’는 원래 ‘낯선, 외국의(strange)’를 뜻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즉, 가이오는 외지에서 오는 낯선 그리스도인들을 재워주고 대접하는 일을 많이 하였는데, 단지 바울에게뿐만 아니라 로마나 다른 곳에서 오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하였다는 말이다.16) 그렇다면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에 연합 모임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된다. 


2. 모임의 회수


그리고 소위 그러한 ‘온 교회’의 모임이 한 달에 한 번 정도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근거가 없다. 홍인규 교수의 그러한 주장은 로버트 뱅크스의 추측에 근거한 것인데, 뱅크스는 이에 대해 그저 추측으로 말할 따름이다. “온 교회가 모였다고 언급할 때 바울이 취한 다소 분명치 않은 표현은 그 모임들이 한 주에 한 번 꼴로도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자발적인 이교도들의 회합이 한 달에 한 번 정도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큰 모임들도 자연스럽게 그러한 예를 따랐을 것이다.”17) 그러나 이것은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 더구나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들의 회합을 따랐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교도들의 제사 행위에 대해 우상 숭배이며 귀신과 교제하는 것으로 보았다(고전 10:7, 20). 따라서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이교도들의 회합을 모방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홍인규 교수도 로마 교회에 대해서는 어떤 한 장소에서 전체 모임을 가졌다는 증거는 없다고 인정한다. 아마도 로마라는 도시의 크기 때문에 전체 모임은 엄두도 못 냈을 것이라고 본다.18) 그렇다면 중요하게 문제되는 것은 고린도 교회인데, 이에 대해서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러 개의 가정 교회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교회가 있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는 ‘연합 모임’ 또는 ‘전체 모임’을 논하는 것 자체가 합당치 않다.


VI. 그러면 대안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대안은 무엇인가?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초대 교회는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한 도시에 여러 개의 가정 교회들로 구성된 하나의 지역 교회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교회 안의 교회’로서의 ‘가정 교회’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성도의 가정에서 교회가 모이는 경우는 많았다. 이것은 성도 수가 많지 않은 초기 상황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획일적인 것은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모이는 경우도 있었고 강의실이나 건물에서 모이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그들이 속한 도시나 마을의 형편에 따라 모이는 장소는 달랐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현재 논란되고 있는 ‘가정 교회’ 문제와 관련하여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우리의 취해야 할 대안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소그룹 모임은 교회 생활에 있어서 중요하다. 따라서 각 교회가 형편에 따라 소그룹 모임을 가지는 것은 자유에 속하며 적극 권장할 만하다. 어떤 형태의 소그룹 모임을 가질지는 시대와 형편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각 교회가 자유롭게 택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형태의 소그룹 모임을 가지든 간에 그것을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교회’가 되려면 참 교회의 표지인 말씀의 전파와 성례의 거행과 권징의 실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직분들(목사, 장로, 집사)이 선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립적인 당회와 집사회(제직회)가 조직되어 운영되어야 한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아직 당회가 구성되지 않은 미조직 교회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조직 교회를 향하여 나아가는 과도기적인 것이다. 따라서 미조직 교회는 조직된 교회 안의 하부구조로서의 소위 ‘가정 교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소위 ‘가정 교회’는 조직된 교회 안에서 의도적으로 만든 소그룹 모임이며 장차 독립된 교회로 나아갈 의사가 애초부터 없다. 이에 비해 미조직 교회는 비록 당회는 없지만 당회장의 지도와 도움을 받아 정규적인 예배와 성례식을 거행하며 필요시에 권징도 실시한다. 제직회와 공동의회도 모인다. 따라서 ‘가정 교회’와 미조직 교회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의 것이다.

  

만일 교회 안의 소그룹 모임을 ‘교회’라고 부르게 되면, 그것은 ‘교회 안의 교회(ecclesiola in ecclesia)’가 되고 만다. 이러한 교회 구조는 신약 성경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가정에 모인 교회’는 한 교회 안의 소그룹 모임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개교회이다. 비록 성도의 집에서 모였지만 하나의 독립된 교회로서 예배와 성찬과 권징 등 교회로서의 모든 기능을 다 수행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신자들이 몇 명 모이면 다 교회가 아니냐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는 개혁주의적 교회의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참 교회의 표지와 직분을 무시하면 교회가 혼란스러워지고 무질서해진다. 그렇다면 굳이 소그룹 모임만 ‘교회’라고 부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유초등부 모임도 ‘유초등부 교회’라고 부르고, 중고등부 모임도 ‘중고등부 교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성도들이 부엌에 몇 명 모여 있으면 ‘부엌 교회’라고 부르고, 화장실에 모여 있으면 ‘화장실 교회’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교회’라는 용어를 남용하는 것은 개혁주의 교회 개념에 맞지 않다. 개혁 교회는 참 교회의 표지와 직분을 중요하게 여기며 교회의 질서를 중요하게 여긴다.


2. ‘장로’가 소그룹 모임을 인도해야 한다.


그리고 장로회 정치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장로교에서는 구역 모임과 같은 소그룹 모임의 지도자에 ‘장로’를 세우는 것이 원칙적으로 옳다. 왜냐하면 장로의 직분이 양들을 치는(돌보는) 것이기 때문이다(행 20:28, 벧전 5:2). 그래서 목사 혼자서 다 돌보기 어려운 성도들을, 구역을 나누어서 장로들이 각각 자기 구역의 성도들을 돌보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따라서 구역 모임과 같은 소그룹 모임의 장은 장로가 맡는 것이 원칙이다. 참고로 화란 개혁교회에서는 장로가 구역장을 맡는다. 구역에서 일어난 일상적인 일들은 일차적으로 구역장 되는 장로가 돌아보며, 그 중에서 중요한 일이 있으면 목사에게 보고하고, 필요할 경우에는 당회에서 의논한다. 그래서 장로는 일주일에 한 두 차례 자기 구역 식구들을 심방하느라 바쁘게 움직인다. 그래서 장로직을 수행하는 것이 힘들어서 한 3~4년 정도 봉사하고 나면 장로직을 그만둔다. 휴무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장로직을 완전히 벗어버렸다가 1년 쉰 후에 다시 장로로 선출될 수 있다. 그러나 장로로 선출하려고 해도 본인이 사양하는 경우도 많다. 왜냐하면 그만큼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한국 교회의 경우에 구역은 많고 장로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경우 장로가 턱없이 부족하다. 이럴 때에는 두 가지 해결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장로 수를 늘리는 것이다. 이것은 원칙적인 해결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장로를 세우신 목적은 양들(교회 성도들)을 돌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을 돌보고 가르치고 권면하기 위함이다. 구역 모임 또는 소그룹 모임을 하는 목적도 바로 성도들을 효과적으로 돌보고 가르치고 권면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구역을 맡아서 지도하는 사람이 바로 장로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옳은 것이다. 화란 개혁교회에서는 교인이 늘어나서 구역이 늘어나게 되면 그 늘어난 구역 수만큼 장로를 더 뽑는다. 장로 선출과 임직 순서도 간단하여서 변화하는 상황에 빨리 대처한다. 그러나 한국적인 상황에서 이러한 해결책을 시도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한국 교회의 구역은 대개 규모가 작으며 장로 수가 적고 또한 장로 선출 절차와 임직 절차가 번거롭고 거창하다.

  

그래서 생각할 수 있는 두 번째 해결책은 몇 명의 구역장(소그룹 인도자)을 한 장로의 지도하에 두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한 장로가 3~4명 또는 5~6명의 구역장을 자기 관할에 두고 지도하는 방법이다. 그러면 장로가 매주 한 구역씩을 돌아보면 한두 달에 한 번씩 자기 관할하의 식구들을 다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몇 개의 구역으로 이루어진, 한 장로가 돌아보는 영역을 예를 들어 ‘지역’ 또는 ‘지구’라고 이름 짓는다면 장로가 ‘지역장’ 또는 ‘지구장’이 되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성도들을 돌아보고 지도하는 일에 장로가 소외되지 않으며, 당회가 제 기능을 감당하게 되므로 장로교의 정치 원리에 벗어남이 없다. 오히려 장로들이 단지 결정만 하고 감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성도들을 돌아보고 지도하는 일에 나서므로, 이것은 성경의 원리에도 맞고 장로교의 원리에도 맞다. 이렇게 하는 것은 구역은 많고 장로 수는 부족한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당장 시행할 수 있는 현실적인 해결책이기도 하다. 


3. 소그룹은 소그룹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구역 또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소그룹 모임은 그에 맞는 역할을 감당하여야 한다. 교회는 교회로서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고, 구역은 구역으로서 감당해야 할 역할이 있다. 공예배와 성례식, 권징은 교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재정 운용과 교회적인 행사, 공동의회와 제직회와 당회도 다 교회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구역 모임에서 세례나 성찬을 행해서는 안 되며, 구역 모임이 공예배를 대신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헌금 사용에 대해서도 각 구역에서 독립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당회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한다. 그리고 권징이나 치리에 관한 문제는 당연히 당회에서 다루어야 한다.

  

그렇다면 구역에서 다루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주된 것은 교제와 교육, 권면과 상담 등이 될 것이다. 교제는 중요한데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날마다 집에서 떡을 떼는 것(식사)을 통해 성도의 교제를 실천했다(행 2:42,46). 나아가서 서로 물건을 통용함으로써 경제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참된 사랑을 실천했다(행 2:45, 4:32).

  

그리고 구역 모임과 같은 소그룹 모임에서는 공예배 시의 설교에서 자세히 배울 수 없는 것을 소그룹 성경 공부를 통해 배울 수 있다. 모르거나 궁금한 것을 질문할 수도 있고, 서로 의견을 나누면서 말씀을 배우는 것은 설교 못지않은 효과적인 교육 방법이다. 이것이 또한 소그룹 모임의 장점인데, 이것을 통해 성도들 각자의 신앙상태와 생활을 점검하며 개인적으로 적용하고 권면할 수 있다. 성경에서도 장로(감독)는 “가르치기를 잘해야” 한다고 말한다(딤전 2:2). 장로의 주된 임무가 ‘양을 치는 것’인데 양을 치는 일이 곧 양을 먹이는 것이다(행 20:28, 벧전 5:2, 요 21:15-17). 곧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다. 따라서 장로는 양을 치는 자로서 가르치기를 잘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 교회의 장로는 그 동안 너무나 회의하는 일에만 치중하고, 주일학교에서 가르치거나 구역을 돌보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장로의 본분을 소홀히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의 소그룹 운동이 성경 공부를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임무를 장로들이 맡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바라고 할 수 있다.

  

구역 모임(소그룹 모임)에서 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것은 권면과 상담이다. 디도서 1:9에 보면 장로(감독)의 직무 중에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는 것”이 들어 있다. 장로는 성도들을 각각 돌아보고 그들 개개인을 권면하는 일을 해야 한다. 이 때 권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해야 한다. 자기 생각이나 인간적인 교훈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교훈을 가지고 해야 한다. 그래서 장로는 말씀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혹 거스려 말하는 자가 있으면 필요한 경우에는 책망도 해야 한다. 이런 권면과 책망은 구역 모임과 같은 소그룹 모임에서 하는 것이 매우 적절하다. 물론 문제가 심각한 경우에는 모든 장로들이 모이는 당회에서 의논하고, 또 필요한 경우에는 공개적으로 책망하거나 시벌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구역 모임에서 장로가 권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성도들의 개인적인 고민이나 갈등,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 상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이런 점들에 있어서 소그룹 모임은 전체 모임이나 예배에서 할 수 없거나 부족한 것들을 보충하고 가르치며, 성도간의 교제를 촉진하며, 개인적인 권면과 상담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며 꼭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일들의 성격상 그러한 것은 기본적으로 신약에서 말하는 장로의 직무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장로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본래의 임무인 성도들을 돌보는 일(양을 치는 일 곧 목양)에 나서는 것이 필요하며, 그리할 때 현재 ‘가정 교회’와 관련하여 일어나는 많은 문제점들은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며 오히려 더욱 더 성경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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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병규, “한국 이단들의 종말 사상에 대한 비평과 제언”, 「바른 신앙」 11호, 서울: 유사기독교상담소, 2007, p.32

2) 최영기, 「구역 조직을 가정 교회로 바꾸라」, 서울: 나침반 출판사, 2006(초판 1996), p.29.

3) 최영기, 「구역 조직을 가정 교회로 바꾸라」, p.30.

4) 최영기, 「구역 조직을 가정 교회로 바꾸라」, p.30.

5) 최영기, 「구역 조직을 가정 교회로 바꾸라」, p.19

6) 최영기, 「구역 조직을 가정 교회로 바꾸라」, pp.19, 148, 165; 또한 최영기, 「가정 교회로 세워지는 평신도 목회」, 서울: 두란노, 1999, p.69: “그러나 가정 교회는 그 자체가 교회입니다. ... 그러나 가정 교회는 예배, 교육, 친교, 전도, 선교 등, 교회가 해야 할 모든 사역을 포괄적으로 다 합니다.”

7) 최영기, 「구역 조직을 가정 교회로 바꾸라」, p.20.

8) 최영기, 「구역 조직을 가정 교회로 바꾸라」, p.21

9) 「벨직 신앙고백」 27조: “Wij geloven en belijden één katholieke of algemene kerk. Zij is een heilige vergadering van de ware gelovigen.”

10)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XXV,i: “The catholick or universal church, which is invisible, consists of the whole number of the elect that have been, are, or shall be gathered into one, under Christ the head thereof;” 

11) Cf. J. A. Heyns, Dogmatiek, Pretoria: N. G. Kerkboekhandel Transvaal, 3판, 1984, p.387: “Die kerk is nie oral daar waar gelowiges saam is of hulle geloof bely nie.”

12)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XXV,iv)은 이것을 “particular churches”(개별적 교회)라고 부른다.

13) 최영기, 「가정 교회로 세워지는 평신도 목회」, p.39.

14) 홍인규, “바울과 가정 교회”, 「한국 복음주의 신약학 연구」 제2권, 서울: 도서출판 바울서신, 2003, p.228.

15) 정용성, “신약 가정 교회와 21세기 한국 교회를 위한 제언”, 「개혁 신학」(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논문집 제13권), 202, p.65.

16) 장동수, “신약 성서의 가정 교회”, 「복음과 실천」 37 (2006년 봄호), 대전: 침례신학대학교 출판부, p.43.

17) 조병수, “초기 기독교의 가정 교회 - 자료 분석 -”, 「신학정론」 38(20권 1호), 2002, p.59.

18) F. W. Grosheide, Handelingen, I, Amsterdam: H. A. van Bottenburg, 1942, p.107. 

19) W.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of the New Testament and other Early Christian Literature, 3rd ed., rev. and ed. by F. W. Danker,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0, s.v.

20) J. Calvin, The Acts of the Apostles, II, tr. by J. W. Fraser, Grand Rapids: Eerdmans, 1966, p.154(행 19:9 주석 중).

21) 정용성, “신약 가정 교회와 21세기 한국 교회를 위한 제언”, p.66.

22) 정용성, “신약 가정 교회와 21세기 한국 교회를 위한 제언”, p.67

23) Cf. F. W. Grosheide, De brief van Jakobus, Amsterdam: H. A. van Bottenburg, 1927, pp.401-406.

24) Cf. Grosheide, Jakobus, p.452. 

25) 가버나움에서 발굴된 주후 2, 3세기경의 회당에는 옆으로 쭉 나 있는 2층으로 된 긴의자들이 발견되었다. 어떤 사람이 바닥에 앉는다면, 그의 머리는 제일 높은 의자에 앉은 사람의 발 위치에 오게 된다고 한다(Dibelius; cf. Grosheide, Handelingen, I, p.453 n.4).

26) 예를 들면 정용성, “신약 가정 교회와 21세기 한국 교회를 위한 제언”, p.65.

27) 최영기, 「구역 조직을 가정 교회로 바꾸라」, p.30.

28) 최영기, 「가정 교회로 세워지는 평신도 목회」, p.41f.

29)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편사 te도 대비를 나타낸다. 여기에 사용된 kat! oi\kpon은 어떤 학자들의 주장처럼(예를 들면 Polhill, Acts, p.121 각주 152; Bauer) ‘집집마다’(from house to house, 배분적 의미)가 아니라 그냥 ‘집에(at home)’를 뜻한다. Cf. Grosheide, Handelingen, p.100 각주 1; J. A. Alexander, A Commentary on the Acts of the Apostles, Carlisle: Banner of Truth, 1857(repr. 1991), p.94f.: “But the best authorities are now in favour of explaining it to mean in the house or at home, as distinguished from the foregoing phrase, in the temple. This philological decision is confirm!ed by the repeated use of the same Greek words in Paul's epistles, to describe a church, or stated meeting of believers, in a private dwelling. (See Rom. 16,5. 1 Cor. 16,19. Col. 4,15. Philem. 2.)” 

30) J. Calvin, The Acts of the Apostles, I, tr. J. W. Fraser and W. J. G. McDonald, Grand Rapids: Eerdmans, 1965, p.89(사도행전 2:46 주석 중). 

31) 행 2:42에는 hJ klavsi" tou' a[rtou(the breaking of the bread)라는 명사적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신약에서 눅 24:35에 한 번 더 나온다. ‘떡을 떼다’는 동사적 표현은 자주 나타난다(눅 22:19, 24:30, 행 2:46, 20:7, 11, 27:35, 고전 10:16 등). 

32) 가톨릭 주석가들은 대개 ‘성찬’으로 본다. Cf. J. A. Fitzmyer, The Acts of the Apostles, New York etc.: The Anchor Bible, 1998, pp.269, 270f.; J. Keulers, De handelingen der apostelen, Roermond en Maaseik: J. J. Romen & Zonen, 1952, p.73. 개신교 주석가들 중에서 이런 견해를 취하는 것으로는 I. Howard Marshall, The Acts of the Apostles,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1999, p.83을 보라.

33) 대개는 ‘성찬’ 또는 ‘애찬’으로 본다. Cf. J. B. Polhill, Acts, Nashville: Broadmann Press, 1992, p.119(성찬을 좀 더 선호); Grosheide, Handelingen, I, p.95(애찬을 더 선호). 

34) 따라서 행 2:42을 정리하면, 1) 사도의 가르침을 받음; 2) 서로 교제함; 3) 떡을 뗌; 4) 기도함, 이렇게 네 항목으로 나눌 것이 아니라, 1) 사도의 가르침을 받음; 2) 서로 교제함 곧 떡을 뗌; 3) 기도함, 이렇게 세 항목으로 나누어야 옳다.

35) 이렇게 보는 학자로는 E. Haenchen(Acts, p.584), H. Conzelmann(Acts, p.23) 등이 있다. Cf. Fitzmyer, Acts, p.270f. 박윤선 박사도 그의 사도행전 2:42 주석에서 ‘떡을 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사랑의 교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먼저 사도들이 가르치는 진리의 말씀을 들었으며, 또 그들은 사랑스러운 교제를 가졌으며, 또한 기도를 힘썼다는 사실이다.”(「성경 주석 사도행전」, 12판, 서울: 영음사, 1981, p.75)

36) Calvin, Acts, I, p.89(행 2:46 주석 중). 칼빈이 여기서 ‘검소함’의 개념을 끌어내는 것은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칼빈은 여기의 ‘순전한 마음으로(ajfelovthti kardiva")’를 ‘절제(temperance)’의 개념으로 이해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오히려 ‘다른 의도 없이’, ‘순수하게, 정직하게’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Cf. Grosheide, Handelingen, I, p.100. 곧 오순절 날에 강림한 성령을 받은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감동과 능력으로 모든 인간적인 장벽을 극복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성령이 주시는 순수한 기쁨으로 서로 교제하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음을 보여준다(cf. 행 4:12). 

37) Cf. 로버트 뱅크스, 「바울의 공동체 사상」, 장동수 옮김, 서울: IVP, 2007, p.68.

38) 홍인규, “바울과 가정 교회”, p.237.

39) 조병수, “초기 기독교의 가정 교회 - 자료 분석”, p.48.

40) 조병수, “초기 기독교의 가정 교회 - 자료 분석”, pp.48-51.

41) 조병수, “초기 기독교의 가정 교회 - 자료 분석”, pp.51.

42) J. Calvin, The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Romans and to the Thessalonians, Grand Rapids: Eerdmans, 1973, p.322 (롬 16:4 주석 중)

43) Cf. F. L. Godet, Commentary on Romans, Grand Rapids: Keregel, 1977, p.490.

44) W. Hendriksen, Romans, I, Edinburgh: Banner of Truth, 1980, p.23; 

45) 예를 들면, S. Greijdanus, De brief van den apostel Paulus aan de gemeente te Rome, II, Amsterdam: H. A. van Bottenburg, 1933, pp.663, 670; J. van Bruggen, Romeinen, Kampen: J. H. Kok, 2006, p.233(그는 세 곳의 모임 장소가 있었다고 본다) 등. 

46) 홍인규, “바울과 가정 교회”, p.236f.

47) 조병수, “초기 기독교의 가정 교회 - 자료 분석”, p.53.

48) 조병수, “초기 기독교의 가정 교회 - 자료 분석”, p.53.

49) G. D.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Grand Rapids: Eerdmans, 1987, p.830.

50) 조병수, “초기 기독교의 가정 교회 - 자료 분석”, p.52.

51) J. van Genderen-W. H. Velema, Beknopte Gereformeerde Dogmatiek, Kampen: J. H. Kok, 1992, p.627(여기서 저자들은 Heyns의 Dogmatiek, p.387을 참조하라고 제시하고 있다).

52) F. W. Grosheide, Eerste brief aan Korinthe, Amsterdam: H. A. van Bottenburg, 1932, p.40.

53)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를 말할 때에는 단수를 사용하였다(살전 1:1).

54) 이에 대해서는 아래의 논의를 참조하라.

55) 조병수, “초기 기독교의 가정 교회 - 자료 분석”, p.52.

56) 홍인규, “바울과 가정 교회”, p.237f.

57) 홍인규, “바울과 가정 교회”, p.238

58) Bauer, A Greek-English Lexicon, s.v.

59) Cf. Grosheide, Handelingen, I, p.163.

60) Cf. Godet, Romans, p.501. Greijdanus도 Godet의 이 견해를 따른다.

61) Greijdanus, Romeinen, II, p.677.

62) 뱅크스, 「바울의 공동체 사상」, 장동수 옮김, 서울: IVP, 2007, p.75.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Paul's rather vague way of referring to meetings of the whole church suggests that it met less than once a week. Voluntary and cult associations met on a monthly basis; these larger Christian gatherings may well have followed suit.”(R. Banks, Paul's Idea of Community, rev. ed., Peabody: Hendrickson, 2004, p.34)

63) 홍인규, “바울과 가정 교회”, p.237 각주 25. Cf. Banks, Paul's Idea of Community, p.32.

출처: 생명나무 쉼터

 

 


끊을 수 없는 줄

대장쟁이 ㆍ 2013-10-12 (토) 07:03 IP: 173.xxx.141 ㆍ조회: 24      

신학적으로 인간은 “완전히 타락한 존재,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도 구원을 지켜낼 능력도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불러내시고 이끄시지 아니하였다면 아브라함도 이스라엘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불러내시고 이끌어주시지 않고서 제 힘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오고 예수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구원을 손에 쥐어주셨다 해도 인간들은 그것을 지켜낼 능력이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이 쥐어주신 구원마저도 내버리고 돌아서서 제 갈 길로 가는 타락의 존재이기 때문이며 또한 원수가 구원을 끊임없이 빼앗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북이스라엘만이 우상숭배의 길로 간 것이 아니라 남유다왕국도 완전히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이세벨 같은 여자가 남유다왕국에도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남유다왕국의 이세벨(계시록 2:20)이라고 할 수 있는 아달랴, 여호사밧왕의 아들 악한 왕 여호람의 아내 아달랴였습니다.
아달랴는 아하시야 왕의 어머니로서 막강한 태후의 지위를 이용하여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를 폐하고 바알 신당을 섬겼습니다. 아들 아하시야 왕이 사마리아에 갔다가 요람을 죽인 예후에게 쫓기다가 죽자 일어나 왕의 씨를 진멸하였습니다. 아들이 죽은 기회를 이용하여 아예 다윗의 혈통을 진멸하고 자신이 최고의 권력을 틀어쥐고 자신의 왕국을 만들려 한 것입니다. 참으로 악한 여자였습니다. 아달랴가 왕자들과 왕의 씨를 모조리 죽여 버림으로 인하여 유다왕국의 혈통은 사라지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 곧 구세주의 혈통이 거의 진멸되었습니다. 아달랴는 이로써 유다왕국이 완전히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것으로 믿었고 사단은 승리의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북이스라엘은 스스로 성전(여호와 신앙)을 떠나 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타락의 길을 갔고 이세벨에 의하여 악한 우상의 국가가 된 반면, 남유다왕국은 어리석고 악하고 유약한 왕들과 내부에 스며들어온 사악한 아달랴에 의해 우상의 국가가 되고 메시아의 계보가 끊어지는 참담한 위기를 맞게 된 셈입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에 엘리야와 엘리사를 세우시고 예후를 일으킨 것처럼 하나님은 남유다왕국에도 여호세바와 여호야다 부부를 숨겨놓으셨습니다.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는 아달랴가 왕자들을 진멸하는 가운데 오빠 아하시야의 아들이자 조카인 갓난아기 요아스를 훔쳐내어 유모와 함께 자신의 침실에 숨겨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남편 여호야다 제사장이 왕자를 6년 동안 여호와의 전에 숨겨놓고 키웁니다. 그리고 제사장 여호야다는 어느 날 거사를 일으킵니다.

여호야다는 가리사람 백부장들과 호위병들의 백부장들을 여호와의 전으로 불러 맹세시킨 다음 일곱 살짜리 요아스 왕자를 보이고 나서 치밀하게 준비하고 요아스 왕자에게 면류관을 씌우고 율법책을 주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웁니다. 그리고 뒤늦게 성전에 달려와 반역이라고 외치는 아달랴를 몰아내어 죽이게 하고 왕과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언약을 세우게 하고 온 국민이 바알의 당으로 가서 당을 부수고 단들과 우상들을 깨뜨리고 바알 제사장을 죽이게 하는 일대 혁명을 일으키게 됩니다.

사단의 무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도 타락시키고 메시야의 계보를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아니, 인간은 메시야의 계보조차 지켜낼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타락으로, 그리고 사단의 모략과 공격으로 금방이라도 끊어져버릴 것만 같은 메시야의 계보..... 그러나 하나님은 그 메시아의 계보를 지키셨습니다. 메시아는 그렇게 바람 앞의 촛불 같고 아슬아슬 실오라기 같은 계보를 통하여 오셨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셨다면 메시야의 계보는 금방 끊어지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약해보여도, 사단이 아무리 애써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결코 끊어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매어놓으신 그 사랑의 줄은 아무 피조물이라도 끊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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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 관리와 신용

성경은 연장신용장(extended credit)과 같은 개인의 재정 관리에 대해서 어떻 게 말하는가?
또한 기독교인은 개인의 빚을 갚는 것에 대하여 어떤 책임이 있는가?

열 한 번째 질문 
비록 성경이 오늘날 우리들과 매우 다른 문화와 사회에서 씌어졌지만 그것의 원칙는 영원한 것이며 또 사람들이 어디에 살든지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이러한 지침과 진실 중에 서 어떤 것들은 우리들의 개인 재정 및 사업 거래에 적용됩니다. 모든 비용을 충당할 수 있는 만큼 수입을 만드는 것은 실제적으로 도전이 될 수 있는 데, 그것은 특별히 새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젊은 부부들에게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인플레의 위협, 우리들이 빌리는 돈에 대한 금리, 경제에 영향을 주는 정부의 결정,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휘발성 주식 시장, 유익하고 만족스러운 직업의 유지, 가족에 대한 의무, 그리고 우리들의 모든 기대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시간과 돈에 대하여 고 려해야만 합니다.

위에 나열한 대부분의 항목은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사항은 소비를 수입 이내로 통제하는 것입니다 –

실상은 하나님께 10%의 십일조 를 드려야 하기 때문에, 수입의 90% 이내로 통제하는 것입니다 (이 항목의 끝에 있는 관심 사를 보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모든 복잡한 일들과 예상하지 못한 비용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산을 세우는 것은 우리들이 기독교인으로서 훌륭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 널리 사용되는 방법입니다. 예산을 세우는 것은 가지고 있는 돈 이상은 쓰지 않는 것과 같이 간단할 수도 있고, 미래의 지출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위하여 매주 그리고 매달의 수입과 지출에 대한 기록을 유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로마서 13:8)고 말한 바울의 가르침을 위반하는 것입니까? 그 구절의 문 맥과 나머지 구절은 빚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의 주된 적용에 대하여 설명을 합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 었느니라.” 바울은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우리들의 의무에 대하여 이야기하 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빚을 갚지 않는 것은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말씀을 재정적인 빚에 적용하는 것은 적절합니다. 신용카드를 사용하여 구입했을 때, 혹은 정해진 시간에 지정된 금액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구입했을 때, 그 계약에 따라서 정기적으로 지불을 하는 한 아무 빚도 없습니 다.

그러나 만일 약속한 시간에 지불을 하지 않는다면, 구매자는 빚을 지게 되며, 그러한 경우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바울의 훈계를 위반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원래의 계약 기간을 지킬 수 없다면, 기독교인으로써 해야만 하는 일은 채권자에게 문제를 설명하고 새로운 계약 체결을 요구하기 위해 연락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을 조정할 수 없다면, 지불해야할 의무를 가진 그 구매자는 빚쟁이가 됩니다. 할부 구입은 나쁘기도 하고 좋기도 합니다. 그것은 사치품이나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기 위해 쉽게 사용할 수 있지만,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계약에 따라 돈을 상환할 수 없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용으로 필수품을 사는 것은 실제로 투자가 될 수 있습니 다. 수년간 월세를 지불하는 것은 물을 땅에 부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집 을 구입하기 위한 자격을 갖출 수 있을 때까지만 행해져야 합니다. 만일 일이나 다른 것을 하기 위해서 차가 필요하다면, 그것 역시도 적절한 신용 구입이 됩니다. 만일 신용카드로 불필요한 것을 구입한다면, 매달 구매한 것에 대한 모든 금액을 갚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 다. 기독교인은 반드시 좋은 평판이 있거나 “칭찬 듣는” (사도행전 6:3) 사람이어서, 그 의 정당한 빚을 갚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성경은 자신의 빚을 갚지 않는 사람을 사악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시편 37:21). 연 장신용(extended credit)에 의한 중요한 구매는 흔히 담보물이 보증이 되기 때문에, 구매 자가 지불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빚을 없애는 대신에 대금업자가 그 구입한 물건을 다시 가져갑니다. 계약에 따라 값을 지불하지 않은 것을 갖는 것은 기독교인의 정직성에 위반되는 것이며, 그것은 죄악입니다. 예수님은 빌리는 것을 허용한 것처럼 보입니다 (마태복음 5:41; 누가복음 6:35). 그러나 신자는 신용대부(크레딧)를 매우 주의 깊게 사용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개인이나 가족의 예산을 가지고 정기적 지출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궁극적으로, 우리들은 잠언 저자의 지혜로운 말씀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찌어다.” (잠언 23:4) 그리고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잠언 28:20). 돈과 소유물을 취급하는 우리들의 태도는 아주 중요합니다.

관심사:

우리들은 도덕과 윤리가 추락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의무를 피하는 수단으로 파산과 파산법 절차(chapter 11 proceeding)를 사용하고 있 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많은 사람들의 사는 방법이 되었다고 해서 기독교인도 이러한 길을 따라야 하는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기독교인은 보다 높은 규약에 의해서 살아야만 합니다. 또 다른 관심사는 재정, 신용, 빚, 그리고 기독교 가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사치품으로 생각되곤 하던 것을 필수품으로 만들었습니다. 가정은 그들이 필요로 느끼는 것들을 구입하기 위해서 두 사람이 일을 해야만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가정과 가족의 영적 성장은 사랑하는 부모가 함께 있지 못하는 대신에 사 주는 더 크고, 더 좋은 장난감보다도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예산을 세우는 것은 실질적으로 가정에 필요한 것 이 무엇인지 합의할 것을 요구할지도 모릅니다. 어린이들의 복지는 모든 가정의 결정에 최 우선으로 고려되어야만 합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시편 127:3). 돈이나 소유물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관심사는 그들이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형편때문에 십일조를 드릴 수 없다고 느끼는 어떤 기독교인들의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그들은 재정이 허락할 때에 주님의 일을 위해 헌금을 드리려고 계획합니다. 또는 그들은 신약성경 어디에서 기독교인들이 십일조 를 드려야만 한다고 요구하는지 질문합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이라고 하는 구약성경의 말씀은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의 십일조에 대해서 계속해서 명하시는 동시에, 또한 그들이 더 중요한 의(義)와 인(仁)과 신(信)(마태복음 23:23)에 대한 것은 순종하지 않는다고 책망한 것을 보면 십일조에 대한 말씀은 계속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들은 십일조를 드릴 때보다 드리지 않을 때가 재정적으로 더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예산을 세우고 지출하는 일에서 하나님의 돈을 최우선으로 삼는 사람을 존귀하게 여깁니 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역자 첨부: 연장신용장 (extended credit) - 수출업자의 자금조달편의를 위하여 신용장개설 의뢰인의 요청 으로 상품을 선적하기 전에 수익자가 신용장개설 은행 앞으로 무담보어음을 발행하면 이것을 통지은행이 매입하고 무담보어음이 발행된 후 일정 기간 내에 해당상품에 대한 일체의 선적서류를 어음매입은행에 제공할 것을 조건으로 한 신용장을 말함.





기독교인의 성품과 현대의 쟁점들에 대한
하나님의성회의 관점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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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을 주는 차

 

어느 교회 믿음이 좋은 권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은 가는귀가 먹었다.

 

이분이 세 아들이 있었는데 하루는 외출을 하고 싶어 세 아들을 불렀다.

 

 

권사님 : 큰애야 외출을 하고 싶구나. 네가 나를 태워주겠니?

 

 

큰아들 : 예, 어머니, 제 소나타 승용차로 모실게요.

 

 

권사님 : 애야, 이 에미더러 소나타고 가라고, 쯧쯧쯧, 못된 놈 같으니라구.

둘째야, 네가 나 좀 태워줘야겠구나

 

 

둘째아들 : 예, 어머니, 제 아벨라 승용차로 가세요.

 

 

권사님 : 뭐야, 이놈이 망령이 들었나? 에미 나이가 몇인데 아를

 

베라 그러는 거야, 이놈아. 아이구, 셋째 너밖엔 없구나.

 

 

 

셋째아들 : 어머니, 제 차는 그레이스 봉고차라 어머니가 타기엔

 

힘들 거예요.

 

 

권사님 : 조금 힘들면 어떠니. 너 차는 은총(Grace)을 주는 차인데.

 

 

 

 

 

메모지

  

부부가 대판 싸움을 하고 며칠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루는 남편이 잠들기 전에 테이블 위에 메모를 남겼다.

 

“아침 6시에 꼭 깨워줘.”

 

다음 날 남편이 일어나 시계를 보니 10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메모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6시에요. 일어나세요.” 

 

 

 


 

 

 

핸드폰보다 기도가 좋은 이유

 

1.핸드폰은 잘해봐야 한 달 200분 무료 통화이지만...

 

기도는 한번 가입하면 평생 무료 통화다.

 

 

2.핸드폰은 환경에 따라 통화성능이 결정 나지만..

 

기도는 이리늄보다 성능이 좋아서 어디서나 가능하다.

 

 

3.핸드폰은 공공장소에서 사용하기엔 논치 보이지만..

 

기도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용 가능하다.

 

 

4.핸드폰의 사용내역은 통신회사에 남지만..

 

기도의 사용 내역은 하늘나라 책에 남는다.

 

 

 

 

 

 

 

 

 

 

 

 

 

 

5.현대의 핸드폰으로는 한사람 밖에 통화할 수 없지만..

 

기도는 원한다면, 한 번에 수많은 사람을 동시에 통화하고 나눌 수 있다.

 

(손잡고도 하며, 돌아가며, 통성으로 하며, 통화방법도 각양각색)

 

 

6.핸드폰의 침묵은 쓸데없는 상상을 일으키지만...

 

기도할 때 침묵은 주님이 알아서 접수하신다.

 

 

7.핸드폰의 업그레이드는 사람의 시선을 끌지만..

 

기도의 업그레이드는 하나님의 시선을 끈다.

 

 

8.핸드폰은 부재중일 때 받는 사람이 없지만..

 

기도는 하나님께서 항상 기다리시고 받아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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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묵상 < 미가 3:9 - 3:12 >


야곱 족속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 곧 정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원하노니 이 말을 들을지어다.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거짓 선지자"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구별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참 선지자는 죄를 지적한다는 것입니다. 참 선지자도 이스라엘의 미래의 희망을 말합니다. 거짓 선지자도 물론 희망을 말합니다. 그려면,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것은 미래의 희망이 현재의 죄악을 처리하는 방향에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죄를 무시하고 미래에 희망이 도래한다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는 복음이 아닙니다. 참 선지자가 아니고 거짓된 선지자의 거짓된 복음입니다.

번영의 복음은 이런 거짓 복음의 대표적인 것입니다. 검은 것을 검고 죄라고 말하지 못하는 긍정의 신학은 거짓입니다. 래리 킹과 대담에서 조엘 오스틴은 죄를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세상도 분별하는 죄를 무시한 복음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됩니다.

참된 길, 선지자의 길은 죄를 죄로 인정하고 사죄의 은총이 주는 은혜의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이런 회개의 소망을 누렸고 나라를 앗수르로부터 건진 것입니다..

제공 : 도서출판 학생신앙운동(SFC)

반쪽 짜리 가짜 복음이 난무하는 시대입니다. 신도들이 부담스러워하는 말씀은 좀처럼 전하지 않으려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할 뿐, 하나님의 공의는 사라져 버린 설교가 대부분입니다. 회개를 가르쳐야 할 자리를 번영과 긍정적 사고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찔림이 없는 말씀만 전하는 목사라면 그는 참 선지자가 아닙니다. 분별력을 상실한 신앙은 재앙입니다...


그랜드 캐년의 관문인

윌리엄스(Williams)에서 40번을 타고

 

동쪽으로 약 145마일쯤 가면

목화석(규화목) 국립공원이라고 하는 특이한 국립공원이 나옵니다.

 

정식 명칭이

Petrified National Forest Park인데

Forest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숲이 있어야 하겠지만

숲이라고는 전혀없는 삭막한 사막같은 국립공원입니다.

 

그런데

왜 Forest 라는 이름이 붙었을까요?

학자들은 이곳이 아주 오래 전에는 숲이었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사막이 되었지만,

지천에 널려있는 우람한 규화목(목화석)이

예전에 이곳이 거대한 숲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이곳에 있는 나무들(규화목)은

멀리서 떠내려 온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곳이 처음부터

숲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목화석 공원(이하 PNFP)은

가장 낮은 곳이 5,300ft(1,615m),

가장 높은 곳은 6,235ft(1,900)인데

 

여름에는 굉장히 덥고,

겨울에는 굉장히 춥기 때문에

봄이나 가을에 방문하는 것이 좋습니다.

 

PNFP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40번 프리웨이를 분깃점으로 북쪽 부분은 Painted Desert,

그리고 남쪽 부분은 Puerco Ridge쪽의 Mesa와 Forest로 나뉘어집니다.

 

북쪽에는

방문자 센터와

Tiponi Point, Tawa Point,

Painted Desert Inn과 Kachina Point,

 

Chinde Point,Pintado Point,

Nizhoni Point, Whipple Point,

그리고 Lacey Point와 Route 66이 있습니다.

 

북쪽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주로 Black Forest와 Paint Deserted인데

아침 일출 때와 석양 때의 모습이 환상적입니다.

 

남쪽 부분에는

Puerco Pueblo,

Newspaper Rock, The Tepees와 Blue Mesa,

 

Agate Bridge와

Jasper Forest, Crystal Forest,

Long Logs와 Giant Logs,

Agate House와 Rainbow Forest Museum 등이 있습니다.

 

PNFP의 본질을 보여주는 곳은

대부분 남쪽에 몰려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오래도록 머물 여유가 없다면

북쪽보다는 남쪽을 돌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 이곳에서는

투어 버스로 가서는

제대로 돌아보기 힘든 곳인

 

PNFP에서도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는

Blue Mesa Trail을 소개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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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Mesa는

Puerco River의 지류인

Dry Wash와 Ninemile Wash의 가운데 위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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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wash란

비가 올 때만 물이 흐르는

얕은 여울이나 도랑을 의미하는데

 

비가 많이 올 경우

wash를 흐르는 물은

웬만한 차량도 휩쓸어가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Blue Mesa에서 보는

PNFP의 모습이 어떤지 한 번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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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FNP의 대부분의 지층은

지질학적으로 Chinle Formation(친리 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0104103_4.jpg

그랜드 캐년이나 자이언 캐년처럼

미국 남서부를 이루는 지층들 가운데는

인디언의 언어를 차용한 지층들이 제법 있습니다.


10104103_5.jpg

이를테면, 그랜드 캐년의

Moenkopi Formation(이하 Fm)

Kaibab Fm, Toroweap Fm, Supai Group과

자이언 캐년의 Kayenta Fm, Chinle Fm 등이 그것입니다.


10104103_6.jpg

목화석 국립공원을 이루고 있는

지층은 대부분 친리 층(Chinle Fm)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0104103_7.jpg

친리 층(Chinle Fm)은

다시 5개의 member(이하 M)인

①Mesa Redondo M ②Blue Mesa M ③Sonsela M

④Patrified Forest M ⑤Owl Rock M로 나뉘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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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Mesa Trail은

Sonsela Member로 구성되어 있는데

Sonsela M는 다시 5개의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①Camp Butte beds,

②Lot's Wife beds,

③Jasper Forest beds,

④Jim Camp Wash beds

⑤Marth's Butte beds입니다.

 

②의 Lot's Wife는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받아 멸망할 때,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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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Mesa에서 볼 수 있는

지형의 형태는 Badlands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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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badlands란 것은

불모지라는 뜻이 아니고,

 

퇴적암이

풍화와 침식 작용에 의해

변형된 형태, 특히 미국 남서부의

말파이스(malpais, 스패니시로 badland 란 뜻임)지형을 말합니다.

 

malpais 지형의

대표적인 곳으로는 유타의 GSENM

South Dakota의 Badlands 국립공원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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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 Mesa Trail은

이암(mudstone)과 점토암(Claystone)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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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암과 점토암은

바위이긴 하지만, 풍화작용에 의하여

모양이 쉽게 변형되거나 닳아 없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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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블루 메사 트레일의 지형은

비와 풍화작용에 의하여 지금도 모양이 변형되어 가고 있습니다.


10105248_14.jpg

PNFP는

수많은 나무가 바위가 된 곳이라서

목화석 국립공원이라 이름 붙여졌습니다.

 

여기서 다시

나무가 어떻게 바위가 되어 가는지

그 과정을 한 번 생각해 볼까 합니다.

 

목화석이란 말은

다른 말로 규화석이라고도 하는데

 

그 이유는,

규소(silica)가 나무 틈새로 들어가서

나무가 규화(petrified wood)되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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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생각으로는

나무가 규화(목화)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나무가 규화되는 것은

생각보다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루어집니다.

 

나무가

땅속(혹은 땅위)에

오래 있게 되면 규화되기 전에

미생물에 의해서 썩거나 분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형태의 목화석은

나무가 살아있을 때 갑자기 대홍수나

화산폭발 같은(Mount St. Helen의 경우처럼)

대규모의 격변이 일어난 후에 생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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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석(규화목)의 경우,

나무가 썩은 상태에서 규화된 나무는 거의 없습니다.

규화목은 대부분 살아있거나, 혹은 죽은 직후에 형성된 것입니다.

 

이것은

규화목이 생성될 당시의

주변 환경을 말해주는 것인데

 

그것은 나무가 죽기 전,

혹은 쓰러진 직후에 급격한 환경의 변화,

예컨대 홍수나 화산이나 지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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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1980년의 헬렌산의 경우처럼,

화산 폭발에 의해 산정상의 눈이 녹으면서

 

그 녹은 눈이

강과 호수를 이루면서

강으로 밀려 들어온 나무가

화산재에 녹아있던 규소에 의해 규화되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강에 녹아있는 규소에 의해 규화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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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공룡이나 다른 여러 화석들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현재,

 화석으로 남아있는 공룡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서서히 죽지 않았습니다.

 

어느 한 순간,

지구의 대격변(catastrophe)에 의해 멸종되었습니다.

 

만약 공룡이

서서히 죽었다면

공룡은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어 썩어 없어졌을 것입니다.

(마치 경주의 신라시대 왕의 무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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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이 화석이 된 것은

공룡이 살아있을 때, 혹은 죽은 직후 썩기 전에

어떤 거대한 힘(대홍수, 화산, 지진같은)에 의해 매몰되고,

 

그 매몰된 흙의 압력 때문에

썩지 않고 그대로 바위처럼 단단한 화석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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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백악기의 지층에

쥐라기의 공룡화석이 발견되고,

 

고생대의 지층에

신생대의 생물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윈은

그의 저서 “종의 기원”의 개정판을 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질학은 지질층이 중간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단계적인 고리를 제시하지 않는다.

이것은 진화론이 반박받을 수 있는 가장 분명하고 치명적인 반론이다.”

 

그렇습니다.

다윈 자신도 지층에서는

진화론을 증명해줄 수 있는 중간 지층이 없다는 것을 시인했습니다.

 

지층은,

그리고 목화석(규화석)은

진화론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격변설(노아 홍수와 같은)과 창조론을 지지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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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미국 서부 사진여행, 오지여헹 최고의 전문 가이드 주안(power21)



은혜의 구원과 행위

주달영 ㆍ 2013-10-09 (수) 23:47 IP: 182.xxx.106 ㆍ조회: 52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선물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온 천하를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구원을 얻지 못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구원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은 가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라도
구원받은 것만으로 얼마든지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구원과 행함은 동전의 앞뒤와 같아서 땔 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것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시작되어
하나님의 은혜로 진행되며 하나님의 은혜로 완성이 되어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믿음은 살아있는 나무와 같으며 그 후에 나타나는 행위는
그 나무의 잎이요, 꽃이요, 열매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구원받은 후 이루어지는 모든 선한 행위들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 마음에서 성령의
의해서 거룩한 소원이 일어나고 행할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이 나타나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자기 의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일이 사람의 의지와 생각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자기 의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과 행위에 대한 관계에 대해서 확실하게 기록된 말씀이 엡 2:8-9절 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죄인인 인간이 구원을 받는 대에는 인간의 어떤 것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완전하게 이루신 복음을 성령의 역사로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죄 없다, 무죄다>고 선언해 주신 것이 은혜의 구원입니다.
여기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포기되지 않습니다.

(롬 8:30-35)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이제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예수의 생명을 받고 성령을 받았으므로
그의 따르는 믿음의 선한 행위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겨울에 죽은 것 같은 나무가 봄이 되면 그 가지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는 이치와 같습니다.
봄이 한참 자났음에도 이러한 일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나무는 죽은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부여받은 생명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믿음의 열매가 없다면 그 사람은 아직 *거듭나지 못했거나 *갓난아이 입니다.
여기에 대해 말씀한 성경이 *야고보서입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믿음의 선한 행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도록 *여러가지 말씀과 함께 *믿음의 사람인
아브라함과 라합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전에 행하는 선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고 나서 성령 안에서 행하는 선은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생명의 열매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거룩과 선한 행위입니다. 이것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구원의 교리는 없고 *구원받은 증거로
구원의 삶 *행함에 대해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어떤 행위를 먼지라도 붙일 수 없습니다.
만약 인간의 행위를 조금이라도 구원에 포함시키려 한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이 됩니다.
행위 구원론이 됩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에 자꾸 인간의 행위를 더하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전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구원을 받는다고 강력하게 십자가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성령을 힘입어 구원받은 것을 적극적으로 나타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은혜를 힘입어 행함을 통해 구원받은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을 죽이고 성령의 소욕으로 삽니다.  성령으로 살게 됩니다.
성령을 힘입어 좁은 길 협착한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다 이런 일들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성령에 의해서 인간의 의지가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자꾸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면 사람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강조하고 묵상해야할 것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면 바울처럼 주님의 사랑에 강권하여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하늘에 보화를 쌓으며 열심히 보좌를 향하여 달음질 하는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인생을 불태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진행되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천국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세세토록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이 땅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삼위 하나님의 이름을 높입니다.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성령님을 찬양합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성령님 사랑합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성령님 감사합니다. ... *아멘*



 

바울에 대한 새 관점학파 유감

     < 송영찬 국장, dan7777@dreamwiz.com >

  지난 40-50년 동안 신학계에서는 소위 바울에 대한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 of Paul, NPP) 학파들로 인해 신학적 학문의 열기가 고조되어 왔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이 학파의 거장으로 알려진 톰 라이트의 저서들이 거침없이 번역, 소개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세계적인 신학계의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다.

 반면에 바울에 대한 새 관점안에 담겨 있는 미묘한 신학적 해석의 차이점에 대해 바르게 알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 가져다 줄 위험성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라는 말은 바울이 말한 신학의 새로운 관점'이 아니라 몇몇 학자들이 말한 '바울 이해에 대한 (그들의) 새로운 관점'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 말은 바울이 그렇게 말하거나 이해했다는 것이 아니라 몇몇 학자들이 바울을 그렇게 말하거나 이해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몇몇 학자들이 바울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그리고 '그들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너무도 쉽게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를 보다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교회가 고백해 온 신앙고백서들 및 교리문답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교회의 공적인 신앙고백서들과 교리문답서들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가장 정확하게 밝혀서 해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에 대한 새 관점학파의 정당성을 주장하려면 먼저 교회의 신앙고백서들과 교리문답서들이 과연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이 주장하는 견해를 지지하고 있는가를 제시해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을 주장하기에 앞서 신앙고백서들과 교리문답서들에게 있어서 무엇이 문제인가에 대한 신학적 오류를 지적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교회의 신앙고백서들 및 교리문답서들이 가장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어떤 신학적 논제들이라 할지라도 교회의 신앙고백서들 및 교리문답서들의 지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세가 성경이 성경으로 말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며, 이것이 곧 성경을 성경으로 보존하는 교회의 준엄한 사명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개혁신보

 출처: 개혁주의마을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HMLI/34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보이거나 만져질 없다.

         그것들은 오직 마음 속에서 느껴질 뿐이다. – 헬렌 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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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과 평화 그리고 낭만과 예술이 살아 쉬는 나라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비겔란 조각 공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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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인 조각가  Gustav  Vigeland (1869 – 1943) 200여개의 작품들이

       전시 되어있는, 작가의 작품만이 전시되어있는  공원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조각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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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겔란은 생명의 순환이라는 테마로 공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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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기본 욕구와  삶을 테마로, 특히 어린아이들의 생생하고 다채로운

       표정들을 소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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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히 우는 아이의 손과 발은 방문객들이 하도 많이 만져서,

               반들 반들 윤이 난다. 손을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저렇게 아이가 아파 정도로 만져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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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사이 사이에 있는  많은 분수는 다산을 의미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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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한 컵을 바치고 있는 작품은 인생의 고뇌를 표현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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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보았을 때에는 , 너무 투박하다라는 느낌을 받았으나,

 계속 작품을 보고 있으니 누드로 인한 작품성이 떨어질까봐 고뇌한

 작가의 심정을 이해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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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명의 형상을 묘사한 화강암 기둥 조각품인 모노리스(Monolith),

        높이17미터, 무게 260톤의  화강암 기둥에  121명의 인간들이 뒤엉켜있는,

 

 안간힘을 다하여 정상을 차지하려는 인간의 욕망과 투쟁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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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성과 여성, 아이들과 놀고 있는 엄마, 아빠, 할아버지 등이 똑같이 누드로

     표현되었지만,  야하거나 어색하다기 보다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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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등과 인권이 생활 속에 뿌리  깊게 녹아있는 노르웨이 사람들은,

  국왕가를 사랑하지만,  특별 대우를 하기 보다는 평범한 이웃으로 대한다고 한다.

  국왕가의 이야기가  메스콤에서 조차도 거의 다루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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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곳에서는 아이들에게도 명령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흔히 아이들한테 먹어라라고 명령조로 이야기 하는데,

  여기서는 지금 먹을 생각이 없니?” 라고 묻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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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길과 호수, 그리고 아름다운 정원들이 조성 되어 있어,

        관광과 휴식을 함께 있었고,

 

        조각품들을 통하여 인간의 삶을 들여다 보는 재미있고도

        기이한 경험을 하는 귀한 시간들을 가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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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 둥지에서
글과 사진 : 들꽃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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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 자들의 특징

 

챨스 스펄젼 목사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이것은 종교상 가장 중요한 질문의 하나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교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거듭났다고 생각합니다"하는 대답만으로는 안된다. 이름뿐인 교인들의 대다수는 성경적인 중생의 표나 증거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면 중생에 대한 성경의 교훈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요한일서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죄의 습성을 멀리함)

첫째로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요일 3:9, 5:18)했습니다. 거듭난 사람, 다시 말하면 중생한 사람은 죄를 짓던 못된 버릇을 끊어버리고 지난날에 행하던 죄악된 마음과 의지와 모든 나쁜 성벽(性癖)을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게 된다.

무슨 일에든지 죄인지 아닌지를 분간하려 하며, 악을 행하고도 전연 마음 아프게 느끼지도 않던 지난 날, 마음 속에 일어나는 악과 더불어 고민하기는커녕 악을 벗으로 여겨왔던 과거의 모든 생활을 이제는 부끄럽게 생각하고 죄를 미워하여 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죄에 대항하여 싸우며, 죄의 비참함을 깨달으며 그러한 죄의 멍에를 탄식하며 넘어질 때마다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 그리고 이 모든 불행에서 벗어나려는 간절한 심령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시는 죄를 즐거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장 미워하고 가증하게 여기기 때문에 다시는 그의 마음 속에 죄를 용납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며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다(요일 1:8). 죄를 무엇보다도 미워하며 심령으로부터의 간절한 소원이 죄를 다시는 범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뿐이다. 누구든지 그 마음에서부터 일어나는 나쁜 생각을 완전히 막을 수 없다.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일어나는 추하고 더러운 언행을 막을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야고보는 "우리는 다 실수가 많다"(약 3:2)고 고백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실수와 허물까지라도 다 원통하게 여겨 매일매일 참회하며, 언제나 하나님앞에 서 있는 것과 같이 전력을 기울여 그러한 일을 저지르지 않도록 힘쓰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음)


둘째로 요한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
(요일 5:1)라고 말했다.

거듭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를 구원하실 유일하신 구세주이심을 믿는다.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한가지 목적을 위하여 보내주신 거룩한 자이며 그분 외에 다른 구세주가 또 없음을 확신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오직 무가치한 것밖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깨달으며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믿을만한 확실하고도 견고한 터를 발견한다. 그리하여 그를 통하여 모든 죄를 용서함 받은 것을 믿는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성취하신 공로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것을 확신하며 아무 두려움없이 죽음과 심판을 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공포와 의심을 가질 수도 있으며 때로는 전연 믿음이 없지나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구를 믿으려고 하느냐?"하고 반문해 보라. 그리고 또 "당신은 당신이 쌓은 선이나, 수양(修養)이나, 기도나, 교회를 봉사하는 일이나, 심지어 당신의 교회에 영생의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자문 자답해 보라.

당신의 마음 속에 어떠한 대답이 떠오르는가 귀기울여 보라.

(의로운 생활을 힘씀)

셋째로 요한은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고 말했다.

거듭난 사람은 성도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모든 일을 행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은 피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항상 바라보고 그의 가신 발자취를 따라 살고자 하며, 그의 명령대로 행하므로 그리스도의 친구임을 나타내려고 힘쓴다. 그렇다고하여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말은 아니다.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떠나지 않는 악을 인하여 탄식하며, 자기 마음 속에 다른 한 지배자가 있어서 은혜의 길을 가로 막으며, 하나님의 품에서 멀리 떠나게 하려는 것을 스스로 느낀다. 그러나 마음 속에 거하는 악을 비록 완전히 빼어버리지 못하였을지라도
그는 결코 악의 세력에 본심으로 동조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거듭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기가 신자인지 아닌지를 전혀 분간할 수 없을만큼 의심하는 자리에까지 떨어지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그는 곧 용기를 회복하여 죤 뉴톤이 말한 것과 같이 "오늘 나의 나된 것은 내게 무슨 자격이 있어 된 것도 아니요, 내가 원하여서나 애씀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다"하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함)


넷째로 요한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요 3:14)하고 말했다.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모든 사람들을 한결같이 진실된 사랑으로 사랑한다. 특히 한 마음을 가진 믿음의 형제들에게는 더욱 뜨거운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말할 수 없이 악한 죄인에게라도 사랑으로 대하며 그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릴 수 있으며, 한편 자기와 함께 한 멍에 아래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는 더욱 열렬한 사랑으로 교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골육의 친척과 함께 지내는 것보다 오히려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 교제하기를 더 즐겨한다.

그들은 서로 한 집안 식구와 같이 여기며, 같은 적을 대항하여 싸우는 전우가 되며, 또한 같은 차에 동승한 반려자가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이해하고 서로 돕는다. 그들은 비록 사회적 지위나, 부나, 나라와 얼굴 빛이 서로 다를지라도 다 한 아버지의 아들과 딸들이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그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을 이김)


다섯째로 요한은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일 5:4)고 말했다.

거듭난 사람은 옳고 그름의 판단을 세상의 표준에 의하여 하지 않는다. 그는 굳게 서서, 두려움 없이, 세상의 온갖 풍조에 휩쓸려 흘러 내려가지 않으며 남들이 무어라 한들 자기의 목표를 굽히지 않는다. 그리고 행복을 줄 듯이 속삭이는 주위의 모든 식물 중에서 향락을 구하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허무하며 무익하며 무가치한 것임을 깨닫는다.

 

그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즐거워하며 사람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그는 이미 모든 일의 경중을 다 판단해 놓았기 때문에 남에게 비난을 받든지 칭찬을 받든지 그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의 첫째 되는 목적은 오직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것이며 이 목적을 향하여 전진할 뿐이다.



(정결한 생활을 계속함)


여섯째로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자기를 지키매"(요 5:18)하고 말했다.

거듭난 사람은 자기의 영혼이 더럽혀지지 않기 위하여 언제나 조심한다. 그래서 그는 죄에 물들지 않으려고 힘 쓸 뿐만 아니라
자기가 할 바 모든 일에 정결한 마음으로 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사려깊게 친구를 사귄다. 그는 악한 사귐이 마음을 더럽게 한다는 것과, 질병이 사람들에게 건강보다 해를 끼치듯이 악한 것들은 유익하기보다 손해를 끼치는 것임을 잘 안다. 그는 모든 시간을 아껴 쓸 줄 알며, 시간을 선용하려고 힘쓴다.

그는 원수들에게 둘러싸인 군인과 같이 무장(武裝)을 늦추지 않고 유혹의 함정에 빠질까 늘 경계한다. 그리고 그는 항상 조심하며, 겸손하며, 기도하기를 힘쓴다.

중생의 표현: 이상은 거듭난 사람들에게 따르는 여섯가지 표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거듭난 사람들에게서 표현될 때는 사람마다 각각 다르게 표현된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조금 약하게 나타나며 어떤 사람에게서는 힘있게 나타나서 누가 보나 확실하고 분명하여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이 표현된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이런 사람들에게서, 또 어떤 것들은 저런 사람들에게서 더 뚜렷이 나타난다.

그러나 여하튼 이 여섯가지 표가 하나님께로서 난 자에게 뚜렷이 나타나는 특징임에는 틀림없다.

끝으로 한마디로 결론을 내린다면 이 여섯가지 표를 가진 사람만이 중생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들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누구든지 중생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이러한 중생의 표를 가지고 있는가?

당신은 거듭났는가?

누구든지 이 물음에 확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내일의 양식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모르는, 깊은 궁핍 속에서 지내지만 결코 동요하지 않고
언제나 고요하고 평온한 한 그리스도인 사나이를 본 적이 있다. 만일 그가 인디안 추장만큼 부자였더라도 그에게는 약간의 근심거리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아무 부족함이 없었으니 바로 그에게는 전혀 가난하지 않고 그의 근심을 언제나 무덤 속으로 가져가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이웃이 있었던 것이다.

- 스펄젼 -

 

 

거듭난 자들의 특징 / 찰스 스펄전 목사
다사랑해 | 조회 12 |추천 0 |2013.10.03. 18:13 http://cafe.daum.net/selck/CJhT/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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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회심의 증거(창32:24)

 

 

 

이 부분은 성경에 나오는 가장 위대하고 극적인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위대한 이야기 중 하나는 됩니다. 여러분은 사실 이 사건의 배경을 모르고서는 이 장을 읽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형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가축들과 처자식들을 줄줄이 늘어 세우느라 앞뒤로 왔다 갔다 하는 야곱을 지켜보려면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그 일을 다 끝낸 다음 야곱은 마침내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이 자리까지 오게 된 야곱의 생애 중 상세한 내용 몇 가지 만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이삭의 두 아들이었습니다. 비록 쌍둥이였지만 에서가 장자였으며 두 사람은 아주 달랐습니다. 야곱은 어머니가 편애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이 잘되기를 너무 바란 나머지 그가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얻어 낼 수 있는 계책을 짜냈습니다. 야곱이 자기 형 에서처럼 꾸민 후 나이 많아 눈이 멀어 잘 보이지 않 는아버지 이삭 앞으로 들어간 일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늙은 아버지가 자기를 만져 보고 틀림없이 털 많은 에서라고 생각을 하게 될 만큼 털가죽으로 자기 팔을 쌋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마침내 아버지의 축복을 얻어냈고 그의 형 에서는 분노와 불만에 가득 차서 야곱을 죽이기로 작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머니 리브가가 이 사실을 알아채고 야곱에게 차라리 도망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합니다. 야곱은 고향을 떠나 외삼촌 라반에게로 갑니다. 오늘의 본문 앞에 나온 장들을 보면 그가 외삼촌을 위해 어떻게 일했으며, 또 그의 두 딸을 어떻게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는지 나와 있습니다. 또 비록 그의 행동 가운데 정죄 받을 만한 일들도 몇 가지 있긴 하지만, 아무튼 어떻게 그가 그토록 번성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처자식을 거느리고 엄청난 재산을 갖게 된 이 야곱에게 라반을 떠나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오늘의 본문 32 장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야곱은 이미 라반을 떠났으며 이제 처자식과 소유물을 다 거느리고 고향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 에서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자기가 과거에 에서에게 어떻게 행했는지도 정확 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에서가 자기에 대해 품고 있을 그 감정들을 상상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자기 재산이 걱정이었습니다. 처자식이 걱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계책과 묘안을 짜냅니다. 그래서 형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종들을 먼저 보냅니다. 여러분은 야곱이 짜낸 계책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영리한 계책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야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 야곱이 있습니다. 그는 과연 어떻게 형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요?

 

이 이야기는 아주 극적인 위력을 갖고 계속 진행됩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 야곱은 안전을 위해 자신이 갖고 있던 소유물과 사람들을 여러 떼로 나누어 먼저 강을 건너게 합니다. 두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두 여종과 잠시 함께 있다가 그들을 모두 앞서 보냅니다. 그런 다음 얍복강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이제 자기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이 특이한 일이 발생합니다.

 

여기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하고 있는 야곱이 있습니다. 그는 비록 부자지만 다음날 자기 형 에서를 어떻게 만나야 좋을지 몰라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형 에서가 무장한 남자 400명을 거느리고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소리도 이미 들었습니다. 자기는 그 공격에 대 해 전혀 손을 쓸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자신은 물론 처자식까지 분명히 살해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모두 다 얍복강을 건너갔으며 야곱 혼자 남아 있습니다. 왔다갔다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잠도 이루지 못한 채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하며 불길한 예감으로 가득 차 있는 야곱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이 장 마지막에 기록된 그 엄청난 결과들로 인도될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물론 야곱의 전 생애에서 하나의 전환점입니다. -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떤 의문도 제기될 수 없습니다. - 야곱이 정말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은 바로 이 시점입니다. 그때까지 야곱은 종교를 이용하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곤란에 빠지거나 어려움이 생기면 항상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까지 그는 단지 종교를 가지고 놀았을 뿐입니다. 그것은 이주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외적인 것으로 자기에게 편리할 때나 꽤 괜찮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그가 맨 처음 자기 집을 떠날 때 하나님과 흥정했던 사실 -“당신이 저를 축복하시면 제가 이것을 하겠습니다” - 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그러나 이 시점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이 사건이 야곱의 이상야릇하고 변화 무쌍한 인생사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 시점부터 그는 종교를 참으로 믿게 되었고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그는 형에서를 만나기 전날 밤에 이 체험을 한 이후로부터 그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야곱의 인생사에 나타난 전환점을 보여 주기 때문에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 이야기에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데는 이것 말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이야기가 기독교와 하나님을 진정으로 체험하는 것, 회심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완전히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이야기는 기독교의 복음이 무엇이며 그것이 한 개인 속에서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을 살펴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일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많이 드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 주변에는 교회 바로 밖에 있는 세상에 대해서는 몹시 신경을 쓰면서 이 점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에 대해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부터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은 갖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필요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기독교에 흥미를 갖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진짜 체험, 이 중요한 체험을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혹시 이 브니엘 환상을 체험하기 전의 야곱과 같습니까, 아니면 이 브니엘 환상을 체험한 후의 야곱과 같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이런 중요한 체험을 했습니까? 이 같은 결정적인 중대한 변화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즉 하나님을 만난 후로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 그런 변화를 체험한 적이 있으십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이야기는 하나님을 실제로 체험한 성경의 고전적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을 보십시오. 이와 똑같은 체험들이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 모릅니다. 그 중 어떤 것은 직접적인 서술 형식으로 또 어떤 것은 가르침과 설명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의 생활 속에 나타난 놀라운 예들 속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위대한 주제로서 한번의 설교로는 도저히 다 설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야곱이 겪었던 이 극적인 체험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 이 허락하신다면, 다음 주에 이 점에 대해 좀더 상세히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주제를 다음과 같이 둘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전반적인 성격을 알아본 다음, 그 체험을 통과하게 되는 상세한 방법과 그것이 어떻게 효과를 발하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그 사건을 전반적으로 살펴볼 때, 거기에는 우리가 반드시 물어 보아야 할 아주 단순하고 기본적인 질문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이야기 속에 깔려 있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했는가? 나는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사람이 체험한 것과 똑같은 체험을 했는가? 이렇게 말하면 제게 이런 질문을 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질문을 하는 것도 좋지만 대체 그런 체험의 특징들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제가 그 체험을 했는지 안 했는지 어떻게 테스트해 볼 수 있습니까? 제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브니엘 체험 이전의 야곱 상태에 있는지 아니면 브니엘 체험 이후의 야곱 상태에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그럼 이제부터 이 지극히 중요한 체험의 특징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첫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특징은 회심은 항상 강렬한 개인적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이 체험에 관한 첫번째 사항은 그것이 항상 우리를 격리시킨다는 사실입니다. 그 체험은 우리를 따로 떼어 홀로 있게 만듭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개체성을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는 모두 이것이야말로 바로 현시대를 살면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 중 하나라는 사실에 틀림없이 동의할 것입니다. 특히 지금 현재와 같은 세상에서는 아주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마치 인생의 모든 것들이 서로 짜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개체성과 독립된 정체성을 잊게 만들려고 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이 자기 일에 파묻혀, 자신의 전문직에 파묻혀, 자신의 직업 속에 파묻혀 자신을 망각하기가 얼마나 쉬운 세상입니까? 자기 가족에 파묻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거나 온 세계 속에 휩쓸려 자기를 잃어버리기는 또 얼마나 쉽습니까? 이 세상이 점점 더 대중과 군중 단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기정 사실화되었습니다. 그 것은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도 그랬지만 그 전쟁 때문에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수많은 대중, 수백만의 사람들에 대해 연구합니다. 세상은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개인이 무시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집단과 그룹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그 단위가 점점 더 커집니다.

 

이런 현상은 실업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소자본을 가진 개인이 합병된 기업이나 체인점들에 의해 먹히는 세상입니다. 이런 현상은 정치계에서도 볼 수 있으며, 노조라는 조직 하에 노동자 개인이 사라지고 마는 산업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난이 아닙니다. 이제 고용주와 피고용자 사이의 개인적 관계가 이전 같지 않다는 것은 이미 기정 사실입니다. 이제는 그 관계가 좀더 기계적으로 조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부서의 전체 생활이 그 부서에 속한 개개인에 기초하기보다는 그 집단 전체에 기초해서 생각되고 있습니다.

 

국제 관계나 원자 폭탄 같은 것들에 대해 생각할 때도 이와 똑같은 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개개인은 자신을 하찮은 존재 -지구상의 전쟁, 세계 대전, 원자 폭탄은 많은 사람들, 아니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죽일 수 있습니다 - 로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대체 개인은 어디로 사라진 것입니까? 한 개인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숫자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 방식만큼 지금 우리가 함께 논하고 있는 이 중요한 체험에 역행하는 것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고 방식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갖게 되는 체험에 가장 역행하는 것입니다. 이 체험을 하기 위한 첫번째 단계는 항상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개체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그런 다음 “한 사람” 즉 하나님과 단둘이 남게 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끌고 오시는 데는 참으로 여러 가지 방법들이 동원됩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 속에서 보는 이 방법은 아마 가장 극적인 방법 중 하나일 것입니다. 야곱은 문자 그대로 자신의 처자식은 물론 자신의 모든 소유물로부터 분리되어야 했습니다. 야곱의 위험은 자신을 이것들과 동일시하는 데 있었습니다 -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그것들로부터 떼어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해서 이 분리 작업을 하십니다. 때로는 질병이라는 수단을 통해 이 일을 하십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 사업이나 재산에 많은 흥미를 갖고 있으며,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이주 행복하고 단란하게 삽니다. 그는 이런 것들을 위해 삽니다. 그는 절대 잠시 멈춰 서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영혼을 가지고 있는가? 이 인생이 다 지나간 후에는 내게 어떤 일이 생길까? 라는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다른 관심사들에 온통 빠져 자기 자신을 잊고 삽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병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하던 사업으로부터 그를 분리시켜 놓으십니다. 그의 소유물과 관심사들로부터 그를 떼어놓습니다. 어쩌면 가족들과 떨어져 병원에 입원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자기는 결국 한 개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자기는 절대적으로 혼자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원 침대 위에서 이런 체험을 했습니다. 물론 자기 집 병상에 누워 이런 체험을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다만 하나님이 이런 체험을 하게 해주시는 방법들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시어 실망을 안겨 주시기도 합니다. 우리의 돈을 앗아가고 우리 사업을 망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친구와의 우정에 금이 가거나 그보다 더 깊은 애정 관계에서 실망하여 이 지점에 도달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성도들의 인생 에 대해 한번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바로 이런 식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격리시키셔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자기 자신도 잃고 자기 영혼도 잃은 채 빠져 있는 것들로부터 그들을 단절시켜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격리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은 개인이라는 것, 자기 혼자 문제들에 직면해야 한다는 것, 이런 사실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이것이 설교가 하는 일의 전부입니다. 설교가 하는 첫번째 일은 우리 모두에게 우리 각자에게 우리는 개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강단에서 사회적 여건이라든가 경제 및 정치 상황 또는 국제적인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다 어떤 의미에서 이 복음을 설교하는 것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선 지나칠 정도로 언제나 개인적입니다. 복음은 여러분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지만 우리는 개개인이 따로 서 있다는 것, 이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 바로 복음의 첫번째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혼자 태어납니다. 죽을 때도 모두 혼자 죽습니다 - 무리를 지어 죽지 않습니다. 사망은 아주 개인적인 것입니다. 복음의 두번째 메시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한 개체라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개인적으로 책임을 물으실 거라는 것, 이런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떼를 지어 한꺼번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서 서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각자 가서 심판 받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여러분과 제가 행한 모든 것, 심지어는 “무익한 모든 말”까지 적힌 개개인의 기록이 거기 다 있다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고 행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며 우리 각자 그 점에 대해 개인적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여러분은 이렇게 격리된 상태에서 자신을 바라보신 적이 있습니까? 자신이 이 세상과 이생에서 하나님 앞에 선 한 개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제가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제발 군중과 대중들로부터 떨어져 나오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격리시켜, 지금 이 시간 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홀로 서서 여러분에게는 개인적인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십시오. 이 복음의 첫번째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그것은 항상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산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다는 사실, 그 외의 다른 어떤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도 책임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 있다가 내일이면 없어질 것이요 각자 혼자서 심판대 앞에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제 두번째 특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회심은 항상 우리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도록 인도해 주는 체험입니다 저는 특히 이 점을 강조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이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와 있는 이야기가 강조하고 있는 위대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극히 중요한 체험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한 개인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교나 기독교를 단순히 도덕과 행실의 문제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또 단순한 개념이나 원리의 문제로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기독교는 어떤 견해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평화와 전쟁, 교육이나 산업에 관한 어떤 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회를 위해 행해질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는 - 한 인간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브니엘에서 이 일을 체험하기 전의 야곱은 이주 달랐습니다. 우리 중 아주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야곱도 항상 하나님을 자기가 필요로 할 때 축복을 주는 일종의 힘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자기에게 힘과 능력이 필요할 때 돌아서서 그 힘과 능력을 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하늘 어딘가에 있는 위대한 능력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얻은 후에는 하나님에 대해 새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대면한 이 극적인 밤에 그 모든 것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모든 회심 체험의 본질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제가 현재의 우리 기독교계, 특히 신학생들을 볼 때 가장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징조가 있다면, 바로 이런 개념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는 그 동안 너무 오랫동안 사회 복음에 관심을 쏟아 왔습니다.

 

기독교를 단순히 윤리의 문제요, 사람을 정신적으로 고양시키고 소생시키는 것, 추상적인 신학의 문제로 보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인 관계가 기독교의 참 본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새로운 관심은 지금으로부터 l00년 전에 살았던 그 유명한 덴마크인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저서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특별한 면을 아주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종교적인 개념을 갖고 노는 것이 아니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 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 인간은 그 점에 대해 무언가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 이것이 소위 결정적인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나와 당신(I and Thou)라는 아주 의미심장하고 흥미로운 제목의 책을 통해 최근 더욱 보편화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나와 당신”이라는 인격적 관계로 생각하는 대신 천국 어딘가에 있는 “그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을, 진짜 인생은 인격간의 만남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관념의 영역에서 살면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지극히 중요한 체험의 두번째 표지로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 철학 속에 있는 단순한 추상적 부호가 아니라는 것, 우리가 자신의 술책을 이루기 위해 가서 엎드려야 하는 어떤 개념 -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외딴 곳에 있는 어떤 개념 - 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이따금씩 우리를 축복해 주는 어떤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시요, 하나님은 참이시며,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고 들을 수 있는 분이요 우리와 용무가 있는 분이요, 우리가 관계해야 할 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눌 수가 있습니다.

 

브니엘 체험을 하기 전에는 야곱도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비인격적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브니엘에서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 아니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 그 “사람”(그는 바로 하나남 자신이었습니다)이 야곱 과 이야기하고, 야곱과 씨름했습니다. 야곱은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챘습니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진짜입니까? 하나님이 이처럼 인격적인 존재입니까? 하나님이 실재입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입니까? 제가 말씀드리지만 이 체험의 두번째 특징은 그것이 항상 우리를 즉각적으로 하나님과 직접 만나게 해주는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주 단순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무릎 꿇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정말 거기 계시다고 믿습니까? 여러분의 기도 생활은 어떻습니까? 단순히 몇 가지 경건한 소원과 소망 사항을 중얼거리는 정도입니까? 여러분 자신에 대해 말하고 어떤 가능성들에 대해 단순히 물어보는 정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 적이 있습니까? 거기 정말 살아 계신 거룩한 인격체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안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이 체험을 해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정말 그리스도 안에 살아 계신 참 하나님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에 비추어 볼 때 그 체험의 세번째 특징은 이것입니다. 이 체험을 한 사람은 항상 그것을 그의 인생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것은 여기 이 오래된 이야기 속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간단히 끝맺는 말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여기 야곱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하며, 에서에 대해 그리고 자기 소유물에 닥칠 위험을 생각하며 불길한 예감에 가득 차서, 걱정 근심에 싸여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야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체험을 하기 시작하고 그 체험이 진행되는 동안 야곱은 에서에 대해 새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자신의 가축들, 소떼와 양떼들, 그 많은 재산, 심지어 처자식들에 대해서도 다 잊어버립니다. 이 분, 이 놀라운 체험, 그에게 제시된 이 축복의 가능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잊어버립니다. 그것은 너무 자명하고 불가피한 일이 아니었을까요? 바로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체험이라 할 수 있는 회심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항상 나타나게 되어 있는 현상 아닐까요? 야곱은 이 축복을 받기 위해 씨름했습니다. 그는 그 축복을 간청하며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날은 밝아 오고 에서가 올지도 모르지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절대 당신을 가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설사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더라도 나는 이것을 반드시 갖고야 말겠습니다.” 이 말은 항상 그리스도인에게 지극히 중요한 체험을 할 때면 반드시 터져 나오게 되어 있는 말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이 누군지 아십니까? 그는 하나님이 자기 인생 속에서 가장 중요한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자기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과 자기가 그 영혼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영혼의 운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다른 일들에도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영원히 살지만 그 외 모든 것은 다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습니다.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 때문에 이제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 -“나는 구원받아야 한다. 나는 용서받아야 한다. 나는 새 생명을 받아야 한다. 나는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 ” - 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를 도와줄 사람이 있을까요? 아, 있습니다. 그는 그 리스도께로 돌아서서 “저는 당신을 절대 가게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 축복을 반드시 갖고 말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는 이것을 간청하며, 이것을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이제 이것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다시 한번 간단한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여러분 인생 속에도 이것이 가장 큰 것이 됩니까? 제가 지금 강단에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이 다 없어져도 꼭 붙잡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라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리스도께 꼭 매달려 있으시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그는 자기 죄를 사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기에게 새 생명과 새로운 본성이 주어지며 하나님 앞에 새롭게 설 수 있는 신분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압니다. 사망과 무덤을 이기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에게 영광스러운 영원한 유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보고 “비록 모든 것을 다 빼앗긴다 해도 내게 그리스도만 계신다면 아무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이처럼 그리스도가 최고입니까?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여기서 야곱이 느끼고 있는 심정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모든 참 그리스도인들의 심정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낙심시킬 수 있다. 나를 핍박할 수도 있으며 내게 뭐든지 행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만 나와 함께 계시다면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항상 영원한 변화가 뒤따르는 체험입니다 저는 여기서 그 변화는 영원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체험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감정적인 체험을 하고 자기가 회심했다고 고백하지만 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령 심리적인 회심 같은 것들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런 감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체험이 진짜라는 특징은 그로 인해 그 사람이 영원히 변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브니엘 체험 이후 다시는 전과 같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다리를 절었습니다. 그 몸에 표지를 갖게 되었고 그 이름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이 시점에서부터 계속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야곱이 전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옛 야곱은 이제 없어졌습니다. 이제 그는 어떤 의미에서 절름발이지만 새사람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체험에는 항상 영원한 변화가 수반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은 새사람입니다. 그는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 옛날의 그가 사라지고 그가 달라진 것을 세상이 압니다. 비록 남은 여생을 절름발이로 살긴 했지만, 누구든지 야곱을 보면 그가 이전의 야곱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와같은 중요한 체험을 한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이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는 자기 위에 표지들을 얻게 되었고 새 생명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을 강하게 믿던 야곱, 그 야곱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불구의 야곱 - 이스라엘이 “다리를 절뚝거립니다.”

 

그것이 마지막 특징입니다. 따라서 이 지극히 중요한 체험의 마지막 테스트는 그것이 영원한 변화를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이전의 그가 아닙니다. 그는 새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옛것이 모두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것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이 브니엘 체험을 하셨습니까? 혼자 격리되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보셨습니까?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 분으로 다가옵니까? 하나님을 아십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일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이 현재의 여러분이 되었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 있는 새사람, 새 생명, 새로운 흥미, 새로운 능력, 새로운 존재를 의식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는, 여러분 자신을 뛰어 넘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바울과 같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혼자 격리되어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찾아오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그분을 발견하고 만나 본 적이 있습니까? 그분이 여러분에게 주실 수 있는 축복을 간청해 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이 순간까지 그런 적이 한번도 없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간이 여러분의 브니엘이 될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한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님께 매달려 여러분을 축복해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여러분에게도 이런 체험을 달라고 구하십시오.

 

믿음으로 구하면 하나님도 거절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 다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난, 브니엘 체험 이후의 사람으로서 앞으로 계속 전진하십시오.

가져온 곳 : 
카페 >양무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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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님
복어와 WCC

김정한 ㆍ 2013-10-09 (수) 07:39 IP: 1.xxx.17 ㆍ조회: 40      

복어요리와 WCC
복어요리는 한방에 따르면 몸을 따뜻하게 되고 혈액순환에 좋으며 근육의 경화를 방지하고 , 부드럽게 하는 장점이 있으며 단백질과 비타민 B1, B2 등이 풍부 하고 유지방이 전혀 없어 고혈압 , 당뇨병 , 신경통 등 성인병 예방에 좋으며 숙취에도 좋아 술꾼들에게는 좋다고 알려진 요리라고 한다.

그런데 이 복어에는 치명적인 毒(독)이 있어 복어를 다루는 자격증을 가진 자들이 요리하지 않으면 생명을 잃기도 한다.

WCC도 그렇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WCC의 긍정적인 면이 얼마나 많은가? 수많은 인권문제를 취급하고, 환경문제, 수많은 갈등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것 그야말로 복어처럼 좋은 것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CC는 치명적인 독성이 내재된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독성이 무엇인가? 니므롯이 불신앙의 바벨탑을 쌓은 것처럼 예수님 없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보려는 자들인 것이다. 그것이 배교인 것인데 그들이 WCC를 숙주삼고 누룩을 퍼트리고 있는 것이다.      
저들의 목표는 우리 모든 종교가 힘을 합쳐 세계평화를 가져오자 라고 하는 이름으로 "우리는 하나”(We are the One)라고 외치기 시작했고 어떤 분들은 23억 기독교인구중 85-90%가 동조하고 있다는 이야길 들어봤다.  (캐토릭이 13억, WCC가 5억 8천만 합해도... )

설마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카토릭은 이미 이들 수중에 넘어갔다. 교황들이, 김수환추기경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안다.

김수환추기경
http://blog.daum.net/ameneden/11785260
현재 교황 프란치스코의 발언  
http://blog.daum.net/back9253/869
평화의 종교로
http://www.newshankuk.com/news/content.asp?news_idx=20101216193036n6698
복음진리대신 종교로 전락하는 기독교
http://blog.daum.net/ameneden/11785259

그런데 복어에는 독이 있는 것은 다 아는데 WCC는 다 좋은 것이라고만 한다.
필자의 눈에는 그렇지 않은데.

최근에 열린(2013년 10월 7일) 전현직 신학총장들이 공동학술대회 때에 찬반 양론이 있고 심지어는 한신대교수인 연규홍교수가  “‘WCC 공동선언’, 무조건 폐기는 학문적 무책임”이며 특히 4개조항중 1항 우리는 종교다원주의를 배격한다 라는 선언문을 쓰레기 라고 함에 문제점이 있다고 하였다.

http://atl.christianitydaily.com/sections/seattle/church/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67346
교단에 속한 목사님들
복어에는 치명적인 독이 있는 걸 아시고들 복어 잡수시길 바랍니다.

영적 갈림길에 서 있는 한국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거목(巨木) 
                        최송연

바람이 가져다준
작은 씨앗 하나 곱게 품고
수없는 밤을 홀로 몸살하며
움을 틔워내야만 하는 그대

간간이 불어오는 미풍,
따사로운 햇살,
밤이면 
흘러내리는 별빛이 있어
그리 외롭지만은 않은 들녘이어도

새들이 날아와 깃들일 만큼
자라가려면
날이면 날마다 
행복한 날만 있는 것은 아니지

한여름 뙤약볕과
모진 비바람
차디찬 눈보라가
그대 고운 얼굴을 할퀴며
주름 짙게 할지라도
그 모든 아픔을 미소로 맞이할 수 있다면

그제야
가지를 더 멀리 뻗어낼 수 있는
거목(巨木)이라  불릴  수 있으리니...
한 마리 피곤한 새마저도 품을 수 없다면
그대의 그 푸른 기상만으로
어찌 거목(巨木)이라 부를 수 있으랴...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 13: 31-32)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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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의 짐을 들어주는 아버지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수진리 고개라는 낮은 언덕이 있다.
    이 언덕에 건널목이 있는데 어제 밤에 건녈목을 건너가고 있는데 우리 앞에 어떤 남학생이(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 잘 모르겠지만) 걸어가고 있었다.
    근데 그 학생이 건널목을 다 건너갔을 때 건널목 앞에서 학생의 아버지인듯한 분이 기다렸다가 학생이 메고 있던 가방을 얼른 벗겨서 자기 어깨에 메고 두사람이 나란히 걸어 가는 것을 보았다.
    아마 늦게까지 공부하고 오는 아들을 마중나와서 집에까지 가는 동안이라도 아들의 등에 멘 무거운 가방을 들어주어 아들을 가볍게 해주고 싶은 아버지의 애틋한 심정이었으리라. 이렇게 아들을 배려해주는 아버지를 아들은 어떤 마음으로 대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마워하는지 아니면 귀찮아하는지...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을 도와주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이 그들의 뒷모습을 보는 나에게 애잔한 감동으로 와 닿았다.
    그리고 내 마음에 그 아버지 보다 더 큰 사랑으로 인생의 무거운 짐을 대신 져 주시는 분의 말씀이 생각났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마 11:28)
    인간인 우리에게는 얼마나 무거운 짐들이 많은가? 절대로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짐들, 마음의 짐들, 육체의 짐들, 물질의 짐들, 가족의 짐들, 직장의 짐들...
    수고하고 무거운 인생의 짐들을 스스로 지려다 지쳐서 쓰러지지 말고 그 모든 짐을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오직 주님 주시는 사명의 짐만 지고 가야 할 것이다.

    샤론의 동산 사모님

     

     (오늘의 꽃) 풍란 난초과(蘭草科 Orchidaceae)의 상록 다년생초. 야생에서 고목의 줄기[樹幹]나 바위에 붙어 자라기도 하지요. 지금 보시는 꽃은 '소엽풍란' 목부작입니다. 나무에 붙혀 살고 있다고 해서 '목부작'이라고 하지요. 풍란은 크게 대엽풍란과 소엽풍란과 나뉘는데 잎과 꽃의 크기로 나뉘지요. 저 목부작은 꽤 여러해 키운 녀석으로 올해 꽃이 많이 피어 한달여 동안...집안 가득 풍란의 향기로 채웠었답니다. *^^*
    '대엽풍란'입니다. 소엽풍란의 꽃은 흰 학이 춤을 추는 듯한 모습이라면 대엽풍난은 꽃잎에 무늬가 있어 조금 더 화려함을 자랑하지요. 식물들은 적응력이 참 빠르지요? 건조한 거실에서도 잘 살아가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윽한 난의 향기까지 전해드려야 하는데 그럴 수 없음이 아쉽습니다.*^^* Islands In The Stream - Bee Gees


 

신학대학교의 학위 논문을 검색하던 중 눈에 띄는 게 있었습니다. 릭조이너의 예언 사역에 관한 비판적 연구였습니다. 신사도운동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뿐 아니라 신사도운동의 12사도중 한명으로 불리는 릭조이너를 특정해서 비판했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 있는 논문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 사이트에는 서론 부분을 뺀 나머지를 중심으로 3회에 걸쳐 요약·연재합니다. 논문게재를 허락해주신 노득용 목사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본 논문은 ‘신사도운동과 릭 조이너(Rick Joyner)의 예언사역에 관한 비판적 연구–개혁신학적 입장에서-’라는 제목으로 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 신학석사 논문으로 2008년 6월 제출됐습니다. 시간이 지났지만 신사도운동을 이해하는데, 특히 그들의 예언사역의 허상과 릭조이너라는 핵심 인물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글입니다. <편집자주>

제 3 장 릭 조이너의 예언사역 이해

3.1 릭 조이너의 환상을 통한 직통계시론
릭 조이너(Rick Joyner)는 현재 미국 노스 캐롤라이너의(Noth Carolina)주 샬롯(Charlotte)에 위치한 샛별출판선교회(MorningStar Publishing and Ministries)의 설립자이며 대표이다. 그는 20여권의 책을 집필했고, 그중에 『빛과 어둠의 영적전쟁』(The Final Quest)과 『예언사역』(The Prophetic Ministry),『동산의 나무』(There Were Two Trees in the Garden), 『추수』(The Harvest)등이 있다. 그는 또 샛별지와 예언회보의 편집인이고 집회강사며 선지자(예언자)라 부른다.

 

릭 조이너는 “예언은 신구약 모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가장 주요한 방법67)”이며, “시대가 종말을 향해 다가갈수록 교회는 더 많은 예언적 통찰력을 필요로 하게 될것”68)임으로, 예언사역은 “말세에 가장 중대한 이슈”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69) 또한 릭 조이너는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靈)”(계 19:10)이기에 “예언이란 예수께서 직접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증거 해 주시는 것”70)이라는 주장이다. 즉 “성경말씀을 가르쳐 대언하는 자가 예언자”가 아니라 “직접 성령의 계시를 받고 전달해주는 자가 예언자”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그의 글을 보면 내가 말하는 ‘예언적 체험’이라는 것은 수도 많고 다양하다. 거기에는 성경에서 주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셨던 모든 기본적인 방법들이 다 포함된다. 주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시기 때문에 자기 백성들에게 동일한 방법으로 말씀해 왔고, 이러한 ‘체험들’은 교회사를 통하여 계속 발견되고 있다71) 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성경에서 주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셨던 모든 기본적인 방법들을 가지고,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말씀하신다는 뜻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백성들은 ‘성경(율법)을 통해서 말씀 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말씀하신 것’이였음으로, 오늘날도 그와 같이 직접적으로 계시하신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릭 조이너의 교회에서 예언사역의 중요한 핵심 역할을 하고 있는 스티브 탐슨(Steve Thompson)72)도 같은 견해이다. 릭 조이너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계시를 받았음을 주장한다. 그리고 나서(필자주: 성령의 압도적인 임재후) 쓴 책이 바로 현재의 교회 상황과 임박한 사건들에 관한 『추수』(The Harvest)라는 책입니다. 그 이후에 나는 다른 환상들과 계시를 받았는데 그것들은 『마지막 추구』(The Final Quest) 그리고 『부르심』(The call)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계시들 중 어떤 것들은 열린 환상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떤 것들은 마치 영화 스크린을 보고 있는 듯한 가시적이고 외적인 환상들이였습니다.73)

 또한 릭 조이너는 『횃불과 검』(The Torch and The Sword)에서 예수님을 직접 만나 가르침을 받는 체험을 적고 있다. 주님이 가까이 오시자 흰옷을 입고 계신 것과 앞으로 묶여져 있는 금띠를 두른 것이 보였다. 옷의 밑 가장자리와 소매 끝은 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해가 뜨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한 곳에서 해가 뜰 때 다른 곳에서 해가 진단다. 너는 한 시대의 황혼과 다른 시대의 새벽에 살고 있다. 내가 여기 온 이유도 네가 살고 있는 시대의 마지막과 다가오는 시대의 시작에 관하여 배우기 위해서이다”.74)

 

릭 조이너는 꿈을 하나님의 직접계시로 믿고 있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1995년 2월 16일에 받은 꿈에서 나는 주 예수께서 하나님의 동산에서 생명 나무 아래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군대가 거기서 주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분은 이제 막 우리에게 아직도 묶여 있는 우리 형제들을 위해 전장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굉장히 잘생겼다고 부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외모는 오히려 평범했습니다.75) 릭 조이너는 환상이나 꿈을 통해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계시를 받고, 그 계시의 내용을 책으로 만들어 냈다.

 이렇게 계시를 받아 만들어진 책들은 신사도주의자들에게는 성경과 상응한 권위를 가진다. 실제 설교를 통해서 이러한 환상과 신비체험자들의 간증을 인용하며,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하기도 한다. 또한 릭 조이너는 예언사역자(선지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체험한 영적체험을 성경에 나오는 경험과 동일시한다. 그는 말하기를 이러한 경험들은 구약과 신약에서 꽤 자주 등장한다. 밧모섬에서 요한이 받은 계시도 여기에 속하며, 에스겔이 경험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 들려 올라가서 자신이 몸 밖에 있었는지 안에 있었는지 분간하지 못했다(고후 12:24). 베드로는 부정한 동물들이 천에 쌓여있는 환상을 보았는데 이것은 직접 계시의 좋은 예이다.76)라고 말하고 있다. 릭 조이너의 “이러한 경험들은 구약과 신약에서 꽤 자주 등장한다”며, 자신의 여러 영적인 체험들은 성경에 기록된 것과 동일하다는 주장이다. 자신의 체험을 성경안의 인물들이 체험했던 것들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성경에 나오는 그러한 성서 기자들의 체험은 나중에 ‘정경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분명 이들이 베드로처럼, 요한처럼, 바울처럼 동일한 입신, 꿈, 환상들을 동일한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았다면, 그 내용들은 ‘또 다른 하나님의 말씀’ 이 될 수 있음이다. 이에 대해 개혁신학적 입장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특별한 체험과 영적 현상들은 성경을 기록하기 위한 한시적이고, 직접적인 계시체험이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영적인 현상들과 그 권위와 초자연적 능력이 동일할 수 없다. 그런데도 릭 조이너는 하나님과의 직통계시적 예언을 주장함으로, 전통적으로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고백해 온 성경의 유일사상을 거부하고, 성경을 벗어난 계시적 영적체험을 중시 여기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를 위협할 수 있다.

 .2 릭 조이너의 사단지배론
릭 조이너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사단의 조종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환상 중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이 사단의 군대들이 말을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 중 대부분은 옷을 잘 차려입고 존경 받을만하고 또한 세련되고 교육도 잘 받은 듯이 보였으며, 사회 각 계층을 고루 대표하고 있는 듯하였다. 이들은 스스로의 양심을 다독거리기 위하여 기독교의 진리는 고백하지만 실제로 삶은 어두움의 세력들과 타협하고 있을 때 그들에게 배속된 마귀들은 더욱 더 강해져서 이들의 행동을 마음대로 조종했다.77)

릭 조이너의 주장을 살펴보면, 사단이 조직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타고 다니며, 조종하고 있다.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교회 안에서나 사회 안에서 지도층 급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도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두운 세력들과 타협할 때, 마귀들이 더욱더 강해져서 악한 행동을 하도록 충동한다. 릭 조이너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마귀들이 이 그리스도인들을 타고 있는 것을 보았으나 불신자들의 경우와는 달리 그들 안에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이 그리스도인들이 마귀를 털어내려면 단지 그들의 마귀들과 타협하는 것을 중단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명백하였다···, 마귀들의 권세는 거의 전부 기만의 힘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명백하였다. 그들은 이 그리스도인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쓰면서도 정작 이들 스스로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만큼만 속고 있었다.78)

 릭 조이너는 환상체험을 통한 예언에서 마귀가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다. 열심히 나름대로 주의 일을 하며, 쓰임 받는다는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실상은 사단에게 속아 사단의 도구로 쓰임을 받고 있다. 이 군대는 교회의 분열을 가져와 교회가 완전히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획책하는 것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그리스도인들을 이용하여 자기 형제들 간에 싸움을 일으키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전방 사단들 중 대부분은 그리스도인들이거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한 사람들이었다.79)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사단의 포로가 되어 사단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군대에 소속되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착각한다.80) 또한 그리스도인 포로들이 같이 포로 된 그리스도인들을 공격한다. 이따금 힘이 처진 포로들은 넘어져 쓰러졌다. 이들이 땅에 쓰러지자마자 다른 포로들은 이들을 조롱하면서 자신들의 칼로 찔러대었다. 다른 포로된 그리스도인들은 옆에 서서 동의한다는 듯이 이를 바라보고 있다가 가끔씩 자기들의 칼로 쓰러진 자들을 다시 찌르기도 하였다.

 그리고 릭 조이너는 마귀들이 들고 있는 무기들을 소개한다. 그것은 “협박, 배반, 참소, 험담, 중상, 흠잡기이며, 공격전초대로 거절, 앙심, 조급, 용서하지 못함, 정욕 등의 이름을 가진 마귀들의 중대들”이라고 주장한다.81) 그러나 이러한 마귀의 무기나, 마귀의 역사에 대해서 신사도주의자인 케네스 헤긴은 그 견해를 릭 조이너와 달리한다. 그는 『모든 어둠 권세를 다스리는 승리하는 교회』에서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들이 직접적으로 악한 영의 역사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라고 말한다.82) 즉, 케네스 헤긴은 인간 내면에 일어나는 죄악된 요소들은 마귀의 일이 아니라 “인간 육신의 역사”이다. 케네스 헤긴은 육신에는 강한 욕망이 있는데, 이것은 마귀의 역사나 귀신의 활동이 아니라는 것이 릭 조이너와 상충된 주장이다.

 인간의 죄악된 요소들은 육신적 취향인데 “유혹의 욕심, 옛 사람”(엡 4:22), “마음의 정욕”(롬1:24), “욕심에 끌려 미혹 당함”(약1:14)등으로 나타난다. 그럼으로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주장하며.83) “육신의 문제를 해결할 주체는 바로 인간 자신임”을 알고,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라고 설명한다.84) 그러나 이와는 달리 릭 조이너는 인간의 삶을 ‘빛과 어둠의 영적전쟁’으로 보고, 사단과의 대결구도로 이끌어가고 있다. 그럼으로 ‘잘못된 인간행동은 사단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이라는 무조건적인 사고는,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인간관계를 이루는데, 큰 어려움을 초래하게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3.3 릭 조이너의 교회 내전(內戰)론
릭 조이너는 다가오는 교회의 모습은 영적인 내전의 전쟁터가 될 것이라 말한다. 그 이유는 전통교회는 ‘종교적 영’이라는 것에 지배당하고 있고, 이 ‘종교적 영’이라는 것의 특징 중 하나인 ‘기만(欺瞞;속임)’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전통교회가 하나님을 위한다는 열정 위에 세워져 있고, 이 하나님을 위한 열정은 악한 것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 때문에 속고 있다는 주장이다. 릭 조이너는 그 실례로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열심과 구약의 엘리제사장과 바울이 회심하기 전의 열심을 들고 있다.85) 릭 조이너는 신사도교회와 전통교회와의 전쟁을 예견하며, 자신들의 편에 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종교의 영에 대한 교회의(신사도교회) 대적은 마지막 시대에 있어서 웅장한 싸움들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전투에서 싸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결정해야 할 문제는 이것입니다. 당신은 어느 편에 설 것입니까.86) 이러한 조이너의 주장은 결국 신사도운동을 수용하지 못하고 제동을 거는 전통교회는, 종교의 영에 사로잡혀 있다며, 전통교회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낸다. 릭 조이너가 말하는 종교의 영의 형태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들의 잘못된 점만을 보는데 열심을 내는 것이라는 “위조된 분별 은사”다. 둘째, 이세벨이 예언자 엘리야를 죽이려 하고 박해한 가장 큰 원수였던 것처럼 예언사역을 공격하는 “이세벨의 영”이다.

 셋째, 주님의 희생을 신뢰하기 보다는 훈련과 개인의 희생을 신뢰한다는 “자기의(自己義)”이다. 넷째, 인간을 과도하게 높이거나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숭배하도록 하는 “거짓계시”이다. 다섯째, 주님을 위해 살기보다는 주님을 위해 죽는다는 자살의 영의 한 형태라는 “순교자 증후군”이다. 여섯째, 십자가의 능력을 통한 내적 치유를 행하는 것이 아닌 상담학적, 인본주의 심리학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것은 “자조적인 심리학”이다.87) 그러나 릭 조이너는 표면적으로는 신사도주의자들과 전통교회간의 갈등을 사단과의 전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악한 자에게 사용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에 충격을 받았고 용기를 잃었다. 그리고 나는 또한 이제 시작되는 전쟁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을 큰 전쟁”이 될 것임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이 임박한 전투의 배후 세력들에 대해 깨닫고 있는 자가 너무나 적을 것이기 때문이였다.88) 그러나 실상은 그 영적인 내전이란 신사도주의 개혁운동의 흐름에 동참하는 세력들과 이에 반대하는 세력 간의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주장인 것이다. 마치 종교개혁시대의 거대한 갈등국면처럼, 다가오는 시대에 교회변혁을 위한 큰 물결인 신사도운동이 활성화됨으로, 교회내의 내전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피터 와그너도 이러한 신사도운동의 갈등관계를 사단과의 대결구도로 몰아가고 있다. “사단은 교회가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려할 때 사도직이 회복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두려워서 방해한다”는 것이다.89) 그러므로 릭 조이너는 “교회(신사도교회)가 완전히 승리할 때까지”, “교회 안에 있는 형제들(신사도주의자들)의 고소자의 요새들”이 무너질 때까지 싸울 것을 아래와 같이 계시 받았다 한다.

 1996년 2월 23일 나는 교회가 영적 내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계시를 세번째로 받았습니다. 나는 1988년 처음으로 그런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95년 초에 나는 다시 꿈에서 그것을 보았고, 그것을 『마지막 추구』(The Final Quest)의 한 부분으로 써냈습니다. 1996년 2월 23일에 나는 이제 교회가 완전한 승리를 얻을 때까지 힘써 싸우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이 큰 전쟁을 예비하도록 경고할 시간이 되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완전한 승리는 교회 안에 있는 형제들의 고소자의 요새들을 완전히 내던져 버림으로써 이루어집니다.90)

 이런 맥락에서 릭 조이너는 교회 공동체 안에 “거짓선지자와 거짓 영적 은사자”가 있다며, 그것은 마치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리는 사건”과 같다91)고 말한다. 그는 지금까지 교회들이 이러한 가라지를 제거하려다가 다른 참된 은사까지도 소멸시키는 우를 범하여 왔다는 이러한 전통교회의 행동을 “교회안의 내전”으로 설명하고 있다.92) 릭 조이너는 전통교회가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알곡을 뽑는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은, 전통교회 성도들이, ‘기만’이라는 거대한 사단의 세력에 의해서, 속고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마귀들의 권세는 거의 전부 기만의 힘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명백하였다. 그들은 이 그리스도인들을 자기들 마음대로 쓰면서도 정작 이들 스스로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 만큼만 속이고 있었다. 이것은 왜냐하면 ‘자기 의’라는 군기는 거의 모든 병졸들이 들고 있어, 막상 행군중인 자들은 부대들의 본질을 나타내는 군기를 볼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93)

 이를 볼 때 릭 조이너의 전통적 교회를 향한 인식은 부정적인 요소가 다분히 있다. 릭 조이너의 저서 『추수(The Harvest)』에서도 기성교회 지도자들 가운데는 많은 경우 “정치적인 조작과 자기 선전으로 현재의 자리를 얻었을 뿐 아니라 부르심에 근거한 사역보다는 전문 직업에 불과한 사람들이 많다”고 지적한다. 언젠가는 “삯군임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94) 또한 거짓된 교회(전통교회)가 압도적인 정치권력을 잡게 될 것이고, 참 기독교인들(신사도주의자들)에게 가하는 공격이 있을 것을 주장하고 있다.95) 릭 조이너는 사이비나 이단종파들의 공격은 얼마간의 어려움은 줄지라도, 성도들이 도리어 강하게 되는 기회가 되지만, 자신은 바르게 산다는 종교적인 사람들이 더 큰 위협이 된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 핍박자라는 사람들은 ‘도덕주의적인 보수파와 그들의 종교기관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그리스도인라고 자처하는 이들이 “참 신자들을 죽이는 행위가 하나님과 사회에 대한 자신들의 의무라며 공격하는, 종교적 편협주의 영을 경계하라”고 말한다.96) 또한 교파와 예수님을 대결구도로 둠으로써 제도적인 교회들은 주님의 반대편에 서있음을 은연중 드러내고 있다.

거짓된 교회들과 거대한 종교단체가 궁극적으로 참 신자들의 최대의 적대세력이 될 것이며 가장 반기독교적인 정부, 사이비 종파와 다른 종교들보다도 더 심하게 참 신자들을 대적할 것이다. 제도적인 교회에 속한 모든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교파와 주님 사이에서 누구를 따를 것인지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될 것이다.97)

 릭 조이너의 주장에 의하면 기성교단 종교지도자들과 성도들은 기만(속임)을 당하고 있고, 영적으로 바로 깨어있지 않음으로 인해서, 그들이 옳다고 하는 그것이 도리어 마귀를 돕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기성교회가 신사도운동의 예언사역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사도와 선지자(예언자)의 현존성’을 비판하는 것은 사단의 교묘한 술책이라는 주장이다. 결국 신사도교회가 승리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전쟁은 당연하다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에 대해 신사도주의자인 마이크 비클(Mike Bickle)는 신사도운동과 예언사역을 옹호하기 위해 마틴 루터의 가름침을 예를 든다. “어그스틴 계열의 수도사이며 신부였던 마틴 루터는 16세기 초반 만인제사장설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루터는 또한 개인의 판단에 대한 교리를 가르쳤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또는 성경을 스스로 해석할 수 있다는 교리였다. 이것이 예언 사역에 대한 신약적 이해의 출발점이다. 구약시대에는 특정인들에게만 제한되어 있던 사역(제사장직과 예언자직)들이 신약시대에는 보편화 되었다.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령에 의해 인도함을 받을 수 있다”98) 신약의 예언사역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생각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개혁교회와 복음주의 자들은 교회에 예언사역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갈등관계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릭 조이너는 진리의 사역들이 회복이 있을 때마다 논란이 있어 왔음을 상기시킨다. 마틴 루터가 모든 믿는 자의 제사장직을 선포했을 때 기독교가 논쟁에 휩싸이게 되었으나,99) 결국은 목회사역의 회복과 전도사역에 괄목할 만한 영향을 끼쳤음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언사역을 시작할 때 오늘날 교계 내에서 논란과 갈등이 있을 수 있으나, 언젠가는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이 판명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릭 조이너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주님께서 논란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사역을 정화하기 때문이다. 첫째로 논란은 모든 진리와 사역의 회복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오류와 극단주의를 바로 잡을 수 있게 한다. 또한 논란은 자기의 이기적인 야망을 위해 새로운 운동을 좇으려는 이들을 가려낸다. 이와 같은 논란은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물러 나게 함으로써 사역에 순결함을 가져 온다.100) 또한 “주님께서는 때때로 일부러 하나님의 역사가 갈등과 논란 가운데 있게 하시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존귀하게 여기도록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한다.101)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다툼과 분쟁이 아니다, 하나 됨이요 일치를 추구하고 있다. 개신교 ‘종교개혁의 역사’와 자신들의 ‘신사도운동’을 동일선상에 두고 합리화하려는 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3.4 릭 조이너의 예언해석론
릭 조이너의 예언사역에는 여러 가지 수준이 있으며 단계가 있다. 그중 가장 낮은 단계가 “느낌(인상들; impressions)”이다. 오늘날 예언이라고 불리는 것들의 대부분은 예언의 가장 낮은 단계인 느낌(impressions)의 단계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선호하는 교리나 그날 우리의 기분, 편견 등 여러 가지에 의해 영향을 받아 혼탁해질 때가 많다.102) 이 계시들은 체험이 많고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에 의하여 해석이 될 경우, 대단히 특징적이고 정확하다는 주장이다.103) 그 다음이 느낌보다 높은 “환상(Visions)” 이다. 이것도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에서, 마치 영화 화면처럼 보이는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런 환상은 상징적으로 나타나기에 해석이 필요하고, 그것이 이루어지기 까지 인내가 필요하다.104) 계시의 그 다음 단계는 주님의 “임재에 대한 의식(conscious sense)”, 즉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mind)에 특별한 조명을 준다. 이것 또한 편견이나 교리에 영향을 받는다.105)

 다음으로는 고넬료가 환상 가운데 천사와 대화를 나눈 것 같은 “열린 환상(open vision)” 이 있다. 그것은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 느낌보다 훨씬 높은 예언사역이다. 이런 계시는 자주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 매우 중대한 말씀을 주실 때 주님이 하신다.106) 또한 “꿈”이 있는데, 대부분들의 꿈들은 낮 동안 생활하며 느꼈던 것들이 축적되어서 생기는 일관성이 없고 무의미한 것들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꿈은 당시는 모르나 보통은 쉽게 안다. 또 하나의 높은 단계의 예언적 체험에는 “비몽사몽(trance)” 즉, “입신”으로 부르는 단계로 깨어 있을 때 꾸는 꿈으로 순식간에 그 장소에 가있는 것처럼 느낀다.107) 릭 조이너는 “이것은 에스겔이 자주 경험했던 것이며,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환상들을 받았을 아마 경험했던 것”으로 말한다.108) 릭 조이너는 『빛과 어둠의 영적 전쟁』에 기록된 환상들은 모두 꿈으로 시작되었고, 그들 중 어떤 것들은 주님의 강한 임재를 느낀 상태에서 왔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은 입신의 상태에서 받았다.109) 릭 조이너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들은 구약과 신약에서 꽤 자주 등장한다. 밧모섬에서 요한이 받은 계시도 여기에 속하며, 에스겔이 경험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 들려 올라가서 자신이 몸 밖에 있었는지 안에 있었는지 분간하지 못했다(고후 12:24). 베드로는 부정한 동물들이 천에 쌓여있는 환상을 보았는데 이것은 직접 계시의 좋은 예이다.110)

 이러한 릭 조이너의 여러 은사들의 체험은 성경에 기록 된 것과 동일하게 나타난 현상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예언사역자들 중 윌리암즈(Willia ms)는 오늘날의 예언의 은사를 성경의 권위와 같은 수준에 두지 않는다. 다만 성경 기자와의 권위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여전히 말씀 하신다”는 것이다. 그의 뜻은 “신약 정경이 마감되었다고 그분이 말씀을 멈추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111) 그런데 릭 조이너는 이러한 꿈과 환상의 해석을 하는 것은, 곧 신자 자신이라고 주장함으로 신뢰성을 스스로 저하시키고 있다. 릭 조이너는 “지금 해석의 부분에서 예언사역자들이 많은 실수를 범하는 경향이 있다112)”라고 시인한다. 릭 조이너는 은사자들이 그 은사를 해석하기 위해서 “추측, 자신의 개인적인 현재의 시각에서만 바라보는 태도,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으로 바라보기, 잘못 맞추어진 초점, 편견, 교리적인 편견, 거절감, 쓴 뿌리, 반항, 거룩하지 않은 자비, 분당(분리)의 영,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불복종, 욕망,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기” 등에 의해서 달라짐을 말한다.113)

 그래서 예언이란 아직도 “유리를 통해 희미하게 보는 것”이고, “부분적으로”(고전 13:12)만 안다는 것을 이해한다고 고백한다.114) 한마디로 오늘날 신자들 사이에 전해지는 예언의 내용은 하나님의 정확한 계시이기 보다는, 예언적 계시를 받은 인간의 영적성숙도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계시를 받은 개인의 “영적통찰력”과 “영적 성숙도”에 의해 주어진 결과가 신자들에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 대해 릭 조이너는 예언사역자가 백퍼센트의 적중률에 이르는 것이 목표이지만 도달하지 못했음을 인정한다.115)

결국 이런 논리는 인간해석에 의해 계시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으니, 예언자들이 받았다며 전달하고 있는 예언적 계시들은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릭 조이너의 논리대로 말한다면, 예언자들이 1차적으로 초자연적 계시를 통해 받은 내용들이 성경적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2차적으로 신자들에게 전달 될 때는, 계시를 직접 받은 은사자의 영적 성숙도에 따라서 그 내용이 하나님의 뜻과 가깝거나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3.5 릭 조이너의 오늘날의 신(新)선지자론
릭 조이너는 “이 시대에도 선지자가 있다”고 주장한다.116) 그 근거로 “거짓선지자를 삼가라(마7:15)”는 구절을 인용한다. 이 말씀은 “거짓선지자가 있다는 말씀은 참선지자가 있기 때문에 사용한 말씀이다”라는 논지로 주장 하고 있다. “참예언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면, ‘삼가’하거나 ‘미혹’당하지 않도록 분변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아예 ‘모든’ 예언은 다 거짓이니 거절하라고 말씀하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곧 거짓선지자를 삼가라고 시금석을 주었다는 것은, 참 예언자가 존재함을 의미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에 대해 신사도주의 선지자 사상을 수용하는 필호이어(Vielhauer)도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고는 교회 안에 참 선지자의 활동을 전제한다(presuppose)”고 주장한다.117)

 이와 같이 릭 조이너는 거짓선지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오늘날 선지자도 존재한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주장을 위해 아래와 같이 성경을 자의(自意) 해석한다. 그것은 주님께서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 알곡속의 가라지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또한 마태복음에서 ‘거짓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마24:11)’라는 말씀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거짓선지자가 일어날 것이라는 말은 참선지자가 있다는 말도 된다”는 것이다.118) 또한 릭 조이너의 알곡과 가라지 비유의 가르침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결국 거짓 선지자는 교회 안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교회 밖에 있는 이단의 교주나, 자칭 재림주가 아니라 교회 안에 사역자들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가라지와 쭉정이가 동일한 장소(밭)에 같이 있음에 대한 해석을 “중생한 거듭난 신자와 중생하지 못한 교인이 교회를 함께 다닐 수 있다”의 개념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거짓 목회자(가라지)와 참 목회자(알곡)라는 논리로 해석하고 있다.119)

 릭 조이너는 『예언사역』이라는 책에는 “왜 오늘날에도 선지자가 필요한가?”제목 하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경은 온전하고 충분하고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기독교의 유일한 기초이다. 그러나 성경책은 하나님의 뜻 전부를 기록하기 위해서 만들어 진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만일 성경의 영적인 은사들과 예언사역이 이 제 더 이상 소용이 없다고 한다면, 다른 사역들 역시 불필요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120)

 릭 조이너는 위의 글을 통해서 선지자(예언자)가 존재121)해야 하는 이유를 성경이 하나님의 뜻 전체를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에,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인간들에게 나타내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즉, 성령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제 2의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기 위해서 오셨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신사도주의자 케네스 헤긴도 그의 책 『환상을 믿습니다』란 글에서 자신은 직접 사도와 선지자의 존재를 환상을 통해 예수님으로부터 직접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122) 릭 조이너는 계속해서 선지자를 통한 예언사역의 정당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이 사역(예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교회가 온전하게 성숙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뜻한다. 누구든지 그런 주장을 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분량의 성숙함에 이르기 위해서 예언 사역은 여전히 요구되어 진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사와 사역을 거부하는 것이 교회를 자라나지 못하게 하고 혼란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다.123)

릭 조이너의 이 말은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교사, 목사의 직임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인데(엡 4:11), 성경만으로는 성도들을 온전히 세우기에는 부족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온전함으로 세움 받기 위해서는 선지자를 통한 예언(하나님의 음성)사역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논지이다. 이 선지자들의 예언사역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교회성장을 방해하고 혼란하게 하는 행위라는 주장이다.124)

3.6 릭 조이너(Rick Joyner)의 ‘예언사역은사’ 이해
‘예언사역의 은사’란 은사 중 일부는 예언사역에 속해 있다는 신사도주의자들과 릭 조이너(Rick Joyner)의 주장을 지칭한 말이다. 신사도주의자들과 릭 조이너는 여러 성령의 은사중 ‘예언사역의 은사’를 따로 분류한다. 전통적으로 목회현장에서 치유(신유)은사를 가지고 사역을 하면, ‘치유사역’이라 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 행함의 은사를 가지고 사역을 하면, ‘축귀사역’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예언의 은사로 사역을 하면 ‘예언사역’이라 한다. 그러나 신사도주의자들과 릭 조이너가 말하는 ‘예언사역’이란 의미는 ‘예언은사’와 구분하며, ‘예언은사를 가지고 사역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릭 조이너가 말하는 예언사역은 “그분의 음성과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과 같은 ‘초자연적인 성령의 은사’에도 항상 민감해야 한다”125)라고 주장한다. 릭 조이너의 교회에서 그의 조력자로서 예언자 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스티브 탐슨(Steve Thompson)도 “예언 사역의 은사들에는 지식의 말씀, 지혜의 말씀, 영분별의 능력, 그리고 예언의 은사들이 포함되어 있다”126)고 말한다. 그러므로 신사도주의자들과 릭 조이너가 주장하는 예언사역에 속해 있는 ‘예언사역은사’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 ‘지식의 말씀은사’, ‘영분별 은사’이다. 이러한 각 은사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개혁신학적 입장과는 그 해석이 다르다.

 3.6.1 릭 조이너의 지혜의 말씀은사(Word of Wisdom) 이해
지혜의 말씀은사에 대한 릭 조이너의 사상을 알기위해, 릭 조이너가 시무하는 교회에서 조이너의 가르침을 대신하며, 예언사역을 책임지고 있는 스티브 탐슨(Steve Thompson)의 해석을 참고하고자 한다. 스티브 탐슨은 지혜의 말씀의 은사(로고스 소피아스)는 “어떤 특별하고 구체적인 경우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계획과 목적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말씀(계시)”이라 한다.127) 스티브 탐슨은 그 예로 사도행전 27장의 바울의 항해 도중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사건을 가지고 설명한다. 바울이 항해가 순조롭지 않고 어려울 것을 미리 예언 받았으며, 또한 천사를 통해 배에 있는 사람들이 안전하게 될 것을 약속받았었다. 그 이후 실제로 큰 풍랑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선원들이 구명보트를 내리려할 때 바울은 구명보트를 내리면 결단코 살아남지 못할 것을 예언했다. 선원들은 바울의 예언에 순종하였고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스티브 탐슨은 이 사건을 통해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설명하기를 ‘선원들이 모두 배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지혜의 말씀이며, 이것은 단순히 “무엇이 일어났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계시하며 알려주는 것,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지혜의 말씀의 은사라고 말하기 보다는 도리어 ‘예언은사의 고유한 기능’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3.6.2 릭 조이너의 지식의 말씀은사(Word of Knowledge) 이해
릭 조이너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λo.γο. γν.σεω.:로고스 그노세오스)에 대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정보를 아는 지식’이라는 주장이다. 꿈과 입신의 경험 속에서 나로서는 엄청나게 큰 영분별의 은사와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받았다. 어느 때는 내가 어떤 사람을 보거나, 교회나 사역을 위하여 기도하면,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들에 대한 일들을 알게 된다. 이러한 예언적 체험 기간 중에 이러한 은사들은 “실제 삶”에서는 내가 개인적으로 결코 체험해 본 적이 없는 수준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략···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떤 사람이나 물건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들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단번에 알게 된다.128)

 이와 같이 릭 조이너는 ‘지식의 말씀 은사’에 대한 주장은 ‘성경에 대한 지식’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로 말미암아 “특정한 사람에 관한 모든 정보를 모두 알게 되는 지식”이다. 이에 대해 신사도주의자요, 릭 조이너의 예언사역의 협력자인 스티브 탐슨(Steve Thompson)도 지식의 말씀의 은사란 “어떤 사람이나 장소, 현재나 과거에 일어난 사실(정보)을 이야기 하는 것”129)이라 한다. 그러면서 스티브 탐슨은 성경에 나타난 지식의 말씀은사의 예는 요한복음4장 16절에서 19절130)에 사마리아 여인을 예수님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그녀의 ‘삶에 관하여(그녀에 대한 정보)’ 이야기하셨다는 사실은 바로 지식의 말씀 은사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본문은 예수님에게 임한 ‘성령의 은사’가 아니다. 요한복음 2:24-25절의 내용처럼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외부로부터 부여받은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은사의 능력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필요 없이 다 아시는 분이심으로 적절한 예가 아니다. 또한 지식의 말씀의 은사의 예로 왕상 5:27에 엘리사와 나아만 장군과의 사건을 예를 들고 있다. 아람나라 나환자인 나아만을 치료한 후 감사의 표시로 주던 선물을 거절하였으나, 그의 종 게하시가 몰래 받았지만 엘리야가 그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또한 아람 나라가 이스라엘을 침범할 때 미리 그 군대의 이동을 알고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 주므로 인해 이스라엘을 승리하게 한(왕하 6:8-12) 이런 사건은 지식의 말씀의 은사의 결과라 주장한다.131)

 또한 신사도주의 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 24절-25절에서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라는 구절 중 ‘드러나게 되므로’라는 말씀이 지식의 말씀의 은사라 주장한다. 즉 지식의 말씀의 은사는 숨겨진 정보를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알아 ‘드러내는 은사’라는 것이다.

 3.6.3 릭 조이너의 영분별의 은사(Discerning of spirit)이해
영들 분별함의 은사는 학자들 간에 일치된 견해 없이 세 가지 논의가 있다.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는 말씀과 연관이 있는지(요일4:1), “하나님의 성령과 악한 영감을 구별하라”는 말인지(행16:16-18)132), “두 세명의 예언함을 다른 사람이 분별하라”는 표현인지 (고전14:29; 롬12:1-2, 살전 5:19-22) 논란이 있다.133) 이 은사에 대한 릭 조이너의 가르침을 대신하는 스티브 탐슨은 “영들과 기름부음의 능력들의 여러 가지 종류를 분별하고 차이점을 이야기하는 것, 치유와 천사의 나타남과 어떤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어떤 몸 안에서 특별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선포하는 지식의 말씀 같은 영적산물134)”이라는 주장이다. 이 은사에 대한 개혁신학적 입장은 ‘영들에 관한 분별’로 보고 있으나, 신사도운동에서는 ‘영적인 여러 현상과 영적인 모든 활동’ 등을 분별하고, 차이점을 이야기하고 다루는 것으로 그 영역(領域)이 넓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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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미주

67) Rick Joyner,『예언사역』, 13.
68) Ibid,. 13.
69) Ibid,. 13.
70) Ibid,. 15.
71) Rick Joyner,『 빛과 어둠의 영적전쟁 』예태해 역 (서울: 은혜기획, 2004), 12.
72) 스티븐 탐슨(Steve Thompson)은 릭조이너가 담임으로 있는 현재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모닝스타 펠로우십 교회 부담임자로 섬기고 있으며, 예언사역 훈련소 상임지도자 및 모닝스타 사역자 학교 학장이다. 가르침과 예언사역의 은사가 있고, 미국내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집회 강사로 알려져 있다. 스티브 탐슨은 예언은 “일반적인 예언”과 “구체적인 예언”으로 구분하고 있다. 일반적인 예언은 성경 말씀을 가지고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을 말함이고, 구체적인 예언이란 성령의 직접적인 음성이나 환상을 통해 신자 각 사람에 대한 구체적인 개별 사안을 알려주는 것을 말한다. 이들이 말하는 예언사역에서 사용하는 “하나님 말씀”은 “기록된 성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직접 받았다고 주장하는 직접계시의 내용”을 의미하는 말이다.(Steve Thompson,『당신도 예언할 수 있다』, 곽정남역 (서울: 순전한나드, 2005), 14
73) Rick Joyner, 『21세기를 위한 예언적 비전』김병국 역 (서울: 바울. 2006), 12.
74) Rick Joyner, 『 횃불과 검』이선협역 (서울: 순전한 나드, 2004), 29-32.

75) Rick Joyner,『21세기를 위한 예언적 비전』, 199.
76) Rick Joyner,『예언사역』, 106.
77) Rick Joyner,『빛과 어둠의 영적 전쟁』, 25.
78) Ibid., 26.
79) Rick Joyner,『빛과 어둠의 영적 전쟁』, 27.
80) Ibid., 29.
81) Ibid., 23.

82) Kenneth E. Hagin, 『모든 어둠 권세를 다스리는 승리하는교회』 김진호 역 (경기: 믿음의 말씀사,
2007), 81.
83) Ibud., 87-90.
84) Ibud., 93-94.
85) Rick Joyner,『21세기를 위한 예언적 비전』, 202
86) Rick Joyner,『21세기를 위한 예언적 비전』, 202
87) Ibid., 217-23.
88) Rick Joyner,『빛과 어둠의 영적 전쟁』, 31.

89) C. Peter Wagner,『교회의 지각변동』, 150.
90) Rick Joyner,『21세기를 위한 예언적 비전』, 262.
91) Rick Joyner,『빛과 어둠의 영적 전쟁, the Final Quest』, 30-31.
92) Rick Joyner,『21세기를 위한 예언적 비전』, 262.
93) Rick Joyner,『빛과 어둠의 영적 전쟁』, 26.

94) Rick Joyner,『추수(The Harvest)』이선협 역 (서울: 은혜, 2007), 166.
95) Ibid., 197.
96) Rick Joyner,『추수(The Harvest)』, 197-98.
97) Ibid., 198.

98) Mike Bickle,『예언사역의 여정』박선규 역 (서울: 뉴와인, 2007), 150.
99) Rick Joyner,『예언사역』, 33.
100) Rick Joyner,『예언사역』, 33.
101) Ibid., 34.
102) Ibid., 100.
103) Rick Joyner,『빛과 어둠의 영적 전쟁』, 14.
104) Rick Joyner,『예언사역』, 101.
105) Rick Joyner.『빛과 어둠의 영적 전쟁』, 15.

106) Rick Joyner,『예언사역』, 104.
107) Ibid., 100-06.
108) Rick Joyner,『빛과 어둠의 영적 전쟁』, 16.
109) Ibid., 16.
110) Rick Joyner,『예언사역』, 106.
111) 김병학에 의하면 피터 와그너는 예언의 은사, 방언의 은사, 방언 통역의 은사를 “계시적인 은사”로 일컫는다. 그는 계시가 오늘날도 발생한다고 믿지만, 그것이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와는 다른 점을 인정한다. 곧 예언이나 방언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자기들 스스로 모순을 낳고 있다. 김병학, “신약시대 이후 예언 은사의 중단성과 계속성에 관한 일 연구”, 44).

112) Rick Joyner, 『예언사역』, 114.

113) Ibid., 114-124.
114) Rick Joyner,『21세기를 위한 예언적 비전』, 13.
115) 최종태,『예언자에게 물어라』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3), 27.

116) 신사도주의자들은 오늘에도 예언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에베소서 1장 1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는 말씀을 인용한다. 이와 관련 서울신대 윤철원 교수는 에베소서 1장 17절은 “지혜와 계시의 영”이 “모든 그리스도인(너희)”에게 충만해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소위 제한된 의미의 예언자들에게만 있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1) 케네스 헤긴, 이 본문을 주로 목회자와 소위 “예언자”들에게만 제한해 생각하는 것은 신사도주의자들의 “성경 주해의 자의성(恣意性)”을 잘 드러내 준다. 또한, 신사도주의 자들과 릭 조이너는 거짓선지자를 설명하여 오늘날 기존교회 사역자들 대한 간접적 불신을 드러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117) 남영기,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예언 은사에 대한 이해", (석사학위논문, 침례신학대학교신학대학원, 2000), 59.

118) Rick Joyner,『예언사역』, 28.

119) 신사도주의자인 변승우도 거짓선지자는 교회안에 있는 종교지도자임을 주장했다. 변승우는 『거짓선지자를 삼가라』는 글에서 다음같이 주장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 하면 “말일 성도 예수 그리스도교회”를 설립한 죠셉 스미스나 “제칠일예수재림안식일교회”의 엘렌 지 화이트여사 같은 사람을 떠 올립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1992년 10월 28일 자정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주장했던 ‘다미선교회’ 이장림 같은 사람을 떠 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들도 거짓선지자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거짓선지자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사람들에게 거짓 선지자로 쉽게 인식되는 자들입니다. 그만큼 이들은 덜 위험 합니다” (변승우,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서울: 은혜출판사, 2007), 168.) 변승우는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3-15)의 말씀 중 “양의 옷을 입고” 라는 말씀은 예수님 당시 목자들이 즐겨 입던 옷이었던 것처럼 목자의 모습으로 위장하여 나타난다는 뜻임을 말하면서, “실제로 오늘날 많은 거짓선지자들이 목자(목사)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목자(목사)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와 있다”며, 노골적으로 기존교회의 목회자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고 있다. 자기들만이 진정한 선지자임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말들을 하고 있다.(변승우,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169)

 

120) Rick Joyner,『예언사역』 조성국역 (서울: 은혜, 2007), 52.
121) 선지자 라로 불리는 게네스 헤긴은 “예언의 은사”와 “선지자적 사역”을 구분 한다. “예언은사”는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기 위한 것으로, 소위 장래를 미리 말해주는 것(foretelling), 즉 예언(prediction)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선지자적 사역” 가운데에는 미래에 대한 예언이 있다고 말한다. 예언자들은 계시의 은사(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혹은 영들 분별함)를 예언과 함께 사용한다고 한다.

122) Kenneth E. Hagin,『나는 환상을 믿습니다』김진호 역 (경기: 믿음의 말씀사, 2004), 146.
123) Rick Joyner,『예언사역』, 55.
124) 이와 같이 신사도주의 자들은 이 시대에 선지자가 존재함을 확언하고 있다. 신사도운동을 표방하는 서울 큰믿음교회 변승우는 2008년 5월 10일날 보내준 카페 이메일에서 “이시대에 수많은 선지자가 존재하며, 그들은 바로 케네스 헤긴, 밥 존스, 데이비드 월커, 릭 조이너, 바비 코너, 신디 제이콥스, 마크 듀퐁, 샨 볼츠, 그레엄 쿡, 짐 골, 패트리샤 김, 등이다. 앞으로 수백 수심반의 선지자들이 일어날 것이며, 우리나라에도 많은 선지자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라는 주장이다.

또한 선지자라 불리는 케네스헤긴은 ‘예언의 은사’와 ‘선지자의 사역’을 구분한다. 예언은사는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장래를 미리 말해주는 것(foretelling), 즉 예언(prediction)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선지자적 사역’ 가운데에는 미래에 대한 예언이 있다고 한다. 예언자들은 계시의 은사라고 주장하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 지식의 말씀은사, 영들 분별함의 은사를 예언과 함께 사용한다는 것이다.(케네스 헤긴, 어떻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 받을 수 있는가? 김진호 역 (경기: 믿음의 말씀사, 2005), 139.

125) 김영한,『개혁신학이란 무엇인가?』, 95.
126) Steve Thompson,『당신도 예언할 수 있다』, 14-15.
127) Steve Thompson,『 당신도 예언할 수 있다 』, 17.
128) Rick Joyner, 『빛과 어둠의 영적 전쟁』, 17.
129) Steve Thompson,『당신도 예언할 수 있다』, 15-16.
130)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예언자)로소이다”(요4:16-19)

 

131) 이승영, “고린도전서 12장에 나타난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 (석사학위논문, 아세아연합신학연구원, 2001), 23-24.
132) 행 16:16-18,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 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 하여 돌이켜 그 귀신 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33) “고전12장7-10 성령의 은사1 ”에서 R. F. Collins, First Corinthians, 455재인용
134) Steve Thompson,『 당신도 예언할 수 있다 』, 18.


 출처: 기독교포털사이트
http://www.kportal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681


열왕기 8장과 9장....

북이스라엘 왕조,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와 타락의 길에서 헤어나지를 못 합니다. 온 나라는 우상의 국가가 되어 버렸고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 같고 악인들이 득세하고 의로운 자들은 자취를 감춥니다. 그러나 이렇게 암담한 시대에도 어두움과 맞서 싸우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와 또 숨겨놓으신 7천인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고 계셨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도 그렇습니다. 세상은 패역하고 하나님은 안 계시는 것 같고 악이 횡행하며 믿음은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불러내신 에클레시아, 믿음의 사람들은 이 시대의 패역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택하신 백성을 지키시며 그들을 사용하셔서 어두움을 대적하고 물리쳐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8장에 수넴 여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공궤하였으며 아들을 얻었고 그 아들이 죽었을 때 엘리사가 살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하여 그 여인에게 7년 가뭄을 피하여 블레셋에 가 살게 하시고 또 돌아와 다시 잃었던 땅을 되찾도록 하십니다. 이는 환난 속에서 그 택하신 자에게 베푸시는 특별한 은혜와 보살핌을 보여줍니다. 이 험악한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백성을 이처럼 지키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악인들을 징벌하실 것입니다. 악인들이 형통하고 그들의 시대가 영원할 것처럼 융성하다가도 하나님께서 손을 펴 보응의 칼을 뽑으시는 순간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소멸되고 날아가는 먼지같이 된다는 것을 말씀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극심한 굶주림 속에 아들을 잡아먹고 비둘기똥콩 한 사발이 수십만원씩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 하룻밤 사이에 반전되어버린 ‘네 문둥이 사건’처럼 순식간에 말입니다.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모략과 섭리는 치밀한 소설이나 각본 같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일점일획도 떨어짐 없이 성취되는 것과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을 아무도 피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건 하나하나, 과정 하나하나마다 오묘하고 치밀하게 이루어져가는 것을 보면 주님의 십자가 사건 때 벌어지는 사소해 보이는 모든 과정이나 사건들까지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었다는 사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하나도 우연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대적 아람왕 벤하닷을 징벌하십니다. 벤하닷은 아합왕때부터 이스라엘을 노략하고 공격하였을 뿐 아니라 아합왕에게 사로잡혔을 때 형제라고 부르며 자기를 놓아준 아합왕의 은혜를 원수로 갚은 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징벌에 의하여 부하인 하사엘에게 죽임 당합니다. 다음은 이스라엘의 악한 왕들과 한 통속이었던 악한 유다왕 여호람입니다. 하나님은 유다왕국을 지키시고 그 등불을 끄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여호람은 에돔과 립나의 배반을 징벌하지 못 한 채 죽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합이 이세벨의 계교에 따라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은 죄악을 인하여 아합의 집안 모든 남자를 다 멸절시키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이스라엘 왕 여호람은 자신에게 닥칠 그러한 최후를 예상조차 하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이 이스라엘 왕일 뿐 아니라 유다왕과의 관계도 돈독하고 70명의 왕자들까지 있었을 정도로 융성하고 형통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순식간에 여호람과 그 집안을 멸절시켜버리십니다. 군대장관 예후를 기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십니다. 예후는 나봇의 포도원 땅에서 여호람왕을 활로 죽입니다. 여호람과 내왕하던 유다왕 아하시야는 도망치다가 죽습니다. 이어서 이세벨을 내어던져 죽여 개의 먹이가 되게 하고, 여호람의 70 아들들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죽입니다. 아합의 집안 모든 남자들이 말갛게 씻김같이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예후는 또 계략을 써서 바알의 선지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서 진멸해버리고 바알신전을 변소로 만들어버립니다. 그야말로 통쾌하기 이를 데 없는 징벌이 일사천리로 순식간에 이루어집니다.

오늘날도 그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의 형통이 지금은 영원할 것 같아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노 앞에 저들의 운명은 겨와 같고 재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저들을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날려버리실 것입니다. 잠시 후 악인들은 사라지고 자세히 살필지라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잠히 인내하며 보응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시편 37:8-10=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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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 들어온 세속주의

 

이승구 교수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평생에 걸쳐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사순절이나 고난 주간에만 십자가와 고난을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의 진정한 의미를 놓치기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그 모든 삶의 국면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살아가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만 한다.

이 글에서는 그렇게 살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북돋우기 위해서 우리네 한국 교회 안에 들어 와 있는 세속주의의 두 가지 양태를 생각해 보면서,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 교회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지를 깊이 있게 생각해 보는 한 가지 방법이 된다고... 여겨진다.

 

1. 교회 안에 들어 온 세속주의의 현저한 양태

 

세속주의가 교회 안에 나타날 때 그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우리 주변에 창궐하고 있는 아주 명확한 비도덕성과 비인격성, 물질 추구, 인간적 방법으로 교회를 이루고 유지하려는 노력 등으로 나타나고 있는 노골적인 세속주의이다. 교회 안에서도 이 세상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또 때로는 이 세상에서 보는 것 보다 더 심각한 여러 형태의 현저한 죄악이 있고 불의가 있음을 많은 이들이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그 모든 일에 대해 회개해야만 한다. 또한 교회 안에도 물질을 추구하며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는 일들이 나타나고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철저히 버려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과연 어떤 교회가 존중되는 교회이며, 어떤 교우가 존중되는 교우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해 보라. 그 기준에 세상적인 것들이 매우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교회가 매우 세속적이라는 증거가 된다.

 

또한 교회 안에 인간적인 방법으로 교회의 일을 하여 교묘한 정치적 방법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현저한 세속주의이다. 개 교회에서의 인간 관계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교단 안에서 어떤 일이 나타나고 있는 지를 심각하게 하나님 앞에서 질문해야 한다. 교단에서나 교회들 간의 모임에서 어떤 이가 어떤 기준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지를 깊이 있게 생각해야 한다. 그 기준이 무엇인가에 따라 우리들의 교회가 세속적인지 아닌지가 드러난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이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세속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다음에 생각할 문제 보다는 덜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다음에 생각할 교묘한 세속주의의 양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그것을 세속주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아주 심각한 형태의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2. 교회 안에 들어온 교묘한 세속주의

우리네 교회에 들어 와 있는 교묘한 세속주의란, 기본적으로 우리 자신의 힘에 의존하려고 하는 경향을 뜻한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문자적으로 힘이 없을 때는 이와 같은 세속주의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땅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기 시작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들의 숫자의 힘이나 우리들의 경제력이나 우리들의 정치적인 영향력 등을 무의식중에라도 의존하게 되기 쉽다.

 

아주 명확한 악에 대항하는 우리의 바른 노력에서도 조금만 잘못하면 우리 자신의 힘과 노력에 의존하는 어리석음이 나타나기 쉽다. 더구나 아주 명확한 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들의 유익을 지키려고 하는 노력 가운데서는 우리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고 드러내며,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를 감히 무시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기가 매우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있는 가장 교묘한 세속주의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성령님께 온전히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성령님께 의존하지 않고, 이 세상적인 것에 의존하든지, 우리 자신들의 믿음과 우리의 기도나 구제 등과 같은 우리의 종교적 행위에 의존하든지, 우리들이 체험한 종교적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된다.

 

우리의 종교적 경험에 의존하면, 우리는 자신들이 전혀 세속적이지 않고 오히려 매우 영적이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병을 모르는 그 상태가 가장 심각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통치하시는 성령님께 의존하지 않고, 이상한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며 의존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세속주의의 형태인 것이다.

 

성령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고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든지, 비인격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든지 하는 것은 아무리 성경임을 강조한다고 해도 성령님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3. 십자가 아래 있는 교회의 참 모습을 회복해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세속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까? 십자가를 깊이 있게 생각하는 것만이 이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항상 십자가 아래서 우리의 삶과 교회를 생각하면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와 힘에만 의존하려고 해야 한다. 적어도 고난 주간에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항상 십자가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 아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십자가 아래서도 자신의 영광과 행복과 자신의 힘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십자가에 그리스도를 못 박은 유대의 종교적 지도자들이나 본디오 빌라도, 또한 그들의 지시대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쳐 대던 유대 민중(오클로스)이나 빌라도의 지시대로 십자가 처형을 준비하고 그 일을 시행한 무자비한 로마 병정들과 같은 사람들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을 자행한 이들도 후에 복음 선포를 들은 후에는 “우리가 어찌할꼬? 했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하는 우리가 결국 우리 자신의 힘과 우리 자신의 행복과 우리 자신의 복받음만을 추구해 간다면 그 얼마나 이상한 상황인가?

우리는 십자가 아래서 우리의 죄를 없애기 위해 우리의 자리에 서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자기를 추구하는 것은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다.

 

마치는 말

 

우리는 자기를 추구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 자신의 행복을 우리의 모든 것의 실질적 목표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 그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승천 등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궁극적으로 이루려 하시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며, 그것을 우리의 궁극적 실질적 목표로 하고 살아가야만 한다.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 왕국을 구축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만이 이 세상에 온전히 드러나기를 바라게 된다. 또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그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사실성을 분명히 말해 주고 그 의미를 명확히 해석해 주는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해야 한다. 진정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결국 부활의 빛에서 사는 사람이고,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그 안에서 약동하는 사람이다. 그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믿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성경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 사는 일의 유일하고도 충족한 기준임을 분명히 하게 된다. 그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다른 어떤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진정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성경을 통해 우리를 다스리시는 성령님의 다스림에만 온전히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 아래 있는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신사임당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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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와 방아개비

제1폭에는 가지·방아깨비·개미·나방·벌 등이 등장하고 있다.
땅위에 개미 한 쌍과 방아깨비가 기어다니고,
위쪽에는 나비·벌·나방이 날고 있다.
자연 생태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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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과들쥐

제2폭에는 수박·들쥐·패랭이꽃·나비·나방 등이 등장하고 있는데,
특히 수박을 파먹는 들쥐 두 마리의 모습이 흥미롭다.
민화에서는 수박이 다남(多男)의 상징물로 여기지만
이 그림에서는 그런 의미와는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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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추리와 개구리

제3폭은 공간을 나는 나비, 원추리꽃 줄기에 붙은 매미,
 뛰어 오르려는 개구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 화폭의 것과 같은 구성 요소와 짜임새를 가진 문양이 반닫이나 장롱 등
가구 장식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원추리는 일명 망우초(忘憂草), 또는 훤초(萱草)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시경 詩經》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림을 잊고 답답함을 푼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기서는 그저 흔히 보는 식물 중 하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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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차조기와 사마귀

제4폭에는 여뀌·메꽃·잠자리·벌·사마귀 등이 등장하고 있다.
 잠자리는 여뀌 주위를 날고 있고, 사마귀는 땅을 기면서 벌을 노리고 있다.
사마귀는 민화나 다른 그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소재이지만
초충도에서는 자주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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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드라미와 쇠똥벌레
 
제5폭에는 맨드라미·산국화·나비·쇠똥벌레 등이 등장하고 있다.
쇠똥벌레 세 마리가 제나름대로 일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고,
나비는 맨드라미 주변을 무리지어 날아다니고 있다.
이 화면의 주인격인 맨드라미는 계관화(鷄冠花)라고도 부르는데,
민화에서는 관계에로의 진출을 상징하지만 이 경우에는 그것과 상관없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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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추리와 개구리

제6폭에는 어숭이꽃·도라지·나비·벌·잠자리·개구리·메뚜기가 등장하고 있다.
나비와 잠자리는 어숭이꽃과 도라지꽃 주위를 맴돌고 있고,
개구리는 땅에 기는 메뚜기보다 허공을 나는 나비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잠자리는 고려 동경이나 도자기 장식 문양에 등장한 예가 있으나
다른 그림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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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와 도마뱀

제7폭에는 양귀비·패랭이꽃·달개비·도마뱀·갑충 등이 등장하고 있다.
도마뱀이 고개를 돌려 갑충의 거동을 살피는 모습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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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와 개구리

제8폭에는 개구리·땅강아지·벌·오이·강아지풀 등이 그려져 있다.
개구리가 땅강아지를 잡아먹으려고 살금살금 다가가는 모습이 비장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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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님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님

 2013년 National Geographic Traveler 사진대회 수상작품들
 
 
 
National Geographic은 1888년에 National Geographic Society가 발간하기 시작한 잡지로 매달 36개국어로 800만부가 판매됩니다. 이 잡지는 지구의 구석 구석에 살고 있는 인류의 모습들을 매달 다양한 사진과 글로 담아냅니다. 인류학, 지리, 역사, 그리고 문화까지 아우르며 빠르게 변화되어가는 서구문명속에서도 맥락을 이어가는 선주민족들의 모습들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기도 합니다. 또한 쉽게 볼 수 없는 자연의 모습들을 사진으로 포착하는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National Geographic의 산하 잡지인 National Geographic Traveler은 1984년부터 매년 10차례에 걸쳐서 발간되는데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여행 잡지입니다. 기존의 여행 잡지와는 달리 널리 알려진 여행지뿐들만 아니라 오지까지 골고루 여행자의 시각에서 보는 세상의 일면을 소개합니다. 친자연적인 성향을 띄고 있는 이 잡지는 관광이 아니라 여행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사진을 통해서 여행자의 이야기를 풀어내게 하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미지에 대한 꿈을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National Geographic Traveler는 매년 여름에 그해 최고의 여행 사진을 뽑는데 지난 달에 2013년 올해의 최고 여행 사진들이 발표되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보내온 15,500 사진들 중 7개의 우수상들, 독자선택상, 그리고 1등, 2등, 3등이 선정되었는데 1등상 수상자에게는 1주일간의 갈라파고스섬 탐험 여행이 부상으로 주어졌습니다.
 
 

 
 Merit Winners 우수상 수상작들 
 
 
 
 Lady in Wa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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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gan, Myanmar
 

 

 

 Eastern Screech Ow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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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efenokee Swamp, Georgia, USA


 

 

 Children of Reinde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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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erøya, Norway
 
 
 
 
 Saku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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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iunji-temple, Arakawa, Saitama, Japan

 
 
 
 
 The Tata Honda S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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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Piano Play at Suns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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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nstown, New Zealand
 
 
 
 
 Guanjiang Sh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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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ichung, Taiwan
 
 
 
 
 
 Viewers' Choice Award 독자선택상 
 
 
 The Fisherman at Bira Be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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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ra Beach, Makasar, South Sulawesi, Indonesia


  

 

 

 Third Place 3등 수상작 
 
 
 Say Che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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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ai Mara National Park, Kenya

 

 

 

 

 Second Place 2등 수상작 
 
 
 Thunderstorm at False Ki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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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tah 

 

 

 

 

  2013년 올해의 최고 여행 사진 

 

 First Place 1등 수상작
 
 Brazil Aquathl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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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o Negro, Ponta Negra Beach, Manaus, Amazon, Brazil


[글, 구성: 하얀 불 (白火); 정보 출처, 사진: National Geographic Traveler]


 


이번 답변에서는  달라스 윌라드나 리처드 포스터와 같이 모두에게 너무나 친숙하지만,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그들의 신학적 경향성과 해악성에 대해 몇 말씀드리겠습니다.

 

1. 과연 그들은 진정한 복음주의자들인가?

 

달라스 윌라드와 리처드 포스터를 비롯해서 헨리 나우웬, 필립 얀시, 브루스 윌킨스, 유진 피터슨, 릭 워렌,

 데이빗 제레마여, 브라이언 매클러렌...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이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복음주의의 아이콘이라는 것과 이들의 이름으로 출간된 책은 여지없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의 관심사가 매우 유사하다는 것과,

 마치 한 사람의 생각인양 내용적으로 강한 결속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또 한 가지가 더 있군요.

교파, 교단, 신학, 심지어 목회자, 일반성도를 구별하지 않고 엄청나게 인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인들로부터 개신교 성도들에게까지, 장로교회에서 오순절교회에까지,

복음주의에서 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이들의 활동과 영향은 전방위적이며,

 이들의 책을 접하는 모든 사람들의 신학적, 교파적, 교리적 차이를 단번에 무장해제 시키는

참으로 놀랍고도 대단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의든, 타의든 누구에게나 복음주의자 혹은 영성주의자라고 불립니다.

 복음과 영성의 조화... 말로만 들어도 뭔가 완벽한 조합처럼 느껴지는 표현입니다.

이들의 책을 접한 사람들은 저마다 이들로 인해 복음없는 영성과 영성없는 복음으로 편향되었던

기존 신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았다고 말합니다.

한국 대형 기독교 서점들의 치열한 보급 정신과 대형 교회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적극적인 추천과

 보다 새로운 복음에 목말라하는 성도들의 강렬한 욕구가 맞아 떨어져,

 이들의 책들은 어느새 복음주의의 신학의 준거점이 되었고,

수준있는 신앙생활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가 되었습니다.

듣기에는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이라고 하는 신학교에서도 교과서로 채택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한국 교회에 소개된 시점이 불과 수년 전의 일임을 감안한다면, 가히 폭발적인관심과 결과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덕분에 님처럼 저도 한때 이들의 책이라면 아무 의심없이 탐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일이 무의미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책을 통해서, 그동안 한국 교회의 강단에서 접할 수 없었던 어떤 고상함과 심오함과 명료함과 건전함이

두루 갖추어진, 마치 명품으로 영혼을 치장하는 듯 한 부티끄한 느낌이 싫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느낌은 그야말로 느낌뿐이었지, 결코 복음의 진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고상하듯 하지만 음험한 속임이었던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의 신학은 ‘참된 복음주의를 말살(훼파)하는 명목뿐인 복음주의’에 불과하였습니다.

결코 그들은 진정한 복음을 증거하는 복음주의자들이 아닙니다.

 

2. 왜 우리는 그들을 복음주의자라고 부를 수 없는가?

 

문제는 그들의 사고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의 신학 때문입니다.

님께서 말씀하신 윌라드 달라스나 리처드 포스터만 봐도 그렇습니다.

이들은 이 시대의 가장 탁월한 복음주의 영성신학자라고 평가받는데,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들의 관심은 복음을 영성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말하는 영성의 뿌리가 전혀 복음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전형적인 퀘이커 교도의 후예로, 퀘이커적 영성 운동을 주도하는

 ‘레노바레’(The Renovare, 일명 ‘친구들’(Friends))라는 단체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윌라드 달라스는 이 단체의 설립부터 정신적인 멘토로서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추구하는 영성은 퀘이커교의 창시자인 조지 폭스(George Fox, 1624-91)에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지 폭스에 의해 조직된 퀘이커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형식적과 무교회적 관념 가운데

하나님과 직접적인 내적 교제(경험, 만남, 합일)가 가능하다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퀘이커 교도들은 기존 교회의 형식적 기재들을 반대하면서,

성도 개인의 묵상과 명상가운데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신앙을 고집하였습니다.

 물론 이들 역시 개신교파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고,

만인제상장설과 같은 종교개혁 사상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개인적인 하나님 체험을 명분으로

 종교개혁의 가장 좋은 선물(예를 들어, 신학, 교리, 예배 모범, 교회 정치 등등..)들을 포기하였습니다.

 퀘이커 교도들에 있어서 성경은 객관적인 (계시)진리의 기준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신앙적 감상과 각성을 위한 전형적인 도구에 불과합니다.

성경 해석의 주관화와 신령주의화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리처드 포스터와 달라스 윌라드는 조지 폭스의 퀘이커교적 신앙을 좀 더 세련되고 현대화된 정서에 맞도록 재해석하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 또는 Centering Prayer, Breath prayer)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L 목사와 K목사등을 통해

한국 교회에 급속도로 붐을 일으키고 있지만,

사실 관상기도는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타종교에서는 오래전부터 행하던 기도 방식이었습니다.

적어도 조지 폭스는 성경의 범주 안에서 하나님과의 실제적 경험을 꿈꿨지만,

리처드 포스터와 달라스 윌라드는 성경 밖으로의 영역으로까지 외연을 확장하였습니다.

이들은 칼 융과 같은 사람의 심리학적 방법론을 기초로 성경을 통하지 않고도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길을 터놓았습니다.

 다시 말해, 보편구원론적 개념에서 신을 찾고자 하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하나님과의 내통하는 방법을

 ‘기독교적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풀이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최근 한국 교회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미국의 대형교회들(윌로우 크릭 커뮤니티교회, 새들백 교회등)이 이들의 ‘영성’운동을 포스트 대안으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참조, http://www.lighthousetrailsresearch.com/willowcreek.htm).

얼마 전에 윌로우 크릭의 빌 하이블 목사의 참회 소식이 한국 교회에 큰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참조, 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406).

그러나 빌 하이블 목사의 참회는 ‘방법론적인 목회’에서 ‘보편구원론적 영성 목회’로의 전환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새들백의 릭 워렌 목사도 전적으로 동감으로 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 이들 교회는 교회의 체질을 관상기도 중심의 영성운동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윌로우 크릭 교회의 경우,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회 콘퍼런스의 주제가 최근 몇 년동안 거의 이 부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목회 비젼을 이루기 위해 이들 교회들은 성도들에게 공개적으로 관상기도와 관련된 서적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달라스 윌라드와 리처드 포스터의 서적도 예외 없이 끼어 있습니다.

 

이왕 여기까지 설명하였으니,

독자들이 잘 알만한 두 사람만 더 언급하겠습니다.

달라스 윌라드와 리처드 포스터가 직접적으로 영적 스승으로 생각하는 인물이, 바로 헨리 나우웬입니다.

 어쩌면 한국 교회에 ‘복음주의 영성주의’ 바람을 일으킨 최초의, 최고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는 책만 수십 권에 달할 만큼 헨리 나우웬의 명성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헨리 나우웬은 절대로 복음주의자가 아닙니다.

그의 책을 조금만 신중하게 읽어 본 사람이라면 몇 문장에 대해서는 고개를 그떡이다가도

전체 문맥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가장 성경적인 사상을

가장 비성경적으로 가장 자연스럽게 풀어내는데 있어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굳이 그가 가톨릭 사제였고, 종교다원주의자였으며,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을 모르더라도,

 우리는 그의 책 속에 숨겨진 그의 비신앙적 본성을 발견하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헨리 나우웬이 스스로 자신의 영적 아버지라고 존경해마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토마스 멀튼(Thomas Merton)입니다.

그는 가톨릭 수사로 20세기 관상기도 운동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영성’이라는 촉매를 통해 복음을 초월한 모든 종교와의 영성과 만날 수 있음을 몸으로 보여 준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 수도원에서 살면서 기독교의 영성과 모든 종교의 영성과의 조화와 일치를 추구하였습니다.

그런 공로로 달라이 라마를 비롯하여 수많은 세계 종교 지도자들이

그의 무덤을 찾아와 멀튼의 방식대로 미사 참배에 자연스럽게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우웬과 윌라드와 포스터의 저서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인물이 멀튼입니다.

그중에서도 포스터의 경우, 그의 모든 책에는 반드시 멀튼의 어록을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풀어내는 방식과 표현을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같은 생각의 소유자들입니다.

 

이들은 복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좋아하지만,

오직 성경, 믿음, 오직 은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의 복음은 혐오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헌신을 부르짖지만, 그리스도의 공의와 심판에 대해서는 침묵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윤리와 도덕을 강조하지만,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집중된 삶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상호 소통을 위한 인격적 영성을 언급하지만,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내적 자아를 찾아가는 침묵과 묵상에 대해서는 열려있지만,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미 죽어 있는 자아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불확실한 종교적 신비를 종교적 확신의 계기로 삼지만,

유일무이한 하나님 말씀으로 인한 계시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종교적 편견으로 몰아붙입니다.

 성경의 일부(구절)를 인용하거나 강조한다고해서 복음이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 말씀만을 가리키며, 그 말씀의 전체를 가리키며, 그 전체를 가감없이 정직하게 증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이 증거하는 내용을 복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과연 이들을 진정한 복음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어느 시대보다도 진리 안에서 명확한 지혜와 사려 깊은 분별이 요청되는 때입니다.

두 가지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지혜와 분별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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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 받은 사역자의 의무(존 오웬)

 

어떤 교회가 복음의 순결을 지킬지 아니면 배도할지는 그 교회의 목사, 지도자, 교사 및 설교자들에게 많이 달려 있다. 마치 구약시대 때 교회의 순결 여부가 제사장들의 신실성에 달려 있었듯이 말이다(말 2:1-9 참조).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사역자가 거룩하고 겸손한 삶을 살면 열심을 다해 일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교회 안으로 인도되어 복음적인 순종을 해나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가르침, 정신, 모범, 삶, 기도, 설교 및 노고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교회는 더욱 더 창대해졌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설교하는 복음의 능력과 진리가 참되다는 사실도 뒷받침되고 증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뒤에 오는 세대들이 영적 퇴보를 거듭하게 됨에 따라 기독교의 주류는 타락한 교사들, 즉 불화, 분열, 야망 및 세상적 마음이라는 슬픈 본을 보여준 교사들에 의해 오염되었다.

구약시대 때는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두 가지 종류의 배도를 하게 했다.

첫째,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미신과 우상숭배로 인도했다(렘 23:9-15 참조). 이 배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거기서 그들은 자기들이 섬기던 모든 우상들을 시날 땅에 묻게 된다(슥 5:11 참조).

둘째,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후 그들은 자신들의 무지, 나태, 및 나쁜 본보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거룩한 것들을 경멸하게 만든다. 이것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말라기 시대 때 시작되어서 마침내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교회와 나라가 다 망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 의해 거절당하셨을 때 백성으로 하여금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소리치게 만든 것은 바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교회 내에서의 첫 번째 배도도 미신과 우상숭배에 의한 것이었다. 이 미신과 우상숭배가 성행하자 결국 모든 사람들의 생활은 점점 더 사악해졌다.

그런가하면 미신과 우상숭배를 피할 수 있었던 많은 교회들은 또 세상적이요 감각적이며 이교적인 행위들로 빠져 들어갔다. 왜냐하면 그 교회들 내에서 행해지는 사역이 세상적이요 감각적이며 이교적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볼 때 임명받은 사역자가 교회를 순수하게 지키고 교회가 배도의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 수 있다.

 

교회의 순결과 복지는 그 교회 사역자들의 순결과 신실성에 달려있다(엡 4:11-15).

교회는 그 교회의 임명받은 사역자가 흥하느냐 망하느냐에 따라 흥하고 망하는 것이다. 만약 사역자들이 나태하고 부패되어 있다면 교인들 역시 복음으로부터 떨어져 나갈 것이다. 목자가 게으른데 양떼들이 안전하게 보존 될리 없다. 만약 목자가 교회를 끊임없이 돌보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잡초와 가시덤불들로 무성하게 될 것이다.

사역자의 중요한 의무 몇 가지

임명된 사역자는 복음의 가르침, 특히 거룩에 관한 가르침을 순결하게 지킬 의무가 있다.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한다.”(말 2:7; 엡 4:11-15 참조) 이것은 바울이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부탁한 가장 중요한 의무였다(행 20:28-30 참조). 바울은 또 디모데에게도 복음의 순전을 지키라고 당부했다(딤전 6:13,14,20; 딤후 2:14,15 참조). 그리고 이 복음의 가르침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충성된 자들에게 맡겨져야 한다고 했다(딤후 2:1,2).

성경, 신자들의 마음, 안수 받은 사역자, 이 셋이 함께 있어야 그 안에 거룩한 진리가 담길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지옥과 세상의 모든 반대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안전하게 지켜진다.

신자들 마음에 있는 거룩한 진리는 그리스도의 영과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켜진다(요 14:16,17,26, 16:13; 요일 2:20,21; 요 6:45; 히 8:10,11 참조). 신자들의 마음에 진리를 보존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배도하던 시대에도 성령께서는 이 일을 하셨다. 마치 이스라엘이 배도하던 시절에도 성령께서 이 일을 하셨던 것처럼 말이다. 그때는 엘리야 혼자 참 종교를 위해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자 7,000명을 남겨 두셨다.(왕상 19:18 참조)

거룩한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모든 일이 임명받은 목사에게 맡겨졌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 교회는, 거룩한 진리는 전통이라는 수도원의 밀실에 보존되거나 그 순전함을 지키려는 어떤 보살핌이나 지혜 또는 정직함도 요구하지 않고, 단지 그 진리를 열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열쇠만 가지고 있으면 되는 그런 비가시적이며 환상적인 보고(寶庫)에 보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런 생각 때문에 진리와 거룩이 이 세상으로부터 추방된 것이다.

 

복음적 거룩은 복음의 진리라는 뿌리 위에서만 자랄 수 있다. 만약 그 뿌리가 부패하면 그 열매 역시 부패할 것이다. 복음의 경건은 복음의 가르침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의 가르침이이 없거나 부패하거나 혹은 경시되는 곳에서는 경건의 능력을 유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한편 사람들이 일단 거룩에 대해 싫증을 내기 시작하면 그들은 성실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갈구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오늘날 복음의 모든 가르침이 반대에 직면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사람들이 거룩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모든 뜻을 가르치는 것이다. 무엇이 유용하고 유익한지 그리고 자기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의 현재의 영적 상태에 비추어 볼 때 어떤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을 볼 줄 모르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가 될 자격이 없다.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파하는 것이 임명받은 목회자가 해야 할 의무이다(행 20:27 참조).

그들은 보살핌과 근면함과 충성됨을 가지고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파해야 한다(딤후 4:1,2 참조). 디모데에게 한 바울의 이 말은 자기 의무를 충성되이 수행하고자 하는 모든 목회자들에게도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서 세우고 보존해 주는 일을 하는 데에 지금이라고 해서 사도시대보다 노력을 덜 기울여서야 되겠는가?

목회자들은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파해야 한다(행 6:4; 딤전 5:17; 고전 16:16: 살전 5:12 참조).

그들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해야 한다(행 6:4). 기도의 뒷받침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면 그 위에 어떤 축복도 임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기도에 있어서 초특급 모본을 보여 준 사람이다(롬 1:9,10 참조). 만약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엡 6:18,19참조). 전파한 말씀이 열매를 맺도록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은 채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는 마음속에 무신론주의를 은밀히 품고 있는 자일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 거룩을 만들어 내려는 노력도 별로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목사의 의무는, 사역과 삶을 통해 자기가 설교하는 그 크고 거룩한 가르침의 능력과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임명된 목회자들은 삶을 통해 온유와 겸손,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들은 중용 및 자기부인 그리고 언제든지 십자가를 짊어질 자세 등에 있어서 본을 보여야 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 자신의 부패한 소욕들을 극복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다.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자는 세상을 경멸하고 그 마음을 하늘나라에 두며 누구에게나 오래 참고 친절함으로써 복음의 사역자다운 표징을 나타내야 한다.

만약 사역자들의 삶 속에서 어떤 악덕이나 부패상이 드러날 경우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그 사역자 안에 아직도 거하고 있는 타락한 옛 본성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 대신 복음을 비난할 것이다. 따라서 사역자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선행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딛 2:7참조). 그들은 자신들을 따르는 모든 자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살후 3:9; 딤전 4:12참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역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영예의 표지이다.

임명받은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의 순결과 거룩 및 순종을 보존하기 위해 지정해 주신 거룩한 훈련 및 규율을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 복음의 가르침 그리고 복음의 비밀을 타락하지 않도록 순전하게 지키는 데 있어서도 신실하지 못하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가지고 있는 그 비밀들을 조사해 볼 의욕도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성경을 충성되이 연구하는 노고를 경멸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무지하게 되고 이 지식의 결여로 말미암아 패망해 간다. 그들은 물론 그들 죄로 죽어야 하고 또 죽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피 값을 이런 충성되지 못한 사역자들에게서 찾으실 것이다(겔 3:16-21참조).

 

로마 가톨릭 교회에 있는 신부들의 대다수가 얼마나 무지한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무지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것을 전해 문제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일이라는 것이 사람들을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무지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방 정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 그것들을 신봉하는 많은 나라들이 스스로 기독교인들이라 자처는 하고 있지만 실상은 무식하여 어리석기 짝이 없고, 타락할 대로 타락하여 거룩한 일들을 우습게 여기고 경멸할 뿐 아니라, 혐오스러울 만큼 부도덕한 일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실정이라 그 도가 지나쳐 이방인들보다 더 심할 정도이다.

만약 복음을 전파하는 것만이 인간의 본성을 중생시켜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지정하신 유일하고 효과적인 방편이라면(이것을 부인한다는 것은 곧 기독교 자체를 부인하는 것임). 그 두 종료를 믿는 나라 사람들을 가르칠 유능한 목회자가 없는 한 그것들이 세상에서 기독교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회복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는 것은 헛된 일일 것이다.

충성되지 못한 타락한 사역자, 가령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런 사역자를 통해 그동안 복음의 진리는 그 품위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타락하여 부패했다. 우리 시대만 해도 부패되지 않은, 아주 복음적인 순종을 증진시킬 만한 가르침이 하나도 없다. 진리가 순전히 지켜지려면 하나님에 대한 기도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만 사역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부패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많은 사역자들이 자기들이 하는 일에 대해 게으르고 냉담하며 무관심하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심과 인간 영혼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부지런히 자기 사역을 수행하는 자는 아주 드물다.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들이 하는 매일의 일과-가령 말씀과 복음의 가르침에 대한 연구는 손톱만큼도 하지 않으면서 성무일도(聖務日禱) 시간에 성무일과를 말해 주고 고해성사를 듣고 죄를 사해 주는 것 등-가 곧 하나님께서 기독교의 능력과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위해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방편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들이 하는 일이란 고작해야 인류를 죄와 무사안일 속에 효과적으로 가두어 놓는 것뿐이다. 그리고 인간은 또 그것을 좋아한다.

많은 사역자들이 아주 공공연하게 야망적이며, 한없이 탐욕스럽고 교만하며 감각적일 뿐 아니라 최악의 인간(부패한 마음이 고질화된 사람)을 사랑하고 동정하는 선한 자들까지 증오한다.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사도들이나 복음을 처음에 전파했던 사람들과 견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시여, 다시 한 번 더 “하나님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저희에게 주시어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저희를 양육하게”(렘 3:15참조) 하소서.

능력 있는 복음의 사역이 회복될 때에야 비로소 교회는 현재의 배도 상태로부터 영광스러운 상태로 변화되어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들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오해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심으로
나를 더욱 더 주님의 형상과 닮게 하시기 위해,
나의 모난 부분들을 깎으실 때
하나님은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시지만,
나는 그것을 ‘고난’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심으로
나를 아버지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
낮은 마음과 넓은 마음을 갖게 하시려고
좁은 길로 인도하시는 것
하나님은 그것을 ‘은혜’라 부르시지만,
나는 그것을 ‘연단’이라 부릅니다.

사탄이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질투하여
나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기 위하여
나에게 물질의 부함과 세상의 즐거움을
풍족히 불어 넣어 주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시험’이라 부르시지만,
나는 그것을 ‘축복’이라 부릅니다.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시선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바라보기에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오해하고
잘못 받아들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하나님의 기준으로,

아버지의 계획하심과 뜻하심을
깨달을 수 있도록
주님에게 아버지의 지혜를 구하고,
나의 아둔하고 어두워진 눈을 밝혀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간혹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마음이 무너질때도 있겠지만
그분은 이해 할 대상이 아니라
믿어야 할 대상이기에
늘 하나님과의 시선 맞추기를
게을리하지 않기를...


좋은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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