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여행

길은 끝이 없었습니다.
모래와 바람과 햇빛만이 있는
사막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지치고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노인은
힘도 들지 않게
기쁘게 걸었습니다.

“모두가 지치고
힘들어하는데 당신은 어째서
그렇게 힘이 납니까?”

그러자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이 길이 조금도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노인이 말했습니다.

“내가 꼭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면 힘들지 않고
괜히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면
힘이 들고 피로합니다.”

그리고 다시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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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 주님 당신은 소리없이 내게오신 바람이었습니다. 먼 여행길에 숱한 사연 배낭에 가득 채워 누구보다 먼저 계절을 앞세워 양지쪽 고운 잔디에 이야기보따리 풀어놓고 기다리시며 우리를 이땅에 내려 놓으신 당신은 따스한 바람 이었습니다. 향기로운 꽃 내음에 젖어 향방없는 사슴 되어도 살랑살랑 고운 눈으로 어머니되어 마음속 깊은 곳에 찾잔으로 마주대해 주시는 당신은 포근한 바람이었습니다. 파도를 앞세워 포말을 날리고 멍든 바위되어 숨어 얼굴 가리워도 어느새 나타나 아버지되어 등두드리시며 수평선 저 넘어 노저어 가시는 당신은 어디나 찾아와 주신 고마우신 바람이었습니다. ...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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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드라이 밸리, 맥머도





지구상에서 가장 극한 지역인 남극지방의 맥머도만에 있는 신비한 협공.

지구상에서 가장 춤고 건조한 이곳의 지하는 수백미터의 투명한 얼음층으로 되어있음.

염도가 높은 이곳에 이렇게 얼음이 꽁꽁 얼어있는것 자체가 미스테리한 일이라고 함.

많은 과학자들은 이곳에 외계의 생명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나온다고함.



2. 간혈천, 미국







미국 네바다주에 위치한 간혈천. 

화산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이곳은 두개의 지맥이 만나 부딪히면서 얇은 틈사이로 온천수가 뿜어져 나옴.

개인 사유지라 관광이 불가능하다고 함.



3. 오로라, 북극









지구의 두자극에 의해 만들어지고 북극에서만 보기 드물게 발견됨.

북극 원주민들은 이 신비한 오로라를 ‘북극 춤사위’라고 부른다고 함.



4.리오 틴토, 스페인






화성을 연상 시키는 이곳은 붉은색 강물이 흐름.

에로빅 박테리아라는 성분이 물에 섞여 있으며 강산성이 다량 포함되어있는 이물이 흐름.

실제 화성의 토양과도 성분이 비슷하며 지구상의 작은 화성이라 불린다고 함.




5.리체트 구조, 모리타니아



황소의 눈을 연상시키는 특이한 모양.

크기가 직경 50km나 되어 지구 밖에서도 관측이 가능함.

우주 비행사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




6.로토루아, 뉴질랜드




1년 365일 화산 활동이 끊이지 않는 곳.

뜨거운 열기로 인해 바위가 녹아 끊어 오르며 특이한 형태가 만들어짐.

끊임없는 유황이 흘러나오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





7.버뮤다 삼각지대









미국 동부 해안부터 북대서양으로 이어지는 곳에 위치.

자기장설, 심해 메탄층설 등 다양한 가설과 논문들이 제기되고 있지만 아직 뚜렷이 밝혀진 바 없음.


8.스팟 레이크, 브리티시 콜롬비아







염분이 아주 강한 호수.

여름 가뭄철에는 수분이 모두 증발하여 소금과 미네랄만이 이런 형태로 남아버린다고 함.

황산염과 마그네슘이 대부분인 저 무늬는 물이 증발하여 단단하게 굳어져 저 위를 사람이 걸어다닐 수도 있음.



9. 카우아이, 하와이






하와이에서 가장큰 섬이자,가장 오래된 섬인 가우아이 섬.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폭포가 있다고 함.



10. 로라이마 산, 브라질









브라질과 베네수엘라 국경지대에 위치.

평평하고 넓은 정상은 생명체가 살기에 힘든 환경이어서 저렇게 평평한 바위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함.




하고 도한 여성들, cafe.daum.net/zzzzzzaaaasasa 
출처 : 베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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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6)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대장쟁이

산염소나 사슴의 새끼들은 태어나 금방 뛰어다니며 곧 어미를 떠납니다. 들나귀 새끼는 제가 알아서 들판에서 살아갑니다. 타조는 모래에다 알을 낳고는 잊어버리지만 그 알은 태양으로 따뜻하게 데워지는 모래에서 부화됩니다. 어미가 돌보지 않아도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지으신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기르시는 것입니다. 동물들 가운데는 용맹스럽고 날랜 말이나 하늘높이 날아오르는 독수리같이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놀라은 용기와 능력을 가진 것들도 있습니다. 수천리를 회귀하여 알을 낳고 죽는 연어나 수천, 수만리를 날아가는 철새나 멕시코만을 건너 날아가 알을 낳는 나비, 바다속의 기이한 동식물까지 보면 볼수록 오묘하고 신기한 하나님의 세계는 신비하고 오묘하며 그 모든 것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와 능력과 손길이 핑계할 수 없도록 나타납니다(롬1:20). 하나님께서 욥과 친구들에게 오셔서 하나님의 세계, 천지창조와 온갖 들짐승의 이야기를 이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거룩하실 뿐 아니라 실수나 잘못이 없으시고 완전하시고 전능하시며 피조세계를 빠짐없이 지켜보시고 주관하시고 기르시고 계신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하시려는 것일 것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허락 없이 떨어지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이 참새보다 더 귀한 욥을 외면하고 욥의 고난을 내버려두실 리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우치시는 것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욥에게 물으셨습니다. “변박하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과 변론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변박하는 자’라고 되어 있는데, 원문은 ‘잇소르’, ‘비난하는’ 자입니다. ‘변론하는’이라고 되어 있는데 영어성경은 ‘검사가 피고를 논죄(論罪)한다.’ 할 때 쓰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인간이 완전하신 하나님을 감히 비난하고 논죄하다니요. 말도 안 되는 것이요, 황공하고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욥은 세 친구들과 논쟁을 하면서 스스로 ‘누가 하나님과 변론하겠느냐’라고 말하면서 ‘나는 순전하다. 하나님이 내 의를 빼앗아가셨다.’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함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게 하시거나 자신이 이유없이 고난당하고 있는 것을 못 보고 계시거나, 혹은 모르고 계시거나, 혹은 외면하고 계시거나, 혹은 부당하게 자신을 징벌하고 계신 것이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을 비난하고 논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이 황공한 말씀 앞에 “나는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두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하지도 아니하겠고 대답지도 아니하겠나이다.” 하고 납작 엎드립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간이 말을 더하면 죄밖에 더해지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네가 내 심판을 폐하려느냐? 스스로 의롭다 하려 하여 나를 불의하다 하느냐?” 하나님의 이 말씀은 욥이 지금까지 해온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심판하지 않으실 수 없으며 심판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믿고 기다리지 못 하고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징벌이 잘못 된 것이라고 미리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을 심판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심판을 하는, 하나님을 향하여 결론을 내리는 꼴이었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질문하십니다. “네가 하나님처럼 팔이 있느냐? 하나님처럼 우렁차게 울리는 소리를 내겠느냐? 너는 위엄과 존귀로 스스로 꾸미며 영광과 화미를 스스로 입을지니라. 너의 넘치는 노를 쏟아서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낱낱이 낮추고, 밟고, 얼굴을 싸서 두고....” 인간은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알지도 못 하며 판단하여 판결을 내릴 수 없으며 징벌을 할 능력은 더더구나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위엄과 존귀와 영광을 옷 입으시며 찬란한 광채를 발하시지만 인간은 스스로를 존귀케 할 능력도 전혀 없습니다. 들의 백합화처럼 하나님께서 입혀주셔야 하며 까마귀 새끼처럼 하나님께서 먹여주셔야 하는 연약한 존재요 불쌍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단 하나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이런 인간들이 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어갈 수 있을 것처럼 나대는 오늘날의 이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한심스럽고 가소로울까요.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아니하며 죄악의 길을 달려가는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안타까움은 또 어떠할까요. 지금 이 시간에도 천지만물을 기르시며 우리를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며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는 하나님, 끝날 심판으로 공의를 행하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Die Religion ist das Opium des Volkes."


칼 마르크스가 남긴 말이다.



실제로 사람은 온갖 동물들 가운데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물이지만


생존이 고되고 어려워지는 극한의 상황에 몰리게 되는 순간에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의지하고자하는 본능적인 욕구가 내재하고 있다.



사이비 종교는 바로 그러한 인간의 감정적 틈을 비집고


숙주의 고뇌와 의지를 양분으로 삼아 기생하는 악질범죄다.


특히 우리 민중의 삶에의 고통이 극한에 다다랐던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의 가혹한 횡포 아래에서 집단 범죄의 싹이 트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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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백교가 실제 기도를 했던 제단>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역사의 흐름을 크게 뒤바꾸어버린 동학의 교세는


전봉준이 체포되고 난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전국팔도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먼 친척이었던 전정운(전정예라고도 한다)은 평안남도 영변군 근산면 화현동에 거주하던


가난한 농사꾼이었으나 동학의 영향으로 1900년, 교세 확장을 목적으로사교집단을 구성하는데


이것이 백도교(白道敎)로서 백백교의 전신이다.




전정운은 1904년 6월, 천재지변이 일어나 전 인류가 멸망하지만


'백백교를 믿으면 동해바다에 새로 생길 신선의 땅으로 피난하여 불로장생하게 된다'는 말로


신도를 끌어모아 부를 축적했다.


또한 60 여명의 첩을 신도들로부터 빼앗아 문란한 생활을 즐겼는데,


이 와중에 기도의 명목으로 4명의 첩과 신도 최씨일가 8명등


많은 신도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이는 순전히 전정운 본인의 기분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사람을 예사로 죽이고는 '천지의 뜻이다' 라는 말로 넘겨버리기 일쑤였다.



1919년, 전정운은 51세의 나이로 가평군 화악산 기슭에서 병사하였고


이 백도교의 교리를 기반으로 하여 전정운의 수제자 우광현(禹光鉉)과 아들인 전용해(全龍海)는


1923년, 백백교를 창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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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백백교'에서 묘사된 전용해>




백백교의 교리는 다음과 같았다.


"백백백의의의적적적감응감감응하시옵숭성(白白白衣衣衣赤赤赤感應感感應하시옵崇誠)"


위의 주문만 외우면 무병장수 하고, 곧 머지않아 종말의 날이 와서


서양과 동양은 각각 불과 물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되며,


이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백백교가 마련한 본소에서 생활하다


물의 심판 날에 금강산의 피수궁(避水宮)으로 옮겨가 교주인 전용해가 하여금


신도들을 각자가 원하는 천국으로 인도하여준다는 것이었다.




시대가 시대였던 까닭에 백백교의 교세는 급격하게 확산되었고


백백교는 홍보를 위해 폐광이 된 금광에 금을 숨긴 다음에


전용해의 힘으로 금광이 다시 터졌다는 식으로 사람을 모았다. (이는 '홍경래의 난' 때에도 사용되었던 수법이다)




교주 전용해는 본래 학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으나


타고난 용안으로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었고


전용해는 교세를 이용하여 총참모격인 이경득과 문봉조 등 간부들을 각도에 보내


예쁜 딸을 가진 부모들을 골라서 백백교에 입교시킨 뒤 딸을 시녀로 바치게하여 강간했다.


이러한 경로로 얻게된 첩들은 전용해가 일러 판단하기에 많다 싶으면


곧 살해당하였고 암매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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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과정으로 전용해에게 누이동생 유전정이 강간당한 것에 분노한 약사 유곤용


1937년, 백백교를 무너뜨릴 작정으로 입교하여 교주 전용해를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우여곡절끝에 전용해를 직접 조우하게 된 유곤용은 전용해와 다툼을 벌인다.




조부와 부친처럼 속히 재산을 바치라는 말이었다. 유곤용은 긴장한 어조로 완곡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그것도 대단히 좋은 말씀이나 사업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지금 당장 올라오기는 어렵습니다.”

‘신의 아들’ 대원님의 말씀을 감히 거부하는 것은 백백교 교단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용해는 격분한 어조로 다그쳤다.

“그럼, 내 명령을 복종하지 않겠다는 말이지?”

그리고 옆에 앉은 유정전을 보고 또 한 번 소리쳤다.

“네 오라비 잘났다.”

일격을 당한 유곤용은 그제서야 본심을 드러냈다.

지난 일주일간 그가 보인 행동은 교주 전용해를 만나 백백교의 악행을 따지기 위한 연극일 뿐이었다.

유곤용은 “백백교의 교리가 도대체 무엇이냐? 그런 얼치기 종교가 어디 있느냐”며 욕질을 했다.

세상에 나서 그런 욕설을 처음 듣는 전용해는 흥분한 나머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나이프’를 빼어들고 유곤용을 찌르려고 덤벼들었다.

이 순간이 그에게는 천려(千慮)의 일실(一失)이었으니 흉악무도한 그들의 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단서가 될 줄이야

악의 천재인 그도 예상치는 못하였을 것이다.

안방에서 소란이 일어나자 대청마루에서 추위에 떨며 기다리고 있던 전용해의 수하들이 교주의 신변 보호를 위해 방문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유곤용의 힘은 의외로 강했다. 쇄도하는 수하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전용해의 멱살을 잡아 넘어뜨렸다.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음을 직감한 전용해는 죽을 힘을 다해 그의 손을 벗어나 도망쳤다. 수하들도 각자 살길을 찾아 도주했다.

유곤용은 위험을 직감했다. 백백교 교도들이 떼지어 몰려올 것이 분명했다.

그는 동대문서 왕십리주재소에 달려가 사정을 말하고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백백교 사건의 정체', ‘조광’ 1937년 6월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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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해는 도주하였고 유곤용은 그 즉시 경찰을 불러 서울 중구 위치에 있던 전용해의 집을 수색했다.


교주 전용해 본인은 도주하고 이미 없었으나, 백백교의 참모인 이경득 등을 체포하는데 성공하였고


이것이 백백교의 악랄한 범죄가 수면으로 드러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백백교는 신도들의 땅과 재산을 기부 명목으로 빼앗고


여성들을 무차별 강간하였으며 교단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이용한 뒤에는 살해하여


아무도 모르게 야산에 매장하여 왔었다.


때문에 범죄의 질이 너무 흉악하다고 판단했던 당시 경찰은 보도를 전면 금지하였고


수사를 시작하였는데 그 경위는 너무나 참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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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백백교의 아지트는 전국에 걸쳐 퍼져있었고


경찰은 양평, 연천, 사리원, 세포, 유곡, 평강 등 전국 20여곳의 비밀아지트를 중심으로


조사한결과 도합 346구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이는 당대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충격을 가져왔고


일본은 물론 중국과 미국을 거쳐 전세계에 이 사이비 종교의 횡포가 알려졌다.




그러나 일제는 2차 대전으로 인해 계속 수사를 진행할 수 없었고


백백교 사건에 대한 조사는 중단되었다가 수년후 재개되어


1941년, 백백교 간부의 선거공판에서 어느정도 마무리되었다.


김서진 (170명 살해) - 사형

이경득 (167명 살해) - 사형

문봉조 (127명 살해) - 사형



가장 문제가 되었던 교주 전용해는 유곤용과의 사건으로부터 몇 달후


솔밭에서 목에 칼이 찔린채 사체로 발견되었는데,


얼굴 부분을 산짐승에게 뜯어먹힌 탓에 그것이 진짜 '전용해'인가 하는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전용해의 아들이 사체를 보고 울부짖었던 것과 나머지 진술을 토대로


경찰은 전용해가 자살한 것으로 판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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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이사건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던 일제는


전용해의 시체를 수습하여 두개골을 추출, '범죄형 두개골'의 표본으로 보존하였는데 (골상학은 19세기에 이미 허구로 판정났다)


이는 2011년 10월 25일 까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보존되어 있다가


이내 논란에 휩싸인 탓에 폐기, 화장한 후 봉선사에서 위령제를 지내주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백백교는 지하에서 유지되어 교단을 이루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극단적 사이비종교의 시작은 이 백백교 부터라고 할 수 있으며


훗날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을 주도한 사이비종교 '오대양' 또한 백백교의 수법을 일부 차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현재 전 백백교의 아지트 터에는 사람들이 접근조차 하지않는 교회가 세워져있다고 한다.







논란 속 동성애 퀴어축제…보수단체 반발로 ‘충돌’



신촌 거리에서 열린 성소수자들의 문화축제가 보수단체와 기독교인들의 항의로 마찰을 빚었다. 동성애를 자연스러운 문화의 일부로, 인권의 범주로 받아들이는 시대적 분위기에 한국교회의 고민과 우려가 깊어지고 있다.

 
▲성소수자들의 퀴어문화축제가 7일 오후 신촌 거리에서 열린 가운데, 선정적 옷차림을 한 동성애자들이 카 퍼레이드에 참여했다.ⓒ뉴스미션

퀴어문화축제, 신촌 연세로에서 강행

성소수자들의 퀴어문화축제가 시민들의 우려 속에 7일 오후 신촌 연세로에서 강행됐다.

오후 2시부터 신촌 연세로 ‘차없는 거리’에는 동성애 단체들의 부스가 마련되고, 국내외에서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모인 동성애자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여장을 하거나 갖가지 모양으로 분장한 외국인들,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앳된 얼굴의 청년, 퍼레이드를 준비하는 속옷 차림의 참가자들이 등장했다. 성소수자의 인권을 외치는 단체부터 무료 콘돔을 배포하고 성병 감염 여부를 검진하는 단체들의 부스에 관람객이 몰렸다.

거리 중앙에 마련된 무대에서는 늦은 밤 열리는 ‘하악하악’이란 이름의 애프터파티, 또 새벽까지 성인들을 중심으로 이태원 클럽에서 이어지는 파티에 대한 홍보가 연신 흘러나와 한낮의 유흥가를 방불케 했다.

하지만 축제 현장에는 인근 지역을 지나치다 들른 10대 청소년과 대학생, 유모차를 끌고 외출 나온 가족 단위의 시민들도 상당수 보였다.

20대의 한 여성은 “이런 축제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외국에서 보는 문화 같아 신선하다”고 말했다. 반면 50대의 한 남성은 “보기에 불편하다. 시대가 변했다고 하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느냐”며 거부 반응을 보였다.

 
▲신촌 연세로 중앙에 마련된 퀴어문화축제 무대 위에서 공연이 진행된 가운데, 일부 기독교인들이 동성애를 반대하는 피켓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뉴스미션

보수단체와 기독교인 항의 vs 일부 기독단체는 옹호

한편 시행 전부터 논란이 일었던 행사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보수 시민단체 및 기독교단체들의 항의 집회로 마찰을 빚었다.

동성애 축제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카 퍼레이드 과정에서 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와 기독교단체들이 경로를 차단해 행사가 중단되고 경찰이 진입하는 등 큰 소란이 일었다. 일부 부상자도 발생했다.

신촌 지역 청년들이 연합한 신촌동성애반대청년연대는 행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늦은 저녁시간까지 퍼레이드 길목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 추모 콘서트’라는 이름 아래 문화공연을 열었다. 이 문화공연에는 축제를 반대하는 지역주민과 상인, 연세대 등 인근 대학생과 일부 교회 교인 등 1만 5천여 명이 참여했다.

이들은 세월호 사건 애도기간에 벌이는 동성애 축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특히 카 퍼레이드가 동성애자들의 성적 취향을 과시하기 위한 퍼포먼스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연대 대표인 김광중(연세대 대학원생) 씨는 “신촌에서 공부하며 기도하는 청년으로, 이번 축제 사실을 알고 마음이 터질듯이 아프고 분한 마음에 기도로 이 일을 준비했다. 많은 분들이 동참해 주셨는데, 카 퍼레이드를 끝까지 막아내서 하나님이 축복하신 신촌 땅이 죄로 물들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외 기독NGO단체인 예수재단은 오전부터 퀴어축제 규탄기도회를 열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동성애는 죄, 소돔과 같이 멸망한다’, ‘동성애도 회개하면 천국간다’는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반대 집회를 계속했다.

보수 기독단체들의 항의 집회가 거센 반면, ‘퀴어와 함께하는 그리스도인들’이란 이름으로 축제에 참여해 동성애를 옹호하는 기독단체도 있었다.

대한성공회 길찾는교회, 기장 섬돌향린교회 등 일부 진보 교회들과 동성애 교인들은 부스를 설치해 찬양을 부르고, 섬돌향린교회 임보라 목사 등 목회자 대표들은 카 퍼레이드 맨 앞에서 행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임보라 목사는 카 퍼레이드 행진 전 기도문을 낭독하고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에게서 떼어낼 수 없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누가 감히 단죄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가. 다양성 속 일치를 이루게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그 분의 선한 뜻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전했다.

 
▲섬돌향린교회 임보라 목사 등 동성애자를 지지하는 일부 목회자들이 카 퍼레이드에 앞서 행진하고 있다.ⓒ뉴스미션

윤화미 ⓒ 뉴스미션

출처: USA 아멘넷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셨다 고백하는 사람이 많고, 성령의 사람이라고 큰소리 치는 사람은 많으나 실제 삶의 영역 속에서 그리스도와 거리가 너무도 먼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이 글을 정리하는 나 자신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신앙 따로 생활 따로인가? 그러하기에,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자기 자신을 가리켜 가장 강력한 성령의 사람인 듯, 다른 목회자들을 형편없는 사기꾼 정도로 몰아가면서 뛰어난 화술로 말씀을 강론하던 한 유능한 목사가 자살이라고 하는 어이없는 선택을 하였던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우리들 때문에 흑암의 세계 속에 강력한 빛으로 나타나야 할 교회는 오히려 점점 더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느낌이고, 서로 잘믿는다고 내세우는 말의 홍수 속에서 정신세계는 대 혼란 속에 빠져들어가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우리는 한 번쯤, 올바른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성경을 되새김질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 다닌다고 모두 성도가 아닌 것이다. 요란하게 떠들고 소리 지른다고 성령의 사람이 아니다. 삶 속에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1. 누가 과연 성도(saints)인가?:

성도(saints)란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을 총칭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saints)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고 마음에 받아들이는 사람을 지칭하며, 물(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곧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과 같고 다시 태어난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백성이 된다는 원리다. 사람의 영(spirit)이 다시 태어나는 현상을 가리켜 신학상 술어로는 ‘거듭남( born again)’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가 다 한 번 육신 적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한 번만 태어나면 되는 것으로 알기에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자식 낳아 열심히 기르다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고, 죽으면 끝이라고 하는 허무한 생을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은 분명히 다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 6-7절 말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무슨 뜻인가? 육으로 난 것은 죽고 망하나 영으로 난 사람만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spirit)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 그만큼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a.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내 의지나 내 노력, 내 열심, 다시 말해서 많은 성도들의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기도를 많이 하고, 부흥회를 열심히 쫓아다닌다고 해서 거듭나는 것이 결코 아니란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물과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따라서 우리가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성령을 받는다는 뜻이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곧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과 동일한 뜻이다. 성령은 어떤 특별한 은사 자들이나 신령한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란 것이다.

b. 내가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먼저,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생각해 보아야 한다. 조건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는 것뿐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 12절 말씀)” 여기서 “영접”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내 마음에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계 3: 20절 참조)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 9-10절 말씀).”

c.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세주로 믿는데, 나는 왜 성령의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내게는 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이 의문으로 남게 된다.

그 대답은 의외로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내가 무언가 의롭고 착한 일을 많이 해야만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성령 받은 상태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다.(엡 2: 10절 참조) 그럼에도, 우리가 행하는 선을 기준으로 성령 받은 사람의 기준척도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님(Holy Spirit)은 누구신가? 하는 것부터 정립되어야 한다. 성령님은 곧 성부, 성자의 영이시다. 때문에 내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나는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이다 (고전 3:16절 참조). 그러면, 나는 왜 느끼지 못하고 성령의 역사 하심이 내 속에서 나타나지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나의 자아, 고집, 아집, 이런 육신의 생각이 너무 강해서 내 속에 계신 성령을 거스리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는 성령님께서는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나를 버리고 멀리 달아나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항상 함께 계시면서 내가 죄 앞에 무릎을 꿇고 쓰러질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한없는 사랑으로 탄식하시며 간구 해 주고 계신 것이다. (롬8: 26-27절 참조)

2.  거듭난 사람에게 나타나는 실재성(증거):

내가 내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고 부르게 되는 것, 그 사실이 곧 성령 받은 증거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 3절).”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곧 성령 받은 사람이며,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란 것이고, 따라서 성령님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며 따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다. 이 상태를 신학상 술어로 "견인"이라고 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 44절 말씀).”

3. 성령의 충만을 내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방법:

a. 그리스도의 말씀을 많이 읽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요1: 1절 참조)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는 사람은 그 사람 속에 그만큼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은 능력이시다. 하나님의 말씀 또한 능력이다. 이 능력의 말씀을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이 더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다. 더 많은 능력이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사람은 더 큰 일을 해 낼 수 있다….이것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비결이라고 하면 믿어지겠는가? 그러나 사실이 그러하다. 말씀이 없는 곳에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질 않는다. 성령으로 가장한 사단, 광명의 천사들의 활동 영역을 넓혀줄 것뿐이다!

b. 그리스도의 말씀에 전적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이 바로 바리세파적인 사람이다. 바리세파처럼 머리만 굵어진다. 사람들은 성경을 많이 알면 무조건 바리새파적이라고 몰아세운다. 그러나 바리세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알기 때문에? 천만에,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는 많이 알았지만, 그 알고 있는 만큼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면 무조건 바리세파로 몰아가는 것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은 사람이 그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기만 하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큰 믿음을 소유한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말씀을 많이 읽고 그 말씀의 잣대(Canon)로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고집과 아집, 이런 죄성을 측정하고 자를 것은 자르고 버릴 것은 버리고, 내 속에 좌정하고 계신 성령님께 굴종하며 복종하는 순종이 우선되어야 한다.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비례해 성령의 열매가 내 삶 속에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우리는 모두 동일한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보다 큰 능력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하고 늘 죄의 마력 앞에 무릎을 꿇어버리고 마는 연약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는 성령을 받고 받지 못하고의 차이가 아니라, 자기의 아집과 고집이 얼마나 더 강하게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에 달렸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자신을 쳐서 더 많이 복종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치 않으면 그런 사람은 그만큼 자신의 아집, 고집 이런 죄의 속성들이 더 크게 드러나게 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굴종할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구원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변화 되는 능력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새로워지는 길이 있다. 내 힘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다.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된다. 부흥회 백날 쫓아다녀봐야 성령받는 것 더더욱 아니다. 오직 말씀을 통해 주시는 그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런고로 성령 충만한 성도는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로, 성령의 사람은 곧 말씀의 사람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8- 9절 말씀).”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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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사도는 벧전1:1-2를 통하여 예정에 대한 다섯 가지 주요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 

1) 죄인들은 성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선택을 받는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이는 공의로운 정죄와 저주로부터 누구를 은혜롭게 구원하실 지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으로서의 법령적 미리 아심을 말한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은, 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르게 만드는 하나님의 예정을 비롯한 그분의 주권적 계획과 목적으로부터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8:29). 하나님의 지식은 택한 백성들을 향한 특별하고도 부성적인 사랑과 분리될 수 없는 지식이다. 

2) 죄인들은 성경의 성화를 통해 거룩해지지 위하여 선택을 받는다.

택자들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를 통하여 거룩으로 부르심을 받는다. 죄악적이고도 타락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지 않는 한 거룩한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갈 수 없으며,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다고 확증한다. 또한 성령께서 성부가 선택하신 백성들을 위하여 이 성화의 사역을 수행하신다고 말한다. 성화의 사역은 계속되는 과정으로서, 택자들로 하여금 성령을 의지함으로써 거룩을 추구하게 한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 선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다. 스펄전, “하나님의 선택은 선택 받은 자들을 엄선된 사람으로 만든다.” 토마스 왓슨, “성화란, 그리스도의 선택을 받은 양들의 귀표이다” 

3) 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함과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선택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기 위하여, 자신에게 적용된 그리스도의 사역과 은택을 소유하기 위하여 선택받은 것이다. 피 뿌림을 위하여 선택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 즉 많은 사람의 죄 용서를 위해 흘리는 피, 새 언약의 피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택의 열매인 용서의 보혈이 신자들의 영혼에 적용된다. 

4) 죄인들은 모두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으로 선택을 받는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너희’는 특정하고도 한정적이며 번복될 수 없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결코 불의하지 않은 강렬한 개인적 선택이 포함되어 있다. 선택의 인격적인 특징은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말1:2,3)라고 말하는 구약성경에서조차 명백하게 드러난다(롬9:13). 하나님의 선택은 따뜻하고 부성적이며 가족적인 본질을 갖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수많은 자녀들을 마치 유일한 자녀처럼 대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 개수도 다 세시는 분이다. 우리의 이름이 여호와 하나님의 손바닥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 우리를 은혜 가운데 선택하신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롬8:28). 

5) 죄인들은 더 크신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기 위하여 선택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영원한 생명을 위한 위대한 비가시적 교회의 한 부분이 되게 하기 위하여 택하셨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바닷가의 모래알과 하늘의 별처럼 많은 것이다. 선택은 하나님의 혹독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광대한 관대하심을 선언하는 것이다. 

6) 죄인들은 자신을 향한 선택을 확신할 수 있다. 

7) 죄인들은 선택이 가져오는 은혜와 평강으로 말미암아 목회적인 영향을 받는다.

 

- 조엘 비키, 『칼빈주의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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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하나님의 성회
우리들의 특유의 교의

성령 세례

 - 20가지 질문과 대답 -

미국 하나님의 성회 한국총회

 

내 용

성령 세례: 그것은 무엇이며, 누가 그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성령 세례의 목적

1. 기독교인이 구원을 받을 때에 성령 세례를 받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이 체험이 성령 세례와 어떻게 다릅니까?

2. 사람이 성령 세례를 받지 않고도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들은 왜 성령 세례를 받아야만 합니까?

3. 사람이 한번 성령 세례를 받으면 왜 후에 재충만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까?

4. 성령 세례를 받았을 때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공중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것”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또한 신자의 개인 기도 생활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방언과 은사의 사용

5. 성경의 기준에 의해 공중석에서 방언으로 말할 때, 항상 방언 통역이 있어야만 합니까? 누가 방언 통역을 해야 합니까?

6. 방언으로 말함과 그 후에 따르는 방언 통역은 누구에게 유익함이 있으며, 무슨 목적이 있습니까?

7.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방언 통역이 가능합니까?

8. 교회에서 방언과 다른 은사들이 역사할 때에 우리들이 한 역할을 담당합니까?

 

혼돈되는 질문들에 대한 성경적 답변들

9.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지 않고도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10. 신약 성경에 기록된 첫번 째 성령이 임하였을 때에,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과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습니다. 왜 이러한 것이 오늘날에는 일어나지 않습니까?

11. 동시에 구원을 받는 것과 성령 세례를 받는 것이 가능합니까?

12. 고린도전서 13:8절은 “방언도 폐하고”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성령 세례가 단지 2000년 전 초대 신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

13. 바울은 고린도전서 14:19절에서 교회에서 “깨달은 마음으로 . . . 말하는 것이 . . .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라고 말했는데, 이 말씀은 방언의 체험이 오늘 날에는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14. 오늘날 체험하는 성령의 부으심이 진정으로 성경적이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15. 왜 오순절파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오직 몇 번 언급한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 강조합니까?

 

성령 세례 받기

16. 누가 성령 세례를 받아야만 합니까?

17. 사람들이 성령에 충만함을 받을 때 그들은 절반은 의식이 없는 상태입니까? 아니면 그들은 완전히 정신이 있으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의식하고 있습니까?

18. 왜 어떤 사람은 즉시 성령 세례를 받으며, 어떤 사람들은 오랫동안 갈망하여도 받지 못합니까?

19. 개인이 성령 세례를 받기를 원할 때 성령 충만함을 빨리 받기 위해 그의 생활이나 주위 환경에서 준비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20. 방언이 성령 충만함에 대한 유일한 증거입니까? 성령 세례를 받은 후에 그 사람의 태도나 행동에 어떤 의미있는 변화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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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세례: 그것은 무엇이며, 누가 그것을 체험할 수있습니까?

교회의 그 어떤 교의 보다도 더 많은 질문과 논란을 일으킨 것은 없습니다. 러한 논쟁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날의 이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 그러한 일을 처음 본 사람들은 질문을 했으며, 사도 베드로는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기 위해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청중들에게 성령님에 대한 깨달음을 갖게하기 위해서 구약 성경의 선지자들에 관하여 이야기 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성령의 바람은 결코 잠잠하지 않았습니다. 2세기의 터툴리안으로 부터 10세기의 시메온, 18세기의 요한 웨슬리, 그리고 19세기의 미국 부흥사들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령님의 강력한 나타내심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가장 위대한 역사는 20세기 초에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보다 완전한 체험을 갈망하던 몇 개의 작은 경건한 모임의 회원들은 성령의 은사의 회복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들의 모임에서 그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과 비슷한 이적들을 보았습니다. 령 세례를 체험한 사람들은 방언으로 말을 하였으며, 예언을 하였고 병자를 위하여 기도했을 때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으며, 새로운 선교 사역의 물결이 일어나서 곧 전 세계로 뻗어 나갔습니다.

이러한 20세기의 오순절파 사람들은 그들의 영적 체험이 사도행전 1:4, 5에 기록된 예수님의 약속이 실현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이 “아버지의 약속”이 “모든 신자들이 받을만 하고, 또 열렬히 고대하고 진정으로 구해야만 하는” (P. C. Nelson, 성경 교의, 774) 체험으로 믿었습니다.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그들의 강조는 거의 모든 기존 기독교 단체들과의 논란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오순절파 사람들은 조롱을 받고 기존의 교회들로부터 내어 쫒김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부흥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들 “거룩한 무리들”은 야외에서 모이거나 점포를 임대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치유와 구원의 이적들은 군중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들을 비웃던 호기심에 찬 사람들은 흔히 기도하기 위해서 남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무리들은 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나 그러한 이적이 계속됨에 따라 모이는 사람들은 사업가나 전문가들로 불어났습니다.

그 후 50년 동안 오순절파 사람들은 교회와 대학들을 설립하고 사역자들을 훈련시켰습니. 그들은 주일 학교를 조직하였고 선교사들을 파송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에 중점을 두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1960년대에는 또 다른 부흥의 물결이 오순절의 축복을 전파했습니다. 많은 루터교 신자들이 방언으로 말을 하고 병자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로마 캐토릭 신자들이 예배 중에 손을 들고 성령 안에서 기도했습니다. 장로교 신자들, 성공회 신자들감리교 신자들, 침례교 신자들, 형제교 신자들, 그리스도의 제자회 신자들 --- 성령의 바람은 모든 교회들에 불어오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그들의 믿음에 대해 진지한 모든 교파의 신자들은 “아버지의 약속”을 바라봅니다.

이 체험은, 구원과 별개의 것으로 구원 후에 따르는 것으로, 성령 충만한 삶의 부요함으로 신자를 인도합니다.

성령님으로 하여금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그 영혼이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갖도록 함으로서 질문에 대해서 가장 잘 대답을 하며, 논란을 가장 잘 해결하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신실한 신자들이 이러한 복된 체험을 하는 것으로부터 방해하는 성령 세례의 교의에 관한 오해가 있습니다. 대답을 요구하는 진정한 질문들이 있습니다. 위에 언급한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그에 대한 성경적 해답을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성령세례_ "20가지 질문과 대답" 중 1번 입니다.
 

성령 세례의 목적

1. 기독교인이 구원을 받을 때에 성령 세례를 받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이 체험이 성령 세례와 어떻게 다릅니까?

,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에 성령님이 그들의 삶에 위대한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성령님은 그들의 죄에 대하여 책망하시며, 의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며, 그들과 함께 거하십니다 (요한복음 6:44; 14:17; 로마서 8:9; 고린도전서 12:13). 아무도 성령의 자비로운 역사하심이 없이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라고 불리우는 성령의 또 다른 그리고 특유의 사역이 있습니다. 세례는 모든 믿는 자에게 약속하신 아버지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있게 만드는 선물입니다 (마태복 3:11; 누가복음 11:13; 24:49; 사도행전 2:33, 38). 그것은 기독교인이 거룩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새로운 헌신적 애정을 갖게 해주며, 그것은 예수님을 매우 사실적이고 귀한 분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 세례의 주된 목적은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더욱 큰 능력을 베풀기 위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8). 다른 유익한 점은 영적 예배에 있어서 가지는 더욱 큰 기쁨과 세계를 향한 우리의 사명에 대해 더욱 고무된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긴 세월을 두고, 교회와 교회 사이, 성도와 성도 사이, 방언에 대해 의견이 분분함을 본다. 방언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방언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을 향해 은혜가 없다고 하고, 방언하지 못하면 성령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말하는 목사님들도 있고, 반대로 방언 받지 못한 사람들은 또 방언하는 사람들을 향해 '은사주의', 심지어 '신비주의'로 몰아가며 방언은 초대 교회로서 중단되었다고 가르치기도 하고, 더 심하게는 현대 방언은 모두 사단에게로서일 뿐이다. 라고까지... 서로서로 경계하며 손가락질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본다. 무엇보다도 말세적 징조의 하나겠지만, 성령을 가장한 사단의 장난 또한 극심한 것이 사실이다. 하여, 필자는 오늘 "방언의 유익과 주의점" 에 대해 주님이 허락하시는 한도 내에서 같이 생각하며 나누어 보려고 한다.

1.어근:
방언이란 말은 헬라어 (글로-싸) 즉 “혀”와 (랄레인) “말하다” 의 합성어로서 “혀로 말한다”는 뜻이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방언(Speaking in tongues)은 성령의 역사 중 하나로서 "배운 바 없는 언어로서 영혼과 이성(理性)이 분리되는 상태에서 말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어근 자체에서 혼란이 오면 안 좋다, 필자가 그렇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근의 뜻이, 그런 뉘앙스를 품고 있어서 신학자들이 오해를 할 수 있는 소지가 많다는 것이다.) 이 방언은 (고전 12:-14:)고린도 교회의 특수 현상이었다. (어떤 신학자들은 무아의 상태에서 말하는 현상은 기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원시종교에서도 흔히 있었던 현상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것은 성령님에 의해서가 아닌, 사탄의 장난이었을 뿐이다.) (무아)는 주로 불교나 이방 종교에서 사용하는 언어이다. 실제 성령님의 역사로 주께 올리는 영의 기도는 결코 무아지경이 되거나 정신을 잃거나 혼절한 상태에서 중얼거림이 아니다. (현대 입신이란 것은 혼절 상태로서 성령의 역사로 볼 수 없다.)

방언에 대한 성서적 견해

1. 성경에서는 방언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함:
방언에는 단수가 아닌, 복수가 있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고전 12:10下에 보면,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to another different kinds of tongues)함을, 어떤 이들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to another the interpretation of tongues) 주시나니.” 했다.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방언”은 분명 우리가 배워서 말하는 모국어 (native speaking)를 가르킴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에는 약 6000개의 다른 방언(native speaking)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영적인 방언도 단수를 쓰지 않고 “방언들”이란 복수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고전 12: 28절 下반절) 보자.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varieties of tongues)을 하는 것이라.” 고 하면서 “varieties” 즉 “다양성, 혹은 변화”의 뜻을 지닌 단어를 사용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령의 선물로서의 방언에도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어떤 다양성인지 인간의 유한한 知적능력으론 한계가 있으니 말하기가 어렵고, 우선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일반 방언과 은사 방언)으로 말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방언에는 일반 방언과 은사 방언이 있다.

2. 성경에서 분리 해 볼 수 있는 방언:
a). 그 첫째가 오순절에 제자들이 방언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기록인데 (행2:3-13)여러 곳에서 모인 사람들이 자기들 지방 방언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each in our own language in which we were born”(행2:7-8),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들었으며, 또 (행2:11)에서는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 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 Cretans and Arabs-we hear them speaking in our own tongues the wonderful works of God”, “speaking in our own tongues” 즉 자기 자신들의 ‘모국어’로 들려졌고, 이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 중, 더러는 “저희가 새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기도 했다. 고넬료의 집과 (행10:46) 에베소에서 (행19:6) 그러했다.

**"이것은 분명히 초자연적인 은사이지만 (이 경우에는 언어의 혼란을 가져온 바벨탑 사건이 성령의 역사로 회복된 사례로 보는 신학자도 있다. 다시말해 바벨탑의 이야기란 (하나에서 다수의 분열), 오순절에는 (다수에서 하나로에 통일)이 일어나 인류의 교만 죄에서 오늘 성령의 은사인 복음의 말씀에 의해 일치(일원화)를 초래한 것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

b) 둘째로 고전12:-14장에 기술된 방언의 은사, 곧 은사적 방언이다. 은사란 영어에는 “gift”로 번역, 한국어에는 “선물” 로만 번역되어졌으나 헬라어에는 “토레아” 즉 선물, 부여된 은총, 하사물, 즉 “bounty”의 뜻이 담겨져 있고, “도시스” 즉 단순히 선물, “gift” 란 뜻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카리스마” 거저 주어진 선물, (성령이 각자에게 내려주신) 여러 가지 은사, 특수한 능력, 이란 뜻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이 은사적 방언은 가장 특색 있는 은사 (행10:46, 19:6, 고전14:2, 12:10-11)이며 바울 자신도 이 은사 방언을 받아 (고전14:18), 그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지만 이것은 최하위에 놓고 있다.

사실, 방언은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고전 14:2). 따라서 “ 영적활동 영역”으로서 이성 (이성(理性)은 성령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상태가 되어야 함)의 활동을 수반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여러가지 위험도 있기에 바울은 은사적 방언을 할 때는 반드시 통역의 은사도 같이 구하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사도 바울도 방언을 (고전13:1)일종의 하늘 언어로 간주하였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다수 (오리겐, 크리소스톰, 데오도덴, 그레고리)는 방언을 전도하기 위해서 내리신 (각 지방언어) 은사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비합리성이 있으며 만일 방언이 오직 전도에 필요한 것이라면 사도 바울이 방언 문제를 크게 강조했을 것이라고 본다. **

c) 새 방언:
어떤 목사님께서는 은사적 방언은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방언속에 포함되지 않았고 훗날 바울사도에게 따로 추가된 계시라고 말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여러 가지 풀리지 않는 논제가 의문으로 떠오르게 된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시란 것을 전제로) 간단 명료하게 한 말씀만 하셨다. 따라서 그 안에는 일반 방언 따로, 은사 방언 따로, 분류를 하시지 않았기에, 우리가 굳이 따로 분류 하려면 (방언을 주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장차 바울을 통해서 어떤 방언을 주실 것과, 또 여러 성도들에게 어떤 은사들을 선물로 주실 것을 다 아시고 미리 계획하신(He's the Planner) 분이시란 것이다.)

물론, 은사적 방언은 예수님 승천 후에 바울이 받았지만, 그것까지라도 미리 아시(선지(先知))는 성자 하나님이 따로 따로 분류해서 말씀하지 (강론의 여지와 시간 필요)않으셨지만, 그렇다고 "새 방언" 속에 (은사적 방언은 제외라는 말씀 역시 언급하지 않으신 것은 장차 바울을 통해서 어떤 방언들을 (각종 방언들, 일반 방언 은사 방언 포함) 몰라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기 보다는 오히려 정확하게 알고 계시기에, 모든 방언(각종 방언)들을 한 마디로 "새 방언”이란 말로 함축, 요약하셨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각종 방언"의 "각종"이란 형용사적 수식어에 대해서 어떤 것들인지...그것도 의문으로 남게 되기 때문이다.

또 새 방언 속에 일반 방언만 포함된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나중에 주시게 될 일을 알지 못한 상태에 우선 "일반 방언"만 언급하셨다가, 나중에 생각해 보니 "은사적 방언" 을 더 주어야겠다)...라고 갑작스럽게 아이디어를 내신 것처럼도 들리고...예수님께서 선지, 전지, 전능하신(先知, 全知, 全能) 하나님 되심의 의미를 크게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 사도가 예수님 후에 받은 방언이 예수님 승천하시기 직전에 언급하신 방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미리 알고 계심 (先知 能力)을 제한 할 때만 가능한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새 방언속에 일반 방언 뿐이고, 은사 방언은 예수님 승천 후 나중에 바울과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졌기에...예수님께서 거론을 안하셨다고 하면, 내게는 그 쪽이 더 모순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예수님께서 우리가(거듭난 성도) “새 방언”받을 것을 약속(막 16장17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하신 것은 “일반 방언”과 “은사 방언”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성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4. 방언을 주신 목적:
교회에 건덕을 세우기 위해서(고전 14: 4-5) (여기에서 교회란: 개인교회(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는 사람 자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인 회중교회를 의미함.

5. 방언을 하는 자의 자세:
a) 교회(개인 교회 포함)에 덕을 세워야 한다 (고전 14: 4-5)
b) 공중 예배시엔 삼가야 한다 새신자 보호 차원 (고전 14: 22-23)
c) 은사 방언은 통역을 할 수 있어야 한다. ( 고전 14: 27-28)
d) 하나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리는 마음이어야 한다.(고전 14:15)

6. 정리:
방언 문제는 초대교회 이후로 교회의 큰 논의의 대상이었으며 특히 교회는 이로 말미암아 교리적인 혼란마저 가져오고 있다. 따라서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서 일부 목사님들은 방언 그 자체마저 부인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성령님의 능력을 제한시키려는 것으로서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또 각종 은사자들이란 사람들이 있어, 방언을 따라 하게도 하고 억지로 혀를 굴려 ‘랄랄랄’ 따라하다 보면 나중에 방언이 터진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런 방언이야말로 위험천만이다. 필자가 존경하는 한 분의 말을 여기 인용해 본다. “(방언이)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방언을 하지 않으나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방언을 하는 사람이 주위에 많지 않고 또 몇몇 하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가 별로 나아 보이지도, 본받을 만한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할까요?”

무슨 말인가? 방언을 말하는 자가 교회나 개인 신앙생활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새 방언을 주신 목적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방언이라면 그 방언이란 것도 성령 하나님의 선물로서가 아닌,
인위적인 방법으로 말하는 경우, 더 심하면 다른 영으로서 말하는 방언이 아닐까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알지못하는 방언을 유창하게 잘하는가 잘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과 그 사람이 성령의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성령의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오히려 그 삶에 나타나는 열매로 분별하는 것이 그 정확도가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눅 6: 43-47절 참조)

새 방언도 (일반 방언이든 은사 방언이든)다른 모든 은사처럼, 위로부터 오는 각종 아름다운 선물이기에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겸손한 마음을 배워 모든 믿는 이들이 아름다운 신령한 은사들을 사모하며 주님 안에서 활용하도록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것은 좋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인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는 안 된다. 새 방언은 분명 성령의 주시는 선물이요, 은사인 만큼 부정해서도 안 되고 따라서 아직 그 은사를 받지 못한 성도들을 비방하거나 무시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새 방언이 성령의 선물이라면 선물을 주시는 분의 주권 또한 주님께만 있음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사신바 되어 성령으로 한 형제 자매된 우리는 구원론(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절 말씀)"즉 하나님의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는 길 이외에 다른 길은 결코 없다고 하는 것은 근본 진리로서 절대 양보해서도 안 되고 물러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전지 전능하신 성령님의 은사는 각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는 고로, 내 자신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경건에 이르는 연습으로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기에, 딤전4: 8) 날 마다 말씀 읽고 열심히 기도하되 그 어떤 경우에라도 신학자들처럼 서로 다투며 형제를 정죄하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의 진보에 아무런 유익이 없고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지 못하면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각종 은사들을 선물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성령님을 근심시켜 드리는 죄를 지을뿐 아무런 유익이 없다. 고로, 방언은 성령 받은 사람의 필수가 아니나 분명한 영적 언어임이 확실하고, 성령 받은 사람은 모든 은사의 주체이신 성령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셨으니, 영언 "ability"를 소유한 자라고 할 수 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 4-7)”,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밤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 5: 12- 22절 말씀)."



아멘넷, 별똥별/최송연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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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야생화(88종) 감상

[아름다운 우리말]


1 부레옥잠화

* “외국인이 한복을 입으니 역시 가량맞다.”에서

가량맞다의 뜻은?

---> 격에 조금 어울리지 않은 데가 있다.


2 금낭화


3 안개 속의 물봉선화


4 모싯대꽃


5 안개 속의 동자꽃

* “보기에는 내미손처럼 보이나 20년 넘게 장사를 해 온

사람이니 조심해라.“에서 내미손의 뜻은?

---> 물건을 흥정하러 온 어수룩하고 만만한 사람


6 당아욱꽃


7 쇠별꽃 과 봄까치


8 산당화(동백 축소판)




9 붉은 인동초꽃



10 백두산 구름패랭이

* “묵은 때가 끼어 덴덕스러워 보이는 살림살이들이

넉넉지 못한 생활 형펀을 잘 말해 주고 있었다.“에서

덴덕스럽다의 뜻은?

---> 산듯하고 개운한 맛이 없고 좀 더러운 느낌이 있다.




11 개갓냉이꽃


12 개불알꽃(일명봄까치)



13 금꿩의 다리


14 천일홍


15 3000년에 1번 핀다는 우담바라꽃

* “보기보다 살림 솜씨가 맵짜다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김원우의 짐승의 시간’>에서 맵짜다의 뜻은?

---> 성질 따위가 야무지고 옹골차다.


16 노루귀꽃


17 양귀비꽃


18 아부틸론 꽃


19 자목련


20 등꽃

* “전체를 한바탕 꾸짖고 나서 그 모가비의 팔목을

끌고 가려 한 즉, 이놈이 팔을 뿌리치며 바동거렸다.”

<이희승의 소경의 잠꼬대’>에서 모가비의 뜻은?

---> 막벌이꾼 패거리의 우두머리


21 구름패랭이


22 꿩의비름


23 말나리꽃


24 뻐꾹나리


25 솔나리

*“아예 한갓지게 버림치로 돌려...

창고에는 버림치가 가득 쌓여 있다.”

<이문구의 우리 동네 김씨’>에서 버림치의 뜻은?

---> 못 쓰게 되어서 버려 둔 물건


26 잔대


27 미역줄나무


28 상사화


29 큰뱀무


30 개쑥부쟁이

* “골목길에서 아주머니들이 아닥치듯 사우고 있다.”에서

아닥치다의 뜻은?

---> 몹시 심하게 말다툼하는 모양


31 파리풀


32 삼잎국화


33 자귀나무


34 기린초


35 쉬땅나무


36 잇꽃 (홍화)


37 땅채송화


38 겹삼잎국화


39 개망초


40 석잠풀


41 술패랭이


42 공조팝나무


43 하늘나리


44 매화노루발


45 끈끈이이대나물


46 정금나무


47 털갈퀴덩굴


48 삼색병꽃나무


49 섬말라리


50 꽈리꽃


51 참골무꽃


52 목수국


53 까마중


54 패랭이꽃


55 범부채


56 인동덩굴


57 불로화


58 산사나무


59 달구지풀


60 찔레꽃


61 벌노랑이


62 붉은 인동덩굴


63 조뱅이


64 접시꽃


65 백 접시꽃


66 흙 접시꽃


67 홍 접시꽃


68 연분홍 접시꽃


69 화야산 흰얼레지


70 배롱나무


71 전봉산 얼레지


72 화야산 노루귀


73 왕깻숙부쟁이 꽃


74 잔대미역줄나무 꽃


75 층꽃


76 설악산 돌단풍


77 솔나리 꽃


78 ?의비름


79 노루귀꽃


80 명자나무꽃




82 석류꽃


83 제비동자 꽃



84 자주색매발톱꽃


85 광덕산 할미꽃


86 백두산 분홍할미꽃


87 백두산 오랑케장구채


88 변산바람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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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8장에서 예언한 사건이 이루어지는 것인가?

출처" You/tube


끝부분에 책 선전이 있는 동영상을 만든 단체는
독자님들의 여러 의견을 수렴하지 못하는 단체인 듯,
어떤 부정적인 견해이건 성도라면 귀를 기울여
주의 사랑으로 경청해주고 이해시켜 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관리실에 신고하기에 더 급급한...
이해할 수 없는 단체인 것이 맞은 것 같습니다.

이유 아닌 이유로 자꾸 다음 관리실에
신고가 들어가기에
게시물 그 자체를 아예 삭제했습니다.
모든 독자님들은 오해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영어가 되시는 분들은 문제가 없으시겠으나
영어 해독이 어려운 분들에게는 불편함을 드려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목양연가 섬기미 드림-

Pompeii는 역사의 베일에 가려진 채 1700년 동안 7~8미터 화산 잿더미 속에 말없이 파묻혀 있었다. 문헌에는 로마 귀족들의 휴양도시이자 환락의 도시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 그곳이 어디인지 행적을 모르다가 16세기말에 사르노 강으로부터 토레안눈치아타 시로 물을 끌어오기 위해 라치비타라고 알려진 구릉 밑에 터널을 팠던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며 1709년 4월 어느 날 수도원 뜰, 우물 작업을 하던 인부의 곡괭이에 걸린 쇠붙이가 계기가 되어 마침내 세상에 그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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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 79년 8월 24일 베수비우스 화산이 용암을 토하다. 그 당시 광경을 컴퓨터 그래픽로 담아 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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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더미를 걷어낸 폼페이 중심 모습. Mt.Vesuvious 화산을 뒤로한 전경.


Pompeii의 발굴 경위


1. 1709년 4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최초 작업 인부에 의해 발견되어 알려지기 시작했다.

2. 1738년 4월 밭 갈던 농부가 곡괭이에 부딪치는 쇠붙이 소리를 듣고 이상히 여겨 입소문이 퍼지자 당시 가장 유명했던 토목기사 도메니코 콘타나가 적극성을 띠고 작업에 뛰어 들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다.

폼페이의 발굴 작업은 1748년에야 시작되었고, 1763년 그 장소가 폼페이였음을 밝혀주는 비문(rei publicae Pompeianorum)이 발견되었다.

3. 1938년 12월 11일 헤르쿠렐늄 극장에 세워진 돌벽, 눈부신 프레스코 벽화, 원형극장등이 발견되다.


1860년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가 발굴 감독이 되면서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발굴작업은 1951년 아메데오 마이우리의 지휘 아래 집중적으로 재개되었다.
그는 1924~61년에 발굴책임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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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 극장 전경 : 수용 인원은 약 8,000명 정도라는 기록인데, 실제 보면 20,000명도 넘게 들어 가는 수준이다.


유적을 유럽에 널리 알려 발굴 추진에 도움이 된 저명한 독일 고고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역할도 컸다.


그는 1764년 "로마고대 미술사"를 편찬하여 학문적 체제확립을 하였고, 그 영향이 세계에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건축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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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제 1, 2차 대전으로 발굴 작업이 중단 되었다가 1951년 아메마데오 마이우리의 지휘감독 아래 발굴이 다시 활기를 띠어 금일에 이르고 있으나 아직도 3/5 정도 밖에 발굴이 안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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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시대를 구가한 화려한 벽화!


1748~1763년 본격적 발국 시작 하여 마침내 폼페이의 족보(근거)"reipublicae pompeianorum" 비문을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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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처음 언급 되기는 BC 310년 제 2차 삼니옴 전쟁때 로마의 함대가 사르누스 강에 상륙하여 공격하려다 실패 했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하지만 BC 89년 로마 장군 루키우스 코린넬리우스 술라에 의해 마침내 로마에 함락되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그 장소가 어딘지 모르다가 위 비석을 통해 마침내 Pompeii라는 사실이 판명 되다.


AD 1803년 ~ 1873년 영국 역사 소설가 E. G 리턴에 의해 쓰여진 폼페이 최후의 날이 세상에 알려 지면서 더욱 세인의 관심의 대상으로 떠 오르다. 이 소설은 빙겔의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삼은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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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창을 옆으로 낀 삼거리 : 이렇게 화려한 곳에 공창이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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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식 이름을 빌리면, 최고급 콘도 휴양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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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양지 전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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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P용 휴양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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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케하는 신의 저주인지, 자연 발생인지 사이를 오가게 만드는 시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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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지에 날벼락을 맞고 죽어가는 최후의 의식 끝자락엔 과연 무슨 생각들이 숨어 있었을까? 앉아서 무슨 생각을 그리도 골돌히 하다가 그 재앙을 만났을까....??? 당시 사망자 수는 2,000명설과 20,000명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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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道와 車(마차)도의 구분이 명확하다.

마차 바퀴가 할퀴고 간 자욱 깊이로 년대를 추정한 고고학자에 따르면 BC2500년의 유구한 도시였다는 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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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최고급 일류 호델 사우나 보다 더 우아하고 훌륭한 사우나 시설에 경탄이 절로 난다.

이때가, 신석기시대로서 우리나라 선조가 몽촌토성 움막에 기거할때 쯤이니 가이 간접비교가 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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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그런 재앙이 있었더냐?고 비웃기나 하듯, 베수비우스 바로 턱밑에 평온히 살아가고 있는 마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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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리 남부 나포리만 연안 항구도시 Pompeii를 끼고 도는 사르누스 강은 베수비우스 활화산을 비웃기나 하듯, 지금도 말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Pompeii는 수 많은 광관객들의 의아스런 눈총을 받아 가며 옛 화려했던 향수를 갈망하면서 도시국가와 로마의 속국 자리를 맴돌았지만 결국 1861년 이태리로 완전 종속 되고 만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최송연
 
비록,
삶의 고통이 흑암처럼 
나를 둘러 진을 쳐도 
당신의 그 사랑
별빛이 되어 
나의 가는 길 인도하시고

바싹 
메마른 광주리 같은 생(生)
변변한 알갱이 없어 부끄러우나
당신의 그 사랑
이슬이 되어
새벽마다 내 영혼 적셔 흐르니

이 생명 다하기까지 
당신께 드릴 나의 고백은 
오직 하나
"사랑합니다, 당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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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안의 4대 이단을 아십니까?



영남신학대학교의 최태영 교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교단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이대위, 위원장 임준식 목사)가 개최한 98회 이단·사이비 대책세미나’(2014.1.16.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아래의 글을 발표했다. 교회 안에 있는 이단이 교회 밖의 잘 알려진 이단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현재 한국교회 안의 이단 가운데 시급히 대책을 강구해야 할 대상으로 펠라기우스주의 로마가톨릭주의 종교다원주의 신사도운동을 꼽는다.


이 글은 한국교회의 기존의 이단연구가들의 접근방식이나 관점과 조금 다르다. 흥미로운 주요 특징은 4가지이다. (1) 갈라디아교회를 향하여 비분강개했던 사도 바울을 언급하면서 한국교회 안에 암약하고 있는 이단사상, 이단운동에 별다른 경계심을 갖지 않고 이들을 간과하는 교회의 현실을 개탄한다. <리포르만다> 운영자 최덕성 교수가 오래 전부터 강조해 온 바와 동일하다. (2) WCC 부산총회(2013)를 계기로 전개된 종교다원주의 관련  'WCC반대 투쟁'과 비평적 학문활동의  정당성을 뒷받침한다. 통합측 교단 소속 목사가 종교다원주의를 배격하는 신학 관점을 이단 논의 마당에서 발표한 것은 특이하다. 

 

(3)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이단 아니라고 판단 발표한 다락방운동(대표 류광수 목사)과 박윤식 목사 등을 이단 목록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4)  한신대학교의 김경재 교수(명예)를 포함한 다수의 종교다원주의 신학자들, 특히 2013년 정초 발표된 '4대 신학조항'을 쓰레기로 여기고 이를 거부하는 성명서들을 발표한 신학교수들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관련자들, '유보적 칭의론을 주창하는 풀러신학교의 김세윤 교수, 그리고 WCC 추종자들과 관련하여, 이들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전제와 조건을 설정하고 제시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지적하거나 설명하는 결기와 단호함을 보이지 않는다.


아래의 전문은 <교회와 신앙>(2014.1..21.)에서 옮겨왔다. 이해를 돕고자 일부분을 의미 변화 없는 범위 안에서 고쳐썼다. 옮겨 실음에 대하여 저자와 <교회와 신앙>의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리포르만다> 편집자 주-


 

현재 한국교회 내 이단: 펠라기우스주의, 로마가톨릭주의, 종교다원주의, 신사도운동

 

최태영 교수 / 영남신대, 예장통합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 전문위원

 

1. 이단에 대한 성경의 교훈

 

1) 갈라디아서 1:6~9. 이단(“다른 복음”)에 의해 흔들리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심정을 생각해 보라.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말을 두번이나 반복한다. 이러한 과격한 선언을 하는 바울에게 있는 것은 예수(진리)에 대한 사랑 그리고 교회(양떼)에 대한 사랑이리라. 기독인이 사랑이 있으면 이단에 대하여 저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단에 대한 저주가 없다면, 예수와 교회에 대한 사랑이 없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 속하는가?

 

2) 마태복음 13:24~30의 비유가 말하는 예수님의 교훈. 가만 두어라라고 한다. 이 말씀은 이단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 가져야 할 사랑과 인내와 권면의 필요성 또 예수님은 교회 안에 이단이 자랄 것을 알고 계셨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가라지를 뿌리 뽑고자 하는 지나친 노력을 경계하셨다. 이는 어차피 가라지 문제는 심판의 때에 가서야 해결될 일이기 때문이다. 이단은 종말의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단에 대한 대처는 신중하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 덕 보다 해를 끼치게 된다. 이단에 대해 저주를 선포하되, 분별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2. 교회사에서의 이단 개관

 

교회사에 나타난 이단들을 살펴보면 바른 교리를 확립할 수 있다. 오늘날의 이단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다.

 

1) 고대교회의 이단들: 삼위일체론적 이단들: 일신론, 양태론, 삼신론에 대하여, 


하나님은 언제나 삼위(성부, 성자, 성령)로 계시며, 삼위는 본질에 있어서 동등하며,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히 낳은 바 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온바 되신다. 기독론적 이단들: 두 본성에 대한 이해 결핍 바른 교리: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 있으며, 신성과 인성은 서로 혼합, 교환, 분리, 분열되지 않는다. 구원론적 이단들: 펠라기우스주의/준펠라기우스주의 바른 교리: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노력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2) 종교개혁 시대의 이단들에 대하여


로마(가톨릭)교회가 보는 오직성경-오직은혜-오직믿음-오직예수(sola scriptura / sola gratia / sola fide /solus Christus)

 

3) 계몽주의 시대 이후


이단정죄가 약화되고, 성경(계시) 보다 이성에 더 큰 권위를 부여하였다. 그 결과로 성경적 교리에 근거한 이단 정죄는 약화되었다. 그러나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와 이성 중심의 합리주의를 주창하는 계몽주의의 정신은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 신앙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그 자체가 이단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4) 현대의 대표적 이단들


여호와의증인: 삼위일체론과 지옥심판을 부정, 몰몬교: 성경외의 경전, 통일교: 성경외의 경전, 종말(재림)론, 신천지교: 종말론(요한계시록에 대한 왜곡된 해석), 하나님의교회: 신론(어머니 하나님), 신구원파: 구원론 왜곡.

 

3. 교회 내 이단 사상

 

이단의 심각성은 바른 교리(정통신조)를 약화시키거나 질식시키는데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단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둘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불교,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에 대한 태도와 이단에 대한 태도가 각각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른 종교는 기독교의 바른 교리를 위협하지 않는다. 기독교와 다른 종교는 각자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단은 기독교의 교리를 직접적으로 위협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단에 대해서는 교리적으로 싸워야 하고 그것으로부터 교회를 지켜야 한다.

 

이단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이 좋다. 하나는 이미 교회에 의해 정죄당한 집단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통일교, 구원파, 신천지교, 하나님의교회 등이 여기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교회 안에 있는 이단 사상이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암약하고 있는 비복음적 가르침을 통칭한다. 우리가 정말 위험하게 여겨야 할 것은 후자이다. 전자는 이미 검증되었고, 또 눈에 잘 띄는 이단이므로 대처하기가 비교적 쉽다. 그러나 후자는 눈에 잘 띄지 않으므로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 전자는 교회가 비교적 잘 대처해 왔으므로 현재 그렇게 크게 위협적인 집단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후자는 그렇지 않다. 보이지 않게 교회를 파괴시킴으로써 가공할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 교회가 경험하고 있는 교회 안의 이단 사상 가운데서 교회가 시급히 대책을 강구해야 할 대상은 펠라기우스주의, 로마가톨릭주의, 종교다원주의, 그리고 신사도운동이다.

 

1) 펠라기우스주의


교회사적으로 가장 위대한 교부로 일컬어지는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가 교회에 끼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기여는 펠라기우스 논쟁과 도나투스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가지 모두 이단 문제에 관련되지만 그 중 더 심각한 것은 펠라기우스주의다. 펠라기우스의 사상은 하나님의 은총을 역설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비판을 받고 교회에서 정죄되었지만, 죽지 않고 그 이후 줄기차게 교회 안에 남아 있었으며, 오늘날은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펠라기우스 사상의 핵심은 인간의 능력에 대한 긍정에 있다.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며,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행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한 업적을 쌓을 수 있으며, 그러므로 노력에 의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에 의하여 배격되었고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주의는 곧 바로 세미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로 소생한다. 준펠라기우스주의로 번역되는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과 은총론을 받아들이지만 거기에 펠라기우스의 사상을 혼합시켰다.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는 없지만 그래도 구원을 향해 상당한 수준에 이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거기에 하나님의 은총이 더해짐으로써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친 것이다. 알기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것이다. 자기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의 완성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상도 역시 펠라기우스주의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어 교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세미펠라기우스주의를 포함한 펠라기우스주의는 고대교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지만 사람들이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긍정이다. 인간은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인간은 위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인간에게는 무언가 본질적인 선이 있다는 것, 결국 인간은 높임을 받고 영광을 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상이 세상의 성공을 추구하는 교회에 만족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펠라기우스주의는 마침내 중세 로마교회를 장악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16세기의 종교개혁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슬로건은 로마가톨릭교회가 펠라기우스주의에 물들어 있음을 증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sola gratia, sola fide 가 바로 그것이다. ‘오직 은총은 로마교회의 공로와 은총, ‘오직 믿음은 로마교회의 믿음과 선행이라는 공식을 타파한 슬로건이기 때문이다. 로마교회의 공로와 은총, 믿음과 선행은 펠라기우스주의의 산물이다. 인간의 가능성에 근거한 펠라기우스주의가 중세교회의 미몽 속에 부지불식간 교회의 교리로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공로와 은총은 인간이 노력하여 이룬 공로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더해져서 구원에 이른다는 가르침이다. 준펠라기우스 사상이다. 믿음과 선행은 믿음만으로는 안 되고 선행이 있어야 의롭게 된다는 것인데, 선행이라는 인간의 행위에 방점을 둔, 역시 준펠라기우스 사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교회를 펠라기우스적 이단으로부터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르친 은총의 구원론, 복음의 진리에로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난공불락의 로마교회의 교권에 의하여 도리어 이단으로 정죄를 받고 파문당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부득이하게 프로테스탄트 교회(개신교)를 형성하게 되었다. 개신교는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의 진리를 회복한 교회이다. 그에 비해 로마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떠나 펠라기우스의 교설에 몸을 담고 있는 거대한 이단적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펠라기우스주의는 펠라기우스라는 이름을 제거하고 다른 이름으로 끊임없이 교회 안에서 살아남았고, 현대 교회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더 큰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형태의 인본주의는 펠라기우스의 후손들이다. 인간을 긍정하고, 인간을 높이고, 인간의 업적을 기리는 인본주의적 행태는 오직 하나님이라는 은총 교리를 부정하는 펠라기우스적 산물이다. 사람을 높이고, 사람을 칭송하고, 사람에게 권력과 재물과 명예를 부여하는 것은 복음의 진리가 아니라 펠라기우스주의이다. 오늘날 기독교 언론을 장식하는 수많은 인물 사진과 그들의 업적에 대한 광고들은 펠라기우스주의가 우리 기독교 안에 얼마나 팽배해 있는지에 대한 생생한 증거라 할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인간을 높이려는 집요한 행태는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선악과, 곧 원죄의 발로일 뿐이다. 바르트는 죄의 가장 뚜렷한 양상은 인간이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하는 교만이라고 하였다. 개혁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원죄의 철저성 및 인간에게는 선이 하나도 없다는 전적 부패(total depravity) 교리가 성경의 진리임을 천명하였다. 마치 인간에게 무슨 선한 것이 있는 것처럼 서로 서로 사람을 높이고 사람의 업적(행위)을 칭송하는 이러한 죄를 용인하고 따르는 것이 교회 안에 있다면, 그것은 교회 안에 있는 이단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 로마가톨릭주의


앞에서 펠라기우스주의로서의 로마교회를 보았는데, 로마교회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정도 이상으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집단임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먼저 종교개혁자들의 슬로건 중 앞에서 말한 것 외의 두 가지를 더 보자. sola scriptura(오직 성경),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이다. 이것은 로마교회의 핵심적인 사상, 곧 성경과 전통, 그리스도와 마리아(및 성인)에 대한 비판이다.

 

오직 성경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개신교의 단 하나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진리의 출처는 오직 성경뿐이라는 신앙고백이다.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이 성경이다. 모든 가르침의 진위는 오직 성경에 의해서만 가려져야 한다. 중세의 로마교회가 성경의 진리에 완전히 역행했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의 원리로써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로마교회는 성경 외에 전통이라는 또 다른 진리의 출처를 내놓았다. 전통이란 교회의 결정을 가리킨다. 교회회의에서 무언가를 결정하면 그것은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는 성경도 하나의 전통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전통이란 원리에 따라 로마교회는 성경에 없는 것을 무엇이든지 만들어 낼 수 있었다. 7성사, 연옥설, 면죄부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로마교회가 얼마나 성경으로부터 자유로운 집단인지는 종교개혁자들을 파문하고 출교한 이후의 행보를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로마교회의 감독을 교황이라 칭하며 그에게 무오한 존재로서의 권위를 부여하였다. 마리아를 제2의 중보자로 격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마리아는 원죄 없이 성자를 잉태하였고, 몽소승천하였다는 교리를 선포했다. 성경에서는 도저히 근거를 댈 수 없는 그들만의 교리들이다.

 

그러므로 로마교회는 성경적 교회라고 부를 수 없다. 거기에다가 로마교회는 거대한 피라미드 형태의 교회정치체제를 구축하였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역사상 가장 견고한 독재체제를 세계적으로 구축하고 있는 것이 로마교회이다. 이것을 필자는 로마가톨릭주의라고 말한다. 이 거대한 로마가톨릭주의는 온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종교계에 끼치는 영향력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우리 개신교에 끼치는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상 세계 최대의 단일종교단체인 로마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5)를 계기로 개신교와 모든 세계의 종교들의 맏형 노릇을 자임하였다. 그리고 개신교 지도자들에게도 화해의 손을 벌리며 교회의 일치를 도모할뿐더러 나아가 세계의 모든 종교를 통합하는 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인지 개신교는 로마교회에 대한 경계의식을 점점 풀어가게 되었고, 오히려 거대한 로마교회체제를 동경하는 듯하다. 우리가 눈을 들어 살펴보면 한국과 세계의 개신교 교회들이 거대한 로마교회체제를 벤치마킹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한 개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강력한 독재체제의 모델이 선호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강력한 독재체제가 거대한 국가를 만들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종교적으로도, 특히 교회에서도 통한다는 것이 비극적인 현실이다. 교회로부터 절대적인 권한을 위임받은 담임목사가 제왕처럼 운영하는 소위 대형 교회가 한국에서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로마교회의 대성당과 같은 거대한 예배당을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건축하고 그 위용을 과시하는 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로마교회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는 오히려 작은 자들의 공동체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거대한 제국을 꿈꾸지 않으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셨다. 신약성경은 로마의 바티칸 같은 거대한 건축을 암시하는 가르침이 없다.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침 뱉음, 채찍질, 못 박힘 당하시고 조롱받으시고 수치를 받으시고 죽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그러한 길을 따르도록 가르치시고 명령하셨다. ‘내 나라는 세상의 것과 다르다고 하셨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세상 나라와 질적 차이가 없는 거대한 나라를 지향하여 왔다. 우리 개신교가 그러한 로마교회를 닮아간다면 이것이 어찌 교회 안에 있는 이단적 요소가 아니겠는가?

 

오늘날 로마교회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옳은지 입장을 정할 필요가 있다. 루터와 칼뱅이 로마교회를 적그리스도의 집단이라고 규정했는데, 칼뱅의 정신을 계승하는 오늘의 개혁교회(장로교회)는 더 이상 로마교회를 경계하지 않는 것 같다. 종교개혁 시대보다도 로마교회는 훨씬 더 비성경적으로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더 가까워지려고 하는듯한 진보적 개신교의 태도는 이해하기 힘들다. 최소한 교리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로마교회와의 차이를 분명히 확인하고 선을 긋지 않는다면, 거대한 로마교회체제와 그들의 이단적 교리에 동조될 위험성이 크다는 것은 불문가지가 아니겠는가?

 

3) 종교다원주의


종교개혁자들의 4대 슬로건 중 마지막은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다. 로마교회가 여기에 마리아를 더하였고, 나아가 성인들(saints)을 더하여 그들의 공로가 교회 안에 쌓이고, 면죄부를 사면 그 공로를 덧입을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로마교회에 의하면 하나님과 죄인들을 화목하게 하는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뿐 아니라, 마리아, 그리고 성인들에게까지 확장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종교다원주의다. 곧 다른 종교들도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역할을 하는 소위 메시야가 있을 수 있다는 사상으로서, 그러므로 기독교는 절대적인 최고의 종교가 아니라 종교들 중의 하나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가르치는 신약성경을 기독교인들에게만 적용되는 말씀으로 제한하면서 그것이 만인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진리주장이라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것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구원의 길이지만, 유일한 길은 아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고 구원의 진리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종교다원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함을 얻는 이신칭의 교리를 부정한다. 루터는 일찍이 이신칭의 교리를 교회의 존폐가 달린 교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에 의하면 오늘날의 종교다원주의는 교회를 폐하는 이단이 아닐 수 없다.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의 구원론을 근본적으로 와해시키는 사상이므로 교회는 배격하지 않을 수 없는데, 유감스럽게도 서구의 신학계에서는 종교다원주의를 용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주류신학사상으로 만들었다. 세계적으로 서구권에서 기독교가 쇠퇴하게 된 것은 종교다원주의 사상의 범람으로 인하여 교회의 구원론이 무너진 데에 크게 기인한 것으로 사료된다. 작년에 성공적인 WCC 부산총회를 앞두고 진보와 보수 진영 간에 종교다원주의 논쟁이 일었던 것을 우연적인 사건이거나 불행한 사건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이제는 우리도 종교다원주의 신학에 대하여 깊이 성찰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지 않나 생각한다. 우리 교단을 비롯하여 한국 교회는 종교다원주의 신학에 대하여 분명한 입장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이르렀다고 본다.

 

4) 신사도운동


신사도운동은 20세기 초반의 오순절운동, 중반의 성령은사운동, 후반의 빈야드로 대표되는 예언과 표적 운동에, 교회성장의 열망이 덧붙여져 나타난 새로운 성령운동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말 미국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파급되고 있다. 전문가들의 조사에 의하면 세계 개신교의 약 40% 이상이 신사도운동의 영향권에 들어갔다고 한다. 아직 한국교회 안에 크게 침투된 상황은 아니지만 만약 이것이 교회 내에 뿌리를 내리게 되면 500년 개신교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운동의 정체를 잘 파악하여 미연에 방지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성령을 빙자한 비성경적인 운동으로 규정할 수 있는데,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이 지적된다. 하나는 신사도라는 직분에 관한 것이다. 1세기 때에 예수께서 사도들을 세워서 교회를 세우고 다스리게 하신 것처럼, 오늘의 시대에는 성령께서 새로운 사도와 선지자(신사도)를 세우신다고 한다. 그래서 사도의 강력한 리더십에 의해 운영되는 체제로 교회를 재편하기를 열망하신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으라는 말씀을 빙자한 소위 새 부대론이다. 다른 하나는 이 운동이 지향하는 신앙 내용, 곧 가르침인데, 그것은 세속적 부, 건강, 행복, 그리고 성공을 지향하는 소위 번영신학이라는 것이다.

 

이 운동이 성공하면 현재 대부분의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교단체제는 무너지고 신사도 중심의 중앙집권적 거대교회 체제로 교회의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 경우 결과적으로 나타날 교회의 형태는 로마교회를 벤치마킹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상당수 대형교회는 신사도운동이 목표로 하는 교회체제에 이미 도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운동이 성공했을 때 나타나는 또 하나의 결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현저하게 후퇴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간단히 말하면 신사도운동은, 첫째, 전통적인 목회자 중심의 교회체제를 무너뜨리고 신사도 중심의 중앙집권적 권위주의체제를 추구하며, 둘째, 전통적이고 성경적인 복음의 진리, 곧 십자가의 도 대신에 이 세상적 가치관과 철학을 추구한다. 그 결과 기독교는 세상적인 종교, 세속적 철학으로 변모되고 말 것이니, 이것을 어찌 이단적 운동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4. 결론

 

이단에는 그 이론과 행태에 있어서 수준이 낮고 유치하여 이단성이 쉽게 드러나는 집단도 있고(신천지교, 하나님의교회, 통일교 등), 그 이론이 정교할뿐더러 실천성에 있어서 교회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력이 있어서 그 이단성을 쉽게 분별하기 힘든 사상 내지 운동도 있다. 둘 중에서 교회에 더 파괴적인 것은 단연 후자라고 할 수 있다. 후자 중에서 현재 우리나라 교회에 파고들어 암약하고 있는 사상으로서는 펠라기우스주의, 로마가톨릭주의, 종교다원주의, 그리고 신사도운동을 들 수 있다. 이 네 가지는 각각 분리된 것이 아니고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성경으로부터 자유로운 사상을 전개한다는 점에 있어서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신천지교나 하나님의교회처럼 드러나게 반교회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집단들에 대해서 강력하게 대처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실상 더 위험한 후자, 곧 교회 안에 암약하고 있는 이단적 사상과 운동에 대해서는 별다른 경계심을 갖지 않고 그저 간과하고 있는 현실을 볼 때 갈라디아교회를 향하여 비분강개했던 사도 바울이 생각난다. 교회 안에 암약하고 있는 이런 이단적인 사상과 움직임에 대해서도 경각심을 가지고 대처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가 감당해야 할, 이 시대 교회의 과제가 아닌가 싶다.

 

- 신학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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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방언 열풍의 허와 실(박영돈)


“방언은 귀한 은사, 그러나 균형 잡힌 이해가 꼭 필요하다”

 

  한국 교회에 때아닌 방언 열풍이 불고 있다. 20세기 초 오순절 성령 운동과 함께 불기 시작한 이 열풍은 점점 거세져 급기야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상관없이 교파를 초월해 온 지구상의 교회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이 방언 열풍은 성령 체험과 은사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뜨겁게 달군 반면, 수마(水魔)가 할퀴고 간 자국처럼 세계 교회의 처처에 상처와 갈등과 분쟁을 남겼다.
  이제 세월의 흐름 속에 그 상처는 아물고 그 열기에 대한 추억마저 아스라이 잊혀져 가고 있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 유독 한 곳, 한반도에만 이 열풍이 또다시 불어닥치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교회를 다시 강타한 방언 열풍

  과거에도 한국 교회에서 방언은 성령 세례와 함께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었고 많은 교회들이 이로 인해 혼란과 진통을 겪었다. 다행히 그 논쟁의 열기는 한풀 꺾여 사그라지고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갑자기 방언의 열풍이 다시 불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이유 때문일까? 왜 한물간 유행이 복고풍으로 다시 인기를 끌듯 방언이 다시 주목받는 것일까? 그동안 한국 교회가 평양 대부흥 백 주년을 맞이하여 성령의 폭발적인 부흥이 다시 한 번 일어나기를 고대하며 기도해 왔는데, 그 기도의 응답일까? 그보다는 무엇인가 영적 침체의 악순환에서 빠져나갈 돌파구를 찾는 많은 교인들에게 방언은 손쉽게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반전시킬 수 있는 매력적인 대안으로 다가온 듯하다.
  신비적이고 열광적인 것에 끌리는 한국 교인들의 종교적 성향과, 극적인 변화와 확신을 안겨 주는 획기적인 은혜 체험을 바라는 교인들의 영적인 요행심에 방언이 딱 맞아 떨어진 것 같다. 이와 더불어 어떻게든 교인들의 열심을 자극해 교회를 속히 부흥시켜 보려는 사역자들의 열망과 그것을 부추기는 데 성공한 대중 매체의 역할이 절묘하게 맞물려 빚어진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같이 방언이 다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기독교 서적과 인터넷 매체의 역할이 지대했다. 그들의 탁월한 기여가 없었다면 방언 열풍은 결코 한국 교회에 다시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김우현 씨처럼 대중과 잘 소통하는 뛰어난 기술과 은사를 가진 이의 글을 통해 사그라졌던 방언의 열기가 다시 살아난 것이다.


  방언 열풍의 기폭제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하늘의 언어」(규장)라는 책의 등장이다. 이 책의 저자 김우현 씨는 이미 KBS ‘인간극장’ ‘친구와 하모니카’로 한국방송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방송계에서도 인정받은 다큐멘터리 영상 작가이며 연출자다.
  그는 ‘팔복 시리즈’와 「부흥의 여정」(규장)으로 교계에도 널리 알려졌고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한 기독교 작가로서의 위치도 굳힌 사람이다. 그는 방송 작가로서의 오랜 경험을 통하여 대중의 심리와 감성에 효과적으로 호소하는 언어를 구사하고 이야기를 구성해 가는 데 뛰어난 역량을 갖추었다.
  그의 책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결은 아마도 우리 주위의 작고 소외되고 평범한 사람들의 생생한 성령 체험담을 마치 다큐멘터리가 눈앞에 펼쳐지듯 실감나고 흥미진진하게 묘사해 간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 뜬구름 잡는 것 같이 멀고 추상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이론적인 책과는 달리 그의 책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것을 피부에 와 닿게 느껴지도록 독자들의 공감과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감화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방언 열풍을 촉발한 저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방언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취했던 이들이 이 책을 읽고 자신이 미처 알지 못했던 방언의 유익과 가치에 눈을 뜨고는 방언 체험하기를 간절히 사모하게 되었다는 고백을 종종 듣게 된다. 그의 책이 이런 ‘개종’의 놀라운 효과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에 담긴 수많은 체험담의 대부분이 방언을 하찮은 은사로 무시했던 이들의 ‘회심’(방언에 대한 회심) 체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하늘의 선물을 아직도 거부하고 있는 ‘죄인들’을 돌이키는 데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주변 인물들이 연이어 ‘개종’하는 사건을 기록하였다. 규장출판사의 대표까지 방언을 체험하고 그가 받은 놀라운 은혜를 혼자만 누릴 수 없어 만나는 사람마다 방언받기를 권하는 ‘방언 전도사’가 되었다. 급기야 이 방언의 불길은 규장출판사 전 직원과 자매 회사인 갓피플닷컴 직원에게까지 번졌다. 한꺼번에 70명에 달하는 직원이 방언을 받고 무려 3시간에 걸쳐 방언 기도에 전념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어떤 선교사는 마치 오순절 부흥의 현장이 재현되는 것처럼 보였다고 증언했다.

  결국 저자는 그동안 줄곧 추구해 온 한국 교회의 부흥이 방언 체험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 책을 쓴 목적도 부흥의 불길이 온 땅에 확산되기를 바람에서였다. 그래서 그는 서적과 인터넷을 통해 방언을 파급시키는 것으로 부족해 자신이 직접 전국 방방곡곡을 뛰어다니며 방언 집회를 인도하고 있다.
  그 노력의 결과로 방언이 바로 하늘의 충만한 은혜 속으로 들어가는 비밀 통로이며, 이 잊힌 통로를 재발견하는 것이 진정한 부흥의 길이라는 메시지가 전국 구석구석에까지 울려 퍼지고 있다. 이제는 오순절파 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교단이 예외 없이 방언 열풍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다. 과거에는 방언이 지성적이지 못한 이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는데, 지금은 오히려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이 방언에 열광하는 형편이다.

  이런 추세에 저항하여 전통적인 신앙의 기치를 높이 든 이는 목사나 신학자가 아닌 김우현 씨와 같은 평신도였다.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부흥과 개혁사)라는 책은 김우현 씨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양측의 입장이 극과 극을 이루며 첨예하게 대립되면서 인터넷을 통해 서로 다른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 간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평택대학교의 김동수 교수가 방언에 대해 양극화된 문제를 해결하고 성경적인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책을 펴냈다. 드디어 평신도들의 논쟁에 신학자가 끼어든 셈이다. 그는 두 사람과는 달리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이로서 방언에 관련된 성경 말씀을 꼼꼼히 주해하고 정리하여 나름대로 성경에 근거한 견해를 제시하려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의 결론적인 입장은 양극단적인 견해를 원만하게 조율하기보다는 한쪽 편의 손을 들어준 격이 되었다.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이레서원)라는 그의 책 제목이 이미 시사하듯이 김우현 씨의 주장이 성경적으로 옳다는 것을 입증해 준 셈이다.

  결국 양극화의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못한 채 갈등과 대립의 골이 깊어만 가고 있다. 「하늘의 언어」로 촉발된 방언 열풍은 그에 대한 반박과 이어지는 논쟁들로 인해 더욱 거세져 한국 교회를 휘청거리게 하고 있다. 방언 열풍은 한편으로는 신앙 생활에 취미를 잃어버린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관심과 열심을 불러일으키며 일시적으로 교회를 뜨겁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 혼란과 갈등을 심화시킴으로써 교회의 영적 생명력을 더욱 시들게 하는 이중적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방언이 “이 시대의 진정한 부흥을 위한 하늘의 전략”이라는 김우현 씨의 주장은 그의 생각에서 나온 전략일 뿐 진정한 하늘의 전략은 아닌 듯하다.

 



김우현 - 하늘의 언어

  김우현 씨는 그의 책 「하늘의 언어」에서 지금까지 우리 교회가 무시했던 방언의 은사에 뜻밖에도 놀라운 영적 비밀이 숨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역설한다. 그것은 바로 방언이 하나님이 이 시대의 교회를 위해 예비하신 가장 강력하고 충만한 은혜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 즉 “하늘 문을 여는 가장 강력한 통로”라는 사실이다.
  방언은 우리 영혼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통로이며, “지치고 무기력해진 주님의 교회를 강하게 충전시키는 귀중한 에너지”다. 더불어 방언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강력한 방편인 동시에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는 비밀 병기다. 그렇기에 “이 영적 기도의 언어가 인류 역사를 통틀어 수행했던 모든 역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라고 그는 말한다.

  지금까지 방언에 대해 이처럼 극찬을 한 글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 책은 참으로 유별난 책이다. 방언을 성령 세례의 증거로 보았던 오순절 교회에서도 방언을 이렇게까지 과대평가하지는 않았다. 그의 견해는 여러 면에서 독보적이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방언에 대해 논하면서도 성경이 방언에 대해 무어라고 말하는지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
  지금까지 나온 방언에 대한 책들의 대부분은 그래도 어느 정도는 성경적이거나 신학적인 바탕 위에서 쓰였다. 그러나 김우현 씨의 책은 그의 주장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 제시나 기본적인 신학적인 논의가 거의 전무하다. 성경이 방언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주관적인 생각과 확신을 마치 하나님의 생각이며 말씀인 양 마구 쏟아놓은 책이다.
  더군다나 그가 자신의 확신을 성령의 음성으로 굳게 믿고 있다는 데서 사태는 더 심각해지며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게 할 위험이 커진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열심과 사랑은 뜨겁지만 그의 신앙은 말씀의 토양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성경의 큰 그림을 볼 줄 모른다. 성경을 전체의 맥락 속에서 살펴볼 때라야 부흥을 위한 하나님의 전략의 큰 윤곽이 드러난다. 김우현 씨는 전체 그림의 극히 미세한 일부분이 마치 가장 중심적이고 모든 것인 양 단순화하고 과장하는 우를 범하였다. 그 결과 진정한 부흥을 위한 하나님의 전 포괄적인 계획과 전략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작은 하나의 방편만이 핵심 전략으로 전면에 부각되었다.


  한국 교회는 지금 총체적인 개혁과 부흥의 전략이 필요한 상황이며 이에 부응하는 부흥관의 정립이 시급한 실정이다. 이런 부흥에 대한 올바른 신학이 없으니 부흥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주장하는 잡다한 가르침들을 따라 목사들과 교인들이 이리저리 휩쓸리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험하고 멀더라도 부흥의 정도를 밟아가기보다 속성으로 부흥을 체험할 수 있는 쉬운 길을 원한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방언을 체험하기만 하면 진정한 부흥과 회복을 경험할 수 있을 것같이 약속하는 희소식에 매료되는 모양이다.

  김우현 씨가 말하는 방언 체험의 유익은 가히 환상적이다. 방언만 체험하면 오래 계속되는 영적 침체에서 확실하게 벗어나고, 자신이 안고 있는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희망을 안겨 준다. 하늘 문으로 들어가는 이 비밀 통로를 발견하기만 하면 성령으로 충만한 세계로 들어가 하늘의 강력한 능력을 받게 된다고 하니 이런 은혜를 원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가르침은 단숨에 충만한 은혜를 받는 횡재를 바라는 영적인 요행 심리를 조장하여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할 수 있으나 그들을 진정한 부흥으로 인도하기에는 많은 허점을 가지고 있다.

  진리의 한 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체험을 말씀보다 우위에 놓는 것은 이단으로 가는 첩경이다. 성령의 다양한 역사하심과 은사들 중에 유독 방언의 은사만을 이토록 부각시키는 것은 성경적인 균형을 현저히 상실한 가르침이며 교회를 부흥으로 이끌기보다는 오히려 혼란만 가중시킬 위험성이 높다.

  그의 주장대로 방언이 하늘의 충만한 은혜를 여는 가장 강력한 통로라면 이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자연히 성령 충만함을 누리기 힘든 영적인 열등생이 될 수밖에 없다. 가장 중요한 은혜의 통로가 없으니 어찌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그의 논리에 따르면 하늘의 능력과 은혜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방언을 받아야 한다. 방언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모든 신자의 특권인 동시에 의무인 셈이다.
  그래서 그는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방언을 받으라고 권한다. 이런 가르침은 본인이 의도하지 않을지라도 교회 안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간에 보이지 않는 갈등을 조장한다. 그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들도 누리기를 바라는 간절하고 순수한 마음에서 방언을 꼭 받아야 한다고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가르침은 그 은사를 받지 못한 이들에게 큰 소외감과 상처를 안겨주며 또한 그들을 은혜 없고 영적 결함이 있는 교인으로 보는 무례를 범한다. 순수한 동기와 열정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그 신앙의 열정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을 때 교회에 큰 폐해를 입힌다.

  방언의 유익과 가치를 새롭게 부각시키려는 저자의 의도는 귀하다. 그러나 말씀의 한도 내에서 그런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사람들의 인기몰이를 하는 데는 완전 실패했겠지만 교회에 혼란을 조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방언의 놀라운 유익을 강조하는 데에서는 성경이 전혀 말하지 않는 데까지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지나치게 비약한 반면에, 방언이 남용될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한 성경 말씀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해 버렸다. 그래서 그의 책에서 방언에 대한 바울의 메시지를 도무지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바울이 염려했던 방언으로 인한 혼란과 갈등이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



옥성호 -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극단은 항상 또 다른 극단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라는 책은 제목에서부터 방언이 하늘의 언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글임이 여실히 드러난다. 이 책의 논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의 견해에 대해 성경적인 근거나 신학적인 논리를 거의 제시하지 못한 김우현 씨와 달리 이 책을 쓴 옥성호 씨는 방언에 대한 많은 신학 서적을 읽고 성경 주석들을 참고하여 나름대로 방언에 대해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관점을 제시하려 하였다.
  그는 한국 교회를 강타하는 방언 열풍을 성령의 역사라기보다 “말씀을 향한 또 하나의 사탄의 공격”으로 보았다. 그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체험을 검증하기보다 우리의 체험에 비추어 말씀을 왜곡하고 거기에 꿰 맞추려는 경향을 개탄하면서 방언 현상을 무분별하게 수용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말씀을 통해 냉철하게 검증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김우현 씨와는 정반대로 그는 방언을 하늘 문을 여는 가장 중요한 은사가 아니라 가장 남용될 가능성이 높은 은사로 보았다. 성경은 방언을 권장할 대상이 아니라 “조심하고 선별해야 할 대상의 은사”로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점이 바울 사도가 그토록 방언의 은사를 특별하게 다룬 유일한 이유라고 보았다.

  옥성호 씨가 「하늘의 언어」가 무시해 버린 바울의 메시지에 다시 주목하며 방언 현상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점검해 보려고 한 시도는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그의 성경 해석은 지나치게 특정한 신학적 전제, 즉 ‘은사중지론’에 의해 주관되고 있다. 그 전제는 방언에 대한 성경의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한다.
  그는 모든 체험은 반드시 말씀에 비추어 검증해야 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지만, 체험뿐 아니라 모든 신학적 전통까지도 성경의 빛 가운데 점검해야 한다는 확신은 없는 것 같다. 성경 해석을 은밀히 주관하는 신학적 편견을 성경적으로 진단할 만한 수준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듯하다.
  잘못된 신학적 선입견에 한번 사로잡히면 거기에 맞추어 성경 말씀의 참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김우현 씨가 체험에 치중한 나머지 말씀을 무시했다면, 말씀을 수호하려던 옥성호 씨는 신학적인 전통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성경 말씀을 왜곡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만 것이다.


  그가 신학적인 전제를 투사하여 성경을 해석한 대표적인 일례는 고린도전서 13:8-12에 대한 해석이다. 이 대목에서도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여기서 옥성호 씨는 방언과 예언이 다 폐하고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바로 성경이 완성될 때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예언과 방언과 지식, 이 세 가지 은사는 완성된 성경이 아직 없었던 초대교회 시대에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중요한 방편으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성경이 완성되자 이 은사들은 그 목적을 완수했기에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한다.

  이런 해석은 성경 본문을 문맥과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이해하기 보다 ‘은사중지론’의 안경을 끼고 읽은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문맥을 통해 볼 때 바울이 말한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다. 바울 사도는 절묘한 시적 표현을 통해 사랑의 탁월성을 찬미한다. 그는 사랑과 은사를 비교하여 사랑이 더 큰 은사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랑은 더 큰 은사가 아니고 은사를 사용하는 더 좋은 길일 뿐이다.

  다만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사랑이 은사들보다 더 탁월하며 믿음과 소망보다도 더 우위에 있다고 본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영원하나 예언과 방언은 종말에는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종말에 가면 믿음과 소망이 바라던 것도 성취될 것이니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것이다(고전 13:13 참조).
  고린도전서 전체에 흐르고 있는 어조는 확연히 종말론적 특성을 띠고 있다. 더욱이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라는 말씀은 마지막 때를 가리키는 성경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이런 말씀을 어떻게 성경이 완성될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는지 납득하기가 어렵다. 완결된 성경이 주어지면 내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며, 주님이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되는가? 이것은 우리가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 서기까지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그런 해석은 앞뒤 문맥과도 상충될 뿐 아니라 성경의 근본적인 가르침과도 배치된다. 바울이 그 글을 쓸 때 자신이 죽은 후 오랜 세월이 지나 성경의 정경화 작업이 완성될 것을 예견하여 그런 의미를 담았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억측에 불과하다. 이런 해석은 바울 사도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뜻을 투사하여 그의 메시지를 왜곡하는 것이다. 요즘 신약학자 중에서 이런 주장을 지지하는 이는 거의 없다. 은사중지론의 대부 워필드의 뒤를 이어가는 개핀(Gaffin) 교수마저 이런 해석은 바울의 관점을 현저히 곡해한 것이라고 배격했다.

  또한 옥성호 씨는 은사중지론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 방언은 예언과 함께 성경 계시가 주어지는 방편이었기에 계시가 완료된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방언의 은사가 계시의 방편이라는 견해를 입증할 만한 성경적 근거는 찾을 수 없다. 방언이 통역되면 계시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고 주장하지만, 방언의 특성상 그것은 타당하지 않은 말이다. 고린도교회에 나타났던 방언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계시와는 정반대로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인데, 어떻게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있겠는가?

  또한 방언이 성경적 계시의 통로라면 사도들에게만 주어졌어야 할 텐데 사도들 외에 많은 신자들에게도 주어졌다. 그러면 그들도 모두 계시의 전달자가 될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계시적 권위를 가진 방언과 일반 신자들에게 주어진 비계시적 방언은 도대체 어떻게 구별되는 것인가? 이런 유의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 밖에도 고린도전서 12-14장에 담긴 바울의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성경 해석의 오류가 곳곳에서 드러난다. 특별히 ‘사랑 장’으로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 13장을 쓴 바울의 의도와 거기에 담긴 바울의 교훈을 온전히 간파하지 못했다. 그 결과 방언에 대한 바울의 입장을 공정하게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될 만한 사실을 놓치고 말았다.

  그는 바울 사도가 사랑 장을 쓴 목적이 방언을 최고로 여기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보다 더 귀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방언보다 사랑을 더 우선적으로 추구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보았다. 그는 “사랑은 방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좋은 길”이라고 했다. 일견 그의 견해는 타당해 보인다. 바울이 사랑의 탁월성을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이 사랑과 은사를 비교하여 사랑이 더 탁월함을 말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아주 미묘한 차이인 것 같지만, 은사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다. 만약 그런 식으로 사랑 장을 이해하면 바울이 본래 의도했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의미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렇게 해석할 경우, 사랑에 의해 은사가 열등한 자리로 밀려나고 은사를 사모하는 것이 사랑을 구하는 것으로 대체됨으로써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바울의 명령이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바울의 의도는 결코 사랑을 제시하여 상대적으로 은사의 중요성을 약화시키거나 은사에 대한 추구를 위축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랑과 은사를 비교하여 사랑의 우월성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대조되는 것은 사랑과 은사가 아니라, 은사를 추구하고 사용하는 서로 다른 두 방식들이다. 곧 은사가 이기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반면에 그것이 사랑을 따라 활용될 수도 있다. 은사를 자기중심적으로 사용하면 교회에 혼란과 분쟁을 야기한다. 그러나 사랑의 길을 따라 은사를 사용할 때, 자신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유익하고 풍요롭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고전 13:8-13 참조). 따라서 사랑은 은사를 추구하고 사용하는 더 탁월한 길이며 방식이다.

  사랑 장을 통해 전달하려는 바울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사랑의 길을 따라 은사를 구하라는 것이다. 바울에게는 사랑뿐 아니라 은사도 중요하다. 그는 그 어느 쪽도 양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랑과 은사는 긴밀하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은사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편이며 능력이다. 은사 없이 사랑의 소원과 목표는 결코 성취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랑만을 강조한 나머지 은사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바울의 관점과는 아주 거리가 먼 가르침이다. 옥성호 씨는 “바울은 13장을 통해 ‘궁극적으로 은사가 있더라도 그 은사 속에 사랑이 없으면 은사가 없는 게 낫다’고 주장했다”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 장에 담긴 바울의 메시지를 잘못 읽은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은사로 인해 분쟁과 혼란이 야기된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도 그들의 은사 추구를 위축시키지 않고 오히려 권장하였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전 12:31)라고 권면했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고 논란이 많아 여기서 다 다룰 수 없다. 이에 대해 의문이 있는 이들은 필자가 이 구절을 좀 더 자세히 다룬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물론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는 열정이 육적이고 이기적인 동인에 의해 자극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고린도 교회에서 볼 수 있듯이 은사에 대한 열정이 교회를 세우기보다 허무는 방식으로 분출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은사 추구가 지향해야 할 훨씬 더 바람직한 방향, 곧 사랑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은사를 그 본래의 기능대로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확실한 바탕 위에 다시 올려놓은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은사와 사랑과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가 은사에 대한 바울 이해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근본 사상인데, 옥성호 씨는 애석하게도 그것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은사에 대한 그의 견해는 부정 일변도로 치우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김우현 씨는 방언의 유익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그 남용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함구했다면, 옥성호 씨는 방언으로 인한 혼란과 문제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바울이 인정하고 있는 방언의 긍정적인 측면을 간과해 버렸다. 그래서 두 견해는 극과 극으로 치닫고 있다.

 

 

 

김동수 -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

  이렇게 방언이 하늘의 언어인가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면서 이 논쟁에 마침표라도 찍으려는 듯 황급히 성경적인 대안을 제시한 책이 연이어 발간되었다. 바로 김동수 교수가 쓴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라는 책이다. 김 교수는 방언에 대한 입장이 양극화되어 갈등과 혼란이 점증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껴 서둘러 쓴 글들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옥성호 씨의 책을 집중적으로 반박하면서 그의 성경 해석이 얼마나 아마추어적인가를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신학을 전공한 프로답게 성경을 심도 있게 해석하고 자신의 논리를 일관성 있게 전개하였다. 방언이 지금도 존재하며 신앙 생활에 큰 유익을 주는 은사임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나서 어떻게 방언을 체험할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방법까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그의 견해 역시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는 김우현 씨의 주장에 대해서는 전혀 비판하지 않았다. 「하늘의 언어」라는 책에 대해 적극적인 호응을 보였고, 성경적인 고찰이 부족한 점을 유일한 아쉬움으로 지적하였다. 그래서 그 결함을 보완해 주기라도 하듯이 자신의 책에서 김우현 씨의 주장을 성경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다. 그의 책의 핵심논지는, 방언은 하늘의 언어가 맞다는 것이다. 결국 그가 우려한 문제, 즉 방언으로 인해 교회가 양극화되는 현상을 해소하는 데는 그의 책이 별 도움이 되지 못한 셈이다.

  김 교수는 옥성호 씨가 은사중지론의 입장에서 성경을 무리하게 해석한 부분들을 잘 지적하여 교정해 주었다. 방언은 계시의 방편이 아니었다는 점, 고린도전서 13:10의 “온전한 것이 올 때”는 성경의 완성이 아니라 종말을 의미한다는 사실, 그리고 사랑은 은사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라 은사를 사용하는 제일 좋은 길이라는 점 등을 올바른 성경 해석을 통하여 잘 밝혀 주었다. 고린도전서 12-14장에 대한 그의 해석은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신학적으로 별 하자가 없다.
  이처럼 방언에 관련된 많은 성경 구절에 대한 그의 해석이 대체로 원만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도달한 결론은 성경 말씀을 무시해 버린 김우현 씨의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어떻게 성경을 충실히 해석해서 이르게 된 결론이 성경적 근거 없이 경험에서 나온 주관적인 확신과 엇비슷한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는 “방언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의 방언 체험 유무와 거의 일치한다. 예외는 없었다”라고 하였다. 이는 방언을 체험했는가 아니면 안 했는가가 방언에 대한 견해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김 교수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것은 아닐까?
  그가 확신한 대로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체험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판단과 연구를 조종할 정도로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김 교수도 자신이 방언 체험에서 얻은 확신, 즉 방언은 하늘의 언어라는 전제가 그의 성경 해석과 논리 전개의 모든 과정을 은밀히 주관하고 있지 않은지 냉철하게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보통 어떤 전제를 가졌느냐에 따라 어떤 자료를 취사선택하고, 어떤 측면을 더 부각시키며, 또 어떻게 그 전제를 맞추어 자료를 분석하고 결론을 이끌어 내는지가 결정된다. 똑같은 성경 본문을 다루면서도 전제에 따라 보는 각도와 강조점이 다를 수 있으며 완전히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김 교수의 책에서도 이런 문제들이 드러난다. 그는 방언을 긍정하는 말씀만을 다루고 방언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은 회피해 버렸다.
  방언의 밝은 면은 최대한 부각시킨 반면, 그늘진 면은 최대한 숨겨 버렸다. 어떤 성경 말씀은 자신의 입장에 유리하도록 무리하게 뒤틀어서 해석했다. 그러면서도 기존의 해석을 뒤집어엎는 아주 독창적인 이해처럼 보이게 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 문제가 무엇인지 짚어 보기로 하자.

  먼저 그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잘못된 방언관을 교정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2-14장을 썼다는 점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바울의 유일한 관심은 방언을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것이라는 옥성호 씨의 주장과는 대조적으로, 바울이 방언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고 보았다.
  두 입장 모두 서로 상반되는 편견에 이끌려 본문의 분명한 메시지를 읽어 낼 수 있는 기본적 균형 감각을 상실한 듯하다. 옥성호 씨는 바울이 방언을 포함한 모든 은사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 고린도전서 12-14장의 기조를 이루고 있음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모든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에 소중한 것이다. 여기에는 방언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모든 지체들에게 은사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몸이 건강하게 제 기능을 하며 성장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이 건강하게 성장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긴한 역할을 한다.
  바울은 은사로 인해 대혼란이 빚어진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도 은사에 대한 추구를 약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권장하였다. 은사를 간절히 구하라고 권면하였다. 그와 동시에 바울은 은사가 잘못 사용되면 교회를 세우기보다 허무는 역기능을 할 수 있다고 경계하였다. 그런 메시지를 통해 고린도 교회에 은사로 인해 야기된 문제가 무엇인지를 보게 하며 그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밝혀 주었다. 곧 은사를 사랑으로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은사를 대체하는 더 우월한 은사가 아니라 은사를 더 잘 사용하게 해주는 탁월한 방식이다. 사랑은 은사의 가치와 역할을 하락시키기보다 은사의 효력을 더욱 고취시킨다. 사랑은 은사를 빛나게 하고 은사는 사랑을 성취시켜 준다. 사랑과 은사는 상호 긴밀히 연결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꼭 있어야 할 단짝이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2-14장의 바탕에 깔려 있는 은사에 대한 바울의 기본 입장이다. 방언에 대한 이해도 이런 맥락 속에서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방언에 대한 바울의 입장이 기본적으로 긍정적이라는 김 교수의 지적은 백 번 타당하다.
  바울은 결코 방언의 은사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다른 은사보다 본질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보지도 않았다. 방언하는 것을 금하지도 않았다. 은사 추구를 장려하는 그의 권면에서 방언만은 제외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모두가 자신처럼 방언하기를 바란다는 말에는 방언을 적극적으로 권하는 그의 심정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언에 대한 그의 언급에 부정적인 어조가 강하게 깃들어 있는 것은 방언이 그 특성상,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의 성향 때문에 남용될 수 있는 위험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로 고린도 교회 안에 그것으로 인한 갈등과 혼란이 빚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바울은 이런 문제를 바로잡고 은사 사용의 올바른 지침을 제시하기 위해 본문을 기록한 것이다.
  김 교수의 문제는 바울이 방언을 긍정적으로 보았다는 점을 변호하는 데 급급하여 바울의 가르침을 균형 있게 고찰하지 못한 점이다. 방언이 남용될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한 바울의 언급에 대해서는 거의 함구하고 이런 문맥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방언에 대한 긍정적인 표현만을 국부적으로 발췌하여 자신의 입장을 입증하려고 했다. 그 결과 온전한 바울의 메시지를 들을 수가 없게 되었다. 방언이 잘못 사용됨으로 야기될 수 있는 혼란과 문제점을 다룬 바울의 교훈은 침묵 속에 묻혀 버렸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1에서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는 수사학적인 표현을 통해 사랑이 없는 방언이 다른 이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고 피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하였다. 자기 과시와 만족을 위해 교회에서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을 무질서하게 하는 것은 교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혼란과 갈등만 조장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방언이 잘못 사용되는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 13장의 비유적인 표현과는 달리 14장에서는 이런 문제점을 구체적이면서도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14장 내용의 상당 부분은 방언의 잘못된 사용으로 인해 빚어질 수 있는 무질서와 혼란, 그리고 공동체에 덕을 끼치기보다 해를 입히는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며 경계했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고전 14:6-9, 16-17, 19, 23).

  비록 바울이 방언에 대해 기본적으로 긍정적이라 할지라도 이 부분에서 그의 우선적인 관심은 방언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기보다 방언이 남용될 위험성을 지적하는 것이었음이 틀림없다.

  또한 김 교수는 어떤 본문을 자신의 주관적인 확신에 지나치게 꿰 맞추는 식으로 해석하였다. 예를 들어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고전 12:30)라고 한 바울의 말에 대한 그의 해석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지금까지 이 구절을 방언의 은사가 모든 신자들에게 다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증거 본문으로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는 그런 해석은 그 말씀의 문맥과 정황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오역이라고 했다. 이 말씀은 교인들이 예배를 할 때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이다. , 사적으로 기도할 때가 아니라 공적으로 예배할 때 모두가 다 방언을 말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이 오히려 문맥과 조화되지 않는 무리한 해석이다. 그가 지적했듯이 고린도전서 14:26 이하에는 공적 예배의 상황이 묘사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12장의 문맥과 정황은 예배에만 국한되지 않고 공동체의 사역 일반과 관련된다. 12장 전체에서 바울이 전달하려는 일관된 메시지는 몸은 하나이나 지체는 여럿이고 은사는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우리 몸의 지체가 다 똑같은 기능을 할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에게도 다 똑같은 직분과 은사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서로의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바울은 다 동일한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고 반문하였다. 12장 전체 문맥만이 아니라 바로 앞 구절의 말씀만을 살펴봐도 이 말이 예배에만 국한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바울은 하나님이 교회에 사도와 선지자와 교사와 여러 직분을 세우셨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전 12:28).

  이것은 바울이 예배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교회 직분과 은사 일반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준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고전 12:29-30)라고 반문했다. 이 말은 교회에 여러 직분이 주어졌으니 모두가 같은 직분이나 은사를 가질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이다.
  김 교수는 왜 이렇게 성경의 명료한 뜻을 왜곡하는 무리한 해석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른 성령의 은사가 모두가 다 받을 필요가 없지만 예외적으로 방언만은 모든 신자가 다 받아야 할 은사라는 그의 확신을 고집스럽게 성경적으로 입증해 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관철하는 데 가장 거침돌이 되는 본문, 즉 모두 다 방언을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의 증거 본문을 제거한 셈이다.

  그는 또한 모든 사람이 방언을 받아 하늘의 언어로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그의 신념을 뒷받침할 성경 본문을 찾아냈다. 그가 유일하게 성경적인 근거로 제시한 본문은 고린도전서 14:5이다. 바울은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다.
김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여기서 바울은 단순히 자신의 소망을 피력한 것이 아니라 실제 그렇게 되는 것이 자신의 분명한 뜻임을 밝힌 것이다. , 모두가 방언을 말하는 것이 실제 가능한 일이기에 그렇게 되기를 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하다’라는 바울의 말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극히 보편적인 이해를 초월한 지나친 비약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바울은 같은 서신에서 독신에 대해 논하면서도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고전 7:7)라고 하였다. 거기서는 바울이 실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원한다는 것이 확실하다. 김 교수는 그 말씀은 전후 문맥에서 그 소망이 실현될 수 없음이을 확신한 반면, 방언에 대한 바울의 소원은 그 문맥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언급된 적이 없다는 점이 다르다고 하였다.
  이렇게 억지스러운 해석이 가능하게 된 것은 앞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고전 12:30)라는 말씀을 근본적으로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 구절만이 아니라 12장 전체의 핵심 메시지를 잘못 이해한 결과다. 바울은 12장에서 각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사는 다르다는 것을 확실시하였고, 마지막에는 모두가 다 같은 은사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못 박아 말하였다. 이런 명확한 말씀을 곡해하니까 억지로 꿰 맞추기식의 무리한 해석이 이어진 것이다.

  김 교수는 바울의 소망을 이렇게 무리하게 해석한 것으로 부족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까지 비약해 버린다. “하나님이 지금 모든 신자에게 원하시는 것도 같은 것이다.” 즉, “개인 기도로서의 방언의 은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모든 신자가 다 방언을 경험하여 하나님과 하늘의 언어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 없이 잘못된 해석과 지나친 비약으로 이끌어낸 결론일 뿐이다. 오히려 성경에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은사의 기본적인 특성은 선별적이라는 점이다. 바울이 계속 강조한 것은 신자에게 주어지는 은사의 다양성이다. 그는 은사를 획일화하는 위험성을 엄중히 경계하고 그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는 구체적인 방안으로 사랑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방언의 은사만은 예외적으로 모든 신자에게 필수적이라는 주장은 특정 은사를 획일화함으로써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이루시려는 주님의 뜻을 무시한 것이다. 결국 고린도교회에서처럼 방언을 과대평가하여 다른 은사에 대해 배타적인 우월성을 주장하는 문제가 재현될 것이 뻔하다.

  만약 다른 은사는 모두 선택적인데 방언의 은사만은 모든 이들에게 다 주어져야 한다면 방언을 다른 은사와 좀 더 다른 차원에서 다뤘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방언은 단순히 은사가 아니라 모든 신자에게 꼭 필요한 은혜의 통로인 기도처럼 자주 강조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전서 외에 방언을 언급한 예는 없다.

  김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8:26)라는 말씀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 “신자의 연약함을 돕기 위해 성령의 직접적인 도움으로 기도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의 탄식이 방언 기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는 이들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의 간구하심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말인가? 성령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데 그들의 기도가 어찌 천상을 가르고 하늘의 보좌에까지 상달될 수 있겠는가? 김 교수는 그렇게까지 주장한 것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의 성경 해석은 이런 논리적인 귀결에 이르는 것을 피하기 힘들다.


방언은 모든 신자가 받아야 할 은사인가

  김 교수의 주장을 종합해보면 방언은 모든 신자에게 꼭 있어야 할 은사이며 온전한 신앙 생활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은사다. 그는 책 앞부분에서 자신이 방언에 대해 지나치게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온건하게 인정하는 입장을 위한다고 밝혔다. 방언은 신앙 성숙의 척도가 아니며 하나의 도구이기에 방언을 못하는 사람은 2급 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짚고 넘어갔다.
  이 정도면 그의 견해가 나무랄 데 없이 건실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책이 도달한 결론은 그것과 사뭇 다르다. 그런 언급은 그의 견해가 건전하다는 것을 피상적으로 표방한 것에 그칠 뿐 실제 내용이 일관되게 말하는 바는 방언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입장이다.

  그는 다른 은사들과는 달리 방언만은 예외 없이 모든 신자가 받아야 한다고 고집한다. 왜냐하면, 그의 말을 옮기면, “방언 기도가 신앙 생활에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앞부분에서는 방언이 “하나의 도움”이라고 말해놓고 여기서는 “절대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하지만 그 말은 그의 진정한 속내를 드러낸 것이며 그의 입장과 딱 맞아떨어지는 표현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신자가 방언을 받아 하나님과 하늘의 언어로 교통하는 것이 성경에 계시된 바울의 뜻이며,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이다. 방언은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누리고 영적으로 성숙하는 데 필수적이다. 또한 “방언이 다른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는 통로일 수 있고 사실상 중요한 통로다.

  만일 방언을 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하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방언을 못하는 이들은 결국 성경적 수준에 미달된 삶을 사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지 않는 삶을 사는 셈이다. 신앙 성숙에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는 은혜의 방편이 없으니 어찌 영적으로 열등한 2급 신자의 신세를 면할 수 있으랴!
방언에 대한 그의 입장은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는 그의 행동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모든 교인들이 방언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열심에 사로잡혀 집회를 인도할 때마다 참석한 전 교인들이 방언을 체험하게 하려 했다. 그는 방언을 하는 이들은 “이 은사를 다른 사람들도 체험하게 하여 같은 복을 누리게 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라고 역설했다.

  그도 역시 김우현 씨처럼 방언 전도사로 열심히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강권하여 방언을 받게 하려고 한다. 그의 책에 방언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그 방법대로 방언을 받게 한 실제 사례를 소개하였다.
  “수련회나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저는 첫째 날 일단 한 명이 방언을 체험하는 것을 목표로 기도합니다. 한 명만 받으면 그 다음에는 쉬워집니다. 방언받는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1분간 간증을 시키면 그 다음에는 방언받는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왜냐하면 학생들은 친구가 받으면 열불이 나서 못 견디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기심과 경쟁심이 자극되면 다 방언을 받는다는 말이 된다. 김 교수는 그렇게 해서 나타난 현상이 성경적인 방언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증하는가? 일일이 다 검증해 보고 하는 말인가? 아니면 어떤 부흥사들이 그러하듯이 혀가 꼬여 이상한 말이 나오면 무조건 방언이라고 보는 것인가?
  이것이 과연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의 말인지 귀를 의심하게 된다. 성경 말씀은 아랑곳하지 않고 감정적인 반응을 유도하는 삼류 부흥사의 말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방언에 대한 성경적인 증거를 논하다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비약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이런 미심쩍은 행위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주어진다. 물론 이 뜻은 인간의 원함을 무시하지 않고 그 갈망에 따라 성취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나서서 사람들을 강권하다시피 해서 방언을 받게 하고 그런 현상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도록 교묘히 유도하는 행위는 전혀 성경적으로 지지받지 못한다. 성령의 은사는 인간의 강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주어진다는 성경의 분명한 진리와 완전히 상충되는 것이다.
  그렇게 성경의 진리에서 벗어난 행위를 통해 촉발된 현상을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는 없다. 질투심과 경쟁심에 의해 자극된 열심과 인간이 은사를 유도해 내려는 은근한 교만으로 점철된 것에는 오히려 미혹의 영이 은밀히 역사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일종의 집단 최면이나 흥분 상태로 사람들을 몰아가 그런 현상을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착각하게 할 수 있다.

  김 교수는 방언에 대한 견해가 예외 없이 그 사람의 방언 체험의 유무와 일치한다는 점을 거듭 상기시켜 주었다. 영적인 은사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는 성경의 방언을 해석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체험을 해석하여 성경 본문에 대입하고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이것이 바로 자신에게 해당되는 문제라는 것을 그는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견지해 온 입장이 과연 성경이 말하는 내용을 진지하게 들으려고 했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어떤 주관적인 확신을 주입해서 성경을 읽는 것인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책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김우현 씨의 책보다 독자들을 헷갈리게 하고 미혹하게 하는 위험성이 더 클 수 있다. 그것은 학자의 깊이 있고 권위 있는 성경 해석에 근거한 주장이기에 독자들은 그만큼 설득되기 쉽고 반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자와 선생들의 책임이 막중한 것이다.

  그의 견해는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과거 고린도 교회 안에 방언으로 인해 빚어진 갈등과 혼란을 고스란히 한국 교회 안에 재현시킬 수 있다. 방언이 모든 신자에게 있어야 할 필수적인 은사라는 주장은 가진 자의 우월 의식과 못 가진 자의 열등 의식을 조장하여 갈등과 대립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뻔하다.
  못 가진 이들은 하나님과의 풍성한 영적인 교제와 신앙 성숙을 위해 꼭 있어야 할 은사가 없으니 어찌 위축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급 신자로 취급받는 기분이 들지 않겠는가? 반면에 가진 이들은 노골적으로 우월 의식을 표하지는 않을지라도 이 은사가 없는 이들을 무엇인가 문제가 있어 다른 사람들은 다 받는 방언을 못 받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아니면 방언 못하는 이들은 무엇인가 영적으로 결핍되고 열등한 신자라는 선입견을 떨쳐버리기가 어렵게 된다. 모두가 다 방언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방언 못하는 이들은 이 주님의 뜻에 못 미치는 삶, 즉 주님이 의도하신 풍성한 은혜와 충만한 능력을 누리지 못하는 삶을 사는 셈이다.
방언 은사로 인해 전혀 교만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방언을 모두가 다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다른 이들에게 큰 무례를 범하는 교만인 것이다. 그런 주장 자체에는 깊은 우월 의식이 잠재해 있을 뿐 아니라 많은 혼란과 갈등을 일으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기우가 아니다. 방언 열풍이 한국 교회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피해 사례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모두 방언 받을 것을 강권하는 집회에서 끝내 방언을 체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은사 체험에서 자신들만이 제외되는 소외감과 하나님에게까지 ‘왕따’를 당하는 씁쓸한 비애를 느끼지 않겠는가? 어떤 이들은 자신만 외톨이로 남고 싶지 않은 절박한 심정에서 방언 전도사가 시키는 대로 입을 벌리고 혀를 굴려 “랄랄랄라”를 연발하며 인위적으로라도 방언과 같은 현상을 만들어 내려고 발버둥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방언을 받지 못한 것 때문에 평생 한 맺힌 신앙 생활을 하는 이도 있다. 한 권사는 오랫동안 방언을 사모하여 구해 왔음에도 방언을 체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늘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하며 산다. 그녀는 아주 신실하고 경건한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 방언을 못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찜찜한 죄의식을 가지고 있다. 또 이 죄의식과 함께 자신만 외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야속함이 그녀의 마음속에 뒤엉켜 있어 주 안에서 온전한 만족과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방언을 모든 신자들이 꼭 받아야 한다는 확신을 가진 목사나 전도사 밑에서 신앙 생활하는 이들 중에 방언을 못하는 교인들은 무척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어떤 교회에서 중고등학생들을 지도하는 한 전도사는 방언을 못하는 학생들을 방언을 받을 때까지 교회에 잡아 놓고 기도하게 해서 말썽을 빚은 적이 있다.
  반면에 방언은 다 받아야 한다고 믿는 교인들이 많은 교회에서는 방언을 못 하는 목사나 복음 전도자가 엄청난 고충과 설움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교회에서는 방언을 체험한 몇몇 집사들이 담임목사에게 방언을 하느냐고 물었다. 목사가 방언을 못한다고 하자 그들은 평신도도 하는 방언을 목사가 하지 못하면 어떻게 교인들을 영적으로 지도할 수 있겠느냐고 도전하였다. 그 목사는 방언을 못하는 이유 때문에 목사의 리더십을 발휘하기 힘든 상황에 처한 것이다.

  어떤 신학생이 노회에서 신학을 계속 공부하는 것을 허락받기 위해 여러 목사들 앞에서 면접을 보게 되었다. 세 명의 다른 신학생과 함께 면접을 보았는데 한 목사가 방언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나머지는 다 받았다고 대답했는데 자신만 방언을 받지 못했다고 하자 기도를 잘 하지 않는 전도사라며 심하게 꾸지람을 들었다고 한다.
  상당히 보수적인 교단에 소속된 목사들까지 이런 가르침에 경도되어 있으니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실태가 어떠할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인 사례만을 든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런 가르침이 확산되어 가면서 사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전에는 방언하는 이들이 광신자로 따돌림을 당했는데, 이제는 방언 못하는 이들이 시원찮은 신자와 사역자로 취급받고 수난 받는 시대가 되었다.

  결국 바울의 메시지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바울이 그의 서신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던 바로 그 문제를 다시 불러일으켰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에 점증해가는 방언으로 인한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 역시 바울의 방언관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관적인 편견을 내려놓고 바울이 말하는 것을 진지하게 들으려는 자세와 균형 잡힌 감각이 필요하다.

 

 

지금도 방언은 존재하는가

  성경적인 방언관을 정립하는 데 가장 큰 거침돌로 작용하는 것이 신학적인 전통과 방언에 대한 체험이다. 한편에서는 ‘은사중지론’이라는 잣대로 성경을 재단해 버리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경험의 틀에 꿰맞추기 위해 성경을 조작해 버린다. 어떤 전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성경 해석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자신의 해석을 은밀히 주관하는 전제가 무엇인지를 냉철하게 직시해야 하며 그것을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점검해보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대개 우리가 자라온 신앙적인 배경과 전통 그리고 배워온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 방언에 대해 서로 다른 선입견을 갖게 된다. 오순절 교회의 배경을 가진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방언에 대해 긍정적인 반면, 보수적인 신학 교육을 받은 이들은 은사중지론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아주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랐고 오랫동안 보수 신학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필자의 박사 학위 논문을 지도한 교수는 바로 워필드를 뒤이어 은사중지론을 철통같이 고수했던 개핀 교수였다.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은사중지론이 필자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신빙성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말씀의 능력이 신학적인 전통을 세뇌하는 마력에서부터 필자를 자유하게 한 것이다.
  우리는 신학적인 전통이나 경험이라는 전제에 의해 휘둘리기를 거부하고 성경 자체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들으려는 진지한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김동수 교수는 방언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은사인 방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영적인 일은 자신이 꼭 체험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영적인 세계, 즉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있다. 만약 자신이 체험한 것만 바로 해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성경 말씀을 거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방언에 대한 말씀을 바로 해석하는 데 꼭 그에 대한 체험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방언을 체험하는 것이 그 실체를 파악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관에 치우치게 하여 냉철한 판단을 흐리게 할 수도 있다.
  반면에 방언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오히려 성경 말씀을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균형 감각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방언 체험이 없는 이들은 대부분 방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에 사로잡히게 된다. 많은 경우 ‘경험’뿐 아니라 ‘무경험’도 성경 해석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방언 체험의 유무가 방언에 대한 평가와 일치한다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이제는 이 불행한 연결고리를 끊을 때가 되었다. 그래야만 양극화를 극복하고 방언에 대한 원만한 일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방언을 하는 이나 못하는 이나 자신들의 ‘경험’ 또는 ‘무경험’이 성경 해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성경의 어디에도 방언이 사라졌다는 확실한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 방언은 계시의 방편으로서 성경적인 계시가 종결됨과 더불어 사라졌다는 주장은 성경적인 지지 기반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방언은 사람이 하나님께 신비한 언어로 기도하는 것이지, 예언처럼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특성상 방언은 계시의 통로가 될 수 없다. 방언이 통역된다고 해도 그것은 단순한 기도의 내용일 뿐이지 결코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신 말씀이 될 수는 없다. 또한 방언이 그쳤다는 말씀을 성경에서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방언과 예언도 그친다는 바울의 말(고전 13:8-12 참조)을 성경이 완성되면 방언도 그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바울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신학적인 의미를 주입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바울이 말한 “온전한 것이 올 때”는 그 말씀의 문맥과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러므로 방언이 존재하느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 다만 오늘날 나타나는 방언이라는 현상이 초대교회의 방언과 질적으로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먼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방언은 오늘날 교인들이 하는 방언과는 사뭇 다른 특성을 띠었다. 사도행전 2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오순절에 제자들이 했던 방언은 ‘외국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난 지방의 언어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이를 보건대 오순절에 제자들이  체험한 방언은 배우지 않은 언어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말하는 현상이었다.

  이런 유의 방언을 지금도 하는 경우가 있다는 보도를 종종 접한다. 대천덕 신부의 글에 의하면 한 청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몇 개 국어로 유창하게 외국인과 대화를 했다고 한다. 어떤 목사의 부인은 집회에서 자신이 전혀 배우지 않은 헬라어로 말할 수 있게 되어 거기에 참석했던 그리스 여성 두 명을 주님께로 인도했다고 증언하였다. 또 선교사들이 선교 현장에서 습득하지 않은 토착어가 갑자기 입에서 터져 나와 설교했다는 말을 간혹 듣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배우지 않은 외국어로 전도하거나 설교하는 것이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제자들의 방언과 꼭 같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제자들의 방언이 찬양과 함께 선포의 성격도 띠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사람들을 향한 설교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습득하지 않은 언어를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기사는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관적인 역사와 비상한 섭리를 우리의 신학적인 편견으로 제한하기보다는 그 가능성을 항상 열어 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런 외국어 방언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처럼 모든 신자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다. 그 방언은 성령이 이 땅에 강림하시는 특별한 이벤트를 장식하는 표적의 성격을 띠었을 뿐 아니라 구원의 복된 소식이 만방에 전파될 새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섭리적 표증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하여 선교 사역을 출범했다는 것을 알리는 특별한 표증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오순절 후에도 그런 방언이 보편적인 현상으로 반복되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방언은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방언의 유형에 가깝다. 고린도전서 12-14장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이 방언의 특성은 특정한 지방의 언어나 외국어가 아니라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종의 신비한 언어라는 점이다. 통역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방언을 하는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으로만 기도하면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전 14:14)라고 하였다. 여기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심령이 아니라 ‘생각’ 또는 ‘이성’을 뜻한다. , 이해하는 마음의 기능을 의미한다. 그래서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하는 내용을 자신의 마음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성경적인 증거를 통해 볼 때 이 방언은 우리의 이해와 인식을 초월하여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비한 기도의 언어 또는 영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외에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다. 그때의 방언이 어떤 말의 형태로 나타났는지, 어떤 음률과 강세를 띠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 소리가 단음절로 끊어졌는지 연음으로 유연하게 이어졌는지 아무도 들어본 사람이 없다. 녹음된 것도 없다. 그렇기에 지금 사람들이 하는 방언이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과 동일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물론 방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언어이기에 그 진실성 여부를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무조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온다고 해서 그것을 다 방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요즘 소위 방언이라고 말하는 현상 중에는 의심쩍은 것들이 적잖다.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 없는 것들이 더러 있다. 그러므로 각별한 주의와 냉철한 분별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이 극단적으로 주장하듯 지금 사람들이 하는 방언을 다 마귀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마귀는 성령의 역사를 모방하는 명수이기에 얼마든지 은사의 모조품을 생산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가 아는 어떤 장로의 부인은 한 기도원에서 방언을 받은 후 귀신들림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 한동안 고생하다가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하자 방언도 같이 사라졌다.

 

  또한 몰몬교 같은 이단이나 타종교에도 방언과 유사한 종교 체험이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는 방언을 무조건 마귀적이고 인위적인 현상이라고 보아서는 안 되겠지만, 그것들을 모두 성령의 역사로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 또한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방언이 과연 성령의 은사인지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영적 지도자와의 상담을 통하여 면밀히 점검해 보는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


방언에 대한 잘못된 견해

  앞에서 지적했듯이 방언은 모두가 다 받아야 하는 은사라는 주장만큼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없다. 다른 은사는 선택적이지만 방언만은 예외적으로 모든 신자에게 필수적이라는 견해는 왜곡된 성경 해석이 아니고는 도저히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는 사상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주시어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분명히 상충되는 것이다. 은사는 모두 선별적인데 방언의 은사만은 필수적이라면 방언은 더 이상 은사로서의 기본적인 특성을 상실한 것이며, 은사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도 없다.

 

  만약 방언을 모든 신자가 다 받는 것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라면 왜 실제 많은 교인들이 방언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 중에서 방언을 부인하고 구하지 않는 이들은 못 받는다고 쳐도 방언을 간절히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왜 그런가?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주어지는 선물이다. 사도나 선지자나 교사와 같은 직분과 은사는 스스로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서 된 것이다. 모두 순수한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물론 어떤 은사는 받는 자의 소원과 간구에 따라 주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선물을 주시면서 애타게 구해도 받지 못할 정도로 애먹이신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만약 방언이 모든 신자에게 주시기로 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구하기 전에라도 자연스럽게 주어지며, 구하면 필히 주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방언을 구해도 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이것은 방언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기로 하신 선물이 아닌 것을 한사코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또 방언을 더 이상 하나님이 기꺼이 주시는 선물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방언을 달라고 하나님께 결사적으로 매달리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인위적으로 방언을 유도해 내려고까지 하는 것은 그 선물을 뺏으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이 교회에 미치는 폐해는 엄청나다. 교인들 모두가 방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은사 체험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그것을 완전히 획일화해 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자신이 경험한 것을 다른 이도 반드시 경험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대단한 무례를 범하는 것이다.
  비록 다른 이들도 자신이 누리는 은혜를 동일하게 경험하기를 원하는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런 행위는 자신의 잘못된 확신을 따라 다른 이들을 강압하려는 교만의 발로다. 그러므로 이런 가르침은 필연적으로 영적인 우월 의식을 낳고, 그 반대급부로 영적인 열등 의식과 소외감을 불러일으키며, 급기야는 그로 인한 갈등과 혼란을 조장한다.

  이런 문제는 실제 교회 현장에서 더 역력히 드러난다. 방언이 모든 신자의 영적인 성숙에 필수적이라는 가르침은 자연히 방언을 못 하는 교인들을 영적으로 미성숙하거나 열등한 신자로 강등시킨다. 신앙의 성숙을 위해 꼭 필요한 은혜의 통로가 없으니 어떻게 영적인 충만함을 누릴 수 있겠는가?
모든 신자에게 필히 있어야 할 은사이기에 강권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며, 그렇게 방언을 받게 하는 집회가 유행병처럼 번져간다. 그런 집회에서는 은사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주어지는 순수한 선물이라는 진리는 묵살되어 버리고 방언을 꼭 받게 하려는 인간의 강권이 은사를 기꺼이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압도해 버린다. 마치 방언이 인간에 의해 유도될 수 있는 것처럼 방언 전도사들은 가는 곳마다 방언의 돌풍을 일으키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선물을 안겨 준다.
  일단 한 사람만 방언을 받게 하면 다른 이들의 시기심이 자극되어 방언하는 이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내려주시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이런 현상은 인간의 부패한 시기심을 자극하여 열심을 부치기는 방언 전도사들에 의해 촉발되고 조작되는 일종의 영적인 집단 흥분 상태를 방불하게 한다. 이것을 은사를 나눠 주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보기에는 의심쩍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방언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에서 주축을 이루는 것은 공중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마구 해 대는 것을 삼가라는 권면이다. 그런데 모든 교인들을 모아놓고 강권해서 방언을 받게 하고 모두 방언으로 말하게 하는 것은 바울의 간곡한 권면을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처사다.
  성경 어디에도 인간이 주동하여 다른 이들에게 방언을 받게 부추기고 강권한 예나 그런 행위를 권장한 말씀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엄연히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는 소행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렇게 성경 말씀을 도외시하고 성령의 순리적인 역사하심에 배치되는 행위를 통해 미혹의 영이 은밀히 역사하기 쉽다.

  그런 집회의 진정성은 그 열매로 드러난다. 집회에 모인 교인들이 모두 방언받기를 강권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끝내 방언이 터지지 않는 사태가 항상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방언을 받지 못한 이들은 공개적으로 모든 교우들 앞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처절히 소외당하는 비애를 맛보게 된다.
  그들은 모든 신자에게 예비된 하늘의 선물이 자신들만 비켜가는 것을 체험하면서 자신의 믿음과 구원을 의심하게 되고 자신들에게만 싸늘하게 등을 돌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야속함을 느낀다. 이런 집회는 어떤 이들에게는 흥분과 기쁨을 안겨주지만, 다른 교인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회의를 안겨 줄 수 있다.

  자신의 일시적인 희열과 감정적인 도취를 맛보는 대가로 다른 형제들이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김우현 씨는 방언이 작고 소외된 이들을 세우는 귀한 은사라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방언을 받게 하는 집회에서는 도리어 방언이 우리 주위의 작고 소외된 이들을 더 소외시키고 짓밟을 수 있다.
  방언 집회가 성행하며 방언 전도사들이 맹활약을 하면서 이런 피해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성경은 공중에서 방언을 마구 해대는 것을 철저히 금하였다. 방언 집회를 인도하는 이들은 이 성경 말씀을 거스르면서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있다는 커다란 착각과 모순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런 비판에 대해 방언 집회로 인한 좋은 열매까지 싸잡아 무시해 버리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방언 집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체험하고 그들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보이는 현상과 실제는 매우 다를 수 있다.
방언 체험의 경우가 특별히 그렇다. 왜냐하면 방언은 그 특성상 가장 전시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기이한 현상과 센세이션과 표적을 동반하기에 그 당시에는 굉장한 부흥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시간을 두고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런 집회에서 방언받은 이들의 삶에 얼마나 지속적인 변화가 나타나는지 조사해 보았는가? 그런 변화의 열매가 있다면 감사한 일이다. 물론 그런 열매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방언은 사람들에게 일시적인 열심과 흥분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들의 삶과 신앙에 근본적인 변화는 일으키지 못한다. 꾸준히 말씀에 따라 성령과 동행하는 신앙 훈련을 대신하는 임시변통의 은혜 체험으로 그치고 만다.

  김우현 씨의 글에는 방언이 단숨에 하늘 문을 열어 충만한 영적 세계로 도약시키는 마술과 같은 은혜로 과대선전되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방언 체험이 금방이라도 자신들에게 놀라운 변화와 부흥을 가져다줄 것 같은 기대에 사로잡히게 한다.

  끝없는 영적인 침체와 방황에서 헤어날 수 있는 빠르고 쉬운 비결을 찾는 수많은 교인들의 귀를 솔깃하게 한다. 부진한 목회의 돌파구를 찾기에 여념없는 목사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하다.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에 쉽게 매료되고 흥분과 감흥을 체험하고 믿음의 가시적인 증거와 표적이 있어야만 신앙을 지탱하고 열심을 내는, 영적으로 미성숙한 교인들을 끌기에는 방언보다 효과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경적이기를 따지기보다 얼마나 개인과 교회에 실제적인 효과와 유익이 있느냐를 먼저 계산하는 이 시대의 실용주의 가치관과 이런 대중의 심리와 관심을 잘 이용하여 그들을 선동하는 포퓰리즘과 영적 현상을 대중화하여 큰 이익을 챙기는 기독교 상업주의가 한국 교회에 방언 열풍을 몰고 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방언이 지금 한국 교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부흥 코드’라고 보는 견해는 지극히 피상적이면서도 근시안적인 생각이다. 침체한 한국 교회가 다시 새로워지며 부흥하기 위한 색다른 비결은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 외에 다른 충족한 대안이 있을 수 없다.


방언에 대한 균형 잡힌 견해

  방언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방언을 평가절하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방언은 하나님의 귀한 은사다(고전 12:4-28 참조). 방언을 성경적인 지침에 따라 올바르게 사용하면 개인의 영적인 성숙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고전 14:4 참조) 그로 인해 공동체의 성숙에도 간접적으로 기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방언의 남용은 교회를 허물지만 방언의 선용은 교회를 세운다. 하나님이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방언으로 기도함으로 영이 새로워지고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함이 깊어지고 풍성해지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하고 진실한 신앙 인격자와, 형제들과 교회를 위해 열심히 간구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건전한 방언의 은사를 받았는가는 이런 성령의 열매를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 겸손하고 온유하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이들은 자신의 은사를 조금이라도 과시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도 다 자신과 같은 은사를 체험해야 한다고 강권하며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 자신이 방언함으로 인해 다른 이들이 위축되며 혼란스러워할까 우려하여 공중에서 방언하는 것을 절제한다. 방언하는 이들 중에 이렇게 겸손하고 훌륭한 교인들도 많다. 이들처럼만 한다면 방언으로 인해 무슨 문제 될 것이 있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방언의 은사는 교회에 큰 축복이 될 것이다.
  이런 자세가 바로 바울이 가르친 바이다. 방언은 많은 은사들 중에 하나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주권적인 뜻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주어지지만, 어떤 이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또한 방언하는 이가 더 영적으로 성장하고 충만하기 쉽다고 말할 수 없다.

  뉴욕에 있는 어느 한인 순복음 교회 집사가 필자가 잘 아는 목사를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 집사는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서 많은 집사들 중에 유일하게 방언을 못한다고 했다. 그러니 그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기에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방언을 구했음에도 하나님이 방언을 안 주시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무척이나 답답해하며 그런 하나님을 향해 서운한 감정을 내비치기까지 하였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장로교 목사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의 안타까운 사정을 들은 목사는 이렇게 조언해 주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떤 사람은 방언이 꼭 있어야 신앙 생활을 잘할 수 있을 것이기에 방언을 주시지만, 집사님은 방언의 은사가 없어도 기도와 경건 생활을 잘하실 수 있을 것 같기에 방언을 안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집사는 이 말을 듣고 큰 위로를 받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 단순한 말 한마디에 지혜와 진리가 담겨 있다.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기질과 성향과 사명과 상황에 꼭 필요하고 알맞은 은사를 주신다. 그분의 자녀들에게 최상의 은혜를 주기 원하신다. 어떤 이에게는 방언의 은사가 없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보시기에 그 은사를 안 주실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는 최상의 은혜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가 영적인 성숙에 꼭 필요한 은사이기에 방언을 못하면 뭔가 영적으로 부족하고 열등한 신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방언을 유창하게 하면서도 영적으로 미성숙하고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들이 많은 반면에, 방언을 못 하면서도 성령으로 충만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한 신앙 인격을 소유한 이들도 많다.
  교회 역사 속에 수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방언을 하지 못했지만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탁월한 영성과 신앙의 발자취를 남겼다. 아우구스티누스, 성 프란체스코, 칼뱅, 루터, 조나단 에드워즈, 스펄전, 빌리 그레이엄 같은 이들이 그랬고, 한국 교회에서도 주기철, 손양원, 박윤선, 한경직 등 수많은 훌륭한 목사들과 교우들이 그 사실을 증명해준다. 그러므로 방언 체험의 유무는 결코 신앙 성숙이나 영적인 충만함의 척도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방언의 유익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이성적인 인식과 이해의 한계를 초월하여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누린다는 점이다(고전 14:14-18 참조). 그로 인해 우리의 영이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믿음의 확신이 없는 이들이 방언을 체험함으로 자신 안에 성령이 거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수도 있다.
  동시에 신앙의 열심이 자극된다. 기도를 잘 안 하던 이들, 5분만 기도해도 기도할 것이 없던 이들이 기도를 자주, 오래 하게 되며 그로 인해 그들의 영이 새로워지기도 한다. 그러니 기도를 10분도 못하는 교인들은 방언이라도 받아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반문이 제기될 만하다. 거기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따르는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기도를 안 하던 이가 방언을 체험한 후 방언으로는 기도하지만 여전히 생각과 이성을 통해 기도하는 데는 전혀 진보가 없을 수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방언으로만 기도하면 마음(생각, 이성)이 열매 맺지 못한다고 했다(고전 14:14 참조). 생각 없이 기도하게 되어 하나님과의 이지적인 관계가 성숙하지 못한다.
  방언을 말하는 신비한 현상에 탐닉하여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며 정작 중요한 일은 소홀히 할 수 있다. 또한 방언 체험은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반면에, 항상 그런 표적과 증거가 있어야만 하나님의 임재를 믿는 영적인 미성숙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역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방언의 실제적인 유익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여 방언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오랫동안 방언을 해 온 어느 목사의 솔직한 고백을 들어볼 만하다.
  “나는 방언을 30년 넘게 하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런 방언이 100퍼센트 하나님이 주신 은사인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내 마음이 주께로 향해 있다는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 사실이 방언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방언하는 이들 중에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중에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황홀경을 체험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지에까지 이른 이들은 실제로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대부분은 방언으로 기도하지만 자신에게 실제로 무슨 유익이 있는지 잘 모르며 시간만 많이 소비하는 것 같아 방언을 그렇게 즐겨 하지 않는다. 방언 집회에서 방언과 같은 현상을 처음 체험했을 때는 열광했던 이들도 별 효력이 없으니 차츰 열심이 식어지고 방언 말하기를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방언하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권면은 자신의 방언이 과연 성령이 주신 은사인지 냉철하게 분별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은사를 주신 뜻대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유용한 방편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적인 지침을 따라 공중 예배에서 방언하는 것을 삼가며, 이 은사로 인해 영적인 우월 의식에 빠져 다른 이들도 방언을 해야 한다고 강권하는 무례함을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동시에 방언을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누림으로써 은혜가 충만하여 교우들에게 영적인 감화력을 미치며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겸손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 그들이 누리는 방언의 은사가 더 빛을 발하게 되며 다른 교우들도 그런 은혜 체험을 사모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방언을 못하는 이들은 신학적인 편견과 교만한 아집을 내려놓고 성경이 방언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진지하게 들으려는 겸손하고 진실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방언은 하나님이 교회에 내려주신 귀한 은사라는 점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

 

  오늘날 나타나는 방언 현상이 다 성령의 은사인지 조심스럽게 분별해야 하지만, 교인들이 하는 방언을 다 싸잡아 마귀적이고 인위적인 것이라 매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바울은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라고 했다. 방언의 은사 자체를 멸시하고 평가절하하거나 방언하는 이들을 광신자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이 성경 말씀을 따라 방언의 은사를 잘 분별하여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선도해 주어야 한다. 그들의 은사 체험을 존중하며, 제대로 기도 생활을 하지 못하는 교인들은 그들이 누리는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제를 보고 부끄러워하며 도전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성경 말씀으로 돌아와 서로 화합할 때 방언의 은사는 교회에 더 이상 갈등의 요인이 아니라 축복의 방편이 될 것이다. 방언 열풍을 통하여 한국 교회를 뒤흔드는 사탄의 역사는 물러가고 화평하게 하는 성령의 미풍이 한국 교회를 부드럽게 감싸안을 것이다.

 

              -박영돈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한국교회 성령운동, 무엇이 문제인가’(IVP)에서

 



 


    발이 없는 사랑 아빠는 몸이 아파서 왼종일 방안에만 누워 있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경수는 아빠 대신 엄마가 장사하는 것이 싫었다. 학교에 갔다 오면 엄마가 없는 집은 텅 비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날이면 경수는 한참을 걸어 엄마가 어묵 장사를 하는 곳까지 갔다. "오늘은 왜 또 왔어? 날도 추운데." "엄마 보고 싶으니까 왔지, 뭐." "밤에 들어갈 텐데, 그때까지도 못 참아?" "밤 되려면 아직 멀었잖아." "밥은 먹었니?" "으응." 처녀시절 유치원에서 일을 했던 경수 엄마는 언제나 다정다감했다. 경수는 김이 하얗게 피어오르는 어묵 국물통 앞에 앉아 조그만 얼굴을 엄마 어깨에 기대고 있었다. 그때 할머니 한 분이 다가왔다. 할머니가 입고 있는 외투 앞자락에는 손바닥만하게 불에 눌은 자국이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끌고 온 망가진 유모차 위에는 펼쳐진 종이상자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하나에 얼마유?" "오백 원인데요, 할머니." 할머니는 잠시 망설이더니 어묵이 달린 꼬치 하나를 집어들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어묵을 입으로 호호 불었다. "칠십이 넘으니까 이가 다 빠져서 음식 먹기가 너무 곤욕스러워." "연세에 비해서 정정하시네요. 힘든 일까지 하시니 말예요." "정정하긴, 뭐. 같이 있는 할망구들 과자 값이라도 벌라고 허는 일이지. 저 아래 '덕성 사랑의 집'에 있거든. 근데 할망구들이 다들 허리 아프고, 다리 아프다고 거동들을 못 해." "네." "근데, 이게 얼마라구 했지?" "나이 먹으니까 입에 들어가는 게 다 까마귀 고기가 되는가벼. 들어도 금방 까먹고, 다시 들어도 금방 까먹고. 이러다 나중엔 내 이름도 까먹겄어." 할머니는 허탈하게 웃다 말고 다시 어묵 꼬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오늘 점심은 이걸로 해야겄네. 저 윗동네까지 다 돌아야 허니까." "네 시가 다 돼 가는데 점심도 못 드셨어요?" "이 일 하다 보면 때 거르는 건 예산걸, 뭐." "국물하고 천천히 드세요." 경수 엄마는 할머니 앞에 있는 종이컵에다 다시 따뜻한 국물을 퍼주었다. 할머니는 두 개밖에 남지 않은 앞니로 조심스럽게 어묵을 배어물었다. 그리고 꼭 탱크가 기어가는 모양으로 입을 오물거렸다. "아까, 얼마라 그랬지? 또 잊어버렸네, 또 잊어버렸어." 할머니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웃고 있었다. 경수 엄마도 할머니를 따라 웃었다. "할머니, 정말로 잘 잊어버리시네요. 벌써 세 번이나 물어보셨잖아요." "글쎄 내가 그렇다니까." "그럼 아까 전에 돈 주신 것도 잊으셨어요? 아까 천 원 주셨잖아요. 오뎅 두 개째 드실 때요." "응? 내가 벌써 돈을 줬다구?" "네. 주셨어요. 이거 보세요." 경수 엄마는 앞 주머니에 있는 천원 짜리까지 꺼내보이며 말했다. "난, 통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줬나." "경수야, 할머니 아까 전에 돈 주셨지, 그치?" "응? 응." 경수는 엄마의 물음에 얼떨결에 그렇게 대답했다. 할머니는 낡은 유모차를 끌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어갔다. 힘겹게 유모차를 밀고 가는 할머니 어깨 위로 햇살 한 줌이 투명한 손을 얹었다. 할머니를 바라보는 경수 엄마의 눈가엔 어느새 물빛 무늬가 새겨졌다. 그 무늬의 실루엣 속에서 아름다움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엄마, 저 할머니한테 돈 안 받았잖아, 그치?" "돈을 안 받은 게 아니라, 그냥 대접해드린 거야." "엄마는 지난번에도 집 없는 아저씨한테 오뎅 그냥 줬잖아. 엄마는 그런 사람들이 불쌍해서 그러는 거야?" "불쌍해서 그러는 건 아니구,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을 사랑해야 하잖아." "우리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이웃들을 사랑하는 건 훌륭한 일이라고 했어." "엄마는 우리 경수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 경수는 알았다는 듯 엄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경수야, 사랑은 발이 없대. 그래서 안아 주지 않으면 혼자서는 한 발자국도 걸어갈 수가 없대. 할머니는 친구들 과자 사주려고 점심도 못 드시고 일하신다고 하잖아. 우리 경수가 조금 더 크면 엄마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경수는 엄마가 해준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파란 하늘에 몸빛을 헹구어낸 겨울햇살이 경수가 바라보는 땅 위를 내리쬐고 있었다. 경수는 동그랗게 등이 굽은 할머니의 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할머니가 무당벌레처럼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로 날아오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수는 국물통에서 하얗게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며 엄마가 해준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사랑은 발이 없대. 그래서 안아주지 않으면 혼자서는 한 발자국도 걸어갈 수 없는 거래…" - 이철환 '연탄길' 중에서- Amour Secret (숨겨 놓은 사랑) / Helene

욥기 15) 네가 무엇을 아느냐?

대장쟁이

인간은 피조물이며 유한한(finite)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하신(infinite) 분이십니다. 유한과 무한은 비교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 유한한 인간은 무한히 작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데 욥과 세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이 왜 이러한 고난을 받는가 하는 문제로부터 시작하였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토론인지 논쟁인지를 벌이고 있는 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로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앞 시간에 엘리후가 욥이 자기의 의를 주장한 것이 하나님 앞에 악이라고 지적하였지만, 그리고 욥에게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오히려 할 말이 있음이라. 내가 먼데서 지식을 취하고 나를 지으신 자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 진실로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 지식이 구비한 자가 너와 함께 있느니라.”라고 담대하게 말했지만 엘리후인들 하나님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진리를 알 인간은 없습니다.  다른 인간에게 진리를 가르쳐 진리로 이끌 수 있는 인간도 없습니다. 우리를 진리로 이끄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시며 우리를 하나님 앞에 이르게 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드디어 38장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폭풍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첫마디로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라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엘리후를 향한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욥과 세 친구, 엘리후 모두에게, 아니 우리 모든 인간에게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 주초(柱礎)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욥이 알 턱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물으셨습니다.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같이 넘쳐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 네가 나던 날부터 아침을 명하였었느냐?.... 네가 바다 근원(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밑으로 걸어 다녔었느냐?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었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었느냐?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었느냐?.... 광명의 처소는 어느 길로 가며 흑암의 처소는 어디냐?.. 그 집의 길을 아느냐?” 겨우 수 십 년을 살았을 욥에게 빗대어 말씀하십니다. “네가 아마 알리라. 네가 그 때에 났었나니 너의 연수(年數)가 많음이니라.”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광명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땅에 흩어지느냐?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뢰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축축하게 하고 연한 풀이 나게 하였느냐? 비가 아비가 있느냐?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얼음은 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네가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겠느냐? 삼성의 띠를 풀겠느냐? 네가 열두 궁성을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 북두성과 그 속한 별들을 인도하겠느냐?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하늘로 그 권능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네 소리를 구름에 올려 큰물로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마음속의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 누가 지혜로 구름을 계수하겠느냐? 누가 하늘의 병을 쏟아 티끌로 진흙을 이루며 흙덩이로 서로 붙게 하겠느냐?... 네가 암사자를 위하여 식물을 사냥하겠느냐? 젊은 사자의 식량을 채우겠느냐?” 하나님의 질문은 39장에 들어가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나 욥은 단 한 마디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알기는커녕 생각조차,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들뿐입니다. 그 어마어마하고 끝 간 데 없이 광활하고 오묘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창조세계 앞에 욥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눈과 입을 딱 벌리고 놀라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이렇게 많은 질문을 하신 것은 욥과 그 친구들로 하여금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은 것인지, 자신들이 스스로를 똑똑하게 여긴 것과 지혜롭다고 자만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를 분명히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아, 그 끝을 헤아릴 수도, 그 깊이를 짐작할 수도 없는 놀라우신 지혜의 하나님께서 지으신 우주만유의 끝은 어디인가요?

그런데 하나님의 하시는 여러 말씀 중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가 가슴에 새삼스럽게 닿았습니다. 그 까마귀 새끼가 바로 우리 같아서입니다. 광야 같은 이곳에 내팽개쳐져 먹을 것이 없어 울면서 오락가락할 때에 우리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공급하시고 지켜주신 놀라우신 능력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끝이 없으신 영원하신 하나님, 그 지혜와 능력과 계획하심과 우리를 향한 사랑하심이 한이 없으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들과 칭호들에 함께 참예한 자가 되었다.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를 얻어 일컬음을 받게 된 것이다. 하늘과 땅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모든 이름을 얻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들의 후사이며,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후사가 되었다. 왕과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신자들로 하여금 왕과 제사장이 되게 하셨다.

 

신자들은 단지 이름만 받은 것이 아니다. 칭호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실제적인 문제에서 은택을 입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신자의 의가 되었다(고후5:21).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신 것이다(23:6). 그 의는 우리 속에 있었던 의가 아니다. 전가의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된 것이다. 의가 전가되어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만 비로소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는 것이다(고후5:21). “우리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심이라”(3:9).

 

그리스도와 신자들은 율법의 구조 안에서 한 사람으로 인정된다. 남편과 아내가, 빚진 자와 보증인을 하나로 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리가 갚지 못할 빚을 대신 변제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우리가 한 일로 인정하시는 것이다. 이보다 더한 복락과 자비의 증거가 무엇인가? 우리가 갚을 길 없던 죄의 빚을 생각해보라.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의 순종으로 그 엄청난 빚을 호리라도 남김없이 대신 갚아 주셨다. 마치 가난한 여인이 부유한 남자와 결혼함으로 그 남편이 자신의 모든 빚을 갚아준 은택을 입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45:24).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로 나와 신자들의 가 되셨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거룩이 되셨다. 전자의 특권은 그리스도의 피 안에 있는 공력의 덕을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경우이지만, 성화의 경우는 신자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을 모시고 있는 경우에 해당된다(고전1:30). 성화는 우리 영혼을 은혜로 충만케 하시는 경우를 말한다. 이를 위해 주어진 은혜 위에 다시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다. 신자들은 넘쳐나는 거룩의 은혜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되는 것이다.

 

거룩은 가장 보배로운 것이다. 거룩은 곧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니 어찌 사람에게 있어서 거룩이 가장 뛰어난 탁월함이 아닐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영광의 증거이자 열매이다.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 은혜는 지체인 우리에게 전달된다. 우리의 거룩은 곧 거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사실을 증거한다.(2:11).

 

여러분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설령 금화가 가득 들어있는 돈 가방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이 여러분 자신의 것으로 여겨져 여러분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거룩하게 하심을 받는 것에 비하면 하찮기 짝이 없는 것이다.

 

- 존 플라벨, 은혜의 방식, pp 180-182

가져온 곳 : 
카페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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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 종교개혁 원리들의 재확인 (조엘 비키 /한제호 역)


 

종교개혁은 실제로 무엇을 추구했던가?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한다고 했는가?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라고 했던가? 종교개혁의 모든 위대한 진리들과 그것이 우리에게 위임한 유산들은 다섯 마디의 구호들에 들어 있다.


 

오직 성경 (Scripture Alone)

 

첫 마디는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즉 '오직 성경'이다. 오직 성경은 종교개혁의 성격을 규정했던 한 위대한 표시였다. 그러나, 성경으로 돌아가라는 구호는 루터에게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오직 성경으로의 구호는 중세의 말기에 특히 죤 위클리프와 존 훗스 등에 의해 급속히 퍼지고 있었다. 훗스는 그의 논적들에게 거듭 '성경에서 증명하라. 그러면 내가 회개하고, 철회하겠다'라고 대답함으로써 루터의 선구자가 되었다. 훗스는 교회의 최고 권위가 한 사람의 가장 높은 성직자에게 주어졌다는 교황주의와, 역시 최고 권위가 성직자들의 회의에 주어졌다는 법왕청주의에 맞서서 오직 성경의 최고 권위를 외치다가 마침내 목숨을 잃었다.

훗스와 같이 마르틴 루터도 무오(無誤)의 성경을 유오(有誤)의 교회 위에 두는 은총을 받았었다. 웜스(Worms)의 국회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그가 했던 다음의 답변은 그의 확신을 십분 증명한다. (폐하께서 간단한 답변을 요구하시니 저는 성결과 명백한 이성에 의해 설득되지 않는 한 저는 법왕들과 로마교의 회의들의 권위를 승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서로 모순하기 때문입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양심을 거스리는 일은 정당하지도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에 나는 아무 것도 철회하지 않겠으며.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일년 동안에 마르틴 루터는 성경 전체를 독일어로 번역했고, 그의 유명한 '소요리문답'을 집필했는데, 그가 그렇게 한 목적은 '한 손에 성경, 다른 손에 소요리문답을 들고 무장한 구라파의 어떤 농촌 소년이라도 신들, 교구장들, 대주교들의 모든 이론을 파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그는말했다.

기독교의 한 원리로써의 '오지 성경으로'는 신속하게 구라파에 퍼졌다. 그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생활과 저술들마다에서 명백하게 나타났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에서 법률, 신조, 설교, 기타 신앙과 도덕에 관한 모든 의문들의 대답을 찾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성경을 신앙과 도덕에 관한 모든 의문에 대하여 성경만이 최고의 시금석(試金石)과 무오(無誤)의 규범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부들의 모범교리 해석들과 교회 회의들의 결정들과 교회들의 법률들은 성경의 명백한 교훈들과 일치해야만 하며,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것들은 즉시 폐기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성경은 종교개혁가들의 생각에는 완전하며, 충분하고, 명백하고, 권위적이며, 오류가 없으며, 전체적으로 성령에 의하여 영감되었다고 믿었다.


오직 은혜 (Grace Alone)

 

종교개혁자들의 두 번째 구호는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 - 오직은혜 - 였다. 루터와 그의 후계자들은 모두 이 위대한 원리를 고수했다. 이 문제는 루터에게 있어서 명확했다. 하나님의 사죄를 인간 편에서 유발시키거나 조력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멸망한 죄인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만이 예비하시고, 착수하시고, 효과 있게 완성하여 그로 말미암아 영광이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에만 돌아가야 할 것인가? 에라스무스의 <반박문>(Diatribe)에 대하여 루터의 <의지의 속박>(Bondage of the Will)은 하나님의 은총의 우위성을 입증했다. 루터는 죄인은 자신의 구원의 방도를 제공할수도 없고, 제공된 그것을 소유할 수도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루터는 로마카톨릭 교회의 면죄부, 순례, 고행, 기타에 관한 장황스러운 교리들은 그 논쟁의 뿌리를 자름으로써 단 해결이 가능함을 밝히 깨달았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이냐, 인간의 자유의지냐(free grace versus free will)의 문제였다. 에라스무스도 이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귀하만이 모든 것이 걸려있는 축(軸)이며 문제 해결의 요충(要衝), 즉 인간의 자유의지냐, 하나님의 은혜냐를 깨닫고 있습니다'.


교회의 절박한 요구는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총이다. '오직 은혜'의 교리 이해는 현대교회의 최대의 과제이다. 성령의 능력에 의해 죄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변화시키는 것은 인위적으로 신자를 만들려는 현대인의 세속적 방법들, 즉 인간의 결단, 인간의 조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만을 전파하는 옛날부터의 복음적인 메세지의 방법뿐이다.

오직 믿음 (Faith Alone)

 

셋째로, 우리는 오직 믿음 - '솔라 피데'(Sola fide)로 살게 되어야 한다. 마르틴 루터의 생애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하나님의 주시는 평안을 얻으려고 고통, 금식, 번민을 체험했다. 그는 시멘트 위에서 자고 극기하면서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찾으려고 결심하고, 심지어는 몸의 피를 빼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날 하나님은 그에게 구원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받는다는 은혜의 단순성을 보여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의 전의(全義)이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루터는 이것을 체험한 후, '나는 즉시 내가 열린 문들을 지나서 낙원에 들어선듯한 느낌이었다'고 기록했다.

 

루터는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붙들도록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것은 믿음의 손, 믿음의 관(管). 믿음의 선물에 의함인 줄을 깨달았다. 믿음은 죄인을 그리스도와 하나되게 하고, 그리스도로 살게 하고, 죄인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동거하게 한다. 믿음으로 신자는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설교할 수 있으나, 믿음이 없다면 우리 마음과 그리스도 사이에 휘장이 쳐지고, 그리스도는 휘장으로 덮은 조상(彫像)과 같다.

 

'오직 믿음'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옷깃을 만짐으로써 병나음을 얻게 한다. 믿음은 구원의 길에서 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노력을 포기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앞에 내 벗은 몸을 던지는 것이다. 믿음은 "주여, 우리가 밤새 수고했으나 잡은 것이 없지만, 주의 말씀대로 그물을 내리리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믿음은 루터가 말한 적이 있었듯이, 버림받은 자로서 예수의 발밑에 가는 일이다(Faith means, as Luther once said, to go lost to the feet of Jesus).


루터가 애쓰면 애쓸수록, 그리고 종교개혁이 진척되면 진척될수록, 루터는 더욱 이 영광스러운 '오직 믿음으로'의 교리 위에 굳게 세워지고 기초를 굳게 해 나갔다. 후일 그는 서한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마귀가 이 기본적인 교리를 계속 공격하고 있으며, 마귀는 이 공격을 멈출 수도 없고 늦출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나 마르틴 루터 박사는 비록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사자로서 부족하지만, 행함이 아니라 믿음만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선다는 이 교리를 고백하는 바이며, 또 로마 황제와 터키 황제, 법왕, 모든 추기경들, 감독들, 사제들, 수도승들, 수녀들, 왕들, 왕자들, 귀족들, 온 세계와 모든 마귀들이 무엇이라고하든간에, 이 진리는 영원히 서리라고 나는 선포한다'. 그의 이 자세는 오늘 우리의 자세여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 (Christ Alone)


우리는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토론문을 자주 얘기하지만, 그로부터 6년 후에 쯔윙글리도 67개조의 토론문을 기록한 사실을 기억하는가? 쯔윙글리의 이 토론문, 즉 신학적 선언문에 '복음의 핵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참 아들이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알게 하셨으며, 그의 무죄하심으로 우리를 영원한 사망에서 속량하셨으며,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제2조)고 했다. '그러므로 과거, 현재, 미래에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시다'(제3조). '누구든지 이 외에 다른 길을 보여주는 자는 오류를 범하며, 그는 영혼의 살인자요, 도적이다'(제4조). '그리스도는 그의 몸인 모든 신자들의 머리시며, 그가 없는 몸은 죽은 것이다'(제7조).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제19조).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이시다'(제22조).
우리의 개혁주의 신앙의 조상들은 부끄럼없이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라고 선포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있고, 그리스도 밖에는 사망이 있다. 그가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그를 통해 우리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하나님은 오직 영원히 소멸(燒滅)하는 불 뿐이요,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의 공의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즉 그의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순종 안에서만 충족된다는 것이 종교개혁 신앙의 교리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 (The GIory of God)


종교개혁은 다섯번째로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a Deo gloria)을 주장한다. 루터의 청년 시절의 큰 질문은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까?'였다. 그러나 그는 특히 그의 말년에 '하나님이 어떻게 영광을 받으실까'하는 보다 깊은 물음을 던졌고, 이 구호를 저술을 통해 깊이 추구했던 사람은 칼빈이었다. 존 칼빈이 임종을 맞았을 때 그의 몸은 여러 가지 질병으로 시달렸다. 한 칼빈의 전기 집필자는 83종의 질병을꼽았다. 그러나 그의 임종 시각까지 그는 그의 유명한 '기독교강요'의 마지막 교정을 보고 있었다. 어느날 그의 고통이 너무심해져서 그의 가장 가까운 벗들까지도 그 일을 그만 하라고 애원했다. 칼빈은 그들의 부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주님의 영예가 좌우되는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칼빈의 생애는 결국 그의 유명한 좌우명인 '주여, 나의 마음을 즉시, 성실하게 주께 드리나이다'(My heart I offer to Thee, Lord, promptly and sincerely)로 표현되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 - 이것이 종교개혁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의 생활신조였다. 그들은 자주 문자 그대로 그들의 생명을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버렸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명이 자기들의 것이 아니며, 그들의 생존 시와 사후의 위안이 그들의 충성스러우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음을 알고 행동했던 남녀들이었다. 종교개혁의 맥박은 이 다섯번째 구호- 오직 하나님의 영광 - 때문에 정상적으로 뛸 수 있었다. 성경도 바울 사도가 그의 모든 사념(思念)의 절정에서 외쳤던 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롬 11:36)라는 말이 교리를 뒷받침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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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사망 / 존 칼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롬10:6-7) 

울이 인용하고 있는 본문에서 모세는 사람들이 도달하기 어려운 곳인 하늘과 바다를 언급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말씀 속에 어떤 영적인 신비가 숨겨 있는 듯이 이 말씀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적용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모세가 한 말을 그대로 되풀이 하지 않고 모세의 증언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바꿉니다. 모세는 다가갈 수 없는 장소에 대해 말하지만 바울은 실제로 우리 모두의 눈에 감추어져 있지만 믿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언급합니다,

바울의 말을 설명해 봅시다. 우리의 구원의 보증은 두 기초, 즉 우리를 위해 생명이 획득되었다는 사실과 우리를 위해 사망이 정복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는 그 위에 놓여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이 복음을 통해 이 두 기초에 의해 지탱된다는 점을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죽으심으로써 죽음을 멸하셨고 부활하심으로써 생명을 얻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유익은 복음에 의해 우리들에게 전해집니다.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라는 말의 의미는 "영원하고 신성한 생명의 기업이 우리 것인지 누가 알겠느냐?",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라는 말은 "영혼의 영원한 멸망이 육체의 죽음 뒤에 따라올 것인지 누가 알겠느냐?"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 두 점에 대한 의심이 믿음의 의로 제거된다는 점을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은 실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충분히 확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신자를 대표하여 신자 때문에 하늘에 올라가셨는데 하늘의 기업이 신자를 위해 예비된 것인지를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늘의 소유 중에 그리스도를 없애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를 지옥의 공포에서 구원하시려고 지옥이 공포를 친히 겪으셨음으로 신자가 아직도 이런 불행에 노출 되어 있다고 의심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http://thevine21.hompee.com/v2.0.asp


출처: 영적분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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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앙과 실천의 유일한 법칙이자 유일한 진리를 시험할 수 있으며 유일하게 논쟁을 판정하는, 성령님께 맡겨진 절대적 초월성이다.

 

말씀에 쓰이지 않은 것, 혹은 그 말씀에 의해 입증되지 않는 것은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위해 성경과 동등한 다른 어떤 안내자가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부인한다. 성경의 지상적 권위는 한 마디로 말하여 우리의 체제의 초석 중의 하나이다. 우리에게 성경에 자명하게 기록된 바를 보여주라. 그리하면 현세의 인간성에 어떻게 작용하는 것이든 간에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고 믿을 것이며 또한 그것에 순복할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신앙으로써 성경에 위배되는 바를 증명해 보여주라. 그리하면 아무리 허울 좋고 진실같이 그럴듯할지라도, 제 아무리 아름답고 명백히 바람직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조금도 취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항이 성경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면 성경으로부터 추출해 낼 수 없으며, 성경과 명백하게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을 조금도 취하지 아니할 것이다. 금단의 과일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감히 그것에 손대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죽게 된다. 우리의 신앙은 성경, 혹은 성경의 논증들 외에는 다른 아무런 의지할 만한 것을 발견할 수가 없다. 바로 여기에 반석이 있다.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은 모래일 뿐이다.

 

2. 인간의 죄악됨과 타락에 대해 그것이 부여하는 깊고도 탁월한 의미이다.

 

그 이론은 아담의 타락의 결과로 모든 인간은 본래의 의로부터 가능한 한 가장 멀리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단지 비참하고 가련하며 파국적인 상황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책과 임박한 위험, 그리고 유죄 판결의 상태에 있게 되었다. 그들은 조물주와 적대관계에 있고 천국에 대한 아무런 권한도 지니지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저희 조물주를 섬기려는 아무런 의지도, 저희의 조물주에 대한 아무런 사랑도, 천국에 대한 아무런 부응되는 요소도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강도(强度)의 영적인 병은 그 치유를 위해 강력한 영적인 치료약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치명적인 상처를 쉽게 치유할 수 있게 해준다는 생각을 부추기는 듯 보이는 어떤 종교적인 체제도 지지할 수 없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형식주의와 예식주의, 그리고 단순히 외적이며 대리적인 측면만을 강조하는 모든 종류의 기독교를 배격한다. 우리는 그와 같은 모든 신앙은 인간의 영적인 필요에 대해 적합하지 못한 생각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보다는 영혼을 구원하고, 대속하고 성화시키는 일이 훨씬 더 필요하다. 성자 하나님의 피가 양심에 적용되며 성령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을 완전히 새롭게 하는 일이야말로 필요하다. 타락의 영향에 대한 무지, 원죄에 관한 전반적인 교리에 대한 무지야말로 많은 사람이 복음주의 신앙을 이해할 수도, 깨달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중대한 하나의 이유라고 믿는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1:10). 이 말씀은 사도의 명령이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직임에 대하여 최고의 중요성을 부과한다는 것과, 그리고 그에 대하여 그가 인간을 위해 행하신 구원의 성격에 지고한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 이론은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표하고 대신하여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죄인들을 위한 완전한 구원, 그리고 죄책과 죄의 세력과 결과로부터의 구속이 있게 되었으며, 그러므로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안에도 완전히 용서받으며 모든 것으로부터 의롭게 되며,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혜들과 관계가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죄인인 인간의 영혼과 구세주이신 그리스도 사이에는 오직 단순한, 어린 아이 같은 신앙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든 수단들과 도움들, 성직자들과 규례들은 이 신앙을 돕는 범위 내에서만 유익하며 그 이상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써 의지하고 의뢰할 때에 그것은 영혼에 독약과 같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이 기독교의 핵심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넉넉함과 값없이 은혜로 주어진 그 단순명료함을 아무리 강조해서 말하여도 결코 지나치니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교리는 엄밀히 말하여 본성적인 인간의 마음들이 대부분 싫어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굳게 확신하고 있다. 사람이 추구하는 종교는 이목과 감각의 종교이지, 믿음의 종교가 아니다. 그 본질이 믿는 것인 내면적이고 영적인 종교가 아니다.

 

우리는 영속적인 삶이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며 그리고 단순한 개인적인 믿음으로 매일같이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4. 사람의 마음 안에서의 성령의 내적인 사역에 높은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 이론이 어떠한 사람에게 있어서 활력있는 기독교 신앙의 뿌리와 근원이 되는 것은 바로 마음 가운데서의 은혜의 사역이라는 것, 그리고 한 사람의 내부에서 진정한 체험적인 일이 있기까지는 그의 신앙은 단순한 껍데기, 쭉정이, 이름 내지는 형식 뿐이고, 그는 위로를 받을 수도 구원을 받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관심이 가장 집중될 필요가 있는 사항들은 성령의 능력이 있는 사역들, 내적인 회개, 내적인 믿음, 내적인 소망, 죄에 대한 내적인 혐오, 그리고 하나님의 법도에 대한 내적인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중요한 은혜들을 알지 못한 채 세례를 받은 것이나 교회의 교인이라는 것 자체에서 위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단순한 실수일 뿐만 아니라 명확하게 참혹함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성령의 내적인 사역은 인간의 구원에 필수적 일이며 인간은 또한 이를 내적으로 느껴야만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여러 감정들은 종종 믿지 못할 거짓된 것들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적으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체험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회심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어떠한 창조도, 영혼의 새로운 탄생도 있을 수 없음을 단호하게 주장한다.

 

우리는 비록 남용될 여지가 많기는 할지라도 영혼의 증거는 진정한 것이요 참된 것이라는 의견을 고수한다. 우리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서 하는 것 만큼이나 그 정도와 위치에 있어서 사모해야 하는 것을 엄중한 의무로 간주한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아무것도 느끼는 바가 없으면 진정으로 아무것도 소유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5. 사람의 생활에 있어서의 성령의 외적이며 가시적인 사역에 대해 중요성을 부과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참된 은혜는 언제나 그 은혜를 소유한 사람의 여러 행위나 품행, 취향, 방법, 선택, 습관들에 명백히 나타나게 된다. 그 은혜는 외부로 드러나지 않고 사람 안에 내재된 채 정지상태로 있을 수는 없다. 하늘의 씨는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모든 사람 안에 거하는 씨이다(벧전1:23, 요일3:9). 성령께서는 그가 거하시는 곳마다 항상 그의 존재를 알려지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실제로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이기지 않는 한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지체요 하늘나라의 후사들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견해를 고수한다.

우리는 열매야말로 한 사람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유일하고도 확실한 증거라고 확신 있게 단언한다.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누구를 섬기고 있는지를 알려면, 우리는 먼저 그의 생활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의 은혜가 있는 곳에는 언제든지 꼭 성령의 열매들이 있을 것이다. 열매가 보이지 않는 은혜는 은혜라고 할 수 없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다.

 

- 존 라일, 오직 한 길, pp 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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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그리스도를 적용시키신다. 그 일을 통해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은택 속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교제케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은 우리 영혼을 달콤하게 하고 부요하게 하는 교제의 터이자 근거이다.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연합으로 우리가 모든 영적인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께 접붙인 바 되어야 한다. 접붙여진 가지가 새로운 뿌리의 진액과 영양분을 공급받듯이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인격과 혼인해야만 비로소 그리스도의 특권과 은택을 부여받고 그 안에 설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왕과 하나님께 대하여 왕과 제사장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은혜로 말미암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왕이 되게 하셨고, 성부 하나님께 대하여 제사장이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받으신 성령의 충만함을 성도들을 위해서 쓰려고 하신다. 마치 태양이 다른 존재들을 비추기 위해 빛을 발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과 그 능력으로 기름 부으심을 받으시어 헌신의 직무를 위해 예비되셨다(10:38). 그리고 그리스도의 머리에 부어져 흘러내린 기름은 옷단을 타고 신자들에게까지 흘러내려 그들의 얼굴을 아름다운 영광으로 빛나게 하며 그들로 하여금 모든 선한 일을 하도록 유연한 마음을 준비하게 한다.

 

기름은 신자들의 영혼 속에 신적 사랑의 화염을 일으키고 유지시키며 등불처럼 그 마음을 비추어 영적인 일들을 아는 지식을 갖게 한다. 기름부음이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기름부음은 또한 신자들의 즐거움이다. 신자들에게 부어진 기름은 그들에게 있어서 환희와 기쁨의 원인이다. 신자들 속에 있는 모든 기쁨의 원인들과 그 기쁨을 일으키시는 장본인이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이다(17:13).

 

그리스도께서는 동료들보다 은혜의 성령을 훨씬 더 많이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4:7) 주셨지만, 그리스도께는 한량없이성령을 부어주셨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3:34).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1:19). “우리가 그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16).

 

그리스도의 동료들인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의 성령에 참여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 부어주신 분량에는 미칠 수 없다. 성도들이 누리는 성령의 은혜와 영적인 특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그리스도와의 복된 교제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1:3).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1:30)

 

- 존 플라벨, 은혜의 방식, pp 174-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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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성화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 / 안토니 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발췌

 

 

성화는 누구의 사역인가? 성화의 모형에서 관찰한 바와 같이 우리는 성화가 하나님의 사역이며, 또한 그의 백성의 책임이라는 점을 숙지하였다.

...

성경은 명백하게 하나님이 성화의 주체이시라고 교훈한다. 성화의 사역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공히 담당하신다고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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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의 두번째 분이신 그리스도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교회를 깨끗하게 하시는 성화의 주체자로 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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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하나님 역시 우리 성화의 주체가 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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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그리고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깨닫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 결국 성화는 인간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화는 역시 우리의 책임있는 참여를 포함한다. 고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고전1:2)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고후7:1)고 권면한다. 앞에 있는 구절에서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6:16)고 언급된 위대한 계약은 이미 상세하게 구현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약의 백성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무의식을 가진다. 그 백성인 우리들은 진심으로 죄와 투쟁해서 승리해야 한다. 여기 "온전히"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에피텔룬은 명사 텔로스(끝 또는 목적)에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이 낱말의 뜻은 "점진적으로 정해진 목적에 도달한다"이다. 보통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으로 생각하는 것이 여기서는 명백하게 신자들의 의무로 묘사되었다. 즉 성도들은 정해진 목적에 이르도록 분투 노력해야 한다.

...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거룩하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여기서 성화는 우리가 계속적으로 추구해야 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에 따르면 성화는 근본적으로 우리 내부에서의 하나님의 역사이지만 우리가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노력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J.C 라일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성화는...모든 신자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만일 신자들이 거룩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그 자신에게 있지 않는가? 만일 성도들이 성화되지 않는다면 그 잘못을 누구에게 돌리겠는가? 그 자신의 잘못이 아닌가? 성도들에게 은혜와 새 마음 그리고 새로운 본성을 주신 하나님은 만일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는다면 그들에게서 모든 관용을 거두실 것이다.(J.C. Ryle)

 

성화에 대한 이 두가지 관점은 다음의 주목할 만한 구절에서 언급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항상 복종하여...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느니라"(빌2:12~13).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했기 때문에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명령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을 향한 복음의 적용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이 명령은 믿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계속 "이루라"고 요구한다. "이루라"고 번역된 단어는 어떤 사본에서 일반적으로 농부가 땅에서 경작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권면을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구원을 계속적으로 경작하라"는 의미로 의역할 수 있다. 신자들은 그들이 이미 받은 구원을 계속적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시키고, 모든 활동 속에서 분명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달리 표현해서 12절은  거룩하게 살아야될 책임이 신자들에게 있다고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13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 구원의 완성이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다고 하는 사실이다. 바울은 놀라웁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 성화의 전체적 과정을 주관하신다. 즉 하나님은 기쁘신 뜻을 가지시고 우리를 성화시켜 나가신다. 우리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때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의존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와 우리의 노력과의 관계를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누군가 주장했듯이(Berkhof.) 성화는 성도의 협력을 포함한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 교리에 대하여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성화의 어떤 부분을 맡아 수행한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이다. 존 머레이는 그 상관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노력하기 때문에 중지하지 않으시며, 또 하나님이 역사하기 ?문에 우리의 노력을 포기해서도 안된다. 그 관계는 마치 하나님이 자기의 부분을 담당하시고 우리는 우리의 부분을 담당하는 것처럼 엄밀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 속에서 역사하신다. 그리고 우리 역시 노력한다. 그러나 그 관계는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노력할 수 있다는 것이다.(John Murray.)

 

결론적으로 우리는 성화란 성도의 노력을 포함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거룩해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우리에게 노력할 수 있게끔 해주는 강력한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안토니 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발췌(327~3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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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처럼/최송연


                                            주여,
                                            오늘처럼
                                            폭풍 세차게 몰아치는 밤
                                            당신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을 수 있게 하소서

                                            내 삶이
                                            풍성한 열매로 찬란한 때나,
                                            아무것도 거두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와 낙심되는 때에도
                                            당신은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십니다 

                                            오, 주님,
                                            오늘처럼
                                            폭풍 세차게 몰아치는 밤이면, 더욱
                                            당신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을 수 있게 하소서


우리 모두를 안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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