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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생각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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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해질 것을 염려하는 마음
보내고 싶지 않은 간절함이 낮달처럼 쓸쓸하다

아쉬움을 가슴에 묻으며 그리움만 약속하나 보다
보내리,..이대로 보내리라 ..

내안의 너는 늘 커다란 나무였고
난 숲 속의 작은 바람이었나니

세상 살아가는 일이..
다 무언가를 보내는 일이라지만..
보내고 나서도 보내지 않은 그 무언가가 있네요.

두고두고 소식 알고싶은
내 단 하나의 소중한사람.
떠나고 나서 더 보고싶은 당신.


혹 지나는 길이 있으면 나랑
커피 한잔 안 할래요?

내 삶이 더 저물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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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음악/ 떠난날의 엘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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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을 만나기 전 /최송연

    부모가 되어보기 전에는 부모의 그 사랑 알 수 없고…
    배우자가 건강할 땐 배우자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임을 認知하지 못합니다
    젊음을 잃기 전, 젊음 그 자체가 특권이며 행복인 줄 알지 못하고 작은 여드름 하나에도 고민하며 슬피 울기도 하죠
    겸손의 주체이신 그리스도, 죄인을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신 당신을 만나기 전, 난, 내가 얼마나 교만한 자임을… 도무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날이면 그것은 모두 내 잘못 아닌, 그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기 일쑤였고….
    나 외 다른 사람은 모두 편하게 잘 사는 것만 같은데 나는 왜 이리도 고달프게 살아야 하는가
    열악한 환경을 탓하며… 쉽게 절망하며, 쉽게 포기하며… 난 그렇게 늘~오만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만난 후 내 삶을 돌이켜 보니 내게는 깎아 내어야 할 부분이 너무 많았고, 다듬어야 하고, 잘라내어야 할 부분들이 너무 많았던 것을...
    내 주여, 나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내게 허락하신 그 모든 아픔... 고난과 시련의 풀무 불은 더 겸손한 그릇으로 만들어 주께서 사용하시기에 합당한 좋은 도자기로 빚으시는 사랑 핏빛 선명한 당신의 사랑이었음을……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의 의견에 선한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예레미야18:4절 말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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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찬송_고려서원 간 스코틀랜드시편찬송(kr) /

      2011/02/22 14:13

       http://kas815.blog.me/70103543475

       

       

       

       

      • 서명 : 시편찬송(The Korean Psalter)
      • 출판 : 고려서원(초판 2004. 8. 20, 2쇄 발행 2008. 3. 3)
      • 편집 : 김준범
      • 가사 편역 : 서창원, 김준범

       

      <머리말>

      시편은 교회가 가진 가장 좋은 찬송임에 틀림없습니다. 시편찬송은 구약 이스라엘 성도들의 찬송이었으며 예수님과 사도들이 부른 찬송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저녁 만찬 때, 주님과 제자들은 찬송을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26:30). 대부분의 성경 주석가들은 이것이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늘 부르던 시편, 곧 할렐(Hallel)이었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마 27:46; 눅 23:46; 시 22:1; 31:5 참조). 사도 바울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엡 5:19; 골 3:16)'고 하였을 때 '시'는 곧 시편을 의미합니다. 무엇보다 성경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 진리의 말씀이요, 우리의 삶과 예배의 유일한 기준이 된다는 점은 다시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시편찬송을 불러야 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시편찬송은 단순히 교회나 성도들의 취향의 문제가 아닙니다. 과연 어떤 찬송이 하나님께 드릴 만한 좋은 찬송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시편찬송을 부르자고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시편은 교회가 가진 가장 좋은 찬송이자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이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칼빈은 1562년에 출간된 [제네바 시편집(The Genevan Psalter)]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으로가 아니면 하나님을 올바로 찬양할 수 없다고 한 어거스틴의 말은 옳다. 우리가 아무리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여기저기를 찾아다닌다 하더라도 이 목적(찬양)을 이루는데 있어서 성령께서 다윗을 통하여 말씀하신 시편보다 더 나은 것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시편을 찬송할 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입에 허락하신 찬송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바른 신앙 위에 서 있던 모든 주님의 교회는 언제나 시편을 애송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찬송도 시편찬송을 의미했습니다. 칼세돈 공의회 같은 종교회의들도 시편찬송 외의 소위 '비영감적인 찬송'에 대해 반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 암흑기였던 중세를 지나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개혁교회는 다시 시편찬송 전통을 회복했습니다. 물론 중세에도 시편찬송이 완전히 사라졌던 것은 아니지만, 회중찬송으로서의 시편찬송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개혁자들은 이것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했습니다.

       

      루터파를 제외한 나머지 개혁교회들은 공예베시에 모두 시편찬송으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루터파와 성공회 등에서는 성경이 금하지 않았다면 모두 허용할 만하다는 허용적 입장을 취하는 반면, 칼빈주의자들은 성경이 제정하고 성경이 명령하는 것만이 지켜져야 한다는 [예배의 규정적 원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제네바의 칼빈과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는 교회 개혁을 위해서는 예배 개혁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들은 말씀으로 돌아가서 말씀 사역을 강조하는 동시에 예배에서 시편찬송을 고수하였던 것입니다.

       

      개혁교회에서 시편찬송이 어떻게 다시 정착되고 발전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칼빈은 1539년에 스트라스부르그(Strassburg)에서 목회하면서 19곡의 시편과 십계명, 사도신경, 시므온의 찬송 등을 포함하는 작은 시편찬송집을 펴내어 개혁교회의 시편찬송 전통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1542년에 30곡이 추가되어 총 49곡의 시편찬송집이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시편곡은 당시 프랑스의 왕 프란시스 1세(Francis 1)의 궁중 시인이었던 클레망 마로(Clement Marot)에 의해서 작시되었고, 칼빈은 그 중 3편만을 직접 운율로 엮었고 나머지는 감수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마로가 1544년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제네바에서 시편찬송을 만들어내는 일은 잠시 주춤했습니다. 칼빈은 자신에게 시적 재능이 그리 많지 않다고 스스로 생각하여 그 일을 중단한 채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러던 중 칼빈은 1548년에 29살의 젊은 청년이었던 데오도르 베자(Theodorus  Beza)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당시 베자의 책상에서 시편 16편을 운율에 맞추어 놓은 원고의 초안을 보게 되었습니다. 역사가들은 베자가 제네바에서의 예배에 처음 참석하였을 때 회중들이 시편찬송을 부르는 것에 매우 깊은 인상을 받고, 개인적으로 곧바로 시편을 운율에 맞추는 일을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칼빈은 그 초안을 다른 목사들에게 보여주었고, 그드은 모두 마로의 중단된 사역을 베자에게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드디어 1551년에 [데오도르 베자의 34편의 시편곡(Thirty-four Psalms of David by Theodorus Beza)]을 출판하게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이전에 사용하던 49곡과 합하여 총 83곡의 시편찬송집을, 그리고 1562년에는 나머지 시편을 모두 운율에 맞추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제네바 시편집]이 출판되었습니다. 이 시편집은 1565년까지 3년 동안에만 63판 이상 출판되고, 화란, 독일, 영국 등 20여 개국으로 번역 보급되어 당시 모든 개신교 가정들은 이 시편집을 비치하고 사요하였다고 하니, 시편찬송이 개혁교회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전통인가 하는 것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 전통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신실하게 믿었던 청교도들도 그들의 예배에서 시편을 운율에 맞추어 찬양하였습니다. 이러한 이류로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주축이 되어 마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도 시편을 찬송하도록 요구한 것입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장 5절). 예배와 찬송에 대한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이러한 입장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영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1564-5년에 걸쳐 만들어진 스코틀랜드 교회의 제1공동의식서(The First Book of Common Order)에는 시편찬송집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시편찬송 외에 다른 찬송가가 전혀 첨가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시편찬송을 교회의 공예배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실제로 19세기 이전까지 모든 개혁교회, 특별히 장로교회에서는 시편찬송 외에는 다른 찬송을 공예배시에 부른 역사가 없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시편찬송은 지난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새롭게 발전해 왔습니다. 세계적으로 각 교단을 망라하여 시편찬송을 부르는 교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유럽이나 북미와 호주같은 영어권 국가들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개혁교회들에서도 이를 번역하여 예배 찬송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시편찬송을 소개하려는 시도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교회 회중 찬송으로환영받지 못한 채 도중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구약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실한 교회들이 불러왔고 지금도 부르고 있는 시편찬송을 한국 장로교회에서 오히려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유물처럼 취급하고 심지어 백안시하는 풍토가 있다면 이는 이해할 수도 없고 용납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날 현대음악과 즉흥적으로 작시된 가사들이 여과없이 복음성가로 만들어지고 있으며, 실제로 이런 복음성가들로 인해 찬송가들과 시편찬송이 예배 찬송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찬양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며, 또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찬양사역자들과 찬양예배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지만 정작 시편찬송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인식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시편찬송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찬송입니다. 시편찬송은 믿음의 선진들이 오랫동안 사랑한 찬송이며 영감된 찬송입니다. 바른 찬양 없이 바른 예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금번에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이와같이 시편찬송 2집을 발행하게 된 것을 무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여기에 소개된 곡들은 주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며, 가사는 우리말 시편 말씀을 사용하되 그 변경을 최소한으로 하여 붙여진 것입니다. 2001년도에 출판된 시편찬송 1집에서는 20곡이 소개된 바 있는데, 본 시편찬송집에는 1집의 곡들을 포함하여 120곡이 수록되었습니다.

       

      특별히 삼양교회의 서창원 목사님과 양의문교회의 김준범 목사님이 시편을 곡의 운율에 맞추어 편역, 작사하는 수고를 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두 분은 강한 시편찬송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스코틀랜드 자유교회 신학교(Free Church of Scottland College)를졸업하셨고, 귀국 후에도 한국교회에 시편찬송을 보급하여 한국교회 예배와 찬송의 갱신 운동에 꾸준하게 힘써 오신 분들입니다.

       

      출판에 필요한 모든 힘겨운 작업과 수고는 고려서원과 성경교육선교회가 자원하여 맡았습니다. 이러한 수고는 고려서원과 성경교육선교회의 설립 목적이요 존재 이유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 수고 뒤에는 시편찬송을 사랑한 양의문교회와 삼양교회, 성경교육선교회와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의 회원들, 그리고 그 밖에도 개혁주의 전통을 사랑하는 여러 교단과 교회, 여러 신앙공동체의 격려가 있었다는 점도 알려드립니다.

       

      아울러 곡의 사용을 너그럽게 허락해 주신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와 시편찬송위원회에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의 시편찬송위원회는 스코틀랜드 자유교회가 판권을 소유한 모든 아름답고 귀한 시편곡들을 아무 조건없이 한국에서 시편찬송을 소개하고 보급하는 일에 사용할 것을 고려서원에 허락해 주셨습니다.

       

      여기에 더 많은 곡을 소개하지 못하여 한편으로 아쉬운 마음도 있으나 120곡은 결코 적지 않은 분량으로, 한국교회의 예배를 돕고 세우며 특별히 찬송을 새롭게 하는데에 유용하게 사용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또한 고려서원이 시편찬송을 지속적으로 보급, 출판하기로 한 한국교회 성도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감사하고 기쁩니다. 이 시편찬송을 부르는 교회와 가정마다 참된 예배와 찬양의 정신을 배우며 하나님의 이름에 큰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2004년 7월

      발행인 송용조

      (양의문교회 담임목사, 계약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항공사에서 잘 말 해주지 않는 열가지


       항공사에서 고객들에게 잘 말해주지 않는 비밀을 파일럿들이 털어 놓았는데

      상당히 흥미로워 번역해서 올립니다.

      이 글은 주로 미국 비행기 조종사들이 이야기 한것이기에

      한국 항공사 실정과 다를수 있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1. 비행기에서 커피나 차를 마시지 마세요 !

      커피나 홍차를 마시면서 좀 이상한 냄새 난다고 생각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 이유는 비행기 물탱크에 여러가지 화학약품이 첨가 되기 때문입니다.

      각종 박테리아 혹은 미생물이 자라지 못하기 위함이지만

      그많은 화학 약품을 마실 이유가 없지않습니까?

      비행기 안에서는 병물이나 캔에 든 것만 마시는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2. 9/11 사건 이후

      우리 파일럿 중에서 상당수는 총기를 차고 있습니다.

      그러나 겁먹거나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총기 소지자는 엄격한 훈련과 함께 안전 수칙을 잘 지키니까요

       

      airplane-seatbelt-sign-shutterstock.jpg

       

      3. 저희들(파일럿)이 “안전띠” 매라는 경고등을 켠후 깜빡 잊고

      끄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 합니다. ^^::

      운항하는 내내 안전띠 경고등을 켜두는 파일럿도 있구요.

      진짜로 안전띠를 매야 할 경우는 승무원들도 앉아서 안전띠를 하라” 

      는 방송이 나올때 입니다.

      그때는 즉시 안전띠를 메고 자리에 앉으시는게 좋습니다.

      분명히 기체가 많이 흔들릴 것입니다

       

      4. 우리 파일럿들은 매우 지쳐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16시간 동안 쉬지않고 계속 일해도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버스나 트럭 운전수들보다 훨씬 열악한 근무조건인 셈이죠.

      트럭 운전수는 다음 검문소에서 조사 할수 있지만,

      하늘 위에서는 아무도 우리를 체크를 하지 않습니다….

       

      5. 또한가지 웃기는 규칙을 이야기 해 드릴까요?.

      일만m 상공에서 시속 800km로 날때는 안전띠를 매지 않아도 되지만,

      지상에 내려와서 시속 10km로 기어가고 있을때는 승무원이나 

      승객 모두 안전띠를 매고 있어야 한다는 규정이 웃기지 않습니까?^^


      plane

      비행기에 번개가 내리쳐 관통하고 있는 사진.

       

      6. 번개 치는것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비행도중 2번이나 벼락에 맞았습니다.

      벽락을 맞으면 큰 굉음과 함께 번쩍이는 빛을 보게 될것입니다.

      모든 비행기는 벼락을 맞더라도 안전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파일럿샬롯 NC>

       

      7. 비행기 안에서 가장 흔들리지 않는곳은 날개 옆 자리입니다.

      비행기는 시소 같아서 앞쪽과 뒷쪽이 더 심하게 흔들립니다.

      가장 심하게 흔들리는 곳은 맨 뒷쪽입니다

      그러나 날개 바로 옆 자리는 엔진소리 때문에 좀 더 시끄럽기는 합니다.

       

      8. 비행기가 흔들리는것 때문에 항공여행을 두려워하는 분들이 있으신가요?

      그런 분들은 가능하면 아침 비행기를 타세요.

      오후가 될수록 땅이 뜨거워져 이상기류 현상이 더 자주 일어납니다.

      폭풍도 오후에 더 많이 일어나는 편입니다.

      <제리 잔슨파일럿>

       

      9. 비행기를 타고 나서 병에 걸리는 진짜 이유는?

      비행기를 타고나서 병에 걸리는 대부분의 이유는 실내공기 때문이 아니라 

      만지는  때문입니다.  우리가 화장실은 소독을 합니다만,

      앞의 식탁 테이블 같은 곳은 매번 소독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곳에서 병이 전염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습니다.

      일회용 알코홀 종이를 준비했다가 탑승후 식탁과 주위를 알코홀 솜으로 

      닦으면 도움이 될듯합니다.

      또 필자의 경우 물에 젖은 마스크 착용이 큰 도움이 됩니다.

      특히 코속이 쉽게 마르는 분들에게는 도움이 될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비행기 실내 공기는 매우 건조한 편입니다.

       

      10. ”방금 비행기 엔진 하나가 멈추었습니다”

      이런 방송안내를 듣게 될 확율은 거의 없습니다.

      엔진이 멈추는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객기의 엔진 하나가 멈춘다해도 나는데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만일 엔진 하나가 멈춘다면여러분은 이런 안내방송을 듣게 될것입니다.

      엔진 하나에 약간의 이상이 감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책임 (아더 핑크)

      그리스도께서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과
      그 한 강도는 주님을 영접하고 다른 강도는 주님을 거절한
      사실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은 하
      나님의 절대 주권에 관한 것입니다. 그 두 행악자들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들은 꼭 같이 그리스도 곁에 있
      었습니다. 그들은 둘 다 이 죽음의 6시간 동안에 일어난 모
      든 것을 보고 들었습니다. 둘 다 악명 높은 죄인들이었습니
      다.

      둘 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둘 다 죽
      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절박하게 요구되는 것은 사죄
      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하나는 강퍅하고 완악해서 그가
      이 때까지 살아오던 대로 죄 가운데서 죽었고 다른 하나는
      자기의 사악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그에게
      자비를 구하여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얼마나 잘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날에도 이와 꼭 같은 일들을 봅니다.
      아주 동일한 환경과 조건 하에서도 한 사람은 녹아지나
      다른 사람은 마음이 굳어진 채로 남아 있습니다.

       

      동일한 설교를 듣고 서도 한 사람은 무관심하나
      다른 사람은 눈이 떠져서 자신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고 하나님의 자비를 간절히 구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복음이 밝히 드러나 있으나 다른 사람에
      게는 복음이 감취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에 대하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하는 것이 하나
      님의 보시기에 선하셨기 때문이다”라는 사실 뿐입니다. 그
      러나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결코 인간의 책임을 파괴하지
      아니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모두 성경에 분명히 밝혀져
      있습니다.

       

      우리가 이 두 가지 사실을 이해할 수 있든지 없든지,
      또 서로 모순되지 않게 조화시킬 수 있든지 없든지 간에
      두 가지 사실을 모두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할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할 때 우리의 청중들에게 대해서 우리 자신이
      모순에 빠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된단 말입니까? 지금 고인이 된 스펄전은
      디모데전서 2:3,4에 관한 설교에서 성경 본문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내가 또 알기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그의 독생자를 믿지 아니한다면
      그 중 아무도 구원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이는 그가 거듭 거듭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구원하지 아니하시겠다고
      밝히셨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알고 있는 바로는 하나님께서 온 마음을 다하여
      자기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 외에는
      결코 아무도 구원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또 내가 알기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소유된 백성이 있어서
      그 백성을 구원하시되 그의 영원하신 사랑으로 만세 전에
      택정하사 그의 무한하신 권능으로 그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나는 이 두 사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는 모릅니다.
      그것은 내가 모르는 일들 가운데 또 하나의 것입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설교가 중의 대 설교가는 또 말하기를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항상 설
      교해오던 것을 앞으로도 계속하여 설교할 것이며 내가 하
      나님 말씀의 어느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일치시킬 수 있든
      지 없든지 간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 그대로 전파할 것입니
      다”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인
      간의 책임을 무너뜨리지 아니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뭇 영혼들을 구원하실 목적으로
      지정하신 모든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베푸시는 은혜는 값없이 거저 주시는 것이며
      그의 구원에의 부르심은 “믿는 자 마다” 모두에게
      넉넉히 해당될 만큼 넓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를 아무도 거저 돌려보내지 아니하시며
      다 영접하여 들이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하고, 심고, 물을 준 후에 “자라나게 하시
      는 이는” 오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로 그의
      절대 주권적인 뜻을 이루시는 가장 큰 기쁨을 삼으십니다.


      가상칠언강해 - 아더 W. 핑크/개혁주의마을
      


      관점, 계획, 실행, 구조, 경영, 개선 - Tony Morgan


      올란 헨드릭스라는 분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전략적 사고는 마치 샤워하는 것과 같아서, 당신은 반드시 지속해야만 한다." 많은 교회들이 장단기 목표들을 계획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속적인 진행과정의 부재로, 쉽게 정체되거나, 예전에 했던 방법대로 돌아가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략적 가동 계획들은 미션과 비전과 핵심 전략들을 명확하게 해 줄뿐 아니라, 올바른 조직구조를 만들어 주고, 우선적인 실행시작을 통해 전략적 가동 계획들의 당위성을 입증해 주는 것이죠.
      전략적 사고의 진행과정은 원의 모양처럼 계속적으로 이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Fast Company(J. Crew)의 5월호 내용에서 Dani......... 전체 내용보기



         
      
      사랑해요, 당신을...
                               최송연             
      사랑해요, 당신을... 
      내 영혼 속에 
      생명을 심으신 주님이기에
      온 맘 다해 당신을 사모합니다
      
      사랑해요, 당신을...
      내 마음속에
      햇살 같은 은총으로
      머물러 계신 주님이기에
      슬픔이 변하여 찬송이 흐릅니다
      
      나의 인생길에
      고난이 狂風 같이 밀려들고
      많은 환난이 빗물처럼 쏟아지나
      늘 깨어 지키시는 주님이기에
      두려움 대신 소망의 빛 반짝입니다
      
      (시 121: 1-6잘 참조)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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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긍정적 사고의 승리자

        일부러
        아픔의 쓴 잔을 마시는 사람이 없고
        고통의 불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려움을 딛고 선 사람이 크게 되며,
        고통을 겪어 본 사람이 성공한다고 해서
        일부러 그런 힘듦을 겪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삶의 길은 순탄치가 않아서
        수고를 하고 역경을 만나지만, 그 때마다
        이길 힘을 기르며 인내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처지에 처했을 때
        용기를 갖고 기운을 차리라는 주위의 말은
        포기하지 말고 새롭게 정진하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이김의 기술들이 내 안에 축적되어
        자신만의 생에 대한 노하우가 생기고
        삶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나약해질 수 있으며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사고이며 마음입니다.

        긍정의 시각이든 부정의 시각이든
        판단의 차원은 끝까지의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부정의 시각으로 생각한 사람은
        생각의 끝에서 절망쪽을 선택하며

        긍정의 시각으로 생각한 사람은
        생각의 끝에서 희망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겪어도 겪어도
        힘듦만이 엄습하기만 할 때,
        모든것을 다 놓아버리고 싶겠지만
        긍정적 시각으로 생각을 해야합니다.

        그러함이 다시 일어서게 하고
        쓰러지려는 자신을 세울 수 있습니다.

        긍정적 사고가 승리자를 만드는 길입니다.


        - 이장익의 '삶을 이기는 기술' 中


        Gabriel.S Oboe


        장운동에 좋은 음식 - 숙변제거 방법 - 쾌변하는 법

         

         

         

         

         

        변비, 가스가 차는 증상이 있으신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장운동에 좋은 음식,

        숙변제거방법, 쾌변하는 법 포스팅입니다.



        서구화된 식습관과 잦은 인스턴트 음식 섭취, 스트레스 등으로 인해 변비,

        뱃속이 더부룩하면서 가스가 차는 증상 등으로 말 못할 고민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숙변제거, 쾌변을 하지 못하면 얼굴 트러블이나 여드름 기미등이 쉽게 생길 수 있고,

        두통, 소화불량 등의 증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장운동에 좋은 음식으로 숙변제거방법, 쾌변하는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파프리카 -

        장운동에 좋은음식, 숙변제거 방법,쾌변하는법



        파프리카에는~

        비타민, 식이섬유, 수분 등이 풍부하게 들어있어

        파프리카1개와 사과1개를 녹즙기나 믹서기로

        갈아 드시면 장운동을 원활하게 해 숙변제거와

        쾌변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 고구마 - 장운동에 좋은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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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마에는 식이섬유와 섬유소가 풍부하게

        들어있어 변비해소에 도움이 되며,

        장운동을 활발하게 해 주는 장운동에

        좋은 음식입니다.



        고구마껍질에있는 세라핀성분은 변통을

        부드럽게 해 주기 때문에 고구마를 드실때

        껍질째 먹는것이 숙변제거방법, 쾌변하는법 입니다.









        ■ 요구르트 - 장운동에 좋은 음식,

        숙변제거방법, 쾌변하는법



        요구르트에는 장에 좋은 유산균들이 많이 들어있어

        장속에 좋은 균을 늘려 장운동을 활발하게 하는

        숙변제거음식, 장운동에 좋은 음식입니다.



        요구르트로 효과를 보시기 위해서는 날마다

        꾸준히 드셔야 효과를 보실 수 있습니다.









        ■ 사과 - 장운동에 좋은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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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과에 풍부하게 들어있는 팩틴성분은 장운동을

        활발하게 해 주는 효능이 있고,

        장벽을 보호해 숙변제거와 변비를 해소해주는

        장운동에 좋은음식입니다.



        사과를 드실땐 껍질까지 같이 드시는것이 좋으며, 아침공복에 드셔야 쾌변과 숙변제거 효과를 보기 좋습니다.








        ■ 당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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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근에는 식이섬유가 풍부하게 들어있어

        장운동과 숙변제거 효과와 장운동을 활발하게

        해주고, 비피더스균을 활성화시키는 성분도

        들어있어 당근을 꾸준히 먹는 것도 숙변제거방법,

        장운동에 좋은음식입니다.










        ■ 바나나 - 장운동에좋은음식, 숙변제거방법, 쾌변하는법



        바나나에는 식이섬유가 풍부하게 들어있어 장운동을 활발하게 해 주는 장운동에 좋은 음식입니다.














        ■ 팥 - 장운동에좋은음식, 숙변제거방법, 쾌변하는법



        팥은 장운동을 활발하게 해 주어 숙변제거 및

        쾌변 효과가 있는 장운동에 좋은 음식입니다.











        ■ 청국장 - 장운동에 좋은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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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국장은 요구르트보다 발효균이 100배이상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어 장운동을 활발하게 해

        숙변제거와 쾌변을 도와 변비를 없애주는

        장운동에 좋은 음식입니다.










        ■ 우유 - 장운동에좋은음식, 숙변제거방법,

        쾌변하는법



        공복에 찬 우유를 마시게 되면 장의 연동운동이

        활발해지는숙변제거방법, 장운동에 좋은 음식입니다.










        ■ 다시마 - 장운동에좋은음식, 숙변제거 방법,

        쾌변하는 법



        다시마에 풍부하게 들어 있는 섬유질은 장내에

        노폐물이 머무르는 시간을 단축시켜 빠르게

        배출하는 효과가 있는 장운동에 좋은 음식,

        숙변제거와 쾌변에 도움이 되는 음식입니다.





        ■ 블루베리 - 장운동에좋은음식, 숙변제거방법,

        쾌변하는 법



        블루베리 1개에는 바나나의 2.5배에 달하는

        식물유지가 들어 있어 장내에 생기는 유해물질을

        차단해 변비, 대장암, 장운동에 좋은 식품입니다.


         

         


        예지와 작정의 관계 / 아더 핑크

        우리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또 한 가지 사실은, 앞서 인용한 처음 두 말씀이 하나님의 예지는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사도행전 2장23절을 다시 보자.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첫째,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둘째, ‘미리 아신대로’ 내어주신 바 되었다. 예지의 토대는 하나님의 작정이다.

        로마서 8장29절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구절은 바로 앞 구절과 긴밀히 연결된다. 그러면 바로 앞 구절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예지는 그분의 작정, 또는 목적에 근거한다(시2:7).

        하나님이 미래의 일을 아시는 이유는 스스로 그 일을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미리 아신 것 때문에 그들을 선택하셨다는 주장은 본말을 전도하는 것이자 성경의 순서를 거꾸로 뒤집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택하셨기 때문에 미리 아신다고 말해야 정확하다. 선택의 근거나 이유는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서 비롯한다.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기로 결정하신 이유는 그들 안에 선한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분의 기쁘신 뜻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왜 선택하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눅10:21)라고 고백할 따름이다.

        로마서 8장29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일부 죄인을 골라내어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다고 가르친다(살후2:13 참조).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는 문구를 보면 그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신 것이 아니라,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 미리 정하신 이들을 “미리 아셨다(즉, 사랑하고 선택하셨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은 것은 예지, 예정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하나님은 죄인이 믿을 것을 아시고 그를 선택하지 않으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 전에는 그 어떤 죄인도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이 눈을 열어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시력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보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을 사용한 결과이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엡2:8,9). 믿는 것은 그 선물을 사용한 결과이다. 하나님이 특정한 사람들이 믿을 것을 아시고 구원을 베풀기로 작정하셨다면 믿는 것이 선물이 아니라 공로가 되며, 그런 경우에 구원받은 죄인은 ‘자랑할’ 빌미를 갖게 된다. 하지만 성경은 구원을 자신의 공로로 자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한다(엡2:9).

        성경에 따르면 믿음은 공로가 아니다. 성경은 신자들을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행18:27)이라고 정의한다. 은혜로 믿음을 갖게 되었다면 믿음은 공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또 믿음이 공로가 아니라면 선택의 이유나 근거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나 우리 자신으로부터 비롯하지 않는다.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달려 있다. 로마서 11장 5절은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라고 말한다. 이처럼 선택은 은혜이고, 은혜는 공로와 무관한 선물, 곧 우리가 하나님께 달라고 주장할 수 없는 순수한 선물이다.

        지금까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예지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예지를 잘못 이해하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생각을 고집할 수밖에 없다. 흔히 통용되고 있는 예지의 개념은 전적으로 부당하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결말을 꿰뚫고 계실 뿐 아니라 영원 전부터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결정하시고, 예정하셨다. 원인이 결과에 선행하듯이 하나님의 작정이 예지에 선행한다.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창세전에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엡1:4).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우리가 믿을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선택하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신앙의 본성을 타고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찬양과 영광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의 공로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행18:27) 믿음을 갖게 되었고, “은혜로”(롬11:5) 선택을 받았다.


        아더 핑크의 [네 하나님을 알라] 책의 4장.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에서 일부 발췌
        출처: 생명나무 쉼터 http://blog.daum.net/7gnak/1572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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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 설 임

        2월의 어느 날 오후에 우리 부부는 칠전마을에 전도를 하러 갔다. 칠전마을을 순 토박이말로 옻밭골이라고 한다. 그 마을이름의 발음이 너무 어려워서 처음에 쉬 알아듣는 사람이 드물다. 시골사람들이야 그러려니 하고 정확한 뜻을 모르고도 잘사는데 도시에서 이사 온 지식인인 어느 성도는 그 동네 이름의 뜻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 봉고차를 타고 그 동네를 지나면서 말했다.

        “오빠꿀이 무슨 뜻입니까? 꿀이 많이 난다는 뜻입니까? 옛날에 어느 오빠와 여동생 사이에 관련된 무슨 이야기가 있습니까? 강원도의 달래강처럼요.”

        설명 잘하는 내가 말했다. “아~, 오빠꿀이 아니고요, 정확히 말하자면 한자로 칠이라는 뜻의 옻, 터라는 뜻의 밭, 고을이 줄어서 골이 된 것들이 합쳐진 것인데 모음의 발음법칙에 의해 골이 굴로 발음되어 그런 거예요. 정확히 옻밭골이죠. 그리하여 한자어로 칠전마을인 거죠. 그래서 행정구역상으로 이 마을을 칠전마을이라 한답니다. 마을이 커서 둘로 나누어 큰 동네를 대칠, 작은 동네를 소칠이라고 하지요.”그제서야 그 집사님은 껄껄껄 웃으면서 “오빠꿀, 옻밭골”이라고 되뇌었다.

        그 마을은 대칠, 소칠이라고 나뉘어 이장님도 두 분이 계시지만 외부 사람들의 눈에는 사실은 경계가 모호하여 한동네로 보인다. 우리는 그 동네를 갈 때마다 구분 없이 동네를 빙 돌며 전도를 한다. 마을회관도 하나 있다. 누군가는 그 마을이 전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이요 가장 살고 싶은 마을이라고 했다.

        그 동네에는 우리가 부임하던 즈음에는 성도의 가정이 한 가정이었다. 그 동네에 남묘호렌게쿄를 외우는 종교에 심취한 할머니가 있어서 마을의 많은 할머니들에게 포교를 하여 기독교가 힘을 잃고 있었던 탓이다. 시골의 할머니들은 자식들이 잘되는 것이 최고의 삶의 목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종교는 그것을 간파하여 할머니들의 마음에 호소해서 남묘호렌게쿄라고 수없이 외우면 자식들이 잘된다고 하여 상당히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믿는 사람들이나 마을의 그 어느 누구도 남묘호렌게쿄가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실은 발음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아 사람들은 남묘호랑개교라고 하다가 그것도 어려워 호랭이교라고 부른다. 그리하여 나는 인터넷에서 그 말의 뜻을 찾아보았다.

        남묘호렌게쿄는 종교 이름이 아니고 그들이 외우는 주문이다. 여기서 남묘(南無)는 우리가 흔히 듣는 나무아미타불이라 할 때의 나무와 같은 말로 어디에 귀의한다는 불교용어이다. 호렌게쿄(妙法蓮華經)는 우리말로 묘법연화경으로, 일명 법화경이라고 많이 쓰인다. 법화경은 화엄경과 더불어 불교의 최고 경전으로 가장 넓은 지역과 많은 민족들에 의해서 애호되는 대승경전 중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는 한 마디로 법화경에 귀의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주문을 외우는 종교는 바로 일본에 본부를 둔 SGI(Soka Gakkai International/국제창가학회)이다. 국제창가학회는 1279년 일본의 니치렌 쇼슈[日蓮正宗]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도들에 의하여 시작된 신흥불교의 한 파로서 1931년 다이세키사[大石寺:일련종의 총본산]에서 하계강습회를 갖는 등,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에 2대 회장 도다 조세이[戶田城聖]는 명칭을 창가학회로 개칭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한국에는 8‧15 광복 후 일본에 살던 교포들의 귀국과 함께 전파되어 대구 출신 최규항(崔圭恒)이 일련정종 한국신도회(日蓮正宗韓國信徒會)라는 이름으로 포교를 시작하였다.

        지금은 SGI 한국 불교회로부르고 있으며 약 100만 명 이상의 회원이 있다고 한다. 니치렌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공덕에 대해서 "한 번 ‘남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 라고 봉창하면 일체 중생의 심중의 불성을 오직 한마디로 불러 나타내는 공덕이 무량무변하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 문장의 뜻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본래 갖추어지는 부처의 생명을 불러서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종교는 불교의 한 종파이다. 그러나 칠전마을의 어느 누구도 그것이 불교의 한 종파인 줄을 알고 믿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나도 지금까지 일본에서 건너 온 사이비 종교인 줄 알았다. 연예인 중에서도 신도들이 여럿 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를 열심히 외우면 세 가지 소원이 이루어지는데 자기는 벌써 두 가지 소원은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마을의 어떤 할머니도 자기는 몸이 아주 안 좋았는데 날마다 그 주문을 외웠더니 몸이 많이 좋아졌다고 자랑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한 기복사상이 때로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에 영생은 없으며 죄문제를 해결할 방도 또한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방도가 없음을 재차 확신한다.

        칠전마을에 전도를 나가면 맨 먼저 마을회관을 방문한다. 농한기의 시골에서는 대부분의 할머니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지내므로 그들을 만나려면 마을회관으로 직행해야 한다. 자녀들도 어머니를 찾아 올 때면 마을회관에 가야 만날 수 있다. 자녀들이 올 때 빈손으로 오지 않고 과일이니 과자니 음료수 등을 사오니 마을회관에는 간식이 풍성하다.

        그날도 우리는 마을회관에 갔다. 6명의 할머니들이 있었다. 그 중 두 명은 남묘호렌게쿄 신도이고, 한 명은 우리 교회 집사님이고, 한 명은 불가지론자, 즉 절대로 아무 것도 믿지 않겠다고 못을 박는 할머니이고, 다른 두 명의 할머니들은 조금 마음이 부드러워 목사님이 전해주는 복음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할머니들이었다.

        목사님은 전도지를 가지고 복음을 설명했다. 오〇〇 할머니는 5년 전부터 목사님과 인연을 맺은 분이다. 5년 전에 그 마을에 가가호호 방문전도를 나갔을 때 어느 집에서 그 할머니를 처음 만났다. 그 할머니는 마침 일 년 전에 돌아가신 남편이 예수병원에서 마지막 가는 길에 간호사의 전도를 받고 돌아가시기 직전에 영접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국에 갔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할머니도 할아버지를 만나려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했더니 믿고는 싶지만 아직은 교회 나갈 때가 아니라면서 미뤘다. 그 후에도 수차례 방문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강권했다. 교회에 나올 듯 나올 듯 하면서 아직까지도 안 나오고 망설이고만 계신다.

        그날도 복음을 제시할 때는 “다 맞는 말이지요”하면서도 “그럼 이번 주일부터 교회 나오세요”하고 권하니 “10년만 더 기다려 줘요”라고 한다. 주변에서 다른 할머니들이 “자네가 그때까지 살아있겠어?”라고 핀잔을 한다. 그리하여 목사님이 “제가 지금까지 5년 기다렸습니다. 이제 그만 망설이시고 이번 주일부터 나오세요. 한 번 나오기가 힘들지, 나오고 나면 내가 왜 망설였던고 하고 후회한답니다”라고 권했다. 그때 작년 이맘때 망설이다가 막내아들의 열성적인 강권으로 교회 다니기 시작하여 벌써 집사님이 되신 송 집사님이 말했다.

        “나도 이제야 후회가 된다니께. 막내아들이 몇 년 전부터 교회 나가라고 할 때 다녔더라면 지금쯤은 찬송도 잘 부르고 성경도 잘 찾을 텐데, 너무 늦어서 찬송은 이제 겨우 찾겠는데 성경은 도무지 찾질 못하겠다니까. 자네도 그만 망설이고 빨리 나랑 같이 교회 다니자구. 어이, 〇〇떡(댁)! 주일날 나랑 같이 교회 가더라고잉.”

        송 집사님은 작년 2월에 막내아들이 교회로 찾아와서 어머니를 부탁했다. 그날 바로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아들과 목사님이 신앙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것을 듣고 나서 그 자리에서 목사님이 강제로 손가락을 걸며 손가락도장을 찍으며 재미있게 약속을 했다. 순진하신 할머니는 그 약속을 어길 수 없어 다음 주일부터 교회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쑥스럽고 어색하여 구석 자리의 안 보이는 곳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말씀을 듣는 건지 안 듣는 건지 존재감 없이 몇 달을 다니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고개를 들고 눈을 반짝이며 말씀을 듣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서 역사하는 것을 실감했다. 그분은 점점 더 믿음이 자랐다. 세례를 받을 때는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막내아들에게 연락을 했다.

        막내아들며느리는 시골 할머니에게는 분에 넘치게 큰 꽃다발을 사 들고 교회를 찾아왔다. 그런데 할머니가 일주일 앞선 날짜를 알려주었던 모양이었다. 꽃다발을 들고 교회를 온 젊은 부부를 보고 나는 감을 잡았다. 내가 예배 전에 며느리에게 조용히 말했다.“집사님, 세례식은 다음 주일인데요. 어머니께서 광고를 잘못 들으셨나보네요.”“아~, 어쩌지? 포항에서 다음 주에 다시 오기도 힘들고…… 사모님, 수고스럽겠지만 다음 주에 우리 어머니 세례 받는 장면을 사진 찍어서 제 메일로 보내주세요.”

        그리하여 처음으로 세례식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었다. 그리고 나서 2013년 첫 주일에는 연세도 들고 해서 집사님으로 임명하기로 했더니 그 아들 부부가 매우 좋아하며 전화를 했다.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집사님이 되시다니…… 꿈만 같아요. 너무 고맙습니다, 목사님, 사모님.”

        송 집사님도 수년 전부터 막내아들부부가 어머니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면서 전화로 혹은 집에 올 때마다 강권했다고 한다. 확인할 때마다 “곧 나가마”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불교를 믿고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내며 살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 너무 겁도 나고 쑥스러워서 망설이고 망설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번 나가보니 괜히 겁냈구나, 싶고 일 년이 지난 지금은 일찍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는 얘기를 하게 된 것이다.

        목사님은 마을회관을 나오면서 오 할머니에게 다시 부탁을 했다.

        “빨리 나오세요, 너무 늦기 전에요.”

        “목사님, 염려 마시랑게요. 내가 그럼, 5년 넘지 않아서 나가도록 할게요.”

        “5년 기다리는 것은 너무 길어요. 할머니 연세가 올해 84세인데 5년까지 살아계실지 장담하세요?”

        “장담 못하지. 늙은이가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어찌 알겠누?”

        “그것 보세요. 그러니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 믿어야지 예수 안 믿고 돌아가시면 지옥에 갑니다. 그럼 사랑하는 할아버지도 못 만나게 됩니다. 지옥은 성경에서 뜨거운 불못이라고 표현했어요. 그런 데서 영원히 살고 싶으세요?”

        “하지만, 이 마음에서 우러나야 가는 거지. 아직은 안 우러나는 걸 어쩌누?”

        안타까운 일이다. 믿음은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니 억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사람은 자유의지가 주어졌으니 자기의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예수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불러야 하는 것이다. 마음이 우러나지 않는다는데 어찌하랴. 우리는 기도하며 기다릴 뿐이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양애옥 사모

        
        

            그래서 나는 행복합니다   



            전에는 남편 때문에 내가 힘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나 때문에 남편이 얼마나 힘들까를 생각합니다
            전에는 내가 참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남편도 많이 참는구나 생각합니다
            전에는 남편을 다른 사람과 비교했습니다
            이제는 남편을 창조적으로 바라봅니다
            전에는 남편이 특이한 사람이라 생각했습다
            이제는 남편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에는 참고 살았지만
            이제는 잘 싸우며 삽니다
            전에는 남편이 전화 안해줘서 섭섭했는데
            이제는 남편이 나를 믿기 때문이라 해석합니다
            전에는 남편을 직분으로 평가했는데(집사가 그럴수가?)
            이제는 남편을 사람으로 봅니다(사람이니까 그럴수도!)
            전에는 농담을 부정적 의미로 느꼈는데
            이제는 재치로 해석합니다
            전에는 친정이 우리집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시댁이 우리집, 친정을 남편의 처갓집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넘편을 미워했는데
            이제는 남편을 불쌍히 여기며 삽니다
            전에는 아이들이 우선 순위였는데
            이제는 넘편이 우선 순위가 되었고
            전에는 남편을 내편 만들려고 엄청 노력했는데
            이제는 남편은 남편으로 나는 여편으로 삽니다
            전에는 남편에게 집중했던 마음이었는데
            이제는 나에게 집중하며 삽니다
            전에는 남편을 사랑하려고 노력했지만
            이제는 나를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전에는 남편이 적용 한 해 속상했는데
            이제는 나에게만 적용합니다
            전에는 남편이 돈벌어 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남편에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전에는 남편이 가해자이고 내가 피해자였는데
            이제는 남편도 나로 인한 피해자임을 알고 삽니다
            전에는 내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남편도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전에는 당신이 나를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내가 남편을 사랑해야할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합니다

            우린 어차피 함께 걸어야 할 인생이니까요.

             

             



            작자미상

            최송연의 목양연가 "은혜의 단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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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② 장신대 김명용 총장 "요한계시록 14만4천은 희망의 숫자"

          2013/06/04 (화) 13:17 ㆍ추천: 0  ㆍ조회: 27      

          뉴욕교협(회장 김종훈 목사)은 한국 장신대 총장 김명용 교수를 초청하여 요한계시록 세미나를 열었다. 세미나는 사회 현영갑 목사(총무), 기도 최창섭 목사(이단대책위원장), 강사 소개 김종훈 목사(회장)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2번째 강의내용이다.


          ▲한국 장신대 총장 김명용 교수

          3년반과 7년 대환란

          요한계시록에는 등장하고 있는 역사와 신학적인 것을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하기 위해서 '3년반'이라는 숫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3년반이라는 숫자를 잘못 이해하여 7년 대환란 이론을 만든 사람이 있다. 역사의 마지막에 7년간은 대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데 요한계시록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요한계시록 11:2(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에 나오는 마흔두 달이 3년반이다.

          요한계시록 12:13-14(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 그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으매)을 보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라는 내용이 나온다. 때가 1년이다. 그러면 '1년과 2년과 반년'이므로 3년반이 된다.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3년반과 12장에 나오는 3년반을 함께 엮어서 두개를 합해 7년이라고 해서 '7년 대환란' 이론을 만든 분들이 있다. 역사의 마지막에 가면 7년간 대환란이 일어날 것이기에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고 다미선교회 이장림 목사과 그 그룹, 그리고 세대주의자들이 많이 이야기를 했다.

          '7년 대환란'에서 앞의 3년반은 전 환란시대이고 뒤의 3년반은 후 환란시대라고 해서, 앞은 복음이 전파되는 시기이고 뒤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 시기이라고 주장을 했다.

          다미선교회 이장림

          이장림 목사가 나중에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조사를 하다보니 휴거가 일어난다는 날의 뒤에 사용할 예금통장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검찰에서 완전히 사기꾼이라고 발표해서 신문에도 대문짝하게 났다. 본인이 이날 휴거가 일어난다고 했으면 그 다음에 쓸 예금통장이 있으면 안된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이장림이 사기꾼이라는 생각을 안했다. 세대주의자들의 전/후 환란시대 이론을 생각하면 그렇다. 세대주의 이론에 의하면 휴거가 일어나고 7년간 대환란중 전 환란시대에는 복음이 전파된다. 만약에 후 환란시대에 사용할수 있는 예금통장이 있었다면 이장림 목사는 100% 사기꾼이다. 그런데 전 환란시대에 쓸 수 있도록 통장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는 순간 완벽하게 세대주의의 잘못된 사고에 빠진 이장림 목사가 전 환란시대에는 복음이 전파된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그때에 휴거를 못했다면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파하다가 죽을 것이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했을 것이라는 느낌이 왔다. 검찰에서 저에게 조언을 해 달라고 했다면 이장림 목사가 사기꾼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물론 엉터리 이단은 틀림없지만 이장림 목사는 신학적인 이단이다.

          7년 대환란 이론의 문제점

          그런데 세대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7년 대환란 이론은 세계신학계에서 보면 참 우스운 이론이다. 그런데도 믿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세대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7년 대환란 이론을 믿었을때 일어나는 큰 문제는 역사에 대한 비관주의가 생겨난다. 그 이유는 역사가 자꾸 나빠져서 마귀가 지배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7년간의 대환란이 일어나 세계가 전부 마귀가 지배하는 세계가 된다는 것이다.

          7년 대환란 이론을 가지게 되면 역사에 대한 비관주의가 자동적으로 따라온다. 역사에 대한 비관주의를 가졌을때 일어나는 교계의 가장 큰 문제는 교회의 사회적 역사적인 책임이다. 바로 거기에서 부터 흔들려 버린다. 역사를 개혁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 거기에서 수포가 돌아간다. 왜냐하면 역사는 마귀의 세상이 되도록 운명되어져 있기에 역사를 개혁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다는 것이 말도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려고 하는, 교회에 아주 중요한 하나님 나라 신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이 정신이 7년 대환란 이론 때문에 완전히 파괴된다.

          7년 대환란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잘못된 것이다. 역사의 마지막에 7년동안 이런것이 있을 것이라는 말세론 사고가 영향을 미치면서 잘못된 이론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교회의 사회적 역사적 책임에 결정적인 암적 요소로 등장되었다. 지금도 이 이론을 믿고 있는 사람은 사회적 역사적인 책임에 속을수 밖에 없다.

          3년반이라는 무엇인가

          요한계시록에서 3년반이라는 숫자가 나오면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 3년반은 마귀가 통치하는 통치기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숫자이다. 666을 잘못 이해하는 분들은 6이 마귀의 수라고 하는데 전혀 그것과 관계가 없다.

          요한계시록에서 마귀와 연결되는 숫자는 3년반이라는 숫자이다. 요한계시록 11장과 12장에 3년반이 나오는데 이 두개를 합치면 안된다. 세대주의자들이 요한계시록 11장 3년반과 12장의 3년반을 합해서 만든 7년 대환란이라는 이론은 세대주의자들 자기들 머리속에서 만든 이론이 불과하다. 요한 계시록을 쓴 요한의 머리속에 들어있는 이론이 아니다.

          그러면 3년반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유대 묵시문학의 가장 맏형격인 다니엘서로 올라가 보아야 한다. 묵시문학의 전통속에 3년반이라는 숫자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구약의 다니엘서 7:25-26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그러나 심판이 시작되면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완전히 멸망할 것이요 / 다니엘서 7:25-26

          구약에서도 나오는 3년반

          구약의 다니엘서에도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가 나온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표현이 이미 구약의 다니엘서에서 정확하게 나오고 있는 것이다. 박해기의 책인 묵시문학에서 다니엘서가 제일 먼저 등장하는 맏형격인 책이다.

          구약의 다니엘서는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4세의 박해와 관련되어 있다. 유대인들이 이름만 들어도 분노하고 그냥 산채로 맷돌에 갈아서 뼈를 마셔도 분이 안풀리는 존재가 둘이 있다. 하나는 유대인 6백만을 학살한 아돌프 히틀러이고 다른 한 사람이 안티오코스 4세이다. 다니엘서의 배경이 되는 통치자이다.

          안티오코스 4세는 유대종교를 뿌리뽑아야 겠다고 결심한 사람이다. 그래서 율법을 읽는 것을 금지시켰다. 율법을 읽다가 발각이 되면 죽였다. 또 할례를 금지시켰다. 유대인 남자아이가 출생하면 8일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는데 할례를 받기만 하면 죽였다. 할례를 집전한 제사장도 죽였다. 할례를 받은 아이의 아버지도 죽였으며, 어머니는 죽은 아이의 시체를 목에 걸고 다녀야 했다.

          유대인들이 가장 거룩하게 생각하는 곳이 성전이고, 가장 더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돼지이다. 안티오코스 4세는 유대종교를 철저하게 짓밟아야 겠다는 생각으로 돼지 떼로 몰고 성전에 들어가게 했다. 성전에서 가장 거룩한 제단앞에서 돼지를 죽여서 피를 제단에 부렸다.

          유대역사에 이렇게 하나님의 성전이 모욕을 당한적이 없다. 이 시대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한다. 믿음을 고백하다가 처형을 당하고, 믿음을 고백하면 그 자리에서 혀를 뽑았다. 산채로 끓는 가마솥에 집어넣었다. 믿음을 지키는 7형제가 있다면 형제를 차례차례 죽였다.

          이 어마어마한 안티오코스 4세의 박해가 약 3년반 지속되다가 마카베오 형제의 영웅적인 저항으로 마침내 끝이 난다. 유대인에게 하누카 절기라는 것이 있는데 마카베오 형제들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이다. 안티오코스 박해의 종식을 기념하는 절기가 하누카 절기이다. 그런데 안티오코스 4세의 박해가 3년반 지속이 됐다. 3년반이라는 숫자가 여기에서 부터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박해기 문학인 묵시문학에서 3년반은 마귀가 통치하는 기간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안에 그대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3년반을 7년으로 만들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은 희망의 역사관

          3년반은 짧지도 길지도 않은 기간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나오는 3년반은 마귀가 통치하는 기간인데 짧은 기간은 아니지만 긴 기간도 아니다. 3년반은 뒤에 나오는 천년왕국과 대립되는 숫자이다. 마귀는 3년반동안 통치하는데 그리스도의 통치는 천년이 지속된다는 것이다.

          판단을 하려면 제대로 판단하라는 것이다. 3년반이라는 것은 도미시안 황제의 폭정, 마귀가 도미시안 황제의 권력을 사용해서 통치하고 있는 처참한 그 기간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머지 않는 장래에 주님께서 오시고 주의 나라는 천년이 지속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3년반은 잠시라는 개념과 서로 연결이 된다. 그 잠시라는 말은 영원과 대립되는 말이다. 마귀는 잠시 3년반동안 통치하지만 주의 나라는 천년이 지속되고 영원히 지속된다는 말이다. 요한계시록은 바로 이런 너무나도 중요한 역사관이 상징적인 표현이 되어서 대립되어 나타난다.

          그런데 3년반과 천년왕국, 잠시와 영원사이의 대립속에 요한계시록 안에는 아주 중요한 역사관이 들어있다. 요한계시록 역사관의 핵은 희망의 역사관이다. 많은 사람들은 특별히 세대주의자들은 요한계시록을 비관주의적 역사관의 증거로 사용하고 있는데 요한계시록을 굉장히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희망의 역사관의 증거이다.

          지금 현재가 비관적이다. 지금 현재 마귀가 지배하고 있다. 지금 현재를 보고 있으면 희망이 안보인다. 마귀가 황제의 권력을 사용해서 악을 행하는데 그곳에 무슨 희망이 보이겠는가. 그런데 희망이 하나도 없는 상황속에서 희망을 이야기 하는 책이 요한계시록이다. 마귀가 황제의 권력을 사용해서 악을 행한다 할지라도 역사의 진짜 주인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 마귀도 우리 주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곧 역사가 바뀐다고 말하는 것이다.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 역사가 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에서 왕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나타낸다.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읽으면 어마어마한 희망의 책이다.

          만델라의 예에서 보는 하나님의 역사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을 보면 참 존경스러운 것이 있다. 그분이 인종차별에 저항해서 일을 시작할때 정말 나라의 전체를 마귀가 지배하고 있었다. 정말 어둠의 세상이었다. 불의한 지배세력의 힘이 국가권력까지 사용해서 엄청나게 컸다. 만델라가 어두운 역사속으로 들어갔다. 감옥에 들어가 27년반을 보냈다.

          만델라가 김영삼 전 대통령과 만난적이 있다. 그때 김영삼이 "나는 가택연금되어 있었는데도 너무 힘들었다. 당신은 어떻게 27년반을 감옥에서 보낼수 있었는가"를 물었다. 만델라는 27년반동안 감옥에 있을수 있었던 비결은 맥주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감옥이 견디기 어려운 곳인데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일주일에 한번 맥주를 주었다. 만델라가 맥주를 기다기며 힘든 시간을 참고 이겼다는 것이다. 만델라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저 분이 참 힘든 세월을 보냈구나 하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만델라가 정말 맥주만 기다렸겠는가. 기도를 한 것이다.

          그런데 진짜 역사가 바뀌었다. 4년쯤 전에 영국에서 만델라 동상제막식이 있었다. 만델라가 참석한 가운데 영국의 당시 수상인 고든 브라운이 연설을 했다. 수상은 "만델라 당신이 감옥에 있을때 모든 영국사람들이 당신을 위해 싸웠다"고 말했다. 그 연설이 내 가슴을 쳤다. 감옥에 있는 만델라가 무슨 힘이 있었겠는가. 남아공 독재자들이 만델라를 죽일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못죽였는가. 하나님이 모든 영국사람을 불러 일으키시고, 세계 사람들을 불러 일으키셔서 만델라를 죽이지 못하도록 하셨다. 그렇게 세계가 외치니 남아공 독재자들이 만델라를 죽일수 없었다. 마침내 만델라는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등장한다. 흑백차별의 종지부를 찍고 민주주의와 정의를 완성한 위대한 대통령으로 등장한다.

          남아공의 기나긴 인종차별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만델라가 감옥에 있었던 그 기간은 짫은 기간인지 모른다. 고난을 받았지만 마침내 역사가 바뀌어지고 새 역사가 시작되었다. 만델라의 이름이 높아졌다. 이 땅에서만 만델라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도 만델라 이름은 영원토록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저는 교회가 희망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인재들을 길러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주님이 진짜 역사의 주인이시지 악이 아무리 강하도 할지라도, 마귀가 국가권력을 가지고 악을 행한다 할지라도 우리 주님이 진짜 역사의 주인이시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이 하고자 하는 말씀의 핵심이 그것이다.

          고난은 잠깐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라.

          저 짐승 그 뒤에 붉은 용이 있고, 로마황제의 모든 권력과 조직뒤에 마귀가 있는데 잠깐이라는 것이다. 우리 주님이 진짜 이 역사의 주인이시고, 너희가 진짜 이 역사속에서 왕이 될 것이며, 너희 이름이 찬란하게 빛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 요한계시록 11:3-4

          이것은 잘못 해석되는 아주 대표적인 본문이다. 여기에도 3년반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3년반은 마귀가 지배하는 통치기간이다. 두 감람나무가 신천지 선생님이나 전도관의 박태선 장로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바로 이런 역사적인 콘텍스트 속에서 그 당시 박해의 콘텍스트 속에서 이 본문을 읽어내야 한다.

          먼저 두 증인이 누구일가. 요한계시록 11:6의 내용을 보면 두증인이 엘리야와 모세이다,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는 틀림없이 엘리야이다.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는 모세이다. 두 증인이 엘리야와 모세인데 이 시대는 두 사람의 시대가 아니다. 바로 상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엘레야와 모세같은 하나님의 일꾼을 말하는 것이다. 박해상황 속에서 엘리야와 모세같은 하나님의 일꾼은 누구인가.

          모세와 엘리야는 적들과 큰 싸움을 했다. 어떻게 보면 힘없는 인간이 국가권력과 싸웠던 대표적인 성경적인 인물이 모세와 엘리야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큰싸움을 했듯이 지금 종말론적인 큰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두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 처럼 영웅적으로 싸우다가 죽어가는 순교자들을 말한다. 이 박해속에서 예언자적인 사명을 감당하다가 죽어가는 순교자들과 순교자들의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 요한 계시록 11:7

          로마제국의 권력이 그들을 죽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 요한 계시록 11:11-12

          그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그들이 살아서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종말론적인 싸움을 하고 있는데 로마제국의 국가권력에 의해 그들이 죽지만 그들이 살아서 하늘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너희들이 승리자가 된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14만4천은 무엇인가?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 요한 계시록 7:4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 요한 계시록 14:1

          요한계시록 자체가 위장언어를 사용하고 상징과 암호를 사용하고 있는 책이기에 14만4천을 문자적인 14만4천으로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요한계시록 전체 흐름에서 잘 맞지가 않는다. 14만4천은 도대체 무엇인가. 14만4천이 유대인만인가. 그것은 아니다. 그러면 14만4천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 요한계시록 7:9

          14만4천을 마지막으로 설명하는 용어인데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라고 나오는데 바로 전체이다. 전체에서 14만4천명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다. 보통 여호와의 증인이나 신천지도 마찬가지인데, 14만4천을 이야기할때 숫자가 적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지금 전 세계에 기독교인 숫자만 생각해도 엄청나게 많은데 14만4천명만 구원을 받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예수님 시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많은 사람들가운데 14만4천명만 구원받으면 큰일이다. 초대교회때 사도들은 그래도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해야 한다. 14만4천이 지금 살아있는 사람만 해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14만4천명 가운데 과거에 믿음을 훌륭하게 지켰던 분들이 많을테니 그 숫자를 다 빼고 나면 지금은 많이 잡아야 5만명 밖에 안남을 것이다. 그 5만명을 세계각국으로 나누면 실제로 얼마나 남겠는가. 결국 소수만 해당된다.

          여호와의 증인 왕국으로 들어오는 사람만 구원을 받으며, 자기들과 연결되는 사람만 구원을 받는다는 그런 의미가 들어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도 구원을 못받는다. 대개 이단들의 특징은 구원의 에고이즘이다. 훌륭한 종교일수록 구원의 보편성을 가지고 있고, 사이비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교파일수록 에고이즘이 있다. 우리만 그리고 소수만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14만4천에 대한 바른 이해

          14만4천의 기본적인 정신은 무엇인가. 그 당시 콘텍스트 속에서 어쩌면 예수믿는 사람의 전체 숫자가 14만4천이 안되던 시절이라고 볼 수가 있다. 당시 워낙 박해가 심하기에 박해속에서 누가 과연 구원을 받을 것인가 하는 회의가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요한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내가 확실하게 다 보았다는 것이다. 무려 14만4천명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서 어린양앞에 서서 찬양을 하더라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믿음의 확신을 가지라는 것이다. 내가 확실히 보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치신 사람은 한사람도 남김없이 다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다 어린양 앞에 서서 찬양하는 그 영광의 비전을 확실하게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14만4천이라는 숫자는 엄청난 희망을 주려는 희망의 숫자이다. 우리 가운데 구원에 실패할 사람이 한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치신 백성을 틀림없이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 요한계시록 14:4

          14만4천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자이다.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다는 뜻은 무엇인가. 요한계시록에 큰 음녀 바벨론이 나온다. 그것은 로마제국이다. 로마를 직접적으로 표현할수 없기에 이미 사라져간 바벨론 왕국을 가지고 표현한 것이다. 음녀는 우상숭배하는 것이다. 주님만 섬기고 예수님만 따라야 하는데 우상을 섬기는 그리고 우상 섬기기를 강요하는 로마제국을 음녀라고 표현한 것이다.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라는 의미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로마황제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명령을 따르지 않고 목숨을 버리면서 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라가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 요한계시록 11:15

          너희들은 하늘나라에서만 주님앞에서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제 멀지 않는 장래에 세상 나라도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세토록 왕 노릇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어떤 책인지를 잘 이해하고 요한계시록에 있는 상징과 암호들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잘 인식하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이단들의 말들이 너무나도 우습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임을 충분히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10주년


           

          한국을 위해 헌신한..

          *

          서서평 선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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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lisabeth Johanna Shepping

          *

          1880 ~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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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9, 조선에는 2만명이 넘는 나환자들이 있었다.

          갈 곳 없는 나환자들을 돌 본 사람들은 평신도 선교사였던 포사잇과 윌슨,

          그리고.. ‘쉐핑( Elizabeth Shepping, 한국명: 서서평)’ 선교사였다

          *특히, 서서평 선교사는 나환자들에게 희망과 사랑을 가르쳐 주었으며

          고아 13명을 자신의 딸로 입양하고 문둥이 자녀를 아들(요셉)로 삼아 함께 살기도 했다.

          구두 한 켤레 없이 남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기도 했다는 서서평 선교사.

          고국인 미국에서 보내오는 생활비는 불쌍한 나환자들을 위해 모두 사용했던 천사였다.

          그녀가 조선에서의 사랑과 헌신의 생애를 마친 날은 1934 6 26일 새벽 4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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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양실조로 서서평 선교사(독일계 미국인)가 운명했을 때..  

          그녀가 남긴 유산은 반 조각짜리 담요 한 장과 지갑에는 7전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마지막 남은 시신마저 해부하는데 쓰라고 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놓았던 선교사

          *장례식은 광주 최초로 사회장으로 열렸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슬퍼했다.     

          운구는 이일학교 제자들이 맡았고, 그 뒤에는 양딸들과 아들, 수백명의 거지, 나병환자들이 따랐다.

          어머니! 어머니! 하고 목놓아 우는 그들의 통곡소리에..

          조객들은 모두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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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서평 선교사가 1922년에 세운 광주 이일성경학교의 1930 졸업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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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서평 선교사와 입양 아들 요셉

           
           

          Come Thou Fount of Every Blessing

           




          시편찬송-인터넷사이트 소개

          조회 수 166 추천 수 0 2013.03.20 14:28:18

          앞 글에 올린 바와 같이 인터넷에서 들을 수 있는 시편찬송 사이트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제네바 시편찬송은   http://www.genevanpsalter.com/music-a-lyrics 을,

          또한 스코틀랜드 시편찬송을  http://www.thepsalmssung.org/scottish/ 에서 찾고 들으실 수 있습니다.

           

          물론 영어로 되어 있지만 조금만 살펴보시면 익숙해지시고  한번 연결하시면 연속해서

          부르는 찬송을 들을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전통을 잇는 개혁교회의 시편찬송을 통해

          깊은 영혼의 충만을 누리시면서 진리로 자라가시길 바라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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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고 있으면 약이 되는 손 지압법


          손과 발에는 우리 몸의 각 장부와 연결된 경혈점이 모여있다.
          따라서 손과 발의 건강은 전신 건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증상별로 효과 있는 손발 지압법을 알아보자.  


          머리가 아플 때
          두통이 있을 때는 가운뎃손가락 첫째 관절 중간에 있는 경혈점인 ①심혈과
          손목 중간에 있는 ②태릉을 세게 눌러준다.

          어깨가 아플 때
          어깨가 아플 때는 넷째손가락과 새끼손가락 사이 움푹 들어간 곳에 있는 ③액문과
          손바닥 쪽 손목에 위치한 ④태연, ②태릉, ⑤신문을 눌러준다.

          관절이 아플 때
          둘째손가락 손톱 밑에 있는 상양, 가운뎃손가락 손톱 밑에 있는 ⑦중층,
          넷째손가락 손톱 밑에 있는 ⑧관충, 새끼손가락 손톱 밑에 있는 ⑨소충,
          그리고 각 손가락 사이에 있는 팔사를 눌러준다.

          허리가 아플 때
          새끼손가락 둘째 관절 중간에 있는 ⑪명문과
          넷째손가락과 새끼손가락 사이 손등 부분에 있는 ⑫좌골신경점을 눌러준다.





          눈이 피로 할 때
          둘째손가락 손톱 밑 안쪽에 있는 상양과 새끼손가락 손톱 바깥쪽에 있는
           ⑤소택,
          넷째손가락 둘째 마디 중간에 있는 간혈을 눌러준다.

          눈이 충혈 될 때
          손바닥 가운데 부분에 있는 ⑦심포구를 마사지하듯이 눌러준다.

          어지러울 때
          손바닥 가운뎃손가락 아래 부분에 있는 이구와 ⑪인구,
          넷째손가락과 새끼손가락 사이에 움푹 들어간 부분의 액문을 눌러준다.

          위가 아플 때
          손바닥 쪽 중앙 아래 불룩하게 튀어나온 지점인 ⑬위장점과
           손등 쪽 둘째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 뼈가 끝나는 지점에 있는
           ⑭낙영오를 세게 눌러준다.

          소화가 안 될 때
          둘째손가락 첫째 마디 중간에 있는 ②대장과
          손등 부분에서 둘째 손가락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③이간을 가볍게 눌러준다.

          이가 아플 때
          새끼손가락 첫째 마디 중간에 있는 ①신혈을 세게 눌러준다.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할 때
          가운뎃손가락 손톱 밑에 있는 ①중충, 손바닥 중앙에 있는 ②심포구,
          넷째손가락과 새끼손가락 사이에서 밑으로 내려온 곳에 있는 ③심계점,
           손목 중앙 부분에 있는 ④태릉을 눌러준다.

          멀미가 날 때
          손바닥 정중앙에 위치한 ⑤수심, 손목 관절 안쪽에 있는 ⑥신문,
          넷째손가락 손톱 밑에 있는 ⑦관충을 눌러준다.

          설사가 날 때
          손등 쪽 가운뎃 손가락과 넷째 손가락이 만나는 뼈 중간에 있는
           
          설사점을 강하게 눌러준다.
           둘째손가락 첫째 마디 부분의 ⑨대장과 새끼손가락 첫째 마디 부분의
           신혈을 눌러주어도 효과가 있다.

          변비가 있을 때
          손등 쪽 둘째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 사이에 있는
          ⑪제2이간을 세게 눌러준다.

          코가 막힐 때
          손등 쪽 엄지손가락과 둘째손가락이 만나는 점에 있는 ⑫합곡,
           합곡 아래쪽에 위치한 ⑬비통점을 꾸준히 자극해준다.


          열이 심할 때
          손등 쪽 둘째손가락 밑에 있는 ⑭이간, 손바닥 쪽 엄지손가락이 붙어있는 지점의
           ⑮ 어제와 그 아래 손목 부분에 있는 "16"태연을 세게 눌러준다.

          딸꾹질이 날 때
          손바닥 쪽 둘째손가락 윗 부분에 있는 "17"대장 경락과
           손등 쪽 둘째손가락 밑에 있는 "18"상양을 부드럽게 여러 번 눌러준다. 


          잘 체하는 사람들은 흔히 12번 지점을 누르곤 하는데 
          이게 다 지압의 한가지 종류 

                                     



                                          [출처]
          알고 있으면 약이되는 손 지압법 //손 지압법.|작성자 soundofhim


          "이단 사역자들을 이단이라 하는 시대다." 미주 지역 대표적인 이단 연구가로 활동하고 있는 한선희 목사의 말이다.

          5월 29일 필라델피아교회협의회(회장 박등배 목사)가 주최한 이단 대책·예방 세미나가 벧엘교회(안재도 목사)에서 열렸다. 이날 강사로 나선 한 목사는 최근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홍재철 목사·한기총)의 다락방(류광수)·평강제일교회(박윤식)에 대한 이단 해제 시도 움직임을 지적하면서 "한기총은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한 목사는 오전 10시부터 시작한 세미나에서 박윤식 목사와 평강제일교회에 대해 '박 목사의 신학은 통일교와 전도관(교주 박태선·한국천부교전도관부흥협회)이 결합된 형태로 봐야한다'고 했다. 실제 박윤식 목사는 전도관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또 한 목사는 '구속사 시리즈를 발간해 이단성을 감추려 하고 있다'며 "어떤 형태의 사역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1월 한기총이 이단 해제를 결의한 바 있는 다락방 류광수에 대해 한 목사는 "구원론과 교회론, 기도론에 결정적인 오류들이 있다"고 말했다. 한 목사는 다락방의 신학이 "그 자체로 잘못됐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단 사상을 표절한 것"이라며 "축사론은 김기동의 귀신론을, 영접론은 권신찬의 구원론을, 축복론은 워치만 니의 향유론을 표절했다"고 말했다.

          이번 세미나 주제로 다뤄진 다락방 류광수는 고려·고신·통합·합동·기성·기침·기감에서, 평강제일교회 박윤식 목사는 통합과 합동에서 이단으로 결의됐다.

          세미나를 마치면서 한 목사는 "이단을 정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교인들을 계몽하고 이단으로부터 성도들을 지키고, 이단에 빠진 이들을 돌이키는 것이 이단 사역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한 목사는 "성경을 바르게, 잘 전한다면 이단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며 목회자들이 책임 의식을 갖고 성경을 전할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한편 한 목사는 "이단 사역자들에게 오히려 주장하지도 않은 것을 주장했다며 이단으로 몰기도 한다"며 한기총이 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단체 및 개인에 대해 이단 해제를 시작하고, 이단 사역자는 오히려 '이단'이라며 그 동역자들을 공격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기총은 다락방과 평강제일교회에 대해 이단 해제 움직임을 계속해왔다. 또한, 이단 연구가로 알려진 최삼경 목사(빛과소금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그와 교류가 있던 이단 사역자들을 이단 혐의로 조사하겠다고 나선 바 있다. 한국과 미주 한인 교계에선 한기총이 '이단 옹호 행위'를 한다며 논란이 됐다. 이 논란은 사역자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한국 교회 모임에 불과한 한기총이 개별 교단 총회가 규정한 이단 단체에 대해 해제할 권한이 어디 있냐'며 반발을 사기도 했다.

          전현진 기자 / jin23@newsnjoy.us

          젊은 시절 3년 동안 군대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들은 소리가 있습니다. “제군들은 돼지들이다. 돼지를 먹이는 것은 때가 되면 잡아먹고 잔치에 쓰려는 목적 때문이다. 국민과 부모님들의 세금으로 제군들은 3년 동안 먹고 입고 자면서 훈련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때가 되면 제군들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그게 하필이면 삼년동안이었군요.

          엘리야의 사명은 삼년동안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엘리야를 숨기시고 까마귀를 동원하여 먹이시고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어 삼년 동안의 가뭄에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열왕기 18장에 들어가자 드디어 하나님의 출동명령이 엘리야에게 떨어집니다.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삼년의 모진 가뭄이 끝나고 단비가 내리느냐 마느냐가 엘리야의 행동에 달렸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함께 등장하는 궁내대신 오바댜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궁내대신 오바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며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멸할 때 여호와의 선지자 100 명을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이며 살려내었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오바댜가 엘리야를 만나 엘리야가 오바댜에게 아합에게 전갈을 하라고 하자 나를 죽게 하려고 그러시느냐고 펄쩍 뜁니다. 정작 나서야 할 때 두려움으로 인하여 나서지 못 하는 모습입니다. 엘리야가 자신이 아합에게 보이겠다고 하나님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자 비로소 마지못해 아합에게 가서 고합니다.

          아합이 엘리야에게 달려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라고 일갈하자 엘리야는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좇았다.”고 말하고 ‘바알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을 불러오라, 대결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갈멜산으로 나아오라 합니다. 백성들에게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언제까지나 머뭇머뭇하려느냐고 질책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한 마디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부답, 마지못해 수동적으로 이끌려옵니다. 인간이란 이렇게 연약하고 비겁한가 봅니다.

          사실 삼년가뭄에 고통 받는 것은 악한 아합왕과 이세벨이 아닙니다. 그들은 궁중에서 잘 먹고 잘 삽니다. 정작 고통 받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삼년가뭄 징벌은 악한 아합과 이세벨에게보다 머뭇거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진 것이라 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머뭇거리며 입을 다물고 있는 궁내대신 오바댜와 비겁한 백성들 때문에 아합과 이세벨의 폭정과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진멸하는 악행이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입 다물고 머뭇머뭇하는 그들이 바로 방관자요 공범자요 폭정과 악행의 바탕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가진 채 입 다물고 머뭇거린다면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세상은 어두워가고 악은 횡행하며 비리와 악행이 난무하나 입을 열어 진리를 외치고 공의를 말하는 자는 적습니다. 자신의 안일을 위하여 입 다물고 죽어가는 영혼을 바라보면서도 복음의 입을 열지 않는 오바댜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말씀을 맡은 엘리야도 없고 백성도 없는 갈멜산에는 오늘도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춤을 추고 진노의 태양이 쨍쨍하고 대지를 시원하게 적실 비는 내릴 낌새조차 없습니다. 모두들 머뭇머뭇하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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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미니우스주의의 5대 강령과 칼빈주의의 5대 강령 / 제임스 보이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5대 강령]

          이 책의 핵심은 성경을 근거로 한 은혜의 교리에 대한 해설이다. 그러나 이 교리들을 철저하게 성경적으로 변호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복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문제가 되는 신학적 주제를 요약해 주는 간략한 설명을 제시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은혜의 교리는 교회 역사 내내 가르쳤지만 이른바 칼빈주의 5대 강령은 야코뷔스 아르미니우스의 신학에 대한 반응으로 전개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라이덴 대학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그가 죽은 뒤인 1610년에 그의 추종자들은 그의 구원에 대한 관점을 요약한 5개항의 신조를 작성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라고 불리게 된 그들은 이 교리를 네덜란드에 항의(또는 항변)의 형식으로 제출하면서 네덜란드 신앙 고백서는 자신들의 견해에 맞게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 내용은 다섯 항목으로 된 그들의 신학적 강령이다.

          .....이하 줄임.....

          이 신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I. 하나님은 예견된 믿음 또는 불신앙을 바탕으로 선택하시거나 문책하신다. II. 비록 신자만이 구원을 받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과 각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III. 인간은 너무 부패해서 믿음이나 어떤 선한 행실에는 신적인 은혜가 필요하다. IV. 이 은혜는 인간이 거부할 수 있다. V. 참되게 거듭난 모든 사람이 확실히 끝까지 믿음을 지킬지의 여부는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한 쟁점이다.

          이러한 진술들의 공통점은 은혜 안에서의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반신반의이자 몇몇 대목에서는 그에 대한 저항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취하는 입장의 핵심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어떻게 해서든 인간의 능력에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이 깔려 있다.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작정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선택에 기초한다. 속죄의 효력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믿음과 회개에도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완고하게 거부하는 이들을 이길 만큼 강력하지는 않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끝까지 인내할 지 그렇지 않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견인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보다는 그리스도인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런 교리들은 뚜렷한 교리적 문제이지만 모든 인간에게 자신의 영적인 운명을 결정하게 할 만큼 예정을 경시하려는 공통된 관심사로 서로 연결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항변은 개혁주의 교리에 대한 국제적회의인 도르트 총회에서 절정에 이르는 신학적 논쟁의 폭풍을 몰고 왔다. 각국 대표들이 7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함께 모였을 때 그들의 논쟁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입장을 명확히 하는 역할을 했다. 약간의 반대되는 재확인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 대표들은 마침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함의를 피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1. 인간의 능력.

          인간 본성은 타락으로 손상되었지만 완전히 무능해지지는 않았다. 우리가 설령 기본적으로 선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우리는 완전히 악하지는 않다. 의지는 죄에 예속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거듭남 이전에도(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믿지는 못하지만)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죄인은 하나님 편에 서든지 하나님을 대적하든지, 성령과 협력하여 구원에 이르든지 하나님의 은혜에 저항하여 저주에 이르든지 선택할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2. 조건적 선택.

          특정한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선택은 예견된 믿음, 즉 그들이 자유롭게 복음을 믿으리라는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기초했다. 선택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조건적이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만이 하나님이 믿을 것으로 미리 아신 이들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미리 아시는 믿음은 오로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인간의 결정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궁극적 원인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죄인의 선택이다.

          3. 비한정적 속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구원을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게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누군가에게 실제가 되게 하지는 않는다. 십자가형으로 인해 하나님은 용서를 베풀 수 있게 되었지만 용서는 오직 개인적 믿음을 조건으로 해서만 베풀어진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그러나 믿는 이들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속죄는 누군가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할 경우에만 효력 있게 된다.

          4. 저항할 수 있는 은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은 외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부르심 받는다. 성령은 모든 심령에 말씀하시며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도록 설득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신다. 그러나 죄인들은 성령을 거역할 수 있으며 회개하지 않으면 회개할 때까지 거듭나지 못할 것이다. 이 점을 달리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대한 성령의 적용은 죄인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성령은 죄인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면 새로운 영적 생명을 주실 수 없다.

          5. 거부할 수 있는 은혜.

          그리스도를 믿고 진실로 구원받은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에서 떨어져 나감으로써 구원을 완전히 최종적으로 상실할 수 있다. 영원한 생명은 죄인이 그리스도께 올 때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께 대한 그리스도인의 신실함에 달려 있다.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고 모든 아르미니우스주의자가 최소한 여기서 기술된 바와 같은 앞의 다섯 가지 교리 모두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요약한 내용은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믿는 바를 표현한 것이다. 이 다섯 가지 교리 모두가 공유하는 점은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을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선택의 자유로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거듭남, 선택, 속죄, 영화 등 구원의 핵심적인 국면들의 효력은 하나님에게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죄인의 협력에도 의존한다. 데이비드 스틸과 커티스 토머스는 <칼빈주의 5대 강령>에 대한 연구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자가 보기에 “구원은 (주도권을 쥐신) 하나님과 (반응해야 하는) 인간의 공동 노력을 통해 성취된다.”고 결론지었다. “인간의 반응은 결정적인 요소다. 하나님은 무두를 위해 구원을 제공하셨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자신의 자율의지로 하나님과 협력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하는 이들에게만 효력 있게 된다. 핵심적인 점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누가 구원의 선물을 받을 것인지를 결정한다.

          이는 현대 복음주의 안에서 왜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이 이토록 우세한가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의 경우 인간의 의사 결정은 구원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는 오로지 하나님 중심적인 신학이 아니라 자아의 방향으로 뒤틀린 신학으로 귀결된다. 물론 이는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것이다. 이탈 근대적이고 점점 탈 기독교적으로 변하는 시대에 사람들은 관심을 요구하고 있다. 사람들은 세속화 되고 인간화 되고 상대화된 영적 체험을 찾고 있다.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오늘날의 복음주의가 요구하는 바로 그것, 즉 개인적 선택에 결정적 역할을 맡기는 복음을 제공한다.



          [칼빈주의의 5대 강령]

          이와는 대조적으로 칼빈주의는 구원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로 말미암는다고 주장한다. 구원은 어느 모로 보나 선물, 즉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아니면 구속받을 수 없는 합당치 못한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선물은 하나님이 선물(구원)을 주시기로 택하신 이들에게 주어진다. 이 선물은 모든 이들에게 제안되지만 모두에게 주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선물을 주기로 작정하시면 효력 있게 선물을 자녀의 손에 쥐어 주신다. 이 선물은 한 번 받으면 결코 잃어버리거나 도난당하거나 손상되지 않는다. 참으로 그것은 하나님이 계속해서 주시는 선물이다!

          이 은혜로운 원리들은 도르트 총회 신경에서 정의되고 변호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국제적인 신학자 집단이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입장을 살펴보기 위해 도르트에 모였다. 그들의 심의는 종교개혁의 위대한 진리들에 대한 한 세기에 걸쳐 성숙된 신학적, 실제적 사고를 대표하는, 조심스럽게 표현된 일련의 교리적 명제들로 귀결되었다. 요컨대 도르트 총회는 선택과 유기의 작정이 예견된 믿음이나 불신앙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기초해 있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두에게 충분하지만 오직 택함받은 이들에게만 효력이 있으며, 인류는 타락으로 인해 완전히 부패했고 따라서 거듭나기 전에는 구원을 선택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불신자를 회심시키는데 효력이 있고, 하나님은 신자들이 결코 완전히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신자들을 보존하신다고 결론지었다. 이 다섯 가지 기본적인 요점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전적 타락.

          ‘전적 타락’이라는 말은 구석구석 만연해 있는 죄 또는 영적인 일에 있어서의 인간의 무능이라는 교리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우리 모두가 더 이상 악해질 수 없을 만큼 악하며 모두가 똑같이 죄로 가득하다는 암시를 주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죄를 짓고 그 죄로 인해 지옥에서 더 큰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신학자 존 거스너가 말해온 바와 같이 우리는 더 이상 악해질 수 없을 만큼 악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 안에는 더 악해질 수 있는 무한한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전적 타락 교리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악함을 뜻한다기보다는 그가 하는 어떤 일도 결코 완벽하게 선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죄는 우리의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구조의 모든 부분에 만연해서 우리에게는 죄가 건드리지 않은 부분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근본적 타락, 포괄적 죄악 또는 죄의 만연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낫다. 우리의 동기는 결코 완전하게 순수하지 않으며 따라서 어느 정도 우리의 모든 행동은 악한 욕구로 부패해 있다. 이러한 부패는 우리의 존재의모든 측면에 침투해서 우리의 존재나 행위의 어떤 것도 완벽하게 죄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런 불행하고 속속들이 죄에 물든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으려는 성향이 전혀 없고 그래서 하나님을 찾거나 심지어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졌을 때 복음에 반응할 수도 없다.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거나 영접하는” 일에 관한 한 자유의지가 없다. 사실 우리는 죄에 철저히 예속되어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영적인 이해력을 주시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믿음조차 선물로 찾아온다. 성령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 이전에는 우리의 부패성이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협력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2. 무조건적 선택.

          인류의 상태가 성경의 타락 교리가 가리키는 것만큼 나쁘다면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어야 한다.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 편에서의 어떤 도움도 없이 성취하시고 적용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사역이어야 한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이므로 (실제로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셔야 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다가오심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이러한 다가오심의 첫 번째 단계는 그 일을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이며 선택이라는 말은 바로 이 결정을 가리킨다. 선택이란 한 개인의 구원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세상이 생겨나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작정을 세우신 하나님의 사전 결정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다. ‘무조건적’이라는 말은 이 결정이 하나님께서 죄에 물든 피조물 속에서 예견하셨을만한 어떤 것과도 관계없이 이루어졌음을 가리킨다. 만일 선택이 죄인이 그렇게 되거나 행할 만한 어떤 것에 바탕을 두었다면 궁극적으로 구원은 인간의 공로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선택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서 나온 자비로운 행위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선택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 중에 하나다.

          3. 제한 속죄.

          튤립이라는 약어로 요약되는 다섯 가지 교리 중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 제한 속죄 교리다. 문제는 용어 자체에도 일부 있다. 이 용어는 사실 오해의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제한’ 속죄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무언가 할 수 있거나 해야 할 모든 역할을 다 하지 않았고 어떤 면에서는 효력이 없는 것 같은 암시를 준다. 그러나 그것은 제한 속죄 교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개혁주의자들이 이 용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속죄는 창세전에 성부가 성자에게 주신 이들의 구원이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염두에 둔 것이며 그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교리는 한정적 속죄 또는 특별 구속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특별 구속이란 그리스도의 죽음이 택함 받은 자들에게만 구원의 효력을 가진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자신을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을 위한 완벽한 대속 제물로 드리면서 죄를 속하셨다. 그러므로 구원의 계획에 따라 그리스도의 죽음은 택함 받은 자들의 죄는 속했지만 한 번도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오지 않은 이들의 죄는 속하지 않았다.

          4. 불가항력적 은혜.

          속죄의 유익은 어떤 식으로든 택함 받은 이들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이 일은 성령의 사역이며 성령의 내적인 역사는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한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복음의 외적인 부르심 외에 성령은 내적인 부르심을 주신다. 이 내적인 부르심은 오직 택함 받은 이들에게만 임하며 필연적으로 그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이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그들을 구원하시므로 그들이 이 효력 있는 부르심을 영구적으로나 효과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며 당해날 수 없다. 성령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들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 속에서 구원의 목적을 반드시 성취하신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도 성령의 은혜롭고 효력 있는 사역을 바로 그와 같이 기술한다. “하나님이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이들, 오직 그들만을 하나님은 스스로 정하시고 받아들이신 시간에 말씀과 성령으로 그들이 본래 처해 있는 죄와 사망의 상태에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으로 효력 있게 부르시고, 그들의 생각을 영적으로 구원 얻도록 조명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게 하시며, 그들의 돌 같은 마음을 제하시고 그들에게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 그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을 선한 것에 이르도록 작정하시고 효력 있게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끄시되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자발적인 상태에서 가장 자유롭게 나아오게 하시기를 기뻐하신다.”(10장1절)

          5. 성도의 견인.

          때때로 이 교리는 ‘영원한 안전’의 교리라고 불린다. 이 교리는 다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1)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오래 참으신다. 2)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오래 참으심으로 그들 또한 오래 참는다. 성도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이 그 아들의 사역을 통해 거룩하게 여기시는 이들이다. 성도의 견인은 사실 성도의 보존이다.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은혜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성도들을 영광으로 인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실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다.

          이 다섯 가지 교리는 각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독특한 기여를 한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각 교리는 개별적으로 분석할 수도 있고 개별적으로 변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 교리는 논리적, 신학적으로 상호 관련되어 있다. 이 교리들은 모두 구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워필드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이 5대 강령은 유기적인 통일체, 하나의 진리 체계를 이룬다. 이 교리들은 성경에서 풍부하게 지지하는 두 가지 전제를 바탕으로 한다. 첫 번째 전제는 인간의 완전한 무능이며 두 번째 전제는 은혜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다. 다른 모든 것은 여기서 도출된다. 이 두 기초적 진리가 만나는 곳이 복음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면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주권적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부패함 가운데 은혜를 거부하고 구속받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은혜의 교리는 함께 운명을 같이 하며 함께 구원은 전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므로 은혜에서 비롯되며, 전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하나의 핵심적 진리를 가리킨다.

          은혜의 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충분히 인식하려면 칼빈주의 5대 강령에서 삼위일체의 각 위격의 역할을 인식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선택은 성부 하나님의 선택이다. 속죄는 성자 하나님의 희생 제사다.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며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견딜 수 있게 하는 은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다. 따라서 우리가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그래야 하듯이 구원은 전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사역-삼위 하나님의 협력 사역-이다. 생각해 보라. 만일 우리가 실제로 죄로 죽어 있다면(근본적 타락) 하나님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실 수 있고(무조건적 선택),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속하실 수 있으며(특별 구속), 성령만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실 수 있고(효력 있는 은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보존하실 수 있다(보존하는 은혜). 그러므로 모든 찬양과 영광은 하나님께만 속한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11:36).


          제임스 보이스의 “개혁주의 핵심” [1장 복음주의에 왜 칼빈주의가 필요한가]중에서 발췌
          출처: 생명나무 쉼터:
          http://blog.daum.net/7gnak/15720783


          조선시대 연인들의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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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적이 끊긴 밤길. 사랑하는 두 남녀가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달빛아래 밀어를 나눈다. 남녀의 인연을 맺어준다는 신윤복의 '월하정인(月下情人)' 내용이다. 화제(畵題)는 "깊은 달밤 3경에 두 사람의 마음 그들만이 알리라 (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 兩人知)" 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은 쓰개치마로 반쯤 얼굴을 가리고 있다. 엄숙한 유교사회였던 조선시대에서도 여성들의 밤길은 보장됐다

          조선 시대 풍속화의 대가 신윤복의(월하정인)에는 넓은 갓에 중치막을 입고 있는 사내와 쓰개치마를 쓴 여인이 초승달 아래에서 밀회를 즐기고 있다.

          '달은 기울어 밤 깊은 삼경인데,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이 안다(月沈沈夜三更 兩 人心事 兩人知)'는 글귀가 은밀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가만, 삼경이라고 하면 밤 11시에서 새벽 1시까지를 가리키는데 통금 시간이 있던 조선 시대에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할한 걸까?
          [경국대전]에는 '궁궐문은 초저녁에 닫고 해뜰 때 열며 도성 문은 인정에 닫고 파루에 연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정'은 통행금지가 시작되는 오후 10시에 종각의 대종을 28번 치는 것이고, '파루'는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오전 4시에 북이나 종을 33번 치는 것을 말한다.
          불과 20여 년 전, 자정 통금 사이렌에 맞춰 줄행랑 치던 우리네와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 사람들도 종이 28번 울리면 일단 집으로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이를 어길 땐 다음 날 곤장을 맞았는데, 시간대별로 곤장 수가 달랐다. 삼경은 곤장 30대를 맞는 가장 무거운 벌이 내려지는 시간이었으니[월하정인]의 두 주인공은 배짱이 꽤나 두둑 했나 보다.

          물론 질병, 출산 등 부득이한 일이 잇는 경우에는 예외였다. 특히 성균관 유생들은 밤늦게 제사를 지내거나, 위급한 일이 있을 때 왕에게 상소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통금 특혜자였다.


          효종은 '성균관에 하사한다'는 글귀가 새겨진 은잔은 유생들에게 나눠주었고, 그것은 일종의 통행증 역할을 했다.
          그런데 영조 때 성균관의 한 유생이 통금을 어겼다는 이유로 곤장을 맞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유생들이 동맹휴학을 결의하자 영조는 즉시 포도대장을 엄벌했다.

          성균관 유생도 아니고 부득이한 일이 없더라도 통금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날이 있었으니 바로 '정월대보름'과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그렇다면 [월하정인]의 두 남녀가 만난 날은 이 두 날 중에 하루였을까?

          조선의 통금제도가 조금씩 느슨해지면서 언제부터인지 낮에 외출하기 힘든 양반댁 여인들이 밤에 외출하는 관습이 생겨났다.
          나라는 이를 알면서도 묵인해ㅆ고 때론 밤나들이 하는 여인들을 적극 보호하기까지 했다.
          남녀가 자유롭게 연애할 공간이 없던 조선 시대.
          사랑 앞에서만은 법도 넓은 아량을 베푼 듯하다. --출처.신윤복 그림 해설 월하정인에서

          조선시대의 금지된 사랑 궁녀

          궁의 궁녀의 경우는 제왕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사람과도 사랑을 나눌수 없다.
          궁녀라는 것이 제왕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평생 소원은 단 한번이라도 승은을 입는 것이다. 승은을 입을 꽃다운 나이가 지나버리면 여인은 스스로 꽃을 단념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기대는 꽃을 단념하는 것은 가을이 이슥하여 홀로 기다린다는 것이리 하여 이여인은 궁내에서 최고직인 상궁에 오르는 것이 다음 목표가 된다.


          간혹, 재정등 여러 이유로 제왕은 궁녀의 수를 줄여 자신의 부덕함을 면죄 받으려 하는 예사가 있었는데 . 이때 궁녀를 출궁시키는데, 출궁 조치를 당한 궁녀는 평생 시집을 갈수가 없다. 이유는 궁에 들어가 나이 15세가 되면 모든 궁녀는 관례를 치르는데 이 관례는 단순한 관례의 의미가 아닌 제왕과의 혼례의 의미다. 그래서 신랑 없이 신부가 혼례를 치르는 경우이다. 출궁 조치를 당하는 궁녀는 대부분 15세 이상되었거나 나이가 많은 궁녀들이 그 대상이 된다
          따라서 여성은 재가를 할수 없는 조선의 법에 따라 궁녀는 출궁해서도 결혼을 할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내시-거세된 내시는 궁안에서의 제왕과 왕녀.왕비등등의 내밀한 사사 심부름을 하는 건택된 남자들이다 이들 또한남녀접근이 금지되었다 *궁녀와 내시는 각각 관계의 직위-벼슬을 내린다


          양반

          신분을 넘는 사랑을 할 수 없다

          양반의 여자들은 천민이나 노비들과 사랑을 할수 없었다.
          이들의 사랑은 신분의 벽을 깨는 것으로 양반 부녀자와 사랑을 나눈 노비 남자나 천민 남자들은 법에 의해 강력히 다스려져 사랑을 할수가 없었다.

          양반의 유부녀

          이들은 삼종 지도를 행해야 한다. 아버지를 따르고, 남편을 따르고, 아들을 따르고 따라서 유부녀는 남편 이외에 어떤 남자와도 사랑을 나눌 수 없다.
          남편이 죽으면 정절하며 아들의 뜻을 따라야 한다.
          아들이 없더라도 정절을 지키는 것이 의무였고 하나의 여자의 범절이라고 했다


          양반 남자의 경우

          남자 양반의 경우는 폭이 상당히 넓다.
          물론 양반 가문의 아녀자와 결혼을 하지만 축첩제가 용인되어 첩으로 양반이 아닌 계급의 어떤 여자와도 사랑을 나누고 첩으로 둘 수 있었다.
          이러한 제도로 서자, 서얼들이 조선 후기에 많이 나타난다. 양반 남자는 부인이 죽고 상을 치른 후에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규수=처녀와 재혼할 수가 있었으나 양반 여자의 경우는 한번 결혼하여 일부 종사 하여야하고 남편이 죽거나 실종되거나 하여도 재혼할 수가 없다.

          동성 동본의 사랑

          동성 동본간의 사랑 역시 법으로 금지되었다
          이는 조선시대 이래로 예로 정착된 혈통과 가문을 중히 여긴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고대나 중대 즉 고려초기까지 근친혼이 행해지고 신라나 고려 왕실만 해도 며느리가 시아버지랑, 또는 누나랑, 또는 시동생간, 등의 근친혼이 이루어 졌으나 주정자 학문이 들어온 후기부터 고려 정종 12년(1046)에 근친 혼을 금하기 시작하여 조선조에 이르러 유교 학문이 국시가 된 이후로는 경국대전(조선의 헌법과 같은 것)等으로 동성동본간의 결혼을 금지했다.


          적자와 서자와의 사랑
          적자는 정혼한 부부사이에 난 자식, 서자는 첩에서 나온 자식으로, 서자 출신의 남자와 적자 출신의 여자는 결혼을 할 수 가 없었다.

          양민 천민을 제외한 계층

          양민과 역적의 자손과는 결코 결혼할 수 없다.
          역적의 후손은 당시 법에의하여 관아의 노비로삼아일하게하였다 노비는 대대로 세습하였는데, 일정한 나라에 대한 공로 특히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전란에 공을 세운다거나 특이한 일로 나라에서 노비를 면해주고 평민으로 복귀해주기도 하였다. 이들이 양민과 결혼해서 불순한 씨앗을 과거 시험이 허용되는 양민으로 편입시킬 수 가 없다는 당시 기존 계층인 양반들의 관념과 유교때문이다.


          황진이가 정을 주고 사랑하자고 한 사람이소세양이라면 홀로연모하며 죽을 때까지 사랑한 사람이 서화담이다 장안의 화제인물 황진이가 남 모르게 연모한 사람 오직 정신적인 순수한 사랑으로 흠모하고 존경했던 인물은 花潭 徐敬德(1489~1546) 당대의 고승高僧 지족선사知足禪師마저도 파계破戒시켰던 황진이로서 마음만 먹으면 정복하지 못할 사내가 없을 것으로 알았지만 아무리 유혹해도 미동도 하지 않던 산림처사山林處士 서화담徐花潭에게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고결한 인품에 감복하여 평생을 스승으로 모셨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 역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기보다는 한 사람의 사나이로서 가슴 속에 이는 불길을 억누르느라고 힘겨워했던 인간적인 모습을 다음 시조에서 엿볼 수 있다.

          마음아 너는 어이 매양에 젊었는다
          내 늙을 적이면 너는 아니 늙을소냐
          아마도 너 쫓아다니다가 남우일까 하노라

            화담

          
          
          
          기다림
            오스왈드 챔버스 (Oswald Chambers)
          
          조바심과 불평없이 
          하나님을 기다릴 수 있는가?
          기다린다는 것은 손을 접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들은 대로 행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는 
          언제나 기다림이라는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이 진리를 인식하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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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회자, 질병을 만나면

          어제 오늘 부슬거리며 여름을 제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다. 내가 지금 머물고 있는 안산의 한 던킨집에서 밖을 보니 그렇게 추적거리며 내리던 비는 그치고, 약간 시원한 바람이 살갛을 간지럽힌다.
          오늘 안산사역을 하기 전에 저녁식사로 커피 한 잔과 빵 한 조각으로 대신하면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특히, 나의 눈에 들어오는 기사는 서울의 모교회 담임목사에 대한 기사로서 아들 결혼식 광고는 숨기고, 본인의 전립선암에 대해서는 교인들에게 광고를 했다는 기사로서 독자들에게 어필하였다.

          기자는 아마도 그 교회와 어떤 친분관계가 있음이 분명하였다. 필자가 여기서 의도하는 것은 그 기사의 옳고 그름에 대한 평가보다는 목회를 하면서 목회자가 질병에 걸렸을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이다. 이는 필자의 부친이 현재 병원에서 가료 중에 있기에 더욱 실감할 수 있다.

          사람이 살다보면, 육신의 연약함으로 질병에 걸릴 수 있다. 어떤 이는 질병은 죄의 결과라고 극단적으로 치부해 버리는 이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또한, 어떤 이는 치병을 받으려면 병을 장악하고 있는 마귀를 축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균형 잡힌 사고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지금 뇌경색증으로 약 10일 정도 입원 중에 계시며, 지금은 호전되어 일반병실로 옮긴 상태다. 부친이 뇌경색을 일으킨 이유는 삶 가운데 어떤 충격을 받은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하나의 예측이지 정확치는 않다. 아마도 뇌혈관이 노쇠하여 그런 결과를 낳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일 주일 정도 더 가료하면 퇴원치 않을까 싶다.

          그런데 목회자의 경우, 목회에 대한 스트레스, 특히 교인들과의 관계로 인한 상처, 부담감, 갈등 등으로 인해 여러 가지 질병에 걸릴 수 있다. 필자는 아직 심각한 질병으로 목회를 그만 둘 상태까지 간 적은 없다. 물론 자신할 순 없지만 건강을 주신 나의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하지만, 목회자들 가운데는 지금도 각종 암, 혈압, 당뇨, 심장병, 협심증 등으로 고통하며 목회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목회자의 나이 50세가 넘으면서 성인병을 체크해야 하며, 예방하는 식사, 운동 등을 해야 한다고 의사가 조언을 한다. 하지만 한국교회와 같이 분주한 목회활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 있어서 목회자가 여유있게 목회하는 것은 그리 간단치는 않은 것이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간 목회하려면 다음 몇 가지를 마음에 두고 목회에 임해야 할지 않을까 싶다.

          첫째, 건강은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필요하다. 만일 목회자가 건강 때문에 불안하게 생각한다면, 어찌 당당하게 목회할 수 있을까. 나는 미국 인디언 선교사 데이빗 브레이너드를 생각하면서 그의 믿음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는 사역하면서 당시 불치병에 감염되어 각혈을 하면서도 끝까지 복음사역을 감당한 위대한 믿음의 거장, 사역자였다. 그를 통해 배우는 바가 크다. 필자는 가끔 신실한 종들이 고통스런 병중에서도 끝까지 사역을 감당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운다.

          둘째, 사람이 할 수 있는 대로 자신의 건강을 잘 유지해야 한다. 18세기 영국 부흥의 두 거장이 존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인데, 웨슬리는 80세를 훨씬 넘게 장수했지만, 휫필드는 50세 중반에 세상을 떠났다. 웨슬리는 자신의 몸 관리를 지혜롭게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부르시면 감사함으로 천국에 입성하는 것이리라. 역사를 공부하면 역사적 인물의 생몰년도에 관심을 갖는데, 장수하는 이들의 특징은 관리를 잘 한다는 것이다.

          셋째, 목회활동을 하면서 어떤 질병에 걸리면, 일단 충분히 쉬어야 한다. 과거에는 불치병이라 할 수 있는 암도 이제는 조기 발견만 하면 거의 완치 가능하다. 그런데 목회자들 가운데는 염려증 때문에 쉬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것을 보면 마음이 아리다. 한국교회의 존경받았던 주남선 목사님은 “목회자가 쉬어야 할 때는 쉬어야 한다”라면서 자신의 병상에서 그렇지 못함에 대해 크게 후회 하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목회자는 무쇠덩어리가 아니다. 쉬어야 할 때가 되면 먼저 몸이 신호를 보낸다. 그때는 무조건 쉬어야 한다. 교회는 주님에게 맡기고 일단 방전된 육체를 회복해야 하며, 질병을 치유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어야 할 때에 쉬지 못하는 목회상황도 있을 것이다. 이는 특별한 상황이기에 주님의 지혜가 필요하다 하겠다. 필자가 주장하는 바는 쉬어야 할 때는 반드시 쉬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를 위하는 일이요, 더 충성할 수 있는 첩경이 아닌지, 그런 의미에서 그 목회자가 자신의 암을 교인들에게 알린 것은 참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13 5 29(수) 도현/조경현 목사
          * 물론 쉼의 전제는 주님과의 교통, 기도의 시간입니다.
          출처: USA 아멘넷
          


          사랑을 원한다고요?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허락하십시오. 이땅의 수많은 사람들은 사랑이 목말랐습니다. 진실로 자신을 사랑해 줄 누군가를 찾고, 그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목마름 때문에 다른 것에 중독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비단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믿는 자들 안에서도 이 사랑 때문에 난리입니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성공하고 싶은 이 욕구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이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시작됨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으로 더 나아가기보다는 보이는 대상들을 향해 원합니다. 부모와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고 싶고, 리더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고, 세상에서 성공하고픈 이 욕망은 끝이 없는듯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원하면 원할수록 의도하지 않게 오히려 더 상처받고 상처를 주고, 쓴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성경에 말하기를하나님은 사랑이시라>십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에 먼저 우리를 사랑했다고 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어떠함에 근거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경건하지 않을 때, 하나님 없이 살았던 그 순간도 먼저 우리를 사랑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셔서 우리의 어떠함에 당신의 사랑이 불타올랐다가 사그라졌다가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시기에 사랑하도록 창조되신 분이시며, 우리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사람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최고조의 사랑이며 한결같으시며, 거룩하고 순결하시며, 우리의 어떠함 때문에 부분적으로 사랑하실 수도 없으신 전체가 사랑이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 사랑을 원할 때 부어주시는 분이시고, 우리를 당신의 거룩함에 참예시키기 위해, 하늘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늘의 방식으로 우리를 최고로 최고로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제 마음에 기도하도록 한 자매가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중보하게 하셨는데 사람의 사랑과 인정으로 끌려다닌 그 자매의 영혼에 속삭이셨습니다.
          " 내가 너를 사랑할수 있도록 허락해 주겠니? 내가 너 안에 들어가서 거하며 사랑의 관계안에서 교제할 수 있도록 내가 너에게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 주겠니? 나와의 더 깊은 연합 안에 걸어가고 싶어서 너를 내가 걸어간 그 몰약산으로 인도해 갈 수 있도록 기꺼이 허락해 주겠니?"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허락하는 것... 그것은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계시가 풀어지는 순간이며,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우리 심령 안에 쏟아지는 시간이며, 사랑으로 인침 받는 시간이며,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것들, 우리 삶을 끌어갔던 것들이 끊어지는 순간이며,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로의 여정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
          근심이 많은 자,
          지치고 피곤한 자, 상함으로 인해 절망가운데 있는 자, 용서하지 못하는 아집이 있는 자, 내 스스로에 화가 나고, 죽지 않는 자, 텅비고 공허한 마음을 가진 자, ......... 그 사랑 앞으로 나아올 때입니다.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허락하며,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거하시도록 기꺼이 허락하신다면 우리의 삶은 주님으로 채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제발 주님이 당신을 사랑하시도록 마음을 열고 허락하십시오. 그 십자가의 사랑이 당신의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허락하십시오.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거룩하고 순결하여 그 사랑이 부어질 때 깊은 회개가 일어나도록 기꺼이 허락하십시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도록 허락한다는 것은 그분의 손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어 그분 앞에 나를 산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함으로 벌거벗은 모습으로 주 앞에 나아가 앉으십시오.
          그분의 사랑이 재대신 화관을, 슬픔대신 희락을, 근심되신 찬송의 옷을 입혀주시며 그 사랑이 나로 하여금 그분을 더 사랑하게 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터키 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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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은 주님을 닮아가는 것,

            온전한 성품이다 / 촬스 스펄젼

            거룩이란 무엇인가? 온전한 성품이 아닌가?

            모자라는 것도 남는 것도 없는, 균형이 이루어진 상태다.

            그것은 차갑고 생명이 없는 조상(彫像)과 같은 도덕이 아니다.

            거룩은 생명이다.

            여러분은 거룩함을 지녀야 한다.

            거룩한 생활은 그 자체가 놀라운 능력으로,

            여러분의 부족함을 채워줄 것이다.

            사실 거룩한 생활이야 말로 최선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설교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순결을 소유하고,

            우리가 이를 수 있는 모든 성결에 이르며,

            하나님의 성령의 효과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한,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로 결심하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게 된다면,

            우리의 사역에서 놀라운 기름부음을 경험할 것이다.

            우리는 거룩한 성품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인해 고난을 받는다면

            우리가 받을 십자가의 고난은 참으로 복되다.

            주님은 우리를 더 높이 들어올리시며,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

            - 찰스 스펄젼, 『목회자들을 위하여』, pp 72-73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은혜의 단비" 중에서

          

          북조선 당국이 남조선에 핵 타격을 하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핵무기로 공격을 하겠다고 직접 협박한 것은 이번 북조선의 협박이 처음입니다. 핵무기는 쓰지 않는 공포의 무기, 쓰지 않고 위력을 발휘하는 무기였는데 쓰겠다고 말하는 순간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핵무기는 인류 최대, 최고, 최악의 무기입니다. 현재 미국과 러시아가 가지고 있는 뜨로찔 2천5백만톤급에서 5천만톤급의 핵무기들은 몇발만 폭발해도 지구는 멸망합니다. 때문에 미국과 러시아의 핵무기만으로도 지구를 수십, 수백번 멸망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겨우 초기의 원시적인 원자탄을 몇 개 만든 북조선 당국이 핵무기를 쓰겠다고 남조선과 세계를 협박하고 있습니다. 불을 즐기는 자는 불에 타죽는다는 속담처럼 이제 김정은 정권은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완전히 소멸시켰습니다.

          김정은이 어리고 철없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것입니다. 김정은이 자질과 능력이 없으며 지도자의 중요한 덕목을 거의 갖추지 못하고 있어서 아주 조급하고 과대망상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이 이번에 확인됐습니다.
          김정은이 핵무기 공격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나는 이제 죽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이나 같습니다. 북조선 내부에서는 외부에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고 핵무기에 관한 상식이 전혀 없으니 북조선 당국의 발표와 보도만 보면서 흥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김정은이 유엔제재 결의에 맞서 핵무기 공격을 하겠다고 선언한 순간 남조선과 미국 등 국제사회와 유엔은 김정은을 소멸시켜야 한다고 결심합니다. 실제로 남조선 국방부는 '북한이 핵무기로 한국을 공격한다면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인류의 의지로 김정은 정권은 지구상에서 소멸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평양의 인민무력부 총참모부나 중앙당, 국가안전보위부, 보안부, 내각 등의 핵심 고위급 간부들은 현 사태의 결말을 짐작을 할 것입니다. 김정은은 이제 끝났고 그 확인이 바로 핵무기 공격을 하겠다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평양과 전국의 모든 핵심간부들에게 남은 것은 김정은 정권이 어떻게 망하는지를 지켜보는 것이고 그 다음에 어떻게 살아남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주장이 황당하고 말도 안되는 거짓말이고 모략선전선동이라고 믿는 간부나 군관, 장령들이 있다면 그 사람은 리성을 잃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김정은 정권은 지난 인류력사의 전 과정에서 권력이 어떤 조건에서, 어떤 문제로, 어떻게 멸망했는지를 보여준 조건을 완벽히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김정은 정권이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김정은 정권의 생존 가능성은 없습니다.

          김정은 정권이 김일성 시대만큼 오래 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지적이고 리성적 사고를 아무것도 못하는 뼈속까지 노예의 근성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김정은 정권이 김정일 시대만큼 오래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추세와 물욕에 빠져서 자신의 영혼을 독재권력에 맡긴 철저한 하수인, 머습입니다.
          조금이라도 지성과 판단, 분석력을 가지고 과거를 제대로 리해한 사람이라면 김정은 정권이 왜 망할 수밖에 없는지를 너무나도 잘 압니다. 지난 1980년대 말부터 현실의 문제점들을 잘 알고 있는 지식인과 간부들은 지금처럼 해가지고는 북조선이 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지금처럼 해가지고는 정말로 북조선이 살아나지 못할 것이라며 망하는 길밖에 없다고 말해왔습니다. 지금은 일반 사람들도, 중학교 졸업한 사람들도 북조선은 망한다고 생각해왔는데 지금의 현사태는 어떻게 망하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입니다.
          진짜로 김정은 정권이 망할 시간은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지난 2007년 김정일은 북조선 멸망의 대문을 열었고 자신은 죽음의 대문을 열기 시작해 지난 2011년 12월에 결국 죽었습니다.

          김정일이 중풍에 걸렸을 때에도 사람들은 그가 죽을 것은 알았지만 좀 길게 살다 죽을줄 알았지만 3년 반밖에 살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김정은 정권이 짧게 5년에서 길게 10년을 보지만 길어서 3년, 짧게는 1년 반안에 죽거나 쫒겨나거나 하면서 독재정권이 끝날 수 도 있습니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나, 리비아의 가다피나 모두 죽기 6개월 전까지만 해도 큰소리를 쳤고 또 그 부하들도 그 말을 철두철미 믿었습니다. 후세인은 교수형을 당했고 가다피는 매맞으며 끌려다니다 20세의 젊은 청년이 쏜 총을 맞고 죽었습니다.

          지난 2012년 1월부터 김정은이 해온 악행들을 보면 김정은의 결말은 결코 좋을 수가 없습니다. 김정은 정권의 종말은 스스로 자초하는 종말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김정은의 종말이 비극적일수록 그 옆에서 아부와 굴종으로 독재권력의 하수인이 되었던 사람들이 미래도 비참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현명한 사람이라면 지금 당장 김정은 독재정권과의 리별을 준비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선택입니다. 북조선의 군대와 국가안전보위부, 당과 보안부, 내각을 비롯한 모든 기관의 책임간부와 고위간부들은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결정지을지를 지금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북조선 전국의 로동단련대와 교화소, 정치범, 경제범 관리소, 집결소 등 모든 인민탄압 시설에서 악행을 감행하던 자들도 선택해야 합니다. 김정은 독재정권 종말 이후에 인간으로서 삶을 살고 싶다면 지금 당장 인간으로서, 량심을 가진 인간으로 돌아가 인민의 편에 서야 합니다.
          문학적 표현을 빌려서 말하면 지금 북조선은 천지를 뒤흔드는 거대한 격동의 중심에 서 있고 그 격동은 8.15 해방 후 67년만의 큰 변화입니다. 다르게 이야기 하면 세상이 복잡하고 어지럽고 대혼란에 빠진 난세가 바로 지금입니다.

          난세에는 영웅이 나오는 법입니다. 지금 북조선의 모든 간부들, 특히 국가안전보위부와 보안부, 군대의 간부들과 군관, 장령들은 영웅의 편에 서서 인민과 함께 하느냐 독재자와 종말을 맞느냐 선택해야 할 시점입니다.
          북조선의 모든 간부들도 부인과 자식들이 있고 형제와 친척들이 있을 것입니다. 김정은 독재정권이 종말을 맞으면 과거청산을 할 것이고 그때 독재정권을 심판하겠지만 모든 간부들이 지금처럼 숙청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가혹한 독재를 했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자 처벌을 받은 간부는 몇백명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살아남았습니다. 북조선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독재가 끝난 새시대에도 인간답게 평범하고 안정된 삶을 살려면 지금 살궁리를 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입니다.
          김정은 독재정권이라는 거대한 배가 비상사태라는 거대한 폭풍을 만나 조만간 가라앉을 것입니다. 이런 시기에는 독재자의 하수인으로 명령과 지시를 고스란히 집행하기보다는 현명하고 영리하게 인민의 편에 서서 자신의 살길을 만들어내는 것이 살궁리입니다.

          분명 북조선 내부에는 반김정은, 반독재세력, 개혁개방 세력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지금 뭉치지 못해서 세력화를 이루지 못했겠지만 조만간에 김정은 독재정권을 대체하는 개혁세력이 될 것입니다.
          바로 개혁세력의 편에 서는 것이 김정은 이후시대에 살아남는 최선의 선택입니다. 현명한자는 시대적 상황을 가장 정확히 판단하고 선택을 잘하는 자입니다.
          이상으로 주간 시사분석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김승철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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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북한에서도 한국의 K-POP이 인기를 끌며 부유층 자제를 중심으로 최신가요와 춤을 배우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답니다.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이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평양 중구역이나 대동강구역에 사는 10대, 20대의 부유층 자녀들 사이에서는 '디스코를 출줄 모르면 아이들 틈에 끼지도 못 한다'는 말이 나올 만큼 댄스가 유행이며, 개별 댄스교습까지 등장해 강사들이 한 달에 20달러가량을 받고 집이나 연습실에서 춤과 노래를 가르치기도 한다니 그 인기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또한, 탈북자 정착교육시설인 하나원 관계자는 "탈북 학생들도 한국의 가요와 춤을 많이 좋아하고 쉽게 잘 따라한다"며 "하나원 수료식이 열릴 때 학생들이 준비하는 댄스공연은 남한의 가수나 학생들 뺨치는 수준"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비록 사회적 통제 때문에 북한에서 K-POP이나 댄스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소수 특권층에 국한되겠지만 우리나라의 문화가 어떤 식으로든 북한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은 분명 긍정적인 일인 것 같습니다.

          Gabriel.S Oboe


          2장 죄를 보는 것과 예수님을 보는 것

          1. 죄와 예수님을 동시에 바라보게 하는 십자가
          옥타비우스 윈슬로우

          우리가 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대응할 수 있는 때는 오직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알고 교제할 때뿐입니다. 믿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일이 없이 죄를 영적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 영혼은 절망의 심연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죄책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는 예수님의 보혈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주를 따로 떼어 놓고 오직 죄만을 바라보고 죄만 독대할 경우, 죄는 인간이 마주 대할 수 있는 대상 중에서 가장 사악하고도 섬뜩한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도 기적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죄의 사악함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십자가를 통해서 죄의 완전한 용서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처럼 죄와 예수님을 동시에 가장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은 우주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우리 대신 지옥의 모든 형벌을 받으신 예수님의 은혜의 그 무한한 깊이를 우리는 얼마나 피상적으로만 선포하고 가르치는지요! 예수님의 그러한 십자가 죽으심이 얼마나 보배롭고 강력한지를 체험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얼마나 나약한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의 무한한 깊이를 알고 십자가의 죽으심이 얼마나 보배롭고 강력한지를 체험해야만 풍성한 위로를 누릴 수 있고 온전한 거룩에 도달할 수 있으며 견고한 소망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하고도 핵심적인 요소이며, 사실상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저주를 담당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기에 결국 우리는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저주를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짐을 지고 있지 않습니다. 죄의 짐이 완전하게 제거되었습니다. 모든 죄의 짐이 예수님께 전가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모든 죄의 짐을 다 짊어지고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는 영원히 잊혀진 바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죄의 짐을 무겁게 짊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님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우리의 손이 그렇게 옮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그렇게 옮겼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예수님은 항상 우리의 죄를 담당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신경 써서 해야 할 일은 우선 우리의 죄가 완전하게 사함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사 겟세마네 동산에서 깊은 슬픔을 맛보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셔야 했던 그 죄들을 반복해서 짓지 않도록, 그분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하지 않도록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는 자신의 죄를 본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동시에 예수님을 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예수님을 동시에 바라보는 사람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죄를 바라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확실하고 행복하며 소망스러운 죄 사함과 용납과 영광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러한 삶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 속에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한 사실은, 그리스도를 바로 알기 전에는 결코 죄를 정확하게 볼 수 없으며, 죄의 존재와 죄책과 권세를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사실은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사악함과 죄책과 저주받은 상태를 알아야만 비로소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그리스도께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보고 영접하며 그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될 때, 우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에서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악한 것인지를 가장 깊이 각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죄책과 압제와 저주로부터 얼마나 완전하고도 영원하게 구원받았는지를 가장 분명히 확신하게 됩니다.

          그림에서 평행선으로 음영을 나타내는 해칭(hatching)이 있어야 더욱 아름답고 인상적이듯이, 어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의 죄와 빛이라 부를 수 있는 그리스도를 균형있게 바라보는 이런 믿음의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신앙 여정의 많은 모습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인상적인 삶입니다.


          옥타비우스 윈슬로우의 “십자가 아래서“ 중에서 발췌

          출처: 생명나무 쉼터 http://blog.daum.net/7gnak/15720782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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