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아는가? / 아더 핑크

믿음은 ㆍ 2013-05-15 (수) 00:03 IP: 119.xxx.126 ㆍ조회: 21      

“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아는가?” / 아더 핑크


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아는가?
그분이 어떤 분이시건, 그저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는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
더 건강해지고 젊어지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오늘은 또 얼마나 부단히 노력했는가?
당신은 스스로 자랑으로 여기는 것을 위해
당신의 시간과 정성과 체력을 아낌없이 쏟아 붓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는가?
정말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그분을 신뢰하며
사랑하며 경외하며 경배하고 있는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은 제대로 믿을 수도, 섬길 수도 없다.
당신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겠지만,
어떻게 자녀가 자기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모를 수 있겠는가?
설령 안다고 해도, 당신이 믿고 싶은 하나님의 한가지 성품만을 붙잡고
왜곡된 신의 형상을 하나님으로 그리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 자녀는 하나님 말씀과 교제와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바르게 알려는 노력을 한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당신이 이 세상에서 얻어야 할 모든 지식의 근본이다.
오직 자기 하나님을 아는 백성만이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자기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욥 22:21)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렘 9:23,24).

구원에 이르는 영적 지식,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지식이다.
하나님에 관한 참 지식은
성경에 계시된 그분의 완전한 속성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은 믿을 수도,
섬길 수도, 경배할 수도 없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이론으로 아는 것 이상의
지식이 필요하다.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분의 권위에 순종하며,
범사에 그분의 거룩한 규례와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영혼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 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즉, 복종을 통해) 여호와를 알자” (호 6:3).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 알리라” (요 7:17).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단 11:32).


아더 핑크의 "네 하나님을 알라"라는 책의 뒷표지에서

출처: USA 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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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 뇌' 기술 개발한 정광훈 박사, MIT 교수로
 

MIT 신임 조교수 채용사상 가장 많은 연구비를 제공
"헤어젤 회사서 병역특례한 게 10년 지나 투명 뇌 기술로…
뇌과학 연구 계속 벤처 창업, 한국 바이오산업 도울 것"
"병역 특례 시절 헤어젤 제조 회사에서 일했는데 그때 배운 게 뇌를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연구로 이어졌습니다."

미 스탠퍼드대 연구원인 정광훈(鄭光勳·34) 박사는 최근 칼 다이서로스(Deisseroth) 교수와 함께 생쥐의 뇌를 투명하게 만들고 그 안에 있는 신경세포의 3차원 연결망을 하나하나 볼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본지 2013년 4월 11일 A2면 참조

뇌가 불투명한 것은 지방 때문이다. 지방은 단백질과 DNA가 제자리에 있도록 지지하는 역할도 한다. 정 박사는 지방을 빼고 묵과 같은 투명 하이드로겔(hydrogel)을 집어넣어 신경세포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도 뇌 안쪽이 훤히 보이게 하는 데 성공했다.


	정광훈 박사
13일 KIST 강연에 앞서 정광훈 박사는“투명한 뇌 기술로 뇌의 각 영역을 연결하는 신경회로를 파악하는‘뇌 지도’작성이 좀 더 편해졌다”고 말했다. /KIST 제공
13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강연을 위해 방한한 정 박사는 "헤어젤 회사에서 하이드로겔이나 헤어젤은 모두 온도가 올라가면 액체에서 그물 형태의 고체로 변하는 특성을 배웠다"며 "병역 특례를 마치고 10년도 더 지났는데 그게 연구에 도움이 될지 몰랐다"고 말했다.

'네이처'지에 발표한 정 박사의 투명 뇌는 미국의 뉴욕타임스(NYT), 영국의 BBC방송 등 전 세계 언론이 "난치성 뇌 질환 연구 흐름을 바꿀 획기적인 성과"라고 앞다퉈 보도했다. 전 세계가 고령화사회로 접어들면서 알츠하이머·파킨슨병 같은 난치성 뇌 질환에 인류가 몸살을 앓고 있다. 알츠하이머 치료 시장만 2020년 16조원, 파킨슨병 치료 시장은 2018년 3조3000억원에 각각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뇌를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면 난치성 뇌 질환이 뇌의 어떤 부위에 발생하고 악화하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정 박사는 하마터면 과학자가 아닌 의사가 될 뻔했다. 부산과학고 3학년이던 1997년 IMF 경제 위기가 터졌다. "먹고 살려면 의대를 가야 한다고 부모님이 강력하게 요구하셨어요. 고등학교 친구들도 진로를 의대로 바꾸기도 했죠. 하지만 과학고 나왔으면 과학자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부모님을 설득했습니다." 그는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아공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번 투명한 뇌 기술로 세계적인 과학자 반열에 올라선 그를 교수로 채용하려고 프린스턴대, 조지아공대, MIT 등 미국의 유명 대학들이 경쟁을 벌였다. 그는 MIT를 선택했다. MIT는 그를 데려가려고 신임 조교수 채용 역사상 가장 많은 연구비인 250만달러(약 27억원) 이상을 조건 없이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MIT가 제 경험을 모두 살릴 수 있는 화학공학과와 뇌신경과학과 양쪽 소속의 교수직을 제안했습니다. 예전 MIT대학원에 진학하려 했지만 낙방한 것도 이번에 MIT를 선택하는 데 작용했습니다."

그의 성과로 지도교수인 다이서로스 교수도 노벨상 수상자 후보로 올라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미 레이저로 뇌 신경회로를 연구하는 광(光)유전학(optogenetics)을 창시한 다이서로스 교수는 정 박사 덕분에 투명한 뇌라는 또 다른 금자탑을 추가한 것이다. 그는 다이서로스 교수 연구실 출신으로서는 다섯 번째로 MIT 교수가 됐다.

그는 "다이서로스 교수에게 과학에 대한 열정, 정신과 의사답게 40명에 달하는 연구원 하나하나의 심리를 읽으면서 운영하는 조직 관리를 배웠다"고 말했다. 다이서로스 교수의 연간 연구비는 100억원에 달하는데, 그중 절반은 개인이 기부한 것이라고 한다.

정 박사는 "다이서로스 교수가 기부를 많이 받는 것은 연구 성과가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글 쓰는 능력이 뛰어난 점도 큰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다이서로스 교수는 수시로 자신의 연구가 사회와 인류의 난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연구 제안서를 쓰고 글로 알립니다. 그 글을 읽으면 많은 사람이 감동을 받을 정도이죠. 연구자에게 글쓰기도 매우 중요한 덕목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를 포함해 한국 과학자들이 가장 부족한 점이기도 하고요."

정 교수는 MIT에서 뇌 과학 분야에서 계속 연구를 하면서 벤처도 창업하겠다고 밝혔다. "바이오 분야는 지금보다 학문은 물론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질 것입니다. MIT에서 벤처를 시작해 한국의 바이오산업을 돕고 싶습니다."


지인에게서 받은 글


고객센터에 전화를 잘못한 어느 할머니!^*^



치매 초기증세일까요?
너무 웃다보니 눈물까지 나오네요
자고로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이왕이면 살아도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금상첨화겠지요
^*^

 

물수제비뜨기 짱 먹는 비법을 알려주마!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5월 16일 밤. 독일의 루르 계곡에 위치한 수력발전용 댐 을 향해 영국 공군의 랭커스터 폭격기가 서서히 접근했다. 18m로 저공비행하던 폭격기는 댐 정면 800m 지점에서 특수하게 고안된 맥주통 모양의 폭탄을 투하했다. 호수에 떨어진 폭탄은 수면을 4번 튕기며 전진하다 댐 벽에 부딪치며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얼마 후 지축을 흔드는 굉음을 울리며 터진 폭탄은 댐에 폭 91m, 높이 30m의 구멍을 뚫었다. 한동안 독일군은 군수공장을 운용하기 위한 전력 생산에 큰 차질을 빚었다.

당시 영국 공군은 폭탄에 회전을 걸어 수면에 던지는 투하법인 ‘스킵 보밍’(skip bombing)을 사용했다. 수면에 일정한 각도로 돌을 던지면 통통 튕기는 물수제비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고공비행을 하면 댐에 정확히 폭탄을 투하할 수가 없고, 저공비행을 하면 폭격기가 대공 사격에 노출될 것을 우려한 묘안이었다. 이 같이 1940년대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물수제비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진척돼 있다.

프랑스 비평형현상연구소의 크리스토프 클라네 박사는 2004년 1월 1일 과학저널 ‘네이처’에 “둥글고 납작한 지름 5cm의 돌을 수면과 20도 각도를 유지하며 초속 2.5m 이상으로 던져야 물에 빠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돌을 강하게 회전시켜야 평평한 면이 안정적으로 수평을 유지해 물속으로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는 결과도 내놨다.

클라네 박사의 실험에 따르면 20도보다 낮은 각도로 던진 돌은 수면에서 튕기기는 하지만 그 다음엔 수면과 지나치게 맞붙기 때문에 운동 에너지가 사라지고 만다. 반대로 20보다 크면 수면에서 튕기는 각도가 점점 커져 몇 번 튕기지 못하고 물속에 빠진다. 진입각도가 45도보다 크면 곧바로 물속으로 빠진다.

이에 앞서 2002년 프랑스 리옹대 리데릭 보케 교수도 물수제비에 관한 수학적 연구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과학저널 ‘아메리칸 저널 오브 피직스’에서 그가 밝힌 바에 따르면 물수제비 회수는 돌의 속도가 빠를수록 증가한다. 각도도 중요하지만 돌을 얼마나 세게 던지느냐가 물수제비 횟수를 결정짓는다는 얘기다. 그가 밝힌 최소 속도는 시속 1km였다. 클라네 박사와 보케 교수의 연구를 종합하면 각도는 20도, 속도는 빠르면 빠를수록 물수제비가 잘 일어난다는 말이 된다.

흥미로운 점은 물수제비 연구가 우주과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다는 것이다. 우주선이 지구로 돌아올 때 지상으로 제대로 진입할 수 있는 각도와 속도를 정확히 계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대기권과의 각도가 지나치게 작으면 우주 공간으로 튕겨 나가 영영 미아가 된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을 비롯한 우주개발기관들은 물수제비 연구결과를 통해 가장 적절한 대기권 진입 각도를 유추해 내는데 도움을 받고 있다.

물수제비는 차세대 항공기에도 과학적인 힌트를 주고 있다. 현재 미국 로렌스 리버모어 연구소는 물수제비 원리를 이용한 초고속 항공기를 구상하고 있다. 이 비행기는 이륙한 뒤 고도 40km의 성층권까지 올라갔다가 엔진을 끈다. 서서히 하강하던 비행기는 밀도가 높은 대류권을 만나면 튀어 오른다. 연구소는 18번 튕기면 미국 시카고에서 이탈리아 로마까지 단 72분에 갈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물수제비 원리를 이용해 눈 깜짝할 사이 대륙 사이를 이동하는 것이다.

물수제비가 지니고 있는 수많은 과학적인 원리에도 불구하고 물수제비뜨기는 역시 재미있는 ‘놀이’다. 고대 그리스부터 시작된 물수제비뜨기 경기는 현재까지도 세계 각국에서 열리고 있다. 기네스북에 따르면 세계기록은 1992년 미국 텍사스주에 사는 저던 콜맨 맥기라는 엔지니어가 세웠다. 그는 미국 블랑코 강에서 무려 38번이나 물수제비떴다.

그가 가진 기록은 15년이나 깨지지 않고 있다. 과학자들은 맥기가 세운 물수제비뜨기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을 계산해 봤다. 지름 10cm의 납작한 돌로 맥기와 같은 기록을 내려면 돌을 초당 14회 회전시키면서 시속 40km로 던져야 한다. 엄청난 연습이 동반됐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쯤이면 물수제비뜨기 위한 ‘사생결단’이라 할 만하다.
(글 : 이정호 과학칼럼니스트)

 

과학향기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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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북에 의하면 물수제비 세계 신기록은 2007년 7월 19일에 러셀 바이어스가 세운 51번이다. 이전 기록은 2002년 9월 14일에 쿠르트 스타이너가 펜실베니아에서 물수제비 예선 토너먼트를 하다가 40번을 튀긴 것이다.

라자로 스팔란차니가 18세기 때 물수제비에 대한 물리적인 설명을 최초로 했다.

리드릭 보케(Lydéric Bocquet)를 필두로 한 프랑스물리학자 연구팀은 물수제비에 대한 실험을 했으며 돌이 수면으로 날아갈 때 입사각이 20° 안팎이면 이상적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보케와 그의 동료는 속도회전을 다르게 줘바도 이 사실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보케가 이전에 한 연구에서는 콜맨-맥기가 세운 예전 기록 38번을 하려면 돌의 속력은 12 m/s (25 mph)이면서 초당 돌이 14번의 회전을 해야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물수제비 세계 선수권 대회는 스코틀랜드의 에스데일에서 매년마다 열리며 돌이 날아간 거리와 튀긴 정도를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2007년에는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231명이나 모였으며 에스데일의 점판암으로 만들어진 돌을 사용했다. 2007년 대회의 우승자는 스코틀랜드의 더기 이삭이었다.

위키백과

하나님이 인간을 시험하시는 것은 두 가지 목적 때문이다. 

첫째,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 주시기 위하여 시험하신다. 
인간은 자신 안에 있는 죄의 속임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분명하게 알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 
은혜와 부패 모두 신자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 어느 것도 신자에게 충분히 그 실재의 상태를 바로 알게 해 주지 않는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고하거나 격려하실 목적으로 넒은 의미에서 시험을 행하시는데 이로써 그는 어떤 특별한 환경에 반응하는 자신의 마음의 작용 안에서 은혜와 부패의 상태 여부에 대해 바르게 알게 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시험을 통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만을 바라보게 하신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때로는 은혜를 막으시는 방법으로 시헌 받기 전에는 자신의 힘으로 산다고 믿던 사람들이 사실은 이제까지 하나님이 자신을 붙드셨기 때문에 살아왓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고, 또 때로는 은혜를 새롭게 하시는 방법으로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을 바라보게 하신다.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중요성을 잘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시험을 통해 신자는 다시 새롭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힘, 그리고 은혜를 확인 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더욱더 깊이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개혁주의마을/Grace

모네 (claude Monet 1840 ~ 1926)
색채가 조화를 이루면 데생의 정확해집니다. 색채가 완벽하면 형태도 안정되게 마련이다.

같은 풍경이라도 같은 순간은 한 번도 없다.

자연이야말로 빛과 색채의 변화를 표현하는 최상의 소재라 생각
풍부한 빛과 찬란한 색채의 대가
붓놀림이 매우 빠른 화가. 팔레트에서 색을 섞지 않고 캔버스에서 직접 색을 혼합. 풍부한 빛을 표현하기 위해 애씀

르아브르의 소부르주아였던 가족들은 그가 미술가가 되는 것을 막으려고 애를 썼다. 어린 시절 부댕의 격려를 받았고, 르누아르 등과 함께 글레르의 스튜디오에서 공부했다. 1870~1871년 런던에 머물렀으며 그 이후에는 파리 북부인 아르장퇴유와 베퇴유에서 살았다. 1883년 고향인 노르망디의 지베르니 쉬르엡트에 정착했다. 경제적으로 절박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잦았고, 뒤랑-뤼엘을 통해 1880년대에 가서야 그런대로 벌이를 하기 시작했다. 명성은 1889년 조르주 프티 화랑에서 열린 로댕과의 2인전 이후 찾아왔다. 그와 풍경과의 신비적인 교감(30대에 인물화에서 손을 완전히 뗐다)은 말기에 추상의 미개척지로 그를 이끌었다
모네는 마네에 의해 창조된 빛의 파악을 발전시켰고, 이것에 과학적인 기초를 둔 화가로, "물체에 그 자체의 고유한 색은 없다. 색채는 빛의 변화와 함께 변화한다."는 그의 인상파 이론은 그 자신에 의해 강조되고 실천되었다.

태양 아래에서 빠르게 그리다. : 인상파의 근본 이념의 실천. 보이는 모습은 표면의 시각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화가는 그 인상을 포착하여 시각적 충돌을 재현하는 것.

흰색으로 바탕칠을 한 캔버스 : 보색효과에 대해서도 신경을 씀. 색의 명쾌성을 위해 바탕을 흰색이나 크림색을 칠함.

인상, 해돋이1872 50×65cm파리 마르모탕 미술관
제1회 인상파 전람회에 출품된 이 작품은 인상파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계기를 만들었다. 빛과 자연의 공기는 마네에게 가장 중요한 회화 주제였으며, 교묘한 발광은 인상파 회화의 정통을 보여준다.

생 타드레스의 테라스1866 91.4×129.6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모네는 태양광 속의 풍경과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색채분할법을 사용하고 있다. 테라스, 바다, 하늘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눈 뒤 깃대를 이용해 합치되는 구도가 이색적이다. 꽃과 파도 등의 눈부신 묘사는 인상주의의 전통적인 기법을 대변한다

 

강 1868 81.7×100.3cm 시카고 미술관

모네의 실험적인 작품 제작 의식이 돋보인다. 물이라는 존재는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을 끊임없이 따라다녔던 과제였다. 모네는 물의 공허함을 표현하기 위해 물이 지닌 고유색의 관념을 해방시키고 빛에 의해 반사든되는 주위의 색감을 받아들였다

 

버드나무 밑의 모네 부인 1880 81×60cm 워싱턴 국립회화관

모네의 회화에서는 어떤 사물이든 고유의 색채를 지니지 못 한다. 빛으로 흡수된 흰 옷을 입은 부인의 모습마저도 확연하지 않다. 버드나무의 나뭇잎들은 엷은 잔 터치로 마치 연기처럼 날아오른다. 멀리 보이는 집들의 풍경도 단지 담홍색과 청회색의 반점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우리가 사물의 개체 하나 하나를 들여다보는 동안 모네는 전체를 꿰뚫어 보며 색채의 혼합을 추구한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혼합되어 있는 색채의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그들은 하나 둘씩 형체를 드러낸다. 풀숲에 감춰져 있던 부인의 모습이 나타나고, 버드나무의 잎사귀들은 가늘게 떨리며 소리를 낸다.

 

지베르니의 포플러 1888 74.5×93cm 뉴욕 근대미술관

포플러를 소재로 20여 장에 달하는 연작을 그렸던 모네는 포플러를 통해 수직과 수평이 만들어 내는 공간에 흥미를 느꼈다. 햇살을 듬뿍 받은 포플러는 화려하게 빛나고, 푸른 잎사귀들잰잿, 푸른 잎사귀들잰의 생생한 떨림은 생동감이 느껴진다.

 

루앙 대성당1  루앙2  루앙3

허공을 향해 장엄함을 과시하고 있는 성당. 성당을 감사고 있는 빛과 색채를 통해 정지되어 있는 듯한 이 건물은 새로운 호흡을 하고 있다. 모네는 하나의 대상물이 빛에 의해 어떻게 변화하는 지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수련의연못1  2
모네의 수련의 연작은 1898년부터 시작된다. 1883년 4월 말 지베르니의 농가를 빌어 이 곳에서 지내 오던 모네는 안정을 되찾게 되면서, 1891년에는 이 집으 ㄹ사서 자기의 소유로 하였다. 마치 캔버스에 물감을 칠해 나가듯 그는 뜰에 화초를 심고, 연못을 파서 에프트강의 물을 끌어들여 버들을 심고, 수련을 심었다. 그리고 대밭을 가꾸고, 장미 울타리를 마련하고, 동양풍의 무지개다리를 가설하였다. 조원, 개축, 식수, 손질 등 이 모든 경영은 정원사 펠릭스 브루유의 힘을 빌어서 모네 자신의 모 티프를 자연 속에서 만들어 냈다.

개양귀비 꽃, 1873년, 50 x 65cm
광활한 초원에 핀 무수한 개양귀비의 빨간 색채의 향연을 그린,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서정이 감도는 그림이다. 모네의 초기작에 해당되는 34세 때의 작품으로, <해돋이, 인상>과 함께 1784년 제 1회 인상주의 전에 걸린 작품이다.
모네는 이 그림에서 선연한 빛을 집요하게 추구하면서, 색채의 독자적 주장을 회화적 차원으로 표현하고 있다. 화면을 상하로 양분시킨 늘어선 나무들의 검푸름과 경쾌한 터치로 처리된 개양귀비의 빨간 반점, 푸른 하늘과 솜털 구름, 그리고 화면 중앙의 멀리 보이는 건물, 포즈를 취한 여인의 옷과 양산의 수색이 빛을 담뿍 받았으면서도 독립된 색채를 띠고 있다. 장대한 공간감과 더불어 색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듯한 초여름의 향연이다.
후일 <양산을 든 여인> 연작을 예고하고 있기도 한 이 그림은 야외 사생화, 데생의 무시, 풍경의 우위성, 미완성으로 끝난 것 같은 터치 등으로 인상주의의 모든 특징을 한눈에 읽을 수 있다. 모네의 그림은 밝고 부드러운 색조 속에도 다른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없는 일종의 비극적인 울림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주제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화가의 생활이나 마음의 직접적인 반응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연에 대하여 비인간적일 정도로 철저하게 자신을 의지하는 태도, 특히 흘러가는 시간의 지배에 대한 거의 절대적인 복종의 자세에서 오고 있다. 이 그림처럼 필촉의 분할이나 빛의 효과를 과도하게 의식하지 않고, 빠른 필촉으로 그린 작품에서는 특히 그런 느낌이 강하다.

점심식사, 1873년, 160 x 201cm
정원에 점심식사가 차려진 이 집은 모네가 아르장퇴유에 정착하여 살던 곳이다. 식탁 왼 편으로 블록 쌓기에 정신이 팔려 있는 아이는 모네가 1867년 얻은 맏아들 장이다.
햇볕이 쏟아져 내리는 한 낮, 갖은 꽃들의 어울림으로 화사한 정원은 모네 가족의 행복한 순간을 느끼게 한다. 나무 그늘에 차려진 식탁에는 나뭇잎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어른거리는 햇살과 나뭇잎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경쾌하게 대조를 이룬다. 이미 식사가 끝난 듯, 화면 중앙의 식탁에는 냅킨이 헝클어져 있고 점심식사의 주인공은 찾아 볼 수 없다. 나뭇가지에 걸린 밀집 모자와 벤치에 남겨진 양산은 중심 인물이 빠진 공간의 미묘하고 신비한 분위기에 가세하고 있다.
모네는 식탁보와 헝클어진 냅킨, 찬 잔과 포트, 과일과 투명한 유리잔 등 일상의 식탁에서 볼 수 있는 세세한 정물들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그려 넣었다. 하늘도 보이지 않고 수평선이나, 길이 끝나는 곳도 보이지 않는 답답한 공간은 관람자의 시선을 저택 정면에 붙들어 두는데, 이러한 공간과 구도는 화면에 묘사된 일상생활의 내밀한 정경을 부각시키고 있다.

아르장퇴이유 철교, 1873년, 54 x 71cm
1860년대 이후 파리는 급속도로 근대화의 면모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도로와 철도가 활발하게 건설되었다. 철도가 등장하자 센느 강 유역의 아르장퇴이유와 파리는 쉽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1872년부터 아르장퇴유에서 작업한 모네 역시 주변에 보이는 다리와 철도 등을 종종 화폭에 담았다. 마치 카메라의 렌즈에 잡힌 순간처럼, 화면에는 철교를 지나는 기차가 비스듬하게 가로질러 배치되었다. 기차가 뿜고 가는 증기는 대기 속에 아스라이 스며들고, 철도의 교각 아래에는 물에 비친 다리의 이미지가 흔들리고 있다. 실재의 다리는 육중하고 견고하지만, 수면에 비친 다리는 물의 반사광 속에서 추상적인 이미지로 변화하였다.
모네는 근대성의 새로운 상징으로 떠오른 철도 그 자체에 매료된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구름과 그 속에 흩어지는 증기, 그리고 일렁이는 수면과 반사된 이미지들에 매료된 것이다. 시시각각 변해 가는 물의 일렁임, 대기의 떨림, 수면에 반사하는 햇볕의 미묘한 변화 등 그 순간성에 대한 집요한 탐구는 모네를 인상주의의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1865∼66년,248 x 217cm
이 작품은 1863년 마네로 하여금 세간의 비난의 대상이 되도록 만든 <풀밭 위의 점심>과 비슷한 주제를 재현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모네 역시 마네의 사실주의를 이어받아 야외의 밝은 빛 아래에서 인물에 접근하고 있다.
처음부터 1866년 살롱전의 출품을 계획하고 구상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인지, 이 작품의 인물들은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는 달리 한결같이 산뜻하고 우아하게 차려입었다. 이 작품을 위해 친구인 바질과 화가인 쿠르베가 모델을 서주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오른편에 앉아 있는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쿠르베인 듯 보인다. 스케치 작업은 야외에서 이루어졌으나, 채색 작업과 많은 섬세한 부분들이 화실에서 이루어진 이 작품에는 여전히 어두운 색조와 그림자가 눈에 띈다. 밝은 빛과 그 속에 어우러진 풍경에 관심을 가지긴 하였지만, 넓은 색면으로 견고하게 잡은 형태감, 개략적인 붓질과 강한 콘트라스트 등에서 아직까지 모네의 초기 화풍이 돋보인다.
살롱에 출품하기 전, 쿠르베의 비평을 들은 모네는 이 작품을 살롱에 출품하지 않았다. 이 후 이 그림은 밀린 집세 대신에 집주인에게 맡겨지고, 지하실의 열악한 보관 상태는 그림을 손상시켰다. 결국 파손된 그림의 오른쪽과 왼쪽 일부가 잘려져 나갔고,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는 이 중앙 패널과 왼쪽 부분화만이 소장되어 있다. 모스크바 미술관에 푸슈킨 박물관에 소장된 이 작품의 습작으로 잘려나가기 전의 본래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몽토르게유가, 1878년 6월 30일의 축제,1878년,81x50cm
이 작품은 1878년 6월 30일 파리 만국박람회의 개최된 날, 파리 거리의 축제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당시 파리는 보불전쟁 이후, 처음 맞는 국경일에 기쁨과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1920년 모네는 그 날을 기억하면서, 인파로 가득 찬 거리를 걷다가 그림을 그릴 만한 발코니를 발견하고 바로 그 곳을 빌렸다고 회상하였다. 모네는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는 이 걸작에서 장중한 구성이나 돋보이는 영웅을 내세우지 않았다. 근대사회의 새로운 주인공인 시민들의 모습으로 근대적인 역사화를 만들어냈다. 거리에 펄럭이는 삼색기는 모네가 꾸준하게 추구하였던 순간적인 움직임, 그 끊임없는 약동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소재였다. 푸른색, 흰색, 붉은색의 경쾌한 병치, 짧게 끊어진 붓질들은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의 순간적인 느낌을 잘 표현하고 있다.

런던 국회 의사당, 1904년, 81 x 92cm
1870년 안개 낀 템즈 강의 모습을 여러 개의 화폭에 담았던 모네는 1899년부터 1901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겨울을 런던에 체류하면서, 템즈 강을 중심으로 워털루 다리, 차링크로스 다리, 국회 의사당을 주제로 100여 점에 가까운 그림을 제작했다. 모네는 상당히 빨리 변하는 안개의 인상을 포착하기 위해, 100여 점의 그림을 동시에 그렸다. 그러나 야외에서만 작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모네는 대부분의 작품들을 런던에 머물며 완성한 것이 아니라, 지베르니에 가지고 돌아와서 완성시켰다.
이 작품은 성 토마스 병원의 발코니에서 템즈 강 너머의 국회 의사당을 그린 것이다. 붉은색과 연한 자주색, 금색 소용돌이의 미묘한 분위기가 화면 주변의 불꽃 모양의 회오리 안에 자리잡고 있다. 캔버스 전체가 깊은 안개 속에 침잠 되어, 희미하게 빛나는 붉은색의 태양은 수면에 반사되고, 고딕풍의 건축을 마치 환각처럼 푸르스름하게 떠올려 놓고 있다. 가로, 수직, 대각의 방향으로 희미한 물감의 흔적이 만들어 낸 템즈 강은 굴절감과 동시에 흐르는 안개의 인상을 주고 있다.

자화상,1917년, 70 x 55cm
이 자화상은 모네의 나이 77세 때에 그린 것으로, 불편한 시력으로 홀로 은둔한 채 <수련> 연작에 몰두하던 시기였다. 모네는 1911년 두 번째 부인인 알리스를 잃었으며, 이어서 1914년에는 카미유와의 사이에 두었던 장남 장마져 앞세웠다.
1910년 이후, 프랑스 내의 비평가들로부터 격찬이 쏟아졌으며, 국외에서 역시 화상, 뒤랑 뤼엘과 포터 파머와 같은 수집가의 도움으로 모네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많은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이제 생의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노화가의 풍모에는 어딘지 서글픔이 베어 있다.
모네는 이 자화상을 가깝게 지내던 지인, 클레망소에게 선물하였다. 1927년 모네가 사망한 지 1년 후, 이 작품은 클레망소의 기증으로 루브르에 소장되었다. 현재는 오르세 미술관에 옮겨져 있다.

과일이있는정물
모네의 모티프에는 정물이 별로 없다. 1879년, 아내가 세상을 떠나면서 실의와 고독을 달래기 위함인지 그 때 그려진 작품이다.
 
건초더미(여름) 건초더비(겨울) 아르장퇴이유 유역  아르장퇴이유의 산책 정원
아르장튀르다리 파라솔여인  일본의상의 여자  라그루누이에르
 
( http://namgane.cafe24.com/detail174_2.html )

도심(都心)의 이웃/최송연 
좋은 말도 나쁜 말도 귀 기울일 것 없는 세상 사랑으로 남기는 여운 흐르는 물속에 잠기듯 메아리조차 없네 그리 먼 곳도 아닌데 아련히 느껴지는 숨결들 나 그대들 곁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 생명 있는 듯, 없는 듯하나 나 여기 있었노라 바람결에라도 그대들에게 전해지기를 주님 향기 소복소복 담아 가슴으로 쓰는 詩라도 모두어 갇힌 벽 모서리에 쌓아두려 하네

 


     

     

     

     

     

     

     

     

     

     

     

     

     

     

     

     

     

    

    출처: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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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라인 커뮤니티. © News1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신기한 시력테스트'라는 제목으로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사진에는 흐릿한 알버트 아이슈타인과 함께 정상 시력일 경우 아이슈타인이 보이고 근시일 경우 마릴린 먼로가 보인다고 설명돼 있다.

    실제로 이 테스트를 수행해보면 근시일 경우 흐릿하지만 아이슈타인이 아닌 마릴린 먼로가 웃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 테스트는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에서 인지과학을 연구하는 오드 올리바 박사가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존 오웬의 신학에 나타난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본 성격

    오 창 록(개신대학원대학교, 역사신학)

    I. 들어가는 말

    구원론적 측면에서 종교 개혁자들에게는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핵심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면, 존 오웬(John Owen, 1616-83)을 비롯한 청교들에게로 옮겨가면 이와 더불어,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과의 교제란 주제가 중요한 관심사로 등장한다.

    오웬은 이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하여 (Of Communion with God)」라는 별도의 저작을 남겼을 뿐 아니라, 사실 그의 저술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더라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혹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루는 자리에서 동 주제는 항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오웬의 ‘하나님과의 교제의 신학’을 다루되, 특별히 보다 실천적 측면에서 ‘삼위 하나님과 교제를 갖는다는 것은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하는 점, 즉 그 교제의 성격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오웬에게 있어 하나님과의 교제의 근본적 성격은 ‘봄(beholding)’에 있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면, ‘봄의 교제(communion of beholding)’가 핵심적 성격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하에서는 먼저 청교도들에게 있어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주제가 차지하는 위치를 간단히 살펴보고, 다음으로 오웬의 신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바 그 교제의 성격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II. 청교도에게 있어 하나님과 인간 간의 교제

    위에서 언급했듯 청교들에게는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과 더불어 그와의 교제(communion)가 또한 빠트릴 수 없는 논의의 주제가 되어 있다. 원종천 교수는 이 ‘연합’과 ‘교제’라는 두 주제를 놓고 칼빈과 청교도를 비교하는 가운데, 사실상 청교도, 특히 후기 청교도들에게 이르면 이제는 아예 주된 관심이 전자(union)에서 후자(communion)로 옮겨온 느낌이라고 결론짓는다.1)

    패커(J. I. Packer)는 청교도들에게 있어 ‘하나님과의 교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 바 있다.

    청교도들에게 있어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는, 창조와 구속이라는 수단의 목적이다.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교제란 신학과 설교가 언제나 지향해야 하는 목표이며 참된 종교의 진수이다. 그것은 사실상 기독교의 정의이다.2)

    사실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가 창조와 구속이라는 수단의 목적’이 되어 있다는 패커의 이 표현은 매우 강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선 다른 어떤 목적보다 인간과의 교제를 위해 그를 창조하셨고, 타락 후 이 교제가 불가능해 진 후, 구속의 전 과정은 다시 이를 회복하기 위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선 그의 아들을 보내사, 이 깨어진 교제의 회복에 가장 큰 장애인 죄를 제거하셨다는 말이 된다.

    청교도에게 있어 이처럼 하나님과의 교제(communion)라는 주제는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를 종교 개혁자들이 중시한 연합(union)의 주제와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의 경우 union에 집중한 나머지 communion의 개념을 찾아보기 어렵다거나, 혹은 오웬과 같은 청교도들의 경우 communion에 관심을 갖는 나머지 union을 소홀히 한다는 결론은 성급한 것이다. 칼빈의 시선이 union에 머물러 있음은 사실이지만,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의 개념이 그의 저술 곳곳에 배어 있다.3) 또한 오웬의 신학 안에서 union은 communion 못지않은 중요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가 communion만을 단독으로 말할 때에도 그 속에는 union이 배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제되어 있다고 해야 옳다. 싱클레어 퍼거슨이 말하는 것처럼 오웬의 communion 속에는 union의 개념이 “포함되어(subsumed)” 있다고 함이 정확할 것이다.4) 그리고 이러한 원리는 communion을 중시하는 청교도들의 신학 일반에도 적용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5)

    III. 오웬의 신학에 있어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본 성격

    1.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봄

    가. '봄'의 교제

    오웬에게 있어 삼위 하나님과 교제를 갖는다 함은 실제로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쉽게 말해서 그것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의 교제의 실천적 성격은 ‘봄을 통한 교제’ 혹은 ‘봄의 교제(communion of beholding)’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오웬 자신이 하나님과의 교제의 성격을 이런 식으로 따로이 정의내린 문구는 찾아보기 어렵고, 그래서인지 이 측면은 오웬 연구에 있어서 충분히 주목을 받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이같은 성격은 오웬의 저작들을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될 수 있다. 오웬이 이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책(Of Communion with God)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그 외에도 그의 여러 저술들에서 그가 동 주제를 언급할 때 '본다’라는 용어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이 그 한 증거이다. 오웬은 ‘behold, see, eye, look' 등 다양한 표현들을 동원하지만 그 기본적 성격은 동일하다. 즉 우리는 하나님을 ‘봄’으로써 그 분과 교제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나. ‘봄’의 대상

    오웬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룰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봄’이란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그는 ‘봄’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의 영광,’ 때로는 ‘그리스도의 영광’이란 표현을 쓰는데, 여기서 ‘영광’이란 무엇인가? 이 영광이란 말하자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미하고 사랑하고 경배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드는 그 분의 모든 아름다우신 성품과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6)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해서 ‘봄’의 대상은 하나님의 영광 자체라기 보다는, 이렇게 영광스럽게 계시되신 하나님 자신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격체로서의 한 신자의 교제의 대상 또한 인격(위격)이신 하나님 그 분이 되셔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문구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 덧붙여진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이다. 오웬이 신자의 교제의 대상으로서 하나님을 제시할 때 그 분을 그리스도 혹은 복음과 분리시키고 있지 않음은 매우 중요한 일면이다. 오웬에게 있어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명히 계시되신다. 고린도후서 4:16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통해서 우리에게 비취는 것이다.7) 여기서 오웬의 인식론, 즉 신지식(神知識)에 대한 그의 기독론적 접근이 확연히 드러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가장 선명하고 정확하게 알 수 있으며, 그 그리스도는 추상적 그리스도가 아닌 복음 속에 계시된 바로 그 그리스도이시다.8) 오웬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논할 때 끊임없이 구속의 역사(historia salutis)로 돌아가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하나님을 봄으로써 그 분과 교제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는 복음에 계시된 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을, 믿음의 내적인 시선으로 주목함으로써 그 분과 참된 교제를 나눌 수가 있는 것이다.

    다. 고린도후서 3:18을 통해 본 ‘봄의 교제’

    오웬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논할 때 가장 즐겨 인용하는 성경 구절 가운데 하나가 고린도후서 3:18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라고 기술하고 있는 동 구절은 사실상 오웬의 ‘봄의 교제론’에 있어 핵심 요절이 되어 있다.

    오웬은 이 구절을 미래의 부활과 함께 일어날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현재적 경험으로 해석한다. 이 구절이 놓인 문맥이 이를 입증한다. 즉 바울은 여기서 현재와 미래를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적 상황(아직 수건을 벗지 못한)과 신약적 상황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9) 반면 유사하게 ‘봄’의 주제를 언급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3:1210)과 같은 구절에서 사도는, 현재적 봄과 미래적 봄을 대조시켜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11)

    고린도후서 3:18은, 우리가 수건(veil)을 벗은 얼굴로, 즉 훨씬 더 밝고 선명하게 주의 영광을 본다고 말한다. 오웬에게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과 갖는 교제의 특성이 된다. 여기서 ‘본다’ 함은 막연한 응시가 아닌, 그 대상을 향한 영혼의 내적 주시를 가리키며, 이것이 (그 대상과의) 교제의 핵심이다. 즉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지속적으로 ‘보는’ 가운데 그 분과 교제를 갖게 되는 것이다.

    라. 봄의 교제를 통한 성화12)

    오웬은 이와 같은 봄의 교제는 신자의 성화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대상에 대한 지속적 주시는 그 대상과의 ‘닮아감’을 산출해 낸다. 위의 고린도후서 3:18에서 ‘주의 영광을 보매 주와 같은 형상으로 화한다’고 하는 표현이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화한다’ 함은 그리스도의 형상(image)으로 변화됨(transformed)을 가리키는 것이다.

    오웬에 따르면, ‘봄’의 교제는 닮아감의 힘(assimilating power)을 가지고 있다.13) 즉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주목하게 되면, 이 가운데 그 분을 향한 사랑, 찬미, 감사 등 여러 은혜들이 왕성히 작동하게 되고,14) 이는 우리를 봄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단단히 붙어(cleave) 그 분과 하나가 되게 하며,15) 이런 가운데 그 분을 닮게하는 힘이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봄의 교제가 제대로 이루어질 때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영혼의 눈을 구원의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만들어내지도, 또한 그분을 닮아감, 곧 성화의 효과를 산출해 낼 수도 없다.16)

    2. ‘봄’의 성격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오웬이 말하는 바 ‘봄’이라는 것의 성격을 규명해 볼 필요가 있다. 오웬이 ‘본다’ 혹은 ‘봄의 교제를 갖는다’고 할 때 그 ‘봄’이란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여기서는 크게 세 가지 중요한 특성을 논의해 보고자 한다. 첫째, 본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믿음의 행동이다. 둘째, 이 가운데 지성의 역할이 강조된다. 셋째, 그것은 또한 영적인 봄이다.

    가. 믿음의 행동

    오웬이 하나님을 ‘본다’고 했을 때, 일차적으로 그것은 ‘믿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봄’ 혹은 ‘믿음으로 묵상(생각)함’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믿음’과 ‘봄’의 관계를 입증하기 위해 오웬은 몇몇 성경 구절들을 가져온다. 성경에서 “우리의 믿음은 종종 그리스도를 보는 것으로 표현된다.”17) 이와 관련 그는 광야에서 있었던 모세의 놋뱀 사건을 놓치지 않는다. 모세가 만들어 장대에 매단 놋뱀을 쳐다 본 사람들은 곧 이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믿었던 사람들이었다.18) 이 경우 봄은 곧 믿음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 들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봄은 하나의 믿음의 행동, 곧 “믿음의 봄”인 것이다.19)

    ‘봄’의 근본적 성격이 ‘믿음’이라면 오웬은 왜 ‘믿는다’ 혹은 ‘믿음으로 묵상한다’고만 하지 않고 굳이 ‘본다’는 표현을 선호하는가? 오웬에게 있어 봄은 곧 믿음의 행동임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이 ‘봄’은 보다 지속성의 뉘앙스를 띤다. 즉 단회적 믿음의 행동 이상의 어떤 것으로서, 믿음 안에서 대상에 눈을 고정시켜 지속적으로 주시하는 것이 ‘봄’인 것이다. 오웬 자신의 표현을 옮겨 보면, “봄은 눈의 고정이다. 믿음은 영혼의 눈이요,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묵상 속에서 믿음을 고정시키는 행위이다.”20)

    오웬은 이 ‘봄’을 혈루증에 걸린 여인이 예수님을 만진 사건과도 연계시킨다. 제자들이 말했듯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현장에 있어 예수님과 맞닿아 있었다. 그러나 진짜 예수님을 ‘만진’ 사람은 그 여인 단 한 명뿐이었다. 이것은 참된 ‘믿음의 만짐’을 의미한다. 여인이 손을 뻗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그 여인은 자신의 전 믿음을 발휘해 그렇게 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봄’도 믿음의 행동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소극적 믿음이 아니라, 혈루증 여인이 특별한 믿음을 발휘해 예수님의 옷을 붙들었듯이, 그렇게 강하고 지속적인 믿음의 눈으로 대상을 주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21)

    나. 칼빈이 말하는 ‘봄(beholding)’

    여기서 잠깐 ‘봄’에 대한 오웬의 이런 개념과 유사한 설명이 칼빈에게서도 발견됨을 관찰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본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구절들을 칼빈이 어떻게 주해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시편의 두 구절만을 예로 들어보자. 칼빈은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한다고 하는 시편 25:1에 대해, 이는 기도 속에서 생각을 하나님께 “고정”시킴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특히 다윗이 ‘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이를 통해 자신의 영혼의 전 틀, 즉 마음의 모든 정서(affections)가 하나님께 집중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22)

    또한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라고 하는 시편 63:2의 주석에서도 마찬가지다. 칼빈은 이 구절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봄(spiritual views of God),” “믿음의 눈을 주님께로 향함,” 혹은 “마음이 끊임없이 하나님에 대한 묵상으로 가득 차 있음”을 말한다. 특히 그는 ‘주를 본다’고 하는 이러한 표현은 그 봄의 대상에의 집중의 열심 혹은 진정성, 즉 마음의 전 묵상이 이쪽을 향함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해하고 있다.23)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칼빈이 이와 관련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들간의 연합(union)을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의 연합(union)은 중생시 단번에 이루어진 사실적 연합이라기보다는, 그 이후 계속적으로 진행되고 더 단단해지고 완성되어가는 과정으로서의 경험적 연합을 가리킨다.24) 그리고 칼빈의 경우 이러한 의미에서의 ‘연합(union)’은 사실상 ‘교제(communion)’를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오웬이 설명하는 ‘봄의 교제’와 유사한 개념이 칼빈에게서도 발견된다는 것이다. 물론 칼빈은 오웬만큼 이를 체계적으로 가르치거나 강조하고 있지 않음은 사실이다.

    다. 지성의 역할

    오웬은, 하나님과의 ‘봄의 교제’ 속에서 지적인 기능의 역할을 중시한다. 하나님을 봄으로써 그 분과 교제한다고 할 때, 이는 신비주의적인 의미에서 직관적으로 하나님을 본다 함이 아니다.25) 이러한 직관적(intuitive) 봄에서는 생각하는 기능으로서의 마음(mind)의 역할이 현저히 약화되는데, 이는 적어도 이 땅 위에서의 봄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오웬은, 이사야(6장)나 밧모섬에서의 요한이 경험했던 것과 같은 직접적인 봄은 이 땅에서는 우리에게 필요하지도 유익하지도 않다고 가르친다.26) 우리의 구조는 이러한 강력한 봄을 견딜 수 없게 되어있는 것이다.27)

    현세의 지상적 봄에서는 지성이 활발한 역할을 하게 되어있다. 앞에서 ‘봄’이란 믿음의 행동으로 제시되었는데, 믿음이란 언제나 지적인 기능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 것인가? 막연한 자기 상상이 아닌 말씀 속에 묘사된 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즉 복음 속에 계시된 하나님을 배워 알고,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서, 그 분을 깊이 묵상(생각)하는 가운데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웬의 다음과 같은 기술은 ‘봄의 교제’에 있어서 지성이 어떻게 적극적으로 작용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다고 했을 때, 우리는 말하자면 성경 속에 있는 [진리의] 여러 조각들과 단편들을 하나씩 모으고 그것들을 우리 마음(minds) 속에서 비교해 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들이 지상에서의 우리의 현세적 봄의 대상이 되는 것이고, 우리는 이 대상들을 영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28)

    라. 영적인 봄

    오웬이 말하는 ‘봄’이, 지성의 역할이 축소되는 직관적이고 신비적인 봄은 아님일진대, 그렇다면 이 봄을 간단히 규정지어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어떤 표현이 있을까? 아마 ‘영적인 봄(spiritual vision)’이라는 표현이 가장 가까운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29)

    오웬이 ‘영적인 봄’이라고 했을 때는 먼저 이것이 ‘육적인 봄,’ 즉 신체의 눈을 통해 보는 것이 아님을 가리킨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되, 외적인 눈이 아닌 내적인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천주교에서는 이 ‘봄’이 순전히 영적인 점을 놓치고서, 이를 겉으로의 외적인 봄으로 대치시켜 버린 문제가 있다고 오웬은 지적한다. 그들은 봄의 주 대상을 십자가 모양 혹은 그리스도의 형상이나 그림들로 제시했고, 그 결과 그리스도를 향하여 영적이 아닌 “육적인 정서(natural affections)”가 고양된 측면이 있다.30)

    영적인 봄이 일차적으로 외적인 봄과 대조됨은 사실이지만, 오웬이 이를 가르칠 때 그 속에는 사실 더 깊고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 여기에서 성령의 역할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영적인 봄이라 함은, 봄의 교제가 성령의 내적 조명에 의해 비로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인용한 고린도후서 3:18에서도 이 점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의 형상으로 변해가되 이는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다. ‘봄’에 있어서 지성의 역할이 무시되어서는 안되지만 그것은 단지 지적인(intellectual) 봄이 아니다. 성령에 의한 영적인 봄에까지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및 그 분과 관련된 모든 영적 대상들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묵상할 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내적 빛 (a glorious internal light)”31)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대상들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생생히 볼 수 있도록 해 주신다. 여기서 오웬은 강조한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보이시는 것은, 이러한 영적 대상들에 관한 “진리나 교리” 뿐만이 아니고, 바로 그 대상들의 “실체(reality)”이다. ‘봄의 교제’ 속에서 바로 이렇게 대상들의 “실체와 능력과 효력”이 우리에게 드러날 때 우리 영혼은 이 대상들에게 끌려 강력히 밀착하게 되고, 이로부터 변화시키는 힘이 나오는 것이다.32)

    오웬은 영적인 봄의 강도(强度)가 신체적 눈을 통한 봄보다 덜 선명하다는 선입견은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오히려 반대이다. 성령을 통한 빛은 언제나 자연적 빛보다 더 밝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 후 성령을 받게 되었을 때, “그들이 육체 가운데 계셨던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보다 더 밝히 그 분의 영광을 보게 되었다.”33)

    때문에 오웬에게 있어 하나님과의 ‘봄의 교제’의 중요성은 필설로 다 형용할 수 없다. 이러한 봄의 교제를 소홀히 하고 무시하는 것은 이 땅에서의 최고의 특권을 포기하는 어리석음이요, 또한 가장 중요한 의무를 방기하는 커다란 악(惡)이다.34)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않는 자는 누구나 그를 알지 못하는 자요, 그는 불가피하게 그 분을 멸시하는 자가 된다.35) 그리고 이것은 종국적으로 배교(apostasy)에 이르게 되는 중요한 원인이 되곤 하는 것이다.36)

    IV. 맺는 말

    이제까지 살펴본 봐와 같이, 종교개혁자들을 지나 청교도에게 이르게 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이란 주제와 더불어 이제는 하나님과의 교제(communion)가 중요한 관심사로 자리잡게 된다. 패커가 지적했듯이, 오웬을 비롯한 청교도(특히 복음적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교제는 창조(creation)와 재창조(re-creation)가 바라보고 나아가는 목표(goal)가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고에서는 특히 오웬에게 있어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본 성격이 무엇인가에 집중하였다. 오웬에 따르면 우리는, 복음 속에 제시되어 있는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봄을 통해 삼위 하나님과 교제를 갖는다. 일차적으로 이 봄은 믿음의 행동이다. 즉 우리는 믿음의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본다. 더 정확히 말하면 믿음 속에서 영혼의 눈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것이다. 직관적 혹은 신비적 봄과는 달리 이 속에서는 지성이 활발히 작용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단지 지적인 봄 혹은 윤리적 묵상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무엇보다 영적인 봄이다. 성령의 조명에 의해 영혼의 내적 눈이 밝아져 봄의 대상 속에 있는 아름다움과 실체를 뚜렷이 보게 되고, 그렇게 되면 여기에서 봄의 주체와 객체가 하나가 될 정도로 강력한 능력이 작용하게 된다. 그 결과는 닮아감이다. 즉 성경이 가르치듯 주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 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성화의 효과가 산출되는 것이다. 때문에 오웬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이 ‘봄의 교제’는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당연히 요구되는 의무(duty)이다. 이를 소홀히 함은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도 없는 악(惡)이거니와, 무엇보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부여된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특권을 포기하는, 안타까운 어리석음이다.


    1) Jonathan Jong-Chun Won, "Communion with Christ: An Exposition and Comparison of the Doctrine of Union and Communion with Christ in Calvin and the English Puritans" (Ph.D. diss.,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1989). 특히 p. 352와, 또한 오웬의 경우에 대해서는 p. 290을 보라.

    2) J. I. Packer, "The Puritan Idea of Communion with God," in Puritan Papers, eds. D. Martyn Lloyd-Jones and J. I. Packer, vol. 2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 Reformed, 2001), 104.

    3) 예를 들어 아래 pp. 7-8에 소개되어 있는 칼빈의 시편 주석을 보라. 또 우리는 기독교 강요에서,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맛볼 수 있는 깊은 정서(affection)를 칼빈이 종종 ‘달콤함(sweetness, dulcedo)’이라고 묘사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다음을 참고하라: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McNeill, trans. Ford Lewis Battles,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20-21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60), 3.2.15; 3.2.23; 3.2.41; 3.20.28.

    4) 오웬의 신학 속에서 union과 communion의 관계에 대해 퍼거슨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 앞에서의 신분(status)을 제공해주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 신분의 열매로서의 하나님과의 교제, 이 둘 모두가 교제(communion)라는 개념 안에 포함되어 있고, 바로 이것이 오웬이 보통 이 표현[communion]을 사용할 때 의미하는 바이다.” Sinclair B. Ferguson, John Owen on the Christian Life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87), 75.

    5) 참고로 연합(union)과 교제(communion)에 대한 칼빈과 오웬의 개념을 조금 더 비교해 설명해 보고자 한다. 우선 용어상으로 칼빈의 경우 union과 communion이라는 두 단어가 거의 구분이 되지 않고 있다. 그가 “communion, fellowship, intercourse” 등 교제를 가리키는 듯한 단어들을 사용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은 거의 대부분 의미상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별반 차이가 없는 용어들이다 (Institutes, 3.2.24; 3.2.25; 4.16.17; Calvin’s Commentaries, 22 vols.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4-56; reprint, Grand Rapids: Baker, 1979], Eph 5:29, 31, 32; 또한 Dennis E. Tamburello, Union with Christ: John Calvin and the Mysticism of St. Bernard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4], 90, 112 참조). 반면 오웬에게 이르면 두 용어는 뚜렷이 구분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가 내린 일종의 communion의 정의에서도 볼 수 있듯이, communion은 union에 “기초하고” 있으며 전자는 후자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John Owen, The Works of John Owen, ed. William H. Goold [Johnstone & Hunter, 1850-53; reprint,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65-68, 1991], 2:8-9. Goold가 원래 편집한 24권은 Banner of Truth사에서 재판 시 라틴어 부분을 빼고 23권으로 조정 출판되었는데, 이하에서는 이 재판된 23권으로부터 인용하며, 또한 인용 시 간단히 ‘3:122’와 같은 식으로 권수와 페이지 번호만을 표기하기로 한다). 즉 칼빈에게서는 communion은 대부분 union과 동의 혹은 유사적 개념으로 쓰이는 반면, 오웬에게서는 union과 더불어 communion도 그 독자적 위치를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칼빈의 경우 union은 두 가지 성격을 지닌다. 즉 중생시 단번에 사실적으로 이루어진 연합의 측면이 있는 동시에, 또한 계속해서 진행되고 완성되는 과정으로서의 연합이란 개념도 함께 있는 것이다. 후자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완전히 하나를 이루실 그 때까지 점점 더 한 몸이 되어가신다” (Institutes, 3.2.24; 또한 2.15.5; 3.6.5; 3.25.2를 보라). 그렇다면 바로 이 후자, 즉 신자의 일생을 통해 더욱 공고해지고 완성되는 union의 개념 속에는 communion의 개념이 녹아들어 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오웬의 경우는 어떠한가? 일반적으로 union은 일회적인 반면, communion은 지속적 성격을 띤다. 간혹 그가 칼빈처럼 점차적으로 완성되는 과정으로서의 union을 논할 경우, 이때는 union을 완성시켜가는 수단으로서 제시되는 것이 바로 communion이라고 할 수 있다 (Owen, 2:57; 11:337 참조). 이럴 경우 우리는, ‘오웬에게 있어 union은 communion을 통해 실현되고(realized) 경험된다(experienced)’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6) 7:337 참조.

    7) 1:222.

    8) Ibid., 392, 2:287; 또한 2:290, 303, 309 참조.

    9) 고후 3:18에 대한 이같은 해석은 청교도들에게 있어 일반적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칼빈도 이 구절을 현재적 봄으로 설명하고 있다. Calvin, Commentaries, 2 Cor 3:18.

    10)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 .”

    11) 1:375; 6:65. 그리고 오웬은 현재의 지상적 봄과 미래의 천상적 봄의 관계, 그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해 상세한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졸저 “Beholding the Glory of God in Christ: Communion with God in the Theology of John Owen (1616-83)" (Ph.D. diss.,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2006), 160-75를 참조하라.

    12) ‘봄’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 혹은 이 봄의 교제를 통한 하나님을 닮아감은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친밀한 주제였다. 예를 들면 리챠드 십스(Richard Sibbes)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사랑하는 이들이여, 하늘 아래서 이루어지는 모든 묵상(contemplation) 중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만큼 달콤하고 능력있는 묵상은 없다, . .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를 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봄은 우리를 그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이건 있을 수 있는 가장 달콤한 묵상이다. 우리는 이 변화가 봄(beholding)에 의해 이루어짐을 안다. 복음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 이것은 능력있는 봄이다. 왜냐하면 그는 여기서 말하기를 ‘우리는 봄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Works of Richard Sibbes, ed. Alexander B. Grosart [Edinburgh: James Nichol, 1862-64; reprint,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73-83], 4:269). 또한 챠르녹(Stephen Charnock)은 봄에 의한 이 변화를 두 종류의 봄에 의해 설명한다: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를 보는 일은 그의 죽으심과 부활 안에서 우리를 그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반면 나중에 있을 봄은 영광 안에서 우리를 그의 형상으로 변화시킨다” (The Complete Works of Stephen Charnock [Edinburgh: James Nichol, 1864-66; reprint, Edinburgh: Banner of Truth Trust, 1985-97], 3:139). 또한 다음을 참고하라: The Works of Thomas Goodwin, ed. John C. Miller (Edinburgh: James Nichol, 1861-67; reprint, Eureka, CA: Tanski Publications, 1996), 5:548; 7:420; The Works of John Howe (London: Religious Tract Society, 1862-63), 1:75-9; 6:78.

    13) 3:584-5; 또한 ibid., 511-3도 참조.

    14) 1:460-1; 7:341.

    15) 이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주제를 가지고 설명해 보자면, 중생시 사실적으로 이루어졌던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러한 봄의 교제를 통해서 경험적으로 성취되며 발전, 완성되어 간다는 것이다. 위 p. 3 각주 5 참조.

    16) 6:292-3.

    17) 9:592. 오웬은 사 45:22, 65:1; 슥 12:10 등을 예로 든다 (9: 592-3).

    18) 오웬 자신이 이 점을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 사건과 관련한 신약과 구약의 본문을 대조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우리 주님은 요 3:14-5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다. 그런데 동일한 사건을 민수기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민 21:9). 신구약의 이 두 구절에서 현 논의와 관련되는 부분만을 뽑아 대비시켜 보면 이렇다. 즉 신약에서는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고 되어 있는데, 구약에서는 ‘쳐다본 자가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 즉 생명을 얻는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을 한 쪽에서는 ‘믿음’으로, 다른 한 쪽에서는 ‘봄’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봄’과 ‘믿음’의 두 주제가 연계되고 있음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19) 9:592.

    20) Ibid., 558.

    21) 3:562.

    22) Calvin, Commentaries, Ps 25:1.

    23) Calvin, Commentaries, Ps 63:2.

    24) 이 측면은 위 p. 3 각주 5에서, 칼빈과 오웬에 있어서의 연합(union)과 교제(communion)의 개념을 비교하면서 언급하였다.

    25) 이러한 점에서 오웬이 말하는 ‘봄’은, 기도 혹은 묵상의 한 방법으로서 제시되는 관상 기도(contemplative prayer)와 다르다. 관상 기도에서의 ‘관상(觀想, contemplation)’에 ‘본다’는 개념이 포함되어있음은 사실이지만, 이는 오웬이 말하는 ‘봄’과는 차이가 있다. 먼저 용어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 ‘관상’과 관련하여 오웬의 저작을 읽을 때는 용어적 표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영어 표현을 그대로 사용해 보자면, 오웬이 ‘contemplation’이란 명사를 사용할 경우 이는 일반적 ‘묵상’의 의미로서 ‘meditation’과 차이가 없으며 그는 이 단어를 자유롭게 사용한다. 그러나 ‘contemplative’와 같은 형용사의 경우에는 문제가 좀 다르다. 특히 오웬이 이 형용사를 ‘prayer(기도)’ 혹은 ‘vision(봄)’ 등의 명사 앞에 붙여 사용할 때, 그는 이를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서 가르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실 그 당시 천주교 쪽에서 보다 깊고 발전된 기도의 형태로서 추천되고 있었던 ‘관상 기도 (mental or contemplative prayer)’에 대해 오웬은 대체로 부정적 입장이었다. 이 기도의 긍정적 측면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동 기도가 성경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 그리스도의 중보를 떠나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알고 즐김을 추구한다는 점(위 p. 4 참조), 그리고 특히 이 기도 속에서는 지성의 역할이 현저히 약화되는 문제점 등을 지적했다. 관상 기도에 대한 오웬의 상세한 견해에 대하여는 그의 전집 4:328-50을 보라.

    26) 1:408.

    27) Ibid. 그러나 나중 하늘에서의 봄에서는 달라진다. 이 천상적 봄(heavenly vision)은 성격상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것이며 (1:378), 우리의 봄의 기능 혹은 능력은 변화되어 완전케 될 것이기 때문이다 (1:380-2).

    28) 1:408.

    29) 참고로, 앞서 칼빈도 그의 시편 주해에서 영적인 봄(spiritual views)이란 용어를 사용했음을 기억하라 (위 p. 7).

    30) 1:393-4.

    31) 오웬이 여기서 말하는 ‘영광스러운 내적 빛’은 퀘이커 교도들이 강조한 소위 ‘내적인 빛 (the inner light)’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사실 오웬 자신이 퀘이커들의 이 주장을 가장 강력히 반대한 사람 중 하나였는데, 그 중요 이유는 이들이 기록된 말씀의 권위를 소홀히 하고 성령의 내적 빛에 의한 인도하심만을 고집하였기 때문이었다. 오웬의 신학에 있어서 이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다만 오웬은, 말씀 뿐 아니라 말씀과 성령 양자를 모두 붙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고, 그의 이러한 태도는, 패커가 평가한 바와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예: 대요리문답 4문)의 원리에 충실한 것이었다. 이런 측면들에 대해서는 다음 글들을 참고하라: John Owen, Biblical Theology: The History of Theology from Adam to Christ, trans. Stephen P. Westcott (Pittsburgh: Soli Deo Gloria, 1994), 772, 839-54; Michael Haykin, "John Owen and the Challenge of the Quakers," in John Owen: The Man and His Theology, ed. Robert W. Oliver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 Reformed, 2002), 141-9; J. I. Packer, "John Owen on Communication from God," in Puritan Papers, eds. D. Martyn Lloyd-Jones and J. I. Packer, vol. 4 (Phillipsburg, NJ: Presbyterian & Reformed, 2001), 136.

    32) 7:447.

    33) 1:381.

    34) 오웬은 심지어 이 교제 자체를 포기하는 것보다는, 좀 방법이 서투르고 치우쳤더라도 열심히 추구하는 편이 더 낫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천주교적인 육적 봄의 추구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비웃으면서 자기들은 그러한 오류에 빠지는 것을 피한다는 핑계 하에 아예 하나님과의 교제 자체를 포기하거나 소홀히 하는데, 이는 천주교의 경우보다 더 잘못된 상태라는 것이다. 1:393-4.

    35) 2:52.

    36) 7:105, 108.

    신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원로와 후임목사 지침서      

    장달윤 목사(73)는 서울 장안동에 있는 무궁교회 원로목사이다. 장신대를 졸업한 장 목사는 1977년 부임하여 2007년 은퇴하여 원로목사로 있다. 글쓰기를 좋아하여 저서로 <성공적 목회를 위한 목사 처신법>, <초임 목사와 부목사의 성공 비법>.<부목사 처신법과 목회 상식>, <목사부인 처신법>,<성공적 목회를 위한 사모학>등이 있다.

    장달윤 목사가 아멘넷 자유게시판에 9회에 걸쳐 연재한 <원로목사와 후임목사 지침서>를 정리했다. 일부중복되는 내용은 편집됐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원로목사 후임 지침서

    원로목사 후임과의 갈등

    한국교회도 역사가 길어지면서 원로목사가 있는 교회가 점점 많아지는데, 그것에 대한 신학교 교육도 서적도 없기 때문에 지식 부족에서 오는 많은 시행착오의 문제가 파생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주소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다음과 같아 <원로목사와 후임 지침서>를 논하고자 한다.

    원로목사와 후임과 갈등, 원로목사와 후임과의 관계가 교회 갈등, 교회 분열로 이어지는 경우가 여러곳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각자 문제의 요인을 생각하여 보고 참고하여 도움이 되기를 희망하는 바이다.

    필자는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정상적인 당회가 구성되어 있고 역사가 있는 교회에서 10년 이상 순탄하게 목회 하였으면 그 목사는 목회에 관한 한 "도사"가 된 분이라고 정의한다. 한국교회 목사들의 수는 수만명인데(통합측 교회만 하더라도 목사가 1만6천명이 넘고 원로목사는 61명, 2010년도) 한 교회에서 10년이상 장기목회 한분은 통계가 나오지 않아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 그 수가 전체에이 비하여  그리 많지않다고 추측된다.

    인생이 전쟁이라면 목회도 전쟁이다. 칼빈은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라고 했다. 원로목사란 한 교회에 부임하여 20년이상 시무하고 교회의 동의를 얻어 추대받은 백전 노장의 장군이다. 원로목사가 장기 목회를 하고 물러간 그 자리를 무난히 메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20년 이상 목회한 원로목사의 자리를 메우려면 첫째 원로자리를 체울만큼 그릇이 커야하고 예의와 범절, 지혜와 목회능력, 처신과 인간관계가 탁월하여야 한다.

    어떤 목사라도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면 눈물과 피와 땀으로 절타 탁마의 인고의 세월을 경험한 자이거나 견디어 낼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있는 자여야 전임목회를 연속할 수 있다. 명장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당회가 구성된 교회에서 20년 이상 목회했다면 그는 명장이다. 그런고로 많은 시간과 난관을 거쳐 많은 수련을 쌓아야 원로의 자리를 무난히 메워 갈 수 있다. 하지만 수련을 쌓는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다. 타고난 달란트와 인격과 그릇이 커야 한다.

    우둔한 단기 목회의 종지기 그릇의 소양을 가진 목회자는 어떤 지혜를 공급 받아도 감당치 못하고 중도 패전하여 탈락할 것이다. 전쟁은 적을 알고 전술이 뛰어난 자가 승리한다. 상대를 먼저 알고 전쟁을 치르는 자가 승리하는데 종지기 그릇의 소양을 가진 목회자는 멀리 넓게 깊게 높게 볼 관찰력이 없고, 전략의 능력과 시력도 없고, 좁은 소견에 인내력도 포용력도 부족하기 때문에 그 자리를 지탱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

    그러므로 확실한 승리의 전술과 지식을 갖지 않은 자는 노하우를 배워서 가던지 아니면 그 자리에 아예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그 자리에 들어가지 말아야 할 자가 들어 앉으면 전쟁은 반드시 일어나고 교회는 쓰라린 시련을 겪게된다. 앞으로 원로목사와 장기 목회자가 점점 많아지는 것이 현실이기에 최소한 전쟁을 막아보고자 하는 심정에서 원로후임 지침서를 쓴다.

    1.비범한 인성과 목회철학과 능력을 가진 자만이 원로목사 자리감당

    1) “도사 기질”을 가진 자만이 원로 자리 무난히 연속 할 수 있다

    목회 초보자라도 원로의 자리를 무사히 이어가는 목회자는 “도사”가 될 수 있는 소양을 가진 자이다. 그는 비범한 천부적 목회 달란트와 탁월한 적응력의 지혜와 그릇을 가진 자이다. 그렇지 않고 평범한 달란트를 가진 좁은 소양의 목회자가 설교 한번 잘하고 인물 좋고 학벌 하나로 부임이 되었다면 그 자리를 지탱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비범한 도사 기질과 뛰어난 적응력의 지혜와 그릇이 큰 자는 그 도사의 자리를 무난이 이어 갈 수 있다.

    2) '원로목사 때문' 이란 말을 입에 담지 말라.

    근간에 후임들이 원로목사 간섭과 시집살이 때문에 목회가 힘들고 어렵다고 당사자들의 입이나 교회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원로목사 제도 반대 운동까지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헌법이 개정되기 전에는 반대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원로목사는 장기간 그 교회를 사랑하고 키웠다. 그는 후임목사가 목회를 잘하도록 도와야 되겠다는 마음에서 그 교회를 떠나지 않고 있거나, 마땅히 갈 교회가 없기 때문에 그 교회에 출석하기도 한다.

    그 교회를 출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멀리서 교회를 살피고 어려움이 없기를 바라며, 어려움이 있으면 돕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자기가 섬기던 교회에 해를 가하겠다는 목사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배은망덕한 버릇없는 후임들이 원로목사를 귀찮게 여기는데 근본  문제가 있다.

    후임에게는 원로만큼 부담스러운 존재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로의 비중이 크고 시어머니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후임은 원로의 비중을 인정하려고 하면 문제가 되지 않은다. 원로의 비중을 인정하지 않으려는데 문제가 있다. 후임은 그 원로목사가 없어도 다른 대상(장로)이 그 후임에게 똑같은 비중의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큰 말이 나가면 작은 말이 큰 말 행세 한다"라는 속담이 있다. 반드시 말의 무리 가운데는 지배하는 큰 말이 있기 마련이다. 인간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을 비 정상으로 보는것이 비정상이다.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 공동체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후임이 원로가 되어도 마찬가지이고 원로장로가 되어도 마찬가지이다.

    담임목사는 큰 말을 탈수 있는 능력있는 자라야 한다. 그래야 그 다음 큰 말도 탈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바로 그분은 그 교회에 큰 공로자 이기에 큰 말이 되어 큰 말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큰 말을 탈수 없는 자는 자기가 큰 말을 탈 능력이 부족한 자로 알고 원로목사 또는 장로 때문이란 말을 입에 담지 말아야 한다. 절대로 입에 담아서는 안되며 물러날 경우 자신의 무능을 사과하고 물러나야하는 것이 정상이다.



    K지역에 교회가 인물 잘나고 학벌좋고 설교 잘하는 후임을 원로는 제외하고 장로들과 교회가 선을 보고 투표하여 선발하였다. 그 원로는 본인의 절친한 친구로서 아주 덕이있는 목사이다. 그 친구원로는 멀리 서울에 와서 살면서 그 후임을 위하여 백방으로 지혜와 방법을 공급하고 후임도 어려움을 늘 상의하며 목회를 하여왔다. 3년 동안은 버티더니 인간관계가 극심하게 어려워 더이상 할수가 없다고 스스로 사임을 하였다.

    원로에게 하는 말이 목사님! ------ㄴ들이 너무 별나, 나는 더 이상 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여기 더 머물다가는 정신 병 들겠습니다, 하면서 인사하고 사임하였다. 원로는 대단히 안타갑게 생각하였다.

    그 릇과 인격과 목회 달란트가 문제였다.  그ㄴ-------나뿐-----ㅇ갈 자들이라 하였을 것이다. 이런자일 수록 자기 부족을 모르고 남을 탓하는 것이다.

    상대를 원망말고 자기 부족을 인정하고 욕하는 입을 회개 하여야 한다.

    3) 원로는 하나밖에 없는 은인 중 은인이다.

    원로는 세상 말로 하면 기업을 만들어 물려준 은인이다. 교회가 아니라면 자식에게 물려줄 것이 아닌가. 그런 원로 목사의 뜻을 전부 수용한들 어떠하랴. 그런 분을 평생 상전으로 모신들 그 은혜를 갚을 수 있겠는가. 내가 담임목사로 서도록 직간접으로 협조하신 분인데 얼마나 고마운 분인가. 그분이 후임결정에 권리가 없었다 하여도 뒤에서 꼬투리를 찾아 반대 하였다면 과연 그 자리에 올수 있었겠는가. 그분이 후임 부임에 전혀 무관하다 하였을 지라도 그분이 이룩한 교회의 후임이다. 약간의 부담스러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분을 원망 불평하면 어떤 이유로던지 그는 배은망덕 자가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 목사들 중에 속된말로 평생토록 원로목사 종노릇하여도 후임되겠다는 목사가 99.999999%가 될것이다. 그도 그런 마음으로 그 교회에 부임하였을 것이다. 원로에 배은망덕 자는 하나님의 은혜도 인간의 은혜도 모르는 저질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목회자로서의 섬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종의 자격이 없는 자이며,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인의 차원을 넘지 못한 지극히 세상적인 사고를 가진 자라고 생각한다.

    부임 전에는 원로목사나 장로에게 사정하며 내가 부임하면 원로목사님 장로님들을 잘 섬기겠다고 말하지않았는가? 안될까봐 부들 부들 떨면서 그런 말을 하였을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지않고 부임한 목사가 과연 있었겠는가?. 그러나 부임 한 후에는 딴 짓거리를 하는 괘씸한 후임이 많다. 일부 중직자들에게 원로목사에 대한 장기간 쌓여진 불만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정상이다. 앞으로 후임에게는 그런 불만자가 없겠는가.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목사는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불만 그룹들과 연대하여 원로에게 도전하는 것은 부도덕하고 있을 수 없는 배은망덕 행위이다(천-동K교회).  배은망덕의 행위를 하였을 때에 교회는 혼란해 지고, 목회하기가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며 교인들을 골탕 먹이게 된다. 후임목사들은 자기에게는 반대 그룹이 형성되지 않는다고 착각하지 말라.

    원로는 후임에게 한 분 밖에 없는 은인이다.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선배에 대한 예우를 깍듯이 하는 것이 목회의 기본 도리이며 하나님께도 인정받고 교인들에게도 인정받는 축복받을 일이며, 원로에게도 많은 도움을 받고 사랑받을 조건이다. 원로의 장기목회에 실증자와 불만자가 많아도 50%이상이 그의 팬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원로목사 때문에 힘 들다는 말은 입 밖에 내지말라. 원로목사를 존경하고 아버지같이 모시면 지지자 50%는 자동으로 내 품안에 들어온다, 원로를 반대하면 50%는 후임에게 등을 돌린다. 이것을 모르는 바보 멍텅구리가 말성부리는 원로 후임들이다.

    4) '원로목사 때문'이란 불평하는 자는 그 교회를 담을 그릇이 못되는 자

    원로목사 때문이라는 이유를 대는 목회자는 원로목사 없는 교회에 부임 하였다면 모두 목회를 무사히 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그 증거로 원로목사가 없는 교회에서 수많은 목회자들이 어찌하여 순탄한 목회를 하지 못하고, 분란을 일으키고 단기간에 불편한 교회를 만들고 단명하는가?

    원로 후임아닌 수많은 목사들은 교회를 떠나면서 누구 때문이라 하는가? 죽일---ㄴ하지않느가?

    예를 들어보자. 전남 이리의 S교회 A목사님은 30여 년의 장기목회로 교회를 성장시켜 놓고 갑자기 소천하자 후임이 부임했다. 하지만 얼마되지 않아서 갈등을 빚고 교회를 떠나고, 그 다음 후임도 자주 갈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물러나는 후임은 자기가 부족한 것은 모르고 장로가 나빠서 나는 당하고 떠난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원로목사가 죽고 들어 왔는데 어찌하여 배척을 받았는가. 원로가 무덤에서 배척운동 하였단말인가?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목사의 자질과 목회 그릇의 문제이다. 목사는 자기 그릇 이상의 양을 담을 수가 없다. 목회학에서 교회는 목사만큼 자란다고 한다. 그래도 통계적으로 원로목사가 있는 교회의 후임 재직 기간이 일반교회보다는 길다. 원로목사가 잘 닦아 놓은 터 덕분에, 바람막이가 되어주기 때문에, 그만큼이라도 하는 것이다.

    2.원로목사 후광을 업고 장기목회 잘하는 목사들

    후임목사가 원로목사를 존경하며 원로목사에게 칭찬을 들으며 교회를 부흥시키며 교인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목회를 잘하는 분들이 있는데 안동교회, 수산교회, 광주 서림교회 예를들어보자. 그 후임들은 어떻게 그렇게 할수 있었는가?.

    1) 안동교회 김광현 원로목사/후임 김기수 목사

    안동교회 후임 김기수 목사는 25년이 넘도록 원로와 교회 한 울타리 안에 살면서 아무런 불평없이 교계와 사회의 존경을 받으며 교회를 3배나 성장 시키는 목회를 하였다. 원로는 후임의 후광이 되어 주고, 후임은 원로가 35년 동안 큰 기업을 만들어 물려준 은인으로 생각하고 존경할 뿐만 아니라 아버님 처럼 모시고 자신을 후임으로 삼아 주신데 대하여 늘 고맙게 생각함으로 전국 교회에 선배와 어른 존경의 효시가 되었다.

    문제는 상대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내게 있는 것이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모시기도 힘이 드는데 어찌 원로를 모시기가 힘드는 일이 없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인간이 은혜를 모른다면 하등 동물보다도 못한 자가 아닐까. 힘든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자라야 큰 일을 할 수 있으며 그 “큰 은혜의 보좌”를 감당할 수 있다. 인자무적(仁者無敵)이란 무슨 뜻인가? 그 반대는 악자유적(惡者有敵)이 아닌가!

    필자가 후임 김기수 목사가 소천하기전 대화를 한적이 있다. 김기수 목사는 원로와 관계에서 한 번도 마음이 상하여 본 적이 없다고 했다. 25년 동안 매주 예배 축도는 원로목사가 하도록 배려했다. 장로들이 담임목사가 다 하라고 건의했으나 "축도는 원로목사님이 하시는 것이 더 축복되고 교인들도 더 은혜롭게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은 선배 어른을 존경하는 예의이며 또한 어른을 모시는 일은 우리의 고유한 문화요 풍속인데 얼마나 아름다우냐고 대답했다.

    반면 원로 김광현 목사는 은퇴후 처음에는 예배후 예배당앞에서 인사를 했으나 교인들이 담임목사에게 집중되는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 같아서 하지않고 후임목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것은 일체 중지하고 모든 것에 침묵했다. 당회 참석이나 결혼 주례 등도 일체 사양했고 원로목사 사무실도 주었으나, 후임에게 해가 되는 것 같아 사양했다. 김기수 목사님는 어디 갈 때나 갔다와서는 아버님께 하듯 인사하고 보고하며, 지금까지 변함없이 새해 첫날은 반드시 부부가 세배하러 온다고 하셨다.

    이런 아름다움이 안동교회 원로와 후임목사 간의 인격과 덕성, 예의와 범절, 장유유서의 위계질서가 온 교인들에게 본을 보이시고 존경을 받고 안동교회를 작은 천국을 만들고 부흥과 발전을 거듭하고 전국 교회에 모범을 보이며 2대 생존 원로목사를 배출한 유일한 교회로서 기네스북에 올릴만 하다.

    모든 문제는 내게 있다. 후임 김기수 목사는 훌륭한 인격과 예의를 갖춘 장유유서의 인격을 가진 목사였다. 상대는 내 모습의 반사경이다. 원로 후임자라면 상대를 원망하지 말고 은인으로 존경하며 내 모습을 교정하고 아량을 넓히고 신앙에 덕성을 쌓아 모든 성도들이 존경할만한 후임목사가 되어야 한다.

    안동교회 원로와 후임이 25년이 넘도록 한 교회 울타리 안 사택에 살면서 이런 관계를 갖고 지낸 것은 성직자다운 구별된 모습이며 세계 기독교사에 빛나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성직자라면 일반인들과는 다른 면이 있어야 되지 않은가. 세인들이나 시장 잡배수준이 되어서 되겠는가?

    2) 서울 수산교회 백용종 원로목사/후임 하용삼 목사

    백용종 목사의 후임으로 부임한 하용삼 목사는 원로 목사의 도움으로 목회를 평안히 했다. 원로목사가 소천하자 원로목사님이 있을 때 훨씬 좋았다고 했다. 원로사후 한참 힘 들었다고 했다. 원로목사를 어렵게 생각말고 존경하면 어느 원로목사라도 다 그렇게 도와 줄 것이다. 후임 하 목사는 원로목사님이 소천하자 홍역을 겪기도 했으나 평탄한 목회 후 곧 원로가 된다. 장기목회를 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그릇과 인격, 그의 덕목과 목회 능력에 정비례 한다.

    3) 광주 서림교회 장동진 원로 목사/후임 송재식 목사

    서림교회 장동진 목사가 27여 년의 목회와 총회장을 역임하고 존경받는 목사인데 후임은 송재욱 목사이다. 송 목사는 목회경험이 전혀 없고 공부만 하여 교수였던 젊은 40대 목사인데 교회에 부임하여 교회를 3배나 부흥시키고 원로목사님을 존경하고 원로의 자녀인 장로와 권사들과도 형제처럼 지내고 있다고 하였다. 원로목사가 있는 것이 목회에 많은 도움을 입는다고 했다.

    어쩌다가 원로목사님이 출타하여 교회출석을 못하였을 경우 빈자리에 허전함을 느낀다고 하였다. 원로목사와 같이 자리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고 유익하고 도움이 된다고 했다. 요즈음 후임들은 원로목사와 한자리에 앉는 것이 부담스럽고 싫다고들 한다. 왜 무엇때문에 그런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자신의 만용과 오만과 어리석음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후임 자신에게 달렸있다. 후임이 전임 목사보다 그릇이 크면 전임의 목회를 담고 남음이 있을 것이고, 그릇이 작으면 전임의 목회를 담을 수 없어 넘어지고 자빠지고 쏟아지고 부서지는 것이다. 후임 송 목사는 그릇이 크기에 교회와 전임을 담고도 교회가 3,4배나 더 성장했다.

    후임 송 목사는 원로목사 퇴임시 10년 사례를 일시불로 드렸는데 10년이 넘도록 생존하시니 당회에서 의논하여 다시 생활비를 책정하여 드려야 되겠다고 말했는데 그 생각도 송 목사의 덕목과 그릇의 크기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반면 서림교회 장동진 목사님은 퇴임 후 그날부터 설교. 결혼주례. 길흉사. 교회 앞에서 인사, 축도를 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부탁과 요청이 있었으나 단호히 거절했다. 그 이유는 물러났으면 후임에게 힘을 실어주어 모든 것이 집중되게 해야지 교인들의 마음이 갈라져 후임이 일하는데 부담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후임 목사가 전적으로 일을 소신껏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 야지 원로목사가 이것 저것 간섭하고 참견하는 것은 교회를 위하여 바람직한 처신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얼마나 존경스러운 처신이며 얼마나 존경받을 아름다운 분이신가. 원로 장 목사와 후임 송 목사는 정말 인격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분들이며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한번 생각하고 본 받아야 할 분들이시다..

    이상 후임 세분들은 자기위에 어른이 한분 계시는 것을 당연시하고 인정하는 반면, 불평하는 후임들은 자기위에 어른이 한분 계시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이 교회에서 최고 어른으로 만용하는 인식에서 불평이 나오는 것이다. 후임목사들은 이상 논한 세분 후임들의 인격과 아량과 덕목과 예의를 배워야 할 줄 안다. 후임들은 아무 수고없이 다 차려놓은 밥상을 받는 격인데 그 은혜를 잊고 어떤 이유로든 배은망덕한 자가 되어서는 아니된다. 부임할때 초심은 어떠 하였는가?

    3.교회를 위한다고 원로목사 될 분을 물리친 교회

    장기목회후 원로목사가 될 분을 남은 짧은 임기를 못체우게하고 교회가 부담스럽고 후임에게도 부담을 준다며 조건을 붙처 은퇴시키고 원로목사가 없는 교회로 만든 다음 공부를 많이 하고 박사 학위도갖고 설교를 뛰어나게 잘하고 큰 교회의 부목사 경험을 쌓은 젊은 목사를 청빙했다. 얼마후 교회는 분열되고 절반 수준으로 교세는 약해졌다.

    원로목사가 내어보내고 없는데 왜 그런 결과가 초래되었는가. 그것은 후임의 설교나 학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목회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무식한 아마추어 목사의 그릇의 문제이다. 또한 장로들이 20여년 가까이 교회를 성장시키며 무난히 목회해온 전임의 능력과 장점을 보지못하고 단점만 보고 실증을 느껴 얼마남지 않은 임기를 단축시켜 처리한데 문제의 원인이 있다.

    필자의 추리로는 그 교회는 전임 장기목회자를 조기은퇴 시키지 말고 원로로 모셨다면 그와 같은 거듭된 분열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안정된 교회로 유지 발전하며 최소한 현상유지는 했으리라고 본다. 원로목사가 있는 것이 결코 교회에 불편한 것이 많은 것이 아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그래도 원로목사가 있는 교회가 무탈한 교회가 더 많음을 볼 수 있다.

    영락교회 후임과 한경직 원로목사 사후 후임을 생각해 보자. 개인적으로 한국교회에 존경받고 덕망이 있고 학위와 지명도가 높고 목회능력이 있는 분명 비범하고 훌륭한 분들이 후임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현상유지도 못하고 교회를 평안히 장기적으로 이끌지 못하며 중도하차 하였는가?

    그분들은 일반적 목회자 기준에서 볼 때 전부가 A+특급이다. 그러나 분명히 아실 것은 초 특급은 아니다. 그것은 영락교회와 한경직 이란 초특급 초대형 교회의 양(量)과 설교와 정치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초 특급 카리스마 그릇은 목회에 관한 한 “칼빈”보다 더 큰 그릇이다.

    프린스턴 신학교에 가면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큰 장로교를 만든 공로로 한경직 목사님 한 복입은 영정이 걸려 있다. 그런고로 그 후임들이 영락교회를 평탄하게 이끌지 못하는 것이 비정상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인데 문제는  그 정상을 비정상으로 보고 대하는 그 교회가 문제이다. 그런 초 특급은 장로교 역사 이래 그분밖에 없었고 지금도 없음을 영락교회는 교회의 앞날을 위하여 알아야 할 것이다.

    4.원로목사와 갈등 이유는 후임의 인간됨이 근본문제

    자신의 역량과 덕목이 모자라는 목사는 원로와 갈등을 빚는다. 내 위에 한 어른으로 모시면 문제기 안된다. 한 어른으로 모시기로 하고 부임하였다. 생각하여 보라. 원로목사를 어른으로 모신다고 손해 볼 일이 있는가. 또한 그렇게 모신다고 윤리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 있는가. 원로를 존경하고 아니하는 것은 후임의 인격의 문제인데 내 위에 어른이 있는것이 싫다는 것이다.

    다 그 교회의 생리가 있다. 그것을 가장 잘 아는 분이 원로이다. 그 원로를 내 위에 어른으로 모시고 자문을 받으며 나아가면 후임목사 목회에 많은 도움이 된다. 건방진 후임은 원로의 자문을 원치 않고 새 물맛을 본 성도들의 즐거운 감정에 취하고 반대자들의 불만을 자기는 충족을 체워주는 우월한 목사라고 우쭐대다가 뜨거운 감자를 먹은 다음 후회하며 원로에 자문을 구하는 경우도 있는데 대부분 기회를 놓진 경우이다.

    문제는 후임 자신의 인간됨과 역량과 덕목과 목회능력의 그릇이다. 원로목사 있는 곳에서 목회를 잘할 수 있는 목사는 일반교회에 가도 잘할수 있고 일반교회에서 잘 할 수 있는 분은 원로목사 계신 곳에 가서도 잘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목회자이다. 목회의 모든 문제 발생원인 90%는 자신의 역량과 덕목이 부족한데서 오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원로와 후임의 갈등은 초심을 버리는데 문제가 있는데 초심을 회복하여야 한다.  인간이 바로 되었다면 초심으로 돌아가 원로의 지도를 받으면 될 것인데 무슨 불평과 원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원로의 지도간섭이 교회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장기적으로 보면 그것을 수용함이 훨씬 빨리가고 자신의 목회에 많은도움이 되는데 그것을 모르는 멍텅구리 목사이다.  원로후임들은 즉시 질된 인성을 버리고 뜨거운 감자를 먹기전에 초심을 회복하여야한다.

    5.원로/후임목사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1.) 후임이 부임 후 하지 말아야 할 것.

    (1) 3년 동안은 원로 목사가 해놓은 주보형식, 행정조직, 교회시설 구조변경. 리모델링 같은 것 일체 하지 말 것 2) 3년 동안은 설교와 심방 또는 당회가 원하거나 부임할 때 합의한 사항 이외에 것은 함부로 하지 말 것

    (3) 원로목사와 장기간 미운정 고운정이든 성도들을 시샘하여 관계를 의도적으로 끊으려 하지 말 것

    (4) 예배 분위기를 원로 목사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당장 바꾸어 새로운 것을 보여 과시하겠다는 경거망동한 행동을 하지 말 것

    (5) 교회를 자기에게 적응시키려 말고 자기가 교회에 적응 할 것

    (6) 매사에 신중하고 말을 많이 하지 말고 말을 가려하며 신중 할 것.

    2) 후임이 해야 할 예의범절

    (1) 원로목사를 친 아버지보다 더 정성을 갖고 공경하라

    (2) 부모님께 보다 더 매사에 예의범절을 갖추어라

    (3) 가능한 한 사양하지 않으면 한 달에 한번 식사 시간을 가지며 대화하며 목회정보를 얻으라

    (4) 무엇이든지 먼저 상의를 하는 습관을 가지고 원로가 무엇을 말하던지 예로서만 대답하고 수용하라

    (5) 만날 때 마다 지혜롭게 원로목사 은덕임을 감사하는 그런 얼굴을 항상 가지라

    (6) 장로들이 원로목사에 대한 원망이 많아 싫어하고 만나지 말라 하여도 후배로서 예의는 지혜롭게 갖추어라. 그 말 안 들었다고 배척 당하지는 않고. 오히려 존경한다.

    3.) 원로목사 후임이 지켜야 할 일.

    (1) 주보에 원로목사 이름을 담임목사 위에 배치 할 것

    (2) 모든 교회 의논을 먼저 예의로 상의 할 것

    (3) 한 달에 한번 설교시간을 드릴 것

    (4) 중요한 행사에는 먼저 같이 가자고 말하고 모시고 갈 것

    (5) 가능하면 의도적으로 시간을 마련하여 대화의 시간을 만들 것

    (6) 처음은 결혼주례나 행사의 집전을 예의로 권하여 드릴 것

    (7) 항상 교회 잘되는 일은 먼저 하님께 영광, 다음은 원로목사께 돌릴 것

    8) 일반 길흉사 행사 때 축도는 반드시 원로목사께 부탁 할 것

    (9) 장기목회자이기에 반대자도 있지만 깊이 정든 50% 팬들의 눈에 섭섭하게 하는 모습 보이지 말 것

    (10) 원로목사가 목회한 문화가 교인들에게 알게 모르게 젖어 있는데 그것을 단숨에 바꾸려 말고 자신이 거기에 적응하고 답습하며 보이지 않게 자기 목회를 접목시켜 나가도록 할 것.

    그렇게 하는 것이 그곳에서 평탄한 목회를 할수있는 길이다. 반대자들의 편에들어 원로를 섭섭게하면 목회는 평탄 할수없다.

    4) 원로 목사에게 잘 못하는 후임 목사.

    (1) 원로의 이름을 주보에 당장 지우고 자기 옆으로 또는 주보 뒷면으로 옮기는 것

    (2) 원로목사가 부담스럽다고 교인들에 말하는 것.

    (3) 원로목사의 목회나 거취에 대하여 폄하 하거나 비평 하는 것

    (4) 원로목사가 교회와도 친절히 대하지 않고 경원시 하는 것

    (5) 원로목사를 자기를 돕는 우군으로 생각하지 않고 훼방꾼으로 생각하는 것

    (6) 원로목사 충고를 잘못된 시어미로 불평하며 교인들에게 불편한 원로로 떠벌리는 것

    (7) 원로목사를 교인들에게 존경도 못 받는 주제에 귀찮스럽게 군다고 생각하는 것

    (8) 원로목사 앞에서 담임이라고 건방지게 구는 태도를 취하는 것

    (9) 당회를 동원하여 원로목사 교회 출입금지 시키는 것

    (10) 원로목사는 어른으로서 그 교회는 더 잘 알기에 자기 경험과 표준에서 충고할 때 자기보다 못한 시대에 뒤 떨어진 것을 가지고 지적하고, 교정을 요구한다고 안색이 변하고 굳어지고 말 대꾸하며 부정적으로 대하는 것..

    5) 원로 목사에게 잘하고 못하는 것에 보응

    (1) 동신교회 김세진 목사 후임 H 목사는 원로목사 이름을 주보 뒷면에 조그만 하게 실었다. 원로 김세진 목사는 그 교회를 개척하여 큰 교회를 만들었고 그 교회에 자녀들이 다니고 사위가 장로였다. 후임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미국식이라고 그렇게 하였는지는 모르지만 어른을 존경하는 한국교회 문화에는 무례한 행위였다. 한번능 필자가 종로에 물건을 구입하러 는데 동신교회 장로였다. 장로님 말씀이 그 처리에 대하여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그렇게하면 자기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고 부덕한 행위로  교인들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후임은 심히 어려운 목회를 하다 중병을 얻어 소천했다. 일반 장로도 그렇게 섭섭해 하였는데 사위 장로가 당회에서 후임목사에게 협조하였겠는가?

    (2) C 교회 후임은 자신의 위임목사 투표를 하는데 원로에게 설교는 안 시키고 공동의회 사회만 시키는 목사였다. 원로를 청하였다면 반드시 설교를 시키고 회의의 사회를 부탁하는 것이 예의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잘못된 목사이며 예의 범절 교육이 전연 안 된 목사이다.

    그 목사는 심한 진통을 격고 3년만에 물러났는데 그런 목사는 그렇게 물러나는 것이 정상이다.

    (3) 서울에 S와C 교회 후임도 원로목사 아름을 주보 뒤편에 조그마하게 실었다. 원로목사 이름을 뒷면에 조그만 하게 넣는 것이 한국 예의에 맞는가? 그것이 자가가 높아지는 것으로 착각 하고있다. 원로목사들을 그렇게 서원하게 하면 권위가 한 차원 높아지고 목회가 더 잘 되는가? 선임의 마음도 즐겁게 못하는 주제에 장로들과 교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는 목사이 겠는가?

    그 목사중 한분으 필자와 대화를 하다가 장목사가 내 후임에게 내 이름을 앞으로 내도록 좀 말해 달라고하였다. 얼마나 섭섭하면!?.

    (4) L교회는 역사는 있고 교인은 많지만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무리한 부담을 시키며 교회를 번듯하게 신축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후임이 부임하여 자신 만만하였다. 설교시간에 수십년 된 교회가 건물이 이게 무엇이냐고 비판 설교를 하였다. 원로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원로목사 사모가 구역장 하던 것을 짤라 버렸다. 원로에게 인사하러 오거나 상의하러 오는 일은 물론 없었다. 괘심한 마음의 원로는 수십년 정든 팬들의 불평을 잠재우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자 후임은 얼마 있지 못하고 쫓겨났다.

    또 공부 많이 한 학자가 후임으로 왔다. 원로에게 인사도 오지 않았다. 또 괘씸죄에 걸려 쫓겨났다. 그 다음 후임이 또 왔다. 이 후임 목사는 자주 교체되는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처하였는데 원로 목사님을 어른으로 모시고 존경하고 상의를 드리고 예의를 갖추었다. 원로 목사에게 인정을 받고 칭찬을 들으며 안정된 목회를 잘하고 온 교회에도 환영을 받고 있다. 원로목사가 후임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원로에게 그 예의도 안 갖추는 10원짜리도 안되는 자존심 어디에다 쓰려는가?

    L교회 원로목사는 은퇴후 그 교회 출석하지 않았다. 그래도 괘씸죄에 걸리면 덕 될 것이 없는 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원로목사가 후임에 결함을 덮어주려 하지 않고 방치하고 못 본척 한다면 어려움을 극복하기 어렵다. 그 교회 출석을 하던 떠나 있던 원로목사의 비중을 50%만 두고 목회하면 50% 원로목사 팬들은 후임목사 품에 자연스럽게 들어온다는 원리를 알아야 한다. 원로 목사를 경원시하고 못 마땅하게 생각하면 50% 원로목사 팬들은 한참은 잠잠하게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적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5)미국에 한 원로후임은 부인하여 원로는 은퇴식을, 후임은 위임식을 갖는데 원로는 후임에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하여 교회를 새롭게 리 모델링도하고 힘을다해 교회 단장을 하여 물려주는 행사이데 후임이 취임사에서 교회를  곧 다시 크게 지어야 할 터인데 리모델링은 왜 했느냐고 하였다. 그런데 6년이 지난 지금도 교회를 다시 짓거나 늘겨할 처지가 아니라고 알려왔다. 얼마나 건방지고 원로목사에 대한 무례한 만용적  언행이였는가? 그 교회 한 평신도 교인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돌것 같았다고 하였다.  이런 얼간이 젊은 후임 목사들이 있다는데 문제가 많다. 초등학생 수준도안되는 예의모르는 검방진 목사이다.



    (6)나의 친구 목사는 약한 교회 부임하여 교회를 키우고 건축하고 17년동안 장기 목회를 잘하였다. 장로님들이 후임을 목사님게 부탁하기에 시골에 있는 한 목사를 좋게 보고 후임으로 청빙했다. 그리고 10/1헌금도 들이고 해서 한달에 한번식 그 교회를 출석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장로들이 목사 집에 모여왔다. 하는말이  후임목사가 목사님이 우리 교회 오시니까 너무 부담스럽다고 다른 교회로 가시도록 하여 달라고 부탁하기에 왔다고 했다. 시골 무명의 목사를 자기가 세운 도시 중형교회에 인도했는데 다 차려놓은 밥상을 받은다음 그렇게 박대한 것이다. 그런 배은망덕한 인간이 과연 목사인가 묻고싶다.  그 후임이 아니더라도 그런 배은 망덕한 목사가 얼마인가도 묻고싶다.

    (7) X.교회 후임목사는 원로가 추천하여 부임한 담임이 되자마자 자기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원로목사 이름부터 끌어 내리기 시작 하였고 자기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당회에서 원로에 대한 불평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그것이 자기가 높아지는 것인 줄 착각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들의 종이 되라” (막10:44)하셨는데 자기를 후임으로 세운 은인이요 선배인 원로목사를 끌어 내리고 원성과 성토부터 시작 하는 목사가 과연 목사의 자질이 있는가?

    이상과 같은 5가지 조문을 참고하고 선배요, 은인인, 원로목사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성의를 다 하였을 때에 어느 원로가 후임 목회자를 돕지 않겠는가. 은혜를 아는 후임을 왜 싫어하겠는가. 원로목사는 후임이 진심으로 존경하고 고맙게 여기는 그 자세와 심성 보기를 원하는것 뿐이다. 그렇게 하면 원로 눈치 보지도 말게 하고 자신의 목회철학을 소신것 펼치도록 뒤에서 도와 줄 것이며, 전적으로 돕게 되어있는 것이 선임의 심리요, 선임의 공통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본심이 있기에 원로가 된 인격이다.

    섭섭하게 하면 원로도 사람인지라 해꼬지 하고 헐뜯고 배척운동을 할 수 있는 동물적 사람이란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한 마음이 들지 않은 분이 있다면 그분은 성자(聖者)로 모셔야 할 것이다. 원로가 바라던 안 바라던 상관말고 후임은 이상과 같은 조건과 예의를 갖추면 아름답고, 교회와 자기에게 유익하다.

    5.원로목사의 5가지 유형과 원로목사의 처신

    1)) 원로는 어디에서 살던지 후임이 목회를 잘하도록

    원로는 교회가 잘 되도록 원근에서 후원만 하는 것이 현명한 처신이라 생각한다. 원로가 후임과 갈등을 빚어 구설수에 오른다면 어떤 이유로도 덕이 될 수 없으며 현명한 처신을 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후임이 목회를 잘하면 다행이려니와 그렇지 않고 원로가 아무리 도와주려 하여도 후임이 목회를 잘못하여 장로들과 교인들과 갈등을 빚고 많은 실수를 자아내어 목회를 더 이상 할 수 없다면 원로인들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서 후임이 사임을 하고 떠나더라도 원로목사 앞에 와서 그렇게 도와주시려고 노력해주셨음에도 제 능력과 자질이 부족하여 더 이상 할 수가 없어 물러갑니다. 목사님 정말 죄송합니다. 용서하여 주십십시오 사과하고 떠난다면 훌륭한 원로의 인격과 성직의 품위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말대로 용이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었을 때에 후임이 떠나도 원로다운 원로가 될 것이고 교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교회에 유익을 주게 되는 원로가 될 것이며 교회는 시험에 들지 않을 것이다.

    2.)원로 목사의 처신의 5가지 유형

    A형 원로목사 처신 형.
    (1) 외국 또는 멀리 이사를 가서 살며 교회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나타나지 않는다

    (2) 직계 가족까지도 그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가서 섬기게 하고 그곳에서 목사 자녀답게 교회를 섬기며 살도록 한다

    (3) 예우는 교회가 처리하여 주는 대로 감사하게 수용하고 불만스러워도 내색하지 않는다

    (4) 멀리서도 후임에 대하여 원성이 들리면 전화로라도 당회에 관용하고 협조토록 권유한다

    (5) 후임목사의 약점이 거론되면 이해하고 잘 도와 훌륭한 목사로 키울 것을 권유한다.

    B형 원로목사 처신 형.
    (1) 한 달에 한번 예배에 참석한다. 이유는 원로한분의 참여가 후임설교에 50% 이상의 중압감을 주기 때문이다

    (2) 당회 출석은 하지 않고 유고가 있어 협조를 요청 할 때에만 참여한다

    (3) 교회와 후임에 관하여는 유구무언 한다

    (4) 길흉사간에 당회의 손이 모자라거나 후임이 출타하였을 경우 지원 협조를 요청하였을 때에 협조하고 그 외에는 일체 사절한다

    (5) 목회에 관하여는 후임목사가 원로의 협조를 요청하였을 때에만 원로는 최선을 다하여 배후에서 암중 협조한다.

    C형 원로목사 처신 형.
    (1) 후임과 교회가 요청하면 한 달에 한번정도 설교한다

    (2) 교회출석은 하되 가능한 한 모든 행사에 참여를 절제한다

    (3) 후임 목사에게 신경 쓰이게 하는 언행은 삼가고 가능한 한 동석은 피한다

    (4) 후임 목사가 상의나 보고하려 오면 독자적으로 하도록 권유하고 사양한다

    (5) 후임목사의 신상이나 목회에 관한한 어떤 교인들의 소리도 듣는 것으로 끝난다.

    D형 원로목사 처신 형.
    (1) 그 교회에 원로이기 때문에 그 교회에 출석한다(마땅히 갈 교회도 없기 때문)

    (2) 그러나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

    (3) 어떤 바램과 기대도 하지 않고 마음을 비운0-다

    (4) 교회에서는 한 교인으로서만 처신한다

    (5) 그런 원로목사님이 동참하심으로 후임은 목회와 매사에 더 조심하는 유익이 있을 것이다.

    E형 원로목사 처신 형.
    (1) 교회 원로목사 사무실을 마련하여 매일 출근한다

    (2) 교인들이 싫어하여도 상관하지 않고 매월 한번씩 설교를 자원하여 한다

    (3) 담임목사와 다를 바 없이 전부를 총괄하고 시시콜콜 간섭하고 후임을 부목 취급한다(대구 D교회)

    (4) 매일같이 후임이 보고를 하기를 원하며 하도록 지시한다

    (5) 매번 당회에 참석하며 참석 전에 사전보고를 받고 결정한 다음 당회는 요식절차만 밟게 한다

    (6) 길흉사간 모든 행사를 자기가 우선으로 하고 싶어 한다

    (7) 후임목사가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결점을 헐뜯으며 불편하게 만든다.

    (8) 후임목사 배척운동에 배후 조종자가 된다

    (9) 후임이 사랑받고 환영받는 것은 시샘이나 못 보아준다

    (10) 질투심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고 원로의 위상을 상실하고 교인들의 증오심을 쌓는다.

    6.필자 본인의 원로 처신 법.
    본인은 은퇴시에 교회 앞에서 마음을 비우고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1) 일체 설교하지 않는다

    2) 일체 축도를 하지 않는다

    3)일체 결혼주례를 하지 않는다

    4) 후임목사는 장로드관 만 의논하고 본인과 의논이나 보고는 일체 금한다

    5) 교인들도 오늘부터 나와는 관계를 끊고 후임목사와 당회원들과 의논하라. 은퇴 후 후임이 설교를 부탁하기도, 축도를 부탁하기도, 보고하기도, 설날에 세배 오기도 하였으나 일체 금지시켰다. 그것은 후임이 불편할 것이며 필자 또한 진심으로 그런 그 자체를 원치 않았고 지금도 원치 않는다.

    7.원로후임 지침서 종합결론

    원로목사들이 모두 잘 처신하고 있는 줄 안다. 그러나 개중에는 아름답지 못한 처신을 한다고 소문이 파다하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평생을 교회를 위하여 헌신봉사 하였다면 은퇴후 선을 넘지 않고 헌신 봉사의 마음으로 직간접으로 그 교회를 돕는 일만 하고 인생 골인해야 아름다울 것이다.

    나는 이상의 원로 처신 형 중 어디에 속하는가. 어느 형이 진정 교회를 위하는 처신 형 인가. 어느 형이 후임과 교인들이 가장 원하는 형인가. 사실 어느 형이 가장 교회를 위하는 형이라고 성경에는 없고 헌법에도 없다. 그것은 각자 신앙양심에 따라 마음을 비우고 교회를 진정 위하는 편에 선다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후임이나 교회가 원로가 교회를 완전히 떠나기를 희망하는 것은 배은망덕한 무례한 행위이다. 어느 교회 시무장로는 원로장로가 당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법이 없는가 라고 필자에게 물어오기도 하였다. 그것은 원로장로가 당회에 참석하여 시무장로 시절처럼 좌지우지하는 월권 행위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원로목사나 원로장로나 월권해서는 안된다.

    잠시 세상에 살며 주님 맡겨주신 일을 하다가 잠시 후에 주님께로 가는 것이 인생이다. 주님 앞에 가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목회자들의 처신이 되어야 될 것이다. 성직자란 무엇을 위하여 한 평생을 산 직업인 인가. 앞으로 얼마나 살겠는가. 필자는 하나님 앞에 갔을 때에 얼마나 하나님의 과녁을 접근할지 의문이다. 원로목사는 마음을 비우고 교회에 일체 간섭 않는 것이 현명한 처신이라고 생각한다. 원로 목사님들은 마음을 비우고 구설수에 오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헌법에 원로목사 이름을 주보 어디에 두어야 한다는 조문은 없다. 원로목사를 존경하란 조문도 없다. 한 달에 한 번씩 설교시키고 축도시키란 조문도 없다. 세배하라는 조문도 없다. 대접하고 찾아뵈라는 조문도 없다. 그것은 우리의 문화요 예절에 속하는 것이다. 한국인은 한국 문화와 예의범절을 반드시 지켜야한다. 목사는 사표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필자는 연세 높으신 어른 성도들을 모시고 은퇴시까지 부목사들을 데리고 세배를 드렸다. 그것이 목사의 위상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높아지는 것이다. 그것이 어른 존경의 우리의 문화요 우리의 예절을 지키는것이다. 존경과 섬김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여야 한다. 존경과 섬김이 있는곳에 평화와 행복이 있다.



    초기에는 원로목사 이름은 주보 맨 위에 담임보다 더 큰 글자로 배치하고 그 다음 작은 글자로 담임 이름을 썼다. 그런데 점점 어디서 온 문화인지, 후임목사의 오만에서인지, 옆으로 오더니 이제는 주보 뒷면에 두는데 십계명에 인륜에 첫째 계명이 부모공경, 어른 공경하라는 것이고, 우리나라 문화는 어른을 존경하는 것이 예의이며 지당한 것인데, 요즘 이런 무례한 행태의 소수 목사들이 있는데 여러분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원로목사는 그 교회에 최고 어른이시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그렇게 예우하는가 그런 목사에게 묻고싶다.

    실무는 떠났지만 원로목사 이름을 주보 뒷면에 배치하는 것은 교회 어른이요 선배요 은혜를 입혀준 분에 대한 존경심과 예의가 전혀 없는 무례한이다. 예의와 존경심이 상식수준 이라면 그런 행동을 할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상식 수준도 안되는 무례한이 그 교회에서 목회를 얼마 동안 할수있을까? 서양가면 서양식 세배하고 동양에서는 동양식 세배하는 것이 예의이다. 분명 그런 예절이없는 목사는 단기는 몰라도 장기목회는 불가능하다고 과감히 단언한다.

    그것이 서양 문화이며 예절인가. 그렇다면 서양에 문화와 예절은 서양에 가서 지키고 동양에서는 동양문화와 예절을 지켜야 한다. 어찌하여 교인이나 당사자가 못 마땅히 생각하는 것을 은혜를 입은 후임이 그런 무례함을 행하여서 되겠는가? 은혜를 입지 않았다 하더라도 목사는 누구에게 던지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어야 한다. 동신교회 장로님과 일반 교인들도 김세진 목사님 후임에게 상식에 벗어났다 생각하고 서운해 했는데 선임자의 후광을 입은 일반인도 아닌 후임목사로서 그렇게 몰 상식해서 되겠는가. 한 마디로 목사는 목사이기 이전에 한국인, 한국 인간이 된 목사여야 한다.

    영세교회 김충열 목사님은 주보에 자기 이름을 전도사 밑에 아니 사찰 밑에 두었다. 그렇다고 그 교회 교인들이 김 목사님을 업신여긴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더 존경한다. 영세교회 목사님은 아버님 대를 이어 목회 하는데도 그렇게 겸손하시다. 그의 겸손이 그 덕목이고 그의 인격이다. 그런고로 존경을 받는다.

    중국에 성왕으로 불이는 “요” 임금이 있었다. 그는 아들을 제쳐 두고 신하 “순”을 왕으로 세우고 이렇게 말했다.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도 어린아이 하나에게 하는 것이 곧 내게 하는 것이라, 냉수 한 그릇이라도 내이름으로 대접하면 곧 내게하는 것이라고. 요즈음 목사들 중에는 목사는 목사인데 인간이 덜 된 목사가 더러 있는데 그의 인간됨이 그의 목회에 까지 그렇게 미치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석두 목사이다. 필자는 어느 교회 원로 후임의 오만한 행태의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제삿날이 3년밖에 없구먼. 예측대로 3년만에 제사를 지내고 말았다.

    필자의 이상 논한 논지는 교리가 아니다. 극히 상식에 속하는 것이다. 원로 목사 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고 그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앞서 논한 후임목사 지침 5가지를 실천하여야 한다. 원로가 수용하던 아니하던 그것은 그분의 몫이다. 후임은 실천하는 것이 원로 목사에 대한 예우이며 예의의 기본 원칙이라 생각한다.

    후임 목사들은 교회 평화와 발전을 위하여 덕이 된다면 광대 춤이라도 출수 있어야 한다. 임기응변 적으로 목사나 장로님들을 섬기는 자세로 처신 할줄 알아야한다. 어떤 후임은 왕이 된것처럼 오만하며 군림하려 하는데 오늘날 교회가 목사를 왕으로 모실 교회는 하나도 없다. 그런 태도는 아주 잘못된 자세이며 그렇게 처신하면 자기가 망하는 것임을 알아야한다. 서울 동신교회 담임목사님은 장기목회하신 전임에게  원로도 아니신데 원로목사 이상으로 예우한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그는 존경과 섬김의 영향법칙을 잘 아는 명석한 목사이다. 그러니까 전임지에서도 목회를 잘하셨다.

    원로목사도 사람인지라 섭섭하게 하면 좋아할 수 없고 감정이 있지 않겠는가? 천신만고의 풍랑을 해치며 평생 이룩한 교회에 부임하여 넘치는 복으로 살면서 고마워 할 줄도 모르는 배은망덕 자라면 자신은 어떻게 할 것 같은가.

    끝으로 양편 모두가 다 잘하여야 한다. 한쪽만 잘해서도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공동체는 관계성이 원만하여야 한다. 교회는 더더욱 그러하다. 원로는 후임을 배려하고 후임은 원로를 존경하는 마음자세를 가짐이 가장 아름답고 좋은 처신 법으로 생각된다.

    필자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처신하고 있다. 자랑이 아니라 필자와 같이 처신하기도 쉽지않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함에도 후임이 원로에 대하는 태도에 대하여 섭섭한 마음이 없는바 아니다. 그 섭섭함을 교회에서 표현하였다면 후임의 목회운명을 달라졌을 것이다. 교회를 위하여 침묵하는 것이며 교회를 위화여 단념하는 것이며 교회를 위하여 마음을 더더욱 비우고 참고 가는것 이다. 필자의 섭섭한 경험을 말한다면 3척 동자가 들어도 웃을 일이댜. 어느원로나 장로나 교인이 들어도 분노할것이다. 목사가 되기전에 인간부터 바로 되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필자는 교회를 위하여 멀리서 보고 협조하고 있다.

    신학교에 원로의 처신법도, 원로후임의 처신법도 교육하는 과정이 없다. 목회현장에서 문제에 부닥친 당사자를 위한 참고 할만한 서적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맨토를 찾기도 쉽지않기 때문에 필자는 나름대로 참고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기를 희망하며 이상을 논하였음을 이해하고 관용을 바랍니다. 원로목사나 후임의 처신에 절대진리는 없다. 하나의 참고서 입니다. 압축된 말 한마디만 남긴다면 상호 인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2013년 5월14일
    서울 무궁교회 원로 장달윤 목사./
    출처: USA아멘넷



    출처: 영락교회 http://club.youngnak.net/yn_contents/home/whats.htm#top

     

     

     

     


     

    이 내용은 1956년에 한경직 목사님께서 기독교방송국을 통하여 "기독교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으로 방송한 설교원고를 그대로 옮겨 만들었습니다.
    아직 기독교를 알지 못하는 여러분께 이 글을 드립니다.
    기독교란 어떤 종교인가를 이해 하시는 가운데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31)

     

     

    종교의 필요성

     

    기독교란 어떠한 종교인가? 하는 이 문제를 특별히 기독교를 아시지 못하는 여러 동포를 위하여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어떤 이는 종교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그 종교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지금은 과학시대 인데, 종교시대는 이미 다 지나가고 과학시대가 되었는데 우리가 과학만 잘 배워서 문화를 발전시키고, 우리가 각 방면에 진보하였으면 그만이지 이제 종교의 필요성이 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도 없지않고 있을 줄 압니다. 혹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줄 압니다.

    특별히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엽에 그렇게 생각하던 이 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여러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기를, 그저 과학을 잘 연구해서 새로운 과학적 진리를 발견하고, 또 여러 가지 과학의 이치를 발견도 하고 그렇게 되어 이세계가 진보하면 그냥 발전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온 세계인류는 행복스럽고 평화롭게 잘 살게 될 터이고, 참 문자 그대로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과학의 꿈은 깨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이와 같은 꿈은 20세기 초엽을 지나자마자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산산이 조각이 나버렸습니다.

    여러분, 가장 과학문명이 발달한 이 20세기의 양상을 잘 살펴보십시오. 전 세계를 휩쓴 세계 제1차 대전후 얼마가지 못하여서 전 세계 인류의 참화를 가져온 2차 대전, 그리고 이곳 저곳의 열전은 말 할 것도 없고 그냥 계속되는 냉전, 과학이 제일 발전되었다고 하는 이 20세기는 문자 그대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세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과학은 극도로 발달되어 지금은 원자시대라고 말합니다. 지금 그 결과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오늘 세계인류는 언제 이 원자탄이 우리 도시, 아니 머리 위에 떨어지지 아니 할까 하는 염려로 전전 긍긍하고있습니다.

    과학이 가져온 세계의 결국은, 첫째 피비린내 나는 세계, 둘째 전 인류를 불안과 공포에 빠지게 한 세계를 가져왔습니다.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동포여러분, 과학은 물론 필요합니다. 불처럼 필요합니다. 불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밥을 짓는데도 쓰고, 방을 뜨겁게 하는데도 씁니다. 얼마나 필요합니까?

    그러나, 그 불을 쓰는 사람이 바로 써야지 잘못 쓰면 오히려 인류에게 큰 피해와 화를 가져오고 맙니다.

    과학 역시 그렇습니다. 과학은 올바르게 써야지 이것을 사람이 바로 쓰지 못하면 오히려 인류에게 더 큰 참화를 가져 오고 맙니다.

    물론, 과학은 비행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원자탄 수소탄도 역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바르게 쓸 수 있는 사람을 과학이 만들지 못합니다.

    이 썩고 악한 사람의 근성을 바로 잡을 세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 가서 이 사람을 바로 만들 수 있습니까? 여기에 비로소 종교적인 문제가 들어옵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바르게 만들 수 없습니다.

    사람을 본래 지으신 조물주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인생의 공허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우리 사람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빵 문제가 아닌가? 빵을 달라고 대중은 부르짖습니다. "나를 따라 만 오라. 그렇게 하면 내가 네게 빵을 주리라"고 어떤 지도자들은 외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말도 옳습니다. 과연 ".."가 큰 문제입니다. 우리 한국 민족에게는 정말 무엇보다도 경제문제를 해결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생각할 것은, 이 문제만을 해결한 사람이 과연 그 생활에 참된 만족이 있었습니까? 공산국가에서는 이 빵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하는 약속을 가지고 전 국민을 노예와 기계로 삼고 있습니다. 설사 그들이 빵 문제를 해결했다고 합시다.

    여러분, 그 독재 아래서 시달리는 그들에게 과연 참된 행복이 있는 줄 믿습니까?

    민주주의 아래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이 문제를 해결한 나라는 아마 제 생각에는 미국일 것입니다. 미국은 참된 민주주의 정책아래에서 국민에게 자유를 확보하면서도 모든 생활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한 미국사람에게는 참된 만족이 다 있을 줄 압니까? 바로 오늘 아침에 제가 어떤 책을 들쳐보니 미국에서 매년 생의 권태를 느껴서 자살하는 사람이 16,000명 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만일 육신 만이라 할 것 같으면, 아마 밥만 먹고 옷만 잘 입으면 만족할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는 바와 같이 사람에게는 육신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속에는 이상한 불길, 혹은 영혼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다른 조건이 만족하다고 할지라도, 이 사람에게 다른 조건, 이 영적 만족이 없으면 그는 언제든지 텅 빈 느낌,  공허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말씀 하시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사람이 떡만 먹으면 만족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이론은 사람을 단순히 한 짐승과도 같이 보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짐승이상의 다른 무엇이 그 육체 속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떡 이상의 무엇을 그리워합니다. 그 이상의 무엇을 탐구합니다. 그 이상의 무엇을 얻지 못하는 한 언제든지 공허감을 느끼고야 맙니다.

    여기에 종교문제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인생은 어디로 갑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독일에 쇼펜하워라고 하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 이가 한번은 어떤 공원에 가서 의자에 외로이 앉아 깊이 인생문제를 명상하였다고 합니다. 깊은 명상에 잠겨서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어느덧 황혼이 깃 들어 공원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는데, 공원지기가 공원을 둘러보다가 한 옆을 보니까, 의자에 어떤 노인이 앉아서 눈을 그냥 감고 나가지를 않고 있는 것을 발견 했습니다.

    이 공원지기는 아마 어떤 빌어먹을 노인인가 생각하고 큰소리로 "이거 누구야, 이 사람 어디서 왔어!"하고 고함을 쳤다고 합니다.

    그때에, 쇼오펜하워가 눈을 번쩍 뜨면서, "어디서 왔어? 아 내가 그걸 알면야 나는 그것을 몰라서 지금까지 이렇게 눈을 감고 앉았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인생이 어디서 왔습니까? 내가 어디서 왔습니까?

    여러분, 그렇게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몇 해전에 제가 어떤 장례식 주례를 맞아 갔었습니다.

    그때 한 오십 세 되는 여자 교우가 세상을 떠났는데, 방금 출판을 하려는 직전에 만주에 가있던 아들이 그 소식을 듣고 급히 집에 돌아 왔습니다. 들어서자 마자 이 아들은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 관을 출관 못하게 그냥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울부짖는 말이,

    "어머니,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셔요. 어머니,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갑니까?"

    그 말이 지금도 제 귀에 쟁쟁합니다.

    여러분,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인생이 다 산후에는 어디로 갑니까?

    우리는 흔히 생로병사 (生老病死) 즉 四苦를 말합니다. 죽은 다음엔 어떻게 됩니까?

    여기에 종교문제가 들어 옵니다. 어떤 이는 이 문제에 대단히 등한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참된 종교의 신앙심이 없이는 참된 영혼의 만족과 행복이 없습니다.

    죽음은 초막에나 궁궐에나 다 같이 옵니다. 노인에게나 청년에게나 같이 옵니다.

    ,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종교란 이름아래 별별 것이 다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종교를 어떤 길이 참 길인지 택하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누렇다고 다 황금이 아닙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汰?없느니라."

    이렇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과학 시대일수록 종교가 더욱 필요합니다. 또 종교가 없이는 인간심령의 깊은 기갈에 만족을 줄 수가 없습니다. 또 종교가 없이는 깊은 인생문제를 깨달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란 어떤 종교인가?

     

    지금 기독교하면 여러 가지 이름이 많습니다. '예수교' 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혹은 교파를 따라서 '장로교' '감리교' 니 이렇게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 기독교의 첫 이름, 처음에는 우리 기독교를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그 첫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제일 쉬운 줄 알아서 첫 이름을 제가 여러분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기독교의 첫 이름

     

    첫 이름은 다른 것이 아니고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 우리 기독교 성경을 읽어보신 이가 계신지 모르지마는, 성경 가운데는 구약과 신약 두 부분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 중의 신약이 우리 기독교의 내용을 말해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약을 펼쳐보면 거기 처음 네 책은 전부 '복음'이라고 하는 말로 씌어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 그것입니다.

    마가복음 1 1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이렇게 시작하지요.

    또 마가복음 1 15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지요.

    "때가 찼고, 하나님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복음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 기독교를 "기독교"라고 부르기 전에 "복음"이라고 불렀는데, 여러분, 그 뜻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물론 한문 글자 뜻대로 '복된 소리'란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현대말로 하면, 그저 '기쁜 소식', 지금은 '소식'이란 말을 영어로 그냥 써서 '뉴스(news)'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말로 표현하면 '좋은 뉴스' 입니다.

    처음에는 기독교를 부를 때 '좋은 뉴스' 또는 '기쁜 뉴스'라 이렇게 불렀습니다.

    전에 아테네 사람들이 흔히 새것을 듣기 좋아해서, 언제나 뉴스를 듣기 좋아한다고 하는 말이 책에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누구나 뉴스는 좋아합니다. 그래서 라디오를 듣게 될 때 뉴스시간을 좋아해서 더구나 뉴스시간을 제일 많이 듣습니다. 또 우리가 신문을 왜 사서 늘 읽습니까? 그 가운데 뉴스가 있는 까닭입니다.

    벌써 40년이 거의 됐습니다마는, 그 때에 일본이 항복 했다고 하는 뉴스가 라디오를 통해서 들어올 때, 그때 우리가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어떤 이는 기뻐서 날뛰다가 뇌출혈이 되어서 죽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뉴스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큰 뉴스도 있고 작은 뉴스도 있고, 그래서 흔히 언론계에서는 이런 말을 하지않습니까. 가령 금년엔 제일 큰 뉴스가 어떤 뉴스였다고, 여러분, 이런 말을 들을 때, 혹 이런 생각을 더러 해 보셨는지요.

    이 우주가 창조되고, 인간이 이 지구에 나타난 이후에 제일 큰 뉴스가 과연 어떤 뉴스였던가 말입니다. 가령 역사적으로 ' 동양' 하면 동양에서 제일 큰 뉴스가 어떤 뉴스였던가?

    징기스칸이 이백만 대군을 몰고 히말라야산맥을 넘어가는 뉴스, 물론 굉장했을 것입니다. 혹은 서양으로 말하면, 나폴레옹 (Napoleon)이 온 유럽을 지배하는 그 뉴스였던가?, 콜럼버스(Columbus)가 대서양을 횡단해서 처음으로 새 대륙을 발견한 그러한 뉴스였던가?

    다 굉장한 뉴스입니다. 여러분, 한국의 역사를 통해서 제일 큰 뉴스가 무엇이었던가 를 생각해보셨습니까? 신라의 반도통일,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뉴스, 신문이 있었다고 하면 아마 큰 뉴스로 보도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뉴스 가운데는 크다고 반드시 좋은 뉴스는 아닙니다. 여기 1950년의 6.25사변, 물론 전 세계를 통해서 큰 뉴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 뉴스가 될 것이 무엇입니까? 큰 뉴스라고 반드시 좋은 뉴스는 아닙니다.

    그런데, 제일 큰 뉴스가 될 뿐더러 제일 좋은 뉴스, 그런 뉴스가 무슨 뉴스인가를 여러분 생각해 보셨습니까?

    , 아무리 좋은 뉴스라고 하지만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 가령 일본이 항복했다고 하는 뉴스는 우리 한국민족에게는 참 좋은 뉴스입니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에게야 그것이 좋은 뉴스가 될 것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들에게야 오히려 슬픈 뉴스이겠지요.

    어떤 뉴스는 크고 좋은 뉴스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만 좋은 뉴스가 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좋은 뉴스가 못 되는 뉴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일 크고, 또 제일 기쁘고, 또 제일 좋고 동시에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요, 어느 민족에게나 어느 국가에게나 어느 시대를 물론하고 좋은 뉴스가 무엇인가?

    이제 그런 뉴스의 내용을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주 최대의 뉴스

     

    여러분, 기독교는 우주가 생긴 이후에 제일 큰 뉴스입니다. 기독교는 우리 인간이 들은 모든 뉴스가운데 제일 좋은 뉴스입니다. 기독교는 누구에게나 어떤 민족에게나 좋은 뉴스입니다.

    저 북빙양 근방에 사는 에스키모에게나, 남양군도에 사는 흑인들에게도 백인이나 황인종이나 물론하고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를 그냥 옛날에는 '좋은 뉴스'라고 그랬습니다.

    , 이제 좋은 뉴스의 내용을 간단히 여기서 말하고 또 이 앞으로 조목조목 들어서 자세히 설명해 볼까 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좋은 뉴스를 간단하고도 명확하게 쓴 말씀이 우리 성경에 한절 있습니다. 혹 예수를 믿는 이가 어느 성경구절인지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요한복음 3 16절의 말씀입니다. 이 뉴스는 누구로부터 시작하지요?

    하나님께로부터 시작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를 통치하시고, 인간을 본래 지으시고, 인간의 운명을 주장하시고, 인류의 모든 역사를 설비하시는, 유일무이하신 대주재 하나님께서 하신일, 이런 우주적 뉴스를 전에 들어 본적이 있습니까? 과연 큰 뉴스입니다. 제일 큰 뉴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다고 했지요?


     

    하나님의 사랑

     

    "이세상"은 세계란 말입니다. 물론 세계라 하면 온 지구를 가리킨 말입니다. 세계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산도 있고, 들도 있고, 나무도 있고, 풀도 있고, 금수도 있고 다 있습니다. 그 위에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를 사랑하셨습니다. 세계를 사랑하셨다는 말은,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했지마는 특별히 세계 위에 사는 사람을 사랑하신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이 세상을 잠깐만 생각해 보세요. 민족과 민족이 서로 미워해 싸우고, 서로 죽이고 하는 이런 세상입니다. 슬픔 많고, 미움 많고, 고통 많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셔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있습니다.,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주기를 좋아합니다. 사랑이 클수록 더 귀한 것을 줄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 중에 제일 귀한 것은 아마 우리의 자녀일 것입니다. 자녀 가운데 외아들이 있다면, 외아들처럼 귀한 것이 없을 줄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세상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세상에 주시고 세상에 보내셨단 말입니다. 무엇 하려고 이런 사람을 도와주시고, 이런 사람을 구원해 주시고, 이런 사람을 축복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보냈다고 하는 사실, 이거 얼마나 큰 뉴스입니까! 과연 천지가 진동할 만한 뉴스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않고 영생을 얻겠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물론 이 시간에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 사실만 잠깐 생각하여도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기독교는 곧 하나님을 믿는 종교요, 사랑의 종교요, 독생자 그리스도의 종교요, 믿음의 종교요, 영생의 종교입니다.

    위에서 말한 기독교란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가장 쉽게 말하면, 제일 큰 뉴스라고 제일 좋은 뉴스라고 또 누구에게나 좋은 뉴스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기독교를 단순히 복음이라고 일컬었다고 여러분에게 말씀 드렸습니다.

    , 뉴스의 내용을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면, 성경에는 요한복음 3 16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 이니라 "

    이렇게 말씀할 수 있을 줄 압니다., 여러분 이제부터, 이 뉴스를 좀 더 해설해야 되겠습니다.

    이 뉴스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뉴스입니다. 물론, 우리 한국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옛날로부터 지금까지 믿어왔습니다., 우리 한국사람뿐 아니고, 서양 사람들도 동양 사람들도 거의 다 대부분은 하나님에 대하여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옛날에도 혹 어떤 사람들, 또 특별히 근자에 와서는 공산주의를 신봉 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부득이 먼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또는 하나님은 어떠하신 하나님인가에 대하여 잠깐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무신론의 우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셨는지요.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이론입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대단히 담대합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주장하기가 심히 곤란한 이론입니다. 그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이 계시다는 이론, 곧 유신론에 대한 논증은 그 증거가 하나만 있어도 능히 증명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신론에 대한 논증,, 하나님이 안 계시다 하는 논증은 사실 전우주와 전우주의 역사를 탐색해서 논증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가령 쉽게 예를 들면, 우리한국에 '갈매기'란 새가 있는데, 갈매기라는 새가 있다는 그런 논증은 만일 어떤 바닷가에서 그 갈매기가 남긴 발자국 하나만 보고도 이것을 보니까 갈매기가 한국에 있지 아니하느냐고 이렇게 논증하기가 대단히 쉽습니다.

    그렇지만, 만일 한국에 갈매기란 새가 없다고 논증하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대단히 어려울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인천지방에 만일 갈매기가 없다는 것을 다 증명한다 할지라도 부산근방에 있는 지 어떻게 압니까? 목표근방에 있는지 어떻게 압니까 ?

    갈매기가 사실 한국에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할 것이면, 전 삼천리 방방곡곡을 답사해서 증명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우주에 없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하면, 우선 이 지구 위에 하나님의 자취가 없다는 것을 논증하여야 되겠고, 그 다음에는 모든 다른 별, 유성과 행성에서도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것을 가서 증명하여야 되겠고, 또 지금 하나님이 계신 증거가 없지만 옛날에 계셨던 증거가 있어도 안 될 터이니까. 전 우주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계시지 아니 하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될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무신론의 논증이 되지 아니합니다. 사실 이와 같은 무신론의 논증을 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과 같은 전지전능자가 아니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가지고 70년도 못사는 사람이 함부로 이와 같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안계시다고 주장하는 것은 보통사람으로는 이해하기 곤란한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생각해보세요.

    가령 무신론이 옳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렇다면, 우주와 시간을 만든 이는 없습니다. 이 우주와 우리인간의 두뇌의 고안자는 없습니다. 우리인간의 두뇌라는 것도 한갓 물질분자의 우연한 배합으로 되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런 물질 문자들이 그저 우연히 모여서 된 그런 두뇌의 사색작용을 우리가 과연 시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두뇌에서 나오는 무신론을 우리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실, 무신론 혹은 유신론은 무신론 자체가 그 무신론을 파괴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모순과 당착을 모르고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은 실상 보통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곤란한 일입니다.

    셋째로, 또 생각해 보세요. 무신론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적극성이 없고, 소극적인 이론입니다. 부정적 이론입니다. 여기 어떤 관념 가운데, 가령 어둡다고 하든지 거짓되다고 하든지, 구부러졌다고 하든지 하는 이런 관념들은 다 부정적 관념입니다. 이 부정적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곧 긍정적 관념이 있음으로 비로소 생긴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빛이 없으면 어둡다고 하는 말이 있을 이치가 없습니다. 또 거짓이라는 것도 참이 있기에 거기에 대한 부정적 관념인 것입니다. 참이 없으면 거짓이란 말도 없을 것입니다., 구부러졌다는 것도 곧은 것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구부러졌다는 말도 생기고, 그런 부정적 관념이 생긴 것입니다.

    사실, 어둡다고 하는 관념이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빛이 있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거짓이라는 관념이 있는 것은 이세상에 참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구부러졌다고 하는 말이 있는 것은 이세상에 바른 것이 있는 증거입니다.

    사실 무신론적이라고 하는 그런 부정관념이 있는 자체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증명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지적으로 아무런 생각도 해보지 않고 무신론을 주장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 말씀대로 우리가 답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시편 14 1절에 어떻게 말씀했는지 아십니까?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어리석어서 그렇습니다. 어리석어서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그런 어리석은 이는 별로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줄 압니다. 그 어리석은 것은 여러분께서 잘 계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1956 1 10일 호 타임(TIME)잡지 종교란에 미국의 여론조사로 유명한 갤럽(Gallup)박사가 하나님의 신앙에 대한 조사를 한 것을 발표한 글이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의 시민들 중 여러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느냐?" "하나님을 왜 믿느냐?"를 물어보고, 그 결과를 발표했는데, 미국시민가운데  96% 다시 말하면 100명에 96명은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대답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제일 많은 이유부터 열거해 보면,

    첫째로, 우주의 질서와 그 위대한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있는 것을 믿습니다.라는 대답이 제일 많고,

    둘째로, 우주와 인간의 기원을 생각해보니 하나님이 반드시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믿습니다. 하는 것이 두 번째 대답이었습니다.

    셋째로, 성경의 교훈을 보니까 반드시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넷째로, 내 개인의 과거의 경험을 보니 반드시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다섯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나는 이 슬픔 많은 세상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하나님을 믿으실 때, 혹은 이런 대답, 혹은 저런 이유로써 하나님을 믿으시는 줄 압니다.

     

    하나님의 존재

     

    지금까지 논술한 것으로, 기독교는 좋은 뉴스, 즉 복음이란 말씀과, 또 이 뉴스는 하나님에 대한 뉴스라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데,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도 있기 때문에 이 무신론이라는 이론이 이지적으로 생각해 볼 때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몇 가지 생각했습니다.

    이제 계속해서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어찌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가? 그 이유를 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게 몇 가지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로마서 119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이런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다음절에는,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가?

    첫째로, 우리 사람 자체를 가만히 살필 때, 안으로 살필 때, 내성할  때에 우리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을 깨닫습니다.

    또 한 가지는, 바깥 모든 세상, 외계의 대자연과 전우주를 바라볼 때 또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전능을 우리는 자연히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먼저 이 시간에 우리 손에 보여주신 그 하나님의 자체를 잠깐 찾아 볼까 합니다.

     

     

     

    인생의 종교본능

     

    첫째는 인간의 종교입니다. 사람이 금수와 다른점이 여러 가지 있지요. 그 가운데 가장 현저한 것은 우리 사람에게는 종교가 있습니다. 금수 사회에는 종교가 없습니다.

    문명한 사회에는 교회가 있고, 야만 사회에는 신당이 있습니다. 동양에도 그렇고, 서양에도 그렇고, 아프리카에도 그렇고, 또 현대 남양군도에도 그렇고, 또 현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옛날에도 그렇고,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어떤 사회문화 가운데 들어가 보던지 종교가 없는 데는 도무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며, 하나님께서 안 계신 듯이 사는 사람들도 흔히 위급하면 하나님을 찾습니다.

    저는 믿지 아니하는 형제와 이야기할 때, 그 사람 말이, 자기는 하나님 앞에 기도는 도무지 않지만 몇 해전에 38선을 몰래 넘어 올 때에는 하나님을 찾았다고 대답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괴뢰군에 억지로 붙들려 나갔다가 석방되어 나온 애국 청년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청년이 괴뢰군과 함께 몰려서 유엔군이 북진하여 올라갈 때, 저 삼각산 어떤 골짜기에 숨었는데 유엔군 비행기들이 대편대를 지어와서 폭격을 하고 기관총 소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보니까 그 저 공산당들과 정치 보위부에 있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솔포기 아래 엎드려서 "하나님, 하나님"하고 하나님을 찾는 소리가 크게 들리더랍니다. 사람이 위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어떤 인류학자는 "사람은 불치병적으로 종교적이다"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여러분, 두 가지를 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본능이 있는데, 그 본능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본능을 만족시킬 대상이 있습니다.

    가령, 우리 사람에게는 먹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 먹는 본능을 만족시킬 음식물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사교적 본능이 있습니다. 사교할 수 있는 많은 다른 친구들이 있습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성에 대한 본능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남성과 여성이 있습니다. 본능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 대상이 있습니다. 사실은 그 대상이 있기 때문에 본능이 생겼습니다. 가령 눈을 보면, 눈이 필요하게 쓸만한 빛이 있을 것입니다. 빛이 없다고 하면 눈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귀가 있습니다. 이 귀가 들을 만한 소리가 있습니다.

    , 우리 사람의 육체를 가만히 보면 감각이 있습니다. 가령 감각하는 기관, 눈이든지 코든지 하는 감각이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 대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코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반드시 냄새가 있습니다. 만일에 세상에 빛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 사람에게 눈이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책을 보니까, 깊은 굴 속에 못이 혹 있을 수가 있는데, 그런 못 가운데 사는 고기는 다른 것은 다  있지만 눈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항상 캄캄한 데 사는 고기에게 눈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감각기관 있는 것은 벌써 대상이 있는 까닭에 감각기관 생긴 줄 압니다. 빛이 있어서 눈이 생겼고 , 소리가 있어서 귀가 생긴 줄 압니다.

    그러면, 우리 사람은 이런 종교적 동물이요, 종교성이 있고 무엇을 숭배하려고 하는 영혼으로써 동경하는 이런 마음, 부인하려고 하여도 부인할 수 없는 종교적 욕망이 있는데, 여기에 대한 대상만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반드시 있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인간 속에 종교성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계신 까닭입니다.

    왜 봄에 풀이 위로 자랍니까? 위에 태양이 있는 까닭입니다. 왜 사람의 심령이 높은 것을 앙망하고 동경합니까? 그 위에 하나님께서 계신 까닭입니다.

    그래서 플라토(Plato)라고 하는 철학자는 말하기를, "무신론은 한 질병이다"라고 했습니다.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환자입니다.

    우리는 다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병으로 보지 못합니다. 이런 소경은 빛이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인간의 종교성을 살펴볼 때, 우리는 자연히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도덕성

     

    다음에는 우리 인간을 가만히 살펴 보십시오.

    둘째로, 인간에게는 도덕이 있습니다.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칸트(Kant)의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유명한 말을 다 아실 것입니다. "하늘에는 별이 있고 사람의 속에는 도덕적 의식이 있다" 보통으로 말하면, 양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사람 된 증거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의 가슴속에는 어떤 사람을 물론하고 이 양심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무슨 일을 대할 때든지,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라고 분별해줍니다.

    물론 어떤 때는 양심이 마비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마비는 안됩니다. 언제나 어느 한구석에서 선악을 분별하여, 선하게 할 때는 마음이 기쁘고, 악한 일을 할 때는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러워집니다. 이 양심이란 것이 언제든지 속에 있어서 잘 할 때는 칭찬해주고, 잘못 할 때는 책망해줍니다.

    물론, 여기에도 인간의 이런 도덕성을 부인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양심을 여러 가지로 설명해 내보려고 애씁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장하기를, "양심은 한 종족의 공통된 유전적 산물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로 후천적 원인으로써 설명하려고 애씁니다.

    물론 양심가운데 후천적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 후천적 요소를 다 제하여 버리고도 그 속에 선천적 요소가 있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도덕적인 법칙이 어디서 왔는가? 성경은, "양심은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다음에 바르게 살기 위하여 도덕적인 법칙, 곧 하나님의 율법을 그 속에 새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계에는 자연법칙을 두신 것입니다. 모든 물질은 이 자연 법칙을 준수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생활에 있어서는 이 도덕적 법칙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물질과 자연법칙과의 관계와 우리사람과 도덕적법칙, 즉 양심과의 관계는 다릅니다. 자연법칙과 물질과의 관계는 그저 그대로 되는 것 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사람은 인격적존재로 지음을 받아 자유가 부여 되었음으로 그 관계가 다릅니다.

    우리 인간은 선과 악을 택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이 자유를 바로 쓰기 위하여 양심이 또한 부여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양심의 방향을 따라 자유를 옳게 사용할 때에만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렇게 양심은 누구에게나 새겨져 있습니다.

    이 골짜기를 파도 물이 나오고, 저 골짜기를 파도 물이 나오면 자연히 그 속에는 물이 있다고 결론하는 것이 아마 정당한 이론일 것입니다. 이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살펴볼 지라도 양심이 있고, 저 사람의 마음속을 깊이 살펴볼 지라도 거기에도 반드시 양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배후에는 큰 양심이, 우주의 배후에는 대 양심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우리가 이 음성을 들을 때, 자연히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미 말했지만, 오늘날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이 양심을 전연 무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 양심이 화살 맞은 것처럼 되어서 마비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양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요히 자리에 누울 때, 혹은 아침 일찍이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음성은 곧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을 스스로 살펴볼 때, 다시 말하면 인간의 종교성, 인간의 도덕성을 살펴볼 때에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확실히 믿게 됩니다.

     

    우주의 원인

     

    그리고, 지금은 로마서 1 20절에 가르쳐 주시는 말씀, "그 만드신 만물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나타내셨다" 하는 말씀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현대를 우주시대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이 우주가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신다는 뜻입니다. 이 면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간단히 두 가지 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과의 법칙'의 견지에서 이 우주를 보십시오. 우리가 다 인과의 법칙을 믿습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둡니다. 이 인과의 법칙이 과학의 기초가 됩니다. 인과의 법칙대로 안되면 과학이 성립 못 될 것입니다.

    인과의 법칙은 꼭 옳습니다.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대 우주를 볼 때, 이것은 어떤 큰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 큰 대 우주의 이런 결과가 생겼은 즉 반드시 제일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제일 원인이 무엇일까요? 제일 원인은 하나님이라고 결론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지으신 까닭으로 이 우주가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다"라고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는 이 우주를 볼 때 큰 운동하는 움직임을 보고 특별히 놀랐습니다. "아무래도 이 움직임을 처음 시작한 분이 있겠다. 그 분은 하나님일 것이다."이렇게 또한 주장했습니다.

    이 인과의 법칙으로 보아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분명히 알 수 밖에 없는 데, 이 진리를 부인하고자 하면 우주는 본래부터 영원까지 그냥 있다고 요새 범신론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무시 무종하다고 주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우주가 영원하다. 이 우주 자체가 영원하다" 하는 이런 주장은 오늘의 과학시대에 와서는 그렇게 강하게 주장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오늘날의 과학적 연구대로 살펴보면, 이 우주는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이 우주는 일정한 시간에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을 거의 단언합니다. 요즘 과학자나 천문학자들은, 이 지구나 태양계나 우주전체가 몇 해전부터 시작이 되었겠나 그것을 측정해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라늄 원소의 그 방사하는 것을 측정해보고 어느 정도까지 확실히 압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우리가 사는 이 지구의 연령은 대략  33 5천만년쯤 되었다고 합니다., 우주전체의 연령은 약 백억년으로 추산합니다. 물론 상당히 오래 전이지요. 그러나 일정한 시간에 시작할 때가 있다고 하는 것을 다 인정합니다.

    이 지구에는 여러 가지 생물이 많지마는, 생물이 이 지구에 영원히 있었는가?

    지질학을 연구해 보면,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생물이 자라나고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지구에 영원부터 살았느냐? 지질학을 연구해보면, 일정한 시기 그것도 아주 말기에 인간이 나타났습니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된 그대로 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 지구에 영원부터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식물도 영원부터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주자체가 영원 전부터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히브리서 3 4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
    집마다 지은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 이시라"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인과의 법칙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말할 때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대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결과에 원인이 있다면, 하나님의 원인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존재의 배후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 아닌가?" 이렇게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무지한 말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무한절대의 신입니다. 하나님의 배후에 다른 원인이 있으면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여기 수학을 좀 공부해 보신 분은 무궁대 또는 무한대의 개념을 알 것입니다.

    하나를 하나로 제하면 하나입니다. 하나를 영으로 제하면 무한대라고 합니다. 이 무한대는 열을 영으로 제하나, 만을 영으로 제하나 모두 무한대로 같습니다. 그런 반대의 이론은 이론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과의 견지에서 볼 때에 이 우주는 반드시 지은이가 있을 것이 분명하고, 그 우주를 지은이가 계시다고 할 것이면 무한절대의 하나님인 것을 우리가 성경에 있는 대로 아니할 수 가없는 것입니다.

     

    우주의 질서와 고안(考案)

     

    , 이 우주를 다른 면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우주의 현상을 자세히 살펴볼 수가 있습니다. 살펴보면 되는 대로 복잡한 것 같지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조직이 꼭 있고 질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을하늘을 쳐 다 보면, 별이 되는대로 널려 있는 것 같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망원경을 통해서 자세히 보면 꼭 조직이 있습니다. 태양계의 조직이 있습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유성들이 있습니다. 일정한 궤도가 있습니다. 일정한 속도가 있습니다.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유성들이 있습니다. 일정한 궤도와 속도가 있습니다. 이런 항성계가 여럿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여서 갤럭시(별무리)가 되고, 이런 것들이 많이 모여서 대우주가 형성됩니다. 아무리 크지만 조직과 질서가 있습니다.

    큰 것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물질을 분석하는 과학자들의 말을 들어볼지라도 그렇습니다. 분자를 원자로 분석합니다. 원자속을 들여 다 보면 그 속에도 양자가 있고, 그 양자를 중심하여 빙빙도는 전자가 있는 것이 마치 작은 우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큰 데서부터 작은 데까지 질서가 있습니다.

    , 보십시오. 이 우주의 모든 현상을 보면 모든 것에 고안이 있습니다. 꽃을 보십시오. 이 꽃 한 송이를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우리가 그와 같은 꽃을 만들려고 하면 얼마나 많이 생각해야 그 같이 만들 수 있겠나? 꼭 고안이 있습니다. 새 한 마리도 고안이 꼭 있습니다. 나비 한 마리도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어떻게 아름답게 생겼는지!

    그것뿐 만이 아닙니다. 동물과 식물이 서로 조화되어 살게끔 된 것을 보면, 기막힐 정도로 놀랍습니다. 흔히 꽃이 있으면 벌들과 나비가 왔다갔다하지요. 벌과 나비가 왜 왕래합니까? 물론 꽃 속의 꿀을 빨기 위해서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나, 꽃은 꿀을 거져 줍니까? 그렇지않습니다. 그것들 때문에 꽃가루가 서로 왔다 갔다 해서는 결국 씨를 맺게 만듭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동물이 쓸 데 없다고 호흡으로 내버린 탄산가스는 나무와 풀에 유익합니다. 나무와 풀은 동화작용으로 탄소를 섭취하고 내버리는 산소는 동물에게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누가 이렇게 동물과 식물이 협동하여 살게 만들었습니까?

    이 우주에는 꼭 고안이 있습니다. 일정한 목적에 의한 고안이 있습니다. 비 오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묘한 것이 있습니다. 태평양에 가면 물이 많지요. 햇빛에 쪼여서 남 태평양의 물이 수증기가 되어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공중에서 찬 바람을 만나서는 다시 물이 되어 비가 되어서 떨어집니다. 빗물이 떨어져서 몇 가지 작용을 하는지 아십니까?

    여러 가지 작용을 합니다. 우선 공기를 깨끗하게 합니다. 이 물방울이 내려오면서 공기 속의 먼지를 모두 잡아가지고 내려옵니다. 그러기에 비온 다음 공기가 신선합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는지 아십니까?

    비가 오면 이 땅을 아주 깨끗이 씻어줍니다. 비가 오래 안 오면 이 땅이 아주 더러워집니다. 저 백운대위의 먼지를 누가 씻습니까?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서 깨끗이 씻어버립니다. 그것뿐입니까? 빗방울이 사막에 떨어져서는 풀이자라고, 곡식이 자라고, 나무에 열매가 맺게 합니다.

    땅을 깨끗이 씻은 빗방울이 모여 시내가 되고, 강물이 되어서 더러운 것들을 다 씻어다가 마지막에는 바다로 들어갑니다. 바닷물이 짭니다. 왜 바닷물이 짭니까? 짜야 소독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비하나를 가지고 이렇게 깨끗이 소제하고, 더러운 것을 다 흘러버리게 하고, 풀과 나무가 자라게 하기 위하여 간단없이 순환하게 합니다.

    전에 제가 제네바에 가보니, 거기 호수 옆에 꽃을 가지고 시계를 만든 것이 있었습니다. 글자를 모두 꽃으로 만들었더군요. 그 속에 기계를 묻었습니다. 큰 바늘이 돌아갑니다. 꽃 시계입니다. 이 꽃 시계를 보고, 저절로 되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고안있는 우주를 보면서 고안자 곧 창조자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큰 정신 병자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면 이 우주에 대한 이론을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나는 모르겠다"는 액나스티즘 즉 불가지론(不可知論)이요, 또 하나는, "이것이 다 거저 되었다. 우연히 되었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시편 19 1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궁창이 그의 솜씨를 우리에게 나타냅니다.

    과연 하나님은 계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애쓰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를 주장하시고, 이 하나님께서 개인의 운명을 다스리고, 이 하나님께서 국가와 민족의 전체 운명도 총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심는 대로 거두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행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시되 수 천대까지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화를 삼 사대까지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우리 동양에도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는 튼튼히 믿고, 어떠한 환경을 당할지라도 흔들리지 말고 이 신앙을 전파하여 우리민족을 구원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의 神性

     

    지금은, 예수는 누구이시며, 그의 하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한번은 제자들을 모아 놓으시고 물으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각각들은 대로 말했습니다.

    "어떤 분은 엘리야라고 하더이다"

    "어떤 분은 예레미야라고 하더이다"

    "어떤 분은 세례요한,또는 선지자 가운데 한분이라고 하더이다."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다시 물으시기를,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일어나며 하는말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니이다."

    '그리스도'란 말은 '메시야' 곧 구주라는 말입니다.

    이 대답은 모든 제자들의 의견을 대표하는 대답입니다.

    아직도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를 그 당시의 사람들처럼 선지자 중의 하나, 다시 말하면 성자 중의하나, 혹은 위대한 종교가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실상 예수를 믿는 분들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의견은 이론적으로 성립도 되지 못합니다.

    물론 예수는 위대한 도덕적 사표인 것은 틀림 없습니다. 물론 예수께서 위대한 종교가 가운데 한 분이란 것도 틀림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예수는 과연 성인인 것을 인정치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산상보훈을 보든지 그의 순결 무흠한 생활을 볼 때에 누가 예수님을 성자가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가만히 성경을 읽어보면, 그는 산상보훈만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다른 말씀도 가르친 것이 많습니다. 가령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브라함 이전에 있었노라. 내가 죄를 사하여 줄 권세가 있노라"

    고 말씀하시면서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직접 사하여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또는, "내가 장차 잡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터이요 3일만에 다시 살아나겠다"고 미리 말씀 하셨습니다. 또 사실 살아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 이가 바로 승천하시기 전에 말세에는 자기가 다시 구름을 타고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 곧 하나님을 보았거늘 너희들은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느냐?"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하신 이 모든 말씀이 사실입니까?

    또는, 사실이 아닙니까? 만일 이 모든 말씀이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를 도덕적 인물이라고 우리가 인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사기자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혹 그렇지 않으면 순전히 정신병자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감히 이런 생각이라도 하여 볼 수 있습니까? 물론 할 수 없지요. 그렇다면 이 하신 모든 말씀이 사실인데, 이것이 사실이라 할 것이면 그는 정녕 사람이상 입니다. 사람만은 아닙니다. 과연 베드로가 고백한 바와 같이 그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인정치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나, 옛날부터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이 그는 만유의 주로 만왕의 왕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단순히 도덕적 위대한 종교가로만 믿고 그 신성을 부인하는 이론은 도무지 성립되지 못합니다.

    예수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삼위일체의 한 분이시요. 곧 말씀이십니다. 그 말씀이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

     

    이제 그의 하신 일을 간단히 생각해 보고 자 합니다.

    그의 하신 일을 간단하게 말하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의 교훈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 것과 하나님의 경륜이 어떠하신 것이며 우리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어떠한 의무가 있다고 하는 그 모든 진리를 우선 가르쳐 주셨습니다.

    둘째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의 실제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생활이 어떠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신 말씀은 이 뜻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의 성품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러나 물론 제일 크신 일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써 만인의 죄를 대속하신 일입니다.

    이제, 인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실인 십자가의 뜻을 간단하게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죄인은 반드시 죽으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었습니다. 한 사람도 하나님 안에서 능히 옳다고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모든 사람은 다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며 또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어서 이 불쌍한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해결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그 사랑으로써 세상에 보내시고 만민의 무거운 죄의 짐을 그의 어깨에 지우셨습니다. 그는 만민의 죄 값으로 십자가에서 만민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또한 죄의 형벌을 받아서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이루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지만 그 죄는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온전히 하나님 앞에 갚았습니다.


     

    십자가의 속죄

     

    우리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지만, 그 죄는 주님께서 담당 하셨습니다. 단순히 그 다음부터 죄인이 구원 얻을 길은 자기를 대속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죄를 회개할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우리가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네가 과거에 무슨 죄를 지었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나 다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네가 과거에 무슨 죄를 지었느냐 그것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실 말씀은,

    "네가 죄를 지었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죄를 다 담당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너를 죄에서 구원한 예수가 있는데, 네가 네 죄를 대속한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입니다.

    이것이 결국 심판의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영생과 영벌이 이 문제로 필경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정죄함을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은, 내가 세상에서 살 때에 무슨 죄를 지어서 받는 것이 아니고, 죄를 용서 받을 길을 열어주셨는데, 그 길을 내가 거역하고 나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무시하고 그를 믿지않는 까닭으로써 결국은 정죄를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 가운데 제일 큰 죄가 믿지 않는 죄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믿지않는 까닭으로 정죄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말씀을 제가 읽을 때 직접 들으세요.

    요한복음 3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예수를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죄 사함을 받은 까닭입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아서 심판 아래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에만 그 심판 아래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3 36절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여러분! 여기 보십시오. 죄를 짓고, 안 짓고 하는 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무리 옳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행동을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죄를 짓고 안짓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안 믿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생활이 지금 어떠한지, 과거 어떻게 많은 죄를 지었던지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 길은 이미 크게 열렸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복음 곧 좋은 뉴스인데, 뉴스의 골자는 요한복음 3 16절에 있는, "하나님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절에 있다고 하는 것은 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영생

     

    마지막으로 영생을 얻으라고 하였는데 ,영생이란 뜻은 무엇인가'?여기에 대하여 잠깐 생각하고자 합니다.

    보통으로 영생하면 죽은 후에 천당 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영생의 한 부분이요, 전체는 아닙니다.

    성경에는 그렇게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영생은 지금 현재, 당장 얻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5 24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기 볼 것 같으면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현재에 소유했다고 하였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졌습니다.

    요한1 5 12절을 읽으면,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이제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 뜻을 잠깐 생각하겠습니다.

    영생이란 생명을 의미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 생명은 곧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이 하나님의 생명이 곧 그리스도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그 마음에 영접하는 이는 그리스도가 그 마음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영생을 그 마음속에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영원불멸의 생명인 까닭으로 영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리스도가 우리 사람의 마음에 계시게 되면, 그 사람 자체에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즉각적으로 그 사람에게 과격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모든 육에 속한 것은 없어지고 영적으로 변합니다.

    고린도후서 5 17절에 이 변화를 가리켜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 새로운 사람, 새사람, 다시 말하면 새 마음, 새 생각, 새 사랑, 새로운 즐거움, 새로운 희망, 새로운 생활로 변화되다' 또는 '중생', '거듭난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가령 쉽게 말하면, 어린애가 어두운 모태 속에 있다가 광명한 세계로 옮겨집니다. 우리가 세상에 올 때 이렇게 나옴으로 세상에 옵니다. 다른 방법으로 올 수 없습니다. 출생함으로 옵니다. 역시 이 신생, 거듭나는 것도, 영적 세계에 낳는 것도 거듭 영으로 출생함으로 말미암아 영의 세계,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습니다. 천국은 그저 넘어갈 수 없습니다. 그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중생하여야, 거듭나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낳는 사실은 갑자기 일어납니다. 물론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어머니에게는 산고가 있습니다. 이런 경험은 누구나 있습니다. 하지만, 아기를 낳는 그 자체는 즉각적으로 되는 것과 같이 중생은 즉각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물론 믿으려고 할 때에 특별한 영적고민도 있고, 믿으려고 하는 마음도 있고, 죄에 대한 간절한 회개와 애통도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모든 경험을 통하여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내 주로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으로 영접하는 중생의 마음은 즉각적으로 그 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중생은 제 말씀을 듣는 여러분 누구든지 참된 마음으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그 시간, 이 시간이라도 영접하면 즉각으로 이와 같은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수양이 아닙니다. 교육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훈련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모르는 진리를 깨달아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빈 마음을 가지고,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내 중심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가 내 마음 가운데 들어오면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 온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마치 곤충 세계를 관찰 해보면 유충이 변하여 성충이 되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온전한 변화가 있습니다. 유충으로 있을 때, 즉 벌레로 있을 때는 땅을 좋아하고 햇빛에 나왔다가도 땅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이 벌레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한번 변화하여 나비나 또는 벌 같은 것이 될 것 같으면 땅속에는 살 수 없습니다. 땅 밖에 나와야 합니다. 햇빛을 보아야 합니다. 날아다녀야 합니다.

     

     

     

     중생자의 변화

     

    중생한 사람의 경험이 또한 이와 같습니다. 전에는 육에 속해서 땅에 속해져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특색이었지만, 한번 주님을 영접한 후, 성신으로 거듭나게 되면 위에 있는 것을 찾고,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위에 있는 것을 탐구하고 위로 올라가는 것이 그 특징이 됩니다. 또 누구든지 이런 중생한 사람은 자기도 중생한 줄 알고 또한 다른 이도 알게 됩니다.

    요한1 5 13절을 보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함 이라."

    중생이 있으면, 이미 중생한 후에는 내게 영생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스스로 중생한 것을 아십니까? 깊이 살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중생하여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출생 함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출생 함으로서 하나님의 가정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려고 한다면, 그 가족으로 출생해야 합니다. 태어나야 실상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됩니다.

    ,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유산, 모든 축복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온 천지만물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금생과 내생의 모든 축복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지금도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축복입니까!

    지금 그리스도를 여러분 마음 가운데 영접하십니까?

    마음 문을 열어놓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를 영접하십시오. 그리하면 영생을 이제라도 얻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철학이 있습니다. 신학도 있습니다. 신조도 물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의식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위대한 도덕적 교훈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기독교는 아닙니다. 그것은 다 기독교에 관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는 곧 이 생명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최대의 뉴스입니다. 평생을 두고 말하더라도 이 기쁜 뉴스를 다 전파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한 두시간에 이 기쁜 뉴스를 다 말할 수 는 없습니다.

    끝으로, 제가 여러분에게 권하는 것은 이 뉴스를 좀 더 아시고, 기독교의 진리를 좀 배우려고 원하신다면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로, 여러분은 교회에 나오십시오.

    여러분 이웃에 있는 가까운 교회에 나가십시오.

    그와 같이하면 여러분은 이 뉴스를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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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불을 주시고 견고케 하신 것은

     

    [왕상 15: 3-5]
    3 아비얌이 그 부친의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 마음이 그 조상 다윗의 마음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나
    4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저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 아들을 세워 후사가 되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셨으니
    5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열왕기는 이제 북이스라엘에서 눈을 돌려 남쪽 유다왕국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솔로몬의 아들이면서 악한 친구들의 말을 듣고 독한 말로 나라가 갈라지게 한 르호보암 왕은 17년 동안 재위하였는데 예루살렘 주위에 산당과 우상을 만들고 아세라 목상을 세웠습니다. 애굽왕 시삭이 예루살렘으로 쳐 올라와 왕궁과 성전의 보물과 황금방패를 다 뺏어가는 바람에 놋방패를 만들었다는 부끄럽고 비참한 기록을 남기고 죽습니다. 그런데 열왕기는 그 못 난 르호보암의 어미가 이방 암몬사람 나아마라는 것이 두 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왕기 저자는 여자의 역할, 어머니의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르호보암이 죽자 그 아들 아비얌이 왕이 되어 3년을 치리합니다. 그리고 그 어미는 아비살롬의 딸 마아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비얌은 르호보암에 이어 불과 3년 동안 남유다왕국의 왕으로 재위합니다. 아비얌도 좋은 왕이 되지 못 하였습니다. 그는 죄를 행하였고 그 마음이 그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비얌의 그 짧은 재위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아비얌에게 등불을 주시고 그 아들을 세워 후사가 되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에는 전쟁이 있었다고만 간단히 기록되어 있지만 역대하 13장을 보면 아비얌과 여로보암 사이의 큰 전쟁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다 왕 아비얌은 40만 군대를 동원하고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두 배나 되는 80만 대군을 동원하여 앞뒤로 협공을 하여 아비얌 군대를 위기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유다 군대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 군대를 패하게 하여 무려 50만의 북이스라엘 군대가 엎드러지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온전치 못 한 아비얌을 도우셨습니다. 또한 아비얌은 무려 22명의 아들을 남겼고 그 중 아사가 아비얌의 뒤를 이어 왕이 되어 41년 동안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행하며 우상을 없이 하고 나라를 든든히 세워가게 됩니다.

    온전치 못 한 왕 아비얌에게 왜 하나님은 이토록 은혜를 베푸시고 많은 후손과 또 훌륭한 아들을 주셔서 예루살렘을 든든히 하셨을까요? 열왕기 저자는 다윗 때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조상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부모의 신앙이 자손에게 얼마나 큰 복이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뿐이었을까요?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것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이 온 세상 이방족속보다 나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우상숭배로 달려간 북이스라엘이나 예루살렘 성전을 가지고서도 우상숭배에 빠졌던 남왕국 유다나 다 마찬가지였고 이방족속보다 하나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다를 택하시고 그 계보로 메시아를 보내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7절을 보면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로 우상숭배를 하고 온전치 못 하였던 왕들의 이름들이 황송하고 영광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등불을 주시고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신 것은 아비얌이 비록 패역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 메시아의 계보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요 그 조상 다윗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패역하고 부족하고 연약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없는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에게 생명의 등불을 주시고 복을 주시는 것은 우리에게 무슨 공로가 있거나 세상사람들 보다 나은 점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말씀 안에, 그 계보 안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여 십자가에 우리 위해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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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이 인도하시는 기도 / 존 오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값을 치르셨으므로, 우리의 영혼에 큰 유익을 주시는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따라 늘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개인적으로나 가정에서 기회가 있을 때나 필요를 느낄 때마다 기도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심이 있고 우리의 삶이 그분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 모두는 기도해야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경험하며 모든 죄를 이기며, 모든 선한 것을 획득하며 매사에 순종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하려고 할 때 많은 어려움과 잦은 좌절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 올바로 기도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며 우리의 부패한 본성이 이를 가로막고, 우리를 산만하게 하고 지치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축복은 바로 이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이 모든 어려움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고 ,우리가 은혜의 보좌앞에 자유롭고 담대히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시고, 우리가 자녀로서 기쁘게 '아바 아버지' 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신 분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은혜와 간구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그가 주시는 은사를 지속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며 죄가 되는 일인지 말로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보다 더 '성령을 근심케 하고', 우리 영혼에 손상을 입히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와 간구의 영을 주셨는데, 우리가 기도한다고 하면서 그것을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그토록 경계를 받았던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 5:19)라는 명령을 어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날마다 이를 무시하면서 제대로 기도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은혜로운 도우심을 경멸하는 것에 대해 어찌 책임을 지겠습니까?
    날마다 이 의무를 무시하며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을 책망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우리보다 더 책망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그들을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 알지 못하고, 기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반면에 기도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의 은사를 받고도 이를 무시하고 내적으로 평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더 큰 죄를 짓는 것입니까?
    종이 울릴 때마다, 자신들이 배운대로 영적인 관심은 없이 오직 양심의 평화를 얻기위해 기도하러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도대체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의 도우심을 무시하며 기도하겠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비록 맹목적이며 미신적이기는 하지만 부지런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성령의 도우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찌 비웃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로마카톨릭 신자들 중에서 종이 울리거나, 미신적인 어떤 표시들이 내결렸을 때 한밤중에도 기도를 하거나 집에서든 거리에서든 관계없이 무릎을 끓는 사람들을 때때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때를 따라 기도하도록 도우시는 성령의 역사와 안내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기도의 방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정확히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받을 수 없는 성령을 받고 그 성령께서 계속적으로 도우시는 사람들이 성령의 활동을 거부하고, 불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 결과로 우리의 영혼에 생길 모든 불이익을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누가 감히 감사를 잃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죄를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를 좀 더 확대시켜 우리가 드리는 온갖 종류의 기도에 대해 곧 개인적인 기도이든 공적인 기도이든 관계없이 고려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유혹들과 위험들이 특별히 이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말을 줄이고, 좀 더 많이 기도한다면 상황은 더 나아질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그런 문제들에 대해 더 잘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우리의 역할을 보다 만족스럽게 감당했을 것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는 것은 안전을 멀리하고 파멸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라벤더 2012.02.03 12:05  http://blog.daum.net/iyunjeong/8718040
    출처: USA아멘넷/믿음은 님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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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과 관련된 것(짚신과 시계-황새와 두루미-흰색, 검은색, 파란색이 많이 들어간 것) 은 피하십시오. 괘종시계처럼 종이 달린 시계는 중국에서 '끝낸다'와 죽음의 의미가 있으므로 피하고, 한국에서 명절 때 선물로 많이 하는 과일인 배도 이별의 의미가 있어 중국에서의 선물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장수'의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 거북이는 발음이 욕설과 비슷해 선물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결혼식에서 가끔 답례품으로 주는 우산도 중국에서는 금기 선물입니다. 중국어의 '우산'은 '이별'이라는 말과 발음이 비슷합니다.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은 여성이있다면 선물하십시오. 꽃다발도 선물로 안 준답니다. 꽃이 '생명이 짧음'을 의미하고 장례용이기 때문입니다. 손수건 역시 슬픔과 눈물을 상징하므로 주지 않습니다. 또한현금을 줄 때 축의금과 선물은 짝수로 부의금은 홀수의 금액을 줘야 합니다. 저녁식사나 파티에 초대를 받은 경우는 먹을 것을 선물로 가져가지 않습니다. 중국인에게 선물해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중국인은 선물을 권할 때는 선뜻 받지 않습니다. 받기 전에는 세 번 정도 거절을 한다고,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받기를 권해야 합니다.
    .
    일본
    .
    칼은 그동안의 관계에 단절을 의미하며 또한 하얀색은 죽음을 의미함으로 죽도록 싫은 여성이 있다면 은장도에 고은 한지포장을 해서 주십시오. 그 정도로 싫어하지 않는다면 흰색 꽃과 4와 관련한 선물을 하셔도 좋습니다. 혹시 그 여성분이 자살을 한다 해도 당신은 모르는일이라고 잡아떼십시오. 일본에서는 반짝거리는 색의 포장지를 쓰지 않으며 선물에 리본도 거의 달지 않습니다. 가벼운 선물을 서로의 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하므로 방문 할 때 반드시 선물을 준비합니다. 일본사람은 김치, 김, 건어물 종류의 식품과 도자기제품을 선물로 주면 좋을 것입니다. 선물 이외에 카드도 보냅니다. 년초에는 연하장을, 여름에는 간단한 식료품을 보냅니다. 식사 초대를 받았을 경우에는 수입 스카치, 코냑을 선물하는 것이 좋습니다. 짝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선물로 주지 않습니다. 꽃도 짝수 개는 금물입니다. 당신이 좋아하던 일본여성을 다른 남자 빼앗겼습니까? 그럼 속옷, 칼 종류, 깨지기 쉬운 물건, 허리 아래에 걸치는 물건을 준비하십시오.
    .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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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색, 검정색, 갈색의 포장지와 리본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특히 꽃은 짝수가 아닌 홀수로 선물하되 열세송이(13)는 피해야 합니다. 아르메니아에서 유래한 관습인가 봅니다. 또한 비즈니스 때문에 독일을 방문 할 때는 값비싼 선물은 뇌물로 취급되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고가의 선물이라 판단될 때는 받은 선물을 되돌려 주는 일도 있습니다. 독일인에게 꽃을 선물할 경우 꽃다발을 싼 포장지를 벗겨 주는 것이 매너입니다. 포장한 꽃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상한 넘들이지만 관습이니 어쩌겠습니까?
    .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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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 장미를 아무에게나 선물하면 큰일납니다. 왜냐하면 빨간 장미는 구애를 뜻하기 때문에 연인 사이에서만 주고받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어버이날 감사의 의미로 선물하는 카네이션이 프랑스에서는 장례식용으로 불길한 꽃이라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또 프랑스 사람들은 향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고 기호품이기 때문에 선물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프랑스 사람에게 와인을 선물하는 것은 한국사람에게 막걸리나 소주를 예쁘게 포장해서 주는 것과 같습니다. 잠깐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사이라면
     
    멕시코
    .
    일본과 마찬가지로 인간관계의 단절을 뜻하는 칼은 피합니다. 연인에게 노란색 꽃은 선물하지 마십시오. 죽음을 의미합니다. 은으로 만들어진 선물도 피합니다. 멕시코에서는 은을 여행자들이나 사는 값싼 장신구라고 생각합니다.
    .
    브라질
    .
    검은색이나 자주색으로 된 것과 인간관계의 단절을 뜻하는 칼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첫 만남에서는 선물을 주지 않는 편이 낫고, 점심이나 저녁을 대접하고 나서 선물에 대한 취향을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계산기, CD플레이어 등과 같은 소형 전자제품이 좋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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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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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은 역시 인간관계의 단절을 뜻하니 피하십시오. 특히 아르헨티나의 경우 수입한 술에는 세금이 많이 붙기 때문에 스카치 위스키나 프랑스 산 샴페인을 선물하면 좋아합니다. 그렇다고 와인을 선물하지는 마십시오. 좋은 와인이 풍부한 나라입니다. 가죽 제품 역시 좋징 않습니다. 아르헨티나는 가죽의 주요 생산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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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우디아라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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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드화와 애완 동물은 격이 낮은 선물로 평가받습니다. 손수건은 눈물 이별을 상징하므로 여성분에게 줄 때는 잘 고려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남자들이 손수건을 받고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선물을 주고받을 때는 왼손 이 아닌 오른손으로 해야합니다.
    .
    이집트
    .
    선물 받는 것을 무척 좋아하고 보석류 등의 화려한 것을 선호합니다. 또한 일부 상류층은 인삼의 우수성을 알기 때문에 인삼을 선물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선물을 주거나 받을 때는 반드시 오른손을 사용한다. 이 넘들도 선물을 받거나 줄 때는 오른손을 사용합니다.
    .
    인도
    .
    자스민은 장례식과 연관됩니다. 당연히 피하는 것이 좋겠죠? 힌두교도들은 소를 신성시함으로, 소를 이용하여 만든 상품은 선물하지 않습니다.
    .
    헝가리
    .
    붉은 장미와 백합은 금기입니다. 헝가리인들은 자신들이 생산하는 와인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므로 와인은 선물하지 않습니다. 꽃은 반드시 포장하여 선물합니다. 독일 넘들과 반대입니다.
    .
    폴란드
    .
    짝수개의 꽃이 금기입니다. 그러나, 폴란드인은 꽃을 좋아하므로 초대를 받은경우 꽃을 선물 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주요한 거래처에는 간단한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 상담에 도움을 줍니다. 민속제품, 라이터, 필기구 등 부피가 크지 않고 소박하면서도 부담 없는 선물이 무난합니다.
    .
    쿠웨이트
    .
    이슬람은 무조건 술과 돼지고기를 피하십시오. 여주인이나 여자식구를 위해 선물을 사오거나, 여주인의 안부를 물어서는 안됩니다. 거리에서 여인의 사진을 찍어서도 안됩니다. 남편이나 아버지와 싸워서 이길 수 있습니까? 그럼 여자식구의 선물을 준비하십시오.
    .
    미국
    .
    혹시 미국 인들에게 선물을 하시려고 합니까? 그럼 백합을 보내십시오. 백합은 미국, 영국, 캐나다, 등지에서 죽음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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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자'와 '힐러'


    니체에 따르면
    자신의 삶의 문제를 주변 사람들에게 투사하며
    의혹과 악의, 자기부정의 태도로 자신과 타인을
    괴롭히며 살아가는 사람을 '병자'라 부른다.
    그들은 가장 오래된 상처를 찢고,
    오래전에 치유된 상흔에서 피 흘린다.
    그들은 친구와 아내와 아이들과 그 밖에
    그들의 주변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악인으로 만든다.


    - 김정현의《철학과 마음의 치유》중에서 -


    * '상처'도 두 갈래가 있습니다.
    하나는, 상처를 후벼파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까지 아프게 만드는 '병자'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픈 상처를 힐러의 통로로 삼는 것입니다.
    이미 지나간 상흔을 다시 건드려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잘 위로하고
    치유의 힘을 발휘하면, 그가 곧
    최고의 힐러입니다.

     

     

     

    보경님의 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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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직 신앙고백

    개혁주의 교회에서 가장 오래된표준 신앙 고백을 말하라고 하면 벨직 신앙고백이라 하겠다.

    16세기 화란에서는 천주교 정권에의하여 개혁교회가 심한 박해를 받게 되는데 이러한 때에 개혁주의자들은 그 박해에 대항하면서 오직 성경에서 주장하는 참된 진리를 외치게 된다.

    이들의 선언은 진리를 위해서라면 등에 채칙을맞아도, 혀가 칼로 잘려도, 입을 지지고 막아도, 우리 온 몸이 불살라지더라도 진리를 양보할 수 없다.”라 하며 어떠한 박해에서도 진리를 포기하지않겠다고 선포한다.

    이때 이들의 진리 선포는 약 2년전 죤 캘빈에 의하여 쓰여진기독교 강요에 기본한 것으로 드 브라스라는 분에 의하여 주창된다.

    1566년에 벨직 신앙 고백의기초가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후, 1618-1619 년에 있었던 화란에서 있었던 돌트 종교 회의에서 공식적으로개혁주의 신앙 고백으로 채택된다.

     

     

    1   유일하신하나님에 관하여 :

     

    우리는 하나님으로 불리는 유일하시며 단일 본질의 영적 존재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다. 그는 영원하시며다 알 수 없으며 보이지 않으며 불변하시고 무한하시고 전능하시고 완전히 지혜로우시며 정의로우시며 선하시며 모든 선이 넘쳐 흐르시는 원천이시다.

     

    2   하나님의인식에 관하여 :

     

    우리는 하나님을 두 방법으로 안다.

     

    첫째는, 우주의 창조와 유지와 통치를 통한 것인데, 이 우주는우리 눈 앞에 있는 가장 훌륭한 책과 같고 그 안에는 있는 크고 작은 많은 피조물들은  글자와 같아서 그것들을 통하여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1:20)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과 같은 하나님에 관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우리는충분히 안다. 이 모든 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드러내기에 충분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변명할 수 없다.

     

    둘째는,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말씀으로 더 분명하고 충분히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알리신다.즉 현세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에 관하여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만큼 우리에게 알리신다.

     

    3   성경에관하여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뜻으로 전달된 것이 아니고 사도 베드로가 말한 대로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은대로 쓴 것이라고 믿는다.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손가락으로 율법의 두 돌판에 쓰셨다. 나중에 하나님은 우리의구원을 위하여 자기의 종들, 즉 예언자들과 사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글로 쓰도록 맡기셨다.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글을 성경이라고 부른다.

     

    4   성경의정경들에 관하여 :

     

    우리는 성경이 구약과 신약의 두 책으로 되어 있고 이 책들은 정경이어서 이 책들에 대한 어떤 이의도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이 책들은하나님의 교회에서 다음과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구약성경의 책들 : 모세오경,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 상., 열왕기 상.,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다윗의 시편, 솔로몬의 세 책들, 즉 잠언,전도서, 아가서; 네 대예언자들,즉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및 다니엘;그리고 12 소 예언자들, 즉 호세아,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그리고 말라기.

     

    신약성경의 책들 : 4복음서들, 즉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바울의 14편지들, 즉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 히브리서; 다른 사도들의 일곱 편지들, 즉 야고보가 보낸편지, 베드로전후., 요한1.2.3, 유다서; 사도 요한의 계시록 등이다.

     

    5   성경의권위에 관하여 :

     

    우리는 이 모든 책들을 우리의 신앙의 조정과 토대와 확인이 되는 거룩한 정경으로 믿는다. 교회가 이책들을 정경으로 받고 또 동의하였기 때문만이 아니고 그 책들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과 또 그 증거가 그 책들 자체 안에 들어 있음을 성령이 우리마음에서 증거하기 때문이다.

     

    6   정경과외경의 구별에 관하여 :

     

    우리는 이러한 성경을 외경과 구별한다. 즉 제 3, 4 에스드라서, 토빗트, 유딧,지혜서, 예수 시락, 바룩, 에스더 부록, 가마솥 속의 세 자녀의 노래, 수산나의이야기, 벨과 용의 이야기, 므낫세의 기도, 마카베오 상.하의 책들이 외경이다. 이 모든 외경들은정경의 책들과 일치하는 한 교회가 읽고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외경들은 우리가 그 책의 증거에서신앙과 그리스도교의 어떤 핵심을 확정할 만한 힘과 효과를 얻기에는 거리가 먼 책들이다. 더구나 이 외경들이정경의 권위를 저하시킬 수 없다.

     

     

    7   성경의완전성에 관하여 :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담고 있으며, 사람이 구원을 위하여 믿어야 할 것은 거기서 충분히 가르치고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의 전체 방식이 성경 안에 대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비록사도라 할지라도 지금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과 다르게 가르치는 것은 부당하다. 사도 바울이 말하듯이(1:8) “그러나 우리나 하늘로부터 천사라도 하나님의 말씀에다가 어떤 것을 보태든지혹은 거기서 어떤 것을 빼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은 가장 완전하고 완성된 것이다. 사람이 쓴어떤 신성한 책이 있다 하더라도 성경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의 진리는 지고하기 때문에 관례,대중, 고전, 연륜, 전승, 회의들, 법령들, 혹은 제도 등등의 가치와 비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다 거짓과 더불어 스스로 속고 속이며공허 그 자체보다도 더 공허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떠한 것이든지 이 절대무오한 규칙과 조화되지않는 것을 마음을 다하여 거짓으로 배격하는 것은 사도들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친대로이다.

    (요일 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요이 1:10-11) “누구든지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8   동일신성의 삼위일체에 관하여 :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는 단 한 분의 하나님을 믿는데, 그는 하나의 단일 신성을 가지신 삼위이며,그 삼위의 교환할 수 없는 특질, 곧 성부, 성자 및 성령은 실질적으로, 참으로, 그리고 영원히 구별된다.성부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원인이며 기원이시다. 성자는 말씀이니,성부의 지혜이며 형상이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는 영원한 능력이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별에 의하여 하나님이 셋으로 분리되지 않았으니, 성경이 우리에게가르치는 바대로 성부, 성자 및 성령은 각각 자기 품격을 가지시며 그들은 각각의 특질에 의하여 구별된다.그러나 이러한 모양으로 삼위는 단 한 분의 하나님이시다. 그리하여 성부는 성자가아니며,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또한 성령은 성부도 아니고 성자도 아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구별된 삼위는 나눠지거나 서로 혼합되었거나 혼돈되지 않는다. 성부는 육신을 입지 않으셨고 성령도 또한 그러하고 성자만이 육신을 입으셨기 때문이다. 성부는성자 없이, 또한 성령 없이 계신 적이 없으셨다. 왜냐하면 삼위는 다같이영원하고 동일한 본질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진리와 능력과 선과 자비에 있어서 삼위는 한분이시기 때문에 첫째되는분도, 또 나중되는 분도 없다.

     

    9   성경이증거하는 삼위일체에 관하여 :

     

    이 진리는 성경의 증거들은 물론 삼위의 역사, 특별히 우리 자신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가안다. 이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성경의 증거들은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기록되고 있는데, 그것을 열거할 필요는 없으나 신중하게 선택할 필요가 있다. 창세기 1 26,27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하나님이 자기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또 창세기 3 22절에서 말하기를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하나 같이 되었으니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로 하신 말씀에서 하나님 안에는한 품격 이상의 품격들이 있음을 증거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으셨다고 말할 때는 통일성을 의미한다. 구약 성경에서는 몇 품격이 계시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것이 사실이지만 구약성경에서 우리에게 애매했던 것이 신약성경에서는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우리 주님이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성부의 소리가 들렸다.

     

    3:21-22백성이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성자가 물에 나타나셨다. 그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그리고 성부께서 친히 들리는 소리로 선포하셨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은 또한 모든 신자의 세례의식에 쓰이도록 그리스도가 제정하셨다.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누가복음에서는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 우리 주님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 1: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또 같은 모양으로 고후 13:13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위의 모든 곳에서 보면, 세 품격이 계시되 한 거룩한 본질을 가지신 하나님을 보게 된다.이 교리는 인간의 이해가 미치지 못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되 내세에는 완전한 지식과 은총을향유할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는 이제 각 삼위의 특수한 직책과 역사(役事)를 살펴야 한다.성부는 그의 능력에 따라 우리의 창조주로, 아들은 그의 피에 따라 우리의 구주이며구원자로, 그리고 성령은 우리 마음에 내재하심에 따라 성화자라고 불리운다.

     

     

    사도시대 이후로 바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참된 교회는 유대교인, 마니교인, 어떤 거짓크리스찬들과 이단들, 곧 마르키온, 프라키아스, 사벨리우스, 사모사태누스, 아리우스와 그리고 정통 교부들로부터정식으로 정죄된 사람들에 대항하여 이 삼위일체 교리를 언제나 변호하고 보존하여 왔다. 그러므로 이 점에 있어서우리는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와 아다나시우스 신조를 받아들인다. 또한 이 신조들에 일치하는 것으로서 고대의교부들이 합의한 신조들도 받아들인다.

     

    10   예수 그리스도는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신성에 따라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며 그는 지음을 받지 않고(만일 그렇다면그는 한 피조물일 것이다) 영원부터 탄생하셔서 아버지와 같은 본질을 가지신 영원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그는 독생자로서 하나님의 분명한 형상이시며 아버지의 영광을 환히 드러내셨으며 모든 것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등하심을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아들이시니, 우리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때부터만이 아니고 영원부터 아버지의 아들이시다.

     

    모세는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말하였다. 요한은 만물이 말씀으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한다.또 사도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통하여 세계를 지으셨다고 말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이만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으셨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으로, 말씀으로, 아들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리우는 그가 만물이 창조되던 그 때에 존재하셨다. 그러므로 예언자미가가 말하기를 ( 5:2)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사도는 말하기를 그는 생의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그러므로 그는 참된, 영원한, 그리고 능력 있는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그를찾고 예배하며 섬기는 것이다.

     

    11   성령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 :

     

    우리는 또한 성령이 영원부터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므로 그는 지음을 받거나 창조되거나 또는 탄생하신 분이 아니고 다만성부와 성자 두 분에게서 발생하신 분임을 믿고 고백한다. 그는 삼위일체의 순서에 있어서는 세째의 위격이시며, 성부와 성자와 같이 하나의 동일한 본질과 존귀와 영광을 가지신 분이며, 따라서 성경이 우리에게가르치듯이 성령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12   세계의 창조와 천사에 관하여 :

     

    우리는 성부가 그의 아들인 말씀으로 자기 뜻에 따라 무에서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개개의 피조물에 존재와형태와 모습과 창조주를 섬길 몇몇 직책들을 주셨다고 믿는다. 그는 인류를 다스리며 사람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그의 영원한 섭리와무한한 능력으로 피조물들을 지금도 보존하시고 통치하신다고 우리는 믿는다. 하나님은 또한 천사도 선하게 창조하시사주께서 선택한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사자로서 봉사하도록 하셨다. 그런데 어떤 천사들은 하나님이 창조해주신 탁월한 성질에서 타락하여 영원히 멸망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은 다른 천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종 여일하게본래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악마들과 악령들은 타락하여서 자기들의 힘이 미치는 데까지 하나님과 모든선한 일의 원수가 되어서 교회와 교회의 개개 회원을 유린하려고 지켜보며 또 그들의 악한 획책으로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살인자들처럼 행한다.그리하여 자기들 자신의 악 때문에 영원한 정죄를 받아 날마다 무서운 고통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물들과 천사들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의 과오와 또한 악마들은 독자적인 기원을 가진 존재라든지 또 부패된것이 아니고 본성이 악하다고 주장하는 마니교도들도 우리는 배격하며 혐오한다.

     

    13   하나님의 섭리에 관하여 :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 그것들을 저버리시거나 혹은 운명과 우연에 맡기시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그것들을지배하시고 통치하셔서 그의 작정 없이 아무것도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으나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가 아니시며 또 범행된 죄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없는분으로 믿는다.왜냐하면 그의 능력과 선은 너무도 위대하고 측량할 수 없을 정도이며 악마와 악인들이 비록 불의하게 행할 때일지라도 그는가장 탁월하고 정의로운 모양으로 자기 일을 정리하시고 실행하시기 때문이다. 또 그가 사람의 이해를 능가하여행하시는데 대하여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허락되는 한도를 넘는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하려 하지 않는다. 오직우리는 최대의 겸손과 존경심을 가지고 우리에게 가리워진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찬양하며, 우리의 피조물의한계를 넘지 않고 그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것만을 알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으로 족하게 생각한다.

    이 교의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주는데 그 까닭은 어떠한 일도 우리에게 우연히 닥치지 않고 오직 가장 은혜로운하늘의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생기는 것임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의 배려로써 우리를 염려하여 주시고 자기에게 속하는모든 피조물을 지배하시며 우리의 머리털 한 가닥도(왜냐하면 그 털들은 모두 헬 수 있기 때문에),또 참새 한마리도 우리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땅에 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하나님을 참으로 완전하게 신뢰하는 가운데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다. 그 까닭은 그의 뜻과 허락 없이는 그어떤 악마와 우리의 모든 원수들도 우리를 해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철저히 통제하시고 제압하심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무 것도 상관하시지 않고 모든 것을 우연에 맡겨 두신다는 에피큐리안들의 사상의 저주할 만한 과오를우리는 배격한다.

     

    14   인간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과 부패에 관하여 :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시되 자기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지으시고, 모든 일에있어서 그의 뜻에 일치되게 사람이 뜻하도록 하기 위하여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지으셨다고 믿는다. 그러나사람이 그러한 영예로운 가운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예를 이해하지 못하며 또 자기의 탁월한 상태를 깨닫지 못한 가운데 오히려 악마의 말에귀를 귀울임으로 자신을 죄에 복종 시키고 그 결과 죽음과 저주를 받게 되었다. 이때 사람은 자신이 받은 생명의계명을 어기고 죄를 짓게 되었다. 따라서 죄 때문에 사람은 자기의 참된 생명이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와자기의 본성이 전부 부패되었고 이에 육체적으로 또 영적으로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하여악하게 되고 왜곡되고 그리고 자기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부패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받았던 자기의 탁월한 소질들을 다 상실하고 다만 그 소질들의흔적으로서 약간만 남아 있으니 이것으로써도 자신의 죄악과 부패가 얼마나 컸었는가를 사람이 변명할 수 없게 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된다.왜냐하면 인간 안에 있는 모든 빛은 어둠으로 변하였기 때문이니, 성경이 우리에게가르치는 대로이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그 빛을 알지 못하였다. 요한은 여기서 사람을 어둠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모든 교훈을 배격한다. 사람은 죄의노예에 지나지 않으므로 하늘에서 주신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예수가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내신아버지께서 나에게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셨으니 누가 스스로 어떤 선을 행할 수 있다고 감히 자랑할 수 있을까?육의 생각은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것을 안다면 누가 자신의 뜻을 영화롭게 할 수 있겠는가?

    자연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하는 것을 알 수 없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누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할 수 있는 것인가? 요컨대 우리자신이 어떤 것을 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서 그런 자격을 우리에게 주신 것임을 알면 누가 감히 자신의 어떤 생각이 자신의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사도가 말한 것을 올바로 그리고 확고하게 주장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자기의 마음에 드는 일을하도록 뜻하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사람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이해에 일치할수 있는 뜻과 이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니, 이것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고 말씀하실때 그가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15   원죄에 관하여 :

     

    우리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원죄가 모든 인류에게 미쳐간 것을 믿는다. 그 죄는인간성 전체의 타락이며 유전적인 병이며, 이 병 때문에 유아라 할지라도 모태 안에서 전염되는 것이며,사람 안에서 모든 종류의 죄를 만들어내는 죄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보시기에 아주 악하고 혐오스러운 것이어서 모든 인류를 정죄하시기에 넉넉하다. 이 원죄는 세례의식으로도 박멸되거나제거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마치 물이 샘에서 솟아나듯이 죄가 이 무서운 원천에서 솟아나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원죄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그들로 멸망하게 못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자비로 용서를 받기때문이다. 이에 그들은 죄 가운데서 안주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타락을 의식하고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을 받고자신자들은 성령으로 탄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는 다만 모방함으로 생긴다고 주장하는 펠라기우스파의 과오를배격한다.

     

     

     

     

    16   선택에 관하여 :

     

    우리는 이처럼 우리의 최초의 부모의 죄로 인해 모든 아담의 후손이 멸망과 파멸로 떨어졌음을 믿는다. 이때 하나님은여전히 자기 본연의 존재, 즉 자비롭고 정의로우신 분으로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신 것으로 믿는다.그는 자비로우시사 사람들의 행위에 따름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영원한 불변의 뜻과 선의에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선택한 사람들을 멸망에서 구출하시고 보존하신다. 그 밖의 사람들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공의 가운데 그들을 내버려 두시사 자기들이 범한 죄악과 타락에 따라 스스로 멸망토록 하신다.

     

     

    17   타락한 인간의 회복에 관하여 :

     

    우리는 가장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놀랄 만한 지혜와 은혜로써 이렇게 육체적 및 영적 죽음에 떨어져서 자신을 전적으로 비참하게만들고 있는 인간을 살펴보시고 자기의 목전에서 두려워 떨면서 도망치는 자를 마음을 다하여 찾으시고 위로하시며 자기의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아들은여자에게서 나서 뱀의 머리를 깨뜨리고 인간을 본연의 자리로 회복 하실 분임을 믿는다.

     

    18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관하여 :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옛날에 조상들에게 거룩한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그가 정하신 때에 자기의 독생자이신 영원한 아들을이 세상에 보내실 것을 약속하시고 이것을 이루신 것을 믿는다. 그 아들은 종의 형상을 취하셔서 사람과 같이 되셨고, 모든 연약함을 지닌 참된 인간성을 취하셨으나 사람의 방법이 아니고 성령의 힘으로 복된 동정녀 마리아의 태내에서 수태되었다.그는 다만 몸으로만 인간성을 취하신 것만이 아니고 참 사람이 되기 위하여 참된 인간의 영혼도 취하셨다. 그가 몸과 영혼을 다 구원하기 위하여 두 가지를 다 취할 필요가 있었던 까닭은 영혼과 함께 몸도 타락하였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의 어머니의 몸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재세례파 신도들의 이단설을 반대하고 그리스도는어린이들과 같은 몸과 피를 공유하고 계심을 믿는다. 즉 그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의 씨에서 태어나셨다.그는 동정녀 마리아의 태의 씨, 여자에게서 나시사 다윗의 후손 이새의 뿌리에서 나셨고유다의 지파이시다. 육신으로는 유대인에게서 나셨고, 아브라함의 씨를받아 모든 것에 있어서 죄를 제외하고는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 그리하여 참으로 그는 우리의 임마누엘,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 것이다.

     

    19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연합과 구별에 관하여 :

     

    우리는 이 수태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품격이(Person) 인간성과 불가분리적으로 연합된 것을 믿는다.그리하여 하나님의 두 아들이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두 품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이 단 하나의품격안에서 연합되었다. 그러나 각 본성이 그 자체 독특한 자질을 보유한다. 그리하여 그의 신성은 언제나 창조된 것이 아닌 비피조물로서 유지되면서 시작하거나 끝나는 날도 없이 하늘과 땅을 채우신다.한편 그의 인성도 그 자질을 잃지 않고 유한한 존재인 피조물로서 남아 있게 되는데 이는 그 시작하는 날이 있고 실제 몸에속하는 모든 특성을 보유한다. 그리고 그가 부활하여 그의 몸을 불멸하게 하였으나 그러나 그의 인성에 있어서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는 우리의 구원과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실제성에 의존한다.그러나 그의 신성과 인성은 한 품격으로 아주 밀접하게 연합되었으므로 그가 죽을 때에도 분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죽으실 때 그의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신 것은 그의 몸에서 떠나던 진짜 사람의 영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성은 그의 인성과 연합하여 그가 무덤 속에 누워 있었을 때에도 함께 하였으며 그의 신격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재하신적이 없었으니 그의 유아기에는 그 신격이 비록 얼마 동안에는 크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역시 같이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임을 고백한다. 즉 자기 힘으로 사망을 정복하신참 하나님이시며, 자기 육신의 연약함에 따라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을 수 있던 참 사람이시다.

     

    20   그리스도의 안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에 관하여 :

     

    우리는 완전하신 자비하심과 전적으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시사 불순종을 저질렀던 인간 본성을 취하게 하시고그 본성 안에서 가장 괴로운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죄의 값을 치르도록 죄의 형벌을 짊어지게 하신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죄를 자기에게 돌리셨을 때 하나님은 자기 아들에게 대하여 자신의 거룩한 공의를 나타내셨고, 그리고 죄를 짓고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는 단순하고 완전한 사랑으로 자신의 자비와 선의를 쏟으셨다.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죽음에 넘겨 주시고, 그리고 그를 통하여 우리가 불멸과 영생을 얻을수 있도록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하여 부활하게 하셨다.

     

    21   우리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하여 :

     

    예수 그리스도는 맹세를 통하여 멜기세덱의 반렬을 따라 영원한 대제사장에 임명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아버지 앞에서 십자가의제단에 자신을 바쳤을 뿐더러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하여 값진 피를 뿌리셨다. 이에 아버지의 거룩하신  진노를 가시게 하기에 충분한 보상을 치르신 것으로 우리는믿는다. 그것은 예언자들이 말한대로 그가 우리의 죄 때문에 상처를 입으셨으며, 우리의 악행 때문에 찢기셨고 그가 징벌을 받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고 그가 매를 맞고 우리를 고쳐 주셨고 그는 어린 양처럼 도살장으로이끌려 가서 사형 죄수들의 하나가 되어 죽게 되었다. 이는 본디오 빌라도가 처음에는 그를 무죄로 선언하였으나범인으로 정죄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남이 빼앗아갈 수 없는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주셨으며 또불의한 자를 위하여 의로운 분이 고난을 받으셨으니, 그의 몸과 영혼이 다같이 우리의 죄 값에 해당하는 무서운형벌을 경험하셨다. 그가 기도하실 때 그의 땀은 땅에 쏟아지는 핏방울처럼 되었다. 그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고 부르짖으셨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죄의 용서를 위한 일이었다. 사도 바울이 말한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으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존귀함으로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고 또 쓰레기로 여겼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상처에서 우리는 온갖 모양의 위로를 얻는다.신자가 영원히 완전할 수 있도록 하신 그리스도의 친히 바치신 그 한 번만의 이 희생 밖에는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는 어떤다른 방법을 찾거나 발견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예수 즉 구주라고 불렀으니 그 까닭은그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22   믿음으로 의롭다 함에 관하여 :

     

    성령은 이 위대한 신비에 관한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하여 우리 마음에 참된 신앙을 불어 넣어주심을 우리가 믿는다. 신앙은 모든공로를 가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며 그를 소유하며 그 분 밖에는 아무 것도 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사람들만이믿음을 통하여 그 분 안에 있는 완전한 구원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그리스도 밖에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대단히 큰 모독이 된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는 반구주(半救主)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처럼 우리는 믿음만으로, 혹은 행위 없는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라고말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믿음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니 그까닭은 믿음은 우리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우리를 위하거나 우리를 대신해서 행하신 많은 거룩한 공로와 일들이 우리에게 유일한 의가 되신다. 그리고 믿음은우리가 그의 모든 은총 안에서 그와 계속 교통하도록 해주는 도구이니, 그 은총들이 우리의 것이 될 때 그것들은우리의 죄를 사면하기에 충분하다.

     

    23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우리의 의에 관하여 :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죄의 용서에 있으며, 또 하나님 앞에 내놓을 우리의 의도 예수 안에 있다고 믿는다.다윗과 바울은 이것이 사람의 행복이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공로를 묻지 않고 의롭게여기시는 자를 복있는 자라 말한 바와 같다. 바울은 또 말하기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하여,또 그에게 있는 구원을 통하여 거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우리는 하나님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며 우리 자신이 그 앞에서 겸손하여 이 튼튼한 터전을 언제나 견지하며, 또 우리 자신의 모습이 이러함을 인정하고 우리 안에 있는 아무 것에도 혹은 우리의 공로에도 의지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순종에만 의지해야 하나니, 우리가 그를 믿을 때 그의 순종은 우리의 것이 된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죄과를 가리우며 우리가 하나님에게 나아갈 자신감을 우리에게 주기에 충분하다. 즉 두려움과 떨림에서 해방되어 우리의 처음 시조 아담의 모범을 따르지 않으니, 그는 두려워서무화과 나무 잎으로 자기자신을 가리우려고 하였다. 따라서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타나려 할 때 우리자신이나 또는 아무리 작은 다른 피조물에라도 의지하면 우리는 멸망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다윗처럼기도해야 한다. “오 주여 당신이 당신의 종을 심판하지 마소서, 당신앞에서는 살아 있는 그 누구라도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24   사람의 성화와 선행에 관하여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인하여 또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사람이 얻는 이 참된 믿음이 사람을 중생시켜서 새 사람을만들어서, 새 생활을 하게 해 주며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의롭게 하는 믿음은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영위하는 원천이 된다. 경건에 게으른 상태나또는 다만 자기 사랑만을 위하여 살던지 아니면 저주가 무서워서 두려워 행하는 것은 의롭게 하는 믿음을 소유한 구원 받은 사람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것이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신앙이 사람에게 있어서 결실이 없는 것이 될 수 없다. 그 까닭은 우리는 헛된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참된 믿음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니 이 믿음은사람을 격려하여 하나님이 자기 말씀으로 명령하신 일들을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이 행위들은 신앙의 좋은 근원에서생긴 것이므로 선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가상할 만한 것이니 그 일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성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행위들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데는 아무 효력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행을 행하기전일지라도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의한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나무 자체가 선하기 전에는 그 나무의 열매가 좋은 것이될 수 없는 사실 이상으로 우리의 행위가 선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하되 그것으로 공로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우리가 무슨공로를 세울 수 있겠는가?). 아니, 우리는 우리가 선행을 행하기 위하여하나님을 우러러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가 그의 기뻐하실 일을 뜻하게 하시며또한 그 일을 행할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을 경청하자. 너희가 명령대로 이 모든 일을 다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 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할 일을했을 뿐입니다. 라고 말해야한다.

    때가 오면 하나님이 선한 일에 보답하실 것을 우리는 부인하지 않으나 그러나 그가 자기의 상을 주심은 자기의 베푸신 은혜에갚으시는 것이다.더구나 우리가 선행을 행하여도 그 일에서 우리의 구원을 찾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욕심으로 오염되어서 벌을 받을 만한 일 밖에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이러한일들을 행할 수 있을지라도 한 가지 죄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하나님이 그 일들을 배격하시기에 충분하다. 이때우리의 빈약한 양심이 우리 구주의 고난과 죽음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아무 확실성 없이 의심을 품고 좌우로 왔다 갔다 할 것이며,계속 고민하게 될 것이다.

     

    25   의식의 율법의 폐지에 관하여, 구약과 신약의 일치에 관하여 :

     

    우리는 율법의 의식과 표상들이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로 폐지된 것과, 또 모든그림자가 성취된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크리스챤들 사이에서는 폐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진리와 실체는 율법을 완성시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는 복음의 교리를 우리가 확신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생활을 정직하게 조정하기 위해서 율법과 예언자들에게서취하여 낸 증거들을 여전히 사용한다.

     

    26   그리스도의 중보에 관하여 :

     

    우리는 유일한 중보자이시며 변호자이신 의로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없음을 믿는다. 그는 이일을 위하여 사람이 되어 한 품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었고 그리하여 사람이 거룩하신 주재께 접근할 수 있게 하였으니, 이 접근을 방해할 것이 없다. 그런데 성부가 자기와 우리 사이에 임명하신 이 중보자는 그의위엄으로써 결단코 우리에게 겁을 주거나 혹은 우리가 공허한 생각으로 다른 중보자를 찾도록 만들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늘이나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니, 그는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계셨으나 자기 자신을 높이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사람과 종의 형상이 되어서 모든 것에 있어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던것이다. 그리하여 만일 우리가 다른 중보자를 찾는다면 누가 우리를 사랑하여 줄 것이며, 또 비록 우리가 원수일 때라도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희생시키신 그분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여 줄 중보자가 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또 만일 우리가 능력과 권세를 가진 자를 찾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분에비할 수 있겠는가? 또 누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보다 더 빨리 우리의 기도를 들어줄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때문에 하나님께 담대히 기도한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가치를 고려하여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공로에의지하기 때문이니 그의 의로움이 믿음으로 우리의 것이 된다.

    그러므로 사도는 우리의 어리석은 공포심이나 혹은 불신을 우리에게서 제거하기 위하여 아래와 같이 올바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그 분(예수 그리스도)은 모든 점에 있어서 당신의 형제들과 같아지셔야만했다. 그래서 자비롭고 진실한 대제사장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고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제물이 되실 수 있었다. 그분은 친히 고난을 당하시고 유혹을 받으셨기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 주실 수 있다. 또 우리를 격려하기 위하여 더 말씀하신다.우리에게는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계심을 알고 우리는 그분에 대한 신앙을 굳게지키자. 우리의 대제사장은 연약한 우리를 몰라주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든 일에 유혹을 받으신분이다. 그러나 죄를 지으시지 않았다.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총의옥좌로 가까이 나아가자.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받아서 필요한 때에 도움을 얻게 될 것이다.

    또 같은 사도가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예수의 피의 덕분으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신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는 영원히 사시는 분이기때문에 그분의 제사장직은 영구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을 언제나완전히 구원해 주실 수 있다. 그분은 항상 살아계셔서 그들을 위해서 중보자의 일을 하신다.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우리의 변호자로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가 다른 변호자를 찾겠는가?우리가 찾을 수도 없는 다른 변호자를 취하거나 찾고 또 찾기 위하여 그를 저버리지 말자. 하나님이 그를 우리에게 주셨을 때 우리가 죄인들이었음을 그가 잘 아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서 주의 기도에서 가르치시는 대로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의아버지에게 부르짖을 수 있다.그의 이름으로 우리가 아버지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실 것을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27   공동 교회에 관하여 :

     

    우리는 하나의 카톨릭, 즉 공동(共同) 교회를 믿고 고백한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되고 성령으로 성화되고 인침을받아 구원 받을 것을 바라는 참된 그리스도인 신자들의 하나의 거룩한 회중이며 회합이다.

    이 교회는 세계의 시작부터 있었고 또 세계의 마지막까지 있을 것이다. 이 진리는그리스도가 영원한 왕이시므로 백성 없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분명하다. 그리고 이 교회는 온 세상의 격렬한박해를 막으시는 하나님이 보존하시고 지원하신다. 교회는 한 때 사람들 눈에는 아주 작고 그리고 아무 것도아닌 것 같이 보이는 것이니, 이것은 아합의 위험한 통치 기간을 보기로 들 수 있으나 그러나 그 때에도 주께서는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던 7천명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셨다.

    더구나 이 거룩한 교회는 어떤 장소나 혹은 어떤 인물에게 국한되거나 구속되어 있거나 제한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온세상에 퍼져서 확장되어 있다.그러면서도 믿음의 힘으로, 또 하나의 같은 성령 안에서 마음과 뜻으로 연결되고 연합되어있다.

     

    28   참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교통에 관하여 :

     

    우리는 이 거룩한 회중과 회합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회합이며 그 밖에서는 구원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지위나 상태의 인물이든지그 회중에서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 살기 위하여 자신을 후퇴시켜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모든 사람이 그 회중에 들어가서 일치하며 교회의 일치를보존하며 교회의 교훈과 훈련에 복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목을 굽히고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재능에 따라 같은 몸의 공통된 지체와 같이형제들의 건덕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것이 보다 잘 지켜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교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분리되며, 어디든지 하나님이 설치하신 회중에 가입하는 일은 정부 관료나 군주의칙령이 반대하거나 심지어 죽음이나 육체의 형벌을 과하는 일이 있더라도 모든 신실한 신자들의 의무이다.

    이렇게 하여 교회에서 후퇴한 사람이나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다 하나님의 명령에 위반하게 된다.

     

    29   참된 교회의 표지에 관하여 :

     

    우리는 열심히 그리고 용의주도하게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인식해야 한다고 믿는다. 즉 오늘세계에 있는 모든 분파가 스스로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참교회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 안에 성도 들과 함께 섞여있는 위선자들을 말하는 것은아니다. 다만 스스로 교회라고 자칭하지만 참된 교회가 아닌 자들을 구별하기 위함이다 .

     

    참된 교회를 인식하기 위한 표지는 다음과 같다. 교회가 순수한 복음의 교훈을 설교하고 있는지 않는지,그리스도가 명령하신 바와 같은 순수한 성례전을 베풀고 있는지 않는지, 교회의 권징이죄를 벌하기 위하여 사용되는지 않는지, 간단하게 말하자면 모든 것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운영되고있는지 않는지, 그 말씀에 위배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배격되는지 않는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머리로 인정되고 있는지 아닌지, 이러한 표지로써 참된교회를 분명히 알며, 이러한 참된 교회에서 분리되어도 괜찮은 권리는 그 어떤 성도도 갖지 않는다.또 교회에 속하는 사람들에 관하여서는,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를 알 수 있는표지로는 믿음이다.

    믿음은 유일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이에 죄사함을 얻으며 죄에서 해방되고 의를 구하며 하나님과 이웃을참으로 사랑하며,좌우로 흔들리지 않고 그들의 죄성을 그 죄성의 열매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연약한 바가 없는 바가 아니다. 그들은 성령의 힘으로 그들의 생애의 모든날에 자신의 연약함과 쉬지 않고 싸우며  예수의 피와 죽음과 수난 및 복종에 언제나 끊임없이 의지하며, 예수 안에서 그들은 믿음으로말미암아 언제나 죄의 용서를 받는 것이다.

    거짓된 교회를 논한다면 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교회자체와 교회의 규정들에 더 큰 힘과 권위를 돌리며 예수 그리스도의멍에 하에 교회 전체를 복종시키지 않으려 한다. 또 이러한 거짓 교회는 그의 말씀으로 지정된 성례전들을 집행하지 않고그 성례전을 자의로 가감한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보다는 사람들에게 더 의존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살며 그 교회의 과오와 탐욕과 우상예배를 공격하는 사람들을 박해한다.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는 쉽게 알 수 있고 서로 구별이 된다.

     

    30   교회의 행정에 관하여 :

     

    우리는 이 참된 교회의 영적 정책에 따라 통치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 주님이 자기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으로믿는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며 성례전을 집행할 목사들이 있어야 한다. 또한 목사들과 함께교회의 정책 기관을 구성할 장로들과 집사들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것은 참된 종교가 보존되며 참된 교리가어디서든지 전파되며 또한 범죄자들이 처벌되며 영적인 방법으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교회 안에서 질서바르고 겸손하게 모든 것이 실시되면 그때에는 성 바울이 디모데에게 지시한 규칙에 따라 신실한 사람들이 선택된다.

     

    31   목사, 장로, 집사에 관하여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들과 장로와 집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시듯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질서에 따라 교회의 정당한방법에 따라 각기의 직무에 피택되어야 하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각자가 부정한 수단으로 자기를 밀어 넣지 않도록 주의하고 자기가부름 받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소명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확신하기 위하여 증거를 갖기 위한 것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는 유일하신 총감독 또는 유일한 교회의머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자로서 예수님께서 부여하시는 권력과 권위를 동일하게 가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거룩한 규약이 침해되거나 혹은 경시되지 않도록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역자들과 교회의 장로들을아주 높이 평가해야 하며 또 불평이나 경쟁이나 혹은 싸우는 일이 되도록 없이 하여 그들과 화평하게 지내야 한다고 우리는 말하는 바이다.

     

    32   교회의 질서와 기강에 관하여 :

     

    우리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자기들 사이에서 어떤 규약을 만들어서 교회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로 인하여 유익함을 얻는다고믿는다. 그러나 우리의 유일한 주이신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것들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그들은 조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는 사람이 만들어낸 어떠한 착상도 거절하며 그러한 것을 예배 법률로 만들어 어떤 모양으로든지신앙의 양심을 구속하고 강요하는 인본적 법률들을 배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순종하는데 있어서 모든 성도로 일치와 통일을 신장하며 보존하는 것만을 인정한다. 이 목적을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출교처분, 혹은 교회 기강을 세워야 하는 필요들을 보게 된다.

     

    33   성례전에 관하여 :

     

    우리는 우리의 자비로운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과 결점을 보시고 이를 돕기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성례전을 제정하셨음을 믿는다. 우리는 이성례전을 통하여 그의 약속의 징표를 보며 우리를 향한 그의 선의와 은혜를 확인한다. 또한 성례는 우리의 신앙을기르며 강화하시는 것을 믿는다. 하나님이 복음의 말씀에 성례전을 추가로 연합시키시고 그의 말씀으로써 우리에게상징으로 주신 성례전의 의미를 알게 하시며, 또한 우리 마음 안에서 내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과 더불어우리의 감관(感官)에 성례를 제시하시므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을 보장하시며확실케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성례전은 볼 수 있는 상징들이며 또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우리 안에서역사하시는 방편이 되는 내적인 보이지 않는 표적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례전의 상징들은 공허하거나 무의미한것이 아니며 속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들이 제시하는 참된 대상이며 그분 없이는 그것들은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더구나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성례전의 수를 만족하게 생각하니 그것은 세례의 성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거룩한 성찬의 단 두 가지 뿐이다.

     

    34   세례에 관하여 :

     

    우리는 율법의 완성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피를 흘림으로써 사람들이 죄의 용서를 위하여 구속의 상징으로 삼았던혹은 삼으려던 모든 동물들의 피흘림의 종말이 된 것을 믿고 고백한다. 또 그는 피로써 행한 할례를 철폐하시고 그대신 세례의 성례전을제정하셨는데,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 용납되고 다른 모든 사람들과 타종교들로부터 떨어져 나오며,우리가 전적으로 그에게 속하게 되며 그의 기장(旗章)과 깃발을 지니는 것이며, 그는 영원히 우리의 은혜로운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이심을 우리에게 증거로삼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에게 속한 모든 사람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순수한 물로 세례를받을 것을 명하셨다. 세례가 우리에게 상징하여 주는 것은 마치 물이 세례받는 사람의 몸에 뿌려질 때 몸의때가 씻겨 없어지듯이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피가 세례 받는 사람의 영혼에 내적으로 뿌려져서 죄를 씻어 영혼을 정결하게 하고 우리를 진노의 자식들로부터변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중생 시킨다. 이것은 외부적인 물의 힘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아들의 고귀한피를 뿌림으로 효능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홍해이니, 우리는이 홍해를 통과하여 바로 왕 폭군, 즉 악마를 피하여 가나안의 영적인 땅에 들어가는 것이다.그러므로 교역자들이 성례전을 행하며 그것은 외부적으로 보이는 것이지만 우리 주님이 세례의식으로 우리에게 보장하여 주시는것은 여러 가지 은사들과 보이지 않는 은혜, 씻음, 정화,아주 더럽고 불의한 것들을 우리의 영혼으로부터 제거하는 일, 우리 마음을 새롭혀서모든 위로로써 채우는 일,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선의에 대한 참된 확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일,우리에게 새 사람을 입히고 옛 사람을 모든 행동과 함께 벗겨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생을 얻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이 세례만을 받아야 하되 같은 세례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가 두번 중생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이 세례는 우리에게 물을 뿌리고 우리가 그것을 받을 때 만이 아니고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서도 효과를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세례파의 과오를 배격한다.그들은 그들이 전에 받은 단 한 번의 세례에 만족하지 않으며 또 신자들의 유아들의 세례를 정죄하지만 우리는 그 유아들도이전에 이스라엘의 어린 아이들이 우리의 유아들에게 주신 같은 약속으로 할례를 받았듯이 계약의 상징으로서 세례를 받고 인침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또 사실은 그리스도는 장년들과 마찬가지로 신자들의 어린이들의 정화를 위하여 피를 흘리셨다. 그러므로 유아들도 그리스도가 그들을 깨끗하게 하신 일의 상징과 예전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율법에서 명령하신대로 유아들도 출생 직후에 그들을 위하여 어린 양을 제물로 바치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성례전을 받도록 되어야 한다.더구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의 할례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세례와 같다. 그리고이 이유 때문에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불렀다.

     

    35   성만찬에 관하여 :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중생하여 그의 가족, 즉 그의 교회에 연합된 사람들을 먹이시며 유지시키기 위하여성만찬의 성례전을 제정하신 것을 믿고 고백한다. 이제 그들 중에 중생한 사람들은 이중의 생활을 하는데,한 가지는 육신적 또는 현세적인 생활인데, 이것은 그들이 처음 출생했을 때부터 하는생활로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영적이며 천상적인 생활인데, 두번째의 출생이며 이것은 복음의 말씀에 따라 또 그리스도의 몸과의 교제를 통하여 효과가 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후자의 삶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특별한 것이다. 이와같이하나님은 육신적인 지상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지상적이고 일반적인 빵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 빵은 육신생활에 유익하며, 삶 그 자체처럼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것이다. 그러나신자들이 영위하는 영적이며 천상적인 삶의 유지를 위하여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 즉 예수 그리스도를보내셨으니, 신자들이 그를 먹을 때, 즉 성령안에서 믿음으로 그를 받아들일때 그가 그들의 영적인 삶을 풍부하게 하시며 강화하신다. 우리에게 이 영적인 하늘의 떡을 제시하시기 위하여그리스도는 자기 몸의 상징으로서 지상의 보이는 떡을 제정하셨고 또 그의 피의 상징으로서 포도주를 제정하셔서 이것으로써 우리가 우리의 손에 이 상징물들을받아 쥐고 입으로 먹고 마실 때 우리의 삶이 나중에 살찌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신앙(이것은 우리 영혼의손과 입이 된다)으로 우리의 유일한 구주의 참 몸과 피를 우리의 영적 삶을 위하여 우리의 영혼에서 분명히받게 하려는 것이다.

    이제,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성례전을 공연히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이 아님이 분명하며 의심할 여지가 없듯이 그는 우리안에서 마치 성령의 역사가 감춰져 있어서 알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없는 모양으로 성례전의 이러한 상징물들에의하여 우리에게 그가 제시하시는 그 모든 일을 우리 안에서 행하신다. 그리하여 드디어 우리가 먹고 마신 것은그리스도의 자연적인 몸과 본래의 피였다고 우리가 말할지라도 잘못된 말이 아니게 된다. 그러나 이 성례전을받는 모양은 입으로서가 아니고 신앙을 통하여 성령으로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언제나 하늘에서 아버지의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여전히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교통하게 역사하신다. 이 만찬은 영적인식탁이며 거기서 그리스도가 자기의 모든 축복을 가지고 우리와 사귀시며 거기서 그는 자기 자신과 자기의 고난과 죽음의 공덕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그것을 즐기게 하시며, 그의 살을 먹음으로 우리의 가난하며 위로가 없는 영혼들을 먹이시고 강화하시며,또 그의 피를 우리가 마심으로 그 영혼들을 살리며 소생케 하신다.

    더 나아가서, 성례전들은 그것들이 상징하는 것과 연결되지만은 성례전에 참예하는 모든 사람이 이 두 가지를받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불경한 사람은 실은 성례전을 받으면서도정죄를 받는 자리에 나가게 되는데 이는 성례전의 진리를 받아 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마법사인 시몬이 성찬을받았으나 실은 그 성례전이 상징하는 그리스도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참 신자들은 성례전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받는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찬을 겸손과 존경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의 회합에서 받으며, 감사하는마음으로 우리 신앙과 우리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고 우리 구주 그리스도의 죽음을 교인들과 함께 거룩하게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미리 올바르게 자신을 반성해 보지 않고는 이 식탁에 와서는 안 되는데, 그것은이 떡을 잘못 먹고 이 잔을 잘못 마심으로 스스로 멸망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이 성만찬 예전을바르게 대하고 나아갈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례전에 사람들이 첨가하는 예식이나 또는 혼합시키는 모든 제도들과 저주를 받을 새로운 의식들을 성례전의모독으로서 배격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제도로 만족해야하며 그 성례전들에 대하여 말씀하신대로 순종해야 할 것을 확언하는 바다.

     

    36   관공리에 관하여 :

     

    우리는 우리의 은혜로운 하나님이 인류의 타락 때문에 왕과 군주와 관리들을 지명하시고 세계가 어떤 법률과 정책으로 통치되기를원하신다고 믿는다.그 결과 사람들의 황폐가 저지되고 모든 것이 질서 있고 보기좋게 운영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집정관에게 무기를 쥐어주셨으니, 악행자들을 벌하시며 선행자를 상주시기위함이다. 그들의 직책은 단지 국가의 복지를 존중히 여겨서 지켜보는 것만이 아니고 거룩한 목회사업을 보호하며,모든 우상숭배와 거짓된 하나님 예배를 제거하며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즉 적 그리스도의왕국이 파괴되며 그리스도의 왕국이 신장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정관들은 어디서든지 복음의 말씀의 설교를경청하여 하나님이 그의 말씀에서 명령된 대로 모든 사람에게서 존귀와 예배를 받게 되어야 한다.

    더구나 어떤 지위나 신분이나 조건의 사람일지라도 집정관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의무이다. 즉 세금을바치며, 그들에게 존경심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말씀에 거슬리는 것이 아니면 모든 일에 있어서 그들에게 복종하는일이다. 또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 집정관들을 지배하시며 그들의 모든 길을 인도하시도록 그들을 위하여 대신기도할 것이며, 또 우리가 경건하고 정직하여 조용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세례파의 과오와 그 밖의 선동적인 사람들과 또 일반적으로 높은 권세와 집정관들을 배격하여 사회의 질서를파괴하며 동등을 주장하여 강제로 모든 것을 획일화 시키려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사람들을 위하여 제정하신 고상하고 선한 질서를 혼란시키는 사람들로여기며 이들을 혐오한다.

     

    37   최후심판에 관하여 :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주께서 지정하신 때(이 때는 모든 피조물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것)가 오면, 또 선택된 자의 수가 찰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가지고 보이게,즉 그가 크신 영광과 권세를 가지고 승천하셨듯이 하늘에서 오셔서 죽은 자와 산 자의 심판을 선포하시며, 세계를 정화하기 위하여 불과 불꽃으로써 이 낡은 세계를 태워버리실 것을 믿는다. 그때에 남자와여자와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듣고 모여 들어서 세상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신 대 재판관 앞에 직접나타날 것이다. 모든 죽은 자들이 땅에서 살아날 것이며, 그들의 영혼이전에 있었던 본래의 몸들과 연합될 것이다. 그때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죽었던 사람처럼 죽지는 않을 것이되 순간적으로변하여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는 책들이 펼쳐지고 죽은 자들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이 세상에서 그들이 행한 일에 따라 재판을 받을 것이다. 아니,모든 사람이 세상에서는 한갖 오락과 농담으로만 간주되던 자기들의 쓸데 없는 말에 관하여 일일이 설명해야 할 것이다.또 그 때 사람들의 비밀과 허위가 드러나서 모든 사람들 앞에 공개될 것이다. 그러므로이 재판을 생각한다는 것은 악한 자와 불신자에게는 바로 무서운 것이지만 의롭고 선택된 자들에게는 가장 바람직하며 통쾌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그들의 완전한 해방이 성취될 것이며, 그들이 짊어졌던 노고와 고난의 열매들을거둬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결백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질 것이며 이 세상에서 그들을 가장 잔인하게 박해하고압박하고 괴롭혔던 악인들은 하나님이 처벌할 무서운 보복을 받을 것이다. 또 그들은 자기들의 양심의 증거에의하여 고발된 것이며, 또 불멸할 것이므로 악마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에서 고통을 받을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신실하고 선택된 사람들은 영광과 영예로써 보답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그가 택하신 천사들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밝힐 것이다. 모든 눈물이 그들의 눈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지금 많은 재판관들과 집정관들에게서이단으로 정죄된 사건들이 그 때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위한 것으로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생각할 수없는 그러한 은혜로운 보답으로서 주께서는 위대한 영광을 준비하셔서 그들에게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위대한 날이 와서 드디어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충분히 즐길 수있기를 가장 간절한 마음으로 기대한다. 주여 오소서.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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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선택/ 최송연

      짐의 무게야 어떠하든지 고통을 느끼는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 기대감은 실망을 대동하여 지친 어깨를 더욱 짓누르게 하지 감정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 믿어보는 거야, 끝까지 주님도, 이웃도... 사랑을 하려면 먼저 신뢰하는 것부터 배워야 해 신뢰감이 무너지면 사랑도 무너지는 것 사랑의 선택은 신뢰니까 그분께서는 오늘도 권고하시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겠다"고..(시 55: 22)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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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교리를 절대적으로 알아야만 하는 이유(마틴 로이드존스)

       

      왜 우리는 성경교리를 공부해야 하는가?

       

      지금까지의 내용이 우리가 앞으로 교리를 고찰해 나가려는 방법의 대략적인 정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지막 요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왜 우리는 이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믿는가?’

       

      이 질문에 대해 제가 제시하려는 몇 가지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성경 자체가 교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관심은 특정한 진리들을 우리에게 분명히 제시하는 것인데, 그 진리들이란 교리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올바르게 읽는다는 말은 교리에 대해 숙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리 자신이 그 교리를 이해하기 원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성경을 대단히 잘 알 수 있으나, 그 교리들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한다면, 성경에 대한 내 지식은 내게 전혀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말해볼까요. 그것이 바로 선지자들이 한 일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들에 대해 읽어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던가요? 선지자들은 교리를, 특히 율법에 대한 교리를 붙잡고 있었으며 그 교리들을 역설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적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민족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백성아! 너희는 율법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율법이 너희에게 보여주고 있는 이 사실을 너희는 이해하고 깨달아야만 한다.” 선지자들은 백성에게 교리를 설교한 것입니다.

       

      우리 주님 스스로도 이 일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주님이 산상설교에서 정말로 하셨던 일이 바로 이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5:27~28)

      주님은 율법을 취하사 그것을 교리의 형태로 해설하셨습니다. 주님은 교리를 설명하셨습니다. 주님은 그저 율법을 일반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원리들을 뽑아내서는 그것을 적용하고 시행하셨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사도들이 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고 초대 그리스도인 설교자들의 설교를 관찰해 보십시오. 그들이 무슨 일을 했습니까? 그들은 본문을 취해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그 본문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제시하고 분석하는 등의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설교하는 방식은 교리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메시지가 있었고 그것을 백성에게 제시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교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바로 설교의 의미입니다. 그것이 설교의 목적과 기능입니다. 설교는 단순히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기회가 아닙니다. 거듭 말하건대설교는 그저 성경 구절의 다른 번역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설교의 목적은 진리를 회중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설교의 본질적인 역할, 그것을 행했습니다.

       

      신약 서신서들을 예로 들어 봅시다. 서신서는 무엇입니까? 이 서신서들에서는 몇몇 위대한 교리를 강조하고 역설하고 있습니다.특정한 교회들에는 특별히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신서 저자들은 교리를 취해 그것을 실제적인 방식으로 적용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언제나 교리를 표현하고 설명하는 데 관심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제가 이 일을 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저는 성경이 그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합니다. 성경 자체가 그렇게 하며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또 다른 이유는 교리를 공부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해 말하곤 합니다! 우리 주님 당시 유대인들의 진짜 문제는 그들이 문자에만 얽매여서 그 정신은 결코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교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을(words) 안다는 데 만족하여 말씀(word)은 결코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유대인의 상황에 우리 모두도 처할 수 있다는 위험한 가능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문자에만 얽매인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자에 얽매이는 것은우리 영혼을 저주받게 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나서도 교리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연구가 전혀 유익이 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연구가 대단히 지적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보내는 좋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성경교리를 연구하는 또 다른 이유는 수십 세기동안 교회가 언제나 성경 교리들을 강조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해 왔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가장 초창기부터 온갖 희생을 치르고 예수가 주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교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 여러분은 교리적 진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례형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례를 받고자 하는 지망생들은 교리 문답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몇 가지 질문을 받았으며,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시지요? 금세 이단들이 일어나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올바르지 않은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상당히 진실하고 진지하긴 했으나, 옳지 않고 해로운 것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단 교사들과 거짓 교사들은 교회 내에 혼란을 야기했을 뿐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도 잘못 인도했습니다. 교회 내에 이교가 발흥함에 따라 초대 교회는 우리가 보통 신경이라고 부르는 것, 예를 들면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 등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너무 많은 오류와 이단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 그런 신경들은 필수적인 것이 되었으며 교회는 성령의 인도 아래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믿으며 무엇을 믿지 않는지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성경을 펼쳐서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완벽하게 진지하고 진실한 사람들도 성경을 읽고 나서 상당히 잘못된 것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리를 규정해야 합니다..”

       

      교리들에 대한 정의들을 우리는 신경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어떤 의미에서 하나였던 교회가 동방 교회와 서방교회 둘로 나뉘어졌습니다.하지만 교리는 대체로 동일했습니다. 교회가 죽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 세 개의 위대한 신경들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 후에 개신교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새 생명, 새로운 활력, 새로운 이해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교회는 교리를 정리하는 것과 그것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진술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개신교도 간에 흔히 위대한 신앙고백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성경 교리들을 함께 열거하고 해설해 놓은 것일 뿐입니다. 그 지도자들은 다시 한 번 “사람들에게 성경을 펼쳐 주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들은 길을 잃기 쉽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떤 것을 믿고 어떤 것을 믿지 않는지를 말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교회에 대해, 그 외 다른 것들에 대해 말해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영국교회에는 [39개 신조]라는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또한 유럽 대륙에도 많은 유명한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모라비아 교회의 신조와 개혁 교회의 신조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17세기 웨스트민스터에서 작성되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라고 불리는 위대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교회와 전 세계 모든 곳에 있는 장로교회 신앙고백입니다.

       

      이 모든 신앙고백들 및 그에 수반되는 교리 문답들은 교회 안의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게 하고, 그 믿음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도록 하기 위해 성경 교리를 진술한 것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를 믿음 안에서 든든히 세우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교회의 초기 시절에 이 모든 것이 필요했다면, 종교개혁 시절과 17세기에 이것이 필요했다면, 분명 그것은 지금 현재 이 순간에도 긴급하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오늘날 교회는 사이비 종교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여러분의 문 앞에 와서, 그들 말로는 “성경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가르치는 성경을 자기들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말을 하는 순간, 여러분은 본능적으로 뭐가 잘못되었다고 느끼지만, 그들에게 대답을 제대로 하지는 못합니다.

       

      성경교리를 연구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함께 그런 가르침들에서 잘못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성경이 정말로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기시키려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알게 되면 우리에게 제시되는 다른 모든 가르침을 평가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교회 주변에만 이 모든 오류와 사이비 종교의식들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바로 교회 안에도 심각한 혼란이 있습니다. 교리가 존재하지 않고, 분명한 정의가 없으며, 누구든 자기 좋은 대로 말하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교리를 함께 고찰해 보는 일이 지금보다 더 긴급하게 필요한 때는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토대에 서 있는지 알아야 하며,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오는 모든 원수, 모든 교활한 원수, 우리의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오는 마귀가 사용하는 모든 계략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 교리를 여러분과 함께 고찰해 보아야 할 더 고상한 이유가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교리 공부는 하나님을 참으로 알며,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에 들어가며,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길이 얼마나 경이로운가를 어느 정도 알게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렇습니다. 계속 성경을 읽고 연구하도록 하십시오. 하지만 세부적인 것들에 매여 헤매지 마십시오. 이 위대하고도 강력한, 교리의 최고봉들을 뽑아내어,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합시다. 우리는 하나님 아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배입니다. 성경에 고찰은 언제나 예배이며, 성경과 그 가르침에 대하여 다른 교과서들에 대해 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내게 말합니다. “신학 대학들이 대체 뭐가 잘못된 것입니까? 내가 아는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신학대학에 들어갈 때는 멀쩡했는데, 졸업하고 나올 때 모습을 좀 보세요!” 그것이 언제나 사실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호들갑스럽게 이야기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그 말이 간혹 사실이라면 제가 여러분에게 그렇게 된 이유를 말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경우의 사람들은 성경을 마치 하나의 교과서인 양 접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너무 자주 이 위대한 교리를 마치 그것이 인간의 사상과 아이디어인 것처럼 접근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예배와 경외하는 마음으로 교리를 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번역과 지적 지식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꼭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교리는 연구 주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교리를 알기를 소망해야 하지만 그 이유는 그것을 배운 후 그 지식으로 교만해지거나 지적 흥분을 느끼려는 것이 아니라, 위대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더 온전한 방식으로 바라보게 됨으로 인해 하나님께 예배와 찬양과 경배로 더 가까이 나아가자고 하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시고, 이 교리들로 인해 우리 모두가 소생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또한 우리 및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통해 모든 교회가 소생하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다시 한 번 목도하기를 소망합니다.

       

      ‘로이드존스 교리강좌시리즈’(부흥과 개혁사 역간)

      1권‘1장 교리공부의 목적과 방법’중에서

       


      자칭 사도들이라고 하는 자들의 정체>

      1. 고린도인들 중 일부는 겉으로는 매우 인상적으로 보이는 새로 들어 온 사람들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그들 사역의 중심에는 소위 명성과 능력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았지만 추천서를 가지고 있었으며(고후 3:1), 자기들은 환상을 보고 황홀경에 빠지는 경험을 했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합법화했다(고후 5:13; 12:1). 심지어 그들이 고린도에 오기까지 얼마나 먼 길을 왔는가를 자랑하기도 했다.

      2. 이 무리들의 정체에 대한 여러 이론들이 있다.
      ... W. Bieder는 사도 바울의 복음을 수용할 준비가 안 된 사람들로 본다. 이들은 바울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믿었으나 바울의 복음을 무효로 만들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D. Georgi는 헬레니즘의 관한 선전 기술을 습득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로 본다.
      G. Frierich는 이들은 헬라파 유대인들로서 기적을 중시했기 때문에 바울과 마찰을 빚은 것으로 본다.
      W. G. Kummel은 이들은 팔레스타인 유대인들로서 지상의 예수와 접촉한 경험과 유대적 가문과 영적인 은사들을 우월하게 생각하여 바울을 경시한 사람들로 본다.

      3. 이들은 자기들을 가리켜 히브리인이라고 주장했고 ‘지극히 큰 사도들’의 권위를 빌어 이야기했던 것으로 보아 유대로부터 왔을 가능성이 높다(고후 11:5; 12:11).
      그들은 자신을 자칭 ‘신령한 사람들’이라고 자처하였으며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서명한 신임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주장했다.
      이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권한을 부여받지 않은 어떠한 가르침도 올바르지 않다고 주장했다(F. F. Bruce). F. F. Bruce, 바울, p. 302.

      4. 따라서 바울이 예루살렘과 독립적으로 복음 전파를 하였다면 바울에게는 예루살렘에게 부여된 그리스도의 위탁이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바울은 영적 권위의 원천으로부터 관계를 끊었기 때문에 육체대로 행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가 성령의 복을 누리고자 한다면 예루살렘의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5. 이러한 정황들을 살펴볼 때 예루살렘에 있는 극단적인 유대주의자 그리스도인들이 신뢰하는 유대적 기독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바울이 세운 교회들을 지배하려고 이 사람들을 파송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은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행 15:24)라는 말에서 확인된다.

      6. 이 거짓 사도들은 단순한 의미에서 유대주의자들은 아니었다.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를 기독교 세계에 확고하게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난 후 AD 66년에 발생한 로마에 대한 유대인들의 폭동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뿔뿔이 흩어짐으로써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 선교지에서 누려왔던 권위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F. F. Bruce). F. F. Bruce, 바울, p. 303.

       

      송영찬목사의 페이스북 


      슬픈 아들의 이름 "아비야"


      <열왕기상 14장>

      오늘 말씀도 북이스라엘을 우상숭배의 나라로 이끌어간 여로보암의 집에 일어난 슬프고도 기이한 이야기입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병이 들었습니다. 아비야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으며 다음 왕위를 이어받을 장래가 촉망되던 청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아들의 병으로 인하여 죽게 되자 여로보암은 아내에게 변장을 하고 실로의 선지자 아히야를 찾아가도록 시킵니다. 우상을 섬기는 자는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못 합니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 하는 나무토막, 돌덩어리 우상이 도와줄 턱도 없습니다. 결국은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해주었던 그 선지자, 곧 사람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사울이 군급할 때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의 아내가 아히야를 찾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아히야에게 여로보암의 아내가 변장하고 찾아올 것을 알려주시면서 여로보암의 아내에게 아비야가 죽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여로보암의 집안 모든 남자가 거름(똥)이 말갛게 씻기는 것 같이 끊어질 것, 성에서 죽은 자는 개가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새가 뜯어먹을 것이라는 참혹한 마지막을 예고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로보암의 집에서 오직 아비야 한 사람만이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으므로 백성들의 슬픔 속에 묘실에 장사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예언을 들은 여로보암의 아내가 디르사로 돌아가 집 문지방에 이를 때에 아이가 죽습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이 슬퍼하며 아비야를 장사하였습니다.

      아비야가 하나님께 선한 뜻을 품었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왜 아비야를 데려가시고 나답 같은 패역한 아들이 여로보암을 이어 왕이 되게 하고 다시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와 패역의 길로 계속 가도록 버려두셨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열왕기의 기록 전체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곧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은, 인간이 왕이 되어 우상을 따라가는 나라든 개인이든 결국은 멸망’이라는 것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비야 같은 청년을 도우시고 세우셨다면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늦추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래 봐야 그것은 아비야 재위로 끝나고 결국 멸망이 되었을 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아비야’는 ‘여호와는 아버지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가진 아비야의 아버지는 불행히도 우상숭배의 대명사와도 같은 여로보암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비야는 아비를 잘못 만나 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 둘째 계명은 ‘우상을 만들지도 섬기지도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까지 하시며 우상을 섬기는 자의 죄를 삼, 사대까지 갚을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상숭배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전율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위해서라도 하나님을 꽉 붙잡아야 합니다. 한 편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아비야, 곧 ‘여호와는 아버지이시다’를 멸망의 길로 달려가는 패역한 이스라엘로부터 일찌감치 불러내어 데려가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슬픈 일이지만 말입니다. 모든 남자들이 거름(똥)처럼 말갛게 씻겨질 것이나 오직 한 사람 아비야만이 묘실 속에 장사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아비야는 ‘여호와는 아버지시다’라는 이름을 가졌음에도 아버지 여로보암의 우상숭배로 인하여 슬픈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이게 우리 이야기 같습니다.  우리가 바로 마귀 아비에게서 난 자, 진노의 자녀, 멸망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흘리신 십자가의 보혈로 죄를 벗고 거듭 나 하나님의 자녀, "아비야"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심판과 멸망으로부터 영원한 생명과 영광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내신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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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화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특히 교회 사역은 훨씬 더 어렵고 불가능에 가깝죠. 또한, 쉬지 않고 변화하고 있는 오늘날의 세상 가운데서,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시대의 징조를 읽지 못하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지금은 예수님 당시보다 훨씬 더 빠르게 시대가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리더십 팀, 사역자들, 후원자들, 혹은 교회 성도들의 사고방식의 전환을 애쓰고 있다면,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이유에 대해 다시금 살펴볼 기회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변화를 거부하는 4가지 이유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자기 관심사
      변화는 당신의 영역에서의 부당한 도입입니다.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며 교류를 막는 담들이 생겨납니다. 사람들은 자기 근거지를 통제하며 지키길 원합니다. 또한 자기 영역 너머의 다른 영역에서도 힘을 행사하길 원합니다. 좋든 싫든, 우리 사람이라는 존재는 영토를 주장하고, 힘을 발휘하길 원하죠.

      2. 오해 혹은 신뢰부족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때, 거부합니다. 변화의 필요를 들먹이는 당신의 단순한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변화의 필요에 대한 지식을 당신은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의 필요에 대한 이슈들과 선택사항들에 대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3. 평가에 대한 서로 다른 방법들
      사람들은 각자의 의견이 있습니다. 그리고 변화를 통한 이익보다는 발생하는 더 큰 비용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중간 매니저로서, 당신에게는 커피휴식공간의 위치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서실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안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사소한 예이지만, 이슈들과 정책들이 얼마나 다른가 하는 것은 사람들마다의 각자의 평가와 의견이 있다는 것입니다.

      4. 결정과정에서의 확신의 결여
      때때로, 사람들은 결정과정에 포함된 모든 적절한 정보들을 믿지 않거나, 변화를 주도하는 담당자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만약, 변화를 위한 비용지불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는다면, 도리어 반대자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항은, 사람들이 자각하고 있는지 혹은 결정과정에 참여해 있는지를 확실히 해야 합니다.
      왜 사람들이 변화에 민감한지를 아는 것은, 변화를 거부 세력과의 전쟁에서 절반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단체에서 변화를 위해 저에게 상담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단체가 변화를 얼마나 싫어했는가하면, 상담중인 저를 제거하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저의 제안이 재정을 확충하고, 임금상향과 더 좋은 장비마련 및 심지어 편안한 의상으로 일할 수 있는 제안까지 포함되어 있음에도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화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리더인 여러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편하게 여기는 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여러분은 진정한 필요에 초점을 둘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바라는 진정한 교회와 사역이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Phil Cooke, "4 Reasons Your Church Won't Change"

      영문 원기사 보러 가기

       

       

       

       

       

       

       

       

      ▼  멀리서 보이는 와이키키(호텔에서~~)

       

       

       

       

      ▼  와이키키에 해가 지는 모습

       

       

       

       ▼  태평양

       

       


      당신은 성령 충만한가? / R.A. 토레이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발췌)


      당신은 성령 충만한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어떻게 성령 충만할 수 있는지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1.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유일하고도 충분한 근거로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의지해야만 한다.

      2.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알고 있는 모든 죄를 버려야만 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나아가서 우리를 속속들이 살피사 우리의 생활에서, 즉 외적인 생활이나 내적인 생활에서 주님 보시기에 그릇된 것을 드러내어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이 드러나면,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리 귀하다 할지라도 떨쳐 버려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모든 죄를 철저히 버려야 한다.

      3.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시인해야 한다. 성령은 은밀하게 제자가 되려고 하려는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성령은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세상에서 공적으로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4.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내어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 나아가 이렇게 말하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값 주고 사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저의 뜻대로 하려는 모든 주장을, 저의 생애를 주관하려는 모든 주장을 저의 길로 가려는 모든 주장을 포기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탄없이 저를 내어 드립니다. 저의 전부와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드립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보내주소서. 하나님의 뜻대로 저를 사용하소서. 하나님의 뜻대로 처리하소서. 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작게 보이는 것이라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붙잡고 있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모든 것을 망쳐 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복종은 단지 무한한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말한다. 그것은 세상의 어떠한 아버지의 사랑보다도 더 지혜로울 뿐 아니라 세상의 어떠한 어머니의 사랑보다도 더 부드러운 사랑을 지니신 하늘 아버지에 대한 복종이다.

      5.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간구가 있어야 한다. 주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1:13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 성령을 달라고 간구하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을 기대하라.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6.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언약이 아무리 명확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믿을 때에만 개인적으로 그것을 누릴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11:24)고 말씀하신다.

      당신이 성령을 간구할 때는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이 구한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알고 또 그에게 구한 것을 얻은 줄을 안다(요일5:14-15).

      당신은 별로 달라진 것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당신의 감정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라. 하나님이 당신의 기도를 들으심을 믿으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셨다고 믿으면, 나중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단순한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을 실제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때때로 성령을 바라보며 홀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당신의 삶에 대한 전적인 주도권을 다시금 새롭게 그의 손에 맡기는 것이 좋다. 당신의 생각을 지배하고, 당신의 욕망을 지배하고, 당신의 야망을 지배하고, 당신의 선택을 지배하고, 당신의 목적을 지배하고, 당신의 말을 지배하고, 당신의 행동을 지배하고, 모든 것을 지배하시도록 주님께 간구하라.

      그리고 반드시 그가 그렇게 행하실 것을 기대하라.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오로지 당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당신의 삶 전체를 지휘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를 갖게 하는 것이다.


      R.A. 토레이의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 중 일부 발췌..
      출처: 생명나무 쉼터
      http://blog.daum.net/7gnak/15720727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방법 - 6 / 찰스 스펄전

       

       

      진정으로 함께할 동지를 얻으라

      나는 성령의 역사가 설교자에게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설교자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그에 못지않게 사역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사실 혼자서 밖에 나가 말씀을 전해야 하는 사람들은 매우 불리한 입장에 있다. 기도로 열심히 후원해 줄 교회와 관계를 맺는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신이 일하는 곳에서 그런 교회를 찾기가 어려울 때는, 뒤에서 필요한 도움도 주고 기도도 해 주고 함께 거리에 나갈 수도 있는 형제를 대여섯 명과 관계를 맺는 것이 가장 좋다. 어떤 사람들은 독립성이 뛰어나서 돕는 사람들 없이도 혼자서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혼자서 일하는 것은 그다지 현명하지 않다. “내가 꼭 대여섯 명의 젊은이들을 함께 데리고 나가 그들에게 유익을 주고 그들을 훈련해 일군으로 만들어야 하는가? ”하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라. 대여섯 명의 형제들 모두 하나님의 진리를 제법 많이 알고 있는 젊은이라면 서로에게 매우 유익할 것이다.

      그동안 하나님은 나의 사역에 큰 복을 베풀어 주셨다. 그러나 모두 앞에서 고백하지만, 그 모든 것은 내가 아니라 테버나클교회를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나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는 사랑스런 친구들 덕분이다. 설교자들은 주의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 나의 사랑스런 친구이자 집사인 월리엄 올니(Willian Olney)는 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목사님은 우리를 지금까지 잘 이끌어 왔고, 우리는 목사님을 진심으로 따랐습니다. 모든 것이 매우 형통했습니다. 모두 목사님의 지도력을 믿지요?” 교인들은 “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만일 목사님이 건널 수 없어 보이는 도랑까지 우리를 인도한다면, 우리의 몸으로 도랑을 가득 채워 목사님을 건너게 합시다”라고 말했다. 참으로 감동적이 말이었다. 도랑이 채워졌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것이 채워진 것을 느꼈다. 진정한 동지가 있다면 설교자의 능력은 매우 커질 것이다.

      훌륭한 아내는 남편에게 큰 복이다. 여성들이 거리에서 설교하는 것은 제 역할에서 벗어난 것일 테지만, 거리에서 전도를 하고 돌아온 남편을 즐겁게 평안하게 맞아 주는 일은 얼마든지 잘 감당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남편이 말씀을 더 잘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신중하고 온유한 태도로 보이는 것도 남편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남편이 사소한 문제에 관해 작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온유한 태도로 넌지시 깨우쳐 준다면, 남편은 즉시 잘못을 깨닫고 바르게 행동할 것이다.

      예전에 “나의 조언자는 오직 아내뿐입니다. 아내는 나보다 교육을 더 잘 받았습니다. 전에 나는 문법에 어긋나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나에게 문법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사람들이 비웃을 것이라고 넌지시 말하더군요.” 그에게 그의 아내는 영어 교사나 다름 없었다. 그에게 그녀는 금보다 더 귀했다.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조력자들을 얻는다면, 날마다 그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보다 지식이 더 많고, 또 신중한 태도로 우리를 깨우쳐줄 수 있는 친절한 신자들과 두터운 관계를 맺는 것도 매우 유익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데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시려는 의도가 있다. 말씀을 전해 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면서 자화자찬에 빠진 설교자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들어보았을 것이다. 어는 날 밤 그는 꿈속에서 마지막 날에 자신이 받게 될 상급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천사에게 누가 상급을 받게 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천사는 “강단 계단에 앉아 너를 위해 기도하는, 귀가 들리지 않는 노인이 복을 가져다 나르는 통로였다”라고 대답했다.

      우리는 그런 노인과 같이 중보하는 기도로 우리의 사역에 복을 가져다 나른 나이 든 기도의 용사들과 친구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한쪽에게만 복을 주시지 않고 양쪽 모두에게 복을 주신다. 아브라함은 참으로 많이 기도했지만, 그만이 구원받은 다섯 개의 도시 가운데 하나를 얻는 것은 아니다(창14:1-16, 18:16-19참고). 비참한 처지가 된 그의 조카 롯도 복을 받았다. 그는 조금밖에 기도하지 못했지만, 그 적은 기도가 그의 처지를 바꿔놓았다. 그가 피한 소알은 심판에서 보존되었다 훌륭한 성도들이 드리는 많은 기도에 우리는 기도를 조금이라도 보태도록 노력하자. 왜냐하면 그들에게 그런 기도가 필요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자신이 제대로 된 목사인지 살펴봅시다

      김정한 ㆍ 2013-05-07 (화) 00:23 IP: 180.xxx.48 ㆍ조회: 114      

      이 글은 자신이 슬기로운 종인지 미련한 종인지를 살펴보자는 의미로 쓰여진 글입니다.

      오늘 아침 시편 53편 1절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목과 같이 내 자신이 슬기로운 종인지 미련한 종인지가 생각이 나서 은혜를 같이 나눴으면 하는 마음으로 글 올린다.

      물론 시편 53절 1절의 말씀처럼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불신자라고 지칭하는 말임에는 틀림없지만, 성경은 믿는 자들 안에게서도 어리석은 자 미련한 자들이 있다는 말씀이 적지 않다.  (마7:26, 마25:2 갈3:1, 엡5:17 등)

      성경은 믿음 안(=언약 안= 주 안)에 들어왔다고 하는 자들 가운데도 이렇게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이 있다고 하면서 이런 자들은 심판의 날에 헛된 것을 쌓았다고 하면서 기업을 유업으로 얻지 못하고 도리어 주님께로부터 징책이 있고 바깥 어둠에 버려질 수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 주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늘 자신을 돌아보며 경계로 삼아야 할 말씀이랄 수 있다.

      이것은 주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목사들이 더욱 경계로 삼아야 할 말씀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직무상 목사들에게 많은 것을 맡겼으니 많은 것을 주님께서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반성도들은 예외란 말은 아닌 것이다. 이 글은 목사님들이 읽었으면 해서 목사님들을 대상으로 썼다.)  

      그러면 누가 어리석고 미련하고 악한 종인가?
      첫째는 당연한 말이지만 자신이 책무가 얼마나 귀한지를 모르고 깨어 있지 않는 자들은 무지하고 어리석은 종이다.
      주님께서는 교회의 성도들의 신앙을 세워나가도록 주님이 불러 책임을 맡겨준 자들인 고로 자신이 늘 깨어 있으며(마26:41) 잠자고 있는 자들을 깨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마24:46)

      둘째는 주님보다 자신을 돌아보는 자들이다.
      주님께서는 제자(=일군=종)를 부를 때 일한 뒤에 삯을 주겠다고 하면서 불렀다(마19:30, 마25:21)

      그런데도 자신이 구약의 제사장인 줄 알고, 성도들을 섬기지 않고 군림하면서 세상 것에 취하여 목사들끼리 서로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주님께서 원하는 분량(엡4:11-15)으로 세우지 않고 망하게 한다면 정말 주님께로부터 엄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마24:51)

      지금이 어디 때인가?
      세상 부(富)에 명예(名譽)에 취하면 주님이 (主님)으로 보이지 않고 복 주시는 주님만으로  보이게 될 것이며 기업으로 주신다는 천국의 상은 시들해 보이는 것이다. 그런 것에 취하면(딤전6:9) 술 취한 자들이 혼미해지듯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모르는 자들이 된 것이다. 그런 자들은 목사라 할지라도 어리석고 미련하고 악한 자들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늘 깨어 돌아보면서 때(時期)를 알고 양식을 나눠줄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글은 누구를 비판하기 위해서 쓴 글이 아니라 자신을 돌보자는 뜻으로 쓰여진 글이며 모든 주의 종들이 그렇게 되기를 기도한다.


      출처: USA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

      십계명 서론 / 아더 핑크

       

      서론적 고찰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필수불가결한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의무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지식에 부응하는 양심적인 행위이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구원에 대한 빛나는 소망은 가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다면 순종에 대한 확실한 방법도 모를 것이다. 행함이 없는 지식은 있을 수는 있어도 지식이 없는 행함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안다는 것은 우리에게 행동규범으로서 율법을 주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심판하시는 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원래 우리 마음속에 기록된 본성의 율법을 우리가 더럽힘으로써 그 계명들을 더 이상 읽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을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과 십계명에 기록하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는 먼저 십계명의 공포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십계명이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전달되었던 모습은 엄숙했고 우리에게 훌륭한 가르침으로 가득 찼다.
      먼저 백성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존전에 서기 전에 외부적인 더러움을 깨끗이 하는 의식을 갖기 위해 이틀 동안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출 19:10,11).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 앞에서 기다리게 되거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받기 전에 몸과 마음의 신중한 준비가 있어야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 존전에 서기 위하여 자신들을 성결하게 했다면, 하물며 우리는 더욱 하늘에 계신 하나님 존전에 서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성결하게 해야만 되지 않겠는가?
      또한 하나님이 강림하셨던 산은 지경이 정해져 있어 어느 누구도 그 거룩한 산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금령이 있었다. (출 19:12,13)
      이것은, 하나님은 무한히 높으시고 최상의 존숭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을 가르치며, 또한 그의 율법의 엄격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번에는 우리가 여호와께서 그의 율법을 전수하시기 위하여 강림하셨던 두려운 현현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자(출 19:18,19).
      여호와의 현현의 그의 권위에 대한 존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두렵게 하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율법의 전수에서도 그렇게 무서운데 율법을 어김으로 우리에게 심판하러 오신다면 그 무서움이 얼마나 심하겠는가를 의미하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전달하셨을 때 백성들은 너무나 두려워서 모세에게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중재자와 통역자로 일해 달라고 간청했다. (출 20:18,19)
      이는 율법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직접 전달된다면 그것은 정죄와 죽음의 역할을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이 중재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달되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보게 되고 지키게 된 것이다. (고전 3:19, 갈 9:21, 갈 6:2)
      따라서 모세는 산으로 올라가서 두 돌판 위에 하나님께서 손수 쓰신 율법을 받았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원래가 악하여 하나님의 손가락 외에는 누구도 그의 율법의 흔적을 남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 돌판들은 모세의 거룩한 분노로 말미암아 깨뜨려져서(출 32:19) 하나님이 다시 기록하신 것이다.(출 34:1)
      이것은 자연의 율법 창조시 우리 마음에 기록 되었으나 우리가 아담 안에서 타락했을 때 깨뜨려졌고 중생 시 우리 마음에 다시 기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히 10:16).
      그러나 혹자는,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으로 완전히 폐지되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아무도 질 수 없는 무거운 속박의 멍에로 우리를 데려가고자 하십니까? 신약에서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분명히 선포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서 자기 백성들을 자유케 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주셨던 그리스도인의 자유와는 전혀 모순되는 것으로 십계명의 권위를 인간의 양심에 부과하려는 시도가 아닙니까?” 라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런 질문에 우리는 흔히 이렇게 답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율법이 폐지되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마 5:17,18).
      진실로 그리스도인은 행위언약이나 정죄하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생활의 법도와 거룩케 하는 율법 아래 있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십계명의 독특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먼저는 이 독특성이 그의 거룩하심에 대해 두렵고도 웅장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시내산 하나님의 계시는 오는 모든 시대에 섬겨야 할 인간 의무를 집대성하였던 것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십계명에 특별하신 중요성을 부과하셨는데 그 공포 모습이 이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십계명은 구름과 어두움, 천둥과 번개와 나팔소리의 무시무시한 부대현상과 함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분명한 목소리로 들려 왔으며 그렇게 들려진 신적 계시는 유일무이한 부분들이었다. 어떠한 의식법이나 시민법도 이렇게 독특할 수 없었다.
      그 열 가지 말씀들, 그것만이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돌판 위에 쓰여 졌으며 그것만이 보호되기 위해 언약궤에 넣어졌다. 이와 같이 십계명에 부여된 유일한 영광과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우리는 극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셋째, 십계명의 원천인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십계명의 서두에 아주 보잘것없는 관심을 가져 왔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아무리 웅장한 권위가 율법의 공포 때에 수반되었다 해도 율법의 원천은 사랑에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율법은 주님이 자기 백성에게 은혜로운 구속자이시며 의로우시다는 것(즉, 그의 성품)을 분명히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것을 분명히 이해함으로 얻어지는 결론이자, 원리는 다음과 같다. 즉 구속받은 사람들에게서는 하나님의 성품과 명령에 일치하는 생활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심은 사랑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을 기초로 자기 백성에게서 사랑받으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때에만 구속하시는 하나님과 구속함을 받는 백성들 사이에 일치와 동일함이 있게 된다.
      제 2 계명 후반부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수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순종이란 오직 사랑하는 데서만 나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모든 필요조건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데 요약되어 있다고 선포하셨다.

      넷째, 우리는 십계명의 영속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십계명이 모든 세대를 거쳐 각 사람들을 얽매고 있다는 점은 여러 면에서 생각해 볼 때 밝혀진다.
      첫째로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해 확고부동한 표현이 있지만 모든 도덕적 행위(moral agent)위에 십계명의 권위는 필연적으로 적용되어진다는 것이다. 즉 율법(다스리시는 법도)이 폐지되기 전에 하나님 자신의 특성도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율법을 말하며 그로부터 인간은 계속적으로 율법에서 떠남으로 구원받을 수 없었다. 이성과 의지가 부여된 피조물이 사는 곳은 어디든지 도덕적 율법이 그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도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다. 그래서 우리도 그의 발자취를 따라야 할 것이다.

      셋째로 이방인들에게 바울 사도가 특별히 “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라는 의문을 제기하고서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우리는 율법을 세우느니라.”라고 자문자답했다(롬 3:31).

      마지막으로 율법의 영속성은 그의 백성들이 새로이 태어날 때마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친히 기록하심으로 유지된다. (렘 31:33, 겔 36:26,27)

      다섯째, 도덕률이 십계명의 숫자에 있어서 열 가지가 완전할 수가 있겠는가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 보자. 이것은 성경상에서 “십계(十戒)”(출 34:28)라고 언급되었는데 열이란 숫자는 전체가 필요한 것들로서 완전하게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애굽에 내린 재앙들이 그렇게도 여러 번 계속되었다는 점은(10번 재앙이 내림) 하나님 심판의 완전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숫자의 상징적인 중요성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히브리인들의 범죄가 열 번에 이르도록 허용되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들은 열 번이나 죄를 범했기 때문에(민 14:21) 죄악의 모든 분량을 채웠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십일조, 혹은 십분의 일을 성별하여 하나님께 드림이 되며 모든 소산은 십이라는 숫자로 표현되고, 이들 중 하나는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고 주를 위하여 있다는 표시로 주께 바쳐진다.

      여섯째, 십계명의 구분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납득할 만한 충분한 이유 없이 행동하시지 않기 때문에 십계명을 두 돌판 위에 기록하신 것에는 특별한 뜻이 계셨다. 이러한 의도는 표면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들 계명의 내용은 하나님의 공의를 한 데 묶어서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의무를, 후자는 인간을 향한 인간의 의무를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전자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관계에 대해, 후자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하늘의 주관자에게 속하는 영광을 취한다면 우리 이웃에게 아무리 예의바르다 해도 그러한 의는 철저히 무가치하다. 마찬가지로 이웃에게 사랑의 의무는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처럼 된다 해도 이는 역시 헛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면서 내가 음행하지 않았다. 도적질하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않았다고 위안 받으면서 예배드리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거부된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의 의무가 첫 돌판에 기록된 것은 칼빈이 일컫는 바와 같이 그 계명들이 ‘종교의 제목’이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과 활기’를 이루는, 즉 ‘종교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경배함이 없이는 인간들 사이의 어떠한 평등도, 사랑도 무익한 것이다. 경건치 않은 인간들이 제 아무리 자기들끼리 실시하는 정의가, 자비가, 인내가 있다 해도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는 쓸데없는 것들이다.
      그와는 반대로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활에 올바른 위치를 차지하고 계시며 우리가 옳고 그름의 주관자로 그를 공경한다면 우리는 이웃들에게도 공평하게 대할 수가 있을 것이다. 5계명이 첫 돌판에서 끝났는지 둘째 돌판에서 시작되었는지 하는 십계명 구분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전자의 견해를 지지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릴 대는 부모가 하나님의 위치에 서게 되고 성경상에서도 부모를 이웃과 동등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로는 첫 돌판의 다섯 계명이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포함하고 있으나 나머지 계명들에게서는 그 어디에도 그 용어가 없기 때문이다.

      일곱째, 우리는 십계명의 영적인 면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율법이 신령하다”(롬 7:14)는 것은 율법이 신령한 입법자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 단순히 외부적인 복종보다 더한 것 즉, 인간 마음의 순종을 가장 철저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십계명이 우리 마음의 생각과 소원에까지 적용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 우리가 십계명을 얼마나 지키지 않는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은 “중심에서”(시 51:6) 진실을 요구하신다. 심지어 우리의 생각에서조차도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벗어나는 조그만 탈선해위도 금하시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가 가장 은밀한 성향과 의도를 감찰하고 있으며, 우리의 지성과 사랑과 의지를 거룩한 뜻에 따르기를 요구하고 있으며,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사랑에서 우러나와야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상의 모든 사실들을 볼 때 율법의 기원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직까지 인간의 영을 주장한다고 장담한 법은 없었으나 여호와의 율법은 인간의 깊은 마음속을 감찰한다. 이러한 율법의 영적인 면은 예수께서 음욕을 품는 것이 곧 간음이라고, 분노가 살인이라고 말씀하셨던 관계로 명백해졌다.

      “여덟째, 우리는 십계명의 임무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첫째로, 도덕적 율법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오직 의(義)이지만 우리에게는 불의(不義)밖에 없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죄는 우리의 판단을 어둡게 하고, 이기적인 사랑에 빠지게 하고, 잘못된 자신감을 갖도록 작용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율법의 높고 거룩한 요구에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더러움과 허물과 오만함을 깨닫게 될 것이며 우리에게 요구되는 의무를 수행하는 데에 능력의 부족을 의식하게 된다.
      칼빈은「기독교 강요」에서(2권, 7장 7절) “이와 같이 율법은 일종의 거울이다. 거울 속에서 우리는 얼굴에 묻어 있는 오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율법 속에서 우리는 첫째 우리의 무능을, 둘째 우리의 허물을, 셋째 이상 두 결과로 인하여 저주를 알게 된다.”라고 잘 표현했다.
      율법의 두 번째 임무는 악인들을 경고한다. 악인들이 비록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에는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를 기쁘시게 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을지라도 형벌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악한 행동을 삼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악인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사회에 유익이 된다. 세 번째, 율법은 성도들의 생활규범이 되는 것으로 그들을 지도하고 하나님의 은총 속에 지켜주는 것이다.

      아홉째, 우리는 십계명의 상벌에 대해 생각하자. 여호와는 우리를 죄의 예속상태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많은 의무를 감당케 하셨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엄숙한 광경을 보여줌으로 그들 마음속에 공경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셨다.
      그 다음에 그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는 약속과 경고의 말씀을 후반부에 추가시키셨다. 이는 우리가 그의 권위에 순종하고 그의 명령을 기쁘게 순복하며 그가 금하신 것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들이 헛되이 일하는 것이 아니며 반역자가 형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열 번째, 마지막으로 우리는 십계명의 해석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시편 기자는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니이다.” (시 119:96)라고 했다. 도덕적 율법은 대단히 넓어서 그 권위가 우리 생활의 모든 도덕적 행위에까지 미친다. 성경의 다른 부분들은 십계명에 관한 주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논리적으로 우리를 경고함으로 자극하고, 약속함으로 우리를 달래며, 경고함으로 죄를 짓지 못하게 하며, 그렇지 않으면 역사적으로 기록된 실례들을 취하여 전자는 고무시키고 후자는 금지시킨다.
      신약의 명령들은 단지 십계명에 대한 설명, 확충 그리고 적용이라는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자. 특별히 명령되거나 혹은 금지되는 부분들이 있다면 이는 형식적으로 말하는 바 그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함축되었음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그러나 좀 더 특별한 의미를 생각해 보자.
      첫째, 각각의 계명들에 있어서 주요한 의무나 죄악은 그보다 사소한 것들의 전형으로 나와 있다. 그리고 나타난 행위에는 그 행위를 일으키게 하는 모든 관련된 원인까지도 포함된다. 어떤 죄가 거론된다 해도 그러한 죄의 원인과 결과와 동일한 종류의 모든 죄는 금지된다. 그리스도께서도 실제로 사람을 죽인 것뿐만 아니라 마음의 분노도 육 계명에 저촉된다고 설명하셨다.
      둘째 어떠한 악이 금지되면 그 반대로 선이 요청되며, 어떠한 선이 명령되면 악은 정죄 받는다. 이를테면 제 3계명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 이름이 망녕되이 일컫게 되는 것을 금하셨으며 그 결과로 자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구하시는 것이다.
      제 8계명에서 도둑질하는 것을 금했던 것은 그 반대의 의무, 즉 우리가 일하여 마땅히 받아야 할 것에는 대가를 주신다는 것이다(엡 4:28).

       

      출처: 포도나무선교회/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그분이 주셨지만







      * 삶은 그분이 주셨지만,
      즐거움은 내가 드릴 선물입니다.

      * 얼굴은 그분이 주셨지만,
      표정은 내가 드릴 선물입니다.

      * 몸은 그분이 주셨지만,
      건강은 내가 드릴 선물입니다.

      * 시간은 그분이 주셨지만,
      유용하게 활용하는건 내가 드릴 선물입니다.

      * 눈은 그분이 주셨지만,
      성경적 세계관으로 보는건 내가 드릴 선물입니다.

      * 입은 그분이 주셨지만,
      좋은말을 말하는건 내가 드릴 선물입니다.

      * 귀는 그분이 주셨지만,
      애써 귀기울여 듣는건 내가 드릴 선물입니다.

      * 손은 그분이 주셨지만,
      땀 흘려 수고하는건 내가 드릴 선물입니다.

      * 발은 그분이 주셨지만,
      사명따라 뛰어가는건 내가 드릴 선물입니다.

      * 가정은 그분이 주셨지만,
      천국으로 만드는건 내가 드릴 선물입니다.

      * 배우자는 그분이 주셨지만,
      사랑하고 섬기는건 내가 드릴 선물입니다.

      * 자식은 그분이 주셨지만,
      가꾸고 키워가는건 내가 드릴 선물입니다.

      * 교회는 그분이 주셨지만,
      충성하고 섬기는건 내가 드릴 선물입니다.

      * 컴퓨터는 그분이 주셨지만
      쓰는건 내가 드릴 선물입니다.

      * 환란당한자는 그분이 주셨지만,
      사랑과 지혜로 섬기는건 내가 드릴 선물입니다.

      * 성경은 그분이 주셨지만,
      나의 인격으로 내면화시키는건 내가 드릴 선물입니다.

      하나님, 그분이
      나에게 주신 선물을 세어보면
      이렇게 끝도 없는데.....
      이제 그 선물들 어떻게 가꾸며 포장해서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릴
      선물로 만드는가 하는건
      내게 맡겨진 일생의 과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하늘아버지 집에 가는 그날까지 .....

       
       
       
       
       
       
      출처: 사모님사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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