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절(貞節)/최송연
                   
눈 내리고
비 내리며 바람 불어
캄캄한 세상이어도

임 그리며
사모하는 내 마음은 
늘 푸른 하늘입니다

풀숲의 이슬처럼
영롱한 사랑으로 오십시오                                            
내 영혼 깊은 곳으로

나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는 
정결함으로 불 밝히오리니...

.
고후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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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중지론은 이단이다

산돌 ㆍ 2014-06-18 (수) 22:42 IP: 107.xxx.129    

말씀보존학회에 소속되어 있는 성서침례교회에 다니는 분이 있습니다.
당연히 은사중지론을 주장하십니다.

우연히 알게 되어 이 분 가게에서 말씀을 나누다가 안타까와서 말씀드렸습니다.
"제게도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데요. 그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단칼에 제가 귀신들린거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은사중지론은 사람의 신학논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단입니다.
사단의 정체성은 창세기 이후 변함이 없는데
성삼위 일체의 하나님의 정체성에 변함이 왔다고 것을 주장이 어디에서 왔겠습니까?
이단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정체성을 왜곡합니다.

--- 예수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


이단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는 것 같지만 사단에게 포제션된 사람들입니다.

성삼위일체중 성령하나님이 사도시대와 현재의 성품이 달라졌다고 속이는 사단의 말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은사중지론을 말씀하시는 분들은
성부- 성자 - 성령의 성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교리를 믿는 분들은 정죄의 영에서 잡혀서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을 갖지 못합니다.

성삼위일체에 관해 간단하게 씁니다.
성삼위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늘아버지는 하나님이시지만 성자가 아니시고 성령이 아니시다.
성자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성부가 아니시고 성령이 아니시다.
성령하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성부가 아니시고 성자가 아니시다.

이 하나님의 정체성(성품과 역사하심)을 변개하면 이단에 속하게 됩니다.
활동이 많으신 존매카더라는 분도 은사중지론자입니다. 각각의 성경강해서가 시리즈별로 나오죠. 어느날 운전하면서 라디오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듣는데
뭔가 갑자기 알싸했습니다.

성령이 아닌 정죄의 영이 느껴져서 스피커가 누군가 기다렸더니
다름 아닌 존 매카더였습니다. 라디오 얼른 꺼야했습니다.
성도만 아니라 사역자들도 성삼위일체를 오해하는 분이 많습니다.  

정체성과 관계성 --- 신앙의 화운데이션이며 스트럭춰입니다.

우리 신앙의 건물을 반석되신 예수그리스도위에 잘 지어나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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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가 이미 끝났다. 라고 은사 중지론에 관해서 반론을 제기하는 말씀을
블레이드라는 아이디를 가진 분이 올리셨습니다. 세부적이고 논리적이라서 퍼왔습니다.

--아이디:  블레이드 --

"성경이 완성됨에 따라 모든 은사와 기적이 중지되었다"
는 것이 은사 중지론자들의 대표적인 견해로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경이 완성된 시점"을 언제로 보고 계시는지 의문이 들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그 때 당시에는 "한 권"으로 모아서 정리된 성경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신약성경의 대부분은 서신문으로

터키 지역에는 요한계시록이 보내졌고
로마에는 로마서가
고린도전후서는 고린도지방..등등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각종 이단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조작된 문서들도 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각지에 흩어져있는 서신서들을 모으고, 그중 조작된 문서를 분별해 내는

작업이 오랜시간동안 계속되었습니다.

2세기에서 4세기 말로 추정되는 신약성경의 목록집이 시리아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베드로 후서, 요한 이서, 요한 삼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이 빠져있었습니다.

AD 170년경의 기록으로 추정되는 무라토리 단편(Muratorian Canon)이라고 하는

성경의 목록이 나왔는데 여기엔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가 빠져있었습니다.

그리고 AD 140년 경에 애굽에서 발간된 "진리의 복음"이라는 책에서는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가 제되어있습니다.

AD206년 경의 바로코치오 사본은 성경을 "60권"이라고 했습니다.

4세기가 지나서야 신구약 성경이 66권으로 최종 인정을 받았습니다.

성경이 완성된 시점은 언제로 보고 계시는지요?

사도요한이 계시록을 마친 때로 보고계시는지요?
아니면 4세기가 지나서야 은사가 중지되었다고 보시는지요?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성경에 써있는데,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은 이미 태초에 완성이 되어있는 채로 있어왔다는 뜻입니다.
다만 그것이 그당시에는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기록된 말씀을 주신건 "언제"주신건가요?

펌글
출처: USA아멘넷 독자공간게시판

3)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뜻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율법과 연계된 개인적 진술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사도됨을 시비하면서 복음 외에 율법도 지켜야만 구원을 온전히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서신입니다. 그래서 2:14까지는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변증을 한 후, 2:15부터 마지막까지는 율법과 복음을 대조한 변증입니다. 본문이 속한 큰 문단은 2:15-21까지인데,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원리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만 책의 내용을 분해해도 벌써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던 “나”는 이전에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부인했던 “원죄하의 옛 자아”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구절 전체로는 성령의 간섭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결과를 설명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동일한 원리를 설명하면서 못 박힌 것은 “옛 사람”이라고 밝혔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롬6:5-7)  

그런데 본문만의 특유한 뜻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선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점을 일관되게 강조하는 15-19절과 21절 사이에 본문(20절)이 복음을 힘겹게(?) 변호하는 모습으로 끼워있습니다. 그렇다면 특별히 율법과 연관된 못 박힘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또 15-17절까지는 의로워지는 주체를 “우리”라고 표현하다가, 18-21절에선 “내”로 바뀌었습니다. 본문이 속한 후자는 바울 자신이 거듭났던 체험에 바탕을 둔 진술이라는 뜻입니다.

이 둘을 종합하면 어떻게 됩니까? 바울은 개인적으로 중생한 후에 율법에 대해 갖게 된 생각을 십자가 복음과 대비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의 경우에는 십자가에 못 박혔던 것은 구체적으로 “도덕적 죄를 넘어서 율법에 따라 행했던” 옛 자아라고 봐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회심 체험

바울이 스스로 예수 믿기 전에 어떤 사람이었다고 고백했습니까?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3:5,6)

그는 정통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의로 따져도 흠이 없다고 자부했던 자였습니다. 도덕적으로 따져 크게 하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이미 하나님을 아주 열심히 믿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고 선을 행하는 기준도 틀렸습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의 깨어진 옛 자아는 생판 불신자였던 경우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는 성전 제사를 지내며 율법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자라야 하나님의 구원에 들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그로선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나사렛의 젊은 사형수 랍비를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다는 것은 처단하여 없애야 할 이단 중의 이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열심이 지나쳐 스데반을 돌로 처형토록 주도, 최소한 적극 가담했었습니다.

틀림없이 그는 스데반이 돌로 맞아 죽는 순간에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던 모습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5,56)는 말은 더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여겼던 자기에겐 없는 그런 신비하고도 견고한 믿음이 못내 궁금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신자를 핍박했던 것도 그런 안타까움, 시기, 궁금증을 해소해보려는 그만의 몸부림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다 산헤드린에서 허가를 맡아 다메섹까지 신자를 잔해하러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광채가 비취자 삼일 간 봉사가 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에겐 너무나 큰 충격이자 일생일대의 위기였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가장 먼저 깨달았던 점은 이단 중의 괴수라 여겼던 예수는 정말로 부활하여 승천하여서 스데반이 말한 대로 하나님 우편 보좌에 서계신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거기다 삼일 후에 자기와는 전혀 일면식도 없는 한 이름도 없는 예수 믿는 신자가 찾아와서 기도해주자 다시 시력을 회복하게 되었을 때의 그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그것도 핍박을 받아 마땅한 이단이 도리어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자신의 상태와 있는 곳까지 정확하게 알고 나타났으니 말입니다.

이 사건 이전까지는 그는 세상에서 가장 큰 자, 사울이었습니다. 지식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그보다 나은 자는 아마 실제로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껏 자기가 세상 앞에 자랑하며 쌓아왔던 모든 것이 예수 앞에선 정말 아무 짝에도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지성적 영적 판단으로는 너무나 보잘 것 없고 죽어 마땅한 한 신자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 것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무력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고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따로 있었습니다. 하늘 보좌에 있는 전지전능하신 예수가 신자들을 죽이려 그렇게 설쳤던 자기를 삼일 간의 죽음 체험만 시키고는 죽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오히려 왕과 방백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사도로 세워주었습니다. 한순간에 당신의 철천지원수에서 열렬한 전도자로 당신께서 바꾸어주신 것입니다. 대체 이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자기 자신의 모습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반면에 예수님에 대해선 그저 엎드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로선 정작 죽어야 할 자는 예수 믿는 신자가 아니라 자기였고, 정작 이단도 나사렛 예수가 아니라 율법의 의를 자랑하는 유대교라는 고백이 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도 율법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앞에 꿇어 엎드려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절감했을 것입니다. 그는 율법에 완전했다고 자랑했던 자기의 의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로 덧입혀졌던 것입니다. 이제 이름도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인 바울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에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고 한 후에 바로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에 세상에서 모든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2:7,8) 또 자기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난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바울처럼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자는 자기를 그리스도에 못 박는 동일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부인 내지 외면하고 만사를 자기 소견대로만 살았던 것이 얼마나 큰 죄인 줄 깨닫게 됩니다. 이 땅이 전부인줄 알아 현실적 형통과 일신상 안락만 추구함으로써 윤리적 죄도 수없이 범하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나아가 자기라는 존재 전부가 썩어서 너무나 추하고 더러운데 깨끗케 할 방도는 도무지 없음을 절감하고 애통하며 진정으로 회개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절망에 머물 틈이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곧바로 너무나 큰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대속 죽음이 바로 자기를 위한 것임을 체험적 진리로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집니다. 자기 속에 새 생명이 창조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 이후로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예수만 증거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게 됩니다. 바로 자신의 옛 자아가 죽어 없어지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것입니다.

바울은 또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합니다. 자기가 능동적으로 자기를 못 박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믿을 생각이 전혀 없었지 않습니까? 주님이 나타나 그를 단번에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육체 가운데 그리스도가 와서 사신다고 합니다. 성령이 내주하여서 평생 떠나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으로 당신께서 주도적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바울의 중생 체험은 예수 믿은 모든 신자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됩니다.

율법과 십자가

그럼 서두에 말씀드린 자신의 체험에 입각하여 율법과 관련된 “십자가 못 박힘”의 더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율법으로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신념을 완전히 버렸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이미 교회에 출석한 신자들을 대상으로 율법, 행위, 육체 등과 은혜, 믿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일관되게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그런 신념을 가지게 된 배경이 무엇입니까? 물론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선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행위언약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이기에 당연히 지켜야 했습니다. 이미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 그분이 주신 법을 지킨다면 누가 뭐래도 구원은 확실히 보장된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는 자들이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도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몰랐던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율법의 의로 흠이 없다고 스스로 자신했지만 사실은 율법으로도 의롭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단지 문자적으로 지켰을 뿐입니다. 거기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는 마지막 계명은 온전히 지키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단지 이웃의 물건, 부동산, 돈을 훔친 적이 없었기에 의롭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 의미라면 “도적질 하지 말라”는 계명과 사실상 중복되는 셈입니다.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등 모든 범죄는 이웃을 탐내는 데서 기인합니다. 이웃의 생명, 아내나 남편, 재물, 인격 등을 탐했던 마음이 실제 행동으로 드러난 것들입니다. 대신에 ‘탐내는’ 것은 아직은 죄가 마음속에 머물고 있는 상태입니다. 말하자면 율법도 마음에 탐하는 것마저 죄라고 분명히 지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것이며, 또 형제를 보고 바보라 욕해도 살인과 같은 죄라고 가르쳤듯이 말입니다.  

바울이 스데반을 죽이고 또 신자를 핍박한 것은 물론 이단이라는 종교적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판단을 내린 원인 중에 시기 질투심도 분명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어떤 위대한 인간도 이 마지막 계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 존재 자체가 썩어빠진 죄인이기에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해주지 않고는 구원의 방도가 없습니다. 율법은 죄의 저주를 깨닫게 만들어서 십자가 복음으로 이끄는 몽학선생인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만난 후에 자신의 모든 지난 어리석음을 깨닫고 자기야말로 죄인 중의 괴수였음을 고백했습니다. 세상에선 율법을 가장 잘 지키는 의인이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추어보니까 가장 추한 자였음을 철두철미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행위로는 절대로 구원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완전히 깨어져 엎드려야만 한다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도 드디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았던 것입니다.

익히 알고 있는 구원의 원리를 계속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이 새사람이 되고 난 후에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너무나 당연한 것 같이 여겨집니까?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 주님을 경배하고 힘든 일이 생기면 주님께 구원해달라고 비니까 당연히 그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까?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생각은 자기는 하나님의 합격점에 들 자신이 있다는 뜻입니다. 착한 자가 천국 가고 악한 자는 지옥가야 한다는 불신자와 여타 모든 종교인들의 신념입니다.  뒤집으면 자기는 착하고 남은 악하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반드시 착한 자에게 그 착한 만큼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 인간이 뭔가를 바치면 하나님은 그에 비례하는 것으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선행 구원을 강조하는 것은 선행이 신에게 바치는 것 중에 가장 의로워 보이기에 보상을 가장 크게 받으려는 욕심의 발로일 수도 있습니다.  .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당연히 이와 정반대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은혜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보시기엔 도무지 열 번째 계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너무나 추하고 불쌍한 죄인임을 매순간 자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분 앞에 내세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음을 진심으로 실토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인가 바쳐선 그 바친 만큼 되돌려 받으려는 생각은 바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고 여전히 의인이라고 자랑하는 꼴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착한 자가 천국 가고 악한 자가 지옥가야 옳다고 큰소리치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교만이자 죄인지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어 인간의 모든 죄책을 대신 감당하신 예수님의 의를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이 사랑 앞에 진정으로 항복하고 나오라는 초대입니다. 언제 어디서 아무리 죄 많고 후패한 모습으로 있더라도 무한하고도 일방적인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율법적, 기복적, 독선적, 인과응보적인 하나님 개념을 갖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철저히 깨달아서 완전히 버리라는 것입니다. 또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안의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를 믿었어도 할례를 꼭 받아야만 구원받을 수 있거나 더 확정적으로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할례 또한 행위로 갖다 바치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복을 더 받거나 그분 앞에서마저 자신들은 남보다 뛰어난 자라고 자랑하려는 생각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용지물로 만들며 그분을 다시 죽이는 짓입니다.      

그래서 본문 뒤에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21절) 예수 믿고 나서도 하나님께 율법적, 기복적, 독선적, 인과응보적인 개념을 갖고 나아가면 바로 그분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은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복음에 장애되는 것은 전부 못 박으라.

“내 몸을 쳐 복종케 한다는 것”(고전9:27)과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함”(고후10:5)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다”(갈2:20)는 세 구절은 그 문자적 서술만 보면 언뜻 비슷한 뜻 같이 여겨집니다. 말하자면 자기 속의 죄의 본성, 물질적 탐욕, 세상에 대한 미련, 이기적 성향 등을 의지적으로 죽여서 죄를 안 짓고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 말입니다.

물론 세 구절 다 그런 초보적이고도 넓은 뜻으로 적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대로 전체 문맥과 당시 상황과 저자의 의도 등과 대조하면 각기  다른 뜻입니다. 첫째는, 복음에 방해된다면 사도로서의 선한 자유와 권리마저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복음을 대적하는 인간적 관습, 지식, 철학, 종교 등 어떤 견고한 진도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과 함께 역사하면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여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는 옛 자아가 죽는 것은 물론, 믿기 전에 갖고 있던 율법적인 하나님 개념을 완전히 없앴다는 뜻입니다. 죄를 지으면 벌만 주는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 있든 십자가를 통해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깨닫는 것입니다. 또 그분의 용서는 신자로 신의 성품에 참예시켜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기에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사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나면 그분께 바친 만큼 되돌려 받는다는, 그 바침이 구제 선행 봉사 예배 헌금 전도 심지어 기도와 믿음이라도, 기대와 예상과 믿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대신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이 절대 신자를 떠나지 않으므로 그분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사는 것입니다.    

신자가 죄를 안 짓고 거룩하게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불신자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나아가 어지간한 신자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의를 믿음으로써 구원 얻은 은혜 가운데 있음도 확신합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고의로 계속해서 죄 짓거나 하나님을 다시 외면 거부하지는 않기에 구태여 그런 측면을 성경이 계속 강조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나님을 열심히 믿되 그 보상을 바라는 미련은 끝까지 버리지 못하는 잘못을 범합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선행과 믿음에 보상해주지 않거나 일부러 고생만 시킨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는 첫째 이유가 절대로 그분이 주시는 선물 때문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바꾸어 당신의 뜻을 이루는 일군으로 들어 쓰시는 하나님이 너무 좋아 기꺼이 그분과 동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자더러 자기를 부인하며 날마다 십자가를 지라는 것도 단순히 죄를 안 지으려 노력하라는 도덕적 계명이 아닙니다. 그 무엇보다 하나님 대신에 자기가 주인이 되려는 생각부터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서도 자기중심주의를 버리지 못하는 까닭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소원대로 잘 응답해 주지 않으니 결국 자기가 나서서 해결하겠다는 뜻입니다. 그와 동시에 자기 소원대로 응답을 받기 위해선 아무래도 뭔가 바쳐야겠다는 이전의 잘못된 생각이 다시 발동하게 됩니다. 구원 이후 날마다 십자가에 정작 못 박아 죽여야 할 것은 바로 이 하나님에 대한 미심쩍음과 오해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신자가 날마다 자기를 죽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은 동일한 뜻이 됩니다. 십자가 복음과 위배되는 모든 생각, 말, 행동을 죽이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신자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절대로 끊을 수 없음을 확신하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모든 일에서 넉넉히 승리하는 것입니다.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세력 앞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 대신에 그것들에 묶이어 신음하는 영혼들을 복음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또 바로 그러하기 위해서 복음 전파에 위배된다면 신자의 자유와 권리마저 포기하고(첫째 구절의 뜻), 예수님을 대적하는 모든 것은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무너뜨리고(둘째 구절), 마지막으로 율법적 기복적인 신관(神觀)을 완전히 버리고 복음 안에서 새롭게 된 참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셋째 구절)  

마지막으로 하나만 덧붙이자면 이미 살펴본 대로 모든 성경은 오직 예수라는 키로 풀어야만 합니다. 십자가 복음은 세상의 어떤 철학, 사상, 도덕, 윤리, 종교와도 그 차원이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직접 이 땅에 보내시어 죽여야만 했던 이유와 의미와 결과를 적은 책입니다. 또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에게 그분의 직접 대놓고 말씀하시는 살아 역사하는 능력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을 읽은 후가 아니라 전부터 예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파한 상태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1/10/2010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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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 아래 간증은 실제 인물이며 저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시는 집사님이십니다. 이분의 간증을 들으면서, 독자님 중, '질문'(Watchman)님의 체험 간증과 일치하여서 올려드립니다. **

안녕하세요, 이영미(가명)입니다.
오늘 이렇게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나의 간증을 할 수 있게 해주신 우리 주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먼저, 나는 여러분께 사단이 어떻게 성령님의 가면을 쓰고 왔는지 나의 체험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2007년, 저는 모 장로교회에서 열심히 성경공부도 하고 또 나름 열심히 우리 주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날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내 딸 민아(가명)를 만져주시기를 바랐고 난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내 딸 민아가 병이 다 낫게 되어 말도 하고 다른 아이들처럼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어면 하는 나의 간절함과 소망이었습니다. 난 기도를 잘 할 줄 몰라서 기도 시간이 매우 짧았습니다. 그리고 늘 기도하는 것이 되풀이하는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난 친구를 통해서 믿음이 참 좋으신 집사님 한 분을 소개받았습니다. 그 집사님은 믿음도 좋았고 사랑도 많은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영적 체험도 많이 하신 분이어서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그분도 아픈 상처가 있어서 나에게 더욱더 신경을 써주셨고 우리 민아에게 아주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난 그분에게 많이 의지했었지요. 난 그분을 너무 좋아하였기에, 그분이 나가는 교회를 자진해서 따라갔고, 그 교회로 옮겨서 열심히 함께 그 교회를 다녔습니다. 우리 민아도 데리고 매주 주일 성수를 지키면서 열심히 그야말로 열심히 믿음생활을 해왔었지요. 그런데 난 그분처럼 방언도 할 줄 모르고 아무런 영적 체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난 그분에게 질투도 나고 속도 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집사님께서 사사기 6장 37-40절 말씀을 펴놓고 기도하라고 하더군요. 자기도 그 말씀을 펴놓고 기도하다가 응답받았고 많은 체험과 기도할 때면 성령님께서 만져주시는 것을 매 기도시간마다 느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난 그분 말씀처럼 밤마다 사사기 6장 37-40 말씀을 펴놓고 기도하기를 시작했고 난 주님께서 나를 만져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짓말같이 나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고 진동이 왔습니다. 어느 날은 감당할 수 없을만큼 몸에 진동이 오면서 떨리기 시작하면서 온몸이 뛰는 듯 공중에 뜨는 듯, 도저히 절제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내 온몸의 기운이 모두 다 빠지는 듯했고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온몸에는 땀으로 범벅이 되고 신기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난 점점 신비주의자가 되어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 집사님을 따라서 외국 분이 인도하는 “치유 집회, 신유 집회도” 서슴없이 따라다녔습니다. 난 사실 오랫동안 신유 집회라면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민아 1살 때 유명하다는 흑인 치유강사가 왔다기에 한 번 가봤었는데 그때 우리 아이 아빠랑 저는 너무 실망을 해서 그 후 10년 동안 그런 집회라면 아예 가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다시 치유, 신유 집회에 정신을 빼앗기고 성령 충만한 집회라면 우리 딸 민아를 데리고 열심히 찾아갔습니다. 그러다가 집회 때 방언도 받고, 수많은 외국 목사님들로부터 안수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 몸이 점점 이상하게 뭔가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할 때면 환상도 보이고, 기도하다가 내 입을 통해서 예언도 하고, 서울 어느 큰 교회 C 목사님의 DVD 설교집을 틀어놓고 찬양을 드리다 보면 내 손과 내 몸이 춤을 추기 시작했고 기도할 때면 내 몸을 가지고 어떤 힘에 의해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난 성령님께서 만져주시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대화가 시작되고 매일같이 대화를 통해서 많은 것을 체험했습니다. 자다가도 내 몸을 막 흔들어서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면 민아 방에 가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난 놀라서 급하게 민아에게 가다가 넘어진 적도 있습니다. 또 내 입을 통해서 민아가 6월 20일 날 말을 한다고 하는 예언도 주었고 8월 22일 날이면 민아가 자리에서 일어난다고 달력의 날짜까지 짚어주면서 예언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난 너무 좋아서 우리 남편이랑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귀라고 하는 느낌도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 많이 읽어라. 금식해라. 찬양 드려라. 기도 많이 해라. 교회 열심히 다녀라.” 이렇게 내가 원하는 것은 다 열심히 하라고 하니까( 만약 교회를 다니지 말라고 한다던지 성경을 멀리하라고 했더라면 의심했겠지요.) 전혀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다 복종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금식도 하루 한 끼만 먹고 30일 씩 3번을 연달아서 금식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금식할 때면 더 역사를 심하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하다가 하품을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토하고 토할 때 이물질은 하나도 나오지 않으면서 창자를 다 뒤틀어서 토하게 합니다. 그때 난 너무 힘들어서 거울을 보면 핏줄이 내 얼굴에 가득했고 얼굴이 너무 심하게 상해있었습니다. 그래도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이라 참고 기도할 때면 쓰레기통을 준비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런 상황을 담임 목사님께 의논하면 마귀가 빠져나가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다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귓가에서 무엇인가 소리가 들리듯 속삭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너 귀신하고 노는 거야. 너 지금 귀신을 부르는 것이야.” 그런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난 성령님께,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하면 내 방언이 또 마귀를 야단치는 소리가 나오는데 정말 무섭게 야단을 치고 그 방언이 나올 때면 난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내 몸을 뒤틀듯이 아주 심하게 야단을 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다 보면 정말 예기치 못한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내 입에서 흉측하고 괴상한 소리가 내 입으로 나오는 것이었어요. 정말 무서웠습니다. 머리끝, 털끝이 다 쭈빗쭈빗 섰고 소름도 끼치고 나의 혼이 다 나가는 듯했고 난 그 순간 “예수님 도와주세요.”를 얼마나 외쳤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귀신의 소리가 끝나면 내 손이 움직여서 귀신이 다 나갔다고 신호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3일 밤 똑같이 귀신한테 시달린 적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난 성령님께 물어봅니다. “예수님이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면, “네 왼쪽에 서 계시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대화한다는 것은 귀로 말이 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생각에서 떠오르는 말로 또는 내 입으로(육성으로) 물어보면 대답해 줄 때는 내 몸을 흔들어서 대답을 주는데 꼭 우리가 사람하고 대화를 하듯, “응, 그래. 그래 맞아.” 하는 듯 탁탁! 제 몸을 쳐줍니다.

그러다가 신나면 사정없이 내 몸을 흔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던 제 남편이 절더러 밖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꼭 미친 사람같다고. 난 그 말도 듣지 않고, 성령님과 대화한다고 확신하면서 내가 있는 곳이 어디든지 난 대화를 했고 방언으로 찬양도 드리고 난 그때 내가 정말 성령 충만한 사람인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렇게 2007년 1월부터 5월까지 성령님인 줄만 알고 의심하지 않고 열심히 기도생활을 해 나왔습니다.

우리 지역에서, 한 달에 두 번 정기적으로 치유 은사 집회가 있었는데 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우리 식구 모두를 데리고 열심히 그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집회가 열릴 때마다 유명한 강사들이 왔었는데 난 그곳에서 여러 가지 기이한 현상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서울의 한 대형교회 H목사님도 병낫기를 구하면서 그곳에 와서 앉아있었습니다. 저는 그분께도 안수를 받았습니다. 손에 금가루가 가득 묻어 있는 사람, 보석을 가지고 있는 사람, 입신한 사람, 이빨이 변해서 금이빨이 되는 것도, 또 하늘 문이 열려서 천국이 보인다는 사람, 또 안수 받고 쓰러져서 울다가 이유 없이 한없이 웃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것을 그들은 거룩한 웃음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웃는데 마음은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습니다. 집회 시간에는 뜨거웠는데 집회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맹맹한 느낌이었습니다.

이상한 느낌이 들 때마다 난 나보다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 나의 현상에 관해서 의논했지만, 오히려 그런 생각을 주는 것이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니까 속지 말고 믿고 계속 의지하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5월에 LA에서 유명한 ‘치유 은사’를 가졌다는 C.S라는 여자 목사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새롭게 하소서’ 기독교 방송국에서 간증도 하신 분이고 그 CD가 나한테 한 장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CD를 듣는 순간 내 몸이 춤을 추기 시작했고 하물며 그분과 전화 통화를 하기만 해도 내 몸이 쓰러지며 중심을 잡을 수 없었고 남이 부축해서 겨우 걸을 수 있었으니까요. 남편과 나는 그분이 정말 성령 충만한 사람인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제가 사는 지역으로 오시게 되어서 함께 지낸 적이 있습니다. 난 그분께 나의 모든 현상을 의논했고 그분은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성령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고 다른 영일 수도 있고 내 영, 내 자아일 수도 있다고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해서 속고 있다고 하더군요. 나의 예언도 거짓이니까 믿지 말라고, 다 잊어버리고 주님만 믿으라고 하더군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고 속도 많이 상했습니다. 방언도 물어보았지만, 통역을 해보시더니 방언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이니까 믿고 의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딸 민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믿고 기도하라고, 예언을 해주시고는 LA로 돌아가셨습니다. 역시나 그분의 예언도 날짜가 지나도 예언대로 우리 딸 민아가 일어나지 않았고 난 너무도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러나 난 다시금 치유집회를 찾게되었고 그곳에서 외국 사람 한 분을 만났는데 당신의 친구분 간증을 해주면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면서 기도하라고 마태복음에서 요한복음까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말씀들을 적은 종이를 주면서 꼭 승리하라고 하더군요. 난 말씀을 받아가지고 와서 그때부터 열심히 기도생활을 했습니다.

말씀 선포하고 방언으로 기도하고 그렇게 여러 날을 반복해서 기도하다가 어느 날은 정말 영에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는데 온 마음을 다해서 기도 드렸슨데 정말 너무나 깜짝 놀라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내 마음속 깊은, 아주 깊은 곳이라고 해야겠는데, 설명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아주 아주 깊은 곳, 마음 어디에선가 아주 속 저 깊은 곳에서, “성령이 아니다!”라고 하는 큰 소리가 마음으로부터 선명하게 들려왔습니다. 난 너무도 놀라서 한동안 아주 잠깐동안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가다듬고 모든 것을 하나하나 지나간 일들을 되짚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속은 것에 화가 났고 성령님인 줄만 알았던 것이 마귀, 사단이라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난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을 멈추었고, 방언도 마귀로부터 온 것이라면 멈추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다시 사사기 6장 37-40절 말씀을 펴놓고 간절하게 기도드렸습니다. 그런데 방언이 나오더니 이번에는 아주 짧은 방언이 나오더니 나의 혀가 밖으로 나오면서 괴물 소리를 내면서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난 너무 놀랐고, 하나님께 다시 보여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짧은 방언이 나오더니 나의 혀가 밖으로 나오면서 괴물 소리를 내더니 딱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난 하나님이 너무도 두려웠고 무서웠습니다.

항상 좋으신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이라고 늘 생각하고 믿었는데 그때는 나는 정말 하나님이 너무 크고 두려워서 어디로든 숨어버리고만 싶었습니다. 꼭 내가 벼랑 끝에 서 있는 느낌이었으니까요. 그때 나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이대로 귀신과 놀고 있다가는 지옥으로 가겠구나 싶더군요. 그때부터 다시 성경 말씀만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성경말씀이 마음속에 와 닿기 시작하고 깨달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렇지만 난 내가 나갈 교회를 잃었고 어느 교회를 가야할지 3, 4개월 방황하며 주님께 계속 좋은 교회를 찾게 해주십사 기도로 여쭈다가 별똥별 사모님(그땐 누군지 전혀 몰랐음)께서 부군 목사님과 함께 섬기시는 지금의 교회를 이 교회의 장로님을 통해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엇보다도 예배 시간이 나와 맞는 시간이고 해서 한 번 방문해보기나 하자고 왔던 것이 지금까지 4년 째 출석하며 섬기고 있습니다. 처음 참석하는 때가 12월 마지막 때였는데 주일 대예배 설교 말씀이 바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 예배 시간마다 찬송에서도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예배시간 주보에 인쇄된 찬송을 펴는 순간 주보에 있는 찬송가 한 마디 한 마디가 빠져나와 내 얼굴로 다가오면서 내 눈으로 내 입으로 들어가는 듯 은혜로웠습니다. 나는 겁이 덜컥 났습니다. 주보를 덮었다가 다시 펴는 순간 하나님 말씀 한 말씀이 한 말씀이 또 다시 빠져나오는 듯, 내 얼굴로 다가오는 듯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마음에 뜨거운 감동이 온다는 것입니다.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자꾸 쏟아졌습니다. 그날은 하루 온종일 뜨거운 눈물로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이제 속지 않습니다. 사단에게 속아서 끌려다닌 지난 세월이 너무도 아깝습니다. 이제는 내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께만 모든 것을 맡기려고 합니다. 내가 내 딸 아이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너무 간절하게 소원하는 것을 알고 있는 마귀가 자신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내게 접근한 것을 나는 성령 충만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난 사단의 장난질을 통해서 더욱더 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정말로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는구나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간증을 읽으시는 여러분, 절대로 사람으로부터, 아니, 치유강사들에게 안수받지 말고, 또 방언 받지 마세요. 그 방언은 마귀로부터 왔음을 여러분께 고백합니다. 그 예언들도 틀린 것은 모두 사단에게서 온 것이라고 성경 말씀에 있다는 것을 우리 별사모님이 말씀해 주셨고 정리해 두신 글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난 보았습니다. 어느 여자 분이 내 앞에서 방언을 받을 때 그분의 혀가 밖으로 나오면서 괴물 소리를 내는 것을, 나 역시 방언이 바뀌면서 혀가 밖으로 나오면서 괴물 소리를 내는 방언을 한 적이 있으니까요. 그때는 마귀가 방해를 하는구나 했었는데 아닙니다. 그 방언의 실체는 괴물이었습니다. 어쨌든, 그 후로 저는 두 번 다시 방언 기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방언을 통해서 무시무시한 체험을 했으니까요.

여러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간증을 하게 해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믿으며 끝까지 간증할 수 있게 도와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믿습니다. 이 간증을 끝까지 할 수 있게 해주신 우리 주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아멘

참고:
내 사랑하는 딸 아이의 병명은 aicardi syndrome 이라고합니다, 아주 희귀병이고 전 세계에서는 300명, 미국 전역에서 50명 밖에 없다고 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주에서도 단 한 명 우리 딸 '민아'뿐이랍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말을 할 수도 혼자 일어나 앉을 수도, 걸을 수도 없으며 눈도 제대로 뜰 수도 없습니다. 특수 제작된 침대에 누워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호흡하며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 민아가, 그래도 주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올해 16살이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그들(치유 은사) 집회 장소에서 나타난다는 하얀 안개
그들은 이 현상을 "Dust Angel"(먼지 천사)라 부른다


마태복음 5장13-16절이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일전에 본 신문기사에 이러한 표현이 있어서 씁쓸했다....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교회가 세상을 향해 오히려 어둡고 부패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부정한 일을 해서 교회가 이 사회의 지탄을 받을 때 역공격을 받는 마태복음의 말씀이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빛과 소금의 의미는 빛과 같이 세상을 밝히고 소금과 같이 세상의 부패를 

막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세상을 상대로 행하여야 하는 기독교의 역할과 기능"이라는 명제를 만든다.

세상을 정화시키고 윤리적으로 깨끗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기독교가 가져야 할 세상을 향한 책임이라는 점을 강조한 구절로써 우리는 이 마태복음을 이해한다. 


물론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사람들 보다 더 도덕적이어야 하며 세상의 정화에 힘써야 함은 틀림없다 해도 성경이 말하는 빛과 소금의 비유는 그 강조점이 조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다" 라고 성경을 말한다. 그리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라고 또 말한다.


소금의 맛이란 말 그대로 "짠맛"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성도)는 짠맛을 내는 기능을 한다는 말이다. 

짜다고 하는 기독교의 독특한 맛을 내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다 더 모양새가 있는 소금의 방부제 효과를 첨가하여 

세상의 부패를 막는 기능이란 견해를 만들었다. 


결국 교회는 세상의 부패를 막는 기능을 가져야 한다는 사명으로 이 말씀을 이해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소금의 부패방지기능에 대한 성경의 언급은 전무하다. 

그것은 우리의 소금에 대한 경험일 뿐이다. 


성경은 "소금은 짠맛을 내고 있다." 라고 말했을 뿐이다.  

계속보자...“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그러므로 쓸모없이 버려져 밟히게 되는 이유는 무언가? 

말씀대로 인용하면 "짠맛을 내지 못하는 소금"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부패방지기능을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소금을 부패방지기능으로 보기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사람들은 "사명감"을 좋아한다. 특히 교회는 더욱 그러하다. 


주님이 주시는 사명감이라 말들을 하지만 

우리는 그 사명감이 우리의 성취욕으로 부터 왔다는 것을 부인 못한다. 


기독교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비장한 결단으로 세워 진 것이 아니다. 

세상의 부패와 싸워서 무언가를 성취하는 소금이 아니라 

그저 소금의 기본특성인 짠맛을 내며 세상앞에 서 있는 것이 기독교인 것이다.


빛의 의미도 마찬가지이다. 

사명감에 불타서 이 구절을 본다면 "어두운 이 세상을 빛으로 밝게 비추리라!" 라는 구호를 만든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무슨 말인가? 

어두운 세상을 밝히 비추라는 사명을 주는 말씀인가? 

사실 필자도 이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빛을 발하여 세상을 비추인다는 내용인가?^^ 

말씀을 그대로 읽어보라... 너무 쉬운 내용이다. 

"산 아래 동네에서 볼 때 산 윗동네가 보이는 이유는 그 윗동네가 빛을 소유했으므로 

숨기우지 못하고 잘 보인다"는 뜻이다.^^  


어두운 밤이 되어도 동네가 있다면 불을 켤 것이고 자연히 그 동네는 그 빛으로 인하여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길을 잃은 나그네라도 그 불빛을 보고 "와 저기 인가가 있구나!"

하고 안심하게 된다. 교회가 이 세상속에서 이러한 존재인 것이다. 

어두운 세상속에서 방황하는 자들이 볼 수 있게 불을 밝히고 서 있는 것이 교회이다. 

빛을 세상을 향해서 강렬하게 내 뿜으라는 말씀이 아닌 것이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불을 켜서 아랫쪽에 두지 않고 윗쪽에 두는 이유는 집안 사람에게 모두 비취기 위함이란 말씀이다. 집안사람에게 빛을 비추는 이유가 빛을 비추어서 그 사람을 밝게 변화시키는 역할로써의 빛이 

아니라 빛은 사람 앞에서 밝게 빛나고 있다는 "빛의 속성'을 말 한 것이다. 


'비춘다"는 표현은 사실 "빛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어떤 대상에게 빛을 비추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교회는 빛을 지니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 빛을 봄으로 교회가 세상에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다시 정리를 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짠맛을 내는 독특한 존재인 소금과 같은 존재이고... 

세상을 향해 밝게 빛나고 있는 빛과 같은 존재이다. 


또 한가지 우리가 주의깊게 봐야 할 부분은... 

이 소금과 빛의 비유가 "심령이 가난한자는..."으로 시작하는 "팔복" 다음에 나온다는 사실이다. 


팔복은 "천국백성의 상태"를 예수께서 가르치셨으므로 그 다음에 나오는 소금과 빛의 비유는...

그렇다면 "천국백성은 어떠한 상태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으로 보는 것이 문맥적으로 

극히 타당하다 하겠다. 


그렇게 본다면 소금과 빛의 비유는 사명을 가지고 어떠한 일을 하는 역할과 기능의 말씀이 아니라 팔복에 연관성이 있는 천국백성의 상태로써의 "어떠한 사람인가?"에 대한 말씀임이 자명하다. 


다시말해 어떤 역할을 해서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드러나는 업적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팔복을 소유한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에 촛점이 있다 하겠다. 


우리는 말씀대로 짠맛을 내는 소금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독특한 소금만이 가지고 있는 짠맛이란 무얼까? 

다시말해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맛은 무얼까? 두말할 것 없이 "복음"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우리만의 이 독특한 복음을 부끄러워 한다.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해야 할 교회가 사람의 마음을 먼저 위로 한답시고 교인들의 사업번창에 

관심을 보이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처세술로 상담하는 기관이 되어 버렸다. 

결국 세상에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전혀 독특하지도 짜지도 않은 맛을 가진 소금으로 

짠맛을 내려 하고 있다. 


교회가 짠맛을 내려면 인간의 죄를 들추어 내야 하는데 사람들의 기호를 생각해서 교회는 

죄를 선포하지 않는다. 그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를 연발하며 귀에 듣기 좋은 

"단맛"을 내기에 급급하다. 


성경은 무어라 경고하는가?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소금의 맛을 잃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죄를 씻는 능력...구원을 주는 능력이 상실된 교회" 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언가. 


그러한 교회는 어찌 되는가...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히"는 것이다. 

이것은 일전에 소개한 "달란트의 비유" 와 마찬가지로 "천국백성의 비유"이다. 


달란트를 땅에 묻은 사람이 밖으로 쫒겨나가 슬피울며 이를 가는 것이나 짠 맛을 내지 못한 소금이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히는 것이나 똑같이 천국의 대열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게 존재를 드러내는 빛은 무엇인가? 

빛은 요한복음 서두에서도  밝히 말했듯이 예수님을 말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였을 때 우리는 빛되신 예수님의 역할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역할은 무엇인가? 

죄를 사하고 구원을 선포하는 독특한 짠맛인 소금의 역할이 바로 예수님의 역할이 아닌가! 

결국 빛의 역할이란 그런 의미에서 소금의 역할과 동일한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사명감에만 불타있는 듯하다. 

"세상의 빛이다" 라는 말이 사회봉사에 참여하고 불쌍한 자들을 돕고 의료봉사를 하고 교회를 짓고 학교를 짓고...하는 선한 일이나 착한 일을 하는 것으로 근본적인 뜻을 삼으면 안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유일 무이한 기관이며 우리가 소금과 빛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더욱 더 말씀에 집중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써의 삶을 삶으로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존재임을 세상이 볼 수 있도록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출처: 물과피와성령/essence


 

 

 

 

당신의 연가(戀歌)
                 - 최송연


풀냄새가 안고 온
싱그러운 향기인 듯
 
빗방울이 들려주는
맑고 청량한 음악인 듯

당신의 그 사랑
어느 날 은총으로
내 영혼 깊숙이 내리셨네

사랑한다, 내 딸아
불러주시는 그 음성은

내 영혼을 살리는 핏빛
당신의 연가(戀歌)...

이제부터 영원토록 내가
부르고 또 부를 사랑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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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이슨을 KO시킨 다마토 이야기


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존 칼빈


자연인의 의지는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다. 사람은 필연에 의하여 죄를 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자발적으로 죄를 범한다. 그러나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상태에 매여 있는 동안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의지보다는 마귀의 의지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 같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의 의지를 마부의 명령을 기다리는 말에 비유하며, 하나님과 마귀를 그 마부에 비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 말에 올라타시면, 그는 온유하시고 숙련된 마부이시니, 말을 적절히 인도하시고, 너무 천천히 가지 않도록 박차를 가하시고, 너무 빠르지 않도록 고삐를 당기시며, 너무 거칠게 달리지 않도록 제어하시고, 갑자기 멈추어 서면 재촉하셔서 달리게 하시고, 그리하여 올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마귀가 안장 위에 오르면, 어리석고 방자한 기수처럼 바른 길에서 멀리 벗어나도록 난폭하게 마구 달리게 하고, 도랑에 빠뜨리기도 하고, 벼랑에서 뒹굴게 하고, 때리고 괴롭혀 고집을 부리게 하고 난폭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멸망에 이르게 될 불신자들의 마음을 “이 세상의 신이 --- 혼미하게 하여”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도록 한다고 말하며(고후4:4), 그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한다고도 말한다(엡2:2). “사탄의 역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람의 일에 하나님은 역사하심으로 개입하신다. 하나님의 예지나 허용을 피난처로 삼게 되면, 이런 활동의 본질에 대해서 결코 설명할 수가 없다.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난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하나님의 빛이 사라지면, 어둠과 눈먼 상태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게 된다. 하나님의 영이 사라지면, 우리 마음은 돌처럼 굳어진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사라지면, 마음이 뒤틀려 악에 빠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 방식은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그의 진노의 사역자로 삼으셔서 심판을 수행하게 하시기 위하여, 사람들이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목적을 갖도록 하시며, 그들의 의지를 불러일으키시고, 그들의 노력을 강화시키신다는 것이다.

 

버림받은 자들에 대해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그들의 마음이 변했고, 완강하게 되었다면,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들의 마음의 상태를 그렇게 바꾸어 놓으셨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서, 자기 백성의 범죄에 대해서 벌하고자 하실 때마다 주께서는 버림받은 자들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일을 진행시키셨는가? 그 사람들은 그저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고, 실제로 그 일을 진행하는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누구라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그렇게 일을 진행시키신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활동한다.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삼상16:14). 그 영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권능에 복종하여 그의 도구로 행동함을 의미한다. 모든 오류와 미혹의 역사는 진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거짓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것이라고 사도는 가르친다(살후2:10-12).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다스리신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실 때마다 언제라도 그의 섭리로 역사하셔서 심지어 외부적인 일에서조차 사람들의 의지를 이리저리 기울게 하시며, 그들이 자유로이 선택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의 다스리심을 받는다. 싫든 좋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유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인도함을 받는 것을 매일매일의 경험이 확증해 주는 것이다.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께서 지으신 것이니라”(잠20:12). 이는 귀와 눈에게 부여된 특수한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으로 인도하시느니라”(잠21:1)라고 말하면서, 솔로몬은 사실상 모든 사람의 경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성경을 부지런히 살피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 악한 것을 선하게 만드시고, 그렇게 만드신 다음 선한 행동으로 이끄시고, 또한 영생에 이르기까지 이끄시는 바 사람의 의지가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있으며, 또한 세상의 피조물을 보존하는 의지들도 역시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가 원하실 때에 원하시는 방향으로 그것들을 움직이시며, 그리하여 은혜를 주시거나, 아니면 지극히 은밀하면서도 지극히 의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벌을 내리거나 하신다는 것이다.”

 

자유 의지는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내적인 자유를 의미한다. 사람이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일의 결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 능력을 외형적인 성공 여부로 판가름해서는 안 되고, 사람의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자유 의지를 논할 때에, 우리는 과연 사람이 외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행하기로 결심한 바를 실행에 옮겨서 완수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어떠한 일에서든 판단의 선택과 의지의 끌림(형향)이 과연 자유로우냐를 묻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이 두 가지 점에서 자유롭다면, 못이 박힌 포도주 통 속에 갇힌 아틸리우스 레굴루스도, 세계의 광대한 지역을 자기 땅으로 만들고 그곳을 통치한 ‘가이사 아구스도’에 못지않게 자유 의지를 지녔다 할 것이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377-387

 



-청교도 아카데미(PBA)-

일제 지배가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신앙고백’(?)으로 국무총리 인준이 위태위태한 문창극 씨의 발언에 대한 사람들의 빈축은 이미 넘쳐나는 지경, 숟가락 하나 슬쩍 얹는듯한 언급은 더이상 필요없다고 생각하던

   
 
  ▲ 온누리 교회에서 강연중인 문창극 장로 ⓒ 미주 뉴스앤조이  
 
차에 한 일간지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문창극 총리후보자 평가 ‘극과 극’”이라는 제목의 지난 6월 12일자 한겨레 신문 기사다. 글을 쓴 이세영 기자는 문후보자에 대한 지인들의 평가가 극과 극이라는 논지의 기사를 전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로 기사를 맺는다.

<그러나 외형적 도덕성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그의 오랜 언론계 지인은 “보수적인 기독교 가문에서 자라 도덕적 하자는 없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일제 강점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사람, 강제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가 필요없다는 사람, 자기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재단의 기금을 이용해 스스로 석좌 교수가 된 사람이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도 기독교 가문에서 자랐기 때문이라는 것이 지인들의 판단. 이 시대에 기독교 가문에서 자랐기 때문에 도덕적 하자가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기는 하다. 그런데 읽는 마음은 편치 않다. 과연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선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전에는 선하다는 말이 “올바르고 착하여 도덕적 기준에 맞는 데가 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면 문창극씨는 도덕적 기준에 맞는 즉 선한 사람이란 뜻이다. 이런 류의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는데 나는 문씨가 진짜로 선할 것이라고 믿는다. 결코 비아냥이 아니다. 그가 다니는 온누리 교회 구성원들은 대부분 적당한 고학력에 예의 바르고, 선교에 열심이다. 교회 운영에도 별 관심이 없어서 사사건건 따지지 않는 아주 착한 교인들이다. 문창극 장로도 소망교회의 이명박 장로처럼 주차장 정리도 열심히 했을지도 모른다. 사회적 지위나 가진 재산에 상관없이 겸손하게 봉사하는 그의 모습에 진정성이 있다고 믿는다.

중앙일보 정치 부장 시절 정치 차장이었던 고도원 기자(현재 아침편지 발행인) 와 일촉 즉발의 상태까지 갔었다는 보도에 따르면 고도원씨가 호남출신이란 것이 불화에도 영향을 미쳤다는데 문창극 씨는 호남출신의 하용조 목사는 지극 정성으로 모셨을 것이다. 아무리 호남 출신이 싫어도 그 지역 사람들이 자기에게 고분고분만 하면 지역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착한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문씨에 대한 온누리 교회 교인들의 반응을 취재한 오마이 뉴스 보도에 따르면 “그분은 아주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이라고 하는데 나도 그렇게 믿는다.

선함의 사회성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 출신의 유대인 작가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모진 세월을 견뎌 낸 생존자 중 한 명이다. 본래는 화학을 전공한 화학도였으나 2차 대전 이후 <이것이 인간인가> 등의 대표작을 남긴 소설가로 변신한다. 아우슈비츠에 끌려 갈 때 그가 탄 화물차칸의 65명 중 겨우 4명만 살아남는 잔인한 시련을 이겨 낸 그였지만 1987년 토리노 자택에서 자살한다. 그를 괴롭히던 수용소의 악몽, 세상이 진보하리라고 믿었지만 인간의 탐욕만이 늘어나는 것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자살했을 것이다.

그의 기억 중에 이런 것이 있다. 화학을 전공한 덕분에 아우슈비츠의 화학 연구실에서 조교처럼 일하는데 그때 같은 연구실에 있던 젊은 독일 여성들이 프리모 레비를 가리켜 수근대는 소리를 듣고 그는 인간에 대한 실망이 더욱 깊어졌다고 회상한다.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여성들이 프리모 레비를 보면서 유대인들은 왜 저렇게 지저분하고 냄새가 나느냐 라고 했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 짐승보다 못하게 취급받던 유대인들, 이처럼 그들을 악취나는 존재로 만든 독일 동족의 만행을 매일 보던 여성들이 마치 더러운 냄새가 유대인의 민족적인 특징인 것처럼 아무 생각없이 말할 때 프리모 레비에게는 여성들의 무감각함이 가스실의 만행보다 더 무서운 충격이었다.

영화같은 데서 보았던 1940년대 초반의 독일 여성들을 상상해 보자. 검소하고 절제된 모습, 머리에는 하얀 띠가 둘러 있을 것이고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수더분한 옷차림, 히틀러가 자신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섭리 중 일부라고 말했던 것에 부응이라도 하듯 조국 독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당시 여성들은 일요일에는 교회에도 열심히 나갔을 것이다. 분명 그 젊은 여성들은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었다. 그녀들이 직접 유대인들을 죽이지 않았고 전쟁 책임자도 아니다. 그러나 그녀들은 도덕적 순수함 때문에 프리모레비에게서 나는 악취의 원인을 보고도 몰랐다.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는 선한 문창극 장로에게는 가난은 원인에 관계없이 게으름의 결과이기에 조상들이 안타까워서 선조들의 일을 거론했을 뿐인데 여론의 질타가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고작 원인을 생각해낸 것이라고는 힘없어서 나라를 빼앗겼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단세포적인 역사관, 그래서 그것을 말했을 뿐인데 자기에게 쏟아지는 비난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쯤 상황의 전개가 자신을 성숙시키는 하나님의 시련으로 생각하고 저들의 용서를 외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선함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

오늘 기독교인들이 선함으로 신앙인의 표징을 삼기를 원한다면 선함에 대한 고민을 가져야 한다. 자크 엘룰에 따르면 선함이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과 인간 앞에서 바로 서는 것의 두가지 측면이 있는데 성서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이라고 한다.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선이고 그것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보면 드러난다. 선함의 응집체인 예수는 때로는 싸웠고 욕했고 부수었다.

선을 알면 책임을 져야 하는데 오히려 믿음이란 이름으로 선악의 결정자가 되려 한다고 자크 엘룰은 우려한다. 즉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선이 무엇인지 아는 백성으로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선을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선와 악을 규정함으로써 마치 하나님처럼 되려는 경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크 엘룰은 이사야 5:20을 읽어준다.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는 자들, 어둠을 빛이라고 하고 빛을 어둠이라고 하며, 쓴 것을 달다고 하고 단 것을 쓰다고 하는 자들에게, 재앙이 닥친다!

오늘 한국 교회의 핵심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천박한 언행을 마다 않는 기독교인들은 SNS상에서 개독교라는 비판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사실 그들이 기독교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그렇게 욕하는 사람들은 기독교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않는다. 게다가 교양있는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들은 저급한 취급을 받는다. 진짜 위험은 우리 안에 있다. 하나님의 진리를 고민하기 보다는 사람들 앞에서 선하게 보이기 위하여 선생인체 하는 학벌좋고 교양있는 기독교인들, 시끄러운 문제를 애써 외면하면서 착한 척 하는 중산층 이상의 기독교인들, 자기 기준으로 게으름과 근면함, 민족사의 비극과 하나님의 섭리를 결정하는 신앙 좋은 기독교인들이 진짜 위험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진정한 기독교적 선함이란 그냥 사람 좋은 것을 넘어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에 참여하는 것이다.

기독교인 뿐 아니라 선한 사람들은 곳곳에 많다. 독일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의 눈에도 선한 사람의 문제점이 커 보였던 모양이다. 문씨를 비롯한 한국의 많은 선한 기독교인들을 위해 브레히트의 시를 선물한다. 이 시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자주 인용해서 유명해진 시이기도 하다.

선한 자에 대한 심문

   
 
  ▲ 독일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브레히트 ⓒ 미주 뉴스앤조이  
 

앞으로 나오라, 우리는
그대가 좋은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대는 매수되지 않지만,
집을 내려치는 번개 또한
매수되지 않는다.
그대는 그대가 했던 말을 지켰다.
그러나 어떤 말을 했는가?
그대는 정직하고, 자기 의견을 말한다.
어떤 의견인가?
그대는 용감하다.
누구에게 대항하는 용기인가?
그대는 현명하다.
누구를 위한 현명함인가?
그대는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돌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대는 누구의 이익을 돌보는가?
그대는 좋은 친구이다.
그대는 좋은 사람들에게도 좋은 친구인가?

이제 우리의 말을 들으라. 우리는 그대가 우리의 적임을 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제 그대를 벽 앞에 세우리라. 그러나 그대의 미덕과 장점들을 고려하여
우리는 그대를 좋은 벽 앞에 세우고 그대를 좋은 총의 좋은 탄환으로 쏠 것이며 그대를 좋은 삽으로 좋은 땅에 묻어 주리라.

 김기대 목사 / LA 평화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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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성에는 언제나 성령의 조명하심이 필요함/ 존 칼빈


우리의 이성은 온갖 형태의 속임수에 넘어가며, 그렇게도 많은 오류에 빠지고, 무수한 장애에 부딪히며, 온갖 난관에 휩싸이기 때문에, 도저히 우리를 올바로 인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고후3:5).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시며”(고전3:20). “그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창6:5).

 

우리의 이성이 어디로 향하든 언제나 허망함에 굴복하는 비참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이 이처럼 연약한 상태임을 알고, 여호와의 계명을 올바로 배울 수 있는 깨달음을 달라고 기도하였다(시119:34). 새로이 깨달음을 얻기를 소원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깨달음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바울은 교회 전체를 위해 간구하고 있다.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 자라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1:9-12). 이것을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로 말할 때마다 동시에 그것이 사람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일들을 깨달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서, 햇빛이 있어야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조명하심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그는 육체의 눈은 우리 스스로 떠서 빛을 바라보지만, 마음의 눈은 주께서 뜨게 해 주지 않으시면 감겨진 상태 그대로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성경도, 우리 마음이 어느날 한 번만 조명을 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스스로 볼 수 있다는 식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계속되는 과정이요 성장을 뜻하는 것이다.

 

다윗은 말한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니자 말게 하소서”(시119:10). 이미 거듭나서 참된 경건에서 적지 않게 성장해 있는 그였으나, 자기에게 주어진 그 지식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매 순간마다 계속적인 인도하심이 필요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곳에서, 지신의 허물로 인하여 잃어버린 정직한 영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시51:10). 처음에 우리에게 주셨으나 우리가 잠시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344-345



-청교도 아카데미-

대체 신학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교회에 스며든 사악한 교리 중 하나가 유대인과 하나님의 교회와 이방인의 구분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유대인은 이방인이 아니고 이방인은 유대인이 아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들 사이에는 구별(차별)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는 유대인, 이방인이 없다. 필자는 한국인이지만 이방인이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다. 바울은 본래 유대인이지만 그는 과거에 유대인이었다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갈1:13).


 대체신학이란 로마 가톨릭이 만든 사악한 교리인데 교회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복을 대신 계승해서 받았다는 것이다. 이 논리의 근거는 유대 백성들이 늘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멀리했기 때문에, 그 댓가로, 하나님이 그들을 거절했고, 그분의 언약을 취소하셨으며, 그분의 약속들을 거두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과 복, 예언들이 이방인 교회(로마 가톨릭)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독자적인 언약을 강탈하려는 '강탈, 도둑 신학'이라 할만한 것이다.


이런 신학이 개신 교회 내에도 암암리에 깊이 퍼져 있다. 

대체신학이란 누룩은 대부분의 개신 교회가 수용하는 방법은 이렇다.



이스라엘---> 교회

성전---------->교회 건물

대제사장 ---------->교황

레위 제사장---------->사제, 목사들, 성직자

할례---------->세례

안식일 ----------> 주일

십일조---------->헌금, 십일조

열방의 머리 ----------> 교회의 수위권

절기, 명절 ----------> 교회가 정한 절기들 

유대의 전통----------> 교회의 전통

모세의 율법 ---------->교회법



한 마디로 웃기지도 않는 신학이다. 이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근거 중의 하나는 성도들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교회는 영적 이스라엘, 영적 유대인이란 주장이다. 오늘날 개신 교회에서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런 주장, 신학에 은근히 동조하는 것을 본다. 


과연 그런가?

교회는 분명히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것은 틀림없는 진리다. 

그렇다면 교회 성도가 이스라엘(유대인)이 된 것인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을 이루는 새로운 창조물을 만드셨다. 하나님의 교회는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닌 새로운 창조물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모독하는 일이며 진리가 아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이 아니고 이방인은 유대인이 아니다. 이 둘 사이에 차이가 없이 하나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둘 다 그리스도 안에서 '몸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대인, 이방인, 하나님의 교회' 세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교회(크리스천)은 유대인이 아니며, 이방인도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신비는 신약에서 바울에게 계시되었는데 핵심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통해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다.


유대인(이스라엘)은 육신적인 아브라함의 자녀이다. 이스라엘 사람들로 구성된다.

하나님의 교회는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다. 


이 둘은 아래와 같은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 ----------------- 교회

레위의 제사장  ------------영적 제사장

동물 희생물---------------영적 희생물

건물 성전-----------------몸된 성전(영적 성전)

지상의 복----------------- 하늘의 복


물질적인 복---------------영적인 복 

지상의 예루살렘-----------새 예루살렘

땅의 왕국-----------------하나님의 왕국 

육체의 할례---------------그리스도의 할례

안식일--------------------안식


정해진 날과 달, 절기--------성도 각자 마음에 정함

음식 규례------------------모든 것이 정결케 됨

죄의 한시적 용서------------죄의 영원한 제거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자기 의---------------------그리스도의 의


종의 자녀-------------------약속의 자녀 

율법에 속박-----------------율법에서 해방

율법 아래--------------------은혜 아래

원수와 물리적 전쟁------------영적 전쟁

혈과 육의 싸움----------------믿음의 선한 싸움


아브라함의 육체적 자녀--------아브라함의 믿음의 자녀



크리스천은 결코 이스라엘에 주신 표적으로서의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성전 건축대신 교회 건축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목사는 제사장 직분을 계승한 것도 대체한 것도 아니다.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많은 교회에서 구약의 율법을 신약에서는 변형, 승계, 심화(upgrade version) 된 줄로 가르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일 뿐 아니라 사악한 교리이다. 복음은 율법을 계승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유대인의 회중을 계승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성전도 회당도 아니다. 침례는 할례나 정결례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정결례는 자신을 씻는 것이지만 침례는 죽은 시체를 묻는 것이다. 유대인들 중에는 교회가 유대인을 뿌리로 계승한 것인 줄로 아는 몰지각한 자들이 많이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 내에는 자신들이 유대인들을 계승한 줄로 여기는 자들이 있다. 


율법에 따라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며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복음에 따라 교회에 주어진 약속들 역시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에게는 주로 땅에서 우리 육신에 주어지는 복이 약속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를 잘 믿으면(교회) 땅에서 복을 받고 잘된다(이스라엘)"고 설교하는데 이는 저주의 복음이다.


신약은 "예수를 잘 믿으면 이 땅에서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게 된다."고 가르친다. 


대체 신학과 참된 복음의 차이를 잘 인지하기 바란다. 


Written by Pastor. Yoon 

가져온 곳 : 
카페 >물과피와성령(water and blood and the Holy Spirit)
|
글쓴이 : 새언약|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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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심보감의 팔반가

       

       

         1.     어린 자식 어쩌다 내게 대들면

                 내 마음에 기쁨이 느껴지지만

                 부모님이 나에게 화를 내시면

                 내 마음 도리어 언짢아지네.

       

                한쪽은 기쁘고 한쪽은 언짢으니

                자식과 부모님 대하는 마음이 어찌 이리 다를까?

                그대여 오늘부터 부모님이 화내시면

                부모님을 자식으로 바꾸어 보시오.

       

         2.     자식들이 천 마디나 말을 하여도

                그대는 언제든 듣기 좋아하지만

                부모님이 어쩌다가 입을 여시면

                쓸데없이 참견 한다 쏘아붙이네.

       

                참견이 아니라 걱정되어 그러신 게지

                흰머리 되도록 아는 것 많으시다네

                그대여 노인 말씀 공경하에 받들고

                젖내 나는 입으로 길고 짧음 다투지 마오.

       

          3.    어린 자식 더러운 똥 오줌도

               그대 마음 하나도 꺼리 낌 없는데

               늙으신 부모님 눈물과 침 떨어지면

               그대는 도리어 미워하고 싶어하네.

               그대의 몸뚱어리 어디에서 나왔는가?

               아버님의 정기와 어머님의 피라네. 

               그대여 늙어가는 부모님을 공경하소.

              젊으실 때 그대 위해 살과 뼈가 닳으셨소.

       

        4.    그대가 새벽에 시장 들어가

               밀가루떡 쌀떡을 사는 것을 보았네.

               부모님께 드린다는 말 들리지 않고

               자식들에게 준다고 많이 말하네.

       

               부모님 드시기 전 자식 먼저 배부르니

              자식만 생각하지 부모님 생각 하나없네.

              그대여 떡 살 돈 많이 내어

              사실 날 얼마 없는 늙은 부모님 공경하오.

       

        5.     시장 길목 약 파는 가게에

              자식을 살찌울 약은 있는데

              부모님 튼튼하실 약은 없다네.

       

              무슨 까닭에 두 가지로 보이나

              자식이 병들고 부모님도 병든 경우

              자식 병 고치는 정성 부모님에 비할 소냐?

       

              다릿살 베어 내도 도리어 부모님의 살이

              그대여 두 분 부모님 빨리 보전하오.

       

       6.    부귀하면 부모님 모시기는 쉽지만

              부모님은 언제나 마음 편치 않으시네.

              빈천하면 자식을 기르기가 어렵지만

              자식을 굶기거나 떨게 하지는 않네.

       

              마음은 한 갈랜데 두 갈래 길 나 있네.

             자식을 위하는 맘 부모님에 비할소냐.

             그대여 부모님 봉양하길 아이 기르듯하여

             가난해서 못한다고 핑계를 대지 마오.

       

       7.    부모님 봉양은 다만 두 분 뿐인데도

              언제나 안 오신다 형제끼리 다툼하네요. 

              자식을 기를 땐 열명이 되더라도

              당신 홀로 그 자식들 모두 떠맡네.

              자식이 배부른지 따뜻한지 물어보지만

              부모님이 주리신지 추우신지 마음이 없네.

              그대여 부모님을 봉양함에 힘을 다하소.

             그대를 기르느라 옷과 밥을 빼앗겼소.

       

       8.    부모님의 사랑은 한 가득 이건만

              그대는 그 은혜 생각지 않네. 

              자식이 조금만 효도를 하면

              그대는 나아가 그 이름을 자랑하네.

       

              부모님 대할 때는 어두우면서 자식을 대할 때는 밝으니

              그 누가 알리오 자식 기르는 부모님 마음

              그대여 자식들의 효도를 부질없이 믿지 마오.

              자식들의 본보기가 그대 몸에 있다네.

       

       

       

       

      세상의 모든 아버지를 응원합니다!^^ 

       Happy Father's Day~!!

       

       







이런 문자 왔으면 나도 당했을듯


"차 빼, 개새끼야"

욕설 문자에 전화했다가 '황당'
따지려고 전화했다 '25만원 결제' 문자…

신종 스미싱 등장 2014. 01. 18.
(머니투데이 이슈팀 방윤영 기자)

욕을 섞은 문자를 보내 전화를 걸게 하는 신종 스미싱(Smishing)

피해 사례가 온라인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는

욕을 포함한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받아 화가 난 나머지

전화를 걸었다가 25만원이 소액결제되는 사기를 당했다는 게시글이 올라왔다.

소액결제를 유도한 문자 메시지에는

"차 빼라. 개새끼야",
"전화해라. 차 부셔버리기 전에",
"네 마누라 단속 똑바로 안 할래?"
"전화해라. 좋은 거 줄테니까",
"전화 안하냐 새끼야"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욕 스미싱을 당한 한 피해자는 
"(화가 나서) 바로 전화해 따졌다"

"전화를 끊자 소액결제가 된 문자를 보고 황당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누리꾼들은 
"진짜 바로 속겠다",

"스미싱 수법이 점점 진화해 가네", 
욕 문자 와도 절대 전화 걸면 안 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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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전에 택함이란?


[질문]

에베소서 1:4에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였다"는 것이 어떤 뜻인가요? 창세전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기 이전의 시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가 되는데 아직 창조되지 않은 인간에 대하여 어떻게 택함을 받는 자와 택함을 받지 못하는 자로 구별을 하였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신학적으로 아주 무거운 주제인 예정론에 대해서 질문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나기 전부터 구원 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로 하나님이 나누었다는 칼빈주의 이중예정론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는 잘 알다시피 알미니안주의와의 끝없는 논쟁의 핵심이자 전부이기도 합니다. 거기다 현대 기독교의 주된 흐름은 유감스럽게도 이를 반발, 거부, 비난, 심지어 정죄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참고로 제 개인적으로는 칼빈주의 입장을 지지합니다.)  

말하자면 이 문제를 깊이 따지자면 신학적으로 너무나 광범위한 요소들을 다뤄야 하며 또 자칫 이 홈피의 방문자들 사이에도 쟁론의 불씨를 당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런 두 신학이론을 인용하여 논증하지 않는 대신에 그에 대한 지식이 없는 신자들도 이해하기 용이한 차원에서 순전히 성경말씀에 따라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시간 밖에 있다.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시간은 피조물, 특별히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개념입니다. 시대별로 일어난 사건의 연속 내지 누적인 역사도 지구상의 인간들의 행적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 역사를 주관, 간섭하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과거, 현재, 미래 같은 시대적 구분에 따른 해석, 적용, 예측은 일차적으로 인간에게 주로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설명할 때마다 필립 얀시가 든 비유를 저는 자주 인용합니다. 태양에서 지구까지 빛이 도달하는 데는 약 8분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인간은 해가 뜰 때에는 사실상 8분 전에 벌써 떠있는 해를 보게 되며, 지는 해도 이미 8분 전에 진 해를 봅니다.

그런데 한 발은 태양에, 다른 한 발은 지구에 걸쳐 놓을 만한 거인이 있다고 치면, 순전히 논리적 가정으로, 그에게 8분의 시차는 전혀 적용되지 않습니다. 지구나 태양을 한 순간에 한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거인에게는 지구상에서 인간이 인지하는 시간은 실종되고 없는 셈입니다. 지구 시간의 밖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거인과는 전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광대하십니다. 우주 한 쪽 끝에 한 발을, 다른 쪽 끝에 다른 발을 두실만큼 큽니다. 하나님이 그런 가시적 물리적 형체를 갖춘 거인이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시간과 연관해 설명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영원히 자존하시며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로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시간이란 행성과 항성의 자전과 공전에 따라 생기는 것입니다. 각 행성마다 시간 개념과 실제 길이도 각기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그 전부를 운행, 통치하시기에 시간 개념이 전혀 적용될 수 없습니다. 우주 전체를 한 눈에 다 본다는 것은 시간 밖에 존재하여 시간과 무관하다는 뜻입니다. 너무나 당연할 것은 시간을 만드신 분입니다. 자동차 공장이 자동차에 실려 다니는 법은 전혀 없습니다.

반면에 우주의 모든 피조물은 각기 시간에 묶입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물체와 존재는 반드시 언젠가는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시간과 완연히 구별된 유일한 분입니다. 시간 밖에서 우주 전체를 한 눈에 본다는 것은 그분에게는 현재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또 그래서.영원하신 분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로마의 극심한 박해 가운데 있는 신자들에게 오직 주의 재림을 소망하며 인내하라는 권면을 시작하면서, 시간과 연관된 하나님의 특성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

하나님이 하루만에도 엄청난 역사를 일으키는 반면에 천 년간의 인간 역사도 단숨에 허물 수 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태초부터 시작되어 지속적으로 흐르고 있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우주만물을 관리 통치하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한대에 가까운 시간의 창조자이자 주관자로서 그 시간마저 통치하고 계실지라도 하나님이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결과적으로 그분 또한 시간에 종속되기에 수정, 변개, 쇠퇴, 소멸의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바뀝니다. .  

대신에 그분에게는 하루나 천 년의 구분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과 역사 밖에서 그것과는 초월해 있다는 초시간성(超時間性)과 초역사성(超歷史性)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분에게는 항상 현재 즉, 영원만 있습니다. 또 그래서 단 한 치의 변화도 없이 신실하십니다. 그분의 언약 또한 전혀 수정 변개 취소되지 않고 반드시 달성되는 법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예수를 믿으면 이 땅에서부터 구원의 확신이 생기고 영생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자꾸만 영생을 유토피아 상태에서 시간적 무한대로 살아간다는 개념으로만 이해합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많이 부족한 해석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가 죽으면 그 육체는 멸망하고 영은 예수님 계신 낙원으로 옮겨집니다. 죽음으로 인간 존재가 멸절되는 것이 아니라 영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이가 죽으면 그렇게 되지만 그 새로운 존재 방식이 옮겨지는 거처만 예수를 믿음으로써 천국으로, 그렇지 않으면 지옥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또 낙원으로 옮겨진 신자는 마지막 날의 육신의 부활을 입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런데 이미 천국에 올라간 신자에게도 시간 개념이 전혀 없어집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말하자면 하나님처럼 영원한 현재로만 모든 것을 이해하는 수준으로 바뀝니다. 이를테면 천국에서 무병(無病)은 몰라도 장수(長壽)는 어울리지 않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시간을 초월하여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복이 됩니다. “이제는(이 땅에선)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주님의 실체 뿐 아니라, 그분의 구속사적 경륜, 또 이 땅에서 가졌던 의문과 오해 등이 씻은 듯이 밝혀집니다. 아니 그 전에 어쩌면 그런 것들을 문제 삼을 시도는커녕 용의조차 사그리 없어질지 모릅니다.  

바울 사도는 이어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13절)이라고 말합니다. 천국에서 주님을 대면한 것과 이 셋과는 도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우선 이 땅에서 갖고 있던 믿음과 소망이 목적하던 바는 천국에 들어옴으로써 사실상 완전히 달성된 셈입니다. 신자가 그 둘을 더 이상 소유할 이유나 필요가 없어집니다. 반면에 사랑만은 천국에서도 영원히 존재합니다.  아니 그곳은 아예 사랑만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천국에는 시간개념이 없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은 신자가 그 육신까지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되돌아갈 소망이나 믿음을 구태여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군인이 매일 달력에 표시하면서 제대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듯이, 예수님이 지구상으로 재림할 때 육신도 부활해 그 분과 동행 귀환할 날짜를 계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이미 영원한 현재로 천국 신자에겐 확보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지 성삼위 하나님께 세세토록 찬양과 경배를 돌리며 그분과 함께 왕 노릇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천국에선 신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덧입혀져 그 분처럼 변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 믿어 구원 얻은 이후 이 땅에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거룩하게 자라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 믿어 영생을 얻은 의미가 시간적 무한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보다,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과 갈라지려야 갈라질 수 없는 온전한 관계로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신자가 이 땅에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순간 시공간을 초월하여 이미 완성된 상태로 신자에게 선물로 주어지게 됩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손바닥에 신자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신자가 구원 이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 완성된 관계의 실체를 가시적 형태로 하나씩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뿐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28,29)

바로 그래서 성경은 영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 여기서 "아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 교리적이 아니라 일대일의 인격적 체험적으로 알고 교제하고 동행하는 것입니다. 영생 즉, 구원을 자꾸만 시공간의 차원 안에서 이해하려 들면 그 풍성함을 제대로 누리지, 아니 맛도 보지 못합니다. 수박을 잘라 먹지 않고 그 겉만 핥은 셈입니다.

토기장이가 악한가?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이런 기본적 이해를 갖고서 질의하신 본문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먼저 "창세 전"에라는 뜻은 하나님의 경우는 시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 당신께서 창조하신 형체나 존재들을 질서정연하게 조성하기 이전입니다. 오직 당신만이 계실 때입니다. 시공간 밖에서 그것과는 초월한 영원한 현재적 존재로 계셨던 상태입니다. 그분은 어제도 오늘도 앞으로도 영원히 한분, 정확히는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창세 전은 인간이 이해할 때에만 아주 오래 된 과거사입니다. 영원한 현재이신 하나님에겐 결코 창세  전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언제라도, 지금 당장 오늘이라도 죄로 물든 이 땅과 하늘을 없애고 새 하늘과 새 하늘로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실은 이런 진술마저도 인간의 사고로 즉, 처음부터 구조적으로 시공간에 제한 받을 수밖에 없는 차원에서 이해 적용하려 들어선 명료한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미국인이 영어로 말하는 데도 한국인이 속도와 억양만 조금 다를 뿐 한국어로 말하고 있다고 믿고 해석하려 들어선 단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착할지 악할지, 또 예수를 믿을지 안 믿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 구원 줄 자와 안 줄 자를 어떻게 창세 전에 독단적으로 나눴는지 이해가 잘 안 되긴 합니다. 그분이 아주 불공평하고 무자비한 독재자처럼 여겨집니다. 언뜻 일리 있는 판단 같지만 이 또한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을 그 안에 가두어 판단하는 인간적 오류에 불과한 것입니다.  

창조, 구원, 택함, 예정은 전부 하나님이 일방적 독단적으로 행하시는 사역입니다. 인간이 간섭은커녕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이 전혀 아닙니다. 인간은 단지 피조되었고, 신자와 불신자로 나눠져 택해졌고 예정 받았기에, 구원 받거나 그렇지 않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해도 단 한 치의 불공평성, 편애, 자의(恣意: 제 기분 내키는 대로 함), 불합리성, 불완전성 등이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거의 모든 신학적 과제에서 거의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분답게 사고 유추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 수준으로 끌어내려서 생각하려 듭니다. 이는 아주 크고도 가장 자주 범하는 오류입니다. 본 주제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태어난 인간이 나중에 착할지 악할지, 믿을지 안 믿을지 미처 모르는 데도 하나님이 무조건 편 가름 했다고만 여기고 치웁니다. 반대로 인간의 하는 짓과 그 처한 사정을 다 감안해서 구원해주어야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분이 아예 처음부터 믿을 자와 안 믿을 자로 나눠서 창조했다면 어떻게 됩니까? 피조물 신분에서 그렇게 나눈 창조와 창조주가 잘못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0,21) 비유이긴 해도 인간은 물건, 토기에 불과합니다. 본차이나가 아니라 뚝배기로 만들었다고 감히 토기장이에게 불평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1,16)

야곱은 태중에서부터 에서 대신에 장자권을 이어받을 자로 택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택함의 근거가 인간의 소원이나 달음박질(공적)이 아니고 오직 당신의 긍휼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에서나 야곱 둘 다 택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당신의 진노 아래에서 지금 당장 몽땅 죽어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이 일관되게 선언하는 바는 인간에게 아무리 높은 도덕성, 영성이 있어 보여도 창조, 택함, 예정은 절대적으로 인간의 논의 밖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택함 받을 자와 그렇지 못할 자로 이미 예정되어 지어진 것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택함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창세 전 택함이 결코 무조건적 독단적이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고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의 계획을 갖고 계셨고 또 그 뜻에 따라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택하심은 반드시 예수 안에서의 택함입니다. 예수가 없으면 택함도 없고 예수가 있기에 택함이 가능하고 또 타당합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타락과 예수 십자가의 구원이 전제가 된 창조라는 것입니다. 전제라는 말은 시간적 전후 순서는 논외라는 뜻입니다. 간단히 예수님의 구원이 예비 되어 있었기에 인간의 타락도 허용한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이 부분에서 타락 전(supra) 예정설과 타락 후(infra) 예정설이 옳은지, 또는 예지예정인지 이중예정인지 같은 복잡한 신학논쟁이 대두되지만,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그런 측면은 제외하고 성경이 말하는 바만 살펴보기로 합시다.)
    
하나님이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아무 조건도 보지 않고 구원으로 선택한 것은 오직 그분의 전적인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역을 통해 그 선택을 완성시켰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는 때에 당신께서 기뻐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통하여 믿음을 심어주십니다. 택함 받은 자 쪽에선 하나님이 볼만하고 기뻐할 조건이 단 하나도 없었음에도 당신께서 구원하셔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날로 자라게 하시고, 나아가 천국에서 그분의 영광을 덧입는 자리까지 한 치의 착오 없이 당신께서 이끄십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13,14)  

같은 맥락에서 주님의 재림의 날이 언제일지 궁금해지는 것도 지구 상의 신자들이 살아 있을 때만 문제됩니다. 천국에선 그 재림은 하나님의 영원한(누차 강조하지만 시간의 무한대 개념이니, 아주 먼 장래의 일이 아니라, 시간과는 무관하다는 뜻임) 뜻 안에 이미 확정되어져 있습니다. 성경 계시대로 모든 역사가 진행되어져서 꼭 오셔야 할 때가 되면 주님은 승천하신 그대로 반드시 다시 지구상에 강림하십니다.

신자는 확보된 재림의 영광 속에 살기에 그 종말을 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언제 어떻게 올지 구체적으로 준비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미 소유한 자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어떤 환난에도 소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어떤 죄악과 흑암과 사망의 세력 앞에도 당당하게 맞서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 쉬지 말고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1-4)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모든 계시는 하나님에겐 그저 “영원한 현재의 사안”일뿐입니다. 영원한 현재라는 용어 또한 그분의 신비한 경륜을 결코 다 드러낼 표현이 되지 못하겠지만 시공간에 제한되어 있는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춘 것입니다. 한마디로 창세 전에 세운 당신의 뜻과 계획은 당신 안에선 창세 전부터 현재 시제로 다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시공간 안에 제한되었고 그분의 피조물로서 그분의 은혜가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인간에게만 창세 전이 시간적으로 태어나기 아주 오래 전이자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일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을 포함한 창조는 물론, 21세기의 한 신자의 탄생과 그 택함과 구원까지도 그분 안에선 이미 성취되어 있으되,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날 시기와 방식만 미결로, 그것도 인간에게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앞에서 구원 받을 때에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올라간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이미 올라가 있는 이름을 당신의 때와 방식대로 당신께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인간 쪽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진리를 앎으로써 자기가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올라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기에 그만한 위로와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이 택함과  예정에 따른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영원한 신비와 은혜에 속할 뿐입니다. 토기장이가 아무 계획 없이 도기를 굽지 않듯이, 하나님도 태초에 이미 당신만의 마스터 플랜이 있었고 그 중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1-4)

질의하신 본문에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또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없게 하려고 택했다고 합니다. 천국에서 그 택함은 완벽한 거룩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신자가 할 바는 이어진 말씀 그대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5,6절) 뿐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1:8)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2-4)
  
인간은 피조물로서 이 땅에선 물질적 차원에 머무르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 존재로 천국에선 그분과 맛 대면할 고귀한 존재입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이 너무 독단적으로 택한 것이 아니라 도무지 측량할 수 없는 긍휼과 사랑으로 예정이란 신비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낙원으로 데려가지 않고 이 땅에 잠시 남겨 놓았습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답은 자명하지 않습니까? 그분의 끊어질 수 없는 사랑 안에서 창세 전에 택함 받았으니 잠시 있다 없어질 이 땅보다는 영원과 맞대어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5/25/2011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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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앵커]

유병언 씨 도피를 결정적으로 도와줬던 것으로 지목됐던 일명 '신 엄마'가 자수했지만 유 씨의 행적을 찾을만한 단서는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일단 검찰은 신 엄마와, 앞서 체포된 유 씨의 형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한 뒤, 신병을 확보해 조사를 이어갈 방침입니다.

이종원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신 엄마'에 대한 검찰 조사는 크게 두 가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꼭꼭 숨어있던 신 엄마가 왜 자수를 결심했는지, 그리고 유병언 씨 도피에 신 씨가 어떻게, 얼마나 개입했는지입니다.

검찰은 유 씨의 도피 행각이 이어진 지난 한 달 동안, 신 엄마의 행적을 재구성하며 유 씨와 신 엄마의 연결 고리를 찾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또, 휴대전화 통화 기록 등을 분석하며, 신 엄마를 통해 유 씨의 도피 작전에 투입된 다른 신도들을 추리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변호인을 대동하고 자수한 신 엄마가 입을 열지 않으면서, 추적에 필요한 직접적인 단서는 얻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또 신 엄마의 자수가 수사에 혼선을 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검찰은 체포된 유병언 씨의 형 병일 씨를 상대로도 유 씨의 행방을 캐묻고 있지만 병일 씨 역시 묵묵부답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지난달 검찰 조사를 받고 잠적했던 병일 씨는 돌연 검문이 강화된 금수원 주변을 지나가다 체포돼, 그 배경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 상태입니다.

검찰은 일단, 신 엄마와 병일 씨 2명 모두 구속영장을 청구해 신병을 확보한 뒤 조사를 이어가기로 방침을 세웠습니다.

이런 가운데, 검찰과 경찰은 유 씨가 여전히 전남 일대에 숨어있는 것으로 보고,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밀항 시도 차단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최근 금수원에서 확보한 유 씨의 DNA와 지난달 순천 송치재 별장에서 채취한 DNA가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유 씨가 순천에 머물렀다는 사실은 확인이 됐습니다.

유병언 씨의 친형 체포와 함께 핵심 조력자로 지목됐던 신 엄마가 자수하면서 검찰의 추적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됐지만, 검찰의 유병언 찾기는 여전히 제자리 걸음을 걷고 있습니다.

YTN 이종원입니다.

[YTN 화제의 뉴스]

[저작권자(c) YTN & YTN PLUS.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방언에 대한 오해 5 - 바울이 말한 방언은 외국어이고, 다른 성도가 말한 방언은 이교도적인 주문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삶의 목표가 더 이상 구원 받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초보적인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히 6:1-2)

우리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두 가지는 우리가 열매 맺어(성령의 열매 -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고, 교회를 통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 입니다.

이 두 가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은사가 사용 되어져야합니다.

만약 방언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 되어진다면...

교회는 거룩해집니다.

방언을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에 힘있게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악한 영들이 주는 가짜 방언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진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은사들 중에 버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에서 그것들이 모두 사용되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현재 성도들이 하는 방언은 성령님이 주시는 은사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퍼져 나가면서 성도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 주장이 보편화 된다면 한국 교회에서 방언은 사라지게 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심히 우려되어 지금의 방언은 성령님의 은사가 아니라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글을 또 씁니다.


오늘은 그 다섯번째로 ‘바울이 말한 방언은 외국어이고, 다른 성도가 말한 방언은 이교도적인 주문 같은 것이다.’ 라는 주장을 성경 말씀을 통해 반박하겠습니다.


첫째 !

바울의 방언과 다른 성도의 방언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고전 14장에서 방언이라 번역된 모든 단어는 헬라어(글롯사)가 사용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 방언과,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말한 방언 사이에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2절 단수, 4절 단수, 5절 복수, 6절 복수, 13절 복수, 14절 단수, 18절 복수, 19절 단수, 14:22절 복수, 23절 복수, 26절 단수, 27절 단수

모두 단수냐, 복수냐의 차이만 있습니다.

원어 성경에서 외국어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라고 구별할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둘째 !

바울이 한 외국어 방언은 복수로 기록 되어있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한 방언은 단수로 기록 되었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전 14:14)

14절에서는 방언이라는 단어가 단수입니다.

만약 바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 같은 것을 중얼거린다거나 이방 종교행위를 한다면, 나의 영이 기도한다고 스스로 말 할 수 없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바울은 방언 할 때 자신도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어가 아닙니다.


세째!

예배 순서를 볼 때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은 이방 종교 행위가 아닙니다.

그 때 고린도 교회에는 예배 순서에 방언이 있었습니다.

예배 순서는 찬송(찬송시), 설교(말씀), 계시, 방언, 예언이었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방언하는 사람의 수를 제한합니다.

두 사람, 많아도 세 사람을 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통역이 있을 경우만 하라는 것 입니다.

통역이 없으면 뭔 소린지 성도들이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언의 경우도 둘이나 세 명만 하라고 명령합니다.

“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 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 14:26-28)


네째!

통역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는 이방 종교에서 온 것이 아님을 강하게 증명합니다.

방언이 학습 없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통역 역시 학습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이방 종교의 주문 같은것은 통역할 수 없습니다.


다섯째!

바울은 방언을 고린도교회 성도들보다 더 많이 했습니다.

방언 많이 말하는 것이 바울의 감사의 이유였습니다.

많다는 것은 종류를 말하지 않고 양을 말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방언과 자신의 방언을 동격으로 말했습니다.

즉 둘 사이에 질적인 차이는 없고 양적인 차이만 있다는 뜻입니다.


여섯째!

예배의 순서는 다양합니다.

그런데 방언만 통역 하라고 합니다.

은사로 주어진 방언과 은사로서 주어진 통역이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결론!

바울의 방언이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방언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둘 다 통역 없이는 이해할 수없는 소리였습니다.

둘 다 외국어가 아니었고, 성령님이 주신 은사였습니다.


예배 순서를 보면 현재 한국 교회와 많이 다릅니다.

차이점은 계시, 방언, 예언이 있었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타락하지 않고 살아납니다.


바울이 예언을 방언보다 더 많이 하라고 명령했던 이유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예언은 하지 않으려 하고 방언만 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모임) 때 방언은 최대 세 명까지만 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저는 방언 은사가 전부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은 구원의 확증, 성화의 증거도 아닙니다.

무시할 수없는 성령님이 주시는 은사라고 말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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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성철| 원글보기




   소리없이 여름이 오듯이         글 / 예하나

    바람이 귓볼에 스칠때 시원하구나
   여름은 이렇게 오더이다.

   연두빛 잎새들이 짙녹색 초록으로 바뀌었구나
   여름이 짙어지는 것을 알겠더이다.

   검은머리가 하나 둘 하이얀 색으로 물들어가는구나
   나이가 들어가는것을 알겠더이다.

   잇사이로 밥알이 새어나오고 말이 빠져나가는구나
   어느새 노인으로 바뀌었더이다.

   여름이 소리없이 오듯이 
   인생도 소리없이 가더이다.

   그 이름이 호적에서 지워지는 날
   천국에서 그 이름이 불리워진다는것을 알겠더이다.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소리없이 여름이 오듯이         / 예하나

 

    바람이 귓볼에 스칠때 시원하구나
   여름은 이렇게 오더이다.

   연두빛 잎새들이 짙녹색 초록으로 바뀌었구나
   여름이 짙어지는 것을 알겠더이다.

   검은머리가 하나 둘 하이얀 색으로 물들어가는구나
   나이가 들어가는것을 알겠더이다.

   잇사이로 밥알이 새어나오고 말이 빠져나가는구나
   어느새 노인으로 바뀌었더이다.

   여름이 소리없이 오듯이
   인생도 소리없이 가더이다.

   그 이름이 호적에서 지워지는 날
   천국에서 그 이름이 불리워진다는것을 알겠더이다.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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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단체들이 주관하는 퀴어문화축제의 카퍼레이드가 7일 저녁 8시30분 현재 동성애 확산을 반대하는 약 7천여 명의 신촌지역 대학생, 시민들과 대치중이다.
  
  매년 홍대입구에서 진행되던 퀴어문화축제는 홍대 인근 지역 주민들 반대로 올 해 신촌로(路)에서 진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알려진 뒤 신촌지역 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서대문구청 역시 세월호 참사로 인한 국가적 추모분위기를 고려하고 이른바 ‘빤스퍼레이드’로 알려진 퀴어문화축제가 미풍양속에 맞지 않은 이유로 행사 허가를 취소했었다.
  
  주최측은 그러나 서대문경찰서의 허가를 근거로 신촌로에서 행사를 강행했다. 이에 따라 신촌로에는 집회신고가 되어 있는 또 다른 행사인 ‘세월호추모행사’와 ‘신촌 동성애(同性愛)축제 반대 일만명 시민대회’가 뒤섞여 진행됐다.
  
  퀴어축제를 시작한 동성애단체들은 오늘 2시부터 5시부터 게이퍼레이드를 시작했다. 그러나 퍼레이드행렬이 5시 30분경 ‘동성애축제반대 일만명 시민대회’가 열리는 장소를 통과해 지나려는 과정에서 시민대회 참석자들과 경찰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들은 경찰에 신고 된 동성애축제 마감시간인 저녁7시를 훨쩍 지난 저녁8시 30분 현재 여전히 대치중이다.
  
  경찰은 이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동성애단체의 편을 들어 시민대회 참석자들의 해산을 시도, 빈축을 샀다. 또 강제해산 과정에서 시민들을 밟고 들어오는 등 물리적 진압도 불사했다. 50대 남성 한 명은 게이퍼레이드 차량에 깔려 병원에 후송됐다. 동성애단체 참가자들 역시 동성애축제를 반대하는 시민들에게 물병을 던지고 욕설과 야유를 보냈다.
  
  한편 오늘 오전 신촌로 인근에서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또 다른 보수시민단체들이 ‘동성결혼금지법 제정 촉구 결의대회’를 열었다. 오후에는 동성애자였다가 회복된 사람들의 모임인 ‘홀리라이프’의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신촌동성애축제반대 일만명 시민대회’의 김광중대표는 이날 성명을 내고 “안타까운 세월호 참사로 인해 전 국민이 유가족과 같은 마음으로 슬퍼하고 애도하고 있는 시기에 동성애 집회 및 빤스 카퍼레이드를 강행하는 것은 국민의 정서에 반하고 시의 적절하지 않으며 신촌지역 주민들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그는 “우리 국민 대다수(74%)는 동성애가 비정상적인 성행태라고 생각하며(2013년 미디어리서치 조사) 동성애는 에이즈 감염 고위험군으로 일반인에 비해 에이즈 감염률이 183배나 높다”며 또 “최근 10년 사이 청소년의 에이즈 감염이 8배나 증가하였고, 감염된 청소년의 54%가 동성애에 의한 감염으로 발표되었다(복지위 이기우 의원 국정감사자료)”고 밝혔다.
  
  또 “이러한 동성애의 폐해와 위험성을 숨긴 채 청소년들이 다니는 거리에서 동성애를 선전하고 조장·확산하려는 행사를 보고 있을 수만 없다”며 “대한민국 청소년, 청년 세대를 동성애로부터 지키고 교육의 거리인 신촌을 깨끗하게 지킬 것”이라고 덧붙였다.

  
  written by 최정현(리버티헤럴드)</IFRAME>

조직신학은 무엇인가, 그리고 조직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1)

출처:  이승구 교수님 블로그  http://blog.daum.net/wminb/13718812

 

 

 

 

 조직신학은 신학(神學)이라는 더 넓은 작업에 속해 있는 분과이므로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이 신학이 무엇인가라고 정의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편의상 신학에 대한 잠정적 정의를 제시하고 그에 근거해서 실제로 구체적인 신학적 작업을 한 후에 다시 과연 신학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신학에 입문하는 사람(novice)이 하는 질문이며, 동시에 완숙한 신학적 작업을 다 한 사람(master theologian)이 그의 생의 마지막에서,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물을 질문이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적 질문과 신학 자체에 대한 질문은 영원하다. 이 영원한 질문에 대한 잠정적 대답의 시도로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1. 신학이란 무엇인가?


신학(神學)은 그 말뜻 그대로 하나님에 대한 학문(scientia Dei, science of God)이라는 말로서 신학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생각하고 그 함의를 이끌어 내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는 매우 이론적이면서도 동시에 실천적인 학문이다. 그러므로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믿고 있는바 신앙이 마땅히 표현되어야 하는 바른 방식을 찾아 진술하고 그에 근거해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은 신앙의 문법(the grammar of faith)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는 좋은 의도로도 사용될 수 있으나 동시에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이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어떤 의미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는지를 깊이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믿는 바를 하나님께서 제시하시고 정하신 규칙에 따라서 표현하며, 그것에 근거해 사는 일이라는 의미에서 이 신앙의 문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이후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바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그것을 표현해 왔다. 그렇게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생각되고 표현되고 실제 삶 가운데서 실천된 바들을 모두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신앙에 대해서 생각하고 표현하고 그에 근거해 사는 것 모두를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의식하지 않은 채 사람들에게 내재해 있는 암묵리의 신학(theologia implicita)과 이를 명확히 표현해낸 명시적 신학(theologia explicita)을 나누어 말할 수 있다. 암묵리의 신학은 명시적 신학의 토대요, 명시적 신학은 암묵리의 신학을 표현하게 하는 것이므로 그것을 세련화 하고 일관성을 가지게 하며 좀더 비판적 성찰을 거쳐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과정을 신학화(theologieren, doing theology)라고 한다. 그러나 이 때 명시적으로 표현된 것만을 신학이라고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표현되지 않고도 내재해 있는 신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적 표현의 과정은 그 자체가 우리의 신학을 보다 바르게 된 것이 되도록 할 수도 있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문창극후보자 온누리교회 특강전문 
2011년 마리아행전 준비특강 "나라를 위해 어떻게 기도할까" 


2011년 온누리교회(담임목사 이재훈) 마리아행전 행사를 앞두고 나라를 위해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를 주제로 문창극 장로(현 국무총리 후보자)가 강연한 내용 전문을 소개합니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발언 내용을 기독교 신앙에 근거한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비판하면서 문 후보자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고, 한국교회연합은 교회 내부의 발언을 비판하는 것은 종교자유탄압이라고 주장하는 등 입장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현재 언론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과 비교해 보면서 전체 맥락을 살펴보기를 바랍니다.-뉴스파워-

제가 이렇게 강단에 설 자격이 없습니다. 여기는 다 목사님들이 서야 되고 그러는데, 저한테 전화가 왔어요. 내주에 마리아행전을 대대적으로 하는데, 나라를 위해서 뭐를 기도해야 되느냐, 기도 제목을 말씀을 해주시면 좋겠다, 그런 부탁을 받았습니다. 다음 주에 아마 오대원 목사님(한국 예수전도단 설립자)이 오시는 걸로 아는데, 제가 오대원 목사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사람으로 여기 섰습니다.(청중 웃음).     

나라를 위해서 우리가 왜 기도를 해야 되느냐. 우리는 각자 개인을 위해서 기도를 하지요. 나라를 위해서도 끊임 없이 기도를 하지요. 왜 기도를 하느냐.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알기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 나라를 위해서 무슨 뜻을 가지고 계신가 하는 걸 우리가 깨달으면 우리가 그 뜻대로 살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라라는 것은 뭡니까. 저는 비행기 어떤 때 타면 3등칸을 주로 타지만 가끔 어떤 기회가 있어서 2등칸을 타게 되면 또 굉장히 대우가 다르더라고요. 1등칸을 다르면 아마 더 대우가 달라지겠지요. 나라라는 것은 저는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3등 나라에 3등칸에 있는 손님이 되고 1등칸에 타면 1등칸에 탄 승객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1등칸에 타면 서비스도 훨씬 좋고 편하고 얼마나 안락합니까. 우리가 1등의 나라를 만일 만든다면은 1등의 나라 안에서 저희들은 개개인의 삶의 고통과 개개인의 삶의 고민을 3등 나라보다는 우리가 덜 겪을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나라가 좋은 나라가 돼야 한다, 나라가 복받은 나라가 돼야 하는 기도를 우리가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왜 한국이라는 나라를 탄생시켜가지고 한국이라는 나라를 무엇에 쓰려고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우리의 제일 먼저 기도의 방향이 될 것 같습니다. 그 뜻을 알아야지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우리 한국에 대해서 이러이런 것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거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국 역사에서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면 과거에서 지금까지 지내온 상황을 보면 대한민국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런 것을 어렴풋이나마 우리가 알 수 있을 겁니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은 그럼 대한민국에 무슨 뜻을 가지고 계신가 하는 거를 저 나름대로 한 번 찾아보려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우리는 1890년 그 때가 처음 선교사님들이 이 나라에 오신 때입니다. 1890년, 이조 말기, 고종 때, 그 이전에는 사실상 선교사님들이 아주 가끔 왔찌만 당시 조선에 상륙을 못했습니다. 배를 타고 있다 돌아가기도 하고, 쇄국정책 때문에. 1890년에 선교사님들이 와서부터 사실은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됐습니다. 1890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 나라가 어떻게 전개됐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훑어보면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근데 이 제목을 놓고 제가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도대체 어떻게 된 나란가. 저는 가만히 돌이켜보면 고비고비마다 구비구비마다 하나님의 뜻의 분명히 있었다 라는 것을 저는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민족한테 고난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민족을 단련시키려고 고난을 주신 것입니다. 또 고난을 주신 다음에 또 하나님은 우리한테 길을 열어주십니다. 매번 길을 열어주셨어요. 중요중요 시기마다. 그러면 길을 왜 열어주셨느냐, 하나님이 이 나라를, 이 민족을 써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길을 열어주신 겁니다. 그래서 그런 걸 보면 우리나라라는 것은 지금까지 구비구비마다 시련과 도전을 받았지만 그것이 또 하나의 기회가 됐습니다. 그 기회가 돼가지고 지금 이 나라가 왔습니다.     

먼저 조선말의 풍경을 제가 하나 말씀드리겠다. 그 당시 어떻게 됐느냐, 어떤 나라냐, 제가 책을 찾아가지고 조선말의 풍경에 대해서 한 두 가지만 먼저 알려드리겠습니다. 1832년에 영국 상선 암허스토호 배가 우리나라 몽금포, 저 황해도 서해에 왔습니다. 그 때 거기에 선교사가 동승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독일 개신교 선교사였습니다. 1832년이까 순조 31년입니다. 퀴츨 라프입니다. 이 사람을 조선을 어떻게 봤냐. 자기가 북경에 가서 보고서를 냈는데, 조선에 대한 현실을 이렇게 썼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불결과 빈곤으로 자기 생애를 보내야 하는 끔찍한 거처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가 만난 많은 사람들의 피부는 어김없이 때로 덮여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몇달씩 씻지 않아서 이 따위의 해충이 득실댔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 해충을 잡아죽이는 짓을 주저하지 않았다…. 살림 도구는 서툴게 빚어졌다. 진흙으로 빚어졌는데 형편없이 빚어졌다.” 이것이 1832년이 선교사님이 우리나라 서해 몽금포에 와서 북경에 자기네 선교본부에 보고한 조선말의 상황입니다.     

그 다음에 30년 뒤에 1874년에 달레 신부라는 분이 왔습니다. 파리 외방선교회 소속이다. 한국에 와서 한국을 삭 보고나서 ‘꼬레의 교회 역사’, ‘코리아의 교회 역사’사를 썼습니다. 거기에 1874년의 조선의 상황을 제가 또 읽어드리겠습니다. “창고에 저장은 장부상에만 있다. 지방 병기고에는 쓸만한 탄약도 무기도 없다. 관리들이 다 팔아먹고 누더기 몇 조각과 고철 나부랭이를 대신 갖다 놨다. 아전과 수령은 그들 마음에만 드는 것이 있으면 무조건 강탈한다. 백성은 하도 곤궁하여 서해안 사람은 밀수업자에게 어린 딸을 쌀 한 말에 팔고 있다. 길마다 송장이 널려 있다.” 이것이 1874년 달래신부가 본 한국의 현상입니다.     

그 다음에 1890년대에 또 한 분이 왔어요. 이 분이 비솝 여사라고 영국 분인데, 이 분은 책으로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구할 수 있습니다. 비솝 여사가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한국을 다 샅샅이 들여다 봤어요. 이 사람은 부산에서부터 저 신의주, 강개 넘어가서 블라디보스톡까지 갔던 분이에요. 그래서 책을 한 권 냈는데 이 사람이 부산에 와 보니까 한국이는 나라가 어찌나 더러운지, 그 하수도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그런 나라고 자기가 놀란 것은 그 당시 일본인들이 거처하는 동래라고 있습니다. 부산 동래가 옛날에는 일본인들이 거기에 거처했었습니다. 동래를 가보니까 동래현에는 그렇게 깨끗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야, 일본은 이렇게 일본인 사는 지역은 이렇게 깨끗한데 어떻게 한국 사람들이 사는 이 부산진에는 이렇게 더러우냐’ 놀라서 썼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서울에 와서 서울구경을 또 했습니다. 서울도 얼마나 더러운지, 냄새가 풀풀 나서 다닐 수가 없는 정도로 서울이 그 당시 더러웠습니다. 그게 언제냐. 지금부터 100년 전 일입니다. 100년 전 한국이 그런 나라였습니다.    

이 사람이 한강을 따라서 영월까지 갔어요. 영월까지 배를 타고 갔는데 그 당시 서양여자라는 건 보기가 힘들었잖아요. 중간중간 내려서 잠을 자는데 얼마나 사람들이 서양 여자귀신이 왔다 그래서 구경을 하려고 밤에 잠을 자려고 누워 있으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빈대, 이같은 것 때문에 잘 수 없는 건 둘째 치고 동네 사람들이 문을 전부 다 구멍을 뚫어서 문을 보느라고, 다 보느라고 눈이 그러니까 창호지에 눈이 몇 십 개가 이렇게 있는 거죠. 사람이 하도 밀려서 그 문이 이렇게 완전히 방 안으로 쓰러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한국여행을 했는데 양평이라는 데를 갔습니다. 옛날에 군수가 있고 그랬는데. 거기 가서 아까 읽어드린 것처럼 그 군 사정을 알아봤는데 그 조그만 군에 이방 이런 것 있잖아요.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이렇게 볼기치는 사람들, 이런 이방 사람들이 800명이나 있다는 겁니다. 이 조그만 군에 이방이 800명씩이나 되면 그 사람을 누가 다 먹여살립니까? 다 백성들이 먹여살리는 거야. 그 백성들이 집에 뭘 가지고 있는지 이방들은 다 안대요. 이 사람 부엌에 숟가락이 몇 개, 장 담그는 독이 몇 개. 아주 낱낱이 잘 알고 있대, 이방들이. 그리고 이방들이 그 집에 조금 뭐가 생기잖아요. 농사 열심히 지어서 뭐가 좀 생기면 그 이방이 부른다는 거야. 불러서 그냥 무조건 곤장을 치는 거예요. 곤장을 쳐, 왜 치느냐. 자기는 모르겠다는 거야, 왜 치는지. 그런데 이방이 하는 얘기가 ‘임마 네 죄는 네가 알지 내가 어떻게 아느냐. 네 죄는 네가 알렸단 말이야. 어떻게 이방이 아느냐, 네 죄는 네가 아니까 고해라’, 그래서 곤장을 쳤습니다. 그러니까 집에 쌀이라도 한두 말 있으면 다 뺏긴다는 거야. 그러나 조선사람들은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 거야. 왜, 일을 하면 다 뺏기니까. 그러니까 게을러지는 거야. 암만 노력해봐야 나에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게을러지는 거야. ‘세월은 가라’, 이렇게 되어 있는 거야. 이 사람이 한강을 따라 가보고 평양을 지나서 대동강을 따라 올라가보고 조선 상황은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란 것은 그 당시 연해주, 지금 소련(러시아) 있는 데죠. 블라디보스톡 갔는데 당시 거기에도 한국에서 이민간 사람들이 북간도, 연해주에 그 때 이민을 많이 갔거든요. 거기를 둘러봤어요. 조선사람들이 여기서는 어떻게 사냐. 그랬더니 연해주 살고 있는 조선 사람들 가보니까 깜짝 놀란거야. 조선에서는 그렇게 더럽고 그렇게 게으르고 그렇게 아주 그냥 하류 삼류민족, 원시인 같은 삶을 사는 조선민족이 연해주에 사는 조선민족은 얼마나 깨끗한지 몰라. 집을 반듯하게 짓고 거기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러시아 사람보다 훨씬 더 잘 살고 훨씬 더 깨끗하게 산다 이거예요. ‘야, 조선민족이 이런 민족이냐. 정말 놀랐다.’ ‘그러면 왜 연해주에 있는 조선인은 그렇고 조선에 있는 조선인은 그러느냐. 그게 뭐냐. 나라가 잘못해서 그렇다’는 거야. 아까 말씀드렸듯이 나라가 백성이 뭐만 생기면 볼기를 쳐서 뺏으니까 일을 안 하는 거야. 그런데 그런 나라를 떠나서 자기들끼리 모여사니까 그렇게 잘 사는 거야. 그래서 조선민족을 자기는 다시 봤다, 이런 얘기를 한 걸 제가 책을 읽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은 한국, 우리의 전신 조선의 말의 한국의 상황이었습니다. 조금 더 그 시절을 하면 1904년 고종이 그때 있었습니다. 민비도 그때, 민비는 죽었죠. 1895년에 을미사변인가요. 그걸 뭐라고 하죠. 민비시해사건, 우리가 민비를 지금은 무슨 굉장히 많이 높이잖아요. 민비에 대해서. 명성황후 이래가지고 오페라 같은 것도 있고 그러는데 그런데 그 당시 왕은 그럼 어땠느냐. 왕도 똑같았어요.    

그 당시에 윤치호라는 분이 일기를 쓴 게 있어요. 쭉. 그 사람은 스물 몇 살 때부터 죽을 때 까지 일기를 썼어요. 그게 우리 귀한 자료가 됐는데 그 사람은 전부 다 영어로 일기를 썼어, 그 당시에. 왜? 한국말로 쓰면 혹시 나중에 잘못되면 그것 가지고 누가 흉잡을까 봐 1890년대 영어로 전부 일기를 썼어요, 매일매일. 그런데 그 사람이 쓴 일기에 당시 고종과 민비에 대해서 한 얘기가 있어요. 얼마나 그 당시 왕궁에는 점쟁이, 무당, 내시, 이런 사람들만 버글버글 한 거예요. 그래서 1904년에 러일전쟁 일어나지 않습니까?    

러일전쟁 일어나면 자기가 왕이면 이거 나라가 어떻게 될 거냐, 조선은 이제 러시아에게 먹히는 거냐, 일본에게 먹히는 거냐 조선이 정신을 차려야겠다, 어디로 가야 되느냐 자기가 생각을 하고 당시 기독교인은 아니었으니까 기도는 안 하더라도 지도자로서, 왕으로서 자기가 진짜 뭘 해야 하는데 그 당시 얘기를 들어 보면 제물포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포탄이 날아다니는데 황제는 점쟁이 말을 듣고 궁궐 기둥 밑에 큰 솥을 묻는 짓을 하느라 바쁘다. 이걸 이 사람이 일기에 쓴 거예요. 우리 고종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무능하고 그렇게 나약하고 그렇게 타락한 사람이었다, 이거예요. 민비라는 사람 똑같아요. 그 다음에 민비가 죽기 전에 이 사람 민비에 대해서 평을 하는데 영리하고 이기적인 이 여인은 미신을 섬기는 것의 반만큼 백성을 섬겼더라면 그녀의 왕실은 안전했을 것이다. 민비라는 사람도 백성을 섬기는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어요. 관심이 없고 전부 다 미신 섬기는 것, 지금 덕수궁 자리, 그리고 경기여고 자리가 경운궁이었거든요. 러시아에서 아관파천을 하고 경운궁으로 옮겼어요, 고종이. 1907년 이때쯤에. 그런데 그 옮길 때 그 즈음 1900년대의 덕수궁과 경운궁, 지금 시청 부근이죠. 시청 부근에는 전부다 점쟁이와 무당이 들끓었대요. 왕이 점쟁이와 무당을 좋아하니까 전부다 점쟁이하고 무당만 있는 거야. 백성들은 그 사람들 먹여살리느라고 세금 내야 되고. 이 사람들은 나라에 대한 걱정이 전혀 없었어요. 나라에 대한 걱정이 없는 대신 뭐만 있었느냐. ‘왕과 왕비, 세자만 안전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다.’ 이것이 민비의 자세였다 이거예요.    

제가 책을 읽어보니까 그 당시 민비라는 사람 죽고 나서 또 고종이라는 또 엄비인가 그런 분들이 대신을 했는데 얼마나 나라에 대해서 무책임하느냐 하면 일본한테 나라를 팔아먹어도 좋다. 일본이 우리를 합병해도 좋다. 단, 우리 왕실, 그러니까 이 씨 왕실만 살려달라. 그게 조건이었어요. 1910년 한일합방할 때의 가장 큰 조건, 이완용이 그 조건을 들고 일본하고 협상을 했어요. 그러니까 이거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이 나라가 없어지는 거예요. 조선이라는 나라가 없어지면 조선의 국왕이라는 것, 대신이라는 것 다 없어지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모르는 거야. 그리고 일본에게 나라, 조선을 너희들한테 바칠텐 데 이 씨 왕조만 살려 달라, 이 씨 왕실만 살려 달라, 그러면 나라를 다 너희들한테 갖다 바치겠다. 그래서 갖다 바친 거예요, 사실.     

그렇게 우리가 무능하고 그런 나라에서 100년 전, 이게 오래된 나라가 아니에요.100년 전에 그런 나라였어요. 이런 나라에 들어 온 게 뭐였느냐. 선교사를 통해서 우리 기독교가 들어 온 거야. 그 때 기독교가 들어 왔어요, 선교사를 통해서. 이승만 박사 전기 같은 것을 읽어보면 그런 게 잘 나타나 있어요.     

이승만 박사가 처음에는 이 사람은 그 당시 과거를 보려고 했어요. 과거를 보려다가 과거를 안 봤어요, 못 봤어. 과거를 안 보고 어렸을 때 눈병이 났는데 이 사람이 눈이 멀게 돼서 아무 것도 안 보여. 그래서 이승만 박사 그 어머니가 깜짝 놀랐어요. ‘이거 큰일 났구나. 네가 외아들인데, 네가 이렇게 눈이 벌면 봉사가 되겠구나.’ 그래서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해보고 해도 안 낫는 거야. 그 이승만의 어머니가 큰일 난 거예요. 그런데 수소문을 해보니까 서양 선교사가 왔다는 거예요. 의사인데 그 양반이 그 분은 뭐든지 병을 잘 고친다더라. 그래서 이승만 데리고 서양 선교사에게 갔습니다. 의사에게. 그래서 서양선교사가 약을 발라주고 집에 가 있어 보라고. 그래서 가 봤어요. 며칠 지났어요. 어머니가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이승만이 이만한 애가 문을 열고 ‘어머니, 내 엄마가 보여요.’ 이렇게 얘기를 한 거예요. ‘네가 정말 내가 보이니? 네가 눈을 떴구나.’ 이승만 엄마가 그렇게 기뻐한 거야. 그래서 너무 너무 고마워서 이승만을 버리고 그 선교사에게 갔어요. 그냥 가지 않았잖아요. 그때 어머니 이런 분들 다 이렇게 계란 한 줄 이렇게 가지고 갔어요. 이승만 어머니도 계란 한 줄을 가지고 선교사를 찾아갔습니다. 선교사에게 너무 너무 고맙습니다. 우리 아들 눈을 이렇게 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하고 선교사에게 갖다주니까 선교사가 그거 계란은 당신 아들 먹이세요. 당신 아들이 눈이 먼 건 영양부족 때문에 그런 거예요. 계란은 당신 아들 갖다 먹이세요. 그렇게 해서 계란을 안 받았어요.    

그때 이승만이 깜짝 놀란거예요. 이야, 서양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저 선교사라는 사람은 뭘 하는 사람이냐. 나는 과거를 봐서 썩어가는 나라를 고치려고 했는데 지금 과거볼 때가 아니구나. 이 선교사라는 건 뭐고 서양의 의술이라는 건 뭐냐. 완전히 머리가 180도달라졌어요. 그래서 과거를 다 때려치웠어요. 과거 공부도 때려치우고 이승만이 어디 들어 갔죠? 배제학당을 들어 갔어요. 배제학당 들어 가서 신학문을 공부했어요. 그러면서 무슨 독립협회니 이런 가입을 했잖아요. 그런데 23살 때 감옥에 들어 갔어요. 왜 들어 갔냐. 고종에 대한 반역죄, 이런 걸로 들어 갔는데 그래 가지고 1907년에 6년 만에 감옥에서 나온 거예요. 그때 조선 은 이미 러일전쟁 일어났지 이미 조선은 일본에 먹히게 될 상황. 그래서 이 사람이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썼어요. 감옥에서 29살 때. 지금 읽어봐도 아주 뛰어난 책이야. 그러니까 이승만이라는 분은 굉장히 훌륭했던 분이었던 것 같아, 젊었을 때. 제가 지금 나이가 60이 넘었는데 네가 쓰라고 해도 그것보다 못쓰겠어요. 29살 때, 100년 전 이승만이 그걸 썼어요. 썼는데 거기에 결론이 뭐였냐. 결론이 있어요. 그 결론이. 독립정신, 마지막 부분 결론입니다. 그걸 읽어드리겠습니다.     

세계 문명국 사람들이 기독교를 사회근본으로 삼고 있으며 그 결과로 일반 백성들까지도 높은 도덕수준에 이른 것이다. 우리나라가 쓰러진 데에서 일어나고 썩은 데에서 싹을 틔우고자 노력하는데 기독교를 근본으로 삼지 않고는 온 세계에 접할지 라도 그 목적을 못 이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독교를 모든 일의 근원으로 삼아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는 자가 되어 나라를 한 마음으로 받들어 우리나라를 영국이나 미국과 동등한 수준에 이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건국 4237년 6월 23일. 이게 1904년에 쓴, 1904년에 이런 글을 쓴 거예요. 이 사람 결론이 뭐였느냐. 이승만이 20세 때의 결론이 이 나라는 기독교 국가가 되어야 되겠다. 기독교 국가가 아니고서는 조선은 살아날 길이 없다. 이 사람이 결론을 내린 거예요. 결론을 그렇게 내렸어요. 이승만이 그런 식으로 결론을 내리고 난 뒤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1910년에 합방이 되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래 가지고 일본이 차지하게 됐죠.    

그런데 그때도 그러면 왜 그럼 우리나라를 보호해 주셨으면 일본한테 합방하지 않게 하시지, 하나님은 왜 이 나라를 일본한테 이렇게 당하게 식민지로 만들었습니까? 라고 우리가 항의할 수 있겠지, 속으로. 그런데 저는 아까 말씀,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거야. 우리한테 너희들은 이조 500년 허송세월을 보낸 민족이다. 너희들은 시련이 필요하다. 너희들은 고난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 고난을 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그 고난 속에서 우리가 36년을 지나고 난 다음에야 마치 광야의 40년 생활을 하고서 우리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 갈 수 있듯이 36년의 고난을 거치고 난 다음에 대한민국에게 독립을 허용하신 거예요. 그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라, 이거예요. 우리가 지금 와서 과거 일제가 우리한테 그게 뭐냐, 우리가 참 못난 민족이다, 이럴 필요가 전 없다고 봐. 그게 다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 핏속에서 하나의 고난이 영글어져서 지금 이것의 뿌리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후회할 필요도 없고 애석하게, 지금 애석하긴 애석하지만 그것 때문에 상심될 필요는 없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기독교가 들어 왔지만 기독교가 들어 온 반면, 그 500년 동안 내려왔던 조선의 못된 관습, 게으름, 이런 것은 일제 시대 때도 같이 기독교인들은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하고 이런 걸 하나의 모토로 삼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저보다 나이가 많은 분도 계실 것 같은데 저는 어렸을 때, 요즘에는 찬송가에 그런 게 없어요. 찬송가, 그 당시 1930~40년 찬송가에 일하러 가세. 지금 우리 찬송가에 있습니까? 일하러 가세~ (노래 부름) 기독교가 뭡니까? 기독교가 우리 조선 민족들한테 너희들 일해야 한다,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근면해야 한다, 근면해야 한다. 그걸 깨우쳐 준거야. 스콜필드 박사라는 분이 선교사였는데, 일제 때.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하나님은 조선 민족에게 나라와 긴 손톱을 두 개를 주셨다고. 아마 양반들이 옛날 청나라 사람처럼 손톱을 안 깎은 모양이에요. 우리나라 양반들이. 하나님은 조선민족에게 나라와 긴 손톱을 두 개를 주시면서 너희들이 선택해라, 이렇게 하나님 말씀하셨다. 그런데 조선 민족은 애닳게도 나라를 선택하지 않고 긴손톱을 선택했다. 양반들이 얼마나 게으르고 민영익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민비의 친척되죠. 일제 말에 굉장히 높은 벼슬도 하고. 이 사람은 일을, 물론 그때 양반들은 아무도 일하는 사람 없었습니다. 양반들이 일하는 것은 수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면 양반들은 뭐하느냐. 긴 담뱃대에다가 담배 피우고 그다음에 또 할 수 있는 건 뭡니까? 앉아가지고 독경, 독경이 아니고 감독? 같은 걸 합니다. 그것만 하느냐. 그러면 또 이렇게 하여튼 게으른 조선민족의 상징은 아까 말씀드렸지만 게으른거야. 그런 게으른 것을 우리 기독교 정신이 들어 와서 그걸 깨자고 한 것이 우리 기독교입니다.    

당시 일본에 유학을 많이 갔어요. 돈 많은 사람들이. 그런데 돈 많은 사람들이 양반 자제겠죠. 일본 유학가서도 일을 하느냐. 일을 안 해. 조선 민족의 그 못된 관습 때문에. 일을 안 해. 일을 안 하고 뭐하느냐. 지금 제가 또 하나 읽어드리겠습니다. 조선 지식인이 어떤 거였나, 그 당시. 조선 유학생 90%가 사회학, 철학, 정치학에 코를 묻고 있는데 그들의 게으른 혀를 굴리는 데에는 사회주의가 이상적일 것이다. 이거 윤치호 일기에 나온 거예요. 그 당시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일본 가서 유학했을 때 공학을 한다거나 의학을 한다거나 진짜로 우리가 이 나라가 비탄에 빠진 이 나라를 구하려면 그런 게 필요한 것 아닙니까? 과학을 한다거나. 그런 것 아무 것도 안 하는 거야. 사회학, 철학, 정치학 그거 뭐냐. 다 혓바닥 놀려서 게으르게 먹고 살려고 한다 그거야. 그게 우리 조선사람들 엘리트들의 생각이었어요.     

윤보선이라는 대통령 아시죠. 그 사람이 영국의 에든버러 대학을 나왔습니다. 문학을 했어요. 그 사람은 집이 백 칸이 넘는, 백칸짜리 집이에요. 안국동에. 그런데 이 사람이 부자니까 영국가서 뭘 했느냐. 문학을 했어. 문학을 했는데 그 때 문학을 하면서 집에 다가 학비를 보내시오. 내가 문학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학비를 보내라고 했는데 800파운드, 그 당시 아마 한 학기하고 생활비하고 800파운드였던 모양이야. 아마 쌀이 100가마 이상 되겠죠. 그걸 이제 보내라고 한 거야. 그걸 보고 통탄을 하였네, 윤치호가. 아니, 그 비싼 돈을 들여서 그것도 영국 에든버러에 가서 문학을 하다니, 지금 우리나라가 당장 필요한 거는 나라를 부강시키고 어떻게 해서 든지 국권을 회복하고 이렇게 해야 하는데 어떻게 문학을 네가 선택하냐, 꾸짖는 편지를 쓴 게 있어요. 우리나라 그 당시 지식인들이 라는 게 다 똑같았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떻게 또 버전업을 시켰느냐 하면, 이 윤치호라는 사람은. 조선유학생들이 일하기가 싫다, 이거야. 앉아서 순 말로만 하는 것 좋아한다 이거야.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지고 이게 아주 우리 민족의 DNA로 남아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윤치호라는 사람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조선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딱 맞는 거다, 체질상. 왜 그러냐. 공산주의가 사람들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기 보다는 남의 노고에 얹혀살기를 조장한다. 이것이 유교를 가진 조선과 공통점이다. 그렇죠? 공산주의도 자기가 일하는 겁니까? 자기 일 안 하려고 하잖아. 정부가 세금 내라고 해서 세금 내서 나니까 어떻게 해서 든지 놀자고 하는 게 공산주의 아니에요? 사람이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자기 노력과 땀으로 일해야 하는데 돈 번 사람들은 다 우리 것을 착취했다, 그러니까 저 사람 것 뺏어서 우리가 먹자. 그게 아주 심플하게 얘기하면 그거 아니겠어요? 조선의 과거 조상들의 그 피에는 오히려 공산주의가 맞는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조금만 먹고 살만한 사람들에게 달라 붙는 친인척들, 조선은 옛날부터 공산주의를 해왔다. 조선버전의 볼셰비즘, 공산주의죠. 공산주의는 강도짓을 무산자의 영광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그 이조 말기에 우리 민족들의 피에는 공짜로 놀고 먹는 게 아주 몸에 박혀 있었대요. 하여튼 이런 나라였어요.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하고 그런데 그런 나라에 선교사님들이 와가지고 변화를 시킨 거야. 제가 국립민속관인가요? 경복궁에 있는 것. 거기에서 재작년에 무슨 사진전이 있었어요.    

사진전을 가봤는데 그게 뭐냐 하면 북간도에 명동이라는 데가 있었어요. 거기에 한 100 몇 명이 처음 가서 정치학을 했는데 이 사람들이 어떻게 정치학을 해서 자기들이 일궈 나갔느냐 하는 것을 그 후손이 사진을 전부 다 발견을 했어. 그래서 사진전을 연거야. 거기에 가보니까 그 당시 북간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깨끗하고 열심히 살았는지 정말 감명스럽더라고요. 이렇게 게으른 나라의 피를 타고 났는데 선교사님들, 거기에 목사님이 있었는데 김약연? 목사라는 분이 가족을 한 120명 5가구를 끌고 가서 거기에서 교회를 만들었어요. 명동교회를 만들고 명동학교를 만들고 명동유년주일학교를 만들고 명신여학교를 만들고. 사진전을 했는데 이렇게 아까 이가 득실거리고 냄새가 나니까 조선이었는데 얼마나 깨끗한지 몰라요. 애들이 중고등학생들에게 전부 다 여학생들에게는 세라복을 입히고 실험실에는 전부 다 실험복을 입혀서 비커 이런 실험 기구들이 다 차 있고, 애들도 악패?를 만들어 가지고 브라스밴드를 만들어서 지휘복을 입혀서 교회를 지었는데 교회가 500명이 다니는 교회를 만들었어요. 그렇게 거기에서 잘 살았어요.    

우리가 게으른 가운데 기독교를 개종을 하고 우리가 하나님 뜻에 맞게 살기로 작정한 다음에 이렇게 달라지는 거예요. 그래서 참 하나님이 우리한테 얼마나 많은 것을 조선 민족들에게 보여줬나 하는 걸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일제 시대가 지났어요. 그래서 우리한테 독립을 주셨어. 독립을 주셨으면 잘 살게 만들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36년을, 40년을 우리가 광야에서 방황을 했는데 잘 살아야 되는데 또 하나님은 시련을 주신 거야. 분단이야, 분단. 남북 분단을 만들게 해 주셨어. 그것도 지금 와서 보면 저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봐요. 아까 얘기했죠. 조선 지식인들이라는 건 다 거의 공산주의 사상에 가깝게 있었어요. 만일 그때 통일한국을 주셨으면 한국은 공산주의가 되는 거예요, 그때. 자동적으로 공산주의가 되는 거예요. 그 당시 남한에 얼마나 많은 공산주의, 그러니까 조선노동당이 있었습니까?    

그 사람들이 나중에 다 여순반란 사건 같은 것 일으켰는데 그 당시 우리 체질로 봤을 때 한국한테 온전한 독립을 주셨으면 우리는 공산화 될 수 밖에 없었어요. 그 당시 위에는 다 소련이고 그 옆에는 다 중공이고, 그러면 우리가 거기에서 견뎌낼 수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를 분단시켰어요. 분단시킨 이유가 뭐냐. 그때는 안타깝고 이게 뭐냐, 도대체. 우리는 독립을 얻었는데 독립도 못하지 않았느냐. 그렇지 않다 이거예요. 하나님의 뜻으로 보면 너희들은 내가 불쌍해서 독립을 시켜줬지만 앞으로도 너희들은 더 고난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어. 아직도 너희의 그 게으름, 죄 깨끗하게 안 된 거야. 분단을 시킨거예요. 분단을 시킨 것이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우리한테 분단이 됐기 때문에 한국이 이렇게, 이 정도 살게 된 거예요. 만일 그때 공산주의가 됐으면 우리가 지금 어떻게 됐겠습니까? 지금 월남, 중국, 중국은 지금 몇 년 사이에 잘 살아졌지만. 지금 북한, 그게 우리 현실이에요. 남한이 그 당시 통일됐다면 지금 북한이 되어 있는 거야.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놔둬 주신 게 아니야. 하나님은 너희들은 안 되겠다. 다시 고난을 더 가져라, 그래서 분단을 시켰어요.    

그것 뿐입니까? 6·25까지 만들어 주셨어요. 이 6·25까지 주신 거야. 우리 생각에는 '이야, 하나님 참 너무 하다, 이럴 수가 있냐.' 어떻게 6·25를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6·25가 저는 이렇게 얘기하면 지가 죽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6·25를 또 저렇게 미화한다는. 6·25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단련이 된 거예요, 6·25가 있었기 때문에. 미국은 그 당시 한국을 떠나려고 했어요. 1949년에 애치슨 라인이라는 걸 만들어서 미국은 방호책임을 한국에서 제외한다. 일본하고 대만까지 만 미국이 방호책임을 진다. 그리고 1949년에 여기 남한에 있던 미군들은 다 철수 했어요. 철수하고 나니까 1950년 북쪽에서 쳐들어 온 거예요. 소련과 중국을 지원을 받아가지고. 그러면 그때 6·25 전쟁이라는 건 6·25전쟁이 그렇게 났으면 우리는 소련이나 중공 밑에서 그 후원을 받은 북한에 우리 다 지금 다 흡수되고 말았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안 되겠다, 너희들 붙잡아야겠다. 너희들 어떻게 붙잡느냐. 미국을 못 가게 만들어 주겠다. 하나님이 미국을 우리 딱 붙잡아 주셨어요. 미국이 6·25 사변이 끝나면서 우리하고 안보조약을 맺었어요. 상호안보조약을 맺었어. 그건 뭐냐. 우리나라가 침략을 당하면 미국이 침략을 당한 것처럼 도와주고 미국이 침략을 당하면 우리가 침략 당한 것처럼 또 미국을 도와준다. 우리가 무슨 미국을 도와줄 힘이 있습니까? 괜히 미국에 조약을 맺기 위해서 그러는 거지. 그 안보조약을 맺었어요. 그것 때문에 지금 까지 그 조약이 있어요. 그것 때문에 지금 우리나라가 살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그것 때문에 지금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한국에 미군이 없는 한국을 한 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반미, 제가 친미를 하자는 게 아니야. 미군이 없는 한국은 금방, 옛날에는 소련 밑에 가 있는 거고 지금은 중국 밑에 가 있는 거예요. 중국의 속국이 될 수 밖에 없어. 이미 북한은 중국의 속국이 거의 되어 있지 않습니까? 6·25를 왜 주셨느냐. 미국을 붙잡기 위해서 하나님이 또, 돌아보면 미국을 붙잡기 위해서 주신 거야.    

그다음에 경제발전 했습니다. 경제발전했는데 경제발전 누가 시켰습니까? 우리 힘으로 했습니까? 물론 우리가 새마을 운동도 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뭐하고 다 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했습니다. 진짜 하루에 3교대씩 밤을 새워가면서 일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해서 상품을 만드는 게 다 어디갔습니까? 그 당시 신발, 앨범, 흑백TV 이런 것 다 우리가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것 다 어디서 사줬죠? 미국에서 사준 거야. 우리 경제개발의 가장 뿌리는 뭐냐, 미국에서 사줬기 때문에. 우리 경제개발도 사실 미국의 덕이 굉장히 컸습니다.   

저는 이런 얘기는 우리가 친미를 하자는 게 아니야. 나라를 지키려면 힘이 있어야 되고 힘이 있으려면 경제도 부강해야 되고 이런 게 골고루 다 있어야 돼. 그런데 그거 있는데에 하나님의 뜻이 지금 돌아보니까 다 이해가 될 만 하더라 하는 걸 말씀드리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때 1960년대에서부터 70년부터 우리는 공업화를 했잖아요. 그런데 공업화를 했던 가장 큰 힘이 뭡니까? 일본의 기술력이야. 일본이 우리보다 먼저 기술을 다하고 일본이 우리보다 앞장섰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일본만 따라 가면 되는 거야. 박정희나 삼성이나 다 일본 따라서, 현대자동차 다 일본 따라서 우리가 이만큼 컸습니다.    

일본이 우리는 지금 우습게 보지만 우리 일본 사람들 특히 우습게 보죠. 쪽빠리들 이렇게 생각했지만 일본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경제가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던 거야. 또 하나, 중국. 그냥 지금은 중국이 달라졌지만 우리가 막 경제발전을 할 때 중국은 뭐했습니까? 중국은 문화혁명을 했어요. 모택동 밑에서. 문화혁명이라는 게 뭡니까? 그 공산주의 젊은 애들이 다 내쫓는 것 아닙니까? 윗 사람들 다 내쫓고 다 폭력으로 정권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한 20년을 중국이 문화혁명으로 경제고 뭐고 다 내팽개쳤어요. 우리가 그 사이에, 20년 사이에 우리는 올라섰어요. 어느 단계까지 올라섰어요. 그러니까 깜짝 놀라고 중국이 1980년부터 지금 등소평이 와서 이런 개혁개방이다 해가 지고 지금 세계의 G2나라가 된 것 아닙니까?    

그러면 안보가 필요할 때 하나님은 미국을 우리한테 주셨고 경제가 필요할 때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 우리나라를 있게 해 주시고 이런 게 그냥 보통 생각하면 다 역사가 그런 거야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뜻으로 보면 이게 당연하게 이렇게 온 우리의 역사라 이거예요. 지금 제가 걱정되는 거는 이제 중국이 옛날 중국이 아니잖아요. G2가 됐어요. G2가 뭡니까? 세계에서 두 번째 강대국이야. 우리는 평생 미국이 제일 큰 나라고 제일 잘 사는 나라인줄 알았는데 앞으로 2015년, 많이 남지 않았어요. 4년 뒤에는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큰 강대국이 된다. 아니, 강대국보다 제일 생산을 많이 하는 경제제1의 국가가 된다 이거예요. 물론 인구가 많으니까 개별 소득을 따지면 미국이 앞서지만 전체 생산량으로 보면 중국이 1위예요. 그러면 지금 까지는 미국이 1위였지만 앞으로는 중국이 1위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게 2015년이에요. 그러면 2015년 이후에 한국은 어떻게 될 것이냐. 이게 상당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미국이 계속 있으니까 잘 봐주겠지, 이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는데 중국이 어떻게 방향을 바꾸느냐에 따라서 우리나라에 아주 막대한 영향 준다 이거예요. 이것도 우리가 잘 해결을 앞으로 해나가야 할 일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중국이 G2로 올라선 것까지는 좋은데 거기에 나는 또 하나님이 뜻이 저는 있다고 봐요. 그건 뭐냐. 과거에는 세상의 축이 어디였느냐 하면 대서양이었어요. 미국과 구라파였어요. 그런데 이제는 일본, 중국, 한국 이 동북아가 세계의 중심이 되어 가는 거예요. 중국이 1위 국가가 되지, 일본이 3위나 4위 국가지. 한국이 7~8위 국가지. 그러면 이 동북아가 세계의 중심권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거는 또 뭐냐. 거기에 또 우리 한국이 앞으로 미래를 어떻게 가야 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지정학적인 것이 있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시간이 없는데, 이렇게 역사를 제가 훑어보면서 중국을 우리가 한편으로는 우리 물건을 수출해야 하니까 중국이 우리하고 친해져야 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은 아직 공산주의를 채택하고 있잖아요. 또 북한하고 가깝잖아요. 그러니까 중국의 영향에 따라서 우리는 통일이 되고 통일이 안 되고 그럴 가능성도 굉장히 많아졌어요. 그러니까 중국이 굉장히 중요한 나라로 우리한테 됐어요. 그러니까 중국을 하나님께서 터치하셔야 된다. 중국을 어떻게 터치할 거냐. 그것은 우리가 아직 모르겠어요. 중국에 지금 1억명이 기독교 신자가 있다고 해요. 그래서 나라에서 인정하는 기독교 말고 그건 교회를 세우게는 하거든요. 그건 나라가 다 감시하는 거고 처속? 교회까지 합쳐서 1억명이라고 하는데 중국이 앞으로 하나님의 터치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모르겠지만 공산주의라는 것이 우리가 무슨 협상을 통해서 이렇게 망하는 건 아니에요. 그렇게 안 망해. 하나님이 터치가 되어야 해.    

그건 뭐냐 하면 동부에서도 다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폴란드가 제일 먼저 변했는데 폴란드를 제일 먼저 변하게 한 건 누구입니까? 그 당시 바오로 2세입니다. 바오로2세가 거기에 가서 설교를 하고 했기 때문에 그때 터치가 되어서 폴란드가 변하기 시작했어요. 소련이 왜 붕괴를 했습니까? 소련이 그냥 붕괴한 게 아니에요. 레이건 회고록에 보면 레이건이 분명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레이건은 소련을 무슨 핵무기 개발 경제를 서로 덜해서 소련을 개방하고 이래서는 소련이 변하지 않는다 이거예요. 하나님이 터치를 해야 한다. 레이건이 아주 믿음이 좋았던 사람인 것 같아요. 겉으로는 무슨 영화배우라고 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굉장히 경시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하나님의 터치가 있어야 한다. 그 하나님의 터치를 어떻게 만들거냐. 고르바초프를 개종을 시켜야겠다. 고르바초프가 교회 나오도록, 하나님 믿도록 만들어야겠다. 그래 가지고 정상회담을 하는데 1985년 한 4차례를 만났는데 그때 비밀이죠. 두 사람만 있을 때 레이건이 고르바초프한테 전도를 했어요. 너, 하나님 믿어야 한다. 너 나보고 헤어질 때는 God bless you 이러더라 이거야, 고르바초프가. 너 God bless you라고 얘기하지 않았냐. 너 하나님 믿어라, 하나님이 계시다. 내 아들이 있는데 내 아들은 지금 하나님 안 믿는다. 나는 내 아들이 꼭 하나님 믿기를 바란다. 그러나 걔한테 얘기하고 싶은 게 있다. 뭐냐, 좋은 식당에 데려가서 우리 아들한테 좋은 음식을 먹이겠다. 그러면 잘 먹을 것 아니에요? 그리고 나서 아들한테 묻겠다. 얘야, 이 음식이 어디에서 만들어 졌는데 네 앞에 와 있니. 그러면 글쎄요, 그거 주방에서 만드는 것 아니에요. 그렇게 얘기할 것 아니냐. 그러면 너는 누가 만들었냐. 너 여기 와 있는데 누가 만들었냐. 하나님이 만든 거예요, 하나님. 고르바초프 당신이 하나님을 믿으세요. 직접 정상회담을 하면서 하나님을 믿으라고 전도를 했어요.    

카터 대통령이 1978년에 한국에 와서 박정희 대통령한테 하나님 믿으라고 전도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하여튼 공산주의라는 것은 그렇게 우리가 뭐 협상을 통해서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남북통일이 되고 이런 것 없어요. 그런 것 일어날 수가 없어. 지금 남북을 분단시킨 이유가 다 있어. 왜냐, 하나님은 통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한다는 걸 우리 민족한테 다시 한 번 보여주려고 한다이거야. 분명히 보여주실 거예요. 그것은 우리가 뭐 남북회담해서 개방정책을 써가지고 그렇게 안 돼. 분명히 10년 내에 하나님의 터치가 온다 이거예요. 그때 한국민족이 아, 이게 뜻이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되는 거예요.    

제가 왜 이 기회의 나라로 만들게 해 주십시오. 우리나라 기도를 하느냐 하면 우리나라가 보통 나라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한테 매 순간 매 순간 기회를 주셨어요. 지금은 어떤 기회를 주셨습니까? 모든 나라가 한국으로 다 오려고 해요, 아시아에서. 우리도 아시아 전도대회에 나가지 않습니까? 아시아에서 베트남, 캄보디아, 모든 사람들이 한국에 오고 싶어합니다. 한국의 예술, 체육, 문화, IT 기술 그거 다 배우려고 해, 다 오려고 해. 그 사람들 생각에 한국은 기회의 나라라는 거예요. 옛날에 우리가 미국을 보고서 미국은 기회의 나라라고 했어요. 그런데 미국이 그 기회의 나라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터치가 있는 그런 축복받은 청교도 사람들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지금 까지 복을 받아서 제일의 국가가 되었지만 지금 미국이 점점점점 쇠퇴해, 왜 쇠퇴하는 겁니까? 미국은 왜 쇠퇴합니까? 사이클이 있는 거예요, 사이클.   

그 사이클은 우리 인간 잘못으로 있는 거야. 가난하고 어렵고 이럴 때는 열심히 노력해. 절약해. 그러면 가난한 고난 있다가 절약하고 열심히 하다가 그러면 돈이 생겨, 부유해져, 번성해. 그러면 그 다음에 뭐가 생깁니까? 그 다음에 퇴폐, 퇴폐로 가는 거야. 그건 인간사가 똑같은 거야. 모든 세계역사는 똑같은 거예요. 번성하고 잘 살게 되면 그 다음 사이클이 뭐냐. 그 다음에는 자기가 나태해지고 게을러지고 부패해지고 이기주의가 번성하고 이렇게 되는 거야. 그 다음 단계는 뭡니까? 몰락이야. 그다음에 몰락이 되는 거야. 이 사이클이야. 하나님은 우리 한테도 이런 사이클을 주실지 몰라요.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지, 이 사이클을 막을 수 있는 거야. 이 사이클을 막는 것은 하나님 뜻을 따라서 우리가 살아야 된다, 이거지. 기회의 나라를 달라는 건 뭐냐. 만들어 달라는 건. 미국 선조들이 처음 미국에 올라갔을 때 청교도들이 원하는 건 뭐냐 미국이라는 나라를 저 언덕 위에 빛나는 집으로 만들게 해 주십시오. 환한 새 예루살렘으로 만들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교도들이 기도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미국이 점점점점 쇠퇴해서 G2의 국가가 됐어요. 앞으로 G3가 될지도 몰라. 미국 기독기독교가 점점점, 유럽은 이미 끝났어요. 이제 그다음에 미국 차례야. 미국도 끝날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을지 몰라. 그러면 그다음에 하나님이 누구를 써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쓸 사람이 있어야 돼. 하나님이 쓸 사람은 전 대한민국이라고 생각해요. 왜? 이건 제가 괜히 우리가 우리 민족이 잘났고 뭐 이런 걸 부추기려고 하는 게 아니야.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어요. 일본이 우리보다 먼저 선교사가 왔어요. 임진왜란 때 일본 소서행장?을 따라서 선교사가 이미 조선에 왔어요, 일본에 있던 선교사가. 일본이 우리보다 먼저 200년, 300년 앞서서 선교사가 왔는데 일본은 하나 님의 나라가 안 됐어. 중국도 우리보다 훨씬 먼저 선교사가 왔어요. 그런데 중국도 하나님 나라가 안 됐어. 한국이 유일하게 그래도 지금 천 만 교인이라고 하는데 천 만 교인을 지금 가지고 있는 거야. 참된 신자는 얼마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하나님 나라로 지금 되어 있는 거예요.    

아까 동북아 시대가 열렸다, 여기가 중심이다 할 때 하나님은 아, 한국을 써야 되겠구나. 한국을 다음 세계의 중심국가, 세계의 새 예루살렘으로 만들어야 되겠다 하는 뜻이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걸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그런데 우리가 다음 주에 우리 오대원 목사님이 와서 나라를 위한 기도를 해야 하는데 나라를 위한 기도 뭘 해야겠습니까? 나라를 위한 기도. 시간이 없어서 제가 간략하게 하고 그만하겠습니다. 아까 사이클이 있다고 했죠.    

흥망성쇠, 번영, 퇴락, 부패 이거 다 이어 진다고 했죠. 우리가 이 사이클을 끊어야 돼. 이 사이클을 끊을 힘은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 성령님 밖에 없어. 그 사이클을 끊어야 돼, 우리 스스로가. 그래서 이 나라를 다시 성령님으로 도덕의 나라, 개혁의 나라로 다시 정신적으로 우리가 다시 바꿔야 된다, 이거야. 그게 우리의 첫째 기도가 되어야 해.

요즈음 왜 자살이 많습니까? 왜 꺼떡한 하면 대통령부터 다 죽습니까? 장관 지낸 사람들. 나라가 벌써 부패해 진거예요. 정신이 썩어진 거야, 벌써. 이러면 이 나라는 고꾸라 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정신, 이 나라의 정신을 살려주십시오. 이 나라에 성령이 임해서 정신의 부흥이 되게 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를 해야 된다는 게 제일 첫째입니다. 둘째는 뭐냐. 우리가 개혁, 지금 정신개혁에 따라 오는 건 뭐냐. 지금 이 시국, 이 나라가 너무 분열이 되어 있어요. 너무 분열이 되어 있어.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 그것은 잘 살게 된 데에도 큰 원인이 있어요. 그것은 또 있는 사람들의 그 원인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분열이 된 이 나라가 다시 통합이 되어야 해요. 지금 갈등에 쌓여있는 이 나라가 다시 화합을 해야 돼요. 그게 우리나라 굉장히 중요해요. 그것 없으면 이 나라는 이제 쓰러질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분열, 이런 것이 이 나라에서 떠나가게 해 주십시오. 두 번째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기도가 있습니다. 세 번째 기도는 북한에 대한 기도입니다. 아까 북한이 하나님의 터치가 있어야지, 북한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제 통일원? 사람들을 몇 사람 만나봤는데 이 사람들 예측은 2020년까지 북한에 분명히 변화가 일어나서 자기들 보기에는 통일이 있다고 믿는다,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2020년까지 우리 통일이 온다 이거예요. 그건 하나님 터치가 있을 때 통일이 오는 거예요. 그때까지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야 돼요. 지금 못 먹고 있는 북한 애들을 위해서 우리가 또 도와줄 것 있으면 도와줘야 돼요. 지난 번에 목사님도 그런 말씀하셨죠. 왜? 애들은 못먹이면 뇌가 상해요. 3~4살까지 뇌가 100% 발달을 하는데 그때 영양부족이 되면 평생을 애들이 IQ가 낮은 저능아가 되는 거예요. 북한애들이 다 저능아가 되면 나중에 통일되면 우리가 어떻게 다 먹여살리겠습니까? 우리가 북한을 도와줄 것은 식량이나 의약품이나 영양가 있는 것 이건 도와줘야 돼요. 도와주면서 북한이 하나님의 터치가 있기를 기도해야 된다. 세 번째는 북한에 대해서 기도.     

네 번째, 중국의 민주화, 중국의 자유화를 위해서 우리가 기도해야 해요. 그 필요는 아까 말씀드렸죠. 중국이 우리한테 굉장히 중요한 나라가 됐어요. 지금 식으로 가면 조선반도, 이 한반도가 어떻게 될지 몰라. 중국에 자유화, 민주화가 있고 중국의 기독교화가 이루어져야 해. 중국의 기독교화가 이루어지면 우리나라 통일은 자연히 되고 중국의 민주화도 자연히 이루어지니 겁니다. 그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그걸 놓고 중국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다섯 번째, 제일 중요한 거예요. 우리 좋은 지도자를 좀 주십시오, 좋은 지도자. 이거 중요한 시점인데 저는 미국의 파운딩 파더들, 조지워싱턴, 제퍼슨, 존 아담스, 해밀튼, 1976년 미국이 독립을 차지했을 때의 그 미국의 무수하게 좋은 지도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미국이 독립이 가능했던 거예요. 그 사람들은 그 당시 월급을 안 받으려고 했어. 나라일을 하는데 월급을 받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 안 받으려고 했던 사람들이에요. 미국의 파운딩 파더들은, 그런 사람들이야. 링컨은 너무나 잘 아니까 말할 필요가 없죠.     

링컨은 무슨 일을 할 때 마다 다기도하면서 했어. 링컨의 명 연설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링컨이 공부 못 한 사람이에요. 켄터키 옛집에서 책 이렇게 해서 그 사람 학교도 못 가봤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이 그렇게 명연설을 합니까?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를 세우겠다. 그런 명 연설을 어떻게 합니까? 이 사람은 자기가 중요한 연설이 있을 때는 요즈음 우리나라는 다 밑의 사람이 써오잖아요. 자기는 그거 안 해요. 안 하고 성경책 하나, 미국 헌법 하나 딱 두 개만 들고 자기가 혼자 멀리 백악관을 떠나서 혼자 갑니다. 가서 성경을 읽으면서 미국 헌법을 읽으면서 내가 이 백성들한테 미국 시민들한테 무슨 얘기를 해야 되겠나 일주일 동안 기도하면서 연설문을 썼어요. 그래서 링컨의 연설문이 그렇게 명 연설문이 된 거예요. 우리 지도자들이 저는 그런 지도자가 좀 나와야 된다. 지도자가 중요해요. 그런데 우리는 지금 지도자에 너무나 기근이 들렸어요. 우리가 좋은 지도자를 만나서 우리가 과거 미국 파운딩 파더 같은 그런 지도자들 우리한테 주십시오. 그런 정치지도자를 주셔서 이 나라를 좀 살리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기도, 마지막 할 것은 우리 크리스찬들이에요. 한국이 천 만이에요. 그런데 이 크리스찬이 지금 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걸 냉철하게 생각해 봐야 돼요. 며칠 전에 임요한이라고 연대 세브란스 병원 교수인데 선교사 아드님이신데 어느 신문에 기고를 했더라고요. 거기에 그런 얘기가 있어요. 만일 지금 한국 교회에 예수님이 며칠 목욕을 안 하고 또 허름한 넝마를 거치고 한국교회에 들어 설 때 한국교회에서 그거 받아줄 교회가 한국교회에 어디 있느냐, 있겠느냐 하고 기도를 했어요. 우리가 이거 그냥 넘길 일이 아니야. 우리 크리스찬들이 먼저 각성을 해야 돼요. 다른 사람 손가락질 할 것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각성해야 돼요. 영국이 그렇게 한때 해가지지 않는 나라가 된 건 뭡니까? 그리고 영국은 망했죠. 이유가 윌보 포스너? 그리고 감리교 했던 누구죠? 그런 분 존 웨슬러, 요한 웨슬러나 이분들의 성령운동? 때문에 가능했던 거예요. 당시 영국에서 영국 상인들이 세계에서 제일 정직했다 이거야. 제일 정직하니까 영국 상인들은 다 믿을 수 있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왜 영국상인들을 믿을 수 있습니까? 그 당시 윌보 포스너 이런 사람들이 개혁운동을 했기 때문에, 크리스찬 개혁운동을 했어요. 그러니까 우리 크리스찬이 개혁운동에 앞장서야 해요. 준비한 건 많았지만 시간이 되어서 나중에 기회있으면 개인적으로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여튼 크리스찬이 먼저 정신차리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어요.   

우리나라 옛날에 80불 하던 소득이 아프리카 기니? 하고 같은 80불의 나라였어요. 불과 50년 전에. 그런 나라를 이렇게 만들어 주신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괜히 그렇게 만들어 주셨습니까? 미국이 기회의 나라가 됐듯이 우리나라도 기회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 소망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수요 여성 예배, 이렇게 또 주님을 찾아 나왔습니다. 주님, 저희들 이 나라를 향해서 주님의 뜻을 지금 생각해 봤습니다. 주님, 저희 우리 크리스찬들이 각성하게 먼저 도와주시옵소서. 저희 생활을 돌아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이 나라를 축복하셔서 이 나라 사람들이 고통당하지 않고 가난하지 않고 불행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 이 나라가 앞으로 세계 복음화와 세계 선교화의 주축이 되는 나라, 미국을 다음 이어 가는 나라가 주님께서 만들어 주시옵소서."

ⓒ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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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친구든지 원수든지 모든 사람의 유익을 추구해야 한다

1. 우리는 선행을 하다가 피곤해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성내지 아니하는"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들이 행한 대로라면 선대를 받을 자격이 없지만 우린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없이 선을 베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사람의 실존적이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고, 다만 우리 모두가 경외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피조물로 생각하라고 가르침으로써 탁월한 논의로서 우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믿음의 권속들에 속한 자들의 하나님의 형상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고 회복된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당신의 친절한 봉사를 필요로 하는 어떤 사람이 당신 앞에 나타나면, 당신은 도움을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령 그가 낯선 사람이라고 합시다, 주님은 그에게 자신의 인을 쳐서 당신과 한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 자신의 혈육을 멸시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가령 그가 아주 멸시받는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황송스럽게도 주님은 그를 자신의 형상으로 단장할 만큼 귀하게 여기십니다.

가령 당신이 섬길 의무를 전혀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자신의 대리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크고 많은 축복을 받은 당신은 베풀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그가 당신으로부터 최소한의 선행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당신이 자아를 죽이고 당신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주도록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그가 아무런 친절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오히려 그는 당신에게 상처와 모욕을 줌으로써 당신을 분노케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그를 사랑으로 감싸지 않고 모든 친절을 베풀지도 않아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당신은 그는 좀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은 오직 모든 사람의 모든 무례함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라고 명령하십니다.

3.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해 받은 것을 친절로서 갚고, 저주를 축복으로 돌려주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사악함만을 생각해서는 안되고,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자임을 영원히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인간의 잘못을 덮고 지워버리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아름다움과 존귀함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고 끌어안게 될 것입니다.

(마 5: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 17: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 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D0VS/4522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캘리포니아의

등뼈라고 불리우는

씨에라 네바다 산맥에 위치한

 

캘리의 국립공원들,

예컨대, 요세미티, 킹스캐년,

세쿼야 등은 많은 호수를 지니고 있습니다.

 

 각 국립공원들은

저마다 경치가 빼어난

아름다운 호수들을 지니고 있지만

  

몇몇 호수를 제외하면

일반인들의 접근이 쉽지 않습니다.

  

세쿼야 국립공원만 해도

백개가 훨씬 넘는 수많은 호수가 있지만

 

세쿼야에 다녀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 하나의 호수도 보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깊은 산속으로

하이킹하지 않는 이상

이들 호수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쿼야에

호수가 있다는 얘기를 하면

세쿼야에도 호수가 있나 하며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하지만 세쿼야에는

일반인들이 자동차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멋진 호수가 있습니다.



 

이 호수의 이름은

바로 흄 레익(Hume Lake)입니다.




이 호수에 가려면

일단 세쿼야 국립공원으로 들어가야겠죠?



하지만

흄 레익의 위치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세쿼야 국립공원이 아닌

Sequoia National Forest에 있습니다.



세쿼야 지역에는

거대한 세쿼야 나무만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사실은

한 없이 아름다운

Hume Lake같은 곳도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180번에서 흄레익으로 들어가는

13S09 길에서 바라 본 흄레익의 모습입니다.



흄레익으로 가려면

13S09, 혹은 13S06으로 가거나

 

도로 이름이 헷갈린다면

킹스캐년으로 가는 180번으로 가다가

Hume Lake Rd 길이 나오면 우회전해서 들어가면 됩니다.

 

위의 사진은

13S09 길에서 바라 본

킹스캐년의 Cedar Grove로 가는 길입니다.



흄 레익은

자연 호수가 아닌

인공적으로 조성된 호수입니다.



Hume-Bennett 이라는 목재 회사가

벌목한 나무를 저장하기 위해, 그리고 수운할 장소로

1909년에 짓기 시작하여 불과 114일만에 완공한 댐이라고 합니다.



1890년, 세쿼야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세쿼야 국립공원 지역내에서

모든 벌목행위가 원천적으로 금지되었지만

 

흄 레익 주변은

국립공원이 아닌

National Forest의 사유지였기 때문에 

 

Hume-Bennett 목재 회사는

계속해서 주변 지역을 벌목해 나갔습니다.



그러던 중 1917년,

이 지역에 대형 산불이 발생하여

목재회사의 설비와 시설이 모두 불타버렸죠.

 

그리하여

연방정부에서는

1935년에 흄 레익을 비롯한

주변의 모든 지역을 사들였습니다.



그 후,

연방관리 하에 지역은

마침내 Sequoia National Forest가 됩니다.



흄 레익과

그 주변 지역에서는

즐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이곳이 호수이니 만큼

당연히 수영같은 물놀이가 우선이겠죠.

 

호수지만

beach가 있어서

물놀이하기에 딱 좋습니다.



물이 잔잔하여

카약이나 카누 타기에도 적격입니다.





이 분은

노젓는 힘이 좋았는데

커다란 부표같은 것을 달고도 잘도 가더군요.



카약이나

카누가 익숙지 않다면

이처럼 고무 보트를 타면 되겠죠?



호숫가에 앉아서

무작정 숲과 호숫가를 바라보며

방해받지 않는 안락한 시간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호숫가 근처에서

홀로 독서하는 것도

멋진 휴식이 될 것입니다.



흄 레익에서의 여명 빛은

사진사들에게는 인기 짱입니다.



숲으로 비취는

아침 빛 또한 일품입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은

Hume Lake Christian Camps입니다.



이곳 주변엔

많은 랏지와 식당, 레스토랑이 있어서

여름 휴가에는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지요.



흄 레익에서

아침 일출을 바라보는 사람들...





아침의

신선한 공기 속에

흄 레익 트레일을 걷는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트레일을 걸으면서

보는 경치도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한낮에 구경하는

생기발랄 +패기 넘치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또 다른 구경거리입니다.



올 여름 휴가는 어디로 가세요?

아직 장소를 정하지 못했다면 세쿼야로 가보세요.

 

자이언트 세쿼야의

거대하고 울창한 나무 숲과

아름답고 멋진 흄 레익이 있는 곳,

  

당신의 여름 휴가를

편안하고 즐겁게 해 줄 것입니다.


 

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blog.koreadaily.com/power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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