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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월은 가정의 달 !
    가정의 중심인 어머니, 아버지
    그런 말이 언듯~언듯 생각나는 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동아의 가슴을 후리는 '아버지'란 노래를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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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란, 뒷동산의 바위 같은 이름이다.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아들 딸의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을 때
        겉으로는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로 되어 있다.
        그래서 잘 깨지기도 하지만,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가 아침 식탁에서 성급하게 일어나서 나가는장소(직장)는,
        즐거운 일만 기다리고 있는 곳은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셋 달린 용(龍)과 싸우러 나간다.
        그것은 피로와, 끝없는 일과, 직장 상사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하는 자책을 날마다 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식을 결혼시킬 때... 한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아들, 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에.. .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본다.

        아버지의 최고의 자랑은 자식들이 남의 칭찬을 받을 때다.

        아버지가 가장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속담이 있다.
        그것은 "가장 좋은 교훈은 손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라는...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그럴 듯한 교훈을 하면서도, 실제 자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 미안하게 생각도 하고
        남 모르는 콤플렉스도 가지고 아버지는 이중적인 태도를 곧잘 취한다.

        그 이유는 "아들, 딸들이 나를 닮아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면서도,
        "나를 닮지 않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몇 살이든지, 아버지에 대한 현재의 생각이
        최종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나이에 따라 변하는 아버지의 인상은,

        4세때--아빠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7세때--아빠는 아는 것이 정말 많다.
        8세때--아빠와 선생님 중 누가 더 높을까?
        12세때-아빠는 모르는 것이 많아.
        14세때-우리 아버지요? 세대 차이가 나요.
        25세때-아버지를 이해하지만, 기성세대는 갔습니다.
        30세때-아버지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요.
        40세때-여보! 우리가 이 일을 결정하기 전에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50세때-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었어.
        60세때-아버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꼭 조언을 들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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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도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후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결코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 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웃음은 어머니의 웃음의 2배쯤 농도가 진하다.
        울음은 열 배쯤 될 것이다.

        아들 딸들은 아버지의 수입이 적은 것이나
        아버지의 지위가 높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지만,
        아버지는 그런 마음에 속으로만 운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른인 체를 해야 하지만
        친한 친구나 맘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소년이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는 기도도 안 하지만,
        혼자 차를 운전하면서는 큰소리로
        기도도 하고 주문을 외기도 하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가슴은 봄과 여름을 왔다갔다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가을과 겨울을 오고 간다.




오늘(5월 5일 화요일)은 멕시코에서는 멕시코 독립기념일인 씽꼬 데 마요(Cinco de Mayo)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어린이의 날입니다.(한국은 하루 지났겠지만)

오늘은 멕시코 최대축제인 씽꼬 데 마요 페스티발이 여기저기서 많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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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치와와 태평양 철도



 

*부모가 자녀에게 주어야할 인생의 선물* ★ 첫번째 선물 - 존경심 존경심은 숭고한 마음의 작용으로 사람을 도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며, 올바른 길을 걷게 만든다. 누구나 인생에서 그 사람만이 할수있는 역할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므로 자신도 다른 사람도 매우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자. ★ 두번째 선물 - 인내심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욕망을 억제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작은 실패에도 쉽게 좌절하게 마련이다. 자녀에게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버리고 자신을 억제하는 법을 가르쳐라. ★ 세번째 선물 - 사랑 사랑하는 마음을 진솔하게 전해 주는 것이 자녀교육의 기본이다. 부모가 따뜻한 사랑을 충분히 주고 부모 자식간의 신뢰 관계가 확고하다면 자녀교육의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 네번째 선물 - 의욕 자녀가 스스로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분위기를 연출하자. 부모 스스로 즐겁게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녀에게도 스스로 하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키라. ★ 다섯번째 선물 - 개성 아이들은 모두 잘 갈고 닦으면 빛을 내는 보석과 같다. 그 아이만의 좋은 개성은 부모만이 잘 살릴 수 있다. 자녀의 개성을 이해하고 그 개성을 살릴수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자. ★ 여섯번째 선물 - 배움 어릴 때부터 자신의 인생관을 갖도록 조언해주자. 높은 이상은 배움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이해시키고 새로운 것을 알아가고 도전하는 것에 신선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주라. ★ 일곱번째 선물 - 꿈 자녀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라. 자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한다면 칭찬해주자. 그것이 자녀의 꿈과 마음을 키워주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이 모든것보다 가장 중요한것-하나님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계심을 어릴적부터 가르치라 늙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휼륭한 주님의 제자가 될 것이다 인생의 성공자가 될 것이다

가져온 곳 : 
카페 >★☆사모님 사모님 ☆★
|
글쓴이 : 달빛| 원글보기

 

1. 질병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 증상이고, 그 증상은 가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증상을 잘 추적해서 그 증상을 일으킨 질병을 알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곧 그 질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우리들 교회에 좋지 않은 어떤 증상들이 나타나고 있다면 그것들을 잘 관찰하여 해결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단점과 아픔을 숨기고 조용하게 넘어가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는 아니다.



2. 교회는 단지 사람들의 행복과 평등한 삶, 환경의 개선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사람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이끄는 것이고 사람을 하나님께 화해시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교회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을 전해야 하며, 죽어 가는 영혼들을 향해 그 복음을 외쳐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들의 삶이 바뀌도록 하는데 힘써야 한다.



3.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고, 인간의 본질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의 상황은 아무 것도 새로워진 것이 없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치명적인 속임수의 하나는 우리가 20세기의 끝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전혀 새로운 문제를 가지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컴퓨터와 위성의 시대, 최첨단의 통신시설과 교통, 의.식.주 생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악하고,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 살려고 하는데,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구원을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출산왕 기네스 깨지다!! 11명 출산한 인도 여성!!| "

인도 여성이 한번에 11남매를 낳았다고 합니다
기네스 기록을 가라치움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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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한국에서도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앵벌이에 대한 기사가 생각난다.

어린 아이들을 데려다가 혹은 유괴하여 지하철 및 도시 한복판에 동냥을 하게 만드는 조직을 일컫는 앵벌이.그러한 어둠의 조직으로 불렸던 앵벌이의 모습을 북경의 한복판에서도 쉽게 볼 수 있었다.

빈부의 격차가 큰 중국에서 부랑자나 거지를 보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하지만 오늘 본 소녀의 모습은 우리가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기에 그 안타까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13~4살 정도로 추정되는 이 소녀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도로변에 앉아 하루 종일 분필로 글을 쓴다.일주일에2번 정도 이곳에 오며 예전에 북경 중심에서 보았던 소녀이기에 쉽게 알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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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가 쓰고 있는 글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와 가족사,그리고 현재 처한 상황이다. 작은 소녀가 쓰는 글씨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곧고 힘있는 서체이기에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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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가 쓴 글을 살짝 번역하자면 아래와 같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장수를 빌며 아주머니 아저씨가 하시는 일이 모두 순조롭기를 바라겠습니다. 오빠 언니 아우 분들이 빨리 조국의 대들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발이 불구 이며 등에도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괴롭다 괴롭다 괴롭다.힘들다 힘들다 힘들다. 저의 고통스러운 일을 한자한자 적어보겠습니다.

출생 후 일년 반이 지나지 않아 천재와 인재로 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도처에서 저를 검사시킨 신 결과 마비증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반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저희 집은 원래 농촌입니다.저금한 돈을 모두 사용하고 친구와 친척들의 돈 또한 모두 사용하였습니다.

그때는 병원 시설이 좋지 않았으며 저의 병에도 호전이 없었습니다. 부모님은 일터에 나가셔서 일년이 넘게 일을 하셨지만 사장의 횡포에 의해 월급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아버지는 화병에 정신병을 얻으셨습니다.
.........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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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저 소녀가 쓰고 있는 글은 아마도 거짓말 일 것이다.많은 중국의 부랑자 및 거지들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동정심을 일으키기 위하여 많은 픽션을 첨가한다.

혹은 거지나 부랑자를 직업으로 자처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중국의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를 알기에 동정의 눈빛 보다는 의심과 차가운 눈빛으로 대하기 일쑤 이다.

하지만 소녀의 밝은 얼굴과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써 내려간 정갈한 글씨는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으며 이러한 의심을 모두 잊고 감탄과 동정의 손길을 뻗게 하였다.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이어지고 있다.

적에는5마오(한화75원)부터 많게는10위안(한화1200원)까지 평소 남의 일이라면 불구경 하는 듯한 중국인이라 생각했던 내 생각이 잘못된것임을 알게 해주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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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을 맞춘 후에는 자신이 적어 내려간 글을 모두 다 지우고 다시 다른 부분에 처음부터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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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람들이 소녀에게 보인 정성과 물질적인 도움은 다른 이들의 배를 채울 것이며 또 다시 소녀를 차가운 도로로 내 보낼 것이다.
하지만 소녀가 세상이 자신을 버리지 않았음을 알고 꿋꿋이 살아갔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회개하지 않는 지도자는 배척해야 한다

황상하 목사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마치 성경 말씀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성경에 “죄를 미워하라”는 말은 없지만, 죄 짓기를 좋아하는 것을 엄히 경계하고 있으니 죄를 미워하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시니까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죄인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죄는 인격적인 존재인 사람을 떠나서 존재하지 않고, 사람이 아닌 다른 피조물은 죄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동물이나 식물이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은 그것들이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관계 되지 않는 죄란 있을 수도 없고 미워하거나 좋아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언뜻 좋은 말 같이 들리지만 하나님도 인간도 나아가서는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무지한 말이고, 모호하고 개념 없는 휴머니즘일 뿐이고, 나아가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말입니다.

선이나 악이나 죄는 인격적 존재를 떠나서는 성립되지 않는 개념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이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전제의 토대에서 성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이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했을 때도, 인격적 존재인 사람과 관련 없는 악이나 선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전제하고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따라서 악이나 죄를 미워하는 것은 곧 악인과 죄인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죄인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과, 우리도 하나님처럼 죄인을 사랑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충돌하지 않느냐고 반문 할 수도 있습니다. 죄와 악이 인격적 존재와 결부되어 있음을 전제할 때 악을 미워하라고 한 것은 곧 악인을 미워하라고 한 것이 분명합니다. 나아가서 죄를 미워하라는 경계의 말씀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곧 죄인을 미워하라는 것 임도 자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죄인을 용서해야 합니다. 서로 모순을 일으키는 것 같은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서 성경적 설명이 필요합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미워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죄인을 미워하신다는 말씀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징계와 영벌로 다스리십니다. 죄인에 대한 영벌의 개념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무한정 용서하시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나 죄인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방법은 징계입니다. 징계란 지은 죄를 회개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 방법에 교회의 치리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누가 죄를 지었더라도 우리는 그를 권하여 회개하게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문제에 대한 구체적 가르침을 주셨습니다(마 18:15-20). 물론 죄인에 대한 개인의 판단이나 교회의 판단도 하나님의 판단처럼 절대적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개인이나 교회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이 죄인에 대한 치리를 엄격하게 할 수 없다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교회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말씀을 따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태도로 치리를 해야 하되 끝내 회개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이방인처럼 여겨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그의 편지에서 이런 자는 교회에서(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 하였습니다.

일반 교인이 죄를 지은 후 교회의 권고를 따르지 않고 끝내 회개하지 않을 때는 이방인처럼 여기고 내어 쫓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도 교회에서 내어 쫓는 것의 의미가 영적이고 도덕적인 것이지 물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은 자가 내어 쫓기는 치리를 받고도 계속 교회에 나오는 것을 물리적으로 막을 수는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치리는 거기까지입니다. 그 이상은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교회에서 물리력이 동원되는 것은 교회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자가 일반 교인이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이고 지은 죄를 끝내 회개하지 않을 때는 문제가 더욱 복잡하고 그 폐해는 일반 교인의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합니다. 범죄 한 지도자의 경우에도 치리의 원리는 동일합니다. 흔히 지도자는 죄를 짓더라도 하나님께서 직접 처리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관여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도자를 존중하는 태도는 장려할 일이지만 지도자의 죄는 사람이 다룰 수 없다는 생각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죄를 지은 지도자도 가능한 회개할 수 있도록 이해와 용서와 사랑으로 대해야 하는 것은 일반 교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강퍅하여 끝내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런 지도자는 배척해야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를 배척하는 것이 그를 사랑하는 것이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조심해야 하는 것은 회개하지 않는 지도자를 배척하는 경우에도 그 방법에 있어서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됩니다. 지도자는 치리의 주체이기 때문에 그가 죄를 범하고 회개하지 않을 경우 합법적 절차를 따라 치리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 교인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기도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가운데 합법적 절차와 질서를 따라 그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도자를 배척하는 마지막 방법은 그가 지도하는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현대 교회 타락의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죄를 지은 개인을 치리 하는 책임과 의무가 교회라는 공동체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 지도자에게 어떠한 형태로든지 힘이 되는 행위는 그가 지은 죄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나는 신학교 시절 신학교와 교단이 어려웠던 때 평소에 존경하던 교수님의 태도와 말씀을 잊을 수 없습니다. 입학 부정과 교수의 고유 권한까지 무시되는 일이 일어나자 그 교수님은 학교를 떠났습니다. 원로 교수가 그 교수를 찾아가 돌아오기를 간곡히 권하였지만 그분은 끝내 학교로 돌아오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 때 그 교수님이 학교로 돌아오기를 거절하며 한 이야기입니다. - 제가 타고 있는 배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고, 그 배가 잘 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안다면 두 지가 선택이 있을 수 있는데, 먼저는 모든 노력을 다해 배를 바른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고, 그것이 불가능할 때 최종적인 방법은 그 배에서 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분은 끝내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행동은 사람들에게 별난 행동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그 태도는 지금까지 나에게 깊은 인상과 여운으로 남아 있습니다. 교수가 학교를 떠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서도 그분은 그러한 결정이 신앙양심상 최선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지은 죄가 명백하게 드러났음에도 회개하지 않는 지도자가 주도하는 교회에 나가는 교인이라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기도하며 그 지도자가 회개하게 하든지,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지도자를 사임하게 해야 하고, 그것도 용이하지 않다면 그 자신이 그 교회를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지도자가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아도 교인의 수가 줄어들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은 지도자의 타락보다 더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문제나 나라의 문제나 지도자만 탓할 일이 아닙니다. 지도자란 공중에서 떨어진 사람이 아니고 그 집단에 소속된 이들이 선택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지도자를 합법적이고 질서를 따라 배척하되 배척하는 행위가 폭력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 교회를 떠나는 것이 교인의 의무요 책임이며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는 것입니다. 지은 죄가 현저하게 드러났음에도 회개하지 않는 지도자가 목회하는 교회에 계속 다니거나 그를 돕는 것은 그 지도자의 행위를 독려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지도자보다 더 나쁜 죄를 짓는 것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롬 1:28-32 -

출처: USA 아멘넷




어떻게 소명을 발견할 것인가

오스 기니스는 이렇게 말했다. "소명을 발견하는 주된 방법은 각자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도록 창조 되었고 어떤 재능을 받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은 '네가 하는 일이 곧 너' 라고 말하지만, 소명은 '네가 누구인지를 알아 그 일을 하라' 고 말한다."

소명이란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이다. 단 두사람도 세상을 정확히 똑같이 보지 않는다. 가령 교통사고 현장에 10여명이 함께 도착했다고 하자. 똑같은 현장을 목격하지만 저마다 보는 것도 다르고, 반응하는 방식도 다르다.

한 남자는 운전자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고 교통정리를 시작한다. 한 여자는 사고를 자세히 관찰한 후 휴대전화로 119에 전화를 걸어 정확하게 사고 현장을 설명한다. 한 은퇴한 여교사는 길가에 죽어 누워있는 엄마를 보고 경악하고 있는 두 아이를 품에 꼭 끌어안고 달래준다.

한 간호사는 부상이 심한 사람들에게 즉시 응급조치를 취한다. 한 목사는 걷잡을 수 없이 흐느끼는 한 목격자를 보고 곁에 가서 진정 시킨다. 어떤 사람은 혼란 스러운 상황을 보고 요긴하게 쓸수 있도록 자기 차에서 담요며, 조명기구며, 비상용품을 가져다 놓는다.

같은 사고를 보면서도 저마다 반응하는 것이 다른 것은 저마다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는가 하는 것은 각자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그 무언가에 의해 결정된다.

내가 주변 세상을 보는 방식에 내 소명의 방향이 들어있다. 어디를 가나 운영상의 문제가 있는 단체만 보이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그 기관을 더욱 효율적인 체제로 바꿔놓는다. 몸이든 마음이든 영혼이든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만 보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신체적, 정신적, 영적 치유를 베푸는 직업을 택한다. 주택문제만 보이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헤비타트 운동 같은 기관에 몸담아 주택문제를 줄여간다.

나는 세상에 잘못된 문제들이 많다는 것을 알지만, 모든 문제가 내 마음의 눈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청소년 흡연, 에이즈 확산, 무능한 정부, 지구 온난화, 환경 오염, 높은 문맹률, 난민문제.. 이런 문제들을 알고 해결을 돕고자 가끔 돈도 보내지만, 이런 일로 밤잠을 설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내게도 마음의 눈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으니, 내 눈에는 영적 고아처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보인다. 기독교 신앙을 실 생활의 경험과 연결시킬 줄 모르는 미숙한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찬 교회가 보인다.

우리는 어떻게 소명을 발견할 것인가? 많은 경우 어렸을 때는 소명을 모른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소명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소명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언 땅 속에 잠자고 있는 씨앗처럼 말이다. 봄이 오면 씨앗은 땅을 헤집고 올라온다.

우리는 깊은 소명의식에 이끌려 내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는 여정에 올라야 한다. 그 길을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이르러야 한다. 꼭 따라가야 하지만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 제랄드 싯처, 하나님의 뜻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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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사스(Kansas) 주는

미국인들의 주식 가운데 하나인

빵의 원료가 되는 밀의 최대 생산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캔사스와 더불어

밀생산량 1, 2위를 다투는 곳이

노쓰 다코타(North Dakota)입니다.


작년(2014년)에

노쓰 다코타의 밀 생산량은

캔사스 주를 따돌리고 1위에 올라 섰지요.


몬태나(Montana) 주가

캔사스와 North Dakota를 이어

밀(wheat) 생산량 3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South Dakota와 워싱턴 주,

아이다호 주가 막상 막하로 그 뒤를 잇고 있지요.


그런데, 밀생산량은

타주에 비해 뒤떨어지지만

밀밭 풍경은 세계 최고인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워싱턴 주의 콜팩스(Colfax) 일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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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생산되는 밀은

그 파종 시기에 따라 여섯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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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서도

워싱턴, 오리건, 아이다호가 만나는

펄루스 (혹은 팔루스, Palouse) 지역에서 생산되는 밀은


Soft white winter wheat 종류인데

이 SWWW는 9월과 11월 사이에 파종해서

이듬해 6월에서 9월 사이에 수확하는 품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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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 주가 만나는 펄루스 지역은

클리어워러(Clearwater) 강과 펄루스(Palouse)강,

그리고 스네?(Snake) 강이 흐르는 비옥한 지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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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엽,

오리건 트레일을 따라

백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한 이래로


펄루스 지역은 줄곧

밀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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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루스는

이 지역에 살던

팔루스(Palus) 부족의 언어로


작고 굵은 풀의 땅

(land with short and thick grass),

혹은 잔디(lawn)와 같은 땅이라고 불리워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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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이 

의미하는바 대로

이 땅은 봄이 되면 광활한 녹색의 땅으로 변모됩니다.


19세기의

프랑스계 탐험가와 무역상들은


펄루스 지역을

초원의 땅(grassland country)이라고 불렀을 정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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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밭 삼각지대라 일컬어지는

콜팩스와 풀먼, 그리고 펄루스를 잇는 지역은


4월부터 6월까지

옅고 진한 고동색의 땅위에


녹색으로 채색된

리드미컬한 밀밭의

경이로운 풍경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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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밀밭 풍경은

고동색의 땅과 그린색의 밀밭,


그리고 요동치는 듯한

리드미컬한 언덕이 어울려


아름다운

대지의 선율과

하모니를 만들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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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루스 지역은

워싱턴 주와 오리건 주에서도

가장 비옥한 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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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진 땅,

봄철의 풍부한 비,

여름의 뜨거운 햇살은

이 지역을 옥토로 만들어 주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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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팩스(Colfax)는

밀밭 삼각지대의 중심인데


콜팩스에서

풀먼까지는 남쪽으로 약 16마일,


콜팩스에서

펄루스 city는 동쪽으로

17마일의 거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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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펄루스 city와

펄루스 지역(region)은

서로 다른 용어로 사용됩니다.


펄루스 region은

3개주를 일컫는 넓은 지역을 의미하며,


펄루스 city는

밀밭 삼각지대에 자리잡은

인구 약 1천명의 소도시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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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주의 밀밭 지역은

자동차로 가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고,


또 밀밭 풍경 외에는

크게 주목할 만한 볼거리가 없어서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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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곳은

사진 작가들에게는

매우 잘 알려진 곳입니다.


이태리의

토스카나 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출렁이는 대지와

리드미컬한 밀밭의 풍경을

이곳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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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의 밀밭 풍경을

가장 시원스럽게 볼 수 있는 곳은


스텝토 뷰트(Steptoe Butte)와

카미악 뷰트(Kamiak Butt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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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텝토 뷰트는

콜팩스에서 13마일,


카미악 뷰트는

풀먼에서 약 15마일의 거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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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3,612ft(1,101m)의

Steptoe Butte 정상에 서면

거의 360도 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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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텝토 뷰트 정상에서 보이는

구릉진 언덕을 Palouse Hills 혹은

일반 명사로 rolling hills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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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

스텝토 뷰트에 서면

정상 시력을 가진 사람은

약 70마일(약113km)의 거리까지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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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펼쳐진

펄루스의 광활한 밀밭을 보신다면

당신 생애의 잊을 수 없는 벅찬 감격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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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전쟁 예언' 홍혜선 전도사 추종세력 여전
추종세력들 해외 머물러..가정파괴 현상 심각

2015/04/29 (수) 12:12 ㆍ추천: 0      



지난해 유투브 상으로 한국 전쟁 예언을 유포했던 재미교포 홍혜선 씨를 추종하는 이들이 지난해 11월 동남아 각국으로 도피했던 일이 있었는데요.

전쟁 예언이 불발됐지만, 홍혜선 씨 추종세력 다수가 여전히 전쟁에 대한 불안감으로 국내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어 가정 파괴 현상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송주열 기자의 보돕니다.

[녹취] 필리핀 민다나오 TV방송 뉴스
"뭐 하세요. 사진 찍지 마세요"

올 1월 필리핀 현지 뉴스 보도 장면입니다. 한국에서 온 목사가 미성년자를 납치했다는 사건 보도 내용입니다.

취재 결과 홍혜선 씨의 전쟁 예언을 추종하는 경기도 파주의 한 교회 목사와 교인들이 필리핀에 도피해 왔을 당시 미성년자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담임목사는 이민국 감옥에 수감됐습니다. 홍혜선 씨의 전쟁 예언이 거짓으로 드러났지만, 홍 씨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여전히 전쟁에 대한 불안감으로 국내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경기도 고양시에 거주하는 기진호 씨는 지난해 9월까지는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가정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에서 담임목사 사모가 홍혜선 씨의 한국전쟁 예언 동영상을 교인들에게 돌렸고, 이를 본 아내는 홍 씨를 추종하게 됐습니다.

급기야 남편을 한국에 남겨두고 11살 딸과 5살 아들과 함께 석 달동안 필리핀으로 도피했습니다.

기 씨의 설득 끝에 한국에 돌아온 뒤 아내는 사이비 종교에 빠져 현실 검증력이 떨어져 있어 자해나 타해의 위험성이 있다는 진단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최근에 또 다시 사라졌습니다.

출입국관리소에 확인해보니 아내가 딸과 아들을 데리고 지난 17일 일본으로 출국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기 씨는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내고, 자녀들이라도 먼저 되찾아오기 위해 이혼소송까지 냈습니다.

[인터뷰] 기진호 씨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이혼소송을 했습니다. 저는 아내랑 이혼 안 합니다. 소송은 하고 이혼은 안 합니다. 그래야 빨리 아이들을 찾을 수 있고.."

[인터뷰] 김광홍 장로
"이건 진짜 말을 이어나갈 수 가 없습니다. 이 심정을 내가 70평생을 살았어도 이렇게 슬프고 말 못할 사정은 처음입니다."

취재 결과 기 씨의 아내와 같이 필리핀에 도피했던 교인 10여 명이 또 다시 실종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송주열 기자 ⓒ CBS 크리스천노컷뉴스

USA 아멘넷

              내 가슴속에 영원히 계신 당신

        최송연


              자욱한 안개가 피어오르듯

              내 마음속에 회의심 덮칠 때

              당신은 찬란한 아침 빛 되시사

              내 가슴속의 안개를 거두어 주소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물처럼
              내 마음에 슬픔이 넘칠 때

              당신은 하이얀 손수건 되시사

              내 가슴속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소서. 

         

              시커먼 먹구름 몰아치듯

              내 마음에 절망감 몰아칠 때

              당신은 무지갯빛 고운 꿈 되시사

              내 가슴속에 찬란한 소망으로

              넘쳐나게 하소서.


              망망한 바다 위를 떠도는 조각배처럼

              내 갈 길 알지 못해 유리방황 할 때

              당신은 밝은 빛 등대되시사

              내 가슴속에 구원의 항구를

              밝히 보여주소서.

              내 가슴속에 영원히 계신 당신,
              내가 피곤할 때 나의 능력되시고

              내가 쓰러질 땐 내 손 잡아 일으키시사
              당신이 계신 그 영원한 집으로
              날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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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구원론에 관한 소고(小考)

- 총신원보 주최 제1회 논문공모대회 최우수상 수상작

Ⅰ. 연구의 필요성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많은 문제들의 궁극적 원인은 결국 강단의 문제로 귀결되고, 이는 곧 설교의 문제요, 한국 교회 내에 팽배해 있는 교리상의 문제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의 이신칭의 교리의 재발견으로 개혁 교회는 구원론에 있어서 이신칭의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 스코필드 주석의 영향과 샌디먼파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믿기만 하면 구원얻는다는 식의 신앙지상주의(Easy Believism)가 만연되게 되었고, 한국 교회도 C.C.C. 선교 단체의 사영리 교리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구원론을 여과 없이 받아들였고, 그러한 결과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구원론의 개념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잘 알려진 것처럼 종교개혁자 존 칼빈(J. Calvin)은 구원에 있어서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였던 존 머레이(J. Murray)교수는 '확정적 성화' 교리를 통하여 성화가 구원론에 있어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역설하였다. 교회사를 통하여 보더라도 청교도들이나 설교의 황태자 찰스 스펄전(C. H. Spurgeon)이나 지난 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D. M. Lloyd-Jones)등의 설교자들의 설교에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바로 회심의 문제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소논문을 통하여 한국 교회에서 재고의 작업 없이 일반화되고 있는 구원론의 문제를 역사적 개혁주의의 관점에서 한국 교회의 구원의 교리에 대한 평가 작업을 시도하려고 한다. 성경에서 명백히 증거하고 있는 가시적인 유형 교회 내의 알곡과 가라지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가 본 논문을 통하여 작은 문제 제기라고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Ⅱ. 역사적 개혁주의 구원론

'그리스도인'을 두 개의 그룹이나 또는 등급으로 구분 짓는 것이 비성경적임을 말하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찰스 핫지(C. Hodge), 제임스 보이스(J. M. Boice), 로버트 답니(R. Dabney), 존 번연(J. Bunyan),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89년의 침례교도 신앙고백, 남침례교 신앙 선언문등에서 나타나 있다.


조지 휫필드(G. Whitefield)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찰스 스펄전에게 극찬을 받았던 경건한 주석가 매튜 헨리(M. Henry)는 그의 마태복음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들어있는 모든 은혜는 우리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구주로서 그분으로부터 받을 혜택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찰스 스펄전은 그의 학생들에게 이런 경고를 했다. '만일 공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주님의 뜻을 분명히 안다고 공언하면서 그 뜻을 전혀 따를 의사가 없다면 그의 주제넘은 말을 그냥 받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확지시키는 것은 여러분의 의무입니다. 사람이 우상들에게 붙잡혀 있고 아직도 마음이 죄를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단순히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순간에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복음을 확장시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만약 그렇게 복음을 전한다면 나는 거짓말쟁이며, 복음을 왜곡시키고,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자며,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의 색욕거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구프린스턴(The Old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의 탁월한 조직 신학자였던 A.A.핫지(Hodge)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이 만약 그리스도를 성화를 위한 분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칭의를 위한 분으로도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죄인이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거룩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죄들 속에서 머물면서 구원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나의 죄들 속에서 머물면서 구원되기를 원합니다." "저를 지금 성화시키지 마십시오. 그러나 지금 저를 의롭게 해주십시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받아 주시겠습니까? 당신이 혈액 순환과 공기의 흡입을 분리시킬 수 없듯이 칭의를 성화와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호흡과 혈액의 순환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어느 한쪽이 빠지면 안 됩니다. 이 두 가지 활동은 동시적이며 하나의 생명체를 이끌어 갑니다. 마찬가지로 당신도 칭의와 성화를 다 같이 가져야 합니다. 이 둘은 함께 공전하면서 하나의 삶을 이룹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성화가 없는 칭의만을 위해 영접하려고 시도한다면 실패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성화되지 않은 것처럼 의롭게 되지도 않습니다.'


스펄전(C. H. Spurgeon)은 그의 설교에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의 의미는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그것은 사실상 구원의 결과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이 아니라, 우리의 나쁜 습관, 악한 심성, 더러운 마음, 습관적인 죄악으로부터 구출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조나단 에드워즈나 청교도들도 이러한 믿기만 하면 구원얻는다는 식의 신앙지상주의(Easy Believism)를 배격했다. 한국 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이 로이드 존스(D. M. Lloyd-Jones)를 오해한 나머지, 로이드 존스의 설교에서 나타나는 죄의 심각성, 율법의 필요성, 심판의 엄중성을 간과한채, 죄에 뒤따르는 건전한 죄의식을 영적 우울 증상으로 매도하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강조하는 사람을 행위론자(신자의 행위로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치는 사람)와 알미니안(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교리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통탈할 노릇이다. 아더 핑크(A.W. Pink)는 회개 없는 복음은 복음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경고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그의 에베소서 설교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길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칭의와 성화를 떼어내는 것처럼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 같이 성경을 완전하게 오해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은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수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구원은 언제나 거룩이라는 차원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뒤에 거룩하여지기로 결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두 문제를 비논리적으로 구분하고 떼어놓는 것처럼 비성경적이고 위험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거룩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룩에서 시작이 되고 거룩에서 끝이 나는 것입니다. 거룩은 구원의 시작이자 끝인 것입니다. 구원의 전체 과정은 우리들을 그리로 인도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데로 우리들을 인도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언제나 거룩으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을 설교하는 것이 복음전도의 진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복음전도에 관하여 아주 다른 개념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반대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전도에 있어서 전도자는 거룩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오직 한 가지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려는"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음에야 그들로 하여금 거룩하게 인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입니다. 복음전도의 전체적인 목적은 일차적으로 사람들에게 죄가 그들에게 어떤 일을 하였으며, 어째서 그들이 현재 이러한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어째서인가 하는 것을 말하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행복하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빛이시오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룩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요점, 곧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과 거룩하게 되는 성화를 분리하여 놓는 것은 제가 볼 때는 성경의 진수와 같은 교훈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일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선택을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은 바로 그러한 목적을 향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거룩을 우리들이 가입하려고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일은 전적으로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거룩하지 아니하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화와 구속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선택하기로 결심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기업이 될 것을 정하는 우선권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곧 그리스도 전체 안에 있든지, 아니면 "그리스도 밖에" 있든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안에" 있으면 여러분은 거룩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들이 거룩함을 위하여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게 되어야 하며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진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의 이러한 진술에 비추어서 볼 때에 필연적으로 진리입니다. 바울에 의하여 우리들이 생각하여야 할 것은 우리들이 거룩의 가능성을 가지고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선택함을 받은 것은 거룩을 실현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거룩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만들기 위하여 창세 전에 우리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들을 선택하여서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가지신 계획이 바로 그것입니다.

 

거룩의 가능성이 아니라, 거룩의 실현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러한 엄숙한 선언을 합니다. 이러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그들의 삶에서 어떤 거룩의 표증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선택"을 받고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많은 교리를 말하고, 그가 선택을 받았고 예정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고 만족하는 것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그에게서 거룩의 요소가 없다면, 그는 선택을 받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지적으로는 정통적이면서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선택을 받은 사람, 그는 선택함을 받아 거룩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의 삶에 있어서 거룩한 것이 하나도 나타나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그가 선택함을 받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엄숙한 생각들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의 진술에 비추어서 볼 때에 이러한 것들은 필연적인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존 머레이(John Murray) 교수도 그의 조직신학 선집에서 확정적 성화의 교리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유비에 따라서, 죄 안에 또는 죄에 대하여 산 사람은 죄의 영역 안에서 살며 활동한다-그것은 그의 삶과 활동의 장이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은 더 이상 그 영역에서 살지 않는다. 그것과의 연계는 끊어졌으며, 그는 다른 영역으로 옮겨졌다. 여전히 죄의 영역에 사는 사람들은 가장 심각한 어조로 '나는 그를 찾았으니 그를 발견할 수 없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결정적인 간격이다. 그것은 신자의 삶에 대한 전 관념이 근거하는 토대이고, 일상적인 죽음의 경험에서와 마찬가지로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에서도 진정으로, 결정적으로, 참인 간격이요 옮김이다. 죄가 죽음 안에서 또는 죽음으로 지배하는 영역과의 단번에 확정된 바꿀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 사도 바울이 이 구절에서 제시하는 대비는 이 변화가 가져오는 결정적인 간격을 부각시키는 데 기여한다. 죽음은 죄 가운데서 죄의 종으로서 봉사하는 것을 뜻한다(롬 6:6, 16, 17, 20절).

 

죄는 우리의 죽을 몸에서 우리를 지배한다(12절). 순종은 죄의 사욕에 드려진다(12절). 우리는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며 종으로서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다(13, 19절). 우리는 의에 대해서 자유롭다(20절). 죄는 우리를 주관하고 우리는 법 아래 있다(14절). 죄에 대하여 죽음은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의 몸이 멸하여 우리가 다시는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6절).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다(7절).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이다(10, 11절). 죄는 더 이상 우리의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며 우리를 주관하지 못한다(12, 14절).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 의의 종이 되고 거룩함에 이른다(13, 19절). 우리는 은혜 안에 있다(14절). 우리는 기독교적 가르침의 모범을 마음으로 순종한다(17절). 그 열매는 거룩함에 이른 것이요 그 마지막은 영생이다(22절). 이러한 대비는 결정적인 변화를 증거한다. 대비를 약화시킬 가능성은 없다. 그것은 삶과 행위의 모든 측면에서 나타난다. 도덕적이고 영적인 삶을 평가하는 모든 척도에 절대적인 차별이 존재한다. 이것은 은혜의 규정들의 지배하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죄의 능력과 죄에의 종사와의 결정적이고 확정적인 단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Ⅲ. 결론

필자가 짧은 이 소논문을 통하여 말하고자 했던 것이 완전주의(Perpectionism)는 물론 아니다.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와 같이 필자도 완전주의를 거부한다. 지상에 있는 성도중 그 누구도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성화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그러한 문제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거룩하지 않은 사람을, 다시 말하여 회심하지 않은 자연인을 예배당에 출석하고 믿음을 표시하는 것만으로 아무런 검증도 거치지 않은 채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통하여 한국 교회는 심각한 구원론에 있어서의 혼동을 겪고 있다. 이에 이러한 구원론에 대한 재발견과 새로운 조명이 이루어져서, 조나단 에드워즈(J. Edwards)가 구원에 있어서 성도의 열매를 매우 강조하면서 실제로 자신의 노샘프(Northampton) 목회지에서 그러한 원리를 적용시켰던 것처럼 한국 교회도 이러한 실천적 개혁주의 구원론에 대한 적용이 목회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본 소논문을 마치고자 한다.

참고문헌
어네스트 롸이씽거, 거짓 신자, 이중수 역, 양무리서원, 1993.
존 머레이, 조직신학 선집 Ⅱ, 박문재 역,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1.
마틴 로이드 존스, 에베소서 강해 1권, 서문 강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84.
조엘 비키, 청교도 전도, 김홍만 역, 청교도신앙사, 2002.
마틴 로이드 존스, 로마서 강해 7권, 서문 강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77.
제프리 윌슨, 뒤틀린 복음, 이중수 역, 양무리서원, 1997.

 

 


개혁주의마을

조직신학회 전국대회서 공헌배 박사 발제… 한·중·일 신학포럼도 진행

 

▲한국조직신학회 전국대회가 진행되고 있다. ⓒ김진영 기자

 

한국조직신학회(회장 배경식)가 9일 오후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대학교회에서 제9회 전국대회를 ‘한국교회를 위한 신학의 미래’를 주제로 개최했다. 특히 공헌배 박사(한국기독교학술원 연구교수)가 ‘방언기도에 대한 개혁신학적 고찰’을 제목으로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기도는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해야”

 

공 박사는 우선 “개혁교회의 교리들은 방언기도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 이유는 방언으로 하는 기도는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고, 제대로 된 기도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잘못 구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알기 어렵기 때문”이라며 “특히 종교개혁의 전통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를 수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언기도의 경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를 제대로 하는지,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부르는지를 구별할 수 없으므로 그 기도는 타당하지 않게 된다”고 지적했다.

 

▲공헌배 박사. ⓒ김진영 기자

이어 그는 “칼빈은 방언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예외를 두었다. 내적 감정의 힘이 부족해 스스로 기도할 마음을 일으키지 못하거나 감정이 격렬해져서 자연적으로 방언이 터져 나오는 경우”라며 “칼빈은 현상적으로 방언이 일어나며 또 방언기도가 가능하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도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을 권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웬만하면 방언으로 기도하지 말고, 지성과 헌신이 따른, 이해할 수 있는 말로 기도하라는 것이 칼빈의 주문”이라고 말했다.

 

공 박사는 칼 바르트의 견해를 살피며 방언기도에 접근하기도 했다. 그는 “사람들은 흔히 방언의 성경적 근거로 사도행전 2장과 고린도전서 12장을 예로 든다”면서 “그런데 칼 바르트는 성령 임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오늘날에도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에 대면시킨다고 여겼다. 그래서 사도행전 2장의 방언사건을 소통으로 이해했다. 즉 성령의 임재를 동시통역기와 같은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그는 “그리고 칼 바르트는 고린도전서를 주석하면서 고린도 교회야 말로 바울을 속상하게 한 곳이요, 문제가 많은 교회로서, 인간 혹은 영웅들을 숭배하고 이교적 종교행태와의 혼합을 시도해 은사를 오남용했음을 지적했다”며 “따라서 개혁교회의 기도신학이나 목양의 방식을 따를 때 기도는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해야 하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오남용되지 않도록(망령되게 일컬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정한 방언기도 경험하는가에 더 초점 둬야”

 

그러나 공 박사의 발표를 논평한 김화영 교수(연세대)는 “칼빈의 경우, 상당히 전투적인 그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방언기도를 대면한 태도는 무엇이 더 본질적인 것이냐의 식별에 있는 것 같다. 칼빈의 초점은 성령으로 인한 방언과 다른 영으로부터 오는 유사방언의 식별과 구분에 있다”며 “개혁주의 교회가 구더기를 잡는 것에만 주력하지 않고 성령충만함, 그리고 성령과 청중의 하나됨을 경험하는 진정한 방언기도를 경험하고 있는가에 더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김 교수는 “방언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의 활용에 있어서는 특별히 성경적 식별과 지도가 필요하다”며 “성령이 마음 깊은 곳에서 통회하도록 하여, 알아들을 수 없지만 성령이 신비의 언어로 말하게 할 때, 소통하여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는 방향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즉 공동체에 덕을 끼치도록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방언기도의 중요한 존재 이유가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한편 이날 한국조직신학회는 전국대회와 함께 한·중·일 신학포럼을 함께 개최했다. 이 포럼의 기조강연은 일본의 코이치 기무라 박사, 중국의 왕친성 교수(푸단대), 한국의 김영복 교수(한일장신대)가 각각 맡았다.

 

 개혁주의마을

그랜드 캐년은

더 이상의 말이나 설명이 필요없는

전세계적으로 너무나도 잘 알려진 천혜의 관광지입니다.

 

그랜드 캐년에 대하여

무슨 설명이라도 덧붙인다면

그것은 쓸데없는 사족에 불과할 것입니다.

 

Marvel Canyon에서 시작되는 그랜드 캐년은

동서의 길이가 약 277마일(약 446km), 협곡의 깊이는 1,800m,

폭은, 좁은 곳이 4마일에서부터 넓은 곳은 18마일쯤 됩니다.(6.4km - 29km)

 

그랜드 캐년은

크게는 7개의 지층으로,

세부적으로는 12개의 지층으로 이루어진

지질학적으로도 전세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랜드 캐년은

화산, 절리, 융기, 퇴적과 침식, 격변(Cataclysm) 등

지질학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을 통하여 오늘날의 그랜드 캐년을 형성하게 되었죠.

 

그랜드 캐년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아래 링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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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itor Center 부근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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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m Trail에서 바라 본 Mather Point의 모습....

 

Mather Point(7120ft/2170m)는

그랜드 캐년에서 가장 유명한 포인트이며 가장 넓은 파킹랏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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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아래쪽에 보이는 파란 숲이 있는 곳이

 Bright Angel Campground와 Phantom Ranch가 있는 곳입니다.

 

가운데 사선의 골짜기는

편도 14.5마일(콜로라도 강까지)의 North Kaibab Trail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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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ght Angel Trailhead에서 바라 본 Bright Angel Trail의 모습과 첫 번째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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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her Point 부근에서 바라 본 Yavapai 쪽의 오후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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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her Point 부근에서 바라 본 Yavapai 쪽의 일출 전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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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her Point 부근에서 바라 본

South Kaibab Trail 쪽의 일몰 전후의 모습입니다.

석양 빛이 O'neill Butte 부근을 붉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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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pi Point(6800ft/2073m)에서 바라 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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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vapai Point에서 바라 본 일몰의 모습입니다.

해가 꼴까닥 넘어가기 직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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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해는 넘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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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는 넘어갔지만 하늘은 여전히 아름다운 색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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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Mather Point에서 바라 본 일출의 모습입니다.

 

가운데 뾰족하게 보이는 부분은

Vishnu Temple(7,829ft/2,386m)입니다.

왼쪽의 평평한 부분은 Wotan Throne(7,633ft/2327m)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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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Rim 방향에서 아침 해가 솟아 오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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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m Trail에서 바라 본 Mather Point 부근의 일출 직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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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출 직후에 본 그랜드 캐년의 아래쪽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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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Kaibab Trailhead 부근에서 본 일출 직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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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Kaibab Trail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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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아래쪽에 길게 이어진 Trail이 Plateau Trail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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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pe Creek Vista에서 바라 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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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dview Point(7399ft/2256m)에서 바라 본 서북쪽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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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dview Point에서 바라 본 북동쪽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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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dview Point에서 만난 여자 레인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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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뷰 포인트에 대한 역사를 알려주는 글...

 

 

1898년,

그랜드 캐년의 Grandview Point는

그랜드 캐년에서도 가장 인기있는 곳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897년 당시 이곳에는

2층짜리 통나무 건물의 호텔이 들어섰고

1901년에 그랜드 캐년에 철도가 개통되었을 때,

 

빌리지에서 서쪽으로

11마일 떨어진 이곳에도 철도가 들어설 정도로 인기있는 곳이었죠.

물론 지금은 그 잔해만이 남아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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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ert View Point(7438ft/2267m)의 Watch Tower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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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atch Tower 전망대에서 바라 본 콜로라도 강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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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ch Tower의 스토어의 창문을 통해 바라 본 Cedar Mountain(7034ft)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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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ted 평원위에 우뚝 솟아 있는 Cedar Mountain(7034ft)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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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ch Tower내에 있는 스토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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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에서

 오른쪽에 앞으로 삐죽하게 튀어나온 부분은 Comanche Point(7073ft/2156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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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안(power21)

 


 

 

 

 

 

 

 

 

 



 

..

 

로이드존스

 

 

징계를 받을 때

  

 

(히 12:5-11)

 

서론 : 영적침체의 원인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성결의 과정에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함에 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함이다(살전 4:3; 엡 1:4).

 

 

1. 하나님의 목적과 방법


1.1 구원은 전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며, 하나님은 그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 자신의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

 

1.2 하나님께서 이것을 행하시는 데 몇 가지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 그 하나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위대한 교리와 원리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는 것이다.

 

1.3 만일 순종치 않거나 말씀의 교훈을 배우려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다른 방법 - 징계의 방법을 사용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시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시이기도 하다(약 1:2; 계 3:19).

 

 

2. 징계의 의미, 방법


2.1
징계의 의미 : 징계는 연단을 의미하며, 교정, 교훈, 견책을 내포한다. 징계의 본질적인 목적은 성인이 되게 하기 위하여 어린 아이를 연단시키는 것이다.

 

2.2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과 환경을 통해서 징계하신다. 그것이 즐겁든 즐겁지 않든 모두 우리의 성화를 위한 것이다.

 

2.3 징계의 방법 : 물질의 형편, 건강의 문제(고후 12:7-9), 핍박, 우리에게서 자신을 숨기심(호 5:15) 등이 있다.

 

 

3. 징계의 이유


3.1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히 12:5-15).

 

3.2 그리스도인이 징계를 참는 것은 우리의 성장이요, 연단이요, 발전이요, 성화이다.

 

3.3 슬프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자마자 완전한 완성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불완전한 것이 남아 있으며, 옛 사람 그대로이다.

 

3.4 영적인 자신감, 즉 영적 교만 때문이다(고후 12:7-9)

 

3.5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은사를 주셨다. 그 재능만을 믿고 하나님은 필요 없다는 의식을 가지는 자만심 때문이다.

 

3.6 세상과 그 세상의 여러 모습들과 그 풍조에 매혹당하는 위험이 있다.

 

3.7 우리가 자신의 귀를 의뢰하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미 도달된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고 뽐내는 위험이다. 해가 바뀌면 우리의 신앙도 성장해야 할터인데 실제로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세상보다는 천국에 마음을 두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더 잘 아는가?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시 119:71)

 

3.8 우리가 만일 항상 예수님에게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주님과 동행하기를 힘썼다면, 모든 일이 잘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3.9 만일 늘 성공한다면 낮아지게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하나님은 우리를 낮아져서 겸손하기를 원하신다.

 

3.10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내의 필요성을 상기시켜주기 위하여 때때로 우리를 연단시키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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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맺으며)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태복음 3:13-15]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첫째, 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고
둘째, 왜 세례를 받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 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이었냐는 거다.

첫째, 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까닭은
세례요한의 사명은 사람들을 회개로 인도하여 그들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일 이었고
그 표로 세례를 베풀었고 이를 예수님은 인정하셨다.
오늘날 우리의 사명도 세례요한과 같이 다시 오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태어나서부터 나실인 이었던 세례요한 같이, 우리를 선택하여 예비하신 길은
서원하여 작정하여 마치 나실인이 된 것처럼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은 은혜의 언약을 받은 사람으로서의 길은
다시 오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 가졌기에, 주의 길을
내 삶의 자리에, 이 땅에, 예비하여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똑 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죄인의 삶에 찾아오셨고
그래서 예수님의 위대한 메시지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먼저 죄인 인 우리를 찾아 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며 긍휼이고 자비이며 인자(Great kindness)이며
이 모든 뜻이 소망이신 하나님의 의(공의)이다.

이를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고린도전서 9:19-22]

둘째, 왜 요한의 세례를 받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 라 예수님은 말씀하셨을까?
이를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 표현했고
KJV 에서는 ‘Then he suffered him. ’ 이라 표현했을까...
세례요한은 의로우시고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세례 베풀기 힘들었을 것이고
예수님은 죄인인 인간의 자리에 오셔서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셨기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음으로서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고
세례요한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이루어 졌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셨다.
[And Jesus answering said unto him,
Suffer it to be so now: for thus it becometh us to fulfil all righteousness.
Then he suffered him. :15]
이와 같이 하여 우리로 모든 의(공의)를 완벽하게 이루는,
for thus it becometh us to fulfil all righteousness,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의 공의(righteousness)로
예수님의 통하여 알려주신 복음(Gospel)인 기쁜 소식
이를 알려주시고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내주(來住)까지 하시는 성령님
이 모든 의(복음)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기에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물에서 올라오실 쌔
나타난 표적의 사건들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는 합당함을 보여주신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렸고
하늘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있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And Jesus, when he was baptized, went up straightway out of the water:
and, lo, the heavens were opened unto him,
and 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like a dove, and lighting upon him:
And lo a voice from heaven, saying,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마태복음 3:16-17]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세 가지 표적이 일어났다.
1.하늘이 열리고(the heavens were opened)
2.성령이 비둘기 같이 주님 위에 임하였고(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like a dove)
3.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
라는 하늘의 메시지가 있었다.
(voice from heaven, saying,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슴에 담고
성령으로 인(印)쳐서 말씀으로 각인(刻印)된 성도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의 길을 따르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는 우리의 소망인 천국이 열렸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비둘기처럼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였고
우리를 향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 라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쁜 소식, 복음이 되었다.
세례요한과 같이 부르심을 받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메시아 되신 증거인 표적이 되셨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 이니이다
But unto the Son he saith,
Thy throne, O God, is for ever and ever:
a sceptre of righteousness is the sceptre of thy kingdom.  히브리서 1:8]

맺으며:
교만이 무엇일까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하는 자랑, 그것도 교만이라 할 수 있지만
성경의 교만은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지 않고 행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에
성도라면,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자랑으로 눈이 멀어 온전히 알지 못하는 것도,
알면서도 어떠한 이유로 침묵하는 것도 교만이라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교만한 자 이다.
성경을 읽고 성경으로 거울을 삼고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면
내 자신의 교만이 보이며
또 공동체를 바라보면 공동체의 어그러진 신앙의 길이 세속화된 종교의 길이라
교만의 길이라,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  말라기 3:15]
반복되어온 자신의 교만 된 길에서
반복되어온 공동체의 교만 된 길에서
자신과 공동체를 하나님의 의(공의)로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어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가 뛰듯이(말라기 4:2) 굳어져 화석처럼 변한 종교적인 의식에서 순수한 신앙의 자유를 위해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간직한 자들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하나님의 의(공의)를 일주일에 한 편씩 쓰겠다고 시작했으나
게시판에 글을 올리기에 무리하다는 판단에
자신은 글을 쓰는 속도 보다 글을 올리는 속도가 늦어졌다.
첫 번째로 우리의 눈에 보이는 교회와 교계를 바라보며
자신의 신앙 간증과 곁들어 주장하는 글로 시작하여
몇 가지 소제목으로 전개하고 이를 한 단으로
두 번째 단은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세례까지
세 번째 단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중심으로 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네 번째 사도들의 사역
다섯 번째 계시에 대하여 자신이 바라본 성경을 가감 없이 써서 논의하고
자신은 공감된 동의든 신랄한 비판이든, 서로 성경을 바라보는 시각의 신앙으로
근본 된 믿음을 바탕으로 토론이나 논의를 같이 하고 싶었었다.
그래서 서로 성경을 바라보는 분별력으로 믿음이 더 굳건히 터를 잡고
분별력만큼 낮아져서 믿음의 영역이 넓어지는,
장성한 분량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각인된 가슴으로
안목이 넓어져서 다음 세대에 이어주는
그런 계기가 글이 되었으면 하는 그리스도를 향한 꿈이 있었기에 글을 시작을
2013년 10월16일에 시작하였고 10월16일은 주님을 사랑하시던 육친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라 더 의미 있는 시작이었는데 이제 1년 반 만에 걸쳐 쓰던 글을 마치려 하니
아쉬움도 많고 자신의 믿음의 한계를 나타낸 부족한 글이 되었지만
내게는 올바른 글이 되도록 기도하고 성경전체를 읽으며 자율 성경공부 한 기간 이라
신학과 교회사를 여러 권 읽으며 나름 열심히 공부한 기간이라 감사했고
그간 시험과 고통의 참을 수 없는 시간도 있어 잠 못 이루는 날도 많았지만
어려움 중에서 성경을 읽는 능력을 주신 주님께 감사함이 넘쳤던 날들도 많았고,
이 짧은 시간이나마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그간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태초에 하나님이

“브레싯 바라 엘로힘 하 샤마임 브엣 하 에레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라는 사실은 성경의 서두에 선포되는 첫 말씀이며, 여호와 신앙의 기초가 됩니다.

히브리어 “브레싯”은 “처음에, 시작에”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In the beginning,’ 헬라어로는 “엔 아르케”입니다.
“바라”는 “창조하다. 무에서 유를 짓다”라는 뜻입니다.
“엘로힘”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임’이 끝에 붙어서 복수(複數, plural)입니다.
하나님이 여럿이라는 뜻이 아니라, “여럿이신 한 분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여럿? 여럿이신 한 분 하나님? 이게 말이 돼?” 이런 의문이 들었을 텐데 유일신사상을 가졌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기록하고 필사할 때 일점일획도 빼거나 더 하지 않고 복수명사인 “엘로힘”을 그대로 기록하고 또 필사한 것입니다.

“엘로힘”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고 말씀하신 것도 유대인들은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창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 11: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사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러한 성경구절들은 두 말 할 것 없이 하나님께서 자신이 단순한 유일신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샤마임”도 끝에 ‘임’이 붙은 복수명사 “하늘들”입니다.
영어성경을 보면 the heavens, 복수로 써져 있습니다. 궁창, 하늘, 삼층천을 의미할 수도 있고, 끝없는 우주공간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에레츠”는 땅입니다. 땅은 단수(單數, singular)입니다. 지구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여럿이신 한 분 하나님,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다.” 이 말씀이 성경의 기초입니다.
어떤 거대한 빌딩도 기초 없이 세워질 수 없듯, 성경도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사실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믿음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도 공중누각(空中樓閣; 공중에 지은 집)이 되고 맙니다.
아니,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사기꾼, 도적으로 여기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건물의 기초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뒤덮이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눈보라가 쳐도 끄떡없는 건축물이 그 기초를 증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심과 하나님의 창조주이심을 믿지 않거나 의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잠잠하십니다. 대답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그 분의 창조주이심은 그 지으신 피조세계, 온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거룩하심과 영광과 엄위가 증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 창세기 기록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시비하고 부정하려 합니다.
말씀으로 6일 동안 만물을 창조하셨다니 터무니없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성경기록을 근거로 우주와 지구의 탄생이 6천 년 전이라고 주장하고 어떤 이들은 6천년전이라니 터무니없다고 말합니다.
굳세게 6천년전 6일창조를 주장하는 분들은 성경무오설을 내세우고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로 틀렸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 첫머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사역을 보여주시려고 창세기를 기록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는 1절 다음에 “땅이 혼동하고 공허하며.....”라고 땅이 이미 존재하고 있음이 나타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사역의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보여주고 계시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이들은 1절과 2절 사이에는 기록되지 않은 긴 시간과 엄청난 사건이 생략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간격이론(間隔理論, Gap Theory)"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1절에서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절과 2절 사이에 긴 세월이 흘렀다는 것입니다.
그 기간 중에 루시퍼를 위시한 천사들의 3분의 1이 하나님께 반역을 하였고 하늘에서 무시무시한 전쟁이 벌어지고 전쟁에서 패배한 타락한 천사들이 쫓겨나 마귀가 되었고 그 하늘전쟁의 결과로 땅이 망가져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에 덮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간격이론” 역시 하나의 설(說)일 뿐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밝히지 아니한 사실을 억지로 추리해내거나 상상해서 믿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가지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우주만유를 어떻게 만드셨는가를 알아내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아니하고 비밀에 두신 것을 억지로 풀다가 실족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가면 알게 되겠지요.
그보다 우리는 성경이 창조실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려고 기록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한복음 5:39, 예수님의 말씀)

요한복음 1장을 읽어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창세기와 매우 흡사하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계신 말씀은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우주만유를 함께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이 아들 하나님이 빛으로, 그 안에 생명을 담아가지고 이 땅에 오셨는데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 하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지 못 하였습니다. 자신들을 살리려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깨닫지 못 하였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것 같아서 성령의 깨우치심 없이는 눈앞에 오신 그리스도도 알아보지 못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는 그래서 빛이 있기 전에 수면 위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두움에 갇힌 죄인의 마음 위를 운행하실 성령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성령님이 죄인의 마음을 여시는 것으로 시작되며 창세기에서 창조사역은 성령님이 수면 위를 운행하심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창세기는 첫머리부터 예수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신의 마음 위를 성령님이 운행하실 때 마음을 여십시오.
당신에게도 생명의 빛, 예수님의 빛이 비치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 그 풍성하신 역사, 창세기가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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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와 성화? 제발! 한국교회 vs 헤르만 바빙크]

칭의와 성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을 때 한국교회는 믿음과 행위를 대립시키고 서로 싸움질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벌어지는 양상은 좀 다릅니다. 예전에는 무율법주의와 율법주의가 판을 벌였다면, 오늘날은 무율법주의와 신율법주의가 판을 벌리고 있습니다. 믿음과 행위를 모호하게 섞어버리는 것입니다. 칭의에 성화를 뒤섞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전에 그릇되게 칭의만을 강조하는 쪽에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것으로, 그저 천국가는 티켓 하나 확보하는 것 정도의 싸디 싼 복음으로 만들었는데, 최근 이것에 대해 맞짱뜨기 위해 등장한 신율법주의는 인간의 행위와 책임있는 삶을 강조한 나머지 믿음에다 행위를 섞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무용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래저래 우리 구원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는 이쪽 저쪽에서 별 거 아닌 것으로 여김을 받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무율법주의와 신율법주의에 대하여 바빙크는 노, 노우! 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칭의뿐 아니라 성화에도 결정적인, 아니 전부라고 말합니다. 칭의도 성화도, 모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의, 그분의 은덕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칭의와 성화에 대해 바빙크가 뭐라고 말하는지, 한 번 들어보시죠. ^^

헤르만 바빙크는 칭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칭의에서는 우리가, 우리 바깥에 있고 에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를 근거로 죄책과 죄의 형벌에서 해방되었음이 선언되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그 의가 우리의 것으로 간주되며 또한 우리 편에서 믿음으로 그것을 받는다. 그러나 성화에서는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이 지극히 분명하게 성령을 통하여 우리 속에 부어지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우리 속에 부어지는 은혜를 거론할 때에, 우리는 그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다만, 이 은혜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 없다고 선포되는 근거가 되는 그 의의 일부로 본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칭의와 성화가, 죄책으로부터의 해방과 죄의 오염의 제거가, 서로 혼동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그 의의 완전함이 제거될 것이고, 따라서 신자의 영혼은 위로와 확신을 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는 '무조건 예수믿으면 구원얻는다'는 식의 값싼 은혜를 남발하는 한국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반대합니다. 일종의 복음 세일즈죠. 정작은 성공과 번영을 강조하고 예수 믿는 것은 '저 천국'가는 기차티켓으로 확보하려는 한국교회. 예수믿는 것은 이 땅에서의 공의와 형평, 그리고 인애를 행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과는 무관한 것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참된 믿음>에 대해 잘 말하지 않고 있어요. 칭의론 자체가 왜곡되어 있다 이겁니다. 진정한 의미의 복음을 바르게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런 왜곡된 칭의론을 두고 또 다른 신율주의적 언약론으로 칭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에요. 허수아비 논쟁인 거죠. 만약 진정한 의미에서 칭의를 이해한다면, 정말 개혁자들이 말한 복음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그들의 구원론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믿음과 행위가 따로 놀고 칭의와 성화가 싸움하게 할까요?

그런 차제에 등장한 그릇된 신율법주의적 칭의론도 저희는 경계합니다. 율법적 행위를 강조한다고 해서, 삶을 강조한다고 해서 다는 아닌 거죠. 중요한 것은 우리의 율법적 순종을 언약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삼아 최종적 칭의의 근거로 삼고, 그 결과 그리스도의 의를 약화시키거나 파괴하는 심각한 오류니까요. 우리의 유일한 근거인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전가를 배제하는 것은 정말이지 두려운 일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의 실체, 곧 황금사슬임을 못보니까 그래요. 칭의와 성화 등, 구원의 서정을 논리적으로 구분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사건'인 거 거든요. 거듭난 자에게는 참된 믿음의 고백 뿐만 아니라 거룩한 삶으로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귀결되니까요. 이것은 모두가 삼위 하나님의 창세 전 택하심에 기초되었고 그리스도의 십가가의 공로의 효력으로 나타나며 오늘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의 결과이기 때문인 거죠.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라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성화에 대해 바빙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위하여 성취하신 이 성화는 우리의 바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누리는 것이다. ... 우리에게 부어지는 바 은혜라는 것이 실제로 있으며, 우리를 위하시는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도 있으며, 의의 상태로 옮겨지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새롭게 되는 것도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신분만이 아니라 우리의 도덕적인 상태의 변화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칭의와 성화의 모든 은덕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아야겠습니다. 칭의도 성화도 하나님의 큰 일인 거죠. 결국 우리가 자랑할 바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베푸심과 구원의 유일한 공로이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오늘도 고백할 뿐이에요. ^^::

출처: 개혁주의 마을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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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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