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나무처럼 향기로운 사람/최송연

 

 

모처럼 맞는 휴일 이른 아침
게을러지려는 몸과 마음을
진한 커피 한 잔으로 다잡고
차를 타고 한 이십분 남짓 외곽지로 나가니
거기 등산하기 안성맞춤인 산이 있습니다.

이른 시간에 찾아온 블청객에 놀랐던지
산새들이 푸드득거리며 달아나고
하얀 안개가 띠처럼 둘러쳐진 숲 속은
마치 선녀의 치마폭같이 부드럽습니다.

숲속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어디선가
향긋한 향기가 솔솔 불어오는바람 결을 타고
내 코 끝을 살살 간지럽히며 파고 듭니다.
달콤한 향에 이끌린 나는 향이 날아 오는 곳을 찾아
우거진 숲을 이리저리 헤치며 따라가 봅니다.

울퉁불퉁한 바위가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부러져 있는 가파른 곳을 지나니
그곳에 키가 큰 떡갈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었고
그 떡갈나무들 사이에 여리디 여린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향나무는 덩치 큰 떡갈나무 그늘에 가려
숨도 크게 쉬지 못하는 듯
잎이 노랗고 길쭉길쭉 한 것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가까이 다가가 어린 잎을 하나 똑 따서 코에 대어 봅니다.
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달콤한 향이 코를 톡 쏘며
말초 신경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듯 행복해 집니다.

향나무는 평소에는 그 향이 약하지만,
어떤 물체에 의해 찍혀지거나,
잎을 하나 똑 따서 맡아 보면,
그 향은 배가 되어 아주 강하면서도 달콤합니다.

은은하고 그윽한 향이
정다운 이의 따스한 미소처럼
아찔하도록 온 몸을 휘감아 옵니다...

달콤한 향을 맡을 때 이렇게 행복해지 듯...
나도 향나무처럼 향기로운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생각만 하여도 입가에 미소가 도는 사람,
 곁에 있지 않아도 믿음직하며 늘 든든한 사람,
가진 것 없어도 넉넉하여  마음이 큰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향나무 같은 사람입니다.

억세고 키가 큰 떡갈나무들이 쭉쭉 뻗어 있어
향나무가 선 자리는 한 뼘이 채 안 되는 듯 해도
그곳에서도 향나무는 향나무입니다


 

다른 이가 설 자리마저 빼앗는
떡갈나무 같은 사람 되기 보다는
내가 설 자리를 남에게 빼앗기고, 찢겨도
불평 대신 향기를 선사하는
향나무 같은 사람 되는 것이 더 행복입니다.

사람들은 달콤한 향기를 따라
숲을 헤치며 먼 곳까지 찾아올 테니까요.

날카로운 창과 대못에 찔린 그리스도의 향기는
그렇게...,
세기를 거쳐 생명의 향을 전해 주고 있건만... ....

 

 

 

 

 


"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고후2: 15-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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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임금님께서 신하들과 함께
      나라의 이곳 저곳을 시찰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시골의 넓은 들판에 이르렀는데
      그곳에는 많은 염소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젊은 목동 한 사람이 이끄는 염소떼가 눈에 띄었는데
      이 목동이 얼마나 염소떼를 잘 모는지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염소들을 잘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임금님께서는
      그를 왕궁으로 데리고 가서 잘 가르치면 좋은 신하가 되겠다 싶어
      그를 왕궁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몇 년 동안의 교육 후에 그에게 작은 일이 맡겨졌는데
      얼마나 일을 지혜롭게 잘 감당하는지 맡기는 일마다
      임금님의 마음에 쏙 들도록 해 내었습니다.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나중엔 나라의 모든 재물들을 관리하는
      재무대신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왕궁에 있는 많은 신하들의 시기를 받게 되었습니다.

      "비천한 목동 출신 주제에 임금님의 총애를 받더니
      급기야 재무대신의 자리까지 오르다니..."

      모든 신하들이 그의 헛점을 잡아 왕궁에서 내 쫓으려고 했지만
      얼마나 일을 충성스럽게 하는지 도무지 허점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생각해 낸 것이 첩자를 붙여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게 했고,
      뭔가 이상한 행동이 발견되면 즉시 보고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얼마 지나지않아 재무대신에게 무언가 이상한 행동이
      한 가지 발견 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매일같이 왕궁의 모든 불이 꺼진 늦은 밤에
      재무대신이 작은 등을 손에 들고 왕궁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작은 방으로 가 자물쇠를 따고 들어간 후 한참 있다가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그 방의 열쇠는 다른 사람에게는 없고
      자기 혼자만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신하들이 생각하기를
      "그럼 그렇지! 나라의 보물중에서 가장 귀하고 값진 보물들만
      몰래 훔쳐다가 그곳에 쌓아두고 있을 것이다"라고 판단을 하고
      바로 임금님께 보고를 했습니다.
      임금님께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재무대신을 잡아 들이게 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열쇠를 빼앗아 그 방을 샅샅이 뒤지도록 명령했습니다.

      얼마 후 그 방을 뒤지고 돌아온 신하들이 보고하기를
      "그 방에는 보물은 커녕 동전 한 닢 없었고 작은 책상 위에
      허름한 옷 한 벌과 다 떨어진 짚신 한 켤레만 놓여 있었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연이 궁금해진 임금님께서 재무대신에게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재무대신이 대답하기를
      임금님 저도 사람인데 왜 저라고 나라의 보물을 만질 때마다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비천한 목동이었을 때
      그리고그렇게 평생을 살아가야 했을 때 임금님께서 저를 불러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지금의 이 자리에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 있던 옷과 신발은 제가 목동이었을 때 입고 신었던 것들입니다.
      그곳에 가서 저의 옛 모습을 기억하면서 저에게 베풀어 주신
      임금님의 은혜를 되새기면서 그 유혹들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재무대신의 그 말에 신하들은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으며
      임금님께서는 재무대신에게 큰 상을 내리셨습니다.

      어느 자리 어느 위치에 있던, 초심을 잃지 않고 살아 간다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우리도 마음속에 유혹을 견디고 신앙적 초석이 될 만한
      그런 초심의 작은 방 하나쯤은 간직하고 살아야겠습니다.



그대 가슴의 사진틀에는.......


어떤 부자가 실험을 했단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를 매일같이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돈 10달러씩을 나누어 주었단다.
“아니, 이 돈을 왜 주십니까?”
“그냥 드리는 겁니다. 받으세요.”
시간이 흐르자 처음엔 돈을 받으며 어색해하고 쭈뼛거리던 사람들이 점점 자연스럽게 돈을 받게 되었고 나중엔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자는 돈 나누어주기를 중단하였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항의를 하였다.
“왜 돈 안 주십니까?”

생각할수록 빛은 얼마나 놀랍고 신비스러운 하나님의 선물인가?
몇 푼 돈 따위와 비기겠는가?
이 세상에 빛이 있고 우리에게 그 빛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가?
우리가 만일 볼 수 없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 빛이 있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감사할 줄을 모른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빛을 거두어 가신다면 어찌 될까?

이 세상의 아름다운 빛을 모든 사람이 다 보는 것이 아니다.
볼 수 없는 사람도 많다.
빛을 보지 못 하는 사람은 불행이라 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빛을 보지 못 하는 사람이 불행이 아니라 빛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축복이다.

소경이며 귀머거리였던 헬렌 켈러는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에서 하나님께서 사흘만 볼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인자한 설리번 선생님과 친구들의 모습, 들판과 숲, 나무와 풀과 꽃의 모습, 타오르는 저녁놀을 보아두고 기억 속에 담아두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본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 된 일인지.

유명한 맹인가수 챨스 레이는 말년에 개안수술을 받더라도 빛에 노출된 시신경이 몇 분 안에 망가져서 도로 맹인이 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몇 분이라도 좋습니다. 도로 소경이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내 사랑하는 딸을 볼 수만 있다면, 몇 분이 아니라 몇 초만이라도 내 딸의 모습을 보고 내 기억 속에, 내 마음 속에 담을 수만 있다면 수술을 받겠습니다.”  

2004년 봄 강원도 험준한 산골짜기 6.25 전적지에서 52년 만에 발굴된 국군장병의 유골은 은박지에 꼭꼭 싼, 아마도 약혼녀이거나 아내였을 한 여인의 사진을 품에 안고 있어 보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 있었다.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격전지에서 틈틈이 그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그는 얼마나 그 여인을 그리워했을까?

“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 모습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 모습을 내게 담아 둘 수 있다면.....”
인간은 그렇게 서로의 모습을 보고,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빛이 있고 눈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만약에 빛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를 볼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고 존재로 나타날 수 없고 인생도 시간도 우주만유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빛이 있음으로 존재는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되고, 빛으로 존재를 인식하는 존재가 있음으로 비로소 만유는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렇다.
우주는 우연히 생겨난 것이 절대로 아니다.
우주는 우주를 보는 자에게 지음 받은 것이 분명하다.
빛은 우주를 보기 위한 것이요 우주만유를 지으신 자와 우주만유를 인식할 수 있는 자를 위한 것이다.
파동도 아니고 입자도 아닌, 과학으로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찬란한 빛은 하나님의 세계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우주만유가 그 인식해주는 자가 없다면 존재의 의미가 없다면 하나님 자신도 그렇지 않겠는가?
하나님도 하나님을 인식해 주는 존재가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으로서의 존재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광활한 우주, 캄캄한 어둠 속에 알아주는 이 하나 없이 하나님 홀로 계신다면 하나님이신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빛이 있으라.",
하나님은 가장 먼저 빛을 지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인식하고 기억하는 존재, 빛을 인식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만유를 함께 바라보면서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존재를 또한 지으셨을 것이다.
거울처럼, 사진처럼 하나님을 인식 속에, 마음속에 담는 존재,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를 인식하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하나님은 그래서 만드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모습을 담은 존재가 얼마 살지 못 하고 죽기를 원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어느 누가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금방 빛바래거나 삭아 없어지기를 바라겠는가?
어느 누가 자신을 알아주고 교제 나누는 벗이 죽기를 바라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영원히 사는 존재로 지으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흙으로 인간을 빚으시고 코에 직접 자신의 영원한 생기를 불어넣어 인간이 영원히 살도록 '생령'으로 만드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인간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였다.
선악과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지워버리고 대신 하나님같이 된 자신을 담았다.
자신의 심령 사진틀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모습이 담겨야 할 마음에 자신의 욕심과 죄악을 담음으로써 더럽혀지고 망가져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한 인간은 자신의 욕심과 물질, 명예와 쾌락을 담고 멸망길로 향하였고 결국 그런 것들을 조종하는 마귀의 모습을 담기까지 타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은 아들을 내어주셨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이는 하나님으로 보내신 것이다.
빛으로 보내신 것이다.

그 목적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모습이 지워져버린 심령에 하나님의 모습을 다시 회복시키려는 것이었다.
보이는 하나님,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 마음에 담으라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그 모습, 그 생명을 담은 자는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슬픈 일이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었으나 사람들은 깨닫지 못 하였고 그 빛 안에 생명이 있었으나 사람들은 그 생명을 얻지 못 하였다.
사람들은 그 빛으로부터 얼굴을 돌렸고 그 빛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렸다.

마지막 날 심판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빛, 그 모습이 담겨진, 그리스도의 빛에 다시 곱게 감광된 마음들을 거두시는 것일 것이다.
보이는 하나님의 모습, 곧 우리를 살리시려 십자가에 죽으신 아들 하나님의 모습으로 다시금 심령을 회복한 자들은 거두시고 여전히 더러운 자신의 욕망과 마귀의 모습을 담은 타락한 영혼들은 소각로, 곧 영원히 타는 유황 불못에 던져 넣으시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아,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음 받은 인간의 영혼이 그 소각장에 던져졌는데 타 없어지지 않는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지금 그대의 눈은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가?
지금 그대 가슴의 사진틀에는 누가 들어있는가?


(오래전에 올렸던 글을 리바이벌 했습니다.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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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섭 소장(목사, 가족관계연구소장, 사이비종교피해대책연맹 총재, 전 침신대 교수)은 이단대처 사역자 중 매우 독특한 위치에 있다. 그는 저술가이자 탁월한 번역가다. 또한 기독교 상담심리학자(트리니티신학대학교대학원 철학 박사, 상담심리학 석사)다. 기독교 상담심리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정 교수의 번역서를 한번쯤 접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만큼 다수의 상담 관련 저술을 한국교회에 소개했다. 가족관계연구소를 설립해 기독교인들의 대화와 소통을 위해 30여 년 이상을 가정 사역자로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단대처 사역자로서 최삼경·이영호·진용식·박형택 목사 등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 필자는 2015년 3월 6일 경기도 안양에 위치한 정 목사의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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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사역과 이단대처 사역은 정동섭 목사에게 동전의 양면과 같다


“가정 사역은 이단대처 사역의 또 다른 이름”


정 목사에게 있어서 이단 대처는 또 다른 측면의 가정 사역이다. 정 목사가 이단대처 세미나를 할 때 반드시 본문으로 하는 말씀이 있다. 디도서 1:11이다.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더러운 이익을 취하는 자들이 마땅치 아니한 교리들을 가르쳐 집들을, 가정을 온통 뒤흔들어 놓고 무너뜨린다는 지적이다. 이단의 그릇된 가르침에 세뇌되면 가출과 이혼의 열매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성경 본문과 주제는 심각하다. 긴장감도 있다. 하지만 정 목사의 강의에선 웃음소리가 자주 터져 나온다.


강의할 때 그는 진지하게 어떤 개념을 설명한 후 “아는 척 하지 말고 받아 적으세요!” “내 말이 틀렸다는 말입니까?”라며 반문한다. 웃음 포인트는 의외로 이런 데서 터져 나온다. ‘이단’문제라는 매우 딱딱한 주제를 갖고 강연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시종 잔잔하고 부드럽다. 그리고 그의 생생한 체험들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디도서 말씀을 근거로 정 목사는 가정을 세우는 사역과 이단 대처 사역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고 제시한다. 가정을 회복하고 바로 세우는 게 가정 사역인데 이단교주와 추종자들은 모두 역기능가정 출신이다. 이단에 빠진 사람의 가정에는 예외없이 불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 사역을 하는 자신은 필연적으로 가정을 파괴하는 이단에 대해 비판하고 경계하며 대처해야 했다는 것이다.

정 목사는 사람들이 이단에 빠지는 배경에 “불안정한 현대 가정”이 자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증가하는 이혼, 잦은 이사와 전근, 성도덕의 문란으로 외로움과 권태를 느낀 사람들이 사랑을 갈구하다가 ‘거짓된 사랑의 공동체’를 만나게 되고 이단들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소속감과 즉각적인 해답 그리고 일시적인 돌봄을 제공받기 때문에 이단에 몰입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정 목사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가정을 대화가 넘치는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며 “결혼예비교육, 부부역할 및 부모역할 교육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가족 구성원들이 효과적 대화기술과 문제해결기술을 습득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간다면 이단 교주는 물론 이단단체들도 현저히 줄어들 것”이라고 역설한다. 건강한 가정 만들기가 결국 가장 근본적인 이단대처 사역이라는 게 정 목사의 생각인 셈이다. 이를 위해 그는 부부간의 대화에 많은 관심을 둔다. 정 목사가 제시하는 방법론은 ‘A, B, C 대화법’과 반영기술로 설명할 수 있다.


현대 가정에 필요한 것은 그날의 경험과 감정을 표현하는 심정대화다. 말할 때는 ABC 공식에 맞추어 말한다. “A상황에서 당신이 B를 했을 때 나는 C를 느꼈다.” 예를 들면 이런 방식이다. “낮에 전화를 아무리 해도 당신이 안 받으니까 걱정이 됐어요.” 듣는 사람은 상대의 말을 자세히 듣고, 반영한 후에 반응을 하라는 것이다. 듣는 사람은 들은 내용을 요약해서 반복한다. “내가 전화를 안 받아서 걱정했다구. 그 때 회의 중이라 받을 수가 없었어.” 이를 반영 또는 바꾸어 말하기 기술이라 한다. 이런 식으로 하루 하루의 삶을 나누다 보면 정서적 친밀감도 생기고 갈등도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 정 목사의 생각이다.

정 목사는 말한다.

“대화는 부부관계의 혈관과도 같은 것이다. 대화가 사실상 일상적인 대화밖에 안하는 경우, 소통은 대화경화증에 걸린다. 집에서 ‘밥 먹으세요’, ‘나, 나갔다 올게’ 등 부부간의 대화가 일상적 대화에서 끝나면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대화, 친목(심정)대화의 단계로 나가지 못한다. 친밀감을 형성하는 대화를 하지 않고 삶을 나누고 희노애락을 나누는 대화를 하지 않으면 부부관계는 금방 정서적 이혼상태에 이르게 된다. 설상 부부들이 교회에서 대외적으로는 멋있게 보여도 그건 ‘사이비’ 친밀감에 불과하다. 정서적 친밀감은 오락적 친밀감으로 이는 다시 성적 친밀감으로 이어진다. 정서적 친밀감 없이 성적 친밀감은 불가능하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게 부부관계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사람들, 특히 목회자들이 평생의 반려자와 즐겁고 행복한 관계를 맺는 것보다 자신이 목양하는 성도들이나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부부관계는 모든 관계의 기본이 된다. 정 교수는 “남편은 아내가 ‘당신 최고야’라며 인정할 때 활력 있는 인생을 산다, 아내는 남편이 ‘여보, 사랑해’라고 표현할 때 말할 수 없는 행복감에 빠진다”며 “가정에 행복이 넘칠 때, 이단에서 소속감을 찾는 사람들은 줄어 들 것”이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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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섭 목사의 사무실에 진열된 책자와 액자들


구원파에서 몰몬교로, 그리고 형제교회로···


가정 사역과 이단대처 사역을 함께 하는 정동섭 목사에게는 언제나 ‘구원파 탈퇴자’라는 이력이 따라다닌다. 그는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경희대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구원파(권신찬·유병언 씨측)에 미혹돼 8년 동안을 허송했다. 정 목사는 자신이 구원파에 빠지게 된 계기에 대해 “친구가 ‘성경을 통달한 사람이 있는데 만나보자’는 권유 때문에 유병언 씨를 알게 됐다”며 “성경을 통달했다는 유 씨의 성경이 닳을 대로 닳아 있는 것을 보고 믿음이 갔고 말할 때마다 성경을 인용하는 유 씨의 모습에 압도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 목사는 “유 씨의 통역 비서로 세계 곳곳을 함께 다니며 유 씨의 실체를 옆에서 보고는 너무도 실망해 탈퇴했다”며 “탈퇴한 후 미국 대사관 직원을 만나서 미혹당해서 간 곳이 몰몬교였고, 또 다시 탈퇴해 극단적 세대주의자들이 모임인 형제교회와 지방교회까지 방황하게 됐다”고 말했다. 정 목사는 “나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한국, 미국, 중국계 이단을 국제적으로 경험한 사람”이라며 “그렇게 이단 단체에서 10여년, 허송세월을 했다”고 고백했다.


이단에 빠져 있을 때, 정 목사는 불행했다고 회상한다. 일주일에 두세번씩 ‘성도의 교제’를 핑계삼아 구원파 교인들을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정 목사의 아내, 이영애 사모는 심신이 쉴 수 있는 날이 없었고, 무리한 헌금과 교제비 지출로 말미암아 정해진 월급으로는 생활을 이어나갈 방도가 없었다고 한다. 구원파식 ‘시한부 종말론’에 세뇌돼 “예수님이 올해 오실지도 모르는데 집이 뭐 필요하냐?”며 아내가 저축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못하게 윽박질렀고,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무조건 화를 냈고, 언성을 높여 아내위에 군림하려 했다고 한다.

구원파안에서 생활하는 동안 정 목사의 아내는 억울하고 분한 감정을 삭이느라 위계양과 고혈압으로 고생하는 신경증 환자가 됐다고 한다.


당시 정 목사는 “나는 구원파에 빠졌을 때 늘 독선적이고, ‘나만 구원받았다’는 생각에 가족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며 “나중에는 가족들이 ‘너처럼 될까봐 안 믿는겠다’는 말까지 했다”고 회상했다. 구원파의 깨달음에 의한 구원은 사람을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배타적이게 만들었다. 정 목사는 “이런 독선적인 신앙을 갖고 있던 내가 사랑의교회에서 참된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 나는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의 되어 아내에게 무릎꿇고 용서를 비는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정 목사는 이단에 빠졌던 사람의 방황이 끝나려면 반드시 이단 상담을 해야 한다며 자신도 사랑의교회 고 옥한흠 목사의 설교를 듣고 비로소 회심하게 됐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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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에 나와 유병언 씨 구원파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정동섭 목사


정 목사는 “1980년, 사랑의교회 개척 2주년 여름 수련회에 참석했을 때 옥 목사의 강연을 들으며 성령께서는 내가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가를 처음으로 일깨워 주셨다”며 “그동안 나는 구원파에서 아담의 범죄 때문에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깨달았으나,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자범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죄인이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구원파를 탈퇴해 정통신앙을 갖게 된 후 정 목사는 구원파 ‘저격수’로서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구원파측과의 소송도 끊이지 않고 있다. 필자와 만나던 날도 그는 오후 3시에 서울 서초동의 법무법인을 방문하기 위해 분주했다. 세월호 사건 후 그는 TV조선을 비롯해 종편채널에 200회 이상 출연해 유병언과 구원파의 실체에 대해 증언했다. 방송 중 발언으로 인해 구원파와 천부교에서 명예훼손 소송을 걸어왔다. 지금까지 총 20회 이상 고소를 당했다. 그의 구원파와 이단을 향한 대처 사역은 끊이지 않을 전망이다. 구원파 뿐 아니라 정 목사의 이단대처 사역은 정통교회에 기반을 둔 ‘회색분자들’을 향해서도 이어질 것이다.

정 목사는 말한다. 한국교회 이단 문제의 현실에 대해 ‘색깔’로 비유해 설명했다. 정통교회가 하얀색이라면 이단·사이비 단체를 검정색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정통교회와 이단·사이비 단체를 오가는 회색분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정 목사는 이단대처 사역자들을 가장 괴롭히고 한국교회의 이단대처를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은 ‘이단·사이비’가 아니라 오히려 회색분자 이단브로커들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이들이 이단대처 사역자들을 ‘이단 감별사, 이단사냥꾼’으로 몰며 한국교회의 이단연구의 질서를 뒤흔들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정 목사는 “구원파와의 보이지 않는 커넥션을 맺으며 이단연구가들을 죽이기 위한 전략을 시도하는 인사들로 인해 이단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며 “<하나 되는 기쁨>이라는 책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는 책인데도 불구하고 음란성과 이단성이 있는 책으로 매도돼 이단옹호단체로 변질된 기관에 의해 사이비로 몰린 적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 목사는 어두움의 공격에 <부부연합의 축복>(요단)이라는 책으로 응수했다. 이단 구원파에서도 정 목사를 음란한 가정사역자라고 그를 매도했으나 30명의 넘는 신학자와 교수들이 그의 책을 아주 건전한 성생활 지침서라고 추천했다.

정 목사는 이단은 이단이니까 이해가 되는데 이단 편을 드는 정통교회내의 이단 브로커, 회색분자들이 더 무섭다며 그들은 정통교회 목사, 장로의 직분을 갖고 이단과 결탁해 대변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성도들의 분별이 필요하고 이들에 대해서도 힘을 합쳐 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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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동섭 목사의 대표적 저술


정동섭 목사는 1947년 충북 음성군 장호원에서 6남 4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동녘 ‘동’(東)에 불꽃 ‘섭’(燮)을 쓴다. 정 목사는 이단의 특징에 대해 첫째는 거짓된 구원의 확신을 준다고 말한다. 우리만 선택받고 들림받는다, 구원은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인데, 이단은 자기들의 교리를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며 거짓된 확신을 심어준다.

 

둘째 이단은 가정을 무너뜨리는 가정파괴세력이라고 한다. 정 목사는 이단에 빠지면 가족간이라도 상호간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며 ‘너희 집안에 원수가 있다’는 성경말씀을 잘못 해석해 가족 관계를 파괴한다고 지적했다. 셋째는 교회를 분열시킨다고 한다. 이단·사이비 단체들이 교회로 들어가 교회를 파괴하며 교회를 분열시킨다는 것이다.

 

정 목사는 “정통교회는 올바른 구원의 확신을 주며 성도들이 풍성하고 행복하고 거룩한 (가정·교회) 공동체를 이룰 수 있도록 돕지만 이단들은 거짓된 확신으로 가정을 파괴하고 교회를 무너뜨린다”며 “이단대처 사역자들이 이단을 막는 것은 물론 이단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을 품어주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혼을 막는 지름길은 행복한 결혼률을 높이는 것이다. 그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야 이단들이 끼어들 틈을 못 찾는다”며 “행복한 가정 만들기가 이단대처의 지름길이다”고 강조하는 이단대처 사역자이자 가정 사역자이다.

 

그의 대표적 저술에는 <자존감 세우기>(요단),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베다니), 박옥수 이요한 유병언의 구원파를 왜 이단이라 하는가(JOY), <부부연합의 축복>(요단), 역서로는 <강자와 약자>(폴투르니에, IVP), <서로를 이해하기 위하여>(폴투르니에, IVP), <모험으로 사는 인생>(폴투르니에, IVP), <아직도 아물지 않은 마음의 상처>(찰스쉘, 두란노) 등 다수가 있다.


호주 <크리스찬리뷰>(권순형 발행인)와 공동기획한 인터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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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로 외롭게 살다가 세상을 떠난 어느할머니의 소지품중 유품으로 단하나 남겨진 이 시가 양로원 간호원들에 의해 읽혀지면서 간호원들의 가슴과 전세계 노인들을 울린 감동적인 글 입니다. "당신들 눈에는 누가 보이나요, 간호원 아가씨들. 제가 어떤모습으로 보이는지를 묻고 있답니다. 당신들은 저를 보면서 대체 무슨생각을 하나요. 저는 그다지 현명하지도 않고, 성질머리도 괴팍하고, 눈초리 마저도 흐리멍텅한 할망구 일테지요. 먹을때 칠칠치 못하게 음식을 흘리기나하고 당신들이 큰소리로 나에게 "한번 노력이라도 해봐욧!!" 소리질러도 아무런 대꾸도 못하는 노인네 당신들의 보살핌에 감사할줄도 모르는것같고 늘 양말 한 짝과 신발 한짝을 잃어버리기만 하는 답답한 노인네 그게 바로 당신들이 생각하는 '나'인가요? 그게 당신들 눈에 비쳐지는'나'인가요? 그렇다면 눈을 떠 보세요. 그리고 제발 나를 한번만 제대로 바라봐 주세요 이렇게 여기 가만히 앉아서 분부대로 고분고분 음식을 씹어넘기는 제가 과연 누구인가를 말해 줄게요. 저는 열살짜리 어린 소녀였답니다. 사랑스런 엄마와 아빠 그리고 오빠,언니,동생들도 있지요. 저는 스무살의 꽃다운 신부랍니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면서 콩닥콩닥 가슴이 뛰고있는 아름다운 신부랍니다. 정다운 남편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고 그러던 제가 어느새 스물다섯이되어 아이를 품에안고 포근한 안식처와 보살핌을 주는 엄마가 되어있답니다. 어느새 서른이 되고보니 아이들은 훌쩍 커버리고 제 품에만 안겨있지 않았답니다. 마흔살이 되니 아이들이 다자라 집을 떠났어요 하지만 남편이 곁에있어 아이들의 그리움으로 눈물로만 지새우지는 않는답니다. 쉰살이 되자 다시금 제 무릎위에 아가들이 앉아있네요. 사랑스런 손주들과 나 행복한 할머니 입니다. 암울한날이 다가오고 있어요. 남편이 죽었거든요. 홀로 살아갈 미래가 두려움에 저를 떨게하고 있네요. 제 아이들은 자신들의 아이들을 키우느라 정신들이 없답니다. 젊은시절 내 자식들에 퍼부었던 그 사랑을 뚜렸이 난 기억 하지요. 어느새 노파가 되어 버렸네요. 세월은 참으로 잔인 하네요. 노인을 바보로 만드니까요. 몸은 쇠약해가고 우아했던 기품과 정열은 저를 떠나버렸어요. 한때 힘차게 박동하던 내 심장자리에 이젠 돌덩이가 자리잡았네요. 하지만 아세요? 제 늙어버린 몸뚱이 안에 아직도 16세 처녀가 살고 있음을... 그리고 이따금씩은 쪼그라든 제 심장이 쿵쿵대기도 한다는것을.. 젊은 날들의 기쁨을 기억해요. 젊은 날들의 아픔도 기억해요. 그리고 이젠 사랑도 삶도 다시 즐겨보고 싶어요. 지난세월을 되돌아보니 너무도 짧았고 너무도 빨리 가버렸네요. 내가 꿈꾸며 맹세했던 영원한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서운 진리를 이젠 받아들여야 할때가 온것같아요. 모두들 눈을 크게 떠보세요. 그리고 날 바라봐 주세요. 제가 괴팍한 할망구라뇨? 제발 제대로 한번만 바라보아주어요. '나'의 참 모습을 말예요." 누구나 다 똑같이 늙어 갑니다 나이가 든다는것,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게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좋은 날인지 어렸을때 어른들은 우리에게 참 좋은때다 라고 말했지요 지금의 저를 보고 더 연세가 있으신분들은 지금도 좋은 때다라고 제게 말하곤 합니다 이 좋은때에 정열을 불태워 뭔가를 할수 있다는건 정말 소중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을 생각하며 서로에게 따뜻한 사랑의 표현을 실천해보세요. 아름다운 하루되세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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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신촌에 있는 <세브란스병원> 심장병동에 가면 지은이의 이름도 없는 무명의 詩가 걸려있습니다. 주님!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고독하고 외로운 것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되도록 틀어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의 교만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돈이 떨어지고 사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사게 하신 것도 감사합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이 공부를 기대만큼 안하고
      아내가 미워지고 어머니와 형제들이 짐스러워질 때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저의 우상이 되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허무를 느끼게 하고 때로는 몸이 늙고
      아프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그럼으로 인하여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불의와 부정이 득세하는 세상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잘못하고 저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그럴수록 더욱 겸손해지고 더욱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밤 잠못 이루고 뒤척이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병들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을 더욱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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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옹]

옆에 있는 당신
오늘은 한 번 꼭
힘껏 안아주고 싶다.

산속 깊은 곳에
등치 큰 소나무
끌어안고 쓸데없이

힘주는 포옹보다

오늘은 꼭!

누가 그러더라구요

한 번의 포옹이
수천 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고!

포옹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오늘
만큼은 꼭 한번
행동으로 옮겨
보자구요

`당신이 있어 좋다'
포옹은 `얼싸안는'
가슴뿐 아니라
그의 영혼까지
감싸안는 것이라고,

처음에는 누구나
쑥스럽겠지.

자꾸 하다보면

`얼싸안는'
그 따뜻함의 힘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구요,

한 번의 포옹이
사람의 운명을
바꾸고 기적을
일으킬 수 있듯이

모든것이
녹아내리니까요..

오늘은 따뜻하게
안아주는 날로
포옹하는 날로
만들어 봅시다.
사랑합니다.

 

-옮긴 글



 

 

출처: 사모님사모님/민들레홀씨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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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가진 천년왕국 사상은 역사적 전천년설
박수암 박사의 <요한계시록의 바른 해석을 위하여> ⑨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76
newsdaybox_top.gif 2015년 05월 11일 (월) 09:31:23 박수암 박사 btn_sendmail.gif webmaster@amennews.com newsdaybox_dn.gif

박수암 박사 / 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신약학


IX. 천년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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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수암 박사

“천년왕국”은 요한계시록의 주제인 “현세의 심판과 교회의 승리” 중 “승리”의 주제를 보여주는 한 주제이다. 그리하여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천년왕국”을 보여주는 계시록 20:1-6의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 구절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것을 실현된 왕국 차원에서 해석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21:1-22:5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 차원에서 해석하는 우(愚)를 범하게 된다.

“천년왕국”은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나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할 그런 나라가 아니라,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와 앞으로 올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있을 잠정적인 하나님의 나라이다.

“천년왕국설”(millenarianism)이란 계시록 20;4의 “천년”을 문자적으로(혹은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현세와 내세 사이에 과도적인 중간시대가 있어, 인간의 이상향이(사 11:6-9, 65:18-25, 겔 37:24, 슥 8:12, 14:17-19, 암 9:13)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1천년간 변화된 지상에서 이루어진다고 믿는 하나의 학설이다.

이 학설에는 대체로 세 가지의 이견이 있다.

1) 무천년설 : 이는 본문의 “천년”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승천부터 재림 시까지의 전 기간을 천년으로 생각하고, 교회를 통한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보는 견해이다(Augustine, Luther, Calvin, A. Kuyper, Lenski, Berkhof, Vos, Warfield 등).

2) 후천년설 : 이는 천년왕국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다는 전제하에 본문의 “천년”을 재림 직전 1000년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 1000년 기간 동안에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고, 교회가 왕성해지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에 해당된다는 것이다(C. H. Hodge, A. H. Strong, Hengstenberg 등).

3) 전천년설 : 이는 “천년”을 문자적이나 상징적으로 보면서, 천년왕국 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천년왕국을 이끄신다는 것이다(이 견해는 다시 두 종류의 견해로 나누어진다).

① 역사적 전천년설 : 이는 천년왕국 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상 재림 한 번만 있고,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 두 번으로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교회는 유대인이나 불신자들과 함께 환난을 통과하며, 그 환난 후에 주께서 재림하시고 성도들은 그를 영접하기 위해 휴거되며 함께 지상에 내려와 이어 천년왕국이 어떤 변형된 세계에서 이루어질 것이라 본다. “천년”을 꼭 문자적으로 보지 않는다(Bengel, Godet, Hofmann, Bousett, Charles, Eerdman, Alford, Ellicott, Zahn 등);

② 세대론적 전천년설 : 이는 천년왕국 전에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비밀 재림하시고, 그 때 신자들은 휴거되어 공중에서 7년간 혼인잔치를 하며, 그동안 지상에 남아 있는 유대인과 불신자는 7년 대 환난을 통과하며, 이 환난을 통해 유대인들은 대규모로 회개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7년 대 환난은 다시 2분 되어, 복음 증거의 전3년 반과 종교박해의 후3년 반으로 나누어진다. 이 7년이 끝나면 주님은 성도들과 함께 지상 재림하여 천년왕국을 건설하신다. 이 견해는 “천년”을 꼭 문자적으로 본다(Scofield, Darby, Walvoord, Hal Lindsay, 이상근 등 세대주의 신학자들).

그럼, 이 견해들 중 어느 견해가 가장 옳으며 성경적인가?

1. 관련된 본문들 석의

천년왕국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신약성서에서의 관련된 본문들을 바르게 석의할 필요가 있다.

(1) 계시록 20:1-6

이는 천년왕국설의 근거가 되는 본문으로서, 본문에 대한 객관적인 해석이 요구되는 본문이다. 먼저 1-3절은 사단의 결박과 무저갱에 갇힘이 나와 있다.

“일 천년 동안 결박하여”(2절) 천년동안 마귀는 결박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재세 시 마귀는 결박되었었다(막 3:27). 그러나 그 결박은 원리적인 것이고 잠정적인 것이었다. 이제 그 완전한 실현이 이때의 결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이를 그리스도의 초림 시에 있었던 결박으로 보나, 이는 그리스도가 아닌, 한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내려와 잡은 용을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시작되는 신약시대는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는 시대이지, 무저갱에 갇히어 있는 시기가 아니다.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4절). 2:26-27(“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3: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4:10(”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 “보좌에 앉은 자들”은 그 다음에 설명이 되어 있는, 예수를 증거 하다가 순교하였거나, 황제 예배를 거부한 순교자들을 가리킨다.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은 계시록에 자주 나오는 표현으로(6:9, 12:17), 일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초대교회 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들이었고, 그럼으로 해서 순교하는 자들이었다.

“심판하는 권세”는 사단의 패배로 인해 오는 통치권을 의미한다. 다니엘 역시 네 짐승이 망하자 인자 같은 이가 보좌에 앉으신 이로부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받음을 보았고, 천사는 이를 성도가 나라를 얻은 것으로 해석했다(단 7:13-14, 22). 성도들은 이 때 짐승과 그 모든 열왕들이 멸망했으므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왕국의 통치권에 함께 참여할 권리를 받은 것이다. 예수님도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성도가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할 것을 말씀하셨다(마 19:28. cf. 딤후 2:11-12, 계 5:10).

이는 확실히 지상의 “전투하는 교회”(church militant)가 아닌, 환난을 통과한 천상의 “승리하는 교회”(church triumphant)를 가리킨다.

“살아서”(ἔζησαν). 이는 5절의 ἔζησαν과 더불어, 영적인 부활이나 중생을 가리키지 않고 육적인 부활을 가리킨다. 순교까지 하는 성도들이라면 그들은 이미 영적인 부활을 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하니. 천년왕국설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구절이다.

(2) 고린도전서 15:23-26

이는 천년왕국설의 간접적인 근거가 되는 구절로, 바울이 부활의 순서를 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을 끝내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를 언급한 구절이다. 바울은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부활부터 나라를 아버지께 바칠 때까지 세 단계가 있음을 보인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첫째는 그리스도의 부활, 다음은 성도의 부활, 그 다음은 불신자의 부활. 불신자의 부활 시 그리스도는 인류를 심판하시고 인류의 최후의 원수인 사망과 음부를 불못에 던지신다.

여기에 사용된 순서를 알리는 부사 “다음에는”(ἔπειτα)과 “그 후에는”(εἶτα)은 모두가 선후관계(sequence)를 나타내는 시간의 부사이며, “그 다음”(then)을 의미한다. 전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 사이에, 후자는 신자들의 부활과 “나중”(τὸ τέλος) 사이에 시간적인 간격이 있음을 알린다. “나중”은 현 세대의 끝을 의미하기 보다, 이 세대에서 오는 세대로 이끌어가는 종말론적 대 파국(the close of the great eschatological finale)의 끝 즉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의 극점(consummation-point)을 가리킨다(G. Vos)1).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자의 부활과 계시록 22: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의 천년이 다 찬 후의 불신자의 부활 사이에는 최소한 천년의 시간적인 간격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왕 노릇하시리니.” 이 왕 노릇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기간 동안의 왕 노릇을 가리킬 수 있다(마 19:28, .Weiss, Lietzmann, Bachmann, Meyer 등)2).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가 부활인류인 성도들과 더불어 왕 노릇 하시는 천년왕국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이 천년왕국 이후 곡과 마곡의 멸망, 마귀의 멸망, 최후의 심판, 사망과 음부의 멸망(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원수를 발아래 두시고 왕 노릇하는 일을 마치심)이 있게 되고, 영원한 신천신지가 있게 되는 것이다.

(3) 계시록 20:7-10

천년왕국이 어떠한 성격의 나라인가를 알기 위해 “천년왕국” 환상 다음에 “곡과 마곡”이 사단과 함께 멸망하는 환상이 나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곡과 마곡의 이야기는 구약 에스겔서 38-39장에 나오는 바, 거기서는 이스라엘의 회복과(36-37장) 이상적인 성전(40-48장) 사이에 나와 있다. 이 경우, 곡과 마곡은 이스라엘 백성을 최후로 괴롭히는 현세에서의 마지막 세력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곡과 마곡의 환상이 계시록에서는 천년왕국 환상과(20:1-6) 신천신지 환상(21:1-22:5) 사이에 나와 있다. 이는 이 천년왕국이 지상에서의 일시적인 왕국임을 보인다. 그러므로 천년왕국과 신천신지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4) 계시록 11:11-12

천년왕국이 어떠한 성격의 나라인가를 알기 위해 계시록 11:11-12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 본문은 교회가 환난을 당한 후 휴거하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여기 “삼일 반”은3.5일로서, 한 이레의 절반이 되는 수이다. 한 이레는 7일이고, 7의 절반은 완전수의 파열수로서, 불안정하고 짧은 기간을 나타낸다. 이의 배경은 다니엘서 9:27로서, 다니엘은 “한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하며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종교박해가 일어나는 기간이란 것이다. 그런데 계시록은 다니엘의 하루를 1년으로 상징화하여, 한 이레(7일)를 7년으로 보고, 그 절반인 3.5년 즉 42개월, 1260일을 복음 증거의 기간(11:3) 혹은 박해의 기간(12:6)으로 보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 세대주의 해석자들은 7년을 문자적으로 보고, 소위 “7년 대환난설”을 주장하며, 이 환난은 휴거 받지 못한 유대인들이 받는 것으로, 계시록 6장에서 18장까지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본다. 이러한 것은 계시록의 원래 의도를 벗어난 것으로, 계시록을 그리스도인을 위한 책이 아닌, 유대인들을 위한 책으로 만드는 잘못이 있다. 성경 어디에도 “7년 대 환난”이란 개념은 발견할 수 없으며, 신약 어디에도 유대인만 환난을 당한다는 말이 없다.

다니엘서 9:27의 “절반에”란 부사는 יצִחִ(‘하치’)란 히브리어로서, 이는 “절반에”란 뜻도 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동안에”(불특정한 시발점)란 뜻도 있어(출 12:29, 24:6, 삿 16:3, 룻 3:8, 삼하 10:4), 시간적인 의미로 해석하기보다 국면(aspect)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1260일은 복음증거의 기간도 되지만, 박해의 기간도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신약시대가 복음을 증거하는 시대이며 동시에 박해를 받을 시기임을 말씀하셨다(막 13:9-10, 눅 22:36).

그러므로 한 이레, 3일 반, 1260일, 42개월, 한 때 두 때 반 때는 모두 동일한 실체를 가리키는 다른 표현들로서, 신약시대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인 것이며, 한 이레의 절반은 신약시대에 있을 두 국면을 가리키는 표현인 것이다. 신약시대(“한 이레”)는 한 적그리스도적 왕이 자기의 때로 정했다는 점에서 전체가 환난의 시대요, 복음을 전하는 시대라는 점에서 전체가 증거의 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증거한 후 환난이 온다는 점에서 신약의 절반인 것이다. 신약시대는 처음부터 복음을 전했던 시대이며, 처음부터 환난을 당했던 시대이다. 그것은 크게 보면 7일간의 환난기간이요, 좀 더 상세히 보면 3.5일 간의 환난기간이다(계 12:6과 12:14 비교).

“그들이.” 이는 유대인들을 가리키지 않고, 앞에서 말했던 두 증인, 두 감람나무, 두 촛대 즉 교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 즉 교회가 고난을 받지, 유대인들이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다.

“하늘로 올라가니.” 교회의 휴거를 가리킨다. 세대론자들은 4:1의 “이리로 올라 오라”를 교회의 휴거로 해석하나, 그것은 요한더러 하는 말이고 교회더러 하는 말이 아니다. 즉 요한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오라는 것이다(spiritual exaltation). 지상에서 고난당한 교회는 주님의 재림 시 공중으로 휴거를 당할 것이다(살전 4:17). 교회의 휴거는 환난 전에 있는 것이 아니고, 환난 후에 있는 것이다.

2. 가장 성경적인 견해로서의 역사적 전천년설

이상의 본문 석의는 우리로 하여금 역사적 전천년설이 가장 성경적인 견해라 보게 한다.

(1) 저자의 의도에서 볼 때

요한 계시록은 박해 중에 있는 교회(ecclesia pressa)를 위로. 격려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당시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로마제국으로부터 황제예배 강요를 받고 있었고, 내적으로는 황제예배를 부추기는 영지주의 이단(니골라 당, 발람의 교훈, 이세벨)의 위협 하에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교회는 말할 수 없는 박해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들은 슬픔과 낙담과 순교와 타협의 기로에 있었다. 본서는 이런 상황에 있는 교회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궁극적인 미래의 승리를 바라보고 신앙의 절개를 지킬 것을 교훈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이런 저자의 의도(exegesis)에서 볼 때 천년왕국의 약속은 교회에게 소망을 주기에 좋은 약속이었으며, 그런 면에서 볼 때 고난 받는 성도에게 왕 노릇함을 약속하는 역사적 전천년설이 가장 올바른 견해라고 보여진다.

(2) 계시록의 구조에서 볼 때

천년왕국(20:4-6)은 그리스도의 재림(19:11-21), 짐승 의 멸망(19:17-21), 사단의 결박(20:1-3)을 전(前) 계시로 가지고, 사단의 멸망(20:7-10), 전 인류의 심판, 사망과 음부의 멸망(20:11-15), 신천신지(21:1-22:5)를 후(後) 계시로 가지면서 그 맨 중앙에 위치하여, 이들 전 후 계시들과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 부분에 기록된 사건들은 서로 다른 사건들로서, 상호연대적인 선후 관계에 있으며, 그 어느 하나도 한 사건의 다른 표현(변이 : variant)으로 볼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런 가운데서 천년왕국 계시는 인접한 다른 계시들과 더불어 계시록에서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 있다. 나선형의 점진적 반복 구조에서 볼 때도, 천지상호작용의 구조에서 볼 때도, 본경과 삽경의 상호교차적인 구조에서 볼 때도, 교차대구법적인 구조에서 볼 때도 천년왕국 계시는 계시록의 제일 마지막 정점에 나와 있다. 이것은 천년왕국이 땅의 사건이 아닌, 하늘의 사건이며, 영혼과 육신의 구원이 함께 아우르지는 사건이며, 구원의 절정으로 인도하는 사건임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이를 영적 부활이나(무천년설), 고난과 관계없는 사건이나(세대론적 전천년설), 재림 직전 이 지상에서의 사건으로(후천년설) 보는 것은 맞지 않는다.

(3) 경고적 설교문 구조에서 볼 때

천년왕국은 계시록을 경고적 설교문으로 볼 때, 권면(2-3장)과 이유(4-22장)의 구조 가운데 “이유”를 나타내는 가장 마지막 부분에 있다. 위의 통일성에서 논한 대로, 이 부분엔 2-3장의 약속들의 성취들이 나와 있다. 그 성취들 가운데 하나가 천년왕국이다. 고난당한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소망을 주려면, 고난당한 교회가 장차 왕 노릇한다는 역사적 전 천년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역사적 전 천년설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고(이사야, 에스겔, 스가랴, 아모스), 재세시의 예수께서도 미리 말씀하셨으며(마 19:28), 부활하신 후에도 일곱 교회 사자들에게 말씀하신(계 2:26, 3:21) 약속의 성취를 보여주기에 합당한 견해이다. 무천년설이나 세대론적 전천년설, 후천년설은 이 성취를 보여주지 못한다.

(4) 종합적 해석법에서 볼 때

계시록을 주후 1세기 로마제국과 교회와의 투쟁의 시각에서 시대사적으로 해석하며, 미래에 일어날 일은 종국사적으로 해석하는 종합적 해석법에서 볼 때, 천년왕국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속하며, 천년왕국을 현세의 영적인 부활로 보는 무천년의 견해는 맞지 않는다.

(5) 관련 본문들 석의에서 볼 때

천년왕국과 관련된 본문들을 석의해본 결과는 역사적 전천년설이 가장 성경적인 천년왕국설임을 보여준다. 이 천년왕국은 특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를 인하여 목 베임을 당했거나, 짐승의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고 그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상급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세대론적인 전천년설의 천년왕국과도 다르고, 무천년설의 천년왕국과도 다르며, 후천년설의 천년왕국과도 다르고, 신천신지와도 다르다.

교회는 환난 전에 휴거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을 통과하며, 문자적 7년 대환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약시대의 환난이 있는 것이며, 그 신약시대를 계시록은 3일 반, 3년 반(1260일, 42개월), 한 때 두때 반 때로 표현하며, 이 때는 교회가 복음을 증거하며 세상으로부터 환난과 박해를 당하는 때인 것이다.

결 론

이상에서 우리는 계시록의 저자 요한이 가졌던 천년왕국 사상이 역사적 전천년설이었음을 보았다. 이는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갑, 파피아스, 폴리갑과 동시대 교부이었던 져스틴 마터, 폴리갑의 제자 이레니우스, 이레니우스의 제자 히폴리투스 등이 역사적 전천년설을 주장했던 것으로 보아서도 확증된다. 그것은 오늘날 릴예(Lilje), 스위트(Swete), 군드리(Gundry), 래드(Ladd), 벡위드(Beckwith), 뵈허(Böcher), 크라프트(Kraft), 비슬레이-머레이(Beasley-Murray), 마운스(Mounce) 월(Wall), 오온(Aune) 등 많은 학자들을 통해 받아드려지고 있다3). 이 사상은 한국교회의 경우 박형용 박사, 박윤선 박사 등을 통해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다.

무천년설은 사단이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니는 현세를 사단이 무저갱에 결박된 채로 갇혀 있는 세대라고 할 수 없는 점이 큰 약점이고, 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무서운 박해와 환난이 따른다는 것이 성경의 사상인데, 어떻게 재림 직전 1000년 동안 사단이 무저갱에 결박된 채 갇히어 있으며,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는 시기가 있는지가 의문이다. 세대론적 전천년설은 일곱 교회는 4:1에서 휴거해버리고 고난을 당치 않으며, 6-18장까지는 휴거되지 못한 유대인들이 당할 운명(7년 대환난)을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것이 큰 잘못이다. 고난과 위기를 맞이한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기록된 글이 계시록이라면, 역사적 전천년설이 가장 적합한 견해라 보여진다.

과연 한국교회가 일제의 신사참배와 극렬한 박해에 순교로 맞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초기 한국교회의 천년왕국 신앙이었고, 그 중에서도 특별히 계시록에서 한국교회의 수난을 읽는 역사적 전천년주의였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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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G. Vos, Pauline Eschatology, Grand Rapids, 1979, 244.
2) J. Weiss, Der erste Korunthian Brief, Göttingen, 1910, 358-359; H. Lietzmann, An die Korinther, Tübingen, 1923, 81-82; P. Bachmann, Der erste Brief des Paulus and die korinther, Leipzig, 1910; H. A. W. Meyer, Critical and Exegetical Handbook to the Epistle to the Corinthians, II, Edinburgh, 1881-1883, 59-63.
3) H. Lilje, The Last Book of the Bible, Philadelphia, 1957; H. B. Swete, The Apocalypse of St. John, Grand Rapids, 1957; R. H. Gundry, The Church and the Tribulation,, Grand Rapids, 1973; H. Kraft, Die Offenbarung des Johannes, Tübingen, 1974.

하나님의 형상

 

(창1:26~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6절을 보니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히브리어 원어는 ‘그들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에 주목을 하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우리’라고 자신을 가리키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반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27절에 가서는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영어로 “His own image”, 단수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복수로 말씀하셨다가 단수로 다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토씨하나 안 빼고, 일점일획도 가감하지 않고 다 기록해야 했던 모세나, 또 성경을 필사했던 유대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라 하셨다가 ‘나’라고 하시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라고 하신 것은 여기 뿐 아닙니다. 창세기 3장 22절, 11장 7절, 이사야서 6장 8절에서도 ‘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단수이면서도 복수이시고 복수이시면서도 단수이시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심을 거듭거듭 암시하고 계시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형상”이라고 하십니다. 영어성경은 “our image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양대로”, 영어성경은 ‘our likeness’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면 하나님은 우리처럼 생기셨을까요?
하나님도 눈, 코, 입, 귀가 있고, 수염이 나고 우리처럼 생기셨을까요?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신다 했는데, 하나님은 영이시라 했는데, 우리와 똑같이 생기셨을까요?
하나님의 형상이 무슨 뜻인가? 학자들 간에는 논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품을 말한다, 그 성품을 말한다, 만물을 통치하시는 위엄을 말한다, 영원불멸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말한다, 등등........

우리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세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갔을 때 하나님이 전혀 낯설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분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하나님 자신의 모습,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고 계실 것이란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실 때마다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스럽게 여기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우리의 형상이 하나님과 같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만일 우리의 형상이 하나님과 달랐다면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실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사람에게로 돌아가 봅시다.
26절에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는 히브리어 원어로는 ‘우리가 아담을 만들고’입니다. 단수,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는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 복수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말 성경은 단수 ‘그’로 되어 있음)
왜 금방 단수로 말씀하셨다가 금방 복수로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지금은 하나님은 아담, 한 사람만을 만드시지만 그 아담은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와는 갈비뼈로 아담 속에 들어있습니다.
즉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고 갈비뼈를 꺼내어 하와를 만드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제야 비로소 아, 여자를 안 만들었네, 생각이 나서 하와가 필요하겠다 싶으셔서 갈비뼈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을 지으시고 그들이라고 부르신 하나님은 이미 그 속에 하와를 하나로, 한 몸으로 만드신 것이고,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하와를 끄집어내신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즉흥적으로 아이디어를 내셔서 행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이미 창세전에 모든 것을 미리 아시고 우리까지도 택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허리 속에는 이미 후손들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들을 통하여 수가 늘어나 생육하고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미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는 그를 지으시지만 그는 그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이면서 여럿, 즉 한 분이면서 세 분, 세 분이시면서 한 분이신 형상입니다.
유대인이 생각하는 유일신 여호와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이슬람의 알라신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주장하는 하나 뿐인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혼자 군림하는 유일신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 없으신 하나님, 성령님 없으신 독불장군 하나님의 형상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삼위일체, 곧 세 분이면서 한 분, 한 분이면서 세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많은 오해와 잘못된 교리들이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 하여 생겨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십니다.
삼위일체 아닌 신(神)은 아무 신이나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홀로 있는 독불장군 같은 인간도 하나님 형상이 아닙니다.
독처하는 것이 선하지 못 합니다.
기독교는 수양이나 도 닦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너와 내가 연합하여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혼자서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누르고 여자가 남자를 밟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저 잘 났다고 혼자 거룩한 사람은 하나님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짓지만 그들로 다스리게 하자, 하신 것 같이 그가 그들이 될 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어
제자삼아 복음으로 자녀를 낳고 생육하고 번성해 나갈 때
우리는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가 되어 자기 혼자 중심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찢어지고 갈라지고 부서져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된 것입니다.
죄는 모든 관계를 갈라버리는 것입니다.
분열시킴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니고 저 여자입니다. 아닙니다, 뱀입니다. 뱀이 그랬습니다.”
혼자가 되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비겁한 죄인의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전쟁과 다툼과 폭력과 추악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저절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고 믿으십니까?
아닙니다.

예수 믿어도 여전히 이전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순종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데는 하나님의 형상보다는 마귀의 형상이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되면 손해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는 힘써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산상수훈으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 믿기만 하면 저절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다면 뭣 하러 이렇게 가르치셨겠습니까?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입니까?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얼마나 이 말씀을 하시는지 보십시오.
-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다가 형제와 불화한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그대로 두고 가서 그 형제와 먼저 화해하고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때리거든 왼 편도 돌려대며
-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거든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며
-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을 닮는 것은 관계로 이루어집니다.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을 닮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악인에게도 불의한 자에게도 골고루 똑같이 해를 비취시고 비를 내리시는 속없는 하나님,
할 줄 아는 게 사랑밖에 없어서 사랑밖에는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원수에게 찾아오셔서 원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사 생명을 주신 예수님
그 하나님을 닮기 위해, 그 예수님을 닮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축복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누리도록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만 이러한 축복을 회복할 게 아니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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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보다 귀한 사랑 
                 최송연    

당신을 사랑하는
그 마음 하나로
오늘까지 버틸 수 있었노라
당당히 말하지 말게 하소서

당신께 받은 사랑 너무 커
모진 세월마저도
진정 행복했었노라
눈물로 고백할 수 있게 하소서
당신 오시는 날 내어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눈물보다 귀한 사랑, 당신의 그 선홍빛 사랑 하나뿐이오니...
 
 
                                                  
눈물보다 귀한 사랑  
                최송연   

당신을 사랑하는
그 마음 하나로
오늘까지 버틸 수 있었노라
당당히 말하지 말게 하소서

당신께 받은 사랑 너무 커
모진 세월마저도
진정 행복했었노라
눈물로 고백할 수 있게 하소서

당신 오시는 날
내어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눈물보다 귀한 당신의 사랑,
그 선홍빛 사랑 하나뿐이오니...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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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행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행복은 별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욕심을 줄이고
      만족할 줄 아는 것,
      그게 행복입니다.

      세상이 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이 불행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재수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안 따라주는 운 탓도 아닙니다.

      욕심이 욕심 때문에 망하고
      불행해지는 겁니다.

      욕심 때문에
      행복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약 1:14)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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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콥트교도 참수 “바다를 피로 얼룩지게 할 것” … 이집트 “유혈복수 단행”

        
조선일보

ytn 방송화면 캡쳐


IS, 콥트교도 참수 “바다를 피로 얼룩지게 할 것” … 이집트 “유혈복수 단행”

'이슬람 국가(IS)'에 충성한다는 리비아의 괴한들이 이집트 콥트교도들을 집단 참수하는 영상을 공개해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이집트가 리비아 내 IS 거점을 공습했다.

이집트는 16일 이슬람 수니파 원리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리비아에서 납치한 이집트 콥트교도 21명을 참수하는 동영상을 공개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리비아 내 IS 거점을 공습했다. 이번 공습은 이집트 정부가 IS가 거점으로 삼은 리비아에 대한 최초의 군사작전이다.

이집트 군 당국은 이날 성명을 통해 "살인자에게 유혈 복수를 단행했다"고 밝혔다.

이어 “공습 작전을 수행한 전투기들이 무사히 귀환했다”며 “이집트 국민이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정부는 이들을 보호할 능력이 있다”고 전했다.

앞서 15일 IS는 리비아 내 이집트인 콥트교도 21명이 참수당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공개했다.

해당 영상에서 괴한들은 "모든 십자군(기독교 전사)들이여. 너희들이 우리 모두와 싸우려 한다면 너희들의 안전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너희들 모두와 싸울 것”이라며 “우리는 너희들이 오사마 빈 라덴 님을 수장한 바다를 너희들의 피로 얼룩지게 할 것을 알라 신에게 서약했다"고 말한 뒤 콥트교도들을 모두 참수했다.

IS 콥트교도 참수에 네티즌들은 "IS 콥트교도 참수, 사람 목숨 가지고 그렇게…" "IS 콥트교도 참수, 잔인하기 이루 말할 수 없네" "IS 콥트교도 참수, 이런 일이 왜 또…” 등의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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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기독교 수난시대'…IS, 시리아 기독교인 150명 납치

        
[CBS노컷뉴스 김구연 기자]

노컷뉴스

지난 15일 IS가 공개한 이집트 콥트교도 영상 (사진=유튜브영상 캡처)


이슬람 수니파 급진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이집트 콥트교도 21명을 참수한 데 이어 시리아 내 기독교인들을 집단으로 납치하면서 중동지역의 기독교인들이 큰 수난을 겪고 있다.

24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은 IS가 시리아 북동부 알-하사케주의 소도시 탈 타머 인근 마을을 습격해 150명의 아시리아 기독교인을 납치했다고 보도했다.

IS는 습격한 지역의 집과 교회를 불태워 3천 명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집을 잃고 피란길에 올랐다.

납치된 이들의 생사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미국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타임스는 이미 8명의 아시리아 기독교인이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IS가 습격한 지역은 19세기 전부터 아시리아 기독교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IS는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납치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있다. 다만, 24일 IS가 자체 운영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십자군' 수십 명을 붙잡았다"는 내용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십자군은 IS가 기독교인을 지칭하는 통상적인 표현이다.

앞서, IS는 지난 15일 이집트 콥트교도 21명을 리비아 트리폴리 인근 해안에서 참수한 영상을 공개했다.
kimgu@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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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곁에 늘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언제나 대기 상태에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이 나를 도와 주시려고 언제나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곧 소망은 나의 생명입니다.
      이 소망 없이 우리는 하루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가장 잘 알고 이해하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소망합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고통을 이해하실 수 있고
      어두운 앞길에 빛이 되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그리고 끝까지 나를 버리지 않는 사랑이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소망합니다.



 

 

지인에게서 받은 글입니다!^^

제17장
도박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

도박이 합법적이든 불법이든 전례없이 용인되고 있는 것이 한 현상이다. 도박이 널리 성행하고 있기 때문에 크리스찬은 이러한 활동에 대한 윤리적, 도덕적 의미를 결정하기 위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도박의 정의

도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활동을 모험이 따르는 다른 사업들과 같은 범주에 놓으려고 애쓴다. 그들은 농사, 보험 심지어 투자에 이르기까지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고 때로는 손해를 보기 때문에 도박이라고 설명한다. 이리하여 그들은 도박에 합법적인 사업과 같은 지위를 부여하기를 원한다.

스탈키(L. M. Starkey Jr.)는 다름과 같이 도움이 될만한 관찰을 하였다. “인생에서 사람이 믿음과 용기로 받아들어야 할 일상적인 모험이 있다. 이러한 일상적인 모험들은 운에 맡기는 게임에 있어서 모험과는 결코 같지 않다. 도박과 시간과 돈과 기술의 투자가 정당화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희망으로 된 인위적인 모험이다. 도박에 있어서 기회는 농부나, 증권투자가가 그의 정신과 돈과 육체적인 노력을 투자하는데 필요한 창조적인 노력과는 관계가 없다.”
도박을 합법적인 사업과 구분하기 위해서 도박에 필수적인 세가지 요소를 이해하려면 도움이 될 것이다.

①돈 혹은 상품으로 구성된 자극이 제공된다. ②그 상금은 주로 운에 따라서 얻어진다. ③주어진 운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돈이나 다른보수를 지불해야 한다.

도박은 주로 운과 도박자의 모험에 따라서 재물의 주인이 바뀌는 활동으로 이해된다. 창조적 노력, 유용한 기술 및 책임있는 투자는 필수요소가 아니다. 도박이 여러 형태로 존재하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도박의 유혹에 직면하기
때문에 책임있는 크리스찬은 그것의 적절한 모양에 관해서 여론을 형성해야 한다. 정부에 의한 도박의 합법화나 어느 종교단체에 의한 도박의 용납이 평가기준이 될 수는 없다. 크리스찬의 차세는 성경의 원리에 의해서 결정되어져야 한다.

도박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성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도박으로 크게 유혹받은 것 같지는 않다. 그 악습은 이스라엘이 이방국가에 의해서 통치 받았을 때만 나타났던 것 같다. 도박이 있었을 때 하나님은 그것에 대한 자신의 자세를 명백히 보여주셨다.
바벨론 포로시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박하는 사람들의 영향아래 있었다. 그 결과로 포로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연류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오직 나 여호와를 버리며 나의
성산을 잊고 갓에게 상을 베풀어 놓으며 므니에게 섞은 술을 가득히 붓는 너희여”(사64:11) 여기서 갓과 므니는 이상신들의 이름으로써 갓은 좋은 운수를 주는 신이고 므니는 나쁜 운수를 주는 신이었다. 제임스 모팻은 이사야 65:11을 다음
과 같이 번역하였다. “오직 영원하신 분을 버리며 그의 성산을 잊고 좋은 운수에게 상을 베풀어 놓으며 나쁜 운명에게 술을 붓는 너희여 내가 너희의 운명을 칼에 붙이리라.”

웰스(Wells)대학의 학장이었던 고 플럼트리(E. H. Plumptre)는 갓은 좋은 운수를 주는 큰 행운으로 예배 드려졌고, 므니는 보다 작은 행운으로서 예배드려졌다고 지적하였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대사 교수로 봉직했던 로우린슨(George
Rawlinson)은 므니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운명을 그들에게 나누어주는 지정된 신”이라고 지적하였다.

몇몇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죄받는 죄는 하나님보다 운수를 의지하는 것이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는 운수를 의지하는 것은 공존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말했다. 만일 사람들이 운수를 의지한다면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이사야는 도박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버린 자” 라고 묘사하였다.(사65:11)

성경적 원리

성경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도박은 피해야 할 악임을 지적하는 수많은 성경적인 원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할 때 그들은 도박이 악이라고 하는 원리를 존중할 것이다.

1. 도박은 책임있는 청지기직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되었다.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에게 맡겨진 모든 것에 대하여 적절하게 관리해야 하는 청지기 위치에 있다.

이러한 청지기직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 위한 첫 단계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신자는 자신이 자기의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고전6:19) 그는 은이나 금이 아니라 예수의 보배로운 피로 값을 주고 구속된 것이다.(벧전1:18,19) 마게도냐 교회는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을 때”(고후8:5) 개인적인 헌신의 귀중한 모범을 남겨 놓았다. 새명은 그것과 관련되는 모든 것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관리되어야 할 청지기직이다.

정직하게 자신을 하나님께 바친 사람들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청지기로써 관리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달란트의 비유는(마25:14-30) 착하고 충성된 종이 자기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주인이 기뻐하는대로 관리해야
함을 지적한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관리에 실패하였으며 그에 해당하는 결말을 겪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청지기직의 책임을 인정한다면 그들은 어떤 형태의 도박도 하나님이 주신 자원과 시간과 능력에 대한 적절한 관리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의 윤리조차도 자신에게 맡겨진 자원을 가지고 도박하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찬의 책임은 모든 다른 책임을 능가하기 때문에 크리스찬에게 있어서 도박은 잘못된 것이다. 도박은 청지기직의 원리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왕국 확장을 위해 사용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자신에 대한 퇴폐행위이다.

2. 도박은 다른 사람의 손해와 고통을 담보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도박의 속성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보기 때문에 한 사람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적인 이익은 극소수에게 돌아간다. 재정적인 손해는 보통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운 많은 사람이 입는다. 도박에 관련된 사람들은 보통 그 행정주들
(promotors)이 인격을 손상시키는 말로 부르는 것을 볼 때 그들의 격하된 신분을 알 수 있다. 재정적인 손해가 크든지 작든지 도박자는 기본적으로 잃은 자이며 도박장 경영자는 따는 사람이다.

도박으로 인하여 겪는 고통은 사랑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과 전격적으로 위배된다. 크리스찬은 사랑할 만한 사람분아니라 원수가지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이웃을 그들 자신들처럼 사랑해야 한다. 사랑의 원리는 크리스찬으로 하여금 주정부나 어느 단체가 인간의 약점에 근거하여 사회를 타락시키는 도박활동을 합법화하려는 노력에 대하여 반대하게 할 것이다.

켄터베리 대주교인 템플(William Temple)은 크리스찬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하고 있다.

“도박은 기독교 교회가 유지하고 확장하고자 하는 생명에 대한 견해에 도전한다. 도박이 단순한 운수를 추앙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질서를 부정하는 것이다. 돈을 되는대로 운수에 맡기는 것은 모든 소유물이 인간에게 위탁된 것이며 인간은 그것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산 믿음에 대한 교회의 주장을 무시하는 것이다. 탐욕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것은 근본적으로 예수와 신약 전체가 가르치는 이타주의에 반대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손해와 고통 가운데서 이득을 취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우리 주님이 주장하시는 이웃사랑과 정면으로 반되대는 것이다.

3. 도박은 성경의 노동윤리와 모순되기 때문에 잘못되었다.

전체 성경을 통하여 먹는 것에 관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구약은 우리에게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잠12:11)라고 상기시켜 준다.

신약성경에서도 같은 원리를 아주 힘있게 강조하고 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라고 썼다.(살후3:10) 성경은 생활의 필요를 위하여 사람이 일해야 할 것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불로소득과 일확천금의 사고방식에 대하여 경고한다.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

(잠28:20)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잠28:22) “망령되이 얻는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잠13:11) 하나님의 지혜로 사람은 타락하기 이전부터 에덴동산에서 일하게 되어있었다. (창2:15) 비록 죄의 결과로 노동의 성격이 변하기는 하였지만(창3:17,19), 일의
책임은 취소되지 않았다. 사람이 아무리 성경의 노동윤리를 회피하려고 노력하여도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급히 부를 축적하려고 하는지 혹은 상 위에 밥을 올려놓고자 하든지 간에 도박은 노동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과 모순된다.

4. 도박은 습관성이 되기 때문에 나쁘다.

도박은 다른 악과 같이 중독되는 경향이 있다. 술이나 마약 중독자의 경우처럼 도박에 중독된 자는 돈 뿐만이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 의미있는 모든 것을 걸 정도로 도박의 지배를 받는다 그들은 자신을 절재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는 성경의 가르침에 반대된다. 하나님의 말슴은 크리스찬이 가한 것 일지라도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고전6:12) 성령께서 거하는 사람은 온유 혹은 절제라는 특징을 갖는다.(갈5:23) 도박중독에 대하여 연구한 사람들은 도박 중독자에게 특징적인 여섯가지 증상이 있다고 동의하는 것 같다.

①그 활동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②그것은 가정을 포함한 모든 다른 흥미들을 방해할 정도로 광적이 된다. ③이전에 잃었던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능력 대신에 병적인 낙관주의가 마음을 차지한다. ④이기고 있는(따고 있는) 상태에서 그만 두는 능력이 없다. ⑤어느정도까지만 도박 하겠다는 처음의 결심에도 불구하고 도박 중독자는 변함없이 너무 많이 도박을 한다. ⑥그 활동은 아픔과 기쁨으로 구성된 즐길 수 있는 긴장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습관적으로 도박하는 사람은 도박 충동의 지배 아래 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종이 되기보다는 스스로 다룰 수 없는 욕망의 종이 되어 버린다. 바울은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롬6:16)고 하면서 그 상태를 묘사하였다. 중독증상의 악화 가능성 때문에 도박은 악이라고 보아야 한다.

도박에 대한 크리스찬의 책임

여러 가지의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비추어 볼 때 크리스찬은 도박에 대하여 중립적인 입장을 가질 수가 없다. 신자가 지나쳐서는 안되는 책임이 있다.

성경이 신자들에게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가르칠 때 그것은 틀림없이 도박을 막는 말씀이다. 사람들이 주님께 의지하기 보다는 운수를 의지할 때 하나님은 영광 받으실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고 가르치실 때 그것은 도박을 막고 있다. 한 습관이 청지기, 타인에 대한 고려 및 정직한 노동의 품위에 관한 하나님 말씀의 원리를 위반할 때 그것은 악이 아닌 다른 것
으로 고려할 여지는 전혀 없다.

성경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어떤 형태의 도박이든지 참여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의 소금으로서(마5:13) 그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 안에서 자선이나, 교회나, 주정부를 위한 모금일지라도 도박의 합법화를 저지하기 위하여 힘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 L. M. Starkey, Jr., Money, Mania, and Morals (Abingdon Press, 1964)
ⓑ Virgil W. Peterson, "Obstacles to Enforcement of Gambling Laws," The
Annals of the American Academy of Political and Social Science(May.
1950)
ⓒ William Temple, "Gambling and Ethics, "issued by The Churches"
Committee on Gambling, 215 Abbey House,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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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의 한 보호소에 앤(Ann)이란 소녀가 있었다. 앤의 엄마는 죽었고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아빠로 인한 마음의 상처에다 보호소에 함께 온 동생마저 죽자 앤은 충격으로 미쳤고 실명까지 했다.

앤은 수시로 자살을 시도하고 괴성을 질렀다. 결국 앤은 회복 불능 판정을 받고 정신병동 지하 독방에 수용되었다. 모두 치료를 포기했을 때 노(老)간호사인 로라(Laura)가 앤을 돌보겠다고 자청했다. 로라는 정신과 치료보다는 그냥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래서 날마다 과자를 들고 가서 책을 읽어주고 기도해 주었다.

그렇게 한결같이 사랑을 쏟았지만 앤은 담벼락처럼 아무 말도 없었고, 앤을 위해 가져다 준 특별한 음식도 먹지 않았다. 어느 날, 로라는 앤 앞에 놓아준 초콜릿 접시에서 초콜릿이 하나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용기를 얻고 로라는 계속 책을 읽어주고 기도해 주었다.

앤은 독방 창살을 통해 조금씩 반응을 보이며 가끔 정신이 돌아온 사람처럼 얘기했고, 그 얘기의 빈도수도 많아졌다. 마침내 2년 만에 앤은 정상인 판정을 받아 파킨스 시각장애아 학교에 입학했고,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심으로 밝은 웃음을 찾았다. 그 후, 로라가 죽는 시련도 겪었지만 앤은 로라가 남겨준 희망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으로 시련을 이겨내고 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졸업했고 한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 수술에도 성공했다.

수술 후 어느 날, 앤은 신문기사를 봤다. "보지못하고, 듣지 못하고,말하지 못하는 아이를 돌볼 사람 구함!" 앤은 그 아이에게 자신이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로 결심했다. 사람들은 못 가르친다고 했지만 앤은 말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요."결국 사랑으로 그 아이를 20세기 최대 기적의 주인공으로 키워냈다.

sullivan.jpg 그 아이가 ' 헬렌 켈러 '이고, 그 선생님이 앤 설리번(Ann Sullivan) 이다.

로라는 앤과 함께 있어주고 앤의 고통을 공감하면서 앤을 정상인으로 만들어냈고, 앤도 헬렌과 48년 동안 함께 있어주었다. 헬렌이 하버드 대학에 다닐 때는 헬렌과 모든 수업에 함께 하면서 그녀의 손에 강의내용을 적어주었다. 헬렌은 말한다.

"항상 사랑과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준 앤 설리번 선생님이 없었으면 저도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제가 볼 수 있다면 제일 먼저 설리번 선생님을 보고 싶어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상처에 대한 적절한 분석과 충고가 아니라 그냥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한 마음은 충고를 주기보다 자신을 줄 때 아뭅니다. 좋은 충고보다 좋은 소식이 중요합니다.

헬렌켈러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으나 그녀의 스승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삼중고를 안고있는 헬렌켈러를 전세계가 놀라게한인물로 만든 사람이 바로 앤 설리반 (ANN SULLIVAN)이다.

헬렌켈러를 가르칠수있는 방법은 감각기관 뿐이었다. 헬렌켈러는 손가락으로 상징적인 터치를 통하여 말하는법을 배우고 열심히 공부하여박사도 되고 영감을 주는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앤 설리반은 늘 되풀이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시작하고 실패하는것을! 계속하라. 실패할때마다 무엇인가 성취할것이다. 네가 원하는것을 성취하지 못할지라도 무엇인가 가치있는것을 얻게되리라. 시작하고 실패하는것을 계속하라.



 


워렌 버핏의 돈버는 비결 10가지

 

620억 달라 상당의 재산을 소유한 것으로 알려진 워렌 버펫은 세계 제1의 부자로 꼽히고 있다. 1962년 처음으로 주식당 7.50 달러에 벌크샤이어 하다웨이(Berkshire Hathaway)의 주식을 사기 시작한 그는 현재 그 회사의 회장과 최고 경영자로 그 회사의 A급 주식 한 주의 가치가 11만 9천 달라라고 한다. 성공의 비결을 최근 알리스 슈레더(Alice Schroeder)가 집필한 그의 전기 <The Snowball>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미국 자본주의의 한 단면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이달의 특집기사의 하나로 소개한다.

 

첫째 이익은 재투자하라: 처음 돈을 벌게 되면 쓰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유혹에 빠지지 말고 이익을 재 투자하도록 하라. 버펫은 일찌감치 이 원리를 터득하였다. 고등학생 때 친구와 같이 핀볼머신을 사서 이발소에 설치하였었는데 거기에서 나오는 돈으로 재투자하여 동네의 여러 가게에 여덟 대의 머신을 설치할 수 있었다. 친구가 사업을 팔려고 하자 그는 그것을 인수하여 계속하해서 주식도 사고 작은 비즈니스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26살에 이미 17만 4천 달러를 모았는데 요즈음의 화폐가치로는 140만 달러에 달하는 액수이다. 작은 것도 모으면 큰 돈이 될 수 있다.

 

둘째 다른 방법을 선호하라. 다른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기준에 맞추어서 결정을 하지 말라. 버펫이 1956년 투자자들로부터 10만 달러를 모아 자금관리를 시작했을 때 그는 괘 짜란 소리를 들었다. 그는 월 스트리트에서 일하지 않고 오마하에서 일했다 그리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돈을 어디에 투자하고 있는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틀림없이 그가 실패하리라고 생각하였으나 14년 후 결산할 때 가치가 1억 달라 이상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는 다수가 가는 길을 따르는 대신 낮게 평가된 투자처를 찾아 다녔고 그 결과는 해마다 시장의 평균치를 웃도는 수익을 내었다. 버펫에게 평균치란 누구나 낼 소 있는 수익을 말한다. 평균을 넘기 위해서는 세상이 말하는 기준이 아니라 나 자신의 기준에 따라 평가하는 자신만의 계산법이 필요하다.

 

셋째 손가락을 빨지 말라. 어떤 결정을 할 때 필요한 모든 정보들을 수집하고 친구나 ?친척들에게 알아 보고 시한을 반드시 지켜라.? 버핏은 자신이 빨리 결정 내리고 행동한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는 쓸 대 없이 앉아서 생각하는 것을 “손가락을 빤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그에게 비즈니스나 투자에 관한 제안을 하면 그는 “가격을 제시하지 않으면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고 대응한다. 그리고 그는 즉석에서 대답을 제시한다.

 

넷째 일을 시작하기 전에 거래내용을 구체적으로 분명히 하라. 항상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는 흥정이 최상의 상태의 흥정이다. 그것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네가 줄 수 있을 때이다. 버펫은 어렸을 때 힘든 경험을 통해 이것을 배웠다. 그의 할아버지 어네스트가 눈보라가 휩쓸고 간 다음날 그와 그의 친구에게 가족들이 경영하던 식품점 주위의 눈을 치우도록 일을 맡겼다. 둘은 혹독한 추위 속에서 5시간을 힘들게 일하여 겨우 눈을 치울 수 있었다. 일이 끝났을 때 할아버지는 90센트를 주면서 나누어 가지라고 하였다. 그는 뼈빠지게 일한 대가가 시간당 10전도 안 된다는데 몹시 화가 났다. 그는 언제나 미리 ?상대가 친구나 친척이라 할지라도- 거래에 대한 것을 분명하게 명시하였다.

 

다섯째 사소한 경비라도 조심하라. 버펫은 사소한 경비에도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쓰는 매네저들이 운영하는 비즈니스에 투자한다. 한번은 어떤 회사의 주인이 500개 들이 화장지 통을 과연 그 숫자가 다 들었는지 확인하는 것을 보고 그 회사의 주식을 매입한적도 있다. 그는 또 자기 사무실의 벽을 페인트 하면서 길거리에 면한 부분만 칠한 친구를 존경하기도 하였다. 모든 경비를 잘 감시함으로 이윤을 극대화 할 수 있다.

 

여섯째 가급적 빚을 지지 말라. 크레딧 카드나 대출 받아 살면서 부자가 될 수는 없다. 버펫은 투자를 하거나 집을 사기 위해서도 돈을 빌린 적이 거의 없다. 그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돈을 빌렸는데 빚에 망했다는 사연들을 賈コ?많이 접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는 그의 권고는 채권자와 협상을 통해 가능한 한도 안에서 갚도록 하고 다 갚았을 때에는 조금이라도 저축을 시작하여 투자하라는 것이다.

 

일곱째는 꾸준히 하라. 집요함과 독창성으로 보다 확고하게 자리잡은 경쟁자들을 이길 수 있다. 버펫은 1983년 Nebraska Furniture Mart를 인수하였는데 그 회사의 창업자인 로즈 브럼킨(Rose Blumkin)의 비지니스 방식을 좋아해서였다. 러시아 계 이민자인 그 녀는 전당포에서 시작해서 북 아메리카에서는 가장 큰 가구점을 이루었다.? 그녀의 전략은 다른데 보다 아주 싸게 파는 것인데 물건을 살 때에는 아주 지독한 흥정가였다. 버펫에게 로즈는 약자에서 승자로 바꾸는 부단한 용기의 화신이었다.

 

여덟번째 언제 그만 둘지를 알아야 한다. 버펫은 10대 때 경마장에 간 적이 있었다. 그는 경마에 돈을 걸었으나 잃어버리고 말았다. 잃은 것을 따볼까 하여 그는 다음 경기에 다시 돈을 걸었다. 이번에도 지자 그는 거의 빈털터리로 집에 돌아 왔다. 그는 거의 한 주간의 수입을 다 잃어버렸으므로 기분이 몹시 상했다. 버펫은 이러한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았다. 돈을 잃을 때는 언제 손을 털고 나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며 초조함 때문에 다시 한번 더해야지 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

 

아홉째 모험을 잘 평가하라. 1955년에 버핏의 아들 하우이(Howie)의 고용주가 가격담합 혐의로 FBI의 조사를 받았다. 버핏은 하우이에게 그 회사에 그대로 있을려면 최악의 경우와 최선의 경우를 다 같이 상상해 보라고 조언하였다. 그의 아들은 그곳에 그냥 있을 때 모험의 확율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깨닫고 그 다음날 당장 그만두었다.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 고심할 때 자신에게 “그러면 무엇을?”하고 묻는다면 가능한 결과들을 모두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보다 현명한 선택을 하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열번째 진정한 성공이 무엇인지를 알라. 그의 막대한 부(富)에도 불구하고 버핏은 성공을 돈으로 계산하지 않는다. 2006년 그는 전 재산을 자선사업을 위하여 주로 빌 과 메린다 게이트 자선재단에 희사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는 자신을 기리는 재단을 만드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으며 심지어 워렌 버핏 이름이 붙은 건물을 짓는 것도 반대한다. “돈이 많은 사람들 중에 그들을 기리는 만찬모임을 주선하거나 그들의 이름을 딴 병동들을 지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다고 세상사람들이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내 나이가 되면 나를 사랑해 주었으면 하는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느냐에 따라 내 삶의 성공여부가 평가되는 것이다. 그것만이 당신이 어떻게 당신의 삶을 살았느냐를 보여주는 궁극적인 시금석이다.”고 말한다.

 

(PARADE 2008년 9월 7일자에서)

 



갚을 수 없는 빚


오래전 미국의 보스톤

시에 스트로사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꿈을 이루는

데 필요한 돈이 없어서,

 

거부인 바턴씨를

찾아가서 2천불을 꾸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자기에게 담보는 없지만

일에 대한 꿈과 용기가

있으니 믿고 대여해 주시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노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바턴씨의 주위 사람들은

경력도 없는 그에게

담보나 후원자도 없이

돈을 꾸어 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만류

했습니다.그러나 바턴씨는

 

그 청년의 용기가 마음에

들어 모험을 걸고

2천불을 주었습니다.

 

과연 스트로사는 얼마

되지 않아 그 돈을

갚았습니다. 이 일이

있는 지 10년이 지났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대

경제공황이 일어나

바턴씨는 완전히 파산이  

될 지경에 이르 렀습니다.

 

소문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트로사는

바턴씨를 찾아가

 

" 당신이 빚진 돈

7만 5천불을 내가

대신 갚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바턴씨는 깜짝 놀라

" 네가 가져갔던 돈은

 

이미 갚았는데 무슨 소리요?"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이에 대한 스트로사의

대답은 멋진 것이었습니다.

 

" 분명히 빚진 돈 2천불은

옛날에 갚았지만 당신이

베풀어 준 은덕은 평생

갚지를 못 합니다.

 

그때에 2천불로 장사를

해서 오늘 이렇게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돈으로 갚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은덕과 사랑은 영원이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좋은 글 중에서 -




사도행전 2장 42절에 대한 설교에서 로이드 존스는 강조하기를 ‘그리스도인들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간다. 이것들은 기도에 대하여 성경에서 언급된 표현들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감”, “하나님께 나아감”, “그의 존전에 들어감”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는 이유이며,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갈망하는 바로 그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1750~1850년 어간의 웨일즈 장로교 설교자들이 한 기도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그들은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또한 그의 회중들에게 기도할 것을 격려하였다.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도하지 않는 칼빈주의자는 진정한 칼빈주의자가 아니다!

 

그 이유는?

 

1) 하나님 한 분만이 죄인에게 새 삶을 주시며, 하나님만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2) 오직 하나님만이 말씀을 축복하사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누어 주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은 모든 것 위에 절대 군림하시지만 말씀, 설교, 기도, 경건과 같은 수단을 사용하시어 그의 목적을 성취하시기도 하시기 때문이다.

로이드 존스가 제시한 실례들

 

① 웨일스 부흥(1736-1790)에서 다니엘 롤란드(Daniel Rowlands) : 설교하기 이전에 많은 시간을 기도하였다.
② 존 엘리아스(John Elias)는 그 자신의 설교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하여 몇 날이던지 몇 주이던지 계속 기도하였다.
③ 존 웰쉬(John Welsh)는 스코틀란드 종교개혁자인 존 낙스의 사위로서 기도하면서 여러 날 밤을 지샜던 것으로 유명했다.

 

로이드 존스 그 자신도 또한 기도의 사람이었으며, 이 사실을 그의 부인이 증명하고 있다.

 

개혁주의마을/아나니아 

 

 

지인에게서 받은 것임.^^

빛이 있으라

 

빛이 무엇일까요?
빛은 파동일까요, 입자일까요?
빛이 파동이라면 수많은 빛들이 충돌과 간섭을 일으켜 엉망이 될 것이고
빛이 입자라면 입자의 수에는 제한이 있을 테니 어디에서나 보이고 아무리 멀어도 보일 턱이 없겠지요.
그래서 빛이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다 가졌다 하여 "Duality"로 정의를 합니다.
그러나 "Duality"라는 정의로 빛의 정체를 밝힐 수는 없습니다.
과학자들도 빛을 무엇이라고 정의하지 못 합니다.

모든 것을 밝히고 모든 것을 드러내는 빛,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직진하는 빛.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따라 질량이 무한대로 치솟아 물질세계의 어떠한 것도 넘을 수 없는 벽,
가시광선, 400 옹스트롬으로부터 750 옹스트롬 사이의 파장대에서 무지개 일곱색깔의 영롱한 빛을 발하는...  
빛은 신비입니다.
피조세계의 어떤 것도 범접할 수 없고 넘을 수 없는 성역입니다.

아무튼 그 빛이 왜 있을까요?
빛이 있어야 우주의 천체들이 운행하고 빛이 없으면 별들이 "아, 어두워. 보여야 가지." 하고 멈추나요?
태양이나 달이나 별들, 우주의 모든 천체에게는 빛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빛은 그것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광활한 우주가 있으면 뭣 하겠습니까?
그것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존재, 곧 생명체가 없다면 우주 또한 아무 존재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존재는 그 존재를 의식하는 주체가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빛이 있다는 사실은 우주만유가 의식을 가진 생명체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겁니다.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광활한 우주공간에 하나님 혼자 계시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누가 하나님이라고 인정해주는 존재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리 위대한 창조사역을 하시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홀로 지으시고 하나님 홀로 보신다면 얼마나 따분한 일이겠습니까?
함께 나누고 함께 누리는 이가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찬송케 하기 위하여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 우리 인간의 존재의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 그 분의 하신 위대한 일들을 찬양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그래서 하나님은 빛부터 만드셨을 것입니다.
빛이 있음으로 인하여 모든 피조세계가 드러나고 나타나며, 창조주이든 피조물이든 서로의 존재의미가 부여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우주만유를 우리와 함께 바라보며 나누기 위한 것일 겁니다.
“우와,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걸 다 만드셨어요? 굉장하다, 멋지다. 우리 하나님 최고다!” 우리의 이런 감탄에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빛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창조사역일 것입니다.

빛을 지으신 하나님은 빛을 기뻐하시고, 그리고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습니다.
창세기 1장을 보니 하나님은 나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계속 나누어 가시며 나누신 다음 창조사역을 행하십니다.
왜 굳이 나누시는 것일까요?

좋은 것을 나쁜 것과 함께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더러운 것과 함께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로지 빛 가운데서만 창조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베소서 1장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창조와 구원의 사역을 행하십니다.
어둠 가운데서는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공허하고 혼돈한 상태에서는, 혼합되고 뒤섞인 상태에서는 창조의 사역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셨습니다.
이 세상에 택하신 자로 불러내어 교회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어둠 가운데서 불러내셔서 빛 가운데로 인도하셔서 예수 안에서 새로운 일을 행하시려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빛 가운데 나오셨습니까?
빛 가운데 행하고 계십니까?
빛 되신 예수 안에 속해 계십니까?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알지 못 하던 때, 그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던 절망 가운데 있었던 심령 가운데 하나님의 창조사역이 아름답게 시작될 것입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답게 지어져가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당신께 임하기 원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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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은 하나님 앞에 서있는가? / 박신 목사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기독교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것이 진실인양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컨대 본문과 연결해도 하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것이 맞으려면 가난하고 소외되었다는 것이 복을 받는 전제가 되기에 하나님도 차별하는 분이 됩니다. 돈 많고 권세 있다고 해서 복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께 역차별을 받는 셈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오해하는 이유는 우선 사람들의 기대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중요한 이유가 자기 능력에 한계가 있는데 반해 힘든 일이 많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간절히 기도하면 고난을 해결 받는 경우가 자주 있기에 하나님은 당연히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더 좋아한다고 섣부른 결론을 내리고 아예 그런 기대까지 품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명제가 진리가 되려면 백이면 백 그렇게 입증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항상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이 하나님께 복을 받는 근거는 빈곤과 소외가 아니라 자신의 무능함과 어리석음과 더러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겸비한 마음으로 그 분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실제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사이에 그런 일이 많이 이뤄지니 마치 그것이 진실인양 여겨지는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이 지상 사역 동안에 주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보살폈기에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그들에게 현실적 복을 더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모든 인간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려는 목적이었는데 또 다시 말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자들이 자신이 죄인임을 쉽게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복을 더 주는 것이 진실이 되려면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구원 후에 세상에서도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가 되었지 않습니까? 본문의 결론도 “이는 모든 가난하고 소외된 자에게 복을 더 주시려 하심이라”고 말하지 않고,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
자랑이란 반드시 자기 능력으로 성취한 것이 남이 한 것보다 우월할 때에 하는 법입니다. 단지 자기가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재벌 회장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최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니면서 자랑한다면 바보입니다. 자기가 하지 않은 일을 두고 자랑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자랑은 소유, 자질, 권세의 많음보다는 그것을 이뤄낸 주체의 형편에 달렸습니다. 예컨대 걷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어 아무 자랑거리가 안 돼지만 돌을 몇 달이나 앞둔 아기가 그러면 사정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은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두고 인간이 자랑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반대로 자랑할 수 있다면 그 이유도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빤한 이치를 왜 다시 언급해야만 하는가 하면 교회 안의 약한 자로 세상의 강한 자보다 더 강하게 만들어 자랑할 수 있게 해주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신자의 강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그분만이 신자의 자랑의 이유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두에 밝힌 대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로 부하고 권세 있게 만들어 세상에서 큰소리치게 만들어주는 것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신자가 세상의 형편이 어떠하든 거룩하고 신령한 자로 바꿔주는 분입니다.

세상에서 미련한 것이나 지혜 있는 것이나, 약한 것이나 강한 것이나, 천한 것이나 귀한 것이나, 멸시 받는 것이나 멸시하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있는 것 모두가 하나님이 주셨거나 허락한 것입니다. 나아가 그런 것은 세상 사람들끼리의 평가, 그것도 상대적 일시적 비교일 뿐이지 “하나님 앞에”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것으로 세상 사람은 몰라도 신자가 자랑하거나 부끄러워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준거를 세상 사람의 잣대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로 바꾸었다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진리만 따르기에 세상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든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겠다는, 아니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비록 사람들 사이에선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 받고, 없어 보이는 것 같아도 그것 자체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인데도 세상에 자랑할 수 있게끔 하나님께 그것을 바꾸어 달라고 요구한다면 신자로서 엄청난 자가당착이지 않습니까? 신자와 불신자는 이미 그 인생의 평가 기준이 완전히 정반대로 나뉘어졌기에 서로 경쟁하고 비교해서 자랑할 사이가 아예 아닙니다.

나아가 본문의 근본 주제는 전도를 통해 이뤄지는 구원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구원 받는데 있어서 세상에서의 지혜와 문벌이 아무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반대도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음도 마찬가지이지만 자신이 세상에서 지혜롭고 강하고 귀하고 풍족하다고 느끼는 자는 자연히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자들이 부끄러워지는 이유도 자기들의 소유, 신분, 능력만 믿고 하나님과 아무 관계없는 삶을 살았던 것이 너무나 허망하고 실패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세상이 주지 못하는 자유와 평강과 위로가 넘쳐서 그 인생이 거룩하고 의롭게 변하기 때문에 죄악과 사단에 묶여 있는 그들로선 부러워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택하시고 이루시고 또 변화시키는 그분의 사역입니다. 구원 받은 자는 혹시라도 구원에 자기 쪽의 원인과 조건이 있었다고 여겨서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자랑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모든 신자가 인생의 지표로 삼아야 할 유일한 기준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확고한 인식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진정으로 소망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힘을 빌려 세상에 자랑거리로 삼을 것들을 쌓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어떻게 쓰임 받을 것인가 뿐입니다. 이제는 세상에 자랑하는 인생을 살지 않고 오직 그분의 마음에 합당하도록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신자는 더 이상 인간 세상의 경계선 안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무한하며 거룩한 영역 안으로 이미 옮겨진 자입니다. 신자 자신의 능력이나 자질이 높아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고 의로우신 능력이 신자를 통해 얼마든지 세상으로 전해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인간들 사이에 멸시 받는 신자라도 오히려 그들로 부끄럽게 만들 만큼 거룩하고 신령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그분의 마음에 합하도록 서있기만 하면, 아니 더 이상 인생으로 자랑하지 않겠다는 자세로 그분 앞에 엎드리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으면 됩니다. 여러분 인생의 자랑거리는 무엇입니까? 혹은 무엇을 자랑하려고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다른 말로 세상에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고자 소원합니까? 자신을 살찌우기를 간구합니까?

7/6/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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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날,  어머니 가슴에 꽂아드리는

카네이션 꽃(Carnation)의 종명은

 dianthus Caryophyllus 으로

서남 아시아와 아라비아 반도를 포함한

 근동지방이 원산지라고 한다

2000년전에 이미 존재했던 꽃으로 원래의 꽃 색깔은

빨강색이었는데 재배업자들이

품종을 개량하여 흰색, 노랑색, 분홍색, 초록색이

 출현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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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학자들은 Carnation의 어원이

 옛 그리스의 예식용 화관에

사용되는 꽃 중 하나여서 

대관식(Coronation), 

 또는 화환(Flower Garlands)을 뜻하는

Corone 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또 다른 학자는 라틴어로Cramis (Flesh)

Incarnation(성육신) 을 의미한다고도 하고

옛 로마에서는 로마 최고의 신이며

 하늘의 지배자로 여겼던

쥬피터의 꽃(Jove"Flower)으 로 알려져있다

 

카네이션은 1974년 포르투갈 혁명(Carnation Revolution)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체제 전복을 꾀한 혁명군들이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표시로

총에다 카네이숀 꽃을 달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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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이션꽃은 사랑,  매혹,  고귀함을 뜻하며

특히

연한 빨강색 카네이션은 찬미를

진한 빨강색은 심오한 사랑과 애정을

흰색 카네이션은 순수한 사랑과  행운을

줄무늬 카네이션은 사랑을 나눌 수 없는 슬픔을

자주색 카네이션은 변덕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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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onna  with the Carnation,   레오나르드 다빈치 작 

 

카네이션의 여러가지 색깔 중에 분홍빛 카네이션은 

특별히 상징적이며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는데

기독교의 전설에 의하면 2000년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지상에 출현하였다고 한다

즉  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목격한 성모 마리아가 눈물을 흘리자

그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피어난 꽃이 카네이션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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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문에 카네이션은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불멸의 사랑의 상징이 되었고

1907년부터 어머니날의 표상(Emblem)으로 채택되어

5월 8을 지키는 우리와 달리

미국과 카나다에서는 5월 둘째 일요일을

어머니날(Mother's Day)로 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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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도 카네이션에 관한 전설이 있었다

어린 소녀의 머리에 세송이의 카네이션을 꽂아

 점을 보는 것인데

제일 위의 꽃이 먼저 죽으면

소녀는 불행한 말년을 보내며

중간의 꽃이 제일 먼저 죽으면

소녀는 초년에 슬픈 일을 당할 것이며

맨 아래 꽃이 제일 먼저 죽으면

소녀는 비참한 일생을 보내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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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 날 보통  위의 모양으로

 카네이션 꽃을 달아드리는데

 (어머니가 살아계신 분에게는 붉은 꽃을, 

 어머니가 돌아가신 분은 흰색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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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청년들이여 !!!

애인과 만난 날을 기념하는 의미로

만난 날짜 수에 맞추어 백날이면 백송이,

  이백날이면 이백 송이의 장미꽃을 

애인의 품에 안겨준다고 하는데........

 

이번 어버이 날에는 카네이션 한송이만을 사서

불쑥 어머니에게 내어드리지 말고 

 애인에게 하듯 어머님 연세대로

카네이션꽃을 사서(위의 사진같은 꽃다발)

어린 시절 수없이 찾아들던

어머니의 그 따뜻한 가슴에 듬뿍 안겨드리고

어머니에게 단 한 순간이나마

자식 둔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선사해드립시다





마틴 로이드 존스-산상수훈(기도하는 태도(마 6:5-8))

 

서론 : 본문은 경건 혹은 신앙생활의 윤리에 대한 두번째 가르침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빠지기 쉬운 잘못은 본문이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점이다.

 

그러나 본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죄의 교묘한 점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한다.

죄란 우리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심지어 하나님 나라에까지 들어오려고 한다.

죄의 출발점을 생각해보라.

 

그것은 시궁창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에서 출발하였다.

죄는 단순한 어떤 행동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안에 자리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죄의 극치는 술자리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의 자리, 경건의 자리에서 더 드러난다.

 

사단의 모습은 바로 예수님이 40일 금식기도하는 순간에 드러내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고, 기도한다고 마음을 놓을 문제가 아니다.

그런면에서 주님은 우리의 기도하는 태도를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1. 잘못된 기도의 문제점

 

1.1 잘못된 기도는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눅18:9-14,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 그는 자신이 지금 기도하고 있다는 그것에 강조를 한다.

 

 

1.2 두 번째 잘못은 자신의 기도를 다른 사람이 봐주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금식기도를 많이 하는지, 철야기도를 하는지를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바리새인의 문제점은 성전에서 기도하고자 나왔는데 너무나 마음에 기도하고픈 마음이 있어서 기다릴 수 없어 길 어귀에서 먼저 하나님을 부르짖고 나아가 성전에서 기도하였다.

 

 

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열심있고 헌신된 신자인지를 보이려고 한다. 우리들도 그러한 문제가 없는가? 골방에서 얼마나 오래 기도하였는지 - 기도굴에서 얼마나 오래 버티고 나오지 않는지를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 한 적은 없는가? 기도시간을 정해 놓고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한 적은 없는가? 좋은 것이지만 그 가운데 우리가 혹여나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적이 없느냐 하는 말이다.

 

 

1.3 기도는 아름다워야 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기도를 미사여구, 훌륭한 문장으로 하려고 한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한다면 굳이 말을 꾸미려고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2. 참된 기도의 방법

 

2.1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남을 의식하는 것이다. 골방에서 기도하라는 말은 바로 그 말이다. 동시에 자기를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했다고 정말 골방만 찾는 사람이 있다. 아니다. 꼭 골방이 아니라 할지라도 당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 그 순간 그곳이 어디든 골방이 될 것이다. 설령 공중기도를 드리는 중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2.2 어디서 기도하든지 기도의 중요한 것은 지금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시편기자는 일심으로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시86:11-12). 이것이 기도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문제이다.

2.3 우리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아들로서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기도는 정기적으로 반복하여 말하므로 듣는다고 생각하지 마라. 기도는 아들과 같은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더욱 더 중요하다.

 

 

 개혁주의마을/아나니아

방언이 없다고? “성경과 교회사를 보라, 지금도 있다”
김동수 교수 북콘서트 ‘방언, 성령의 은사’

2015/05/07 (목) 13:42 ㆍ추천: 0      

방언은 일부 교회에선 여전히 신앙성숙의 척도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방언은 이미 중지된 은사(은사중지론)일 뿐이다. ‘방언’을 바라보는 시각이 성도마다 천차만별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크리스천에게 ‘방언’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지난 2일 국성연에서 김동수 교수의 '방언, 성령의 은사' 출간 기념 북콘서트가 열렸다.ⓒ뉴스미션

못 받았다면 받도록 사모해야 하는 것이 맞을까, 받았다면 가짜가 아닌지 의심해야 하는 것이 맞을까. 방언에 대해 무엇이 진실이고 오해인지 성도들을 혼미케 하는 상황에서 신약성경과 교회사적 측면, 그리고 신학적 측면에서 방언을 검증한 책이 출간됐다. 평택대학교 김동수 교수의 ‘방언, 성령의 은사-성경과 교회 역사에 나타난 방언’(킹덤북스)이다.

김 교수의 방언 관련 저서는 이번이 세 번째다.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이레서원 2008), ‘신약이 말하는 방언’(킹덤북스 2009) 집필을 통해 신앙적 측면과 신학적 측면의 방언을 다룬 바 있다. 이번 저서는 방언 신학과 교회사에 나타난 방언, 그리고 방언중지론에 대해 담았다. 그리고 실천적 측면에서 방언이 신앙생활에 매우 유용하며 성경의 원리대로 사모하면 방언을 체험할 수 있다는 내용까지 담겨 있다.

김동수 교수는 한국교회에서 방언 논쟁을 네 가지 입장으로 정리했다. ▲방언중지설: 방언은 중지됐기 때문에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방언 적극 지지설: 방언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고 지금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방언 소극적 인정설: 방언은 지금도 유용하지만 방언 체험 유무는 성령에 의한 것이므로 신자는 개의치 말아야 한다 ▲평화주의자: 논쟁은 좋지 못하며 이 문제로 다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동수 교수는 방언 적극 지지의 입장에서 신학자로서 방언이 충분히 연구 가치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에 관해 연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국내에서 방언 연구가 충분하지 않은 것에 저서를 통해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책에서 김 교수는 방언이 지금까지 학자들과 신자들이 흔히 생각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신학적 주제임을 다뤘다.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 국제성령신학연구원 사무실에서 열린 ‘방언, 성령의 은사’ 북콘서트에서는 신학자, 목회자, 성도 등 방언에 관심 있는 청중들이 모여 김동수 교수의 ‘방언’에 대한 연구 결과와 실제적인 이야기들을 나눴다. 북콘서트에서 사회를 맡은 성서대학교 이민규 교수와 저자 김동수 교수 사이에 오간 질의응답을 인터뷰 형식으로 엮어 소개한다.

- 방언에 차별이 있던데, 남자들보다는 여자가, 강남보다 강북이, 유럽보다 아프리카에서 방언을 더 잘 받더라. 심지어 진보보다는 보수에 속하는 쪽에서 방언이 많이 나타난다는 연구결과도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나?

계몽주의와 현대주의 사고 안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몸을 쓰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다. 몸이 컨트롤 안 된다는 것에 대해 불편을 느끼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 기도 방식에는 묵상 기도가 많고 방언 기도가 없다. 배운 사람들이 오히려 방언을 덜 받는 것 같다. 계몽주의적 은사중지론, 세대주의적 은사중지론 사상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영향을 받는 거 같다. 이미 정신 속에 들어간 사상이 있으면 방언을 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인 것 같다. 한 사회학자는 1970-80년대에 낸 책에 보면 방언은 못 배우고 못 사는 사람들이 주로 하고, 배우고 잘난 사람들은 안 한다는 사회학적 측면에서 방언을 설명하기도 했다. 평균적으로는 낮은 사회 부류에서 방언을 많이 받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영원불변의 법칙인 것은 아니다. 최근 온누리교회 같이 사회적으로 중산층 이상에 있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방언을 많이 한다는 것이 이것을 방증한다.
그래서 방언을 체험하는데 있어서 사회적 위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방언에 대한 태도인 것 같다. 담임 목사가 방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말하는 교회에서는 부정적으로 말하는 교회에서보다 방언 체험이 더 많다.

- 방언해도 사람이 성숙해 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인격이 변하지 않고. 특히나 방언하는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던데, 어떤 입장으로 설명 가능할까?

이 세상에 방언이 아니라 3층천을 갔다 와도 사람이 안 변한다.(웃음) 사람이 어떤 경우에도 인격 자체가 완전히 변해 천사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표현이라는 게 노동자 분들(워킹클래스)는 마음보다 말이 거칠다. 배운 사람들은 마음보다 말이 훨씬 더 부드럽다. 배운 사람들이 마음보다 말을 부드럽게 말하는 것을 배우는 거다. 매너 없이 표현하는 걸 성숙하지 못한 것으로 흔히 생각하는데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관점으로 보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셨기에 거친 사람들의 마음이 더 깨끗하다고 본 경우가 많다. 방언이 신앙성숙에 이바지 하지만 방언을 비롯한 어떤 신앙 체험도 사람을 하루아침에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방향성이 분명하다면 개인적으로는 영적 체험이 강할 때 인격이 꾸준하게 변하는 것을 느끼게 되긴 하더라. 통역에 대해 질문해 보겠다. 방언을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전하는 통역도 중요하다. 방언은 강조되는데 반해 왜 통역은 약할까? 어떻게 균형을 잡아갈 수 있나?

현상으로 통역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방언 천명이면 통역 한명 있을까 말까다. 방언은 성령충만한 상태에서 입술만 맡기면 쉽게 터진다. 하지만 방언 통역은 임해도 막상 하기가 두려울 거 같다. 그래서 통역이 많지 많다. 또 통역을 하려면 통역의 장이 있어야 한다. 고린도교회 예배 시에는 찬송시도 있고, 계시도 있고 방언도 있었다(고전 14:26). 은사집회 같은 형식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교회의 예배가 포멀화(formal) 됐다. 우리나라는 오순절 교회도 똑같다. 주일 낮 예배는 장로교식 예배고, 금요철야예배는 순복음식 예배다. 금요철야예배라도 은사집회가 있으면 좋은데 장이 없고, 모델이 없었다. 토레이 신부님이 원장으로 있던 예수원에는 그런 것들이 좀 있었다. 방언 통역이 임했을 때 해보고 검증도 받아보고 이런 게 있었다. 오순절 교회 안에서도 그런 집회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예언과 방언, 통역이 모두 있으려면 권위가 담임목사에게만 있으면 안 된다. 누구에게나 임하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은 우리나라의 위계질서, 유교적 가부장제의 폐해 같다. 성령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어야 되는데 우리나라는 가부장제가 자유함을 빼앗았다.(웃음)

- 가짜방언은 어떻게 구별하나. 방언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나도 가짜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가짜방언이라는 것은 누가 퍼드렸느냐. 증거는 없지만 심증은 간다. ‘가짜방언’이라고 할 때 움츠러들지 않나. 천사와 마귀 중 누가 이 풍문을 퍼뜨렸냐고 묻는다면 마귀가 퍼뜨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진짜나 가짜냐를 구분하라고 하는데, 고전 14장에는 두 세 사람이 방언하고 한 사람이 통역해서 분별하라고 한다. 또 신앙고백 여부로 구별할 수 있다(고전 12:3). 실제 집회에서 가짜방언은 우려할 만큼 많지 않다고 본다.

- 방언은 신의 언어인가?

언어학 분야 논문을 보니 방언을 녹음해서 들어보면 언어학 규칙에서 벗어난다고 하더라. 실존하는 언어는 아니다. 그러면 방언이 하나님의 말인가? ‘천사의 말’ 이라는 표현은 아름다운 말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 그만큼 귀중한 것이라는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방언이 하나님의 언어나 천상의 언어는 아닐 것이다. 언어학적으로는 혀에 근육이 생기기 때문에 혀는 해보지 않은 발음을 잘 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근육의 움직임을 뛰어 넘는 것이 방언이라고 한다. 그래서 방언을 ‘other tongue’이라고 하는 것이다.

- 방언은 외국어여야 하는가? 종종 외국어 방언이 검증된다고 하던데, 언어학자들이 조사해 보면 거의 UFO 발견처럼 근거가 없는 얘기인 경우가 많다.

누가는 성령 세례를 설명하던 중에 방언을 말했다. 성령, 은사, 충만, 세례를 풀다보면 방언이 나온다. 사도행전 2장에는 방언이란 말만 있고 외국어인지 분명하지도 않다. 지금과 같이 똑같이 방언이 터진 거고, 알아듣는 기적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만약에 그게 아니라면 오순절 사건에서만의 일회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순절 사건 이후 베드로가 설교할 때는 성령론이 아니라 구원론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렇다고 본다면 사도행전 2장은 특수하게 볼 수 있다.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고 듣는도다’라는 의미가 다른 나라 말로 유창하게 한다는 내용은 아닐 것으로 본다.

- 방언이 바로 이런 유익이 있다는 설명을 한다면?

바울이 말한 건 두 가지다. 고전 14장에는 자기를 ‘오이코도메’ 한다고 하고 있다. ‘빌드 업(build up)한다’ 곧 ‘허물어진 것을 세운다’는 것이다. 바울은 오이코도메오(세운다), 오이코도메(세움)라는 말을 ’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의미로 주로 썼다. 방언으로만 회복할 수는 없지만, 희로애락, 마음의 상처, 마음의 응어리 이런 것들이 회복될 수 있다. 그리고 로마서에는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돕는다는 의미로 방언을 사용한다. 성령의 기도인데, 피조물이 탄식하고 처음 익은 열매 신자들이 탄식하는 것에 공감한다는 의미다. 즉 하나님이 나의 기쁨, 희로애락에 공감해 주신다는 거다. 이 두 가지 때문에 어려움이 있을 때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 논문에 따르면, 신자들을 조사해 보니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새벽기도와 철야기도 참석률에 가장 크게 있더라.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이 새벽기도와 철야기도에 참석률이 높았다. 다른 차이보다 깊이 기도하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 방언의 체험 중 소개해줄 만한 체험이 있는가?

인생의 위기 때마다 대부분 기도로 극복했는데 그 때마다 방언 기도를 했다. 어느 대학에 갈까, 어디로 유학을 어떻게 갈까와 같은 모든 문제를 새벽기도에서 방언 기도를 하며 결정했다. 미국에서 영국으로 갔을 때는 기도로 결정하고도 3년을 후회했다. 나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당시엔 나쁜 결정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10년 후에 돌아보니 대부분 좋은 결정이었다.

이동희 ⓒ 뉴스미션

USA 아멘넷

살렘워십 소속 외국인 유학생 10여 명이 지난달 26일 저녁 서울 지하철 1호선 객차 안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사’를 부르며 춤추는 모습을 한 페이스북 유저가 인터넷에 올린 동영상이 지난주 페이스북에서 큰 화제가 됐다.


동영상에서 객차 양편에 마주 앉은 남녀 흑인들이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한다. 흥에 겨워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기도 했다. 노랫말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이다. 4분 58초 분량이다. 한 페이스북 유저는 “뉴욕 지하철인 줄 알았다. 흑인들이 한국어 찬송을 하다니 놀랍다”고 말했다. 

영상의 주인공은 외국인 유학생들로 구성된 ‘살렘워십(Salem Worship)’이었다. 워십팀 소속 콩고 출신 프랭크 이마니(24·성균관대)씨는 5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경기도 동두천 소요산역 앞 집회에 참여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즉흥적으로 불렀다. 한국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한국어로 찬양을 했다. 우리를 우연히 본 승객 한 명이 자신의 페북에 올린 것 같다”고 말했다. 

살렘워십에서 활동한 학생들은 동영상 반응에 놀라워했다. 이마니씨는 “지난해 여름에도 지하철에서 찬송을 부른 적이 있다. 그땐 이렇게 관심이 크지 않았다. 하나님이 우리의 일을 도와주신 것 같아 멤버 모두 감사하며 기뻐하고 있다”고 전했다. 스캇 브레너 목사도 인터넷에서 이 영상을 보고 “매우 기쁘다. 언젠가 이 청년들을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평화가 늘 함께 하길 바란다는 의미로 2012년 결성된 살렘워십은 매주 토요일 연습하고, 종종 교회 집회 등에 참여한다. 




지금 1호선 상황!

Posted by 김보미 on Sunday, April 26, 2015


 

어머니 나에게 티끌 하나 주지 않는 걸인들이 내게 손을 내밀 때면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전부를 준 어머니가 불쌍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나한테 밥 한번 사준 친구들과 선배들은 고마웠습니다 답례하고 싶어 불러냅니다 그러나 날 위해 밥을 짓고 밤 늦게까지 기다리는 어머니께 감사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드라마 속 배우들 가정사에 그들을 대신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일상에 지치고 힘든 어머니를 위해 진심으로 눈물을 흘려본 적은 없습니다 골방에 누워 아파하던 어머니 걱정을 한번도 해 본 적은 없습니다 친구와 애인에게는 사소한 잘못 하나에도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한 잘못은 셀 수도 없이 많아도 용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제서야 알게돼서 죄송합니다 아직도 너무도 많은 것을 알지 못해 죄송합니다 어머니 서울여대 공모전 대상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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