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파에 구원이 있을까?>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 침몰, 안산 단원고교 학생을 포함, 3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세월호가 구원파 이단 유병언의 청해진해운 소속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구원파 신도들의 맹신적 복종과 헌신을 통하여 온갖 교묘하고 야비한 수단을 동원, 재산을 축적해온 유병언의 파렴치한 행태가 밝혀지면서 세상을 아연하게 하고 있습니다.

구원파는 무엇인가요?
박신찬-유병언 계열, 박옥수 계열, 그리고 이요한 계열로 나누어지는 그들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어째서 그들은 구원파에 몸을 담고 평생토록 교주 유병언에게 충성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과연 구원파에 구원이 있기는 한 것일까요?
가급적이면 짧게, 간략하게 간추려 이 문제에 대하여 쓰고자 합니다.

1. 구원파 교리
구원파의 교리는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았다고 할 수 없고 구원의 핵심을 깨달아야 비로소 온전히 구원에 이른다고 한다. “아하, 그렇구나!” 하고 믿음의 비밀, 죄사함의 비밀을 깨닫고 이를 입으로 시인할 때 그 사람은 진실로 모든 죄를 벗은 의인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구원파의 핵심교리이다.

2. 구원파의 교리가 먹혀드는 이유
구원파의 교리가 먹혀드는 이유는 바로 “아하!” 하고 깨달을 때 오는 충격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 죄를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한다.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는 믿음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라고 선언한다. 크리스천들은 이 복음을 전하고 교회들은 이를 선포하고 가르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구원을 받아 거듭나도 별다른 변화나 감동이 없다. 예수를 믿으면 뭔가 확 달라지고 마음이 뜨겁고 기쁨으로 펄쩍펄쩍 뛰고 삶이 뒤집어지면 좋겠는데 믿기 전이나 믿음 후에나 별 차이가 없다. 그래서 마음에 의심이 생기거나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경우가 많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를 믿고 나서 다시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는가, 지금까지 지은 죄는 용서되었다 하더라도 앞으로 죄를 지으면 예수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가, 예수 믿고 다시 죄를 지으면 도로 구원을 잃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과 불안에 휩싸이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교인들이 구원파의 밥이다.
구원파가 구원의 확신이 없는 연약한 크리스천들에게 다가가서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하고 물어 혼란스럽고 두렵게 만든 다음 “죄사함의 비밀”과 “의인으로 거듭나는 감격”을 가르쳐 깨닫게 한다. 그러면 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고 “죄사함 받고 의인으로 거듭난” 그 감격에 일평생 구원파의 충성된 신도가 되는 것이다.
사실 구원파가 생겨나고 날뛰게 만든 것은 성도를 바로 세우지 못 하는 기성교회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구원이란 기쁨, 감동, 감격이나 확신, 징표 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만유가 없어진다 해도 없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있다는 것을, 성도가 죄를 지었다고 도로 지옥으로 끌려간다면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 죄의 능력을 이기지도 못 한다는 말이냐, 성도가 구원을 얻지 못 한다면 예수님이 헛 죽으신 것이냐고 확실히 가르치지 못 하고, 바른 믿음 위에 확고히 세우지 못 했기 때문이다.  

3. 죄사함의 비밀, 의인으로의 거듭남
구원파가 가르치는 “죄사함의 비밀, 의인으로 거듭남”의 교리에는 교묘하고 무서운 함정이 들어있다. 그것은 “말씀 살짝 비틀기와 바꾸기”다. 그들은 죄의 해결에 있어 “안수”와 “전가”를 이용한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인류의 모든 죄가 세례요한의 안수를 통하여 세상 죄, 인류의 모든 죄가 예수님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이다(박옥수). 그리고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고 한다. 그리고는 되묻는다. “이 손에 있던 죄가 안수를 통해 어린양에게 옮겨졌다면 이 손에 죄가 남아있습니까?” 그리고 답한다. “그럴 수가 없지요.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넘겨지지 않고 남는 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그러면 이제 예수님께 믿음의 코드를 꽂으십시오. 마음으로 당신의 죄를 예수님께 안수하십시오. 자, 이제 당신의 모든 죄는 한 점도 남김없이 넘어갔습니다.”
그러고서는 이어서 설명한다. “그렇다면, 죄가 남김없이 예수님께 넘어갔다면 죄인이 그냥 죄인으로 남을 수 있습니까? 없지요? 모든 죄가 넘어갔다면 죄가 없는 사람, 곧 의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자가 의인입니다. 이것이 죄사함의 비밀입니다. 당신은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모든 죄가 사해졌다니, 의인이 되었다니, 구원의 확신이 없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과 감동이겠는가?

4. 교묘한 비틀기와 바꾸기
잠깐! 여기에서 우리는 구원파의 교묘한 말 비틀기(왜곡)를 끄집어내어야 한다.
과연 세례요한이 세상 죄를 예수님께 안수하였는가?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무슨 자격으로? 세례요한이 무슨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죄를 예수님 어린양에게 안수하는 대제사장? 예수님은 세상죄를 안수 받은 죄인이 되어 삼년동안 공생애?
말도 안 되는 왜곡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이 땅에 오셨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를 지셨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구원파는 바로 ‘우리 죄를 지시고’를 이용, 세례요한으로부터 세상 죄를 안수 받은 ‘죄인’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가 해결되었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질문해 보자.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신 죄인으로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아니면 죄 없으신 어린양으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는가?
죄인 예수의 피는 더러운 죄인의 피인가, 흠 없는 어린양의 피인가?  
또 물어보자.
예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어 주려고 오셨는가? 우리를 죄의 저주, 곧 사망에서 구하려고 오셨는가?
당신은 의인이 되어서 천국에 가는가, 아니면 주님의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가?
그렇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 없는 몸을 속죄제물로 드렸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를 기쁘게 받으셨다. 만족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죄 없고 흠 없는 예수 어린양 제물을 만족하게 받으시고 죄인들을 향한 진노를 푸시고 용서하셨다는 증거이다. 그렇다. 모든 죄인들이 용서받은 것이다. 이것이 대속(代贖 Redemption)이다.
구원파는 이 대속교리를 “죄속함”, 아니 “죄씌움 교리”로 바꾸었다.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어 십자가에 처형하였다. 그리고 죄인들이 의인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신 게 아니라 죄인이 아닌 의인이 되고 말았으니 용서고 뭐고가 있을 수도 없다.  

5. 의인이 되었으니
자, 어쨌든 구원파 교인들은 감격 속에 “죄사함의 비밀을 깨달아 거듭난 의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도 안다, 진짜로 의인이 되지는 못 한 것을. 여전히 죄인의 속성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말(言語)’이다. 말의 능력.... 하나님은 ‘네 입으로 말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하든지 그 말대로 된다는 것이다. 입으로 시인하면 시인될 것이요 부인하면 부인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로 ‘의인 됨’을 지킨다.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죄를 죄라고 하면 죄가 된다. 그러나 죄가 아니라고 하면 죄가 아니다. 말대로 되기 때문이다. 의인이 죄를 지을 수 없다. 의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 의인이 행하는 모든 것은 죄가 아니다. 심지어 살인을 저질러도 입으로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한 죄가 아닌 것이다.  
구원파에서 늘 다그치는 이러한 가르침이 너무하다 싶었는지 이요한이라는 사람이 구원파에서 뛰쳐나와 대한예수교침례회라는 단체를 만들면서 좀 다른 교리를 만들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영적구원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죄를 짓는 것은 육신이 아직도 사단마귀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영혼만 구원 받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초대교회 때 교회를 어지럽힌 영지주의자들의 이원론(二元論)적 이단사상이다. 이요한의 그 외의 가르침은 박신찬-유병언이나 박옥수 계열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연예인 유진이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저희 교회는 기독교복음침레회와 뿌리는 같지만 구원파와는 무관해요. 생명의말씀선교회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세요.” 어이없고 안타깝다.

6. 구별과 종말론
이단의 공통된 행태는 자신들만이 진리에 속하고 구원을 받은 특별한 무리라고 구별하고 기성교회를 멀리하거나 심지어 공격한다는 점이다. 기성교회는 구원받지 못 한 어리석은 무리요, 타락한 종교집단이요, 그들이 구원해 내어야 할 선교의 대상이다. 거짓선지자들이 누룩을 뿌리고 사단이 가라지를 뿌린 기성교회는 심지어 바벨론이요 음녀이다. 그들은 십사만사천에 속한다. 신천지가 그렇고 구원파도 그렇고 많은 이단들이 그렇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종말론이 대단히 중요하다. 임박한 종말과 심판. 모든 교회들이 무너지고 무화과 잎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떨어지는 그 두려운 날 그들은 들림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세대주의자들의 종말론을 받아들여 유럽공동체가 단일국가로 이어지고 중동의 평화협정과 전쟁이 지구최후의 아마겟돈 전쟁과 칠년환난, 천년왕국으로 이어지는 종말론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고 가르친다. 이러한 종말론이 압박감과 공포분의기를 조성하여 신도들이 이탈하지 못 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또한 삼위일체를 양태론적으로 해석하는 이단성도 유사하다 할 것이다.    

7. 구원파에 구원이 있을까?
구원파는 명백히 이단이다. 그런데 이단이라도 믿음과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좋은 것 아닌가, 그들의 믿음에 다소 오류가 있다 할지라도 구원을 받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 된 생각이다. 이단이 무서운 것은 아주 작은 차이, 사소한 견해차이로 보이는 것이 엄청난 차이, 삶과 죽음을 가르는 차이를 가져오는 데 있다.
아들을 죽이려는 도적이 있다. 그 아들은 어두운 광야에서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아버지와 비슷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바로 그 때 다른 쪽에 또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 둘의 모습은 매우 비슷하나 하나는 아버지고 하나는 도적이다. 비슷하다고 해서 아버지가 아닌 도적을 따라간다면 그 아들은 죽게 될 것이다.
사단의 모습은 광명한 천사이다. 그의 말은 달콤하고 그의 모습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들의 속임수는 선악과를 따먹게 한 뱀처럼 매끄럽다.

예수님을 죄인 만들어 죽이고 자기들은 의인이 되었다고 하는 그들,
의인이 된 그들이 천국에 갈 때 예수님의 보혈이 필요가 있을까?
구원파에 과연 구원이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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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빵에 붕어 없는데.....^^

(짧게 쓰려고 노력했는데도 길어졌네요. 길게 쓰는 나쁜 버릇은 할 수 없나 봅니다. 아무튼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2014. 5. 9, 대장쟁이)






 
(잠언 1장 8-9절)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에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몸의 금 사슬이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신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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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유병언 구원파와 뿌리만 같다?
"유병언파 소속 아니다"는 해명글 올렸으나 이요한 구원파 소속 밝혀

2014/05/09 ㆍ추천: 0      

연예인 유진이 7일 자신의 팬카페에 올린 글을 통해 자신이 다니는 교회는 요즘 유병언 구원파가 아니라고 밝혔으나, 유병언씨의 장인 권신찬 씨가 뿌리라고 밝혀 이요한 구원파 교회에 출석하고 있음을 자인했다.

유진은 “교회는 구원파와는 무관하다. 기독교복음침례회와 저희교회가 뿌리가 같아서 이런 오해가 생긴 것 같다.”고 해명했으나 이요한 씨가 이끄는 구원파 대한예수교회침례회 소속임을 밝힌 것.

유진은 “아주 오래전에 기독교복음침례회의 권 목사님과 지금 저희 교회 이 목사님께서 함께 복음을 전하시다가 권 목사님의 사위인 유병언씨의 사업시작으로 인해 교회가 흐려지면서 점점 교회의 참 모습을 잃어갔고 그 이유로 지금 저희 교회의 이 목사님께서 몇 십 명가량의 성도들과 함께 기독교복음침례회를 나오시고 대한예수교침례회 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세우셨다. 그게 벌써 32년 전 일이라고 한다.”고 밝혔다.

.유진은 또 “저희 교회를 비난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에게 당당히 말 할 수 있다.”며 “지금까지 저희교회에서 성경말씀에 어긋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다. 제가 다녀본 여러 교회 중에서도 가장 올바로 말씀을 가르치고 순수한 복음만을 전하는 교회”라며 자신이 소속된 교회와 대한예수교침례회가 이단이라는 사실을 부인했다. 유진은 그러나 “만약 이 교회가 앞으로 어떠한 계기로든 타락의 길로 빠지게 된다면 전 주저하지 않고 이 교회를 나올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유진이 쓴 글 전문.

괌에 다녀왔더니 날씨가 오히려 추워졌네요~ 그래도 어제 오늘은 해가 쨍쨍 따뜻하네요~. 저는 아빠를 만나서 점심을 먹고 돌아왔답니다~^^ (전 아직 아빠라고 불러요 아버지는 어색어색)

실은 고민 하다가 글을 올립니다~ 최근 이런저런 말이 많아서 저도 속상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여러분들이 더 속상하고 또 답답해 하실것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전 인터넷을 잘 보지 않는 편이라 댓글에 그리 민감하지도 않고 솔직히 신경을 잘 안 쓰거든요. 그런데 이번 사건(?)은 뭔가 좀 크게 번지는 듯 하여 여러분들께 큰 걱정을 끼쳐드리는 것 같아 이렇게 글을 남기기로 했어요.

물론 오랜 세월 저를 좋아해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여러분은 저에 대한 믿음도 있을 거라 생각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기사나 SNS글들, 댓글들을 보고 정말일까 하는 의구심을 갖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요즘 구원파가 큰 이슈가 되면서 저희 교회까지 연루가 된 것처럼 여론이 형성이 되어 적지 않은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확실히 말씀을 드리자면 저희 교회는 구원파와는 무관합니다.

기독교복음침례회와 저희교회가 뿌리가 같아서 이런 오해가 생긴 것 같아요. 아주 오래전에 기독교복음침례회의 권 목사님과 지금 저희 교회 이목사님께서 함께 복음을 전하시다가

권 목사님의 사위인 유병언씨의 사업시작으로 인해 교회가 흐려지면서 점점 교회의 참 모습을 잃어갔고 그 이유로 지금 저희 교회의 이 목사님께서 몇십 명가량의 성도들과 함께 기독교복음침례회를 나오시고 대한예수교침례회 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게 벌써 32년 전 일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80년대 초반에 단 몇 십명으로 시작된 교회가 지금은 국내외에 500개가 넘습니다.

단지 뿌리가 같다고 이렇게 같은 취급을 하고 비방을 하는 것을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제가 알고 있는 저희 교회의 역사는 이렇습니다. 그런데 구원파와는 별개로 저희 교회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 글들을 살펴보니 정말 터무니없는 것들이더라구요.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것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얘기들이었습니다. 정말 어이가 없고 속상합니다.

저는 15살에 이 교회를 통해 성경을 배우고 하나님의 사랑은 깨달았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보혈로 내 모든 죄가 사함받았다고 믿고 오직 예수님을 저의 구원자로 믿고 그 분의 은혜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그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주님의 말씀을 따라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구요... 저는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고 단지 그렇다러라 그런 것 같더라 라는 말들에 휩쓸려 저희 교회를 비난하고 비방하는 사람들에게 당당히 말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저희교회에서 성경말씀에 어긋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다구요. 제가 다녀본 여러 교회 중에서도 가장 올바로 말씀을 가르치고 순수한 복음만을 전하는 교회입니다. 만약 이 교회가 앞으로 어떠한 계기로든 타락의 길로 빠지게 된다면 전 주저하지 않고 이 교회를 나올 것입니다.

저희 교회 말씀은 생명의 말씀 선교회 홈페이지를 통해 모두 공개가 되어있습니다. 전도집회 말씀을 들어보시길 바래요. 그리고 정말 잘못 된것이 있다면 저에게 알려주세요. 아까도 말했지만 이 교회를 통해 주님께서 일하지 않으시다면 전 새로운 곳을 찾아야 하니까요.

말이 많이 길어졌네요~ 억울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한 마음을 이곳에서나마 이렇게 털어놓을 수 있어서 감사가 됩니다. 여러분들도 부디 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중심을 지켜주시길 바래요.

그럼 여러분~! 모두 바자회에서 뵐게요~! 조금이라도 여러분의 궁금증이 풀리고 걱정이 덜어지고 가려운 곳을 긁어드렸길 바라며...^^;;

김철영 ⓒ 뉴스파워

출처: USA아멘넷


 

[세월호 침몰 참사] “마지막 순간, 아이들 모여 기도하는 동영상 나와”

[쿠키 사회] 전남 진도 세월호 침몰사고로 숨지거나 실종 상태인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가라앉는 선실 안에서 기도를 했던 장면이 새롭게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선대인 ‘선대인경제연구소’ 소장은 8일 자신의 트위터에서 “안산합동분향소에 다시 왔는데 천막 안에서 갑자기 부모님들의 찢어지는 듯한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며 “숨진 아이의 새로운 동영상 하나가 나왔는데 마지막에 아이들이 함께 기도하는 장면이 나왔다고 한다”고 밝혔다.

아이들이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서 표출한 절박함과 처절함의 행동이었던 것이다.

선 소장은 “너무 마음이 아프다”면서 “애꿎게 숨져간 이 아이들 원한을 어떻게 하면 풀어줄 수 있을까요”라고 안타까워했다.

지난달 29일 종합편성채널 JTBC에서는 침몰 당시 선실 내부 동영상을 공개한 바 있다.

고(故) 박예슬 양의 아버지가 방송사에 전해준 이 동영상은 16일 오전 9시 40분쯤 세월호와 진도VTS 교신이 끝날 무렵 아이들이 복도와 방 안에 모여 구조를 기다리는 모습을 담고 있다.

아이들은 “헬리곱터 온다” “아, 다리 아파” “구조 좀”이라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등 그다지 무서워하지 않고 있다. 한 아이가 “엄마 보고 싶다”며 울먹이자 친구가 “살 건데 왜 그래”라며 위로하는 소리도 들린다. 이때까지도 아이들은 선내 방송 지시대로 가만히 기다리면 구조될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범정부사고대책본부는 이날 수색·구조 작업에 대한 중간 결과 발표에서 시신이 발견된 사망자 269명 중 3분의 2가 단원고 학생이라고 밝혔다.

269명 중 4층에서 발견된 사람이 176명으로 가장 많았다. 4층은 단원고 학생의 객실과 다인실 등이 밀집한 곳으로 학생들의 피해가 컸던 만큼 사망자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총 탑승자 476명 중 단원고 학생은 325명, 교사는 14명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현섭 기자 afero@kmib.co.kr
노란 리본과 나비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

서재생 ㆍ 2014/05/09 ㆍ추천: 0      

세월호 실종자들의 무사귀환(無事歸還)을 기원하기 위해 시작된 ‘노란리본 달기 캠페인’을 놓고 ‘무속이다, 부활의 상징이다’ 하는 논쟁이 일고 있었습니다. 즉, 일부 기독교인을 사이에 캠페인의 상징인 근조를 나타내는 노란리본이 무속에서 영혼을 뜻하는 나비이므로 즉시 삭제해야 한다는 글이 전파되어 있는 가운데 필자에게 국민일보 기자님께서 전화가 왔고, 내용인즉 노란리본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듣고자 하는 것 이였습니다. 필자는 근조 노란리본에 나비형상이 있는 것과 나비형상의 상징이 없는 것에 대한 견해에 대한 통화를 했습니다. 즉, 노란리본에 나비형상이 있는 것은 기독교 정서와 교리적인 것은 거리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세월호 실종자들의 무사귀환(無事歸還)을 기원하기 위해 시작된 ‘노란리본 달기 캠페인’은 기독교 정서와 큰 문제를 제기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국민일보 기자와 통화 내용 이였습니다. 즉, 노란리본에 나비가 없는 것은 한국 전통적(傳統的)인 정서에 없는 서구적(西歐的)인 문화에서 발생(發生)한 것이 때문입니다.

불교의 사후(死後)에 대한 종교적 의식에는 살아 있을 때 하는 생전예수재(生前豫修齋)와 사후에는 지내는 천도의식인 수륙재(水陸齋),영산재[靈山齋]가 있습니다. 이 사후 천도하는 종교의식 중에 죽은 자의 혼백을 나비형태인 나비춤으로 고인을 좋은 곳으로 천도하는 의식행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조의 의미와 세월호 실종자들의 무사귀환(無事歸還)을 기원하기 위해 시작된 ‘노란리본 달기 캠페인’은 기독교 교리와 배치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러나 노란리본에 나비형상으로 디자인 된 것은 한국 전통적(傳統的)인 사후 천도재가 혼합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세월호 사고 때문에 대한민국이 큰 슬픔에 잠겨있고, 아직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들을 위해서 온 국민이 노란 리본 캠페인에 진심으로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노란리본을 가지고 한국교회는 국민에게 큰 분노와 근심을 주었습니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한 선배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하신 기억이 생각납니다. 부흥강사목사님께서 교리적으로 중대한 잘못된 말씀을 증거 했고, 집회 후 바로 잘못된 교리를 바로 잡기 위해서 바로 언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최하 6개월 후에 가서 잘못된 교리 부분을 재교육적인 차원에서 바로 잡는 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집회 후 바로 잘 못된 교리를 지적하면 성도들에게 큰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리본 문제도 세월호 사건이 어느 정도 수습이 되었을 때 언급 했으면 하는 심히 안타깝습니다. 지금 우선 되어야 하는 것은 어려움을 당한 분들과 아픔을 함께 울어주고 마음을 같이 해 주는 것이 주님께서도 그것을 더 기뻐하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아니하는 세대(눅7;32)에 대하여 책망하셨고. 사도바울도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고 말씀했습니다.

출처: USA아멘넷

데쓰 밸리는

미본토에서 가장 큰 국립공원입니다.

 

데쓰 밸리는

요세미티와 세쿼야,

킹스캐년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넓고,

옐로우스톤(Yellowstone) 국립공원보다 훨씬 더 큽니다. 

 

이렇게 넓고 큰

데쓰 밸리이니 만큼

가서 볼 것이 너무나 무궁무진하며 

 

천의 얼굴을 가졌다고 할 만큼

데쓰 밸리는 그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데쓰 밸리의

국립공원 지역에 속하지는 않지만

바로 그 인근에 있는 특이한 곳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트로나 피너클스(Trona Pinnacles)입니다.



트로나 피너클스는

캘리에서 데쓰 밸리와 더불어

지질학적, 혹은 지형학적으로 독특한 곳입니다.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캘리포니아의 다른 지역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언뜻 보면

지구가 아닌 화성이나

다른 행성같은 느낌이 나기도 합니다.



어느 특정한 부분은

마치 모뉴먼트 밸리와 닮았기도 합니다.



트로나 피너클스는

지구가 처음 생겨나던 때부터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아니라면, 언제부터

왜 이런 모습을 하게 되었을까요?



세상의 모든 학문에

다양한 주장과 견해가 있듯이

 

지질학도 예외는 아니라서

모든 지층과 지형의 형성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때로는 어느 견해가

다른 견해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에

 다수가 따랐던 학설이

 뒤집히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다수에 의해서 틀렸다고 여겨진 견해가

 

다시금 득세하는 일들이

지질학계에서 자주 벌어지곤 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트로나 피너클스의 형성과정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위해 그곳으로의 여행을 떠나볼까요?



먼저,

 트로나 피너클스는

크게 3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Southern Group과

Northern Group, 그리고

Middle Group이 있는데  

 

Middle Group 외에

다른 두 곳은 일반인들의 접근이 쉽지 않습니다.



데쓰 밸리의

Bad Water가 그랬듯이

이곳도 한 때는 거대한 호수지역이었습니다.

 

바로

모하비 사막 일원의

거대한 호수였던 Searles Lake의 일부였죠.



Searles Lake은

Endorheic Lake 이었습니다.

 

Endorheic 호수란,

분지처럼 지역 자체가 낮거나,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인 곳이라서 

 

흘러 들어온 물이

다른 곳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는 호수를 말합니다.



이곳이

예전에 호수였을 때,

 

땅 아래는

지금의 Salton Sea와 같이

부글 부글 끓는 Hot Springs 지역이었죠.



Searles Lake은

탄산염으로 축적되어 있었는데

 

땅아래의 끓는 물들이

호수 아래층의 갈라진 틈을 통하여

위로 올라오면서 칼슘과 결합하여 Tufa를 만들기 시작했죠.



이러한 Tufa 들은

이곳이 아직 호수였을 때

물속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지구의 기후가 변화되기 시작했고,

 

거대한 호수였던

Searles Lake은

 

데쓰 밸리의

Lake Manly처럼

물이 마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Tufa가 드러나기 시작했죠.



Tufa의 형성과정이

모노 레익(Mono Lake)의 그것과 비슷한데

 

차이점이 있다면

모노 레익은 지금도

여전히 물이 있는 호수인 반면에

  

트로나 피너클스가 있는

Searles Lake은 물이 완전히 말라버린 dry lake이라는 것이죠.



이곳의 Middle Group을

한바퀴 돌아 보는데 2-3시간이 걸립니다.



곳곳을 느긋하게 돌아보며

사진까지 촬영하려면 최소한 4-5시간은 걸립니다.



주말에 가면 오토바이족들이나

굉음을 내지르며 달리는 둔버기족이나 4×4족들을 볼수도 있습니다.

 


 

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세월호 유족, '침몰 후 찍은 동영상' 최초 공개
유족들...구조만 빨리 했다면 살 수 있었는데...통곡
 
서울의소리 기사입력  2014/05/09 [06:07]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은 8일 오후 9시께 세월호 희생자 정부합동분향소에서 버스 5대에 나눠타고 서울 여의도 KBS에 항의방문에 돌입했다.

그러나  kbs 보도국장 김시곤의 망언에 대한 사과를 받지 못하자 세월호 유족들은 9일 오전 2시30분쯤 결국 청와대로 향했다.


버스로 KBS를 출발한 세월호 유가족 200여명은 경복궁 앞 광화문 광장에 모였다가 인도를 따라 청와대 옆 효자동주민센터 앞까지 희생자 영정을 품에 안고 행진하며 대통령 면담을 요구했다.


이들은 박근혜 면담 요구가 거절되자 청와대 진입을 시도 했지만 저지하는 경찰에 가로막혀 희생자들의 영정사진을 품에 안고 바닥에 주저앉아 항의 농성에 들어갔다.

유가족들은 청와대 입구 효자동 사무소 앞 차도에서 연좌농성을 하며, 희생된 학생들이 애절하게 구조되게 해달라고 '아멘'하며 기도하는 모습의 동영상을 처음 공개하였다.


세월호 사건 이후 최초로 공개된 이 영상은 '16일 오전 10시경 침몰 후 8시간이 넘은 오후 6시38분에 세월호 희생자 학생들이 촬영한 것이다'고 유족이 9일 청와대 옆에서 공개한 것이다.

유족들은 "잠수 구조를 포기한 16~17일 적극적인 구조 활동을 하였다면 살릴 수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라며 이를 보고 통곡을 하였다.


유가족들은 청와대를 향해 "시위를 하러 온 것이 아니고  대통령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싶다"며 "KBS 보도국장의 망언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사과를 하러 오지 않는 보도국장 대신 KBS에 사과를 받으러 왔으나 사과를 하지않아 결국 청와대로 왔다"고 말했다.


날이 훤히 밝아 아침이 되었지만 유족들은 미동도 하지않고 게속 박근혜 면담을 요구하며 연좌 농성을 하고 있다.



 
    마음을 열어주는 따뜻한 편지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가둬 놓고 살고 있습니다. 서로를 못 믿으니까 마음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스스로 감옥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사랑의 눈으로 마음의 문을 열면 세상은 더욱 넓어 보입니다. 세상은 아름답게 보입니다 내가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으로 향하면 세상은 내게로 다가와 나를 열고 넓게 펼쳐 집니다. 빈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한 없이 아름답고 또 따뜻하지요 정말 살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이거든요. 내가 있으면 세상이 있고 내가 없으면 세상이 없으므로 분명 세상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입니다. 내가 더 마음의 상처를 입었어도 먼저 용서하고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아름다운 화해의 정신으로 이 세상을 여는 작은 창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우리들의 아름다운 삶 속에서 -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는 의미는?(Q&A) (2) / 박신 목사



    2. 성경전체(context)와 연결 된 뜻 - 구원에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

    구약성경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5:39,40)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요5:18)으로 인해 예수님의 정체성을 따지고 들었습니다. 상기본문은 그런 논쟁 중에 예수님이 당신의 신성(神性)에 대해 변증하는 말씀입니다. 요점은 유대인들이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고 그럼으로써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은 곧 당신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폐하지 않고 완전케 하려는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성경 전체가 오실 메시아에 대해 예언하고 있는데 바로 당신이 그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진정으로 메시아를 대망하고 영생을 얻고 싶다면 구약의 그에 대한 예언들을 온전하고도 세밀하게 연구했어야 했으며 또 그러면 당연히 당신을 믿고 따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바로 앞에서 “그 말씀(하나님의 구원진리와 보내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라”(요5:38)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본문에 이어서 유대인들을 견책하는 말씀이 흥미롭습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요5:45-47)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당신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 믿지 않는다고 해서 직접 고소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대신에 모세가 고소한다고 합니다. 이미 1500년 전에 죽은 모세가 어떻게 고소합니까? 예수님은 모세가 기록한 글을 믿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모세오경 즉, 율법을 비롯해서 구약성경 전체를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얼마나 중시했습니까? 모세를 믿지 않았다는 예수님의 설명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학적으로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이 이 토론에서 말씀하신 앞뒤 내용과 연결해 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상고는 하지만 실제로 그 말씀이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택함 받은 족속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수여 받아 소지하고 있고 제대로 지키고 있으니 구원은 이미 얻은 것으로 여겼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율법적 행위만 중요시 했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진리와 또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해선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실은 너희가 율법조차 제대로 믿지 않았고 또 지키지 못했으니 바로 모세가 아닌 모세를 통해 받은 그 율법이 너희를 고소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 원리를 명백히 밝혔습니다.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2:12b) 율법을 준수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면, 율법을 하나라도 어기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답변 1장에서 살펴본 대로 유대인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럼 자기들이 그렇게 자부심을 갖던 바로 그 율법에 의해 정죄를 받게 되므로 주님은 모세가 그들을 고발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문자적 준행과 열 번째 계명

    문제는 유대인들 스스로는 절대 율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살펴본 대로 어쨌든 증서를 주고 이혼했으며, 하나님께 서약한 것은 부모를 희생하고라도 지켰으며, 안식일은 더더욱 철저히 지켰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 외에 장로들이 고안한 세부적 실천규정까지 준수했으며, 의심과 혼동이 생길 때마다 랍비의 해석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율법준행은 극도로 문자적 형식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말1:8,9)라고 한탄할 정도였습니다. 희생제물의 종류와 개수만 맞추려니까 저는 것 병든 것으로 채웠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가장 좋은 것을 도리어 자기들이 차지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율법에서 가장 핵심이자 근본인 십계명마저 사실상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관한 첫 네 계명들을 그들 나름대로 성실히 지켰습니다. 예컨대 야훼 하나님의 이름은 아예 부르지도 않았으며 안식일은 추가규정을 39개나 만들어 지켰지 않습니까? 또 인간관계에 관한 나머지 계명인 부모공경,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의 금지 등도 겉으로는 비교적 잘 지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인간관계 계명 중에 다른 것은 행동으로 짓는 죄지만 마지막 계명만은 마음으로 짓는 죄입니다. 살인은 이웃의 생명, 간음은 이웃의 아내, 도적질은 이웃의 재물, 거짓증거는 이웃의 인격을 직접적인 행동으로 파괴한 것입니다. 탐심은 아직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그런 악한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것이 간음이요, 말로 형제를 욕한 것이 살인이라고 죄의 의미를 더 고차원적으로 해석해준 까닭입니다. 이 마지막 계명에 넘어지지  않을 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종교적으로 경건하고 신실해도 단 한 명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실은 그 이전에 유대인들은 다른 십계명들도 행동으로 무수히 어겼습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고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1:15-17)

    이스라엘이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는 까닭은 그들 손에 죄로 인한 피가 가득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난한 자 고아 과부들을 학대했습니다. 저울을 속이는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제대로 변호하지 않는 악행은 거짓 증거로 약자들을 수탈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소망하는 공평과 정의가 완전히 실종되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무수한 제물을 갖고 와도 받지 않으며 성전 마당만 밟고 간다고 한탄했던 것입니다.(사1:11-12)
      
    바울도 로마서 2장에서 유대인들의 죄를 신랄하게 지적했습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롬2:23) 그래서 1:18-32까지 열거했던 이방인의 죄도 함께 감안해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선언하였느니라.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3:9-18)고 선포한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인류의 영적 상황일뿐 아니라 예수님을 모르는 현재와 장래의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의 상태입니다.  
      
    율법의 역할

    결국 모세의 율법은 유대인들의 도덕적 성결에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계속 선포하게 했던 메시지는 손에 피가 가득할 정도의 악행에서 돌이키고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들과 상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종교적 의식에 충실했어도 당신의 구원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설명한 것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19,20) 율법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음을 깨닫게 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고백케 만든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 믿기 전의 바울을 포함하여 지금껏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해 갖고 있던 개념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이미 소지한 택한 백성이므로 구원을 받았거나, 최대한 양보해도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얻는다고 여겼습니다. 반면에 성경은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줄 뿐이라고 합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롬4:15) 요컨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뜻이 그것을 지키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이는 너희로 들어가서 기업으로 얻을 땅에서 그대로 행하게 하려 함인즉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신4:5,6)

    율법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행할 기준이었습니다. 열국들에게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백성임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입경하는 것은 하나님께 구원 받았음을 상징합니다. 율법을 지키면 그 땅에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단지 그 땅에 들어간 후에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야 할 표준이었습니다.

    출애굽 첫 세대가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한 것이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가 아니지 않습니까?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서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았기”(히3:15,16) 때문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도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고 그 마음에 하나님은 실종되고 애굽에서의 즉, 세상의 풍요와 안락과 형통만 목표로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율법과 언약

    구약백성에게 율법 준행이 구원의 기준이 아니었다면 다른 기준이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을 그 대표적 예로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세가 율법을 받기 약 5백 년 전 사람이었습니다. 율법과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롬4:3, 창15:6)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약속(창12:1-3)이 실현될 기미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음에도 하나님 그분의 신실함을 믿었기에 구원 받은 것입니다.

    특별히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롬4:13a)을 믿었습니다. 그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롬4:13b)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기 후손을 통해 이 땅에 그분의 나라를 세워주겠다는 언약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처음으로 불현듯 주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로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하나님이 아담이 타락한 직후에 사탄을 저주한 말씀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을 패배케 한다는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최초로 언급된 복음이라고 해서 ‘원시복음’(Protevangelium)이라고 합니다.]  

    아담이 타락한 것이 율법을 지키지 않았던 연유가 아니지 않습니까?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고 그 자리를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인 자기가 대신 차지하려 한 까닭입니다. 인간이 타락할 때부터, 아니 태초에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예비 되어 있었습니다.(요1:1) 그 구원은 윤리적 선행과 공적으로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에 하나님을 타락 이전의 원래 위치대로 복귀시키는 방식이었습니다.  

    바꿔 말해 구약시대에도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했습니다. 아담에게 주신 원시복음이자 최초의 언약이 그 표현과 내용이 조금씩 더 구체화되면서 에녹과 노아를 통해 아브라함에게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또 아브라함의 약속의 씨인 외아들 이삭을 거쳐 모세와 다윗에게까지 계승 확대 발전되었습니다.

    결국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갈4:4,5)이었습니다. 아담 때의 약속을 골고다 십자가에서 달성했다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율법으로 구원을 받을 것 같으면 구태여 따로 그 아들을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의 범함과 깨달음만 있고 구원의 방도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아들을 보낸 것입니다.

    예수 믿어 구원 얻은 아브라함

    바울은 구약시대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 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3:22,23) 몽학선생은 고대의 가정교사를 말합니다. 특별히 여러 아들 중에 유업을 얻을 아들을 선택해 가르칠 정도의 권한을 가졌습니다. 그런 몽학선생에 비유된 율법은 사람들로 하나님의 유업을 잊게 만들어주는 예수님의 구원에 대해 가르치고 십자가로 이끄는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8:56) 예수님의 놀라운 이 선언을 보십시오. 예수님보다 근 이천 년 전의 아브라함이 당신을 보길 소망하다가 실제로 보았기에 구원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는 유대인들과 구원에 관해 논쟁을 벌이고 있는 중에 그들더러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이기에 당연히 구원받는다고 착각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당신의 후손에서 약속의 씨앗인 메시아가 날 것을 믿었습니다. 무엇보다 윤리적 잣대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도무지 없지만 그분께서 언약의 계승자로 택해주시어 그 언약을 이뤄갈 수 있게끔 자신의 삶의 모든 면에서 보호 인도해주셨음을 믿었습니다. 자신의 인간적 의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만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자신을 품어주셨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구원 받을 아무 공로 없음을 인정했기에 그의 믿음은 사실상 예수님의 조건 없는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인 믿음이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2-24) 아브라함은 자신이 철저한 죄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구원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때부터 율법 준수가 구원을 얻는 수단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 혈통적 후손에게도 그 원리는 당연히, 아니 더더욱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그와는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언뜻 보기에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고 가르치니까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길을 막는다고 여기고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려 한다고 비난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리스도로 은혜로 인한 값없는 구원을 두고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3:21)고 말합니다. 참으로 성경이 정미하지 않습니까? 이전에 율법의 최고 전문가로서 가장 유대인다웠던 바울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두고 율법과 선지자를 폐한다고 간주했지만, 성경은 거꾸로 예수님의 의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이 정반대로 틀렸다는 것입니다. 2장 답변 서두에서 유대인들이 구원을 얻으려고 성경을 상고하나 실패했다는 예수님이 지적하신 그대로입니다.    

    살펴본 대로 십계명조차 제대로 지킬 수 없기에 율법에 따라 온전한 의를 이룰 수 있는 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의 도덕적 영적 실상이 그랬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임을 율법 자체가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그리스도가 와서 인간 쪽의 공로와 전혀 무관한 값없는 구원을 주실 것이라고 계속 예언했는데도 유대인들이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의 무수한 제물을 받지 않으며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다고 한탄했던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에 바로 이어지는 예언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주홍이나 진홍 즉, 가장 진한 붉은 색으로 손에 가득한 피(15절)를 상징합니다. 그럼에도 눈과 양털처럼 희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지 않습니까?

    이처럼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성경 전체가 그리스도에 의한 대속적 구원을 증거하고 있기에,  예수님이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겠다.”는 말씀은 당신께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돌아가시겠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은혜의 복음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심으로써 구약성경의 계시를 성취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3:13,14)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던 우리를 대신해서 주님은 죽으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대속 은혜를 믿는 자는 하나님과 완전히 화목되어서 그분의 친 백성이자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기 때문입니다.(롬8:1,2)

    3. 첨언 - 예수님이 율법을 폐했다고 믿는 오류

    질문과 연관해서 덧붙이고 싶은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복음으로 구약의 율법을 완전히 대체했기에 더 이상 율법은 소용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간혹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에서 용도 폐기된 부분이 일부 있습니다. 바로 제사법과 정결례와 음식법과 사회법 등입니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9:9)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의 동물 제사로는 속죄가 완전하지 못하며 일시적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 제사법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은 개혁될 때까지 즉,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이 완성되고 성경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온전히 계시될 때까지 잠시 맡겨둔 것이라고 합니다. 잠시 맡겨두었다는 것은 때가 되면 용도가 다한다는 것입니다.

    제사법과 정결례 등은 그 전부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영단번의 제물로 바쳐진 이후로는 더 이상 동물 제사나 정결법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제사법이라는 명문화 된 종교의식과 절차만 폐지된 것이지 그 안에 담긴 대속의 원리는 폐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되었습니다.

    또 음식법과 사회법은 당시의 상황과 여건에 맞춘 것들입니다. 예컨대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이 위생적 처리와 보관이 힘들었기에 부패를 염려한 것입니다. 시대적 환경이 완전히 변하고 발전된 지금은 그 규정에 얽매일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종교적 의식과 절차보다 자신의 심령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채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율법 폐기론자들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에 대해 오해하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주시겠다는 뜻이었다면, 복음이 율법을 대체한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그렇게 오해한 것일 뿐, 살펴본 대로 성경은 구약시대부터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류 구속의 경륜 안에서 복음과 율법은 상호 역할이 다른 것입니다. 복음과 율법이 상호 대칭, 반목하는 것이 아니기에 대체될 성격이 아닙니다. 율법은 윤리적으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이방인들 앞에 여호와를 아는 백성답게 살게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구원과 연관해선 모든 이로 죄를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고백케 해서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신약의 율법이라고 할 수 있는 산상수훈도 동일합니다. 산상수훈을 따라야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수훈의 첫 말씀대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차지합니다(마5:3). 그렇게 심령이 가난해져 천국을 가진 자들이 세상 앞에서 빛과 소금으로 선한 행실을 보임으로써 사람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구약 율법을 주신 뜻과 완전히 동일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구원 받은 신자는 아무리 더 이상 영원한 심판의 정죄함이 없어도 산상수훈은 물론 구약의 율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으로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율법과 복음을 대치 관계로 오해하는 자들에게선 극단적 반응이 나타납니다. 복음으로 율법이 완전히 무용화 되었으므로 모든 종교적 의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교회, 주일성수, 목사, 제직, 교단, 십일조 등등은 이젠 아예 필요없다고 합니다. 심지어 복음으로 모든 죄에서 구원 받았으니 죄를 지어도 된다고까지 주장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서 더 살리요.”(롬6:1,2) 신자는 더더욱 율법대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무력화시킨 것은 율법이 아닙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외식적 율법주의와 잘못된 선민사상이었습니다. 대신에 율법과 선지자는 완전케 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구원을 얻으려면 복음 외에도 할례 같은 종교의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유대율법주의처럼 되어선 안 되지만,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인식하여서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신자를 볼 때에 그리스도도 함께 보게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십자가 구속의 진리를 땅 끝까지 전파하기 위해서 함께 모여 하나님의 일에 죽기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1/23/2014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미연방대법원, '공중기도 위헌 아니다' 판결
    케네디 대법관, '의회기도는 정교분리 원칙과 양립하는 미국의 전통'

       
     
      ▲ 미연방대법원은 시의회 공중기도모임이 위헌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심지어 기독교적 성향을 가진 기도 모임이라도 헌법위반은 아니라고 밝혔다.  
     

    뉴욕 주 그리스 시가 타운홀 미팅 때마다 기도를 하는 것은 위헌이 아니라는 판결이 나왔다. 연방대법원은 공중기도는 헌법에 위배되지 않으며 기도내용이 특정종교에 편향되어 있더라도 불법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을 비롯해 새무얼 알리토, 안토닌 스칼리아, 클래렌스 토마스 대법관 등 보수적 성향의 대법관 4명은 찬성표를, 스테픈 브레이어, 엘리나 케이건, 소니아 소토마이어, 루스 긴스버그 대법관 등 진보적 성향의 대법관 4명은 반대표를 던졌으나 결정적으로 앤소니 케네디 대법관이 찬성표를 던져 공중기도는 5대 4 합헌으로 판결이 났다. 

    케네디 대법관은 "마쉬 대 챔버스(Marsh vs. Chambers) 소송에서 의회의 기도가 정교분리 조항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연방대법원 판례가 있듯이 기도는 종교적이지만 헌법의 정교분리 조항과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헌법이 구성될 때부터 의회는 기도해 왔고 이것은 의원들이 보다 숭고한 목적을 위해 사소한 차이를 초월하며 정의와 평화라는 공동의 열망을 표현하도록 했다”며 찬성이유를 설명했다. 

    2008년 유대인 수잔 갤로웨이와 무신론자 린다 스테픈스는 타운홀 미팅에서 다수의 크리스천 의원들이 공중기도를 하며 아멘을 외치는 것은 타종교인들에 대한 차별적 행위이며 수정헌법 1조가 명시한 정교분리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소송은 '기도에 대한 중립성'보다는 '기독교적인 기도를 금지시키겠다'는 의도가 강한 것으로 많은 크리스천들의 공분을 샀다. 케네디 대법관은 이를 의식한 듯 기도가 종교적 중립성을 가져야 한다는 인식에 대해서도 분명한 선을 그었다. 그는 "기도가 중립적(nonsecterian)이어야 한다는 것은 기도모임을 주관하는 의회나 이를 판단하는 법원이 기도 내용까지 검열하고 심의하도록 강제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밝혔다. 

    현재 미국에서는 뉴욕의 그리스 시 외에도 다수의 지역에서 공공기관의 기도에 대한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사회는 이를 종교자유의 전통과 역사를 가늠하는 중요한 시험대로 인식하고 있다. 이번 판결은 관련 소송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박화중 기자 / 미주뉴스앤조이


     

     
      자녀를 리더로 만드는 언어 교육 10계명 1. '미안하다''감사하다'를 입에 달고 살도록 하라. 말하기는 습관. 어렸을 때 버릇들이지 않으면 커서는 민망해서 못 한다. 2. 존댓말은 말 배울 때부터 가르치라. 부모가 자녀에게 존댓말을 사용하면 아이도 따라 하게 마련이다. 3. 남의 말을 경청하게 하라. 남의 말을 잘 들으면 친구들을 잘 사귈 수 있다. 4. 자녀가 할 말을 대신하지 말라. 아이가 생각을 정리해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안 생긴다. 말을 잘 못하더라도 맞장구를 치며 끝까지 들어주도록 해야 한다. 5. 말하기 매너도 가르치라. 말하면서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등의 나쁜 습관은 빨리 고쳐준다. 그러려면 아이가 말할 때 부모는 하던 일을 멈추고 열심히 들어주는 게 우선이다. 6. 발표문은 직접 쓰게 하라. 어려서부터 발표문을 스스로 써봐야 남 앞에서 자연스런 말투로 발표하는 능력이 길러진다. 거창하지 않은 주제를 잡아 쉬운 단어로 쓰게 한다. 7. 때와 장소에 맞게 말하도록 하라. 아이가 다른 사람 앞에서 눈치 없이 얘기할 경우 야단치지 말고 그 말이 어떤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지 나중에 쉽게 설명한다. 8. 논리적으로 말하게 하라. 개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원인과 결과를 정확하게 갖춰 말하도록 한다. 풍부한 독서는 논리적인 사고의 토대가 된다. 9. 긍정적으로 말하게 하라. 부모 먼저 긍정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자녀의 기를 살려준다고 거친 말투나 욕을 해도 그냥 두면 아이를 망친다. 10. 주제가 있는 토론을 자주 하라. 성적, 친구 등 개인 신상에 관해서만 얘기하면 부모와 대화하기를 싫어한다. 시사 문제 국제흐름 등 폭 넓은 주제로 토론해본다. 끝으로 아이에게 꿈을 갖도록 하여야 합니다. 꿈을 구체화 시키며 선포하여 꼭 실천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리더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행동입니다. 여러 경험을 많이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시오. '지식은 빌릴 수 있지만 경험은 빌릴 수가 없습니다.' -- 옮겨온 글 -- 파란나라 / 혜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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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종자체가 변형된 북한!

    박선영 의원님이 북한을 위해 오랜 금식 이후, [아래와 같이] 한경 논설위원과 대담을 했습니다

     (바쁘신 분들께서는 8분 40초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놀라운 말씀을 하시더군요. 북한 사람들이 남한 사람들에 비해 신장이 엄청나게 줄어 든 이유가... 1990년대 고난의 대행군을 통해 300만명이 아사해 죽었기 때문이 아니랍니다. 그게 이유가 아니랍니다. 70년도부터 시작했던, 노예화 작업....

    사람이 하루 필요한 열량이 100이면 그걸 80, 70으로 의도적으로 줄였답니다. 사람이 필요 칼로리가 100이라면 배급을 70~80으로 줄여 벌이면 본능적으로 집단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 진답니다. 결국 사람이 굶으면 다른 거 생각 못하고 그저 밥주는 당을 위해 충성하듯이... 충성을 위해 의도적으로 배급을 줄였답니다.

    북한 사람들이 김일성 김정일에게 발광을 하듯 울부짖고 하는 이유가 오랜 연구 끝에 배급량을 조절해서 최대 충성도가 나오는 배급량.... 그 칼로리만 배급을 통해 줘서 충성도를 높였답니다. 그게 바로 바이오팔라틱스...한국명으로는 생명정치...사람 생명을 가지고 정치에 이용한다...

    세계 최고의 석학 푸코의 이론을 북한이 실제 사용한거 같습니다. 푸코라면 “광기의 정치”라는 저서로 일반인들도 익히 알고 있는 석학인데...그 마지막 중요 주장이, 바이오팔라틱스...생명을 조절해서 충성도를 높이는 로보트를 만드는 이론...그걸 북한이 시행 했답니다.

    기근과 집단 아사가 평균 신장률을 대폭 낮춘다면, 러시아 스탈린 때 대 기근...중국의 모택동때 한국 인구만큼 아사한 사태....러시아와 중국도 평균 신장이 대폭 줄어야 하는데, 중국과 러시아는 작아지지 않았어요. 굶어 죽을 지언정, 유전자 자체에 내제되 있는 신장은 작아 지지 않아요. 그런데 북한은 DNA 자체가 변형 되버렸습니다.

    70년도 부터 30년 넘게 장기간 바이오팔라틱스를 시행한 결과, 인종 자체가 달라져 버렸어요. 탈북 고아들을 국내로 들여 와서, 연구한 결과도 똑같았답니다. 한족이 아버지인 아이들은 충분한 영양을 공급한 결과, 키가 원 상태로 회복됬데요. 그런데 북한의 아버지를 둔 아이들은 아무리 영양을 공급해줘도 키가 자라지가 않았데요. DNA가 변형 된겁니다.

    그 이론의 주요 논거는....생명은 어떤 특정 환경에 처하면 거기에 적응해 버린다.
    예를 들어.....갈라파고스...똑같은 종이지만, 갈라파고스섬이라는 특수한 환경에 처한 동물들은 2세대를 거치면서 거기에 맞게 적응이 되버려 원래 종과는 다른 외모를 갖게 된다. 이게 갈라파고스 이론 맞지요? 북한 사람들이 오랜 기간 정치적 목적에 의해 생명의 근원이 되는 배급을 강제적으로 조절이 되버리니까, 그 영양소만 가지고도 생명 유지가 되도록 DNA 자체가 적응되 버린 겁니다. 원래 북한 사람들이 남한 사람들 보다 키가 더 컷어요.

    일제 시대 학자들이 통계를 낸 한국의 평균 신장입니다.



    압도적으로 북한이 더 컷어요. 이게 반세기 만에 역전이 되버렸습니다. 큰키가 유지 되기엔 배급량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 몸이 스스로 키를 낮춰 버린 겁니다. 그게 DNA에  학습되서 2세대들 까지 저 신장의 인종으로 인종 자체가 변형되 버렸어요. 이게 푸코의 바이오팔라틱스입니다. 오직 김일성에 대한 충성도 높은 로봇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국민들을 가지고 인종 실험을 한거에요. 북한 이 나라는 나라 자체가 인종 실험실이 되버린 겁니다.

    성균관대 다니엘 쉬베켄디엑 교수의 연구 결과는 더 충격적입니다. “여성의 키가 남성보다 더 큰 유일한 사례가 될 것”이라 말하였으며, 탈북자들이 북한의 취약계층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닌 북한의 전 계층과 모든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고 전했다.”

    여성의 키가 남성보다 더 큰 유일한 나라랍니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북한이 거슬려 버렸어요. 그런데 2006년도 충격적인 증언이 나옵니다.
    “2005년에 질병관리본부에서 3070명의 탈북자를 대상으로 정밀하게 건강상태를 조사했다. 탈북자들의 건강검진 결과 우리보다 평균신장은 8cm, 평균체중은 8kg 정도 적게 나타났다. 게다가 14세 이하의 경우 그 수치가 2배에 달해 평균신장은 16cm, 평균체중은 16kg이 우리보다 적다.”

    1~2세대보다 14세 이하, 3~4세대 아이들의 평균 신장이 급격하게 줄어 들고 있습니다. 이들은 고난의 대행군을 경험하지 않은 그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입니다. 세대를 이어 갈수록 이전 세대의 영양불균형이 유전되어 빠르게 고착화 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부분이 중요합니다.

    “질병관리본부에서는 2003년부터 2005년까지 계속 조사를 했다. 하지만 조사된 자료의 정확성이 검증되지 않았다면서 공개를 안했다. 결과가 너무 심각하고, 이게 공개되면 북한 정부가 불편한 심기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공개하지 않은 것 같다.”

    이때가 참여 정부 때 입니다.


    출처: http://cafe.daum.net/_service/bbs_read?grpid=12Oc7&fldid=BUVI&contentval=000gazzzzzzzzzzzzzzzzzzzzzzzzz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는 의미는?(Q&A) (1) / 박신 목사


    [질문]

    예수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요? 제가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말씀을 따른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따르다보면 주님을 사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부정하지 못하겠습니다. 처음엔 사랑 이었던 행동이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형식적인 습관이 되고 또 그래서 율법이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답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5:17)

    성경 말씀의 해석은 먼저 그 구절이 속한 본문에서의 뜻을 밝힌 후에 성경 전체에 계시된 진리와 연결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하셨습니다. 따라서 먼저 말씀이 속한 앞뒤 단락에서의 뜻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 주제는 신학적으로 따져볼 내용이 많아 자칫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가능한 이해하기 쉽게 접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본문(text)에서의 뜻 - 율법의 윤리적 측면의 완성

    주정뱅이로 오해 받은 예수님


    우선 말씀의 첫 부분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님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처럼 오해했다는 사실을 함의(含意)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지 말라”고 전제했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이 볼 때는 예수님이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과 달리 경건하지도 신실하지도 않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11:19) 예수님이 포도주를 마시고 세리와 죄인과 교제를 하니까 율법을 어긴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수여한 율법(모세오경)*에는 포도주를 마시면 안 된다거나, 세리와 죄인과 교제를 금하는 규정이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후대에 그 율법을 더 잘 지키기 위해서 세부적인 실천 규정을 고안 추가해서 시행했습니다. 그것들이 구전으로 전해내려 왔는데 복음서에서 “조상들(장로)의 유전”(막7:3)이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바빌론 포로귀한 이후에는 자기들이 율법대로 살지 않아 하나님께 벌을 받아 그 고난을 겪었다고 이해하고 율법을 더 잘 지키려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율법과 구전을 정밀히 해석 보완해서 미드라쉬, 미쉬나, 탈무드 등의 성문화된 규정과 예화집을 저작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이라고 말할 때는 가장 좁게는 십계명에서 시작해, 모세오경, 구약성경전체, 각각을 또 이런 성경 외의 주석 및 보충저작물까지 다 합친 것까지 의미합니다.

    예수님 당시는 그런 성문화 작업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아직은 구전으로 전해진 것들이 주였습니다. 예컨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여자의 화장금지와 5리 이상 여행금지 등을 포함해 39가지 규정을 추가했습니다. ‘세리’는 로마의 편에 붙어 동족을 수탈한다는 자로 취급하여서, 또 ‘죄인’은 모세의 율법은 물론 자기들이 정한 유전을 위반한 자들로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다고 보고 교제를 금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규정은 밥 먹듯이 위반하고 세리와 죄인들을 친구로 삼으니 율법을 무시하고 폐하는 자로 간주한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마5:41)도 주님이 산상수훈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안식일에 누군가 위급한 일로 도움을 청할 때에 장로의 유전으로는 오리 이상 여행하면 안 되지만 주님은 그 배인 십리라도 함께 가라고 권합니다.

    안식일이라고 무조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이를 돕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면 얼마든지 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십리를 가라고 해서 예수님마저 여행 거리를 제한했다고 이해해선 안 됩니다. 정말로 그런 선한 일이라면 얼마든지 멀리 가도 된다는 의미로 두 배나 강조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자 유대인들이 문제 삼았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12:11,12)고 대답했던 대로입니다.  

    이 사건이 있기 바로 전에 바리새인에게 주님은 자신을 성전보다 크며(마12:6) 또 안식일의 주인(마12:8)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성전보다 큰 자라면, 또 안식일의 주인으로써 그 안식일 제도를 제정하여 사람들로 거룩하게 지키게 한 자가 당신이라면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당신이 바로 모세의 율법을 제정하여 수여하신 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분이 율법을 폐할 리는 결코 없습니다.

    율법의 해석을 정확하게 하신 예수

    예수님은 장로의 유전은 위반했을지라도 구약성경의 율법은 위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이는 오히려 그 장로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주님과 제자들이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장로의 유전을 위반했다고 시비를 걸어왔습니다.(마15:1) 그 때에 주님이 답변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15:4-6)

    장로들은 부모 부양할 돈을 성전에 헌금하겠다고 서약하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께 맹세한 것은 절대 어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분명 좋은 의도로 제정했으나 사람들은 부모를 부양하지 않으려는 의도로 악용했습니다. 입으로 서약만 하고선 지키지 않는데도 그냥 두었는데 장로들은 자기들이 정한 문자적 규정에 스스로 묶여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서약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도 형제와 송사가 생각나면 가서 화해부터 하고 오라고 했지 않습니까?(마5:23-25) 하나님의 뜻은 신자가 당신께 종교적 행사를 문자적으로 준행하기 이전에 세상 사람들 앞에서 소금과 빛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기는커녕 그 해석을 올바르게 바로잡아 주었습니다. 율법을 완성했다는 첫째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하는 방식을 잘 살펴보면 거의 다 “너희는 ~~ 하라고 배워왔으나, 나는 그보다는 ~~ 하라”고 하십니다. 장로들이 자기들 유전으로 율법을 잘못 가르쳐왔던 관습을 바로 잡겠다는 뜻입니다.  

    대표적 예가 모세의 이혼증서에 관한 해석입니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5:31,32)      

    신명기에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신24:1)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유대 장로들은 남편이 아내에게서 하자를 발견하면 증서를 주고 이혼해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수치되는 일을 음행으로 한정하고 그런 연고 외에는 이혼하지 말라고 원래 율법을 주신 뜻을 정확히 해석해주었습니다.

    나아가 여자를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음행에 대한 범위를 확대했습니다.(마5:28) 죄가 되는 범위 즉, 하나님의 기준대로 따라야 할 차원이 행동과 말뿐 아니라 마음에까지 이른다고 율법을 더 진지하고 심오하게 적용했습니다. 그런 분이 율법을 폐할 리는 만무합니다.    

    율법대로 거룩하게 살라.

    이처럼 예수님은 장로의 유전의 잘못된 점들을 바르게 고쳐주었습니다. 율법을 바르게 해석했다는 것은 당연히 산상수훈을 듣는 청중들더러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대로 살아야 한다고 권면하려는 의도입니다. 율법을 완성한다는 둘째 의미입니다.  

    본문이 속한 앞뒤 문맥을 보십시오. 먼저 앞에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빛이라고 합니다. 소금의 맛을 잃지 말아야 하고 또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합니다. 신자의 거룩한 삶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서 착하다는 칭찬을 들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선행을 하되 사람들로 반드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끔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면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출19:6, 레11:45) 계속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하여야 할 뿐 아니라, 제사장 나라로서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족속들로 참 하나님 여호와를 알고 믿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모든 민족의 복의 근원으로 세우겠다는 언약의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유대인들에게만은 선행이 절대 인간의 자격, 능력, 공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요, 율법을 지키려는 마음의 소원과,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여건과 힘까지 오직 하나님이 주십니다. 인간 쪽에 공로가 있다면 인간도 칭찬 받아야 하지만 주님은 그런 차원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말씀도 율법의 성실한 준행만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지 말라고 합니다. 신자의 의가 구제, 선행, 금식, 기도, 십일조 등에 열심을 내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강조한 후에 “옛 사람에게 말한바 ~~~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형식으로  율법을 정확하고도 심오하게 해석해줍니다. 즉, 신자의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나아야만 천국 갈 수 있다고 강조했으므로 그렇게 될 수 있는 구체적인 지침을 주신 것입니다.  

    본문이 포함된 산상수훈의 구조를 다시 살펴보십시다. 처음에는 팔복강화가 나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의 영적인 상태와 그 영성이 성숙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천국에 입성하기에 합당한 자가 지킬 규범을 지금부터 말씀하겠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빛과 소금의 비유를 통해 신자의 바뀐 신분과 세상에서 마땅히 살아가야 할 기본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본문을 통해 율법의 완성을 강조했고 그 후에 율법의 구체적 해석과 적용을 가르쳤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뜻은 신자들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요컨대 신자가 산상수훈의 의미하는 진리대로 거룩하게 살아야만 예수님이 의도하신 율법의 완성이 실제로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율법 완성을 몸소 본으로 보이신 예수님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느냐고 물었습니다.(마22:36) 서두에서 살펴본 대로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 외에도 수많은 구전과 성문화된 계명들을 지켜야 하다 보니 그 우선순위가 궁금해졌습니다. 몇 가지 안 되는 계명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지만 너무 많은지라 반드시 지켜야할 가장 중요한 계명을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8-30)고 권면했습니다.

    여기서 수고와 짐은 현실적 고난이 아닙니다. 바로 장로들의 유전 같은 종교적 계명들입니다. 만약에 고난에서 구해준다는 뜻이라면 “내게 배우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내가 구출해주겠다고 표현해야 합니다. 반면에 이전에 짊어진 무거운 수고와 짐을 벗고서 당신의 쉽고 가벼운 멍에와 짐을 다시 메라고 권합니다. 잘못된 율법 해석으로 인한 종교적인 부담감과 죄책감을 벗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2장에서 설명할 구원을 주는 복음의 은혜와도 연관됩니다.)      

    주님은 가장 중요한 계명을 물은 율법사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둘째는 그와 같다고 했습니다. 즉,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구약성경과 장로들의 유전에 포함된 그 수많은 계명을 단 둘로 줄였습니다. 다른 계명들을 다 무시하고 이 두 계명만 지키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율법의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제정한 목적과 의도가 바로 신자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머지 모든 계명들도 바로 그런 마음의 바탕에서 준행하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치료하거나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해도 십리를 함께 가주는 행동들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발적으로 기꺼이 우러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바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13:10)이라고 한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또 어떻게 말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9,10)

    예수님은 죄에 빠져 당신과 원수가 되어 있었음에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사 당신의 모두를 주셨습니다. 이 땅에서의 주님의 삶과 사역은 한 마디로 완전한 사랑의 구현이었고 그 절정은 십자가였습니다. 당신께서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대로 죽어가면서까지 당신을 십자가에 매단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인간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지 주님이 직접 보여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뜻을 가르치시고, 그대로 완전히 실천하시는 본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 데까지 이르게”(엡4:13)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는 말씀의 본문에서의 뜻을 간략히 다시 정리하면; 1) 율법의 해석을 본래 하나님이 제정하신 의도대로 정확하고도 심오하게 풀어줄 것이며, 2) 신자더러 문자적 형식적 실천이 아니라 당신께서 새롭게 해석한 그 의미대로 준행하여서 거룩하게 살라는 것이며, 3) 당신께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시는 본을 몸소 보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처럼 율법의 윤리적 측면만 강조하려 했다면 “율법을 완전케 하러 왔다”고만 말하면 됩니다. 그러나 “선지자”도 완전케 하겠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율법과 선지자”라고 말할 때는 율법은 모세 오경을, 선지자는 나머지 구약성경 전체를 의미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구약이 말한 모든 것을 완전케 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성경 전체의 진리와 연결해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살필 차례입니다.

    To be continued;

    * 모세오경: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구약성경의 첫 다섯 권을 총칭하는 이름
    - 모세가 저작한 것으로 보기에 모세오경이라고 부르며 모세가 하나님께 직접 받은 율법이 기록된 책들입니다.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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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절대 왕복표를 발행하지 않는다
    한 번 출발하면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다는 말인가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 순간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하겠지요

    한번밖에 없는 나의 생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은 우리네 인생
    지금부터라도 좀더 소중히 생각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바램과

     

    그토록 많은 아쉬움을 남겨놓고 소리없이 이렇게
    속절없이 하루가 또 지나가버립니다

    까닭없이 뭔가 잃어버린 것만 같은 마음

     

    뭔가 꼭 빠져나간 것만 같은 텅빈 가슴
    아마도 인생이 다 그런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더 소중히

     

    우리의 삶을 껴안고 살아야 되겠지요
    한번 지나가면 영원히 이땅에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우리의 인생이기에 말입니다

    기회는 축복이란말도 생각이 납니다

    하루 하루 더욱더 충실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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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총, 원로들 앞세운 통합 제안…한교연은 ‘냉담’

    2014/05/06 ㆍ추천: 0      

    한기총이 교계 지도급 원로 목회자들을 앞세워 재차 한교연과의 통합 제안에 나섰다. 하지만 한교연이 문제 삼은 이단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선통합 후논의’ 방식을 주장하고 있어 난항이 예상된다.

     
    ▲한기총이 2일 오전 조용기 목사, 이만신 목사 등 교계 지도급 원로들과의 조찬 모임을 갖고, 한기총-한교연의 통합 제안서를 발표했다.(사진 출처 한기총 홈페이지)

    “한교연이 한기총 복귀하는 조건으로…” 통합 제의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홍재철 목사)가 2일 오전 서울힐튼호텔에서 조용기 목사, 이만신 목사, 지덕 목사 등 13명의 원로 목회자들과의 모임을 갖고, 한기총-한교연의 통합 제안서를 발표했다.

    제안서에서 한기총은 “총론에서 무조건 통합하여 하나가 되고, 문제가 되는 부분은 각론에서 상임위원회를 통하여 합리적으로 처리”할 것을 주장했다. 그간 홍재철 대표회장이 ‘일단 통합부터 해놓고 문제되는 것은 나중에 논의하자’고 주장했던 내용과 일치한다.

    또한 제안서에서 홍재철 대표회장은 “한교연이 한기총에 복귀하는 조건으로 대표회장직을 사임하고 통합 대표회장을 선출할 것”을 재확인했다.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겠지만, 한교연이 한기총에 다시 들어온다는 전제 하에 가능하다는 얘기다.

    마지막으로 한기총은 “한교연에 고소, 고발한 모든 것을 취하하고, 향후 통합에 관한 모든 권한을 조용기 목사에게 위임하기로 결정한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조용기 목사는 “빠른 시일 내에 한영훈 목사를 만나 통합이 진행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그리고 양 기관 대표들을 모아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한교연 “이단 문제 정리 안되면 통합 못해”

    한편, 이 같은 한기총의 통합 제안에 한국교회연합(대표회장 한영훈 목사, 이하 한교연)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지난 번 통합 제안에도 한교연은 2011년 7.7 정관 당시로 돌아가지 않으면 대화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힌 바 있다.

    1일 성민수양관에서 열린 한교연 임원회에서 한영훈 대표회장은 “겉으로는 화합을 얘기하면서 뒤로는 나를 상대로 계속적으로 고소, 고발해왔다. 진정성이 없다”고 일축했다.

    한교연이 한기총의 통합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이단 문제에 있다. 한기총이 이단에서 해제한 인물 또는 교단들과는 결코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영훈 대표회장은 임원회에서 “예장통합 등 우리 회원 교단들이 이단으로 규정한 인사가 한기총 회원으로 들어가 있다. 교단들의 의견을 따라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교연 측 관계자는 “이단 문제가 정리되지 않으면 같은 멤버십으로 갈 수 없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고 통합을 했다간 오히려 연합사업 전체가 깨져버릴 위험이 있다”고 우려했다.

    윤화미 ⓒ 뉴스미션


    출처: USA아멘넷

    신자의 삶에 대한 주요 원리는 바로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곧 영적 예배로 드리는 것이 신자의 의무라는 것이다(12:1).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는 권면의 근거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여기 나타나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구별된 자로서 하나님께 드려졌으므로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면 생각하거나 말하지도 말고, 계획하거나 행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거룩한 것을 세속적인 용도로 사용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의 생각이나 우리의 뜻이 우리의 계획과 행동을 주장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악된 육체에 편리한 것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대로 우리 자신이나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잊어버려야 할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살고 그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14:8).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니 그의 뜻과 그의 지혜가 우리의 모든 행동을 다스리게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우리의 삶의 각 부분마다 그를 향하여 나아가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고전6:19). 자기가 자기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받고서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통치권과 경영권을 자기 자신에게서 취하여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사람이 있다면, 그 얼마나 위대한 전진의 모습이겠는가! 사람을 멸망으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길이 바로 자기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이듯이, 유일한 피난처는 다른 의지와 지혜를 다 버리고 오직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고자 하는 의지와 지혜를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취하여야 할 것 걸음은, 우리 자신을 버리고 우리의 모든 능력과 정력을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드리는 것이다. 여기서 섬긴다는 것은 말로 순종하는 것뿐만 아니라 육체의 정욕을 버리고 성령의 부르심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마음을 갖는 것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 바울은 이를 심령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4:23)- 야말로 생명에 들어가는 첫 관문인데, 철학자들은 이것을 전혀 몰랐다.

     

    그들은 사람을 경영하는 것이 이성에 있다고 보았고, 따라서 이성의 소리만 들으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성만이 사람의 행동을 주장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철학은 이성 대신 성령을 그 자리를 올려 놓고 그에게 완전히 굴복하고 복종할 것을 명령한다. 그리하여 이제는 사람이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서 사시며 통치하시는 것이다(2:20).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천다이제스트), pp 20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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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합동 실행위, 교단 탈퇴 홍재철 목사 ‘시벌’ 결의

    2014/04/29 ㆍ추천: 0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합동총회가 교단 탈퇴를 선언하고 최근 새로운 교단 설립을 추진 중인 홍재철 목사에 대해 소속 노회를 통해 시벌키로 결의했다.

     
    ▲합동 실행위가 29일 오전 총회회관에서 열렸다.ⓒ뉴스미션

    교단 탈퇴하고 새 교단 만든 홍재철 목사, 소속 노회 통해 시벌키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총회장 안명환 목사)는 29일 오전 서울 대치동 총회회관에서 실행위원회를 열고 교단 주요 안건을 처리했다.

    이날 실행위는 교단을 탈퇴하고 지난 2월 ‘사단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교단’을 서울시청 주무부서에 등록한 홍재철 목사(한기총 대표회장)에 대한 처리와 관련 소속 노회인 함남노회의 보고를 받았다.

    앞서 총회는 지난 3월 6일과 4월 11일 두 차례에 걸쳐 함남노회(노회장 김한종 목사)에 홍 목사에 대한 처리를 지시하고 이를 속히 보고할 것을 공문으로 지시했다.

    이에 함남노회는 ‘홍재철 목사와 일체 관계를 단절함과 노회 명부에서 삭제하게 되었음’을 보고했다.

    그러나 실행위원들 사이에서 노회 명부에서의 삭제는 단순한 행정 절차에 불과하며, 보다 명확하고 근거 있는 권징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됐다.

    한 실행위원은 “소속 노회가 홍재철 목사를 경서교회의 원로목사로 추대했고 경서교회도 노회에 소속이 돼 있는 상황에서, 노회가 홍 목사를 삭제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황규철 총무는 “이미 해당 노회의 20여 개 교회들이 홍 목사의 새로운 교단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얘기가 있다”며 “이단과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함께할 수 없고,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이 우리 교단의 입장이다. 오늘 실행위에서 어떤 분명한 결의를 해준다면 노회에서의 처리가 수월해지지 않겠는가”라고 제안했다.

    격론 끝에 김상윤 목사(황동노회)가 “함남노회로 하여금 이 문제에 관한 조사처리위원회를 구성해서 홍재철 목사를 시벌하도록 하자”고 건의, 실행위가 이를 통과시켰다.

    세월호 참사 유족에 2억 원 지원키로

    합동은 전 국민을 비통함에 빠뜨린 여객선 세월호 침몰 사건과 관련 유족 지원을 위해 2억 원을 기부하기로 결의했다.

    당초 안건은 ‘진도 여객선 침몰사고 희생자 유족 지원을 위한 아이티구호헌금 차용 건’으로 올라와 있었으나, 아이티구호헌금을 차용하는 것에 대해 찬반 논쟁이 치열하게 계속됐다.

    지난 2010년 합동은 아이티 지진 피해복구를 위한 구호금으로 약 30억을 모았지만, 이 구호금이 비전센터 건립, 해피나우 직원 급여, 타 재해 국가 및 지역 지원 등에 사용되는 등 전용 논란이 일었다. 이에 교단은 아이티구호헌금전용문제처리전권위원회를 조직했고, 전용 사건과 관련한 법적 소송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다.

    아이티구호헌금 차용을 찬성하는 입장에서는 ‘사안이 시급한 만큼 법적인 문제는 차후로 미루고 유족부터 돕자’고 주장했고, 반대 입장에서는 ‘구제부를 통해 모금하자’, ‘아무리 급해도 원칙은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갑론을박이 길어지자 오정호 목사(대전 새로남교회)가 “장자교단인 우리 총회가 이런 문제로 긴 시간 결론을 내지 못해서야 되겠느냐”며 “우리 교회에서 지원금 2억 원을 내겠으니 총회에서 차용증을 써 달라”고 말했다. 실행위원들은 박수로 이 안을 통과시켰다.

    이밖에도 실행위는 국가적 재난 발생 시 교단 차원에서 빠른 구호 시스템을 가동시키자는 취지 아래, 총회 산하 국제긴급재난구호 NGO 단체를 설립하기로 결의했다. 이후의 문제는 연구위원을 구성해 진행토록 하고 오는 99회 총회 때 상정하기로 했다. 연구위원 선정은 총회장에게 일임키로 했다.

    또한 교단 차원에서 ‘개혁주의 성경찬송’을 발간하자는 안건은 오는 99회 총회에서 다루기로 했다. 성경찬송가번역출판위원회(위원장 김영우 목사)는 현재 교단이 사용하는 성경과 찬송가를 분석한 결과 원문 번역에 충실하지 못한 부분이 적지 않다고 판단, 새로운 성경찬송이 필요함을 제안했다.

    한편 ‘상비부장 선거 방법 관련 총회결의 채택 사항 확인’ 건에 대해서는 ‘각 상비부장, 총신운영이사장, 기독신문 이사장, 사장, GMS이사장 선출은 절충형(제비뽑기+직선제)으로 한다’는 결의대로 가는 것을 최종 확인했다.

    김민정 ⓒ 뉴스미션
    출처: USA아멘넷


    WCC 당산(성황당) 나무를 기도나무로 소개하다.  

    2013/11/06 13:04

    복사http://blog.naver.com/esedae/90184187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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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사진은 WCC의 주관언론인 국민일보에 소개된 '기도나무' 대한 기사를 캡쳐한 것이다.  밑의 사진들과 비교해보면 나무 가지에 소원을 쓴 색색의 천을 메단 이 나무가 바로 그 옛날 우리네 마을마다 있던 '당산나무'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처>>

     

     





    소원을 적은 천들을 당산나무에 걸어놓는 한국의 무속신앙을 그대로 흉내 낸 기도나무(?)가 WCC 부산 총회에 등장하여 '인기'를 끌고 있다는 기사이다.  

     

     

    다음 국어사전에서는  당산(성황당) 나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민속] 마을을 지켜 주는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여 제사를 지내는 나무.

    정월 대보름날 당산나무 아래에서 풍년 농사를 비는 굿을 했다.

     

     

    일반적으로 성황당 옆에 위치한 당산 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신령이 깃든 나무라 여겨져, 매년 중요한 절기마다 이곳에서 무당이 마을의 복을 비는 굿을 하곤 한다.

     

     





    일반적으로 성황당 옆에 위치한 당산 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신령이 깃든 나무라 여겨져, 매년 중요한 절기마다 이곳에서 무당이 마을의 복을 비는 굿을 하곤 한다.

     

     

    WCC 부산 총회가 이런 ‘당산나무’를 ‘기도나무’라는 이름으로 속여 귀신을 섬기는 무속신앙과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 신앙을 혼합해 버리고 있다.

     

    기도나무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당산나무가 바로 WCC가 종교혼합(종교짬뽕)을 목적으로 세워진 '사단의 회'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WCC는 더 이상 한국교회를 속이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올 굿판을 멈추어야 한다. 

     

     

     

     

    - 예레미야 -


    *******************************************************


    카페 회원 Gaetul 님이 제보로 위 기도나무는 일본의 기도나무에서 따온 것인 것 같다고 하여 참고 사진을 올립니다.


    사진을 보니 똑 같네요.


    해당 블로그


    http://blog.naver.com/jjyseon/10179446726






    복음은 예수에 관한 복된 소식이고 그 예수를 다시 압축해서 요약하면 십자가와 부활이다. 사복음서의 내용을 잘 살펴보라.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일주일 전부터 부활하기까지의 내용이 대부분 반 이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복음서의 악센트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있는 것이다. 예수의 유년시절이나 공생애 기간의 사역조차 그의 수난과 부활을 전하기 위한 무대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바울은 우리가 전했고 받았고 알고 붙잡고 있는 복음을 다시 상기하도록 진술하고 있다. 그는 복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한 문장으로, 단 두 가지로 정의했다.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3-4).

     

    이것이 복음이다. 우리가 전할 기독교의 압축 파일은 바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죄와 관련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사실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2천 년 전에 일어난 예수 부활의 사건과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제 명확히 알아야 한다.

     

    침체된 직장생활의 위기를 돌파해내는 힘을 주지 못하는 예수님의 부활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런 부활을 왜 믿는가? 부활을 믿는다는 사람이 실연의 상처를 받았을 때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과 아무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면 그 부활을 왜 믿는가? 실직했을 때에도 부활을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의 모습이 똑같다면 그가 믿는 부활이 그 사람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은 인생의 위기 앞에서 우리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순간에도 문제에 답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아의 문제만을 하나님으로 섬기면서 자신의 일상사에만 함몰된 채 자신의 위기에 전혀 발언하지 못하는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고 하고 있다.

     

    십자가와 부활에서 은혜받지 못하면 기독교는 달리 은혜 받을 곳이 없다. 나의 위기와 난관과 시련의 문제에 대해 십자가와 부활이 발언하지 못한다면 그런 기독교는 믿지 말라. 부활의 능력은 우리 문제는 작게 보이고 그리스도의 은혜는 커 보이게 만든다. 아무리 셀프 토크로 자기 긍정의 메시지를 부르짖어봐야 소용이 없다. 은혜 받고자 한다면 십자가와 부활에 깊이 침잠하라. 기독교의 은혜의 저수지는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다.

     

    기독교의 중심이 십자가 부활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지금 우리가 그 메시지를 듣고 배우는지 점검해보아야 한다. 지금 당신의 교회에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는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가르치는가? 그렇지 못하다면 교회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무기를 성도의 손에 쥐어주지 않은 셈이 된다. 부활의 종교라는 기독교란 무엇인지, 부활의 능력이 무엇인지 교인들에게 그 핵심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다.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 아닌가?

     

    교인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무기를 스스로 노력해서 취해본 적도 없이, 교회는 여가선용으로 나가는 곳이 되어버렸다.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영어회화학원을 다녔는데, 거기서 영화회화를 가르쳐주지 않고 꽃꽂이를 가르치고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친다면 당신은 그 학원에 계속 다니겠는가? 거세게 항의하고 환불까지 요구할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교회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안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영어회화학원에서 영어를 안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미 매주 교회에서 자기계발이나 성공학에 대해 듣는 데 익숙해졌다. 어떻게 하면 알콩달콩 재미있게 사는지 교회에서 부지런히 듣고 배운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들어야 한다.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이다.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들어야 우리에게 현실을 박차고 나갈 수 있는 힘이 붙는다.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 인생에 베터리가 되어 돌아간다. 그것이 없으면 말짱 소용없는 일이다. ‘앙꼬 없는 찐빵이라 그러는데 십자가와 부활이 바로 기독교의 앙꼬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도외시하고는 어디에서도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미래 시제가 아니라 현재 시제)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6,57).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긴 시점부터 바울은 곧 미래의 부활에서 현재의 부활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그분이 우리에게 현재 이김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그리스도 재림하실 때 비로소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지금우리의 현실에서도 우리는 사망의 세력, 죄의 세력을 이긴다.

     

    따라서 부활을 믿는 사람은 현실에서 이김의 질서에 참여한 사람이다. 장래에 이기는 것이 아니라 현재이긴다. 최고 강자 사망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기셨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장차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다 부활시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뿐만 아니라 사망의 세력을 이긴 힘을,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지금베풀어주셔서 우리도 같이 그리스도의 이김에 동참하게 하시고 현실 생활에서 이김을 맛보게 하신다. 현실에서는 물론, 종국에, 그리스도 재림 때 완전히 이길 것이다.

     

    - 김응국, 부활, pp 56-62

     

    가져온 곳 : 
    블로그 >청교도의 길
    |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추ㄹ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납치된 10살 소년, ‘가스펠송’ 덕분에 풀려나 
     


    유괴범에게 납치됐던 한 소년이 가스펠송 덕분에 무사히 부모의 품으로 돌아온 사연이 알려져 화제다.

     
    ▲납치된 후 3시간 넘도록 가스펠송 ‘Every Praise’을 부른 끝에 풀려난 윌리 마이릭과 이 곡의 원작자 헤즈콰이 워커가 함께 찬양을 부르고 있다.(NBC News 영상 캡처)

    외신들의 보도에 따르면 지난 달 31일 미국 애틀랜타에 사는 윌리 마이릭(10)이라는 이름의 이 소년은 자신의 집 앞마당에서 놀던 중 용돈을 주겠다며 유인한 한 남성에게 납치를 당했으나, 범인의 차에서 쉬지 않고 가스펠송을 부른 끝에 기적적으로 풀려난 것으로 전해졌다.

    마이릭은 범인에게 붙잡힌 채 차에 강제로 태워졌고, 몸값을 요구하며 놓아주지 않는 유괴범과 함께 계속해서 차를 통해 이동했다. 그러나 보통의 아이들이었으면 두려움에 떨며 울고 있을 이때, 마이릭은 겁을 먹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내 가스펠송을 부르기 시작했고, 이는 3시간이 넘도록 쉬지 않고 이어졌다.

    유괴범은 마이릭이 가스펠송을 부르는 내내 그에게 그만 부르라며 욕을 하고 다그쳤지만, 그럼에도 마이릭은 찬송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런 마이릭의 모습에 참다 지친 유괴범은 자신이 졌다는 듯 소년을 차에서 내리게 했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그를 풀어주고 떠났다.

    큰 부상 없이 풀려난 마이릭은 곧바로 인근에 있는 집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해 구조됐으며, 이후 현지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그가 차문을 열고 날 던져버렸다"면서 "욕을 하거나 소리를 질러도 노래를 멈추지 않고 계속 불렀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편, 이 사연이 알려지며 당시 마이릭이 부른 가스펠 곡 ‘Every Praise’와 이 곡을 만들고 부른 가스펠 뮤지션 헤즈콰이 워커도 함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마이릭을 직접 만나 껴안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며 애정을 드러냈으며, 며칠 뒤 결국 직접 마이릭의 교회를 찾아가 그와 함께 이 곡을 부르기도 했다.

    또한, 이 사연에 감동을 받은 해외 누리꾼들 역시 '아이가 믿음으로 악을 이겨냈다'며, '이것이 찬송의 힘이다', '하나님이 아이를 지켜보신다' '믿음은 매우 강한 것이다' '이 어린 소년에게 축복을' 등의 댓글을 남겼다.

    현재까지 흑인으로 알려진 이 사건의 범인은 아직 검거되지 않은 상태이며, 현지 경찰은 마이릭의 증언을 바탕으로 몽타주를 제작해 본격적으로 공개수사에 돌입했다.

    정원희 ⓒ 뉴스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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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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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 국가와의 수많은 전쟁을 통하여 스페인, 영국과 함께 스웨덴을 세계 3

             강국 반열에 올려, 대왕의 칭호를 받는 구스타프 2(1594 – 1632)발틱해의

             패권을 장악하고자 세계에서 제일 크고 강력한 전함을 건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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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이 69미터, 12 미터, 높이 53 미터, 배수량이 1200톤에 이르는 전함은,

                   아무도 지은 적이 없었기에, 당시 선박 제조 기술이 제일 발달한 덴마크의

              장인들을 불러, 천그루의 참나무를 베어 내어, 3 동안 공들여, 발틱해에서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전함, 바사호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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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스타프 2세는 스웨덴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기술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 좌우에 16문씩 설치할  대포의 수를 늘려, 2 구조로 올려

     

           64문의  11kg짜리 포탄을 장진할 있는 대포를 설치,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한  위험천만한 바사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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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28,  주변국들의 귀빈들을 초대하여 성대한 진수식을 마치고,

         출항한지  20분도 안되어, 1,200미터 정도 전진하다가 갑자기 불어닥친

             돌풍에 중심을 잃고 맥없이 바다 속으로 침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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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스타프 2세의 욕심으로 잉태한 과욕의 죄가 30여명의 젊은이들을 사망으로

          이르게 하고, 스웨덴 바사 왕조의 위상에 손상을 주었다.

     

          구스타프 2 자신도 4 독일과의 전투에서 38 나이로 전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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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사호는 333 동안 수심 300미터 바다밑 6미터 갯벌 속에 묻혀 있다가 

      2년간의 인양 작업 끝에, 처음 건조되었던 조선소 자리로 옯겨졌다.

     

    17년간의 복원 작업과 위에 6 높이의  건물을 지어,

    건물 중심에  배가 세워져 있고, 층별로 돌아가면서 전시장이 있어,

    17세기의 스웨덴 사람들의 생활상과 수장품들을 있는 흥미로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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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  박물관으로 개관된 이래 매년 백만명 이상, 지금까지 3천만명 이상의

         방문객들을 맞이하여 발틱해안에 있는 수많은 박물관 가장 많은 방문객을

         맞이하는 명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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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톡홀름 항구를 지나  구시가지 감라스탄에 있는 왕궁으로 갔다.

          젊고 생긴 근위대의 절도 있는 모습과 우렁찬 밴드 소리는,

        자연스레 관광객들을 불러 모아   디딜 틈이 없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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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군중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제대로 구도도 잡지 못한 채,

         그저 열심히 카메라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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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마차가 다니던 좁은 골목길, 우여곡절이 많았던 스웨덴의

    역사를 보여 주는  스토르토리에트 광장으로...

     

                    17세기초, 덴마크 통치하에 있던 스웨덴에 독립의 기운이 감지되자,

                덴마크왕은 스톡홀름으로 출병,  감라스탄 지역의 스토르토리에트  광장에 있는,

              호텔에 머무는 동안, 스웨덴 독립군들에 의해 피습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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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탄의 불발로 암살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한 덴마크왕은, 음모에 가담한

           스웨덴 귀족 82명을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참수하여, 머리들을 광장

               중앙에 있는 우물에 던져 넣었다.

     

           때는 1520년, 스웨덴 사람들은 위에 탑을 세워 피의 우물이라고 부른다

     

                  붉은 벽돌 건물의 하얀 점들은 이곳에서 학살 당한 82명의 숫자만큼

              건물에 박아 넣은 하얀 벽돌들로, 날을 잊지 말자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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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덴마크에 유학 중이었던 구스타프 1 (1496- 1560), 스웨덴 원로원 의원이며,

                 스웨덴 독립을 주장했던 아버지와 삼촌들이 처형 당한 , 

     

                 스웨덴으로  비밀리에   귀국, 독립군의 유능한 장군으로서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승리 1523 17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바사 왕조를  창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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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시가지의 아름다운 건축물들과 거리의 악사들이 어울려,

         다른 세계에 있는 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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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토르토리에트 광장에는 세계 각국에서 모여 관광객들이 인산 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각기 다른 나라말로 설명을 하고 있는 가이드들과,

        열심히 듣고 받아 적는 여행 메니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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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장  정면에는 노벨 박물관이 있었지만,

                  여행 일정 때문에 내부에 들어갈 없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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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곳에도 어김없이 자전거 대여소가 있어 시민들이나 방문객들이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었다. 건강에도 좋고, 대기 오염도 시키고 돈도 절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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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틱해와 마라렌(Malaren) 호수가 만나는 , 14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

             북구의 베니스라고 불리우는 인구 천만의 스웨덴, 위의 도시라고 불리우는

             스톡홀름에 도착, 매년 12 10, 노벨상의 잔치가 벌어지는 시청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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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위적인 시청이 아니라 시민들과 함께 하는 공간, 시청사 광장은

                주변의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 매우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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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장이 덩굴 마저 몫하는, 붉은 벽돌의 멋진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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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 교환 학생으로 다녀온 생긴 청년이 현지 가이드로 배정되어,

                    시청사의 역사와 소개를 영어로성의껏 설명을 잘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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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으로 들어가니 블루홀이라 불리우는 넓은 홀이 나왔다.

                      곳에서는 노벨시상식의 만찬이 열리는 곳으로,

                      평소에는 음악 콘서트같은 많은 행사가 열린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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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주는 아래 홀에서 하고, 소리는 천정에 있는 곳으로 부터

                    청명한 소리가  실내에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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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층 발코니에서 내려다 아름답고 평온한 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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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단 시설의 시의회실, 곳에서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경제학

                     5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를 선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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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유의 디자인과 단단함으로 센스있는 자동차의 대명사로 한때  호황을 누렸던

                  Volvo  Saab 만들고 있는 나라의 시청 답게 실내 장식이 우아하고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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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든 ,  노벨상 시상식과 만찬 무도회가 열리는 .

             시민들이 기증한 금으로 만든 1800만개의 금박으로  실내를 도금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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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20, 덴마크왕을 겨냥한 포탄이 불발로 끝나, 스웨덴의 독립도 불발로

                   끝날 보였으나, 82명의 애국지사가 참수 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3 뒤인 1523 마침내 독립을 이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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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톡홀름 관광을 끝내고, 우리는 비행기 삯과 호텔비를 절약할 있는

               헬싱키행 실자라인 페리에 올랐다.

                    자고 나면 15시간만에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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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 : 둥지에서
    글과 사진 : 들꽃 사랑




    쾌락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지녔던 삶의 한 특징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도 전에는 행락(쾌락)에 종노릇한 자였다"(딛 3:3). 쾌락은 무지, 불신, 사기, 정욕, 악독, 투기, 가증, 상호 증오와 같은 다른 요소들과 함께 옛 삶을 이루고 있는 무서운 요소이다(참조. 벧후 2:13). 쾌락은 주인으로 인간을 지배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쾌락에 종노릇을 하였다. 이러한 옛 삶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셨다(딛 3:4). 쾌락에서 구원받는 것은 인간의 의로운 행위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만 가능하다(딛 3:5).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와 같이 바울이 쾌락에 종노릇하던 우리의 옛 삶을 운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도 자칫하면 다시 쾌락을 추구하는 삶으로 돌아가기 쉽기 때문이다. 이전의 수치를 사모하고, 현재의 영광을 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쾌락은 여전히 무서운 유혹거리이다.

    야고보는 그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심지어 쾌락을 위하여 기도한다고 지적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해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는 쾌락을 얻기 위하여 기도하기 때문이다(약 4:3). 이것은 잘못된 기도에 대한 대표적인 예이다. 쾌락을 위한 기도는 응답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쾌락은 다툼의 원인이기 때문이다(약 4:1). 그래서 쾌락은 "싸우는 쾌락"이라고 불리운다(약 4:1). 사람들은 쾌락을 얻기 위해서 싸움을 한다. 오직 쾌락의 자리인 육신의 "지체", 몸의 각 부분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쾌락을 추구하는 자는 사람과도 싸우고 하나님과도 싸운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사실상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약 4:4). 쾌락은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적이며, 최종의 적이다.

    예수께서도 쾌락은 최대의 적이며, 최종의 적인 것을 알려주셨다. 이것은 눅 8장에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해석하는데서 잘 나타난다. 하나님의 말씀에 세 가지 적이 있다. 첫째는 길가의 적이고, 둘째는 바위의 적이고, 세째는 가시떨기의 적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마지막 적인 가시떨기는 또 다시 세 가지 원수를 가리킨다. "염려와 재리와 쾌락"이다(눅 8:14). 여기에 나오는 단어들의 순서에 주의해야 한다. 모든 인생은 더 나은 경제를 갖기 위해 염려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다음 단계는 재물을 모으는 것이다. 재물을 모으게 되면 반드시 쾌락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쾌락이란 것은 인생에게 있어서 가시와 같은 존재이며, 마지막 단계의 문제이다. 쾌락은 최종적인 적이다. 쾌락은 말씀을 질식시키고 결실하지 못하게 하는 최종적인 적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말세가 되면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게 된다"(딤후 3: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쾌락을 억제하는데 높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아마도 우리 시대에 기독교의 최대의 적은 쾌락주의라고 생각된다. 세상의 문화는 전반적으로 쾌락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문화에 참여할 때 깊은 비판력을 가지지 않으면 쉽게 쾌락에 빠져들고 만다. 우리는 예수, 베드로, 바울, 야고보와 같은 신약성경의 중심적인 인물들이 쾌락에 대하여 지적하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쾌락을 멀리함으로써 이 세상에 대하여 못 박힌 것을 분명하게 보일 수가 있다(갈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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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신자들은 모두가 다 그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8:36). 그러므로, 신자가 하늘에 마음을 두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 높아져서 현재의 일들을 그렇게 초월하지 않는다면, 그들이야말로 가장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고전15:19).

     

    그러나 이 땅의 모든 것들을 넘어서서 고개를 위로 들어 하늘을 바라보게 되면, 아무리 악인들이 이 땅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평화를 누리며 자기들이 지닌 모든 화려하고 사치한 것들을 자랑하며 온갖 즐거움을 다 누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더 나아가서 악인들에게 괴로움을 당하고 그들의 교만 때문에 모욕을 당하며 그들의 탐욕 때문에 약탈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모든 악조건들 속에서 꿋꿋하게 견뎌나가게 될 것이다.

     

    신자는 그날을 향하여 시선을 돌릴 것이다. , 주께서 그의 신실한 종들을 영접하사 눈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영광과 희락의 옷을 입시시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먹이시고, 그들을 높이사 그와 함께 고귀한 교제를 나누게 하시며,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을 영접하사 그의 복락에 함께 참여하게 하실 그날을 분명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25:8, 7:17).

     

    그러나 악인은 이 세상에서 번영을 누렸을지라도, 극한 수치와 함께 망하게 하실 것이요, 기쁨이 변하여 고통이 되게 하실 것이요, 즐거움과 웃음이 변하여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게 하실 것이요, 평화가 변하여 양심의 찔림이 되게 하실 것이며, 그들의 사치를 꺼지지 않는 불로 벌하실 것이며, 또한 그들에게서 고통을 당한 경건한 성도들의 발 밑에 머리를 조아리게 만드실 것이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에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1:6-9).

     

    과연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위로가 없다면, 우리는 절망에 빠지거나 아니면 이 세상이 주는 헛된 위로에 사로잡혀서 멸망에 빠지고 말 것이다. 시편 기자는 고백하기를,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73:2,3)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성소에 들어가서 의인과 악인의 마지막 결국을 깨달은 다음에야 비로소 평안을 찾았다(17).

    한 마디로 결론을 짓는다면, 신자들이 시선을 돌려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분명하게 바라볼 때 신자들의 가슴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마침내 마귀와 육체를 무찌르고, 죄외 죄인들을 무찌르고 승리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24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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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재권 구원 논쟁에 대한 고찰
    예수가족교회 임범진 집사
    주재권 구원(lordship salvation) 논쟁은 미국에서 1980년대 대중들에게 알려져 지금까지도 그 열기가 식지 않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 용어 자체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단지 극소수의 출판물과 인터넷 상의 글이 주재권 구원을 비성경적 행위구원론이라 비판하며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본 글에서 필자는 주재권 구원 찬성파와 반대파의 주장을 비교하여 주재권 구원이 결코 행위구원론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적이고 종교개혁의 전통에 충실한 구원론임을 주장하고자 한다. 다음과 같은 순서로 글을 전개하겠다.
    01 주재권 구원 논쟁이란?
    02 주재권 구원 논쟁의 역사와 인물들
    03 주재권 구원 논쟁의 핵심 쟁점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무엇인가?
    -회개와 구원의 관계는 무엇인가?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가?
    04 한국교회와 주재권 구원 논쟁
    05 결론 및 요약
    01 주재권 구원 논쟁이란?
    주재권 구원 논쟁의 자세한 역사는 잠시 뒤에 다루기로 하고 일단 이 논쟁이 대중의 관심을 얻게 된 것은 1988년에 발간된 존 맥아더(John McArthur, 사진1)의 Gospel According to Jesus2 라는 책 때문이었다는 사실만 언급하겠다. 당시 미국 교회에는 (그리고 지금까지도) 결단주의식 구원론, 즉 구원 얻는 믿음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의지적 결단의 산물이라는 주장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 구원에 이르는 것과 그 이후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을 독립된 두 개의 단계로 보았고 두 번째 단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의지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맥아더는 그의 책에서 이런 구분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반박하였다. 구원 얻는 믿음은 오직
    John McArthur 1
    1 이하 인물 사진은 특별히 언급하지 않은 경우 http://en.wikipedia.org 에서 얻었다.
    2 우리나라에서는 이 책의 개정증보판이 참된 무릎 꿇음-예수가 목숨 걸고 전한 복음 (살림출판사, 2008)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2
    G로 약함)로 명명하였다.
    중생한 사람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서, 중생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을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열망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삶에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의 믿음을 참된 구원하는 믿음으로 인정할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맥아더의 책이 미국 교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특히 달라스 신학교를 근거지로 한 아르미니우스적 세대주의자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위와 같은 구원론을 미국 교회에 유행시킨 장본인이 바로 세대주의자들이었으며 존 맥아더 역시 출신학교는 다르지만 세대주의자였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집안 식구에게 뒤통수를 맞은 모양새였다. 이에 달라스 신학교의 교수인 핫지스(Zane C. Hodges)가 Absolutely Free! (1989) 라는 책3을 통해 맥아더의 구원론은 믿음에 행위의 요소를 첨가한 행위구원론이며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변질시킨 것이라고 비판함으로써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세대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으로 출발했으나 맥아더가 옹호하려는 구원론이 개혁신학의 전통적인 구원론과 일치한다는 것을 인지한 개혁주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가세하면서 아르미니우스적 세대주의와 개혁주의 사이의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존 맥아더와 같은 구원론을 가진 이들을 주재권 구원파(이하 LS로 약함)4라 부르게 되었고, 이에 반대하는 아르미니우스적 세대주의자들은 스스로를 값없는 은혜파(Free Grace파, 이하 F
    주재권 구원 논쟁의 주요 논점을 보여주기 위해 다음 몇 가지 항목에 대해 LS와 FG의 견해를 대조하여 열거해 보겠다.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무엇인가? 회개와 구원의 관계는 무엇인가?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가? 이 질문들은 LS와 FG가 첨예한 대립을 보여주는 주요 논점이며 양 진영이 이에 대해 무엇이라 대답하는지 살펴보는 것은 주재권 구원 논쟁의 핵심을 파악하는 좋은 방법이다.
    -구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FG: 믿음이란 예수가 구원자이시며 그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겠다는 의지적 결단이다. 광야에서 놋뱀을 바라보고 살았던 사람들이 한 번 쳐다 본 그 행위가 바로 믿음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 원인인 믿음은 선물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다.
    LS: 구원 얻는 믿음은 우리의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중생이라는 기적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일 뿐 아니라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무엇인가?
    FG: 구원은 값없이 얻으나 그 이후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행위는 제
    3 이하 책의 이미지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은 경우 http://www.amazon.com에서 얻었다.
    4 누가 이 명칭을 처음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다른 정보를 제공한다. 주재권 구원파라는 명칭은 논의의 핵심을 정확히 짚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율법주의적인 냄새를 풍기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반대파가 자신들을 Free Grace라 한 것도 다분히 의도적이다. 자신들은 값없는 은혜, 즉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상대방은 율법주의 행위구원을 주장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주려는 계산이 깔린 작명이다.
    3
    자가 되어 하나님과 교제의 삶을 사는데 필요한 것일 뿐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LS: 믿음은 중생의 결과이기 때문에 믿음을 고백한 사람에게 행위의 변화가 수반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뒤집어 말하면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을 구원 얻는 참된 믿음이라고 인정할 근거는 없다.
    -회개와 구원의 관계는 무엇인가?
    FG: 회개 역시 일종의 행위이기 때문에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단지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할 뿐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 회개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행위구원론이다.
    LS: 중생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회개한다. 믿음과 회개는 회심이라는 사건의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믿음이 중생의 결과인 것과 마찬가지로 회개 역시 중생한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회개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회개와 믿음은 언제나 함께 한다.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무엇인가?
    FG: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자는 영생을 확신할 수 있다. 설사 외적으로 배교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배교로 보시지 않는다.
    LS: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창세 전에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신 하나님 자신이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는가?
    FG: 그리스도인은 두 부류가 있다. 구원 얻는 믿음을 가졌으나 아직 육신에 속한 육적인 그리스도인과, 믿음을 가졌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의 삶을 사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삶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의 구원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LS : 모든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육신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중생한 사람이라도 때로는 육신에 속한 것처럼 행동할 수 있으나 오직 중생한 자와 불신자가 있을 뿐 육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완전하지는 못할지라도 필연적으로 성화에 대한 강력한 소망을 갖게 된다.
    ‘주재권 구원’이라는 적절치 못한 작명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지만 이 논쟁의 핵심은 결국 “중생(거듭남, regeneration)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입장차로 요약할 수 있다. FG에게 있어서 중생은 인간이 믿음이라는 의지적 결단으로 예수의 구원자 되심을 인정한 결과 획득하게 되는 사건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복음을 들었을 때 믿음을 선택할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을 발휘해 의지적 결단으로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제자의 삶, 성화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의지적 결단이 필요하다. 이 두 번째 결단은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반면 LS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스스로 믿음의 결단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믿기 위해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중생의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 중생한 자는 믿음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그의 행실은 필연적으로 거룩을 향해 변화되어 간다. 다시 말해 믿음과 행위는 모두 중생의 결과이며, 그러므로 믿음과 행위는 분리되지 않는다. 바로 이 입장차가 주재
    권 구원 논쟁의 배경이다. 이 논쟁은 아르미니우스적 세대주의, 혹은 펠라기우스-반(半)펠라기우스적 세대주의와 개혁주의 구원론 사이의 논쟁이다. FG는 개혁주의 구원론 중 중생과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의 교리를 반대할 뿐 아니라 심지어 혐오의 감정까지 드러낸다. 이 두 교리가 의지적 결단으로서의 믿음이라는 FG의 주장을 가장 강력하게 반박하기 때문이다. FG의 저자들이 이 사실을 매우 직설적으로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주재권 구원 논쟁을 세대주의 내부에서 벌어진 집안 싸움으로서 FG를 은혜 구원론으로, LS를 행위구원론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올바른 판단이 아니다. 이어지는 글에서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겠다.
    02 주재권 구원 논쟁의 역사와 인물들
    주재권 구원 논쟁은 1980년대에 본격화 되었지만 그 뿌리는 20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루이스 체이퍼(Lewis S. Chafer, 사진)는 스코필드(Cyrus I. Scofield, 스코필드 주석 성경의 저자)와 더불어 미국 세대주의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의 가장 중요한 공헌으로는 세대주의적 관점의 조직신학 교과서를 집필한 것과 현재까지도 세대주의 신학의 본산 역할을 하고 있는 달라스 신학교를 설립한 것을 꼽을 수 있다. 후에 주재권 구원 논쟁을 촉발시키고 지속시킨 주요 주제들이 20세기 초에 출판된 그의 저작들에 거의 모두 담겨있다. 그 중에서도 주재권 구원 논쟁과 가장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1918년에 출판된 He That Is Spiritual5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체이퍼는 고전2:9~3:4을 근거로 사람을 1) 자연인(natural man), 2) 육적인 사람(carnal man), 3) 신령한 사람(spiritual man)의 세 종류로 분류하였다. 자연인은 불신자를 말한다. 문제는 구원 얻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었다는 점인데,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육신을 따라 살아가는 육적인 그리스도인과, 구원을 받은 이후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에 도달한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그것이다. 이 전제 하에 체이퍼는 신자가 신령한 사람의 상태에 도달하는 비결을 기술한다. 이 주장에 대해 당시 개혁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사진)가 서평6을 통해 비판을 가하였다. 워필드의 설명에 의하면 체이퍼의 주장의 핵심은 구원에 이르기 위한 첫 번째 결단이 있은 후, 성화의 삶에 도달하기 위한 두 번째 결단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두 번째 결단의 유무에 따라 신자가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구원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역사로 파악하지 않고, 하나님은 단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가능성만을 제공하며 각자가 구원 받는 것은 스스로의 결단 여부에 달려 있다는 아르미니우스적 구원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과정인 성화를
    Lewis S. Chafer
    B. B. Warfield
    4
    5 이 책의 전문은 http://www.baptistbiblebelievers.com/BookList/HeThatIsSpiritualbyLewisSperryChafer 1918/tabid/271/Default.aspx 에서 읽을 수 있다.
    6 Princeton Theological Review 1919;17:322-7. 이 글의 전문은 http://www.thebluebanner.com/pdf/ bluebanner11-3.pdf 에서 읽을 수 있다.
    5

    할을 하였다.

    어난다고
    박하였다. 1994년에 출판된 로마서 주석에서도 존 스토트는 동일한 입장을 고수한다.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답변이다. 그런 일은 불
    구원 이후 이차적인 헌신 혹은 특별한 결단을 한 일부의 신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부가적인 과정으로 만듦으로써 당시 유행하던 더 높은 삶 운동(higher life movement)7에 동조한 것이다. 워필드를 비롯한 개혁주의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후 체이퍼의 가르침은 미국 복음주의 교회에서 인기를 얻었고 다음 세대에 이르러서는 복음주의 교회에서 대중의 확고한 지지를 얻게 되는데 여기에는 빌리 그래엄(Billy Graham)으로 대표되는 대중전도집회와 CCC(Campus Crusade for Christ, 1951년 창립)를 위시한 선교단체가 큰 기여를 하였다. 빌리 그래엄은 ‘내 모습 이대로’와 같은 찬양으로 감정적, 심리적 반응을 자극하는 가운데 사람들을 전도자의 초청에 응해 강단으로 걸어 나오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건을 흔들고, 특정한 기도문(영접기도)을 따라 하게 하고는 이것을 구원 얻는 믿음과 동일시하는 전도방법8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것은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 빌리 선데이(Billy Sunday) 등의 결단주의적 전도 기법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양산된 새로운 유형의 ‘회심자’들(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고 말하지만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을 진정 구원 받은 사람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체이퍼의 이론을 도입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CCC는 유명한 ‘마음의 보좌’ 예화로 체이퍼의 가르침이 대중화되는데

    체이퍼의 가르침이 본격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 시기에 다시 한 번 분명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던 사람이 바로 존 스토트(John R. W. Stott)이다. 1959년에 Eternity 지에서 “그리스도가 구주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님이 되어야 하는가? (Must Christ Be Lord to Be Savior?)”라는 제목의 지상논쟁이 벌어졌을 때 에버렛 해리슨(Everett F. Harrison)은 “아니다”의 입장에서, 존 스토트는 “그렇다”의 입장에서 글을 기고하였다.9 대체로 이때부터 주재권 구원이라는 새로운 명칭이 사용된 것 같다. 논의의 초점이 구주(Savior)로서의 그리스도와 주님(Lord)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구분하는 문제로 옮겨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용어를 사용해 체이퍼의 주장을 다시 기술하자면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였으나 아직 주님으로 모시지는 않은 사람이고,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이자 주님으로 모신 사람이다. 존 스토트는 이에 반대하여 그리스도는 구주이자 주님이지 그 둘이 분리될 수는 없으며,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는 칭의와 주님으로 모시는 성화 두 가지 모두 반드시 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은 그 안에 복종의 요소를 포함한다. 그 믿음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필연적으로 평생에 걸친 순종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완전하고 거리낌 없는 헌신을 기대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는 이것을 ‘믿음의 순종’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는 모시지 않으면서도 구주로는 영접하는
    7 19세기 말 영국에서 케직(Keswick) 사경회를 통해 대중화된 운동으
    blessing)’, ‘성령충만’을 통해 완전성화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함. 8 빌리 그래엄 전
    1967) pp11-16.
    9 Eternity Magazine, 1959;10:14, 16, 48 & 15, 17-8, 36-7. 아쉽
    6
    가능하다.10
    슷한 시기에 로이드 존스 또한 그의 로마서 강해에서 이 문제에 대해 분
    한 태도를 보여줬다.
    모실 수 있다고 명백히 가르친다면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완전한 이단입
    니다.11
    신학자나 설교자들을 주재권 구원에 대해 취하
    입장을 기준으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salvation)파
    Eternity에서의 논쟁과 비

    아마 여러분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당신의 구주로 모시면서도 수 년 동안 주님으로는 모시지 않을 수도 있다고, 혹은 수년간은 그분을 당신의 주님으로 믿지는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들어왔을 것입니다....만일 당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그가 당신의 주님이심은 알지 못한 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당신의 믿음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분을 구주로만 모실 수는 없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 당신을 사심으로써 당신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이 사실을 믿는다면 당신은 그분이 당신의 주님이심을 즉각 알아야만 합니다. 바로 여기서 모든 위험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화 없는 칭의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바로 그 위험 말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분이 당신의 주님이 되지 않는 한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사실을 인지하는 정도는 시시각각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고도 구주로
    그러나 체이퍼식 구원론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대중이 인지하게 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존 맥아더의 공이다. 1988년에 출판된 그의 책 Gospel According to Jesus에 의해 미국 교계에서 소위 주재권 구원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맥아더의 등장 이후 많은 사람들이 미국 교회 안에 구원에 대해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진 집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현대 교회에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LS(Lordship
    존 스토트
    마틴 로이드 존스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
    제임스 몽고
    존 맥아더
    존 파이퍼(John Piper)
    R. C. 스프로울(Robert C. Sp
    존 거스너(John Gerstner)
    11 D. M. Lloyd-Jones, Romans: Exposition of chapter 1. The Gospel of God (The Banner of Truth, 1985), p134. (설교를 한 시기는 1955년)
    12 Dennis Rokser, Examining the Lordship Salvation: Part 2, Grace Family Journal 2007:3, http://www.duluthbible.org/246451.ihtml 에서 인용. Rokser 자신은 FG파이다. 마이클 호튼 같은 이는 자신이 LS로 분류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는지 모르겠으나 FG 주의자들은 어쨌든 그를 LS파로 인식하고 있다.
    7
    )
    더 핑크(Arthur W. Pink)
    l S. Horton)
    케네스 젠트리(Kenneth L. Gentry

    마이클 호튼(Michae
    FG(Free grace)파13
    루이스 체이퍼(Lewis S. Chafer)
    제인 핫지스(Zane Hodges)
    드와이트 펜테코스트(J. Dwight Pen
    찰스 라이리(Charles C. Ryrie)

    워렌 위어스비(Warren W. Wiersbe) 사실 FG파를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Google에서 ‘Lordship salvation’을 검색해보면 즉각 알 수 있듯 적어도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미국 목회자의 절대 다수는 FG 지지자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운영하는 웹사이트에서는 한결같이 LS를 행위구원론과 동일

    서 접할 수 있는 글들은 대부분 LS를 행위구원론으로 폄하하는 내용이다. 논쟁이 벌어지면 거기에는 언제나 기존의 입장을 수성하는 측과 새로운 견해를 들고 나와 기존 견해를 반박하는 측이 있다. 주재권 구원 논쟁에서는 FG와 LS 어느 쪽이 수성의 입장일까. 많은 사람들이 LS가 새로운 이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1950년대 이후 현대 복음주의의 배경 속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시야를 종교개혁 이후의 교회사로 확장해 보면 양상은 전혀 달라진다. 개혁교회가 일관되게 고수했던 구원관에 더 가까운 것은 LS이며 FG가 오히려 변종에 해당한다. 실제로 FG의 수장격인 핫지스는 LS를 과거 청교도주의자들의 뒤틀린 믿음관을 현대에 되살리려고 애쓰는 자들이라고 말한다.14 LS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대부분 이런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며, LS와 FG가 실제로 무엇을 말

    13 Gentry KL, Lord of the Saved (P&R Publishing, 1992), p5. Gentry 자신은 LS파이다. 14 Hodges, Absolutely Free!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9), p32. p220의 각주에서 알 수 있듯 핫지스는 존 맥아더가 신학적으로는 청교도주
    주의 신앙 자체이다. 15 마이클 호튼(Michael S. Horton)과 그의 White Horse Inn 사역(www.whitehorseinn.org 참조)의 동료들이 함께 저술한 Christ the Lord (WIFF and STOCK Publishers, 1992)는 주재권 구원 논쟁에 대한 매우 훌륭한 안내서이다. 이 책이 번역되었더라면 필자가 이 글을 쓸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호튼은 FG를 비성경적 구원론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지만 동시에 맥아더의 세대주의적 경향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또한 맥아더의 초기 저작들이 믿음의 본질에 대해 오해를 살 만한 문구를 포함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후 맥아더가 개혁주의자들과의 교제를 통해 자신의 오류를 기꺼이 수정하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를 비판하는 것은 그의 초기 저작들만 읽은 사람들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FG 주의자들이 이 책
    8
    3 주재권 구원 논쟁의 핵심 쟁점
    원 얻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에서 인용하는 FG의 자료들은 그들 내부에서 광범위한 지지와 인
    을 받은 것들임을 밝혀둔다.
    G: 믿음은 결단의 산물이며 믿는 것은 대단히 쉽다
    이다. 이 장에서 그는 믿음이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시는 것이 진실이라는 내적 확신이다. 그것이, 오직
    그것만이 구원 얻는 믿음이다.17
    0
    -구
    주재권 구원 논쟁은 무엇보다도 구원론에 대한 논쟁이다. 개신교 구원론의 핵심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즉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므로 LS와 FG가 ‘믿음’, 혹은 ‘구원 얻는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이 논쟁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두 진영 모두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는다는 신앙을 분명히 고백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S는 FG가 말하는 믿음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 FG는 LS가 구원 얻는 믿음의 기준을 높여놓는 오류, 즉 믿음뿐 아니라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추가하는 행위구원론을 주장하고 있다고 반박하였다. 앞에서 말했듯 대중들은 FG의 주장에 손을 들어 주었으며 미국 복음주의 교회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LS를 행위구원론자와 동일시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비록 주재권 구원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는 일은 드물지만 많은 설교자들과 선교단체 지도자들이 FG의 견해에 동조하는 입장을 기독교의 정통 구원론인양 가르치고 있다. 읽는 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분명히 밝히지만 필자는 LS와 개혁주의의 구원론을 지지하는 사람이다. 이 글의 목적은 LS와 FG의 견해를 단순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LS가 성경적인 구원론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FG의 주장을 인용할 때 문맥을 무시하고 일부분만 인용하여 기괴한 주장인 것처럼 보이게 하거나 어느 집단에나 존재하는 일부 극단주의자들의 견해를 전체의 것인 양 과장하는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 필자가 이 글

    F
    핫지스(사진16)는 그의 책에서 구원 얻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장에 ‘믿음은 그저 믿음일 뿐이다 (Faith Means Just That-Faith!)’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는 맥아더를 위시한 LS 주의자들이 단순한 지적 동의와 구원 얻는 참된 믿음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반발을 표현한

    성경이 말하는바 믿음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
    여기서 하나님의 증거란 구원하는 사실들(saving facts)에 관한 증거를 말한다.
    16 http://www.faithalone.org/bookstore/james.html
    17 Hodges, p31.
    9
    4장에서 예수님이 사마리
    여인에게 하신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 선물에 대해 알아야 했으며 이 선물을 주
    시는 분이 누구이신지를 알아야 했다.20
    을 논증하기 위해 그들이 자주 사용하는 성경의 예화는 나사로의 부활과 모세의 놋
    사건이다.
    음성을 듣는 것을 통해 새로운 탄생이라는 놀
    랍고도 비가역적인 기적이 일어난다.21
    . 한 번
    바라봄으로써 영생이라는 결과가 온다. 이보다 단순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22
    핫지스가 말하는 saving facts는 첫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 둘째 그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사실 두 가지이다.18 이 사실들을 믿을 때 그가 약속하신 영생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appropriate 할 수)19 있다. 영생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실에 대한 ‘단순한’ 믿음이 필요할 뿐이다. 그는 요한복음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해야 하는 일은 내가 너에게 주고자 하는 무언가를 너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너는 특정한 사실들을 알아야만 한다. 너는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며,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보다 더 명료하고 이보다 더 단순한 것이 있겠는가? 이 죄 많은 여인은 중대한 정보를 얻기 전에는 영생을 얻을 수 없었다.
    믿음은 ‘단 한 번’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것으로서 FG는 이 일이 대단히 단순하고 쉽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

    모든 믿는 자에게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요11:25-26)는 나사로의 생명 없는 상태에 방해 받지 않으셨다. 오히려 “나사로야 나오라!”는 단순한 말씀이 죽은 자의 귀를 관통하였고 그 음성은 나사로에게 다시 생명을 주었다. 그 일은 이토록 단순했다. “나사로야 나오라.”(요11:43)라는 말은 직설적이었고, 명료했으며, 효과적이었다. 나사로는 단 한 번 듣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한 순간으로부터 그는 살아났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단 한 번 마시고, 단 한 번 아들의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모세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다(민21:9). 모세에게 이렇게 하고 나서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21:8)라고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이 일어났다.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 본즉 모두 살더라”(21:9). 구원 얻는 믿음을 보여주는 얼마나 놀랍고도 단순한 장면인가!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달았듯 하나님의 아들도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 달릴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죄로 고통 받는 인류를 위해 정하신 구세주로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즉시 생명을 얻는다
    18 Hodges, p39.
    19 Appropriate, appropriation 등의 단어는 FG에서 즐겨 사용하는 중요한 용어로서 믿음이 구원, 영생 등 하나님이 우리 외부에 베풀어 주신 선물을 나의 것으로 획득하는 수단임을 강조한다.
    20 Hodges, pp40-41, 강조는 원문의 것.
    21 Hodges, p61, 강조는 원문의 것.
    22 Hodges, p62.
    10
    일이지만 영생을 얻는 것 자체는 쉬운 일이다.
    지어 그 믿음이 지속되지 않더라도 문제없다.
    정적 순간이
    며 이 때 하나님의 아들의 목소리가 비가역적인 영적 부활을 일으킨다.23
    40). 심지어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믿지 않게 되더
    라도 그분은 여전히 신실하시다.24
    참가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 절
    대로 아니다. 문제는 끝마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25
    있는 데니스 록서(Dennis Rokser)는 FG의 입장에서
    라본 LS의 오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종하고자 하는 일생의 헌신 등을 복음에 대한 합당한 반응의
    목록에 추가시킨다.26
    FG가 ‘단 한 번’이라는 단어를 중요시하고 믿는 것이 단순한 일이라고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믿음을 대상(saving facts)에 대한 단회적인 신뢰의 결단으로 규정한다는 사실과 연관되어있다. 전도에서 해야 할 일은 saving facts를 전달하고 이 사실들을 믿기로 결단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가 영생의 선물을 소유하게 되느냐의 여부는 이 결단에 달려있다. 단 한 번만 결단 하면 되기 때문에 결단을 내리는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전혀 어려운

    신라의 찬란한 문화유적지 경주,
    이제 세계에서 인정을 받게 되어
    경주 양동마을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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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론: 절기에 대한 혼란

    구약의 3대 절기는 유월절(무교절)과 칠칠절(오순절, 맥추절)과 초막절(수장절, 장막절)이다. 구약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절기들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명령한다. 그렇다면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절기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 절기들을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지키지 말아야 하는가?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7월 초순에 맥추감사주일을 지킨다. 그리고 많은 교회들이 11월 중순에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는데, 일부 교회는 추수감사주일을 초막절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유월절을 지키는 교회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더욱이 많은 교회들은 성탄절, 부활절, 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과 같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 ‘절기’를 지키고 있다. 따라서 신약성경이 절기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하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매우 적실하다. 필자는 복음서에 나타난 절기, 사도행전에 나타난 절기, 그리고 바울서신에 나타난 절기를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절기에 대하여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2. 복음서에서의 절기

    예수님은 열두 살 되셨을 때에 유대인들의 절기를 지키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참고. 눅 2:42). 이후 예수님은 유월절을 비롯하여 여러 절기들을 지키셨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절기들을 지키신 것은 그분이 구약의 규정들과 이에 기반을 둔 유대의 전통들을 존중하셨다는 뜻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본인이 유대인으로서 그것들을 지키셨을 뿐이지 우리도 그것을 지켜야 한다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즉 예수님이 행하셨다고 해서 우리가 다 행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고 해서 우리가 거기서 태어날 필요는 없으며, 예수님이 광야에서 설교하셨다고 해서 설교자들이 광야에서 설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행적과 모범에 대하여 그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여 적절히 적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행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성경 해석의 주체이시다. 예수님은 성경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한다고 말씀하셨다(요 5:39). 즉 성경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은 성경을 그분 자신의 프리즘으로 해석하도록 요청하신다. 따라서 신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구약의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 이것을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이라고 한다. 율법조항들에 있어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관점에서 그것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님이 율법을 어떤 식으로 성취 혹은 완성하셨는지를 발견하고 그에 맞게 적용해야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학적 전제를 가지고 절기를 이해해야 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관점에서 절기를 친히 ‘해석’해 주셨다. 두 가지 예를 보자.

    먼저, 요한복음 6장의 이야기는 유월절과 연관되어 있다(6:4).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게 하셨으며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하셨다. 그들은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는 동안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로 생존하였다. 요한복음에는 이러한 사실을 배경으로 하여 예수님께서 광야에 모인 많은 무리들을 풍성히 먹이신 일을 언급하며 예수님은 새로운 모세로서 온 인류에게 양식을 주실 것이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예수님이 주시는 양식을 먹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들은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실 생명의 떡은 그분의 살이고 예수님이 주실 물은 그분의 피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유월절 어린 양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다음으로, 요한복음 7-9장의 이야기는 초막절에 일어난 일이다(7:2). 초막절의 두 요소는 물과 빛이다. 유대인들은 초막절에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제단 옆 은 그릇에 붓는 의식을 행한다. 이에 예수님은 물을 소재로 삼아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신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라고 말씀하신다(7:38). 그리고 유대인들은 초막절 마지막 날 밤에 성전 안 여인들의 뜰에 있는 네 개의 대에 불을 붙여 성전의 마당을 밝힌다. 이에 예수님은 빛을 소재로 삼아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신다(8:12). 그런 후에 예수님은 실로암 못가에서 맹인을 고쳐주심으로 초막절의 두 요소인 물과 빛을 예증하신다. 따라서 초막절의 성취자는 예수님이시다.

    3. 사도행전에서의 절기

    사도행전에 나타난 절기에 대한 가장 중요한 언급은 오순절이다(행 2:1). 오순절은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로서 맥추절 혹은 칠칠절이라고도 부른다. 이 날은 첫 열매를 먹는 날이다(레 23:20). 아직 완전한 추수는 남아 있지만 유대인들은 이 날에 첫 추수한 것을 먹으면서 초막절에 있을 완전한 추수를 바라본다(출 23:16). 구속사적으로 유월절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맥추절은 성령의 강림을 통한 영적 추수의 시작을, 그리고 초막절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한 완전한 추수를 예시한다. 실제로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하심으로 복음이 널리 전파되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본격적으로 추수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7월 초순에 맥추감사주일을 지키는데 이것은 구약적으로나 신약적으로 근거가 없다. 오히려 맥추감사주일을 지키려면 오순절이 있는 5월경에 지켜야 시기적으로 적합하다. 그리고 절기의 이름을 맥추감사주일이라 하기 보다는 성령강림주일이라 해야 한다. 구약의 절기를 지켜야 하느냐는 문제와 관련하여 굳이 맥추절을 지키려면 유월절과 초막절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초막절과 추수감사주일을 연관시켜서 이해하려고 하는데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을 지키고 있는지 묻고 싶다. 게다가 맥추감사주일의 의미는 절반의 추수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대로 미래에 있을 완전한 추수에 대한 기대이며 소망이다. 따라서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추수가 시작된 것을 기리는 성령강림주일을 지키는 것은 대단히 큰 의의를 가진다.

    4. 바울서신에서의 절기

    바울은 회심하기 전에 철저한 유대주의자였으므로 유대의 절기들을 절대적으로 신봉했다. 하지만 그는 회심한 후에 절기에 대하여 이전과는 전혀 다른 입장을 가졌다. 이는 그가 절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그는 구약시대의 율법조항들이 신약시대에 더 이상 지켜져야 한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지키는 것을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역행하는 것으로 보면서 그것을 지키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입장은 그의 서신들에 많이 나온다. 그의 입장은 사역초기에나 후기에나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여기서는 갈라디아서와 골로새서에 나타난 그의 언급을 살펴보겠다.

    우선 갈라디아서를 보자. 바울이 갈라디아를 떠난 후에 그곳에 유대주의적 율법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사람들을 미혹하였다. 이에 바울은 바른 복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위하여 갈라디아서를 기록하였다. 바울은 “이제는 너희가 .....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라고 말한다(갈 4:9-11).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킨다고 비판한다. 이것들은 제사의 시간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구약시대의 제사 시간들을 다시 지킴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이루신 희생제사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헛수고가 될까 ‘두려워한다’고 절박한 심정을 드러낸다. 그런데 그는 절기를 지키는 일을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이라고 말한다. 초등학문이란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성숙한 자들에게 그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새 시대가 시작되었기에 옛 시대에 속한 것들은 폐지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골로새서를 보자. 바울은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라고 말한다(골 2:16-17).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을 이루신 일을 언급하는 문맥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셨음으로 우리가 더 이상 율법조항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말한다. 바울은 율법조항들을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율법의 조항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과 사역을 암시하고 상징한다는 뜻이다. 실로 율법에 제시된 모든 의식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실 구원 사역의 모형이 된다. 따라서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는 더 이상 그러한 모형을 따를 필요가 없다. 그것을 따르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부정하는 일이 된다.

    당시에 기독교인들 가운데에서 절기에 대하여 양분된 견해가 있었다. 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비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절기를 지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음식규례나 할례규정 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로마서에서 매우 적절한 교훈을 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롬 14:1-6). 바울은 어떤 사람들이 음식을 구별하거나 날을 구별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를 비판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가 견해의 차이를 가진 사람들을 대하는 데 중요한 지침이 된다. 우리는 절기 때문에 나누어져서는 안 된다.

    5. 결론적 교훈: 신약이 말하는 절기

    우리는 지금까지 신약이 절기에 대하여 말하는 본문들 몇 군데를 분석하였다. 사실 오늘날 개혁주의 진영에서 구약의 절기들이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주제는 그다지 논란거리가 아니다. 구약의 절기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따라서 신약시대에는 더 이상 구약의 절기들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만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구약의 절기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 절기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1) 구약의 절기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구약의 절기들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그림자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예수님이 이루신 구속사역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준다. 우리는 구약의 절기들을 부지런히 공부함으로 예수님이 이루신 구원 사역의 속성을 깨달아야 한다. 실제로 우리가 그것을 부지런히 공부하면 대단히 풍요로운 신학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

    2)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에는 유월절의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을 예표한다. 우리는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보낼 때 유월절의 의미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유월절은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탄의 수중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고 사망의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신 일을 보여준다.

    3) 맥추감사주일은 성령강림주일로 지켜야 한다.
    7월에 지키는 맥추감사주일은 한국의 실정에 맞추어서 지키는 것일 뿐이다. 필자는 맥추감사주일을 성령강림주일로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성령강림주일을 지키면서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들고 추수의 현장으로 나아가는 것을 결단해야 한다. 실제로 필자가 시무하는 산성교회는 당회의 결의로 맥추감사주일을 성령강림주일로 지키고 있다.

    4) 초막절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초막절과 추수감사주일은 ‘추수’라는 소재의 연관성을 가진다. 하지만 구속사적으로 초막절이 추수감사주일로 연결 혹은 진전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 해를 마쳐가는 시점에 한 해 동안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장려할 만하다. 

    5) 교회가 ‘기념주일’ 혹은 ‘특별주일’을 만들어서 시행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가 특별한 날을 만들어서 지킬 수는 있다. 실제로 우리 교단은 총회의 결의로 ‘교단창설기념주일’ 같은 날을 만들어서 지키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특별한 날을 구약의 절기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구약의 절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교회의 필요에 따른 것이지 율법적인 의무사항을 따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러한 날들에 ‘절기’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혼란을 부추길 가능성이 있다. 오히려 그것들을 ‘기념주일’ 혹은 ‘특별주일’ 정도로 부르는 것이 좋다. 우리가 그런 행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상하게 여길 것이 아니며 한다고 해서 비난할 것도 아니다. 그것은 교회가 정하기 나름이다. <개혁정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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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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