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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이름 雪痕 새벽이슬 노릇노릇 구운 갈치 한 조각 뽀-얀 쌀밥 위에 얹어 오물오물 씹는 입만 봐도 배 부르시다던 어머니 가시고기 인생 마다않으시고 땀과 눈물로 씨앗을 뿌려 긴긴 세월 하루같이 살아온 자식농사 50년 인생 찌든 세월 한눈에 알아봄직한 굵직한 주름들 새벽미명부터 예배당에 무릎 꿇어 주저리주저리 내려놓는 자식들을 위한 기도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끝이 없어라 먼저가신 아버지는 주님 품에서 편히 계시겠지 긴긴 세월 마당 넓은 집에서 먼-산 먼-하늘만 치어다보는 애닯은 내 어머니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이름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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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하나님의 율법 / 월터 챈트리

 

 

제 2 장 하나님의 율법

 

(막 10:19)“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20)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21)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첫 번째 아홉 가지 계명

부자 죄인에게 주신 우리 주님의 메시지를 좀더 밀접하게 분석하면 할수록 현대 복음전도와의 차이점은 훨씬 현저해집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서 언급한 후에 예수께서는 나머지 대화의 대부분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 특히 십계명으로 요약되어진 율법에 대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청년에게 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진술은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과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도덕법은 하나님의 속성을 계시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지식으로 인해 그는 첫 번째 4 가지 계명에 따라 하나님을 적절하게 예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인간을 찬양하는데 더 민첩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그 관원으로 하여금 ‘첫번째 부분의 율법들’을 깨뜨릴 수 있도록 깨닫게 해주었음에 틀림없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비록 정확한 순서는 아니지만 그 다음의 다섯가지 계명들을 명확하게 인용해 나가셨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하는 질문에 이것은 좀 이상한 답변처럼 보이지 않는가? 진실로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 율법을 지킴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왜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값없는 은사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바로 이점입니다! 왜 자신을 “개인의 구세주”로 제시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이 모든 것들은 율법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다시금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보다도 훨씬 유능한 전도자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메시지를 그분의 메시지에 의해서 판단하고 그 반대로는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율법은 복음 전파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기 때문입니다”(롬 3:20). 현대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빠진 것은 아마도 현대의 교회와 선교가 무기력한 다른 어떤 이유보다도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 관원은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무엇이 부족한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누구를 대적했습니까?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예수께서 계명들을 열거하셨을 때 그는 계명들에 따른 모든 죄에서 자유로웠습니다. 예수께서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때 부자는 “전혀 무죄입니다”라고 이와같이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과 그의 대답은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가려진 눈이 진실로 자신의 죄를 보기 시작할 때까지 그에게 율법을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의 조명을 통해서만이 마음속에 있는 죄라고 하는 해충은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입니까? 성경의 답변은 요한일서 3:4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죄란 하나님의 의로우신 율법과 떨어져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하게 오해했다면 부자 관원은 자신의 죄악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현대의 죄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과 자신들에게 주어진 율법의 요구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지하다면 자신들을 정죄되어진 죄인으로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의 마음속에 생소한 것이기 때문에 죄라고 하는 개념도 생소한 것입니다.

일반적인 복음 사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쉽게 지나쳐 버립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율법과 분리해서는 결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의 극심한 고난은 온전한 계명에 대한 경외심이 없는 사람이 볼 때에는 비참하고 무의미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예수께서는 죄인들에 대한 율법의 합당한 요구를 만족시키셨습니다. 만약 죄인들이 자신들에 대한 십계명의 요구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정죄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십자가는 죄인들로부터 구원의 믿음을 이끌어내기보다는 동정을 불러 일으킬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화목제물(롬 3:25) - 즉 파기되어진 율법에 대해 가해지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속물 - 로 내어준 바 되었습니다.

위험에 대해 막연한 생각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구원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비록 자신이 영생을 얻을지에 대해서 의구심이 있었지만 그는 결코 자신을 율법의 파기자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따라서 그는 자신이 결코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도덕주의자가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서 자신의 영혼을 볼 수 있을 때까지 그는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현대의 설교는 인간은 구세주를 진심으로 영접할 수 있기 전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개념에 대해 입에 발린 말만을 할 뿐입니다. 일반적인 전도용 소책자는 “당신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을 강조합니다. 만약 그 질문에 머뭇거림이 있다면 여러분은 즉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는 말씀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정의는 결코 포함되지 않습니다. 가장 완악한 죄인을 포함해서 이 광범위한 진술을 부인할 사람은 결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물론 나는 하나님보다 거룩하지 못하며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답변할 것입니다. 젊은 관원 역시 그처럼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죄에 대한 인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거짓말장이요 간음자요 도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였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마치 그것이 옛 시대의 쓸모없는 유물이요, 오늘날 그것을 지키면 죄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차단시키게 될 것이라고 하는 상당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율법을 전도의 일차적인 수단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십계명을 전하는 것이 죄인에게 죄의식을 가르치고 그로 인해 그 안에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은 그녀의 양심에 적용되어진 제7계명을 들어야만했습니다. 그렇지 않았을 경우 결코 회개하지 못했을 것이며, 이 관원도 개인적으로 전하여진 율법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는 여전히 혼돈 가운데 머물렀을 것입니다. 모든 참된 성도는 자신의 회심을 율법의 사역에 기인한 것으로 말했던 바울에게 동의를 표할 것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롬 7:7). 죄를 알게 해 주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특정한 죄에 대해서 정죄가 행해질 때 비로소 죄인은 그리스도의 긍휼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그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물을 수 있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율법을 이해한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자신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압니다. 죄인이 해야 할 일은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현대는 과거 그 어느 세대보다도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무지합니다. 강단은 출애굽기 20장을 무시하며 심지어 교인들조차도 “안식일을 기념하라”고 하는 제 4계명을 무시합니다. 이 세대가 예배를 소홀히 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어떻게 느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잡동사니 신학에 대해 나무라기를 두려워하는 많은 설교자들은 현대에 필요한 진리의 참 요소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멸망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도구로 필요한 율법을 침묵시키기 위해서 매우 현명한 계략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율법과 사랑은 서로 화해될 수 없는 원수요 적대관계라고 제시해왔습니다. 만일 양자가 대립관계라면 사람들은 당연히 사랑을 택하고 율법을 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무시할만한 사람은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악한 원수는 사랑은 율법과 무관한 것이요 그것과 적대관계라고 선포해 왔습니다.

성경은 이 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과 사랑은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이 사람들에게 강권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라고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의로운 율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질 수 있습니다.

(마 22:37)“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39)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율법은 사랑의 요구에 대한 설명 자체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 주님께서는 사랑을 율법과 연관지어 정의하셨습니다. 이 점에 대한 반복은 놀랄만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사랑은 율법의 인도 없이 표현되어질 수 없고 율법은 사랑의 동기가 아니고서는 결코 영적으로 준행되어질 수 없습니다.

요한은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사랑은 율법을 즐겁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분의 계명을 기쁘게 준행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다윗처럼 외칠 것입니다.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시 119:35). 자연인에게 있어 하나님의 율법은 사슬과 같고 지배자의 뜻에 강요와 같습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율법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부재를 말해줍니다. 만일 그의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하다면 그는 율법을 결코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이 율법을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것처럼 율법도 사랑을 실천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줍니다. 표현하지 못하는 사랑은 약해지고 말 것입니다. 참으로 살아하는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하면 나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단 말인가?”하고 묻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답변을 제시해줍니다. 요한일서 5:3이 선포하듯이 율법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으로 표출되어집니다. 또한 로마서 13:8-10에서 분명하게 언급하듯이 율법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지침입니다.

(롬 13: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9)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율법과 사랑은 결코 대립관계가 아닙니다. 갈등은 구원의 방식으로서 율법과 은혜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율법은 죄인에게 생명으로 나가는 길을 제공해주지 못합니다. 율법은 죄인을 정죄하여 칭의의 유일한 소망인 하나님의 은혜에로 그를 이끕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를 인한 믿음으로 말미암는(엡 2:8)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이 복음전도에 있어 무가치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압니다. 율법은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서 준행되어지는 기준으로는 무가치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 3: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로마서의 시작부터 율법의 검을 폭 넓게 휘둘렀습니다. 그가 이처럼 행한 이유는“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죄인에게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미움과 사람에 대한 적대감을 보여주기 위해서 계명들을 선포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 의와 사랑을 제공받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죄책감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로 돌이키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죄를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설교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죄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당신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하는 성급한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 주제를 오랫동안 취급해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그 계명으로 인해 죽게 될 때까지 십계명을 설명하십시오.(롬 7:10). 사람들이 율법에 의해 상처를 입게 되었을 때 바로 그 때가 복음이라고 하는 향유를 발라줄 때입니다. 율법이라고 하는 바늘을 통해서만이 복음이라고 하는 주홍색 실은 나아가는 것입니다.

 

제 10 계명

우리 주님께서는 계명에 대한 그 관원의 지식이 피상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셨습니다. 주께서 계명을 언급하셨을 때 이 가련한 친구는 자신의 무죄를 고백했습니다. 외적인 행위가 결코 계명이 요구하는 전부는 아닙니다. 그 청년은 “율법이 신령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했습니다(롬 7:14). 아마도 그는 율법의 엄한 외적 규율을 인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율법이 마음과 생각과 뜻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구세주께서는 율법을 전하시는 데 있어서 훨씬 철저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점을 그 영혼 깊은 곳에 고통을 가져다주는 계기로 삼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하셨던 것처럼 각 계명들에 영적인 적용을 첨가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과 함께 그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고 설명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아무런 이유없이)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마 5:22)를 내포하는 것이라고 부연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하신 상생께서는 부자가 그 마음속에 가장 아끼는 죄를 지적하실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예수께서 “네게 있는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제10계명을 적용하여 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탐 내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영혼에 있는 지독스런 탐욕을 찌르는 칼로 사용하셨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그 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죄는 부자의 표면적인 행위에 전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오물과 추함에 딸라 탐욕은 그의 영혼을 지배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마치 화살처럼 이 청년의 양심을 처음으로 꿰뚫었습니다.

예수께서 단지 “탐 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면, 그 공손한 질문자는 “나는 그 누구의 재물이나 부를 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현재의 내 삶에 만족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출애굽기 20장을 재인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자신의 부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제 10계명을 실제적인 테스트로 전환시키셨습니다. 그 청년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사랑하기보다 자신의 부를 더 사랑했기 때문에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떠나갈 때 그는 자신이 탐욕스런 죄인이라는 명백한 인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율법의 기초가 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여되었습니다(마 22:40).

여러분은 예수께서 구한 것이 그 청년이 하나님보다 거룩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었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그 관원의 양심에 깊고도 고통스러운 상처가 생길 때까지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칼을 휘두르셨습니다. 구세주께서는 그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하는 사실에 동의하도록 그를 설득시키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청년의 영혼이 자신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한 반역자요, 그의 영혼은 탐욕으로 인해 사단에게 팔리운 바 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때까지 계속해서 율법을 설명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랑이라는 미영하에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진리와 타협하기보다 오히려 그 관원이 떠나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 죄인을 자신에게 이끌기 위해서 온전한 율법의 파기할 수 없는 특성을 무시했다면 그는 사랑을 파괴시키고 말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계명들을 준수하는 것과 연루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그것이 기초하고 있는 자리를 결코 무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현대의 설교자들은 필히 하나님의 신령한 율법을 선포하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양심에 상처를 내는 법을 알아야만 비로소 그 상처들을 복음이라고 하는 붕대로 감싸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세기의 교회들은 미력이나마 전도하여 회심자들을 얻는 비결을 알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그들은 최소한의 공동적인 메시지가 우리의 힘을 유지하고 복음을 널리 전하며 나아가서는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연합을 가져다 줄 것으로 가정해왔습니다.

교회가 계속해서 진리를 약하게 전해왔기 때문에 세상은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단조롭게 반복되어져 왔던 사영리의 전도방법은 죄인들이 우리 주위에 생겨나게 했으며 또한 교회를 약화시켰습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온전하고 풍성한 복음을 회복시킬 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을 증거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율법을 우리의 회중 가운데서 부지런히 그리고 철저하게 적용시키면서 전파해야만 합니다. 율법의 용례를 보면 일반적으로 예수께서 율법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이끌어내고자 하신 것은 “무지하고 무감각하며 자고한 반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도덕법의 적용은 바로 인간의 속사람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율법이 영혼의 동기, 열망, 감정과 태도에 엄격한 요구를 행한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강단은 어디 있습니까? 그러한 강단을 찾았을 때 여러분은 또한 그 교회가 구원의 도에 대해 듣고자 하는 유죄 선고를 받은 죄인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건강한 힐링푸드 히포크라테스 스프 만드는법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건강한 힐링푸드 히포크라테스 스프 만드는 법을

알려드릴까 해요 히포크라테스 스프는 아직 저도 만들어보지는 못했지만

히포크라테스 스프로는 암을 이겨내고 건강에 좋다고 하니 언제 한 번 만들기 위해서

미리 만드는 법을 알아봤거든요 힐링푸드 히포크라테스 스프 혼자만 만드는

법을 알아서는 안 되니 여러분들에게도 알려드릴게요 ㅎㅎ

 

 

그러면 히포크라테스 스프 만들기에 앞서서 히포크라테스 스프의 역사와

히포크라테스 스프 효능을 알아볼께요 ! 히포크라테스스프는 기원전 550년경정도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히포크라테스가 암치료제로 처방했던 기적의 스프라고

불리우는 스프인데요 아 히포크라테스 스프란 이름이 이렇게 해서 나왔나봐요 ㅎㅎ

히포크라테스 스프의 효능은 암에 걸렸을때 병원치료와 히포크라테스 스프를 먹으면

암을 치료하는데 좋고 많은 야채가 들어가기때문에 미네랄 식이섬유 비타민 섭취를

원할하게 해서 변비와 다이어트에도 매우좋다고 해요!

 

그러면 지금부터 히포크라테스 스프 만드는법을 알려드릴께요! 참고로 저는 아직

히포크라테스 스프를 만들어보지 않아서 직접찍은 사진은 없답니다 ㅜㅜㅜ  

히포크라테스 스프 만드는법!

 

히포크라테스 스프 재료 :  감자 400g (중간 크기 감자 2개가량) , 고구마 한개 , 양파 중간 크기

2개 ,토마토 200g ~ 400g (중간크기 한개정도) , 샐러리 2줄기 , 마늘 한 줌 ,파슬리 조금 (파슬리는

선택 사항)  (+) 고구마 양을 늘리거나 바나나 , 단호박 등을 더 추가하면 달달하니 아이들도 쉽게

먹을수 있어요!

 

그리고 히포크라테스 스프 만들때 가장 중요한점은 히포크라테스 스프를 끓일 때 스텐냄비 혹은

유리냄비를 사용해야 한다는 점 잊지마시고요!!

 

 

히포크라테스 스프 요리 방법

 

1. 준비해둔 재료를 껍질을 벗기지 않고 깨끗이 씻어서 준비해 주시고 조리 직전 재료를 전부

   깍뚝썰기해서 준비해 주세요

 

2. 토마토 , 양파 , 감자 그외 재료 순으로 냄비에 넣어주세요

 

3. 물을 넣지 않고 1시간 반 ~ 2시간 가량을 낮은 불로 익혀주세요

(히포크라테스 스프에서는 야채에서 물이 나오기 때문에 물을 안넣어 주는게 특징이에요)

 

5. 다 끓였으면 믹서 , 도깨비 방망이 등을 이용해서 살짝갈아 죽처럼 만들어 주세요

 

6. 히포크라테스 스프 완성 입니다! 참고로 히포크라테스 스프는 냉장보관하면 2 ~ 3일 가량

더 먹을수 있다고 하니 먹을 만큼만 먹고서 냉장 보관하면 좋을것 같아요

 

히포크라테스 스프 만드는법을 한번 봤는데 다이어트붐 때 주목 받았었던 마녀스프랑

비슷하네요 ㅎㅎ 이웃분들도 건강을 위해서 히포크라테스 스프 한번 만들어 보세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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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질을 뽑아라                   

  어떤 원로목사님께서 "목회하면서 집을 바치는 교인도 보았고,
땅 팔아 바친 교인, 전세금 뽑아 바친 교인, 심지어 피를 뽑아 팔아서
헌금하는 교인도 보았지만 자기 성질을 뽑아 바친 교인은
한 사람도 못 보았다"고 했다.

"예수 믿기 어렵다"고 말하는 교인을 보았다.
결심한 대로 살아지지 않고, 은밀한 죄의 종노릇하며 '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좌절감만 더 느낀다고 했다.

세상 없는 설교를 들어도, 은혜로운 간증을 들어도,
통곡하고 회개해도, 뜨거운 성령 체험이 있어도
성질 하나 뽑아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임마누엘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 복음으로 사는 삶의 핵심이다.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다. 십자가 복음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기독교는 도를 닦는 종교가 아니다. 사랑하라. 용서하라.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면 힘든 것이 없다.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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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지 비방 보도에 조용기 목사 ‘종말론’ 재부각
“종말, 부패한 개신교의 끝” vs“ 1998년 이후 지구 종말”
강수경 기자 | ksk@newscj.com2013.04.10 10:54:01

▲ 1999년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종말론을 설교하고 있는 조용기 목사. (사진출처: 유튜브 동영상 화면캡처)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CBS에 이어 이번엔 국민일보가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신천지)’을 타깃으로 삼았다.

7일 국민일보가 “신천지가 한국교회와 사회에 피해를 입히고 있다”고 단정하고 5회에 걸친 기획을 다루겠다고 보도해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이날 핵심으로 다룬 내용은 ‘시한부 종말론’이다. 이 언론은 “신천지가 시한부 종말론을 강조하고 있다”며 요한계시록에 나온 14만 4000명의 해석에 대해서 언급했다.

신천지가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개신교계와 풀이를 다르게 한다는 것과 14만 4000명이 채워지면 육체로 영생한다는 내용을 강조한다는 점을 문제로 삼았다.

보도에 따르면 정통을 주장하는 개신교계 목회자들은 스스로 연구를 통해 14만 4000명을 상징수로 판단했다. 그리고 이를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로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은 많은 목회자들이 인정해 그동안 통용해왔다.

하지만 신천지는 이 해석에 편승하지 않고 성경에 나온 그대로 14만 4000명을 ‘14만 4000명의 사람’으로 봤다. 이에 주류 개신교계가 문제를 삼은 것.

논란이 되는 이 14만 4000명에 대해 성경 계시록 7장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12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로 구성된다고 기록돼 있다.

아울러 이 언론이 또 문제라고 꼬집은 내용은 신천지가 ‘14만 4000명을 채울 때 죽지 않고 육체영생(肉體永生)하며, 순교자들과 신인합일(神人合一)해 왕 노릇 할 수 있다’며 이 숫자를 채우기 위해 신천지 성도들이 총력을 다해서 전도를 한다는 것이다.

이 언론은 “신천지가 다른 사이비 종교와 같이 조건‧시한부 종말론을 강조하며 이 같은 전도활동을 한다”며 이에 대해 ‘허구’라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탁지일 부산장신대 교수는 이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날짜를 정한 사이비 집단과 달리 신천지는 조건·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움으로 신도들의 ‘올인’을 부추기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이에 신천지 총회 관계자는 “‘종말’의 의미는 지구촌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부패한 개신교 세계가 종말을 맞는 것”이라며 “타락한 개신교계에서 먼저는 인 맞은 14만 4000명을 세우는 것이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 14만 4000명은 셀 수 있는 수이며, 이후에 흰 무리라는 셀 수 없는 사람들이 몰려온다고 기록돼 있다”고 설명했다. 영생과 관련해서는 “14만 4000명도 흰 무리도 모두 영생한다”고 덧붙였다.

‘시한부 종말론’이 이슈로 떠오르며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의 발언이 재조명되고 있다.

일부 언론은 조 목사의 ‘시한부 종말론’을 보도하는 등 관심을 보이고 있다.

1984년 설교 영상에 따르면 조 목사는 “주님은 한 세대 후에 오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한 세대는 1998년도면 한 세대가 되는 것이니, 한 2000년쯤이면 한 세대가 다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이 84년도이므로 역시 16년 이후가 되면 이 세상 6천 년 역사가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예언했다.

1998년 이후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예언한 것이지만 불발로 그쳤다. 그는 종말이 오면 교회가 통째로 들려 올라간다는 휴거를 주장했다.

이후 조 목사는 예언이 빗나가자 “예수님이 가르쳐 준 것이니 책임이 없다”고 회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분노한 네티즌들은 ‘조용기목사 휴거추진위원회’를 결성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 같은 예언은 1994년 해럴드 캠핑의 종말론과 흡사하다. 캠핑은 성경의 심판 날이 2011년 5월 21일이라고 주장하며 이날 신의 부름을 받아 하늘로 올라가는 휴거가 일어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예언도 역시 빗나갔고, 캠핑은 다시 날짜를 10월 21일로 수정‧발표해 빈축을 샀다.

한편 조 목사는 일본 지진에 대해 ‘하나님의 경고’라고 해석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고, 지난해 4월에는 자신이 3월 16일에 천당에 간다고 주장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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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中 사이비종교가 국내 주요 일간지에 전면광고를?
한국교회언론회, 中 사이비 종교 ‘동방번개파’ 국내 활동에 ‘주의 당부’

2013/05/03 (금) 10:28 ㆍ추천: 0  ㆍ조회: 87      

중국의 사이비 종교 ‘동방번개파’가 국내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교회’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홍보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제보가 있어 주의가 요청된다.

 
▲동아일보 1월 15일자에 게재된 전면 광고ⓒ전능하신 하나님교회 홈페이지

국내 언론사 통해 대대적 홍보 활동

한국교회언론회(대표 김승동 목사, 이하 교회언론회)는 1일 교계 언론사에 보낸 보도자료를 통해 ‘중국교회 이단인 동방번개파가 국내에서 홍보 활동을 하고 있다’며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이들에 따르면, 동방번개파(東方閃電派)는 ‘전능하신 하나님교회(이하 전능신교)’라는 이름으로 최근 국내 각 언론사에 동일한 제목의 홍보성 광고를 게재하고 있다. 광고의 제목은 ‘예수님의 재림-전능하신 하나님이 국도시대에 발표하신 말씀’으로, 성경을 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교회언론회가 지난 1월부터 4월 30일까지 모니터링한 결과에 의하면, 총 101회의 광고가 게재됐다. 각 신문별로는 경향신문이 12회, 동아일보가 22회, 매일경제 1회, 서울신문 10회, 조선일보 16회, 중앙일보 11회, 한겨레 2회, 한국일보 23회, 한국경제 4회 등이 전면광고로 게재했다.

교회언론회는 “아침 시각 지하철 등에서 배포하는 무가지에도 간간히 광고를 내고 있다”며 “특히 이단광고 게재를 상당히 자제하던 주요 신문들조차 마구잡이로 광고를 게재해주고 있다”고 우려했다.

기독교 핵심 교리 전면 부인…정부ㆍ교계ㆍ언론 ‘주의 요망’

전능신교는 호함파(呼喊派, 위치만 니의 영향을 받은 이상수가 교주) 출신의 조유산(趙維山)이 발기인, 하남성 낙양(河南省 洛陽) 사람으로 등(鄧)씨 성을 가진 여자가 교주로 알려져 있다. 지상의 모든 교회를 정복해 동방번개파로 귀의하게 하고, 만국을 정복해 세계가 동방번개파를 중심으로 하나 되게 하는 것이 존재 목적이다.

조직은 주요 인물이 포함된 상부 구조와 성(省)급 책임자들을 포함한 행정관리요원, 행동요원들로 구성된 하부 구조로 나뉘어 있으며, 엄격한 규율 하에 운영된다.

전능신교는 성경을 지나간 시대의 유물(遺物)로, 예수 그리스도를 피조물로 여긴다. 성경의 권위와 삼위일체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등 기독교의 핵심을 전면 부인하며 전통교회 또한 부정한다.

하나님은 삼위일체가 아닌 일위일체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동방번개파의 교주가 완성한다. 또한 교주에게 순종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는 이미 여성의 몸(동방번개파의 여교주)으로 중국 땅에 재림했다는 게 이들의 교리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교회의 예배와 성례를 부인하고 전도 무용론을 주장한다.

교회언론회는 “전능신교는 구로에 자체 빌딩을 구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100회 이상 전면광고를 내는 등 막대한 자금에 대한 의혹도 생긴다”며 “이것이 신도들을 통한 것이라면, ‘혹세무민’하는 사이비ㆍ이단들의 현상이 아닌가 주목할 일”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들은 “동방번개파는 중국 사회에서 암적 존재로 평가되고 있으며, 중국 정부도 경계령을 내린 상황”이라며 “우리 정부도 사이비ㆍ이단에 의한 혼란과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힘써야 하며, 한국교회도 성도들이 이단에 미혹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교회언론회는 이어 “언론들도 이렇게 대대적으로 기독교 진리를 훼손하고 국민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는 사이비ㆍ이단 종파의 홍보대사 역할을 멈춰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민정 ⓒ 뉴스미션/USA아멘넷




 

이가봇을 막는 비결 | ▶설교 본문
2013.05.05 17:13
 

이가봇을 막는 비결

 사무엘상 4:12-22

 

12 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영에서 달려나와 자기의 옷을 찢고 자기의 머리에 티끌을 덮어쓰고 실로에 이르니라

13 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자기의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떨릴 즈음이라 사람이 성읍에 들어오며 알리매 성읍이 부르짖는지라

14 엘리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떠드는 소리는 어찌 됨이냐 사람이 빨리 가서 엘리에게 말하니

15 때에 엘리의 나이가 구십팔 세라 그의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16 사람이 엘리에게 말하되 나는 진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이르되 아들아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17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18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가 많고 비대한 까닭이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사십 년이었더라

19 그의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하여 해산 때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를 빼앗긴 것과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은 소식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20 죽어갈 때에 곁에 있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하지도 아니하며 관념하지도 아니하고

21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22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기는커녕 오히려 버림을 받아서 철저히 이방인들의 발에 밟히는 비참 가운데 처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려하신 결과를 맞는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5:13).

 

그러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값주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실패합니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영광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밖에 버려져 세상 사람들에게 밟힐 뿐입니까?

 

성경은, 이유는 때문에 그러하다고 합니다. 거룩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가운데 있을 ,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십니다.

우리가 가운데 있을 , 하나님의 영은 고통가운데 근심하십니다.  

우리가 가운데 있을 , 우리의 영원한 원수인 사탄이 우리를 짓밟습니다.

 

그러므로 죄라는 것은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우리 신자들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죄이며 나아가 우리 하나님의 영광을 땅바닥에 떨어뜨려 모독을 돌리는 것도 우리의 죄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과의 전쟁에 있어서 용기를 가지고 전쟁에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4천명 정도가 죽게 되면서 패전하게 됩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나라에 패할 수가 있느냐, 아니 하나님은 전능하시다고 하는데 우리를 이렇게 비참케 하시느냐라고 따집니다. 이때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에 대하여 돌아볼 생각은 하지 아니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합니다. ,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면 이길 것이라는 발상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언약궤 자체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실로에서 언약궤를 가져 후에 다시 전쟁에 나갑니다. 이러한 발상이야말로 신앙을 마법의 세계로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이때 언약궤를 사람은 다름 아닌 당시의 제사장인 엘리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언약궤와 더불어 그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함께 전투에 내보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대패를 하였습니다. 심지어 저번 전쟁과는 상대도 되지 않게 3만명이 되는 보병이 죽었습니다. 이는 엄청난 패전이었으며 이로 인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좌절과 낭패와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본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친히 성별하신 민족으로서 얼마든지 승리와 영광을 누리며 있는 특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백성은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을 누리기 보다는 블레셋 사람의 발에 밟히며 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비참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군사들은 걸음아 살려라 하고 도망가더니 하나님의 성스러운 언약궤를 블레셋 군사들에게 빼앗겼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심한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더불어 죽은 병사들 가운데는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끼어 있었습니다.

 

소식을 들은 엘리 대제사장! 그는 자신의 아들이 전쟁에서 죽었으며 하나님의 언약궤를 적군에게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더니, 앉고 있던 의자에서 그대로 쓰러져 목이 부러져 죽게 됩니다.

 

마지막 죽음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한지, 모습은 구약의 배경에서 때는 비참과 저주였습니다.

 

이때 시아버지도 죽고 남편도 죽고 또한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접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엘리 대제사장의 아들인 비느하스의 아내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여인은 당시 임신 중이었고 또한 거의 아이를 낳는 순간이었습니다.

 

21절에 보니, 엘리 대제사장의 며느리요, 비느하스의 아내인 여자가 아이를 낳으며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줍니다. 너무나 슬픔 가운데 갓난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이가봇!”이라고 지었습니다. 뜻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라는 의미였습니다.

 

여인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정과 나라에서 떠나는 것을 보며 죽도록 슬퍼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슬픔 가운데 정말로 죽은 여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가봇의 비참한 상태가 주어지는 것입니까? 성경은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게 원인을 자세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엘리 제사장이 깨어 있지 못함으로 가정이 타락한 것이 대표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장은 엘리 제사장의 가정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12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13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은 이러하니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14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가지되 실로에서 곳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아니라

15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16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지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17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엘리 제사장은 가정의 아버지로서 가정의 거룩을 지켜야 하고, 또한 제사장으로서 성전의 거룩을 지켜야 하는데 그는 두가지에 있어서 게으른 자였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기도와 말씀에 매우 게으르더니 노쇠한 가운데 영력이 감소되었습니다. 심지어 사무엘상 2 22-25절을 보면 엘리 대제사장은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는 더러운 죄를 짓는 것을 알면서도 방관하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이에 엘리 대제사장의 가정은 하나님으로부터 엄중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마음이 강퍅한 상태에서 계속 죄를 지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유의해야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고 용서하기를 기뻐하시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이 회개하지 않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같은 죄를 계속 지으면서 어떤 선을 넘으면 하나님은 그들을  절대로 가만두지 않으시고 죽이기로 작정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때는 아무리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더라고 하나님은 마음을 돌이키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떤 도를 넘어서서 같은 죄악을 반복하여짓는 일이 있어서는 됩니다. 죄를 짓게 되면 신속하게 주의 보혈 앞에 나아가 회개하고 다시 새롭게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사무엘상 2장에서 신자의 가정이 타락하는 과정과 하나님께서 가정을 심판하시는 과정을 있습니다.

 

먼저 엘리 제사장의 안일함과 영력의 감소는 가정의 타락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제일 먼저 가정의 타락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하는 현상입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제사를 멸시하는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현대어로 말하면 예배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삼상2:17).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이 사라지면 자녀 가족원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물질적인 면에서 타락하고, 쾌락적인 면에서 성적으로 타락합니다. 이때 이가봇 현상이 나타나는 가정의 특징은 그러한 죄악들을 알면서도 방관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자녀들의 죄악을 방관하는 엘리 제사장의 모습이 나타나고 이에 하나님께서 아들들을 죽이기로 작정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치시는 방법은 언제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백성을 그들의 발에 짓밟히게 하십니다.

 

아무튼 이가봇의 첫째 원인은 가장이 엘리 제사장처럼 하나님 앞에서 바른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할 가정에 이가봇 현상이 발생합니다. , 가정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것입니다.

 

교회라면 담임 목사가 영적으로 죽어 있으면 이가봇 현상이 나타날 것이며 국가적인 차원이라면 교회가 죽어갈 이가봇의 현상이 나타날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지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3 1 절에 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도 없고 배우는 자도 없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모두 무지하였습니다. 엘리 제사장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마치 눈이 어두워진 엘리 제사장과도 같이 국민이 영적으로 소경의 상태, 영적인 암흑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교회와 나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영광은 함께 거할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갈 사회는 건강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마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관심이 없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질 때는 사회는 이가봇 현상,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게 됩니다. 그러면 이후에는 주의 심판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유황불로 도시를 태워 멸하셨습니다. 여기서 의인 10명이 누구입니까? 착한 사람을 말합니까? 도덕적으로 선한 10명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 10명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 사회에서 소금과 빛으로 있어야 그리스도인이 없었다는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였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사회는 이가봇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교회나 나라는 이제 얼마 있어서 이가봇이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가봇의 원인입니다.

삼무엘상 4 4절을 보면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전쟁이 나서 벌써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났음에도 그들은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오늘 사건은 갑자기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에게 경고한 내용이 발생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2 27 이하입니다.

27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28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제사장으로 삼아 그가 제단에 올라 분향하며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

2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처소에서 명령한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아들들을 나보다 중히 여겨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집과 조상의 집이 앞에 영원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31 보라 내가 팔과 조상의 팔을 끊어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

32 이스라엘에게 모든 복을 내리는 중에 너는 처소의 환난을 것이요 집에 영원토록 노인이 없을 것이며

33 제단에서 내가 끊어 버리지 아니할 사람이 눈을 쇠잔하게 하고 마음을 슬프게 것이요 집에서 출산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34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날에 죽으리니 둘이 당할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그러나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엘리 제사장과 그의 아들이 회개하였다는 사실이 없습니다. 만일 이들이 베개를 적시며 회개하고 삶을 바꾸었다면 이야기는 전혀 판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회개도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가운데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거룩한 법궤를 메고 진중으로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입니까?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려고만 하였지 하나님을 두려워 함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니 신앙이 무슨 마술인줄 착각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도 가장 중요한 단어가 서로 연결되어 등장하고 있습니다.

6번이나 되풀이 되는 단어인데 단어는 하나님의 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단어와 관련되어 되풀이 되는 단어는 "하나님의 영광"이란 단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궤가 떠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에 슬픔 가운데 죽은 여인은 새로 태어낫 갓난아이에게 "이가봇"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여호와의 궤는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인생의 가장 비극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인생의 가장 비극입니까? 돈이 없어서 비참한 것입니까? 세상이 세상이 나를 알아 주지 않고 교회가 나를 알아주지 않으며 가족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이 제일 비극입니까?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해서 비극입니까? 건강을 잃어서 비극입니까?

 

오늘 본문의 저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것을 최고의 비극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비극은 하나님께서 우리는 떠나시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가장 비극은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가정이 이상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비극은 아무리 많은 행사를 하고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거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라의 가장 비극은 하나님께서 나라를 버리고 떠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없이 사는 인생은 시체와 방불합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은 사는 같지만 사실은 죽은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떠난 인생은 아무런 가치 없이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이 무의미한 인생을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사실, 숨을 쉬는 동안 죄악을 쌓는 것밖에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에 대하여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떠나고 없는 인생! 세상에 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하였구나!”

 

에스겔서 10장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앞의 땅에서 올라가는데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도 곁에서 함께 하더라 그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위에 덮였더라”( 10:18-19).

 

이스라엘이 죄악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을 하나님은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십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들 위에 머무르는데 구름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런데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통해 동편으로 나가십니다. 그리고 후에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은 여인의 고통과 죽음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슬픔 가운데 죽었습니다. 여인은 무엇을 가장 고통으로 느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떠난 것으로 인한 심한 영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생명을 잃을 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소중히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을 괴로워 하며 죽은 여인의 죽음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바친 그리스도의 모습을 봅니다.

 

한편, 이가봇이라는 이름을 지닌 아기의 입장이 되어 봅시다.  순진하게 태어난 아기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이름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아이의 인생은 어떠했겠습니까? 사람들은 아이를 부를 때마다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이 역시 십자가 상에서 주의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가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십자가 상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이가봇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그분은 사실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이십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우리의 죄로 인하여 이가봇이 되신 죄가 없는 아기! 그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 상에서 이가봇이 되심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소유할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찾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신 이가봇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영원토록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언제나 반드시하나님의 새언약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다시 찾아 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으로 인하여 다시 이스라엘 성전으로 돌아오는 장면이 에스겔 43장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 성전에서 내게 하는 말을 내가 듣고 있을 때에 어떤 사람이 곁에 있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는 보좌의 처소,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에 영원히 있을 곳이라. 이제는 그들이 음란과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거하여 버려야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 가운데에 영원히 살리라”( 43:4-5, 7, 9).

 

그리고 에스겔이 장면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실 이루어졌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4).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붙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믿어야 합니다. 또한 그분의 새언약인 복음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언약궤를 찾아와야 합니다. , 말씀이 되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붙들뿐만 아니라 말씀을 담은 하나님의 언약궤인 성경으로 돌아가야만 하나님이 영광이 우리 가운데, 우리 가정 가운데, 우리 교회 가운데, 나라 가운데 다시 회복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지라도, 시간에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이가봇의 고통을 당한 여인과 아이가 상징하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다시 붙잡는다면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주의 언약에 의하여 우리에게 찾아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을 버리고 말씀으로 돌아가기 바랍니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우상을 회개하고 주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갑시다.  자녀들과 가족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모든 지인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과 그리스도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도록 합시다. 그러면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분의 보혈로 덮으시고 우리의 심령을 깨끗하게 씻어주시며 나아가 성령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악을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다시 거할 ,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이가봇으로 버림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오늘도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여러분의 삶과 가정, 그리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위에, 또한 우리 조국 위에 임하기를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300 년 후 이루어진 예언

[열왕기상 13장]

오늘 말씀은 여로보암에게 일어난 기이한 사건에 관한 기록입니다. 유대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벧엘로 가서 여로보암이 분향하는 단을 향하여 외칩니다.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아라 이름 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또 그 예조로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 이 말씀을 보니까 마태복음 1장 21절에 기록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금송아지 앞 제단에서 분향하다가 그 소리를 들은 여로보암이 손을 펴 ‘저를 잡으라.’ 할 때 그 손이 말라서 거두지 못 하게 되고 단이 갈라지며 재가 쏟아집니다. 놀란 여로보암이 그 하나님의 사람에게 자기 손을 고쳐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리고 그를 붙잡고 자기 집으로 가자, 예물을 드리겠다 하나 그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다른 길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다른 길로 돌아가다가 벧엘의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에 속아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되고 사자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이 슬픈 선지자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게 됩니다.

분향이 무엇입니까? 분향은 하나님께서 향내를 맡으시며 받으시는 것입니다. 분향은 자신을 드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죄인과 죄인의 분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죄 때문에 향내가 아니라 악취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사장으로 하여금 죄 없는 짐승을 잡아 태워서 죄의 악취를 잠시 제거한 다음 성소에서 분향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또 이것은 죄 없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제물이 드려진 다음에야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5장은 성도의 기도가 금대접의 향으로 드려지는 광경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우상은 죄든 뭐든 가리지 않고 분향을 받습니다. 우상이 악취 덩어리니 죄나 악취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우상 앞에 분향하는 것은 자신을 우상에게 드리는 행위입니다. 지금 여로보암이 하는 짓이 바로 그짓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지 300 년이 지난 다음 “단아, 단아.” 하고 외쳤던 '하나님의 사람', 그 슬픈 선지자의 예언은 성취됩니다. 유다왕국의 요시야 왕은 산당을 헐고 우상을 훼파하며 하나님의 전을 수축하고 율법책을 찾아 절기를 지키며 유다왕국이 잠시나마 여호와 신앙을 회복하는 영적대각성운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벧엘의 산당을 헐고 묘실에서 산당 제사장들의 뼈를 꺼내어 우상의 단 위에다 불사르고 산당 제사장들을 단 위에서 죽이고 그 뼈를 거기에다 불사르는 통쾌한 일을 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날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실 그 날도 이처럼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여로보암은 그 선지자의 무서운 경고를 받고도 우상숭배의 길에서 떠나지 않았을까요? 결국은 그 후손과 집안이 땅에서 끊어지는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는데 말입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권력 때문에,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제사 드리러 가면 그들의 마음이 유다왕국으로 돌아설까봐 그랬다지만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왜 여로보암을 따라 단과 벧엘에 세운 금송아지 앞에 엎드려 제사하고 분향했을까요? 참으로 이상하고도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 같으면, 우리 같으면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뭐? 금송아지에게 절하라고?" 반란을 일으켜 여로보암을 내쫓고 금송아지와 제단을 때려부수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여호와 신앙으로 돌아갔어야 할텐데 말입니다.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내심 백성들은 그게 더 좋았을 것입니다. 일년 삼차 절기 때만 되면 뜨거운 중동지방의 태양 아래 땀 흘리며 예루살렘까지 먼 길을 가지 않아도 되니 그게 좋았을 것입니다. 가까운 벧엘이나 단에 가서 제사 드리니 그게 훨씬 편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까지 가봐야 레위지파가 제사장이라고 거들먹거리며 제사 지내고 분향하는 것도 눈꼴시었는데 이젠 직접 제사 드리고 분향할 수 있으니 그것도 속시원했을 것입니다. 금송아지에게 제사하는 게 좀 께름찍해서 도저히 자기가 나서서 하지는 못 하겠지만 여로보암 왕이 앞장서서 해주니 자기책임도 아니고 마음의 부담도 한결 덜어졌을 것입니다. 벧엘과 단의 금송아지는 결국 여로보암의 권력을 위한 계략과 백성들의 편안하게 자기 마음대로 믿고 싶어하는 마음이 합치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편안한 길이 아닙니다. 신앙이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슬픈 선지자가 사자에게 죽임당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고쳐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은 싸움이라고 말씀합니다. 씨름이요, 싸움이요, 전쟁이라고 말씀합니다. 속이는 자들과 거짓선지자들과 허탄한 세상의 유혹과 때로는 강압과 위협과 위험이 끊임없이 공격해 오고 때로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힘들더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끊임없이 여호와의 전에, 오늘날 우리들은 날마다 주님 앞에 나아가 그 얼굴을 뵙고 그 말씀으로 새힘을 얻고 그 능력으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여로보암이 이끄는대로 편안한 우상숭배의 길로 이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여로보암들이 편안한 신앙의 길로 이끌어갑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께름직해 하면서도 여로보암들이 만들어놓은 편안한 곳에서 자신이 좋은대로 신앙생활을 한다 합니다. 사자에게 죽임당할 줄도 모르는지 하나님의 말씀도 고쳐서 행한다 합니다.  
"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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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조경현
     

여전히 별이 하늘에
걸려 있네
아이 이뻐라...

 

밤새 얼마나 힘들었을까? 햇님이 나오면 좀 쉴 수 있을걸,

 

"힘들었지" 말 걸자, 별은 나에게 하는 말이 있다. "이게 나의 일이야" 도현

 


 별/조경현
     

여전히 별이 하늘에
걸려 있네
아이 이뻐라...
밤새
얼마나 힘들었을까?
햇님이 나오면 좀 쉴 수
있을걸, 
 "힘들었지" 말 걸자,
별은 나에게 하는 말이
있다.
"이게 나의 일이야"



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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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없는 신앙인의 모습

긴 세월 신앙생활을 하다가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속칭 ‘가나안 성도’라 부른다 한다. 이 단어를 거꾸로 말하면 ‘교회 안나가’를 의미하는 뜻이 된다. ‘한국 목회사회학 연구소’에서 교인 누수현상을 실감하며 비상종을 울렸다. 드디어 심각한 붉은 불이 켜지며 4월 25일 명동 청어람에서 ‘가나안 성도’숫자와 그 대안에 대한 세미나가 열렸다.

평소 관심 있는 분야 인지라 참석했다. 대부분 신앙은 있지만 제도화된 교회를 출석하지 않는 속칭 ‘가나안성도’들의 문제점을 진단해보았다. 그동안 ‘목회사회학연구소’는 현대인들의 종교성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 했다 한다. 왜 그들이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서도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심층 연구했다.

장진원(목회사회학연구소 기획실장)실장의 사회, 한기양목사의 기도와 함께 정재영 교수(목회사회학 연구소 부소장)가 ‘소속 없는 신앙인’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최근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증가함에 따라 그 실체와 특성을 분야별로 분석 했다. 2004년도 한국갤럽 조사 결과를 예로 들었다. 그 당시 교회를 떠난 사람이 758만 명, 그중 198만은 타종교로, 560만 명은 ‘가나안성도(교회를 떠난 사람들)’가 된 결과를 볼 때 심각성을 짐작할 만했다. 그 후 9년이 지난 지금의 ‘가나안 성도’ 숫자는 감히 우려할만한 숫자로 감지된다.

이들 대부분은 교회 내에서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교회를 떠난 가장 큰 이유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원한다가 30.3%를 차지했다. 그다음 목회자에 대한 불만이 24.3%를 나타났다. 대체적으로 고학력자와 직분자 일수록 목회자에 대한 불신이 컸다. 그 예로 맹목적인 충성, 무조건 순종, 헌금강요, 전도, 교회출석 등 교회의 제도화된 독선이 이들을 떠나게 한 요인으로 나왔다.

이런 목사 참 꼴불견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그동안 한국교회, 특히 대형교회가 큰 몫을 차지했다. 각종 세습, 정종유착(정치와 종교), 권력다툼, 건축, 논문표절, 재정독점, 문어발식 개척, 성문제까지 대두되었다. 심지어 부끄러운 세습을 하고도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나쁜 목사들이 많다. K교단 K교회 K목사는 종편 방송에 나와서 뻔뻔하게 북한의 세습을 강하게 질타했다. 그러나 자신의 세습은 당연하다 말했다. 한마디로 ‘네가 하는 사랑은 불륜이고 내가 하는 사랑은 로멘스’라는 독단과 독선이 ‘가나안 성도’의 숫자를 증가시키는 공로자임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세상이 교회를 한심하게 볼 정도까지 와 있는데도 여전히 이러한 문제들은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학력이 높고 직분을 맡은 교인들이 먼저 ‘가나안 성도’가 될 수밖에 없다. 자유로운 의사소통이나 개인의 의견은 무조건 비판적인 시야로 보기 때문이다. 심지어 안티성도로 낙인찍어 설교자는 설교 때마다 이런 성도들을 집중 공격한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 ‘가나안 성도’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렇듯 소수 공동체 의견이 묵살되는 곳이 교회다. 예일대 심리학자 어빙 재니스는“구성원들이 어떠한 공동체에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없도록 왜곡된 사고방식을 ‘집단사고(Groupthink)'라” 했다. 자칫 ‘집단사고’는 권위를 과시하며 방망이를 휘두르는 독선 독재집단으로 전락하기 쉽다.

지금 한국교회는 이 ’집단사고‘즉, 맹종을 부추기는 당회장의 독단과 독선 앞에서 무너지고 있다. 직분 자들 대부분은 무조건 순종과 충성만이 신앙생활을 편하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택한다. 즉 자기방어적인 ’집단사고‘이다. 무한성장주의, 물질숭배주의, 배타적 일방주의, 기복주의, 개교회주의, 권위주의가 교회를 병들게 한 바이러스와 같다.

‘가나안 성도’들은 이러한 수많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병들어서 교회를 떠났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사실 성도가 교회를 떠나 ‘가나안 성도‘가 된 것이 아니다. 더 깊게 들어가면 교회가 성도를 떠났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복음의 진리가 떠난 교회는 이미 교회의 사명을 잃어버린 부도위기에 처한 부실기업과 같다.

언제 붉은 딱지가 교회에 붙을지 모른다. 현재 건물을 짓다 실패하여 경매로 나온 교회가 얼마나 많은가. 교인 머리 숫자대로 대출이 되는 세상이 되었으니, 과연 누가 누구를 불쌍하다 해야 할 것인가. 이렇게 비상 사이렌 소리가 요란해도 우리교회와 상관없다는 관념으로 교회는 대형화를 넘어 초대형화를 향해 바벨탑을 쌓고 있지 않은가.

여전히 건물에 목메고 있는 목회자는 지금 길을 잘못 가고 있다. 현재 한국교회가 "서구사회를 따라가고 있다"고 우려하지만, 그것은 우려의 문제가 아닌 기정사실적인 문제로 다가올 것이다. 필자가 <크리스찬이여, 핸들을 꺾어라>책을 썼을 당시, 여러 교회를 방문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성전마다 하얀 서릿발이 내린 것처럼 이미 나이든 사람들만이 성전을 지키고 있었다. 또한 주일 오후예배나 수요저녁 예배, 금요철야는 서릿발보다 더 하얀 함박눈만이 앉아있었다. 필자 자신도 충격이었다.

매 년 젊은이와 어린아이가 사라지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건물에 집착하고 세습과 독선의 배를 타고 가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으니. 얼마나 더 많은 ‘가나안 성도’가 증가할지 우려되는 문제다.

이런 모든 문제들을 볼 때 교회 공동체 회복이 시급한 과제임을 실감했다. ‘가나안 성도’들이 다시 희망하는 교회도 올바른 목회자가 있는 곳이다. 이런 교회를 찾는 '가나안 성도'가 16.6%를 차지했다. 그리고 대부분 구원의 확신도 버리지 않았다는 것도 알려 주었다.

가나안 성도를 통해 본 현대인의 영성

조성돈(목회사회학연구소 소장)소장은 ‘가나안 성도’의 출현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들로 꼽았다. “이들은 성장과정에서 강요받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다양한 경험과 책을 통해서 신앙에 대한 회의와 교회에 대한 실체를 보고 나만의 신앙생활로 돌아간다. 신앙의 생활화로 만족하는 사람들로서 실천을 통해서 만족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자기 식으로 표현하는 신앙 생활자를 말하며 자신의 종교를 패치워크 종교성(Patchwork Religiositaet)즉 조각 천들을 연결하여서 담요를 만들 듯이 현대인들은 다양한 종교적 상징들을 이어 붙여서 자신의 종교를 만들어 가고 있다.”라 했다.
대부분 교회가 신앙심을 볼모로 억지 아멘을 강요시키며 공동체의 맹종을 요구했다. 심지어 두 손 들고 울면서 찬양하며 감동하는 성도를 믿음 좋은 성도로 내세웠다. 어찌 보면 개인의 감성까지 침범하며 억지 춘향이 노릇을 강요한 결과들이 지금의 문제들을 야기 시켰다. 신앙 안에서 자연발생적인 믿음이 성장하기 까지는 긴 세월 기다려야 한다. 스스로 자신을 성찰하고 깨닫는 시간은 평생이 걸릴 수도 있다. 우물 앞에서 숭늉(헌금, 전도, 출석, 건축)등을 강요하니 성도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성도들은 일주일간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상처받고 살다가 교회 와서 위로받고 재충전의 시간을 원했다. 그러나 교회는 더 큰 부담과 죄의식까지 심어주었다. 특히 헌금과 전도를 많이 하지 못한 사람은 그저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1960~80년대에는 그러한 독선이 통했기에 한동안 뜨거운 냄비로 달구어 졌다. 그러나 그 냄비는 복음이 아닌 상품이었기에 오래가지 못했다. 불량상품을 썼던 소비자는 다시는 그 상품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성돈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강인하게 자신의 종교를 만들고 그것을 용납해줄 교회와 하나님을 찾고 있었지만 채워지지 않는 신앙의 정서적인면 때문에 고민하고 아파하는 자들이다. 이들을 4영리에 묶는 시대는 지났다. 좀 더 논리적인 변증론이 필요하다. 그래서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이들, 포기할 수 없는 ‘가나안 성도’”라 했다.

과연 누가 무엇을 포기하고, 누가 무엇을 포기 할 수없는 것인지는 더 깊이 있게 상고해봐야 할 문제로 남았다.

가나안 성도’와 새로운 신앙의 방향

양희송(청어람아카데미 대표기획자)대표는 점차 증가하고 있는 ‘가나안 성도’현실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 사례가 있는데 대부분 신앙을 떠난 것이 아니라, 단지 제도권 교회를 떠났지 기독교 신앙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전형적인 제도권 교회의 강화가 아니라 교회 바깥에 느슨한 네트워크를 통해 신앙적 각성과 새로운 신앙 유형을 형성한다. 또한 제도 종교에 대한 반발, 즉 무의미한 예배(종교의식), 위선적이거나 피상적인 라이프 스타일(성도들의 영성과 윤리), 윤리적 질문에 대한 무능력한 대답. 그리고 성직주의, 성장주의, 승리주의가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질병의 대표적 증상이다.”라 했다.

양대표 주장은 기독교 신앙 바깥에서 이들의 신앙을 유지 발전 시켜줄 재구성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좀 더 앞서가는 대안으로 볼 수 있다. 필자 주위에는 ‘가나안 성도’가 많다. 필자도 이중 한 사람이다. 한기양 목사(기장)는 “기장교인들이 ‘가나안 성도’반열에 많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필자의 의견은 다르다. 고신, 합동, 통합, 감리, 성결, 순복음, 침례등 수많은 교파에서 떠나온 ‘가나온 성도’의 순례는 더 많다. 그것은 대형화된 교회에서 더 많은 ‘가나안 성도’가 이탈했기 때문이다.

웃지못 할 교단의 거룩성을 나타내는 일화가 있다.
‘기장 목사들은 술병에 술을 그대로 놓고 마시는데, 다른 교단 목사들은 박카스 병이나 우우 병에 술을 담아서 마시면서 거룩한 체한다.’그만큼 거룩으로 위장한 교단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어디 술뿐이던가. 담배와 잡기까지 친구삼아 위장한 자들이 있다는 것은, 과연 누가 가나안 교회를 만든 범인인가. 결국 ‘가나안 교회’가 먼저 바이러스를 옮긴 결과 ‘가나안 성도’들이 병들어 떠난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바로 ‘가나안교회(안나가는 교회)현실 앞에 서 있다. 성도가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이미 복음의 본질을 떠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정한 의미로 ’가나안 성도‘들은 ’영적 노숙인‘이 아니다. 가야 할 저 본향 길을 향해 단지 외롭게 가고 있을 뿐이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땅이다. ‘가나안 성도’라는 별칭이 합당 타당하다. 이들은 가보지 않는 새로운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초대교회 정신으로 다시 돌아가 초심을 찾아가고 있다. 초대교회는 가정이 바로 교회 아닌가. 예수님도 성전 없는 사역을 감당했기에 복음이 지금 이곳까지 왔다.
그 당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초호화 초고층 교회를 짓고 사역 했다면, 오늘날 복음은 전파되지 않았을 것이다. 열두제자가 각기 흩어져 ‘가나안제자’가 되었기에 복음은 흩어져서 결실을 맺었다. 복음이 성전 안에 갇혀 소수 공동체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면, 복음은 이미 진리가 아닌 상품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 복음이 점차 인간의 탐욕으로 교회가 상품화 되면서 변질되기 시작했다. 어디가 끝인지 끝이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 서있다. 정재영 부소장의 주장과 같이 “‘가나안 성도’들은 기성교회에 대해 뚜렷한 불만을 가지고 떠난 사람들이다. 일부는 기성교회와 차별성을 갖는 ‘대안적 교회’를 세우고 있다.
이것은 마치 중세 교회가 제도화되고 교권화 됨에 따라 수도원 운동이 일어나고 교권이 미치지 않는 사막으로 나갔던 사막 교부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들을 섣불리 교화하려 하거나 제도권으로 흡수하려 하기보다는 그들의 영적인 욕구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것을 기성 교회에서 수용함으로써 교회 갱신 노력이 절실함이 요구된다.”라 말했다.

필자는 ‘가나안 성도’에 대한 대안 책으로 가정교회를 ‘대안적 교회’라 말하고 싶다. 특히 미주지역에서 가정교회가 초대교회처럼 공동체를 형성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도 현재 가정교회를 이루고 있다. 가족이 모이기도 힘든 시대이다. 먼저 가족이 모이고 뜻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예배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다. 절기와 세례의식은 자신이 가고 싶은 교회로 가서 드린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에서 활력을 얻고 있다.

끝으로 조성돈 소장은 “교회를 떠난 가나안성도들이 불쌍하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그러나 세상이 교회를 얼마나 한심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도 알아야 한다. 성경책을 들고 다니기가 창피한 시대를 살고 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라는 말도 있다. 적을 알면 전쟁에서도 백전백승하는 법이다. 세상 사람들 시각과 ‘가나안 성도’들 신념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와 공감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우리 안에 예수의 마음이 함께 행할 때 그곳이 바로 성전이다.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사행7:47-50)’

바로 가정, 삶의 현장이 성전이라는 신념과 신앙의 지각을 넓힌다면 ‘가나안 성도’ ‘가나안 교회’ 문제도 그리 먼 곳에 가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 모든 것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기 말이다.
-- Jennifer 김 은주 Eun Joo Kim 

    감동을 주는 명언들


    1*음악이 있는 곳엔 악이 있을 수 없다.

    2*힘없이 사라져가기 보다는 불꽃처럼 한번에
    타오르는 것이 낫다는 것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3*내가오르는 길이 아무리 험난한 길일지라도 이 길이
    절벽이 아니기에 나는 이 길을 헤쳐나 갈 수 있다.

    4*진정으로 신을 사랑하는 자는 신에 대해서 자기를
    사랑해 달라고 원하지 않는다.

    5*의심스러운 사람은 쓰지 말고
    사람을 썼거든 의심하지 말라.

    6*폭풍은 참나무의 뿌리를 더욱 깊이 들어가도록 한다.

    7*바쁘게 움직이는 꿀벌에게는 슬퍼할 여유가 없다.

    8*강을 거슬러 헤엄치는 자가 강물의 세기를 안다.

    9*고통은 인간의 위대한 교사이다.
    고통의 숨결 속에서 영혼은 발육된다.

    10*낙오자란 세 글자에 슬퍼하지 말고
    사랑이란 두 글자에 얽매이지 말고
    삶이란 한글자에 충실하라
    사랑이 두려운 것은 깨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변하는것이다.

    11*사랑은 달콤한 꽃이다 그러나 그것을 따기 위해서는
    무서운 벼랑 끝까지 갈 용기가 있어야 한다.

    12*진실한 사랑의 실체는 믿음이다.

    13*눈물은 눈동자로 말하는 고결한 언어.

    14*친구란 두 사람의 신체에 사는 하나의 영혼이다.

    15*흐르는 강물을 잡을수 없다면,
    바다가 되어서 기다려라.

    16*영원히 살 것 처럼 꿈을 꾸고 내일 죽을 것 처럼
    오늘을 살아라.

    17*가장 낮은 사랑이 가장 깊은 사랑이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때문에
    바다를 이룰 수 있다.

    18*남자는 여자에게 모든 것을 바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여자가 모든것을 받쳐서 헌신하면
    남자는 또다시 그 무게에 부담스러워 한다.

    19*스토킹은 날 위해 그 사람의 앞모습을 잡아두는 것이고 사랑은 그 사람을 위해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봐주는
    것이다.

    20*이별보다 더 비참한 것은 이별마저 허락받지 못한
    사랑이다.

    21*남자는 아무데서나 함부로 무릎을 꿇어서는 안되지만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무릎을 꿇는건 사랑하는 여자를
    갖은 남자만의 특권이다.

    22*흐르는 강물을 잡을수 없다면, 바다가 되어서
    기다려라.

    23*사랑은 '그렇기 때문에'가 아니라 '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24*남자는 술을 먹되 취하지 않고 취하되
    비틀거리지 아니하고 쓰러지되 무릎꿇지 아니한다.

    25*첫사랑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이루어지지 않아서기 때문이다.

    26*견디기 힘든 고통이란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반대말이다.

    27*여자는 첫사랑을 기억에 남기고
    남자는 첫사랑을 가슴에 남긴다.

    28*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다.

    29*하늘에 계신 분에게 통하는 유일한 길은 기도이고
    사람에게 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직이다.

    30*세상에서 가장 장엄한 광경은 불리한 역경과 싸우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31*운명은 우연을 가장해서 찾아온다.

    32*매일 맑은 날만 계속된다면
    이 세상은 사막이 되었을 것이다.

    33*왕비가 백설 공주를 미워한 이유는 백설공주가
    예뻐서가 아니라 거울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다.

    34*자신의 단점을 깊숙히 숨겨두지 말고 햇볕을 쏘이게
    하라 그래야 그 단점이 광합성을 하여 꽃을 피울 수 있다.

    35*사랑했다면 앞을 보고 사랑할거면 서로를 보고
    사랑한다면 같은곳을 보라.

    36*하늘의 별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기 발 아래의
    아름다운 꽃을 느끼지 못한다.

    37*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내 안에서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넓혀나가는 것이다.

    38*산다는 것은 서서히 태어나는 것이다.

    39*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40*사랑이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41*미래에 관한한 그대의 할 일은 예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42*겨울은 눈 앞의 풍경을 깨끗이 치워 우리에게 자기
    자신과 서로를 더 분명히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43*질문을 잊지 않으면 언젠가 그 답안에서 살고 있는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44*사람이 있을 곳이란 누군가의 가슴밖에 없는 것이란다.

    45*나는 사업을 하면서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아이디어보다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46*아버지가 누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분으로 기억하느냐는 것이다.

    47*지성이란, 그것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법이다.

    48*사람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바꿔 말하자면 그가 어제보다
    도 오늘 더 현명하다는 것을 매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49*나쁜 일 속에는 좋은 일이 들어 있다.

    50*인간이란 이상한 것이다.
    몇 번을 만나도 덤덤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과 몇 분 동안 만나도 평생 잊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51*편지는 입맞춤 이상으로 영혼들을 화합시켜 준다.

    52*어떤 일을 더 바르게, 더 훌륭하게 하려고 노력할 때, 그 노력은 창조적인 활동이 된다.

    53*명성을 얻은 예술가는 그 때문에 괴로워한다.
    따라서 때로는 그들의 처녀작이 최고다.

    54*바늘은 사람에게 옷을 입게 하나 자신은 언제나
    알몸이다.

    55*큰 희생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작은 희생을
    줄곧 계속하는 것은 힘이 든다.

    56*의견이 분분한 문제에서 누구의 편을 들지 않고도
    이치에 닿게 얘기할 수 있는 재주를 가진 사람,
    이름하여 휴머니스트라고 한다.

    57*어떤 벽을 없애려 하기 전에 먼저 그것이 왜 거기
    있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58*뭔가를 배울 수 있는 실수들은 가능하면
    일찍 저질러 보는 것이 이득이다.

    59*지금 당장 침몰할 위기에 놓인 선박일지라도
    날개를 다친 바닷새가 그 배의 돛대에 앉아 있다면
    선장은 그 배를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

    60*인생은 성냥갑과 비슷하다.
    너무 조심스럽게 다룰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다루다가는 화상을 입고 만다.

    61*누구의 인생에도 끼어드는 위험,
    그러나 항상 무릅쓸 가치가 있는 것, 사랑.

    62*사람은 지쳤을 때 더 멀리 간다.

    63*가장 귀한 향수는 가장 작은 병에 담겨 있다.

    64*예수의 삶을 따라 사는 법은 어렵지 않다.
    점심시간 우두커니 혼자 있는 친구에게 다가가기,
    의기소침한 친구와 함께 걸으며
    무엇을 도와줄지 생각하는 것이다.

    65*미래는 많은 이름들을 갖고 있다.
    약한 자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것이고,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알려지지 않는 것이며,
    용감한 자에게는 기회이다.

    66*모스크바로 가는 길 위에서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것은 대포가 아니라 작은 눈송이의 힘이다.

    67*과거를 연연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며
    미래를 대비하자.

    68*너의 불이 꺼졌을 때 나의 폭풍이 시작된다.

    69*다친 손으로 일 할 수는 있지만,
    다친 마음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70*사람이 운을 찾는 게 아니라, 운이 사람을 찾는다.

    71*친구의 눈이 좋은 거울이다.
    친구의 눈에 비친 모습이 참 모습이다.

    72*항상 아름다운 것을 눈 앞에 두어라.

    73*미소를 많이 보내라.
    값은 나가지 않지만 잴 수 없을 정도의 값어치가 있다.

    74*듣는 법을 배워라.
    기회는 가끔 아주 조용히 문을 노크한다.

    75*친구에게 속는 것보다
    그를 못 믿는 것이 더 수치스럽다.

    76*간결한 격언 속에 흔히 많은 지혜가 깃들어 있다.

    77*옆 사람이 다쳤다고 해서
    자신마저 절룩거릴 사람은 없다.

    78*귀담아 듣는 것은 지혜를 가져다주고,
    지껄이는 것은 후회를 가져다준다.

    79*남자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재산 또는 최악의 재산은 바로 그의 아내이다.

    80*현명하라. 너무 높게 솟아올라서 떨어지기보다는,
    솟아나기 위하여 굽히고 있으라.

    81*고난은 사람의 참된 값어치를 시험하는 시금석이다.

    82*시작이 좋으면 반이 끝난 것과 다름없다.

    83*오늘은 오직 한 번만 오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84*최고의 친구는 당신이 자신에 대한 사랑을 잊고 있을 때, 당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다.

    85*우리가 가장 헛되이 보낸 날들은 웃지 않았던 날들이다.

    86*죄없이 우리는 좋아질 수 없다.
    죄야말로 우리 인간의 미덕을 찾게 하는
    옳은 길이기 때문이다.

    87*오늘 생각하고 내일 말하라.

    88*인내가 없는 사람은 지혜가 없는 사람이다.

    89*시간은 위대한 의사이다.

    90*잠은 근심들을 깨우는 것에 대한 최고의 치료약이다.

    91*시간의 날개를 타고 슬픔은 날아가 버린다.

    92*할 일이 없으면 혼자 있지 말라.
    혼자 있거든 할 일을 찾아라.

    93*결혼은 하늘에서 맺어지고 땅에서 완성된다.

    94*인간의 눈은 그의 현재를 말하며,
    입은 그가 앞으로 될 것을 말한다.

    95*환경은 약한 자들의 통치자이며,
    지혜로운 자들의 도구이다.

    96*시간은 가장 깊은 슬픔도 길들인다.

    97*때로 어리석은 사람처럼 시늉하는 것도
    인간의 지혜이다.

    98*행복은 훌륭한 선생이다.
    하지만 역경은 그보다 더 훌륭한 선생이다.

    99*불은 황금을 시험하고, 역경은 강한 사람을 시험한다.

    100*쾌락이란 것은 우리들이 가장 즐거워하는
    그 순간에 이미 사라지는 것이다.


11. 예수를 믿으면 학교성적이 올라갑니다.

예수 믿기 시작하면 바로 그때부터 학교 성적이 쑥쑥 올라갑니다. 참말입니다. 실제로 예수를 잘 믿는 가정의 학생들을 자신과 비교하면서 한번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명백한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첫째, 예수를 잘 믿어 신앙심을 가진 사람은 아이나 어른이나를 막론하고 헛된 잡생각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잡생각 하는 데 소모합니다. 특히 호기심이 많고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잡생각에 빼앗기는 그 시간의 양은 교회에 다니는 시간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을 꼭 짚어 기억하기 바랍니다. 진정 시간관리를 잘 하고 싶은 사람은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둘째,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은 정서가 안정되어 있습니다. 자기라는 존재가 애초 어떻게 생겨났고, 자기가 걸어갈 바가 어디인가를 깨달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를 믿으면 늘 즐거운 정신상태가 됩니다.

넷째, 예수를 믿으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수업을 하건 자습을 하건 시험을 치르건
‧‧‧ 무엇을 하던 간에 자신감이 넘칩니다. 학교성적이 올라가는 그런 정도는 그야말로 문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좋은 성적으로 성공적인 인생을 약속 받고 싶으면 더 늦기 전에 지금부터라도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12.
예수를 믿으면 좋은 친구를 사귑니다.

터키 속담에 ‘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의 친구가 어떤 사람들인지를 먼저 알아 보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친구란 분명히 내가 아닌 남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남을 통해 나를 평가하는 게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눈입니다. ‘친구는 유유상종이다’ 하는 말도 그래서 타당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친구관계란 한마디로 말해서 생각과 행동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특히 청소년 시절의 교우관계는 일생의 운명을 좌우하기 쉽습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은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도 있지요. 그래서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나 예수 믿는 친구를 사귀면 결코 후회할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또 서로 인내와 온유의 미덕을 발휘하여 상대방을 긍정적으로 보려 하기 때문에 그 우정이 손상되지 않고 오래오래 갑니다. 아름다운 우정이란 바로 그런 것이지요. 예수 안에서의 모든 인간관계가 그런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습니다.

13.
예수를 믿으면 영어를 잘 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어릴 적부터 예수를 믿으면 믿지 않는 이들에 비해 영어를 잘 할 확률이 현저히 높아집니다. 왜일까요? 근본적으로는 기독교가 서양으로부터 전래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를 부다(Buddha), 공자를 컨퓨셔서(Confucius)라고 표현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예수를 지저스 크라이스트(Jesus Christ)라고 부른다거나 기독교인을 크리스천(Christian)이라고 부르는 일은 이미 관용어처럼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바이블(Bible)이라 부르고 성탄절을 크리스마스(Christmas)라 흔히 부르고 있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의 예입니다. 특히 기독교가 영어문화권으로부터 전래되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영어문화의 영향권 안에서 세계화의 추세로 나아가고 있는 현상과 상관관계가 매우 깊습니다. 성탄절만 되면 믿는 이나 믿지 않는 이나 즐거운 마음으로 영어로 된 크리스마스 캐롤을 자연스럽게 부릅니다.

영어를 잘 해서 손해보는 경우가 있을까요? 성경공부를 많이 해서 손해보는 경우가 있을까요? 어차피 우리는 지금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비좁은 국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세계로, 세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습니다. 경쟁국들보다 먼저 세계화로 나아가는 무기가 있다면 바로 폭넓은 외국어능력일 것이고 그리고 말씀으로부터 얻는 무한한 용기와 막강한 신념일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지금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기독교 복음의 중심국가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14.
예수를 믿으면 역사지식이 풍부해집니다.

몇 년 전 나는 초동교회 원로목사님이신 조향록 목사님과 함께 유럽 일대를 함께 여행할 행운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조 목사님은 신학자이자 역사학자, 기독교 윤리학자 그리고 진보적인 사회사상가로도 유명하신 분입니다.

낯선 대륙의 고공을 떠다니는 기나긴 비행시간 중 목사님께서는 영국, 독일, 스위스 등 통과하는 나라들의 역사에 대해 그 해박한 지식의 일단을 내게 구수한 말씀솜씨로 들려주셨습니다. 목사님과 함께 한 당시의 소감을 나는 ‘세계사의 거대한 산맥을 우러러보는 느낌’ 이라고 어느 글엔가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한국전쟁 때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을 못 받아 기초가 부실한 데다가 워낙 머리도 나빠서 역사공부를 옳게 하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남들과 같은 기독교 교육조차 받을 기회를 놓치다 보니 역사에 무지한 사람으로 나이만 먹었습니다. 여간 후회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자연히 역사지식이 풍부해진다는 사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5.
예수를 믿으면 음악을 잘 하게 됩니다.

어릴 적부터 예수를 믿으면 누구라도 음악을 잘 하게 됩니다. 내가 만난 우리나라의 훌륭한 음악가 몇 분들도 하나같이 다 어릴 적부터 예수를 잘 믿어온 이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성악가 박인수 님, 지휘자 금난새 님, 피아니스트 서혜경 님들이 그 대표적인 분들입니다. 노래 잘 하는 윤형주님, 양희은 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음악대학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교수님들의 대부분도 거의 예외 없이 예수를 잘 믿는 분들입니다. 복음성가 가수들에 이르러서는 더 말할 나위조차 없겠지요. 음악의 역사를 빛낸 세계적인 대 음악가들도 예외 없이 어릴 적의 음악생활을 교회음악으로부터 시작했거나 교회음악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음악을 잘 하게 됩니다. 따라서 음악을 잘 하려면 예수를 믿어야 됩니다. 왜일까요? 기독교는 말씀과 기도와 찬송 찬양으로 그 형식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어릴 적부터 교회음악에 젖어 찬송과 찬양생활을 하게 되면 음악의 눈을 남들보다 빨리, 남들보다 정확하게 뜨게 됩니다. 그 좋은 증거로 어느 대학교나 음악대학을 찾아가서 학생들의 성향을 조사해 본다면 저들의 대부분이 어릴 적부터 예수를 잘 믿어온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금세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음악을 하면 사람의 심성이 맑아집니다. 음악 자체가 하나님께서 인간의 심성 정화를 위해 특별히 배려하신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의 선물을 통해 다시 그것으로 하나님께 찬송과 찬양을 되돌려 드릴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감사한 일이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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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과 격려가 없어도  (0) 2013.04.26

마네 (Edouard Manet 1832-1883)

마네는 인상파 그룹의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위치에 있었고 당시 많은 신문들이 인상파의 거두로 그를 표현하긴 했지만 마네는 한 번도 인상파전에 출품하지 않았다.
근대회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새로운 양식의 작가로서 회화의 평면성을 추구
일상의 주제를 채택하여 새로운 회화언어를 추구(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느냐의 문제)

전통적인 기법으로 동시대를 그리다 : 고전적+현대적+새로운 미의식의 창조=서양 근대 회화의 창시자

회화의 의미 부여 거부 : 작품의 자립 추구.

대담한 공간 처리와 강력한 색채 대비 : 원근법과 결별하고 대상의 단순화. 명쾌한 색면대비로 본질 구현

검정색을 매혹적으로 사용한 화가 : 인상파화가들과 가장 큰 차이점임.

풀밭위의점심식사(1863년, 214×270cm 파리 인상파 미하고 술관)
이 작품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충격적인 연출로 인해 1863년 낙선작 전시회에 출품되자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맹렬한 비난과 항의가 쏟아졌다.
'거장이 갖는 이미지와 현대 생활을 보여주는 정경의 융합'이라는 마네의 의도가 감춰져 있다. 그것은 당시 권유에 대한 도전이자 예술의 인습에 대한 문제 제기와 도발이기도 했다.이 작품은 마네의 작품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인상주의가 탄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미술사적으로도 상당히 의미 있고 중요한 자료로서 평가되고 있다

올랭피아(1863년. 130×190cm 파리 루브르미술관)
티치아노의 올랭피아의 구도에서 차용. 여체로서의 관능성, 신비로운 신화적 일면을 배제하고 창녀임을 알수 있는 도상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자신있으며 저돌적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재현양식은 중간색조는 사용하지 않은 단순화된 색채가 어둡고 밝게 대조되어 단조로운 색채들을 대위법적으로 배치했다
도발적인 태도와 시선은 현재에도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이 그림이 1865년 살롱에 출품되었을 때 도덕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그림이라는 관객들의 비난과 항의 때문에 경관을 배치하여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같은 해 살롱전에 걸렸던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과 같은 거의 포르노에 가까운 이런 그림들이 쉽게 받아들여 진 것은 이러한 작품들이 신화나 역사화의 허울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캔바스의 표면이 창문처럼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창문의 형식자체를 보여주는 것, 즉 미술의 형식이 중요해지는 것도 매우 현대적인 양상이라 하겠다

투우 (1863~66 48×60.8cm 시카고 미술관)

마네는 1865년에 스페인을 여행했다. 그는 스페인의 회화에 매료되어 있었고, 일체의 감정을 배제한 채 단지 빛과 그림자로만 승부를 걸고 있다. 극적인 상황의 형상을 통해 마네는 추상적인 요소에도 근접하고 있는 듯하다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1881~82 96×130cm 런던 대학 커톨드미술관)
이 살롱에 전시되었던 1882년 레죵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이듬해에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그에게 이 명예는 너무 늦은 것이었다.
마네의 말년을 장식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중앙의 우울한 표정을 지닌 젊은 여인과 그 옆에서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여인, 실크 모자를 쓴 남자 등의 배치가 재미있다. 우울에 젖어 있는 여인과 서로 공유하기를 꺼리는 배경의 화려함은 마네의 근대적이고 도시적인 세련된 감각을 드러낸다

스페인 무희 롤라 드 발랑스 ( 1862년, 123 x 92cm)
이 작품은 '스페인 발레'에 등장했던 롤라 멜레아라는 무용수를 그린 것이다. 그녀는 마드리드 왕립극장의 마리아노 캄푸르비 무용단의 수석 무용수였으며, 세칭 롤라 드 발랑스라고도 불렸다. 마네는 이 여인을 통해 당시 스페인 사람의 전통적인 모습을 표현하려 했으며, 고야의 <알바 공작 부인>을 본떠 작품을 제작했다. 이 스페인 여인에게서 착상을 얻은 보들레르는 마네를 위해 사행시를 지었고, 그의 유명한 시집 『악의 꽃』에 수록하게 된다.

거리의 여가수 (1862 175.3×108cm 보스턴 미술관)

파리의 거리를 걷고 있던 마네는 카페에서 나오는 거리의 여가수를 보았다. 순간 예술적 가능성을 포착한 마네는 그녀에게 다가가 모델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녀가 너무도 완강하게 거절을 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다른 모델을 통해 그가 보았던 포즈를 만들어 냈다. 마네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에서도 얼마든지 예술적인 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 걸작은 당시의 아카데믹한 인습에 대한 반항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맥주잔을 들고 있는 여급 (1878 97.5×77.5cm 런던 국립미술관)

마네의 후반기 작품으로 빛과 그 흐름을 통해 색채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그는 구성의 면밀함보다 빛에 의한 강조를 통해 시원한 화면을 연출해 내고 있다

피리부는소년 (1866년)
강력한 색채 대비로 화면에 독특한 효과를 주는 방법을 이용했으며 손과 발 부분을 빼고는 그림자가 전혀 없는 평면적인 묘사로, 인물의 실재감을 표출시킨, 마네의 재주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는 대표작의 하나, 검정, 빨강등 몇 개 안되는 색면이 각기 다른 음을 내는 듯한, 이른바 음악적 효과를 겨냥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배면처리도 원근법이나 수평 감각을 배제, 종이를 바른 듯 '없어진 배경'인 이러한 단순함이 오히려 실재감을 강조한 효과로 나타나고 있다. 대상을 이와 같은 '공기로 감싸는' 수법은 그가 1865년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 벨라스케즈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배웠다는 사실이 마네의 편지에서 밝혀졌다. <피리 부는 소년>이 1866년 살롱에서 거부되자 소설가 에밀 졸라가 자청해서 변호에 나섰다. 모델은 마네와 보들레르의 친구 근위대 사령관이 데려온 근위군의 소년병.

나나,(1877년)
파리의 상류층 사회의 퇴페풍조를 전하는 작품으로, 속옷바람의 육욕적인 여인이 거울 앞에 서서 루즈를 바르고 있다. 긴 의자에는 야회복 차림의 중년신사가 화장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여인의 생명력이 응축된 튀어나온 엉덩이와 이 엉덩이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는 사나이와의 대조가 해학적이다.

해변에서, 에두아르 마네, (1873년, 캔버스에 유채, 59.6 x 73.2cm)
마네는 1873년 살롱전에 <비어 홀>을 출품해, 네덜란드 화풍을 제대로 옮긴 작품이라 하여 보수적인 평론가들에게서 호평을 받았다. <비어 홀>은 조각가 에밀 벨로의 초상화로서, 1872년 네덜란드에서 본 프란스 할스의 <술고래>에 대한 마네의 경애심을 담고 있었다. <해변에서> 역시 그림 속의 모래알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할스의 예술적 감각에 대한 정취를 감지할 수 있다. 마네의 풍경화는 풍경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거기에 인물을 배치하고 있다. 으젠느 부댕이나 모네가 그린 해변과 비교해 볼 때, 마네의 <해변에서>는 화면 대부분을 인물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 작품은 1873년 7월 마네가 가족과 함께 베르크쉬르메르에서 3주간 체류하는 동안 그린 그림으로, 해변에서 책을 읽고 있는 부인 쉬잔과 남동생 유진을 담고 있다. 수평선은 그림의 윗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하늘을 배경으로 선박의 닻이 드문드문 점을 그리고 있다. 마네는 모래와 하늘뿐인 회색빛 세계에 붉은 선을 가미하면서, 북해의 해변을 밝은 분위기로 바꿔 놓고 있다.

로슈포르의 탈출, (1880∼81년, 80 x 73cm)

19세기 후반에 일어났던 한 사건을 다룬 이 작품은 후일 마네가 전해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그린 것이다. 소재를 제공한 로슈포르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프랑스에서 활동한 언론인이자 정치가였다. 나폴레옹의 제 2제정을 반대했던 로슈포르는 파리 코뮌 시기에 코뮌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1872년 누벨 칼레도니아로 유배되었다. 그는 투옥된 지 2년이 지난 1874년 섬을 탈출하였다. 이후 스위스에 숨어 지내던 로슈포르는 1880년에 사면을 받고 귀국하였다.

이 작품의 소재가 실재 사건을 토대로 한 것은 틀림없지만, 사건에 대한 정확한 정보나 혹은 암시적인 비판, 시사성을 찾을 수 없다. 이는 마네가 한 정치인의 극적인 일화에 어떠한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극적인 탈출을 감행한 로슈포르가 누구인지, 함께 탈출을 돕고 있는 인물들은 누구인지, 그러한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물결치는 파도가 화폭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그림의 주된 모티프는 탈출자가 아니라 일렁이는 파도이다. 바다를 강조함으로써 작은 배는 더욱 위태롭게 부각되어서 탈출자의 고독이 강조되고 있다.

모든 인상주의자들에게 있어 바다는 가장 중요한 묘사 대상이었다. 모네가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종킨트로부터 처음 그림을 배운 것도 바로 프랑스 북부의 해안이었다. 19세기 후반, 바다는 단순한 자연 공간이 아니라 해수욕 붐과도 관련된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삶이 이루어지던 공간이기도 했다. 인상주의자들에게 바다는 눈부신 빛의 공간이자 동시에 해수욕이나 해변 산책을 할 수 있는 여가를 즐기는 도시 공간이기도 했다.

1880년대 초에 그려진 마네의 그림은 인상주의의 터치가 눈에 띠긴 하지만 그림의 분위기에 있어서는 인상주의와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마네의 바다는 좌절된 꿈의 공간이었다. 어린 시절 선원이 되기 위해 두 번이나 시험에 응했지만 실패했고 그 사이 견습 선원으로 일을 하기도 했던 마네에게 바다는 남다른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바다가 인상주의자들의 바다보다 어둡고 해변의 사람들도 우울한 분위기를 띄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연유인지도 모른다.

아틀리에에서의 식사

좋아하는 모티프를 자유롭게 그려 넣은 작품으로 왼족 테이블 위에 있는 투구, 장검, 검은 고양이, 그리고 그 뒤의 화분, 부인이 들고 잇는 물병과 식탁 위의 여러가지 소품이 인물 못지 않게 흥미를 끈다. 노랑, 검정, 하얀색과 엷은 푸르름이 조화를 이루고 부드러운 음영이 화면 전체를 뒤덮어 방안 공기를 아늑하고 차분하게, 그리고 친밀감이 돌도록 표현하였다. 앞쪽의 소년은 마네의 아들로 전해지는 레옹 코에라, 그 뒤가 마네의 부인, 그리고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은 친구인 오귀스트 르스랭이다.

막시밀리언의사형
고야의 < >의 구도 차용.

에밀졸라의초상(1868년. 오르세미술관)
인상파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지만 인상파화가들과는 몇가지 차이점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색채로서의 검정색을 중요시했다는 것이다. 같은 검정이라도 밝고 품위 있는 검벙, 분위기 있는 검정등 변종이 만들어졌다. 필치도 인상파처럼 섬세하지 않고 붓에 물감을 듬뿍 적셔 견고한 화면을 만들었다. 그것도 여러 종류의 검정색이 만들어진 이유이다.

파리교외의 경-마장 보트의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리는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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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9) 일의 윤리

왜 개인의 이니셔티브(主導)와 강한 직업윤리가 기독교인과 일반 사회에 대하 여 그토록 중요한가?

아홉 번째 질문 

어떤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리신 벌이 일이라고 느낍니다. 아담은 음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죽을 때까지 “얼굴[에] 땀 을 흘[려]” (창세기 3:19) 수고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일을 유익하고 생산적인 것이며 심지어는 창조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스스로 창조하시고, 지으시 고, 세우시고, 또 심으셨습니다 (창세기 1:1, 2:7,19; 시편 127:1; 아모스 9:15). “모든 일 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창세기 2:2). 그리고 그 지으신 모든 것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기독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습 니다.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 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12,13). 바울은 여러 번 그들에게 게으르지 말 것에 대해서 경고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14; 데살로니가후서 3:6,11). 그러나 성경에 일은 결코 모든 인간을 위해 마련된 소중한 활동으로 기술하지 않고 있습니다. 일은 타락한 세상의 체계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즐거운 활동으로 나쁘게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더 많은 여가를 갖기 위해서 또는 더 나은 생활수준을 갖기 위해서 부를 축적하는 방법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은 이러한 점에 서 목적을 위한 수단이며, 일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성경은 일을 회피하는 사람을 주의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데살로니가후서 3:10) 고 말했습니다. 신체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일을 하는 대신에 웰페어를 받기를 선택하는 사람은 성경의 정신에 반대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직접적으로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현대의 일의 모양에 관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성경은 일에 대해서 어떤 매우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러한 말씀을 참고로 해서 오늘날의 일터에 대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담에게는 동물을 다스리고 에덴동산을 돌보는 특정한 일이 주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들은 그들의 농업과 경작을 통하여 얻은 것의 소출에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들은 일상생활에서의 일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게으름과 도둑질을 비난하고 유용한 일의 활동을 격려하였습니다 (에베소서 4:28). 그는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이 언제든지 있을 것을 기대할지라도 계속 일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14).

성경에는 일에 대한 어떤 귀천함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정직한 노동에 대해서는 칭찬을 합니다. 지식을 필요로 하는 일과 기술직 일은 손으로 하는 일이나 육체적 노동과 다를 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이 적게 받는 직업 보다 더 나은 것이 아닙니다. 직업이 무엇이라 할지라도 기독교인 일꾼은 그 일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위하여 받은 특별한 은사로 보아야만 합니다. 기독교인 부모는 지시하는 일과 본을 보이는 일을 통하여 일에 대한 강한 윤리를 자녀들에게 양심적으로 가르쳐야만 합니다. 어린이들에게 간단한 “일”을 맡기고 좀 더 큰 아 이들에게는 더 책임감 있는 일을 맡기는 방법은 본을 보이는 일의 아름다운 시작입니다. 좋은 일에 대하여 적당한 용돈을 지불하는 것도 일에 대한 강한 윤리를 키우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떤 부모들은 이러한 것이 뇌물을 주는 것과 같이 느낄 수 있으며, 어린이들은 그들이 하는 모든 것에 대한 급여를 받아야 한다는 느낌이 없이 일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에 대해서 심지어 적은 금액이라도 지불하는 것은 “ 일”의 경험에 대한 동기유발과 즐거움을 더해줍니다.

관심사:

일에 대한 세상의 태도가 기독교인의 태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을 최소한의 노력으로 충족시켜야 하는 피할 수 없는 필요한 것으로 보는 대신에 기독교인의 의무가 전도서 9:10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그가 일터에서 그리스도를 대표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은 고귀하고 하나님께 위임받은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지상 대 명령과 같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파하는 도구입니다. 적극적인 태도는 가장 실증이 나는 일을 부담이 별로 되지 않는 일로 만들 수 있습니 다. 그것은 그들의 작업환경을 달가워하지 않는 동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습니다.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에 대한 감사의 태도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일에 대한 세상의 부정적인 태도에 결코 굴하지 마십시오. 적극적인 태도는 긍정적인 생각 이상의 것입니다. 우리들은, 비록 그 일이 매우 만족 스럽고 성취감을 주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감독이나 상사에게 하는 것처럼 일을 하지 않 고, 주님께 하는 것처럼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그의 삶의 모든 곳으로 그리스도를 모시고 가야만 하며, 보통 한 주일의 약 25%를 차지하는 일터도 예외가 되어서는 않됩 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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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르다가
잃어버린 후에야
그 안타까움을 알게 되는
못난 인간의 습성
내 자신도 그와 닮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때면 매우 부끄러워집니다.

내일이면 장님이 될 것처럼
당신의 눈을 사용하십시오

내일이면 귀머거리가 될 것처럼
말소리와 새소리
오케스트라의 힘찬 선율을 들어보십시오.

내일이면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못 만져보게 될 것처럼 만져보십시오..

내일이면 다시는
냄새와 맛을 못느낄 것처럼
꽃향기를 마시며
매 손길마다 맛을 음미하십시오.

못 가진 것들이
더 많았지만 가진 것들을 충분히 누린
헬렌 켈러여사의 글입니다.

문제의 근원은
있고 없음이 아닙니다
없는 것들에 대한 탄식에
자신의 시간을 망쳐버리느냐
있는 것들에 대한 충만함에
자신의 영혼을 매진하느냐
문제는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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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 나에게 주는 선물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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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를 분별하기 (귀하가 목사라면 어떤 선교사를 파송할 것인가?

김정한 ㆍ 2013-05-03 (금) 23:00 IP: 180.xxx.48 ㆍ조회: 17      

위쪽의 안내사항을 필독하세요!


요즘 화두가 WCC 대한 것이기에 분별하는데 참고가 되었으면 해서 올려본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필자 개인적인 생각이다.

만일 여러분이 목사라면, 목사가 아니더라도 여러분의 교회에서 처음으로 해외선교사를 파송한다면 어떤 선교사를 파송하고 싶은가?


1. 거듭나고 자신에게 복음진리를 전하라는 것이 사명인 줄 알고 성령의 인도를 구하기 위해 기도하며 선교지가 정해지면 선교지에 대해 충분한 식견을 가지고 사역할 수 있도록 준비된 선교사,

2. 거듭나지 않았으나 기독교적 인류애(人類愛) 정신을 산 사람을 본 받아 파송되어 선교지의 사회현경의 비통한 현실과 열악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는 사회악적인 구조(構造)를 보고 개혁하려는 것을 선교라고 생각하는 선교사.    

좀 작위적이지만 독자의 분별력을 위해서 그렇게 두 부류의 선교사로 나눠봤다.

그러면 한국교회에서 파송되어지는 선교사는 어떤가? 한국교회는 1군(극보수)-2군(보수 성향)에 속한 교단과 선교단체에서 대부분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으며 그 다음군인 3군(보수+진보)에 속한 그 다음이며 4군과 5군에 속한 교단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http://blog.daum.net/jaegunchurch/17554430)

WCC가 무엇 때문에 생겨났는가? 그것은 해외선교지에서 복음진리를 전하려면 빵(환경)문제에도 해결하고 도움을 줘야 한다는 문제 때문에 WCC가 태동되었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빵을 먼저 주고 하든지 아니면 동시에 주든지 그것은 방법상의 문제일 뿐 최종적으로는 복음진리를 전하기 위해서였든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인용한 수치를 보면 NCCK(WCC한국지부)에서는 해외선교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남북문제, 인권문제에 주력하고 있은 것을 볼 수 있다. (북한의 인권에 대해선 침묵하는 대신 한국의 인권상황만 이야기 하고 통일문제에 집착하고 있는 것을 보수 측에서는 이를 친북이라고 하기도 한다)

WCC 지지하는 분들은 지금껏 세계도처 여러 나라 빵(환경)을 바꾸고 세계를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종교와 대화를 해서라도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한다고 한다.    

그런 것을 캐토릭에서 먼저 하고 있는 것을 본다. (교황의 주도의 타종교와 대화, 해외 선교사의 보편적 人類愛로 선교하는 일 대표적으로 마더 테레사.)

필자의 생각으로는 한국교회는 주님의 방법대로 하면 된다고 본다. 예수님은 내 말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라고 하시며 궁극적으로는 영생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진 것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든지 육의 문제를 해결하여 달라는 자들과 배고픔에 당면한 자를 해결해 주시는 사역을 하셨지 않는가?

그렇다면 자명하지 않는가? 바로 3군(보수+진보)에 해당하는 선교를 하면 된다. 복음진리로 영생을 얻게 하는 진리를 전하고 억압받는 자, 약자를 위해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일에도 힘써야 한다. 고 생각한다.  


작금의 WAC가 3군에 해당되는 선교를 하기 위해 가고 있는가? 아니면 복음진리 대신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쪽으로 흐르는가를 각자가 판단하였으면 한다.  

보수 측에서는 진보 측을 배도의 세력으로, 진보 측에서는 보수 측을 독선주의로 서로를 공격하고 있는 것에 대해 두 진영에서 크게 크게 통렬한 자성을 하고 돌아서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한다면 한국교회는 다시 극심한 혼란에 빠질 것이다.

필자는 WCC를 한국에 유치한 교단들이 이것을 알기를 원하고 WCC 반대하는 분들도 NCCK 교단 형제들이 바른 길로 가기로 기도해주기를 바란다.  

출처: USA아멘넷


하나님의 은혜

 


성경은 공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연민하셔서 인간과 함께 하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시려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벨을 택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려는 것이지
하나님의 공평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 자손을 축복하신 것과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출하여
내신 것은 공평의 뜻이 아니라 은혜의 뜻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도
세상을 공평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언약을 받았지만, 그 은혜를 삶에
뿌리내리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언약을 율법적으로 이끌어 감으로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들이 율법을 지킨다는
공로를 더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받는 것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 것이지 은혜가 아닙니다.


따라서 은혜는 율법으로 묶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율법으로 묶어 버릴 때 은혜는
은혜로운 점이 없어지고 맙니다.


은혜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다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시지만
무엇 때문에 은혜로우신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특성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흔들릴 수 없는 바탕입니다.


...........


세상을 바라보는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공평은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의 눈입니다.
이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려고 할 때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온전하게 바라볼 때
은혜의 눈을 뜨게 됩니다. 은혜에 눈을 떠서
세상을 바라볼 때 은혜를 베푸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공평하냐 아니냐를 따지지 않고
조용히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공평한 세상이 아니라 은혜가 넘치는 세상을
보이도록 그리스도인들은 부름을 받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삶에 공평을 심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삶에 은혜를 심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은혜로 받은 믿음이기 때문에,
믿음의 삶은 은혜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될 이유가 없는 데도 베푸는 은혜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온 것입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황두용 목사/자료ⓒ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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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니힌 집회©Bennyhinn.org

TV 복음전도자 베니힌은 4월초 남미의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집회 참석자들에게 축복받기위한 종자를 심으라면서 100달러씩의 헌금을 요구하여 현지언론이 관심있게 보도 했었다.

최근에도 베니힌은 자신의 빚을 갚는데 도와 달라면서 그의 사역 후원자들에게 250만 달러를 헌금해 줄 것을 요구했다.

베니힌은 오랜기간 논란이 많은 번영복음을 설교하며 그의 추종자들에게 헌금은 재정적 축복으로 되돌아온다고 자주 말해왔다.

그는 미 국세청(IRS)로부터 조사를 받아왔으며 2007년 미 상원이 고소득 설교자들의 금융거래를 정밀 조사할 때도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베니힌은 어떤 잘못도 없다고 부인했다.

텍사스의 부흥사 베니힌은 헌금을 제트기와 최고급 자동차를 구입하는데 사용해 왔다고 비판 받아왔다. 그러나 그의 정확한 재정상태는 공개되지 않았다.

그는 4월초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수천 명의 집회 참석자들에게 축복받기위해 100달러의 종자헌금을 내도록 요구했다.

베니힌은 사람들이 재정적 지원을 통해 교회를 돕는다면, 하나님이 보상해주며 그것도 갑절로 축복해 준다는 아이디어로 그의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우편함에 가는 것이 두렵지 않고, 집으로 걸려오는 빚쟁이들의 전화가 없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하나님은 당신의 빚을 청산하기를 원하신다. 단 한 푼의 빚이라도. 그것도 90일 이내에!” 라는 글을 자신의 웹사이트에 올렸다.


사전에 이단에 이기려면

주도홍 ㆍ 2013/04/18 ㆍ추천: 0  ㆍ조회: 65      

이단은 교회사와 같이한다. 이단 없는 교회 역사를 생각하면 좋겠지만 그것은 비역사적이며 비현실적이다. 성경에도 이단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다거나 인간의 몸을 입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경우이다. 성경은 그들을 적그리스도(antichrist)라 일컫는다. 특히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이원론에 빠진 영지주의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 250년 전부터 있어온 대표적 이단이다. 이단은 교회를 괴롭혀 왔으며, 역으로 이단에 대처해 바른 교회를 힘써 세웠다. 이단문제에 부딪혀 교부들이 신학의 정립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단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사전예방과 사후처방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그렇게 효과적이지 않으며, 이단은 놀랄 정도로 대대적으로 세력을 강화시키고 있다. 신자 수도 늘어나고 있고, 반듯한 건물도 지어 현대인을 세련되게 유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목회자들은 이단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런대로 역사를 가진 기성교회도 파고들어 어려움을 주며 분열을 획책한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가져오는 이단대처 방법 중에 사후처방은 그 효과가 미미하고 교육도 어렵고 성공한다 해도 부작용이 크다. 이단에 빠진 자가 교육을 스스로 받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왜 교인들이 기성교회를 이탈해서 이단에 쉽게 빠지는가 하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바른 신앙기초도 없이 신앙생활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세례도 고작 몇 주간 교육을 받은 상태로 토요일 오후 간단한 문답을 하지만 제대로 대답도 못한 체 목사 장로의 인자한 선심용 세례를 받는다. 이렇게 기독교의 근본도 모른 체 세례자가 되어 어느 순간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어 그럴 듯한 교인행세를 불안하게 한다. 이들은 이단의 유혹을 받으면 구별이 안 된 상태에서 쉽게 빠져들고 만다. 무엇보다 신앙의 권태기가 찾아왔을 때, 보다 다른 그 무엇이 있어 보이는 그럴듯한 ‘보암직한’ 이단의 유혹에 빠져들고 만다. 뭐가 다르고 문제인지 전혀 판단이 서지 않아, 이를 말리는 교회의 사후처방을 급기야는 ‘땅 따먹기 식’으로 비난하기에 이른다. ‘어디서든지 신앙생활 잘하면 되지 않는가?’ 식의 항의를 해오기까지 한다. 그래서 이단 대처 사전예방법 두 가지를 생각하려 한다.

첫째, 교리교육이다. 교리교육은 기독교교육의 근본이다. 바른 신앙인을 양성하기 위해 교리교육은 필수적이다. 세례를 받기 위해 철저한 교육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교회교육이 쉽지 않지만, 세례를 받기 위해 교회가 일 년 이상 애를 써서 교육할 때 신앙의 기초가 형성되며 여러 가지 유혹 가운데서도 보다 성숙한 신앙에로 성도들을 이끈다. 2천년 교회사는 이를 위해 교리문답서(Catechism)를 만들었다. 신앙고백(confession)이란 일반적으로 선언적이어서 일반 신도들의 이해를 가져오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묻고 답하는 식의 평이한 교육을 통해 신앙고백을 이해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교리문답서이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제네바 교회교육의 모든 목적을 성만찬에 바르게 참여함에 두었다. 그런 맥락에서 제네바교회법을 ‘성만찬 법’(칼 바르트)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바른 교회의 판단기준은 보이는(visible) 복음과 보이지 않는(invisible) 복음의 유무에 있었다. 순수하고 바르게 복음이 전파되고 집행될 때 바른 교회라는 것이다. 칼빈은 성도들이 바른 복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바른 복음의 수혜자가 되는지를 힘써 교육했다는 말이다. 당시 교회는 교리교육에 일 년 이상 정성을 쏟았다. 교리교육이 비로소 끝났을 때, 정한 주일에 세례를 주었고, 세례식이 끝남과 동시에 성만찬에 참여시켰다. 성만찬에의 참여란 진정한 교회의 일원, 천국백성이 되었음을 확인시키는 복된 영적 예식이었다.

둘째, 수준 높은 윤리적 삶이 요구된다. 이단들이 기성교회를 문제 삼는 여러 가지 중 하나는 교회가 타락했다는 것이다. 바른 목회자도 성도도 찾아 볼 수 없다고 비난한다. 그렇다고 이단들이 그토록 윤리적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남 눈의 티를 보듯이 한국교회의 크고 적은 비리들을 문제 삼아 침소봉대한다.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기성교회에 실망과 회의를 갖고 이단에 빠진 자들은 비로소 바른 교회 바른 신앙을 찾았다고 항변하듯 큰 소리를 친다. 물론 윤리가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바른 신앙인은 윤리적으로 살아간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그러기에 한국교회는 보다 수준 높은 삶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초대교회도 ‘사람들로부터 칭찬 듣는 자’를 지도자로 선택했다는 점이다. 어떻게 세상의 칭찬을 듣겠는가? 신앙심이 두껍고 새벽기도 나오고 교회봉사 잘 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단지 윤리적 도덕적 삶이 세상인의 모범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성도를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셨다.

사실 기독교인의 수준 높은 윤리적 삶은 복음전도를 위해서도 많은 힘이 된다. 어찌 윤리적으로도 처진 사람들이 믿는 신앙을 가지려고 하겠는가? 그만큼 ‘어떻게 사느냐’는 교회 밖의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보는 중요한 판단 근거라는 말이다. 교회의 분열, 수준이 되지 않는 비상식, 비윤리, 부정부패, 타락 등이 한국에 이단이 성행하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여기서 말하는 윤리적 삶이란 먼저는 개인 대 개인의 영역에서 제시되는 작은 윤리인 미크로윤리(micro ethic)에 국한시켜서는 안 되고,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으로 이 시대의 문제를 직시하며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대처하는 매크로윤리(macro ethic)까지를 포함한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인권, 환경, 남북관계, 다문화 등에 있어서도 기독교인들이 바른 성경적 가치관을 가지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교회는 수도원적 신앙교육의 패러다임을 뛰어넘어 교회교육의 폭을 보다 넓힐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이를 위해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한 양질의 교사들이 어느 영역에서든지 이를 기꺼이 담당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부흥회식 집회 뿐 아니라, 전문 기독교인의 특강식의 집회도 가질 필요가 있다 하겠다.

이단에 대처하기 위해 한국교회는 사전예방법을 가져와야 하는데, 첫째, 교회사의 지혜가 말해주는 최소한 일 년을 기본 단위로 세례 전 진지하고 차분한 교리교육을 필히 이행해야 하며, 둘째, 수준 높은 기독교인의 윤리적 삶이 보다 복잡해진 21세기에도 두드러져야 한다는 것이다.

주도홍 교수 (백석대학교)
ⓒ 뉴스미션/USA아멘넷

아름다운 사람


공기같은 사람이 있다.
편안히 숨쉴 땐 알지 못하다가,
숨막혀 질식할 때 절실한 사람이 있다.

나무그늘 같은 사람이 있다.
그 그늘 아래 쉬고 있을 땐 모르다가
그가 떠난 후,
그늘의 서늘함을 느끼게 하는 이가 있다.

이런 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매일 같이 만나고 부딪히는 사람이지만,
위안을 주고 편안함을 주는
아름다운 사람은 몇 안된다.

세상은 이들에 의해 맑아진다.
메마른 민등산이
돌틈에 흐르는 물에 의해 윤택해지듯,
잿빛 수평선이
띠처럼 걸린 노을에 아름다워지듯,

이들이 세상을 사랑하기에
사람들은 세상을 덜 무서워한다..



좋은 글 중에서




니케아신조과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의 비교

- 역사적 배경을 근거로 하여 -




차 례



서론 ------------------------------------------------------ 1

본론 ------------------------------------------------------ 1

1. 니케아 신조의 배경 - 아리우스 논쟁의 발발과 니케아 회의

; A.D. 318-325. ---------------------------------------- 1

1.1. 아리우스 논쟁의 발단 ----------------------------------- 1

1.1.1. 속사도에서 오리겐까지 -------------------------------- 1

1.1.2. 아리우스 논쟁의 발발과 전개 --------------------------- 3

1.2. 니케아 회의 ------------------------------------------- 5

2. 니케아 신조 및 분석 --------------------------------------- 7

2.1. 니케아 신조 ------------------------------------------- 7

2.2. 니케아 신조 분석 --------------------------------------- 7

3.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배경 ---------------------------- 10

3.1. 아리우스파와 반아리우스파의 응전과 이들의 우세 시기인

콘스탄틴 황제의 사망시까지; A.D. 325-361. ------------------- 10

3.2. 정통 기독교의 최종 승리와 니케아 신경이 완성된

콘스탄티노플 회의시까지; A.D. 361-381. --------------------- 12

3.3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 14

4. 니케아 신조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비교 ----------------- 15

결론 ---------------------------------------------------- 17




서론


초대 기독교가 갖고 있는 최대의 주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1) 초대 기독교의 배경 속에서도, 그리고 속사도, 변증가, 교부들의 글 속에서도 그리스도는 핵심 주제였다. 과연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정말 하나님이신가? 만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면 창조주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부도 하나님이고 성자도 하나님이라면, 둘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된 이러한 문제들은 초대 교회 수세기 동안 줄곧 쟁점이 되어 왔다. 그러던 중 4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Alexander)와 장로 아리우스(Arius) 사이에서 시작된 성부와 성자 관계에 대한 논쟁은 초대 교회 역사상 가장 큰 논쟁으로 비화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이른바 아리우스 논쟁이다. 니케아 종교 회의는 바로 아리우스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회의였다. 그런데 니케아 회의는 이 논쟁의 불씨를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했다. 그 결과 이 문제는 진일보하여 성령과의 관계 문제까지로 확대됨으로써, 결국 콘스탄티노플 종교 회의에 이르러서야 삼위일체 교리 정립으로 매듭지어지게 되었다.

본 졸고의 관심은 니케아 회의와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각각 도출된 두 신조를 역사적 맥락에서 서로 비교 검토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각의 회의에 이르까지의 역사를 고찰해야 하는데, 이러한 작업은 아리우스 논쟁의 흐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아리우스 논쟁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가장 핵심에 도달하는 첩경이라 사료된다. 아리우스의 논쟁은 니케아 회의를 중심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니케아 이후의 아리우스 논쟁은 학자들에 따라 통상 두세 부분으로 세분된다. 본 졸고에서는 필립 샤프(Philip Schaff)의 견해를 좇아 아리우스 논쟁을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2)


1. 논쟁의 발발로부터 정통 기독교의 일시적 승리를 확인해 준 니케아 회의까지 ; A.D. 318-325

2. 아리우스파와 반아리우스파의 응전과 이들의 우세 시기인 콘스탄티우스의 사망시까지; A.D.

325-361.

3. 정통 기독교의 최종 승리와 니케아 신경이 완성된 콘스탄티노플 회의시까지 ; A.D. 361-381.


본론


1. 니케아 신조의 배경 - 아리우스 논쟁의 발발과 니케아 회의 ; A.D. 318-325


1.1. 아리우스 논쟁의 발단.


아리우스 논쟁은 콘스탄틴이 등장하기 오래 전부터 계속 되고 있었던 신학적 발전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만 한다. 가깝게는 오리겐의 기독론이 갖는 모순적인 요소들과 알렉산드리아 신학과 안디옥 신학 간의 대립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3), 멀게는 속사도들에게까지 소급된다.


1.1.1. 속사도에서 오리겐까지

주후 약 90년부터 140년 사이에 활동했던 속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분명한 싱앙을 고백하고 있었다. 속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분명한 신앙이 있었다. 안디옥의 감독 익나티우스(Ignatius)는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나신 분이면서도 나시지 않은, 인성 안에 계신 하나님이신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4)고 했으며, “에수 그리스도는 만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때가 차매 나타나셨다”5)고 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견해는 변증가들에게로 오면서 한층 더 분명해졌는데, 변증가 유스틴(Justin)은 성육신 이전에 선재하신 로고스는 “하나님의 첫아들”6)이며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하나님 다음되시는 분”7)이라고 했다. 그러나 변증가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성부와 성자간의 차별을 두는 종속설적 경향이 따라다녔다.

한편 교부 이레니우스는 변증가들보다 상당히 진보된 신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레니우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로고스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은 바 되었으며, 그는 또한 역사 속에서 모든 인류에게 나타나셨으니, 아버지의 약속에 따라 이 마지막 시대에 말씀이 자신의 솜씨를 연합하여 감성있는 인간이 되셨음은 이제 명백히 증명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일 그리스도가 어느 때에 태어났다면 태어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모든 반박을 일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와 항상 존재하셨기 때문에, 존재하기 시작한 어느 때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았기 때문이다.”8) 이레니우스는 성자와 성부의 영원한 공존을 언급함으로써 성자의 신성을 확증했지만 성자와 성부가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이런 면에서 터툴리안(Tertullian)은 이레니우스보다 훨씬 앞선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는 본질(substance)과 인격(person)이라는 두 용어를 통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통일성을 추구했다. 즉 세 개체는 하나이면서 나눌 수 없는 본질을 소유하면서 서로 방해받지 않고 세 개의 개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그렇지만 셋은 지위에 있어서가 아니고 정도에서이며, 본질에서가 아니고 형식에서이며, 능력에서가 아니고 그 양상에서 나뉘인다. 그렇지만 그 분이 한 분 하나님으로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이러한 정도들과 형상들과 외양들로 생각되어질 수 있다면 여전히 하나님의 본질이며, 하나의 조건이며, 하나의 능력을 갖는다.”9) 그러나 터툴리안이 사용한 용어들은 그 뜻이 모호했다.

한편, 오리겐(Origen)은 이레니우스나 터툴리안보다 훨씬 발전된 견해를 피력했는데, 로제(Bernhard Lohse)에 의하면, 그는 주장하기를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아들과 성령에도 적용시킬 수는 있어도 아버지 한 분만이 하나님이며, 아들과 성령의 신성은 아버지로부터 파생된 것이고, 하나님은 아들을 영원한 행위로써 산출한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종속되듯이 성령도 아들에게 종속된다”10)고 하였다. 신격의 세 위격에 대해서 오리겐은 본체(Hypostasis)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개별적 요소 혹은 개별적 존재라는 의미에서이고 아들과 성령은 본질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다름이 없다. 그렇지만 동시에 세 위격은 의지와 조화와 통일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하나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종류의 통일성을 말하기 위해서 오리겐은 동일본질(Homoousios)이란 개념을 사용했다.11) 이처럼 오리겐은 아들을 아버지의 피조물이라고 아들의 종속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이들과 아버지의 본질적인 동일성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삼위 간의 차이점을 말하는 쪽이 항상 우세해서 삼위 간의 통일성을 말하는 쪽은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했다.12)

오리겐의 죽음과 아리우스 논쟁이 시작되었던 몇 십년 사이에 오리겐이 주장하는 삼위일체 교리는 어떻게 하든지 새롭게 다듬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영원한 창조를 거절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종속을 엄격하게 주장하든가 아니면 오리겐을 넘어서서 상이한 실체 간의 본질적 하나됨을 강력하게 주장하든가 하는 두 범주에 속하게 되었고, 그 후에 등장하는 모든 신학이 오리겐의 좌파에 서든지 혹은 우파에서 그의 주장을 폈다.13)


1.1.2 아리우스 논쟁의 발발과 전개

아리우스 논쟁은 약 318년경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 알렉산더(Alexander)와 그 교회 장로 아리우스(Arius) 사이에서 발생한 논쟁을 말하는데, 한마디로 오리겐 좌파인 알렉산드리아 장로 아리우스와 오리겐 우파인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 사이에 일어난 논쟁이었다.14) 이 논쟁은 역사가 소크라테스(Socrates)에 의하면 이렇게 발단되었다.15) 디오클레티안 박해 하에 순교한 알렉산드리아 감독 베드로를 승계하여 아킬라스(Achillas)가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되었고, 다시 아킬라스를 이어 알렉산더가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되었다. 그는 용기있는 행동으로 교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감독이었다. 한번은 알렉산드리아 감독인 그가 자신의 교구 장로들과 교직자들을 모아 놓고 그들 앞에서 삼위일체의 통일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을 하면서 야심적이고 확신에 찬 신학적 견해를 펴고 있었다. 바로 그 자리에 있던 장로 가운데 한 사람인 아리우스가 일어나 감독은 사벨리우스(Sabellius)의 교리를 말하고 있다고 하면서 정면으로 감독의 삼위일체 견해를 반박해 버렸다. 아리우스는 만일 성부가 성자를 낳았다면 난 자는 존재의 시작을 가졌을 것이며 아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아들의 존재는 성부와 같은 본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로부터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리우스. 소크라테스가 장로라고 언급한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12교구 중 하나인 바우칼리스(Baucalis)를 담당한 수석 사제였다. 아리우스는 역동적 단일신론을 주장한 사모사타의 바울16)의 제자였던 루키안(Lucian)의 문하생이었다. 루키안의 지적 세계는 오리겐의 많은 사상을 계승했는데, 아리우스는 루키안보다 훨씬 더 오리겐적으로 신학을 재구성했다. 이로 보건대 아리우스는 동방에 유행하던 두 가지 신학 사조, 곧 알렉산드리아와 가이사랴를 중심으로 전파된 오리겐의 사상과 안디옥을 중심으로 전파된 루키안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아리우스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초월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아리우스의 신앙고백을 보면, “우리는 홀로 유일하게 비출생적이고 홀로 유일하게 영원하시고, 홀로 유일하게 시작이 없으시고, 홀로 유일하게 주님이시며, 홀로 유일하게 만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고백한다”17)고 되어 있다. ‘하나님’이라고 쓰는 아리우스의 사상에는 하나님 아버지 한 분만을 뜻한다. 하나님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초월적이고 불변적이므로 다른 어느 존재에게도 전달될 수 없다. 그러므로 초월하신 한 분 하나님 이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창조되었음이 확실하고, 무에서 창조되었음을 뜻한다. 아리우스는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나왔다는 사상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와 같은 사상 형식은 하나님의 육체적인 범주에만 적용될 수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이 이상 이외의 다른 생각은 하나님을 ‘복합체’로 만들려는 것이며 따라서 그릇된 것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아리우스도 자기 앞의 변증신학자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처럼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말씀과 지혜로 더불어 계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씀과 지혜를 위격과는 전혀 관계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렇지만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되었는데,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시간의 시작 이전에 무로부터 창조된 것으로 보았다. 아리우스는 아들을 다른 피조물과 같은 수준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에 의하면 아들은 완전한 피조물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아들을 피조물이라고 할 때, 아리우스는 아들의 산출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면 아들과 아버지가 너무도 가깝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로지 “파생적인” 의미에서 아들의 “출생”의 뜻을 사용했다.18)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적인 동일성은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있을 수 없다.

여기에 덧붙여서 하나님은 항상 아버지가 아니고, 하나님은 혼자 계신 때가 있었으며, 아직 아버지가 아닌 때도 있었다.19) 그래서 아버지의 경우와 같이 아들의 불가변성을 주장할 수 없다. 아들은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의 신성을 속성에까지 연장시킬 수는 없다.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수여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알렉산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Alexander, 312?-328 재위)는 오리겐의 성자의 영원 발생 교리를 좀더 발전시켜서 성자는 성부의 본질로부터 영원 발생된 동일본질의 위격적 존재라고 보았다.20) 즉, 말씀은 한 위격으로서 성부와 구분되며, 또한 성부는 말씀 없이 계실 수 없기 때문에 아들은 성부와 동등 영원하다. 그러나 말씀의 아들됨은 실재적이고 형이상학적이지 입양에 의한 것이 아니다. 둘은 상호 불가한 두 실재이며 완전히 같으나 하나는 아니다는 것이다.21) 그는 아리우스의 견해가 그릇되며 그는 더이상 그 견해를 제기해서는 안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 무렵 아리우스는 팔레스타인으로 도피해 있었으며, 이곳에서 자기 견해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찾아나서 실제로 목적한 바를 성취하였다. 그 중에서 제국의 동방 수도의 주교인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Nicomedia)라는 유력한 인물이요 루키안의 동료 제자를 지지자로 만들었다.

아리우스는 한동안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와 함께 지냈으며, 이곳에서 자신의 견해를 다소 체계적으로 정리한 ‘탈리아’(Thalia)를 썼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22) 아리우스와 유세비우스는 편지 공세를 통해서 알렉산더에게 아리우스를 복권시키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알렉산더도 이에 못지 않은 편지 공세를 통해서 아리우스가 로고스의 신성을 부인한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하였다. 감독 알렉산더는 성자가 시간과는 무관하게 영원히 발생하며 ‘무로부터’라기 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며 불변하고 완전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양 당파는 모두 성경으로부터 뽑아낸 증빙 구절들과 아울러 상대방의 위치를 붕괴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였던 논리적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우스는 우선 알렉산더가 기독교적 유일신론을 부인한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리아 감독의 주장에 의하면 신성을 지닌 존재가 둘 있게 되므로 결국 두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알렉산더는 이에 답변하기를 아리우스의 이론은 말씀의 신성을 부인함으로, 이에 따라 예수님의 신성이 부인된다고 하였다.

알렉산더는 결국 감독의 권위와 책임에 근거하여, 320년경 약 100명의 이집트 주교들로 구성된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와 그의 동료 성직자들을 파면하였다. 아리우스는 이러한 처분에 승복하지 않고 알렉산드리아 시민들과 안디옥에서 그와 함께 수학하였던 동방 제국의 중요한 감독들에게 호소하였다. 곧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아리우스의 신학적 요절들을 외치며 행진하는 일반인들의 시위를 볼 수 있었다. 또한 아리우스의 호소를 받은 감독들은 아리우스의 입장을 옹호하여 알렉산더의 이론이 오류라는 서신들을 띠우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알렉산드리아 지방 신학 논쟁이 전체 동방 교회를 분열시킬 위협을 가져왔다.

이것이 바로 리키니우스를 패배시킨 직후 콘스탄틴이 중재에 나섰을 때의 상황이었다. 제국을 위해 교회의 통일을 원했던 콘스탄틴은 우선 종교 문제에 관한 한 그의 고문이었던 코르도바(Cordova) 감독 호시우스(Hosius)를 파견하여 양파의 화해를 꾀하였다. 양자간의 갈등은 결코 중재로 해결될 수 없다고 호시우스가 보고하자, 콘스탄틴은 제국 전역으로부터 기독 교회의 감독들을 소집하여 대 종교회의를 열게 되었다. 당시 선명하게 기준이 되는 정책들을 필요로 하였던 몇 가지 문제들과 아울러 이 대회의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된 논쟁을 해결해야만 했다.


1.2. 니케아 회의


후세인들에 의해 최초의 에큐메니칼 즉 세계 종교회의라고 알려지게 된 모임을 위해 콘스탄티노플에서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소 아시아의 니케아(Nicea)에 감독들이 모인 것은 A.D. 325년 5월 20일이었다. 황제는 안내장을 각 감독에게 보내 장로 2인과 수행자 3인을 동반토록 했으며 왕복 여비와 체재비 일체를 국가에서 부담했다.23) 정확한 참석 인원은 알 수 없으나 약 3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일부 사가(史家)들이 기록한 318명은 아브라함 시대에 할례를 받은 숫자와 동일하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에 의해 그 진위를 의심받고 있다.24) 이들은 대부분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방에서 왔으나 서방 교회의 대표들도 6명 있었다. 당시 기독교 신자들이 이 회의를 대하는 감상은 각별한 데가 있었다. 이 대회의에 참석한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최근까지도 투옥당하고, 고문당하고, 귀양을 갔던 인물들이었으며, 어떤 이들은 자기들 신앙에 대한 간증으로서 육체적 상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어러한 시련 후 채 몇 년도 지나지 않아 바로 그 감독들이 황제의 융숭한 대접 속에 니케아에 초대되었던 것이다.25) 이곳에 참석한 많은 이들은 소문과 서신 왕래를 통해 서로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이들은 교회의 보편성을 증거하는 사건에 직접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개회날이 되자 콘스탄틴 황제가 회의장에 참석하였다. 사회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맡았고, 황제가 라틴어로 개회사를 하였다.26) 회의의 의사 진행은 호시우스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가 하였다.

희열에 찬 분위기 속에서 감독들은 박해 후에 시급히 처리해야 했던 많은 안건들을 의논하였다. 이들은 변절자들을 다시 교회 안에 받아들이는 절차와, 장로들과 감독들의 선출 및 안수, 그리고 여러 교구들의 우선 순위에 관한 기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물론 이 회의가 직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아리우스 논쟁이었다. 이 안건에 관하여는 서로 입장을 달리하는 집단들이 존재하였다.

우선 확신에 찬 소수의 아리우스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그 후 이 논쟁의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니코메디아 감독 유세비우스에 의해 통솔되고 있었다.27) 이 니코메디아(Nicomedia) 감독은 물론 역사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와는 다른 인물이다. 아리우스는 감독이 아니었으므로 회의에 직접 참석할 수가 없었으며, 이 때문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그 입장을 대변하였다. 이 일파는 아리우스의 이론이 옳은 것으로 너무도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그 주장을 명료하게 설명하기만 한다면 회의 석상에서 아리우스의 정당성이 인정되고 알렉산더가 정죄받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소수의 집단은 정통파로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에 의해 이끌어지고 있었다. 이들은 아리우스주의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분명히 그 가르침을 정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확신하였다. 알렉산더의 추종자들 가운데는, 당시 집사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으나 그 후 니케아 정통의 수호자로서 그 이름을 떨치게 되는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라틴어 사용권인 서방 교회를 대표하는 감독들의 대부분은 이 논쟁에 관해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들은 당시의 논쟁이 단지 오리겐의 추종자인 동방 교회 출신들 사이에 발생한 국부적 논쟁으로만 생각하였다. 이들은 이미 오래 전 터툴리안이 선포한 바대로 하나님은 “한 본질에 세 위격”이시라고 정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보았다.28)

그런데 여기에는 겨우 세 명, 혹은 네 명으로 구성된 또 다른 집단이 ‘성부고난설’을 주장하고 있었으니, 이는 곧 성부와 성자는 동일하므로 성부가 고난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 감독들 - 이러한 감독들 가운데 안디옥의 유스타티우스(Eustathius of Antioch)와 안키라의 마르셀루스(Marcellus of Ancyra)가 있다 - 은 아리우스주의가 오류라는 데 동의하였으나, 이들 자신의 신조 역시 그 후 교회가 삼위일체 교리를 보다 명확하게 정의하는 과정 속에서 정죄받게 된다.29)

그러나 당시 참여하지 않았던 감독들의 대부분은 이들 가운데 어느 집단에도 소속하지 않았다. 이들은 드디어 박해가 겨우 종식되고 새로운 기회들과 수많은 문제들이 출현하는 가운데 이처럼 교회를 분열시킬 가능성이 있는 논쟁이 발생했다는 자체를 걱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회의 초기에 이들 감독들은 우선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단지 모든 이들의 타협책을 찾기에 부심했던 듯하다. 이러한 태도를 견제한 대표적 인물은 동료 감독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던 학식있는 역사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였다.30)

먼저 아리우스파에 속하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18인의 감독과 함께 기초한 그들의 주장을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는 피조물로서 다만 최고의 존재일 뿐 영원성은 없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그 본질이 유사할 뿐 본질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31)

이와 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은 즉각 반대에 부딪혔고, 그 연설문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조각조각 찢겨져 발에 밟혔다. 그러자 중간파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자기 교회에서 사용하는 ‘신앙의 규율’을 낭독했는데, 아리우스파는 그 정도 신조라면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통파는 아리우스파를 명확하게 배제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교회의 신앙을 표현할 신경의 작성을 원했으며, 두 귀절을 삽입할 것을 요구했다. 하나는 성자가 피조된 것이 아니라는 귀절이고, 다른 하나는 성부와 성자가 동일본질(homoousios)이라는 귀절이었다.32) 궁정 감독 호시우스는 서방사람으로서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에 익숙했을 가능성이 있고33) 그런 연고로 정통파의 ‘호모우시오스’가 니케아 신조에 삽입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마침내 회의는 아리우스주의를 명백하게 배격하였던 신경에 합의하였다. 이 신조 말미에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하한 기본 명제들을 직접 정죄하는 짧은 저주 문구들을 덧붙였다.

니케아 회의에 참석했던 감독들은 그들이 합의한 신경에 의해 아리우스 논쟁이 끝나기를 소망하여 이에 서명하였다. 단지 두 명의 감독만이 서명을 거부하였다.34)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저주 문구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 회의는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직분을 박탈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틴은 자기 자신이 내린 처벌을 첨가하여 면직된 감독들을 자기들의 도시에서 축출해 버렸다.


2. 니케아 신조 및 분석


2.1 니케아 신조


니케아 회의에서 결정된 신조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전능자시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노라.

우리는 또한, 유일하신 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니], 이는 성부에게서, 곧 성부의 본질로부터 태어나신 독생자시며,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 빛에서 나온 빛,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이시고,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으셨으며, 성부와 동일본질이시고, 이를 통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지은 바 되었으니, 이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사,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셨으며, 고난당하신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하늘에 오르셨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우리는 또한, 성령을 믿노라.

그러나 “성자께서 안계신 때가 있었다”든지, “그가 태어나시기 전에는 그가 계시지 않았다”든지, “그가 무로부터 생성되었다”고 말하거나, “성자가 다른 본체나 본질로부터 유래했다”든지 “피조물”이라든지, “가변적”이라든지, “변화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보편교회가 저주하노라.?


2.2 니케아 신조 분석


니케아 신조는 그 후에 첨가된 부분들과 함께, 그리고 마지막 귀절의 저주 부문을 삭제한 형태로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모체를 이룬다. 원래 로마에서 기원하였던 ‘사도신경’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으로부터 비롯된 서방에 기원을 둔 교회들 사이에서만 알려지고 사용되었다. 반면 니케아 신경은 이러한 서방 교회들 뿐만 아니라 동방 교회, 즉 그리이스 정교, 러시아 정교 등에 의해서도 인정되었다.35)

이 신조에서 주목을 끄는 귀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36)

첫째,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과 동시에 “유일하신 주...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한다. 유일하신 하나님이 곧 아버지라고 해서 아들이 제외되는 것이 아니고 “유일하신 주”이시요 같은 하나님이다.

둘째, 성부는 불가견적이고 성자는 가견적이라는 말이 없다. 이것은 그노시스 이단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터툴리안보다도 일보 진보한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란,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말처럼 플라톤적인 이데아에 관한 언급이 아니라, 성경대로 말한 것이다(골 1:16).

셋째,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απαντων ορατων)라고 하지 않고 “보이는 모든 것”(παντων ορατων)을 창조하셨다고 한 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지음 받음을 피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넷째, 로고스(λογο?)가 언급되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 터툴리안까지만 해도 로고스의 영원 전(前) 존재에 대한 사색을 했으나, 여기서는 그것이 전혀 없고 로고스라는 용어까지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아들이 말씀이심을 부인코자 함이 아니고 스토아 철학이나 누스(νου?) 혹은 무인격적 사유나 논리와 혼동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될 수 있다.

다섯째,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독생자”이심을 강조한 점이다. 홀로 나셨다고 할 수 있는 것을 성부에게서 나셨다고 한 후, 홀로 나신 분이라고 덧붙였다. 이것은 성부와도 다르고, 성령과도 다른 위격임을 특별히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독생하심은 성부와 성령에게 없고 성자에게만 있는 특성이다. 이로서 사벨리우스의 동질동격설을 완전히 배격한 것이다.

여섯째, 이 독생하심이 성부의 본질로부터 나셨다는 것, 즉 신성의 근원이 성부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εκ'는 근원을 의미한다. “성부에게서” 독생하셨다고만 하다가 이것을 다시 헤석하여 성부의 “본질로부터”라고 한 것은 본질은 불가분리하나 위격은 나누어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일곱째,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은 무에서 지음 받은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이라는 것, 그러나 보통 흔히 재판장에게도 붙여지는 신이 아니라는 것을 보강하기 위해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오해를 할 우려가 잇었음인지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으셨으며”라고 덧붙여서 피조물이 아님을 완전히 못박았다. 이로써 아리우스의 피조설을 뿌리부터 제거해 버렸다.

여덟째, 피조물이기는 커녕 오히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음 받은 것을 강조하되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포함된다는 것을 덧붙였다. 이것만 고백해도 충분하나, “성부와 동일본질”이란 말을 덧붙인 것은 니케아 신조 전체의 상징(symbol)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단어는 모호하고 비전문적인 단어이어서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닐 수 있었으며, 따라서 장차 많은 논란을 야기했다. 다시 말해, 본질의 동일성을 어떠한 의미로 이해할 것인가 라는 의문이 제기된다.37) 오리겐이 의미하는 바대로 성부와 성자가 하나라는 뜻인가? 아니면 오리겐이 단일신론자들을 반박하면서 주장했던 대로 성부와 성자는 숫자적인 면에서는 분명히 구별되지만 본질의 동일성으로는 하나라는 뜻인가? 아니면 본질의 숫자적인 동일성의 의미에서 이 표현을 이해해야 하는가?

오랫동안 니케아의 결정은 두 번째의 뜻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 경우 “성부와 동일본질”이라는 표현은 신성의 각 위격들이 공통적인 신적 존재로서 하나임을 뜻한다. 이러한 해석은 후기 정통 이해와 일치하지만, 이 표현이 지닌 본래적인 의미와는 일치하지 않게 된다. 3세기 신학자들 사이에서 동일본질이란 “똑같은 본질”을 의미했다. 이 때까지는 숫자적인 동일성이 문제로 부각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니케아 회의에서 갑자기 그리고 준비도 없이 새로운 의미로 사용되었다고는 추측할 수 없다.38)

니케아 회의는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는 표현을 채택함으로써 다시 한번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으셨다”는 표현을 강조하였으며 결국 성자의 신성을 강조하였다. 회의는 신성의 통일성과 각 위격의 독특성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일종의 반신(Demigod)으로 만들었던 아리우스와 그의 주장들에 대한 반대로서 아들의 완전한 신성을 주장하려고 했다.39)

니케아 신조는 철학적 사색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양태론적 단일신론과 역동적 단일신론으로 인하여 교회가 약 120년간 연단을 받은 후 계속해서 성경을 상고하는 가운데 집약된 신앙고백으로서, 단순히 아리우스주의만 배격한 것이 아니고 오리겐주의의 종속설도 완전히 극복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신조는 세 위격,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성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킴으로써, 비록 아리우스주의를 정죄했지만 이 정죄만으로는 아리우스주의를 교회 밖으로 몰아내는 데 충분하지 못했으며, 교회가 아리우스주의를 결정적으로 정죄하기까지는 또 다시 50년이라는 장구한 기간에 걸친 논쟁을 계속해야만 했다.

니케아 신조는 성령의 신성 문제는 다루지 아니했으며, 후미(後尾)에 아리우스파에 대한 정죄문을 포함하면서 맺고 있다.


3.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배경


3.1 아리우스파와 반아리우스파의 응전과 이들의 우세 시기인 콘스탄틴 황제의 사망시까지;

A.D. 325-361.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주의를 정죄했지만, 논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그후 50여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일부 감독들이 니케아 신앙 형식에 대해서 진지한 의문을 제기하는 데 있었고 또한 황실의 정책이 돌변하는 데, 즉 콘스탄틴 황제의 개종이 모든 신학적 논쟁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는 데 있었다.40) 니케아 결정 사항에 대한 감독들의 불만은 일찍부터 예상하던 대로였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그리고 주안점이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해석한 아리우스주의로 축약되는 과정에서 회집한 대부분의 감독들은 사벨리우스주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언급되지 않은 채 아리우스만 정죄했던 신앙형식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어졌었다. 그러나 감독들은 자신이 맡은 교회로 돌아와서 실정을 살펴보니까 아리우스주의는 아직까지 크게 걱정할 것이 못되고 사벨리우스주의가 여전히 골치거리로 성가시게 굴자, 회의의 결정이 현명한 것이었던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니케아에서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함으로 파급된 관심사는 서로 다양하였다. 알렉산드리아에 위치한 오리겐 우파, 안디옥과 소아시아의 반(反)오리겐주의 일파들, 그리고 서방세계의 반(反)사색적 관심들로 나뉘게 되었다.41) 이러한 동맹관계로 아리우스주의의 사색에 대항해서 서로 이해관계 없이 뭉치게 되었으나, 아리우스파 지도자들의 개별적 공격에 대해서는 공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점차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뛰어난 정략가로서, 교회 고문 자리에서 해임된 호시우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리우스를 성찬에 참여시킨 행위로 유배를 당한 유세비우스는 감정을 억누른 콘스탄틴의 부름을 다시 받으면서 아리우스 반대 세력 제거에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황실 고문 유세비우스의 용의주도한 반대파 제거 계획은 특히 세 인물에게 초점 맞추어졌다.

유세비우스가 벌인 공세에 희생당한 첫 번째 사람은 안디옥의 유스타티우스였다.42) 그는 오리겐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악명 높던 인물로서,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에게 단일신론자로 공식적인 고소를 당했었다. 유스타티우스가 교회 평화의 파괴자이고, 윤리적으로 의심스러운 사람이며,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Helena)에게 가혹한 비판을 가한 사람이란 이야기를 고문들로부터 전해 들은 콘스탄틴은 330년경 안디옥에서 오리겐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어 열린 교회회의가 그를 폐위하도록 묵인하였고, 그를 트라케로 귀양보냄으로써 그 조치를 더욱 강화하였다.

유세비우스의 그 다음 희생자는 328년 알렉산더의 사망으로 그 뒤를 이은 아다나시우스였다.43) 결연하고 요지부동한 니케아 신조 옹호자이자 전임 감독 알렉산더의 대변자로 대변자로 자임한 아다나시우스44)는 과거에 멜리티우스파들을 다룰 때, 그리고 이집트 교회에 대해 자신의 권위를 강화할 때 사용한 강압적인 방법들을 가지고 비판의 포문을 열였다. 335년 아다나시우스는 철저히 신학적인 정적들로 구성된 두로 교회회의에 소환당했다.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죄목들 중에서 아르세니우스(Arsenius)라는 멜리티우스파 감독에 대해 살해를 음모했다는 죄목으로 고소당하였다. 이 고소 내용은 거짓이었지만 (아다나시우스는 아르세니우스를 폐위하였을 뿐이다), 알렉산더의 후임자로서는 그러한 교회회의에서 정의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다나시우스는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직접 황제를 만나 호소하기 위해 두로를 몰래 빠져 나왔다. 그러나 황제에 대한 호소도 아무런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와 그의 동료들은 아다니시우스가 수도에 대한 이집트의 곡물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는 말로 황제를 설득했다. 이것은 반역죄에 해당했으며, 그 말을 조사해 보지도 않고 콘스탄틴은 아다나시우스를 독일의 트리어로 귀양보냈다. 바로 이것이 아다나시우스의 생애에서 일어난 첫 번째 귀양이었다.

유세비우스가 거둔 마지막 승리는 또 다른 반(反)오리겐주의자인 안키라의 마르셀루스를 폐위하고 귀양보내는 일이었다.45) 그는 아리우스에 대해 아주 공격적이며 확고한 입장을 취했던 동방 감독이었으나 단일신론적 경향을 분명하게 지님으로써 쉽게 정죄받고 말았다.

이상 요약하면, 330년부터 7년 후 콘스탄틴이 죽는 때까지 니케아 회의의 옹호자들은 빈번히 패했다.46) 황제의 주된 관심은 신학적인 면보다는 정치적인 데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을 잘 활용한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정치적 수완의 덕분으로 아리우스주의는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니케아의 옹호자들 가운데는 그들의 이론이 사벨리우스주의와 어떻게 다르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어려웠다. 니케아파의 패배는 콘스탄틴 자신이 임종시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손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콘스탄틴 황제 사후에 로마제국은 콘스탄틴의 세 아들에 의해 삼분되었다. 맏아들 콘스탄틴 2세(Constantine II)는 주로 영국, 갈리아, 스페인 등 서방을, 둘째 아들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는 주로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등 동방을, 셋째 아들인 콘스탄스(Constans)는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제국의 중앙부를 차지했다.47) 콘스탄틴 2세와 콘스탄스는 서방의 입장을 따라 아다나시우스를 지지했다. 콘스탄스는 338년에 아다나시우스를 다시 알렉산드리아 감독으로 복귀시켰다. 339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아다나시우스의 주도로 약 백여명의 감독들이 모여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였다.48)

340년 장자 콘스탄틴 2세가 막내 동생 콘스탄스에 대한 주권을 확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기습을 당하여 전사하자 콘스탄스가 서방을 통치하게 되었다. 제국은 이제 서방의 콘스탄스와 동방의 콘스탄티우스로 양분되었다. 동방의 통치자가 된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파와 반아리우스파를 지지했고, 서방의 통치자 콘스탄스는 니케아 신조를 옹호했다. 콘스탄티우스가 동방의 통치자가 되자 아다나시우스는 두 번째로 추방되어 로마로 피신하게 되었다(339년 혹은 340년).49)

이런 정치적 상황 속에서 재기를 노리는 아다나시우스, 마르셀루스 그리고 다른 감독들은 유배지에서 귀환의 기회를 노렸고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황제의 신임을 등에 업고 세력 구축에 나섰다. 그런데 이즈음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 등 동방교회 지도자들이 폐위한 바 있는 감독들의 지위를 둘러싸고 일련의 논쟁이 일었다.50)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자들을 복직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고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는 자기들을 정죄한 자들이 이단들이었으므로 그 결정이 무효라는 입장을 취했다.51)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는 로마 감독 율리우스(Julius)에게 동정을 호소했고, 율리우스는 340년 교회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교회회의는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에 대한 페위조치의 부당함을 공포하였다.

자기들이 요청한 교회회의에 참석을 거부당한 동방교회 지도자들, 특히 동방에서 세력을 장악한 반(半)아리우스파는 341년에 안디옥에 모여 회의를 개최했다.52) 97명의 감독들은 모여서 네 개의 신조를 발표했는데, 극단적인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하면서도 니케아 신조의 핵심 단어인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를 회피하였다. 안디옥 회의는 니케아 신조에 대해서 공식적인 교리적 반발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회의였다.

반(半)아리우스파와 니케아파간의 대립이 심화되자 콘스탄티우스와 콘스탄스 형제는 지루한 논쟁을 해결해 보고자 343년에 현재의 소피아에 해당하는 사르디카(Sardica)에서 동서방을 다 포함한 대규모 종교회의를 개최했다.53) 서방의 감독들이 주종을 이룬 이 회의는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였고, 동방측은 아다나시우스의 감독 복직, 서방측은 마르셀루스에 대한 후원 중단이라는 화해안에 합의하였다.54)

그러나 일부 동방의 감독들이 사르디카 회의에 폐위된 감독 아다나시우스가 참석한 데 반발하여 사르디카 근처에 있는 빌립보폴리스(Philippopolis)에서 별도의 회의를 개최하고 안디옥 회의의 결과를 재확인할 뿐만 아니라 니케아 신조를 선언한 감독들에게 강한 분개심을 표현하였다.55)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콘스탄스의 압력에 의해서 346년에 아다나시우스를 다시 알렉산드리아 감독직에 복귀시켰다. 그러나 350년에 서방 황제 콘스탄스는 왕위찬탈자 마그넨티우스(Magnentius)의 지지자들에 의해 살해당했고, 콘스탄티우스는 반란을 진압하고 동서방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353년부터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한 361년까지 8년 동안은 니케아파의 철저한 패배기였다. 콘스탄티우스는 열렬한 아리우스 지지자인 무르사의 감독 발렌스(Valens)를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를 이어 황제 고문에 위촉했다. 콘스탄티우스가 취한 첫 버째 조치는 아다나시우스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351년 시르미움(Sirmium) 회의, 353년 알레스(Arles) 회의, 355년에 밀라노(Milan) 회의 등의 일련의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그는 감독들에게 아다나시우스를 포기하고 동방 교회들과 충분한 교제를 재개하도록 강요하였으며, 니케아파 감독들을 폐위 혹은 추방시키고 반아리우스파를 대거 등용하였다.56)

아다나시우스도 356년에 다시 감독직에서 추방되었는데, 이것이 세 번째 추방이었다. 그는 감독직에서 쫒겨난 뒤 6년 동안 이집트 오지의 수사(修士)들 틈에 피신해 있었다. 황제는 반대자들을 처리한 뒤 아리우스파 고문들의 조언에 따라 교리 문제에 손을 댔다. 357년 시르미움(Sirmium) 황궁에서 열린 교회회의는 ‘실재’(substantia), ‘본질’(ousia), ‘동일본질’(homoousios) 같은 성경에 없는 용어들과, 또는 성자가 “성부께 종속된다”고 암시하는 구절들을 “언급해서는 안된다”고 못박은 신조를 선언하였다. 이 신조는 니케아 신조를 배척하고 사실상 아리우스주의에 여지를 남겨 준 것으로, 갈리아의 감독 포이바디우스(Poebadius)가 붙인 명칭대로 ‘시르미움의 신성모독’으로 전해 내려왔다.57)

그런데 아리우스 지지자들의 내부에도 두 파로 분열되어 다투기 시작했다. 좀더 온건한 우익파는 성부와 성자는 동일본질이 아니라 유사본질(Homoiousios)임을 주장했다.58) 이들 가운데 사실상 니케아 신조의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동일본질(Homoousios)이라는 단어는 양태론적인 냄새를 너무나 풍긴다고 하여 유사본질이라는 단어를 선호했다. 이들은 니케아 종교 회의 이후 좀더 온건해진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342년 사망)의 입장과 비슷하다고 해서 “유세비우스파”(Eusebians)라고 불리기도 하고, “반아리우스파”(Semi-Arians)라고 불리기도 한다. 안키라의 바실(Basil of Ancyra)과 라오디게아의 그레고리(Gregory of Laodicea)가 반아리우스파의 대표자 역할을 하였다.

좀더 과격한 좌익파는 성부와 성자의 “상이본질”(Hetero-Ousios) 혹은 “부동”(不同, Anomoios)을 주장하는 아리우스파였다.59) 이들은 성자가 성부의 본질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무에서 생성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무에서 발생을 주장하는 파”(Exukontians)라고 불리우기도 하였다. 안디옥의 감독 유독시우스(Eudoxius)와 안디옥의 집사 아에티우스(Aetius)가 이런 주장을 했고, 특히 시지쿠스의 감독 유노미우스(Eunomius of Cyzicus)가 이 사상의 대표자였기 때문에 유노미우스파(Eunomians)라고도 불리운다. 닛사의 그레고리는 12권의 책을 저술함으로 유노미우스의 사상을 심층분석하여 반박했다.

이 두 파는 자체 내에서 일어난 분열을 치료해 보고자 358년부터 360년 사이에 여섯 번에 걸친 종교회의를 열었으나 해결점을 얻지 못했다.60) 콘스탄티우스는 권력을 이용해서 해결해 보고자 했으나 그것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한편 이즈음 아다나시우스는 박해의 와중에서도 니케아에서 사용한 ‘동일본질’을 변호하였는데, 아다나시우스에게 있어서 이것은 성자가 “성부와 동일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가 성부께 속한 것은 무엇이든 충분히 소유하고 있으며, 비록 성자가 성부께 속한 것을 무엇이든 성부로부터 받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두 분 사이에 속성상의 불변의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그의 주장과 안키라의 바실 학파가 주장한 ‘호모이우시오스’ 교리 사이에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따라서 결국 그들의 제휴는 이루어졌고, 이것은 아리우스주의를 타파하는 데 그게 이바지하였다.61)

한편, 이 즈음에 아리우스 논쟁은 또 다시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콘스탄티우스가 361년에 사망하고 그의 사촌 율리안(Julian)이 즉위하였기 때문이다.

3.2 정통 기독교의 최종 승리와 니케아 신경이 완성된 콘스탄티노플 회의시까지 ; A.D.

361-381.


콘스탄티우스 사후 황제가 된 줄리안은 플라톤 철학자로서 로마 제국 안에 헬라의 이교 사상을 다시 도입하고자 했다. 그는 기독교를 도입한 것이 콘스탄틴의 큰 실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방 종교를 다시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지도자들의 특권을 박탈했다. 또한 기독교인들끼리는 서로 다툼이나 하다가 망하라는 의미로 대립하고 있던 감독들을 모두 용인했다.62) 그래서 362년 추방되었던 아다나시우스는 다시 알렉산드리아에 복귀하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에 줄리안은 아다나시우스를 “이방신들의 원수”라고 하며 다시 추방했다.63) 이것이 아다나시우스의 네 번째 추방이었다. 줄리안은 361년부터 363년까지 두 해밖에 통치하지 못하고 사망했으며 역사 속에서 ‘배교자 줄리안’이란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아다나시우스는 줄리안 사후에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다.

율리안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콘스탄티우스의 지원을 받던 아리우스파는 세력의 약화를 겪었다. 아다나시우스가 362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유사본질파에게 화해를 제안한 것도 그 한몫을 했다. 그가 제시한 화해안은, 먼저 동방 보수주의자들의 구호인 ‘세 휘포스타시스(hypostasis)’가 ‘삼신’(三神) 또는 ‘서로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실체들’을 뜻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고, 그 다음에 ‘호모우시오스’가 ‘본질의 동등’을 뜻하되 성부, 로고스, 성령이 구분된다는 진리를 부정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64) 이 교회회의는 아울러 성령도 하나님과 ‘동일본질’을 갖고 계신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이로써 교회회의는 아다나시우스의 주도 아래 공포하기를, 분파들의 화해 조건으로는 아리우스주의를 배척하고, “니케아의 거룩한 교부들이 고백했던 신앙을 고백하고” “성령이 피조물이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하였다.

줄리안의 후계자인 죠비안 황제(Jovian, 363-364)는 다양한 기독교 분파에 대해서 관용 정책을 썼다. 죠비안의 사후에 통치권은 발렌티니안 1세(Valentinian I)에게 넘어갔는데, 그는 동방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아우인 발렌스(Valens, 364-378)에게 동방 통치권을 넘겨주었다. 발렌스는 니케아파를 완강하게 적대하여 365년에 아다나시우스를 다시 감독직에서 추방했다. 이것이 아다나시우스의 다섯번째이자 마지막 추방이었다. 아다나시우스는 시골집으로 낙향했다. 그러나 아다니시우스는 이듬해에 발렌스의 후계자 그라티안(Gratian)에 의해 다시 직분이 회복되었고, 성령훼방론자들(Pneumatomachi)과 투쟁하다가 373년에 사망하였다.

아다나시우스가 죽을 무렵에는 아리우스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지적-정치적 지도권이 이른바 ‘신니케아파’(new Nicene)라는 새로운 집단에게로 넘어갔다.65) 이 파의 주역들은 ‘세 명의 위대한 캅바도키아 교부들’ 즉 가이사랴의 바실(Basil of Caesarea),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이다. 캅바도기아 교부들이 ‘옛’ 니케아파와 호모이우시오스파로 대표되는 동방전승에 대해 이루어 놓은 화해의 열쇠는 ‘본질’(ousia)과 ‘본체’(hypostasis)라는 단어의 뜻을 조심스럽게 구분한 데 있었다.66) 이 두 단어는 철학적 문헌 속에서, 그리고 심지어 니케아 회의의 결정 가운데서도 동의어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라틴어로는 본질(substantia)로 번역되었다.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이 두 단어를 구분하여서 본체(hypostasis)는 사물의 개별적 존재를 언급하는 뜻으로, 본질(ousia)은 같은 종류의 모든 개체들이 다같이 공유하고 있는 본질로 분리해서 사용했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 안에 세 개의 본체(hypostasis)가 있으나 한 본질(ousia)만 있다고 주장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세 개의 개별적 존재가 하나의 신적 본질에 참여한다는 뜻이었다.

더 나아가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신 존재 또는 본질의 통일성은 신의 행위 또는 작용의 통일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하였다.67) 달리 말해서, 세 ‘위격’이 서로 다른 활동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간에 구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독특한 방법들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모든 신적인 행위에 세 위격이 모두 포함된다고 하였다. 위격들을 서로 구분하게 하는 유일한 것은 그들이 서로 간에 관계를 맺고 있는 - 각각 한 신성의 원천(source), 출생(offspring), 발출(procession)로서 - 방식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캅바도키아 교부들의 신학은 니케아 회의에서 거의 언급하지 않은 성령의 신성을 분명히 한 것으로 큰 의의를 지닌다.

한편, 니케아파 내에서도 아리우스주의의 상이 본질에 지나치게 반동하다가 다른편 극단인 양태론에 빠진 사람들도 있었다. 안키라의 감독 마르셀루스(Marcellus of Ancyra)와 그의 제자이자 안키라의 집사였던 포티누스(Potinus)는 로고스와 성부의 동일본질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사모사타의 바울처럼 역동적 단일신론에 빠졌다.68) 이들은 로고스와 성자를 구별하여 로고스는 성부와 동일본질이라고 하였고, 로고스가 인간 예수와 결합하여 성자가 되었다고 했다. 성자로서 구속 사역을 다 마치면 로고스는 다시 성부에게로 돌아간다고 하였다.69) 성자의 발생이라는 말은 로고스가 인간 예수와 결합하는 성육신 사건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성자의 영원발생설을 부인하였다. 사모사타의 바울과는 정반대되는 전제에서 시작했으나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70) 이들은 성자직은 임식직으로 생각했고, 로고스와 성령은 위격적인 의미가 없고 분할될 수 없는 신성의 다양한 표현이라 함으로써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양태론적인 주장도 하였다. 그러므로 마르셀루스파는 양태론적 단일신론과 역동적 단일신론이 결합된 형태의 이단 사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라오디게아의 감독이었던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of Laodicea)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무죄성을 옹호하려다가 또 다른 이단 사상에 빠졌다.71) 인간 구성의 삼분설에 입각하여 그리스도는 영만이 로고스의 영을 취했고, 혼과 육은 인간의 혼과 육을 취했다고 하였다. 영이 죄의 자리인데, 그리스도의 영은 로고스의 영이므로 죄가 없다고 하였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아폴리나리우스 사상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불구 인성으로 만들고 결국은 인간 구속에 합당치 못한 존재가 되게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는 니케아파조차도 처음에는 명료하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라우스파나 반아리우스파는 성령의 신성을 처음부터 부인하였다. 특히 반아리우스파에 속하는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마세도니우스(Macedonius)는 성령의 위격을 부인하고 “성령은 우주 전체에 분사된 신적 에너지”72)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닛사의 그레고리는 ?성령론?을 저술하여 마세도니우스 사상을 공박했다.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마세도니우스파”(Macedonians) 혹은 “성령훼방론자”(Pneumatomachi)라고 불렀다.73)

결국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아리우스주의, 반아리우스주의, 마르셀루스파, 아폴리나리우스파, 마세도니우스파 등의 이단적 사상과의 투쟁 속에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발렌스 황제 이후의 황제들은 대체로 니케아 신조를 옹호했다. 발렌티니안 1세의 아들 그라티안(Gratian, 375-383)은 발렌스의 사후(378)에 동서방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그라티안은 동방을 효울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데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379-395)를 동방 통치자로 임명했다. 데오도시우스1세는 급한 성격으로 인해 암브로스(Ambrose)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기독교를 국교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제국 내의 모든 이단과 이방 종교를 제거하고자 했다.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종교 회의는 이런 동기에서 데오도시우스 1세가 소집한 것이었다. 이 회의에는 서방 교회 감독들은 참석치 아니했으나 동방 교회 감독들은 약 150명 참석하였다. 이 중 36명은 반아리우스주의인 마케도니아파 곧 성령 훼방론자들이었다.74)


3.3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전능자시요, 하늘과 땅, 곧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며,

또한, 유일하신 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니], 이는 성부에게서 만세 전에 태어나셨고, 빛에서 나온 빛,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이시며,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으셨고, 성부와 동일본질이시며, 이를 통해 만물이 지은 바 되었으니, 이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수육하여, 인간이 되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못박히사, 고난을 당하시고, 장사되셨으며,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하늘에 오르셨고, 성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영광 중에 다시 오시리니, 그의 나라는 무궁하리라.

또한, 성령을 믿노니, 이는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고, 성부에게서 나오신 자로, 성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이라.

유일하고,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우리는 믿노라].

우리는 죄 사함을 통한 한 번의 세례를 믿으며, 죽은 자들의 부활과, 장차의 영원한 생명을 대망하노라. 아멘.?


4. 니케아 신조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비교


325년에 작성된 니케아 신조와 381년에 작성된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기본 내용을 같이하면서도 표현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니케아 신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삭제된 내용은 괄호로 표시하였다.


<니케아 신조>


?우리는 전능자시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노라.

우리는 또한, 유일하신 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니], 이는 성부에게서, (곧 성부의 본질로부터 태어나신 독생자시며,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 빛에서 나온 빛,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이시고,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으셨으며, 성부와 동일본질이시고, 이를 통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지은 바 되었으니, 이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사,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셨으며, 고난당하신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하늘에 오르셨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우리는 또한, 성령을 믿노라.

(그러나 “성자께서 안계신 때가 있었다”든지, “그가 태어나시기 전에는 그가 계시지 않았다”든지, “그가 무로부터 생성되었다”고 말하거나, “성자가 다른 본체나 본질로부터 유래했다”든지 “피조물”이라든지, “가변적”이라든지, “변화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보편교회가 저주하노라.)


<니케아-콘스탄티노믈 신조>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니게아 신조를 기본으로 하되 확대된 부분도 있고 삭제된 부분도 있다. 니케아 신조와 차이가 있는 부분은 괄호로 표시하였다.


?우리는 전능자시요, (하늘과 땅), 곧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며,

또한, 유일하신 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니], 이는 성부에게서 (만세 전에) 태어나셨고, 빛에서 나온 빛,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이시며,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으셨고, 성부와 동일본질이시며, 이를 통해 만물이 지은 바 되었으니, 이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수육하여, 인간이 되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못박히사), 고난을 당하시고, (장사되셨으며),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하늘에 오르셨고, (성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영광 중에 다시) 오시리니, (그의 나라는 무궁하리라).

또한, 성령을 믿노니, (이는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고, 성부에게서 나오신 자로, 성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이라.

유일하고,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우리는 믿노라].

우리는 죄 사함을 통한 한 번의 세례를 믿으며, 죽은 자들의 부활과, 장차의 영원한 생명을 대망하노라.) 아멘.?


이 두 신조의 형식상의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75)

첫째, 니케아 신조에 “성부의 본질(ουσια)로부터 태어나신”이라는 표현이 콘스탄티노플 신조에는 생략되었다는 점인데, 이는 확실치 않은 철학 용어를 삽입함으로 공연히 물의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자가 성부로부터 나셨다는 표현과 동일본질이라는 표현으로도 성경의 진리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는데, 반드시 “성부의 본질로부터”라는 표현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니케아 신조에 있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콘스탄티노플 신조에는 탈락되었다는 점인데, 이것은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건재함으로 사실상 동어반복적인 표현을 제거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셋째, 니케아 신조에 없던 “만세 전에”라는 문구를 “성부에게서 태어나셨고”라는 말 가운데 삽입시켰다. 이는 성자의 출생과 관련하여 존재론적 추리방식을 포기하고 형상적 표현방식으로 대치한 것이다.76)

넷째, 기독론 마지막 부분에 니케아 신조에 없는 “그의 나라는 무궁하리라”는 문구를 삽입했는데, 이는 로고스가 영원하지 않다고 주장한 안키라의 마르셀루스의 가르침을 배격한 것이다.77) 그리스도는 종말 완성 상태에서도 자신의 인격성이 완전히 보존된다. 이로써 교리적 진술이 바울의 단일 진술, 곧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고전 15:24-28)라는 진술 위에 승리하게 된다.

다섯째, 니케아 신조에서 너무나 간단한 고백(“성령을 믿노라”)으로 그친 성령론이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성숙한 내용으로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1)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το κυριον”은 주권자 곧 피조물과는 구별된다. “거룩한 영”이라고만 하여도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거룩”이 그 본성이므로 신(神)일 수 밖에 없지만, 그 위에 “주” 혹은 “하나님”이란 말이 덧붙여져서 더욱 강조되었다. 2)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은 영의 활동을 말하는 것인데, 성부와 성자와 동질(同質)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말씀 안에 생명이 넘침과 같이 성령 안에 생명이 넘친다. 생명의 영이므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만물에게 생기를 주시며, 마지막 날에 죽은 자들을 일시에 다시 살리신다. 3) “성부에게서 나오신 자”란 성령이 주권자요 생명의 수여자로되, 독자적인 신성을 소유한 분이 아니라 성부에게서 나오시는 분임을 말해 준다. 4)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란 성령이 성부와 성자와 완전히 동질일 뿐 아니라 동등(同等)임을 결정적으로 단언한 것으로서, 성령 자신이 다른 두 분과 함께 “함께” 경배를 받으신다는 뜻이다. 5)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이란 말씀하신 이가 성령이라는 뜻으로서, 구약에 항속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여섯째, 성령 발출에 대해서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는 성부로부터 발출했다는 점만을 밝히고 성자와의 관계는 침묵하였으므로 후대 동서방 교회 간에 필리오케(Filioque) 논쟁의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점이다. “아들로부터”라는 의미를 가진 “필리오케”는 589년 스페인의 톨레도(Toledo) 종교 회의 이후로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삽입되었는데, 교황 니콜라스 1세(858년) 때부터 전 서방교회에서 점진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결국 개신교에서도 인정되는 교리가 되었다.

일곱째,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경대로”라는 귀절을 삽입함으로써 진리의 절대적인 기준으로서 전통보다도 성경의 권위를 더욱 높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78)

아울러 그 내용에 있어서도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교회들의 “신앙의 규율”의 내용을 니케아 신조보다 더욱 많이 반영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아리우스파에 대한 저주문은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와서 삭제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또한 “유일하고,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라는 문구 속에서 교회에 대한 신앙 고백을 첨가시켰으며, 구원의 길로서 “죄 사함을 통한 세례”를, 그리고 내세와 과련하여 “죽은 자들의 부활”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의 소망’을 추가하였다.79)

이로써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여러 이단들을 정죄하였다.80) 과격한 아리우스파로서 성부와 성자의 “상이본질”(Hetero-Ousios) 혹은 “부동”(Anomoios)을 주장한 유독시우스(Eudoxius)와 아에티우스(Aetius), 유노미우스(Eunomius)를 정죄하였다. 그리고 성령의 위격을 부인하고 “성령은 우주 전체에 분사된 신적 에너지”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성령의 신성을 부인한 마세도니우스(Macedonius)와 성령훼방론자들(Pneumatomachians)을 정죄하였다. 또한 순수 양태론을 가르친 사베리우스(Sabellius)파를 정죄하였으며, 그리고 로고스와 성부의 동일본질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사모사타의 바울처럼 역동적 단일신론에 빠져 로고스를 성부의 계시방식으로 본 마르셀루스(Marcellus of Ancyra)와 포티누스(Potinus)를 정죄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무죄성을 옹호하려다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불구 인성으로 만들어 인간 구속에 합당치 못한 존재가 되게 한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of Laodicea)를 정죄하였다.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공존하다가 451년 칼케돈 종교회의 이후로는 점차 콘스탄티노플 신조가 니케아 신조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신조라는 이름보다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81)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아리우스 논쟁에서 비롯된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는 니케아 회의에서 ‘성부와 성자의 동이본질’로 일단락 지어졌다가, 니케아 이후에 계속된 논쟁에서 성령의 신성이 문제로 부각되면서 삼위일체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이런 면에서 정통 삼위일체론을 정립한 회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의 본질에 있어서의 일치와 위격에 있어서의 명확한 구별이 정통 교리로 선언되면서, 상이본질론, 유사본질론, 양태론, 성령훼방론, 종속설 등 모든 이단들이 정죄되었다. 아을러 성자의 불완전한 인성을 주장한 아폴리나리우스도 극복하였다.

그러나 본질의 일치성이 숫자적 일치성이냐 총칭적인 일치성이냐 하는 문제와, 성자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이 완성된 것이냐 아니면 미완성된 것이냐 하는 문제, 그리고 성령의 발출이 성부로부터 발출되었다고 선언했는데, 성자로부터의 발출을 내포한 것이냐 배제한 것이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후대의 숙제로 남게 되었다.82) 그러나 “삼위일체를 설명하라. 그러면 네 정신을 잃을 것이다. 삼위일체를 부인하라. 그러면 네 영혼을 잃을 것이다”83)라는 격언이 시사한 바대로, 신비의 영역을 인간의 제한된 지성으로 온전히 파헤치려는 교만은 삼가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니케아 신조와 비교할 때 성령론, 교회론, 구원론, 내세론의 면에서 크게 진보했으며, 성경의 권위를 크게 인정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Grand Rapids: Wm. B. eerdmans, 1974.


Henry Chadwick, The Early Church. ?초대교회사?.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1987.


Justo L. Gonzalez,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vol. 1. ?기독교 사상사 (I)?, 고대편. 이형기,

차종순 역. 서울: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1988.


Justo L. Gonzalez, The Story of Christianity. ?초대교회사?. 서영일 역. 서울:은성, 1987.


Bernhard Lohse, A Short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 ?기독교 교리의 역사?. 차종순 역. 서울:

목양사, 1990.


Williston Walker,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4th edition. ?기독교회사? 제4판. 송인설

역. 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정수영, ?새 교회사 I?. 서울:규장문화사. 1992.


박용규, ?초대교회사?. 서울:총신대학출판부, 1994.


차영배, ?개혁교의학: 삼위일체론?. 서울:총신대학출판부, 1992.


피영민,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삼위일체론,” 제9차 기독교학술원 학술 심포지움 미간행 자

료집(1994).


서철원, 교리사 강의안 (미간행).







1) 박용규, ?초대교회사? (서울:총신대학출판부, 1994), 323쪽.


2)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Grand Rapids: Wm.B. eerdmans, 1974), p. 619.


3) Ibid., p, 619.


4) Ignatius, Ad. Eph., vii.2. 박용규, 상게서, 324쪽에서 재인용.


5) Ignatius, Ad. Magn., vi. I. 박용규, 상게서, 324쪽에서 재인용.


6) Justin, The First Apology, I. xlvi. 1-4. 박용규, 상게서, 325쪽에서 재인용.


7) Justin, The Second Apology, II. xiii. 1-6. 박용규, 상게서, 325쪽에서 재인용.


8) Irenaeus, Adv. haer., III. xviii. 박용규, 상게서, 326쪽에서 재인용.


9) Tertullian, Adv. Prax. 2 (ANF, 3:598). Justo L. Gonzalez,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vol. 1. ?기독교 사상사 (I)?, 고대편, 이형기, 차종순 역 (서울: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1988), 219쪽에서 재인용.


10) Bernhard Lohse, A Short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 ?기독교 교리의 역사?, 차종순 역 (서울:목양사, 1990), 72-73쪽.


11) Lohse, 상게서, 73쪽 참조.


12) Ibid., 73쪽.


13) Ibid., 75쪽.


14) 윌린스턴 워커(Williston Walker)는 이 논쟁에 관해 이렇게 설명한다. “324년 콘스탄티누스가 리키니우스(Licinius)를 물리치고 제국의 동쪽 절반을 장악하게 되었을 때 한 논쟁이 단일 지방이 아니라 리키니우스의 옛 영토 전역을 분열시키며 맹렬히 번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번의 쟁점은 신학적인 것이었고, 그 초점은 로고스(Logos) 신학에 관련된 해묵은 문제, 즉 말씀(하나님의 아들)의 본성과 지위와, 그가 성부 및 피조물들과 맺고 있는 관게에 대한 문제와 맞추어져 있었다. 그것은 거의 60년 동안 공식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논쟁이었고, 기독교인들에게 신관을 표현하는 방식을 재고하도록 요구한 논쟁이었다.” Williston Walker, A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4th edition. ?기독교회사? 제4판, 송인설 역 (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152쪽.


15) Socrates, Ecclesiastical History, I. 5. 박용규, 상게서, 334-335쪽에서 재인용.


16) 안디옥의 신학자요 감독인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은, 예수가 다른 선지자보다 강력하게 작용하여 로고스가 되었다고 보고 예수가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한 다음에야 하나님은 그에게 신성을 부여하였다고 한느 역동적 단일신론을 주장했다. 바울의 이같은 주장으로 안디옥 교회에서는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17) Athanasius, De Synodis, 16. Opitz, Urkunden, No. 6. Lohse, 상게서, 76쪽에서 재인용.


18) Lohse, 상게서, 77쪽.


19) Ibid., 77쪽.


20) P. Schaff, Ibid., p. 620.


21) 서철원, 교리사 강의안 (미간행). 114쪽.


22) Walker, 상게서, 152쪽.


23) Schaff, Ibid., p. 623.


24) Justo L. Gonzalez, The Story of Christianity. ?초대교회사?, 서영일 역 (서울:은성, 1987), 256쪽.


25) Gonzalez, ?초대교회사?, 256쪽.


26) Schaff, Ibid., pp. 624-625 참조.


27) Schaff, Ibid., 627. 샤프는 이 파에 가담한 감독들이 약 20명이라고 주장한다.


28) Gonzalez, ?초대교회사?, 258-259쪽.


29) Gonzalez, ?초대교회사?, 259쪽.


30) Gonzalez, ?초대교회사?, 259쪽.


31) 정수영, ?새 교회사 I? (서울:규장문화사, 1992), 124쪽.


32) 피영민,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삼위일체론,” 제9차 기독교학술원 학술심포지움 자료집(미간행, 1994), 156쪽.


33) 차영배, ?개혁교의학: 삼위일체론? (서울;총신대학출판부, 1982), 130쪽.


34) Schaff, Ibid., p. 629. 두 명의 감독 이름은 데오나스(Theonas) 와 세쿤두스(Secundus)로서 모두 이집트 감독이었다.


35) Gonzalez, ?초대교회사?, 261쪽.


36) 차영배, 상게서, 131-133쪽 참조.


37) Lohse, 상게서, 84-85쪽.


38) Lohse, 상게서, 85쪽.


39) Ibid., 85-86쪽.


40) Gonzalez, ?기독교 사상사?, 323쪽.


41) Ibid., 323-324쪽.


42) Walker, 상게서, 157쪽.


43) Walker, 상게서, 157-158쪽.


44) 아다나시우스는 325년 니케아 회의가 개최되기 이전에 ?성육신에 대하여?라는 소논문을 발표하여 생명을 상실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말씀이 인간이 될 필요가 있음을 논증했다. 아다나시우스는 아리우스의 입장은 철학적으로 네 가지 내적 모순을 지니고 있다고 비판했다. 첫째로, 아리우스는 피조되지 않은 신과 피조된 신의 두 종류의 신을 가르침으로써 이교도의 다신론에 빠졌다. 둘째로, 아리우스 주의는 그리스도를 피조물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세상의 창조자로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피조물이 세상의 궁극적 근원이 될 수 있다는 모순을 낳았다. 셋째로,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세상이 존재하기 전에 선재했다고 말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부인했다. 그럼으로써 마치 시간은 피조물이 아니요 세상이 존재하기 이전에도 시간은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는 모순에 빠졌다. 넷째로 아리우스는 그리스도 이전에도 시간의 존재를 언급함으로써 성부 하나님조차도 시간의 개념 속에 포함시켰고 따라서 성부의 영원성을 부인했다. 피영민, 상게서, 157쪽.


45) Gonzalez, ?기독교 사상사?, 328쪽.


46) Ibid., 328쪽.


47) 박용규, 상게서, 352쪽.


48) 피영민, 상게서, 157쪽.


49) Ibid., 157쪽.


50) Walker, 상게서, 159쪽.


51) 박용규, 상게서, 353쪽.


52) 피영민, 상게서, 157쪽.


53) Schaff, Ibid., 634.


54) 박용규, 상게서, 353쪽.


55) Schaff, Ibid., p. 635. 피영민, 상게서, 157쪽.


56) Schaff, Ibid., 635. 박용규, 상게서, 353-354쪽.


57) Walker, 상게서, 161쪽.


58) Schaff, Ibid., p. 637. 피영민, 상게서, 158쪽.


59) Schaff, Ibid., p. 637. 피영민, 상게서, 158쪽.


60) Schaff, Ibid., p. 637. 여섯 차례의 회의란 두 차레의 시르미움 회의(A.D. 357, 358), 안디옥 회의(358), 안키라 회의(359), 셀류키아(Seleucia)와 리미니(Rimini)에서의 이중 회의(359), 콘스탄티노플 회의(360)를 말한다.


61) Henry Chadwick, The Early Church. ?초대교회사?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1987), 178쪽.


62) Schaff, Ibid., p. 638.


63) 피영민, 상게서, 158쪽. Schaff, Ibid., p. 638.


64) Walker, 상게서, 164쪽.


65) Ibid., 164쪽.


66) Gonzalez, ?기독교 사상사?, 340쪽.


67) Walker, 상게서, 166쪽.


68) Schaff, Ibid, p. 652-653 참조. 피영민, 상게서, 159쪽.


69) Schaff, Ibid, p. 653.


70) Schaff, Ibid, p. 653.


71) Ibid., 159쪽.


72) Gregory of Nyssa, "Against the Followers of Macedonius," N.P.N.F. 2nd Series, vol.5, p. 315. 피영민, 상게서, 159쪽에서 재인용.


73) Schaff, Ibid., pp. 663-664.


74) Schaff, Ibid., p. 639.


75) 차영배, 상게서, 142-145쪽 참조.


76) 서철원, 상게서, 158쪽.


77) Ibid., 158쪽.


78) Schaff, Ibid., p. 670. 피영민, 상게서, 161쪽.


79) Schaff, Ibid., p. 670.


80) 서철원, 상게서, 160-161쪽. Schaff, Ibid., p. 640.


81) 이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는, 박용규, 상게서, 363쪽의 각주 53을 보라.


82) 피영민, 상게서, 164-165쪽.


83) Ibid., 165쪽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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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매각설 배후는 ‘신천지’...시민들 반발 거세
범시민신천지대책위, "계룡시에서 산 매입에 나서줄 것" 요구

2013/05/01 (수) 08:14 ㆍ추천: 0 ㆍ조회: 49



이단 신천지가 충남 계룡산 일대의 땅 수십만 평을 매입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포착됐다.

계룡시민들은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고 있는 이단 신천지가 전국에서 손꼽히는 명산을 훼손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며, 시민단체까지 결성했다.

계룡산 주봉인 천황봉에서 뻗어나온 향적산.

신천지가 계룡시 엄사면 향적산 일대의 12필지, 1,469,186평방미터(약 45만 평)의 땅을 매입할 계획인 것으로 CBS 취재 결과 확인됐다.

사실 계룡산 일대 매각설은 수년전부터 있었는데 그 배후에 이단 신천지가 있다는 사실은 지난달 초 계룡시의회 임시회에서 한 시의원의 폭로로 드러났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계룡시 교계를 비롯해 20여 개 시민사회단체들은 지난달 20일 범시민신천지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신천지의 땅 매입 저지운동에 돌입했다.

시민단체들은 "조건부 시한부 종말론을 유포하고, 반사회적인 행위까지 일삼는 신천지에 산을 매각할 경우 출입제한은 물론 난개발이 이뤄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임왕규 실행위원(계룡시 범시민신천지대책위원회)은 "신천지가 무상사를 기준으로 약 45만 평을 매입하려고 하는 정황이 포착됐다"며, "반사회적인 집단인 신천지가 계룡시에 진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시민단체들이 연대하게 됐다"고 말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신천지에 산을 팔려고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산주인들로 구성된 송계회 회원들 사이에서도 반대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224명의 송계회 회원들은 70억원 선에서 산을 매각한다는 원칙을 정해놓고 있지만, 반대여론이 심해지자 계약을 미루고 있는 상태이다.

송계회원 A씨는 "신천지가 들어오면 동네가 이미지가 안 좋아져서 안된다"며, "신천지가 200억원을 준다고 해도 팔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신천지는 왜 갑작스레 향적산을 매입하려고 하는 것일까?

신천지는 향적산 국사봉 일대에서 교주 이만희가 하늘의 계시를 받고, 교리 책을 완성했다고 선전해왔다.

이 때문에 신천지의 향적산 매입 추진은 교주 이만희의 신격화를 위한 교육장소로 조성해 활용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을주민 B씨(계룡시 엄사면 향한리)는 "1년 전부터 차를 대절해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며, "어디서 왔냐고 물으니까 신천지에서 왔다고 하면서 이곳을 성지로 만들 것이란 말을 했다"고 증언했다.

신천지가 계룡산 일대를 성지화하려는 계획을 세운 가운데 계룡시 범시민신천지대책위원회는 앞으로 계룡시가 직접 향적산 매입에 나서 시민들을 위한 휴양림을 조성하는 등 관광자원으로 활용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할 계획이다.

계룡시 교계도 이 시민단체에 참여하고 있지만, 인근 지역 교계 연합단체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도 필요해 보인다.

CBS TV보도부 송주열 기자
ⓒ CBS 크리스천노컷뉴스/USA 아멘넷

(Q 8) 술, 담배, 그리고 마약

잠긴동산 ㆍ 2013-05-01 (수) 08:40 IP: 67.xxx.142 ㆍ조회: 53      

(Q 8) 술, 담배, 그리고 마약

왜 성결교회와 오순절 교회는 술, 담배, 그리고 마약 사용의 절제를 옹호하는 가?
왜 그것의 절도 있는 사용을 허락하지 않는가?

여덟 번째 질문

성결교회와 오순절교회 신자들은 역사적으로 고린도전서 6:19-20을 매우 존중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殿)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술 취함에 대해 경고하는 이 말씀과 다른 말씀은 술, 담배, 또는 마약을 사용하는 것으로부터의 완전한 절제를 옹호하기 위한 충분한 이유로 여겨졌습니다. 인간의 몸은 성령의 전이기 때문에, 그 전을 더럽혀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완전한 절제를 옹호하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1) 현대 사회는 이 세 가지 중독성 물질의 파괴적인 결과로 인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있으며, 또한
(2) 이러한 물질, 특별히 술과 마약은 심지어 소량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흔히 파괴적 중독성 습관으로 이어집니다.



성경은 술의 파괴적인 힘에 대해서 자주 말합니다. 노아의 술 취함은 그의 가정에 수치를 가져왔습니다 (창세기 9:20-27). 롯의 술 취함은 그의 두 딸과 근친상간의 관계를 야기시켰습니다 (창세기 19:30-38). 술 취한 아하수에로는 공중 석에서 왕후 와스디에게 모욕을 주려고 했습니다 (에스더 1:9-22). 술의 소비는 판단을 흐리게 하고, 감정에 불을 붙이며, 폭력을 초래합니다 (레위기 10:8-11; 잠언 20:1; 23:19-35; 31:4,5).

술중독과 그것과 연관된 우울증은 흔히 도덕적 저해(沮害)의 와해, 무분별한 혹은 포악한 행동, 또는 양심의 상실(술 취함)에 이르게 합니다. 장기간의 음주는 간, 췌장, 뇌, 혹은 심장을 완전히 훼손시킬 수 있습니다. 대학교 교정에서 마시는 폭음은 순식간의 죽음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천 4백만 명이 술 취함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치명적 자동차 사고의 절반은 음주 운전자들에 기인합니다. 매년 술과 관련된 사고, 병, 강력 범죄, 그리고 노동시간의 손실은 천억 불을 초과할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불법 약물 (마약)

비록 마약의 사용에 대하여 성경에 특별히 언급이 없지만, 마약 사용자와 사회에 미치는 그것의 영향은 음주의 해로운 결과를 훨씬 초과합니다. 어떤 마약의 중독성은 매우 강력하여서 단 한 번 사용할지라도 그 사람을 평생 동안 마약 중독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용하는 사람의 장기와 정신적 수용능력에 미치는 돌이킬 수 없는 육체적 손상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마약은 지극히 위험한 것입니다. 가장 커다란 위험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일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개인의 대인 관계와 영적 행복을 파괴시킴으로서, 그 사람의 삶을 극단적으로 소모시키며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마약 중독으로 인한 개인의 손상 이외에 마약은 그들의 가족과 사회에 비참한 짐을 지웁니다.
술과 불법 약물의 사용은 가정 폭력, 거리와 직장에서의 격노, 아동 학대, 자살, 그리고 여러 가지의 사회의 다른 파괴적인 행동들에 대한 요인이라고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술중독과 마약중독은 우리 사회 기간(基幹)의 파괴를 위협하는 국가적 위기를 제공합니다.

담배

담배를 피우고 씹는 것이 그 사람의 판단을 손상시키거나 여러 가지 술과 마약에 연관된 부작용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담배는 지금 가장 중요한 건강의 관심사인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마다 젊은이들이 담배가 성숙함과 인기에 연관시키는 효과적인 속임수 광고 캠페인 때문에 그 습관에 사로잡히고 있습니다. 수 년 동안 미국 연방의무감(surgeon general)은 흡연의 위험에 대해서 사회에 경고해 왔으며, 심지어 담배 제조회사들에게 제품에 위험 경고문을 부착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구강암과 폐암 및 담배중독의 희생자들이 증가할 때까지 사람들은 그러한 경고를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금연가가 간접흡연으로 인하여 담배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분명하게 되었을 때에야 사회는 담배의 사용에 대하여 심각하게 반대하기 시작 했습니다. 최근의 의학 연구들이 담배가 폐암의 주요 원인이 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 주었지만, 교회는 성령의 전(殿)인 기독교인의 몸에는 물론 기독교인의 증언에 해로운 습관이기 때문에 담배의 사용을 반대해 왔습니다.

술, 담배, 그리고 마약의 사용에 관한 이러한 사실에 입각하여 보면 이러한 것을 절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육체와 영적인 행복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하는 그러한 것에 대하여 높은 표준의 자제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취하지 말도록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술, 마약, 혹은 담배를 어떤 정도 “적당히 사용”하는 것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 말씀의 중요함과 우리 사회가 부딪치고 있는 현재의 위험에 대해 무감각한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우리들의 세상 앞에 순수한 증언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로마서12:1,2) 해야 합니다.

관심사:

위에서 언급한 술, 마약, 담배의 사용은 중독된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무거운 짐을 지웁니다. 약물의 남용은 더 큰 사회에서 생산성 있는 개인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는 중독자로 만들 수 있으며, 따라서 그가 속해 있는 사회에 재정적인 짐을 지워줍니다. 중독자로 인하여 생기는 상해(傷害)와 병에 대한 의학적 치료의 비용은 훨씬 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더욱 소모합니다. 그리고 약물 남용이 흔히 범죄 행위로 이어지기 때문에 사회는 보험 비용의 추가와 법의 집행을 위해 비용을 두 배로 지불합니다. 우리들은 사탄이 중독자들의 생활에서 그들을 노예로 구속하기 위하여 사탄이 사용하는 이러한 중독성 물질과 싸울 것을 모든 사회에 요구합니다.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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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식의 손과 부모의 손 노년빈곤(老年貧困)이란 말이 있습니다 노년의 빈곤은 노추(老醜)를 불러 불행한 일이라는 것이지요 자식이 내미는 손과 부모가 내미는 손은 어떻게 다를까요? 부모는 자식이 내미는 그 손에 자신의 모든 것을 쥐여주면서 애벌레가 성충으로 크도록 애정으로 돌봅니다 그리고 껍질만 남은 곤충처럼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서도 부모는 자식의 손에 더 많은 것을, 더 좋은 것을 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세월이 흘러 부모는 늙고 힘도 없고 이제 부모는 가진 게 없습니다 너무 늙어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이번에는 몇 푼 용돈을 얻기 위해 자식에게 손을 내밉니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 마음 같지가 않습니다 부모의 내미는 손이 보기가 싫은 것이지요 그에게 부담이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내미는 손에 부모는 섬으로 주었건만 자식은 부모에게 홉으로 주는 것마저 부담스럽게 느낍니다 - 좋은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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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 교회가 받은 칭찬과 책망” - 스데반 황 목사

주일설교  2013.4.28

 

주일 본문 ( 계시록 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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