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암 환자 치료 중단했는데 오히려 살아나고…

임종예배 두 번 본 자궁암환자
아무 치료 안 했는데도
상태 좋아져 넉달 만에 퇴원
투혼 보이던 또다른 폐암환자는
고통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인공호흡기 튜브를 뽑다가… 
환자가 존엄한 죽음 선택하는
‘존엄사’ 존중받고 있지만
때때로 일어나는 기적을 보며
‘무의미한 연명치료’가 뭔지
그 판단을 의사가 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의사는 환자의 생명을 붙잡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다. 환자를 살릴 수 있다면 무덤까지 따라가 관 뚜껑을 열고서라도 데려와야 하는 직업이 의사다. 그런데 의미가 없는 생명연장에 불과한 치료는 중단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불필요한 치료를 거부할 권리를 환자에게 주는 것을 존엄사라고 한다. 존엄사의 인정은 불필요한 의료비의 낭비를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실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암 환자가 지출하는 치료비용의 거의 절반이 사망 전 마지막 두 달에 집중되어 있다는 통계를 보고한 바 있다. 이렇듯 불필요한 의료비 지출 때문에 남은 가족의 생계가 위협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운동’도 벌어진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무엇이 의미있는 치료이고 의미없는 치료인지 누가 어떤 기준에 따라 결정할 것인가? 그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 사람은 의사다. 의학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냐 그렇지 않으냐를 의사가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과연 의사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정확하게 알 수 있을까?
그의 회복은 의학적 설명이 불가능했다
약 20년 전, 서울 불광동 아파트에 살던 내게는 동갑내기인 우리 부부와 비슷한 나이의 이웃이 있었다. 어느 날 당시 30대 중반이었던 부인이 내가 근무하던 지방의 한 대학병원으로 찾아왔다. 자궁근종으로 진단을 받고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 후 암 진단이 나왔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떼어낸 자궁에서 평활근육종(uterine leimyosarcoma)이라고 하는 드물고 예후가 불량한 암이 발견된 것이다.
몇 달 지나지 않아 그가 병원으로 다시 왔다. 수십개의 ‘결절’이라 부르는 혹이 피부 여기저기에 생긴 것이다. 조직검사를 했더니 전이된 암세포로 나왔다. 두어 달 뒤 아내가 내게 그의 집을 함께 방문하자고 했다. 병세가 많이 악화되어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이유였다. 그는 매우 쇠약해져 있었다. 대화 도중에도 끊임없이 기침을 했고, 기침을 할 때마다 검붉은 피가 휴지에 묻어나왔다. 암이 이미 폐에도 전이된 것이다.
또 두어 달 뒤, 그의 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환자가 쓰러져 곧 죽을 것 같은데, 어디로 가면 되겠냐는 전화였다. 나는 장례식장이 붙어 있는 근처 병원을 안내했다. 몇 시간 뒤 다시 전화가 왔다. 119 구급차를 타고 그 병원에 도착했는데, 원무과에서 말하기를 말기 암 환자는 죽은 뒤 장례식장에서 받아줄 수 있지만 입원을 시킬 수는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내가 근무하는 대학병원으로 오시라고 했다.
응급실에서 환자를 맞았다. 환자는 쇼크상태로 혈압이 많이 떨어져 있었고 의식은 희미한 상태였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폐가 있어야 할 곳이 새하얗게 보였다. 모두 암세포였다. 배에는 지름이 수십㎝에 이르는 커다란 종괴(장기에 발생한 종기)들이 만져졌고 악성 복수가 찬 듯이 출렁거렸다. 기본 혈액검사 결과에서는 혈소판 수치가 크게 떨어져 있는 등 ‘범발성 혈관내응고증’(DIC·혈관에 응고가 일어나 조직 경색과 괴사가 일어나는 증상)도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말기 암 환자는 중환자실의 입원 대상에서 제외된다. 중환자실의 침상은 부족하기 마련이어서 살 수 있는 급성기환자를 우선으로 입원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자가 그날을 넘기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중환자실 실장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환자를 입원시켰다. 가족에게는 임종예배를 보셔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환자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몇 시간 뒤 가족과 친척들 그리고 교인들이 왔다. 목사님도 도착하여 막 임종예배를 시작하려던 순간 어떤 분이 나를 잠깐 보자고 하셨다. 자신을 교회의 수석장로라고 소개한 그는 “저 사람은 죽지 않을 사람인데 임종예배를 보면 어떻게 하느냐”고 질타를 하셨다. 의사가 아닌 분이 의사인 내게 “환자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하니 어이가 없었지만 환자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러는 것이려니 하면서 무시했다. 결국 임종예배를 보았다. 환자는 그날 밤을 넘겼다. 다음날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환자의 의식은 거의 소실됐고 폐 기능은 더욱 떨어졌다. 저녁이 되자 몇몇 가족들이 전날 임종예배에 참석하지 못했다며 임종예배를 한 번 더 드리기를 원했다. 가족들은 결국 두 번째 임종예배를 드렸다.
기적은 그 다음 나타났다. 아무런 치료를 하지 않았는데 환자의 상태가 급속도로 좋아진 것이다. 1만개가 채 되지 않던 혈소판 수치(정상 15만 이상)도 불과 사흘 만에 10만개로 상승했다. 두 달 뒤 환자는 병원 마당을 산책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됐고 입원 넉 달 만에 걸어서 퇴원했다. 암 말기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의학적 치료는 전혀 없었다. 퇴원 뒤 외래에서 만난 그는 호흡곤란도 없었고 별다른 증세도 없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그의 의학적 소견이었다. 흉부엑스레이도 암 전이 상태 그대로였고 피부에 올라온 수십개의 결절도 그대로였다. 크게 줄어들기는 했지만 배에서는 여전히 종괴가 만져졌다. 약 2년 동안 간간이 외래를 방문하며 건강상태를 확인하던 그는 약 3~4년 뒤 연락이 끊겼다. 의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 환자에게 일어난 기적은 ‘무의미한 생명연장’이라는 단어의 정의에 대한 나의 상식과 자신감을 없애버렸다.
심낭창조성술과 1년 뒤 분홍빛 매니큐어
내과에서 진료의뢰가 들어왔다. 환자는 강원도에서 온 40대 초반의 여자 환자였다. 자궁암이 진행돼 암세포가 심장을 싸고 있는 심낭에 전이가 되어 심장 주변에 물이 차서(악성심낭삼출) 심장을 누르고 있는 상태였다. 심장이 눌리면 폐로부터 심장으로 들어가는 피가 원활하게 순환되지 못하므로 폐가 울혈 상태에 놓이게 되어 숨이 가빠진다. 환자를 처음 보았을 때 환자는 숨이 너무 차서 눕지도 못하여 차가운 땀을 뻘뻘 흘리며 침대를 세운 뒤 기대어 앉아 헐떡이고 있는 상태였다. 심장을 누르는 물을 빼기 위해 심낭에 튜브를 삽입하여 물을 빼어주는 심낭창조성술을 해야 했다. 환자는 튜브 삽입 뒤 빠르게 상태가 좋아졌다. 그러나 암 때문에 발생한 악성심낭삼출이었기 때문에 좀처럼 물이 줄어들지 않았다. 이 경우 예후는 대체로 매우 불량하다. 약 일주일이 지나자 환자는 누워서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지만 악성삼출은 하루에 수백㏄씩 계속되었다. 의사로서 환자에게 해줄 것이 없었다. 그런데 몇 주 뒤, 다행히 심낭에서 나오는 악성삼출이 줄어들었다. 튜브도 뽑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약 1년쯤 지났을까? 외래 진료 중이었다. 짙은 화장에 얼굴에는 은빛가루를 뿌려 한껏 멋을 낸 긴 머리를 가진 여성이 진료실에 들어왔다. 그는 차트를 들여다보는 내게 “선생님, 저 못 알아보시겠어요?” 하고 물었다. 나는 전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선생님, 저예요 저….” 차트를 들여다본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눈 앞에서 멀쩡한 모습으로 웃고 있는 그는 일년 전 진행된 자궁암으로 심낭에 튜브를 넣었던 바로 그 환자였던 것이다.
환자는 퇴원 후 특별한 치료를 받지도 않았고 검사를 받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는 인사를 하러 들른 것이라며 검사를 해보자는 내 권유를 무시하고 병원을 떠났다. 말기 암에 대한 나의 의학상식이 두번째 파괴되는 순간이었다.
“제발, 제발 떠나게 해달라”는 호소 앞에서…
나는 성인 심장수술이 전공분야였지만 폐수술 담당교수가 장기간 자리를 비우는 경우 간혹 폐 수술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조기 폐암 진단을 받은 30대 후반의 여성을 수술하게 된 것은 그런 경우였다. 나이 차가 꽤 나는 남편과 일찍 결혼한 그 환자는 중학생 아들과 초등학생 딸을 두고 있었다. 폐암 진단을 받았지만 검사 결과 다행히 초기 상태여서 수술이 결정되었다. 수술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폐를 떼어낸 뒤 찾을 수 있는 임파절들도 모두 찾아내어 떼어냈다. 그런데 폐를 떼어내고 난 뒤 가슴을 닫으려는 순간 절개 부위의 흉벽에 좁쌀보다도 작은, 아주 작은 크기의 결절이 살짝 도드라진 것이 보였다. 수술을 위해 가슴을 여는 부위에 있어서, 수술 도중에는 내내 가려져 있어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혹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작고 납작했고 여러 개가 아니라 한 개뿐이어서 전이된 암덩어리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나는 무시할까 했다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결절을 떼어내고 수술을 마쳤다. 며칠 뒤 나온 병리검사는 큰 충격이었다. 흉벽에서 떼어낸 작은 결절이 전이된 암으로 나온 것이었다. 무척 드문 일이었다. 흉벽의 전이된 암 그것 하나 때문에 환자의 진단이 조기 폐암에서 진행된 폐암 즉 4기 폐암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환자는 수차례의 항암치료를 잘 이겨내고 퇴원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환자가 병원에 와야 할 날짜에 오지 않았다. 그렇게 일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가 남편과 함께 외래 진료실로 들어왔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수술을 한 쪽에 악성흉수(악성종양으로 인해 폐가 들어 있는 공간인 흉강에 물이 차는 현상)가 가득 차 있었다. 환자에게 입원을 권유했지만 그는 입원을 거부했다. 결국 외래 진료실에서 주사기로 악성흉수를 1리터 가까이 빼냈다. 환자의 호흡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얼마 뒤 환자는 다시 병원을 찾았다. 늑골(갈비뼈)에 전이된 암으로 인해 몹시 고통스러운 통증 때문이었다. 나는 마취제로 늑간신경차단술을 하여 통증을 덜어주었다. 그 후에도 환자는 악성흉수가 찰 때마다, 통증으로 못 견딜 때마다 나를 찾았다.
어느 날, 그의 남편이 내게 집으로 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부인이 너무 숨이 차서 병원으로 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퇴근 뒤 주사기를 챙겨서 환자의 집으로 갔다. 환자의 집은 내가 살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악성흉수를 빼고, 늑간신경차단술을 다시 해주었다. 그렇게 수차례 환자의 집으로 다니던 중, 내가 살던 집의 전세의 만기가 되었다. 아내가 내게 말을 꺼냈다. 어차피 이사를 가야 하는데, 환자가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아내는 이미 환자에게 기도를 해주기 위해 몇 차례 환자 집을 방문한 터였다. 나는 환자의 남편에게 물었다. 그러자 남편은 마침 위층에 전셋집이 나왔는데, 내가 그리로 와준다면 좋겠다고 답했다. 얼마 뒤 나는 그 집으로 이사를 했다.
환자의 가족과 위아래집 이웃이 된 이후, 나는 수시로 드나들면서 악성흉수를 빼내고, 늑간신경차단술을 반복했다. 환자는 더 이상 나빠지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아직 어린 아들과 딸 때문에 생명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 집을 방문하는 간격은 조금씩 짧아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에게서 다급한 연락이 왔다. 환자가 자력으로 숨쉬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급히 병원으로 옮겨 예전의 환자처럼 중환자실로 입원을 시켰다. 그리고 인공호흡기를 걸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인공호흡기가 걸려 있어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던 환자는 수첩으로 나와 대화를 했다. 그는 “살고 싶어요”라고 썼다가도, “이제 그만 보내주세요”라고 쓰기도 했다. 그의 생명을 붙잡는 것이 무의미한 일인지 아닌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묶인 손을 움직여 스스로 인공호흡기와 연결된 튜브를 뽑았다. 중환자실은 간호사가 환자 옆을 24시간 지키고 있으므로 곧바로 발견되어 다시 튜브를 삽입하고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그러나 몇 시간 뒤 그는 다시 튜브를 뽑았다. 나는 연락을 받고 그에게로 갔다.
창백한 얼굴의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간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잘 나오지 않는 여리고 쉰 목소리로 “제발…”이라고 겨우 말하고는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그가 말한 ‘제발’은 제발 더 이상 인공호흡기를 걸어 고통을 연장하지 말고 자신을 이제 그만 떠나게 해달라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뜻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였다. 그를 바라보았다. 의학적인 판단에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예전 환자처럼 혹시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의 바람대로 해주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인공호흡기를 걸기 위한 기관 삽관을 하지 않았고 그의 곁을 지켰다. 약 10여분 뒤 그는 평안히 먼 길을 떠났다.
그에게 다시 튜브를 삽입하고 인공호흡기를 걸었더라면 환자의 생명은 조금 더 유지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처럼 불치의 병으로 죽음이 예고된 상황에서 적극적인 치료를 하지 않은 것은 ‘소극적 안락사’에 해당한다. 만일 의사가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약물 등을 사용하여 죽음을 더 빨리 앞당긴다면 그것은 ‘적극적 안락사’에 해당한다. 현재 우리나라 법과 윤리는 ‘소극적 안락사’는 인정을 하고 있으나, ‘적극적 안락사’는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을뿐더러 윤리적으로도 용인되지 않는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소극적 안락사가 의사의 주관에 의해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의사가 소극적 안락사를 결정할 때에도 반드시 환자의 사전동의가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소극적 안락사라는 단어보다 환자 스스로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존엄사’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 최근 환자가 의식이 없는 경우 가족 동의 하에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단하도록 할 수 있는 안이 마련된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그런데 의사는 신이 아니고 의학적 통계에 의해 판단하는 과학자일 뿐이다. 의사의 상식을 비웃으며 죽음의 문턱을 딛고 걸어 나오는 환자가 존재하는 한, 생명연장이 의미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하는 의사의 역할은 어렵기만 하다. 그것은 의사의 몫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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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우리의 첫사랑은 "하늘의 선물" 입니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누군가 돕지 않는다면 일이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 .
또 보기에도 좋지 않다는 것을 . .
내 뼈와 내 살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나 . .
우리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 되었습니다.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운 줄도 몰랐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깨끗하고 투명했습니다.
처음 우리의 사랑은 . . .


<이삭과 리브가>

예 . . ! 함께 가겠습니다.
우리의 첫사랑은 "위로" 입니다.
주위에 좋은 사람이 많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위해 수고한 많은 손길들 . .
먼 길을 마다 않고 달려온 소중한 사람이 있습니다.
더 오랜 시간이 그저 기쁠 뿐입니다.
살아가면서 다치는 어려움과 슬픔들은
우리의 사랑으로 인해 그 흔적을 지웁니다.
오랫동안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던 슬픔의
잔재까지 당신으로 인해 큰 위로를 얻습니다.


<야곱과 라헬>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십 사년을 수일같이 . . .
우리의 첫 사랑은 "인내" 입니다.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쫓기는 삶 속에서 빛으로 가다온 만남.
아리땁고 고운 당신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7년 후 . . .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이 되는 사람.
7일 . . .그리고 또 7년 . . .
힘든 생활 속에서도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이 되는 사람 !
일생을 다 바쳐서라도 얻을 수 있다면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보아스와 룻>

여기서 떠나지 말고 함께 있으라.
우리의 첫사랑은 "순종" 입니다.
그런 서로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하라는 대로했을 뿐입니다.
가슴 졸이며 아파하거나. 안타까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믿고 기다렸습니다.
사랑한다는 단순한 사실하나 만으로 . . .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우리를 있게 하신
그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보았습니다.


<다윗과 아비가일>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우리의 첫 사랑은 "존경" 입니다.
서로가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생각과는 상관 없이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현명함으로, 지혜로움으로
대처할 수 있다면 . . .
이해심이 많고 용모가 아름다운 여인 . .
품은 소망 하나만으로 며칠만에 이루어주신
첫 사랑으로 인하여 행복합니다.
서로가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서로를 축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종이 되어 섬기겠다는 그 고백에
더욱 사랑스럽습니다.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우리의 첫사랑은 "성숙" 입니다.
말 없는 침묵 속에서도 전할 수 있는 . .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노래합니다.
검게 그을린 얼굴위로 흐르는 땀.
보잘 것 없는 그대로를 사랑한 우리
만남의 거품을 행복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달려가는 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갈등과 오해 속에서도
우리는 노래합니다.
성숙된 사랑을 기대하며
여물어 가는 우리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호세아와 고멜>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우리의 첫사랑은 "기다림" 입니다.
내 뜻은 아니었습니다.
정결하고 깨끗한 사랑을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타락한 세상만큼 사람과의 만남은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떠나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내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잠시 떨어져 있어도 기다리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한 그 분의 한없는 사랑
함께 있을때 변화하는 세상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우리>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져라.
우리의 첫사랑은 "보혈" 입니다.
잊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쉽게 얻었던 첫사랑에 대해서
셀 수도 없는 큰 대가를 지불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아직 남아있는 불씨를 찾아
언젠가처럼 훨훨 타오르던
붉은 사랑 꽃 피우고 싶습니다.



 




                                                                          


대장쟁이

네델란드 기업가 바스 란스돌프(Bas Lansdorp)가 2023년까지 화성에 지구인을 보내는 ‘마스 원(Mars One) 프로젝트’를 추진한답니다. 처음에 4명을 보내고 그 후 2년마다 4명씩 더 보내는 식으로 보낸답니다. 지난 4월 22일부터 화성으로 갈 희망자를 모집했는데 불과 2주일 사이에 7만 8천 명이 지원을 했답니다. 화성까지 가는데만 약 8개월이 걸리고 지구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편도우주여행인데도 말입니다. 지원한 희망자는 미국인이 1만 7천 324명, 중국인이 1만 241명, 그 다음으로 영국인이 3,581명이랍니다. 지구를 떠나고 싶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은가, 놀랍습니다.





화성까지 지구인들을 싣고 날려 보낼 우주선은 우주정거장까지 화물을 싣고 오가던 무인 우주왕복선 드래건(용)호를 개조해서 사용할 것이랍니다. 화성에서 지구로 귀환할 수 있는 기술력이 지금은 없기 때문에 화성에 가면 거기에서 살든지 죽든지 해야 한답니다.

소요경비는 약 6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데 란스돌프는 이 경비를 “마스 원 프로젝트” 전세계 TV중계권 판매로 충당할 것이라고 한답니다. 화성 우주인들이 화성으로 출발하여 도착하고 화성에 정착하여 생활하는 전 과정을 TV로 생생하게 중계한다는 것입니다.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처럼 말입니다.

마스-원 프로젝트는 올 8월 31일까지 화성 이주희망자 지원을 받고 전세계 300개 지역에서 1차로 50~100명씩 선발하고 다시 네 차례의 선발과정을 거쳐 28~40명을 선발한 다음 7년 동안 우주인 훈련을 시킬 예정이랍니다.


화성에 우주인 정착촌이 건설된 상상도를 보면 근사해 보이기도 합니다. 원추형 우주선 단독주택들이 줄을 지어 이어져 있고, 사다리인지 계단인지도 보이고, 앞에는 태양광발전설비가 펼쳐져 있고, 자동차 같은 것도 서 있고 흰 우주복을 입은 우주인들도 보입니다. (사진이 안 올라가네요)
멋있어 보입니까? 지구로부터 아득히 먼 우주공간의 별천지가 환상적으로 보입니까? 당신도 화성 우주인으로 지원해 보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화성은 태양으로부터 1.52 AU(1 AU는 지구-태양 간 거리, 1억 5천만 킬로미터), 즉 태양으로부터 약 2억 3천만 킬로미터 떨어진 타원의 궤도를 686.98일 (1.88년)에 한 바퀴씩 공전하고 있습니다. 화성은 지구보다 훨씬 작습니다. 지름이 6,794 ㎞로 지구지름의 절반이 약간 넘고, 질량은 지구의 10분의 1이 조금 넘을 뿐입니다. 화성표면의 중력은 지구의 0.38배에 불과합니다. 체중이 3분의 1 정도로 줄어드니까 헤비급 체중을 가진 사람도 화성에서는 몸이 가벼워져서 날아갈 듯 한 기분을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화성의 자전주기는 지구와 아주 비슷한 긴 24시간 37분입니다. 또 자전축의 기울기도 지구가 23.5도인데 비하여 25도로 아주 비슷하여 낮과 밤, 그리고 계절의 변화도 지구와 비슷할 것으로 생각지만 낮에는 기온이 25도 가까이 올라가고 밤에는 영하 110도까지 떨어집니다. 하늘에는 감자처럼 생긴 조그만 달이 두 개나 떠다닙니다.  

화성의 대기는 지구의 100분의 1에 불과합니다. 대기라 할 것도 없습니다. 뭐, 진공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주성분은 95% 탄산가스입니다. 오존층이 없고 자기장도 없으므로 태양광선의 자외선이 살인광선처럼 대기를 통과하고 우주로부터 방사능 입자들이 쏟아져 들어올 것입니다. 더러 먼지폭풍도 분답니다. 만일 인간이 우주복 없이 화성의 대기 속으로 나선다면 화성의 낮은 대기압이 고성능 진공소제기처럼 달려들어 호흡과 혈액의 산소와 수분을 증발시키면서 뽑아내어 인간의 몸을 순식간에 북어처럼 말려버릴 것입니다. 우주선 주거공간에 그대로 머문다 할지라도 우주방사선을 얼마나 막아낼 수 있을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화성에서는 화성의 지표면에 놓여있는 것이 다를 뿐 우주정거장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우주복을 입고 밖에 나오는 것 말고는 그저 거주 공간 안에 전자게임이나 하면서 갇혀 있는 것밖에 할 일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지구와의 무선통신이나 인터넷이 가능하긴 하겠지만 지구와 화성 사이를 전파가 오가는데 몇 십 분이나 걸리니 그것도 문제입니다.

지구로부터 가져갈 수 있는 식량이나 물이 얼마나 될지, 화성에 도달할 때까지 좁은 우주선 안에 갇혀 캄캄한 우주공간을 8개월 동안 날아가는 동안 우주인들이 정신적 고통과 우주방사선 속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무중력상태가 가져올 무기력증과 골다공증 그리고 정신적 스트레스, 인간관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화성에 도착한 다음 어떻게 식량과 물을 조달할 수 있을지, 화성의 혹독한 환경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불의의 사고는 없을지, 과연 정착이 가능할지.....

화성은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트루먼 쇼’ 같은 흥미로운 TV중계가 아니라 화성우주여행과 화성착륙의 위험한 순간들과 화성에서 우주인들이 하루하루 당하는 고통과 비극, 인간의 무모한 실험결과를 TV중계로 지켜봐야 할지, 란스돌프가 이 미래지향적이고 창의적인(?) 프로젝트를 통하여 거부와 유명인사가 될 수 있을지, 결국 악한 인간들의 호기심을 이용하여 살인쇼를 벌인 악마가 될지.......  
지구에 매장지가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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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새다짐 10계명



1.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하겠습니다.
2. 나는 항상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말을 부드럽게 하겠습니다.
3. 나는 어느 자리에서나 예절을 지키고 친절하겠습니다.
4. 나는 기본 질서와 규칙을 잘 지키겠습니다.
5. 나는 양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먼저 양보하겠습니다.
6. 나는 항상 겸손하고 근면 성실하게 살겠습니다.
7. 나는 할 일을 미루지 않고, 회피하지 않고 즉시 하겠습니다.
8. 나는 나 자신 보다는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겠습니다.
9. 나는 기도하고 찬송하고 헌금하는 신앙의 기본 의무를 다하겠습니다.
10.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고 살겠습니다.

--------------------------------------------------------------------------------------

처음보는 말들은 아닌데 윗 글을 보다보니 저를 돌아보게 합니다.

사람들 앞에 서는 일들이 많을 수 밖에 없는 삶이다보니^^

하나하나가 제게 꼭 필요해보이구요

저와같은 공감들 하시죠?^^

성령의 충만함으로 온전히 고품격의 그리스도인이고 싶어 묵상하며 함께 나눕니다.

평안하세요~ 샬롬^^

<옮긴 글>


먼저 행복한 목회자가 되어야 !

목사들은 대부분 목회에 성공해서 행복한 목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는 원초부터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목회는 목회자가 주님의 명령을 이루어야 할 지상(至上)의 목표이지 자신의 행복을 이루는 수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내 모든 것을 다 투자해서 이 지상의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야 합니다.
목회자의 잘못은 목회를 수단으로 내 행복의 쟁취를 목표로 삼는 데 있습니다.
이는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목회는 행복한 목회자가 해야 목회가 됩니다.
즉 행복하지 못한 자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영역이 목회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하지 못한 자는 목회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목회란 복음(행복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행복한 생활을 코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복음을 가르치고 지도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마치 축구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체육 교과서를 보고 축구 코치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목회자는 목회를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행복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행복한 자가 될 수 있을까요?
구원 받은 성도가 행복해지는 것은 참으로 간단합니다.

저는 서울 도봉동에 있는 도성교회 전도사로 있을 때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낸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담임 목사님이 병원에 입원 중이실 때 도봉시장 상인 한분이 찾아와서 자기 남편이 귀신들려서 자기를 죽이려 하니 목사님께서 오셔서 남편에게 들어온 귀신을 내어 쫓아달라는 것입니다. 그 때 강 장로님이 그 말을 듣고
“목사님이 안 계시니 예 전도사님께서 심방을 가셔야 하겠습니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앞장서는 바람에 저는 강 장로님과 권사님 두 분을 모시고 난생 처음 귀신을 쫓아내는 심방을 하게 되었습니다.

강 장로라는 분은 방언의 은사를 받은 분인데 목사의 평가를 귀신 쫓아내느냐, 못 내느냐로 진위를 가리는 분이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면 그는 가짜 목사라고 공언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그 때 제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여태껏 귀신을 쫓아보지 못하였고, 귀신 쫓아내는 것을 구경해 본적이 없었던 나로서 만약 이때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면 “내 목회 길은 끝장이겠구나!” 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그 집에 도착했습니다.

강 장로님이 먼저 대문을 열고 호기 있게 앞서 들어갔습니다.
그 때 마루위에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장정(귀신들린 남편)은 키가 육척이 넘어 보이고 기골이 장대하여 보기만 해도 조폭 두목 같은 무서운 인상을 풍겼습니다.
먼저 강 장로님께서 호통을 치셨습니다.
“허우대가 멀쩡한 사람이 연약한 아내를 때리고 학대를 하느냐?”
이 소리에 장대한 남편이 귀신들린 자의 특이한 눈빛으로 강 장로를 당장 요절이라도 낼 기세로 주먹을 휘두르며
“너는 또 웬 놈이냐? 어제는 경찰관 나부랭이가 와서 쫓아 버렸더니 오늘은 또 웬 놈이 와서 귀찮게 구느냐?”
라고 소리치면서 마루에서 내려서려는 순간 저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게 주의 종에게 무슨 망령된 소리냐? 거기 꿇어앉지 못해!”
라고 꾸짖었습니다.
그 순간 내 눈을 의심할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꿇어앉으라면 꿇어앉으면 되지요.”
라며 사자 같은 기세로 덤비던 사람이 그만 순한 양같이 돌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운데 예배를 드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더러운 귀신아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
라고 일갈했더니 그 순간 귀신은 나가고 남편은 제 정신으로 돌아 왔습니다.

아, 그때의 제 심정은 천하를 다 얻은 것 같은 행복감으로 가슴이 벅찼습니다. 그 순간 저는 목회자가 된 것이 한 없이 기뻤고, 이 세상 어떤 자 보다 더 행복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 귀신을 쫓아내는 것보다 더 기쁘고 행복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 것은 예수님의 피 공로로 죄 사함 받고 구원받은 사람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사실이라 했습니다.
구원받은 확신이 있는 자는 이 세상 어떤 자보다 더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행복하지 못한 목회자가 있다면 이는 구원의 확신이 없는 짝퉁 목사 입니다.
진정한 목회자는 이 세상에서 그 어떠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사실을 더 기뻐해야하며 , 이 세상 그 어떠한 환란과 고통이 닥쳐와도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빼앗길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의 기쁨은 충만했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2:17-18)

그렇습니다. 만약 행복하지 못한 목회자가 있다면 그는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확신도 없고 행복하지도 못한 자는 참 목회자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10:20)

원로 Essay중에서
성도교회 원로목사 예종규
http://cafe.daum.net/y9144
http://ye9144.hosting.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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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유성구에 목원 대학교라는 감리교 소속 기독교 종합대학교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일이 26년째 년례 행사로 계속 되고 있다는군요

그것은

목원대 총장 승인하에 국문과에서 26년째 지내는 유교적 행사인 고사를 대학구내에서

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사건 당일


교수들과 학생들이 모여서 고사상을 차리고 고사제를 지내려는데

신학과 학생 한명이 오더니 기독교 학교에서 불교적행위를 하지 말라고 말하니

하지만 교수가 이것은 유교적 행사일뿐 불교적 행사가 아니다라 하니까 신학대 학생이 돌아갔다가

고사제 하는 순간 현장에 다시 나타나 교수가 보는 앞에서 볼리베어처럼 고사장 뒤엎은 사건입니다

신학교로 시작했고 종합대학교가 된 현재까지

설립목적이나 교훈이 기독교적이며 신학대학교와 신학대학원까지 있으며

매년 많은 목회자를 배출하는 대학교에서 우째 이런일이 26년째 가능 했단 말입니까?

불교나 유교나 기독교적관점에선 모두 적그리스도 행위인것을 왜 모르시나요

정말 큰일은 큰일 같습니다

home 대학소개 > 목원대 소개 > 대학 상징 > 캐릭터

대학 상징

캐릭터

목이&원이(Character) 기본형

목원대 캐릭터와 main color M34Y87 M11Y14 C40M100Y80  C85M23  C58M12  C26

목이는 목원대학교의 영문표가 &quot;Mok&quot;의 첫글자 &quot;M&quot;과 건실한 목원대학교 남학생을 상징하는 &quot;Men&quot;의 첫 글자 &quot;M&quot;을 이미지화 하였다.

목이는 가장 대중적인 대학 초년생이지만, 정보화시대에 개성이 뚜렷하면서 목표와 비젼이 확고한 신세대의 표상이며 ,분명한 자의식과 냉철한 지성, 성실한 행동으로 이 사회를 이끌어 갈 주목받는 목원대학생을 상징하고 있다. >

반면 원이는 목원대학교의 영문표기 &quot;Won&quot;의 첫 글자 &quot;W&quot;와 참신한 목원대학교 여학생을 상징하는 &quot;Woman&quot;의 첫글자 &quot;W&quot;를 이미지화 하였다.

이는 목원대학교의 개교이념을 살려 천사의 이미지를 형상화 하였다. 특히 원이는 기독교의 기본 정신인 사랑과 평화를 전달하는 메신져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처럼 원이는 내적으로는 영적,정신적 필요에 응답하는 수호천사이며, 외적으로는 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능력과 열정을 갖춘 목원대학교 여학생을 상징한다.

<목이와 원이>는 목원대학교의 미래 지향적 이념을 표현하며, 분명한 목표의식과 균형있는 성장으로 주목 받는 목원대학생의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친숙한 목원대학생을 대변하며 문자적 형상 "M" "W"의 균형과, 부를 때의 자연스런 발음은 "목이와 원이"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말해준다.

<목이와 원이>는 시대감각이 뛰어나며 깨어있는 지성의 목원대학교를 상징하므로 많은 목원인들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이렇듯 학교상징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독교 학교인것 만큼은 사실 같은데 26년째 무속행사를 정기적으로

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랫 영상이 관련영상입니다


  

영국 여류화가의 눈에 비친 조선

1919 ~ 1938

Elizabeth Keith

 
18195525_62.jpg


한국에서 키스는 오랫동안
잊혀진 화가 였다.
우리나라에는 남아있는 작품이 거의없었고
,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화가가 아니라
미술가들도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키스의 작품에
관심을 갖고 오랫동안
한 점 두 점 수집했던
송명달 이스트 캐롤라이나
대학 명예교수의 노력으로
,
2006 929부터
이듬해
56일까지 전북도립 미술관
,
국립현대미술관, 경남도립미술관에서
푸른 눈에 비친
옛한국
, 엘리자베스 키스전.이 열리면서 알려졌다.

 
 일제강점 36. (1910 829 ~ 1945 8 15)

일본인들에게 온갖 핍박을 받았던 치욕의 세월.

 

스코틀랜드 출신 영국인으로 한국을 찿았던 여류화가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서울과 평양은 물론 금강산, 수원, 원산, 함흥과 시골등..

한국의 구석구석을 여행하며 그 모든 것들을 화폭에 담았다.

우리에게는 모두가 귀중한 역사자료다.

 

그녀는 평생을 독신으로 보내며 한국을 비롯한..

일본, 중국, 필리핀등 동양의 나라들을 섬세한 화풍에 그려 넣었다.

키스의 작품 중 현재 전해지는 우리나라 소재 작품은 66점이다.

작품 하나하나를 살펴 보면, 그녀가 얼마나 정감어린
시선으로 이땅의 풍물들을 그렸는지 쉽게 느낄 수가 있다
.

 

지난 십 수년간, 조선의 탁월한 그림, 도자기, 조각들이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

나는 일본이 이 귀중한 문화재를 본고장인 한국으로 반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올바른 처사이기 때문이다.'

글을 통해 엘리자베스 키스가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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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행렬: Marriage Procession, Seoul (1921)
*당시 청계천의 풍경이다.
 


 
18183053_10.jpg
**좁은 대청과 마당에서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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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집: 제목은 '식당 풍경'
 
 
 
 
18184602_36.jpg
**Court Musicians, Korea (1938)
 
 
 

18183053_22.jpg
(*East Gate, Pyeng Yang, Korea (1925)
 
 
 
 
18195525_67.jpg
**동산에서 신나게 연을 날리는 아이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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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가에서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고 있다’: 'Water Gate, Suwon'
 
 
 
 
18183053_23.jpg
**’동대문의 해돋이’: East Gate, Seoul, Sunrise (1920)


 

18183053_12.jpg
**부유한 한 가정의 모습: 장농과 요강, 나막신과 고무신등이 보인다.
 
 

 
두 명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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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을 하는 여인: 뒷 모습의 자태를 아름답게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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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자가게: 옛날 선비들은 갓을 쓰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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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Temple Kitchen, Diamond Mountains, North Korea (1920)

*다이아몬드 마운틴은 금강산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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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의 잔치상: Country Wedding Feast (1921)
 

 
 
18184602_42.jpg
**서울에 실제 있었던 중국 장수들을 숭배했던 사당: 'temple Interi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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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하는 처녀: Embroidering, Korea (1921)
 
 
 
 
18183053_13.jpg
**함흥 아낙네: A Hamheung Housewife

 
 
 
 
* Korean Mother and Child (1924) - 엄마와 아이
 
 
 

18184255_25.jpg
**피리부는 사람:  The Flute Player (1927)
 
 
 
 
18184255_27.jpg
**북치는 사람: The Gong Player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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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앞바다 : Wonsan, Korea (1919)
 
 
 
 
18183053_18.jpg
**제목은 '대조’(contrasts)'
*아기를 업은 여인이 부자집 하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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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아침: New Year's Shopping, Seoul (1921)


 
 
18184602_35.jpg
**From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1921)
 
   
 
 
18183053_21.jpg
**금강산 구룡폭포: Nine Dragon Pool, Diamond Mountains (1921)
 
 
 
 
18184255_26.jpg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 오는 길 ‘Returning from the Funeral’ (1922)

 

 
 
 
18184602_34.jpg
**양반: Korean Nobleman (1938)
 
 
 
 
18184255_32.jpg
(*신부: Korean Bride (1938)*
*신부는 안방에 앉아 눈감은 채로 조용히 앉아만 있어야 한다.
*반면에, 신랑은 다른 별채에서 온종일 친지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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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씨가의 규수: A Daughter of the House of Min (1938)
 
그림 속의 주인공은 <순종실록>에 덕혜옹주의 '학우'로 등장하는 민용아이다.
명성황후의 조카딸이자 민영환 충정공의 조카로 알려져 있다.
덕혜옹주에게 손위 종질녀(외종사촌의 딸)가 되고 이런 인척관계 때문에
'덕수궁 유치원'과 '일출소학교'를 함께 다니며 '친구'노릇을 했다.

*
키스는 머리에 쓰는 조바위와 그 앞으로 늘어뜨린 산호구슬도 섬세하게 묘사했으며..
*밑으로는 예쁜 신발 '운혜’(雲鞋)를 살짝 그려 넣었다.




왼쪽에서 두번째가 민용아, 그 오른쪽이 덕혜옹주



 

우리나라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키스는,
이 여인의 머리 부분의 장신구를 섬세하게 묘사했다.
이마와 귀를 가리면서 윗부분은 드러내는 조바위와
그 앞으로 믈어뜨린 산호구술은 당시 상류층 여인의
화려한 삶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코끝이 살짝 보이는 신발은 조선시대 상류층 부녀자가 신던
'운혜(雲鞋)'다. 제비의 부리같이 생겨서 '제비 부리신'이라도 불리는
운혜는, 겉은 분홍색 구름무뉘를 장식한다.
 
여인 뒤에 있는 옥색 병풍의 그림은 <백동자도>다.
시집가서 아들을 많이 낳으라는 의미로 그런 조선시대 그림인데,
그림의 격이 높아 도화서 화원이 그린 고급 병품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엘리자베스의 크리스마스실 
 
 

 

1940
1940

1936                                                   1934
 
 
 
 
18184602_33.jpg
**조선의 두 아이(1925)
 
 
<조선의 두 아이>는 색동저고리와 꽃신을 신고 손을
잡고 있는 오누이가 정겹게 느껴지는 목판이다.
한옥 지붕위에 앉은 잔설과 초가집,
그리고 아이를 등에 업은 채 물동이를 이고 비탈길을 내려가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은 아련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이 그림은 1940년에 발행된 실의 도안으로 사용 되었다.
키스는 우리나라에 올 때마다 해주결핵요양원을 운영하던
홀 박사와 교유하며, 1934년, 1936년, 1940년 크리스마스실
도안을 그려줬다. 그러나 이 그림으로 인쇄한 1940년
크리스마스 실은 일본군의 국방안보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인쇄가 끝난 후 압수당했다.
 
 
 
 
 

 

높이가 20미터를 넘는 배경의 산 그리고 일본 건국 2600 대신 표기한
1940이라는 서기연도가 문제가 되었다. 화가 난 키스는 일제의
검열 아래서는 절대 실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며  짐을 쌓으나,
홀 박사의 설득으로  화가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고쳤다. 
 
아이들과 산 사이에 대문을 그려 넣은 것이다. 홀 박사는 일본 건국연도
대신 실 보금운동이 9년 되었다는 의미에서 'Ninth Year'라고 표기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1940년 실을 발행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일제강점기에 더 이상의 실은 발행되지 못했다.
그래서 키스의 판화 <조선의 두 어린이>는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마지막 크리스마스실의 도안 작품이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우리 문화를 세계 각국에 알렸다.

1940년 이후 더는 우리나라에 오지 못했지만,
광복 후 우리나라를 소재로 한 그림, 역사, 문화,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글을 함께 묶어 <옛 한국>을 출판했고,
책 첫 페이지에서 당시 일본에 있던
맥아더 장군에게 헌정한다고 밝혔다.

 
한국이 서구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미개한 나라가 아니라,
오랜 역사와 훌륭한 문화를 가진 나라임을 알리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키스는 이렇게 우리나라를 사랑하다가
1958년 영국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전시 작품 중 일부
 
 
18195525_63.jpg
*Young Korea (1920)
키스의 초기작 중의 하나인데 그림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아이들이 설빔 차림을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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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례하객 Wedding G, Seoul(1919)
 
 
"일본 여자들은 두 다리를 붙이고 무릎을 끓고 바닥에 앉아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반면에 한국 여자들은 가부좌로 앉아서 피로하면 서슴지 않고 수시로
다리를 고쳐 앉는 게 풍습이다. 교회에 나온 한국 여자들을 그리다 보면,
다리를 고쳐 앉을 때마다 치마가 불쑥하게 들어올려졌다
내려앉았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재미있는 광경이다."
 
 
18183053_11.jpg
미망인 The Widow(1919)
 
 
"온화하면서도 슬픈 얼굴을 한 이 부인은 한국 북부 출신의 여인이다.
한국에서는 남남북녀라 하여 북쪽의 여자를 더 쳐준다.
모델을 서려고 내 앞에 앉았던 그 당시, 일제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풀려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몸에는 아직도 고문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였고 원한에 찬 모습은 아니었다.
타고난 기품과 아름다움이 전신에서 품어져 나오는 여인이었다.

이 과부는 남편의 죽음을 마냥 슬퍼 할 처지가 못 되었다.
외아들은 일제히 끌려갔고 그녀는 언제 그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기약이
없는 상태였다.  아들은 삼일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애국자였다.
이 그림을 그린 것은 여름이었다. 여자는 전통적이고 폭넓은 크림색
치마르 입었고 그 속에는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저고리는 빳빳한 삼베였다.
북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풍습대로 머리에 두건을 두른다.
무척이나 더운 날씨인데도 여자는 그런 두건을 쓰고 있었다.
여자의 머리는 숱이 많고 길었으며 그것을 땋아서 머리에 감아올리고 있었다.
 
 
 
 
18183053_17.jpg
*’장기를 두고 있는 두 분 할아버지’:  A Game of Chess (1936)
 
 
"전형적인 한국 시골의 두 노인이다. 한국에서는 남자들이 장기를
두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때로는 길가에 앉아서도 한다.
한국에는 놀이가 여러가지가 있지만,
내가 보기엔 여자들에겐 그네뛰기가 유일한 놀이이다.
그들은 우리 스코트랜드 여자들보다 훨씬 높이 그네를 탄다.

그네 타는 여자들은 자리에 앉아서 타는 것이 아니라 일어서서 탄다.
그네는 대개 소나무에 줄을 맨 것이지만,
때로는 벽돌로 세운 기둥에 매기도 한다.
그네는 이런저런 명절에 타기도 하지만 주로 봄에 타는 듯 하다."
 
 
 
 
조선의 아침 안개 (1922)

"우리가 있는 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금강산 입구인데,
눈을 들어보면 끝도 없이 산들이 중첩해 있다.
이른 아침에 계곡을 내려다보면 아침 안개,
아니 밥 짓는 연기 같은 것이 올라오는데
소나무 타는 향기가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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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김윤식 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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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부벽루: Riverside, Pyeng Yang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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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의 두 여인: A Morning Gossip, Hamheung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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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복 차림의 젊은 벼슬아치: Young Man in 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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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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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Buddha's Birthday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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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연날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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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아기: Mother and Child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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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 엽서: 나들이


 
 
 
 
 
Black & 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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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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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갓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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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이 춤추며 굿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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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동기'라는 이름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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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옷 입은 여인의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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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복의 젊은 벼슬아치가 책을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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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천시 쓰는 모자와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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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농부와 시골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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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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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옷을 입은 공주

 
 
 
 
Elizabeth Ke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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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7-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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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와 돈은 쉽게 헤어진다’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이 얼마나 진리인가를 보여주는 사례로 복권 당첨보다 나은 것은 없어 보인다. 뉴저지에 살던 에블린 애덤스는 85년과 86년 총 540만 달러에 달하는 복권에 연속 당첨되는 기적을 만났다. 그러나 이 돈을 도박장이 있는 애틀랜틱시티에서 모두 날리고 지금 트레일러 팍에서 파산 상태로 살고 있다.

1988년 1,600만달러짜리 펜실베니아 복권에 당첨된 윌리엄 포스트의 삶은 더 극적이다. 그의 전 여자친구는 재산 분할을 요구하며 소송을 걸어와 승소했다. 친동생은 유산 상속을 노리고 청부 살해업자를 고용해 죽이려 했고 친척들은 끊임없이 돈을 요구했다. 1년 만에 그는 돈을 모두 날리고 100만달러의 빚까지 진채 푸드 스탬프와 월 450달러 소셜 시큐리티에 의지해 살아야 했다.

1989년 310만달러짜리 미시건 복권에 맞은 윌리 허트는 2년 뒤 이혼 당하고 자식의 양육권을 빼앗긴 뒤 살인 미수 혐의로 기소됐으며 전 재산을 날리고 코케인 중독자로 전락했다.

2006년 190만 달러짜리 영국 복권에 당첨된 루크 피타드는 여행 경비와 결혼식 비용 등으로 1년 반 만에 돈을 탕진하고 맥도널드에서 일하고 있다.

1997년 3,100만달러짜리 텍사스 복권에 당첨된 빌리 해럴은 흥청망청 돈을 쓰다 아내와 이혼한 후 돈을 모두 날리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제프리 댐피어는 1996년 2,000만달러짜리 일리노이 복권에 당첨됐다. 그는 이 돈으로 친척들에게 집을 사주고 팝콘 비즈니스를 시작해 돈도 곧잘 벌었다. 그러나 2005년 차가 고장 났다는 처제의 전화를 받고 그 집에 갔다 처제와 그 남자친구에 의해 납치됐다 살해당한다. 범인들은 결국 잡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캐나다 온타리오에 살고 있던 배리 셸은 2009년 380만 달러짜리 복권에 당첨됐다. 그러나 그는 절도 및 장물 취득 혐의로 지명 수배된 상태였다. 그가 돈을 타러 오자 경찰을 그를 체포했다.

복권 당첨자 중 아마 가장 비극적인 경우는 당첨 액수도 가장 컸던 2002년 잭 위테이커 케이스일 것이다. 건축업자로 행복한 삶을 살던 그는 그 해 크리스마스 3억 달러가 넘는 당시로서는 사상 최대 복권에 당첨됐다. 그는 수천 만 달러를 교회 등 자선단체에 헌금했으나 돈을 달라는 사람들의 행렬은 그치지 않았다. 그는 결국 술집을 전전했고 여러 차례 강도의 표적이 됐다. 차 4대를 사주고 주급 2,000달러를 주던 애지중지하던 손녀딸은 마약에 중독돼 시체로 발견됐다. 지금 무일푼인 그는 “그 때 복권을 찢어 버리지 않은 게 천추의 한”이라며 후회하고 있다.

복권 전문가들에 따르면 거액 당첨자의 70%가 수년 내 돈을 모두 잃는 것으로 나타났다. 위의 사례가 보여주듯 당첨자들은 투자하자, 꿔 달라, 그냥 달라 등등 끊임없는 돈 요구에 시달려야 한다.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부모 자식 형제 자매 관계도 엉망이 된다. 실제로 자식이 당첨금을 나눠주지 않는다며 소송을 제기한 엄마와 83세와 87세 된 할머니 자매가 당첨금 배분을 놓고 소송을 제기한 사례가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사기꾼과 강도의 표적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이로 인한 스트레스로 마약 중독자로 전락하기도 한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만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에 차 있다.

6억4,000만달러에 달하는 사상 최대 메가 로토 당첨자가 지난 주말 마침내 나왔다. 여기 당첨될 가능성은 1억7,000만 분의 1로 한 자리에서 벼락을 세 번 맞을 확률이라고 한다. 맞는 티켓이 3장이라니까 세금을 제하고 일시불로 받는다면 장 당 1억 달러 정도다. 불행의 씨앗이 되기에 충분한 돈이다. 그리스에 ‘신이 인간을 벌하려 할 때는 그 소원을 들어준다’는 속담이 있다. 이 돈을 받게 된 사람이나 받고 싶은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큰돈은 내가 만지기에는 약간 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번쯤 해보기 바란다


엘리야로 인하여 사르밧 과부의 통과 병에 가루와 기름이 다 하지 않는 기적이 계속되고 덕분에 극심한 삼년동안의 가뭄 속에서 과부와 그 아들은 엘리야와 함께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 때 사르밧 과부의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습니까?”였습니다. “당신이 왜 내게 오셨단 말입니까? 당신이 오시지 않았다면 그저 세상풍조 가운데, 죄 가운데 섞여 맘 편하게 흘러가고 있었을 텐데 당신이 오셔서 나의 죄를 깨우쳐 나를 괴롭게 하고 그 죄로 인하여 내 아들이 죽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한 움큼의 가루와 한 방울 기름을 먹고 죽으려고 하던 삼년 전 그 때를 잊어버린 듯이 엘리야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과부에게 생각난 죄는 무슨 죄였을까요? 과부가 무슨 간음죄 같은 죄를 저질렀던 것일까요?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과부에게 생각난 죄는 하나님께 대한 죄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합과 이세벨의 폭정 하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대세에 이끌려가며 저지르는 우상숭배의 죄였을 것입니다. 목숨을 위하여 하나님을 버린 죄였을 것입니다. 과부는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와 함께 삼년동안 지내면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그 죄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진노하고 계신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부에게는 삼년동안 가루가 다 하지 않고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기적만 필요하였을 뿐, 그런 문제는 엘리야의 문제이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과부가 울부짖자 엘리야가 그 죽은 아들을 자기의 거처하는 다락에 안고 올라가 자기 침상에 눕히고 하나님께 간구하였고 아들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제야 과부는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인 줄 아노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과부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하다고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만일 삼년동안의 가뭄이 끝난 다음 아무 일 없이 엘리야가 과부의 집을 떠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 같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 목숨의 문제만 해결되면 하나님은 큰 필요 없습니다. 가루와 기름이 다 하지 않는 기적이 중요하지 죄와 영혼의 문제 따위는 별 문제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개인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적 풍조로 인하여 “너는 너, 나는 나”, 목회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거나 서로간 프라이버시에 속하는 일은 건드려지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쓰디쓴 죄와 회개의 말씀은 덮어둔 채 가루가 다 하지 않고 기름이 없어지지 않는 축복의 말씀만 달콤하게 먹이다가 떠나기도 하고 성도들은 그렇게 삼년가뭄을 잘 지내고 떠나기도 합니다. 이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들의 죄를 건드려 생각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고백이 있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루와 기름이 다 하지 않는 기적’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나를 괴롭게 하려고 내게 오셨습니까?” 엘리야의 모습과 과부의 고백을 통하여 진정한 목회자상을 생각해 봅니다. 이 어두운 시대일수록 더욱 절실히 필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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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 유물론과 세속성에 대한 성경의 위치는 무엇인가?

열 번째 질문 

하나님의 성회는 창설 초기부터 일상생활의 필요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우리 주님께 사랑의 표현으로 헌신적 헌금을 드리고, 또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것 보다는 영적 가치에 대한 성경의 주제들에 대해서 강조해왔습니다. 우리들을 세상으로 이끌며, 영 원한 진리와 가치로부터 멀리하도록 만드는 것은 그 무엇이든지 모두 세속적인 것입니다. 물질주의, 혹은 세속적인 소유물에 마음을 두는 것은 인간이 받는 가장 강한 유혹 중의 한 가지입니다.

성경에서는 부(富) 그 자체를 견책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하나의 선물과 축복으로 인식되며, 특별히 그것을 구하지 않을 때 더욱 그렇습니다 (열왕기상 3:13). 그러 나 성경에는 부의 위험과 그것의 적절한 사용에 대한 여러 말씀이 있습니다.
부는 부 그 자체를 위해서 축적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부정 또는 탄압을 통해서 얻어져서는 안 됩니다. 부는 흔히 탐욕으로 연결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우 리들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단지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우리들이 그것을 가 난한 사람이나 연약한 사람, 그리고 압제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을 때 우리는 죄 를 짓는 것입니다 (에스겔 22:29). 관대함은 기독교인이 부를 사용하는 표시입니다.
몇몇 기독교인들은 부유함을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기본적인 음식, 의 복, 그리고 거주지를 위하여 필요한 것보다 더 가지고 있을 때, 우리들은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과 비교해 볼 때 부유합니다. 부와 물질에 대한 유혹은 부자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자들이 가지는 욕심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들이 가지는 욕심은 유물론에 대한 징후 입니다.
세속적 사회는 항상 부와 물질의 소유에 높은 값어치를 두어왔습니다 (누가복음 16:9,11에 기록된 불의의 재물). 이러한 것을 강조하는 것이 교회의 성격을 나타내야 하는 영적인 우선권을 착색하고 침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우리의 훌륭한 본보기가 되시는 예수님은 결코 부나 소유물을 축적하지 않고, 겸손하고 낮은 신분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장래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 것을 가르쳤는 데,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해 마련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복 음 6:25-34).
신약 성경이 부자에 대하여 강력한 권고와 경고의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들은 물질적 빈곤함이 고유한 가치가 있다고 추정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 르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은 고통을 완화시키는 그들의 노력 가운데 기독교 인의 노력을 칭찬했습니다. 어떤 초대 기독교인들은 부유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얼마나 부유한 것이 충분할까요? 유물론은 “조금만 더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예는 모든 신자들에게 도전이 됩니다. 그의 중년에 요한 웨슬리는 그가 생활을 하기 위해서 매년 얼 마가 필요한가를 계산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생활비를 거의 똑같은 수준으로 유 지하겠다고 서약했으며, 후에 그의 많아진 수입은 주님의 일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하나님 의 성회는 모든 회원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모든 것에 대하여 좋은 청지기가 될 것을 격려합니다.

관심사:

현대 사회로부터 받는 심한 압력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그들의 성경적 가치와 삶의 우선순위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압력은 물 질적인 것들에 대한 과도한 평가, 성공의 상징으로서 물질의 축적, 상류상회로 진출하려고 하는 노력(pursuit of upward social mobility), 그리고 당장 만족을 취해야만 하는 것 (fixation on immediate gratification)을 포함합니다. 공생애 동안에 이 땅위에서 가지셨 던 예수님의 삶은 오늘날의 여러 문화가 보여주는 삶에 대한 자세와는 매우 대조적이었습 42 니다. 마가복음 8:31-38의 “복음의 역설”은 생명이 고난과 죽음으로부터 나온다는 원리 에 기초하여 사는 제자직분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하여 죽으시기 위해 오셨습 니다. 왕관이 있기 전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희생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의 한 부분이어 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성회의 위치를 보여주는 선언문 “신자와 긍정적(적극적)인 고백”은 성경적 가르침을 어떤 은사주의 모임에서 인기 있는 유물론적 “믿음 가르치기 (faith teaching)”와 구분하는 명확한 선언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신자들을 물질과 재정적인 성공으로 축복 하셔서 그들이 지상명령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자원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 나 물질적 성공은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부를 내려줌으로 말미암아 그에 대 한 것을 하나님이 승인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별로 소유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을 부와 유물론에 관 하여 주의를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보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물질적 소유물을 유 연하게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이 그에게 믿고 맡기신 것들에 대해 좋은 청지기가 되는 부 한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반면에, 가지고 있지 않은 물질적인 것들을 탐내고 움켜 쥐려 하는 것은 죄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부를 가지고 있는지 혹은 갖고 있지 않은지가 아니라, 참된 경건의 삶을 이끄는 것은 무엇이 그 사람이 삶에서 우선순위냐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17-19).

* 위에 기술한 선언은 “신자와 긍정적인 고백”에 기록되어 있으며,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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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선지자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장21절).

주님은 15-16절에서와 본 장 말미에까지 한 가지 큰 원리, 한 가지 큰 메시지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주님은 단 한 가지, 좁은 문으로 들어감의 중요성과 우리가 참으로 좁은 길을 따라 걷고 있는가를 확실히 할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13-14절 말씀에 대한 일종의 강화인 것입니다. 13-14절에서는 초대 또는 권면의 형식으로, 우리가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계속해서 걸어 가야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것을 정교화(精巧化)하여 세부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 일을 시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주쳐 오는 위험과 장애와 방해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내 중요한 이 원리, 즉 복음은 귀를 기울이는 것에서 끝나거나, 찬양을 받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적용되어야 할 것임을 계속 강조하고 계십니다. 야고보가 표현한 대로, 저 완전한 율법의 거울을 끈기 있게 바라보고 그것을 기억하고 실천에 옮기는 대신, 그 거울을 들여다보고 나서 우리가 본 바를 즉시 잊어버리는 것에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이 주께서 산상설교 말미까지 줄곧 강조하신 주제입니다. 우선 주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마주쳐 오는 두 가지 특정 위험의 형태로 나타내셨습니다. 주님은 이 위험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으며, 이 위험들을 알아본 후에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가 그 방법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를 처리하시고 나서 주님은 논증의 끝을 맺으시며, 두 집(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세워진 집)의 관점에서 명료하고 단도직입적이며, 꾸미지 않은 그대로의 진실로 나타내시고 산상설교를 끝맺으셨습니다. 그러나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주제요, 포괄적 진술 속에 들어 있는 공통점은, 심판의 사실에 관한 무서운 경고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7장을 일관하는 주제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일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의 난제와 문제의 대부분의 원인은 이것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너무나 일반화된 경박하고 피상적인 복음전도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들 대다수에게 있어 성결과 성화된 삶이 부족함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이 우리 위에 계심과 우리 모두 최후 심판의 방향으로 착실하고 확실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이것을 계속 반복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이것을 다른 형태로 표현하긴 하셨지만, 내내 심판의 사실과 심판의 성격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피상적인 검토나 단순히 외부적인 것들을 검토하는 것이 아니요, 마음을 탐사하고 전 성품을 검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은 심판의 최종성과 심판에 이어올 결과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미 13절과 14절에서 어째서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인즉, 다른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이요, 이 멸망은 최종 심판 후에 불경건인에게 따라오는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에 너무 심려하신 나머지 계속해서 반복하고 계십니다. 이 점은 다시 교사로서의 그분의 방법의 완벽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반복의 중요성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둔하며, 얼마나 더딘가를 아십니다. 사실은 그렇지가 않는데, 우리가 어떤 일을 안다고 생각하기가 얼마나 쉬우며,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실을 변함없이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아셨습니다. 이 사활적으로 중요한 원리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가 어려운 것을 우리 모두 아는 터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일들을 다시 상기시켜 주고 계신데, 무엇보다 두 특수경고를 우리 앞에 제시함으로서 그렇게 하십니다. 첫째 경고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우리 마음속에 그려보아야 할 장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말하자면, 이 좁은 문 밖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산상설교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권면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 중입니다. 우리 주님은 결국 ‘자, 이 지점에서 너희가 가장 주의해야 할 것 한 가지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위험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거기에 항상 있다. 그들은 항상 저 좁은 문 바로 밖에 서 있다. 그곳이 그들이 애용하는 장소이다. 만일 그들에게 귀 기울이기 시작한다면 너희는 전적으로 파멸이다. 그들은 너희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좁은 길을 걷지 못하게 설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한 말을 듣지 못하도록 너희를 단념시키려 애쓸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즉 그 특유의 교활한 유혹을 가지고 오는 거짓 선지자의 위험을 항상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즉각 이런 질문이 제기됩니다. ‘이 거짓 선지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의 정체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언뜻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해석은 흥미와 매혹으로 가득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에 관한 본문을 놓고 교회사상 두 해석학파로 갈라져 있습니다. 각 학파에는 교회사상 위대한 인물들이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학파는 본문이 거짓 선지자들의 교훈만을 언급하는 것이라 말하는 학파입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열매는 교훈과 교리를 가리킨다. 열매는 오직 이것만을 가리킨다.’는 말을 우리는 듣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의미를 이것에만 제한시켜 풀이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부류에 속하는 프로테스탄트 해석가들은 대체로 이것의 최고의 실례를 로마교회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부류는 이것과 전적으로 의견이 달랐습니다. 이 부류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이 교훈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이 사람들이 어떤 유의 삶을 사는가 하는, 순전히 ‘그들의 삶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알렉산더 맥클라렌 박사와 같은 잘 알려진 해석가는 ‘본문은 이단들을 탐색해 내는 시금석이 아니요, 위선자들 특히 무의식적 위선자들의 가면을 벗겨내는 시금석’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해석을 따르는 사람이 많거니와 그의 논증인즉, 본문은 교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온통 문제되는 것은, 그들의 가르침은 옳으나 그들의 생활은 잘못되어 있고, 자기네가 위선자들임을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해석학파가 있습니다. 본문에 대하여 그들의 상이한 두 가지 해석에 마주 대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둘 중 어느 해석을 믿을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두 해석은 둘 다 옳은 동시에 둘 다 잘못되었으며, 잘못은 둘 중의 어느 한 해석이 바르다고 말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타협한다는 말이 아니요, 두 요소를 포함하지 않고는 본문을 만족스럽게 해석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만 교훈이 문제요, 이단적 교훈만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단의 가르침을 탐색해 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분별력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단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강단에 올라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설교를 하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이적을 부인한다면, 여러분은 그가 이단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것은 어려울 것도, 미묘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묘사하신 말씀을 보면 이것에 어려움이 있고, 이것에 미묘한 것이 있다는 암시가 있습니다. 주께서 양의 가죽을 묘사하실 때 사용하신 용어를 주목해 보십시오. 주님은 이런 유의 거짓 선지자에게 문제되는 것은, 처음에는 그가 그런 자라고 결코 상상할 수도 없다는 점을 암시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극히 미묘하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것에 잘못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에서 이것을 어떻게 나타냈는지 주목하실 것입니다. “이 자들은 이단을 가만히 몰래 끌어들인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른 사람들 같아 보입니다. 그들은 양의 가죽을 입고 옵니다. 아무도 거짓된 것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그런데 신구약 성경은 거짓 선지자의 이런 성격을 늘 나타내고 있습니다.

위험한 것은 실로 그의 미묘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을 바로 해석하려면 이 특정 요소를 참작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것을 이단과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경고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편 해석에도 역시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위에 어떤 극악 무도한 것이 있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행위로 나타난다면 누구라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미묘하지도 어렵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우리에게 오는 사람이요, 처음에는 바람직한 것을 모두 갖춘 외모로 오는 사람입니다. 그는 마음에 들고, 붙임성 있고 유쾌합니다. 그는 철저한 기독교인으로 보이며, 옳은 것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대체로 아주 옳고 참된 기독교인 교사가 마땅히 사용해야 하고, 또 사용하는 용어들을 구사합니다. 하나님을 논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논하고, 십자가를 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등, 기독교인이 마땅히 해야할 말을 모두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활방식도 일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잘못된 곳이 있음을 여러분은 눈치채지 못합니다. 즉각 여러분의 주목을 끌거나 혐의를 일으키거나 눈에 거슬리게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즉 그런 사람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으며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침내 이 사람은 가르침에서나 생활에서나 모두 잘못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뒤에 가서 보겠거니와 이 두 가지는 항상 불가분리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을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란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가르침과 생활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어떤 모양 어떤 형태로든 잘못이 있는 곳에는 어느 점에선가 잘못된 생활 유형으로 인도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서술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가르침에 잘못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을 대답하는 가장 편리한 방법은 그 속에 ‘좁은 문’이, 그 속에 ‘좁은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그런 대로 괜찮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포되어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가르침이며, 그 거짓됨은 그들이 ‘논하는 것’에 있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상황의 미묘함을 자각하는 것도 바로 이 점에서 인 것입니다. 오늘날 대다수 기독교인이 옳은 것들을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활적으로 중요한 것들을 제외시키는 사람을 색출할 수 없노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고 냉혹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과오란 크게 잘못된 것만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라는 관념을 우리는 아무튼 갖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사람은 옳은 것들을 강조하지 않는 사람들임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상으로 본문의 거짓 선지자들을 바로 이해하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그의 복음에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갖고 있지를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연인에게 거슬리는 것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그는 양의 가죽을 입고 옵니다. 보기에 너무나 매력적이요, 너무나 붙임성 있고, 너무나 마음에 듭니다. 그는 너무나 멋지고 기분 좋게 위로가 되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며, 모든 사람이 그를 좋게 말합니다. 그는 결코 설교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일이 없으며, 호되게 비판을 받는 일도 결코 없습니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에게도 현대주의자들에게도 찬양을 받으며, 복음주의자들에게도 칭찬을 받습니다. 그는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는, 이른바 약방의 감초 격입니다. 그에게는 ’좁은 문‘이 없으며, 그의 메시지는 ‘좁은 길’이 없으며,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없습니다.


이상이 거짓 선지자에 대한 대략적 서술이라면 이런 질문을 던져 볼만합니다. ‘이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설교에 거슬리는 것이 조금도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라고 말입니다. 그 대답으로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베드로후서 2장에서 어떻게 논증하고 있는가 기억하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러나 민간(구약 이스라엘 백성)에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 났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벧후2:1)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으로 돌아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기록을 읽어봐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유형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기에 항상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나 그와 같은 참 선지자가 올 때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항상 거기 있어서 그를 문제삼고, 그를 적대하고 탄핵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무엇과 같았습니까? 그들에 대한 서술을 보기로 합시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가볍게, 피상적으로)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8:11). 거짓 선지자는 항상 매우 위로 적인, 기분 좋은 설교자입니다. 그에게 귀를 기울이면 그는 여러분에게 항상 잘못된 것이 별로 없다는 인상을 줍니다. 물론 그도 잘못이 약간은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 잘못이 조금도 없다고 말할 정도로 바보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만사가 괜찮으며 잘 되어 나갈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는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말하며, ‘예레미야와 같은 사람의 말을 듣지 말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는 편협된 사람이요, 이단을 추적하는 사냥꾼이요, 그는 비협조적이다. 그의 말을 듣지 말아라. 모든 것이 잘 돼 나간다.’고 말합니다.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고치며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종교적인 사람들에 대한 무서운 진상으로써 놀랍게도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렘5:31)란 말씀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을 결코 불안케 하거나 언짢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전과 같이 계속합니다. 여러분은 만사가 괜찮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좁은 문과 좁은 길이나 이런 저런 것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강하다, 평강하다.’ 이렇게 양의 가죽을 쓰고 있는 거짓 선지자는 항상 속 편하게 하며, 매우 안심을 줍니다. 그는 항상 악의가 없고 기분 좋고, 항상 변함없이 매혹적이어서 마음을 끄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모양으로 정체를 들어냅니까? 전체로써 그 메시지에 교리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고 저는 말씀드립니다. 그의 메지시는 항상 모호하고 일반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교리를 특수화하여 하나 하나 상세히 열거하지를 않습니다. 그는 교리적 설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의 설교는 항상 매우 모호합니다. 그러나 ‘교리를 특수화하여 자세히 열거한다는 말은 무슨 소리이며,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어디서 들어갑니까?’라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대답은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결과 의와 공의와 진노에 대해서는 매우 드물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말하나 그 밖의 일들은 말하지를 않습니다. 그는 우리들이 모두 관계를 맺고 있는 이 거룩하고 존귀한 분에 대해 설교할 때, 그 아무도 두려워 떨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가 이 진리들을 믿지 않는다고 입밖에 내지는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말썽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썽인 것은 그가 이것들을 조금도 말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그는 이런 것을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대체로 하나님에 대한 진리 하나만을 강조하는 데 곧 사랑입니다. 그는 성경에 두드러진 기타 진리들은 말하지를 않습니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은 바로 여기입니다. 그는 분명히 잘못된 것들을 말하지 않으며, 분명히 옳고 참된 것들을 말하지 않고 피합니다. 그가 거짓 선지자인 것도 이 때문입니다. 진리를 감추는 것은 철저한 이단을 전파하는 것만큼이나 괘심하고 저주받을 일입니다. 그런 가르침의 결과를 ‘노략질하는 이리’의 결과로 비유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기분 좋게 하고 붙임성 있는 것이지만, 사람들을 파멸로 이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성결과 의와 공의를 직면케 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결코 강조하지 않는 또 다른 교리는, 최후 심판과 버림받은 자들의 영원한 운명입니다. 지난 50-60년 동안 최후심판에 대한 설교는 많지 않았습니다. 지옥과 악한 자들의 ‘영원한 파멸’에 대한 설교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베드로후서와 같은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베드로후서의 정경성을 부정하려고 애썼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교리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장(章)은 성경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는 그토록 강하고, 그토록 폭발적입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는 거기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 산상설교에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양의 가죽을 입었으나 노략질하는 이리들인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말씀하신 이는 주님이십니다. 그들을 썩고 악한 나무로 서술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바울이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을 설교했을 때(행24:24-25)와 꼭 같이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동시에 거짓 선지자의 교훈은, 죄의 사악성과 인간 스스로의 구원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실로 죄가 있음을 믿지도 않으며, 그 사악성을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완전하다고 말하지는 않으나 죄가 그리 중대한 문제는 아니라고 암시합니다. 그는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만 개별적이거나 어떤 특정 죄에 대해서만 말할 뿐입니다. 그는 타락한 인생에 대해서나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버림받고 부패했다고 말하지를 않습니다. 그는 전 인류가 죄의 연대책임을 지게 된 것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신약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바 ‘죄의 사악성’(롬7:13)의 교리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허물과 죄로 죽었고’, 철저히 무력하고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렇게 할 필요성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강조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이런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말을 듣는 순수한 신자들이 그가 이런 것을 믿고 있는 것이라 착각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런 거짓 선생들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문제는, ‘그들이 이런 것을 믿고 있는가?’입니다. 그 대답은 물론 ‘아니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것을 설교하며 가르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될 것입니다.

그런데 속죄에는 보상적인 면이 있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도 ‘예수’에 대해서 말은 합니다. 그도 예수의 십자가와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이 죽음에 대한 그의 견해가 어떤 것인가? 십자가에 대한 견해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이단적이며,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는 견해가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시험하는 시금석 하나를 소개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은, 이것만이 죄를 위한 보상이요, 화해의 유일한 방법임을 그가 진정으로 믿고 있는가? 그리스도가 그를 위해 대속물로서 거기 십자가에 달리신 것, 그가 ‘나무에 달리시므로’ 그의 죄책과 죄책에 대한 형벌을 떠맡으신 것을 그가 진정 믿고 있는가? 하나님이 십자가 위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의 죄를 처형하시지 않았다면, 존경하는 생각을 품고 말씀드리거니와 하나님이 그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라 함을 그가 믿고 있는가?

하나님이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롬3:25-26) 하실 수 있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물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보내심으로만 가능했던 것을 그가 믿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대속적 속죄론인가? 하고 묻는 것이 거짓 선지자를 시험하는 방법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이런 것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대해 말은 합니다. 십자가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말하며, 우리 주님에 대해 감상에 젖기는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십자가의 거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의 십자가 설교는 “헬라인들에게 어리석음”이 아니요, ‘유대인들에게 거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십자가를 ’그의 철학을 통해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는 십자가를 아름다운 것으로 경이로운 사랑의 철학으로, 무관심한 세상 때문에 애끓는 마음을 자아내는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는 십자가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거대하고 성스러운 계약으로 본 일이 없습니다. 이 계약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죄’가 되게 하셨고, 우리의 죄를 아들에게 지우셨던 것입니다. 그의 설교와 가르침에는 이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의 가르침이 거짓된 것도 이 때문인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어떤 의미에서든 회개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의 교훈에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매우 큰문과 천국으로 인도하는 매우 넓은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죄성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집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검은 것을 대수롭게 여길 필요가 없어집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해 결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무리들과 함께 달려나가고, 여러분의 이름이 기입되고 신문에 보도되는 많은 ‘결정’한 사람 중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청교도나 조지 휫필드나 기타 인물들의 전도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 사람들의 전도는 사람들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게 했고, 가끔 영혼들로 하여금 며칠, 몇 주, 몇 개월간이나 고뇌하게 했습니다. 요한 번연은 그의 「은혜가 넘치다」란 책에서 자기가 18개월 간 회개의 고통을 당한 것을 말했습니다. 오늘에는 이를 위한 여지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회개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죄책이 있고, 악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받아야 할 것과 지옥가게 되어 있는 것을 자각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회개란 죄라 불리는 이것이 여러분 속에 있음과 여러분이 그것을 제거하려 갈망하며, 어느 모양, 어느 형태로든 그것에 등을 돌릴 것을 자각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세상을 버리되, 실제생활에서는 물론 생각과 전망으로도 세상을 버리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갑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가깝고 가장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온 세상은 여러분을 바보라고 하거나 여러분이 종교광이 되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관없으며,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치료하며, 모두 괜찮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와서, 예수를 따르고, 또는 기독교인이 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좁은 문을 들어가며, 좁은 길은 걸어가야 할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하지 않는다.’라고 말입니다. 그는 산상설교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산상설교를 실천하지 않고 이 설교에 귀만 기울인다면, 우리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산상설교를 비평만 하고 실천이 없다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일어나서 심판을 선고하며 우리를 정죄할 것입니다. 거짓된 가르침은 참된 성결, 성경적 성결에 관심이 없습니다. 거짓된 가르침은 바리새인이 가졌던 것과 같은 성결관에 집착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네가 짓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어떤 죄들을 끄집어 내가지고 여러분이 이 죄들을 짓지 않는 한 모두 괜찮다고 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오늘에도 얼마나 많습니까! 성결은 서너 가지 무엇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문제로 격하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성결을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5-16)의 관점에서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이생의 자랑은 교회의 가장 큰 저주거리의 하나입니다. 거짓 가르침은 바리새적인 성결을 소원합니다. 거짓 가르침은 우리들 자신이 행하지 않기로 동의한 어떤 조목들의 문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조목들은 특별한 호소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성결을 안이한 그 무엇으로 격하시켜 버렸습니다. 우리는 넓은 길로 밀려들어가 넓은 길을 실천하려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양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오는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의 일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안이한 구원과 안이한 생활 유형을 항상 제의합니다. 그들은 자기 검토를 훼방놓습니다. 자기 검토에 거의 이단이라는 느낌마저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검토해 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항상 ‘예수를 바라봐야’하고, 여러분의 죄를 찾기 위해 여러분 자신을 보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을 검토하고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고, 우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13:5)고 한 산상설교의 이 마지막 대목을 똑바로 보라는 권면을 훼방놓습니다.

그들은 청교도들과 18세기의 위대한 지도자들 곧 휫필드나 웨슬레나 요나단 에드워즈뿐 아니라, 잠자리에 들기 전 매일 밤 열두 가지 질문을 자문해본 성도, 요한 플렛쳐와 같은 사람들이 가르친 자기 검토와 죄의 억제 과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유쾌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이한 구원이요, 안이한 기독교 생활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지고 탄식하는 것은”(고후5:4)이라 말할 때의 기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들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들은 바울이 “우리가 싸우는 것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악마의 지배와 권력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들은 이것의 진의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필요를 보지 못하는 것은 이 문제를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온통 안이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거짓 선지자들을 공격하는 이런 유의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는 한 그를 형제로 여기고, 함께 교제를 계속해야 한다고 말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대답인즉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무섭게 쏘아보는 이 경고들이 신약성경에 들어있는 까닭은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려 온 바와 같습니다. 물론 우리가 비판적이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렇다고 친절과 정중함을 성도다움으로 오인해서도 안되겠습니다. 그것은 인격이나 개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을 멸시해서도 안되겠습니다. 사실, 알렉산더 맥클라렌 박사가 그들이 무의식적 위선자들이라고 한말은 옳습니다.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고, 붙임성 없고 유쾌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대하기가 기분 좋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그들의 가장 위험한 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을 위험의 근원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제가 이 문제를 강조하고 있는 까닭은, 주님에 의하면 우리는 이것에 항상 직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는데도 거짓 선지자는 멸망을 믿지를 않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고찰해 온 바로 이것이 오늘의 교회상태라 말한다면 지나친 말이겠습니까? 교회가 어째서 이처럼 허약하고, 무능하며 무력해졌습니까? 그 원인은 지난 세기의 고등비평운동의 결과로 온 설교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에 저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정죄 받은 설교인 것입니다. 그 옹호자들은 도덕과 일반적인 정신앙양을 설교했습니다. 그들은 설교의 실례를 문학과 시에서 끄집어 내왔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하나님을 운운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운운합니다. 그래도 그들이 명백한 이단으로 인정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받는 데 절대 중요한 기타의 사항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막연한 메시지만 전했습니다. 그들은 인기감식력에 딱 들어맞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너무나도 많이 보고 있는 텅 빈 교회들과 저질의 기독교 생활이 온 것입니다. 이렇게 된 데는 우리들 대다수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입맛 떨어지고 불쾌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나는 정직히 고백합니다.

만일 내가 이처럼 산상설교를 설교하기로 서약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말씀들을 설교 본문으로 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전에는 이것에 대해 설교한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그렇게 한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이 설교를 좋아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설교는 비위에 거슬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만을 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말씀하신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을 심판과 멸망의 문맥 속에 집어넣으신 이는 그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 이단 사냥꾼으로 알려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또는 자기 형제들과 다른 모든 사람 위에 심판자로 앉아있는 괴짜요, 괴팍한 사람으로 알려지는 것을 무릅쓰고, 정직하게 성경을 풀이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불멸의 영혼과 이 영원한 운명을 평가하고 값을 매길 때, 여러분은 하나님 존전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기를 간곡히 권면하는 바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장21절).

http://cafe.daum.net/ciak/6KEc/543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 세계최대의 꽃 공원 네델란드 쾨켄호프의 플라워 랜드 **


약 8만 4천평의 넓은 대지위에 세계최대의 꽃 공원이 조성되어 형형색색의 모든튤립을
비롯하여 4천여종,10만여 포기의 아름다운 꽃들이 만개하고있다. 해마다 3월하순부터
5월하순까지 개장 하며,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아름다운 꽃들을 보기위해
몰려들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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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놀란 독일 아우토반에서의 티코 이야기

어느 한적한 오후....


독일의 아우토반을 달리던 우리의 자랑스런 티코가 그만 고장으로 갓길에

정차중이였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독일은 히치하이킹 처럼 길에서 손을 흔들어

방향만 맞으면 누구나 누구나 태워주는 분위기 좋은 나라이다.

하여튼 우리의 티코 운전자는 고속도로이긴 하지만


손을 흔들어 일단 아우토반을 빠져나갈 생각으로 하치하이킹을 시도했다.

몇대의 차가 지나가고 드디어 나타난 티코의 구세주~! 멋진 벤츠를 끌고 등장했다.

벤츠 : 아.. 차가 고장이 났군요.. 제가 도와 드릴 일은 없나요??

티코 : 정말 고맙습니다. 제 차를 다른 톨게이트까지만 끌어다 주시면 제가

견인차를 불러 제 차를 옮길수 있을텐데요.. 부탁 좀 드릴께요..

벤츠 운전자는 왕년의 카레이서로서 자신의 벤츠를 자랑하고 싶었다.


그리고 딱 보아하니깐 티코는 자신의 차로 끌어도 아무 무리 없어 보이기두 해서


자신의 차로 직접 끌고 다음 톨게이트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말한뒤.

벤츠 : 제가 너무 빨리 달린다고 생각하시면 뒤에서 경적을 울려주세요..

그럼 천천히 달릴께요.. 라고 말했다.

한참을 그렇게 다음 톨게이트 까지 가고 있는데..

난데없이 뒤에서 포르쉐가 200km 의 속력으로 쒜~엥! 지나가는게 아닌가?

이에 열받은 왕녕의 카레이서 벤츠 운전자~!


뒤에 티코를 매달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순간적으로 흥분해서

포르쉐와 경쟁을 버리게 됐다.


벤츠와 포르쉐는 정말 빨랐다. 포르쉐가 250km를 넘어서자 벤츠 역시 250km로

달리면서 영화에서나 보던 대추격전을 벌이며 아우토반의 끝까지 달리게 되었다.


그 사건이 있은후 3개월 후......

대우의 직원이 독일의 티코 시장조사를 위해 독일에 갔다...

근데 이게 웬일인가?


아우토반을 달리는 차 중 40~50% 정도가 티코인 것이다.


대우 직원은 예상치 못했던 티고의 열풍에 너무 놀라 이 상황이 어떻게

이루어진것인지를 수소문하여 그때 사건을 직접 목격한 어느 운전자를

만날 수 있었다.

목격자 : " 내가 그날 아우토반을 달리고 있었지.. 나도 한 스피드 하는 놈이라

200km 정도로 스피드를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포르쉐하고 벤츠가

250km 넘는 속도로 내옆을 쒜~엥 하고 지나가는게 아니겠어?

그런데 그 벤츠 뒤를 티코가 바짝 붙어서 똑같은 속도로 달리고 있는거야...


그 3대가 온 아우토반을 자기 무대인 것처럼 휘젓고 다녔지.. "


대우 직원은 티코가 250km로 달렸다는 데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끝까지 얘기를 들었다.

목격자 : "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 벤츠 뒤를 바짝 뒤쫓던 티코가 글쎄 ...
.
.
.
.
.

.
.
.
.
경적을 마구 올리며 그 벤츠와 포르쉐를 비키라고 하는게 아니겠어?
    ♡정성껏 말하면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 상대편은 내가 아니므로 나처럼 되라고 말하지 말라 내가 이 말을 듣는다고 미리 생각해 보고 말해라 정성껏 들으면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지루함을 참고 들어주면 감동을 얻는다 한쪽 말만 듣고 말을 옮기면 바보 되기 쉽다 자존심을 내세워 말하면 자존심을 상하게 된다 남의 명예를 깎아 내리면 내 명예는 땅으로 곤두박질 처진다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면 진실성을 인정 받는다 말의 내용과 행동을 통일 시켜라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해야 인정받는다 무시당하는 말은 바보도 알아 듣는다 말은 입을 떠나면 책임이라는 추가 다린다 대화의 질서는 새치기 때문에 깨진다 침묵이 대화 보다 강한 메시지를 전한다 첫 한마디에 정성이 실려야 한다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면 대화는 저절로 잘된다 내 마음이 고약 하면 남의 말이 고약하게 들린다 지적은 간단하게 칭찬은 길게 해 눈으로 말하면 사랑을 얻는다. 말투는 내용을 담은 그릇이다 따져서 이길 수는 없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도 잔소리는 용서가 안 된다 좋은 말만 한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받는 것은 아니다 유머에 목숨 걸지 말라 반드시 답변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화를 자초 한다 -좋은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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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의 주 원료는 당연히 바닷물이나 또는 염수호이지만 기이한 것이 많은 이 지구촌에는 이것외에도 특이한 방법으로 생산되는 소금이 여러곳 있습니다.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Sala de Uyuni)이나 오스트리아 짤쯔부르크 근교의 소금광산과 폴란드의 비엘리츠카 소금광산, 그리고 중국 심해정의 소금 우물도 유명하지요.

그리고 이것외에 또 하나 페루의 꾸스꼬에서 자동차로 약 2시간 거리에 위치한 마라스(Maras) 마을의 계곡속에 위치한 살리나스(Salinas)염전을 빼 놓을수 없습니다.
 
15,16세기에 번성하였던 잉카문명이 후대에 남긴 놀라운 유물 살리나스(Salinas)는 백두산 보다 높은곳에 자리한 해발 3000m의 고지대 산속에 자리한 계곡 염전입니다.
 
이 거대한 염전이 산속에 자리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원래 안데스 산맥은 수만년전에 해저가 융기하여 이루워졌고 그 지층에는 암염이 넓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가 암염지층을 통과하면서 바닷물과 같은 염천수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잉카인들은 이 염천수를 이용하여, 위에서부터 차래로 물을 흘러보내서, 좁은 계곡에 계단밭 형태의 염전을 만들어 소금을 생산하였습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아토피성 피부병에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이 곳에서는 아직도 잉카시대와 똑같은 방법을 이용해 소금을 채취하고 있고 소금 채취와 더불어 요즈음은 관광 명소로까지 각광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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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재들의 방식/최송연 1970년대라고 하면 옛날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그래도 디지털 시대로는 많이 뒤떨어진 시기죠. 
       
      그런 때에 벌써 오늘보다 더
      화려하고 더 웅장한 스타일을
      창안해 낸 노르웨이의 사진작가
      그 위대한 이름, Solve Sundsbo
       
      그의 작품 속에 숨 쉬는 창의력
      미적 감각은 보는 이로하여금
      숨을 쉴 수 없게 하죠.
      그런데, 그가 남긴 말은 더 유명하죠.  "I've got a style" "It's that I've got no style." (내가 스타일(형식)을 가졌다면 그것은 내가 스타일(형식)이 없다는 것이다.) 숨은 뜻으로는 "내가 나만의 스타일을 가졌다면 그것은 곧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것" 그런 뜻이 되겠지요. 나만의 독특성을 가지는 것.... 어느 분야에서든지... 이것이야말로 천재들의 방식이 아닐까 싶네요. 물론, 우리 모두가 천재적인 재능을 소유했다곤 할 수 없겠죠. 그럼에도, "나는 할 수 없어." 라며, 어떤 일이건 시작해 보기도 전에 미리 좌절하고 접어버리는 부정적인 사람보다는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해" 전능하신 주님을 믿고 삶에 도전장을 던지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임을 부인할 순 없을 겁니다. 그것 아세요? 창조주 하나님을 닮은 독특성, 창의력이 우리 모두의 영혼 깊은 곳에 잠재해 있다는 사실을... 나만의 독특성을 살려낼 수 있는가... 깊이 연구해봐야 할 과제네요.^^ 그렇거든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자신 속에 있는 창의력을 계발, 온 열과 성을 다 하여 발전시키는데 여러분과 저, 우리에게는 도우시는 주님이 계시잖아요. Go for it~!^^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1.모든 선택에는 반드시 끌림이 있다
- 첫 만남(Starting Relationship)

좋은 인상을 유지하려면

첫인상이 아무리 좋았더라도 부정적인 정보를 접하면
쉽게 나쁜 쪽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열 번 잘하다가도 한번 잘못하면
나쁜 이미지로 낙인찍히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좋아하면 판단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한다.
따라서 성공적인 설득을 하고 싶다면 우선 상대방으로부터
호감을 사고(에토스), 감정에 호소한 다음(파토스), 필요성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고(로고스), 마지막으로 상대방이
마음을 바꾸지 않도록 다시 에토스를 이용하는
순환과정을 거치는 것이 필요하다.


신은 마음을, 사람은 겉모습을 먼저 본다

옷차림은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에 대한 평가뿐 아니라
우리자신의 태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끄는 사람은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옷차림을 할 줄 안다.겉모습
때문에 내면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면
그건 너무나 아쉬운 일이다.
문밖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우리의 옷차림은 다른 사람에게
엄청난 양의 정보를 제공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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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은 동색, 가재는 게 편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좋아하는 반면
자기와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반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자주 보면 정이 들고 만나다 보면 좋아진다

가까이서 자주 만날수록 호감도가 커지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간간이 안부를 묻고,
만나기가 힘들다면 책이나 신문 등 상대가 흥미를 느낄 만한
내용을 메일로 보내는 등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칭찬 방법을 바꾸면 관계가 달라진다

좋은 말도 자주 듣다 보면 식상하듯이 칭찬도 반복되면
그 효과가 급격히 줄어든다.
즉 신빙성이 떨어져 그 사람의 말을 신뢰하지 않게 된다.
부정적인 말을 했다면 반드시 칭찬이나 격려의 말로 마무리를 짓자.
언제나 시작보다는 끝이 중요하다.
칭찬은 구체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
또한 면전에서 칭찬하는 것보다
제3자에게 칭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을 통해 듣는 칭찬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자랑하고
싶은 욕구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칭찬을 전해 듣게 되면 두 명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셈이 되기 때문에 면전의 칭찬보다 몇 배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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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끌림을 유지하는 1%의 차이
- 관계의 발전(Developing Relationship)


나는 왜 나를 사랑해야 하는가

자기애가 깊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과장해서 과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교만하지 않으면서도 자신감이 넘치는 당당함으로
주변사람들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든다.


다름을 인정하면 공감이 쉬워진다

인간관계의 갈등을 줄이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머릿속에서 ‘다른 것=나쁜 것’이라는 공식을 삭제해야 한다.
사람들은 옳은 말을 하는 사람보다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사람들은 말을 잘하는 사람보다 잘 들어주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관계의 문제는 말을 못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듣지 못해서 생기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사람들은 말을 잘하는 사람보다 잘 들어주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슬픔이나 분노가 해소되고 마음이 후련해진다.
또한 존중받고 이해 받는다는 느낌이 들게 된다.


작은 빈틈이 마음을 열게 한다

너무 완벽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게 만든다.
또 사람들은 결점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에 대해
위선적이고 인간미가 없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상대가 틈을 보일 때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스펀지가 공간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물을 빨아들이듯이 누군가가 다가오게 하려면
그가 들어올 수 있는 빈틈을 마련해두어야 한다.


뒷담화, 만족은 짧고 후회는 길다

검지 하나로 손가락질을 하면
나머지 세 개의 손가락이 나를 향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뒷담화의 유혹에 빠질 땐 스스로에게 ‘또 시작이야!’라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꿔보자.


“나는 당신이 좋아요”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친구로 선택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도와주려고 하며,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 물건을 사고 싶어한다.
또한 상대가 자기와 관련된 사람이나 일 또는 사물에 대한 호감을 보이면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호감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함께 밥 먹고 싶은 사람이 되라

우리는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을 때,
가장 흔한 표현으로 식사를 제안한다.
먹거나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면 대화가 더 쉽게 풀리고
음식을 접대한 사람에게 더 쉽게 설득된다.
왜 그럴까? 뭔가를 받으면 그만큼 베풀어야 한다는
‘상호성의 원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또한 맛있는 음식으로 인한 유쾌한 감정이 파급되기 때문이다.
정말 기분 나쁜 사람을 ‘밥맛 없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가.
함께 밥 먹고 싶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보자.



3.끌리는 사람은 이렇게 관계를 유지한다
- 지속되는 만남(Staying Relationship)


관계를 알리고 싶은 사람이 되라

사람들은 자신을 승자와 연결시켜 자존심을 고양시키려는 반면,
실패자들로부터는 최대한 거리를 두어 자신의 이미지를 보호하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과의 관계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콤플렉스를 건드리면 돌부처도 돌아선다

차마 해서는 안 될 말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과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은 그 질이 다르다.
“뭐 틀린 말했어?”라고 되물으면서
다른 사람의 아픈 곳을 건드리는 습관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프랑스 속담을 명심해야 한다.
“진실만큼 마음에 거슬리는 것은 없다”


위대한 사람에겐 그를 믿어준 사람이 있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위대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던 것은
“너는 장차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다”라는
어머니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가능성을 믿어주면 기대에 부응하는 결과가 일어난다


너무 멀지도 않게 너무 가깝지도 않게

사람들은 개인 공간이 침해당하면 반사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낸다.
물리적 공간뿐 아니라 프라이버시도 침해당하고 싶지 않은 개인 공간이다.
상대방이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시시콜콜 다 알고 싶어하는 것은 관심이 아니라
간섭이며 경계를 넘는 침입행위다.


사과 먼저, 변명은 나중에

잘못된 상황을 개선하려면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 해명은 그 다음에 할 일이다. ‘
미안하다’는 말은 마법과 같은 힘을 발휘한다.
그 말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동시에 전달한다. ‘제 탓입니다’,
‘당신을 존중합니다’, ‘우리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한다면
절대로 ‘미안하다’는 말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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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일에서도 감사할 일을 찾아 보라

누군가를 당연하게 생각하면 우리 역시 당연한 존재로 취급당한다.
감사란 그냥 저절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며
선택해야 하는 것이고, 배우면서 훈련해야 하는 것이다.
감사란 고마워하기를 선택한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의도적인 감정이다.


퍼주고 망한 장사 없다

먼저 베풀어도 당장 돌아오지 않을 때가 많다.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또한 씨앗을 열 개 뿌렸다고 열 그루 모두에서 수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거두려면 먼저 뿌려야 한다.
인간관계의 기본은 상대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다.
무엇이든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다.


끝은 언제나 또 다른 시작이다

첫인상은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에 더 이상 바꿀 수 없다.
하지만 끝인상은 언제든 바꿀 수 있다.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공한 기업과 개인은

모두 주어진 일의 경계를 넘어 추가서비스를 할 줄 안다.
당신이 다수 대중과 차별화하고 싶다면
남들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는 뭔가를 추가로 해야 하다.
이제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순간이 곧 또 다른 시작임을 잊지 말자.



이민규 / 끌리는 사람은 1%가 다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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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 "
    (Soon it shall also come to pass)

     

    어느날 다윗왕이 궁중의 세공인에게 명령했다.
    "나를 위한 아름다운 반지를 하나 만들라.


    반지에는 내가 큰 승리를 거둬, 기쁨을 억제치 못할 때,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글귀를 새기도록 해라.


    또한 그 글귀는 내가 큰 절망에 빠졌을 때
    용기를 함께 줄 수 있는 글귀여야 하느리라."


    細工人은 명령대로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었지만,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고민하던 그는 지혜롭다던 솔로몬 왕자에게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였다.


    "왕자님, 왕의 큰 기쁨을 절제케 하는 동시에
    크게 절망했을 때 용기를 줄 수 있는 글귀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솔로몬 왕자가 말했다.
    "이 글귀를 넣으세요."

    "이것 또한 곧 지나가리라 "
    (Soon it shall also come to pass)

     

    "승리에 도취한 순간에 왕이 그 글을 보면
    자만심은 곧 가라앉을 것이고,
    동시에 왕이 절망 중에 그 글을 보게 되면
    이내 큰 용기를 얻을 것이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곧 지나가리라..."



           

691년 압델 말릭이 세웠다는 바위사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했던 곳으로 지금은 회교사원으로 쓰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황금돔은 회교 사원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사진은  보기힘든 사진 입니다.. 통곡의 벽.. 유대인의 눈물의 장소 입니다.

 통곡의 벽 뒤편은 팔레스타인 아랍 지역입니다..   유대민족의 소망 시온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힌옷 입고 있는 사람.. 모자 쓴 사람.. 군인들 보입니다. 대리석 바닥 깨끗합니다..

신기하게 여자는 안보입니다.. 저만 그렇게 보는가? 봅니다.. 확인 안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통곡의 벽...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군인들이 머리를 기대어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 랍비로 보이는 분이 성경(토라)을

읽고 있습니다... 오래전엔 .. 통곡의 벽에는 쪽지가 꽃혀 있었습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습니다....?? 순례객들의 기도 장소 이며 유대인의 소망인 예루살렘 성전 건축

..... 이스라엘의 진정한 회복은  저 .. 회교 사원을 불도저로 밀어내고

다시금  성전을 건축하며 성소를 짓는것일것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2001년 신문 자료 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믿게 만드시고  믿어지게 하신 주님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아멘..







캐나다와 미국 국경사이에 있는 섬들
-약 1800개의 그림같은 아름다운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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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겨둘만한 좋은 명언들!

 

장부라도 청년기는 그리워지는 초년이나,
군자라도 노년기는 서러워지는 만년이다.

 

 

청춘 경험이 있는 노인은 청춘을 잘 알지만,
노년 경험이 없는 청년은 노년을 잘 모른다.

 

 

누구나 청년기는 반복하고 싶은 세월이나, 
누구나
노년기는 거부하고 싶은 세월이다.

 
 
 
찬란하다 한들 젊음을 지켜낼 장사는 없고,
초라하다 한들 늙음을 막아낼 장사는 없다.
 

 

늙는다 해도 추한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되며,
늙는다 해도 험한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된다.

 

 

노추는 탐탁찮을 지라도 장수는 기대하고,
노환은 달갑잖을 지라도 장수를 기대한다.

 

 

장수한다 해도 노추를 경험하면 불행이며,
장수한다 해도
노환을 경험하면 불행이다.

 

 

곱게 늙지 못하면 체면불구하기 십상이며,
곱게 늙지 못하면
후안무치하기 십상이다.

 
 
늙어 추하다 해도 인생을 포기 할수는 없고,
늙어 험하다 해도 인생을 포기 할수는 없다.
 

 

늙어도 있는 자는 타락으로 주체를 못하나,
늙어도 없는 자는 가난으로 주체를 못한다.

 

 

노인이 명예를 얻는다면 훨씬 큰 보람이나,
노인이 명예를 잃는다면 훨씬 큰 망신이다.

 

 

노년에 미색을 탐하면 망신을 당하기 쉽고,
노년에 재물을 탐하면 재앙을 당하기 쉽다.

 
 

비록 늙었다 해도 약한 티를 내서는 안 되며,
비록 늙었다 해도
없는 티를 내서는 안 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외면을 가꾸어야 하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면을 다듬어야 한다.

 

 

나이가 들다 보면 화려한 학벌도 퇴색되고,
나이가 들다 보면
화려한 경력도 퇴색된다.

 

 

나이가 들다 보면 몰골마저 추해지기 쉽고,
나이가 들다 보면 행동마저 추해지기 쉽다.

 

 

나이가 들다 보면 수치심도 무뎌지기 쉽고,
나이가 들다 보면
공포심도 무뎌지기 쉽다.

 

 

나이가 들다 보면 자존심도 무뎌지기 쉽고,
나이가 들다 보면
자부심도 무뎌지기 쉽다.

 

 

늙었다 해도 자존심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늙었다 해도
자부심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나이가 들어 사랑받기란 여간해 쉽지 않고,
나이가 들어 존경받기란 여간해 쉽지 않다.

 
 
나이가 먹을수록 건강이라도 좋아야 하고,
나이가 먹을수록
재산이라도 있어야 한다.
 

 

늙었다 해도 마음은 꿈 많은 소년이고 싶고,
늙었다 해도 기분은 꿈 많은
소녀이고 싶다.

 
 
늙었다 해도 중진 대접은 받고 싶은 법이고,
늙었다 해도
원로 대접은 받고 싶은 법이다.
 

 

무릇 부실한 신품보다 견고한 중고가 낫고,
무릇
미숙한 패기보다 노련한 경륜이 낫다.

 

 

늙었을지언정 발군의 특기가 있어야 하고,
늙었을지언정
비장의 묘수가 있어야 한다.

 

 

비록 늙는다 해도 강렬한 노인이 돼야 하고,
비록 늙는다 해도
당당한 노인이 돼야 한다.

 

 

늙다 보면 하찮은 일에도 감동을 하기 쉽고,
늙다 보면 사소한 일에도 감정을 품기 쉽다.

 

 

젊어서는 능력이 있어야 살기가 편안하나,
늙어서는
재물이 있어야 살기가 편안하다.

 

 

재산이 많을수록 늙는 것은 더욱 억울하고,
인물이 좋을수록 늙는 것은 더욱 억울하다.

 

 

재산이 많다 해도 죽어 가져갈 방도는 없고,
인물이 좋다 해도 죽어 가져갈 도리는 없다.

 

 

성인군자라도 늙음은 싫어하기 마련이고,
도학군자라도 늙음은 싫어하기 마련이다.

 

 

주변에 미인이 앉으면 바보라도 좋아하나,
주변에 노인이 앉으면 군자라도 싫어한다.

 

파보면 달라진 세상인심을 잘 알수 있고,
늙어 보면 달라진 세상인심을 잘 알수 있다.

 

 

대단한 권력자가 망명신세가 되기도 하고,
엄청난 재산가가
쪽박신세가 되기도 한다.

 

 

육신이 약하면 하찮은 병균마저 달려들고,
입지가 약하면 하찮은 인간마저 덤벼든다.

 

 

일이 풀린다면 어중이떠중이 다 모이지만,
일이 꼬인다면
갑돌이 갑순이 다 떠나간다.

 

 

잃어버린 세월을 복구하는 것도 소중하나,
다가오는 세월을 관리하는 것도 소중하다.

 

 

여생이 짧을수록 남은 시간은 더 소중하고,
여생이 짧을수록 남은 시간은 더 절박하다.

 

 

개방적이던 자도 늙으면 폐쇄적이기 쉽고,
진보적이던 자도 늙으면
타산적이기 쉽다.

 

 

거창한 무대라도 공연시간은 얼마 안 되고,
훌륭한 무대라도
관람시간은 얼마 안 된다.

 
 

 

자식이 없으면 자식 있는 것을 부러워하나,
자식이 있으면 자식 없는 것을 부러워한다.


 

대개 자식 없는 노인은 고독하기 마련이나,
대개 자식 있는 노인은 심난하기 마련이다.

 

 

못 배우고 못난 자식은 효도하기 십상이나,
잘 배우고 잘난 자식은 불효하기 십상이다.


 

있는 자가 병들면 자식들 관심이 집중되나,
없는 자가 병들면 자식들 부담이 집중된다.


 

세월이 촉박한 매미는 새벽부터 울어대고,
여생이 촉박한 노인은 새벽부터 심난하다.


 

계절을 잃은 매미의 울음소리는 처량하고,
젊음을 잃은
노인의 웃음소리는 서글프다.


 

심신이 피곤하면 휴식자리부터 찾기 쉽고,
인생이 고단하면
안식자리부터 찾기 쉽다.


 
삶에 너무 집착하면 상실감에 빠지기 쉽고,
삶에 너무 골몰하면
허무감에 빠지기 쉽다.

 
영악한 인간은 중죄를 짓고도 태연하지만,
순박한 인간은 하찮은 일에도 불안해한다.

 
저명인사라도 자살은 신상문제이기 쉽고,
유명인사라도 자살은
경제문제이기 쉽다.

영웅이라도 속이 상하면 자살을 생각하고,
호걸이라도 몸이 아프면 자살을 생각한다.


 
누명을 쓰고 자살하는 것은 항변의지이나,
허물을 피해 자살하는 것은 현실도피이다.

 
있는 자는 향유하기 위해 음식을 먹지만,
없는 자는 연명하기 위해 음식을 먹는다.

 
초년의 건강이 노년까지 가기란 쉽지 않고,
초년의 호강이 노년까지 가리란 쉽지 않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해도 약하면 소용없고,
고생 끝에 복이 온다 해도 죽으면 소용없다.

 
 
종말이 온다 해도 희망의 꿈을 심어야 하고,
종말이 온다 해도 희망의 꿈을 가꿔야 한다
 
 
 
 
 
 

시스템 클럽/휴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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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최송연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쳥명한 날이거나 먹구름 휘몰아치는 어두운 날이어도 나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잔잔한 生이거나 시커멓게 뒤집힌 바다처럼 거친 生이거나 나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따스한 햇살로 행복한 때나 칼날처럼 매서운 바람, 서러운 눈물 삼켜야만 하는 때에도 나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새벽 이슬같은 당신의 사랑 바싹 메마른 광야에서도 내 영혼을 적셔 열매 맺게 하시며 칠흑으로 새까만 밤하늘 아래서도 가슴에 피어나는 소망은 별빛으로 반짝입니다 내 주여, 당신의 고귀한 생명 나를 위해 내어주셨으니 나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영원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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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거리에서 줄넘기 하기 (18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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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로드웨이 가 (19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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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 타고 나들이 가는 가족 (1900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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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리 악사 주위에서 춤추는 아이들 (1900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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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전용 지하철 칸 (19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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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팔이 소년들 (19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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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공들이 일하는 건물 (19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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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채권 구매를 홍보하는 영화배우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19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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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흑인 부대의 행진 (19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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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자들의 거리 (19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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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서 뉴욕을 바라보는 이민자 가족 (19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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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하철 환기창에 떨어진 동전을 줍는 아이들 (19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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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동차에서 내리는 세련된 여인 (19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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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식 폭락으로 자신의 고급 승용차를 길에서 팔고 있는 남자 (19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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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항 전 마지막 키스 (19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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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번가 (19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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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 배급소에 길게 늘어선 실업자들 (19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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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해튼 풍경 (19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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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눈을 붙인 인부들 (19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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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렘의 조촐한 클럽에서 보내는 즐거운 시간 (19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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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해튼의 야경 (19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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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개봉 (19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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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발 구역의 두 소년 (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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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니 아일랜드의 피서 인파 (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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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클린의 어느 길에서 자전거 타는 꼬마들 (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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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디오 시티 뮤직홀의 안내원들 (19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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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기자에게 다가온 아이들 (19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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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행기와 충돌한 엠파이어 스테이츠 빌딩을 바라보는 사람들 (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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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패망에 환호하는 시민들 (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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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거리의 속옷 판매원 (19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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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물에 뛰어드는 소년들 (19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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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님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학생들 (19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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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아더 귀환을 환호하는 시민들 (19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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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렘플린에서 점프하는 소년 (19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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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한복판의 교통 경찰 (19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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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퍼마켓을 뒤적거리는 어린 소녀 (19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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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서하는 소년 (195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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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록앤롤 쇼에 들어가기 위해 줄 서 있는 청소년들 (195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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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덮인 센트럴 파크에서 뛰노는 아이들 (19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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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세련된 남녀 (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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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위 도중 연행되는 흑인 여성 (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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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틀즈가 머무르는 호텔에 진입하려는 소녀 팬들 (19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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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피 커플 (196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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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전쟁 반대를 외치는 학생들 (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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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해튼 풍경 (19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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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에서 처음 열린 게이 퍼레이드 (19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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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권리 운동 (19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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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설 중인 국제 무역센터 (19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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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튜디오54에서 춤추는 여자들 (19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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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레이크 댄스 (19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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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한 뉴욕 맷츠를 환영하는 시민들 (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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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격 당한 국제 무역 센터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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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센트럴 파크 전경 (2006년)





          

        ((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

        Garmisch - Partenkirch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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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rm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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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의 알프스 리조트로 유명한 가르미슈 – 파르텐키르헨(Garmisch-Partenkirc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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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6, 독일 동계올림픽을 위해 가르미슈와 파르텐키르헨 두 마을이 합쳐져 생겨난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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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객들이 이 도시를 방문하는 이유는 추크슈피체(Zugspitze)’ 정상을 오르는 것이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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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크슈피체는 독일의 최고봉으로 2,962미터(9,718피트)의 높이를 자랑하는 알프스 산맥의 일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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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예배당까지 갖추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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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 도시에는 또 다른 유명한 장소가 한군데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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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파르트나흐클람(Partnachklamm)’ 이라는 계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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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계곡 사이로는 알프스산 꼭대기에서 내려 오는 거센 물결이 세차게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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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소리가 얼마나 큰지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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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곡 위에서는 실폭포가 쉴 새 없이 떨어 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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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은 계곡 사이로 들어와 실폭포와 바위를 은빛으로 채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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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가운 공기와 계곡 사이로 흐르는 물은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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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이곳을 올라 가려면 옷이 흠뻑 젖는 것은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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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비옷을 미리 준비한 사람도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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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차게 굽이치며 흐르는 빠른 물결의 폭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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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프스 눈이 녹아 만들어진 초록색 물에 밀크를 탄 오묘한 색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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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물 속에 석회질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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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벽 사이와 계곡길을 계속 올라 가다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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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자기 나타나는 평화롭고 조용한 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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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를 돌아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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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아래로 떨어지며 거센 물결을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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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굴 속의 장엄한 폭포는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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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르미슈 피르텐키르헨 역에서 파르트나흐 계곡으로 가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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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 앞에서 1 or 2 버스를 탑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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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키 점프장이 있는 Skistadion 정류장에서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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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류장에서는 역으로 돌아 가는 버스시간표를 확인한 후(시간 절약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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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이 많이 가는 방향을 따라 20분 정도 걸어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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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이란,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것이다.



         

         

        , 사진: 서정

           Dream Scapes




        출처: http://mission.bz/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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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의 비밀


          '신의 손'을 만든 말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에는 '신의 손'이란
          별명을 가진 소아신경외과 벤 카슨 박사가 있습니다.

          그는 오늘날 의학계에서 '신의 손'이라는 별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세계 최고의 의술을
          인정받고 있는 의사입니다.

          그가 저명한 의사가 된 데에는 특별한 이력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많은 의사들이 수술을 포기했을 정도로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고 있던 4살짜리
          악성 뇌암 환자와 만성 뇌염으로 하루 120번씩
          발작을 일으키던 아이를 수술하여 완치시킨 일입니다.

          두 번째는 1987년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머리와
          몸이 붙은 채 태어난 샴쌍둥이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샹쌍둥이로 태어나 불행한 앞날이 예고되었던 파트리크
          빈더와 벤저민 빈더가 카슨 박사의 수술로 인해
          새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이 수술을 통해 벤 카슨은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손을 가진 벤 카슨도 아주 어두운
          성장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 그를 보고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의사가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벤 카슨은 디트로이트의 빈민가에서 태어나 8세 때
          부모의 이혼으로 편모슬하에서 자라면서 불량소년들과
          어울려 싸움질을 일삼는 흑인 불량소년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백인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했고, 초등학교 때에는 항상 꼴찌를
          도맡아하는 지진아였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구구단을 암기하지 못했고
          산수시험을 한 문제도 맞추지 못하여 급우들의
          놀림감이 되곤 했습니다.

          이런 불량소년이 어떻게 오늘날 세계 의학계에서
          신의 손이라는 칭송을 얻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어느날 그에게 기자가 찾아와서, "오늘의 당신을
          만들어 준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나의 어머니, 쇼냐 카슨 덕분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늘 꼴찌를 하면서 흑인이라고
          따돌림을 당할 때도,
          '벤, 넌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노력만 하면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려주면서 내게 격려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벤 카슨은 그의 어머니가 끊임없이 불어 넣어준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는 말에
          사로잡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성적이 오르기 시작해 우등생이 될 수 있었고,
          사우스웨스턴 고교를 3등으로 졸업했으며,
          명문 미시간 대학 의대에 입학하여 '신의 손'을
          가진 의사가 되었습니다.

          빈민가의 불량소년, 꼴찌 소년, 놀림과 따돌림을
          받던 흑인 소년을 오늘의 벤 카슨으로 변화시킨 것은
          바로 그의 어머니가 해준 말 한 마디였습니다.

          "벤, 넌 할 수 있어. 무엇이든지 노력만 하면 할 수 있어!"

          말은 보이지 않지만 무한한 창조력과 힘을 가진
          인생 최대의 에너지입니다.

          사람은 말의 열매를 먹고 삽니다.
          말 속엔 크고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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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사람의 향기

         

         

          

        사람은 누구나

         

        그 사람만이 지니고 있는

         

        향기 가득한 고운 마음씨가 있습니다.

         

        없으면서도 남을 도우려고 하는 사람

         

        자기도 바쁘면서 순서를 양보 하는 사람

         

        어떠한 어려움도 꿋꿋하게 이겨 내는 사람

         

        어려울때 보기만 해도

         

        위로가 되고 힘이나는 사람입니다.

         

         

         

         

        어려움을 함께 해결 해 주려는 사람

         

        나의 허물을 감싸주고

         

        나의 미흡한 점을

         

        고운 눈길로 봐 주는 사람

         

        자기의 몸을 태워 빛을 밝히는

         

        촛불과도 같이 상대를 배려하고

         

        도움을 주는사람

         

        인연을 깨뜨리지 않는 사람

         

        삶을 진실하게 함께 하는 사람은

         

        잘 익은 찐한 과일 향이 나는 사람입니다 .

         

         

         

         

        그런 마음,

         

        그런 향기,

         

        그런 참 진실

         

        그런사람을

         

        나에게서 찾고 싶습니다.

         

         

         

         

         

        향수를 아니 뿌려도,

         

        촛불을 켜지 않아도

         

        넉넉한 마음과

         

        찐한 과일향이 풍기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출처: 한국중앙교회 전도부 까페

        "변하지 않는 성도는 가짜이다"라고 소리높여 외치던 로이드 존스 목사의 마지막 설교중에서 입니다.

        기독교는 여러분과저의 작은 선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가 무엇을 행하느냐와 행하지 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가 다른사람보다 얼마나 더 나으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내가 이전 보다 얼마나 더 나아졌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절대 그런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잊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요.
        그러면 그분의 흠없고 완전한 의가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분을 믿으면 그분의 의가 여러분에게 주어지고 여러분은 그분의 의를 덧입게 될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나 저것을 행하려 하고 있습니까?
        그 모든것은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모든것은 여러분에게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니 중단하십시요.
        이것들은 절대로 여러분을 그어디로도 인도하지 못할것입니다.
        더 멀리가기전에 멈추십시요.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종교가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나가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노력해 보십시요.
        그러나 그순간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가엽고 비참한 사람이 될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절대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거기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면 가장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될것입니다.
        성도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을 뿐입니다.
        그 은혜의 십자가,영광의 십자가를 만인이 본받아야 하는 아름다운것으로 변질시키지 마십시요.

        성경어디에서도 언급하지 않는 인간의 가능성이나 하나님의 위한 사역이라는 말로 포장된 거짓복음에 대하여 가르치기를 중단하고 성경에서 계시되는 예수그리스도의 피 공로에 의한 값없고 완전,완벽한 은혜에 대하여서 만이 선포되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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