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적인 예배의 주된 원리 (존 라일)

 

 

성경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공적인 예배의 주된 원리를 다음과 같이 간추려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참된 예배는 합당한 예배의 대상에게만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라고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다른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 기도나 송영을 금합니다. 다른 대상을 예배하는 것은 시간낭비요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가증한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2계명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예배하는 것은 물론 그것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조차 금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참된 예배는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 또한 성경이 분명히 명하는 사실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들입니다(히 7:25).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죄를 미워하시는 무한히 정의로우시고 순전하시고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중보자와 그분이 이루신 대속과 상관없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겠다고 하는 사람의 예배는 밥지 않으십니다.

 

셋째, 참된 예배는 온전히 성경의 제어를 받는 예배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예배에 대한 직접적인 지침이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예배를 준비하고 드리는데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교회의 39개 신조에서 밝히는 것처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배치되는”그 무엇도 행해선 안 됩니다. 성경은 이런 유대인들 에 대해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마 15:9). 그러므로 사람이 정한 규례를 예수님이 친히 정하신 것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기고 양심에 대한 구속력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주제넘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규례가 “자의적 숭배”를 하는데는 “지혜 있는 모양”으로 드러나지만, “육체의 욕망을 억제하는데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말합니다(골 2:23).

 

넷째, 참된 예배는 지각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자는 지금 자신이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면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무지는 경건의 어머니다”라는 말은 전혀 잘못된 말입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사람의 예배에 대해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라고 하셨습니다(요 4:22).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몸은 물론 지각을 가진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지성을 발휘하지 않는 예배는 사람이 아닌 짐승에게나 어울리는 무익한 예배입니다.

 

다섯째, 참된 예배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예배입니다. 우리의 지각은 물론 감정까지도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물론 속사람까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입술로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유대인들의 예배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사 29:13, 겔 33:31). 사적인 예배든 공예배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예배자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아무리 경건하게 보이고 잘 조직된 예배라 할지라도, 마음으로부터 우러난 예배가 아니라면 영이신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깨지고 상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멸시하지 않으십니다(삼상 16:7, 시 51:7).

 

여섯째, 참된 예배는 하나님께 경외함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역은 실제로 처음부터 끝까지 경외함이 없는 예배를 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성전 뜰을 더럽히는 자들을 두 번이나 성전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교회당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시로 사방을 두리번 거리고, 귓속말을 주고받고, 계속해서 무엇을 만지작거리는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 성전 뜰에서 쫓겨난 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몸만 와 있는 예배”는 아무 의미가 없는 예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갖추어야 할 합당하고 바른 예배이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소중한 만큼, 합당하고 바르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또는 감사하자.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28-29).

 

이 원리들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 무익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경과 상관없고, 그리스도가 없고, 성령도 없고, 지식도 없고, 마음도 없고, 아무런 유익도 없는 예배 말입니다. 이런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회중과 함께 있지만 실상은 회중 밖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이런 결함이 있는 예배를 드리지 않도록 조심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참되고 바른 예배를 원하십니다. 무익한 예배를 길게 자주 드리는 것을 전혀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드리는 회중의 영적이고 내적인 상태를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회중의 숫자나 그들의 외적인 경건의 모양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
글쓴이 : 전상범|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By: 기자석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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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재 박사의 성서 건강학] 배변 습관-변비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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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비는 건강의 커다란 문제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경 쓰고 고민하며 살게 하는 몸의 현상이다. 특히 많은 여성들이 변비를 숙명처럼 안고 살고 있다. 변비가 과연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 현상일까.

긴 소장여행 후 대장에서는 남은 수분이 흡수되면서 소화된 음식의 찌꺼기를 고체화하는 작업을 한다. 결국 1m 남짓한 대장에서의 과정을 거치면서 대장균이라 불리는 미생물의 작용과 수분 흡수에 의해 대변이 완성된다.

대장을 통해서 완성된 대변은 길이가 15㎝쯤 되는 직장에 쌓이게 된다. 직장에는 대변이 어느 정도 모이는가를 수시로 중추신경계에 알리는 감각수용체가 발달되어 있다. 끊임없이 밀려 내려오는 대변이 직장에 계속 쌓인다 하더라도 그때마다 대변을 볼 필요가 없도록 하나님이 창조해 놓으셨는데 자율신경계 중 교감신경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항문의 속조임근을 수축시켜 쌓여 있는 대변이 아무 때나 나오지 못하게 하여 평상시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옛날에는 사람이 죽은 것을 확인할 때 항문을 살폈다. 이는 자율신경계의 지배를 받는 속조임근이 작용하지 못해 직장에 쌓여 있던 변이 죽음과 동시에 배설되어 있음을 확인한 후 사망을 선언하는 과학적 사실을 근거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대변의 양이 점점 많아짐에 따라 도저히 교감신경의 작용만으로 배변이 억제되지 못하게 될 때 중추신경계는 직장근육을 수축시켜 배변을 추진한다. 그러나 변의에 따라 배변할 상황이 아닌 경우 항문 바깥조임근에 수의적으로 힘을 주어 변을 참게 한다.

결국 항문의 바깥조임근이 속조임근을 최종 조절한다고 할 수 있다. 설사를 할 때는 어떤 병적인 이유로 미처 흡수되지 못한 수분을 포함한 많은 배설물이 엄청나게 빠르게 직장으로 모여들기 때문에 평소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는 교감신경의 억제 한계를 넘어 수의근인 바깥조임근조차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어 화장실로 가게 되는 것이다.

결국 배변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대장의 운동속도다. 장운동이 항진되면 자주 화장실에 가게 되고 장운동이 억제되면 배변이 더디게 된다. 그러면 흔히 주위에서 목격되는 변비환자들의 경우 전적으로 장의 운동속도만이 문제일까.

장운동이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1주일에 3회 이하로 대변을 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적게 먹는 데다 소위 ‘배변습관(bowel habit)’을 잘못 들인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즉, 변의가 있지만 그렇게 급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중추신경의 의사를 쉽사리 무시해버리기 때문에 변비는 시작된다. 그 결과 점차 강한 자극이 있어야만 변의를 느끼게 되고 이것이 만성화될 때 변비가 고착된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배변습관’이라는 말을 쓴다. 장운동이 정상이라 하더라도 적은 양의 음식을 먹으면 상대적으로 변의를 느낄 정도의 대변이 모이는 데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다. 결국 여성이 음식을 덜 먹는 현상이나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다이어트도 변비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확실한 것은 특별히 병적요인에 의해서 변비가 생긴 것이 아니라면 변비를 해결하기 위해 적당량의 섬유질이 함유된 음식을 섭취하고 매일 아침 화장실에 가서 배변을 시도하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배변은 생리적 현상이지만 습관에 따라 얼마든지 조절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정교하고 편리한 장치를 우리 몸에 장착해 놓으셨다. 절제되지 못한 삶 가운데 그 질서를 습관적으로 무시할 때 몸이 불편해지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바로 변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울대 의대 교수>


 
[이왕재 박사의 성서 건강학] 대장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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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와의 FTA 문제가 오랜 논의 끝에 타결된 모양이다. 필자가 다녀 온 캐나다는 분명 자동차 산업과 같은 중공업보다는 농축산업과 같은 1차 산업이 발전한 나라이니 자동차를 파는 회사는 신이 날 것이고 농축산업에 종사하는 분들은 울상일 것이라는 짐작은 뉴스를 통해서 확인한 바대로다.

육류가 싼 값으로 식탁에 오르겠지만 축산업 도산이 우려된다는 뉴스와 상관없이 이제 분명 더 많은 분들이 육류를 소비하게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2012년 통계에 따르면 국민 1인당 육류소비가 연간 44㎏에 이르러 거의 육식국가가 된 듯한 기분이다.

양질의 단백질이 전 국민에게 원활히 공급되어 국민건강지수를 끌어 올린 것은 틀림없지만 우려되는 것은 대장암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육식을 주식으로 하는 미국을 위시한 서구 국가들의 경우 대장암이 항상 상위권에 포진하는 것을 보면 분명 육식과 대장암은 그 관계를 뗄 수 없을 것 같다.

대장은 소장에 비해 길이가 현저하게 짧다. 다만 그 직경이 소장보다 크다. 소장의 기능이 소화와 흡수라고 하면 대장의 기능은 대변 만들기라고 보면 된다. 6∼7m의 긴 소장 여행을 통해서 우리 몸에 필요한 양분이 거의 다 흡수되고, 흡수될 수 없거나 흡수할 필요가 없는 물질들이 대변이 되어 배설되는데 그 과정의 핵심은 수분흡수다. 실상 수분 흡수의 양으로 보면 소장에서 더 많이 이루어지지만 흡수율이 대장에서 더 높다는 이야기다. 즉, 하루에 약 1.5ℓ의 수분이 대장으로 넘어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중 90% 이상이 흡수되고 나머지 10%(100㎖ 내외) 정도가 대변을 통해 배출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장의 다른 큰 특징의 하나는 그 안에 많은 균이 서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위 일반인들이 대장균이라고 일컫는 균을 말한다. 그 수가 사람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 수보다도 무려 10∼100배에 이른다고 하니 가히 ‘사람은 균의 바다 위에 산다’는 어느 미생물학자의 말이 생각난다. 이 균들은 우선 인간에게 직접 감염을 통해 만날 수 없는 균들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예방주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먹고 남은 음식을 먹고 살면서 인간에게 유익한 물질을 남기는 소위,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실례가 유산균으로 한국 사람이 즐겨 먹는 김치 속에 풍부하게 살고 있는 것은 상식적으로 독자들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생관계로 좋은 물질만을 인간에게 주는 것은 아니다. 대변의 냄새가 그를 증명해 준다. 실제로는 대부분의 균들이 부패균이어서 먹고 남은 음식을 부패시키기 때문에 숙주인 인간에게 결코 좋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대변 냄새의 주종이 단백질이 부패될 때 발생하는 냄새인 것으로 보아도 금방 이해할 수 있는 사실이다. 부패균과 인간이 공생한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대장암의 절반이 맨 끝 부분인 직장에서 발생하고 균이 없는 소장에는 거의 암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대장암은 대장균과 관계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필자에 의한 흥미로운 실험의 결과는 건강을 위해 다량의 비타민C를 복용한 경우 병원성을 나타내는 대장균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비병원성 대장균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데 이는 비타민C의 정기적 복용이 늘어나고 있는 대장암에 대한 대비일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단서라는 생각이다.

지나친 단백질이 부패돼 대장건강을 위협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지나친 욕심이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을 위협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탈이 난다. 건강한 신앙, 건강한 몸을 잘 유지하는 크리스천이 되자.

<서울대 의대 교수>

강단에 노트북 들어다 보고 설교하는 목사

광야의 소리 ㆍ 


강단에 노트북 들어다 보고 설교하는  목사들!!!|
 
 
 
   
몇년 전에 저희 모친 상을 당하여 모친이 살아 생전 일평생 다니시든 본 교회 50대 후반의 담임목사가 저희 모친 장례식을 맡아 인도하는데 내가 맏 상주가 되어 그 장례식을 지켜보니, 그야말로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다.
 
 모친 상을 당하여 유족들은 슬픔에 잠겨 있는데 그 장례식을 집례하는 목사는 소위 입관예배, 발인예배, 하관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 장례식 다 마칠 때까지 그 넘의 손바닥보다 좀 더 큰 노트 북을 들어다 보고 모든 장례예식
을 다 마치는데, 나도 명색이 목사로  저의 모친이 다니시던 교회 담임목사가  인생 일대 가장 경건하고 엄숙해야 할 장례예식에 솜털보다 더 가볍고 경박스럽게 그 따위 노트북 들어다 보고 성의없이 장례식을 치루는 것을 보고 적잖이 불쾌하고 마음에 트라우마가 생겼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속으로 그 목사 참 싸가지 없네,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자기 교회 교인 장례식을 맡아 진행하는 담임목사가 그 장례예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무슨  계산기 두드리듯이 노트북 들어다 보고 어디서 클릭해 주셔온 설교를 하는지  모르지만,연신 노트북 들어다 보고 두드리며 성의없이 건성으로 사무적식 장례예식을 진행하는 것은 고인에 대한 예의도 아닐뿐만 아니라 유족들에게도 하나의 모독이고 치욕에 가까운 일일게다.
 
 
 교회 담임목사가 한 영혼이 마지막가는 가장 엄숙하고 경건한 예식을 그렇게 쉽게 싸구려 땜질식을 하듯 하는 것을 보니,참 요즈음 목사들 너무 쉽게 목회하는구나!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천국가신 저희 모친에 대한 장례예식에 보여 준 그 목사의 예의 없고 싸가지 없는 행동에 그 때 일을 지금도 생각하면 마음 한켠에 드리우진 그 목사에 대한 부정적인 그림자는 지울 수가 없다.
 
저희 모친 장례식을 다 마치고  난 후 나는 내가 담임하는 교회로 돌아와서 그 뒤 목사들이 강단에서 설교하는 것을 t.v나 인터넷을 통해 유심히 보게 되었다.
 
 
그 전에는 강단에서 설교하시는 목사님들을 여사로 보았는데, 저희 모친 장례식에 그 목사가 노트북을 들어다 보고 설교하는 것을 보고 마음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뒤로 요즈음 목사님들이 강단에서 조차 노트북을 들어다 보고 설교하는지, 아니면 손수 정성껏 준비한 원고를 들어다 보고 설교하는지 유심히 살펴 보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그걸 지켜 보면서 더 놀라고 까무라치게 경천동지한 일은 오늘날 대형교회로 부터 적은 개척교회 목사들 까지 예배시간 많은 목사님들이 노트북을  갖다 놓고 그걸 들어다 보고 설교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그걸 보고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 정말 너무 충격적이고 맨붕 상태였다.
 
 대학교수는 학교선생은 자기가 연구한 것을 노트북에 준비해 저장해 놓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또 강의해도 그건 무방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단언하건대 목사는 절대 강단에서 노트북 들어다 보고 설교하면 안된다.
 
지금 우리가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첨단 디지텔 전자 문명속에 편리한 삶을  살아 간다고 해도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 강단에서 구원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교인들이 볼때에 얘들 컴퓨터 앞에 앉아 모니터 들어다 보고 자판 두드리며 장난하며 게임하듯, 불경스럽고  경박하고  천박스럽게 강단에 노트북 올려 놓고 그것 들었다 보고
두드리며 설교하는 목사는 정말 아니다 싶다.
 
 
사실 그런 식으로 설교 할려고 하면 노트북엔 인터넷 설교 사이트 같은데 들어가면 손가락으로 몇번 안 두드리리고 클릭만 해도 수십만 수백만 설교가 주루루 쏟아져 나오는데, 목사가 가령 일주일 내내 놀다가 주일 낮 아침에도 그런 사이트에 들어가서 적당한 설교 하나 줏어 설교 한들 하나님이나 아실까, 교인들 누가 알겠는가? 
 
 또 그 주간 무슨 일로 바빠 설교준비 제대로 못한 목사는 그런 남의설교 줏어 가지고 자기것 마냥 설교하고자 하는 유혹을 떨쳐버릴 목사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우리나라 유명한 대하 장편 소설가들 중에 대부분 작가들이 컴퓨터앞에 앉아 자판 두드리면 원고 작성을 하지 않고 손수 자기 손으로 원고에다가 한글짜 한글짜 각고의 노력으로 소설을 쓴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힘들게 손수 자기 필력으로 원고지에 글을 쓸때 그기에 기상천외한 영감이 떠오르고  또그 글속에 작가의 혼이, 생명이 그 소설속에 묻어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작가는 아무리 힘들어도 자기 손으로 펜을 들고 한자 한자 마치 한폭의 천에 수를 놓듯 정성을 다해, 혼을 다해 원고지에 글을 쓰내려 간다고 한다.
 
 
그리곤 또 쓰다가 지우고 또 쓰고 그러면서 그 글 한자, 한자 속에 작가의 혼과 생명을 불어 넣는다고 한다.
 
 
영생이 없고 생명이 없는 일반 소설도 오늘날 이렇게 편리한 디지털 문명의 이기를 다 제쳐 놓고 마치 장인이 손으로 일구월심 지극정성을 다해 조각을 다듬어 명작이 되고 걸작 빚어  그렇게 작품을 만들어 간다면 오늘날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들은 얼마나 더 설교 말씀을 준비하는데 혼신을 다해 손수 그 말씀을 쓰고 적고 준비 하면서 마치 산모가 해산의 고통을 통해 새생명을 잉태시키듯 그런 각고의 노력과 심혈을 다 기울려 준비한 설교를 강단에서 전할 때 그 목사의 메세지에 성령님이 크게 역사하시고 그런 설교를 준비한 목사의 설교에 은혜받지 못하고 돌아갈  성도들이 없지 않겠는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순교자 주기철목사님은 그의 전기에서 그 분은 주일 설교 한편을 위해 일주일을 내내 기도하시고 골방에서 씨름하시며 설교준비를 하시고 그리고 주일 날 설교하시고 나면 온 몸에 기운이 진하여  드러누워 일어 날 기력 조차 없었다고 하셨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 라는 말은 만
고 불변의 진리다.
 
 
 그래서 우리 목사들은  강단에서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선지자가 본 환상중에 어느 골짜기에 마른 뼈닥기들 이 천을 이루고 만을 이루는데 그기에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에스겔선지자로  통해 대언되어 질때에 그 바짝 마른 뼈닥기들이 살아 여호와의 큰 군대가 되듯 그런 목사의 각고의 힘든  말씀의 준비속에 이루어진 설교가 강단에서 선포될때 많은 성도들의 상하고 병들고 죽어가는 영혼들이 살아 일어나는 역사가 일어 날 줄 믿는다.
 
 
 
그래서 목사에게 제일 우선순위는 교회성장도 부흥도 아니고 철저한 설교 준비다. 그런 설교속에 내 마음과 내 정성과 믿음과 삶이 그 말씀속에 녹아 들어가게 되고 그리고 그런  준비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강단에 서서 전할때 비로소 그  말씀을 준비 할 때에 함께 하시며 도우시던 성령님이 그 
말씀을 전하는 강단에서도 함께 하시고 임재하셔서  그 말씀을 통해 좌우에 날선 검보다 더 예리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그 날 그기에 참석한 모든 교우들에게 혼과 영과 골수를 찔러 쪼개고 그들은 그 말씀 앞에 민둥산보다 더  벌거벗은 자신들의 벌거벗고 수치스러운 죄악된 모습들을 발견하고 
꼬구려지며, 그날 강단에서 쏟아지는 예배시간  말씀의 폭포수속에 늘 세상을 이길 새힘을 얻고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점점  주님의 뜻가운데  주님을 닮아 가는 거룩산 삶을 살아가게 될것이고 또한  장성한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가게 될것이다.
 
 
 그렇니 목사님 들이여!  제발 강단에 노트북 갖다 놓고 그거 들어다 보고 손쉽게 가볍게 설교하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앞에 심히 불경스럽고, 그기 앉아 예배드리는 교인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우리 목사들의 치명적인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싸구려 극장, 쇼구경하는 것보다 더 수준 낮고 저질스럽게 만드는 일이다.


출처: USA아멘넷 독자 게시판

행복을 막는 10가지 습관

(livewiseblog.com)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를 희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해지기 위해 할 일과 가져야 할 습관에 대해서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행복을 방해하고 불행을 낳는 습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미국 허핑턴 포스트는 지난 30일 행복해지기 위해서 알아두어야 할 “행복을 막는 10가지 습관”에 대하여 보도하였다.

1. 원한을 품는 것

남에게 원한을 품는 것은 결국 본인의 정신 건강에 이롭지 못하다. 상대를 향한 분노와 적의심을 이기지 못하고 해하고자 하면 결국 인과 응보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의심을 누르고 다시 한번 상대방에 대하여 생각 해볼 필요가 있다. 왜 그렇게 행동했을까? 혹시 내가 모르는 그 사람의 좋은 면이 있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을 통해 상대방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면 상대에 대한 원한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2. 꿈을 포기하는 것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는 꿈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이 중 몇몇의 사람들은 실패가 두려워 쉬운 길을 택해 결국 꿈을 실현하지 못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시간이 흘러 후회하기 마련이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행복을 누린다. 원하던 결과를 얻지 못할지라도, 후회가 없기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않은 사람보다는 백배 낫기 때문이다.

3. 즐거움을 주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것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할 때 당연히 더 행복한 법이다. 그러나 일이나 상사와의 만남 등 하고 싶은 일 보다 해야 할 것이 더 먼저라는 생각에 좋아하는 일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즐거움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는다면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만 하고 사는 지루한 하루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고, 궁극적으로 삶에서 행복을 영위할 수 없다.

4. 진솔치 못한 인간관계를 맺는 것

요즘 사람들의 대화는 진솔치 못하다. 늘 겉돌며 누구도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나를 이해하고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과 함께할 때 행복을 느낀다. 서로 교감하고 조언을 구하는 대화를 통해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이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5. 비교하는 것

어떤 사람은 부자이나 끔찍한 결혼 생활에 시달릴 수도 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성공적인 직장생활은 못해도 행복한 가정이 있을 수 있다.

이처럼 비교한다는 것 자체는 매우 편협적이고 과장이 심하며 진실되지 못하다. 따라서 타인의 삶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그 대신 자신이 가진 행복을 즐길 줄 아는 삶이 더 바람직하다.

6. 경험보다 물질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것

사람들은 평소 원하던 물건을 가질 때 일시적인 행복감에 젖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익숙해지면 금방 사라지곤 한다.

반면, 오랜 친구와의 저녁식사, 여행, 사랑하는 이들과의 만남 등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들은 오래 기억 속에 남으며 의미가 깊어 더 큰 행복을 전해준다.

7. 창의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가끔 마음속에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채 창의적이고 새로운 도전을 하지 못하는 것 또한 행복을 불러오기 어렵다. 삶의 재미는 새로운 시도와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의력을 발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8. 삶에 안주하는 것

행복은 끈임 없이 추구되어야 한다. 정말로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항상 본인이 가진 삶에 안주하지 않고 이를 뛰어넘고자 한다. 더 큰 행복을 얻고자 하는 과정과 결과의 즐거움을 알기 때문이다.

반면 본인이 가진 것에 안주하는 삶은 결국 익숙해져 계속적인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9. 남에게 베풀지 않는 것

대부분의 행복은 바라는 것을 얻을 때 느껴지나, 남에게 베풀 때 얻는 행복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가끔 봉사활동에 참여하거나 매월 소정의 금액 기부하는 등 대단한 일이 아닐지언정,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 때 얻는 행복은 배가 되어 삶을 보람차게 할 것이다.

10. 현재를 즐기지 못하는 것

미래를 걱정하거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현재를 즐기지 못하는 행동은 어리석다.

본인의 의지로 바꾸지 못하는 일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눈 앞에 놓인 순간 하나하나를 즐기고 보람 차게 보낸다면 행복도 제 발로 걸어 들어올 것이다.

(코리아헤럴드 김민진 인턴기자 minjin10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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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 오려나 봐요
               최송연                                                                   
         
봄이 오려나 봐요
버들개지 사이로
새하얀 안개 이슬을 타고 

봄이 오면
내 사랑
그분도 오시려나
가슴이 마냥 콩닥이네요

하지만
기나긴 겨우살이
너무 찌들어버린 내 옷

행여,     
내 사랑 그분께서 
날 몰라보시면 나는 어찌할까

세마포 옷 빨리 꺼내
그 피로 씻고 닦아 정결케 하고
꽃단장 분단장도 곱게 해야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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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주 리투아니아 일본 영사 스키하라의 자아 희생이 유대인 30,000명 이상의 목숨을 구하다


(1) 영사관에 몰려 온 사람들

1939년 세계 제2차 대전이 한창 무르익을 때, 나고야 태생의 스카하라 치우네씨는 일본 의 전통적인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예수를 믿게 된 그는 기도 중에 외국 대사가 되어 복음을 열 방에 전하라는 소명을 받는다.  1930년 그는 일본 정부로부터 러시아 근처 리투아니아( 폴란드, 소련 간의 작은 나라)의 총 영사로 임명되었다.

하루는 대사관 앞에 50여명의 사람들이 몰려 오더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왼 종일 떠나 지 않고 무어라고 소리 쳐 아우성 대고 있었다. 스키하라 영사는 그들 중 몇 사람을 대표 자로 대사관 안에 불러들여 사연을 물었다. 사연인즉 자기들은 폴란드에 살던 유대인들인데 독일군이 폴란드를 점령하여 거기서 야간에 탈출 하여 리투아니아로 피난왔는데, 독일군 탱크가 지금 리투아니아로도 들어오고 있다.

독일인은 유대인은 다 잡아 죽이니 자기들도 여기 있다가는 필경 죽을 판이라. 우리를 살려 달라고 절박하고, 간절한 어투로 탄원하는 것이었다. 스키하라는“날보고 어찌 해달라는 것이냐?” 물으니 그들은 우리가 여기서 빨리 탈출하 도록 일본행 비자를 발급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을 불쌍하게 여긴 스키 하라씨는 하 루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 본국에 전보를 쳤다

“여기 유대인들에게 비자를 발급해 주어도 되겠느냐?” 고 하니 답신은 NO!였다.  일본이 동일과 이태리와 삼국 동맹을 맺고 있는 중인데, 독일이 원치 않는 일을 일본이 허락할 리가 없었다. 대사관 앞에서 노숙하며 애타게 기대를 걸고 있는 유대인들을 실망시킬 수가 없 어서 조금 더 기다리라고 하고 두번째 전문을 보내어도 역시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 날 또 세번째로 급히 보낸 전문은 비자 발급 여부에 대한 질문이 아닌 강한 어투로 "이들을 여기서 내보내지 않으면 그들은 다 죽으니 허락해 달라." 고 하였으나 역시 노!였다.  

 

(2) 사람의 생명이 더 중하지 아니한가?

그래서 그들을 불쌍하게 여긴 기독교인 스키하라씨는 생각하기를 “사람의 생명이 더 귀하지 아니한가? 어찌 이들이 죽는 것을 뻔히 보면서, 그들을 사지로 내몰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주님께 기도로 주님의 인도를 구하며 성경을 펴니, (행5:29)이 펴졌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는 이제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이 유대인들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했다. 사무라이 전통 정신을 그리스도인 정신으로 승화시킨 스키하라는 그가 비겁하지 않고 주께 순종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다시 기도하였다. 그리고 결심하기를

“국가의 명을 어겨 나는 처벌을 받는 한이 있어도 내 직권으로 그들에게 비자를 내주리 라” 고 의로운 결단을 내리고, 그들을 불러들여 비자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비자는 이름 쓰고 싸인만 하는 것 뿐이 아니고 서류를 다 작성하는 것이므로 1인당 서류 작성에 20분~ 30분만 가지고는 되지 아니하므로 서류 작성은 너무 바뻤다.

드디어 그들 50여명에게 비자를 다 내주고 나니, 그 소문을 들은 유대인들이 점점 몰려 와 수백명이 되고 드디어 며칠 동안에 1,000명이 넘게 되고, 나중에는 2,000명에서 3,000명 가량도 넘었다

그래서 부지런히 싸인 하는데, 하루에 200명씩 밖에 싸인을 못하므로 자기 부인 가족과 직원들까지 총동원 되어 서류를 작성하고 자기는 싸인만 하여도 시간이 부족하였다.

너무 바뻐 야간에 잠도 누워 못자고,의자에 앉은 채 잠깐씩 졸며 싸인하였고, 싸인하는 손은 마비되어 감각도 없이, 잘 움직여지지도 아니하였으나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 라 만난을 무릅쓰고 싸인하였다

 하루 200명씩 다 싸인했으나 더 많이 몰려와 지쳐 죽도록 싸인하였다. 그 때 본국에서 전문이 날아와 주 리투아니아 일본 영사관을 폐쇄하니, 영사관 문을 닫고, 독일로 이동 하라는 지시가 왔다,

그래서 모든 행정 조치가 단절되니 더 이상 영사관 업무를 볼 수가 없어서 영사관 문을 닫고 이동할 수 밖에 없었는데 드디어 이사하는 그 D-Day 에 그와 가족이 가는데도 유대인들이 따라왔다. 기차가 정거장에 서 있는 동안에도 기차 안에서 계속해서 싸인해서 창 밖으로 내어주었다.

드디어 기차가 움직이자, 유대인들은 일제히 눈물을 흘리면서 양팔을 들어 큰 소리로

“스키하라 만세”

를 외쳤다. 그 때 스키하라는 다 싸인 못해 준 사람들을 위하여 마지막 결단을 내려 주 리투아니아 일본 영사의 직인(印)을 창 밖으로 던져주며

“ 당신들 마음대로 하라!”

고 외치자 유대인들이 그 도장을 줏어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그 도장으로 가로 싸인 만든 것까지 합하면 스키하라가 구한 유대인은 세대주인 남자들만 약 6,000명이라 하며, 그 딸린 가족들까지 합하면 약 30,000명 이상이라 한다. 그들은 일본까지 와서 2,3일 정도 있다가 다시 홍콩을 통해서 독일군이 없는 유럽으로 갔다

 

(3) 스키하라의 고독한 신세

스키라하씨는 영사직에서 쫓겨나고 그 후 독일은 패망하고 2차대전이 끝나자 서독에 진주한 미군에 의하여 스키하라 가족은 수용소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 미군이 진주 안했으면 유대인 방면 죄로 곧 사형 당했을 것인데 사형 직전 풀려 났다 한다.)

일본에 돌아 왔으나 직장도 없이 불쌍한 처지가 되며 세상은 그를 다 잊었다. ( 그러나 천사들은 물론 그의 모든 행실을 하늘 책에 다 기록하였을 것이다.)  

(4) 스키하라를 찾아라

그 후 이스라엘이 독립하고 6일 전쟁을 승리하며 안정을 되찾은 후 이스라엘 정부는 주 일본 이스라엘 대사에게 “ 스키하라를 찾아내라 ”는 특명을 내렸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독특한 첩보 능력은 드디어 시골에 쓸쓸히 묻혀 있던 스키 하라를 찾아내었는데, 그를 만난 주일 이스라엘 대사 자신이 바로 스키하라의 싸인으로 리투 아니아를 탈출한 유대인들 중 한 사람이었다. 대사는 스키하라를 만나자 말하기를 “ 당신은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저는 당신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자 여기 당신이 발행한 비자를 보십시오”  하면서 오랜 세월 지나는 동안 다 낡은 주 리투아니아 일본 대사 스키하라 발행의 일본 행 비자를 꺼내 보여주며

“ 당신이 발행한 이 비자로 수천명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 비자를 귀중한 보물로 간직하며 당신께 감사하며 “홀로코스트”의 쓰라린 경험을 잊지 않고 이스라엘 나라 건설에 힘쓰고 있습니다

앞으로 얼마 안 있어 열리는 이스라엘 건국 기념일에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이스라엘 나라를 대표하여 초대합니다.”

하면서 미리 작성한 이스라엘 수상의 초대장을 주었다  그리하여 스키하라는 그 건국 기념일에 초대 받아 대대적인 전 이스라엘 국가적 환영을 받으며, 건국 기념일에 이스 라엘 대통령으로부터 이스라엘 건국 제1공로 훈장을 받았다
( 그 훈장에는 많은 상금과 그의 한 평생 생활비가 따라 다닌다.)

그 자녀들은 이스라엘 정부에서 공부 시켜주고 장남은 나중에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을 졸업하고 보석 회사 사장이 되었다

스키하라씨는 일본 정부로 부터도 명예 회복이 되었고 더구나 그를 2차대전의 영웅으로 추서하였고 그의 기념관도 있다.

그와 그의 아내 그의 아들 그리고 그의 몇 동료들은 해직 당하여 끌려나기까지 약 28일간 무려 6,000명의 유대인들에게 비자를 발급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서 그는 그와 그의 가족은 많은 어려움을 당했지만 후일 이스라엘 국가가 예루살렘 근교에 유대인 학살 기념관 야드 받셈을 건립하였을 때 이스라엘의 은인으로 그와 그의 가족이 초청받아 오게 된다. 그리고 이 결정에 대하여 후회가 없었느냐는 한 유대인 기자의 질문이 있었을 때 가족을 대신하여 스키하라의 아들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저희 아버지께 말씀하셨고, 저의 아버지와 저희들은 기꺼이 순종했을 따름입니다. 아무런 후회가 없습니다. 우리를 통해 당신들(유대인들)을 인도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 또한 우리의 남은 날도 인도하실 것을 믿고 있으니까요”

그는 일본으로 돌아온 몇년 후 이스라엘 정부에서는 그에게 또 다시 다른 훈장을 추가로 재차 수여하려 하였으나 그가 몸이 약하여져서 이스라엘로 가지 못하고 주일 이스라엘 대사가 그에게 와서 훈장을 전달하였고 그로부터 얼마 후 죽었다  자아 희생은 예수님의 정신이다

사랑은 자아 희생이 없이는 나타나지 않으며 주님의 십자가처럼 자아 희생은 많은 사람 의 목숨을 구하니 사랑은 하나님 나라의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요  우주 행복의 대원칙 이다

출처:
 "예수가 좋다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죄를 참되이 보속하며 양심에 평안을 준다/ 존 칼빈

 

 

그들(카톨릭)은 말하기를, 죄 사함과 화목이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갈 때에 단번에 일어난다고 하고, 세례를 받은 후에 죄를 범하면 다시 보속을 통해서 회복해야 한다고 하며, 교회의 열쇠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피가 아무런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고 하니, 그들의 패역함이 어느 정도인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와는 전연 달리 말하고 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요일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라”(요일2:12). 그는 신자들을 향하는 말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 제시하면서 거역을 당하신 하나님을 진정시킬 수 있는 다른 보속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단번에 너희와 화목되셨으니, 이제 너희 스스로 다른 수단을 구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영원하신 대언자로 제시하며,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심으로 우리를 아버지의 사랑에로 회복시키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야말로 죄를 사하는 영원하신 화목 제물이시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한 말은 언제나 진리이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곧, 다름 아닌 오직 그가 죄를 없이 하시는 것이요, 그가 홀로 하나님의 어린양이시요, 그가 홀로 유일하신 속죄 제물이시요, 화목 제물이시요, 유일하신 보속이시라는 것이다. 죄를 사하시는 권세와 능력은 아버지께 속한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또 다른 각도에서 제시되고 있다. 곧, 우리가 지고 있는 형벌을 그 스스로 담당하셔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우리의 죄책을 씻어버리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속죄에 우리가 참예하게 될 것이다. 다만 자기 자신의 보속으로 하나님을 진정시키려 하는 자들이 그리스도께 있는 영광을 빼앗는 일만 없다면 말이다.

 

보속의 원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빼앗고 양심을 괴롭힌다.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곧, 그리스도의 영광을 순전하게 지키며 그 영광을 흐리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양심으로 죄 사함을 확신하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우리의 죄악을 담당시키셨고(사53:6) 그가 맞으신 채찍으로 우리가 낫게 하였다(사53:5)고 말씀한다. 베드로는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2:24). 바울도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셨고(롬8: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셨다(갈3:13)고 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짐을- 그 저주와 그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과 사망의 형벌과 함께- 친히 담당하시고 제물로 드리신 바 되셨을 때에, 그의 육신 속에서 죄의 권세와 저주가 죽임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처음 죄를 씻은 이후부터는 우리 각자가 회개에 합당한 보속을 드리는 정도만큼만 그리스도의 고난의 효능을 느낄 수 있다는 그들의 거짓된 이론 같은 것은 여기서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죄를 범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보속을 의지해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리고 양심을 편안하게 하는 면에 있어서도, 과연 보속을 통해서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에 과연 그 사람의 양심이 편안해지겠는가? 과연 어느 정도 보속해야 충분하다는 확신을 얻게 되겠는가?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과연 긍휼하신 분인지에 대해서 항상 의심하게 될 것이고, 언제나 근심에 싸이고 언제나 두려워 떨게 될 것이다.

 

사소한 인간적인 보속을 의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가볍게 여기며 죄의 그 큰 짐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적절한 보속을 통해서 몇 가지 죄를 속한다 치더라도, 나머지 무수한 죄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 죄들을 다 보속하자면, 평생을 죄를 보속하는 데 소비한다 해도 수백 번의 인생을 살아도 모자라지 않겠는가?

 

또한, 죄 사함을 선언하는 그 모든 성경의 말씀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 교육 받는 자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교회의 품에서 양육 받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높이 기리는 사신의 임무, 즉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5:20)고 선포하는 일은 외인들에게가 아니라 이미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보속과는 작별을 고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탁하게 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 자기와 화목되”게 하셨다(골1:20)고 말하는데, 그 사실은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교회에 받아들여지는 순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평생토록 지속되는 것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155-158

 

 

출처: 청교도의 길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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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하나님의 나라, 과연 무엇인가?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세계교회협의회(WCC)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매특허 낸 듯이 사용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회적 활동, 윤리적 실천, 이상사회 건설 등 비종말론적이고 세상적인 무엇으로 이해한다. 지난 해 부산에서 선포된 WCC의 새로운 선교-전도 선언서 "함께 생명을 향하여"(2012)는 하나님의 나라와 이상적 세상 만들기 활동을 똑 같은 것으로 여긴다. 한국교회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하나님 나라 개념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듯 하다. 교회의 생명력을 앗아가는 죽음의 독이 한국교회에 깊숙이 침투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설교자들의 메시지, 신학자들의 대화, 교회일치운동 선언문, 기독언론 보도문 등에 자주 등장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독교인이 추구해야 하는 최대의 가치이다. 그러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이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마다 이해가 다르다. 하나님의 나라, 과연 그것은 무엇인가?


아래의 글은 필자가 신학 초년생 때 쓴 것이다. 당시의 한국교회는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천당으로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미래에 도래할 신국으로 인식하는 것이 지배적이엇다. 이 글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체적을 조망하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enjoy)하는” 삶(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 제1)의 중요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추구하는 것과 다른 개념의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한다.


(원제: 천국이란 무엇인가?)


기독교는 천국(하나님의 나라) 운동이다. 천국은 기독신자의 소망이며 현실이다. 성경 전체에 깔려있는 주제이다. 특히 신약성경에 나타난 우리 주님의 사역과 메시지의 중심 주제는 천국이었다. 이 천국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은 기독교 안에서 늘 있어왔다. 근래에 서구신학계는 이 문제를 새로운 관심사로 등장시키고 있다.

 

우리 한국 기독인들은 천국, 하나님의 나라를 죽은 다음에 가는 저 세상으로 이해해 버리는 데 커다란 문제가 있다. 한국 기독교는 수세기 동안 토착화된 샤머니즘과 불교, 유교, 도교 등 이방 종교 영향권 안에서 성장하면서, 특히 윤회사상을 가진 불교의 열반, 극락 관념 등의 영향으로, 천국을 마치 저 세상으로, 그것도 행위에 대한 인과응보와 관계되는 다음 세상으로만 인식하여 다른 종교가 말하는 것과 별 다를 바 없이 이해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아가 신비적 경향이 강한 교회들과 세대주의자들은 지나친 종말론을 앞세워 타계주의 또는 염세주의적 신앙에 빠진다. 현실을 저주, 무시하고, 오직 내세 또는 저 천국만 바라는 나머지 현실에 주어진 책임과 축복을 도외시 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글은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을 중심으로, 성경이 천국을 무엇이라고 가르치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1. 천국 이해에 대한 역사적 고찰

 

천국(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를 더 잘 하기 위해서는 천국관의 역사적 고찰이 매우 필요하나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어거스틴은 그의 신국에서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잘 표현했으나 완전하다고 볼 수 없다. 슈바이처, 리츨 등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천국의 미래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너무 현재성만을 강조한다. 천국을 사회적, 윤리적, 비종말론적인 무엇으로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비롯된 그릇된 종파들은 지상천국의 실현을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신학자 칼 바르트는 천국을 비역사적, 비시간적, 찰나적인 것으로 본다. 도드는 실현된 종말론에 기초를 두고 해석한다. 오스카 쿨만은 변증법적 시간의 긴장관계로 설명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성경에 충실하지 않은 점이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으면서도 이 보다는 인간의 사변적 철학적 사상을 딛고 서서 그 위에 하나님 말씀을 끌어 들인다. 여기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태도는 비평적 취급이 빈약한 상태이고, 종말론적 사상이 농후하여 천국(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을 소홀히 취급하고 있는 형편이다.

 

2.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신국, Kingdom of God)라는 용어는 마태복음에 4, 마가복음에 4, 누가복음에 32, 요한복음에 2, 사도행전에 6, 바울서신에 8, 요한계시록에 1번 나타난다. 하늘나라(천국, Kingdom of Heaven)는 마태복음에 33, 요한복음에 1, 히브리서에 11번 나타난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이란 말을 직접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습관을 따라, 마태는 하늘나라(천국)라고 하였다. 이 두 표현은 결국 같다. 그리스도의 나라도 동일한 의미이다.

 

천국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면, 우선 나라’(Kingdom)의 의미를 살펴봐야 하겠다. 나라는 본래 한 왕이 그 권위를 시행하는 영역(a realm)이. 요즈음의 영연방(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이 그 예이다. 그러므로 왕으로 원수를 삼은 국가 또는 왕국 또는 지배(dominion),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나라는 첫째로 왕이 있어야 하고, 둘째로 백성과 신하 각료들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의를 가지고는 성경이 말하는 천국의 올바른 개념에 도달할 수 없다.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나라에 대한 일차적 의미는 왕에 의하여 실행되는 신분, 권위, 주권(sovereignty), 그 주권이 권위를 행사하는 영역이다. 그리고 그 영역에 속한 백성이나 각료는 이차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시편 103:19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한다. 시편 145:11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능력(Power)이다. 다니엘 2:37, 5:26은 왕의 통치를 의미한다. 마태복음 10:15, 누가복음 16:11, 12하나님 나라는 그의 왕직, 그의 통치, 그의 권위를 말한다. 마태복음 6:33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그의 지배를 구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시되어질 영역이 없는 지배는 없다. 성경은 천국을 현재 들어갈 영역으로 묘사한다. 마가복음 9:47과 같은 구절은 미래의 천국을 말한다. 이 나라는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만 경험할 수 있는 영생과 동일한 측면의 하나님 나라를 말한다(10:23, 14:25, 7:21).

 

이상의 설명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a. 성경의 어떤 구절은 천국을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적 지배(reign, dominion)을 의미한다.

b. 성경의 어떤 구절은 하나님의 복의 지배를 체험하려고 지금 들어갈 수 있는 영역(realm)을 의미한다.

c. 성경의 어떤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할 때 임하는 미래의 한 영역(a future realm)을 의미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통치나 지배 영역의 상태는 어떠한가? 다시 말하면 천국을 무엇인가? 성경 어느 곳에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간결한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다. 다만 그 나라에 들어오라는 초청과 요구만 있을 뿐이다. 다음과 같이 집약하여 생각할 수 있다.

a. 한 나라의 국민이 된다는 것은 그 나라의 법률을 받아들이고 지켜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국민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이다.

b. 그 나라의 시민이 된다는 것은 각자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인격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c. 그 나라에 대한 이 개념은 어떻게 그 나라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동시에 있을 수 있는가를 설명해 준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사람은 누구나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의 완성은 아직도 미래에 속하며 여전히 인간의 기도와 인간의 목표이다. 천국은 인간의 노력으로 임하게 할 수 있는 성질을 가진 무엇이 아니다.

d. 천국은 예수님과 더불어 임했고 또 와야 했다. 그가 오시기 전의 시간과 오신 이후의 시간은 달랐다. 예수님은 그의 능력을 통해 천국이 임했음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다. 천국은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뤄진 상태 속에 실현될 것이다(6:10).

3. 미래의 천국

천국은 하나님의 뜻의 실현과 동반되는 축복을 누리는 권계(權界) 또는 영역이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뜻이 현세에서 완성된다고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신자의 부활로 완성된다고 말한다. 하나님 나라와 궁극적 실현은 역사 건너편에 있는 새롭고 바른 질서가 존재하는 곳이다(20, 21, 22). 그곳은 이 세상과는 다른 오는 세상”(12:32)이다. 현세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세계이다(1:4, 2:1-2, 5:19-27, 고후 4:3-4).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나타나고 구원의 완성과 복의 전개는 내세에 속한다.

그러면 영생이 도래할 세상에 속하고 예수님의 재림 때에 비로소 천국이 시작된다면 우리는 그때까지 구원도 영생도 얻을 수 없단 말인가?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미래의 천국은 근본적으로 역사의 건너편에 장소성을 가지고 임할 하나님의 영원하고 완전한 통치이 영역이다.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한 곳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벌써 임했으며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때에 구원과 영생도 이미 주어졌음을 가르친다(2: 1-9).

4. 도래한 천국

완전하고 영원한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영광 중에 임할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 구절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에 올 뿐만 아니라 현재에 와 있음을 분명하게 말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체험할 수 있고 그 나라의 생활을 조금씩 맛볼 수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6: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라고 한다. 현세에서 우리가 내세의 능력을 맛본다고 하였다. 맛보는 것은 약속보다 나으며, 현실이며, 경험이다.

그리스도는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구하려고 오셨다(1:4). 로마서 12:2너희는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한다. 이 악한 세대에 사는 우리가 어떻게 이 세대를 본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가 내적 변화를 체험해야 가능하다. 이는 악한 세대로 들어오는 오고 있는 세대의 능력의 결과이며, 능력 그 자체이다. 이 두 가지 세대가 겹쳐 함께 존재함을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 구원과 교회를 이해할 수 있는 근본 도리이다.

이 세대는 오는 세대를 포함하고 있다. 두 줄이 겹쳐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이 악한 세대 가운데서도 우리는 천국의 현재적 측면을 볼 수 있다. 네덜란드 신학자 헤르만 리덜보스(H. Ridderbos)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a.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 예수님의 이 말씀 가운데 나오는 때가 찼다는 말은 그 나라가 완성 단계에 들어간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 세례요한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했으나 주님은 때가 찼다고 하였다(4:18,19, 61장 참고).

b.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노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1:12). 이 말씀은 천국, 하나님의 나라의 실재 곧 현재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요한은 지금 다가오는 미래적 측면의 천국 입구에 서서 우리를 옛 시대에서 새 시대로 인도하고 있다. 요한은 사치와 안위를 거부하고 금욕적 생활을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혼인집을 찾아갔고, 죄인과 세리의 친구가 되었다. 그의 반대자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자라고 비난할 정도로 먹고 마셨다. 금식에 대한 태도도 유태인과 같지 않았다(9:14-17). 예수님과 함께 새 시대가 도래했다.

c.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 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16:16). 이 말씀에 따르면, 천국은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임했으며(과거), 오늘도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임하고 있다(현재).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의 활동들에서 천국,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음을 볼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12:28, 11:21). 여기의 임하였다는 완료형이다. 사탄의 통치가 깨어지는 위대한 순간이 도래함과 동시에 천국 도래의 시작을 말하고 있다(4:13, 12:43-45, 8:29, 1:24, 5:7, 4:34, 8:28-31, 10:18, 19 등 참조하라).

그리스도의 이적들은 그 나라의 권세와 그 나라의 현재적 임함을 증거한다(4:23, 11:12, 15, 13:6). 특히 죽은 자를 살리신 이적은 그 나라의 구원이 최고 절정에 달했음을 말해준다.

예수님이 전파하신 복음 메시지는 천국,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것은 미래에 도래할 천국 뿐 아니라 더욱 이미 임하여 존재하고 있는 나라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마태복음 13장의 천국 비유와 산상보훈의 교훈들은 천국과 천국 백성들의 새로운 지침이다. 이것들을 미래적인 무엇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 비유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을 크게 강조한다.

천국,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는 우리가 미래의 어느 날 완전히 주어질 구원을 현재에 이미 소유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을 받은 사람들이 기뻐해야 할 선물이다(12:32, 21:43, 10:12, 25:34). 기독신자의 구원은 미래에 이뤄질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라고 함은 기독인이 현재 구원을 소유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예수님은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5:24)라고 말씀하셨다.

신약신학자 박윤선 교수는 위 성경본문을 신자가 현세에서 부터 영생을 소유했다는 뜻이다라고 주석한다. 요한복음 5:24사망에서 생으로 옮겼느니라옮겼다3인칭 단수 완료형으로 기술되어 있다. 옮겨져서 지금 영생을 가지고 있는 상태로 표현되었다. 이 점에 유의하자.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1)라는 가르침의 너희 안에 있다”(in the midst of you, among you), 무리들 가운데 있는 예수님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일 수 있다. 무리들 가운데 있는 예수님 자신의 오심은 곧 천국, 하나님 나라의 도래(coming)라는 뜻이다.

맺음말

성경이 말하는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신자가 죽어서 가는 저 세상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천국은 임했고,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에게 임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 심판과 함께 완전하고 영원한 천국은 임할 것이다. 천국은 3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근본적으로 역사의 저쪽에 있으며 장소성이 있는 미래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신자는 현세에서 그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맛보고 체험하며 승리하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에게 미래도 중요하지만 현재는 더욱 중요하다.

현재의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오고 있는 세대의 능력이 이 악한 세대에 들어와 겹쳐져 있는 상태이다. 천국은 예수님의 임재와 동시에 시작되었다. 지금도 예수가 구원자라고 하는 복음을 믿는 자는 즉시 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옮겨진다. 그 백성이 되어 버린다. 천국은 임하였다. 그러나 그 완성은 미래에 속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창조하고 교회를 통해서 세상에서 역사하며 확장된다. (이 때의 교회는 가시적인 교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 천국은 이 세상이 보기에는 매우 미미하고 초라해 보일 수 있다. 그 나라는 강력한 권력으로 임하지 않는다. 복음전도와 자기희생과 봉사를 통해 임한다.

천국은 임했고, 임하고 있고, 임할 것이다. 지금 현재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알고 감사함으로 주님을 위하여 봉사한다. 날마다 기쁨과 희망을 가지며 승리생활을 한다. 타계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저 세상만을 추구하는 생활과 사고방식을 버린다.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구원과 하나님의 복을 누린다. 주님과 매일 동행하는 삶을 산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를 올린다. 장래의 희망과 함께 성도의 생애와 기쁨을 더 좋아한다. 미래도 중요하지만, 현재는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 글은 다음의 책들에서 도움을 얻었음을 밝혀둔다. Herman Ridderbos, Coming of the Kingdom (Philadelphia: Presbyterian and Reformed, 1962); Eldon G. Ladd, The Gospel of the Kingdom (Grand Rapids: Eerdmans, 1959); 박윤선, <성경주석: 공관복음> (부산: 영음사, 1960).


원제: 천국이란 무엇인가?


최덕성, 高神大學報 29(1977): 37-43

 

출처: 리포트만다

가져온 곳 : 
카페 >지명교회까페
|
글쓴이 : 아침그림| 원글보기

 

아주 특별한 실험


 

첫째날,
집집마다 들러서 만원씩 놓고 나오는 그를 보고
사람들이 제정신으로 하는 행동인지 의아해하면서도
멈칫멈칫 나와서 그 돈을 집어 갔습니다.
둘째날도 거의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셋째날, 네째날이 되자
그 동네는 만원씩을 선물로 주고가는
사람의 이야기로 떠들썩 했습니다
신기하기도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두번째주쯤 되었을때
동네 사람들은 현관 입구에 까지나와
돈을 나눠주는 사람이 오는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언제쯤 올것인가 기다리게 되었고,
그 소문은 이웃마을까지 퍼졌습니다

세번째주쯤 되자
 이 마을 사람들은 더이상
그 이상한 사람이 와서 돈을 주는 것을
신기해하거나 고맙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주 쯤이 되었을때는
매일 만원씩 돈을 받는 것이
마치 세끼 밥을 먹고 세수하고
출근하는 것 같은
일상사가
되어버렸습니다


드디어
실험기간이 끝나는 한달의 맨 마지막날
그 실험을 계획했던 사람은
평소와는 달리 그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지않고
그냥 그 골목을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반응들이 터져나왔습니다
여기저기서 투덜대고 화를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돈은 어디 있습니까?"
"오늘은 왜 내 돈 만원을 안 줍니까?" 라고
따져 묻기까지 했습니다
마을사람들이 매일 만원을 받는 일은
어느새 당연한 권리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일 공짜로 만원을 받는 것처럼
공기가 있어 숨을 쉴 수 있는 것도,
물을 마실 수 있는 것도,
흙이 있어 딛고 설 수 있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직장에 처음 입사했을 때는
적은 보수도 낮은 직책도,
부족한 근무환경도 개의치 않고
고마움을 느끼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받는 것이 익숙해지고,
고마운 것들이 당연한 것이 되고,
더 잘 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들이 쌓이게 됩니다



부모님만 찾던 아이도 성장하면
부모님의 사랑을 당연시하거나
귀찮게 여기다가 결국 돌아가신 후에야
그 사랑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느끼고 후회하곤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왜 일까요?
모든것이 늘 곁에 그렇게 있으리라는 착각,
당연히 내가 가져야하는 권리라는 착각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계약서를쓰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내 심장이 70년동안 아무 탈 없이
뛰어주리라는 보장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가 댓가를 지불하고 구입한 물건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몸조차도
온전히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 입니다


 


따라서
내가 가진 내가 누리는 모든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하는 맘을 가져야합니다.
감사하는 풍요로운 마음이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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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경
Sola Scriptura vs Sola Ecclesia,,,

흔히들 종교개혁자들이 종교개혁을 성취할 수 있었던 형식규범을 꼽아보세요, 라고 질문하면 "오직 성경" 혹은 "오직 성경으로"라는 격언을 취한다. “오직 성경”의 원리 아래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와 “오직 그리스도”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실질적인 내용을 견고하게 취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올바른 입장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오직 성경”...이라는 명제를 내세웠을 때, 그 반대편에 “오직 교회”라는 명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그 진의가 파묻히는 사태에 직면할 수도 있다.

“오직 교회”라는 명제는 중세의 교회적 삶의 근간을 보여주는 핵심적 지위를 차지했다. 중세교회는 “오직 교회”의 원리 아래 다스려졌다. 키프리아누스를 통해서 적어도 이단들과 유사기독교가 출몰하던 그 당시의 문맥에서는 합당하게 강화되기 시작한 감독직의 기능이, 10세기를 넘어서면서 교황권의 강화로 변질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런 흐름에서 중요한 교회 인식이 나타나는데, 교회의 본질을 정의할 때 회중을 소외시키고 일차적으로 직분자에게서 파악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느 덧 교회라는 말을 쓸 때, 자연스러이 이원화된 상을 동반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교훈하는 교회”(ecclesia docens)와 “교훈받는 교회”(ecclesia audiens)로 교회를 구분했는데, 전자가 직분자이고, 후자가 평신도들이다. 이 둘의 관계는 계급적이어서, 직분자가 높은 질서를 점유하며 동시에 본질적인 요소이고 평신도는 낮은 질서를 차지하며 이차적인 요소로 밀려나게 된다.

그리고는 교훈하는 교회에 7성례를 귀속시켰다. 세례성사로부터 종부성사에 이르는 일체의 신앙의 과정에, 쉽게 말하여 신앙에 입문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일체의 과정에 은혜의 직접적인 매개자인 직분자가 개입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평신도는 직분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접근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역으로는 하나님도 직분자를 매개로 삼지 않고서는 어떤 은혜도 그의 백성들에게 전하지 못하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이것은 비단 은혜와 관련된 일만은 아니다. 인격(persona)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말한다면, 로마 가톨릭 교회는 한 인격적 존재의 지배 아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평신도, 일반성직자, 감독, 주교, 추기경이라는 계급질서적인 교회의 수장인 교황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실질적인 “유일한 인격”이다. 교황이외의 다른 인격들은 사유하고 행동하는 주체로 인정되지 않는다. 다만 교황이라는 한 인격의 결정을 다양한 인격의 양상(樣相)을 통해서 실행에 옮길 뿐이다. 그러니까 교황이라는 한 인격적 주체의 다양한 양상들이 교황 이외의 인격자들의 현주소인 셈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교황은 천상의 그리스도의 실질적인 성육신으로서 연장된 그리스도(the extended Christ)라고 불릴 수 있다. 물론 이 사실은 교황은 자기 인식을 철저한 그리스도 따름에서 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전제한다. 따라서 교황이 정상적일 때는 그나마 로마 가톨릭 교회의 상황이 괜찮을 수 있으나, 비정상적일 때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한 인격적 주체와 함께 다 무너지게 되니까 말이다. 교리적으로나 삶에 있어서나 그 영향력은 실로 심대하다 하지 않을 수 없고, 바로 그 부패되고 왜곡된 양상이 종교개혁시대전야에 만연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오직 성경”의 원리에 의해서 전복되었다는데 있다. “오직 교회”라는 원리를 “오직 성경”이라는 원리로 대체했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 교직제도의 한 대표적인 양상으로 교황제도를 꼽았고, 교회의 유일한 머리로서 그리스도를 외치게 된 것이다. 교황과 추기경과 주교와 감독과의 관계성 가운데 의존적으로 실존하는, 무/비인격적 인간의 굴레를 깨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교회 구성원 각각의 인격적 실재를 인정했고, 이로써 교회 구성원인 개개 그리스도인을 인격적 주체로서 하나님 앞에 곧바로 설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오직 성경”의 원리를 따라 교회를 재형성한 것이다.

인간론적인 면에서 본다면, 교황이라는 한 인격적 주체의 존재와 사유의 양상으로 단순히 존재하던 무인격적인 인간을 인격적인 인간으로 복원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형성해갈 수 있도록 한 것이 종교개혁인 셈이다. 중세적 인간이해에 배태된 집단인격의 담벼락을 헐고 개인의 주체성,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서야 하는 인간을 발견하고 일깨운 운동이 종교개혁이었다.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직접 설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에로 인간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종교개혁은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진정한 인간 주체성의 재발견을 꾀한 운동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오직 성경”은 성경해석의 주체로서 교황을 비롯한 교회의 직분자의 지위에 대한 문제제기를 노정했다. 왜냐하면, 과연 직분자로서의 교회가 “성경”과 “전통”을 매개하고 그 의미를 권위적으로뿐만 아니라 창조적으로까지 종합할 수 있는 지위를 점하는가에 대하여 종교개혁교회는 의심했고, 직분으로서의 사도직의 계승을 사도적 가르침의 전통의 계승이라는 내용차원으로 잡아 끌어당겨 높아진 직분을 상대화하여 “오직 성경”의 원리 아래 놓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니까 성경을 사도적 교훈의 전통을 통하여 해석해야 한다는 큰 흐름을 정당화하고, 또한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원리를 세움으로써 “쏠라 에클레시아”의 해석적 권위를 해체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성경을 평신도에게 돌려주는 위업을 이루었다.

확인했듯이, “오직 성경”은 형식적인 원리이면서 실질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여, “오직 성경”을 형식원리로 내세울 경우, 바로 그 동일한 원리를 가지고 실제 삶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둘이 실제로 통합되지 않고 분리되는 현상, 즉 “오직 성경”을 외치면서 “오직 교회”를 취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종교개혁의 상속자가 아님을 보이거나, 혹은 미성숙한 상속자임을 드러내거나, 혹은 이익에 기댄 기회주의적 처신임을 스스로 증언하는 셈이다.

카페 >개혁주의 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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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미니우스주의의 5대 강령과 칼빈주의의 5대 강령 / 제임스 보이스

제임스 보이스의 개혁주의 핵심” [1. 복음주의에 왜 칼빈주의가 필요한가]중에서 발췌

 

[아르미니우스주의의 5대 강령]

 

이 책의 핵심은 성경을 근거로 한 은혜의 교리에 대한 해설이다. 그러나 이 교리들을 철저하게 성경적으로 변호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복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문제가 되는 신학적 주제를 요약해 주는 간략한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은혜의 교리는 교회 역사 내내 가르쳤지만 이른바 칼빈주의 5대 강령은 야코뷔스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에 대한 반응으로 전개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라이덴 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그가 죽은 뒤인 1610년에 그의 추종자들은 그의 구원에 대한 관점을 요약한 5개항의 신조를 작성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라고 불리게 된 그들은 이 교리를 네덜란드에 항의(또는 항변)의 형식으로 제출하면서 네덜란드 신앙 고백서는 자신들의 견해에 맞게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 내용은 다섯 항목으로 된 그들의 신학적 강령이다.

 

이 신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I. 하나님은 예견된 믿음 또는 불신앙을 바탕으로 선택하시거나 문책하신다.

 II. 비록 신자만이 구원을 받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과 각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III. 인간은 너무 부패해서 믿음이나 어떤 선한 행실에는 신적인 은혜가 필요하다.

IV. 이 은혜는 인간이 거부할 수 있다.

 V. 참되게 거듭난 모든 사람이 확실히 끝까지 믿음을 지킬지의 여부는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한 쟁점이다.

 

이러한 진술들의 공통점은 은혜 안에서의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반신반의이자 몇몇 대목에서는 그에 대한 저항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취하는 입장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어떻게 해서든 인간의 능력에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이 깔려 있다.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작정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선택에 기초한다. 속죄의 효력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믿음과 회개에도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완고하게 거부하는 이들을 이길 만큼 강력하지는 않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끝까지 인내할 지 그렇지 않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견인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보다는 그리스도인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런 교리들은 뚜렷한 교리적 문제이지만 모든 인간에게 자신의 영적인 운명을 결정하게 할 만큼 예정을 경시하려는 공통된 관심사로 서로 연결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항변은 개혁주의 교리에 대한 국제적회의인 도르트 총회에서 절정에 이르는 신학적 논쟁의 폭풍을 몰고 왔다. 각국 대표들이 7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함께 모였을 때 그들의 논쟁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입장을 명확히 하는 역할을 했다. 약간의 반대되는 재확인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 대표들은 마침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함의를 피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1. 인간의 능력.

 

인간 본성은 타락으로 손상되었지만 완전히 무능해지지는 않았다. 우리가 설령 기본적으로 선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우리는 완전히 악하지는 않다. 의지는 죄에 예속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거듭남 이전에도(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믿지는 못하지만)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죄인은 하나님 편에 서든지 하나님을 대적하든지, 성령과 협력하여 구원에 이르든지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하여 저주에 이르든지 선택할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2. 조건적 선택.

 

  특정한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택은 예견된 믿음, 즉 그들이 자유롭게 복음을 믿으리라는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기초했다. 선택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조건적이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만이 하나님이 믿을 것으로 미리 아신 이들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미리 아시는 믿음은 오로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인간의 결정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궁극적 원인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죄인의 선택이다.

 

3. 비한정적 속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구원을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게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누군가에게 실제가 되게 하지는 않는다. 십자가형으로 인해 하나님은 용서를 베풀 수 있게 되었지만 용서는 오직 개인적 믿음을 조건으로 해서만 베풀어진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그러나 믿는 이들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속죄는 누군가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할 경우에만 효력 있게 된다.

 

4. 저항할 수 있는 은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은 외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부르심 받는다. 성령은 모든 심령에 말씀하시며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도록 설득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신다. 그러나 죄인들은 성령을 거역할 수 있으며 회개하지 않으면 회개할 때까지 거듭나지 못할 것이다. 이 점을 달리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대한 성령의 적용은 죄인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성령은 죄인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면 새로운 영적 생명을 주실 수 없다.

   

5. 거부할 수 있는 은혜.

 

그리스도를 믿고 진실로 구원받은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에서 떨어져 나감으로써 구원을 완전히 최종적으로 상실할 수 있다. 영원한 생명은 죄인이 그리스도께 올 때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께 대한 그리스도인의 신실함에 달려 있다.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고 모든 아르미니우스주의자가 최소한 여기서 기술된 바와 같은 앞의 다섯 가지 교리 모두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요약한 내용은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믿는 바를 표현한 것이다. 이 다섯 가지 교리 모두가 공유하는 점은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을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선택의 자유로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거듭남, 선택, 속죄, 영화 등 구원의 핵심적인 국면들의 효력은 하나님에게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죄인의 협력에도 의존한다. 데이비드 스틸과 커티스 토머스는 <칼빈주의 5대 강령>에 대한 연구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가 보기에 구원은 (주도권을 쥐신) 하나님과 (반응해야 하는) 인간의 공동 노력을 통해 성취된다.”고 결론지었다. “인간의 반응은 결정적인 요소다. 하나님은 무두를 위해 구원을 제공하셨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자신의 자율의지로 하나님과 협력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하는 이들에게만 효력 있게 된다. 핵심적인 점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누가 구원의 선물을 받을 것인지를 결정한다. 

 

이는 현대 복음주의 안에서 왜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이 이토록 우세한가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경우 인간의 의사 결정은 구원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는 오로지 하나님 중심적인 신학이 아니라 자아의 방향으로 뒤틀린 신학으로 귀결된다. 물론 이는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것이다. 이탈 근대적이고 점점 탈 기독교적으로 변하는 시대에 사람들은 관심을 요구하고 있다. 사람들은 세속화 되고 인간화 되고 상대화된 영적 체험을 찾고 있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오늘날의 복음주의가 요구하는 바로 그것, 즉 개인적 선택에 결정적 역할을 맡기는 복음을 제공한다.

  

 

[칼빈주의의 5대 강령]

 

이와는 대조적으로 칼빈주의는 구원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로 말미암는다고 주장한다. 구원은 어느 모로 보나 선물, 즉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아니면 구속받을 수 없는 합당치 못한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선물은 하나님이 선물(구원)을 주시기로 택하신 이들에게 주어진다. 이 선물은 모든 이들에게 제안되지만 모두에게 주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선물을 주기로 작정하시면 효력 있게 선물을 자녀의 손에 쥐어 주신다. 이 선물은 한 번 받으면 결코 잃어버리거나 도난당하거나 손상되지 않는다. 참으로 그것은 하나님이 계속해서 주시는 선물이다!

 

이 은혜로운 원리들은 도르트 총회 신경에서 정의되고 변호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국제적인 신학자 집단이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입장을 살펴보기 위해 도르트에 모였다. 그들의 심의는 종교개혁의 위대한 진리들에 대한 한 세기에 걸쳐 성숙된 신학적, 실제적 사고를 대표하는, 조심스럽게 표현된 일련의 교리적 명제들로 귀결되었다. 요컨대 도르트 총회는 선택과 유기의 작정이 예견된 믿음이나 불신앙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기초해 있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두에게 충분하지만 오직 택함받은 이들에게만 효력이 있으며, 인류는 타락으로 인해 완전히 부패했고 따라서 거듭나기 전에는 구원을 선택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불신자를 회심시키는데 효력이 있고, 하나님은 신자들이 결코 완전히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신자들을 보존하신다고 결론지었다. 이 다섯 가지 기본적인 요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전적 타락이라는 말은 구석구석 만연해 있는 죄 또는 영적인 일에 있어서의 인간의 무능이라는 교리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우리 모두가 더 이상 악해질 수 없을 만큼 악하며 모두가 똑같이 죄로 가득하다는 암시를 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죄를 짓고 그 죄로 인해 지옥에서 더 큰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신학자 존 거스너가 말해온 바와 같이 우리는 더 이상 악해질 수 없을 만큼 악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 안에는 더 악해질 수 있는 무한한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전적 타락 교리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악함을 뜻한다기보다는 그가 하는 어떤 일도 결코 완벽하게 선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죄는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구조의 모든 부분에 만연해서 우리에게는 죄가 건드리지 않은 부분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근본적 타락, 포괄적 죄악 또는 죄의 만연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낫다. 우리의 동기는 결코 완전하게 순수하지 않으며 따라서 어느 정도 우리의 모든 행동은 악한 욕구로 부패해 있다. 이러한 부패는 우리의 존재의모든 측면에 침투해서 우리의 존재나 행위의 어떤 것도 완벽하게 죄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런 불행하고 속속들이 죄에 물든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으려는 성향이 전혀 없고 그래서 하나님을 찾거나 심지어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졌을 때 복음에 반응할 수도 없다.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거나 영접하는일에 관한 한 자유의지가 없다. 사실 우리는 죄에 철저히 예속되어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영적인 이해력을 주시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믿음조차 선물로 찾아온다.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 이전에는 우리의 부패성이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협력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인류의 상태가 성경의 타락 교리가 가리키는 것만큼 나쁘다면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어야 한다.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 편에서의 어떤 도움도 없이 성취하시고 적용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어야 한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이므로 (실제로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셔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다가오심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이러한 다가오심의 첫 번째 단계는 그 일을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이며 선택이라는 말은 바로 이 결정을 가리킨다. 선택이란 한 개인의 구원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세상이 생겨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작정을 세우신 하나님의 사전 결정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다. ‘무조건적이라는 말은 이 결정이 하나님께서 죄에 물든 피조물 속에서 예견하셨을만한 어떤 것과도 관계없이 이루어졌음을 가리킨다. 만일 선택이 죄인이 그렇게 되거나 행할 만한 어떤 것에 바탕을 두었다면 궁극적으로 구원은 인간의 공로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서 나온 자비로운 행위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선택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 중에 하나다.

 

3.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튤립이라는 약어로 요약되는 다섯 가지 교리 중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 제한 속죄 교리다. 문제는 용어 자체에도 일부 있다. 이 용어는 사실 오해의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제한속죄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무언가 할 수 있거나 해야 할 모든 역할을 다 하지 않았고 어떤 면에서는 효력이 없는 것 같은 암시를 준다. 그러나 그것은 제한 속죄 교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개혁주의자들이 이 용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속죄는 창세전에 성부가 성자에게 주신 이들의 구원이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염두에 둔 것이며 그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교리는 한정적 속죄 또는 특별 구속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특별 구속이란 그리스도의 죽음이 택함 받은 자들에게만 구원의 효력을 가진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자신을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을 위한 완벽한 대속 제물로 드리면서 죄를 속하셨다. 그러므로 구원의 계획에 따라 그리스도의 죽음은 택함 받은 자들의 죄는 속했지만 한 번도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오지 않은 이들의 죄는 속하지 않았다.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able Grace)

 

속죄의 유익은 어떤 식으로든 택함 받은 이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 일은 성령의 사역이며 성령의 내적인 역사는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한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복음의 외적인 부르심 외에 성령은 내적인 부르심을 주신다. 이 내적인 부르심은 오직 택함 받은 이들에게만 임하며 필연적으로 그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이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그들을 구원하시므로 그들이 이 효력 있는 부르심을 영구적으로나 효과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며 당해날 수 없다. 성령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 속에서 구원의 목적을 반드시 성취하신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도 성령의 은혜롭고 효력 있는 사역을 바로 그와 같이 기술한다. “하나님이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이들, 오직 그들만을 하나님은 스스로 정하시고 받아들이신 시간에 말씀과 성령으로 그들이 본래 처해 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으로 효력 있게 부르시고, 그들의 생각을 영적으로 구원 얻도록 조명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게 하시며, 그들의 돌 같은 마음을 제하시고 그들에게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그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을 선한 것에 이르도록 작정하시고 효력 있게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되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발적인 상태에서 가장 자유롭게 나아오게 하시기를 기뻐하신다.”(101)

 

5. 성도의 堅忍.(Perseverance of Saints)

 

때때로 이 교리는 영원한 안전의 교리라고 불린다. 이 교리는 다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1)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오래 참으신다. 2)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오래 참으심으로 그들 또한 오래 참는다. 성도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이 그 아들의 사역을 통해 거룩하게 여기시는 이들이다. 성도의 견인은 사실 성도의 보존이다.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은혜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을 영광으로 인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실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다.

 

 

이 다섯 가지 교리는 각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독특한 기여를 한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각 교리는 개별적으로 분석할 수도 있고 개별적으로 변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 교리는 논리적, 신학적으로 상호 관련되어 있다. 이 교리들은 모두 구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워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이 5대 강령은 유기적인 통일체, 하나의 진리 체계를 이룬다. 이 교리들은 성경에서 풍부하게 지지하는 두 가지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첫 번째 전제는 인간의 완전한 무능이며 두 번째 전제는 은혜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다. 다른 모든 것은 여기서 도출된다. 이 두 기초적 진리가 만나는 곳이 복음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면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주권적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부패함 가운데 은혜를 거부하고 구속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은혜의 교리는 함께 운명을 같이 하며 함께 구원은 전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므로 은혜에서 비롯되며, 전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하나의 핵심적 진리를 가리킨다.

 

은혜의 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충분히 인식하려면 칼빈주의 5대 강령에서 삼위일체의 각 위격의 역할을 인식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선택은 성부 하나님의 선택이다. 속죄는 성자 하나님의 희생 제사다.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며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견딜 수 있게 하는 은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그래야 하듯이 구원은 전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사역-삼위 하나님의 협력 사역-이다. 생각해 보라. 만일 우리가 실제로 죄로 죽어 있다면(근본적 타락) 하나님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실 수 있고(무조건적 선택),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속하실 수 있으며(특별 구속), 성령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실 수 있고(효력 있는 은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보존하실 수 있다(보존하는 은혜). 그러므로 모든 찬양과 영광은 하나님께만 속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11:36).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네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대장쟁이
[욥기 6:1-4]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분한을 달아 보며 나의 모든 재앙을 저울에 둘 수 있으면
바다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럼으로 하여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 진실로 엄위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모든 지식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그저 세상종교의 한 종류로, 혹은 사상(思想)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심지어 일부 교회와 목회자들마저도 그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심판하실 것을 안다면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악한 일마저 해치울 정도로 타락한 오늘날입니다. 교회에서마저 ‘경외(敬畏)가 실종되고 있는 지경인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진실로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일 것입니다. 보이지 아니하신다는 것은 시각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느껴지지도 않고, 아무런 응답도 없고, 아무런 역사나 기적이나 증거나 체험도 없고, 도대체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소리쳐도 침묵하시는 하나님, 도대체 계시는 증거가 아무것도 아니 보이는 하나님이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그 하나님을 찾는 믿음의 싸움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이신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나 방언보다도, 성령충만보다도, 어떠한 신앙생활보다도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욥이 말로 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찾아온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 그들이 한 주일동안 욥의 곁에 앉았다가 드디어 욥의 고난을 놓고 토론이 시작되는데 그것은 욥이 탄식하며 자신의 생을 저주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 토론의 첫 번째 주제가 “경외”입니다. 지난 시간 살펴본 욥이 탄식한 그 탄식은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의 생에 대한 저주.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하는 탄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태어나지 않는 것이 복일까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복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천한 것으로라도, 아무리 짧게라도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 복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으심을 입어 존재하는 것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아름다운 하나님의 세계에 피조물로 태어나는 것이, 설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 복일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자신의 생을 저주하고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한탄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3장 26절,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입니다.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나은 고통” 때문입니다. 욥이 누구입니까? 그 욥은 하나님이 인정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두 번이나 사단에게 자랑하신 자입니다. 욥 또한 그 엄청난 고난 가운데서도 두 번이나 그 믿음을 나타내었습니다. “적신으로 나왔으니 적신으로 돌아갈지라.”, “하나님이 복도 주셨으니 재앙도 주시지 않겠느뇨?”고 말한 욥입니다. 그러나 그 욥도 완전하지는 못 하였습니다. 만일 욥이 완전하였더라면 어떠한 고난, 고통도 그를 흔들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도 한계성을 가진, 극심한 고난 앞에서는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연약한 피조물이었던 것입니다. 욥의 탄식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연약하기 때문에,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요 연약함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연약함 때문에 참소하는 자의 공격이 가해지는 것입니다.

그 욥에게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입을 열어 지적합니다.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히브리어 '라아'; ‘싫증이 나겠느냐?’) 염증이 날지라도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쉽게 말하자면 “야, 도저히 못 참겠네. 보자보자 하니 하나님 앞에서 방자하구나. 내가 한 마디 안 하고는 안 되겠구나.” 그러고는 공격이 시작됩니다.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교훈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였고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매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놀라는구나.” “그래, 남은 잘 가르치더니만 너 자신은 그게 뭐냐?” 참으로 약점을 찌르는 아픈 지적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네 의뢰가 경외함에 있지 아니하냐? 네 소망이 네 행위를 완전히 함에 있지 아니하냐?” 다시 말하면 “네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더니, 그것이 너의 모든 것이라더니 어째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의문의 제기입니다. 그리고 공격의 화살을 날립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욥이 남모르게 죄를 범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에 의한 단죄요 정죄입니다. 욥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면서 사실은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재앙이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엘리바스의 지적이 욥에게는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엘리바스가 하는 말은 우리 모두가 새겨들어야 할 말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온갖 죄악들이 심지어 교회 안에서까지 벌어지는 시대입니다. 진실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코람데오"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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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의도가 무엇이냐 묻는 이들에게
2014년 02월 25일 (화) 16:15:15 전현진 ( 메일보내기 )( wjsguswlswls

파장은 컸다. 고 김성수 목사의 사인이 자살이었다는 사실을 밝힌 기사의 조회수는 사흘이 지나지 않아 2만 건을 훨씬 넘겼다. 기사 밑으로는 '신뢰할 수 없다', '진실은 하나님만 아신다'는 식의 의문과 '자살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댓글이 달렸다. 항의성 메일도 이어졌다. 내용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소문을 사실인 것처럼 썼다는 비판과 1년이 지난 지금 이런 기사를 쓰는 의도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기사 자체로 의혹을 해소하지 못한 채 의문을 남긴 부족함을 인정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그동안의 취재 과정을 간략하게나마 설명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취재수첩은 의도가 무엇이냐 묻는 이들에게 보내는 답장인 셈이다.

처음 제보를 접한 건 지난해 11월이었다. 고 김성수 목사가 개척한 LA·서울 등 서머나교회에서 그가 사망한 뒤에도 생전 촬영한 설교 영상을 통해 예배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2013년 3월 세상을 떠난 김 목사의 사인 역시 당초 알려진 심장마비가 아닌 자살이라는 소문도 돈다고 했다. 교회 리더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교인들에게는 비밀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 김성수 목사의 사인은 심장마비사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자살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아내를 제외한 유족들과 교회 팀장들은 이를 알고 있었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시험에 들까 봐 심장마비사로 발표했다고 했다. 사진은 서울서머나교회 홈페이지에 게재된 김 목사 소개. (서울서머나교회 홈페이지 갈무리)

 
 
민감한 내용이었다. 소문이었지만, 대게 소문은 여러 경로를 거쳐 확인할 경우 사실로 드러난다. 사실 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고인이 된 김 목사의 이야기를 다시 들춘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 이의 영상으로 정기적인 예배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인터넷 등을 통해 그의 설교를 들으며 그를 추종하는 이들도 여전했다. 또, 김 목사가 실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 사실을 알면서 침묵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취재를 통해 사실 관계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동안 떠도는 소문을 정리했다. 기본적인 내용을 정리하고 틈틈이 자료를 확인했다. 실체에 다가서기 전 조금씩 디딤돌을 쌓아 갔다. 그리고 올해 1월부터 한국 <뉴스앤조이> 기자와도 함께 취재를 진행해 소문을 확인했다. 설교 영상을 틀어놓고 예배를 열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확인되었다.

자살설에 대한 확인은 쉽지 않았다.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는 그의 첫 부고 소식을 보며 사실 관계를 확인할 방법을 궁리했다. 장례식에 함께 했던 조문객들과 교회 리더들을 수소문했다. 김 목사 자살에 대해 인터넷 카페에 장문의 글을 올린 한 인사와 어렵게 연락이 닿았다. 그는 김 목사가 자살한 것이 맞으며 장례식장에서 들었다고 했다. 당시 추모를 위해 자리한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장례 위원으로 참여한 이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했다. 장례 예배에 참여한 한 목회자는 기자의 질문에 "세상을 떠나신 분인데 사인을 확인할 필요가 있냐"고 말했다. 

김 목사가 스스로 목을 매 숨진 것으로 2월 6일 처음으로 확인됐다. 사실을 확인해 준 이는 취재원 보호를 요청해 그대로 반영할 수는 없었다. 유족들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었다. 김 목사의 아내는 자살 사실을 부인했다. 김 목사의 다른 가족과 취재 과정에서 접촉한 교회 팀장들은 자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김 목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교회 장로 등 책임자들에게 침묵한 이유를 물었다. 서울서머나교회의 한 팀장은 자살 사실에 대해 부인하지 않았지만, 사인을 굳이 밝힐 필요가 없었다며 일부러 감출 의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믿음이 약한 이들과 김 목사의 명예를 위해 심장마비로 사인을 발표한 것이라고 했다. 미주LA서머나교회 한 장로는 '그런 소문이 있다'며 확답을 피했다. 오히려 자살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확인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전했던 말씀이라고만 했다.

보도가 나간 뒤 논란이 이상한 방향으로 번졌다. 많은 이들이 자살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마치 진리인양 '선포'하기 시작했다. 기사에 밑으로 달리는 무수한 댓글 속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유로 한 인간이 겪어낸 비극을 마치 스스로 신이라도 된 것 마냥 판단하는 자들이 넘쳐났다. 그의 구원 여부를 자신이 판가름하겠다고 나서는 모양새였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김 목사의 설교를 들어오던 많은 이들이 한 목회자의 죽음을 파헤친 이유가 무어냐고 물었다. 의도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김 목사를 질투한 돈 많은 목사가 사주한 것 아니냐며 추측을 늘어놓았다.
   
 
 

▲ 서울서머나교회는 김성수 목사가 2012년 4월 설립한 교회다. 김 목사는 2013년 3월 사망했지만, 교인들은 흩어지지 않고 장소를 얻어 김 목사의 영상 설교를 들으며 예배를 지속하고 있다. 주일예배 때는 본당에 빼곡히 앉고서도 자리가 없어 바깥 로비까지 의자를 놓는다. ⓒ뉴스앤조이 구권효

 
 
그의 죽음을 파헤친 이는 누구인가. 1년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가 여전히 스크린 안에서 살아가게 만든 이들은 누구인가. 죽어도 죽지 못하는 존재로 만든 것은 누구인가. 도대체 누구의 유훈 쫓는 것인가.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저 살아남은 자들이 김 목사의 영면을 훼방한 채 스크린 속에 그를 끝없이 불러낸다. 누구나 문제 의식을 품을 법한 일이다. 기사를 사주한 것은 질투에 눈 먼 목사가 아니다. 진실에 눈 감은 채 매주 프로젝터로 그를 소환하는 이들이다.

당신들의 예배는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그가 전한 말씀이 중요하다'는 그 말씀은 누구의 말씀인가. 예수의 말씀인가 김 목사의 말씀인가. 지금 당신을 향해 김 목사는 뭐라 말하겠는가. 양복 입은 무당을 절규하며 비판한 그를, 스크린 속에 가둬 양복 입은 우상으로 만든 당신에게 뭐라 말하겠는가.

전현진 기자 / jin23@newsnjoy.us


 

대장쟁이


(욥기를 깊이 음미하면서 살펴보는 것도 좋겠지만 42장까지 계속되는 욥기를 그렇게 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주마간산이 되는 감이 있기는 합니다만 간단간단하게라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욥기 3:1-5]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말을 내어 가로되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유암과 사망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 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어떤 인생이 가장 복된 인생일까요? 무병장수, 부귀영화, 평안한 삶이 복 된 삶일까요? 가난과 질병, 전쟁과 재앙으로 뒤덮인 이 험한 세상을 살면서 그런 재앙과 한난을 만나지 않고 안전하고 평탄하고 순적하며 부유하게 사는 것도 복 된 삶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한국인들은 고래(古來)로 ‘복(福)’자와 ‘희(囍)’자를 숟가락, 밥그릇, 베개, 장롱에까지 새겨 넣고 평안하고 풍족한 삶의 복을 빌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평생 평안히 살다 가는 것이 복 된 인생일까요? 내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왜 생겨나서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지 알지 못 하는 채 그저 태어나서 한 평생 잘 먹고 잘 살다 가는 것이 복이라면 인생은 동물과 무엇이 다르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복 된 인생이란 진리를 알고 진리를 만나는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무엇이 진리입니까? 인생이 무엇인지, 내가 왜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우주만유는 우연히 존재하는 것인지 창조된 것인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계신가 아니 계신가와 나라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 못 한다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 한다면, 내가 무엇인지 누구인지를 알지 못 한다면 아무리 평안하고 잘 먹고 잘 살아도 그것은 의미 없고 가치 없는 삶이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난다면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복 된 삶이라 할 것입니다.  

욥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복되고 귀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욥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사단의 극악한 발톱에 할키우면서도 그것을 죽어도 빼앗기지 아니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입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린 에서처럼 작은 고통을 이기지 못 하고 생명보다 귀한 하나님을 바꾸어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오늘 말씀을 보니 욥이 가졌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엄청난 고난을 당해도 하나님을 놓지 아니하자 사단은 더욱 혹독한 시험을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은 속담입니다만 사단이 말하는 것은 “그 정도로는 포기하지 않겠지만 생명을 생명으로 바꾸어 보십시오. 생명이 죽음 같이 되게 해 보십시오. 사는 게 죽는 게 되게 해 보십시오. 그 살과 뼈를 쳐 보십시오. 그러면 그가 하나님을 저주할 것입니다.”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단의 손에 욥을 붙이십니다. 사단은 욥의 전신에 악창이 나게 합니다. 그 악창이 단순히 지독한 종기였을까요? “욥이 재 가운데 앉아 기와조각을 가져다가 자기 몸을 긁고 있더니.......”라고 되어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극심한 가려움 정도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살과 뼈’를 쳤다면 견디기 어려운,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욥의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할 정도였으면, 욥의 세 친구가 그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참담하고 기막혀 칠일칠야(한 주일 꼬박) 동안 한 마디 말조차 할 수 없었을 정도였으면 욥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사단이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저주하도록 하려고 작심하고 치는 것이었으므로 그것은 가혹한 고문보다 더 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욥은 너무나도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자기의 난 생일을 저주합니다. 자신의 태어난 것을 한탄합니다. 죽음이 차라리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생명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뼈가 으스러지고 몸이 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을 놓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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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에 대한 斷想

김정한

장례식에 대한 斷想

목회자가 되면 다루어야할 것이 장례식이랄 수 있다. 필자도 목회를 해 오는 동안 수십 여 차례의 장례를 치뤘다. 아마 특이한 생을 마감한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런 이야기 보다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전도의 기회를 삼고 예식의 진행시키고 메시지도 전도의 방향으로 전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이 나서 글을 올려봤다.

교단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필자는 보통 임종 당일에 위로 예배, 다음 날 입관식 예배 3일에는 발인식 예배, 하관식 예배(요즘은 화장이 많아 승화원에 가서 예식이 있고 그 다음에 하관을 할 때 예배) 이렇게 5번 예배가 기본이다.

이 다섯 번 예배 때가 전도의 절호의 기회가 되거니와 기존 교인들에게도 기독교의 진리를 확고하게 전할 수 있는 기회로 삼자는 것이다.(물론 그렇게 다들 하고 있을 것이겠지만)

위로 예배
임종 당일 위로 예배 시에는 요한복음 14:1-3절을 근거로 죽음에 대한 슬픔과 당황과 죽음이후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의 아들 되는 예수님을 믿는 것인데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고서도 자신도 걱정하지 않고 제자들에게도 근심하지 말라고 한 것은 죽음 이후에 있을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돌아가신 분이 바로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말한 대로 지금은 천국에 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입관 예배
고후 4:16-5:3을 근거로 우리의 육체라는 것은 후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과 그 대신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영혼의 속사람은 믿음과 소망으로 더욱 다져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며 그런 신앙을 고인은 가지고 살았기에 틀림없이 영혼이 하늘나라에 갔을 것이라며 이런 것이 기독교의 진리라는 것을 전한다.  
입관은 사랑하는 분의 얼굴을 다시없기에 가장 애통한 시간이다. 이때 한국의 전례 입관식을 말하면서 노잣돈과 평소 고인이 아끼는 물품을 넣고 주는 것은 죽음이후에 있는 사후세계에 대한 대비를 하라고 하는 것이라고 말한 뒤(이때 시간이 있으면 이집트의 피라밋이라든지 진시황의 병마총 설명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입관은 그 영혼은 하나님께 이미 돌아갔으나 그 몸담았단 시신을 하나님의 법대로 흙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입관한다는 것을 알린다.

발인 예배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천국과 지옥을 만드신 분이기에 사후세계에 대해서 이런 예가 있었다고 말하며 누가복음 16:19-25을 근거로 이 땅의 그 어떤 자도 하나님의 정한 법에 예외가 없다고 확신 있게 전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역전된 상황을 설명하면 왜 신앙이 필요한지 이때에 예수를 믿어야 함을 확실하게 증거한다.

화장터에서 예배
과거에는 없던 것이 火葬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화장터에서도 예배를 드리는 것이 상례가 되고 있다. 이때에 고전15:50-52 말씀을 근거로 해서 부활진리를 전한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무덤에서 사흘 만에 부활할 것임을 예고하신 후 부활하심으로 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은 이 부활을 통하여 영원한 나라의 생명을 주시려고 했다는 메시지를 증거한다.

장지에서 예배
창세기 3장 16-19을 근거로 사람이 고달픈 인생을 살게 된 이유를 증거한 뒤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 땅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죽음. 질병, 고통이 없는 하나님나라를 주실 것이며 예수님이 오시는 날 예수님처럼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 영원한 삶이 있을 것이란 것을 증거하며 예수님을 믿도록 권면하며 특히 불신 자녀들에게 예수를 믿어야 그 부모님을 다시 볼 수 있으니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자랑스런 신앙을 이어받아야 되겠지 않느냐? 하관식을 할 때 약속하라고 권하고 예수를 믿겠다고 약속하라고 힘 있게 권한다.

찬송도 예배 때마다 거기에 맞는 것을 선정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리고 발인예배 때는 弔歌를 부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참고로 한 교우가 지난주일 오후에 임종하고 오늘 장례식을 마치고 나서 피곤하여 간략하게 써봤습니다.

출처: USA아멘넷 게시판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잠19:21)

 

-은혜와평강이 넘치는 커피브레이크-

 

 

 

 

어떤 사람이 바닷가를 거닐다가

알라딘의 요술램프를 주었다. 이 사람이

램프를 문지르자 곧 연기와 함께 거인이 나타났다

 

"주인님, 소원이 무엇입니까?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단 한가지만 남아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라고 거인은 말했다

 

이 사람은 생각하다가

"1년 후의 신문"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주식시장의 주가를 미리 알면 전 재산을 투자해

거부가 되겠다는 탐욕에서 였다. 거인은 즉시 1년후의

신문을 가져왔다. 이 사람은 급히 주식표를 찾았다

 

그러다 우연히 부고(訃告)란을 보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거기에 자신의 사망 소식과 함께

장례식 날짜와 시간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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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 한기총 홍재철 목사 '진정서' 수사

2014/03/31 ㆍ추천: 0      

 
▲사진은 A목사가 청와대에 접수한 진정서 일부 내용.

한국기독교총연합회 홍재철 대표회장이 국유지를 편법으로 매입하려는 등 박근혜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면서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내용의 진정서가 지난달 23일 청와대 민정수석팀에 접수된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일고 있다. 현재 이 사건은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국민권익위원회를 거쳐 서울 혜화경찰서에서 수사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진정서는 한기총 홍재철 대표회장이 박근혜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해 불법적으로 당선됐다는 주장으로 시작됐다.

한기총 전 자살방지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A 목사가 낸 진정서에서 “홍재철 목사는 총회 전 임시총회를 소집해 박근혜 대통령과 할 일이 많아 같이 가야하기 때문에 2년 단임을, 다시 2년 연임으로 정관을 개정하고, 2년 연임뿐만 아니라 영구히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진정서에서는 또, “홍재철 목사는 입버릇처럼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시절 자신을 통일부장관으로 적격이라고 했다며, 나이 때문에 문제라면서 금명간에 대통령 특사로 북한에 보낼지 모르겠다”는 말도 했다고 주장했다.

홍 목사가 박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해 국유지를 비롯한 토지 수십만 평을 편법으로 매입하려 한 정황도 폭로됐다.

A 목사는 진정서에서 “홍 목사가 강원도 홍천군수와 합의해서 국유지 또는 도, 군, 부지 수십만 평을 싼값에 구입 기독교박물관을 지으려면 자신이 연임돼야 한다고 말해왔다”며, “자신이 되면 4천억 원의 예산 중 2천억 원은 교계에서 모금을 하고, 2천억 원은 국가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고 했었다”고 밝혔다.

사실 확인 결과 홍재철 대표회장을 비롯한 실무진들이 지난해 12월 이후 서너 차례 기독교센트럴파크 사업 논의를 위해 강원도 홍천군을 방문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강원도 홍천군(허필홍 군수)의 한 관계자는 “한기총이 군내 수천 억 규모의 토지 개발 사업을 제안하자 동면과 화촌면, 삼마치 등 4-5곳을 안내했다”고 말했다.

홍천군 관계자는 또, “처음에는 수천억 원의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는지에 대해 의아했지만, 정부 예산에서 불교계가 돈을 쓰면 기독교도 돈을 가져다 쓸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홍천군 관계자는 이어 “대통령과의 친분관계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홍천군에서 개발 가능한 곳을 알려주면 자신들이 정치적으로 어떻게든 풀어보겠다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이밖에도 A목사가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접수한 진정내용은 금품수수에 의한 이단 해제, 홍목사를 반대한 목사와 교단에 대한 불법적 제명 조치 등 모두 9가지에 이른다.

A 목사는 “대통령과 친분을 빙자한 불법이 다시는 생기지않고, 한기총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진정서를 제출하게 됐다”며, “나와 뜻을 같이하는 한기총 회원들이 30여 명 된다”고 말했다.

한편, 사건을 넘겨받은 서울 혜화경찰서측은 “이 사건이 형사 입건 할 정도의 사항인지를 먼저 검토한 뒤 사건을 반려할지 수사를 진행할 지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대선과정에서부터 박근혜 대통령을 적극 지지하는 행보를 보였던 한기총 홍재철 목사가 박근혜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해 불법행위를 저지른 정황이 포착되면서 경찰 수사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송주열 기자 ⓒ CBS 크리스천노컷뉴스
출처: USA아멘넷

'예수 그리스도' 는 히브리어로 '예슈아 하마쉬아흐'(הַמָּשִׁיח

고비야  

                                     

아브라함의 자손 이며 다윗의 자손인 예수그리스도의 계보이다(마태복음1장1절)

א זֶה סֵפֶר תּוֹלְדֹת הַמָּשִׁיחַ יֵשׁוּעַ בֶּן־דָּוִד בֶּן־אַבְרָהָם׃

    아브라함   자손 다뷛의 자손 예슈아  하마쉬아흐 톨레돋트    쎄펠      째 

                                   예수     그리스도     계보       책      이

 

 예수님의 이름 예수(ihsou)는 헬라어 신약성경에 나오는 발음이다. 영어발음은 지저스(Jesus)이다.

 헬라어성경이 신약성경의 원본이기 때문에 그대로 발음한 것이므로 별 문제가 없이 보이지만  예수님이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의 역사 즉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점에서 구속사에  좀더 깊은 의미있는 정확한 발음 할 필요성을 지나가면서 생각해 본다.

 

 예수라는 이름은 본래 히브리어로 ‘예슈아(ישוע)으로서 구원이란 뜻.

‘예슈아(ישוע) 불려진것은 (마1:21 )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슈아(ישוע)라고 불러라. 이는 그가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들로부터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되어있다.

그래서  히브리어 ‘예슈아'(ישוע)는 분명히 구원의 뜻으로  히브리어의 ‘예수’(ihsou)는 별 의미가 없는 발음이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예수’(ihsou) 헬라어의 발음이다.

하나님은   유대인을 선택해서 구속사를 하시기를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ihsou)님을 유대인 통해서 낳게 하셨는데 그런데 어찌 헬라어에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예슈아(ישוע) 라고 해야 되는데 그렇게 표기하지 않고 예수(ihsou)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예슈아(ישוע)는 히브리어 알파벳 요드(י), (ש), 봐브(ו), 아인(ע)으로 구성 되어져 있다. 그런데 헬라어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쉰(ש) 발음을 낼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ihsou)라고 했다.

그래서 현재 이스라엘에서는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은 '예슈아'(ישוע)라고 부르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예슈아’(ישוע)라고 부르지 않고 단지‘예수’(ihsou)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예슈아(ישוע)란 단어의 뜻이 '구원'이라는 것을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뜻 그대로 예슈아(ישוע)라고 부르지 않는것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인정 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사실을  예수(ihsou) 보다는 구원의 뜻이 정확히 담겨 있는 '예슈아'(ישוע)라고  부르는것도 하나의 팁으로 생각해본다.

 

중국의 주석 습근평을 -시진평으로, 호금도를-후진타오로, 등소평을-뎡샤오핑으로, 목택동을-마오쩌뚱으로 원래 그 나라 이름을 부르듯이 말이다.   허지만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도 하나님은  이해하시고 구속하심은 변함이 없으시다.

 

Iésous: Jesus or Joshua, the name of the Messiah, also three other Isr.

Original Word:Ἰησοῦς, οῦ, ὁ

Part of Speech: Noun, Masculine

Transliteration: Iésous

Phonetic Spelling: (ee-ay-sooce')

Short Definition: Jesus

Definition: Jesus; the Greek form of Joshua; Jesus, son of Eliezer; Jesus, surnamed Justus.

 

 

2424 Iēsoús – Jesus, the transliteration of the Hebrew term, 3091 /Lṓt ("Yehoshua"/Jehoshua, contracted to "Joshua") which means "Yahweh saves" (or "Yahweh is salvation").

 

"Jesus Christ" is properly "Jesus the Christ." "Jesus" (2424 /Iēsoús) is His human name, as the incarnate, eternal Son of God (Mt 1:21,25, see also Lk 1:31) – the Christ, the divine Messiah (the second Person of the holy Trinity).

 

[Christ (His title) means "the Anointed One" (the eternal pre-incarnate, Logos, Jn 1:1-18).]

 

 

Word Origin

of Hebrew origin Yehoshua

Definition

Jesus or Joshua, the name of the Messiah, also three other Isr.

NASB Translation

Jesus (904), Jesus' (7), Joshua (3).

 

 

STRONGS NT 2424: Ἰησοῦς

 

Ἰησοῦς, Ἰησοῦ, dative Ἰησοῦ, accusative Ἰησοῦν, vocative Ἰησοῦ (Winer's Grammar, § 10, 1), ὁ, Jesus (יְהושֻׁעַ and according to a later form, יֵשׁוּעַ , Syriac 9wSy [], i. e. whose help is Jehovah; German Gotthilf; but later writings gave the name the force of יְשׁוּעָה, see Matthew 1:21, cf. Sir. 46:1 Ἰησοῦς ὅς ἐγένετο κατά τό ὄνομα αὐτοῦ μέγας ἐπί σωτηρία ἐκλεκτῶν αὐτοῦ, of Joshua, the successor of Moses; Philo, nom. mutat. § 21 Ἰησοῦς ἑρμηνεύεται σωτηρία κυρίου), a very common proper name among the Israelites; cf. Delitzsch, Der Jesusname, in the Zeitschr. f. d. luth. Theol. for 1876, p. 209f (or Talmudic Studies xv.). In the N. T.:

 

1. Joshua (fully Jehoshua), the famous captain of the Israelites, Moses' successor: Acts 7:45; Hebrews 4:8.

 

2. Jesus, son of Eliezer, one of Christ's ancestors: Luke 3:29 L T Tr WH.

 

3. Jesus, the Son of God, the Saviour of mankind: Matthew 1:21, 25; Luke 1:31; Luke 2:21, and very often; see κύριος and Χριστός.

 

4. Jesus Barabbas; see Βαραββᾶς.

 

5. Jesus, surnamed Justus, a Jewish Christian, an associate with Paul in preaching the gospel: Colossians 4:11.

 

 

Jesus.

 

Of Hebrew origin (Yhowshuwa'); Jesus (i.e. Jehoshua), the name of our Lord and two (three) other Israelites -- Jesus.

 

see HEBREW Yhowshuwa'

 

 

ΙΗΣΟΥ Ἰησοῦ Ιησουν Ἰησοῦν ΙΗΣΟΥΣ Ἰησοὺς Ἰησοῦς IeSOU Iesoû IĒSOU Iēsoû Iesoun Iesoûn Iēsoun Iēsoûn IeSOUS Iesoùs Iesoûs IĒSOUS Iēsoùs Iēsoûs

 

Christos: the Anointed One, Messiah, Christ

Original Word: Χριστός, οῦ, ὁ

Part of Speech: Noun, Masculine

Transliteration: Christos

Phonetic Spelling: (khris-tos')

Short Definition: Anointed One, the Messiah, the Christ

Definition: Anointed One; the Messiah, the Christ.

 

 

5547 Xristós (from 5548 /xríō, "anoint with olive oil") – properly, "the Anointed One," the Christ (Hebrew, "Messiah").

 

 

Word Origin

from chrió

Definition

the Anointed One, Messiah, Christ

NASB Translation

Christ (516), Christ's (11), Messiah (4).

 

 

STRONGS NT 5547: χριστός

 

χριστός, χριστη, χριστόν (χρίω), the Sept. for מָשִׁיחַ, anointed: ὁ ἱερεύς ὁ χριστός, Leviticus 4:5; Leviticus 6:22; οἱ χριστοι ἱερεῖς, 2 Macc. 1:10; the patriarchs are called, substantively, οἱ χριστοι Θεοῦ, Psalm 104:15 (); the singular ὁ χριστός τοῦ κυρίου (יְהוָה מְשִׁיחַ) king of Israel (see χρῖσμα), as 1 Samuel 2:10, 35; (1 Samuel 24:11; 1 Samuel 26:9, 11, 23); 2 Samuel 1:14; Psalm 2:2; Psalm 17:51 (); Habakkuk 3:13; (2 Chronicles 22:7); also of a foreign king, Cyrus, as sent of God, Isaiah 45:1; of the coming king whom the Jews expected to be the saviour of their nation and the author of their highest felicity: the name ὁ χριστός (מָשִׁיחַ, Chaldean מְשִׁיחָא) is not found in the O. T. but is first used of him in the Book of Enoch 48, 10 (cf. Schodde's note); 52, 4 (for the arguments by which some have attempted to prove that the section containing these passages is of Christian origin are not convincing (cf. υἱός τοῦ ἀνθρώπου, 2 and references)), after Psalm 2:2 referred to the Messiah; (cf. Psalms of Solomon 17:36 Psalm 18:6, 8). Cf. Keim, ii., 549 (English translation, 4:263f; Westcott 'Additional Note' on 1 John 5:1. On the general subject see Schürer, Neutest. Zeitgesch. § 29.) In the N. T. it is used:

 

1. of the Messiah, viewed in his generic aspects (the word, that is to say, being used as an appellative rather than a proper name), ὁ χριστός: Matthew 2:4; Matthew 16:16; Matthew 23:10; Matthew 24:5, 23; Matthew 26:63; Mark 8:29; Mark 12:35; Mark 13:21; Mark 14:61; Luke 3:15; Luke 4:41; Luke 20:41; Luke 22:67 (); ; John 1:20, 25 ( () Rec.); Rec.; ; Acts 2:30 Rec., ; ; 1 John 2:22; 1 John 5:1; ὁ χριστός κυρίου or τοῦ Θεοῦ, Luke 2:26; Luke 9:20; Acts 4:26; without the article, Luke 2:11; Luke 23:2; John 1:41 () L T Tr WH; ; Acts 2:36; ὁ χριστός, ὁ βασιλεύς τοῦ Ἰσραήλ, Mark 15:32; ὁ χριστός so used as to refer to Jesus, Revelation 20:4, 6; with τοῦ Θεοῦ added, Revelation 11:15; Revelation 12:10.

 

2. It is added, as an appellative (`Messiah', 'anointed'), to the proper name Ἰησοῦς a. Ἰησοῦς ὁ χριστός, Jesus the Christ (`Messiah'): Acts 5:42 R G; (R G); 1 Corinthians 3:11 Rec.; 1 John 5:6 (R G L); Ἰησοῦς ὁ λεγόμενος χριστός, who they say is the Messiah ((cf.

 

b. below)), Matthew 27:22; without the article Ἰησοῦς Χριστός, Jesus as Christ or Messiah, John 17:3; 1 John 4:2; 2 John 1:7 (but in all three examples it seems better to take χριστός as a proper name (see b. below)); ὁ Χριστός Ἰησοῦς, the Christ (Messiah) who is Jesus, (Matthew 1:18 WH marginal reading (see b. below)); Acts 5:42 L T Tr WH (R. V. Jesus as the Christ); Acts 19:4 Rec. b. ὁ Χριστός is a proper name (cf. Winers Grammar, § 18, 9 N. 1; (as respects the use of a large or a small initial letter the critical editions vary: Tdf. seems to use the capital initial in all cases; Treg. is inconsistent (using a small letter, for instance, in all the examples under 1 above, except Luke 22:67 and John 4:29; in Matthew 1:1 a capital in Mark 1:1 a small letter, etc.); WH have adopted the principle of using a capital when the article is absent and avoiding it when the article is present (1 Pet. being intentionally excepted; the small letter being retained also in such examples as Luke 2:11; Luke 23:2; Acts 2:36, etc.); see WH. Introductory § 415])]): Matthew 1:17; Matthew 11:2; Romans 1:16 Rec.; (here L omits; Tr brackets the article); ; 1 Corinthians 1:6, etc. without the article, Mark 9:41; Romans 6:4; Romans 8:9, 17; 1 Corinthians 1:12; Galatians 2:16f, 19 (), ; ; Philippians 1:10, 13, 19-21, 23; Philippians 2:16; Colossians 2:5, 8; Hebrews 3:6, and often. Ἰησοῦς Χριστός, Matthew 1:1, 18 (here Tr omits Ἰησοῦς; WH text brackets Ἰησοῦς; others have, ὁ Ἰησοῦς Χριστός which is unique; see WH's Appendix at the passage); Mark 1:1; John 1:17; Acts 2:38; Acts 3:6; Acts 4:10; Acts 8:12; (Acts 9:34 L T Tr WH); (R G); (here L WH text omit; Tr brackets Χριστόν); (Tdf. omits Χριστόν); Romans 1:1 (R G WH text (see below)), ; (R G Tr text WH marginal reading (see below)); 1 Corinthians 1:7-9; 1 Corinthians 3:11 (G T Tr WH (Rec. Ἰησοῦς ὁ Χριστός)); 1 Corinthians 15:57, and very often in the Epistles of Paul and Peter; Hebrews 13:8, 21; 1 John 1:3, 7 (R G); ; ( G T Tr WH); 2 John 1:7 ((see a. above)); Jude 1:4, 17, 21; Revelation 1:1, 5; Revelation 22:21 (Buttmann, G (WH brackets others omit Χριστοῦ)). Χριστός Ἰησοῦς, Rom. ( T Tr WH marginal reading (see above); T Tr marginal reading WH text (see above)); (WH brackets Ἰησοῦς); 1 Corinthians 1:2, 30; ( Lachmann (see above)); Galatians 3:14 (here Tr text; WH text Ἰησοῦ Χριστῷ); (WH brackets Ἰησοῦ); ; Philippians 2:5; Philippians 3:3, 14; Colossians 2:6; 1 Timothy 1:2; 1 Timothy 2:5. Ἰησοῦς ὁ λεγόμενος Χριστός, surnamed 'Christ' ((cf.

 

a. above)), Matthew 1:16. on the phrases ἐν Χριστῷ,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see ἐν, I. 6 b., p. 211b (cf. Winer's Grammar, § 20, 2 a.). Χριστός and Ἰησοῦς Χριστός ἐν τισίν, preached among, 2 Corinthians 1:19; Colossians 1:21 (others (so R. V.) would take ἐν here internally (as in the following examples), within; cf. ἐν, I. 2); Χριστός ἐν τισίν is used of the person of Christ, who by his holy power and Spirit lives in the souls of his followers, and so moulds their characters that they bear his likeness, Romans 8:10 (cf. 9); 2 Corinthians 13:5; Galatians 2:20; Ephesians 3:17; a mind conformed to the mind of Christ, Galatians 4:19.

 

Christ.

 

From chrio; Anointed One, i.e. The Messiah, an epithet of Jesus -- Christ.

 

see GREEK chrio

 

 

χριστε χριστέ Χριστον Χριστόν Χριστὸν ΧΡΙΣΤΟΣ Χριστός χριστὸς ΧΡΙΣΤΟΥ χριστού Χριστοῦ χριστόυ Χριστω χριστώ Χριστῷ χριστών christe christé Christo Christō Christôi Christō̂i Christon Christón Christòn CHRISTOS Christós christòs CHRISTOU Christoû

출처: USA 아멘넷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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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상급 (에우세비우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5-36).

우리 가운데 참된 평화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지치지 않는 사랑이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잘못을 책망할 때 우리 목적은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격려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징계는 가혹하게 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만 신실한 믿음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도 신실함을 보이고 있습니까?
우리는 불행한 이들을 긍휼히 여깁니까?
우리는 기만과 위선 뒤로 악을 은폐하는 것을 미워하는 꾸밈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참 하나님과 그분의 나뉨 없는 주권을 인정합니까?

  이것이 참된 경건이며 진실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신앙입니다. 하나님께 헌신을 고백하는 이들은 쉽게 분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궁핍의 압박 속에서도 고결하게 처신합니다. 그들의 헌신을 시험하는 시련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통하는 통행 허가증입니다. 하나님은 탁월한 인간의 행동을 기뻐하신다는 점을 우리는 의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권세 있는 자나 비천한 자나 자기를 돕는 이들에게 감사하고 그 보답으로 자기도 그들을 돕는데 지극히 높으신 주권자이시며 선 그 자체이신 분이 그와 같이 보상해 주시기를 소홀히 하신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은 평생토록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가 선을 베풀 때마다 우리 가까이 계시며 우리의 의와 순종을 받으시고 보상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행동을 다 살펴보실 때까지는 완전한 보상을 미루십니다. 그때가 되면 거리낄 것이 없는 이들은 영생의 상급을 받지만, 악인들은 자신이 받아 마땅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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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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