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도 있는 복음의 위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5:3)

 

 

사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고난과 인간이 휘두르는 폭력으로 인해 당하는 핍박은 서로 다르다. 하나님의 손은 공의롭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범한 죄책은 우리 영혼을 그리 유쾌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질병이나 친구의 죽음이나 그밖에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섭리로부터 오는 고난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시련일 뿐이다. 이와 같은 고난을 당할 때는 슬픈 울음이나 겸허함 뿐만 아니라 거룩한 용기와 확신을 가져야 한다. “네가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5:22)

 

믿음은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어야 한다. 받는 이로 하여금 현재의 모든 사건들을 이겨내도록 해 주는 것이 믿음의 참된 역할이다. 심지어 우리의 고난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닐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신다. 그러므로 일상적으로 당하는 시련 속에서도 즐거워하고 기뻐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받는 고난이 아닌한 그들의 슬픔에 무관심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런 생각은 커다란 오류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복음의 위로라는 것도 오직 순교의 경우에만 해당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일상적인 고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우리 자신의 연단과 인내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즐거워 할 수 있다. 

 

- 토마스 맨튼,야고보중에서

 

 

출처: 류호준 교수의 무지개 성서교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謹賀新年 

 

하루를 지내고 나면 더 즐거운 하루가 오고 사람을 만나고 나면 더 따스한 마음으로 생각하고 좋은 일이 생기면 더 행복한 일을 만들 수 있는 아름다운 새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希望찬 새아침에 健康과 幸運을 祈願하오며 새해에도 변함없는 聲援을

부탁드려요.^^ 주 안에서 새해 福많이 받으십시오.

 >>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푸슈킨, 시를 써서 물오리에게 읽어준다  (2) 2014.02.11
꽃샘추위/최송연  (0) 2014.02.11
깨달음이란...  (0) 2014.01.12
근하 신년- 2014  (2) 2013.12.31
네 자신을 위하여...  (0) 2013.11.09

동정녀 탄생이 가능합니까?

2014/01/30 (목)

오래 전부터 무신론신자들은 기독교를 공격할 때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주된 목표로 삼아왔습니다. 남자와 관계하지 않은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이 생물학적 상식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직접개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기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 믿음의 기초가 되는 동정녀 탄생을 공격해서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신론자들이 동정녀 탄생을 부정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동정녀 탄생을 사실로 믿지 않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일부 자유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동정녀 탄생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예수님의 성육신이나 예수님 탄생의 영적인 의미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서 꼭 지켜야 할 중요한 신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동정녀 탄생이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제자들이 만들어낸 신화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정녀 탄생이 비록 성경에 크게 강조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일관된 구원 계획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어야 하는 중요한 신앙중의 하나입니다. 인간이 죄를 범하자, 하나님은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에 저주를 내리시고 나서 바로, 구원자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뱀, 사탄)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 3:15).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뱀으로 위장한 사탄을 저주하시며, 장차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 사탄에게 치명상을 입힐 것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사탄을 무찌를 구원자는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 될 것임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남자의 후손이라고 인식되어 있지만, 특히 이스라엘은 가부장적 가족제도가 강한 사회인데 “여자의 후손”이라고 명시되어 있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예언은 한참 지난 후, 이사야서 7:14에서 더욱 분명히 밝혀집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구절에서 “처녀(virgin)”는 성경 전체의 문맥을 살펴볼 때, 창세기 3:15에 예언된 바로 그 “여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아기의 탄생은 흔히 일반적으로 태어나는 아기와는 다른 특별한 방법으로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 친히” 잉태하게 하신 초자연적 기적임을 알리는 “징조(sign)”가 될 것이며, 그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세상 속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Immanuel)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요한복음(1:1, 14)에서는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고 하셨는데, 이 구절도 예언된 “임마누엘”을 의미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으로 오시는데 있어서, 만약 보통 인간이 태어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태어나셨다면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반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장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라는 식으로 계속되는 예수님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두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는데 비해서, 유달리 예수님의 경우만은 요셉을 단지 마리아의 남편이라고만 소개하고,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나신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은 요셉과 관계없는 동정녀 탄생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 1:16)  

마태복음 1:23에서도 이사야서 7:14의 예언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알리고 있고, 이사야서 9:6-7에서는 우리에게 태어나는 한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가서 5:2에서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구원자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과, 그의 근본은 탄생 이전에 이미 "태초"부터 존재하셨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 상으로는, 동정녀 탄생을 믿지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전체가 일관성 있게 동정녀를 통해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인류구원을 위한 대속(代贖, redemption)사역의 성격과도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흠 없는 속죄양이 되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시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먼저 죄가 없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의 본성을 유전 받지 않기 위해서, 생물학적인 자연법칙을 따르지 않고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태어나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동정녀 탄생을 믿지 못하는 것은 결국 창조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창조주 하나님께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시고 모든 동, 식물들과 인간을 창조하신 사실을 믿는다면, 처녀의 몸을 빌려서 아기 예수님을 태어나게 하신 사실을 왜 믿을 수 없겠습니까?

박창성 목사(세계창조선교회 회장)
ⓒ 뉴스파워/ USA 아멘넷


 

 

 

 새해 새 아침의 내 기도
                   최송연

주님,
이 새해 새 아침에…
당신의 영을 내게 부어주소서
 
주의 순백한 영으로
내 삶에 순수성을 잃지 않고
날마다 영원을 향해 피어나는
새순(筍)이기 원합니다
 
흐르는 세월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갉아 병들게 하고
  
숨겨진 죄악은
마음에 느껴지는 모든 것을
시꺼멓게 더럽힐 수 있습니다
 
미움과 증오는
인생이 가꾸어야 할 초원을 
 바싹 마른 검불로 태워 사위고
 
매서운 역경의 된서리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할 수 있습니다
 
 살아가는 날 동안 
쉽게 낙담하는 연약함에서 벗어나
조금 더 강해지는 것은 좋으나
당신의 도움없이도 잘 할 수 있다
 스스로 하늘을 향해 자고하지 않게 하시며
 
사람을 사랑하되
그 영혼을 사랑하게 하시고
한 점 죄악도 가슴에 숨겨두지 않도록
분초마다 내 안과 밖을 살피시사
견인(牽引)해 주시기를
그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그리하시옵소서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
(살전 5: 23-24)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을 기다리는 마음  (0) 2014.02.15
눈물보다 귀한 사랑/최송연  (0) 2014.02.03
은몽(恩夢)  (0) 2014.01.27
나는 압니다  (0) 2014.01.24
그대 가슴에...  (3) 2014.01.17

Ⅲ. 모든 질병이 귀신에서 온다는 말의 오류
 김씨는 귀신의 사역을 다섯 가지로 지적했다(마귀론 하, pp.170-174). 귀신은 모든 병의 원인이요, 모든 사고의 원인이요, 모든 중독의 원인이요, 모든 범죄의 원인이요, 모든 자살의 원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모든 병의 원인이라고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질병은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운동에 의해서만 고침을 받는다고 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한마디로 김씨는 모든 질병의 원인을 귀신이라고 단정하는데 더욱이 예외도 없는 진리로 본다. 한의학 6,000년, 양의학 3,000년에 병의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모든 병의 원인은 귀신에게서 온다고 주장한다. 즉 어떤 사람이 벙어리 되고 귀 먹는 것은(막 9:25) 그 사람이 벙어리 되고 귀 먹는 것이 아니라 벙어리 되고 귀 먹은 귀신이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자체가 병든 것이 아니라 귀신 자체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김씨는 모든 질병이 귀신에게서 온다는 주장을 할 뿐 아니라 의학이나 약으로는 어떤 질병도 고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연스런 논리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예컨대 병이 과로로 생겼다고 볼 때 자연히 과로를 피하면 병이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귀신에게서 온다고 볼 때 오직 귀신을 쫓아내야만 병이 물러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의학이나 약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은 귀신이 약에 의해 쫓겨날 수 있다는 말이 되어 버리니 그렇게 주장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약은 병을 고치지 못한다. 병을 첨가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저항력있는 병균을 투입함으로써 병의 단위를 높여 줄 뿐이다. 제약회사는 인류의 보건과 생명을 위하여 고심하면서 새로운 발견이 있을 때마다 크게 공헌한다. 그리고 학계는 물론이려니와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푸짐하게 받는다.

 그러나 얼마가서는 그 공헌한 바가 무색케 되고 투약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하고 자기들이 양식시킨 병균으로부터 도전을 받아야 한다. 주기적으로 되풀이 되어야 하는 이러한 방식이 제약회사를 성장시켜 갈 수 있을 것이다. 날이 갈수록 제약회사들은 늘어가고 비대해 가는 동안 사람들의 신체는 마치 각 제약회사들의 경쟁하는 실험장같이 어처구니 없이 낡아져 가고 있는 것이다. 병이 사라져 간 것이 아니다. 병균의 단위는 투약 때마다 올라간다. 마치 약은 사람 몸에 먼저 들어가 있는 선배균을 죽이고 대신 자신이 군림하는 것이다. 제약회사의 난립은 인류에겐 희소식 같은 예방공해라고 보아 과언이 아니다"(풀빛목회 86, 1·2. p.57).

 오히려 약은 귀신으로 낮은 단위의 병균을 포기하고 대신 높은 단위의 새로운 병균을 확보하게 할 뿐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약의 투약이나 의술의 사용을 전혀 부정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의심스럽다. 귀신이 만든 질병을 치료하는데 약이나 의술을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남겨두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 점에 대해 직접 들어보자.

 "그러나 투입한 먼저 병균을 이긴 저항력있는 균이 후에 때에 맞추어 발병하게 되면 전보다 더 큰 병고를 치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은 병의 원인이 되어 병균을 생산 파송하는 귀신을 제거함으로써 깨끗하게 한다. 어떤 병은 대수술을 치른 후에도 재발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도 마찬가지의 경우이다. 귀신이 그 몸에 잠재되어 있는 한은 병은 계속 재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방법이 있다. 귀신을 추방한 후에 수술하는 방법, 수술즉시 추방하는 방법이다. 귀신을 추방한 후에 잠재한 병균을 멸하기 위한 투약 방법과 투약 직후 귀신을 추방하는 방법은 무리는 아니다. 귀신이 사람의 몸에서 떠난 다음에는 균만으로써는 인체 내에서 스스로 견디기가 힘들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병균은 모두 사멸되고 만다"(Ibid., p.57).

 김씨는 죄와 병은 불가분리로 생각한다.
 "죄는 보이지 않는 병이요, 병은 보이는 죄악입니다. 이것을 철저한 신앙관으로 삼아야 합니다. 몸이 상할 때 병을 짊어지셨고 죽으실 때 영혼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죄와 병은 구분시킬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다 해도 병이 있으니 죄가 있다는 말이요, 보이는 병은 내게 죄악이 있다는 말입니다"(T.P.46-1).

 모든 질병은 귀신에게서 왔다는 말과 그러기에 의약은 질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김씨의 이론은 그의 귀신론의 자연스런 결론일 수밖에 없지만 이 이론이 상식적인 수준에서 일반인에게 이해가 안될 뿐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이론으로 보이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일단 하나의 전제를 해 놓고 반증을 하기로 하자. 틀림없이 질병의 일부는 귀신에 의한 것임을 성경이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모든 질병이 귀신 때문이라는 이론가 더욱이 의약은 질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말이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이다.

 비판해 보자.
 첫째, 김씨의 행동에 모순이 있다. 모든 질병은 귀신에 의한 것이니 자연히 축사로만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이론은 논리적인 필연적 결과이다. 그런데 1984년 7월에 서울 기독병원(전 베데스다 병원)을 김목사 동생 김호동 목사를 인수했다가 10억이나 되는 손해만 보고 84년 11월에 손을 떼게 되었는데(현대종교 86, 3, pp.78-79) 그 사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교리적인 타당성을 묻는 것이지 윤리적인 약점을 묻는 것은 아니다. 약은 병을 더 심하게 할 뿐인데 무엇 때문에 병원을 인수했었는지 이해가 안된다. 혹시 김목사 마음 속에도 모든 질병이 귀신에게서 온다는 표면적 주장과 내면적 생각은 다른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둘째, 모든 질병이 귀신 때문이라면 귀신은 우리의 구원문제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게 된다. 김씨의 말에 의하면 신자도 귀신에 들릴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1985년 11월 18, 19일에 한국기독교백주년기념관에서 한 강연에 의하면 성락교인도 중에 병원에 입원한 작 하나도 없다고 자랑하는 것을 보았다. 과연 성락교회 교인 중 병원에서 치료받은 사람이 단 한명도 없는 것인가?

 신자도 병이 들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신자가 귀신에 들려 질병에 사로 잡혀 있으면 구원을 받는냐 받지 못하느냐는 질문이 생기게 된다. 여기에 대해 직접 언급한 부분은 본 일이 없으나 그의 논리적 결과로는 구원은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도 바울마저도 지옥에 가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7에서 육체의 가시 즉 사탄의 사자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데 평생 그 가시(육체의 질병 즉 사탄의 사자)를 가지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씨도 아마 질병에 걸릴 것이다. 김씨를 모함하는 자의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간이 나쁘다는 소문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그의 말처럼 죄는 보이지 않는 병이요, 병은 보이는 죄악이라면 모든 죄인은 병이 들 것이요 김씨도 죄인임에 틀림없으니 김씨도 병에 들 수밖에 없다고 고백해야 정직할 것이다.

 디모데전서 5:23에 바울이 디모데에게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는 말에 대하여 김씨는 바울이 모든 것을 안다고 결론할 수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풀빛목회 1986, 1·2. p.56). 즉 바울의 지식을 불완전한 것으로 해석했다. 바울이 적어도 귀신에 의한 질병의 요인을 모르고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하였다는 말이 기독교 정통신학에서 타당한 말일 수 있는가?

 이미 앞서 계시론에서 밝혔지만 바울서신은  가감할 수 있는 성서라고 한 점을 볼 때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주장이다. 이 디모데전서 5:23의 해석과 같이 바울을 격하시켜 바울은 병들 수 있어도 김씨는 병들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않는다면 김씨도 병들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그러면서도 수술(의학)을 질병치료의 하나의 방법론으로 인정하는 점이 더욱 모순된다. 김목사의 말에 의하면 일단 귀신이 몸 속에서 병균을 부리는 것처럼 되어있다. 병균과 귀신은 다르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귀신없이 병균만으로서는 인체 내에서 스스로 견디기 힘들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병균은 모두 사멸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세운 방법론이란 이런 것이다.

 "귀신을 추방한 후에 수술하는 방법, 수술 즉시 추방하는 방법이다. 귀신을 추방한 후에 잠재한 병균을 멸하기 위한 투약방법과 투약 직후 귀신을 추방하는 방법은 무리가 아니다."
 이 말은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말을 하게 된 저의가 베데스다 병원 인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한 통로를 만드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후에 다시 병원을 인수한다거나 병원을 건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그의 교리적 결론은 역시 수술이나 투약만으로는 질병을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수술 후에 귀신을 추방하는 방법이나 귀신을 추방한 후 수술을 하는 방법이란 모순 중에 모순이다. 귀신을 쫓는 축사현상 앞에 수술이나 투약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귀신만 사라지면 병균 혼자서 인체에 있을 수 없고 시간만 지나면 병균이 사라진다고 했지 않은가? 그것도 수술 가능성이나 투약의 가능성이 있는 질병이 따로 있다고 억지로 끼워 맞추면 김씨의 이론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의 경우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이론이 아닌가?

 왜 이같은 비논리적이고 필자가 보기에 부정직한 이론을 전개하고 있는가?
 이 점에 대해 구체적인 예를 들면 들수록 더욱 그러하다. 의약으로 고칠 수 있는 확실한 병의 경우 의약으로만 치료하려는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를 설명할 길이 없고, 불치병의 경우 축사와 의약의 균형 있는 치료와 그 타당성을 설명할 길이 없게 된다.

 넷째, 모든 질병이 귀신으로부터 기인된다고 보는 것은 모든 역사를 귀신이 역사로 볼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에게는 무지도 있을 수 있고 실수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질병 이전의 그 실수나 무식마저도 귀신이 주장한다는 말이 되어 버린다.

 김씨는 성도가 믿음을 지속시키는 것만이 귀신을 이길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믿음 안에 있는 성도도 생활 속의 실수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예컨데 수렁에 빠질 수도 있고 넘어져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 이상으로 귀신이 섭리를 인정해야 된다. 그렇게 될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마저도 귀신에 대한 공포 속에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귀신의 주권이 서로 대등한 것처럼 인식되지 않는가?
 다섯째, 귀신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 모호하다. 질병의 원인도 불행의 원인도 귀신이다. 축사 시에도 귀신과 대화하는 것으로서 환자의 의지는 배제하고 있다. 인간의 책임이 무엇인가?

Ⅳ. 미혹의 영에 대한 오류
 서론에서 간단히 밝혔지만 먼저 미혹의 영에 대해 분명히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다. 마귀론 중권은 그 부제가 미혹의 영이듯이 미혹의 영에 대해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그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 번호를 붙여 간결하게 설명해 보겠다.

 ①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수호하는 천사를 파송했다(마귀론 상, p.137).
 ② 이 천사가 가변되는 것을 미혹의 영이라 한다(Ibid., p.138).-가변된다는 말은 선한 천사가 변하여 악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③ 그런데 귀신이 우리 몸에 들어올 때 단독으로는 들어올 수 없고 반드시 미혹의 영의 도움으로만 들어온다(마귀론 하, p.54 이하)
 ④ 그래서 성경에 유혹이란 말은 모두 미혹의 영이란 뜻이다(마귀론 상, p.137, 중 p.64).

 ⑤ 이 가변된 천사, 미혹의 영은 한번 가변되면 절대로 다시 환원될 수 없으며(마귀론 하, p.61),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고 우리 주변에 따라 다린다(마귀론 상, p.142).
 ⑥ 이 미혹의 영이 인간의 인격을 지배한다(마귀론 중, p.70).
 ⑦ 그런데 능력있게 살려면 가변된 천사의 수보다(미혹의 영의 수보다) 천사의 수가 많아야 하며(마귀론 상, p.141), 천사가 가변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마귀론 중, p.74).
 ⑧ 천사가 가변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요, 좁게 세 가지가 된다. 첫째는 천사가 자기 우두머리를 따라 같이 가변되는 경우요, 둘째는 하나님에 의해 가변되는 경우이다(마귀론 상, p.137).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변시키는 경우는 둘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하나님께 과잉충성 할 때와(마귀론 하, p.61)둘째, 성도가 불의할 때 성도의 불의를 따라서 가변된다(마귀론 상, p.137).
 ⑨ 그가 가변된 천사를 위해 사용되는 성구들은 다음과 같다: 삼상 16:14, 19:23, 왕상 22:19, 사 66:3, 4, 겔 14:9, 살후 2:11, 12, 롬 1:28(마귀론 중, pp.62-67). 그런데 마귀론 상권(p. 137)에서는 위 성구 중 3개만 들었다 : 왕상 22:19-23, 사 66:4, 5, 겔 14:9, 10.

 비판해 보자.
 제일 먼저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천사문제를 살펴보자. 그가 인간을 섬기라고 보낸 천사가 신자에게만 주어졌는지 불신자에게도 주어졌는지 분명하지가 않다. 그가 "인간들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사람들에게 천사가 배치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할 때는(마귀론 중, p.59) 불신자도 포함되는 것 같은데, 곧 천사를 가리켜 성도를 섬기라고 보냄을 받은 자들이라고 한 것을 볼 때(Ibid., p.59)는 불신자는 제외되어 있다.

 더욱이 마귀론 상권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은 천사가 없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p.130). 여기에서 모순이 생긴다. 우선 태어날 때에 천사가 배치되었다는 말은 분명 잘못된 말이다. "태어 날때"를 "예수를 믿을 때"로 바꾸든지 "예정된 사람들에게는"이란 말을 첨가하든지 해야 할 것이다.

 분명 김씨는 불신자는 천사가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더 큰 모순이 생긴다. 불신자의 질병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질병은 귀신이 일으키고, 귀신은 인격이 아닌 항구적 존재인 사후의 영일 뿐이니 반드시 미혹의 영의 도움으로만 우리 몸에 들어온다고 했다.
 그러면 어떻게 인격이 아닌 항구적 존재인 사후의 영이 불신자의 몸에 들어갈 수 있는가? 불신자에게는 천사가 없으니 가변된 천사, 즉 미혹의 영도 없을 것이요, 미혹이 영도 없으니 불신자에게는 귀신도 못들어 올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는 분명히 자기모순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 점은 그가 미혹의 영에 대하여 든 성구 중에 로마서 1:28에서도 잘 나타난다(마귀론 중, pp.66-67). 인간으로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어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돕는 천사로 가변시켜 유혹으로 역사하는 것을 가르친다고 하였다(Ibid., p.67).

 그런데 이 로마서 1장은 신자에 대한 말이 아니다. 불신자에 대한 말이라는 점이다. 또한 천사가 없는 불신자의 성격형성은 무엇으로 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격형성은 오직 천사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의 아홉가지 미혹의 영에 대한 설명은 모두 가설에 불과하며 그것도 거짓된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대해 그가 제시한 성구들에 대해서만 변증하겠다.

 그가 제시한 사무엘상 16:14과 19:23은 모두 사울왕에 대한 것이다. 16:14의 말씀은 이렇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19:23의 말씀은 이렇다.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14절에서 "여호와의 신"은 사울이 타락하기 전, 즉 천사가 가변된 후라고 한다(마귀론 중, p.62).

 23절에서 "하나님의 신"이 가변된 천사 미혹의 영이라고 한다. 그 스스로의 모순점 들을 살펴보자. 김씨는 마귀론 하권에서는 사울왕은 구원받지 못한 인간으로 보았다(p.143). 즉 자살한(삼상 31:4) 시체는 저주받아 더럽게 처리된(삼상 31:7-13) 자로서 사울이라고 한다. 김씨의 말에 의하면 사울은 죽어서 결코 사무엘처럼 될 수 없고 즉 귀신이 될 수밖에 없든지 아니면 무저갱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생긴다. 미혹의 영과 귀신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성도의 구원문제에도 그렇다. 미혹의 영이 있던 사울은 귀신을 초청하여 질병에 들었다는 말이 성경에 없다. 또한 미혹의 영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타락까지 하여 지옥에 갈 수도 있다는 말이 된다. 김씨는 천사의 인간의 육체에 못들어 간다고 하면서(마귀론 하, p.63) 또한 영에도 못들어 간다고 하면서 미혹의 영은 인간을 지옥에도 보내는가? 미혹의 영의 힘은 하나님의 구속의 권능보다 커져 버리고 말지 않는가?

 다음에는 열왕기상 22:19-23까지의 말씀이다. 본문의 "거짓 말하는 영"이 바로 가변된 천사, 미혹의 영이라 하는데 이 또한 선한 천사를 가변시켜 사용한다는 말은 전혀 없다. 에스겔 14:9, 10에서 선지자들의 마음이 변하고 인격이 변하면 하나님께서 유혹하시어(미혹의 영을 말함:필자 주) 그들의 영을 가변시킨다는 말은(마귀론 중, p.64) 이사야 66:3, 4에서 하나님께서 보실 때 가능하면 유혹으로 역사하시어(미혹의 영을 말함) 유혹을 택해 준다는 말도(Ibid., p.64)다 가변된 천사를 가리키는 내용이 전혀 아니다. 기타 그가 제시한 어떤 성구도 마찬가지다.

 결론적으로 김씨가 주장하는 미혹의 영에 대한 이론만큼 큰 이 시대의 미혹의 영이 없을 것이다.

Ⅴ. 인격에 대한 오류
 본 항은 인간론에서도 취급할 수 있는 항이지만 본 항에서 따로 취급하는 것은 모두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씨가 이 인격이란 말을 모호하게 사용하여 더욱 성도들을 혼돈케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 항에서도 간결한 이해를 돕기 위해 번호를 붙여 설명하겠다.

 ① 김씨는 인간의 영은 항구적 존재로 인격이 아니며 좁은 의미에서는 혼이 인격인데 실제로는 혼은 몸과 함께 인격이 된다고 한다(마귀론 상, p.80, 하, p.62).
 ② 그런데 인격의 주체인 몸이 죽을 때는 혼이 영에 잠재해 버리므로 항구적 인격이 된다(마귀론 상, p.83).
 ③ 그러면서도 사람의 몸이 없어지면 인격이 나타날 수 없어 영에 잠재해 버리므로 인격은 존재하나 그 기능 지·정·의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마귀론 상, p. 167).
 ④ 또한 천사는 몸이 없어도 인격이라고 한다(마귀론 하, p. 62). 반면에 몸은 있어도 보이지 않는 현상으로서 인격이라고 한다(마귀론 상, p.80).

 ⑤ 김씨는 하나님은 또한 비록 세 인격이 아닌 한 인격이라고는 하나 인격이라고 한다(T.P.9-1, 성령을 알자 등).
 ⑥ 그리고 예수님의 육체는 영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었으니 (마귀론 상, P.89)그래서 예수님의 육신은 인격이 아니다(T.P.9-2)라고 한다.
 ⑦ 그리고 귀신은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기 때문에 인격이 아니며 남의 몸에 들어갈 때만 인격이 나타난다(마귀론 하, PP.62-63)고 한다.
 ⑧ 귀신은 인격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몸에 들어올 때 반드시 가변된 천사, 즉 미혹의 영이 도움으로만 들어오게 된다고 한다.
 이미 독자들은 위에 열거된 그의 사상이 서로서로 모순 투성이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탄의 궤계가 얼마나 교묘한지 알 수 있다.

 비판해 보자.
 우선 김씨는 인격이란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있든지 두 개의 기준을 가지고 인격이란 말을 쓰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 이유는 쉽게 귀신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한 필연적 논리적 귀결이다. 그가 쓰는 인격이란 말이 의미는 두 가지가 된다.

 하나는 육체를 가져야만 인격이라고 한다는 점이다. 즉 인격의 "사람 인(人)"자 때문에 사람과 같은 존재를 가리킨다고 보기 때문에 육체를 입어야만 인격이라고 하게 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자유의지와 책임을 가진 존재를 가리켜 인격이라고 한다는 점이다. 그 자신이 인격의 기능인 지·정·의를 말하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두가지 기준을 동시에 사용하기 때문에 서로 모순 투성이가 도어 버렸다.

이를 살펴보자.
 첫째, 몸을 가져야만 인격이라고 생각할 때 오는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귀신은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라는 말과 미혹의 영의 도움을 입어야만 우리 몸에 들어 온다는 그의 이론을 설명할 때만 그의 논리가 가능하다. 그러나 많은 모순을 낳는다. 귀신은 절대로 인격이 아니어야 하고 그 귀신은 인격적 기능이 있을 수 없다고 하는(마귀론 상, p.167) 반면 또한 귀신은 인격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마귀론 하, pp.124-135)고 하는 모순된 소리를 했다.

 더욱이 그가 귀신 자체는 영으로 인격이 아니라고 하면서 귀신 자체가 몸도 없이 의지를 보이고 대화하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게 된다(마 12:43, 44). 그런가 하면 귀신이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미혹의 영의 도움이 없이 우리 몸에 못들어 온다는 그의 이론이 파괴되고 말 것이다.

 다음으로는 그가 천사의 몸이 없어도 인격이라고 하였지만(마귀론 하, p.62) 천사는 영인데 어떻게 인격이 될 수 있겠으며 그보다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영이신데(약 1:17) 어떻게 인격이 될 수 있겠는가?

 둘째, 지·정·의를 가진 그리고 책임을 가진 존재가 인격이라고 보는 경우에도 많은 문제점들이 생긴다. 처음에는 김씨가 인격을 전자의 의미로 받아 들인다고만 생각했는데 그의 글을 읽어 본 후 후자의 의미로 인격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항구적 존재라는 영의 문제이다. 영은 인격이 아니며 오직 항구적 가치만 있다는 점이 다르다고 한 그의 말이 모순된다(마귀론 상, p.83) 영자체가 인격이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귀신은 몸을 입기 전에도 인격으로 존재하니 대화도 가능하며 미혹의 영의 도움 없이도 몸에 들어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고의든, 무지든 인격이란 말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 이것을 네 가지로 나누어 하나씩 문제점을 지적해 보겠다.

1. 사람의 인격
 김씨가 인간을 영·혼·육의 삼분설을 취하면서 그 인격의 주체를 혼으로 잡았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래야만 창세기 1장의 인간과 2장의 인간이 다르다는 이중아담론이 가능하고 귀신의 존재에 대한 설명과 축사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세운 교리이지만 사실 인간의 인격은 영혼 자체만으로(이분설을 취하여) 가능한 것이다 .

 몸이 없어도 다른 모든 천사들이나 신들이 영만으로 인격인 것과 같이 인간도 영혼만으로 인격이 되는 것이다. 혼을 인격의 주체로 보는 것은 구원의 핵심이 혼이 되어 버리고 만다. 모든 것이 혼에 의해 움직여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인격을 지배한다는 천사가 실질적으로 하나님보다 더 큰 영향력과 힘을 가지게 된다.

2. 귀신의 인격
 귀신이란 말 자체가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기 때문에 이는 인격이 아니란 말이 된다. 그렇게 볼 때 귀신 그 자체는 죽을 수도 없어질 수도 없다는 말이 되고 만다. 그런데 "죽은 자"라고 표현한 것이 "귀신"을 의미한다고 하는 것은(마귀론 하, p.141, 144)귀신이란 본질에 대한 표현으로서는 맞지 않게 된다. 죽은 것은 몸이지 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혼이 영에 잠재할 때는 인격이 아니고 몸에 들어올때는 인격이 된다는 말은 귀신은 아무런 의지가 없다는 말이 된다. 아무리 미혹의 영의 도움을 입어 몸에 들어와 질병을 일으킨다고 하지만 전혀 의지가 없는 비인격체인 귀신이 어떻게 몸에 들어오겠는가? 차라리 미혹의 영이 귀신을 강제로 몰아 넣었다고 해야 김씨의 논리가 맞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김씨의 마귀론의 핵심이 귀신이 아니다. 미혹의 영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천사의 인격
 천사는 육체가 없어도 인격이란 말은 천사의 인격과 사람의 인격이 다르다는 전제에 의해서만 가능한다. 천사의 영과 인간의 영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전제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몸은 있어도 보이지 않는 형상으로 인격이란 말은(마귀론 상, p.80)구약에 천사가 몸을 입고 나타난 경우를 가리키는 것 같은데 "보이지 않는 형상"이란 말이 모순된다.

 이 형상이란 개념을 내적인 성품으로서의 형상이라면 천사가 몸을 입었든지 안입었든지 형상일 것이요, 형상이란 개념을 외적인 모습으로 생각했다면 천사가 몸을 입었을 때는 보이는 형상이 될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보이지 않는 형상"이란 말은 네모난 삼각형같이 모순된 말이 된다.

4. 예수님의 인격
 그의 말에 의하면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인격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몸을 입고 오신 인간으로서 신이라고 하면 이단이 되고 그의 몸은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요(요 1:1), 그 말씀은 곧 영이기 때문에(요 6:63) 영은 인격이 아닌 항구적 존재이니 예수님의 육신은 인격이 아니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가 예수님의 육신이 인격이 아니라고 할 때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위에서 지적한 인간의 몸을 중심해서 생각하는 인격의 범주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몸은 영이니 인격이 아니라는 논리는 자연스런 것이다. 천사는 몸이 없어도 인격이며 예수님은 몸이 있어도 왜 인격이 아닌가? 이 해괴망칙한 인격론이 어디에 있겠는가? 왜 이런 말이 생겼다고 독자들은 생각하는가? 한마디로 그의 귀신의 존재와 축사운동 때문에 생긴 비성경적인 이론이다.

 마귀는 그 본질이 거짓말쟁이이다(요 8:44). 위에서 밝힌 것처럼 김씨의 마귀론이 성경을 떠난 것만은 분명히 사실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유익정도나 숫자와 아무 상관없이 사탄의 역사이다. 우리는 쉽게 김기동씨의 마귀론은 마귀신학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많은 평신도들은 영의 세계를 두려워 한다. 마귀에 대한 두려움도 크다. 그래서 오늘날 신비주의는 많은 사람을 모으는 나팔같이 사용되지만 또한 이단을 위한 문이 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다(요 1:12).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구원 곧 영생을 얻었다(요 3:16). 그리고 아들을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롬 8:38, 39).

 그렇기 때문에 성도는 요한계시록을 보며 어떤 징계와 저주가 나올지라도, 어떤 환난이 나올지라도, 어떤 혼란이 나올지라도 우리는 주의 권능으로 능히 이길 것이며 보호될 것이니 오히려 감사하고 감사해야 하는 줄로 믿는다. 이것이 말씀의 권능을 믿는 성도요,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권능을 믿는 성도이다.

결론
귀신은 타락한 천사이다

서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성서적 마귀론은 신학의 많은 숙제를 남기고 있다. 이제 신학계의 적극적인 관심이 모아지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필자가 결론적으로 이 항을 만든 것은 적극적인 면에서 성서적 마귀론을 정립하겠다는 뜻보다는 많은 연구의 가능성을 남겨 놓자는 것이며 김씨의 마귀론의 표면적 실제적 핵심이 귀신이란 점에서 이 부분에 대한 성서적 접근을 하자는 적이다.

 그동안 학계에 나온 마귀론 중에서 복음적인 면에서 가장 많이 이용되는 마귀론을 메릴 엉거(Merrill. F. Unger)가 쓴 성서적 마귀론(Biblical Demonology)이다(정학봉 역, 요단출판사, 1981). 그러나 이 책에서도 많은 연구점을 남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마귀에 대해 많은 부분을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성서적 마귀론, pp.22~23). 그러나 또한 마귀론 연구의 핵심은 다른 어떤 인간의 자연주의적 이론들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분명한 답을 주는 것이 성경이 되어야 한다(Ibid., pp.44~43).

 먼저 김씨가 귀신론을 중심해서 정통교회를 향해 내어놓은 도전을 살펴보자.
 김씨는 귀신이 제명에 죽지 못한 불신자의 사후의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귀신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통신학에서는 귀신 또한 타락한 천사로 보는데 이는 성경적으로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귀신은 결코 불신자의 사후 존재가 아니요, 마귀와 함께 타락한 천사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모순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성서적 증거도 없습니다"(마귀론 하, p.62).

 그가 그렇게 말하는 논리의 근거는 귀신이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도 많은 귀신들이 있어서 질병을 일으키느냐고 하는 것이다. 김씨 자신의 주관적 논리의 근거는 이렇다.

 천사나 마귀는 절대로 우리 몸에 못들어 오는데(Ibid., p.63) 만일 들어간다면 A속에 있으면 B속에 마귀는 없을 것이라고 한다(T.P.9~2). 그러니 질병을 일으키는 것은 귀신이요, 그렇게 많은 질병들을 이 우주 안에서 일으키는 귀신들은 많을 수밖에 없고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라고 할 때 잘 믿는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점이 성경과 다르다. 성경에 보면 사탄과 마귀가 인간에게 들어 온다는 점이다.

 요한복음 13:2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했으며 누가복음 22:3에서는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라고 했다. 심지어 사도행전 5:3에서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고 하였다.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할 때만 사탄이라고 하는 김씨에게 위의 말씀중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가니"란 말은 이중으로 불가능한 말이다.

 또한 마귀가 A란 사람 속에 있으면 B라는 사람 속에 없다는 말은 영의 세계를 모르는 말이다. 그러면 마귀가 A라는 사람을 대적하고, 유혹하고, 올무를 놓는다면 B라는 사람을 대적할 수도, 유혹할 수도, 올무를 놓을 수도 없어야 할 것이다(약 4:7; 딤전 3:7).
 한마디로 귀신은 사탄과 마귀와 같이 타락한 천사이다. 엉거는 타락한 천사를 활동하는 계층과 묶여있는 계층으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탄의 처음 반역에서 그가 비천한 천사들을 많이 끌어들인 것을 알 수가 있다(마 25:41; 게 12:4 참고). 이들 타락한 천사들은 두 계층으로 나누이는데 (1) 자유스럽게 활동하는 계층과 (2) 묶여있는 계층이 있다. 이들 자유스럽게 활동하는 계층은 그들의 재왕인 사탄의 지도하에 하늘에서 왕래하고 있는데 이들 타락한 영들에 대해서만 성경에 분명히 언급되어있다. 그들 '귀신의 왕 바알세불'(마 12:24)이라고 불렀고 '마귀와 그 사자들'(마 25:41), '용과 그의 사자들'(계 12:7)이라고도 불렀다. 이들 사탄의 왕국의 통치하에서의 감금되지 아니한 악령들은 그의 사자와 신하들이며(마 12:26) 그의 세력을 실제적으로 어디에나 있게 할 만큼 수없이 많은데 바로 이들이 귀신들인 것 같다"(엉거, 마귀론, p.88).

 분명히 귀신이 타락한 천사들이란 증거는 "마귀와 그 사자들"(마 25:41)과 "용과 그의 사자들"(계 12:7)을 그 결정적 증거로 들 수 있다. 더욱이 사탄의 최초 반역시 그보다 못한 수많은 천사들이, 모든 천사의 삼분의 일 가량되는 천사들이 그곳에 가담하였다(겔 28:18; 계 12:4). 이렇게 귀신을 정의하는데 성경적으로 아무 모순이 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사탄, 마귀 또는 귀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여인의 후손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미 그의 머리가 상하였으며(창 3:15), 하늘에서 떨어졌으며(눅 10:18), 사탄의 권세는 무너졌다(고전 15:55 이하). 이제 마지막 심판이 남아 있을 뿐이다(계 20:10).

 아무리 그들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지라도(고후 11:1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하나만으로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그들이 강할지라도 우리는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엡 6:10) 승리할 것이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5:57)고 찬송하고 찬송하고 찬송해야 할 것이다.

----------------------------------------------
최삼경 목사가 쓴 <베뢰아 귀신론을 비판한다>(기독교문화협회刊, 1990년 9월10일 발행)를 전재했습니다.

최삼경의 다른기사 보기  
ⓒ 교회와신앙(http://www.amennews.com)

죄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C.H. 매킨토시

 

그리스도인이 죽어서 하늘에 갈 때 죄의 권능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죄가 죽은 사람에게 권능이나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마치 죽어서 하늘에 갈 때처럼 믿는 이가 현세(現世)에서 죄의 권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보지 못합니다. 죄가 실제 죽어서 장사된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죄의 권능을 말하는 것이지 죄의 존재(presence)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주의하여 주지하십시오.

 

죄의 문제에 관해서 현재의 그리스도인과 장래의 그리스도인 사이에는 이러한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현세(現世)에서 그리스도인은 단지 죄의 권능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장차 그는 죄의 실재(實在)로부터 자유로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현재 신분에서는 죄가 그 안에 거주하고 있지만, 그를 군림하지는 못합니다. 머지않아 죄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 안에 거주하지 못할 것입니다. 죄의 군림은 끝났습니다. 은혜의 군림이 시작되었습니다. 죄는 십자가에서 이미 정죄되었습니다. 지금은 은혜가 왕좌에 있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얼마나 영광스러운 해방입니까! 얼마나 복된 해방입니까! 부디 성령님의 보배로운 사역으로 말미암아 은혜 안에 들어가서 은혜의 권능으로 살 수 있기를!.

 

로마서 6장을 세심히 살펴보면, 사도는 죄들(sins)의 용서에 관해 말하지 않습니다. 죄들의 용서는 3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복되신 하나님이시여! 우리의 죄들은 용서되었고-지워졌으며-영원히 말소되었습니다. 로마서 6장의 주제는 죄들(sins)의 용서가 아니라, 지배하는 권능이나 원칙으로서의 죄(sin)로부터 완전한 해방입니다.

어떻게 이 엄청난 혜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죽음에 의해서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었습니다. 이 사실이 모든 믿는 이들에게 적용됩니까? 그렇습니다. 모든 믿는 이들은 하늘의 덮개 아래 있습니다. 이 사실은 믿는 이가 성취해야 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모든 참된 믿는 이들에게 속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믿는 이의 공통된 신분입니다. 복되도다, 거룩한 신분이여! 우리를 위해 이러한 신분을 획득하시고, 우리를 이러한 신분 안으로 인도하신 분께 모든 찬양과 경의를 표하십시오. 우리는 지금 은혜의 영광스러운 군림 아래서 살고 있다-“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1).

 

이 영광스러운 해방의 진리를 주님의 백성들이 거의 알지 못합니다. 비교적 소수만이 죄들의 용서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의 권능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보지 못하고, 죄의 권능이 실재함을 느끼며,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인가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대로 자신들을 인정하려는 대신, 고통스러운 감정을 끊으려고 애씁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회심에 대하여 의심과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대신 자의식으로 사로잡힙니다. 화평과 위로를 얻기 위하여 자신들의 상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비참합니다. 비참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고의 영적 상태로도 결코 화평의 기초를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상태, 우리의 상황, 우리의 경험, 우리의 어떠함으로부터 화평을 구하려 한다면, 결코 얻지 못할 것입니다. 화평을 얻는 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며, 그분과 함께 장사되었고, 지금 그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았고, 그분 안에서 받아진 바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분의 어떠하심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이것이 화평의 신성한 기초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거룩한 삶의 유일한 신적 비결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죽음에 처하려고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수도사, 금욕주의자, 죄 없는 완전함을 열심히 추구하는 자들은 다양한 육체적 연습으로 죄를 죽음에 처하도록 애쓸지 모릅니다. 그 필연적 결과는 무엇입니까? 비참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열심에 비례한 비참함입니다. 그것은 참된 기독교와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 복된 지식으로 출발하여, 이 사실을 믿음으로, 몸이 아닌 몸의 “행실”을 “죽은 것으로 처리”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오늘 우리는 믿음에 의해 이 완전한 해방의 권능 안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 출처 : http://www.christian.or.kr/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지인에게서 받은 자료.^^

'동영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래에 숨겨진 비밀  (0) 2014.01.31
조엘오스틴 VS 폴와셔  (1) 2014.01.30
북한정권의 기독교 박해상황  (0) 2014.01.29
잔해 속에서 맨손으로 구해낸 생명~!!!!  (0) 2014.01.26
하나님과의 인터뷰  (0) 2014.01.24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기 위해 주목할 부분(성경과 죄)

 

아더 핑크

 

1. 말씀이 우리를 죄 있는 자라고 가르칠 때에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2.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 슬퍼하게 가르칠 때에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3. 하나님 말씀의 인도하심으로 죄를 고백할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4. 성경 말씀이 읽는 이로 하여금 죄를 심히 미워하게 만들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5.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 죄를 버리게 될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6. 하나님 말씀을 통해 죄에 대해 강력히 저항하게 될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7. 말씀이 그것을 읽는 이로 하여금 죄와 반대되는 것을 행하게 만들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지난 여러 해 동안 성경을 읽고 공부했지만 사람들이 영적인 유익을 별로 얻지 못했다는 데에는 어떤 중대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참으로 우리는 이보다 더한 경우를 볼 수도 있다. 즉 성경 공부가 축복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저주가 되었다는 예를 종종 접하게 될 때 우리는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같은 말이 심한 경우를 보여주는 말임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 같은 사례의 심각성 그 자체보다 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사는 남용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 또한 오용될 수 있는데 이런 사실이 말씀 공부에서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은 그 열매를 통해 명백히 드러나는 사실이다.

본성에 속한 사람도 과학을 연구하듯이 큰 열정과 기쁨을 갖고 성경 연구에 착수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지식의 양이 늘어나는 만큼 그의 자만심도 커지게 마련이다.

흥미 있는 실험에 열중하는 화학자처럼 성경을 지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참으로 자만하게 된다. 그렇지만 후자의 기쁨이란 전자의 기쁨만큼이나 영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화학자가 성공하면 자만심이 커져서 자기보다 무지한 사람들을 멸시하기 쉽듯이, 성경 속의 숫자나 예표나 예언이나 그 밖의 다른 주제들을 연구한 사람들도 이 같은 경우에 속할 때가 많다.

 

성경을 대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문학적 자부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성경을 모르면 교육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단순히 성경의 일반적 내용을 습득한다는 것이 존경할 만한 일이며 인기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다른 유명한 글을 읽어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듯이 그런 목적으로 성경을 읽는다.

또 다른 이들은 자기들만의 특정한 자만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성경을 읽으며, 또 자기 교단의 특성을 보여주는 구절들을 외우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며 "자기네 교리"를 뒷받침하는 구절들만을 열심히 찾는 사람들도 있다. 또 다른 이들은 자기들과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공박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일에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나 영적으로 세움을 받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 혼이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성경 말씀에서 얻을 수 있는 참된 유익이란 무엇인가?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 명확한 해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 함이라"

이 내용 중에서 혹시라도 빠진 것이 있는지 살펴보라! 성경은 우리의 지적 만족이나 세속적 사색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다. 성경을 주신 목적은 가르치고 책망하고 바로 잡음으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 함이다. 이제 이 말씀의 의미를 더 명확히 찾아보기 위해 다른 구절들도 인용하도록 하겠다.

 

1. 말씀이 우리를 죄 있는 자라고 가르칠 때에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바로 이것이 말씀의 첫 번째 기능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우리의 타락함을 드러내며 우리의 더러움을 밝히 드러내며 우리의 사악함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의 도덕 생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도 있으며 인간관계가 나무랄 데 없이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사람의 마음과 양심 속에 말씀을 적용하사 죄로 가려진 눈을 뜨게 하시고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 및 태도를 바라보게 하실 때에 비로소 그 사람은 대언자 이사야 같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하고 울부짖게 된다. 참으로 구원받은 영혼은 이런 식으로 예수님의 도우심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되, 온전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필요하나니"(눅 5:31).

참으로 성령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말씀을 적용하실 때에야 비로소 모든 사람은 자신이 병들었으며, 병들어 죽게 되었음을 느끼게 된다.

인간의 본질 속에 죄가 이루어 놓은 황폐한 자취들이 있다는 것을 마음속에서 확신하는 일은 회심한 이후에 즉시 일어나는 초기 경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으로 내 마음속에 축복을 내리실 때마다 나는 그분께서 내 앞에 세우신 기준 즉 "오직 너희를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 같이 너희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할지니"(벧전 1:15) 라는 기준에서 내 자신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으며 또 내가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다음과 같이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성경 속에서 여러 사람들이 비참하게 실패한 것을 읽을 때에 그 사실이 나로 하여금 나도 저들처럼 비참한 상태에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가?

또 그리스도의 복되고 완전한 삶에 대해 읽을 때에 그 사실이 나로 하여금 나는 그분에 비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해주는가?

 

2.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 슬퍼하게 가르칠 때에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돌밭과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자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나니."(마 13:20,21) 한편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의 가책을 느낀 자들에 대해 성경은 "그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행 2:37)고 기록한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모습이 그대로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교자의 수사학적 능력이나 지적 기교를 보여주는 화려한 설교나 '세대주의적 진리' 등을 담은 말씀을 듣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대개 이런 것들은 양심을 꿰뚫는 침투력이 없다. 사람들은 이 같은 설교에 수긍은 하지만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든지 혹은 가깝게 접근하려 들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자신의 "지적 탁월함"에 대한 명성을 얻으려고 힘쓰지 않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훌륭했던 하나님의 사람들조차도 비참하게 실패했었음을 보여주며 신자들의 성격과 행동의 지침을 삼게 해야 한다.

 

비록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설교자를 멸시할지 모르지만 참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자신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고 슬피 울며 부르짖게 해주는 그 말씀에 고마움을 표할 것이다. 성경을 홀로 읽을 때도 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성령님께서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말씀을 적용시켜 주실 때에 우리는 자신의 부패함을 바라보며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예레미야 31장19절에는 "내가 교훈을 받은 뒤에 내 볼기를 쳤나이다. 내가 부끄럽고 참으로 당황하기까지 하였나이다." 라는 말씀이 있다. 독자 여러분은 이 같은 체험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가? 성경 공부를 통해 상한 마음을 갖게 되고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어 본 적이 있는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스스로의 죄를 깨달아 매일 같이 하나님 앞에 회개해 본 적이 있는가? 유월절 어린양은"쓴 나물"(출 12:8)과 함께 먹어야만 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에도 성령님께서는 그것이 우리 입에 달게 되기 전에 쓰게 만드신다. 계시록 10장 9절의 "내가 그 천사에게 나아가 말하되, 그 작은 책을 내게 주소서, 한즉, 그가 내게 말하되, 이것을 가져다가 먹으라. 이것이 네 배를 쓰게 할 것이나 네 입에서는 꿀같이 달 것이라, 하거늘" 말씀에서 순서를 자세히 살펴보라. 이것이 바로 영원토록 적용되는 실증적 순서이다. 위로 받기 전에 먼저 애통함이 있어야 하며(마 5:4) 높임을 받기 전에 먼저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벧전 5:5).

 

3. 하나님 말씀의 인도하심으로 죄를 고백할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성경은 "책망"(딤후 3:16)하기에 유익하므로 정직한 사람은 말씀을 통해 자기의 허물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세상에 대하여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고 또 빛으로 나아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자기 행위를 책망 받을까 함이요"(요 3:20) 라고 말하고 있다.

거듭난 마음의 소유자는 "하나님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부르짖게 된다. 말씀으로(시편 119편) 새롭게 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범죄한 사실을 깨닫게 되고 우리의 죄를 자백하게 된다.

"자기의 죄들을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들을 시인하고 버리는 자는 다 긍휼히 여김을 얻으리라"(잠 28:13).

우리가 마음 한가운데에 죄를 숨기고 있으면 결코 어떤 영적 성장이나 열매(시 1:3)를 기대할 수 없으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맛볼 수가 있다. 우리의 양심이 고백하지 않은 죄로 눌려 있으면 평안이 있을 수 없으며 우리 마음 한가운데 진정한 휴식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 온전히 모든 죄를 털어놓을 때에 비로소 안식이 찾아온다.

다윗이 체험한 고백을 들어보자.

"내가 잠잠할 때에 하루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들이 쇠하였나이다. 밤낮으로 주의 손이 나를 무겁게 누르오니, 내 진액이 여름 가뭄에 마른 것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시 32:3,4).

당신은 상징적이면서도 강한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가? 혹은 당신 자신의 신앙의 역사를 통해 이 말씀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개인의 체험 없이는 도저히 만족스런 해석을 할 수 없는 성경구절들이 많이 있다.

다음 구절에 나오는 말씀은 참으로 매우 복된 말씀이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범법한 것들을 주께 고백하리이다, 하고 주께 내 죄를 시인하고 내 불법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주께서 내 죄의 불법을 용서하셨나이다. 셀라"(시 32:5).

 

4. 성경 말씀이 읽는 이로 하여금 죄를 심히 미워하게 만들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주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악을 미워하라."(시 97:10).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우리는 악을 피하고 그 속에 계속 머물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악을 대항하고 마음속으로 그것에 분개해야 한다."(C. H. 스펄젼).

회심했다고 고백한 후에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시험은 죄에 대한 마음의 태도이다.

거룩한 생활의 원칙이 마음에 세워지면 거룩하지 못한 모든 것을 미워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죄를 미워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죄악을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감사하게 된다.

다윗의 경험을 보라. "주의 교훈들을 통해 내가 깨달음을 얻으므로 모든 거짓된 길을 미워하나이다."(시 119:104). 이 말씀을 잘 살펴보면 거짓된 길을 "단지 삼가는" 정도가 아니라 "미워하며", "일부 혹은 몇 가지"가 아니라 "모든 거짓된 길"이며 단순히 "모든 악"이 아니라 "모든 거짓된 길"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모든 것에 관한 주의 교훈들을 바르게 여기며 모든 거짓된 길을 미워하나이다"(시 119:128).

그러나 사악한 자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반대의 말씀을 하신다.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시 50:17).

잠언 8장 13절을 보면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 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명기 17장 18-19절을 보라. "그가 자신의 왕국의 왕좌에 앉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있는 것에서 이 율법을 책으로 한 권 필사하여, 평생토록 자기 곁에 두고 읽어서 주 자기의 하나님 두려워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법규를 지켜 행할 것이니라."

다음의 말은 이에 대해 아주 바르게 설명해 주고 있다.

"죄를 미워하기 전까지는 결코 죄를 죽일 수 없다. 마치 유다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고함을 지르며 그분을 증오했던 것처럼 참으로 그렇게 죄를 미워하지 않고는 결코 울부짖으며 죄를 대적할 수 없을 것이다."(E. 레이너 1635).

 

5.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 죄를 버리게 될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다 불법에서 떠날지어다"(딤후2:19).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이며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더욱 더 잘 알 수 있다.

더욱이 우리의 마음이 주님과 함께 바른 관계에 있다면 우리의 생활 방식도 그 말씀에 더욱 부합될 것이다. 이를테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요삼 4절)이 있게 된다. 고린도후서 6장 끝 부분을 보면 자신들을 불신자들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사람들에게 주신 귀한 약속 몇 가지가 있다. 성령님께서 이것들을 어떻게 적용하시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라. 그분께서는 "이 약속을 가진 자들이여, 그러므로 위로를 받고 안심하라" 고 하시지 않고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자"(고후 7:1) 고 말씀하신다.

"이제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깨끗하게 되었으니"(요 15:3).

이 말씀에는 우리가 늘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아야만 하는 중요한 규칙이 들어 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여 우리의 행위를 깨끗하게 하고 있는가?

구약의 시편 기자는 이런 질문을 하였다.

"청년이 무엇으로 자기의 길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하나님은 이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신다.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라". 옳은 말씀이다. 말씀을 단순히 읽고 믿고 기억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우리의 "행실"에 적용시킴으로 깨끗함을 받을 수 있다.

"음행을 피하라"(고전 6:18),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전 10:14), "이것들을 피하라-즉 돈을 사랑하지 말라“(딤전 6:11),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딤후 2:22).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버리고 떠나기 위해서는 위의 사항들을 삶에 적용시켜야 한다. 죄는 단지 고백하는 차원을 넘어서 "버려야"(잠 28:13)하는 것이다.

 

6. 하나님 말씀을 통해 죄에 대해 강력히 저항하게 될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성경은 우리의 본성에 따른 죄를 나타내주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롬 3:23) 여러 가지 면들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구원받고 하나님을 노엽게 만드는 길에서 떠나는 방법들을 제시해주고 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숨겼나이다"(시119:11).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실천 사항이다.

"청하건대 너는 그분의 입에서 법을 받고 그분의 말씀들을 네 마음에 쌓아 두라"(욥 22:2).

이 말씀은 우리가 특별히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귀중히 여길 필요가 있는 명령이며 권고며 훈계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하며 묵상하는 가운데 기도로 실천에 옮겨야 하는 것이다.

땅에서 잡초가 자라는 것을 막으려면 좋은 씨를 뿌려야 한다.

"악에게 지지 말고 도리어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더욱 "풍성히"(골 3:16) 거하면 거할수록 죄가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서 활동할 자리는 더욱 좁아질 것이다.

성경이 진리임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다고 볼 수 없다. 우리는 성경을 사랑을 가지고 애착심을 가지고 받아야 한다. 성령님께서는 사람들이 배교하는 이유가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기"(살후 2:10)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입술이나 마음속에만 두고 이야기 거리나 사색 거리로 삼는다면 곧 그 말씀이 사라지고 만다. 땅 표면에 놓인 씨앗은 공중의 새들이 물어가고 만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땅속 깊이 묻어야 한다. 말씀을 귀로 듣고 생각 속으로 넣고 그 뒤 마음속에 깊숙이 새기고 다시 새겨 마음 깊숙이 잠기게 해야 한다. 말씀을 사랑으로 받는다는 것은 말씀이 마음속에서 우선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말씀을 우리의 정욕보다 더 소중히 여길 때 말씀이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T. 맨튼)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결코 미끄러지지 아니하리로다"(시 37:31).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세상의 나쁜 영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사탄의 유혹에서 건져 주며 죄에 대한 효과적인 예방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진리가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양심을 움직이며 우리가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결코 실족하지 않을 것이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들 때에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하리이까?"(창 39:9) 라고 말하였다. 말씀이 그의 마음속에 있어 그의 정욕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말로 다할 수 없이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누가 다가오는 때를 위하여 귀를 기울이고 듣겠느냐?"(사 42:23).

그렇다. 앞으로 다가올 비상 사태에 대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저장해 둠으로써 미래를 예견하고 방어해야 하는 것이다.

 

7. 말씀이 그것을 읽는 이로 하여금 죄와 반대되는 것을 행하게 만들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누구든지 죄를 범하면 율법도 범하는 것이니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요일 3:4).

하나님께서는 "너는.....을 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죄는 "나는......을 하지 않겠다" 말하며, 하나님께서 "너는.....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 죄는 "나는 .....을 하겠다"고 대답한다. 이와 같이 죄는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며 자기 갈 길로 가고자 하는 결심하는 것이다(사 53:6).

또한 죄는 영적 세계에 존재하는 일종의 무정부 상태이며 하나님 앞에서 붉은 기를 드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불법을 행하지 않으려면 법에 굴복해야 하듯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으려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이처럼 죄와 반대되는 길로 걷기 위해서는 순종의 길로 걸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성경을 주신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을 깨닫게 된다. 또한 성경은 책망과 바르게 함을 위해 유익할 뿐만 아니라 의로 교육하기에도 유익한 것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아야 하는 중요한 사항이 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사고를 형성하고 있으며 내 마음을 지배하며 내 길과 행실을 통제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하신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의 표현 방법을 보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명령들을 지키라"(요 14:15).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나로 하여금 주의 명령들의 길로 들어가 걷게 하소서. 내가 그것을 기뻐함이니이다"(시 119:35). 이것이 바로 다윗의 기도였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가는 길을 보여 줄 빛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행하고자 하는 마음도 필요하다. 우리의 마음은 어두운 고로 지침이 필요하고 우리의 마음은 연약한 고로 은혜의 역사가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따르지 않는다면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맨튼).

진리를 받아들여 죄와 반대되는 것을 행하는 것이 "주의 명령의 길"임을 유의하라. 이 길은 자신이 선택하는 길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명백히 제시된 길이며, 누구나 다 아는 "큰 길"이 아니라 개인만이 아는 "좁은 길"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 같이 위에서 열거한 7 가지 사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그리고 열심을 내어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의 성경 공부가 우리 자신을 더욱 겸손하게 만들었는가?

혹시라도 지식을 얻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지는 않았는가?

성경공부가 우리 자신을 친구보다 더 높은 존재로 만들어 사람의 존경을 받게 만들었는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좀더 겸손하게 만들었는가?

성경 공부가 자신의 죄성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심을 유발시켰는가? 아니면 자신에 대한 깊은 만족감을 주었는가?

우리가 교제하거나 가르치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나도 저 정도의 성경 지식을 가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탄식하게 만들었는가? 아니면 그들로 하여금 ‘나의 선생님이나 친구에게 주셨던 믿음과 은혜와 거룩함을 주소서!’ 하고 주님께 기도하도록 만들었는가?

"이것들을 묵상하고 네 자신을 이것들에 온전히 드려 너의 진보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5).

 

아더 핑크의 "성경은 언제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가 - Profiting from the Word" 중에서

  개혁주의마을




북한정권의 기독교 박해상황

 

 

 

 

 

 

 

 

■ 박해지수(WORLD WATCH LIST)에 대한 설명

 

     세계 기독교 박해지수는 특별하게 고안된 질문들을 사용해 작성한 것이다. 이 질문지는 50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의 답변에 따라 점수가 매겨진다. 그리고 각 개별 국가의 합산된 점수에 의해 기독교 박해 지수의 순위를 결정한다.

 

 

    질문들은, 먼저 법적인 종교의 자유에 대한 부분 즉 기독교인에 대한 법적 차별 문제와 기독교인의 신분에 대한 것들(예를 들면, 헌법을 비롯한 국가의 법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가? 법적으로 개인이 자유롭게 기독교로 개종할 수 있는가?)과 기독교인의 실제적인 상황 부분(기독교인이 신앙 때문에 살해 당하는 일이 발생하는가? 신앙 때문에 기독교인이 감옥이나 노동 수용소, 정신병원에 보내지는 일이 있는가?) 교회 활동의 자유부분 (교회와 기독교 단체에게 기독교 문서를 인쇄하고 출판할 자유가 있는가? 기독교 문서에 대한 검열이나 금지가 있는가?), 기타 종교 활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요소들 (기독교인 모임이나 성도들의 집이 기독교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공격을 당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박해지수를 발표하면서 함께 표시하는 변수는 획득한 정보의 정확성에 대한 자체 평가를 담고 있다. 때때로 그 정보에 대한 확인이 힘들거나, 정보가 불완전한 채로 수집된다. 그런 경우, 변수는 높게 책정된다. 그 나라에 대한 완벽한 정보 획득이 어렵기 때문에 종교 박해의 정도가 실제보다 낮은 순위로 평가되는 나라도 있을 수 있다.

 

 

WWL 2011

박해순위

2011

박해지수

2010

박해순위

2010

박해지수

2009

박해순위

2009

박해지수

 

 

 

 

 

 

1. 북한   

90.5

1

90.5

1

90.5

 

2.  이란

67.5

2

65.5

3

67.0

3.  아프가니스탄 

66.0

6

61.5

4

63.0

4.  사우디아라비아

64.5

3

63.5

2

67.0

5.  소말리아

64.0

4

62.5

5

60.5

6.  몰디브

63.0

5

62.0

6

60.0

7.  예멘

60.0

7

60.5

7

57.5

8.  이라크

58.5

17

48.0

16

49.0

9.  우즈베키스탄

57.5

10

56.0

10

54.5

10. 라오스 

56.0

9

56.0

8

55.0

11. 파키스탄 

55.5

14

51.5

13

51.0

12. 에리트리아

55.0

11

54.5

9

55.0

 

13. 모리타니아

53.5

8

59.5

18

48.0

14. 부탄

53.5

12

53.5

11

53.5

15. 투르크메니스탄 

51.5

15

49.5

14

50.0

16. 중국

48.5

13

51.5

12

52.0

17. 카타르 

48.5

18

48.0

17

48.0

18. 베트남 

48.0

21

46.0

23

42.5

19. 이집트

47.5

20

47.0

21

45.5

20. 체첸 

47.0

19

47.0

20

46.0

21. 코모로 

46.5

16

48.0

15

50.0

22. 알제리

45.0

25

41.0

19

46.5

23. 북부 나이지리아 

44.0

27

41.0

26

41.0

24. 아제르바이잔

43.5

24

42.0

27

39.5

25. 리비아 

41.0

22

42.5

25

41.0

26. 오만 

41.0

28

40.0

28

39.5

27. 미얀마 

40.0

23

42.0

24

41.5

28. 쿠웨이트 

40.0

31

38.0

32

36.0

 

29. 브루나이  

39.5

29

38.5

29

38.5

30. 터키

39.5

35

36.0

39

33.0

31. 모로코  

39.5

37

34.0

40

32.5

32. 인도 

39.0

26

41.0

22

45.0

33. 타지키스탄

38.0

32

38.0

34

35.0

34. 아랍 에미리트 

37.5

33

37.0

35

35.0

35. 북부수단 

37.0

30

38.0

30

36.5

36. 잔지바르 섬

36.0

34

36.0

31

36.0

37. 튀니지

35.0

43

30.0

47

26.5

38. 시리아

34.5

41

30.0

46

28.0

39. 지부티 

33.5

36

34.0

38

34.0

40. 요르단 

33.5

39

32.0

37

34.5

41. 쿠바

33.5

38

32.0

33

35.5

42. 벨라루스

32.0

42

30.0

44

28.0

43. 에티오피아

30.0

44

29.5

45

28.0

44. 팔레스타인

29.5

46

27.5

42

29.5

45. 바레인

28.5

47

27.0

48

26.0

46. 키르키즈스탄 

28.5

49

26.5

 

 

47. 방글라데시 

27.5

45

29.0

43

29.0

48. 인도네시아 

26.5

48

26.5

41

30.5

49. 스리랑카

26.0

40

30.0

36

34.5

 

50. 말레이시아

22.5

 

21.5

 

19.5

 

 

심각한 박해

 

 

억압

 

 

심각한 제한

 

 

약간의 제한

 

 

약간의 문제

 

 

오픈도어 선교회 

 

 

 

 

 

* 자료 출처 : http://www.opendoors.or.kr/sub2/menu1.php 

* 동영상 출처 :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24637245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a1.jpg

    a2.jpg

    a3.jpg

    a4.jpg

    a5.jpg

    a6.jpg

    a7.jpg

    a8.jpg

    a9.jpg

    a10.jpg

    a11.jpg

    a12.jpg

    a13.jpg

    a14.jpg

    a15.jpg

    a16.jpg

    a17.jpg

    a18.jpg

    a19.jpg

    a20.jpg

    a21.jpg

    a22.jpg

    a23.jpg

    a24.jpg

    a25.jpg

    a26.jpg

    a27.jpg

    a28.jpg

    a29.jpg

    a30.jpg

    a31.jpg



칼 바르트는 신학자가 아니라 철학자 / 로이드존스

 

 

칼 바르트의 허망한 사색을 따라가다가는 오직 멸망일 뿐이다. 그는 기독교를 파괴하고, 하나님의 택하신 영혼을 꾀어내기 위한 사단의 도구이다. 그런데 수많은 목회자, 신학자, 교단과 교회가 그의 허울 좋은 말놀음에 속고 있다. 그럴듯한 미사여구로 꾸며놓은 한 위장 신학자의 말에 이리저리 휘둘리고 정신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꾀나 유식하게 보이거나 좋아 보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길은 필경 사망의 길이다! 

다만 불쌍한 것은 아무 것도 모르고 그 목회자들을 따르는 양들이다. 어리석은 거짓 선생에 속지 말고, 깨어서 바른 진리를 따라가자! 정통 기독교 2천년사는 바르트와 같은 거짓 궤변을 따른 적이 없다! 성경은 정확무오하며,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다.(딤후3:16) 거짓 선생에게 속지 말라!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 14장12절)

 

 

- 학자의 혀.

 

 

칼바르트는 신학자가 아니라 철학자

 

마틴 로이드 존스

 

  

 

 

전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자, 현(1961년) 교황이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가장 위대한 신학자'라고 칭했던 칼 바르트가 바로 이 '만인 구원론'을 가르쳤다는 사실 자체가 이것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칼 바르트)가 성경을 믿는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는 신학자가 아니라 철학자였기 때문입니다.

   

- 로이드 존스, 로마서 강해 6에서

 

 

* 출처 : http://lloydjones.org/zbxe/75350#0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대장쟁이

[느헤미야 4:7]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어 그 퇴락한 곳이 수보되어 간다 함을 듣고 심히 분하여


온 세상이 전도와 선교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대적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때로 놀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한 현실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을 싫어하고 기독교를 대적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느헤미야 때도 그랬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 아라비아 사람들, 암몬 사람들, 아스돗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이 중수되고 보수되어간다는 말을 듣고 심히 분노합니다. 왜 그들이 분노한단 말입니까? 자기들에게 무슨 피해가 있는 것도,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화를 내고 대적한단 말입니까? 이유가 안 됩니다. 이것은 우상숭배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악한 영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 됩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기독교, 아니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대적과 탄압을 보십시오. 불교와 천주교는 서로를 대적하지 않습니다. 천주교의 수녀, 불교의 비구니, 천도교의 정녀들이 사이좋게 모여서 만들어진 삼소회도 있습니다. 이슬람 사원이 들어서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해괴한 무속신앙과 점집과 우상들이 나라를 뒤덮어도 그들 사이에는 별 싸움도 없고 별 말도 없습니다. 오직 기독교에만 손가락질과 지탄과 훼방과 대적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들에게 아무런 손해도 없는데 사랑과 도움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기독교를 향하여 이유 없는 분노와 폭력과 조롱과 비웃음을 퍼붓는 현상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타락한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본성’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주를 믿는 자는 대적들의 한 가운데 던져진 외톨이 군병이거나 적으로 둘러싸인 외딴 성과도 같습니다. 하나님께로 오는 자 보다 하나님을 싫어하는 자의 수가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그 혹독한 재앙과 진노 가운데서도 끝내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대적하는 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용, 곧 옛뱀이요 마귀요 사단을 잡아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인봉하고 천년왕국을 다스리시는데, 천년이 차면 사단이 그 옥에서 잠깐 놓여나와서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는데 그 수가 바다 모래 같고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소멸하고 마귀는 불과 유황불에 던져진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년왕국의 끝에도 그토록 많은 수가 하나님의 도성을 에워싸고 대적한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택한 자의 수는 적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더욱 귀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주의 성도들의 외로운 싸움, 고군분투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느헤미야는 대적들 가운데 던져진 것 같은 상황에서 성벽을 수축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당하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적들 앞에서 유대사람들은 낙담하고 힘이 빠집니다. 도저히 성벽을 세울 수 없다고 체념하려고 합니다. 대적들의 위협에 겁을 먹고 열 번이나 와서 구해달라고 합니다. 이러한 유다 사람들에게 느헤미야는 “대적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고 독려합니다. 그렇습니다. 싸우지 않으면 죽습니다. 물러설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싸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파숫군을 세우며 백성들을 무장시켜 대기시키고 든든히 방어하도록 합니다. 한 손에 무기를 잡고 한 손으로 일하는 치열한 싸움을 이끌어갑니다. 그 때 하나님은 함께 하셔서 대적의 꾀를 폐하시고 성벽을 수축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기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도성은 싸움으로 세워집니다. 우리의 신앙, 우리의 구원도 싸움으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싸움, 곧 불을 던지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12:49)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 부모자식간, 형제지간이라 할지라도 그 싸움은 시작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만 영접하면 구원이 이루어지고 평화가 얻어질 것 같이 생각하기 쉬운 우리에게 그것은 충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싸움 없이 얻어지는 승리 없고 피 흘림 없이 이루어지는 생명은 없습니다. 이 땅에서의 주님의 생애 또한 처절한 싸움이었습니다. 대적들과의 싸움, 십자가의 승리를 막으려는 마귀의 유혹의 치열한 싸움을 주님은 끝내 싸워 이기시고 “다 이루었다.”고 승리의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대적의 수가 바다모래같이 많다 해도 승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승리는 우리것입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기꺼이 복음을 들고 용감하게 달려나가 분전하여 이기는 승리의 기쁨을 택합시다.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지막 순간까지  (0) 2014.02.09
돈놀이, 이자놀이  (0) 2014.02.01
산발랏과 도비야가 두려워하고 근심하나  (0) 2014.01.26
도려내어야 한다면  (0) 2014.01.23
일어나라, 하나님이 하신다  (0) 2014.01.08

전 세계에서

가장 큰 호수는

카스피해(Caspian Sea)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큰 호수는

캐나다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5대호의 하나인 Superior 호수입니다.

 

그렇다면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큰 호수는 무엇일까요?

  

Lake Tahoe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캘리 최대의 호수는 바로 Salton Sea입니다.

 

 쏠튼 씨는

애리조나와 유타에 걸쳐있는

파웰 호수(Lake Powell)보다 넓으며

  

미국의 100대 호수 가운데

유일하게 바다(sea)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그만큼 쏠튼 씨는 바다로 착각할 만큼 넓은 곳입니다.

  

하지만, Salton Sea의 물은

해마다 점점 말라가고 있습니다.

 

쏠튼 씨가 캘리에서는

Death Valley 다음으로 낮은

 

-226ft(-69m)의

저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기온이 높은

사막지대일 뿐만 아니라

유입량보다 증발량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겨울은

쏠튼 씨를 방문하기에

아주 좋은 계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덥지 않은

따뜻한 날씨에다가

 

이곳에서 겨울을 나는

수많은 철새를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쏠튼 씨에서의 석양과 일몰은 빅서만큼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22142521_1.jpg

아름다운

Salton Sea의 석양 모습입니다.


22142521_2.jpg


쏠튼 씨

가는 길에 있는,

 

1월 초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포도 단풍의 모습입니다.


22142521_3.jpg

겨울철,

쏠튼 씨의 백미는

엄청나게 많은 철새를 보는 것입니다.


22142521_4.jpg

땅에서

뭔가를 바라보는

철새를 구경하는 것과...


22142521_5.jpg


22142521_6.jpg

하늘을 나는

철새를 바라보는 것은

정말 가슴 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2142521_7.jpg

하늘을 나는 새들이

마치 알프레드 히치콕의 새에 나오는 무리 같습니다.


22142706_8.jpg

낙조시에

비치에서 바라보는

새들의 모습도 황홀하지만


22142706_9.jpg


22142706_10.jpg

유유히 헤엄치는

펠리컨 가족을 지켜보는 것도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즐겁습니다.

 

사진속의 녀석들은

White pelican의 모습입니다.


22142706_11.jpg

그런가 하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사슴인가...

 

아니,

목이 길어서 우아한

두루미의 자태를 보는 것도 좋지요.


22142706_12.jpg

Salton Sea에 가면

카약을 즐기며 유유자적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습니다.


22142706_13.jpg

호숫가에서

재미있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① 노랑다리 갈매기가

틸라피아(tilapia)를 먹고 있는데

장다리 물새(Black-necked stilt) 한 마리가 다가왔습니다.

 

② 갈매기는

장다리 물새를 저리가라고 소리지르며 위협했죠.

 

 

③ 하지만 장다리 물새는 겁먹지 않고

“이래봬도 내가 롱다리야! 한 번 붙어 볼래” 라며

한판 싸움도 불사할 태세를 보였습니다.

 

 

④ 그러자 겁먹은 갈매기는 도망가고

틸라피아는 장다리 물새의 차지가 되었답니다.


22142706_14.jpg

쏠튼 씨에서는

새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2142706_15.jpg

멋있고 신기하게 생긴,

사진 찍기에 좋은 나무들도 볼 수 있지요.


22142914_16.jpg

이곳에는

춤추는 나무(Dancing Tree),

놀라는 나무(Surprising Tree)

결투하는 나무(Fighting Tree)

뒤로 자빠지는 나무(Tumbling Tree) 등

 

재미있고

신기한 나무들도 있습니다.


22203506_31.jpg


석양에 빛나는
이들 나무의 모습은 가히 환상적입니다.

 
22142914_18.jpg

 
새들이
나무 주변을 날아준다면
더욱 환상적인 장면이 연출됩니다.

 
22142914_19.jpg

 
어어어!!!
뒤로 자빠지는 나무의 모습입니다

 
22142914_20.jpg

 
이곳에는
Death Valley의
Bad Water만큼 멋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데쓰 밸리에 필적할 만큼
광활하고 멋진 소금밭도 있습니다.

 
22142914_21.jpg

Salton Sea의
소금밭을 걸어보는 것은
 
 
Bad Water의
소금밭을 걷는 것과는
또 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22142914_22.jpg

 
Salton Sea의 소금밭에
마치 눈이 내린 것 같습니다.

 
22142914_23.jpg


22143146_24.jpg

 
Salton Sea 근처에는
Death Valley의 Sand Dunes 보다
훨씬 더 크고 멋진 Sand Dunes도 있습니다.

22143146_25.jpg


22143146_26.jpg

 
마지막으로
Salton Sea의 석양을 보실까요?

 
22143146_27.jpg

 
Salton Sea에서
석양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면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금문교를 보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22143146_28.jpg

 
쏠튼 씨의 석양은
때로는 구름에 가려진 태양이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해 주기도 합니다.

 
22143146_29.jpg

 
Salton Sea의
석양을 바라 보노라면
너무나 멋진 그 장면에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22143146_30.jpg
 
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Ⅲ. 베뢰아의 성령은 허수아비이다.

 김씨의 성령론은 "성령을 알자"라는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이책을 통해 그의 삼위일체는 양태론적 삼위일체임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고,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런데 그가 이해하는 성령론은 정통적인 성령론과는 하늘과 땅처럼, 동과 서처럼 먼 것이다.

 그는 구약시대의 성령의 역사는 인간 속에 내주하신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양자의 영인 성령이 없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다고 한다.

 "구약시대에는 모두가 천사에 의해 이끌림을 받았기에 성령을 받은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들은 양자의 영이 없기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지 않았습니까?"(마귀론 상, p.57)
 그런 점에서 예수 이전에는 성령의 내주가 없었다고 한다.

 "예수 이전에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성경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권능을 입어' '감동함을 입어'하여 위에 입었다는 뜻이지 '내주'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승천하신 다음 오신 성령에 대하여는 '성령이 너희 안에 오시리라',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하여 모든 사람 속에 '내주하리라'는 말로 나옵니다."

 "…과거 선지자들도 성령을 힘입었고, 요한도 '모태로부터 성령 충만함을 입어'라고 했으나 그들은 성령의 권위로 외투를 입고 있듯 힘입었던 것이지 내주하여 임하신 것은 아닙니다"(성령을 알자. pp.95-96).

 그렇기 때문에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은 모두 천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의 신, 하나님이 보내신 영들은 천사들을 말하는 것이지 성령이 아닙니다."(마귀론 상, p.112). 그래서 창세기 1:2에 "하나님의 신"도 천사를 말한다고 했다.

 "구약에서 아브라함이나 모세에게 나타난 여호와가 천사였던 것같이 하나님의 신이 그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는 것은 하나님의 천사가 수면 위에 운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신은 모두 천사를 말합니다"(마귀론 상, p.62).

 그의 성령론 역시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에 근거하여 이해할 때 잘 이해되는데 결국 김씨는 성령의 편재성을 부정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도 성령 받고 우리도 성령 받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지만 성령이 예수 안에 계실 때에는 어느 장소에도, 어느 사람 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늘로 가신 다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교회 안에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성령을 알자, p.96).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시기 전에는 성령은 예수 안에 계셨으니 다른 사람에게 있을 수 없다는 말을 볼 때 성령의 편재성이 와전히 부정되고 있다. 그러나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비로소 교회에 성령이 오셨다는 말은 성령의 편재성을 부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스스로 모순되는 말이다. 즉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교회에 성령이 왔다는 말은교회에 성령이 오신 후에는 하늘에 계신 예수님 속에는 성령이 분명히 안계신다는 말이 된다.

 다시 상기하여 보자. 성령이 예수 안에 계실 때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가 우리 안에 있을 때 성령이 된다는 김씨의 말을 따르게 되면 구약에서의 성령이 내주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안계셨다는 말이 되고, 신약의 예수님이 승천하신후 성령이 교회 안에 계신다는 말은 아버지가 우리 속에 오셨다는 말이니 하늘에는 아버지가 안계신다는 말이 된다.

 그는 심지어 성령이 임하지 않아도 예수를 인정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고(성령을 알자, p97) 오직 예수님의 공생애는 성령이 오심으로 시작되는 것 같이 교회가 성령을 받을 때부터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한다(Ibid., p.97). 그래서 성령이 없어도 구원은 받으나 공생애는 아니요 사생애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성령을 받아 공생애의 삶을 살지 않으면 면류관은 없다고 한다(Ibid., p.98).

 이처럼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엄격하게 따지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시대의) 성령의 사역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례 요한이 모태로부터 "성령충만함을 입어" 태어났다는 말도 성령의 내주가 아니라고 하게 되었고 양태론적 삼위일체관에 의해서 성령이 예수 안에 계실 때는 어느 누구의 속에도 성령이 없다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속에 성령을 받게 되면 그 성령은 하늘에도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 보다는 성령은 한 분인데 어떻게 모든 사람들 속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갑 속에 성령이 있으면 을 속에 성령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김씨는 성령의 역사를 모두 천사의 역사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비록 김씨는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셨다는 말을 하지만 사실은 천사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으며 권능을 받는다고 할 때의 성령을 권능과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한번 움직이면 그의 주변을 경호하는 수행자들이 많이 수행하며 뿐만 아니라 대통령이 가만히 있어도 수행자들과 경호원들은 계속 일하듯이 성령이 임하시면 이러한 권능들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있으면 자연히 수행자가 따르는 것입니다"(마귀론 상, p.113).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지배를 받는 자들은 천사가 수종들려고 보냄을 받게 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라는 말은 '천사를 얻고'라는 말로, 신약시대의 권능은 천사와 동격입니다"(Ibid., p.111).

 김씨는 천사의 숫자에 따라 능력있는 성도의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귀신도 천사가 쫓고(T.P.21-2) 인격형성도 천사가 하며(마귀론 중, P.67) 가변된 천사, 즉 미혹의 영, 모든 행동과 생각도 천사가 주장하고 관리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비판해 보자.
 한 마디로 김씨의 삼위일체론은 구약에는 일신론이요 신약에서만 삼위일체론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나마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론이다.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있기 전에는 예수가 있을 수도 없으며 그러기에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 본래 이름이란 말이 가능했고(김기동, 보이지 않는 벽, 서울, 1982, p.185) 구약에는 성령이 인간 속에 내주한 일이 없었으며 그러기에 구약에 나온 하나님의 신은 모두 천사란 말은 자연스런 결론이다. 왜냐하면 성령이란 아버지가 인간 속에 있을 때만 성령이라는 그의 정의를 볼 때 구약에는 성령이 인간 속에 내주한 일이 없다는 말은 아버지께서 우리 속에 내주한 일이 없다는 말과 같은 말이기 때문에 구약에 성령이란 이름조차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구약의 성령의 역사를 말한다면 스스로 모순될 뿐이다. 더욱이 창세기 1:2의 하나님의 신마저도 천사로 볼 수밖에 없음은 하나님의 신을 성령으로 보면 그가 내린 성령에 대한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성령은 아버지가 우리 속에 있을 때만 성령이신데 수면위를 운행할 그런 신은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사람의 영 자체가 신이요, 사람의 영은 천사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라고 한 점을 볼 때(T.P.35-1)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을 천사라 했고 사람의 영(귀신을 포함해서)은 하나님의 신이기 때문에 결국 정통교회가 보는 성령, 즉 하나님의 신은 천사나 귀신 수준으로 바꾸어 버림은 자연스럽고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비록 그가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이론적으로 말하지만 실질적으로 천사의 역사로 설명하여 누가 보아도 성령은 허수아비 같은 인상을 못 벗어나는 이유 또한 삼위의 양태론적 이해와 성령의 편재성을 부정하는 자세에서 나온 체계없는 이론일 뿐이다. 그가 "성령이 예수 안에 계실 때에는 어느 장소에도, 어느 사람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성령을 알자, p96)는 말을 깊이 분석해 보면 성령의 편재성을 부인함을 알 수 있게된다. 혹 그가 신약시대의 성령의 편재성을 억지로 주장하더라도 구약의 신은 삼위 하나님이 아니요 그나마 이해하는 양태론적 삼위일체마저도 신약에만 국한될 뿐이다.

제Ⅲ장
창조론에 나타난 베뢰아의 이단사상

 창조론만큼 중요한 교리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현상이든 그 의미를 찾을 때마다 근원부터 살펴야 하는 학문적 습관과 당연한 방법론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단은 모든 교리의 근원인 창조론에서부터 달라진다. 그리고 가장 많은 이단 사상을 숨길 수 있는 숲 또한 창조론이다. 더욱이 우리는 창조론에서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많은 부분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호기심을 정통신학에서 채워주지 못하는 것을 이단 사상으로 채울 위험이 큰 것이다.

 김씨의 창조론을 살펴보자.
 먼저 그가 말하는 창조목적은 마귀를 멸하기 위함이라기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천사가 타락한 시기는 천지창조 전이 될 수밖에 없다(마귀론 상, p.64). 그 증거는 이렇다.
 그는 세 가지로 하늘을 구별하여 가르치는데 지구 가까이에 지구의 하늘(sky)이 있고, 그 다음에 궁창의 하늘(space)이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하늘(heaven)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타락한 마귀를 하나님의 하늘에서 내어 쫓아 궁창에 가두신 때가 창세기 1:8이요, 그 마귀가 셋째 하늘로 내려온 때가 요한계시록 12:7-10이라고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하늘과 궁창의 하늘 사이는 물벽이 있는데 그 물벽이 창세기 1:2의 그 물벽이요 거기 있는 하나님의 신, 즉 천사는 마귀가 하늘나라에 못들어 오도록 지키는 천사라고 한다.

 "천사는 하나님의 일을 수종드는 종으로서 지음을 받았는데 그가 하나님을 반역했기에 하나님은 계획전으로 그 천사를 멸하기 위해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천사가 인간보다 먼저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만물을 지을 때에 천사도 함께 있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에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할 때의 그 신은 성령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교도소를 지키는 교도관은 법무장관의 지시 하에 그 교도소를 지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운행한다는 것은 곧 천사를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교도소에 법무장관이 직접 총을 메고 나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교도관을 파송하는 것같이 하나님께서 영원한 결박으로 지키신다는 뜻입니다"(마귀론 상, pp.61-62).

 그리하여 첫째 날 만든 빛은 어둠의 세력인 마귀에 대한 심판의 시작이라고 한다.
 "만물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이미 천사가 타락했기에 이 타락한 천사를 멸하기 위해 만든 곳이 바로 우주입니다. 성경은 여기에 흑암과 먼지와 안개가 가득하더라 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우주를 만드실 때 창조한 사실이 없으나 이미 과거에 있었던 것이며 이러한 우주 안에 그를 영원한 결박으로 가두신 것입니다. 천지창조는 그 다음에 구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1의 태초는 만물의 태초로 이 우주 안에서 이루어진 태초입니다. 그곳이 어둠과 먼지와 안개로 가득했기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신 것입니다. 이 빛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닙니다. 우주 안에만 있는 시한적 존재입니다. 이러한 피조물은 어느 때인가는 없어질 것들입니다."

 "이러한 계획은 하나님이 천사를 만드셨을 때 그들의 배타적인 부분, 곧 그들이 지위를 떠났을 때의 만약을 위해 사전에 그러한 준비를 하셨을는지도 모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신 것은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빛이 있으므로 인류가 있게 되고 인류가 존재하게 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곧 인자가 오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마귀론 상, pp.64-65).

 여기에서 소위 성도들에게 가장 미혹이 되는 둘째 날 궁창 창조시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없는 이유인데 거기에 마귀가 있기 때문이라는 사상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중을 만드셨으나 좋았더라 하지 않으신 것은 마귀가 거할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누가 형무소를 만들어 놓고 놓았더라 하겠습니까?"(마귀론 상, p.66).

 그리하여 하나님은 마귀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대적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합법적인 권리를 받았다는 논리가 나오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시고 사탄으로 마귀가 되게하여 그 사람을 대적하도록 방향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합법적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곧 마귀라는 불법을 합법화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4장에 시험하는 자라고 주님께서 합법적인 신분이기에 그가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것은 합법적인 권리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면 매일 시험에 빠져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마귀론 중, p.23).

 비판을 하기 전에 창조론에서 한 가지 더 소개해야 할 중요한 이단사상이 있다. 소위 이중아담론이다. 이 사상은 마귀론 상권 79페이지에서부터 95페이지에 잘 나타나있다. 간단히 설명해 보자.

 창세기 1:27의 남자와 여자는 몸과 혼만 가진 존재인데 창세기 2:7의 아담은 영과 혼과 몸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이다. 1장의 인간은 사람이라 하고, 2장의 인간을 아담이라고 한다. 직접 인용해 보자.

 "창세기 1:27의 '하나님이…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할 때의 이 남자와 여자는 지금 말하는 인격적인 사람이라기보다는 남자와 여자라는 곧 암컷과 수컷이라는 하나의 자웅을 구분하는 이치로서의 표현입니다. 이때 많은 자손을 얻어 번성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육체는 생물학적인 유전은 가져왔지만 영적인 유전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 사람 자체가 여섯째 날 모든 동물을 만드심 같이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들 역시 몸과 혼을 합해 완전한 인격이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육신이 있는 동안 이들에게는 도덕이 잇고 윤리가 있었으며 또 문화도 있었습니다. 다만 영적인 요소가 없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내세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당시 죄 지은 자들은 내세가 없는 자들이기에 더 행복할는지 모릅니다"(마귀론 상, p.81).

 이 2장의 아담은 충만한 수의 사람들(영이 없는 짐승과 같은)중에 뽑혔으니 굉장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이란 말은 생 또는 삶(육+혼)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여 땅에 충만하라 명하심으로 이들의 임무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명하심으로 이들의 임무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몇몇 사람중에서 한 사람으로 뽑힌 것이 아니라 땅에 충만한 수 중에서 뽑혔으니 굉장한 사람입니다. 몸으로서의 혼, 곧 인격인 아담을 하나님은 생령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마귀론 상, p.84).

 이제 하나씩 비판하겠다. 다음 세 가지로 나누어 하려한다. 첫째,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비친 베뢰아의 이단사상. 둘째, 하늘 문제 속에 비친 베뢰아의 이단사상. 셋째, 이중아담론에 비친 베뢰아의 이단사상.

Ⅰ.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비친 베뢰아의 이단사상
 우선 그가 보는 천사의 타락시기부터 문제가 된다. 성경은 전혀 천사의 타락시기를 말하고 있지 않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와 하나님이 절대창조만은 무너뜨릴 수 없는 절대적인 사상이다. 성경의 가르침이 그렇고 역사적인 기독교의 전통이 그렇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천사의 타락시기를 말하려면 겸손하게 가능성 정도만 비쳐 말해야 하며 그것도 하나님의 절대창조와 선한 창조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복음적인 학자들은 천사의 타락시기를 창조 후로 보는데 공통적이다.

 그 다음에는 창조목적이 잘못 되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된 일이다. 그런데 마귀를 멸하기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는 말은 인간은 하나님의 노리개가 되어 버린다. 하나님은 계획적으로 마귀를 멸하기 위해 사람을 만들었다는 말과, 마귀는 불법자로서 하나님께로부터 그 불법을 합법화 하도록 하는 권리를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은 악하며 인간타락의 책임이 하나님께 돌아가 버리는 무서운 사상을 가지게 된다.

Ⅱ. 하늘 문제 속에 비친 베뢰아의 이단사상
 우선 김씨가 주장하는 세 가지 하늘이 있는데 우주(궁창의 하늘과 지구의 하늘을 합하여)와 천국의 하늘이 물벽으로 구분되며 이 우주는 결국 사탄이 지배하는 음부라고 하는 사상은 그의 상상의 산물일 뿐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하늘과 궁창의 하늘은 물벽으로 나누어 졌다고하여 그 선이 선명한데 반해 지구의 하늘과 궁창의 하늘은 구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보니 궁창은 마귀의 감옥으로 만들었으며 천지창조 둘째 날 궁창 창조에 만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란 말이 없다고 하는 그의 이론은 잘못된 말이지만 그것을 인정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 버렸다.

 궁창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마귀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가 가르친 베뢰아 강의에 보면 바로 넷째 날 만든 해와 달과 별들이 궁창에 있다고 했다(T.P.3-1,2). 이는 그가 과학자들의 말을 빌려 우주, 물벽과 물벽의 지름을 백만 광년이라고 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상하다. 궁창에 마귀가 있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않은데 마귀의 감옥 속에 있는 해와 달과 별은 어떻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제 둘째 날 창조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이 없음은 궁창이 마귀의 감옥이기 때문이라고 한 김씨의 잘못을 적극적으로 비판해 보자.

 ① 창세기 1:1의 창조에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이 없다.
 김씨는 창세기 1:2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영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김씨에 의하면 창조 자체가 마귀를 위해 창조한 세상이니 그렇게 해석함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기에 1:의 창조를 가리켜 어둠과 먼지와 안개로 가득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했다는 것이다(마귀론 상, P. 65).

 본문의 "혼돈"과 "공허"는 단지 사람이 살 수 없는 조직되지 못한 자연적인 상태를 가리키고 있을 뿐이며 더욱이 "흑암"은 자연적인 어두움일 뿐이지 영적 어두움이 아니다. 하나님은 빛도 만드셨지만 어두움도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사 45:7).

 ② 1:4의 "어두움"에 대해서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이 없다.
 1:2의 "흑암"도 사탄에 의한 어두움으로 본다면 자연히 1:4의 "어두움"도 사탄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김씨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음이 이상하다. 이 "어두움"또한 자연적인 어두움을 가리킨다.

 만일 자연적인 어두움마저 사탄적인 것으로 본다면 김씨는 자기방에다 밤이 되면 수만 볼트의 전깃불을 가능한 한 많이 켜 놓고 자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김씨에게는 자연적인 어두움이 곧 영적인 어두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빛도 만드시고 어두움도 만드셨다.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나오나이다"(시 104:20)라고 했다. 그런데 창세기 1:4에 보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빛에만 해당되고 어두움에 대하여는 말하고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③ 1:27,28의 인간창조에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없다.
 위 두 가지는 해석적인 입장에 따라 이의를 제기할 가능성이 남는다. 그러나 인간창조 문제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이 없음은 해석할 길이 없다. 25절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은 땅의 짐승에 대하여 한 말이지 인간에 대하여 한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인간마저도 마귀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이 없는 것이가? 그렇게 본다면 모든 창조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이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김씨의 이론을 따르면 어차피 창조는 마귀를 멸하기 위한 창조였으니까 말이다.

 ④ 1:31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이 모순된다.
 이 본문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에서 궁창창조는 예외인간? 1:2의 "흑암"도 1:4의 "어두움"도 1:26, 27의 인간도 예외인가? 오직 궁창창조 하나만 예외가 있더라도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이란 말은 모순되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경계시를 잘못하신 것이다.

 ⑤ 궁창창조 후에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 대신 "그대로 되니라"라는 말이 있다(1:7).
 "그대로 되니라"란 말은 누구의 뜻대로 되었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뜻대로 되었다는 말이다. 김씨도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믿는 줄 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뜻하는대로 원하시는대로 만드신 것이 둘째 날 궁창이다.

 본문에 "그대로 되니라"란 말이 다른 곳의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을 대신한다. 그리고 1:31의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은 이 궁창까지 포함한 모든 것이다.

Ⅲ. 이중아담론에 나타난 베뢰아의 이단사상
 이중아담론이 이단적이라는 것을 아는 자는 김씨 자신일 것이다. 그가 1983년 자신이 속했던 침례교 총회에 이중아담론을 가르치지 않겠다고 한  각서를 보아 알 수 있다(물론 후에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결국 그 교단에서 1987년 11월에 이단으로 정죄되었지만). 이 항은 인간론의 측면에서 별개의 장으로 취급될 수 있으나 본항에서 취급하겠다. 이 이중아담론과 베뢰아의 인간론은 "마귀론"상권 사람의 인견(pp.79-95)에 잘 나타나 있다.

 우선 하나님의 이중 인간창조문제를 비판하고 인간의 인격문제는 후에 취급하자.
 김씨는 1장의 인간은 혼과 몸으로만 이루어진 존재로 단지 동물의 자웅을 칭하는 용어로 보고 2장의 인간은 혼과 몸 외에 영을 받아 수많은 1장의 사람들 중에서 뽑힌 개화딘 인간이라고 한다(마귀론 상, p.79). 그러므로 그는 히브리 원문에 보면 창세기 1:27의 남자와 여자가 2:8의 인간과 다름을 잘 알 수 있다고 하였다.

 "히브리 원문을 보면 창세기 1:27의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가 영적인 것을 의미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동물적인 자웅을 구분하고 있는 것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란 말은, 생 또는 삶(육+혼)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여 땅에 충만하라 명하심으로 이들의 임무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몇몇 사람 중에서 한 사람으로 뽑힌 것이 아니라 땅에 충만한 수 중에서 뽑혔으니 굉장한 사람입니다. 몸으로서의 혼, 곧 인격인 아담을 하나님은 생령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령은 아담 하나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하와의 영도 따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아담 하나를 만들어 아담에게서 분리되었다가 다시 합하여 아이를 낳은 것입니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부터 시작했으나 아다믄 충만한 수의 사람 중 하나를 뽑아 경건한 자녀를 얻기 위해 분리시킨 것입니다"(마귀론 상, pp.84-85).

 원래 이단은 거짓말의 명수이다. 김씨는 원문을 들면서 결정적인 거짓말을 했던 경우가 두 번 있는데 그 한 번이 바로 이중아담론이다. 이는 실수로 인한 거짓말이 결코 아니다. 실수로 인해 거짓말을 할 성질의 것이 아니며 그럴 가능성이 신학적으로나 어학적으로나 조금도 없다.

 왜냐하면 1:27의 인간이나 2:8의 인간이 경우 히브리 원문은 똑같이 '아담'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본 상 그렇게 말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오직 고의적인 거짓말을 하여 미혹하려는 경우와 원어도 모르면서 아는 체 하는 무지와 교만의 가능성 외에는 절대로 다른 가능성이 없다.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이단들은 성도들을 미혹하기 위해 성도들이 모르는 원문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데 구원받은 자는 의인이라 해야하며 죄인이라 하면 반드시 지옥에 간다고 하는 구원파 이단의 경우도 그렇다(특히 박옥수파의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들에게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15에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했다고 말하면 원문에는 과거시제로 과거에 죄인의 괴수였다고 했기 때문에 현재 죄인의 괴수라고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원문에는 과거시제가 아닌 현재시제로 되어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단들의 거짓말을 간파할 수 있다.

 1장의 인간과 2장의 인간은 똑같은 인간이다. 2장의 인간도 1장의 인간처럼 하나님 형상을 가진 인간이요, 1장의 인간도 2장의 인간처럼 생령을 가진 인간이다. 단지 2장은 1장에 대한 더욱 구체적인 창조의 모습을 가르치는 것이다. 2:4의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의 "대략"이란 말은 히브리어 "톨도트"란 말로 구체적인 모습을 설명하는 단어이다.

 만일 1장 창조와 2장 창조를 다른 창조로 보면 많은 문제점들이 생긴다. 1장의 인간은 에덴동상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는 말이 되며 에덴동산을 위한 창조가 따로 있게 된다. 그 이유는 2:8에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라고 한 것을 보아서 에덴동산을 따로 창조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1장에는 에덴이란 말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김씨가 말하는 1장의 동물과 같은 인간(동물의 자웅을 칭하는 것과 같은 인간이니까)에게 하나님 형상을 주셨다는 말이 설명되지 않는다. 27절과 28절을 보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단지 동물과 같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었다고 한다면 김씨는 하나님 형상에 영적 요소를 배제시켜야 할 것이다.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어떤 성품과 같은 하나님 형상을 주었다는 것도 모순되는 말이 된다. 더욱이 그런 인간에게 만물을 정복하고 다르시라는 특권을 주었음도 모순된다. 그보다 영적 요소가 없는, 영적 요소가 배제되는 하나님 형상이란 무엇인지 설명할 길이 없다. 이는 하나님 형상에 대한 전통적인 교회의 이해와 완전히 배치되는 이단적 해석이다.

 본 항에서 김씨의 인간론 문제를 취급할 수 있다. 그러나 마귀론에서도 이 점이 핵심이 되기 때문에 다음 장에서 베뢰아의 인격 문제를 같이 취급하여 비판하겠다.


제Ⅳ장
마귀론에 나타난 베뢰아의 이단사상

 김씨는 마귀를 모르면 예수를 모른다고 했는데 과연 그러한가? 자신의 마귀론은 성경에 근거했으며 또한 경험에 근거하여 만들었다고 하는데(마귀론 상, pp.9-10) 얼마나 성경에 접근하고 있으며 얼마나 성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가? 그리고 그가 그토록 강조하는 경험과 성경은 어떤 관계에 있으며, 그의 경험 앞에 성경은 얼마만한 의미가 있는가?

 그의 계시론에서 밝힌 것처럼 이미 그의 설교나 학설은 성경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본장을 다섯 가지로 분류하여 소개비판 하겠다.

Ⅰ. 김씨가 사탄과 마귀에 대해 내린 정의의 오류
 베뢰아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탄과 마귀는 창세전에 하나님께 혁명을 일으킨 천사(마귀론 상, p.37)로서 원래 동격인데 사탄은 하나님을 대항할 때를 가리키고 마귀는 인간을 대적할 때 부르는 명칭이라 한다.

 "사탄과 마귀는 동격으로 사탄이라고도 하고 마귀라고도 하여 단수입니다. 사탄은 흑암에 갇히기 전 자기 지위를 떠나 하나님께 도전할 때를 말하며 이는 혁명가라는 뜻으로 타락한 자의 신분을 말합니다. 임금을 반역했을 때에 혁명가가 되듯 사탄은 유일하신 하나님께 반역을 일으켜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반역한 원수일 뿐, 권세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주 안에 들어와서 이를 주관하는 자로 권세의 대명사입니다"(마귀론 상, p.151).

 그래서 그는 성경에 사탄을 대적하라고 한 일이 없다고 거듭거듭 말한다. "우주를 창조하기 이전, 하나님을 반역하고 대적하는 자의 신분을 사탄이라 하며 우주를 창조하고 사람을 창조한 후부터 마귀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사탄을 대적하라는 말은 없습니다"(마귀론 중, p.23).

 즉 사탄은 창조 전, 하나님을 도전할 때 가진 이름이요, 마귀는 우주 안에 들어와 인간을 주관하는 합법적인 불법자라고 한다.

 그의 말이 옳은지 살펴보자.
 우선 사탄마귀의 타락시기에 있어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타락의 시기를 창조 전으로 잡는 것은 하나님을 불법자로 만들어 버렸으며 인간은 불법적인 합법자 마귀를 멸하기 위하여 피조된 이용물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의 시기를 창조 후 하와가 유혹받기 전 어느 시기로 보는데 복음적인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김씨가 사탄은 하나님을 도전할 때 사탄이라고 한 말과 인간을 대적할 때 마귀라고 한 말은 전혀 성경적으로 무근한 말이다. 김씨는 너무나도 무책임하게 자신의 사상을 전개시키는데 이든 이단의 속성이요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사탄과 마귀에 대한 정의이다.

 사탄이란 말은 신구약에 56회 , 구약에서는 명사형태로 28회, 동사형태로 6회 정도 사용되고 있는데 김씨의 말처럼 창조 전에 하나님을 대적할 때만 사탄이거나 창조 후부터는 인간을 대적할때는 마귀라고 하는 말은 전혀 무책임한 말이다.

 김씨 말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마 4장) "사단아 물러가라"(10절)는 말은 모순된다. 첫째, 그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은 인간이신데(하나님이 아닌), 인간 예수를 대적하는데 왜 "사단"이라고 했는가? 둘째, 창조 후에는 마귀에게 맡겨진 일인데 왜 마귀가 아니고 사단인가?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할 때(23절), 김씨 말에 의하면, 베드로가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에 사단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니다. 분명히 김씨가 주장하는 인간 예수를 대적했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했다. 여기에서 김씨의 말이 옳다면 결국 모든 사단의 역사는 직접·간접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의 사상을 완전히 뒤엎을 몇 가지 경우를 더 들어보자.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땅값을 속였을 때 베드로가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3절)라고 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가리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다고 했으며(고후 12:7),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2:31에서 시몬에게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라고 하였다. 그의 말로하면 이는 사단이 아니라 마귀가 되어야 한다.

 이 점은 구약에서도 같다. 욥기 2:7에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틀림없이 사단이 욥을 쳐서라고 했다. 분명히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 아니라 욥을 대적했다.

 그보다 스가랴 3:1을 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여기에서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에서 그는 누구인가? 틀림없이 여호수아이다. 인간 여호수아를 대적하는데 마귀가 아니고 사단이었다.

 이제 인간을 대적할 때 마귀라는 그의 말을 살펴보자. 역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실 때(마 4장)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다고 하였다. 김씨의 말로 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니까 인간 예수를 시험하였으니 마귀가 맞는데 그때 "사단아 물러가라"고 한 것은 모순된다. 그러나 마귀를 사단이라고 한 것을 보니 하나님을 대적하든 인간을 대적하든 사단이요 마귀인 것이다. 그리고 김씨의 주장처럼 베드로가 예수님께 책망을 들을 때 하나님께 대적했으므로 사단이라고 한 것이 사실이라면(마 16:23)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할 때야말로 더욱 사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가룟 유다를 가리켜 "마귀니라"(요 6:70)라고 하셨다.

 그의 말에 의하면 천사장 미가엘과 모세의 시체로 싸울 때 그 원수를 가리켜 "마귀"라고 했는데(유 1:9) 천사를 대적할 때는 마귀인지 사탄인지 모르겠다.

 결론적으로 볼 때 성경에서 사탄과 마귀라는 용어가 구별된 의미로 사용됨에는 틀림이 없으나, 사탄과 마귀를 같은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계 12:9; 20:2). 김씨의 마귀론은 그 출발부터가 성경을 잘 살펴보지도 않은 채 무책임하게 엮어 놓은 이단체계임을 알 수 있다.

Ⅱ. 귀신은 제명에 죽지못한 불신자의 사후의 존재라는 말의 오류
 김씨의 모든 신학의 초점은 바로 이 귀신의 존재와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현상을 맞추어져 있다.
 먼저 인간수명문제를 생각해 보자. 김씨는 인간의 평균수명이 노아 이전에는 천 년 가까이도 살았는데 노아 때 120년으로 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그가 노아 이후부터 120년이 인간의 수명이라고 가르쳤는데 언제부터인가 이제 평균수명이 고정되지 않은 것으로 설명을 하는 것 같다.

 "창세기 6:3에 인간이 세상에 머무는 연수의 한계를 120년이라 했습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천 년 가까이 살았는데 노아 홍수 이후부터 사람의 수명이 줄어들었습니다. 곡식을 심으면 다 고르지 않고 위로 올라오는 것도 있고 내려가는 것도 있듯이 하나님이 인간의 연수를 120년이라 하신 것은 평균수명이기에 다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곳은 더위와 영양부족으로 설흔 네 살이 최장수인 곳도 있습니다"(마귀론 상, p.180).

 그런데 그가 실례를 들어 설명할 때 80세를 자연수명으로 설명하기도 하고(Ibid., p.180), 또한 100세를 자연수명으로 예를 들기도 한 것을 볼 수 있다(Ibid., p.187). 어쨌든 자연수명을 다 채우고 죽은 불신자의 영은 무저갱으로 가고 그렇지 않고 제명에 죽지 못한 영은 제 수명이 차기까지 귀신으로 활동하며 몸에 붙어 질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수명이 백살인 을이라는 사람이 암으로 60살에 죽었다고 합시다. 그는 자연수명에서 60살에 죽었기에 아직 40살이 남아 있습니다. 이때는 무저갱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음부에서 자연수명이 차기까지 40년간을 마귀와 그 사자들과 함께 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Ibid., p.187).

 그래서 100살이 제명인 자가 2살에 죽으면 98년간 인간을 괴롭힌다는 것이다(Ibid., p.187). 그리고 귀신이 들렸다가도 자연 수명이 다 되면 자연히 귀신이 떠나 무저갱으로 간다고 한다(Ibid., p.188).

 비판해 보자.
 "제명에 죽지 못한 불신자"란 말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한다.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위배된다. 인간의 수명은 하나님이 정하신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마 10:29). 만일 인간의 수명을 하나님이 정하시고 또 하나님이 죽게하여 남은 생명을 귀신으로 일하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 편에서 스스로 모순된다.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작정을 파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의 수명은 하나님이 아닌 운명론적으로 정해졌을 것이며 그러하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도전이다. 이 점에 대한 김씨의 성경적 증거를 찾을 길도 없으며 또한 구체적 논증을 본 일이 없다.

 이제 귀신은 과연 불신자의 사후의 영인가 하는 점을 살펴보자.
 그는 8,000명을 상대로 하여 귀신이 불신자의 사후의 존재임을 밝혔다. 그의 경험에 의하면 "나는 죽은 불신자의 영혼이다"라고 한 자가 7,995명이요, "나는 천사다"라고 한 자가 2명이요, "나는 신자였으나 후에 배교했다"는 자가 2명이요, "나는 신자였으나 자살했다"는 자가 1명이라고 했다(마귀론 하, p.146). 이 귀신은 인간의 몸 속에서는 인격을 나타내지만 인간의 몸 밖에 나가서는 항구적 존재인 영으로 있다고 한다.

 이를 살펴보자.
 "성경은 '귀신 들려'라 하며(마 8:16,28; 막 9:25) 사람 몸안에 귀신이 들어 잇을 때에는 '소오마'(헬)라 하며 인격으로 나타냈으며 '귀신이 나가더라'하여 육체에서 귀신이 떠나게 될 때에는 '퓨뉴마'(헬)라 하여 인격이 아닌 영으로 다루었습니다."

사람몸+귀신=인격(소오마)
(X)+귀신=영(퓨뉴마)
 "인격은 몸과 혼은 함께 말하면 영은 하나의 항구적 존재이기에 귀신 들린 사람이라 할 때의 귀신이란 말은 '인격을 지닌 귀신이 들려'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육체가 없어지면 영 안에 인격이 잠재해 버려 그 기능이 나타나지 않기에 영이라 말합니다. 귀신도 사람과 같아 몸을 떠나면 그 인격이 영 안에 잠재해 버리기에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영으로서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귀신은 사람 몸 안에 들어와서만 역사하지 몸 밖에서는 역사하지 않습니다"(마귀론 상, pp.167-168).

 그가 귀신이 몸 밖에서는 인격이 아니라는 말에 대한 비판은 다음에 따로 하겠으나 먼저 그가 원어를 말하며 결국 성도들을 속였던 두 번 째 거짓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마태복음 8:16, 28과 마가복음 9:25을 들어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 몸 안에 있으면 '소오마'(몸이란 뜻임)가 되고 귀신 자체는 '퓨뉴마'(영이란 뜻임)가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거짓말이다.

 성경에는 그런 일이 없다 .단지 동물의 몸이나 인간의 썩을 몸과 육체를 가리켜 '소오마'라고 했으며 귀신이 몸 속에 있을 때 '소오마'라고 불리워진 경우는 성경에 단 한번도 없다.
 귀신이 불신자의 사후존재라는 김씨의 주장은 체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하나의 학설이라고 하기도 하고(마귀론 상, p.179), 성경에서 명제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는 말은 사실이라 하기도 하고(마귀론 하, p.140), 그러나 성경은 귀신의 정체에 대해 우리에게 충분한 증거를 보여 준다고 하기도 한다(Ibid., p.140). 그리고 학문적으로 뒷받침 하기가 어려움을 인정하고 이론이기에 표현에 약간의 무리가 있다고 전제하기도 한다(마귀론 상, p.9). 그러나 그가 말하는 성경적 증거만 살펴보자. 그가 제시하는 성경적 증거는 일곱 개가 된다. 사도행전 16:16, 이사야 8:19, 사무엘상 28장의 신접한 여인 사건, 고린도전서 10:20-22, 시편 106:28, 29 마가복음 6:14-16, 마태복음 16:13, 14이다(마귀론 하, pp.141-145).

 하나씩 소개하며 비판해 보자.
 모두가 다 적은 가능성을 확대하여 해석했을 뿐이며 결정적으로 귀신이 불신자의 사후의 영임을 밝히고 있는 부분은 없다.

 첫 번째 성구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지라"(행 16:16).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에서 점하는 귀신의 정체가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라고 생각한다면 다음의 이사야 8:19을 제시한다.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여기에서 문제는 '죽은 자'에 대한 해석이다. 이 '죽은 자'가 바로 신접한 자나 마술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점하는 귀신들을 말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모순된다. 이 신접한 자와 마술사 속에 있는 귀신은 비록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라 하더라도 죽은 자라고 할 수는 없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귀신 자체가 항구적 존재이다. 항구적 존재는 죽을 수 없는 것이다. 신약 에베소서 2:1에 우리 성도를 가리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했다. 단지 성경은 영적 생명이 없는 자르 죽었다고 한다. 이 점은 누가복음 9:60에서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장사하게 하라는 말의 두 번째 "죽은 자"에서도 같은 의미이다.

 세 번째로 그는 사무엘상 28장의 사울왕의 경우를 든다.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 갔을 때 그 영인이 한 노인을 올라오게 하였는데 사울이 사무엘인 줄 알고 땅에 대고 절하였다는 것이다(삼상 28:13, 14). 그런데 김씨가 강조하는 점은 사울왕이 그 신을 본 것이 아니고 신접한 여인만 보았다고 한 점이다.

 "여기서 분명한 사실은 사울왕 자신이 그 신을 본 것이 아니고 신접한 여인이 신접한 방법으로써 그 신을 불러 올렸고, 땅에서 올라온 그 신을 그 신접한 여인만이 복 있었다는 것입니다(삼상 28:13)"(마귀론 하, p.142).

 그런데 이때 나타난 사무엘은 사무엘이 아닌 이 신접한 여인의 술법에 이하여 끌어 올려진 다른 사후 존재라고 한다(Ibid., p.143). 왜냐하면 그 사무엘이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삼상 28:19)는 예언은 참 예언일 수 없다고 한다.

 "사무엘의 사후 형편과 사울의 사후 형편이 같은 수 없습니다. 사무엘은 죽어 거룩히 장사되었고(삼상 25:1), 사울은 자살하여 (삼상 31:4) 그 시체는 저주받아 더럽게 처리됐습니다(삼상 31:7-13). 결코 거룩한 자의 죽음과 타락하고 자살한 자의 죽음을 동일시 할 수 없습니다"(Ibid., p.143).

 비판해 보자.
 김씨가 그 사무엘이 참 사무엘일 수 없다는 데는 정통적인 신학자과 의견이 같다. 그런데 김씨가 사울은 그 신(사무엘)을 보지 못했다고 하는데는 문제가 있다. 그가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항구적인 존재일 뿐, 육신을 입고 있는 사울이 인격이 아닌 사후의 존재를 보았다는 말이 그의 귀신론의 체계상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사울은 분명히 그 신이 노인이라는 것도 알았고 겉옷까지 입고 있음을 알았고, 더욱이 15절에서 들려온 그 음성은 사무엘의 음성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말처럼 모습은 볼 수 없었다면 소리는 들을수 있는가? 귀신은 반드시 몸에만 들어오고 몸에 들어 올 때만 인격인데 어떻게 소리를 낼 수 있겠는가?

 또한 모순되는 것은 자신은 8,000명을 상대한 경험 속에서 귀신의 말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서 본문의 사무엘의 "내일…나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은 사실일 수 없다는 점이 모순된다. 김씨의 주장은 이같이 모순투성이다.

 네 번째 성구는 고린도전서 10:20-22이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그는 "이방인의 제사는 귀신에게 하는 것입니다"(Ibid., p. 144)라는 짧은 한 마디로 위의 귀신이 사후의 존재라고 비약해 버렸다. 자시의 전제를 하나님 말씀의 전제로 삼은 것이다.

 다섯 번째 성구는 시편 106:28, 29이다.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 앞의 이사야 8:19에서와 같이 '죽은 자'를 귀신이라고 한다. 필자도 위의 두 번째 성구에서와 같은 모순점을 지적할 뿐이다.

 여섯 번째 성구는 마가복음 6:14-16이며, 일곱 번째 내용은 마태복음 16:13, 14이다.
 여섯 번째 성구는 헤롯왕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목 베인 요한이 살아났다고 생각했다는 내용이다. 일곱 번째 성구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 하나라고 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그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에 그런 사상이 너리 퍼져있었을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 당시의 사람들이 귀신은 불신자의 사후의 영 또는 악한 자들의 영이라고 생각했음을 부인하지 못하면서도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합니다"(Ibid., p.145).

 과연 위의 두 성구가 초대교인들이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 귀신이라고 믿었다는 말이 될 수 있으며, 아니 그렇게 믿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말이 될 수 있으며, 아니 그렇게 믿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그 신앙이 귀신은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라는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있겠는가? 구체적 변증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위의 입곱 개의 성구를 살펴 보았으나 어느 것 하나 성경이 그의 사상을 뒷받침해 주지 못하고 있다. 아니 그렇게도 중요한 계시라면 하나님께서 성경에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언급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
최삼경 목사가 쓴 <베뢰아 귀신론을 비판한다>(기독교문화협회刊, 1990년 9월10일 발행)를 전재했습니다.

출처: 교회와신앙


청교도들의 가정과 신앙교육

   

김 남 준  열린교회 담임목사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가정의 붕괴다. 아이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만나는 세계는 어머니이고 그 다음으로는 가정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의 질서, 사람의 의무 등을 교육받음으로써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준비된다. 그러한 가정은 하나님의 통치를 반영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들을 가르쳐줄 수 있는 가정의 기반이 해체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세상의 정신이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가정을 거짓된 세속의 가치관으로 물들게 하거나 붕괴시키기 때문이다. 세상의 정신에 물든 기독교 가정은 다음 세대에 참된 교회의 영적 번영과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해 헌신할 자녀들이 자랄 수 없다. 우리는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이 가정을 중시했던 사상으로 되돌아가 성경적 가정 교육을 재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가정교육

 

기독교 신앙의 개혁을 부르짖었던 종교개혁자들은 한결같이 자녀에 대한 종교교육의 책임을 부모들에게서 찾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언약백성들을 당신의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시는 중요한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교육적 책임과 역할에 대해 각성하도록 만든 사람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였다. 그는 부모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가장 중요한 의무가 자녀들을 신앙으로 교육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일을 교회와 학교가 도울 수는 있으나 결코 가정교육을 대신할 수 없다고 보았다. 자녀들은 부모와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을 습득해가야 한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가정을 교회와 함께 하나님이 주신 신적인 두 기관으로 이해했다.

 

존 캘빈(John Calvin)도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기독교교육을 특별히 강조했다. 그는 부모의 신앙고백을 통해 유아세례를 받음으로써 자녀들이 언약백성으로 공동체 속에 포함된다고 여겼다. 이러한 언약의 맹세는 자녀들에게는 부모의 기독교적 가르침에 순응할 것을, 그리고 부모에게는 자녀에게 기독교신앙을 가르칠 것을 맹세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목사의 직무는 교회 안에서 이런 일들이 올바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피고 감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호레이스 부쉬넬(Horace Bushnell)은 가정이야말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한 신앙교육의 현장이며 이러한 교육을 통해서 언약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유지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모는 교사로 부름을 받은 사람으로서 참된 신앙인이 되지 않는다면, 가정교육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더 나아가 자녀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교육할 때, 그 방법도 신앙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 각자에게 주신 다양성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신앙적인 삶과 성품을 형성해가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정은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통치를 공정하게 반영하는 방식으로 자녀들을 올바로 가르칠 수 있다고 보았다.

 

 

청교도와 가정

 

청교도였던 인크리스 매더(Increase Mather) 목사는 국가의 건강에서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이었다. 사회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복음화된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진실하고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필요하고, 그러한 세상의 변혁을 위해 섬길 수 있는 좋은 그리스도인은 가정을 통해서 배출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1679년에 타락한 가정들을 보며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가정은 교회와 국가의 양성소입니다. 가정을 잘 관리하십시오. 그리하면 나라는 보다 훌륭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뉴잉글랜드에서 경험하는 많은 상처와 커다란 불행들은 가정이 신앙적으로 무질서하기 때문입니다”.

 

 

1. 남편과 아내

 

중세 가톨릭에서는 결혼의 제일 목적을 자녀 생산으로 보았지만 청교도들은 결혼의 제일 목적을 거룩한 친교에 두었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의 주요 관심사는 그들의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신앙에 방해받을 정도로 사랑하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여겼다. 하나님만이 자신들의 가장 고귀한 사랑과 경배를 받으실 분이었고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을 향한 경배를 인간이나 피조물이 차지하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생각했다.

아내가 출산 중에 죽어가고 있을 때 털어놓았던 토머스 쉐퍼드(Thomas Shepard) 목사의 다음과 같은 참회는 청교도들의 정신을 잘 반영한다. “나는 더 큰 약속을 바친 내 하나님보다 아내를 나의 영혼으로 기뻐하며 그래서 은밀하게 오만해지고 마음이 육욕으로 가득 차는 것을 깨달았다”.

청교도들에게 아내를 얻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내를 얻는 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데 더 훌륭한 준비를 갖추기 위한 것이었으며, 아내를 더욱 하나님께로 가까이 인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청교도 남편은 법적으로 가정을 대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또 제자들과 종들을 포함하여 자기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징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가족의 우두머리이며 주인이었다. 남편은 영적인 지도력과 통제권을 행사할 것을 기대했고, 가족을 적절하게 부양할 책임이 있었다. 청교도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위로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며 아내를 때리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었다.

 

 

2. 가정과 질서

 

청교도 가정의 질서는 부부간의 질서와 부모와 자식 간의 질서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과 위로를 받으며 남편에게 복종해야 했다. 그들은 남편과 아내의 친교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비유해 설명했다. 아내가 남편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하며 이로써 온전한 가정을 이루어가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모든 가족구성원들보다 뛰어난 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도록 요구받았다. 교회는 남편들을 통해 아내와 자녀들의 신앙을 돌보고자 했다. 또 하나는 자녀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책임이었다. 그들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며 말씀을 따라 살도록 가르쳐야 했다. 그리고 자녀들이 하나님을 스스로 찾도록 신앙적으로 격려했다.

 

 

3. 가장의 신앙적 책임

 

남편의 가정에 대한 지도권은 그가 가족들의 신앙에 대해 깊은 의무감과 책임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흔히 알려진 것처럼 그들은 일찍 결혼하지 않았다. 10대의 남자가 결혼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17세 미만의 여자가 아내가 되는 일도 매우 예외적인 일이었다. 평균적으로 신랑의 나이는 신부보다 세 살 정도 많았으며 뉴잉글랜드의 이주민들의 경우 신랑의 평균 연령은 약 24세였다.

 

그들은 조혼을 거부하고 성숙한 나이의 결혼을 권장했다. 남편이 한 가정을 책임지는 데 가정을 부양할 경제적인 능력을 갖출 뿐 아니라 한 가족을 목회할 수 있는 영적인 지도력을 함양할 것을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편으로서 아내를 가르치고, 아버지로서 자기의 자녀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도록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었다.

 

청교도 남편들을 가장으로서 가족공동체를 무질서와 혼란에서 보호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가정생활의 경건을 통해 온 땅을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가정의 경건한 개혁을 위한 두 가지 열쇠가 있었는데, 그것은 질서와 교육이었다. 청교도들의 가족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넓은 것이었다. 그들에게 가족은 단지 남편과 아내 그리고 자녀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를 떠나서 아내와 연합하는 것이 한 가정을 이룩하는 성경적인 모범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같이 여러 세대가 한 지붕 아래서 사는 대가족제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부모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심지어는 사망한 배우자의 시집이나 처가와도 친밀한 가족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의 가족의 개념에는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 일하는 일꾼들까지 모두 포함되었다. 청교도 남편들은 이러한 가족구성원들 전체에 대한 신앙적인 인도자의 역할을 감당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한 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아내와 함께 하나님을 위해 자녀를 기르고 자신들의 가정 속에 하나님이 가슴 아파하시는 어떠한 죄가 자라지 못하도록 했다.

 

 

4. 자녀에 대한 신앙교육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된 부모들에게는 대체로 선택받은 자녀들을 주신다고 믿었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이라도 태어날 때부터 부패한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절하게 교육하지 않으면 죄와 부패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나님께는 자녀만 있을 뿐, 손자는 없으시다”라는 사상은 신앙이 혈통과 가문으로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회심과 신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앙은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각 세대마다 각기 하나님 앞에서 회심이 요구되는 것이며, 부모들의 경건한 신앙을 통해 자녀가 저절로 구원에 이를 수는 없다.

 

리처드 매더(Richard Mather)는 부모들이야말로 자녀들의 영적인 운명을 인도하는 효과적인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어린 자녀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과 씨름하는 데 최선을 다하라.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어머니의 기도와 눈물이 자녀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신다”.

인크리스 매더의 다음과 같은 지적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우리의 조상들이 황무지와 같은 신대륙으로 건너온 것은 후손을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한 세대를 훈련시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조상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경건한 부모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특별한 유익과 격려 아래 있습니다”.

 

또한 카튼 매더(Cotton Mather)의 충고는 그 당시 부모들에게 절실한 것이었다. “충분한 권위를 유지해 여러분의 말이 자녀에게 법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렇지만 여러분의 권위를 무자비와 난폭함 같은 것으로 잘못 생각해 자녀를 실망하도록 만들지 마십시오. 우리의 자녀를 가혹한 행동으로 노예처럼 취급해 우리 앞에 나올 때 항상 떨고 피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하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권위는 친절과 온유와 애정으로 조화를 이루어 우리의 자녀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를 두려워하고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은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자녀들이 하나님께도 고통이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당시 부모들이 자녀들의 응석을 너무 많이 받아주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녀가 부모에게 반항하는 것이 극도로 큰 죄악이라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자녀들을 향해서는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의 때가 이르기 전에 대개 죽임을 당합니다”라고 권고했다. 인크리스 매더는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자녀가 주님을 저버릴 때 경건한 아버지의 눈물은 영원한 불길이 그 자녀의 영혼에 영원토록 더 맹렬하게 타오르도록 만들 것입니다. 부모를 가볍게 여기는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가 내릴 것입니다”.

 

 

가정예배를 통한 자녀교육

 

자신의 자녀들을 향한 가장으로서의 영적인 지도력은 그들의 가정예배를 통해 잘 나타났다. 가정의 신앙교육과 실천은 가정이 마땅히 담당해야 할 필수적인 의무로서 중요하게 여겼다. 가장은 교회의 신앙교육을 보좌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교회는 자주 회중들에게 가정을 신앙으로 돌보는 의무들을 행하도록 일깨웠다.

 

매일 아침과 저녁, 성경봉독과 기도, 시편 찬송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예배가 있었으며, 이 예배를 인도하는 것은 가장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때때로 자녀들을 포함하는 가족들은 예배활동의 일부분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인도하기도 했다.

 

청교도 가장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고유한 질서를 유지했고 가족들이 건강한 신앙의 상태를 간직하도록 의무를 다했다. 간혹 교회들은 가장들에게 가장으로서 가정신앙의 의무들을 이행하겠다고 공적으로 서약하도록 지도했는데, 1680년 인크리스 매더 목사가 목회하던 보스턴교회의 다음과 같은 언약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에서 온전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자 노력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서 분명하게 요구하시는 대로 우리의 가정에서 기도와 성경읽기를 중시하며,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힘입어 끊임없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또한 우리들은 우리 자녀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양육함으로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진정한 헌신으로 주님의 이름을 받는 자들이 되도록 우리의 책임을 행할 것이며, 그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며, 그들에게 주님을 경외하고 섬기도록 권하고 명하며, 그들 앞에 거룩한 모범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들의 회심과 구원을 위해 많이 기도할 것을 약속합니다”.

 

 

리처드 백스터: ‘어머니의 교리문답’의 예

 

청교도들에게 가정예배의 중요한 내용은 세 가지다. 기도와 성경봉독과 찬송이다. 이 세 가지를 기본으로 한 단순한 형태로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청교도들은 가정예배와는 별도로 자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일을 중시했다. 이러한 교리교육에서 어머니의 역할이 매우 컸다. 실제로 키더민스터의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의 경우 “어머니의 교리문답(Mother’s Catechism)”이라는 항목의 문집을 만들어서 활용했는데 약 100페이지 분량의 내용들이었다.

리처드 백스터는 자신의 설교를 십 수 년이나 들어왔던 사람들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각 위가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무식한 처지를 개탄하며 교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를 힘썼다. 어른들은 교회를 통해 교리를 배워야 했고 자녀들은 부모와 교회를 통해 학습해야 했다. “어머니의 교리문답”이라는 제목 아래 이러한 해설적인 성격을 띤 부제가 붙어 있다. “하나님과 그들 자신과 성경에 관한 지식에서 자녀들을 교리로 가르치는 친근한 방법(A Familiar Way of Catechising of Children in the Knowledge of God, Themselves, and the Holy

Scripture)”.

이 교리학습서는 엄마와 어린아이가 문답식으로 주고받는 이야기체로 되어 있는데 창조와 성경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 등을 망라하는 방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한 예를 들어보면 <표1>과 같다.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은 공통적으로 가정예배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교리를 자녀들에게 가르치기를 힘썼다. 이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리처드 백스터 목사가 주중에 자기 교구의 가정들을 심방했다. 그리고 자녀들이 부모에게서 교리를 올바로 배우고 있는지 문답으로 확인했다. 만약 자녀가 적절히 대답하지 못하면 그 부모들이 주일예배 때 서서 예배를 드리게 했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의지를 가지고 신앙을 고백하는 가장과 아내들이 자녀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정기적인 가정예배는 이러한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통로다.

   

맺는 말 

 

자녀들에 대한 신앙교육이 반드시 가정예배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필자는 네덜란드를 방문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교회 안에 있는 아름다운 전통을 발견하고 많은 것을 느꼈다. 예를 들면, 그들은 식사의 자리에서 부모와 함께 대화하며 기독교 교리를 한 가지씩이라도 가르친 후에야 식사한다. 모든 가정이 그리하지는 않겠지만 오늘날처럼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자녀들에게 가르치지 않는 시대에는 되새겨볼 가치가 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불신앙적인 문화와 가정을 파괴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사회적인 위협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복잡한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경쟁적인 삶은 가족간의 결속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인 남편들이 가장으로서의 영적인 책임을 통감하고 가정예배를 통해 가족들간의 영적인 유대를 공고히 하고, 무엇보다도 자녀들을 바른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부모들이 경건한 삶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자녀들에게 존경을 받아야 할 것이며 기쁨으로 가정예배에 참여하도록 지도해야 할 것이다. 가정에서의 기독교 신앙의 보존을 위해 부모와 자녀 모두에게 참된 회심과 중생이 강조되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 출처

http://lloydjones.org/zbxe/?mid=Puritan07&search_target=title&search_keyword=%EA%B0%80%EC%A0%95%EA%B3%BC&document_srl=67606


C.S. 루이스는 과연 그리스도인인가?

 

제가 c.s루이스를 알게 된것은 여러해 전 "마귀의 지령"(스크루테입의 편지)라는 책을 읽으면서부터 입니다. 최근에는 제법 많은 독자들이 생겨나고 있고 앞 다투어 그의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의 책은 펵이나 매력적이어서 그후로 "순전한 기독교","고통에 대하여","네가지 사랑' 등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좀 의아하게 생각이 드는 부분이 있어서 c.s루이스의 신학적인 사상이 어떠한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던 차였습니다.

 

얼마전에 마틴 로이드 죤스 목사님께서 c.s루이스와의 만남을 가진 후 그에 대한 상당히 부정적인 평가를 했었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 저곳 찾다가 아래의 자료를 찾게 되었습니다.

다른건 몰라도 20세기 복음에 대하여 가장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되는 존경하는 로이드 죤스 목사님께서 평가하신 부분은 정당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용이 조금은 충격적 입니다. c.s루이스가 과연 그리스도인 이었을까요? 물론 하나님만 아시겠죠. 하지만 저는 그가 그리스도인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래의 내용이 사실이라면...)참된 신자라면 천주교로 개종하는 배교는 차마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국내의 많이 크리스챤들이 '헨리나우웬' 이나'c.s루이스'와 같은 사람들을 흠모하는 것은 무척이나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이 흥왕하던 시대에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이단시 되어) 사람들이 지금은 신실한 신앙의 선배로 추앙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본문은 미국 침례교에서 출간한 Fundermental Baptist Service라는데 기고된 내용 중 David Cloud라는 분이 2000년 7월에 쓴 글입니다.

 

 

우선 로이드 죤스 목사님께서는 본문에 의하면, C.S.Lewis가 구원관에 결함을 가지고 있으며, 속죄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교리에 반대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Christianity Today 1963년 12월 20일 판 크리스차니티 투데이는 미국에서 발행되는 가장 저명한 복음주의 잡지중 하나입니다).

 

그 이유를 David Cloud는 다각적인 면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David Cloud의 개인적인 판단은 차치하고 우선 사실만을 번역 정리하겠습니다 )

 

1. C.S 루이스는 죽기 전에 천주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2. 망자를 위한 기도와 연옥을 믿었고,

3. 사제에게 정기적으로 고해를 했으며

4. 1963년 7월 16일 천주교에서 종부성자를 받았고

5. 육체의 부활의 교리를 거부했고

6.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7. 인간의 전적 타락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대속의 교리를 거부했으며

8. 성경을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임을 믿지 않았고

9. 지옥에서의 영벌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지옥은 마음의 상태라고 믿었습니다.( 영문판 / 천국과 지옥의 이혼, p65 )

10. 교회관은 에큐메니칼적이었는데,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의 서문에서 루이스는 이 책을 쓰는 목적을 "동의되었고, 일반적이며, 중심이 되며, 순전한 기독교를 제시하려는 것이라고 했다."(그의 책 the Mere Christianity를 말하는 것인데, 앞의 단어 An Agreed or common or Central or Mere Chrsitianity라는 단어를 고려한다면, 그가 사용한 단어 Mere는 순전한의 의미보다는 "단순한 기독교" 즉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동의된 기독교, 다른 종류의 형태의 기독교인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유별난 교리를 제거한 기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루이스는 모든 형태의 기독교(천주교를 포함해서)에 일반적이라고 자신이 믿는 교리에 집중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비판하려는 종교지도자의 부류를 성공회 / 감리교 / 장로교/ 천주교 4가지로 구분한 것도 이 맥락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다. ( 그는 천주교 마져도 기독교의 형태중 하나로 인정하였다 )

 

루이스는 그의 책"순전한 기독교"가 모든 기독교인들이 왜 하나가 되어야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하고자 했다.

 

c.s 루이스에게 있어서,교회란 많은 방이 있는 집과도 같은 것이었고, 그 방들은 하나의 전통과도 같은 것이었고, 한 사람이 기독교라는 집에 들어가면, 거실에 머무를 수 없고, 하나의 방을 선택해서 들어가야 하며, 어느 방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은, 루이스에게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천주교"라는 방으로 들어가는 것도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별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가장 적당한 방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과 들어간 다음에는 다른 방문을 열고 들어간 사람들에게 대하여, 친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음 글에는 c.s 루이스의 성찬에 관한 의견과, 그가 사후에도 왜 이렇게 인기가 좋은가 ( 심지어 천주교인들과 몰몬교도들에게도 )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간단히 정리하면, 루이스가 고인이 된 후에도 매해 200만권 이상의 책이 팔려나가는 이유를 DAVID CLOUD는 그가 관심을 가졌던 교리들이 현대 복음주의진영에서 피하고 싶어 하는 "교회의 분열"과 상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봤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무엇을 먹는가가 그 사람을 결정한다"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기독교인은 무엇을 듣고 읽는가"라는 말도 사실일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은 그 읽고 듣는 것에서 영적인 양식을 얻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1998년 몰몬교도의 대학인 브리암 대학의 학장인 로버트 밀레의 말을 남긴다.

"C.S LEWIS는 말일성도(몰몬교도)들에게 잘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가 제시하는 기독교의 광범위하며 포괄적인 비전 때문이다."

     

 

* 출처: http://blog.naver.com/jcmlkr/19278753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애리조나와

유타를 비롯한 미국 서부는

관광자원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유타주는

주 전체를 국립공원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가는 곳마다 빼어난 풍광을 자랑합니다.

  

미서부는 또한

해외의 사진작가들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필수 코스이며,

  

아마추어든 프로든

일생에 꼭 한 번 방문하여

카메라에 담아보고 싶은 꿈의 출사지이기도 하죠.

 

 얼마 전에

한국의 사진 작가와 더불어

9박 10일 동안 미서부를 촬영하고 돌아왔습니다.

  

겨울에 돌아 본

미서부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그리고 10일 동안 어디서, 무엇을 촬영할 수 있을까요?




첫째날, 공항에서

라스베가스로 직행하여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에

다음날 새벽 자이언 캐년으로 향했습니다.



둘째날,

자이언 캐년의 관문인

스프링데일에서 아침을 먹은 후에

자이언 캐년의 설경을 촬영했습니다.



그리고는

앤젤스 랜딩으로 가는 길목인

Lookout Scout까지 올라가 그곳 주변을 촬영했습니다.



커납(Kanab)으로 가는 길에

코랄 핑크 샌듄에 잠시 들렀습니다.

 

마침 때가

사슴들이 저녁 먹으러 나온 시간이라서

가는 길에 만난 사슴만도 약 150-200마리나 되었습니다.

  

유타와 애리조나를 통틀어

사슴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지역이

바로 Coral Pink Sand Dune 가는 길목입니다.



셋째날,

커납에서 웨이브 추첨을 한 후,

곧바로 브라이스 캐년으로 향했습니다.

 

가슴 졸이는

추첨도 해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퍼밋을 받는 불행(?)이...



브라이스 캐년에서

해가 질 때까지 머문 다음에

웨이브로 가기 위해 다시 커납으로 돌아왔지요.



넷째날,

웨이브로 들어갔습니다.

 

우리 일행이 갔던 날은

우리까지 모두 10명이 왔기 때문에

무추첨으로 퍼밋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1달 뒤,

지난 주에 다시 웨이브에 갔을 때

 

이번에는 소원대로

가슴 졸이는 추첨을 하게 되었고...

 

결과는 아뿔사!

그만 철커덕 당첨되고 말았습니다.

웨이브에 한 번도 못가본 분들에게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도

인테넷 추첨에서는

2년 연속으로 떨어지고 있으니 위로 받으시길...

  

2월 초에도

웨이브에 갈 예정인데

그렇게 되면 두 달에 세 번 가는 셈이 되겠군요.



다섯 째날,

호슈 밴드 일출을 촬영했습니다.

 

그리고,

앤털롭 캐년으로 갔습니다.



겨울의 앤털롭 캐년은

해가 낮게 지나가므로 색감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름철에 비하여 다양한 색감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겨울철은

붐비지 않아서 여유롭게 촬영할 수 있습니다.



앤털롭 캐년에는

다양한 형상들이 존재하는데

위의 사진은 배트맨을 닮은 이미지입니다.

 

구글 이미지를 검색해 보았지만

아무도 배트맨 형상을 찍은 사람이 없더군요.

 

아마,

이 형상을 촬영한 사람은

제가 최초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여기서 제가

아주 쉬운 문제를 하나 내볼까요?

 

누군가가

제가 앤털럽 캐년에서 찍은

배트맨을 그대로 흉내내어 촬영한 다음

  

책으로 출판하거나

광고 홍보용으로 쓰게되면

저작권법에 걸릴까요? 안걸릴까요?

 

저는 저작권법에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는 이 문제로

사진작가들 사이에 큰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마이클 케나라고 하는

흑백만 주로 찍는 별 시덥잖은 사람이 있는데

 

 참고로,

흑백으로 찍으면

무슨 작품이 되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어쨌든, 케나라는 작자가

우리나라 삼척에 있는 월천리의

솔섬에 와서 흑백 사진 한 장 찍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칼라로 솔섬의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람의 사진이 공모전에 당선이 되었고,

 

대한항공에서는

합법적인 댓가를 지불하고

 이 사진을 자사 광고에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케나라는 작자가

자기가 찍은 사진에 저작권이 있다고

대한항공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아니, 남의 나라에 와서

남의 땅에 있는 풍경을 찍어 놓고

저작권을 주장하다니 얼마나 황당한 말입니까?

 

케나의 주장대로라면,

웨이브를 가장 처음에 찍은 사람이

나중에 찍은 사람에게 모두 소송을 제기한다면

웹에 올려진 웨이브 사진은 모두 저작권에 걸리는 것입니다.

 

2월 25일에

두 번째 공판이 열린다고 합니다.

 

 만약,

이번 소송전에서

케나의 승리로 끝날 경우

 

제가 앤털럽 캐년에서 촬영한

배트맨 사진 저작권을 한국에 등록할까요? *^_^*



앤털롭 캐년 촬영 후에

모뉴먼 밸리로 말을 달렸습니다.

 

아,

말이 아니고

차로 달렸습니다.



사람들은

모뉴먼 밸리를 볼 때마다

서부 영화를 떠 올리곤 합니다.



여섯 째날

모뉴먼 밸리에서

일출을 촬영한 후에

아치스 국립공원으로 향했습니다.



아치스는

서부에서 arch가

가장 많은 지역입니다.

 

일몰을 촬영하기 전에

이곳 저곳을 돌아본 다음에

델리킷 아치(Delicate Arch)로 향했습니다.



델리킷 아치는

아치스에서 가장 유명하며

가장 널리 알려진 아치입니다.

 

유타의

공식 자동차 번호판엔

델리킷 아치가 새겨져 있습니다.



일곱째날,

캐년랜즈의 일출 촬영을 위해

이른 새벽에 메사 아치로 향했습니다.



Canyonlands의

겨울 새벽은 혹독하게 춥지만

 

Mesa Arch의

황홀한 일출을 생각하면

가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매력이 있는 곳입니다.



캐년랜즈에서

그랜드 캐년으로 오는 길에

라살 마운틴을 망원으로 당겨보았습니다.

 

라살 마운틴은

아치스와 캐년랜즈에서

동시에 볼 수 있는 멋진 산입니다.



Recapture Reservoir의 겨울 풍경...

 

유타의 남서부 지역은

기후와 지역 특성상 호수가 많지 않습니다.

  

호수가 드문 이 지역에서

Recapture Reservoir은 지역 주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위락지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구스넥을 휘감아 도는

산 후안 강(San Juan River)의 모습...

 

구스넥(gooseneck)은

거위목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여덟째날,

그랜드 캐년의 일출을 바라보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랜드 캐년에서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보지 못한 사람은

그랜드 캐년의 참 모습을 제대로 보았다고 말하기 힘들 것입니다.


 

아홉째날,

세도나를 중심으로 돌아보았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커씨드럴 락(Cathedral Rock)은

세도나에서 볼텍스가 나오는 곳 가운데 하나입니다.




세도나는

자세히 돌아보면

의외로 촬영할 장소가 많은 곳입니다.



열째날,

소노란 사막을 방문했습니다.



모하비가

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사막이라면

Sonoran Desert는 애리조나를 대표하는 사막입니다.



출국하기 전,

마지막으로 그리피스 팍에 들렀습니다.

 

아래 사진은

그리피스 팍에서 바라 본

쌔나 마니까(산타 모니카) 쪽의 석양모습입니다.


 

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은혜의 단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믿음의 선배_루비 켄드릭
어느 목사의 30년 목회 고백  (0) 2014.02.10
믿음의 사람들  (0) 2014.02.01
크리스찬의 비상 연락망을 아세요?  (0) 2014.01.21
라인홀드니버의 기도문  (0) 2014.01.20
☆ 록펠러 어머니의 10가지 교훈 ☆  (0) 2014.01.16



 
   은몽(恩夢)
                            최송연
어느 날 밤
새하얀 백마를 타고
바다를 넘어
임 계신 동산엘 내가 갔었네

그곳엔
흰 세마포 입으신 우리 님 
천군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네

주님 모습 나 뵈올 때
그 발 앞에 넙죽 엎드리니

" 내가 세상에 다시 갈 날 임박했는데
내 종들은 해야 할 전도는 하지 않고
시기 질투만 일삼고 있구나"
사랑의 주님 통곡하셨네

아름답고 숭고하신 그 모습
나 다시금 뵙기 원하여
내 작은 발이 부르트도록 달리리

목이 터지도록 나 외치리
십자가의 고통을...
그분 사랑의 절규를...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물보다 귀한 사랑/최송연  (0) 2014.02.03
    새해 새 아침의 내 기도  (0) 2014.01.31
    나는 압니다  (0) 2014.01.24
    그대 가슴에...  (3) 2014.01.17
    저 흰 눈처럼...  (0) 2014.01.08

     

    아더 핑크(1886~1952) 목사님은 회개와 회심(回心)을 강조하는 청교도 스타일로 복음을 제시했기 때문에 부담을 느낀 그 당시 회중들로부터 심한 배척을 받았다. 그리하여 시무할 교회조차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더 핑크 목사님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열심과 하나님 말씀 연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더 핑크 목사님은 세상을 떠난 이후에야 제대로 평가를 받게 되었는데, 타협하지 않는 회심과 거듭남의 촉구, 심오한 신관(神觀), 명확한 하나님 절대주권 사상 등이 깊이 있고 적용성 있는 성경 해석과 더불어 제시된 그의 글들은 경박한 미국식 복음주의와 현대의 자유주의 신앙에 지친 사람들에게 청량제(淸凉劑)로 다가오고 있다.

     

    - 조계광의 번역서에서 요약하여 옮김. 

     

     

     

    아래는 아더 핑크 목사님이 로웰 그린이라는 형제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아더 핑크 목사님께서 지적한 당시 교회의 타락해가는 모습은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에도 아주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들이다.

     

    교회들이 성경적인 바른교회의 모습을 잃어가고,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에 잠식당해 가는 모습을 바로보노라면 마음이 너무나 아프다.

     

    조국의 교회들이 속히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며, 거룩을 회복하고, 경건을 회복하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바란다.

     

     

     

     

     

     

     

     

     

     

    교회의 상태

    로웰 그린에게 보내는 아더핑크의 편지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랑을 받는 이에게

    주님의 거룩하고 복되신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그 앞에는 높이 있는 천사들도 머리를 숙이고, 그의 거룩한 임재앞에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6:3)고 외칩니다. 그분은 우리가 겸손함과 경외함으로 나아가야 할 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소위 공적 예배에서 거룩한 경외심을 찾기가 어찌나 힘든지요! 이방인들조차 그들의 우상에게 절을 할 때에는 고상함과 단장으로 처신하고 있는데, 교회에서는 어찌된 일입니까?

     

    그리고 이 패역한 세대에서 회칠한 종교인들과 관계를 맺을수록, 우리는 그들의 천박함과 방종함에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썩은 사과 속에 있는 잘 익은 사과는 썩은 사과를 온전케 할 수 없고 오히려 모두 썩게 됩니다.

     

     

    형제의 12일자 편지가 제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623일자 저의 편지를 통해 형제의 마음에 말씀하심으로 인해 그를 찬양합니다.

    저에게는 사본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온유함은 하나님 앞에서 큰 가치가 있는 은사입니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3:4)

     

    그것은 성령의 열매의 한부분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22,23)

     

    우리는 온유함을 구하도록 명령을 받습니다.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라 너희가 혹시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숨김을 얻으리라" (2:3)

     

    성구사전을 찾아보면 온유한 자에게 귀한 것들이 많이 약속되어 있음을 볼 것입니다. 온유함은 그리스도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1:29)

     

    형제께서는 알려진 죄를 극복하는 삶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써보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형제께서는 제가 그 문제에 대해 쓴 것이 많지 않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리는 것은 지난 20년간 성공적인 삶에 대해 가르쳐진 내용에 대해 저로서는 찾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를 앞장서서 변론하고 주장했던 사람들은 유능한 판단자의 눈으로 볼 때에는 별로 신용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근본적인 교리에 있어 상당히 불건전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선택된 사람들을 영원히 구별하심을 부정하고, 또한 그리스도가 그들의 죄를 담당하심을 부정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전적타락을 부인하고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어 그 자신의 결정에 의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참조:1:13)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6:44)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8:3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9:16)

     

    어떤 설교자나 교사가 이러한 기본적인 진리에 불건전하게 되면, 어떤 주제에 관해서도 그들을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기초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 위에 구성하는 것도 잘못되게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참된 종들, 건전한 교사들은 이 땅에서 거의 사라져 버렸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딤후4:3)이 지금 우리 눈앞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소위 복음이라고 불리는 것을 관용하고 시대의 표적들에 대한 말을 진지하게 듣고자 합니다. 내용인 즉 성경의 내용과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 흥미위주의 기사를 신문에서 오려 모아 놓은 것입니다 .

     

    그들은 선교사의 연설을 듣고자 하나 건전한 교리 즉, 바른 가르침은 용납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결코 오류가 없는 판단의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가련한 자녀들은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행해지고 있는 언어의 혼란 속에서 사물들을 판별할 수 없게 됩니다.

     

     

    그 판단 기준이란 이것입니다.

    , 오늘날 종교적인 세계에서 지속되고 있는 것은 바른 가르침이 될 수 없습니다. 대중적으로 인정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출석하는 가르침은 바른 가르침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곳에서는 항상 그의 말씀으로 더불어 역사하십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세우시고 무장을 시키시고 그의 종을 보낼 때 그의 종은 반드시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을 거역하는 모든 것을 정죄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메시지는 인기가 없기 마련입니다. 사실은 중생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른 가르침을 지니고 있었습니까?

    주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사도들이 말씀을 전할 때는 어떠했습니까?

    루터와 칼빈의 시대에 그들은 바른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까?

    비천하고 타락한 인간 품성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여, 이것을 생각하십시오. 구약의 선지자들과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쳤던 사람들은 종교심이 없는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종교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종교를 갖고자 했으며, 그들에게 어울리는 종교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정죄하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정통기독교 국가도 그 자신의 종교를 갖고 있습니다. 사실 그 안에는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조금은 있습니다. 마치 바리새인과 로마 카톨릭교에도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비성경적이고 반성경적인 것이 많이 있으며,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그 가운데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말씀하시기를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 14:34) 그리고 나서 성령께서 간증과 기도회를 갖게 해서 여인들이 남자 앞에서 말하도록 격려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함은 신성모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주님께 매우 헌신적이고, 매우 영적이고, 매우 건전하고, 죄인들의 구원에 관심이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의 분별된 삶에 관심을 가지면서, 간증과 기도회를 갖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잘못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을 시험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기를, 그들을 시험해 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자 세상에 나왔음이니라"(141)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에베소 교회에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시험해 보라고 어떻게 명령했는지 살펴보십시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2:2)

     

    그러나 어떻게 그들을 시험할 수 있습니까?

    그들이 바른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디모데 후서 43"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의 원리를 적용해 보십시오.

     

    바른 가르침의 한 부분은 교회 안에서 여자들의 침묵입니다.

     

    디모데 전서 212,13"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을 비교하고,

    그들에게 고린도 전서 1434"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을 읽어주고 그들이 그 말씀을 감당하는지 보십시오.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굴복한다면 그들은 잘 감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밝혀준데 대해 감사할 것이고 그들의 실수를 자백하고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주께 복종하지 않는다면, 겉으로의 거룩함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들 자신의 종교를 갖고자 하며, 형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들에게 전해주는 빛을 거절하고 오히려 논쟁하려고 할 것입니다.

     

    한번 시험해보고 스스로 살펴보십시오. 그들에게 고린도 전서 1434절은 너무나 명백한 것이라 오해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십시오. 그 말씀은 우리가 순종해야 할 거룩한 명령인 것입니다. 그 말씀에 대한 형제의 입장을 분명히 하십시오. 그러면 그 바른 가르침그들에 의해 용납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이 형제조차도 원치 않음을 곧 알게 될 것입니다.

     

    말씀으로부터 더 많은 빛이 형제에게 허락 될수록 말씀의 교훈과 명령에 지배 받을수록 말씀의 빛에 의하여 사람들과 종교적인 운동을 시험할수록 이는 그들을 심판하는 자리에 앉는 것이 아니라, 바른 가르침을 따라 그들을 헤아려 보는 것입니다.

     

    지식이 많으면 근심이 많다.(1:18)는 말씀의 진리를 더욱 더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근심은 육신이 원치 않는 어떤 것으로, 가련한 기독교계가 빠져들어간 비극적인 상태에 대한 근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이집트나 그리스를 위해서가 아니라 예루살렘을 위해 우셨던 것처럼, 이 근심을 통해 그의 고난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3:10 )

     

    이 때문에 형제는 멸시를 받는 자 가운데 처하게 되나 에스겔 914절의 은총을 받는 무리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형제는 하나님께 부르짖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3:2)

     

    다른 사람들은 우의(友誼)있는 젊은 사람들과의 교제로 멋있는 시간을 보내면서 이 모임에서 저 모임으로 다니고 있을 때에, 또한 다른 사람들은 애굽의 고기 가마를 탐하면서 그 배를 신으로 삼고, 음악을 듣는다든지, 타락한 성도들과 웃고 농담하며 방종에 빠져 있을 때에, 형제는 은밀히 하나님께 얼굴을 향하고, 이사야 5919(서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편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의 약속을 간구하고 있을 것입니다.

     

     

    형제가 은밀하지만 효과적인 중보자가 되어, 모든 은총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면! 그 고통과 눈물이 하나님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이것이 다른 사람을 향한 저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일에 쓰디쓰게 실망하고 돌아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육체를 멸하고 그 대가를 치루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나의 커다란 슬픔은 이곳저곳을 수없이 다니면서 또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능력 있는 중보자가 되겠다고 진정으로 다짐하는 사람을(제 아내를 제외하고) 한사람도 알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되리라고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희망은 땅에 내던져졌고, 이 때문에 제 자신을 어디 적막한 곳에 격리시켜버리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거기서는 다른 그리스도인을 다시는 만나지 않게 되겠지요.

     

    그들은 모두 에스겔3331-33절에 언급된 사람들과 같습니다.

    백성이 모이는 것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서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하고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거니와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 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그들은 어떤 사람의 발 앞에 앉아 엄숙한 가르침에 놀라며, 이를 전하는 자의 용기와 신실함에 감탄하고 심지어는 그런 목회자와 함께 있음을 큰 특권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가르침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켜 보려고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상세한 적용에 이르러 곧 그들의 생활 속에서의 특별한 실패와 죄를 바로잡는 문제에 있어서는(신발이 발을 위축시킬 때에는),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거절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을 등 뒤에서 비난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함몰시킵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들 자신이 좋아하는 우상에 매어 달립니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그들이 중보의 기도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련하게 속고 있는 몽매한 영혼들이여! 그들은 한 시간 동안이나 라디오를 듣고, 다른 사람들과 농담 섞인 대화를 하고 나서 그들의 방으로 물러가서 기도를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주목하는 것은 빈말이 아니고 마음의 고통과 눈물입니다.

     

    어떤 마음도 세상적인 즐거움과 공허할 이야기로부터, 삼중으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영적인 통곡으로 옮아 갈 수 없습니다. 그는 진실함을 요구하시는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 속에 역사하는 성령만이 진실함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형제여, 제가 돌보고자 하는 대부부의 사람들 가운데 진실함의 결여를 바라보게 될 때, 나의 영혼은 쳐지고 거의 눌리게 됩니다. 이것이 제가 미국을 떠나고자 했던 주요한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거의 틀림없이 그리고 은혜스러운 방법으로 저의 서신사역에 함께 하여왔고,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 접촉을 통한 개인적인 사역은 거의 완전한 실패입니다.

     

    그러나 에스겔 33장의 마지막 구절이 엄숙하게 선포하는 것처럼 이런 일이 일어날 때에 한 선지자가 그들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나는 개인적인 연약함과 실패 중에서도 제가 간절하게 찾았던 바, 충실하게 봉사할 사람의 손에 그것을 남겨 둡니다.

     

    저는 이 편지가 형제에게 약간 실망을 안겨주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 방에 홀로 앉아 지난 수년을 돌아보고, 제가 이렇게 일찍 미국을 아주 떠나게 됨을 알고 나서, 공식적인 편지를 쓸 기분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형제가 그렇게 자주 그 마음을 제게 열어주었던 것처럼 저의 마음을 형제에게 열어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 외에 아무도 저와 제 아내가, 저의 가장 훌륭하고 친절하고 가까웠던 친구들로 인해 겪었던 슬픔과 고민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때때로 여러 방법으로 관대하고 이기심 없이 우리를 도왔고, 우리는 그들에게 영적으로 참되고 부유한 축복이 될 수 있기를 바라왔습니다. 이는 평범하고 일반적인 뜻에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정하신 최선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우리가 보기를 원했습니다. 아마 그들을 향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고, 우리의 바람들이 실현될 것입니다. 제가 너무 거리낌 없이 쓰는 것을 용납하시기 바랍니다.

     

    어떻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종의 내적 경험들에 대한 통찰을 갖게 해줄 것입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한 달이 지나기 전에 형제에게 다시편지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때는 형제의 편지 안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로마서 7장에 대한 저의 소책자를 동봉해 드립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범사에 축복을 기원하며 형제드림.

       

    * 출처 : http://cafe.daum.net/yangmooryvillage/RkzJ/11819

    * 이미지 출처 : http://etc.usf.edu/clipart/54900/54920/54920_church.htm

     

    출처: 좁은 길을 걸으며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어디서나 생명은 귀한 것!!!

    양자 됨의 증거

     

    마틴 로이드 존스

     

    우리가 양자가 되었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3:26) 또한 베드로전서 1장 3-6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상속자 즉 자녀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확신의 두 번째 근거는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다."는 것입니다(롬8:15).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5).

    여러분은 성령이 여러분 안에 내주하시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여러분이 양자 됨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성령은 우리 영으로 더블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양자 됨을 받았다는 절대적인 증거입니다.

     

    마지막 증거로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바울의 논지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바울은 "무릇 화평하게 하는 자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자들, 또는 원수를 사랑하는 자들은......"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사람" 즉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고 그 인도를 기뻐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 양자 됨의 결과 -

     

    지금까지 증거들을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의 양자 됨의 결과를 생각해 봅시다.

    첫째, 양자의 영을 가진 사람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롬8:15)을 잃어버렸습니다.

    둘째로, 적극적으로는 우리에게 자유의 영이 주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더 이상 율법과 율법의 정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또 셋째로, 우리는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 이 양자의 영을 받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에 더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지닐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들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에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26:12)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옛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던 것을 베드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하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벧전2:9-10).

     

    또 어떤 결과가 있습니까?

    다섯 번째 유익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현재의 보호와 위로,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자녀에게 주시는 공급하심을 누리는 것입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눅12:7).

    하나님 없이는 아무 일도 우리에게 일어날 수 없습니다.

    자녀들에게 주어지고 우리의 경험을 통해 참되다는 것이 증명된 은혜롭고 영광스러운 약속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보호와 위로 우리 모든 필요를 완벽하게 공급하시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13: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 유익은 첫눈에 보기에는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징계입니다

    그것이 히브리서 12장 전반의 전체 논지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6절). 이 구절이 말하는 바는 징계를 받지 않는 사람은 아들이 아니라 사생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우리를 징계하실 것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11절).

    그러므로 징계는 우리가 양자 된 것의 매우 명확한 결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에 이르게 하시기로 결심하시며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와 가르침을 듣지 않으려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애정을 지니셨기 때문에 우리가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자녀는 징계하시지만 자기 자녀가 아닌 사람들은 징계 하시지 않습니다.

     

    다음은 상속권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롬8:17).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자녀라고 선포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유업은 확실합니다.

     

    마지막 사항은 그 모든 것이 홧실하고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여러분이 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이하는 하늘에 간직하신 유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벧전1:4). 그러므로 안전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38-39절에서 똑같은 것을 말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양자 삼으셨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여러분의 운명은 안전하고 확실합니다.

     

    미래의 것도, 현재의 것들도

    아래있는 모든 것도 위에 있는 모든 것도

    하나님이 뜻하신 바를 취소시키지도

    내 영혼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지도 못하리니

    - 아우구스투스 토플레디 -

     

    그것은 보증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가족으로 맞아 주셨다면 나는 자녀일 뿐 아니라 상속자이며 아무것도 그 누구도 나에게 유업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시작 부분에서 말했듯이 이것은 가장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고 격려가 되는 교리입니다.

    이 교리를 소홀이 여기고 사람들이 죄사함이나 혹은 심지어 성화에서 더 나가지 못해 양자 됨이야말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상기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놀라운 유업 우리가 장차 받을 말 할 수 없는 영광을 깨닫게 해 주는 교리라는 사실을 알지 모하는 비극이 아닙니까?

     

    우리는 자녀로 입양되기 위해 구원받습니다.

    단지 죄사함만이 아닙니다.

    단지 의롭다고 선포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단지 새로운 본성을 받은 것만이 아닙니다.

    그 위에 거기에 더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상속자요

    하나님의 독생자와 함께한 상속자로 선포됩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


    구원의 확신의 최종적 기초/존 파이퍼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데
    살로니가후서 2:13)

    성경에 있는 수십 개의 구절들은 우리의 최종적 구원은
    (택함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지만) 변화된 마음과
    ... 삶에 조건적인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질
    문이 뒤따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영원한 삶
    을 상속받는 데에 필요한 믿음과 거룩함 안에서 인내하리
    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나?

    이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우리의 확신은 하나님의 택
    하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베드로후서 1:10). 신적 택하
    심의 사실은 택하시는 은혜가 시작한 것을 성화의 은혜
    (성화되게 만드는 은혜)로 끝까지 이루실 것에 대한 보증
    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순종을 명령하기
    만 한 것이 아니라, 이를 주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
    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
    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명기 30:6).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에스겔 36:27; 11:20, 히브리서 13:20, 빌립보서
    2:13도 보십시오)

    택하심은 구원의 확신의 최종적 토대입니다. 왜냐하면 이
    는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며,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기 때문입
    니다.

    택하심은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
    라"(로마서 8:30)라는 말을 보장합니다. 그래서 영화를
    위해 놓여진 모든 조건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에 의해
    충족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
    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
    이니" (데살로니가후서 2:13)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사진은

    빛의 예술입니다.

     

    빛이 있어야만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아름다운 빛이 있는 곳에

    더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빛이 없다면

    사진이라는 예술 자체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앤털롭 캐년은

    오묘하고 환상적인 빛의 예술이 있는,

      

    전 세계의 사진작가들이

    꿈에라도 가고 싶어하는 버킷 리스트 가운데 하나입니다.

      

    Antelope Canyon에서 벌어지는

    빛의 향연은 너무도 아름다워 할말을 잃게 만듭니다.

      

    지금은

    앤털롭 캐년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 되었지만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이곳은 극소수의 사람만이 아는 곳이었죠.

     

    그런데 이곳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비극적인 사건이 1997년에 일어났습니다.



    22094141_1.jpg

    1997년은

    엘니뇨가 유난히 기승을 부리던 때였죠.

     

    그해 8월 12일,

    오후 3시 30분 경이었습니다.

      

    앤털롭 캐년의 Lower에서

    동남쪽으로 10마일 가량 떨어진

    LeChee Rock 부근에서 거대한 먹구름이 생성되었습니다.


    22094141_2.jpg

    이 비구름은

    사전에 아무런 예고나 전조도 없이

    갑자기 생성되어 짧은 시간 동안 주변에 많은 비를 뿌렸습니다.


    22094141_3.jpg

    하지만 8월 12일,

    앤털롭 캐년의 Lower에는

    전혀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날도

    관광객들은 Lower로 들어갔죠.


    22094141_4.jpg

    하지만

    나바호 원주민의 땅인

    LeChee Rock 주변에 내린 비는

     

    홍수가 되어

    앤털롭 캐년의 Upper를 통해

    빠른 속도로 Lower로 돌진해 왔습니다.


    22094141_5.jpg

    Upper 주변을 지날 때

    물의 높이는 약 11ft(약 3.3m)였습니다.

     

    대부분의 길이

    평지로 이루어진 Upper와는 달리

    Lower는 경사지고 매우 좁은 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22094141_6.jpg

    홍수가 있던 그 시각,

    Trek America를 통해 관광을 온

     

    프랑스, 영국, 스웨덴,

    그리고 미국에서 온 11명은

    앤털롭 캐년의 Lower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28세였던,

    Poncho Quintana가 이 관광 팀을 가이드하고 있었죠.


    22094141_7.jpg

    잠시 뒤에 일어날

    비극적인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들은 앤털롭 캐년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있었습니다.


    22094141_8.jpg

    그것도 잠시,

    그들은 좁은 협곡을 통과해 들어오는

    사자의 울부짖는 것과 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22094141_9.jpg


    물은

    Upper를 지날 때는

    11 feet에 불과했지만

     

    좁은데다

    내리막 길인

    Lower를 지날 때에는

    30ft의 높이로 불어나 있었습니다.


    22094141_10.jpg

    잠시 뒤, 그들은 모두

    갈색 초컬릿 색의 거대한 홍수가

    쓰나미처럼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22094141_11.jpg

    공포에 질린 그들이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성난 파도같은 홍수는 그들을 삼켜 버렸고,

     

    그들 모두를 사정없이

    캐년의 벽에 내동댕이 친 다음

    파웰 호수(Lake Powell)로 토해 내었습니다.


    22094141_12.jpg


    Eye of the Eagle의 모습...

     

    이 사건이

    그들에게 비극이었던 이유는,

     

    그들은 이미

    앤털롭 캐년의 구경을 마치고 나갔다가

      

    그들 가운데 6명이

    다시금 Eye of the Eagle 까지 가서

    그들의 남아있던 필름으로 촬영하기를 원했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남아있던 필름을 사용하기 위해

    다시 캐년 안으로 들어가던 중 이 비극을 만난 것입니다.


    22094141_13.jpg

    그들이

    다시 걸어 들어간 거리는

    불과 100야드, 약 5분에서 10분 거리였습니다.

     

    10분만 더

    늦게 들어갔더라도

    그들은 모두 살았을 것입니다.


    22094141_14.jpg

    얼마 뒤,

    사건 소식을 들은

    신문과 방송사의 헬기가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수색 헬기가 뒤를 이었습니다.


    22094141_15.jpg

    이 홍수로 인해

    프랑스에서 온 Paul과

    Anita Lohr 부부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22094141_16.jpg

    부모의 비극을 알지 못한 채

    호텔에 남아있던 10살과 12살된 딸이

    영문을 몰라 울먹이는 것이 매스컴에 보도되었고,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희생자의 절반이 넘는 7명이

    프랑스 사람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프랑스의 모든 매스컴에서 이 사건은 대서 특필되었습니다.


    22094141_17.jpg

    게다가

    영국과 스웨덴에서도

    희생자가 각각 1명씩 발생하자

    이 사건은 전 유럽의 최대 뉴스가 되었습니다.


    22094141_18.jpg

    사고 경위와

    사체를 찾는 과정, 그리고

     

    사체 수습과정에서 앤털롭 캐년은

    수주 동안 전 유럽의 신문과 방송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습니다.


    22094141_19.jpg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2명의 희생자가 있었지요.


    22094141_20.jpg

    그래서

    미국의 전국구 신문과

    대규모의 방송 뿐만 아니라

     

    소규모의 매스컴들도

    날마다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22094141_21.jpg

    지금까지 전 유럽과

    미국의 모든 방송과 신문이

     

    월드컵이나 올림픽같은

    대형 스포츠 이벤트를 제외하곤

    이처럼 떠들썩하게 취재한 적은 없었습니다.


    22094141_22.jpg

    사건 이틀 뒤엔

    전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신문, 방송사의 헬기들로 인하여

     

    주변 일대는

    대혼잡이 발생하여

    항공을 통제하는 상황까지 발생할 정도였습니다.


    22094141_23.jpg

    더불어

    앤털롭 캐년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전 유럽과 미국 전역에 순식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22094141_24.jpg

    그리하여

    이 사건 이후에

     

    앤털롭 캐년을 찾는 방문자는 급증하였고,

    지금도 이곳을 방문하는 상당수는 유럽 사람들입니다.


    22094141_25.jpg

    희생자 가족의 한 사람은

    앤털롭 캐년을 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곳이 너무 아름다워서 이곳을 싫어한다고.”


    22094141_26.jpg

    이곳이 아름답지 않았더라면

    희생자들은 이곳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그들은

    지금도 살아있을 것입니다.


    22094141_27.jpg

    마치 로렐라이 언덕에서

    싸이렌의 황홀하고 아름다운 소리에

    넋을 잃고 있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처럼

     

    그들은

    앤털롭 캐년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들의 생명을 내어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22094141_28.jpg

    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가이드 Quintana는 극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22094141_29.jpg

    사건이 일어난 지

    올해로 17년째가 됩니다.

     

    앤털롭 캐년은

    이제 세계적인 명승지가 되어 

     

    한해에 수십 만명이 찾는

    페이지(Page city)의 인기 코스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Lower 입구에는

    그날에 희생당한 사람의

    국적과 명단이 기록된 기념비가 서 있고,

     

    오늘도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날의 비극을 아는지 모르는지

      

    앤털롭 캐년의

    아름다움에 충격을 받고 돌아갑니다.


    22095121_30.jpg

     

    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산발랏과 도비야가 두려워하고 근심하나 대장쟁이 ㆍ 페르샤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 기슬르월, 왕의 술관원이었던 느헤미야는 유다에서 돌아온 형제, 아마도 동생인 것 같습니다만, 하나니로부터 황폐한 유다와 예루살렘 성읍의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울고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니는 아마도 아닥사스다 왕 7년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에스라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13년만에 형 느헤미야가 있는 수산으로 돌아와서 형에게 그간 사정과 예루살렘 형편을 자세히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4개월이 지난 니산월, 수산궁에서 왕의 앞에 술을 따라 드렸다가 왕으로부터 ‘네가 어찌하여 얼굴에 수색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크게 두려워하며 근심하게 된 사연을 아뢰게 됩니다. '수색이 있느냐?'는 왕의 질문에 느헤미야가 왜 크게 두려워하였을까요? 술관원은 왕이 마실 술에 혹시 독이 들어있지 않은지를 먼저 시음해보고 올려드리는 왕의 신변안전요원입니다. 술관원은 마음먹거나 반역자와 내통하여 음모를 꾸미면 술에 독을 타서 왕을 암살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습니다. 술관원은 술을 마시는 왕의 마음을 안심하게 하고 편하고 즐겁게 해드려야 합니다. 그러한 술관원의 안색이 심상치 않게 보였다는 것은 왕에게 암살기도의 징후로 오해되거나 혹은 왕의 술 마시는 기분을 잡치게 했다는 죄가 되어 목이 달아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수색이 왠 일이냐는 왕의 질문에 느헤미야는 크게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느헤미야에게 수색의 이유를 묻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에게서 유다 땅과 예루살렘 성읍의 형편을 듣고 느헤미야가 고향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우는 일을 허락하면서 금과 은, 식량과 제사에 필요한 희생제물, 건축에 필요한 재목 등 모든 필요한 지원을 하도록 조서를 내립니다. 그리고 군대장관과 마병까지 딸려 느헤미야를 호위하게 합니다. 이것은 그만큼 왕이 느헤미야를 신임하고 아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움직이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강 서편으로 가서 총독에게 조서를 전하자 호론사람 산발랏과 종 되었던 암몬사람 도비야가 크게 두려워합니다. 느헤미야를 읽으면 느헤미야의 영웅적인 신앙과 행적이 돋보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볼 일이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니로부터 유다 땅과 예루살렘의 참담한 형편을 듣고 슬퍼하고 울며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기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허락하셨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루어가고 계셨습니다. 이미 70년을 작정하셨고 때가 차매 고레스 왕을 세워 유다의 남은 자들을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스룹바벨과, 그 다음엔 에스라, 그리고 다시 느헤미야를 차례차례 부르시고 보내어 사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스룹바벨을 보내어 성전을 먼저 세우게 하시고 그 다음에는 에스라를 보내어 말씀을 세우게 하시고, 이제 느헤미야를 보내어 성벽을 세워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시는 모습은 마치 교회를 세우는 순서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훼방과 억압이 따르고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낙망, 그리고 중단과 침묵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이루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스룹바벨과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예비되고 있었습니다. 마치 요셉이 종으로 팔려가 보디발의 집과 감옥을 거쳐 애굽총리가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섭리하심은 차질이 없습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리라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금식과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끌어내거나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부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순종하는 느헤미야 앞에 산발랏과 도비야는 몹시 근심합니다. 그들이 두려워하고 근심하는 것은 느헤미야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저들은 발악하고 훼방할 것이나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능력이 저들에게는 없습니다. 승리는 우리 하나님의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속한 우리의 것입니다.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돈놀이, 이자놀이  (0) 2014.02.01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0) 2014.01.28
    도려내어야 한다면  (0) 2014.01.23
    일어나라, 하나님이 하신다  (0) 2014.01.08
    성전건축을 막아랏!  (0) 2014.01.06

    거짓 선지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특징 / 로이드존스

     

     

    "거짓 선지자는 그의 복음에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거짓 선지자는 좁은 문을 들어가며 좁을 길을 걸어가야 할 절대 필연성을 강조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나아가서 그는 거짓 선지자들이 설교 시에 침묵하는 진리들이 무엇인지를 폭로하였는데 그것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어떤 모양으로 정체를 드러내는가?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에는 말씀이 거의 없다.
    그의 메시지는 항상 모호하고 일반적인 성격을 띤다.
    그의 메시지는 교리를 특수화하여 하나하나 상세하게 열거하지 않는다.
    그는 교리적 설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설교는 항상 매우 모호하다."

    "성경 말씀은 귀에 걸면 귀걸이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말이 나오게 된 이유는 거짓 선지자들의 일관성이 없고 모호한 설교 덕분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설혹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성경을 조화있게
    그리고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는 하늘의 빛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뱀의 혀가 둘로 갈라져있는 것처럼 한 입으로 두 말을 합니다.
    어떤 때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설교하다가
    어떤 때는 "행함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혼란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의 설교의 특징입니다.
    이와 같은 전제를 말한 후 로이드 존스는 짓 선지자의 메시지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꼽았습니다.

     

    1)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결과 의와 공의와 진노에 대해서는 매우 드물게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말하나 그 밖의 것들은 말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들이 모두 관계를 맺고 있는 이 거룩하고 존귀한 분에 대해 설교할 때 아무도 두려워 떨게 하는 일이 없다.
    그는 대체로 하나님에 대한 진리 하나만을 강조하는데 곧 사랑이다." 

     

    2) 거짓 선지자는 심판과 지옥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가 결코 강조하지 않는 또 다른 교리는 후 심판과 버림받은 자들의 영원한 운명이다.
    유감스럽게도 지난 반세기동안 최후 심판에 대한 설교는 많지 않았다.
    그렇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와 같은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는다." 

     

    3) "거짓 선지자는 죄의 사악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죄가 그리 중대한 문제가 아니라고 암시한다.
    그는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4) 거짓 선지자는 회개의 필요성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회개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의 교훈에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매우 큰문과 천국으로 인도하는 매우 넓은 길이 있다.
    여러분은 자신의 죄성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다.
    여러분의 마음이 검은 것을 심각하게 여길 필요가 없어진다.
    여러분은 그저 믿는다고 하기만 하면 다.

    하지만 청교도나 웨슬레나 조지 휫필드나 기타 위인들의 전도는 전혀 달랐다.
    그들의 전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심판을 두려워하게 했고, 가끔 영혼들로 하여금 며칠 , 몇 주, 몇 개월간이나 고뇌하게 했다."

     

    5) 거짓 선지자는 성결한 생활에 대해 침묵합니다.

    " 거짓 선지자는 산상수훈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산상설교를 실천하지 않고 이 설교에 귀만 기울인다면 우리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거짓된 가르침은 참된 성결, 성경적 성결에 관심이 없다. "

     

    6) 거짓 선지자는 자기 기만의 위험성에 대해 침묵합니다.

    " 거짓 선지자들은 안이한 구원과 안이한 생활 유형을 항상 제안한다. 그들은 자기 검토를 방해한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검토해 보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항상 ' 예수를 바라봐야 ' 하고 여러분의 죄를 찾기 위해 자신을 보면 안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을 검토하고 '자신을 시험해보고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라! (고후13:5)고 한 산상설교의 이 마지막 대목을 똑바로 보라는 권면을 훼방놓는다

    그들은 청교도들과 18세기의 위대한 지도자들 곧 웨슬리나 휫필드,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들이 가르친 가기 검토와 죄의 의제 과정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안이한 구원과 안이한 기독교 생활을 추천한다. " 

    이것이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정통 교단에 속해있고 아무리 큰 교회를 목회 한다 할지라도 이와 같은 것을 빠트리고 설교하는 자는 누구든 거짓 선지자입니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로이드 존스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C.S. 루이스는 과연 그리스도인인가?  (11) 2014.01.27
    양자 됩의 증거  (0) 2014.01.26
    참된 신자의 모습  (0) 2014.01.25
    설교자가 되어야 했던 이유  (0) 2014.01.15
    기독교 연합의 기초-2  (0) 2013.11.28

    “이단 수출국 1위 한국…이단 늘고 정통교회 줄어”


    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협회가 최근 한국교회에 무섭게 확산되고 있는 이단들의 동향을 분석했다. 진용식 협회장은 이단들이 정통 교회 신도들을 주된 포교 대상을 삼고, 교계 언론이나 이단 연구가, 연합단체를 이용해 포교를 확산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또한 신천지와 같은 방식으로 포교하고 있는 중국 이단 ‘동방번개’의 위험성도 지적했다.

    진용식 협회장, 한국교회 이단 동향 분석해 발표

    한국기독교이단상담소협회(협회장 진용식 목사)가 24일 새에덴교회(소강석 목사)에서 전진대회 및 세미나를 가졌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협회장 진용식 목사가 최근 한국교회의 이단 동향에 대해 설명했다. 진 목사는 한국에 1천명 신도를 거느린 재림주가 40여명, 이단단체가 2백여 개, 이단단체에 포섭된 신도는 2백만 명 이상으로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고 우려했다.

    진 목사는 “한국에서 탄생한 이단들이 국외까지 퍼지며 한국은 이단 수출국 1위가 됐다”며 “이단은 점점 불어나는 반면, 정통교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어 심각한 상황이다. 이단은 정통교회 성도들을 포교 대상으로 삼고 포교 방법을 훈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진 목사는 이단들이 교계 언론, 이단 연구가, 연합단체를 이용해 이단에서 해제받으려 노력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들은 이단 옹호 언론을 통해 이단을 보도하게 하고 이단 규정한 이들을 공격하게 한다. 또 이단 연구가들을 매수해 비판할 수 없게 한다”며 “또한 이들은 교단에서 이단 해제 받기가 어려운 것을 알고, 연합단체로 가 해제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진 목사는 특히 연합기관 중 한기총의 이단 해제 행태를 비판했다. 그는 “한기총이 억울한 이단들의 재심청원을 받는다며 다락방 류광수 목사와 평강제일교회 박윤식 목사를 이단에서 해제했다. 이를 지적한 교수 200여 명을 집단 고소하고 이단 연구가들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사태까지 갔다”며 우려를 표했다.

    중국발 이단 ‘동방번개’, 신천지와 같은 포교법 ‘우려’

    한편 진용식 목사는 최근 신천지와 안상홍(하나님의교회), 구원파 등 이단 단체들이 정통 교회에 큰 피해를 주고 있는 가운데, 앞으로는 ‘동방번개’의 포교가 극심해질 것이라며 주의를 당부했다.

    진 목사는 “현재 중국에서 100만 신도를 보유하며 활발히 포교하고 있는 중국산 이단 ‘동방번개’가 한국에 들어와 활개를 치고 있다. 몇 년 사이에 동방번개의 피해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며 “지금 큰 피해를 주고 있는 신천지도 처음에는 몰랐지만 단 몇 년 새 늘어난 것이다. 동방번개도 미리 알고 철저히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방번개는 지난 해 1월 국내 주요 일간지에 전면광고를 내보내고 인터넷 홍보를 통해 확산되고 있으며 현재 구로동 본부를 만들기까지 했다.

    진 목사는 동방번개가 현재 국내에 퍼지고 있는 신천지와 비슷한 방법의 포교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진 목사는 “이들의 교리는 비유풀이로 시작한다. 교주가 예수의 영을 받아 재림주가 됐다고 주장한다”며 “2천년 전의 복음은 들을 필요가 없고, 현재 와 있는 재림주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포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들의 포교 방법 중 하나는 ‘내부 정탐’이다. 신천지의 추수꾼과 같이 각종 관계를 통해 교회 내부에 침입해 내부 실정을 파악하고 포교해서 성경공부를 시켜 빼내온다”며 “지금 각 교회에 내부 정탐꾼이 많이 들어가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진 목사는 동방번개 포교에 대응해, 교인들이 교회 밖에서 성경공부를 삼가고 이단 세미나 등을 통해 이단 포교를 예방할 것, 이단에 경계심을 갖고 교회 내 침투한 내부정탐꾼을 색출하는 방법 등으로 철저히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화미 ⓒ 뉴스미션

    출처: USA아멘넷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