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마음(The Heart of Jesus)


예수님은 연약한 어린아이이시고, 겸손한 설교자이시며,
업신여김을 받은 사람이시고, 거절당한 사람이시며,
그리고 십자가에 처형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이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기 전에 계신 분입니다...
모든 것은 그분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15,17)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조롱당하신 왕이시며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의 권자에서 통치하십니다
예수님은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주님이시고,
알파요 오메가이시며, 처음이고 끝이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는 저주를 받았으나 하나님으로부터는
축복을 받으셨습니다. 항상 예수님을 쳐다 보십시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처형받은,
그리고 영광스럽게 된 가슴 안에서
그분의 고통과 영광을 함께 나누어 가지도록
부름을 받은 우리 자신을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열왕기상 8장 시작부분을 보면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완성하고 언약궤를 모셔올 때 여호와 앞에 소와 양으로 드린 제사가 너무 많아 헤아릴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었다고 되어 있는데, 8장 끝부분을 보면 하나님께 화목제를 드릴 때는 소가 이만 이천이요 양이 십이 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두 차례의 제사에 드려진 소와 양의 수가 모두 얼마나 되는지 짐작조차 어렵습니다.  

번제는 전부를 태워드리지만 화목제는 기름을 태우고 나머지는 드린 자와 제사장이 함께 나누어먹습니다. 칠일, 칠일, 모두 십사일 동안 절기로 지켰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전낙성식을 하고 십사일 동안 실로 어마어마한 수의 짐승이 제사로 드려지고 이스라엘 백성 전부가 화목제물을 나누어 먹으며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한 것입니다. 대한민국 서울에서 올림픽을 하던 1988년에 故정주영씨가 북한에 끌고 들어간 소가 1,001 마리라고 하는데, 백성들이 드린 이만 이천 마리의 소와 십이만 마리의 양을 오늘날 식량부족으로 허덕이는 북한사람들이 본다면 아마 눈이 뒤집혀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9장에 들어가면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 나타나셨던 것처럼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걸으며=walk) 내가 네게 명한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나라가 영원하고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을 지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내 앞에서 행하며”의 원래 뜻이 “내 앞에서 걸으며”라는 점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말 성경은 ‘행위(doing)’나 ‘걷는 것(walking)'을 모두 “행(行)”으로 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선한 행위를 요구하신다고 오해하기 쉬운데 그게 아닙니다. 창세기 17장 1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에서도 ‘행’은 doing(행함)이 아니라 walking(걸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힘 드는 노동과 수고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걷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솔로몬에게 “만일 노와 네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고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숭배하면 끊어버릴 것이요, 이 전이라도 던져버릴 것이라.”고 엄히 경계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솔로몬과 그 후대는 ‘하나님 앞에서 걷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떠나 옆길로 빠져 행하였고 우상을 섬겼고 하나님을 불순종하여 그 노를 격발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나라는 쪼개어지고 결국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화려하게 건축하고 법궤를 모셔 들인다고 다 끝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하나님 앞에서 걷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우상을 섬기며 악을 행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악행을 하면서 성전에 와서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에 속지 말라.”고 절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벗어나 옆길로 빠지고 어둠 속을 걸으며 더럽고 악한 일을 행하고 우상을 좇다가 여호와의 전에 와서 뻔뻔스럽게 제사를 드린다면, 더러운 헌금을 드리며 이걸 받으시라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조폭두목, 우상두목으로 만드는 것이고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제사를 받으실 리 없고 그러한 성전에 계실 리 없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성전을 허물고 예루살렘을 폐허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한 번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다 끝나는 게 아닐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만을 섬기며 주님의 계명을 사랑하며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빛 가운데 걸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 때의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 다른 것을 섬기며 악한 행실로 산다면 주님은 슬퍼하며 우리를 떠나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7절은 우리 몸이 성전인 것과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며 만일 우리가 거룩하게 살지 못 하고 성전을 더럽히면 멸하실 것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 부름 받은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항상 빛 가운데로, 하나님 앞에서 걸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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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명   서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세이연)

제 목 : 십계 석국(구 엘리야복음선교원, 한농복구회, 돌나라 유기농)의 박명호(본명 박광규)에 대한 이단성과 피해 대책을 위한 세이연의 성명서

최근에 박명호(본명: 박광규)씨의 이단적 행위로 말미암아 한국사회에서 많은 피해자들을 양산하였고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을 뿐 아니라 미국, 캐나다, 브라질 등 여러 나라에 신문이나 광고를 통하여 마치 건전한 종교인양 선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본 세이연에서는 이에 대한 대처를 위하여 아래와 같이 성명서를 발표하기로 하였다.

1. 박명호 씨는 한국 여러 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안식교 출신으로서 자신을 엘리야의 사명을 받은 자라고 선전하다가 마지막 시대의 엘리야라고 선전하면서 엘리야복음선교원이라는 이단단체를 만들고 집단생활을 하며 많은 성도들을 미혹한 자이다.

2. 박명호 씨는 자신을 동방의 의인, 동방의 독수리, 어린양, 마지막 아드님, 우주의 심판장, 인류의 죄를 지신 구세주, 보혜사 성령, 마지막에는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이단이다. 사람인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자기를 신격화한 이단자이다.

3. 박명호 씨는 자신을 구속주 또는 심판주라고 주장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천사중 하나인 미가엘이라고 주장하였고 “미완성 승리자 예수님”이라는 제목아래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실패로 만들어 버린 자이다. 이는 한국의 이단자였던 박태선이나 문선명이 주장한 이단적 사상이다.

4. 박명호 씨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죄인들이 구세주인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서게 하는 것으로서 “구세주인 자기가 색욕의 함정에 들어가서 죄인이 되심으로 구원하신다는 창기 십자가의 사상”을 전하는 자로서 수많은 여성들을 성폭행한 사실을 정당화한 자이다.

5. 박명호 씨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자신을 신격화하고 자신의 더러운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짜깁기하고 임의로 자의적 해석을 할 뿐 아니라 왜곡되게 편집한 자이다.

6. 한국의 공영방송(SBS 그것이 알고 싶다 2012.12.8)에서 창기 십자가로 수많은 여성들을 유린한 내용이 방송되어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고 기독교의 명예를 실추케 한 장본인이다.

따라서 십계 석국(박명호/구 엘리야복음선교원, 한농복구회, 돌나라 유기농)의 정체를 알고 그들의 위장한 모습에 더 이상 미혹되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다.

2013. 3. 14

세이연  
대표회장 :  박형택 목사(한국), 김순관 목사(미국)
공동대표 :  진용식 목사(한국), 나성균 목사(미국)

ⓒ 아멘넷 뉴스(USAamen.net) 1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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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경험 (An Expierece Offered to All)

    어떤 사람들은 "나는 때가 찼다는 경험을 해본 일이 없어... 나는 그저 보통 사람이야 신비주의자가 아니야" 라고 말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하여 독특한 경험을 했으며 따라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선포해야 할 독특한 사명을 가지고 있지만, 배운 사람이든
    또는 배우지 못한 사람이든, 부자이든 또는 가난한 사람이든, 돋보이는 사람이든 또는 돋보이지 않는 사람이든, 우리 모두는 때가 되면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다

    이 신비한 경험이 소수의 예외적인 사람들만을 위하여 예비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선물을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모든 자녀에게 주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원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내면적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예정된 때의 경험이 극적인 방법으로 오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예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강렬한 빛 속에서 주님을 체험했습니다. (사도행전 9:3~4 참조)>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속삭임처럼 미세한 음성 또는 등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미풍과 같이 오기도 합니다(열왕기상 19:13 참조)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알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사두개인들이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로 와서, "세상에서 일곱 남편들을 소유했던 그 여자가 부활 때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므로 오해하고 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2:23-31)

     

    만일 우리가 주님의 교회에 퍼져 온 모든 오류들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아본다면, 그 오류들은 대부분이 동일한 기초로부터,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로부터 흘러나온 것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셨지만, 사람으로서 오신 그 분은 성경기록들을 자신의 변함없는 규범과 안내로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율법사로부터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질문을 받으셨을 때에도 주님은 그 대답으로서, "너는 무엇을 읽느냐?" 하시면서 자신에 관하여 성경을 언급하셨습니다.(누가복음 10:25-28)

     그리고 성령에 이끌리심을 받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에도, 주님은 "기록되었으되" 라는 말씀으로 마귀의 모든 공격들을 물리치셨습니다.

    이 점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우리의 행동 원칙이 되어야 한다기 보다는 성령만으로 우리의 행동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꾸짖을 수 있는 대응책으로 충분합니다.

     만일 이들의 주장대로 정말 그렇다면, 무한히 성령으로 충만하신 우리의 구주께서는 기록된 말씀을 언급하실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행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적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존중하지 않고, 그 거룩한 말씀을 무시하며 옛사람에게나 해당되는 케케묵은 책으로만 다루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는 이유는 성경의 기록들이 무엇을 말씀하며, 어떠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첫째, 성경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는 일은 모든 사람들의 의무라는 것을 설명하겠습니다. 둘째, 성경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는 일을 할 때 유익을 얻도록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1. 성경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는 일은 믿는 자의 의무입니다.

     

    저는 먼저, 성경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는 일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의무라는 것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제가 성경이라고 할 때 율법서와 선지자들의 글과, 여러 세기 동안 정경(正經)으로 인정받아 온 책들, 그러니까 보통 성경이라 불리는 책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내용들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 여기서는 '진리의 성경기록들'(다니엘 10:21)이라는 말을 강조해서 쓰고 있습니다. 마치 성경을 기초로 보면 다른 책들은 '진리의 기록물, 또는 경전'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전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듯이 말입니다. 성경의 기록들은 개인이 사사로이 해석하거나, 그의 권위나 창작에 의해서 기록된 것들이 아닙니다. 예전에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기록한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나타내시는 계시의 근본적인 목적은, 아담으로 인해 우리가 타락하였으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만일, 우리가 마땅히 할 바대로 성경의 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낸다면 그것들의 총체와 본질이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인 두 가지의 큰 진리를 아는 지식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들 속에 있는 모든 위협의 말씀이나 약속과 교훈의 말씀, 모든 권면과 교리들, 모든 의식과 유대 율법의 경륜 아래서 지정된 예식들과 제사법, 성경의 역사적인 부분 모두가 아담 안에서 우리가 타락했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오실 중보자를 바라보도록 지시하며 이미 육신으로 오신 그 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죄 없는 상태에 계속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이처럼 외적인 계시를 주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이 사람의 마음판에 깊이 새겨져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금지된 열매(창세기 2:15-17)를 먹음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고,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외적으로 드러나는 계시가 없으면 사람은 하나님과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타락한 본성의 비참과 흑암에서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외적인 계시가 없었다면 말입니다.

     

    자, 이것이 진리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다른 책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보면 됩니다. 만일 우리가 타락한 피조물들이 아니라면, 날마다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그 가증한 부패함들(마가복음 7:21-22)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실 때는 부패한 존재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선하심 그 자체이시므로 그 분 자신처럼 거룩하고 공의로우시며 선한 존재 이외의 그 어떤 것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본성의 혼돈에서 해방되고 싶어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부패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우리의 실제 됨됨이와는 전혀 다른 마음의 성향과 기질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시를 대적하는 사람들의 삶을 보라고 여러분에게 간청하는 바입니다. 그 사람들에게서 본성적으로는 거만하고, 분노에 차 있으며, 복수심에 들끓고, 하나님의 정결하심과 거룩하심과 오래 참으심과는 상반되는 열정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자, 이것이야말로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타락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확실한 증거가 아닙니까?

     

    또한 그런 사람이 자기 마음속에서 그 해로운 경우를 발견함과 동시에 자기를 상냥하고 예의 바르고 그럴 듯한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야말로 그는 자기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 사람은 그 비참으로부터 구원받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단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무한한 선하심을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현대의 자연신론자들처럼 부패하고 패역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라도 성경을 보면서 그 점에 유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속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 인생이여, 어찌하여 너는 눈멀어 흑암과 비참함 속에 떨어져 있는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소원하는 바에 이르는 길, 즉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그를 따라 행함으로 말미암아 그 비참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다시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그 두 가지 진리가 하나님의 모든 계시에 관통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다른 어떤 목적에서가 아니라 오직 우리의 비참과 우리의 행복을 보여 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타락과 회복, 한마디로 말해서 아담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함께 죽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우리가 다시 살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성경의 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들은 우리 구원의 위대한 헌장이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과 맺어진 언약의 계시이며, 평안의 길로 인도하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마땅히 성경을 읽고 탐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연합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 필요를 동등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대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나 하나님의 계시의 진리를 입증하려고 외향적인 증거를 찾으려고 벌이는 논증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들이 그러한 노력을 한다고 할지라도 사실상 그들이 열심히 추구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고, 자기들 속에서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곰곰이 생각하고 상의한다 할지라도 자기들이 원하는 것밖에는 느낄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들을 비교하며 밝혀낸다면, 자기들의 모든 결핍을 해결할 처방이 제시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록된 말씀은 마음의 결핍과 소원을 정확하게 채워 준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치 얼굴을 물에 비추어 보면 그 모습이 그대로 떠오르듯이 말입니다.

     

    서기관이 어디 있으며, 지혜자가 어디 있으며, 이 세대의 견실함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이 바라는 대로 분명하게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말씀을 제쳐 놓고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어떠한 표적도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처럼 분명한 계시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결단코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성경의 기록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계시임을 믿고 아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또한 성경을 단순히 읽는 데에만 관심을 두지 않고 성경의 기록들을 비교하며 깊이 밝혀내는 일을 자기들의 의무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2. 성경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는 일을 할 때 유익한 방법들

     

    저는 여기서 성경의 기록들을 어떤 방식으로 비교하며 밝혀내야 유익한지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해 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기록된 목적을 항상 기억해 두라는 것을 말씀드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는 "성경을 상고하라. 이는 너희가 성경에 영생이 있다고 생각함이니, 그 성경은 나에 관하여 증거하고 있음이라." (요한복음 5: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성경의 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어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십시오

     

    여러분은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찾으려고 항상 애를 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약과 구약 모두에서 밭에 숨겨진 보물이십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여러 예언들과 모형들, 제사들과 그림자들을 통해서 예표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고, 신약 성경에서는 육신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모든 뜻을 계시하시는 선지자로 오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 항상 그리스도를 기억해 두면 동편에 떠 있는 새벽별처럼 여러분을 메시야께로 인도할 것입니다. 말씀은 분명하지 못한 모든 것을 여는 열쇠와 같이 작용할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모든 신비들의 부요함과 지혜를 열어줄 것입니다.

     

    (2) 성경의 기록들은 어린 아이 같은 겸손한 마음으로 비교하며 밝혀내야 합니다.

     

    이러한 겸손함을 가지고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들마다 결단코 성경의 내용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만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깨달음을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마태복음 11:25/누가복음 10:21/누가복음 24:45)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갓난아기와 같은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밝히 보여 주십니다. 자기들은 마땅히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순수한 말씀의 젖을 먹고 자라기를 겸손하게 소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히브리서 5:12-14)

     

    그러므로 여러분이 성경의 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낼 때, 특별히 신약 성경을 읽을 때에는 거룩하신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서 말씀을 듣던 마리아와 같은 자세를 취하도록 애를 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든지 사무엘처럼 기꺼이 들으려는 자세를 가지십시오. 사무엘은 "주여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나이다." (사무엘상 3:9)라고 말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모든 사상과 상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거역하고 싶어합니다. 오, 갓난아기들처럼, 그들이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그들이 더 이상 조롱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성경을 읽을 때에 필리스티아인들이 삼손을 끌어다가 우스갯거리로 만든 것과 같이 농담처럼 읽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모든 말씀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혼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자신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두려움 속에서 자라갈 것입니다.

     

    (3) 성경의 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되, 읽는 말씀을 실행하고자 하는 믿음으로 하십시오.

     

    성경의 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오직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만일 누구든지 그 분의 뜻을 행하려고 한다면, 그 교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내가 내 자신에 관하여 말하는 것인지 알게 되리라" (요한복음 7:17).

     

    또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천국의 신비들이 너희에게는 알도록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니라.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받게 되어 더 풍성히 가질 것이나, 누구든지 갖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노니, 이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또 깨닫지도 못함이라." (마태복음 13:11-13).

     

    하나님께서 강력한 미혹을 보내시어 저희로 거짓을 믿게 하시고, 하나님을 찾을 의향이 조금도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감추어 놓으신 것은 정당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와 같이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그 분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믿고, 따라 살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것처럼 그 분 자신을 분명하게 나타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그니라"(요한복음 4:26)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눈먼 소경에게 말씀하셨는데, 사실 그 눈먼 사람은 예수님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쫓겨남을 당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에게도 "너와 말하고 있는 이가 그니라"(요한복음 9: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주님을 알고 그 계명을 지키고 싶은 소원은 전혀 없으며, 또 주님의 성령 속에서 계시된 말씀의 단순함을 비웃는 자들'에게는 결단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성경을 연구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이 메시아인지 아닌지 결코 말씀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호기심에서 의문을 제기하거나 예수님을 트집잡기 위한 목적으로 질문하는 사람들에게도 결코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4) 읽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십시오.

     

    성경기록들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비교하며 밝혀내기 위해서 여러분이 읽는 모든 것들을 여러분의 마음에 적용시키십시오. '하나님의 책'에 기록된 모든 말씀들은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으로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기록들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기록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타락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떻게 회복되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지 않습니까? 모든 교훈과 위협적인 말씀, 약속의 말씀은 그 말씀들을 직접 받았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말을 할 때에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갈라디아서 2:20) 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속에 모셔 들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이 우리 각자에게 효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나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교리들과 역사적인 사실들은 자신에게 적용해야만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책망하고, 바로잡아 주고, 의로 훈육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고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디모데후서 3:16-17).

     

    성경을 읽는 모든 영적인 독자들의 체험에 비추어, 감히 저는 호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비교하며 밝혀내고 적용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명백하게 알 수 있지 않았습니까? 구약 시대에는 우림과 툼밈1)이 대제사장의 흉배 안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성경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에게 계시하시는 방법입니다. 새로운 계시를 주시지 않고, 이미 주어진 말씀을 모든 신실한 독자의 마음에 깨닫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그 분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렇게 하면 더불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행동을 위한 완벽한 원리는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일 때 그 길을 정확하게 지도해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말씀이 아닌 성령의 지시가 오직 유일한 법칙이어야 한다."

     

    그러나 저는 그 주장을 부인합니다. 오히려 저는 이렇게 확언합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거룩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의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우리가 원하는 특별한 도움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점은 저로 하여금 다음의 요점에 이르게 합니다.

     

    (5) 성경이 쓰여지도록 간구하신 성령을 구하십시오.

     

    성경기록들을 유익하게 비교하며 밝혀내는 또 다른 방안은 성경이 쓰여지도록 간구하셨던 성령을 부지런히 구하는 것입니다. 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의 말씀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들은 영이시며 생명이기 때문에 자연인은 그 말씀의 참된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보며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원리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성경의 말씀들이 이스라엘을 앞서 인도했던 구름 기둥에 비유된다고 말하는데 사실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마치 구름 기둥이 이집트 사람들 앞에서는 어둠처럼 보였듯이 자연인에게 성경의 기록들은 깜깜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빛과 생명입니다. 파라오와 그 집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어둠처럼 보였던 구름 기둥이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에는 밝음과 영광스러움으로 나타났던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요, 유대인의 관원이었던 니코데모가 거듭남의 교리에 대해서 그처럼 무지했던 것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니코데모가 아직 자연인이었기 때문에 거듭남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 구주의 제자들이 주님과 그처럼 자주 교제를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이 말씀하신 가르침들의 본질에 대해서 날마다 오해를 했던 것도 성령께서 아직 그들에게 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자연인의 휘장'이 그들의 마음에서 걷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성경 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는 체하는 사람들이 그처럼 많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문자적 의미 외에는 알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여러 비유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이방인인 채로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책'의 거의 모든 교훈에 포함된 영적인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인 방식 외에는 사람들의 마음과 교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께 대하여 이방인이라면 그 분의 말씀에 대해서도 계속 이방인으로 남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그 분 자신과 같이 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복되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지혜의 문이 결코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야말로 성령의 감동을 받는 가장 즉각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다음 요점으로 나아가 봅시다.

     

    (6) 성경기록들을 읽기 전에 먼저 기도하십시오.

     

    저는 여러분에게 충고하고 싶습니다. 성경기록들을 읽기 전에 먼저 기도하십시오. 그리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약속을 따라서 여러분을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는 성령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요한복음 16:13) 여러분은 성경을 읽으면서 간간히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가능하다면 모든 구절을 읽을 때마다 기도하십시오. 성경책을 덮은 후에는 읽은 말씀이 여러분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여러분 속에서 선한 열매를 맺도록 간절히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자, 이렇게 하면 거룩한 공격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에 임할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은혜로운 감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고, 여러분의 마음이 빛을 받아 깨어날 것이며, 여러분의 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타오르게 하는 성령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성경기록들을 읽을 것뿐만 아니라 읽은 것을 표시하고, 배운 것들이 내적으로 소화하게 될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의 혼을 위한 양식과 생수가 되어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마치 아폴로처럼 성경기록들 안에서 능력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기꺼이 배울 의향을 가진 서기관처럼 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쌓인 선한 보화들이 나오게 하십시오. 구약과 신약성경의 말씀들 속에서 배운 것들이 여러분의 행실 속에 더 나타나도록 하십시오.

     

    (7) 성경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되 끊임없이 집요하게 하십시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경기록들을 끊임없이 읽으십시오. 본문 속에 있는 우리 주님의 표현대로, "성경을 상고하십시오"(요5:39).

    감추인 보화를 파내듯이 성경기록들을 파고드십시오. 감추인 보화를 찾는 사람의 모습이 성경에 비유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것을 통해 우리가 깨닫기를 바라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말씀을 통해 지혜를 얻고 성장하려면 금과 은을 캐내는 사람들처럼 구주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읽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기록들 속에 은밀할 것들을 숨겨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주의하고, 겉치레적이고, 몹시 서두르는 방법으로는 절대로 충분하게 파헤쳐질 수 없습니다. 다만, 부지런하고 면밀하고 겸손한 자세로 읽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의인의 특징으로 "주의 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시편 1:2)"를 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주야로 그 안에 있는 것을 묵상하라... 그리하면 네가 너의 길을 번영하게 만들 것이고 네가 좋은 성공을 이루리라.(여호수아 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기록들을 경건하게 뿐만 아니라 날마다 비교하며 밝혀내십시오. 성경기록들 속에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복음 5:39) 지혜의 문에서 끊임없이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그때까지가 아니라, 그때서야 그 지혜의 문이 여러분에게 열리며 하늘 보화들을 보여줄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자라 하더라도 그 하늘 보화를 갖지 못한 것에 대한 핑계를 대어서는 안됩니다. 가난한 자라면 여러분에게 있는 짧은 시간을 주의깊게 활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에 의해서 마지막 날에 용서함을 받기도 하고, 그 말씀들에 의해서 정죄함을 받기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멸시받는 책에 대한 맛을 전혀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아마 연극이나 소설, 또는 재미난 책들이 여러분의 입맛을 더 당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상태라면 여러분이 가진 그 분별력은 손상된 것임을 감히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침받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결코 그 분의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지 못한다면 내세에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쓸모없는 그 책들을 읽는 것이 죄냐고 물으시겠지요? 저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똑같은 이유에서 무익한 대화에 빠지는 것도 죄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성령을 몹시 슬프시게 하고 소멸시키는 일입니다.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속의 날까지 인침을 받았는데도 말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권면해 드린 것들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십시오. 제가 제시해 드린 방안대로 성경기록들을 비교하며 파헤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의 그 책과 동일하신 하나님의 영을 통하여 쓰여진 책들이 아닌 다른 책들을 읽는 것이 죄악이고 위험하며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여러분은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 내가 어린 아이였고, 하나님의 말씀의 탁월함을 몰랐을 때, 나는 세상이 해롭지 않다고 말하며 추천하는 그런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지식이 있다 하던 다른 아이들이 행했고, 지금도 행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일을 내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생명의 선한 말씀을 맛보게 되었으며, 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다 완전한 지식을 아는 데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는 이러한 유치하고 어리석은 것들을 집어던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인도해 주는 이 책만을 읽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성경기록들을 비교하며 밝혀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좋은지를 맛보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결코 하늘의 만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빈 껍데기와 무가치한 빵과 죄악적인 소일거리들을 향해서 나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 속에는 거짓된 입맛을 가진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제 그러한 보잘 것 없는 오락들을 매우 하찮게 여기게 될 것이며, 그러한 것들을 좋아했던 지난 과거를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꿀과 벌집보다 더 달게 느껴질 것이고, 금이나 은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질 것입니다.(시편 19:10)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 여러분의 혼은 골수와 기름진 것으로 배부를 것이며(시편 63:5), 여러분의 마음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복되신 창조주의 영을 따라 형성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인도함을 받을 것이며, 내세에는 그 분의 거룩한 말씀의 빛을 따라서 영광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청교도 개혁주의 도서 보급 선교회/출처: 개혁주의마을/Jennifer



    "남자 며느리 맞이하라고?"
    6개 평신도 지도자들 차별금지법안 관련 긴급성명서 발표
     
    정순주
    한국교회평신도단체협의회(대표회장 조석환 장로),한국장로회총연합회(대표회장 김정남 장로),한국기독교평신도세계협의회(대표회장 심영식 장로) 등 6개 평신도 단체는 12일 11시, 한국기독교평신도세계협의회 사무실에서 긴급대책회를 갖고 현재 성시화운동협과 기공협에서 주관하고 있는 차별금지법 철회 활동에 함께하기 위해 긴급 성명서를 발표했다.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는 차별금지라는 명분을 앞세워 동성애를 허락, “남자 며느리, 여자 사위’를 맞이해 주체사상을 허용함으로써 국가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3개의 차별금지법안이 계류 중에 있다.
     
    제1법안은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 등 10인이 지난 해 11월 16일 발의했다. 법안에는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전과’,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등이 논란이 될 만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또한 제2법안은 지난 2월 12일 민주통합당 김한길 의원 등 51인이 발의했으며,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전과, 성적 지향, 성 정체성 등을 담고 있다.
     
    제3법안은 지난 2월 20일 민주통합당 최원식 의원 등 12인이 발의했고, 동 내용에서는 가장 민감한 ‘사상’과 ‘종교’ 등은 빠져 있으나 결국 정치적 견해, 성적 평등,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전과 등이 포함돼 있다.
     
    이와 관련해 6개 평신도 관련 협회 측은 “이상의 법안 모두 차별금지라는 명분 속에 감춰진 악법 중에도 최대의 악법인데도 불구하고 국회의원 73명이 발의했다는 점”에서 우려를 표했다.
     
    다음은 성명서 전문이다.
     
     첫째 동성애를 허락함으로써 ‘남자 며느리나 여자 사위’를 맞이할 수 있다.
     지난 2007년 법무부가 차별금지법안에 ‘성적 지향’ 즉, 동성애를 포함시키려고 하다가 교계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국회에서 의원입법으로 차별금지법안이 발의된 것으로 확인됨으로써 한국 교회의 대응이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다. 성경에는 간음과 음행과 동성애 등은 사형에 해당한다고 엄히 경계하고 있다.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며…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하느니라”(롬1:26-32)고 말씀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로마는 동성애와 성적타락으로 망했음을 알고 있다.
     
    둘째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주체사상’은 용납할 수 없다.
     주체사상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있다. 사상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종북세력들이 자신들의 합법적인 공간을 마련하려는 저의를 우리는 몸으로 막을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경계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2:8).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시절 철학 이었던 영지주의를 가장 경계했다. 영지주의는 유대철학과 동향철학, 헬라철학이 혼합된 사상이며, 결국 인본주의를 대표하고 있다. 바로 이런 사상과 행위는 지금도 그대로 있어서 공산주의 변종인 사람을 신격화 시키는 주체사상으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셋째 이단․사이비 종교를 합법화하는 종교조항을 두고 있다.
     현재 혹세무민하는 이단 종교들이 난무하고 있다. 최근에도 정체도 드러내지 않은 중국의 ‘전능신교’는 주요일간지 전면광고를 통해 자신들을 선전하는 등 많은 이단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왜곡하고 있다. 심지어 앞으로는 교회 강단에서 특정이단을 경계하라는 설교만 해도 종교차별에 해당되어 민형사상의 책임을 지게 된다. 바로 거짓선지자들을 견제할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당하게 되는 위급한 상황을 맞고 있다.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 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를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2:1). 여기의 이단은 ‘진리와 상관없는 다른 교리’를 전파하는 ‘미혹의 영’(요일4:6)들이며, 이들은 오늘도 그대로 활동하고 있다.
     
     넷째 사상범은 물론 청소년 강간 등 흉악범도 차별 말라는 악법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사상범은 물론 어린 초등학생 등 청소년에게 성폭력을 행하는 흉악범들에게도 차별을 말라는 차별금지법이 되고 있다.  특히 성경에서는 ‘간음’과 ‘음행’은 하나님의 교회를 내부로부터 허물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더욱더 무서운 것은 이것이 기독교 진리를 파괴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자 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폭력의 흉악범에 대하여 엄격하게 격리시킬 것을 바란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엡5:3)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이다.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벧후2:2).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성(性)풍속을 경계하고 있다.
     
     다섯째 망국의 차별금지법을 발의한 국회의원들에게는 주민소환과 낙선운동을 전개할 것이다.
     우리는 이 법안이 얼마나 악법인지는 처벌 조항을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이법을 위반할 경우에 “2년 이하의 징역과 1천만원 이하의 벌금”과 손해배상을 해야 하는 민형사상의 책임을 지게 된다. 우리는 이 법안을 철회하거나 폐기되도록 모든 조치를 다할 것이다. 특히 동 법안에 서명한 국회의원에게 항의 전화는 물론 주민소환과 낙선운동에 주력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연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대한민국이 평안하고 안전한 나라가 되도록 기도하고 행동할 것이다.

    2013. 3. 12
                 
       한국교회평신도단체협의회(대표회장 조석환 장로)
       한국장로회총연합회(대표회장 김정남 장로)
       한국기독교평신도세계협의회(대표회장 심영식 장로)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대표회장 김형원 장로) 
       기독교시민운동중앙협의회(대표회장 문원순 목사)
       한국교회개혁연대(상임회장 양원준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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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복음교회 조용기·조희준 부자 150억원대 배임·탈세
    교회 돈으로 비싸게 사들여 교회에 157억 손실 끼친 혐의
     
    서울의소리 기사입력  2013/03/09 [02:38]

    검찰이 조용기(77·사진)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가 교회에 150억원대의 손실을 끼친 배임 혐의를 밝혀내고, 수십억원이 넘는 탈세 혐의까지도 포착 정밀한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조사부(부장 이헌상)는 지난 1월에 법정 구속된 조 원로목사의 아들인 조희준(48)영산기독문화원 사무국장에 이어 혐의가 드러난 조 목사도 곧 기소할 방침이나 구속으로 이어질지 비상한 이목이 집중된다.
     
    신도 100만명을 자랑하는 동양최대의 교회로 성장한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 일가들은 지난 수십년동안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의 온상지로 각종 의혹을 받아 왔었다. 지난 2003년 <선데이저널>이 조희준의 일본인 처 유리꼬와의 이혼 서류에서 드러난 내용들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2년전 이 문제로 한국 검찰의 수배를 받던 중 일본으로 도피 현지 경찰에 체포되었을 당시도 현지에서 무려 50억원의 벌금을 납부하고 석방되는 등 조 목사 일가의 의혹은 계속되어 왔다.

    이번에 또 다시 도마 위에 오른 조용기 목사 일가를 둘러싼 각종 의혹들을 적나라하게 취재한 한겨레신문을 토대로 <선데이저널>이 조용기 목사 일족의 행적들을 짚어 보았다.

    조희준은 2002년 12월6일 자신이 갖고 있던 아이서비스 주식 25만주를 적정가(1주당 2만4032원)보다 훨씬 비싼 1주당 8만6984원에 여의도순복음교회에 팔아, 교회에 157억3800만원의 손실을 끼친 혐의(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의 배임)로 1월 전격 구속 기소된 바 있다. 조희준의 공소장에 따르면 조용기 목사를 배임죄의 ‘공범’으로 지목하고 있다.

    조 목사는 2002년 11월28일 K모 여의도순복음교회 총무국장으로부터 “교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주식을 조 목사의 특별지시로 주당 8만6984원이라는 고가에 매입하는 사실에 대해 장로들 및 교인들이 알게 되면 큰 소란이 있을 수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조 목사는 “지금 조희준이 어려운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다. 교회에 소란이 있으면 안 되니까 가능한 한 조용히 처리해 달라”고 지시했다. 조 목사가 교회에 손실을 끼친 주식 매입 작업을 보고받고 지시했다는 얘기다.

    검찰은 수사 과정에서 조 목사의 탈세 단서도 포착했다. 2004년 서울지방국세청이 이 주식거래를 증여로 판단하고 103억원의 세금을 매기자, 조 목사가 증여가 아닌 일반적인 금전대차 거래로 꾸미기 위해 허위자료를 국세청에 제출한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조희준은 당시 조세 포탈과 횡령 혐의로 형이 확정된 뒤 일본으로 도피했다가 2007년 12월 11일 일본 동경에서 전격 체포되어 범죄인인도요청에 따른 송환절차를 밟다가 같은 해 12월 말경 벌금 50억원을 검찰에 전액 변제하고 석방된 것으로 확인됐다. (선데이저널 참조)

    그러나 <선데이저널>은 해외도피 생활 중이던 무일푼인 조 씨가 무슨 돈으로 거금 50억원을 납부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었다. 50억원의 대납자는 조용기 목사의 일본인 재산관리인인 사까시씨로 알려져 있지만 누구의 명의로 입금되었다는 사실만 확인됐을 뿐이다. 따라서 과연 조 씨의 벌금 50억원 대납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혹은 지금까지 증폭되고 있다. 조 씨는 벌금을 냄으로써 국내로 송환될 이유가 없어졌을 뿐 아니라 자유의 몸으로 국내외를 드나들 가능성이 높아졌다.

    법무부 관계자는 벌금미납으로 인한 범죄인 인도송환을 요청했으나 벌금을 낸 만큼 그 근거가 없어졌다는 이유로 국내로 송환될 근거가 없어졌다고 설명했다. 결국 조 씨는 도피생활을 하다 검거되자 뒤늦게야 벌금을 냈다는 비판에 처할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7년 뒤 검찰 수사를 통해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의 배임 혐의가 드러남에 따라, 우리나라 기독교계 최고 실력자 가운데 한 명인 그도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2011년 9월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 29명의 고발장을 접수하고 조 목사와 아들인 조희준 영산기독문화원 사무국장의 배임 혐의 수사에 착수했다. 교회도 자체적으로 위원회를 꾸려 진상조사에 나섰고, 조 사무국장이 가지고 있던 주식을 교회가 적정가보다 훨씬 비싸게 사준 행위에 대해 “절차적으로 매우 적절치 못한 투자로 교회에 손실을 입힌 것이 확인됐다”는 조사 결과를 지난해 5월 발표했다. 검찰은 수사 착수 1년3개월 만인 올해 1월, 조희준을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의 배임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공소시효 10년이 만료되기 직전이었다.

    검찰이 작성한 조희준의 공소장을 보면, “조용기 목사는 교회 자산을 취득함에 있어서는 취득하는 자산의 적정 가액이 어떠한지 평가해 교회에 손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할 업무상 임무가 있음에도 그 임무에 위배해 전문가에 의한 주식평가 절차 및 교회 내부에서 거쳐야 하는 필수 절차를 거치지 아니한 채 아이서비스 주식 25만주를 매수”했고, “(조 사무국장은) 조 목사에게 보고하여 승인을 득하는 등으로 조 목사의 매수행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고 돼 있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검찰이 조 목사를 사실상 주범으로 지목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 구속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2월27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조희준에 대한 공판에서도 변호인은 “조 목사는 당시 여의도순복음교회 당회장이고 피고인은 아무런 직책 없는 신자에 불과하다. 당회장 업무를 아들과 합의했다는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교회의 주식 매입 업무의 최고 책임자는 조 목사라는 얘기다.

    탐욕이 빚은 조용기 목사 부자의 비극

    검찰이 ‘공범’으로 규정하면서도 조 목사의 기소를 늦춘 것은 추가로 포착된 탈세 혐의 때문이었다. 주식을 비싸게 매입한 게 증여가 아니라는 점을 주장하기 위해 조 원로목사가 교회 간부를 비롯해, ㅅ회계법인 회계사, 세무사 등과 모여 대책회의를 하고, 일반적인 금전대차 거래로 위장한 각종 서류를 작성해 과세당국에 제출했다는 사실을 검찰이 확인한 것이다. 허위 자료를 제출하는 등 ‘사기, 기타 부정한 방법’으로 수십억원의 세금을 피했다면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의 조세포탈죄를 적용할 수 있다.

    검찰 관계자는 “조 목사 쪽에서 이런 주식거래가 과세 대상이 안 된다는 판례를 제출해 법리를 검토 중”이라며 “공범인 조희준씨를 기소했기 때문에 배임죄만으로 라도 조 목사를 기소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제 급기야 큰아들을 교도소에 보내고 조용기 목사마저도 배임 혐의로 기소될 처지에 놓여 있어 조용기 목사 일가의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이 찾아 온 것이다. 아들과 공모한 혐의를 받고 있는 조 목사는 정상적인 거래로 위장해 수십억원대의 세금을 회피한 혐의(조세포탈)로 자칫 구속될지도 모른다. 이 사건은 2002년 여의도순복음교회 담임으로 있던 조 목사의 지시로 일어난 것이니, 배임의 주범은 사실상 조 목사다.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 구실을 하는 데 쓰일 헌금을 목사 일가가 멋대로 빼돌렸으니 죄질이 매우 나쁘다.

    조 목사는 담임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재)순복음선교회를 통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선교회는 여의도순복음교회 등 20개 교회와 국민일보, 한세대학교, 사랑과행복나눔, 엘림복지회, 굿피플인터내셔널 등 각종 기관의 운영을 총괄한다. 2011년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나면서 총재직을 신설하는 등 선교회에 집착하는 건 그런 까닭이다. 이렇게 돈과 권력이 집중되다 보니, 지난해 조 목사 친인척 사이엔 요직을 둘러싸고 격렬한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 뒤 조 목사가 순복음선교회, 사랑과 행복 나눔을 관장하고, 부인인 김성혜씨는 한세대학교, 조희준씨는 엘림복지타운, 차남 조민제씨는 국민일보를 관장하는 것으로 정리되긴 했지만, 교회 사유화 논란은 오히려 더 커졌다.

    신도의 헌금을 개인 재산으로 전용

    신도의 헌금으로 축재하는 건 종교기관의 가장 큰 죄악이다. 예수는 재산 자체를 죄악시했다. 적은 재산도 가난한 과부와 고아들에게 모두 주라고 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웬만한 규모만 되면 가정부를 두고 명품으로 치장한 채 외제차를 몰고 다니고, 자녀를 외국 유학 보내지 않는 목사가 거의 없다. 축재와 출세를 신의 은총으로 여기며 탐욕을 정당화한다. 신을 팔아 다름 아닌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이들이다. 예외 없이 교회 세습 등으로 물의를 빚고 있는 대형교회 목사들은 그 표상이다.

    조희준씨는 이미 2001년 조세포탈, 횡령 혐의로 기소돼 3년 징역에 5년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고, 집행유예 기간 중 자신이 책임지고 있던 회사의 계열사 자금 35억원을 빼내 사적으로 쓴 혐의(횡령, 배임)로 지난 1월 법정 구속됐다. 결국 아버지 조 목사의 권세를 믿고 만행을 저지르다 이제 세번째 사법처리를 당하게 됐다. 조 목사 역시 욕심 때문에 신의 뜻을 외면하고 세속의 규범도 어기다가 자신과 가족을 구렁텅이로 빠뜨렸다. 사법당국은 이번 사건을 엄정히 심판해, 권력과 탐욕에 취한 대형교회들이 자정하는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교회개혁실천연대가 지난 13일 오후 서울 명동 청어람 빌딩에서 연 ‘조용기 원로목사 일가의 여의도순복음교회 재산 사유화 중단 촉구 기자회견’에는 20개 안팎의 언론사 기자가 몰려들었다. 기자회견은 언론의 높은 관심 속에서 1시간여 동안 진행됐지만 이를 보도한 언론은 거의 없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대형교회, 세계 최대의 단일교회로 불리는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순복음교회) 54년의 역사는 조용기 원로목사의 가족사이기도 하다.
    이제 서서히 1958년 천막교회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초대형교회로 성장한 순복음 교회는 그늘이 지고 있다.

    순복음교회는 1958년 5월18일 서울 서대문구(지금의 은평구) 대조동의 허름한 집에서 5명의 개신교인이 올린 첫 예배가 순복음교회의 출발이었다. 당시 예배를 이끌었던 두 명은 조용기 목사와 훗날 그의 장모가 되는 최자실 목사였다. 나머지 3명의 교인은 최 목사의 세 자녀인 김성혜·성수·성광 등이었다.   <다음 주 계속>

     

                     선데이 저널 USA (http://www.sundayjournalusa.com/) 조현철(취재부기자)





    정상의 경험(The Mountaintop Experience)

    어떤 순간에 우리는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주위에서
    완전한 연합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산 정상에 올라가
    주위의 경치에 매혹될 때, 이런 경험을 합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의 출생의 증인이 될 때,
    또는 친구의 죽음의 증인이 될 때도 이러한 경험을 합니다

    우리는 또한 친밀한 대화를 나누거나 가족과 함께
    식사할 때도 이런 경험합니다 교회 예배중에 또는 조용한 방에서
    기도드리다가도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을 경험할 때마다, 또 어떤 식으로 경험하든,
     "바로 이거야..모든 것이 잘 맞아....내가 바라던 모든 것이
    바로 여기에 있어" 라고 우리 자신에게 말합니다

    이것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다볼산 정상에서
    경험한 것과 같은 경험입니다
    이들은 산 정상에서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변하고
    그분의 옷이 희어져 눈부시게 빛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원했습니다(누가복음 9:28~36 참조)
    이것이 바로 때가 찬 것을 맛보는 경험이었습니다

    이러한 순간들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여겨지고,
    또 모든 일이 공허하고 쓸모 없는 것같이 보일 때도
    이런 순간들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참으로 은혜스런 순간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하나님의 관심


    축복과 광야의 연단은 같이 가는 패키지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만드실 때, 우리의 삶에 반드시 연단의 사람을 붙여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바뀌는 데 있다. 힘든 사람을 붙여주시는 이유이다.
    -이용규의 [떠남] 중에서-

    하나님의 관심은 나 한 사람이 온전히 변화되어,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온 열방을 품고 생명을 낳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축복과 광야의 연단을 통과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어려운 연단은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받은 연단도 하나님은 또 다른 사람을 얻기 위해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한 목적을 두고 행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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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의 국민 가수 프레디 아길라. 그는 〈아낙〉이라는 노래로 인기를 끌면서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아길라는 미국으로 진출해 마이클 잭슨이나 스티비 원더 같은 내로라하는 가수들 사이에서 빌보드차트 5위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가난한 필리핀으로 되돌아와 한 빈민가에 정착, 주민들과 어울려 살기 시작했다. 그가 돌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이곳은 문밖에 나서면 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잘사는 곳에서는 문밖에 나와도 어찌 된 일인지 도대체 사람 구경을 할 수 없어요.” 아길라는 빈민가에는 사람 사는 맛이 있고 그것이 자기에게 생생한 음악적 영감을 선사한다고 밝혔다
    .

    화재로 동네 학교가 불타 없어지자 아길라는 자신의 집을 학교로 사용하게 했으며 2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학교의 운영을 돕고 있다. 아이들이 교육을 못 받아 빈민층이나 소외 계층이 되어서 사회 문제를 일으키면 지금보다 많은 돈을 들여도 해결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길라는 사회의 미래는 무엇보다 아이들의 교육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

    아길라가 한창 인기를 누릴 때, 필리핀에서는 마르크스라는 독재자의 횡포가 극에 달해 있었다. 결국 필리핀 민주화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고 아길라 역시 자신의 노래를 무기 삼아 적극 참여했다. 이후 아길라는 필리핀 민중의 삶을 대변하는 국민 가수로 자리매김했다. 현재 갈등의 시간은 지났지만 아길라의 노래는 여전히 필리핀 사람들의 삶을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있다
    .

    글ㆍ《좋은생각》 편집팀 / 2009 10월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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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가 차매(The Fulness of Time)

    예수님은 때가 차서 오셨습니다
    그분은 때가 차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때가 옵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시간이 비어 있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는 내일, 내주, 내달 또는 내년에 참으로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가끔씩 우리는 때가 된 것을 경험합니다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될 때,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그 밖에 함께 있는 모든 것들이 완전한 연합 속에 있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바로 이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시간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
    여자에게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갈라디아서 4:4)

    그리고 하나님은 "때가 되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하실 것입니다"(에베소서1:10)
    때가 차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dpq2;7)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엡2/7) 로이드존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서론 : 우리는 삶을 살아나갈 때 이런 저런 일로 고통을 받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일을 당할 때 너무나 쉽게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하고 원망하기가 쉽습니다. 사실 우리의 고통의 대부분은 너무나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가를 설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인식한다면 우리의 자세와 마음가짐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
    나님께서 왜 우리를 위하여 이 큰 일을 하셨습니까?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1.1 구원의 제일되는 목적과 의도와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만천하에 보여줍니다.

    1.2 우리는 모든 면에서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에만 생각을 집중합니다. 그러나 이제 눈을 돌려 객관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보고 세계를 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인류에 죄라는 것이 들어와서 이 세상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변하였는지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하여, 또 우리 불쌍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1.3 죄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공할 일입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사회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훨씬 더 중대한 문제입니다. 거기에는 영생과 영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과 죄악의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계획을 온전히 드러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2.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냄



    2.1 구원은 그 밖에 다른 것을 행할 수 없는 특수한 방식과 방법으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하나님의 성품을 변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우게 됩니다. 만일 이러한 일이 없었다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온유, 사랑, 자비, 긍휼)을 알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2.2 아담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우리는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구원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그 놀라운 품성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에 대한 온갖 오해와 편견들을 말끔히 제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3. 교회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3.1 하나님은 이 위대한 이 장엄한 일을 우리를 방편으로 해서 우리를 통하셔 맨 먼저 행하십니다. 그는 이 모든 일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기 위해서" 하셨습니다.

    3.2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구성원들 한 사람 한사람에게 놀랍고 풍성한 은혜를 베푸셔서 그것이 계계승승 이어지기를 소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불러모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3.3 요한계시록에 보면 요한이 환상 중에 어린 양 곁에 서 있는 흰옷 입은 무리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입니다. 이들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이렇게 큰 무리가 모이게 된데는 바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이 일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의 목적은 나를 구원하는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와 본성을 나타내고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먼저 부름 받고 쓰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크시고 위대하신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구원받는 허다한 무리들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크게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로이드존스설교요약/개혁주의마을/Grace



    두 번째 죽음(A Second Death)

    지옥은 두 번째 죽음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요한계시록 21:8 참조)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처럼 영원한 죽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첫 번째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 될 수도,
    영원한 죽음으로 가는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옥을 두 번째 죽음으로 이해하면 중세의 예술품과 문학 작품에
    잘 묘사되어 있는 영원한 고통과 고문과 같은
    이미지는 사라져 버립니다 중세의 작품은 지옥을
    잘못된 행동에 대한 벌이라기보다는 생명의 선택을
    거부한 것이라는 점에 더 치중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도 요한계시록이 열거하고 있는 영원한 죽음으로
    인도하는 온갖 죄는 살인자와, 우상 숭배자와,
    음란한 사람과, 모든 거짓말쟁이와 같이 죽음을 선택하는 죄입니다
    (요한계시록21:8)

    우리가 죽음을 심으면 죽음을 거둡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명을 심으면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심는 자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매일 아침에 해가 뜨면 일어나 사택 마당에 와서 “나 왔어. 혁수 왔어”라고 외치는 청년이 있다. 목사님이 밖에 나가서 “우리 혁수 왔구나”하고 반기면, “나……, 나……, 나 교회 다닐 거야. 나 하나님 믿을 거야. 하나님은 정말 있어”라고 말하곤 한다. 목사님은 매일 똑같이 묻는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데?” 혁수는 “하나님은 내 마음 속에 있어”라고 대답한다. 이런 대화는 매일 목사님과 혁수가 수없이 나누는 것이다. 목사님은 혁수에게 존댓말을 가르치려고 매 번 말을 교정해주지만 혁수는 곧 잊어버리고 반말로 한다.

     

       그는 하루에도 수없이 교회와 사택 마당을 순회한다. 그의 별명은 ‘교회지기,’ 혹은 ‘사찰성도’이다. 그는 집에나 길에 있다가 누군가 교회 마당에 온 기척만 나면 금방 달려온다. 그리하여 우리는 교회를 비워두고 출타할 때에 “혁수야, 교회 잘 지켜라”하고 당부한다.

     

       그는 우리 교회에 개근하는 성도이다. 그의 집은 우리 교회 바로 앞에 있다. 진짜 나이는 33살? 그러나 그의 정신 연령은 정확히는 모르지만 5살쯤 된다. 대변의 뒤처리를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며, 소변은 아무데나 눈다. 방금 전에 한 얘기도 잊어버려서 반복해서 말해야 한다.

     

       혁수를 보면 사람에게는 노동의 욕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약간 불편한 몸이긴 하지만 거동하는 데는 지장이 없으니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는 붉은 고추를 따야 할 때 푸른 고추까지도 따고, 익은 곡식과 아직 익지 않은 곡식을 구별하지 못하며, 스스로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오직 누군가가 시키는 단순한 일만 할 따름이다. 그러니 그의 집에서는 오히려 거치적거릴 뿐이라고 해서 아예 밭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한다. 날만 밝아오면 일어나는 그는 심심해서 하루 종일 집 주변을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교회에서 목사님이 무슨 일이든 하는 소리가 나면 달려온다. 목사님은 그에게 단순한 일일망정 시켜준다. 나무토막 옮기기, 뺀 못 주워 담기, 공구 들고 있기 등. 그는 그런 일을 하면서 신이 나서 파안대소를 한다.

     

      그는 위로 딸 넷 다음에 태어난 외동아들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간질이 있어 어려서는 자주 경기를 일으키며 쓰러지곤 했다. 설상가상으로 초등학교 3학년인가 다닐 때 교통사고를 당하여 뇌를 심하게 다쳤다. 그 때 며칠 동안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포기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죽으면 자기도 따라 죽겠노라고 했다.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는지 그는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한쪽 손을 쓰지 못하는 아들이 불쌍하여 모든 시중을 다 들어주었다. 심지어 밥을 떠먹여 주었다. 동네 사람들이 요양기관에 보내 재활치료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으나 그의 어머니는 듣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가 늘 하는 소리는 “내가 죽기 전날에 내 아들을 내 손으로 죽이고 가겠어”였다. 그것은 서러운 오기였다.

     

      사람의 일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자명하다. 아들과 운명을 함께 하겠노라고 호언장담하던 그의 어머니는 몇 년 전에 불구의 아들을 뒤에 두고 먼저 갔다. 늘 아들 문제로 남편과 다투던 그녀는 어느 날 홧김에 농약을 마셨다. 그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병원에 갔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순간에, 어머니가 죽어가고 있는데도 환하게 웃고 있는 아들을 뒤에 남기고 가는 그녀의 눈 속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라목손(제초제)을 마신 다른 사람은 24시간 내에 다 죽었다는데 혁수의 어머니는 아들을 못 잊어서인지 사흘을 버텼다. 그러나 결국 눈물을 가득 담은 눈을 감고 말았다.

     

       오늘도 혁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맨 먼저 사택 마당에 와서 “혁수 왔어”라고 외친다. 목사님이 밖에 나가서 “우리 혁수 왔냐?”라고 반길 때가지 계속 외쳐댄다. 목사님이 밖에 나가 상대해주노라면 다음에는 “나 교회 다닐 거야”를 수없이 반복한다. 혁수가 “나……, 나……, 나……”하면, 목사님이 “교회 다닐 거라고?”한다. 그러면 혁수는 허허허 큰소리로 웃는다. 목사님이 제 마음을 족집게같이 잘 알아주는 게 너무 좋아서 큰소리로 웃는다.

     

       혁수는 늘 큰소리로 웃는 게 흠이라면 흠이다. 웃는 게 어찌 흠이냐고? 시도 때도 없이 웃기 때문이다. 설교시간에도 혁수의 웃음소리 때문에 성도들은 설교 내용을 놓치곤 한다.

     

       다른 한편, 혁수는 우리 교회 성도들 중에 가장 용감하다. 목사님의 질문에 대답을 크게 한다. 가끔 목사님은 설교 도중에 질문을 한다. 대부분 시골 교회 연세가 드신 성도들은 대답을 안 한다. 늘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사는 것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몰라서라기보다는 겸양해서이다. 항상 남편 뒤에, 아들 뒤에 자기를 숨기고 살았던 여인들인지라 자기의 목소리를 밖으로 내지 않는다.

     

       어느 날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물었다. “세상에 믿을 것이 있다? 없다?” 묵묵부답이다. 아무도 대답을 안 하니 박자가 안 맞는다. 하나님 외에는 믿을 것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질문한 것이다. 남편도, 자식도, 돈도, 지식도, 건강도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을 상기시키려고 던진 질문이다. 목사님은 다시 큰 소리로 물었다. “세상에 믿을 것이 있다? 없다?” 그래도 대답을 안 한다. 목사님 왈, “오늘 아침에 꿀 드시고 오셨어요?” 그때 혁수가 “있어”라고 크게 소리친다. 모든 성도들이 와! 하고 웃는다. 동문서답이기 때문이다. 목사님이 혁수에게 다시 묻는다. “세상에 믿을 것이 있다고?” 혁수의 대답, “있어.” 성도들이 다시 웃는다. 그때 혁수가 “나, 하나님 믿어. 그러니까 있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정답이요 현답이다. 그럴 때 보면 혁수가 말귀를 잘 알아들으며 성인의 표현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혁수를 보면 지능은 낮아도 어휘력은 나이를 반영하는 것 같다. 그가 사용하는 어휘는 어른의 어휘들이다. 어느 날 목사님이 새로 산 구두를 신고 외출을 하려고 나가니 어느새 교회로 달려온 혁수가 다가와서 오른손 엄지를 치켜세우고 “목사님 구두 끝내주게 멋져”라고 말했다. 넥타이를 새로 하고 나가면 오른손 엄지를 치켜들고 “넥타이 멋져”라고 말한다.

     

       혁수는 늘 심심하다. 그래서 혁수는 주일이 되면 신이 난다. 하루 종일 교회에서 지낼 수 있으니까. 8시에 교회에 와서 오후 5시 경에 집에 간다. 아침에 해만 뜨면 밖으로 나와 하루 종일 주변을 걷는 것이 그의 일과이다. 그의 어머니가 죽은 후에는 식사를 할 때와 화장실을 사용할 때를 제외하고는 밖에서 돌아다닌다. 세 끼 밥이나 제대로 먹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의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있으니 제삼자인 우리가 관여할 수도 없는 일이다. 가끔 사택에 오면 간식을 줄뿐이다.

     

       혁수는 10분 이상을 가만히 앉아있지 못한다. 그러니 교회에 와서도 예배 도중에 서너 번씩은 들락날락한다. 그렇잖아도 연세 드신 분들은 집중이 안 되는 편인데 혁수의 움직임을 따라 여러 명의 성도들이 주의가 산만해진다. 또 시도 때도 없이 큰소리로 웃는다. 그리고 옆 사람이나 뒷사람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처음 나온 어떤 사람은 그런 그에게 막 화를 냈다.

     

      설명을 해서 간신히 화를 가라앉혔다. 어떤 이가 말했다. 혁수는 교회에 왜 오는지 모르겠다고. 내가 말했다. “그런 말 마세요. 혁수는 우리 교회 개근하는 성도예요. 혁수처럼 주일성수하는 성도는 드물다고요. 그리고 혁수는 신앙고백이 분명하답니다. 혁수는 날마다 수없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시인을 해요. 그보다 더 귀한 믿음이 어디 그리 흔하던가요?”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필      자

     양애옥 사모

    정읍시 옹동면 비봉리 산성교회 

     (창골산 칼럼니스트)

     ao-y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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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인에게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특성이 있다.
    혹시 당신의 현재 모습이 악인과 닮아 있지는 않은가?
    당신의 진정한 속마음을 깊이 들여다 보라.

    1. 악인은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한다.
    악인은 땅에서 최고의 만족을 얻으며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한다.
    악인은 육신의 번영을 하늘의 축복 위에 놓고 육에 속한 것들을 즐기지만 한다.

    성령에 속한 것들은 인지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맛보지도 못한다.
    악인은 하늘이 땅보다 더 높다고 떠들지만 실제로는 하늘보다 땅을 더 높인다.

     

    악인은 땅을 믿기때문에 하늘을 버리려고 하며 땅에 머무르려고 한다.
    악인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임자 안에서 영원히 사는
    천국의 완벽한 성결의 삶이나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국의 축복을 소망하는 것보다

    땅에서 인락함이나 돈이나 명예를 축적하는 것에 관심이 온통 쏠려 있다.

    악인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공언하지만

    그 마음이 하나님보다는 세상과 육신의 즐거움에 고정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결코 느끼지도 맛보지도 못한다.

    즉 하늘보다 땅을 더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보다 육신의 즐거움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그사람이 누구든지 악인이요 아직 회개하지 못한 죄인이다.

    반면 회개한 사람은 성령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을 분별한다.
    장치 하나님과 누리게 될 영광을 확실하게 믿고 세상 어떤것 보다 그 소망에 마음을 기울인다.

    세상의 모든 물질이나 인간의 모든 쾌락을 준다고 유혹을 해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영원토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며 사는 삶을 선택한다. 

    또한 세상의 모든것이 헛되고 하나님외에는 자기 영혼을 채워줄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있다.


    세상이 나날이 악해져도 자신의 재물과 소망을 하늘에 쌓으며
    하늘을 얻기 위해서라면 모든것을 기꺼이 버리겠다고 단호히 각오한다.
    마치 불이 위로 솟아 오르고 자력에 이끌린 하늘에 북쪽을 향하듯 하늘의 하나님을 향한다.
    하나님의 사랑외에 다른 어떤것에서도 만족이나 쉼을 얻으려 하지 않으며 세상 무엇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회개한 사람들은 한마디로 세상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더 높이며

    땅에서 잘되는 것보다 하늘에서 잘되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긴다.

    2.악인은 육신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여긴다.

    악인은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해서 육신의 욕구를 한껏 충족 시키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여긴다.
     

    악인도 물론 말씀을 듣고 읽으며 외적으로 신앙적인 의무를 수행하고 추잡한 죄를 짓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영원한 영광을 얻는 것을
    인생의 으뜸가는 일로 삼지 않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부수적인 것으로 끝나버린다.

     

    악인은 하나님을 세상의 쓰레기 옆에 갖다 놓는다.
    악인은 세상과 절교하면서까지 하늘을 얻을 생각이 추호도 없기 때문에
    육신의 즐거움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하나님을 버린다.

    반면 회개한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것과 구원받는 것을 인생의 주된 목표와 관심으로 삼는다.
     

    이생에서 받은 모든 은혜와 축복을 또 다른 삶으로 향하는 여정의 도구로 여기며

    하나님 안에서만  피조물을 사랑하고 사용한다.

     

    신령한 삶을 사랑하며 더욱 신령해지기를 소망한다.
    회개한 사람들은 죄를 멀리하고 죄를 미워한다.
    자기의 삶에서 죄를 제거하기를 갈망하며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면서 간절히 기도한다. 

    마음을 온통 하나님께 기울이고 하나님을 향해 힘차게 나아간다.
    혹 죄를 범했다면 그것이 그의 마음과 삶의 방향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즉시 일어나 뉘우치고 회개하며 죄로 아는 것을 감히 고의로 저지르지 않는다.

    회개한 사람은 하나님과 영광의 소망을 위해 모든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버릴 각오가 되어있어서 세상 그무엇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3. 악인은 영혼의 의사인 그리스도께 치료받기를 거부한다.

    악인의 영혼은 구속의 오묘함을 분별하지도 맛보지도 못하기 때문에
    구세주를 감사히 영접하지 못하며 구세주의 사랑에 온전히 붙들이지도 못한다.
    악인은 죄인들을 죄책감과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하고 온전히 치유하며
    하나님께 인도하는 영혼의 의사이신 주님께 다스림받기를 거부한다.
    악인의 마음은 이 말할수 없는 은혜를 감지하지 못하며
    주님께서 제공하시는 치유의 수단을 완고하게 거절한다.

     

    악인은 겉으로 신앙생활을 할지라도 자기 영혼을 그리스도께 절대 내맡기지 않으며
    성령의 역사와 말씀의 명령에도 결코 고분고분하게 순종하지 않는다.

    그러나 회개한 사람은 자기가 전에 죄로 인하여 사망했던 자임을 알고있다.
    하나님과 불화하여 천국의 소망을 상실하고 영원한 형벌에 처할 위험에 처했던 자임을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구속의 선물을 감사하게 받이들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인생의 구세주로 믿고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을 얻기위해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내맡긴다.

     

    또한 그리스도를 영혼의 생명으로 영접하여 그분을 힘입어 산다.
    벗겨지고 문드러진 모든상처의 치유자로 여기며

    구속이라는 놀라운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을 흠모한다.

     

    회개한 사람의 심령에는 한마디로 그리스도께서 거하신다.
    회개한 사람의 삶은 그를 위해 친히 목숨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그렇다!

    회개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사람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출처: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간디 이야기

     

    마하트마 간디(Mohandās Karamchand Gandhi 1869∼1948)에 관한 일화 한 토막이다.

    어느 날 한 어머니가 십오륙 세 나이의 아들을 데리고 간디를 찾아왔다.
    간디 앞에 무릎을 꿇은 어머니는 아들을 도와주기를 간청하였다.
    “선생님 내 아들을 도와주세요. 아들이 설탕을 너무 좋아해요.
    건강에 나쁘다고 아무리 타일러도 안 듣는군요.
    그런데 아들이 간디 선생님을 존경해서 간디 선생님이
    설탕을 끊으라면 끊겠다는군요.”

    이 부탁을 들은 간디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세요. 그렇다면 내가 도와드릴테니
    보름 뒤에 다시 나를 찾아와 주세요.”
    그 어머니는 보름 뒤에 다시 아들을 데리고 간디를 찾아갔더니
    그는 아들에게 간곡히 타이르기를 “설탕을 많이 먹는 것은
    건강을 해치는 것이니 끊으라” 고 일러주었다.

    존경하는 어른의 부탁을 들은 소년은 그날로 설탕을 끊게 되었다.
    후에 그 어머니는 간디를 다시 찾아와 고마운 뜻을 전하면서 물었다.

    “그런데요. 선생님 처음 제가 아들과 함께 선생님을 찾아왔을 때에
    왜 보름 뒤에 오라고 하셨나요?” 간디가 답하기를
    “실은 나도 설탕을 좋아했는데 아들을 도와주려면
    나부터 나쁜 버릇을 고친 후에야 도울 수 있었기에
    내가 먼저 설탕을 끊는 기간을 보름을 잡은 것입니다.”고 하였다.

    지도자가 되고,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자가 되려면
    자신이 먼저 진실되게 사는 실천이 앞서야 함을
    가르쳐 주는 교훈이 되는 이야기이다.

     

    글: 김진홍 목사


    <열왕기상 8장>

    드디어 솔로몬의 성전이 완공되고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려져 성전에 모셔 들여집니다. 이스라엘 장로들과 모든 지파의 두목, 곧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족장들이 모이고 제사장들이 궤를 멥니다. 그야말로 온 나라의 경사요 축제입니다. 얼마나 많은 양과 소로 제사를 드렸던지 그 수가 많아 기록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왕기 저자는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지성소로 메어 들였고, 그 처소의 그룹들이 날개를 펴서 그 궤와 채를 덮었는데 채가 길어서 내전 앞 성소에서는 보였다고 되어 있으며, 제사장들이 두 돌판이 들어 있는 궤를 모셔 들이고 나올 때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여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섬기지 못 하였으며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신비하신 임재의 역사가 나타나고 넘쳐났던 것 같습니다.

    이 때 솔로몬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격과 환희가 어떠하였을까요?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 회중을 향하여 축복하고 경과보고를 한 다음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솔로몬의 한 말과 그의 기도가 오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심과 존귀하심, 그 언약의 이루심을 선포하고 간구하는 그의 기도는 오늘날 성경을 읽는 우리의 가슴을 울리도록 장엄하고도 간곡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 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리이까.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이름을 두신 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 범죄한 자가 기도를 하거나, 백성이 범죄함으로 기근이 들어 기도할 때나, 온역이나 질병, 적국의 침략으로 환난당할 때나, 이방인이 기도를 하거나, 전쟁을 할 때나, 범죄함으로 적국에 잡혀가서 기도할 때에나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성전을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하면 하늘에서 들으시고 구원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일을 당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의 성전을 향하여 두 손을 들고 기도하면 들어주실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어떻게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성전 때문이지요.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이렇게 아뢰고 구할 수 있는 것은, 성전을 지었기 때문이요 그 성전 안으로 하나님의 궤를 모셔 들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열왕기의 이 대목을 읽으며 하나님을 가까이에 모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며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성전에 모셔 함께 거한다는 것은 얼마나 굉장한 일이며, 얼마나 큰 힘이며, 권세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 오랜 세월을 두고 염원하며 성전을 짓고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 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격은 얼마나 큰 것이었을까요? 그러나 슬프게도 그 감격은 오래 가지 못 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졌고 백성들은 성전을 돌아보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을 진노케 하고 나라가 갈라지고 결국은 멸망을 당하고 성전이 파괴되는 비극의 역사를 당하게 됩니다.

    그것은 돌과 나무로 지은 성전은 영원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일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몸이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주를 믿는 우리의 마음이 영원한 성전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처럼 굉장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고 힘들여 짓지 않아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믿는 믿음으로 건축하는 성전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처럼 두 손을 들고 성전을 향하여 간구하지 않고 언제나 내 속에 계신 주님께 두 손을 모으고 구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주님과 은밀하게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언제나 예배드릴 수 있고 손을 내밀고 구하는 것, 필요한 것을 달라고 말씀드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솔로몬 성전 보다 더욱 귀한 성전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인지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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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스트리아 태생의 유대인 사상가 Martine Buber는 그의 책 「Ich und Du(나와 너)」에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피할 수 없는 3가지 관계 적시했습니다. ①나와 너(사랑해야할 관계) ②나와 그것(사용해야할 관계) ③나와 당신(믿고 섬겨야할 관계)입니다. 올바른 관계는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며, 세상 사물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한 청지기로 관리하는 것입니다. 물질을 섬기고 하나님을 이용한다든지, 이웃을 이용하고 사랑하지 못할 때 관계는 파탄되며, 이것이 죄입니다.
    바른 관계 형성된 건강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삶의 템포를 조절해야 합니다. 그래서 ①빠른(바쁜)삶은 병든 삶, ②느린 삶은 건강한 삶, ③조용한 삶은 거룩한 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거룩한 삶을 위하여 우리에게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이 영성입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내 집에는 세 개의 의자가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우정을 위한 것이고, 세 번째 것은 교제를 위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3가지를 홀로, 마주, 둘러앉음이라고 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순간순간, 하루하루가 모여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점(點)모여서 선(線)이 되고, 선이 모여 면(面)이 되고, 면이 모여 공간이 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점 하나를 바로 찍어야 하듯이 우리도 지금 이 순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누가 말했듯이 가장 중요한 시간은 "지금"이요,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요,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영원과 잇대어 있기 때문입니다. 함석헌의 「우주」라는 시가 있습니다. "제대로 노는 뜻의 파동 / 점 모여 선 / 선 모여 면 / 면 모여 체(體) / 체 모여 하나. 한 체가 쪼개어 면이 있고 / 넓은 면 쪼개어 곧은 선 있고 / 긴 선 잘라서 묘한 점 있으니 / 전체를 나타내는 것은 일점이니라...."

    오늘 이 순간이 바로 영원과 잇대어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 그리고 "이 일"이 가장 중요한대도 사람들은 행복이나 가치를 현재가 아니라 미래나 다른 곳에서 찾고 있습니다. Karl Busse의 시 「산 너머」가 있습니다.  "산 너머 / 저쪽 하늘 멀리 / 사람들이 말하지요 / 행복이 있다고... 아, 그래서 나는 / 남들 따라 떠나갔어요 / 그리고 눈물만 머금고 / 돌아왔어요. 산 너머 / 저쪽 하늘 멀리 / 사람들 말하지요 / 행복이 있다고..."
    그래서 우리는 오늘 여기서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삶은 늘 저 건너편에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행복은 지연되고 우리는 오늘의 반복적인 일상으로부터 벗어나야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2. 그러기 위해서 요청되는 삶의 자세가 홀로-마주-둘러앉음입니다. "일상(日常)에서 일생(一生)까지"라는 어떤 광고 문구처럼 우리는 일상 속에서 즉 지금 여기서 내가 하는 일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이 주시는 복을 발견하고 누려야 합니다.

    (1) 먼저 "홀로"입니다.

    오늘 우리 삶은 분주하고 복잡하고 소란합니다. 조용히 혼자 있지 못합니다. 아니 혼자 있으면, 삶이 조용하고 한가로우면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나고, 어딘가를 가게 됩니다. TV를 켜야 하고, 컴퓨터나 핸드폰을 조작해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삶은 달랐습니다. 막1:35절에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나아감과 물러남이 분명했습니다. 나아감과 물러남의 균형을 맞추었습니다. 나아감만 있고 물러남이 없다면 삶은 맹목이 됩니다. 물러남만 있고 나아감이 없다면 삶은 진부함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쁜 일과를 시작하기 전이나, 고된 일과를 마치고 나서, 가장 고요한 시간 홀로 하나님을 찾아가 하늘 아버지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시간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준삼아 자신의 마음을 조율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외로움과 고독을 구분했습니다. '외로움'은 모든 것들로부터 단절된 데서 오는 '홀로 있음의 고통'입니다. 반면에 '고독'은 내 존재의 근원과 하나 됨의 기쁨을 누리는 '홀로 있음의 영광'입니다. 죽음보다 더 무서운 외로움을 치료하는 길은 하나님의 현존 앞에 고요히 앉아 있는 고독입니다. 고독은 외로움의 치료제입니다.
    아무리 바쁘고 소란한 세상에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현실이지만 하나님 앞에 홀로 있는 고독의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과 일상생활의 출발점이요 승리의 길입니다.

    (2) "마주"입니다.

    a. 먼저 하나님과 마주해야 합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들을 일망타진한 엘리야는 그 때문에 목숨에 현상붙은 절체절명의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까지 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음식과 마실 것과 단잠을 준비해서 기력을 회복시키시고 하나님의 산에까지 가도록 도우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과 마주하게 되고, 세미한 음성과 함께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게 됩니다. 하나님과 마주할 때 우리는 확신과 담대함을 얻게 되어 새롭게 삶과 사역에 임하게 됩니다. 사실 은퇴라는 말(retire)은 펑크난 타이어를 때우고 바람을 넣어 다시 운행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마주할 때 우리에게 이런 기적이 일어납니다.

    b.사람과 마주함이다.
    마주 섬 즉 "對立"이라는 말은 싸움, 투쟁을 말합니다. 간음중의 여인을 끌고 온 한 무리가 예수님까지 해치려고 눈을 부라리고, 손에 돌을 들고 서 있는 모습입니다. 생과 사가 말 한마디에 좌우될 형국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허리를 굽히고 땅에 글씨를 쓰셨습니다. 이 간단한 동작이 대립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이 한 마디 말씀으로 대립은 끝났습니다. 아마 우리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똑같은 처지에 "그 입 다물라."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 대립은 지양됩니다.

    이와 반대로 마주함 즉 "對坐"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마주 앉는 것입니다. 상대에 대한 편견을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이 잘났다고 하는 교만한 마음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너와 나는 서로 꺾어야 할 적이 아니라 함께 보듬고 보완하고 함께 동행해야할 동료요 친구라는 뜻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주 앉음은 화해와 평화의 시작입니다. 이런 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우리 사이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회퍼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직행로가 없고 그리스도를 거쳐야 하듯이 이웃에게 나아갈 때도 직행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거쳐야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은 서로의 결점이나 단점을 보지 않듯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우리가 마주 할 때 모든 담은 허물어지고, 모든 간극은 메워져서 마침내 사랑으로 서로의 손을 잡게 됩니다.

    (3) 둘러앉음이다.
    홀로한 사람이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둘러앉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교회란 홀로 그리고 마주한 사람들이 둘러앉은 곳입니다. 여기서는 "네가 꼭 나와 같아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너는 나와 같지 않기 때문에 여기 들어올 수 없다."고 배제하지도 않습니다. 비록 서로 사이에 다른 점이 많고 차이가 있어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무한정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밥상 공동체가 그랬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핀잔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예수 공동체의 특징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어떤 잣대를 가지고 차별하고 배제했다면 오늘 내가 어떻게 이 예수공동체의 일원이 되었겠습니까? 예수 공동체에서 제외된 사람이 아무도 없었듯이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형제의 떡을 공평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결국 이쪽저쪽 떡을 다 먹어치웠다는 이야기처럼 이렇게 저렇게 따져서 정죄하고 배제한다면 우리 공동체는 와해되고 해체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의 공동체가 아니라 인간적인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거기는 사탄만이 역사합니다.

    예수님의 밥상 공동체가 나중에 성찬성례전으로 발전한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아주 세속적인 먹고 마시는 그것이 성찬성례전이 되었습니다. 여기를 떠나서 하늘나라를 따로 찾는다면 엄청난 착각입니다. 여기서 부터가 아니라 어디 하늘에서 하늘나라가 뚝 떨어질 것으로 생각한다면 크나큰 오해입니다.

    예수 공동체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엑스트라가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모두 주인입니다. 차별이 없는 공동체, 제외하지 않는 공동체 그래서 새로운 세상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홀로 있음을 통해 하나님 현존 안에 머뭅시다. 마주 앉음으로 평화의 기쁨을 누립시다. 둘러앉음으로 하늘나라를 여기서부터 누리며 삽시다.


    출처: USA아멘넷 게시판/김오동 목사

     기만의 일시적 형통

     사무엘하 15:12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왕권을 차지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세우지 않았음에도 상관없이 자신의 꾀와 힘으로 왕이 되려고 하였던 것이다. 주님의 역사가 아닌 인간의 꾀로 마음의 우상 및 야망을 이루려는 자들은 언제나 기만이 나타난다. 철저한 음모를 꾀한다. 오랫동안 생각하며 악한 일을 도모한다. 이 기간 중에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거나 순종하려는 자세가 없다. 계속 죄악을 자신의 머리 위에 쌓을 뿐이다. 결국 심판을 받아 멸망할 때까지 끝없이 죄악을 쌓는다.

     

    압살롬은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모든 사람을 속인다. 그 첫 단계는 사람들의 마음을 부정한 방법으로 사로잡는 것이었다. 다윗 시대에는 억울한 일을 당한 자들이 왕께 호소할 수 있었다. 압살롬은 이러한 사람들을 겨냥하여 그들이 왕을 만나기 전 왕을 오해시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힘으로 “왕의 이름으로” 억울함을 해결해 준다. 억울한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야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지만 압살롬의 동기는 왕의 권한을 가로채고 자신의 권한을 늘리려는 속셈이기에 악이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압살롬은 왕인 아버지를 속였으며 왕의 재판을 찾는 군중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다윗을 나쁜 왕으로 만들었다.

     

    무려 4년간 이러한 일을 하다 보니 (참으로 오랜 기간 자신의 동기와 음모를 감출 수 있는 압살롬을 볼 수 있다!) 압살롬을 따르는 자들이 허다하게 많아졌다. 이들 중에는 자신의 억울함을 보살핀 압살롬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이 생겨났다.

     

    드디어 자신의 숨은 야망을 이룰 때가 되었다. 반란을 일으킬 날과 장소를 잡았다. 모든 것이 자신의 계획대로 빈틈없이 치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 왕을 만나 헤브론으로 “여호와께 예배 드리러 가겠다”고 말을 한다. 신앙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린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마저 자신의 뜻을 이루는 방편으로 사용하고 있는 압살롬이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을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께 진실한 예배, 애통하는 예배를 드린 흔적이 압살롬에게는 없다. 아무튼 그의 반란은 치밀한 계획 가운데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기에 그는 누구에게도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아서, 특히 영특한 다윗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다윗의 입장에서야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는 아들 압살롬을 그 어찌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었으랴!

     

    이 와중에 간신이 있다. 아히도벨이다. 아히도벨은 다윗 왕에게 총애를 받아 지극히 높은 자리에 앉게 된 사람이다. 그러나 무엇이 못마땅하기에 압살롬 편에 서게 되었을까! 그는 압살롬이 왕이 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며 그러기에 약삭빠르게 신의를 저버린 것이다. 이제 압살롬과 아히도벨은 긴밀하게 만난다. 그 장면이 위의 구절이다.

     

    “제사 드릴 때에” …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가짜들은 신앙을 탐욕의 도구로 삼는다. 그들의 신앙은 언제나 거짓과 동반된다. 따라서 그들에게 신앙은 하나님을 절대적인 목적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우상을 이루기 위한 종교 형식이며 위선의 껍질일 뿐이다. 압살롬에게서 종교와 신앙이라는 명목 하에 철저하게 진행되는 거짓과 모함과 위선을 본다. 나아가 그들의 계획이 잠시 형통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 누가 이들의 계획이 완전한 멸망이 될 것을 감히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완벽한’ 궤계를 엎으신다. 신기한 능력으로 엎으신다. 압살롬이 이길 것 같으나 결국 주님께서는 그들의 기만과 궤계를 부끄럽게 만드신다.

     

    다윗은 연약한 죄인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생애를 보면 하나님을 향하여 언제나 ‘진실하였다.’ 한때 밧세바로 인하여 무서운 죄악에 빠졌던 것 외에는 그는 언제나 하나님께 진실하였다.

     

    오늘 우리는 내 힘으로 내 원함을 위하여 사는 삶을 버려야 한다. 이러한 삶은 신앙을 수단으로 삼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는 반드시 기만과 거짓과 악을 도모함이 진행된다. 따라서 철저하게 우리의 삶의 목표부터 점검하자. 정말로 여호와 하나님 그분만이 나의 삶의 목표요 나의 삶의 기쁨인가? 하나님이 나의 삶의 면류관인지 분명하게 하자. 매일 순간마다 내 삶의 목표와 동기를 점검하며 살아야 하겠다. 그렇지 않으며 그토록 깊고 질긴, 그리고 완벽하게 기만을 진행시키는 우리 속의 죄성에게 우리 자신도 속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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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더우드 선교사와 YMCA의 관계

    (언더우드 선교사 가문은 프리메이슨이다.)

     

       언더우드(Underwood, Horace Grant, 1859.7.19~1916) 선교사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인터넷상에 매우 많기 때문에 간략하게 답변하겠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아펜젤러 선교사와 함께 미국의 북장로교 선교사가 되어 조선에 와서 광혜원(廣惠院)을 설립하고,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한국명은 원두우(元杜尤)로 영국의 런던에서 1859년 7월 19일 아버지 존(John Underwood)과 어머니 엘리자벧(Elisabeth Grant Marie) 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언더우드의 아버지 존(John Underwood)은, 화공학 분야에 재주가 탁월하여 인쇄용 잉크를 발명했으며, 타자기와 묵지(리본) 등을 발명하여 일루미나티 조직에 하나인 영국 왕실의 예술원으로부터 메달과 표창을 받았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일루미나티와 관련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순전한 자기의 노력과 재능으로 얻는 상처럼 보입니다.

      언더우드(Underwood)는, 1881년 뉴욕대학을 졸업하여 문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같은 해 가을에 '뉴 브런즈윅' 시에 있는 화란개혁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 Seminary)에 입학했습니다. 언더우드는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학업은 물론 전도 활동에도 매우 열심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언더우드는 신학교를 졸업하기 마지막 해인 1883년 뉴 저어지(New Jersey) 주 폼턴(Pomton)에 있는 교회를 맡았습니다.

    1884년 11월에는 목사 안수를 받고 뉴욕 시에 있는 한 교회의 협동목사로 있으면서 인도 선교를 위해 1년 동안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언더우드는 엘린우드 박사의 지원과 '맥윌리암스'의 기부(6천 달러)로 1884년 7월 28일 미국 장로교 선교본부에 의하여 한국 최초의 목회 선교사(Clerical Missionary)로 파송되었습니다. 언더우드는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월 25일 요코하마에 도착했습니다. 이 당시 조선의 사회는 갑신정변으로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본에서 잠시 정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일본에 머무는 동안 헵번(I, C, Hepburn) 박사의 집에 머물면서 선교에 필요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수정에게 2개월 동안 조선말을 배워 마가복음을 번역하는데 기여하였습니다. 언더우드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4월 7일 위험을 무릅쓰고 상륙하였습니다. 조선에 도착한 언더우드 선교사는 아펜셀러와 함께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재 번역하기 시작했으며,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을 편찬했으며, 1886년 3월 29일 설립된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기독교 엄격하게 금했으므로 선교사라는 직분을 드러낼 수가 없었으므로 제중원의 교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활동했던 것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7년 벽지전도를 시작하였으며, 1887년에는 서울 ‘새문안교회’를 설립하고, 1889년에는 기독교서회(基督敎書會)를 창설하였습니다. 또한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조직의 회장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1897년에는 주간지 “그리스도신문” 도 창간하였습니다. 1900년에는 프리메이슨 조직에 하나인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하였으며, 1903년에는 프리메이슨 조직에 하나인 YMCA 이사로 선임되었습니다. 1915년에는 경신학교(儆新學校)에 대학부를 개설하였으며,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1916년 병이 생겨 미국으로 귀국했다가 애틀랜틱시티에서 사망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조선말에 우리나라에 입국하여 종교, 교육, 문화,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언더우드 선교사가 프리메이슨 조직과 연관되어 충성을 했다는 명백한 역사적 증거들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저는 주저없이 언더우드 선교사를 프리메이슨의 동조세력으로 간주합니다.

    그 증거들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들인 한국명 원한경(元漢慶, 언더우드, Underwood, Horace Horton, 1890.9.6~1951.2.20)에게서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원한경(元漢慶)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들로 서울에서 출생하여 미국에서 살다가 뉴욕대학교를 졸업하고 내한하였습니다. 원한경은 1912년 경신(儆新)학교의 교사와 자유주의 신학교인 조선신학교의 교수와 교장직을 역임하였으며, 1933년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의 3대 교장직을 역임하였습니다.

    원한경은 프리메이슨 조직에 하나인 ‘영국의 왕립 아시아학회 조선지부 부회장으로 지내면서 학회지(學會誌)에 한국관련 논문을 많이 발표하기도 였습니다. 원한경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일제에 의하여 미국으로 추방되었다가 1945년 8·15광복과 함께 한국에 돌아와서 프리메이슨 조직에 하나인 미(美)군정청의 고문직과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 고문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그의 큰 아들 원일한(元一漢, Underwood, Horace Grant, 1917.10.11~2004.1.15)은 연세대학교 교수로 활동했으며, 둘째 아들 요한(堯翰)은 종교 기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원일한(元一漢, Underwood, Horace Grant, 1917.10.11~2004.1.15)은, 1917년 10월 11일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조선 말기에 인천 제물포를 통해 입국하여 광혜원을 설립한 언더우드 선교사의 큰 손자입니다. 원일한은, 1939년 뉴욕 해밀턴대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1962년 동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이수하였습니다. 그는 1939년 뉴욕 해밀턴대학교를 졸업과 동시에 미국의 북장로교회의 파견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하여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42년 일제의 압력으로 강제 추방되었습니다.

    원일한(元一漢)은, 1947년 다시 자원 선교사로 한국에 돌아와, 영국왕립 역사학회 정회원(1938~F.R.H.S, 프리메이슨 조직)과 프리메이슨 한양랏지 멤버인 고 백낙준(白樂濬, 연세대학교 총장=1946~1960, 한양랏지 이름, George Baik) 박사와 함께 연세대학교 복구사업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50년 한국전쟁(6·25) 때는 미국의 해군에 입대해 인천상륙작전 당시 정보부에서 활동하였고, 1951년 7월 정전협정 때는 국제연합군 수석통역관을 맡아 정전협정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그 후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교수(1956~1978)를 역임하고, 경신중고등학교 이사(1956)와 연세대학교 총장서리(1960)직을 역임했으며, 중앙도서관장과 동 기관의 재단이사, 부산 일신병원 이사(1977), 한미교육위원단 운영위원, 한미협회 부회장, 대천수양관 이사장, 대한성공회 이사, 광주기독병원 이사, 광주기독전문학교 이사 등을 지냈습니다.

    원일한(元一漢) 박사는 짧은 기간 동안만 미국에서 거주하고, 평생을 한국에서 교육자로 활동하였습니다. 사망 후에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공원 가족 묘에 묻혔습니다. 국민훈장 모란장, 5·16민족상, 인촌문화상, 한미우호협회상을 받았습니다. 저서로는 “한국전쟁, 혁명 그리고 평화”(2002)가 있습니다.

    이제까지 살펴 본 것처럼 언더우드의 선교사 가문은 기독교로 위장한 프리메이슨 조직의 일원으로 활동했던 가문입니다. 역사의 깊이를 알지 못하는 한국교계의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영적으로 어둡고 우매하여 사탄의 종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칭송하고 있으나, 이것은 진실을 호도하는 반기독교적인 행위이며, 명백한 역사 왜곡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 역시 우리 카페가 한국 최초로 밝히고 있음을 아셔야할 것입니다. 연세대학교를 기독교계통의 학교로 착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기독교정보학회

    운영자 필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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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백낙준(白樂濬) 교수의 약력

    고백낙준 박사는 영국의 프리메이슨으로, 1958년에 프리메이슨 한양랏지에 두 번째로 가입했던 인물로 영문 이름은 George Baik이다. 프리메이슨 한양랏지에 처음으로 가입한 사람은 1957년 4월 24일에 가입했던 윤인식(In Sik Yun) 씨이다.

    고백낙준(白樂濬) 박사의 생애를 간략하게 논하면 다음과 같다.

    1895년 3월 9일 평북 정주 출생

    미국 파크대학 학사(1922)

    미국 프린스턴대학교대학원(1925)

    미국 예일대학교대학원 철학 박사 학위 취득(한국개신교 선교사)

    연희전문 교수(1927~ )

     

    영국 왕립 역사학회 정회원(1938~F.R.H.S) 프리메이슨 기관

    미국 역사학회 정회원(프리메이슨 기관)

    조선어학회 회원(1931)

    미국 캔사스 노회에서 장로교 목사 안수

    조선 예수교 장로회 경기노회(제 14회)로 이명

    조선야소교서회의 이사

    조선기독교연합의회(朝鮮基督敎聯合公議會) 이사(1930)

    연합공의회(聯合公議會, N.C.C) 찬송가 편집위원

    연세대 총장(1946~ 1960)

    한국 교회사학회 창립, 초대 학회장(1966년 2월 8일)

    대한소년단 총재(1948 ~ )

    제2대 문교부 장관(1950년 5월~ 1952년 10월)

    국사편찬위원(1952~ )

    서울시교육연합회 회장, 대한 YMCA재단 이사장(1953~1956)

    프리메이슨 기관

    제5대 대한교육연합회 회장(1956년 8월~ 1958년 5월

    참의원 의장(1960년 8월~ 1961년 5월)

    국토통일고문회의 의장(1969~  )

    외솔회 이사장(1974 ~1985)

    국회의원동우회 회장(1980~ )

    국정자문위원(1980~ 1985)

    제2대 대한민국헌정회(前국회의원동우회) 회장(1981 ~1983)

    학술원 원로회원(종교사) (1983~1985)

    1985년 1월 13일 사망

    호, 용재(庸齋)

    장지,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 /중국새계물결


    【 사탄 숭배 집단 프리메이슨과 공산주의(러시아 혁명 포함) 】


      ■ 프리메이슨과 공산주의

    (`일루미나티`의 창시자 아담 바이스하우프트, 1776년 5월 1일)

      "우리의 비밀을 밝힌다. 

    우리가 유일무이한 종교를 가진 척 했던 것은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를 없애기 위해서이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사악한 자가 악한 일을 할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듯 현자도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이는 비밀결사에 의하지 않고서는 달리 이루어질 수 없다. 

    이 교단의 특별한 목표는 기독교를 말살하는 것이고 모든 시민정부를 전복하는 것이다.


     ■ 기독교 파괴를 목표로 조직된 ‘일루미나티’

    공산주의(Communism)라는 용어는 1830년대 말 프랑스 혁명을 일으켰던 유럽 내 비밀조직인 ‘일루미나티’(Illuminati Freemason*광명회)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루미나티는 프리메이슨의 한 지파로서 18세기 후반 독일의 바바리아 지방의 한 대학에서 창설됐다. 

      

     이 조직의 창시자인 아담 바이스하우프트(Adam Weishupt)는 1748년 유대인 교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대학 재학 중 많은 책을 읽었으며, 특히 프랑스의 루소 같은 이의 철학 사상에 심취했는데, 

    그때 그는 기독교교리에 대해 회의적인 사상가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1772년부터 모교인 잉골슈타트(Ingolstadt)대학에서 종교 철학과 주임교수로 재직하면서부터 색다른 사상을 주창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은 후 프리메이슨의 조직법을 모방, 발전시켜서 ‘일루미나티’ 조직을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일루미나티는 기독교 전통에 따른 모든 제도에 반항하면서 자유사상을 불러일으킨 철학적 비밀 단체로서, 

    비밀조직인 프리메이슨(Freemason)을 모방해 엄격한 동지애와 비밀 엄수를 강조했다. 

     

    잉골슈타트에서부터 시작된 이 조직은 대단히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1779년에는 바바리아 (Bavaria)지방을 완전히 장악하고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이때 단원으로 가입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괴테, 쉴러, 모차르트 같은 유명인사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바바리아의 왕 요셉2세 까지도 단원이 될 정도였다. 

    당시 독일에서는 왕정이 아닌 공화국 정부 제도에 대한 토론이 활발한 상황이어서 이들은 모임에서 주로 종교철학과 일반 철학에 대해 토론했다. 

    이들은 주로 루소, 모렐리, 마블리의 사상 따위를 논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일루미나티는 평등주의와 합리주의를 근본 사상으로 내세워 많은 호응을 얻었다. 

     

    일루미나티가 항상 내세우는 모토(Motto)는 "자유·평등·박애"였다. 

    그러나 이들은 상급으로 올라갈수록 사탄 숭배의 속내를 드러낸다. 

    실제로 프리메이슨 최고 계급인 33도까지 올라갔던 마리 P. 홀(Manly P. Hall / 1990년 사망)은 그의 저서인 `The Lost Keys of Freemasonry`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일단 프리메이슨의 신비한 의식에 참여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세뇌되어 참된 신은 ‘루시퍼’(Lucifer)라고 믿게 된다. 

    프리메이슨의 입회의식 후 탈퇴할 경우는 살해를 당하고, 프리메이슨이 아니고서는 사탄의 교회 일원이 될 수 없으며, 

    사탄의 교회 일원이 됨은 사탄과 영매로서 접촉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와 종교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것으로 포장한 이들의 사조는 유럽전역으로 퍼져나갔으며 기독교와 대립이 생기면서 쌍방은 사회 전반에 걸쳐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그러나 당시 일루미나티라는 비밀조직의 존재를 몰랐던 대중들은 점점 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한편 바이스하우프트의 중심세력은 프랑스에 이미 세워진 프리메이슨 총종단에 침투해 패권을 장악했고, 

    1786년에 미라보 후작(Marquis de Mirabeau)은 자코뱅 파리대학에 일루미나티 종단을 세우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자코뱅파가 된다. 

     

    프랑스에 뿌리를 내린 일루미나티는 프랑스 혁명을 배후에서 조종했으며 이를 통해 일루미나티의 조직망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 현재 570만 명의 단원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이들 중 일부 그룹은 미국으로 건너가 `해골종단`(Skull & Bones)을 조직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일루미나티’, 러시아 공산 혁명 주도

    한편 바이스하우프트는 1830년에 이미 인간과 신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 프리메이슨 철학의 근간으로 삼았다. 

    이 사상은 후에 니체가 받아들여 체계화 시킨 후 세상에 발표했으며, 이는 다시 파시즘(Fascism)과 나치즘(Nazism)의 근간이 되었다. 

     

    일루미나티의 프랑스 활동을 보면, 범법자로서 망명해 왔다는 점을 강조한 ‘파리 범법자동맹’이 있었고, 

    그 산하 조직으로는 ‘공산동맹’(kommunistische Internationale)이 있었다. 

    특히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프랑스로 유학 와 있다가 이 조직에 가입했다. 

     

    당시 공산주의는 일루미나티 회원들 가운데서도 혁명적인 경향의 사람들이 선호하는 용어였으며 

    공산주의라는 용어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하면서 부터이다.

     

    한편 일루미나티는 프랑스 혁명 뿐만 아니라 ‘러시아 공산 혁명’에도 관여했다. 

    일반적으로 러시아 공산혁명은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노동자와 농민을 너무 탄압하고 돌보지 않은 나머지 굶주림을 못이겨 일어난 자연 발생적인 반정부 폭동이었고, 그것이 공산혁명으로 연결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여기에는 프랑스 혁명과 마찬가지로 그 진실은 따로 있다. 

     

    실제로 1814년 러시아가 나폴레옹 군대와 전쟁을 할 때 파리를 점령한 러시아 장교들은 이곳에서 일루미나티 사상과 접하게 된다. 

    귀국 후 이들을 중심으로 러시아에는 두 개의 프리메이슨 종단이 탄생하게 된다. 

    바로 ‘북극성종단’(the polar star)과 ‘남극성 종단’(the South Pole star)이 그것인데, 당시 이들은 수많은 부호들과 상류층 사람들을 입단시켰다. 실제로 ‘3면 작전’을 저술한 얀 코자크(Jan Kozak)는 공산혁명당시 러시아에는 3개의 세력이 있었다고 전한다. 

     

    첫째는 러시아의 황제(차르*Tsar)의 권위를 박탈한 임시정부이고, 둘째는 이를 뒤에서 조종하는 수많은 프리메이슨 계열 조직중 하나인 ‘브나이 브리스’(Bnai Brith / 1882년창설)종단, 리고 셋째는 행동대라고 할 수 있는 조직폭력배가 그 세력들인데, 이중 전체를 통솔하는 세력은 역시 비밀조직이었다고 전한다. 

     

    이외에도 영국군 첩보장교 출신으로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 전문가인 존 콜먼(John Coleman)박사는 

    지난 1997년 그의 저서인 ‘The Committee of 300’에서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주요 공격 목표는 기독교였으며 

    레닌, 트로츠키, 케렌스키의 배후에는 이러한 충격적인 사건들을 완전히 조종할 수 있는 능력과 수단을 가진 강력한 조직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임시정부의 우두머리로 사회주의자였던 알렉산더 케렌스키(Alexander Kerensky / 1881-1970)는 

    ‘브나이 브리스’ 단원이었으며 조직 폭력배들의 중심은 사회민주노동당의 ‘블라디미르 레닌’이었다. 

    한편 이들은 러시아 공산 혁명에 가장 앞장섰던 순수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임시정부 파에 대해서는 

    일단 혁명에 성공한 후 대부분 숙청 또는 유배를 보냈으며 이후 레닌파가 권력을 인계받아 악정을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공산주의는 헤겔의 변증법과 다윈의 진화론 등을 바탕으로 

    형이상학이나 신이 없이도 물질 스스로 존재하고 진화 할 수 있다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초하고 있다. 

    유물론은 정신세계를 일체 부정하고 종교, 양심, 도덕, 기존의 가치 등을 전면 부인하고 오직 혁명사상을 전파하며 동물적으로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주의이다. 

     

      ■ 공산주의, 무신론 사상 - 종교 말살론

     공산주의는 무신론 사상이며 종교 말살론이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을 노예로 만드는 아편”이라고 말했으며, 

    레닌의 경우 “현대 종교 특히 기독교는 노동 계급에 대한 억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전제 한 뒤 

    “교회는 노동자, 농민, 무산대중의 원수이기 때문에 교회부터 파괴해야 한다. 

    무엇보다 대형 교회부터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 엥겔스는 “정신은 물질의 생물학적 부산물”이라고 말했다. 

    이를 통해 그는 영혼의 존재를 부인하고 인간을 물질로 구성된 고깃덩어리로만 보았다. 

    이외에도 구소련의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흐루시초프는 

    서기장이 된 다음 “3년 안에 크리스천들을 다 없앤 후 마지막 한 사람 남은 것을 전국 TV에 보여 준 후 처치하여 크리스천들의 씨를 말려 버리겠다.”고 했다.

     

    한편 공산주의는 인류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학살을 저질렀다. 

    후버 연구소의 러시아 전문가인 로버트 콘퀘스트(Robert Conquest)박사는 그의 저서인 `The Great Terror(엄청난 폭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56년 2월 전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폭로하기를 1936년에서 1938년 사이에, 10월 혁명 이전에 공산당에 입당한 사람의 90%를 죽였고 그 후에 입당한 사람은 50%를, 군 장성 급의 60%를 처형했다” 

     

    공산혁명을 일으킨 후 소련은 귀족 및 군인, 지식인의 저항에 부딪쳐서 국내정치가 안정되지 못하고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켜 1941년 6월 바바로사(Barbarossa)계획에 의하여 소련을 침공함으로서 

    오히려 스탈린으로 하여금 공산혁명의 완성을 결정적으로 도와주는 격이 되었다.

     

     당시 스탈린은 혁명에 저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선별하여 애국이라는 명분을 주고 들을 징집하여 전선(戰線)으로 몰아넣어 이들 전부를 죽게 만들었다. 

    실제로 모스크바 전투시기인 1941년 6월 22일에서 11월 말까지 단일 전투에서 400~500만의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에서 제일 먼저 총알받이가 되어 죽은 사람이 바로 혁명의 방해가 되는 모스크바 인사들이었다. 

     

    소련은 전체적으로 2차대전시 군인 750만이 전사하였고, 군인부상 1400만, 민간인 사망이 1500만이 발생했다. 

     

    스탈린은 혁명에 방해가 되는 대상에 대해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무자비한 처형을 단행하였다. 

    그는 소위 ‘에조프시치나’라고 불리는 대학살로 세계를 경악시켰다. 

    스탈린의 군부 대숙청은 계속되어 5천명이 넘는 고급장교가 처형되었다. 

    이 숙청으로 5명의 원수 중에서 3명, 5명의 군사령관 중에서 13명을, 

    85명의 군단장 중에서 57명을, 195명의 사단장 중에서 110명을, 406명의 여단장 중에서 220명이 처형되었다. 

     혁명에 방해가 되는 군부의 고급 장교들을 두하체프스키 원수의 죄목에 뒤집어 씌워서 처형했다. 

     

    공산주의의 대학살은 중국에서도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1948년 장개석 군대가 모택동에게 패한 후, 

    대만으로 탈출을 못하고 본토에 남아 있는 옛날 장개석 총통의 군인들이 많았다. 

    들은 공산혁명의 저해요소로서 한국전이 발발하자 이 군인들 20만을 소집하여 한국전에 투입했다. 

    어떻게 하면 명분 있게 다 죽일 수 있을까? 그들이 택한 것이 바로 ‘인해전술’이었다. 

    말 그대로 UN군의 지뢰밭과 화망(火網)지역을 사람으로 바다를 만들어 공격을 하는 전술이다.

     

    혁명의 방해요소인 장개석 군대의 국부군 출신을 항미(抗美)전쟁이라는 구실로 자연스럽게 제거했다. 

    그 후 모택동은 전 세계가 경악한 홍위병의 문화혁명을 일으켜 

    공산주의 혁명의 적대세력인 지식층을 10대와 20대 초반의 공산주의 맹신자를 동원하여 철저하고 무자비하게 제거하였다. 
    폭력과 체형 및 체벌 학대 행위를 자행하고 대상자를 비참하게 참살하였다. 

    가난한 자가 지식인과 가진 자에 대한 투쟁은 항구적으로 계속되어야 하며, 이것은 전쟁으로 발전한다는 칼 막스의 계급투쟁 정의를 철저히 이행했다. 

     

    이때 피해를 입은 인사가 처형된 사람이 10만을 넘고 투옥(投獄) 및 고문으로 불구가 된 인사가 2억에 이른다. 

     

    ■ 칼 포퍼, “공산주의는 악마가 꾼 꿈” 주장

     2차대전당시 나치의 박해를 피해 뉴질랜드로 망명한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Sir Karl Riamund Popper)는 

    그의 저서인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통해 마르크스주의가 출발점에서부터 잘못되었다고 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념은 인류의 주요문제를 푸는 데 서로 협력할 동반자를 발견하는 대신에 

    적(敵)을 발견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특히 칼 포퍼는 마르크스가 기술한 것과 같은 자본주의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말해 공산주의는 날조된 것이며 ‘악마가 꾼 꿈’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사회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형태로 도래해야 한다고 예견했던 

    ‘역사주의적 관점’도 오늘날에 와서 오류임이 판명되었다. 

     

    칼 포퍼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역사주의자들의 생각을 도덕적으로 매우 그릇된 발상이라고 보았다. 

    과학자의 이론, 법관의 판결, 정치인의 정책, 경영자의 결정, 신학자의 교설 등 우리 인간의 생각은 언제나 잘못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것은 평범한 진리이다. 

    포퍼는 “우리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런 의미에서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적 진리, 영원한 지식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고 말했다.

     

      ■ 공산당에 의해 학살당한 1억 인구

      - 중국: 6500만 명
      - 소련: 2000만명
      - 북한: 200만 명
      - 캄보디아: 200만 명
      - 아프가니스탄: 150만 명
      - 아프리카: 170만 명
      - 월남: 100만 명
      - 동유럽: 100만 명
      - 남미: 15만 명
      - 공산주의가 집권하지 못한 나라와 국제공산주의 운동: 1만 명

     

    출처 : 공산주의 黑書(The Black Book of Communism-Crimes Terror Repression, 1997) 

     

    프리메이슨단이 실재하는 사탄숭배의 집단이란 것은, 언뜻 와닿지 않고 납득이 안가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체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 사탄의 지혜를 차지하고 휘두르다 탈퇴하여 비밀을 폭로한 세걔적으로 유명한

    한 여인의 회고담(악마가 사랑한 여인)을 보면 그것이 사실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한때 가톨릭에서도 그녀의 경험담이 사람이 아무나 쉽게 알지못하는 가톨릭의 특수한 영적보화 부분을 말하고 있었고 회심을 전제로 하고 있어서 악마의 현세적 역활을 압증하는 교육자료로서 추천된적이 있었으나 사탄은 결국 그녀의 회두라는 감명적인 드라마속에 한차원 더 속이는 영성을 갉아먹을 교묘한 술책이 벌견됨으로서 추천도서에서 빠지게됬습니다.

     

    이 여인의 프리메이슨단에서의 역할은  모짜르트의 유명한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밤의 여왕"으로도

    암시적 폭로의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옮긴 글


    

    읽어볼수록 여운이 남는 글!!!

    깡통

    빈 깡통은 흔들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속이 가득 찬 깡통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소리 나는 깡통은 속에 무엇이 조금 들어 있는 깡통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도,
    많이 아는 사람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무엇을 조금 아는 사람이 항상 시끄럽게 말을 한다.
    거울

    때 낀 거울 닦고 나니 기분 좋네.
    한번 닦으니 자꾸 닦고 싶네.
    말갛던 거울,
    때가 끼니 보기 싫네.
    한번 보기 싫으니 자꾸 보기 싫네.
    한번 마음 먹는 것이 참 중요하네.
    한번 마음 먹기에 따라 세상이 좋아지고 싫어지네.


    거울과 반성

    이 세상에 거울이 없다면
    모두 자기 얼굴이 잘났다고 생각하겠지.
    어떤 얼굴이 나보다 예쁘고
    어떤 얼굴이 나보다 미운지 모르겠지.
    사람들의 삶에 반성이 없다면
    모두 자기 삶이 바르다고 생각하겠지.
    어떤 삶이 옳은 삶이고,
    어떤 삶이 그른 삶인지 모르겠지.
    고민

    고민이란 놈 가만히 보니 파리를 닮았네.
    게으른 사람 콧등에는 올라앉아도
    부지런한 사람 옆에는 얼씬도 못 하네.
    팔을 저어 내쫓아도 멀리 날아가지 않고
    금방 또 제자리에 내려앉네.
    파리채를 들고 한 놈을 때려잡으니
    잠시 후 또 다른 한 놈이 날아오네.

    고집

    고집과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말했다.
    “보아하니 저 놈은
    제 멋대로만 하려고 하는 아주 버릇없는 놈이오.
    당신은 왜 저런 못된 놈을 데리고 사시오?”
    사람들의 말에 그는 한숨을 깊게 쉬며 말했다.
    “처음엔 저 놈이 어떤 놈인지 몰랐어요.
    알고 보니 저 놈은 힘이 무척 센 놈이에요.
    내가 데리고 사는 것이 아니라
    저 놈이 날 붙들고 놓아 주질 않는답니다.”
    꽃과 바람

    세상을 아름답게 살려면 꽃처럼 살면 되고
    세상을 편안하게 살려면 바람처럼 살면 된다.
    꽃은 자신을 자랑하지도 남을 미워하지도 않고
    바람은 그물에도 걸리지 않고
    험 한 산도 아무 생각 없이 오른다.

    구름과 세월

    무심히 떠가는 흰 구름을 보고
    어떤 이는 꽃 같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새 같다고 말한다.
    보는 눈이 달라서가 아니고
    서로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심히 흐르는 세월을 두고
    어떤 이는 빠르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느리다고 말한다.
    세월의 흐름이 달라서가 아니고
    서로의 삶이 다르기 때문이다.

    저절로 열리고 닫히는 귀를 가졌으면 좋겠다.
    남을 칭찬하는 소리엔 저절로 활짝 열리고
    남을 욕하는 소리엔 금방 닫히는
    그런 예쁜 귀를 가졌으면 좋겠다.
    칭찬 보다 욕이 많은 세상에
    한 쪽만을 가지더라도 그런 귀를 가졌으면 좋겠다.
    그 때

    사람들은 말한다.
    그때 참았더라면, 그때 잘 했더라면,
    그때 알았더라면, 그때 조심했더라면,
    훗 날엔 지금이 바로 그때가 되는데
    지금은 아무렇게나 보내면서
    자꾸 그때만을 찾는다.
    그렇기에

    무지개는 잡을 수 없기에
    더 신비롭고
    꽃은 피었다 시들기에 더 아름답지.
    젊음은 붙들 수 없기에
    더 소중하고
    우정은 깨지기 쉬운 것이기에 더 귀하지.
    나무

    태풍을 막아 주는 나무, 홍수를 막아 주는 나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맑은 공기를 만들어 주는 나무,
    나무 같은 친구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내가 먼저 누군가의 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
    너의 웃음

    너의 밝은 웃음이
    추운 겨울 따뜻한 이불이 되고,
    허기진 배를 채우는 빵이 되고,
    어둠을 밝혀 주는 등불이 되고
    좋은 꿈을 꾸게 하는 베개가 된다.


    내 손에 손톱 자라는 것은 보면서
    내 마음에 욕심 자라는 것은 보지 못하고
    내 머리에 머리카락 엉킨 것은 보면서
    내 머릿속 생각 비뚤어진 것은 보지 못하네.
    속까지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으면 좋겠다.
    크고 밝은 눈을 가졌으면 좋겠다.
    눈물

    보고 싶던 사람을 만나면 반가워서 눈물 나고
    아파 누워 있던 사람이 일어나면 좋아서 눈물 난다.
    가진 사람이 없는 사람 돕는 걸 보면 고마워서 눈물 나고
    가진 사람이 더 가지려고 욕심내는 걸 보면 슬퍼서 눈물 난다.
    다람쥐와 두더지

    나무에 잘 오르지 못하는 다람쥐는 슬픈 다람쥐다.
    땅을 잘 파지 못하는 두더지도 슬픈 두더지다.
    그 보다 더 슬픈 다람쥐와 두더지는
    나무를 포기하고 땅을 파려는 다람쥐와
    땅을 포기하고 나무에 오르려는 두더지다.
    따르지 않는다.

    게으른 사람에겐 돈이 따르지 않고
    변명하는 사람에겐 발전이 따르지 않는다.
    거짓말 하는 사람에겐
    희망이 따르지 않고
    간사한 사람에겐 친구가 따르지 않는다.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에겐
    사랑이 따르지 않고
    비교하는 사람에겐 만족이 따르지 않는다.

    딱하다.

    먹을 것이 없어 굶는 사람도 딱하지만
    먹을 것을 앞에 두고도
    이가 없어 못 먹는 사람은 더 딱하다.
    짝 없이 혼자 사는 사람도 딱하지만
    짝을 두고도 정 없이 사는 사람은 더 딱하다.
    땅과 정성

    땅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채송화 씨를 뿌리면 채송화를 피우고
    나팔꽃 씨를 뿌리면 나팔꽃을 피운다.
    정성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일에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나쁜 결과가 나타나고
    일에 정성을 들이면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

    때 문

    잘 자라지 않는 나무는 뿌리가 약하기 때문이고
    잘 날지 못하는 새는 날개가 약하기 때문이다.
    행동이 거친 사람은 마음이 비뚤어졌기 때문이고
    불평이 많은 사람은 마음이 좁기 때문이다.
    더하기 빼기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는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알지만
    좋은 생각에 좋은 생각을 더하면
    복이 된다는 건 몇 사람이나 알까?
    둘에서 하나를 빼면 하나가 된다는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알지만
    사랑에서 희생을 빼면 利己가 된다는 건 몇 사람이나 알까?

    더하기와 빼기

    세월이 더하기를 할수록 삶은 자꾸 빼기를 하고
    욕심이 더하기를 할수록 행복은 자꾸 빼기를 한다.
    똑똑한 사람은 더하기만 잘 하는 것이 아니고
    빼기도 잘 하는 사람이다.
    훌륭한 사람은 벌기만 잘 하는 것이 아니고
    나누어 주기도 잘 하는 사람이다.
     
    모시고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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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을 거절하는 자유
    (The Freedom to Refuse Love)

    흔히 지옥은 벌을 받는 장소로 그리고
    천국은 상을 받는 장소로 묘사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했을 때
    우리를 체포하거나 또는 잘못이 클 때는
    형무소로 보내는 경찰관이라고 생각하도록,
    아니면 우리의 모든 선행을 헤아려서
    크리스마스 때 우리의 양말에 선물을 넣어 주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쯤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찰관도 아니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자주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또는 순종하지 않는 가에 따라서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시기도 하고,
    지옥으로 보내시기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오직 사랑이십니다
    하나님 안에는 미움도, 복수심도,
    또는 우리가 벌 받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용서해 주시기를, 치유해 주시기를,
    회복해 주시기를, 끝없는 자비를 보여 주시기를,
    그리고 우리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탕자의 아버지가 그의 아들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 결정하도록 내버려두 것처럼
    하나님도 심지어는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할 수 있는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선택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것인가,
    개인의 선택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레드 헤링(red herring)

    ''레드 헤링(red herring)’이란 ‘붉은 청어’인데 이 말에는 ‘훈제 청어’란 뜻이 있
    습니다. 
    훈제 청어는 냄새가 지독합니다. 사냥감을 쫓던 개가 그 냄새를 맡으면 혼란을 

    일으켜 사냥감을 놓치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도망자들이 수색견(搜索犬)을 
    따돌리기 위해서갖고 다니던 생선이라고 합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레드 헤링은 논리학에서 ‘엉뚱한 데로 사람의 관심을 돌려 논

    점을 흐리는 것’을 지칭합니다.

    논쟁에서 논점을 흐리거나 주의를 전환시키는 것으로 자신이 불리할 때 화제

    바꾸거나 지엽적인 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논점일탈의 오류’ 중 대표적인 것입니다. 주의전환의 오류는 자주 의도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주의전환법이라고도 합니다. 넓은 의미의 주의 전환법은 부수적인 문제, 중
    요하지 않은 사항, 흔해 빠진 것, 관련성 없는 사항들을 강조하여 문제의 핵심
    로부터 주의를 따돌리는 기법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토론 주제로부터 주
    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무관한 문제를 끌어 들이는 ‘레드 헤링’(red herring)이 
    포함됩니다. 

    기독교 안티와 이단들이 ‘레드 헤링’(red herring) 기법을 교묘히 구사합니다.
    순진한 성도들이 ‘레드 헤링’(red herring) 기법에 속아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안티에 동조하고, 이단의 유혹에 넘어가게 됩니다.

    안티와 이단들은 기독교 교리가 잘못되었다고 논쟁을 걸어옵니다.
    이 논쟁에서 종교개혁 이후 400년 이상 수많은 신학자와 석학들이 토론과 

    논쟁을 거처 형성된 교리의 모순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 때 그들이 사용하는 것이 바로 이 ‘레드 헤링’(red herring)입니다.
    교리 논쟁을 하다가 교묘하게 일부 목사들의 비윤리적 행동, 교회의 비리를 

    거론하면서 신랄하게 인신공격을 합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든 순진한 일부 성도들은 교회와 목사들의 비리에 혐오감을 

    갖게 됩니다.
    훈제 청어의 냄새로 후각이 마비된 사냥개와 같이 ‘레드 헤링’(red herring)에 

    이성이 마비되어 여태까지 몸담아 오든 교회에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됩니다.
    특히 교회에서 부당한 일을 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목사 포함)은 치를 떨게 

    됩니다.
    이들 중 정의감이 강하고 교회에 충성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레드 헤링’(red 

    herring)에서 빠져 나오기가 더욱 어려워집니다.

    우리는 일반 성도들에게 ‘레드 헤링’(red herring)에 빠지지 않게 이 사실을 

    널리 알려서 기독교 안티에 동조하고, 이단의 유혹에 빠지는 일이 없게 해야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
    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9-12)


    원로 Essay 중에서
    성도교회 원로목사 예종규
    http://cafe.daum.net/y9144
    http://ye9144.hosting.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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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받은 은혜를 감사하라(휫필드)

    사람의 영혼 속에는 자신이 타락한 존재이며, 하나님과 소원한 상태에 있는 자라는 사실을 증명해줄만한 표시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사람들은 감사와 찬송의 임무를 거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을 낙원에 두셨을 때에는 그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풍성한 감정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복됨 안에서 살게 됩니다.

    1. 구속받은 자가 당연히 해야 할 찬양과 감사

    태초에 인간은 완벽한 존재였습니다. 이는 죽음 후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완벽한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종종 누릴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섬기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자들은 참으로 복된 영혼들입니다. 하지만 이 자들은 우리의 심령을 감화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입이 열려 여호와의 자애로우심을 노래하거나 그의 찬양에 대하여 말하는 때가 거의 없습니다. 찬양과 사모함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들에게는 결코 결핍되어서는 안 되는 임무입니다.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은 전 인류에게 매일 그의 복을 내리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런 사랑과 흠모를 나타내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들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다른 은총들도 마치 자기들의 공적으로 받은 것인 양 감사하지 않습니다.

    1) 감사하지 않는 것이 죄이며 , 그런 죄를 범하지 않도록 기도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타락한 인간을 신나게 만드는 가장 위대한 경향을 가진 이 감사와 찬양은 하나님의 개별적인 은총들에 대한 인식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 마음에 가까이 다가올 때 그것들은 더 큰 효과를 발합니다. 성도들은 그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그 사실들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임무입니다. 우리가 주 여호와로부터 수천 가지 복을 받은 자들 중에 그의 거룩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됩니까? 감사할 줄 몰랐던 문둔병자들에 대한 기록은 인간들이 얼마나 감사할 줄 모르는 지를 잘 예증합니다. 병에서 고침 받거나 심한 고통가운데서 해결함을 받고 정말로 다시 돌아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은 십분의 일도 채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는 이런 죄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것은 그런 자가 되지 않도록 주님께 기도하는 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것과 정반대의 성품보다도 더 절대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성도의 성품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7,18).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2)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기이하신 섭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세도 여호수아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이한 일을 행하셨는지를 항상 상기시켰습니다. 이 보다 더 좋은 사례는 없습니다. 실로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을 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스라엘을 백성들을 떠나지 않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그 동일한 하나님이 지금도 태양으로 낮을 달로 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는 물이 갈라져 육지같이 건너는 것을 본적이 없고, 왕과 그의 군대에 의해 추격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바다에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다른 배에 의해서 침몰 할 수 있는 위기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실로 무신론자들은 모든 것들을 행운으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기술과 선견지명으로 이곳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섭리하심이 모든 것을 관할하십니다. 바람과 바다고 그의 말씀에 잠잠케 되었습니다. 그분이 어떤 때는 가라고 명하시매 바람이 가고, 때로는 오라고 말씀하시매 바람이 왔습니다. 우리가 엄청난 광풍 속에서 그 파도를 타고 안전한 항구에 도착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이 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그를 찬송해야 합니다.

    2. 우리에게 복을 베푸시는 까닭

    1) 감사의 찬송을 받으시기 위해

    가장 약한 사람들의 아들들보다 못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그의 행사를 인하여 진정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분에게서 멀어지면 목이 곧은 백성이 되어 그분께 드리는 제사는 하나같이 가증스러운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오직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의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이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의 무한한 사랑의 끈으로 여러분을 단단히 잡아매 그에게 영광을 돌리며 순종하십시오. 여러분 스스로 그분보다 더 나은 주인을 결코 섬길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짐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를 섬기는 것이 가장 완벽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 우리에게는 엄청난 상급이 주어지고 이후에는 결코 썩지 않는 면류관을 주십니다.

    다른 주인들은 여러분들에게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고 경배하며 이 세상의 모든 왕국과 그 영광을 준다고 약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설혹 모든 세상을 준다 할지라도 여러분들을 결코 행복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속한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오직 그분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 분 없이는 여러분은 비참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 영적 삶을 더욱 증진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지만 또한 의로운 분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복을 많이 받을수록, 우리가 받은 복만큼 우리의 영적 삶을 진전시키지 못한다면 우리가 이후에 받을 저주가 그만큼 커집니다. 우리가 믿음의 진보를 이루지 않으면 그러한 일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함께 항해한 군인들과 그의 아내들, 그리고 선원들에게 주는 당부

    1) 행실을 선하게 하십시오.

    이제 여러분들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곳 주변은 엄청나게 많은 이교도들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방인들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지는 것’을 주의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부름에 합당하게 행동’하지 않는 다면 여러분은 간 헤롯의 군사들처럼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조소거리로 만들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땅에 들어온 다른 사람들보도 많이 누렸던 특권이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그들은 말씀의 기근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지나치게 많은 영적 양식으로 과식을 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여러분들에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영적 진보를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실패 할 수 없고 실패하기를 원치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은밀하게 저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하여 기꺼이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들을 더 많이 사랑함으로 인해 제가 사랑을 덜 받을지라도 그렇게 되기 원합니다.

    2) 옳은 일에 장부가 되십시오.

    낙심치 말고 강해지고 대장부가 되십시오. 민수기 13장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겁쟁이가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행동하십시오. 용감히 행동하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서 모든 난제들을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십시오. 더 나아가 여러분들 위에 세우신 지도자들에게 불평하지 않도록 주의 하십시오.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3) 혀를 주의하고 마음의 정결을 지키십시오.

    여러분들의 아내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드립니다. 결혼식 때 엄숙한 서약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모든 합법적인 일에 있어서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자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의 문을 굳게 지키도록 조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리하여 여로 남을 공격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사랑으로 행동하십시오. 그리하여 기도가 막히지 마십시오. 아이들을 둔 여성들은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아이들을 양육하는 일이 여러분의 주된 관심사가 되도록 하십시오. 거룩하고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삶이 되게 하여 정결치 못한 여자로 의혹을 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4) 영혼이 폭풍을 피할 수 있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진노의 폭풍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회개하지 않고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 폭풍은 우리를 순식간에 삼키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이 조심스럽게 항해하기 위해 나침반을 살펴보는 것처럼 믿음의 파선을 방지하고 선한 양심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인 말씀에 눈을 떼지 않기를 바랍니다.

    5) ‘오늘’이라고 말하는 동안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지혜로운 자가 되십시오. 오늘 듣고 있는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오늘이라고 말하는 동안 주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왜냐하면 병들었을 때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시기를 촉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취하실 때의 결단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약속에 따라 그분께 감사를 표현하십시오. 입술로만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으로 표현하십시오. 비록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분이기는 하지만 언제까지나 참으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흠모하시기 바랍니다.

    6) 하늘 아버지의 집에서 다시 만나기를 빕니다.

    여러분들은 유혹의 세상으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리석은 자가 될 준비가 된 자들로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하늘에 있는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결코 헤어짐이 없는 그 집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여러분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하는 데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필경 종말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경건과 일에 있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간직하십시오. 그리하면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서로 사랑하는지 보라고 하는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7) 입술로가 아니라 삶으로 감사를 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심령을 주시고, 이 말씀을 여러분의 실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면 크게 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분이 여러분들을 포구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험한 파도와 고통의 순간들을 다 이기게 하시고 여기로 도달하게 하셨기 때문에 할 일이 더 이상 없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에 도달할 때까지도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오직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할 것입니다. 찬양의 노래를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신 놀라운 인들을 노래하며 선포할 것입니다. 사람들의 다른 모든 노래와 더불어 그분을 찬양할 것입니다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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