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름이 의미하는 것

1.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의미

영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kabod는 ‘무겁게 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kabad, ‘무거운’을 의미하는 kaved에서 왔다. 이 단어들의 일차적인 의미는 무겁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명사 kabod는 무거움, 위대함, 풍부함을 의미한다(잠27:3,삼하14:26,와상12:11,시38:4,사30:27). 물체의 무게는 밀도나 크기에서 발생하는데 밀도의 의미로 사용된 것은 출19:6에서 볼 수 있고, 크다는 의미로 아주 자주 사용되는데, 사32:2,창5:9,왕상10:2등에서 볼 수 있다.

kabod는 보통 영광으로 번역되며,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용된다. 때로 이 단어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떤 내적이며, 고유한 것을 의미한다. 때로는 이러한 내적 영광의 발산, 전시 또는 전달을 의미한다. 때로는 전시된 것을 보거나 전달받은 사람이 이러한 것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느낌을 말한다. 또는 이러한 지식이나 느낌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구약의 kabod는 신약의 doxa로 번역되었다. 에드워즈는 계속해서 이 말들이 성경에서 사용되는 용례들을 고찰하는 데로 나아간다.

정의 1 영광은 내적인 탁월함을 의미한다.

영광이라는 말은 때로 내적인 것을 의미한다. 영광이 내적인 것 혹은 주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지칭하는 데 사용될 때, 이것은 일반적으로 탁월함, 존귀함 혹은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것 등을 의미한다. 영광이라는 말은 크기나 아름다움에 있어서 혹은 이 두 가지가 결합된 것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탁월함을 지칭하기 위해 아주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때로 영광이라 불리는 내적이며, 크고 탁월한 선은 선천적인 것보다 후천적인 것에 사용되기도 한다. 부유함이 때로 영광으로 불리우며(창31:1,에5:11,시49:16-17,나2:9), 크게 번성하고 일반적으로 충만한 선을 의미하는데도 사용되었다(창45:13,욥19:9,사10:3,16,17:3-4,21:16,마4:8,눅24;26,요17:22등).

정의 2 영광은 전시 혹은 발산을 의미한다.

(1) 영광은 내적인 위대함이나 탁월함의 외적 발현이다.

영광이란 단어는 성경에서 종종 내적 영광의 전시, 발산 혹은 전달해 줌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로부터 영공은 종종 빛의 발산에 의한 광휘 혹은 빛남을 의미한다. 고전 15:41에 해와 달과 별들의 빛남이 이들의 영광이라 불린다. 특히 영광은 빈번하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 사용되어진다(겔1:18,10:4,사6:1-3,요12:41,겔43:2,사24:23,60:1-2, 눅2:9,행22:11,고후3:7-8,3:18,4:4,6,히1:3,벧후1:17,계21:11,23).

(2) 영광은 때로 하나님의 충만하신 선과 은혜를 말한다.

영광이란 단어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때, 때로는 분명하게 하나님의 충만의 전달을 의미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풍성한 선하심과 은혜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엡3:16,1:7,2:7; 빌4:19,롬9:23,출33:18019). 에드워즈는 특히 요12:12-32를 주목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 앞에 높여있는 기쁨이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견디고 부끄러움을 이겨내셨다(히12:1-2). 하나님의 영광은 특히 그리스도의 영혼이 추구한 목적이며, 그리스도께서 얻기 원한 기쁨의 목적이었다(사53:10-11). 또한 동시에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사람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위대한 수난의 목적으로서 언급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발산과 열매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설명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 하나님의 영광이 아주 빈번히 발광체 혹은 빛의 원천으로부터 나오는 빛의 발광, 발산, 전달로 표현되는 것은 지금 살펴 본 것과 일치한다. 하나님의 내적 영광의 발산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적합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또는 하나님 안에 있는 무한히 충만한 선하심이 풍부하게 쏟아져 나오고, 풍성하게 전달되는 것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빛은 성경에서 아주 종종 일반적으로 위로, 기쁨, 행복, 선을 표현하는데 사용된다.

정의 3 영광은 탁월한 관점이나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

영광의 전시는 보는 사람의 관점을 포함한다. 영광의 나타남, 발산 혹은 발광은 눈과 관계가 있다. 빛 혹은 밝음은 시각과 관련된 것이다. 우리는 빛에 의해서 발광체를 본다. 또한 지식은 성경에서 가끔씩 빛으로 표현된다. 성경에서 영광이란 말은 아주 빈번하게 존귀를 의미하거나 함축한다. 그러나 존귀는 존귀함을 가진 사람의 존엄성과 탁월함에 대한 지식을 함축한다.

정의 4 영광은 찬양을 포함한다.

성경에서 영광과 찬양은 빈번하게 동의어로 사용된다. 찬양이란 말과 행동으로 존경 혹은 존귀를 표현하는 것이다(시50:23,22:23사42:8,42:12,48:9-11,렘13:11,엡1:6,12,14,빌1:11,고후4: 15). 영광이 성경에서 사용될 때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탁월함과 완전하심을 기뻐하는 마음의 존중과 사랑을 함축하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 또는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즐거워하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나 찬양은 보통 기쁨의 표현이다. 찬양은 기쁜 소리로 불린다(시66:1-2,96:4-5). 그리고 찬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심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포함한다.

2.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이름의 의미

(1)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영광은 성경에서 아주 흔히 같은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삼위일체의 제2위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주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모세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은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해 주겠다고 말씀하셨다(출33:18-19).

(2) 하나님의 이름은 때로 하나님 찬양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사48:9,렘13:11,신26:19,렘33:9,습3:20).

(3) 하나님의 이름은 때로 하나님의 선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출33:19,34:5-6).

(4) 광야에 나타났던 구름기둥에 보여졌으며, 성막과 성전 안에 있는 속죄소에 있었던 밝음과 광채가 종종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렘14:21에 의하면 성전 안에 있는 속죄소는 하나님의 이름 또는 영광의 보좌로 불린다.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은 동일한 것으로 말해진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목적에 대한 성경적 고찰(조나단 에드워드)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성적 순결

왜 성적 순결함을 유지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생활에 그토록 중요한가?

다섯 번째 질문

비록 사탄은 우리가 도덕적 순결을 지키면 기독교인의 삶에서 즐거움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거짓으로 위협하지만, 도덕적 순결은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즐거움을 제거하기 위하여 잘못 설계된 방법이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순결은 진정한 행복과 가족 관계를 오래 지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한없으신 지혜로우심에 그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회의 근본 진리에 대한 선언은 성화(악에서 떠나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와 “국가의 놀랍게 퇴폐되어가고 있는 도덕적 기준” (세속적인 것)에 관한 선언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성적 순결에 관한 하나님의 성회의 위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우리들은 도덕에 대한 성경적 기준이 가장 보편적이며 또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성경적 기준은 모든 세대에, 모든 사회에, 그리고 모든 문화에 적용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고린도와 로마에 적용이 가능했듯이, 뉴욕, 로스앤젤레스, 싱가포르, 그리고 바로 여러분의 지역사회에 적용됩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성(性, sex)으로 넘쳐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물어야만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이 점점 더 세속적이고 도덕관념이 없는 사회에서 살면서, 성적생활에 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만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agnostics)들이 행동하는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을 구별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 사람의 성적 순결에 의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性)이 넘쳐흐르고, 온갖 종류의 성적 표현이 허락되는 문화 속에서 성적 순결을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그것은 누가 정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구별하는 훌륭한 시험이 됩니다. 성적 순결을 유지하는 것은 인간 본연으로 할수 있는 최대의 노력 그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에서 구속하시고 성화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필요로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말했던 말씀은 현대의 타락한 사회에 대해서도 충분히 적용이 됩니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고린도전서 5:1).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6:9).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고린도전서 6:13). “음행을 피하라” (고린도전서 6:18).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고린도전서 7:2). “우리는 ... 간음하지 말자” (고린도전서 10:8). 첫 번째 편지에서 말했던 권면을 듣지 않았을 때,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또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나를 너희 앞에서 낮추실까 두려워하고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치 아니함을 인하여 근심할까 두려워하노라”  (고린도후서 12:21).
바울은 모든 개인들 속에서 용솟음치는 성욕의 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도발적인 의상, 성적 파티에 관한 공공연한 이야기, 그리고 성에 관련한 유머들은 정욕과 죄악을 불러 일으키는 강한 자극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성적 유혹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든지 상관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혼한 사람들에게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 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7:5) 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성관계를 갖지 않는 것이 배우자를 유혹과 죄악으로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혼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성적 순결을 요구했습니다.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고린도전서 7:8,9). 이러한 여러 말씀을 종합해 볼 때, 결혼 밖에서 성관계를 갖는 것은 허락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며,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부도덕한 성관계는 개인의 관계와 사회의 안전을 파괴합니다.

성적 부도덕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성경에 의하면 그것은 간통, 음행, 동성애, 근친상간, 매춘, 강간, 및 음욕을 포함합니다. 우리 주변의 대중적인 문화는 성관계를 갖지 않는 다른 모든 것들은 죄가 아니라고 큰 목소리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2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혼하지 아니한 더 젊은 청년들에게 하신 성경말씀은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디모데후서 2:22) 라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성적으로 흥분을 자아내게 만드는 접촉과 육체적 친밀함은 결혼한 두 사람 사이에서 그들이 성관계에 이르기 전에 자연적으로 진행하는 과정입니다. 결혼을 통하여 일생을 언약하기 전에 그러한 관계를 갖는 것은 사랑이라기 보다는 정욕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행복을 적절하게 배려해 주는 것보다는 자신의 쾌락을 위하여 가지는 이기주의적인 만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망과 믿음의 아름다운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원하여 책임있는 기독교인의 결혼생활을 갖기를 바라는 젊은 부부들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마음과 방황하는 생각을 다스리는 것이 연애를 하는 관계에서 성적 순결을 지키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만일 마음이 즉각적인 육체의 만족을 원하는 생각에만 사로잡히게 되면, 사랑과 책임있는 결혼의 기회는 크게 감소합니다. 그러나 만일 교제의 시간이 상대방의 육체를 탐구하기 보다는 그의 내면의 삶을 알아가는 시간으로 채워지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수 있는 영원한 기독교인의 결혼에 대한 가능성은 현실로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적으로 순결치 못함과 죄악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유혹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청년 디모데에게 적어도 세 번 경고했습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디모데전서 4:12). 그는 디모데에게 순전한 마음으로 여자를 대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하라” (디모데전서 5:2). 그리고 또 한 번,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디모데전서 5:22).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이 청결함으로 순결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상을 약속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태복음 5:8).

관심사:

성과 성적 자극에 대하여 현대 사회가 받아들이는 모습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심판하시고 멸망시키신 타락한 사회의 모습을 급속도로 닮아가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 기독교 청년들이 성적 순결에 대하여 전심으로 책임있는 약속을 지키는 것만이 자멸을 향하여 곤두박질하는 이 사회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과 관계에 대한 이교도의 악한 영향은 심지어 교회의 세계 속까지 미묘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혹시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이 그것을 하며”, 또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벌도 받지 않는다면, 아마도 성경적 기준은 구식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쉽게 이유를 말할 수 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도덕에 관한 하나님의 표준은 변화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그가 우리들을 보존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세우신 총명한 규칙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니다. 결혼전이나 결혼 생활 가운데 성적 순결을 지키는 것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님의 방법은 풍부한 유익을 가져다 주며, 그것은 흔히 성공적인 평생의 결혼 생활로 나타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성화와 세속적인 것에 대한 공식적인 기술은 근본진리에 대한 선언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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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주의란 무엇인가 - 민병석 목사

http://cafe.naver.com/kokkos/569

세대주의 종말론이란 무엇인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한때 종말론 해석이 '세대주의적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요한계시록을 연구하며 올바로 강해해 보려는 분들은 '세대주의적 종말론'이 무엇인가? 세대주의 신학이 요한계시록 해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대주의 해석에 경계심을 늦추게 되며 오히려 매료되어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세대주의'란 세대주의 신학을 의미하는데 이 신학은 18세기 영국의 신학자 '존 넬슨 다비'에 의해 제창되었으며 그후 '스코필드'에 의해 신학적 체계를 갖추어 미국의 신학계를 휩쓸었고 계속하여 전 신학계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세대주의 신학이란 말은 성경에 나타난 인류의 세대를 7세대로 나눠 세대별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나름대로 정립해 놓은 신학입니다.

'세대주의 종말론'이란 세대주의 신학에 의해 정립된 종말론을 말하는데 원래가 세대주의 신학이란 세대주의 종말론에 그 연구의 초점을 두고 출발한 신학입니다. 세대주의 신학은 종말론 해석에 있어서 대략 다음 몇 가지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가. 요한계시록은 다니엘서와 함께 유대인들을 위한 종말론적 계시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교회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
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메시야 왕국을 세우기 위해 오셨는데 유대인들이 그들의 메시야를 십자가에서 죽인 결과 그들의 메시야 왕국이 연기됨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 교회 시대이다.
다. 성경에서는 인류의 역사를 일곱 세대로 구분하고 있는데 교회 시대는 바로 여섯번째 시대에 속한 세대로, 7년 대환란은 교회 시대에 속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회복을 위한 종말적인 회개 기간이다.

교회시대는 '7년 대환란 전'까지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종말의 7년 대환란 이전에 '공중 휴거'되어야 하며 이 땅위에 임하는 7년 대환란을 겪지 않는다.

이것을 알기 쉽게 하나의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대주의 종말론의 '7년 대환란' 표

1세대 무죄시대
2세대 양심시대
3세대 인간통치시대
4세대 언약시대
5세대 율법시대
6세대 교회시대 (왕국 연기시대)

►7년 대환란이 있기 전 예수님의 공중재림이 있고 이 때 교회의 공중 휴거가 일어남
►7년 대 환란이 일어나고 이 때 유대인의 회복이 일어남
►7년 대 환란 이후에 예수님의 지상재림이 있음

7세대 천년왕국시대


위의 '표' 에서와 같이 세대주의 종말론에서는 '7년 대환란 전 휴거설'이 전제됩니다. 세대주의 종말론의 신학적 핵심 사상이 바로 '7년 대환란 전 휴거'에 있습니다. 이 사상은 세대주의 신학이 그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주장입니다.

세대주의 신학은 주로 종말론을 구심점으로, 그들의 종말론을 정당화시키려는 의도로 연구개발한 신학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들이 주장하는 요한계시록 해석은 대단히 특이합니다.

1) 계 6장의 흰말의 등장은 적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마 24장)
2) 계 7장의 144000명은 육적 유대인들을 의미한다.
3) 계 4:1절의 "이리로 올라오라"는 하늘의 음성은 공중휴거의 음성으로 이때 교회가 휴거되므로 계 4장 이후의 계시는 교회와는 상관이 없다.
4) 천년왕국에 육적 몸으로 들어가는 대상은 유대인 뿐이다.
5) 교회시대(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은혜시대)는 왕국연기 시대다. 만약 유대인들이 예수님 당시, 그를 영접하고 믿었더라면 그 때 '메시야 왕국'이 이루어져 더 이상의 인류의 역사는 없었을 것이며 교회시대 역시 존재치 아니했을 것이다.
6) 7년 대환란 시대는 유대인들의 회복을 위한 (메시야 왕국인 천년왕국을 이룰) 회개 기간이므로 교회와는 상관이 없는 기간이며 그러므로 교회는 7년 환란 이전에 공중으로 휴거된다.
7) 적그리스도는 대환란 기간인 7년 대환란에 들어갈 때 등장한다.

대게 이런 것들입니다. 물론 세대주의 신학자들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그들의 종말론 해석의 대요는 대강 이러합니다.

이런 세대주의 종말론이 한국초기의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 교계에 퍼지게 되어 한국 교회에서는 종말론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으며 그들의 종말론이 한국 교회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오순절 계통의 교단에 속한 교회(순복음교회도 포함)들이 이같은 세대주의 신학노선을 따르고 있으며 종말론 역시 세대주의 종말론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그들의 세대주의 종말론은 비 성경적인 요소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어 올바른 종말론 연구에 혼미를 주고 있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종말론뿐 아니라 성경전체의 해석이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가게 되며 '시한부 종말론'의 온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출처: 안개꽃 블로그



    지옥의 복음(The Good News of Hell) 지옥이 있는 것입니까?
    천국과 지옥에 관한 개념은 선악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는 데 자유로우면 우리는 또한 악을 행하는 데도 자유롭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네" 라고 대답할 수 있으면, "아니오" 라고 대답할 가능성도 또한 존재합니다
    따라서 천국이 있으면 지옥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유 의사에 따라 택한 사랑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신비한 일입니다 이 신비함을 지키기 위하여 선악을 구별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지옥에 관한 생각은 기쁜 소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로봇이나 자동 인형이 아닙니다
    로봇과 자동 인형은 선택권이 없으며,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결국은 그 끝이 동일하게 됩니다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척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보답으로 우리들로부터 사랑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사랑은 강요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자유 의사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지옥은 최후까지 하나님에게 "아니오" 라고 부정한 것에 대한 쓴 열매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침례교세계연맹 "베뢰아 가입 연기하기로"



침례교세계연맹(BWA) 총회가 김기동 베뢰아교회연합(이하 베뢰아) 측의 가입 청원을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교계에서는 그동안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이하 기침총회)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BWA측이 베뢰아 가입에 우호적이어서 이번 실행위에서 가입이 결정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컸는데, 연맹의 이번 결정으로 한시름 놓는 분위기다.

BWA실행위 총회는 6일 열린 회의에서 “베뢰아의 침례교세계연맹 가입 청원에 대해 더 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며, 이에 대한 연구 보고가 있을 때까지 청원을 연기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미국 워싱턴에 머물고 있는 한국 기침 총회측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BWA 측이 “베뢰아에 대한 한국교회와 한국 기침 총회의 의견을 존중하기에 이에 대한 가입을 연기했다”고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기침 총회는 한국 교단들의 베뢰아 이단성을 담은 연구서를 모아 연맹에 보내고, 베뢰아의 연맹 가입을 막기 위해 총회 총무를 회의가 열리는 워싱턴에 보내는 등 대응했으며, BWA 총회 내부 사정을 알고 있는 한명국 증경총회장도 자비를 털어 워싱턴으로 향했다.

이런 가운데 한편으로는 BWA 총회의 이번 결정으로 급한 불은 끈 상황이지만,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는 게 지배적 여론이다. BWA 임원단의 베뢰아에 대한 우호적 입장이 크고, 1990년대 중반 이후에 내놓은 베뢰아 연구 자료가 전무한 한국교회 상황에서 BWA 측이 지속적으로 최신판 연구 자료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 한국 주요 교단들이 베뢰아에 대한 이단 사상을 재연구하고, 발표하는 일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다.

BWA 총회 결과를 전해들은 한국 기침 총회측은 “한국교회와 주요 교단이 보다 구체적으로 베뢰아에 대한 이단 사상을 재연구해서 발표하고 지난 총회의 결의들을 재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한연희 ⓒ 뉴스미션/USA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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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제자도와 복종운동

최근에 성령의 부어주심은 예수가 신자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전세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 결과로 많은 옛날의 장애물들이 무너졌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함께 모이게 했다. 이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새로운 갈급함이 일어났다. 매일같이 기도와 성경공부란 목적으로 새로운 모임이 형성된다.

그러나 이런 모임들 중 어떤 모임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숙한 이해를 가진 지도자가 없다. 많은 경우에 이 사람들이 속해 있는 전통적인 교회의 목사들은 너무나 바쁘든지, 아니면 필요로 하는 사람을 상담하거나 도와주는데 유익한 오순절 경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훈련시키고 지도력을 개발하기 위한 필요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공인된 목적을 갖고 유명한 성경교사들이 목양, 제자도 그리고 권위에 대한 복종에 대하여 새로운 개념을 조장하고 있다. 옛적 충성으로부터 이탈된 많은 사람들과 자신들을 인도해 줄 사람이 없는 새로운 개종자들에게는 이러한 가르침이 좋은 결과처럼 보이는 것으로 진공사태를 메꾸어주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다른 경우에 있어서는 심각한 부작용이 있어 왔다. 파괴적이고 분파적인 많은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이러한 사례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성경과 교회와 신자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과 연관해 이러한 운동의 주장을 조사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성경

이러한 교사들 모두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충성심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과 행위에 대한 영감된 오류가 없는 법칙으로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면 성경에 의하여 판단되어야한다고 모두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현재 상황에 적용되어야 하며 우리의 매일의 필요와 문제에 대하여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현재 말해진 말 즉 레마에 보증되지 않은 권위를부여함으로써 그것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즉 로고스와 동등하다고까지 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이나 예언과 통역같은 성령의 은사가 신자들에게 구체적인 도움과 격려 그리고 안내를 제공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을 조사해 보거나 하나님의 말씀의 전체적인 의도에 의해서 그 말들을 판단하는 대신에 선택된 구절을 영해하거나 비유를 해석하여 자신들의 가르침을 합리화 할 때는 위험하게 된다.

그 한 예가 요한복음 10장을 해석하는 방법이다. 요한복음10:1-6에서 예수께서는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목자와 다른 데로 넘어가는 도적을 대조시키고 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림을 바꾸시고 평이한 말로 말씀하셨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요10:7,8) 또한 선한 목자와 같이 그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고자 하였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나는 문이다”라는 구절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가 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모든 사람이 문(door)인 목동(undershepherd)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러한 목동이 절도와 강도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와 축복을 빼앗고 신자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교사로부터 보호한다고 가르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목동이 그의 양을 평생동안 가르치고 훈련시키고 상담하고 안내하는 일에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많은 새로운 개종자가 누군가 자기를 잘못으로부터 보호하며, 진리로 인도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개인이 자기를 잘못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전적으로 다른 사람을 의지할 경우 그는 성경을 찾아보기를 그칠 것이며 거짓교사에 저항하기 위한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과 베드로는 거짓교사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신약은 그 해결책이 신자를 보호해 줄 인간 목자를 구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믿음의 선한싸움을 싸워야 한다고 가르친다.(딤전6:12)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믿음의 방패와 성경의 검을 사용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굳게 서야 한다.(엡6:10-18)

요한복음 10장을 더욱 세밀하게 조사해 보면 예수께서 문이 되신 것 같은 의미로 어느 사람이 문이라고 하는 개념은 성립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는 모든 양의 문이시다. 참된양은 그리스도 외에 어느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
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양들이 그를 알고, 그 분만이 자기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신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분은 양들의 필요를 아신다. 그분은 그 양의 음성을 듣고 안다. 이와같이 요한복음 10장을 취하여 개종자와 그리스도 사이
에 인간 목자를 끼어 넣는 근거로 사용하거나 인간 교사를 문으로 만들기 위한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전혀 근거없는 교리를 억지로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목자들)이 양무리를 쳐야 할 책임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늑대가 그 가운데로 들어가 양떼를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또한 그는 이 장로들이나 목동들 안에서도 사람들이 일어나 성경을왜곡하고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즉 그들은 얼핏 좋은 선생처럼 보이지만 어느 시점에 가서는 자기를 좇는 자들을 늘리기 위하여 성경을 왜곡할 것이다. 이와같이 신자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인간 목자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그는 성령의 인도아래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 오직 성령만이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신다.(요16:13)

교회

이 운동의 또 다른 모습은 교회에 대한 이 운동의 자세에서 볼 수 있다. 그 지도자들은 그들이 새로운 교단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현존하는 교회와 목자들을 존중한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성 교회와 목사들은 잘못되었
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행동을 설명하려고 어떻게 애쓴다 할지라도 이 운동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목자제도를 세움으로써 새로운 조직과 새로운 교단을 세우고 있다.

이것과 일치하여 이들 중 어떤 교사들은 그들의 역할과 교회의 역할은 더 이상 복음적이지 못하지만 이 지상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함으로써 천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약은 우리가 이 시대에 순수한 질서를 세울 수 있다
고 가르치지 않는다. 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하지만 추구할 때까지 곡식 중에 가라지도 있게 마련이다. 다니엘서 2장, 데살로니가후서 1장, 그리고 요한계시록 19장에서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 지상에 이루어지기 전에현재의 세상질서를 파괴하는 심판이 필요하다. 현 시대에 교회의 복음적 목적을 무시하는 이러한 후천년설의 주장을 피하여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 관계에서 새로운 제자도의 질서에 대한 모형을 찾지만 그들은 예수께서 그의 교회를 세우시기 전에 유대주의 배경안에서 행한 것이었음을 잊고 있다. 그 대신에 그들은 사도행전과 서신서들 안에서 교회의 모형에 대한 안내를 구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모든 상황에 대한 필요를 채워 주는 다양한 모형을 발견할 수가 있다. 이와 함께 교회안에서 권위에 대한 복종을 선호하여 민주주의적인 자세가 내리막길을 가는 경향이 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와 장로들이 예루살렘 교회와 다른 교회들에 대하여 권위를 행사하는 것처럼 추측된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과부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일곱 집사를 뽑을 때 사도들은 단지 그 자격요건을 말해 주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일곱명을 선택하여 뽑아줄 것을 부탁하였다.(행6:3,5) 행14:23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모든 교회에서 장로들을 안수하였는데(한글 성경에는 “택하여”라고 번역된:역자주) 안수에 대한 헬라어의 뜻은 “손을 들어 선택하다 혹은뽑다”라는 의미가 있다. 고후8:19 에서 “택함”이라고 한 것은 정확한 번역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도들이 주어이므로 행14:23에서의 “뽑다”라는 말과는 같은 뜻일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동사가 바울과 바나바가 장로에 대 한 자격을 설정한 후에(딤3:1-7에서와 같이) 선거를 행하였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지 않다고 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신약에서 한 가지 고정된 형태의 조직보다는 다양한 조직을 본다. 조직의 목적은 항상 필요를 충족시키고 사역을 이루기 위한 것이지 조직을 위한 조직이 아니었다.

예루살렘 교회가 다른 교회에 대하여 권위를 행사하였다는 근거는 없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에 보내었을 때 그것은 관심을 보여주고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내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바나바가
도움이 필요했을 때 조언을 듣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것을 주의해보면 더욱 이해하기 쉽다. 그는 다소에 가서 사울을 데려와 함께 일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바나바의 권위 아래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둘 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권위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후에 바나바는 기쁜 마음으로 바울이 지도자의 위치에 있도록 허용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은 어떤 사건에 대하여 바나바와 다투었으며(행15:36-41)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된 사람들과 베드로와 다른 일로 인하여 다투었다.(갈2:11-14) 그의 권위는 말씀이었으며 성령과 말씀에 의하여 인도를 받았다. 예루살렘에서 결례를 행하라는 야고보의 요청에 바울이 응한 것은 진리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지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 아니었다.(행21:17-26) 성경은 사랑 안에서 지도자에게 복종하며 피차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에 대한 관심과 배려의 문제이다. 성경은 또한 지도력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되어야 한다고 경고하셨다.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의 기업 위에 군림할 수는 없다.(벧전5:3) 바울과 그 일행은 다른 개종자들의 믿음에 대하여 주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그들은 다른 사람의 기쁨을 위해 돕는 자였으며 이 개종자들은 그들 자신의 믿음으로 서는 것이 기대되었다.(고후1:23,24) 베드로는 (벧전5:5) 젊은이들이 순복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바로 이어서 모든 사람이 서로 복종하고 겸손으로 옷을 입으라고 덧붙이고 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 위에 함부로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각 사람이 사단에 대하여 승리하기 위하여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자

신자의 위치와 관련하여 이 목자운동(Shepherding movement)의 경향은 성경을 지나치게 우화적으로 해석하는 것 같으며 너무나 광범위하게 비유화하고 있다. 이 사람들은 신자가 어리석은 양인 것처럼 말한다. 이것은 문맥이나 성경의 다른 부분에 의해서 입증되지 않는 극단적인 비유를 취한다. 성경에 신자는 양으로 비유되는데 그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리스도는 그를 인도하며 먹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다. 그는 다른 보혜사가 오셔서 각자와 함께 계시면서 주님께서 하시던 일들을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한 중보자이시다. 또한 성령을 통하여 다양한 은사와 사역들이 신자를 세우는 일에 사용된다.(롬12:4-8, 고전12장, 엡4:11-13) 이 목자운동의 강조점은 신자 자신이 목자를 발견하여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하여 그에게 복종하여야 한다는 것인데 엡4:16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관점의 지지자들은 이 구절의 의미를 우리가 마디 혹은 줄을 통하여 몸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또한 비유의 인간적인 측면을 너무 강조한 것이다. 이 문맥은 모든 사람이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지식의 일치에 이를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아무도 여러 가지 교회의 풍조에 밀려 이리 저리 방황하는 어린 아이와 같아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 함으로써 모든 일에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자라게 될 것이다. 인간의 몸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몸의 각 부분이 올바른 위치에 있게되면 각 부분은 그리스도로 부터 직접 받아서 몸은 자라게 되고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게 된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는 포도나무이다. 모든 가지는(모든 신자) 직접 그와 연결되어 있으며 직접 그의 생명을 받는 것이지 다른 가지를 통해서 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체 몸에 대한 다양한 사역의 한 부분으로서 교회 안에 목사와 교사를 두셨다(엡4:11) 이러한 사역을 거부하는 것은 이러한 은사를 주시는 교회의 머리되신 분의 지혜로운 공급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크리스챤이 인간 목자를 떠나서는 주님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든지 혹은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없다고 한다면 신자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잇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이며 성경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것이 된다.(히4:14-16)

이와 관련하여 목사는 사람들의 모든 계획과 결정사항을 알아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목자는 그 사람을 덮어줄(cover) 수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 용어는 사람들을 오도한다. 성경은 “덮는다”(cover)는 말을 피의 대속이란 의미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단번에 이루신 것이며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디모데에 대한 바울의 관계를 비교함으로써 합리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 사역자에 대한 나이먹은 사역자의 관계였을 뿐이지 목자와 신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한 모형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의 비유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복종의 비유이지 한 사람에 대한 신자의 비유가 아니다. 이것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비유를 잘못 해석하는 것이다.

결론 아마도 현재의 목자-제자 복종운동은 현실적인 필요에 따라서 성장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자유분방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권위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본적인 말씀의 권위를 그들에게 지적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우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우리를 다스리는 자들을 우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그들을 귀히 여기라는 바울의 충고를 그들에게 지적해 주어야 한다.(살전5:12) 비인격적인 우리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작은 모임의 밀접한 교제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것은 개교회 안에서 목자의 지도를 받아 지도자 훈련을 통하여 제공될 수 있다.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법은 환경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안에 나타난 것 같이 인간 지도자를 따름으로 해서 생기는 분파작용 은 피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은 복잡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가르치는 것과 훈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필요가 한 사람이나 한 교회가 공급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것이 문제이다. 성경은 개 교회 안에서 사역과 은사의 다원화를 요구하고 있다.(고전12장) 또한 성경은 아볼로의 경우와 같이 다른 사람을 데려올 수 있음을 말해준다.(행18:27,28) 또 다른 사람을 훈련받기 위해 성경 학교에 보낼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분파를 조장하는 죄는 가장 심각한 죄임을 깨달아야 한다.(롬16:17,18, 딛3:9-11) 오늘날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교회의 사명을 이루려고 한다면 보다 큰 몸으로서의 연합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성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일치된 노력은 많은 지역 교회 간의 협력의 효과에 대한 증언이다. 각각 개별적으로 일하는 소수 집단들이 하지 못하거나 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이 수행되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셔야 한다. 그분만이 양의 위대한 목자이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유일한 언약은 그의 피로 맺어진 것이다. 우리는 오직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다.(히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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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동목사.jpg


김기동은 2013년 1월 현재, 신장병으로 매주 피를 걸러 내고 있다. 심각한 병에 걸려있는 것이다. 과거에는 당뇨병 합병증으로 실명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왔던 적도 있다. 그는 '김기동의 당뇨병 교실'이란 강의도 한 적이 있다. 김씨는 모든 질병의 원인은 귀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귀신을 쫓아낼 생각은 하지 않고 병원신세를 지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기동은 귀신이 모든 질병의 원인이며(성서적 신학적 현상적 마귀론, p. 224), 병의 원인이 귀신이라고 말한 성경 구절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자기 견해나 고집, 다른 신학이나 교리, 또는 무지를 앞에 놓고 그 안경으로 이를 이해하려고 하므로 해답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귀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p. 28, 30)

 

그는 자신이 그런 부류의 사람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암으로부터 감기까지 그리고 위장병이나 기타 사소한 병까지 모든 병의 원인이 귀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자신이 약 8천여 명의 귀신들린 사람과 대화하면서 얻은 자료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귀신을 쫓으면서 귀신에게 그 정체를 물었을 때 죽은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은 그 증거이며 이것은 귀신이 불신자의 사후존재라는 현상학적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영적인 원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혼돈만 가중시키는 것이다.

 

김기동이 모든 병의 원인이 귀신이라는 표현을 다음과 같은 설명한다. 모든 질병은 일차적으로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호르몬이나 면역체계, 마음과 육체, 사고와 폭력, 음식과 같은 환경적인 요인이 첫 번째 이유이며, 둘째로, 귀신이라는 근본적이고 배후적인 원인이 얼마든지 병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이율배반적인 말을 한다.

 

성령이 충만하다고 해서 매일 철야를 하거나 계속 금식을 한다면 배겨날 장사가 없습니다. 육체는 질그릇이라서 잘 먹고, 잘 자지 않으면 깨지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육체를 함부로 다루고 학대하게 되면 당연히 병이 들고 고장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 잘 먹고 잘 자고 몸관리를 잘 하면 귀신은 역사할 틈이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김기동은 사람의 몸속에 들어와 있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를 움직여서 병이 들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자가 바로 귀신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똑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 중에도 어떤 자는 병이 들고 어떤 자는 건강한 경우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즉 몸속에 귀신이 들어와 있는 자는 병의 또 다른 원인이 발생했을 때, 귀신의 억압과 사역 때문에 병이 들지만, 몸속에 귀신이 들어와 있지 않은 자는 그 원인을 물리치고 이겨냄으로써 병에 들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귀신은 사람의 영혼과 육체의 중간인 신경계통에 거한다고 주장하는데 신경계통이 영혼과 육체의 중간이란 성경적인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또한 그는 어린아이들의 귀신들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유아에게는 의지가 없습니다. 그의 의지는 그 생모에게 있습니다. 어린 아이의 생에 관한 애착은 그 생모가 소유합니다. 따라서 생모의 의지 속에서 귀신을 추방할 때 어린 아니는 그 즉시 병고에서 해방됩니다. 유아라 함은 7-8세 이내를 말합니다. 그리고 8-9세부터 15세까지의 경우에는 그 생부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야 합니다. 유아의 의지는 생부에게로 의지가 전환됩니다. 그 다음 16세부터는 완전히 의지가 독립되므로 자신의 의지로서 쫓아내야 할 것입니다”(성서적 신학적 현상적 마귀론, p. 228-229)

, 7세 이하의 어린이에게는 의지가 엄마에게 있으므로 귀신이 그의 어머니의 의지로 들어오고, 8-15세의 어린이는 의지가 아버지에게 있으므로 귀신이 아버지의 의지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귀신이 영혼과 육체의 중간인 신경계통에 들어온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아버지의 의지에 들어온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이것은 너무도 터무니없는 주장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체험을 마치 진리인 양 가르치는 것이며 성경의 근거를 찾아 볼 수 없는 억지 주장이다.

 

김기동은 이렇듯 모든 병의 원인이 귀신이라고 해놓고 나서 디모데의 병에 대해 언급한 사도 바울의 말이 맘에 걸렸는지 다음과 같이 변명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들으면 펄쩍 뛸 일이다.

 

성경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디모데에게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는 기록에 지나치게 집착되어 병의 원인은 귀신이라는 말에 회의적입니다. 그러나 이는 교습받는 일꾼으로서 아직 영적 경험이 미숙한 디모데가 그의 지병을 처리하기에 미약했던 것을 말한 것입니다.(같은 책, p.235)

또한 병들어 약을 먹는 문제에 대해서도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모든 병의 원인이 귀신이라면 약을 먹고도 병이 낫는데 약이 귀신을 추방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약은 병을 완치시킨다기보다는 예방하는 것입니다. 귀신은 사람의 육체에 붙어서 병균을 가져오고, 또 계속 파송합니다. 귀신이 사람의 몸에서 떠난 다음, 병균만으로는 인체 내에서 스스로 견디기가 힘들게 되어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병균은 모두 사멸되고 맙니다. 병균을 보내는 원인은 영입니다.(같은 책, p.236)

 

나도 건강을 위하여 병원에 가거나 때로는 소화제를 복용하기도 한다. 건강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도 얻고 또한 지도받기도 한다. 이는 내가 밥을 먹으면서 찬을 곁들여 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귀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p.52)

암 덩어리는 수술하여 제거하고 암의 원인은 예수의 능력으로 추방한다면 재발 없이 완전해질 것이다.”(같은 책, p.53)

 

그러나 이러한 김기동의 주장은 현장에서 귀신을 쫓았는데 병이 낫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 회피라고 보면 된다. 성경에 나타나는 예수의 귀신 축사와 신유의 능력은 김기동이 주장하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르다. 예수의 신유와 귀신 축사는 이러한 구차한 변명이나 시간적인 간격이 없다

 

여기에 몇 가지 그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문둥병자를 즉시 고치셨으며(8:3), 백부장의 하인을 그 시로 하인이 나았으며(8:13),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즉시 고치셨다.(8:15) 신약성경 어디에도 밥을 먹으면서 찬을 곁들여 먹은 것과 같다는 김기동식의 신유는 찾아볼 수 없다

 

소경이 즉시 눈을 떴고, 앉은뱅이가 즉시 걸었으며, 죽은 자가 즉시 걸어 나왔다. 사도 바울의 경우에도 귀신을 쫓고 약을 먹여서 서서히 병균을 말라 죽인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즉시 나았으며,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가 즉시 걸었고 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따라서 김기동의 주장은 모두가 변명이고 자기 합리화이며 성경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무속적인 주장일 뿐이다. 그것은 김기동이 예수의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 뿐 다른 종교에서 행하는 퇴마술(退魔術)과 다름없는 것이다. 김씨는 다음과 같이 귀신들림과 헌금과의 관계를 주장한다.

  

헌신은 귀신이 속일 수 없는 실상이므로 귀신은 헌신하는 자들 앞에서는 거의 절망적이다. 철저히 하나님께 순종하고 감사하며 그가 명령하신 섬기는 도리를 다하라. 그리하면 귀신은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그의 계명을 지키며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자들에게서는 귀신들이 활동을 더 하지 못하고 조용히 잠복하거나 견딜 수 없어서 스스로 떠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을 하는 것은 늘 귀신을 제어하는 일이다. 인색하지 말고 주를 섬기는 기쁨이 충만하면 귀신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를 두려워 한다. ”(귀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p.188-189)

 

결론적으로 헌신예배를 드릴 때 헌금을 많이 내라는 소리이다. 우회적으로 말을 돌려서 하기 때문에 언뜻 들으면 무슨 말인지 잘 알지 못하게 된다.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은 예수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십일조와 각종 감사헌금, 그리고 건축헌금과 기타 수많은 이름으로 새겨진 봉투에 수시로 헌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귀신을 제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오늘도 부지런히 바치고 또 바칠 것이다

 

의사가 하는 일은 돈벌이지만 자신이 귀신을 쫓아주는 것은 돈벌이가 아니기 때문에 돈을 받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귀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p.146), 귀신을 쫓아 준 사람들에게 모세의 예물을 바쳐서 그것을 증거해야 한다는 주장은 참으로 사악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같은 책, p.190)

모든 귀신 축사와 신유는 오직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 만이 참되신 우리의 주인이시요, 우리 인생의 목자되시며 창조주이심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김기동식의 귀신 축사는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즉시 나으니라가 아니며, ‘의사가 수술로 병든 부위를 제거함으로써 병을 고치는 것은 귀신의 집을 허무는 것과 같다는 등의 구차한 변명과 핑계를 대면서 자신의 사적인 주장으로 점철된 베뢰아 운동에 사용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다.

 

김기동의 주장에 따르면 귀신은 다음과 같은 통로를 따라 들어온다

 

충격을 통해서, 부정적 관념을 통해서, 혈기를 통해서, 담배연기를 통해서, 내성적인 성격을 통해서, 자포자기하는 마음을 통해서, 불신자의 죽음을 슬퍼할 때, 제사를 지낼 때이다. 또한 다음과 같은 자신의 체험적인 진단을 통해서 귀신이 들어왔는지를 자가 진단할 수 있다고 한다. 유전으로 병으로 오는 것, 왕신단지 섬기는 집에 살면서 우환이 끊임없이 계속될 때, 차멀미, 배멀미 하는 것, 어두운 곳이나 골목에 들어설 때 머리칼이 쭈뼛할 때, 점치러 다니거나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하는 것, 죽고 싶다는 좌절감을 갖게 될 때, 앉거나 설 때 어지러울 때, 각종 신경질환도 귀신이 들렸기 때문이다.

 

김기동은 질병 뿐 만 아니라 모든 사고의 원인도 귀신이라고 한다. 무엇인가를 잘 잃어버리는 것도, 자주 화재를 당하는 것도, 매를 맞는 아내 속에(이때 때리는 남편은 귀신이 아니라 미혹의 영에 지배를 받는다고 함) 귀신이 있기 때문에 아내 속에 있는 귀신을 쫓으면 남편이 안 때린다고 한다. 또한 도둑질하는 것도 귀신의 역사이며, 연탄가스를 마시게 하는 것도 귀신이라고 한다.

 

김기동이 귀신을 쫓아내는 방법도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다르다. 서울 성락교회가 발간한 신유기도의 길잡이란 내용을 보면 축사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신유기도의 길잡이. 기초상식 4, 5)

 

목사가 묻는 말은 당신에게 묻는 말이 아니고 귀신에게 묻는 말이니 혼돈하지 마시고 당신의 의지로 대답하지 마시오. 귀신이 대답할 때는 큰 소리로 시원스럽게 대답하는 것이 좋습니다. 답답하게 얌전빼지 마십시오. 울고 싶을 때는 속이 후련하도록 하소연 하면서 실컷 우십시오. 정신이 아찔하며 주저앉거나 쓰러지는 순간에 귀신은 나가는 것입니다. 안 쓰러지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 이때 쫓겨 나가는 귀신을 자신들이 볼 수도 있습니다. 목사의 눈은 당신에게 붙은 귀신을 볼 수 있습니다. 명찰을 달고 죽은 귀신은 심지어 이름까지도 볼 수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 귀신은 더럽다, 심방 갔다가 집이 더러우면 집 청소해 주라. 귀신은 잔인하게 다뤄라. 만물의 찌꺼기다. 똥 같은 귀신아, 꾸짖을 수 있다. 잔인하게 욕설로 소리쳐라.”

 

귀신은 저주해서 꾸짖어서 내어 쫓는 것이다. 귀신 쫓아내려면 욕 잘하는 은사 도움 받으라 이놈’, ‘쌍년’, 목사가 경건치 못하다고 만류하면 귀신 못 쫓아

 

귀신을 미워하며 저주하고 추방하라. 귀신은 인격을 가지고 있기에 자기를 미워하고 저주하면 싫어한다. 귀신이 나가는 속도와 미워하고 저주하는 분량과는 정비례한다. 그 귀신이 아무리 부모나 친척이나 남편, 아내, 자식이라 해도 관계하지 말고 추방해야 한다.”

 

환자와 귀신의 의식을 분리시켜라. 귀신도 인격적 존재이니 의식이 있다. 마음을 평안이 하여 환자의 의식을 아래로 가라 앉히고 귀신의 의식은 위로 떠 올리게 한다. , 자기 의식을 밑으로 가라 앉히는 방법은 환자로 하여금 귀신을 미워하게 함으로서 귀신의 의식을 위로 밀어 올리고 심호흡을 해서 무심한 상태로 들어가서 자신의 의식을 가라 앉히고 긴장을 풀게 한다. 환자로 하여금 축사자의 말에 신경 쓰지 않게 하고 주위에 누가 있던지 도무지 의식하지 않게 한다. 환자가 귀신을 미워하는 정도에 따라 귀신이 나가는 시간이 단축된다.”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나가라고 명령하라! 당신의 머리에 손을 얹고 명령하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내몸에서 나가라! 나가라!힘있게 외치라! 하나님이 함께 역사하신다 이때 귀신의 의식이 눈을 통하여 나타나면 환자의 눈동자는 고정되고 깜박거리지 않으며 동공이 커진다. 이 때 축사자는 귀신을 꾸짖고 정체를 밝힐 수 있다. 예수께서도 축사하실 때 더러운 귀신을 꾸짖고 잠잠하게 하신 후 나가라고 명하셨다

 

이와같은 귀신 축사 방법은 김기동 개인의 축사 체험에서 나온 것으로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예수께서 귀신을 쫓는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치신 일이 있는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귀신 축사는 귀신들린 자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비밀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설명하고, 그로 하여금 예수를 영접하게 한 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내쫓는 것이다

 

그러나 베뢰아의 귀신 축사는 귀신 들린 자신과 귀신의 의지를 분리시키고 귀신을 저주하고 욕함으로 내어 쫓는 일종의 최면술이다. 또한 이런 축사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가 아닌 개인의 능력와 방법에 강조점을 둔 큰 문제가 있다.

 


출처: 세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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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론>1984년도 17주간에 걸쳐 김기동이 주일예배에 설교한 것을 책으로 엮어 놓았던 <성도가 알아야 할 하나님의 의도>라는 책과 별개의 내용이다. 김씨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도>는 그의 인간론과 구원론, 그리고 기독론 및 삼위일체론과 모두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핵심사상이다. <하나님의 의도론>1990년대부터 베뢰아에서 다루어진 소위 <후사론>이라고도 불리우며,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의도론>은 기독교 역사 2천년 동안 비밀리에 감추어졌다가 하나님께서 오직 자신에게만 계시한 참 진리이며, 자신이 최초로 공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진리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도라는 그림을 수 천 년 만에 처음 그려지는 그림입니다. 저는 다른 지식이나 다른 것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아는 데는 내가 나를 생각해도, 나같이 무식하고 무지하고 무력한 사람을 택해서 성경을 많이 알게 하시고, 정말 진리를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래서 이 하나님의 의도를 나에게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20009, 베뢰아 제23차 특별성회).

 

만일 김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아무도 하나님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김씨는 '하나님의 의도'라는 말을 자신이 최초로 만든 사람이라고 주장하는데, 사실  하나님의 의도라는 말은 베델성서연구원에서 다루어졌던 용어이다

 

다음은 기독교 2천년 역사를 통해서 최초로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김기동의 <하나님의 의도론>의 간추린 핵심 내용이다.

 

“<하나님의 의도(意圖)>이란 영원 전부터 홀로 자존하시는 하나님이 구상하시고 계획하신 후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들 안에서 성취된 하나님의 뜻을 한 폭의 그림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론>는 크게 아들의 보좌 상속’, ‘마귀진멸’, ‘인간구원이라는 3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각각 <1의 의도>, <2의 의도>, <3의 의도>라 칭한다. <1의 의도>는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 <2의 의도>는 하나님과 마귀의 관계, <3의 의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로 요약되며, 이 모든 것은 아들 안에서 성취된다

 

아들이 없이는 한 가지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 없으니, 예수의 공생애 자체가 <하나님의 의도>이다. 이와 같이 3중 구조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의도론>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 하늘과 각각 밀접한 관련을 맺고 진행된다.

 

<하나님의 의도론> 가운데 <1의 의도>아들의 우편보좌 상속’(2:5-11)이다. <1의 의도>는 그 목적 자체가 아들이 하늘 보좌에 오르는 것이므로 아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들이 하늘 보좌를 상속하는 것은 인간, 천사, 하늘도 지음을 받지 않은 영원 전에 작정된 것이며, 이것은 타락한 천사인 마귀를 멸하는 일이나,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는 일보다 선재(先在)하는 하나님의 뜻이다.

 

<1의 의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그 초점이 있으며, 그 관계는 사랑과 순종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셋째 하늘(영계 하늘, 천사들의 하늘, 신들의 하늘)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은 아들을 사랑하사 그를 후사로 세우시고 유업으로 주시려고 하늘(셋째 하늘)을 지으셨는데(1:2), 아들은 하늘을 상속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신 아버지 앞에서 죽음을 맛보는 존재로 자신을 낮추셨다. 그런데 성자 하나님은 이렇게 겸손한 아들의 모습을 보고 아들에게 다시 살 수 있는 계명을 주셨는데 요한복음 10:17-18절과 빌립보서 2:5-8절이 그 증거이다.

따라서 예수의 죽음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적 죽음의 차원 이전에 아버지의 계명으로 주어진 것이며, 인간이 지음 받기 이전, 아니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 오직 아들이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실 때 아버지께서 예비하신 하늘을 상속하기 위한 과정에서 이미 계명으로 주어졌다.

 

<하나님의 의도> 가운데 <2의 의도>는 마귀진멸이다. 영원 전에는 천사도 마귀도 없고 하나님만 홀로 계셨는데, 어느날 하나님은 아들을 후사로 세우시고 그를 위하여 하늘을 지으셨으며, 아들이 하늘에 들어갈 때 그를 수종들도록 천사들을 지어 하늘에 두셨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 들어가기도 전에 천사장 중 하나인 루시퍼가 여호와의 이름을 맡고 있는 여호와의 사자를 대적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때 천사장이 대적한 상대는 여호와의 사자라는 천사였지만, 그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임받아 하나님의 권한으로 일하던 천사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적은 곧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대적이요 하나님께 대한 대적을 의미했다.

 

만일 루시퍼가 하나님을 직접 대적했더라면 소멸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즉시 심판 받았을 것이나 그가 대적한 것은 여호와의 사자였고, 하늘의 주인이시며 심판의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직 하늘에 들어가시기 전이었으므로, 아들이 죽음을 맛보시고 하늘에 들어가시는 길에 합법적으로 심판하실 때까지 가두어 둘 필요성이 생겼다. 이 가두어 두는 곳이 바로 흑암, 우주, 음부이다.

 

이런 과정에서 하늘을 혼란케 한 천사들과 의의 천사들 간에 전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 타락한 천사장 루시퍼(사단)와 그를 따르는 하늘의 천사들 중 삼분의 일이 천사들의 하늘인 셋째 하늘에서 쫓겨나 둘째 하늘에 갇혔다

 

둘째 하늘에 갇힌 사단은 제한적인 권세를 부여받았는데 이때부터 사단은 흑암 권세자’, ‘음부의 권세자’, ‘어둠의 주관자가 되었고, 하나님이 흑암 가운데 궁창을 만드신 후부터는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되었다.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존재로 지음받은 아담을 꾀어 범죄케 함으로써 아담에게 주어진 권세를 빼앗았으며, 이때부터 사단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하는 마귀가 되었다.

마침내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후사로 작정한 우편보좌를 상속받기 위한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기 위하여 세상에 나타났다. 이때 아담을 꾀어 범죄케 한 마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지만 그가 죽음과 부활을 경험함으로써 마귀가 불법자라는 것을 온 천하에 드러났으며 이때 동시에 하늘에서 하나님을 대적한 사단에 대한 합법적인 심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시는 것은 본래 아버지 앞에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과정이었는데, 천사의 타락이 발생하자 하늘 보좌 상속을 위한 자신의 죽음에 마귀를 심판하기 위한 목적을 첨가하셨다. 예수는 그냥 죽으실 수도 있었으나, 마귀를 심판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셨고,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한 사단에 대한 물적 증거를 확보하는 사건이었다.

 

<하나님의 의도론> 가운데 <3의 의도>는 인간구원이다. 예수는 천사와 인간 등 피조물이 지음받기 이전에 하나님만 홀로 계실 때, 사람으로 오셔서 죽음을 맛보시고 하늘에 들어가시기로 이미 작정되어 있었다

 

본래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을 맛보기 위해 오시는 통로로 예비된 존재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대로 지음받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시기도 전에, 하늘에서 타락한 천사인 마귀의 유혹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그만 영이 죽고 말았다.

 

 결과 아담에게 속한 모든 인간은 원죄 아래 영이 죽은 채로 태어나게 되었으며, 이에 성부 하나님은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인간에게 은혜가 되게 하셨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이다.

 

아들의 하늘 보좌 상속이나 마귀진멸, 인간구원은 하나님의 뜻이므로 아들의 공생애를 통해 이미 성취되었는데 이중에 아들의 보좌 상속이나 마귀진멸은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은 개인의 의지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개인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자신의 의지로 예수를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만 구원이 은혜로 주어진다. 예수는 어떠한 형태로든 죽음과 부활을 경험함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신 후 하늘에 들어가시면 되는데, 자신의 죽음이 인간에게 은혜가 되게 하기 위해 피 흘리며 고난받는 죽음을 맞으셨다고 한다

 

창세기 322절에 나오는 ()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 중 하나같이라는 말을 우리 중 예수와 같이라는 뜻이다. 선악과를 먹은 순간 인간은 영원 전에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기로 작정된 예수처럼 선과 악을 경험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구원은 영원 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며 불과 2천년 전에 결정된 것이다.“

 

김씨의 이러한 황당한 주장은  애당초 주장하던 것과는 사뭇 다르며 시간이 지나면서 수정과 보완을 거듭하였다. 그는 창세기 2:17먹으면 죽으리라라는 것은 첫 사람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순간 둘째 아담인 예수가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성경적인 근거를 창세기 3:22에서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에서 찾는다. 여기에서 우리 중 하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 가운데 하나인 예수를 의미하며, 또한 선과 악이란 죽음과 부활을 의미하는데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영원 전에 인간의 죄와는 상관없이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도록 되어 있는 예수처럼 죽음과 부활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김기동은 삼위일체의 근거를 우리라는 단어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삼신론(三神論)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 창세기 126절에 나오는 '우리가'라는 의미는 사람들이 설교할 때 이해시키기 위하여 '우리'라는 말을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게 '우리'라는 말의 의미를 하나님의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라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세 분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삼신(三神)이 돼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억지로 그렇게 말한다면 안됩니다.”(베뢰아 22차 특별집회, 죽어야 사는 길, 설교 테이프 제1).

 

한편, 김기동의 <하나님의 의도론>은 빌립보서 2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5-8).

 

본문이 과연 김기동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도론>을 위한 것인가?  빌립보 교회는 개인적인 공명심을 가진 교인들 사이에 교만함이 팽배했었다(2:3-4; 4:2). 바울은 그리스도의 겸손하심을 예로 들면서 그들을 눈물로써 훈계하였다(3:18). 따라서 본문은 김기동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한 구절이며, 그리스도의 겸손함(The humiliation of Christ)에 대한 것이다.

 

김기동은 원래 자신의 <하나님의 의도론>의 성경적 근거를 요한복음에서 찾았던 자이며, 그러한 흔적은 얼마든지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요한복음서는 다른 복음서에 비해 탁월하다 할 수 있는 내용으로서, 하나님의 의도를 한 눈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장엄한 저작이다.”(한국신학, 시론)

 

그러나 김기동은 말을 바꾸어 바울서신인 빌립보서에서 <하나님의 의도론>의 핵심 사상을 추려내었다. 그에 따르면 바울서신은 성경이 아닌 성서이며 따라서 얼마든지 가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가감할 수 있다는 성서에 속한 편지인 빌립보서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찾았다니 그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도론>은 나중에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위에 열거한 <하나님의 의도론>는 앞서 지적한 바 1990년대부터 주장하기 시작한 것으로써 최초에 그가 주장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1980년대 베뢰아 강의 초기에 김기동은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신 것은 범죄한 천사를 심판의 날까지 가두기 위함이라고 했다.

 

루시엘 천사장 곧 사단이 하나님께 반역하였고, 그를 가두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는데, 사단의 형벌을 마치시게 되면 우주도 함께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죄인이 있음으로써 형무소가 생겼다가 죄인이 사라져 버리면 형무소도 사라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하나님의 의도, 27).

 

그래서 둘째날 궁창을 만드시던 날에는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없었는데 이것은 형무소와 같은 것을 만드시고 무엇이 좋았겠냐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예수의 성육신을 인간구원에 초점을 맞추면 본질을 오해한 인본주의이며 마귀진멸에 있다고 했다. 예수의 성육신이 인간 구원을 위한 첫번 째 목적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마치 돼지가 자기에게 밥을 주는 주인이 자기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주인은 오직 돼지를 키워서 잡아먹기 위하여 밥을 주는 것이지 돼지 자체를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랬던 그가 <하나님의 의도론>이란 주장을 하면서 말을 바꾸기 시작했던 것이다. 예수의 성육신의 초점을 마귀진멸과 인간구원에 두었다가 나중에 가서는 <그리스도 후사론>을 새롭게 주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락교회 교인들과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론>을 성령께서 기독교 2천년 역사상 최초로 김기동을 특별히 감동하셔서 계시한 참된 진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의 이런 주장으로 인해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바로 인간이 죄를 짓든 안 짓든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셔야 했다는 황당한 얘기가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황당한 주장은 자신의 상상과 추리를 근거로 한 '추리신학'(推理神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출처: 세이연

 

40. 타인을 위한 기도 (2) 만일 기도한다면 / 챔버스의 글들

타인을 위한 기도의 능력과 제한 

 

요한일서 5:16 

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어떤 사람이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지었는지 안지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오직 중보기도를 통해 알 수 있다. 만일 우리 스스로 이 문제를 판단하려 한다면 우리는 큰 실수를 범하게 된다. 종종 이러한 실수를 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관련 없는 추상적인 진리에 따라 행동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 그분보다 그분이 하신 일에 우리의 믿음을 두려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일이 잘못되는 것처럼 보이면 중보 기도를 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불평한다 

 

          자기 생각에 도취되어 맹신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나는 반드시 이 일을 해야 한다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보좌를 시끄럽게 할 뿐이다. 이러한 기도는 중보 기도가 아니다. 이러한 기도는 천사가 지나가면서 기도의 대접에 담기를 두려워하는 기도이다.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려는 자세는 없고 오직 자신의 뜻을 관찰시키려는 비정상적인 정열을 가지고 하나님의 보좌를 몰아 세우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도를 듣고 행하셔야 한다고 믿는 기도이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떤 일을 행하셨다고 해서 항상 똑 같은 패턴으로 일할 것이라고 제한하지 말라. 주님께서 과거에 어떤 일을 하셨기 때문에 다시 반드시 그 일을 하실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러한 제한은 종종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망각하고 과거에 그 일을 하셨으니 이번에도 반드시 또 그렇게 하시라고 강요하는 기도를 하는 경우이다. 우리는 아무런 잘못된 느낌도 얼마나 열심히 이러한 잘못된 기도를 드리는지! 열광적인 기도! 그러나 아무런 능력과 절제가 없는 기도! 이들은 자신의 열정에 너무나 사로잡힌 나머지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도 보이지 않더니 마침내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통해 이루신 구속은 모든 것을 포용한다. 따라서 죄와 병마와 인간의 한계와 죽음 등은 구속 안에서 다 해결된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속죄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주님의 때에  역사한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지금 세대에서 사람이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 문제를 허용할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을 주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자명하신 뜻은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다. 그러나 병마 및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들의 발생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 즉 속죄의 효력이 지금 우리에게 닥친 문제에 나타나는 것은 주님의 주권에 속해 있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의 결정은 내 뜻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있다.

  

          속죄의 효력을 오해한 사람 중에는 이제 속죄를 통하여 구원을 받았으니 나는 아프지 않겠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근본적으로 혼돈하고 있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치유는 저절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주께서 친히 간섭하시며 만져 주신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주께서 만져 주셔야 한다. 한편 죄로부터의 구원은 이러한 구체적인 주님의 간섭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속죄를 받아들였느냐에 대한 문제이다. 이러한 진리를 잊은 경우, 우리는 영혼 구원의 문제와 현실의 문제를 혼돈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바리새인적인 부담을 안겨주게 된다. (역자 주 - 챔버스가 살던 시대는 전세계적으로 전쟁이 많은 때였다. 일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쓰여진 글들이 많다. 그 당시 흔하였던 가르침 중에는 믿음이 있다는 사람이 왜 저렇게 고통을 당하는 것일까? 아마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다라는 바리새인적인 깨달음들이 있었다. 그래서 믿음이 좋아 보이는 사람은 아파도 아픈 척을 못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 재난을 당하면 그가 왜 재난을 당하는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구원 받은 자가 어떻게 저렇게 가난할 수 있고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식의 사고이다.)

  

          논리적으로 볼 때 바리새인적인 사고는 완벽하게 맞다. 즉 속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완전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들 말대로 속죄 안에서는 병마가 없어야 한다. 죽음도 없어야 한다. 죽을 필요도 없어야 한다. 인간적으로 제한 받는 일도 더 이상 없어야 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도 완벽해야 한다. 속죄를 받은 사람에게는 건강한 몸도 보장되어야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현재 부활체를 가르치는 자들의 사고와 매우 잘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현재 부활체라는 가르침이 얼마나 도덕적인 문제를 일으키는지! 이 가르침은 온 땅을 돼지 우리로 만들고 있으며 모든 기독교를 익살 또는 장난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대신에 자신들이 유추한 추상적인 진리를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생각에 도취된 맹신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러한 맹신이 없었다. 그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추상적인 진리로 만들어 맹신한 일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삭을 바치라.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 안된다. 만일 맹신자라면 이렇게 말하였을 것이다. 전에 말씀하신대로 그냥 하겠습니다. 나중에 하신 말씀은 사탄의 음성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어떻게 해 달라고 요구한 우리의 요구와는 정반대로 하나님의 섭리가 진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배워야 할 매우 중요한 교훈 중에 하나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이 시대 속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그 섭리가 나타날 것인지를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한 많은 기적들을 베푸셨다. 특히 병고침 같은 기적이 많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지금도 그렇게 하셔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도를 할 경우 나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명령하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아프면 기도하라. 기도하지 않으면서 구원 받았으니 아프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지 말라. 기도를 멈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대화가 차단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우리가 기도했으니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반드시 치유하셔야 한다고 주장하지 말라.  단지 간절히 기도를 드린 후에 주께서 주의 주권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맡겨라.

 

 

[출처] 40. 타인을 위한 기도 (2)|작성자 스데반 황/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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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젼을 예견하기(Anticipating the Vision)

모든 폭력을 극복하고, 그리고 모든 남녀노소가
자연과의 사랑의 조화 속에서 살아가는
평화로운 나라의 비전은 우리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실천되어야 합니다

현실 도피적 꿈을 꾸기보다는, 비전이 약속하는 것을
예상해 보는 것이 우리가 당면한 도전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할 때, 우리가 어린아이를 웃게 할 때,
우리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페풀 때,
우리가 꽃다발을 만들고, 가축과 야생 동물을 돌보며,
환경 오염을 방지하며, 우리의 집과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며,
그리고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의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노력할 때, 우리는 비전을
현실로 이루어지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끊임없이 비전을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비전이 살아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에서 비전이 이루어지게 하는 에너지를 발견합니다

이 아름다운 비전은 우리를 현실 도피자로 만들지 않고
현실에 진정한 참여자로 정진하게 만듭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비젼에 활력을 불어넣기 (Energizing Visions)

온 인류의 궁극적인 평화,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궁극적인 조화에 대한 커다란 비젼은 단지 유토피아적인 동화에 지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러한 비전은 인간의 마음 가장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갈망과 일치하며, 그리고 온갖 거짓과 기만을 뛰어넘어 드러내 보여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진리와도 합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전은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하고, 또 우리의 마음을 튼튼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비전이 있으면, 절망이 우리 눈앞에 다가왔을 때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으며, 우리가 삶을 포기하려고 마음먹을 때 우리는 용기를 낼 수 있으며, 의구심이 더 논리적인 태도로 생각될 때 우리는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비전이 없으면, 커다란 장애물과 고통스러운 실패를 극복게 하는 힘을 주는 우리의 성취 의욕이 무디어지고, 우리의 생활이 재미없어지며, 지루해지고 그 리고 결국에 가서는 파괴되어 버립니다
우리의 비전은 우리가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결코 받지 못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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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의 저자 어네스트 헤밍웨이.

그는 훌륭한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멋진 수염을 기르는 사나이로도 유명했다.

어느 날 미국의 한 위스키 회사 간부가 헤밍웨이를 찾아왔다.

헤밍웨이는 강하고 대담한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아

사냥과 낚시를 유달리 좋아했지만 술은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기에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조금은 의아해했다.

비서를 따라 들어온 손님은 헤밍웨이의 턱수염을 보고는 매우 감탄했다.

“선생님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턱수염을 가지셨습니다.

우리 회사에서는 선생님의 얼굴과 이름을 빌려 광고하는 조건으로

4천 달러와 평생 마실 수 있는 술을 드리고자 합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헤밍웨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정도의 조건이면 훌륭하다고 생각한 위스키 회사 간부는

기다리기 지루한 듯 대답을 재촉했다.
“무얼 그리 망설이십니까? 얼굴과 이름만 빌려 주면 그만인데….”

그러자 헤밍웨이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유감이군요. 전 그럴 수 없으니 그만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헤밍웨이의 완강한 말에 당황한 손님이 돌아가자

비서는 왜 승낙하지 않았는지를 물었다.
“그의 무책임한 말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야.

얼굴과 이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회사에

내 얼굴과 이름을 빌려 준다면 어떤 꼴이 되겠는가?

그리고 사람들이 맛없는 위스키를 마시며

나를 상상한다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일이네.”

글ㆍ《좋은생각》 편집팀 / 2001년 6월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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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요 8:30)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제자가 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참된 믿음을 나타내지 못했다. 일시적인 열정에 휩싸여 자신이 따르고자 하는 분이 누구인지 조차 깨닫지 못했다. 이런 자들에게 주님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 한마디 말씀에 많은 지혜가 담겨 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 우리는 복잡하게 얽힌 동기로 교회 문을 들어설 수 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듣기 좋지만 분별없는 칭찬들에 대한 기대. ‘자기 의’에 대한 만족과 새로운 자리에 설 때 대체로 느끼는 흥분 등, 새신자는 이런 감정들을 조금 씩 느끼면서 신앙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이러한 감격과 흥분에 힘입어 과거의 잘못된 습관들을 버리고 선한 것들을 덧입으며 편안한 마음으로 한 동안 거침없이 하늘나라를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신앙에 대한 새로움이 지나가고 교회 안에서 신선한 느낌과 감정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을 때, 세상과 사탄은 시련과 환난을 주기 시작한다. ‘초보’를 벗어난 신자들의 약한 부분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도 바로 이때다. 이때가 참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한 어려움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며, 동시에 주님의 말씀에 담긴 깊은 지혜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런 일은 한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것이며, 진정한 은혜를 경험하기 위한 시험대 역할을 한다.

다른 사람들의 신앙을 평가하는 경우에도 우리는 이 점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악에서 벗어나 선한 일들을 하게 된 것에 우리는 물론 감사해야 한다. ‘하루의 작은 일들’도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된다(슥 4:10). 그러나 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속하는 것이야말로 더욱 중요하다. 인내하며 지속하는 것이야말로 은혜의 가장 확실한 증거다. 처음에 열정을 가지고 힘차게 뛰던 것처럼 속력을 유지하며 나아가는 자만이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진정한 신자다.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

 

 

이탈리아의 로카세카에서 출생한 카톨릭신학자요 철학자이다. 아퀴노의 란돌포와 테오도라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5세 가량되었을때에 몬테카시노 근처에 있는 베네딕투스 수도사 밑에서 초보 학문을 닦기 시작했다. 또 나폴리대학에서 인문과목을 계속 공부하였다.

아퀴나스는 1224년 설교자단,곧 도미니쿠스회에 입단하기 이전에 이미 나폴리대학에서 인문과목에 능통하게 되었을 것이다.그는 도미니쿠스밑에서 공부하였다.1252년에는 파리대학으로 갔는데 이는 신학의 고급과정을 공부하기 위해서 였다.

그는 이 대학에서 강좌를 맡았는데 1256년까지는 신학자였다.1257년 이 대학의 교육가 되었다.

다소의 반대도 없지 않았으나,정식 교수가 된 아퀴나스는 파리대학에서 1259년까지 계속 가르쳤다.그후 아퀴나스는 로마 근교의 여러 도미니쿠스수도회에서 거의 10년간을 보냈다.이 동안 신학과 철학을 강의하거나,그 수도회에서 여러 자문 및 행정 직임을 수행했다.

1268년 가을에는 파리대학으로 돌아가,두번째 교수직을 시작하였다.그는 세가지의 논쟁에 개입하였다.즉 아퀴나스의 철학사상을 비판하는 일단의 보수적 신학자들과 싸웠으며 도미니쿠스수도사들과 프란체스코수도사들을 비판하면서 이들에게는 대학에서 교수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싸웠다.또한 아리스토텔레스 주의,곧가틴 아베로이스주이의 급진적 주창들과도 싸웠다.

아퀴나스이 많은 저작들이 대부분 이 시대에 나왔거나 완성되었다.이런 작업을 해내는 데는 비서의 도움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사실상 아퀴나스의 필체는 알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12723년 초에 프랑스의 리용으로 출발하였는데,이것은 교회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였다.악화된 건강으로 그가 자기의 출생지 근처까지 왔을 때 더 이상 여행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 해 3월 포사노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작들은 그가 교수 활동을 하던 20년동안에 나왔다.모두 라틴어로 쓰여졌으며,긴 신학 논문들이 대부분이고,신학과 철학 논쟁에 관한 기록들,약간의 성서 주석,12개의 아리스토텔레스 논문들에 관한 해설 그리고 뵈티우스와 위디오니시우스,익명에 대한 주석서가 더 들어 있다.이밖에도 40편 가량의 단문,서한,설교,철학이나 신학 주제에 관한 짧은 글들이 있다.아퀴나스의 철학 견해는 그의 저작 어디에서도 엿볼수있지만,특별히 철학자들의 관심을 끄는 논문들이 있다.

 

 

1. 특징

·알프스 산맥 북쪽 지역(현대의 벨기에와 네델란드 지역인 플랑드르와 독일지방으로 크게 나눌 수 있음 )

·부유한 시민 계급 형성(종교화임에도 현실이 사실적으로 반영된 새로운 미술을 발달)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지역의 비교

이탈리아지역 플랑드르지역

원근법. 명암범. 고전의 발견등 이론 강조 고딕 전통 고수

신흥 시민 계급이 주도했지만 교회나 광장과 같은 대중공간을 위한 거대한 규모의 미술품 선호
실질적인 경제력이 우선하여 비교적 소품이며, 사적이고. 친밀함을 보여주는 미술품 선호




랭브르 형제(Limbourg Brothers, Herman, Jean, Paul: 1370/80년경-1416년)
플랑드르 출신의 필사본 화가. 베리 공작의 미술품 제작에 종사했다. 그들이 공작을 위해 그린 <가장 호화로운 기도서>는 크기가 22.5×13.6cm밖에 안 되는 자그마한 기도서로써 12달의 생활을 글과 그림으로 나타낸 책이다. 그 중 5월은 사랑의 축제로 그려졌다. 5월의 색채인 녹색 옷을 입은 여인들과 호화로운 옷을 입은 남자들이 야외로 나가고 있으며 그들의 앞에는 음악대들이 축제의 흥을 돋우고 있다. 이들은 아마 1400년과 1410년에 결혼한 베리공작의 딸과 아들인 듯하여, 멀리 보이는 성은 그들이 결혼식을 행하였던 파리의 시테궁이라고 짐작된다.


가장 호화로운 기도서 5월(1414-16). 9월
9월은 포도수확이 한창인 과수원과 그들의 주인이 살고 있는 하얀 성(城)으로 그려졌다. 포도를 따고, 그들이 거둬들인 수확물은 모두 성으로 옮겨지고 있다. 성벽으로 굳게 둘러싸인 하얀 성은 너무나 환상적이어서 현실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귀족과 농노계급으로 대변되는 중세 말의 사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로베르 캉팽(Robert Campin: 1375년경-1444)

메로데 제단화(1427년경.메트로 폴리탄 박물관)
세 폭의 제단화 중에서 왼쪽의 무릎꿇고 있는 이들은 이 그림의 주문자 잉겔브레히트부부이다. 당시의 부유한 시민계급들은 귀족들을 모방해서 미술품들을 주문하였는데, 귀족들은 필사본이나, 금속공예품과 같은 값비싼 매체들을 주로 주문한데 반해서 이들은 제단화라는 매체를 선호했다. 제단화는 값이 쌀 뿐 만 아니라 그림의 장면에 자신들의 실제 모습을 넣을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림에 자신들의 집이나 생활도구들을 넣을 것을 계약서에 명시하였다고 한다. 제단화는 신흥 브루주아들의 세속적인 욕망을 표현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매체였으며, 이들의 요구는 마치 현장을 그대로 살린 듯한 사실적인 회화를 탄생시킨 것이다.
가운데 수태고지 장면이다. 창문은 위 아래를 따로 열 수 있는 방식이며, 나무로 된 천장은 격자로 엮어져 있다. 물을 담는 커다란 포트 옆엔 면 수건이 걸려 있고 마리아 앞의 테이블엔 화병에 꽃이 꽂혀 있다. 마치 이 시대 가정집의 내부를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마치 집안 살림도구와 같은 이들 소품들은 또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청동제 그릇에 담긴 물과 화병에 꽂힌 백합은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한다.
오른쪽 패널엔 목수일에 열중하고 있는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그려져 있다. 수태고지에 요셉을 넣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요셉과 함께 있는 여러 공구들은 예수 수난에 많이 등장하는 도구들이어서 오른쪽 패널은 예수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 광경 또한 당시의 목공작업실 같다다. 그리고 창 너머엔 꼭대기 층을 삼각형으로 한 북유럽 특유의 집들이 빽빽한, 바쁜 도시의 풍경이 참으로 정교하게 묘사되었다.



반 아이크 형제(Jan, Van Eyck 1390-1441. 벨기에출신)
궁중화가로 초상화에 정취가 넘치며, 세속적인 풍경속에 품은 상징주의적인 종교화

롤랭 수상의 성모상(1436년. 루브르박물관)
아예 그림의 안으로 들어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니콜라 롤랭(Nicolas Rolin: 1376-1462)이라는 주문자는 브르고뉴 공국의 3대 공작인 선량공 필립(Philippe de Bon)의 수상으로 부르고뉴 공국의 정치, 경제, 외교의 권력을 거머쥐었던 권력자였지만 그는 부유한 시민 계급 출신이었다. 아이크의 이 그림을 X-레이로 촬영한 결과 롤랭수상은 돈주머니를 차고 있었다고 한다. 그림이 진행되는 동안 이 돈주머니는 지워졌지만 그러나 그의 부(富)는 그림 곳곳에 나타나 있다.이탈리아의 제단화에서는 주문자가 아직 작은 크기로 묘사되었던 시대에 플랑드르에서는 이렇게 주문자를 그림의 주역으로 크게 등장시키는 것은 참으로 대담한 개인의 선전이었다.


아르놀피니부처의초상
부유한 상인들은 독립된 초상화도 주문하였다. 주인공 죠반니 아르놀피니(Giovanni Arnolfini)와 그의 부인 죠반나 체나미(Giovanna Canami)는 모두 이탈리아의 루카(Lucca)출신으로 브루주(Bruges)에 정착한 이후 가장 성공한 은행가였다. 아마 이러한 신흥시민들은 자신들의 고상함이나 신비감, 그리고 신앙심을 보여주기 위해 초상화가 필요했을 것이다. 단정한 자세의 부부는 갈색톤을 배경으로, 매우 성실하게 그려져서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 그림은 세속적인 관심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우선 아르놀피니는 값비싼 모피코트를 입고 있으며 창가엔 수입산 오렌지가 놓여있고, 침대 밑엔 터키산 융단이 깔려있다. 이 그림에서도 소품들은 물론 상징의 역할을 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강아지는 믿음을 상징하며 하나만 남은 샹들리에의 불빛은 이들의 결혼을, 그리고 침대의 붉은 색은 사랑의 행위를 의미한다.
이 그림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배경에 볼록거울을 배치한 반 아이크의 창조성이었습니다. 두 인물이 있는 방을 그림으로 묘사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공간적인 제약을 받게 되어있는데 반 아이크는 배경에 볼록거울을 놓음으로써 천장과 바닥, 창문 밖의 풍경에까지 시야를 넓히고 있습니다. 거울의 더욱 중요한 역할은 이 두 부부 앞에 있었을 화가 자신을 넣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거울 위 벽면에 "얀 반 아이크가 여기에 있었노라. 1434년"이라고 서명함으로써 반 아이크는 자신의 존재를 그림 속에 확실히 하였다.
이 거울 속의 화가 이미지와 서명에 대하여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을 증명하는 증인으로서의 화가라는 해석이며, 다른 하나는 회화 안에 자신을 넣으려는 화가 자신의 존재증명이라는 해석이다. 이 시대에 부각되고 있던 화가의 자의식의 발달을 염두에 둔다면 두 번째 의미가 더 잘 부합되는 것 같다. 실제로 이 시대 화가들은 회화의 효과를 높이기 위하여 참으로 많은 노력을 하고 대단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겐트의제단화 십자가책형 추기경초상 터어번의사나이
반데르파알레성모 마아가레트반아이크의초상

북유럽 미술(16세기 이후)

히에로니무스 보스(Bosch, Hieronymus. 1450-1516년) : 지옥의 화가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보쉬는 반 아이크 전통의 리얼리즘과는 매우 다른 환상적인 그림을 남겼다. 그가 그린 인간의 타락과 지옥의 장면은 소름끼치도록 끔찍하여서 그는 '악마의 화가, 지옥의 화가' 라고 알려졌다. 심지어 초기의 비평가들은 지옥의 광경을 소름 끼치게 묘사한 그를 비밀종파에 가입했을 것이라면서 이단자로 몰아붙였다.왜냐하면 그의 그림들이 종교적인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속세의 악에 이끌려 결국 타락하는 인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형식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형제회의 초정통주의 종교단체에 속해 있었고,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신자와 문하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용 그림이었다. 스페인 펠리페2세가 보스 작품의 최대 수집가였다는 점을 들어 그의 작품이 진지한 신앙에 의한 창조물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소묘가로서도 뛰어났던 그는 불가사의한 상상력이 산물이 뛰어난 묘사력으로 재현됨으로써 존재할 리 없는 광경이 보는 이의 마음 밑바닥까지 파고든다. 그야말로 20세기의 쉬르리얼리즘(초현실주의)의 원류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예수의 십자가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힘들게 걸어가고 있으며 화면 왼쪽 아래에는 군중 속에서 성 베로니카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이 그려진 천을 들어보이고 있다. 이렇듯 보스는 현존하는 그림들 중에서 가장 창의적인 화가이다. 물론 그의 그림들에서 보는 이런 몽환적이고 강박적인 시각들은 중세후반 고딕의 여명기에 여러 화가들을 통해서 나타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전작의 화가들과 달리 광기(狂氣)와 부조리(不條理)와 도착(倒錯)의 지옥도(地獄圖)이며, 합성·변모된 무수한 동물과 식물 비유기적(非有機的) 물체들로 화면을 꽉 메우고 날뛰는, 괴기하고 어두운 해학(諧謔)의 마술세계로 그의 화폭을 가득채운다.

접었을 때의 쾌락의 동산
플랑드르 전통의 세 폭 제단화로 그림은 흑백의 그리자이유로 그린 우주의 창조로부터 시작한다. 양쪽 패널을 열면 <쾌락의 동산>이 펼쳐진다. 닫았을 때의 태초의 모습은 안쪽의 왼쪽 날개인 낙원으로 이동하며, 낙원은 인간의 갖가지 탐욕이 그려진 가운데 패널을 지나 오른쪽의 지옥으로 이어진다. 아담과 이브의 창조는 질서 있고 평화로운데 비해 탐욕과 지옥의 세계는 무질서하고 기괴하다.

쾌락의 동산. (1505-15년경. 프라도미술관)
성욕.식욕.물욕 등 인간의 모든 욕망과 악덕, 그 악몽과 같은 이미지가 뒤얽혀 있는 이 작품은 사실 세 개로 구성된 연작의 일부다. 왼쪽 패녈에는 '낙원' 즉 에덴동산, 오른쪽 패널에는 죄의 결과로서의 '지옥'이 그려져 있다.
가운데 패널에 그려진 이 '쾌락의 동산'은 최초의 죄, 즉 원죄를 그린 것이다. 무시무시한 이미지로 가득 찬 '낙원'이나 '지옥'에 비해, 이 작품에 그려진 것은 오히려 사랑스럽고 순순한 이미지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 세상의 거짓과 위선, 욕정, 경박함 같은 악덕이 가득 차 있다
이 그림은 제단화라는 형식 때문에 교회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렇게 성적이고 기괴한 그림이 어떻게 교회에 놓여 있었을까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곤 했다. 그러나 1960년대의 새로운 연구에 의하면 이 그림이 1517년에 나사우의 앙리 3세(Henry Ⅲ of Nassau)의 브루셀 궁전에서 발견되었음을 상기해 볼때 1568년 스페인 군대에 의해 약탈당하기까지 왕의 개인 소장품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마 욕망을 절제하라는 교훈을 담은, 개인의 결혼과 관계된 작품이라고 유추할 수도 있겠다.

중앙패널의 부분
벌거벗은 인간들은 괴상하게 변형된 파충류나 거대한 식물들에게 갇히거나 괴롭힘을 당하기도 하며, 쾌락을 즐기는 남녀를 바라보면 거의 관음증적인 시선을 느낄 수 있다. 가운데 패널의 오른쪽 중간과 아래쪽을 보면 사과를 따먹으며 즐기는 남녀가 있으며 사과를 들고 춤추는 두 여자의 머리는 지혜의 상징인 올빼미로 덮혀있다.
오른쪽 패널의 부분1
여기에 그려진 수많은 탐욕은 분명 아담과 이브의 유혹이며, 타락한 인간들은 오른쪽 패널에서 벌을 받게 된다. 음악에 지나치게 탐닉한 사람들은 하프에 매달려죽는다.

오른쪽 패널의 부분2
1어떤 이는 머리가 새인 옥좌의 왕(?)에게 통째로 먹히고 만다.

오른쪽 패널의 부분3
멀리 유황불이 터지는 지옥 아래엔 커다란 귀에 눌린 버러지 같은 인간들이 꿈틀대고 인간의 영혼들은 우왕좌왕할 뿐이다. 정상적인 모습은 화면 가운데서 조금 위에 그려진 한 인간의 얼굴뿐이다.

이단의 지옥도
기독교에서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지옥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확대된 귀와 나이프는 남성의 성기를 나타내며, 또 나이프에는 반 기독교를 뜻하는 문자 M이 그려져 있는 등 수수께끼 투성이다. 그림 속에 보스의 자화상이 있다는 말도 있다.

그뤼네발트(Mattias Grunewaltl: 1470/80-1528) : 마귀의 화가
뷔르츠부르크 출생. 1508년 이후 마인츠 대주교였던 알브레히트 폰 브란덴부르크의 궁정화가가 되었으나 나중에 농민전쟁에 가담하였다가 1528년 할레에서 죽었다. 남아 있는 작품수는 적으나 종교적인 정열에 넘치는 대표작 이젠하임 제단화 하나만 가지고도 충분히 그의 신비주의를 살펴볼 수 있다.

이젠하임 제단화(1515년경, 콜마르, 운테르린덴박물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부분도
이젠하임(Isenheim)의 안토니오 수도원 병원 예배실에 놓여 있었던 제단화이며 양쪽 날개가 두 쌍인 다소 복잡한 구성을 지니고 있다. 제일 표면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있다.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받는 예수의 모습이 너무도 처절하다. 피부병이 돋아있는 몸과, 고통에 뒤틀린 손가락의 표정을 보면 보는 이까지도 아픔을 느낄 듯하다. 그의 왼쪽에는 실신할 듯 슬퍼하는 마리아를 요한이 부축하고 있으며, 그 아래엔 막달라 마리아가 오열하고 있다. 막달라의 붉은 옷과 흩날리는 금발머리, 그리고 그의 제스춰는 우리까지도 전율하게 한다. 요한과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오른쪽 세례요한의 붉은 색들은 검은 바탕을 배경으로 매우 표현주의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수태고지.예수탄생.부활
반으로 나뉘어 그려진 위 그림을 양쪽으로 열면 제일 왼쪽부터 수태고지, 예수 탄생, 예수 부활로 이어진다.

성 안토니오의 유혹
가운데 패널을 다시 열면 오른쪽 패널에 그려져 있다. 수도하고 있는 안토니오에게 온갖 마귀가 그를 괴롭힌다. 용머리의 괴물은 머리칼을 잡아 당기고, 올빼미 형상의 괴물은 몽둥이를 내려친다. 음산하고 파괴적인 배경에 무너진 건물 위를 날아다니는 기괴한 동물들이 특색이다.
뒤러 ( Albrecht Durer 1471.5.21~1528.4.6)
이탈리아여행을 하면서 르네상스와 독일고딕성향이 만나 북구양식의 인체표현과 합리적 공간표현을 이루게 되었다. 25세때 이탈리아를 방문한 뒤러는 이탈리아의 회화양식 뿐 아니라 미술가의 개념, 지위까지도 북부에 전하고자 하였다. 베네치아에서 돌아온 다음 그의 그림은 소용돌이 치는 필세와 몸부림이 가득찬 환상적인 장면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인체에 있어서 이탈리아 거장들의 업적이었던 근육이나 동물들의 움직임에서 비롯되는 근육이완, 배경에서도 섬세한 끝마무리까지를 이루고 있다. 고전 미술이 부여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인체의 표현에도 관심을 쏟은 뒤러는 무엇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인가를 알기 위해 인체의 배율에 대해 연구하였다
어떤 예술가보다 끈기있고 충실하게 자연을 묘사하였는 데, 이는 성경의 이야기를 더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마틴 루터의 신봉자가 되어 새롭고 위대한 프로테스탄트 예술을 창조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종교계 지도자에게로부터는 우상숭배의 위험등의 이유로 환영받지 못했다.
뉘른베르크 화가 뒤러는 근사한 외모에 모피 옷을 즐겨 입는 멋쟁이였다. 사치만 부리는 게 아니라 그림도 곧잘 그렸다. 베네치아에 갔을 때 그의 붓놀림을 본 벨리니가 화들짝 놀랐고,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는 황제에 버금가는 국빈 예우를 받았다. 그 당시 화가로는 드물게 부와 명예를 누린 셈이다. 당대의 예술가, 인문학자와 교류했고, 나중에는 황제가 초상화 좀 그려달라고 뉘른베르크까지 찾아와 모델을 설 정도였다. 뒤러가 올라가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합스부르크 황제 막시밀리아누스가 사다리를 붙들고 시중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동박박사의 예배>

폐허를 무대로 하여 오른쪽에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성모를 좌단에 배치하여 성보자와 세박사의 만남을 보다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북방 특유의 섬세한 자연묘사에 이탈리아적 원근감을 가미하여 밀도있는 화면을 형성하고 있다. 북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뒤러는 이탈리아에서 유행한 과학적인 원근법과 완벽한 인체표현을 가증하게 했던 해부학에 근거한 세밀한 인물묘사로 유명하다. 1504년은 뒤러의 목판화 연작 '성모전'이 완결된 해이며, 당시 열중하고 있던 성모화 시리즈의 야심작이 바로 이 그림이다.

아담과이브
1494년과 1505년 두 번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에서 그는 미술을 통하여 인문주의적 세계를 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후 그린 그림으로 더 이상 원죄를 지은 성경의 인물이 아니다. 등신에 가까운 크기로 그려진 아담과 이브는 조화로운 비례와 경쾌함을 지닌,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델이다.

1498자화상 1500 자화상
그는 베네치아 체류 중 독일의 인문학자 친구인 피르크이머(Pirckheimer)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기에서 나는 신사이다"라고 쓰고 있다. 즉 뉴렘베르그에서의 화가는 아직도 목수나 양복쟁이와 다름없는 장인이지만 베네치아에서의 화가는 대우받는 신사라는 뜻이다. 그는 자의식이 강한 화가였다. 그의 나이 26살 때 그린 자화상에서 그는 자신을 잘 차려입은 신사로 나타내더니 2년 후 28살 때의 자화상에서는 자신을 예수의 형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왕이나 예수의 상에 주로 사용하는 정면 자세에 손가락으로 바로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원근법 연구(1525년, 목판화)
그가 남긴 수많은 드로잉과 판화 중에는 인체 비례와 원근법에 대한 연구가 포함되어 있다. 비스듬히 놓여있는 류트를 손잡이 쪽에서 보면 화면에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에 대한 연구이다. 화가와 사물 사이엔 한쪽을 움직일 수 있는 화폭이 놓여있고, 화면에서의 사물의 형상을 정하기 위하여 화가의 눈과 사물을 잇는 선이 화면 위치에서 만나는 점을 찾아내고 있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배운 미술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 방법에 매료되어 있었던 것이다 .
4인의시도
그의 생애 말년에 그린 이 그림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의 결산 같다. 좁고 긴 두 폭의 화면은 두 사도의 긴 옷이 가득 차지하고, 나머지 두 사도는 거의 얼굴만 그려졌다. 단색의 옷은 거대하고 단순하며, 명암처리에 의해 입체감이 풍부하다. 옷은 이렇게 이탈리아 르네상스전통의 화법으로 그려졌으나 얼굴의 사실적인 묘사는 미화시키지 않고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북구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왼쪽부터 붉은 옷의 요한과 열쇠를 들고있는 베드로, 복음사가 마르코, 그리고 칼을 들고 있는 바오로이다. 그러니까 그림은 요한과 바오로를 중심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이러한 네 명의 구성은 종래의 종교화에서는 거의 없는 선택이었다. 더구나 이 그림은 교회를 위해 그린 것이 아니고, 그가 주문 없이 스스로 제작하여 뉴렘베르그의 시청 위원회에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독일지역이 루터의 종교개혁에 휩싸였고, 뉴렘베르그시는 막 루터주의를 인정하였음을 생각하면 이러한 분위기와 관계된 것은 아닐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뒤러는 루터를 '참으로 큰 고뇌에서 자신을 구해 준 크리스챤'이라고 존경해 왔으며 프로테스탄트가 거론한 성상 숭배의 금지에 대해서도 마음속 검토하고 있었다. 요한은 루터가 가장 좋아하는 사도이며, 용감한 바오로는 프로테스탄트의 영적인 아버지임을 고려하면 루터주의적인 주제의 선택이며, 이를 시청에 선물하였음은 시와 루터교의 평화로운 해결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 일수도 있겠다.

-노성두의 미술이야기에서-.

<멜렌콜리아>
뭣하나 부러울 것 없던 뒤러는 마흔 셋에 아주 골치 아픈 그림을 한 점 그린다. 훗날 `미술사학의 우울한 저주'로 일컬어질 손바닥만한 동판화였다. 제목부터 우울하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멜랑콜리의 우의일까? 그러나 중세 이후 알려진 멜랑콜리의 여러 유형 가운데 달콤한 우울, 나태한 우울, 꿈꾸는 우울 어느 것하고도 안 어울린다. 그냥 머리 총명한 학생이 눈빛을 반짝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다. 그림 해석은 여러 갈래가 나왔다.

'I'는 숫자일까? 준말일까?

먼저 멜랑콜리를 아리스토텔레스 기질론과 연결해서 흑담즙의 우울하고 비관적인 성격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자 박쥐 날개에 새긴 멜렌콜리아 I에서 `I'이 숫자 1인지 라틴어 IRE의 줄임말인지가 논란이 되었다. 1이면 동판화 연작 첫 그림일 테고, 줄임말이면 `멜랑콜리, 꺼져라'다.

멜렌콜리아는 멜랑콜리?

뒤러의 동판화가 네테스하임의 아그리파가 쓴 <비밀 철학>에 나오는 세 단계 멜랑콜리를 설명한다는 해석도 나왔다. 울부짖는 박쥐가 표상하는 공포, 절망, 슬픔, 고독 따위 부정적인 우울로부터 날개 달린 우아한 알레고리의 여성이 신성의 비밀을 투시하는 상위 단계까지 차례로 재현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아그리파가 흘려 쓴 수기원고를 미리 돌려읽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정작 책으로 나온 건 동판화보다 19년이나 늦고, 그림 중앙 사다리 디딤목이 아그리파가 내세우는 천체 구성처럼 여섯 개가 아니라서 주장의 설득력이 바랬다.

혹시 연금술 비밀이 감춰져?

돌을 깎은 다면체 뒤쪽에 곤로와 집게가 연금술의 비밀을 감추고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박쥐 꽁무니에 뱀 꼬리가 달렸고, 밤에 뜨는 무지개에다 마방진의 숫자 배열이 기막히게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뒤러가 연금술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는 기록이 없고, 비교할 만한 작품도 남기지 않아서 아직 가설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벽에 걸린 천칭, 모래 시계, 마방진, 그리고 컴퍼스, 막대자 같은 도구를 두고 우주의 생성 비밀을 측량하려는 예술가의 야심으로 보기도 했다. 솔로몬의 지혜서 11장 끝줄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잘 재고, 헤아리고 달아서 처리하셨다”는 인용이 따라붙었다. 그럴 경우 뒤러는 갑자기 플라톤을 성서의 눈으로 읽는 피치노 류의 신플라톤주의자로 둔갑한다.

예술가의 나그네 운명 예시?

또 멜랑콜리의 알레고리 여성을 뒤러의 정신적 초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논리도 나왔다. 예술가의 정령이 돌계단에 턱을 괴고 앉아 있다는 것이다. 길짐승과 날짐승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박쥐가 빛을 등지고 무지와 맹목 속에 빠져드는 것을 필멸의 예술가가 벗어날 수 없는 인간적 약점으로 보고, 제 몸을 부수며 밤하늘을 떠도는 혜성은 궤도 없이 헤매는 예술가의 나그네 운명을 예시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화상을 그토록 좋아하는 뒤러가 왜 여기엔 제 얼굴을 안 그렸을까?

중구난방 해석이 그럴싸

요컨대 문제는, 미리 결론을 정해두고 끼워 맞추는데도 신통하게 논리의 구슬이 술술 꿰어진다는 데 있었다. 사방 팔방 어디를 꿰어도 수의 합이 일치하는 마방진처럼. 결국 지난 백 년 동안 논의와 반론이 빗발치고 무수한 학문적 굴착과 시추가 거듭되는 동안 뒤러의 동판화는 끝없는 의문부호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학문적 노력들이 전혀 무상한 건 아니었다. 그 사이 미술사학의 학문적 방법론이 지레 성숙하고, 부수 성과들도 풍성하게 쏟아져 나왔으니까.

비탄에잠긴예수 마리아의일곱비애 예수의애도 산토끼 카나리아날개 히에로니무스초상 기사, 죽음과 악마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
아우크스부르크 출생. Hans Holbein d..의 아들이며, 독일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북유럽에서는 성상제작을 금지한 종교개혁의 확산으로 그림의 주문이 줄어들고, 화가들은 생계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제 화가들은 종교화가 아닌 다른 장르를 아야했으며 이러한 변화는 16세기 북유럽의 미술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한스 홀바인이 초상화가가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처음 아버지와 목판화가인 브루크마이어에게 그림을 배우고 바젤·북이탈리아·런던 등지에서 명성을 얻은 뒤 영국 헨리8세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1523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홀바인은 그 곳에서 책의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는데 그 중엔 카톨릭 교회의 타락을 맹렬히 비판한 에라스무스(Erasmus)의 『우산 예찬』(1509)도 있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에라스무스의 초상>도 여러 점 제작하였다. 이 그림은 사실적인 얼굴묘사와 모피코트의 질감묘사 등 북유럽 회화의 방식을 전수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초상화의 중요 요인은 배경의 기둥이나 책꽂이 선반에 적용한 이탈리아의 고전주의와 함께 어울려 품위 있고 침착하며 정확한 초상화로 완성되었다.

헨리8세(1540년)
1520년대의 종교개혁으로 그림의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자 홀바인은 그림 주문을 찾아 영국에 가게 된다. 1526년 에라스무스의 편지를 들고 영국에 건너 간 그는 그 곳에서 역시 에라스무스의 소개로 캔터베리 주교 토마스 모어(Thomas More) 등 인문학자들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이 그림들은 초상화가로서의 그의 명성을 높였다. 1532년부터 영국에 정착한 그는 1536년 영국 왕 헨리 8세(Henry Ⅷ)의 초상화가가 되었다. 왕은 1539년 앤 클레브(Ann of Cleves)와의 결혼식에서 입었던 의상을 입고 있다. 보석이 달린 수놓인 모직 옷과 비단 겉옷, 그리고 모피 등걸이 등의 묘사는 그가 어려서부터 익힌 섬세한 사물 묘사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홀바인의 역량은 단순히 사실적인 묘사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그가 택한 인물의 자세와 표정은 언제나 초상화 주인공의 성격과 초상화의 제작적에 적합했다. 헨리8세는 정면으로 당당히 서 있고, 과장되게 넓은 어깨는 그의 과감한 정치력을 나타내기 위한 홀바인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외교관들(1533년. 런던 내셔널갤러리)
초상화의 주인공은 주영 프랑스 대사 쟝 드 딩테빌(Jean de Dinteville)과 죠르쥬 드 셀브(George de Selve) 주교이지만 두 인물 사이에 있는 정물들이 우리의 시선을 끈다. 제일 위칸엔 지구본을 비롯한 당시의 첨단과학 도구들이 정연하게 놓여있는 데 반해 그 아래 칸엔 루트와 피리종류의 악기들이 어지러이 늘어져 있다. 그리고 루트의 끈은 끊어진 채있고, 그 아래 바닥의 중앙엔 알 수 없는 물체가 애매하게 떠 있다. 여러분의 눈을 오른쪽 인물의 아래 손 부근에 바짝 가져다 대고 이 형상을 한 번 보면 인간의 해골임을 알 것 이다. 해골은 전통적으로 인생의 무상을 상징하는 정물이다. 외교관의 화려한 명예, 첨단의 과학, 음악의 즐거움, 이 모든 것 무상함을 말하려 한 것으로 추측된다.

브뤼겔(Pieter Brueghel 1528-1569)

브뤼겔 마을의 이름을 따서 브뤼겔이라 하며 부가 모두 화가. 풍속화로서 자리잡고 우화, 농민생활에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던 인문주의자로서 속담을 담은 내용의 풍자등에서는 강한 사회성도 엿볼 수 있다.

네덜란드 최고의 화가 : 처음에는 인기를 끌었던 판화를 모티브를 자기 나름대로 재구성하여 유화로 표현. 설화집이나 우화집에서 제재를 얻음.

환상적인 풍결 속에 인간의 불안과 욕망을 그리다. : 기괴한 형태에 집착하거나 불안정한 구도를 고안함으로써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사악한 욕망을 표현

바벨탑(1563년)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탑을 세우려는 인간의 오만에 대해 신이 언어가 통하지 않게 함으로써 혼란을 부추긴다는 이야기다. 경사로이 세원진 거대한 건축물로서 바벨탑을 그린 것은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드문 예인데, 인물들을 세세하게 묘사함으로써 브뤼겔은 그 주제를 좀더 선명하게 부각시킴.

사냥꾼들의 귀환
눈 덮인 겨울, 사냥을 끝내고 마을로 돌아오는 장면이다.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 남기고, 온 세상은 눈으로 덮인 스산한 겨울이지만 사람들은 모두 바쁘다. 불을 지피고, 멀리 언 밭에서는 얼음을 지치며 놀고 있다.브뤼겔이 조감도의 방법으로 풍경화를 그리는 것은 매우 의도적인 것 같다. 이 방법은 인간을 주인공으로 보이게 하기 보다 무수한 자연물 속의 피조물로 객관화시키고 있다.

장님의 우화(1568년 나폴리국립박물과)
브뤼겔이 만년에 그린 작품으로, 종교적·정치적으로 광적인 믿음이 팽배해 있던 사회를 향한 분노와 조소가 담겨진 그림이다 .마태복음 15장 1절에서 9절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바리새인들에 대한 말씀을 하면서 예를 든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게 되면 구렁에 빠진다"란 구절이 있다. 이것을 소재로 역동적이면서도 강렬한 표현의 깊이가 이 그림의 주제를 깊이 인식시킨다. 그림을 보면 따뜻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인간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장님이 장님을 어설프게 인도하면서, 뒤로 넘어지고 어디로 가야할지 좌충우돌하는 혼란만이 화면에 가득할 뿐이다.
장님들이 장대로 서로를 의존하며 길을 가고 있다. 그러나 맨 앞의 장님이 개울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자 그 다음 사람은 함께 넘어지려 하고, 그 다음 사람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도 맨 뒤의 사람은 넋 놓고 쫓아오기만 한다. 브뤼겔은 아마 아무 판단을 못한 채 세상 사람들이 사는 대로 쫓아만 가는 우매한 인간사를 비유했는지도 모른다. 웃음의 화살은 우리에게 되돌아와 인간사에 대한 비유로 변하게 된다. 그의 유머는 오히려 교훈적이다.

거지들
16세기 북유럽이 종교개혁으로 인해 극도로 혼란한 사회로 치닫고 있을 때, 플랑드르 지역은 이러한 혼란을 비껴가면서 더욱 풍속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브뤼겔은 이런 사회가 보여주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빗댄 작품들을 많이 그렸는데, 작품 <거지들> 또한 그러한 전형 중의 하나이다. 그림 오른 편에 부랑자들을 외면하며 행인이 지나가고 있다. 목발을 집고 한데 모여 있는 부랑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들의 행색과 흐리게 처리된 표정이며 남루한 의복들을 보면 묘한 슬픔이 배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정확한 원근법이 후면에서 앞으로 접근하게끔 배치되어 시선이 가운데로 고정되게끔 구도를 설정하고 있는 이 작품은, 당대 플랑드르 화파들이 보여주지 못한 알레고리들이 숨어 있다.
아주 작은 크기이지만 이 작품은 작가 브뤼겔이 인간 사회를 향한 조소와 고뇌를 그리면서, 한편으로 그것들을 감싸안는 한없이 따뜻한 애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그림이 단순히 나병 구제소에 수용되어 있던 문둥이들이 마을 축제를 구경가기 위해 막 출발하려는 모습을 담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는 심오한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의미가 숨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어쨌든 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하게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인간 육신의 고통과 부랑자들에 대한 도덕적 불감증에 대해, 브뤼겔은 강력한 메시지로 혹은 은유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농부결혼축하(1568년 빈미술사박물관) 농민의결혼식
종교화의 주문이 끊기고 등장한 새로운 장르는 풍속화와 풍경화였다. 이 그림은 아마 농민들이 그림의 주인공이 된 것은 미술의 역사상 처음이 아닌가 싶다. 벽에 검은 천을 걸고 그 앞에 눈을 내리깔고 앉아있는 여자가 신부인 것 같다. 그녀로부터 왼쪽 두 번째에 앉아서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이가 신랑같다. 우리의 시선은 대각선으로 놓인 식탁을 따라 한 가운데서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을 지나 왼쪽 구석의 문으로 향하게 됩니다. 작은 문에서는 하객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고 왼쪽 아래에서 술 따르는 이, 빈대떡을 받아들고 손가락까지 빠는 어린아이, 그리고 문짝을 떼어 받침으로 사용하여 음식을 나르는 이, 식탁에 옮기는 이들을 지나 다시 신부에게 닫는다. 브뤼겔이 농부들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그들에 대한 진솔하고, 깊은 애정이 담겨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묘사한 농부들의 표정과 다소 퉁퉁하게 부풀린 옷은 그들을 어리석게 보이게도 한다.

어린이들의놀이 동방박사예배 십자가진예수 베들레헴호적조사

( http://namgane.cafe24.com/detail164_7.html )



    부부 십계명 1. 넓 게 - 상대에 대한 아량은 넓게 2. 좁 게 - 다른 이성에 대한 관심은 좁게 3. 길 게 - 칭찬은 길게 4. 짧 게 - 불평불만은 짧게 5. 깊 게 - 상대방에 대한 믿음은 깊게 6. 얇 게 - 부부 싸움 후 심리전은 얇게 7. 굵 게 - 양가 부모에 대한 마음 씀씀이는 굵게 8. 가늘게 - 충동구매, 과소비. 지출은 가늘게 9. 즐겁게 - 상대방을 항상 즐겁게 10. 진하게 - 사랑의 확인은 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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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골라 당

    1. 이방인으로서, 유대교로 개종했다가 다시 기독교로 개종한 자. 예루살렘 교회에서 선출된 일곱 집사 중 하나(행 6:5).
    2. 기독교 초기의 교회들에 의해 니골라당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음.
    3.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육신을 위한 기회로 삼음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잘못 오용하여 육신의 죄악을 조장하게 하였음(갈 5:13).


    니골라당의 사상

    1. 인간의 육신은 근본적으로 악하다.
    2. 인간의 영혼은 육신의 행위와는 아무 상관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
    3. 인간의 구원에 육체는 중요치 않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육체가 짓는 죄는 정죄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4.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 있다.



    현실적 결론

    현재도 이 사상과 똒같은 가르침으로 한국교회를 잠식해 가는 무리가 있다. 니골라당의 사상은 마치 현 구원파의 교리와 유사하다(권신찬, 박옥수 계통...). 이들은 교묘히 정통교단인 듯한 간판을 붙이고 나와 외부에서는 분별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소위 믿는 그 순간(구원받은 시간)을 강조하며, 그 이후로는 어떠한 죄도 없이 의로운 상태에 들어갔으므로 올바른 믿음을 가진 인간이라면 더 이상 죄의식을 느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며.. 또한 기도는 감사와 간구의 기도만 해야지, 회개의 기도를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니 순진한 많은 양떼들이 미혹 받고 있다. 여하튼 주기도문을 하지 않고, 회개기도를 하지 않고, 죄의식을 느껴서는 안 되며, 구원 받은 시점이 언제냐 등의 질문 등으로 교리전파를 하는 행위는 의심의 여지 없이 100% 니골라당의 소행인 것이다. 이같은 교리가 악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교묘히 죄와 타협할 수 있는 편안한 통로를 갖게 한다는 데 있다. 성도는 세상과 구별되라는 것이 하나님의 바라심인데, 세상과 타협할 수 있는 길을 자유롭게 열어주게 되니 그 본질이 마귀의 사상인 것이다.

    니골라당의 교훈은 발람의 교훈과도 함께 상고해야할 중요한 대목이다. 발람은 한 두푼 물질에 눈이 멀어 마귀의 하수인들을 따라간 자며, 이스라엘로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 자니... 종말로 볼 때 음란, 탐심의 생활로 교회를 세속화시키며 교회의 외적 성장, 비대화에 치우치는 잘못된 종교지도자들 모두가 이 교훈을 받아야 할 대상이 된다.

    계 2:6 "오직 네(에베소교회)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사랑은 원수 마귀도 어루만져 주는 것이 본질이 아니요,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않는 것(고전 13:6)이 본질임을 한 시라도 잊지 말아야 하겠다.

    ( http://www.headstone924.net/06_subjective/J_comeAagain/nicolas.ht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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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지주의자들(1)-니골라당과 시몬 마구스


    1.1.1. 영지주의자들

    1.1.1.1. 니골라당

    “먼저 니골당이란 흔히들 사도행전에 나오는 시몬이라는 자부터 시작했다고들 합니다. 보다 거슬러 올라가면 요한계시록 2:6, 15~17에 나오는 ‘니골라당’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언급하신 분은 2~3세기 교부이며 변증가인 저스틴 마터이었습니다. 기억나시죠? 순교자였기에 저스틴 ‘마터’라 불렸던 인물이었다는 분 말입니다. 이어서 변증가 이레니우스는 자신이 쓴 유명한 『이단에 반대하여』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니골라당은 사도들에 의해 집사를 처음으로 받은 자인 니콜라스를 추종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절제적인 방종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의 특징에 대해서 요한 계시록에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계속하여 이런 자들은 영지주의자들이라고 칭하고, 이그나티우스와 동일하게 시몬과 메난더를 근거하고 있다고 합니다.


    1.1.1.2. 시몬 마구스

    사도행전 8:5~2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오래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바 되었도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세.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시몬’이라는 말은 후에 ‘simony’를 만듭니다. 이 말은 중세시대에 들어서서 ‘성직매매’라는 말로 사용됩니다. ‘성직매매’라는 용어는 중세 교회사를 배우면서 자주 듣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성직을 권력으로 여겨 재물을 가지고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큰 교구를 맡거나 큰 교회에 가서 부교역자 역할을 하면 생활비를 넉넉하게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뇌물을 주거나 인맥을 통해 직책을 차지하게 되면 누구든 이런 유혹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겠지만, 이러한 것도 ‘성직매매’의 일종으로 봐도 과언이 아니라 여깁니다. 아무튼 귀한 교역의 일을 물질적 조건으로 여긴다면 바로 현대판 ‘성직매매’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러한 시몬 마구스는 변증가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작품에 등장하는데 그가 후에 ‘사마리아인들’이라는 단체를 세웠다고 합니다. 시몬 마구스는 로마제국 황제 클라우스 시대(41~54)에 스스로 인간 형태를 가진 신이라고 억지 주장했습니다. 요즘에 나타나는 사교들의 교주들의 말과 같죠?

    ‘작은 예수’ 뭐~ ‘큰 예수’ 등등으로 자칭하면서 말이죠. 신으로서 유대인의 메시야라고 자청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죽은 후 3일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고 합니다. 말도 안되는 말이지만 당시에는 통했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해변가 도시인 두로에 가서 ‘헬렌’이라는 매춘녀를 만나 즐기면서 그녀를 길 잃은 양과 비유하면서 그녀를 구출할 것이라고 했답니다. 자신을 인류의 구원자로 자칭했지요.

    그래서 『이단과 정통』을 쓴 브라운 교수도 하는 말이 “시몬 자신이 실제로 하나님이고 외형으로만 사람인 것처럼, 자신의 십자가에 못 박힘과 죽음도 단순히 외형으로 나타났을 뿐이라고 시몬은 가르쳤다. 그래서 그노시스주의가 그리스도가 단순히 인간인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교리인 ‘가현설’의 서론이 시작된 셈이라고 했습니다.”

    - 국제신대 라은성 교수의 재미있게 배우는 교회사학교 23
    - 크리스천투데이 (입력 : 2006.04.10 07:26)

    (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1735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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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니골라당이 무엇인가요?

    답변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계 2:1-6)

    에베소 교회 시대에는 사도들이 세워 놓은 교리들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진리를 수호하고 이설을 반대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계 2:2절) 하나님께서는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배척한 에베소 교회(사도 시대의 교회)를 칭찬하셨다.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계 2:6)

    니골라당은 그 당시 소아시아 지방에 있던 일곱 교회 중에서 특히, 에베소와 버가모 지역의 교회를 괴롭힌 이단 분파들 중 하나이다. 니골라 당 사람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도덕률에 순종하기 위해서 구태여 육체의 욕구를 자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또한 물질과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기 때문에 육체의 방종이나 죄 된 행위는 영의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니골라당 사람들이 믿는 가르침의 바닥에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라는 사상이 깔려 있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저(예수)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3-4)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요일 3:7)

    어떤 의미에서 니골라당은 현대 기독교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자유주의 복음, 즉 그리스도를 지적으로 인정하고 믿기만 하면 구원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에는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서기 2세기의 교부 이레내우스는 자신의 책에서 니골라당을 그 당시에 있었던 영지주의의 한 분파와 동일시하였다. 적어도 한 세기 이상 동안, 니골라당이라고 불린 영지주의에 관한 역사적인 증거들이 있는데, 니골라 당은 육신의 행위는 영혼의 순결에 영향을 주지 않으므로 구원과 관계가 없다는 가르침을 주장하였다.

    ( http://sostv.net/bibleman-questions/2609-bibleman-59.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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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골라당을 아십니까?


    계시록을 읽다보니 2장에 에베소 교회에 칭찬과 와 버가모 교회에서 니골라당이 있다는 책망을 요한이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요한은 이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행음하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계2:14~15)


    니골라당(Nicola tans)은 무율법주의자와 무도덕주의자들로,

    율법의 때는 지났으므로 지킬 필요가 없다.
    육신은 악이요 영만이 선하므로 육신으로는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다.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보호를 받기 때문에 어느 곳에 가서 무엇을 행하든 해받음이 없다고 주장했다.
    니골라 당의 기원에 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는 데,

    역사적 기원설로 유대교에 입교한 수리아의 안디옥 사람 (이방인) 으로 다시 기독교로 개종해 초대교회 일곱집사의 한 사람인 (행6:5) 니골라 (Nicolas)가 후 일에 배교하여 이 당을 시작했고 그의 제자들은 니골라의 엄격한 율법주의에 대한 반발로 무율법주의로 떨어졌다는 설과

    상징적 기원설로 ‘백성을 이김’ 이라는 뜻의 “니골라”라는 말을 계시록 2:14의 ‘백성을 삼킴’ 이란 “발람”과 동의어로 보고 발람의 교훈을 쫓는 자들처럼 기독교 복음을 세속적인 문화와 절충하여 교회안에 우상숭배와 성적인 부패가 들어오게 되었다고 보는 설이다.


    어느 것이든, 오늘날 기독교안에 너무나 많은 니골라당이 있는 것을 봅니다.

    예를 들면, 요즘 화제인 세계최대의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교회 건물뿐 아니라 교인들을 권리금을 받고 매매하는 행위들이 태연자약하게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더욱 안타까운 것은 에베소 교회처럼 니골라당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버가모 교회처럼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알게 모르게 쫓을 뿐만 아니라 교회전체가 니골라당인 곳이 너무 많은데 정작 그들은 니골라당인 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가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교회의 외형은 커져가지만 사회속에서 빛과 소금의 영향력은 점점 없어져만 간다.


    초대교회에 요한이 말한 것처럼 ‘회개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속히 임하셔서 그 분의 검으로 그들을 칠 것이다. (계 2:16)

    내 안에 우리 안에 니골라당의 요소가 있는 지 살펴보고 이를 경계함이 마땅할 것이다.

    (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upiterprinc&logNo=40127907819 )



    과거에 나타난 기록으로서 우리 시대에 영광스런 죽음의
    장면들을 우리는 증거할 수 있는가?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
    지 않는다. 무디는 승리와 봉사와 헌신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 그의 죽음은 영광스러웠다.

     

    천국에 들어가기 몇시간
    전에 무디는 그를 기다리고 계시는 영광스런 광경을 힐끔 보
    았다. 잠에서 깨어난 무디는 `땅은 물러나고 내 앞에 하늘이
    열린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다.

     

     나는 가야한다.`라고 말
    을 했다. 곁에 있던 그의 아들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는
    잠을 주무셔야 합니다.`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무디는 `아
    니다. 나는 잠을 자지 않는다. 나는 그 문에 들어가서 아이
    들의 얼굴을 볼 것이다.` 몇 시간이 경과한 후 죽음과 투쟁
    하면서 가족들에게 다시 무디는 말하길 `이것이 나의 승리이
    다.

    오늘이 나의 대관식 날이다. 영광스럽구나` 하고 말을 맺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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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웨슬리 L. 듀웰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터널을 지나는 동안에는 결코 기차 칸을 옮겨 다니지 말라.”

    실망해 있거나, 큰 어두움을 느끼고 있거나, 또는 낙심에 짓눌러 있는 동안에는

    결코 결단을 내리지 말라. 그럴 때 결정을 내린다면

    당신은 그것을 후회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 왔다.

    침묵 때문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질문이 응답되지 않았다고 해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두운 침묵때문에 당신이나 하나님이나 상황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현재 당신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전 번처럼 그렇게 분명한 인도하심을 주시지 않는 한,

    당신이 조금이라도 변화를 시키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변화를 계획하고 계실 때에는 하나님의 성격상

    반드시 적절한 시기에 당신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사 30:20-21).

    반복해서 말하지만, 순종하는 자녀에게 적절한 때에

    새로운 지시 사항을 전달하는 일은 아버지가 절대적으로

    책임을 지셔야 하는 일이지, 새로운 지시 사항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녀가 책임지고 알아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내주하시는 상담자가 책임지고 당신이 나아갈 방향을 지시하는 것이지,

    당신이 그에게 방향을 지시해 달라고 요청할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에는,

    다시 말씀하실 때까지 당신이 그대로 있어 줄 것을 하나님은 기대하신다.

     

    "웨슬리 L. 듀엘의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싶거든"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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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하늘과 새 땅(A New Heaven and a New Earth)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오래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구원에 관한 그리스도의 위대한 통합적 사역의 비전을
    예견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상당한 세월이 지난 후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인 요한도 이사야와
    비슷한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본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변화되었으며 또 이 피조물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부가 되기 위하여
    불멸의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의 보좌에 앉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비전을 보았습니다
     "보아라, 이제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이제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몸소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우는 것도, 아픔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전에 있던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요한계시록 21:3~4)

    이사야와 요한은 둘 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 대하여 우리의 눈을
    뜨게 하고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겨울 연가(戀歌)/최송연 기다림이란 이런 걸까 바람이 너무 세차게 느껴지네 한여름 청청함을 자랑하던 저 활엽수, 불어치는 찬바람에 누렇게 변하더니 이제 그 바람이 부는 대로 쓸려가는구나 겨울 밤은 이렇게 점점 깊어가고 바람 더욱 거세어지나 임 그리는 내 마음은 늘 푸른 송죽향이네...

     

     


    겨울 연가(戀歌)/최송연   

    기다림이란 이런 걸까
    바람이 너무 세차게
    느껴지네

    한여름 동안
    청청함을 자랑하던
    저 활엽수 찬바람에
    누렇게 변하더니 이제
    그 바람따라 쓸려가는구나

    겨울밤은
    이렇게 점점 깊어가고
    바람 더욱 거세어지나...


    임 그리는 내 마음
    늘 푸른 송죽향이네...

    ** 단어 해석 도우미:
    시험과 환난을 견디지 못해 변질하는 성도(활엽수)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며 기다리는
    성도의 절개는 송죽향임을 노래한 것임**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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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피조물의 회복(The Renewal of the Creation)

    우리의 마지막 귀향은 우리 자신들과
    우리 인간들만이 아니라 피조물 전체와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완전한 자유는
    이 땅 전체의 자유가 되며, 또 부활 속의 완전한 회복은
    전 우주의 회복을 포함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입니다
    바울은 전체 창조 질서를 새 생명의 탄생을 간절히 기다리면서
    출산을 위해 신음하고 있는 여인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헛된 것에 복종한 것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도 썩어질 것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로마서8:20~21)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올려질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평화의 나라(The Peacable Kingdom)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의 품안에 함께 있습니다
        궁극적인 비전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들의 연합 가운데 살도록 부름받은 형제 자매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완전한 조화 가운데 연합을 이루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비전을 실천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오래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이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때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송아지와 사자 새끼가 함께 먹으며

        어린아이들이 그것들을 돌볼 것이다

         

        그리고 암소와 곰이 함께 먹고 그 새끼들이

        함께 누울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곁에서 놀며

        어린아이들이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해를 입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산 시온에는 해로운 것이나

        악한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바다에 물이 가득하듯이 세상에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할 것이기 때문이다"(이사야 11:6~9)

        우리는 이 비전, 주님 다시 오심을 사모하는 마음이

        늘 살아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하나님 계시' 빌미로 신도 돈 편취한 女목사 실형

    춘천지법, 3억원 편취·횡령한 혐의…징역 1년 6월 연합뉴스 | 입력 2013.03.01 07:06

     

     춘천지법, 3억원 편취·횡령한 혐의…징역 1년 6월

    (춘천=연합뉴스) 이재현 기자 = 하나님의 계시로 '땅값이 10배 이상 오른다'며 신도들을 속여 거액을 빼앗은 여성 목사가 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춘천지법 형사 2단독 이삼윤 판사는 신도들을 속여 3억원을 편취·횡령한 혐의(사기 등)로 기소된 목사 A(45·여)씨에게 징역 1년 6월을 선고했다고 1일 밝혔다.

    A씨는 2005년 8월 초께 인천 옹진군의 한 교회에서 신도 B씨에게 '땅을 사면 2년 이내에 최소 10배 이상 오르고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하나님 계시가 있었다'고 속여 5천만원을 받아 챙겼다.

    이후 A씨는 2008년 11월 말까지 신도 6명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미끼로 거액을 빌리거나 알박기 땅을 사들일 돈이 필요하다며 모두 3억400여만원을 속여 뺏었다.

    또 2007년 8월 서울 은평구의 한 연립주택을 관리해 달라는 C씨의 부탁을 받은 A씨는 2008년 4월 임대계약을 통해 입금된 보증금 4천만원 중 2천530만원을 자신의 사업자금으로 임의 사용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계시를 빌미로 신도들에게 돈을 빌리기 시작한 2005년 8월 당시 A씨는 총 채무가 6억5천만원에 이를 정도로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판사는 "목사의 지위를 악용해 교회 신도들의 돈을 속여 뺏는 등 범행 수법이 매우 좋지 않다"며 "편취·횡령 금액이 3억원에 이르는 거액임에도 피해 회복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점으로 볼 때 실형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판시했다.

    jlee@yna.co.kr

    (끝)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출처: 연합뉴스

    34. 거룩을 위한 바울의 기도 (5) | ▶좋은 글들
    2013.02.25 08:17

     

    종합적 진리의 귀중함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살전 5:23).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게 되고 기꺼이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하길 바랄 때, 주님은 우리에게 종합적 진리를 알려 주신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이 의미는 주께서 당신을 흠이 없는 고결한 상태로 보전하시겠다는 뜻이다. 고결함(integrity)이란 손상된 곳 없이 흠이 없다는 뜻이다. 특히 하나님이 보시기에 책망할 것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바울의 중보기도는 일시적이면서 동시에 지속적인 거룩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일시적이면서 지속적인 거룩의 상태란 계속적으로 흠이 없이 고결한 상태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보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위대한 종합적 진리에 마음을 다 쏟지 않기 때문에 기껏해야 거룩을 회심의 두 번째 현상 정도로만 본다. 그러나 거룩이란 오직 하나님의 존전 앞에서 그 위대한 의미를 안고 있다. 거룩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후에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 종합적 진리는 온 영과 혼과 몸에 있어서의 거룩의 비결을 알려 준다. 

     

    출처: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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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선함과 청렴 그 자체에 사람의 시선이 끌리게 해서는 안된다. 선함과 청렴은 다만 다른 이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에게 끌리게 하는 자석의 기능이 되어야 한다. 만일 나의 거룩이 남으로 하여금 주님께 시선을 끌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순서가 어긋난 성결이다. 그런 거룩을 지닌 자는 타인에게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라는 인상을 풍겨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신랑의 참 벗이 아니다. 주님이 아닌 내가 언제나 흥하기 때문이다. 신랑에 대한 바른 우정과 충성을 유지하려면 다른 어떤 일보다도 더욱 주님과의 생명력이 있는 관계 수립에 신경을 써야 한다. 우리가 먼저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생명력있는 관계 유지인데 여기에는 아무 것도 방해할 수 없도록 착념하며 경계해야 한다. 우리 생애의 대부분은 '의식적인 순종의 계속' 보다는 '주님과의 참 관계', 즉 신랑의 친구가 되는 것이다. 신자들의 봉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영혼의 집중을 분산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신랑의 친구가 되기는 커녕 주님의 무기를 사용하면서 주를 대항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로 우리의 일생동안 항상 주의를 요하는 일임을 명심해야 한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오스왈드 챔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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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억만장자들의 기부 도미노가 일고 있습니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은 “블라디미르 포타닌 러시아 인테로스 그룹 회장 등 세계적인 부호 12명과 그의 배우자들이 ‘기빙 플레지(Giving Pledge)’에 새로 참여했다.”고 19일(현지시간) 전했습니다. 새 서약자 12명의 재산은 610억 달러 규모입니다.

    기빙 플레지 기부서약은 2010년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회장과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 시작한 ‘재산의 사회 환원 약속’입니다. 이날 새 참여자까지 억만장자 104명이 서명했습니다. 이들의 재산을 모두 합하면 5000억 달러(약 540조원)에 이릅니다.

    서약자들은 생전이나 사후에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적어도 2500억 달러가 순차적으로 사회에 환원되는 셈입니다. 그들은 해마다 재산의 일정 부분을 내놓는다. 버핏의 경우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주식을 빌 게이츠의 자선재단에 기탁했습니다.

    FT 등은 “기존 서약자들은 대부분 미국인이었다.”며 “최근 러시아·인도·우크라이나·말레이시아·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신흥국가 부호들이 대거 동참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인도의 빌 게이츠’로 불리는 아짐 프렘지 위프로테크놀로지 회장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식용유 회사인 위프로를 넘겨받아 세계 굴지의 정보기술(IT) 기업으로 키웠습니다. 인도 3위 IT 업체를 운영하면서도 ‘짠돌이’로 유명한 그는 사재 20억 달러를 넣은 재단을 만들어 저소득층의 교육 등을 지원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아예 전 재산(122억 달러) 중 절반 이상을 내놓기로 했습니다.

    러시아의 4대 부호 블라디미르 포타닌 인테로스 그룹 회장도 서약에 동참했습니다. 포타닌 회장은 러시아 광산재벌로 유명합니다. 그는 재산 178억 달러 중 대부분을 사회로 환원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가 밝힌 이유가 걸작입니다. 자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는 너무 많은 돈 때문에 내 아이들이 인생에서 뭔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꿈조차 꾸지 않을까 두렵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영국 버진그룹 회장인 리처드 브랜슨은 취미로 우주선을 제작해 이름을 떨쳤던 인물입니다. 그도 죽기 전에 재산(42억 달러) 대부분을 기부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그는 물질로는 행복을 얻을 수 없다. 가족과 친구, 건강, 만족 등이 더 중요하며 기부는 여기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욕구를 가진 존재이고, 그리고 인정받고 칭찬 받고 싶어 하는 것도 오늘 사람들이 기대하는 행복의 조건입니다. 사람들이 칭찬 받으면 모두 좋아하고 기뻐하고 보람을 느끼고 행복해 합니다. 사람이 칭찬을 받으면 하는 일에서 능률도 올라간다고 합니다. 강아지도 칭찬을 해주면 좋아합니다. 화초도 칭찬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가면 더 잘 자란다고 합니다.

    그만큼 칭찬은 능률을 오르게 합니다. 또한 행복해지려고 사람들은 더 나은 환경, 더 넓은 집을 추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합니다. 사람은 이 행복한 삶을 이루기 위해서 눈물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큰집으로 늘려 나갑니다. 행복이 그렇게 넓은 집에서 나온다면 사람이 얼마나 살아가기가 쉽겠습니까.

    이것들은 모두 외형적인 행복의 조건들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그렇게 외면적인 것에서 나오질 않습니다. 행복은 내면적인 것입니다. 외형적인 것에서 주어지는 행복은 일시적이고 길게 만족함을 주질 못합니다. 집 큰 것은 일시적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 큰집에서 오래 살면 그것도 별로입니다. 더 큰집으로 가고 싶어집니다.

    행복은 지극히 내면적인 것입니다. 내면적인 행복이 근본적인 행복의 요인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은 엄청난 것이 아닙니다. 순교하고 고난 받고 핍박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바램은 우리들이 그리스도안에서 기쁘게 살고 행복하게 살고 지극히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삶,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바램입니다.

    마치 우리 부모님들의 바람과 똑 같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들이 세상에서 크게 성공하고 크게 되는 것 보다 건강하게 살고 재미있게 살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 하나님의 바람이고 우리 부모님들의 소박한 바램입니다.

    서구사회는 기독교 역사가 오래된 사회입니다. 그래서 서구사회는 기부문화가 정착되어 아주 활발하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서구사회는 기부생활을 얼마나 했느냐에 따라서 그 사회에서 인정받는 사회입니다. 그런 사람은 국가가 노후생활을 보장하고 우대해주고 존중해 줍니다.

    이 기부문화가 발생은 성경에서 나온 정신입니다. 성경에서 나온 이 청교도적인 정신과 문화가 오늘의 미국 땅에 심겨진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미국을 향해서 별의별 부정적인 말들을 말하지만 그 사회는 그 어느 나라도 따라갈 수 없는 이런 장점을 가진 나라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사회는 이 기부문화가 아주 미숙합니다. 서툴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아직 훈련이 안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의 속성은 움켜쥐고 소유하려는 의식이 강합니다. 돈이 많아 30억 원짜리 100평 아파트에 살면서도 나눈다는 것은 전혀 익숙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통장에 현금으로 몇 억 원씩 가지고 있으면서도 돈이 없어 세금을 내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나라가 먹고 살만해졌다고 선진국이 다된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무지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유는 했는데 만족감이 없고 감사함이 없고 행복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서툰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면서 좀 살게 되었다고 거드름 떨고 살고 있으니 선진국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볼 때 참 우습게 볼 것입니다. 행복함의 지수는 소유의 양, 집의 크기, 자리의 높고 낮음과는 상관도 없습니다. 기부는 소유가 많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없다고 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과는 상관도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내면적으로 행복한 삶을 발견하게 하는 성숙한 삶의 요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가난한 사람을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래서 네 착한 행실을 아무도 모르게 하여라.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복음 6장 2~4정>

    이것이 이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행복의 요소들입니다. 이 마음의 나눔, 생각의 나눔, 물질의 나눔, 신앙의 나눔, 관심의 나눔의 생활 얼마나 고급스런 삶입니까. 그 삶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이 신앙으로 세상을 행복을 창조하며 살아가는 나와 여러분이 되어야겠습니다.

    ♬ 주님만이 나의 행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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