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총회의 이단결의자료 -

《 KJV만이 유일한 성경이라 주장하는 말씀보존학회 무엇이 문제인가? 》




◇ 출    처 :
http://www.gapck.org/

◇ 결의연도 : 1998년(제83회 총회)



제83회 총회보고서 pp.477 ~ 508



                             - 목   차 -
I. 말씀 보존학회 왜 문제인가?

II. 말씀보존학회의 정체
1. 성경침례교회 이송오 목사가 이끄는 단체
2. 대표인 이송오 목사는 누구인가?
3. 그는 어디에서 영할을 받았는가?
4. 말씀보존학회(이송오 목사)의 주장은 무엇인가?
5. 이송오 목사의 글을 통해 본 그의 신학적 사고 성향

III. 말씀보존학회 성경관의 문제점 연구
1. 성경에 대한 바른이해
2. TR(수용원문,Textus Receptus)에 바른 이해
3. 한글 개역성경이 말씀을 삭제하고 빼먹었다는 말씀보존학회의 주장에 대해
4. 이송오 목사가 혼자 13년간 번역했다는 한글킹제임스성경이 무오한 최종권위라는 주장 에 대해

IV. 경계해야 할 말씀보존학회의 위험한 주장들
1. 재창조설(再創造設, 중조론, The Gap Theory) 주장
2. 칼빈주의를 이단으로 보는 견해
3. 보편적 교회를 부정하며 성경침례교회만이 성경의 교리를 실천하는 교회라는 주장
4.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는 주장
5.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께 순종치 않는다 해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주장
6. 이 땅에는 성경을 가르친 신학교도 교수도 없다는 주장

V. 정리하는 말



Ⅰ.말씀보존학회 왜 문제인가?

우리 교단을 포함하여 한국의 건전한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적 교단들은 모두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믿고(딤후 3:16) 신앙의 기초로 삼고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훼손시키는 어떠한 시도도 단호히 배격하며, 성경을 불신시키려는 책략도 거부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경은 한국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모태이며 보루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사단이 주도하는 많은 이단 운동들은 성경의 절대성에 도전하며, 또한 복음적 해석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주의깊게 살펴보고자 하는 말씀보존학회라는 단체에서 주장하는 주장의 내용은 이제까지 성경을 대적했던 운동의 방향과 질을 달리하며 한국 교회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한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알지 못하는 사이 문제성을 가지고 교계 전반에 확산되고 있다.

◆ 말씀보존학회가 논란을 일으키는 부분이 다른 것들과 차별화되고 독특성을 가지는 이유는,

① 단순한 성경의 해석 차원이 아니라 성경 자체에 대한 이견(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역성경은 사탄이 변개한 가짜 성경이라느니 한국 교회는 성경을 가지고 있지 않다느니 하는 등등)을 주장한다는 점.

② 그 동안 성도들이 의심의 여지 없이 믿고 따르던 성경을 불신하게 한다는 점.

③ 그들의 주장이 사본학과 원문 비평에 익숙치 않은 사람들에게 접촉되어 터무니 없고, 무지한 논리지만 대단히 학구적이고, 합리적으로 들릴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우려성이 크고, 이에 따라 개역 성경을 사용하고 다른 번역본을 무시하지 않는 정상적인 성경관이 파괴되어 성도들이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점.

④ 무엇보다 비 성경적인 성경관과 학문적 접근으로 흑백 논리를 증폭시키고 기존의 성경을 가지고 설교하는 사람들을 무 가치한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파괴시킬 수 있다는 점.

이러한 것이 말씀보존학회가 한국 교회에 끼칠 수 있는 오류이며, 성경적인 교회들이 우려하는 포괄적 내용이다. 때문에 이 단체에 대해서 신중하고 정확하게 분석하여 교단과 한국 교회가 성경적이지 못한 사설에 미혹되지 않도록 대처해야 할 것이라는 점에서 분석의 중요성이 있다.






Ⅱ. 말씀보존학회의 정체

1. 성경침례교회 이송오 목사가 이끄는 단체

말씀보존학회는 성경침례교회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 단체이다. 성경침례교회는 기존의 성서침례교회와는 또 다른 교단이 없는 독립 교회로 담임 목사가 이송오이다.
서울시 강서구 방화동에 위치한 성경침례교회는 그들의 팜플렛에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성경침례교회는 변개되지 않은「한글 킹 제임스성경」만을 사용하며, 구령하고, 선교하며 성경을 가르치는 지역교회로서 성경대로 믿는 독립교회입니다.
협력 사업으로는「한글 킹 제임스성경」을 번역·출판하고 성경 교리에 충실한 책들 만을 출판하는 말씀보존학회와 신약 교회를 위한 목회자를 양성하는 펜사콜라성경신학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매월(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란 학회지를 출간합니다."

자신들을 소개한 것과 같이 성경침례교회, 말씀보존학회, 펜사콜라성경신학원 이  모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2. 대표인 이송오 목사는 누구인가?

출판물에 나와 있는 그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연세대학교 정치 외교학과 중퇴
·대한항공 조종사
·(미) Pacific Coast Baptist Bible College, 신학사
·(미) Liberty University 대학원, 상담 심리학 석사 과정
·(미) Califonia Graduate School of Theology 신학 석사, 신학 박사
·(미) Central Baptist Church, Pomona, CA. 교육 목사
·(미) Califonia 주립 Chino 형무소 목사
·선교침례교회(경기도 송탄시) 목사
·(현) 말씀보존학회 대표
·(현) 펜사콜라성경신학원 원장
·(현) 성경침례교회 담임 목사

그가 발표한 이력 만으로는 이렇다.
전해 듣는 그의 나이는 현재 61 세이다.


3. 그는 어디에서 영향을 받았는가?

말씀보존학회 책자와 그의 글 속에서 발견하는 것은 특징은 그가 피터 럭크만(Peter S. Ruckman)이라는 인물에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피터 럭크만은 미국 펜사콜라성경신학원(약칭 PBI)의 학장으로 소개된다. 럭크만은 1965 년 9 월에 미국 플로리다 주 펜사콜라 시에 성경신학원을 설립했다.
럭크만은 성경침례교회의 담임 목사이다.
바로 이 럭크만이라는 인물과 이송오의 관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이내 발견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송오 목사가 말한 다음의 내용을 통해 그의 내면 세계를 볼 수 있다.


(내용은 95 년 잡지 '교회와 신앙'과의 인터뷰에서 인용한다.)

▶문)  이곳(서울)에 펜사콜라신학교가 있는 것으로 안다. 특징은 무엇인가?

답) "세계에서 성경대로 가르치는 신학교는 두 곳밖에 없다. 미국에 있는 펜사콜라 신학교와 이곳이다. 이 기회에 한 사람을 소개하고 싶다. 책을 1만 5천권을 읽은 사람이다. 또한 킹제임스성경을 1백 50회 통독했다. 저작이 1백 40권이 있다. 이 사람이 쓴 성경주석은 칼빈 이래로 유명하다는 성경 주석가 5백명 이상이 쓴 성경 주석을 일일이 지적했다. 그래서 그 분이 쓴 성경 주석서가 없으면, 그리고 바른 성경이 없이는 우리는 신학을 해서는 안된다. 그 사람은 바로 피터 락크만이다. 미국 펜사콜라신학교의 학장이다. 성경에 어떤 단어가 왜 그 곳에 쓰여졌는가에 대해서 말해 줄 수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사람이다."

이글을 보면 이송오 목사 속에 차지하고 있는 럭크만이라는 인물의 비중을 손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말씀보존학회에서 출판한 책들은 대개 피터 럭크만의 글이다. 그리고 나머지 것들도 대부분 그에게서 배운 내용을 풀어서 쓴 책들이다. 이송오 목사 뿐 아니라 서울의 펜사콜라성경신학원의 대부분 강사는 다 미국에서 럭크만에게 배우고 온 인물들이다.

이렇듯 피터 럭크만에게 전적으로 의존되고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럭크만의 주장이 곧 이송오 목사의 주장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계속 이어지는 이글에서도 럭크만의 주장을 이송오 목사가 찬성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내용을 펴고자 한다. "그 분이 쓴 성경 주석서가 없으면 신학을 해서는 안된다"고 한 이송오 목사가 만약 럭크만의 주장이 틀렸다고 한다면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피터 럭크만의 지식을 이단으로 매도한 그가 그리스도인이겠는가"라며 그의 글을 통해서 럭크만에 대한 적대적인 신뢰를 보여준바 있다.

이송오 목사와 피터 럭크만은 또한 「세대적 진리(Dispentional Truth)」라는 책을 쓴 클라렌스 라킨(Clarence Larkin)이라는 20세기 초의 인물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말씀보존학회가 출판한 「세대적 진리」라는 하드카바의 책 서문에서 이송오 목사는 라킨이라는 인물을 극찬하며 럭크만도 이 「세대적 진리」라는 책을 그리스도인이 갖추어야 할 4권의 책 중의 하나라고 했다며 비중있게 말했다. 클라렌스 라킨의 책을 보면 누구나 금방 세대주의에 입각한 글임을 알 수 있다.

이송오 목사는 럭크만에게 배운 지식을 가지고 한국교회가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성경설을 배포하고 있는 것이다.



4. 말씀보존학회(이송오 목사)의 주장은 무엇인가?

이송오 목사의 주장은 의외로 단순하고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다. 목회자들이 알기 쉽게 쓴다면 Sola Scriptura(오직 성경)이 아닌 Sola KJV(오직 킹제임스성경)을 주장한다고 하겠다.

횃불 트리니티신학대학원의 장두만 교수는 이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요약했다.

①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특별한 섭리로 변개되지 않게 보존하셨다.
②TR(Textus Receptus)만이 그렇게 보존된 헬라어 사본이다.
③비잔틴 계열의 사본을 중시한다.
④TR에서 번역된 KJV(KJV외에서 TR에서 번역된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⑤한글 개역판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삭제했다.
⑥KJV은 영감된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한 마디로 이송오 목사는 KJV을 쓰지 않는 교회는 교회도 아니며 KJV을 가르치지 않는 성경공부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KJV이 원문으로 채택한 TR이라는 사본만이 하나님이 섭리로 이 땅에 남겨주신 유일한 성경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복음주의적인 교회와 또 신학자들과 어긋나간 것이다. TR을 여러 사본들 중의 하나로 보지 않고 유일한 사본으로 삼기 때문에 성경을 번역하면서 참조한 다른 계열의 사본은 원천적으로 사탄이 변개한 것이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번역한 한글개역성경, 그들이 그토록 저주하는 영어의 NIV, RSV 등은 성경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림)

핵심적인 주장은 이것인데 이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그들은 많은 노력을 들여서 도표를 만들고 수많은 이름과 연대와 자료를 그들의 상상력과 더하여 책들과 글들을 통하여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참조 도표-말씀보존학회가 주장하는 성경의 구분)

본존된 성경(시 12:6~7)
변개된 성경

하나님께서 기록



최초의 원문
히브리 맛소라 원문
코이네 헬라어 표준원문

구 시리아 역본(the Old Syriac, A.D.120)

구 라틴역본(Old Latin, A.D.150)

이태리교회에서 사용한 성경(A.D.157-180)

골교회에서 사용한 성경(A.D.177-200)

켈트교회에서 사용한 성경(A.D.300)

발칸과 독일 지역에서 사용한 성경(A.D.400)

비잔틴 제국기간 동안
희랍교회들에서 사용한 성경(A.D.312-1453)

헬라어 표준원문(Textus Receptus)
에라스무스성경(1522),  콜리네우스성경(1534)
스테파누스성경(1550),  베자성경(1604),
엘지버성경(1633)

틴데일성경(1525)

루터성경(1534)

킹제임스성경(1611)

새성경 사복음서1988)
새성경 1판(신약, 1990)
새성경 2판(신약, 1990)
새성경 3판한영판(신약, 1991)
새성경 4판(신약, 1992)

한글킹제임스성경(신구약 합본, 1994)
한영대역 한글킹제임스성경(1995)
사탄이 변개


바빌론, 그리스, 로마의 신비종교

오리겐(A.D.184-254)의 헥사플라
제5란70인역(LXX)

유세비우스의 50권의 복사본
바티칸 사본, 시내사본 : "외경포함

제롬의 라킨 벌케이트(A.D.415)

예수회의 림즈 듀웨이 성경(1582)

여러 비평가들이 편집한 헬라어 성경들
그리스바흐(1812), 라흐만(1851),
트레겔레스(1872), 티쉔돌프(1874)

웨스트코트와 홀트의 헬라어성경(1881)

영어개역본(R.V.1884)

네슬(Nestle)판 헬라어성경(1898-1979)

연합성서공회의 헬라어성경 1,2,3판
(1966-1975)

개역표준역본(RSV, 1952),
여호와의증인-신세계역본(NWT, 1957)
새미국표준역본(NASV, 1959),
새개역표준역본(NRSV, 1970)
새국제표준역본(NIV, 1978),
뉴킹제임스역본(NKJV, 1982)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1956)-
첨가와 삭제가 임의로 이루어짐

공동번역 성서(1977), 현대인의 성경(1986)
현대어성경(1991), 표준새번역(1993)







만약, 말씀보존학회가 이송오 묵사가 KJV은 많은 면에서 우리가 잃어버리면 안되는 중요한 번역이라든가, 우리가 적극 참조하여 하나님의 뜻을 더 풍성히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물론 현대에 발달한 사본학과 원문비평의 결과 대다수의 신학자가 KJV이 불명확하고 오역과 오류가 많은 성경이라 증언함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KJV을 선호하는 이 목사를 틀렸다고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번역본 중의 하나로 과거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정확하고 더 원문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성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KJV을 사용하고 있지 않은 것이지 그것을 폐기시킨 것은 아니다.

문제는 "오직 킹제임스", "오직 TR"을 외치며 이외의 성경은 사탄이 변개한 작품이라는 그의 독단성과 아집과 공격성에 있다.

이송오 목사는 더 나아가 자신이 혼자 13년 동안 영어 KJV에서 한글로 옮겼다는 한글판 킹제임스성경을 권위역이니 최종 권위의 유일한 성경이니 하면서 개인적 번역본을 하나님이 이 땅에 주신 유일한 성경으로 주장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판단할 수 있다.

럭크만과 이송오 목사는 우리시대의 배교(背敎)를 킹 제임스 성경을 쓰지 않는데서 이유를 찾고 있다.

"우리 시대에 있어서 이 배교의 모습은 킹제임스성경을 거부하고 다른 많은 변개된 성경들을 사용한 데서부터 찾을 수 있는데……우리 시대에 가장 부패한 역본인「새국제역본」(NIV)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럭크만, 배교의 결정판 NIV, p.9)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들어온지 120여 년이 되었지만 불행하게도 성경대로 믿고 실천하는 신약교회가 세워진 적은 없었다. 물론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조명해보면 그 해답을 간단히 얻을 수 있다.

첫째, 이 나라는 그동안 바른 성경을 가져보지 못했다."

(이송오 지음, 완변한 교회는 없는가, 서문 중)

"성경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 성경의 영감을 말하는 그 위선자의 말을 어디까지 신뢰하겠는가? 성경을 갖고 있지 않으면서 원문이 어떻게, 성경의 보존이 어떻게 되고, 정확무오함이 어떻고, 교회성장은 어떻게 되고, 영적 대각성이 어떻고, 부흥해야 하고, 개혁해야 하며, 말씀을 믿어야 한다고 설교하는 그들의 위선을 당신은 어떻게 신뢰하겠는가?"(위위 책, p.74)

"「개역한글판성경」으로는 진리의 조명을 받을 수가 없다. 필자는 개역성경을 백독했다는 사람들을 만나보기도 하고 전해 듣기도 했다. 하루는 잠실에 있는 어느 교회의 목사가 자랑스레 성경을 백 독했다고 말하기에 나는 즉시, 읽고 무엇을 남겼느냐고 물었다. 아무 것도 없다고 했다."(위위 책, p.211)

"개역성경이 남겨놓은 유산이 없음은 지난 100여 년 동안에 이 나라 성도들을 영적으로 깨우쳐 줄 수 있는 책이 쓰여지지 않았다는 점과 이 민족에게 거국적으로 복음을 전한 사람이 없었다는 점으로 증명될 수 있다."

"「개역한글판성경」으로는 이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 성경이 얼마나 무가치한지도 동시에 알게 될 것이다."(클라렌스 라킨 지음, 세대적 진리, 서문에서 이송오 목사)

이러한 이송오 목사의 주장들을 읽고 있으면 그가 결국은 개역성경을 써왔고 쓰고 있는 교회 자체를 교회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단계로 갈 것임을 예측 할 수 있다.

(95년 잡지 '교회와 신앙'과의 인터뷰 중)

▲문) '신약교회'라는 용어도 자주 언급했는데 그 뜻은?
 답) "신약성경의 교리를 실천하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문) 그런 교회가 한국에는 어디에 있는가? 이곳 성경침례교회를 말하는 것인가?
 답) "그렇다. 이곳은 한국에서 최초의 신약교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 한글킹제임스성경을 가지지 않고서는 이런 교회가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답) "물론이다. 한글킹제임스성경은 변개되지 않은 성경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2최종 권위를 가지고 있다."


▲문) " 어떤 교회가 참다운 교회인가?
 답) 모든 것을 바른 성경으로 측정되어야 한다.... 주님이 지정한 교회에 다녀야 하고 주님이 지정한 성경을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이송오 지음, 완벽한 교회는 없는가, p. 21)



5. 이송오 목사의 글을 통해 본 그의 신학적 사고 성향

성경과 원문비평학에 관련된 비교 비판은 잠시 뒤에 다루며 이 장에서는 이송오 목사의 글을 통해 그의 개인적인 학문, 신앙성향을 엿보고자 한다.

1) 성경이해 부족을 통해 왜곡된 사회관

"아프리카 난민촌에 가서 죽을 쑤어 먹게 해주는 것은 일차적으로 교회가 해야할 사명이 아니다. 교회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명은 사람들에게 죽을 주는 것이 아니다. 복음을 전해주는 일이다. 인간의 육신적인 생명을 어떻게 연장시키며 언제까지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가하는가? 몇 끼의 죽으로 한달, 아니 일년을 살게 할 수 있다고 하자.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또 허기진 채 잠을 자야 하고, 그 다음날 아침에는 오십만 명이 죽는다. 그들을 모두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중에서 단 몇 명을 구해낼 것인가? 질병, 재난, 교통사고, 암, 에이즈로 죽어가는 사람들……붕대와 들것을 들고 어디까지 다니겠는가? 그런 일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할 일이 아니다. 그런 일들은 UN, WCC, 메스컴, 카톨릭 교황, 정치꾼들이 하는 일이다."(완벽한 교회는 없는가 p.12)

"갖가지 형태로 마귀의 종노릇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하나님의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에 많다……그들은 말씀을 거부하고 말씀에 역행하여 일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사회복음에 참여하고,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 애쓰고, NCC, WCC, 에큐메니칼운동, 장기기증 등의 일을 하는 것이다."(위의 책 p.223)

우리는 이 두 가지 글만 보아도 그의 사고 성향이 왜곡되어 있고 주님의 말씀이 본질을 오해하고 있는 것을 너무도 쉽게 발견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정말 제대로만 읽었다면, 성경의 정신을 조금만이라도 이러한 대담한 오류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를 더 보자. 그는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회의 특징을 열거하며 다음과 같은 것도 꼽았다.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며, 세상적인 교육과 학문은 육신을 변호하는 것으로 신뢰하지 않으며 장려하지도 않으나, 그 효용성은 어느 정도 인정한다."(위의 책 p.29)

이송오 목사의 성경침례교회가 세상의 학문을 경멸하는 듯한 입장을 취하는 것은 PC통신에 떠있는 그들의 글 속에서도 발견한다.

"최초의 영감받은 원본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필사되고 보존되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다면 하시는 것입니다. 이들의 소위 과학적인 비평원리는 자연인의 관점입니다. 왜 자연인의 관점이냐면 인간이성에 근거한 판단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이성은 반대입니다."

2) 편의주의적 모순

이송오 목사는 위에서 인용한 책 97면에서 빌리 그래함을 우리가 사는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크게 쓰임을 받았던 사람으로 인용해 놓고, 말씀보존학회에서 발간하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라는 잡지에서는 빌리 그래함을 천하에 쓸모없는 배교자인 양 혹독하게 비판을 해 놓았다.

또한 한글 킹제임스성경을 그들이 발간하며 광고문에는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이 암흑시대에서 되찾은 성경"이라며 칼빈의 지명도를 십분 이용하더니 실상 그들의 22글에서는 칼빈을 형편없는 사람으로 매도하고 있다.

"칼빈은 위대한 개혁주의자였다. 그러나 그의 이론들은 성경에 비추어 높이 평가할 부분은 많지 않다. 칼빈은 요한계시록도 강해하지 못하였다. 아기에게 물 뿌려서 구원시킨다고 믿은 사람, 삼위일체의 교리에서 자기와 의견을 달리 했다고 친구를 화형에 처한 사람을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라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럭크만 저,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칼빈주의자인가, 서문에서 이송오 목사)

그의 말대로 높이 평가할 것도 별로 없는 사람을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여놓고 말하는 앞 뒤 맞지 않는 사고, 이것은 다분히 기존교단들의 비판을 우회하려는 시도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또한 위의 글은 럭크만의 책에서부터 따와서 거의 단어까지 똑같이 말한 것이다.

3) 신앙적 우월주의

"또 몇 년 전에 장로교 합동 어느 교파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려는 12명의 목사가 모여 필자에게 강의를 부탁해 왔다. 박사과정을 한다고 하기에 자료를 영어로 준비하고 내 딴에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3주의 강의가 끝났는데도 강의의 분위기는 아주 냉랭했다. 4주째 되는 날 한 사람이 일어나 질문을 하는데 어찌나 유치하든지 고소를 금할 수 없었다. 나는 즉시 수강생들의 수준을 알아차리고……"(완벽한 교회는 없는가, p.215)

"이제는 성경이 나온다. 참 하나님의 말씀이 이 달에 나온다. 참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고대했던 그 성경이 나온다. 그때까지만 사탄의 사람들이 사탄의 성경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94년 4월호,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중)

▲문) 영어 킹제임스성경을 번역했던 사람들이 보았던 원본을 가지고 한국사람이 한글로 직접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이 드는데?

답)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말로 옮겨야 한다. 무슨 수단을 쓰든지 수용언어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서 이것이 수용언어로 되어 나온 것이다. 우리나라도 히브리어 학자나 헬라어 학자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이 이제 우리 성경에서 틀린 것을 찾아내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질문을 해야한다. 그러면 나는 그 단어가 왜 여기에 쓰여졌는가에 대해서 설명을 해 줄 수 있다. 이날에 학자들이 질문을 하라는 것이다."(잡지「교회와 신앙」, 95년 2월호)

설명이 필요치 않다.

4) 반대자에 대한 공격적 상황

이송오 목사는 그들이 발행하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통권 63권 95면에 "신원조회Ⅰ"이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은 다름아닌 그와 한 때 함께 일했다가 그의 성경해석이 부당함을 지적하고 빠져나간 네 사람에 대한 그야말로 "신상비판"적인 글이다.

"필자가 여기서 신상을 밝히려고 하는 사?宕湧?필자와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던 사람들로 필자를 적대하고 비방했던 자들이다. 이들은 필자에게 인간적으로 상당한 결례를 범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필자가 이들 각인과 외나무다리에서 만났을 경우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는 독자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또 필자가 이들을 어떤 방법으로 대해 줄 것인지도 아직은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모르긴 해도 신사적으로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대우를 않을 것이 분명하다. 자기 앞도 못가리는 주제에 피터 럭크만의 성경적 지식을 이단이라고 하다니 정신이 좀 어떻게 된 것 ?틈璣? 필자가 아22는 백씨는 그런 말을 할 위인도 못된다. 아마도 그의 처남 ○○○이 맛이 좀 가더니 그가 그런 헛소리를 지껄였을 것이다. 피터 럭크만의 지식을 이단으로 매도한 그가 그리스도인이겠는가?"

그는 때로 마치 자신이 마치 하늘의 재판장이 된 것처럼 말을 하기도 한다.

"내가 만약 지옥에 가 볼 수만 있다면 그곳에 제일 많이 와 있는 사람들은 개신교회 제직들일 것이다."(교회와 신앙 인터뷰 중)

자신이 그렇게도 경멸하는 카톨릭 교인들도 제치고 개신교회 교인을 지옥에 갔다 놓았다.

5) 자신의 윤리성에 대한 이상한 반박

그는 자신과 함께 일했다가 독립한 박만수라는 인물을 깎아 내리며 알지 못할 이상한 논리를 들고 나왔다.

"그는 필자 개인의 사생활까지 들고 나왔다. 이 무식한 자는 이혼한 것(divorced)과 이혼당한 것(being divorced)을 구분할 줄도 모른다. 필자나 피터 럭크만은 이혼한 것이 아니라 이혼을 당했고, 필자는 한 여인에게서 두 번이나 이혼소송을 당하여 법정에 서기도 했다."(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통권 63호 p.102)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자신은 이혼한 사람이 아니라 이혼당한 사람이라는 논리는 이송오 목사처럼 매일 해석학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통용되는지는 몰라도 상식에는 모자라는 이상한 발상임에 분명하다. 자신의 이혼을 남의 가정, 남의 일처럼 말하는 논법이다. 이러한 논리라면 그는 결혼했던 것이 아니라 결혼 당했던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6) 극단적 성경해석

"연예인 교회가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연예인들끼리만 모이는 지역교회가 있다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별 희한한 교회도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들은 특수한 계층이란 말인지 모르겠다."(완벽한 교회는 없는가, p.100)

"새벽예배가 어디 있는가? 무엇을 근거로 새벽예배가 있는가? 성경대로 믿는 교회들이 세계 전체에 새벽예배를 드리는 곳은 없다. 초대교회 때부터 그렇게 안해왔고 그렇게 해야할 이유도 없다.

▲방언이나 은사에 대해서는 어떤가?
비성경적이다. 특히 방언은 악령이나 하는 것이다.(교회와 신앙, 인터뷰 중)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이 제도교회의 예배의식에 들어 온 것은 순전히 카톨릭 교회에서 모방해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약교회는 이 두 가지를 하지 않는다. 초대 교회에서부터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그런 것은 헛된 것이니 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완벽한 교회는 없는가, p.95)

"세 가지 절기, 즉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을 대략 살펴 보았다. 이 세 가지 모두 성경적 근거가 없다. 이 절기들이 그리스도인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아무런 관계도 없다."(위의 책, p.111)

이상 몇가지를 살펴 볼 때 이송오 목사는 성경의 정신보다는 성경전체를 이해하지 못한 속에서 문자주의에 얽매여 있으며 때로는 유아적이라 할만큼 이상한 성경 추론을 하는 경향을 발견하게 된다.

Ⅲ.말씀보존학회 성경관의 문제점 연구

킹제임스성경과 그 원문인 TR(Textus Receptus)만이 하나님이 보존하신 성경이라는 주장

1.「King James」성경의 바른 이해
1611년 번역된 킹제임스(King James)성경은 그 당시로도 전혀 새로운 성경이 아니라 이전의 번역판들에 대한 개정작업이었으며 제임스 왕이 권위를 인정한 것이었다.

"이른바 흠정역(欽定譯) "Authorized Version"이라는 것도 사실상 그 자체는 그 이전의 번역판들을 개정한 것으로 1611년 제임스 왕이 권위를 인정한 것으로 Erasmus의 그리스어 텍스트를 기초로 한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6개의 후기의 빈약한 그리스어 사본뿐이었으므로 많이 애용되어 온 흠정역에 있는 재료는 3세기 이상이나 영어를 사용하는 세계의 성경으로서는 매우 불명확한 것이다. 사실상 Erasmus도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좋은 그의 사본도 전부 사용하지 않았다…… 만일 Erasmus가 그것을(시내산 사본)을 볼 수 있었다면 지금의 흠정역 성경은 의심할 여지없이 좀더 정확한 텍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George E. Ladd, The New Testament and Criticism)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신약학자 죠지 래드(George Ladd)의 말이다. 죠지 래드는 성경 헬라어와 교부 헬라어로써 박사학위를 받은 분으로서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신약학자이다.

횃불 트리니티신학대학원의 장두만 교수의 글을 인용해 본다.

"KJV은 1611년에 번역된 성경이다. 언어는 역사성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경과하면 그 의미가 변화된다. 약 400년이 경과하면서 단어의 의미가 바뀐 경우도 많이 있고, 1611년 이후에 성서 고고학은 물론 다른 학문도 급격히 발달되어 성경의 배경이나 단어의 의미가 분명히 밝혀진 경우도 많이 있다.
사본의 수도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엄청나게 많이 있다. TR의 원형인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이 겨우 5권의 사본을 사용해서 편집된 것임에 비해 지금 우리는 약 5,400여권의 헬라어 사본을 가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모든 것들을 무시해 버리고 킹제임스 유일론을 주장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망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전반적으로 볼 때 KJV은 좋은 번역이고 믿을 만한 번역이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번역판이기 때문에 오류가 상당히 많다. 우리가 성경의 영감을 말할 때 그것은 원본에만 국한시키지 결코 사본이나 번역판에까지 확대해서 적용시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모든 사본과 번역판은 다소간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장두만, 목회와 신학, 98년 7월호)

R. C. Sproul 박사가 「Knowing Scripture」에서 KJV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도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King James」성경처럼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면서 널리 사용되었던 성경 번역의 경우 그 영예가 위협받을라치면 그에 대한 저항이 봇물처럼 터져나오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들은 킹 제임스 성경을 없애는 것은 마귀의 소행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또다른 사람들은 「King James」성경이 문자적으로 영감을 받은 번역인 것처럼 행동해 왔다.

그러??반응을 보이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King James」성경은 그 오랜 수명 때문에 문학이나 시나 찬송가에서 그 글귀가 울려 퍼질 때마다 그것은 더없이 소중한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 번역의 아름다움을 나만큼 사랑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King James」성경과 관련하여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하고 잊을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King James」성경이 대부분의 현대 번역보다 성경의 원뜻을 정확히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기에는 중요한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King James」성경의 원문이었던 희랍어 텍스터(Textus Receptus)는 오늘날의 새로운 희랍어 텍스트들보다 분명히 좋지 못하다. 「King James」성경에서 발견되는 많은 텍스트상의 오류는 최근의 번역들에서는 거의 제거되었다. 16세기 이후 발견된 사본들은 원본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큰 도움을 주었다…… 아름다운 번역으로 말하자면 「King James」성경을 따라올 성경이 없다. 그러나 성경 번역의 정확성과 흠없음에 관심이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King James」성경을 넘어서야 한다."
신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조언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다. 현재 서구 세계가 사단의 사주를 받아서 교묘히 짜고 「King James」성경을 제거하려고 하고 있다는 럭크만과 이송오 목사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무지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2. TR(수용원문, Textus Receptus)에 대한 바른 이해

말씀보존학회는 「King James」성경의 원문인 TR만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유일하게 조본된 참된 말씀이라 주장하고 있다.

"한편 신약 성경의 원문은 사도 시대 이후 주로 소아시아의 지역 교회들과 성도들에게 산재되어 있었고, 이 사본들이 신실한 성도들의 손에 의해 믿는 사람들이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던 안티옥에서 발칸 반도를 거쳐 알프스를 넘어 유럽으로 옮겨졌고, 독일에서 영국으로 들어갔다. 이 원문은 악한 세력들의 성경 변개 시도와 갖은 박해 속에서도 한 번도 그 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옴으로써 정통원문(Taditional Text)이란 명칭이 붙게 되었다."

아래의 글은 한글 킹제임스성경의 홍보 팜플렛의 내용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최초의 원본에서 수많은 현사본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5,366개의 필사본들이 현존하는데, 이 가운데 85%의 필사본들이 "다수필사본"인 헬라어 「표준원문, TR」이며, 나머지 15%가 소수필사본인 알렉산드리아 원문이다. 이렇게 아렉산드리아 원문이 소수인 이유는 사람들이 틀린 원문을 필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문에 따라 성경을 판단할 때, 영어 「킹제임스성경」과 「한글킹제임스성경」은 「표준원문」계열의 성경이고, 「개역한글판성경」은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성경이다."(홍보 팜플렛 4∼5쪽)

정말 그런가? 장두만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TR의 기원은 중세의 인문주의자요 신학자인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9-1536)에서 시작된다. 그 당시까지 시중 판매용으로 제작된 헬라어 성경은 전무하였다. 그해서 프로벤이라는 인쇄업자의 종용으로 에라스무스가 헬라어 성경 판집작업을 하기로 하고, 영국의 케임브리지대학과 스위스 바젤에서 헬라어 사본을 수집하였지만, 실망스럽게도 12세기경의 사본 5권 밖에는 입수하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입수한 사본 가운데 요한계시록을 포함하고 있는 사본은 단 한 권뿐이었고 그것도 마지막 6절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에라스무스는 부득이 라틴어 벌게이트(Vulgate)성경을 번역하여 그 부분을 채워 헬라어 성경을 시중에 내놓았다. 1515년 10월 2일에 시작된 인쇄가 1516년 3월 1일에 완성되었다. 1,000페이지 가량 되는 방대한2 작업을 너무 급히 인쇄했기 때문에 오자가 엄청나게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헬라어 성경 출판은 대성공이었다. 그것은 4판에 69쇄가 발행되었다. 그의 성경은 그후에도 스테파누스(Stephanus), 베자(Beza), 엘제비르(Elzevir) 등을 통해 여러 차례 개정되었다. 특히 엘제비르는 그의 2판(1633)서문에서 에라스무스 헬라어 성경의 인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본문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TR(Textus Receptus=Received Text)이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고, KJV의 신약 부분은 바로 TR에서 번역된 것이다."(목회와 신학 98년 6월호)

조지 래드의 말을 들어본다.

"우리는 3세기 반 동안이나 수백 만의 신도들이 사용하고 사랑하여 왔던 하나님의 말씀의 형태는 1611년의 「King James Version」이었으며 최초로 인쇄된 신약성경, Textus Receptus에 기초를 둔 것이고 Textus Receptus는 후기 사본의 대다수로써 이루어진 시리아(Byzantine) 계보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상기해 두자. 좀더 최근의 학문연구로 만들어진 텍스트에 비교해 볼 때 이 Textus Receptus는 빈약한 텍스트일뿐 아니라 판본의 오류가 수천 개나 여기저기 있는데 이것이 바로 애지중지하여 온 흠정역을 만드는데 기본이 된 것이다. 이것은 신앙이나 신학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단순하고 객관적인 사실인 것이다.(중략)

Textus Receptus와 KJV은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인정되어야 한다. 영감적인 이 책에서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과 만날 수 있고 나나님과 구원의 관계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3세기 반 동안이나 흠정역(欽定譯)은 텍스트상에 수 천개의 오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 백만의 신도들에게 단 하나의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왔다. 그 위엄성, 아름다움, 친숙함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늘날에도 다른 번역에서는 느낄 수 없는 평안함을 느끼는 것이며 흠정역의 영어 말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인 양 읽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 때문에 우리가 익숙해진 흠정역의 기초가 되었던, 그 시대에 뒤떨어진 텍스트의 결점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리고 다수 번역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하는 말씀보존학회의 주장은 참된가?

장두만 교수의 글을 본다.

"사본의 숫자로 볼 때에는 비잔틴 계열에 속하는 사본이 가장 많다. 비잔틴 계열의 사본을 중시하는 학자들은 사본의 '정상적인 전승'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보존' 때문에 비잔틴 계열의 사본이 많고, 따라서 이 계열의 사본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정상적인 전승'이란 올바른 사본이 오류가 있는 사본보다 많이 제작되는 경향이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증명할 수 없는 하나의 가정에 불과한 것이다. '섭리에 의한 보존'이란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당연히 그 사본도 보존되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본의 무오성을 약속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시다.

그러면 왜 비잔틴 계열의 사본이 많이 제작되었는가? 우리가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한다면 문제는 어렵지 않게 풀릴 것으로 생각된다. 신약성경이 기록된 후 얼마 후부터 로마제국 내에서는 라틴어가 헬라어 대신에 통용되었기 때문에 헬라어 사본을 제작할 필요가 적어졌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는 헬라어 사본이 많이 제작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역 사본으로는 라틴어 역본이 많다. 또다른 이유는 이슬람교가 팔레스타인은 물론 북아프리카, 스페인 및 남프랑스에까지 여향을 미쳤지만,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 지역은 15세기까지 이슬람 영향권밖에 있으면서 계속 헬라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자연히 헬라어 사본 제작이 활발했던 것이다."

3. 한글 개역성경이 말씀을 삭제하고 빼먹었다는 말씀보존학회의 주장에 대하여

말씀보존학회에서는 자신들이 번역한 한글 킹제임스성경을 홍보하면서 자신들의 성경만이 유일하게 "없음"이라는 구절이 없는 참된 성경이라 주장하고 있다. "없음"이라는 구절이 없기 때문에 삭제가 없는 유일한 성경이라는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는 곧 발견할 수 있다.

앞서 인용한 죠지 래드의 말처럼 TR 자체가 부족한 원문이고 판본 자체에 수 천개의 오류가 있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더 신빙성 있고 정확한 전기 시대의 사본이 있는 상황속에서 이 부족한 번역들은 교정될 수 있었다.

우리들이 사용하는 개역성경에 있는 "없음"이라는 부분은 말씀보존학회의 주장처럼 원래 있었는데 삭제한 것이 아니라 성경 필사자들이 후기에 첨가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원문비평학적으로 제외시킨 것이다.

한 예를 살펴본다.

■요한일서 5:6∼7절

▶한글 개역성경: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한글 킹제임스성경(말씀보존학회 발행):이 분은 물과 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시니, 물로만 아니라 물과 피로니라 증거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이시기 때문이라 이는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가 세 분이시니,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요 이 세 분은 하나이시라.(영어 KJV에는 이 부분을 이탤릭체로 적어 놓았다. 한글 개역성경에는 이 부분이 없음.)

말씀보존학회에서는 이 부분의 차이점을 이렇게 해석하고 설명하고 있다.

"개역성경은 삼위일체를 완전하게 증명할 수 있는 구절을 통째로 제거해 버렸다. 뿐만 아니라 6절의 끝부분을 7절에 놓아 7절이 없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다."(홍보 팜플렛)

말씀보존학회는 결국 사탄의 세력들이 삼위일체를 부정하기 위해 너무도 삼위일체를 증명하기 멋진 구절을 의도적으로 제거해 버렸다는 의미이다. 정말 그런가?

R.C. Sproul 박사의 말을 들어본다.

"나는 성경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삼위일체의 교리를 전하고 있다고 믿는다. 나는 또한 위에 인용한 구절이 참된 말씀임을 믿는다. 하지만 나는 요한이 이 구절을 직접 쓰지 않았으며 또한 이 구절은 요한1서의 텍스트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확신한다. 왜일까?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잇는 최고의 희랍어 사본들이 압도적으로 이 구절에 대한 반대 증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최초의 텍스트들에는 나타나있지 않다. 성경 텍스트에 우연히 첨가된 필사자의 주석을 지적할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

죠지 래드의 말을 들어보자.

"성부, 진리, 성령인데 이것을 증거하는 이가 셋이다"(요일 5:7, 8 A.V.) 이것에 관한 증언을 빠뜨렸다는 이유로 Erasmus 자신이 비난을 받게 되었다. Erasmus는 자신을 변론하여 말하기를 Latin Vulgate에 있는 이 말은 자기가 알고 있는 그리스어 사본에는 아무데도 없었으며 단 한 개의 그리스어 사본에서만 발견된다 해도 그의 후판에 그것을 집어 넣겠다고 약속했다. 이와 같은 사본이 나왔을 때 Erasmus는 그의 약속을 이행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흠정역에 이 말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이 그리스어 사본은 옥스퍼드에 있는 한 수도승이 Latin Vulgate에서 그 말을 뽑아다 쓴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수천 개의 그리스어 사본에 이 말이 있는 것은 단지 셋 뿐이며 그 연대는 12세기부터 13세기, 그리고 16세기이다. Erasmus의 신약의 다른 열 두 개의 구절에는 그리스어 사본의 증언의 뒷받침이 없는 부분이 있다."

장두만 교수

"사본상의 증거가 분명한데도 의도적으로 그 구절을 빼먹었다면 어떤 비난이라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NASB나 NIV번역자들이 KJV에 있는 일부 구절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은 사본상의 증거로 볼 때 원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필사자들이 나중에 포함시켰다는 증거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포함시킨 사람들이 더 큰 비난을 받아야 되지 않겠는가?"(목회와 신학 98. 6)

이 외에도 합리적으로 성경적으로 원문비평학적으로 논할 구절이 많지만 원리는 같기에 지면상 한 예로 그치고자 한다. 개역성경이 말씀을 삭제했다는 대담한 말씀보존학회의 주장은 무모하고 무지한 주장에 불과하다. 오류가 있을 수 있는 한 인간이 편집한 사본을 마치 원본인 것 마냥 취급하고 또 그것을 한 번 더 번역한 KJV을 우상시 하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4. 이송오 목사 혼자 13년간 번역했다는 한글 킹제임스성경이 무오한 최종권위라는 주장에 대해

(교회와 신앙 95. 2월호에서 이송오 목사의 인터뷰 내용)

▶ 문) 한글 킹제임스 성경은 누가, 얼마동안 번역을 한 것인가?
"나 혼자했다. 13년 걸렸다."

▶문) 그렇다면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100%로 번역한 것인가?
  답) "그렇다."

▶문) 한글 킹제임스 성경에도 오류가 있다는 말이 있다던데?
  답) "하나님의 말씀을 파괴시키려는 말이다."

▶문) 한글 개역성경을 사용해도 원문과 교리적으로 큰 차이점은 없다는 의견도 많이 있던데.
  답) "누가 그런 말을 하는가. 그런 거지같은 ○○의 말을 듣는가?"

▶문) 만약 한글 킹제임스성경에 잘못된 부분이 발견된다면 수정할 용의가 있는가?
  답) "물론이다."

▶문) 그 의미는 한글 킹제임스성경이 불완전하다는 뜻인가. 아니면 고칠 것이 전혀 없다는 뜻인가?
  답) "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점은 있다. 유죄가 판명될 때까지 무죄라는 말이 있다. 성경에 쓰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한글 킹제임스성경보다 훨씬 좋은 성경을 번역해 냈다고 하자. 그 때까지는 이것이 최종권위이다."

이송오 목사는 한글 킹제임스성경 발간 서문에 번역의 표준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구약의 번역은 처음부터 히브리어 맛소라 원문을 영어로 가장 잘 전수한 킹제임스성경에서 번역하였고, 신약은 처음에 희랍어 표준원문에서 직역했으며 제3판을 킹제임스성경과 대조하면서부터 킹제임스성경에 철저하게 어휘를 맞추었고, 구약의 어휘는 히브리 맛소라 원문과 비교, 투영시킴으로로써 히브리어, 희랍어,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는데 불가피하게 생길 수 있는 언어의 간격을 좁히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굳이 번역이 원칙이라고 내세워 틀을 먼저 짜놓고 끼워 넣는 식의 번역을 탈피하였고 표현기법에 있어서 이전 것보다 더 낫다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선택하였다. 「개역 한글판」성경으로 익숙해져 버린 문화적 및 전통적 통념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며, 성구사전(Young's Concordance)의 어휘만을 획일적으로 따르지 않고 오히려 본 성경 어휘로 새로운 성구 사전을 만든다는 자세를 취하여 어휘의 통일성과 더불어 의미의 전달에도 중점을 두었다."(한글 킹제임스 성경 발간 서문)

위의 말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자신의 표현대로 '번역의 기준도 없이' 이것저것 뒤섞어서 자신의 판단대로 노력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영어 킹제임스에서 100%번역했다는 그의 말을 이내 자신의 말로 거짓임이 판명된 것이다.

그가 혼자 원칙없이 편의주의적으로 번역한 이 성경이 어떤 부분이 오류인지는 나열한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욥기 29:3이 원래 "촛불"(candle)인데 단어를 개역한글판성경(NASV)에서는 "등불"(lamp)로 바꾸어 놓았으니 변개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준이다. 고고학적으로 유대민족이 초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등불로 더 정확히 번역해 놓은 것을 변개라고 말하는 정도니 다른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이송오 목사는 영어 킹제임스가 이상한 듯한 부분은 자기 나름대로 고치고 영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역한 부분도 많다.

결론적으로 "한글 킹제임스성경이라는 영어 킹제임스성경의 번역도 아니고 헬라어 원문에서의 새로운 번역도 아니다. 그것은 번역으로서는 별 가치가 없는 중역(重譯)에 불과한 것이다.「말씀보존학회」 사람들이 번역을 하려면 구약은 MT(Masoretic Text)에서 직접 번역하고, 신약은 TR(Textus Receptus)에서 번역했어야 할 것이다."(장두만 교수)

▲문)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했던 사람들이 보았던 원본을 가지고 한국사람이 한글로 직접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이 드는데?

  답)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말로 옮겨야 한다. 무슨 수단을 쓰든지 수용언어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서 이것이 수용언어로 되어 나온 것이다. 우리나라도 히브리어 학자나 헬라어 학자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은 이제 우리 성경에서 틀린 것을 찾아내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질문을 해야한다. 그러면 나는 그 단어가 왜 여기에 쓰여졌는가에 대해서 설명을 해 줄 수 있다. 이 나라에 학자들이 질문을 하라는 것이다."(잡지, 교회와 신앙. 95. 2)

결론적으로, 한글 킹제임스성경은 이송오 목사가 개인적인 의욕을 가지고 이것저것을 사용해 편집해 만든 조잡한 번역판인 '이송오 버전'(Version)에 불과하다. 이 성경을 유일하게 영감된 성경으로, 고칠 것이 전혀 없는 성경으로 말한다는 자체가 참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100년 전통의 권위있는 성서공회를 무참히 깍아내리며 자신의 번역만이 참 성경이라고 하는 그의 주장은 '비성경적'이라 말해도 과하지는 않으리라 본다.

그러기에 아래의 말은 우리가 매우 위험스럽게 여겨야 할 말이다.

"이제 성경이 나온다. 참 하나님의 말씀이 이 달에 나온다. 참그리스도인이 그렇게 고대했던 그 성경이 나온다. 그때까지만 사탄의 사람들이 사탄의 성경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94년 4월호,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중)

Ⅳ.경계해야 할 말씀보존학회의 위험한 주장들

1.재창조설(再創造說, 중조론, The Gap Theory)주장

2재창조설 혹은 중조설이란 우주가 2차에 걸쳐 창조되었다는 이론으로서 재창조론에 의하면 온 우주가 창조되었으나 천사가 타락하는 이변적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지구를 심판하신 결과 어둠과 물로 뒤덮인 혼돈과 공허가 생기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6일동안 다시 재정비 창조하게 되었다는 설(說)이다.

▣창세기 1:28절의 오역을 통한 재창조설 주장

  ▷개역한글 성경: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한글 KJV(이송오 목사):땅을 다시 채우고

  ▷영어 KJV : and replenish the earth

이송오 목사의 정신적 뿌리인 피터 럭크만은 '배교의 결정판 NIV'란 책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다시 채우라"(replenish)를 "채우라"(fill)로 바꾸어 버림으로써 아담 이전에 있었던 문명에 대한 기억을 말끔히 없애버린다.(욥 38:7절을 보라.) "다시 채우라"는 말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담이 채우기 이전에 이미 뭔가가 채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시편 82편의 "신들(gods)이며, 창세기 6:1과 욥기 1:6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로 나타나는 천사들이다. 창세기 1:1에서 하나님께서 완전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을 때 이들 천사들은 땅 뿐 아니라 온 우주를 채웠으나, 사탄의 타락과 함께 한 이들의 타락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물로 심판하셨고(벧전 3:5,6), 그 결과로 온 우주는 "혼돈" 상태에 있게 되었다(창 1:2). 그 후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3부터 시작하는 재창조를 하셨고, 그때 아담은 이전에 채워 있었던 땅을 "다시 채우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NIV는 "다시를" 빼버림으로 이 진리를 가린 것이다."(피터 럭크만, 배교의 결정판 NIV, p.29)

피터 럭크만이 영향을 받은 클라렌스 라킨(Clarence Larkin)이라는 인물은 그의 책 「세대적 진리」에서 창세기 1:1절을 아담 이전의 무한한 과거의 일로 보았다.

"태초에 땅이 무슨 이유로 공허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아담 이브의 타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죄가 존재했다는 사실이다"(클라렌스 라킨, 세대적 진리, p.5880)

본문 창세기 1:28절에서 문제가 되는 단어는 히브리어 '말레'이다. 이 단어의 해석에 대한 의견을 장두만 교수에게 들어본다.

"Brown-Driver-Briggs의 히브리어 사전에 의하면, 이 단어의 의미는 '채우다'(fill). '가득하다'(be full)이다. 「구약원어사전」(Theological Wordbook of the Old Testament)이나 퀄러-바움가르트너(Koehler Baumgartner)의 히브리어 사전에서도 동일한 설명을 ?構?있다. 그렇기 때문에 '말레'라는 단어는 '다시 채운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냥 '채운다'는 의미다. 따라서 영어 KJV는 분명한 오역이고, 한글 킹제임스는 영어 KJV의 오역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글 개역판은 바르게 번역하고 있다."(목회와 신학 98. 7)

재창조설 혹은 중조설은 그 현대 시조라고 할 수 있는 Thomas Chalmers가 1814년에 발표한 것으로서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성경적 근거가 희박하고 성경에 모순되며 성경 해석자의 권한을 벗어난 월권행위로, 받아들일 수 없는 비성경적 교리이다.(참조, 유재원 교수, 창세기 강해1장, p.27)

피터 럭크만은 KJV의 오역을 의심해 볼 의지가 전혀 없기 때문에 바르게 교정된 성경을 악한 무리에 의한 고의적 변개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적인 안목의 결여와 KJV을 무오하다고 여기는 잘못된 성경관이 빚어낸 그릇된 주장인 것이다.

2. 칼빈주의를 이단으로 보는 견해

이송오 목사는 한국의 대다수 복음주의적 교단들이 칼빈주의적 믿음, 다시 말해 성경의 가르침을 정리한 칼빈주의 5대교리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의 속마음은 칼빈주의에 대한 증오로 가득차 있다고 할 만큼 칼빈주의를 어리석은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그 파장이 어떠할 것인지를 알아서인지 그는 그의 서적에서 모호한 표현으로 비판을 빗겨나가려고 하고 있는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칼빈주의를 이단으로 보고 있는 피터 럭크만의 주장과 같음을 곧 알 수 있다.

이송오 목사의 견해에 앞서 피터 럭크만의 책「나는 그리스도인인가 칼빈주의자인자」라는 책에서 인용해 보고자 한다. 그런 이후 이송오 목사의 주장을 살펴본다.

"극단적 칼빈주의란 스위스의 종교 개혁자 존 칼빈이 가르친 교리들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을 말한다. 칼빈주의의 주요한 교리들은 영어 머릿글자를 따서 이른바 튜울립(TULIP)이라는 단어로 표현되어 왔다. 그러나 그 5대 교리들이 내용은 비성경적이며, 따라서 "칼빈주의"는 하나의 이단으로 분류된다."(위의 책 p.13)

"좀 더 분명히 말하자면 "극단적 칼빈주의"는 칼빈이 가르친 어떤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주의의 5대 교리는 비성경적이며 성경에 나와 있지도 않고 철학적으로도 엉터리다. 이제 우리는 이 사실들에 대해 하나 하나 살펴보고자 한다."(같은 책 p.17)

럭크만은 위의 책의 도입부에서 칼빈주의 5대 교리를 강조하는 것을 "극단적 칼빈주의"라 말했다. 더 나아가 칼빈주의 5대 교리는 비성경적이고 엉터리라고 말했으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책을 썼다. 그러나 분명한 TULIP으로 요약되는 칼빈주의 5대 교리를 믿지 않는 사람은 칼빈주의자가 아니라고 해야하지 온건한 칼빈주의자니, 강조의 문제니 하는 것은 비난을 염두에 둔 말의 유희일 뿐이다. 만약 럭크만의 주장대로 칼빈주의가 전혀 비성경적이고 엉터리라면 온건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철저히 배격해야 할 것이지 TULIP을 믿지 않는 칼빈주의자란 이치상 이미 칼빈주의자가 아닌 것이다.

럭크만은 책을 처음 시작할 때는 성도의 견인 교리를 의식하며 그것은 인정할만할 것처럼 글을 써 나갔다.

"우리는 본 칼빈이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존 칼빈에 대해 말할 때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느 정도 지각과 믿음을 가진 한 사람의 종교 개혁자였다는 것과 사람이 한 번 거듭나면 다시 타락하88여 멸망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한 사람이었다는 것 외에 인정할 만한 것은 별로 없다. 그 밖에도 인간이 행위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행위에 따라 구원이 지켜지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 점에 있어서만은 칼빈을 높여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외에 그를 인정할 만한 점이란 거의 찾아볼 수 없다."(위의 책 p.14)
"그러나 우리는 그 칼빈주의 5대 교리가 전체적으로 암시하는 바 "구원의 영원한 보장"에 대해서만은 칼빈주의자와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위의 책 p.15)

하지만 '성도의 견인'을 약간 인정하는 듯한 제스츄어도 본론적인 비판에서는 역시 대상이 되는 것을 발견한다.

"칼빈주의 다섯번째 교리인 "성도의 견인" 역시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 본다면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라는 성경적 교리와는 상관?愎?비성경적인 교리임을 알 수 있다."(위의 책 p.64)

그럼 이송오 목사는 어떤가?

"필자도 칼빈주의자이다. 왜냐하면 내가 받은 구원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알미니안주의자들처럼 나는 구원을 잃어버릴까봐 겁먹지 않으며 구원을 잃어버릴까봐 새벽기도하러 가는 등 행위를 붙잡지 않는다."(완벽한 교회는 없는가, p.204)

하지만 이 말을 우리 관점에서 오해하면 안된다.

"그러나 극단적 칼빈주의 이론은 성경적으로 비?上咀?때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극단적 칼빈주의는 성경으로 조명해 볼 때 이단 교리임이 지금부터 200년 전에 이미 밝혀졌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 교리를 한국의 장로교회들은 기본교리로 삼아왔는가? 장로교회 교리들로 잘못 배운 사람들이 성도들을 성경으로 가르치지 않고 칼빈주의로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다."(위의 책 p.205)

이송오 목사는 칼빈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이렇게 부언한다.

"이러한 비성경적인 교리는 성경을 잘못 안 사람들이 날조한 것이지 성경의 교리가 아니다…… 이 교리가 왜 이처럼 깊숙이 자리잡게 되었는가? 그것은 초창기 선교사들이 퍼뜨려 놓은 씨앗을 그 다음 세대들이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교리가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꼬집어 해쳐낼 수 있는 성경이 있어야 했는데, 한글 개역성경은 그 일을 해낼 수 있을 만큼 정확한 성경이 아니었다."(위의 책 p.206)

한 마디로 럭크만과 이송오 목사가 주장하는 극단적 칼빈주의란 용어는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에 대한 보호막이며, 그들이 주장하는 칼빈주의자는, 비성경적이며 날조된 것이 분명한 칼빈주의 5대교리(TULIP)를 믿지 않는 칼빈주의인 것이다.

지면 관계상 이송오 목사의 칼빈주의의 대한 조야한 이해를 다 적을 수는 없지만 한 구절을 든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적 타락이다.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다는 것이 타당한 이론인가?
둘째, 무조건적인 선택이다. 지옥갈 사람과 천국갈 사람을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았다로 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이 확정되어 있다면 전도와 선교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셋째, 제한된 속죄이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는다.

넷째,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이다…… 믿고 영접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사용해서 결8정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주권으로 강제로 믿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8나는 그리스도인인가 칼빈주의자인가, 발간사에서 이송오 목사)

이송오 목사의 칼빈주의에 대한 이해 부족이 여실히 드러난다. 인간의 의지는 타락하지 않았다는 주장과 하나님은 예지에 근거하여 조건적으로 선택하신다는 것, 믿음은 오직 인간의 의지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 그리스도의 구속은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선택할 때에만 유효하다는 것, 하나님의 은총은 거스릴 수 있다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는 그의 주장은 전형적인 알미니안주의적 견해이다.

그러나 우리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는 양립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인간의 책임과도 양립될 수 있음을 믿는다. 칼빈주의자는 성경에 근거하여 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의지마저도 타락했고, 우리는 자유는 있으되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믿는다.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인간의 행위는 경계선을 같이하여 상충되지 않고 모순되지 않음을 믿는다.

우리 교단은 1619년 도르트 회의에서 고백된 칼빈주의 5대교리를 참되다 믿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성격적이라 믿으며 고백하기에 칼빈주의를 이단으로 여기는 말씀보존학회의 이단적 가르침을 배격해야 할 것이다.

럭크만의 주장을 다시 한 번 본다.

"우리가 칼빈의 저서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주건적인 은혜"에 이야기 할 때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쓰레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럭크만의 위의 책 p.43)

"칼빈은 심오한 성경학자가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성경에 관한 한 이단자"였다."(위의 책 p.44)

3. 보편적 교회를 부정하며 성경침례교회만이 성경의 교리를 실천하는 교회라는 주장

말씀보존학회가 주장하는 성경의 교리를 실천하는 이른바 '신약교회'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주장하고 있다.

1)KJV만을 사용하는 독립침례교회

"교회가 운영되는데 있어서 그 교회가 완전히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고 다른 것에 눈치를 보게 된다면 그것은 독립교회가 될 수 없다.", "신약교회란 성경대로 믿는 독립침례교회를 말한다.", "신약 지역교회는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으며 회중의 의사를 집약시켜 자치적이고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교회를 말한다.", "말로만 성경대로 믿는다고 하면서 「개역 한글판 성경」을 최종권위로 삼는 사람은 정하지 않는다. 그런 고백은 위선이요, 자기 기만이며, 그 사람은 하나님의 양무리를 오염시키고 있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어떤 교회가 참다운 신약교회인가? 모든 것은 바른 성경으로 측정되어야 한다.", "주님이 지정한 교회를 다녀야하고 주님이 지정한 성경을 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완벽한 교회는 없는가 中)

결국 말씀보존학회의 눈으로 보는 한국교회는 「개역성경」을 쓰기 때문에 구원 받을 수 없는 교회다.

"한글개역 성경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성경으로는 신학적인 논쟁이나 교리적인 연구를 물론, 잘못된 이단교리와 논쟁을 할 수 없습니다." (말씀보존학회 연구원 조승규씨의 교회와 신앙 인터뷰 중, 95. 2)

"이 나라는 130여 년 동안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지내왔기에 사단의 무법천지가 될 수 있었다. 지난 130년 동안에 이 나라에는 성도의 영적 깊이를 깨닫게 해주는 단 한권의 책도 쓴 사람이 없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130년 동안 이 나라를 영적으로 부흥시킨 부흥사도 단 한 사람 나온 적이 없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3호 p. 20)

▶그런 교회(신약교회)가 한국에는 어디 있는가? 이곳 성경침례교회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 이곳은 한국에서 최초의 신약교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글 킹제임스성경을 가지지 않고서는 이런 교회가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물론이다. 한글킹제임스성경은 변개되지 않은 성경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최종권위를 가지고 있다."(이송오 목사, 교회와 신앙 인터뷰, 95. 2)

2)성경침례교회는 교회의 전통적인 절기, 새벽기도, 철야기도, 사도신경, 주기도문을 비성경적인 것으로 여긴다.

"세 가지 절기, 즉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을 대략 살펴보았다. 이 세 가지 모두 성경적 근거가 없다. 이 절기들이 그리스도인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새벽기도나 금요철야, 금식기도와 더불어 사람이 만든 규례를 놓고 지키지 않으면 가책을 받게하여 행위를 요구하고 있다. 주님은 우리를 속박에서 풀어주셨는데 그 반대로 다 묶으려고 하는 세력은 누구이겠는가?(완벽한 교회는 없는가, p.111)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은 헛소리를 하게 되어 있고 그것이 정상적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그들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짓이 수치스런 일인지 아닌지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아직 유치한 수준에 있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예배 때마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거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도 주기도문과 사도신경만 암송할 줄 알면 마치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인정해주는 전통은 카톨릭 전통이다. 제도교회들이 이 전통을 모방해서 쓰고 있으나, 이런 전통은 비성경적 관습입니다."(위의 책, p.97)

3)침례만을 세례로 인정하며, 유아세례는 인정하지 않는다.
"구원받지도 않은 사람에게 물 뿌려 교인을 만드는 행위는 순전히 콘스탄틴에게서 나온 카톨릭의 방법인데, 개신교회에서 분별없이 받아들여 주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교회를 욕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들의 교회가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라고 생각한다면 물 뿌리는 행위는 즉각 중단되어야 할 것이다.  심지어 아기들에게까지 물뿌림으로써 교인을 만들고, 더 나아가 예정된 자로 취급하는 것은 이단적 교리이며, 그 결과는 그로 하여금 지옥에 가게 하는 것이다.” (위의 책, p.113)

4) 개혁성경을 사용하는 교회는 말씀을 깨달을 수 없다.
말씀보존학회에서 발행하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에는 간증문이 실리는데 하나같이 KJV을 사용했기에 깨달을 수 있다는 류의 내용들이다.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열심히 성경공부도 하고..... 그러나 나에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한 구절도 없었기에.. 내 마음을 늘 공허했고, 결국은 교회 출석을 포기하게 되었다...<한글 킹제임스 성경>을 가지고 진리의 지식을 배우는 순간부터 성령님께서는 하나씩 하나씩 말씀에 조명을 해 주시며 나로 하여금 말씀을 깨닫게 하셨다.”(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75호)

5) 교단에 가입하지 말라
이송오 목사는 교단에 가입한 교회들을 “제도교회”란 단어로 매도하며 교단을 가입하지 말도록 종용하고 있다.

“제도교회란 글자 그대로 교회가 제도화되어 성경은 뒤로 한 채 어떤 강령이나 신조 같은 것을 정해 두고, 그 범주 안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괜찮게 여기는 교회를 말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제도 교회의 본보기이다. 소위 “믿음의 원칙”이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그것들만 믿거나, 믿는 체하면 된다... 이런 카톨릭 방식을 따른 교회 운영을 그대로 전수한 것이 개신교회들이며 이들 역시 제도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 제도화된 교회들은 대개 어떤 “교단”에 속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데(엡 5:23), 만일 교회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나 조직이 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군림하는 셈이다.”(완벽한 교회는 없는가, pp.23-25)

“하나님께서 이 지상에 인정하신 기구는 지역교회밖에 없다... 지역교회가 제도교회와 다른  것은 일체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위의 책, p.31)

“소신있는 목회를 하려면 교단에 가입하지 말라. 교단에 가입하면 교단의 종이 된다.”
(위의 책, p.177)

6) 이 땅에 교회는 없었다.
말씀보존학회의 주장에 따르면 이 땅에 성경침례교회가 나오기 까지는 교회가 없었던 나라이다.

“성경대로 믿는 지역교회의 요건 - 첫째, 바른 성경이 있어야 한다... 둘째, 성경을 기초로 한 정통신학을 공부한 일꾼이 교회를 세워 이끌어나가야 한다. 셋째, 어떻게 신약지역교회를 운영하는지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요건을 갖추지 않음으로 성경대로 믿는 지역교회가 설립되지 않았다.” (위의 책, pp.184-185)
“우리나라 교회들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은 교회의 실상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시인하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왜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으며 왜 아직껏 그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지 못한 것일까? 먼저 성경대로 믿는 교회가 우리나라 신약교회 사상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위의 책, p.19)

7) 성경침례교회외의 다른 교회는 가지 말라
말씀보존학회 연구원인 조승규씨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 만약에 급박한 일이 생겨 주일을 지방에서 보내야 될 경우, 이곳의 신도들은 어느 교회를 가는가? 주변의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가?
  -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내 마음에 있기 때문에 혼자서 예배를 드린다.
▶ 다른 신도들의 경우는 어떠한가?
-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교회와 신앙, 95년 2월호 p.125)

이송오 목사는 성경대로 믿는 침례교회(참교회)의 특징을 열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성경(KJV)을 거부하는 교회들이나 선교단체 또는 어떤 사람들과도 제휴하지 않는다.”
(완벽한 교회는 없는가, p.29)

4.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는 주장

“구약의 사람들은 “저항할 수 없는 은혜”에 의해서 새롭게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었는가? 혹자는 “성령께서 사람에게 임하여, 그를 주장하고 그를 살려내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노아에게 임하지 않았다. 성령은 히스키야나 아사에게도 임하지 않았다. 노아나 모세, 다윗, 이삭, 또는 야곱을 주장하신 “저항할 수 없는 은혜”라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지도 않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지도 않았으며, 새롭게 되지도 않았고, 영적으로 할레를 받지도 않았으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지도 않았고, 양자가 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허물과 죄 가운데 죽어 있던 상태에서 그들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른 행위에 의해 구원받은 것이다.”
(피터 럭크만, 나는 그리스도인인가 칼빈주의자인가, p.44)

참으로 위험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럭크만과 이송오 목사가 세대주의적인 성경해석의 관점을 철저히 따른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5. 구원받은 사람은 예수님께 순종치 않는다 해도 지옥에 가지는 않는다는 주장

말씀보존학회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얻기 때문에 행위 운운하거나 순종을 해야 한다는 것을 믿음과 연관시키고 있지 못하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관계로 믿음과 순종은 별개의 것으로 말한다. 이것은 한글킹제임스성경의 팜플렛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대로 옮겨본다.

요한복음 3:36
▶ 한글킹제임스성경
이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그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물러 있으니라.
▶ 개역한글판성경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차이점 : 개역성경은 이 구절에서 행위를 통한 구원을 가르치고 있다.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예수님께 순종치 않는다 해도 지옥에 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개역성경의 번역은 정확하다.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도 “disobey"로 번역되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본문 자체가 믿지 않는 것을 거역하는 것, 불순종으로 보여주고 있다. 전반절에 분명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있다고 말씀하고 대조하여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를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 순종치 않는 자가 믿는 않는 자이지 믿음 따로 순종 따로인 믿음도 세상에 있는가?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이송오란 인물의 성경이해 수준을 극명히 볼 수 있다. KJV의 단어를 직역하며 그 의미까지도 곡해하고 있다. 본문의 순종치 않음이 믿지 않음임은 누가 보아도 이해하기 쉬운 개념이다. 그들이 그렇게도 싫어하고, 성경으로 차마 인정도 안하는 공동번역과 현대인의 성경이 오히려 그들이 좋아하는 번역을 따르고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 공동번역 :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의 영원한 분노를 사게 될 것이다.▷ 현대인의 성경 : 누구든지 아들은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되지만 아들을  믿지 않고 거절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형벌을 받게 된다.

한 마디로 이송오 목사는 성경속의 “의미의 일치” 조차도 알지 못하고, 자신이 개인적 성향으로 갖고 있는, 순종이란 단어는 행위구원을 의미한다는 선입견과 전제를 따라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기존의 교회를 행위로 구원받는 가르침을 전파하는 교회인양 매도한 것이다.
상식적인 사람 누구도 이 본문을 이런 식으로 오해하지 않을 것인데 본인은 그렇게 받아들인다니 얼마나 생각이 왜곡되어 있는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지면관계상 이송오 목사가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많은 부분을 생략하지만, 이송오 목사의 성경을 보는 시각이 대개 이러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개역성경을 사단이 교묘히 변개시켰기 때문에 본인이 그 교묘히 변개시킨 부분을 찾아내야 한다는 사명으로 상식적인 수준의 이해를 파괴하고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를 펴서 괴변을 늘어놓는 특징이 있다.

6. 이 땅에는 성경을 가르칠 신학교도 교수도 없다는 주장

글 초두에서 살펴본 대로 이송오 목사는 세계를 통틀어 성경대로 가르치는 신학교는 미국의 펜사콜라 신학교(학장:피터 럭크만)과 한국의 펜사콜라성경신학원 두 곳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럭크만에 대해서 “ 성경에 어떤 단어가 왜 그곳에 쓰여졌는가에 대해서 말해 줄 수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럭크만 맹신을 드러냈다.

▶ 국내에 있는 기존의 신학교 중 추천한다면 어디인가?
- 모른다. 기존의 신학교에는 성경을 가르칠 사람도 없고 가르칠 성경도 없다.
(교회와 신앙, 95. 2)
“또 대부분의 신학교들은 <킹제임스성경>을 배격하고 변개된 성경을 사용하는 프린스톤, 에모리, 웨스트민스터, 퓰러등 신정통주의나 자유주의 표방하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리를 채택함으로써,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는 상이한 신앙노선을 걷고 있습니다.”
(펜사콜라 신학교 홍보 팜플렛에서)

V. 정리하는 말

말씀보존학회와 그 대표자인 이송오 목사의 주장은 살피면 살필수록 균형을 상실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사상적으로는 미국 펜사콜라신학교의 피터 럭크만의 영향을 그대로 받았고, 해석학적으로는 세대주의적 방법과 관점을 그대로 쓰고 있으며 전천년설을 주장하면서 헬라어 사본 중의 하나인 TR만이 유일한 성경이고 또 그것을 번역한 KJV, 또한 자신이 이것을 보고 13년간 번역했다는 한글 킹제임스성경만을 인정하는 것으로 그의 주장을 요약할 수 있다.
이 글의 서두에서도 밝혔지만 이송오 목사의 주장이 터무니없고 그릇된 학문으로 교묘히 포장된 사이비적인 가르침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사람들에게 혼란을 가져다 주는 것은 단순히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이 아닌 성경 자체에 대한 부정과 비판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성경이 마치 구원을 알려주지 못하는, 사탄이 변개하여 품에 안겨준 성경이라 말하며, 숨겨져 있는, 섭리로 보존된 성경이 “따로 있는 듯”주장할 때, 평신도들 뿐 아니라 원문비평학에 익숙치 않은 목회자들까지도 미혹될 수 있다는 점이 대단히 위험하다. 특별히 비판의식이 높고 아직 성숙된 성경 이해가 없는 청년층과 교회에 대한 반항감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들의 가르침이 전해질 때 미혹되기 쉽다는 점에서 개교회와 목회자들의 주의가 요구된다.

먼저는 성경 사본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교단의 목회자들이 가져야 겠다.
성경은 주님이 주신 원문으로부터 많은 양의 필사본으로 우리에게 전해졌다. 인쇄술이 없었던 시대에 한 복사본에서 또 다른 복사본으로 내려오는 동안 그 텍스트에 여러 가지 종류의 오류가 스며들었다. 텍스트마다 조금씩 다른 것은 때로 신학적 중요성의 문제가 포함되어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성경의 의미에 근본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 복사상의 오류는 사소한 차이의 것이다. 띄어쓰기 오류, 오탈자, 필사자의 착오, 중간절 건너뜀 등등

“과거 두 세기에 걸쳐 사본들을 수집하고 비교하는 일을 해 온 본문 비평가들의 수고 원문과 관련된 주요 의문들은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비록 해결되진 않은 점이 있다 하더라고 기독교 역사나 교리의 근본적인 내용들은, 그것 때문에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풀 바네트, 신약성경은 믿을 만한가, p.56)

“믿을 만한 텍스트를 이룩하는 것은 과학적인 학문의 작업이다. 그렇다고 이 말이 하나님의 섭리의 손이 인간의 모든 역사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하나님은 역사적인 인물, 사전, 과정을 통하여 자기를 나타내셨고 그의 계시적인 말씀을 인간에게 주셨기 때문에 비평은 필요하다. 그리고 비평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는 역사적 차원 때문에 야기되는 문제들을 다루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성경이 미술적으로 주어졌다면 문제는 좀더 간단하고 쉬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다. 성경 비평의 역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비평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원본 비평은 묻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가? 그것을 묻는다. 하나님의 말씀의 텍스트는 어느 것인가? 얼마  만큼 정확히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를 보이신 그 말씀을 재구성할 수 있는가?”
(조지 래드, 앞의 책, pp.94~95)

결론적으로 우리는 과거 400년 전의 사본과 번역보다 훨씬 좋고 믿을 만한 헬라어 사본과 번역을 가진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원문 비평학이 지금보다 발달되지 않았고 고고학적 연구가 미진하고 훨씬 이전의 사본이 발견되지 않았을 당시에 제작된 성경을, 더욱 정확해진 성경보다 우위에 놓은 것으로 모자라 KJV 外의 성경들을 모두 사탄의 작품으로, 쓰레기통으로 매도하는 말씀보존학회의 주장과 가르침은 비성경적임을 확인한다. 더더군다나 자격이 검증되지도 않은 한 개인이 개인 성향에 따라 여러 번역본을 짜 맞추어 번역해 놓은 것을, 유일하게 섭리로 보존된 성경으로 주장하는 것은 이송오씨의 표현대로 “또다른 변개된 성경”을 생산해 내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행동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개역성경을 쓰는 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말씀보존학회와 이송오 목사에 대해서 단호한 대처를 해야 할 것이다. 말씀보존학회에서 나오는 출판물에 의해 더 이상 말씀이 불신당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성도들에게 주의를 당부하고, 특별히 신학을 알지 못하는 지성인과 일부 목회자들에게 말씀보존학회의 논리가 허황된 신빙성을 가지고 전파되지 않도록 교육이 필요할 때다. 믿음이 없는 것을 탓하지 않고 믿음이 없는 이유는 바른 성경을 못 가졌었기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논리에 젊은이들이 미혹당하지 않도록 한층 젊은이들의 신앙교육도 힘을 써야 한다.

자신이 번역한 한글킹제임스성경이, 완전하지만, 유죄가 판명될 때까지는 무죄라며 이상한 논리를 펴는 이송오 목사, 성경을 가지고 전혀 비성경적인 주장을 펼치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어지럽히는 말씀보존학회에 이제 한국교회와 교단이 유죄를 선언할 때가 된 것이다.

http://blog.daum.net/algosipo/5899161

출처: USA 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 보배를 담은 질그릇 님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초로 건네진 성경역사  (0) 2012.03.12
이런 사이트에 회원가입 절대 안 되죠!  (0) 2012.03.08
역사 스페셜-대고구려  (0) 2012.03.06
지옥에서 온 편지  (0) 2012.03.06
(애니케어) 666 짐승의 표 그 실체  (0) 2012.03.06

                           

 

우정의 꽃잎


명성은 화려한 금관을 쓰고 있는
향기 없는 해바라기이다.
그러나 우정은 꽃잎 하나하나 마다
향기를 풍기는 장미꽃이다.
벗의 결점을 보지 않은 사람은
그 벗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작자 미상 ‘마음의 양식’에서-


명성은 다만 그 사람의 인상을
남이 마음대로 평판하는 외부적인 소리에 불과합니다.

광고를 많이 하는 물건이 좋은 상품인 것처럼 착각하듯이
유명한 사람이 바로 훌륭한 사람이라고 오해를 하게 되고
명성만으로도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명성이 곧 행복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깥에 비추인 나와 실제적인 자신은 다를 수 있으며
허울뿐인 명성, 그 명성에 갇혀
오히려 더 고독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과 상관없는 여러 사람에게 보여준 자신 보다
결점과 단점까지 서로 용납하는 두 사람의 우정
장미꽃처럼 향기로울 것입니다.

새벽종소리

'은혜의 단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동하는 영혼  (0) 2012.03.11
믿고 기다리라  (6) 2012.03.07
환상을 좇지 말아야  (0) 2012.03.05
세 종류의 사람  (3) 2012.03.04
소명  (0) 2012.03.03

1. 질의요지
서울북노회장 문장식씨(서북노 제25-4호, 1995. 11. 9.)가 1991. 11. 26. 예장(합동) 부산노회 제 133회 제 1차 임시노회에서 목사 면직 당한 바 있고, 1995. 9. 예장(고신) 제 45차 총회에서 류광수씨의 이단성을 지적한 바 있으나, 본 총회 사이비이단대책위원회의 어떠한 언급이 없으므로 본 노회에서 이 문제에 대한 지도에 혼란을 가져오고 있는 실정이므로 이단성 여부를 질의하오니 회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참고 - 대구남노회 소속 교인 길호덕 씨 외 103명이 제출한 진정서(예장총 제 80-715호, 1996. 7. 15.)>

2. 연구결과
가. 다락방 전도운동의 개요
1) 류광수씨
다락방전도훈련원의 창시자요 원장인 류광수씨는(부산 동삼제일교회) 예장합동측 부산노회 소속 목사였으나, 1991년 11월에, 류씨가 베뢰아 귀신론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과 1987년에 음주운전을 하다 사고를 내고 도주한 혐의로 구속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것 등의 이유로 그 교단으로부터 면직된 자이다.
2) 다락방 전도운동이란?
류광수씨는 다락방 전도운동을 정의하기를 "우리가 처해 있는 곳에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는 줄 믿고, 전도의 지역에 침투해 들어가서 전도 활동을 펴기 위한 성경 공부 활동"이라고 한다([평신도가 읽을 전도훈련교재-전도훈련교재 1], p.11). 즉 부산에 있는 류씨의 교회(동삼제일교회)에 본부를 둔 '다락방전도훈련원'에서 합숙훈련을 받은 요원이 전도 지역에 들어가서(학교 직장 기관 등 포함) 성경 공부를 하면서 전도운동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락방전도훈련원은 전국에 100개 이상의 지역에 전도학교 전도신학원 등을 두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1천만 요원과 국내 40만 요원을 양성하고 '10만 대학 요원'과 '10만 중고 요원'을 확보하겠다고 선전하고 있으며, 다락방전도신문 · 도서출판 예수생명 · 다락방 방송센타(영상다락방) 등의 기관들을 통해서 류광수씨의 '다락방 메시지' 등을 담은 교재와 녹음(녹화)테이프를 공급함으로 이 운동을 확산시켜 가고 있다.

나. 다락방 전도운동의 문제점
1) 류광수씨의 핵심 사상은 구속사를 마귀와의 대결로 보는 잘못된 마귀론에서 비롯되었다.
류씨는 김기동(베뢰아 아카데미) 마귀론의 기본 사상과 유사한 구도 속에서 '전도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통해 마귀의 세력을 결박하라'([평신도가 읽을 전도훈련교재-전도훈련교재 1], p.15, [전도의 관점에서 본 창세기 - 현장메시지 4], p.12, [목회자·전도자를 위한 현장복음메세지 - 현장메세지 3] 제 44 과)고 하며, '성도에게는 기도하면 천사를 동원할 수 있는 천사동원권이 있다'([전도의 관점에서 본 창세기 - 현장메시지 4], p.31, [새생명], p.13, [지역복음화를 위한 다락방전도전략] p.122)고 주장한다. 또한 자율신경이 약해지면 병이 든다고 하면서도, 모든 영적 정신적 육체적인 병은 마음을 타고 들어오며, 마음의 병은 악령의 활동이며 특히 정신병 영혼의 병은 사단(마귀)과 미혹의 영(악한영)의 작용 때문이라거나, 재난 불화 실패 같은 것이 연속되는 것은 전부 영적인 병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나, 미혹의 영이 평생 따라다니고 계속 증가되어 결국 육체를 멸하게 한다([목회자·전도자를 위한 현장복음메세지 - 현장메세지 3], 제 8, 9, 10, 49 과)고 주장하여 구속사를 마귀와의 대결로 보고 있다.
류씨의 위와 같은 가르침이 비록 김기동의 마귀론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류씨의 변명에 의하면 자신도 김씨의 마귀론이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고 하며([지역복음화를 위한 다락방전도전략], p.120) 단지 역술인과 무당들을 전도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변명하고 있긴 하지만, 결국 예수가 오신 것이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한 것이라는 류씨의 주장은 김기동의 마귀론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2) 기성교회를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교회를 혼란하게 한다.
류씨는 '다락방전도훈련원'이라는 간판을 내걸었으나 전도 훈련을 시키는 것보다 '다락방전도훈련원'을 중심으로한 전도운동을 목적으로 다락방식 성경 공부를 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정통교회에서 수용할 수 없는 다락방 사상들을 주입시킴으로 교인들을 혼란하게 하고 있다. 나아가 다락방 전도운동을 하나의 전도의 방법으로 보는 차원을 넘어 전도의 유일한 방법인양 강조하는 인상을 강하게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성교회를 부정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기성교회보다 다락방을 우월시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3) 다락방 전도운동 과정에서 기성교인들에게조차 다락방식으로 영접을 시키는 사례가 나타난다.
구원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과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류씨는, 예수 믿고 죽으면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은 맞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이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영접이며,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진짜 복음이라고 한다([다락방전도전략] pp.37-38, EBS 양육테이프 2A, 복음편지 테이프 1A, 복음편지 테이프 2A). 또한 믿음에는 '첫째는 예수를 아는 단계(사 53:5, 요삼 1:2)가 있고, 둘째는 믿는 단계가 있고, 세번째는 영접하는 단계가 있다'고 하였다(테이프).
즉 "정확한 복음을 빨리 전해야 돼요. … 전도지를 들고 나가기 전에 성도들로 하여금 이걸 깨닫게 해야 합니다. 올바른 구원(을 몰라) 지금 너무 너무 확신이 없이 방황하거든요. 신자 가운데 수많은 신자들이 지금 이것이 안돼 가지고 방황하고 있습니다."(복음편지 테이프 1A)라고 하고, '교인들의 80%가 믿지 않는다'([목회자·전도자를 위한 현장복음메세지 - 현장메세지 3], 제 28 과)고 가르쳐 다락방 전도운동 과정에서 기성교인들에게조차 다락방식으로 영접을 시키는 사례가 나타나는 것은 구원론에까지 심각한 문제로 여겨진다.
류씨는 자신의 다락방에 대하여 문제들이 제기되자 수차에 걸쳐 자신의 잘못을 시정하겠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나 방법을 어떻게 시정하겠다고 밝히거나, 구체적으로 시정되었다고 인정할 수 있을 만한 일이 없다.

3. 연구결론
류광수씨의 다락방 전도운동은 비록 전도운동이라 주장하지만 그 가르침 가운데 마귀론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교회를 어지럽히고 성도들을 혼란하게 하는 등 사이비성이 있으므로 제 81회 총회 이후로는 본 교단 소속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거나 이 운동을 그대로 답습하는 일이 없어야 될 것이며, 본 교단에서 운영하고 있는 총회전도학교를 적극 활용토록 함이 좋을 것으로 사료된다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이단자료에서 펌글)

저도 교회를 찾다가 우연찮게 들어간적이 있는데
순복음출신 목사도 있고 다른교단출신 목사들이 있어서
특이하게 생각했습니다
예배는 좀 특이했습니다
토론 비슷하기도 했고.....
어쨌든 제가 알기로는 다락방의 시초는
구리등  공단에서 일하던 노동자청년들을 상대로
다락방성경공부를  한다고 하며 포교하여서
기성교회의 청년신자들까지 빼내서 물의를 일으켰다는것을
전에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한것은 다락방은 이단으로 정죄되었다는사실입니다

 

출처: 아멘넷 독자공간게시판/ 도봉옥 님

( 다락방의 배타성은 단순한 배타성이 아닙니다. 제가 잘 파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까임을당함님은 다락방 교재를 통한 공부를 하시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다락방은 2000년 동안 '숨겨졌던' 복음이 다락방을 통해 '부활'했다고 주장합니다. 정통 교회의 견해와 완전히 다릅니다. 정통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부활, 승천 이후 사도들을 통해 전해진 복음이 지금까지 '계승'되었다 믿습니다. (그래서 교단이 어디든 '사도신경'을 공통의 신앙 고백으로 믿지요)


(류광수 목사, 2006년 4월 12일 충주호리조트, 교회와 신앙).

“종교개혁이 있었던 때가 1500년이다. 지금까지 복음이 제대로 있었냐? 정확하게 보면 없다. 요한 웨슬레가 한 것은 영성 운동이지, 복음 운동이 아니다. 무디의 경우는 청년 운동을 한 것이다. 다락방이 복음을 회복한 것이 약 500년 걸렸다. 그 동안 성경적인 전도는 그동안에 없었다...... 성경적인 전도는 초대교회에 딱 한 번 있었다. 그래서 2천년만에 회복한 운동인 것이다. 이것을 다른 교단이 들으면 상당히 기분 나쁜 소리다. 최OO 목사가 그런 질문을 했다. 2천년만에 찾아낸 전도라면 그 동안에는 전도가 없었냐라고 했다. 물론 있었다. 그러나 성경적 전도 자료를 남긴 적이 없다. 지금까지···. 지금 성경을 들고 나와서 성경대로 전도하자고 나온 것이 2천년만이다. 실제적으로···. 보통 사건이 아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생겼어도 2천년만에 회복된 운동임을 알아야 한다")

기다림님의 댓글 중 일부

 

 

영혼의 빛, 미소... 최송연 그대여, 오늘을 슬퍼하지 말고 사랑 가득 행복한 미소로 그대 영혼에 불을 밝혀보세요 영혼의 빛, 그대 고운 미소는 캄캄한 밤하늘의 별이 되어 이웃의 마음도 행복한 보석으로 만들고 사랑의 빛으로 반짝이게 할 것입니다 힘들고 지친 이들의 영혼에 소망과 꿈을 줄 수 있는 신비한 묘약은 오직 하나 영혼의 빛, 그대 고운 미소뿐이니까요

<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나비의 연무 (戀舞)  (0) 2012.03.21
믿음의 날개...  (2) 2012.03.18
아침의 기도  (0) 2012.02.27
하루의 시작 기도  (0) 2012.02.26
위장된 겸손  (0) 2012.01.15


 

일찌기 플리니(Pliny)는 말하기를,

로마인들은 건물을 아름답게 짓지 못하면

크게라도 짓는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일이 다반사입니다.

우리는 잘할 수 없으면 크게 부풀립니다.

수입금액을 늘리고 집 평수를 늘리고

일정표의 활동을 늘리고 달력의 약속을 늘립니다.

 

그렇게 늘어날 때마다 삶의 질은 떨어집니다.

 

반면 내 삶의 일부를 군중에서 끌어내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마다,

우리는 그만큼 더 자기다워지고 더 인간다워집니다.

 

군중의 관습을 거부하고 믿음의 훈련에 임할 때마다

우리는 좀 더 살아있는 존재가 됩니다.

 

 

 

 

 

 

 

 

 

 

 

 

'지식의 寶庫'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자들의 공통점  (0) 2012.03.20
장기기증, 당신이 모르는 (충격적인) 것들  (0) 2012.03.12
아름다운 열두 달 우리 말 이름  (0) 2012.02.22
재미 있는 시편 111 편  (0) 2011.12.04
힘과 용기의 차이  (0) 2011.11.12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 스페셜-대고구려  (0) 2012.03.06
지옥에서 온 편지  (0) 2012.03.06
칼빈과 세르베투스 (Servetus)  (0) 2012.03.04
노아방주의 발견을 세상에 널리 알립시다!  (0) 2012.03.03
음간(陰間)이란 무엇인가?  (0) 2012.03.03

 

 

 

    나는 나사로 보다 낫다

     

     

    어제 주일은 이슬비내린 날씨에 아직 겨울 흔적 때문에

    여러교인들이 빠졌습니다

    그런 가운데 몸불편으로 3주빠진 경집사님이 오셨습니다 (96세)

    지난주 전동차가 굴러 몸불편중에도 오신 손집사님(85세)

    양지교회 개척부터 지금까지 술담배와 몸 향기 마셔도

    청정공기와 하늘산소로 이김주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제가 농사짓는 야콘은 11월부터 이듬해 3~4월까지 늘 일합니다 

    대략 1년에 약 5~7톤을 손으로 분리작업 하여 물로 씻고 얇게 칼작업 

    여러공정 거쳐서 야콘원액 100% 된 포장작업후에 전국에 보급합니다

    10년동안 보통 4월중순경에 작업이 끝납니다만 

    올해는 2월말에 마무리되어 너무 기뻐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하나님앞에 착한 목사가 좀 되고 싶어서 토요일

    하루종일 말씀 묵상하였을 때에 설교말씀 오랜만에 제대로 준비한 느낌입니다

    여기서 잠깐 어디좀 글을 외출시키고 오겠습니다 .....

     

    항상 주일 오전 9시쯤에 교인들 모시러가서 동네에서 태울 때에 

    차에 잘 오르도록 궁둥이에 손을 받쳐 밀쳐주어야 합니다 (어르신)  

    그 순간에 얼굴은 그 몸에 가까워지면서 도시교인들에게 없는 향기를 마십니다 

    구름낀 날씨에는 그 향기가 더욱 진동하는데 어제 주일이 그 날입니다 

    향기에 취하여 ....머리아프고 비실비실한 체 강단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6장 19절에서 31절 말씀을 심부름하고 있습니다  

    제 눈앞에 교인들 바라보면서 오늘따라 불쌍하고

    슬픈 목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른들은 귀 안들리고 글자 모르고 눈어둡고 향기 진동시키고 ....

    이런 생각을 하니 비젼들도 캄캄하게 여겨졌습니다  

    이런 한 편의 시각 속에도 준비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 때입니다

    주님 음성이 제게 들리는데 저는 교인들에게 설교하고

    주님은 제게 설교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너는 냄새 맡을 코와 보이는 눈과 건강한 입이 있지만

    눈도 귀도 입도 건강하지 못한 저들이 나사로니라  나사로보다 낫다 ""  

    그 순간에 교인들을 바라보니 교인들이 나사로로 보였고

    예수님으로 보여졌습니다

     

    나사로는 차도 리어카도 전동차도 없고 걸을수도 없는 불편한 몸입니다

    동냥하러 다닐 자유도 없고 가난하여 약국도 병원도 못갑니다 

    그래서 부자의 대문곁에 누워 있어야할 처지입니다 

    나사로의 땅바닥은 방이며 나사로의 이불은 하늘입니다 

    그가 영양실조 걸려 겨우 목숨 연명하니 개들조차 이길 수가 없습니다

    개들이 그 헌데를 훔쳐갈때에 빤히 보고도 그 도둑들을 막을수 없는

    힘없는 우리 이웃의 고난과 똑 같습니다 

    상처가 보였으니 옷도 다 떨어진 누더기입니다 

     

    나사로는 부자가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로 살아가기 때문에  

    맛없다 더럽다 짜다 싱겁다 맵다는 음식투정

    불평불만 할 처지는 1%도 없습니다

    만약 그 음식 부스러기와  찌꺼러기 없는 날에는 하루종일 굶어야합니다

    부자인 당신들은  배고프다고 표시 오기 전에 간식먹었지만

    나사로는 그림의 떡입니다

    그 곳이 3디직장이며 도시속의 개척교회요 농어촌교회이며 북한동포입니다

    그런 깊은 곳을 찾아 그물을 내리면 153마리의 은혜를 건져보시길 바랍니다 

     

    나그네길 잠깐동안의 고난나라는  좁은문 좁은길입니다

    그 길 끝에는 아브라함의 품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는 천국같고 나사로는 지옥같아 보였지만

    끝에는 나사로가 웃었습니다  

    오늘 부자와 나사로를 보면서 마 5장 3절 말씀이

    다시 한번 묵상되어졌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나사로는  천국에 들어갔네...

    우리 교회에서 어제 설교한  내용의 일부에 살을 좀 붙인 글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

    말씀안에 비유지만 실제 믿음인물로 보시면 복이 되옵니다

    간절히 바라옵기는 힘드실때마다 이 말씀 가지소서  

    나는 그래도 나사로보다 낫다 

     

    2012년 3월6일 머슴 김대원목사올림 (합천양지교회 010ㅡ8512ㅡ1626)

 


 

P> 

           ♬주만 바라 볼찌라/이경수 색소폰 연주♬

    
    
    
    P>

      크롬웰(Cromwell)은 영국의 유명한 장군이자 정치가이며 수상까지 역임한 바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 자신에게 있어 가장 인기가 많고 최고의 권력을 가졌을 때 갑자기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크롬웰이 그의 가장 가까운 부하 직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내 시골로 돌아가고 싶네. 이제부터는 작은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며 조용히 주님을 섬기고 싶어.” 그의 부하 직원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수상 각하, 각하께서는 아직 충분히 능력이 있고 많은 일을 할 수 있는데 왜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시골로 떠나려고 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힘차고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결코 환상을 좇지 않네. 오직 주님의 뜻을 좇고자 하네." 크롬웰에게는 사람들이 갈망하는 권력이나 존경받는 것이 환상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즐겨 보는 동화책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맑은 날에 엄마와 어린 딸이 넓은 들판으로 소풍을 나왔습니다. 아이가 꽃 사이로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고 잡으려고 쫓아가자 어머니는 딸에게 급하게 소리질렀습니다. “안돼, 거기로 가면 안 된다." 어머니는 아이가 나비를 보느라고 바로 앞에 있는 절벽을 보지 못한 것을 알고 소리지른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바라보는 권력과 성공의 바로 건너편에는 어쩌면 인격의 파멸과 영혼의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이런 환상을 좇다가 정말 중요한 것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한일서 2: 17
       퍼온 글

    '은혜의 단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고 기다리라  (6) 2012.03.07
    우정의 꽃잎  (0) 2012.03.06
    세 종류의 사람  (3) 2012.03.04
    소명  (0) 2012.03.03
    봄, 그리고 '피카소' 소회(素懷)  (4) 2012.03.03

    42. 원자, 그 미시의 세계

    인간의 몸은 약 6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지만 인간의 몸에 붙어서 사는 미생물의 수는 수백 조에 달한단다.
    대장균부터 유산균, 각종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등 세포보다 훨씬 작은 수많은 미생물, 인간의 몸에 기생하는 미생물의 수는 은하수의 별만큼이나 많다는 이야기다.

    인간은 지구에 붙어산다.
    인간은 우주의 티끌 같은 지구 위에 붙어사는 미생물(?)인 셈이다.

    인간은 미생물이 아니다.
    지구 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광활한 우주를 바라보며 우주만유의 기원을 궁구하고 창조주의 존재를 생각하는 인간이라면, 그 인식과 사고가 드넓은 우주를 활공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 사고가 땅에 고정된 인간은 미생물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지구의 바닥, 땅에 눈을 박고 먹고사는 문제와 인간들끼리의 생존경쟁에만 매달리다가 생을 마친다면 그 생이 미생물과 다를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눈을 들자.
    광활한 우주공간과 신비스러운 생명과 물질의 세계를 바라보며 그 기원과 창조주를 생각하자.
    영원을 사모하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인류에게 다만 별을 관측하고 바라보는 수준을 넘어 우주의 크기와 생성과 본질에 대하여 관심을 돌리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광활한 우주의 기원은 미시의 원자, 물질의 기원과 통하게 된다.
    과연 만물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우주만유는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가?

    1) 원자의 발견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부터 인간은 물질의 기본이 무엇인지 궁금해 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 이전까지는 엠페도클레스가 주장한 4원소설이 그럴듯한 이론이었다. 4원소설이란 자연의 모든 물질이 흙, 불, 물, 공기, 네 가지의 원소로 이루어져있으며 이 네 가지가 얼마씩 구성되었느냐에 따라 갖가지 물질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뼈는 절반이 불이며 나머지는 흙과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4원소에 냉, 열, 건, 습 등 네 가지 성질을 추가하여 만물이 생성되고 변화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지상의 물질은 이러한 조건들이 항상 변하므로 불완전하지만 천상(天上)의 물질은 완전하여 변하지 않는 한 가지 물질 ‘에테르’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였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4원소설만을 믿은 것은 아니다. 기원전 480년부터 420년까지 살았던 레우시푸스가 최초로 원자설을 주장하였고 그 제자 데모크리토스가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에 도달한다.’고 생각하였다.

    사람들은 2,0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설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을 더 신봉하였다. 그러다가 1803년 기상과 대기를 연구하던 영국의 화학자 돌턴이 다시금 원자론을 제안하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한동안 원자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기본입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나눌 수 없다.’는 뜻의 그리스어로 “a-tom"이라고 이름을 붙였었다.

    돌턴이 원자론을 제안할 당시에는 화학이 발달하기 시작하여 원자의 존재는 믿어지게 되었지만 원자의 존재 자체를 관찰할 수 있는 실험방법이 없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러더포드에 의하여 원자는 양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진 원자핵, 그리고 그 주변을 도는 전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물질의 최소단위라고 믿었던 원자가 양자, 중성자로 이루어진 원자핵 주위를 전자가 돌고 있는, 마치 태양 주위를 혹성들이 돌고 있는 것과 비슷한 모양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원자의 내부에도 복잡한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튼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이 양자와 중성자, 그리고 전자의 수로 결정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발견된 원소들을 양자-중성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의 숫자로 원자번호와 질량수를 나타내는 방법으로 분류하였다.

    원자번호 1 수소
    원자번호 2 헬륨
    원자번호 3 리튬
    원자번호 4 베릴륨
    원자번호 5 붕소
    원자번호 6 탄소
    원자번호 7 질소
    원자번호 8 산소
    원자번호 9 플루오린
    원자번호 10 네온
    원자번호 11 나트륨(소듐)
    원자번호 12 마그네슘
    원자번호 13 알루미늄
    원자번호 14 규소
    원자번호 15 인
    원자번호 16 황
    원자번호 17 염소
    원자번호 18 아르곤
    원자번호 19 칼륨/포타슘
    원자번호 20 칼슘
    (여기서부터는 생략하고 넘어가면서......)
    .
    .
    원자번호 26 철
    .
    .
    원자번호 79 금
    .
    .
    원자번호 88 라듐
    .
    .
    원자번호 92 우라늄
    .
    .
    원자번호 118 우누녹튬

    이렇게 오늘날 천연원소와 인공원소를 포함하여 118번까지 118 가지의 원소목록이 나와 있다.

    사람들은 원자(Atom)가 아니라 양자, 중성자, 전자가 진짜 모든 물질의 기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원자(Atom)이라는 이름은 이미 써먹었기 때문에 소립자(素粒子, Elementary Particle)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물질의 비밀을 다 풀어낸 것 같은 생각에 사람들은 잠시 행복해 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과학자들은 너무나 작은 전자는 그렇다 해도 더 이상 쪼개어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원자(Atom)가 쪼개진 것처럼 전자보다 2,000 배나 큰 양자와 중성자도 더 쪼개어질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에 겔만이라는 물리학자가 양성자와 중성자 같은 소립자 내부에 세 개의 쿼크가 들어있다고 제안하였다.

    2) 원자의 구조

    전에 언급하긴 하였지만 기억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다시 원자의 구조를 말하자면 그렇다.
    원자의 크기는 대략 1 옹스트롬, 10⁻¹⁰ m (백억분의 1 미터) 정도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들어있는 원자핵의 크기는 1 fm,  10⁻¹⁶ m (원자 지름의 백만분의 1)이다.
    (fm= fermi or femtometer, 페르미 또는 펨토미터)

    1 옹스트롬(백억분의 1 미터)를 표현하자면...., 지구지름을 1 미터라고 가정한다면 1 옹스트롬의 크기는 1 밀리미터 정도가 된다.
    거기다 원자핵은 그 원자 크기의 백만분의 1이다.
    즉 1 옹스트롬의 백만분지 1인 1 펨토미터이다.
    그야말로 상상이 잘 안 되는 작은 크기다.

    그리고 이번에는 원자 크기를 확대하여 지구(지름 약 12,700 킬로미터)만 하다고 가정한다면 원자핵은 그 100만분의 1, 즉 지름이 13 센티미터 정도 되는 크기라는 이야기가 된다.

    원자의 껍질을 이루는 것은 질량이 거의 제로라고 취급되는 작디작은 전자(電子)가 원자핵을 광속으로 뱅글뱅글 도는 궤도가 이루는 ‘전자껍질’이다.
    그 전자껍질이 이루는 거품이 바로 원자의 크기가 된다.
    그러므로 “색즉시공공즉시색”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지구를 이루고 있는 물질도 전자껍질을 벗겨버리고 핵만 남겨 놓는다면 지름 13센티, 주먹보다 약간 큰 작은 공 크기로 줄어든다.

    전자껍질을 이루는 전자의 궤도에 관하여는 화학반응을 정리한 원소 주기율표와 슈레딩거 방정식, 그리고 파울리의 베타원리로 밝혀지고 정리되었다.

    복잡하고 기니까 얼렁뚱땅 간단히 설명하자면......,
    과학자들은 우주의 천체의 운행을 관찰한 케플러의 운동방정식의 법칙을 도입하여 각운동계산을 통해 같은 궤도에 무한히 많은 전자가 함께 돌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과학자 슈레딩거는 원자번호가 높은 원소는 여러 층의 전자껍질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그 각 층이 수용할 수 있는 전자의 수를 아래와 같이 각운동 계산으로 밝혀내었다.

    K 껍질: 전자 2개
    L 껍질: 전자 8개
    M 껍질: 전자 18개
    N 껍질: 전자 32개
    O 껍질: 전자 50개
    P 껍질: 전자 72개

    그리고 마지막 층의 전자가 그 숫자와 같으면 매우 안정되어 다른 원소와 화합하지 않는 성질을 가진 불활성기체 같은 것이 되고 마지막 층의 전자수가 위 숫자에 부족하면 그 숫자를 채워 넣으려는 성질 때문에 다른 원소와 쉽게 결합하여 안정된 분자를 이룬다.
    예를 들어,
    원자번호 1인 수소는 전자가 하나뿐이므로 불안정하다.
    왜냐하면 K 껍질에는 전자 2개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원자번호 8인 산소는 전자가 8개이므로 K 껍질에 전자 2개, L 껍질에 전자 6개를 가지는데, L 껍질은 전자 8개가 들어갈 수 있는 층이다.
    그래서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한 개가 결합하면 전자가 모두 10 개가 되어 K 껍질에 2개, L 껍질에 8개가 배치되므로 매우 안정된 물 분자(H₂O)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원자번호 2인 헬륨은 전자가 2개로 K 껍질을 이루고 있으므로 다른 원소와 결합하지 않기 때문에 불활성기체로 불리는 것이다.

    그런데 원자핵의 크기는 어떻게 알아내었느냐고?
    러더포드는 방사성 원소에서 나오는 알파선을 원자에 쏘는 산란시험(散亂試驗)을 통하여 원자내부의 양전하와 질량이 모두 작은 원자핵에 들어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산란시험은 미시세계를 탐구하는데 주로 이용되는 방법으로 전자나 뮤온 같은 렙톤 입자를 쏘아서 표적의 구조를 알아내는 시험이다.

    비유를 들자면 짚더미 속에 도끼 같은 금속덩어리가 들어있다고 하자. 손을 집어넣어 짚더미를 헤치고 찾아내지 않고 찾아내는 방법이 무엇일까? 그 한 가지 방법은 짚더미에다 무수한 탄환을 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짚더미를 통과한 탄환의 위치를 모조리 측정하면 짚더미 속의 도끼의 위치와 모양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3) 자꾸만 발견되는 소립자들

    아무튼 전자(電子)는 워낙 작으니까 제쳐두고, 원자핵을 이루는 양자와 중성자를 쪼개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양자와 중성자를 결합하고 있는 힘보다 큰 에너지로 충돌실험을 하면 된다. 러더포드는 알파선 방사선을 이용하여 실험을 하였다.
    당시에는 아직 입자가속기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양자와 중성자를 쪼개지 않고도 많은 새로운 소립자들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우주로부터 지구로 날아드는 우주선(宇宙線)이었다. 우주선(宇宙線)이란 우주공간을 날아다니는 작은 입자들이다. 대부분 양성자들인데 매우 큰 운동에너지를 갖고 있다. 이 우주선들이 대기권의 공기분자와 충돌하면서 새로운 입자들을 만들어내고 방사선을 발생시키며 일부는 지상에까지 떨어진다.

    이러한 우주선들은 태초의 빅뱅으로 인하여 생겼든지 초신성(퀘이사)의 폭발로 생겼든지 지금도 무수히 우주공간을 날아다니고 있다. 만일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달리는 우주선(宇宙船)을 만들어 우주여행을 한다면 우주공간에 흩어진 수소원자 뿐 아니라 이러한 우주선(宇宙線) 소립자들도 우주선(宇宙船)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과학자들은 차곡차곡 쌓은 여러 겹의 사진건판을 기구에 실어 대기권 상층부로 날려 올려 보내고 소립자들이 사진건판을 통과하면서 남긴 흔적들을 분석하여 입자들을 검출하였다.
    이렇게 하여 1937년에 뮤온이 발견되었고 또 여러 가지 많은 종류의 소립자들이 발견되었다.  

    1945년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의 물리학자 히데키 유가와는 원자핵을 이루는 양자와 중성자들이 무슨 힘으로 뭉쳐져 있는가 하는 문제를 연구하고 그 작은 양자와 중성자들이 중력과 인력으로 결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기력 같은 힘, 즉 핵력으로 결합되어 있고 그 핵력을 매개하는 어떠한 매개입자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실제로 우주선(宇宙線)실험에서 파이메존이라는 매개입자가 발견되었다. 히데키 유가와는 이 공로로 1949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된다.
    이렇게 우주선 실험을 통하여 수많은 소립자들이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1960년대에 개발된 입자가속기로 더 많은 소립자들이 발견된다.

    소립자는 크게 둘로 나뉜다.
    그 하나는 양자, 중성자, 전자와 같이 물질을 구성하는 소립자들이다. 페르미의 이름을 따서 ‘페르미온’이라고 부른다.
    다른 하나는 핵을 이루는 결합력 같은 힘의 매개입자들이다. 인도의 물리학자 보제의 이름을 따 ‘보존’이러고 부른다.
    우주선실험으로 발견된 파이메존이 바로 대표적인 힘의 매개입자인 ‘보존’이었던 것이다.

    소립자들을 질량의 크기에 따라 분류하기도 한다.
    가장 가벼운 입자를 렙톤(그리스어로 가볍다는 뜻)이라고 부른다.
    대표적으로 전자가 여기에 해당한다.
    전자(電子)보다 더 가벼운, 물리학적으로 질량이 제로(0)인 뉴트리노 입자도 있다. 뉴트리노는 원자핵이 베타붕괴를 할 때 나온다.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수많은 뉴트리노는 지금도 거침없이 지구를 관통하여 지나가고 있다.

    중간 크기의 질량을 갖는 소립자들은 ‘메존’이라고 부른다.
    가장 무거운 소립자들은 ‘바리온’이라고 부른다.
    바리온에는 양성자, 중성자들과 람다, 시그마, 카이, 오메가 같은 것들이 있다.


    <정리>
    * 원자번호: 1부터 118까지
    * 전자의 층: K, L, M, N, O, P
    * 소립자 분류
    1) 역할분담으로 분류
      물질을 이루는 소립자: 페르미온,
      매개소립자: 보존
    2) 질량의 크기로 분류
      가벼운 것: 렙톤,
      중간 것: 메존,
      무거운 것: 바리온 (양자, 중성자 등)

    칼빈과 세르베투스 (Servetus)

    칼빈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종종 하는 이야기가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화형시켰다는 것이다. 자, 그럼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보자.

    세르베투스가 정죄 받게 된 그의 저서

    세르베투스는 1530년에 “De Trinitatis Erroribus”(삼위일체의 오류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하였다. 거기서 그는 삼위일체의 존재 방식은 “머리 셋 달린 Cerberus(신화 속의 동물)이며, 어거스틴의 망상이고, 마귀의 착상이다“고 주장했다. 세르베투스는 칼빈에게 편지를 보냈고 1546년에서 1548년 동안 두 사람 사이에 편지가 오가게 된다. 그 편지 중 칼빈은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습니다. 또 징계받게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바른 교리를 그토록 후안 무치하게 모욕하는 것 앞에서 저는 강철과 같이 굳세게 맞설 수 밖에 없습니다.”

     

    세르베투스의 저서

    이 당시 칼빈은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완성하였다. 세르베투스는 그것을 누르기 위해 ”Restitutio Christianismi”를 썼다 (사진 참조). 그는 로마교회와 개혁교회를 모두 반대하였다. 거기서 그는 믿음에 의한 칭의, 그리고 삼위일체론을 공격하였다. 특히 하나님의 삼위일체적인 존재에 대해 공격한 것이 훗날 재판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세르베투스는 원고를 미리 칼빈에게 보냈다. 그는 그의 출판이 가져올 위험 때문에 자기 이름을 숨기고 책 끝에 M.S.V. 라고만 적었다. (Michael Servetus, Villanovanus의 약자.) 그러나 그 책이 출판 된 이후 그의 이론을 전에 들었던 사람들은 단 번에 그 책이 세르베투스의 책임을 알았다.

    비엔나에서 로마교회로 부터 사형 선고를 받음

    그 당시에 제네바에는 Guillaume de Trie라는 프랑스인이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 리용(Lyon)에 Arneys라는 친척이 있었다. Arneys는 로마 가톨릭 교인이었는데 그는 Trie를 다시 로마교회로 돌이키고자 했다. 개혁교회는 불의한 집단이며 리용으로 돌아오라는 Arneys의 편지에 대해 Trie는 반대하며 “이곳보다는 그곳에 더 불의가 횡행하고 있다. 믿음에 관하여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어서는 안된다. 솔직히 내 심정을 말하겠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화형대에서 불살라지는 마당에, 너의 있는 곳 비엔나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도를 우상이라고 하며 신앙의 모든 기초를 파괴하고 있는 세르베투스 같은 사람은 그것에 대해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그 당시 리용의 감옥에는 개신교도들이 많았다.

     

    Arneys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고 Trie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어 그 사실을 증명하라고 했다. 여기에 칼빈 보다 더 적합한 증인은 없었다; 그에겐 세르베투스와 오랫동안 주고받은 서신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Tire는 칼빈을 간신히 설득하여 세르베투스의 편지 몇 통을 받았다. Trie는 그것을 Arneys에게 보내며 이렇게 적었다 ”이 편지들을 칼빈으로부터 얻기는 너무도 어려웠다. 그는 세르베투스의 신성모독이 벌 받아 마땅하지만 정죄의 칼날을 휘두르는 것은 자기 권한이 아니라고 하였다. 오히려 그는 잘못된 사상은 처형하기 보다는 가르침을 통해 징계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그의 도움 없이는 내가 거짓 증언자로 고소당할 것이라는 나의 말에 결국 이 편지들을 주었다.

     

    Villanovanu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세르베투스는 체포되었다. 그는 재판장에서 끝까지 자신이 세르베투스라는 사실을 부인하였다. 울면서 자신은 가톨릭 교인으로 살고 죽기를 원한다고 외쳤다. 그러던 가운데 감시의 틈을 타 그는 거기서 탈출하게 된다. 결국 그가 자리를 지키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은 진행되었고, 그의 사진을 놓고 “산채로, 천천히, 그의 몸이 숯으로 변할 때 까지 불사른다”는 사형선고가 내려지게 된다. 그리고 그날 그의 책들은 불살라졌다. 중세 로마교회는 이단자들에 대해서는 긍휼이 없었다. 세르베투스가 도망치고 얼마 되지 않아 칼빈이 있던 제네바와 또 로잔에서 공부하여 프랑스에서 복음을 전하려던 다섯 명의 학생들이 리용에서 붙잡혔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였고 결국 화형을 당했다. 이 시대는 칼빈이 제 멋대로 자기를 주장하던 시절이 아니다. 칼빈 자신 조차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던 시대이다. 이와는 반대로 제네바에서 가톨릭 교도가 죽임을 당한 일은 없었다.

    탈출 후 칼빈이 있는 제네바에 나타난 세르베투스

    이처럼 이미 이단자로 낙인 찍힌 세르베투스는 몇 개월 후 제네바에 나타났고 거기서 체포되었다. 이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세르베투스는 이탈리아로 가려고 했는데, 그가 애초에 숨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엔나 또는 툴루즈(Toulouse)에서는 Grenoble, Modane, 그리고 Turin을 거쳐가도록 되어 있지, 제네바까지 멀리 돌아 갈 이유가 없다. 게다가 이미 1546년 당시 칼빈은 그의 친구 Farel에게 편지를 쓰며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 온다면, 제게 영향력이 있다면 그가 살아서 나가도록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이런 단호함을 당시 편지를 주고 받던 당사자들인 칼빈과 세르베투스는 더욱 잘 알았다. 그런 세르베투스가 칼빈이 있는 제네바에 갔다면 그 이유로 추정되는 것은 그 당시 제네바 시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것이 Libertine (자유당)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칼빈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이었다. 칼빈은 그들 때문에 많은 곤란을 당하였다. 칼빈을 중심으로 한 개혁은 제네바에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바울이 로마를 은혜의 복음 전파를 위한 기점이 되어야 할 것을 깨달은 것 처럼, 칼빈은 제네바를 그 기점으로 생각하였던듯 하다. 개신교회를 저해하려는 것은 로마교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개혁자들의 주장을 무너뜨리려 했던 세르베투스가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칼빈이 “교만하고 악마적인 세르베투스를 무너뜨릴 망치”가 되어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이론을 철저히 논박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제네바 시의회는 다시 재판을 열었다. 이것은 비엔나에서 열렸던 로마교회의 재판과는 다르다. 이단자들에 대해 무자비했던 로마교회 앞에서 그는 울면서 자기를 숨겼을지 모르나 제네바 시의회라면 다르다. 거기서는 정부에 대한 교회의 주권을 제거하려는 Ami Perrin, Berthelier, 그리고 Vandel 같은 사람들의 당파가 강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라면 세르베투스는 승산이 있었다. 얼마나 자신만만했냐면, 그의 이단성을 증명할 증언자로 선 칼빈에게 던진 그의 공격을 보면 “마술사 시몬 같은 자, 범법자, 살인자여 …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판단하는 불쌍한 자 … 거짓말장이이며 사악한 말다툼꾼 … 너의 뻔뻔함은 눈이 희다는 사실도 논쟁하려는구나 …  웃기는 난쟁이 같으니라고 … 너의 개짖음으로 재판장들의 귀를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느냐?” “불쌍하구나, 불쌍해” 세르베투스의 이런 말들을 갖고 그를 너무 비난해서는 안된다. 그 당시에는 이런 강한 말투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다만, 이러한 모습 속에서 세르베투스가 얼마나 자신만만 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은 특유의 차분함으로, 때론 반박할 차례가 와도 세르베투스에게 더 말할 기회를 주는 등 세르베투스의 오류를 하나씩 지적해 나갔다. 하지만 세르베투스는 모든 물질이, 심지어 자신이 밟고 있는 이 “발등상”도 하나님을 이루고 있는 물질 중 하나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시의회 주관이었던 재판

    칼빈은 제네바에 거주하는 이방민이었다. 어떤 이들은 칼빈이 그의 죽음을 승인했다고 하나, 그는 시민권이 없었고 고로 투표권도 없고 공무원도 될 수 없었다. 다만 교사나 목사의 경우 적격한 시민이 없을 때 비시민이 그 직책은 맡을 수 있었고 그래서 칼빈은 거기서 목회를 하였다. 칼빈이 세르베투스의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종교회의에서뿐이었는데, 세르베투스의 재판은 시의회 주관이었다. 거기서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정죄할 권리도 없었다.

     

    세르베투스의 재판은 다른 지역의 교회들에게도 신학적인 자문을 구하는 등 두 달이 넘는 시간에 걸쳐 힘들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최후의 단계에서 삼일에 걸친 논의 끝에 가장 고통스런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 때 칼빈은 의회 쪽에 그의 형벌을 감해 달라고 구하게 된다. 적어도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형으로 바꿔달라고 구한다. 그러나 시의원들은 듣지 않았다. 결국 세르베투스는 칼빈 생전에 제네바에서 신성모독으로 사형을 당한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칼빈이 1553년 10월 26일에 Farel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내일 세르베투스는 사형을 당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사형 방식을 바꾸려는 모든 노력을 다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다음에 만나면 왜 우리가 실패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Opera, XIV, pp. 590, 613-657).

     

    더 자세한 사건의 흐름은 적지 않겠다. (Emanuel Stickelberger의 ”Calvin – An Authentic Account of the Life & Ministry of John Calvin”이 좋은 참조 문헌이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내거는 주장을 곧이 곧대로 믿어서는 안 되겠다. 그 시대에는 오늘 우리 사회가 일부 죄에 대해 사형을 행하는 것처럼 신성모독에 대해 사형을 시행하던 시대였다. (사형 제도가 옳다는 주장을 지금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칼빈이 사형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오늘 우리로서 그의 잘못으로 볼 수 있다. 칼빈은 오류 없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아브라함도 종을 데리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 시대의 사회 제도에 안에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과 사회적인 통념들을 고려하지 않고, 칼빈을 자기 의견과 다르면 마구잡이로 사형시키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왜곡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세르베투스를 죽인 것이 칼빈인가? 아니면 그는 시대의 현실 아래서 사형이라는 형벌을 당한 것인가?

     

    칼빈의 전한 말이 어떤 성경적 근거가 있는지는 제쳐두고 그에 대한 인신공격 아래 그러한 칼빈이 한 주장들은 틀렸다고 가르친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경을 최종 권위로 생각하는 태도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런 사람들은 칼빈이 싫은 것이 아니라 칼빈 뿐만이 아니라 루터 등 개혁자들이 한목소리로 전한 바 죄인은 자유의지로 구원의 신앙을 만들어내지 못하기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은혜의 복음을 못 마땅해 함이 아닐까.


    출처: 양무리마을/ Holyjoy 님

    퇴짜는 퇴보가 아닙니다


    이미지 전체보기

    작년 7월, 사랑칼럼 출판을 위해 원고를 몇몇 출판사로 보내보기로 하고,
    먼저 김영사로 원고를 보냈습니다. 7월 18일 답장이 왔습니다.
    “선생님의 원고는 저희 회사의 출판 방향과 다소 맞지 않고,
    시장성(판매) 면에서 확신이 없어 출판이 어렵습니다. 양해하세요.”
    편한 마음으로 원고를 보냈지만 퇴짜를 맞으니 ‘상처’가 되었습니다.

    다음날 새벽, 기도 중에 다짐했습니다. “이번엔 기독교 출판사
    한 군데로 더 보내보자. 이번에도 퇴짜 맞으면 더 이상 원고를
    보내지 말자.” 그날 두란노 출판사로 원고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이틀 만인 7월 21일에 출판이 어렵겠다는 답장이 왔습니다.
    연속으로, 그것도 이틀 만에 퇴짜를 맞으니 ‘상처’는 더 커졌습니다.


    이미지 전체보기

    ‘상처’를 부여잡고 기도할 때, 며칠 후 이런 감동이 생겼습니다.
    “미션퍼블릭에서 출판해보자!” 그때까지 미션퍼블릭에서는 주로
    내 설교 파일을 정리해 공급하는 일만 했었습니다.
    결국 직접 출판을 결심했는데, 이미 원고는
    10번 이상 교정된 상태였기에 일사천리로 출판이 진행되어
    1달 만에 ‘상처는 인생의 보물지도’가 나왔습니다.

    작년 9월 초, 산더미 같은 책이 미션퍼블릭 사무실에 쌓였습니다.
    한숨이 나왔습니다. “저걸 언제 다 파나?” 마케팅 방법도 몰랐고,
    판로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칼럼 독자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감동’을 선물하겠다고 선물용으로 구입해
    결국 2달 만에 인터넷을 통해 다 팔렸고, 지금도
    그 기적과 감동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미지 전체보기


    지금 생각하면 출판사에서 퇴짜를 놓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며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결국 책 제목대로 ‘상처는 인생의
    보물지도’가 되었습니다. 시련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퇴짜는 퇴보가 아닙니다. 페인(pain,고통)이 없으면
    게인(gain,유익)도 없고, 크로스(cross,십자가)가 없으면
    크라운(crown,왕관)도 없습니다.

    시련은 영혼의 불순물을 제거합니다. 시련은 ‘양적인 영혼’을
    ‘질적인 영혼’으로 만듭니다. 1톤의 돌에 백만분의 일인
    1그램의 금만 있어도 금광석이라고 합니다. 터무니없이
    양만 많은 금광석이 제련 과정을 거쳐 순금이 될 때
    큰 양적 축소가 있으나 진짜 가치는 훨씬 커집니다.
    시련을 통한 양적 축소는 질적 가치를 높입니다.
    시련은 성공의 전조입니다. 사람은 성공으로 평가되기 전에
    시련으로 평가됩니다.


    이미지 전체보기

    시련 없는 인생은 물 없는 우물입니다.
    말은 맨몸으로 달릴 때보다 적당한 짐을 질 때 더 빨리 달립니다.
    적당한 시련은 인생을 가속시킵니다. 바람은 배를
    전복시키기도 하지만 배를 전진시키기도 합니다.
    성공의 길은 삼각형의 꼭짓점을 향하는 길이기에
    오를수록 편한 공간은 줄어듭니다. 시련의 길은
    영혼의 오르막길이고 시원한 길은 영혼의 내리막길입니다.
    큰 성공을 원하면 큰 시련도 기대하십시오.
    시련은 부정적인 사람에게는 ‘절망의 늪’이지만
    긍정적인 사람에게는 ‘희망의 샘’입니다. (070327)


    이웃 게시판에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세 종류의 사람을 소개하며

    ‘나는 누구인가’를 따져 보라고 권면합니다.

    우리 시대가 염려하는 ‘도덕의 상실’과 현대인들이

    공감하는 ‘인간 자아의 상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영적 자아

    의 상실’과 ‘신분 의식의 상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과연 나는 누구입니까?

    먼저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육체

    (프쉬케)의 본능에 지배를 받는 중생 이전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신비한 하나님의 성

    령의 일들을 믿을 수 없으며(14절), 단지 육체의 통

    치를 받고 육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육에 속한 사람들은 영적인 분별력이 없기 때문

    에 성령의 역사들이 어리석게만 보이며(14절).

    성도들이 하는 주일 성수와 십일조, 직분에 충성하는

    모든 것들도 어리석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육에 속

    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성령

    (프뉴마)의 인도함을 받는 중생 이후의 성도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육체의 본능 대신 말씀에 지배 받

    으며 말씀대로 믿고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입

    니다. 영에 속한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경험

    하게 됩니다. 성령의 탄식을 듣고 기도하고자 하는

    충동이 일어나고(롬 8:26),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으

    려는 신령한 근심이 마음에 있고(엡 4:30), 성령의 불

    을 소멸시키지 않으며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삶을 삽

    니다(살전 5:19).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하

    나님의 자녀들은 영광을 받을 뿐 아니라 고난도 함께

    받는 사람들입니다(롬 8:14). 구체적인 가정과 사회에

    서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말씀 충만의 삶을 살아갑

    니다(엡 5:18 이하).

    교회가 세상처럼 시끄러워져 말씀을 떠나 감정으로만

    치우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균형 잡힌 건강한 지식

    과 감정의 통제에서 나오는 의지력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 다음으로 육신에 속한 자(영적 어린아이)입니다.

    육신(살코스)에 속한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

    말씀의 지배를 받지만 여전히 육체의 지배를 받는 영

    적 어린아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을 의미합니다.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하며 무엇보다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3:2). 육신에 속

    한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시기와 분쟁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3:3).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이 성장할 수 있습니까?

    감리교 창시자 찰스 웨슬리 목사가 미국에서 사역에

    실패한 뒤 영국으로 돌아올 때 대서양에서 큰 풍랑을

    만나 겁을 먹고 있을 때 두려움 없이 기도하는 모라비

    안 교도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속에서 성령의 강한

    역사를 체험한 웨슬리 목사는 자신의 이름, 얼굴, 명성,

    재물을 위해 설교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사역하며 많은 열매를 거두는 귀한 일꾼이 되었

    습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육에 속

    한 사람이 아니고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중간 지대에

    머무르지 않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신령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

    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3장 9절


    퍼온 글 

    k.s.a

             


    '은혜의 단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정의 꽃잎  (0) 2012.03.06
    환상을 좇지 말아야  (0) 2012.03.05
    소명  (0) 2012.03.03
    봄, 그리고 '피카소' 소회(素懷)  (4) 2012.03.03
    타고르의 기도  (0) 2012.02.29






      

    '은혜의 단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환상을 좇지 말아야  (0) 2012.03.05
    세 종류의 사람  (3) 2012.03.04
    봄, 그리고 '피카소' 소회(素懷)  (4) 2012.03.03
    타고르의 기도  (0) 2012.02.29
    기도의 30가지 명언 모음  (0) 2012.02.26

    지구가 온란화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동토의 땅 남극과 북극마저 엄청난 양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터키지역 아라랏산 역시 만년설이 녹아 내리면서
    빙하속에 감추어진 성경에 기록된 노아의 방주가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보도 되었습니다.
    숨쉬기도 힘든 백두산 두배의 높이에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축구장 크기의 나무로 만든 배가 발견되었는데도
    연예인의 작은 사고 소식에도 난리법석이던 세상은 놀랍게도 조용하기만 합니다.
    선사시대의 것이라며 돌조각 하나 발견해도 메스컴에 떠들어대던 세상도
    미스테리 다큐멘타리에서 잠시 다룰뿐 이 엄청난 발견물에는 애써 외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은 악한 영이 지배하며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4200미터 고지에 방주를 올려 놓으셨고
    만년설 빙하속에서 수천년을 썩지도 않게 보존하셨을까요?
    그 당시 많은 동물들이 그 높은 곳에서 내려 오기도 힘들었을텐데 말입니다.
    성경에는 노아의 방주의 규격 그리고 마지막에 머무른 위치가 정확하게 명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에 적힌 바로 그 장소에 성경 그대로의 구조와 크기의 목조물이 발견되었다는 것을
    알게되는 사람들은 반드시 창조주의 존재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지막 때까지 보존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마지막 심판을 경계하기 위한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전하지않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메시지를 전해야만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페이지뷰가 높은 게임사이트에서
    "노아의방주"라는 길드를 만들어 길드 홍보용 글에 이 동영상을 꼭 올리고 있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이 속해 있는 곳에서 노아의방주 발견을 전해 봅시다.
    세상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적어서 교회를 다녀본 경험이 없어서
    창조주를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알아보기도 전에 창조주는 없다고 단정짓고
    알아보는 것이 헛된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믿는 우리또한 믿기 전에는 어떠하였을까요?
    우리들도 똑같은 마음이었기에 처음부터 자발적으로 믿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노아의 방주의 발견은 지금까지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도 아니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들에게
    성경이 사실인 것과 창조주의 심판이 사실인 것을 깨닫게하는
    뉴스로 그 마음을 파고들 것입니다.
     
     
     



     

     


     

     
    <script type=text/javascript>//</script>


    출처: USA 아멘넷: 예전부터 님

    

    
    당신은 몇 시에 살고 있나요?
     
    

    아시는 분은 금방 눈치 채셨겠지만 요즘 전국적으로 큰 관심을 끌고 있는 「인생시계」에 대해서 알려드릴까 합니다. 「인생시계」는 서울대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쌤앤파커스」책에서 나오는 내용 중 하나로, 우리 인생을 24시간 시계로 표현한 것이죠

    많은 청춘들이 지금껏 이뤄 낸 것도 없고, 앞으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며 하소연을 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많은 청춘들이 시간의 속도 앞에서 낙담하고 전율한다고 서술합니다. 덜컥 졸업을 하고 흘러가는 시간을 조급함과 낙담의 시간으로 남기며, 취직하여 사회에 성공적으로 첫발을 내딛었을까?, 빨리 자리 잡고 싶고, 빨리 뭔가를 이루고 싶고, 누구나 “이 나이 되도록 제대로 해놓은 것이 없구나” 생각하게 마련이죠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그대, 인생을 얼마나 산 것 같은가?”라고 막연한 질문 같지만 다른 표현으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24시간에 비유한다면? 지금 현재 당신은?.... 태양이 뜨거운 정오?, 아님 사회에 입문한 이십대 후반이라면 오후 1~2시?, 막연한 상상만 할 게 아니라 계산을 한번 해보시죠. 만약 서른살에 사회에 입문했다고 하면 하루 중 몇시일까요. 당신의 평균수명이 80세 쯤 된다고 하면, 30세는 몇 시? 오전 9시!! 생각보다 이르지 않나요? 오전 9시 직장에 출근해서 이제 일을 막 시작할 시간이죠? 말 그대로 이제 시작할 때입니다. 이 「인생시계」의 계산법은 생각보다 쉬워요 24시간은 1,440분으로 이것을 80세로 나누면 18분이니 1년에 18분씩 늘어난다는 겁니다 20세는 오전 6시, 29세는 8시 42분이다. 앞으로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만큼 인생시각은 좀 더 여유로워질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일반인들이 은퇴를 하고 노년을 준비하는 60세는? ... 저녁 6시!! 직장인이 일을 마치고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오거나 저녁에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시간이다. 맞아 떨어지죠?..아직도 할일 많은 시간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도 한번 계산을?..

    여러분은 어디쯤 계신가요? 「인생시계」계산이 어려운가요?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분이라면 인생시계에 대한 어플도 있으니 활용이 가능합니다. 어느 청년이 28세를 넣으니 현재 시간 오전 8시 24분... “지금껏 뭐했나, 앞으로 답답하네”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워 집니다. 아직 업무 시작도 안했을 시간인데 벌써부터 포기했나 싶기도 하구요 우리가 잘 아는 브래트피트 주연의 영화 <벤자민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에 이런 대사가 있죠 “인생에 너무 늦었거나, 혹은 너무 이른 나이는 없다” 라고 했다면서 용기를 냈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항상 과거에 얽매이거나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하거나 현재를 만족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당신의 인생시계를 보면서 다시 한번 마음을 잡아 보시죠 지금 하고 싶은게 있으신가요? 주저 말고 시작해 보세요. .. “지금하지 않으면 영원히 실천할 수 없다” 저도 도전할까 합니다. 늦었다고 주저할 필요도 너무 빠르다고 포기할 필요도 없겠는데요. 우리에겐 아직도 많은 시간이 있습니다.

    흐르는곡/천 번을 불러도

    '일상/건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버이날 영상특집  (0) 2012.05.08
    가정의 달을 맞아 부부에게 주는 교훈  (0) 2012.04.29
    만년설 속의 미이라는 0 형  (0) 2012.03.01
    중요한 특급정보!  (0) 2012.03.01
    사랑차 끓이는 법  (0) 2012.02.23

     

     

     

     
    
    

         

         봄, 그리고 '피카소' 소회(素懷) 날이 끄무레한 금요일 아침입니다.
        출근을 하려고 차의 시동을 켜놓고 차고옆 작은 기다란 화단을 바라보았습니다. 튜울립 싹이 나왔네요. 난도 나오고,겨울내 추위에 떨었던 파랭이꽃이 굳굳하게 자태를 지키고 이제 작은 꽃송이를 품었습니다.
        저는 이 파랭이꽃을 어느 꽃보다 좋아합니다. 질긴 생명력으로 늘 그 모양으로 봄부터 늦은 가을 까지 꽃을 피우고 어느날은 눈 속에서도 가느다란 목을 내놓고 얼굴을 내밀듯 꽃를 피우는 그 환하고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듯 하면서 자랑하지 않는 자태를 바라보면서 신앙이 그렇지 않나 생각하면서 저를 돌아 보지만 참 어리석은 자 라는 자의식은 그 분과 연결되는 고리가 되면서 "못났다"는 마음이 늘 듭니다.
        그런 중에도 그분,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누군가의 꽃이 되어야 겠다는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이 되어 주께서 제게 있는 그대로 그렇게 닿아오셨듯이 모든이에게 기쁨으로 그렇게 닿아가야 한다는 아주 자연스러움은 패랭이 꽃을 지으신 그분과 교통하기 때문이라 말 못할 위로가 됩니다. 이제 봄이 오고 있고 봄이 되면 환하게 꽃들이 피고 새가 노래하고 나무잎들이 푸르러 가듯이 인생의 중년 마디에서 새로운 봄을 맞이 하듯이 주를 뵙기를 팽랭이 꽃처럼 끊이지 않듯이 이제 주의 부활을 떠오르듯이 새로운 마음이 되어 그의 뜻을 헤아려 봅니다. 잠시 전 읽었던 주께 사로잡혀 복음의 열정을 불살렀던 복음의 사나이였던 바울이 복음의 아들이었고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며 그 열정을 살리는 불꽃처럼 그렇게 불꽃처럼 살고 싶다는 도전을 다시 받습니다. 피카소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의 열정은 대단했지요.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 같이. 기쁜 하루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글/ 짐보: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 

      
     
     
     
     
     

     

    '은혜의 단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 종류의 사람  (3) 2012.03.04
    소명  (0) 2012.03.03
    타고르의 기도  (0) 2012.02.29
    기도의 30가지 명언 모음  (0) 2012.02.26
    성령님 안에서 전진하라  (0) 2012.02.22

    음간(陰間)은 사도신경의 'hell' 을 직역한 표현이다. 죽음의 세계를 뜻한다.

    사도신경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뒤 3일 동안 내려갔던 곳이 음간이다.

    성공회의 사도신경과 39개조 신조에 나오고, 대한민국의 개신교 교파에서는 성공회의 사도신경에만 등장하기 때문에 성공회에만 존재하는 개념으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영어권(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등)에서 외우는 사도신경에는 교단에 상관 없이 모두 'hell' 이 나온다.

    이 'hell' 을 일반적으로 이르는 지옥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에 대한성공회에서 '음간' 으로 번역한 것이다.

    음간은 로마 가톨릭교의 연옥과는 분명히 다르며, 또한 아무 상관도 없는 개념이다.(성공회를 비롯한 모든 개신교에서는 연옥을 부정하고, 천국 또는 낙원과 지옥 또는 음부 둘만을 인정한다.)

    http://ko.wikipedia.org/wiki/%EC%9D%8C%EA%B0%84

    (천주교)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He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ied, and was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On the third day he rose again. He ascended into heaven and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the Father. He will come again to judge the living and the dead.

    (개신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성공회)
    본티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시어 사흘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계시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다시 오시리라 믿나이다.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The third day he rose again from the dead, He ascended into heaven, And sitteth on the right hand of God the Father Almighty; From thence he shall come to judge the quick and the dead.

    출처: USA 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Stone 님

    

    

    '마음의 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학자의 성공비결 "열정"  (0) 2012.03.19
    마음  (0) 2012.03.08
    하나님을 빚쟁이로 만든 사람?  (4) 2012.03.01
    터놓고 말하고 가슴으로 듣기  (0) 2012.02.24
    세상을 바꾸는 한 가지 방법  (2) 2012.02.08



     

     
    
    

         

         

         

         화나고 힘들 때 이렇게 해보세요 1, "참자!" - 그렇게 생각하라. 감정 관리는 최초의 단계에서 성패가 좌우된다.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화는 일단 참아야 한다. 2, "원래 그런 거"- 라고 생각하라. 예를 들어 고객이 속을 상하게 할 때는 고객이란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하라. 3, "웃긴다" - 고 생각하라. 세상은 생각할수록 희극적 요소가 많다. 괴로울 때는 심각하게 생각할 수록 고뇌의 수렁에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간다. 웃긴다고 생각하며 문제를 단순화 시켜보라 4 "좋다. 까짓 것" - 이라고 생각하라.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는 "좋다. 까짓 것" 이라고 통 크게 생각하라. 크게 마음 먹으려 들면 바다보다 더 커질 수 있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5,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 - 라고 생각하라. 억지로라도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라. 내가 저 사람이라도 저럴 수 밖에 없을 거야~ 뭔가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저럴 거야~ 라고 생각하라. 6, "내가 왜 너 때문에" - 라고 생각하라. 당신의 신경을 건드린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고 있는데, 그 사람 때문에 당신이 속을 바글바글 끓인다면 억울하지 않은가. 내가 왜 당신 때문에 속을 썩어야 하지? 그렇게 생각하라. 7, "시간이 약" - 임을 확신하라. 지금의 속상한 일도 며칠 지나면, 아니 몇 시간만 지나면 별 것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라. 너무 속이 상할 때는 "시간이 약" 이라는 생각으로 배짱 두둑히 생각하라 8, "새옹지마" - 라고 생각하라. 세상 만사는 마음 먹기에 달렸다. 속상한 자극에 연연하지 말고 세상 만사 "새옹지마" 라고 생각하며 심적 자극에서 탈출하려는 의도적인 노력을 하라. 9, "즐거웠던 순간" - 을 회상하라. 괴로운 일에 매달리다 보면 한없이 속을 끓이게 된다. 즐거웠던 지난 일을 회상해 보라. 기분이 전환 될 수 있다 10, "눈을 감고 심호흡" - 을 하라. 괴로울 때는 조용히 눈을 감고 위에서 언급한 아홉 가지 방법을 활용하면서 심호흡을 해 보라. 그리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침을 삼키듯 "꿀꺽" 삼켜 보라. * 이 모든 것 위에 기도를 더 하라

        나를 괴롭히는 그 사람의 영혼마저

        우리들의 주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 ♧ 지금의 고통은 먼훗날 보답하겠다는 인생의 눈물겨운 약속이다 ♧ 꾸민 이: 별똥별

     

    '좋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말 소중한 사람  (0) 2012.03.10
    퇴짜는 퇴보가 아닙니다  (0) 2012.03.04
    꾸미지 않아 아름다운 마음  (0) 2012.02.28
    겸손은 보배 무언(無言)은 평화  (0) 2012.02.27
    가장 멋진 인생이란  (0) 2012.02.26

     

     

    이미지 전체보기

     

     

     

    어렸을 때 목사가 되고픈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몰래 교회에 들어가 강단에 서서

    목사 흉내를 내며 설교를 했다. 그는 철학,

    역사, 정치 등 각 방면의 책을 즐겨 읽었

    으며 재능 또한 대단했다. 특히 가난한 사

    람들이나 병든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

    이 남달랐다. 부활절이 되면 월급을 몽땅

    털어서 달걀을 사서 가난한 사람들이나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갔다.

    이쯤 되면 이 사람이 누구일까 알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을 들으면 대부

    분은 깜짝 놀란다. 그토록 악명 높았던 아

    돌프 히틀러이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아마

    도 이 지구상에서 태어난 인간 중에 가장

    잔인하고 악마 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그의 삶 가운데 이런 의로운 생활이 한 부

    분을 차지한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양면성이 있다. 더구나

    변한다. 누구나 마음속에 악마와 같은 본성

    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 임재할 때 천사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주님의 도

    우심을 구한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정직한

    영을 부어주시기를 기도한다. 오직 주님의

    은총으로!

     

    퍼온 글

     

     

     

    k.s.a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아방주의 발견을 세상에 널리 알립시다!  (0) 2012.03.03
    음간(陰間)이란 무엇인가?  (0) 2012.03.03
    불멸의 꿈 이뤄질까?  (0) 2012.03.01
    예배란 무엇인가(2)  (0) 2012.02.29
    예배란 무엇인가(1)  (0) 2012.02.29

    [한겨레]만년설 속 미라 유전정보 밝혀내

    1991년 알프스산맥의 만년설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미라 '아이스맨'(사진)의 완벽한 유전 정보가 밝혀졌다.

    영국 <비비시>(BBC) 방송은 28일 5300년 전에 사망한 아이스맨의 유전 정보를 분석한 결과 그의 혈액형은 O형이고, 갈색 눈빛을 가졌으며, 심장병에 걸리기 쉬운 유전적 특징과 유당분해 효소 결핍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이런 내용은 세계적인 과학저널 <네이처>의 자매지인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 최근호에 공개됐다. 또 그의 조상은 농업과 목축이 확산되면서 중동을 떠나 유럽 쪽으로 퍼진 이주민들로, 현재 알프스산맥 주변에 사는 사람들보다는 이탈리아의 사르데냐섬이나 프랑스의 코르시카섬 주민들과 가까운 유전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유럽 고고학자들은 지난 20년 동안 아이스맨의 사인과 유전적 특성에 대한 연구를 거듭했다. 2007년 스위스 취리히 대학팀 연구를 통해 그가 '동맥 손상에 의한 과다 출혈'로 숨졌음이 확인됐고, 이탈리아 연구팀은 "주변 부족과의 싸움에서 희생된 그를 동료들이 해발 3000m 지점에 매장했다"는 가설을 제시했다.

    길윤형 기자charisma@hani.co.kr

    대단히 중요함

    ※.. 이 일은 꼭.!. 읽으시기 부탁드립니다..※
     

     
    ★◈..[특급정보]..◈★
     
     
     
    세상에 이런일이!
    * 중요한 정보"주변분께" 알리세요. *
     
    요즘들어 개인정보 유출사태가 많아지면서
    신종사기들이 급증하고 있네요..

    어느날 자신의 통장에 알수없는 거액이 입금됩니다.
    그리고는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네요.

    자기실수로 입금이 잘못되었다고
    알려주는 계좌로 다시 보내 달라고 합니다.
    절대로 보내 주시면 안됩니다.

    해당은행이나 경찰에 바로신고 하셔야 해요.
     
    개인정보를 캐내어 당신의 명의로 대출한 돈이
    통장에 입금된 것입니다.

    통장으로 보내달라고 해서 보내주면
    그 순간 나는...

    그럼 아무것도 몰랐던 피해자는 고스란히
    자신의 명의로 대출이 된 것이기 때문에
    쓰지도 않은 돈을 갚아야 한다네요.
     
     



    (IHOP이 있는 캔자스시티는 신사도 운동(New Apostolic Reformation)으로 인해 최근에 자주 거론되는 도시이다. 신사도 운동은 과거의 자유주의 신앙운동과 종교다원주의보다 더 심각한 피해를 교회에 끼치는 마귀의 운동이다.) 위의 글은 우리 아멘넷에 올라온 최신 칼럼 글 중의 일부이다.

    (IHOP에서 조용하게 하나님과 개인이 함께 하는 분위기이며 그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wholistic encounter) 영적인 만남의 장이요,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서 이런 형태의 기도방(The Prayer Room, The House of Prayer)을 할 수 있으면 하는 생각과 비전을 가져본다.) 이 역시 우리 아멘넷에 올라온 다른 칼럼 글 중의 일부이다.

    ( “교회내 민주주의는 반성격적, 성경으로 돌아가야," 라는 거창한 제목과 함께, 목사에게만 교회 내의 치리권도 있고 주권, 목회권이 있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기사도 있다. 다른 한 편, 우리 게시판에는 ( “교회의 주인은 장로인가, 목사인가? 라는 제목과 함께 평신도가 교회의, 사회적 주인이기에, 교회는 민주주의가 타당하며 교회의 주인은 평신도인 성도들이다.) 라고 역설하는 글도 올라와 있다. 모두 자신들의 주장이 성경적이라고 한다. 극과 극, 심각한 대립현상이다. 헷갈린다.

    우리의 딜레마는 이 글을 쓴 필진들이 이단의 창시자도, 그들의 교주도 아니고 모두 우리(성도)가 믿고 신뢰하며 따라야 할 소위 정통교회 목사님들이시란 데 있다. 그분들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강하고 높으며 집요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과연 누구의 말, 어느 목사님의 말씀을 더 믿고 따라야 하는 것일까?  대단히 혼란스럽다. 우리 독자들은 혼란상태에서 어제까지 믿음의 동지로 서로 사랑하는 것 같았는데, 한순간에 서로 등을 돌리며 “내가 보기에 이 목사님의 말씀이 더 옳다. 다른 목사님을 지지하는 네가 틀렸다.” 서로 손가락질하며 다투기도 하는 가슴아픈 헤프닝이 연출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같은 성경을 두고 무엇 때문에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 함께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목사님들이 자신의 신앙에 발란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너무 한쪽으로 치우쳤고,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라고는 하지만 말씀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그 말씀이 주는 참뜻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주견을 먼저 뼈대로 세워놓고, 그 주견에 맞은 말씀 성구만을 부분적으로 골라서 인용하는, 이헌령비헌령(耳懸鈴鼻懸鈴), 아전인수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거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생각은 비단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자신의 주견을 앞세우기 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하며 내 생각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 뜻을 우선순위에 둘 때 내 신앙에 무리가 오지 않고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잘 유지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기적이며 총체적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신앙의 발란스가 필요한 부분과 그 해법
    신앙의 발란스라고 하면, 넓게는 구원론에서부터 신론, 기도론까지 다양하고 복잡하겠으나, 아쉬운대로 좁은 의미로서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의 발란스는 어떤 것인가, 정립을 해보면,

    a) 신사도 운동은 과연 성경적인가?

    사도(Apostle)란 "보냄을 받은 자"란 그리스 원어의 뜻이 있다. 그렇다면, 보내는 자가 계시고, 보내시는 목적이 분명 있고서야 보냄을 받은 자가 있을 것이다. 사도를 따로 불러 세우시고 보내신 분은 그분(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엡 4: 11절 참조), 보내신 목적은: 몇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기록하는 붓으로 사용하시기 위함이다.

    초대 교회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도 희귀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이 한데 묶어져 있지않은 때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해 줄 사도들이 필요했었고, 이를 위해 주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친히 불러 사도로 세우셨고 그들,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다.( 벧후 1:20절 참조)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완성된 정경 신구약 66권이 우리 손에 들려져 있는 이 시대, 하나님의 말씀을 따로 직통계시로 받아 우리에게 전해줄 사도(Apostle)직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 22:18-19절을 보면,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이 말씀 외에 더하거나 빼거나 하지 말라고 되었기에, 그 대답은 분명 “No!”이다. 그리고, 지금은 성령이 친히 우리들 속에 임재하셔서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의로 교육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데, 그런 우리에게 따로 선지자나 예언자가 특별히 필요한가? 그것도 역시 대답은, “ No!” 이다.
     
    b)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우리가 잘 아는대로, 교회의 주인은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실질적으로 모두 주님이 주인이시다. 주인 = "주"(Lord)는 히브리어로는 "아도나이 ", 헬라어로는 "큐리오스" 즉 "주인, 상전"이라는 의미다. 영어로는 Lord 이 역시 주 종과의 관계성에서 상전을 의미할 때 사용되어지는 뜻이다. 민주국가의 주인은 물론 국민이다. 그러나 교회는 민주주의로서 기능과 신권정치를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주권이 주님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개인 교회건, 가시적 교회건 비가시적이요 우주적인 교회이건) 그 누구도, 예수님 외에는 주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주인’이란 단어보다는 '청지기'란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 용어가 가장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우리 예수님께서 그 피를 값으로 지불하시고 산 성도들이 모인 단체인, 교회에서 마저 그분의 설 자리가 없고 통치권이 박탈당한다고 해서야 어디 말이되겠는가?

    (주인의 것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충성된 종) 이것이 우리, 목회자건, 직분자건, 평신도이건...성도가 주님의 몸을 섬기는 태도가 되어야 하고, 이런 자세가 바로 발란스 잡힌 신앙인의 태도라고 본다.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

    c)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마귀의 장난을 분별하는 방법

    아래는 오래 전, 작자 미상으로 필자가 운영하는 이웃 게시판에 올라온 글에서 도움을 받고 참조한 것이다.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신비주의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새롭게된 성도들의 삶 속에서 성령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바르게 깨달아야만 한다. 이것은 참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신비주의에 연루되지 않았던 크리스천들도 마귀들의 장난이 어떻게 성령님의 인도처럼 작용하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마귀의 장난을 성령님의 인도처럼 착각하여 잘못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자기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 성경이 무어라 말하는지 제대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이런 실수의 대부분을 쉽게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님의 인도는 마귀의 장난과 매우 다르다." 다음은 성령님의 인도와 마귀의 장난 사이의 차이점을 비교해서 보여준다. 성령님은 무한한 능력과 지식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하나님의 속성을 모두 갖고 계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제한된 피조물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 지식과 지능이 인간에 비하면 훨씬 우수하다 할지라도 역시 제한된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의 개성을 존중하셔서 어떤 식으로든 개개인의 인격을 침해하려 하시지 않는다. 반면에 마귀들은 우리 인간을 미워한다! 그들은 개인의 인격을 강탈하여 자기의 인격으로 바꿔치려 한다. 

    성령님은 우리가 스스로의 행동을 관리하고 그것에 대해 책임지길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항상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일하신다.(빌2:13) 반면에 마귀들은 완전한 통제를 원한다. 그들은 인간의 무의식 세계에 들어와서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이용한다.

    성령님은 온화한 분이시다. 그분께서 어떤 사람에게 들어오시면, 너무나 온화하시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의 내부를 들여다 볼 때 어떤 것이 성령님이고 어떤 것이 자신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반면에 마귀들은 매우 거칠다. 자신들이 점거한 사람들의 모든 것을 탈취하려는 마귀들의 욕망 때문에 누구나 마귀와 자기 자신과의 차이를 늘 인식할 수 있다. 비록 마귀들이 자신들의 잠재의식 일부의 어떤 "상담자" 같은 존재라고 그들이 생각할지라도 위의 진술은 사실이다. 마귀는 항상 피해자의 의식과 분리된, 또 다른 "하나의 실체"인 것이다.

    성령님은 거룩하고 정결하시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 정결함을 가져오시며 또한 우리에게 죄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완전히 부정하며 사람들을 항상 죄 속으로 깊이 이끌어간다. 새 시대 운동(뉴에이지 운동)의 마귀들이 스스로를 선한 존재로 제시하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람들을 죄 가운데로 빠르게 이끌어 가는 존재들이다. 새 시대 운동에 속한 죄의 영역으로는 구체적으로 성적 부도덕, 신비주의에 깊이 빠져들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영계와의 접촉 증가 등을 들 수 있다.

    성령님은 항상 예수님을 높이고 찬미하여 자신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의 삶 속에 겸손을 가져온다. 반면에 마귀들은 예수님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그들은 항상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에게 관심을 돌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행하는 사람에게로 돌리게 하며, 또 자기들이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찬미하도록 한다. 교만은 마귀들과 그들이 거주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성령님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의식을 잃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생각을 우리의 마음속에 넣어주시지만 결코 우리의 마음을 흐릿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항상 "모든 생각을 사로잡고"(고후10:5)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빌2:13)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또한 우리가 적극적으로 자신과 협력하기를 원하시며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텅 비울 필요가 없다. 즉 정신을 잃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매우 능력이 크시므로 우리의 의식이 활발할 때도 우리의 의식을 누르시고 자신의 원하는 바를 주실 수 있지만 이 때에도 깨끗하고 질서 있게 행하신다. 성령님께서 자기들에게 말씀하시거나 혹은 운행하시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신을 잃어야만 한다는 잘못된 속임수에 빠지는 크리스천들이 매우 많은데, 이것은 결코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니요, 증산도, 요가, 명상, 만트라 등의 뉴에이지 운동에 속한 기법에서 나온 것이다.

    한편 마귀들은 자주 사람의 의식을 잃게 한다. 그들은 사람이 제 정신을 잃고 피동적으로 되어 그를 쉽게 점령할 수 있을 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다. 이것이야말로 동양적이며 신비주의적인 명상에서 사람의 마음을 비우기 위해 긴장 이완의 기법을 도입하는 이유인 것이다. 사실 마귀들이 사람들의 능동적이며 강력한 의식을 무효화시키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심적으로 수동적 상태에 있으라고 격려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신다. 그러나 그분께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자각케 하시는 일은 결코 파괴적이 아니며, 그분께서는 항상 사람들을 회개, 용서, 구속 그리고 평화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를 행한다.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악을 정당화시키도록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용서나 구속에 대한 소망이 없는 파괴적이고 무서운 죄의식을 가져다준다. 마귀는 항상 "너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정죄와 심판의 메시지를 가져다준다.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이 되는 메시지를 주시지 않는다. 반면에 마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뒤틀고 변경하여 우리의 죄를 정당화시켜준다.

    우리는 결코 성령님을 통제할 수 없다! 그분께서는 자신이 원하실 때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종이며 그분께서는 우리의 주인이시다. 예를 들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임재를 알게 하실 때, 우리를 고치시거나 통찰력을 주실 때, 우리는 결코 성령님을 제어할 수 없다. 또한 성령님께서는 같은 일을 두 번 하시지 않는다. 또한 그분께서는 우리가 어떤 틀에 박힌 일이나 혹은 의식에 의존하는 것을 인정하시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학습 방언과 같이 똑 같은 것을 반복하는 일은 결코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다.

    반면에 마귀들은 자기들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속이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마귀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 뒤 이 마귀들은 그 사람이 부를 때마다 와서 그 사람이 원할 때 치료하는 일 을 행하곤 한다. 또한 마귀들은 의식과 예식 등을 사랑하며, 사람들에게 영계를 많이 보여준다. 성령님의 은사를 마귀가 모방 할 때 그는 대개 이 일을 자기에게 사로잡힌 사람의 통제하에서 수행한다. 다시 말해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가 원할 때마다 병 고치고, 예언하고, "지식의 말씀" 을 갖는 등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마귀를 통제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궁극적으로 마귀의 통제를 받아 영원히 멸망 받게 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보는 것이나 감정에 의지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고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환상이나 감정의 치솟음 등과 같은 일을 일상적으로 혹은 자주 주시지 않는다. 분명히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감정을 자극하고 우리의 육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려 하시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는 것'(sight)이 아니라 '보지 않고'(insight) 믿음으로 모든 일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영계를 보여주시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가 원할 때마다 그 원하는 것들이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즉 병을 고치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병을 고칠 수 없으며, 방언을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방언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하시고자 할 때 기적이 일어나며 단지 우리는 주님의 뜻 안에서 온전히 아뢸 뿐이다. 그 결과는 주님께서 처리하시는 것이다.

    반면에 마귀들은 인간의 감정을 교묘히 다루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정의 극치 즉 황홀경을 줌으로써 그들을 통제한다. 마귀들은 빈번히 사람들로 하여금 영계를 보게 하며 그 결과 믿음을 소유하지 못하게 한다. 자꾸 보게 되면 자연히 믿음이 필요 없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은 자주 환상을 보거나 초자연적인 경험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우리에게 주신 한 권의 책, 즉 성경으로만 만족해야 한다. 그 안에 있는 대로 주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 바로 그것을 주님께서 요구하신다.

    구원받은 우리도 의도적으로 성령님께 불순종함으로써 그분을 탄식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에게 복종하지 않을 때에, 그분께서는 단지 조용히 뒤로 물러나셔서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시지 않는다. 성령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자유의지를 반대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인형극에서 손가락으로 놀리는 인형이나 로보트를 원하시지 않는 것이다. 성령님으로 밥티스마(침례)를 받아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다. 즉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relationship)는 영원 불변하며, 단지 그가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제(fellowship)가 즐겁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가 너무나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경우에는 그를 쳐서 죽게 하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마귀들은 자기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를 재빨리 징계한다. 그들은 항상 개인의 자유의지를 빼앗으려고 힘쓰며 그것을 점령하고 통제하기에 민첩하다. 마귀들은 인형이나 로보트들을 좋아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늘 우리를 하나님 앞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우리를 싫어하고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는 "영원한 파멸"로 인도한다.

    예수님께서는 죄로부터 우리를 정화시키시기 위한 죄값을 친히 지불하사 우리를 위해 자신의 피를 흘리셨고 우리를 대신해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 반면에 마귀들은 우리를 위해 자기들의 피를 단 한 방울도 흘린 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을 위해 피를 흘릴 것을 요구해 왔으며, 자기들을 위해서그들이 정화되어야만 하고 이를 위해 피흘리는 일을 해야만 한다고 가르쳐 왔다.
     
    또한 성도들을 향해 마귀들은 하나님께 축복을 받으려면 신자들 스스로 부과한 모든 종류의 얽어매는 규례와 엄격한 형식에 따른 율법 조항들을 지켜야만 한다고 가르쳐 왔으며, 이 경우에도 마치 이런 가르침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처럼 꾸며 크리스천들이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만들어 왔다. 다시 말해 마귀들은 "주일 성수, 십일조 준수 등을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거나 혹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등의 거짓 가르침을 신자들에게 불어넣어 그들로 하여금 항상 위기의식이나 죄의식 등을 느끼게 만든다.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종교의 특징이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유와 기쁨을 가져다준다. 또한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단 한번에 우리의 죄를 위한 대가를 지불하셨다.(벧전 3:18) 반면에 마귀들은 항상 점점 더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그들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마음속에 성경을 읽고자 하는 갈망을 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요 14:26) 반면에 마귀들은 혼란을 가져와서 사람들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성도들의 모든 참된 기도를 방해한다.

    성령님께서는 절대로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다. 반면에 마귀들은 항상 자랑하길 좋아한다.

    성령님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며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다 거짓말쟁이며 그들이 거주하는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배우는데 능동적으로 활용하길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결코 우리 마음의 의지와 상관없이 단지 우리의 정보 은행으로서 봉사하길 원치 않으신다. 반면에 마귀들은 자기들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정보 은행이 되어 주며, 그 결과 마귀에 들린 사람들은 자기 의지대로 정보나 지식을 배울 필요가 없게 된다. 이것을 쉽게 풀이하자면, 예수님을 영접했어도 공부하지 않으면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귀들은 기도만 하면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기들이 노력하지 않는데도 성령님께서 도와주시기만 하면 무슨 일이든지 다 잘 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물론 마귀에게 사로잡히면 점 같은 것은 잘 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언기도, 축복성회 등에 참석해서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려 하는 것이다. 예전부터 우리 사회에는 두 세 살 먹은 아이들이 영어도 유창하게 하고 대학생이나 풀 수 있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서 신문에 보도가 되곤 했다. 성경적으로 보면, 바로 이런 경우의 대부분이 마귀에게 사로잡힌 경우이다. 하나남께서는 결코 정상적인 과정을 무시하신 적이 없다. 심지어 예수님도 아이로 태어나 지식이 자라고 영이 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신동으로 불리던 아이들이 커서 잘 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가? 일단 마귀가 떠나면, 그 아이의 삶은 완전히 망가지고 말며, 더 이상 정보나 지식 창고로 존재하던 마귀가 없으므로 그 아이는 사회의 폐인이 되는 것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성령님께서 일하심을 기억해야만 한다.

    성령님께서 들어오시면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들을 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크리스천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능동적인 의식과 자신의 뜻이 연합되어 우리 가운데 선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길 원하신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기를 포기하면, 마귀가 우리 속으로 쉽게 우리를 다스리게 된다. 마귀들은 자기들이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점령하고 통제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결코 점쟁이가 아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예견력을 주시지 않는다.(마6:34) 반면에 마귀들의 가장 일반적인 속임수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간단한 예견에 불과한 "거짓 지식의 말들"을 주는 것이다. 마귀들은 또한 운수를 점치는 것에 불과한 많은 개인적인 "예언들"을 말해 준다. 성경의 예언은 대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며, 개인의 신상에 대한 것은 매우 드물다. 따라서 대학 진학, 배우자 선택, 직업 선택 등을 위해 소위 용하다는 예언기도를 받으러 가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큰 죄를 범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런 예언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들처럼 보이나, 사실 이들은 대부분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믿어서도 안되지만, 부분적으로 이해하거나 부분적으로 인용 해석을 하려해서는 더더욱 안 될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 역시 부분적으로 치우치게되면 극단주의가 될 수도 있고, 더 심하면 이단사설로 빠져들 수도 있다. 그런고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그 말씀 속에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친히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로 간구하고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대로 어디든지 따라가는 겸손함이 필요하다고 본다. 신앙 생활의 발란스를 유지하도록 힘쓰자!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나누어 하나님께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힘써 연구하라(딤후 2:15)



     

    이미지 전체보기

     

    고대했던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 천만 달러의 은행 빚으로 초호화판으로 교회건물을 신축 중이었던 나성열린문 교회(담임목사 박헌성)는 지난 9일 예정대로 결국 강제매각처분되는 비운을 피하지 못했다.

    3,000만달러가 넘는 건축융자금 부채를 안고 있던 이 교회는 지난 9일 진행된 경매결과, 2,500만달러에 매각됐다. 이날 매각된 이 교회의 자산에는 95% 공정이 진행돼 완공을 눈 앞에 두고 있던 신축건물과 부지 그리고 이 교회의 피아노며 의자, 마이크 등 자잘한 비품까지 이 교회가 가진 자산 전부가 포함됐다. 은행이 퇴거를 명령할 경우, 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에 몰리게 됐다는 것이다.

    지난 7년간 족히 수 백만 달러는 넘을 신도들의 헌금을 쏟아 붓고도 교회자산 전부를 송두리째 빼앗긴 이 교회 사태는 사실 오래 전부터 예견돼 왔던 것이다. 당초 책정됐던 공사비 5,000만달러는 처음부터 능력을 훨씬 벗어나 있었고, 지난 2009년에는 불투명한 회계와 교회운영에 불만을 품은 교인들이 대거 교회를 이탈해 축소된 공사비 3,000만달러마저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2010년에는 공사대금을 내지 못해 완공을 앞 둔 교회건물이 법정관리인에 손에 넘어갔고, 급기야는 밀린 융자금 이자액만 180만달러에 달해 매각이 불가피했다. 차압에 이어 경매처분 통보까지 받고서도 ‘하나님의 기적’만을 앞세우며 신도들에게 진실을 감춰왔던 이 교회 목회자의 무책임도 빼놓을 수 없다.

    밀린 페이먼트 납부 마감시한을 앞두고 이 교회 목회자는 “최종시한까지 밀린 대금을 지불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도와줄 것으로 믿는다”며 납득하기 힘든 말로 일관했고, 매각처분이 확정된 다음에도 “우호적인 투자자들과 협상 중이다. 은행이 퇴거를 요구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라며 ‘하나님 기적론’ 설파를 중단하지 않더니 급기야는 “매각처분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며 사실을 부정하기까지 했다.

    재정적인 능력도 없이 지난 7년간 올인해 왔던 이 교회의 거대하고 호사스런 성전 건축은 그들의 ‘하나님’을 3,000만달러 빚쟁이로 만들면서 결국 막을 내리게 됐다. 목회자나 신도들의 재산일 수 없는 교회의 빚은 고스란히 그들의 ‘하나님’의 몫이 되고 만다. 하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을 오해하지 말자. 탐욕의 결과까지 ‘하나님’이 책임질 수는 없지 않는가..

    미주한국일보 김상목 기자

    '마음의 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  (0) 2012.03.08
    지금은...  (2) 2012.03.02
    터놓고 말하고 가슴으로 듣기  (0) 2012.02.24
    세상을 바꾸는 한 가지 방법  (2) 2012.02.08
    3치 혀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  (0) 2012.02.04
    불멸의 꿈 이뤄질까? ‘죽지않는 동물’의 비밀 찾았다
     
    입력: 2012.02.28 ㅣ 수정 2012.02.28 11:10
     

    이미지 전체보기

    이미지 전체보기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은 이미 오래 전부터 불멸을 꿈꿔왔다. 불로불사의 약을 원했다는 진시황제부터 불멸을 소재로 한 각종 소설과 영화까지, 죽지 않는 것은 모든 인간이 꿈꾸는 소망이자 이룰 수 없는 꿈 중 하나였다.

     

    하지만 과학이 발전하면서, 불멸은 더 이상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가고 있으며, 일부 과학자들은 불멸의 실현 열쇠가 값비싼 ‘마술 물약’이 아닌 편형동물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호수나 연못 웅덩이에 사는 편형동물인 플라나리아 벌레는 반으로 잘라져도 머리가 다시 자라며 심지어 머리에 새로운 뇌가 생겨나기도 한다. 이 벌레를 20조각으로 자르면 20마리의 플라나리아가 생겨나고, 각각 모두 최초의 플라나리아와 동일한 형태와 성질을 갖는다.

     

    영국 노팅엄대학 연구팀은 이 같은 사실을 이용해 단 한 마리의 플라나리아를 2만 마리까지 늘리는데 성공했다. 최초의 한 마리가 2만 마리로 재탄생 한 것이다.

     

    연구를 이끈 애직 아부바커(Aziz Aboobaker)는 “플라나리아 벌레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본다.”면서 “이를 이용해 나이가 들어도 건강한 신체를 가지거나, 질병으로 손상된 세포 역시 재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 같은 확신은 플라나리아 벌레의 뇌와 머리를 재생시키는데 필수적으로 작용하는 말단 소립(염색체 팔의 말단에 있는 것으로, 노화와 연관이 있다), ‘Smed-prep’라는 유전자와 연관이 있다.

     

    연구팀은 플라나리아 벌레의 몸 어디를 절단하던, 어느 곳에서나 새로운 뇌와 머리가 재생되는 반면 또 다른 편형동물인 지렁이는 절단 즉시 죽는다는 사실을 주시하고 이를 비교한 결과, 두 동물 사이의 차이점이 재생에 필수적 유전자에 있음을 깨달았다.

     

    아부바커 박사와 연구팀은 “다음 목표는 ‘불멸의 동물’들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죽지 않고 영원히 재생하는지를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고 이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번 연구결과는 미국 국립 과학원 저널(the journal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 PNAS)최신호에 실렸다.

     

    사진=잘라진 뒤 머리와 뇌, 눈이 새로 생겨나는 플라나리아

     

    송혜민기자 huimin0217@seoul.co.kr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