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 는 1714년 12월 16일 글로스터에 있는 벨이라는 여관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에 부친을 여의었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자기 자신은 젊은이들이 빠지기 쉬운 거의 모든 죄를 저질렀다고 하였다.

 

그는 행복하지 못하였고 예민한 양심은 죄책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결국 그가 일하던 술집을 나와 옥스퍼드로 향하였다.
그는 18세에 옥스퍼드의 팸브록 칼리지에 근로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수학함으로서 그의 일생이 변화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두명의 웨슬리, 요한과 그의 동생 찰스를 알게 되었고 엄격한 생활 방식(method) 때문에 처음으로 Methodists로 불렸던 경건한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 옥스퍼드에는 신앙적으로 열심이 있는 학생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들은 '성경 벌레들', '성경꾼들',  '성찬 증시자들', '형식주의자들', '홀리 클럽' 등으로 불렸다.

그 모임에 속한 사람들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긴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을 실천했다.
그 모임 회원의 한 사람인 찰스 웨슬리가 휫필드의 종교적으로 열심히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아침 식사에 초대했다. 이것은 그 두 사람이 역사적인 우정을 맺게 되는 발단이 되었다.


홀리 클럽의 영향 아래서 휫필드는 그의 사고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은 책 한 권을 접하게 된다.

그것은 스코틀랜드 사람 헨리 스쿠걸이 쓴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그때까지 휫필드는 '중생'의 기적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선행으로서 천국의 도상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책을 읽고 그는 지금까지의 그런 생각들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1735년에 회심하여 1736년부터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1736년은 그의 부흥운동에서 중요한 해로서 6월 20일 그의 나이 21세에 글로스터의 감독 벤슨으로부터 안수를 받고 일주일 후 6월 27일에 성마리아 크립트 교회에서 처음으로 설교하였다.

 

8월에는 런던의 비셥스게이트에서 큰 군중을 모아 놓고 설교집회를 열었고 런던타워 예배당의 대리목사로 봉직하였다. 두 달 후 햄프셔에서 교구목사로 일하기 시작하였고 죤 웨슬리의 영향을 받아 죠지아 선교에 대한 소명을 느끼게 되었다. 1731년 1월 브리스톨에서 첫설교를 하고 1737년 5월까지 이곳에서의 설교활동은 계속되었다. 휫필드는 광부 등의 가난한 자녀들을 위해 킹스우드 스쿨을 설립했으며, 웨일즈 장로교회로 불리는 웰쉬 칼빈적 메도디스트 교회의 지도자가되었다.

 

그는 1743년에 이 교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그의 영향은 스코틀랜드를 거쳐 미국으로 확대되었다.

1740년 이후 휫필드가 미국 교회에 끼친 영향은 1735년 제1차 대각성운동을 능가하는 제2차 대각성운동이었다. 그는 미국을 일곱차례 방문하였으며 대서양을 일곱 번이나 건너는 선교의 열정은 그가 34년간 18,000회 이상의 설교를 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2. 휫필드 부흥운동의 특징 -위대한 설교가

 

휫필드의 설교의 주된 내용은 원죄와 중생이었으며, 성령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이고 내적인 영향을 믿었다. 그의 설교의 또다른 주제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는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설교는 중생치 못한 자연인의 마음의 부패성과 신생의 필연성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신학적인 면에서 웨슬리와 차이를 느끼고 결별하였는데, 웨슬리는 알미니안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었는데 비하여 휫필드는 칼빈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웨슬리와 휫필드는 다같이 평생 영국성공회 성직자로 남아 있었다.

영국성공회는 오랫동안 청교도와 투쟁하는 동안 극단적인 칼빈주의를 배격하게 되었고, 알미니안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웨슬리는 이러한 전통을 따라서 알미니안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브리스톨을 떠나면서 휫필드는 웨슬리가 "예정(predestination) 교리에 관해서는 아무런 논쟁을 하지말기를" 기원했다. 웨슬리는 휫필드가 바로 칼빈주의라는 신학 체계를 지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상황을 볼 때 예정론에 관해 "논쟁하지 말라"는 휫필드의 권고는 웨슬리로서는 따르기 힘든 권고였다. 결별은 필연적인 것처럼 보였다.


복음적 알미니우스주의와 예정론의 결별이 이뤄진 것이다.

휫필드는 1737년 런던에서 중생에 관한 일곱편으로 이뤄진 설교를 출판했는데, 여기서

 

"중생은 외적인 고백뿐 아니라 내적인 변화요, 마음의 정결이요, 성령의 내주이고, 그러므로 신비적으로 참되고 생동감 있는 신앙에 의하여 신비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로부터 영적인 덕목을 받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또한 그는 주장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칭의와 중생을 구별하는데, 그러나 이것을 구별하려는 것은 중대한 잘못이라고 못 박는다.

 

휫필드에 의하면 물세례는 결코 참된 신자의 표징이 될 수 없다.
참된 신자의 표시는 외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데에 있다.

그 내면적인 것이란 성령으로 말미암는 중생을 말한다.


휫필드는 물세례가 아니라 성령세례가 참된 신자의 표징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가 말하는 성령세례란 곧 중생을 말한다.

 


3. 공헌

 


죠지 휫필드는 옥스퍼드의 "거룩한 모임"의 회원이었으며, 그의 업적은 신학적인 면에서 웨슬리와 약간 상이했다고 인정할 수 있으나 웨슬리와 병행했다.

 

휫필드가 기독교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그가 모든 면에서 감리교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 그의 신학은

 

-자신은 칼빈을 읽은 일이 없다고 강력하게 말하지만-알미니우스주의자라기보다는 견실한 칼빈주의였다는 점이다. 그와 동시대 사람들은 그가 웨슬리보다도 더 설득력 있는 설교가라고 생각했으며, 그의 활동은 급기야 웰쉬-칼빈주의


-감리교-교회(Welsh Calvinistic Methodist Church)를 탄생시켰다.

 

휫필드의 18세기의 위대한 설교가로서의 면모는 당시의 잡지였던 "신사의 잡지(The Gentleman's Magazine)" 기사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엿볼 수 있다. 기사에 의하면,

 

"한 사회 내에서 열등한 사람의 근면은 그 부요의 원천이 된다.


그러나 휫필드 목사와 같은 사람이 5,6천 명의 대중으로부터 매일의 노동을 그의 설교로 앗아간다면 적은 시간이지만 그 사회에 가져오는 손해는 얼마나 큰 것인가!


내 견해로는 만일 이 신사가 킹스우드의 광부들에게 자진해서 설교를 시작한 것처럼 여기서도 계속 설교를 해 나간다면 브리스톨 시 근방에서 얼마만큼의 석탄 가 폭등이 일어날지 모르겠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은 그의 설교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매료되었으며, 그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했는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준다. 평일이나 주일이나 그가 전도하는 곳의 교회는 청중이 빽빽이 들어 찼고 굉장한 평판을 낳곤 하였다.

 

명백한 사실은 참으로 웅변을 잘하고 즉석에서 아무 준비 없이 설교를 하는 전도자가 순수한 복음을 보기 드문 목소리와 훌륭한 몸짓으로 전하는 것인데, 그 때 런던에서는 전혀 새로운 체험이었다.

그의 청중들은 놀라고 황홀해진 나머지 넋을 잃었다.

 

1739년부터 1770년 그가 사망하기까지 31년 동안 그는 오직 한 가지 일에 매달리는 사람이었으며, 항상 주 예수의 일만을 추구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혼신을 다해 청중들에게 설교했다.

휘필드는 웨슬리의 정확한 논리성과 비상한 행정력, 그리고 깊고도 강인한 성품이 결여되었으며, 웨슬리는 그보다 좀 느리기는 하지만 더욱 확고한 편이었다.

 

휫필드는 보다 신속하고 열렬하였으며 충동적이지만 그러나 웨슬리와 같은 종교적인 심원함을 소유하였으며, 더욱이 그는 웨슬리가 알지 못할 정력적인 영역에서 살았다.

거기에 첨가하여 그는 웨슬리로서는 당할 수 없는 웅변가였다.


그는 그의 일생에 걸친 설교사역에서 엡 2장 8절의 말씀을 주제로 삼았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개혁자의 신앙을 이어받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에 진력한 휫필드의 삶은 굳어진 18세기 교회의 문을 부수고 무뎌진 명목상 신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에 감격하였고, 내면적 부흥운동의 큰 줄기로서 그들을 중생의 길로 인도하였다

 

 출처: 안개꽃


구원 (혹은 용서)의 확신      

 

존 오웬(John Owen)

 

죄에 대해서 용서를 발견하지 못했을 경우

죄로 인해 혼동에 빠진 영혼이 하나님 안에 있는 용서를 발견하는 과정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발견하는가? (시편 130)
아들의 피로 마련하신 죄 사함을 믿음으로 발견하며, 죄 사함을 받은 영혼은 예배와 순종을 하게 된다.

용서를 발견하기 전의 모습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나서 (창 3:10)
아담은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였던 자이다. 그러나 그는 죄를 범한 후에 두려움에 빠졌다. 아직 하나님의 용서의 약속이나 계시가 주어지지 않았다.

가인은 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숨었다. (창 4:16) 어리석은 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거나 숨을 수가 없다. (시 139:7-10)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용서를 발견하기 전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 33:14)

죄의 책망과 질책은 있었으나, 용서를 발견할 수 있는 빛을 주시기 전까지는 그들은 하나님을 소멸하시는 불로 인식하게 된다.

죄에 대한 압박은 커지고 용서를 발견하지 못했을 때는 블레셋은 공격하려고 하는데, 사무엘 선지자는 오지 않고 있을 때의 사울의 심령과 같은 것이다.

 

죄의 용서를 발견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하나님의 용서를 발견하는 것은 신비적인 것이며, 거룩한 것이며, 한편으로 드문 (rare) 경우이다.
죄의 용서함을 발견하지 못했을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극한 상황에 까지 이른다. 가인과 삽비라의 경우가 그렇다. 그들의 생각은 비고 만다.말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발견해야 하는데, 그것은 복음 안에 있다. (엡 3:8, 9)
그러나 무지와 어두움으로 인하여 발견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양심은 그 본성상 용서를 알지 못한다. (롬 2:14, 15)
죄와 심판에 대한 인식은 뗄 수 없는 쌍둥이와 같다. (히 10:1, 2)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을 비추어 주는 빛과 같다. 이것 역시 죄 용서함이 없다. (갈 3:10, 12)
죄 용서의 복음이 사람들에게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거나 혹은 어리석어 보인다. (고전 1:18)

 

죄 용서함에 대한 잘못된 확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체험하였다고 말한다. 어리석은 체험들로 인한 거짓 확신들과 용서에 대한 헛된 거짓 확실들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마치 그림자와 구름을 잡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함으로, 하나님의 위대함, 거룩, 순결, 엄위에 대한 인식이 없는 자들이 있다. 이러한 자들은 자신의 죄에 대한 심각성이 없다. (시 50:21) 사람들의 자신의 죄에 대해 심각성이 없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과 관련된 것에 대해서 (계명, 죄, 심판, 용서) 문제될 것이 거의 없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없고, 죄는 사소한 것으로 여겨지며, 용서는 단지 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과 순결함에 대해서 모르는 자는 죄와 죄 성에 대해서 모르는 자이며, 용서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는 자이다. 

 

복음이 일반적으로 외쳐지며, 어느 정도 교리를 알고 있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용서의 준비가 되었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죄에 대한 용서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믿음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발견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죄에 대한 용서를 믿음으로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죄에 대한 질책으로 인하여 심령이 편안하지 못하다. 그때 마다 나는 용서함 받았다, 혹은 구원 받았다라고 스스로 자기 암시를 주거나 심리적으로 확신을 주는 것은 구원의 확신이 아니다. 이것은 자기 설득에 불과하다. 이것은 믿음이 아니며 단지 자신의 견해 (opinion)에 불과하다. 거짓 평안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으로 죄를 해결하려는 태도가 아니다. 이것은 단지 죄의 용서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성령의 더 깊은 죄의 질책과 책망이 있어서, 결국 자기 의를 포기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용서를 발견하기까지 부르짖고 찾아야 한다. 이때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용서를 발견할 수 있는 빛을 주시게 되며, (갈 1:16) 이 빛으로 말미암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된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남용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보통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미래의 죄까지 용서하셨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전혀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모르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자신의 거룩한 백성을 만드시는 원리에 대해서 무지한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구절을 남용한다. 그러나 같은 요한 일서 3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속죄의 죽음으로 죽으신 것은 죄를 없이 하기 위함이지, 우리로 마음껏 죄를 지어도 문제가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남용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거룩성을 모르는 자들이다. 자신의 죄를 보지도 못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경멸하는 자들이다. 이러한 자들로 부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나 공경함이 없다. 자신의 육신적 만족을 위해 살아갈 뿐이다. 계명을 지키거나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갈 마음도 없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거나 용서하여 주신 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라. (요 5:14, 8:11, 참고, 겔 37:23) 

그리스도의 용서함을 경험한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게 되어 있다. 막달라 마리아를 보라.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시편 116:1, 5-7절에 의하면 용서함 받은 자로부터 사랑과 존경과 감사가 넘쳐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죄의 용서에 대해서 개념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자에게는 죄에 대해서 미워하거나 싸우는 심각성이 없다. 오히려 그 영혼은 죄를 짓는 것에 용기를 가지고 있다. 죄에 대해서 물타기를 하는 영혼이다. 유다서 1:4 에 의하면 경건하지 못한 자이며, 은혜 아래에서 죄를 짓는 방탕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남용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은혜의 교리를 알면서 죄에 방임하고, 육신적으로 살아가는 자들에 대해서 로마서 6:1, 2절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우리가 은혜 아래에 있다는 것은 용서에 대한 믿음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로 죄의 힘으로부터 우리를 보존해주는 능력이 된다. 용서에 대한 믿음은 우리로 복음적 순종 가운데 살게 만든다. (딛 2:11, 12)

 

용서에 대한 개념만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게는 영혼에 평안함이 없다. 물론 일시적으로 기쁨이 있을 수 있지만 지속적인 것은 아니다. 잘못된 근거에서 스스로의 확신은 잘못된 목적을 낳게 된다. 그것의 뿌리는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죄의 용서함을 발견하지 못한 자들은 결국 교만하게 된다

 

복음의 용서에 대한 진정한 성격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을 하는 것이며, 그의 거룩하심에 반대하는 것이고, 그의 공의에 도전을 하는 것이며, 그가 부과하신 멍에를 거부하고 내어던지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죄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인들로 자신에게 오도록 제안하시고 격려 하시는 것이다. 죄의 용서함이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는 것은 자신의 성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출 34:6, 7; 시 9:10) 죄인들로 하나님에게 나아오게 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사 1:10)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요한은 사랑이라고 하였다. (요일 4:8)

죄인들로 용서를 위해서 하나님에게 나아오게 하는 일은 그의 무한하신 선하심과 은혜로부터 오는 것이다. (느 9:17; 미 7:18; 호 11:9)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는 복음의 용서와 관련하여 몇 가지가 있다. 
아들을 보내셨다. (롬 3:25; 사 53:11)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는 죄인들로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주셨다. 
그의 피 안에 있는 용서의 약속은 믿음으로 우리가 호소 할 수 있다. (고후 1:20)
주께서 우리에게 회개를 주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 (골 3:13)
성령에 의해서 적용된다. (골 2:13)
믿음의 눈은 실제적 용서를 보게 한다. (사 44:22)
그래서 우리로 완전하게 (fully) 하나님에게 돌아오도록 한다. (삼하 23:5)

 

용서의 발견

용서의 발견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 이다. (고전 2:9-10; 롬 1:17)
이것은 매우 깊고, 놀라운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발견하는 자들은 놀라워하고, 감사한다. (엡 1:19; 엡 3:19)그러나, 용서의 확신을 못 가지는 경우들이 있다 (행 13:38, 39; 욜 2:13, 14) 이러한 경우 복음적 회개가 일어나도록 촉구하고 있다. 확신을 얻게 하기 위한 지침들은 다음과 같다.
1) 죄로부터 평안해지고자 하는 자신들의 노력을 내려놓아야 한다. (삼하 15:25, 26)
2) 기다려야 한다. (애 3:26)
3) 기다리되 은혜의 수단 가운데 있어야 한다.

 

특별한 용서의 확신을 얻게 된다.
영적으로 깊은 황폐의 상태에서 용서함을 체험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게 된다. (갈 2:20, 딤후 4:8, 롬 8:38, 39)
구원의 확신을 지속시키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히 10:22, 3:14)
믿음의 성질 때문이기도 하다. (신 4:4; 수 23:8; 행 11:23)
이것은 성령의 인침, 증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일반적인 것보다 더 충만한 성령의 교통으로 인한 열매이다. (롬 5:1-5)

 

용서의 확신으로부터 따라 나오는 효과들

1) 하나님과 함께 있고자 하는 결심 (요 15:4) 어려움과 유혹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 안에 거하고자 하는 심령이 일어난다. (시 73:28, 2, 14절 참조, 요 6:66-68)
2)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게 된다. (사 28:16) 내가 서두르지 않는다 (사 9:22) 야곱이 라헬을 사랑함으로 얼마나 기다렸는가?
3) 압력과 어려움으로부터 구출함을 받고 위로를 받게 된다. (잠 25:25; 사 33:17)

 

확신이 가져다주는 영적인 삶

1) 이기적이지 않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것이 믿음의 가장 주요한 목적이다. (롬 4:20) 하나님께서 용서를 제공하시는 목적은 사람들로 그의 은혜로운 은혜를 찬양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엡 1:6)
2) 인내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발 앞에 내려놓는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기다린다. 
3) 염려와 불안에서부터 벗어나서 확신하는 상태를 유지한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의무

1) 우리가 서로 용서해야 한다. (마 6:12)
2) 우리의 신실성의 표식이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는 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
3) 용서함 받은 것으로부터 강력한 동기를 요구한다. (엡 4:32)
4) 구약에서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명기된 것이다. 
5)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서 용서 받는 조건은 아니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 다는 것은 우리가 용서 받지 못하였다는 증거이다. (마 6:14, 15
6) 자기 부정,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버리는 것과 같이 복음 속에 있는 의무이다.
7) 하나님의 성품의 반영이다. (하나님 형상의 회복으로 인해 나타나야 하는 덕목이다)(엡 4:24)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다른 사람에게 안전한 장소가 되기
(Being Safe Places for Others)

우리가 판단하고 정죄하려는 욕구로부터 자유로울 때,
우리는 서로에게 자신들을 드러내 놓고
만날 수 있는 안전한 장소가 될 수 있으며
또 사람들을 갈라놓는 벽을 허물어 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으면,
우리는 사람들이 서로서로를 사랑하도록 초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논해야 할 일을 숨기지 않고,
또는 자신의 의도를 감추지 않으며, 자신을 위하여
어떠한 이익도 얻고자 하는 의사가 없으면,
그리고 우리가 오직 바라는 것은 평화와 화해라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게 되면, 그들은 자신의 무기를 현관 문에
내려두고 적과의 대화를 시작할 수 있는
내면의 자유와 용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가 계획하지 않았는데도 자주 일어납니다
우리의 화해 사역은 우리 자신이 그것을 거의 알지 못하고
있을 때 더 빈번히 일어납니다. 우리의 단순하면서도
남을 판단하지 않는 태도가 화해를 기져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오늘 있었던 주요 방송3사와 금융업체에 감행된 APT공격을 보고, 한번글을 적어본다.
APT 공격이란?

※파이어세일:국가기반시설에 대한 3단계의 체계적인 공격
ex)원자력발전소, 정보통신시스템, 위성, 화력발전소, 연구소, 그 국가의 주요 웹서버(커뮤니티, 정부기관, 보안포럼, 대규모 포털 등)

우선 파이어세일의 1, 2, 3단계 구성을 보자

1단계
교통체계를 무터트리고, 모든 재정과 주요 통신망(웹, 네트워크, 휴대폰, TV 등의 모든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마비 혹은 장악.
여기서 이용되는 해킹방법은 주로 DDoS(분산서비스거부공격), drDos(분산반사서비스거부공격)
백신 업데이트 서버 점령으로 인한 악성코드 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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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단계
가스, 수도, 전기 원자력 등 모든 공공시설물에 대한 통제권한(제어권)을 빼앗는 것, 쉽게말해 그나라의 전기와 동력원들을 모두 끊어버림.
여기서 주요 이용되는 공격방식은 마찮가지로 DDoS 그리고 스카다시스템해킹에 가장 많이 이용 되는 백도어, 맞춤형 악성코드 등 EX)STUXNET
그러나 2단계를 실현하기 위해선 원자력 발전소, 화력발전소 안의 시스템에 직접 침투해야 하므로, 대규모 인력이 필요하다.
왜? 침투해야하지? => 그 이유는 원자력 발전소, 화력발전소 같은 중요 스카다시스템은 모두 외부와 단절된 네트워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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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계 그 나라를 무력으로 초토화 시킨다.


북한군이 만약 계획적인 남침을 한다면, 제일먼저 국내 웹 포털과 국방부의 인트라넷 네트워크에 DDoS를 때릴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이번 공격은 40Gbps의 약 2배~3배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공격으로, 이번 공격을 주도한 세력이 마음만먹으면

대한민국의 주요 웹포털 사이트는 전부 마비된다.

만약 일본에 있는 DNS 서버를 노리고 DDoS 공격으로 DNS서버를 마비시킨다면(사실상 DNS서버를 마비시키는건 불가능)

대한민국과 일본의 모든 컴퓨터들은 웹페이지를 문자(String) 형태의 주소로 접속하지 못하게된다.
ex(http://www.naver.com)
북한이 대한민국에 대한 파이어세일 공격을 한다는 가정하에 시나리오를 세워보겠다.

STEP ONE
1.북한 간첩/해커들에 의해 국내 모든 업체의 백신 업데이트 서버가 크래킹 당한다.
2.악성코드를 업데이트 시킨다.
3.국내 V3/알약/바이로봇 등을 사용중인 교통관리국
모든 금융업체, 전화국(KT/SK/LG), 전상망에 모조리 악성코드가 업로드 된다.


피해정도:신호등, 감시카메라(CCTV)를 전부 장악당했으니 설명안해도 피해가 어느정도인지 알것이다.
또한 더 섬뜩한 것은 이렇게 개좆털렷는데 시민들은 방송국, 네트워크가 전부 공격당해 이사실을 전혀알지 못한다.

STEP TWO
1.위에서 해킹 당한 업데이트 서버로 인해, 국정원 전산망, KISA의 보안서버에도 악성코드가 업로드 된다.
2.업로드된 악성코드는 KISA/NIS가 관리하는 수도/전기/원자력 시설로 모두 업데이트 된다.
3.원자력/수도/전기 시설이 북한해커들의 권한안에 들어가게 된다.

STEP THREE

북한군이 남침한다.


세 줄 요 약

1.교통장악
2.공공 시설 장악
3.무력으로 초토화
V 3 퇴 출
V 3 퇴 출
V 3 퇴 출
V 3 퇴 출
V 3 퇴 출


끝이 없는 사역(A Ministry That Never Ends)

화해는 싸움이 해결되고 평화가 온 것과 같은
일회적인 시간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화해의 사역은 문제의 해결, 중재 그리고 평화 협정을
초월하여 행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생애에 화해가 필요 없는 순간이란 없습니다

우리의 가슴과 마음속에 무수한 적대적인 생각과
느낌을 살펴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크고 작은 수많은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적은 부모일 수도, 자녀들일 수도,
'친근한' 이웃일 수도, 생활 양식이 다른 사람들일 수도 있으며,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또는 행동하는 것과
같이 생각하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으며, 또는 행동하지도 않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그들' 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화해가 필요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짝퉁 목사가 많을 수록...

이성은

매년 그러하듯이 2011년을 보내면서 아쉬움과 온전치 못한 모습들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의 많은 기독교인들과 목사님들께 바라는 마음이있습니다.

특별히 저에게는 다일 공동체 최일도 목사의 비 성경적이고 비 복음적인 영성 수련회로 부와 명예의 상징을 경험하고서 반면에 적은 숫자의 교인들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먹이고 그러기위해 목사님과 사모님께서 일하시면서 어려운 교회 제정을 꾸려가는 목회자 가정을 봅니다.

여인들이 좋아하는 명품 짝퉁 가방이 거리를 물결 치듯 돌아 다닐수록 오리지날 디자인된 가방의 그 가치는 상상 할 수 없으리 만큼 오르는 것 같이, 진리의 말씀을 수호하며 가르치는 목사님들의 귀함은 우리가 상상 할 수 없는  하늘의 상급이 될 줄로 믿습니다.

마태복음 24:4,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느니라.

마태복음 24:24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특별히 한국에서나 여기 애들란타에 변승우 목사의 큰 믿음 교회

주일 동영상으로 자신의 설교를 상영하여 자기를 극대화 시키는 것이 자기우상화의 산당임을 알 수 있습니다. 표적과 기사는 마귀가 자신이 영광받기 위함으로 광명의 천사의 탈을 쓰지만 예수님의 꾸짖음을 면치 못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회사업의 확장에 주일에도 가게(유빌라떼)를 오픈해서 될 수만 있으면 돈을 벌고, 예수님의 사랑을 밥 한 주걱에 될 수만 있으면 많이 팔아 청치인들과 무당춤을 추는 다일 공동체 최일도목사, 그 명성에 무슨 부스러기라도 떨어 질까 으뜸 (엄지 손가락세우는)으로 야합하는 송상철 목사, 정인수 목사 ( 다일 신임 취임행사에 무슨설교를 하셨는지 ???) ,그 뒤를 무단히 ㅤㅉㅗㅈ아가는 많은 분들을 봅니다.

관상기도가 문제가 되는 듯 싶으니 3번째 단계의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살짝 바꾸고, 강단 앞에서 이마에 손을 데고 미는 듯이 하여 뒤로 자빠지게 하는 것이 관상기도라 해서 특별하게 보여 교인들을 우매하게 하는 목사님들!

그 분들은 주님께서 맡기신 영혼들을 무엇으로 어떻게 끌고 가는 것일까요?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로 미혹케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택함을 받은 주의 자녀에게 (잠언 19:27)"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찌니라."라고 우리에게 깨어 있기를 간구하십니다.

내가 어머니입니다!, 내가 아버지입니다! 라는 프로그램에 이리저리 분주히 ㅤㅉㅗㅈ아 다니는 분들!

So what? 그래서 어떤 부모가 되셨나요? 저는 너무도 못난 엄마라서요. 하나님 아버지만이 오직 아바 아버지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2012년은 진정 말씀으로 돌아가서 나에게 주는 귀한 영의 양식을 끝까지 붙들고 묵상하며 구원을 이루시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주의 백성들이 성경 말씀으로 깨어있기를 기도하는 작은 교회 귀한 종들의 연구와 가르침이 우리 평신도들에게 힘이됩니다.

그 소수의 목사님들께 바라기는 소위 한국 교회의 유명한 분들이 복음과 교회를 어지럽힌 부분들에 대한 글을 올려 우리같이 약한 성도들에게 알려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지금 손기철 장로가 규장을 통하여 출판한 모든 책들은 평신도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여기 애틀란타에도 와서 집회를 했는데 많은 목사들과 교인들이 넘어갔습니다. 나오는 책이 모두 베스트셀러의 반열에오르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성령님"은 약 20만권이 팔렸다고 합니다. 성경구절을 많이 인용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내용에는 너무나도 비성경적인 내용이 많다고 합니다.

기도 부탁합니다. 성도들이 이를 알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 년에는 미국과 애틀란타 지역의 목회자들이 이 시대의 교회를 공격해오는 사탄의 공략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지고, 오직 진리의 노선으로만 향하는 목회를 하기로 각오하며 기도하는 목사님들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www.treeoflifemiss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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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게 힘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왜 내가 할 수 없겠는가?

(빌4:13) 

 

 

2.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나의 모든 것을 채워주신다고 했는데
왜 내가 부족하겠는가?

(빌4:19)

 

 

3.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인데
왜 내가 두려워하겠는가?

(딤후1:7)

 

 

4. 하나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분량만큼 믿음을 주셨는데
왜 내가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는데 믿음이 부족하겠는가?

(롬12:3)

 

 

5. 여호와는 나의 생명의 능력이시며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휘할 것인데
왜 내가 약하겠는가?

(시27:1, 단11:32)

 

 

6.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신데
왜 내가 사단의 지배를 허용하겠는가?

(요일4:4)

 

 

7. 하나님께서 항상 나를 이기게 하시는데
왜 내가 실패하리라고 생각하겠는가?

(고후 2:14)

 

 

8.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지혜가 되셨고
내가 지혜가 부족하여 구할 때

꾸짖지 아니하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내게 지혜가 부족하겠는가?

(고전1:30, 약1:5)

 

 

9.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신실하심과 소망이 있는데
왜 내가 우울해져야 하는가?

(애3:21-23)

 

 

10. 나를 돌봐주시는 그리스도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데
왜 내가 염려하고 두려워하겠는가?

(벧전5:7)

 

 

11. 주의 성령이 계시는 곳에 자유함이 있는데
왜 내가 멍에 속에 있겠는가?

(갈5:1)

 

 

12. 그리스도 안에 정죄함이 없다고 했는데
왜 내가 정죄받은 것처럼 두려워하겠는가?

(롬8:1)

 

 

13. 그리스도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떠나거나 버리시지 않는다고 했는데
왜 내가 외로워하겠는가?

(마28:20, 히13:5)

 

 

14.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사
율법의 저주에서 나를 속량하시고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는데
왜 내가 저주를 받았거나 불행한 희생자라고 느끼겠는가?

(갈3:13,14)

 

 

15. 내가 모든 환경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웠는데
왜 내게 불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빌4:11)

 

 

16.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리스도를
나 대신 죄로 삼으셔서 나를 의롭게 하셨는데
왜 내가 무가치한 사람처럼 느끼겠는가?

(고후5:21)

 

 

17.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니 아무도 나를 해할 자가 없는데
왜 내가 박해를 받는 것처럼 피해의식을 갖겠는가?

(롬8:31)

 

 

18.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나에게 지식을 주시는데
왜 내가 혼란에 빠지겠는가?

(고전14:33, 2:12)

 

 

19.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일에 이길 수 있는데
왜 내가 실패할까 두려워하겠는가?

(롬8:37)

 

 

20. 예수께서 세상과 세상의 환란을

모두 이기신 것을 알고나니 담대함이 있는데
왜 생활의 어려움으로 고민하겠는가?

(요 16:33)

 

 

-Mom's Awesome Garden-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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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로 환난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형벌을 받으리라”(살후 1:6-9)

참으로 두렵고 비참한 광경이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영원의 골짜기로 분별없이 서둘러 가는 많은 가련한 죄인들을 본다. 그들의 현재의 불경한 태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건지 생각조차 해보지 않는다. 그러한 죄를 범하는 그들이 반성을 않는다면 그들은 지옥의 심판대 위에서 견디기 어려운 조사를 당하고 끝내는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참담과 비애, 가득 찬 시련에 잠기게 될 것이다. 얼마 후에 그들은 숨을 거두게 된다. 반면에 이성적이고 건전한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결코 그들이 존재하는 목적과 그들의 본질의 진가를 결코 망각하지 않고 사라져가는 헛된 것들을 모으는 것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잠시 동안에 그들은 영원한 존재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하여 게을러지게 되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의 결정적인 시간을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이렇게 하나님의 가슴속에 묻어둔 비밀로 최후의 심판의 시간을 밝히지 않는 것은 우리의 공포를 깨우치고 우리의 근면을 촉진하고 우리의 인내심을 뒷받침한다는 그러한 이유이다. 우리의 주님의 오실 날을 모르고 있는 이상 우리는 매일 생각을 하고 준비를 해야 하는 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말하기를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리라.”고 했다. 한밤중에 부르짖는 소리가 날 것이니, “보라 신랑이 오도다. 나가서 그를 맞으라. 노아와 롯의 시대에 있었던 일은 주님의 아들의 날에도 있으리니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를 든다.” 무서운 생각 때문에 죄인들은 구원을 청하며 산모의 진통과도 같은 갑작스러운 파괴가 그들에게 닥쳐오며, 지구 위에는 홍수가 쏟아질 것을 생각지 못하고 탐욕에만 빠진 것이다.

심판의 장소는 아마도 모든 사람이 심판의 모습과 공정한 심판을 볼 수 있게 하시기 위해 땅 위에 가까운 중간 지점이 될 것 같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 쓰여 있는바“...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라고 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생명력을 그리스도에 주셔서 그에게 심판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셨으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성을 가지고 생각하고 행동을 하는 인간에게 명확한 인식을 주기 위해서 그리스도라는 한 사람에게 신격과 인격을 동시에 부여하신 것은 참으로 합리적인 일인 것이다. 또한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지식과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최고의 존재인 하나님만이 가지신 권능인 것이다. 어떠한 비밀의 행동도 그 선과 악의 구별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으로는 보실 수가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고유하신 책의 인봉을 떼실 수 있으며 인간과 천사들에게 영원한 대가와 벌을 지우시는 것이다.

죄악성은 이에 의심할 여지없이 드러날 것이며 한층 더 악화된 상태로 나타나 지독한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죄악은 가장 부드러운 동정에 엄격함으로 다스려지게 된다. 그러한 역할은 그를 축복해 주시는 아버지(광명에 찬 영광의 보좌이며 가장 행복한 은혜의 자리인 엄격한 보좌의 중심이신)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어진 자비로운 구주가 담당하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겸양에 가득 찬 그리스도는 인간의 본성을 그의 권력으로 다스리고 인간의 영혼을 영원의 파멸로부터 건져내고 영원한 광명과 영광에 찬 생활을 약속하시기 위해 많은 고통과 불행을 견디셨다. 그러한 피로서 겪으신 많은 고통이 지나간 후 그리스도는 구제할 수조차 없은 죄인들은 영원한 죽음으로 내쫓아야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죄악에 대한 혐오감을 마음속에 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주의 심판관이 되셔서 새로운 하나님의 왕궁 체제를 확실히 이루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고 순종하는 구제주가 최고의 마지막 심판자가 되시는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죽음을 선고하신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1장 7절에서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라고 밝혔다. 최후의 심판의 권리는 그리스도가 심한 굴욕과 고난의 세월에 대한 대가로서 하나님이 주신 주 예수의 권한임에 틀림없다. 빌립보서 2장 8,9절을 보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라고 했다.

이러한 말씀은 온 세상에 엄숙한 영원의 심판대가 마련되면 그날에 하나님이 마련하신 심판관이 나타날 것이다. 그때는 성경책에 있는 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어머어마하고 거대한 권능으로 충만해 있으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면 주 예수는 하늘에서 불꽃을 감은 천사들과 함께 나타나시리니” 지금 그리스도는 천국에 계시지만 때가 되면 천국으로부터 오실 것이다. “모든 눈이 주님을 지켜보리라.”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내려오실 때는 수많은 천사들에게 호위되어 오실 것이다. 그리고 심판대에서 천국과 지옥의 길로 만인에게 심판할 것이다. 준엄한 상태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던 경건함을 나타내실 것이다.

이러한 거룩한 권세를 가진 천사들은 틀림없이 그 최후의 심판에 정의와 자비의 권력자로 일할 것이다. 그들은 죄인을 심판대로 소환하고 그들에게 곧 판결문을 선언하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즐거이 그들의 행복에 넘친 안식처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주님은 성령의 불꽃 속에서 나타나실 것이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았을 때 산은 두려워서 움직이는 것 같았고 불과 연기로 둘려 쌓였었다. 그리고 불꽃 중에서 들려온 말씀은 온 이스라엘을 놀라게 하셨다.

성경은 그리스도 재림의 기록은 굉장히 화려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리스도가 구세주로서 세상에 오셨을 때는 그리스도의 권능과 영광은 그의 인간미로서 감추어졌었다.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빈곤과 멸시로 태어나셨으며 인간들의 숙명적인 질병도 겪으셨다. 그러나 다음에 온 만물을 심판하려 오실 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하신 모양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위엄을 드러낼 것이다. 하늘은 뒤흔들리고 땅에선 지진으로 인하여서 용암이 휩쓸고 땅 속 깊이 흔들릴 것이다. 삽시간에 하늘과 땅은 온통 성한 데가 없이 될 것이며 천사장이 부른 나팔소리는 죽은 자를 그들이 묻혀 있는 무덤에서 일어나게 하며 바다에서는 무섭게 파도가 치고 하늘에는 천둥이 몰아치며 땅에서는 소름이 끼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며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저주 받은 인간들이 두려운 비명소리를 지르게 된다.

이 최후의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가 권능과 영광에 휩싸여 천사들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경은 죄 많은 자들에게는 보기조차 두려운 광경일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천사장의 호령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우리의 구주께서 변화산에 오르셨을 때 그의 얼굴은 태양같이 빛났었고 입으신 옷은 희고 빛났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가 영광과 위엄에 찬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면 그 화려함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화려함에 대해서도 사도 요한이 쓴 성경 가운데 인상적인 구절을 잘 보면 짐작이 갈 것이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맑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계 1:13-16)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 자신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으로서 동시에 오시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빛과 아름다움 장엄함과 권능은 지금 현재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도, 말로 표현하기도 힘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보좌는 크고 희며 순결하며 권능으로 되어 있다고 하며 거기서 빛과 천둥과 음성이 들려온다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 만일 그리스도가 1900년 전에 이미 권능에 휩싸인 몸으로 계셔 그를 체포하러 왔던 사람이 되돌아가다가 땅에 쓰려져 버렸다면 그의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그리스도가 가장 고귀하고 영광과 권능에 가득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실 최후의 날을 기다릴 수 잇겠는가?

그리스도의 권능을 나타낼 천사장의 나팔소리는 지구의 끝까지 퍼지고 하늘을 울리며 어두컴컴한 동굴을 뒤흔들고 육지와 바다의 구석구석까지 들려가며 죽은 자에게는 그들의 영혼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세상이 창조된 이래의 모든 과거의 사람 중에서 그리스도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공정한 심판을 받고 그때부터 영원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만했던 독재자, 음흉한 정치가, 주제넘은 영웅들은 모든 지위를 빼앗기고 그들이 가졌던 권력과 힘, 위엄은 모두 잊어버린 채 산을 향해서 보좌에 앉아계시는 구세주에게 도망가게 해달라고 빌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그들이 멸시했던 구세주 앞에 끌려가 꿇어 엎드려 그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엎드려 빌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미 때가 늦은 비참한 애원에는 냉정하실 것이다. 그들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몸이라면 그들이 죄에 대해 회개를 하고 자비와 용서를 비는 것도 도움이 됐을 것이나 그들이 죽어진 다음에는 너누 늦은 것이다. 구세주께서는 일어나셔서 회개하지 않는 낮에게는 자비와 구원의 문을 굳게 잠가 버리시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죄 많은 자의 영혼과 육체가 하나로 결합이 되면 그들의 심장은 죄의식과 두려움과 수치로 찢어지는 것 같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두려운 판결소리가 온 만민 앞에서 들릴 때 공포와 당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노하신 심판관은 이미 옛날에 자기 자신을 구세주라 밝히시고 회개하기를 만일에게 종용하신 분이신 것이다. 그들이 불꽃같은 예수의 눈을 바라보고 물소리 같은 음성을 들을 때는 그들의 가슴은 날카로운 고통으로 찢어지는 것 같을 것이다.

궁지 속에 빠져 있는 그들을 동정하거나 도와 줄 사람은 하늘이나 땅 어느 곳에도 없는 것이다. 반면에 크신 하나님과 한때는 사랑을 베푸시고 무한한 노력을 기울이시며 그 사랑을 받아 회개하기를 권유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는 그들에게 냉정하시며 그들의 참회를 비웃으며 모든 천사의 무리와 영광을 얻은 성자들까지도 그들의 파멸에 기쁨을 나타낼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그러나 무서운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모든 산 자와 죽은 자는 불붙는 심판대 위에 놓지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구별을 둔다. “염소는 그 왼편에 양은 오른편에”(마 25:33) 이에 악한 자와 선한 자는 쉽게 구별할 수가 있는 것이니 주제넘은 위선자는 가면을 쓰고 경건한 영혼 가운데 섞을 수도 있고 속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교묘한 거짓은 곧 발견될 수 있으니 곧 선한 자들의 집단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위선자는 한 사람이라도 많은 존귀한 틈으로 침입하게 방임해 두지는 않는다.

그리고 큰 죄뿐만 아니라 작은 죄악도 모두 조사를 받고서 이제는 별 악의가 없다고 인정이 되는 죄악도 조사를 받는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알려주시길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두려운 말씀으로 들리겠는가? 많은 죄인들의 죄가 분석되고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선한 자들이 행했던 신앙과 사랑은 자랑스럽게 밝혀질 것이다. 그들이 옳은 일을 위해서 한 숨은 노력과 기도와 눈물과 고통 등 그들의 미덕은 기억되고 경건하게 간주되어 보답을 받을 것이다. “내가 굶주릴 때 너는 음식을 주었고 병들어 감옥에 있을 때 찾아 주었고 헐벗었을 때 그대는 옷을 나에게 주었도다” 그에 대한 작은 사랑의 표시, 심지어 냉수 한 잔마저도 결코 잊지 않고 보답없이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니 이는 하나님에 대한 복종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영광의 보좌로부터 심판하러 오신 왕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 이런 말씀을 듣는 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이보다 더한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 어디 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어느 누구가 당신을 비난하더라도 당신은 그때에는 하나님의 축복과 인정을 받을 것이다.

“오라, 땅 위에서 나를 저버린 자들에게서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너의 나쁜 친구들로부터 고난을 당하더라도 나는 너를 버리지 않는다. 오라! 나의 날개 아래 있는 죄악과 비참의 세상에서 나의 가슴 안으로 와서 나의 사랑의 기쁨을 맛보라! 와서 너를 위해서 창세적부터 예비해 둔 영광의 나라를 상속 받으라! 오라 너 죄인들에게서 고난을 받아 약해진 영혼아! 오라, 너를 위해 남겨 준 것을 물려주리라!” 영광을 받은 자들은 가슴깊이 스며든 기쁨과 즐거움은 말로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선한 자들의 영광에 가득 찬 문장이 끝난 뒤에 그들은 천사들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려 갈 것이다.

다음에는 죄 있는 자들의 재판이 행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하나님의 율법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경시한 행동이 나타나고 인정이 된 불순하고 속된 이러한 영혼들은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두려운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이니, “너 저주받은 자여! 악마와 그의 무리들을 위해 마련한 영원한 불길 속으로 들어가라! 이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의 말씀인가? 그대는 그대의 재산과 헛된 욕망 속에 쾌락을 즐기며 남에게 아첨을 해왔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됐다. 그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그대와 떨어져 있기를 원했고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알기를 원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종의 무리를 멸시했다. 이제는 그러한 하나님의 종의 무리와는 영원히 떨어져 있게 될 것이다.

심판관이신 그리스도가 판결문을 읽으신 뒤 곧 집행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면 이 불행한 영혼은 심판대에서 끌어내려져 무서운 지옥으로 끌려갈 것이다. 지옥의 불꽃은 불이 붙었다. 하나님에게서 그리고 온화한 성도들과 천사들에게서도 영원히 추방되는 것이다. 또한 빛과 사랑의 행복에 넘친 곳에서 모든 기쁨과 영광에서도 멀어지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가질 수 없었던 어두침침하고 공포에 휩싸인 동굴 속에서 고통을 겪을 것이며 같은 죄인들의 끊임없는 비명소리와 소름이 끼치는 비탄의 소리뿐이다. 하나님의 두렵고 무서운 질책이 그들에게 끊임없이 내릴 것이다. 이 불행한 영혼들의 수치와 당황과 고통, 괴로움은 더 이상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은총의 복음 속에서 하나님의 교훈, 약속, 말씀을 경시할 때는 우리가 이미 수난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라는 것이다(요 3:36). 우리가 참회를 하지 않는 이상 곧 집행이 시작될 것이다. 만일 그대가 계속 죄악을 범한다면 주님의 생전에 소돔과 고모라가 겪었던 그 이상의 벌이 그대를 다스릴 것이다. 지옥은 그 입을 벌리고 그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경건했던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그도 역시 공포와 불안으로 떨었을 것이다.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히 12:21),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얼핏 보기만 했지만 그는 공포에 휩싸여, “하나님은 성스럽고 영광이로다”라고 부르짖고는 “나는 도대체 누구냐! 아직 영광을 받지 못했으니”라고 한탄했다. 여러 가지 죄로 비열한 모습을 한 그대는 어떻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심판관 앞에 나설 수 있겠는가? 그의 허리는 온갖 금 은으로 둘려 있고 그의 몸은 찬란한 녹주석같이 빛나고 얼굴은 빛 같으며 그의 눈빛은 등불과도 같으며 팔 다리는 청동이 잘 닦여진 것같이 윤기가 나며 그의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과도 같은 것이다.

붉은 예복을 입으신 심판관들이 심판대 위에 선 죄인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공포로 두렵겠는가?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의 구름을 헤치고 내려오셔서 그가 심판대에 찬연히 앉아 계시는 것을 보고 후회를 한대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순간에 우리가 하늘의 천둥소리와 요동치는 소리를 듣고 사방에는 갑자기 무서운 불빛이 번득이고 발밑에는 대지가 우리를 삼키려는 듯이 움직이며 갈라지고 열려진 하늘의 문에서는 태양보다 밝은 광채로 천사들로 에워싸인 그리스도 심판관이 내려오시는 것을 보고서 우리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두려움에 질려 불안에 잠기어서 하나님에게 때늦은 자비와 용서를 울며 애원하겠는가?

그리스도는 그가 오시는 날을 연기까지 하지지만 어리석은 죄인들은 믿으려고도 하지 않고 심판의 날에 대비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내가 말한 갖가지 죄를 짓고 계속 죄악 속에 머무는 모든 불쌍한 심령들은 그대의 죄악을 다스리러 그리스도가 틀림없이 오심을 믿으시기 바란다. 죄인들은 영원히 은혜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추방되어 무섭고 영원한 파멸과 고난에 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엄하신 정의와 저들의 무섭고 끝없는 파멸에 오히려 영광을 내리실 것이다. 형제들이여! 만일 그대들에게 이러한 벌이 내리지 않는다면 나는 어떠한 벌이 그대들을 다스리게 될지 알 수가 없다. 이교도인 빌립도 이러한 형벌의 말씀을 듣고서 공포에 떨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이름과 자비심을 빌어 그대들에게 빨리 다가올 어쩌면 내일 새벽이 기 전에 다가올지도 모르는 그리스도의 심판에 준비하고 마음을 순결하게 하도록 권한다.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에는 “한밤에 커다란 소리가 있으니, 보라! 신랑이 오도다.”라고 적혀 있다. 나는 이로서 여러분에게 최후의 심판의 날에 다가올 죽음에 대비해 빨리 회개하고 기도와 말씀 공부하기를 바란다. “죄인들이여, 회개하라”

나는 우리들이 최후의 심판에 대해 생각하면 우리는 죄악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봉사로 향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제 다시금 겸손하게 행하는 모든 행동은 천국에 똑똑히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기록이 될 것이다.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필수 불가결한 준비 작업으로 여러분이 직접 교회의 봉사자가 되어 있어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피의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죄악으로부터 성스러운 몸이 되시오.

죄인들이여!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관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5,26)

형제들이여! 심장을 죄악의 소용돌이에서 깨끗이 닦아내십시오. 우리의 가슴속에는 얼마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이 있는지, 그대들의 손을 씻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오. 주저하는 자들이여!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시오. -삶은 짧고 영생은 긴 것, 죽음은 가깝고 심판은 문 앞에 있으니 후회하지 않는다면 잠깐 사이에 구원의 기회는 자나가 버릴 것이다. 그대들 중에 죄악과 위기에 대해 확신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에 대해 생각을 하고 기도를 함으로써 귀중한 보석같이 보존을 하고 그러한 확신을 일깨우시오. - 그대에게는 어떤 희생이 오더라도 겸손하게 하나님에게 봉사를 하시오. 진지한 신앙은 보다 큰 대가가 치러지게 될 것이다. 지금의 이러한 고난은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에 비해 비교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퇴폐하고 그릇된 시대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 거슬리는 것이 되더라도 그대는 그렇게 생각 말라는 것이다. 죄진 자들이여! 내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빌어 바라노니 그대들은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지 말라. 만일 당신이 선한 행동을 진실된 마음으로 행한다면 그리스도가 오시는 날은 당신에게 축복을 내리는 날이 될 것이며 그대는 그 날이 오기를 바라게 될 것이며 “주 예수여! 속히 오서서.”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아멘.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



                         

                             
Nocturnes  In E flat , Op.9  / Chopin 外



 


탐욕을 버리라


황새는 매우 오래삽니다.
그 이유는 황새는 욕심이 없는 새여서
절대로 과식, 과욕이 없는 새이기 때문입니다.
먹이를 아무리 줘도 양만큼 먹고는
그 이상은 안 먹는다고 합니다.
식사절제는 사람에게도 장수의 조건이 됩니다.
경건 생활에서도 이렇게 절제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송태승 목사의 ‘탐욕을 버리라’에서-

과욕을 부리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먹는 것에 쓰는 것에 가지는 것에 욕심을 부리다가
다치거나 망한 사람의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을 이러한 절제 속에서 했습니다.
오늘도 절제있는 생활 속에서 아름답게 살아가십시오.
결국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새벽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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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끼오~!” 담장 위에 냉큼 올라앉은 수탉이 목청 돋워 새벽 미명을 알리는 울음소리를 신호로, “구구구~” 부지런한 암탉도 어느새 일어나 그 품속에 있는 병아리들의 먹이를 찾아 나선다. 부리로 짚더미를 헤치기도 하고 언 땅을 발톱이 닳도록 열심히 파헤치기도 한다. 수탉에게 질세라, 사립문 틈으로 목을 쑥 빼고 밖을 내다보던 누렁이가 아직은 이른 시간, 호젓한 시골 길, 지나가는 이 하나 없는데, 저 멀리 사라져가는 달그림자를 좇는 것인지, 희부옇게 밝아오는 하늘을 향해 “컹컹!” 요란하게 짖어댄다. 자신이 주인집을 지키는 지키미임을 과시하는 충성스러운 표현일 것이다.

부엌에서는 어머니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끓이는 냉잇국 냄새가 구수하게 집안을 감싸 흐르고, 부지런한 아버지는 손수 만드신 싸릿대 비로 “사그락사그락” 밤새 떨어져 내린 오동잎을 끌어모으기도 하고 “서걱서걱” 긴 작두로 소여물 써는 소리가 꿈결에서 들리듯 정겹다. 어른이 된 후, 각박한 세상을 힘들게 헤쳐가는 동안에도 평화롭던 고향 집은 필자에게 지속적으로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요람처가 되고, 질서정연한 자연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메마른 심령을 풍요롭게 해준다.

그렇다. 창조주가 맡겨주신 사명을 역행하거나 거스르는 일 없이 순복하는 자연, 질서 정연한 세상은 언제 어디서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우리(여성들)도 모든 분야에서 지도자가 될 수 있는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말하면, 그 대답은 “Yes, 얼마든지 될 수 있다.” 이다. 능력만 있다면 여성이라고 해서 지도자가 되지말란 법이 없다. 성경에도 수많은 여인이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하기도 하고 여선지 ‘드보라’는 정치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최고 지도자 자리라고 할 수 있는 여성 사사였다. (당시 이스라엘에 왕이 없던 때라, 사사가 치리했으니, 그때 사사는 현대 대통령과 같은 위치임(사사기 4:4절 참조)) 그리고 그녀는 그 역할을 훌륭하게 잘 감당해 나왔음을 성경이 증명해 주고 있다.

남자와 여자는 모두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만물을 다스리고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어떤 분야에서건, 그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와 자질, 그리고 지도력을 가졌다면 여자라고 해서 한 단체의 지도자가 되지말란 법은 없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오랫동안 유교사상에 찌든 문화는 “남존여비”라는 무서운 이념을 체계화시켰고, 때문에 수많은 여인이 어두운 곳에서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져 한 맺힌 삶을 살아나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국가이기에 그 수치의 역사를 바로 잡는 의미에서도 여자 대통령을 선출한 것은 잘된 일이라고 본다.(필자는 정치를 좋아하지 않기에, 누가 더 좋은가 나쁜가에 관한 matter가 아님을 알아주기 바란다.)

이런 관점에서, 여자 대통령이 다른 나라가 아닌, 대한민국, 우리나라에서 탄생한 것은 글자 그대로, 획기적인 일이요,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다. 한 많은 여성들에게 능력만 있으면 무엇이건 할 수 있다고 하는 소망으로 미래를 열어가는 견인차 구실이 될 것이란 점에서 그 시사하는 바 크다 하겠다.

그러나 그 책임 사역을 제대로 감당해 나가려면 피나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여인이 한 나라의 운명을 걸머지고 나간다는 것은 결코 만만하지도, 녹록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나라라는 특성이 그렇고,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남성분들 대다수는 아직도 여성 리더에게 그리 우호적이질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거는 기대가 자못 크다. 정치와는 상관 없이, 필자도 한 사람의 여인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ㅠㅠ

그렇다면, 신약시대, 교회 안에서 여성의 사명은 무엇인가?
 
여성은, 교회 안에서 치리(주관자)자의 사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우는(helper)사람, 조력자(partner)조용히 배우는 자로서 사명이 주어졌다. 목회 서신서(디모데 전 후)에서는 교회와 가정에서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치리권)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여성)로서는 상당히 억울(?)한 느낌이긴 하지만, 성경은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선언한다(고전 11:3; 엡 5:23). 성경은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를 사람의 머리와 몸으로 비유하고,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도 사람의 머리와 몸으로 비유하였다(엡 1:22, 23; 4:15; 5:23; 골 1:18). 머리는 온 몸과 지체들을 주관하듯,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주관하고 다스리듯, 남자가 여자를 주관하고 사랑하는 것이 성경적 원리다.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여자를 남자의 몸으로 삼으신 제도와 위계질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때부터 설정하신 원리며 제도로서 이것을 지키는 것이 바로 창조 질서를 지키는 것이다. 세상적, 유물론적, 정치적 이슈와는 다른 그 무엇이 하나님의 교회, 그리고 천국의 작은 모형인 가정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께서 지시하신 것이다!!!

“여자의 남자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을, 교회에서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남자”(아넬, ; an adult male, husband)는 남자 어른 또는 남편을 뜻한다. “주관하는 것”(아우덴테인, ; to exercise authority; 권위를 행사하다) 이 단어는 권위를 행사하다(아우덴테오, ; to exercise authority or to domineer over, 위에 권위를 가지다 또는 지배하다)의 현재·부정·능동이다. 현재 부정사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로서 행동의 계속이나 반복개념이 있다.

“허락지 않는다”(우크 에피트레포, ; do not permit;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가르치는 것과 연결되어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일, 남자 위에서 권위를 행하는 일을 계속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여자가 남자를 주관하는 것은 성경이 허락하지 않는다.)

주관하는 자리(치리권)는 교회에서는 감독(장로, 목사)의 임무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히 13:17)고 하였다. 여기서 다스리며 권면하는 자들과 인도하는 자들은 동일한 직분을 맡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을 가리킨다(딤전 3:5; 5:17).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여자가 남자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여성이 목사 안수 받아 총 책임 지도(주관(leader))자가 되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딤전 2: 12-15절 참조) 이 말씀이 주는 진정한 의미는 여자는 교회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란 것이거나, 성경공부도 가르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주관하는 자리 즉, 교회에서 총책임 리더(Leader)격인 목사 안수를 받아서 남자를 주관하는 자리까지는 탐하지 마라...그런 뜻이다.

성경에서 분명히 이브(여자)는 아담(남자)의 갈비뼈를 취해서 만드셨다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창 2: 23)' 교회나 가정에서 최고의 권위는 하나님에 의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대리로서 여성에게로서가 아니라 남성에게 그 사명이 주어진 것은 보다 나은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각자에게 맡겨주신 것이며 누가 더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니라 위계 질서 문제인 것이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성경말씀을 가감하지 마라

얼마 전 올라온 아멘넷 기사엘 보면, "아담을 남자로 보면 큰일 난다." 라고 하는 대목이 있다. 아담이 인류를 대표하기에 인류로 보아야 한다는 뜻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이라면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담이 인류를 대표하는 중성이 아니라, 인류를 대표하는 ‘남성(Man)이 틀림없는데, 어찌해서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인지, 참으로 의아해진다. 진리를 거스르려고 하면 다른 이가 아닌 그 자신이 먼저 고통당한다.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고서야 어찌 평안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물론, 우리나라는 과거 '남존여비'사상으로 인해서 여성들이 압박을 많이 받은 나라이긴 하다. 그래서 많은 여인의 가슴에 한이란 것이 있다고 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인생의 잣대, 신앙인의 가는 길에 이정표가 되는 성경 말씀마저 변개하는 것은 옳지가 않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서 남성분들, 특히, 기독교 남성분들이 회개해야 한다. 교회에서, 가정에서 그리스도가 그 교회를 사랑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준 것처럼 헌신과 사랑을 쏟아붓지는 않으면서 여인들에게만 순종과 복종을 강요하는 목사님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즉, 인간은 남녀가 동등하다, 그러나 역할 면에서는 반드시 구분되어야 하고 그 구분을 할 수 있는 '매뉴얼'이 성경 말씀이고 그 ‘매뉴얼’대로 순복하는 것이 창조질서에 부합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 어떤 경우라고 하여도 성경 말씀을 변질시키거나 호도해서 가르쳐서도 안 되고 내 삶에 끌어당겨서 적용해서도 안 된다...진리는 변개시킬 수도 없고, 또 변질을 시켜 내 삶에 적용한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가지 않는 것이 창조 질서를 지키는 것

성도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귀와 절과 각이 서로 맞다. 구약에서 말씀되어진 내용이 신약에서 나오고 있으며 신약에서 인용되는 글이 구약에서 출처 된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인간 구원이다. 성경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사람은 각계각층의 사람이지만,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성령에 감동되어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받아 기록하였다. (딤전 3: 16절 참조) 때문에 각각의 시차와 역사와 문화를 달리하여 기록된 예언이 수천 년이 지나서도 이루어지고, 성경은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경을 풀기 위하여는 성령의 감동함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 기준선(基準線(base line))이다. 성경은 인간이 자신의 뜻대로 사사로이 풀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벧후 1: 20-21)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 다른 사상을 주입시키려 하는 것은 영적 교만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고로, 말세를 사는 우리 성도들은 이런 자들의 패역한 교훈을 단호하게 배격해야 하며 엄히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닭은 새벽을 알리는 울음을 우는 것이 사명이고, 개는 주인 대신 도적을 보고 힘껏 짖어대는 것이 사명이며, 해는 반드시 동쪽에서 떠 서쪽으로 져야만 한다. 기차는 철로(railroad)를 벗어나지 않고 달리는 것이 사명이다.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여인은 남자의 부족한 부분을 도와 완전케 하는 것이 창조 질서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사랑하는 동역자님들이여, 어떤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성경을 넘어서지 말자. 그것만이 창조 질서를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아름다운 신앙의 미덕일지니...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1: 20-21), “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고전 4:6)


1. J. Glen Gould, I and II Timothy, Titus(B.B.C. Vol. 9), p.577
2. G.L. Archer, Encyclopedia of Bible Difficulties, pp.411-413
3. William M. Hendriksen, Timothy and Titus(Banner, 1964), p.109
4. Donald Guthrie, The Pastoral Epistles(IVP), p.76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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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하지 않는 태도(A Nonjudgemental Presence)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했다는 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만큼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한
화해의 심부름꾼이 될 수 있습니다

화해를 도모하는 데 필수적인 것은 판단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판단하고 정죄하고 평가하고 분류하고
또 꼬리표를 붙이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나름대로 사람들을 판단하여
그 사람들의 잘못된 점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고칠 수 있는가를
지적해 주기 위하여 돌아다닌다면, 우리는 분열을 더 조장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운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남을 죄인으로 단정하지 말아라...남을 용서하여라..."
(누가복음 6:36~37) 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판단을 하도록
끊임없이 강요하는 세상에서 판단하지 않는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판단하지 않는 태도는 심오한 영적 생명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이며
화해를 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쉽게 인정받을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나는 하나님께...

 

나는 하나님께 나의 오만을 없애 달라고 청하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NO"라고 말씀하시며,
오만은 내가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포기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다시 하나님께 인내를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NO"라고 말씀하시며, 인내는 고난의 선물이라고,
또 그것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네 스스로 얻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다시 하나님께 행복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시"NO"라고 말씀하시며,
나는 너에게 은총을 줄 뿐이지 행복은 너에게 달려있다고 하셨다.

 

나는 다시 하나님께 영혼을 성숙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하나님 께서는 "NO"라고 말씀하시며, 성장은 네 스스로 하는 것이고
나는 네가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가지를 쳐 줄 뿐이라고 하셨다.

 

나는 다시 하나님께 고통을 덜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NO"라고 말씀하시며,
고통으로 인하여 네가 나에게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여쭈어 보았다
그러자 "YES, YES!" 하시며,
그래서 당신 외아들을 나에게 보내 주셨다고 하셨다.

 

나는 다시 하나님께 나를 사랑하시는 것 만큼
나도 다른 이를 사랑하게 도와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아! 드디어 ...네가 드디어 바로 그 생각을 하였구나!"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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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 1997. 8 마리아에 대한 기사가 난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은 카톨릭의 교인들은 교황청에 청원을 하였다는 내용이다,
다시 말하여 성모마리아의 지위를 지금보다 더 높혀 차라리 신격화시키자는 것이다.


KENNETH L. WOODWARD 기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번주 미국 캘리포니아州에서 바티칸 교황청으로 우송된 대형 소포를 받게 된다. 내용물은 ‘성모 마리아는 예수와 함께 공동 구세주이며, 모든 은총의 중재자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옹호자’라는 새로운 가톨릭 교의를 교황의 무류(無謬)의 권위로 선포할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 4만3백83장이다. 이 청원서들은 남극을 제외한 모든 대륙을 망라한 10여 개 국가에서 모은 것이다.

이런 대규모 청원운동은 성모 마리아의 지위를 지금까지 대다수 기독교인들이 간주해 온 것을 초월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지난 4년 동안 교황은 마리아에 관한 새로운 교의를 지지하는 청원서를 1백57개국에서 4백34만4백29장이나 받았다. 평균 한 달에 10만 명이 보낸 셈이다.

저명한 서명자 가운데는 인도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를 비롯해 5백 명에 달하는 주교, 그리고 미국 뉴욕 교구의 존 오코너, 폴란드의 요세프 글렘프, 바티칸 주재 추기경 6명을 포함한 42명의 추기경들이 포함돼 있다. 로마 교회에서 이런 조직적인 청원운동은 유례가 없을 뿐더러 가톨릭 교계가 교황에게 이런 무류의 교시(敎示)를 요청한 적도 드물다. 이 서명운동이 성공을 거둔다면 가톨릭 교회는 세 가지의 특이한 교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즉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 예수가 이룬 구속(救贖·기독교에서 남의 죄를 대신 갚아 구원하는 일)의 대업에 직접 참여하고, 예수의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은총은 마리아의 중재를 통해서만 내려질 수 있으며, 모든 신도들의 기도와 청원도 이와 마찬가지로 마리아를 통해 예수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학자들이 ‘존귀한 마리아학’(High Mariology)이라 부르는 이 교의는 디모데 전서 2장 5절에 나오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仲保·개신교에서 그리스도가 인간에게는 그 죄를 사하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뭇사람의 죄를 홀로 지고 죽은 일)도 한 분 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라는 신약성서의 기본 원칙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아울러 그 교의는 마리아를 성부(聖父)의 딸, 성자(聖子)의 어머니, 그리고 성신(聖神)의 배우자로 섬기게 함으로써 聖삼위일체를 聖사위일체 형태로 바꾸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

오하이오州 스투벤빌에 있는 프란체스카大의 신학 교수이며 이번 청원운동의 주도자인 마크 미러밸(39)은 “개인적으로 나는 마리아에 대한 이런 진실이 2000년 이전에 공인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미러밸은 여러 차례 교황을 알현한 적이 있으며 1993년 한 마리아 협의회에서 이와 같은 대담한 교의를 제안한 이래 관련 서적을 세 권이나 펴냈다. 그는 이 교의가 교황의 무류의 권위로 선포되면 ‘최고의 진실’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새 교의가 선포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기독교 다른 종파의 거센 반발을 촉발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도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스정교 미국 교구장인 조지 G. 파시아스 목사는 “마리아를 예수와 함께 공동 구세주로 부르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 이단(異端)”이라며 “마리아에게 아들 예수의 중재자가 되도록 요청하는 것과 마리아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로 떠받드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말했다.

성공회와 가톨릭 교회의 대화를 통해 세계 교회주의 운동을 이끌어온 성공회 신학자 R. 윌리엄 프랭클린도 교황이 마리아에 관한 새로운 교의를 선포하는 것은 “성모 마리아를 내세워 예수의 지위를 약화시키고 교황의 교의상 지위를 재강화함으로써 교파를 초월한 세계 교회주의 운동을 고사시키게 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신교도들이 그런 교의를 받아들일 리 없다는 주장이다. “그렇지만 가톨릭측은 이런 비판에 눈도 꿈쩍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폴란드 출신인 현직 교황이 현지에서 수호신으로 떠받들어지는 마리아에 대해 가진 신비주의적인 애착에서 비롯된 오만일 뿐”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마리아에 관한 새로운 교의는 가톨릭 신학자 사이에서도 심각한 분열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 바티칸에서 발행되는 신문인 로세르바토레 로마노紙는 지난 6월 교황청이 23명의 마리아학 연구자들로 구성된 위원회에 새로운 교의를 검토하도록 위촉했다고 보도했다. 그들은 마리아 신학의 전문가들로 대다수가 새로운 교의를 환영할 만한 학자들이었다. 그러나 위원회는 만장일치로 새로운 교의가 바티칸 제2차공의회의 교의에 배치되며 표현이 모호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 교회의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세계 교회주의 운동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교의 선포에 반대했다.

그러나 성모 마리아는 평범한 성서의 인물이 아니라 지난 2천 년 동안 서양 문화의 지배적인 여성상으로 간주돼 왔다. 프랑스의 샤르트 및 노트르담 성당, 東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현재 터키의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 그리고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등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들이 마리아를 섬기기 위해 세워졌다.
단테에서 홉킨스·엘리엇·오든에 이르는 시인들과 장엄한 ‘아베 마리아’를 작곡한 슈베르트를 비롯한 수많은 음악가들도 마리아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성수태 고지(하나님의 사자인 가브리엘 천사가 10대 처녀였던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를 잉태할 것이라고 알리는 장면)는 서양 역사상 가장 많이 그려진 그림에 꼽힌다.

특히 20세기는 여러 면에서 마리아의 세기였다. 마리아의 현신(現身)을 목격했다는 보고는 4백 건 이상에 이른다. 미러밸의 추정에 따르면 그것은 그 전 3세기의 목격 사례를 합친 것보다 더 많다. 마리아 운동가들은 이런 모든 사례들을 종합해 볼 때 20세기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로서 마리아의 역할을 인정하는 마지막 교의를 탄생시키게 될 ‘마리아의 시대’가 확실하다고 믿는다.

이런 마리아 운동은 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메주고례를 프랑스의 루르드나 포르투갈의 파티마 같은 가톨릭 교도들의 순례지로 만들었다. 크로아티아語를 사용하는 2백50가구가 고립돼 살고 있는 오지 마을인 이곳에서는 지난 81년부터 6명의 어린이가 마리아의 현신을 목격했을 뿐 아니라 메시지도 받기 시작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곳을 찾은 순례자의 수는 1천만∼2천만 명으로 추산된다. 순례자 가운데 많은 사람이 스스로 마리아를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미국의 대도시에도 그런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 결과 마리아의 행적을 좇는 일이 소규모 사업으로 발전하고 있다. 마리아의 현신을 목격한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 관련 뉴스레터·잡지·신문들이 소규모이긴 하지만 수백 가지나 발행되고 있으며 눈물을 흘리는 마리아상 등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와 책·팸플릿 등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아울러 세계 각지의 목격자들이 보내온 마리아의 메시지를 게재하고 그 의미를 토론하는 채팅룸을 제공하는 인터넷 웹사이트도 등장했다.

오랜 전통을 지닌 가톨릭이 초자연적인 현상을 갈구하는 뉴에이지와 자연스럽게 융합되고 있는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메주고례를 순례한 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이어 마리아 관련 웹사이트의 회원이 된 웨인 웨이블은 “모든 사람이 마리아의 현신을 목격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차별성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마리아를 하나님의 중재자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캘리포니아州 모데스토에서 노스 캐롤라이나州 샬럿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모든 곳에서 마리아에 관한 모임이 끊임없이 개최되고 있다. 전통적인 교의를 믿던 가톨릭 신도들도 마리아를 성신의 배우자로 간주하고 있다.

캘리포니아州 샌타 바버라에서 소규모 인쇄소를 운영하며 미러밸을 비롯한 마리아 학자들의 책을 발간하는 로버트 섀퍼는 “주말마다 어디선가 마리아 관련 집회가 열리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주 그는 2만 명이 서명한 청원서가 담긴 1백 번째 소포를 교황청으로 우송할 준비를 하면서 “과거 어느 때보다 마리아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설명했다.
다음은 카톨릭이 2차바티칸공의회에서 공표한 마리아에 대한 교의헌장이다.
 
마리아는 거의 신격화 되어있음을 알 수가 있다.
마리아는 피조물을 멀리 초월하는 존재이며, 구원과 죄사함에 있어서 주님과 공동사역을 하는 존재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마리아는 예수 다음의 위상을 갖으며, 모든 천사와 성인의 위에 있는 존재로서 하늘과 땅의 모후가 되며, 교회의 예식으로 공경을 받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위상을 높이자는 것이 카톨릭교인들의 청원이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52항
지극히 자비로우시고 지혜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세상 구원을 완수하시려고 "기한이 찼을 때에 당신 아들을 보내시어 여인에게 태어나시게 하셨으니…그것은 우리에게 아들이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다"(갈라 4,4-5). "그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혈육을 취하셨다". 이러한 구원의 신비가 교회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되고 계속되는 것이며, 주께서 당신 몸이 되도록 교회를 세우셨고 교회 안에서 신도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그 성도들과 교류하는 것이니, "먼저 우리 주 천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이시며, 영화로운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를 생각하며 공경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53항
동정 마리아는 천사의 아룀을 들으시고 하느님의 말씀(성자)을 마음과 몸에 받아들이시어 생명의 생명을 세상에 낳아 주셨으므로 하느님이신 구세주의 참 모친으로 인정받으시고 공경받으시는 것이다. 마리아는 아드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뛰어나게 구원되고 아드님과 불가분의 관계로 긴밀히 결합되었으며 천주 성자의 모친이 되는 직무와 품위를 갖추시었다. 그러므로 성부의 가장 사랑하시는 딸이 되셨고 성령의 궁전이 되셨으며 이렇게 탁월한 은총 때문에 마리아는 천상 천하의 다른 모든 피조물을 멀리 초월하신다. 그러나 마리아도 구원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아담 혈통(血統)에 결합되어 계실 뿐더러 "참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들의 어머니이시다…왜냐하면 마리아는 사랑으로써 교회 안에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신도들이 태어나도록 협력하셨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마리아는 교회의 가장 뛰어나고 가장 독특한 지체이시며 신앙과 명백한 전형과 모범으로서 찬사를 받으시는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아 마리아를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로 받들며 그에게 자녀다운 효성을 바치는 것이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54항
그러므로 거룩한 공의회는 하느님이신 구세주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교회에 관한 교의(敎義)를 설명하면서, 혈육을 취하신 말씀과 그 신비체의 신비 안에서의 복되신 동정녀의 역할과 그리스도의 모친이시며 사람들, 특히 믿는 사람들의 모친이신 천주의 모친께 대한 구원된 사람들의 의무를 성실하게 밝히고자 하는 바이다. 그러나 마리아에게 관한 교리를 전부 설명하거나 신학자들의 노력으로도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교회 안에서 그리스도 다음으로 가장 높고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시는 마리아에게 대하여 여러 가톨릭 학파에서 자유로이 논의되는 학설들은 그 권리를 보장받고 있을 것이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55항
신구약(新舊約) 성서와 존귀한 성전(聖傳)은 구원 계획에 있어서 구세주의 모친이 맡으신 역할을 점차로 보다 명백히 드러내어 우리 눈앞에 제시해 주고 있다. 구약이 서술하는 구원의 역사 속에서 세상에 모실 그리스도의 내림이 천천히 준비되고 있다. 이 초기의 문서들은 교회 안에서 낭독되고 보다 상세하고 완전한 계시의 빛으로 이해되는 바와 같이 그 문서들은 구세주의 모친인 한 여인의 모습을 점차적으로 밝혀 주고 있다. 이 빛 속에서 본다면 죄에 떨어진 원조에게 약속된 뱀에 대한 승리(창세 3,15) 속에 이미 예언적으로 그 여인의 모습이 암시되어 있다. 비슷한 예언으로서, 그 여인은 아들을 잉태하여 낳을 동정녀이며 그 아들의 이름은 엠마누엘이라 불릴 것이었다(이사 7,14; 미케 5,23; 마태 1,22-23). 그 여인은 신뢰로써 주님께로부터 구원을 기다리고 받은 주님의 겸손하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뛰어난 분이다. 시온의 훌륭한 딸인 이 여인이 나타날 때에 오래 기다리던 약속의 때가 가고 새로운 계획이 시작되었으며, 그 때에 천주 성자께서 이 여인에게서 혈육을 취하시고 당신 육신의 신비로써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키신 것이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56항
자비하신 성부께서는 여인이 죽음에 이바지한 것처럼 여인이 생명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예정된 어머니의 승낙이 화신(化身)에 선행하기를 원하셨다. 이것은 각별히 예수의 모친에게 해당되는 것이니, 마리아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생명 자체를 세상에 낳아 주셨고 하느님께로부터 이 위대한 임무에 합당한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교부(敎父)들이 흔히 천주의 성모는 마치 성령께 형성된 새로운 조물같이 온전히 거룩하시고 아무런 죄에도 물들지 않으셨다고 부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특수한 성덕의 빛으로 꾸며진 나자렛의 동정녀는 하느님의 명을 받은 천사로부터 "은총이 가득하시다"는 인사를 받으셨고 (루가 1,28) 동정녀는 천사에게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루가 1,38)하고 대답하셨다. 이렇게 아담의 딸인 마리아는 하느님 말씀에 동의함으로써 예수의 모친이 되셨고, 아무런 죄의 거리낌도 없이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받아들이시고,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당신 아드님 밑에서 아드님과 함께 구원 사업에 봉사하기 위하여, 아드님의 인격과 사업에 당신 자신을 주의 종으로 온전히 바치셨다. 그러므로 교부들은 마리아가 순전히 피동적으로 하느님께 이용당하신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신앙과 순명으로 인류 구원에 협력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리아는 이레네오의 말씀대로 "순명함으로써 자신과 인류 전체를 위한 구원의 원인이 되신 것이다". 그러기에 적지 않은 예 교부들이 설교 중에 이레네오와 함께 "에바의 불순명이 묶어 놓은 매듭을 마리아의 순명이 풀어 주었고, 처녀 에바가 불신으로 맺어 놓은 것을 동정 마리아가 믿음으로 풀었다"고 즐겨 주장하였다. 그리고 에바와 비교하여 마리아를 "산 사람들의 어머니"라고 부르며, 가끔 "에바를 통하여 죽음이 왔고 마리아를 통하여 생명이 왔다"고 주장한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57항
구원사업에 있어서의 성모와 성자의 이 결합은 동정녀로서 그리스도를 잉태하실 때부터 그리스도 죽으실 때까지 나타난다. 우선 마리아는 일어나 급히 엘리사벳을 방문하고 약속된 구원을 굳이 믿었기에 엘리사벳으로부터 복되다는 인사를 받았으며 그리스도의 선구자가 태중에서 즐겨 용약하였을 때(루가 1,41-45), 또 어머니의 완전한 동정성을 감소시키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성화하신 당신 맏아들을 목동들과 박사들에게 기꺼이 보여 주시던 성탄 때에 그 결합이 나타났다. 성전에서 가난한 이들이 바치던 예물을 바치시고 당신 아들을 주께 봉헌하실 때에는, 성자는 반대의 표적(標的)이 되실 것이요, 어머니의 마음은 칼에 찔릴 것이며 많은 사람 마음에서 숨은 생각이 드러나리라는 시메온의 예언을 들으셨다(루가 2,34-35). 어린 예수를 잃고 슬퍼하며 찾던 양친은 성전에서 성부의 일로 골몰하신 그를 발견하고서도 그의 말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모는 이 모든 것을 묵상 재료로 마음에 간직하셨다(루가 2,41-51).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58항
예수의 공생활(公生活)에 있어서 성모는 시초부터 뚜렷이 나타나신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동정심을 억제하지 못하시고 구세주 예수의 첫 기적을 당신 전구로써 행하시게 하셨다(요한 2,1-1l). 예수의 설교 과정에 있어서는 성자께서 천국은 혈육의 인연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성모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듣고 지키는 사람은(루가 2,l9와 51) 복되다고 선언하시는(마르 3,35; 루가 11,27-28) 그 말씀을 충실히 받아들이셨다. 이렇게 복되신 동정녀께서도 신앙의 나그네길을 걸으셨고 아드님과의 일치를 십자 정사(釘死)에 이르기까지 충실히 보존하셨으며, 하느님의 섭리대로 그 십자가 밑에 서 계셨던 것이다(요한 19,25). 거기서 성모는 당신 외아드님과 함께 심한 고통을 당하셨고 아드님의 제사를 모성애(母性愛)로써 함께 바치셨으며 당신이 낳으신 희생자의 봉헌을 사랑으로 동의하셨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머니, 곁에 당신 아들이 있습니다"(요한 19,26-27) 하신 그 말씀으로써 성모는 제자의 어머니가 되신 것이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59항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언약하신 성령을 보내시기 전에는 인류 구원의 신비를 장엄하게 나타내시기를 원치 않으셨으므로 성령 강림 전에는 사도들이 "여인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과 함께 마음을 합하여 기도에만 힘썼고"(사도 1,14) 마리아도 이미 천사의 아룀을 받으실 때에 당신을 덮어 그느르신 그 성령의 은혜를 당신 기도로써 간구하신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마침내 티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 조금도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으며 지상 생활을 마치신 후에, 영혼과 육신이 천상 영광에로 부르심을 받으시어, 주님으로부터 천지의 모후로 추대받으셨다. 이로써 마리아는 다스리는 자들의 주님이시며(묵시 19,16)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당신 아드님을 더욱 완전히 닮게 되셨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60항
"하느님이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의 중재자도 한 분이시니;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값으로 당신 자산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1디모 2,5-6) 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우리 중재자는 한 분뿐이시다. 사람들에게 대한 마리아의 모성적 역할은 그리스도의 이 유일(唯一) 중재성을 흐리게 하거나 감소시키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실 인간 구원에 유익한 복되신 동정녀의 온갖 영향은 어떤 필연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호의에 기인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넘치는 공로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중재 역할에 근거를 두고 거기 속하며 거기서 전적으로 힘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믿는 이들과 그리스도와의 직접 결합을 절대로 방해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도와 주는 것이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61항
하느님의 말씀의 화신(化身)과 함께 하느님의 모친으로 예정된 복되신 동정녀는 하느님 섭리(攝理)의 계획을 따라 세상에서 하느님이신 구세주의 좋은 어머니로서 남보다 각별히 친절한 주님의 동반자(同伴者)요 겸손한 종이시었다. 그리스도를 잉태하시고 낳으시고 성전에서 성부께 바치시고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그 아드님과 함께 수난하시며 순명과 믿음과 희망과 불타는 사랑으로써 영혼들의 초자연적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온전히 독자적인 방법으로 구세주의 구세 사업을 도와드리셨다. 이 때문에 은총의 세계에서 우리의 모친이 되시었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62항
은총의 계획 속의 마리아의 모성은 천사의 아룀을 듣고 충실히 동의하신 그 순간부터 - 이 동의는 십자가 밑에서도 망설임 없이 지속되었다 - 뽑힌 이들의 수가 찰 때까지 영구히 끊임없이 계속된다.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후에도 이 구원의 역할을 그치지 않으시고 계속하여 여러 가지 당신 전구로써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얻어 주신다. 당신 모성애로써 당신 아드님의 형제들이 지상 여정(旅程)에서 위험과 고통 중에 있는 것을 돌보시어 행복된 고향으로 인도해 주신다. 그 때문에 교회에서는 복되신 동정녀를 변호자, 보조자, 협조자, 중재자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유일한 중재자 그리스도의 지위와 효능(效能)을 조금도 감하기도 가하지도 않는다는 의미로 알아들어야 한다. 혈육을 취하신 말씀인 구세주와는, 어떠한 피조물도 절대로 대등(對等)한 위치에 설 수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제직에는 성직자나 평신도가 여러 모양으로 참여하는 것처럼, 또 하느님의 유일한 선이 피조물들에게 서로 다른 모양으로 널리 퍼지듯이, 구세주의 중재도 유일한 것이지만 그 유일한 원천에 참여하는 피조물들의 협력을 배제(排除)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요구하는 것이다. 교회는 주저함이 없이 이와 같은 마리아의 종속적 역할을 선언하고, 끊임없이 체험하며, 신도들의 마음도 이러한 모성적 보호로 중재자이신 구세주께 보다 깊이 결합되도록 권고하는 바이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63항
복되신 동정녀는 하느님의 모친이라는 은혜와 역할로써 아드님 구세주와 결합되신 그만큼 당신의 특수한 은총과 임무로써 교회와도 밀접히 결합되어 계신다. 이미 성 암브로시오의 말씀대로 신앙과 사랑과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일치에 있어서 천주의 모친은 교회의 전형(典型)이다. 교회 자체도 당연히 어머니라 또는 동정녀라 불리느니만큼 교회의 신비 안에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탁월하고 독자적인 어머니와 동정녀로서의 모범을 보여 줌으로써 뛰어난 위치를 차지한다. 마리아는 믿음과 순명으로 바로 성부의 아들을 세상에 낳아 드렸다. 남자를 몰랐지만 성령의 부르심을 받고 새 에바로서 옛뱀에게 속하지 않고 하느님의 천사를 믿어 조금도 의심치 않으셨다. 마리아가 낳으신 아들을 하느님은 그 형제들인 많은 신도들 가운데의 맏이로 삼으셨다(로마 8,29). 마리아는 이 신도들을 낳아 기르시는 데에 모성애로 협력하신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64항
그런데 교회는 마리아의 깊은 성덕을 바라보고 그 사랑을 본받으며 성부의 뜻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스스로도 어머니가 된다. 과연 교회는 복음 전도와 성세성사로써 성령으로 잉태되어 하느님께로부터 태어나는 자녀들을 낳아 줌으로써 그들에게 불사의 새 생명을 준다. 교회는 또한 동정녀로서 사람에게 바친 완전한 신의를 깨끗이 지키며, 주님의 어머니를 본받아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답게 완전 무결한 신앙과 굳은 희망과 진실한 사랑을 지니고 있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65항
교회는 복되신 동정녀로 말미암아 이미 완덕에 도달하여 티나 주름이 없는 교회가 되었지만(에페 5,27), 그리스도 신도들은 아직도 죄를 극복하고 성덕에 자라도록 더욱 노력한다. 따라서 신도들은 뽑힌 이들 공동체 전체에서 덕행의 모델로 빛나고 계신 마리아를 바라본다. 교회는 자녀다운 효심으로 마리아를 생각하고 사람이 되신 말씀(성자)의 빛을 받아 마리아를 직관하며 존경심으로 화신(化身)의 최고 신비(神秘)를 파고 듦으로써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보다 완전히 닮아 가는 것이다. 과연 마리아는 구원의 역사 속에 깊이 참여하시므로 신앙의 최대 요소(要素)들을 어떤 의미로 자기 안에 종합하여 반영하시는 것이며, 따라서 마리아를 설교하고 공경할 때에 마리아는 당신 아들과 아들의 희생과 성부의 사랑에로 신도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추구하는 교회는 계속적으로 신앙과 희망과 사랑에 진보하며 만사에 하느님의 뜻을 찾아 따름으로써 그 탁월한 전형(典型)인 마리아와 비슷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사도적 활동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를 낳으신 마리아를 쳐다보며, 바로 성령으로 잉태되시어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그분이 교회를 통하며 신도들 마음속에도 탄생하시어 성장하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과연 마리아는 그 생애를 통하여 교회의 사도적 사명으로 사람들을 재생시키는 데에 협력하는 모든 이가 지녀야 할 모성애의 모범이 되셨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66항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성자 다음으로 모든 천사와 사람들 위에 들어 높임을 받으신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하신 지극히 거룩한 천주의 모친으로서 교회의 특별한 예식으로 공경받으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실 복되신 동정녀는 오랜 옛적부터 "천주의 모친"이란 칭호로 공경받으시고 신도들은 온갖 위험과 아쉬움 중에 그의 보호 밑으로 들어가 도움을 청한다. "이제로부터 과연 만세가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니, 능하신 분이 큰 일을 내게 하셨음이로다"(루가 1,48) 하신 마리아의 예언대로 특히 에페소 공의회 이후로 하느님 백성의 마리아 공경은 존경과 사랑과 기도와 모방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였다. 교회 안에 언제나 있었던 이같은 마리아 공경이 비록 온전히 독특(獨特)한 것이기는 하나, 혈육을 취하신 말씀인 성자가 성부와 성령과 함께 받으시는 흠숭(欽崇)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그 흠숭에 오히려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건전한 정통(正統) 교리의 테두리 안에서 시대와 장소의 조건이나 신도들의 기질(氣質)과 품성(品性)에 따라 교회가 인준(認准)한 성모 신심의 여러 형태는 성모가 공경을 받으심으로써 성자가 옳게 이해되시고 사랑과 영광을 받으시며 성자의 계명이 준수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부께서 성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골로 1,15-16) "성자 안에 모든 충만함이 머물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골로 1,19)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67항
거룩한 공의회는 이러한 가톨릭 교리를 의식적으로 가르치며, 동시에 복되신 동정녀 공경, 특히 전례적(典禮的) 공경을 충분히 촉진하고, 세기를 통하여 교도권이 권장해 온 신심 행위의 풍습을 중히 여기며, 과거에 그리스도와 복되신 동정녀와 성인들의 성상(聖像)에 대하여 결정한 것을 엄수하도록, 교회의 모든 자녀들에게 권고하는 바이다. 신학자들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성모의 고유한 품위를 존중하는 데에 있어서 지나친 마음의 협소함과 마찬가지로 온갖 거짓 과장도 힘써 피하기를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교도권의 가르침을 따라 성서와 교부들과 교회 학자들과 교회의 전례를 연구함으로써 복되신 동정녀의 역할과 특권을 올바로 밝혀 줄 것이니, 그것은 언제나 모든 진리와 성덕과 신심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로 향한 것이다. 또한 말이나 행동으로 갈라진 형제나 다른 그 누구도 교회의 참된 교리에 대하여 오해를 품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다 힘써 피할 것이다. 참된 신심은 결실없이 지나가는 일시적 감정이나 허황한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참된 신앙에 있다는 것을 신도들은 알아야 하겠다. 참된 신앙이 있어야만 우리가 성모의 탁월성을 인정할 수 있고 우리 어머니이신 성모께 자녀다운 사랑을 드리며 그의 덕행을 본받을 수 있을 것이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68항
예수의 모친은 천상에서 이미 영혼과 육신으로 영광을 누리고 계심으로써 후세에 완성될 교회의 모상이며 시작이 되심 것처럼 이 지상에서는 주의 날이 올 때까지(2베드 3,10) 하느님 백성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시로서 빛나고 계신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 69항
갈라진 형제들 사이에도 구세주의 모친을 합당하게 공경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는 사실과 특히 동방 교회 신도들이 평생 동정녀이신 천주의 모친을 신심 가득한 마음으로 열심히 공경한다는 사실은 이 거룩한 공의회의 큰 기쁨과 위로가 아닐 수 없다. 모든 그리스도 신도들은 천주의 모친이시며 사람들의 어머니이신 성모께 간절한 기도를 바쳐야 하겠다. 당신 기도로써 초기 교회를 도와 주신 성모께서 모든 성인들과 천사들 위에 들어 높임을 받으신 오늘도 모든 성인의 통공 중에서 그리스도 신도의 이름을 가졌거나 아직 자기 구세주를 알아 모시지 못하는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평화와 화목 속에서 행복하게 유일한 하느님의 백성을 이루고 지극히 거룩하신 불가분(不可分)의 성삼께 영광을 드리게 되도록 성자께 전구하시기를 간구해야 하겠다


많은 한국인들이 김연아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한 선수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맞지 않는 스케이트화나 피겨전용링크 조차 없는 불모지 그리고 그들에 기인한 후유증으로 부상을 달고 살게 됐다는 정도가 어려운 환경 이라고 알았다면 한국 언론이 감춘 2/3는 모르는 것이다.

1989년 세계 피겨 선수권 대회에서 트리플악셀을 내세운 일본의 이토 미도리가 우승을 차지한다.

아시아 최초의 우승이었고 전 일본 열도가 열광했다. 서양의 전유물이었던 피겨에서 일본은 그들의 가능성을 본다.

아시아 속의 유럽(탈아입구:脫亞入歐)을 외치던 일본은 동계올림픽의 꽃이자 예술성이 결부된 피겨가 당시 아시아 유일의 G7 국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는데 아주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일명 '얼음폭풍'프로젝트를 가동시키며 20조라는 천문학적 액수를 투입해 집중 육성한다.

그러나 2006년 동계올림픽에서 우승 후보들의 무더기 실수 덕에 요행수로 딴 금메달을 제외하고는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얼음 폭풍 프로젝트의 효율성을 되물을 시점에 나온 것이 아사다 마오이다.

그녀는 일본선수로서는 예쁜 외모에 여자 선수 중 유일하게 트리플악셀 점프를 구사했다.

스타성과 천재성을 겸비해서 아이콘으로 삼기 적합한 소재라고 판단한 산케이신문 등 일본 우익들은 아사다에게 개인전용링크는 물론 막대한 지원비와 CF까지 몰아주며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다.

그녀를 통해 서양의 전유물이었던 피겨에서의 입지를 확고히 함으로써 아시아 속 유럽이란 이미지를 공고히 하려는 계산이였다.


그들의 계획이 순순히 맞아 들어가기 시작할 즈음, 돌연 아무도 예상치 못한 천재가 혜성처럼 나타난다.

김연아였다.

겨우 100년 정도 역사를 가진 세계 여자 피겨계에서 관계자들 누구나가 100년에 한번 나올 천재, 심지어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이자 코치인 알렉산더 줄린은 1000년에 한번 나올 천재라고 극찬하는 그녀는 일본이 20조의 예산을 쏟아붇고도 만들어낼 수 없던 존재였다.

첫 출전한 해외 주니어대회에서는 심판들이 어린 김연아의 연습만 보고도 애국가를 준비시킬 정도였고, 김연아를 낮게 평가하던 전문가들 조차 경기장에서 깃털처럼 날아다니는 그녀를 눈앞에서 직접 보고나면 팬보이가 될 정도였다.

갑자기 나타난 김연아가 주니어 세계대회에서 아사다를 꺾고 우승하자 일본은 충격에 빠진다.

그러자 일본은 언론을 동원해 아사다와 김연아의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 김연아의 수준을 깎아내린다.

그리고 아사다의 트리플 악셀을 내세워 기술의 아사다, 표현력의 김연아란 이미지를 만든다.


원래 아사다의 필살기 트리플악셀은 치팅이 심했고 성장하면서 체중이 늘수록 더욱 질이 낮아져 대회에서 쓰기 곤란한 수준의 점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국제빙상연맹 ISU가 점차 일본의 지배아래 놓이게 되면서 이를 지적하는 심판이 드물게 되고 감점은 커녕 가산점까지 받는 기술로 포장된다.

반면 아사다의 코치였던 야마다 마치코가 어린 김연아의 날아가는 듯한 트리플 컴비네이션 점프를 보고, 아사다와 달리 완벽했던 이토 미도리의 트리플악셀 보다도 높이 평가하며 '이건 못이겨'라고 생각했다고 극찬할 정도로, 김연아의 점프는 여자는 물론 남자조차 흉내내기 힘든 '무서운' 경지였다.

더욱이 아사다와 달리 김연아의 점프는 점점 발전해갔다.

토털패키지로 불리는 김연아에 비해 점프밖에 내세울게 없는 아사다는 나머지 면에서 더욱 비교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남들은 대번에 알아본 자기 수중의 보물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 한국의 언론은 이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와 앞장서서 국민들에게 홍보했고 한국인들은 아사다의 실력, 특히 트리플악셀이 김연아보다 대단하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아사다와 달리 치팅이 허락되지 않는 김연아에게 약점을 극복해야 한다며 트리플악셀을 훈련시키다 몸만 더 상하게 만든다.

한편 일본은 특유의 비열한 수단들을 동원해 김연아를 밟기 시작한다.

당시 스케이트화에 테이프를 칭칭 감고 경기를 할 정도의 경제적 곤란을 겪으며 피겨를 지속할 지를 심각하게 고민하던 김연아의 가족들에게 IMG라는 국제적 기업의 한국지사가 접근한다.



그 실체는 일본 우익 자본과 연결된 아사다의 소속사였다.

이들은 지원은 커녕 다른 기업들의 접근까지 차단하고 김연아가 고사하기를 기다린다.

김연아에게 관심을 갖고 있던 국민은행이 직접 접촉해오고 나서야 사정을 알게된 김연아의 가족들은 작은 곳으로 소속사를 옮긴다.

그러자 소송을 걸며 죽여버리겠다는 협박까지 했고 아이스 쇼를 열 때면 항상 방해하는 것은 물론 기회있을 때마다 한국 기자들을 동원해 악의적 기사를 쏟아내는 등 김연아 괴롭히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IMG코리아의 직원들이 국내에서 열린 대회에 참가한 김연아에게 욕을 퍼붓는 장면이 목격된 적도 있다.

하지만 최근 김연아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준 것은 역시 오서와의 결별일 것이다.

이번 세계대회에서 김연아의 전 의상 디자이너가 아사다 측에 고용된 것이 드러남으로써 확인됐듯이, 본래 올림픽 후에 김연아의 코칭스텝 전부를 뺏어가려 했는데 오서의 경우 직접 고용은 너무 노골적이라 IMG가 장기 계약을 제시하는 조건으로 떼어낸 것이고, 데이비드 윌슨만 남아 준 것이다.

이렇게 김연아의 훈련시스템을 붕괴시켜놓고 한국언론을 동원해서 비난기사를 퍼부어서 모든 책임을 김연아에게 뒤집어 씌우고 비난여론을 조성해 정신적 상처까지 입혔다.

이 밖에도 김연아의 해외 진출까지 막아서 대성공을 거두었던 미국에서의 아이스쇼도 이제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 스케이트화 문제로 고생하던 김연아가 일본에 유명한 장인이 있단 말을 듣고 직접 찾아간게 국내 방송에도 방영된 적이 있다.

이미 아사다의 라이벌로 일본에서 오히려 더 유명했던 김연아를 알아본 그 장인은 이것저것 조언 하는 척 하며 한칫수 높은 신을 신으라고 충고하고 새 신을 맞춰준다.

그러나 다음 경기에서 김연아는 맞지도 않는 신발 덕에 피겨선수에게 생명과도 같은 발을 또 고생시키는 골탕을 먹게된다.

김연아가 각종 대회를 휩쓸기 시작하자 편파판정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다른 나라, 특히 일본선수들이 치팅이나 회전수 부족 등에서도 감점은 커녕 가산점까지 받을 때 김연아는 자신의 고난이도 기술들에 어울리지 않는 등급을 받는 일이 다반사였고 주관성이 강한 예술점수에서 더욱 심한 차별을 당한다.

김연아는 부상과 더불어 편파판정도 달고 살아온 것이다.

(2008년 세계선수권 사진: 부상때문에 진통제를 맞아 부은 얼굴로 나갔지만 혼신의 힘으로 최고의 연기를 펼쳐 기립박수까지 받은 후 나온 점수에 놀라는 김연아. 경기장은 야유로 들끓었고 해설자들도 편파판정을 지적했다.

반면 아사다는 치팅인 비비기를 시도하다 크게 넘어져 거의 20초간 연기를 못하고서도 김연아와 2점차로 1위를 차지한다.)



또한 교과서라고 불릴 정도로 완벽한 김연아의 점프를 음해하는 동영상이 유튜브 등에 나돌기 시작한다.

실제 그녀의 점프는 교재영상으로 사용된다.

헌데 이렇게 여론을 조작하더니 후에 대회에서 심판이 이를 지적하며 점수를 깍는 식의 편파판정이 반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완벽한 점프로 평가받는 기술을 거짓으로 흠잡아 보통 사람이라면 스스로 무너질정도로 가혹한 정신적 고통을 가해 그녀의 점프를 망가뜨리려는게 목적이었다.

배후에는 히라마츠 준코 같은 일본심판들이 있었지만 표면에는 로리올-오버윌러 미리암같은 타국 심판을 내세우는 용의주도함도 잊지 않았다.

특히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2009년에야 첫 금메달을 딸 정도로 지독한 편파판정의 견제를 받는다.

2002년 올림픽때 큰 무리를 일으켜 IOC에게 퇴출 경고까지 받은 ISU는 올림픽에서는 그나마 행동을 조심하게 됐었다.

하지만 자기들이 주관하는 기타 대회에서는 여전히 비리를 저질렀고 올림픽 다음으로 권위있는 세계선수권에서는 더욱 노골적인 편파판정으로 일본에 메달을 몰아줘 왔던 것이다.

이때 김연아는 처음으로 시상식에서 눈물을 흘린다.


김연아가 겪는 편파판정이 얼마나 심한지를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NBC 해설자인 스캇 해밀턴의 말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는 김연아가 끝에 2분정도는 빙판위에 서있기만 해도 우승할 정도로 압도적인 선수라고 평가한다.

모든 판정이 공정했다면 김연아의 기록은 올 포디움이 아닌 올 골드였을지도 모른다.

그 밖에도 경기장에서는 일본선수들이 김연아를 따라다니며 연습을 방해했고 장외에서는 일본기자들이 김연아가 참가하는 대회마다 벌때처럼 몰려들어 공격적인 질문을 퍼부어 정신적 압박을 가해왔다.

심지어 기자회견을 거절하면 대회본부에 항의를 해서 강제로 기자회견을 열게했다.

여기에 화난 사람들이 한국 기자들도 보복성 질문을 할 수 없냐는 푸념을 한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 한국기자는 '일본 선수들은 마음이 약해서 그런 질문을 하면 안된다. 김연아는 무슨 질문을 해도 괜찮다'는 같은 한국인인지 의심이 드는 답변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돈벌이에 급급한 소속사(ib)는 언론에의 노출을 반겨 이를 거의 방치했다.

올림픽 직전에는 국제빙상연맹 회장인 친콴타까지 전례가 없는 압박을 김연아에게 가한다.

올림픽 참가 선수들 대부분이 컨디션 조절을 위해 건너뛰는 4대륙대회에 참가하라고 종용한 것이다.

김연아는 거부했지만 한국언론들은 일본언론들과 함께 호들갑을 떨었고 되려 미국 기자 필립 허쉬와 미셸콴이 친콴타의 행동이 잘못됐음을 지적할 정도였다.

더욱이 위에 언급한 편파판정의 앞잡이 미리암이 올림픽 심판으로 또다시 내정되고 그 와중에도 김연아를 음해하는 날조영상들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 김연아는 이 모든 것은 물론 여기에 언급되지 않은 국내의 추악한 밥그릇 싸움의 견제(한국언론이 감춘 나머지 1/3)까지도 극복하고 일본피겨육성의 결정체인 아사다 마오를 보란 듯이 수차례 압도하더니 끝끝내 2010년 벤쿠버 올림픽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퍼포먼스 중 하나라는 극찬과 사상 유래가 없는 최고의 점수를 받으며 금메달을 거머쥔다.

전세계 언론이 새로운 전설의 탄생을 거의 찬양 조로 보도했고 그녀를 타임지의 영향력있는 100인 영웅부문에 클린턴 다음으로 2위, 아시아인 최초로 올해의 스포츠우먼, 메시와 베컴, 페더러와 나란히 유니세프 친선대사 등에 선정하는 등 세계가 그녀에게 스포츠 선수에게는 드문 경의를 표한다.


이를 통해 일본이 상처 입은 것은 크게 두가지이다.

하나는 자국을 피겨 왕국이라 자칭하며 종목 독점을 목표로 한다고 방송에서까지 대놓고 큰소리치던 일본의 자존심이 통째로 날아간 것이고, 또 하나는 그들이 피겨를 집중 육성함으로써 이루고자 했던 '탈아입구(脫亞入歐)'의 과시가 불가능해진것이다.

더군다나 자기들 식민지였다고 깔보던 한국에서 난 선수에 의해서 말이다.

김연아, 그녀는 강대국들이 수조, 수십조의 예산을 들여가며 자국에 나오길 간절히 바랬지만 허락되지 않았던, 그런 존재다.

이는 말 그대로 한국에 뚝 떨어진 기적과도 같은 행운이 아닐 수 없으며 그녀는 해방 이후 가장 완벽하고 통쾌하게 일본이 엄청난 심혈을 기울인 계획을 '엿먹인' 한국인인 것이다.

올림픽 금메달은 김연아가 땄으니 일본이 저지른 짓들에 통쾌한 비웃음을 날릴 수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한 본인 입장에서는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들이었을까.

게다가 음해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올림픽 직후에는 금메달 박탈 음모를 시도 했었고, 이번 세계대회에서 안전하기만 할 뿐 느리고 저질의 연기를 펼친 안도 미키에게1점차로 금메달을 내주게 만든 계속된 편파판정과 이를 감추려듯 뒤이어 쏟아진 김연아를 비난하는 한국 언론의 기사들은 단지 드러난 예에 불과하다.

국제빙상연맹은 맞춤형이라고 할 정도로 김연아에게 불리하도록 룰을 개악했으며 일본언론들의 김연아 흠집내기는 더욱 심해졌고 유튜브에는 김연아를 비방하는 영상이 계속 올라오고 있으며 김연아를 옹호하거나 조회수가 높은 대회 영상은 지속적으로 삭제되고 있다.

더욱이 아사다는 올림픽에서의 패배 이후에도 김연아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일본 기업들의 엄청난 지원과 일본 언론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반면 김연아는 CF 등에 출연하여 정당하게 얻는 수입조차 운동선수의 본분을 망각한다는 비난여론이 조장되며 견제당한다.

그리고 전용링크 없이 훈련하다 후유증으로 부상을 달고 살게 된 김연아의 한이자 염원이며 한국이 여러번 약속했던 전용링크 건설도 줄줄이 취소되고 있으며 나서서 짓겠다는 것 마저 방해받고 있다.



김연아는 인터뷰때마다 우승할 때 잠시를 제외하고는 선수생활의 대부분이 힘겹고 어려웠다고 회고한다.

무심코 그 말을 들으면 운동선수라 몸이 힘들었다는 말로 듣고 지나칠 것이다.

그러나 지독하단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열심히 연습하고 누구보다 뛰어난 퍼포먼스를 펼쳤는데도 거짓된 판정으로 메달을 빼앗기는 것도 모자라 진실이 아닌 비난에까지 시달리며 겪어야 한 정신적 고통과 한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다시 태어나면 피겨선수는 되지 않을 거라고 한 적도 있다.

김연아같은 경이적인 선수가 한국인임에 세계가 놀라도록 만들 때까지 한국은 그녀에게 별로 해준게 없다.

헌데 아직도 그녀가 속수무책으로 당하도록 방치까지 하고 있다. 이래도 되는걸까?

반면 일본을 보자.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받는 선수가 나왔는데도 여전히 전용링크조차 지을 생각이 없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이토 미도리 정도의 선수에서도 가능성을 발견하고 인프라 구축과 우수 선수 발굴은 물론 ISU에 손을 뻗쳐 심판들까지 자기 편으로 만드는 전략적 투자를 감행하였다.

동계올림픽에서 가장 주목 받는 피겨를 집중 육성하는 것이 여러 종목을 지원하는 것보다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김연아가 전례가 없다고 평가될 정도로 경이적이고 압도적인 선수가 아니었다면 일본은 이미 피겨계를 평정하고 확실한 결실을 보았을 것이다.

또 한국말로 쓴 일본 기사인가 싶을 정도로 자국 선수를 깎아내리고 흠집내는 한국언론들과 대조적으로 일본 언론들의 아사다 마오에 대한 과보호는 철저하다.

반면에 조직적으로 타국선수를 깎아내리고 매도하는 것은 물론 파렴치한 방법까지 동원해 타국 선수를 방해하고 자국 선수에게 힘을 보탠다.

게다가 언론 뿐 아니라 그 밖의 수단방법도 가리지 않고 동원한다.

그들의 비열함을 욕하기 이전에 그에 대응해 한국은 뭘 했는지 생각해 보면 한심하기만 하다.

역사왜곡, 독도문제, 최근엔 방사능 피해까지 일본을 비판할 구실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일본은 입으로만 떠들어서 이길 수 있을 만큼 녹녹한 상대가 아닌 것을 먼저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한국인들이여, 부디 김연아를 아끼자.

그러지 않을꺼라면 최소한 욕하진 말자.

그게 부상때문에 반창고로 등을 도배하고, 진통제로 얼굴이 퉁퉁 부어서도 링크에 올라가 편파판정이란 거대한 장애물까지 이겨내고 우리에게 수많은 기적들을 가져다 줬던 이 천재소녀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라고 생각하자.



출처 : 씨스템 클럽_ 휴게실


출처: 영락교회 http://club.youngnak.net/yn_contents/home/whats.htm#top

 

 

 

 


 

이 내용은 1956년에 한경직 목사님께서 기독교방송국을 통하여 "기독교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으로 방송한 설교원고를 그대로 옮겨 만들었습니다.
아직 기독교를 알지 못하는 여러분께 이 글을 드립니다.
기독교란 어떤 종교인가를 이해 하시는 가운데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31)

 

 

종교의 필요성

 

기독교란 어떠한 종교인가? 하는 이 문제를 특별히 기독교를 아시지 못하는 여러 동포를 위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어떤 이는 종교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그 종교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지금은 과학시대 인데, 종교시대는 이미 다 지나가고 과학시대가 되었는데 우리가 과학만 잘 배워서 문화를 발전시키고, 우리가 각 방면에 진보하였으면 그만이지 이제 종교의 필요성이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도 없지않고 있을 줄 압니다. 혹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줄 압니다.

특별히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엽에 그렇게 생각하던 이 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여러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기를, 그저 과학을 잘 연구해서 새로운 과학적 진리를 발견하고, 또 여러 가지 과학의 이치를 발견도 하고 그렇게 되어 이세계가 진보하면 그냥 발전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온 세계인류는 행복스럽고 평화롭게 잘 살게 될 터이고, 참 문자 그대로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과학의 꿈은 깨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이와 같은 꿈은 20세기 초엽을 지나자마자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산산이 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여러분, 가장 과학문명이 발달한 이 20세기의 양상을 잘 살펴보십시오. 전 세계를 휩쓴 세계 제1차 대전후 얼마가지 못하여서 전 세계 인류의 참화를 가져온 2차 대전, 그리고 이곳 저곳의 열전은 말 할 것도 없고 그냥 계속되는 냉전, 과학이 제일 발전되었다고 하는 이 20세기는 문자 그대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세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과학은 극도로 발달되어 지금은 원자시대라고 말합니다. 지금 그 결과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오늘 세계인류는 언제 이 원자탄이 우리 도시, 아니 머리 위에 떨어지지 아니 할까 하는 염려로 전전 긍긍하고있습니다.

과학이 가져온 세계의 결국은, 첫째 피비린내 나는 세계, 둘째 전 인류를 불안과 공포에 빠지게 한 세계를 가져왔습니다.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동포여러분, 과학은 물론 필요합니다. 불처럼 필요합니다. 불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밥을 짓는데도 쓰고, 방을 뜨겁게 하는데도 씁니다. 얼마나 필요합니까?

그러나, 그 불을 쓰는 사람이 바로 써야지 잘못 쓰면 오히려 인류에게 큰 피해와 화를 가져오고 맙니다.

과학 역시 그렇습니다. 과학은 올바르게 써야지 이것을 사람이 바로 쓰지 못하면 오히려 인류에게 더 큰 참화를 가져 오고 맙니다.

물론, 과학은 비행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원자탄 수소탄도 역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바르게 쓸 수 있는 사람을 과학이 만들지 못합니다.

이 썩고 악한 사람의 근성을 바로 잡을 세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 가서 이 사람을 바로 만들 수 있습니까? 여기에 비로소 종교적인 문제가 들어옵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바르게 만들 수 없습니다.

사람을 본래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인생의 공허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우리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빵 문제가 아닌가? 빵을 달라고 대중은 부르짖습니다. "나를 따라 만 오라. 그렇게 하면 내가 네게 빵을 주리라"고 어떤 지도자들은 외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말도 옳습니다. 과연 ".."가 큰 문제입니다. 우리 한국 민족에게는 정말 무엇보다도 경제문제를 해결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생각할 것은, 이 문제만을 해결한 사람이 과연 그 생활에 참된 만족이 있었습니까? 공산국가에서는 이 빵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하는 약속을 가지고 전 국민을 노예와 기계로 삼고 있습니다. 설사 그들이 빵 문제를 해결했다고 합시다.

여러분, 그 독재 아래서 시달리는 그들에게 과연 참된 행복이 있는 줄 믿습니까?

민주주의 아래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이 문제를 해결한 나라는 아마 제 생각에는 미국일 것입니다. 미국은 참된 민주주의 정책아래에서 국민에게 자유를 확보하면서도 모든 생활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한 미국사람에게는 참된 만족이 다 있을 줄 압니까? 바로 오늘 아침에 제가 어떤 책을 들쳐보니 미국에서 매년 생의 권태를 느껴서 자살하는 사람이 16,000명 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만일 육신 만이라 할 것 같으면, 아마 밥만 먹고 옷만 잘 입으면 만족할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사람에게는 육신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속에는 이상한 불길, 혹은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다른 조건이 만족하다고 할지라도, 이 사람에게 다른 조건, 이 영적 만족이 없으면 그는 언제든지 텅 빈 느낌,  공허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말씀 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사람이 떡만 먹으면 만족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은 사람을 단순히 한 짐승과도 같이 보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짐승이상의 다른 무엇이 그 육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떡 이상의 무엇을 그리워합니다. 그 이상의 무엇을 탐구합니다. 그 이상의 무엇을 얻지 못하는 한 언제든지 공허감을 느끼고야 맙니다.

여기에 종교문제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인생은 어디로 갑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독일에 쇼펜하워라고 하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이가 한번은 어떤 공원에 가서 의자에 외로이 앉아 깊이 인생문제를 명상하였다고 합니다. 깊은 명상에 잠겨서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어느덧 황혼이 깃 들어 공원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는데, 공원지기가 공원을 둘러보다가 한 옆을 보니까, 의자에 어떤 노인이 앉아서 눈을 그냥 감고 나가지를 않고 있는 것을 발견 했습니다.

이 공원지기는 아마 어떤 빌어먹을 노인인가 생각하고 큰소리로 "이거 누구야, 이 사람 어디서 왔어!"하고 고함을 쳤다고 합니다.

그때에, 쇼오펜하워가 눈을 번쩍 뜨면서, "어디서 왔어? 아 내가 그걸 알면야 나는 그것을 몰라서 지금까지 이렇게 눈을 감고 앉았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인생이 어디서 왔습니까? 내가 어디서 왔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몇 해전에 제가 어떤 장례식 주례를 맞아 갔었습니다.

그때 한 오십 세 되는 여자 교우가 세상을 떠났는데, 방금 출판을 하려는 직전에 만주에 가있던 아들이 그 소식을 듣고 급히 집에 돌아 왔습니다. 들어서자 마자 이 아들은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 관을 출관 못하게 그냥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울부짖는 말이,

"어머니,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셔요. 어머니,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갑니까?"

그 말이 지금도 제 귀에 쟁쟁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인생이 다 산후에는 어디로 갑니까?

우리는 흔히 생로병사 (生老病死) 즉 四苦를 말합니다. 죽은 다음엔 어떻게 됩니까?

여기에 종교문제가 들어 옵니다. 어떤 이는 이 문제에 대단히 등한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참된 종교의 신앙심이 없이는 참된 영혼의 만족과 행복이 없습니다.

죽음은 초막에나 궁궐에나 다 같이 옵니다. 노인에게나 청년에게나 같이 옵니다.

,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종교란 이름아래 별별 것이 다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종교를 어떤 길이 참 길인지 택하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누렇다고 다 황금이 아닙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汰?없느니라."

이렇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과학 시대일수록 종교가 더욱 필요합니다. 또 종교가 없이는 인간심령의 깊은 기갈에 만족을 줄 수가 없습니다. 또 종교가 없이는 깊은 인생문제를 깨달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란 어떤 종교인가?

 

지금 기독교하면 여러 가지 이름이 많습니다. '예수교' 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혹은 교파를 따라서 '장로교' '감리교' 니 이렇게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 기독교의 첫 이름, 처음에는 우리 기독교를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그 첫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제일 쉬운 줄 알아서 첫 이름을 제가 여러분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기독교의 첫 이름

 

첫 이름은 다른 것이 아니고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 우리 기독교 성경을 읽어보신 이가 계신지 모르지마는, 성경 가운데는 구약과 신약 두 부분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 중의 신약이 우리 기독교의 내용을 말해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약을 펼쳐보면 거기 처음 네 책은 전부 '복음'이라고 하는 말로 씌어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그것입니다.

마가복음 1 1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이렇게 시작하지요.

또 마가복음 1 15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지요.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복음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기독교를 "기독교"라고 부르기 전에 "복음"이라고 불렀는데, 여러분, 그 뜻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물론 한문 글자 뜻대로 '복된 소리'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현대말로 하면, 그저 '기쁜 소식', 지금은 '소식'이란 말을 영어로 그냥 써서 '뉴스(news)'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말로 표현하면 '좋은 뉴스' 입니다.

처음에는 기독교를 부를 때 '좋은 뉴스' 또는 '기쁜 뉴스'라 이렇게 불렀습니다.

전에 아테네 사람들이 흔히 새것을 듣기 좋아해서, 언제나 뉴스를 듣기 좋아한다고 하는 말이 책에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누구나 뉴스는 좋아합니다. 그래서 라디오를 듣게 될 때 뉴스시간을 좋아해서 더구나 뉴스시간을 제일 많이 듣습니다. 또 우리가 신문을 왜 사서 늘 읽습니까? 그 가운데 뉴스가 있는 까닭입니다.

벌써 40년이 거의 됐습니다마는, 그 때에 일본이 항복 했다고 하는 뉴스가 라디오를 통해서 들어올 때, 그때 우리가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어떤 이는 기뻐서 날뛰다가 뇌출혈이 되어서 죽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뉴스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큰 뉴스도 있고 작은 뉴스도 있고, 그래서 흔히 언론계에서는 이런 말을 하지않습니까. 가령 금년엔 제일 큰 뉴스가 어떤 뉴스였다고, 여러분, 이런 말을 들을 때, 혹 이런 생각을 더러 해 보셨는지요.

이 우주가 창조되고, 인간이 이 지구에 나타난 이후에 제일 큰 뉴스가 과연 어떤 뉴스였던가 말입니다. 가령 역사적으로 ' 동양' 하면 동양에서 제일 큰 뉴스가 어떤 뉴스였던가?

징기스칸이 이백만 대군을 몰고 히말라야산맥을 넘어가는 뉴스, 물론 굉장했을 것입니다. 혹은 서양으로 말하면, 나폴레옹 (Napoleon)이 온 유럽을 지배하는 그 뉴스였던가?, 콜럼버스(Columbus)가 대서양을 횡단해서 처음으로 새 대륙을 발견한 그러한 뉴스였던가?

다 굉장한 뉴스입니다. 여러분, 한국의 역사를 통해서 제일 큰 뉴스가 무엇이었던가 를 생각해보셨습니까? 신라의 반도통일,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뉴스, 신문이 있었다고 하면 아마 큰 뉴스로 보도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뉴스 가운데는 크다고 반드시 좋은 뉴스는 아닙니다. 여기 1950년의 6.25사변, 물론 전 세계를 통해서 큰 뉴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 뉴스가 될 것이 무엇입니까? 큰 뉴스라고 반드시 좋은 뉴스는 아닙니다.

그런데, 제일 큰 뉴스가 될 뿐더러 제일 좋은 뉴스, 그런 뉴스가 무슨 뉴스인가를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

, 아무리 좋은 뉴스라고 하지만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 가령 일본이 항복했다고 하는 뉴스는 우리 한국민족에게는 참 좋은 뉴스입니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에게야 그것이 좋은 뉴스가 될 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들에게야 오히려 슬픈 뉴스이겠지요.

어떤 뉴스는 크고 좋은 뉴스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만 좋은 뉴스가 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좋은 뉴스가 못 되는 뉴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일 크고, 또 제일 기쁘고, 또 제일 좋고 동시에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요, 어느 민족에게나 어느 국가에게나 어느 시대를 물론하고 좋은 뉴스가 무엇인가?

이제 그런 뉴스의 내용을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주 최대의 뉴스

 

여러분, 기독교는 우주가 생긴 이후에 제일 큰 뉴스입니다. 기독교는 우리 인간이 들은 모든 뉴스가운데 제일 좋은 뉴스입니다. 기독교는 누구에게나 어떤 민족에게나 좋은 뉴스입니다.

저 북빙양 근방에 사는 에스키모에게나, 남양군도에 사는 흑인들에게도 백인이나 황인종이나 물론하고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를 그냥 옛날에는 '좋은 뉴스'라고 그랬습니다.

, 이제 좋은 뉴스의 내용을 간단히 여기서 말하고 또 이 앞으로 조목조목 들어서 자세히 설명해 볼까 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좋은 뉴스를 간단하고도 명확하게 쓴 말씀이 우리 성경에 한절 있습니다. 혹 예수를 믿는 이가 어느 성경구절인지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요한복음 3 16절의 말씀입니다. 이 뉴스는 누구로부터 시작하지요?

하나님께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를 통치하시고, 인간을 본래 지으시고, 인간의 운명을 주장하시고, 인류의 모든 역사를 설비하시는, 유일무이하신 대주재 하나님께서 하신일, 이런 우주적 뉴스를 전에 들어 본적이 있습니까? 과연 큰 뉴스입니다. 제일 큰 뉴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사랑

 

"이세상"은 세계란 말입니다. 물론 세계라 하면 온 지구를 가리킨 말입니다. 세계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산도 있고, 들도 있고, 나무도 있고, 풀도 있고, 금수도 있고 다 있습니다. 그 위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를 사랑하셨습니다. 세계를 사랑하셨다는 말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했지마는 특별히 세계 위에 사는 사람을 사랑하신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이 세상을 잠깐만 생각해 보세요. 민족과 민족이 서로 미워해 싸우고, 서로 죽이고 하는 이런 세상입니다. 슬픔 많고, 미움 많고, 고통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셔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주기를 좋아합니다. 사랑이 클수록 더 귀한 것을 줄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 제일 귀한 것은 아마 우리의 자녀일 것입니다. 자녀 가운데 외아들이 있다면, 외아들처럼 귀한 것이 없을 줄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세상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세상에 주시고 세상에 보내셨단 말입니다. 무엇 하려고 이런 사람을 도와주시고, 이런 사람을 구원해 주시고, 이런 사람을 축복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보냈다고 하는 사실, 이거 얼마나 큰 뉴스입니까! 과연 천지가 진동할 만한 뉴스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않고 영생을 얻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물론 이 시간에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 사실만 잠깐 생각하여도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기독교는 곧 하나님을 믿는 종교요, 사랑의 종교요, 독생자 그리스도의 종교요, 믿음의 종교요, 영생의 종교입니다.

위에서 말한 기독교란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가장 쉽게 말하면, 제일 큰 뉴스라고 제일 좋은 뉴스라고 또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기독교를 단순히 복음이라고 일컬었다고 여러분에게 말씀 드렸습니다.

, 뉴스의 내용을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면, 성경에는 요한복음 3 16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 이니라 "

이렇게 말씀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여러분 이제부터, 이 뉴스를 좀 더 해설해야 되겠습니다.

이 뉴스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뉴스입니다. 물론, 우리 한국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옛날로부터 지금까지 믿어왔습니다., 우리 한국사람뿐 아니고, 서양 사람들도 동양 사람들도 거의 다 대부분은 하나님에 대하여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옛날에도 혹 어떤 사람들, 또 특별히 근자에 와서는 공산주의를 신봉 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부득이 먼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또는 하나님은 어떠하신 하나님인가에 대하여 잠깐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무신론의 우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셨는지요.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이론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대단히 담대합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주장하기가 심히 곤란한 이론입니다. 그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이 계시다는 이론, 곧 유신론에 대한 논증은 그 증거가 하나만 있어도 능히 증명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신론에 대한 논증,, 하나님이 안 계시다 하는 논증은 사실 전우주와 전우주의 역사를 탐색해서 논증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가령 쉽게 예를 들면, 우리한국에 '갈매기'란 새가 있는데, 갈매기라는 새가 있다는 그런 논증은 만일 어떤 바닷가에서 그 갈매기가 남긴 발자국 하나만 보고도 이것을 보니까 갈매기가 한국에 있지 아니하느냐고 이렇게 논증하기가 대단히 쉽습니다.

그렇지만, 만일 한국에 갈매기란 새가 없다고 논증하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대단히 어려울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인천지방에 만일 갈매기가 없다는 것을 다 증명한다 할지라도 부산근방에 있는 지 어떻게 압니까? 목표근방에 있는지 어떻게 압니까 ?

갈매기가 사실 한국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할 것이면, 전 삼천리 방방곡곡을 답사해서 증명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우주에 없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하면, 우선 이 지구 위에 하나님의 자취가 없다는 것을 논증하여야 되겠고, 그 다음에는 모든 다른 별, 유성과 행성에서도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것을 가서 증명하여야 되겠고, 또 지금 하나님이 계신 증거가 없지만 옛날에 계셨던 증거가 있어도 안 될 터이니까. 전 우주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계시지 아니 하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무신론의 논증이 되지 아니합니다. 사실 이와 같은 무신론의 논증을 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과 같은 전지전능자가 아니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가지고 70년도 못사는 사람이 함부로 이와 같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안계시다고 주장하는 것은 보통사람으로는 이해하기 곤란한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생각해보세요.

가령 무신론이 옳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우주와 시간을 만든 이는 없습니다. 이 우주와 우리인간의 두뇌의 고안자는 없습니다. 우리인간의 두뇌라는 것도 한갓 물질분자의 우연한 배합으로 되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런 물질 문자들이 그저 우연히 모여서 된 그런 두뇌의 사색작용을 우리가 과연 시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두뇌에서 나오는 무신론을 우리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무신론 혹은 유신론은 무신론 자체가 그 무신론을 파괴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모순과 당착을 모르고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은 실상 보통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곤란한 일입니다.

셋째로, 또 생각해 보세요.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적극성이 없고, 소극적인 이론입니다. 부정적 이론입니다. 여기 어떤 관념 가운데, 가령 어둡다고 하든지 거짓되다고 하든지, 구부러졌다고 하든지 하는 이런 관념들은 다 부정적 관념입니다. 이 부정적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곧 긍정적 관념이 있음으로 비로소 생긴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빛이 없으면 어둡다고 하는 말이 있을 이치가 없습니다. 또 거짓이라는 것도 참이 있기에 거기에 대한 부정적 관념인 것입니다. 참이 없으면 거짓이란 말도 없을 것입니다., 구부러졌다는 것도 곧은 것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구부러졌다는 말도 생기고, 그런 부정적 관념이 생긴 것입니다.

사실, 어둡다고 하는 관념이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빛이 있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거짓이라는 관념이 있는 것은 이세상에 참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구부러졌다고 하는 말이 있는 것은 이세상에 바른 것이 있는 증거입니다.

사실 무신론적이라고 하는 그런 부정관념이 있는 자체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증명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지적으로 아무런 생각도 해보지 않고 무신론을 주장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 말씀대로 우리가 답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시편 14 1절에 어떻게 말씀했는지 아십니까?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어리석어서 그렇습니다. 어리석어서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그런 어리석은 이는 별로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줄 압니다. 그 어리석은 것은 여러분께서 잘 계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1956 1 10일 호 타임(TIME)잡지 종교란에 미국의 여론조사로 유명한 갤럽(Gallup)박사가 하나님의 신앙에 대한 조사를 한 것을 발표한 글이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시민들 중 여러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느냐?" "하나님을 왜 믿느냐?"를 물어보고, 그 결과를 발표했는데, 미국시민가운데  96% 다시 말하면 100명에 96명은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대답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제일 많은 이유부터 열거해 보면,

첫째로, 우주의 질서와 그 위대한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있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대답이 제일 많고,

둘째로, 우주와 인간의 기원을 생각해보니 하나님이 반드시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믿습니다. 하는 것이 두 번째 대답이었습니다.

셋째로, 성경의 교훈을 보니까 반드시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넷째로, 내 개인의 과거의 경험을 보니 반드시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다섯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나는 이 슬픔 많은 세상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하나님을 믿으실 때, 혹은 이런 대답, 혹은 저런 이유로써 하나님을 믿으시는 줄 압니다.

 

하나님의 존재

 

지금까지 논술한 것으로, 기독교는 좋은 뉴스, 즉 복음이란 말씀과, 또 이 뉴스는 하나님에 대한 뉴스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데,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도 있기 때문에 이 무신론이라는 이론이 이지적으로 생각해 볼 때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몇 가지 생각했습니다.

이제 계속해서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어찌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가? 그 이유를 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게 몇 가지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로마서 119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이런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다음절에는,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가?

첫째로, 우리 사람 자체를 가만히 살필 때, 안으로 살필 때, 내성할  때에 우리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을 깨닫습니다.

또 한 가지는, 바깥 모든 세상, 외계의 대자연과 전우주를 바라볼 때 또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전능을 우리는 자연히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먼저 이 시간에 우리 손에 보여주신 그 하나님의 자체를 잠깐 찾아 볼까 합니다.

 

 

 

인생의 종교본능

 

첫째는 인간의 종교입니다. 사람이 금수와 다른점이 여러 가지 있지요. 그 가운데 가장 현저한 것은 우리 사람에게는 종교가 있습니다. 금수 사회에는 종교가 없습니다.

문명한 사회에는 교회가 있고, 야만 사회에는 신당이 있습니다. 동양에도 그렇고, 서양에도 그렇고, 아프리카에도 그렇고, 또 현대 남양군도에도 그렇고, 또 현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옛날에도 그렇고,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어떤 사회문화 가운데 들어가 보던지 종교가 없는 데는 도무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며, 하나님께서 안 계신 듯이 사는 사람들도 흔히 위급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저는 믿지 아니하는 형제와 이야기할 때, 그 사람 말이, 자기는 하나님 앞에 기도는 도무지 않지만 몇 해전에 38선을 몰래 넘어 올 때에는 하나님을 찾았다고 대답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괴뢰군에 억지로 붙들려 나갔다가 석방되어 나온 애국 청년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청년이 괴뢰군과 함께 몰려서 유엔군이 북진하여 올라갈 때, 저 삼각산 어떤 골짜기에 숨었는데 유엔군 비행기들이 대편대를 지어와서 폭격을 하고 기관총 소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보니까 그 저 공산당들과 정치 보위부에 있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솔포기 아래 엎드려서 "하나님, 하나님"하고 하나님을 찾는 소리가 크게 들리더랍니다. 사람이 위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어떤 인류학자는 "사람은 불치병적으로 종교적이다"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여러분, 두 가지를 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본능이 있는데, 그 본능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본능을 만족시킬 대상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 사람에게는 먹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 먹는 본능을 만족시킬 음식물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사교적 본능이 있습니다. 사교할 수 있는 많은 다른 친구들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성에 대한 본능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남성과 여성이 있습니다. 본능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 대상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 대상이 있기 때문에 본능이 생겼습니다. 가령 눈을 보면, 눈이 필요하게 쓸만한 빛이 있을 것입니다. 빛이 없다고 하면 눈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귀가 있습니다. 이 귀가 들을 만한 소리가 있습니다.

, 우리 사람의 육체를 가만히 보면 감각이 있습니다. 가령 감각하는 기관, 눈이든지 코든지 하는 감각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 대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코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반드시 냄새가 있습니다. 만일에 세상에 빛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 사람에게 눈이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책을 보니까, 깊은 굴 속에 못이 혹 있을 수가 있는데, 그런 못 가운데 사는 고기는 다른 것은 다  있지만 눈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항상 캄캄한 데 사는 고기에게 눈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감각기관 있는 것은 벌써 대상이 있는 까닭에 감각기관 생긴 줄 압니다. 빛이 있어서 눈이 생겼고 , 소리가 있어서 귀가 생긴 줄 압니다.

그러면, 우리 사람은 이런 종교적 동물이요, 종교성이 있고 무엇을 숭배하려고 하는 영혼으로써 동경하는 이런 마음, 부인하려고 하여도 부인할 수 없는 종교적 욕망이 있는데, 여기에 대한 대상만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반드시 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인간 속에 종교성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신 까닭입니다.

왜 봄에 풀이 위로 자랍니까? 위에 태양이 있는 까닭입니다. 왜 사람의 심령이 높은 것을 앙망하고 동경합니까? 그 위에 하나님께서 계신 까닭입니다.

그래서 플라토(Plato)라고 하는 철학자는 말하기를, "무신론은 한 질병이다"라고 했습니다.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환자입니다.

우리는 다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병으로 보지 못합니다. 이런 소경은 빛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인간의 종교성을 살펴볼 때, 우리는 자연히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도덕성

 

다음에는 우리 인간을 가만히 살펴 보십시오.

둘째로, 인간에게는 도덕이 있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칸트(Kant)의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유명한 말을 다 아실 것입니다. "하늘에는 별이 있고 사람의 속에는 도덕적 의식이 있다" 보통으로 말하면, 양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사람 된 증거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의 가슴속에는 어떤 사람을 물론하고 이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무슨 일을 대할 때든지,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라고 분별해줍니다.

물론 어떤 때는 양심이 마비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마비는 안됩니다. 언제나 어느 한구석에서 선악을 분별하여, 선하게 할 때는 마음이 기쁘고, 악한 일을 할 때는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러워집니다. 이 양심이란 것이 언제든지 속에 있어서 잘 할 때는 칭찬해주고, 잘못 할 때는 책망해줍니다.

물론, 여기에도 인간의 이런 도덕성을 부인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양심을 여러 가지로 설명해 내보려고 애씁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장하기를, "양심은 한 종족의 공통된 유전적 산물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후천적 원인으로써 설명하려고 애씁니다.

물론 양심가운데 후천적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후천적 요소를 다 제하여 버리고도 그 속에 선천적 요소가 있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도덕적인 법칙이 어디서 왔는가? 성경은, "양심은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다음에 바르게 살기 위하여 도덕적인 법칙, 곧 하나님의 율법을 그 속에 새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계에는 자연법칙을 두신 것입니다. 모든 물질은 이 자연 법칙을 준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생활에 있어서는 이 도덕적 법칙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물질과 자연법칙과의 관계와 우리사람과 도덕적법칙, 즉 양심과의 관계는 다릅니다. 자연법칙과 물질과의 관계는 그저 그대로 되는 것 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사람은 인격적존재로 지음을 받아 자유가 부여 되었음으로 그 관계가 다릅니다.

우리 인간은 선과 악을 택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를 바로 쓰기 위하여 양심이 또한 부여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양심의 방향을 따라 자유를 옳게 사용할 때에만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양심은 누구에게나 새겨져 있습니다.

이 골짜기를 파도 물이 나오고, 저 골짜기를 파도 물이 나오면 자연히 그 속에는 물이 있다고 결론하는 것이 아마 정당한 이론일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살펴볼 지라도 양심이 있고, 저 사람의 마음속을 깊이 살펴볼 지라도 거기에도 반드시 양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배후에는 큰 양심이, 우주의 배후에는 대 양심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우리가 이 음성을 들을 때, 자연히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미 말했지만, 오늘날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이 양심을 전연 무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 양심이 화살 맞은 것처럼 되어서 마비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요히 자리에 누울 때, 혹은 아침 일찍이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음성은 곧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을 스스로 살펴볼 때, 다시 말하면 인간의 종교성, 인간의 도덕성을 살펴볼 때에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확실히 믿게 됩니다.

 

우주의 원인

 

그리고, 지금은 로마서 1 20절에 가르쳐 주시는 말씀, "그 만드신 만물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나타내셨다" 하는 말씀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현대를 우주시대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이 우주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는 뜻입니다. 이 면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간단히 두 가지 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과의 법칙'의 견지에서 이 우주를 보십시오. 우리가 다 인과의 법칙을 믿습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둡니다. 이 인과의 법칙이 과학의 기초가 됩니다. 인과의 법칙대로 안되면 과학이 성립 못 될 것입니다.

인과의 법칙은 꼭 옳습니다.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대 우주를 볼 때, 이것은 어떤 큰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 큰 대 우주의 이런 결과가 생겼은 즉 반드시 제일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제일 원인이 무엇일까요? 제일 원인은 하나님이라고 결론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지으신 까닭으로 이 우주가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라고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는 이 우주를 볼 때 큰 운동하는 움직임을 보고 특별히 놀랐습니다. "아무래도 이 움직임을 처음 시작한 분이 있겠다. 그 분은 하나님일 것이다."이렇게 또한 주장했습니다.

이 인과의 법칙으로 보아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분명히 알 수 밖에 없는 데, 이 진리를 부인하고자 하면 우주는 본래부터 영원까지 그냥 있다고 요새 범신론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무시 무종하다고 주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우주가 영원하다. 이 우주 자체가 영원하다" 하는 이런 주장은 오늘의 과학시대에 와서는 그렇게 강하게 주장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오늘날의 과학적 연구대로 살펴보면, 이 우주는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우주는 일정한 시간에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을 거의 단언합니다. 요즘 과학자나 천문학자들은, 이 지구나 태양계나 우주전체가 몇 해전부터 시작이 되었겠나 그것을 측정해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라늄 원소의 그 방사하는 것을 측정해보고 어느 정도까지 확실히 압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우리가 사는 이 지구의 연령은 대략  33 5천만년쯤 되었다고 합니다., 우주전체의 연령은 약 백억년으로 추산합니다. 물론 상당히 오래 전이지요. 그러나 일정한 시간에 시작할 때가 있다고 하는 것을 다 인정합니다.

이 지구에는 여러 가지 생물이 많지마는, 생물이 이 지구에 영원히 있었는가?

지질학을 연구해 보면,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생물이 자라나고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지구에 영원부터 살았느냐? 지질학을 연구해보면, 일정한 시기 그것도 아주 말기에 인간이 나타났습니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된 그대로 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 지구에 영원부터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식물도 영원부터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주자체가 영원 전부터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히브리서 3 4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
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 이시라"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인과의 법칙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말할 때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대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결과에 원인이 있다면, 하나님의 원인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존재의 배후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 아닌가?" 이렇게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지한 말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무한절대의 신입니다. 하나님의 배후에 다른 원인이 있으면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여기 수학을 좀 공부해 보신 분은 무궁대 또는 무한대의 개념을 알 것입니다.

하나를 하나로 제하면 하나입니다. 하나를 영으로 제하면 무한대라고 합니다. 이 무한대는 열을 영으로 제하나, 만을 영으로 제하나 모두 무한대로 같습니다. 그런 반대의 이론은 이론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과의 견지에서 볼 때에 이 우주는 반드시 지은이가 있을 것이 분명하고, 그 우주를 지은이가 계시다고 할 것이면 무한절대의 하나님인 것을 우리가 성경에 있는 대로 아니할 수 가없는 것입니다.

 

우주의 질서와 고안(考案)

 

, 이 우주를 다른 면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우주의 현상을 자세히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살펴보면 되는 대로 복잡한 것 같지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조직이 꼭 있고 질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을하늘을 쳐 다 보면, 별이 되는대로 널려 있는 것 같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망원경을 통해서 자세히 보면 꼭 조직이 있습니다. 태양계의 조직이 있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유성들이 있습니다. 일정한 궤도가 있습니다. 일정한 속도가 있습니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유성들이 있습니다. 일정한 궤도와 속도가 있습니다. 이런 항성계가 여럿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여서 갤럭시(별무리)가 되고, 이런 것들이 많이 모여서 대우주가 형성됩니다. 아무리 크지만 조직과 질서가 있습니다.

큰 것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물질을 분석하는 과학자들의 말을 들어볼지라도 그렇습니다. 분자를 원자로 분석합니다. 원자속을 들여 다 보면 그 속에도 양자가 있고, 그 양자를 중심하여 빙빙도는 전자가 있는 것이 마치 작은 우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큰 데서부터 작은 데까지 질서가 있습니다.

, 보십시오. 이 우주의 모든 현상을 보면 모든 것에 고안이 있습니다. 꽃을 보십시오. 이 꽃 한 송이를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그와 같은 꽃을 만들려고 하면 얼마나 많이 생각해야 그 같이 만들 수 있겠나? 꼭 고안이 있습니다. 새 한 마리도 고안이 꼭 있습니다. 나비 한 마리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어떻게 아름답게 생겼는지!

그것뿐 만이 아닙니다. 동물과 식물이 서로 조화되어 살게끔 된 것을 보면, 기막힐 정도로 놀랍습니다. 흔히 꽃이 있으면 벌들과 나비가 왔다갔다하지요. 벌과 나비가 왜 왕래합니까? 물론 꽃 속의 꿀을 빨기 위해서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나, 꽃은 꿀을 거져 줍니까? 그렇지않습니다. 그것들 때문에 꽃가루가 서로 왔다 갔다 해서는 결국 씨를 맺게 만듭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동물이 쓸 데 없다고 호흡으로 내버린 탄산가스는 나무와 풀에 유익합니다. 나무와 풀은 동화작용으로 탄소를 섭취하고 내버리는 산소는 동물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누가 이렇게 동물과 식물이 협동하여 살게 만들었습니까?

이 우주에는 꼭 고안이 있습니다. 일정한 목적에 의한 고안이 있습니다. 비 오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묘한 것이 있습니다. 태평양에 가면 물이 많지요. 햇빛에 쪼여서 남 태평양의 물이 수증기가 되어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공중에서 찬 바람을 만나서는 다시 물이 되어 비가 되어서 떨어집니다. 빗물이 떨어져서 몇 가지 작용을 하는지 아십니까?

여러 가지 작용을 합니다. 우선 공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이 물방울이 내려오면서 공기 속의 먼지를 모두 잡아가지고 내려옵니다. 그러기에 비온 다음 공기가 신선합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는지 아십니까?

비가 오면 이 땅을 아주 깨끗이 씻어줍니다. 비가 오래 안 오면 이 땅이 아주 더러워집니다. 저 백운대위의 먼지를 누가 씻습니까?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서 깨끗이 씻어버립니다. 그것뿐입니까? 빗방울이 사막에 떨어져서는 풀이자라고, 곡식이 자라고, 나무에 열매가 맺게 합니다.

땅을 깨끗이 씻은 빗방울이 모여 시내가 되고, 강물이 되어서 더러운 것들을 다 씻어다가 마지막에는 바다로 들어갑니다. 바닷물이 짭니다. 왜 바닷물이 짭니까? 짜야 소독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비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깨끗이 소제하고, 더러운 것을 다 흘러버리게 하고, 풀과 나무가 자라게 하기 위하여 간단없이 순환하게 합니다.

전에 제가 제네바에 가보니, 거기 호수 옆에 꽃을 가지고 시계를 만든 것이 있었습니다. 글자를 모두 꽃으로 만들었더군요. 그 속에 기계를 묻었습니다. 큰 바늘이 돌아갑니다. 꽃 시계입니다. 이 꽃 시계를 보고, 저절로 되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고안있는 우주를 보면서 고안자 곧 창조자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큰 정신 병자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면 이 우주에 대한 이론을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나는 모르겠다"는 액나스티즘 즉 불가지론(不可知論)이요, 또 하나는, "이것이 다 거저 되었다. 우연히 되었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편 19 1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궁창이 그의 솜씨를 우리에게 나타냅니다.

과연 하나님은 계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애쓰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주장하시고, 이 하나님께서 개인의 운명을 다스리고, 이 하나님께서 국가와 민족의 전체 운명도 총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심는 대로 거두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행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시되 수 천대까지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화를 삼 사대까지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우리 동양에도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는 튼튼히 믿고, 어떠한 환경을 당할지라도 흔들리지 말고 이 신앙을 전파하여 우리민족을 구원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神性

 

지금은, 예수는 누구이시며, 그의 하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한번은 제자들을 모아 놓으시고 물으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각각들은 대로 말했습니다.

"어떤 분은 엘리야라고 하더이다"

"어떤 분은 예레미야라고 하더이다"

"어떤 분은 세례요한,또는 선지자 가운데 한분이라고 하더이다."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시 물으시기를,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일어나며 하는말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니이다."

'그리스도'란 말은 '메시야' 곧 구주라는 말입니다.

이 대답은 모든 제자들의 의견을 대표하는 대답입니다.

아직도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를 그 당시의 사람들처럼 선지자 중의 하나, 다시 말하면 성자 중의하나, 혹은 위대한 종교가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실상 예수를 믿는 분들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의견은 이론적으로 성립도 되지 못합니다.

물론 예수는 위대한 도덕적 사표인 것은 틀림 없습니다. 물론 예수께서 위대한 종교가 가운데 한 분이란 것도 틀림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예수는 과연 성인인 것을 인정치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산상보훈을 보든지 그의 순결 무흠한 생활을 볼 때에 누가 예수님을 성자가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가만히 성경을 읽어보면, 그는 산상보훈만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다른 말씀도 가르친 것이 많습니다. 가령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브라함 이전에 있었노라. 내가 죄를 사하여 줄 권세가 있노라"

고 말씀하시면서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직접 사하여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또는, "내가 장차 잡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터이요 3일만에 다시 살아나겠다"고 미리 말씀 하셨습니다. 또 사실 살아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 이가 바로 승천하시기 전에 말세에는 자기가 다시 구름을 타고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 곧 하나님을 보았거늘 너희들은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하신 이 모든 말씀이 사실입니까?

또는, 사실이 아닙니까? 만일 이 모든 말씀이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를 도덕적 인물이라고 우리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사기자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혹 그렇지 않으면 순전히 정신병자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감히 이런 생각이라도 하여 볼 수 있습니까? 물론 할 수 없지요. 그렇다면 이 하신 모든 말씀이 사실인데, 이것이 사실이라 할 것이면 그는 정녕 사람이상 입니다. 사람만은 아닙니다. 과연 베드로가 고백한 바와 같이 그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인정치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나, 옛날부터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이 그는 만유의 주로 만왕의 왕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단순히 도덕적 위대한 종교가로만 믿고 그 신성을 부인하는 이론은 도무지 성립되지 못합니다.

예수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삼위일체의 한 분이시요. 곧 말씀이십니다. 그 말씀이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

 

이제 그의 하신 일을 간단히 생각해 보고 자 합니다.

그의 하신 일을 간단하게 말하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의 교훈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 것과 하나님의 경륜이 어떠하신 것이며 우리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떠한 의무가 있다고 하는 그 모든 진리를 우선 가르쳐 주셨습니다.

둘째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의 실제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생활이 어떠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신 말씀은 이 뜻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의 성품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러나 물론 제일 크신 일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써 만인의 죄를 대속하신 일입니다.

이제, 인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실인 십자가의 뜻을 간단하게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죄인은 반드시 죽으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었습니다. 한 사람도 하나님 안에서 능히 옳다고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모든 사람은 다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며 또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어서 이 불쌍한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해결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그 사랑으로써 세상에 보내시고 만민의 무거운 죄의 짐을 그의 어깨에 지우셨습니다. 그는 만민의 죄 값으로 십자가에서 만민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또한 죄의 형벌을 받아서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이루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지만 그 죄는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하나님 앞에 갚았습니다.


 

십자가의 속죄

 

우리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지만, 그 죄는 주님께서 담당 하셨습니다. 단순히 그 다음부터 죄인이 구원 얻을 길은 자기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죄를 회개할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가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네가 과거에 무슨 죄를 지었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나 다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네가 과거에 무슨 죄를 지었느냐 그것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실 말씀은,

"네가 죄를 지었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죄를 다 담당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너를 죄에서 구원한 예수가 있는데, 네가 네 죄를 대속한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입니다.

이것이 결국 심판의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영생과 영벌이 이 문제로 필경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정죄함을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은, 내가 세상에서 살 때에 무슨 죄를 지어서 받는 것이 아니고, 죄를 용서 받을 길을 열어주셨는데, 그 길을 내가 거역하고 나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무시하고 그를 믿지않는 까닭으로써 결국은 정죄를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 가운데 제일 큰 죄가 믿지 않는 죄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믿지않는 까닭으로 정죄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말씀을 제가 읽을 때 직접 들으세요.

요한복음 3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예수를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죄 사함을 받은 까닭입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아서 심판 아래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에만 그 심판 아래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3 36절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여러분! 여기 보십시오. 죄를 짓고, 안 짓고 하는 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무리 옳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행동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죄를 짓고 안짓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안 믿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생활이 지금 어떠한지, 과거 어떻게 많은 죄를 지었던지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길은 이미 크게 열렸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복음 곧 좋은 뉴스인데, 뉴스의 골자는 요한복음 3 16절에 있는, "하나님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절에 있다고 하는 것은 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영생

 

마지막으로 영생을 얻으라고 하였는데 ,영생이란 뜻은 무엇인가'?여기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보통으로 영생하면 죽은 후에 천당 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영생의 한 부분이요, 전체는 아닙니다.

성경에는 그렇게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영생은 지금 현재, 당장 얻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5 24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기 볼 것 같으면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현재에 소유했다고 하였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졌습니다.

요한1 5 12절을 읽으면,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이제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뜻을 잠깐 생각하겠습니다.

영생이란 생명을 의미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 생명은 곧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이 하나님의 생명이 곧 그리스도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그 마음에 영접하는 이는 그리스도가 그 마음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영생을 그 마음속에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영원불멸의 생명인 까닭으로 영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리스도가 우리 사람의 마음에 계시게 되면, 그 사람 자체에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즉각적으로 그 사람에게 과격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모든 육에 속한 것은 없어지고 영적으로 변합니다.

고린도후서 5 17절에 이 변화를 가리켜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 새로운 사람, 새사람, 다시 말하면 새 마음, 새 생각, 새 사랑, 새로운 즐거움, 새로운 희망, 새로운 생활로 변화되다' 또는 '중생', '거듭난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가령 쉽게 말하면, 어린애가 어두운 모태 속에 있다가 광명한 세계로 옮겨집니다. 우리가 세상에 올 때 이렇게 나옴으로 세상에 옵니다. 다른 방법으로 올 수 없습니다. 출생함으로 옵니다. 역시 이 신생, 거듭나는 것도, 영적 세계에 낳는 것도 거듭 영으로 출생함으로 말미암아 영의 세계,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천국은 그저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중생하여야,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낳는 사실은 갑자기 일어납니다. 물론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에게는 산고가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누구나 있습니다. 하지만, 아기를 낳는 그 자체는 즉각적으로 되는 것과 같이 중생은 즉각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물론 믿으려고 할 때에 특별한 영적고민도 있고, 믿으려고 하는 마음도 있고, 죄에 대한 간절한 회개와 애통도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모든 경험을 통하여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내 주로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으로 영접하는 중생의 마음은 즉각적으로 그 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중생은 제 말씀을 듣는 여러분 누구든지 참된 마음으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그 시간, 이 시간이라도 영접하면 즉각으로 이와 같은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수양이 아닙니다. 교육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훈련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모르는 진리를 깨달아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빈 마음을 가지고,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내 중심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가 내 마음 가운데 들어오면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 온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마치 곤충 세계를 관찰 해보면 유충이 변하여 성충이 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온전한 변화가 있습니다. 유충으로 있을 때, 즉 벌레로 있을 때는 땅을 좋아하고 햇빛에 나왔다가도 땅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이 벌레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한번 변화하여 나비나 또는 벌 같은 것이 될 것 같으면 땅속에는 살 수 없습니다. 땅 밖에 나와야 합니다. 햇빛을 보아야 합니다. 날아다녀야 합니다.

 

 

 

 중생자의 변화

 

중생한 사람의 경험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전에는 육에 속해서 땅에 속해져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특색이었지만, 한번 주님을 영접한 후, 성신으로 거듭나게 되면 위에 있는 것을 찾고,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위에 있는 것을 탐구하고 위로 올라가는 것이 그 특징이 됩니다. 또 누구든지 이런 중생한 사람은 자기도 중생한 줄 알고 또한 다른 이도 알게 됩니다.

요한1 5 13절을 보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함 이라."

중생이 있으면, 이미 중생한 후에는 내게 영생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스스로 중생한 것을 아십니까? 깊이 살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중생하여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출생 함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출생 함으로서 하나님의 가정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려고 한다면, 그 가족으로 출생해야 합니다. 태어나야 실상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됩니다.

,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유산, 모든 축복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온 천지만물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금생과 내생의 모든 축복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지금도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축복입니까!

지금 그리스도를 여러분 마음 가운데 영접하십니까?

마음 문을 열어놓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를 영접하십시오. 그리하면 영생을 이제라도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철학이 있습니다. 신학도 있습니다. 신조도 물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의식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위대한 도덕적 교훈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기독교는 아닙니다. 그것은 다 기독교에 관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는 곧 이 생명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최대의 뉴스입니다. 평생을 두고 말하더라도 이 기쁜 뉴스를 다 전파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한 두시간에 이 기쁜 뉴스를 다 말할 수 는 없습니다.

끝으로, 제가 여러분에게 권하는 것은 이 뉴스를 좀 더 아시고, 기독교의 진리를 좀 배우려고 원하신다면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로, 여러분은 교회에 나오십시오.

여러분 이웃에 있는 가까운 교회에 나가십시오.

그와 같이하면 여러분은 이 뉴스를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출처: 생명나무쉼터/한아름
 

 



    낙엽송의 고백 김은태

     

    처음엔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따사로운 봄볕과 싱그런 하늘 대지를 적시는 촉촉한 빗방울을 맞으며 맘껏 싹을 틔우며 푸르른 잎을 뽐내던 그땐 저도 제가 소나무인 줄 알았습니다.
    여름, 두 팔 크게 뻗어무성한 가지와 부드런 잎사귀 그 어느 나무들보다 뒤지지 않는 푸르름과 싱그러움 사계절을 독야청청할 줄 알았습니다.
    어느 늦은 가을 날 다른 나무들이 울긋불긋한 옷들로 갈아입을 때도 난 아닌 줄 알았습니다.
    춥고 두렵고 쓸쓸할 때에 비로써 그렇게 벌거벗은 채로 수치와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는 교만한 나를 발견했습니다.
    그제야 나는 내가 푸른 솔이 아닌 낙엽송인 것을 알았습니다.

     

     

    별똥별/최송연의 겨울 연가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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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빛(Light in the Darkness)

우리가 "죽음과 같이 어두운 골짜기" 를 걸어가도(시편 23:4)
두렵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지키십니다(시편 23:4 참조)

이것은 단순히 위안을 주기 위한 생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마음의 경험입니다

우리 생애는 고통, 아픔, 환멸, 상실 그리고 슬픔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생애에는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번개가 동쪽에서 서쪽까지 번쩍이듯" (마태복음24:27)
 다시 오신다는 비전이 있습니다
우리의 여행 길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보고, 크게 들으며, 그리고 깊이 느끼는
그 순간순간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어둠을 뚫고 빛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취게 하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14~16)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이스라엘의 자녀교육 25



  1. 기회 있을 때마다 민족의 긍지를 심어준다.
2.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피해는 잊지 말라.
그러나 용서하라
3. 부모에게 받은 만큼 자식들에게 베풀어라.
4. 노인을 존경하는 마음은 아이들의 문화적
유산이다
5. <내 것> <네 것> <우리 것>을 구별시킨다.
6. 은은 무거워야 한다.
다만 무겁게 보여서는
안 된다
7. 용돈을 줌으로써 저축하는 습관을 길들인다
8.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은 위생상,
외견상 목적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9. 편식 버릇을 방관하면 가족이란 일체감을
잃게 된다
10. 한 살이 될 때까지는 부모와 함께 식탁에
앉히지 않는다
11. 외식을 할 때는 어린 자녀를 데려가지 않는다
12.가족 모두가 모이는 식사시간을 활용한다
1 어떤 일이든 제한된 시간 내에 마치는 습관을
길러준다. 시간의 소중함을 깨우쳐 줍니 다
14. 자녀들의 잘못은 매로 다스린다
15. 협박은 금물이다.
벌을 주든 용서를 하든지 하라.
16. 최고의 벌은 침묵이다
17. 자녀를 꾸짖을 때는 기준이 분명해야 한다
18. 자녀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헛된 꿈을
갖게
하지 않는다
19. 텔레비전의 폭력장면은 보여주지 않지만
다큐멘터리 전쟁영화는 꼭
20. 어릴 적부터 남녀의 성별을 자각시킨다
21. 성문제는 사실만을 간결하게 가르친다
22. 음식에 대해 감사 드리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해 감사 드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3. 돈으로 선물을 대신하지 말라
24. 자선행위를 통해 사회를 배운다
25. 친절을 통해 아이를 지혜로운
인간으로 키운다

 

 

 

지인에게서 받은 글/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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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왈드 챔버스 (Oswald Chambers)

 

 

‎사람을 향한 사랑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주께서는 우리에게 ‘주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교훈하셨다.
주님의 이 교훈은 “취하여 붙들려”는 인간의 본성과 상충된다. 어린이가 선물을 받으면 이렇게 말한다. “이거 내거야.” 그러나 사람이 거듭나면 소욕의 본능이 주는 본능으로 대치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삶의 법칙은 “주고 주며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주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하게 받았으며 또한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마 10:8). 이때 주는 문제는 얼마나 많이 주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지의 문제다.

 

“준다”고 할 때 우리는 흔히 돈을 생각한다. 물론 돈은 피처럼 중요하다. 그러나 돈을 주면서 마음을 주지 않을 수 있고 또한 마음으로는 동정하면서 돈을 주지 않을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마음과 물질 등,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주의 사랑을 행하려면 무엇보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내재하셔야 한다. 그 이유는 성령만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주의 사랑의 생명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준다’는 면에 있어서 우리 주님의 삶에서는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났지만 우리가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과의 관계다. 주님은 사람들의 후대를 받아들이셨다. 세리 및 바리새인들에게 대접을 받으셨다. 사람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눅 7:34)라고 비방하였다. 그러나 주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잃은 자를 구원하시려는 것이었다. 바울이 말한다.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라” (고전 9:22).

우리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그들에게 ‘영적으로’ 주는 것을 뜻한다! 영적으로 주는 사랑만이 주님의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우 인색해서 자신에게 실질적 유익이 되지 않으면 남들과 대화할 시간마저 갖지 않는다.

[주님은 나의 최고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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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해의 과제(The Task of Reconciliation)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예수님의 형제 자매로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화해입니다
        어디를 가든 우리는 사람들 간에 분열을 목격합니다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도시에서, 국가내에서, 그리고 국가와 국가 간에... 이 모든 분열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을 비극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 품안에서 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뭉쳐져 있다는 진리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진리를 우리 일상 생활의 현실에서 나타내 보이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왜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 화해하기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했기 때문에 화해하는 사역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8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사람들 간에 화해를 이끌어 낼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지금도 추적 중인 사라진 `인류 7대 보물`

       

      지금도 추적 중인
      사라진 `인류 7대 보물`
       
      월스트리트저널

      1500개의 작동하는 인공위성이 지구 주변을 돌고 있다.
      인구는 70억에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지구에는 여전히 찾지 못한, 많은 고고학자들과
      보물 사냥 기업들이 찾아 헤매고 있는
      신비의 인류 유산이 적지 않다.
      1.칭기스칸의 무덤이 어디인지 아무도 모른다.
      1227년 중국 북서부를 정벌하다 사망했다는
      역사 기록이 있으나 매장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정복자의 무덤이 발견된다면
      이는 역사적 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미국 일리노이의 변호사이자 기업가 모리 크라비츠(75)
      지난 15년간 4백만 달러를 들여 몽골리아의
      북부 중앙 지역을 뒤진 바 있다.
      2. 스페인 겔리온선 산 호세는 1708 6월 컬럼비아
      해안에서 영국 전함들을 피해 달아나다,
      원인 불명의 폭발이 일어나면서 600미터
      바다 속으로 침몰했다.
      이 보물선에 실린 금과 은과 에메랄드 등은
      최대 2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3. 러시아의 앰버 룸 (amber room 호박의 방) 1716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러시아 표트르 황제에게 선물한 것으로,
      러시아 왕족의 여름 궁전에 만들어진 화려한 보석의 방이다.
      호박 패널과 황금 이파리 그리고 거울로 가득한 이 앰버 룸을 두고
      영국의 외교관은 “세계 제 8대 불가사의”라 칭하기도 했다.
      2차 대전 중 나치는 바로크 예술의 걸작품이라 불리는 앰버 룸의
      보석과 장식물들을 뜯어내 어디론가 운반했다.
      보석을 운반하던 배가 1945년 침몰되었다는 설과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설 등이 난무하다.
      4. 기원전 14세기에 살았던 고대 이집트 왕비
      네페르티티는 완벽한 미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또한 강력한 개혁주의자로도 알려져 있다.
      네페르티티의 흉상은 가장 유명한 유물 중 하나이다. 0
      그러나 네페르티티의 무덤은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왕비가 언제 어떤 이유로 사망했는지,
      당시 정치상은 어땠는지 밝혀줄 그녀의 무덤은
      모든 고고학자들이 찾아내고 싶어 하는
      고고학적 보물이다.
      5.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성배’이다.
      예수가 마지막 만찬 때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접시 혹은 잔이 성배이다.
      성배에는 기적의 힘이 담겨 있으며, 전설과 영화와 소설 속에서
      끝없이 언급되는 인류 최고의 미스터리이다.
      역사학자들은 성배가 가공 물건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상상력은 성배 추적을 포기하지 않는다.
      6.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앙기아리 전투’는 실제로 존재할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503년 피렌체의 의뢰를 받아 베키오
      궁전 벽에 이 위대한 걸작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1506년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벽화를 미완성 상태로 남겨두고 떠났으며,
      전형적인 프레스코 기법 대신 유화로 그렸었다고 설명한다.
      말 탄 군인들의 숨 막히는 전투 장면을 담은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16세기 중반 궁전이 개축되면서 사라졌다.
      아무도 이 위대한 걸작을 발견해내지 못했다.
      (위 그림은 루벤스의 작품으로
      ‘앙기아리 전투’를 모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7. 아멜리아 이어하트가 월스트리트저널이 선정한
      ‘사라진 7대 불가사의’의 주인공이다.
      여성 인권 운동가이며 베스트셀러 작가이고
      대서양을 단독으로 비행 횡단한 최초의 여성인 이어하트는
      1937년 항법사 프레드 누먼과 함께 세계 일주 비행에 나섰다가
      태평양 하울랜드 섬 부근에서 교신이 두절되고 실종되었다.

      그녀의 비행기와 유해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며
      사고 경위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고 있다.
      하울랜드 섬에서 500km 떨어진 무인도에 추락해
      수개월 동안 생존했다는 추정이 있다.
      또 미군의 스파이 역할을 했던 그녀는 일본군에 체포되어 숨졌다는
      설도 있다. 그녀의 실종을 설명하는 이론은 무려 30가지.
      아직도 미국인들에게는 전설적 여성 조종사인 이어하트의 죽음///

      유흥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은 도덕적으로 무슨 해로움이나 위험이 있는가?
      텔레비전, 연극, 비디오, 도서 등과 같은 다른 세속적인 형태의 오락물은 어떠한가?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유흥물들이 삶에서 점점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될 때에 주의해야할 점은 무엇인가?

      여섯 번째 질문

      하나님의 성회에는 유흥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그것에 대한 신앙과 실천에 관하여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성의 대부분은 연령의 차이에 그 원인을 둘 수 있는데, 그것은 젊은 연령의 구룹이 친구들 사이에서 소속감을 느끼기를 원하며 또한 같은 유흥을 경험한 친구들 속에 포함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들과 나이 많으신 분들의 구룹은 서로 비슷한 감정을 체험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현대 사회의 문화나 혹은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에 무분별하게 참여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청년들이 하나님과 가지는 영적 관계가 부식되거나 손실되지 않도록 청년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각종 유흥 매체에 대한 것을 취급한 아래의 사항들은 우선 일반적인 관심사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설명하였으며, 그 다음에는, 성경적 결론에 입각하여서 특별한 매개체에 대해 가지는 전통적인 태도와 현세대의 태도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헌신이 성숙해질 수록, 현대의 여러가지 형태의 유흥이 영적 생명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그 관심이 깊어지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성경 원리

      성경의 원리를 따르기를 원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무슨 종류와 유형의 유흥이 적합합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신약과 구약 모두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위기 11:44,45; 20:7; 베드로전서 1:15,16)라고 하는 명령의 의미를 먼저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거룩함은 “영적으로 순결함”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구별됨” 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허용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거룩함을 우리들에게 부여하십니다.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의 힘이나 노력으로 거룩하게 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의로움 가운데 지시하신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하며, 또 성령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그러한 일로 부터 절제하도록 도우시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거룩하다고 선언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독교인이 죄악으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기를 요구하십니다 (로마서6:12-19; 데살로니가전서 4:3,4). 따라서 적합한 형태의 세속적인 유흥을 선택할 때에, 우리들은 성경이 저주하는 죄악된 활동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모든 것들은 거룩함의 표준에 어긋난다고 결론을 지어야 합니다. 이것은 간음, 혼전(婚前) 성생활, 동성애을 찬양하는 것, 그리고 그밖에 그릇된 욕망을 자극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 특별한 지혜와 지도가 필요한 때는 성경이 저주하지도 않으며 또 승인하지도 않는 그러한 활동에 관련할 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조차도 성경에는 기독교인들이 따라야 할 지침과 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위치에 있는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그의 양심에 위반되거나 혹은 형제에게 거리낌이 되게 할 때에 그에게 죄가 되는 행위의 문제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비고. 고린도전서 8:1-13; 로마서 14). 그러한 경우에 기독교인은 때때로, 개인적으로는 자유함을 가질 수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맺어진 형제나 자매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거나 제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자신의 자유를 억제하는 것은 강력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에 있어서 흔히 필요한데,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로마서 14:15; 고린도전서 8:13).

      성화나 거룩함의 또 다른 면은 구별됨입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거룩”과 “거룩함”을 의미하는 말은 근본적으로 불결하거나 깨끗지 못한 것들로부터 구별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이 하나의 구룹으로서 그리고 하나의 개인으로서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몸이며 또한 하나님의 성전인 것을 기억할 것을 권면합니다 (고린도전서3:1, 6:15). 우리들의 유흥 활동은 살아있는 성전으로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우리들의 능력을 손상시켜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전서 2:4,5).
      구별됨과 거룩함의 원리는 하나님의 성회의 조례, 9조, 6항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속적인 것에 대한 가르침에서 성경은 다음에 대하여 경고하나니 그들은 아래와 같다. 즉, 육신을 병들게 하고 마음과 심령을 썩게 하는 행동에 동참하는 일; 결국 남용케 되는 쾌락, 직위와 소유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과 집착; 극단적인 태도, 적합지 않은 언어의 사용, 부적당한 외모;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을 약화시키는 유혹과 이에 관련된 것(누가복음21:34,35; 로마서 8:5-8, 12:1,2; 고린도후서 6:14-18; 에베소서 5:11; 디모데전서 2:8-10,4:12; 야고보서 4:4; 요한일서 2:15-17; 디도서 2:12) 등이다.”

      마지막 원리는 가능한 한 최소한의 노력만으로 그저 빠져나가기 원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서 주님을 기쁘게 하기를 원하며 주님의 임재하심과 능력을 완전히 체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구별합니다. 어떤 유흥은 명확히 잘못된 것이며, 그러한 일에 참가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러나 현대 유흥의 종류 가운데 어떤 것들은 성경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것에 대해 지침이 주어지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율법으로는 가한 것이나 유익한 것은 아닌 것들로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원리를 고린도교회에 보낸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두 번 이야기 했습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고린도전서 6:12)  바울은 우상에게 제사 드린 고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원리는 유흥을 포함한 모든 활동에 적용 됩니다. 그는 조금 후에 그의 편지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0:23). 어떤 유흥은 그것에 중독될 수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유흥이든지 그것에 지나치게 빠지면 그것은 기독교인으로부터 하나님과 함께하는 귀중한 시간을 빼앗습니다. 기독교인은 그러한 때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는 대신에 그와 같은 일에 지나치게 열중함으로서 흔히 영적으로 중화되거나 무디어져 버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들은 하나님보다는 다른 어떤 능력 아래 사로잡히게 되는 것에 대해서 늘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바라는 바는 전심으로 --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마태복음 22:37, 마가복음 12:30, 누가복음 10:27). 이 진리의 말씀에 비추어,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들은 스스로에게 질문해야만 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 유흥이 덕을 세우거나 혹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굳세게 만들까?” 또는 “이 특별한 유흥이 나의 생활을 일시적 산만하게 만드는 것을 영적으로 허용할 수 있을까?” 기독교인은 도덕적으로 허용되는 모든 유흥이 영적으로 유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건전한 유흥의 장소가 있습니다. 아직 스스로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지 못한 어린이들은 가족과 함께 “재미있는 시간”을 즐겨야 합니다. 함께 웃고 노는 시간들은 어려운 사춘기 시절에 가족이 결속하도록 만드는데 상당한 도움을 줄 것입니다. 비록 유익한 유흥을 통하여 배움의 시간을 가질 수 있지만, 그러나 유흥이 항상 교육적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유흥은 악을 묘사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교회의 예배 분위기도 만들어 주지 않는 그저 중립적인 것이 있습니다. 부모는 가족 전체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중립적인 형태의 유흥을 지혜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선택은 어린이들의 나이에 따라서 다를 것이며, 또한 그것은 그들이 친구들과 함께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것들이어야만 합니다. 몇 년 후에 친구들이 기독교인들은 재미있게 놀 줄도 모른다고 조롱할 때에, 어린이들은 그러한 경험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에서 기독교인은 죄악된 행위를 의미하는 어떤 것이든 피하도록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영화와 비디오

      유흥을 위해 볼거리를 만드는 사람들은 그 제품의 내용에 대해서 경고하고 그 제품에 적당한 나이 수준을 알리는 레이블을 제품에 부착함으로서 일반인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왔습니다. 이러한 레이블을 붙이는 제도는 세속적인 것이며, 종교적인 것은 아닙니다. 어떤 제품은 폭력, 나체, 성적인 내용, 그리고 모욕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R” 등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덕을 세우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이 모든 연령에게 피하도록 경계를 주어야 하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PG 13, TV 14, NC 17 등과 같은 등급이 있습니다. 이러한 세속적 등급제도를 사용하는 이유는 나이 어린 아이들이 현실과 환상을 구별할 능력이 없어서 어떤 내용은 그들에게 적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등급제도는 또한 우리로 하여금 “나는 지금 그 나이보다 많기 때문에 그것을 볼 수 있으며 또 보기를 원한다.”고 생각하도록 조장합니다. 세속적인 검열관이 보아도 좋다고 말한다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가 그렇게 말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만일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그러한 행동과 생활양식을 인정하는 것을 묘사하는 그러한 것들 속에 우리들이 빠져들지 않는다면 우리들의 영적 생동력이 더 강하지 않을까요?

      “G” 등급 영화와 비디오에 관해서 특별히 주의를 상기시켜야만 합니다. 비록 그것에 “R” 등급의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을런지 모르지만, 그렇게 등급을 주는 그러한 제도는 그 이야기 뒤에 있는 사상적 의도에 대해서는 등급을 매기지 않습니다. 행동주의자 작가나 제작자에게는 별로 해롭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가 성경적 진리와 기독교인의 행동에 대하여 의심의 씨앗을 뿌릴 수 있습니다. 부모들과 모든 성인들은 그러한 영화나 비디오가 어린이들과 그들 자신에게 이러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인식해야만 합니다. 기독교 문학 비평가들은 진실로부터의 이러한 탈선에 대해서 경종을 울리고 동료 신자들에게 그것에 대하여 경고를 해야 만 합니다.
      어떤 것들이 기독교인을 위한 여가 시간의 활동에 합당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실제적으로 많은 유흥 프로그램과 영화를 직접 볼 필요는 없습니다. 등급제도 이외에도 여러 유흥 매체에 대해 평론한 인쇄물들은 유익하지 않은 것들에 관해서 경고할 것입니다. 도덕적인 면에 대해서 염려하는 시청자들이 폭력과 성적인 내용을 피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마련된 그러한 등급제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한 그러한 것들을 찾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불행한 일입니다.
      영화를 상영하는 공중 영화관은 그러한 영화를 기독교인 -- 흔히 가족과 함께 -- 과 동시에 감상하는 비 기독교인들의 유익하지 못한 행동 때문에 관심사에 추가적인 요인을 제공할지 모릅니다. 모든 형태의 유흥에서 기독교인은 그 유흥의 실제 내용뿐만 아니라 다른 관객들이 조성하는 분위기를 반드시 고려해야만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유익한 유흥이 저주하는 말, 술취함, 그리고 폭력적이고, 험악한 말을 하는 군중에 의해서 망쳐질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

      텔레비전은 사회와 기독교인의 삶에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도 더욱 많은 영향을 미쳐왔다. 심지어 때때로 값싸고 번지르르한 종교 프로그램 조차도 신자들이 지역 교회에서 기대하는 것에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뉴스 취재원들이 보도하는 뉴스의 경향은 사람들과 문제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에 미묘하게 영향을 줍니다. 광고주들은 여가를 즐기기 위한 새로운 “장난감”을 구매하는 사람들의 습관과 욕망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아주 매력적이고 해(害)가 없는 것처럼 보여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별로 신중하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영화나 다른 프로그램들에 대해서도 위에서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면밀한 조사를 해야만 합니다. 연속 코미디극, 심야 프로그램, 그리고 코미디 프로그램들은 특별히 유혹적입니다. 우리들이 보고 웃는 것들은 별로 해롭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그저 재미있는 것들이며, 진실을 가르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머들은 교묘하게 살며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진리에 반대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하여 우리들이 무감각하도록 만듭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텔레비전이 가족에게 매우 해(害)가 된다고 결정을 하고, 그들의 가정에 텔레비전을 가지지 않기로 선택을 했습니다. 그토록 극단적인 조치를 갖지는 않을지라도, 텔레비전은 주의 깊게 감시해야만 하는 것이며, 그것은 결코 어린이들을 위한 보모의 대용품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케이블 텔레비전은 우리 사회의 도덕적 면에 대하여 염려하는 성인, 부모, 그리고 영적 지도자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제공합니다. 자기 집에서 가지는 사생활에서 비기독교적인 주제와 그릇된 행실을 촉진시키는 케이블 채널뿐만 아니라 유료 시청을 통해서 온갖 종류의 호색적(好色的)인 요소들에 관한 것들을 접근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모든 성인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은 장려하고 악한 것은 피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기독교들인은 그들의 유선 방송 회사에게 적절하게 여과되지 않은 혐오감을 주는 모든 프로그램에 대한 비디오와 오디오 신호를 철저히 봉쇄할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케이블 방송국들은 그러한 채널 프로그램들이 가정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무료로 완전히 봉쇄할 것을 법으로 요구되고 있습니다.

      읽을거리

      어떤 지역사회의 공립 도서관은, 검열 없이 무제한으로 자료에 접근할 수 있다는 미명(美名) 아래, 인쇄물이나 인터넷 접속을 통하여 부도덕한 것들과 심지어 포르노 서적들까지도 수집하게 되었습니다. 몇 십 년 전의 도서관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동안에 일어난 변화에 충격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정숙하지 못한 대중의 태도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관찰하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동안에 일어난 조용한 변화의 증거입니다.
      이와 동시에, 반기독교인의 계획을 가진 행동주의자 구룹들은 그들의 주장을 촉진시키는 서적을 포함하도록 압력을 넣어왔습니다. 책방이나 소매점포의 잡지 진열대는 성경의 가르침은 물론 공중의 도덕을 해치는 읽을거리들을 뻔뻔스럽게 진열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무엇을 읽을 것인가 하는 것을 주의 깊게 선택해야만 합니다.

      인터넷

      가장 최근의 유흥 매체인 인터넷은 교회가 청년과 성인들의 순결을 보존하기 위해 고투해야 하는 전쟁터가 될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다른 매체의 형태에 대해서 도덕적 표준이 느슨하게 설정되어 있는 반면에 (비록 그러한 표준이 최근에 매우 침식을 당하긴 했지만), 인터넷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어떤 제한이나 표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특정 지역에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방지 프로그램이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자발적인 것이며, 또한 그러한 프로그램은 모든 원하지 않는 지역에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지는 못합니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모든 기독교인은 어떤 원거리 통신 학교에서 그 학교의 학생들에게 추천한 다음과 같은 맹세문을 컴퓨터 모니터에 부착해 놓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나는 특별히 포르노나 부적절한 관계를 위하여 인터넷을 사용하여 접촉하는 것을 피함으로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순결하게 지킬 것을 하나님께 맹세합니다. 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컴퓨터의 자원을 사용할 것입니다.”

      관심사:

      거룩함에 대한 개인의 표준을 제시하면서, 우리는 항상 율법주의나 세속적인 것을 촉진시키려 한다는 책임 추궁을 받을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표준을 위한 어떤 형태의 정의라 할지라도 그것은 기독교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세속적인 특별한 경우에 대하여 비난하지 못하는 것을 거룩함에 대한 타협으로 바라봅니다. 기독교인들은 특별한 매체의 표현에 대해서 위에서 언급한 것이, 우리들을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가르친 진리의 말씀에 반대되는 가치, 표준, 및 행동에 계속적으로 드러내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들의 헌신에 대해서 계속해서 맹렬히 공격하고 있는 활동을 단지 예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유구한 성품에 대한 이방인입니다.
      비록 휴식, 유흥, 그리고 몸과 마음에 도움이 되는 좋은 장소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들의 시간을 사용하기 위해 결정한 우리들의 선택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십니다. 우리들의 입술로 나오는 모든 안일한 말들에 대해서 우리들이 책임을 져야 할 뿐만 아니라(마태복음 12:36), 우리들은 시간과 자원에 대한 우리들의 청지기 직분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할 것입니다. 몇 몇 기독교인들은 주님의 일에 대한 깊은 책임감 때문에 육체적 및 정신적 힘을 유지하기에 겨우 충분한 최소한의 시간만을 유흥이나 오락을 위해 소비합니다.
      책임 있는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인 시간을 어떻게 가장 잘 사용할 것인가를 현명하게 저울질합니다. 신자들은 개인의 삶에서 유흥을 위한 장소를 평가하고 재고(再考) 할때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만 한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이 위치에 대한 공식적인 기술은 위에서 인용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성회 조례, 8조, 6항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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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예수회-신대륙 출신` 교황 프란체스코 1세는?

       

      - 2005년 베네딕토 16세에 밀려 2위..8년만에 선출
      - 아르헨 가톨릭 현대화 주도..청빈한 삶 정평
      - 낙태-안락사에 반대..동성애자 차별에도 거부감

      [뉴욕= 이데일리 이정훈 특파원]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돼 프란체스코 1세로 즉위를 앞둔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 추기경(76)은 세계에서 가톨릭 신자가 가장 많은 라틴아메리카에서도 가장 보수적으로 평가받는 아르헨티나 가톨릭교회의 현대화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다.

       

      제266대 교황에 오른 프란치스코 1세

      지난 2005년 콘클라베에서도 유력 후보로 꼽혔지만, 득표수에서 2위로 베네딕토 16세에 교황 자리를 내줬던 그는 8년만에 교황 자리에 올랐다.

      사상 최초의 예수회(Jesuits) 출신 교황이자 신대륙 출신 첫 교황이라는 점은 가톨릭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는 1534년 창립 이후 교황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지만 단 한 번도 교황을 배출하지 못했다.

      보수적인 아르헨티나 가톨릭교회의 일원답게 낙태와 안락사에 대해 강한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또한 지난 2010년 아르헨티나 정부가 동성간 결혼을 허용하려고 하자 강한 반대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성애에 대해서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인정하며 이로 인해 동성애자들이 부당하게 차별받아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193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탈리아 출신 철도노동자 가정의 5남매 중 한 명으로 태어났다.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고 이후 1958년 예수회에 입문해 수도사의 길을 걸었다. 이후 산미겔 산호세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뒤 산타페에 있는 인마큘라다대학과 부에노스아이레스 살라도르대학에서 문학과 심리학 등을 가르쳤다.

      30대 시절 수도사로서 탁월한 지도력을 인정받아 1970년대 후반까지 아르헨티나 지방을 돌며 사목 활동을 했으며, 1980년에는 산미겔 예수회 수도원의 원장으로 발탁됐다.

      1998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에 올랐으며 2001년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평생을 기도와 고행을 통해 봉사하며 살아가는 생활을 실천해온 그는 대주교 직에 오른 뒤에도 운전기사를 따로 두지 않는 청빈한 생활로 잘 알려져 있다.

      한편 지난 2005년 콘클라베를 앞두고는 두 예수회 신부들의 유괴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본인은 혐의를 부인했고 이후 자서전 작가와의 인터뷰에서는 “나는 오히려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배후에서 노력했다”고도 해명했다.

      이정훈 (futures@edaily.co.kr)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18&aid=0002745856

       

       

      아르헨티나 베르골리오 추기경 새 교황으로 선출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76) 추기경이 13일(현지시간) 베네딕토 16세의 뒤를 이을 제266대 교황에 선출됐다.

      비유럽권에서 교황이 선출된 것은 시리아 출신이었던 그레고리오 3세(731년) 이후 1천282년만에 처음이다. 또 가톨릭 역사상 처음으로 사상 첫 미주 지역 출신 교황이 탄생했다.

      교황 선출은 이번 콘클라베에서 5번째 투표 만에 이뤄졌다. 새 교황 선출은 265대 교황인 베네딕토 16세의 갑작스러운 사임에 따른 것이다.

      새 교황은 교황 즉위명으로 프란체스코를 선택했다.

      교황 프란체스코 1세는 성 베드로 성당의 발코니에 나와 축복을 전하는 ‘우르비 엣 오르비(Urbi et Orbi 바티칸시와 전 세계에게)’ 를 발표했다. 교황은 발코니 주변의 군중들에게 “좋은 저녁입니다”라고 말문을 연 뒤 “여러분의 환영에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새 교황은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위해 기도했다.

      앞서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여든 수만 명의 신자들과 관광객들은 이날 저녁 콘클라베가 열린 시스티나 성당 굴뚝에서 교황 선출을 알리는 흰 연기가 피어오르자 환호했고, 이어 성당 첨탑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아르헨티나인들은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새 교황으로 선출됐다는 소식에 “라틴 아메리카 가톨릭의 승리”라며 환호했다.

      아르헨티나는 헌법상 가톨릭을 국교로 채택하고 있다. 2010년 현재 아르헨티나 전체 인구 4천만명 가운데 가톨릭 신자는 70%를 넘는다.

      <디지털뉴스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32&aid=0002315020

       

       

       

      <교황선출> 교황 배출한 예수회는 어떤 수도단체?

       

      (런던=연합뉴스) 김태한 특파원 = 13일(현지시간) 프란치스코 1세 교황의 취임으로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아르헨티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76) 추기경은 새 교황으로 선출돼 1534년 예수회가 설립된 이후 처음으로 배출한 교황이 됐다.

      예수회는 가톨릭교회 내의 수도회로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등과 결성했다. 수도회의 목적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회원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의 구원을 전심전력으로 추구하는 데 있다. 영성 수련을 통한 자기 헌신을 생활 태도로 표방한다.

      1540년에 정식 수도회 조직으로 로마 교황청의 승인을 받아 로욜라가 초대 총장을 지냈다.

      예수회는 새로운 수도회 정신을 앞세우면서 개신교에 맞서 전 세계로 포교 무대를 확장했다. 18세기 말에는 반(反) 교회 움직임이 확산하면서 포르투갈, 프랑스, 스페인 등에서 예수회에 대한 금지 및 추방 조치가 이어지기도 했다.

      아시아에는 1542년 프란시스 사비에르가 포교 활동을 위해 인도를 거쳐 일본에 건너온 것을 계기로 전파됐다.

      세계 100여개국에 226개의 단과대학과 종합대학을 설립했으며, 4천여 개의 중·고교와 기타 교육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는 1954년에 진출해 서강대와 광주가톨릭대 등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thkim@yna.co.kr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6145073

       개혁주의마을/behold


      그리스도에게 의지하기(Holding On to the Christ)

      우리의 생활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루는 행복하고 다음날은 슬프고. 하루는 건강하고
      다음날은 아프며, 하루는 부자이고 다음날은 가난하며,
      그리고 하루는 살았는가 하면 다음날은 죽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우리가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우리가 항상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우리의 목자이시며,
      우리의 바위이시며, 우리의 성체이시며,
      우리의 피난처이시며, 우리의 형제이시며,
      우리의 안내자이시며, 그리고 우리의 친구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로 가는 길의 문을 여시려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 나셨으며,
      그리고 우리를 환영하기 위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우리는 바울과 함 께 "죽음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지옥의 권세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은 것이나
      깊은 것이나 그 밖에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 (로마서 8:38~39)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거지 나사로와 지옥에 간 부자 - 대한항공 신우회 말씀 선포 | ▶설교 본문
      2013.03.12 17:19
       

      거지 나사로와 지옥에 간 부자

       

      누가복음 16:19-31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본문은 누가복음 10-18장까지 계속되는 예수님의 진리 강론의 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계속적으로 모든 사람이 이해하기 쉬운 가장 평범한 이야기로 깊은 영적인 세계의 진리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특히 본문의 비유, 즉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는 사후의 세계가 어떠한지와 또한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부자에 대하여 소개를 하고 있는데 19절을 보면 부자는 자줏빛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이 표현은 이 부자는 세상에서 신분이 높고 호화로우며 유명하고 부요한 삶을 살고 있음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본문에서는 그가 부자이기 때문에 악하다라는 의도를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을 가지고 부자는 죽여야 한다,” 또는 부자는 이 세상에서 잘 살았기 때문에 죽으면 반드시 고통을 받는 지옥엘 갈 것이다. 그러므로 잘 살 때 좋은 일을 많이 해 두거라라고 가르치면, 이는 성경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엉뚱한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성경을 아주 곡해하는 것으로서 괜히 부자들에 대한 증오와 경멸을 조장할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잘 생각해보면 본문의 부자는 악한 부자가 아닙니다. 그냥 잘사는 평범한 부자입니다. 단지 자기 돈을 열심히 모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살고 있을 뿐입니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대학과좋은 직장을 다니며, 그래서 좋은 집에서 살고 또한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위치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기회가 닿으면 사람들을 불러 파티를 하면서 살고 있을 뿐입니다. 본문의 부자는 흔히 현대의 부자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정확합니다.

       

      이 부자 집 앞에는 거지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나사로라고 합니다. 20절에 보니 그는 헌데를 앓고 있습니다. “헌데는 몸에 나는 심한 부스럼병입니다. 피부에서 진물이 나고 냄새가 나는 병입니다. 너무 가려워서 계속 긁어야 하고 긁으면 그 자리에서 피가 곪아터지는 피부병입니다. 물을 대면 매우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아주 더럽고 악독한 피부병입니다.

       

      나사로는 부스럼 병에 걸리게 되면서 일을 하지 못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거지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일이 안 풀려서 가난하던 차에 부스럼 병까지 생겼지만 치료도 하지 못하고 더욱 악순환의 고통 속에 빠져, 할 수 없이 거지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는 지금은 직업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거지입니다. 또한 부스럼이라는 병 때문에 사람들이 멀리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래도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기에 그 부자집의 문전에 누운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의 관습을 보면, 부자 집에서 잔치가 끝난 후에는 남은 음식을 거지나 가난한 자를 위하여 대문 밖에 내어 놓았습니다. 이 부자도 그 관습대로 행하였습니다. 따라서 나사로는 이 부자집을 택하여 그 곳의 문 앞에 누워 있기로 한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보면, 물론 이 부자가 나사로의 병을 보고 나사로를 사랑하여 자기 아들을 삼거나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의원을 만나게 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거지 나사로가 남은 찌꺼기 음식이라도 먹는 것이 싫어서 심통을 부리며 개를 풀어서 물게 하며 못먹게 했다는 그런 내용도 아닙니다. 그냥 이 부자는 그 당시의 다른 부자처럼 행동하였을 뿐입니다.

       

      오히려 24절에 보니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라고 호소를 하는데, 이 구절을 통하여 보면 이 부자는 거지 나사로를 기억하여 잘 알고 있으며 나사로를 통하여 심부름 부탁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24절로 볼 때는 이 부자는 거지 나사로에게 더 자선을 베푼, 어쩌면 다른 부자보다 더 착하고 다른 부자보다 더 많은 관용과 사랑을 가진 부자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28절을 보면 부자가 말하길 내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이로서 우리는 그 부자가 상당히 가족적인 사람이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옥의 고통 가운데서 자신의 형제들을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 악한 사람이라면 심보가 이렇지 않습니다. ‘나도 이러한 고통 받는 곳에 왔으니 너희도 전부 이곳에 와라. 나 혼자 억울하고 심심하구나.’ 그런데 부자는 가족들을 생각합니다. 사실, 고통 중에 남을 생각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부자는 지극한 고통 속에서 가족을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얼마나 사려가 많고 사랑이 많은 사람입니까? 얼마나 가정적입니까?

       

      심지어 24절과 27절을 보면,“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부릅니다. 이로 보건데 그는 평소에 세상을 살면서 소위 신앙 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나아가 이 부자가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불렀다는 사실을 볼 때 어쩌면 그는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반드시 천국에 들어갈 줄로 믿었던 사람일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 당시 유대교에 열심히 있는 부자의 모습이요, 소위 현대로 말하면 교회의 문을 밟고 다니며 스스로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아무튼 본문에서의 부자는 세상에서 뚜렷한 선행을 행한 흔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나쁜 짓을 했다거나 남에게 큰 폐를 끼친 사람도 아닙니다. 단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을 가지고 자기를 위하여 열심히 잘 사는 것 뿐이요, 심지어 교회도 다니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가정적이며 매우 부자였고 사회적 지위가 있었으며 가끔은 고와와 과부에게 몇푼씩 던져 주는 아량도 있는 그러한 부자였던 것입니다. 그는 세상이 일반적으로 부러워하는 그런 사람이었으며 자신의 돈으로 인생을 즐기고 또한 종교 생활에도 관여하는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도덕이나 또 법적인 기준으로는 전혀 하자가 없고 남에게 규탄을 받거나 비난을 받는 그러한 사람도 아닙니다. 특히, 이 비유에서는 그가 지옥을 갈 어떤 뚜렷한 악행이 묘사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지옥에 가 있습니다.

       

      부자는 지금 자신도 신앙이 있다고 생각하며 구원 받을 줄 믿었는데, 의외로 죽음을 통과해 보니 구원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이 있는, 고통이 심한(23), 또한 불에 타는(24) 지옥에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신의 현실을 보며 이 부자는 놀라움과 좌절과 고통 속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옥에서 물 한방울마저 먹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23절을 봅시다.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아니 나를 모르십니까?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한방울만 찍어 내 혀에 넣어 주소서. 이 불꽃 가운데서 너무나 너무나 큰 고통을 당하나이다.”

       

      제가 번역한 책 중에 청교도 신학자이며 목회자였던 리차드 백스터의 <영원한 안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는 그 책을 번역하면서 얼마나 많이 지옥을 체험하였는지 모릅니다. 한 번은 너무 무서워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내 자신이 구원을 받은 사실을 확신하게 되면서 몇 일 동안 눈을 감고 주의 사랑을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지옥의 깊이보다 더 깊고 넓은 영원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구원했음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 그 책의 5장과 6장은 지옥에 대해 집중해서 쓰고 있습니다.

      5 . 성도의 안식을 잃는 자들의 큰 비참

      6 . 즐거운 시간을 잃고 지옥의 고통을 당하는 자들의 비참

      1. 저주 받은 자들이 잃는 즐거운 시간들

      2. 저주 받은 자들이 당하는 너무나 큰 고통들

      그 중에 지옥은 영원한 고통이다라는 부분만 읽어 드리겠습니다.

       

      지옥의 고통이 가장 무서운 이유는 영원하다는 사실이다. 수천만 년이 지나도 지옥의 고통은 언제나 처음과 똑같다. 만일 고통에 끝이 있다면 저주 받은 자들은 그나마 바랄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고통이라니, 생각을 하면 감당할 수가 없다! 그들이 죄를 짓는데 지치지 않았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형벌하시는데 지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이 진심으로 죄를 회개한 적이 없듯이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형벌하심을 후회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였기 때문에 영원한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거절한 것이 영원한 나라였음을 알고 있었기에 나라에 영원히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불멸의 영혼들은 죄를 지었으므로 정죄 선고를 받아 불멸의 고통을 당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일 무덤에 누워있거나 다시 무덤으로 돌아갈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한다! 그들은 소리 질러 외치길 “오 죽음아, 너는 어디로 날아가 버린 것이냐? 이제 와서 서글픈 삶을 끊어주렴. , 고통이 나를 무너지게 하고 나의 존재를 끝낼 수만 있다면! , 마침내 내가 사라져 없어져 버린다면! ,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라고 외칠 것이다. 이러한 신음들은 그들이 어쩔 없이 고통의 영원함을 떠올릴 때마다 터져 나올 것이다. 그들은 설교와 기도가 길다고 생각했었다. 하물며 끝없는 고통을 당할 그들은 얼마나 고통이 길다고 생각하겠는가! 그들이 누린 쾌락의 길이에 비교하여 그들의 고통의 길이는 얼마나 것인가! 하나는 순간이었지만 다른 하나는 영원히 이어진다.

       

      죄인들이여! 때가 거의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당신은 영원의 앞에 있다. 죽음은 문을 열고 당신을 잡으려고 기다리고 있다. 가서 밤을 자라. 땅에서 날을 즐기라. 그러다 보면 당신의 밤과 낮은 끝이 나게 것이다. 당신의 생각과 세상 관심들과 쾌락은 영원에 의해 삼킨바 것이다. 당신은 영원히 변함없는 저주의 상태로 들어가야 한다. 천상의 기쁨을 우리가 없듯이 지옥의 고통도 마찬가지다. 영원한 고통은 상상조차 없는 고통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가르침은 당신에게 공포가 아니라 위로가 것이다. 만일 당신이 아직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면 지옥에 대한 내용은 물론이고 천국이나 구원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걱정과 함께 두려움이 몰려올 것이다. 하지만 당신에게 천국과 자비를 설교하는 것은 당신이 천국과 자비를 거부하지 말고 구하라고 부탁하려 함이며, 지옥을 설교하는 이유는 당신이 단지 그것을 피할 있도록 설득하려 함이다. 만일 당신이 지옥을 피할 가망이 전혀 없다면 내가 당신에게 지옥을 말하는 것은 헛수고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아직 이곳에 살아있는 , 당신이 회복할 있는 기회는 아직 있다. 따라서 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당신을 당신의 무감각 상태에서 깨우려고 하는 것이다.

      아아! 하나님의 진노 하에 있는 영혼들의 고통을 지금 땅의 사람들이 어찌 있겠으며 어떻게 표현할 있겠는가?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 1:6).

       

      당장 결심을 하여 영혼을 망하게 하는 죄악들을 멀리하고 그리스도께 당신 자신을 전부 드리도록 하라. 그러면 당신의 얼굴은 성도 중에 사람이 되어 당장 천상의 안식을 누리게 것이다. 이상 지체하지 말고 복음의 언약을 붙들기를 바란다! 만일 당신이 죽기까지 마음을 강퍅하게 하면, 그때는 회복이 있을 없다. 다른 날로 미루지 말고 지금 당신에게 진실하게 경고하는 친구의 말을 들으라. 그러면 당신의 저주를 막아준 영원한 친구 하나를 얻을 것이다.

       

      *****

       

      지옥의 고통 가운데 부자가 던진 부탁에 대해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안타까움 가운데 대답을 합니다.

      부자야. 미안하구나. 너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이 끼어 있어서, 여기서 너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너는 우리에게로 건너올 수도 없구나”(26).

      다시 말하면, 죽음으로 인하여 갈라지는 영원한 운명은 영원토록 바뀔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결국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만 지옥으로 가느냐 천당으로 가느냐 하는 둘중 한 길을 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고, 죽음을 통하여 이 세상을 지난 후에는 다시는 그런 기회가 일절 없다는 뜻입니다. 부자가 당하는 이러한 지옥의 영벌, 혹은 나사로가 누리는 영원한 복락은 이 세상에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일단 죽으면 각각 결정된 대로, 아브라함의 품으로 가거나 아니면 고통의 장소인 음부, 곧 영원한 불꽃의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 누구를 가르쳐 부자라고 말하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 당시에 부자들의 모습이 꼴불견이라 그들을 향하여 이놈들, 지옥에나 들어가라저주한 것일까요? 아니면 너희는 이 땅에서는 평안했고 나사로는 고생했으니, 이제 신세가 바뀌어야 공평하다는 것을 말하시려는 것일까요? 아니면, ‘부자, 너는 이 땅에 사는 동안 내가 준 부귀로 거지 나사로에게 약 한번 안 지어 주고, 친자식처럼 사랑하지 않고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너는 지옥에 간다는 가르침일까요? 사실, 이 본문에 대한 도덕주의의 가르침은 언제나 이러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가르침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거지 나사로를 봅시다. 거지 나사로! 그는 빈곤과 고독의 고통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과거에 부스럼 병이 없고 여러가지로 평범하고 건강하게 살 때에는 많은 정답던 사람들, 친하던 사람들, 심지어사랑하는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스럼 병에 든 이후로는 그는 모든 사람에게 버림을 받고 이제는 보고싶은 사람마저 볼 수 없는 부끄러운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솔직히 지금 이 거지는 이 세상적 기준으로 볼 때는 쓰레기 같은 사람이요, 아무 쓸모없는 무용지물이며, 귀찮은 빈대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또한 혹시 부스럼 병이라도 옮을까 두려워하며 모든 사람이 멀리 멀리 피해 다니는 아주 싫은 사람입니다.

       

      지금 그 거지의 입장에서는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한끼 때우며 생명을 연장할 뿐입니다. 절망적 인생입니다. 큰 슬픔과 고통의 현장속에 있습니다. 심한 천대를 받고 있습니다. 하루의 삶이라고는,부자 집 대문 밖에 누워 있다가 떨어지는 음식이 있으면 그 음식 찌꺼기를 먹을 뿐입니다. 그는 남들이 자신을 얼마나 싫어하며 피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야하니 거지로 구걸할 뿐입니다.

       

      아마 이 거지가 죽었을 때는 짚으로 만든 멍석으로 누군가 둘둘 말아서 똥 치우듯이 쓰레기장에 던져 버리고 다른 쓰레기와 함께 불로 태웠을 것입니다. 누가 부스럼 병이 든 혼자 남은 그 거지를 장사나 치뤄 주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지금 가 있습니까? 이 비유에서 거지 나사로가 선을 행한 모습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빈곤하고 가난하고 거지였기 때문에 이제는 좀 편안하게쉬라고 하나님께서 천국에 보내신 것입니까? 세상에서 이 거지처럼 지독히 고생하면 죽은 후에는 자동으로 반드시 천국가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까? 만일 이러한 원리로 하면, 거지마다 천국가고 부자마다 지옥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부자가 누구이며 거지 나사로는 누구입니까? 주님은 지금 누구를 대상으로 무엇을 말하려고 하십니까? 그리고 우리는 지금 진심으로 이 부자보다 나은 것이 있어서 지옥가지 않을 보장이 있으십니까? 솔직히 우리의 인생이란, 이러한 부자들의 인생이 부러워서 더 열심히 일하고 날마다 지치도록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데 왜 부자는 지옥 가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을 갔습니까? 여러분, 그 답을 아십니까? 그 답이 나오셔야 성경을 바로 보시는 것입니다. 이 질문이 바로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예수님의 긍극적 질문인 것입니다.

       

      29절이 답입니다. 모세와 선지자가 답입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네 형제들이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믿고 들으면, 그곳에 가지 않는다.”

      그들에게 들으면, 지옥에 가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옥가지 않고 천국가게 되는 것은모세와 선지자들이 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살던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이 천국 갈 수 있도록 모세와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이 땅에 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고통 받는 지옥에 가지 못하도록 경고하기 위하여 모세와 선지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부자가 대답합니다. “아브라함이여, 그들로 불충분합니다. 혹시 나사로가 가면 그들이 믿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그들에게 가서 말하면, 저들이 회개할 것입니다.”(30)

       

      이에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31절입니다. 이것은엄청난 진리입니다. “부자야, 만일 네 형제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을 듣지않는다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본문의 핵심을 찾았습니다. 그 핵심은모세와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을 들으면 아브라함의 품이요, 그들을 듣지 않으면 지옥인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자명하고 확실한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모세와 선지자들이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 그것이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키가 되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성경에서 모세와 선지자라는표현은 구약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모세와 선지자들은 무엇을 말한 것일까요?

       

      오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자신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가르쳐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 24:25-27).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은 열한 제자들이 함께 모여있고 그들과 함께 모인 성도들 앞에서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24:44-48).

       

      예수님께서 공생애 중에는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5:46).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는 이렇게 증언합니다.“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10:43).

       

      사도행전 26장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교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26:22-23).

       

      모세와 선지자가 무엇을 증거하였는지에 대한 내용은 성경에 무한하게 깔려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1:2).

      로마서 3: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라고 증거합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율법과 선지자는 다른 표현으로 할 때 모세와 선지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가 모세와 선지자가 말하는 핵심입니다.

       

      한마디로, 모세와 선지자들이 가르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죄사함을 받아 구원 받는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함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메시야시며,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은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심이요, 그가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성령을 통해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주님께서 부활을 앞두어 약 두달 정도 전에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주께서 말씀하시길, 모세와 선지자의 가르침을 믿지 않는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볼지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약하면 구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다리며 믿게하신 하나님의 계시였음이요, 이를 믿는자들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영생의 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핵심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어리석은 부자에 대하여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어리석음은 그가 세상으로 볼 때 특별한 어리석음이 있어서 어리석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의 부자와 누가복음 12장의 비유의 부자는 한결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 공통점은 이 세상이 보기에 아주 좋은 것들을 누리기 위하여 열심히 살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을 지나면서 천국을 잃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12장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의 결론을 우리 주님은 다음과 같이 내립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12:21).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취하리니,네가 수고하여 이 땅에서 예비한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어리석은 자들아.”

       

      세상에만 미쳐서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하여 무관심하며 준비치못한 영혼들을 다 묶어서, 누가복음 12장에서는 어리석은 부자, 본문에서는 지옥에 내려간 부자로 비유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지 나사로는 왜 구원을 받았습니까?

      22절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라고 되어 있고, 23절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나사로의 구원과 관련한 핵심 단어는 아브라함의 품입니다.

       

      아브라함의 품에 대해 갈라디아서 37-9, 그리고 갈라디아서 329절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로마서 4:2-8, 로마서 422-24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그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3:7-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3:29).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4:2-3).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4:22-24).

       

      이로 보건데, 거지 나사로가 천국간 이유는 딱 한가지였습니다. 바로 복음을 듣고 믿은 것입니다. 자신의 고통 속에서 그는 이러한 죽음과 고통의 원인이 죄였음을 알았으며,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속죄를 필요로 하였고, 결국 모세와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실 어린양을 믿으며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모세와 선지자가 대표하는 복음의 소리를 듣고 속죄의 도리와 복음의 도리를 믿고, 대속과 사죄,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믿은 것입니다. 그는 부잣집 대문간에 누워 구걸할지라도 마음 가운데는 항상 죄사함을 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 메시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늘 바라고 기다리며 불렀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의 문제 깨닫고 메시야를 통한 속죄를 믿은 것입니다. 나아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이 괴로운 인생 속에서 잠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천사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으로 안긴 것입니다. 본문에 아주 중요한 내용이 있는데 부자가 죽을 때는 천사가 인도하지 않지만, 주 안에서 죽은 나사로는 천사가 영광스럽게 호위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 거지 나사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와 구원하신 은혜로 천국에간 것입니다. 사실은 그 사람이 거지였던 부자였던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천국으로 그 영혼이 가게 된 것입니다.그 외에는 아무런 다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결론은, 예수님의 비유는 나를 믿으면 천국이요, 나를 믿지 않으면 지옥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하려는 핵심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죽으면 곧 바로 영원한 운명이 결정됩니다. 영원히 바뀔수 없는 운명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그 운명은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그리고 그 갈림길은 아무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주 예수께 속하였는가 아니면 아닌가.다른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을 사랑하기에 피를 토하듯이 외치고 싶습니다.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여러분의 마음 속에 영접하면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천국백성이 되었으며 언제 죽어도 천국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외칩니다. 예루살렘 큰 광장에서 외칩니다.

      다른 이로써는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4:12).

       

      이제 다 같이 성경 한 구절을 찾읍시다. 데살로니가후서 18-9절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우리의 삶이 모세와 선지자를 잊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말씀에 근거를 내리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까이 하며 성경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면 천국으로 인도하시지만, 하나님을 잊고 망각하고 소중히 여기지 않고 살면 아무리 도덕적으로 살고 열심히 살아도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어 영벌을 받게 됩니다. 사실 성경은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않은 죄를, 그래서 하나님을 망각하는 죄를 최고의 악한 죄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 안에서 영생을 주신 주님을 찬양하며 다시 한번 복음을 깨닫고 주께 나오시며, 우리의 짧은 여생을 하나님께 더욱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특히 그의 보내신 독생하신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주변에 주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아브라함의 품을 알립시다. 그리고 모세와 선지자가 전한 주 에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립시다. 남은 여생에 더욱 복음을 알리시며 복음의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출처] 거지 나사로와 지옥에 간 부자 - 대한항공 신우회 말씀 선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작성자 스데반 황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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