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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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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간증은 실제 인물이며 저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시는 집사님이십니다. 이분의 간증을 들으면서, 독자님 중, '질문'(Watchman)님의 체험 간증과 일치하여서 올려드립니다. **
안녕하세요, 이영미(가명)입니다.
오늘 이렇게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나의 간증을 할 수 있게 해주신 우리 주 예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먼저, 나는 여러분께 사단이 어떻게 성령님의 가면을 쓰고 왔는지 나의 체험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2007년, 저는 모 장로교회에서 열심히 성경공부도 하고 또 나름 열심히 우리 주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날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내 딸 민아(가명)를 만져주시기를 바랐고 난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내 딸 민아가 병이 다 낫게 되어 말도 하고 다른 아이들처럼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어면 하는 나의 간절함과 소망이었습니다. 난 기도를 잘 할 줄 몰라서 기도 시간이 매우 짧았습니다. 그리고 늘 기도하는 것이 되풀이하는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난 친구를 통해서 믿음이 참 좋으신 집사님 한 분을 소개받았습니다. 그 집사님은 믿음도 좋았고 사랑도 많은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영적 체험도 많이 하신 분이어서 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그분도 아픈 상처가 있어서 나에게 더욱더 신경을 써주셨고 우리 민아에게 아주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난 그분에게 많이 의지했었지요. 난 그분을 너무 좋아하였기에, 그분이 나가는 교회를 자진해서 따라갔고, 그 교회로 옮겨서 열심히 함께 그 교회를 다녔습니다. 우리 민아도 데리고 매주 주일 성수를 지키면서 열심히 그야말로 열심히 믿음생활을 해왔었지요. 그런데 난 그분처럼 방언도 할 줄 모르고 아무런 영적 체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난 그분에게 질투도 나고 속도 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집사님께서 사사기 6장 37-40절 말씀을 펴놓고 기도하라고 하더군요. 자기도 그 말씀을 펴놓고 기도하다가 응답받았고 많은 체험과 기도할 때면 성령님께서 만져주시는 것을 매 기도시간마다 느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난 그분 말씀처럼 밤마다 사사기 6장 37-40 말씀을 펴놓고 기도하기를 시작했고 난 주님께서 나를 만져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짓말같이 나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고 진동이 왔습니다. 어느 날은 감당할 수 없을만큼 몸에 진동이 오면서 떨리기 시작하면서 온몸이 뛰는 듯 공중에 뜨는 듯, 도저히 절제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내 온몸의 기운이 모두 다 빠지는 듯했고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온몸에는 땀으로 범벅이 되고 신기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난 점점 신비주의자가 되어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 집사님을 따라서 외국 분이 인도하는 “치유 집회, 신유 집회도” 서슴없이 따라다녔습니다. 난 사실 오랫동안 신유 집회라면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민아 1살 때 유명하다는 흑인 치유강사가 왔다기에 한 번 가봤었는데 그때 우리 아이 아빠랑 저는 너무 실망을 해서 그 후 10년 동안 그런 집회라면 아예 가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다시 치유, 신유 집회에 정신을 빼앗기고 성령 충만한 집회라면 우리 딸 민아를 데리고 열심히 찾아갔습니다. 그러다가 집회 때 방언도 받고, 수많은 외국 목사님들로부터 안수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 몸이 점점 이상하게 뭔가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할 때면 환상도 보이고, 기도하다가 내 입을 통해서 예언도 하고, 서울 어느 큰 교회 C 목사님의 DVD 설교집을 틀어놓고 찬양을 드리다 보면 내 손과 내 몸이 춤을 추기 시작했고 기도할 때면 내 몸을 가지고 어떤 힘에 의해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난 성령님께서 만져주시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대화가 시작되고 매일같이 대화를 통해서 많은 것을 체험했습니다. 자다가도 내 몸을 막 흔들어서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면 민아 방에 가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난 놀라서 급하게 민아에게 가다가 넘어진 적도 있습니다. 또 내 입을 통해서 민아가 6월 20일 날 말을 한다고 하는 예언도 주었고 8월 22일 날이면 민아가 자리에서 일어난다고 달력의 날짜까지 짚어주면서 예언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난 너무 좋아서 우리 남편이랑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귀라고 하는 느낌도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 많이 읽어라. 금식해라. 찬양 드려라. 기도 많이 해라. 교회 열심히 다녀라.” 이렇게 내가 원하는 것은 다 열심히 하라고 하니까( 만약 교회를 다니지 말라고 한다던지 성경을 멀리하라고 했더라면 의심했겠지요.) 전혀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다 복종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금식도 하루 한 끼만 먹고 30일 씩 3번을 연달아서 금식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금식할 때면 더 역사를 심하게 주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하다가 하품을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토하고 토할 때 이물질은 하나도 나오지 않으면서 창자를 다 뒤틀어서 토하게 합니다. 그때 난 너무 힘들어서 거울을 보면 핏줄이 내 얼굴에 가득했고 얼굴이 너무 심하게 상해있었습니다. 그래도 성령님께서 하시는 것이라 참고 기도할 때면 쓰레기통을 준비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런 상황을 담임 목사님께 의논하면 마귀가 빠져나가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다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귓가에서 무엇인가 소리가 들리듯 속삭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너 귀신하고 노는 거야. 너 지금 귀신을 부르는 것이야.” 그런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난 성령님께,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렇게 하면 내 방언이 또 마귀를 야단치는 소리가 나오는데 정말 무섭게 야단을 치고 그 방언이 나올 때면 난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내 몸을 뒤틀듯이 아주 심하게 야단을 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다 보면 정말 예기치 못한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내 입에서 흉측하고 괴상한 소리가 내 입으로 나오는 것이었어요. 정말 무서웠습니다. 머리끝, 털끝이 다 쭈빗쭈빗 섰고 소름도 끼치고 나의 혼이 다 나가는 듯했고 난 그 순간 “예수님 도와주세요.”를 얼마나 외쳤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귀신의 소리가 끝나면 내 손이 움직여서 귀신이 다 나갔다고 신호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3일 밤 똑같이 귀신한테 시달린 적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난 성령님께 물어봅니다. “예수님이 지금 어디 계십니까?” 하면, “네 왼쪽에 서 계시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대화한다는 것은 귀로 말이 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생각에서 떠오르는 말로 또는 내 입으로(육성으로) 물어보면 대답해 줄 때는 내 몸을 흔들어서 대답을 주는데 꼭 우리가 사람하고 대화를 하듯, “응, 그래. 그래 맞아.” 하는 듯 탁탁! 제 몸을 쳐줍니다.
그러다가 신나면 사정없이 내 몸을 흔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던 제 남편이 절더러 밖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꼭 미친 사람같다고. 난 그 말도 듣지 않고, 성령님과 대화한다고 확신하면서 내가 있는 곳이 어디든지 난 대화를 했고 방언으로 찬양도 드리고 난 그때 내가 정말 성령 충만한 사람인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렇게 2007년 1월부터 5월까지 성령님인 줄만 알고 의심하지 않고 열심히 기도생활을 해 나왔습니다.
우리 지역에서, 한 달에 두 번 정기적으로 치유 은사 집회가 있었는데 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우리 식구 모두를 데리고 열심히 그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집회가 열릴 때마다 유명한 강사들이 왔었는데 난 그곳에서 여러 가지 기이한 현상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서울의 한 대형교회 H목사님도 병낫기를 구하면서 그곳에 와서 앉아있었습니다. 저는 그분께도 안수를 받았습니다. 손에 금가루가 가득 묻어 있는 사람, 보석을 가지고 있는 사람, 입신한 사람, 이빨이 변해서 금이빨이 되는 것도, 또 하늘 문이 열려서 천국이 보인다는 사람, 또 안수 받고 쓰러져서 울다가 이유 없이 한없이 웃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것을 그들은 거룩한 웃음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웃는데 마음은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습니다. 집회 시간에는 뜨거웠는데 집회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맹맹한 느낌이었습니다.
이상한 느낌이 들 때마다 난 나보다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 나의 현상에 관해서 의논했지만, 오히려 그런 생각을 주는 것이 마귀로부터 오는 것이니까 속지 말고 믿고 계속 의지하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5월에 LA에서 유명한 ‘치유 은사’를 가졌다는 C.S라는 여자 목사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새롭게 하소서’ 기독교 방송국에서 간증도 하신 분이고 그 CD가 나한테 한 장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CD를 듣는 순간 내 몸이 춤을 추기 시작했고 하물며 그분과 전화 통화를 하기만 해도 내 몸이 쓰러지며 중심을 잡을 수 없었고 남이 부축해서 겨우 걸을 수 있었으니까요. 남편과 나는 그분이 정말 성령 충만한 사람인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제가 사는 지역으로 오시게 되어서 함께 지낸 적이 있습니다. 난 그분께 나의 모든 현상을 의논했고 그분은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성령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고 다른 영일 수도 있고 내 영, 내 자아일 수도 있다고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해서 속고 있다고 하더군요. 나의 예언도 거짓이니까 믿지 말라고, 다 잊어버리고 주님만 믿으라고 하더군요.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고 속도 많이 상했습니다. 방언도 물어보았지만, 통역을 해보시더니 방언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이니까 믿고 의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딸 민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믿고 기도하라고, 예언을 해주시고는 LA로 돌아가셨습니다. 역시나 그분의 예언도 날짜가 지나도 예언대로 우리 딸 민아가 일어나지 않았고 난 너무도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러나 난 다시금 치유집회를 찾게되었고 그곳에서 외국 사람 한 분을 만났는데 당신의 친구분 간증을 해주면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면서 기도하라고 마태복음에서 요한복음까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말씀들을 적은 종이를 주면서 꼭 승리하라고 하더군요. 난 말씀을 받아가지고 와서 그때부터 열심히 기도생활을 했습니다.
말씀 선포하고 방언으로 기도하고 그렇게 여러 날을 반복해서 기도하다가 어느 날은 정말 영에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는데 온 마음을 다해서 기도 드렸슨데 정말 너무나 깜짝 놀라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내 마음속 깊은, 아주 깊은 곳이라고 해야겠는데, 설명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아주 아주 깊은 곳, 마음 어디에선가 아주 속 저 깊은 곳에서, “성령이 아니다!”라고 하는 큰 소리가 마음으로부터 선명하게 들려왔습니다. 난 너무도 놀라서 한동안 아주 잠깐동안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가다듬고 모든 것을 하나하나 지나간 일들을 되짚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속은 것에 화가 났고 성령님인 줄만 알았던 것이 마귀, 사단이라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난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을 멈추었고, 방언도 마귀로부터 온 것이라면 멈추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다시 사사기 6장 37-40절 말씀을 펴놓고 간절하게 기도드렸습니다. 그런데 방언이 나오더니 이번에는 아주 짧은 방언이 나오더니 나의 혀가 밖으로 나오면서 괴물 소리를 내면서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난 너무 놀랐고, 하나님께 다시 보여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짧은 방언이 나오더니 나의 혀가 밖으로 나오면서 괴물 소리를 내더니 딱 멈추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난 하나님이 너무도 두려웠고 무서웠습니다.
항상 좋으신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이라고 늘 생각하고 믿었는데 그때는 나는 정말 하나님이 너무 크고 두려워서 어디로든 숨어버리고만 싶었습니다. 꼭 내가 벼랑 끝에 서 있는 느낌이었으니까요. 그때 나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이대로 귀신과 놀고 있다가는 지옥으로 가겠구나 싶더군요. 그때부터 다시 성경 말씀만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성경말씀이 마음속에 와 닿기 시작하고 깨달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렇지만 난 내가 나갈 교회를 잃었고 어느 교회를 가야할지 3, 4개월 방황하며 주님께 계속 좋은 교회를 찾게 해주십사 기도로 여쭈다가 별똥별 사모님(그땐 누군지 전혀 몰랐음)께서 부군 목사님과 함께 섬기시는 지금의 교회를 이 교회의 장로님을 통해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엇보다도 예배 시간이 나와 맞는 시간이고 해서 한 번 방문해보기나 하자고 왔던 것이 지금까지 4년 째 출석하며 섬기고 있습니다. 처음 참석하는 때가 12월 마지막 때였는데 주일 대예배 설교 말씀이 바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로 예배 시간마다 찬송에서도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예배시간 주보에 인쇄된 찬송을 펴는 순간 주보에 있는 찬송가 한 마디 한 마디가 빠져나와 내 얼굴로 다가오면서 내 눈으로 내 입으로 들어가는 듯 은혜로웠습니다. 나는 겁이 덜컥 났습니다. 주보를 덮었다가 다시 펴는 순간 하나님 말씀 한 말씀이 한 말씀이 또 다시 빠져나오는 듯, 내 얼굴로 다가오는 듯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마음에 뜨거운 감동이 온다는 것입니다.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자꾸 쏟아졌습니다. 그날은 하루 온종일 뜨거운 눈물로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이제 속지 않습니다. 사단에게 속아서 끌려다닌 지난 세월이 너무도 아깝습니다. 이제는 내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께만 모든 것을 맡기려고 합니다. 내가 내 딸 아이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너무 간절하게 소원하는 것을 알고 있는 마귀가 자신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내게 접근한 것을 나는 성령 충만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난 사단의 장난질을 통해서 더욱더 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정말로 천국과 지옥이 존재하는구나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간증을 읽으시는 여러분, 절대로 사람으로부터, 아니, 치유강사들에게 안수받지 말고, 또 방언 받지 마세요. 그 방언은 마귀로부터 왔음을 여러분께 고백합니다. 그 예언들도 틀린 것은 모두 사단에게서 온 것이라고 성경 말씀에 있다는 것을 우리 별사모님이 말씀해 주셨고 정리해 두신 글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난 보았습니다. 어느 여자 분이 내 앞에서 방언을 받을 때 그분의 혀가 밖으로 나오면서 괴물 소리를 내는 것을, 나 역시 방언이 바뀌면서 혀가 밖으로 나오면서 괴물 소리를 내는 방언을 한 적이 있으니까요. 그때는 마귀가 방해를 하는구나 했었는데 아닙니다. 그 방언의 실체는 괴물이었습니다. 어쨌든, 그 후로 저는 두 번 다시 방언 기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방언을 통해서 무시무시한 체험을 했으니까요.
여러분,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간증을 하게 해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믿으며 끝까지 간증할 수 있게 도와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믿습니다. 이 간증을 끝까지 할 수 있게 해주신 우리 주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아멘
참고:
내 사랑하는 딸 아이의 병명은 aicardi syndrome 이라고합니다, 아주 희귀병이고 전 세계에서는 300명, 미국 전역에서 50명 밖에 없다고 합니다. 제가 살고 있는 주에서도 단 한 명 우리 딸 '민아'뿐이랍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말을 할 수도 혼자 일어나 앉을 수도, 걸을 수도 없으며 눈도 제대로 뜰 수도 없습니다. 특수 제작된 침대에 누워서 산소호흡기에 의지하고 호흡하며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렇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 민아가, 그래도 주님의 도우시는 은혜로 올해 16살이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그들(치유 은사) 집회 장소에서 나타난다는 하얀 안개
그들은 이 현상을 "Dust Angel"(먼지 천사)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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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13-16절이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일전에 본 신문기사에 이러한 표현이 있어서 씁쓸했다....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교회가 세상을 향해 오히려 어둡고 부패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부정한 일을 해서 교회가 이 사회의 지탄을 받을 때 역공격을 받는 마태복음의 말씀이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빛과 소금의 의미는 빛과 같이 세상을 밝히고 소금과 같이 세상의 부패를
막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세상을 상대로 행하여야 하는 기독교의 역할과 기능"이라는 명제를 만든다.
세상을 정화시키고 윤리적으로 깨끗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기독교가 가져야 할 세상을 향한 책임이라는 점을 강조한 구절로써 우리는 이 마태복음을 이해한다.
물론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사람들 보다 더 도덕적이어야 하며 세상의 정화에 힘써야 함은 틀림없다 해도 성경이 말하는 빛과 소금의 비유는 그 강조점이 조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다" 라고 성경을 말한다. 그리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라고 또 말한다.
소금의 맛이란 말 그대로 "짠맛"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교회(성도)는 짠맛을 내는 기능을 한다는 말이다.
짜다고 하는 기독교의 독특한 맛을 내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다 더 모양새가 있는 소금의 방부제 효과를 첨가하여
세상의 부패를 막는 기능이란 견해를 만들었다.
결국 교회는 세상의 부패를 막는 기능을 가져야 한다는 사명으로 이 말씀을 이해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소금의 부패방지기능에 대한 성경의 언급은 전무하다.
그것은 우리의 소금에 대한 경험일 뿐이다.
성경은 "소금은 짠맛을 내고 있다." 라고 말했을 뿐이다.
계속보자...“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그러므로 쓸모없이 버려져 밟히게 되는 이유는 무언가?
말씀대로 인용하면 "짠맛을 내지 못하는 소금"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부패방지기능을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소금을 부패방지기능으로 보기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사람들은 "사명감"을 좋아한다. 특히 교회는 더욱 그러하다.
주님이 주시는 사명감이라 말들을 하지만
우리는 그 사명감이 우리의 성취욕으로 부터 왔다는 것을 부인 못한다.
기독교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비장한 결단으로 세워 진 것이 아니다.
세상의 부패와 싸워서 무언가를 성취하는 소금이 아니라
그저 소금의 기본특성인 짠맛을 내며 세상앞에 서 있는 것이 기독교인 것이다.
빛의 의미도 마찬가지이다.
사명감에 불타서 이 구절을 본다면 "어두운 이 세상을 빛으로 밝게 비추리라!" 라는 구호를 만든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무슨 말인가?
어두운 세상을 밝히 비추라는 사명을 주는 말씀인가?
사실 필자도 이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빛을 발하여 세상을 비추인다는 내용인가?^^
말씀을 그대로 읽어보라... 너무 쉬운 내용이다.
"산 아래 동네에서 볼 때 산 윗동네가 보이는 이유는 그 윗동네가 빛을 소유했으므로
숨기우지 못하고 잘 보인다"는 뜻이다.^^
어두운 밤이 되어도 동네가 있다면 불을 켤 것이고 자연히 그 동네는 그 빛으로 인하여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길을 잃은 나그네라도 그 불빛을 보고 "와 저기 인가가 있구나!"
하고 안심하게 된다. 교회가 이 세상속에서 이러한 존재인 것이다.
어두운 세상속에서 방황하는 자들이 볼 수 있게 불을 밝히고 서 있는 것이 교회이다.
빛을 세상을 향해서 강렬하게 내 뿜으라는 말씀이 아닌 것이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불을 켜서 아랫쪽에 두지 않고 윗쪽에 두는 이유는 집안 사람에게 모두 비취기 위함이란 말씀이다. 집안사람에게 빛을 비추는 이유가 빛을 비추어서 그 사람을 밝게 변화시키는 역할로써의 빛이
아니라 빛은 사람 앞에서 밝게 빛나고 있다는 "빛의 속성'을 말 한 것이다.
'비춘다"는 표현은 사실 "빛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어떤 대상에게 빛을 비추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교회는 빛을 지니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 빛을 봄으로 교회가 세상에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다시 정리를 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짠맛을 내는 독특한 존재인 소금과 같은 존재이고...
세상을 향해 밝게 빛나고 있는 빛과 같은 존재이다.
또 한가지 우리가 주의깊게 봐야 할 부분은...
이 소금과 빛의 비유가 "심령이 가난한자는..."으로 시작하는 "팔복" 다음에 나온다는 사실이다.
팔복은 "천국백성의 상태"를 예수께서 가르치셨으므로 그 다음에 나오는 소금과 빛의 비유는...
그렇다면 "천국백성은 어떠한 상태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으로 보는 것이 문맥적으로
극히 타당하다 하겠다.
그렇게 본다면 소금과 빛의 비유는 사명을 가지고 어떠한 일을 하는 역할과 기능의 말씀이 아니라 팔복에 연관성이 있는 천국백성의 상태로써의 "어떠한 사람인가?"에 대한 말씀임이 자명하다.
다시말해 어떤 역할을 해서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드러나는 업적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팔복을 소유한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에 촛점이 있다 하겠다.
우리는 말씀대로 짠맛을 내는 소금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독특한 소금만이 가지고 있는 짠맛이란 무얼까?
다시말해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맛은 무얼까? 두말할 것 없이 "복음"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우리만의 이 독특한 복음을 부끄러워 한다.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해야 할 교회가 사람의 마음을 먼저 위로 한답시고 교인들의 사업번창에
관심을 보이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처세술로 상담하는 기관이 되어 버렸다.
결국 세상에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전혀 독특하지도 짜지도 않은 맛을 가진 소금으로
짠맛을 내려 하고 있다.
교회가 짠맛을 내려면 인간의 죄를 들추어 내야 하는데 사람들의 기호를 생각해서 교회는
죄를 선포하지 않는다. 그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를 연발하며 귀에 듣기 좋은
"단맛"을 내기에 급급하다.
성경은 무어라 경고하는가?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소금의 맛을 잃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죄를 씻는 능력...구원을 주는 능력이 상실된 교회" 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언가.
그러한 교회는 어찌 되는가...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히"는 것이다.
이것은 일전에 소개한 "달란트의 비유" 와 마찬가지로 "천국백성의 비유"이다.
달란트를 땅에 묻은 사람이 밖으로 쫒겨나가 슬피울며 이를 가는 것이나 짠 맛을 내지 못한 소금이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히는 것이나 똑같이 천국의 대열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게 존재를 드러내는 빛은 무엇인가?
빛은 요한복음 서두에서도 밝히 말했듯이 예수님을 말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였을 때 우리는 빛되신 예수님의 역할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역할은 무엇인가?
죄를 사하고 구원을 선포하는 독특한 짠맛인 소금의 역할이 바로 예수님의 역할이 아닌가!
결국 빛의 역할이란 그런 의미에서 소금의 역할과 동일한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사명감에만 불타있는 듯하다.
"세상의 빛이다" 라는 말이 사회봉사에 참여하고 불쌍한 자들을 돕고 의료봉사를 하고 교회를 짓고 학교를 짓고...하는 선한 일이나 착한 일을 하는 것으로 근본적인 뜻을 삼으면 안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유일 무이한 기관이며 우리가 소금과 빛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더욱 더 말씀에 집중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써의 삶을 삶으로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존재임을 세상이 볼 수 있도록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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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존 칼빈
자연인의 의지는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다. 사람은 필연에 의하여 죄를 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자발적으로 죄를 범한다. 그러나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상태에 매여 있는 동안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의지보다는 마귀의 의지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 같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의 의지를 마부의 명령을 기다리는 말에 비유하며, 하나님과 마귀를 그 마부에 비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 말에 올라타시면, 그는 온유하시고 숙련된 마부이시니, 말을 적절히 인도하시고, 너무 천천히 가지 않도록 박차를 가하시고, 너무 빠르지 않도록 고삐를 당기시며, 너무 거칠게 달리지 않도록 제어하시고, 갑자기 멈추어 서면 재촉하셔서 달리게 하시고, 그리하여 올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마귀가 안장 위에 오르면, 어리석고 방자한 기수처럼 바른 길에서 멀리 벗어나도록 난폭하게 마구 달리게 하고, 도랑에 빠뜨리기도 하고, 벼랑에서 뒹굴게 하고, 때리고 괴롭혀 고집을 부리게 하고 난폭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멸망에 이르게 될 불신자들의 마음을 “이 세상의 신이 --- 혼미하게 하여”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도록 한다고 말하며(고후4:4), 그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한다고도 말한다(엡2:2). “사탄의 역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람의 일에 하나님은 역사하심으로 개입하신다. 하나님의 예지나 허용을 피난처로 삼게 되면, 이런 활동의 본질에 대해서 결코 설명할 수가 없다.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난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하나님의 빛이 사라지면, 어둠과 눈먼 상태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게 된다. 하나님의 영이 사라지면, 우리 마음은 돌처럼 굳어진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사라지면, 마음이 뒤틀려 악에 빠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 방식은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그의 진노의 사역자로 삼으셔서 심판을 수행하게 하시기 위하여, 사람들이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목적을 갖도록 하시며, 그들의 의지를 불러일으키시고, 그들의 노력을 강화시키신다는 것이다.
버림받은 자들에 대해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그들의 마음이 변했고, 완강하게 되었다면,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들의 마음의 상태를 그렇게 바꾸어 놓으셨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서, 자기 백성의 범죄에 대해서 벌하고자 하실 때마다 주께서는 버림받은 자들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일을 진행시키셨는가? 그 사람들은 그저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고, 실제로 그 일을 진행하는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누구라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그렇게 일을 진행시키신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활동한다.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삼상16:14). 그 영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권능에 복종하여 그의 도구로 행동함을 의미한다. 모든 오류와 미혹의 역사는 진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거짓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것이라고 사도는 가르친다(살후2:10-12).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다스리신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실 때마다 언제라도 그의 섭리로 역사하셔서 심지어 외부적인 일에서조차 사람들의 의지를 이리저리 기울게 하시며, 그들이 자유로이 선택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의 다스리심을 받는다. 싫든 좋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유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인도함을 받는 것을 매일매일의 경험이 확증해 주는 것이다.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께서 지으신 것이니라”(잠20:12). 이는 귀와 눈에게 부여된 특수한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으로 인도하시느니라”(잠21:1)라고 말하면서, 솔로몬은 사실상 모든 사람의 경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성경을 부지런히 살피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 악한 것을 선하게 만드시고, 그렇게 만드신 다음 선한 행동으로 이끄시고, 또한 영생에 이르기까지 이끄시는 바 사람의 의지가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있으며, 또한 세상의 피조물을 보존하는 의지들도 역시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가 원하실 때에 원하시는 방향으로 그것들을 움직이시며, 그리하여 은혜를 주시거나, 아니면 지극히 은밀하면서도 지극히 의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벌을 내리거나 하신다는 것이다.”
자유 의지는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내적인 자유를 의미한다. 사람이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일의 결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 능력을 외형적인 성공 여부로 판가름해서는 안 되고, 사람의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자유 의지를 논할 때에, 우리는 과연 사람이 외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행하기로 결심한 바를 실행에 옮겨서 완수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어떠한 일에서든 판단의 선택과 의지의 끌림(형향)이 과연 자유로우냐를 묻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이 두 가지 점에서 자유롭다면, 못이 박힌 포도주 통 속에 갇힌 아틸리우스 레굴루스도, 세계의 광대한 지역을 자기 땅으로 만들고 그곳을 통치한 ‘가이사 아구스도’에 못지않게 자유 의지를 지녔다 할 것이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377-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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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지배가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신앙고백’(?)으로 국무총리 인준이 위태위태한 문창극 씨의 발언에 대한 사람들의 빈축은 이미 넘쳐나는 지경, 숟가락 하나 슬쩍 얹는듯한 언급은 더이상 필요없다고 생각하던
▲ 온누리 교회에서 강연중인 문창극 장로 ⓒ 미주 뉴스앤조이 | ||
<그러나 외형적 도덕성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그의 오랜 언론계 지인은 “보수적인 기독교 가문에서 자라 도덕적 하자는 없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일제 강점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사람, 강제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가 필요없다는 사람, 자기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재단의 기금을 이용해 스스로 석좌 교수가 된 사람이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도 기독교 가문에서 자랐기 때문이라는 것이 지인들의 판단. 이 시대에 기독교 가문에서 자랐기 때문에 도덕적 하자가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기는 하다. 그런데 읽는 마음은 편치 않다. 과연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선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전에는 선하다는 말이 “올바르고 착하여 도덕적 기준에 맞는 데가 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면 문창극씨는 도덕적 기준에 맞는 즉 선한 사람이란 뜻이다. 이런 류의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는데 나는 문씨가 진짜로 선할 것이라고 믿는다. 결코 비아냥이 아니다. 그가 다니는 온누리 교회 구성원들은 대부분 적당한 고학력에 예의 바르고, 선교에 열심이다. 교회 운영에도 별 관심이 없어서 사사건건 따지지 않는 아주 착한 교인들이다. 문창극 장로도 소망교회의 이명박 장로처럼 주차장 정리도 열심히 했을지도 모른다. 사회적 지위나 가진 재산에 상관없이 겸손하게 봉사하는 그의 모습에 진정성이 있다고 믿는다.
중앙일보 정치 부장 시절 정치 차장이었던 고도원 기자(현재 아침편지 발행인) 와 일촉 즉발의 상태까지 갔었다는 보도에 따르면 고도원씨가 호남출신이란 것이 불화에도 영향을 미쳤다는데 문창극 씨는 호남출신의 하용조 목사는 지극 정성으로 모셨을 것이다. 아무리 호남 출신이 싫어도 그 지역 사람들이 자기에게 고분고분만 하면 지역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착한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문씨에 대한 온누리 교회 교인들의 반응을 취재한 오마이 뉴스 보도에 따르면 “그분은 아주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이라고 하는데 나도 그렇게 믿는다.
선함의 사회성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 출신의 유대인 작가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모진 세월을 견뎌 낸 생존자 중 한 명이다. 본래는 화학을 전공한 화학도였으나 2차 대전 이후 <이것이 인간인가> 등의 대표작을 남긴 소설가로 변신한다. 아우슈비츠에 끌려 갈 때 그가 탄 화물차칸의 65명 중 겨우 4명만 살아남는 잔인한 시련을 이겨 낸 그였지만 1987년 토리노 자택에서 자살한다. 그를 괴롭히던 수용소의 악몽, 세상이 진보하리라고 믿었지만 인간의 탐욕만이 늘어나는 것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자살했을 것이다.
그의 기억 중에 이런 것이 있다. 화학을 전공한 덕분에 아우슈비츠의 화학 연구실에서 조교처럼 일하는데 그때 같은 연구실에 있던 젊은 독일 여성들이 프리모 레비를 가리켜 수근대는 소리를 듣고 그는 인간에 대한 실망이 더욱 깊어졌다고 회상한다.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여성들이 프리모 레비를 보면서 유대인들은 왜 저렇게 지저분하고 냄새가 나느냐 라고 했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 짐승보다 못하게 취급받던 유대인들, 이처럼 그들을 악취나는 존재로 만든 독일 동족의 만행을 매일 보던 여성들이 마치 더러운 냄새가 유대인의 민족적인 특징인 것처럼 아무 생각없이 말할 때 프리모 레비에게는 여성들의 무감각함이 가스실의 만행보다 더 무서운 충격이었다.
영화같은 데서 보았던 1940년대 초반의 독일 여성들을 상상해 보자. 검소하고 절제된 모습, 머리에는 하얀 띠가 둘러 있을 것이고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수더분한 옷차림, 히틀러가 자신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섭리 중 일부라고 말했던 것에 부응이라도 하듯 조국 독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당시 여성들은 일요일에는 교회에도 열심히 나갔을 것이다. 분명 그 젊은 여성들은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었다. 그녀들이 직접 유대인들을 죽이지 않았고 전쟁 책임자도 아니다. 그러나 그녀들은 도덕적 순수함 때문에 프리모레비에게서 나는 악취의 원인을 보고도 몰랐다.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는 선한 문창극 장로에게는 가난은 원인에 관계없이 게으름의 결과이기에 조상들이 안타까워서 선조들의 일을 거론했을 뿐인데 여론의 질타가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고작 원인을 생각해낸 것이라고는 힘없어서 나라를 빼앗겼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단세포적인 역사관, 그래서 그것을 말했을 뿐인데 자기에게 쏟아지는 비난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쯤 상황의 전개가 자신을 성숙시키는 하나님의 시련으로 생각하고 저들의 용서를 외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선함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
오늘 기독교인들이 선함으로 신앙인의 표징을 삼기를 원한다면 선함에 대한 고민을 가져야 한다. 자크 엘룰에 따르면 선함이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과 인간 앞에서 바로 서는 것의 두가지 측면이 있는데 성서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는 것이라고 한다. 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 선이고 그것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보면 드러난다. 선함의 응집체인 예수는 때로는 싸웠고 욕했고 부수었다.
선을 알면 책임을 져야 하는데 오히려 믿음이란 이름으로 선악의 결정자가 되려 한다고 자크 엘룰은 우려한다. 즉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선이 무엇인지 아는 백성으로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선을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선와 악을 규정함으로써 마치 하나님처럼 되려는 경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크 엘룰은 이사야 5:20을 읽어준다.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하는 자들, 어둠을 빛이라고 하고 빛을 어둠이라고 하며, 쓴 것을 달다고 하고 단 것을 쓰다고 하는 자들에게, 재앙이 닥친다!
오늘 한국 교회의 핵심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천박한 언행을 마다 않는 기독교인들은 SNS상에서 개독교라는 비판을 한 몸에 받고 있지만 사실 그들이 기독교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그렇게 욕하는 사람들은 기독교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않는다. 게다가 교양있는 기독교인들에게도 그들은 저급한 취급을 받는다. 진짜 위험은 우리 안에 있다. 하나님의 진리를 고민하기 보다는 사람들 앞에서 선하게 보이기 위하여 선생인체 하는 학벌좋고 교양있는 기독교인들, 시끄러운 문제를 애써 외면하면서 착한 척 하는 중산층 이상의 기독교인들, 자기 기준으로 게으름과 근면함, 민족사의 비극과 하나님의 섭리를 결정하는 신앙 좋은 기독교인들이 진짜 위험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진정한 기독교적 선함이란 그냥 사람 좋은 것을 넘어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에 참여하는 것이다.
기독교인 뿐 아니라 선한 사람들은 곳곳에 많다. 독일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의 눈에도 선한 사람의 문제점이 커 보였던 모양이다. 문씨를 비롯한 한국의 많은 선한 기독교인들을 위해 브레히트의 시를 선물한다. 이 시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자주 인용해서 유명해진 시이기도 하다.
선한 자에 대한 심문
▲ 독일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브레히트 ⓒ 미주 뉴스앤조이
앞으로 나오라, 우리는
그대가 좋은 사람이라고 들었다.
그대는 매수되지 않지만,
집을 내려치는 번개 또한
매수되지 않는다.
그대는 그대가 했던 말을 지켰다.
그러나 어떤 말을 했는가?
그대는 정직하고, 자기 의견을 말한다.
어떤 의견인가?
그대는 용감하다.
누구에게 대항하는 용기인가?
그대는 현명하다.
누구를 위한 현명함인가?
그대는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돌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대는 누구의 이익을 돌보는가?
그대는 좋은 친구이다.
그대는 좋은 사람들에게도 좋은 친구인가?
이제 우리의 말을 들으라. 우리는 그대가 우리의 적임을 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제 그대를 벽 앞에 세우리라. 그러나 그대의 미덕과 장점들을 고려하여
우리는 그대를 좋은 벽 앞에 세우고 그대를 좋은 총의 좋은 탄환으로 쏠 것이며 그대를 좋은 삽으로 좋은 땅에 묻어 주리라.
김기대 목사 / LA 평화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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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성에는 언제나 성령의 조명하심이 필요함/ 존 칼빈
우리의 이성은 온갖 형태의 속임수에 넘어가며, 그렇게도 많은 오류에 빠지고, 무수한 장애에 부딪히며, 온갖 난관에 휩싸이기 때문에, 도저히 우리를 올바로 인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고후3:5).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시며”(고전3:20). “그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창6:5).
우리의 이성이 어디로 향하든 언제나 허망함에 굴복하는 비참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이 이처럼 연약한 상태임을 알고, 여호와의 계명을 올바로 배울 수 있는 깨달음을 달라고 기도하였다(시119:34). 새로이 깨달음을 얻기를 소원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깨달음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바울은 교회 전체를 위해 간구하고 있다.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 자라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1:9-12). 이것을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로 말할 때마다 동시에 그것이 사람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일들을 깨달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서, 햇빛이 있어야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조명하심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그는 육체의 눈은 우리 스스로 떠서 빛을 바라보지만, 마음의 눈은 주께서 뜨게 해 주지 않으시면 감겨진 상태 그대로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성경도, 우리 마음이 어느날 한 번만 조명을 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스스로 볼 수 있다는 식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계속되는 과정이요 성장을 뜻하는 것이다.
다윗은 말한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니자 말게 하소서”(시119:10). 이미 거듭나서 참된 경건에서 적지 않게 성장해 있는 그였으나, 자기에게 주어진 그 지식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매 순간마다 계속적인 인도하심이 필요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곳에서, 지신의 허물로 인하여 잃어버린 정직한 영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시51:10). 처음에 우리에게 주셨으나 우리가 잠시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344-345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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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신학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교회에 스며든 사악한 교리 중 하나가 유대인과 하나님의 교회와 이방인의 구분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유대인은 이방인이 아니고 이방인은 유대인이 아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그들 사이에는 구별(차별)이 없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는 유대인, 이방인이 없다. 필자는 한국인이지만 이방인이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이다. 바울은 본래 유대인이지만 그는 과거에 유대인이었다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갈1:13).
대체신학이란 로마 가톨릭이 만든 사악한 교리인데 교회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복을 대신 계승해서 받았다는 것이다. 이 논리의 근거는 유대 백성들이 늘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고 멀리했기 때문에, 그 댓가로, 하나님이 그들을 거절했고, 그분의 언약을 취소하셨으며, 그분의 약속들을 거두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과 복, 예언들이 이방인 교회(로마 가톨릭)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독자적인 언약을 강탈하려는 '강탈, 도둑 신학'이라 할만한 것이다.
이런 신학이 개신 교회 내에도 암암리에 깊이 퍼져 있다.
대체신학이란 누룩은 대부분의 개신 교회가 수용하는 방법은 이렇다.
이스라엘---> 교회
성전---------->교회 건물
대제사장 ---------->교황
레위 제사장---------->사제, 목사들, 성직자
할례---------->세례
안식일 ----------> 주일
십일조---------->헌금, 십일조
열방의 머리 ----------> 교회의 수위권
절기, 명절 ----------> 교회가 정한 절기들
유대의 전통----------> 교회의 전통
모세의 율법 ---------->교회법
한 마디로 웃기지도 않는 신학이다. 이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근거 중의 하나는 성도들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교회는 영적 이스라엘, 영적 유대인이란 주장이다. 오늘날 개신 교회에서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런 주장, 신학에 은근히 동조하는 것을 본다.
과연 그런가?
교회는 분명히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것은 틀림없는 진리다.
그렇다면 교회 성도가 이스라엘(유대인)이 된 것인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을 이루는 새로운 창조물을 만드셨다. 하나님의 교회는 유대인도 이방인도 아닌 새로운 창조물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모독하는 일이며 진리가 아니다. 유대인은 이방인이 아니고 이방인은 유대인이 아니다. 이 둘 사이에 차이가 없이 하나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둘 다 그리스도 안에서 '몸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대인, 이방인, 하나님의 교회' 세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교회(크리스천)은 유대인이 아니며, 이방인도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신비는 신약에서 바울에게 계시되었는데 핵심은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통해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다.
유대인(이스라엘)은 육신적인 아브라함의 자녀이다. 이스라엘 사람들로 구성된다.
하나님의 교회는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다.
이 둘은 아래와 같은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 ----------------- 교회
레위의 제사장 ------------영적 제사장
동물 희생물---------------영적 희생물
건물 성전-----------------몸된 성전(영적 성전)
지상의 복----------------- 하늘의 복
물질적인 복---------------영적인 복
지상의 예루살렘-----------새 예루살렘
땅의 왕국-----------------하나님의 왕국
육체의 할례---------------그리스도의 할례
안식일--------------------안식
정해진 날과 달, 절기--------성도 각자 마음에 정함
음식 규례------------------모든 것이 정결케 됨
죄의 한시적 용서------------죄의 영원한 제거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자기 의---------------------그리스도의 의
종의 자녀-------------------약속의 자녀
율법에 속박-----------------율법에서 해방
율법 아래--------------------은혜 아래
원수와 물리적 전쟁------------영적 전쟁
혈과 육의 싸움----------------믿음의 선한 싸움
아브라함의 육체적 자녀--------아브라함의 믿음의 자녀
크리스천은 결코 이스라엘에 주신 표적으로서의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성전 건축대신 교회 건축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목사는 제사장 직분을 계승한 것도 대체한 것도 아니다.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많은 교회에서 구약의 율법을 신약에서는 변형, 승계, 심화(upgrade version) 된 줄로 가르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일 뿐 아니라 사악한 교리이다. 복음은 율법을 계승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유대인의 회중을 계승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성전도 회당도 아니다. 침례는 할례나 정결례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정결례는 자신을 씻는 것이지만 침례는 죽은 시체를 묻는 것이다. 유대인들 중에는 교회가 유대인을 뿌리로 계승한 것인 줄로 아는 몰지각한 자들이 많이 있다. 마찬가지로 교회 내에는 자신들이 유대인들을 계승한 줄로 여기는 자들이 있다.
율법에 따라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며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복음에 따라 교회에 주어진 약속들 역시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에게는 주로 땅에서 우리 육신에 주어지는 복이 약속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를 잘 믿으면(교회) 땅에서 복을 받고 잘된다(이스라엘)"고 설교하는데 이는 저주의 복음이다.
신약은 "예수를 잘 믿으면 이 땅에서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게 된다."고 가르친다.
대체 신학과 참된 복음의 차이를 잘 인지하기 바란다.
Written by Pasto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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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자 왔으면 나도 당했을듯☆
"차 빼, 개새끼야"
욕설 문자에 전화했다가 '황당'
따지려고 전화했다 '25만원 결제' 문자…
신종 스미싱 등장 2014. 01. 18.
(머니투데이 이슈팀 방윤영 기자)
욕을 섞은 문자를 보내 전화를 걸게 하는 신종 스미싱(Smishing)
피해 사례가 온라인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는
욕을 포함한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받아 화가 난 나머지
전화를 걸었다가 25만원이 소액결제되는 사기를 당했다는 게시글이 올라왔다.
소액결제를 유도한 문자 메시지에는
"차 빼라. 개새끼야",
"전화해라. 차 부셔버리기 전에",
"네 마누라 단속 똑바로 안 할래?"
"전화해라. 좋은 거 줄테니까",
"전화 안하냐 새끼야"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욕 스미싱을 당한 한 피해자는 "(화가 나서) 바로 전화해 따졌다"며
"전화를 끊자 소액결제가 된 문자를 보고 황당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누리꾼들은 "진짜 바로 속겠다",
"스미싱 수법이 점점 진화해 가네",
욕 문자 와도 절대 전화 걸면 안 되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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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전에 택함이란?
[질문]
에베소서 1:4에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였다"는 것이 어떤 뜻인가요? 창세전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시기 이전의 시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가 되는데 아직 창조되지 않은 인간에 대하여 어떻게 택함을 받는 자와 택함을 받지 못하는 자로 구별을 하였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신학적으로 아주 무거운 주제인 예정론에 대해서 질문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나기 전부터 구원 받을 자와 받지 못할 자로 하나님이 나누었다는 칼빈주의 이중예정론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는 잘 알다시피 알미니안주의와의 끝없는 논쟁의 핵심이자 전부이기도 합니다. 거기다 현대 기독교의 주된 흐름은 유감스럽게도 이를 반발, 거부, 비난, 심지어 정죄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참고로 제 개인적으로는 칼빈주의 입장을 지지합니다.)
말하자면 이 문제를 깊이 따지자면 신학적으로 너무나 광범위한 요소들을 다뤄야 하며 또 자칫 이 홈피의 방문자들 사이에도 쟁론의 불씨를 당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런 두 신학이론을 인용하여 논증하지 않는 대신에 그에 대한 지식이 없는 신자들도 이해하기 용이한 차원에서 순전히 성경말씀에 따라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시간 밖에 있다.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시간은 피조물, 특별히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개념입니다. 시대별로 일어난 사건의 연속 내지 누적인 역사도 지구상의 인간들의 행적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 역사를 주관, 간섭하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과거, 현재, 미래 같은 시대적 구분에 따른 해석, 적용, 예측은 일차적으로 인간에게 주로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설명할 때마다 필립 얀시가 든 비유를 저는 자주 인용합니다. 태양에서 지구까지 빛이 도달하는 데는 약 8분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인간은 해가 뜰 때에는 사실상 8분 전에 벌써 떠있는 해를 보게 되며, 지는 해도 이미 8분 전에 진 해를 봅니다.
그런데 한 발은 태양에, 다른 한 발은 지구에 걸쳐 놓을 만한 거인이 있다고 치면, 순전히 논리적 가정으로, 그에게 8분의 시차는 전혀 적용되지 않습니다. 지구나 태양을 한 순간에 한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거인에게는 지구상에서 인간이 인지하는 시간은 실종되고 없는 셈입니다. 지구 시간의 밖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거인과는 전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광대하십니다. 우주 한 쪽 끝에 한 발을, 다른 쪽 끝에 다른 발을 두실만큼 큽니다. 하나님이 그런 가시적 물리적 형체를 갖춘 거인이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시간과 연관해 설명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영원히 자존하시며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로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시간이란 행성과 항성의 자전과 공전에 따라 생기는 것입니다. 각 행성마다 시간 개념과 실제 길이도 각기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그 전부를 운행, 통치하시기에 시간 개념이 전혀 적용될 수 없습니다. 우주 전체를 한 눈에 다 본다는 것은 시간 밖에 존재하여 시간과 무관하다는 뜻입니다. 너무나 당연할 것은 시간을 만드신 분입니다. 자동차 공장이 자동차에 실려 다니는 법은 전혀 없습니다.
반면에 우주의 모든 피조물은 각기 시간에 묶입니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물체와 존재는 반드시 언젠가는 썩어 없어질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시간과 완연히 구별된 유일한 분입니다. 시간 밖에서 우주 전체를 한 눈에 본다는 것은 그분에게는 현재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또 그래서.영원하신 분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로마의 극심한 박해 가운데 있는 신자들에게 오직 주의 재림을 소망하며 인내하라는 권면을 시작하면서, 시간과 연관된 하나님의 특성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
하나님이 하루만에도 엄청난 역사를 일으키는 반면에 천 년간의 인간 역사도 단숨에 허물 수 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태초부터 시작되어 지속적으로 흐르고 있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우주만물을 관리 통치하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한대에 가까운 시간의 창조자이자 주관자로서 그 시간마저 통치하고 계실지라도 하나님이 시간과 함께 흘러가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럼 결과적으로 그분 또한 시간에 종속되기에 수정, 변개, 쇠퇴, 소멸의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바뀝니다. .
대신에 그분에게는 하루나 천 년의 구분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시간과 역사 밖에서 그것과는 초월해 있다는 초시간성(超時間性)과 초역사성(超歷史性)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분에게는 항상 현재 즉, 영원만 있습니다. 또 그래서 단 한 치의 변화도 없이 신실하십니다. 그분의 언약 또한 전혀 수정 변개 취소되지 않고 반드시 달성되는 법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예수를 믿으면 이 땅에서부터 구원의 확신이 생기고 영생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자꾸만 영생을 유토피아 상태에서 시간적 무한대로 살아간다는 개념으로만 이해합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많이 부족한 해석입니다.
구원 받은 신자가 죽으면 그 육체는 멸망하고 영은 예수님 계신 낙원으로 옮겨집니다. 죽음으로 인간 존재가 멸절되는 것이 아니라 영속해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존재 방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이가 죽으면 그렇게 되지만 그 새로운 존재 방식이 옮겨지는 거처만 예수를 믿음으로써 천국으로, 그렇지 않으면 지옥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또 낙원으로 옮겨진 신자는 마지막 날의 육신의 부활을 입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런데 이미 천국에 올라간 신자에게도 시간 개념이 전혀 없어집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말하자면 하나님처럼 영원한 현재로만 모든 것을 이해하는 수준으로 바뀝니다. 이를테면 천국에서 무병(無病)은 몰라도 장수(長壽)는 어울리지 않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시간을 초월하여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복이 됩니다. “이제는(이 땅에선)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주님의 실체 뿐 아니라, 그분의 구속사적 경륜, 또 이 땅에서 가졌던 의문과 오해 등이 씻은 듯이 밝혀집니다. 아니 그 전에 어쩌면 그런 것들을 문제 삼을 시도는커녕 용의조차 사그리 없어질지 모릅니다.
바울 사도는 이어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13절)이라고 말합니다. 천국에서 주님을 대면한 것과 이 셋과는 도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우선 이 땅에서 갖고 있던 믿음과 소망이 목적하던 바는 천국에 들어옴으로써 사실상 완전히 달성된 셈입니다. 신자가 그 둘을 더 이상 소유할 이유나 필요가 없어집니다. 반면에 사랑만은 천국에서도 영원히 존재합니다. 아니 그곳은 아예 사랑만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천국에는 시간개념이 없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죽은 신자가 그 육신까지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되돌아갈 소망이나 믿음을 구태여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비유컨대 군인이 매일 달력에 표시하면서 제대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듯이, 예수님이 지구상으로 재림할 때 육신도 부활해 그 분과 동행 귀환할 날짜를 계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이미 영원한 현재로 천국 신자에겐 확보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지 성삼위 하나님께 세세토록 찬양과 경배를 돌리며 그분과 함께 왕 노릇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천국에선 신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덧입혀져 그 분처럼 변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 믿어 구원 얻은 이후 이 땅에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거룩하게 자라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 믿어 영생을 얻은 의미가 시간적 무한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보다,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과 갈라지려야 갈라질 수 없는 온전한 관계로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신자가 이 땅에서 성령으로 거듭나는 순간 시공간을 초월하여 이미 완성된 상태로 신자에게 선물로 주어지게 됩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손바닥에 신자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신자가 구원 이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 완성된 관계의 실체를 가시적 형태로 하나씩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뿐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28,29)
바로 그래서 성경은 영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 여기서 "아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 교리적이 아니라 일대일의 인격적 체험적으로 알고 교제하고 동행하는 것입니다. 영생 즉, 구원을 자꾸만 시공간의 차원 안에서 이해하려 들면 그 풍성함을 제대로 누리지, 아니 맛도 보지 못합니다. 수박을 잘라 먹지 않고 그 겉만 핥은 셈입니다.
토기장이가 악한가?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이런 기본적 이해를 갖고서 질의하신 본문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먼저 "창세 전"에라는 뜻은 하나님의 경우는 시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 당신께서 창조하신 형체나 존재들을 질서정연하게 조성하기 이전입니다. 오직 당신만이 계실 때입니다. 시공간 밖에서 그것과는 초월한 영원한 현재적 존재로 계셨던 상태입니다. 그분은 어제도 오늘도 앞으로도 영원히 한분, 정확히는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창세 전은 인간이 이해할 때에만 아주 오래 된 과거사입니다. 영원한 현재이신 하나님에겐 결코 창세 전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언제라도, 지금 당장 오늘이라도 죄로 물든 이 땅과 하늘을 없애고 새 하늘과 새 하늘로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실은 이런 진술마저도 인간의 사고로 즉, 처음부터 구조적으로 시공간에 제한 받을 수밖에 없는 차원에서 이해 적용하려 들어선 명료한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미국인이 영어로 말하는 데도 한국인이 속도와 억양만 조금 다를 뿐 한국어로 말하고 있다고 믿고 해석하려 들어선 단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착할지 악할지, 또 예수를 믿을지 안 믿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 구원 줄 자와 안 줄 자를 어떻게 창세 전에 독단적으로 나눴는지 이해가 잘 안 되긴 합니다. 그분이 아주 불공평하고 무자비한 독재자처럼 여겨집니다. 언뜻 일리 있는 판단 같지만 이 또한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을 그 안에 가두어 판단하는 인간적 오류에 불과한 것입니다.
창조, 구원, 택함, 예정은 전부 하나님이 일방적 독단적으로 행하시는 사역입니다. 인간이 간섭은커녕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이 전혀 아닙니다. 인간은 단지 피조되었고, 신자와 불신자로 나눠져 택해졌고 예정 받았기에, 구원 받거나 그렇지 않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해도 단 한 치의 불공평성, 편애, 자의(恣意: 제 기분 내키는 대로 함), 불합리성, 불완전성 등이 개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거의 모든 신학적 과제에서 거의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분답게 사고 유추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 수준으로 끌어내려서 생각하려 듭니다. 이는 아주 크고도 가장 자주 범하는 오류입니다. 본 주제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태어난 인간이 나중에 착할지 악할지, 믿을지 안 믿을지 미처 모르는 데도 하나님이 무조건 편 가름 했다고만 여기고 치웁니다. 반대로 인간의 하는 짓과 그 처한 사정을 다 감안해서 구원해주어야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분이 아예 처음부터 믿을 자와 안 믿을 자로 나눠서 창조했다면 어떻게 됩니까? 피조물 신분에서 그렇게 나눈 창조와 창조주가 잘못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0,21) 비유이긴 해도 인간은 물건, 토기에 불과합니다. 본차이나가 아니라 뚝배기로 만들었다고 감히 토기장이에게 불평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1,16)
야곱은 태중에서부터 에서 대신에 장자권을 이어받을 자로 택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택함의 근거가 인간의 소원이나 달음박질(공적)이 아니고 오직 당신의 긍휼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에서나 야곱 둘 다 택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가 당신의 진노 아래에서 지금 당장 몽땅 죽어 없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이 일관되게 선언하는 바는 인간에게 아무리 높은 도덕성, 영성이 있어 보여도 창조, 택함, 예정은 절대적으로 인간의 논의 밖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택함 받을 자와 그렇지 못할 자로 이미 예정되어 지어진 것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택함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창세 전 택함이 결코 무조건적 독단적이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택했다고 분명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의 계획을 갖고 계셨고 또 그 뜻에 따라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택하심은 반드시 예수 안에서의 택함입니다. 예수가 없으면 택함도 없고 예수가 있기에 택함이 가능하고 또 타당합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타락과 예수 십자가의 구원이 전제가 된 창조라는 것입니다. 전제라는 말은 시간적 전후 순서는 논외라는 뜻입니다. 간단히 예수님의 구원이 예비 되어 있었기에 인간의 타락도 허용한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이 부분에서 타락 전(supra) 예정설과 타락 후(infra) 예정설이 옳은지, 또는 예지예정인지 이중예정인지 같은 복잡한 신학논쟁이 대두되지만,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그런 측면은 제외하고 성경이 말하는 바만 살펴보기로 합시다.)
하나님이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아무 조건도 보지 않고 구원으로 선택한 것은 오직 그분의 전적인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역을 통해 그 선택을 완성시켰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기뻐하는 때에 당신께서 기뻐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통하여 믿음을 심어주십니다. 택함 받은 자 쪽에선 하나님이 볼만하고 기뻐할 조건이 단 하나도 없었음에도 당신께서 구원하셔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날로 자라게 하시고, 나아가 천국에서 그분의 영광을 덧입는 자리까지 한 치의 착오 없이 당신께서 이끄십니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2:13,14)
같은 맥락에서 주님의 재림의 날이 언제일지 궁금해지는 것도 지구 상의 신자들이 살아 있을 때만 문제됩니다. 천국에선 그 재림은 하나님의 영원한(누차 강조하지만 시간의 무한대 개념이니, 아주 먼 장래의 일이 아니라, 시간과는 무관하다는 뜻임) 뜻 안에 이미 확정되어져 있습니다. 성경 계시대로 모든 역사가 진행되어져서 꼭 오셔야 할 때가 되면 주님은 승천하신 그대로 반드시 다시 지구상에 강림하십니다.
신자는 확보된 재림의 영광 속에 살기에 그 종말을 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언제 어떻게 올지 구체적으로 준비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미 소유한 자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어떤 환난에도 소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어떤 죄악과 흑암과 사망의 세력 앞에도 당당하게 맞서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 쉬지 말고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1-4)
이처럼 성경에 기록된 모든 계시는 하나님에겐 그저 “영원한 현재의 사안”일뿐입니다. 영원한 현재라는 용어 또한 그분의 신비한 경륜을 결코 다 드러낼 표현이 되지 못하겠지만 시공간에 제한되어 있는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춘 것입니다. 한마디로 창세 전에 세운 당신의 뜻과 계획은 당신 안에선 창세 전부터 현재 시제로 다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시공간 안에 제한되었고 그분의 피조물로서 그분의 은혜가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인간에게만 창세 전이 시간적으로 태어나기 아주 오래 전이자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일뿐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을 포함한 창조는 물론, 21세기의 한 신자의 탄생과 그 택함과 구원까지도 그분 안에선 이미 성취되어 있으되,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날 시기와 방식만 미결로, 그것도 인간에게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앞에서 구원 받을 때에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올라간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이미 올라가 있는 이름을 당신의 때와 방식대로 당신께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인간 쪽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진리를 앎으로써 자기가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올라가 있음을 확신하게 되기에 그만한 위로와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이 택함과 예정에 따른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영원한 신비와 은혜에 속할 뿐입니다. 토기장이가 아무 계획 없이 도기를 굽지 않듯이, 하나님도 태초에 이미 당신만의 마스터 플랜이 있었고 그 중심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1-4)
질의하신 본문에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또 그분 앞에 거룩하고 흠없게 하려고 택했다고 합니다. 천국에서 그 택함은 완벽한 거룩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신자가 할 바는 이어진 말씀 그대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5,6절) 뿐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계1:8)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2-4)
인간은 피조물로서 이 땅에선 물질적 차원에 머무르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 존재로 천국에선 그분과 맛 대면할 고귀한 존재입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이 너무 독단적으로 택한 것이 아니라 도무지 측량할 수 없는 긍휼과 사랑으로 예정이란 신비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낙원으로 데려가지 않고 이 땅에 잠시 남겨 놓았습니다.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답은 자명하지 않습니까? 그분의 끊어질 수 없는 사랑 안에서 창세 전에 택함 받았으니 잠시 있다 없어질 이 땅보다는 영원과 맞대어 살아야 할 것 아닙니까?
5/25/2011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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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에 대한 오해 5 - 바울이 말한 방언은 외국어이고, 다른 성도가 말한 방언은 이교도적인 주문 같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삶의 목표가 더 이상 구원 받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초보적인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히 6:1-2)
우리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두 가지는 우리가 열매 맺어(성령의 열매 -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고, 교회를 통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 입니다.
이 두 가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은사가 사용 되어져야합니다.
만약 방언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 되어진다면...
교회는 거룩해집니다.
방언을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에 힘있게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악한 영들이 주는 가짜 방언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진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은사들 중에 버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에서 그것들이 모두 사용되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현재 성도들이 하는 방언은 성령님이 주시는 은사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퍼져 나가면서 성도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 주장이 보편화 된다면 한국 교회에서 방언은 사라지게 될 것 같습니다.
그것이 심히 우려되어 지금의 방언은 성령님의 은사가 아니라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글을 또 씁니다.
오늘은 그 다섯번째로 ‘바울이 말한 방언은 외국어이고, 다른 성도가 말한 방언은 이교도적인 주문 같은 것이다.’ 라는 주장을 성경 말씀을 통해 반박하겠습니다.
첫째 !
바울의 방언과 다른 성도의 방언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고전 14장에서 방언이라 번역된 모든 단어는 헬라어(글롯사)가 사용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한 방언과,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말한 방언 사이에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2절 단수, 4절 단수, 5절 복수, 6절 복수, 13절 복수, 14절 단수, 18절 복수, 19절 단수, 14:22절 복수, 23절 복수, 26절 단수, 27절 단수
모두 단수냐, 복수냐의 차이만 있습니다.
원어 성경에서 외국어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라고 구별할 수 있는 근거가 없습니다.
둘째 !
바울이 한 외국어 방언은 복수로 기록 되어있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한 방언은 단수로 기록 되었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고전 14:14)
14절에서는 방언이라는 단어가 단수입니다.
만약 바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 같은 것을 중얼거린다거나 이방 종교행위를 한다면, 나의 영이 기도한다고 스스로 말 할 수 없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바울은 방언 할 때 자신도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국어가 아닙니다.
세째!
예배 순서를 볼 때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은 이방 종교 행위가 아닙니다.
그 때 고린도 교회에는 예배 순서에 방언이 있었습니다.
예배 순서는 찬송(찬송시), 설교(말씀), 계시, 방언, 예언이었습니다.
특별히 바울은 방언하는 사람의 수를 제한합니다.
두 사람, 많아도 세 사람을 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통역이 있을 경우만 하라는 것 입니다.
통역이 없으면 뭔 소린지 성도들이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언의 경우도 둘이나 세 명만 하라고 명령합니다.
“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다 불과 세 사람이 차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 14:26-28)
네째!
통역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는 이방 종교에서 온 것이 아님을 강하게 증명합니다.
방언이 학습 없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통역 역시 학습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이방 종교의 주문 같은것은 통역할 수 없습니다.
다섯째!
바울은 방언을 고린도교회 성도들보다 더 많이 했습니다.
방언 많이 말하는 것이 바울의 감사의 이유였습니다.
많다는 것은 종류를 말하지 않고 양을 말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방언과 자신의 방언을 동격으로 말했습니다.
즉 둘 사이에 질적인 차이는 없고 양적인 차이만 있다는 뜻입니다.
여섯째!
예배의 순서는 다양합니다.
그런데 방언만 통역 하라고 합니다.
은사로 주어진 방언과 은사로서 주어진 통역이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결론!
바울의 방언이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방언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둘 다 통역 없이는 이해할 수없는 소리였습니다.
둘 다 외국어가 아니었고, 성령님이 주신 은사였습니다.
예배 순서를 보면 현재 한국 교회와 많이 다릅니다.
차이점은 계시, 방언, 예언이 있었다는 것 입니다.
이것이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타락하지 않고 살아납니다.
바울이 예언을 방언보다 더 많이 하라고 명령했던 이유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예언은 하지 않으려 하고 방언만 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모임) 때 방언은 최대 세 명까지만 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저는 방언 은사가 전부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은 구원의 확증, 성화의 증거도 아닙니다.
무시할 수없는 성령님이 주시는 은사라고 말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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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없이 여름이 오듯이 / 예하나
바람이 귓볼에 스칠때 시원하구나
여름은 이렇게 오더이다.
연두빛 잎새들이 짙녹색 초록으로 바뀌었구나
여름이 짙어지는 것을 알겠더이다.
검은머리가 하나 둘 하이얀 색으로 물들어가는구나
나이가 들어가는것을 알겠더이다.
잇사이로 밥알이 새어나오고 말이 빠져나가는구나
어느새 노인으로 바뀌었더이다.
여름이 소리없이 오듯이
인생도 소리없이 가더이다.
그 이름이 호적에서 지워지는 날
천국에서 그 이름이 불리워진다는것을 알겠더이다.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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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은 무엇인가, 그리고 조직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1)
출처: 이승구 교수님 블로그 http://blog.daum.net/wminb/13718812
조직신학은 신학(神學)이라는 더 넓은 작업에 속해 있는 분과이므로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이 신학이 무엇인가라고 정의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편의상 신학에 대한 잠정적 정의를 제시하고 그에 근거해서 실제로 구체적인 신학적 작업을 한 후에 다시 과연 신학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신학에 입문하는 사람(novice)이 하는 질문이며, 동시에 완숙한 신학적 작업을 다 한 사람(master theologian)이 그의 생의 마지막에서,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물을 질문이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적 질문과 신학 자체에 대한 질문은 영원하다. 이 영원한 질문에 대한 잠정적 대답의 시도로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1. 신학이란 무엇인가?
신학(神學)은 그 말뜻 그대로 하나님에 대한 학문(scientia Dei, science of God)이라는 말로서 신학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생각하고 그 함의를 이끌어 내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는 매우 이론적이면서도 동시에 실천적인 학문이다. 그러므로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믿고 있는바 신앙이 마땅히 표현되어야 하는 바른 방식을 찾아 진술하고 그에 근거해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은 신앙의 문법(the grammar of faith)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는 좋은 의도로도 사용될 수 있으나 동시에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이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어떤 의미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는지를 깊이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믿는 바를 하나님께서 제시하시고 정하신 규칙에 따라서 표현하며, 그것에 근거해 사는 일이라는 의미에서 이 신앙의 문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이후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바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그것을 표현해 왔다. 그렇게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생각되고 표현되고 실제 삶 가운데서 실천된 바들을 모두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신앙에 대해서 생각하고 표현하고 그에 근거해 사는 것 모두를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의식하지 않은 채 사람들에게 내재해 있는 암묵리의 신학(theologia implicita)과 이를 명확히 표현해낸 명시적 신학(theologia explicita)을 나누어 말할 수 있다. 암묵리의 신학은 명시적 신학의 토대요, 명시적 신학은 암묵리의 신학을 표현하게 하는 것이므로 그것을 세련화 하고 일관성을 가지게 하며 좀더 비판적 성찰을 거쳐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과정을 신학화(theologieren, doing theology)라고 한다. 그러나 이 때 명시적으로 표현된 것만을 신학이라고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표현되지 않고도 내재해 있는 신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적 표현의 과정은 그 자체가 우리의 신학을 보다 바르게 된 것이 되도록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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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친구든지 원수든지 모든 사람의 유익을 추구해야 한다
1. 우리는 선행을 하다가 피곤해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성내지 아니하는"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들이 행한 대로라면 선대를 받을 자격이 없지만 우린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없이 선을 베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사람의 실존적이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고, 다만 우리 모두가 경외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피조물로 생각하라고 가르침으로써 탁월한 논의로서 우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믿음의 권속들에 속한 자들의 하나님의 형상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고 회복된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당신의 친절한 봉사를 필요로 하는 어떤 사람이 당신 앞에 나타나면, 당신은 도움을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령 그가 낯선 사람이라고 합시다, 주님은 그에게 자신의 인을 쳐서 당신과 한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 자신의 혈육을 멸시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가령 그가 아주 멸시받는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황송스럽게도 주님은 그를 자신의 형상으로 단장할 만큼 귀하게 여기십니다.
가령 당신이 섬길 의무를 전혀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자신의 대리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크고 많은 축복을 받은 당신은 베풀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그가 당신으로부터 최소한의 선행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당신이 자아를 죽이고 당신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주도록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그가 아무런 친절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오히려 그는 당신에게 상처와 모욕을 줌으로써 당신을 분노케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그를 사랑으로 감싸지 않고 모든 친절을 베풀지도 않아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당신은 그는 좀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은 오직 모든 사람의 모든 무례함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라고 명령하십니다.
3.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해 받은 것을 친절로서 갚고, 저주를 축복으로 돌려주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사악함만을 생각해서는 안되고,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자임을 영원히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인간의 잘못을 덮고 지워버리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아름다움과 존귀함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고 끌어안게 될 것입니다.
(마 5: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 17: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 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D0VS/4522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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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의
등뼈라고 불리우는
씨에라 네바다 산맥에 위치한
캘리의 국립공원들,
예컨대, 요세미티, 킹스캐년,
세쿼야 등은 많은 호수를 지니고 있습니다.
각 국립공원들은
저마다 경치가 빼어난
아름다운 호수들을 지니고 있지만
몇몇 호수를 제외하면
일반인들의 접근이 쉽지 않습니다.
세쿼야 국립공원만 해도
백개가 훨씬 넘는 수많은 호수가 있지만
세쿼야에 다녀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 하나의 호수도 보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깊은 산속으로
하이킹하지 않는 이상
이들 호수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쿼야에
호수가 있다는 얘기를 하면
세쿼야에도 호수가 있나 하며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하지만 세쿼야에는
일반인들이 자동차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멋진 호수가 있습니다.
이 호수의 이름은
바로 흄 레익(Hume Lake)입니다.
이 호수에 가려면
일단 세쿼야 국립공원으로 들어가야겠죠?
하지만
흄 레익의 위치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세쿼야 국립공원이 아닌
Sequoia National Forest에 있습니다.
세쿼야 지역에는
거대한 세쿼야 나무만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사실은
한 없이 아름다운
Hume Lake같은 곳도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180번에서 흄레익으로 들어가는
13S09 길에서 바라 본 흄레익의 모습입니다.
흄레익으로 가려면
13S09, 혹은 13S06으로 가거나
도로 이름이 헷갈린다면
킹스캐년으로 가는 180번으로 가다가
Hume Lake Rd 길이 나오면 우회전해서 들어가면 됩니다.
위의 사진은
13S09 길에서 바라 본
킹스캐년의 Cedar Grove로 가는 길입니다.
흄 레익은
자연 호수가 아닌
인공적으로 조성된 호수입니다.
Hume-Bennett 이라는 목재 회사가
벌목한 나무를 저장하기 위해, 그리고 수운할 장소로
1909년에 짓기 시작하여 불과 114일만에 완공한 댐이라고 합니다.
1890년, 세쿼야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세쿼야 국립공원 지역내에서
모든 벌목행위가 원천적으로 금지되었지만
흄 레익 주변은
국립공원이 아닌
National Forest의 사유지였기 때문에
Hume-Bennett 목재 회사는
계속해서 주변 지역을 벌목해 나갔습니다.
그러던 중 1917년,
이 지역에 대형 산불이 발생하여
목재회사의 설비와 시설이 모두 불타버렸죠.
그리하여
연방정부에서는
1935년에 흄 레익을 비롯한
주변의 모든 지역을 사들였습니다.
그 후,
연방관리 하에 지역은
마침내 Sequoia National Forest가 됩니다.
흄 레익과
그 주변 지역에서는
즐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이곳이 호수이니 만큼
당연히 수영같은 물놀이가 우선이겠죠.
호수지만
beach가 있어서
물놀이하기에 딱 좋습니다.
물이 잔잔하여
카약이나 카누 타기에도 적격입니다.
이 분은
노젓는 힘이 좋았는데
커다란 부표같은 것을 달고도 잘도 가더군요.
카약이나
카누가 익숙지 않다면
이처럼 고무 보트를 타면 되겠죠?
호숫가에 앉아서
무작정 숲과 호숫가를 바라보며
방해받지 않는 안락한 시간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호숫가 근처에서
홀로 독서하는 것도
멋진 휴식이 될 것입니다.
흄 레익에서의 여명 빛은
사진사들에게는 인기 짱입니다.
숲으로 비취는
아침 빛 또한 일품입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은
Hume Lake Christian Camps입니다.
이곳 주변엔
많은 랏지와 식당, 레스토랑이 있어서
여름 휴가에는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지요.
흄 레익에서
아침 일출을 바라보는 사람들...
아침의
신선한 공기 속에
흄 레익 트레일을 걷는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트레일을 걸으면서
보는 경치도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한낮에 구경하는
생기발랄 +패기 넘치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또 다른 구경거리입니다.
올 여름 휴가는 어디로 가세요?
아직 장소를 정하지 못했다면 세쿼야로 가보세요.
자이언트 세쿼야의
거대하고 울창한 나무 숲과
아름답고 멋진 흄 레익이 있는 곳,
당신의 여름 휴가를
편안하고 즐겁게 해 줄 것입니다.
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blog.koreadaily.com/power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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