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협, 한기총 탈퇴
한복협 중앙위원 탈퇴에 찬성 31명, 반대 1명으로

2012/09/29 ㆍ추천: 0  ㆍ조회: 13      

한국복음주의협의회(한복협, 회장 김명혁 목사)가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 탈퇴한 것으로 29일 확인됐다.

한복협은 지난 28일 한기총에 공문을 보내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중앙위원들의 건의에 따라 최근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 대한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의 태도를 문의한 바 탈퇴에 반대한 분이 1명, 행정보류에 찬성한 분들이 9명, 탈퇴에 찬성한 분들이 31명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따라서 한국복음주의협의회는 중앙위원 다수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서 탈퇴할 것을 결의하고 이를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 알린다”고 공문을 보내 탈퇴의사를 분명히 했다.

정하라 ⓒ 뉴스파워
출처: USA아멘넷

 
      먼저 우리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기 (Tending Our Own Wounds First) 외로움, 우울함 그리고 두려움에 대한 우리 자신의 경험은 다른 사람을 위한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이러한 상처에 대하여 좋은 간호를 받았다면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의 상처가 드러나 피를 흘리고 있는 동안,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겁을 주어 그들을 쫓아 버립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우리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간호한 후에는, 우리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도 상처 때문에 겁을 먹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치유를 경험할 때,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의 치유의 재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상처로 인하여 상처받은 우리의 형제 자매들과 깊은 유대감을 갖게 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구원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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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현 목사 / 나성서부교회


소위 구원파로 알려진 단체는 크게 3계열로 나뉜다. 권신찬(사망)-유병언 계열,이요한 계열, 박옥수 계열 등이다. 이들은 모두 한국교회 주요 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공식 규정됐다.

권신찬-유병언 계열(기독교복음침례회)은 서울 삼각지에 위치한 서울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국에 10개 지부를 두고 있으며 수시로 성경강연집회를 개최하고 있다.

박옥수 계열(대한예수교침례회)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위치한 기쁜소식 강남교회를 중심으로 전국에 200여 개의 지부를 두고 있다. 이들 지부 이름은 대체로 ‘기쁜소식 00교회’으로 되어 있는 게 특징이다. 구원파 단체 중 가장 세가 큰 편이다. 관련 단체로는 기쁜소식 선교회, 국제청소년연합(IYF, 참고 IVF가 아님), 링컨학교(대안학교), 그라시아 합창단 등이 있다.

구원파는 사회적으로 대변혁기였던 1960년대 우리나라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외국인(딕욕, 길기수 등)에게 교리를 전수받은 한국인들에 의해 국내에 뿌리를 내리게 됐다. 구원파의 교리를 전수했던 외국인 선교사들은 공통적으로 체계적인 신학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세계관은 당시 기성교회 안에는 복음이 없고 구원받은 목회자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시각을 갖고 제자들을 양성했다.

위의 권신찬, 유병언, 이요한, 박옥수 씨는 처음 함께 길을 걸어갔다. 그러던 중 1968년 박옥수 씨가 결별하면서 독자 노선을 걸었고, 1983년 이요한 씨도 이탈하게 됐다. 권신창-유병언 씨는 장인과 사위관계로 함께 동행했다.

구원파는 ‘깨달음’을 통해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정통교회에서 말하는 ‘믿음’과 ‘깨달음’이 같은 의미라고 말을 하기도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다른 의미로 가르친다.

권신찬 씨가 ‘죄사함을 깨닫고’ 유병언 씨가 ‘복음을 깨닫고’ 이요한 씨가 ‘중생을 경험하고’ 박옥수 씨가 ‘거듭난 체험’을 했다는 것은 같은 뜻으로서 ‘깨닫고 거듭나야 구원을 받는다’면서 그 구원받은 시각(영적생일)을 알아야 한다고 하며, 육적생일을 기억하는 것과 같이 영적생일을 기억해야 구원받은 증거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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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파 측은 영적인 생일을 모른다고 해서 꼭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니라고 말은 하면서도 구원받은 날(영적생일)을 모르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반응한다. 다시 말해 구원파식 구원은 반드시 자신이 구원 받은 날짜를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깨달음’의 증거가 된다는 말이다.

구원파 신도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어떻게 육신의 생일을 알면서 참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영적 생일은 모르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럴듯하게 보인다. 그렇지만 그 말 속에 바로 허점이 있다. 육적 생일과 영적 생일은 유사성 내지는 유비성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육적 생일을 알듯이 영적 생일을 알아야 한다면, 영적 생일도 자기 스스로 알 수 없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적으로 태어난 사람 스스로 자기 생일을 감지하거나 아는 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육적인 생일은 자신이 발견한 게 아니라 훗날 부모님이나 주변 어른들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자마자 달력을 보고 안 사람이 있을까? 따라서 육적생일을 아는 것처럼 영적인 생일을 알아야 한다는 말은 그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재미있는 예가 또 하나 있다.

구원파 신도들이 어떤 집사님에게 구원받은 날짜를 모르는 것을 보니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니냐고 다그치니까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한다.

“나는 언제부터 구원받았는지는 모르나 분명히 구원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내 속에 성령님이 계시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언제부터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내가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부터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지 모른다고 나보고 자전거를 못 탄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언제 구원받았는지는 모르나 분명히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얼마나 통쾌한 대답인가?


출처: 크리스챤헤럴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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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s)

 

누구도 상처입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육체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또는 영적으로든,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상처를 숨길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난처한 입장에 빠지는 것을 면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받은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데

이용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상처가 부끄러움의 원천이 아니고

치유의 원천이 될 때 우리는 상처를 받았지만

치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상처받은 치유자이십니다
그의 상처를 통하여 우리는 치유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들에게 기쁨과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이 받은 굴욕은 우리들에게 영광을,

그리고 그가 당한 거부는 우리들에게

사랑의 공동체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도 우리의 상처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데 사용될 수 있도록 할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개혁주의 교회의 4가지 신앙고백서


 개혁주의 신조는 벨직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도르트신경,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에  나타난다.


벨직 신앙고백


1.벨직 신앙고백서의 역사적 배경


벨직 신앙고백서는 1561년, 화란의 개혁교회가 핍박받고 있는 상황에서 작성된 것이다. 화란을 다스리던 필립2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아버지 찰스 황제처럼 가톨릭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그 당시 화란은 프랑스와 긴밀한 교류 있었고, 프랑스에 확산되었던 개혁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개혁의 움직임을 언짢게 여겨왔던 필립 2세는 이 개혁을 근절하기 위해 Spanish Inquisition(스페인의 탄압)이라는 스페인의 종교탄핵제도를 도입하였다. 당시의 분위기에 대하여 역사학자들은 "자연의 모든 위대한 힘이 이 핍박에 동원되었다. 불은 사람을 태우는 데, 물은 사람을 수장시키는 데, 공기는 공중에 사람을 매다는 데, 흙을 사람들을 생매장시키는 데에 사용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필립 2세는 개신교인을 살려두기보다는 네덜란드를 초토화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필립 2세 아래서 순교당한 개혁교회 성도의 숫자가 10만 명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초대교회 때에  로마 황제 아래서 순교당한 사람들의 수보다 더 많은 숫자이다.


초대교회의 유명한 교부 터툴리안이 말하기를 "기독교회가 부흥한 데 있어서 순교자들의 피가 씨앗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강한 개혁교회가 세워진 밑거름에 순교자들의 피가 있었다. 개혁교회의 전통 위에 있다는 것은 순교의 전통 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참된 기독교 신앙은 순교 신앙이다. 개혁주의적인 신앙고백자는 순교적 삶을 살아간다. 순교 신앙은 자신의 삶 속에서 죄에 대하여 그리고 아직도 교만한 자신에 대해서 철저히 죽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는 매일 죽는다"라고 말하는 바울의 신앙이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Daily dying and rising. 성공적인 신앙의 비결은 매일 자아에 대해서 죽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개혁교회에서 아주 강조하는 것이다. 실지로 육적인 죄의 생각이 죽으면 행복해지고, 아주 편해진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먼저 죽으시고, 부활의 영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신다. 부활의 영의 능력이 아닌 자기의 육적인 에너지로 신앙생활하려고 하면 힘들고 어려워진다.


벨직고백서는 순교자 가운데 한 사람인 귀도 드 브레스(Guido De Bres)가 작성하였다. 가톨릭신자였다가 금서였던 성경을 읽고 개혁주의를 전파하다가 1567년에 순교를 당하였다. 그의 처절한 편지는 우리에게 감동과 도전을 준다. 벨직고백서는 신학자의 책상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던 신앙의 선배들을 통해서 작성된 것이다. 벨직고백서는 순교자의 신앙의 생명력을 표현한 문서이다. 이 문서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의 기초 위에 세워졌고, 칼빈주의 맥락 속에서 발전된 신앙고백서이다.


2. 벨직 신앙고백서의 내용적 특색


1). 하나님을 아는 방법(1-9장).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주셨다. 하나님은 일반계시를 통해서도 자신을 보여주셨으나 우리 맘이 어두워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계시인 성경으로 분명히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이 고백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는 방편으로서의 성경에 대해서 먼저 논한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성경과 함께, 혹은 성경보다 전통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중세 가톨릭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에게는 두 가지 계시인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주어지는데, 자연계시(일반계시)에서도 하나님을 알만한 증거(evidence)를 주셨다는 것이다. 자연과 이성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아퀴나스는 거듭나지 않은 지성을 가지고도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지성으로는. 구원에 대한 지식, 삼위일체에 대한 지식 등은 알 수가 없다.


중세 가톨릭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연계시와 특별계시의 2중 구조를 주장한다. 그러나 칼빈은 자연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고 말한다. 칼빈은 자연신학의 불가능성을 말하고, 성경만이 우리 신앙의 유일한 지침과 척도임을 분명히 한다. 우리의 죄의 문제는 자연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연계시의 증거로만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창조물을 보면서 하나님의 분명한 계시를 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확실한 계시의 증거를 보면서 살지만, 그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우리는 그 증거를 보는 즉시 눈을 감아 버리고, 특별 계시에로 나아가지 않고, 부인해 버리려고 한다. 그것은 인간 안의 부패성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문제로서, 마음이 부패한 문제이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 문제이다. 부패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증거들을 왜곡시켜 버리고, 부인해 버린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종교개혁시의 유명한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와 루터가 논쟁을 벌였다. 에라스무스는 우리 안에 자유의지가 남아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죄에서 돌이키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자유의지가 철저히 손상되었다고 말하였다. 루터는 인간은 죄를 지을 자유의지밖에 없다고 말했다. 칼빈은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에 메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기 전에는 죄의 결박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가 없고, 하나님을 선택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타락한 인간은 자기가 선을 원하는데도 불구하고 외부의 세력에 의해서 어쩔 수가 없이 죄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의지적으로 죄를 원하고, 그것을 선택한다(롬 7장).  우리는 자신들의 부패한 마음에 부합되는 부패한 길만을 추구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성령이 말씀하시는 선택을 할 수가 없다. 자기 스스로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돌이킬 수가 없다. 우리는 육신의 범죄에 속한 것만을 선택을 한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 선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육신의 범주에서 탈피하지 못한 것이다. 좀 더 고상한 것을 선택한 것이지만, 육적인 동기로 선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육적인 행위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가 없다. 만일 우리가 죄에서 돌이키기 원한다면 이미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작용한 결과이다. 이것이 Total Depravity(전적부패)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방법(10-21장).


기독론의 맨 앞부분에서 선택(election)을 다루고 있다. 왜 선택이 이 부분에 나오는 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적 부패를 다루고 난 다음에 논리적으로 어떻게 연결이 되겠는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믿도록 선택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구원을 이루셔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오직 삼위하나님께서만이 전적으로 구원의 사역을 이루셔야 한다. 바로 그 구원사역의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그의 죽음은 불의한 자를 위한 죽음이다. 그는 죄인의 자리에서 지옥을 맛보셨다. 그 대가로 우리는 완전한 의인의 자리에서 그 축복을 받게 됐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완전충족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이다. All sufficiency of Jesus' atoning work


3).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방법(22-37장).

 

22장은 믿음을 다룬다. 전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 그 방편이 믿음이다. 믿음은 성령의 은혜다. 믿음은 인간의 공로로 얻는 게 아니다. 믿음은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구원의 공로나 조건이 되지 않는다. 구원의 근거로서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의 은혜가 주어지는데, Sola fide는 꼭 필요한 것이지만 믿음이 공로적인 측면에서 구원의 조건이라고 할 수는 없다. 즉 믿음은 조건이 아니라, 방편이다( instrument channel))이다. 믿음은 구속의 은혜가 이루어지는 통로, 그릇(vessel)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은혜로 믿음의 그릇도 만들어서 내려주신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재적인 은혜의 산물이다. 우리가 믿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선재하여, 믿음을 주시는 역사가 일어난다. 믿음은 지적 승인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안으로 끌어안는 것이다. 예수님의 축복과 예수님을 분리하지 않는다. J. I. 패커 "믿음이란 예수님의 공로를 움켜잡는 빈 손이다." 믿음은 자기를 의존하지 않고 예수와 그의 의만 절대적으로(only and entirely) 의존한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나를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교만을 죽이는 것이다.


24장에서는 성화와 관련해서 믿음이 어떤 것인가 다룬다. 우리를 new man으로 볼 뿐 아니라, new generated man으로 본다. 칭의와 성화의 구별성을 강조할 뿐 아니라 연결시킨다. 이 믿음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는 믿음이다. 순종을 가능케 하는 믿음이다. 온전히 순종하는 것과 믿음은 다르다. 믿음은 온전한 순종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믿음이란 우리로 선행의 열매를 맺게 하는 믿음이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하는 믿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행의 열매를 맺으니까. 성화에 대한 믿음도 우리로 자랑할 게 없게 만든다.


의롭게 하는 믿음과 성화의 믿음은 어떻게 다른가? 의롭게 하는 믿음은 수납한다(reception)는 것이고. 성화의 믿음은 역사한다는 것이다(operation). 24장 첫 부분은 칭의와 성화의 연결성을 강조하고, 뒷부분은 구별성 강조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그 결과 의롭게 산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낸 의로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한 순간이라도 자기 공로로 하나님께 나가면 하나님께서 거절하신다.


성령론을 그 다음에 다루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은 객관적(objective)이다. 이 객관적 사역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관적(subjective)인 체험이 되도록 전환하는가?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다. 성령께서는 과거의 주님이 현재의 주님이 되도록 한다. 역사적인 주님이 오늘날의 실존적인 주님으로 만나게 해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다.( Christ for us -> Christ in us. )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2000년 전의 역사적인 예수를 믿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을 통해서 내 마음에 모셔드리고, 그 주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고, 성화로 인도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과 그분께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은혜를 소유하는 것을 분리할 수 없다.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을 실제화하고 주관화시키는데, 성령께서는 예수와 내가 생명적인 연합이 이루어지도록 도우신다(Union with Christ).

 

27-29항까지 참 교회의 표식 세 가지를 명시하고 있다. 말씀전파(순수한 복음설교), 바른 성례의 시행, 권징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참된 영적인 성숙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은 원래 키프리아누스가 했다. 어거스틴도 주장했다. 칼빈도 말했다. 모든 교인은 교회에 속해야 한다. 개인주의적인 신앙을 조장하지 않는다. 그 다음 마지막 부분에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정부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정부에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 특별히 그 당시 사회의 여러 가지 물의를 일으키고 있던 재세례파와 같이 교회의 신자들은 정부를 거스림으로 말미암아 사회의 혼란을 초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벨직 신양고백서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과 칼빈주의 맥락에서 발생한 17세기의 정통주의 신학에 기초를 제공했다. 초대교회에서는 기독론과 삼위일체 논쟁의 가열에 따라서 그에 대한 신앙고백의 항목이 확대가 되고, 증보가 되었으며, 종교개혁이후에는 성령론, 구원론, 교회론에 대한 항목들이 증보되었다. 또한 그와 관련된 여러 부분의 교리들이 재조정되고 확대됨으로써 교리의 내용은 조직신학과 같은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벨직 신앙고백서와 같은 역사적인 신조를 통해서 오늘날의 완성된 조직신학적인 교리의 내용을 볼 수 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http://blog.daum.net/_blog/hdn/ArticleContentsView.do?blogid=06maZ&articleno=15711268&looping=0&longO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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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Things GOD Wants You To Remember
    하나님께서 당신이 기억하길 원하시는 10가지


      1. I will Strengthen you.
        내가 너에게 힘(능력)을 주리라.


      2. I will Provide for you.
      내가 너의 필요를 채우리라.


      3. I will Answer you.
      내가 너에게 응답 하리라.


      4. I will Be With you.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5. I will Give you Rest.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6. I will bless you.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


      7. I will not fail you.
      내가 너로 실족치 않게 하리라.


      8. I Believe in you.
      나는 너를 믿는다.


      9. I am For you.
      내가 너를 위해 있으리라.

      10. I Love you.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보름달이 유난히도 크고 밝은 한가위네요.







        이번 한가위만이라도...
        삶의 무게로 힘들고 지친 그대,
        잠시라도 쉴 수 있고...
        둥근 보름달 같은 환한 미소를
        그대 얼굴에서 볼수가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십자가 사랑,
        영원한 생명을 주신 그분께서 오늘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마 약속하시네요... ^^*
        주님이 사랑하시며 축복하시는 그대,
        나 또한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이곳을 찾아주신
        사랑하는 모든 님들...
        풍성하고 행복한 한가위 보내시기를...
        안개꽃: 최송연 드림
       
       

       

       

      예쁜 그림 배경: 들꽃이랑 샴님께 감사!^^*



      성령훼방죄에 대한 바른 해석

      오역(誤譯)으로 인한 성령훼방죄에 대한 오해 바로 잡기

      한국교회에서는 '성령훼방죄'라는 죄목이 매우 특수하고 난해한 구절로 인식되고 있음과 동시에 오해되고 곡해되어 목회자들이 자기 권세(?)를 방어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잘못된 행태를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분들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성령훼방죄'는 '성령의 권위를 허락받은 목회자를 방해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런 죄는 영원히 용서 받지 못하는 것인가? 이것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단순히 성령훼방죄라는 것이 무엇인가?”,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용서 받지 못하는 죄목인가?” 라는 차원의 접근 보다는 성경 본문을 차분하게 해석해 내야만이 바른 이해해 충분히 도달 할 수 있다. (해당 구절을 바르게 해석하면 성령훼방죄에 대한 의문이 자연스럽게 풀린다.) 그러므로 해당 구절인 마태복음 1231,32절의 해석을 통해 성령훼방죄가 무엇인지를 이해해 보자.

      1. 마태복음 12장 31

        

      개역한글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개역개정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헬라어(Nestle-Aland 27) :

      Dia; tou'to levgw uJmi'n, pa'sa aJmartiva kai; blasfhmiva ajfeqhvsetai toi'" ajnqrwvpoi", hJ de; tou' pneuvmato" blasfhmiva oujk ajfeqhvsetai.

       

      위의 헬라어 본문을 편의상 몇 부분으로 나누어서 번역해 보면 아래와 같다.

       

      헬라어

      kai; o~" eja;n ei[ph/ lovgon

      번역

      그러므로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말한다.”

      헬라어

      kata; tou' uiJou' tou' ajnqrwvpou, ajfeqhvsetai aujtw'/:

      직역

      모든 죄 그리고 악담(조롱) 용서 받을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번역

      모든 죄와 악담(조롱)은 사람들에게 용서 받을 것이다.”

      헬라어

      o~" d! a]n ei[ph/ kata; tou' pneuvmato" tou' aJgivou,

      직역

      그 그러나 그 영의 악담(조롱) 못한다 용서 받을 것이다

      번역

      그러나 영의 악담(조롱)은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

       

                             ★★★ 최종 번역 :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에게 범하는 모든 죄와 악담은 사람들에게 용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하는 악담은 사람들에게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

       

      31절에서 성령이라고 번역된 프뉴마성령으로 번역될 수 있지만, ‘이라는 뜻도 있다. 또는 이성적인 부분’, ‘정신적인 부분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된다. 무엇보다 31절에서 성령으로 번역된 프뉴마토스성령이 아닌 또는 마음, 정신으로 번역해야 하는 이유는 마태가 32절에서 성령을 따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31절에서는 프뉴마토스’()라고 했고, 32절에서는 하기우 프뉴마토스’(거룩의 영)이라고 분명히 구분하여 표기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31절에서는 그냥 ’, 32절에서는 거룩의 영이라고 다르게 적고 있다. 동일 저자가 동일 스토리에서 다르게 기록한 단어라면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다르게 기록한 단어 '프뉴마토스'와 '하기우 프뉴마토스'를 동일하게 성령’으로 번역한 것은 매우 초보적인 오역(誤譯)이다.

          ※ 개역개정 번역 VS 학자의 혀 번역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가 맞는가?

            아니면 “모든 죄와 악담은 사람들에게 용서 받을 수 있다”가 맞는가?

       

         - 개역개정은 프뉴마토스성령으로 번역했기 때문에 용서를 구해야 하는 대상성령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31절의 문장에서 성령이나 하나님은 등장하지 않는다. 31절에서 주어는 분명히 그 사람들(토이스 안쓰로포이스)’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죄와 악담을 행하는 대상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대상이 모두 그 사람들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죄와 악담을 범하는 방법은 두 가지 일 것이다. 하나는 로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 속으로 하는 것이다. ‘로 악담의 죄를 범하면 피차간에 죄가 드러나기 때문에 용서를 구하므로 결국에는 용서 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악담을 한다면 죄가 드러나지 않아 용서를 구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으로 지은 죄는 영원히 용서 받지 못함이 틀림 없다 

      성령의 주된 사역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죄를 드러내시는 일을 하신다.(고전2:10,11, 살전2:4) 인간 판사나 경찰은 우리가 로 행한 악담의 죄를 판단하여 드러내지만 마음 속에 있는 악담의 죄는 오직 성령만이 가능하시다 

      마음속으로 악담을 하는 것, 마음 속에 계속해서 악을 품고도 회개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성령님을 무시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 마음의 죄와 악을 알고 계시는 유일한 분이신 성령님을 무시하고 있으니, 누구 앞에서도 죄인임을 인정할 필요가 없고, 죄가 전혀 없는 의인의 행세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겉으로는 깨끗하게 행동했던 바리새인들은 사람들 앞에서는 물론이요 유일하게 그들의 죄를 아시는 성령님을 무시하고 있으니 용서를 구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이고, 영원히 용서를 구할 일이 없으니 영원히 용서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2. 마태복음 1232

        

      개역한글 :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개역개정 :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헬라어(Nestle-Aland 27) :

      kai; o~" eja;n ei[ph/ lovgon kata; tou' uiJou' tou' ajnqrwvpou, ajfeqhvsetai aujtw'/: o~" d! a]n ei[ph/ kata; tou' pneuvmato" tou' aJgivou, oujk ajfeqhvsetai aujtw'/ ou[te ejn touvtw/ tw'/ aijw'ni ou[te ejn tw'/ mevllonti.

       

      위의 헬라어 본문을 편의상 몇 부분으로 나누어서 번역해 보면 아래와 같다.

       

      헬라어

      kai; o~" eja;n ei[ph/ lovgon

      직역

      그리고 누구나 말하다 말

      번역

      그리고 누구나 말하면

      헬라어

      kata; tou' uiJou' tou' ajnqrwvpou, ajfeqhvsetai aujtw'/:

      직역

      ~에 대적하여 그 아들 그 인간의 용서받을 것이다. 그에게

      번역

      인자를 대적하여 말하면 인자에게 용서를 받을 것이다.”

      헬라어

      o~" d! a]n ei[ph/ kata; tou' pneuvmato" tou' aJgivou,

      직역

      누구 그러나 든지 말하다 ~에 대적하여 그 영 그 거룩의

      번역

      그러나 누구라도 성령에 대적하여 말하면

      헬라어

      oujk ajfeqhvsetai aujtw'/

      직역

      못한다 용서받을 것이다 그에게

      번역

      그에게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헬라어

      ou[te ejn touvtw/ tw'/ aijw'ni ou[te ejn tw'/ mevllonti.

      직역

      또한 아닌 ~에서 이 시대 또한 아닌 ~에서 오는

      번역

      이 시대도 오는 시대도 안된다.”

       

                            ★★★ 최종 번역 : 그리고 누구라도 인자를 대적하여 말하면 인자에게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성령께 대적하여 말하면 이 시대나 오는 시대에서나 성령께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개역개정은 아우토(그에게)’라는 여격 인칭대명사를 해석하지 않고 생략했다. 이것은 정말 큰 실수이다. 이것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해석상 매우 큰 차이를 불러 온다. 이 여격 인칭대명사를 생략하면 의미가 혼잡 되어버리지 않는가?! ‘인자에게성령께라는 단어를 무시해버리면 주어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32절에서 사하심을 얻되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의 주체는 각각 인자성령이시다. ‘여격 인칭대명사를 생략하지 않고 넣어서 해석하여, 전자는 인자에게는 사하심을 받되이고, 후자는 성령께는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라고 해석해야 한다.  

       

       

         

      < 본문 강해 >

        지금 예수님께서 비교, 중첩하여 말씀하심으로 바리새인들의 무언가를 드러내고 계시는 것이다. 첫째는 (사람에게) 보이게 죄를 짓고 용서 받는 문제  VS  마음속으로 죄짓고 용서 받는 문제를 말씀하셨고, 둘째는 인자에게 죄짓고 용서 받는 것  VS  성령께 죄짓고 용서 받는 문제를 말씀하셨다.

        이 두 구절만 봐도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지 알 수 있지만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자면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된다 

      - 2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자 바리새인들이 마음 속으로 생각하기를 예수가 귀신의 앞잡이다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그러한 바리새인들의 (악한) 생각을 아셨다.” 고 기록한다.

        -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시기를 그들의 문제는 마음에 악이 가득한 것이라고 지적하셨다.

        - 33절에는 나무의 열매를 비유로 들어 말씀하셨는데, 나무를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듯이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보고 그들의 속의 정체를 알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의 문제를 다루고 계시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깨끗하였지만 그 마음과 생각은 악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들의 마음속의 죄를 그들은 숨기고 있기에 (혹은 깨닫지 못하고 있기에) 용서를 구하지 않는 그들이야말로 영원히 용서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성령훼방죄'라는 번역은 개역한글판에서 차용한 단어이다. 그런데 이 단어가 부적절하다는 판단에서 였는지 개역개정판에서는 '성령훼방죄' 대신에 '성령을 모독하다'라고 번역을 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한다’, ‘성령을 훼방한다’, ‘성령을 비방한다보다는 성령을 무시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의도에 가장 가까운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진짜 회심자는 행위는 물론이요 그 마음까지도 청결하기 위하여 애쓰고 힘쓰는 사람이다. 진짜 회심자는 마음을 감찰하시는 성령님을 모시고 살기에 그분을 의식하여 마음을 청결하게 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는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처럼 거짓 회심자는 마음의 청결은 안중에 없고, 겉으로 보이는 행실의 청결만을 신경쓰고 살필 뿐이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성령님을 무시하고 대적하는 것 아니겠는가? 성령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죄와 잘못을 누구도 지적해 줄 수 없고, 자인(自認)하지도 않기에, 자신이 깨끗하고 의로운 자라 착각하여 마음 속에 가득한 악을 영원히 용서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무서운 상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행실이 아니라 마음을 살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행실을 거룩하게 하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깨끗하게 하기위하여 힘쓰지만 아무도 보지 못하고 성령님만이 보실 수 있는 우리 마음의 청결과 거룩을 위해 힘쓰지 않는다면 우리 마음속에 가득한 죄악은 영원히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 마음의 청결을 위해 힘쓰고 애쓰지 않는 기독교인은 두려워해야 한다. 성령님께서 지금 당신의 마음을 감찰하고 계심을 부인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와 같이 자신의 마음을 거룩하게 청결하게 하기 위해 힘쓰지 않는 교회 안에 거짓 회심자들을 향한 경고, 마음의 죄와 싸우지 않고 타협하고 있는 한때는 주를 뜨겁게 사랑했었던 미지근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경고이것이 바로 31,32절의 말씀의 바른 의미이고, ‘성령훼방죄라고 오해된 구절의 참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목회자에게 반대하는 것을 성령훼방죄라고 하는 것은 성경본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엉터리 해석’, ‘자기 맘대로 해석이며, 이것을 알고도 계속해서 주장한다면 사기, '기만' 해당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원하셨던대로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성령님'이 더욱 바르게 가르쳐짐으로 마음의 청결함을 받지 못한 자,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성령님 앞에 마음 속 깊은 것까지 자복하고 회개하는 역사가 더욱 일어나기를 바란다.

       

       

       

      2012830, 학자의 혀.
      출처: 좁은 길을 걸으며

       

      학자의 혀님에 대한 반론글(Lamad)

      학자의 혀님의 글에  반론을 하여도 너그럽게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본문의 정확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학자의 혀님의 글 "성령 훼방 죄"에 관한 글 을 본  저로서는 님의 해석이 원문을 근거로 하고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본문을 충실히 설명하고 있지 않다고 보기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마 12:31,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이 부분은 문맥상 성령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 마12:31절의 "프뉴마" 를 해석할 키는 다른 복음서입니다. 막3:29절에 보면

      동일한 내용을 "에이스 토 프뉴마 토 하이온"= 성령을 거스려"로 언급합니다.

      그러므로 마 13:31절의 "프뉴마"를 프뉴마 하기온(성령)"을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마31절 끝에 "토이스 안트로포이스(= 그 사람들에게)"라는 단어가 나온 사본을 근거로만해석 하면 안됩니다.

      나오지 않는 사본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집어넣에서 해석하면 마가복음의 동일한 본문과 충돌합니다.

       

      (막 3:28,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막 3:29, 개역)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

      (막 3:30, 개역) 이는 저희가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 30절은 그리고 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직역: 왜냐하면 그가 더러운 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막 3:22, 개역)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막3:22절과 30절을 근거로

      성령훼방죄란 하나님의 능력이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악한 영에 의하여 그랬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학자의 혀님 앞으로 공관복음의 경우에는 원문을 제시하더라도

      사복음서에 관련된 본문과 원문을 개략적으로라도 살펴보고 글을 올렸으면 해요

       

      

       

        세월이 약이다(How Time Heals)

         

        "세월이 약이다" 라고 흔히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결국 우리에게 가해진 상처를

        우리는 잊게 될 것이고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가 살 수 있을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치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현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약이다" 라는 표현이

        어려운 인간 관계 안에서 신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서로에게 상처 주었던 행동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음을 의미할 때,

         

        이 말에는 많은 진리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월이 약이다" 라는 말은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며

        또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출처: USA 아멘넷 게시판/ 진리 님
       

      생성된 이물질 덩어리가 오래되어 단단하게 굳어진 것입니다. 현대의학은 수술의 방법으로 제거합니다.

      수술하시기 번에 한 가지 방법을 소개합니다. <간청소>를 통해서 담석도 함께 씻어내는 방법입니다.

      100%는 아니겠지만 성공했다는 사례가 인터넷으로 많이 소개되었습니다.

      간청소
      병원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 - 간 질환을 앓고 계시는 분은 물론
      간 질환자는 물론, 현재 건강한 분들도 간청소를 해보세요. 몸이 확 달라집니다.

      ※ 이 사이트의 모든 글과 자료는 저작권 및 지적소유권 공증필하였습니다.

      모방이나 복제는 법률로 금합니다.
      기존의 알려진 방법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 캐나다의 홀다 레게 클락 박사가 발명한 방법입다.

      *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다.
      * 저녁에 마시고, 자고나서 화장실 가면 끝난다.
      * 화장실 변기에 많은 노폐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 아래 사진 참조

      간에는 신경이 없어서, 병들어도 느낌이 오지 않는 <침묵의 장기>라고 합니다.
      당신이 느끼지 못할지라도, 지금 당신의 간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어서 청소해 주세요.
      20대 젊은이들도 꼭 하세요. 간청소 후에는 술을 마셔도 취하지도 않고 뒤끝이 개끗합니다.

      간 청소?(Liver Cleaning)

      준비물

      1. 올리브유(대형 슈퍼마켓에서 판매함) 2. 오랜지 쥬스(고급 100%)

      3. 구운 소금이나 정제염(=죽염, 천금, 빛소금 등)

      혼합액 제조법

      1. 유리컵에 오랜지 쥬스(90cc)와 올리브유(90cc)를 담아 잘 저어 골고루 섞는다.

      * 종이컵 윗부분 1cm정도 남기고 물을 채우면 180cc입니다.

      어린이는 양을 좀 더 줄이고, 체격에 따라서 양을 조금 더 늘리거나 줄이면 좋습니다.

      12세 이상의 어린이도 할 수 있습니다.

      2. 생수병(1.8~2리터)에 위 소금을 17~20g 을 넣어서 소금물을 만듭니다.
      소금물 농도 약 1%

      소금물에 자몽 1/2개를 즙을 짜서 섞습니다. 자몽을 구하기 힘드시면 매실 쥬스를 30cc정도 섞어도 됩니다. - (자몽이나 매실쥬스는 마시기 좋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보임. 자몽이나 매실쥬스를 섞지 않고 소금물만 마시는 것이 더 편할 수도 있음)


      필요한 소금의 양
      시중에 판매하는 생수병 큰 병은 2리터이고, 위 사진의 소주잔에 담긴 소금은 20g 이다. 이를 혼합하면 1% 농도의 소금물이 된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섭씨 10 도 정도의 미지근하게 마시는 것이 좋다. - 위 사진을 보고 소금의 양을 잘 조절하기 바랍니다.

      먹는 법

      1. 간의 청소는 2일이 소요되므로 토요일을 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2. 청소를 하는 2일 동안은 일체의 약을 중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3. 시작하는 날은 아침, 점심은 채식위주의 식사를 하고 육식이나 기름진 음식은

      피하는것이 좋습니다.

      4. 당일 오후2시부터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물이나 쥬스는 먹어도 됩니다)

      오후 8시~10시까지는 완전 금식합니다.

      실시요령

      저녁 10시쯤 혼합액(올리브유+오랜지쥬스)을 마신 다음 곧바로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서 처음 30분간은 몸통을 움직이지 않아야 합니다. 손이나 발을 조금 움직이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간청소에 실패 하실 수도 있습니다.

      잠자리는 미리 준비해두고 중도에 화장실을 갈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하여, 혼합액을 드시기 전에 화장실에 미리 다녀오도록 하십시오. 이 날은 새벽기도 못 가겠군요.

      다음날 아침

      1. 아침 6시쯤(혼합액을 마신지 8시간 후)에 깨어나시면 혼합액을 또 새로 만들어 한 번 더 드시고 곧바로 천장을 바라보고 반듯이 누워 30분간 움직이지 않고 있은 다음, 그대로 누워서 60~90분을 더 기다린다.

      1.8리터에 만들어 놓은 소금물을 맥주컵으로 2컵 연속적으로 마십니다. 이후로 약 5~10분 간격으로 30분 정도 걸려서 소금물을 다 마십니다. 만약 소금물을 다 마시기도 전에 설사를 하게 되면 소금물을 조금 남겨두어도 좋습니다. 체격에 따라서 소금물 마시는 양이 다르겠죠. 체격에 큰 남자는 2리터를 다 마셔도 좋지만 체격이 작은 분이나 어린이는 그 만큼 덜 마셔도 됩니다.

      (소금물을 마시는 과정에서 구토증세가 있을 수 있는데,

      그렇다면 소금물을 조금씩 천천히 마시면 됩니다)

      2. 소금물을 마시면 곧바로 화장실에 가게 되거나 설사를 여러 차례 보게 됩니다.

      설사를 하고 나서 변기 속을 들여다보면 초록색과 황갈색의 크고 작은 덩어리들이 발견 될 것입니다. 이것들이 간장에서 빠져나온 간석, 담석, 노폐물, 콜레스테롤 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간의 건강상태에 따라서 나오는 양과 덩어리의 크기와 색깔이 다릅니다.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마신 소금물이 설사로 거의 다 배출되려면 1시간 정도가 걸립니다. 설사가 끝나고 속이 편안해지면 소화가 잘되는 죽을 드시거나 밥을 잘 씹어서 가볍게 드시고, 저녁식사는 평소처럼 하시면 됩니다. 그날 하루는 고기(육류)는 드시지 마세요.

      소금물을 마시는 것은 설사(=장청소)를 하여 간에서 배출된 노폐물 덩어리를 보기 위한 것이며, 소금물 그 자체가 간청소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간청소를 하는 것은 올리브유 혼합물입니다.

      위와 같은 방법으로 환자들은 2~3주 후에 한 번 더 해 주시면 건강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건강하신 분들도 처음에는 2주 간격으로 2번 정도 해주시고 6개월에 한 번씩 생활화 하시면 건강에 아주 좋습니다.


      주의 사항

      천연 재료로 직접 만들어 드시기 때문에 부작용이 일체 없으나 간혹 간 기능이 저하된 분이나 여성분들은 혼합액을 드시면 속이 매스껍고 구역질이 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되도록이면 참고 껌을 준비하였다가 씹으시면 구역질이 진정 될 겁니다. 다만, 심장병, 심한 위장장애 환자를 제외한 사람들은 누구나 안심하고 해도 됩니다. 노폐물이 빠져나오다가 중단된 경우에는 개운치가 못하고 오히려 피로한 느낌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2주일쯤 후에 제2 제3차 시도하면 결국 빠져나오고 시원한 느낌을 맛보게 됩니다.

      처음부터 노폐물이 쏟아져 나오는 사람도 있고, 처음에는 조금 나오다가 2주일쯤 후에 두번째 간청소에는 엄청난 노폐물이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드시 2~3회까지 시도하시기 바랍니다.


      간에서 이런 것이 나옵니다.


      돌처럼 단단한 것이 아니고 진흙처럼 뭉쳐져서 나온다.
      오래된 것일수록 단단하고 변기의 물 속에 가라앉는다. 나머지는 물 위에 뜬다.
      간이 나쁠수록 많이 나온다.

      많이 나올 때는 변기에 약 2 cm 두께로 쌓입니다.


      미국과 유럽 선진국에서 먼저 많이 알려진 방법입니다.


      아래 사진은 두영이꺼. 2007년 4월 2일 - 엄청 많이 나왔는데, 몇 개만 건져 놓은 것.
      두 번째 화장실에 갔을 때는 작은 초록색 덩어리들이 많이 나왔음.
      갈색 덩어리

      간청소의 효과

      1. 각종 간질환이 치료되고 중증의 간질환이 매우 완화됨

      2. 체내 콜레스테롤 감소와 지방간 해소, 혈액이 맑아짐

      3. 해독작용으로 몸이 굉장히 가벼워짐

      4. 지방 소화가 잘 되어 배변이 좋아짐

      5. 담이 결리고 뒷목, 어깨 뻐근한 증상 해소

      6. 독소가 피부로 나와 생기는 알레르기 현상 해소

      7. 숙변제거의 부수적 효과

      간청소는 우리 민족의 것이 아닙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사용해 오던 요법입니다.

      캐나다의 홀다 레게 클락 박사가 인디언들이 간질환이 없는것을 알고 연구를 하다 발견한 오래된 요법입니다. 이 요법은 부작용이 전혀 없습니다. 7,80대 노인이 해도 아무런 해가 없는 요법이랍니다. 지혜로운 황색인종인 인디언의 직관력이 만들어낸 천년이 넘은 요법이며, 미국에서는 간청소를 통해 많은 간질환자들이 치료를 하고 있답니다.

      간청소 체험담- '石 路 半 砂' 김영일 -

      점심이 늦었기에 밤11시에 지시된 내용대로 실시하고 30 분간 움직이면 안 된다기에 그대로 잤다.

      아침에 7시경에 일어나니 가슴이 약간 뻐근한 느낌이었는데 소금물을 마시는데 구토가 날 것 같고 배가 불러 한꺼번에 마시지 못하고 3번에 나누어 30분 안에 마셨다.

      구토가 날려고 하면 약간의 오렌지 쥬스로 입술을 축였는데 뱃속에서 기별이 오기 시작 하였다.

      사진을 올리지 못하여 현장감이 떨어지긴 하지만 이건 분명 장난이 아니었다. 딴 사람들의 사진을 참고하시고 다만 김영일님의 콜레스테롤 사진보다 더 큰 덩어리와 검정색 덩어리도 있었음을 알려 드리며 참고로 제가 간 청소를 결심 한 것은 약 25년 전에 편도선염과 주부 습진으로 인해 1년이 넘도록 항생제를 오래 복용하여 위장병을 얻어 고생을 하였고 그 결과 간에 무리가 와서 간 기능 검사도 몇 번 받았다. 그러나 병원에서 간은 한번 나빠지면 재생이 잘 되지 않는다고만 하면서 뾰족한 방법이 없다고 하였다 물론 간장약을 권하긴 했지만..

      그래서 항상 찜찜하게 여기던 터라 굳게 결심하고 작은 아이에게도 권하여서 같이 준비했는데 작은 아이는 내가 하는 것이 의심이 갔는지(평소에도 병원 안가고 이상한 짓 한다고 많은 핀잔을 주곤 했음) 밤에 배고프다며 10시에 저녁을 먹더라구요. 그래서 저만 실행을 하였는데 아침에 쏟아져 나온 것을 본 아이가 본인도 하겠다며 시작을 하더라구요

      아이가 아침 6시반에 1잔을 다시 마시고 30분을 누워있다 물도 먹기 전에 일어나 화장실로 가더니 엄마 ! 이것 좀 보라고 막 부르더군요 달려갔더니 아니 이게 웬일 입니까 변에 메주콩 불린 것보다 약간 큰 푸른 콩이 엄청 많더라구요 . 너 언제 푸른 콩을 먹었냐고 물어 봤죠. 그랬더니 엄마가 밥 줘 놓고 무슨 콩 이냐고 ? 정말 메주 콩 불린 것과 꼭 같이 생긴 푸른 덩어리가 너무 많아 건지다가 말았죠 . 머그 컵 1잔 이상이 나온 것 같네요 .사진을 찍긴 했는데 다음 기회 닿으면 올려놓을게요.

      저랑은 비교가 안 되더군요. 이 아이는 생후 9개월부터 버터에 비빈 밥을 먹고 고기도 좋아하고 치즈. 햄버거 .피자 .튀김 . 라면 등을 너무 좋아하고 채식을 거의 하지 않기에 항상 걱정을 했는데 본인도 쇼크 받더라구요 토요일 점심부터 준비하면 일요일 오후3-4시경에 끝날 수 있으니 꼭 한번 해 보시고 아울러 먹거리 조심하세요.

      다들 건강하시고 소중한 자기 몸 잘 지켜 주세요.



      의심이 가시는 분은 먼저 확인 하시고 시도 하세요.

      Interview with Dr. Hulda Regehr Clark Part1 New




           

          내 기억 속에 늘 아름다운 그대,

          따뜻한 배려가 있는 마음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늘 감사한 그대,

           힘들 때 따스하게 손잡아 준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늘 불쌍한 그대,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모습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늘 부러운 그대,

            역경을 딛고 일어선 용기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영원히 간직하고픈 그대,

          한없이 쏟아부어준 그 사랑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영원히 지우고 싶은 그대,

          내게 아픔을 준 모진 말들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늘 안타까운 그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매일 매 순간, 그대 하는 말이, 그대 행동이    너와 나, 우리에게 기억되는 것임을...

          사랑으로 수놓으며 예쁘게 살아요,우리.
          별똥별/최송연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관계-도르트 신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팁~!]

      1. 예정론을 운명론 내지 숙명론, 혹은 기계적 결정론으로 공격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결정적인 오류가 바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와의 관계다.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다 결정하셨으면 우리 인간은 더 이상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항변이다. 인풋(in-put)된 정보에 의해 정해진 결론을 도출(out-put)하는 컴퓨터와 같은 존재, 더 심한 말로 로보트와 같은 존재 아니냐는 것이다.
      ...

      2. 자유의지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다면 그런 지적이 타당할 것도 같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에 반하여 그 어떠한 외부적 강압에 의해 강제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다.

      이것은 타락한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타락한 후에는 이제 더 이상 선을 행함에 있어서 무능력한 존재지만 여전히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다. 이말은 인간은 스스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자발적인 존재라는 말이다.

      3. 예정은 늘 언제나 하나님의 섭리와 함께 이해되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예정(넓게는 작정)하신 바를 이루어가는 방식에 대한 이해다. 당연히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모든 일의 궁극적 원인, 곧 제 1원인이 되신다. 하나님의 손을 떠나 이루어지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이 우리 눈에 우연으로 보이는 일까지도 말이다.

      (만약 하나님의 주권을 넘어 그것과 상관없이 행해지는 일들이 있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능가하는 자유로운 존재가 하나님이지 않겠는가? 만약 누군가 하나님의 주권을 뛰어넘는 인간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면 그는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제 2원인, 다른 말로 그 일과 관련된 직접적인 가까운 원인들을 제거하지 않으신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일들은 자연법칙, 우연,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하여 일어난다는 말이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일들은 여전히 자연법칙과 우연, 그리고 인간의 자유로운 생각과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주권적 의지를 제 2원인을 사용하여 사용해 가신다.

      인생사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관련하여 "하나님도 일하고 사탄도 일하고 사람도 일한다"는 말은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방식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말이다.

      4.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유감스럽게도 성경은 이에 대한 논리적 설명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지 않는다. 성경은 단지 하나님께서 절대 주권자이시며 동시에 우리 인간이 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존재라고 선언할 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에겐 신비다. 유한한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섭리방식은 이해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자꾸만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논리적인 이해로 해결하려 하는가? 그것은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을 피조된 인간의 미천한 논리 세계 안에 가둬두고자 하는 오류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을 클리어하게 논리적으로 파악하려 하는가? 아니다. 그래봤자 못한다. 해봤자 안되는 걸 왜 자꾸만 하려고 하는가? 더 이상 어리석은 사변에서 벗어나자.

      (성경이 명약관화하게 선언하고 있는 이 사실을 논리적으로 꿰어 맞추려고 할때, 우리는 우편에서 하이퍼 칼비니즘을 만나며 좌편에서 펠라기우스주의나 알미니우스주의를 만나게 된다.)

      5. 그럼 나는? 나는 논리로 이해되어 받아들이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나의 논리로는 납득되지 않고 오리무중으로 빠질 수 밖에 없는 이 사실을 성경이 선언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셨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논리로 공박하고 항변하는 하나님의 구원을 향한 예정과 섭리를 나는 그저 믿음으로 수납할 따름이다.

      눈을 떴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본다는 것이다. 마치 소경이 예수님의 일하심으로 눈을 떴던 것처럼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은 내가 그 사실을 마음으로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령께서 나로 하여금 이 놀라운 구원의 사실을 믿음의 눈을 열어 보게 하셨다. 그래서 나는 믿는다. 그리고 나는 단지 사실에 대한 지적인 동의를 넘어 마음을 다하여 감사하며 찬송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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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성헌목사의 페이스북 /개혁주의마을


      
      
          질투를 넘어서(Beyond Jealousy) 우리는 쉽게 질투합니다
          방탕한 아들의 얘기에 나오는 큰아들은 자기의 동생과

          그의 단정치 못한 부인이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는데도

          돌아와서는 칙사 대접을 받는 것을 보고 질투가 났습니다

          (누가복음 15:30 참조)

           

          포도원 일꾼의 비유에서 하루 종일 일한 일꾼들은

          오후 다섯 시에 와서 일한 일꾼들이

          그들과 같은 임금을 받는 것을 보고 질투했습니다

          (마태복음 20:1~16 참조)

           

          그러나 방탕한 아들의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네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누가복음 15:31)

           

          그리고 포도원 주인은 "내 너그러움이

          네 비위에 거슬리느냐?" 라고 말했습니다(마태복음 20:15)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한 관대함을 참으로 즐길 때

          우리는 우리의 형제 자매가 받는 것에 대하여도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질투가 우리 마음에 자리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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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에게 보낸 것이다.

      이 서신서의 기록 연대는 누구를 수신인으로 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갈라디아'라는 용어가 문화 및 지리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로 동시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지배를 받는 갈라디아 지역(정치적 의미의 '갈라디아'는 로마의 행정구역을 의미한다)은 소아시아 남부 지방의 일부를 포함하는데, 이 지역은 '갈라디아'로 알려진 켈트족이 거주하는 소아시아 중부 지방(문화,지리적 의미의 '갈라디아'를 말한다)에는 포함하지 않는 곳이다.

       

      이 교회들이 타비움, 페시누스, 안키라(현재의 안카라)와 같은 조성들이 위치한 북(北) 갈라디아에 있었는지 또는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및 다른 도성들이 위치한 남(南) 갈라디아에 있었는 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전자라고 생각하는 견해를 북(北) 갈라디아설, 후자라고 생각하는 견해를 남(南) 갈라디아설이라고 부른다. 갈라디아란 이름은 B.C. 278년 경에 소아시아에 침입한 몇몇 골(Gallic) 종족들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들은 B.C. 25년에 로마제국의 갈라디아 도(道)가 된 지역의 북부 지방에 정착했다.

       

      1) AD 49년

       

      '남 갈라디아 이론'에 따르면 바울은 로마의 행정구역으로서 더 넓은 정치적 의미를 지닌 '갈라디아'를 언급한다고 한다. 따라서 편지를 받은 교회들은 바나바와 함께 한 그의 1차 전도 여행 때에 복음을 전했던 도시들 속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행 13:13-14:23). 이는 예루살렘 공의회가 있기 바로 전이며(행 15), 그렇다면 2장 1절에서 10절에 기술된 예루살렘 방문은 분명히 사도행전 11장 27절부터 30절 기근을 돕기 위한 방문이었으며, 따라서 갈라디아서AD 49년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출처 : http://cafe.naver.com/truthfulchurch/370

       

      2) AD 53년

      갈라디아서 4:13'처음에' 라는 말을 근거로 바울은 최소한 두 번 이상 갈라디아 지역을 방문했음을 알 수 있다. 바울의 두 번째 갈라디아 방문은 사도행전 18:23의 갈라디아 지역 방문 내용과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에 잠시 머물다 안디옥으로 내려가고 얼마 있다가 갈라디아로 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갈라디아서는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에 쓰여진 것이고, 바울이 1년 반 동안 머물던 고린도 지역 사역후인 A.D.53년경에 썼다는 결과가 도출된다

      [출처] 갈라디아서 살펴보기|작성자 shfla200

      3) AD 53~56년

      '북 갈라디아 이론'은 바울이 이전에 더 제한된 의미의 갈라디아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1차 전도 여행 때에 방문했던 도시들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때에, 드리아로 가는 길에 민족적 배경에서 갈라디아를 방문했을 것이다(행 16:6). 3차 전도 여행에서 바울은 자신이 세운 갈라디아 교회를 다시 방문했으며(행 18:23), 에베소(AD 53-56) 아니면 마케도니아에서(AD 56) 이 편지를 썼다.

      출처 : http://cafe.naver.com/truthfulchurch/370

       

      4) AD 56년

      톰슨 2 주석 성경

      출처 : cafe.naver.com/anyquestion/16373

       

      * 참고 자료

      1.jpg

      <바울의 제1차 선교여행: AD 47~49년>

      2.jpg


      <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 : AD 50-53년>

      3.jpg




      <제3차 선교여행 : AD 53-57년>

      4.jpg



      출처: 개혁주의마을

       

       

      아버지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

      (A Fahter's As Well As a Mother's)

       

      탕자의 얘기에 나오는 아버지는 또한 어머니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는 달려가서 아들을 환영하고 포옹하고 입을 맞추며,

      제일 좋은 옷과 반지, 그리고 신을 주고 파티를 열어 주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시골의 촌장이 취하는 전형적인 행동은 아닙니다
      이러한 행동에서 우리는 깊은 애정과 자비로운 배려,

      그리고 드러내지 않는 용서가 내포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이런 행동 속에는 아버지로서 뿐 아니라

      또한 어머니로서의 사랑이 꽉 차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녀를 위하여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포함하는 것이며, 또 초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한 손은 아버지의 손처럼 그리고 다른 한 손은

      어머니의 손처럼 우리를 껴안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 손은 우리를 어루만지고, 위로하며, 그리고 편안하게 만들며,

      다른 손은 우리를 지지하고, 격려하며, 그리고 권능을 줍니다

      집으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도 또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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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천사에게도 자유의지를 주었나요?

      [질문]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예정은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께선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위해 인간에게 자유(자아)의지를 주셨고, 죄는 인간 스스로 선택한 것이고, 이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비하심이 예정이란 것! 이건 이해가 됩니다.

      문제는 천사들에게도 자유의지를 주었고, 타락한 천사가 생겼다는 거죠. 천사들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동물들처럼 프로그램대로 움직이게 하시지, 왜 자유의지를 주신 걸까요?
      인간타락의 제 일은 인간 스스로의 책임이며, 사단 또한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선이시기  때문에 인간에게 완전한 자유의지를 위해 악으로서 사단이 필요하신 걸까요? 그럼 사단은 필요악이라는 이상한 결론에 도달합니다. 천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면 그들도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데, 구원은 인간에게만 있죠. 인간과 천사의 관계와 왜 인간에게만 있는 자유의지를 천사에게도 허락하셨을까란 질문이 생깁니다.  

      [답변]

      성경에도 언급이 전혀 없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를 질문해 주셨습니다. 관련 구절로 유추하는 수밖에 없지만 그 또한 아주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 같은 난제는 그 반대의 반대를 따져보면 답이, 그것도 최선의 답이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 전에 먼저 천사의 창조에 대해 분명히 해놓을 것이 있습니다. 천사는 천지의 창조와 거의 동시에 그러나 인간의 창조 전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임은 틀림없습니다. 그 창조 목적은 하나님의 사역을 보좌하고 앞으로 창조할 인간을 섬기도록 위한(히1:14)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창조 시에 천사들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창조와 마찬가지로 선하고도 완벽하게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천사들은 그들의 자유를 남용하여 하나님을 거역하고 심지어 그 자리에까지 오르려다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타락한 천사들은 그 우두머리 사단을 비롯해서 비록 하나님을 보좌하는 위치에선 떨어졌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궁극적인 주권 아래에 있습니다. 단지 한정된 시기 동안 제한된 범위 안에서 자신들의 능력과 권세를 행사할 수 있는 자유를 하나님으로부터 허락 받았을 뿐입니다. (욥기 1장 참조)

      예수님이 무덤 사이에 군대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는 기사에 이런 원칙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마8:29)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눅8:31)

      사단의 졸개인 군대 귀신들도 자기들은 한시적으로 활동하다 때가 되면 영원한 심판을 받아 무저갱으로 떨어질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또 그 전에는 임시로 인간을 상대로 흑암의 권세를 행사하여 훼방할 수 있도록 허락된 것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때가 오기 전에 무저갱으로 집어넣지 말라고 예수님께 부탁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 약속 위반이라고 따진 셈입니다.

      따라서 천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해서 모든 천사가 하나님과 교제하지는 않습니다. 사단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충실했던 선한 천사들만 그럴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도 하나님과 교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명에 따라 그분의 사역을 돕고 있을 뿐입니다. 천사에게는 원래부터 구원과 심판이 나중에 따로 해결되어야 할 과제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타락한 천사들에게 구원의 문제는 아예 해당도 되지 않습니다. 원래 하나님의 사역에 직접 참여할 존재로 창조되었는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다 못해 그분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덤볐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해 하나님을 거역하긴 했어도 그분의 자리를 넘볼 신분과 능력이 아예 되지 못하기에 구원의 여지를 남겨 둔 인간의 경우와는 그 전후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이제 질문하신 주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 반대의 반대를 유추해봅시다. 즉 만약 천사들에게 자유의지를 전혀 허락하지 않았다면 그 후 사태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를 말입니다. 천사들의 반란은 당연히 없었고 인간의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오직 선한 천사만 하나님의 사역을 보좌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아담이 선악과 금령을 범했던 그 시점에도 뱀의 모습으로 나타난 사단은 당연히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혼자서 스스로 자유의지를 사용해 하나님을 순종 내지 거역해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래도 인류 역사는 틀림없이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는 방향으로 진행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은 사단이 있었으나 없었으나 간에 인간의 전적 책임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이미 자유의지가 완전히 허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구태여 천사에게 자유의지를 허용할 필요는 없었다는 결론이 도출됩니까? 아닙니다. 또 다시 역의 역을 따져 봅시다. 인간 스스로 타락했다면 논리적으로 그 구원도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동원해 스스로 노력해 취득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결론이 됩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타락하게 된 결과는 아무 차이 없지만 구원의 방안이 전혀 달라져버립니다.  

      나아가 죄란 오직 인간이 자유의지를 실수로 혹은 잘못 사용하여 일으킨 나쁜 행동일 뿐입니다. 당연히 그 죄를 바로 잡는 방안도 그 행동만 바로 잡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한마디로 죄는 있어도 죄인은 없습니다. 쉽게 말해 인간이 선행을 할 때는 선인이 되었다가 악을 행하면 죄인이 되는 일이 교대로 일어날 뿐입니다.

      바꿔 말해 아담 이후의 세계는 조물주가 인간을 창조해 놓고 손을 놓은 상태로 남게 됩니다. 죄와 관련해선 인간은 오직 스스로 악행을 삼가거나 악행을 했어도 선행의 공적으로 갚아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자력으로 노력하여 하나님의 합격점에 들게 되면 구원도 따라오게 됩니다.

      결국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의 구원관과, (세계관 신관 인간관도 당연히 포함하여) 동일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필요 없습니다. 세상에는 악의 세력이 따로 없고 인간이 오직 자유의지를 선하게 혹은 악하게 사용하는 것으로만 선악간이 갈라집니다. 선악의 기준이 그야말로 인간으로부터 기인합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 대신에 인본적 도덕이 심판을 좌우할 잣대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하는 일이란 사람이 죽은 후에 생전의 성적표를 작성해주는 것뿐입니다. 천하 만물의 운행을 주관하는 분이 아니라 단지 채점관에 불과해집니다.  

      흔히들 착한 자는 천국 가고 악한 자는 지옥가야 공평하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평생을 두고 자유의지를 일관되게 선하게만 또는 악하게만 사용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한 인간이 수시로, 그것도 죽기 직전까지 죽 끓듯이 변덕을 부립니다. 그런 인간을 채점관에 불과한 하나님은 굳이 선인과 악인으로 구별해서 심판과 구원의 상벌을 주어야 합니다.

      몇 번이나 강조하지만 이만큼 하나님을 불공평하게 만드는 원리는 없습니다. 거짓말을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의 카트라인이 평생에 천 번이라고 칩시다. 거짓말 백 번 한 자가 천국가고 만 번한 자가 지옥 간 것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1001번한 사람의 경우 천 번과 비교하면 어떻게 됩니까? 너무나 억울하고 불공평한 하나님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은 아담이 타락할 때에 악의 세력이 먼저 존재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질문자님의 표현대로 하자면 일종의 필요악으로서 악은 반드시 인간보다 선재(先在)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고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는 방식이 태초부터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구원의 계획에 필요한 사전 무대 장치로서 혹은 하나님이 직접 죽으신 십자가 구원을 더 영광스럽게 만들려는 필요악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에 대해 정말 세밀하고도 철저하게 대처해 주길 바랐던 것입니다. 죄란 단순히 인간의 실수, 판단착오, 게으름, 습관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가공한 그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흑암의 세력에 인간이 노예가 되어 종노릇한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악은 도저히 말도 못할 정도로 음흉하며 도무지 분간하지 못할 만큼 교묘하기에 인간이 잠시라도 방심하면 그 힘에 지게 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인간으로 악을 철저하게 저주하게끔 하여 죄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죄만 안 짓게 만들려는 목적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죄가 저주스러워질수록 빛과 의와 생명에 대한 갈증을 더욱 솟구치게 만들고자 하는 뜻입니다. 품성을 성결하게 유지하고 의를 행하는 경건한 삶이 얼마나 당신의 은혜와 능력이 풍성하게 넘치는지 체험토록 하는 것입니다. 죄악이 더럽고 추하게 여겨질수록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소망은 커지게 마련입니다. 절대적 죄악을 체험케 되면 절대적 선과 의가 그리워집니다.

      이 또한 구원의 방식을 십자가로 하고 또 그 효과를 극대화 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아닙니다. 인간이 반드시 서 있어야 할 곳은 절대적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의 품 안이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창조된 인간이 그분이 공급해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떠나서는 제대로 인간다운 구실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을 지으시고 인간보다 더 인간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 인간을 참 인간답게 되돌리시려는 긍휼입니다.

      나아가 기독교 구원은 하나님이 인간을 지옥 심판에서 면하고 당신의 은혜로 인도해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당신의 동역자로 부른 것입니다. 이 땅을 다스리는 거룩하고도 영원한 당신의 계획 가운데로 인도해 자신의 대리자로 이 땅에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로 구원한 당신의 자녀에게 영원까지 이어지는 계획에 동참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대리자가 되려면 인간부터 영적인 영역에 대한 안목과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역으로 말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 사단에게서 죄를 발단토록 하고 때가 찰 때까지 그 악의 세력이 활개 치도록 허락하신 까닭입니다. 신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시어 불신자와는 달리 영적 존재로 바꿔주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요컨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이 있게 하려는 하나님의 예정이었다면 천사에게 그렇게 하신 것도 동일한 맥락의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최종적이고도 확실한 해답은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적극적 능동적 계획이었던 묵인하고 허용한 간접적 계획이었던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알 필요도 따질 이유도 없습니다. 그분은 절대자로서 절대적 선이며 절대적으로 완전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하신 일은 그 무엇이든, 인간의 이해와 분별을 아무리 초월했든 간에, 오직 절대적으로 선할 따름입니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측면에 그분의 신비는 등장하며 인간으로선 믿음으로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둘 중 하나의 선택만 있을 뿐입니다.

      다른 말로 천사의 자유의지는 결과적으로는 필요악의 형태를 띠었습니다만 필요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필요악이란 그 본질과 내용은 악하지만 전체적인 균형과 조화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동원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잘못이나 악함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하나님의 예정, 아니 단순히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오직 하나,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인간을 유일하고도 완전하게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하기 위해서 예정된 절대적 선이라는 것뿐입니다.

       

       

      답변 글/박신목사 출처: 개혁주의마을

      

      

       

       

       


       

       

       

       

       

      커피처럼 그리운 당신

       

       

       

       

      사랑하는 사람들이 못 견디게 그리운 날엔
      까맣게 타 들어간 알갱이
      내 속마음인양 정겨울 때가 있습니다

      뜨거운 물위로 떨어지는 알갱이
      그 위에 하얀 물보라를 펼치는 부드러운 크림..
      당신의 품속으로 스며드는 나인 듯
      조심스레 떨어트려 봅니다

      맑고 투명하던 물이 검은빛으로 물들 때면
      가슴 저리게 타 들어가는 그리움...
      사랑은 빈잔 가득 차 오르는 기쁨인 것을

      그리워서 한 잔 ...보고파서 한 잔...
      쓸쓸해서 또 한 잔 그렇게 마셔되는 커피
      온몸 가득 향으로 남습니다

      그리움을 목으로 삼키듯
      당신을 삼키며 삼킵니다
      쌉스름한 맛이 당신이 주신 아린 맘으로
      그렇게 그리운 이를 가슴 가득 삼킵니다

      커피 한 잔으로도
      그리운 이를 삼킬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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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으로 세워진 율법 (2)

      요한 웨슬리(John Wesley)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로마서 3:31)

      1.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가장 통상적인 방법은 앞에서의 설교 속에 밝혀져 있습니다. 즉, 첫째로는, 율법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번에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방법으로서는 매우 효과적입니다. 비록 여기에는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하고, 복음을 확장한다는 구실이 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모두 파괴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직접적이든지 간접적이든지 간에) 믿음이 성결의 필요성과 대치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즉, 지금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보다 성결의 필요성이 거의 없거나 또는 그 필요성의 정도가 줄어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다면 성결의 필요성이 요청되겠지만믿고 있기 때문에 성결이 우리에게 거의 필요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인의 자유란 어떤 종류나 어떤 정도의 성결로부터도 자유롭다는 것입니다.(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선행이 아니라 은혜의 계약아래 있다는 것, 사람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것, 그리고 '행하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에게 그의 믿음이 의롭다함을 얻게 된다' 는 진리를 외곡하게 됩니다) 세 번째로, 이러한 사실들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입니다. 비록, 원칙에서는 아니지만 행동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믿음 때문에 성결이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처럼 생활하거나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 죄를 지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어떻게 보다 나은 방식을 따르면서,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고 말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논의하는 문제만이 남게 됩니다.

      2. 실제로 우리는 낡은 의식적 율법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율법이 영원히 폐지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 전체를 수립할 수는 더욱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십자가에 못박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율법을 완성하고 모든 계명을 지키는 것이 마치 우리가 의롭게 되는 조건인 것처럼 생각하여 도덕법 (너무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기 때문에 걱정이 됩니다만)을 세우자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생전 의롭게 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아직도 사도 바울이 의미한 바와 같이 '율법' 즉 도덕법을 '세우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첫째로, 도덕법을 따라 율법을 세웁니다. 우리는 위대한 바울 사도가 지상에 살 동안 그랬던 것처럼 똑같은 방법으로 전면적으로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훈계하신 바와 같이 '어떤 사람이라도 말을 하려거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말하게 하시오' 하는 말씀을 따름으로서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우리를 교훈하기 위해 가르치고 이것을 기록했던 그 옛날 경건한 성도들처럼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동일한 성령의 지시에 따라 자비하신 주님의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동일한 성령의 지시에 따라 자비하신 주님의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숨김없이 말하게 될 때 언제든지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가르치심을 어떤 제한이나 유보함이 없이 사람들에게 선포함으로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효과적으로 율법을 수립하기 위하여 매우 분명한 말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혀 온 많은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즉 (나쁜 포도주를 가공하는 사람들처럼)가 아닙니다. 우리는 청중들의 구미에 맞게 하기 위하여 율법을 불순하게 하거나, 뒤섞거나, 질을 떨어뜨리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말씀으로,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스도 안에서만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스스로의 양심에 따르도록 진리를 표명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2. 우리가 이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율법을 선포하게 될 때 교리에 따라 율법을 세우게 됩니다. 우리의 자비하신 주님과 사도들에 의해서 율법이 전해진 그 충만함 가운데서, 그리고 우리가 그 율법을 고도로, 깊게, 길게 그리고 넓게 공포하게 될 때 율법을 세우게 됩니다. 우리가 율법을 충분하게, 그리고 문자적인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내적 원리와 마음 속의 생각, 욕구, 의도에 유의하여 선포하게 될 때 비로서 율법을 세우게 됩니다.

      3. 그리고 참으로 우리가 율법이 가장 심오한 중요성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즉, 나무가 악하다면, 그리고 마음의 성향과 기질이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다면, 모든 열매, 즉 모든 언행은 계속적으로 악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들이 중요한 것 만큼 사람들이 생각을 하지도 않고 이해를 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보다 열심히 율법을 전하게 됩니다. 즉, 거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철저하게 영적인 의미에서 율법을 고찰한다면 역시 '율법은 창조 때부터 시시대대로 숨겨져온 것 이라고' 진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이방인들의 세계에서는 완전히 감추어졌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자랑스러운 지혜를 가지고서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기록된 글로서는 물론 율법의 정신은 더욱 더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은 더욱 더 어두워졌습니다.' '스스로 현명하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은 우매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유대민족에게 있어서도 거의 동일하게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을 알지 못하는 백성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그렇게 즐겨 선포했던 사람들 조차도, 이로서 자신에게 대하여도 선고를 내리게 되는 것은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똑같은 저주와 똑같이 지독한 무지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크게 곡해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들 가운데 가장 현명한 자들일지라도 주님의 끊임없는 질책이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십시오. 이것은 그들이 율법을 너무나 엄청나게 곡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결함을 사함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은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게된다는 사실을 증거하십시오. 그들이 단지 컵의 겉만을 깨끗게 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실, 그리고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만 드리면, 즉 외적인 정확성만 기하게 되면, 공정과 자비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적으로 등한히 해도 내적인 불결함을 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을 말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 중 가장 현명한 자들에게도 율법의 영적인 의미가 너무나 절대적으로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 중 가장 유능한 랍비의 한 사람도 시편의 말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만일 내 마음이 불의를 즐거워한다면 주님은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오직 내 마음 속에서만 그렇다면, 그래서 내가 외적인 죄악만 범하지 않는다면 주님은 여기에 대해 개의하지 않으시며', 내가 외적인 행동으로 죄를 짖지 않는 한 주님은 나를 벌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4. 아! 그러나 내적이고 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율법은 단지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에게만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고, 소위 기독교 세계에서도 감추어져 있으며, 적어도 그들 대다수에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의 영적인 의미는 아직까지 이들에게도 역시 신비로 남아 있습니다. 암흑과 무지로 가득찬 캐토릭 국가들에 있어서만 이런 사실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소위 개신교들이라고 불리우는 대다수에 있어서도, 그 율법의 순수함과 영적인 면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5. 그러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율법은 종교의 능력이 아니라 형식만을 소유하고, 자신의 눈에서만 일반적으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의견으로만 의롭다고 생각해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속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말을 듣고 마음 속에 분노를 느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의 종교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매우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특별히 이러한 마음의 종교가 없이는 '우리가 가진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먹이기 위해 나누어 준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사실을 밝혀주게 될 때 그들은 더욱 더 화를 내게 됩니다. 그들이 화를 내는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나타난 그대로의 진리를 말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듣든지 그렇지 않으면 마음에 있는 말을 참든지 간에 우리의 영혼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성서 가운데 있는 모든 말씀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선포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서 안에서 발견된 모든 약속 뿐만 아니라, 모든 경고들도 다같이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예배하신 모든 축복과 특권을 선포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다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유용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즉, 잠자는 자들을 일깨우고,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고, 빈약한 마음을 가진 자들을 위로하고, 또한 성도들을 일으켜 세우고 완전하게 하기 위하여 유용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요 참된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주고 의로 교육하는 일에 유익한 책' 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과정에 있어서 그가 마침내 완전해지고 결국 그가 그것으로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합당하도록' 하기 위해 성경의 모든 부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6. 하나님께서 계시하셨던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모두 다 선포하여,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그때 참으로, 아무런 비난도 없이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 속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다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의 의이신 주님을 증거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 세상과 화해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세히 설명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그가 상하심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하는 그런 주님을 높이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여기에만 집착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를 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모든 직능을 선포하지 않는 한 하나님 앞에서 깨끗할 수 없습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길을 위해 사람 가운데서 택함을 받고 사람을 위해 성별 된' 우리의 위대한 대 제사장으로서, 즉 '주님의 보혈로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고 지금까지 살아 계셔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시는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를 전해야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혜가 되시는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즉 그분의 말씀과 영으로써,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며'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며, 또한 영원히 살아 계시는 왕으로서, 즉 그의 피로 사신 모든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그의 은혜를 처음 회복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시는 왕으로서, 그리고 '모든 만물이 그의 발아래 복종할 때까지, 즉 모든 죄를 완전히 물리치시고 영원한 의를 가져올 때까지 모든 믿는 자들의 마음을 지배하시는 왕으로서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1. 둘째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이 성결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성결을 가져온다고 선포하게 될 때, 즉 소극적이건 적극적이건 간에 마음과 생활에 모든 종류의 성결을 가져온다고 선포하게 될 때 율법을 세우게 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서, 믿음 자체, 기독교적인 믿음까지도, 하나님의 선택인 믿음, 하나님의 역사인 믿음까지도, 단지 사랑의 시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계속 선포해야 됩니다. 이 사실은 '믿음으로 율법을 무용하게 하지 않으려는' 모든 사람들이 자주 그리고 심각하게 생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것이지만 계명의 목적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지 사랑에만 이런 명예를 주셨습니다.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 사라질지라도 '사랑'은 계속될 것이고 사랑만이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믿음은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영원한 비죤속에서 삼켜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사랑은 남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본질과 직무는 여전히 같은 것이네.
      그 불빛은 영원히 불타오르고,
      그 불꽃은 소멸되지 않네.
      죽음이 없는 승리 속에 영원히 살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끊임없는 선함이 넘쳐 흐르고,
      영원히 찬양을 받게 되네.

      2. 매우 훌륭한 일들이 믿음에 대해 언급되어 집니다. 그리고 믿음의 동참자는 누구나 사도 바울과 같이 '주님의 말할 수 없는 은사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도 사랑과 비교하게 되면 그 모든 우수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의 영광이 율법의 영광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사실을 아주 적적하게 피력한 것은 사랑의 영광이 믿음의 영광보다는 훨씬 우월하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보다 우월한 영광 때문에 영광을 상실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라지는 것이 영광스럽다면 남아 있는 것은 더욱 영광스럽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사라지기 전에 있었던 믿음의 모든 영광은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사랑을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목적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제정하였던 아주 일시적인 수단입니다.

      3. 모든 일을 삼켜 버릴 정도로 정도에 지나치게 믿음을 찬양하는 사람들, 그리고 믿음이 사랑에 대치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믿음의 본질을 전적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랑은 믿음 후에 존재하게 되는 것으로서 믿음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사랑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더욱 생각하십시오. 창조된 순간부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게 된 천사들은 일반적인 개념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평가되는 믿음을 소유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보다 특별한 의미에서, 신앙, 즉 예수의 보혈을 믿는 믿음을 소유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본성을 취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의미에서나 특수한 의미에서 이 세상의 기초가 놓여지기 전에는 믿음이 설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설자리가 있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 안에, 즉 위대한 사랑의 대양 안에, 영원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창조의 순간부터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필요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은혜로운 창조주로부터 즉시 이를 받아들여 존재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4. (많은 사람들이 교묘하고 그럴 듯하게 이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믿음이, 일반적인 의미에서까지도, 낙원에서는 설자리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단편적이고 상세하지 못한 설명에 따르면, 하나님께 대해 반항하기 전에는 아담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동행했던 것이지 믿음으로 동행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 이성의 눈은 강하고 맑았기 때문에
      (태양을 바라 볼 수 있는 독수리처럼)
      그리고 총명한 천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주 가까이서 창조자의 얼굴을 바라 볼 수 있었다네.

      그때, 아담은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얼굴을 지금은 우리가 볼 수가 없고 그 얼굴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담은 믿음을 가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시력의 결핍을 충족시키는 것이 믿음의 직무이기 때문입니다.

      5. 다른 한편, 특수한 의미에 있어서의 믿음이 그 당시 불필요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분명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의미에서는 죄와 죄인들에 대해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필연적으로 전제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없다면 죄인들을 하나님께 화해시키기 위하여 속죄의 행위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타락 이전에는 속죄가 필요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속죄에 대한 신앙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즉, 사람이 당시에는 모든 죄의 허물로부터 깨끗해졌고,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했기 때문에 사랑이 사람의 마음 속을 채웠고, 어떤 경쟁자도 없이 인간을 지배했었습니다. 단지 사랑이 상실되었을 때에만이 믿음이 요청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인간이 타락시킨 그 사랑을 인간에게 회복시키기 위한 목적에 응답한 후에는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도록 계획되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타락시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인 믿음이 첨가되었는데 이것은 그 전에는 전혀 불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구속적인 사랑에 대한 이 확신은 '여자의 자손들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라는 약속이 맺어질 때까지는 그 설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6. 그런고로, 믿음은 사랑의 율법을 다시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본래적으로 계획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한다고 해서 믿음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거나 그것의 당연한 칭송을 빼앗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면에 그것의 진가를 들어내고 믿음을 적합한 위치로 끌어올리고, 태초로부터 하나님의 지혜가 부여한 바로 그 자리에 믿음을 놓는 것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본래적으로 창조되었을 때 그 속에 있었던 거룩한 사랑을 회복시키는 위대한 수단입니다. 비록 믿음 자체는 어떠한 가치가 없을지라도(어떤 다른 수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믿음은 그러한 목적, 우리의 마음 속에 사랑의 율법을 새롭게 세우는 목적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현재의 상태에 있어서 믿음이 이 세상에 있어서 사랑의 법을 나타나게 하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이런 이유로 믿음은 사랑에 말할 수 없는 축복이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1. 그리하여 셋째로, 이것은 자연적으로 율법을 세우는 가장 중요한 방법에 대하여 생각을 하게 합니다. 즉, 율법을 우리 자신의 마음과 생활 속에서 세우는 일입니다. 사실 이것 없이 다른 모든 일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교리로서 율법을 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전면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율법의 모든 부분을 설명하고 강조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장 영적인 의미에서 율법을 들어 내야 하고,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직무를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의 모든 보화를 더하게 하여 주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동안에도 만약 우리의 마음 속에 우리가 전한 율법이 세워지지 않는다면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가리로' 보다도 하나님 앞에 쓸데없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의 모든 선포는 우리 자신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고 오직 우리의 파멸만을 증가시킬 뿐입니다.

      2. 그러므로 '어떻게 우리의 마음 속에 율법을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우리의 생애에 율법이 충분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를 고찰하는 것이 중요한 요건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배운 바와 같이 이러한 목적에 답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 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보는 것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한 우리는 민첩하게 성결의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을 꾸준히 바라보는 동안 우리는 더욱 더 세상에 대해 못박히고 세상은 우리에게 못박힌 바 됩니다. 우리의 영혼의 눈을 일시적인 것들이 아니라 영원한 것들을 향해 끊임없이 고착시키고 우리의 애정을 세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여 위의 것에 집착하게 합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믿음은 모든 의와 진정한 성결을 증진시키며, 믿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거룩하고 영적인 율법을 세우는,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수단인 것입니다.

      3. 그리고 보다 특수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 때문에 우리는 더욱 효과적인 방법으로 우리 자신의 마음 속에 주님의 율법을 세우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의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우리를 그렇게 강하게 이끄는 동기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강력한 확신보다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을 바치도록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감사에 넘친 사랑의 원리로부터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역시 생기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랑을 진실하게 믿는다면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믿음에 근거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며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랑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도 바울이 관찰했던 바와 같이 사랑은 부정적인 모든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거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하는 계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어떤 다른 계명이 있다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간단하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우리 이웃에게 어떤 악행도 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시간과 기회가 있는데로 선을 행하도록 우리를 격려합니다. 가능한 한 모든 종류와 정도로 모든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라고 재촉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하나님의 율법을 이와 같이 소극적으로 완성시킬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4. 단지 외적인 면으로만, 믿음이 소극적이거나 적극적인 율법을 성취 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깨끗게 하고 모든 악한 감정으로부터 율법을 께끗게 하기 위해 사랑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주님께서 깨끗하신 것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세속적이고 관능적인 모든 욕구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악하고 과격한 감정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적하는 육욕적인 마음 전체로부터 우리를 깨끗게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믿음이 완전하게 역사하게 된다면 모든 선과 의와 진리로 인간을 가득 채웁니다. 믿음은 사랑의 영혼에 모든 천국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빛속에 계신 것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빛속에서 걸어가게 합니다.

      5. '우리가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를 완성시키기 위해서' 우리가 받은 모든 능력을 사용함으로 우리 자신 속에 율법을 세우도록 노력 합시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받은 빛을 마음 속에 회상하면서, 그 빛을 우리가 끄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그때 우리가 성취한 것을 단단히 붙들도록 합시다. 어떤 것이라도 우리가 파괴한 것을 다시 세우지 않도록 하고, 크건 작건 간에, 우리가 분명하게 깨달았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닌 것, 또한 우리 자신의 영혼에 유익한 것이 아닌 것은 어떤 것이라도 다시 계속하지 않도록 하고, 또는 크건 작건 양심의 가책이 없이는 등한히 할 수 없는 것을 우리가 무시하지 않도록, 하여 어떤 것에도 유혹을 받지 맙시다. 이전에 받았던 빛을 더 증가시키고 완전케 하기 위하여 이제 믿음의 빛을 첨가합시다. 주님께서 전에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은 무엇이든지 보다 깊은 의미로, 보다 온유한 양심으로, 죄에 대해 보다 날카로운 감각을 가짐으로, 하나님께서 전에 주신 은사를 확신하도록 합시다. 지금 우리가 기쁨을 가지고 영원한 두려움이 없이 이것들을 분명히 확고하게 바라보며 살아 간다면 우리는 쾌락, 부귀, 칭찬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물 위에 뜬 거품처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즉, 아무것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아무것도 바랄 만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아무것도 깊이 생각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단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장막 속에' 있는 것 만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6. '당신은 나의 불의에 대해 자비로우신 분이시니 내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마십시오'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장차 도래하는 그 때를 위해 뱀의 얼굴을 보고 피하듯이 죄를 보고 피하도록 하십시오. 죄가 당신에게 지금 심각하게 죄악적으로 보입니까! 이 죄는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 얼마나 흉악한 것입니까! 다른 한편에,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전한 뜻을 지금 당신은 얼마나 자랑스러운 빛 속에서 바라다 봅니까! 그러므로 지금 당신 안에서 그 뜻이 성취되도록 하고, 당신에 의해서 성취되도록 하며, 당신에게 성취되도록 노력하십시오. 더 이상 죄를 짖지 않도록 조심하고 기도하십시오. 또한 주님의 율법의 가장 적은 부분이라도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피하십시오. 태양이 어두운 곳을 비출 때 당신은 전에 볼 수 없었던 티끌까지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의 태양이 당신의 마음 속에 비칠 때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죄를 보게 됩니다. 이제부터 모든 면에서 당신이 받아 들였던 빛을 따라 살기 위해 부지런히 행하십시오! 매일 매일 빛을 받으며,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사랑, 그리스도의 영, 그분의 생명,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더욱 더 받도록 열심을 내십시오! 이제 여러분이 이미 얻은 모든 지식, 사랑, 생명, 능력을 사용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믿음이 목격함으로 삼켜진 바 되고 사랑의 법이 영원히 성취될 때까지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속해서 전진하고 거룩한 사랑 안에서 매일매일 성장합시다!



      
      
      탕자의 이야기에 나오는 아버지는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겪게 될 실망과 

      거부감 그리고 학대를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큰 아들이 화를 내고 무정한 사람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아들에게 애정도 도움도 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생의 대부분을 기다림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작은 아들을 강제로 집으로 돌아오게 할 수도 없었으며 큰아들의 노함을 풀어 줄 수도 없었습니다 오직 두 아들 스스로 돌아오는 결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길고도 긴 기다림의 세월 동안 아버지는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여러번 죽기도 했습니다 그는 고통으로 눈물을 흘렸으며 공허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아들이 돌아올 때가 되었을 때 바로 그 공허함이 아들을 환영하는 장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와 같은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 옮긴 글 -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통합측, 극단적 신비주의운동 ‘도입 및 참여금지’ 결의
      97회 총회…“눈 돌린 일부 목회자와 교인들 있는 게 사실”
      2012년 09월 24일 (월) 00:09:34 전정희 gasuri48@amennews.com


      예장 통합측(총회장 손달익 목사)이 2012년 9월 17일~21일 서울 압구정동 소망교회에서 열린 제97회 총회에서 극단적이고 미신적인 신비주의 운동에 대해 “도입 및 참여금지”를 규정했다.

      이대위는 보고서에서 “최근 한국 교회에서는 직통계시·예언·환상·넘어짐·금가루 현상·금이빨 사건·입신 등 신비적인 현상을 체험하게 하거나 강조하는 집회가 유행하고 있는 사실”이라며 “이런 현상은 최근 한국교회가 성장을 멈추고 도리어 교인들이 감소하는 과정에서 일부 목회자들이 목회 성장에 대한 압력에 의해 도입되고 확산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통합측은 “우리 교단은 초창기부터 미신적인 신비주의 운동에 대해 엄히 경계하는 전통을 견지해 왔다”며 “우리 교단 소속 목회자와 교인들은 이런 미신적인 신비주의운동을 도입, 참여하는 것을 엄히 금해야 한다”는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이대위, 위원장 최기학 목사)의 보고를 그대로 받았다.

      한편, 통합측은 충남 금산군 진산면 석막리 지역에 위치한 대전노회 석막교회를 특별선교교회로 지정해 기독교복음선교회(JMS, 교주 정명석)의 대처사역에 힘쓰기로 했다.

      다음은 ‘극단적 신비주의’에 대한 통합측 연구보고서 전문이다.

      극단적 신비주의에 대한 연구보고서

      I. 연구 경위

      최근 한국교회 일각에서 극단적인 신비주의가 유행한다는 우려가 제기되어 본 이단대책위원회 전체 회의(제96-7차회의, 2012.5.17.)에서 연구하기로 결의하여 연구하게 되었다.

      II. 연구 보고

      1. 신비주의 운동의 배경

      최근 한국 교회에서는 직통계시, 예언, 환상, 넘어짐, 금가루 현상, 금이빨 사건, 입신 등 신비적인 현상을 체험하게 하거나 강조하는 집회가 유행하고 있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신비주의적 현상은 최근 한국교회가 성장을 멈추고 도리어 교인들이 감소하는 과정에서 일부 목회자들이 목회 성장에 대한 압력에 의해 도입되고 확산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런 신비주적인 집회에 참여하는 교인들의 경우, 경제적인 문제, 질병, 진학, 인간관계 등 자신들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는 욕구 때문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운동은 예언 및 치유사역 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이름으로 복잡다기하게 발전하고 있다.

      2. 신비주의 운동의 계시와 성경해석의 문제점

      대다수 신비주의 운동을 이끄는 인사들은 직통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인사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성경의 완전성을 무시하고 하나님이 오늘도 자신들에게 직접 계시를 주신다고 주장하여 자신들의 주장에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부여한다. 가령 신사도 운동의 주도자 피터 와그너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성경이 완성된 후에도 하나님 자신과 그 뜻을 나타내기를 중단하지 않으셨다”
      (피터와그너, 『신사도적 교회로의 변화』, 178.)

      물론 이러한 그의 견해는 요리 문답과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에 근거하고 있는 우리 교단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또한 신비주의 운동가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많은 성경구절들을 억지해석 하고 있다.

      3. 신비주의적인 집단에 대한 우리 교단의 역사적 지침들

      우리 교단은 초기부터 이용도의 극단적 신비주의 운동을 비롯하여, 천부교 박태선의 부흥 운동, 김기동의 귀신 축사론, 빈야드, 김계화의 할렐루야 기도원 운동, 토론토 공항교회, 등등은 모두 우리 교단에서 이단시 내지 엄히 경계되었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교단은 최근 변승우씨에 대한 이단 결정 등 극단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운동에 대해 엄히 경계하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따라서 현재 한국 교계 일각에서 일어나는 여러 미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현상에 대해 우리 목회자들이 참여하거나 도입하는 것은 우리 교단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아울러 이런 건전하지 못한 집회에 교인들이 참여하는 것을 엄히 경계하고 우리 교단의 건전한 신학에 따라 양육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금전만능주의의 횡행, 세속문화의 급속한 영향력 확대, 경제 성장으로 인한 여가와 스포츠의 유행, 출산율의 급격한 저하 등 목회에 대단히 어려운 환경이 대단히 빠른 속도로 조성되고 있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건전한 신학사상에 의해 이런 변화된 목회 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목회 경쟁력을 회복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III. 연구 결론

      우리 교단은 초창기부터 미신적인 신비주의 운동에 대해 엄히 경계하는 전통을 견지해 왔다. 이런 우리 교단의 전통은 계승 유지되어야 한다. 최근 들어 교회 성장의 둔화, 사회적인 불안의 확산, 세속적이고 오락 문화의 확산 등 어려운 목회 환경 때문에 이런 불건전한 신비적인 운동에 눈을 돌리는 일부 목회자와 교인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교단 소속 목회자와 교인들은 이런 미신적인 신비주의운동을 도입, 참여하는 것을 엄히 금해야 한다.

      IV. 참고 문헌

      피터 와그너, 『신사도적 교회로의 변화』, 서울: 쉐키나, 2008.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헌법』,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10.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종합 이단 사이비 연구보고집』,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1.

      출처: 교회와신앙


      혹 나 때문에 상처 입은 가슴을 안고,
      마음 쓰린 나날을 보내다가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되어있는 경우가 없는가?
      가시로 찌른 사람은 아프지 않다.
      찔린 자만 아플 뿐이다.
      사단은 찔러놓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쾌감을 느낀다.
      그것이 사단의 속성이다.
      사단의 노리개가 되어 다른 이를 상처 입혔다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 회개해야 한다.


      김기원 목사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 기도’에서

       

       

      이런 경우 형식적인 회개는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습니다.
      1대1로 잘못한 것은 1대1로 회개하면 되지만
      공개적으로 잘못한 것은 공개적으로 회개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손으로 넘어갑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서시기 전에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것이 진정한 회개이며 무서운 징계를 피하는 일입니다

      -새벽종소리

       

       

       

       

       

       

       

       


       


       


       


       


                작은 씨앗의 기도   

                                    최송연 
       
                 보잘 것 없는 영혼

                 작디작은 생명의 씨앗으로
                 당신 손안에 놓여 있습니다
       
                 내게 생명 주신 당신의 뜻을 따라
                 땅에 심기어 죽으라 하실 그때
                 불평하지 않고 죽어
                 새순으로 곱게 피어나기 소원합니다

                 촉촉한 습기 

                 따스한 햇살, 생명의 젖줄
                 맘껏 들이킬 수 있는 순간을 
                 게으름으로 놓쳐버리는 일이 없게 하시며

                 화려한 성장으로 빛난 순간엔 
                 성장을 거듭할 수 있도록
                 부족함 없이 공급해 주신 은총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하는 마음을 주시옵고

                 그 어느 한 순간에라도

                 내가 잘 나 성장하고 있노라
                 으쓱거리는 愚를 범하지 말게 하소서

                 내게 맺힐 열매가 단 한 개라도 있다면
                 그 열매는 오직
                 당신께 바치기 위한 것,

                 열매의 영광은 주인을 위해서만
                 존재의 가치가 부여되었음을
                 잠시도 잊지 않는 겸손함이 있기를.. 
                 
                 매서운 추위
                 눈보라 휘몰아치고 찬 서리 뒤덮여
                 마디마디 쓰리고 아픈 때에는
                 이것도 나에게 필요한
                 과정이려니 원망없이 순응하게 하시고

                 당신 창고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씨앗 된 사명을 잘 감당하다가
                 하나뿐인 목숨마저 사명으로 바치는

                 충성된 자리로 나를 이끄시옵소서

                
      나는

                 당신 손길 기다리는

                 한 톨의 작디작은 씨앗이오니...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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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어떻게 잃어버렸던

      형제 자매의 귀향을 환영할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로 뛰어 달려가서,

      끌어안고 키스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제일 좋은 옷으로 그들을 입히고,

      그들을 우리의 주빈으로 모심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제일 좋은 음식으로 대접하고 그들을 위한 파티에

      가족과 친구들을 초청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변명이나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오직 우리와 다시 함께 있는 데 대한 한량없는 기쁨을

      그들에게 보여 줌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15:20~24 참조)

       

      이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완전하신 사랑과 같이

      우리도 완전한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이란 자기만 옳다는 독선과 책망

      또는 호기심을 조금도 보이지 않고

      마음속으로부터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과거는 모두 지워져 버립니다
      자금 그리고 바로 이곳이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바로 이곳에서

      우리의 가슴을 꽉 채워 주는 것은

      우리의 형제 자매가

      집으로 돌아온 것에 대한 감사일 뿐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예수 아내가 언급되었다는 파피루스 조각과
      예수 가족묘 발견설, 그리고 예수의 인도 유학설>

      이글은 상당히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꽤 길지만, 여러분들이 숙독하시고 왜곡된 사실에 대해 정확히 알고 계시길 바랍니다. 글을 가급적 공유해주시고, 만일 공유가 안되면 퍼가주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인터넷 공간에 수 많은 잘못된 사실에 근거한 기독교 비판에 대해 제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최근 AD 4세기 경의 파피루스...

      한 조각이 해독되어 전 세계적 뉴스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예수가 "나의 아내"라는 말이 기록된 것으로 해독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본에 그런 기록이 나오기는 최초이기에 빅뉴스가 될 만 했죠.

      그래서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무려 예수님 이후 400년이나 지난 파피루스 사본, 손바닥보다 작은 한 조각에서 나온 이 증거로 다들 야단입니다.

      사실 학문적 입장에서는 사본학계의 이러한 발견, 즉 불과 조그만 하나의 파편에서 나온 단일한 증거라도 결정적일 수 있고 놀라운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AD 400년 짜리 파피루스에 등장하는 단편적인 예수의 모습을 신빙성 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연구 결과를 발표한 킹 박사도 물론 인정했지만요.

      이것이 또한 안티 기독교의 좋은 공격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저는 기독교의 잘못에 대해 철저히 인정해야 하나, 안티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자체를 궤멸시키려하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한 대응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어제 언론 보도를 보니 당장에 그 파피루스 조각은 현재 학계에서 진위 여부 논란에 휩싸여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 동안 수 차례 유물 사기범들에 의해 파피루스 조각들이 위조되곤 했습니다. 이 경우도 그 가능성이 일단 의심을 받고 있는 형편인 듯 합니다.

      그리고 그게 설사 진본이라 해도 학자들의 야단 법석이 사실 제겐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그들이 문제를 공정하게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페친인 김요한 목사님이 지적해주신대로, 신약성경 복음서들은 모두 100년 이전에 기록된 것입니다. 마가복음이 주후 65년경, 마태와 누가복음이 주후 70-75년경, 요한복음이 주후 85년경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 이후 400년이 지난 손바닥만한 파피루스 한 조각에서 발견된 "예수 아내" 운운한 한 단어가지고 떠들썩한데, 정작 학자들은 정작 예수 사후 (우리가 믿기에 또한 부활 후) 불과 30년에서 50년 지난 뒤 기록된 복음서 기록은 그리 신빙성있게 다루지 않습니다. 학자들마다 관점이 다르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불만스런 점이지요.

      앞서 말한대로 그들도 그 기록이 예수가 아내를 가졌다는 증거는 될 수는 없다고 한 발을 빼긴 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4세기 사본에 대한 열광적 반응은 대단히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 사본학계에서는 텍스트의 판독 사실만을 말할 뿐, 해석과 의미의 문제는 다루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의미의 논쟁은 그 다음 과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신빙성이 없는 4세기 사본의 어구 하나를 가지고 안티 기독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하게 될 엄청난 주장입니다. 즉, 이것을 근거로 예수는 결혼했다는 증거가 또 하나 나타났다는 주장이 난무할 것입니다. 이 글은 일차로 이것을 반박하기 위한 글입니다.

      사실 예수의 결혼설은 느닷없는 주장은 아닙니다. 이게 역사가 상당히 오래되었는데, 이미 초기 영지주의 이단 종파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아내였다는 몇 가지 암시들이 있다는 주장이 존재해왔지요. 그것이 기록된 문서로는 최초로 확인되었다고 말하는 겁니다.

      몇 년전에는 기독교를 당혹케 한 충격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1980년 경에 예루살렘의 어느 건축 현장에서 발견된 가족 묘가 예수 가족 무덤이라는 주장이 제기 된 것입니다. 그것을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디스커버리에서 다큐멘터리 3부작으로 제작해서 전 세계에 방영되었는데,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그 가족묘에서 10개의 유골함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 <요셉의 아들 예수>,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라고 주장되는 <미리암네>, <마태>, <요세> 그리고 <예수의 아들 유다> 라고 기록된 것들이 있어 세상을 놀라게 한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와 미리암네는 DNA 분석 결과 모계적 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왔기에 부부가 확실하며 따라서 예수는 결혼을 해서 <예수의 아들 유다>의 유골함을 근거로 유다라는 아들까지 낳았다고 주장합니다.

      제작진들은 엄청나게 그럴듯한 논리과 과학적 데이타와 통계를 사용해서 그것이 예수의 가족묘라고 100% 단정을 짓습니다. 이게 얼마나 교묘한지 그 다큐를 본 사람은 도저히 믿지 않을 수 없게 끔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게 책으로도 나왔는데, 최근 계속 오발탄을 쏘며 일단 사라지셨으나, 한국에서 최고 머리 좋은 사람의 하나라는 강용석 전 의원, 그분의 블러그에서 우연히 본 바, 강용석도 집사로서 신앙심이 나름 깊은데, 도저히 반박할 여지가 없다면서 이게 사실이면 자신의 신앙은 뭐가될까 두려워 하는 걸 봤습니다. 그런데 그의 결론이 "에라 그냥 눈 찔끔 감고 덮어 두고 오늘로 잊어버리자" 이거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소위 예수 가족묘에 대한 다큐멘터리 자료들은 현재 인터넷 상에서 수많은 안티 기독교인들에 의해 기독교 공격 자료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은 수 많은 고고학자와 성서 학자들의 강력한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단행본 책들도 한 두권 나왔지만, 인터넷을 뒤져보셔도 유용한 자료가 많이 나옵니다.

      당장에 요셉, 마리아, 예수는 당시에 가장 흔한 이름들이었습니다. 주변 900기의 묘에서 71개의 "예수" 명패가 발견될 정도로 예수란 이름이 흔했고, 나아가 마리아는 네 명 중 한명의 이름이었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다른 묘에서도 똑같은 <예수의 아들 유다>가 발견되었습니다.

      미리암네라는 이름도 의견이 매우 분분합니다. 이 이름이 4세기 경의 또 다른 영지주의 문서인 "빌립행전"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다른 이름으로 나오기 때문에 미리암네는 막달라 마리아이며, 결국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서 함께 가족 묘에 안장되었다는 겁니다.

      "빌립행전"에서 미리암네가 막달라 마리아를 지칭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빌립행전은 매우 오랜 후대의 문서이고, 또한 학자들은 미리암네란 이름이 마리아의 예명으로 쓰인 것은 예수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를 구분하기 위한 매우 후대의 관행임을 지적합니다. 실제로 3-4세기 이후의 사본들에서 나타납니다. 이 경우 예수 당대의 미리암네는 막달라 마리아와 상관없는 다른 여인일 가능성이 커집니다.

      더불어 <미리암네>의 이름 뒤에는 '마라'라는 단어가 붙어 있는데 이것이 '지도자(Master)'로 해석될 수 있는 일반 단어인지 아니면 미리암네의 다른 이름, 즉 별칭인지 모호한 단어가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의 이름인지 한 사람에 대한 두 개의 이름인지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좀 더 알아봐야 겠지만, 제 생각엔 그 미리암네가 꼭 거기 있는 "요셉의 아들 예수"와 배우자란 법은 어딨습니까? 마태의 배우자일 수도, 요세의 배우자일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건 완전히 이건 의도적인 표본 선정인 겁니다.

      제작자들의 의도적 조작의 예를 한가지만 들면, 그 가족묘에 <요세>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제작자들은 요세가 신약에 나오는 예수의 형제 <요셉>이라고 단정짓고, 예수와 요셉이라는 이름을 가진 형제가 같은 무덤에 묻힐 확률을 계산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대중 기만술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만일 요세(요셉)도 요셉의 아들이었다면, 왜 그에게는 "요셉의 아들 요세"라고 하지 않았냐는 겁니다. 예수의 경우 "요셉의 아들 예수"라고 쓰였는데도 말입니다. 예수가 "요셉의 아들 예수"로 기록되었으면, 예수의 형제 유세도 "요셉의 아들 요세"로 기록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 요세는 바로 아버지 요셉을 지칭하는 것으로 봅니다. 이 경우 그들의 확률 산정 방식에 심각한 의도적인 조작과 과장이 있는 겁니다. 다른 팩트들도 의도적인 결론으로 끌어 가는 것이 학자들에 의해 상세히 지적되었습니다.

      또한 어느 날 <야보고의 유골함>이라고 주장된 물건이 예루살렘의 골동품 시장에 나타났는데, 다큐 제작자들은 그<야고보의 유골함>이 원래 가족 묘게 함께 안치되어 있었으나 예수 가족묘로 확증되면 곤란케 될 어떤 기독교인 탐사자가 고의적으로 훔쳐 없어졌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열개의 유골함 중 1개가 보관을 위한 이동 중에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 사라진 유골함 한 개가 예루살렘 시장거리에 나타난 야보고 유골함이라 주장하며 실제로 방사선 동위원소, 화학분석 등으로 다른 유골함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골동품 시장에 등장한 야고보의 유골함은 이스라엘 정부가 나서서 과학자들이 조사한 결과 가짜로 판명되었습니다. 이것은 신문에도 기사화되었지요 (연합신문 참조). 당시 이것이 엄청난 고고학적 이슈였기 때문에 2003년 6월 18일 이스라엘 정부가 직접 나서서 공식 발표를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정적으로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가족묘에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그들의 주장에 치명타입니다. 그것 뿐 아니라 예수의 형제로 알려진 시몬과 유다도 거기에 없습니다. 최소 두명으로 추측되는 자매들은 시집을 가서 다른 묘에 안치되었다해도 말이죠 (예수의 형제자매는 형제 4명, "그의 자매들"이 복수이므로 자매는 최소 2명으로 추측됨 - 마태 13:55-56).

      물론 그들은 시몬과 유다가 사망할 때 즈음에는 가족묘 관행이 없어졌다고 주장하지만, 이미 만들어져 있는 가족묘를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이상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 가족과 같은 이름이 함께 묻힐 확률 통계 계산법에 근거한 그들의 주장에 교묘한 인위적 조작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와 미리암네의 DNA 검사도 단 1회 되어진 것이며, 뼈의 미토콘드리아에서 시료를 채취했습니다. 미토콘드리아는 그 특징상 모계만을 판명해줍니다. 그 결과 모계 일치는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사실은 부계 일치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이 약점에 대해 함구합니다. 또한 다른 유골함들은 DNA 검사가 시행되지 않았기에 알 수 없습니다.

      추가적으로 마태는 성경에서는 예수의 한 식구가 아니라 제자였는데, 거기에 유골함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그들은 별다른 이유를 내놓지 못합니다. 당시 역시 흔한 이름이었고 예수 가족의 일원이 아니었던 마태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예수의 가족묘일 가능성은 0%가 되는 겁니다. 또한 그들은 나머지 세 개의 표본에 대해서도 의도적으로 침묵합니다.

      무엇보다 가족묘는 당시에 상당한 재력가들만이 가질 수 있었다는데, 예수 가족이 그만한 집안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회의적인 시각입니다. 게다가 당시 예수는 정치/종교 지도자들에게 반역자였습니다. 반역자와 그의 가족들이 그렇게 좋은 가족묘에 평안히 안치될 수 있었을지요.

      어쨌든 2007년 2월에 이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은 기자들 300명을 모아 놓고 지난 3년간 연구한 내용을 발표했는데, 세계적 쇼크를 일으킨 뉴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 즉각적으로 3월자 뉴욕타임즈는 그것이 흥미로운 주장이긴 하나 유수한 학자들의 반론을 실어 신빙성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터넷에도 이 자료가 나옵니다.

      그러나 안티 기독교인들은 그 다큐멘터리만 온 사방에 퍼트려 진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제작자들은 사실 일종의 장사꾼들입니다. 상업적 대빡을 목표로 의도적으로 대단히 흥미로운 결론을 내려놓고 작업을 한 것이고, 기자들을 불러 회견을 함으로써 세계적 흥행을 노린 것으로 의심됩니다. 뭐 3년을 이 일에 매달려 작업했으니, 본전은 뽑아야만 했겠죠.

      그리고 우리 입장에서 가장 큰 문제는 그 예수라는 이름의 유골에서 결정적으로 십자가 죽음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분명 로마에 의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역사적인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예수 사후 불과 30-40년 안에 쓰여진 복음서들은 당대에 가짜로 치부되어 예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사기꾼 집단으로 매도되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런 무엄한 조작된 가짜 복음서는 살아 남을 수가 없었겠지요.

      만일 복음서가 기독교측의 조작 문서로 의심되어 예수의 죽음을 믿기 어렵다면,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의 기록을 들여다 보면 됩니다. 그는 AD 50년 경에 태어나 110년 경에 죽은 예수 직후의 인물입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해 말합니다. "이 골치아픈 전염병과 같은 기독교는 본디오 빌라도가 극형에 처한 그리스도라는 자에게서 시작되었다."

      이 기록은 마치 우리가 일제 말기나 6.25 전쟁에 대해 기술하는 것만큼이나 가까운 역사 기록이니 100% 믿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기독교를 말살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진 로마 역사가 였습니다. 거짓을 기록할 이유가 없었지요. 즉, 예수는 십자가에서 처참히 죽은 겁니다. 그러나 그 예수 가족묘의 예수 시체에는 그런 십자가 처형의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예전에 예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피에르 프랑타르>란 사람이 나타났는데, 자신이 예수의 26대손이라고 한 겁니다. 신문에 크게 나왔고 역시 반-기독교의 공격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예수는 살아서 프랑스로 망명해서 그의 후손이 바로 프랑스의 메로빙조 왕조 가문이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계산해보니 한 대에 무려 73년이어야 26대 손이 되는 사기극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이 사기극이 1982년에 세계적 베스트 셀러까지 된 "성혈과 성배"라는 책에 고스란히 실려 사실인 양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우리나라 주요 신문에도 여러 번 소개될 정도였습니다.

      결국 수 많은 사람들이 진실인 것으로 받아들여, 지금까지도 기독교 공격용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빈치 코드도 이와 다를 바가 없는 호사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상업 소설일 뿐입니다.

      참고로 다빈치 코드의 저자는 자신의 소설이 완전히 픽션에 불과하므로 진위를 따지며 논쟁을 할 필요가 없다고 분명하게 언론에 밝힌 바 있습니다.

      심지어 피에르 프랑타르가 진짜 예수 후손이냐는 문제로 영국에서 재판이 열려 3년간이나 심리를 해서 결국 "성혈과 성배" 책 내용이 사실이라고 판결을 내렸다는 이야기도 떠 돌았습니다. 그런데 영국에서 이런 재판 자체가 열린 적이 없다고 합니다. 완전 어떤 사교 집단에서 기독교를 매도하기 위해 조작해 퍼뜨린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 자연사설에 두가지가 존재하게 됩니다. 하나는 프랑스로 망명가서 거기서 죽었다.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죽어 가족묘에 매장되었다. 그럼 양쪽이 한번 대판 싸워서 결판을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둘 다 허황된 추리소설 급 주장입니다.

      또 한 가지 회자되는 거짓 주장이 있습니다. 이건 예수의 결혼설과는 별개이긴 하지만, 역시 너무 중요한 왜곡입니다. 예수님이 13세때 인도로 가서 불교 수행을 30세까지 하고 유대로 돌아왔다는 주장입니다. 그것을 추적한 다큐멘터리도 또한 존재합니다.

      실제로 티벳 불교계에 오래도록 내려온 전승인 <이사전>에 예수와 비슷한 이름인 "이사"가 나타나고 전래되어 내려온 그의 행적도 예수와 비슷하다는 겁니다.

      또한 많은 불교의 가르침이 복음서의 예수님의 가르침과 흡사하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비유도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이 불제자였다는 주장, 불교 우월론을 주장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가 티벳 라마불교의 진언(眞言), "엘리엘리 라마 삼약 삼보리 다라니"(Eli Eli Lama Sammach Sam Bori Daranii, '성자시여 위대한 바른 지혜로 드러내주소서'에서 기원했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가 지구상의 그 어떤 언어도 아닌 수수께끼로서 해독이 안되는 언어인데, 그 이유가 바로 그 라마 불교의 진언에서 변형되어 온 것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결국 예수는 마지막 죽음 때 열반에 들어가며 그 불교 주문을 외웠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사전>이라는 경전은 실체가 드러난 적이 없는 완전한 사기극으로 종료되었습니다. 결코 존재하지도 않은 문건이었는데, 러시아의 어떤 사기꾼 학자 두명에 의해 유럽에 널리 퍼졌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완전 이건 황당한 UFO 목격담 수준의 소설을 쓴 겁니다. 아래 사이트에 모든 사실이 적나라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http://commsys.tistory.com/entry/예수는-불제자였다-1

      이 사이트에보면 복음서가 불경을 베꼈다는 주장도 정말 어처구니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로 너무나 악의적인 조작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네루 수상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과학적 사고를 지닌 사람으로 기독교를 증오했지만, 자신이 쓴 "세계사 편력"에서 그런 루머들에 대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거짓이라고 명확한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이 이토록 중요한 것이라면, 왜 종교, 신학계에서는 거론 조차 안되는 걸까요? 마치 그레이엄 핸콕의 <신의 지문>이란 책이 1권에서 대단히 그럴 듯하게 나가다 2권에서 인류 문명의 화성 기원론으로 황당 SF 소설로 빠지는 것과 똑같습니다. 학계에서는 누구도 그레이엄 핸콕의 저서에 학술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제 1권의 몇 가지는 그럴 듯 하지만 말이죠.

      고래로부터 책 팔아먹기 위해 저런 일을 하는 사람이 존재해왔고, 지금도 대중을 대상으로 혹세무민하는 저런 류의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곤 합니다.

      이런 주장들은 몇 가지 기본적 사실만 알고 있으면, 너무나 어처구니 없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선 히브리어와 셈어를 나름 공부한 입장에서 볼 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두말할 것도 없이 명확한 아람어입니다. 무슨 해독이 안되는 수수께끼가 아니라, 성경에 나온 대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최근 제가 찾아낸 놀라운 사실은 그 티벳 교의 진언(眞言)으로 주장된 "엘리엘리 라마 삼약 삼보리 다라니"(Eli Eli Lama Sammach Sam Bori Daranii)는 "아누타라-삼먁-삼보디 (an-uttara-samyak-sambodhi)" (뜻: 비길데 없는 최고의 바른 깨달음)의 악의적인 조작이라는 것입니다.

      증산도 안경전 씨의 "다이제스트 개벽"이라는 책에서 최초로 그 진언이 등장하는데, 그 이전 어디에도 그런 진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건 예수의 마지막 외침을 티벳 불교도의 주문으로 만들어 놓기 위한 악의적인 고의적 조작이었던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최광민 씨라는 블로그를 찾아가보십시오. 그 분은 너무나 정확한 근거로 그 거짓과 조작을 찾아냈습니다. 심지어 그분은 티벳의 승려에게서 직접 사실 확인을 했습니다. 이것이 존재하지도 않은 진언이라는 걸 말이죠. 이분의 검증 작업에 저도 정말 너무 놀랬습니다.

      http://kwangmin.blogspot.com/2011/09/blog-post_14.html

      또한 결정적으로 이것이 단번에 거짓말인 이유는 앞서 잠깐 언급한대로 티벳 불교가 주후 600년 경에야 티벳에 도입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티벳 사원의 고문서들이 존재한다면 모두 한참 후대의 것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티벳 사원에 있지도 않은 <이사전>이 경전이 러시아의 사기꾼 과학자 호사가 노토비치와 그의 제자에 의해 유럽에 책으로 소개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래 전에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그곳을 직접 방문한 동양학 박사 독일 학자들 (Marx Muller와 Archibald Douglas)에 의해 <이사전>의 실체도 <이사>란 존재도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으로 결론 났고 따라서 그 뒤로 노도비치와 그의 제자는 완전한 거짓말쟁이로 비난받으며 대다수 학자들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위키 백과 사전 참고 - 출처까지 있음).

      그리고 설사 그런 것이 있다해도 저는 완전히 다른 해석을 합니다. 만일 그런게 존재한다면, 이미 AD 600년에 유래된 티벳의 라마 불교에 간직되어 있는 것이므로 그것은 오히려 예수 이야기가 전래된 결과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의 복음이 티벳을 비롯 인도 북부에 들어가서 예수의 이야기가 매우 이른 시기부터 전래되어 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 가장 초기부터 티벳에까지 복음이 들어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인도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고 순교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인도에 가면 도마의 행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고 하더군요. 물론 이것도 다 믿기는 어렵습니다. 상업적 목적으로 유적들이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도마가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순교했다는 상당한 증거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일찌기 복음이 들어갔으니, 티벳에서 예수에 대한 전승이 내려오다가 주후 600년 티벳 불교의 태동과 더불어 불교의 가르침과 예수 전승이 뒤섞인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 이야기는 인도의 불교와도 섞인 것으로 보이고, 또한 기독교의 분파인 네스토리우스 기독교가 일찌기 중국에 경교라는 이름으로 전해졌고, 그것이 신라에 까지 전파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징기스칸의 몽골 민족도 대거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를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또한 예수의 인도 유학설이 얼마나 황당한지는 결정적으로 유대/히브리 사상과 불교 사상은 세계관의 출발점 부터가 다르다는 점에 있습니다.

      당장에 유일신과 무신론의 입장으로 나뉩니다. 또한 불교는 순환적 시간관과 세계관 (윤회)이나, 히브리 사상은 직선적 시간관과 세계관 (태초와 종말)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이렇듯 두 종교는 아예 출발부터 다른 완전히 이질적인 사상입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후자에 속합니다. 즉, 예수의 가르침은 태초를 말하며, 또한 끝날, 곧 준엄한 마지막 날의 심판을 강렬히 가르쳤습니다. 완벽하게 히브리 사상입니다. 18년을 인도에서 불교를 배운 사람이 어떻게 이런 주장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영원한 순환적 시간과 윤회설의 흔적이라도 보여야지요. 대신 예수는 태초와 창조를 이야기하고, 시종일관 마지막 날의 심판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그러니 이 예수를 인도 불교의 수행자였느니, 혹은 정면으로 모순되게 600년 뒤에나 생긴 티벳 불교의 유학파로서 불제자였느니 어쩌느니 하는 주장은 정말 완전히 어거지요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예수는 예수고 석가는 석가였을 뿐입니다. 종교의 특성상 가르침의 공통점은 존재할 수 있으나, 두 분은 전혀 다른 세계관에 의한 전혀 다른 가르침을 설파 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참고로 제 페친들 중에 비그리스도인들도 있어서 말씀드리는데, 저는 타종교를 받아들이지는 않으나 전적으로 존중합니다. 광적이고 공격적인 배타성을 보이는 기독교 신자들에 대해서는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기독교에 대해 완전히 조작되고 왜곡된 사실을 가지고 공격하고 매도하거나 자신의 종교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일은 중단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토록 비판하는 광적인 패권적 기독교인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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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처 없는 독수리는 없다 날개를 크게 다친 독수리 한 마리가 벼랑 위에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는 몇 번이나 하늘 높이 날아 오르려고 했으나 다친 날개로는 도저히 하늘 높이 날 수가 없었습니다. "독수리가 하늘 높이 날 수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거야." 그는 날기를 포기하고 지난 날을 생각했습니다. 태어나자 마자 형제들을 벼랑아래로 떨어뜨리던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넌 위대한 독수리가 될 자격이 있다!" 형제들 가운데서 살아 남자 그에게 뺨을 비비며 기뻐하던 아버지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보다 더 이상 위대한 독수리로 살아 갈 수 없게 된 상처의 아픔이 더 컸습니다. "나는 평범한 새가 아니야, 가장 높이 나는 새들의 왕이야, 그런데 이게 뭐야? 이제 가장 낮게 나는 새가 되어버렸어.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그는 벼랑 아래를 오랫동안 내려다 보았습니다. 벼랑아래는 죽은 독수리의 뼈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 속에는 아버지의 뼈도 쌓여 있었습니다. "독수리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은 이 방법 밖에 없어!" 그는 아버지를 떠 올리며 벼랑아래로 뛰어 내리려고 몸을 잔뜩 웅크렸습니다. 순간 어디선가 대장 독수리가 쏜살같이 하늘에서 내려와 "잠깐!" 하고 소리쳤습니다. "형제여, 왜 자살을 하려고 하는 가?" 대장 독수리가 그를 가로막고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니? 왜 그런 생각을 다 하는가?" "저는 더 이상 높이 날 수 가 없습니다. 독수리의 명예를 잃게 되었습니다." 대장 독수리는 한참 동안 그를 말없이 바라 보았습니다. 그러고는 그를 향해 날개를 활짝 폈습니다. 그이 몸에 여기저기 상처 자국이 나 있었습니다. 솔가지에 찢긴 자국, 다른 독수리에게 할퀸 자국 등 수 많은 상흔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나를 봐라, 내 온 몸도 이렇게 상처투성이 란다, 상처 없는 독수리가 어디 있겠니?" 자살하려고 했던 독수리는 대장 독수리의 말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러자 대장 독수리가 조용히 말을 이어 나갔습니다. "이건 겉으로 드러난 상처일 뿐이다. 내 마음의 상처는 이 보다 더 하다. 일어나 날아 보자. 상처없는 독수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자 마자 죽어버린 독수리 뿐이다." -옮긴 글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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