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파의 소름 돋는 억지와 음모론
법, 질서, 국가도 아랑곳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이기주의다. 정의(正義)와 공평(公平)의 기준은 오직 구원파 뿐이란 것인가?

1.
  기독교복음침례회(일명 구원파)가 발표한 15일 공식성명 내용은 오싹하다. 구원파는 ‘우리는 왜 검찰에 저항하는가’ 제목의 성명을 통해서 유병언 회장 수사 관련,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불공정 수사”라고 강력 반발했다. 연이어 발표한 기독교복음침례회 평신도 어머니회 성명은 “법의 공정함을 믿지 못해 법집행을 거부한다”고 했다.
  
  구원파 성명엔 세월호 침몰 사망자·실종자·유가족에 대한 유감(有感), 위로(慰勞)의 표현이 전무하다. 300여 명의 희생자 앞에서 TV를 통해 낭독된 이 성명은 일단 뻔뻔하다.
  
  구원파 성명은 오히려 “침몰의 책임은 청해진에 있지만 사망의 책임은 해경에 있다” “300여명의 사망사고에 대해서는 당연히 청해진보다 해경의 책임이 크다”고 주장했다.
  
  2.
  ■ 세월호 참사의 주(主) 책임은 선장(船長)·선원(船員) 그리고 선사(船社), 청해진해운에 있다.
  
  검찰의 판단에 따르면, 선장·선원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혐의자들이다. 이들은 승객의 탈출을 유도할 장비(裝備. 선내방송, 비상벨, 무전기 등)와 충분한 시간(時間)이 있었다. 그러나 탈출 직전 일상복으로 갈아입었다. 검찰은 ▲선장·선원이 제복을 입고 있었다면 선원법에 따라 가장 늦게까지 배에 남아야 했었고, ▲대피령을 내려서 갑판 위로 승객이 쏟아져 나오면 자신들이 구조될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승객들의 사망 위험을 외면한 ‘미필적 고의’가 성립된다고 보고 있다.
  
  선장·선원은 육지에 내려서도 무전기로 대피하라는 명령을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분을 속였다. 증거인멸까지 시도한 것이다.
  
  ■ 청해진해운은 무리한 증축(增築)·과적(過積)으로 사고를 자초했다. 사고 당시 세월호엔 최대적재량보다 1,400t을 초과한 2,478t을 실어 운송료 6,200만원을 더 챙기려 했었다.
  
  청해진해운은 세월호가 무리한 증축·과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합수부 발표에 따르면, 상무 金모씨는 김한식 대표에게 복원성(復原性) 등 세월호 결함을 보고한 사실이 있었다. 원래 선장 신(申)모씨와 선원들 일부는 회사에 단체로 사표를 내기도 했었다. 사고 위험을 수차례 알려도 묵살된 탓이다.
  
  ■ 선장·선원·선사의 범죄혐의는 유병언 회장에게 귀결된다. 유 회장은 사원번호 ‘A99001’로 등재된 세월호의 실제 주인이다. 매년 월급·고문료 등으로 청해진해운에서 1억6천 만 원을 받았다. MBN 5월12일 보도에 따르면, 유 회장은 김한식 대표가 세월호 복원성 문제를 보고한 뒤 매각 지시를 내렸다. 유 회장 본인도 세월호 결함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 합수부가 확보한 2013년 초 청해진해운 임원회의 회의록엔 “복원력 저하로 최고경영자께 심려를 끼쳐 죄송스럽다”는 내용이 나온다.
  
  유병언 회장 일가로 흘러간 계열사 자금은 996억 원에 달한다. 이 엄청난 자금이 빠져간 회사의 곡간은 텅텅 빌 수밖에 없다. 청해진해운도 지난 해 7억8천만 원 손실이 났었다.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 급여를 줄였고 안전교육비 역시 연 54만1000원을 쓰는데 그쳤다. 그 결과 참사가 터졌다.
  
  ■ 구원파는 이 예측된 참사의 책임이 유병언 일가와 청해진해운에 없다는 억지를 부린다. 해경의 사후 대처는 분명 엉성하고 어설프고 답답했다. 그러나 언론이 과장한 부분을 빼고 나면 ‘해경의 책임이 선장·선원·선사의 책임보다 크다’는 주장은 가당치 않다. 궤변이다.
  
  구원파는 사람 죽인 강도(强盜)보다 사람 죽는 것을 막지 못한 경찰(警察)의 책임이 크다는 식으로 말한다. ‘우리는 주된 책임이 없다’며 ‘유병언과 천해지·아이원아이홀딩스 압수수사를 해야 한다면, 해경청은 물론 상부부서인 경찰청, 해수부, 안행부, 청와대까지 압수수색 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법, 질서, 국가도 아랑곳하지 않는 철두철미한 이기주의다. 정의(正義)와 공평(公平)의 기준은 오직 구원파 뿐이란 것인가?
  
  3.
  구원파 성명은 동문서답(東問西答)식 ‘물타기’로 쟁점(爭點)을 돌렸다. 성명은 “우리를 근거 없이 살인집단·테러집단 등으로 몰고 가는 정부의 보도지침을 즉각 중단하라”며 “우리는 테러집단도 사이비집단도 아니”라고 했다.
  
  역시 궤변이다. 검찰은 물론 언론도 구원파를 사이비집단 심지어 살인집단·테러집단으로 몰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의 주범인 선장·선원·선사 이 피라미드 꼭짓점에 위치한 유병언 일가의 업무상과실치사, 횡령·배임·탈세 등 불법·탈법 행위에 대한 수사와 비판을 하고 있을 뿐이다.
  
  구원파 성명은 이 모든 불법·탈법에 대한 법리적 항변 대신, 있지도 않은 “살인집단·테러집단” 비난과 있지도 않은 “정부의 보도지침” 운운한다. 부당한 피해를 보고 있다는 약자(弱者) 코스프래, 희생자(犧牲者) 연극이다.
  
  4.
  구원파 성명은 음모론도 동원했다. “언론의 마녀사냥” 운운하며 “유 씨 일가에 대한 수사가 마치 사전에 기획하고 준비시킨 수사처럼 진행됐다”며 91년 오대양 사건을 수차례 언급했다. 이어 “91년과 비슷하게 2014년 국정원 간첩조작사건 등등 정부에 대한 국민들 원성이 높아질 무렵(···) 오늘의 상황이 단순한 우연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구원파 성명은 ‘국정원 간첩증거조작 논란’을 ‘국정원 간첩조작사건’이라고 주장했다. 박근혜 정부가 이것을 감추기 위해서 유병언 탄압에 나섰다는 논리이다. 인터넷에 유포되는 좌익들의 종말론적 거짓선동과 다를 바 없다.
  
  5.
  구원파 성명은 자해공갈(自害恐喝)식 엄포도 서슴지 않았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잃을 것도 없다”며 박근혜 대통령에게 “기독교복음침례회를 말살해서 당신이 얻을 것은 무엇인가. 이런 음모를 꾸밈으로써 국가의 통합과 화해를 파괴하는 사람의 계획이 박 대통령 당신을 위험하게 만들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라. 이 이야기는 세상에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드리는 충언”이라고 했다. 물러날 곳도 잃을 것도 없는 이들의 마지막 충언. 섬뜩한 말이다.
  
  구원파 성명은 “상기 우리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검찰과 정부는 더 이상 저희 협조를 기대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법의 공정함을 믿지 못해 법집행을 거부한다” “저희가 아무리 결백하고 당당해도 그것이 결코 공정하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1991년 경험으로 배웠기에 더는 똑같이 당하고 싶지 않다” “여기서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단순한 검찰의 수사(搜査)가 아니라 법집행을 거부하는, 반(反)법치·反질서·反국가 집단의 선언이다.
  
  5.
  법 앞에 모든 이는 평등하다. 불법엔 처벌이 따른다. 그것이 국가다.
  
  만일 정부가 구원파 협박에 굴복해 유병언 일가의 처벌에 몸을 사리게 된다면 국민은 모든 책임을 해경과 정부에 돌리게 될 것이다. 거대한 혼돈의 쓰나미 앞에서 박근혜 정부가 살고 대한민국이 사는 길은 유병언 일가의 불법(不法)에 대한 엄정한 집행뿐이다. 유병언과 연결된 부패의 고리를 끊지 못하면 국가가 쓰러질 판이다 

  
  
김성욱의 전체기사  
2014년 05월15일 23시05분


조병수의 목회편지(115)

딤전 6:11

피(避)와 추(追)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믿음의 성패는 일상에서 결판이 난다. 우리에게는 무슨 신기한 현상을 체험
할 때 믿음이 강화되고 그렇지 못할 때 믿음이 상실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이 은근히 이런 생각을 조장하고, 또한 적지 않
은 신자들이 뭔가 특별한 것을 맛보고 싶어 안달을 한다.

일상에서 쉽게 판가름나는 ‘믿음’

물론 어떤 놀라운 일들을 경험한 결과 신앙이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는 경우
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훌륭해지느냐
아니면 망가지느냐 하는 것은 훨씬 더 일상적인 생활에서 벌어진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삶에서 신앙이 독실하게 자라기도 하고
형편없이 무너지기도 한다. 이 때문에 날마다 만나는 삶의 현장을 믿음의 현
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신앙의 이런 일상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피하다”라는 말과
“따
르다”라는 말을 사용한다. 피(避)와 추(追)는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한
시도 따돌릴 수 없이 필연적으로 반복하는 두 가지 행위이다. 바꾸어 말해
서 우리의 삶은 어떤 것을 피하거나 어떤 것을 따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일상 생활가운데 무엇인가를 멀리하고 무엇인가를 가까이하는 것을
수없이 반복한다.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그러나 피하는 행위와
따르는 행위는 서로 간에 너무나 순간적으로 교체되기 때문에 어떤 때는 이
둘이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엇을 피하는 것은 다른 것을 따르
는 것이며, 무엇을 따르는 것은 다른 것을 피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길에서 성공하려면 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피(避)는 우리가 이미 일상생활 가운데 익숙하게 연습한 방법이다. 사도 바
울은 “이것들”을 피하라고 지시한다. “이것들”이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다른 교훈(3절), 교만과 변론과 언쟁(4절),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
(4절) 그리고 돈을 사랑함(10절) 같은 것을 가리킨다. “이것들”은 우리가
매일같이 끊임없이 마주치는 문제들이다.
우리의 주위에는 “이것들
”이 짙은 안개처럼 빽빽하게 포진해 있다. 우리
의 귀는 계속적으로 다른 교훈을 듣고, 우리의 마음은 쉴 새 없이 교만과 투
기와 악한 생각에 공격을 받으며, 우리의 입은 틈만 나면 변론, 언쟁, 비방
을 내뱉기에 알맞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것들”에 직면한 우리에게 아주
간단히 “피하라”는 대처방법을 제시한다. 어찌 보면 이것은 너무나 간단해
서 과연 이런 방법으로 “이것들”을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도 한다.
바로 이런 의구심을 깨뜨리겠다는 듯이 사도 바울은 또 하나의 처방을 내밀
었다. 그것은 “따르라”는 제안이다. 피하는 것은 결국 따르는 것으로 연결
되어야 한다. 추(追) 역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많이 연습한 방법이다. 사
도 바울에 의하면,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
내와 온유”이다.
사도 바울이 여기에 열거한 여섯 가지 단어는 우리의 일상에 들어와 살이 되
어버린 하늘세계의 신비들이다. 그것들은 출처가 하나님인 것임은 분명하지
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본래는 하나님께 속
해 있던 그것들이 이제는 모두 우리의 현장에 들어와
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
켰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같이 지속적으로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
와 온유를 따라야 한다.
우리는 인생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무엇인가를 따르고 무엇인가를 피한다.
갓난아기였을 때 우리는 먹고 싶은 것에는 떼를 쓰면서 달라붙고 먹기 싫은
것에는 악을 쓰면서 거절했다. 소년시절 우리는 재미있는 것을 열심히 했지
만 재미없는 것 앞에서는 미련 없이 줄행랑을 쳤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되
어서도 무엇인가를 따르고 무엇인가를 피하는 것은 여전히 계속된다.

피할 것과 따를 것조차 구별 못해

우리는 피하는 것과 따르는 것을 일생동안 충분히, 정말 충분히 연습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이렇게 많이 연습한 피함과 따름을 신앙의 길에서
는 잘 실천하지 않는다. 게다가 더 이상한 것은 따라야 할 것은 피하고, 피
해야 할 것은 따르는 기괴한 행위를 전혀 스스럼없이 저지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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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꽃 놀이패 쥔 금수원
강제진압은 진상규명 물거품 만들 가능성 커
2014년 05월 17일 (토) 14:35:10 양재영 ( 메일보내기 )( newsnjoy

   
 
  ▲ 구원파 금수원 입구에 걸린 ‘김기춘 실장, 갈데까지 가보자’ 플래카드. 사진제공 서울신문  
 
“모든 것은 이미 말해졌다.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지 평론가였던 앙드레 지드의 말이다. 잘못되고 왜곡된 역사가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것은 지나간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을 귀 기울여 듣지 않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작년 4월 17일 텍사스 비료공장에서 대형 폭발사고가 일어나 20년 만에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일명 ‘다윗파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1993년 4월 19일 작년 폭발 사고가 일어났던 텍사스 웨이코의 비료 공장 자리에서 인질극을 벌이다 발생한 참극이었다.

당시 ‘다윗파’라는 광신적 종교 집단이 인질을 잡고 경찰과 51일간 대치하다, 미국 연방경찰이 진압작전을 전개하자 자신들의 건물을 방화, 신도 80명(어른 53명, 어린이 25명, 태아 2명)이 불에 탄 체 주검으로 발견되었던 당시 미국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다윗파’ 교주인 데이비드 코레시가 이끄는 일당들은 연방정부의 사법, 조세권 등을 거부하며 독자생활을 하다 공권력과 대립하고 되었고, 무기와 폭발물을 잔뜩 쌓아놓은 채 연방요원들과 무장 대치극을 벌이다 화재에 의해 몰살되었다. '웨이코 학살(Waco massacre)' 이라고도 불렸던 이 사건은 ‘집단자살극’이라는 설도 있었지만, 대체로 과도한 공권력의 횡포로 인해 발생한 ‘집단살상극’이었다는 비판이 지배적이었다. 

   
 
  ▲ 다윗파 사건을 다룬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캡처 화면  
 
잘못된 역사의 데쟈뷰

20여 년 전의 이 사건을 새삼 떠올리게 하는 상황이 지금 ‘금수원’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다. 경기도 안성시에 위치한 금수원에 1,000 여명의 신도들이 인간 바리케이드를 친 채 찬송가를 부르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지고 있는 반면, 검찰은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에 대한 사전 구속영장을 청구한 채 조만간 강제 진입할 채비를 하고 있다.

유병언은 검찰 소환 출석시한인 16일 오전 10시까지 나타나지 않았고,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 본산인 경기도 안성 금수원에는 1,000여명의 신도들이 모여 앞으로 있을 검찰의 강제 진압에 대비해 세를 불리며 항전을 준비하고 있다.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 홍보담당 조계웅씨는 금수원 정문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경찰과 검찰 뿐 아니라 국세청, 감사원, 금융감독원 등의 초강도 수사를 받는 등 종교탄압을 받고 있다”라며,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잃었다. 종교시설인 금수원에 공권력이 투입되면 저항할 것이다”고 힘주어 말했다.

또한 금수원에 모인 구원파 신도들은 현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과거 ‘오대양 사건’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다고 주장하며, ‘김기춘 실장, 갈 데까지 가보자!!!’라는 플래카드를 금수원 입구 철문에 걸어두고 ‘표적탄압’에 대해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고 있다.

‘웨이코’와 ‘금수원’의 오버랩

‘오대양 사건’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구원파 일당들의 집단 자살 사건으로, 지난 87년 8월29일 경기도 용인시 오대양 공장 터에서 오대양 대표 박순자와 직원, 가족 등 32명이 이곳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오대양교 박순자 교주의 지시에 다른 집단 자살’로 결론을 내렸던 ‘오대양 사건’은 이후 외부인에 의한 타살 가능성과 함께 집단 변사의 배후에 전 세모그룹 회장 유병언씨가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 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 민속공예품 제작업체 ‘오대양’ 대표로 알려진 박순자는 유 전 회장의 무역회사인 삼우트레이딩의 사채모집책이었으며, 300여명으로부터 200억 여 원의 사채를 빌린 후 갚지 못해 총무 등 3명을 암매장 살해 후 집단 자살했다고 알려진 사건이다. 

   
 
  ▲ 오대양 사건을 다룬 신문 기사.  
 
금수원에 모여든 1,000여명의 신도들과 검찰의 대치 국면이 20여 년 전 미국 텍사스 웨이코에서 벌어진 비극적 참극과 오버랩 되는 것은 지나친 상상력의 소산일까?

텍사스 웨이코의 ‘다윗파’ 신도들이 자신들을 조여오던 공권력에 맞서 결사항전을 외치던 모습이나, 지금 금수원에서 ‘표적탄압’이라며 ‘갈 데까지 가보자!’라고 외치는 구원파 신도들의 모습에서 20년의 시간을 두고 반복되고 있는 '종교적 광신에 의한 집단 자살(Cult Suicide)‘의 가능성이 느껴져 불안감을 지울 수 없다.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

미국에는 현재 약 700~5,000개 정도의 종교적 사교집단이 기승을 부리고 있고, 한국에도 약 1,000여 집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들 사교집단에 의한 ‘광신적 집단행동’은 잊을 만하면 발생하는 사회적 골칫거리이자 본질을 밝힐 수 없는 종교적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92년 ‘영생교 사건’, 94년 ‘태양의 사원 집단자살사건’, 95년 ‘일본 오움진리교 사건’ 97년 ‘미국 천국의 문 집단자살사건’ 등 끊이지 않는 사교집단에 의한 광신적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지만 그것들의 정확한 원인은 규명되지 않고 있으며, 전문가들의 숱한 연구와 조사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집단 자살이 결정되고’, ‘왜 수많은 신도들이 이 참극에 순수하게 동참했는지’는 아직도 의문투성이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갖고 지나간 역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지금 금수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치상황이 끔찍한 종교적 비극으로 번질 수도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아직 세월호의 실종자도 모두 발견하지 못한 현 상황에서 또 다른 참사의 발생은 온 나라를 감당하기 어려운 사회적 위기로 몰아갈 것이며, 이로 인해 발생할 온전한 아픔은 고스란히 맥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국민들의 몫이 될 것이다.

상상하기도 싫은 건 강제 진압이 이루어질 경우 역설적으로 청해진 해운에 대한 조사는 실종되고 무능한 대처로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된 현정부의 실책 마저도 잠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유병언측은 공권력의 강제 진압과 저항하는 신도들의 '순교적 행동'을 상상하며 나쁘지 않은 시나리오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대치든 진압이든 결코 금수원에게는 불리하지 않은 심지어 정부에도 여론 전환의 국면을 줄 수 있는 삼 중의 꽃놀이패인 셈이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다. 그러므로 강압적 공권력 진입은 재고해야 한다. 공권력 진입은 유병언 일가를 소환해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묻겠다는 의도와는 별개로, 그들에게 사회적, 정서적 면책과 ‘오대양’ 사건 때처럼 구원파와 함께 그 일가들이 재건할 수 있는 빌미를 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칼 마르크스는 말했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이번 사건만큼은 어이없는 비극적 역사의 반복으로 종결되지 않고, 모두 다 수긍할 수 있는 희극의 역사가 반복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린 과거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좀더 지혜롭고 슬기로운 대처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양재영 기자 / <미주뉴스앤조이>


 

 

...하나님의 편지...
너는 나를 잘 모를지 모르지만 
나는 너를 너무도 잘 안다.  너의 앉고 일어섬을 알고 (시 139 : 2)
너의 모든 행위를 알며 (시 139 : 3)
너의 머리털을 다 셀 정도지 (마 10 : 29 - 31)
이는 내 형상대로 너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창 1 : 27)
너는 항상 내 안에서 살며 기동하여 있느니라 (행 17 : 28)
복중에 짓기 전에 내가 너를 알았고 (렘 1 : 4, 5)
창세 전에 너를 택하였도다 (엡 1 : 11, 12)
너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너를 위해 정한 날이 내 책에 다 기록되어 있었고 (시 139 : 15, 16)
너의 태어날 때와 살 곳을 정하였으며 (행 17 : 26)
너를 신묘막측하게 만들어 (시 139 : 14)
어미의 모태에서 지었고 (시 139 : 13)
내 너를 취하여 태어나게 하였다 (시 71 : 6)
나를 모르는 자들이 나를 잘못 알렸다만 (요 8 : 41, 44)
나는 너와 함께 있는 사랑이니라 (요일 4 : 16)
이 사랑을 너에게 아낌없이 주련다 (요일 3 : 1)
너는 나의 자녀이고 나는 너의 아비니라 (요일 3 : 1)
육신의 아비가 줄 수 없는 것을 주리니 (마 7 : 11)
나는 온전한 아비니라 (마 5 : 48)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내게로부터 오나니 (약 1 : 7)
네게 있어야 할 것을 내가 아니라 (마 6 : 31, 33)
너를 향한 나의 생각은 평안이요,너의 장래에 소망을 누리는 것은
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렘 31 : 3)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조차 없구나 (시 139 : 17, 18)
나는 너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노래부르며 (습 3 : 17)
너에게 복 주기를 멈추지 아니하리니 (렘 32 : 40)
너는 나의 소유니라 (출 19 : 5)
내가 기쁨으로 너에게 복을 주며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해 너를
이땅에 심으리라(렘 32 : 41)
보아라!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구하면 나를 만나리니 (신 4 : 29)
나를 기뻐하라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리라 (시 37 : 4)
네가 소원을 두고 행하기를 원하노라 (빌 2 : 13)
네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넘치게 주리니 (엡 3 : 20)
나는 너의 위로자니라 (살후 2 : 16, 17)
모든 환란중에도 너를 위로할지니 (고후 1 : 3, 4)
너의 마음이 상할 때 내가 너를 더욱 가까이 하리라 (시 34 : 18)
양을 안은 목자같이 내가 너를 품 속에 안으리라 (사 40 : 11)
언젠가 너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고 (계 21 : 3, 4)
내가 예수를 사랑한 것 같이 너를 사랑함이라 (요 17 : 23)
예수를 통해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을 보였나니 (요 17 : 26)
예수는 나의 형상이라 (히 1 : 3)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을 보이고 (롬 8 : 31)
너의 죄를 묻지 않으며 (고후 5 : 18, 19)
너와 화목하게 하려고 그가 죽었나니 그의 죽음은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이라 (요일 4 : 10)
너의 사랑을 얻기 위해 나의 소중한 아들을 아끼지 아니했다 (롬 8 : 31, 32)
아들의 사랑을 받는 자는 나를 받는 것이요 (요일 2 : 23)
나의 사랑에서 너를 끊을 것이 없느니라 (롬 8 : 38, 39)
네가 돌아오는 날 하늘에서는 기쁨의 잔치를 열리라 (눅 15 : 7)
나는 언제나 너의 아비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나 (엡 3 : 14, 15)
너는 나의 자녀가 되기를 바라느냐? (요 1 : 12 - 13)

     
   ♤♡...행복통장...♡♤*☆
 
내게는 색다른 통장이 하나 있습니다
 
이 통장은 비밀번호도 없고 도장도 필요 없습니다
잃어 버릴 염려도 없고 누가 가져가도 좋습니다
 
아무리 찾아 써도 예금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찾아 써도 늘어나고 새로 넣어도 늘어 납니다
 
예금을 인출 하기도 쉽습니다.
은행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한밤중에 자리에 누워서도 찾아 쓸 수 있습니다
이 통장은 "추억 통장"입니다
 
통장에는 저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빼곡이 들어 있습니다
더러는 아픈 추억도 있지만 그 아품이 약이 되기도 합니다
 
나는 가끔 이 통장에서 추억을 꺼내 사용합니다
꺼낼 때 마다 행복도 함께 따라 나옵니다
 
오늘도 추억 통장을 열고 추억 몇 개를 꺼내봅니다
그리고 여기에 꺼내 놓았습니다
누구나 가져 가십시요.
원금도 이자도 안 주셔도 됩니다
이 은행은 행복을 주는 은행입니다
 
*-좋은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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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부부가 되기를 바라며     


부부란 반쪽의 두 개가 아니고 하나의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한 몸이 된다는 "결혼서약"은,두 개의 물방울이 모여 한 개가 된다는 의미 입니다.

부부는 가위입니다.
두개의 날이 똑같이 움직여야 가위질이 됩니다.
부부는 일체이므로 주머니가 따로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부부는 주머니도 하나여야 합니다.

부부란 피차의 실수를 한없이 흡수하는 호수입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 이니까요.
좋은 남편은 귀머거리요, 좋은 아내는 소경입니다.

좋은 남편은 골라서 듣고, 좋은 아내는 골라서 봅니다.
좋은 남편은 고개로 사랑하고 좋은 아내는 눈으로 사랑합니다.
부부는 해묵은 골동품과 같습니다.

부부의 사랑이란
꽤 "오래 뜸을 들인 후에야 성숙해"집니다.
아내의 인내는 남편을 살리고 남편의 인내는 아내를 명예롭게합니다.

"부부생활이란 긴 대화"입니다.
결혼 생활에는 견습 기간이 없습니다.
부부생활에는 "five bear(곰 다섯 마리)"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있습니다.
"a bear(곰 한 마리-bear는 참는다는 뜻)"와
"for bear(역시 참는다는 뜻으로 곰 네 마리 곧 four bear와 발음이 같다)"가 
합쳐 곰 다섯 마리인 것입니다.
결국 부부생활은 참고 또 참는 길만이 최선이란 얘기 입니다.

*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초엽의 시대는
  "신경을 극도로자극하고 정신을 초조하게 만드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피곤한 시대"입니다.
  부부는 아내는 남편의 안식처가 되며, 남편은 아내의 안식처가 될 때
  비로소 가정은 평화의 공간이 되는 것 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개성을 상실하기 쉬운시대"입니다.
개성이 인정되지 못할 때 사람은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와(이브)를 만드실 때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 재료로 삼으셨는데
왜 하필 갈비뼈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리뼈를 사용하면 밟는 습성이 생길 것이고,
팔뼈를 쓰면 삿대질을 잘 할 것이고,
머리뼈를 재료로 하면 아담의 훈장 노릇이나 하려 들것이며,
턱뼈 같은 것을 뽑아 쓰면 말이 많아 싸움이 그칠 날이 없을 것이고,
어깨뼈를 쓰면 거들먹거릴 것이고, 목뼈를 사용하면 교만할 것이니
행복한 짝이 될 수 없었기때문 일 것입니다.
그러나 갈비뼈는 팔 밑에 있으니 보호의 뜻이 있고,
심장과 가까우니 사랑의 이미지가 있는 것입니다.
갈비뼈가 나란히 줄지어 있는 것도
동고동락하며 나란히 걸어가라는 의미의 적절한 선택이었을 겁니다.

결혼은 사랑의 만남이고,
자녀는 사랑의 열매이며,
가정은 사랑의 온상이고,
"부부 싸움은 사랑의 훈련"입니다.

부부의 조화를 위하여 다음의 몇가지를 생각해 보죠.
*떨어지지 말고 되도록 함께 다녀라.
*교대로 화내고 동시에 소리지르지 말라.
*남편(아내)의 약점을 남에게 말하지 말라
*확실한 증거없이 아내(남편)의 실수나 허물을 지적하지 말라.
*냉전은 해 떨어지기 전에 끝내라.
*아직 부부로 있는 이상 의심하지 말라.
*아내들이여, 들릴 만큼 한숨 쉬지 말라.
*남편들이여,소리 지르기 전에 두 번만 심호흡을 하라.
*그대가 용서받은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하고 그대도 용서하라.
* 행복해야 할 그대의 아이들과 조화를 원하시는 창조자가 그대들을 보고 있음을 기억하라.
*오늘 아내(남편)를 어떤 말, 어떤 행동으로 사랑했는지 반성해보라.
인간에게 속박되는 자유가 있는 데 그것은 사랑입니다.

결혼이란 피차 어떤 점에서 묶이는 것입니다.
결혼생활에서의 자유와 사회생활에서의 자유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사회생활에서는 무언가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하나,
결혼 생활에서는 자신의 소중한 자유를 상대에게 바치게 됩니다.
피차의 자유를 주장하기만 하고 바칠 생각이 없는 사이라면
동거인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부부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랑은 오랜 세월을 걸쳐 싸우며 자라는 것입니다."
"부부의 사랑에는 연륜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여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 금이 생기는 원인은 어느한 쪽이 혹은 양쪽이 다 
자기를 상대에게 공개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생각 넘버 원은 상대가 변화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부부문제의 해결은 "내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대의 상대는 기성품이 아니라 원료에 불과합니다."
결혼상대자는 잘 관찰하고 되도록 이상에 가까운 상대를 골라야 합니다.
"이야기하라,이야기하라."
두 사람의 대화가 많을수록 문제는 적어집니다.
고양이 이야기든 유치한 농담이든 많이 이야기하라.
동시에 들어주라.
무슨 이야기든 잘 듣는다면 사랑은 저절로 여물어 갑니다.

이제 끝으로 "부부생활의 십계"를 말씀드립니다.
1.아내를 관리하지 말자.
  아내는 재산이 아니라 그대의 영원한 파트너이다.

2.그대들 사이에 "STOP(일단정지)"사인을 놓지 말자.
  흐르지 않는 사랑은 썩게 되니까.

3.기다리지 말자.
  가정은 정거장이 아니다. 
  남자다움은 능동성이다.기다리지 말고 그대가 먼저 다가가라.

4.아내를 생과부로 만들지 말자.
  그대는 남편으로서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5.아내를 남과 비교하지 말자.
  그것은 망령을 끌어들이는 푸닥거리에 불과하다.
  더구나 남의 아내와 비교해선 안된다.

6.찌푸리고 집에 들어가지 말자.
  가정은 병원이 아니다.되도록 많이 아내에게 이야기 하자.

7.아내 앞에서 으스대지 말자.
  그녀는 그대를 아는 면에서는 귀신이다.

8.아내를 돈주머니로 여기지 말자.
  가정은 주식회사가 아니다.
  부엌 일이든 가게 일이든 아내에게 "일을 시키고 있다"는 생각은 잠시도 갖지 말자.

9.아내에게 훈장 노릇하지 말자.
  사랑은 서로 보충하는 것이다.

10.비밀을 두지 말자.
  사랑은 아는 것이다.
  미움은 오해에서 나오고 오해는 알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아내에게 비밀이 전혀 없다면 그대의 사랑은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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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지역에는

해마다 많은 축제가 펼쳐집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축제는

LA County Fair 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LACF 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큰 규모의 축제가 있으니

  

바로 LA의 동쪽

어윈데일(Irwindale)에서 벌어지는

르네상스 페어(Renaissance Pleasure Fair)가 그것입니다.

  

지난 4월 5일에 개막하여

이번 주말을 끝으로 폐막되는 이 축제는

 

일반인들 뿐만 아니라

사진사들에게 특히 인기있는 축제죠.

  

물론,

사진을 찍지 않는 일반인들에게도

특이한 체험과 경험을 할 수 있는 멋진 축제입니다.

 

볼거리와 먹거리와

많은 쇼들로 이루어지는

진짜 축제의 장이라고 할 수 있죠.

 

이번 주말에

축제가 폐막되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하는데

 

 시간을 내어

자녀들과 함께 한다면

많은 추억거리를 안겨주는

멋진 나들이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르네상스 페어는

그동안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열렸습니다.

 

이번 일요일에 폐막되니

실제로는 이틀 밖에 남지 않은 셈입니다.



음악과 연극,

묘기와 각종 쇼 등이

르네상스 시대의 무대 위에서

 

시간마다 화려하게,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그 중에 압권은

영화 “기사 윌리엄”에 나오는

마창 시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곳에 가면

피아노가 발명 되기 전,

 

중세 시대에

피아노의 전신으로 쓰여진

쳄발로의 아름다운 연주도 들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Hammered Dulcimer 이라는

좀처럼 들어보기 힘든 악기의 연주도 들어볼 수 있죠.

 

하프보다 낭랑하고

플룻보다 더 투명한  

 

맑고 깨끗한 음색을 지닌

이 악기로 연주한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중세 시대 음유 시인의

음악을 듣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해머드 덜시머의

탁월한 연주자인 Glen Morgan의 모습입니다.



이런 곳에서

안면이 있는 사람이나

친구를 만난다면 무척 반가울테죠.



빅토리아 여왕이 출연하는

공연을 보고 있는 어린 꼬마 소녀의 모습...

 

아래 사진은

이 소녀가 보고 있는 장면입니다.



Lord, Save the Queen,

Lord, Save the Korea

 

각운을 맞추려면

Lord, Save the Queen,

Lord, Save the Korean



다른 복장을 한

위의 사진과 같은 여왕의 모습입니다.



보석을 발견한

잭 스패로우가 기뻐 어쩔줄 모르고 있네요.



혼인을 서약한

공주님과 이웃 나라의 왕자님...

 

그러나 둘 다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듯...



이번에는

르네상스 페어에서 만난

미녀들의 모습을 보도록 할까요?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정면, 측면, 후면 사진들은

당사자들의 동의나 허락을 받은 사진들입니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99% 포즈를 취해주기 때문에

 

르네상스 페어는

사진사들에게 최고로 신나는 축제입니다.



우리 커플인 것처럼 찍어주세요.

헉! 그렇담 커플이 아니란 말이지.....요?



나도 한 인물 한답니다



찍는 자가 있으면

찍히는 자도 있게 마련이고....

 

이분의 사진은

허락을 받을 시간이 없어서 ...



이 아이를 보는 순간,

아버지의 복수를 감행하는

서부 영화 True Grit의 소녀 주인공이 생각났습니다.



얼굴 사진만 보면 재미없으니

이번엔 곡예 사진을 한 장 볼까요?



여왕의 가족이

시원한 나무 그늘 쪽으로 나들이를 왔군요.



공주는 잠 못 이루고...

아니 공주는 신나게 놀고...



공주가 노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이 아이....

 

나도 커서

어른이 되면 저런 공주와 결혼할꺼야...



이번엔

재미있게 분장한 얼굴을 볼까요?



숲속의 창백한 요정의 모습이군요.



표범의 모습 같은데

뿔을 보니 아닌 것 같고...

얼굴의 반점을 보니 사슴 같기도 하고...




마녀군요.

빗자루를 들고 다니던데...



얼룩말 의상을 입은 여인...




생김새가 꼭

잭 스패로우의 형님같군요.





나도 한 눈빛 한다오.



이번엔 쌩얼...





뒷모습이 너무 예뻐서 한 컷...



저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면 이런 모습이 될까나?


 

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罪) 고백(告白)]

“우리는 이미 범죄(犯罪)하여 패역(悖逆)하며 행악(行惡)하며 반역(叛逆)하여 주의 법도(法度)와 규례(規例)를 떠났사오며”(단9:5)

성경에 규정된, 죄를 고백하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잊으시며 도말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므로 용서를 얻으려면 주님께 죄를 고백합시다. 주님은 의사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처를 그분께 보여 드립시다. 주님은 상하시고 모욕을 받으셨...으니 그분께 평안을 구합시다. 주님은 마음을 감찰하시고 사람의 모든 생각을 아시므로 그분 앞에 서둘러 나아가 우리 마음을 쏟아놓읍시다. 죄인을 초대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지체하지 말고 그분께 나아갑시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시32:5). 다니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단9:5). 우리는 누구에게 죄를 고백해야 합니까? 그분께 고백해야 합니다. 분명히 우리는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 앞에 엎드려 진심으로 우리 자신을 꾸짖고 책망하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에서 비롯되는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런 진심에서 우러나온 고백을 한 사람은 틀림없이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널리 알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꺼이 혀로 하나님의 자비를 고백할 것입니다. 그는 자기 마음의 비밀을 한 사람의 귀에 단 한 번 속삭이는 데 만족하지 않고 자주 공개적으로 온 세상 사람들이 듣는 데서 솔직하게 자신의 수치와 더불어 주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에 대해 말할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다윗도 나단의 책망을 들은 뒤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자신의 죄를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고백합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삼하12:13). 즉, 이제 아무런 변명거리도, 빠져나갈 구멍도 없으니 모두가 자신을 죄인으로 판단해야 마땅하며, 하나님만 아시는 비밀로 감춰 두고 싶었던 자신의 죄도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비참함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우리 자신과 온 세상 앞에 나타내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 -존 칼빈과 함께하는 말씀묵상 36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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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 그 시금석, 있는 자리서 책임을 다하는 것

 


“잎사귀보다 푸른 너희들이 왜 여기에…. 창밖에 우거진 신록을 보는 것조차 사치 같구나. 어른들이 미안하다.”(60대 조문객 정인자 씨•여) 애절한 조문 글이 말해주듯,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은 ‘세월호 사건’, 이 사건이 우리를 절망케 하는 것은 그들(희생자들)이 한 번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채, 게으르고, 나태하고, 자기중심적인 어른들의 희생제물이 되었다는 것, 그것이 아니겠는가?

아직 젖살도 채 가시지 않은 앳된 얼굴을 영정 사진이라며 붙들고 오열하는 부모의 모습은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었고, 우리들의 눈앞에서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배를 “저런, 저런!” 발만 동동구를 뿐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이 당혹감이란…나도 자녀를 둔 부모이기에 더욱 그들의 아픔을 통감하게 된다. 부모가 되어보기 전에는 부모의 마음을 모른다고 했던가?

그들 희생자가 내 자식 같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쪽같은 자식을 잃고 울부짖는 그들 부모의 마음이 내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듯…아, 하늘이여, 땅이여…통곡하라! 이런 일을 보면서 어찌 한 시라도 잠잠할 수 있겠는가? 오월, 가정의 달을 눈앞에 두고 그토록 귀한 아이들을 지켜내지 못한 못난 어른으로서 대신 사죄하는 마음을 담아보고 싶은데...

문제는 우리의 둔화한 책임의식이다. 이런 대형 참사가 일어난 후면 의례, “내 그럴 줄 알았다.” “이 사건은 천재가 아니라 인재로서 갖출 것은 모두 갖추었다.” 등등…각 언론이 술렁이며 들끓고 국민이 일어나 왁자지껄 여기저기서 분개한 목소리, 비난의 목소리의 수위를 잠시 높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술렁임도 잠시일 뿐, 곧 다시 잠잠해질 것이고 철저히 준비되지 않은 각 단체장의 무책임함, 그들의 무딘 양심 때문에 생때같은 우리 자식들은 또 다른 대형 참사 앞에서 수장되고 매장되지 않는다는 보장 없다. 과거 오대양 사건이 그랬고, 삼풍백화점 사건이 그랬고, 성수대교 사건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위대한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러나 범인들은 할 수 있는 일도 안 하면서 할 수 없는 일만 바란다”-로맹 롤랑(프랑스 소설가) 그렇다. 세월호 선장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 우리(성도라 이름하는 사람들) 역시 침몰한 세월호의 선장과 같은 전철을 밟고 있지나 않은지…생각해 보아야 한다. 충성의 시금석, “있는 자리서 책임을 다 하는 것” 오직 그것이다! 자기 자리에서 책임을 다 하지 않은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수많은 어린 새싻을 무참히 짓밟고 저 춥고 캄캄한 바다 밑에 수장시켜버린 것이다!

운항의 최저 상식조차 무시당한 세월호

큰 배건 작은 배건 바다를 항해하는데 따르는 운항상식이란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
바다라고 하면, 어디든지, 크고 작은 파도가 일게 마련이다. 큰 배나 작은 배나 바다에 띄우면 그 즉시 파도를 타게 되어 있다. 뱃사람들만 알고 사용하는 파도에 대한 두 가지 고유명사 “롤링[rolling]”과 “피치(pitch)란 단어가 그것이다. 지속적으로 밀려오는 파도, 운항 중의 배가 파도를 향해서 앞질러 넘어가는 것을 “피치(pitch)’라 하고 파도를 옆으로 타는 것을 ‘롤링 [rolling]”’이라 한다. 선장의 기술 여하에 따라 그 파도를 잘 넘고 잘 넘지 못하고 결정되는 것이다.

둘:
배의 컨테이너에 짐을 싣는 데도 원칙이 있다고 한다. 배 벽면에 쇠갈고리를 박아 그 쇠갈고리에 모든 짐을 단단히 묶어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 짐들이 움직이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해두어야만 한다.
쇠갈고리에 짐들을 잘 묶어두면 “롤링[rolling]”이든, “피치(pitch )‘이든, 파도가 아무리 드높아도 짐이 한쪽으로 쏠리는 일이 없으므로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짐들을 제대로 묶어두지 않으면 파도를 타고 넘을 때 배가 기울어지는 각도 대로 짐이 한쪽으로 쏠리게 되어 있고, 배가 쏠리면 그 짐의 무게가 한쪽으로 쏠리기 때문에 배가 발란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그쪽으로 넘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 쏠리는 힘 때문에 배가 침몰할 수도 있다.
 
셋:
모든 배는 비상종이 선장실 바로 옆에 부착되어 있다. 그 배가 ‘롤링’의 의해서 45%로 기울게 되면 종이 그 기우는 힘 때문에 자동으로 ‘땡!”하고 울리게 되어 있고, 선장은 그 종소리를 듣는 즉시 파도 타는 것을 더욱 조심스럽게 하여 배를 몰아 안전 선으로 되돌리도록 조정해야 한다. 위의 정보는 해양학에 밝은 측근 지인에게서 직접 들은 상식이니 믿어도 좋을 것이다. 

세월호 사건’의 원인 규명
 
1. 안전 수칙을 무시했다
배에 실은 짐을 쇠갈고리에 묶지 않았던 탓에 배가 한쪽으로 기울 때 그쪽으로 짐들이 와르르 쏟아지게 되었고 그 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배는 한쪽으로 기울여짐이 심하여 결국은 침몰하게 된 것이다. 선장이 전문(해양대)지식이 없었거나 아니면 안전수칙을 고의적으로 무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사건은 그런 책임성 없는 사람을 선장으로 기용하고 수많은 생명을 맡긴 선박회사에 철저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2. 타인의 생명을 경시했다

타이타닉호 침몰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선장과 항해사들, 그리고 음악사까지 모두 자신의 생명보다 타인의 생명을 더 귀하게 여겨 침몰하는 배에 끝까지 남아 다른 사람을 구하려고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는 숭고한 인간정신을 나타낸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은? 학생들에게는 ‘가만히 있어라’ 명하고 끝까지 남아서 구출작전을 시도했어야 할 그들이 제일 먼저 밖으로 도망쳐 구조선에 올라타는 모습이란…! 참으로 분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짐작건대, 배가 한쪽으로 침몰해 가는데, 학생들이 당황해서 우르르 몰리면 배가 더 심하게 요동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생명이 위협을 받게 됨을 미리 알고 있던 그들이 고의적으로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지시한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의 덧없는, 말도 안 되는 기우였으면 좋겠다.

3. 기술적 경험을 무시했다

이번 세월호를 운행한 사람은 “경력 1년 25세 삼등 항해사”였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눈앞이 아찔, 현기증이 일어났다. 뱃사람이 아니어도 상식선에서 아는 것은 진도에서 제주도로 항해를 하는 주위에는크고 작은 섬들이 즐비하다. 바다의 생태란 육지에서 200m까지를 ‘대륙붕’이라 하고 ‘대륙붕’에는 파도가 거세다. 그리고 섬 사이사이에서 일어나는 파도를 ‘삼각파도’라고 부를 만큼 급하고 강하다는 것 쯤은 모두 알고 있다. 선장이 그런 정도의 해양상식이 없었다는 것인가? 아직은 좀 더 바다를 배워야 할 젊은 항해사에게 그토록 위험지구를 맡겼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선장의 태도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이 정도면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렇지 않은가?

나는 오래전에 ‘나의 꿈이 너를 울게 하는가? 새만금 프로젝트로 수많은 조류가 그 생명을 잃어가는 것을 보고 가슴 아팠던 경험을 글로 기술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그보다 한층 더 가슴이 아리고, 아니, 그 도를 넘어 속에서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은 이 사건이야말로 인간정신을 송두리채 땅에 내동댕이쳐버린 파렴치한 행동이고, 선장과 선원, 그리고 해양경찰대원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때문에 일어난 대참사였기에 그렇다.

자정 능력을 상실한 것 같은 현대 교회

이번 참사를 바라보는 많은 지성인, 성도들이 ‘자정 능력을 잃고 무참히 쓰러진 배를 두고 그 배를 당당히 벗어나 탈출한 선장의 비행을 보면서 이를 자정 능력을 상실한 현대 교회 지도자와 비유하기도 하고 침몰하는 세월호를 침몰하는 교회로 묘사하면서 ‘ 탄식의 공감대를 형성”해나가는 현상도 쉽게 볼 수 있다. 이해한다. 지금 이대로 나가다가는 교회마저 몰아치는 저 흙탕물 같은 세상 풍조에 침몰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엄밀히 따져 주님의 교회는 아주 망하거나 영원히 침몰할 수 없다. 왜? 우리 주 예수님이 친히 교회의 주인이시요 , 교회가 배라면, 그 배의 선장은 책임성 없는 지도자, 목사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님이시기에 그러하다!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한다. 할렐루야!

그러나, 이대로 가다가는 전도의 문이 막히고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먼저 믿는 우리들, 교회 지도자들이 선장이신 주님께로부터 그 책임을 추궁당할 날이 반드시 오게 될 것이다. 이제는 우리 모두 깨어 일어나야 한다. 그 빛을 밝혀야 한다! 너와 나 우리가 하나 되어 죽어가는 영혼을 그리스도 호(The ship of Christ)에 건져 올리도록 힘써 일해야 하며 있는그 자리에서 자신을 바쳐 충성을 다 해야 한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과거 하늘을 향해 높이, 더 높이를 외쳐대며 바벨탑을 쌓아올리던 고대 사람들처럼 무엇이든지 크고 높고 강한 것만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목회자들, 그들을 큰 종이라 따르며 숭배하는 어리석은 성도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을 추구하는 기복신앙가들이 주님의 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모두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일부 대형교회의 목사님들은 그들의 무리한 욕심을 꿈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그 포장된 꿈을 이루기 위해 무수히 작은 교회를 쓰러트리고 성도들의 헌금을 갈취한다.

교회당 건물은 주님께 예배 드리기 위한 목적보다는 부와 권력과 능력의 상징이라도 되듯 하늘 높은지 모르고 더 크게 더 높게 올라만 간다. 어디 건물뿐이랴, 이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교회와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영혼을, 사업, 그 이상도 그 이하로도 보지 않는 것 같다. 성도들을 철저하게 관리해야 한단다. 사업가적 마인드가 뛰어난 몇몇 삯군 목자들은 목회보다는 성도관리 차원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진행시켜 사고팔기도 한다. 이런저런 정말 기막힌 아이디어 상품들로 성도들의 영혼을 유치(그렇다 유치가 아니고 무엇이랴)하기 급급하다.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신자들을 각종 프로그램과 상품으로 미혹해서 더 많이 수용하고 보자는 심산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작은 교회도 엄연히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교회이건만, 약한 교회를 집어삼키기 경쟁이라도 하는 듯, 교회 내에서도 심각한 빈익빈 부익부 기현상을 빚어내고 있다. 문어발처럼 자신의 교세 넓히기 작전으로, 자신의 명성을 세계로 뻗어 나기 위해 많은 돈과 인재들을 투자해서 지부 교회를 세운다. 이런 비본질을 본질보다 더 크게 부각시키는 교회나 목회자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반기련도, 극단적 신비주의 자들도,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각종 이단 사설을 양산(produce)해 내는 그 어떤 단체도 막아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자기 자신만이 성공하겠다고 생각하거나, 나만 살아남겠다는 생각으로 침몰해가는 배에서 뛰어내리는 비겁한 행위는 지탄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 그런 행위는 이제 세상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 하물며 하나님의 교회랴? 우리는 이제 서로 연합해야 산다. 연합하여 일한다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힘을 합쳐서 일할 때, 그 결과는 엄청난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서로 도우는 교회가, 서로 도우는 성도가 되어야 그날에 주님께로부터 잘했다 칭찬과 함께 면류관을 받아 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2,000여 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가슴에 각인시키고 결코 잊지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너를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죽음을 택하셨다. 너를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기에, 사흘 만에 너도 살고 나도 살려내는 부활의 영광을 쟁취하신 것이다.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인간 구속을 위해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나뉘어 사역하시는 아픔을 참으셨으며, 협력하여 일하셨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셨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충성된 종이셨고 그 이름은 세세 무궁토록 길이 빛날 것이다! 모든 무릎이 그분의 발 앞에 꿇게 될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구하시려고 십자가도 개의치 않는 위대한 일을 하셨기에 그러하다.
그러나, 그분은 그 위대한 일 이전에, 요셉의 집에서 목수인 요셉을 도와서 작은 일에 묵묵히, 있는 그 자리에서 충성하는 본을 보이셨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 충성의 시금석은 어떤 큰 것이 아니다. 내가 맡은 본분을 지키는 것, 있는 자리에서 해야할일에 책임을 다 하는 것, 그것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 만사가 모두 같은 이치일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이웃과 이웃, 목회자와 성도, 교회와 교회, 국가와 국가, 모두 하나 같이 크게, 더 크게만 외치지 말고 있는 그 자리서 자기의 본분을 지키고 책임을 다할 때 우리의 가정이, 교회가, 사회가, 더 나아가서 국가가 번창하게 되고, 그 길만이, 이번 참사처럼 황당한 일을 되풀이하여 겪게 되지 않는 길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말 잘하는 사람 너무 많다. 글 잘 쓰는 사람도 너무 많다. 그러나 자기 자리에서 충성하지 못하면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랴. 충성의 시금석, “있는 자리서 책임을 다하는것”그것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 10)"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 10)




출처: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조병수의 목회편지(108)딤전 6:3-5

바른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조병수 교수_합신 신약신학


나무벽돌 쌓기 놀이는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긴장감을 발동시킨
다. 바닥 위에 여섯 켜, 일곱 켜를 쌓을 때까지는 그래도 자신만만하게 나무
벽돌을 올려놓지만, 열 켜 이상만 쌓아도 다음 나무벽돌을 올려놓을 때는 손
에 힘을 빼고 가만히, 함박눈송이가 살포시 땅에 닿듯이 하지 않으면 큰일난
다.
하지만 쌓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나무벽돌을 다 쌓은 후에 가운데서 하나
씩 빼내는 게임을 하는 시간이 되어, 상대방이 고약한 자리에서 나무벽돌을
빼내 아슬아슬한 상황을 만들어내면, 꼬집어 주고 싶을 정도로 얄밉다는 생
각을 하면서 호흡마저 정지하고 나무벽돌 하나를 꺼내보지만 공든 탑은 속절
없이 무너지고 만다.
이처럼 나무벽돌을 하나 잘못 빼면 열 층, 스무 층으로 쌓은 탑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듯이, 산간마을 창문에 쳐둔 방충망이 찢어지면 온갖 벌

와 나방이 삽시간에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며, 원두커피 기계의 필터가
찢어지면 찌꺼기로 머물러 있던 가루 녹은 잔재물이 커피 물과 뒤섞여버린
다. 이런 현상은 마음에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긴장감 일으키는 나무벽돌 쌓기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걷어버리면 시기하고 원망하고 배척하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침노한다. 청결하고 정숙한 마음이 상실되는 순간 곧바로 방
탕, 패륜, 음란이 엄습한다. 칭찬하고 격려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자마자 욕
설, 저주, 악담을 일삼게 된다. 건전한 것 하나를 따르지 않는 것은 불결한
것 열을 따르는 것이 되고 만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건전한 말씀이다. 그 말씀 안에 머물면 영혼이 건강해지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은 치료받고 양육되며 강해진다. 그런데 예
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영혼을 건강하게 만들 뿐 아니라 생활에도 건강함을
가져다준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경건을 일으키는 교훈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를 때 우리는 경건한 삶을 생산하고 유지하며 발
전시킬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리켜 건전
한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건전한 말씀이자 경건을 일으키는 교훈인 예
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다른 교훈을 따르는 순간 엄청나게 악한
결과가 수없이 벌어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한 가지 건전함을 따르지 않는 것
은 열 가지 불결함을 따르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경건 잃으면 모든 것 무너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
고 변론과 언쟁이라는 병을 앓는 자가 된다. 주님의 말씀에 일치하지 않는
것은 교만과 무지와 논쟁을 일으키는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다. 이것은 주
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나쁜 현상을 만들어내는지 잘 보여주
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악한 결과는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교만과 무지와 논쟁은 고
작해야 1회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교만과 무지와 논쟁으
로부터 또 다시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과 다툼이 나온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
씀을 따르지 않는 결과의 2회
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 갈수록 태산이라는 표현처럼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결과가 더욱더 심각해진다.
사도 바울은 특히 마지막에 언급한 다툼에 관해서 자세히 설명한다. 다툼은
마음이 부패한 사람들,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 그리고 경건을 이익의 방도
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다툼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를 상실하고, 경건을 이익의 방
도로 간주하는 왜곡을 야기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것은 예수 그리
스도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때 일어나는 악한 결과의 3회전이다.
나무벽돌 쌓기 놀이에도 영적 교훈이 들어있다. 마치 나무벽돌을 하나 잘못
빼낼 때 공든탑이 산산조각으로 무너지듯이, 경건을 일으키는 예수 그리스도
의 건전한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은 영혼을 순식간에 깡그리 망가뜨리는 두
려운 일에 봉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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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파, 교주님은 있고 세월호의 아픔은 없나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상삼리에 있는 구원파의 총본산 금수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지난 12일부터 전국 각지의 구원파 신도들이 금수원으로 속속 집결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금수원으로 통하는 길목을 차량으로 막고, 그 주변에는 신도들이 몇 겹으로 에워싸며 인의장막을 쳤습니다. 금수원 입구에는 300여명의 신도들이 굳게 닫힌 철문 뒤로 모여 검·경의 진입 등에 대비하는 모습입니다. 신도들은 외부인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하면서도 신도들의 차량은 자유롭게 드나들게 하고 있습니다.

 

 

 

 

 

유병언 검찰 출석 불응...금수원 있을 가능성 높아

 

현재 금수원에는 주말을 맞아 구원파 신도들의 숫자가 계속 늘어나는 가운데, 오늘 저녁 8시로 예정된 정기예배 시간까지 최대 3000명이 모일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게 다 교주인 유병언을 결사옹위하겠다는 행동으로 보여집니다. 안성의 한 산자락에 위치한 금수원은 축구장 30여개를 합친 규모의 땅에 교회와 주택, 의료시설 등이 갖춰져 있는 곳으로 오랫동안 자급자족이 가능할 정도입니다. 이곳의 대표는 구원파 핵심인물로 알려진 탤런트 전양자(본명 김경숙)입니다.

 

구원파 교주인 유병언은 어제(16일) 오전 10시 검찰 출석통보를 받았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검찰은 “좀더 기다려 보자”고 했지만 유씨는 이를 보기좋게 비웃었습니다. 이에 열받은 검찰은 유씨에게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했고, 20일 오후 3시가 영장실질심사일인데, 이날에도 나올 확률은 낮습니다. 검찰은 유씨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수원에 찾아가 강제로 영장을 집행할 생각이지만 지금의 금수원 상황을 보면 검찰 뜻대로 순조롭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검찰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죽을 맛입니다. 유씨를 종용해서 자진 출석을 유도하자니 말을 들을 것 같지 않고, 금수원에 가서 영장을 집행하자니 물리적인 충돌이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법집행을 미루고 가만히 있자니 검찰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노조파업이나 촛불시위 등을 강제진압 전력이 화려한 만큼 이번에도 어떤 진압작전을 펼칠 지 두고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설마 구원파와 신도들이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는 것은 아니겠죠?

 

사실 검찰의 체면은 이미 구겨질대로 구겨졌습니다. 검찰은 유병언 이전에 그의 자녀들에게도 출석을 통보했지만 이들은 소환에 불응한 채 연락을 끊고 도주하거나 잠적한 상태입니다. 검찰은 이들의 위치를 제대로 추적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소재 파악에 허둥대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장남인 유대균에게 즉시 체포가 가능한 ‘A급 지명수배'를 내리는데 그쳤습니다. 검찰은 유씨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지시를 받아 계열사 자금을 빼돌려온 횡령·배임 혐의의 공범으로 보고 수사중입니다. 

 

 

 

 

금수원에 신도들 속속 집결...물리적 충돌 배제할 수 없다

 

지금 금수원이 ‘폭풍전야’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경찰과 검찰은 대대적인 병력을 동원해서 금수원을 돌파하려고 시도할 것이고, 구원파 신도들은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양측의 충돌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구원파 신도들은 정부의 공권력 집행을 ‘종교 탄압’으로 몰고 있습니다. 금수원에 내걸린 현수막에는 “종교탄압을 중단하라” “공권력의 교회진입을 반대한다”는 문구들이 많습니다.

 

@출처=MBC 뉴스화면

 

지난 15일 구원파 조계웅 대변인(금수원 직원)은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를 맹비난 했는데, 그는 “세월호 침몰 사고의 책임은 청해진에 있지만 사망 책임은 해경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구조활동은 느릿느릿하면서 종교탄압은 속전속결”이라며, 강한 불만을 표시한 것입니다. 조씨는 또 “만약에 유혈사태가 초래된다면 유례없는 종교탄압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검찰총장은 물러나야 할 것”이라면서, 신도들을 향해서는 “교회를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이라며, “죽음을 각오하고 종교탄압에 맞서 싸우자”고 했습니다.

 

 

'국가'와 '법' 보다 '교주님'이 먼저다?

 

이런 것을 보면 한 가지는 명확해 집니다. 구원파에게는 대한민국의 ‘법’과 ‘체제’ 보다 교주인 유병언이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세월호가 침몰해 300명이 넘는 승객들이 죽거나 실종된 아픔보다 교주가 검찰에 불려간다는 것에 더 아파한다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행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파의 교리는 ‘죄를 깨달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영혼을 구원받으면 이후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다’는 것인데, 과연 저들의 행동은 구원을 받을런지 궁금합니다.

 

 

 

금수원에 걸린 ‘김기춘 실장’ 플래카드 내막

 

“김기춘 실장, 갈데까지 가보자”

금수원 정문에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의 실명을 언급한 대형 플래카드가 걸려있습니다. 구원파 신도들은 왜 대통령도, 검찰총장도 아닌 ‘김기춘 실장’을 언급했을까요? 이를 제대로 알려면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오대양 사건이 터졌을 다이 김 실장은 법무부장관을 맡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김 실장은 검찰총장 출신입니다.

 

 

경기 용인에 위치한 공예품 제조회사 오대양(주)의 공장 식당 천장에서 대표 박순자씨와 그의 가족, 종업원 등 32명이 시신으로 발견됐는데, 대부분 손이 묶이거나 목에 끈이 감겨있는 상태로 죽어있었습니다. 박순자는 자신을 따르는 신도와 자녀들을 집단시설에 수용하고, 신도들로부터 170억 원에 이르는 거액의 사채를 빌렸습니다. 물론 원금을 갚지 않았고, 돈을 받으러 간 신도의 가족을 집단 폭행하고 잠적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후 집단 살인극으로 최후를 맞은 것입니다.

 

당시 검찰은 구원파가 해당 사건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고 유병언 전 회장에 대해 수사를 벌였지만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유 전 회장은 1991년 8월, 구원파 신도들에게 거액을 빌린 뒤 갚지 않은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 받았는데, 오대양 사건과는 별건입니다. 그러니까 구원파 신도들이 '김 실장'을 거론한 플래카드를 내건 것은 당시 오대양 사건처럼 이번 세월호 사건도 구원파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리려는 의도로 보이는 것입니다.

 

구원파 평신도 복음선교회도도 “사건의 결말이 오대양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기사건으로 종결이 됐다는 것도, 증인들의 말에만 의존해서 판결이 이뤄졌다는 것도 알고 계실 것이다. 1991년의 상황이 재연되지 않게 해달라"고 한 대목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레지나 브렛(Regina Brett)이 90세 인생에서 배운 45가지의 교훈

1. 인생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인생은 좋습니다.
2. 의심이 들 때는 그저 약간만 앞으로 전진하십시오.
3. 인생은 매우 짧습니다. 즐기십시오.
4. 당신이 아플 때 당신의 직업은 당신을 지켜주지 않습니다. 친구와 가족만이 당신 곁을 지켜줄 것입니다.
5. 카드빚은 매달마다 정산하십시오.
6. 모든 논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스스로 진실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7. 누군가와 함께 우십시오. 혼자 우는 것보다 훨씬 더 치유해 줄 것입니다.
8. 신에게 화를 내도 괜찮습니다. 신은 받아줄 수 있습니다.
9. 첫월급을 탈 때부터 은퇴할 때를 대비하여 저축을 시작하십시오.
10. 굳이 초콜릿을 먹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참 쓸데없는 짓입니다.
11. 당신의 과거와 화해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과거가 현재를 망가뜨리지 않습니다.
12.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이 우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도 괜찮습니다.
13. 당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의 삶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삶이 실제 어떠한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14. 만일 어떤 인간관계가 비밀에 부쳐져야 한다면, 그런 인간관계는 맺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15. 모든 것은 눈깜짝할 사이에 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은 결코 눈을 깜빡거리지 않습니다.
16. 숨을 깊이 들이쉬십시오. 그럼 당신의 마음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17. 쓸모없는 것들을 제거하십시오. 잡동사니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당신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18. 어떤 고통이든지간에 그것이 실제 당신을 죽이지 못했다면 항상 당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19. 행복해지는 것은 언제라도 늦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당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20. 당신이 인생에서 정말 사랑하는 것을 추구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대답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21. 촛불을 켜십시오. 좋은 침대시트를 쓰십시오. 근사한 속옷을 입으십시오. 아껴두지 마십시오. 오늘이 바로 가장 특별한 날입니다.
22. 준비는 항상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하고, 실전에서는 흐름에 따르십시오.
23. 괴짜가 되십시오. 자주색 옷을 입기 위해서 나이가 먹을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24. 섹스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신체 기관은 뇌입니다.
25. 당신 외에는 아무도 당신의 행복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26. 소위 재앙이라고 말하는 모든 일들을 다음 질문의 틀 속에서 판단하십시오. ‘5년 후에도 이 일이 정말로 내게 중요할까?’
27. 항상 삶을 선택하십시오.
28. 용서하십시오.
29.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당신이 신경쓸 일이 아닙니다.
30. 시간은 모든 것을 치유합니다. 시간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31. 상황이 좋건 나쁘건, 반드시 변하게 됩니다.
32. 스스로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당신 자신 말고 다른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33. 기적을 믿으십시오.
34. 신은 그저 신이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이 하거나 하지 않는 것들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35. 인생을 청강하지 마십시오. 당당히 앞으로나와 최대한 활용하십시오.
36. 성장해가는 노인이 죽어가는 젊은이보다 낫습니다.
37. 당신 자녀에게 있어서 어린 시절은 인생에서 오직 한번 뿐입니다.
38. 마지막에 결국 중요한 것은 당신이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39. 매일 밖으로 나가십시오. 기적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40.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들을 쌓아 올린 후에 다른 모든 사람들의 문제들을 보게 된다면, 우리 자신의 문제는 나중에 처리하게 될 것입니다.
41. 질투는 시간낭비입니다.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이십시오.
42. 가장 좋은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43. 당신의 기분이 어떻든 간에, 아침에 일어나 옷을 잘 차려입고 당당하게 나오십시오.
44. 양보하십시오.
45. 인생에 나비넥타이가 묶여있지 않더라도, 인생은 여전히 선물입니다.

 

**옮긴 글

그 하나님이 이 하나님이 아닌가벼
공공기관 기도 합헌 판결을 보면서
2014년 05월 15일 (목) 22:58:45 김기대 ( 메일보내기 )

미국사회에서 하나님(God)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그 의미가 많이 다르다. 교회 안에서 성서를 통해 만나는 하나님이 보통의 미국인들이 말하는 하나님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한국에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라고 말하지만 어떤 익명의 초월적 존재를 말할 때 신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은 신이지만 익명의 신이 모두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미국을 기독교적 가치가 잘 실현되고 있는 나라인 것처럼 착각할 때의 하나님(God Bless America를 종교에 상관없이 공공장소에서 부르는 행위, 달러화에 In God We Trust라는 문구가 써있는 점)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라 미국 시민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 즉 한국에서 말하는 신이다.

공공기관에서의 기도가 헌법 정신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지난 주 연방 대법원의 판결, 본보에도 보도된 ‘하나님 앞에서’라는 문구가 들어 있는 국기에 대한 맹세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매사추세츠 대법원의 판결은 얼핏 보면 환영할 만한 일인 것 같지만 결코 기독교인들에게 고무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는데 바탕에는 미국의 시민종교가 깔려 있다.

   
 
  ▲ 샌디에고 솔리다드 언덕에 있는 30피트 높이의 십자가상.ⓒ <미주뉴스앤조이>  
 
미국 시민 종교의 역사

‘시민종교'(Civil Religion)라는 말은 종교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가 1960년대 후반 사용하면서 알려진 학술용어이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의 독립 당시부터 시민 종교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미국의 건국 시조들은 유일신 전통을 가진 공적 종교와 종교를 개인의 양심의 문제로 축소시키는 모순된 생각으로 종교문제에 접근했다. 특정 종교를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 전통을 유지함으로써 새롭게 시작한 국가의 구심점을 삼으려 하면서도 영국에서 당했던 종교 핍박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미국 독립 전쟁 초기에 협력관계에 있었던 프랑스로부터 들려오는 프랑스 대혁명의 소문은 미국의 초기 정치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프랑스 혁명에서 교회가 시민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받는 상황을 미국 땅에서는 보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시민의식을 무시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민종교는 미국인들의 마음 속에 새로운 종교 형태로 자리잡게 된다.

예를 들어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성서의 모세처럼 미국을 영국의 압제에서 해방시켰으며 여호수아처럼 신대륙이라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사람이다. 따라서 독립전쟁은 자연스럽게 거룩한 전쟁의 반열에 오른다.

시민종교는 미국이 인류 역사 속에서 특별한 사명을 행하기 위해 선택된 나라라는 믿음위에 서 있다. 그 사명을 준 존재는 신일 수도 있고, 이성일 수도 있고, 역사 일수도 있다. 아무튼 미국의 소명을 허락한 존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일 수 있다는 개연성만 있을 뿐, 하나님이라고 직시하지는 않는 것이 시민종교의 특징이다. 한국의 목회자들이 설교 예화 시간에 자주 사용하는 워싱턴, 링컨, 루즈벨트 등은 시민 종교의 대표적 성인으로 그들의 일화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과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성공담을 예화로 사용할 때는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시민종교의 성인 뿐 아니라 독립선언서, 헌법 등도 성물이 되었으며 초기 정치인들이 만든 미국의 공식 인장(Great Seal)에는 시민 종교의 정신이 잘 표현되어 있다. 류대영은 <미국 종교사>(청년사, 2009년)에서 공식 인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장의 뒷면에는 미완성의 피라미드 위에 광채가 나는 삼각형의 눈 하나가 그려져 있고 그것을 “그(혹은 그것)가 우리의 일을 인정했다.(Annuit Coeptis)”, “시대의 새로운 질서(Nous Ordo Seclorum)”라는 라틴어로 된 두 표어가 둘러 싸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중략) “그(혹는 그것)가 우리의 일을 인정했다.”는 말은 미국이 신(그것을 어떻게 정의하던 간에)에 의해서 선택된 국가이며, 신의 뜻을 행하는 나라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또한 “시대의 새로운 질서”라는 말은 선택받은 미국이 세계의 역사를 새롭게 열어 놓을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했다.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발달되어온 탁월한 문명을 말하는 것이고, 미완성의 피라미드를 광채가 나는 눈이 완성한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가 아직 완성시키지 못한 일을 새로운 시대의 질서를 이끌어갈 미국이 완성시킬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미국 종교사, 202~203쪽)

헌법에서 인정한 기도행위는 기독교 의례인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점점 반기독교적 정서로 흘러 가는 미국 사회가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공공기관에 성물을 설치하고 십계명 석비를 세우고 하는 일들이 기독교의 부흥을 가져오는 행위인지는 솔직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이미 다종교 사회에 접어선 미국에서 여전히 신(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자연스럽다라는 것은 기독교라기 보다는 시민종교의 하나님이라는 인식이 더 깊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공기관에서의 기도 역시 미국의 시민종교적 의례일 수도 있다는 위험성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번 판결은 공공 모임에서 기도하는 것을 관용과 전통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라는 권고처럼 읽히기도 한다. 기독교인들이 이 판결을 환영하려면 우리 역시 어떤 모임에서 행해지는 다른 종교 의례를 관용의 차원으로 수용해야 한다.
미국의 진보적 기독교인 언론인 크리스 헤지스는 <지상의 위험한 천국>(개마고원, 2012)에서 오하이오 회복 프로젝트라는 운동을 이끌고 있는 러셀 존슨 목사를 이렇게 묘사한다.

연설자들은 또한, 기독교인들은 가정을 보호하고 낙태를 금지하고 학교 기도들을 다시 도입하고 기독교적 오하이오를 창조할 투표자를 등록시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간절히 호소한다. (중략) 이 새로운 투표자들은 “미국을 위한 빛과 소금”이라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과 나라를 파멸시키려는 세력들을 저지할 것이다. 그들이 미국이 기독교적 길로 되돌아가게 할 것인데, 존슨은 그것이 이 나라 창설자들의 의도이며 목표였다고 주장한다. (지상의 위험한 천국, 216쪽)

크리스 헤지스는 존슨 목사를 가리켜 공화당 주지자 후보를 밀자는 선거운동을 복음이란 이름 뒤에 숨긴 기독교 파시즘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소개한다. 그의 주장은 복음적이 아니라 전투적이며, 기독교의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미국의 가치를 앞에 두는 시민종교의 메시지일 뿐이다. 이처럼 시민 종교의 흐름에서 우파는 근본주의 속에 녹아 들었고 자유주의 좌파들은 불가지론자가 되어 개인 명상이나 수행을 통해 그들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다. 종교다원주의라면 사탄 보듯이 하는 근본주의 기독교가 시민 종교라는 타 종교와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존슨 목사의 경우는 시민 종교가 기독교 우파를 통해 나타난 극단적 경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 밖으로 복음주의에서도 미국 국가주의는 빈번하게 등장한다. 존파이퍼 목사는 2012년 미국 대선에 앞서 빌리 그래함 목사와 함께 성서적 가치를 실현할 후보에게 투표하자고 호소하기도 했다. 목사의 입장에서 그런 입장 표명을 하는 것이 탓할 일은 아니지만 이면에는 모르몬 교인인 롬니를 밀어야 한다는 뜻이 숨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크리스천 포스트 인터넷판 2012년 10얼 18일 참조). 존 파이퍼는 기독교의 부흥이야 말로 미국을 제자리에 돌려 놓을 것이라며 국가 주의 기독교에 대한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이런 시각은 지난 2008년 “빌어먹을 미국”이라는 말로 유세중에 있던 오바마 후보를 당혹케 함으로써 그와 형식적 결별을 했던 오바마의 정신적 스승 제레미아 라이트 목사의 시각과는 대척점에 서 있다.

대법원 합헌 판결 이후 워싱턴 포스트지는 인터넷판 5월 11일자에서 이 판결 이후 공공장소의 십자가도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예를 들어 샌디에고의 솔레다드 언덕(mount Soledad)의 거대한 십자가상은 의회에서 국가 기념물로 인정했지만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다면서 이런 논쟁이 쉽게 가라 앉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법원의 기도 합헌 결정, 공공장소에서 만나게되는 기독교 성물이나 의례가 신앙의 표준 또는 미국 복음화를 가늠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공공 영역에서 기독교인지 시민종교인지 구분이 모호한 영역이 확대되어 가는 것에 승전가를 부를 것이 아니라 하우어 워스의 말처럼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에서 고유한 영역을 지키며 신앙인으로 올곧게 살아가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김기대 목사 / LA 평화의 교회

출처: 뉴스엔죠이

모든 나라마다

그 나라를 상징하는,

혹은 그 나라를 대표하는 꽃이 있습니다.

 

영국의 장미라든가

우리나라의 무궁화가 대표적인 것이지요.

 

참고로,

일본의 국화는

벚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벚꽃은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꽃일 뿐

일본의 공식적인 국화는 아닙니다.

  

그럼,

미국의 국화는 무엇일까요?

아쉽게도, 미국의 국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신 미국은

국화 대신에 각 주마다

주를 대표하는 꽃(state flower)이 있습니다.

  

예컨대

유타의 Sego Lily,

애리조나의 서과로, 혹은 싸와로라고도 하죠.

  

그리고

우리가 사는 캘리의 파피가

주를 대표하는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두 개의 주가 동시에

주화로 지정한 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산딸나무라고 불리는 dogwood입니다.



dogwood는

North Carolina와

Virginia의 주화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곳 남가주에서

dogwood는 좀처럼 보기 쉽지 않은 꽃입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이 꽃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바로 요세미티 국립공원입니다.



해마다

4월부터 피기 시작하여

5월까지 계속 피어납니다.

 

물론

날씨에 따라

더 빨리 피거나

 

 혹은

더 빨리 꽃이 질 수도 있습니다.



4월과 5월에

요세미티를 방문하면

 

요세미티의

신록과 더불어

산뜻하고 밝은 이 꽃을 볼 수 있습니다.



dogwood가

요세미티를 대표하는

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봄날에 요세미티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꽃이

바로 이 dogwood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요세미티를 대표하는

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dogwood 꽃의 색은

white, plink, green의 세 종류가 있는데

요세미티에서 피는 이 꽃의 99%는 white입니다.



green color도

드물긴 하지만 이따끔씩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pink 색의 dogwood는

요세미티에 단 두 그루 밖에 없습니다.



비록 두 그루 뿐이지만

이 핑크빛의 dogwood 가

만개했을 때는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합니다.



조지아주의

Atlanta 같은 곳에서는

 

pink dogwood를

가로수로 심은 곳이 많아서

4월에는 대대적으로 dogwood 축제를 벌인다고 합니다.



dogwood는

한국, 중국, 일본과

유라시아의 북쪽과 캐나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

건조한 사막지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 서식하고 있으나

 

주로 남동부에

 많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dogwood는

숲속의 큰 나무 밑에서 자라기도 하지만

 

자연산일 경우

대부분 산 아래쪽과 강이나 물가에서 자랍니다.



한국에서는

산딸나무라고 부르는데

왜 미국에서는 dogwood라 부를까요?



여기에는

유래가 확실하지 않지만

두 가지 설이 있다고들 말합니다.



첫째는

유럽에서 개에게 물린 상처를

치료하는데 이 꽃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영국 사람들은 dogwood 껍질을 다린 물로

진드기가 붙은 개를 묙욕 시키는데 사용하곤 했는데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나무가 dogwood로 불리워진다고 합니다.



dogwood는

기독교와 관련된

유래와 전설이 있는 나무이기도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dogwood 나무에 못박히셨다고 합니다.



dogwood는

부활절 시기에

꽃이 피었기 때문에,

 

그리고

dogwood 꽃잎 끝에

붉은색 점이 있었기 때문에

  

또한

이 꽃의 4개의 잎이

십자가 형태를 하고 있기에

 

dogwood에

그런 전설이 생겨났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1세기 경에 dogwood는

지금보다 훨씬 더 크게 자랐는데

 

하나님께서는

dogwood가 더 이상

십자가 형틀에 사용되지 않도록

나무가 크게 자라지 않게 하셨다고 합니다.



 

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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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칭의 교리와 개교회주의|황대우 글방
apeldoornh | 조회 140 |추천 0 |2008.10.25. 21:36 http://cafe.daum.net/C.N.B./Qf1s/16 

 

*이 글은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오해 "라는 제목으로 개혁주의학술원(고신대) 홈피에 칼럼으로 실린 글을 약간 수정한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7절에 근거한 이신칭의(以信稱義)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이다. 이것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결정적인 교리이기도 하다. 이후 모든 개신교도들은 이 교리를 성경 해석의 열쇠로 삼았다. 그래서 오늘날 개신교도들은 이 교리에 도전하거나 이 교리를 위협하는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이러한 분위기는 한국 개신교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하지만 이 건전한 이신칭의 교리가 개신교의 새로운 교리적 면죄부(new doctrinal indulgence of the Protestant Churches)로 전락해버린 것 같아 너무나도 안타깝다.

 

혹자는 이러한 교리 위에 세워진 개신교를 개인주의의 천국으로 이해한다. 이유는 이 교리가 개인의 신앙고백인 믿음을 절대화함으로써 교회의 공동체성을 희생양으로 삼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평가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상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지적 가운데 하나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교리가 본래 그와 같은 개인주의를 조장할 의도를 가지도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개혁주의 교리에서 보자면 이신칭의의 가르침이 더더욱 그와 같은 개인주의로 왜곡될 가능성은 희박해야 정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한국의 거의 모든 장로교단 교회들에 그러한 개인주의가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안타까운 현실이다.

 

“예수천당”이란 구호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진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진리는 이신칭의 교리와 더불어 한국교회를 개인주의화 하는 일그러진 모습으로 왜곡되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이 한 때 대학선교단체인 CCC를 통해 80년대 한국교회를 강타했는데 이 질문 역시 이신칭의 교리와 예수천당이란 구호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교회는 이 모든 교리를 개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춘 전도 전략의 모티브로 사용해왔다. 지금까지 그것은 전도전략의 부동의 모티브로 활용되었고 폭발적인 결과를 가져왔고 교회 부흥이라는 황금 알을 낳았다.

 

지금도 여전히 교회 부흥이란 황금 알은 형태상 성경공부, 다양한 전도 프로그램, 전도 집회, 다양한 수련회 등을 통해 부화되기를 바라고 있다. 교회 부흥은 곧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으로 통한다. 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바라고 소원하시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정말 개교회의 외적 성장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일까? 자기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이웃교회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가 과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방법일까?

 

때때로 교회들 사이의 연합에 대한 아름다운 소식이 보도되기도 하지만 지역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 교회와의 연합 사역에 대한 소식을 듣는 일은 그렇게 쉽지 않다. 대형교회가 가장 가까운 이웃 개척교회를 대대적으로 지원했다는 이야기나, 상가의 조그마한 교회가 이웃을 덩치 큰 교회와 연합 사업을 했다는 소식들은 접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문제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교회가 천상적이든 지상적이든 하나님 앞에 있는 교회(ecclesia coram Deo)는 하나님의 교회는 분명 하나라는 성경의 가르침 때문이다. 바울 사도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몸 즉 교회는 하나라는 사실을 거듭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분리된 한국교회의 여러 교단들은 한 교회가 아닐 뿐만 아니라, 결코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고 하나가 되어서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이러한 기형적인 양상이 단지 교단과 교단 사이에만 상존하는 것이 아니라 한 교단 안의 교회와 교회 사이에도 상존한다는 점이다. 마치 죽어서 서로가 갈 천국이 다른 것처럼 이웃 교회들 사이의 관계는 너무나도 적대적이다.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참 모습이 이런 것인가? 전도라는 미명아래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것이 당연하기라도 하듯 외치는 각 교회 강단의 소리에 청중들은 너무나도 쉽게 감염되어 왔다. 어쩌면 교인을 빼앗기지 않고 뺏어오는 일이 전도라는 미명에 내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각 교회들은 이웃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행사에 대해 민감할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역적으로 인접한 교회일수록 서로에 대한 미움과 적대감은 더욱 심각하게 증폭되어 왔다.

 

물론 이런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연합과 교회 연합 사업을 장려해야 한다고 외친다.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 교회연합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구호는 분명 옳지만 때로 그들이 지향하는 목표는 개 교회들이 추구하는 개인주의와 물량주의의 목표와 너무나도 닮아 있다. 이럴 경우 교회연합은 연합 사업을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되고 만다. 교회연합이란 그 자체가 교회의 본질이요 목표이지 결코 그 무엇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각 교회의 개인주의화와 이로 인한 지역 교회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인가?

 

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약 4:1)고 반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교회 간의 갈등의 주원인은 어쩌면 전도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인간적인 “욕심”이 아닐까? 한국교회가 전도라는 미명아래 감추고 있는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고 사도교회와 초대교회의 초심, 즉 “교회는 하나이며 그 머리도 하나”라는 성경의 근원적 교회론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철부지 아이들의 명분 없는 아집으로 인해 벌어지는 싸움과도 같은 지역교회들 사이의 아귀다툼은 분명 해소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이신칭의 교리를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교리를 우리 자신의 욕심을 포장하는 포장지로 사용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나만 옳다는 독선을 옹호하는 도구로, 그래서 내가 싫어하는 상대를 무조건 부정하고 배척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경은 분명 이신칭의를 가르치지만 성경의 교회론은 결코 개인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없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만 알 뿐이다. 하지만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은 결코 따로 국밥이 아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은 한 몸을 이룬 “더불어 공동체”이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자마자 그분의 몸의 한 지체가 된다. 많은 지체 가운데 하나라는 뜻이다. 몸에서 한 지체는 다른 지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다른 교회의 성도 없이 우리 교회의 성도도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 개념이며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론이다. 천국이 하나이듯이 하나님의 교회도 하나다. 이 지상의 교회가 아무리 불완전하다 해도 그것은 분명 그리스도의 몸, 한 몸이다. 정상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지체가 있다면 모든 지체가 함께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 지체가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도움의 필요는 더욱 긴박하고 절실하게 느껴져야 할 것이다. 모든 한국의 지역교회들이 “우리 교회” 내지는 “내 교회”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을 벗어던지고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보다 성경적이고 보편적인 사상에 사로잡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20년전쯤 한국의 낯익은 장면 

길을 가다 보면 어떤 사람이 친절하게 다가와 속삭인다. “ 도에 관심있으세요?” 증산교의 일파인 대순진리회의 포교 행위다.

세월을 더 거슬러 올라가서 학교에서 자주 경험했던 낯익은 장면

여학생이 다가와 예쁘게 속삭인다. “구원의 확신이 있으세요?” 구원은 교회에서 늘 듣던 말이지만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터라 잠시 머뭇거리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예”. “그럼 언제 받았는지 날짜를 기억하세요?”. 이건 또 뭐야라는 불쾌감이 확 밀려온다. 이른바 구원파의 포교행위다.

인재나 다름없는 침몰로 아직도 사람들의 분노와 눈물을 그치지 않게 하고 있는 세월호 참사, 그 세월호가 소속된 선박회사 청해진 해운의 실소유주가 유병언씨 일가로 밝혀져 다시금 구원파가 언론에 회자되고 있다. 다수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아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유명 사진 작가 역시 유병언씨며, 아들 중 하나가 청해진해운의 지주사 아이원아이홀딩스 대주주로 있다. 사진작가 아해가 운영하는 아해프레스는 지난 2012년 프랑스 생 니콜라 쿠르베피 마을 경매를 통해 마을을 52만 유로에 낙찰 받은 것으로 보도된 바 있다.

   
 
  ▲ 유병언씨 소유 대 저택 10.5에이커대지에 건평 8500스퀘어피트. 뉴욕주 웨체스터카운티 있다.ⓒ 안치용 기자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인 세모그룹 유병언 전 회장 일가족의 재산은 약 2400억 원 정도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병언씨는 1970년대 삼우 트레이딩을 창업한 후 교인들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모았다.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당시 자금 모금 과정의 의혹으로 기소되었을 때 검찰의 공소사실에는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재물의 무조건적인 헌납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취지로 신도들을 미혹시키는 설교를 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유병언씨가 삼우트레이딩을 기반으로 성장시킨 세모그룹이 운영권을 가지고 있던 한강 유람선은 1990년 사고로 14명의 인명피해를 낸 뒤 1997년 부도 처리됐다.

1987년 발생한 오대양 사건(교주 박순자씨를 비롯해 32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에도 구원파가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유병언씨의 이름이 언론에 오느내리기도 했다. 이런 의혹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다시 대단한 재력을 소유한 거부임이 드러남으로써 그의 사업 수완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안은 이전 것 보다 훨씬 메가톤 급이어서 그의 수완이 다시 견뎌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세 갈래로 나뉜 구원파

구원파는 유병언의 장인 권신찬에 이해 설립된 기독교 복음 침례회의 다른 이름이다. 권신찬은 남산 총회 신학교(현재 장신과 총신이 분열되기 전의 신학교)출신의 장로교 목사였으나 재침례를 허용했다는 이유로 1962년 면직되었다. 1966년 복음주의 방송(극동방송의 전신)에서 일하던 중 여기서도 교리문제로 그만두었다가 1981년 기독교 복음 침례회를 설립했다. 그 전까지는 구원파로 불리는 비조직적 형태의 이단이었으나 사업 수완이 좋은 사위 유병언이 교단을 만들어 공식 교단으로 출범한 것으로 보인다.
1983년 종교와 사업을 연계하는 유병언의 정책에 반대한 이복칠이 이탈한 후 대한 예수교 침례회 서울 중앙교회를 세웠다. 현재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박옥수의 기쁜 소식 선교회도 구원파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딕욕의 상선회사 경험

구원파는 미국 시애틀 출신인 딕욕(Dick York)이 1953년 한국에 들어오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미국에서 믿음의 방패 선교회(Shield of Faith Mission)를 세운 딕욕은 일종의 재침례파로 사람이 한 번 죄사함을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으면 양심의 모든 죄책감에서 해방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이후에 짓는 죄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교리를 전파했다. 그러므로 구원의 일시가 중요하며 그들의 주장에 따른 죄사함을 경험하지 않으면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한다.

1928년생인 딕욕은 믿음의 형제들(http://bif.or.kr)이라는 홈페이지에서 아직 활동중이며 신도들의 질문에 응답하고 있다. 최근에 올라온 자료를 보면 그는 (박옥수의) 기쁜 소식 선교회가 잘못 가고 있다며 박옥수와의 관계는 끊어졌다고 밝히고 있다. 기쁜 소식 선교회의 영어 안내문에는 딕 욕 소개도 나와 있지만 박옥수는 케이즈 글라스(Kays Glass)라는 선교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며 박옥수의 청소년 시절 케이즈와 찍은 사진도 싣고 있다.

딕욕이 16세인 1944년부터 1950년까지 미국 상선(US Merchant Marine)에서 일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그가 한국에서 배출한 제자들에게 상선의 경험을 이야기했던 것은 아닌가, 그것이 구원파의 유람선, 여객선 사업에 영향을 준 것은 아닌가라는 흥미로운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돈오점수냐 돈오돈수냐?

불교에서는 한 번 깨달음을 얻은 뒤 지속적인 수행이 필요하다는 입장(돈오점수)과 한번 깨달음으로 모든 수행이 완성된다는 입장(돈오돈수)이 수백년째 논쟁을 이어오고 있다. 고려 시대 승려인 보조 국사 지눌은 돈오점수의 입장이며 조계종 종정을 지냈던 성철은 돈오돈수를 대표하는 승려다. 구원파는 불교로 치자면 일종의 돈오돈수인 셈이다. 한번 구원받으면(돈오) 모든 죄를 더 이상 씻을 필요가 없다(돈수)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정통 기독교의 성화 과정이 생략된 것인데 이런 교리적 차이로라면 토론도 가능할 수 있다. 문제는 그들이 가진 물욕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다. 더 이상의 회개가 필요없다면 교회라는 제도도 필요없고 이 세상에서의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와야 한다. 하지만 이들이야 말로 교인들로 하여금 며칠씩 직장도 포기하게 만들고 합숙 집회를 열어 자유를 구속하며 교주들은 경쟁적으로 재산 불리기에 나서고 있다.

권력자들이나 부유층의 해외 재산 기록을 찾아내는 것으로 유명한 재미 파워블로거 안치용씨가 발견한 세모 소유로 의심되는 해외 재산 목록이 아래 박스에 정리되어 있다. 그들의 교리에 따르면 구원의 깨달음 이후의 모든 것은 죄가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재산을 축적하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비아냥 거리고 싶은 부분이다.

   
 
  ▲ 구원파 유병언씨의 일가 미국 내 숨겨진 부동산 내역 일부. ⓒ 안치용 기자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승려들이 그 교리를 깨닫기 위해 세상을 등진채 힘겨운 수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반면교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세월호의 구원파 관련 사실이 보도되자 분노한 여론의 화살이 기독교를 향하지 않을까라는 우려가 기독교계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구원파가 이단이라는 사실은 모른 채 한묶음으로 교회를 비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지연되는 구조 과정으로 인한 여러 음모론이 SNS를 채우는 가운데 언론이 구원파와의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정부를 향해 악화된 여론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려 하는 것이 아니냐는 새로운 음모론도 제기되고 있다.

오해든 음모든 중요한 것은 그들은 이단이며, 동시에 이번 참사의 원인제공자라는 사실이다. 아무리 유병언씨의 사업 수완이 뛰어나도 권력과의 유착이 없었다면 그의 화려한 재기가 가능했을까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청해진에 대한 엄중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그 정도로 모든 것을 미봉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기대 목사 / LA 평화의 교회
출처: 미주뉴스엔죠이

마이클 호든- 주님은 "내 교회를 세워라"하지 않고 "내 교회를 세우리니"하셨다

교회의 사역은 목사, 교사, 장로 그리고 집사를 통하여 우리를 섬기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 사역은 세상을 향해 넘쳐흐르는 진정한 선물의 시혜를 받는 감사하는 공동체를 만든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세우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받는 무엇이다(12:28). 교회의 주께서는 내 교회를 세워라하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이라는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6:18)고 말씀하셨다.

 

지상 명령을 주면서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내가 지금 떠나니 내 자리를 승계하여 내가 끼친 모범을 좇음으로써 내 구속의 일을 확장하도록 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런 말씀을 주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18-20).

 

복음이 우리 뒤에, 우리 앞에,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가는 것이다. 교회는 무엇보다 먼저 복음에 의해 창조되어 의롭다 함을 받고 새로움을 입은 백성으로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다시 세상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존재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이 심판과 은혜 안에서 활동하시는 장소이며 동시에, 심판당하고 의롭다 함을 받아 이 세상에서 자신의 부르심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창설한, 그리스도가 세례, 설교 그리고 성찬 안에서 죄인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역사적인 조직이면서 동시에, 믿음을 통해 살아 계신 머리에 연합해 있는 영적인 유기체다. 복음이 다른 모든 인간 활동에 앞서 우위를 갖는다. 그리고 어떤 특정한 교회도 그리스도가 그분의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셔야만 진정한 교회라는 뜻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거느리셨다. 제자는 학생이다. 물론 1세기 유대의 학생은 오늘날 대학생과는 다르다. 선생이 교훈과 개인적인 교제를 위해 정기적으로 만나는 추종자들을 모은다. 강의를 하곤 교실을 떠나는 오늘날의 거리감 있는 교수(목사도 아주 자주 이런 식이지만)와는 달리, 이런 선생들은 학생들과 시간을 보냈고 학생들은 랍비로부터 정보를 받을뿐더러 그의 지혜와 모범을 통해 인격을 형성한다.

 

루터가 사도신경, 십계명 그리고 주기도문이나 겨우 아는 무지한 서민들에게 칭송을 받았지만, 그들을 아랫사람 취급하지 않았고, 그 자녀들에게 주중이면 교리문답을 써 가르쳤다는 점에 늘 감명을 받는다. 칼빈과 다른 개혁자들도 주로 교리문답 선생으로서 목사에 대한 이러한 기대를 수용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그들 역시 일부요 그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공동체에 젊은이들이 연결되었다. 이와 반대로 오늘날의 사람들은 언약의 상속자가 아니라 고아들 마냥 영적인 지도자, 코치 그리고 멘토들에게 환호한다.

 

성공하는 과학자는 선배들의 권위에 순복한다. 좋은 과학자가 된다는 것은 좋은 바이올린 주자 혹은 양조 기술자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써야 한다. 성숙과 질보다는 효율성과 규모를 중시하는 이런 사대에서 우리는 쉬운 네 단계로 바이올린 켜는 법 혹은 와인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는 전문가를 훨씬 더 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인(藝人)이 되기 위한 장기적인 헌신을 가치 우위에 두는 실천이다.

 

기독교인의 제자도는 목사와 교사들이라는 선물을 통해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4:11-13,14-16)으로 세워지는 평생 과정이다. 이 사역은 부모와 가정의 친구들, 조부모와 어린이 체육 활동 코치들을 어린이들을 위해 말씀의 종이 되도록 한다. 또한 우리는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벧후3:17-18) 가기 위해 함께 부르심을 받았다.

 

공증된 복음이 공증된 사역과 함께 온다. 하나님 말씀의 사역자들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추구하고, 스스로의 체험을 유포하며, 강조하고 싶은 것을 강조하는 자들이 아니다. 훈련과 시험 그리고 인정으로 하나님이 자격을 보증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선물을 가져오는 자들이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 자신의 유산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유산을 골고루 나눠 주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물이요 하나님의 선택하고 구속하고 새롭게 하시는 은혜의 결과이다.

 

- 마이클 호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pp 296-299

 

가져온 곳 : 
블로그 >청교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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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십자가 아래서의 기도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아, 기도란 얼마나 큰 특권인지!

염려로 상했던 마음 평안을 얻고

세상을 벗어나 천국 맛보고

비참한 죄인이 만복 누리네.

 

강력한 기도에 큰 권능 있으니

영원한 보좌 한걸음에 이르고

거기서 전능자의 도움 당당히 구하며

그 모든 도를 우리 것으로 누리네.

 

나 아무리 약하고 내 원수들 강해도

기도의 힘이 모든 원수 이기니

나 기도하면 내 하나님

내 주변에 불담 쌓아 주시네.

 

나 기도하면 내 모든 원수들

연기 사라지듯 혼비백산 도망하고

나 기도하면 여호와의 능력

지친 내 영혼 강건하게 하네.

 

무슨 잘못 있고 무슨 필요 있든지

기도로 그 모든 것 토해 낼 수 있으며

사랑하는 내 아버지의 귀가

그 모든 것 세심하게 들으시네.

 

죄에서 벗어나려 힘써 싸우나

오히려 죄가 더 무겁게 짓누를 때,

무력감에 휩싸여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승리 주시네.

 

거룩함에 도달하려 애쓰는 이들도

기도 가운데 그것에 이를 수 있으니,

믿음과 기도로 씨름하면

불가능한 일 전혀 없음이라.

 

성령께서 기도 가르쳐 주시고

어린양의 공로 의지하며 나아가니

아무리 연약한 기도도 들으심을 얻음은

그리스도의 이름이 기도의 향기가 됨이라.

 

존귀하신 예수님 통해 드리는 기도

단숨에 하늘의 보좌에 이르고

빛나는 천사들 사랑의 날개에

응답 싣고 내려오네.

 

지친 심령에 소망도 기도요

염려하는 마음에 확실한 위로도 기도라.

약속의 말씀으로 하나님께 간구하여

거기에서 구원을 발견하네.

 

기도는 모든 것 채우실 수 있는 분께

모든 소망 아뢰는 것!

거지가 왕에게 나아가

원하는 모든 것 아뢰는 것!

 

마음은 여전히 세상에 뒹굴면서

허공을 치는 유창한 말 늘어놓고

멋진 말과 표현 내뿜는 것은 기도 아니라.

기도는 마음의 깊은 중심이거늘.


신자들의 궁극적 양식과 하나님의 말씀

 

김영규 목사

뉴욕학술원 회원

개혁주의성경연구소 소장

 

| 신명기 8장 2- 6절 |

 

 

창조이래 교회는 존재해 왔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가르치는 내용도 질적으로 큰 발전이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있어서 발전이 있다는 것은 약간 서두른 개념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의 본질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은혜언약의 내용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는 내용’은 계속해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완성이 되지 않은 교회를 위한 계시의 내용으로 모든 시대에 계시되어 왔지만, 우리의 하나님이 최고의 상급으로 계시되는 일은 창세기 15장 1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처음이요 마지막이었습니다.

칼빈 이래 하나님이 ‘너의 지극히 큰 보상’이라는 이 본문은 우리 장로교회의 성경인 제네바 성경을 필두로 하여 개혁교회 안에서 ‘오직 하나님 안에서 우리 선(善)들의 최고의 그리고 가장 완전한 충만이 있다’는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의 기초가 되어 왔습니다.

로마서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가르침 중에 몇 가지 말씀들은 오늘날 우리의 연약한 교회나 시대 혹은 성공적 교회의 정체성을 완전히 뿌리 채 흔드는 말 씀이 되기 때문에, 종종 설교의 말씀으로 선포되는 것으로부터 제외되거나 왜곡되게 해석하여 영원히 땅에 묻혀 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연약함이 말씀을 왜곡시켜

 

로마서는 유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물론 로마서 3장에 나타난 극단적 궤변론자들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그 궤변론자들에 의하면,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그리고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신 것이 아니냐?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대상하여 사도 바울은 그의 논박을 차근차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어떤 불의든 반드시 심판이 있다. 창세로부터 만물 안에 하나님의 속성들 과 지식들을 분명히 보여 주셨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은 스스로 불의 들에 대해서 핑계할 수 없다. 그들의 죄들로 내버려두어 죄들로 인한 스스 로 보응을 받도록 길이 참으신다. 유대인들에게는 은혜를 더하여 거기에 하 나님의 말씀을 주셨지만, 그런 은혜를 받지 못한 이방인들에게 더 부끄럼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에 대한 신뢰를 버리시지 않으셨다. 이는 이방인들처럼 그들도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죄인이었을 때,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난 의다. 율법이 있기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할 것이 없는 그런 믿음에 의한 의에 기초하였다. 그렇게 유대인들이든, 이방인들이든 그리스도 안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었다면, 더욱 더 죄를 지을 수 없다 (롬 6:1,15).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서 죽었고 그런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곤고한 자로 남아 있는 자들에게 율법이 죄들을 지적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은 없다. 그러나 율법의 요구들을 이루도록 모든 것이 이루어 질 영생의 때까지 그리스도의 영이 도우신다. 결국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그리스도의 형상과 동일한 형상을 얻기 위해서 예정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대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불가항력적이다.

유대인들과 헬라인들로부터 온 참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하 나님의 의지에만 원인이 있다. 그의 사랑하는 택한 자들 중 이방인들의 수 가 차기까지 이스라엘은 완악하여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었던 것처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다. 그런 역사의 비밀 안에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 그 판단과 그의 길이 있다.>

그런 하나님 앞에 사도 바울은 결론적으로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롬 11:35)라고 되묻고 있습니다. 그 대답으로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하나님께 돌아간다(롬 11:36)고 하였습니다. 역시 욥기의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의 신비의 원인자로 자신을 증거하시고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내 것이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원인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욥을 책망하는 엘리후의 말 가운데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범죄하고 죄악이 관영해도 하나님께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욥 35:6-8)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 화자가 욥기 처음에서 언급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난 욥의 고난에 대한 깊고 다양한 원인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하나님에 대한 욥의 불평과 쟁변에 대해서 하나님은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고 좀더 긍휼과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반복하여 말씀하시기도 하고 모든 일들을 행하신다고 변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악이 나오지 않고 항상 공의를 행하시사 피조물이 스스로 보응을 받도록 하신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산상보훈처럼 그의 사랑과 은혜는 피조물들 사이에 차별이 없으시고 우리를 교육하시기를 땅의 짐승에게 하심보다 더하시며 우리에게 지혜주시기를 공중의 새에게 주심보다 더하시는 것처럼 다만 그의 자비로 기다리실 뿐이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 대신 스스로 곤고한 자가 되어 의를 하나님께 돌리는 경배를 행하고 하나님의 하신 일을 찬송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욥 36:3,24).

 

선하심의 극치이신 하나님

 

속성들에 있어서 가감되지 않으시며 사랑과 은혜와 자비만을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한 엘리후의 지식은 자신에 관한 하나님의 결론적 말씀의 핵심과 상당히 일치함을 비교해 주고 있으며 나아가 이스라엘 밖에도 그런 지식의 소유자가 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서 있고 존재하는 것으로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고 존재의 가치를 크게 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자연과 섭리의 수단들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더 하는 역사적인 증거로 남아 있는 이상, 그런 은혜들을 받기만 한 자로 있기 때문에 그런 계시들을 목격하고 그의 말씀을 들으며 그로부터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일만이 남아 있다고 결론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로마서의 가르침이나 욥기의 가르침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음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의 속성들이 가감되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하여 인간 스스로의 의나 공로에 대한 근거가 전혀 없어진 셈입니다.

 

인간의 의나 공로는 근거 없어

 

그러면 로마서와 욥기 사이에 차이는 무엇입니까? 욥기는 변명할 수 없이 충 분하고 판명한 일반적인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한 하나님의 지식에 관한 것 이 기본적인 내용으로 포함되어 있지만, 로마서에서 일반적인 하나님의 계 시 이외에도 거기에서 전달될 수 없고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선포되어 왔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것이 주 내용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에서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참된 양식으로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율법이나 계명의 기능이 죄를 깨닫고 죄를 죄 되게 하는 기능에 제한되어 있습니다. 욥기에서도 다만 “내 발이 그의 걸음을 잡고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과 그의 규례로부터 떠나지 않으며 내가 그의 입의 말을 간직하였다. 이것은 일정하니 누가 돌이킬까? 그의 마음이 하고자 하여 그가 행하신다”(욥 23:12-13)는 욥의 말이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히브리어 원문(MT)에는 일부 번역이나 우리 말 번역처럼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라고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인용하신 말씀 속에서만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성에 따라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서 인성을 입으시사 극한 굶주림에 처하여 있을 때 예수님은 그의 참된 양식에 대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그리스도께서 지금 신명기 8장 3절에 의해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야곱의 우물가에서 어떤 사마리아 여인과 만난 자리에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이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의 양식이 무엇인지를 다시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만이 유일한 구원의 방도

 

히브리서 10장 9절의 가르침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의식법으로서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폐하여졌으나, 십계명과 같은 거룩하고 신령한 법으로서 율법은 폐하여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음으로 그런 율법을 오히려 굳게 세우신 것입니다(롬 3:30). 율법에 의해서 스스로 의인이 되게 하는 일이 일어나거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자가 율법에 의해서 정죄받는 일은 없으나, 하나님의 거룩한 선한 뜻으로서 율법은 우리의 매일 양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명기 8장의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원리가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시험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시험을 받은 것은 그런 참된 양식에 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시험이 중요한 것은 그런 광야생활에서의 양식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신 8:12-13)에 무엇이 양식인지 를 알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담이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에덴동산과 창조된 자연 속에 살도록 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하는 참된 양식에 대한 말씀이 있었던 것과 같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모든 요구가 성취되어 더 이상 율법에 의한 정죄가 없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살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살도록 하는 삶의 형식은 무엇이겠습니까?

 

유일한 생명의 원인으로 주어진 말씀

 

확실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로만 살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복된 삶의 형식일 것입니다. 창조이래 인류를 향한 역사와 제사장의 나라 이스라엘 안에서 이루신 역사 및 그리스도의 구원의 성취에 이르기까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 앞에서 창조된 사람의 참된 양식에 관한 것이라면, 그 양식은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 재물을 얻었다” 함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신 8:17-18)이라는 복의 내용과 관련되어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1-27절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베드로가 대답하였을 때, 주는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복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일하심이 복입니다.

 

말씀 성취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

 

우리 본문에서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모든 역사들이 우리에게 우리의 참된 양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모든 기적들과 만나가 비유이듯이 창조를 통해서 각인된 우리의 매일 양식도 비유라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매일 양식으로 주신 것은 그것을 통해서 진정한 복을 주시기 위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매일 일하심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포된 말씀들이 우리의 참된 양식이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 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 일하시는 뜻이 그 매 말씀에 표현되어 있 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양식만이 우리의 진정한 양식이요 하나님이 가장 큰 복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조될 때나 이스라엘이 출애굽 될 때나 마지막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부름을 받을 때나 하나님의 뜻을 매일 양식으로 먹는 자로 초대되었다는 것 이 하나님의 마지막 복에 관한 초대라고 설명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명령하시지 않고 설명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좋은 것을 주실 때 가장 좋은 방식으로 주시고자 하는 뜻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복의 실제적 내용이 내 안에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인류에게 내리신 최대 마지막 기적이요 복일 것입니다.


선악을 아는 것이 왜 나쁜가?
선악과에 대한 둘째 의문 / 박신 목사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네가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5-17)


동물은 선악(善惡)과는 전혀 무관하다.  

선악과 금령에 대한 대표적인 세 의문 중에 둘째 질문을 살펴보기로 하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데 왜 나쁜 일이 되는가? 그것도 정녕 죽어야 하는 벌을 받을 정도로 말이다.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는 일로 벌 받을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그 일 자체는 상을 받아야 할 만큼 선한 것이다. 그런데도 성경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다른 말로 선악을 아는 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우선 인간이 무엇이 선과 악인지 분별하는 일이 아주 힘들다는 뜻일 수 있다 또 성경이 말하는 선과 악의 본질도 흔히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내용과 전혀 다르다는 뜻도 된다. 실제로 현대의 콧대 높은 최고 지성인과 도덕가들조차 이구동성으로 선악을 함부로 판단할 수 없으며, 성경이 말하는 바와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지만, 또 시대와 상황과 사람에 따라 다 달라진다고 합의하고 있지 않는가?  

본문이 일차적으로 말하는 바는 실과를 따먹는 것과 선악을 알게 되는 것이 직접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의약품이나 아편처럼 열매에 특수한 성분이 들어있어서 먹자마자 선악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아담과 이브에게 나타났던 열매를 따먹은 효과는 선한 일을 해야겠다는 열정이 생겼거나 반대로 죄를 범하려는 악한 생각이 엄습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자기가 이미 행한 행동으로 인해 두렵고 부끄러워졌을 뿐이다. 열매를 먹기 전후로 이미 죄를 범한 것이지 열매 자체가 양심을 심어주거나 악한 생각이 들게 만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이 금령을 주신 단계에선 에덴동산에 선만 있고 아직 악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악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사탄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물질계를 만들기 전에 영계의 천사들을 창조하셨는데 그중에 가장 뛰어난 천사가 하나님을 배역해 쫓겨났다. 그 사탄이 아담과 이브를 통해 악을 세상에 뿌리려 에덴동산까지 숨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사14:12-14)

사탄이 선재(先在)한 경위는 어쨌든, 에덴동산은 아직 악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다. 최초 인간과 악의 연결된 고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선악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을 알 수 있다. 선과 악은 인간을 통해서만 세상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인간만이 선악의 행동주체가 된다. 인간이 아니면 세상에 어떤 선악도 드러날 수 없다. 인간 외의 어떤 피조물도 선악과는 무관하다.

예컨대 동물은 아무리 근친상간을 해도, 의외로 그렇게 하는 케이스가 드물긴 해도, 또 생존을 위해 다른 동물을 죽여도 악행이라고 하지 않는다. 나무가 열매를 많게 맺든 적게 맺든 나무 자체가 선하거나 악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의 평가에 따라 나무의 품질에 대한 등급만 매겨질 뿐이다.

영혼은 물론 자유의지도 없는 동식물은 오직 생존과 번식이라는 본능에만 따라 움직인다.  반면에 인간은 자유의지로 스스로 판단, 결정, 행동했기에 그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 자유의지와 영혼을 소지한 인격적 존재만이 선악을 실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선악의 두 궁극적 기원

우주에는 인격성을 갖춘 존재는 크게 보아 셋이다. 하나님과 사탄과 인간이다. 천사나 귀신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사탄의 지시에 따른다는 뜻에서 제외된다. 삼위 하나님은 절대적 선의 근원인 반면에 사탄은 절대적 악의 근원이다.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께로 나오고 반대로 모든 악한 것은 사탄에게 기인한다.

선과 악의 궁극적인 근원이 공존한다고 해서 동양적인 이원론 사상을 성경이 지지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우주에 태초부터 선재하고 있던 선과 악의 세력이 세력 다툼을 하면서 시기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승리와 패배를 나눠가진다는 것이 이원론이다. 말하자면 선과 악의 두 기원이 세상에 미치는 주권과 능력의 범위를 대등한 크기로 보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 세상에선 당연히 절대적 선악의 기준이 없어진다. 그야말로 시대와 장소와 사람마다 선악이 각기 달라진다. 또 한 사람이라도 생각하기에 따라 선악이 변화무쌍하게 바뀐다. 나아가 인간의 구원과 심판에 어떠한 일관성도 생길 수 없다. 두 세력의 승패에 따라 심판과 구원의 기준 및 방도가 매번 달라진다는 이상한 결론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이원론의 세상에선 인간은 자기 세대의 흐름이 선과 악 중에 어느 쪽으로 더 쏠리는지 눈치를 보고 센 쪽에 빌붙어야 한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믿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심지어 나치 독일의 치하에선 기독교 사역자들마저 악의 편에 줄을 서지 않았는가?

그러나 악은 절대 선을 이길 수 없다. 우주의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 모두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거룩한 주권 하에 있다. 비록 악의 세력이 가공할 위력은 갖고 있지만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완벽한 권위를 벗어날 수는 결코 없다.

욥기의 서론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결코 사단과 협력하지는 않는 반면에, 사단은 하나님의 허락 내지 묵인 없이는 꼼짝도 못하는 존재다. 그리고 지금 시대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공중 권세를 사단더러 잡도록 하나님이 한시적으로 풀어 놓으신 상태다.

군대 귀신들린 자를 예수님이 고쳐주자 귀신들은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눅8:31) 했고, 또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8:29)라고 종말의 시기가 그 때 벌써 닥쳤는지 염려했다. 자기들에게 허락해준 공중 권세를 제발 당장 회수하지 말아달라고 간청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탄을 세상에 당분간 군림하도록 허락하셨다는 뜻은 결국 인간은 당신과 사탄 둘 중에 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중간에 회색 지대는 없다. 인간은 영적 존재인 하나님과 사단 어느 쪽과도 영적 교통이 가능토록 영혼을 지음 받은 유일한 존재다. 또 자유의지는 그 교통을 스스로 판단하여 어느 쪽과 지속적 교제를 할지 선택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사탄과 별도로 떨어져 자존(自存)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인간이 비록 사탄을 택하여 넘어가는 한이 있어도 동물과는 다른 존재로, 특별히 기꺼이 자발적으로 사탄보다는 당신과 동행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말하자면 아담에게 선악과 금령을 내리신 이유는 에덴동산에 아직은 선악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곧 그 음흉한 본색을 드러낼 것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선악이 아담을 통해 이 땅에 최초로 구현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선하게 만들거나 그 반대로 악에게 농간 당하게 할 키를 그가 쥐고 있었다. 절대적 선과 악의 근원에 그가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따라 선과 악이 세상에 구체화 될 판국이었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다.

선과 악의 궁극적 기원이 따로 있다는 것은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도 사실상 그 두 기원에서 받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선과 악이 흔히 세상에서 인식하듯이 인간 행동의 품질(Quality)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그 두 근원 중 어느 쪽에 인간이 붙었느냐에 따라 결과적으로 나타난 모습일 뿐이다.

바꿔 말해 인간이 자유의지로 하나님과 사단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행동의 품질도 그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선악과라는 과실을 따먹으니까 선악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명령의 준행 여부로 인간이 속한 영역이 선과 악으로 확연히 나눠지는 법이다. 금령을 순종하고 있으면 하나님 쪽에 붙어 있는 것이고, 어기면 사단에게 붙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 이상이 없으면 당연히 그 금령을 순종하게 되며 반대로 그 관계에 이상이 생기면 순종할 수 없게 된다.  

기독교를 제외한 여타 모든 종교의 구원 기준은 무엇인가? 거짓말, 강도, 폭행, 간음, 살인 등 인간끼리 서로 피해 입히며 도덕적으로 나쁘게 행동한 것만 죄다. 또 죽을 때에 평생 동안 그런 죄를 얼마나 지었는지 여부만 따진다. 인간의 행동 자체를, 선하든 악하든 간에, 하나님이나 사단과 전혀 연결시키지 않는다. 인간이 순전히 자기 재량과 능력으로 행한 것이다. 인간을 그 재량과 능력에 따라 선악 간의 등급을 매길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과 사단은 인간과 아무 연관이 없다. 인간은 그 둘과 별도로 떨어져 혼자 존재한다. 아니 그 둘부터 평소 인간 만사에 아무 관심도 없고 어떻게 되어가든 전혀 상관도 않으며 별도로 떨어져서 존재한다.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선언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게 만들어졌고 그분의 생기가 부어진 유일한 존재다. 인간의 인격이 올바르게 서려면 그분과의 지속적인 영적 교제가 있어야만 한다. 선의 기원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 선의 기원에서 떨어지면 자동적으로 악의 기원에 가서 들어붙게 된다.

요컨대 인간 사이에 저지르는 모든 죄는 하나님을 배역한 결과라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그분께 불순종하여 선악과 금령을 어기자 다른 이를 비방하고, 하나님 앞에 억지 핑계 대기 바쁘며, 서로 간에는 부끄러워졌다. 서로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았던 둘 사이에 부부임에도 악한 행위들이 난무하게 되었다.

구원과 심판의 궁극적이며 절대적 주체는 누구인가? 단연코 하나님이다. 사단이 절대 될 수 없다. 세상 모든 종교에서도, 사탄숭배교를 빼고는, 이 점에 대한 이견(異見)의 여지는 일절 없을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 기준으로 구원을 주시겠는가? 이미 하나님을 배역하여 사단에게 붙어 있던 자가 저지른 행동의 질과 양을 심사하여 구원과 심판으로 나누겠는가? 아니면 그전부터 오직 하나님께 붙어 있는 자를, 비록 때로는 악행을 저질렀어도, 구원해 주겠는가?

나아가 평소에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경배할 마음이 전혀 없이 단지 몇 가지 선행한 공적만 가지고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를 과연 구원해주겠는가? 또 생전의 선행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조차 없이 저지른 수많은 악행에 대해선 뻔뻔스럽게 전혀 회개하지 않고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다고 자신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과연 긍휼을 베푸시겠는가? 당신께 붙어 있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사탄의 종으로 평생을 살았다는 것을 당신만큼 잘 아시는 분이 없는데도 말이다.  

인간에게만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와 영혼이 둘 다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구원의 길은 하나뿐이다. 하나님께 처음부터 끝까지 붙어 있는 자다. 불신자처럼 인간에게 자유의지만 있고 영혼이 없다면, 다른 말로 동물과 같은 차원의 존재라면, 인간의 선함과 악함은 그 행동으로 밖에 평가될 수 없지만 말이다.

영혼이 있어 동물과 다른 차원의 인간이란 영을 통해 하나님과 사탄과 교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자유의지는 어느 쪽으로 그 영혼이 교통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작동된다. 그 반대로 자유의지를 어느 쪽으로 작동하느냐에 따라 그 영혼도 그 쪽을 향해 주파수를 맞추게 된다. 결국 인간의 선행과 악행도 영으로 교통하여 따르기로 결정한 궁극적인 선악의 근원에 의해 좌우된다. 행위 구원이 불가능하며, 착한 자가 천국 간다는 상식이 틀린 이유다.    

창조론과 진화론

동양적 이원론이 성립되려면 창조에서 사단도 하나님과 동일하게 반(半)만큼의 역할을 감당했어야만 했다. 그게 아니라면 창조는 없었고 세상은 처음부터 오직 플러스 전기와 마이너스 전기를 띤 두 종류의 물질 뿐이라고 해야 한다. 진화론과 이원론과 무신론이 모든 불신자의 일관된 사상이자 가치관이 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창조된 세상의 기원은 오직 한 분 하나님께 귀속되고 그 운행과 통치도 전적으로 그분의 손 안에 있다. 단지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사단을 하나님이 임시로 풀어 놓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아담은 타락하고 말았다. 그 이후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가시적 모습은 마치 이원론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은 선과 악이 쟁투하는 무대이고 수시로 그 승리자가 변하는 것 같다.

그러나 세상만사의 실상은 인간의 윤리 기준으로 어떻게 판단하든 간에 하나님 보시기엔 둘 뿐이다. 당신께 속한 것과 사단에 속한 것이다. 생명과 죽음, 빛과 흑암, 의와 죄, 진리와 거짓, 구원과 심판이다. 정반대의 두 쌍의 개념들이다. 생명이 아니면 죽음일 수밖에 없다. 진리가 아니면 거짓이다. 다른 여러 가능성이 있다는 것 자체가 벌써 거짓이며 죽음이다.  

현실적 혹은 학문적 사안에 대한 진리는 여럿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출생에서 죽음까지 자신의 전부를 걸어야 할 궁극적 진리는 여럿일 수 없다. 오직 하나다. 둘일 수도 없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출생에서 죽음이라는 두 지점을 잊는 선은 하나의 직선뿐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인생이 되려면 설령 그 직선에서 좌우로 들락날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여러 지점을 왔다 갔다 할 수는 없다. 아니면 출발은 했는데 목표지점이 없다면 그 인생이 허공에 뜬 모양이 될 수밖에 없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고전9:24-26)  

바울은 신자의 불신자의 삶을 바로 인생이 걸어가는 방향감각에 비추어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다. 먼저 신자는 평생을 달려가 도달해야만 할 골인 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기에 모든 면에서 절제하여 결국은 그곳에 도착한다. 여기서 절제한다는 것은 한 방향으로 달리는 데에 장애가 되는 것을 없앤다는 뜻이다. 단순히 도덕적 죄와 인간적 욕심을 제거하거나 줄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반면에 불신자는 목표 지점이 여럿 있거나, 아니면 아예 없다. 전자는 향방 없는 달음질을 하며 사는 것이다. 뒤엉킨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할지 모르는 것과 같은 인생이다. 후자는 허공을 치는 싸움만 한다. 어쨌든 출발은 했어도 도착지를 전혀 모르거나, 간혹 관심은 있어도 죽을 때까지 찾지 못한 자다. 어쨌든 둘 다 헛되고 헛된 삶을 살다 죽을 뿐이다.

누구에게나 단 한번 뿐인 인생은 참으로 간단하고 명료하다. 어떤 인간적 선행과 위업을 쌓아도 결국은 다 죽는다. 목표지점이 누구에게나 하나다. 모두가 죽음을 향해 간다. 과연 어떻게 죽을 것인 지를 먼저 결정하는 것이 어떻게 잘 살 것인 지를 좌우한다.

그러나 죽음도 사실은 원천적으로 출생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창조와 진화 둘 중 무엇을  따르느냐에 따라 그 종착지도 이미 확실하게 정해져 버린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진리를 찾으려 구도(求道)하는 노력과는 아무 상관없다.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에게 생명을 주셨음을 믿으면 자연히 하나님과 끝까지 동행하는 인생이 된다. 그분이 마지막의 죽음도 책임지신다. 반면에 진화를 믿으면 당연히 그분과는 무관한 인생이 된다. 물질에서 물질로 끝나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출발의 기반이 전혀 없는 진화에선 아무리 인간 스스로 노력하여 진리를 추구하며 가치 있는 삶을 살려 해도 이미 허공에 뜬 인생이요 향방 없는 달음질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기원을 어디서 출발하느냐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태도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궁극적인 결과도 달라진다. 창조와 진화는 출생이라는 한 지점에서 서로 등을 진 채 정 반대 방향으로 출발한 셈이다. 그 끝에 도착하는 죽음이라는 지점은 서로 정반대의 곳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참되고도 흔들림 없는 선이다. 궁극적인 절대적 선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것은 악이다.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는 순간 그냥 끊어진 채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단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누차 강조하지만 인간은 영적 존재로 하나님과 사단에 그 영이 접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창조는 선이자 진화는 악이다. 진화를 믿는 자들이 도덕적으로 악하고 죄를 많이 짓는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과 전혀 무관하다는 면에서 그렇다. 최근에 온갖 변조된 창조론, 창조의 허울을 덮어쓴 진화론 등이 양산되지만 다 사단의 변종들이거나, 잠시 그 놀음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 진리와 거짓 사이에 유사 진리나 유사 거짓이란 없다. 진리가 아니면 아무리 진리인 척 해도 거짓일 뿐이다.

진화론자가 아무리 윤리적으로 선해도 또 아무리 그들 스스로 인정하기 싫어도 악의 근원인 사탄과 연결되어 있다. 그 인생은 허무하게 끝난다. 아무리 선행을 많이 했어도 그 전체 인생이 헛되고 헛된 것으로 끝나는 것 만한 악이 따로 없지 않는가? 인생의 출발과 도착에 아무 의미가 없다면 그 중간에 인간 스스로 어떤 의미를 부여해도 그 전체가 의미 없어지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말이다.  

진리는 절대 타협할 수 없다.

성령 안에서 거듭난 신자는 이미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가 아니다. 벌써 진리를 소유한 자다. 연약하고 어리석으며 죄에 찌든 인간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진리란 여전히 하자가 있기 마련이다. 절대적 진리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다. 그분께 순종하며 그분 품 안에 있는 것만이 진리를 소유하는 길이며 그 길만이 인간이 참 인간다워지는 유일한 길이다. 평강, 자유, 만족, 행복, 안전 모든 선한 것은 그분께로만 오기 때문이다.

선악과 열매는 바로 그 진리 자체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선악과 열매를 따먹지 않고 순종하는 것이 진리를 소유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선이 확보되는 유일한 길이었고 어기면 바로 모든 악과 직통하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어 있었다.

이제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신자는 다시 선악과 앞에 서게 된 셈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선조 아담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평생을 두고 선악과를 따먹으려는 생각이 없어진 자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가진 도덕성, 종교성, 영성으로는 도무지 그렇게 되지 못하니까 성령이 오셔서 내주해 주심으로, 그리고 평생을 떠나지 않으심으로 하나님 쪽으로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어서 고정된 자다.

한 마디로 자기 인생의 출발을 궁극적 선인 창조주 하나님에게 두고 그 도착도 궁극적 심판과 구원의 주이신 하나님에게 두게 된 자다. 그 존재와 삶과 인생이 그 두 지점을 잊고 있는 직선상에 두고 있기에 좌우로 흔들림이 있더라고 절제하면서 목표 지점을 향해 걸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자는 정말로 자기 속에 보배 되신 예수를 소지하게 된 것에 대한 온전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마음껏 누리고 주위에 증거하고 나눠주어야 한다. 죄와 사단과 사망의 세력 앞에 진짜 당당해져야 한다. 진리를 아는, 아니 소지한 자이기에 교만해지라는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걸어가야 할 정상 궤도에 들어섰기에 더 이상 요동함이 없어야 한다. 갈급하고 허망한 것과는 거리가 완전히 멀어졌다.

그리고 그분이 내 안에 계심으로 인해서 더더욱 겸손해져야 한다. 인생에 대해서, 특별히 하나님을 따르는 여부로 선악이 결정되어짐에 대해 정말로 진지하고도 심각한 통찰과 분별과 실행이 따라야 한다. 그분께 붙어 있지 않음은 그분의 간절한 호소대로 “정녕 죽음”일 뿐이라는 사실을 실제 삶에서부터 철저하게 체험해야 한다. 또 자신의 삶에서 그 영원한 진리를 다른 이에게 온전히 드러내 보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있는 자들을 비방, 멸시, 배척하기보다는 관용과 포용으로 대하면서 예수님처럼 자신을 희생하며 섬겨야 한다. 그들과 무조건 타협 조정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진리는 하나다. 삼위일체 외에 우리의 전 인생을 걸만한 궁극적 대상은 절대로 없다. 아무리 진화론자가 착하게 살고, 선한 일을 하고, 타인을 위해 큰 업적을 이루어도 진화론 자체를 인정해선 안 된다. 진화는 오직 과학이라는 이름을 빌어서 하나님을 지워서 없애려는 지성적 시도일 뿐이다. 그렇다고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이 없어지지 않으며 그분만이 당신께서 창조한 모든 피조물의 절대적 진리가 된다는 사실도 결코 부인되지 않는다.

다른 말로 선이 인간의 배타적 태도에 따라 악이 되지 않고, 그 반대로 악도 인간의 관용적 자세로 선으로 둔갑하지 않는다. 어떤 인간도 자신이 연결된 절대적 선과 악의 근원에 따라 하나님의 자녀와 사단의 자녀로 나눠질 뿐이다. 진화를 믿는 자는 사단에게 미혹되어 멸망으로 걸어가는 악한, 도덕적이 아닌 영적으로, 인생일 뿐이므로 너무나 비참하고 불쌍할 뿐이다.

신자는 진리 자체는 절대 타협을 하지 말되 그 진리 밖에 있는 자들은 사랑해야 한다. 왜냐 하면 신자만이 진리를 소유했을 뿐 아니라 무엇이 선악인지 이제 정확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인생의 정상궤도에 올라서 있는 자가 그 반대편에서 헤매는 자를 보면 그저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계는 거꾸로 가고 있다. 진리를 거짓과 타협하면서 서로의 종교를 존중해주자고 한다. 사단과는 타협하고 그 수하에 노예로 묶여 있는 자들을 건져올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것이 오히려 사랑의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고 큰소리치면서 말이다.

만약에 그 주장이 옳다면 바로 이 선악과 명령부터 성경에서 지워 없어져야 한다. 선악이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여부로만 나뉜다고 했고 또 당신께 순종하지 않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분명히 선언했지 않는가? 하나님을 하나님 당신께서 계시하신 성경대로 알려고 하지 않고 죄에 찌든 인간의 생각 안에 그분을 제한하려 드는 짓이다.

선악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 비결은?

비록 아담이 자유의지로 불순종을 선택했지만 악의 근원인 사단의 유혹이 끝까지 없었다면 그는 악을 몰랐을 것이다. 사단이 존재했기에 그는 악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인간 죄악의 원흉이 사단이고 심지어 사단을 허용하신 하나님에게 궁극적 책임이 귀속된다는 뜻은 아니다. 자유의지에는 사단과 하나님 둘 중에 어떤 쪽이든 택할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되었고 그 결단도 오직 인간에게 맡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는 말씀은 이렇게 바꿔서 읽어야 한다. 열매를 끝까지 따먹지 않는 것 즉, 하나님 품 안에서 남는 것만이 선이다. 대신에 열매를 따먹으면 즉, 하나님 품에서 벗어나면 자동으로 즉각적으로 악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래서 도덕적 선악을 잘 분별하여 실행하는지 여부는 구원과 심판의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 생전부터 하나님 품 안에 있는 자는 죽어서도 계속 그런 상태가 유지되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흔히 이해하는 도덕적 선과 악은 결국 자신이 어디에 속했는지에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결과일 뿐이다.

신자는 선악에 대해 새롭고도 확고한 개념을 가져야 한다. 아담의 원죄 이전에 절대적 선과 악의 근원이 따로 존재했다. 인간이 둘 중 어느 쪽에 속하느냐에 따라 선과 악은 확연히 나눠졌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해 선택은 했지만 실제로 선을 행할 소원, 열망, 기회, 능력, 평가, 열매 등 그 모두를 두 근원에서 인간이 받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책임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은 그 근원인 하나님과 사단에서 출발하여 인간을 통해서만 겉으로 드러난다는 뜻이다. 선악을 구체화할 인간의 책임이 막중하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선과 악은 반드시 드러나야만 선과 악으로서 의미를 갖는다는 뜻이다. 선을 안다고 행하지 않으면 선이 안 되는 것이다. 악이 나쁘다는 것을 아는 것과 실제로 행하지 않는 것과도 다른 것이다. 요컨대 악은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악이 된다. 또 선은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한 것을 인간에게 바로 주신다. 진실하고 아름답고 선한 당신의 품성과 뜻과 역사를 당신께 진심으로 순종하는 인간과 공유하신다. 인간을 청지기 삼아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려 하시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단은 강도, 간음, 살인 등을 행할 소원, 열정, 기회, 능력 등을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심어주지는 않는다. 악은 겉으로 드러나면 아무리 아직은 도덕적으로 중립이었던 최초 인간이라도 더럽고 추하다는 것을 단박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에 사단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인간으로 하나님께서 떨어지게만 만들려 한다. 인간이 하나님께 떨어지기만 하면 덜 선하고 덜 악한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단 자신의 수하로 변해 철두철미 악의 하수인이 되기 때문이다. 아담에게도 하나님께 바로 불순종하게 하지 않았다. 나중에 타락 기사에서 더 자세히 알아보겠지만 아주 교묘하고도 음흉하게 유혹하여 하나님과 서서히 등지게 만들었다. 빛의 하나님과 등지면 수준 낮은 천사나, 인간 쪽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단의 흑암만 기다릴 뿐이다.    

하나님이 아담더러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절대부정의 강력한 의지를 내비친 뜻이 바로 이것이다. 빛과 흑암 사이에 중간 완충지대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인간이 의지할 인격적 존재는 하나님과 사단뿐이기 때문이다. 진리 아니면 거짓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벗어나는 것은 진짜로 바로 죽음이기 때문이다.

정녕 죽으리라고 명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어디 따 먹기만 따먹어봐라 당장 죽여 버릴 테다”라고 벼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오히려 “제발, 제발 두 손 모아 비니 따먹지 말라.”는 너무나 간절한 호소다.

신자마저 선이 좋은 줄 알고도 실행하기 힘든 이유는 사단의 방해가 집요하기 때문이며, 악이 나쁜 줄 알고도 빠져드는 이유는 사단이 선과 비슷하게 악을 제시하기에 인간으로 혼돈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절대로 먹지 말라,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하신 것이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는 방도는 무엇인가? 간단하다 사단을 물리치면 된다. 그러나 사단이 워낙 교묘한 위장의 최고 전문가이기에 스스로의 실력으로는 물리치기 힘들다. 사단이 인간으로 하나님을 벗어나게만 하면 자동적으로 자기 부하가 되듯이, 인간도 끝까지 하나님께만 붙어 있으면 자동적으로 사단의 대적이 되는 것이다. 이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의 비밀은 바로 인간의 기원과 세상을 통치하는 주권은 오직 한 분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인간이 그분을 벗어나면 인간답지 못하게 되고 실제 삶도 비정상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악과 금령을 주신 뜻도 제발 인간답게 거룩하고 아름답게 살려는 소원이 있다면 자신을 떠나지 말라는 간절한 호소였던 것이다.  

4/25/2010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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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심술쟁이 하나님? - 선악과에 대한 첫째 의문 / 박신 목사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네가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5-17)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어 에덴동산을 다스리는 일을 맡겼다. 그리고 그 동산 안의 모든 나무 실과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되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고 엄하게 금했다. 이 금령(禁令)은 인류가 지금 이런 상태로 있게 된 시발점이었다.

성경은 최초 인간이 그 명령을 어김으로써 현재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지금은 그 배역에 대한 하나님의 벌을 받은 이후다. 만약 그가 명령을 어기지 않았더라면 지금과는 어느 모로나 훨씬 좋은 상황으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불신자뿐 아니라 신자들마저 이 선악과 금령에 대해 크게 세 가지의 의문을 가진다. 1) 하나님은 아담이 명령을 어길 줄 미리 알았으면서도 왜 그런 명령을 하셨는가?, 2) 선악을 알게 하는 즉, 좋은 분별력이 생기게 하는 열매를 먹었는데도 왜 벌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도 죽음이라는 치명적인 벌을 말이다, 3) 만약 아담이 그 명령을 어기지 않고 지켰다면 인류는 육체적으로 영원히 살 수 있었을까? 세부적으로는 더 많은 의심들이 생길 수 있겠지만 가장 많이 제기되는 질문이므로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그래도 잘못은 개구쟁이들에게 있다.

우선 첫째 질문은 자칫 신학적으로 복잡한 논쟁을 야기 시킬 수 있다. 예지(豫知)와 예정(豫定) 중에 어떤 것이 옳은가, 아니면 둘 다 동일하게 적용되되 어느 쪽에 더 무게 중심이 실리는지 등등이다. 지금은 그것을 일일이 논할 계제가 안 될 뿐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다. 첫 질문의 초점은 그 쪽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담이 명령을 어길 줄 하나님이 미리 아셨다는 데는 아무도 이의가 없다. 전지전능하신 그분이 아담이 어떻게 반응할지 전혀 감도 잡지 못한 채 도박하듯이 그 금령을 제정하셨을 리는 만무하지 않는가? 정작 지금 궁금한 것은 미리 알고도 그런 금령을 주었던 이유다.  

제기된 질문 그대로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할 줄 알고도 금령을 제정했다. 그렇다면 일차적 답변은 간단히 얻을 수 있다. 아담이 타락하리라는 위험 부담을 안고서도 그렇게 했으니 당연히 타락하더라도 타락 전보다 더 좋거나, 최소한 같거나, 아니면 뭔가 회복될 만한 후속 조치가 있기에 그렇게 하셨다는 뜻이 된다. 바꿔 말해 하나님이 최초 인간에게 아무 사후대책 없이 무조건 망할 수밖에 없는 명령을 내렸을 리는 만무하다는 것이다.  

그 질문 안에 이미 그 답변이 내포된 셈이다. 다른 말로 질문 자체가 질문다운 질문으로 성립할 만한 내용이 별로 없다는 뜻이다. 왜 별다른 의미가 없는 질문인지는 이 질문을 하게 된 저변에 어떤 생각이 깔려 있는지 따져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 질문의 근본적인 뜻은 지키지 못할 명령이라면 차라리 내리지 말았어야 하지 않는가라는 비난이다. 또 그랬더라면 아담은 당신의 벌을 받지 않았을 것이며 인류도 영생복락을 누리거나 지금보다는 훨씬 나은 형편이었을 것 아니냐는 불만이다. 한마디로 현재의 인류의 고난을 야기한 아담의 범죄의 궁극적 원인은 오히려 하나님 쪽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너무나 잘못된, 아니 유치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그들의 생각을 비유하자면, 아래에 들 다른 예들과 함께 완벽한 비유는 아니지만, 이와 같다. 부자 집의 큰 감나무가 담장을 넘어 골목길에까지 뻗쳤는데 잘 익은 홍시가 주렁주렁 달렸다. 동네 꼬마들이 목말을 타거나 장대를 이용해 따먹을 수 있었다. 마당쇠 영감이 틀림없이 아이들이 감을 따먹을 줄 미리 알고선 담벼락 밑에 가만히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범행을 저지른 아이를 현장에서 잡아 혼쭐을 내주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심술궂은 영감 같지 않느냐는 것이다.  

선악과가 이와 비슷한 상황인 것은 맞다. 그렇다 해도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가? 단연코 남의 집 감을 따먹은 동네 악동들이다. 야단을 친 마당쇠는 자기 할 바를 다했다. 비록 숨어서 기다린 것이 좀 치사해 보이긴 해도 그 자체를 두고 잘못했다고 말할 수 없다. 어쨌든 잘못은 남의 감을 따먹은 아이들에게 귀속되지 감나무를 심은 집주인과 하인에게는 없다.

마당쇠 영감으로선 도적이 오리라 예측하고 잡으려 미리 대비한 것뿐이다. 선악과와 비슷한 느낌을 줄려고 감나무를 예로 들었지만 만약 집안 금고의 보석이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괴도 루팡을 잡으려고 경찰이 매복하고 있는데 경찰과 루팡 중에 누가 잘못한 것인가 말이다.

이런 식의 의문과 반발을 갖는다는 자체가 사실 인간의 도덕성이 얼마나 철저하게 왜곡, 파괴 되어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다. 자신의 단점, 허물, 잘못, 죄에 대해선 완전히 시야가 가려져 있다. 백일하에 들어났어도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도 많다.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은 어김없이 지적해내는 것이 모든 인간이 가진 가장 보편적 특성이다.  

그런 성향을 심지어 하나님에게까지 적용한다. 지금도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보다 그것을 심은 하나님에게 탓을 돌리지 않는가? 다른 모든 과실은 다 따먹도록 허락한 은혜에는 전혀 관심을 돌리지 않는다. 사실은 하나님을 배반하여 타락하자 무엇이든 남의 탓으로 돌리는 성향이 생겼다. 자기만이 세상과 인생의 주인이기에 자신을 나무라거나 강요하는 자는, 하나님이라 해도, 크게 잘못한 것이다.    

신자가 되어서도 별반 나아진 것이 없다. 조금만 현실이 잘못 풀리면 자신의 태만, 부주의, 판단착오, 오류 등에는 전혀 눈을 돌리지 않고 하나님 탓만 한다. 그것도 자신의 정성과 열심으로 이룬 종교적 실적에 걸맞은 보상을 반드시 해주어야 한다고 떼를 쓰면서 말이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었던 원죄의 본성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선악과 금령의 가장 본질적인 뜻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벌 줄 것이라는 문자적 진술에만 매달린다. 초점은 하나님이 벌준다는 데에만 가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하나님이 스스로 가학성(加虐性)에 빠지거나 즐길 분이 절대 아니지 않는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아담더러 제발, 나아가 절대 따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히브리 어법상 “먹지 말라”는 절대 부정문으로서 결코 먹어서는 안 된다는 그분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또 “정녕” 죽는다고 말함으로써 한 번 더 그 의지를 강조했다. 요컨대 진짜로 죽으니까 절대 먹지 말라는 것이다.

냉장고의 Hot 소스 병을 보이며 어린 자녀에게 “절대 먹으면 안 된다. 먹으면 진짜 큰 일 난다.”라고 누차 강조할 때에, 그것을 어기기만 하면 부모 말 안 들었으니 곧장 크게 야단쳐야지 하고 야무지게 다짐하는 부모는 단 한 명도 없지 않는가?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가 제발 먹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방금 창조되어 에덴동산 사정에 전혀 낯선 아담에게 하나님이 과연 어떤 마음을 가졌을지 조금만 헤아려 보아도 그런 질문은 아예 발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미국 목사님이 선악과 금령을 쇼핑몰에 간 엄마와 아이로 비유했다. 이제 아장아장 걷는 아이의 손목에 줄을 묶어서 엄마가 조정하고 있는 모습으로 말이다. 그 줄은 아이가 가는대로 자동으로 풀리게 되어 있다. 엄마는 아이가 제 멋대로 가도록 버려두다가 위험한 상황에 빠지려 하면 곧바로 줄을 당겨서 막아준다.  

그 줄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엄마의 무한하고도 진정한 사랑이다. 아이가 위험한 상황을 빼고는 제 마음대로 놀 수 있게 해주기에 무한한 사랑이다. 또 줄을 당겨 위험한 상황을 막아 준다는 데서 진정한 사랑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둘 중 하나만 있다면 결코 온전한 사랑이 되지 못한다. 반드시 둘이 합쳐져야만 그렇게 된다.

바로 그런 사랑을 아이에게 말로는 어떻게 표현하는가? “줄을 절대 스스로 풀지 말라. 풀면 진짜 큰 위험에 빠진다.” 이것 외에는 표현할 방도가 없다. 또 아무리 잘 설명해주어야 제대로 이해도 못한다. 그 아이 수준에선 엄마가 왜 줄을 묶어가면서 엄하게 금했는지 온전히 깨달으려면 줄을 풀어버리고 혼자 다니다 위험에 빠진 후라야 가능하다.

갓난아이가 볼 때는 쇼핑몰 안에는 너무나 재미있고 신나는 것들로만 가득 차 있다.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라 어떤 것이 위험하지 전혀 모른다. 다양한 색깔의 캔디를 담은 온갖 신기한 모양의 유리병도 있다. 아이 눈에는 여전히 영롱하고 아름다운 무지개로만 비취지, 잘못 만져 병이 깨어지면  어떤 일이 생길지는 전혀 모른다.

이 정도로만 비유해 봐도 아담이 위반할 줄 알고도 선악과 금령을 주신 이유의 반(半)은 풀렸다. 무엇보다 부모 같은 사랑에 바탕을 둔 계명이지 않는가? 하나님은 아담이 절대로 당신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엄마가 갓난아이와 항상 줄로 서로 묶여 있길 바란 것과 똑 같은 심정이었다. 혹시라도 아이가 엄마가 당기는 것이 싫고 귀찮아서 스스로 줄을 벗는 일이 생기더라도, 또 엄마를 어떻게 오해하든 간에 엄마로선 반드시 줄로 묶었어야만 했다. 아이 입장에선 조금 귀찮다고 줄을 풀었다간 순식간에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지경에 빠지지 않는가?

범할 줄 알고도 명하신 까닭은?

이제 쇼핑 몰에서 아이를 줄로 묶은 엄마의 뜻은 십분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진한 부분이 다 해소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엄마 쪽에서 쇼핑몰에 아예 가지 말든지, 혹은 유리병 가게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는 반발이다.

또 다른 비유를 들어보자. 고급 자동차를 열 대나 갖고 있는 엄청난 갑부가 있었다. 그가 여행을 떠나면서 갓 운전면허를 딴 틴에이저 아들에게 자동차 열쇠 열 개 전부를 맡겼다. 그리고 다른 모든 차는 마음대로 운전해도 되는데 아빠가 가장 아끼는, 예컨대 벤즈 600만은 타지 말라고 당부하고 떠난 경우와 같다.  

만약 차고 문을 다 잠그고 열 개의 열쇠를 아예 주지도 않았다면 아들의 운전 솜씨를 전혀 믿지 못한 것이다. 또 아들이 임의로 행할 수 있는 자유도 완전히 막은 것이다. 아예 위험한 쇼핑몰 근처에 데리고 가지도 않은 것이다. 그럼 아이는 평생 쇼핑몰은 구경도 못하게 된다.
  
반면에 열쇠도 다 주고 차도 다 타게 하면 어떻게 되는가? 아빠가 눈에 안 보이는지라. 아빠가 있다는 인식이 점점 무디어질 것이다. 벤즈 600도 마음껏 탈 수 있으니 차츰 아빠가 가장 아끼는 차라고 미처 생각지 못한다. 나중에는 마치 처음부터 자기 것이었던 양 여길 것이다. 결국은 그 집 주인은 바로 그 아들이 될 것이다. 친구들을 불러다 놀면서 집안을 완전히 엉망으로 만들 것이다.  

그렇다고 벤즈 600의 차고만 잠그고 그 열쇠를 아버지가 갖고 나머지는 다 주고 여행 갔다면 어떠한가? 아예 처음부터 벤즈 600은 없었던 양 치부할 것이다. 그 주인 아빠도 잊어버릴 것이다. 열쇠를 주고 가도 타지 말라고 말만하면 얼마든지 타지 않을 자신이 있는 데라고 순진하고도(?) 시건방진 생각을 할 것이다. 당연히 자기를 믿지 못해 열쇠를 주지 않았다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 경우, 아버지는 독재자요 아들은 그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부자간에 진정한 사랑과 신뢰는 실종되었다. 아들로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벤즈를 타볼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원천 봉쇄한 것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아들이 자발적으로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기회를 아빠가 주지 않은 것이 더 큰 문제가 된다.

선악과 금령은 다시 말하지만 쇼핑몰의 엄마 예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인간더러 제발 당신의 품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간절한 호소였다. 그분의 울타리 안에서 진정한 기쁨과 감사와 함께 그분께 자발적으로 순종할 때에만 세상을 살아갈 참 된 능력과 은혜가 그분으로부터 인간에게 임한다는 것이다. 또 자동차 열쇠 전부를 맡기고 여행하는 것처럼 그분과 온전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이 참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이다.

아빠가 여행을 떠나면서 열쇠를 다 주고 가면 철없는 틴에이저 아들이 틀림없이 벤즈 600도 타리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열쇠를 다 안 주면 아이는 당장에 자기를 못 믿는다고 마음속으로 자신에게 반발할 것이 빤하다. 그렇다고 아이가 탈 수 있는 차의 열쇠만 주면 아이더러 임의로 집안을 관리하라는 의미가 전혀 없어진다. 아이가 어떤 짓을 해도 사고가 안 나게끔 미연에 다 방지해 놓은 셈이다. 아이는 그저 아빠 명령만 따르면 되는 로봇이 되어버린다.  

아들의 성숙을 바라고 또 그렇게 키우려는 아빠라면 벤즈를 타리라 빤히 알지만 열쇠를 다 주고 떠나야만 한다. 혹시 운전미숙이나 사고로 벤즈가 고장 나고 부셔져도 아빠로선 문제 삼을 것 하나 없다. 돌아와서 일단은 엄하게 야단쳐도 진정한 사랑으로 용서해줄 것이니까 말이다. 또 갑부인지라 그 수리 비용쯤은 아무 부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들을 용서하고 차 수리비를 감당할 능력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는 아빠라면, 나아가 아들을 온전히 사랑하여 스스로 성숙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아빠가 아니라면, 도저히 벤즈 열쇠까지 주지는 못한다. 선악과를 따먹든지 안 먹든지 아담의 임의에 맡긴, 그것도 따먹을 줄 알고서도 그렇게 한 하나님의 심정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 명령의 특성

신자마저 이 금령을 하나님의 사랑의 호소라기보다는 단순히 인간에게 명한 종교적 계명이라고 여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성경에 드러난 계명의 특성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글에서도 이미 몇 번 든 예를 다시 들어보자.

시청에서 “일요일 OO 공원으로 오전 열시까지 오면 Free Hotdog를 주겠다.”는 광고를 했다 치자. 그럼 공짜로 핫도그를 먹게 되는 근거는 오직 공원에 열시까지 간 것 때문이다. 열시 넘어서 도착하면 자격 미달로 절대 먹을 수 없다.  

반면에 회사에서 일요일에 야유회를 가면서 철자 하나 틀리지 않고 똑 같은 광고를 했다 치자. 이 경우에는 공짜로 핫도그를 먹을 수 있는 근거는 공원에 열시까지 도착한 것 때문이 아니다. 그 이전에 그 회사의 직원이기 때문이다. 다른 회사 직원이라면 아무리 일찍 공원에 가도 먹지 못한다. 반면에 직원이라면 혹시 열시 넘어서 도착해도 남아있는 핫도그를 먹을 수 있다.

어쨌든 두 경우 다 열시까지 공원에 가기는 가야 먹을 수 있다. 그 표현은 동일하지만 내용은 이처럼 두 가지로 나뉜다. 전자의 광고는 반드시 광고대로 따라야 하는 행위가 상을 받는 전제 조건이 된다. 후자는 직원이라는 이미 확보된 신분을 전제하고 공짜 핫도그를 먹고 못 먹고는 순전히 본인의 자유의사에 맡겨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네가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계명도 사람에 따라 그 해석이 두 가지로 나뉜다. 먼저 군대처럼 상관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명령으로 해석하면 자연히 어기면 벌 받는다는 생각부터 앞선다. 반면에 인간의 유익을 위한 권면으로 받아들인 자는 자발적으로 기꺼이 순종하기만 하면 그 예비 된 복을 찾아 누릴 수 있다.

이 계명은 하나님이 방금 창조하여 심히 좋았던 당신의 첫 자녀에게 명한 것이다. 이미 그분의 백성이 된 신분을 전제하고 주신 권면이다. 지키고 안 지키고는 순전히 아담의 자유의지에 맡겨졌다. 그러나 그가 지키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장중에 붙잡혀 있게 되는 반면에 어기면 그 은혜에서 벗어나게 된다.

계명의 성격상 분명 아담이 지켜야 했고 하나님도 지키길 간절히 원했다. 그럼에도 최종 결정권은 아담에게 있었다. 회사 직원으로 야유회는 가야 했지만 정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 단지 공짜 핫도그를 먹을 수는 결코 없다. 벤즈 600을 탈지 말지 여부도 아들의 재량에 달렸다. 그러나 타지 않았다면 아버지와 진정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는 변함없이 이어질 수 있다. 반면에 타면 그 관계에 일단 금이 가고 부자간에 해결 할 일는 용서와 치유와 회복과 회복 후의 성숙이 남을 뿐이다.  

성경의 계명은 당연히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명령이다. 그러나 “안 되면 되게 하라”면서 무조건 굴종을 요구하는 군대식 명령이 절대 아니다. 이미 당신의 백성이 되었음을 전제로 한 사랑의 권면이다. 불신자에겐 전혀 해당 사항이 없다. 그들로선 하나님의 실존도 믿지 않는데 그분의 계명을 지킬 이유는 더더욱 없다.  

반면에 신자라면 그분의 계명을 당연히 전부 지켜야 한다. 그러나 따라오는 상벌을 기대하거나 두려워서 그래선 안 된다. 아무리 포현 방식이 명령형이라 해도 하나님이 진정 바라는 바가 아니다. 신자는 이미 그분의 자녀가 되었기에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듯이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자가 순종 혹은 불순종했다는 그 행위를 보고 상벌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그럼 더 많이 순종하면 더 많은 상을 주어야 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이미 순종하는 마음을 먹을 때부터 신자에게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신다. 말하자면 계명을 실천으로 옮기기도 전에 그분과 영적 관계만 바로 되어 있어도 세상의 것으로는 전혀 맛볼 수 없는 너무나 큰 기쁨과 충만함이 넘치게 된다.

또 순종하여서 실천하면 자연히 따라오는 축복이 벌써부터 예비 되어 있다. 순종 후에 그 실적을 심사해서 상 주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벌도 마찬가지다. 한 마디로 순종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 자체가 상이다. 반대로 불순종 즉, 그 관계가 굽어지고 끊기는 것 자체가 벌이라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상벌에 대한 원칙은 선악과 계명에서 더 확고하게 드러난다. 인간에게 주신 첫 계명으로 자유의지를 주신 바탕에서 하신 명령이다. 순종 여부는 전적으로 아담에게 달렸다. 다른 모든 과실을 먹게 했다. 또 선악과 금령을 순종하는 것 자체와 그 따라오는 결과는 엄청난 축복이었다. 하나님으로선 인간에게 해 줄 바는 전부 다하셨다. 그분에게 인간 타락의 책임은 정녕 전혀 없다.

그럼에도 신자들마저 군대식의 명령과 복종의 관계로만 이 금령을 이해하니까, 지키지 못할 명령을 한 상관이 잘못되었다고 반발하는 것이다. 지킬 수 없는 명령을 주었다면 분명히 상관의 잘못이다. 그러나 선악과 계명은 얼마든지 지킬 수 있는 명령이었다. 틴에이저 아들이 벤즈를 얼마든지 안 탈 수도 있듯이 말이다.

이처럼 성경의 모든 계명은, 첫 계명이 자유의지를 전제했기에, 절대적 명령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권면이자 호소다. 그럼에도 지키거나 안 지킨 결과는 영생과 죽음처럼 극과 극의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엄청난 차이로 나눠진다.  

하나님과 인간의 너무나 큰 격차

마지막으로 앞에서 열거할 예들이 다 완벽하지는 않다고 말한 이유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한다. 인간의 경우는 아무리 참 사랑과 진정한 신뢰를 앞세워서 자식을 줄로 묶거나 또 자동차 열쇠를 다 주어도 때로는 부모로서의 개인적인 욕심이 앞설 수 있다. 자식과 동일한 죄인 된 처지에서 아무리 자식을 사랑하고 신뢰하려 해도 불순물이 조금은 개입될 수 있다. 나아가 부모가 자녀에게 베풀 수 있는 보호와 인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갑부라도 아들이 모든 차를 다 고장 내놓으면 화부터 낼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나님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그분은 인간 갑부와는 도무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분이다. 단순히 전지전능하여 우주만물을 다스리고 인간만사를 섭리한다고 이해해선 안 된다. 모든 진실 되고 아름답고 선한 것은 그분으로부터만 나온다. 그분의 인간을 향한 사랑과 신뢰에는 어떤 불순물도 개입되지 않는다. 나아가 인간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어도 그 용서와 치유의 능력에는 부족함이 없다. 심지어 자신을 미워하며 원수 된 자가, 그것도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고 있어도 용서해 주실 수 있다.

또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 금령을 어길 줄을 미리 알았어도 처음부터 그를 얕보거나, 무시하거나, 야단쳐서 고쳐야지라는 마음이 앞선 것이 절대 아니다. 진정한 사랑으로 이 금령을 제정했다. 당신의 품을 벗어나선 절대 인간답게 살 수 없으니 제발 내 품에서 벗어나지만 말라는 오직 한 가지 소원뿐이었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 사랑의 뜻은 모르고 지키지 못할 명령을 했다고 그저 불평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만큼 인간과 그분의 격차는 너무나 커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선악과 금령을 인간이 제대로 이해하든 못하든 그 명령 그대로 하나님을 배역한 인간은 진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한 치의 하자 없이 너무나 명료한 진리라는 것이다.

아들이 틀림없이 벤즈를 타리라 예상하고도 열쇠를 준 아빠가 여행에서 돌아왔다고 치자. 아들을 다시 만나면서 어떤 기대를 품었을까? 틀림없이 스스로 회개하여 이실직고 하며 용서를 구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들은 어떻게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가? 그 집의 하인과 놀러온 친구들이 자꾸만 벤즈를 타보라고 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탔다고 다른 이의 탓으로 돌렸다. 또 아버지가 열쇠를 주고 가지 않았다면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심지어 아빠에게서 궁극적 원인을 찾았다. 아빠로선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겠는가?  

아담은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는 하나님의 추궁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하나님이 이브만 제게 붙여주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 아니냐는 항변이다. 바로 “아담이 거역할 줄 미리 알고도 선악과 금령을 준 하나님이 나쁘지 않느냐? 차라리 그런 금령을 주지 않았다면 아무 문제없었을 것 아닌가?”라는 지금 논의하고 있는 첫째 질문과 그 내용이 똑 같지 않는가? 아담의 원죄를 물려받은 인간인지라 같은 내용의 의심과 반발을 할 수밖에 없다.

이브도 하나님의 같은 추궁에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핑계를 대었다. 친구들이 놀러 와서 자꾸 벤즈 600을 몰아보라고 꾀므로 어쩔 수 없이 탔으니 친구가 잘못이지 자기에게 책임이 없다는 철없는 아들 모습 그대로다. 아버지는 이웃집 아이들에겐 관심이 없다. 문제는 자기 아들이 정말 아들다운 모습으로 성숙하기만 바랄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기껏 그런 정도의 핑계밖에 못 댄다는 사실조차도 미리 아셨다 또 그러니까 더더욱 선악과 금령을 주신 것이다. 금령의 뜻을 풀어서 말해보자. “제발 나의 품에서 벗어나지 말라. 나와 온전한 영적 교제를 이어가지 못하면 매사에 겨우 이런 정도의 수준 즉, 왜 거역할 줄 미리 알고도 선악과 금령을 주었는지 따지고 반발하는 수준 밖에 안 된다. 그러니 정말 참 인간답게 살려면 나의 말을 순종해라.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탈만 썼지 전혀 인간답지 못하게 된다. 바로 그것이 죽음이지 않느냐?”

다시 말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결코 인간을 우습게보고 경멸한 것이 아니다. 지구상의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뛰어나며 천사보다 약간 못한 존재인 인간이, 그래서 당신 대신에 이 땅을 다스릴 자로 삼은 인간조차도 죄악의 너무나 큰 힘 앞에는 맥을 못 쓸 수 있다는 것을 그분께서 진정 염려한 것이다. “제발 내 품을 벗어나지 말라. 그러면 곧 바로 사단의 장막으로 넘어간다. 그 중간 회색 지대는 결코 없다. 그러니 절대로 선악과를 먹지 말라.”

또 다시 말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은 타락을 손을 놓고서 마냥 두고 보지 않으셨다. 서두에서 말한 대로 타락할 줄 미리 알았다는 것은 그 대비책이 다 마련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당신의 독생자를 매달 십자가가 이미 골고다 언덕에 예비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당신의 뜻 가운데 있었기에 자유의지도 허락하고 선악과 금령도 주신 것이다. 당신의 독생자의 생명과 맞바꿀 만큼 우리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또 선악과 금령이야말로 그분의 지고(至高)의 사랑과 긍휼에서 나온 것이지 않는가?
  
4/19/2010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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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美國 워싱턴 탈북여성 기자회견 눈물바다

29일 '북한자유주간'행사의 하나로 탈북 여성들의 기자회견이 열린 미국 워싱턴 DC의 프레스센터. 탈북 여성 방미선(55)씨가 검은 치마를 걷어 올려 자신의 허벅지 상처를 공개했다. 순간 참석자들의 짧고 깊은 탄식이 기자회견장을 가득 메웠다.

방씨는 수용소에서 당한 고초(苦楚)를 말해 달라는 질문을 받자 의자에 올라가 치마를 걷었다. 방씨의 허벅지 전체가 수용소에서의 고문과 폭행으로 여러 군데가 마치 칼로 베어낸 듯이 움푹 파여 있었다. 걸음도 부자연스러운 상태다. 고향이 평남 진남포라는 재미교포 이양춘(76) 할아버지는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참혹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소똥에 묻어 나온 옥수수를 줍는 날이면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나도 그렇게 안 하면 죽어버리기에, 그 참혹한 현실에서 살아야 했기에…." 방씨의 증언이 이어지면서 눈 뜨고 바라보기 어려운 상처에 회견장의 여성들은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눈물을 글썽거렸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은 몸에 새겨져 있었다. 29일 미 워싱턴DC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탈북 여성 기자회견에서 탈북자 방미선씨가 북한 당국의 고문으로 움푹 팬 허벅지 상처들을 보여주고 있다./워싱턴=이하원 특파원
북한의 무산광산 선전대 여배우 출신인 방씨는 남편이 2002년 굶어 죽은 후 자녀들과 함께 탈북했다가 여러 차례 인신매매를 당했다. 중국 공안에 잡혀 북한에 송환된 후엔 수용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결국 2004년 다시 탈북했다. 방씨는 자신처럼 중국으로 탈출했던 한 21세 여성이 임신한 몸으로 북한에 강제 송환된 뒤 낙태를 거부하다 살해된 사실도 증언했다.

그는
버락 오바마
(Obama)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말을 통해 "북한 여성들이 중국에서 짐승처럼 팔려 다니지 않도록 해 달라. 감옥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지 않도록 국제사회에서 떠들어 달라"고 절규했다.


*어떻게 하면 북한 동포들을 구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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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초빙교수로 살다가 귀국한 세계적인 정신 의학계 교수에게 "한국인의 이미지가 어떻냐 ?" 고 묻자. “한국인은 너무 친절하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판단하면 오해다.

권력 있거나 유명한 사람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지만 자기보다 약하거나 힘없는 서민에게는 거만하기 짝이 없어 놀랄 때가 많다.

특히 식당 종업원에게는 마구잡이로 무례하게 대해 같이 간 사람이 불쾌할 정도다. 잘 나가는 엘리트일수록 이 같은 이중인격을 지니고 있어 인간적으로 "사귀고 싶지가 않았다.” 공감이 가는 소리다.

서울에서 온 점잖은 사람이 미국의 코리아타운 식당에서종업원에게 “야, 이봐, 너” 하면서 큰소리치는 광경을 한인들도 많이 봤을 것이다.

그 사람이 친구나 친척이면 ‘미국서는 그러면 안돼’하고 충고를 해주겠지만 잘 알지 못하는 사이거나 VIP인 경우는 난감하다.

한국에서 엘리트 계층에 속한다면 배운 사람이다. 배운 사람일수록 겸손해야 하는데 오히려 거만을 떤다. 지식은 많은데 지혜롭지가 못하다. 말은 유식한데 행동은 무식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준법정신이 엉망이다.

서울에서 내가 겪은 일이다. 어느 회사 중역과 저녁을 먹고 그의 차로 호텔에 돌아오게 되었는데 한가한 길에서 빨간 신호등이 켜져 운전기사가 차를 멈추자 중역이 “아무 차도 없잖아? 그냥 건너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후부터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되었다.

힘 있는 사람부터 법을 안 지키니 부정부패가 만연할 수밖에 없다. 대법관으로 임명된 인사가 청문회에서 위장전입을 인정할 정도니 정부 요직에 있는 다른 인사들이야 말해서 무엇 하랴.

한국 엘리트들의 또 다른 모순은 자기 잘못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점이다. 회사에서도 뭐가 잘못되면 전부 윗사람 아랫사람 탓이고 자기반성은 조금도 없다. 모두가 남의 탓이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너무 네거티브하다.

모여 앉으면 정치 이야기인데 완전히 흑백논리로 평한다. 호남친구들과 만나면 박정희,박근혜 혹평하는 것 듣다가 시간 다가고 경상도 친구들과 만나면 김대중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저녁자리가 피곤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한국에는 존경받는 대통령이 없다. 모두가 이래서 죽일 놈이고 저래서 죽일 놈이다.

국민소득은 2만3,000달러 수준인데 국민의식은 500달러 수준(1970년대)이다. 경제가 눈부시게 발전했다고 자랑하지만 그것은 곧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벼락부자의 단점이 무엇인가. 그저 남에게 내가 이만큼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이다.

재산이 사람평가의 기준이다. 요즘 미주 한인들 중에 한국에 가서 여생을 보내면 어떨까하고 역이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돈 없이 한국에서 살면 사람취급 제대로 못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돈 없는 사람은 동창들 사이에서도 냉대 받는 곳이 한국이다.

미국에서 재산 몽땅 정리해도 한국에서는 아파트 하나 사기 힘들다. 성공의 의미가 너무 좁다. 몇 평짜리 아파트 사느냐, 강남에 사느냐 강북에 사느냐가 사람평가의 기준이다.

돈 있고 잘사는 데도 자기보다 더 잘사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항상 뭐가 불만족이다.



지난 주일 설교했던 것을 정리해서 올립니다. 바울의 구원론을 이해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본문인데 자주 오해되고 있는 성경구절에 대한 설교라서 참고하시라고 시원찮은 내용이나마 올려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빌 2:12-16



바울 사도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바울 구원론의 진수가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바울이 말한 구원의 핵심 진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그들에게 매우 생소하게 들릴 뿐입니다. 늘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라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구원이 성화의 노력에 의해 점진적으로 완성되는 것처럼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성화가 이루어 질 때까지 신자의 구원은 미완성이며 자신의 구원을 미리 확신한다는 것은 자기기만에 빠지는 셈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확신을 심대하게 위협한 중세 로마 가톨릭의 오류를 답습하는 것이지요.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점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가르침이 값싼 은혜와 거짓구원의 확신을 양산하는 무율법주의 폐단을 낳는다면, 후자는 신자들로부터 구원의 확신과 위로를 앗아가며 율법주의적 신앙의 덫에 걸리게 합니다. 


전자가 구원의 즉각적인 면에 과도하게 집중한 나머지 구원의 점진적인 측면을 간과했다면, 후자의 경우는 구원의 즉각적인 면을 무시한 채 그 점진적인 측면에만 역점을 기울인 우를 범한 것이지요.


바울사도의 가르침에는 구원의 즉각적인 면과 점진적인 측면이 절묘한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구원은 인간의 선한 행위(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운 행위, 즉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의 행위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전적인 은혜의 산물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의가 없이 온통 죄로 가득한 사람이라도 이 예수님의 의로움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믿음으로 즉각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믿는 즉시로 신자 안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믿음은 신자를 하나님과 연합하게 하며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여 하나님이 신자를 구원하신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너희가운데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입니까? 아들을 희생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이루시고자 하는 기쁘신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 그의 아름다운 형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런 새사람들이 모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는 교회를 세워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우리로 인해 찬양과 영광을 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성령은 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와 부활의 모든 효력과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일하시는 것을 이루어가야 할 중대한 책임이 있습니다(to work out what God works in us). 이것이 신앙생활, 성화를 한마디로 요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우리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행위구원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내포한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이미 우리 안에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구원을 그 목표를 향해 진행시키는 말씀입니다. 이루라는 원어의 의미는 “결론, 마지막 단계로 계속 발전시키라”입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서 강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나머지 이루어가는 것은 우리에게 다 떠 맡겨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처음 구원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 안에서 그 구원을 진행시켜 완성케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구원의 시작과 그 과정과 마지막이 모두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의 보장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 구원의 확신과 유일한 근거는 우리 주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에 있습니다. 우리를 한 순간도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그 무한한 열심과 오래 참으심에 있습니다. 


우리 구원과 성화는 우리의 시원찮은 열심의 산물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무한한 열심의 결실입니다. 하나님의 이 뜨거운 열심이 우리의 냉랭하고 강퍅한 마음에 절연이 되어 잘 전달되지 않아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할 뿐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권적으로 이루거나 기계적으로 이루어지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자유로운 의지를 상실한 로버트나 꼭두각시로 대우하지 않으시고, 자유로운 인격자로 하나님과 마음과 뜻을 같이하여 그 뜻을 이루어 가는데 성령과 긴밀하게 연합하여 일하게 하십니다. 


성화과정에서 성령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과 무관하게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 노력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성령의 은혜는 우리를 게으르게 하지 않고 오히려 부지런하게 합니다. 피동적으로 손 놓고 가만히 있게 하지 않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일하게 합니다. 선한 일에 열심 있게 합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 가려는 소원을 가지고 열심히 힘쓰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강렬한 열정의 영입니다. 우리 마음에 그 열정과 소원을 불붙이는 분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소원이 우리의 소원이 되게 하십니다. 


성령은 아들의 영, 자녀의 영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드리려는 아들의 소원을 우리 안에 심어주십니다. 성령, 아들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며, 그 성령으로 거듭난 증거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가장 확실하게 나타나는 부분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드리려는 사무치는 소원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려는 소원에 온통 삼킨바 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성부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려는 불타는 열심에 사로잡혀 사신 분입니다. 비록 그 뜻이 자신의 고난, 십자가의 죽음,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는 일일진대도 말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은 주님과 같이 십자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난의 덕을 보는 것, 그 모든 혜택을 누리는 것인데도 그 뜻을 이루기를 별로 원치 않는다는 것은 영적 무지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로 이런 평생의 소원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살 때 우리는 가장 복되고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고 했습니다. God works in you to will and to act. 소원하게 하실 뿐 아니라 그 원하는 바를 행하게 하십니다. 


선한 의지와 소원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반드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선함의 한계는 무엇입니까? 선한 의지와 마음은 있지만 그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지요. 인간의 타락성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이 우리 의지의 연약함입니다. 


바울사도가 롬 7장에서 이 인간의 연약함을 잘 묘사했습니다. 내가 원하는바 선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악을 행하는 것을 본다고 괴로워했습니다. 


선한 의지만으로는 결코 바르게 살 수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 안 밖에서 우리의 선한 의지를 좌절시키는 많은 세력들이 그 의지를 압박하여 무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부패성과 죄의 습관, 죄의 관성이 우리를 우리의 선한 의지에 거스려 죄로 치우치게 합니다. 죄에 익숙해진 우리의 몸은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악으로 치우치기십상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우리 밖의 수많은 환경적 방해와 난관이 우리의 선한 의도를 번번히 무산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다고 변명하기 일쑤입니다. 이런 넋두리가 아직 은혜 밖에 있는 이들에게는 별수 없는 것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변명의 구실이 되지 못합니다. 


신앙생활하면서 계속 이런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분명히 약속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대한 무지와 불신앙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의 은혜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간절히 소원하게 하고는 그것을 행하지 못하는 우리의 연약함을 전혀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할 뿐입니다. 


우리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행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진정으로 원하지 않기 때문에 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소원하지 않고 희미하게 원하기 때문이며,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나누인 두 마음을 품고 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육신이 연약해서, 또는 죄와 사탄의 세력이 너무나 막강해서, 유혹이 너무 많아서, 이 세대가 악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No excuse입니다. 유일한 이유는 내 마음에 있습니다. 내가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원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거하는 성령이 우리의 선한 의지를 거스르는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력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롬8:2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죽음의 권세를 죽이는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일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우리 안에 잔재해 있는 부패성과 믿음의 연약함으로 인해 이런 죄의 세력으로부터 완전한 자유함을 아직은(not-yet) 누리지는 못하지만, 성령 안에서 이미(already) 풍성히 임한 자유의 은혜를 만끽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한시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령이 구원의 목적, 즉 하나님이 당신의 기쁘신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의 보혈로 확보하신 모든 새 언약의 은혜를 아낌없이 부어주시고자 말할 수 없는 탄식과 갈망과 무한한 열심과 인내로 일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신자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내가 혹시 거스르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갑니다. 


자기만 바로 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른 이들을 돌아보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빌 2:4에 자신의 일 뿐 아니라 각각 다른 이의 일을 돌아보라고 했습니다. 다른 교우들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살도록 자신이 기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적성숙과 성화는 혼자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섬김과 기도와 사랑과 용서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서로가 다른 이들의 성숙을 위해 성령이 사용하시는 은혜의 도구와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이런 공동체적인 구원과 성화를 의미합니다. 온 교회가 함께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뜻을 이루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며 사랑의 화평의 열매가 가득하여 천국을 맛보며 증거하는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이 곧 우리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이 말씀을 무시하고 거스르고 사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영원 전부터 가지신 계획과 소원, 아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거스르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당하신 모든 고난과 희생을 헛되게 하는 것이며, 성령이 충만한 은혜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곧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의 간절한 소원과 뜻을 거스르고 그 역사하심을 훼방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이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오래 믿어도 변하지 않고 복음의 빛을 현저히 가리고 있는 것은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삼위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 풍성한 은혜와 능력을 모두 탕진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에게 구원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증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려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행하는 삶이 없습니다. 


이런 이들을 믿기만 하면 구원은 이미 받은 것이라고 안심시키는 가르침이 한국교회를 망하게 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을 신앙의 나태와 방종에 빠지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바울이 전한 구원의 진리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입니다. 이것은 이단적인 가르침이며, 마귀의 속삭임입니다. 마귀도 믿고 떠든다고 했습니다. 


자신 안에 구원의 목표를 향해 성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증거와 열매가 전혀 나타나지 않아도 예수를 믿었으니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안심하는 것은 무서운 자기기만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탄은 진정으로 구원받은 이들의 확신은 자꾸 흔들어대는 반면에 거짓 구원의 확신을 가진 이들의 자기기만은 더욱 강화시킵니다. 그래서 자기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게 하여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값싼 은혜의 메시지는 교인들을 진리의 영이 아니라 미혹의 영이 주는 거짓 확신에 빠지게 합니다. 


자신이 구원 받았는지는 그 구원의 목표가 자신 안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분명한 증거와 열매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에게는 이런 증거가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교회생활을 했어도 이런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이는 참으로 구원 받은 사람인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그런 사람은 거듭났더라도 심각하게 타락한 교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이 참으로 구원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인지 자신을 돌아보게 해야 합니다. 자신이 구원받았는지의 여부를 심각하게 점검하고 성찰해봐야 할 사람들에게 억지로 구원의 확신을 주입시키려는 인위적인 시도는 사람들을 거짓구원의 확신으로 세뇌시키는 마귀의 교활한 수법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에는 도리어 안일하게 사는 교인들에게 자신의 구원을 의심해보게 해야 한다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조언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이런 의심이 참된 확신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혹 자신이 구원에 이르지 못한 자가 아닌지 두려워해야 합니다. 


두렵고 떨림은 참된 신앙의 핵심요소입니다. 이것이 없을 때 더 이상 진정한 신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원도 없습니다. 성화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참된 경건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에 이 두렵고 떨림이 사라지면서 온갖 부패와 방종이 밀려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방자하며 경박하기 짝이 없는 목사들과 교인들로 큰 군상을 이루고 있는 실정입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이 다른 이에게 전파하고 자신은 버림받을까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는 바울이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시사 한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신자 안에 시작한 구원을 결국 완성하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 1:6에서 그는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거듭 확신하였습니다. 그의 서신은 온통 이런 확신에 찬 선언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그가 말한 두려움은 하나님이 행여 자신을 버림받게 하실까 두려워함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신실하심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경건한 경외심의 표현입니다. 자신이 구원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에서 오는 율법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을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영원무궁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확신함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야 할 두렵고 떨림은 하나님께 버림받거나 징계 받을까 두려워하는 율법 아래서 떠는 종의 두려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지극히 사랑받는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갖는 깊은 경외심입니다. 


지존하신 하나님이 비천하고 추악한 죄인들에게 한없이 자애로운 아빠가 되어 주심에 대한 경이로움과,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시며 우리는 그 거룩한 임재 속에 산다는 의식에서부터 오는 두려움입니다. 


혹여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이 변할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사랑을 배반할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우리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해 성령님을 근심시키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자의 가장 기뻐하는 뜻을 이루어주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그 뜻을 이루어 주지 못할 때 한없는 슬픔이 있습니다. 이런 소원과 슬픔이 없는 사람을 어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무시하고 사는 수많은 교인들, 교회들을 보면서 마음에 슬픔과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참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거스르고 살므로 우리의 위선적이고 거짓된 모습으로 인해 생명의 말씀이 땅에 짓밟히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제 우리의 말에 귀를 막고 듣지 않습니다. 진저리를 냅니다. 우리의 말과 너무도 모순된 삶을 보며 구역질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거룩한 말씀이 짓밟히게 하면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멸시하는 자들로부터 빼앗아 말씀을 잘 청종하고 순종할 이들과 민족에게로 옮겨가실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 깊은 각성과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절대 절명의 위기 앞에 계속 지금처럼 안일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나 자신부터, 우리 교회부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신앙의 자세를 회복해야 합니다.


박영돈 목사님


100년전 한국----격동기 민초들의 일상과 죽음 칼을 쓴 죄수
칼은 중죄를 지은 죄수의 목에 씌우는 형구로 마른 나무널조각으로 만들었다. 칼을 쓰면 죄수는 보행이 불가능한데 원칙적으로 양반에게는 칼을 씌우지 않았다. 사진의 죄수들은 동학농민군이라는 설명도 있는데, 의병들이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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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형(笞刑)
길이 1m 정도의 곤장으로 볼기를 치는 형벌. 가벼운 죄를 처벌하는 것으로, 삼국시대부터 일제 초기까지 존속되다가 3·1운동 직후인 1920년 완전히 폐지되었다. 태 10부터 여러 등급이 있었고, 속형(贖刑)이 허락되어 주로 가난한 민초들에게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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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형
교수형은 중죄인의 목을 형구로 옭아매어 죽이는 형벌이다. 사진에서 교수형을 당한 사람들은 의병이 아닐까 추측된다. 1910년 전후 10여명이 공개적으로 교수형을 당할 만한 사안은 일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의병 외에는 달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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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와 하인
간략한 사진 설명에는 ‘죄수’라고만 되어 있는데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혹 귀양살이하는 양반 죄인이 하인을 데리고 가는 광경일 수도 있겠지만, 옆의 담장으로 미루어 시골풍경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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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개다리소반에 차려진 음식을 먹고 있다. 벽에 두루마기가 걸려 있고 신선도 병풍이 쳐진 것으로 보아 여염집은 아닌 듯하다. 여인네는 음식을 덜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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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
두 남자가 장터 주막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있다. 돗자리 위에 놓인 개다리소반이며 엉거주춤한 자세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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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발굽 갈기
소를 이용한 농경은 삼국시대부터 시작됐다. 온순하고 인내심이 강한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게 된 것은 농업기술 발달에 획기적인 일이었다. 소를 쓸모 있게 활용하려면 굽갈이는 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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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청하는 관리
조복을 갖춰 입은 관리가 의자처럼 생긴 남여(籃輿)를 타고 관청에 출근하고 있다. 뒤에는 서류를 넣은 궤를 짊어진 하인이 따른다. 사진을 찍는 모습이 오히려 구경거리였던 듯 집안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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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공사
세 명의 인부가 담장을 쌓고 있다. 나무틀에 돌과 진흙을 개어 넣어 토담을 쌓는 광경이다. 나무틀 안에서 흙을 밟아 다지는 인부가 흙을 쏟아 붓는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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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터
활터에 나가 활 쏘는 일은 한량들의 스포츠였다. 멀리 있는 과녁을 겨누어 막 활을 당기고 난 모습이다. 몇 사람은 아직 시위에서 화살이 떠나지 않았다. 시합을 마친 뒤엔 술 한잔씩 마시고 헤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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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간
말들이 먹이를 먹고 있다. 말은 주로 군용(軍用)이나 역마(驛馬)로 사용되었지만 일반에서는 타고 다니거나 수레를 끌게 하고 농사에도 동원했다. 값이 비싸 농가에서 기르기는 쉽지 않았다. 사진은 말을 길러 삯짐을 실어 나르던 곳의 마구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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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
장례 행렬을 구경하는 사람들. 권세 있는 개성 상인이 세상을 떠난 듯 상점가 깃발이 펄럭인다. 지붕에 올라앉은 아이들에게는 좋은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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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기생
기생이 부채춤을 추고 뒤에서 악사들이 장구와 징을 쳐 장단을 맞추고 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은 상황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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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패
인간 피라미드를 이룬 놀이패. 아마도 동네에 큰 잔치가 있었던 모양으로, 사당패가 동네에 들어와 갖은 재주를 부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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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구질
두 아낙이 나무로 만든 절구통에 곡식을 넣어 공이로 빻고 있다. 나무절구는 통나무의 속을 파내 만들고, 공이는 손으로 쥐는 부분을 파내 둥글게 만든다. 혹 명절날 쓸 떡을 만들려고 절구질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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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에 다녀오는 여인네
동네 아낙들이 장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다. 젊은 아낙들은 장옷을 입고 머리에 물건을 이었고, 나이 든 아낙들은 장옷도 물건과 같이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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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갓을 쓴 여인
먼 길을 떠나는 젊은 여인이 방갓을 썼다. 오른쪽 사진은 같은 여인을 옆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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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동이를 인 여인
두 손으로 물동이를 이고 있다. 배경이나 분위기로 보아 현장에서 찍은 것이 아니라 실내에서 연출해 촬영한 사진임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자식을 낳은 여인의 가슴 노출은 큰 흉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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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강 닦기
요강은 집 안에 화장실이 있는 주택이 보급되기 전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생활용품이다. 신분이나 경제력에 따라 놋이나 도기, 자기, 목칠기 등으로 요강을 만들어 썼는데 사진에 보이는 것은 자기로 만든 것 같다. 연출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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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동이를 인 여인
동네 어귀에 우물이 있었을 것이다. 아낙이 물을 길러 왔다가 사진을 찍게 되었다. 한 손으로 물동이 손잡이를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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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에 다녀오는 여인
장에 나가 채소라도 팔고 오는 길일까. 동생을 들쳐 업고 엄마를 따라 나섰던 아이의 손에는 채소가 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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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이질
여자아이 둘이 다듬잇돌에 세탁된 옷감을 놓고 방망이로 두들겨 다듬고 있다. 옆에서 동생들이 구경을 한다. 옷 손질과 바느질은 여성들의 일상이었다. 두 사람이 네 개의 방망이로 다듬이질을 하는 리듬감 있는 소리는 이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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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날리기
네 아이가 연 날릴 준비를 하고 있지만 시선이나 표정이 부자연스럽다. 이미 1890년대 초부터 널리 퍼진 연출기법에 따른 사진이다. 한 아이는 얼레에 연줄을 감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종이에 대오리를 붙이고 실을 매어서 공중에 날리는 연 놀이는 당시 어린이에겐 최고의 겨울 스포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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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1)

이승구 목사(국제신대원 교수)

 



우리 나라에서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사는 일을 흔히 "예수 믿는다"고 표현합니다. 너무 많이 사용되어서 그 의미가 손상되어 사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어떻게 생각해 보면 좋은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은 다른 존재나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믿으며 산다는 의미를 함의하니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힘과 능력에 의존하거나, 돈과 재화에 의존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거나, 인간의 능력에 의존하거나, 과학 기술을 믿거나, 이 세상을 의지하거나, 그 어떤 다른 것들을 믿는 이들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 믿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도대체 이 "예수 믿는다"는 말로서 우리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1) 구원의 방도로 예수님과 그의 사역에 의존한다는 것을 뜻하고(예수님을 "구주, 구원주"[Saviour]로 믿음) (2) 삶 전체를 예수님을 의존해서 살아간다(예수님을 "주님"[Lord]으로 믿음)는 의미를 가진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차례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번 호에는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말을 우리의 구원의 방도로 예수님과 그의 사역을 의존한다는 뜻으로 사용한다는 점, 즉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원주로 믿는다"는 뜻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과 관련 없는 우리의 상태가 구원받아야 할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스스로의 힘으로서는 전혀 구원함을 받을 수 없는 상태(total inability)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태를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믿기 이전의 우리 상태를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에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엡 2:1). 이를 영적인 죽음(spiritual death)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는 그 사람 안에 영혼이 없다거나 영혼이 전혀 활동하고 있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그의 영혼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믿기 이전의 상태를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보는 것은 사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바르고 온전하게 인정하는 데서 나오는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 한 사람만이 예수님과 관계되기 이전의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인 사람은 자신의 이전 상태를 성경을 따라서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자신의 힘으로, 또는 다른 인간들의 힘에 의존해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직도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철저히 절망하지 않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자신을 철저하게 심각한 상태에 있다고 여기는 이들만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들은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참으로 철저하게 절망한 이들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전적 부패(total depravity)에 대한 바른 인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자신의 상태를 생각하지 않는 이들은 결국 어느 정도는 자신이 구원에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바르지 못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스스로에게 어떤 기여점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직 자신과 모든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철저히 절망하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방도를 하나님께서 구원 사건을 일으키신 그대로, 또 성경에 기록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시어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후에 우리의 자리, 우리의 형벌의 자리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대리 구속[代贖]의 방도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고, 그런 방식으로 구원 사건을 이 세상 역사 가운데서 이루셨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고전 15:3, 4).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내신 이런 구원의 방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서, 그가 이루신 구원의 방도에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복음 사건과 그것을 전하는 말인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고전 15:2).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다른 구원의 방도를 마련하시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든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방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든지, 하나님의 구원 방도는 너무 쉬워서 그런 식으로 구원하려 하신 것은 옳지 않다든지 하는 식의 말과 태도를 나타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는 십자가와 그를 통한 구원의 방식을 어리석은 것이라거나,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는 이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의 표현이라고 하며,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연약하여 죽고 돌아가신 십자가상에서의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며(고전 1:18, 24), 그 수욕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이는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라든지, 있지 않았어도 되는 것이라든지, 실제 역사 가운데서의 부활은 없이 그 의미만이 역사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라는 말과 태도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이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 역사 가운데 오셔서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어 주시고 다시 사신 것에 온전히 의존하고 그것이 바로 자신을 위해 일어난 사건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그는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기 위해 부활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롬4:25).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존하며 최후의 심판 자리에서도 그것에 근거해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십자가와 부활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는 십자가와 부활이 바로 자신을 위해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라고 받아들이는 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들은 자신들의 유일한 구원의 근거가 예수님께서 이루신 대속에 있음을 믿으면서, 언제까지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 의존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다른 방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구원을 이 역사 가운데서 이루신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분의 구원을 이루시는 방식에서 지혜를 발견하고 영원을 다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이는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든지 구속해 주신 예수님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이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일찌기 죽임을 당하셨던 그러나 다시 사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어린 양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찬양과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돌려 드리며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이들은 이렇게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을 찬양만 하고 있는 이들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의 뒤를 따라가며, 그의 손발이 되어 그가 이루시려는 일을 열심히 이루어 가는 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에는 예수님을 믿는 다는 말의 또 다른 부분인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의 의미를 좀더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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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런 종말론....

탁영철 목사


 

기독교는 처음과 마지막이 있다고 믿는 직선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과 마지막이 언제냐는 문제가 항상 심각한 논쟁거리가 됩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대한 관점이 훨씬 더 많이 논쟁거리가 됩니다. ...

특별히 종말시기에 대한 관점은 세 가지로 나눠질 수 있습니다. 


1. 시한부 종말론 predicted eschatology 

재림(parusia)의 날짜와 시간을 예고하고 그것을 준비하는 태도입니다. 

역사상 많은 이단들이 시한부종말론을 통해 급격히 부흥하고 융성했다가 예고한 날짜가 지나간 후 급격히 사그라졌습니다. 

현세에서의 삶이 고통스럽고 힘도 없으며 희망도 없는 사람들은 쉽게 시한부종말론에 빠져듭니다. 

심지어 집단생활을 조장하고 강요하여 일종의 현실도피처를 만들어줍니다. 

하지만 주의하십시오.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른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니라 ”(막 13:32-33)


2. 임박한 종말론 impending eschatology

 

마지막 날짜를 예고하지는 않지만 매우 가까웠다는 것을 강조하는 종말론입니다. 

이것은 정말 교묘한 종말론으로 시한부종말론의 종국을 피하면서 종말론을 이용하여 긴박감을 조성하므로 교회나 선교단체를 급성장시키는 방법입니다. 

특별히 어느 이슬람권선교단체는 임박한 종말론을 강조하며 가정이나 사회를 모두 버리고 선교하러 나가야 된다고 말합니다. 

또한 미국에서 시작한 어느 선교단체 같은 곳은 늘 깨어있으며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개념을 강조하여 가정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 자신들의 단체를 급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교회들이 이러한 사상과 방식을 도입하여 성장시키는데 이용하고 있습니다. 

선교단체나 교회가 임박한 종말론을 이용하여 현실에 힘들어 하는 이들에게 현실도피처를 제공하여 자신들을 급성장시키고 가정을 깨뜨리며 개인의 인생을 망치는 행태는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악입니다. 


3. 돌연한 종말론 sudden eschatology

 

가장 성경적인 종말론으로 예수께서 갑자기 임하신다는 개념입니다. 

앞의 두 종말론과는 달리, 돌연한 종말론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니 현재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 차리고 더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 교회 그리고 사회생활에서 최선을 다하며 크리스천다운 인격과 삶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따라서 교회는 크리스천들이 세상을 등지고 교회생활만 잘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생활, 교회생활 그리고 사회생활에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시한부종말론이나 임박한 종말론의 미혹에 빠져 사회적 책임을 버리고 인간관계를 단절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마 5:13-16)

 

(욥기 10)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대장쟁이 ㆍ 2014-04-18 (금) 17:21 IP: 96.235.163.16     ㆍ조회 235  

욥기 24장에 이르러 욥은 왜 악인이 형통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속히 징벌하지 않으시는가고 묻습니다. “어찌하여 전능자가 시기를 정하지 아니하셨는고. 어찌하여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 ‘날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욥은 악인에 대하여 묘사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계표를 옮기며 양떼를 빼앗아 기르며 고아의 나귀를 몰아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빈궁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세상에 가난한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그들은 거친 땅의 들 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광야가 그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식물을 내는구나. 밭에서 남의 곡식을 베며 악인의 남겨 둔 포도를 따며 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위에 덮을 것이 없으며 산중 소나기에 젖으며 가리울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미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주리면서 곡식단을 메며 그 사람의 담 안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하면서 술틀을 밟느니라. 인구 많은 성중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 불의를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또한 악인들은 하나님의 광명을 피하고 어두운 길을 걷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자는 새벽에 일어나서 가난한 자나 빈궁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적같이 되며,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변장하며, 밤에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문을 닫고 있은즉 광명을 알지 못하나니, 그들은 다 아침을 흑암같이 여기니 흑암의 두려움을 앎이니라.” 욥의 말대로 이 세상은 악인들이 형통하고 그렇지 못 한 자들이 억울함을 당하는 기가 막힌 상황이 벌이지고 있으나 하나님은 눈을 감고 계신 것 같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았고 그의 심판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 산업은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행치 못할 것이라.” 욥은 또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말리나니 음부가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은 것인즉 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기억함을 다시 얻지 못하나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고 말합니다. 욥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호위하사 평안케 하시나 그 눈은 그들의 길에 있구나. 그들은 높아져도 잠시간에 없어지나니 낮아져서 범인(凡人)처럼 제함을 당하고 곡식 이삭같이 베임을 입느니라. 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능히 내 말을 거짓되다 지적하거나 내 말이 헛되다 변박할 자 누구랴.” 욥은 지금은 악인이 형통하고 심판은 보이지 아니하나 하나님의 심판은 필연적으로 임할 것을 믿으며 끝까지 낙심하지 아니하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욥의 이 같은 대답에 대하여 수아 사람 빌닷이 다시 나섭니다. “하나님은 권능과 위엄을 가지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그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 광명의 비췸을 입지 않은 자가 누구냐?” 하나님은 권능(통치권)과 위엄(두려움)을 가지신 주권자로서 땅에 평안을 주시며 땅 위에 사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은총의 빛을 받지 않은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빌닷은 또 말합니다.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

빌닷의 말도 옳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고 깨끗지 못합니다. 빌닷이 말한 대로 사람은 죄로 인해 죽고 썩는 존재요 인생은 벌레와 같습니다. 이것은 염세주의 사상이 아니라 사실이고 현실입니다. 악인이 형통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억울함을 당한다 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 피조물임과 죄인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구원의 출발점에 설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죽을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 곧 인간이 존귀함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 곧 참된 지식과 의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그 길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어엿이 설 수 있는 의의 길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구원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올해 캘리포니아는

100년 만의 가뭄이라서

야생화는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2월의 마지막 날에

큰 비가 내려주는 바람에

한가닥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아는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숨어있는 야생화 필드를 향해 카메라를 들고 출발했습니다.

  

예상대로 그곳은

찾아오는 사람하나 없었고

아무런 방해없이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가끔씩 지나가다가

차를 세우고 아이폰이나

똑딱이를 가지고 찍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요.

  

100년 만의

극심한 가뭄 가운데 피어난

남가주 언덕의 야생화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야생화가

전혀 없을 줄 알았던 곳에서

칼라풀한 야생화 언덕을 보니 감사가 저절로...



이 언덕은

파셀리아(phacelia) 비슷한

보라색 꽃이 많이 피어 있더군요.





이 언덕엔

파피도 제법 피어 있었는데

보라색과 오렌지 컬러가 조화되어

 

아주 멋지고

아름다운 색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입을 벌린 파피보다 입을 다문 파피가 더 많군요



파피는

바람이 불거나

빛이 없을 경우엔

꽃잎을 열지 않습니다.

 

해가 있더라도

빛이 어느 정도 강할 때 꽃잎을 열며

빛이 약해지는 오후 4시 이후에는 꽃입을 다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파피를 잘 찍으려면

빛이 좋은날 오전 10시 이후,

 

그리고 늦어도

오후 4시 이전에 촬영해야

입을 활짝 벌린 파피를 촬영할 수 있습니다.



위의 야생화는

피들넥(fiddleneck)이라는 꽃인데

 

해가 뜰 무렵에

역광으로 촬영하면

멋진 사진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한 여류 사진작가가

야생화 촬영에 몰두하고 있군요.




해가 뜨고 나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입을 다물었던 파피들이 활짝 입을 열었습니다.




잡초도
생명력이 강하지만
야생화는 그보다 더 강력합니다.
 
 
이른 봄에
잡초가 피기 전에
야생화가 먼저 피는 것은
야생화가 잡초보다 강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야생화를 촬영할 때
야생화 가운데 잡초가 있으면
야생화 사진이 별로 좋게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생화를 촬영할 때
야생화 사이에 잡초가 없는 곳을
골라서 촬영해야 야생화가 예쁘게 나옵니다.




 
감사한 것은,
파피나 루핀(Lupine)이
잡초보다 생명력이 강하기 때문에 
 
파피나
루핀이 있는 곳에
잡초가 발붙이기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잡초가 없는
예쁜 파피나 루핀을 찍을 수 있답니다.

 

봄에 야생화를 촬영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가 뱀입니다.

 

야생화 촬영의
주요 포인트인 앤털롭 밸리나
 
베이커스필드,
카리조 평원, 그리고
셸크릭 길 등은 방울뱀의 주요 서식지입니다.

 

 
야생화 촬영시
사진사가 만나는 80-90%의 뱀은 방울뱀입니다.


 
다행히도
방울뱀은 뱀 가운데서도
가장 신사적인 뱀이어서
 
 
꼬리를 밟는다든지,
혹은 먼저 위협하지 않으면
사람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가까이 가려하면
“나 여기 있으니 오지마” 하면서
방울 소리를 촤르륵(딸랑딸랑이 아닙니다) 냅니다.

 

 
그러므로
야생화 촬영시에
방울뱀을 만나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뱀을 만나게 되면
우회해서 가거나 돌아가면 됩니다.


길이 없는
야생화 필드에서
 
뱀의 꼬리를
밟지 않기 위해서는
전방 2-4m 앞을 내다보며 걸어야 하며 
 
뱀이 사람을
피해갈 수 있도록
야생화 필드에서는 천천히 걸어야 합니다 
 
야생화 필드에서 뛰는 행위는
뱀의 꼬리를 밟을 수 있는 확률이 아주 높으며
(특히 아이들과 함께갈 경우 주의시켜 주어야 합니다)
  
뱀은
꼬리를 밟히자 말자
본능적으로 문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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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과연 영생할 수 있었을까?
- 선악과에 대한 셋째 의문 / 박신 목사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네가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5-17)


선악과 금령에 대해 대표적으로 품는 세 가지 의문 중에 마지막을 알아볼 차례다. 아담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과연 영생했고 또 그 후손인 우리도 불로장생할 수 있었을지 여부다. 그 답을 따져보기 전에 사실은 이 질문자체가 아무 의미 없다는 사실부터 먼저 깨달아야 한다.

예컨대 가난한 집에 태어나 학비가 없어서 학업을 중단해야 하는 고학생은 이왕이면 재벌가에 태어났더라면 이런 고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미국 유학생들은 좀 더 일찍 미국에 왔더라면 영어를 훨씬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여기다가 이왕이면 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이 두 소원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미 자기 소원과는 정반대의 상황에 처해졌고 도무지 되돌릴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아담은 이미 하나님을 거역해 선악과를 따먹었고 하나님도 생명나무를 에덴에서 옮겼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이전 상태로는 도저히 돌아갈 수 없다. 아담이 하나님의 벌을 받은 원죄 상태로 태어난 인간의 수명도 한정되어졌다. 과학과 영양의 발전으로 조금은 늘릴 수 있을지 몰라도 육체적 죽음 자체를 없앨 수는 결코 없다.  

그럼에도 이 질문의 답을 한번 추적해보려는 이유는 불신자들에게 변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앞선 두 질문과는 달리 오히려 믿는 자의 의구심을 씻어주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 신자의 의구심보다는 미련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질문의 저변에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진하게 깔려 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이 주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과는 관련이 없지만 더 성숙하게 자라기 위해선 한번쯤은 정리해둘 필요는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인가?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2,24)

아담이 타락한 후에 하나님이 가장 염려한 것은 혹시 그 타락한 상태에서 생명 나무 실과도 따먹어 영생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럼 만약 타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실과를 먹었다 해도 분명 영생했다는 뜻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생명 나무 중에 어느 쪽을 먼저 먹어야 할지 그 순서는 고려 대상에서 일단 제쳐두더라도 말이다.

어쨌든 하나님은 아담이 당신의 명을 위반하자 생명 나무 과실을 옮겨서 영생을 누리지 못하는 벌을 확실하게 내렸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육체적 영생도 누렸을 것이라는 전통적인 가르침은 분명히 옳다.

그래서 그 원죄 하에 태어나는 후손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신령한 몸을 언젠가는 덧입고자 하는 소원과 기대만 가지게 되었다. 아담으로 인해 실패했던 영생의 길이 마지막 때의 부활 가능성으로 대치 또는 연기되었다. 단 아담에게 물려받은 원죄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완전히 씻음 받은 자에 한해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4-57)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모든 눈물은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1,4)

마지막 때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뀔 때에는 다시 사망이 없다고 했다. 마땅히 육신의 사망도 없지만 무엇보다 이젠 인간을 통해 악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은 죄와 그 근원인 사탄과는 영원히 결별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라.”(계22:1,2,5)

대신에 에덴동산에서 새 예루살렘으로 옮겨진 생명 나무가 열두 실과 즉,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먹고 남을 만큼 달마다 열매를 맺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진정으로 부르는 자는 마지막 때에 온전하고도 영화로운 육신의 몸을 다시 입는다. 그분과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된다. .  

아담이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아담의 배역으로 육신적 영생은 물거품이 되었고 마지막 때에나 누릴 수 있는 소망으로 대치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죄의 삯이 사망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과연 선악과 금령을 어겼을 때에 정녕 죽게 된다는 뜻이 그것이 전부일까, 아니 진짜 육체적으로 죽게 된다는 뜻일지 조금 더 음미해볼 여지는 있다.

기독교 교리를 듣고 온전히 납득이 안 되면 반드시 곰곰이 따져 봐야 한다. 수학공식 암기하듯이 받아들여선 안 된다. 수학 공식이야 시험 점수를 잘 받느냐 못 받느냐만 좌우하지만, 성경 말씀은 영원한 운명을 비롯해 인생의 모든 면에 결정적이고도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데 어찌 이해도 되지 않는 교리를 무조건 수용만 하고 치울 수 있겠는가?

교리로 정리될 수 있는 성경의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들을 교회에서 열심히 배운다. 그러나 그 교리가 실제로 역사하여 은혜와 권능을 드러내는 것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오직 일대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만 사랑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객관적 교리라도 신자는 반드시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통해 그분과의 온전한 언약으로 변화시켜 자기 몸에다 새겨두어야 한다. 은사, 체험, 신비주의를 강조하려는 뜻이 아니다. 교리를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온전히 이해하여서 자신의 삶에 실현하는 것이 바로 개인적 신앙 체험이라는 뜻이다.    

성경말씀이 난해(難解)하다는 것은 본문 그대로 읽었더니 뜻을 잘 모르거나 완전한 실감을 하지 못하는 경우다. 문자적 신학적 해석만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살아 있는 생생한 신앙으로 다가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에는 아무리 목사님에게 문의하거나, 혼자 계속 묵상해도 여전할 때가 많다. 지금 다루는 주제가 그런 대표적인 경우다.

그럴 경우는 역(逆)으로 가정해 따져보면 의외로 쉽게 문제 해결의 키를 발견할 수 있다.  수학에서 3+4=7이라는 해답이 맞는지 틀렸는지 의심날 때는 어떻게 하는가? 7-4=3으로 검산해보지 않는가? 어떤 사안이 확실히 그렇게 되려면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 둘 다 만족시켜야 하듯이, 본문대로 해석한 내용을 역으로 따져보는 것이 신앙성숙에 큰 도움이 된다.

아담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먼저 현실적으로 가정해보라. 모두가 영생을 얻었을까? 그러면 지구상에 발 디딜 틈도 없는 인구폭발이 되었지 않겠는가? 또 이 땅에 악은 드러나지 않고 선만 실행했다면 그래서 모두 육체적으로 영생했다면 이 땅에는 인간보다 천사 내지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들만 남아 있지 않겠는가?

먹지 않았다면 육체적으로 영생했을 것이라는 가정 자체를 다시 역으로 따지면 먹었으면 당장 죽었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바로 죽지는 않았다. 대신 얼마간의 수명을 허락받고는 죽었다. 또 초기의 인간은 지금보다 수배나 오래 살았으며 거의 천년이나 살기도 했다. 번성하여 생육하려면 당연히 장수하며 자식을 많이 낳았어야 했다.

그러나 수백 년의 수명을 허락한 후에 죽일 양이었다면 하나님이 꼭 먹지 말라는 절대부정 형식으로 당신의 의지를 강조하지 말았어야 했거나,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거기다 정녕 죽는다고 재차 강조할 필요는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근 천년이나 살 수 있다면 오늘날의 수명과 비교하면 사실상 육신적 영생이나 다름없다. 또 실제 그렇게 오래 살면 인생에 더 이상 미련도 남지 않고, 어쩌면 계속되는 수고와 환난 때문에 오히려 빨리 죽었으면 바라기도 할 것이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지금 타락하지 않았다면 육체적 영생을 누릴 수 있었다는 성경 진리를  부인코자 하는 뜻이 아니다. 서두에 말한 대로 이 질문 자체는 아무 의미와 소용이 없다.  단지 신앙을 견고히 세우기 위해 죽음에 대한 의미를 좀 더 깊이 따져 보자는 뜻일 뿐이다.

죄와 죽음의 연관관계

무엇보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음에도 즉사(卽死)하지 않았다는 것이 의미심장하지 않는가? 죄와 육신적 수명 내지 죽음과는 직접적 연관이 없다는 뜻이지 않는가 말이다. 물론 죽음이 죄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연관 관계는 더 폭넓은 차원의 고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악과 금령에서 강조하려는 초점이 육신적 죽음보다 다른 데에 있다는 것이다.

앞 장에서 배운 선악의 본질이 무엇이었는가? 선은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종교적으로 경건한 것을 떠나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붙어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분의 품 안에서 그분께 순종하면 모든 선한 것의 궁극적 근원이신 그분으로부터 선을 공급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행할 선의 근거, 기준, 판단, 분별 등을 오직 절대적이고 완전한 선이신 하나님께만 두어야 한다. 궁극적 구원과 심판도 당연히 오직 그분의 몫이다. 나아가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는 소망, 열정, 능력, 기회, 여유마저도 그분만이 공급해주신다. 신자가 그분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해야만 선을 올바르게 분별할 수 있고 실천할 힘도 그분께 얻을 수 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땅의 모든 악은 그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근원인 사탄으로부터 온다. 인간이 적극적으로 그를 따르려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벗어나면 자동적 즉각적으로 사탄의 노예가 된다. 그 결과는 무엇보다 선과 악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다. 나아가 악을 행할 힘을 사탄에서 직접 공급받기 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을 행할 소망, 열정, 능력, 기회 전부에서 차단된다. 자연히 그 일생이 악의 편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그런 선악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그 과실을 따먹는 순간 사단의 종이 되었다. 정확하게 말해 하나님을 배역하는 순간 이미 사단에게 넘어갔고 그 결과로 선악과를 따먹었다. 그런 상태에서 생명나무 과실도 먹으면 영영 구원할 길이 없어진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옮기시고 대신에 사단의 머리를 밟을 여자의 후손을 예비해 놓으셨다. 비록 아담과 그 후손들이 사단의 종이 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로 구원할 길을 에덴동산에서부터 활짝 열어 놓으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아담이 순종하였다면 그 후손의 구원 방안은 어떻게 되겠는가? 참으로 미묘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앞에서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과실을 따먹는 “순서”가 문제될 수 있다고 언급한 이유다. 두 가지 경우, 구체적으로는 세 경우를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선악과를 먹기 전에 생명나무과실부터 먹는 경우다. 그럼 도덕적으로 완전 중립인 상태에서 즉, 진정한 선악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육체적으로 영생해버린다. 인간이 선악을 모르면 그 실현도 전혀 불가능하다. 이는 하나님이 바라셨던 바가 전혀 아닐 것이다.  

창세기 3:22에 따르면 육체적으로 영생한다는 것은 어떤 특성이 그대로 굳어져서 아무 변함없이 끝까지 이어진다는 의미이지 않는가? 또 그래서 생명나무를 먼저 먹고 선악과를 그 후에 먹는 경우는 아무 의미가 없기에 검토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미 도덕적 중립 상태로 굳어진 후인지라 변화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 반대의 경우는 현재 성경이 기록된 그대로다. 하나님을 배역하여 선악과를 먼저 먹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생명나무를 먹느냐 마느냐의 두 가지 경우를 가정해볼 수 있다. 만약 먹게 되면 3:22대로 구원이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타락한 아담이 생명나무 과실을 먹지 못하게 아예 하나님 쪽에서 먼저 옮겨버렸다.    

창3:22에 드러난 하나님의 주된 관심은 어디에 가있었는가? 아담과 그 후손의 구원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지는 것만은 어떡하든 막으려 했지 않는가? 다른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반드시 실현시키시려는 뜻이었다.

만약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상태라면, 생명나무 과실을 먹든 안 먹든 간에, 그 후손에 대한 구원 기준도 여전히 선악과 금령이 되지 않겠는가? 지금껏 모두가 영생하고 선악과나무도 남아있다면 선악과 금령 또한 전 인류에게 여전히 유효한 계명이 되지 않겠는가?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필요 없게 된다.

또 혹시 누군가 그 열매를 따먹으면 남과 비해 너무나 짧은 수명으로 죽는 것을 목격할 텐데 누가 그 금령을 어길 생각을 하겠는가? 그럼 단지 오래 살고 싶다는 이유로, 또 하나님이 무섭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을 믿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십자가는 무용지물이다.

초점은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더라도 인간이 선악과 금령을 잘 지켜냄으로써 구원 가능성이 없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데에 있지 않다. 그 정반대로 인간은 절망의 나락에서 여전히 흑암 가운데 헤매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 없이는 죄가 처리되지 않고 그럼 그 삯인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 엉터리 같은 가정을 하여서 이왕의 교리를 고치자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또 아담이 받은 벌로 인간 육체의 수명이 얼마로 바뀌었는지 혹은 영원했을 가능성을 따지자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역으로 따져 봐도 선악과를 따먹어서 받은 벌인 죽음이 인간 수명의 길이에 좌우되기보다는 예수님과 연관되어서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육체적 죽음보다 더 중한 일

선악과 금령은 사실상 최초 인간 아담과 이브에게만 유효했던 계명이었다. 그 일차적 이유는 하나님으로선 그들이 위반할 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아들 대(代)부터 사실상 무효하게 될 줄도 그분은 아셨다. 그 무엇보다도 앞에서 살펴본 대로 만약 계속 선악과 계명으로만 인간 구원이 가능하다면 주님이 오실 이유가 전혀 없었다.

따라서 선악과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궁극적이고도 절대적인 계획으로 가는 첫 관문이었다. 이를 또 역으로 따지면 골고다 십자가가 예비되어 있지 않았다면 도무지 인간에게 명할 수 없는 계명이었다. 그것도 순종과 불순종을 책임지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인간에게 주었기에 비로소 성립되는 계명이었다.    

누차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최초 인간 부부에게 “절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먹으면 진짜로 죽는다.”고 간절히 호소했다. 따먹기만 하면 당장 죽일 것이다가 절대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여서 다른 모든 것은 다 해도 좋은데 당신이 그들을 비롯해 우주만물의 주인이자 통치자라는 그 진리만은 절대 잊지 말라고 읍소한 셈이다.  

하나님의 이런 본심에만 비추어보아도 계명을 어기는 것과 죽음의 직접적 관련성은 훨씬 감소되지 않는가? 그리고 따 먹었음에도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이지 않은 것도 진짜 죽음이 따로 있다는 뜻이지 않는가?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비록 육체적 죽음이 임할지라도 당신과의 온전한 교제를 더 중히 여기셨다는 뜻이지 않는가? 비유컨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외동아들에게 큰 고생이 될 줄 빤히 알아도 온전한 성인으로 자라게 하려고 면제가 이미 확정되었음에도 일부러 군대에 보내는 부모 심정과 같은 셈이다.

그래서 아담이 타락하여 그 벌로 육신적 영생을 잃어버릴지라도 자유의지를 주셨지 않는가? 그분은 인간이 당신을 진정으로 기꺼이 스스로 찾아주기를 가장 원하셨던 것이다. 당신의 독생자 예수가 인간의 모든 수치와 고통과 죄책을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게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죄인을 살리셨던 뜻도 바로 그것이지 않는가?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후에 심히 좋아하셨다. 창조의 최종 목적을 인간과의 아름다운 교제에 두었다는 뜻이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인간이 정말로 참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의 장중에 붙들려 있는 것뿐이다. 그 외의 길로는 절대 온전한 인생이 되지 못한다.  

요컨대 하나님 형상을 닮게 지어진 인간에게만은 육신적 죽음이 진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꿔 말해 선악과 금령을 어겨 그 벌로 육신적 죽음을 입게 된 것 또한 하나님이 주신 진짜 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아담이 선악과 계명을 어김으로써 원죄를 범하게 된 결과로 모든 인간이 얻게 된 진짜 죽음은 무엇이며, 또 진짜로 받은 벌은 무엇인가?

진짜 죽음은 무엇인가?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葬事)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8:21,22)

당신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부친이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고 오겠다고 하자 예수님은 그러지 말고 즉시 따르라고 대답했다. 신자는 장례 같은 사회 관습을 완전히 무시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 아님은 물론이다. 죽음의 본질을 가르치려는 말씀이었다.  

예수님은 돌아가신 부친도, 그 장례를 치를 자도 죽은 자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전자는 육신적으로 죽은 자였고 후자는 살아 있었다. 그럼 예수님은 전자는 육신적으로 죽은 자를, 후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라는 두 가지 의미로 나눈 것인가?  

언뜻 그렇게 보이긴 한다. 그렇다면 두 종류의 죽음을 나누는 기준이 단지 육신적으로 죽었는지 아닌지의 차이뿐이다. 그러나 장례 치를 자가 육신적으로 죽지 않았다고 해서 영적으로는 살았다고 아무도 말 못한다.

그보다는 둘 다 예수를 따르지 않은 자임은 분명하다. 예수를 따를 자는 이 제자뿐이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 말씀의 본의(本意)가 있다. 당신을 따르지 않으면 육신적으로 살아있든 죽어있든 간에 둘 다 영적으로는 죽은 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죽음이 육신적 죽음과 영적 죽음의 두 가지가 있는 것은 분명 맞는데 그것을 나누는 기준은 오직 예수님을 따랐느냐에 따라 나눠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더러 두 죽음 중에서 어떤 죽음의 길을 택할지 확실히 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심지어 육체적으로 영생을 해도 영적으로 죽긴 마찬가지다. 요컨대 진짜 죽음은 예수를 모르는 것이다. 그 결과 진짜로 받는 벌도 하나님 대신에 사탄과 짝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신자는 창조에 대한 새롭고도 확고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선악과 금령에 대해 온전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면 그 계명은 아무 의미가 없고 한갓 하나님의 독단적 명령에 불과했을 것이다. 또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한 것도 하나님이 인간이 타락하여 실패할 것을 무릅쓰고 감행한 도박이 되는 셈이다. 나아가 타락으로 받은 인간의 육신적 죽음도 그야말로 긍정적인 측면이라곤 하나 없이 저주에 가득 찬 벌로만 그칠 것이다.

절대 그렇지 않다. 태초부터 성자 예수님이 계셨기에 우리 눈에는 미처 이해되지 못한 일들이 오직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시행되었다. 너무나 크고 놀라운 은혜가 그런 외형적 모순들 안에 숨겨져 있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에 이미 부여하신 자유의지를 전제로 당신의 모든 역사를 진행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으로선 쉽게 순종하기 힘든 계명들도 줄 수 있었고 또 주셔야만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비록 아담의 원죄 때문에 인간이 육체적 죽음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십자가의 완벽한 은혜를 통해 육신적 영생과는 도무지 비교도 안 되는 너무나 좋은 진짜 영생이 예비 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원죄의 잔재가 펄펄 살아있는 신자들  

그럼에도 신자들마저 자꾸만 아담이 순종했더라면 우리도 육체적 영생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심과 미련을 품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님의 십자가 구원을 얻고도 하나님께 진정으로 순종하는 것보다는 육체적 영생이 더 나은 것 같다는 마음이 깔려 있지 않는가?

만약 모든 인간이 진짜 육체적으로 영생한다면 하나님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그 자체로 이미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 내지, 아예 하나님이 되는 셈이다. 하나님을 전혀 찾지 않을 것이다. 지금 실제로 죽음을 벌로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알려고도 않고 찾지도 않으니 말이다.  

이 질문의 배경에는 원죄로 타락한 악의 잔재가 도사리고 있다. 육체적으로 영생하여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소원 말이다. 사탄이 아담에게 어떻게 유혹했는가? “너는 선악과를 먹어도 절대 죽지 않는다. 하나님과 같은 존재, 아니 더 뛰어난 존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괜히 너를 시기 질투하여 먹지 못하게 하려고 겁을 준 것뿐이다. 이제 네가 선악과까지 먹으면 육체적으로 영생도 하고 하나님 대신에 네가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다. 이보다 꿩 먹고 알 먹는 일이 어디 있겠니?”

바꿔 말해 오늘날의 신자에게도 믿음으로 일석이조를 누리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잘 믿어 영적으로도 충만하고 또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현실적으로도 크게 형통할 것을 소원하고 믿는다. 이왕이면 신자도 무병장수(無病長壽)하면 좋지 않는가라는 뜻이다.  

물론 신자가 영육 간에 형통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소원하는 바다. 그러나 그분은 일차적으로 당신과의 온전한 교제를 더 원하신다. 신자가 십자가 은혜를 통해 당신을 진정으로 찾고, 알고, 믿고, 감사하고, 찬양하며, 경배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당신의 뜻대로 기꺼이 순종하며 그 뜻을 실제로 삶에 드러낸다면 나머지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신다.

그렇다고 현실적으로 풍요하고 안일하게 해주신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풍요나 궁핍이든 당신께서 주권적으로 나눠주신다. 그보다는 당신과 온전한 교제와 동행을 유지하는 신자라면 이미 세상의 안일이나 핍박은, 심지어 육체적 죽음을 당하는 순교까지 아무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기쁨과 감사함으로 감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진짜 보배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속에 소지하게 되었고 그분의 은혜로만 이미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주는 어떤 안일과 풍요보다 더 충만한 하늘의 신령한 것에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담이 선악과 금령을 위배하는 바람에 그 후손들의 육신적 영생은 물 건너갔다. 그러나 그 영생은 천국에서, 특별히 마지막 부활 때에 육신의 몸을 입음으로써 더 완전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맛보게 될 것이다. 또 그 전에 이 땅에서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아나감으로써 영생을 미리 소지하게 될 것이다.

서두에서 말한 대로 신자는 아담이 선악과 금령을 위반하는 바람에 모든 인간이 육신적 죽음을 맞게 되었다는 기독교 교리를 실제 삶에서 철두철미 깨달아 적용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이전에 불신자 시절에는 하나님과 그분을 따르는 삶보다 육신적 죽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사실은 하나님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든 현실에서 육신적으로 죽지 않은 일에만 매달렸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알고 난 후에는 육신적 죽음과 현실에서의 궁핍함보다는 하나님을 알아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함을 깨달아 그렇게 실천하며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신자마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아담이 죽지 않았을 것 아니냐는 질문과 의구심은 가질 필요도 의미도 전혀 없다. 엄밀히 따지면 하나님보다 육신적 안일을 더 바라는 불신앙이자 죄다.

그보다는 선악과 금령의 배경에 우뚝 서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 전부터 예수님의 십자가를 먼저 마련해 놓으셨다. 온 세상을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실 만큼 사랑하신 그 은혜 위에 만드셨다. 그리고 아담에게 제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즉, 그 사랑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간절히 호소하셨다.

예수님만이 알파요 오메가이자,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인간의 창조 때에 예수님이 계셨고, 그 타락의 현장에도 눈물지으셨고, 십자가에 죽으시어 구원을 다 이루셨으며, 마지막 때에 하늘 보좌에서 내려와 심판과 구원을 이루려 다시 오실 것이다. 그 때에 끝까지 그분을 따르는 자는 영생을 입을 것이요, 그렇지 못한 자는 둘째 사망을 맞을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5,16)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5-8)  

4/27/2010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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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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