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전 기도하는 견공들(동영상)

누지문서

유투브에 올라온 동영상입니다.
중국 여성이 밥을 준비하며 줄 동안에 식탁에 기대어 차분하게 기다리는
예의범절을 보여주는 모습과 이어서 기도가 시작되니 모두 머리숙여
기도하는 모습이 보여집니다.
그중 한 놈은 기도중 머리를 들었다가 옆을 보더니 다시 머리를 숙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만듭니다.
아멘과 동시에 머리를 들은 견동들은 식사가 시작되고 이어서 식사가 끝날
즈음에는 식기를 혀로 깨끗이 마무리짓고 주인에게 다시 갖다주는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동물도 훈련하면 겉으로는 기도의 모습을 갖춘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충격실체! 무섭게 다가오고 있는 이슬람!

 

▼충격] 예멘 테러 사건의 실체와 이슬람 학살 (1 of 3)

http://www.youtube.com/watch?v=7HA2PJNIaP8

▼충격] 예멘 테러 사건의 실체와 이슬람 학살 (2 of 3)
http://www.youtube.com/watch?v=QlJh3VokO54

▼충격] 예멘 테러 사건의 실체와 이슬람 학살 (3 of 3)
http://www.youtube.com/watch?v=rAxCN6XX_FY

▼이슬람이 몰려온다 (1 of 2)
http://www.youtube.com/watch?v=3ObS80_UE6g

▼이슬람이 몰려온다 (2 of 2)
http://www.youtube.com/watch?v=vfrQH7ADRg8

▼무슬림과 결혼 후 피해보는 한국여성.. .
http://www.youtube.com/watch?v=vPNHvthR1T4

▼탈레반, 킬러 그들은 왜 한국으로 오는가?
http://www.youtube.com/watch?v=KYqfBiBy3oA

▼이슬람이 장악한 미래의 유럽
http://www.youtube.com/watch?v=TjLFbcHquSk

▼무슬림은 온건한 척한다
http://www.youtube.com/watch?v=BuPTT7weXlE

▼말세의 성전을 준비하는 유대인
http://www.youtube.com/watch?v=QMHpZBbfdFU

▼무슬림에서 개종하는 이란의 지하교회인들
http://www.youtube.com/watch?v=Xg40R66_VZc

▼이스라엘 제3 성전
http://www.youtube.com/watch?v=cY-2rsM5j2M


제게 속하였나이다 /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아버지여, 이 죄 많은 자녀를 아버지께 데려왔나이다.

아버지의 용서를 구하나이다.

한번 더 이 자녀를 제 손에서 받아 주시옵소서

이 자녀는 제게 속하였나이다.

이 자녀는 죄가 크나 자신의 죄를 지백하나이다.

이 자녀를 보지 마소서, 아버지의 시선 감당할 수 없으니.

 

저를 보소서, 제가 이 자녀의 약함을 가리겠나이다.

이 자녀는 감히 자기 자신을 위하여 변론할 수 없으나

제가 이 자녀의 대언자이며 이 자녀의 문제를 맡았나이다.

이 자녀 위해 제가 흘린 피 한 방울 한 방울

이 자녀 위해 심령에 새긴 모든 슬픔

이 자녀 위해 제가 입은 모든 상처 기억하시고 용서하소서

 

성부 하나님! 저는 이 자녀를 절대 잃을 수 없나이다.

비록 죄가 크나 이 자녀도 제게 속한 자녀이오며

죄가 이 자녀를 파괴시켜으나 제가 죄를 멸하였고

사망이 이 자녀를 따르나 제가 사망을 정복하였으며

사탄이 이 자녀를 옮아매나 사탄은 제 발 밑에 있나이다.

 

내 아버지여! 이 자녀의 기도를 들으소서.

아니 제 기도를 들으소서

온 세상을 다 준다 해도 결코 이 자녀와 바꿀 수 없으니

당신의 영광 위해 당신이 택하시고 만드신 이 자녀,

죄 때문에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서 있는 자녀,

제게 모든 소망을 걸고 있는 이 자녀를 받아 주소서,

저는  제 자녀를 알고 제게 속한 이들을 아옵나이다.

 

제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그들이 흘리는 모든 눈물

제 심장 고동소리와 어울려 뛰는 그들의 심장 고동소리

죄로 인한 탄식과 간절한 기도

제게 매달려 의지하는 저들의 깊은 사랑과 신뢰

이로써 제게 속한 이들을 아옵나이다.

 

저는 그들이 쫓겨나는 것을 도저히 볼 수 없나이다.

비록 약해도 그들은 제 양무리 중에 약한 양이며

저를 가장 아프게 하는 양도, 저를 가장 적게 사랑하는 양도

길잃고 방황하는 양도 저는 한결같이 사랑하나이다.

 

이 자녀를 집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더 빨리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채찍을 사용하긴 했지만

이 자녀는 제 것이며 세상에서 불러낸 제 양이옵니다.

제 사랑이 아니면 이 자녀에게는 권리도 없고 집도 없고

땅과 지옥이 공모하여 이 자녀를 해치려 하나

제가 그를 지키고 보호하고 구원하오니 우리는 하나입니다.” 

 

 

 "십자가 아래서” 중에서 /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출처: 사람이 되신 하나님 "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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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명자의 고백
                  최송연
 
쪽빛으로 파란 하늘에는
하얀 새털구름 두둥실 흐르고
살랑거리는 바람 따라
풀 내음마저 향긋한 데...

풀 숲에 쪼그리고 앉아
시계꽃 넝쿨째 뜯어
손목에 칭칭 감아 팔찌 만들고...

빨간 진달래꽃
입에 물고 잘근잘근
입안에 달착지근한 꽃잎 물,
소녀의 마음
나비 되어 춤추었네

내 인생의 들녘에
봄은 그렇게 왔다 가고
오고 또 가는데...

저 멀리 메마른 광야
길 잃은 양떼의 울부짖는 울음소리
어쩌자고 귓전을 때리며 들려오는가....

그 울음소리
차마 외면치 못해
훌훌 따라 나선 이 길

가도 가도 끝없는 사막의 길,

멀고도 외로운 길,
눈물의 길이었네

가야할 길은 아직도 상거가 먼데,
나는 어이하여
이리도 주저앉고만 싶어지는지

때때로,
돌부리에 채여 넘어지며, 자빠지고,
뾰족한 가시 찔러대어 피맺힌 무릎,
고픈 배 움켜쥔 채 터벅거려도

목자의 핏빛 사랑이
나를 오라 손짓하며 부르시니
나는 힘없는 무릎 일으켜 세우고

오늘도
생명으로 생명 바꾸신
목자의 끝없는 그 사랑이야기
가녀린 목 터지도록 외쳐보려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시록2:10절)."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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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일조 헌금의 신학적 근거


    서철원교수 (총신대)

     

     

    구약이 그리스도의 책임을 그리스도 자신이 반복적으로 분명히 하였다.

    그는 자신이 구약의 선지자들 곧 모세와 선지자들과 시편이 예언한 메시아임을 밝히고 증명하기 위해 구약을 인용하였고

    자기가 구약 예언들의 성취임을 성경 증명 형식으로 개진하였다.

     

    그리스도 자신이 모든 구약의 성취로 왔다는 의식을 분명히 하였고,

    그러므로 그의 십자가상에서의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라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그가 구약의 성취이기 때문에 자신이 구약 선지자들과 같은 선상에 서는 것으로 결코 보지 않고

    그들을 전적으로 능가함을 강조하였다.

     

     

    왜냐하면 구약은 전체로 그리스도의 예비로서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 생명도 없고 목표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구약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준비이어서 그리스도와 연관됨이 없이는 아무런 가치를 갖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약은 그 생명인 그리스도와 연관해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메시아 예언인 부분들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전혀 연관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부분들도

    다 그리스도를 사전에 나타내고 가리키고 지시한다.

     

    이렇게 볼 때 구약은 구속사적으로 혹은 예표론적으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예표론적 구약 이해는 우화적 해석과 완전히 별개다.

    구약에서 전개된 사건과 인물과 제도는 다 그 당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봉사한 가장 구체적인 사건들이면서,

    또 그렇기 때문에 세상 구원의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으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하나님의 모든 섭리는 세상 구원의 오직 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의 예비였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가 산출해낸 세상 구원과 하나님나라 건설의 유일한 길이다.

    구약역사에서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하고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구약역사가 그리스도의 사전모형으로 나타난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의 준비요, 예표인 구약은 그 성취인 그리스도로부터 읽어지고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또 성취인 신약도 약속이요, 예언인 구약으로부터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십일조 - 서철원교수

     

    십일조 헌금문제도 이 연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구약의 제도들 특히 의식 규례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에서 다 성취되고 종결되었다.

    구약에서처럼 구원의 길로서 지켜지고 시행되지 않는다.

    구원의 길과 연관되었던 모든 제도들은 다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고 종결되어 신약의 백성들을 구속하지 않는다.

    신약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하여 영 안에서 자유함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구원을 위한 조건 충족은 신약 백성들에게 일체 면제되었다.


    그러나 구약에서 시행되던 헌금제도가 그 형태와 방식은 변하였어도 신약교회에서도 행해져왔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구약교회에서 하던 제도의 그냥 연속인가,

    아니면 구약제도의 성취와 또 율법 정신과 교회 존립에서 해석하고 정립될 것인가?

     

    구약제도의 연속으로 보는 것은 이 글 전반부에서 고찰했듯이 신약의 성취의 관점에서 승인되거나 정립되지 않는다.

    구약의 바치는 제도들은 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과 바쳐드림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구약의 바치는 제도들이 십자가에서 성취가 없었던 것처럼 구약교회에서 신약교회에로 그냥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취된 것은 성취의 관점에서 고찰되고 해석된다.

    그러므로 신약교회 혹은 현재 그리스도 교회에서 시행되고 있는 헌금제도는 구약 율법제도의 연속이 아니다.

    그것은 성취 후의 일이다. 즉 율법적 제도로서 연속되고 시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 신경들 특히 칼빈에 의해 기초된 ‘불란서 개혁교회 신앙고백서’와 ‘화란 신앙고백서’는

    율법의 성취와 종결을 말하면서 율법의 정신 혹은 실체가 우리와 함께 남음을 말한다.

    바로 이 관점에서 그리스도 교회에 시행되고 있는 헌금제도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

     

    구약교회의 헌금제도는 신약교회의 존립과 연관해서 이해함이 그 율법정신에 적합하다고 볼 것이다.

    예루살렘의 구약교회는 여호와 신앙의 유지를 위하여 제사장들의 유지가 필수적이었다.

     


    “구약교회는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서서 중보역을 담당한 제사장들의 유지없이 존속할 수 없었다.

    제사장의 중보 없이 백성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불가능하였다.

    제사장들은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구약교회를 가능케 하였다.

    이 제사장들의 유지없이 구약교회는 존속될 수 없었다.

    바로 이 유지에 백성들의 십일조 헌금과 다른 헌금이 필수적이었다.

     

    지금도 동일한 원리와 정신이 성립되고 적용된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전파와 가르침에는 이 일에로 부름받은 교역자들의 유지 없이는 안될 것이다.

    이 복음의 전파와 가르침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의 봉사자로 세워진 자들을 유지하기 위해 십일조 헌금이 필수적이다.

     

     

    또 십일조는 하나님의 소유권 인정에서 비롯되고 시행되었다고 할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의 모든 소유는 다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그런데 우리의 수입의 십분의 일을 드림은 우리의 수입과 소유가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그의 소유권을 인정해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교회도 수입의 십분의 일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소유권을 반복적으로 인정해드려야 할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교회 특히 한국교회가 헌금을 위에서 밝힌 두 원리에 의해 바쳐야 할 것이다.

    특히 십일조 헌금이 그러하다.

     

    그러면 헌금이 구약교회에서처럼 율법적 강제 하에 이루어질 것이 아니고

    바울이 가르치고 강조하듯 자발적으로 바쳐지도록 해야 바르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속에 이른 자들은 영의 자유함에 이르렀는데

    율법적 강제를 다시 시행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와 해방을 잃게 될 것이다.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늘 자유와 해방이 생활되어 자발적인 헌금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십일조 헌금을 전교인들에게 의무화하여 내도록 하되 강권하는 것을 없애는 것이 바르다.

     

    헌금은 무슨 종목이든지 자발적인 바침이어야 하고

    구약교회에서처럼 율법적 강요가 되면 안된다.

     

    십일조를 전교회가 바른 헌금 방식으로 삼으면 교회 재정이 충족할 뿐 아니라 흘러넘치게 되어

    다른 헌금을 강조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교회가 생활화하면 다른 헌금들을 조목화하여 구제할 필요성이 스스로 소산된다.

     

    거기에는 영 안에서 자유함이 역사하여 자발적이고 기쁜 헌금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교회가 생활화하고 다른 각종 헌금들의 제약을 해제하는 것이 바르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함과 해방됨이 율법적 강조에 의해서 제약되고 축소되면 안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가져다 준 자유를 아무도 제약하거나 빼앗을 권리가 없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자유와 기쁨과 감사가 넘쳐 자발적인 헌금이 십일조액을 항상 넘어갈 것이다.

     

     

     

    십일조 - 서철원교수 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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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영혼 옥토 되게 하소서 /최송연 
           
    척박한 땅
    사랑으로 일구고자 
    내리신 은총의 단비
    
    생명의 씨앗 
    싹 틔운 지 오래나
    드릴 열매 변변치 못하오니
    
    오, 주님
    은혜의 말씀으로 
    갈고 또 갈아
    내 영혼 옥토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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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그 밤 홀로 지새우며 피땀 흘리실 때

     

    얼마나 힘드셨을까

    수많은 무리들 야유를 퍼부을 때

     

    얼마나 괴로우셨을까

    제자들 욕하고 저주하며 떠나갈 때

     

    얼마나 아프셨을까

    칼날같은 채찍끝이 살속을 파고들 때

     

    얼마나 아프셨을까

    억센 가시나무 머리 위를 짓누를 때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 길고 긴 대못 손과 발에 박히울 때

     

    얼마나 아프셨을까

    연약한 몸 십자가에 매달리울 때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런 주를 부인하고 방황하는 나를 보시며...

     

     

     

     

    새찬송가 614장 - 얼마나아프셨나 [다니엘 새찬송가 전집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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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무드 처세 17계명

         

         

        1. 지금 힘이 없는 사람이라고 우습게 보지 마라.

        힘 없고 어려운 사람은 백번이라도 도와줘라. 

        그러나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은 경계하라.

        2. 평소에 잘해라. 평소에 쌓아 둔 공덕은 위기 때, 빛을 발한다.

        3. 내 밥값은 내가 내고 남의 밥값도 내가 내라.

        남이 내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라.


         

        4. 고마우면 고맙다고, 미안하면 미안하다고 큰소리로 말하라.

        마음으로 고맙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사가 아니다.

        남이 내 마음 속까지 읽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

        5. 남을 도와줄 때는 화끈하게 도와줘라. 도와주는지 마는지

        흐지부지하거나 조건을 달지 마라. 

        괜히 품만 팔고 욕만 먹는다.

        6. 남의 험담을 하지 마라. 그럴 시간 있으면 팔굽혀펴기나 해라.

        7. 직장 바깥사람들도 골라서 많이 사귀어라.

        직장사람들 하고만 놀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된다.  

        직장 그만두면 고아가 된다.

        8. 불필요한 논쟁, 지나친 고집을 부리지 마라. 직장은 학교가 아니다.

        9. 회사돈이라고 함부로 쓰지 마라. 사실은 모두가 다 보고 있다.

        10. 가능한 한 옷을 잘 입어라. 외모는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11. 남의 기획을 비판하지 마라. 자신이 쓴 기획서를 떠올려봐라.

        12. 조의금을 많이 내라. 사람이 슬프면 조그만 일에도 예민해진다.

        13. 약간의 금액이라도 기부해라. 마음이 넉넉해지고 얼굴이 핀다.

        14. 수위 아저씨, 청소부 아줌마, 음식점 종업원에게 잘해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경계하라. 

        나중에 그대가 어려워지면 배신할 사람이다.

        15. 옛 친구들을 챙겨라.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드느라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자산을 소홀히 하지 마라.

        16. 너 자신을 발견하라. 일주일에 한 시간이라도 좋으니

        혼자서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라.

        17.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지금 그대가 살고 있는 순간은 나중에

        그대 인생의 가장 좋은 추억이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지혜의 창" 중에서


    알곡과 가라지 비유 / 김홍전 목사

     

    성경: 요일2:18-29절

     

    제목: 알곡과 가라지 비유

     

     

    오늘날에 우리는 마태복음 13장에서 제둘째번에 기록된 비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배웠는데, 이 “알곡과 가라지”비유 가운데서 가라지라고 하는 것이 순전히 이세상에 예수를 믿는 사람과는 아주 다른 불신자의 세계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알곡을 뿌려 놓은 위에 덧뿌려 놓은 알곡과 가장 근사하게 보이는 것들로, 또 알곡의 생장에 같이 뿌리를 박고 자라나는 것들로서 그것이 가라지가 그 우거진 숲이 알곡을 해할 여러가지 우려가 있는 까닭에 그것을 주인의 종들이 “뽑으리이까”하고 물을 때 주인은 “그만 둘다 자라게 두었다가 추수 때 추숫군들을 시켜가지고 가라지를 먼저 불사르기 위해서 뽑아서 단으로 묶을 것이다”

     

     

    그 가라지에 대해서 주께서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을 하시면서 거기에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고 하니 가라지를 말할때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이를 갊이 있으리라”(아 13:41,42)

      이렇게 해서 결국은 주께서 이 역사의 종말에 심판을 하셔서 그 초자연적인 위대한 심판에 의해서 이들을 다 전부 불사뤄서 비로소 교회를 정화하기까지는, 이 땅위에는 참것과 거짓것이 같은 모양을 가지고 뒤섞여 가지고 역사는 진행되어 나갈 것이니라.

      여기서 우리가 아침에 생각한 것은 배교의 중요한 한 상태의 하나가 참되이 진리를 속으로 받는 것이 아닌 가라지가 - 그 소종래를 따지면 그 악한 자 호 포네로쓰가 뒤에 뿌려놓았던 이 가라지가 - 가장 알곡인 것 같이 나타나서 얼마 동안 자라지가 그 싹이 나고 결실을 할 때쯤되면 비로소 그 가라지의 본명을 발휘하는 것아리고··· 이렇게 해서 한동안 같이 지내다가 나중에는 그것이 이색적인 것, 이질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는 이야기 올시다.

     그것이 누가 뿌린 것이냐하면 <그 악한 자> 곧 마귀가 뿌린 것이라··· 또 “가라지는 마귀의 자식들이요” 그랬어요. 이것은 보통 “이세상 사람이요”하는 말보다도 현저하게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에게 대척적인 위치에, 아주 반대되는 위치에 서 있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어요.

      그 성격이나 목적이나 그 전체의 존재의 이유가 왜 하필 넓은 세상에 다른 데 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어 나가는 역사의 현실속에 들어와서 그것을 같이 붙들고 나라는 체 하면서 항상 작해를 하느냐 하면, 이것은 자체가 그악한 자, 즉 좋은 씨를 뿌리시는 인자에 대치해서 스스로 인자의 그 천국의 자식들을 뿌려 놓은것을 모방해서 자기의 자식들을 뿌리는 마귀의 소치이니까 그렇다····

     

     

    이렇게 여러가지 다른 면에서 보는 것 보다도 그들이 이세상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운영해 나갈 때에 그 위치나 그들의 소행이나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활, 모든 결과가 결국은 악한 자의 자식으로서 가라지로서 알곡에 해를 끼치고, 또 사람들로 하여금 알곡인지 분별할 수 없이 스스로 알곡의 위신을, 진리성을 파괴하고 혼탁하게 하고 사람들에게 미혹을 주려고 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그거요. 이런 것이 또 하나 중요히 배교의 증상, 혹은 현상 가운데의 하나인데···· 여기와 [요한일서 2:18]

     

     

    부터 오늘 저녁에 읽은 말씀을 대조해 보면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 그리스도가 이르갰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 처럼 지금도 많은 적 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건 마지막에 오는 그 한 적 그리스도, (즉)안티그리스토쓰라는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릇 적 그리스도의 신과 본질을 가진 자들은 어떤 한 사람만 종말에 환연히 홀연히 나타날 것이 아니라 벌써 사도요한이 있던 일세기부터 그 인물이다 있었다.

     

    많은 적 그리스도, 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적 그리스도가 지금 여기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 2:18) 이 마지막 때라는 것은 역사의 종말인 줄 아노라 하는, 소위 역사의 맨 종점, (즉)터머너쓰라 하는 의미가 아니고, 여기 마지막 때하는 특수한 성격을 가진 역사 서기를 가르치는 것으로서 이 후라 하는 말에도 그 특수한 많은 시기, 긴 시기를 보이는 바가 있지만 적 그리스도적인 그 패괴와 또 역사의 종극적인 성격을 띤 시간이 그것이 1000년이든지 2000년이든지 계속 할 때라는 말로 표시하는 것 뿐이요.

     

     

    그것이 말하는 그 터미너스 혹은 에스카토스, 역사의 중점을 늘 의미하는 것 보다는 이것이 한 마지막의 시기를 시기의 그 정격을 띤 그런 역사 시기다 하는 것을 가르키는 것이 올시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거 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 2:19)

     

     

    그러면 여기 많은 적그리스도가 있다고 했는데 그 많은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자들은 원래 하나님의 참자녀들과, 거룩한 나라의 시민들과 관계없이 바깥에서 일어나서 한 세력을 형성해 가지고 쳐들어온 것이 아니요. 원래는 안에 있었는데, 안에 있다가 자기가 싹이 나가지고 결실할 때쯤 되니까 마침내 스스로 자신의 그 정체를 나타내면서 떠나 다 하는 것이올시다

     

     

    그러니까 소위같이 있다가 나간 자도 크게 적그리스도라 하는 말로 표현할 만큼 강렬하게 적그리스도의 성격과 세력을 표시하는 것이요 이말은 달리 뒤집어 보면 적그리스도의 성격이나 그 세력은 반드시 교회의 바깥이나 하나님의 자녀 바깥에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원래 안에 있다가도 나가는데 안에 있다 나간 것을 자세히 살펴 보니까, 알고 보니까 정체는 적그리스도다. 적그리스도의 성격과 그 세력을 그대로 가진 자들이다 하는 것이 올시다.

     

    다른 말로 말하면 교회안에 적그리스도의 성격과 세력이라는 것은 주저 앉아서 거기에 보금자리를 치고 자랄 수 있는 것이다. 하는 말이요.

     

     

    그리고 그런 세력과 성격이란 것이 보금자리를 치고 자라나는 그교회는 그러는 동안에 그만큼 적그리스도적 성격이나 그 세력이 교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요. 적그리스도의 세력이나 그허한 성격을 가진 자들이 교회에 ?아 있어도 교회는 조금도 손상을 안 받는다는 법은 없어요.

     

    그가 또 교회안에 있는 동안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데 주저 앉아 있는 것은 아니어요. 있을 만한 곳이니까 있는 것이요.

     

    교회는 적그리스도적인 성격이나 세력을 가진 자들도 있을 만한 곳으로 여기고 얼마만한 동안은 있는 것이니라 그 얘기요.

     

    그러면 교회에 그러한 자들이 강렬한 성격으로 뒤흔들고 나가면 많은 수가 거기에 영향을 받아 가지고 이끌려 나가기 쉬운 것이요. 이렇게 해서 배교의 현실의 하나는 별다른 세력과 이질적인 작용이 교회안에서 움직여서 교회를 찢어갈기기도 하고 교회의 성격을 변질도 시키고 그래서 발생하는 것이요.

     

     

    배교라는 문제는 항상 중요한 문제로서 1972년에 들어서 우리는 세계의 교회, 기독교계의 정세의 전진이라는 것을 더 주시를 하면서 우리 교회의 사명이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할 때 그 문제를 심각하게 주의깊게 연구하는 것이 좋은 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때때로 이 배교라는 사실과 관련이 된 하나님의 말씀의 도리를 때때로 이야기 한 것이요. 지난 주일 저녁에는 씨뿌리는 비유 가운데 [돌밭에 뿌리운 씨]에 대한 얘기를 할 때 그 돌밭에 뿌리운 씨에 대한 주님의 해석은 처음에는 잘 자라고 다른 옥토에서 난 씨하고 조금도 차별이 없이, 구별을 가질 수가 없이 좋은 씨였지만, 좋은 나무였지만은 그러나 얼마 지난 다음에 뜨거운 햇빚이 비취듯이 말씀의 연고로 인하여 환란과 시련을 만날 것같면 그만 “말씀을 포기하고 배반하는 자요”(눅 8:13) 그래서 거기에 배교의 중요한 이유 하나를 주께서 말씀하셨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오늘은 우리가 낮에 본 그 [가라지와 좋은 씨]의 그 비유의 몇가지 문제점과 더불어서 [가라지]라 할 때 가장 교회적인 그 자태를, 모양을 잘 가진 자로서, 교회적인 모양을 가지고 많은 사람에게 그럴 듯한 영향을 주는; 그런고로 단독적이 아니고 많은 종자, 추종자들을 만들어 내는 그 사람이, 그런 사람들이 갑자기 본색을 드러내 가지고 - 그건 본색을 드러내기 아니할 수 없는 그런 시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요.

     

     

    차츰차츰 해 나가느라면 저도 그냥 할 수는 없고 무엇을 결정하고 무엇을 행동하고 무엇을 해 나가야 할 테니까 아무래도 시간이 가는 동안에 더욱 발전하는데 따라서 그 정체가 차츰차츰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란 말이에요 - 났을 때에는 거룩한 교회의 코유니온가운데, 그 교통가운데들어 있을 수가 없는 까닭에 그 세력을 별다른 그 장소를 찾아서든지 별다른 형식을 취해서 그대로 수립하고 나가는 것이요.

     

     

    그러면 그것은 교회라는 이름을 포기하고 나가는 것은 아니요. 그러나 그것도 교회는 교회요. 그리고 그것은 정치적으로는 교묘하게 항상 큰 교회와 관련을 가지는 것이요. 즉 교파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교회의 큰치리회와 관계를 가지고 나가게 되면, 여기서 오늘 아침에 이야기한 것과 같이 많은 진과 그 비진리가 뒤섞이는 현실이 그대로 존재하는데, 사도 요한은 그러한 사람들을 지목해서 적그리스도라고 그랬어요.

     

     

    적그리스도라고 하는 만치 강렬한 반 그리스도성격을 가진 것이다고···이것은 그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정도에 있는 것은 아니요. 강력하게 그리스도에 반대하는 성격을 가졌어요.

     

    적그리스도라고 할 때에는 우선적으로 제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인 점을 예수의 그리스도인 점을 부인하는데 있는 것이요.

     

     

    다른 말로 말하면 정당한 기록론을 항상 외곡시키고 부인하는데 있어요. 여기서 이 적그리스도의 문제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말씀을 할 때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요일 2:22) 그래서 나사렛예수 그 분이, 그분이야 말로 참 그리스도다 하는 사실을 부인하는 자가 이것이 거짓말을 하는 자다···

     

     

    둘째는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요일 2:22) 여기는 또 일단 더 뛰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결론을 내리랄 것같으면 그러면 먼저 소급해 올라가 가지고 신론에 올라가서는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으로서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과 아드님되시는 하나님과 성신이신 하나님이 세 위로, 즉 세 인격으로서 계시나 일체로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 아드님 되시는 하나님이 그 인격을 가지고 사람의 본질을 취할 때에는 성모 마리아에게서 취하사 당휘에 - 또한 사람이시요, 하나님으로 계셨다 하는 사실 그리고 그런 그 분이 잊[는 땅위에서 성경이 예언한 것과 같이 메시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이로서, 즉 중보자로서 사람과 하나님사이에 거룩한 직분을 가지셨으니; 이 중보자로서의 거룩한 직분은 기름을 부은 자로서의 제사장이요 왕이요 선지자다.

     

     

    이렇게해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 하마시야 곧 메시야 크리스토스란 말씀이요. 그가 누구냐 하면 그가 이 세상에 나오셨을 때 나사렛에서 나온 예수라는 이름으론 세상에 거하셨더니라. 그 분이 곧 그다 그 얘기요.

     

    그런데 그 분이 우리가 기대하는 그 메시야고 또 제이위되시는 하나님이 친히 성육신하시사, 땅에 사람의 본질을 취하시고 거룩하신 로고스의 인격을 가지고 땅에 임하셨다는 그 사실을 부인하면 그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다.

     

     

    즉 신론을 별다른 것으로 부인해 놓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적그리스도니라 그것이 올시다. 그런고로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일 2:23) 이 말은 아주 중요한 말이어요,

     

     

    모두다···· 어떤 말이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는 말이 없지만 기독론을 할 때와 우리 에수 믿는 도리의 가장 대본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시냐”는 문제요, 늘····· 그냥 예수를 믿는다 하지말고 “그리스도는 누구시냐”하는 문제인 것이요.

     

     

    그런데 이 그리스도를 논할 때에 그리스도를 논하려면 필연적으로 신론을 해야 하는 것이요. 하나님은 그러면 누그시냐? 어떤 하나님이시냐?

     

    만일 유일신의 하나님만을 생각할 때는 그리스도는 생각할 수가 없어요.

     

    그런 경우에 메시야는 성경이 구약에서부터 차례차례 바로 가르친 그 메시야가 아니고 구약을 읽되 오해해 가지고 읽었던 유대 사람들의 교법사나 바리새인들의 생각과 같은 메시야관을 가지게 되는 것이요.

     

     

    그것은 더떤 메시야냐하면 하나님은 일신이시요, 유일신이시요 메시야는 하나님의보내심을 받은 초연한 인물로 위대한 인물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는, 혹은 그 직에서 건져 내신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모든 기반 가운데서 겉져 내시는 그 분이다···· 그런고로 그들의생각에서는 메시야는 사람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왜곡되고 일부적인 사람들, 그러면서 교법사라고 하고 바리새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생각에는 그것이 있었다. 그말씀이에요.

     

     

    성경을 우리가 주의해서 읽을 때 성경 가운데 [메시야는 그냥 사람일 수가 없다]는 그 결론을 못 얻는 것은 아니요. 그러나 그렇게 갖지 않고 저들은 괴이한 - 메시야는 아무리 위대해도 하나의 인물이다 하는 - 생각을 하게 됐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특별히 바벨론 포로 이후에 그 우상 섬긴 것 때문에 큰 징벌을 받았다는 것을 깊이 아는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다시는 우상을 섬길 수는 없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하나님 없고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다. 독일 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독일성만을 생각했지, 하나님의 완전성이라는 데서부터 추출해서 하나님은 삼위로 게시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는 거룩한 계시와 거룩한 도리를 생각해낼 길이 없었단 말씀이요.

     

     

    그런고로 그런점에 있어서 이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은 유일한 하나님으로서 여호와요. 또한 하나님의 모든 종들, 여호와의 모든 종들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특출한 종의 사상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특수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과연 메시야는 종의 형상을 입고 나오셨어요. 그런 의미에 있어서 여호와의 종이란 말로 쓸 수 있는 것이요.

     

     

    그리고 종의 형상으로서 어떻게 봉사했는가는 성경에 자세히 그러한 관점에서 그를 기록했어요. 여러분은 복음서 가운데 마가복음은 종으로서의 그 임무를 특별히 그리노라고 한 것 아니에요? 그런데도 우리가 하나님의 그 완전하신 위치 가운데서 볼 때에는 참으로 이스라엘을 건지시려면, 그리고 참으로 구약의 약속하고 예언한 모근 사실들을 이루려면 그건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을 알아야해요.

     

     

    그것은 죄를 속하는 것, 또 “저가 대신 우리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약한 것을 짊어지시고, 우리의 맞을 매를 대신 맞으심으로 우리를 고치고 성하게 하셨다.”(이사야 63:4,5)는 사실은 사람으로 한 것은 아니요.

     

     

    위대한 엘리야나 이사야와 같은 위대한 인물이, 다니엘 같은 위대한 인물이 다시 회생해서, 부생해서 왔다고 하는 것은 아니에요. 이러므로, 그런 점으로서 구약의 메시야관의 그 이해의 문제가 결국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침침한 흑암 속으로 자꾸 들어가게 한 것이올시다.

     

     

    여기서 우리가 또한 주의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도 그렇게 메시야관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하사람에 불과하다. 도무지 하나님일 수 없다고 모두가 일체로 믿는 것은 아니에요. 어떤 초연한 인물이라는 것을 막연하게 믿고 있던 많은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에게 메시야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다하는 점을 또 생각지 못할 것은 아니였어요.

     

     

    그러나 대체로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할 때에도 반드시 성경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쓸 때에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신성, 신의 본성이라는 것을 붙여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서는 그가 초연한 인물이어서, 말하자면[한 분의 ㅅ긴이다]하는 사상이 없는 것은 아니요. 이런 사상은 헬라에도 있던 것이요.

     

     

    데미-갇 그래서 사람이요 신 그리고 기독론에 대해서 기독의 그 두개의 본성이 한 인격에서 충분하게, 충전하게 나타나는 그 신비를 설명해 보려고; 지난번 말 한것과 같이 에수님이 하신 업적을 보아서 그것은 초연하고 위대해서 결국은 그에게는 신이 계시다하는 식의 생각··· 그러면 사람이 신을 내포하고 계신다는 이야기올시다.

     

     

    이것은 물론 그대에 와서늬 신학상 가장 영향을 준 기독론의 하나요. 릿출이라는 사람이 특별히 강하게 주장했다고 저번 번에도 말씀드렸는데··· 이런 것들을 주의해야 할 것은 항상 그러한 사상이 어느 때는 더강하게, 어느 때는 약하게 항상 돌아다니는 것이요.

     

     

    예수님께 대한 생각을 할 때 역사적기독을 역사적 그리스도를 우리는 깊이 연구를 해야 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는 위대하고 그는 신이지만 그러나 먼저 그는 사람이다 그 ?기요. 역사적 기독, 역사적인 그리스도, ㅁ날을 들어보면 그럴듯하고 좋은데 예수님은 그러면 역사적인 그리스도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한 분자로서의 의미를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요.

     

     

    그러나 예수님은 역사적인 그리스도인 동시에 초연하신 선재의 그리스도요 동시에 내재의 그리스도인 것이요. 이런 것들을 종합해서 늘 생각해야지 부분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유일의 하나님으로 생각할 때에는 그러면 메시야는 하나님과 동렬에 놓을 수가 없는 것이요. 그건 참람인 것이요.

     

    그런 까닭에 메시야는 아무리 위대해도 그건 하나님 아래에 있는 분이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완전히 같은 권리의 같은 본질과 같은 영광을 생각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있고 그 아래 아들이 있다 하는 생각···· 그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신비한 요어가 거기에는 적용치않고 하나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그 아주 초연한 인물이다 하는 것이올시다.

     

     

    이런 말들이 다 알송달송한 말이 되는데 이런 것을 누가 주장?느냐? 적그리스도가 주장한 것이다 그거요. 적그리스도의 주장한 것은 그렇게 현묘하다. 그래서 자칫하면 끌려 들어가기 쉬운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반대한다 하는 이것이 적그리스도인데,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그리?반대하고 자기가 그 그리스도의 취한 그 위치를 대신 취한다.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아주 성격에 뚜렷한 점이올시다. 그런데 그러한 적그리스도가 먼저 하는일은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르리스도니라” 그랬어요. 성경이····

     

     

    “만일 사람이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사람이 신의 존재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 할 때에도 신의 존재를 그냥 막연한 가운데서 승인할 때는 적그리스도가 시인하는 정도의 신을 시인할 수 있는 것이요. 그건 뭐냐하면 신은 계시다.

     

     

    이론상 적그리스도가 시인하는 것이요. 적그리스도가 진짜로 마음으로 시인하는 것은 물론 삼위일체의 신성한 하나님을 자기가 모르는 것은 아닐것이요.

     

    차라리 마귀도 한 분이신 하나님을 알고 믿고 떠는 거요(약 2:19). 그렇지마는 이 세상에 베푸는 이론으로서는 신은 계시냐 하면 신은 계시다. 그는 한 분이신 신이다.

     

     

    그러나 신 이외에 다른 신은 없는 것이니라. 그리고 신은 한 인격으로서 나타나 계신 분이다. 거기까지, 즉 인격신까지도 시인할 수 있는 것이요.

     

    그러면 인격신까지 시인하지만 삼위의 신을 시인하지 않을 때 적그리스도적이다. 그것이요. 여기서··· 교회안에서 그런 것을 그렇게 생각할 때 “너는 적그리스도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엄격하게 재단한 말이에요.

     

     

    그리고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철학적인 한 ?론에 불과한 것 같지마는 실지로 알고 보면 적그리스도의 이론이다 그거요. 교회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올 수 있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 얘기요. 왜 그러냐면 기독론이 명백하지 아니할 때, 신론이 그렇게 모호할 때는 적그리스도는 얼마든지 도량한다. 그 말이어요.

     

     

    이것이 무서운 사실이요.

     

    그래서 아직 으때에 기록론이나 신들에 대해서 확연한 신학적인 이론으로 구체적인 개념을 세우기 전에 - 개념이 없다는 말은 아니에요. 구체적인 개념을 문자화해 가지고 확실히 신학화하기 이전에 - 벌써 노쓰티시-즘 같은 것이 그때 횡행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과 인성의 그 신비를 이리저리 설명을 하고 싶어서 누구는 두개의 인격을 가졌다는등, 그렇지 아니할 것 같으면 가현설 가현 신인데 신가운데에도 아마 차등된느 신일텐데 그가 사람으로서는 가현한 것이다하는 설을 주장을 하고···· 그 제일세기에 돌아다니든 여러가지 이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늘나의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오늘날의 강렬한 것은 무엇보다도 역사적인 그리스도를 이해하자는 것이 강렬한 것이요. 오늘날 신학계에 강렬하게 세계에 떠들어지는 중요한 문제의 기독론의 그 대체를 볼 것 같으면, 역시 역사적인 그리스도라는 점과 동정녀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의미없다는 설이올시다.

     

     

    동정녀에게서 탄생했다는 것이 의미없다는 것은 동정녀 탄생을 믿었던 빨트와 그의 종자의 구릅가운데에 그런 사람들이 다 용인 됐다 그 말이요. 여러분, 한국에도 왔다간(다녀간) 부른너같은 사람은 동정녀 타생 같은 것은 그것은 일이 없는 이야기다 그것이요.

     

    같은 빠티안이면서 그 사람은 동정녀탄생 같은 것은 일없다고 해요. 이렇게 해서 그들도 그 한 빨티안이면서 기독에 대한 생각이 반드시 통일되어 있는 것은 아니요.그러나 오월동주를 하는지는 몰라도 같이들 가는 것이요. 그것을 용인할수 있을만 하다. 그 얘기요.

     

     

    이런 것은 뭐냐하면 그이들이 이론으로써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트리니테리안들이요. 그렇지만 그의 삼위일체론과, 또 예수 그리스도론은 자꾸 분리되어 있는 것이요. 유리되어 있단 말씀이요. 이렇게 해 가지고 만일 하나님께 대한 그 이론이라는 것이 정당하지 않고 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친대로 정당하게 유지되지 아니하면 그건 참 무섭게 적그리스도적으로 변한다는 것이요. 세상에 신에 대한 이론이 많습니다.

     

     

    여러가지 신론이 많아요. 혹은 지고의 선이라고 하는 철학적인 관념도 있는 것이고, 혹은 유신론적인 관점에서 하나의 신이 계시다하는 생각도 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신의 계신 여러가지 것을, 소위여러 논증에 의해서 자꾸 증명해 보려고 하는 것이요. 스콜라철학자들이 중요히 그런것을 했어요.

     

     

    삼위일체의 문제를 논하는 것보다 오히려 신의 존재론을 해 왔던 것을 여러분 아시지요?! 특별히 스콜라 철학을 가지고 있던 신의 존재의 이론들이 그렇다 말씀이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시인하고 주장하는 신이 삼위일체의 신이요. 그 삼위일체 신가운데 제2위되시는 그 로고스되시는 분이 그 인격을 가지고 육신을 입었다는 사실까지를 명확하게 믿지 아니할 때는 그 신론은 적그리스도가 지지하고 있는 신아라 그 말이요.

     

     

    적그리스도의 신론이 된다는 말이요. 그것을 거기까지 수긍할 수 없이 그냥 교회안에서 고려중이라든지 생각중이라든지 하다가 “그럴수가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로서 분리해서 생각을 하자. 그가 신이라고 하더라도 좋다. 그러나 먼저 시작은 그는 위대한 인물이다”하는 데서 시작을 한다면 이런 릿츌리안적 기독론이라든지, 그로인한 신사상이라는 것은 그것은 적그리스도적인 것이다 그거요. 그것을 무섭게 적그리스도적인 것이다고 그랬어요.

     

     

    둘째의 신의 존재에 대한 생각을 사람들의 여러가지로 할 때 그것을 억지로 증명해 가지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요. 성경은, 한번도 “신은 존재하시나라, 존재하는 신을 믿어야 한다. 신은 이러이러하니까 존재하니라”고 여러분, 신의 존재의 논증을 한 일이 없지요! 스콜라 철학자들은 했어요, 그러나 성경은 그런일 없어요.

     

     

    성경이 맨 처음에 시작하는 말은 하나님은 계시다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서 그가 지으신 만물을 보아 알 것이고 각 사람에게 핑계할 수 없이 그것을 계시되는 것이다.(롬 1:19,20) 사람의 그 본성에 의해서, 그 네이쳐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지으신 바깥에 있는 네이쳐에서 그런고로 우리안에 있는 본성과 우리 바깥에 있는 자연계에 위해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묘하신 신성, 그 본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주장인 것이요.

     

     

    사람들은 말할때 “아! 사람이 신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거짓말인 것이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까닭에 아무리 부패해서 타락해서 이즈러졌더라도 사람이라고 말을 붙일 수 있는 이상 신을 부인 못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그는 핑계할 수 없느니라” (롬 1:20, 롬 14:11,12, 고후 5:10 묵 20:12, 행 10:42) 그랬어요. 핑계할 수 없는것이니라···· 이런데 신의 존재부터 증명하려고 나선다면 벌써 틀린 생각이다. 그 말이요.

     

     

    그러나 거대한 무신론이 이론으로 지배하는 것이요. 이론으로··· 그런데 이 무신론의 이론에 대해서 사람들은 신의 존재에 대한 자연적인 경향도 불구하고 이번데는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이론을 만드는 것이요.그러니까 신의 존재의 그 부인의 적극적인 이론이라는 것은 그것 자체가 신의 존재의 증명의 하나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요. 계시니까 자꾸 부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 말이요.

     

     

    그런데 이런 현실가운데서 신께대해서 바로 파악하게 가르치려면 무얼 먼저 가르치느냐하면 “아들”을 가르치는 것이요. 아들을··· 그런고로 여기 말하기를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아들을 가르쳐요. 즉 아드님 되시는 그분을 가르치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부터 시작하여도 괜찮아요. 그러나 사람에게서 시작하라는 말은 아니요.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하면 그리스도가 도우신 줄 알면 그 다음에는 천부는 누구신줄 아는 것이다. 아버지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적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것이요. 다른 말로 말하면 분리해 놓는 것이다. 말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시인해요. 하나님도 시인해요.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한다. 그말이요. 그 관계를 ···· 이렇게해서 적그리스도적인 사상이 차츰차츰 들어오는 것이요.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되, 역사적인 그리스도로 안다는 이러한 설에 귀를 기울여 가지고 거기에 주저앉으면 안되는 것이요···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위대성에 대해서 우리는 십분 연구해야하는 것이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님께서 그 로고스의 인격을 가지고 사랑을 취하시고 나오신 후에는 그가 사람에게 나와서 사람과 동류가 되사 사람의 모든 연약한 것을 짊어지시기 위하여 아담의 범죄아래에 인류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 약점을 당신 스스로 취하고 나오셨다. 그 말이요.

     

     

    강건하고 아주 도무지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가장 초연적인 인간으로 나온것이 아니라 “죄만 없으시지 모든 점에 있어 우리와 한결같이 같으시니라”(고후5:21,히7:26,요일3:5) 그러기 까닭에 그런 의미에 있어서 그는 역사의 제한 가운데 나오셨고 순전히 인간성인 그 방면에서만 볼 때에는 당신은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는 것을 이야기 하시는 것이고 당신은 한꺼번에 훌쩍 날라서 천리를 가는 것이 아니고 한 발씩 한 발씩 걸어 가지고 사람들이 보통 걷는 걸음에 의해서 가는 거리를 가는 것이고,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먹어야 살았고, 그리고 사람들이 자는 잠을 자고 피곤을 그는 회복하시고···· 이렇게 사신것이요.

     

     

    그러한 까닭에 이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상이란 것이 잘 분명하게 들어가요. 들어가 가지고 그 다음에는 그의 가지고 있는 그 초연한 신성에 대해서 바로 알 때 거기서는 필연적으로 성삼위에 대해서 우리는 확신을 해야 하고 성삼위의 깊은 이론을 다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러나 삼위, 완전하신 하나님으로 삼위, 삼위의 하나님이 아니 계실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요.

     

     

    하나님을 가만히 생각할지라도 하나님의 그 무한성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그 영원성이라는 것이 동시에 하나니므이 완전성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완전하려면 하나님의 그 발휘하는바 속성들이 완전해야 한다.

     

    발휘하는 속성이 완전하려면 발위하는 속성이 완성하기 위한 그러한 완전한 대상을 늘 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어떠한 속성이라는 것은 반드시 대상이 있고서 비로소 발휘되고 완선하는 것이요.

     

     

    예를 들명 여러분이 사랑을 한다면 사랑을 마음에 품고만 있어가지고는 사랑이 안되는 것이요. 사랑은 그 발휘될 대상이 있어 가지고 사랑이 발생하는 것이고 사랑은 완성하는 것이요. 그러기 까닭에 참된 사랑의 덕이라는 것이 완성되려면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고 받는 사람이 있어야 한는 것이요. 하는 사람만 있고 받는 사람이 없으면 그 사랑은 어디 갈데 없는 것이요. 완성이 안되는 것이요.

     

     

    그렇기 까닭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할 때 완전한 사랑을 가진 하나님께는 필연적으로 그 사랑의 대상의 인격이 늘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요.

     

    그러고 그분도 또한 그렇게 완전하신 거요. 그분이 불완전한 대상이 아닌 것이요.

     

    불완전한 대상에 대한 사랑이란 것은 그만큼 제한된 사랑이고 완전한 사랑이 유지되는 것이요.

     

     

    이렇게 해서 주는 이가 있고, 받는이가 있고 그것을 증거하는 이가 있고 그 사실에 대해서는 그것을 방종하는 이가 있고···· 이렇게 함으로써 반드시 셋을 요구하는 거요.

     

    그래서 히브리 사상에는 증거할 때에도 두 사람의 증거를 요구하는 것이요.

     

     

    한 사람이 있고 양쪽 가운데 하나가(한 사람의) 증거자가 있어야 해요. 그래서 두 사람이 증거하면 된다. 즉 세 사람이 늘 거기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요. 이것은 간단한 우리의 이론이지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의 그 무한성과 영원성과 완전성이라는 것을 차례차례 생각해 나갈 때 하나님의 그 영원성 완전성이라는 것이 그의 발휘할 수 있는 속성의 면에서만 생각할지라도 반드시 거기에도 그것이 발휘하는 때가 발출하는 때가 있고 그것이 또 주어지는 급여되는 대상이 생기고 그것이 발출하고 급여하는 것이 확실한 사실로서 입증하는 대상이 거기 생기고····하는 것이다. 하는 것이다 말씀이어요.

     

     

    그러니까 이러한 현실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의 삼위라는 것을 깊이 늘 생각하는 것이요. 이렇게해서 삼위 가운데에 아드님 되시는 그 하나님이 당신의 그 신으로서의 인격을 가지고 사람을 입고 땅에 오셨다. 이것이 아드님이요.

     

     

    그런고로 아드님되신 것을, 즉 하나님의 아들이요, 동시에 당신은 사람의 아들이라고 했다고 그랬지요?! 그분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아! 그런고로 하나님은 인격자시요 완전하신 분이시요.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요···” 그런 의미에 있어서는 아주 유니크한 독특한 그 의미를 가지니까 우리 주께서는 때때로 “내 아버지라”(마 7:21)는 말을 썼어요.

     

    우리 아버지라는 말을 제자들에게 그 주기도문을 가르칠 때 제자들 끼리 자기네가 기도할 때는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 것이고, 에수님 당신이 기도할때 “우리 아버지여!”하지 않았단 말이요.

     

     

    “내 아버지!” 늘 명확하게 그렇게 썼어요. 그리고 둘째는 예수님은 또한 당신의 완전성을 늘 표시하는 점에 있어서 “아! 이건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을 그렇게 했다고 후외한 일이 없고 잘못했다고 한 일이 없어요.

     

     

    예수님의 그 말씀을 종합해서 보면 언제든지 예수님이 한 것은 그것 대로 완전했던 것이요. 완성한 것이요. 이런 점에서 우리가 아드님을 바로 알아야 하고 그런 아드님을 통해서 아드님께 대한 바른 지식은 우리를 이끌억서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을 바로 알게 하시는 것이요/ 그런데 그것을 바로 알게 못하면, 또 바로 알기에 주력하지 않고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항상 모호하거나 유치하면 적그리스도의 도모한 이론에 압도 당하는 것이요.

     

     

    왜 신학교에서 많은 신학생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교수가 가르칠때 그것을 좋다고 받아들입니까?

     

    지금 미국에 푸린스톤신학교가 그 야단이요. 존획이라는 교수가 동정녀 탄새을 시인하지 아니하니까 거기에 있는 여러 장로들이(그 지역의 장로들이) 푸린스톤에 이러나서 총회에다 대고 건의를 하고 “이럴수가 있느냐”거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어요. 총회에서는 ···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장로들 무슨 아우성이냐 하고서 그대로 승인해 주었어요.

     

     

    죤휙이라는 사람은 영국사람인데 영국국교 성공회에서 초빙을 받아 가지고 미국의 변증학, 또 종교철학 그런 중요한 것들을 가르치려고 푸린스돈신학교에 와서 가르치는데 그이가 또 역시 그런 것이요. 옛날에 칼빈선생이 가르쳤던, 도도한 좋은 이론들을 가장 잘 가르치고 크게 그것을 선양했다는 그 본산이라고 할만한 학교가 그렇게 변해 버렸어요.

     

     

    그래가지고 학생들에게는 그것이 인기가 있으니까 그 선생이 와서 그대로 튼튼한 지반을 가지고 가르친 것이요. 밀어내려고 하던 사람들이 혼나고 알았어요.

     

     

    이것이 미국의 북장로교회의 현실이고 푸린스톤신학교의 현실인 것이요. 그러면 세계에서도 이름이 알려져 있는 학교인데 왜 이 모양인가?

     

     

    요컨대 기독론에 대해서 심오하지 않고, 명확하지 아니하니까 일단 이론을 배우게 될 때에는 그런 설이 좋단 말이요. 훨씬 이론적이고 훨씬 현실적이고 훨씬 소위 인간이성에 의한 합니적인 이론이란 말씀이요. 합리적인 이론인줄 안단말이요.

     

     

    그러니까 교회가 에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깊이 안가르치고 밤낮 그만한 정도안에서만 뱅뱅돌고 “예수님 예수님”하고 부르면 일단 신학적인 큰 바람이 불때에는 넘어가는 것이다 그거요. 일세기에 그랬어요. 일세기에 그 때는 아직 기독론이 형성하기 까지 바쁜시대니까 이럭저럭하는 동안에 막 노스티즘이라는 것이 일어나서 기독은 이것이다 하고서 기독론으로; 말하자면 마귀가 다른 것으로 공격을 않고 그 사람의 신앙이나 서로의 사랑이나 봉사로는 공격을 못했다. 그말이요.

     

     

    그러나 그사람들의 허점이 아직 그리스도에 대한 이론이 명확하지 아니할때 그것을 공격했다 그 말씀이요. 이에 사도요한은 엄격하게 쓴 것이요. 적그리스도가 그런줄 알아라. 이게 많은 적그리스도가 돌아 다니는구나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요.

     

     

    그것은 그 때만이 아니올시다. 오늘도 그래요. 유치한 교회에는 나중에 그러한 신학 바람이요. 너무 유치하면 무슨 바람이 부는 줄 압니까?

     

    성경만 가지고 바람부는 거요. 아직 기독론까지 바람 불 필요가 없는 것이요. 성경관이란 정도로 바람불어 놓으면 그것 때문에 막 야단 내는 것이요.

     

    거기 아직 확립을 못했다. 그얘기요.

     

     

    성경이 순순하게 무류한 하나님의 말씀인가?

     

    무모한 하나님의 말씀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어 가지고서는 교회가 찢어 갈겨 가지고 싸울만한 정도라면 이야기 할 것 없지 않느냐 그 얘기요. 이것이 유치한 교회의 당하는 일이란 말씀이어요.

     

    그리고 이렇게 유치하면 적그리스도가 와서 몰고 나간다 그것이요. 우리는 이래서 금년에는 특별히 이 매교의 현실과 거기에 문제점이라는 것을 좀더 때때로 생각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가 항상 든든하고 확실한 믿음의 근거 가운데에 서 있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시지요.

     

     

    출처: 지명교회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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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가 자신의 오심과 생애와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이를 신학적으로는 "은혜의 왕국"이라고 선인들이 불러왔다.

     

     이 은혜의 왕국은 이 땅에서 "교회"라는 형태로 드러난다. 하늘에 계신 교회의 왕께서 오늘도 이 땅에 있는 교회를 다스리신다. 그의 기록된 말씀과 그에 대한 바른 해석과 선포, 그리고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그는 지금도 이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말씀을 통해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이들은 교회의 참된 성원으로서 그들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높이고 존귀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를 무시하거나, 교회가 하나님 나라적 성격을 가지지 못하게 하거나, 교회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말씀을 통해 주시는 바를 혼잡하게 하거나 복종하지 않거나, 교회의 참된 사랑을 파괴하는 이들은 그 왕이신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이고,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일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우리를 다스시리신다는 사실 앞에 서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님 나라적 성격을 잘 타나내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을 위해 교회의 모임에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고, 그 공동체 전체와 개인은 그 깊은 이해에 근거한 하나님 나라적 사상을 갖고 그것에 근거해서 그 교회와 그 사회와 그 개인들이 직면한 문제를 판단하고 적용해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교회 공동체와 개개인이 성경에서 가르치시는 그리스도의 품성이 성령의 능력으로 그들 가운데서 잘 나타나도록 해야만 한다. 우리 개인의 마음의 움직임에서나 다른 이들에 대한 태도에서나, 주어진 일을 하여 나가는 과정에서 이런 것들이 잘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다.

     

     


     http://cafe.daum.net/ansanhoebok/7MyF/1602

     

     


    뉴기니아섬의  석기 문명 종족

    이리얀 자야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섬인 뉴기니섬의 서반부로서 인도네시아 령이다. 뉴기니 섬의 서반부 이리얀자야 중앙고원지대인 분지(발리엠 Baliem계곡)에는 최후의 石器人들이 살고있다. 이곳은 1938년 백인들에게 처음 알려 졌고 1950년에 가서야 선교단이 들어왔다. 이 지역에는, 다니족, 라니족, 얄리족 등이 살고있다. 이들 부족의 문명이 곧 석기문명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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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 서 있는 여인은 손가락 모두가 잘려있다.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나체의 사람을 만나는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나체로 보이는 위의 남자는 실은 정장차림이다.


     

    라니족 축제 장소 입구의 문
     

    추수가 끝나면 부족들은 축제를 벌이는데 호전적인 부족답게 전투형식으로 축제를 벌인다.
    축제의 일환이지만 활, 창, 돌도끼로 치열한 공방전을 펼친다.
    이는 이웃 부족의 처녀를 빼앗아 부인으로 삼는 "약탈혼"을 대비한
    실제의 상황을 축제로 재현한 것이다.

     

     

     

     

    전투에서 승리한 팀의 환호

     

    약탈 해온 여자들(?)
     

     축제에 참가한 소년 소녀들

     

    - 다니족의 축제 -


     

    축제에 참가하기위해 모인 다니족 여자들
    여자들은 도롱이처럼 생긴 치마 "욘갈"을 입고있다.

     

     

     

    - 라니족 마을 -

     

    대항군인 가상의 부족이 침입하고 망루에서 경고의 고함을 치면
    각자의 위치로 이동 해 민방위 훈련에 버금가는 일사분란한 전투태세를 갖춘다.

     

     

    마무리는 마을 방어로 끝이난다.

     

     

    여자들은 전투에서 승리한 전사들을 맞이한다.
     

     

     

     

    음식 준비, 음식에 쓰일 돼지는 활로 심장을 쏘아 잡는다.

     

     

    마찰열로 불 지피기
     

    음식물을 익히는데 사용할 돌멩이를 불에다 달군다.

     

     

     

    돼지를 잡고 가공하는 일은 남자들의 몫이다.

     

      

     

     

    4시간 후면 음식이 익고 음식을 꺼낸다

     

    분배

     

    즐거운 회식

     

    마을 족장

     

     

    가족 중에 사람이 죽으면 추모의 뜻을 가지고 돌도끼로 손가락을 잘라 버리기 때문에
    이들 중에는 손가락이 없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가 있다.

     

     

    라니족 여인의 헤어 패션
     

    토산품 상점에는 남성용 정장인 "코데까", 돌도끼등의 토산품이 있다.
    남성용 PENIS 가리개인 코데까는 길다란 조롱박으로 만든다.

     

    굴절형 코데까

    코데까 와 돌도끼, 노껜(편물주머니)
    주머니형 코데까도 보인다.
    석기 문명자체가 관광상품으로 전락하고 있어
    얼마나 그 고유문명이 유지될찌는 아무도 모른다.
    변화자체가 역사이니까.......






    [2회 연속] 총회개혁주의 신학대회 종말론 발제(2)
    -김광열 교수 ‘개혁주의 종말론의 목회적용’
    2014년 04월 01일 (화) 14:44:38 박민균 기자 min@kidok.com

     
    종말론 내세성·복음의 현재성 균형 중요

    ‘총체적 성화의 삶’ 이뤄가는 목회돼야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 삶 영위하는 ‘복음의 현재적 의의’ 가르쳐야


    신학부가 주최하는 총회개혁주의 신학대회가 3월 24일 광주양림교회에서 개최됐다. 1차 광주호남지역 대회는 종말론을 주제로 문병호 김광열 교수(총신대)가 발표를 했다. 문병호 교수는 현재 한국 교회에 불고 있는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김광열 교수(사진)는 목회현장에서 개혁신학 종말론을 바르게 가르치기 위한 방안을 제시했다 2회에 걸쳐서 두 교수의 강의 핵심을 정리한다.<편집자주>


       
     
    성경에서 종말론은 개인적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과 연관하여 설명되는 우주적 종말로 나뉘어 설명되어왔다. 금세기 초부터 성경신학자들과 조직신학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신약성경에서 종말이란 그리스도의 초림과 연관되어 설명되고 있음이 밝혀졌다. 전통적으로 ‘세상의 끝’이라는 종말개념(종말론의 내세성)과 함께 예수님의 지상사역 안에서부터 종말의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음(종말론의 현재성)을 말하는 구절들도 풍부하게 제시되고 있음(마12:28; 눅17:21; 마11:12; 눅16:16)을 확인해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연구의 결과들을 고려해 종말론 논의에는 오늘을 사는 신자의 삶(예를들면, 성화의 삶 등)에 대한 논의도 포함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 이후의 신자의 삶은 이미 종말론적 삶이기 때문이다. 목회사역의 주요한 내용들 속에서도 신자들이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삶을 어떻게 이루어갈 것인가에 대한 교육과 훈련이 포함되어야할 것이다.


    내세적 종말론에 치우친 분위기

    총신의 개혁주의 종말론은 평양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담당한 이율서 구례인 선교사의 영향 속에, 박형룡 박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박형룡 박사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강하게 비판했으며, 무엇보다 ‘왕국연기론’에 대해 분명히 비판했다. 또한 박 박사는 신약의 종말개념의 이중성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존성과 신약의 성도들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나라의 내세적 삶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주어질 영원한 내세의 사건들에 더 흥미를 갖고 초점을 맞추어 종말론을 접근했던 것이다. 하지만 박 박사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자유주의신학과 신복음주의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성경을 약화시키는 모습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종말론의 현재성보다 내세적 신앙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 강화돼야

    한국 교회는 90년대 교회성장 정체기를 맞았고 21세기에 더욱 악화되는 상황이다. 그 원인으로 교회가 복음의 사회성을 간과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런 점에서 종말론에 대해 새로운 방향을 설정할 때이다. 우리가 지켜왔던 종말론의 내세성을 지키면서, 복음의 현재성을 강조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주의 재림 때에 들어갈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에만 관심하지 않고, 오늘 여기에서의 현재적 교회의 삶 속에서도 의미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종말이해를 제공해준다.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 이미 공급되기 시작한 그 나라의 능력들을 부여받은 신자로서, 이 땅에서부터 종말적 하나님 나라의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복음의 현재적 의의”를 제공해주는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총체적 성화의 삶을 이뤄가는 목회

    한국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중요성과 내세론의 중요성이 함께 균형있게 제시되는 종말론이 요구된다. 목회사역에서도 신자들에게 종말의 하나님 나라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살아가도록 돕는 사역이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포괄적인 관점으로 조망하도록 도와주는 개념이 바로 “총체적 복음”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신자가 종말의 하나님 나라의 삶의 가치들을 구현해가는 부분을 적절하게 취급해주는 주제들 중의 하나가 “성화의 삶”이라고 할 때, 특히, 그 성화의 삶을 하나님 나라의 포괄성의 관점으로 들여다보게 해주는 성화론이 바로 “총체적 성화”인 것이다. 총체적 성화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화의 삶을 전포괄적으로 그리고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성화관이다. 그것은 주님과 연합하여 그 분의 죽음과 ‘함께’ 죄에 대해 죽은 사건이 주와 연합한 신자들에게 우주적인 죄의 통치와의 전포괄적인 결별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성화란 일차적으로 죄로 물들은 인간의 내적 성품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닮도록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이다. 그것은 죄인이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부패한 성품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해 가는 영적 성숙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형제와의 관계 속에서, 이웃과의 삶 속에서, 그리고 사회와 국가생활 속에서도 변화를 일으키는 작업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85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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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2회 연속] 총회개혁주의 신학대회 종말론 발제(1)
    -문병호 교수 강의요약
    2014년 03월 25일 (화) 14:22:30 박민균 기자 min@kidok.com

     
    “기독론 떠난 자의적 종말론 존립할 수 없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너무 많이 벗어났다”

    성경 문자 충실한 해석하려면 먼저 성경이 멈추라는 곳에서 멈춰야


    신학부가 주최하는 총회개혁주의 신학대회가 3월 24일 광주양림교회에서 개최됐다. 1차 광주호남지역 대회는 종말론을 주제로 문병호 김광열 교수(총신대)가 발표를 했다. 문병호 교수(사진)는 현재 한국 교회에 불고 있는 세대주의적 종말론의 문제점을 지적했고, 김광열 교수는 목회현장에서 개혁신학 종말론을 바르게 가르치기 위한 방안을 제시했다 2회에 걸쳐서 두 교수의 강의 핵심을 정리한다.<편집자주>


       
    요즘 한국 교회에 종말론이 넘치고 있다. 유행하는 종말론을 보면 온건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이 대부분이다. 세대주의적 입장에서 종말론을 언급하고 있는 책들도 많이 출판되고 있다. 종말론은 구속사적-구원론적 관점에서만 합당하게 다룰 수 있다. 종말은 끝이 아니라 완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종말론을 다루면서 성경해석학과 기독론이라는 두 축을 올바로 붙잡아야 한다. 자의적인 성경해석과 인용은 자의적인 종말론을 배태한다. 자의성은 교리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다. 교리는 성경의 문맥을 진술하는 동시에 성경의 각 구절이 놓여있는 문맥을 제시해 준다. 종말론의 경우, 중보자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구속사적-구원론적 의의와 가치가 그 문맥을 이룬다. 기독론을 떠난 종말론은 존립할 수 없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바로 이 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구원에 대해 기본(성경의 문맥)을 벗어나 있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태동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전천년설을 세대주로 재구성하는 가운데 신학화 되었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문제의 핵심은 세대주의 자체의 신학적 결함에 있다. 오늘날 세력을 얻고 있는 ‘점진적 세대주의’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다윗 왕국의 통치를 부활 때부터 시작하셨며 교회와 천년왕국을 극단적으로 분리시키는 ‘원래적 혹은 고전적 세대주의’와 일관적인 성경해석에 좀 더 주목하고자 한 ‘수정 세대주의’보다 온건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본질적인 문제점은 남아 있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역사를 일곱 단계의 세대로 나누고 각각의 세대에 이상적인 관념을 부여하고자 하는 정통교리로부터 벗어난 비성경적인 입장이 견지되고 있다. 종말론과 관련해서는 마지막 세 세대 즉 율법-은혜-천년왕국이 문제가 된다.


    그리스도 유일성 무너뜨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주의자들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속은 그 중심에 이스라엘 민족이 있으므로 교회는 역사에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고 본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유대인의 왕국을 건설하여 구약의 예언을 이루고자 오셨으나 마땅한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자 교회를 설립하는데 그쳤으며, 그리하여 본래의 목적이 천년왕국의 때까지 미루어졌다는 연기론(延期論, postponement theory)을 제기한다.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들은 그리스도가 두 가지의 다른 복음 즉 초기에는 왕국의 복음, 나중에는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궁색한 변명을 내세우기도 한다.

    또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주의자들은 근래에 좀 더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내고자 ‘중보적인 왕국’(mediatorial kingdom)과 ‘우주적인 왕국’(universal kingdom)이라는 개념을 내놨는데, 그들이 얼마나 성경적 가르침으로부터 많이 일탈해 있는지를 잘 보여줄 뿐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몇몇 사람들을 중보자로 세워 역사상 여러 형태의 지상왕국을 이루어가시던 중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마지막으로 우주적 왕권을 수립하고자 하셨다고 한다. 이 일이 처음에는 여의치 않았으나 그가 다시 오시면 이루실 것이니 천년왕국이 바로 그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렇게 본다면 그리스도의 중보의 유일성이 무색해진다. 마지막에 그리스도는 단지 사람의 중보를 완성하기 위하여 오실 뿐이다. 그는 구약의 왕국을 이루실 뿐 자신의 왕국을 수립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의 통치는 일시적으로 신약의 교회에 머물고 만다.


    말씀에서 멀어진 세대주의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구약 이스라엘 왕국의 완성으로서 유대인이 주도적으로 다스리는 천년왕국을 상정하기 때문에 이에 맞추어 몇몇 궤변을 양산한다. 그 요지는 이러하다.

    7년 대환난 전에 어떤 예고나 징조도 없이 언제든 급박하게 그리스도의 은밀한 공중 재림이 있을 것이며 그때 성도들의 부활과 끌어올림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하늘에서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가 있고 지상에는 대환난이 따른다. 이때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며 왕국 복음이 다시 전파되고 하나님의 진노가 내린다. 7년 대환난 이후에 그리스도의 지상 강림이 있다. 이때 생존한 민족들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이며 대환난 중에 죽은 성도들은 부활한다. 그리고 적그리스도가 멸망하며 사탄이 천 년간 결박되고 천년왕국이 건설되어 성전이 개건되고 레위 제사가 복구된다. 더불어 세계의 신속한 회심이 있게 되며 천년왕국에 대한 곡과 마곡의 대항이 있으나 패퇴하여 사탄이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진다. 그리고 악인들의 부활이 있으며 대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이 뒤따른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은 문자적 성경해석과 교회와 왕국을 분리하는 근거 없는 이분법에 집중된다. 교회를 역사의 괄호에 집어넣고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이중의 재림, 삼중 혹은 사중의 부활, 삼중의 심판을 주장하는 그들의 입장은 성경의 말씀과 거리가 멀다. 그들이 진정 성경의 문자에 충실한 해석을 수행하고 있다고 자처하려면 먼저 성경이 멈추라는 곳에서 멈추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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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당신의 연가(戀歌)
                        최송연

     


    풀냄새가 전해 주는
    싱그러운 향기인 듯


            빗방울이 들려주는
            맑고 청량한 음악인 듯

            당신의 그 사랑
            어느 날 은총으로

            내 영혼 깊숙이 내리셨네

            사랑한다, 내 딸아
            불러주시는 그 음성은

            내 영혼을 살리는 핏빛
            당신의 연가(戀歌)...


            이제부터 영원토록 내가
            부르고 또 부를 사랑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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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머징 교회 바로 보기

     

     

    1. 서론

     

    2013년 목회사회학연구소(소장 조성돈)에서는 7월 2일부터 11일까지 미국 이머징 처치와 미셔널 처치를 직접 방문하고 체험해 볼 수 있는 비전트립을 진행했다. 조성돈 소장은 “우리는 아직 포스트모던이라는 것이 익숙하지 않지만, 미국에서는 이미 꽤 오래 전에 교회가 이 포스트모던 문화와 씨름해 왔다. 그 결과가 바로 이머징 처치와 미셔널 처치로 대표될 것”이라고 말했다. 계속해서 조 교수는 “이머징 처치와 미셔널 처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비롯해 미국 모델교회들에 대한 정보, 이머징 교회의 다양한 모습들, 현대인들의 종교성 등을 강의하고 함께 스터디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한국 사회도 이제 포스트모던 사회로 깊게 진입해 있다. 이 시대에 교회가 어떠한 대응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우리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일찍 포스트모던 문화와 씨름하며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낸 미국 교회를 살펴보는 것은 한국의 목회자들에게 귀한 영감을 허락할 것”이라고 밝혔다(http://www.c3tv.com/newsmission/news_view.asp?seq=53108).

     

    현대 사회를 포스트모던 사회라 부른다. 진리는 상대적이다. 내가 옳다면 그것이 곧 진리가 된다. 즉 객관적 진리가 사리진 시대, 주관적 진리가 판을 치는 시대이다. 즉 모든 것이 진리가 되는 시대 사회 풍토 속에서 교회의 예배도 점차 변해하고 있다. 이미 수년전부터 이머징 처치라는 형태의 교회가 한국에도 상륙하여 한국교회를 변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과연 이머징 처치가 무엇인지 그 특징을 살펴보고 개혁주의 입장에서 평가해 보고자 한다.

     

     

    2. 이머징 교회의 특징

     

    2.1. 용어

     

    이머징(Emerging)이란 단어는 사전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형용사로는 ‘최근 생겨난, 최근에 만들어진’이라는 의미이다. 동사로는 ‘나타나다, 발견되다’는 의미를 가진다. 주로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신흥’으로 번역되고 사용되기도 한다.

     

    D. A. Carson에 의하면 지난 수년 동안 이 단어가 “신흥의, 새로 떠오르는”이라는 말과 함께 영미뿐 아니라 전 세계 여러 나라의 교회 안에서 나타나고 있는 운동과 관련이 있다고 하였다. 이 운동에 속한 이들은 이 용어를 ‘새롭게 떠오르는, 신흥의’라는 의미로 규정한다고 했다(D. A. Carson, 2009, 14). 즉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새롭게 떠오르는 교회의 형태,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체험해보고 모방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2.2. 특징

     

    2.2.1. 새로운 교회

     

    이머징 교회 운동의 핵심인사라 할 수 있는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새로운 세계를 원한다면 우리에게 새로운 교회가 필요하다. 새로운 종교가 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의 신학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새로운 영이 아니라 새로운 영성이 필요하며, 새로운 그리스도가 아니라 새로운 그리스도인이 필요하다. 새로운 교단이 아니라 모든 교단 내에 새로운 교회가 필요하다”고 했다(Roger Oakland, 2010, 11).

     

    그의 주장을 보면 현대는 과거와 아주 다른 새로운 세계라고 본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세우신 신약의 교회,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해 전수된 복음의 기초들, 신학체계들을 낡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들 말고 이제는 새로운 교회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마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과 유사한 주장을 한다. 새로운 관점의 신학, 새로운 영성, 새로운 그리스도인, 새로운 교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2.2.2. 통합적 교회

     

    마크 스칸드렛은 “이머징 교회는 좀 더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신앙생활에 대한 탐구이다. 신학적 탐구 작업이 계속되고 있는데, 하나님 나라의 신학, 내적인 삶, 친교-공동체, 정의, 환경보전, 포용성, 영감적 리더십 등의 문제에 좀 더 집중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머징 교회 운동은 통합적 영성에 대한 탐구이다”라고 했다(Gibbs and Bolger, 2008, 8).

     

    기존의 교회와 달리 이머징 교회는 좀 더 통합적이고 전체적 신앙생활에 대한 탐구하라고 하였다. 넓은 포용력을 가진 교회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오순절, 구세군, 성공회, 정교회, 로마 가톨릭등의 교회들을 연합하고 통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교회를 만들 수 있다는 식으로 들린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보면 하나님 나라의 신학, 내적인 삶, 친교-공동체, 정의, 환경보전, 포용성, 영감적 리더십등의 문제에 더 집중한다는 것이다. 즉 통합적 영성에 대한 탐구가 이들의 특징인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각 교파별, 신학노선 별로 다양한 색체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을 모두 통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바로 WCC의 주장과 합치되는 것이다.

     

    2.2.3. 사람 중심

     

    이머징 교회의 여러 특징들을 살피다보면 재미있는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의 교회를 보면 설교나 찬양시간에 예배를 표현하는 그림을 자유롭게 그릴 수 있는 미술 처소를 설치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또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예배실 안에서 빵을 굽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예배실로 들어갈 때 빵 냄새를 맡고 배고픔을 유발하게 하여 하나님과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예수님에 대한 갈급함을 자극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는 것이다(Dan Kimball, 2004, 139).

     

    재미있는 발상이다. 그러나 육체적 배고픔과 영적 갈망이 같은 것인가? 육체적 배고픔은 육체적 양식으로 채워야 하는 것이지 영적 갈망으로 육체적 배고픔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그들의 발상은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다. 이는 결국 하나님께 나가는 인간의 입장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결국 사람중심의 예배,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된다.

     

    2.2.4. 9가지의 실천들

     

    이머징 교회는 9가지의 실천들을 주장한다. 1.예수님의 삶을 따라하기 2.세속의 영역을 변화시키기 3.고도의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기 4.낯선 이들을 영접하기 5.아낌없이 봉사하기 6.생산자로 참여하기 7.창조된 존재로서 창조해 나가기 8.하나의 몸으로서 인도하기 9.영성활동에 참여하기이다(Gibbs and Bolger, 2008, 71).

     

    2.2.5. 3가지 핵심 실천들

     

    앞에서 말한 9가지의 실천들 가운데 핵심이 되는 3가지가 따로 있다. 1.예수님의 삶을 따라하기 2.세속의 영역을 변화시키기 3.공동체적 삶을 살아가기이다(Gibbs and Bolger, 2008, 69).

     

    이들의 실천들은 바로 이머징 교회의 신학적 뿌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상들은 결국 현대신학자들에게 뿌리를 두고 있다.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아가는 것,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는 것등은 바로 현대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의 사상이고, 그의 후손이라 할 수 있는 리츨까지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신학과 연결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강조하는 듯 보이나 예수님의 삶에 관심을 가진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즉 예수님의 길에 대한 관심이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 예수님이 살아가신 방식에 관심을 더 가진다. 그것을 공동체 안에서 구현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산상수훈을 통해 표현된 내용이 바로 예수님의 삶인 것이다. 이것을 당시 유대인의 문화에 예수님이 불어 넣으신 것처럼 오늘 교회도 세상의 문화에 이것을 불어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윤리와 도덕만 남게 되는 것이다.

     

    2.2.6. 예배

     

    2.2.6.1.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미국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다양한 시대적 문화 속에서 예배의 변호와 형태들이 변해왔다. 이에 대해 고민하고 만들어낸 것이 구도자 중심의 예배이다. 그리고 구도자 중심 그 이후의 예배 형태이다. 전통적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와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는 차원의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면 소위 말하는 열린 예배, 구도자의 예배는 새로운 문화의 전환에 대응하는 예배이다. 열린 예배와 구도자의 예배 이후에 등장하는 예배가 바로 이머징 예배이다.

     

    이머징 교회의 거두 중 하나인 킴볼은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고귀한 예배」(The Emerging Worship)라는 책에서 포스트모던 시대에 대안적 예배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예배라는 것이다. 이 예배의 대상은 신흥 세대와 문화이다. 이것을 통해 청년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킴볼은 현대 예배가 하나의 쇼, 공연이 되고 있다고 반성한다. 그리고 예배자들은 예배의 주체가 아니라 앞에서 이루어지는 쇼나 공연을 감상하고 구경하는 관객이 된다는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그가 제시한 것은 유기적 예배이다.

     

    유기적 예배는 정통 교회들이 가진 예배의 틀이 없다. 틀에 매이지 않고 유기적 흐름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다. 예배 모임은 찬양, 성경봉독, 간증과 침묵의 시간, 찬양과 설교, 영상, 침묵과 묵상의 시간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배 순서에 매이지 않고 자리를 떠나서 예배실 주변에서 기도하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기도문을 쓰기 위해 알맞은 장소를 찾아 각자 움직이기도 한다(Kimball, 2004, 111).

     

    2.2.6.2. 자유로운 예배

     

    또 하나의 이머징 예배 특징은 다양한 시각적 미술품들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술품을 바라보는 중에도 자신들만의 은혜를 누리고 예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즉 그들은 자유로움을 누리며 그 가운데서 참된 예배를 드린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들의 예배 현장에는 자리를 이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자리를 이동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Kimball, 2004, 129).

     

    우리는 어린 시절에 예배를 드릴 때에 뒤도 돌아보면 안 된다고 배웠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는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고 졸거나 딴 짓을 하면 안되었다. 그러나 이머징 예배는 그런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젊은 세대들의 편의를 고려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유롭게 예배를 드린다면 과연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수선한 분위기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과제로 남는다.

     

    2.2.6.3. 기도 처소

     

    또 이머징 예배의 특징 한 가지는 곳곳에 설치된 기도 장소이다. 이곳들은 영적 진리를 전달하는 다양한 상징들과 창의적 방법으로 기록되어 있는 성경 구절들이 꾸며져 있다. 그래서 예배 모임이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사람들은 기도처소에서 기도를 할 수 있고 예배 시간이 아니더라도 이곳에서 홀로 묵상을 하고 기도할 수 있다(Kimball, 2004, 114).

     

    앞에서도 보았지만 예배 중에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고 기도하러 갈 수 있다. 그렇게 자유가 주어진다면 예배에 대한 집중도는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기도 역시 중요하지만 예배 중에 기도하러 돌아다니는 문제, 기도 처소에 여러 상징적 그림들과 꾸며진 것들이 기도의 집중도를 방해하지 않는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2.2.6.4. 촛불

     

    촛불은 원래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는 장점이 있다. 이머징 교회는 이를 활용하여 촛불을 곳곳에 놓고 테이블을 벨벳 천으로 감싸서 사람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고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집중하도록 한다. 그리고 예배실은 거실처럼 꾸민다. 쇼파를 놓기도 한다. 무대를 바라보는 형태가 아니라 무대를 중심으로 둘러싸는 형태로 배열하고 유기적 모임이 되도록 사람들이 움직일 공간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Kimball, 2004, 115).

     

    2.2.7. 교회의 지체로서의 삶

     

    이머징 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교회의 지체로서의 삶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9가지, 3가지 실천을 보면 예수님의 삶을 따라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으로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따라서 교회의 지체는 모두 삶을 강조한다. 소그룹, 가정 그룹, 가정교회, 선교여행, 반별모임등의 그룹들을 통해서 모임을 갖고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Kimball, 2004, 164).

     

    2.2.8. 감각적 체험

     

    이머징 교회는 감각적 체험을 강조하는데 이를 에픽(EPIC)이라고 한다. E는 체험(Experiential)이다. 둘째로 P는 참여(Participatory)이다. 셋째 I는 이미지(Image-Driven)이다. 넷째 C는 연결(Connected)이다. 이머징 교회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형상을 매우 흔하게 사용한다. 또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의 형상도 매우 흔하게 장식을 해 놓았다. 이는 진리의 말씀보다는 감각적 체험을 더 중요시 하는 것이다.

     

     

    3.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대로 이머징 교회는 새시대에 사람들의 문화에 맞게 교회와 예배의 형태를 바꾸려 한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질을 상실하면 더 이상의 교회가 될 수 없고, 예배 역시 예배의 본질을 상실하면 예배가 될 수 없다. 개혁주의 입장에서 이머징 교회의 특징을 평가해 보아야 할 것이다.

     

    3.1. 하나님 중심의 교회->사람 중심의 교회

     

    청중을 이끌어 모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전도하여 사람들을 교회로 이끄는 것은 교회의 사명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핵심이 되면 안된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사람들을 만족하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데 목적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교회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교회는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친 사람 중심의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 사람의 교회로 전락하게 된다. 예배의 문제 하나만 예를 들어도 사람의 편의를 위해서 예배 시간에 자유롭게 돌아다니게 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예배가 아니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예배의 순서가 있고 그 순서를 따라서 질서있게 예배해야 하는 것이 합당하고 바른 것이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고전 14:33)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고전 14:40)

     

    3.2. 말씀보다 인간의 감각적 체험에 대한 강조

     

    예배의 문제에서 등장하는대로 예배는 회개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은 용서와 말씀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그래서 회개와 말씀은 예배자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요소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요소는 없다. 인간의 감각적 체험은 말씀보다 중요하지 않다. 감각적 체험을 위한 그림, 형상들이 결코 말씀보다 우위에 있거나 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세 시대에 로마 가톨릭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그림과 형상에 더 관심을 가졌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를 반대했다. 하나님은 결코 우상으로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그것이 시청각적 교육의 차원이든 감각적 체험을 위한 차원이든 말이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출 20:4)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레 26:1)

     

    3.3. 상대주의

     

    이머징 교회의 문제점 중 하나는 상대주의이다. 이것이 바로 이머징 교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여 절대적 진리를 부정해 버린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진리가 된다. 삼위일체, 성경, 구원, 예수 그리스도, 교회, 천국과 지옥, 천사, 영생, 부활 모든 것이 상대적이 되어 절대적 진리를 거부하게 된다.

     

    성경과 다른 주장을 하여도 다 인정하고 포용하게 되어 타종교까지도 다 구원에 이른다는 종교다원주의까지 나가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사상을 경계해야 하고 수용불가한 것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 4:12)

     

    3.4. 다원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핵심 중 하나는 다원주의 사상이다. 역시 이머징 교회도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 모두 다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찌보면 좋은 것처럼 보인다. 대단히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고 아량이 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매우 위험한 것이고 무서운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다원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린 적이 없다. 그들은 가나안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종교를 받아들인다. 한 손에는 하나님을 다른 손에는 바알과 아세라를 믿은 것이다. 가나안은 농사를 하는 문화이다. 이스라엘이 농사를 하기 위해서는 가나안의 문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즉 그들의 농사의 방법, 농사의 방식, 농사의 문화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농사의 신, 바알을 섬기게 되고 아세라를 섬기게 된 것이다. 이렇게 우상숭배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문화를 통해 스며들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바알의 숭배자들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버린 일이 없다. 하나님도 섬기고 바알도 섬긴 것이다. 하지만 성경의 평가, 하나님의 평가는 그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으로 나온다.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조상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나를 버려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 (렘 16:11)

     

    3.5. 해체주의

     

    포스트모던의 특징 중 하나는 해체주의이다. 모든 기존의 것들을 다 무시하고 해체해 버린다. 기독교의 진리, 기독교의 예배, 기독교의 정체, 기독교의 신학들을 모두 해체하고자 한다. 이는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뿌리들이 무너지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 사교모임일 뿐이다.

     

    어떤 교회 부교역자가 심각하게 전화를 했다. 자신이 섬기는 교회는 말씀이 사라지고 진리가 사라지고 오직 모여서 먹는 일만 한다는 것이다.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예배 마치고 모여서 먹고 마시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매주 모여 예배 후에는 어디로 갈까? 어느 음식점이 맛있나? 어떤 음식을 먹을까? 에 모든 관심이 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에 교제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교제를 꼭 밥을 먹는 것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교회가 더 이상 교회되지 못하고 사교모임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은 바로 해체주의의 영향이다.

     

    3.6. 감성주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 즉 인격을 닮게 만드셨다. 지성, 감정, 의지를 가진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그러나 지성과 의지를 무시하고 감정만 자극하는 것은 바람직한 은혜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인격 전체를 통해 변화를 가져온다. 감정만 자극하는 것은 성경적 은혜가 아니다. 슬픈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은혜를 받은 것은 아니다. 감정만 자극된다고 해서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머징 교회는 감성주의에 지나치게 빠져 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합당하게 살아가게 하신다. 그러므로 지나친 감성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오해하지 말고, 신비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11년 9월 우리 교단은 이머징 교회와 관련된 관상기도와 왕의 기도의 성경적 신학적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들 집회에 교류와 참여를 금지할 것을 결정했다. 총회 신학부 최종보고서는 “관상기도운동은 불건전한 신비주의, 종교다원주의, 이교적 영향이 혼합돼 있어 복음의 순수성을 해치며 성경과 개혁주의 신학에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 한국교회에 관상기도를 소개했던 지구촌교회의 이동원 목사는 관상기도를 중지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는 다행한 일이다. 지금이라도 개혁주의 신앙에서 벗어난 형태의 운동은 우리가 조심스럽게 연구하고 평가를 해야 한다. 그리고 바람직한 성경적인 교회, 예배, 기도등 신앙 전반에 걸친 내용들을 살피고 연구하여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참고 서적

     

    Carson, D. A. 2005. Be Coming Conversant with the Emerging Church. Grand Rapids: Zondervan.

    Gibbs, Eddie and Bolger, Ryan K. 2005. Emerging Churchs. Grand Rapids: Baker Academic.

    Gilley, Gary E. 2006. This Little Church Stayed Home. Darlington: Evangelical Press.

    Kimball, Dan. 2003. The Emerging Church. Grand Rapids: Zondervan.

    Kimball, Dan. 2004. The Emerging Worship, KCBS Literary Agency: Zondervan.

    Oakland, Roger. 2007. Faith Undone. Silverton: Lighthouse Trails Publishing.

    Oakland, Roger. 2010. 이머징 교회와 신비주의. 황 스데반 역. 서울: 부흥과 개혁사.

    Carson, D. A. 2009. 이머징 교회 바로알기. 이용중 역. 서울: 부흥과 개혁사.

    Gibbs, Eddie and Bolger, Ryan K. 2008. 이머징 교회. 김도훈 역. 서울: 쿰란출판사.

    Kimball, Dan. 2007. 시대를 리드하는 교회. 윤인숙 역. 서울 이레서원.

    김길성. 2005. 개혁주의교회론. 총신대신학대학원강의안.

    김득룡. 1985. 현대교회예배학신강


    신자가 되는 조건(1)

     

    최낙재 목사

    (사람의 일을 생각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것)

    마 16:13~28

     

    예수 그리스도는 홀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고 양육하시고 생명과 영광의 길로 인도하시고,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를 때에만 생명과 영광에 이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그 터 위에서 우리가 이 말씀을 할 수가 있습니다.

     

    방금 낭독한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대화하는 대화의 두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데 각각 놀라운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 장면에서는 열두 사도 가운데 베드로 가 하는 대답을 예수께서 잘 대답하였다고 인정을 하시고 칭찬을 하셨는데 놀라운 말씀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둘째 장면에서는 뜻이 깊고 오묘한 진리의 사실을 알려 주시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인간적인 충정에서 거기에 이르는 길을 가로막으려 할 때에 사단이 거기서 활동하고 있다고 책망하시고, 그들을 바른길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먼저 베드로가 내놓은 그 대답을 보십시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는 예수께 관하여서 믿고 아는 바를 말하였습니다. 주 예수께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돌보실 자임을 말하였습니다.

     

    열두 제자나 베드로가 이러한 신앙 고백을 한 것은 매우 특별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다른 많은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여건 하에서 살았고 같은 시대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게 됐는데, 그러나 자기 동족들보다 훨씬 뛰어난 지식과 깨달음을 가지고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처음에는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고, “이에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하고 대답을 하자, 또 이어서 물으시기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능력과 기사와 표적을 행하셨을 때에 무리들, 일반 대중도 제자들과 함께 듣고 보고 뭔가 큰 감명과 인상을 받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이 메시야를 보내시고 세상에 어떤 큰 변혁을 일으키시고 새로운 시대가 오게 하시려나 보다. 그러시기에 앞서서 엘리야를 보내신다고 하지 않았던가? 모세 때부터 말한 그 선지자나 대 변혁기에 그 선지자 예레미야가 나타났는가?’ 하나님이 메시야를 보내셔서 일대 변동을 일으키시고 새 시대를 오게 하실 그 기미를 느끼고, 그러기 위해서 쓰시는 선지자인가 보다 하는 만큼 생각들을 하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공생애 초기부터 예수의 행하신 일을 보고 어떻게 하면 저를 죽일꼬 하고 원수같이 여기고 죽일 꾀를 생각해내느라 모의하곤 하였지만 일반 대중은 그렇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큰 인물이라, 선지자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지는 아니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 요한이 앞서 나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외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그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메시야를 위하여서 백성을 예비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삼십여 세 되셨을 때에 요한에게 나아가서 세례를 받으셨고, 요한에게 모여든 소수의 백성 가운데서 따르는 자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의 뒤를 이어서 백성들 앞에 천국 복음을 전하시며 병자들을 불쌍히 여겨서 낫게 하시고 큰 능력들을 행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표적이 될 만한 일들을 행하실 때에 이들 군중들은 이것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고 멀리서 따라왔고, 제자들은 훨씬 더 가까이 따르며 배우고 보고 들었습니다. 출발부터 이 제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세례 요한이라, 엘리야라, 예레미야라, 또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말할 때에 이 제자들은 그리스도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렇게 갈라서 물으심으로 다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지만,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뿐 아니라 바짝 따르지 아니하고 멀찍이서 따르며 환영하는 그 무리와는 달리,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예수께 가까이 밀착해서 따르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자요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나타내 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신 뒤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렇게 갈라서 물으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실 때에 그를 중보자 그리스도로 믿고 분별력이 있어서 영접하는 사람은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의 백성이 되는 특권을 얻을 사람입니다.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많은 사람이 다 같이 그리스도의 권능 행하심을 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고 겸손해져서 회개하고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를 계시하여 주시고, 구원을 얻게 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다 같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접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계시의 빛을 비추어 주신 자가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외의 다른 사람은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아무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 자들은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인데 이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또 아버지를 알게 하여 주십니다. 오직 이들만 하나님을 알고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고백한 것에 대하여서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고 말씀하신 것은 구원의 은혜의 선포요, 하나님의 백성된 것을 확증하시는 말씀입니다. 큰 칭찬의 말씀입니다.

     

    또 이것은 신자가 하나님과 말씀을 주고받고 사귈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고 영원한 생명을 받은 것임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다” 하고 후에 사도들은 말하였습니다. 주 예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이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 주셨고 그리스도께서 이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하여 알게 하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의미심장한 칭찬의 말씀을 믿음이 있는 베드로와 다른 사도에게 하셨고, 이러한 신앙의 소유자인 사도들의 터 위에 주의 교회를 세우실 것과 그들에게 천국열쇠를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주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이때로부터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셨다” 하는 점과 이를 “그리 마옵소서” 하고 말리는 그 베드로를 아주 호되게 책망하신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시라고 믿는 믿음을 가진 것은 진리를 안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으로서 많은 외면적 유대인, 외면적 아브라함의 자손과는 달리 참 이스라엘인이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구별된 백성이 된 것을 표하는 것이라고 칭찬을 하셨는데, 그 이외에 중대하게 가르치실 것이 있어서 가르치셨다는 그 사실과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적인 생각으로 가로막으려 하였을 때에 크게 책망하신 사실은 우리가 깊이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첫째,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람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는 것을, 그것을 제자들이 더 배우고 알아야 했습니다. 제자들이 이미 영생에 이르는 구원의 지식을 가졌을지라도 아직도 더 배울 진리가 있고 그리스도의 하실 일과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알아가는 데에 진보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어둠에서 빛으로 찾아 나왔으면 그것이 큰 은혜이지마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그것으로 다 되었다고 자만할 수가 없고, 더욱 진리를 배우고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크신 중보자 그리스도이시므로 그의 위대하심과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가에 관하여서 배워야 할 것이 신자에게는 많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에게 주신 그 대사명,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의 이름 안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 말씀을 하셨는데 이 제자를 삼는 일, 제자를 삼아서 세례로써 하나님의 백성된 표와 인을 치는 일이 있고, 그리고서는 그리스도의 가르치신 것, 명령하신 것을 모두 다 가르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직분을 맡은 사람은 그렇게 할 것이고, 그러면 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은 다음에는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교훈과 명령을 배워서 지키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 앞에서 이르기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하였고,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하였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해야 하는 것이에요. 숨김없이 다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모든 하나님의 자녀된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다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 전체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서 이제는 어린아이가 아니고 온전한 사람,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리스도의 장성의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자라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신자가 된 다음에 열심히 진리를 탐구하고 남보다 앞서서 진리를 알고서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더니 어떠한 수준에 이르니까 ‘이제는 알 만큼 알았으니 봉사에 힘쓰자. 나의 사명을 찾아서 사명을 수행하고 나아가자’ 하고서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의 은혜 가운데 자라나는 일은 할 만큼 했으니 이제는 그 일을 쉰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로 그렇게 선언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마음에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어요. 참 딱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희에게 있을지어다.” (벧후 3:17,18)

     

    서신으로서는 베드로 사도가 마지막으로 한 말씀입니다. 한편으로 무법한 자들의 무법한 말과 행동으로 믿음에 굳게 서서 나가는 신자를 자꾸 옆에서 이렇게 건드리고 저렇게 건드리고, 이렇게 시험하고 저렇게 시험해서 곁길로 가게하고 넘어뜨리는 일이 세상에 많이 있으니까 주의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받으며 자라가고 그를 배우고 아는 데서 자라가라그렇게 권하는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나 유대주의나 헬라의 문화에 풍부한 지식과 소양이 있었지만 그리스도를 배우고 아는 일에는 평생 쉬지 않고 정진하여 나갔습니다. 빌립보서 3:5 이하의 몇 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백발이 된 사도가 그리스도를 더욱 알고 그의 능력을 더욱 알아서 의지하고 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을 여기서 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사명을 받아서 이루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봉사할 일이 있으면 하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마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고 그리스도를 배우고 아는 데에서 자라가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자라가는 것을 일단 중지하고서 봉사하는 봉사란 없는 것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요, 중보자는 크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등이 아니시면 우리에게 중보자의 일을 하실 수가 없으신 것입니다. 크신 중보자이심을 우리가 더욱 배우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큰일을 우리를 위해서 하셨는가? 지금도 행하고 계신가? 우리는 자꾸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판단하실 때에 제자들이 동족 중 다른 사람과는 달리 그리스도를 알았을지라도 그리스도에 관하여서, 그리스도의 하시는 일에 관하여서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데, 베드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가 가시는 길을 가로막아 서는 것을 크게 책망하신 것을 보면 그 가르치시려 한 것이 얼마나 중대하였던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로 알았다고 칭찬을 받은 베드로가 깨닫지 못하므로 걸림돌이 되는 것을 보면 베드로나 제자들 앞에 있는 그 문제가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닌 것을 짐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그리스도께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 하셨단 말씀입니다. 이것은 복을 받은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이 큰 무지 가운데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이것은 또한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은 아무도 도울 이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홀로 짊어지시는 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오시고 특별히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오셨지마는 다들 깨닫지 못하고 심히 반대하고 죽이려는 사람도 있고, 소수 제자들도 그리스도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말씀하셨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막아선다면 천지간에 하나님의 일을 함께 이룰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닙니까? 오직 그리스도 홀로 아버지께서 하라고 주신 그 일을 이루시러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 책망을 들음으로써 주를 따르는 제자로서 부족한 것이 무엇이고, 장성하기 위하여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드러났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고 책망하셨습니다. 사람으로서 도덕적으로 저급한 일을 생각한다든지 주를 따르는 일에 비겁하다든지 해서 책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태도는 인간 사회에서는 오히려 고상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후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께서 잡히실 때에 그 검 하나를 가지고서 그리스도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 많은 군사들과 그냥 싸우려고 한 것을 보면 그는 용기 있는 사람이고 또 주를 위해서 헌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인간적으로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계시의 빛 가운데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주를 따르지 않는 동족들과 같은 평면에서 생각하고 움직이고 하였을 뿐인 것입니다.

     

    동족들도 악한 일만 일삼아서 그리스도를 배척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다 애국을 할 줄 알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바로 들을 귀가 없어서 말씀을 깨닫고 순종하는 대신에 들을 귀가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오해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여 버리고 사람의 계명으로 바꾸어 가르치고 바꾸어서 지켰던 것입니다. 십계명 하나라도 마음으로부터 깨닫고 지키지를 못하고 외형적으로만 지켰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다니 이놈 혼 좀 나봐라’하고 이제 누가 법정으로 끌고 간다며는 그러한 경우에 끌려가서 처벌을 받지 않을 정도로 그만큼만 지키면 지켰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수준에서 살았던 것이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받고 산 이스라엘의 대중들이었습니다.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따르며 빛을 받아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왔지만, 일상생활에서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교훈을 받고 고침을 받아서 바르고 선하고 아름답게 되었느냐 하면 아직 그러지를 못하고 일반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준에서 왔다갔다 활동을 하고 살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 때도 있었던 현상으로서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책망하시고 고치라고 하셨던 점입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55:6-9)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일이 있고,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경영하시며 행하시는 일이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그것은 생각지도 않고, 그것은 전혀 모르고 그냥 인간적이며 세상적인 평면에서 선한 것과 의로운 것, 아름다운 것과 진실 된 것을 찾고 그것을 세워 나간다고 아무리 힘쓰고 애쓴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그냥 넘어지고 무너질 뿐입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의 경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해요. 사람의 생각으로 이렇게 하면 도움이 되겠다 해서 여러 가지 프로그램도 만들고 세상 학문의 도움도 받고 그러지만 그런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하고 그냥 넘어지게 하고 무너지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에는 이미 예부터 가르쳐지고 예고되었던 바입니다. 잠언 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사람의 생각과 이 세상 나라가 경영하는 일들은 언뜻 보기에 좋은 것 같고 곧 이루어질 것 같지만 이 세상과 인생사를 다스리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경영하시는 일이 이루어지고 그 일만이 마침내 이루어지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지는 하나님의 백성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나온 생각이나 위대한 사상이라도 어떤 선행이나 영웅적인 행위도 주 예수께서는 다 물리치시고, 오직 하나님의 경영하시는 일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이루는 데 자신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할 일임을 뚜렷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명백하게 드러내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사단은 한사코 하나님의 경영하시는 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것을 막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훌륭한 생각, 도둑질하려는 생각이 아니고 이 사회를 위해서 어떻게 할 건가. 염려하고 의를 행하고 선을 쌓는 일, 그런 일을 자꾸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에요. 다만 하나님의 생각하는 것, 하나님이 지금 이루시려고 도모하는 것 그것만은 생각하지 마라라 그것입니다. 사단의 속임이란 그런 데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행동, 베드로의 주님을 만류하는 것. 그것 참 인간 사회에서는 아름다운 일 아닙니까? 다만 예수님의 가르침, 하나님의 일을 지금 예수님께서 계시하여 주시는데 그것만 막는 것입니다. 거기는 가지 마라라. 자꾸 선을 행하고 하라. 그런 데에 사단의 시험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텐데 그것이 곧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 당신에 관하여서 가르치기 시작하시면서 하신 그 말씀에서 나타내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그렇게 하셨어도 무방한 듯한데, “살아나야 하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뜻, 특별히 자기 백성에게 언약하신 바를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므로 반드시 이뤄지는 그 필연성을 표시하는 말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항상 ‘이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뤄지리라. 이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뤄지게 하리라’ 하는 이 거룩한 필연성에 자신의 발걸음을 항상 맞추셨습니다.

     

    당신을 가리켜서 ‘인자’라 칭하신 것도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신 것을 성취하시는 자로서의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하신 말씀입니다. 다니엘서에 예언된 바 세상 나라가 한때 기세를 올리지만 그 악함과 강포로 인해서 다 차례로 하나님의 심판에 해당하는데, 그런 가운데서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어서 영원한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받는 사실이 이제 바야흐로 이루어진다는 뜻으로서 다니엘의 본 바 그 환상 가운데서 이 인자의 칭호를 만드시고 당신을 위해서 그 칭호를 사용하셨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선을 추구하고 자선을 행해서 자기의 의를 쌓는다하여도 자기나 이 세상의 중생을 그 죄에서 또 사망에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구원의 일을 이루려 하실 때에 먼저 선지자들을 통하여서 예언으로 알리시고 이 큰일을 인류 역사의 가도에서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입니다.(3:7) 예언은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따라서 예언은 현실 세상에 확실히 실현되고 열매를 맺으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은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의 말씀으로써 널리 온 세상에 전파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눈을 사람의 일에서 하나님의 경영하시는 일로 돌리려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자가 장성하기 위하여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이 어떤 생각을 하시는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고 능력이 있으려면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가르치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깊이 있게 풍부하게 전파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 힘 있게 전파되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빛을 발휘하던 1세기에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그렇습니다.

     

    복습문제

     

    1. 제자들이 자기 동족보다 훨씬 더 뛰어난 지식과 깨달음을 가지게 된 배경을 정리해 보십시오.

    2.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3. 예수님의 칭찬 후에 이어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가르치신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첫째로 알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4. 교회 안에서 지극히 안타까운 일은 무엇이고,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풍부하게 알았던 백발이 된 사도도 어떻게 하였습니까?

    5. 그리스도의 길을 가로 막으려고 하였던 베드로의 태도에 대한 사회적인 평가와 그러나 이에 대한 그리스도의 책망이 가지는 의미, 그리고 교회에 대한 사단의 은밀한 속임은 어디에 있는가를 간단히 정리해 보세요.

    6. 신자나 교회가 장성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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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의 신비 뉴질랜드 石球 

    뉴질랜드에 가면 반드시 가 보아야 할 곳이 있다.
    그곳은 Koekohe 해변으로, 이곳에 와야만 볼 수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Moeraki Boulders...
    모에라키 석구라 부르는 거대한 돌 구슬이다.

    지름 1m에서 6m가 넘는 것까지 다양한 크기의 돌 구슬들이
    해변에 늘어서 있는 모습은 정말 보기드문 장관이다.

    이러한 둥근 석구를 보면 마치 돌 표면을 이스터섬의
    모아이석상 처럼 깎아내어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혹은 자연적인 풍화침식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측 하는데, 실상은 진주가 만들어지는 방식과 유사하다.

    과거 바닷 속에서 작고 단단한 동물의 뼈를 핵으로 삼아 점점
    자라게 되었다. 칼슘과 탄소, 산소가 결합하여 탄산칼슘,

    즉 방해석과 같은 조성을 이루며 오랜 시간 몇 천만년이 넘는
    시간동안 형성된 돌들인 것이다.

    그러다 부드러운 진흙 속에 묻혀있다 밖으로 드러나며 약한 부분은
    침식되어 사라지고 단단한 돌 구슬들이 밖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한마디로 바다가 만들어낸 진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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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 안에서의 복음의 의미 ( 존 칼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복음"이라는 말의 의미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서 복음은 고결함을 통해 세상과 세상의 사라져 가는 부요와 쾌락을 경멸함으로써 우리의 온 마음으로 이 소중한 복을 소망하고 그 복이 우리에게 베풀어질 때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난 기쁘고 즐거운 은혜의 메시지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명시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해 선포되도록 명하신 메시지에 복음이라는 이름을 허락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참되고 확고한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행복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복음"이라는 말이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흩어져 있는 모든 은혜로운 하나님의 약속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보통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복음이 처음 선포되었다고 밝히시므로 내가 제시한 복음의 정의를 따르도록 합시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은혜의 엄숙한 공표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일컬어집니다(롬 1:16). 복음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비와 우리를 향한 아버지로서의 사랑의 보증인 것처럼 특별한 방식으로 복음의 주제가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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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옥과 미래의 형벌에 대하여 말하라(존 라일)

    지옥과 미래의 형벌에 대해 말하는 것이 가혹하고 몰인정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크게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자들이 이 본문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또한 그들이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많은 말씀들 특히,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9:48)라고 하신 그러한 구절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그들은 거짓된 자비와 병적인 호의에 오도되어 성경의 분명한 교훈을 비난하면서 기록된 말씀들 보다 자기들이 더 현명하다고 본다.

    우리 신앙의 기본 진리의 하나로서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가 경건한 자들을 위한 영원한 천국이 있다고 확고히 믿는 것처럼 사악한 자들을 위한 영원한 지옥이 있다는 것을 확고히 믿도록 하자.
    지옥에 대해 말한다고 해서 무자비하다고 생각하지 말자.

    오히려 그것이 사람들에게 “다가올 진노를 피하도록” 간절히 부탁하는 지극히 높은 사랑이라고 생각하자.

    태초에 하와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한 자는 속이는 자요, 살인자요, 거짓말쟁이인 사단이었다(창 3:4).
    그들이 “그들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기는 하지만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을 꺼리는 것은 사단을 기쁘게 할 수는 있을지언정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는 없다.

    개혁주의 마을/Grace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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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과 소망은 서로 연결된다/ 존 칼빈

    믿음은 그것이 살아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영원한 구원에 대한
    소망을 불가 불리의 동반자로서 곁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더 적절하게 말한다면 믿음은 그 자체 내에서 소망을 일으키며 생산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진실성을 확신하는 것이 믿음이다.

    곧 그것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우리를 속이거나 빈 말을 할 수 없다는 것
    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들을
    - 그들이 반드시 진실하다고 믿는 그 약속들을- 실현하실 때가 오리라고 기대하
    며 의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간단하게 말하면 소망은 하나님께서 진실하게 약속하셨다고 믿는 일들에
    대한 기대이다. 이와 같이 믿음은 하나님을 진실하다고 믿으며 소망은  하나님의
    진실성이 밝히 나타나는 때를 기다린다.

    즉 믿음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믿으며 소망은 그가 우리에게 대해서 항
    상 아버지가 되시리라고 예상한다.

    믿음은 우리가 영생을 받았다고 믿으며 소망은 영생이 언젠가는 나타나리라고 예
    상한다. 믿음은 소망의 토대로 소망은 믿음에 영향을 주며 힘을 준다.

    하나님의 약속들을 이미 믿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의 약한 믿음은 오래 참는 소망과 기대에 의해서 지지대고
    조성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은 무력해지고 희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이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바른 말이다(롬8:24).
    소망은 묵묵히 주를 기다리는 동시에 믿음이 너무 서두르다가 곤두박질

    하여 떨어지지 않도록 제어한다. 소망은 믿음에 힘을 주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
    심하거나 그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도록 한다. 소망은 믿음의 생기를 회복시켜
    지치지 않게 한다. 소망은 종점에 노착할 때까지 믿음을 지탱하여 주어 도중에
    서 심지어 출발점에서도 힘이 빠지지 않도록 한다. 간단히 말하면 소망은 끊임
    없이 믿음을 갱신하고 회복함으로써 믿음에 견인하는 힘을 주는 것이다.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서 소망의 지지가 얼마나 많이 필요한가를 더 잘 알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닥치는 시험의 형태가   얼마나
    많은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첫째로 주께서는 약속하신 일을 연기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너무도 오랫동안 불
    안정한 상태에 두신다. 이런 때에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합2:3)고 한 예언
    자의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 소망의 기능이다.

    어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치는 것을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분명히 노여움
    을 보이신다. 이런 때에 소망이 우리를 도와서 다른 예언자가 말한  대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사8:17)할 필요가   훨씬
    더 절실하다. 또 베드로는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라
    고 말한다(벧후3:3-4) 사실상 육과 세상은 꼭같은 말들을 우리에게 속삭인다 이
    런 때를 위해서 우리는 길이 참는 소망으로 우리의 믿음을 보강해야 한다. 천 년
    을 하루같이 여기리만큼(시90:4, 벧후3:8) 우리의 소망을 영원한 데에 두어야 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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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욥기 4) 누구를 의지할 수 있으랴.

    대장쟁이 ㆍ 

    [욥기 7:1-6]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품군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품군은 그 삯을 바라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되었다가 터지는구나.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왕으로부터 소환장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왕으로부터 소환장을 받은 그는 몹시 두려웠습니다. 함께 가 줄 친구가 필요했습니다. 그에겐 친구가 셋 있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그가 매우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고, 세상에 둘 도 없는 특별한 친구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친구 또한 그가 사랑하고 있었으나 첫 번째 친구만큼 소중하게 여기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친구는 친구로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평소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던 친구였습니다. 그는 세 친구에게 차례로 함께 가자고 청했습니다. 첫 번째 친구는 싫다고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대궐 문 앞까지는 함께 가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곤란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론 함께 가주고말고. 내가 왕에게도 잘 말씀드려 줄게.” 세 친구는 누구이며 왜 그렇게 대답할 걸까요? 첫 번째 친구는 재산을 말합니다. 아무리 재산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더라도 죽을 때에는 고스란히 남겨둔 채 혼자 떠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두 번째 친구는 친척과 친구를 말합니다. 무덤까지는 함께 따라 가주지만 그를 무덤 속에 남겨둔 채 돌아가 버릴 것입니다. 세 번째 친구는 善行(선행)을 말합니다. 선행이란 평소에는 남의 눈길을 끌지 못하지만 죽은 뒤까지도 그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탈무드 이야기가 꼭 성경적이지는 않지요. 선행(善行)을 우리가 죽을 때 가지고 갈 주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라고 바꾸어서 읽는다면 좋을 것 같네요.

    인간은 외로운 존재입니다. 극한 고난이나 죽음 앞에서는 결국 혼자 남겨지는 것이 인생입니다. 결국은 혼자 가야 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아무리 가깝던 친구라도 아무도 함께 해 줄 수 없습니다. 아내조차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라 하고 떠나버린 다음 홀로 고통 가운데 남겨진 욥, 그 욥에게 그의 가장 친한 친구 셋이 찾아와 칠일칠야를 곁에 있어 주었지만, 생각하면 그렇게 고마울 수 없는 친구들이지만, 그러나 그들에게서도 인간이라는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사야 2장 22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사2:22)” 시편 146편 3절은 말씀합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인간은 의지할 존재가 못 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한 존재, 그 근본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은 한계를 가진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스러질지 모르는 들의 꽃 같고 풀잎 같은 존재, 죽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46편은 오직 하나님만이 도움이시며 소망이라고 말씀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4절)

    또한 인간은 공감하고 고통이나 마음을 나누는데도 한계를 가집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世界觀, World View)을 가지게 됩니다. 각자 나름대로의 틀과 모양과 색깔을 갖춘 창(窓)을 통하여 사물을 바라보고 느끼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똑같이 느끼거나 나눌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애쓴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한계입니다. 보십시오.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자기가 셋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욥의 친구라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욥에게 충고하려고 나섰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나름대로 욥의 처지와 욥이 당하는 고난을 자신이 가장 잘 이해하고 공감하며 그래서 충고를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욥을 온전히 이해하지도 알지도 공감하지도 못 했으며 아무런 도움도 되지도 못 했습니다. 엘리바스의 이야기를 들은 욥은 “너도 평소에는 푸르다가 막상 마시고자 하면 말라버리는 시냇물 같은 자로구나.” 하고 실망과 분노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친구에 대한 실망이라기보다 인생은 애당초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발견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누구를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인생이 하소연할 곳, 의지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7장에 들어가면 욥은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극심한 고통 가운데 순간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죽기보다 못 한 생명이라고,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러시느냐고, 나는 가련하고 불쌍한 생명이라고, 이제 내가 죽어 흙에 누우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으실찌라도 다시는 있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소연하며 간구합니다. “주여, 나를 기억하소서, 나를 돌아보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건지소서.”
    그렇습니다. 하나님밖에는 없습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 하던 우편강도가 생각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밖에 없습니다.

    .

    억만장자 선박왕 오나시스(1906~1975)의 후회
    
    01ona.jpg 오나시스
    1336048148.png 칼라스
    21134449_70.jpg 오나시스와 칼라스
    485593c599ba4&filename=오나시스재크린.jpg 재클린과 오나시스의 결혼
    이 세상에 성공적인 결혼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어떤것이 생애의 행복한 결혼 일까요?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의 행로를 살펴보며 생각해 봅니다. 
    
    억만장자 오나시스는 무대에서 노래를  잘 부르는
    마리아 칼라스에게 반해서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와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라고 생각하다가 칼라스와 꿈의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8년이 되기 전에,
    주부로서 너무 모자란데다 권태가 생겨서 이혼하고
    세계 최강의 케네디
    
    대통령의 영부인이었던
    재클린과 다시 결혼했습니다.
    
    
    재클린과 결혼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오나시스는 "내가 실수를 했다." 고 하며 고민하다가
    "파혼할 길이 없을까?"
    하고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그러나 재클린이 엄청난 위자료를 요구하여
    이혼도 못합니다.
    재클린이 한 달에 24억 원이나 되는 돈을 펑펑 쓰니
    오나시스는 화가 나서 혈압이 올라갑니다. 
    
    
    그 아들마저 비행기 사고로 죽습니다.
    그 충격으로 그도 얼마 못살고 이혼수속중에 죽고 맙니다.
    "나는 인생을 헛살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쓰레기로 던지고 간다."
    하며 오나시스는 눈물을 흘리며 죽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69 세 입니다.  
    
    
    끝까지 이혼에 합의 않던 재클린은
    엄청난 오나시스의 유산을 거의 차지 했지요.
    
    
    최고로 노래를 잘 부르는 소프라노 칼라스와 살아도,
    최고의 여자 재클린과 살아도 후회뿐입니다.
    그들은 사회적 명성은 높았을지 몰라도
    한 남자를 행복하게 하는 데에는 크게 미흡했습니다.
    
      
    우리는 오나시스의 체험을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적인 명성도 좋고, 또 사교계의 여왕도 좋지만
    애초에 이들의 결혼은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오나시스가 억만장자가 아니었더라면
    과연 이들의 결혼이 쉽사리 이루어 질수 있었을까.
    이런 질문을 던저보면 그 이유는 명백해 집니다.
    서로의 욕심을 충족시키고, 이익을 얻기 위한 결혼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큰 욕심없이 같은 목표를 추구하며 노력하고, 
    꾸준히 정진해 나가며, 같이 웃고 즐기는 사람.
    아들 딸 잘 낳고, 살림 잘하고
    따뜻이 가족 돌볼 줄 알고, 내조 잘 하는
    알뜰살뜰한 내 곁의 사람이 최고가 아닐까 합니다.
    



    시대의 표적들을 분별하라!

     

     

     

     

     

     

     

     

    ▲ (좌) 유럽엽합(EU) 헤르만 판롬파위 대통령.

    (우) 독일에서 열린 JDDJ 10주년 행사.

     

     

    세계 전역에서 교회통합 운동과 더불어 세계통합 운동(Globalism)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2009년 11월27일 서울 장충동 그랜드 앰배서더 호텔에서는 한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NCCK), 대한 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 대한감리회, 한국 기독교 장로회, 구세군 대한본영, 대한성공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기독교 대한하나님의 성회, 한국천주교, 정교회 한국 대교구 등이 모여 올해 사업 보고와 내년 계획을 나눴다.
    NCCK 총무 권오성은 “지난 한 해 동안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에 벽을 허물고 연합을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오고 있는데, 이제는 이러한 움직임들이 지역에 있는 개신교회와 천주교회에까지 확대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러한 비성경적인 교회통합 운동이 우리나라만의 문제일까?

    비성경적 통합은 교리적으로 또한 실제적인 연합으로 일어나고 있다. 지난 10월 31일은 창녀 교회인 로마 카톨릭과 루터교가 “공동칭의교리선언”(JDDJ; the Joint Declaration of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에 합의한지 10년째 되는 날이었다.
    마틴 루터(A.D. 1488∼1546)가 로마서의 위대한 의롭게 됨의 교리에 입각하여, 생명을 걸고 했던 종교개혁이 그의 후배들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폐기 된지 이미 10년이 지났다. 10주년을 기념하는 에큐메니칼 예배가 이날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있었으며, 지난 10년간 교회통합이 얼마나 진전되었는가 자축하는 장이 마련되었다. 국내 모든 개신교 신문들을 이 일에 대해 침묵하고 지나갔다. 아무도 의분을 표출하거나 성경의 진리로 한국교회를 질타한 사람이 없었다.

    루터교만 타협한 것이 아니다. 지난 2006년 7월 23일에는 세계감리교협의회 또한 이 공동칭의교리선언에 합의했다. 바로 서울 금란교회에서 교황청 교회일치평의회장인 발터 카스퍼 추기경과 세계감리교협의회 선데이 음방 회장이 함께 모여, 음방 회장이 이 선언(JDDJ)에 동의하고 함께 친교의 공동체를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선언했다. 개신교를 로마 카톨릭의 창녀 집으로 끌어들이는 교리적인 타협안인 이 “선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역사에 대한 믿음으로 또한 은혜만으로, 우리 편에서의 공로에 의하지 않고,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성령을 받으며,」(JDDJ, 3-15)

    여기까지는 성경적인 진술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음 부분을 주목하라.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셔서, 선한 행위에 합당하도록 우리를 갖추시고 우리를 부르신다.」(JDDJ, 3-15), 「믿음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며, 성령께서 이 믿음을 말씀과 믿는 자들의 공동체 속에서의 성사를 통해 주시는 선물이다.」(JDDJ, 3-16), 「세례 가운데 성령의 역사로 그들은 구원의 선물은 받으며, 이 구원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반이 된다.」(JDDJ, 4-25)

    이 선언은 교묘하게 성경의 칭의 교리를 각색하여 “행위들”과 “성사들”과 “세례”를 삽입해 놓았다.

    공식적으로 루터교와 감리교는 개신교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반성경적 적그리스도의 교회인 로마 카톨릭에 저항하지 않는다. 자신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로 만들었던 가장 위대한 구원의 교리를 포기한 것이다. 장로교는 예외일까? 장로교 또한 예장 통합을 중심으로 “공동칭의교리선언”에 대해 별다른 반감을 표시하지 않고 오히려 반색하고 있어, 장로교 또한 이 선언에 동의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정치적으로도 세계는 통합을 가속화하고 있다. 지난 11월 20일경에 결정된 유럽연합(EU)의 대통령 헤르만 판롬파위(Herman Van Rompuy, 62세)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 국가들 간의 공동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2009년은 또한 경제적 위기 가운데 G20의 설립과 더불어 세계 통치의 원년이 될 것입니다. 코펜하겐에서의 기후 회의는 지구의 전세계 차원에서의 관리를 위한 또 하나의 조치가 될 것입니다.」

    헤르만 판롬파위 대통령 자신이 적그리스도라는 말이 아니다. 적그리스도가 단일 세계정부를 건설하기에 최적의 상황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왕국은 머지않아 만들어질 신 세계질서 계획하의 단일 세계정부이다.
    “세계통치”의 원년을 연 유럽연합은 적그리스도의 세계통치를 위해 로마 제국을 부활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신이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위하여 하나 하나씩 단계를 밟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유럽연합의 움직임과 함께 전세계는 계속해서 정치·경제·군사·문화 면에서 유래없는 통합을 추구할 것이다.
    사탄은 이 세상 통치자들의 마음 속에 신 세계질서”(New World Order)”라는 이상을 불어넣어 이것만이 모든 세계의 분쟁과 경제적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이라 여기게 만들 것이다. 죄인들 안에 역사하는 영인 사탄은 죄인들이 적그리스도의 등극을 위한 발판을 마련토록 착실하게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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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크리스천 포스트 보도…美최대 웹커뮤니티 토픽스 링크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복음주의 설교가이자 한국에도 잘 알려진 존 파이퍼(68) 목사가 "조용기 목사가 그리스도를 욕되게 했다"고 비난한 사실이 알려져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존 파이퍼 목사는 지난 5일 자신의 팟 캐스트 '존 목사에게 물어보세요'에서 조용기 목사가 1200만 달러(약 131억원) 횡령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사실에 대해 질문을 받고 "그리스도를 공공적으로 욕되게 함과, 그 분의 말씀과 그 분의 복음, 또 그 분의 교회를 욕되게 하는 것은 나를 매우 화나고 슬프게 한다"라고 직설적으로 지적했다.

    정상추(정의와 상식을 추구하는 시민네트워크)의 외신전문사이트 '뉴스프로(thenewspro.org)'에 따르면 이번 방송은 워싱턴DC에 본부를 둔 크리스천 포스트와 프리 리퍼블릭이 보도한데 이어 미국 최대의 웹 커뮤니티 사이트인 '토픽스(topix)'가 링크시키는 등 뜨거운 관심을 반영했다.

    크리스천 포스트는 "한국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큰 오순절교회 설립자인 조용기 목사가 1200만 달러 횡령죄로 유죄를 선고받은 사실에 대해 인기있는 목회자 존 파이퍼가 최근 메시지에서 미국에 있는 돈을 사랑할지도 모르는 목사들에게 경고를 보냈다"고 전했다.

    파이퍼 목사는 "이 일에 대해 내가 대응하여 비난을 더 추가하려는 것은 아니다"라고 전제하며 "나의 바램은 목사들이 이 호소를 잘 듣고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에 이 같은 치욕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목사들이 돈의 사악한 유혹을 피하기 위해 ▲ 부자가 되거나 부를 축적하려는 욕심을 버려라 ▲ 수입이 늘어나기 시작하면 관리자를 두라 ▲ 장로들에게 당신의 수입의 근원을 완전히 투명히 하라 ▲ 당신의 보물은 땅이 아니라 천국에 있음을 보여주도록 검소하게 살아라 ▲ 다수의 장로들이 지도하는 구조를 만들라 등 다섯 가지의 간곡한 당부를 전했다.

    파이퍼 목사는 "예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씀하셨다. 마음 속에 그런 욕망이 보이거든 성령의 검으로 그 욕망을 단칼에 없애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부의 축적을 피하는 한가지 좋은 방법은 기부금의 비율을 늘리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어떤 목사가 100만 달러의 수입에서 30%를 기부하고 나머지 70%는 사치품 구입을 위해 남겨두는 것은 전혀 감동적이지 않다. 어떤 목사들이 30~40%를 기부한다고 자랑하는 것을 들었다. 심지어 1000만 달러의 수입 중 90%를 기부하고 나머지 100만 달러를 자신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도 전혀 감동적이지 않다. 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타락의 길로 인도한다. 목사들에게 간곡히 부탁하건대, 교회에서 지급하는 것에 만족하고 기쁨과 현명한 지혜로 나머지는 모두 내려놓으라."

    뉴스프로는 "기사 속에 조 목사의 집행유예 및 수백만 달러를 횡령해서 유죄를 받아 명예가 땅에 떨어졌다고 언급하는 등 세계 최대의 교회라 자랑하는 순복음 교회가 전세계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파이퍼 목사의 이러한 발언은 국내 보수적인 기독교계에 만만치 않은 충격을 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존 파이퍼 목사는 복음주의 교계에서 '기독교 희락주의자', '탁월한 기쁨의 신학자'로 불리며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로 높이는 순수하고 강력한 복음 선포를 전하는 이 시대 최고의 설교가"라는 평을 듣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기뻐하라', '하나님이 복음이다', '예수님의 지상명령', '삶을 허비하지 말라', '말씀으로 승리하라' 등의 저서로 한국 교회에도 널리 알려졌으며 미주 한인 교계에도 지난 2012년 '한인세계 한인 선교대회'에 주강사로 초청받기도 했다.

    robin@newsis.com

    <저작권자ⓒ 공감언론 뉴시스통신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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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너무 사랑하던 남녀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가 군대에 가게 되었고
        급기야, 월남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를 위험한 월남전에 보내 놓고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조금만 참으면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고국에 돌아가리라는 일념으로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넘기던 중...
        남자는 부상을 당하고야 말았다.

        폭탄의 파편에 맞아,
        양팔을 절단해야만 했다.

        이런 모습으로 그녀를 힘들게 하느니,
        차라리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자 하고
        남자는 맘을 먹고 고국에 있는 여자에게
        전사했다는 편지를 보내고야 말았다.

        양팔을 절단한 모습으로
        남자는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국에 돌아왔고
        행여나 여자의 눈에 띨까 숨어 살았다.

        얼마 후 그녀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맘이 아팠지만 그래도...
        그녀가 행복해진다는 것에 기뻐했다.

        몇 년이 흐른 뒤
        남자는 사랑하는 그녀를 그리워하다
        멀리서나마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려고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녀의 집 담 너머에서 안을 들여다보니...
        그녀는...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그녀는...

        양팔과 양다리가 없는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한 채 살고 있었다.

        월남전에서 전사한 사랑하던 애인을 생각하며
        그 전쟁에서 양팔과 양다리를 잃은
        남자를 보살피며 살아가고 있었다.

        손익을 계산하지 않고
        온전히 배려하고 희생하는
        사랑의 힘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오늘은 이 기막힌 사랑 이야기를 되새기며
        우리의 사랑과 삶을 조용히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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