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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교회를 장악한 거짓복음 / 아더 핑크
현대교회를 장악한 거짓복음
요즈음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사실은 기독교계 안에 영성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가 급격하게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주님의 백성들은 복음이 여전히 널리 전해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위안을 갖습니다. 슬프게도 이들의 낙관적인 추측은 근거가 약하며 모래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만약 지금 선교 홀에서 전해지고 있는 메시지를 조사해 보거나, 일반대중 가운데 뿌려진 소책자를 면밀히 검토해 보거나, 옥외에서 전해지는 말씀을 주의해서 들어 보거나, 구령 캠페인에서 전해지는 설교나 강연을 분석해 보거나, 현대의 복음주의를 성경의 저울에 무게를달아보면, 요컨대, 참된 회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없으며, 죄인이 구원자(救主 : Saviour)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본질적인 것이 없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변화된 삶의 열매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흠을 잡으려고 이 글을 쓰거나 남의 감정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함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며, 완전함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평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다른 이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평하는 것도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훨씬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시대의 "복음주의"는 철저하게 표면적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는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나오도록 호소하는 기초가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안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의 거룩보다 훨씬 더 크며,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진노보다 훨씬 더 크다는 균형을 잃은 슬픈 양상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를 알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들이 치명적으로 빠져 있습니다.
비난받아 마땅할 자기를 드러내는 멋진 찬양, 유머 있는 익살, 재미있는 일화 등은 도입되었지만, 오직 복음만이 효과적으로 비출 수 있는 어두운 배경은 의도적으로 삭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심각한 것은 이러한 것이 부정적인 면의 한쪽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더욱 심한 것은 복음이 현대의 싸구려 복음전도자들에 의해 값싸게 팔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은 단지 죄인의 눈에 먼지를 날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의 혼은 전혀 의심받지 않고 사용되는 마귀의 마취제로 잠에 빠져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정통" 설교에서 전해지는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치명적으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길이 사람에게는 옳은 길로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은혜의 기적으로 간섭하지 않을 경우, 그 길을 따르는 자는 결국 그 끝이 사망의 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늘(천국)을 향해 가는 중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후에 지옥에서 깨어날 때 참혹한 환멸을 갖게 될 것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자를 사악함 가운데서 편하게 만드는 하늘로부터 전해진 좋은 소식인가요? 미친 듯이 쾌락을 추구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믿기만" 하면 장차 두려워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확신을 주고자 주어진 것인가요? 혹자는 대부분의 "복음전도자들"이 복음을 제시하는 방식에 - 오히려 왜곡시킨 방식에 - 비추어 그렇게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회심한 자들"의 삶을 바라 볼 때,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 영적 분별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들을 위해 죽으셨으며, 단지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죄(과거, 현재, 미래)를 완전히 용서받았다고 확신하는 것은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 앞서 계시된 하나님의 율법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공의를 완화시켰다거나 그분의 거룩의 표준을 낮추셨다고 공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복음을 성경적으로 설명할 때 복음은 하나님의 공의와 단호함과 그분께서 죄를 절대적으로 혐오하신다는 것에 관한 가장 확실한 실증과 가장명확한 증거를 보여줍니다.
슬프게도 육체의 자랑은 수많은 자격 없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보다 훨씬 지혜로운 자들이 지나가기를 두려워하는 곳을 뛰어들도록 방임합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비참한 상황을 초래한 원인은 이러한 자격 없는 자들이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들과 모임들이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이유는 이러한 "회심자"들로 가득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이여, 복음은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결코 죄들을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자기 백성들의 범법으로 인한, 구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치신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공의의 검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율법을 무효로 하기는커녕 오히려 율법의 저주를 견디어내시는 구원자(구주)를 보여줍니다. 갈보리는 엄숙하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를 시간 안에서와 영원 안에서 계속 줄 것입니다.
당신은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이 우상에 집착하고 그 마음이 여전히 죄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리스도를 단지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함으로 복음이 존귀하게 되거나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복음을 왜곡시키고,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음란한 것으로 변개시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몇몇 독자들은 앞에 기술된 우리의 "거칠고" "비평적인" 말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물을 것입니다. "영감을 받은 베드로 사도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분명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렇다면 오늘날 동일하게 죄인들에게 말하는 것이 틀렸단 말인가요? 우리가 그렇게 하는 데에는 신성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요?"
그러한 말씀이 성경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한 말씀이 성경에 있기 때문에 훈련받지 않은 많은 표면적인 사람들이 모두 그 말씀을 그대로 말하는 것을 옳다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행전 16:31이 결코 어중이 떠중이 군중들에게 전해진 것이 아니라 특정개인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그 말씀은 아무에게나 전해진 메시지가 아니라 복음이 최초 전해졌던 자들과 같은 성품을 가진 자에게 전해진 특별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구절들은 절대로 왜곡되어서 안 되며, 본문에 따라 고찰하고, 해석하고, 적용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듯이 숙고하고, 주의 깊게 명상하며, 시간을 드려서 연구해야 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급변하는 시대가 만든 이러한 겉만 번지르르한 가치 없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6:31을 보십시오.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사도와 그의 동료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라고 말한 때가 언제이며 누구에게 말했는가요? 복음의 말씀이 진실로 전해진 자들의 특성을 뚜렷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일곱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이들 일곱 가지 항목들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독자들은 이 항목들을 주의 깊게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그 말씀을 들은 사람은 바로 전에 기적을 일으킨 하나님의 권능을 목격했습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감옥의 기초가 흔들리고 즉시 모든 문이 열리며 각 사람의 결박이 풀린지라"(행16:26).
둘째, 그 결과로 그 사람은 매우 동요되어 스스로 자기 생명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간수가 잠에서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친 줄 생각하고, 검을 뽑아 자결하려 하거늘..."(27절).
셋째, 그는 경위를 알고 싶었습니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 한 후..."(29절).
넷째, 자기 만족을 누리며 살던 그의 삶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뛰어 들어가 떨면서..."(29절).
다섯째,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 앞에 와 엎드리고..."(29절).
여섯째, 그는 하나님의 종에게 존경과 경의를 보였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나와..."(30절).
일곱째, 자신의 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우리가 기꺼이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를 가르치는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 간수는 "단순히" 믿기만 하라는 권면을 받은 경솔하고 부주의하고 무사태평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가 자기 안에 이미 역사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는 자입니다.
그의 혼은 깨어 있었습니다(27절). 그 간수의 경우, 그의 잃어버린 상태를 깊이 느끼도록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잃어버린 상태를 분명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사도들이 반드시 회개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의 완전한 태도는 그가 진정으로 회개한 자임을 보여줍니다. 자신들의 타락한 상태에 완전히 눈이 멀어 있고 하나님께 대하여 완전히 죽어있는 자에게 간수에게 전해진 말씀을 적용하는 것은 방금 물에서 나와 후각이 없는 자의 코에 후자극제(嗅刺戟劑 : 냄새로서 각성, 자극시키는 약)를 갖다대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입니다.
독자들은 이 글의 비평을 읽고 사도행전을 주의 깊게 통독하며, 과연 사도가 어중이떠중이 청중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에게 연설을 할 때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라고 말한 경우가 단 한 번이라도 있는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구약 성경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신약 성경에 대하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에 앞서서 회개로 부르기 전에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처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마음에 율법이 적용되기 전까지는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되기" 때문입니다(롬 3:20). 미리 경작하지 않았거나 일구지 않은 땅에 씨를 뿌리는 것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온통 죄를 짓는 일에 몰두하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대속을 소개하는 것은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자는 반드시 그가 인격적인 관계를 가져야 할 분의 성품과 자신에 대한 그분의 권리와 의로운 요구와, 그가 극악무도하게 그분을 무시하고 자기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슬프게도 그리스도의 구원의 본질이 오늘날의 "복음전도자"들에 의해 잘못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원자 대신에 지옥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원자를 전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치명적으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육욕과 세속적인 마음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갈망이 조금도 없이 불호수만 피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맨 처음 언급하는 곳은 "그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다가오는 진노로부터가 아니라) 그 죄들에서 구원할 것임이라"입니다(마 1:21).
죄의 엄청난 가증함에 관하여 깨닫는 자, 양심에 죄의무거운 짐을 느끼는 자, 그리하여 죄를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자, 죄의 무서운 지배로부터벗어나고 싶어 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구원자가 되시지만, 다른 이에게는 구원자가 되시지 않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죄를 사랑하는 자들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신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사악함을 묵과하며, 하나님을 대적하여 그들을 편드는 죄의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 이 거룩한 분을 그같이 고소하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신성모독인가요?
만약 독자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실 때, 나는 죄의 가증함을 알지 못했고, 죄의식으로 복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즉시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결코 구원받은적이 없거나, 당신이 이전에 구원받았다고 생각했을 때 실제로는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은혜 안에서 자라감에 따라 죄가 무엇인지를 -<하나님께 대한 반역> - 더욱 분명하게 깨닫고, 더욱 더 죄를 미워하고 죄에 대하여 슬퍼하게 됩니다. 그러나 양심이 결코 성령에 의해 찔린바 된 적이 없는 자와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적이 없는자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떠한 사실의 영역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온전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니라"(마 9:12). 진정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위대한 의사에게서 치료받기를 구하는 자만이 죄로 병든 자입니다. 그러한 자만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죄의 행위와 혼을 더럽히는 죄의 오염으로부터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죄로부터의 구원이요, 죄를 사랑하는 것으로부터의 구원이요, 죄의 지배로부터의 구원이요, 죄의 교활함과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에, 복음전도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와 주된 사역은 죄에 관하여 선포하고, 죄의 열매가 아닌 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죄 안에 있는 무한한 극악성을 보여주며, 마음속에서 죄의 다양한 역사를 찾아내고, 영원한 형벌이 바로 죄의 공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아, 복음전도자가 죄에 관하여 선포하는 것, 단지 죄에 관하여 상투적으로 몇가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가 무엇인가를 선포하는 것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지 않고 청중들의 관심을 끌지도 않을 것입니다. 분명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칭찬을 얻는 것보다 사람의 칭찬을 사랑하는 자와, 구령(救靈)보다 자기 봉급에 더 가치를 두는 자는 그에 알맞은 임기웅변의 조치를 취하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씀의 선포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것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신실한 말씀을 선포함으로 사람들을 쫓아내는 것이 부정하게 육체와 영합하여 성령을 쫓아내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전도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이란 용어를 잘못 전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복음전도자들이 전하는 내용은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며 값없이 선물로 받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에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고, 단지 그리스도의 피의 무한한 공로를 믿고 신뢰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이 지금 "정통" 기독교계에 널리 유행하고 있고, 그들의 귀가 멍하도록 자주 듣고 있으며, 그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내리고 있어서, 이제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이 부적절하고 한쪽으로 치우쳐서 사람을 미혹하며 잘못된 것 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면, 그는 즉시 이단이라는 낙인을 찍히고 행위 구원을 가르침으로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손상시킨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타락한 피조물이 하나님께 공로를 인정받거나 은혜를 얻을 만한 일을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거룩을 희생하면서 까지 역사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결코 죄와 타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원은 값없는 선물로서, 오직 빈손으로 받아야 하며, 여전히 세상을 굳게 쥔 손으로는 결코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셨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배를 채우지 못하는 돼지 먹이인 곡식 껍질로 죄인의 배를 채우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먼 나라에서 돌아서게 하셔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자기 죄들을 인정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죄인 스스로가 반드시 해야 할 행동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것들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탕자가 계속해서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죄악 가운데 있는 동안은 아버지의 입맞춤과 반지를 받을 수 없는 것 같이, 탕자가 이러한 것들을 행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믿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단단해진 마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먼저 반드시 그 마음이 부서져야 합니다. 성경은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그와 같이 멸망하리라"고 말합니다(눅 13:3). 회개도 믿음과 똑같이 구원에 필수적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그 후에 회개하지도, 믿으려 하지도 아니하였음이니라."(마 21:32). 모든 순서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정하셨습니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회개는 죄를 슬퍼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마음으로 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를 버리고자 마음으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자유로이 역사합니다. 왜냐하면 거룩의 요구는 죄를 버릴 때 만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전도자는 반드시 다음과 같이 외쳐야 합니다.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아담 안에서 떠났던)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리라"(사 55:7).
복음전도자의 책무는 그의 청중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병기를 버리도록 요구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긍휼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구원의 길에 대한 정의가 잘못 내려져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현대의 "복음전도자"들은 죄인이 지옥을 면하며 확실히 하늘(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단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회중을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은 죄인을 완전히 잘못 인도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배척하면서 동시에 구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복음 선포자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는 또한 주님으로서 그분께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고 부언하기는 하지만, 회심자가 그와 같이 하지 않더라도 하늘이 확실하게 보장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즉시 그러한 말을 쓸모 없게 만듭니다. 그와 같은 주장은 마귀의 거짓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적으로 눈먼 자들만이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그분의 멍에를 거절하는 자도 구원하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독자들이여, 그것이 은혜가 아니라 수치인 이유는 그리스도를 불법을 장려하시는 분으로 뒤집어씌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주님(Lord)의 직분으로 하나님의 영예를 유지하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도우시며, 하나님의 법을 집행하고 계십니다.
만약 독자들이 두 개의호칭이 등장하는 누가복음 1:46,47, 사도행전 5:31, 베드로후서 1:11, 2:20, 3:2, 3:18을 본다면, 항상 "구주와 주님"이 아니라 "주님과 구주"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권에 복종한 적이 없고, 그분을 자신의 마음과 삶 가운데서 왕위에 앉힌 적이 없으면서도 여전히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을 환상에서 깨어나게 해 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오른 손에 거짓을 쥐고 영존하는 타오르는 불 속으로 떨어질 것입니다(사 44:20). 그리스도는 "자신을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가 되십니다(히 5: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님 되심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그분께 대해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라는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눅 19:14).
독자들이여, 잠깐 멈추고 정직하게 다음의 질문을 직시하기 바랍니다.
"당신은 그분의 뜻에 복종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진정으로 그분의 명령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슬프게도 오늘날 하나님의 "구원의 길"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본질은 거의 보편적으로 오해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이란 용어는 모든 방면에서 잘못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선포되고 있는 "복음"은 십중팔구 진리를 벗어났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천국)을 향하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사실은 가능한 빨리 지옥으로 서둘러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계 안에 이러한 사태는 심지어 "비관론자"와 "기우가 심한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나쁩니다. 우리는 대언자가 아니며, 결코 대언서의 예언을 고찰하는데 깊이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필자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들이 자주 그렇게 행함으로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건대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영국에서조차 종교적인 상황은 150년 전보다 훨씬 더 나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심히 두려워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정한 부흥을 주시지 않는다면, 머지 않아 곧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짙은 어둠이 백성들을 덮을 것입니다"(사 60:2). 왜냐하면 참된 복음의 빛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판단컨대 현대의 "복음주의"는 모든 "시대의 표적들" 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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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승구 교수님 홈페이지 http://blog.daum.net/wminb/13718956
존 스토트 목사님을 아쉬워 하며
존스토트 목사님께서 향년 90세로 (은퇴한 영국 목사님들이 사는 곳의 하나인) Surrey에 있는 St. Barnabas College에서 많은 친구들이 모여 성경과 헨델의 메시야를 들으면서 하늘의 부름을 받으셨다는 소식을 듣고(http://www.bbc.co.uk/news/uk-14320915; http://www.myfoxatlanta.com/dpps/news/anglican-evangelist-john-stott-dies-dpgonc-km-20110727_14324824), 그 분 개인만을 생각하면 김재영 목사님께서 페이스 북에서 표현하신대로 하나님께서 안식을 주신 것을 감사할 수 있고, 또 전 세계 기독교를 보면 상당히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또한 그를 아쉬워 하는 분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냉소적인 생각도 해 봅니다. 그를 진정으로 아쉬워하고, 그리워한다면 그가 한 말과 그 행적을 따라가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이 기회에 기독교에 대한 스토트 목사님의 기여 등을 간단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1921. 4 . 27- 2011, 7. 27) 88세 생신 때 찍었다는 사진
첫째로, 그는 목회자가 계속해서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 좋은 예를 남겼습니다. 그가 열심히 공부하고 써 놓은 책이 많아서 많은 사람들은 그가 학자라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물론 그는 참으로 학자였습니다. 캠브리쥐대학교에서 불어와 신학을 전공하여 두 분야 모두에서 우등(first class)으로 졸업하고 역시 캠브리쥐의 리들리 홀에서 영국 교회 사제로서의 훈련을 받은 그는 그러나 무엇보다 목회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회자는 평생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 대표적인 예입니다. 나의 친구 David Currie가 자주 말하였듯이 "왜 뛰어난 학자는 학교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뛰어난 학자를 교회가 가지도록 하자"고 한 말을 몸소 실현한 귀한 모범입니다. 스토트 목사님께서 사랑하던 영국의 청교도 목사님들처럼 그는 20세기 상황에서 공부하는 목회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드러내어 주었습니다. 이점은 한국 목회자들이 특별히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아무리 바빠도 오전에는 그의 목사관 서재를 지키는 일에 헌신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좋은 설교와 목회는 책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잘 보여준 것입니다. 이점은 우리들이 두고 두고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로서 그는 무엇보다도 성경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잘 강해하며 설교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가 섬기던 런던 중심부의 All Soul's Church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모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1945년에 목사로 임직하자마자 와서 이 교회 부목사로 섬기다가, 1950년부터 1975년까지 담임목사로 섬겼다고 합니다).
(1950년 All Soul's Church 담임 목사 임직식 때에 찍은 사진)
제가 그 교회를 처음 방문했던 1984년은 그가 이미 1975년에 은퇴하고 때때로만 설교하던 때이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제가 참여했던 1984년 9월의 한 주일에 내 옆에 앉았던 젊은이는 Oxford 대학교 학생이었는데,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자주 옥스포드로부터 런던까지 온다고 말하였습니다. 그에게 예배 마치고 커피를 사주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날 저녁예배는 스토트 목사님 자신이 설교하신다고 하여 저녁예배에 참여했을 때 1,000여명의 사람들이 저녁에 하나님께 예배하고, 말씀을 듣고 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All Soul's Church와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목회하셨었고 (제가 유학할 때에는 미국인 목사님인 R. T. Kendall이 목회하던, 그러나 그도 이제는 은퇴하였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채플과 웨일즈의 예배당, 아버딘의 신실한 성도들이 모이던 예배당에 주일 저녁 예배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던 것을 생각하면, 특히 겨울에는 4시만 되면 깜깜해지는 그런 곳에서도 주일 저녁예배를 지켜가던 그 교회들을 생각하면 오늘날 우리들의 한국교회에서 주일 저녁예배가 무시되고 있는 상황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신실한 목회자들이 목회하는 곳은 언제나 사람들이 예배를 중요시한다는 것을 자주 목격합니다. ALL SOUL'S Church 도 그런 곳의 하나였습니다. 신실한 목회자인 스토트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점입니다.
그 날 저녁 예배 마친 뒤에 그의 설교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이제 신학 석사 학위를 하기 위해 한국에서 온 학생이라고 하자 1984년 당시 김명혁 교수님께서 그의 선교에 관한 책을 번역하신 것을 언급하시면서 한국의 어느 교단 사람인가고 물으며 "합동, 통합" 등의 용어를 한국말로 하실 정도로 한국 상황에도 밝았던, 이제 막 유학을 시작하는 학생에게 손을 벌리시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공부에 복주시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실 때 한편으로는 너무 상투적인 목화자다운 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말씀을 감사해 하던 그 때가 벌써 27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그의 그의 축복을 들을 수는 없지만 그것을 아쉬워 하는 사람들은 그가 쓴 여러 책들을 심각하게 읽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나아 가려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그가 명확한 복음주의적 입장을 가지고서 성경을 중요시하면서 설교하고 강연하고 책을 쓰고 활동하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의 여러 주석과 강해서는 그가 얼마나 성경을 존중하는 태도로 성경을 설명하고 있는 지를 잘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학자들 가운데 호주의 레온 모리스나 NICNT, NICOT 주석을 쓰신 분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언제나 본문에 충실하되 그 성경적 의미를 잘 드러내 주는 작업을 그는 해 주었습니다. 특히 "성령 세례와 세령 충만"에 대한 짧은 책은 이 문제에 대한 명확히 개혁파적인 입장을 잘 드러낸 준 고전에 가까운 것이어서 개혁신학자인 안토니 후크마도 그 책은 적극적으로 인용하면서 이 문제를 설명하려고 애쓰던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날 성경을 비평적으로 대하려 하고 성경을 존중하고 그 형성에 관여 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무시하는 해석들이 난무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더 귀하게 여기면 존중해야 할 태도가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셋째로 그는 우리 시대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서 성경의 가르침을 적용하고 그것들과 관여하면서 해결하려는 적극적 노력을 보인 진정한 복음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올 소울즈 교회 안에 이 문제를 돕기 위한 전문가 위원회가 있었다는 것은 그의 책으 읽은 사람들은 누구나 잘 아는 매우 잘 알려진 이야기 입니다.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고민하며 효과적으로 설교하기 위해 애쓴 그의 모습을 이제는 <현대 사회의 문제들과 기독교적인 대답>을 통해서 더욱 더 깊이 생각하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가 은퇴후에 현대 목회 연구소 같은 것인 Langham Partnership International을 세워서 2007년까지 봉사하면서 많은 목화자들을 도우려고 하던 그 진정한 의도를 높이 사야 할 것입니다.
넷째로, 그는 영국 안에서나 전세계적으로 복음주의 운동을 확산하기 위해 애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은 그를 현대 복음주의 운동의 형성자(건축자)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WCC 회의에 참여하며 그 문제점을 목도하다가 결국은 복음주의자들을 결집하여 세계 복음화를 위한 로잔 선언(1974)을 하도록 했던 장본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람이 스토트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주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의 기조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로잔 선언을 우리들이 참으로 깊이 있게 생각하며 동의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로잔 선언에 동의하는 진정으로 성경을 사랑하는 이들을 형제 복음주의자로 여기면서 같이 활동하려고 하던 그 노력이 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이 바쁜 삶을 살면서도 그의 취미 활동인 새 관찰(Bird Watching)을 계속해 나간 것은 환경 문제에 대한 그의 관심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이 여가를 보는 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함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우리 나라에 방문 했을 때도 여유 시간이 있으면 새 관찰 할 수 있는 기회를 물었었다는 것은 의 한국 방문에 대해 들었던 사람들은 신기하게 여겼던 점의 하나입니다. 기독교적인 삶이 생활화된 서구인들과 달리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주의 사역을 위한 일 중독자들에 가깝기에 이렇게 여유를 내어 '새 관찰'이라는 취미를 즐기던 스토트 목사님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를 떠나 보내면서 아쉬운 점은 그가 (1) 데이비드 에드워즈의 유도 심문에 답하면서 영혼 멸절설(annihilation theory)을 선호 할 것이라고 말한 점, (2) 로이드 존스와의 단절, 그리하여 청교도 컨퍼런스가 계속되지 못하도록 한 점 (즉, 그와 로이드 존스 ,패커 같은 분들의 유대가 지속되었어야 우리가 말하는 복음주의의 영향력이 더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아쉬움의 표현입니다) (3) 몇몇 문제에서 특히 그가 속해 있던 성공회 전체를 좀더 성경적인 방향으로 전환하는 일에서 별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는 점 (이점은 어떤 교회가 기성화되었을 때 그것을 성경적으로 돌이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수많은 청교도들과 스토트나 페커 같은 분들과 함께 아쉬워 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오늘날에는 그와 같이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 보다 이상한 성령 운동을 하는 분들이 우리 주변에 더 많고, 그런 분들의 책들이 주변에 많이 팔리고 읽히고 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스토트 목사님의 하늘 부르심 받음을 게기로 우리 주변에 좀더 성경에 가깝게 가는 운동이 더 일어 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것이 하늘에서 안식을 누리고 계시는 스토트 목사님이 원하시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가 섬기던 올 소울즈 교회 홈페지에 실린 글도 보십시오:
http://www.allsouls.org/Publisher/Article.aspx?ID=273279
출처: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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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 소곡
최송연
대지의 맑은 물 길어올려
꿰어 반짝이는 구슬이네
메마른 풀잎 쓰다듬는
천사의 고운 숨결
화사한 햇살 한 줌
그대 가녀린 가슴에 채우니
햇살인 듯,
진주인 듯,
은빛 모래인 듯...
그대 영롱한 빛
대지를 움 틔우는 생명,
척박한 땅 갈아엎고
내일을 꽃피우는 사랑이네
주님의 놀라우신 은총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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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러려니..하고 (0) | 2013.06.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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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의 항구.../최송연
주께서
나의 여정에
함께하지 않으셨다면
나 지금보다 얼마나
더 많이 외로웠을까
주께서
내가 연약할 때
손잡아 주지 않으셨다면
나 지금보다 얼마나
더 많이 울었을까
밤 점점 깊어가고
광풍(狂風) 휘몰아쳐
내가 탄 배 삼키려 하나
주께서 날 지키심 믿으니
두려움 없는
바위 틈새 작은 비둘기처럼
나 즐거이 사랑노래 부르며
소원의 항구로 노 저어 가네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107: 29_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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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107: 28-30 참조)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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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5)
장대현교회
1893년 평양에 살립된 장로교회로 사진의 ㄱ 자 예배당은 1900년 건립된 것이다
소래교회 1895년 기와 지붕의 한식교회 건물로 개축한 소래교회 (사진 상,중)
서상륜과 서경조 등 그의 가족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비롯되었다. 이는 세계 선교사상 유래가 없는 자발적 자전에 의한 복음의 토착, 수용사 였다. 곧 선교사 입국 이전에 한국에는 이미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한국교회사(45)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한국교회사(46)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한국교회사(47)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한국교회사(48)
한국교회사(49) 제2장 선교사 입국과 복음의 전래 |
출처 :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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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작가 두초 디 부오닌세냐(Duccio di Buoninsegna, 1255-1319)가 그린 호세아. (인터넷 블로그 갈무리) ▲ 바알(왼쪽)과 아세라(오른쪽)의 형상물. (인터넷 블로그 갈무리) ▲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를 그린 작가 코디 밀러(Cody F. Miller)의 작품. (코디 밀러 홈페이지 갈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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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 교회와 신앙 고백 공동체
16세기 종교개혁에서 시작된 개혁 교회는 진리에 대한 민감성을 가진 교회 건설 운동의 열매다. 종교개혁자들과 그 후예들은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분했다. 교회를 신앙 고백 공동체로 보고 계급적인 교회관을 거부한 채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가르치고 고백하는 신앙 고백 공동체를 재건하고자 했다.
오늘날 교계 일부에서 성경이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는 진리에 대해 차츰 등을 돌리고 거짓 교사의 가르침과 다를 바 없는 비진리에 마음의 문을 열고 있다. 다원주의(pluralism), 포용주의(inclusivism), 신앙무차별주의(indifferentism)로 흐르고 있다. 이런 풍조 아래 한국 교회는 점차 진리에 대한 민감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한국 교회가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받은 개혁 교회다운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진리에 대한 민감성을 회복해야 한다. 유럽과 미국의 주류 교회들처럼 교인들의 수가 떨어지고 생명력을 상실한 한 채 사양길로 접어들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선 신앙 고백 공동체를 건설하고 유지하려는 당찬 노력이 있어야 한다.
진리에 대한 민감성을 가진 교회
개혁 교회는 신조와 신앙 고백서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한편 신조와 신앙 고백에 집착하기 때문에 성경적이지 않다는 오해를 받을 정도다. 제네바신앙고백서, 벨기에신앙고백서, 도르트신경, 하이델베르크신앙문답, 제1스위스신앙고백서, 제2스위스신앙고백서,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등을 만들어냈다.
개혁 교회의 신앙 고백서들은 성경이 제시하는 진리가 참이라는 강한 신념에 기초한다. 진리에 대한 민감성을 표현한 것이다. 성경이 가는 데까지 가고, 멈추는 곳에서 멈추며, 되돌아가라고 하는 곳에서 되돌아서고자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신조와 신앙 고백서를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설교자들은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가르치기보다 위로, 사랑, 인간 관계, 축복 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신조나 신앙 고백서들에 대해 등을 기댈 수 있는 방어벽 정도로 취급한다. 직분 받기 전에 한 번쯤 읽어보는 문건에 지나지 않는다. 반대자를 누르기 위해 방패용으로 가끔 인용하는 실정이다.
더욱 걱정되는 것은 교회가 공적인 신앙 고백문을 갖고 있으나 그것은 문건일 뿐 회원 교회·회원 단체·구성원들의 실질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는 자신의 신조나 신앙 고백에 상반된 신학을 가진 구성원들을 규제하지 않는다. 자유주의신학자, 종교혼합주의자, 종교다원주의자들을 포용한다. 심지어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공적으로 분명하게 고백하지 않는 자들에게 신학교에서 목회자 양성을 허용하고 있다.
몇몇 교회들은 신조나 신앙 고백의 상대적인 권위를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성경의 참된 권위를 약화시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는 자유주의 기독교가 교리와 신앙 고백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교리를 믿을 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일치한다. 이런 움직임은 교리나 신앙 고백서를 가볍게 여기는 풍토를 조성한다.
공식화된 신조나 신앙 고백 없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화이다. 신조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이 인정하든 않든 나름대로의 신조 공식과 신앙 고백적 진술을 소유하고 있다. 신앙고백주의(confessionalism)는 배격해야 하지만 신앙 고백은 언제나 중요하다.
성경은, 그것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어떤 지침(clue) 없이 신자 개인과 교회에게 알기 쉬운 안내를 제공하기엔 너무 방대하다. 신조와 신앙 고백은 신자들을 연합시키며 강건케 한다. 신조와 신앙 고백의 일차적 목적은 교육, 복음 전도, 참된 성도의 삶의 본질인 위대한 자유에 대한 즐겁고 행복한 선포이다(롬 10:9; 고전 12:3; 딤전 6:13; 요일 4:2). 참된 신앙이 존재하는 곳에 언제나 신앙 고백과 그것에 대한 강한 열정이 존재한다.
중추적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
종교개혁자들이 펼친 교회 개혁은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왕으로 높임을 받으시고 그분의 말씀만이 절대적인 권위로 받아들여지는 교회 재건 운동이었다. 교회의 표지(標識)에 대한 그들의 논쟁은 진리에 대한 강력한 민감성의 표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의 선포를 교회의 항구적인 표지로 보았다. 교회의 존립이 그것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존재가 교황 중심의 교계(敎階)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는 교회관을 거부했다. 거창한 조직체와 성직 제도 그리고 예배당을 가졌다고 참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어디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가 집행되는 곳에는 교회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진리를 떠난 교회는 참 교회가 아니라고 했다.
종교개혁자들이 말하는 교회의 표지는 단순한 설교 행위가 아니다. 사도들이 가르친 중추 교리를 설교하고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교회 안의 미신적인 겉치레 예배와 의식을 개혁하고자 했다. 성경이 제시하는 진리를 가르치고 그것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성수를 뿌리고 무릎을 꿇으며 가슴에 십자가를 긋는 형식과 절차를 밟는다고 해서 참 예배, 참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친 진리의 말씀을 설교할 때 비로소 구원의 길이 제시되며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참 예배가 된다고 보았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사도성이 어떤 인물과 처소와 지위로 계승되는 게 아니라, 신앙과 교리의 계승으로 유지된다고 확신했다. 신앙 고백 공동체가 전하는 복음, 성경, 신조를 의심할 여지 없이 참 교회의 표지로 여겼다. 이런 확신을 바탕으로 그들은 ‘오직 성경’에 토대를 둔 진리의 기둥과 터 곧 신앙 고백 공동체를 세우고자 했다.
종교개혁자들이 오늘의 한국 교회를 목격한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말씀``-교리를 무시하는 교회, 진리를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는 설교, 십자가 없는 선교, 부활과 영생에 대한 고백이 없는 신학을 목도한다면 무엇이라고 할까? 한국 교회는 설교자가 강단에서 설교하는 행위를 교회의 표지인 말씀 선포로 여기는 게 아닌가? 예배와 교육이 설교 위주로 진행된다고 해서 개혁 교회의 표지를 가진 것은 아니다. 교회의 표지는 바울이 가르치고 사도들이 전한 복음, 초대 기독교인들이 박해 중에도 믿고 확신한 교리를 선포하는 일이다. 중추적 기독교 교리를 거부하는 자들의 설교나 인본주의적 내용으로 일관하는 설교는 교회의 표지가 아니다.
계급적 교회관을 배격하는 교회
종교개혁자들이 교회를 신앙 고백 공동체로 이해한 것은 교회를 계급 조직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계급-교권 개념의 교회관을 배격했다. 개혁 교회는 목사, 장로, 집사직 사이에 상하의 구별이 없고 다만 직임이 구별된다고 보았다. 집사로 봉사한 사람이 장로로 임직되는 것은 승진이 아니다.
마르틴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참으로 제자들이며 사무에 관한 일을 제외하곤 그들 사이에 하등의 구별이 없다”라고 말했다. 루터의 만인제사장주의는 계급주의와 사제제도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평신도와 성직자 사이의 계급적 구조를 배격하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등하다고 강조한다.
존 칼빈은 만인제사장주의를 보완하여 안수례에 의해 세움을 받아 영적 직무를 수행하는 교역자와 그 교역자의 영적 보살핌을 받는 일반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지만, 그 직무는 구분된다고 가르쳤다. 무질서를 싫어한 그는 교역자의 권위와 특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동체의 효율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직능의 구분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교회는 하나의 살아 있는 기관이기 때문에 거기에 일정한 질서가 있어야 한다. 각각의 직분 사이에 질서가 유지돼야 하고 존경과 신뢰에 바탕을 둔 사역이 이뤄져야 한다. 인도를 받는 자는 인도하는 자를 배나 존경할 자로 여기고 순종해야 한다(히 13:17). 신도들이 목회자를 존경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한국 교회는 교회 안의 직분들을 다분히 계급 개념으로 이해한다. 일반 성도보다 집사, 집사보다 장로, 장로보다 목사의 계급이 더 높거나 서열상 높은 지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선배나 연장자를 존경하고 그들의 경험과 지혜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바람직하다. 집사로 봉사하다가 장로로 선택돼 봉사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교회의 직분은 문화의 맥락에 따라 그 개념이 약간씩 다를 수 있다. 성경이 보여주는 것과 똑 같은 형태의 직분을 유지하지 않아도 교회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면 무방하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의 계급적 직분 이해와 교권적 교회관은 성경이 말하는 교회 직분의 본질을 흐릴 정도다. 유교의 장유유서, 서열 의식과 그것에 바탕을 둔 전제 정치 문화와 권위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계급적인 직분 이해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장로나 권사직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잡음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서둘러 장로가 되고 싶어 하고, 집사나 권사로 선출되고 싶어 한다. 공동 의회, 교인 총회에서 집사나 장로로 선출이 되지 않은 일로 교회 안에서 이런저런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리스도를 섬길 기회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높은 계급을 얻으려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서리 집사인 연로한 부인에게 권사라는 ‘직위’를 만들어 ‘승격’시키는 것도 계급 의식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들이 개교회 안에 다양하게 남아 있다.
교회 안의 계급 의식은 교회의 영적 활기와 역동성을 앗아간다. 교회를 경직시킨다. 계급 의식에 투철한 교회일수록 의식적(儀式的)이고 건조하며 열정이 없고 획일적이다. 교조적인 권위와 질서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는 교회일수록 창의적이지 않다. 주님 안에서 사랑, 기쁨, 자유, 평화, 화해, 용서의 보람을 누리기 어렵다. 노인성에 깊이 빠지면 빠질수록 더욱 권위적이 되고 반지성적이 된다. 이런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에 억압당한다.
먼저 진리에 민감하라
한국 교회가 개혁 교회다운 정체성을 회복하는 길은 먼저 진리에 대한 민감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상적인 개혁 교회는 신조와 신앙 고백을 중요하게 여기며 하나님의 말씀 선포를 교회의 실제적인 표지로 간직한다.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명료하게 가르치고 확고하게 고백한다. 진리에 대한 민감성을 가진 신앙 고백 공동체가 교권주의, 중세기적 미신, 새로운 형태의 이단, 거짓 교사의 가르침 등에 저항력을 가질 수 있고 하나님 사랑과 교회 사랑의 의무를 성실하게 감당할 수 있다. [object TEXTAREA]
최덕성 _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 200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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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신조과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의 비교
- 역사적 배경을 근거로 하여 -
차 례
서론 ------------------------------------------------------ 1
본론 ------------------------------------------------------ 1
1. 니케아 신조의 배경 - 아리우스 논쟁의 발발과 니케아 회의
; A.D. 318-325. ---------------------------------------- 1
1.1. 아리우스 논쟁의 발단 ----------------------------------- 1
1.1.1. 속사도에서 오리겐까지 -------------------------------- 1
1.1.2. 아리우스 논쟁의 발발과 전개 --------------------------- 3
1.2. 니케아 회의 ------------------------------------------- 5
2. 니케아 신조 및 분석 --------------------------------------- 7
2.1. 니케아 신조 ------------------------------------------- 7
2.2. 니케아 신조 분석 --------------------------------------- 7
3.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배경 ---------------------------- 10
3.1. 아리우스파와 반아리우스파의 응전과 이들의 우세 시기인
콘스탄틴 황제의 사망시까지; A.D. 325-361. ------------------- 10
3.2. 정통 기독교의 최종 승리와 니케아 신경이 완성된
콘스탄티노플 회의시까지; A.D. 361-381. --------------------- 12
3.3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 14
4. 니케아 신조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비교 ----------------- 15
결론 ---------------------------------------------------- 17
서론
초대 기독교가 갖고 있는 최대의 주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1) 초대 기독교의 배경 속에서도, 그리고 속사도, 변증가, 교부들의 글 속에서도 그리스도는 핵심 주제였다. 과연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정말 하나님이신가? 만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면 창조주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부도 하나님이고 성자도 하나님이라면, 둘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된 이러한 문제들은 초대 교회 수세기 동안 줄곧 쟁점이 되어 왔다. 그러던 중 4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Alexander)와 장로 아리우스(Arius) 사이에서 시작된 성부와 성자 관계에 대한 논쟁은 초대 교회 역사상 가장 큰 논쟁으로 비화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이른바 아리우스 논쟁이다. 니케아 종교 회의는 바로 아리우스의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회의였다. 그런데 니케아 회의는 이 논쟁의 불씨를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했다. 그 결과 이 문제는 진일보하여 성령과의 관계 문제까지로 확대됨으로써, 결국 콘스탄티노플 종교 회의에 이르러서야 삼위일체 교리 정립으로 매듭지어지게 되었다.
본 졸고의 관심은 니케아 회의와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각각 도출된 두 신조를 역사적 맥락에서 서로 비교 검토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각의 회의에 이르까지의 역사를 고찰해야 하는데, 이러한 작업은 아리우스 논쟁의 흐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아리우스 논쟁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 가장 핵심에 도달하는 첩경이라 사료된다. 아리우스의 논쟁은 니케아 회의를 중심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니케아 이후의 아리우스 논쟁은 학자들에 따라 통상 두세 부분으로 세분된다. 본 졸고에서는 필립 샤프(Philip Schaff)의 견해를 좇아 아리우스 논쟁을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2)
1. 논쟁의 발발로부터 정통 기독교의 일시적 승리를 확인해 준 니케아 회의까지 ; A.D. 318-325
2. 아리우스파와 반아리우스파의 응전과 이들의 우세 시기인 콘스탄티우스의 사망시까지; A.D.
325-361.
3. 정통 기독교의 최종 승리와 니케아 신경이 완성된 콘스탄티노플 회의시까지 ; A.D. 361-381.
본론
1. 니케아 신조의 배경 - 아리우스 논쟁의 발발과 니케아 회의 ; A.D. 318-325
1.1. 아리우스 논쟁의 발단.
아리우스 논쟁은 콘스탄틴이 등장하기 오래 전부터 계속 되고 있었던 신학적 발전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만 한다. 가깝게는 오리겐의 기독론이 갖는 모순적인 요소들과 알렉산드리아 신학과 안디옥 신학 간의 대립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3), 멀게는 속사도들에게까지 소급된다.
1.1.1. 속사도에서 오리겐까지
주후 약 90년부터 140년 사이에 활동했던 속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분명한 싱앙을 고백하고 있었다. 속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분명한 신앙이 있었다. 안디옥의 감독 익나티우스(Ignatius)는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나신 분이면서도 나시지 않은, 인성 안에 계신 하나님이신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4)고 했으며, “에수 그리스도는 만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때가 차매 나타나셨다”5)고 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견해는 변증가들에게로 오면서 한층 더 분명해졌는데, 변증가 유스틴(Justin)은 성육신 이전에 선재하신 로고스는 “하나님의 첫아들”6)이며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하나님 다음되시는 분”7)이라고 했다. 그러나 변증가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성부와 성자간의 차별을 두는 종속설적 경향이 따라다녔다.
한편 교부 이레니우스는 변증가들보다 상당히 진보된 신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레니우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로고스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은 바 되었으며, 그는 또한 역사 속에서 모든 인류에게 나타나셨으니, 아버지의 약속에 따라 이 마지막 시대에 말씀이 자신의 솜씨를 연합하여 감성있는 인간이 되셨음은 이제 명백히 증명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일 그리스도가 어느 때에 태어났다면 태어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모든 반박을 일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와 항상 존재하셨기 때문에, 존재하기 시작한 어느 때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았기 때문이다.”8) 이레니우스는 성자와 성부의 영원한 공존을 언급함으로써 성자의 신성을 확증했지만 성자와 성부가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설명하지는 못했다.
이런 면에서 터툴리안(Tertullian)은 이레니우스보다 훨씬 앞선 견해를 제시하였다. 그는 본질(substance)과 인격(person)이라는 두 용어를 통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통일성을 추구했다. 즉 세 개체는 하나이면서 나눌 수 없는 본질을 소유하면서 서로 방해받지 않고 세 개의 개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그렇지만 셋은 지위에 있어서가 아니고 정도에서이며, 본질에서가 아니고 형식에서이며, 능력에서가 아니고 그 양상에서 나뉘인다. 그렇지만 그 분이 한 분 하나님으로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이러한 정도들과 형상들과 외양들로 생각되어질 수 있다면 여전히 하나님의 본질이며, 하나의 조건이며, 하나의 능력을 갖는다.”9) 그러나 터툴리안이 사용한 용어들은 그 뜻이 모호했다.
한편, 오리겐(Origen)은 이레니우스나 터툴리안보다 훨씬 발전된 견해를 피력했는데, 로제(Bernhard Lohse)에 의하면, 그는 주장하기를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아들과 성령에도 적용시킬 수는 있어도 아버지 한 분만이 하나님이며, 아들과 성령의 신성은 아버지로부터 파생된 것이고, 하나님은 아들을 영원한 행위로써 산출한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종속되듯이 성령도 아들에게 종속된다”10)고 하였다. 신격의 세 위격에 대해서 오리겐은 본체(Hypostasis)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개별적 요소 혹은 개별적 존재라는 의미에서이고 아들과 성령은 본질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다름이 없다. 그렇지만 동시에 세 위격은 의지와 조화와 통일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하나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종류의 통일성을 말하기 위해서 오리겐은 동일본질(Homoousios)이란 개념을 사용했다.11) 이처럼 오리겐은 아들을 아버지의 피조물이라고 아들의 종속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이들과 아버지의 본질적인 동일성을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삼위 간의 차이점을 말하는 쪽이 항상 우세해서 삼위 간의 통일성을 말하는 쪽은 그렇게 만족스럽지 못했다.12)
오리겐의 죽음과 아리우스 논쟁이 시작되었던 몇 십년 사이에 오리겐이 주장하는 삼위일체 교리는 어떻게 하든지 새롭게 다듬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영원한 창조를 거절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종속을 엄격하게 주장하든가 아니면 오리겐을 넘어서서 상이한 실체 간의 본질적 하나됨을 강력하게 주장하든가 하는 두 범주에 속하게 되었고, 그 후에 등장하는 모든 신학이 오리겐의 좌파에 서든지 혹은 우파에서 그의 주장을 폈다.13)
1.1.2 아리우스 논쟁의 발발과 전개
아리우스 논쟁은 약 318년경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 알렉산더(Alexander)와 그 교회 장로 아리우스(Arius) 사이에서 발생한 논쟁을 말하는데, 한마디로 오리겐 좌파인 알렉산드리아 장로 아리우스와 오리겐 우파인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 사이에 일어난 논쟁이었다.14) 이 논쟁은 역사가 소크라테스(Socrates)에 의하면 이렇게 발단되었다.15) 디오클레티안 박해 하에 순교한 알렉산드리아 감독 베드로를 승계하여 아킬라스(Achillas)가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되었고, 다시 아킬라스를 이어 알렉산더가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되었다. 그는 용기있는 행동으로 교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감독이었다. 한번은 알렉산드리아 감독인 그가 자신의 교구 장로들과 교직자들을 모아 놓고 그들 앞에서 삼위일체의 통일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설명을 하면서 야심적이고 확신에 찬 신학적 견해를 펴고 있었다. 바로 그 자리에 있던 장로 가운데 한 사람인 아리우스가 일어나 감독은 사벨리우스(Sabellius)의 교리를 말하고 있다고 하면서 정면으로 감독의 삼위일체 견해를 반박해 버렸다. 아리우스는 만일 성부가 성자를 낳았다면 난 자는 존재의 시작을 가졌을 것이며 아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아들의 존재는 성부와 같은 본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로부터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리우스. 소크라테스가 장로라고 언급한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의 12교구 중 하나인 바우칼리스(Baucalis)를 담당한 수석 사제였다. 아리우스는 역동적 단일신론을 주장한 사모사타의 바울16)의 제자였던 루키안(Lucian)의 문하생이었다. 루키안의 지적 세계는 오리겐의 많은 사상을 계승했는데, 아리우스는 루키안보다 훨씬 더 오리겐적으로 신학을 재구성했다. 이로 보건대 아리우스는 동방에 유행하던 두 가지 신학 사조, 곧 알렉산드리아와 가이사랴를 중심으로 전파된 오리겐의 사상과 안디옥을 중심으로 전파된 루키안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아리우스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초월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아리우스의 신앙고백을 보면, “우리는 홀로 유일하게 비출생적이고 홀로 유일하게 영원하시고, 홀로 유일하게 시작이 없으시고, 홀로 유일하게 주님이시며, 홀로 유일하게 만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고백한다”17)고 되어 있다. ‘하나님’이라고 쓰는 아리우스의 사상에는 하나님 아버지 한 분만을 뜻한다. 하나님의 존재는 절대적으로 초월적이고 불변적이므로 다른 어느 존재에게도 전달될 수 없다. 그러므로 초월하신 한 분 하나님 이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창조되었음이 확실하고, 무에서 창조되었음을 뜻한다. 아리우스는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나왔다는 사상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와 같은 사상 형식은 하나님의 육체적인 범주에만 적용될 수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이 이상 이외의 다른 생각은 하나님을 ‘복합체’로 만들려는 것이며 따라서 그릇된 것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아리우스도 자기 앞의 변증신학자 이레니우스와 터툴리안처럼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말씀과 지혜로 더불어 계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씀과 지혜를 위격과는 전혀 관계 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렇지만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되었는데, 하나님의 피조물로써 시간의 시작 이전에 무로부터 창조된 것으로 보았다. 아리우스는 아들을 다른 피조물과 같은 수준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에 의하면 아들은 완전한 피조물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아들을 피조물이라고 할 때, 아리우스는 아들의 산출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면 아들과 아버지가 너무도 가깝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로지 “파생적인” 의미에서 아들의 “출생”의 뜻을 사용했다.18)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적인 동일성은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있을 수 없다.
여기에 덧붙여서 하나님은 항상 아버지가 아니고, 하나님은 혼자 계신 때가 있었으며, 아직 아버지가 아닌 때도 있었다.19) 그래서 아버지의 경우와 같이 아들의 불가변성을 주장할 수 없다. 아들은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의 신성을 속성에까지 연장시킬 수는 없다.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수여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알렉산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Alexander, 312?-328 재위)는 오리겐의 성자의 영원 발생 교리를 좀더 발전시켜서 성자는 성부의 본질로부터 영원 발생된 동일본질의 위격적 존재라고 보았다.20) 즉, 말씀은 한 위격으로서 성부와 구분되며, 또한 성부는 말씀 없이 계실 수 없기 때문에 아들은 성부와 동등 영원하다. 그러나 말씀의 아들됨은 실재적이고 형이상학적이지 입양에 의한 것이 아니다. 둘은 상호 불가한 두 실재이며 완전히 같으나 하나는 아니다는 것이다.21) 그는 아리우스의 견해가 그릇되며 그는 더이상 그 견해를 제기해서는 안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이 무렵 아리우스는 팔레스타인으로 도피해 있었으며, 이곳에서 자기 견해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찾아나서 실제로 목적한 바를 성취하였다. 그 중에서 제국의 동방 수도의 주교인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Nicomedia)라는 유력한 인물이요 루키안의 동료 제자를 지지자로 만들었다.
아리우스는 한동안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와 함께 지냈으며, 이곳에서 자신의 견해를 다소 체계적으로 정리한 ‘탈리아’(Thalia)를 썼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22) 아리우스와 유세비우스는 편지 공세를 통해서 알렉산더에게 아리우스를 복권시키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알렉산더도 이에 못지 않은 편지 공세를 통해서 아리우스가 로고스의 신성을 부인한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하였다. 감독 알렉산더는 성자가 시간과는 무관하게 영원히 발생하며 ‘무로부터’라기 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며 불변하고 완전하다고 주장하였다.
이 양 당파는 모두 성경으로부터 뽑아낸 증빙 구절들과 아울러 상대방의 위치를 붕괴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였던 논리적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우스는 우선 알렉산더가 기독교적 유일신론을 부인한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알렉산드리아 감독의 주장에 의하면 신성을 지닌 존재가 둘 있게 되므로 결국 두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알렉산더는 이에 답변하기를 아리우스의 이론은 말씀의 신성을 부인함으로, 이에 따라 예수님의 신성이 부인된다고 하였다.
알렉산더는 결국 감독의 권위와 책임에 근거하여, 320년경 약 100명의 이집트 주교들로 구성된 공의회에서 아리우스와 그의 동료 성직자들을 파면하였다. 아리우스는 이러한 처분에 승복하지 않고 알렉산드리아 시민들과 안디옥에서 그와 함께 수학하였던 동방 제국의 중요한 감독들에게 호소하였다. 곧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아리우스의 신학적 요절들을 외치며 행진하는 일반인들의 시위를 볼 수 있었다. 또한 아리우스의 호소를 받은 감독들은 아리우스의 입장을 옹호하여 알렉산더의 이론이 오류라는 서신들을 띠우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알렉산드리아 지방 신학 논쟁이 전체 동방 교회를 분열시킬 위협을 가져왔다.
이것이 바로 리키니우스를 패배시킨 직후 콘스탄틴이 중재에 나섰을 때의 상황이었다. 제국을 위해 교회의 통일을 원했던 콘스탄틴은 우선 종교 문제에 관한 한 그의 고문이었던 코르도바(Cordova) 감독 호시우스(Hosius)를 파견하여 양파의 화해를 꾀하였다. 양자간의 갈등은 결코 중재로 해결될 수 없다고 호시우스가 보고하자, 콘스탄틴은 제국 전역으로부터 기독 교회의 감독들을 소집하여 대 종교회의를 열게 되었다. 당시 선명하게 기준이 되는 정책들을 필요로 하였던 몇 가지 문제들과 아울러 이 대회의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된 논쟁을 해결해야만 했다.
1.2. 니케아 회의
후세인들에 의해 최초의 에큐메니칼 즉 세계 종교회의라고 알려지게 된 모임을 위해 콘스탄티노플에서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소 아시아의 니케아(Nicea)에 감독들이 모인 것은 A.D. 325년 5월 20일이었다. 황제는 안내장을 각 감독에게 보내 장로 2인과 수행자 3인을 동반토록 했으며 왕복 여비와 체재비 일체를 국가에서 부담했다.23) 정확한 참석 인원은 알 수 없으나 약 3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일부 사가(史家)들이 기록한 318명은 아브라함 시대에 할례를 받은 숫자와 동일하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에 의해 그 진위를 의심받고 있다.24) 이들은 대부분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방에서 왔으나 서방 교회의 대표들도 6명 있었다. 당시 기독교 신자들이 이 회의를 대하는 감상은 각별한 데가 있었다. 이 대회의에 참석한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최근까지도 투옥당하고, 고문당하고, 귀양을 갔던 인물들이었으며, 어떤 이들은 자기들 신앙에 대한 간증으로서 육체적 상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어러한 시련 후 채 몇 년도 지나지 않아 바로 그 감독들이 황제의 융숭한 대접 속에 니케아에 초대되었던 것이다.25) 이곳에 참석한 많은 이들은 소문과 서신 왕래를 통해 서로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이들은 교회의 보편성을 증거하는 사건에 직접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개회날이 되자 콘스탄틴 황제가 회의장에 참석하였다. 사회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맡았고, 황제가 라틴어로 개회사를 하였다.26) 회의의 의사 진행은 호시우스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가 하였다.
희열에 찬 분위기 속에서 감독들은 박해 후에 시급히 처리해야 했던 많은 안건들을 의논하였다. 이들은 변절자들을 다시 교회 안에 받아들이는 절차와, 장로들과 감독들의 선출 및 안수, 그리고 여러 교구들의 우선 순위에 관한 기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물론 이 회의가 직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아리우스 논쟁이었다. 이 안건에 관하여는 서로 입장을 달리하는 집단들이 존재하였다.
우선 확신에 찬 소수의 아리우스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그 후 이 논쟁의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니코메디아 감독 유세비우스에 의해 통솔되고 있었다.27) 이 니코메디아(Nicomedia) 감독은 물론 역사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와는 다른 인물이다. 아리우스는 감독이 아니었으므로 회의에 직접 참석할 수가 없었으며, 이 때문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그 입장을 대변하였다. 이 일파는 아리우스의 이론이 옳은 것으로 너무도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그 주장을 명료하게 설명하기만 한다면 회의 석상에서 아리우스의 정당성이 인정되고 알렉산더가 정죄받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소수의 집단은 정통파로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더에 의해 이끌어지고 있었다. 이들은 아리우스주의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분명히 그 가르침을 정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확신하였다. 알렉산더의 추종자들 가운데는, 당시 집사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으나 그 후 니케아 정통의 수호자로서 그 이름을 떨치게 되는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라틴어 사용권인 서방 교회를 대표하는 감독들의 대부분은 이 논쟁에 관해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들은 당시의 논쟁이 단지 오리겐의 추종자인 동방 교회 출신들 사이에 발생한 국부적 논쟁으로만 생각하였다. 이들은 이미 오래 전 터툴리안이 선포한 바대로 하나님은 “한 본질에 세 위격”이시라고 정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보았다.28)
그런데 여기에는 겨우 세 명, 혹은 네 명으로 구성된 또 다른 집단이 ‘성부고난설’을 주장하고 있었으니, 이는 곧 성부와 성자는 동일하므로 성부가 고난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 감독들 - 이러한 감독들 가운데 안디옥의 유스타티우스(Eustathius of Antioch)와 안키라의 마르셀루스(Marcellus of Ancyra)가 있다 - 은 아리우스주의가 오류라는 데 동의하였으나, 이들 자신의 신조 역시 그 후 교회가 삼위일체 교리를 보다 명확하게 정의하는 과정 속에서 정죄받게 된다.29)
그러나 당시 참여하지 않았던 감독들의 대부분은 이들 가운데 어느 집단에도 소속하지 않았다. 이들은 드디어 박해가 겨우 종식되고 새로운 기회들과 수많은 문제들이 출현하는 가운데 이처럼 교회를 분열시킬 가능성이 있는 논쟁이 발생했다는 자체를 걱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회의 초기에 이들 감독들은 우선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단지 모든 이들의 타협책을 찾기에 부심했던 듯하다. 이러한 태도를 견제한 대표적 인물은 동료 감독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던 학식있는 역사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였다.30)
먼저 아리우스파에 속하는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18인의 감독과 함께 기초한 그들의 주장을 제출하였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는 피조물로서 다만 최고의 존재일 뿐 영원성은 없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그 본질이 유사할 뿐 본질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31)
이와 같은 아리우스의 주장은 즉각 반대에 부딪혔고, 그 연설문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 조각조각 찢겨져 발에 밟혔다. 그러자 중간파인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는 자기 교회에서 사용하는 ‘신앙의 규율’을 낭독했는데, 아리우스파는 그 정도 신조라면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통파는 아리우스파를 명확하게 배제할 수 있는 방법으로 교회의 신앙을 표현할 신경의 작성을 원했으며, 두 귀절을 삽입할 것을 요구했다. 하나는 성자가 피조된 것이 아니라는 귀절이고, 다른 하나는 성부와 성자가 동일본질(homoousios)이라는 귀절이었다.32) 궁정 감독 호시우스는 서방사람으로서 터툴리안의 삼위일체론에 익숙했을 가능성이 있고33) 그런 연고로 정통파의 ‘호모우시오스’가 니케아 신조에 삽입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마침내 회의는 아리우스주의를 명백하게 배격하였던 신경에 합의하였다. 이 신조 말미에는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하한 기본 명제들을 직접 정죄하는 짧은 저주 문구들을 덧붙였다.
니케아 회의에 참석했던 감독들은 그들이 합의한 신경에 의해 아리우스 논쟁이 끝나기를 소망하여 이에 서명하였다. 단지 두 명의 감독만이 서명을 거부하였다.34)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저주 문구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 회의는 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직분을 박탈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틴은 자기 자신이 내린 처벌을 첨가하여 면직된 감독들을 자기들의 도시에서 축출해 버렸다.
2. 니케아 신조 및 분석
2.1 니케아 신조
니케아 회의에서 결정된 신조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전능자시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노라.
우리는 또한, 유일하신 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니], 이는 성부에게서, 곧 성부의 본질로부터 태어나신 독생자시며,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 빛에서 나온 빛,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이시고,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으셨으며, 성부와 동일본질이시고, 이를 통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지은 바 되었으니, 이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사,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셨으며, 고난당하신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하늘에 오르셨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우리는 또한, 성령을 믿노라.
그러나 “성자께서 안계신 때가 있었다”든지, “그가 태어나시기 전에는 그가 계시지 않았다”든지, “그가 무로부터 생성되었다”고 말하거나, “성자가 다른 본체나 본질로부터 유래했다”든지 “피조물”이라든지, “가변적”이라든지, “변화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보편교회가 저주하노라.?
2.2 니케아 신조 분석
니케아 신조는 그 후에 첨가된 부분들과 함께, 그리고 마지막 귀절의 저주 부문을 삭제한 형태로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모체를 이룬다. 원래 로마에서 기원하였던 ‘사도신경’은 로마 카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으로부터 비롯된 서방에 기원을 둔 교회들 사이에서만 알려지고 사용되었다. 반면 니케아 신경은 이러한 서방 교회들 뿐만 아니라 동방 교회, 즉 그리이스 정교, 러시아 정교 등에 의해서도 인정되었다.35)
이 신조에서 주목을 끄는 귀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36)
첫째,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음과 동시에 “유일하신 주...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한다. 유일하신 하나님이 곧 아버지라고 해서 아들이 제외되는 것이 아니고 “유일하신 주”이시요 같은 하나님이다.
둘째, 성부는 불가견적이고 성자는 가견적이라는 말이 없다. 이것은 그노시스 이단을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터툴리안보다도 일보 진보한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란,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말처럼 플라톤적인 이데아에 관한 언급이 아니라, 성경대로 말한 것이다(골 1:16).
셋째,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απαντων ορατων)라고 하지 않고 “보이는 모든 것”(παντων ορατων)을 창조하셨다고 한 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지음 받음을 피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넷째, 로고스(λογο?)가 언급되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 터툴리안까지만 해도 로고스의 영원 전(前) 존재에 대한 사색을 했으나, 여기서는 그것이 전혀 없고 로고스라는 용어까지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아들이 말씀이심을 부인코자 함이 아니고 스토아 철학이나 누스(νου?) 혹은 무인격적 사유나 논리와 혼동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될 수 있다.
다섯째,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독생자”이심을 강조한 점이다. 홀로 나셨다고 할 수 있는 것을 성부에게서 나셨다고 한 후, 홀로 나신 분이라고 덧붙였다. 이것은 성부와도 다르고, 성령과도 다른 위격임을 특별히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독생하심은 성부와 성령에게 없고 성자에게만 있는 특성이다. 이로서 사벨리우스의 동질동격설을 완전히 배격한 것이다.
여섯째, 이 독생하심이 성부의 본질로부터 나셨다는 것, 즉 신성의 근원이 성부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εκ'는 근원을 의미한다. “성부에게서” 독생하셨다고만 하다가 이것을 다시 헤석하여 성부의 “본질로부터”라고 한 것은 본질은 불가분리하나 위격은 나누어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일곱째,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은 무에서 지음 받은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이라는 것, 그러나 보통 흔히 재판장에게도 붙여지는 신이 아니라는 것을 보강하기 위해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오해를 할 우려가 잇었음인지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으셨으며”라고 덧붙여서 피조물이 아님을 완전히 못박았다. 이로써 아리우스의 피조설을 뿌리부터 제거해 버렸다.
여덟째, 피조물이기는 커녕 오히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음 받은 것을 강조하되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포함된다는 것을 덧붙였다. 이것만 고백해도 충분하나, “성부와 동일본질”이란 말을 덧붙인 것은 니케아 신조 전체의 상징(symbol)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단어는 모호하고 비전문적인 단어이어서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닐 수 있었으며, 따라서 장차 많은 논란을 야기했다. 다시 말해, 본질의 동일성을 어떠한 의미로 이해할 것인가 라는 의문이 제기된다.37) 오리겐이 의미하는 바대로 성부와 성자가 하나라는 뜻인가? 아니면 오리겐이 단일신론자들을 반박하면서 주장했던 대로 성부와 성자는 숫자적인 면에서는 분명히 구별되지만 본질의 동일성으로는 하나라는 뜻인가? 아니면 본질의 숫자적인 동일성의 의미에서 이 표현을 이해해야 하는가?
오랫동안 니케아의 결정은 두 번째의 뜻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 경우 “성부와 동일본질”이라는 표현은 신성의 각 위격들이 공통적인 신적 존재로서 하나임을 뜻한다. 이러한 해석은 후기 정통 이해와 일치하지만, 이 표현이 지닌 본래적인 의미와는 일치하지 않게 된다. 3세기 신학자들 사이에서 동일본질이란 “똑같은 본질”을 의미했다. 이 때까지는 숫자적인 동일성이 문제로 부각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니케아 회의에서 갑자기 그리고 준비도 없이 새로운 의미로 사용되었다고는 추측할 수 없다.38)
니케아 회의는 “아버지와 동일본질”이라는 표현을 채택함으로써 다시 한번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으셨다”는 표현을 강조하였으며 결국 성자의 신성을 강조하였다. 회의는 신성의 통일성과 각 위격의 독특성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일종의 반신(Demigod)으로 만들었던 아리우스와 그의 주장들에 대한 반대로서 아들의 완전한 신성을 주장하려고 했다.39)
니케아 신조는 철학적 사색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양태론적 단일신론과 역동적 단일신론으로 인하여 교회가 약 120년간 연단을 받은 후 계속해서 성경을 상고하는 가운데 집약된 신앙고백으로서, 단순히 아리우스주의만 배격한 것이 아니고 오리겐주의의 종속설도 완전히 극복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신조는 세 위격,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별성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킴으로써, 비록 아리우스주의를 정죄했지만 이 정죄만으로는 아리우스주의를 교회 밖으로 몰아내는 데 충분하지 못했으며, 교회가 아리우스주의를 결정적으로 정죄하기까지는 또 다시 50년이라는 장구한 기간에 걸친 논쟁을 계속해야만 했다.
니케아 신조는 성령의 신성 문제는 다루지 아니했으며, 후미(後尾)에 아리우스파에 대한 정죄문을 포함하면서 맺고 있다.
3.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배경
3.1 아리우스파와 반아리우스파의 응전과 이들의 우세 시기인 콘스탄틴 황제의 사망시까지;
A.D. 325-361.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주의를 정죄했지만, 논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그후 50여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일부 감독들이 니케아 신앙 형식에 대해서 진지한 의문을 제기하는 데 있었고 또한 황실의 정책이 돌변하는 데, 즉 콘스탄틴 황제의 개종이 모든 신학적 논쟁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는 데 있었다.40) 니케아 결정 사항에 대한 감독들의 불만은 일찍부터 예상하던 대로였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그리고 주안점이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해석한 아리우스주의로 축약되는 과정에서 회집한 대부분의 감독들은 사벨리우스주의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언급되지 않은 채 아리우스만 정죄했던 신앙형식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어졌었다. 그러나 감독들은 자신이 맡은 교회로 돌아와서 실정을 살펴보니까 아리우스주의는 아직까지 크게 걱정할 것이 못되고 사벨리우스주의가 여전히 골치거리로 성가시게 굴자, 회의의 결정이 현명한 것이었던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니케아에서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함으로 파급된 관심사는 서로 다양하였다. 알렉산드리아에 위치한 오리겐 우파, 안디옥과 소아시아의 반(反)오리겐주의 일파들, 그리고 서방세계의 반(反)사색적 관심들로 나뉘게 되었다.41) 이러한 동맹관계로 아리우스주의의 사색에 대항해서 서로 이해관계 없이 뭉치게 되었으나, 아리우스파 지도자들의 개별적 공격에 대해서는 공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점차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특히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뛰어난 정략가로서, 교회 고문 자리에서 해임된 호시우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리우스를 성찬에 참여시킨 행위로 유배를 당한 유세비우스는 감정을 억누른 콘스탄틴의 부름을 다시 받으면서 아리우스 반대 세력 제거에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황실 고문 유세비우스의 용의주도한 반대파 제거 계획은 특히 세 인물에게 초점 맞추어졌다.
유세비우스가 벌인 공세에 희생당한 첫 번째 사람은 안디옥의 유스타티우스였다.42) 그는 오리겐을 공개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악명 높던 인물로서,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에게 단일신론자로 공식적인 고소를 당했었다. 유스타티우스가 교회 평화의 파괴자이고, 윤리적으로 의심스러운 사람이며,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Helena)에게 가혹한 비판을 가한 사람이란 이야기를 고문들로부터 전해 들은 콘스탄틴은 330년경 안디옥에서 오리겐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어 열린 교회회의가 그를 폐위하도록 묵인하였고, 그를 트라케로 귀양보냄으로써 그 조치를 더욱 강화하였다.
유세비우스의 그 다음 희생자는 328년 알렉산더의 사망으로 그 뒤를 이은 아다나시우스였다.43) 결연하고 요지부동한 니케아 신조 옹호자이자 전임 감독 알렉산더의 대변자로 대변자로 자임한 아다나시우스44)는 과거에 멜리티우스파들을 다룰 때, 그리고 이집트 교회에 대해 자신의 권위를 강화할 때 사용한 강압적인 방법들을 가지고 비판의 포문을 열였다. 335년 아다나시우스는 철저히 신학적인 정적들로 구성된 두로 교회회의에 소환당했다.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죄목들 중에서 아르세니우스(Arsenius)라는 멜리티우스파 감독에 대해 살해를 음모했다는 죄목으로 고소당하였다. 이 고소 내용은 거짓이었지만 (아다나시우스는 아르세니우스를 폐위하였을 뿐이다), 알렉산더의 후임자로서는 그러한 교회회의에서 정의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다나시우스는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직접 황제를 만나 호소하기 위해 두로를 몰래 빠져 나왔다. 그러나 황제에 대한 호소도 아무런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와 그의 동료들은 아다니시우스가 수도에 대한 이집트의 곡물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는 말로 황제를 설득했다. 이것은 반역죄에 해당했으며, 그 말을 조사해 보지도 않고 콘스탄틴은 아다나시우스를 독일의 트리어로 귀양보냈다. 바로 이것이 아다나시우스의 생애에서 일어난 첫 번째 귀양이었다.
유세비우스가 거둔 마지막 승리는 또 다른 반(反)오리겐주의자인 안키라의 마르셀루스를 폐위하고 귀양보내는 일이었다.45) 그는 아리우스에 대해 아주 공격적이며 확고한 입장을 취했던 동방 감독이었으나 단일신론적 경향을 분명하게 지님으로써 쉽게 정죄받고 말았다.
이상 요약하면, 330년부터 7년 후 콘스탄틴이 죽는 때까지 니케아 회의의 옹호자들은 빈번히 패했다.46) 황제의 주된 관심은 신학적인 면보다는 정치적인 데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을 잘 활용한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정치적 수완의 덕분으로 아리우스주의는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니케아의 옹호자들 가운데는 그들의 이론이 사벨리우스주의와 어떻게 다르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어려웠다. 니케아파의 패배는 콘스탄틴 자신이 임종시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의 손에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콘스탄틴 황제 사후에 로마제국은 콘스탄틴의 세 아들에 의해 삼분되었다. 맏아들 콘스탄틴 2세(Constantine II)는 주로 영국, 갈리아, 스페인 등 서방을, 둘째 아들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는 주로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 등 동방을, 셋째 아들인 콘스탄스(Constans)는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제국의 중앙부를 차지했다.47) 콘스탄틴 2세와 콘스탄스는 서방의 입장을 따라 아다나시우스를 지지했다. 콘스탄스는 338년에 아다나시우스를 다시 알렉산드리아 감독으로 복귀시켰다. 339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아다나시우스의 주도로 약 백여명의 감독들이 모여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였다.48)
340년 장자 콘스탄틴 2세가 막내 동생 콘스탄스에 대한 주권을 확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기습을 당하여 전사하자 콘스탄스가 서방을 통치하게 되었다. 제국은 이제 서방의 콘스탄스와 동방의 콘스탄티우스로 양분되었다. 동방의 통치자가 된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파와 반아리우스파를 지지했고, 서방의 통치자 콘스탄스는 니케아 신조를 옹호했다. 콘스탄티우스가 동방의 통치자가 되자 아다나시우스는 두 번째로 추방되어 로마로 피신하게 되었다(339년 혹은 340년).49)
이런 정치적 상황 속에서 재기를 노리는 아다나시우스, 마르셀루스 그리고 다른 감독들은 유배지에서 귀환의 기회를 노렸고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황제의 신임을 등에 업고 세력 구축에 나섰다. 그런데 이즈음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 등 동방교회 지도자들이 폐위한 바 있는 감독들의 지위를 둘러싸고 일련의 논쟁이 일었다.50)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자들을 복직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고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는 자기들을 정죄한 자들이 이단들이었으므로 그 결정이 무효라는 입장을 취했다.51)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는 로마 감독 율리우스(Julius)에게 동정을 호소했고, 율리우스는 340년 교회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교회회의는 아다나시우스와 마르셀루스에 대한 페위조치의 부당함을 공포하였다.
자기들이 요청한 교회회의에 참석을 거부당한 동방교회 지도자들, 특히 동방에서 세력을 장악한 반(半)아리우스파는 341년에 안디옥에 모여 회의를 개최했다.52) 97명의 감독들은 모여서 네 개의 신조를 발표했는데, 극단적인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하면서도 니케아 신조의 핵심 단어인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를 회피하였다. 안디옥 회의는 니케아 신조에 대해서 공식적인 교리적 반발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회의였다.
반(半)아리우스파와 니케아파간의 대립이 심화되자 콘스탄티우스와 콘스탄스 형제는 지루한 논쟁을 해결해 보고자 343년에 현재의 소피아에 해당하는 사르디카(Sardica)에서 동서방을 다 포함한 대규모 종교회의를 개최했다.53) 서방의 감독들이 주종을 이룬 이 회의는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하였고, 동방측은 아다나시우스의 감독 복직, 서방측은 마르셀루스에 대한 후원 중단이라는 화해안에 합의하였다.54)
그러나 일부 동방의 감독들이 사르디카 회의에 폐위된 감독 아다나시우스가 참석한 데 반발하여 사르디카 근처에 있는 빌립보폴리스(Philippopolis)에서 별도의 회의를 개최하고 안디옥 회의의 결과를 재확인할 뿐만 아니라 니케아 신조를 선언한 감독들에게 강한 분개심을 표현하였다.55)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콘스탄스의 압력에 의해서 346년에 아다나시우스를 다시 알렉산드리아 감독직에 복귀시켰다. 그러나 350년에 서방 황제 콘스탄스는 왕위찬탈자 마그넨티우스(Magnentius)의 지지자들에 의해 살해당했고, 콘스탄티우스는 반란을 진압하고 동서방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353년부터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한 361년까지 8년 동안은 니케아파의 철저한 패배기였다. 콘스탄티우스는 열렬한 아리우스 지지자인 무르사의 감독 발렌스(Valens)를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를 이어 황제 고문에 위촉했다. 콘스탄티우스가 취한 첫 버째 조치는 아다나시우스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351년 시르미움(Sirmium) 회의, 353년 알레스(Arles) 회의, 355년에 밀라노(Milan) 회의 등의 일련의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그는 감독들에게 아다나시우스를 포기하고 동방 교회들과 충분한 교제를 재개하도록 강요하였으며, 니케아파 감독들을 폐위 혹은 추방시키고 반아리우스파를 대거 등용하였다.56)
아다나시우스도 356년에 다시 감독직에서 추방되었는데, 이것이 세 번째 추방이었다. 그는 감독직에서 쫒겨난 뒤 6년 동안 이집트 오지의 수사(修士)들 틈에 피신해 있었다. 황제는 반대자들을 처리한 뒤 아리우스파 고문들의 조언에 따라 교리 문제에 손을 댔다. 357년 시르미움(Sirmium) 황궁에서 열린 교회회의는 ‘실재’(substantia), ‘본질’(ousia), ‘동일본질’(homoousios) 같은 성경에 없는 용어들과, 또는 성자가 “성부께 종속된다”고 암시하는 구절들을 “언급해서는 안된다”고 못박은 신조를 선언하였다. 이 신조는 니케아 신조를 배척하고 사실상 아리우스주의에 여지를 남겨 준 것으로, 갈리아의 감독 포이바디우스(Poebadius)가 붙인 명칭대로 ‘시르미움의 신성모독’으로 전해 내려왔다.57)
그런데 아리우스 지지자들의 내부에도 두 파로 분열되어 다투기 시작했다. 좀더 온건한 우익파는 성부와 성자는 동일본질이 아니라 유사본질(Homoiousios)임을 주장했다.58) 이들 가운데 사실상 니케아 신조의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나 동일본질(Homoousios)이라는 단어는 양태론적인 냄새를 너무나 풍긴다고 하여 유사본질이라는 단어를 선호했다. 이들은 니케아 종교 회의 이후 좀더 온건해진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342년 사망)의 입장과 비슷하다고 해서 “유세비우스파”(Eusebians)라고 불리기도 하고, “반아리우스파”(Semi-Arians)라고 불리기도 한다. 안키라의 바실(Basil of Ancyra)과 라오디게아의 그레고리(Gregory of Laodicea)가 반아리우스파의 대표자 역할을 하였다.
좀더 과격한 좌익파는 성부와 성자의 “상이본질”(Hetero-Ousios) 혹은 “부동”(不同, Anomoios)을 주장하는 아리우스파였다.59) 이들은 성자가 성부의 본질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무에서 생성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무에서 발생을 주장하는 파”(Exukontians)라고 불리우기도 하였다. 안디옥의 감독 유독시우스(Eudoxius)와 안디옥의 집사 아에티우스(Aetius)가 이런 주장을 했고, 특히 시지쿠스의 감독 유노미우스(Eunomius of Cyzicus)가 이 사상의 대표자였기 때문에 유노미우스파(Eunomians)라고도 불리운다. 닛사의 그레고리는 12권의 책을 저술함으로 유노미우스의 사상을 심층분석하여 반박했다.
이 두 파는 자체 내에서 일어난 분열을 치료해 보고자 358년부터 360년 사이에 여섯 번에 걸친 종교회의를 열었으나 해결점을 얻지 못했다.60) 콘스탄티우스는 권력을 이용해서 해결해 보고자 했으나 그것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한편 이즈음 아다나시우스는 박해의 와중에서도 니케아에서 사용한 ‘동일본질’을 변호하였는데, 아다나시우스에게 있어서 이것은 성자가 “성부와 동일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성자가 성부께 속한 것은 무엇이든 충분히 소유하고 있으며, 비록 성자가 성부께 속한 것을 무엇이든 성부로부터 받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두 분 사이에 속성상의 불변의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그의 주장과 안키라의 바실 학파가 주장한 ‘호모이우시오스’ 교리 사이에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따라서 결국 그들의 제휴는 이루어졌고, 이것은 아리우스주의를 타파하는 데 그게 이바지하였다.61)
한편, 이 즈음에 아리우스 논쟁은 또 다시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콘스탄티우스가 361년에 사망하고 그의 사촌 율리안(Julian)이 즉위하였기 때문이다.
3.2 정통 기독교의 최종 승리와 니케아 신경이 완성된 콘스탄티노플 회의시까지 ; A.D.
361-381.
콘스탄티우스 사후 황제가 된 줄리안은 플라톤 철학자로서 로마 제국 안에 헬라의 이교 사상을 다시 도입하고자 했다. 그는 기독교를 도입한 것이 콘스탄틴의 큰 실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방 종교를 다시 도입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지도자들의 특권을 박탈했다. 또한 기독교인들끼리는 서로 다툼이나 하다가 망하라는 의미로 대립하고 있던 감독들을 모두 용인했다.62) 그래서 362년 추방되었던 아다나시우스는 다시 알렉산드리아에 복귀하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에 줄리안은 아다나시우스를 “이방신들의 원수”라고 하며 다시 추방했다.63) 이것이 아다나시우스의 네 번째 추방이었다. 줄리안은 361년부터 363년까지 두 해밖에 통치하지 못하고 사망했으며 역사 속에서 ‘배교자 줄리안’이란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아다나시우스는 줄리안 사후에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다.
율리안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콘스탄티우스의 지원을 받던 아리우스파는 세력의 약화를 겪었다. 아다나시우스가 362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유사본질파에게 화해를 제안한 것도 그 한몫을 했다. 그가 제시한 화해안은, 먼저 동방 보수주의자들의 구호인 ‘세 휘포스타시스(hypostasis)’가 ‘삼신’(三神) 또는 ‘서로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실체들’을 뜻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고, 그 다음에 ‘호모우시오스’가 ‘본질의 동등’을 뜻하되 성부, 로고스, 성령이 구분된다는 진리를 부정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64) 이 교회회의는 아울러 성령도 하나님과 ‘동일본질’을 갖고 계신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이로써 교회회의는 아다나시우스의 주도 아래 공포하기를, 분파들의 화해 조건으로는 아리우스주의를 배척하고, “니케아의 거룩한 교부들이 고백했던 신앙을 고백하고” “성령이 피조물이라고 말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하였다.
줄리안의 후계자인 죠비안 황제(Jovian, 363-364)는 다양한 기독교 분파에 대해서 관용 정책을 썼다. 죠비안의 사후에 통치권은 발렌티니안 1세(Valentinian I)에게 넘어갔는데, 그는 동방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아우인 발렌스(Valens, 364-378)에게 동방 통치권을 넘겨주었다. 발렌스는 니케아파를 완강하게 적대하여 365년에 아다나시우스를 다시 감독직에서 추방했다. 이것이 아다나시우스의 다섯번째이자 마지막 추방이었다. 아다나시우스는 시골집으로 낙향했다. 그러나 아다니시우스는 이듬해에 발렌스의 후계자 그라티안(Gratian)에 의해 다시 직분이 회복되었고, 성령훼방론자들(Pneumatomachi)과 투쟁하다가 373년에 사망하였다.
아다나시우스가 죽을 무렵에는 아리우스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지적-정치적 지도권이 이른바 ‘신니케아파’(new Nicene)라는 새로운 집단에게로 넘어갔다.65) 이 파의 주역들은 ‘세 명의 위대한 캅바도키아 교부들’ 즉 가이사랴의 바실(Basil of Caesarea),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이다. 캅바도기아 교부들이 ‘옛’ 니케아파와 호모이우시오스파로 대표되는 동방전승에 대해 이루어 놓은 화해의 열쇠는 ‘본질’(ousia)과 ‘본체’(hypostasis)라는 단어의 뜻을 조심스럽게 구분한 데 있었다.66) 이 두 단어는 철학적 문헌 속에서, 그리고 심지어 니케아 회의의 결정 가운데서도 동의어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라틴어로는 본질(substantia)로 번역되었다.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이 두 단어를 구분하여서 본체(hypostasis)는 사물의 개별적 존재를 언급하는 뜻으로, 본질(ousia)은 같은 종류의 모든 개체들이 다같이 공유하고 있는 본질로 분리해서 사용했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 안에 세 개의 본체(hypostasis)가 있으나 한 본질(ousia)만 있다고 주장했는데, 다른 말로 하면 세 개의 개별적 존재가 하나의 신적 본질에 참여한다는 뜻이었다.
더 나아가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신 존재 또는 본질의 통일성은 신의 행위 또는 작용의 통일성을 함축한다고 주장하였다.67) 달리 말해서, 세 ‘위격’이 서로 다른 활동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간에 구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독특한 방법들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모든 신적인 행위에 세 위격이 모두 포함된다고 하였다. 위격들을 서로 구분하게 하는 유일한 것은 그들이 서로 간에 관계를 맺고 있는 - 각각 한 신성의 원천(source), 출생(offspring), 발출(procession)로서 - 방식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캅바도키아 교부들의 신학은 니케아 회의에서 거의 언급하지 않은 성령의 신성을 분명히 한 것으로 큰 의의를 지닌다.
한편, 니케아파 내에서도 아리우스주의의 상이 본질에 지나치게 반동하다가 다른편 극단인 양태론에 빠진 사람들도 있었다. 안키라의 감독 마르셀루스(Marcellus of Ancyra)와 그의 제자이자 안키라의 집사였던 포티누스(Potinus)는 로고스와 성부의 동일본질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사모사타의 바울처럼 역동적 단일신론에 빠졌다.68) 이들은 로고스와 성자를 구별하여 로고스는 성부와 동일본질이라고 하였고, 로고스가 인간 예수와 결합하여 성자가 되었다고 했다. 성자로서 구속 사역을 다 마치면 로고스는 다시 성부에게로 돌아간다고 하였다.69) 성자의 발생이라는 말은 로고스가 인간 예수와 결합하는 성육신 사건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성자의 영원발생설을 부인하였다. 사모사타의 바울과는 정반대되는 전제에서 시작했으나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70) 이들은 성자직은 임식직으로 생각했고, 로고스와 성령은 위격적인 의미가 없고 분할될 수 없는 신성의 다양한 표현이라 함으로써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양태론적인 주장도 하였다. 그러므로 마르셀루스파는 양태론적 단일신론과 역동적 단일신론이 결합된 형태의 이단 사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라오디게아의 감독이었던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of Laodicea)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무죄성을 옹호하려다가 또 다른 이단 사상에 빠졌다.71) 인간 구성의 삼분설에 입각하여 그리스도는 영만이 로고스의 영을 취했고, 혼과 육은 인간의 혼과 육을 취했다고 하였다. 영이 죄의 자리인데, 그리스도의 영은 로고스의 영이므로 죄가 없다고 하였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아폴리나리우스 사상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불구 인성으로 만들고 결국은 인간 구속에 합당치 못한 존재가 되게 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는 니케아파조차도 처음에는 명료하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이라우스파나 반아리우스파는 성령의 신성을 처음부터 부인하였다. 특히 반아리우스파에 속하는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마세도니우스(Macedonius)는 성령의 위격을 부인하고 “성령은 우주 전체에 분사된 신적 에너지”72)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닛사의 그레고리는 ?성령론?을 저술하여 마세도니우스 사상을 공박했다.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마세도니우스파”(Macedonians) 혹은 “성령훼방론자”(Pneumatomachi)라고 불렀다.73)
결국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아리우스주의, 반아리우스주의, 마르셀루스파, 아폴리나리우스파, 마세도니우스파 등의 이단적 사상과의 투쟁 속에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발렌스 황제 이후의 황제들은 대체로 니케아 신조를 옹호했다. 발렌티니안 1세의 아들 그라티안(Gratian, 375-383)은 발렌스의 사후(378)에 동서방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그라티안은 동방을 효울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데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379-395)를 동방 통치자로 임명했다. 데오도시우스1세는 급한 성격으로 인해 암브로스(Ambrose)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기독교를 국교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제국 내의 모든 이단과 이방 종교를 제거하고자 했다.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종교 회의는 이런 동기에서 데오도시우스 1세가 소집한 것이었다. 이 회의에는 서방 교회 감독들은 참석치 아니했으나 동방 교회 감독들은 약 150명 참석하였다. 이 중 36명은 반아리우스주의인 마케도니아파 곧 성령 훼방론자들이었다.74)
3.3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전능자시요, 하늘과 땅, 곧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며,
또한, 유일하신 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니], 이는 성부에게서 만세 전에 태어나셨고, 빛에서 나온 빛,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이시며,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으셨고, 성부와 동일본질이시며, 이를 통해 만물이 지은 바 되었으니, 이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수육하여, 인간이 되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못박히사, 고난을 당하시고, 장사되셨으며,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하늘에 오르셨고, 성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영광 중에 다시 오시리니, 그의 나라는 무궁하리라.
또한, 성령을 믿노니, 이는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고, 성부에게서 나오신 자로, 성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이라.
유일하고,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우리는 믿노라].
우리는 죄 사함을 통한 한 번의 세례를 믿으며, 죽은 자들의 부활과, 장차의 영원한 생명을 대망하노라. 아멘.?
4. 니케아 신조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비교
325년에 작성된 니케아 신조와 381년에 작성된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기본 내용을 같이하면서도 표현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니케아 신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삭제된 내용은 괄호로 표시하였다.
<니케아 신조>
?우리는 전능자시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노라.
우리는 또한, 유일하신 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니], 이는 성부에게서, (곧 성부의 본질로부터 태어나신 독생자시며,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 빛에서 나온 빛,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이시고,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으셨으며, 성부와 동일본질이시고, 이를 통해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지은 바 되었으니, 이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사,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셨으며, 고난당하신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하늘에 오르셨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우리는 또한, 성령을 믿노라.
(그러나 “성자께서 안계신 때가 있었다”든지, “그가 태어나시기 전에는 그가 계시지 않았다”든지, “그가 무로부터 생성되었다”고 말하거나, “성자가 다른 본체나 본질로부터 유래했다”든지 “피조물”이라든지, “가변적”이라든지, “변화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보편교회가 저주하노라.)
<니케아-콘스탄티노믈 신조>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니게아 신조를 기본으로 하되 확대된 부분도 있고 삭제된 부분도 있다. 니케아 신조와 차이가 있는 부분은 괄호로 표시하였다.
?우리는 전능자시요, (하늘과 땅), 곧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으며,
또한, 유일하신 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노니], 이는 성부에게서 (만세 전에) 태어나셨고, 빛에서 나온 빛,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이시며, 출생하셨으나, 창조되지는 않으셨고, 성부와 동일본질이시며, 이를 통해 만물이 지은 바 되었으니, 이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사,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수육하여, 인간이 되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못박히사), 고난을 당하시고, (장사되셨으며),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하늘에 오르셨고, (성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영광 중에 다시) 오시리니, (그의 나라는 무궁하리라).
또한, 성령을 믿노니, (이는 주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고, 성부에게서 나오신 자로, 성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이라.
유일하고,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우리는 믿노라].
우리는 죄 사함을 통한 한 번의 세례를 믿으며, 죽은 자들의 부활과, 장차의 영원한 생명을 대망하노라.) 아멘.?
이 두 신조의 형식상의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75)
첫째, 니케아 신조에 “성부의 본질(ουσια)로부터 태어나신”이라는 표현이 콘스탄티노플 신조에는 생략되었다는 점인데, 이는 확실치 않은 철학 용어를 삽입함으로 공연히 물의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자가 성부로부터 나셨다는 표현과 동일본질이라는 표현으로도 성경의 진리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는데, 반드시 “성부의 본질로부터”라는 표현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니케아 신조에 있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콘스탄티노플 신조에는 탈락되었다는 점인데, 이것은 “참된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된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건재함으로 사실상 동어반복적인 표현을 제거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셋째, 니케아 신조에 없던 “만세 전에”라는 문구를 “성부에게서 태어나셨고”라는 말 가운데 삽입시켰다. 이는 성자의 출생과 관련하여 존재론적 추리방식을 포기하고 형상적 표현방식으로 대치한 것이다.76)
넷째, 기독론 마지막 부분에 니케아 신조에 없는 “그의 나라는 무궁하리라”는 문구를 삽입했는데, 이는 로고스가 영원하지 않다고 주장한 안키라의 마르셀루스의 가르침을 배격한 것이다.77) 그리스도는 종말 완성 상태에서도 자신의 인격성이 완전히 보존된다. 이로써 교리적 진술이 바울의 단일 진술, 곧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고전 15:24-28)라는 진술 위에 승리하게 된다.
다섯째, 니케아 신조에서 너무나 간단한 고백(“성령을 믿노라”)으로 그친 성령론이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성숙한 내용으로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1)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το κυριον”은 주권자 곧 피조물과는 구별된다. “거룩한 영”이라고만 하여도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거룩”이 그 본성이므로 신(神)일 수 밖에 없지만, 그 위에 “주” 혹은 “하나님”이란 말이 덧붙여져서 더욱 강조되었다. 2)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은 영의 활동을 말하는 것인데, 성부와 성자와 동질(同質)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말씀 안에 생명이 넘침과 같이 성령 안에 생명이 넘친다. 생명의 영이므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만물에게 생기를 주시며, 마지막 날에 죽은 자들을 일시에 다시 살리신다. 3) “성부에게서 나오신 자”란 성령이 주권자요 생명의 수여자로되, 독자적인 신성을 소유한 분이 아니라 성부에게서 나오시는 분임을 말해 준다. 4)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실 분”이란 성령이 성부와 성자와 완전히 동질일 뿐 아니라 동등(同等)임을 결정적으로 단언한 것으로서, 성령 자신이 다른 두 분과 함께 “함께” 경배를 받으신다는 뜻이다. 5)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분”이란 말씀하신 이가 성령이라는 뜻으로서, 구약에 항속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여섯째, 성령 발출에 대해서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는 성부로부터 발출했다는 점만을 밝히고 성자와의 관계는 침묵하였으므로 후대 동서방 교회 간에 필리오케(Filioque) 논쟁의 여지를 남겨두었다는 점이다. “아들로부터”라는 의미를 가진 “필리오케”는 589년 스페인의 톨레도(Toledo) 종교 회의 이후로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삽입되었는데, 교황 니콜라스 1세(858년) 때부터 전 서방교회에서 점진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결국 개신교에서도 인정되는 교리가 되었다.
일곱째,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경대로”라는 귀절을 삽입함으로써 진리의 절대적인 기준으로서 전통보다도 성경의 권위를 더욱 높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78)
아울러 그 내용에 있어서도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교회들의 “신앙의 규율”의 내용을 니케아 신조보다 더욱 많이 반영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아리우스파에 대한 저주문은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와서 삭제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또한 “유일하고,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라는 문구 속에서 교회에 대한 신앙 고백을 첨가시켰으며, 구원의 길로서 “죄 사함을 통한 세례”를, 그리고 내세와 과련하여 “죽은 자들의 부활”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의 소망’을 추가하였다.79)
이로써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여러 이단들을 정죄하였다.80) 과격한 아리우스파로서 성부와 성자의 “상이본질”(Hetero-Ousios) 혹은 “부동”(Anomoios)을 주장한 유독시우스(Eudoxius)와 아에티우스(Aetius), 유노미우스(Eunomius)를 정죄하였다. 그리고 성령의 위격을 부인하고 “성령은 우주 전체에 분사된 신적 에너지”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성령의 신성을 부인한 마세도니우스(Macedonius)와 성령훼방론자들(Pneumatomachians)을 정죄하였다. 또한 순수 양태론을 가르친 사베리우스(Sabellius)파를 정죄하였으며, 그리고 로고스와 성부의 동일본질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사모사타의 바울처럼 역동적 단일신론에 빠져 로고스를 성부의 계시방식으로 본 마르셀루스(Marcellus of Ancyra)와 포티누스(Potinus)를 정죄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무죄성을 옹호하려다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불구 인성으로 만들어 인간 구속에 합당치 못한 존재가 되게 한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 of Laodicea)를 정죄하였다.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공존하다가 451년 칼케돈 종교회의 이후로는 점차 콘스탄티노플 신조가 니케아 신조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신조라는 이름보다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81)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아리우스 논쟁에서 비롯된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는 니케아 회의에서 ‘성부와 성자의 동이본질’로 일단락 지어졌다가, 니케아 이후에 계속된 논쟁에서 성령의 신성이 문제로 부각되면서 삼위일체 논쟁으로 확대되었다.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이런 면에서 정통 삼위일체론을 정립한 회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의 본질에 있어서의 일치와 위격에 있어서의 명확한 구별이 정통 교리로 선언되면서, 상이본질론, 유사본질론, 양태론, 성령훼방론, 종속설 등 모든 이단들이 정죄되었다. 아을러 성자의 불완전한 인성을 주장한 아폴리나리우스도 극복하였다.
그러나 본질의 일치성이 숫자적 일치성이냐 총칭적인 일치성이냐 하는 문제와, 성자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이 완성된 것이냐 아니면 미완성된 것이냐 하는 문제, 그리고 성령의 발출이 성부로부터 발출되었다고 선언했는데, 성자로부터의 발출을 내포한 것이냐 배제한 것이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후대의 숙제로 남게 되었다.82) 그러나 “삼위일체를 설명하라. 그러면 네 정신을 잃을 것이다. 삼위일체를 부인하라. 그러면 네 영혼을 잃을 것이다”83)라는 격언이 시사한 바대로, 신비의 영역을 인간의 제한된 지성으로 온전히 파헤치려는 교만은 삼가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니케아 신조와 비교할 때 성령론, 교회론, 구원론, 내세론의 면에서 크게 진보했으며, 성경의 권위를 크게 인정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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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철원, 교리사 강의안 (미간행).
1) 박용규, ?초대교회사? (서울:총신대학출판부, 1994), 323쪽.
2) Philip Schaff,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Grand Rapids: Wm.B. eerdmans, 1974), p. 619.
4) Ignatius, Ad. Eph., vii.2. 박용규, 상게서, 324쪽에서 재인용.
5) Ignatius, Ad. Magn., vi. I. 박용규, 상게서, 324쪽에서 재인용.
6) Justin, The First Apology, I. xlvi. 1-4. 박용규, 상게서, 325쪽에서 재인용.
7) Justin, The Second Apology, II. xiii. 1-6. 박용규, 상게서, 325쪽에서 재인용.
8) Irenaeus, Adv. haer., III. xviii. 박용규, 상게서, 326쪽에서 재인용.
15) Socrates, Ecclesiastical History, I. 5. 박용규, 상게서, 334-335쪽에서 재인용.
17) Athanasius, De Synodis, 16. Opitz, Urkunden, No. 6. Lohse, 상게서, 76쪽에서 재인용.
24) Justo L. Gonzalez, The Story of Christianity. ?초대교회사?, 서영일 역 (서울:은성, 1987), 256쪽.
26) Schaff, Ibid., pp. 624-625 참조.
27) Schaff, Ibid., 627. 샤프는 이 파에 가담한 감독들이 약 20명이라고 주장한다.
28) Gonzalez, ?초대교회사?, 258-259쪽.
31) 정수영, ?새 교회사 I? (서울:규장문화사, 1992), 124쪽.
32) 피영민,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삼위일체론,” 제9차 기독교학술원 학술심포지움 자료집(미간행, 1994), 156쪽.
33) 차영배, ?개혁교의학: 삼위일체론? (서울;총신대학출판부, 1982), 130쪽.
34) Schaff, Ibid., p. 629. 두 명의 감독 이름은 데오나스(Theonas) 와 세쿤두스(Secundus)로서 모두 이집트 감독이었다.
40) Gonzalez, ?기독교 사상사?, 323쪽.
45) Gonzalez, ?기독교 사상사?, 328쪽.
55) Schaff, Ibid., p. 635. 피영민, 상게서, 157쪽.
56) Schaff, Ibid., 635. 박용규, 상게서, 353-354쪽.
58) Schaff, Ibid., p. 637. 피영민, 상게서, 158쪽.
59) Schaff, Ibid., p. 637. 피영민, 상게서, 158쪽.
61) Henry Chadwick, The Early Church. ?초대교회사? (서울:기독교문서선교회., 1987), 178쪽.
63) 피영민, 상게서, 158쪽. Schaff, Ibid., p. 638.
66) Gonzalez, ?기독교 사상사?, 340쪽.
68) Schaff, Ibid, p. 652-653 참조. 피영민, 상게서, 159쪽.
73) Schaff, Ibid., pp. 663-664.
78) Schaff, Ibid., p. 670. 피영민, 상게서, 161쪽.
80) 서철원, 상게서, 160-161쪽. Schaff, Ibid., p. 640.
81) 이에 대한 논쟁에 대해서는, 박용규, 상게서, 363쪽의 각주 53을 보라.
83) Ibid., 165쪽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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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클레어 퍼거슨/ 김재성 옮김
IVP 조직신학시리즈
목차:
1장 성령과 그의 내력
2장 그리스도의 영
3장 성령의 선물
4장 오늘날의 오순절?
5장 질서의 영
6장 재창조의 영
7장 성결의 영
8장 성령의 교통
9장 성령과 그리스도의 몸
10장 성령의 은사들과 사역
11장 우주적인 영
역자서문
성령에 대해 개혁주의 신학적으로 정리된 교과서가 아브라함 카이퍼 이후로 약 100년 만에 출간되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교파마다, 심지어 목사마다 정리되지 않은 온갖 성령론을 주장하는 혼란의 극을 달리고 있는 시점에서 이 책은 그런 혼돈을 치유할 수 있는 훌륭한 해답서이다.
이 책은 현대의 성령론에 대한 수많은 조류와 사조를 각주에서 일일이 참고하고 논평하고 점검하면서, 성경적이며 전통적인 칼빈주의 신학에 근거한 성령론을 체계화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를 받는다. 특히, 오순절과 성령의 은사 이해에서 이미 주목할 만한 저술과 논문을 발표한 리차드 개핀(Richard Gaffin, Jr. 아들)도 이 책이야말로 개혁신학의 발전을 보여 주는 놀라운 책이라고 극찬했다.
이 책은 성경적 안목으로 성령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정리해주고 있다. 경험이나 전통, 혹은 교회에서 행해지는 관행에서 성령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전에, 먼저 성경에서, 그리고 역사적인 교회의 문서들과 신학자들의 설명에서 찾아보는 것이 순서이다. 그런 점에서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정리된 본서의 내용은 훌륭한 출발점이 된다.
1998년 9월 합신 연구실에서 김재성.
정리자 주:
퍼거슨의 성령론을 읽으면서 필자가 감탄을 한 점은, 이 책이 다소 스콜라적인 정통 개혁 조직신학을 매우 생동감 있게 재편성했다는 점이다. 그뿐 아니라 그간의 많은 학문적 발전의 결과와 논의가 이 책에 반영되어 있을 뿐 아니라 퍼거슨의 깊은 신약 신학적인 연구 결과도 들어 있다. 또한 이 책에는 퍼거슨의 깊은 영적 체험이 그의 학문과 놀랍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우리의 신앙 생활과 직결된다. 혹자에게는 이 책이 정통의 틀을 벗어났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마음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내용은 정통 개혁 신학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그 신학을 풍성하게 해주었다.
필자가 이 책을 읽다가 후배들에게 정리를 해두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정리록을 만들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김재성 교수의 탁월한 번역(어려운 말을 이해하기 쉽게 번역함)은, 독자들로 하여금 책의 깊은 내용을 쉽게 생각하고 지나치는 일이 있을 것이라는 노파심 때문이다. 먼저 번역서를 읽고 이 정리록을 읽으면 이해가 쉽게 되고 배운 것이 기억에 남을 것을 희망한다.
가끔 나타나는 괄호에 들어 있는 말이나, „à„ 이후에 있는 말은 정리자가 이해를 더하려고 붙인 말, 혹은 요약이다. 송다니엘(하이델베르크 개혁교회 목사)
5장 질서의 영
오순절에 교회에 부어진 하나님의 영은 회복의 영이다(성령님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러 오셨다). 성령은 이처럼 새로운 창조의 머리이신 예수님께 오셔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로운 지배권을 회복하실 자로서 봉사하도록 예수님을 구비시켜 주셨다(고전15:45-491)) à 성령님이 임하시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회복된다! 금이빨로 바뀌는 곳에서는 인간의 탐욕이 부추겨지고, 넘어지는 곳에서는 인간이 물건이 된다. 비인격적인 역사는 인간적 혹은 사단적이다!
새창조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믿는 자들도 다른 피조물과 함께 그날을 기다리며 탄식하고 있다. 성령의 사역은 마지막 날의 영광을 향하고 있으므로 종말론적이며, 종국에는 하나님이 새 창조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하신 영광을 모든 피조물에게서도 완성하신다.
그러나 그 영광이 이미 믿는 자들 안에서 회복2)되고 있으므로 반(半) 종말론적이라고 볼 수 있다. (신자는 이미와 아직 이라는 긴장 속에서 산다)
오순절 이후 성령의 활동은 물 위에 퍼지는 동심원의 물결처럼 역사를 통해서 퍼지고 있다. 구약 시대와 같이 신약 시대에도 성령의 활동은 구원론적이요 공동체적이요 우주적이며 종말론적이고, 개개인의 변화와 교회와 세상의 통치, 새로운 시대의 도래와 관계되어 있다.
이러한 유형에 대한 시사는 이미 사도행전의 이야기 속에 존재하고 있다: 오직 성령의 권능에 의해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구속주요 주님으로 믿게 되고, 새로운 주님의 공동체는 성령의 활동 안에서 형성되며, 장차 올 새 시대의 권능이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서 현시대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히2:4; 고후12:12; 행3:1-10;5:12)
만일 우리가 죄 가운데서 수치스러운 삶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옮겨지려면, 거기에는 분명히 기나긴 여정이 있다. 어떻게 우리가 성령의 길과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는가?
구원의 서정
신학사에서 보면, 먼저 신론과 기독론이 어느 정도 정립된 후에야 구원론의 문제에 대한 자세하고도 비평적인 탐구가 이루어 졌다. 교부시대에는 하나님의 존재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격과 본성에 관한 질문이 압도적이었다.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구원론에 대한 결정적인 선언들이 추구되고 제시되었다. 칭의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고전적 해설은 트렌트 종교회의(1545-1563) 말기에야 공포되었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어떻게 구원이 성취되었는가에 대한 해석은, 불가피하게 그 구원의 개인적인 적용에 관한 질문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이런 맥락에서, 중세 신학의 주된 관심은 구원의 은혜를 성례에 연계시키는 것이었고, 따라서 의롭게 되는 과정(processus justificationis)에서 교회의 제사장적인 사역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성령의 사역은 7성례의 시행에 한정되어 버렸다. 종교개혁의 관점에서 이것을 볼때, 일곱 성례는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성령은 교회의식의 시행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세 신학은 주로 칭의의 과정에 집중하였으므로, 죄인이 은총을 받기 위해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비중을 두었다:
·선행적 은총(gratia praeveniens3))을 받아 의지가 죄를 미워하고 의와 칭의를 사모하는 쪽으로 움직이게끔 하다 보면 그에게는 상습적으로 은총을 받는 성향이 굳어진다. (선행적 은총은 아무에게나 공짜로 주는 것이 아니라, 성례를 받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따라서 성례를 은총의 수단이라고 한다. 성례를 계속 받으면서 죄를 미워하게 되면 은총을 받는 성향이 굳어지게 되는데, 이것을 habitus가 생긴다고 말한다. 이러한 가르침으로 가톨릭은 사람을 교회와 예식, 시제에 단단히 묶는다. 사제 없는 구원은 없다! 신교에서는 만인이 제사장이다. 은혜론에서 근본적인 차이는 가틀릭에서는 „공짜는 없다“이고, 신교는 „오직 은혜로“를 가르친다)
·죄에 대한 완전한 비탄이 결여된 불완전한 애통은 고해성사라는 수단으로 보충된다.
·평생토록 충분한 은총을 단번에 받을 수 있는 의식이란 없다(따라서 가톨릭은 „오직 은혜로 단번에 칭의를 받는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고해성사는 칭의를 향한 지속적인 과정에서 정규적인 행사가 되어 버렸다.
·이들의 칭의 개념은 실제로 의롭게 되는 것(justum facere)을 뜻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선포되고, 간주되고, 구성되는 종교개혁적 개념은 없었다. 즉 칭의가 내적인 의로움과 혼동되고, 법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면 개인이 완전한 성결에는 못 미치기 때문에 결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드물게 개인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계시 없이는(성자) 누구도 칭의의 복을 확신할 수 없다. (트렌트 공의회의 결정에 따르면, 특별한 계시 없이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
칭의 문제는 마틴 루터가 해결했다. 그는 많은 정신적 영적 투쟁을 통하여 중세적인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이것은 롬1:16-17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통해 분출되었다. 바울은 이곳에서 의로움을 획득하기 위한 자신의 업적을 말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예비하심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음을 루터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것은 구원에 대한 인식의 패러다임의 전환이었고, 이 깨달음은 종교개혁의 초석이 되었다 à 전혀 다른 구원론)
제2세대 종교개혁자인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로 불린다. 칭의는 의로움이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gratia infusa) 전가되며, 스스로 취득한 것이 아니라 양도된 것이 (루터가 발견한) 칭의의 본질이다. 칼빈은 이 새로운 이해를 구원과 적용시켜 성령의 역할을 회복시켰다. 칼빈은 구원에 관해서는 성례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례가 말씀과 성령의 활동에 종속되었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칼빈은 „어떻게 성령이 개인에게 그리스도의 복을 적용하는가4)„에 큰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식은 매우 중요하므로 이것은 구원의 서정5)이라는 표제 아래서 논의되어 왔다. 서정이라는 말은 일련의, 한 가지 계열로 된 연속된 구조를 의미한다. 구원의 서정이란, 구속의 적용에 관해서 사용될 때, 성령께서 각 개인에게 구원을 부여해 주실 때, 구원의 다양한 측면이 질서 있게 배열됨을 의미한다. 특히 „어떤 방법으로 그 다양한 구속 적용의 측면들(중생, 회심, 칭의, 성화와 같은)이 서로 연관을 맺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서정에 대한 논의는, 성령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적용하는 면에서의 내적인 일관성과 논리성을 밝혀 보려는 시도이다.
구원의 서정에 대한 토론에 있어서 주지해야 할 점은, 정통신학자 사이에도 관점이 일치하지 않으며, 이것이 소모성의 논쟁으로 발전될 위험도 있고, 점차적으로 이 개념 자체에 대해서 비판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제시하는 방식에는 구원의 서정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은연중에 표출되기 마련이며, 기독교의 복음이 선포되는 방식을 좌우하는 사고틀을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성령이 개인에게 역사하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논리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어떤 순서인가?
구원의 서정: (예정) – 소명 – 중생 – 회심 – 신앙 – 칭의 – 양자됨 – 성화 – 성도의 견인 – 영화
학자에 따라 순서가 바뀔 수 있다. 알미니안주의에서는 회심과 신앙이 중생에 앞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à 정리자 주.
구원의 서정에서 중요한 것은 순서가 아니라 논리적 배열이다. 서정에서 드러나는 순서는 시간상 어떤 것이 먼저 일어나는가가 아니라, 논리적인 연관성과 본질상의 순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6).
영어권 전통에서 구원의 서정에 대한 고전적 사례는 초기 청교도 신학자인 윌리엄 퍼킨스(1558-1602)의 저작 황금 사슬에서 발견된다. 그는 구원의 모든 다양한 측면의 원인을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는 주로 롬8:28-30, 특히 하나님이 예정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는 바울의 선언에 기초하고 있다. 퍼킨스는 이것을 서로 나눌 수 없는 연속적인 것, 즉 구원의 „황금 사슬“안에서 하나로 묶인 것으로서 그 안에서 구별되는 요소들로 보았다. 사실 퍼킨스의 도식은 스스로 닫힌 형태의 연결고리가 이어지는 외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목회적인 탁월함을 가지고 있고, 많은 좋은 영향을 끼쳤지만, 근래에 이 유형은 심각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롬8:28-30과 같은 구절들은 구원의 적용에 있어서의 순서에 관해 언급한다기 보다도 오히려 구원으로 말미암는 복의 풍성함과 충만함에 관한 언급으로 해석되어 왔다. 벌카워는 여기에 성화가 빠져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여기에서 전혀 다른 요소들의 순서를 언급하고 있지 않음을 지적한다. 만약 이것이 구원의 순서를 지칭한다면 성화가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이 원인과 결과로 구성된 사슬 형태라는 용어로 표현될 때, 전통적인 구원의 서정은 구원론의 핵심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빼놓는 위험을 범하게 된다. 이것은 주님의 사역의 열매들이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하나의 사슬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으로서,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연합으로 연결시키는 일이 좀 더 근본적으로 성령의 사역에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다.
예를 들자면, 이 도식에서는 선택은 중생의 원인이며, 이어서 중생은 믿음의 원인이 되고,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불변하고 필연적인 결과는 성화와 견인이다. 각각의 경우에서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모호하고 심지어는 축소되고 만다.
따라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그분과 우리의 연합이 불분명한 상황에서, 관심의 초점이 우리 안에 무엇이 이루어졌느냐에만 있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와 그분의 연합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헤르만 리델보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바울의 설교에는 구원의 인간론적인 적용에 대한 자세한 교리인 구원의 서정의 조직적인 발전 단계와 같은 요소가 전혀 없다. 이는 바울의 교리의 특징이 학문적인 의미에서 조직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의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구원의 서정이라는 개념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신학을 거론할 때에는 질서 정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원리, 혹은 모델을 사용하여 성령 사역의 순서가 추론되어야 하는가이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성령의 전체 사역에 핵심적인 개념 안에서 더 좋은 모델을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엔 크리스토)
성령의 핵심적인 역할은,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그분을 우리와 연합시키고 그분의 몸 안에 모든 사람을 참여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내주하심과 성령의 내주하심은 신약에서 하나이자 동일한 실재의 두 측면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7)„ 유지시키는 것이 성령 사역의 핵심이며 진수이다.
이는 성령의 사역을 구조화함에 있어서 우리가 채택할 모델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적용하는 모든 측면은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방식에 관계되어야만 하고, 그분과의 개인적인 교제로부터 직접 발생하는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따라서 구원의 서정의 가장 두드러진 동기이자 중추적인 근본 원리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복음주의 신학의 핵심에 위치해 있고, 칼빈이 기독교강요의 제3권을 시작하는 방식에서 분명히 입증된다:
……그분이 불쌍하고 곤궁한 인간들을 부요하게 하려고 주신 그 은혜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는가?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 밖에 머물러 계시고 그분이 우리에게 떨어져 계시는 한, 그분이 고난 당하신 모든 것과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하신 일들은 우리에게 아무 소용도 없고 가치가 없는 채로 있게 되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또한 우리는 그분 안으로 접목되어야 하고(롬11:17),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갈3:27)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소유하신 모든 것은 우리가 그분과 한 몸이 될 때까지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는 복음주의 신학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강조점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야말로 성령의 사역을 고찰할 때 뼈대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의 고전1:5(„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그분 안에서라는 말을 그대로 지키는 것을 그분에 의해서 라는 말로 바꾸는 것보다 더 좋아한다…우리가 그 몸의 일원이기 때문이요, 우리가 그안에 접목되었고, 한 걸은 더 나아가 우리가 그분과 하나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분은 성부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우리와 나누신다.
칼빈은 여기서(그리고 유사한 다른 주석에서도) 구원의 복들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를 그저 그 복들의 궁극적인 근원으로만 여겨서는 안 되고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 안에 직접 참여함으로써만 우리의 것이 된다고 여겨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접근이 성령의 역사에 대한 더 나은 성경적 관점을 대변한다.
구원의 복은 성령을 통해서, 배타적으로, 즉각적으로, 동시적으로, 종말론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것이 된다. 바울의 용어로 말하면, 그분 안에서(엔 크리스토)만 구원의 복들이 우리의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일은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은, 각각 나름대로의 독특한 완성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도 우리의 것이 된다(엡1:3이하)
이러한 접근은 구원의 서정에 대한 해석의 주류를 이루는 일련의 묶음 또는 원인론적인 사슬 구조에 비해 몇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은혜를 베푸시는 분으로부터 분리되거나 떨어져서는 복음의 축복들을 생각하거나 즐거워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으면, 관심과 신앙의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구원의 사슬상 현재의 체험에 두게 되는 주관주의가 배태되는 위험에 빠지게 된다.
더욱이 구원의 적용의 다양한 부분은, 신약 사상에 광범위하게 나타나 있는 생동감 있는 종말론적 차원(그리고 긴장)을 지닌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성령의 사역을 해석하는 중추적인 원리가 될 때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 참여한 사람들은, 또한 한편으로 이 세상 즉 육체에 의해서 지배되는 곳에서 살고 있으므로, 거기에는 구원의 현재 체험에서 „이미 그러나 아직8)„이라는 특성이 있다.
사슬 모델에서는 하나의 연결 고리가 그 자체로서 완전하고 다른 것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으므로, 이 긴장 관계를 충분하게 표현할 수 없다. 예컨대, 중생의 결말에 이르면 믿음이 시작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 반대로, 구원의 측면들 각각에는 아직 완성에 도달해야만 하는 부분들이 남아 있음을 이야기한다.
성령의 사역에 대한 사슬 모델은, 이미 시작된 것은 또한 완전히 성취된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구원론의 각 측면에는 종말론적(이미, 그러나 아직) 구조가 들어있다:
·중생이란 현재적 실재이지만, 이것 역시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마19:29)
·성화 역시 죄의 지배로부터 이미 급격하게 그리고 단번에 결별이 이루어졌지만(고전6:11; 롬6:1-14), 이것 역시 완성을 향하여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있다(살전5:23).
·영화도 미래에 완성되지만, 이미 이곳에서도 그리고 지금 은혜와 영광의 성령이 임재하심을 통해 시작되었다(고후4:18)
·칭의 역시 이미 완성되고 완벽한 실재이면서 또한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양자됨 역시 우리 몸의 구속, 곧 아들로 양자됨(롬8:23)을 우리는 기다린다.
모형과 근원이신 그리스도
이렇게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구원의 복들이 지닌 동시성을 바라보는 관점은 실상 바울 신학의 종말론적 구조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9). 세밀하게 검토해 보면, 그 신학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의 적용에 관하여 주목할 만한 빛을 던져주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은덕인 칭의, 양자됨, 성화, 영화는 그리스도께서 부활을 통해 얻으신 것이다. 이 점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형이요 근원이 되신다) 이러한 교훈은 세 단계로 세분화할 수 있을 것이다:
1) 이 점에 관련하여 사도의 사상에 담긴 핵심은 바울의 경우, 우리의 구속의 근거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함으로써뿐만 아니라, 또한 부활에 참여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롬6:3이하; 엡2:5-6; 골2:12-13;3:110)). 이처럼 그리스도가 죽으실 때, 우리도 죽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는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대표적으로 이루어졌다.
믿는 자들에게서 이것이 현실화되거나 실존화 되는 것은 중생이나 회심에서이다. 이들 두 가지 순간, 즉 그리스도와 부활과 우리의 부활은 시간적으로는 떨어져있으나 논리적으로 묶여 있다. 양쪽 모두 성령의 사역이다 à 우리의 영적 투쟁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삶 속에서 현실화되는 것이다.
2) 바울은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 그리스도 자신의 구속으로 보았다11). 그분의 죽으심은 진정으로 죽음의 모든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심판을 받았고, 생명으로부터 격리되었고, 죄의 삯으로 죽음을 경험하셨다. 그러나 죽은 것으로 생각된 그리스도가 일으킴을 받았고, 건져졌고, 보호를 받았고, 부활을 통하여 구출되었다.
3) 복음에 대한 바울의 설명에서 믿는 자들에게 구속의 적용을 설명하고자 사용된 범주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밝혀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에 대한 구속의 적용은 그리스도께 대한 구속의 적용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예수님의 부활은 그분의 칭의로 간주된다(딤전3:15).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죽음에 머물러 계실 수가 없었다.
2.바울은 또한 이 부활은 예수님의 양자됨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부활은 그분으로 하여금 권능있는 메시아적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했다. 부활 안에서 그분은 새로운 시대의 사람으로 양자가 되셨다12).
3.부활은 또한 그리스도의 성화로 간주될 수 있다. 우리의 성화에 근본적인 것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다. 바울은 성화의 점진적인 측면이 아니라 결정적인 측면을 유념하고 있는데, 이는 죄의 영향권으로부터의 점진적인 해방을 위한 기초를 제공해주는, 죄의 지배권으로부터의 급격한 구원을 의미한다. 죽음으로 그리스도는 죄의 지배권 아래 들어갔다. 부활에서 그분은 그 지배권에서 구출되었다. 이 구출은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우리의 성화의 근거이다.
4.부활은 그리스도의 영화를 이루었다. 성령의 권능에 의해서 그분의 육의 몸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하였다(빌3:21)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모든 것을 함께 소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이 그분의 칭의, 양자됨, 성화, 영화를 함께 소유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런 것들은 그분의 부활이라는 단 하나의 종말론적 사건의 모든 측면이며, 그분에게 그것들이 동시적이고 분리 불가능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들이 즉시, 종말론적으로, 동시에 우리의 것이 된다.
물론 칭의, 양자됨, 성화, 영화는 구속의 적용에서 각각 구별되는 범주어이며 우리는 결코 이것들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것들을 각각 동떨어진 사건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것들은 그분의 부활하신 영광 가운데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한 가지 사건의 측면이요 부분들이며,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가고 성령의 권능으로 획득된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의 은덕(칭의, 양자됨, 성화, 영화)을 우리도 성령을 통해 누림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통한다. 그리고 그분이 가지신 모든 것이 우리의 소유가 된다.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에게 결합하는 것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 다양한 전치사들은 그 연합의 긴밀성과 범위를 강조한다.
1) 위해서(hyper)
믿는 자들은 하나의 연합의 끈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분이 그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할 수 있다(롬5:6,8; 8:32; 고후5:21). 이러한 연합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 사이에서 그분이 하신 일이 곧 그들의 것이 된 것을 의미한다.
2) 함께(syn)
그리스도의 구속의 순간들에서 믿는 자들은 그분에게 긴밀히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 순간들 가운데 그들이 그분과 함께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있고, 따라서 이런 사건들은 그들의 현세적 삶에서 지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갈2:20: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롬6:4: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
롬6:8: 그와 함께 산다.
3) 그리스도 안에서(en Christo)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구절은 바울 사상의 특징이자 가장 두드러진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전부를 요약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동의어와 같다. 신자는 „아담 안에“ 있다가 „그리스도 안에“ 오게 되었다. 아담 안에 있다는 것은, 아담이 대표성을 가지고 행한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요, 우리가 죄를 통해서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존재인 아담과 연합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한 유비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이 대표적으로 나를 위해서 행하신 모든 것이 실제로 나의 것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의 세 가지 차원: 그리스도와 연합은 세 가지 순간, 곧 영원한 순간, 성육신의 순간, 실존적 순간에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서로 다르지만 보완적이다.
1) 영원한 순간
믿는 자들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의 언약적인 연합 안에서 복을 받아, 그분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선택되었다(엡1:3-4,11-12). 이 연합에는 우리의 개인적인 실존을 넘어서 영원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으로 돌이켜 생각해야만 할 초월적인 차원이 있다. 여기에는 주권적이요, 단독적인 결정이 놓여 있다. 사도 바울은 더 이산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믿는 자들을 택하신 것은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선택하신 것과 관계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은 어거스틴이나 여러 신학자들이 총체적 그리스도(totus Christus)라고 옛, 영원한 하나님의 결정에 의하여 떨어질 수 없이 함께 결합되어 있다.
2) 성육신의 순간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뿌리로서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1.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필요한 구원을 준비하기 위해서 성령의 권능 안에서 우리와 같은 몸을 입으셨다. 그분은 우리 구원의 창시자(아르케고스)가 되기 위하여 우리의 몸을 입으셨다. 이는 순종과 의로움을 성취하신 자로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이것들(순종과 의로움)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롬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2.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은 그의 육체에 접지되어 있고 그 연합의 수행자인 성령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분의 구원 사역의 위대한 순간들이 함축하는 것들은 우리가 함께 공유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죽임을 당하고, 장사 지낸 바 되고, 다시 살아나시고, 승천하였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신 일에서 연합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신 중보자로서의 그분의 신분에도 연합된다. 그분과 연합으로, 우리의 신분은 급격히 바뀌었다. 더욱이 그분이 우리의 육체적인 실존을 거듭나게 하시고, 자신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시켜 가는 이상, 우리의 인격은 그분이 우리를 영광의 최종 단계로 변화시키실 때까지 점진적으로 바뀔 것이다(빌3:21)
3) 실존적 순간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초시간적으로 의도된 이 연합은, 성육신에서 구체화되었고, 이것은 다시 그리스도의 영의 내주하심과 그에 관련된 믿음을 통해서 비로소 실존적인 실재가 된다. 이 실재는 신자의 삶 전체를 결정짓는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 연합의 충만한 실재는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믿음으로 연합시킬 때, 우리의 실존 안에 자리하게 된다. 바울의 특유 표현 중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믿는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비록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을지라도, 우리가 그분을 신뢰할 때까지는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대상(엡2:3)이요,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있다. 오직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언약적 목표가 우리 안에 현실화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함축된 의미
그렇다면, 믿음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구원의 적용에서의 성령의 역사에 관한 전반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세 가지 요점을 주목할 수 있다:
첫째, 성령의 사역은 본질적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사역이며,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물려받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칼빈은 이를 잘 그려내고 있다(II,16,9):
우리는, 우리의 구원과 그것의 모든 부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됨을 알 수 있다(행4:12). 따라서 우리는 그것의 부분들을 다른 데서 찾아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구원을 알기 원한다면, 이것은 그분의 것(고전1:30)이므로 예수님의 이름만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만족이라면, 그분의 희생에서 찾을 수 있으며, 정결하게 하심은 그분의 보혈에서, 화해는 그분의 지옥에 떨어지심에서, 육체를 죽이는 일이라면 그분의 무덤에서, 생명의 새로워짐은 그분의 부활에서 찾을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그분 안에 모든 종류의 선이 풍성하게 넘친다. 그러므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 샘에서 우리에게 충분한 양을 채우자.
두 번째 함의는, 신약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강조된 것으로, 우리가 „육체 가운데서“ 지난날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지만, 그것은 현재 우리의 생활에 더 이상 압도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더 이상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요, 영에 속한 사람이다(롬8:9). 우리의 과거는 아담 안에서의 과거다. 우리의 현재 존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성령 안에 있다.
셋째로,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의 인성 안에서 그분이 우리와 연합하심에 근거하고 있다. 이로부터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변화가 이루어진다. 구원받은 인성의 창시자(아르케고스)가 되시려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표현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성령의 목표이다. 이는 믿는 자들로 하여금 점차로 참되고도 온전한 인간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성령의 성화시키는 사역을 논할 때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루이스 벌코프는 이를 훌륭하게 언급한 바 있다.
이 연합으로 인하여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따라서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된다. 그리스도가 그분의 백성 안에서 행사하시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분에게 일어났던 일의 복제이자 재생산이다. 객관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주관적인 의미에서도 그들은 십자가를 지고, 못박히고, 죽임을 당하며, 그리스도의 생명의 새로움으로 일으킴을 입는다. 그들은 다소간 그들의 주님의 경험을 공유한다13).
정리: 성령의 역사의 핵심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믿음을 통한 우리의 그리스도와 연합이다.
6장 재창조의 영
(우리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먼저 우리가 중생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단원은 중생과 회개를 다룬다)
성령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묶는 일에는 성격상 다양한 차원이 있다.
바울이 말한 바,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계“에 들어가는 것이다(고후5:1714)). 이는 죄와 사망의 옛 질서, 즉 육체와 마귀에 의해 지배 당하는 시대가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있는 새로운 질서에 길을 내어 주었다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이 이루는 상호 결합은, 출애굽 때와 안식의 땅에 들어갈 때 나타났던 여호와와 이스라엘 백성 간의 옛 언약적 결합에서 어렴풋하게 예시된 모든 것이 성취된 것이다. 이는 메시아의 사역에 근거한 것으로, 새로운 인성을 창조하는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을 통해서 서서히 진행되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 있는 생명은 다양한 차원을 가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신약 성경에서 다양한 각도로 다루어진다. 이것은 그분의 죽으심, 부활, 승천 안에서 그분과 동일시되는 것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위와 하나님의 행위간의 상호 관계를 포함하고 있다. 물론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이 창시자이므로 단 하나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하나님이 기원인 것)은 본질적으로 믿음(인간이 수납하는 것)과 양극단을 이루는 양면적인 것이다.
중생과 믿음의 실타래는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얽혀 있다. 성령은 이 두가지 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이것은 별도로 분석되어야 하지만, 실존적으로 서로 분리될 수 없다. 그런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의 단독적인 사역이 끝나고, 어디에서 신자의 행동이 시작하는지 명확히 알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중생과 회심이라고 하는 두 가지 요소가 모두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중생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종말에 완성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신자들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새롭게 하는 사역에 의해서 시작된다. 하나님이 그분의 영의 내주하심을 통해 백성에게 새로운 마음과 정신을 주실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활 양식을 낳게 될 것(겔36:24-27)이라는 옛 약속은 성취된 것이다.
칼빈의 가르침 가운데 중생이란 용어는, 성령이 신자의 생애 전 과정을 통해 영향을 미치는 새롭게 하심을 지칭하는 것15)으로 사용되었다. 칼빈은 중생이 묘사하는 실재는 회심, 회개의 경우와 동일한데 단지 다른 각도에서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훗날 17세기의 많은 저술가들은 유효적 소명과 중생을 동의어로 취급하는 경향을 보였다. 오직 복음주의 신학의 지속적인 발전 과정에서 중생은 좀 더 제한적인 의미, 곧 하나님의 주권과 은밀한 사역에 의한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라는 특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권능에 관심을 가지도록 돕고 있는데, 이것이 합당한 신학적인 맥락에서 벗어날 때, 거듭남이라는 이 용어는 성경적인 근거로부터 동떨어져서 주관적이며 심리적인 것이 되고 만다16).
신약은 중생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복음주의 구원론의 구조에서 중생은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두 번째 탄생“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체험에서 결정적인 요소로 간주된다(복음주의 구원론 비판!: 정리자 주17)). 그러나 중생을 뜻하는 용어인 팔링게네시아는 신약에서 단지 두 차례밖에 쓰이지 않았다.
마19:2818)에서 이 단어는 „만물의 새로워짐“을 암시하며, 우주의 재탄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팔링게네시아는 마지막 부활이요 하나님 아들의 양자됨의 실현이며, 그들의 몸과 탄식하는 모든 피조물의 구원이며(롬8:19이하), 의의 본향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설립이다. 이는 우주적인 영향을 미친다.
신약에서 사용된 또 하나의 팔링게네시아는 딛3:519)에서 바울이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하여20)„이라고 한 말에 나타난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같은 의미로 보는 중언법, 즉 두 가지 표현이 한 가지 개념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인데, 그렇다면 개인의 중생과 새로운 세대의 도래 사이의 놀라운 관계를 시사해준다. 왜냐하면 바울은 „새롭게 함(아나카이노시스, 롬12:2.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는 용어를, 현존하는 세상 질서와 다가올 시대가 이루는 대조를 강조하면서 다른 곳에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헤르만 리델보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 문맥에서 바울이 언급하는 성령의 부어주심은 „전형적인 종말론적 용어“이다. 이것은 바울이 중생을 좀 더 넓은 문맥에서, 곧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에 의해 시작된 부활의 새로움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중생의 결과로 나타나는 새롭게 됨은 단순히 내적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사물의 현재 질서에 대한 새로운 질서의 침입이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의 권능에 참여함으로써, 더욱 구체적으로는 성령을 통해 둘째 사람이며 첫 열매인 종말론적 아담으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교제함으로써 초래된, 밖으로부터 혹은 위로부터의 변혁을 의미한다(고전15:45).
1. 새로운 창조 – 새 생명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의 역사로 인한 새로운 탄생을 통하여 시작된다는 생각은 신약에 널리 퍼져 있으며, 이것은 요한의 신학에서 근본적인 주제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이 탄생이 성령의 사역이라는 사실은 훗날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에 의해 강조된 바 있다. 요한의 신학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특징짓는 설명 방식인데, 이는 사도 바울의 글에 나타나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과 같다.
중생은 원인의 측면에서 볼 때 그리스도의 부활에 뿌리를 두고 있다(벧전1:3). 이치상 어떤 존재이든 그와 동류를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우리의 중생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열매이다. 그분과의 연합 가운데 지금 여기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효과를 발휘하게 되고, 그분이 돌아오실 때에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이분은 마지막 때에 이룰 부활 – 중생의 첫 열매이다. 우리는 마지막 추수에 참여하게 될 것이며 이미 성령 안에서 연합의 끈을 통해서 첫 열매에 참여한다(롬8:23). 여기에 중생의 종말론적 본질이 강조되고 있다.
2. 하나님의 단독 사역
신약 성경의 설명은 중생이 성령의 주권적이고 단독적인 사역임을 강조하고 있다. 태어난다는 비유는 그 자체에 급격하고 새로운 시작이 있다는 암시를 포함할 뿐 아니라, 그것이 결코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단독사역(divine monergism)은 다른 곳에서 반명제 형식을 통하여 설명되어 있다. 즉 우리가 태어나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가 아니요 하나님의 결정에 따라서이다(요1:12). 아래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나는 것이며, 육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도움 없이는 잉태하거나 태어날 수 없는 것과 같이, 도움 없이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 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중생의 사역은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가?
3. 중생의 측면들
중생이란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는 성령의 사역은 몇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로, 지적인 조명을 포함한다. 이전에는 하나님 나라를 알지 못했으나 이제는 분명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요한은 이것을 기름부음이라는 말로 설명하는데, 그리스도인이 그것을 받은 결과로 진리를 안다고 말한다(요일2:20). 그들은 자신을 가르칠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요일2:27).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는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은 것을 공유하며, 인간 중개인이 없이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하게 된다. 이것은 옛 언약에서 제사장들, 선지자들, 왕들을 통해서 전달되던 것과 구별되는 점이다.
둘째로, 중생은 죄에 의해서 지배되던 본성에 속박되었던 의지가 자유롭게 된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중생에서 핵심적인 요소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도록 인간의 의지에 성령이 능력을 주는 것21)이다.
셋째로, 중생에는 깨끗이 씻어 낸다는 의미가 있다. „이것은 물로 거듭난다“(요3:5)는 구절의 가장 유력한 해설이다. 성령은 새로운 생명을 주시며 동시에 심령을 깨끗게 하신다.
중생에서 일어나는 씻음은 딛3:5과 함께 고전6:11에서도 강조되었다: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이 되었다“ 여기서 씻음과 거룩함은 중생과 같은 것이다. 중생과 더불어 인간의 욕망들은 갱싱되고 깨끗하게 씻긴다. 성령의 새로운 시대와 그 실재들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영을 새로 태어나게 한다.
따라서 중생에서, 성령의 사역이 변혁시킬 수 있는 능력의 범위는 총체적이다. 거듭나는 사람은 전인격적인 개인이다. 중생은 개인의 삶의 근본적인 욕구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그의 존재 중 손대지 않은 부분이 전혀 없다.
결과적으로 중생의 범위는 부패한 전 영역에 해당된다.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렘17:9)는 말씀에 근거해서 신학자들은 전적 부패의 교리를 주장하는데, 이것은 인간이 악해질 수 있는 만큼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는 죄의 영향에 의해서 더럽혀지지 않은 부분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부패를 역전시키는 것이며, 비록 중생한 개개인이 아직 완전히 거룩하지는 않지만, 새롭게 하고 깨끗하게 씻으시는 사역에 의해서 영향을 입지 않고 남아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이다. 중생은 새로운 심령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
4. 성령의 주권
어떻게 성령이 새로운 탄생에 영향을 미치는가? 그의 사역은 신비롭고 주권적이다. 성령의 사역은 바람과 같아서, 보이지는 않지만, 그 사역에 의해 알 수 있다. 성령의 임재는 오로지 그 결과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 우리는 믿음과 회개의 표현들 가운데서 성령으로 인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중생에 대한 고전적인 개신교 신학의 공식적인 가르침은 사람의 인격의 온전성(우리는 외부적인 압력에 의해서 강요되지 않는다)이나 하나님의 단독 사역의 필요성(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자요, 우리 자신의 의지로는 생명으로 옮길 수 없다) 중 어느 것도 타협하지 않는데, 이는 올바른 입장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밝혀주신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생명으로 예정된 모든 사람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들만을 자기가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인정한 때에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실제로 불러서 또한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있도록 영적으로 또한 구속적으로 계몽하신다. 돌과 같이 굳은 마음을 없게 하고 살과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셨다. 선을 원하게 하는 절대적인 권능으로써 그들의 뜻을 새롭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실제로 가까이 나오게 하신다. 이때에 그들은 가장 자유롭게 나아오며 은총으로써 그것을 원하도록 변화를 받는다22).
우리가 여기서 직면하게 되는 긴장의 초점은(하지 않으려는 자들로 기꺼이 하도록 만드는 것)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개입(의지)에 대한 광범위한 문제에 속한 것이며, 성경의 영감과 섭리의 문제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 역할의 신비로움과 유사하게, 여러 면에서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은 인간 행동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의 기초가 되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
비록 개인의 중생이 추상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는 정신적이고 의지적이고 감정적인 능력들에 대한 성령의 작용이 개인의 인격과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개인은 생각과 의지와 감정을 가지 피조물이요 전인격적인 존재이다. 성령은 지식, 의지, 감정이라는 넓은 맥락 가운데서 활동한다. 결과적으로, 비록 중생이 요한에 의해서는 주권적이며 단독적인 사역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진공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격 전반을 향해서 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의 마음은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설득되고, 감성은 그리스도인의 간증이나 배려로 인하여 감동을 얻으며, 이로 인해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를 분석해보면, 개인은 자신의 마음을 바꾸게 되고(회개), 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된다(믿음).
그러나 믿음과 중생은 말씀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발생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의식할 수 있는 수준에서 우리에게 개입하고, 우리의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그에 반응하는 우리의 행동 수준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의 단독적이며 주권적인 사역이라는 개념을 희석시키지 않은 채, 어떻게 중생이 말씀을 통하여 발생한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가? (듣는 자가 의지적으로 말씀을 수납해야 한다)
신약 성경의 기록자에게는, 성령이 중생의 유효적인 원인인 반면에 말씀이 중생의 도구적 원인이라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어떠한 암시도 없다. 중생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은 인지적인 것과 감정적인 능력을 포함한 전인격의 변화에 관여하기 때문에, 말씀의 외적 계시에 의해 성령의 내적 조명이 수반되는 일이 전적으로 타당하다. 믿음이 지식을 포함하는 까닭에, 성경에서는 믿음이 복음의 가르침과 연관되어 등장하기 마련이다. 중생과 그것이 가져다 주는 믿음은 오로지 신적인 주권에 의해 다른 요소들과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증거와 말씀의 선포를 모체로 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5. 믿음, 하나님의 선물
한가지 더 신약에서 강조되는 것은, 믿음은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열매이며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믿음은 성령에 의하여 지도를 받는, 그리스도를 향한 전인의 행동이다. 우리가 믿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이지만, 우리가 믿는 것이다. 믿음은 그분의 선물인 동시에 우리의 행동이다. 이러한 연관성을 드러내는 고전적인 본문이 엡2:8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얻었지만, 이 은혜는 우리의 행동을 무시하지 않고 그것을 관여시킨다. 믿음이란 우리의 능동적 반응이다. 즉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받게 되지만, 행위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동에 관련되지만, 우리에게 자랑할 것은 전혀 없다(엡2:9)
워필드는 이 문제의 핵심을 잘 지적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믿음의 구원하는 능력은 그(믿음)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의거하고 있는 전능하신 구원자 안에 있다. 성경에서 믿음이 구원을 얻게 한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이러한 지성의 틀이나 마음의 태도가 그 자체로서 하나님께 보상을 요청할 만한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심리적인 행위로서의 공식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 구원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다23).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을 얻는다. 구원하는 권능이 믿음 자체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믿음이 신뢰하는 대상 속에 들어 있다. 이는 벌카워가 다른 곳에서 이와 관련하여 기록한 바와 같다:
믿음은 단 한 순간도 건설적이거나 창조적이지 않다. 오직 약속의 실재 안에 유일하게 오로지 머물러 있을 뿐이다.
회개
믿음과 회개는 중생에서 성령의 사역이 현상적으로 드러난 측면이라는 사실이 지금까지의 논의로부터 분명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에게 회심할 때 작용하는 성령의 사역에는 여러 요소들이 있지만 믿음과 회개라고 하는 두 가지는 회심에 있어서 본질적이기 때문에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 믿음은 항상 참회하는 것이다. 참된 회개라면 언제나 믿음을 동반한다. 믿음과 회개, 두 가지로 표현되지 않는 중생은 없다.
그렇다면 참된 회개란 무엇인가? 두 가지 요소를 고려할 수 있다.
1.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그분이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에 대한 반항을 인식하는 것이다. 인간들은 스스로 믿음과 순종의 의무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적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다. 회개는 이러한 인식을 포함한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된 „먼 나라“에 머물게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2. 회개는 하나님의 언약의 은혜로운 규정의 빛 가운데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을 포함한다. 회개란, 뉘우치는 신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인식하면서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 본연의 자세로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회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생각을 통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극되고, 죄의 참된 특성에 대한 인식으로 촉발된다. 이것은 하나님께 중심을 두는 반응이다. 참으로 이것은 참되신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첫 출발이다. 회개는 죄로부터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회개는 믿음과 마찬가지로 구원에 필수적이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이것은 용서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 회개는 우리의 성화를 포함한다. 따라서 그것은 회개에 포함한 바 죄로부터의 돌이킴으로 구원받는 자들을 성화의 과정에 참여시켜야 한다. 변함없이 죄악된 행실을 계속 허용한다면 구원은 주어질 수 없다. 그러나 회개가 믿음처럼 구원에 필수적이긴 하지만, 회개는 칭의와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오직 믿음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받아들여지고 구원자로서 좌정하신다.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회개에 의해서 받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회개는 믿음으로 받는 구원에 필수적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신뢰다. 회개는 동일한 개인이 죄를 중지하는 것이다. 둘은 서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다.
회개의 징표들
회개의 체험은 개인마다, 그들의 죄에 대한 표현이나 자의식이 그러하듯이 매우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공통적인 몇 가지 요소를 추론해 볼 수 있다.
1. 회개의 순간에 성령은 죄에 대해 새로운 태도를 가지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죄에 대해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감정이 수반되는 것은 불가피하다(롬6:2124)). 죄에 대한 그러한 태도는 구체적이다. 회개는 불순종의 영 가운데 걸어온 길을 벗어나서 순종의 영 가운데로 돌아오는 것이요, 하나님의 명령들에 대해 구체적인 순종을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신30:225)). 이점에서 바울은, 율법의 의로운 요구들이 육체를 따라 살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충족된다고 말할 때, 회개를 거듭난 심령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롬8:3-4). 여기에서 회개는 순간의 행동에 제한되지 않고, 지속적인 생활 양식으로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2. 회개에서 성령은 또한 자아에 대한 변화된 태도를 불러일으킨다. 회개는 옛 생활에 대한 죽음이요,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회개의 첫 단계는 단순히 죽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회개는 근본적이고도 과격한 변화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실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동의하는 것을 포함한다. 회개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육체의 정욕들을 함께 못박음으로써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지속적인 의미를 가지는 영구한 변화이다. 이것은 육신이 그 욕망을 성취할 여지를 전혀 남겨두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이고 새로운 삶으로 살리는 일은 개인의 전 생애를 통해서 나타난다.
3. 회개는 또한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하나님께 대한 변화된 태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처음의 두 요소 어느 것도 이것 없이는 존재하지 못한다. 회개는 하나님의 참된 이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만일 하나님이 죄악을 따진다면 어느 누구도 설 수 없다. 그러나 죄 용서가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기 위함이다(시130:4). 복음적인 회개,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시작되어 지속되면, 항상 용서의 약속과 소망으로 충만하게 된다.
성경 신학에서는 개인의 자율적인 죄의식을 회개와 동일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따라서 회개를 향한 격려는 „이스라엘에게 여전히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아더 와이저에 의하면,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고전적인 유형을 시편 51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시편은 죄의 본질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으로 시작하고 있다.
·참된 회개는 불가피하게 상한 심령을 포함한다(시51:17). 그것은 감정이 고조된 상태가 아니라, 자만심과 자기 방어가 깨어지고 부서진 상태의 심령이다.
·회개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에 대한 희망으로 이끄는 데서 나온다. 회개는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사랑에 호소하는 것이다.
·이러한 회개는 거룩함에 대한 새로운 관심으로 분명히 드러난다. 중심의 진실함과 깨끗한 생활(시51:6-7), 정결함과 새롭게 하심을 향한 새로운 열망, 깨어진 자존심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바 다른 사람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대한 열망(13)도 여기에 수반된다.
·마지막으로, 참된 회개는 은혜의 맥락에서 나오기 때문에, 예배로 인도하고, 예배할 힘을 불어넣는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15)“
믿음과 회개는 중생의 표현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국면들일 뿐 아니라,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의 특징들이요 열매이다. 참으로 성화의 전 과정은, 다름 아니라 중생이 그 본연의 모습으로 되어가고 믿음과 회개가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점점 드러나게 되는 과정이다.
7장 성결의 영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 성령께서는 중생한 자들 가운데 이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역사하신다. 그분의 목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이 되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롬8:29)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는 것(Christiformity): 성화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인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는 것이라고 하며, 이것을 칭의의 맥락에서 본다면, 이것은 중생의 씨가 자라나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외적으로 작용해서 삶의 열매가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지고 그분의 모양대로 태어났으므로, 우리는 존재의 모든 국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고귀한 신분으로부터 떨어졌으므로, 구원과 성화(구원의 외적 열매)는 결과적으로 하나님 형상으로의 회복을 의미한다.
성령의 역할: 성령은 하나님의 형상을 수치스러운 죄악으로 망쳐 버린 자를 변화시켜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덧입도록 만들어 준다. 이것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벧후1:4)가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성화가 우리를 인간 이상의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창조될 때 의도되었던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며, 이 일이 현재에는 원칙상으로, 미래에는 충만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미와 그리고 아직 사이의 긴장).
구약 성경에서의 거룩
‚거룩하게 하다’라는 히브리어 카다스는 구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개인의 소유“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거룩하게 하다라는 말은, 다른 목적과 용도로 사용되던 사람과 사물을 하나님이 다시 취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자신의 소유로 삼으신다는 말이다.
언약과 성화의 관계: 구약에 나타난 언약들은 바로 이러한 성화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피로써 인쳐진 그 언약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가족 관계로 만든다. 아니, 가족 관계를 재창조하고 재건한다. 파괴된 하나님의 가정이 하나 된 가족의 모습과 형상을 드러내도록 재창조되고 회복된다. (언약을 통하여 죄인이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닮아간다. 따라서 언약과 성화는 불가불의 관계가 있다)
이는 출애굽에서 언약이 시행될 때에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가정으로 양자삼으신 사건이었다(롬9:4).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본래적인 관계가 은혜로 말미암아 회복되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점점 더 반영하여서 그분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어야만 한다.
언약 관계의 핵심은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혹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역시 거룩하라“, 즉 „가족적인 닮은꼴의 현상을 나타내어라“ 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표출하는 것: 구약 율법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고, 이것은 각 개인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출하는 것이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 하나님이 이들을 양자 삼으시고, 아들들이 그분의 충만하고도 궁극적인 영광을 표현하는 데까지 나가도록 율법을 주셨는데, 이것은 초기의 걸음마 단계를 포함하고 있다. 옛 언약 아래에서 하나님의 가정은 구체적이고 종합적이며 때로는 강한 금지어들로 표현된 레위적인 율법 조항들에 의해 다스려졌다. 모세의 시대가 그 자체로 영광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사역 그리고 그것에 뒤따라오는 성령의 새로운 사역을 핵심으로 하는 새 언약의 뛰어난 영광과 비교해 볼 때에는 이제 아무런 영광도 갖지 못한다(고후3:7-18)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본받도록 노력해야 한다26).
신약 성경에서의 거룩
신약에서 성화의 동기, 목표, 형식은 비록 그 내용이 좀 더 충분하게 그리고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규정되기는 하지만, 구약성경에서와 동일한 기본 구조를 가지고 있다.
목표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엡4:24; 골3:10). 형식 역시 동일하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자기 계시를 설명하는 데 이어 그분에게 순종하는 삶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명령한다. 그러나 이제 동기, 목표, 형식은 더욱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옛 언약에서 불분명하고 부분적인 형태로 계시되었던 것들이 새 언약에서는 분명히 설명되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분은 언약의 목표(telos)이다.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어 감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새 언약에서 새로운 순종의 구체적인 내용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일은 장차 다가올 결말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롬8:29). 성화는 그것을 생산해 내는 변화이다. 거룩함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주님이다“라는 말씀이 „나는 나의 영으로 너희로 하여금 나를 닮도록 변화시킬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대체되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너희는 하나님의 집에 소속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맏형이 되시며, 그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셔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도록 너희에게 능력을 주실 것이니 그와 같이 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변화의 집행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틀림없이 이렇게 변화된다.
1. 우리를 위하여 성화되신 그리스도 à 성화의 창시자
성화의 기초는 예수님의 대제사장 기도에서 압축적으로 표현된다: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27),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19)
칼빈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분이 전 생애를 통해서 자신을 죄인의 위치에 두려고, 죄인의 이름과 성품 두 가지를 취하셨다고 말한다. 그분은 생애 동안 순종함으로써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행하셨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우리가 행한 죄의 죄책을 담당하셨다. 그분은 이 사역을 성취하기 위해 평생 거룩하게 사셨고 또한 하나님께 헌신하셨다.
신약은 예수님을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성화의 창시자, 곧 선구자(히2:10)로 본다. 무엇보다도 먼저, 완전한 인성과 완전한 거룩함이 그분 안에서 드러났다. 그분은, 자신을 위해서 죽지 않으시고 자신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게 하시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으시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사셨으며, 우리와 연합함으로써 우리의 인성 안에서 그분이 이룩한 성화를 이루신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성화의 창시자이며 근원으로 보며 성령을 그 집행자로 볼 때, 성화의 두 번째 요소에 대해서 바른 근거를 가지게 된다.
2. 그리스도 안에 참여함
성육신이 있기 전까지 성화의 문제는 상대적으로 불분명하고 아직 형성 단계에 있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다양한 율법은, 그것의 목표가 항상 거룩함, 즉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었으나, 이러한 메시지가 신약에서 처럼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이 거룩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고, 이제 은혜와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것이 되었다. 신약은 이것을 설명할 때, 가장 결정적인 구속 사역들 안에서의 그분과의 연합을 특별히 강조한다(갈2:20; 골2:6-3-17; 롬6:1 이하)
로마서 6장은 그리스도와 믿는자들의 연합에서 성령의 역사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는데 가장 적절한 도움을 준다. 바울은 여기에서 성화의 핵심이 죄로부터의 구출과 의로움 가운데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자유라고 설명한다: 이전에 죄와 맺은 관계는 끝이 났다. 그리스도 인은 „죄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롬6:7,18)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지어도 되는가?
5:12-21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행하신 구속 사역의 풍성함을 아담의 죄와 비교함으로써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인상적으로 드러낼 것이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지어도 되는가라는 잘못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여기에 그는 „절대로 그럴 수 없느니라“고 강한 부정을 한다:
·그러한 사상은 복음의 핵심을 파괴한다. 바울은 은혜가 의로움을 통하여 우리를 다스리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은 은총이 지배하는 생활 양식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성령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어 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에 대해 죽었다. 그런데 어떻게 계속해서 죄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는가? 이것은 모순이다.
·우리는 본질이 바뀐 사람이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사람들의 범주에 속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의식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것은 본질이 바뀌지 않았다는 의미다.
·성령이 그들과 그리스도 사이에 창조한 연합의 끈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새롭고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성령의 역사를 받아서 생명의 새로움으로 일으킴을 받고, 계속해서 셩령의 지도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새 생활을 부인하고 옛 사람처럼 계속 죄 안에 머무는 것은 자기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성령의 어떤 사역으로 인해 신자들이 죄에 대해서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났는가?
바울은 세례의 의미를 설명함으로써 신자의 정체성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세례란 개인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언약 공동체 안에 속하였다는 정체성을 공적으로 확인 받는 시점의 표시이다. 그는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며 새로운 권위 아래 들어간다. 그들은 이것으로써 새로운 신분을 갖게 되는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공유하게 된다. 이것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a)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한 죽으심이다(6:10). 죽음은 죄의 삯이다. 그리스도는 그 삯을 지불하셨고, 십자가에서 죄의 속박에 대해 복종하셨다. 그분은 죄의 지배하에 들어가셨고, 그 모든 요구를 짊어지고 죽으셨다. 이제 죄는 더 이상 우리의 대속자인 그리스도에게 요청할 것이 없게 되었다. 모든 삯이 그분의 죽음으로 지불되었다. 죄가 요구하는 바는 이제 소용이 없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죄에 대해 죽으신 그리스도와 죽음을 공유하게 되므로, 우리는 결과적으로 그 죽음 안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의 연합 가운데, 우리 역시 죄의 속박에 대해서 죽었다. 죄의 통치는 끝났다. 우리는 더 이상 그의 신하가 아니다.
b)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말론적이고 영적인 삶으로의 부활이다(롬1:3-4; 고전15:45)
우리는 성령에 의해서 그분과 연합했으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에 죄에 대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죄 가운데 계속 머무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기본적인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은 물 세례에 담긴 성령 세례의 모든 중요한 의미를 말살시키는 것이다.
성령 사역의 중요한 표현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롬6:6-7
이 구절은 성령 사역에 대한 화려한 묘사로서 몇 가지 중요한 표현들을 내포하고 있다.
1) 옛 자아(사람)
옛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전 아담 안에서의 전 존재를 의미한다. 그때 나는 육체 가운데, 죄의 지배하에, 율법의 저주 아래, 죽음의 운명 속에 있었다.
그러나 이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이 일이 대표적으로 그리스도에 의해 십자가 상에서 일어 났으므로, 이러한 그리스도와 함께는 실존적으로 실현되었으며 성령으로 말미암는 그분과의 연합이다.
이러한 연합은 구속사적으로 갈보리에서 일어났고, 그 의미가 실존적으로는 중생, 회개, 믿음 가운데 성령의 의해서 우리 안에서 실현된다. 후자의 실현은 앞서 일어난 사건의 역사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28). 바울의 다른 표현은(갈2:20):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다.
·사는 자는 그가 아니라 그리스도이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의 생명 가운데서, 그를 위해서 자신을 주시고 그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2) 죄의 몸
옛 자아의 죽음으로 인한 직접적인 열매는 죄의 몸이 „무능력하다고 간주된다“는 것이다. 죄가 지배력을 행사하고 우리의 존재를 다스리는 통로인 우리의 육신이 드디어 굴복하게 되었다.
3) 무능력하다고 간주됨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가 죄의 값을 온전히 치루었기 때문에 우리의 몸은 더 이상 죄의 소유물이 아니다. 몸은 더 이상 죄의 수단으로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신자의 몸은 그리스도의 편이므로 신자는 죄에 종노릇 하지 않는다.
4) 죄로부터 자유함
신자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성령의 사역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을 죄로부터 자유롭게 했는가? 이것은 성화에 대한 이해에서 결정적인 질문이다.
먼저 잘못된 이해는:
a) 유사-완전주의(quasi-perfectionism): 죽은 자는 죄에 의해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석의학적으로나 실존적으로 불가능하다. 바울은 신자가 죄에 대하여 면제된 자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b) 법정적 의미: 죽은 자는 죄책으로부터 자유케 되었다.
바울은 죄의 속박으로부터 구출되었다고 했을 뿐, 죄책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다. 바울이 말하는 초점은 죄가 가져오는 죄책이 아니라 죄의 지배 혹은 다스림이다.
믿는 자에 대한 죄의 권리가 종국에 이르렀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의 내재적인 본성이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죄의 현존이 근절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죄와의 관계에서 성령 안에서의 모든 현재 생활을 특징짓는 종말론적인 긴장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의 통치는 이미 종말을 고했지만 아직 그의 실존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성령의 인도 아래서 살고 있다. 그러나 최종적인 승리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이것은 바울이 6:3-10에서 설명한 일련의 선언에 의해서 확정된다.
여기서 바울은 중간기에 사는 생활에 있는 것들을 묘사하는 6:11-14의 명령에 덧붙여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새로운 실재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통치는 끝났고, 당신은 죄에 대해 죽었음을 알아라(6:11)
·죄가 당신을 실존적으로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왜냐하면 실제적으로 그것은 당신에 대해서 아무런 권세가 없기 때문이다(6:12)
·당신의 몸이 죄가 가져다 주는 일시적인 즐거움에 매혹되어 죄의 종 노릇 하는 데 드려지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6:13)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워진“ 자라는 당신의 새로운 신분을 인식하고 의도적으로 자신을 주님께 복종시켜라. 몸의 지체들을 주님의 병기로 드려라(6:13)
은총의 요구와 의무들은 은총의 신적인 사역만큼 광범위하다. 중생 – 믿음 패턴은 애초에 성령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성사시킨 통로로서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지속된다. 복음의 명령(Imperatives)들은 그 설명(Indicatives)들과 동일한 영역에서 작용한다:
·하나님은 인격 전체, 즉 몸과 혼과 영을 거룩하게 만드신다(Indicatives). 따라서 신자들은 인격 전체, 즉 몸과 혼과 영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한다(Imperatives).
·하나님은 믿는 자들 가운데서 그분의 기쁘신 뜻을 성취하시고 행하신다(Indicatives). 그러므로 신자들은 순종과 성별된 생활 가운데, 하나님께 대해서 살고 죄에 대해서는 죽는 가운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의미를 실천해 가야만 한다(Imperatives).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영광과 그리스도인의 윤리의 보장이 그 교리에 결부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죄 가운데 산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 죽지 않은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죽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소유가 아니다. 만일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 안에 살지 않는다.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2)29)
3. 그리스도를 본받음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성화이다. 성화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일을 포함한다. 따라서 복음의 명령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구체화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고전13장에 기술된 거룩한 사랑의 생활 역시 그리스도를 모방하여 닮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그분과 교제하고 그분에게 참여한다는 사실이 이런 모방을 가능하게 한다. 신약의 권고들은 그 모방의 구체적인 형태와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여 준다 à parenesis(paraenese). 권고
4. 육신을 대항하는 영
성령의 인도로 신약의 많은 권고를 실행하며 사는 삶은 저항이나 방해 없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타락에 의해 망가진 세상에서 살고 있으며, 죄된 육신을 입고 살고 있다. 성령 안에서의 생활은, 다른 한편으로는 육체 가운데의, 즉 지난날의 죄에 대한 불가사의하고도 끈질긴 집착으로 점철된 육체적 실존 가운데서의 삶이다. 우리를 통치하던 죄와의 과격한 결별은 이미 일어났으나, 죄와의 최종적인 결별은 – 죄가 아직도 현존하고 있다는 면에서 –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완벽하지않다. 영화의 마지막 단계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영역, 새로운 시대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존재의 질서는 여전히 옛날 것들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긴장, 갈등 그리고 투쟁이 신자의 신분상 주된 특징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싸움은 육체와 영의 싸움이다.
육체는 존재하는 세상 전체이다. 육체는 분열된 세상 질서로서 현시대와 아담과 함께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있기 전에, 육체를 따라서, 육체 안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육체 가운데 살지 않고 성령 안에서 살아간다고 강조하여 말한다. 이 대립은 철저하면서 완전한 것이다. 육체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개념은 생각할 수 없는 모순이다.
그런데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음에도 불구하고 육체는 여전히 성령 안에서의 삶을 위협하는 존재로 남아 있다. 육체는 여전히 „성령에 반대되는 것을 바란다“(갈5:17).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조차도, 육체에 의해서 오랫동안 지배되어 온 신체적이며 정신적인 실존 가운데 사는 것이다.
여기서 제시된 갈등이나 긴장을 생생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바울의 두 가지 선언을 대조시켜 본다:
갈2:20 롬7: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리스도인의 현재 신분에 대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요소가 여기에 있다. 초 개인적(인격적)인 육체- 영의 갈등이 신자들의 존재 안에 깊은 반향을 남기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통하여 마음속에 머물러 계신다. 그러나 죄 역시 그 안에 머물러 있다. 두 개의 동등한 힘이 존재하며 서로를 견제하는 것은 아니다. 은혜가 의로움을 통하여 지배한다! 우리는 육체 안에 있는 자가 아니라 성령 안에 있는 자이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긴장과 갈등은 더욱 치열하고 절실하다.
성화의 과정에는, 결코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될 근본적이고도 깊이 뿌리박한 갈등 상황이 존재한다. 이러한 갈등을 깔보게 되면, 우리는 완전주의로 빠져버리거나 구원에 대한 부적절한 견해(성령의 능력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를 갖도록 만들고 말 것이다.
이 갈등을 다루고 있는 고전적인 장면은 롬7:13-25에 들어 있으며, 곤고한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전체 해석이 달라진다.
연구: „곤고한 사람“은 누구인가?
전통적 견해: 자서전적-실존적 접근 방법. 이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의 삶을 언급하고 있다는 견해로서, 아타나시우스, 어거스틴, 종교개혁자들이 지지하고 있다(이 견해는 „인간 의지의 무능력“이라는 사상에 바탕을 둔다). 그러나 오늘날 심각하게 이 견해는 도전을 받고 있다.
반대 의견: 구속적-역사적 접근 방법. 유대인으로서 율법 아래 있는 자신을 보고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관점에서 묘사하고 있다. 헬라 교부, 아르미니우스 주장. 오늘날 알미니안 주의자들. 이 주장은 1929 큄멜의 „로마서 7장과 바울의 회심“ 이후 현대 신학자들의 압도적 지지를 얻고 있다. 즉 롬7의 „나“는 엄밀하게 말해서 수사학적 비유 속의 인물이라는 말이다. (이 견해는 거듭난 후에 자유 의지가 어느 정도 회복된다는 사상에 바탕을 둔다)
„자서전적-실존적 접근 방법“이 지지받는 이유
1) 수사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바울이 사용하는 바, 강렬하고 직설적인 표현들은 심리적으로 볼 때, „나“라는 인물이 허구적인 비유 속의 인물이라는 견해를 어렵게 만든다. 이 표현들은 매우 사실적이다.
·더욱이 과거 시제로부터(롬7:6-13) 현재 시제로(7:14-25에서 일관성 있게 사용되고 있다) 전환되는 문맥에 나타나는 „나“라고 하는 주격의 연속성은, 극적일 뿐만 아니라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바울이 자신의 편지의 이 지점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상태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 설사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하더라도, 현재 시제로 갑자기 그리고 일관성 있게 전환한 사실은 그런 견해를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
2) 6-8장의 사고 구조를 고려할 때(어거스틴 전통).
·바울은 더 이상 아담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고 있는 중이다.
·6장에서 바울은, 신자는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으나 아직 죄의 현존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지는 못하였음을 논증하였다. 결과적으로 신자는 죄에 대하여 싸우는 운명적인 전투에 임하고 있다. 은혜의 강력한 구출이 성령 안에서의 강력한 싸움을 설정한다.
·7장의 구조도 이와 유사하다:
o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율법에 대해 죽었다(7:4)
o그러므로 율법의 정죄하에 놓여 있지 않고, 이제 율법으로 벗어났다(7:6)
o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표현으로서 아직 죽은 것이 아니다(율법은 펄펄하게 살아 있다).
o문제는 가장 훌륭한 신자라고 할지라도 율법의 기준에서 보면 완전함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육체 안에 있는 한, 그들에게는 율법이 정죄하는 것이 있으며, 그들을 죄의 포로로 만들어 버리려는 요소가 남아 있다.
o따라서 부활이 오기 전까지는 죄와의 투쟁이 있을 뿐 아니라, 율법에 관련해서는 좌절의 감정을 피할 수 없다.
이 (곤고한 자가 신자라는) 관점은, 이 문단에 등장하는 특정한 진술에 담긴 의미를 고려할 때, 더욱 지지를 얻는다.
·바울은 롬7:1-17에서 참된 자아와 자신 속에 거하는 죄를 구분하면서, 스스로를 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면제시키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다.
·삶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인 관점은 신자의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는 „성령 안에서“ 자신의 육체 가운데서의 타락을 인식하는(7:18) 삶의 조망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자신의 즐거움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있다.
·7:25 하반절에서 오직 신자에게 해당되는 이중성이 다시금 나타나 있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문제는 계속해서 모순으로 남아 있다. 바울은 자신을 두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었다(신자에게는 두 가지 상반되는 원칙이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말하는 7:25 상반절에 이어서 나온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두 가지 법, 두 차원, 두 세계: 그러면 이 두 가지 법 사이에 살고 있는 신자의 갈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바울 내부에 존재하는 모순을 이해해야 한다. 이 모순은 이 세상 가운데서 진행되고 있는 우주적 갈등에서 비롯된다. 이는 현시대와 다가올 시대 간의 충돌이 하나님의 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들 두 차원은 바울의 정신-신체적인 존재의 내부를 싸움터로 삼아 각각 동맹 관계를 맺고 있다:
·그의 마음은 성령의 의해서 새롭게 되었다. 그는 육체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다 à 바울이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감. 여기에서는 새로운 원리가 적용됨.
·그러나 그는 죽음의 몸인 그 몸 안에서(갈2:20) 살아가고 있다. 육체의 지배를 받아, 혹은 육체를 따라 살아 간다는 의미에서 육신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물리적인 몸이 불변하는 것처럼 육체의 본성은 불변하는 것이다 à 그가 육신에 있는 한, 육신의 원리의 지배를 받음. 즉 죄를 부추기는 육신은 그대로 살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완전한 순종을 방해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구원은 보장된다. 그러한 깨달음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현재 상황이 야기시키는 긴장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견뎌 낼 수 있다.
반론: 그러나 다음과 같은 표현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성령 안에서의 생활에 대해 묘사한 것들과 조화시킬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성령이 임하기 전의 사울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나는 새 언약적 믿음의 관점에서 본 옛 언약의 사람이다.
·나는 죄 아래서 노예처럼 팔려갔다(7:14).
·나는 죄의 법 아래 사로잡혔다(7:23)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7:24)
·나는 본성상 죄의 법을 섬기는 종이다(7:25)
그러나 이러한 진술들은 단순히 바울이 자기 존재 내부의 내재적인 모순을 의식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육체의 지배하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을 때에도 지속해서 그 안에 죄가 거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과 죄의 동시적인 내재가 섬뜩한 모순을 야기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그 사실을 심지어 모순되는 용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사실 표현!). 그는 비록 현재 악한 시대로부터 구원을 받았지만, 그는 아직 죄의 영향이 미치는 장소(육신)를 떠난 것이 아니다.
주의할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구절들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한 신약 성경에 나오는 여러 관점의 총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특별한 하나의 관점에서, 즉 하나님의 거룩하고도 영적인 법(7:14,16)에 비추어서 자신을 조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빛 가운데서 볼 때, 비록 신자라 하더라도 그 안에 죄가 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항하는 추악한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죄는 아직도 머물러 있고, 반항아로서의 죄의 본성과 노예화시키는 근성은 변하지 않은 채 있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 죽은 바울이 아직 그것에서 완전히 구출되지는 않은 것처럼, 그는 성령 안에 있는 자로서 자신이 율법의 정죄 아래 죽었으나 아직 그 요구에 따라서 볼 때에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긍정적인 점: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죄와 육체에 의해서 마비된 자가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양자의 영의 인도하심과 내주하심이라는 빛 가운데서 육체의 잘못된 행실을 죽여야 할(롬8:13이하; 골3:4)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말은 성립이 안 된다..
이 갈등에서 양측의 세력이 동등하지 않다. 은혜가 의로움을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 안에서 다스리신다. 이 문제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내적인 측면에서 육신과 성령의 갈등은 실재한다. 그리스도인은 거룩함에서 성장해 나가면서 육신이 굴복하는 징후들을 일생에 걸쳐 경험하게 된다. 죄어 빠져 있던 지난날과의 결별이 일어날 때, 그것과의 갈등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되는 것이다.
2.이것은 영속적인 실재이다. 그러나 신자가 그 강도 면에서 항상 동일한 수준으로 끊임없이 의식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은 아니다. 롬7:14-25에 나타난 전망은, 비록 이것이 본질적인 전망(perspective)이지만, 신자가 자기 자신을 조망하는 유일한 전망은 아니다.
3.이 갈등이 해결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비록 성령의 내주하심 가운데서 구원의 보장을 이미 소유하고 있지만, 현재의 신자는 죽음의 몸으로부터의 구원을 부르짖고 있다. 하나님의 성화에서 놀라운 점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 내주하는 성령의 임재가 갈등이 일어나는 근원적인 원인이라는 점이다. 몸의 구속, 곧 양자됨을 간절히 기다리는 가운데 내적으로 탄식하는 자는 성령의 첫 열매들을 가진 자이다(롬8:2330))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와 함께 부활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육신을 죽이고 영 가운데 살라는 명령을 수행하면서 살아야 한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일이 계속되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신약 복음(indicatives)의 약속 아래서, 복음적 명령(imperatives)을 끊임없이 수행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는 이러한 투쟁 가운데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겸손해지며, 또한 성령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면서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연합되어나간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육신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덧입는 방법을 터득해 나갈 것이다31).
5. 성령과 율법 (율법과 복음)
롬7장에서 율법 아래서 신음하는 „곤고한 나“와 8장의 „정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말이 등장하면서, 율법에 대한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혹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라는 매우 중요한 질문이 발생한다: 복음은 율법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새 언약은 옛 언약과, 그리고 오순절과 시내산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 구약 율법은 폐기 되었는가?
우리는 이미 오순절과 시내산 사이에 대립적인 병행 관계가 있음을 고찰한 바 있다.
·시내산에서 모세는 거룩한 하나님 존전에 올라갔으며, 돌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율법을 백성에게로 가지고 왔다.
·오순절에, 하나님의 영이 내려왔으며, 성령께서 사람들의 심령에 법을 쓰셨다.
베드로는 이런 일련의 사건에 대한 해석을 내리는데, 그는 시내산적 경영과 오순절적인 경영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청중에게 이것이 요엘2:28-30의 성취라고 지적하고 있다. 율법 아래 존재했던 지난날의 차별이 사라졌고, 성령을 통하여 새로운 경영이 시작되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시내산의 시대가 끝나는 상징으로 보인다. 신약에는 이러한 전제를 확정 짓는 내용들이 많이 나타나 있다. 예컨대 요한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왔으며,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왔다(요1:17). 독립된 문맥에서 읽게 되면 이 구절은 분명히 율법의 폐기를 시사하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바울도 율법의 폐기를 가르쳤다는 혐의를 받아 고발당하였다(행21:28). 그의 가르침 가운데 많은 부분이 얼핏 보면 이 점을 가르치는 것 같아 보인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롬3:28).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롬6:14-15).
·성령의 법이 죄와 죽음의 법 아래 있는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었다(롬8:2)
·… (이외에도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신약을 좀 더 자세히 읽어보면 성령과 율법의 관계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한 예로, „폐기“라는 요소와 함께 연속성이라는 요소가 강조되고 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마5:17-20). 사실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본질인데(롬13:8-10), 이 율법은 선하고 거룩하며 신령하다.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의 표장은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성령 안에서 행하는 자에게 성취되는 것이다(롬8:3-4)
율법의 구분?
이러한 외견상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개혁주의 신학에서 모세 율법의 세 가지 차원32)을 구분하였다: 시민법적인 요소, 제사법적인 요소 그리고 도덕법적 요소이다.
모세 율법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에 첨가된 것으로서 한시적인 경영을 위한 법으로 의도된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님과 선택받은 백성의 언약적인 관계에 본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그분이 계획하신 것들을 이루기 위한 도구였다. 즉 1) 약속하신 메시아가 그들 가운데서 나오실 때까지 구별된 민족을 다스리기 위해, 2) 하나님의 도덕적 요구들을 어긴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방법을 규정함으로써 돕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율법은 다음의 세 가지로 구분된다:
1.도덕적인 요구들(십계명)을 통해 구속주가 필요함을 계시함.
2.제사법적인 요구를 통해 구속의 희망을 주고,
3.시민법적 요구를 통해 구속주가 나오게 되는 민족을 하나님을 위해 보전해 주었다.
율법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모세 율법이 근본적으로 인간 삶에 대한 영구한 하나님의 법을 해석하고 적용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세 율법은 (영구한 가치를 가지는 동시에 또한) 한시적으로 유용한 것이다. 십계명도 하나님의 영구한 뜻을 당시의 상황에서 재생산해 낸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알아야지만 계명들의 본래의 의미, 즉 인류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본래 계획을 깨달을 수 있다.
율법에 대한 이러한 고전적인 구분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바울도 십계명의 도덕법을 다른 계명과 구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율법이 주어질 때 분명했던 점은, 모세의 통치 시대에 통치의 근본 원리로 다같이 기능했던 율법이 특정한 적용점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적용점도 바뀌게 되자 시민법과 제사법은 무용하게 되었고, 도덕적 차원33) 은 영원하며 따라서 새 언약의 시대에도 적용 가능하도록 남아 있다.
율법에 대해 또 한가지 알아야 할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율법의 지위가 새로운 언약 아래 변했다는 것이다. 율법이 새로운 방식으로 내면화되리라는 것이 옛 언약 아래 하나의 큰 소망으로 주어졌다.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은 율법의 명령들을 성취하실 것이다. 바울은 폐기가 아니라 완성의 원리를 강조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신6:6)라는 옛 언약의 설명이 하나님의 백성 앞에 규범으로 세워졌다. 그러나 예례미아가 강조한 것처럼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렘17:1,9). 율법이 아니라 죄가 마음에 새겨졌으며, 이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약속이 필요했다.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렘31:33-34)
옛 언약의 배경 내에서 조망한 새 언약의 경험에 대한 기대는, 새로운 시대에 이르러서는 명령된 것, 즉 „마음속에 있는 율법“이 성취되리라는 점이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와 사역 안에 있는 특별한 요소로 보인다. 마음에 있는 율법과 성령의 내주하심은 하나뿐인 새 언약의 실재에서 드러나는 두 측면이다. 이것은 바울이 말한바, 다소 수수께끼 같은 선언의 핵심이 된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3:31).
율법은 참으로 모세로 인해서 온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것이며 성령의 내주하심에 의해서만 유효하게 된다. 따라서 새로운 언약의 신자들은 모세의 경영하에 있던 신자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도덕법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우리 대신에 그 불법의 형벌을 당하시고 그 법령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 법을 받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의 생활 속에서 그 법들을 성취하게 하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정죄란 없다. 성령의 사역은 율법의 정죄가 아니라 그것의 목표를 이루는 것이다. 이제 율법 아래 있지 않은 신자는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에게 내적인 법으로 연결된다(고전9:21).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에게 연합됨으로써 거룩한 율법은 신자의 것이 되는 것이다.
6. 나라(Kingdom)를 거스르는 나라(kingdom)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종말론적 분위기로 인도한다. 그들은 천국의 영역에서 살아간다(엡1:3;2:6). 그러나 이곳은 악한 날을 직접 대면하는 곳으로서 종말론적 갈등의 영역이기도 하다(엡6:12-13). 성령 안에서의 삶은 마지막 날의 상황에서 살아가는 것이요, 그 특징은 고통하는 때로 표현된다(딤후3:1). 성령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하여 시작된 다양한 차원의 갈등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우리는 육신과 성령 사이의 전쟁 외에 또 다른 차원의 갈등을 접하게 된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출발은 종말의 시작이자 마지막 날의 전쟁의 출현을 표징하고 있다.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들이 예수님께,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8:29)라고 묻는다.
광야에서 그분을 유혹하던 사단을 그리스도가 물리치신 사건은 마지막 날의 승리가 미리 침투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확정되고 보장되었다.
그러나 마지막은 아직 오지 않았다. 중간기(초림과 재림 사이)에 사는 교회는 이 세상과 다가올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 속에서 살 뿐만 아니라, 육체와 영의 갈등 속에서 살며, 하나님의 나라가 어두움의 세력과 대적하여 발전되어 나가는 전쟁 지역 내에서 살고 있기도 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는 지옥의 문들과 마주 서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굳게 머물러 있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죄의 지배의 종말에 관한, 한 가지 중요한 병행점이 있다. 인간 안에서의 죄의 지배력은, 아직 그 현존이 완전히 말살당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효화되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사단을 정복하시고, 무장을 해제시키셨다(골2:15; 엡2:2). 교회와 신자들이 사단의 세력들과 충돌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자유의 몸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해졌다. 이 충돌은 신자 속에 있는 죄의 지속적인 현존 때문에 더욱 격렬해진다.
그러므로 육체-영의 갈등과 나라-나라의 갈등이 일직선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사단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이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다“(요14:30)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죄가 머물고 있는 곳에 어둠의 나라와의 접촉점이 있다. 이런 „착륙 공간“은 죄를 지으려는 우리의 지속적인 성향 속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 사실을 무시하면 화를 자초하게 된다.
사단은 우리를 시험하는 자요, 우리를 대항하여 (하나님께) 고소하는 자요, 우리를 삼키려고 찾는 자이다(벧전5:8). 이런 이유로 성화의 이러한 요소에서 핵심적인 명령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막14:38)는 것이다. 스스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시험에 넘어진 길에 관련된 사람은, 그를 돕다가 똑같은 죄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갈6:1)
7. ‚겉 사람’의 죽음과 속 사람의 소생
성령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주어진 종말론적인 긴장과 갈등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연장선상에서 또 다른 차원을 창출한다. 죄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은 바울이 옛 겉 사람의 죽음과 속 사람의 소생을 수반한다(고후4:1634)).
바울은 이 점을 의도적인 선언 가운데 암시한 바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0-11)
부활-죽음 그리고 죽음-부활이라는 교차대구법의 구조에서 바울은, 성령에 의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연합되고, 따라서 새로운 삶을 사는 자로서, 그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고, 이미 시행된 그리스도의 죽음을 함께 나눈다고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신자의 생활 방식에는 외적으로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도 그리스도의 기본적인 생활 방식 즉 죽으심과 부활을 따라가는 과정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몸의 부활 시에 정점에 도달하게 되며, 그때에 그리스도의 몸의 영광과 같이 변형되고 바뀔 것이다(빌3:11,21)
칼빈은 성령의 사역이 지닌 이런 측면을 언급하면서, 성령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뿐 아니라 그분과의 교통을 성사시키는데, 이는 모두 죽임(mortificatio)과 소생(vivificatio)으로 구성되는 이중적 혹은 양면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내적으로 성화는 죄에 대한 죽음 혹은 거부와 새로운 생명 안에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다. 외적으로 성화는 온갖 종류의 고통과 핍박 가운데 십자가를 짊어지는 죽임, 그리고 궁극적으로 부활의 소생을 포함한다35).
이런 의미에서 데살로니가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엄청난 박해를 경험함으로써 다른 신자들에게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살전1:7). 그들의 경우 그리스도의 고난 가운데 그분과 연합한 모델로서 다른 이들이 볼 수 있도록 분명히 전시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죽임과 생명의 소생이라는 이중적인 측면에 담긴 하나님의 목적이기도 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성령에 의하여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그분의 백성을 인도한다(롬8:29).
바울은 이 원리의 세부 사항을 고린도후서의 중요한 세 구절에서 자세히 풀어놓았다.
1) 고후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그리스도)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고린도에서 „슈퍼 사도들“(거짓 교사들)은 바울의 „연약성“을 경멸했다: „그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고후10:10). 그들은 바울이 별로 인상적이지 못하다고 말했다(고후10:10). 바울은 이에 대해 자신을 그리스도와 유비시키면서, 그분도 연약하셨음을 지적함으로써 반박한다. 하나님의 권능이 반드시 연약함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그분의 구원하시는 권능은 십자가의 연약성을 통하여 표현되었다(고전1:25이하).
신자는 성령에 의해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그리스도에게 묶였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이 넘칠 뿐 아니라 동시에 그분 안에서 약하다는 것이다. 그는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힘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 약함은 자신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약함은, 연약한 가운데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말미암는 직접적인 결과요 열매이다.
따라서 이런 것이 성화의 길이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에 이르기까지 회복이 완성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2) 고후 4:7-12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임(mortificatio36))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4:10-12)
여기에는 죽음과 생명의 대조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핵심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연합된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삶의 목적이었으며, 따라서 그 삶 전체의 결정적인 패턴이었듯이, 이것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성령의 사역의 목적이며 그러한 삶의 결정적인 패턴이 된다. 성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 „죽음을 통한 생명“의 삶을 살도록 성령께서 전인(全人)에게 역사하는 것이다.
성화의 견지에서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바는, 우리가 죽음 곧 외적인 죽음에 넘겨진 것은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 즉 우리 안에 그분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 선행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 모든 것의 결론으로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죽음(즉, 그리스도의 죽으심 속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결과)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노라“. 밀알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땅에 떨어져서 죽어야만 한다(요12:24). 그 결과 생명이 다른 사람 속에서 역사하는데, 이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이다.
3) 고후1:5
바울은 이러한 고난에 대해서 이미 고후1:5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거기서 그는 성령의 기름 부음의 결과로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의 삶 속에서 흘러 넘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1:5)
우리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과는 달라서 대속이나 속죄의 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만들어 준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고난 안에 참여하는 우리의 교제에서 우리의 부족한 점이 점차적으로 완전하게 되어 가는 것이다(참고. 골1:24)
이 원리는 단지 롬8:29에 나오는 바울의 진술을 풀이해 본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의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것이다. 우리를 그와 닮은 가정의 일원으로 재생산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아들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거룩하게 할 때 사용했던 바로 그방식을 통해 역사 하신다. 주님이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죽는 것과 다시 살아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바로 그 패턴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도 유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 역시 필수적이다.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가장 기본적인 차원에서 성령이 성화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한 기본 계획이다. 그분의 죽으심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함께 심어지고, 그 안에서 함께 성장하듯이(롬6:5), 믿는 자들은 그분의 부활 가운데도 이와 같이 참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모두 참되며, 종말의 날에 최종적으로 충만하게 실재로 드러날 것이다.
고전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à 인간을 최종적으로는 부활을 통해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을 수 있도록 회복하심.
prevenient grace. 웨슬리는 이 용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여 독특한 교리를 만들었다. 그에 따르면, 이 선행적 은총은 누구나 받는다고 한다. 따라서 누구든지 자신의 결단에 따라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한다.
롬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엡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골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정리자 주: 복음주의자들은 결신자를 강조한다. 빌리 그래함이 설교를 한 후에 결신자들은 강단 앞으로 초대한다. 이것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본인의 결단과 중생은 전혀 다른 것이다. 사람은 비췸(Illumination, Erleuchtung)을 얻고 결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에서도 비췸을 통해 결단하고 순교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이러한 오류로 인해 교회는 수없이 많은 가짜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냈으며, 그들은 교회성장(가짜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ὑμεῖς οἱ ἀκολουθήσαντές μοι ἐν τῇ παλιγγενεσίᾳ.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롬6:20-21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
정리자 주: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하기 위해 연약한 그들의 수준에 최대한 맞춘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율법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리자 주: 내가 보기에는 퍼거슨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애매하게 해석하는 것 같다. 요한복음의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한 구속 사역을 수행하시기 위해(„저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시키신다(„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바로 밑에서 칼빈은 이 구절을 올바르게 해석하였다. 또한 퍼거슨은 히2:11을 „예수님이 스스로를 성화시키셨다“고 해석하였는데, NA27에 따르면,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하는 사본은 없다. 본문은: „(죄인을) 거룩하게 하는 자와 거룩하게 되는 자들“이다. 즉 본문에 „거룩하게 하다“의 목적어는 없는데, 그리스도 자신을 거룩하다의 목적어로 취하는 것보다 죄인을 목적어로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성경에 유일하게 나타나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성화시킨다“는 말을 „구속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놓는“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그렇다면 퍼거슨이 계속하여 예수님을 창시자(아르케고스)라고 한 것에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퍼거슨은 지금 율법의 세 가지 차원을 이야기하지만, 그는 실상은 세 가지 종류를 이야기하고 있다. 율법의 세 가지 차원(기능, 용도)이란, 정치적(시민적) 용도, 정죄적 용도, 제3 용도를 말한다.
이곳에서 퍼거슨이 혼동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번역의 오류인지 모르겠다. 시민법, 제사법, 도덕법은 율법의 종류이지, 율법의 차원은 아니다. 차원이란 말은 한 가지 법에 세 가지 기능이 있다는 의미에서 사용된다. 예를 들어서 „도둑질하지 마라“라는 한 도덕법은, 정치적, 정죄적, 제3 용도의 세 가지 차원을 가지고 있다.
불가타에 모르티피카티오로 번역됨. 이 단어는 앞에서 칼빈이 사용한 죽임(살인)이라는 말이다. 예수의 죽임이란 예수님의 고난을 의미한다. 즉 항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었고, 또한 그분은 종국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신자는 이러한 예수님의 죽임을 항상 몸에 감싸듯이 고난 속에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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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든 피 교수는 1966년에 남가주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Wheaton 대학, 고든 콘월 신학대학원에서 강의했으며 현재는 캐나다 소재 리젠트 대학의 신약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가 집필한 고린도전서 주석(NICNT, Eedmans)은 가장 유명한 고린도전서 주석으로 정평이 나있다. 또한 그는 최근에 출판된 [성경의 성령에 귀기울임](Listening th the Spirit in the Text, Eerdmans, 2002)에서 “바울이 말하는 방언”(Toward a Pauline Theology Glossolalia)에서 방언의 연속성과 유익성을 변호하고 있다. 다음은 [바울과 성령과 하나님의 백성]의 출판에 즈음하여 성령의 사역에 대한 고든 피 박사의 주장을 요약한 것이다.
어떤 형태의 예배가 과연 성경적인가? 성령의 새 술에 취하여 “우. . .”소리를 내면서 예배를 드리는 오순절식인가, 아니면 질서정연하고 점잖게 예배를 드리는 보수적인 방법인가?
이러한 논란은 최근 관심의 표적이 된 '토론토 블레싱'을 한편에서는 지지하고 다른 편에서는 부인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어느 것이 정답인가? 이에 대해 고든 피는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즉 우리는 성령께서 어떻게 나타나시는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교회가 어떻게 성령의 사역을 대변하며, 어떻게 증거해야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고든 피는 은사주의자들이나 비은사주의자들이나 모두 성령의 오심의 중요한 측면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에, 그 결과 성령을 소멸하고 성령을 자신의 취향에 맞게 길들여서 궁극적으로는 교회의 사명을 비효과적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교회에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들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중요한 측면을 간과하고 있으므로 성령 안에서의 신자들의 삶을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다음은 그의 견해를 요약한 것이다.
수십 년에 걸쳐 사도 바울에 대해 연구하고, 강의하고, 주석을 집필한 바에 의하면 나는 바울이 말하는 교회와 오늘날의 교회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허다한 사람들이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중요한 점을 간과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성령 충만한 삶의 가장 근본적인 측면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면들도 상태가 나빠졌다.
성령의 오심의 중요한 측면은 (지역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내세의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천국이 현세에 침노했다는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천국의 침노’를 구체화 하는 기관이다. 이 말은 교회가 너무나 천국 중심이 되어 지상의 일들을 무시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성령이 침노하여 교회는 내세의 능력으로 무장되고, 교회의 구속이 인쳐지고 보증되었으며, 하나님의 속성이 사람들의 마음을 점유하였고,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바로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임해있기 때문에, 교회는 이제 천국의 백성처럼 살아야 한다. 의롭게 살아야 하는 것은 “의무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삶을 바로 지금 이 땅에서 사는 것”이다.
신자는 말세를 만난 사람들이다(고전 10:11).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두 시대 사이에 끼여 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을 통해 이 땅에 임했지만 아직 완전히 임한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 구원 및 교회에 대해 현재형과 미래형을 섞어서 말한다. 우리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엡 2:8), 지금 구원을 받아가고 있으며(고전 1:8), 미래에 완전한 구원을 받을 것이다(롬 5:9).
이처럼 교회는 천국과 타락한 지상의 두 가지 갈등 속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문제가 생긴다. 바로 고린도 교회에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났다. 이러한 갈등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천국 쪽을 지나치게 강조하면?많은 경우 잘못된 동기로 인해?모든 것을 너무 빨리 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들은 부도덕하고(고전 5장),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이었다(고전 7장).
그러나 지상 쪽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신자들의 삶은 천국의 삶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삶을 살게 된다. 오늘날 대부분이 교회가 지상 쪽에 지나치게 치중해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상의 법정에 호소했다(고전 6장).
천국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세상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한 것이다.
오늘날 은사주의자든 비은사주의자든 내세의 능력에 의해 지배 받는 천국의 삶을 사는 신자들이 드물다. 오늘날의 신자들은 현대 사회의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신자들은 천국의 삶이 아니라 지상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고든 피 교수는 오늘날의 교회들이 이렇게 타락하게 된 근본적이 원인은 성령의 사역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성령의 오심의 핵심은 무엇인가?
첫째, 성령의 오심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성령이 오실 것을 약속하셨고 이 약속이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해 성취되었다. 성막이나 성전에 임하시던 성령이 이제는 교회나 신자들 속에 임하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자신이 어떤 신분에 있는지를 망각한 것 같다. 이저에 하나님의 임재가 성전에 임했을 때 제사장들은 서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할 정도였다(왕상 8;10).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뵈었을 때 얼굴을 감추어야 했다(출 3:6). 이전에는 예배자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얼굴을 가려야 할 정도로 두렵게 하고 놀랍게 하시는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을 때 두렵게 하고 놀랍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다. 죄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외경심과 함께 자신의 비천한 상태를 절감해야 하며 동시에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으로 넘쳐야 한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은 기쁨은 있지만 외경심이 부족하고 비은사주의자들은 외경심은 있지만 기쁨이 없다. 천국과 지상의 삶을 사는 신자들은 외경심과 기쁨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둘째, 성령을 통해 하나님은 통상적이고 비통상적인 두 가지 방법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능력을 주신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은 신자들에게 능력으로 임하신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은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병 고치는 능력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하는 능력을 주신다(고전 12장). 또한 동일한 성령의 능력으로 신자들은 역경과 환난을 이기는 능력을 얻는다(고전 1:11). 즉 신자들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빌 2장), 동시에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갈 5장). 신약이 말하는 신자들은 성령으로 인해 너무나 기쁘고 행복하며, 또한 구원을 확신하기 때문에 사자 굴에 던져져도 눈도 깜짝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성령은 단지 추상적인 어떤 능력이나 영향력이 아니다. 성령은 능력을 받은 교회의 신자들을 통해 통상적이고 비통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임재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통상적인 사역은 물론 기사와 이적 같은 하나님의 비통상적인 사역도 인정하는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이 옳다. 일부 교회에서 하나님께서는 단지 성경을 통해서만 말씀하신다는 생각에 너무나 집착되어 있어서 하나님께서 체험적으로 사역하시고 말씀하신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 버렸다.
셋째, 성령은 많은 것을 하나로 만드신다. 그리스도 안의 구원은 개인적으로 받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백성을 만드시는데 있다. 우리 모두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저 12;13)는 말은 사람들이 어떤 방법으로 구원을 받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은 천차만별로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도 만드는데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이 말하는 교회는 상호의존적인 것이다. 성전, 가족, 몸이란 말이 그것을 증거한다. 성전이란 말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이며 구원 받은 개개인이 이룬 공동체이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집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가족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한다. 신자들 모두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다(롬 8;15-16). 바울이 말하는 몸의 이미지는 하나이지만 삼위이신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반영한다. 몸은 한 성령으로 하나가 되었지만 다양한 지체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들은 서로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교회로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성령의 사역을 오해하고 있다.
넷째, 성령의 사역은 은사와 열매 두 가지를 포함한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성품(열매)과 사역(은사)으로 재창조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 모두가 필요하다. 바울이 사용하는 가장 보편적인 단어는 ‘성도’이다. 성도란 거룩하게 된 사람을 말하며, 거룩이란 일부 슈퍼 스타가 아니라 모든 신자들을 위한 거룩한 삶을 말한다. 갈라디아서 5장이 말하는 열매는 성령 안에서 공동체의 삶을 사는 신자들의 대표적인 성품들이지 성품 전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열매는 단체 속에서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지 개인의 경건한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령의 열매를 개인화시키는 그 자체가 문제이다. 상대방이 없이 어떻게 혼자 사랑하고 오래 참을 수 있는가. 한편, 은사는 보통 공중의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기적행하는 은사(고전 12장)는 물론 생활의 은사(롬 12장)를 포함한다. 기적 행하는 은사들을 지나치게 방치하면 균형을 잃을까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은사가 열매의 통제를 받는다면 개인적인 황홀 체험 보다는 성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쪽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문제가 생긴다. 은사주의자들은 지나치게 은사를 강조하고 비은사주의자들은 지나치게 열매를 강조하지만 어느 하나 없이 다른 하나를 완전하게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섯째, 바울이 말하는 교회와 오늘날의 교회는 차이점이 많다. 먼저 건강한 교회는 거대 교회라는 (잘못된) 생각이다. 둘째 여러 면에서 통제되고 형식화되어 있는 오늘날의 교회의 예배를 바울을 도대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셋째 비슷한 사람, 언어, 종족만으로 모여 있는 교회를 바울은 도대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구경꾼이 야구장에 가듯이 교회에 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예배는 행사 위주로 되어 있다. 우리는 유급 성가대나 교역자들에게 예배를 맡기고 있다. 예배의 형식을 중요시한다고 해서 예배가 메마르거나 형식화, 화석화 될 필요는 없다. 예전적인 형식을 통해서도 기쁨이 흘러 넘칠 수 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예배 시에 성령의 자유로운 운행을 억제하고 소수가 주관하는 행사와 예식에 맡기고 있다. 그 결과 신자들의 삶은 메마르고 성령 하나님은 입술로만 섬기고 있다. 신자들은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성령이 당신을 가졌는가, 성령이 당신을 통제하는가, 당신은 성령으로 충만해 있는가 이다. 과연 오늘날의 교회가 천국의 삶을 살고 있는가, 신자들이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를 계속 추구하고 사모하는가.
모세가 시내 산에서 기도한 내용을 바울은 마음 속에 담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인 성령이 우리들과 함께 하지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의 백성들을 구분할 방도가 어디 있는가.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성령을 계속 구하고 찾고 두르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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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가 기뻐해야 하고 하나님을찬양할 이유가 되는 연합의 결과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럽고 끝없는 주제입니까? 이것이 언제나 신자들을 향한 설교의 주제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자와 주님의 연합의 결과에 대한 설교를 들어 보기가 얼마나 힘든지요.
이 주제는 두 가지 주요 항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즉, 여러분은 이 위대한 주제에 대해 객관적으로 또는 주관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유사한 용어들을 말씀드겠습니다. 객관적이라는 말 옆에는 ´언약적´이라는 말을 주관적이라는 말 옆에는 ´영적´이라는 말을 놓아 보십시오. 지금은 몇 가지 제목만 제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성화 교리를 다룰 때 그 중 일부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필연적으로 어떤 의미기 있는 것인지 조금만 알아보도록 합시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언약적이고 객관적인 면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저는 심지어 계속해서 객관적인 면에 대한 이야기만 하고 싶은 생각까지 듭니다. 언제나 주관적인 것보다 객관적인 것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관적인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경험의 느낌을 원하며 그런 느낌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 근거들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 결과 감정이 사라지면 우리도 불행해지게 되는데 이것은 모두 우리가 객관적인 진리에 근거해서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연합으로 인해 우리의 경험의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는 몇 가지 일이 생겨나고 이 일들은 우리의 지위 상태 신분에 영향을 줍니다.
언약이라는 말은 로마서 5장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용어입니다 본질상 우리 모두는 아담에게 언약적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만드셨습니다. 그는 언약의 머리입니다.
미합중국의 예를 들어 봅시다 그 나라는 여러 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주는 자신들의 주 의회-어떤 의미에서는 주 정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더하여 이 모든 주를 포함하는 연방 정부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모든 주는 연방적 연합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쳐 주는 바는 모든 인류가 아담과 이와 같은 언약적 연합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이미 알고 있듯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아담에게 언약적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법적인 의미에서 그가 행한 것은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아담이 범죄했기에 우리도 범죄했습니다. 그가 타락했기에 우리도 타락했습니다 이것이 원죄와 원죄책의 교리입니다.
그러나 이제 다른 한 편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똑같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가르침 사이의 대응관계를 인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6장 6절을 주관적으로 혹은 경험적 의미에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객관적 의미입니다.
내가 언약적으로 그리스도와 결합했기 때문에 그가 못박혔을 때 나도 못박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을 진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여기십니다.
로마서 6장 5절에는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6장 8절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롬6:4)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6장 11절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이 모든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모두에 해당됩니다. 이 언약적 관계로 인해 나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믿어야 합니다. 아담이 죄를 범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나도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엇고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며 그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에베소서 2장 6절을 보십시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바울은 지금 우리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여기서 말하는 바는 비록 우리가 여전히 땅 위에 있지만 언약적으로 그리고 이 관계의 견지에서 볼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재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골2:10)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 역시 분명히 언약적 진술 법적 혹은 법정적 진술입니다. 이 모든 일이 당황스럽게 여겨지는 분이 아무도 없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지금 여러분이 들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들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저는 여러분과 나 자신에 대한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용어들로 인해 주저앉지 마십시오. 이것들은 성경의 진술입니다. 물론 이 용어들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가치 있는 것은 모두 어려운 법입니다. 어렵다고 해서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자신이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확인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앉아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여집니다. 다시 한 번 들어 보십시오 바울은 고리도전서 1장 3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이 일은 이미 일어났습니다. 물론 이 일이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면에서 다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적으로 구속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칭의에서 바로 영화로 넘어가 부르심 받은 사람들은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합은 파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합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습니다. 이 가르침이 정말로 말해 주고 있는 사실은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었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우리의 연합으로 인해 나의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으로 강조해야 할 사항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인해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연합은 인치심을 통해 발생하지만 둘은 분리되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결합되었기 때문에 성령으로 인 치심을 받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에 나는 그분이 한량없이 받으신 성령을 받습니다.
이 연합의 그 다음 결과는 우리가 양자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별도의 교리이며 나중에 다룰 것입니다. 앞으로 보겠지만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양자 됨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양자 됨은 연합의 결과 가운데 하나입니다.
마지막 사항입니다. 바울이 또다시 로마서 8장에서 논증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가 상속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공동 상속자들임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영광을 받는 공동 상속자들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들이 우리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연합으로 인한 언약적이고 객관적인 결과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주관적이고 영적인 결과들 중 중대한 것들을 열거해 보겠습니다.
연합은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나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교제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17장과 요한일서에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위에 은혜러라" 이것은 또한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나와 있듯이 우리가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이기고 합니다. 얼마나 엄청난 개념압나까! 그리스도께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됩니다.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롬8:29)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의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수건을 벗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정지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물론 그리스도의 인성을 닮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 이 세상에 살고 계셨을 때의 모습처럼 변화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처럼 됩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 중 맏아들입니다.
그 결과 우리도 당연히 열매를 맺게 되고 주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5장의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마지막 사항은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그리고 심지어 그의 죽으심까지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얼마나 위대한 사상입니까! 우리는 이 일을 성취하고 곰곰히 생각하며 이 일에 대해 기도해야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감히 이 말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신자와 주님과의 연합의 교리에 대해 이보다 더 훌륭한 진술이 없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가운데 있는 자신의 고난을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고난과 역경의 남은 것을 채우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이것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신비적 연합의 결과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이와 같이 신비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중세 시대의 어떤 사람들은 주님과 주님이 그들을 위해 하신 일을 너무 깊이 묵상한 나머지 그들의 손에 못자국, 즉 성혼이 나타나기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잘 모르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와 주님 간의 이 연합에 대한 진리를 더 깊이 깨달을수록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더 알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은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자"(사53:3)이셨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보시고 마음이 상하셨으며 슬픔과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 및 연합을 가장 민감하게 측정핳 수 있는 기준은 우리가 이 고통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구원받기를 갈망하는 영혼들´에 대해 상투적인 말을 늘어 놓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것입니다. 그런 말은 순전히 육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고통을 안다는 것은 언제나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죄와 그들의 상실된 상태 때문에 정말로 고통을 받습니다. 우리와 주님과의 연합 때문에 우리는 주님처럼 영혼의 탄식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그 깊은 관심과 고통 영혼의 고뇌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복되신 주님이자 구세주와 우리가 연합한 것의 주관적 결과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 성령을 통해 우리가 신자와 주님 간의 연합이라는 이 놀라운 교리에 눈을 뜨게 하소서 우리가 힘을 다해 이 연합을 상세히 연구하고 자신에게 적용하며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나는 그의 죽으심을 닮도록 심어졌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장사되었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았습니다. 그것이 나의 상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와 연합했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입니다."라고 말하게 하소서.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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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7가지 이유
남을 판단하지 말라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의 티를 빼내어 주겠다.' 하겠느냐?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7장 1절에서 5절)
마태복음 7장 1절에서 5절까지는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교훈이 담겨있습니다.
여기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은 단순히 평가를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말의 뉘앙스로는 ‘심판 혹은 정죄’를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는 그의 산상수훈 설교집인
‘은혜의 각성(Awakening Grace;조이선교회역간)’에서
비판하지 말아야 할 일곱 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습니다.
1. 우리는 모든 사실을 다 알지는 못한다
정당한 비판을 위해서는 모든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늘 제한된 사실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제한된 사실만 알고 있다면, 우리는 비판은 늘 불완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비판은 사실에 기초해야 하는데, 제한된 사실로 어떻게 올바른 비판을 할 수 있겠습니까?
2. 우리는 그 동기를 다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누군가를 비판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동기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나 말, 표정을 통해서 그 동기를 100%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동기란 내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기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조건 비판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동기를 다 이해할 수 없는 만큼 우리는 비판을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3. 완전히 객관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
인간의 판단은 항상 객관성과 주관성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판단이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각자의 판단은 늘 어느정도 주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의 판단처럼 다른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판단을 할 때에만
그것은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을 비판하고자 할 때
그것은 우리 자신의 주관성이 개입된 것이라는 점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4. 상황을 완전히 알지 못한다
어떤 사실이나 사건은 모두 상황맥락적입니다.
동일한 사실도 어떤 상황에서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유명한 비트겐슈타인의 예를 봅시다. 미장이가 벽돌을 쌓다가
조수에게 “벽돌!”하고 외치면 그것은 “벽돌을 가져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만약 공사장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에게 “벽돌!”하고 외치면
그것은 “떨어지는 벽돌을 피하라”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쉽게 누군가를 비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5. 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
우리의 인식은 늘 제한적입니다.
제한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자 할 때 우리는 늘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지 못한 어떤 부분들이 있고
그것이 칭찬받아야 할 부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불쌍히 여겨야 할 부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이 정말 드러내기 힘든 장애를 가졌거나
남모르는 고통을 가졌다면, 우리의 비판은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6. 우리는 편견이 있으며 시야가 흐려질 수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편견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관성보다 훨씬 더 우리자신을 슬프게 하는 모습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비판하려고 하는 상대방에 대한 첫인상이 편견으로 작용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비판하려는 상대방에 대해서 주위 사람들이 평가를 내린 것이 편견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편견이 있는 한 우리의 평가는 사실에 근거한 평가가 될 수 없습니다.
이미 평가를 내려놓고 거기에 필요한 사실들만을 열거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7. 우리 자신은 불완전하며 일관성이 없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늘 불완전합니다. 특별히 일관성이 없습니다.
C S 루이스는 자신이 가르치던 옥스퍼드 대학원 학생이
일관성없는 태도를 가졌던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 학생은 저명정치인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떤 파티에서 그 정치인이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 칭찬하자,
그 다음부터는 그 정치인에 대해서 우호적인 시각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완전하며 일관성이 없는 것이 그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은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중에 아무도 비판하고자 하는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 유혹 속에서 쉽게 험담과 비판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비판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을 간단히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다면, 위에서 언급한 일곱가지 근거를 늘 생각하십시오.
비판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입니다.
C.S 루이스/자료ⓒ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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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왈드 챔버스의 위험성 |
2013.06.04 2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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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매니저 |
http://cafe.naver.com/thebandofpuritans/41363 |
오스왈드 챔버스의 글이 몇년 사이에 한국교회 안에 깊이 스며들었다.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 한국에 번역되어 처음 나온 것은 1990년대 초반이다. 그때 기독교 문서선교회에서 출간이 되었다. 그 이후에 몇몇 출판사에서 책이 나오고 이제는 챔버스의 모든 글이 출간이 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초창기 신학을 막 공부하기 시작할 때 챔버스의 글에 여러가지 신앙적으로 도움이 되고 유익한 것을 얻을 수 있어 챔버스의 글을 즐겨 읽었고 추천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챔버스의 글을 추천하지 않는다. 또한 추천도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적어도
개혁주의적 관점으로나 성경적인 관점에서 챔버스는 받아 들이기 힘들고 위험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개혁교회, 개혁주의 신앙의 사람들은 청교도와 개혁주의자들의 신앙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야 신앙이 성경적으로 바르게 자랄 수 있다.
무엇보다
1. 챔버스는 성경해석에 있어 자기 주관적인 해석이 많이 들어가 있다. 챔버스는 신학을 제대로 배운 사람이 아닌 거의 독학으로 배우다시피해서 성경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주관적이고 주석, 주해, 석의에서는 거의 챔버스는 무지에 가까운 사람이다. 또한 챔버스는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에 대해서 거의 무지에 가깝다. 그의 전기글 어디에서도 청교도 개혁주의에 대한 언급도 없고 그의 글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다.
2. 챔버스는 알미니안주의자로 인간의 의지를 과도하게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대단히 중요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부족하다. 챔버스 글의 곳곳에서 챔버스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를 할수 있다, 해야 한다는 의미의 메세지를 과도하게 주입해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의지와 노력, 판단을 우선시하도록 요구하는 메세지를 주입하고 있다.
챔버스의 글에 심취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자기의 의와 의지를 더 신뢰하게 되고 신앙이 병든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알미니안적, 영성주의적인 기독교 신앙의 분위기에서 챔버스는 어쩌면 제대로 시대를 맞이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챔버스를 좋아하는 것이다.
3. 챔버스의 죄에 대한 이해가 과연 성경적으로 교리적으로 분석한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심리와 철학적 관점과 성경과 혼합한 것인지? 챔버스의 죄에 대한 이해는 결국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있어 상당히 많은 결점을 보여준다. 그는 인간이 죄로 인해서 무너진 인간의 본성과 타락에 대해서 마치 인간이 극복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은연중에 말한다.
그것은 죄에 대해서 인간의 무기력, 무능력을 강력하게 가르치는 성경과 개혁주의 관점하고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챔버스의 글을 읽다보면 성경에 근거한 이해를 하기보다는 그의 개인적인 철학과 심리학적인 성경 이해를 강요한다는 생각이 그래서 많이 든다.
4. 챔버스는 인간의 내적인 성찰을 중요하게 여긴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내적 성찰을 통해서 성화의 삶을 더욱 깊이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지나친 내적 성찰은 자칫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뺏기고 자신에게 모든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것은 결국 신앙의 토대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자아에 두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5. 챔버스는 전체적으로 독일의 경건주의의 흐름의 연속이다. 경건주의가 기독교 신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크다. 그러나 경건주의는 교리적 약화를 가져왔고 개인주의적인 신앙의 집중으로 기독교를 세상과 이원화된 종교로 만든 요인이 된다. 경건주의는 결국 교회의 참된 영적 부흥을 가로막는 훼방꾼이 된다.
6. 챔버스는 확실히 신비주의 성향이 강하다. 신비주의는 기독교 역사에서 항상 위험하고 교리적인 문제를 일으켰으며 신비주의의 근원은 로마카톨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챔버스는 자신이 경험하고 자신이 신앙으로 깨닫고 얻을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것이 성경에 근거한 것인지? 아닌지? 보다 자신이 내적으로 겪은 신앙의 체험과 신비함을 추구하는 신앙이다. 챔버스는 성경자체를 증거하기 보다는 성경을 통해서 자신이 어떻게 깨닫고 체험하고 순종했느냐를 집중적으로 드러낸다.
7. 챔버스의 영향을 잘못 받으면 인간의 죄와 의지, 타락, 체험 ,교리에서 상당히 성경에서 멀어지고 이탈되며 실천사역 역시 개혁주의적인 것에서 멀리하게 된다. 무엇보다 개혁주의적인 면에서 챔버스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 시대의 기독교 분위기와 상황이 교리를 무시하고 은사주의와 경건주의, 신비주의가 혼합이 되어 챔버스 같은 사람이 인기를 얻는 것은 그만큼 교회가 영적으로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악한 배도자 미국의 전도자 빌리 그래함이 즐겨보는 책이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다. 그는 이 책을 부시 전 미국 대통령에게도 추천을 했다. 그런데 빌리 그래함이 왜 로마카톨릭을 추종하고 종교 다원주의자가 되었는지?
그렇게 챔버스를 오랜동안 읽었다는 사람이?
오스왈드 챔버스의 글은 결코 교회에 유익을 주기 힘들다.
그런 책을 읽느니 청교도들의 책과 개혁주의자들의 책을 읽기를 바란다.
개혁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오스왈드 챔버스를 읽는데 시간낭비 하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적어도 개혁주의권에서는 오스왈드 챔버스를 퇴출해야 한다.
또한 개혁주의를 한다면서 챔버스를 변호한다면 그것은 개혁주의가 아닌 역시 위장된 유사 개혁주의라는 의미다.
오인용 목사, 밴드 오브 퓨리탄스
밴드오브퓨리탄스 흑 그렇군요. ㅠㅠ
개혁주의 마을 이라는 카페에서 스테반 황목사 참여로 예전에 오스왈드 챔버스에 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스테반 황목사님은 오스왈드 챔버스가 4.5TULIP이라고
말하였고 제한된 속죄에 대해서 챔버스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는 듯한 글을 계속
쓰셨습니다. 결론은 그곳에서 4.5tulip이라는 이상한 개념을 소개하면서 그곳에서 다른
목사님들의 반발이 심해서 토론은 흐지부지 갑자기 끝났습니다.
그 토론 과정을 잘 살펴보면 뭔가 계속 숨기려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분명 알미니안이냐 아니냐를 말해달라고 했지만 그 부분에서는 명확한 대답을 회피하였고 tulip의 제한된 속죄에 대한 부분에서 오스왈드 챔버스가 뭔가 부족하다는 말을 스테반 황목사님이 하셨습니다. 제 짧은 견해로는 분명 챔버스가 알미니안 색채가 있고 번역본과 원본을 비교해 본 결과 해석이 이상한 부분들을 발견하면서 뭔가 석연치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믿음의시련 챔버스는 어떤식으로도 개혁주의 관점에서는 변증을 할수 없습니다 어떤 신학의 천재라도. 현재도 챔버스를 비판한다고 비난을 하지만 그들이 왜 자신들이 챔버스를 받아들이는지를 개혁주의관점으로 정당하게 자신들의 주장은 여전히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놓아봐여 괴변밖에 안되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자가 알미니안주의자를 변호한다 ? 그들 스스로도 속으로 웃기는 일일거라고 생각할것입니다 그냥 솔직하게 개혁주의와 알미니안을 결합한 것이라고 정직하게 말해야 하는데? 그것은 양심상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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