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의 저택 사진이 최초로 공개됐다.

25일 데일리메일은 히틀러가 살았던 저택 사진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히틀러 저택 사진은 사진작가 후고 자에게르가
2차 세계대전 발발 전 2년 여 동안
베를린에 있는 히틀러의 사무실과
바이에른 사저를 찍은 것으로 60년 만에 세상에 공개된 것.
Hitler and Inge Ley sit on a promenade of the German KdF (Kraft durch Freude, translated as 'Strength Through Joy') cruise ship Robert Ley (named after Ms Ley's husband, a Nazi Labour leader) during the ship's maiden voyage in April 1939

히틀러 저택 사진은 그의 호화스런 생활을 짐작케 하고 있다.
화려한 외관과 고급스러운 내부로 구성된 히틀러 저택은
수려한 경관까지 자랑한다.

Hitler's huge office in the Chancellery, Berlin, Germany, in the late 1930s or early 1940s

Hitler's private apartment above the Chancellery, giving a rare look at what he saw each day, and how he lived

This room in Hitler's Berlin apartment in the 'New Chancellery' reflects the Fuhrer's baroque, often sentimental taste

Between 1936 and 1945, Hugo Jaeger served as one of Adolf Hitler's personal photographers and was granted unprecedented access to the Fuhrer's private moments

An office in the Berghof estate, in Upper Bavaria, Germany. The interior of Hitler's Berghof estate reflected his conception of what a 'Germanic' style should look like.

Adolf Hitler's office in the Fuhrerbau, Munich, Germany, 1940. This is where the Munich agreement was signed by British Prime Minister Neville Chamberlain, giving Germany a portion of Czechoslovakia

Hitler's secret 'Wolf's Lair', set deep in the heart of a forest in north-eastern Poland, is to be turned into a major tourist attraction

The Fuhrer takes tea with several people including the wife of prominent politician Albert Forster at Hitler's home, Berghof, Berchtesgaden, Upper Bavaria, Germany, in the late 1930s

보도에 따르면 사진작가 후고 자에게르는
1945년 전쟁이 끝날 쯤 자신이 촬영한 히틀러 사진 2천여 장을
가죽 서류가방에 숨겼고
미군 병사들에게 가방을 수색 당했지만
사진은 들키지 않았다.

그는 히틀러 저택 사진을 포함한 히틀러 사진들을
12개의 유리 항아리에 넣어 뮌헨 근처 땅 속에 묻었다가
10년 뒤 발굴해 한 은행의 귀중품 보관소에 보관해왔다.

The entrance to Hitler's office in the Chancellery A side table in Hitler's private apartment in the Chancellery

히틀러 저택 사진을 접한 네티즌들은
“히틀러 저택 사진 으리으리하네”,
“히틀러 저택 사진 영화 세트장 같다.
정말 저런 곳에서 사는 사람이 있었구나”,

“지금 웬만한 부자들도
라잡기 힘들 듯”이라며 감탄했다.

 



암암리에 퍼지는 신사도 운동…“냉철한 평가ㆍ대처 시급”
기독교학술원, ‘신사도 영성과 개혁주의’ 주제로 발표회

2013/06/09 (일) 23:39 ㆍ추천: 0  ㆍ조회: 170      

최근 신천지를 비롯한 이단 대처 관련 논의가 교계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단 시비 논란이 있는 신사도 운동도 이에 포함된다. 특히 신사도 운동은 한국교회에서 그 영향력이 암암리에 확산되고 있는 데 반해, 체계적인 자료나 연구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이에 교계 차원의 냉철한 평가와 대처 방안이 모색돼야 한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신사도 운동의 ‘두 날개’, 보편 기독교회의 권위 전면 부정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은 지난 7일 오후 ‘신사도 영성과 개혁주의’라는 주제로 발표회를 개최했다.

▲피터 와그너(사진)로 대표되는 신사도 운동은 계속되는 이단 시비에도 불구하고, 국내 주요 교회들과의 교류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정확한 평가와 분석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뉴스미션 

이날 주제와 동일한 제목으로 발제한 최윤배 교수(장신대 조직신학)는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신사도 영성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먼저 그는 신사도 운동과 관련해 가장 논란이 되는 ‘두 날개’ 개념, 즉 사도직과 선지자직의 역사적 반복 및 계승은 개혁신학적 입장과 정면충돌함을 재차 강조했다.

최 교수는 “신사도 운동은 그동안 교회사 속에서 없어졌던 사도직과 선지자직으로 부름 받아 임명된 사람들을 통해 이룩될 신사도 개혁교회를 주장하고 있다”며 “이는 역사상의 보편 기독교회의 권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피터 와그너가 결성한 ‘국제사도연맹’에는 500명 이상의 사도들이 소속돼 있는데, 신사도 운동은 이들이 신사도 개혁교회를 지휘하는 하나님의 엘리트 일꾼들로, 강력한 영적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한다.

두 날개 개념이 야기하는 또다른 문제는 ‘직통계시’를 인정한다는 점이다. 신사도 운동은 오늘날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계시를 받아 예언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최 교수는 “기독교는 물론 개혁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고백하는 ‘오직 성경만’의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할 뿐 아니라, 그 원리를 뿌리째 뽑아버리게 된다”며 “직통계시 사상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로서의 정경의 절대적 권위를 훼손하고 파괴하는 사상”이라고 비난했다.

비성경적ㆍ비윤리적 성령론…지도자들 인격도 ‘문제’

신사도 운동이 주창하는 성령론과 은사론이 비성경적이며 비윤리적이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그에 따르면, 성령론 특히 성령의 은사론과 관련 신사도 운동에서는 방언 현상, 우울증 등의 치유 현상, 예언 현상, 이적과 기적 현상이 강력하게 나타난다. 여기에는 괴이한 소리, 쓰러짐, 금이빨과 금가루 현상, 입신 현상, 심리학이나 최면술 등의 효과 현상 등이 포함된다.

최 교수는 “미국이나 캐나다 등 해외에서 신사도 운동을 주도하는 지도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집회 도중에 수많은 거짓 예언을 하고, 심리술이나 최면술을 사용해 속이고, 성적으로 타락했고, 많은 추종자들은 정상적인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힘들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들이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파괴적이면서도 비윤리적인 비정상인으로 변화됐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며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아야’ 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최 교수는 신사도 운동의 지도자들이 ‘신학과 성경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으로 부족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신사도 운동이 ‘다윗의 장막’에 근거해 24시간 365일 연속으로 진행하는 중보기도 운동의 경우,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삶을 완전히 제쳐 놓고, 특정 장소에서 기도와 예배에만 며칠씩, 몇 달씩, 몇 년씩 몰두하는 것은 중보기도 개념을 크게 잘못 이해한 결과라는 것.

최 교수는 또 “신사도 운동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사회에서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기존 교회와 정상적인 신학 교육기관에서 신앙훈련과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며 “지도자가 되려면 직위와 분야에 걸맞은 인격성과 전문성을 구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사도 운동, 한국교회의 취약점 역이용할 수 있다”

이밖에도 최 교수는 신사도 운동의 신비주의적 구원론, 전투적인 신앙운동, 미신적이고 세대주의적 종말론에 근거한 선교 방법 등을 문제 삼았다.

그는 “신사도 운동은 지나치게 ‘새 포도주’, ‘성령의 술’, ‘군화 신은 신부’ 등의 개념을 사용해 신비주의적 구원론을 띠는가 하면, 매우 전투적인 신앙운동을 추구한다”며 “물론 지상의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지만, 신사도 운동이 사용하는 ‘군대’(요엘의 군대, 예수의 군대 등) 개념은 근본주의적 종교에서 발견되는 전투적 개념이 지나치게 강하다”고 주장했다.

선교 방법과 관련해서는 ‘영적 도해’, ‘땅 밟기 중보기도’, ‘백투예루살렘’ 운동 등은 미신적이거나 이원론적인 방법과 세대주의적 종말론에 근거한 선교 방법으로,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론적으로 최 교수는 “신사도 운동의 영성과 신학이 개혁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위협하는 심각한 수준임은 분명한 사실”이라며 “최근 한국교회에서 다른 다양한 프로그램들은 증가하는 데 비해 기초 교리 공부 훈련이나 성경공부 훈련은 태반으로 부족한 현상이 나타난다. 신사도 운동은 한국교회의 이 같은 취약점을 역이용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김민정 ⓒ 뉴스미션/USA아멘넷



 



 

     


    하나님 저는 하나님께 화가 났습니다 세상을 지으시고 사람을 만드신 것은 잘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목사를 만드셨습니까? 세상의 모든 만물은 다 아름답고 쓸모있게 지으셨는데 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목사를 지으셨습니까?
    어떤 이들은 살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목사 탓을 합니다.

    목사의 능력이 부족해서 자신이 고통당한다고 말입니다.
    자기 뜻대로 안되면 목사가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목사를 지으실 때 물 위를 걷거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는 능력 정도는 주셨어야 합니다.
    적어도 부동산이나 주식 시세를 예측하는 능력이라도 주셨어야 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는 목사는 한심한 존재인거 같습니다.
    사람들은 목사의 참 얼굴을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사는 슬픔이나 분노나 절망을 느껴서도 안되고 표현해서도 안됩니다. 조그만 감정의 흔들림에도 사람들은 ‘목사도 사람이었군’하면서 실망합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가면 뒤에 숨기도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목사에게 인간미가 없다고, 가식적이라고 비난합니다.
    목사는 정말이지 숨을 곳도 없습니다. 목사가 편안하게 허물없이 대하면 권위가 없다고 하고 권위를 세우려하면 건방지다고 합니다. 친구가 되어달라해서 친구가 되어주면 아버지가 되어 달라하고,

    아버지가 되어 주려하면 끌어 내리려 합니다.


    목사는 이것도 저것도 할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권한은 성도에게 있다고 하면서,
    모든 책임은 목사 혼자서 지라고 합니다.


    성도의 성공과 출세를 위해 목사 더러 축복기도 하라면서
    목사는 고난과 가난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목사는 먼지보다 못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목사는 힘없고 쓸모 없는 존재인데도
    사람들은 목사의 독재와 횡포를 막아야 한다고 소리 지릅니다.

    내일의 밥상을 걱정하며 살아가는 목사에게
    사람들은 배부르고 탐욕스런 삯 꾼이라고 손가락질 합니다.
    목사는 이래도 저래도 죄인입니다.



    아 참, 가끔 사람들이 목사를 찾아오기도 합니다.
    외롭고 힘들 때, 도움이 필요할 때 찾아와서는

    함께 울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성공하거나 잘 나갈 때는

    찾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만일 목사가 외롭고 힘들 때는

    누가 위로해주지요?


     

    사람들에게 이렇게 넋두리를 했다가는

    아마도 저는 해고되겠지요.

     


    목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나님 앞에 화를 내는 것 밖에 없습니다.
    땅에도 속하지 못하고 하늘에도 속하지 못하는
    세상의 변두리에서 위태롭게 춤을 추는 광대처럼,
    아무도 듣지않는 노래를 홀로이 부르는
    은퇴한 늙은 여가수처럼
    그런 이방인이 바로 목사인듯 합니다.



    그러니 목사를 만드신 하나님은

    분명히 실수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덕택에 이 땅의 목사들은 무거운 십자가를
    어깨 위에 지고 살아갑니다.
    벗을래야 벗지도 못하는 목사라는 굴레는
    너무 무거워서 잠시도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 눈물이 납니다.
    메마르고 딱딱한 마음속에서
    속울음이 터져 나옵니다.
    예수님의 고통의 무게를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이번 고난주간은 정갈한 기도는 아니지만
    그냥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대신하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하나님.

     

     

    어느 목사의 고난주간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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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봇대에 붙은 아르바이트 공고물
자녀와 청년 교우들이 미혹되지 않도록
알려주세요

아래 전면을 잘라서 올립니다
혹시 미혹되는 분 있을 까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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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총, 다락방 이단해제 취소하라"
전국 14개 신학대학교 교수 110인, 한기총 다락방 이단 해체 관련 성


전국 14개 신학대학교 교수 110인은 12일 성명서를 발표하고 “한기총은 류광수 다락방에 대한 한국교회의 이단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한기총은 이단을 결정하거나 해제할 수 있는 성격의 기관이 아니다.”라고 강조하면서 “따라서 한기총은 다락방 류광수에 대한 이단해제 발표를 즉각 취소하고, 그렇게 한 것에 대해서 한국교회 앞에 사과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한기총은 이단해제를 결정하거나 특정 집단이나 개인을 이단, 친 이단 혹은 이단 옹호자라고 결정․주장하는 시도를 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한국교회의 연합기관으로서 본래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며 한국교회의 바른 신학과 신앙을 계승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성명서 전문,

최근 한기총의 다락방 류광수 이단해제에 대한 신학대 교수 110인 의견

지금 한국교회는 신학적으로 사상적으로 심각한 도전과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전에 없는 양적, 질적 침체를 맞고 있고, 또한 반기독교 정서는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놀라운 속도로 일고 있는 이단들의 무서운 발흥과 도전입니다. 수많은 이단들이 1990년대 이후 한국교회 안에 더 무섭게 발흥하여 정통 기성 교회에 심각한 폐해를 주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언제나 이단에 맞서 정통신학을 지키고 바른 신앙을 계승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이것은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서 한국교회 주요교단이 일치하여 지켜온 자랑스러운 유산입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전통을 깰 수 있는 심각한 도전이 한국 교회에 제기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주요 교단이 일치하여 이단 혹은 이단성이 있다고 규정한 바 있는 다락방(현 세계복음화전도협) 류광수에 대해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홍재철, 이하 한기총)가 2013년 1월 3일 이단성이 없다고 발표함으로 한국교회에 심각한 신학적 혼란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주요 교단들은 류광수 다락방의 이단성을 해제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에 속한 여러 교단의 연합기구라는 한기총이 다락방 류광수가 이단성이 없다고 선언한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전국의 주요 신학교 교수들은 2011년에 이미 두 차례에 걸쳐 한기총의 이와 같은 행보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해온 바 있습니다. 류광수 다락방전도총회를 영입한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 측을 한기총이 2011년 9월 22일 회원 교단으로 인정한 것과 그로 인해 생겨날 한국교회 안에서의 혼란을 예견하고 신학교수들이 입장을 표명했던 것입니다. 그런 교수들의 우려가 2013년 1월 3일 한기총의 다락방 류광수의 이단성 해제를 통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이에 한국의 대표적 신학대학교에 속한 신학교수들은 한국교회 앞에 한기총이 일으킨 최근 사태와 관련하여 다시 한 번 더 다음과 같은 의견을 강하게 표명하는 바입니다.

첫째, 한기총은 류광수 다락방에 대한 한국교회의 이단 결정을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한기총은 이단을 결정하거나 해제할 수 있는 성격의 기관이 아닙니다.

셋째, 따라서 한기총은 다락방 류광수에 대한 이단해제 발표를 즉각 취소하고, 그렇게 한 것에 대해서 한국교회 앞에 사과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 한기총은 앞으로 한국교회가 이단 혹은 이단성이 있다고 발표한 어떤 집단에 대해 이단해제를 결정하거나 특정 집단이나 개인을 이단, 친 이단 혹은 이단 옹호자라고 결정․주장하는 시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문제는 각 교단의 신학위원회와 이단대책위원회가 할 일이지 한기총이 할 일이 아닙니다.

다섯째, 한기총은 한국교회의 연합기관으로서 본래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며 한국교회의 바른 신학과 신앙을 계승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할 것입니다. 한기총이 근자에 보인 이단해제나 이단주장 행보와 같은 일을 계속할 경우 한국교회를 혼란으로 몰아넣을 것이 자명하며, 이로 인한 한국교회와 사회의 폐해는 더욱 심각한 수준에 이를 것입니다.

전국의 주요 신학대학교에 속한 여러 교수들은 수많은 이단들의 발흥으로 한국교회가 전에 없는 혼란을 맞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이단 사상과 이단 집단이 한국교회 안에 교묘히 들어와 정상적인 교회와 같이 인정받도록 하여 교계를 혼란시키는 행위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기총은 한국교회의 주요교단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즉각 다락방의 류광수의 이단성 해제를 취소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한기총은 한국교회연합기구로서 존재 가치를 상실한 것입니다. 한기총은 더 이상 이단해제나 이단 결정을 중지하고 한기총 본연의 책임과 사명과 충실히 감당할 것을 촉구합니다.

2013년 6월 12일
전국 14개 신학대학교 교수 110인 일동

강무순(한일장신대학교), 강성열(호남신학대학교), 김성욱(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춘서(한일장신대학교), 김길성(총신대학교), 김광열(총신대신학대학원), 김금용 (호남신학대학교), 김병모(호남신학대학교), 김병훈(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김상이(한일장신대학교), 김상훈(총신대신학대학원), 김성봉(대신총회신학연구원), 김승호(영남신학대학교), 김성룡(영남신학대학교), 김안식(한일장신대학교), 김영일(한일장신대학교), 김양이(한일장신대학교), 김옥순(한일장신대학교), 김웅수(한일장신대학교), 김인(한일장신대학교), 김훈(한일장신대학교), 김준현(한일장신대학교), 김해룡(한일장신대학교), 김지찬(총신대학교), 김진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김진영(호남신학대학교), 김창훈(총신대신학대학원), 김태훈(한일장신대학교), 김충렬(한일장신대학교), 김형곤(한일장신대학교), 남연희(한일장신대학교), 노항규(한일장신대학교), 문병호(총신대신학대학원), 민경진(부산장신대학교), 박경수 (장로회신학대학교), 박대우(한일장신대학교), 박만(부산장신대학교), 박명수(서울신대학교), 박용규(총신대 신학대학원), 박종기(한일장신대학교), 박화경(한일장신대학교), 박문수(서울신학대학교), 박원선(한일장신대학교), 박중수(영남신학대학교), 박효정(한일장신대학교), 배경식(한일장신대학교), 배성찬(한일장신대학교), 박태연(총신대신학대학원), 서원모 (장로회신학대학교), 서정열(부산장신대학교), 성주진(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송인규(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신재식(호남신학대학교), 신혜순(한일장신대학교), 안교성(장로회신학대학교), 안명준(평택대학교), 안병채(한일장신대학교), 안상혁(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안승오(영남신학대학교), 안인섭(총신대 신학대학원), 유갑준(한일장신대학교), 유재경(영남신학대학교), 오덕교(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오덕호(한일장신대학교 총장), 오성호(총신대신학대학원), 오현선(호남신학대학교), 이관직(총신대신학대학원), 이남섭(한일장신대학교), 이병진(한일장신대학교), 이상규(고신대학교), 이상원(총신대신학대학원), 이승갑(한일장신대학교), 이승구(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이승현(부산장신대학교), 이승진(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이은선(안양대학교), 이원일(영남신학대학교), 이종록(한일장신대학교), 이현웅(한일장신대학교), 이혜숙(한일장신대학교), 이한수(총신대학교 목회대학원), 임채광(부산장신대학교), 임희국 (장로회신학대학교), 임희모(한일장신대학교), 장보철(부산장신대학교), 전낙표(한일장신대학교), 정경호(영남신학대학교), 정원범(부산장신대학교), 정창교(부산장신대학교), 정창균(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병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현애(한일장신대학교), 진호석(한일장신대학교), 주인자(한일장신대학교), 차명제(한일장신대학교), 차명호(부산장신대학교), 차성환(한일장신대학교), 차정식(한일장신대학교), 채은하(한일장신대학교), 최동규(한일장신대학교) 최민준(한일장신대학교), 최상도(영남신학대학교) 최영현(한일장신대학교), 최태영(영남신학대학교), 허호익(부산장신대학교), 형근혜(한일장신대학교), 황금봉(영남신학대학교), 황선우(총신대신학대학원), 황홍렬(부산장신대학교), 탁지일(부산장신대학교)

<성명서 1차 발표 참여 교수 명단>

고신대, 대신총회신학연구원, 대전장신대, 부산장신대, 서울신대, 안양대, 영남신대,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장로회신학대학교, 총신대학교, 평택대학교, 한일장신대,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호남신대 등 14개 전국 신학대학교

김준수 ⓒ 뉴스파워/USA아멘넷













나 자신 다스리기

신 새벽 어쩌다가 눈이 떠져 가만히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여태껏 살아 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이
무엇이더냐

그리고 진정 참을 수 없던 것을
참아낸 것이 뭐더냐고 물어본다
살면서 살아 오면서 제일 힘든 일이
내가 나를 다스리는 일이었다고
섬광 같이 지나가는 기억의 내면의식
그렇다 바로 그거였어...

내가 나를 주저 앉히고
내가 나를 타이르고 나무라고
내가 나를 용서하고 기도하고
내가 나를 다스리는 일이었다...

-글/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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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 ‘강남스타일’ 열풍을 몰고 온 가수 싸이(본명 박재상·35)가 ‘프리메이슨(Freemasonry)’ 연계 조직인 ‘일루미나티(Illuminati)’ 조직원일 것이라는 추측이 일부 개신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다.

프리메이슨은 16세기말 영국에서 시작된 세계시민주의적·인도주의적 우애(友愛)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로 알려져 있다. 프리메이슨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종종 일부 ‘프리메이슨 존재 신봉자들’들은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거대 현상이나 미스테리한 사건들의 ‘배후’라는 음모론의 표적이 돼 왔다.

그런데, 왜 갑자기 싸이와 프리메이슨과의 관계 ‘의혹’설이 인터넷에서 번지는 것일까. 이른 바 ‘싸이 프리메이슨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수록된 싸이 6집 앨범 제목이 ‘6갑’이라는 점 △앨범 무늬가 일루미나티의 상징인 ‘호루스의 눈’과 유사하다는 점 △앨범에 일루미나티를 상징하는 인어 모양의 삽화가 그려져 있다는 점 △‘6갑’ 앨범 발매일 등을 근거로 삼는다.

지난달 초 ‘싸이 프리메이슨설’을 자세히 설명한 한 블로거의 글을 보면 “일루미나티의 상징들이 등장하자는 싸이의 앨범이 인터넷상에서 히트를 칠 조짐이 보이자, 저들(일루미나티)은 저들이 장악한 대중매체와 유명 연예인들을 동원해서 ‘강남스타일’을 전 세계적 트랜드로 바꿔 놨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 블로거는 지난 8월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싸이의 흠뻑쇼에서 싸이가 관객들에게 3만 개의 앨범을 선물하고서 공연도중 ‘호루스의 눈’ 모양이 그려진 앨범을 머리 위로 들어달라고 요구했다면서 이는 싸이가 일루미나티 조직원이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고 주장했다. ‘6갑’이 3만개가 있으니 이 두 숫자를 곱하면 18이 되는데 이는 ‘6+6+6’ 즉, 프리메이슨의 상징인 ‘666’을 뜻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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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전체보기 한 블로거가 주장하는 '싸이 프리메이슨설'에 대한 증거들. 오른쪽 아래 사진은 싸이가 지난 8월 흠뻑쇼에서 관객들에게 자신이 선물한 앨범을 들어달라고 요구해 관객들이 응하는 장면. /출처=인터넷 블로그 캡처
싸이가 앨범 표지에 ‘숫자 6’을 나타내는 몸짓을 한 채, 일루미나티 상징인 ‘인어’로 형상화돼 있는 것도 의심되는 정황이라고 이 블로거는 분석한다. 또 ‘6갑’의 앨범발매일은 2012년 7월 15일인데 이 숫자들을 ‘일루미나티 수비학’으로 더하면 ‘2+0+1+2+7+1+5=18’이 되는데 이 역시 위의 경우처럼 ‘666’을 뜻한다는 것이다.

‘싸이 프리메이슨설’에 동조하는 상당수 네티즌들은 이 블로거의 주장에 공감하며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싸이에 열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 네티즌은 “무섭네요…. 저 관중들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싸이 요청대로 공짜로 선물 받은 기분에 좋아서 열심히 흔들어주는 거 같은데 싸이는 충분히 저 그림을 계획하고 팬들에게 CD를 공짜로 나눠준 것이지요. 솔직히 저 공연 간 팬들 중에 CD 산 사람들도 있을 텐데.. 저 그림을 만들기 위해 3만개나 자비로 푼 거죠. 수비학적으로도 정말 맞아떨어지네요. 앨범발매일이 666을 상징하는 거나 특히 낙원노래 부를 때 싸이 표정은 정말…”이라는 댓글을 달았다.

반면에, “어이구 여기 웬 음모론자들 나셨네! 싸이가 노리긴 뭘 노려요 이 사람들아..”, “뭐에요 이거???? 일루미나티??? 여기 이 사람들 왜 이렇게 진지해요??” 등의 댓글을 달며 ‘싸이 프리메이슨설’ 의혹 주장에 ‘터무니 없는 억측’이라는 반응도 많았다.

이에 대해, 싸이의 소속사 YG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싸이 프리메이슨설’에 대해 “너무 황당하다. 처음 듣는 얘기다. 해명할 정도의 얘기도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프리메이슨·일루미나티란?
개신교에선 프리메이슨이 신이 ‘전 세계의 지고의 건축가’이긴 하지만, 이후엔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적(理神論的)’ 경향을 가진다고 판단해 불경시한다. 프리메이슨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G.워싱턴, J.먼로, T.루스벨트 등의 미국 대통령 18명과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음악가들, 골프 선수 아놀드 퍼머, 영국 수상 처칠 등이 모두 프리메이슨 조직원이었다고 주장한다.
가톨릭계 역시 대대로 프리메이슨 조직원을 파문하는 등 경원시했으며, 현재의 교황 베네딕토 16세 역시 바티칸의 교리수호성장 재직시였던 라칭거 추기경 시절에 “교회와 프리메이슨이 늘 양립할 수 없었으며, 프리메이슨 가입은 금지된다”고 못박았다.

‘광명(光明)’이란 뜻의 일루미나티는 계몽주의(Enlightment)의 영향을 받아 1776년 독일 바이에른에서 결성된 조직으로, 프리메이슨의 조직 모델을 따라 설립됐다. 현대의 프리메이슨이 상당히 대중적 조직으로 거듭나는 것에 반해, 일루미나티는 보다 은밀한 활동을 음지에서 펼치고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프리메이슨 수뇌부들이 일루미나티와 관련됐다는 주장도 있다. 영어판 위키피디아는 실제로 두 그룹의 멤버가 중복되는 것으로 기술한다.

많은 사람들의 어깨가 축 처져 있습니다. 그들의 머리는 온갖 근심과 염려와 걱정으로 지탱하기도 힘들어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걱정과 근심도 없이 잘 사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며 이 세상에 나 혼자 외톨이라는 생각에 가족도 없고, 부모 형제도 필요 없는 그냥 모든 것이 거추장스럽게만 느껴지고, 또 모든 것이 귀찮게만 여겨지며, 그래서 마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까지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80년대에 유행했던 김도향이 부른 아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노래가 흘러 나옵니다

.

어느 날 난 낙엽 지는 소리에 갑자기 텅 빈 내 마음을 보았죠 그냥 덧없이 흘려버린 그런 세월을 느낀거죠 저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렇게 살아버린 내 인생을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참 우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잃어 버린 것이 아닐까 늦어 버린 것이 아닐까 흘려버린 세월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을까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난 참 우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한참을 이렇게 푸념하다 보면 눈가엔 이슬이 맺힙니다. 그리곤 갑자기 노래 가사가 바뀌며 지금이 이 땅에 있지 않은 음유시인 이남이가 부른 울고 싶어라 울고 싶어라 이 마음을 읊조립니다.

"울고 싶어라. 울고 싶어라, 이 마음. 사랑도 가고 친구도 가고 모두 다. 왜 가야만 하니. 왜 가야만 하니. 왜 가니. 수많은 시절, 아름다운 시절 잊었니. 떠나보면 알거야. 아마 알거야"

 

     현대인들은 일곱 가지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고 합니다. 가난, 질병, 실패, 사랑의 상처, 자유상실, 노쇠, 죽음. 이러한 것들 중에서 하나라도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들에 대한 어떠한 해결책도 심지어는 어떠한 일말의 가능성 있는 대안도 현대인들에게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여기 38년 된 병자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에 한 병자가 누워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오랫동안 질병의 고통 속에 있었으며 그것으로 인해 그는 가난하게 되었고 가족이 떠나가는 사랑의 상처를 안고 무엇 하나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자유의 상실 속에서 38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몸은 늙어 가고 결국 죽음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처절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38년 병자에게 더 절망적인 것은 주변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데스바 못에는 물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병에 낫는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 병자는 물이 움직일 때 자신을 도와 줄 사람이 없다는 것에 더 절망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가 낫기를 원하냐고 물었을 때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라고 예수님께 자신의 솔직한 절망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이는 마치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이러한 불안과 공포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때 어느 누구도 그 손길을 붙잡아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아무 희망도 없이 절망가운데 살아가는 그에게 예수님께서 찾아 오십니다. 아무도 손 내미는 사람이 없는 그에게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아무 대책이 없는 그에게 예수님께서 대책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아무 소망도 없이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고 있는 그에게 예수님께서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당신은 왜 불안해 하십니까? 왜 걱정하십니까? 왜 괴로워하십니까? 왜 초조해 하십니까? 왜 절망하십니까? 왜 슬퍼하십니까? 왜 불평하십니까? 왜 포기하십니까? 왜 속상해 하십니까? 왜 낙심하십니까? 왜 좌절하십니까? 이러한 상황 속에 있는 모든 현대인들에게 성경은 시편 42편을 통해 분명히 해결책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너는 불안하여 하는가?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42)

 

    하나님을 바라라바로 여기에 해결책이 있습니다. 영원하신 분이며 온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은 새 힘을 얻을 것이며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며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현대인들에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 이제 어깨를 쭉 펴고 고개를 드세요.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사랑의 하나님께서 절망을 희망으로, 불안을 안정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포기를 도전으로, 낙심을 소망으로, 불평을 감사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글/ 김해찬 목사/ 출처: 창골산 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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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표적 - A.W. 핑크 -

 

요즈음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사실은 기독교계 안에 영성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가 급격하게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주님의 백성들은 복음이 여전히 널리 전해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위안을 갖습니다. 슬프게도 이들의 낙관적인 추측은 근거가 약하며 모래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만약 지금 선교 홀에서 전해지고 있는 메시지를 조사해 보거나, 일반 대중 가운데 뿌려진 소책자를 면밀히 검토해 보거나, 옥외에서 전해지는 말씀을 주의해서 들어 보거나, 구령 캠페인에서 전해지는 설교나 강연을 분석해 보거나, 현대의 복음주의를 성경의 저울에 무게를 달아보면, 요컨대, 참된 회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없으며, 죄인이 구원자(救主:Saviour)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본질적인 것이 없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변화된 삶의 열매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흠을 잡으려고 이 글을 쓰거나 남의 감정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함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며, 완전함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평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다른 이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평하는 것도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훨씬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시대의 "복음주의"는 철저하게 표면적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는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나오도록 호소하는 기초가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안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의 거룩보다 훨씬 더 크며,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진노보다 훨씬 더 크다는 균형을 잃은 슬픈 양상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를 알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들이 치명적으로 빠져 있습니다. 비난받아 마땅할 멋진 찬양, 유모 있는 익살, 재미있는 일화 등은 도입되었지만, 오직 복음만이 효과적 으로 비출 수 있는 어두운 배경은 의도적으로 삭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심각한 것은 이러한 것이 부정적인 면의 한쪽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더욱 심한 것은 복음이 현대의 싸구려 복음전도자들에 의해 값싸게 팔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은 단지 죄인의 눈에 먼지를 날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의 혼은 전혀 의심받지 않고 사용되는 마귀의 마취제로 잠에 빠져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정통" 설교에서 전해지는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치명적으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길이 사람에게는 옳은 길로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은혜의 기적으로 간섭하지 않을 경우, 그 길을 따르는 자는 결국 그 끝이 사망의 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늘(천국)을 향해 가는 중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후에 지옥에서 깨어날 때 참혹한 환멸을 갖게 될 것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자를 사악함 가운데서 편하게 만드는 하늘로부터 전해진 좋은 소식인가요? 미친 듯이 쾌락을 추구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믿기만" 하면 장차 두려워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확신을 주고자 주어진 것인가요? 혹자는 대부분의 "복음전도자들"이 복음을 제시하는 방식에 - 오히려 왜곡시킨 방식에 - 비추어 그렇게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회심한 자들"의 삶을 바라 볼 때,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 영적 분별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들을 위해 죽으셨으며, 단지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죄(과거, 현재, 미래)를 완전히 용서받았다고 확신하는 것은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 앞서 계시된 하나님의 율법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공의를 완화시켰다거나 그분의 거룩의 표준을 낮추셨다고 공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복음을 성경적으로 설명할 때 복음은 하나님의 공의와 단호함과 그분께서 죄를 절대적으로 혐오하신다는 것에 관한 가장 확실한 실증과 가장 명확한 증거를 보여줍니다. 슬프게도 육체의 자랑은 수많은 자격 없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보다 훨씬 지혜로운 자들이 지나가기를 두려워하는 곳을 뛰어들도록 방임합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비참한 상황을 초래한 원인은 이러한 자격 없는 자들이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들과 모임들이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이유는 이러한 "회심자"들로 가득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이여, 복음은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결코 죄들을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자기 백성들의 범법으로 인한 구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치신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공의의 검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율법을 무효로 하기는커녕 오히려 율법의 저주를 견디어내시는 구원자(구주)를 보여줍니다. 갈보리는 엄숙하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를 시간 안에서와 영원 안에서 계속 줄 것입니다. 당신은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이 우상에 집착하고 그 마음이 여전히 죄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리스도를 단지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함으로 복음이 존귀히 되거나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합니까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복음을 왜곡시키고,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음란한 것으로 변개시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몇몇 독자들은 앞에 기술된 우리의 "거칠고" "비평적인" 말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물을 것입니다. "영감을 받은 사도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분명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렇다면 오늘날 동일하게 죄인들에게 말하는 것이 틀렸단 말인가요? 우리가 그렇게 하는 데에는 신성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요?" 그러한 말씀이 성경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한 말씀이 성경에 있기 때문에 훈련받지 않은 많은 표면적인 사람들이 모두 그 말씀을 그대로 말하는 것을 옳다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행전 16:31이 결코 어중이떠중이 군중들에게 전해진 것이 아니라 특정 개인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그 말씀은 아무에게나 전해진 메시지가 아니라 복음이 최초 전해졌던 자들과 같은 성품을 가진 자에게 전해진 특별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구절들은 절대로 왜곡되어서 안 되며, 본문에 따라 고찰하고, 해석하고, 적용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듯이 숙고하고, 주의 깊게 명상하며, 시간을 드려서 연구해야 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급변하는 시대가 만든 이러한 겉만 번지르르한 가치 없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6:31을 보십시오.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사도와 그의 동료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라고 말한 때가 언제이며 누구에게 말했는가요? 복음의 말씀이 진실로 전해진 자들의 특성을 뚜렷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일곱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이들 일곱 가지 항목들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독자들은 이 항목들을 주의 깊게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그 말씀을 들은 사람은 바로 전에 기적을 일으킨 하나님의 권능을 목격했습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감옥의 기초가 흔들리고 즉시 모든 문이 열리며 각 사람의 결박이 풀린지라"(행 16:26). 둘째, 그 결과로 그 사람은 매우 동요되어 스스로 자기 생명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간수가 잠에서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친 줄 생각하고, 검을 뽑아 자결하려 하거늘..."(27절). 셋째, 그는 경위를 알고 싶었습니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 한 후..."(29절). 넷째, 자기 만족을 누리며 살던 그의 삶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뛰어 들어가 떨면서..."(29절). 다섯째,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 앞에 와 엎드리고..."(29절).여섯째, 그는 하나님의 종에게 존경과 경의를 보였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나와..."(30절). 일곱째, 자신의 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우리가 기꺼이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를 가르치는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 간수는 "단순히" 믿기만 하라는 권면을 받은 경솔하고 부주의하고 무사태평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가 자기 안에 이미 역사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는 자입니다. 그의 혼은 깨어 있었습니다(27절). 그 간수의 경우, 그의 잃어버린 상태를 깊이 느끼도록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잃어버린 상태를 분명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사도들이 반드시 회개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의 완전한 태도는 그가 진정으로 회개한 자임을 보여줍니다. 자신들의 타락한 상태에 완전히 눈이 멀어 있고 하나님께 대하여 완전히 죽어있는 자에게 간수에게 전해진 말씀을 적용하는 것은 방금 물에서 나와 후각이 없는 자의 코에 후자극제(嗅刺戟劑 : 냄새로서 각성, 자극시키는 약)를 갖다대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입니다. 독자들은 이 글의 비평을 읽고 사도행전을 주의 깊게 통독하며, 과연 사도가 어중이떠중이 청중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에게 연설을 할 때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라고 말한 경우가 단 한 번이라도 있는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구약 성경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신약 성경에 대하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밥티스트 요한이 그리스도에 앞서서 회개로 부르기 전에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처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마음에 율법이 적용되기 전까지는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롬 3:20). 미리 경작하지 않았거나 일구지 않은 땅에 씨를 뿌리는 것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온통 죄를 짓는 일에 몰두하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대속의 회생물을 소개하는 것은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자는 반드시 그가 인격적인 관계를 가져야 할 분의 성품과 자신에 대한 그분의 권리와 의로운 요구와, 그가 극악무도하게 그분을 무시하고 자기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슬프게도 그리스도의 구원의 본질이 오늘날의 "복음전도자"들에 의해 잘못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원자 대신에 지옥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원자를 전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치명적으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육욕과 세속적인 마음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갈망이 조금도 없이 불호수만 피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맨 처음 언급하는 곳은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다가오는 진노로부터가 아니라) 그 죄들에서 구원할 것임이라"입니다(마 1:21). 죄의 엄청난 가증함에 관하여 깨닫는 자, 양심에 죄의 무거운 짐을 느끼는 자, 그리하여 죄를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자, 죄의 무서운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구원자가 되시지만, 다른 이에게는 구원자가 되시지 않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죄를 사랑하는 자들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신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사악함을 묵과하며, 하나님을 대적하여 그들을 편드는 죄의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 이 거룩한 분을 그같이 고소하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신성모독인가요.

 

만약 독자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실 때, 나는 죄의 가증함을 알지 못했고, 죄의식으로 복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즉시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결코 구원받은 적이 없거나, 당신이 이전에 구원받았다고 생각했을 때 실제로는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은혜 안에서 자라감에 따라 죄가 무엇인지를 - 하나님께 대한 반역 - 더욱 분명하게 깨닫고, 더욱 더 죄를 미워하고 죄에 대하여 슬퍼하게 됩니다. 그러나 양심이 결코 성령에 의해 찔린 바 된 적이 없는 자와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적이 없는 자도 구원받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떠한 사실의 영역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온전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니라"(마 9:12). 진정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위대한 의사에게서 치료받기를 구하는 자만이 죄로 병든 자입니다. 그러한 자만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죄의 행위와 혼을 더럽히는 죄의 오염으로부터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죄로부터의 구원이요, 죄를 사랑하는 것으로부터의 구원이요, 죄의 지배로부터의 구원이요, 죄의 교활함과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에, 복음전도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와 주된 사역은 죄에 관하여 선포하고, 죄의 열매가 아닌 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죄 안에 있는 무한한 극악성을 보여주며, 마음속에서 죄의 다양한 역사를 찾아내고, 영원한 형벌이 바로 죄의 공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아, 복음전도자가 죄에 관하여 선포하는 것 - 단지 죄에 관하여 상투적으로 몇 가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가 무엇인가를 선포하는 것 - 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지 않고 청중들의 관심을 끌지도 않을 것입니다. 분명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칭찬을 얻는 것보다 사람의 칭찬을 사랑하는 자와, 구령(救靈)보다 자기 봉급에 더 가치를 두는 자는 그에 알맞은 임기웅변의 조치를 취하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씀의 선포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것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신실한 말씀을 선포함으로 사람들을 쫓아내는 것이 부정하게 육체와 영합하여 성령을 쫓아내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전도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이란 용어를 잘못 전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복음전도자들이 전하는 내용은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며 값없이 선물로 받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에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고, 단지 그리스도의 피의 무한한 공로를 믿고 신뢰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이 지금 "정통" 기독교계에 널리 유행하고 있고, 그들의 귀가 멍하도록 자주 듣고 있으며, 그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이제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이 부적절하고 한쪽으로 치우쳐서 사람을 미혹하며 잘못된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면, 그는 즉시 이단이라는 낙인을 찍히고 행위 구원을 가르침으로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손상시킨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타락한 피조물이 하나님께 공로를 인정받거나 은혜를 얻을 만한 일을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거룩을 희생하면서 까지 역사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결코 죄와 타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원은 값없는 선물로서, 오직 빈손으로 받아야 하며, 여전히 세상을 굳게 쥔 손으로는 결코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셨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배를 채우지 못하는 돼지 먹이인 곡식 껍질로 죄인의 배를 채우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먼 나라에서 돌아서게 하셔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자기 죄들을 인정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죄인 스스로가 반드시 해야 할 행동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것들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탕자가 계속해서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죄악 가운데 있는 동안은 아버지의 입맞춤과 반지를 받을 수 없는 것 같이, 탕자가 이러한 것들을 행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믿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단단해진 마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먼저 반드시 그 마음이 부서져야 합니다. 성경은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그와 같이 멸망하리라"고 말합니다(눅 13:3). 회개도 믿음과 똑같이 구원에 필수적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그 후에 회개하지도, 믿으려 하지도 아니하였음이니라."(마 21:32). 모든 순서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정하셨습니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회개는 죄를 슬퍼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마음으로 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를 버리고자 마음으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자유로이 역사합니다. 왜냐하면 거룩의 요구는 죄를 버릴 때 만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전도자는 반드시 다음과 같이 외쳐야 합니다.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아담 안에서 떠났던) 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리"(사 55:7). 복음전도자의 책무는 그의 청중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병기를 버리도록 요구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긍휼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구원의 길에 대한 정의가 잘못 내려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현대의 "복음전도자"들은 죄인이 지옥을 면하며 확실히 하늘(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단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회중을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은 죄인을 완전히 잘못 인도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배척하면서 동시에 구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복음 선포자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는 또한 주님으로서 그분께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고 부언하기는 하지만, 회심자가 그와 같이 하지 않더라도 하늘이 확실하게 보장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즉시 그러한 말을 쓸모 없게 만듭니다. 그와 같은 주장은 마귀의 거짓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적으로 눈먼 자들만이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그분의 멍에를 거절하는 자도 구원하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독자들이여, 그것이 은혜가 아니라 수치인 이유는 그리스도를 불법을 장려하시는 분으로 뒤집어씌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주님(Lord)의 직분으로 하나님의 영예를 유지하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도우시며, 하나님의 법을 집행하고 계십니다. 만약 독자들이 두 개의 호칭이 등장하는 누가복음 1:46,47, 사도행전 5:31, 베드로후서 1:11, 2:20, 3:2, 3:18을 본다면, 항상 "구주와 주님"이 아니라 "주님과 구주"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권에 복종한 적이 없고, 그분을 자신의 마음과 삶 가운데서 왕위에 앉힌 적이 없으면서도 여전히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을 환상에서 깨어나게 해 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오른 손에 거짓을 쥐고 영존하는 타오르는 불 속으로 떨어질 것입니다(사 44:20). 그리스도는 "자신을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가 되십니다(히 5: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님 되심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그분께 대해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라는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눅 19:14). 독자들이여, 잠깐 멈추고 정직하게 다음의 질문을 직시하기 바랍니다. "당신은 그분의 뜻에 복종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진정으로 그분의 명령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슬프게도 오늘날 하나님의 "구원의 길"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본질은 거의 보편적으로 오해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이란 용어는 모든 방면에서 잘못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선포되고 있는 "복음"은 십중팔구 진리를 벗어났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천국)을 향하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사실은 가능한 빨리 지옥으로 서둘러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계 안에 이러한 사태는 심지어 "비관론자"와 "기우가 심한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나쁩니다. 우리는 대언자가 아니며, 결코 대언서의 예언을 고찰하는데 깊이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필자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들이 자주 그렇게 행함으로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건대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영국에서조차 종교적인 상황은 150년 전보다 훨씬 더 나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심히 두려워합니다 : 하나님께서 진정한 부흥을 주시지 않는다면, 머지 않아 곧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짙은 어둠이 백성들을 덮을 것입니다"(사 60:2). 왜냐하면 참된 복음의 빛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판단컨대 현대의 "복음주의"는 모든 "시대의 표적들" 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작금(昨今)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에베소서 5:11이 하나님의 답을 주고 있습니다.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참여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들을 책망하라". 말씀의 빛을 대적하는 것은 모두 "어두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가져야 할 의무는 오늘날의 "복음주의" 괴물과 아무 관계도 갖지 않으며, 이들에 대한 모든 도덕적 재정적 지원을 보류하고, 그들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며, 그들의 소책자를 배포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인들에게 우상을 버리지 않고도, 회개하지 않고도,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에 복종하지 않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하는 자들은,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으며 하늘(천국)은 반드시 자기 공로에 의해서만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자들 만큼이나 진리에서 벗어났으며 위험한 자들입니다.

 


사역 시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것과 기회를 붙잡는 것 - Steve Gladen

여러분과 섬기시는 교회의 성도들이 성장의 기회를 맞게 되었을 때, 어느 정도의 위험부담은 항상 함께 나타납니다. 시간과 돈에 대한 위험부담이거나 혹은 편안함을 버려야 하는 것등이죠. 그러한 성장의 기회에 두가지 선택사항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발걸음을 내딛거나 두려움에 떨어 움직이길 원치 않는 것이죠.

두려움의 마비증상을 막기 위한 방법은 위험부담을 최소화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성장의 기회에 조금씩이라도 발을 맞추어 참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기가 기는 법부터 배우듯, 성도들이 조금씩 따라오기 시작할 때, 믿음이 생기기 시작할 것이고 그로 인해 걷도록 요청하고 나중에는 힘껏 달릴 수 있도록 이끌어내게 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너무나도 자주 많은 교회들이 성장의 기회시에 성도들에게 큰 부담을 줄 뿐만 아니라, 즉시 달려 덤벼들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로 인해서, 성도들은 두려움에 큰 부담을 가지게 되고, 교회와 리더의 요구에 응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위험부담의 수위는 항상 높아 보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 위험부담을 최소화하면서, 성도들로 하여금 조금씩 순응토록 한다면, 성장의 기회에 찾아오는 위험부담을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긍정적인 반응을 얻게 되는 가능성을 높이게 되죠.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다윗의 삶에서 기회와 위험부담 혹은 두려움과 믿음의 관계에 대한 정말 좋은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첫번째 기회는 양들을 보살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매우 어렸죠. 그래서인지 그는 양들을 보살피는 책임감에 그리 큰 두려움을 갖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양치는 일이라는 위험부담을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 그에게는 믿음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의 두번째 기회는 양을 치는 중 만난 곰으로부터 싸움이었습니다. 그러한 것들로부터 양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부담을 감수했기에, 침착하게 곰을 죽였고, 그의 믿음은 계속적으로 성장했죠. 다윗은 이러한 일련의 기회들로 인해 그가 안전지대를 믿음으로 벗어날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위험부담의 수위는 점점 더 높아져 갔습니다. 이번에는 사자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위험부담을 감수했고 사자를 죽이게 되었죠. 여러분의 이미 다윗의 이러한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시죠? 드디어 골리앗을 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곰과 사자의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죽이는 일이 없이 다윗이 만약 골리앗을 대했다고 한다면 어떠했을까요? 믿음으로 골리앗을 향해 달려나갈 수 있었을까요? 벌벌 떨다가 숨을 곳을 찾아 도망치지는 않았을까요? 다윗이 고작 물매로 골리앗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이유는, 아주 조금씩, 마치 아기처럼 기고, 그러다가 서서 걷고, 마침내는 달리는 기회의 단계들을 차근히 밟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은 그들이 자원해서 받아들이는 고통 혹은 위험부담의 한계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도전 혹은 기회들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위험부담의 정도와 믿음의 정도에 의해 결정되어질 것입니다.
만약 성도들의 믿음의 정도와 위험부담의 정도가 일치하지 않게 되면, 아무리 성장한다해도 그 기회를 피할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만약 위험부담을 최소화하게 된다면,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할 기회를 제공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나서 이어서 오는 기회에, 그 성도들은 위험부담을 감내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뿐 아니라, 한 차원 높은 위험부담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새들백교회에서 일전에 소그룹 리더들을 구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느끼기에 소그룹 리더가 된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었죠. 그래서, 소그룹 리더를 찾기 보다는, "H.O.S.T.s. A H.O.S.T."라고 하여서 자신의 집을 열어서 간단한 스넥과 DVD 비디오(성경공부용)를 틀어줄 가정을 찾았습니다. 그 결과, 소그룹 리더는 부담되었지만, 모임장소를 제공해 줄 많은 가정들이 자원하게 되었었죠.

안전지대를 벗어나 믿음으로 나아간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삶을 위한 기회들을 허락하셨죠.
시편 78:72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이 말씀이야말로 소그룹 사역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죠.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양치는 자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자로 인도하셨죠.
그리고 그 일을 두가지의 자격조건 즉, 진정(완전)한 마음과 능숙함을 기초로 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두가지의 자격조건을 다윗으로 하여금 아기처럼 기는 단계와 걷는 단계, 그리고 뛰는 단계를 취하게 하심으로 발전시켜 나가셨죠. 결국 다윗의 믿음이 자랐을 때, 그의 능숙함도 함께 성장했죠. 그리고 그는 훨씬 더 증가된 위험부담을 취할 수 있게 되었죠. 만약 여러분이 계획적으로 이것을 발전시키고, 기고 걷고 달리는 단계들에서 기회들을 제공한다면, 이것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입니다.

Steve Gladen, "TAKING RISKS AND SEIZING OPPORTUNITIES"

영문 원기사 보러 가기

 


 생명의 향기.../ 최송연
  
훌훌
털어버리는 거야
공기처럼

잠시 머물다 가는 生,
아웅다웅 욕심낸들
죽음 저 편 영원의 세계로
가져갈 수 있는 것 무엇인가

목련의 화사함도
자작나무의 웅장함도 
한순간일 뿐 
곧추세워 자랑할 것 없네

늘 허허로와
독함이나 해함 없이
대지를 품어 살리는 공기처럼

그렇게 한 세상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향기로
허허롭게 살다 떠날 수 있기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 2: 15-16)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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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볼산(변화산)에  대하여

    다볼산은 히브리어로 "하르타보르 ; 높은 산" 의 뜻입니다  갈리리 바다에서 남쪽으로   이스르엘 골짜기에 서있는 이스라엘 역사의 초기부터 중요한 곳의 하나이며  스불론 땅의 대표적인 산입니다   BC1125 년에 여사사 드보라가 시스라와 치열하게 전투했던 곳이며 (삿4:1-24), 기드온과 미디안 사람과 격전한 곳입니다(삿7:1-23)   갈릴리 산지와 갈멜산, 길보아산 사이에 넓게 펼쳐저 있는 이스르엘 골짜기의 한가운데 있는 다볼산은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였습니다  다볼산은 예수님께서 변화하신 변화산 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로부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십니다" (마16:13-16) 고백을 들은 후에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셔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다볼산으로 가셔서 변형된 사실을 보여 주셨으며  이 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께 나타나서 장차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눅9:28-31)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1) 다볼산은 구약시대에도 많은 전쟁이 있었던 곳이였는데 오늘날에도 세계전쟁의 한 요지가 될 가능성의 지역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다볼산 같은 지역이 있어서 많은 영적 전쟁이 있는 곳이 있는 것입니다  이 지역에서 적군들과 싸워야 하듯, 우리는 영적인 원수된 사탄과 대결해서 싸워야 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현대의 영적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했습니다

  (2) 다볼산(변화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변화하셨고 그곳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고 베드로는 여기있는 것이 좋으니 초막 셋을 짓겠다 하였습니다  다볼산은 승리의 산입니다  옛날 드보라도 시스라를 물리쳤고 기드온도 300명으로 미디안 군대를 쳤으니 승리의 산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를 보여주는 하나님으로써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2) 갈릴리 가나에서 갈릴리 바다로

    갈릴리 가나의 동리를 벗어나면 평야가 펼쳐지고 밀밭에 밀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마12:1-)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했는데 바로 그 지역입니다   그 곳을 지나 갈릴리 바다가 보입니다   갈릴리 바다로 가는 지역과 갈릴리 바다를 둘러싼 지역은 아름답습니다   디베랴는 특히 아름다우며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 한 곳입니다  바다를 끼고 돌아서 거라사 동리(막5:1)가 있으며  그리고 가버나움 동리는 예수님께서 공생에 3 년동안 가장 활동을 많이 한 중심 도시 가운데 한 곳입니다 (마 4:12-22)    베드로, 야고보 , 안드레, 요한을 제자로 부르셨으며, 예수님은 이 곳에서 중풍 병자를 고치셨고 ,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셨고 ,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셨고, 혈루증으로 앓은 여인을 낫게 하셨고 , 장님의 눈을 뜨게 하셨고 , 손이 오그라진 사람의 손을 펴게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이지 않는 표적인 도시로서 심판날에 소돔과 같은 결과를 가지게 될 것을 선언하기도 하신 것입니다 (마11:23) 

    우리가 얻을 교훈입니다   

  (1) 예수님이 계셨던 곳,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까지 살았던 곳은 참 아름답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땅, 거하는 내 집, 거하는 직장, 사업체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시편16:6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했습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현재 나의 처하는 곳이 아름답고, 교회가 아름답고, 하나님이 줄로 측량해 주신 하나님의 세계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2) 생명을 얻는 말씀이라고 하여도 한 동리에서 살아오고 같이 자란 사람에게는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 습관인 것입니다   롯도 사위될 사람들에게 멸망을 이야기 했을 때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창19:14)   가버나움의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그 곳에서 많은 이적을 행하고 가르쳤어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마11:23)   마13:57 에서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가 어디서 어떤 말을 할 때에 생명의 말씀이요, 진리이면 듣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성지순례 요약설교 말씀)  


하나님은 종종 죄인을 용서하신다. 그러나 죄를 용서하지는 않는다. / 아더 핑크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글쓴이 : 뿌리깊은 나무 날짜 : 2013-01-25

 

 

하나님은 종종 죄인을 용서하신다. 그러나 죄를 용서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모든 죄악을 미워하신다.
그는 자신의 계명에 따르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나, 그에게 반역하시는 모든 것을 미워하신다.
그의 말씀은 이를 명백히 하고 있다.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거니와”(잠 3:32) 또 다시 이르기를 “악한 꾀는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이라”(잠 15:26)그런고로, 하나님은 죄를 벌하셔야만 한다. 죄는 그의 미워하심을 받으며 따라서 그의 징벌을 초래한다.
 
하나님은 종종 죄인을 용서하신다. 그러나, 죄를 용서하지는 않는다.
또한 죄인은 하나님의 징벌을 대신한 구속자의 공로에 의해서만, 용서받는다. 왜냐하면,
“피흘림이 없은즉 사(赦)함이 없느니라”(히9:22)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나1:2) 라고 하였다.
한 가지 죄로 신은 인류의 조상을 에덴에서 쫓아내셨고 한 가지 죄로 함의 아들 가나안은 오늘날까지 이르는 저주아래 놓이게 되었다.(창9:21)
한 가지 죄로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고, 한 가지 죄로 엘리사의 종은 문둥병에 걸렸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 세상에서 끊어짐을 당했다.
 
중생치 못한 자는 신성을 믿지 못한다.
신의 속성에 대한 그들의 개념은 반쪽이다.
어리석게도, 그들은 신의 자비가 모든 것의 우위에 있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시 50:21) 고 책망하신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악한 생각을 따라 ‘신의 모양’을 그려낸다.
따라서 그들은 끊임없이 어리석음에 잠겨있다.
성경에 묘사된 신성(神性)과 속성은 그것이 명백하게 초인적인 근원임을 보여준다.
고대(古代)와 현대(現代)의 이교도들이 상상해낸 신성은 참 신에게 속하는 흠 없는 순결과 역행한다.
모든 죄악을 극도로 혐오하시는,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거룩한 하나님은 결코 타락한 아담의 후예들에게는 발견되어질 수 없다.
무한히 변치 않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자신들과 동등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타락한 마음과 적대감을 더 명백히 드러내는 것은 없다.!!
그들 자신의 죄에 대한 관념은 그들이 소위 일컫는 ‘범죄’에 국한되어 있다.
그보다 덜한 상태를 ‘결점’ 혹은 ‘실수’, ‘약점’등으로 완화시킨다.
심지어 죄가 완연한데도 변명과 죄의 경감이 행해진다.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대다수가 사랑하는 신은 어리석지는 않지만, 인정 많게 젊은이의 ‘경솔한 짓’을 눈감아 주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와 흡사하다.
그러나 말씀에 이르기를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시 5:5)하였고,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는 하나님이시로다!!”(시7:11) 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이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도리어 죄를 향한 신의 진노가 그들을 짓누를때, 그들은 이를 간다.
죄인은 자신이 영원히 고통받을 불못을 생각해내지 못하는 것처럼, 거룩한 하나님을 생각해내지 못한다.
신은 거룩하기 때문에 피조물의 행위의 기준에서 그를 받아들임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타락한 피조물이 거룩한 무한히 순결하신 하나님의 요구에 일치하는 세상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한 세상을 창조해내는것이 더 빠를 것이다. 어두움이 어찌 빛과 함께 거할 수 있는가?
순결한 자가 어찌 ‘더러운 옷’(사64:6)을 기뻐할 수 있는가?
죄인이 만들어내는 최상의 것도 부정하다. 썩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만약 하나님께 있지도 않은 것을 의롭다거나 거룩하다고 한다면, 신은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의 완전성을 모욕하는 셈이 된다.
신의 본성에 반대되는 조그마한 흠이라도 있다면,그것은 거룩할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성호(聖號)를 찬양하라!
신의 거룩함이 요구하는 것을 신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에게 피하는 모든 죄인은 그의 ‘사랑하시는 자’(엡 1:6)가 된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최고의 경배를 드려야 그에게 나갈 수 있다.

“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회중에서 심히 엄위하시오며. 둘러있는 모든 자 위에 더욱 두려워할 자시니이다”(시89:7)
그러므로 “너희는 야훼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시99:5).
그렇다.
그의 발등상’ 앞에서 가장 낮아진 자세로 엎드려야 한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로 다가갔을 때, 하나님은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경외함으로 섬겨야 한다.(시2:11) 그가 이스라엘에게 요구하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영광을 얻으리라“”(레10:3)
 
우리의 마음이 형용할 수 없는 그의 거룩함을 인하여 경외함이 넘칠수록 우리는 보다 더 가까이 그에게 다가갈 수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므로 우리도 그와 같도록 소원해야 한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고 명령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능하거나 전지하라고 이르심이 아니라, “모든 행실”(벧전 1:15)에 거룩하라고 명하신다.
 
“하나님의 신성” 중에서/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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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위한 교훈들 [로이드존스-로마서 강해]

 

* 교회를 위한 교훈들 (부록)


우리는 성경을 연구함에 있어서 실제적인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순전히 이론적으로, 또는 이지적이고 학문적인 관심만을 가지고 성경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치명적으로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① 구약 성경의 가치의 위대함을 알아야 합니다. 

❶ 구약을 배척하고, 우리는 유대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여, 이제 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옛 구약의 문헌과 합치시켜야 합니다. 

❷ 구약 성경이 우리 믿음을 받쳐주는 참으로 큰 버팀목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❸ 하나님의 뜻은 하나로서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의 뜻은 동일합니다. 

❹ 하나님의 방식도 언제나 동일합니다. 

❺ 믿음이나 교회의 교리의 영역에 있어서 어떤 난제에 부딪히게 될 때에 언제나 성령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난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② 성경은 개인적으로 적용해야 할 교훈들입니다. 

❶ 우리 자신의 믿음 자체를 의뢰하지 않아야 하는데, 심지어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 자체도 의뢰해서는 안 됩니다. 나를 구원하는 것은 내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 자신을 신뢰한다는 소리가 되며, 그것은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 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으로부터 어떤 믿을 만한 요점도 없음을 강조합니다. 

❷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❸ 구원은 그리스도로만 말미암습니다. 

❹ 그 믿음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그리스도께로 연결시켜주는 하나의 통로입니다. 

❺ 그러나 그 믿음마저도 우리의 의지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❻ 그리스도께로 향한 믿음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서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❼ 만약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의지한다면, 그것은 내 이지와 신념을 의지하는 것일 뿐 그것이 성령님께서 주시는 참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❽ 만일 우리의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가 있다면, 어느 누구도 구원에 으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❾ 왜냐하면 사람의 의지나 신념은 한계가 있어서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수시로 변하며, 그것은 영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③ 우리는 각자의 선입견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기도 없이 성경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❶ 로마서 9장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기독교회의 지체들 모두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부단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❷ 교회는 오직 하나뿐이며,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거듭난” 사람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의 신령한 공동체입니다. 

❸ 만일 교회가 배고의 상태에 처하는 것을 보더라도 놀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 전체가 다 잘못되어 나갈 수도 있지만, 우리는 교회에 속해 있기 때문에 옳다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판단 아래 자신을 항상 놓아야 합니다. 

❹ 그러나 기독교회의 장래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남은 자만 구원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❺ 많은 세력이 배교의 상태에 빠져 있고 남은 자가 너무나 연약하고 작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❻ 우리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교회의 순결성만을 추구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향하여 “개”로 취급했던 것과 똑 같은 실수를 범하는 것입니다. 

❼ 우리는 하나님의 부흥이 예기치 않은 장소와 예기치 않는 사람에 의해서 임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한국 교회에 존재하는 성령세례에 이론들

지금 한국 교회에 존재하는 성령세례에 대한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신자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성령의 임하심과 영혼이 거듭남 그 자체가 성령세례라는 관점이다. 이후에 나타나는 모든 성령의 역사를 “성령의 충만”과 “성령의 은사”로 이해하는 개혁주의의 관점으로서 한국인으로서는 박형용 교수, 서철원 교수가 있고, 외국인으로서는 존 스토트 등이 있다.

둘째로, 존 웨슬리와 R. A 토레이의 사상을 계승하여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나, 방언을 성령세례를 연관시키지 않고 봉사의 능력(power for service)이 나타나는 것이 성령세례의 증거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이들은 거듭났을지라도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면 무력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고 본다. 그렇다고 이들이 정신이 몽롱해지거나, 쓰러지거나 웃음 등의 현상을 성령세례의 현상으로 간주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평양대부흥에 영향을 미친 초기 외국인 선교사들이 이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한국인으로서는 차영배 교수 등이 이러한 사상을 주장하면서 중생 이후의 별도로 성령세례로 인하여 참된 회개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외국인으로서 로이드존스(D. M. Lloyd-Jones)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셋째로, 방언을 거의 절대적인 성령세례의 증거로서 이해하는 관점이 있다. 이는 오순절-은사주의 성령세례 운동의 공통적인 특징이며, 대부분의 순복음 교회들과 다양한 교단에 속한 은사주의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넷째로, 방언을 절대적으로 중시하지 않고 완전히 무시하지도 않으면서 성령세례를 주장하는 그룹이 있다. 이들은 신사도 운동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방언이 성령세례의 절대적인 현상이 아니며 그 대신 다양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다고 한다. 이들은 쓰러짐, 웃음, 방언 ... 모든 신비하고 기괴한 일들을 성령세례와 연관시킨다. 예영수 목사와 손기철 장로가 이에 해당하며, 외국인으로는 피터 와그너가 대표적이다.



아나뱁티스트(재침례파) 신앙을 배우자!

 

2010 7 22일은 세계 기독교 역사를 새로 쓴 날이다. 루터교세계연맹(LWF·Lutheran World Federation)은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서 제11회 총회를 열어 16세기 당시 루터교가 아나뱁티스트(재세례파)를 박해했던 일에 대해 깊은 용서와 회개를 선포했다. 총회에서는 아나뱁티스트 후예인 메노나이트 교회 대표자들이 참석했고 루터교 지도자들은 이들에게 사죄했다. 루터와 칼뱅 등 개혁가의 반대를 받으며 500년간 박해 속에서 받아온 오해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아나뱁티스트는 종교개혁 시대에 출현했던 개혁적 분파다. 형식에만 그쳤던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세례는 개인의 철저한 신앙고백에 근거해 시행돼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몸 전체가 물속에 들어가는 침례를 실시했다. 이 때문에 반대파들은 이들을 유아세례에 이어 또 한번의 세례를 받는다고 비꼬며 ‘Anabaptist, 즉 ‘재세례파’라는 별명을 붙였다.

개혁시대 초기 이들은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유아세례 거부뿐 아니라 당시 마르틴 루터 등이 추구하던 정교일치를 비판하고 철저한 정교분리 원칙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교회와 국가가 서로 대치상태에 있다고 주장하고 사회의 권력구조가 교회 속으로 전이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교회를 세속사회로부터 분리된 자발적 공동체로 정의하고 당시 전통과 관습에 도전했다.

개혁파들보다 더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던 이들은 평화주의를 지향했다. 마태복음 57장에 이르는 예수의 산상수훈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철저한 제자도를 추구했으며 이에 대한 대가는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확실한 신앙고백에 근거한 침례의식, 정교분리, 공동체, 제자도, 평화주의 등은 당시 기독교 환경에서는 혁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이단과 반역자로 몰리며 루터파와 가톨릭교회 둘 다에게 핍박을 받았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나뱁티스트 이단’을 두 발을 묶은 채 물에 빠뜨려 살해하기도 했다. 교회역사가 후스토 곤잘레스는 “순교자의 수는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다. 그 숫자는 아마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회심하기 전 3세기 박해 기간에 죽은 이들보다 많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최근 한국교회에 이 같은 아나뱁티스트 신앙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아나뱁티스트 신앙을 배우자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그 배경은 한국교회가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안타까움에서 기인한다.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도 정교일치를 추구하고, 공동체 정신을 상실해가며 세상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제자들만 넘쳐난다는 것이다. 산상수훈에 대한 설교는 많지만 산상수훈에 따라 사는 사람은 적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나뱁티스트 신앙과 삶이 고귀하게 비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루터와 칼뱅이 아니라 아나뱁티스트일까.

 

김기현 부산수정로침례교회 목사는 “화해를 바탕으로 한 평화주의, 공동체 지향, 제자도 추구 등이 현대 한국교회의 병폐를 치유할 요소가 되기 때문”이라며 “아나뱁티스트 영성은 예수 정신의 근본을 잃어가며 종교화되는 교회를 향한 치료제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적어도 오늘날 한국교회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목회자를 비롯해 평신도 역시 본질 회복에 대한 목마름으로 넘쳐난다. 아나뱁티스트 영성이 회자되는 이유는 그들은 말 대신 삶으로 예수 정신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2006 10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 소재 아미시학교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은 아나뱁티스트의 삶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피해자 가족은 즉각적으로 범인을 용서한다고 알렸고 그 어떤 보복이나 원망의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미국 언론들은 현대문명을 거부하고 살아온 이들을 별난 사람으로만 치부하다 용서의 모습 앞에 경의를 표했다.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KAC) 김경중 총무는 “현대 아나뱁티스트의 특징은 제자도와 비폭력 평화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며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을 용서하며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고 말했다.

현대 아나뱁티스트는 메노나이트, 후터라이트, 아미시파에서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신앙 색깔은 조금씩 다르지만 선조들이 추구했던 신앙적 전통은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메노나이트는 가장 큰 규모의 교단으로 메노나이트세계교회 총회 소속 신자만 160만명에 이르고 있다.

아나뱁티스트 영성은 전 세계 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걸출한 신학자이자 기독교 평화주의자로 알려진 고()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 전 노트르담대학 교수는 현대 메노나이트파 대표적 신학자다. 요더의 신학은 스탠리 하우어스(듀크대), 글랜 스타센(풀러신학교) 등 기독교윤리학 대가들에게 이어졌다. 하우어스와 스타센 교수는 자신을 각각 ‘아나뱁티스트적 감리교도’ ‘아나뱁티스트적 침례교도’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메노나이트파의 경우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김경중 KAC 총무는 “한국전쟁 당시인 1952년 메노나이트 봉사자들이 국내에 입국해 대구와 경산 지방에서 71년까지 활동했었다”며 “이들은 구호 원조활동뿐 아니라 직업학교를 세워 사람을 키웠다”고 말했다.

2001 KAC가 설립돼 아나뱁티스트 신앙과 전통을 국내에 소개하고 있으며 서울과 춘천에 아나뱁티스트 교회가 설립돼 있다. 침례신학대학교 출신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아나뱁티스트 모임 등도 형성돼 있다.

국민일보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개신교의 한 부류인 메노나이트

- 메노나이트 교파의 특징을 살펴보다

 

2010 10 09 ()                                                                                        김백형

       

메노나이트 교파의 시작은 1525 1 21일의 16세기의 재세례파 운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들은 종교 개혁 당시 기독교회의 한 지류로 분리되어진 급진주의적인 개혁파의 한 그룹이라고 볼 수 있다. '메노나이트'라는 이름은 네덜란드의 로마 가톨릭 사제였던 '메노 싸이먼스'(Menno Simons 1496~1561)에게서 비롯되었다.

 

이들 그룹의 특징은 그리스도인의 세례에 있어서 당시의 유아 세례는 참 된 세례가 아님을 주창하였다. 다시 말해 이들은 유아 세례는 참된 세례가 아니기 때문에 유아 세례를 받은 이들에 대해 성인이 된 이후에는 진실된 신앙 고백과 아울러 다시금 세례를 받아야 함을 언급했다. 때문에 이들은 '재세례신자들'이라고도 불려졌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폭력에 반대하는 '비폭력주의'를 주창하였다.

 

'재세례신앙운동' 1600년까지 1만여 명의 순교자들을 내었고, 이 신앙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던 메노나이트 운동 역시도 탄압을 받아야만 했다. 결국 유럽에 있던 메노나이트 교도들은 미국과 러시아로 이민을 가거나 종교의 자유를 허락한 예카테리나 대제가 다스리는 제정 러시아에 정착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성경이 증언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기본 신앙 고백은 물론 평화, 정의, 단순한 삶, 공동체, 봉사와 섬김, 상호 원조 등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성경 원문에 충실한 삶에 근거하여 영적인 책임을 다하는 것을 신자 개개인의 믿음으로 보았다. 초반기의 메노나이트 교도들은 매우 급진적인 개혁주의를 선포하였으나 점점 더 이들은 신앙의 보수성을 중요시하면서 역사적 배경과 신앙 고백에 대한 폭 넓은 의견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들은 폭력 사용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과 군 복무 참여를 거절하였다. 결국 이들의 이와 같은 양심적 병역 거부는 국가와의 갈등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미국의 진보적인 지식인인 하워드 진(Howard Zinn, 1922.8.24 ~ 2010.1.27)에 의하면 제 1차 세계 대전 당시 메노나이트와 러시아 정교회 내 평화주의 교회인 두호보르파 등의 비폭력주의를 주장한 기독교인들 상당수가 감옥에 수용되는 탄압을 받았다고 언급한다.

 

지금은 대체 복무제가 시행되어, 양심적 병역 거부를 허용 받고 있는 것으로 필자는 안다. 대신에 이들은 순수한 차원에서 교회와 사회, 그리고 국가에 대한 봉사의 일에 대하여 매우 헌신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메노나이트 교도들은 신앙 고백의 표현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봉사와 섬김을 강조한다. 현재에도 상당수의 메노나이트 교도들은 '메노나이트 선교협의회' '메노나이트 본부 위원회'와 같은 단체들을 통하여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도움을 주고 있다.

 

이들의 특징에 대하여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국가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한다.

2. 세례는 자기 선택 능력이 가능한 사람에게만 시행토록 한다.

3. 신앙이란 주변의 강요와 강압이 아닌 철저하게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신실하게 따라야 한다.

4. 평신도들이 돌아가면서 목사로 목회하는 교회 정치를 통한 만인 제사장설을 실천토록 한다.

5. 모든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위해 존재하며, 이를 위해 부름을 받았음에 평화주의를 실천한다.

6. 철저히 제자도를 강조한다.

7. 양심적 병역 거부를 통한 사회봉사에 적극적 참여한다.

8. 평화, 정의, 단순한 삶, 공동체, 봉사, 섬김, 상호 원조 등을 강조한다

 

http://www.newsnjoy.co.kr/news/quickView.html

 


메노니이트 교회에 대한 이해:

 

 *캐나다 셜브룩 메노나이트 한인교회에서 발췌 (http://sbrookechurch.org/learning)

 

 

◈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약속 ◈

나는 이렇게 할 것입니다

…노력할 것입니다
   - 대화를 위해 부드러운 환경을 만들어 가도록…
   - "문제를 공략하는 것이지, 사람을 공격하지 않도록"
   - 서두르지 않도록…
   -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도 직접 다가가도록…
   -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나의 지식, 경험, 관심, 
      의견을 나누도록…
   - 실제적 사실과 개인적인 의견을 구별하도록...
   -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 감각을 유지할 수 있도록… 
   -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우며 그분의 뜻을 행하도록… 

…들을 것입니다
   - "모든 목소리는 가치가 있다"는 것과 우리가 진심으로 
      각 사람의 목소리를 듣기 원한다는 것을 믿으며…
   - 내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방해하거나 따돌리지 않으면서...
   -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수용하는 마음으로… 
   - 진리, 하나됨, 의견일치, 기쁨을 위하여…

…말할 것입니다
   - 다른 사람을 대변하지 않고, 나 자신의 말을…
   - 정중하고 "거룩한 매너"로…
   - 정직하게…
   - 내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그리고 직접…
   - 간략하게…
   - 문제 자체에 대하여…
   - 온유하고 사랑의 마음으로… 
   - 주님을 존중하고 높이는 방법으로…

…될 것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사람이"
   -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한 사람이…
   - 긍정적인 사람이…
   - 인내하는 사람이…
   - 설득하기도 하지만, 열린 마음으로 설득되기도 하는 사람이…
   - 긍휼히 여기고, 민감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 
   - 내 뜻을 이루려는 로비스트가 되기보다, 
      의견일치를 만드는 사람이…


 - 어느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작성된 공동의 약속에서 ... 

 

비전 (Vision statement of the Mennonite Church)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되고, 성령의 능력에 의해 은혜와 기쁨과 평화의 공동체로 성장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치유와 희망이 우리를 통해 세상에 전해질 것입니다. 

God calls us to be followers of Jesus Christ and,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to grow as communities of grace, joy, and peace, so that Gods healing and hope flow through us to the world.
사명 

우리는 메노나이트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이해하는 성경적 믿음과 삶을 표현하며, 다문화 사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구세주이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초대합니다. 그래서 함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치유와 희망을 발견하도록 

- 진리와 거룩함으로 한 분이신 주님을 예배하고 
- 교육과 전도와 봉사를 통해 섬기고
- 평화를 만들고 청지기로 살아감으로써 지구촌을 돌보고
-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교가 잘 이루어지도록 리더십과 자원을 제공합니다. 
 

 

메노나이트의 간략한 신앙고백

우리는 만물을 지으셨고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일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델로 삼아 본받으려고 노력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믿음의 공동체로 모으시고 하나가 되게 하셔서, 우리를 열어 믿음과 삶을 다른 이들과 나누게 하십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바르게 지도하는 표준입니다.

세례는 진지한 믿음의 고백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며, 성도들은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 서로 돌보고 세우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는 또한 선한 청지기로서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것, 가족,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물질, 환경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의견 차이, 분쟁에 대해 비폭력적인 답을 찾고, 평화를 위해 일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상세한 신앙고백: www.mennonitechurch.ca/about/cof/

 

 

메노나이트에 대한 간략한 소개

대부분의 개신교는 종교개혁자들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루터교가 마틴 루터로부터, 장로교가 칼빈으로부터, 감리교가 웨슬레로부터 비롯되었듯이, 메노나이트는 메노 시몬즈라는 개혁자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유럽에서 시작된 메노나이트는 개혁자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려는 노력으로 종교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해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현대에는 오히려 제자도, 공동체, 평화라는 성경의 소중한 가르침을 말씀 그대로 실천하는 교회로 존중받고 있습니다. 말과 삶의 일치를 소중히 여기고 실천해 온 메노나이트는 지금은 북미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특히 재난과 분쟁이 극심한 지역에서 화해와 평화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참조/ 이야기 교회사 김기홍저 두란노) 

한국에서는 6.25 전쟁 후 폐허가 된 땅에 식량보급과 재활을 위한 농업과 기술 교육 등을 위해 MCC (Mennonite Central Committee) 소속 봉사자들이 약 15년간 머물며 구호사역을 했으나 교회를 세우지는 않았습니다. 최근 메노나이트 선교부는 갈등과 분쟁이 많은 한국 교회와 사회가 화해와 평화의 길을 알고 선택하도록 돕기 위해서 선교사를 파송하고 KAC (Korea Anabaptist Center)를 세워 일하고 있습니다.  

북미에서 메노나이트와 같은 뿌리와 정신을 가진 크리스천 그룹들 중에는 생활 공동체인 후터라이트(Hutterite)와 부루터호프(Bruderhof), 그리고 아미쉬(Amish) 등이 있습니다. 
 

 

메노나이트 교회와 목회자 

메노나이트 크리스천들이 일반 크리스천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보다 교회에 대한 생각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신자들의 모임이며, 특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따르겠다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성도 숫자를 말할 때 메노나이트는 멤버가 된 사람들의 숫자만을 말합니다. 그리고 빨리 멤버가 되라고 권하지도 않습니다. 스스로 진지하게 생각한 후, 자원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정하고 또한 이미 멤버가 된 형제 자매들과 서로 돌보고 세우는 관계에 충실하겠다는 약속에 의해 멤버가 됩니다. (일반 교회는 누구든지 원하면 바로 멤버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구성된 교회의 멤버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역자(제사장)입니다. 그렇게 모두가 제사장이라면 목회자는 왜 필요할까요? 다른 형제 자매들이 세상에서 각자의 직업과 역할을 통해 제사장의 역할을 한다면, 목회자는 교회에서 그 역할을 합니다. 교회의 일도 함께 나눌 수 있기에 때로 전임 목회자가 없는 교회도 많습니다. 그러나 멤버나 교회 출석자의 숫자가 많아짐에 따라 그 필요를 전담할 사람이 세워지기도 합이다. 그렇기에 세워지는 목회자는 그 필요의 크기에 따라 part time, half time, full time 등으로 일하며 다른 직업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일반 교회 목회자는 다른 직업을 갖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어떻게 교회의 목회자로 세울까요? 자격은 신학교나 교단에서 주지 않습니다. 멤버라면 신학공부 여부와 관계없이 목회자가 될 자격이 있습니다. 세워질 사람을 가장 잘 알고 가장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은 신학교 교수도 교단본부도 아닙니다. 교회의 멤버들이 가장 잘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신학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이 더 좋은 목회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경력이 많다고 좋은 목회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형제 자매들을 통해 인정받고 세워지는 사람이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 (일반 교회에서는 신학과정을 마치고 교단에서 인정한 자격이 있는 사람만 목회자가 될 수 있습니다.)

목회자의 권위는 무엇일까요? 진정한 권위는 주장해서 갖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얻게 되는 것이며, 대가를 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얻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 스스로 권위가 있다고 해도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권위는 아무 영향력이 없습니다. 메노나이트 교회 목회자의 권위는 사람들과 관계없이 하늘에서 직접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형제 자매들에 의해 인정받고 부여되는 것이며, 그만큼 존중됩니다. 곧 목회직은 형제 자매들이 그 권위와 역할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 중단됩니다. (일반 교회에서는 교회에서 사역을 하지 않더라도 교단에서 안수 받은 목사라는 신분은 계속됩니다.)         
      
목회자에 대한 대우는 어떨까요? 모든 형제 자매들이 세상에서 제사장으로 살아가기에 목회자가 특별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직업을 통해 수입을 얻듯이 목회자도 그 직업을 통해 수입을 얻습니다. 사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일한 시간과 수고만큼 봉급을 받듯이 교회에서 일하는 목회자도 일한 시간과 수고만큼 봉급을 받습니다. 일반 직업도 그 전문성과 경력, 역할에 따라 봉급 규정을 갖고 있듯이, 현재 메노나이트 교회들도 기본적으로 교단에서 제안한 Salary Guideline을 따라 목회자에게 봉급을 줍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교회를 통해 받는 재정은 사례비가 아니라 봉급입니다. (일반 교회에서는 성과 속의 구별이라는 의미에서 목회자의 급여를 사례비라고 말합니다.) 

목회자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예배와 모임이 형제 자매들의 참여를 통해 잘 이루어지도록 돕고, 또한 새로 참여하는 가정과 사람들을 돌보고 세우는 일을 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일이나 성경을 가르치는 일과 성도들의 가정을 돌보는 일을 주로 하지만, 그것도 목회자가 독점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도 은사가 있고 세워진 형제 자매들과 함께 동역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설교)와 축복의 기도를 하는 것(축도)가 결코 목회자만의 일로 제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반 교회에서는 '설교권' '축도권'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설교와 축도는 목회자만이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모든 차이는 교회에 대한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일반 교회들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제사직의 구별됨을 강조하고 그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메노나이트 교회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초대교회의 실천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멤버쉽(Membership)

교회의 멤버쉽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고백을 통해 세례를 받은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 충실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 메노나이트 교회의 신앙을 받아들이는 사람, 제자들의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나라를 세우기로 헌신한 사람은 교회의 멤버가 될 자격이 있습니다.  

멤버들은 상호간의 돌봄과 조언을 주고받고, 재정적인 헌금과 예배 참여와 기도를 통해 회중이 세운 목표와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교회"와 언약의 관계를 세웁니다. 멤버들은 회중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에 대한 의사결정에 참여합니다. 멤버들은 회중 조직 내의 직분을 갖고 또한 회중을 대표하도록 지명되기도 합니다. 

의사결정(Decision Making) 

모임의 의사결정은 멤버들의 충분한 토의를 통해, 그리고 가능한 한 합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메노나이트의 간략한 역사

 

메노나이트 신앙의 역사는 16세기 종교개혁당시에 보다 철저한 개혁을 요청했던 그룹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성경이 증언하는 세례의 참 의미가 당시의 유아세례에 있지 않음을 분명히 말하고, 이미 유아세례를 받은 성인 크리스천으로서 진지한 신앙고백과 함께 신자의 세례(Believers' baptism)를 서로에게 주었기 때문에 아나뱁티스트(재세례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메노나이트"라는 이름은 그 후 네덜란드의 한 카톨릭 성직자, 메노 시몬즈(Menno Simons)가 재세례파에 합류한 후 16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박해받고 흩어져 있던 그룹의 리더였던 데서 유래한다. 

전세계적으로 볼 때 백만이 넘는 교인들이 현재 아메리카,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역사적 배경을 소중히 간직한 채 성경에 충실한 삶을 사는 제자로서 오늘도 열심히 그리스도 복음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메노나이트 신앙은 일반 크리스천과 동일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기본 신앙고백에 덧붙여, 이 시대에 맡겨진 그리스도의 참 뜻을 충실하게 실천하기 위해 평화(peace), 정의(justice), 단순한 삶(simplicity), 공동체(community), 봉사와 섬김(service), 그리고 상호원조(mutual aid)를 강조한다.

메노나이트는 신약성경에 충실한 삶,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르는 것에 충실한 삶을 기본으로 한다. 평화주의(pacifism)는 메노나이트 신앙의 주춧돌이다. 메노나이트는 폭력 사용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기에 전쟁이나 군복무 참여하지 않는 대신에 순수한 의미에서의 교회와 사회, 국가에 대한 봉사의 길을 택한다. 메노나이트 교회는 신앙고백의 중요한 표현 방법의 하나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봉사와 섬김을 강조한다. 지금도 상당수의 메노나이트 교인들이 메노나이트 선교부나 메노나이트 구호단체를 통하여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 선교사로서, 또는 자원 봉사자로서 일하고 있다. 

초기 메노나이트들은 주로 스위스와 독일에서 온 당시의 순교자 출신 가정의 후손들이다. 그러나 핍박을 피해 상당수의 메노나이트 교인들이 서유럽을 떠나 신앙의 자유를 좀더 보장  받을 수 있는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러시아는 한때 메노나이트를 환영하여 정착을 허락해 주었지만,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에 걸쳐 박해하게 되었고, 메노나이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또 다른 세계로 이주하게 되었다. 상당수의 메노나이트들이 이때 미국 서부의 여러 지역으로 이주했는데 오늘날은 인구가 많은 수로 증가했다. 이들 중 구세대에 해당하는 많은 사람들은 아직 독일어 방언(low German)을 사용하며 음식문화도 전통을 따른다.

지금도 상당수의 메노나이트 가정에서 low German이 사용되고 있다. 스위스와 독일 메노나이트들은 18, 19세기 펜실베니아에서의 정착을 시작으로 마침내 북아메리카(캐나다) 중서부 지역을 넘게 되었으며, 한편 선교를 통해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흩어져 있다. 

현대문명의 이기(利器) 사용을 거부하고 아주 간소한 옷차림과 단순한 생활 양식을 하는 사람들로 널리 알려진 아미쉬는, 메노 시몬즈라는 리더에서 메노나이트가 나왔듯이, 비슷한 시기에 암만이라는 리더의 영향으로 비롯된 재세례파 그룹이다. 또한 후터라는 리더에 의해 형성된 후터라이트라는 재세례파 그룹이 있는데, 그들은 문명의 이기를 부분적으로 사용하며 사유재산 없이 공동으로 살아가는 생활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이런 다양성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아야 한다는 소명(거룩함, 구별)과 시대의 필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소명(선교, 봉사) 사이에서 어느 쪽에 보다 강조점을 두느냐에 따라 나타난다. 전자를 보다 중시하는 재세례파는 복장을 간소화하고 여자들은 머리 덮개를 하고 바깥 일반 사람들과 구별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면, 후자를 보다 중시하는 재세례파는 바깥의 더 큰 공동체를 섬기기 위해 노력한다. 서로 상대방이 무엇인가 중요한 소명을 놓치고 있다고 본다면 서로를 품기 어렵지만, 메노나이트나 아마쉬나 후터라이트나 모두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수님과 제자들의 발자취, 초대교회의 건강한 모습을 보다 가까이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다. 

 

*셜브룩 메노나이트 한인교회 바로 가기:
http://sbrookechurch.org/main

 

세 종류의 그리스도인

 

아더 핑크

 

일반적으로 말해 소위 “그리스도”이라고 불리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설교자에 의한 그리스도인, 자아에 의한 그리스도인, 하나님에 의한 그리스도인이다.

 

‘설교자에 의한 그리스도인’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받고 교회의 정회원이 되었을 뿐 아니라(특수한 직임은 맡지 않았을지라도), 책임 연령에 이르면 전도자에게 ‘고백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러한 강요받는 형태와 정도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에서 대중최면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법을 통하여 ‘앞으로 나오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도 없이 ‘당당한 일을 하도록’,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모이도록‘, ’하나님의 백성들과 연합하여 악에 대항하여 싸우는 십자가의 군병이 되도록‘ 권유받는다. 이러한 신자들은 버섯과 같아서 밤사이에 돋아 올라 잠시 동안 지탱하나 뿌리가 없어 견디지 못한다.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소위 ’인격적인 사역‘이란 미명하에 많은 사람들이 강요받는다. 이는 마치 떠돌이 외판원들이 세일하는 방식으로 실적을 올리려는 수작과 유사하다.

 

‘자아에 의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방금 앞서 말했던 사실들로 경고 받은 자들이며, 종교적인 협잡꾼들에게 농락당할까봐 두려워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협잡꾼들이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과 영교함으로 ‘만사형통’하다고 농간부리는 데 속지 않으려고 주의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만인을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그리스도께서 전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복음을 믿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받아 들인다.

그들은 요한복음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과 로마서 10:16(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라는 말씀을 단지 지적으로 승인하거나 받아들인다. 요한복은 2:23-24의 말씀은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많은 사람이 그를 믿었으나 저희가 바리새인을 인하여 회당에서 쫓겨날까봐 그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께 칭찬 듣는 것보다 사람에게 칭찬듣기를 더 좋아함이라”. 여기에서 그들의 믿음이 문제가 된다. 자연인도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들은 나름대로 만사형통하게 나아갈 수가 있으며, 기뻐할 수가 있다.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흔들 수 없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놀라운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이 지적으로 승인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러한 자들은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전적으로 자기 의지에 의해 좌우된다고 생각하는 자들과 다를 바 없다.

타락한 인생의 운명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처분에 달려 있다는 사상은 이러한 교만한 자들에게는 정말로 관심이 없다.

그리스도께 나아온다는 자체가 영적인 활동이지 자연적인 활동은 아니다.

중생하지 못한자는 죄와 허물 가운데 완전히 죽어 있기 때문에 어떤 영적 인 활동도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께 나아온다는 것은 주님을 절감하는 영혼의 사역이며, 잃어 버린 바 된 죄인을 영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게 된 결과이며, 그를 간절히 사모하는 애정의 발로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과 원수’된 자연인이 성자 하나님을 사모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에 의한 그리스도인’은 은혜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지으심으로 말미암는다(엡 2:10).

그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듭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고 새로운 지각과 활동을 하게 된다.

옛 성품으로써 신령한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없는 무언가 새로운 것으로써 교통하는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은 ‘영으로 난 자는 영이니’(요 3:6)라고 말한 분과 동일한 성품에 참예한다. 그의 거룩한 성품에 참예한다.

그것은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 전가시킨 은혜의 원리이며, 그를 기쁘시도록 열매 맺게 하는 성향이다.

중생은 어떤 지루한 과정이 아니라 즉각적이다.

거기에는 다른 아무것도 추가 될 수 없고 제해버릴 수도 없다(전 3:14). 그것은 하나님의 법정적인 소산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매 그대로 되었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중생은 성직자의 마술적인 사역의 결과이거나 개인적인 체험의 결과가 아니다.

중생받는 자는 순전히 피동적이며 무의식중에 그것을 받는다.

성육신 하신 진리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3).

혈통에 대해서 - 유전은 이 일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교도들의 조상들이 수세기 동안 우상을 숭배하였지만 그 후손들을 중생시켰기 때문이다.

육정에 대해서 - 하나님의 살리시는 역사 이전에 인간의 자의지는 철저히 하나님과 ㅂ나대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뜻에 대해서 - 설교자는 자신을 중생시키지 못할뿐더러 남도 중생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생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전권적인 역사로써만 가능하다.

 

또 다시 그리스도께서는 선포하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그 결과는 명백함)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이것의 원인과 작용은 인간으로서는 깨달을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신비한 역사임)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이러한 하나님의 선포는 마치 빛이 어둠과 구별되듯이 모든 종교적인 가르침과는 완전히 판이하다.

 

포도나무 선교회/개혁주의마을



신앙생활이란 무엇일까?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나올 수 있겠지만, 필자가 보는 신앙생활이란 영적 전쟁을 치르는 싸움터에서 진군하는 용사들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성도이기에, 날이면 날마다 치러야 하는 영적 전투는 참으로 치열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하여서, 믿음이 좋다고 하여서, 시련이 찾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오히려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악으로 악을 갚을 수 없기에 더욱 절박하다.

물론, 그리스도 우리 주께서 십자가로 이겨놓은 싸움에 우리는 그저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마지막 승리는 이미 획득해 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곳까지 가는 동안, 성도의 길은 여전히 악전고투의 연속 선상이라고 하여도 결코 무리한 말은 아닐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 만사가 형통하고 잘 된다.”라고 말하지만, 글쎄, 그 잘된다는 것이 어느 선에서 어떻게 잘되는 것인지, 때때로 막막할 때가 있는 것이다. 세상은 이미 상식이 통하지 않은 세상으로 변한지 오래다. 온갖 불법과 불의가 대세를 이룬다. 이런 험악한 말세를 살아가는 현대 성도들에게나 과거의 성도들에게나 당해야 하는 환란과 어려움은 세상 불신자들의 생활보다 어쩌면 성도이기에 더욱더 극심할 수가 있다. 구약의 요셉이 그랬고, 신약의 바울 사도가 그랬고, 초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다 그러했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어서 때로는 나의 실수로, 때로는 전혀 내게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억울한 모함을 받거나, 오해를 사거나 이런저런,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빠질 때가 잦고, 그로 말미암아 큰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가 많이 있었던 것이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경 속, 믿음의 용사들의 삶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지만, 특히, 구약의 왕들 중 ‘여호사밧’과 그의 ‘브라가 골짜기’의 전술(?)과 막강한 전승 기록을 읽게 되었고, 그 방법을 내 삶에 적용시킨 후, 환난과 시련 앞에서, 그토록 두렵던 마음에 큰 담력을 얻게 되었으며, 하늘의 평강과 축복을 누릴 수 있었기에 우리 독자님들에게도 이 브라가 골짜기의 비밀을 잠시 소개하고 싶어진다.

역대하 20장에 나오는 “브라가 골짜기”의 전쟁은 다른 말로 ‘드고아 전쟁’이라고 불리는데,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졌던 때였다.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는 악명 높은 '아합'이 다스렸고, 남 왕국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여호사밧’왕이 다스리던 때라, 백성들이 편안하게 거하던 그때, 모압, 암몬, 마온 몇 사람들이 동맹을 맺었고, 시쳇말로 연합군을 조직해서 유다 나라를 치려고 올라왔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유다 왕 ‘여호사밧’은 크게 두려워했다.(대하 20: 3) 갑자기 몰려온 연합군의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며 떨고 있던 그는 이 문제야말로, 여호사밧 왕,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인 것을 판단했던 듯, 그는 직면한 문제를 들고 조상적부터 섬겨 오던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온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나이다 우리는 어떻게 할 줄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 대하 20: 3-13절)

여호사밧 왕은 이렇게 국가의 위기 앞에서 자기 자신도 기도했지만, 온 백성에게 금식하며 기도하라고 선포했음을 보면서 지도자의 선이 무엇인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지도자란 난제 앞에서 해결책을 제시하는 지혜와 통솔력이 필요한 것이다. (작은 단체건 큰 단체건 지도자는 한 두 사람의 말만 듣고 움직이면 안된다.)

그런데, 여호사밧 왕이 전술적 지략이라고 내놓은 것이 “백성들아, 금식하며 기도하라.” 라고 하는 것이었다. 놀랍지 않은가? 이런 말을 현대 지도자가 했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도 정신병자라 치부하고 말았을 법한 희안한 전술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을 구할 때, 하나님의 신이 하나님의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여 두려워 떨고 있는 유다 백성에게 기적같은 말씀을 약속으로 주셨다. 기도 응답을 받은 것이다.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 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어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하리라 하셨느니라” (대하 20:10-17) 했다.

이 말씀을 들은 여호사밧 왕은 몸을 굽혀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리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도 모두 다 하나님께 경배했고, 그대로 믿고 밀고 나갔다. 무기와 철갑옷과 병거 대신 찬양으로 적군 앞에 나아갔고, 여호사밧 왕은 계속해서 믿음의 말을 선포하고 백성들을 격려하며 앞으로 진군했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대하 20:20) 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두려움을 물리치고 백성들과 함께 노래하는 사람들을 택하여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했다.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대하 20: 21)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게하셨다 (20:21-22) 왕과 백성들이 담대하게 찬송을 부르면서 드고아 전쟁터로 나아갔고, 연합군 앞에서 칼과 무기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을 부르며 나가자고 하는 것이 두려움의 적을 물리치는 전략과 전술이었던 것이다! 황당한가?

그런데, 더욱 황당한 것은, 찬양 소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울려 퍼졌을 때, 이상한 일이 현실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그 연합군들의 눈이 갑자기 어떻게 된 것인지, 자기네들끼리 서로서로 치기 시작하는데 이건 가관치도 않다. 완전히 다 죽고 멸종할 때까지 그리했다고 기록되었다. 글자 그대로 자중지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믿을 수 있는가?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것이 사실로 성경 말씀에 엄연하게 기록되어 있다. 찬양만으로 유다 왕 여호사밧과 그의 백성들은 벌떼처럼 몰려오던 모압, 암몬, 마온, 이 세 나라 연합군들을 손 하나 대지 않고 다 물리쳤던 것이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자칫, 서로서로 미운 마음이 생기면 그때 흔들리면 안된다.)

그뿐이 아니다. 적군들이 가지고 왔던 수많은 재물. 의복, 보물을 전리품으로 거두었는데, 전리품이 얼마나 많았던지 유다 백성들이 그 전리품을 거두는 데만 사흘 동안이나 거두어 들였다.라고 증거하고 있다. (대하 20: 22-25) 전리품을 모두 거둔 후에 그 골짜기의 이름을 “브라가 골짜기”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송축의 골짜기” 란 뜻이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내용이다. 어려움을 당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어려움이 있을 때 건져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어디에서 건져 주시는가?.

(1) 사탄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내신다

본문의 암몬 자손, 모압 자손 그리고 마온 사람들, 이 연합군은 영적으로 사탄의 군대를 의미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 연합군들이 하나님의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을 집어 삼키려고 달려든 것 같이 사단 마귀는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방해하고 침범하는 것이다.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예수님과 거리가 멀어지게 하고 구세주이심을 믿지 못하게 도전해 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사단을 대적하며 싸워야 하는데, 오히려 아군을 향해 총칼을 겨누는 촌극을 벌리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을 도처에서 보게 된다. 자칫 서로서로를 향해서 총칼을 겨누는 것은 이미 사단의 조종으로 말미암아서 영안이 멀어진 것이라고 보면 틀림 없다. 이런 사악한 사단의 장난을 인간인 우리가 능히 대적하고 싸워서 이길 능력이 없다. 그렇다. 인간은 마귀와 싸워 이길 능력이 없다. 착각하지 마라. 사람이 제 아무리 학술적으로 논리 정연하게 설명하여도 마귀의 요술을 당해 낼 수가 없다. 죽이려고 모함하며 덤비는 데 이길 자가 없는 것이다.

마귀는 영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예를 들면, 우리가 마귀를 잡으려고 몽둥이를 들고 화가 나서 달려가면 저쪽에 있던 사탄이 피해 버리면 나만 벽에 부딪혀서 상하게 된다. 영적 전쟁은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함으로 전쟁에서 승리했듯,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수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내게는 없다. 예수님께서도 막 9:20에서 제자들이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것을 보시고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막 9:29) 말씀하셨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하여 저를 대적하라” (벧전 5:8-9) 권고하신다.

우리는 이미 사탄을 이겼고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께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승리케 하셨음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요 16:33)

(2) 우리를 죄에서 건지신다.
사실상 인간의 근본 문제는 사회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 문제이다. 인간이 죄에서 해방을 받고 온전히 변화되기 이전에는 언제나 어두운 생활일 것뿐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타락한 이래로 선한 것을 미워하고 악한 것을 택하는 성품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다. 눈을 들어 세상을 한 번 바라보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마귀의 세력이 판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다. 의식주만 해결되고 돈만 있으면 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의를 따라, 진리를 따라 선하게 살아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숨이 막힐 듯 답답한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런 모든 것은 다 인간의 근본 문제인 ‘죄’가 해결 받지 못해서 그렇다. 내 죄 문제도 주님께 들고 나가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사밧 왕은 자기들의 부족함을 깨닫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내어 맡겼더니 문제가 해결이 된 것이다. 우리의 죄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해야 하는 것이다!

(3) 어려운 역경에서도 우리를 지켜 보호하신다.
세상에서 어려움이 없는 자가 누가 있겠는가? 어려움이란 대개 자기의 잘못을 통해서 오기도 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전혀 잘못한 일이 없는 때도 심한 어려움에 빠질 때가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여호사밧 왕이 그러한 경우이다. 구약 성경에 요셉이 그런 경우이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당하는 어려움, 이런 때에는 정말 괴롭다.

그렇지만 염려할 것도 없고 분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이런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한 전조임을 깨닫고 믿어야 한다. 오늘 여호사밧이 당한 어려움은 곧 브라가 골짜기의 축복을 받기 전에 일어난 하나의 현상이었다. 요셉도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감옥에 갇힌 후, 극심한 환난과 고통을 모두 통과한 이후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것이다!

여호사밧과 그의 백성들에게 엄청난 재난이 찾아 왔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그 환난 때문에 그들이 망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환난은 큰 축복의 장소에 들어가게 하는 충실한 안내자가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도우시면 모두 그렇게 된다. 주님을 믿는 우리도 그렇다. 내가 실수하여 당하는 어려움이건, 모함에 빠져서 당하는 억울한 시련과 환난이건, 그 모든 고난과 환난을 두려워해서도 안되고, 내게 환난을 가져다 주는 사람에게 물리적으로 대항하거나 육신적인 싸움을 싸우지 말아야 한다.

이런 때를 당했을 때, 곧 죽고 망할 것 같이 몰려오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하나님 약속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기도와 찬송으로 나간다면, 그때 주님께서 준비해 두셨던 복병을 풀어내 주시고 환난에서 건져내 주시는 것이다! 주께서 도우시면, 환난과 두려움의 골짜기가 ‘축복의 골짜기’, ‘브라가 골짜기’, ‘송축의 골짜기’로 변하게 되는 환희의 순간을 내가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좁은 길을 지나가고 십자가의 길을 지났더니 광명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시험의 길을 거쳐서 예수 그리스도의 품을 떠나지 않았더니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된 것이다. 시험은 힘들고 전쟁은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아름다운 송축의 골짜기가 내 앞에 좌~악 펼쳐지게 되는 것, 이것이 ‘브라가 골짜기의 비밀’인 것이다. No cross, no glory라고 했던가…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역대하 20: 20 하반절) “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 50: 15)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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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부. 중생|다시읽고싶은글
keeper77 | 조회 93 |추천 0 |2006.07.31. 23:53 http://cafe.daum.net/keeper77/17Ia/13  

 

 

10. 중생


  중생이란 본질적으로 두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다. 첫째 본질적인 측면, 성품, 우리의 마음 등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중생은 회개하도록 만들고 믿음으로 사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새 생명의 시작이다. 이것을 현상으로 보면, 중생은 오관의 영역을 뛰어 넘을 수 없는 우리의 관찰될 수 없는 것이기에 현상학적으로 표현하면, 그러한 새 생명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노출되어서 사람들이 명백하게 볼 수 있는 어떤 변화된 삶의 증거를 중생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의 본질적인 변화는 반드시 우리 삶의 주변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반드시 일어나는 숨길 수 없는 것이다. 중생이 우리 삶의 특징적인 변화를 수반한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본질적인 변화이기는 하지만 중생의 변화를 현상학적으로 관찰해서 그 증거를 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생은 신비적인 것이지만, 가시적으로 눈으로 관찰하는 것으로 현상적인 중생의 증거가 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중생이란 의미가 통일된 하나의 의견으로 모아지는 것은 아니다. 중생이 의미하고 있는 그 범위를 두고 학자들 간의 의견이 약간씩 다르다. 예를들면, 존 칼빈은 중생을 회심하고 돌이키고 성화까지를 포함한다고 말한다. 이런 말은 신학적 이유가 있다. 벨직 신앙고백서에서는 중생을 새롭게 되는 삶의 전부라고 하였다.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는 중생이라는 의미를 약간 좁게 해석하였는데, 본질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였던 것이다. 물론 현상학적으로 죤 칼빈은 성화까지를 중생의 측면을 접근하려고 하였다. 중생을 이해하는 가능한 것은 이것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접근한 것이 아니라 현상학적인 측면에서 접근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생이 어떤 변화를 수반한다고 했는데 그 변화가 단순히 어떤 부분에 멈추는 것이 아니하고 성화에 까지 변화가 나타난다면 그 변화를 중생이라고 이해했다. 왜냐하면 중생의 증거가 굉장히 다양하고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넓게 이해했다는 것은 중생을 단순히 본질적인 측면에서 신비로운 길로 성령의 하시는 우리가 볼수 없는 길로만 남겨놓지 않고 그것을 관찰 가능한 증거를 수반하는 경험으로 중생을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 넓게 이해되는 것이다.


  벨직 신앙고백에서는 중생을 새롭게 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를 말한다. 그 이유는 그 중생이 그렇게 새롭게 된 삶에 중요한 변화들을 수반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것이 중생이다.  중생을 현상학적으로 보면 예수를 믿을 때 한 번 일어나는 사건으로 간주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보통 중생을 우리 일생에 단 한번 예수 믿을 때 일어나는 신생이다 라고 생각하는 데 이것은 본질적인 이해이다. 이 본질적인 신생이 우리 삶의 인격이나 말이나 생각이나 의지나 인간관계나 죄에 대한 관계나 하나님에 대한 관계나 교회에 대한 관계나 이 모든 것을 변화로 이끌어 갈 때 그 나타나는 변화되는 중생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면 그것을 중생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고 신학자들이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중생을 넓게 본 것이다. 중생이 단 한번 일어나고 마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생에서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현상학적으로 볼때 우리 일생에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현상학적으로 보는 것을 지지한다. 본질적으로 본다면 단 한번의 인생에 한번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현상학적으로 본다면 우리의 생애의 전반에 걸쳐서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이유는 그 중생의 내적인 변화가 외적인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 내적인 변화가 국한된 시간이나 국한된 국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의 삶, 전 생애 동안에 중생이 어떤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정도에 있어서, 다양한 변화에 있어서 중생이 우리의 어떠한 변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 한 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최근에 개혁주의 신학자들 가운데에는 성화와 중생을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성화를 가르치면서 중생을 같이 이해하려고 하는 이유는 중생을 현상학적으로 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중생이 실제로 어떤 변화를 수반하는 사건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기 때문에 성화를 이야기 할때 그 성화는 우리의 삶에 성숙이고 개성이고 변화이다. 그러한 성화론적 변화는 중생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성화를 중생과 떼어서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예수를 믿을때 한 번 중생하고 믿으면서 거듭 거듭나는 것 날마다 죽고 날마다 새롭게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성화라는 것을 중생으로 말하자면 성화는 반복된 중생이고 중생은 성화를 위한 중생(거듭남)이다. 성화는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반복된 중생이다. 그래서 어제 나는 죽고 오늘 나는 새로운 사람이다 라는 말이 성립된다. 다시 오늘의 나는 죽고 내일의 나는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다. 중생은 무엇인가하면, 성화를 위한 거듭남이다. 그냥 목적없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성화의 목적을 앞두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성화와 중생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면에서 성화론을 다룰때, 성화와 중생을 같이 이해하는 신학자는 상당히 성경적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대표자 신학자가 누구인가하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수인 닥터 데이비스가 있다. 이분은 주로 성화론을 다룰 때 중생과 같이 이해하였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부터는 중생을 우리 일생에서 일어나는 단 한 번의 일어나는 신비적인 사건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본질적으로 말하는 것도 옳지만, 중생이란? 본질론적인 좁은 의미에서 정리하면, 성령의 사역으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엡2장 1~2절)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리심을 받아서 새 생명 가운데서 출생한 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중생이란? 거듭나고 회심과 믿음과 의롭게 되는 성화에 이르는 전 과정을 말한다. 본질론적으로 중생이란 것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리심을 받아 새 생명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넓게 말하자면 중생은 단순히 우리의 구원의 경험에 제일 먼저오는 한번있는 사건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서 회심하고 믿고 거룩하게 되는 전 과정의 문제라고 이해해야 한다.


  중생이란 말은 구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성경에서는 딱 두 번에 걸쳐 나오는데,  마태복음 19장28장에 나타나는 중생은 한 개인의 신생을 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종말론적으로 온 우주가 새롭게 될 것을 중생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신생에 관해 말하는 것은 오직 디도서 3장 5절에만 있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진실로 거듭남의 중생한다고 말한다. 마19장28절의 종말론적 우주론적 변화에 중생이란 말을 쓰는 이유는 만물이 새롭게 된다는 것은 현재 이 땅에 있는 것을 새롭게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는데 이것은 있던 땅을 고치는 것이 아니다.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은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없는 이유는 마19장28절 중생이라고 말하는데 이 중생은 본질적 변화를 말하는 것인데 현재 있는 것을 고치는 것은 개선이 아니다. 새로운 것의 유익이다. 그전의 어떠한 것이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이란 그전에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어떠한 것이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역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완전의 새로운 것으로 재 창조를 의미한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중생을 언약적으로 볼 때 사람이 태어나면서 죄인이 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아담의 행위언약에서 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약적으로 죄인된 것이다. 그래서 율법의 기능은 죄를 더욱 죄 되게 만들고 죄를 생각나게 만들고 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가르키는 삼중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율법은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하나님의 경륜이다. 율법에는 구원을 상징하거나 구원을 암시하거나 구원의 가능성이 일체 그안에 없다. 그런데 행위언약에서 태어나는 자는 다 죄인으로 태어난다. 결국에는 언약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구원에 이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새 언약의 사람으로 태어나야 한다. 아담의 행위언약안에서 태어남으로써 죄인되고 예수그리스도의 새 언약안에서 태어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적으로 볼때 중생은 필연적이다. 중생이 없이는 언약에 들어갈 수 가 없다. 따라서 중생은 새 언약의 들어갈 수 있는 절대 조건이다. 중생은 우리가 새 언약안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동시에 새 언약안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언약적으로 말하면, 중생은 그리스도의 새 언약에 백성이 누리게 될 은혜에 참여하기 시작하는 사건이다. 우리가 아담 언약안에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담이 우리에게 물려준 모든 죄의 전가와 죄의 결과를 모두 우리에게 전적으로 다 물려받게 되고 그 저주와 심판 아래에서 살아가기 시작한다. 이것은 우리가 아담의 언약가운데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이 중생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약속된 그 모든 은혜를 언약안에서 누리기 시작하는 사건이다. 그러하므로 예수 믿고 구원받는 다는 것은 지성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지식을 깨닫는 것도 아니고 이방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깨달아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새 언약안에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은 사람의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일평생 세가지 중요한 사건은 태어나고 결혼해야 하고 죽는 것이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어보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으로 집행하신다. 태어날 시간과 장소와 부모를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저 감사하므로 수용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언제 어떻게 부르실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단 한번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 결혼이다. 결혼생활은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선택적 생활에 맡겨진 것이다. 이 세가지 중대한 사건중의 하나가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결혼에는 권리가 있고 책임이 있는 것이므로 잘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언약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새 언약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의와 진리로 태어나는 사건이다. 태어남으로서 구원받는다. 기독교의 이 진리를 잊지마길 바란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남으로써 자녀로 살고 태어남으로써 자녀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다. 아무런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선행을 믿어 하지 않고 기뻐하시지만, 그러나, 그 선행으로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다. 오직 거듭나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강단에서 설교자가 설교할 때, 중생하길 바랍니다! 라고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저 회개하라고 말할 수 있고, 다만 믿어라 라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중생하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 그 청중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다. 단지 외치기만 할 뿐이고 그 외침을 통해서 중생케 할 일은 성령이다. 그래서 성령이 외치는 자와 함께 하지 않으면, 그 외침이 무익하고 변명일 뿐이다. 특별히 강단에서 서는 목사들은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설교문을 잘 준비하고 아무리 성경본문을 철저히 잘 준비하더라도 아무리 뛰어난 수사적 표현을 동원하여 증거한다 할찌라도 성령이 불러주지 아니하고 성령이 중생케 하지 아니하면, 그 전하는 외치는 자의 수고가 무익되고 전혀 헛된 것이다. 이 말은 목회의 성공도 하나님의 뜻이고 목회의 실패도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인간이 목회에서는 적어도 성공했다, 실패했다 라고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하나만 가르칠 뿐이다. 이것이 충성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 훌륭하고 업적을 이룬 사람 이라고 말하지 않고 착하고 충성된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상 받는 사람은 크게 이룬 사람이 아니다. 언제나 착하고 충성된 종이다. 충성이라는 말은 주어잔 조건하에서 있는 힘을 다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사역에 바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우리를 찾지 않고 그 자세로 우리를 찾는 것이다. 어떠한 자세로써 말이다. 그 자리에서 어떠한 자세로 살아 왔는가 그것이 착하고 충성된 종인 것이다. 따라서 충성된 종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너무 큰 것을 이룰려고 하지 말고 너무 높이 올라가려고 하지 말라! 언제나 오늘 내게 그 주어진 작은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지내는 것이 충성된 종의 자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에 따라 그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지내는 것이 착하고 충성된 종의 자세이다. 여러분 삶의 자리를 바꾸려고 하는 시도자체 어려운 것이고 불순종의 모습이다. 바꾸려는 하는 과정에서 많은 마찰이 생기고 어려움이 생긴다. 그래서 신앙인들이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것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대로 너희의 부르심 행하라고 하였다. 그 자리에서의 수용성이 요구된다. 주시는 대로 잘 받는 것이다. 다른 사람 쳐다보지 말고 여기 이 자리에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여기 이 자리에서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에서 묵묵히 충성할 때 열매 맺는다. 지금 이 자리에서 충성하는 것이 최선이고 지혜이다.


  중생에 반드시 있어야 할 필연성을 살펴보면,(요3장 3~5절) 기독교 신앙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중생이다. 기독교 복음의 가장 위대한 것은 중생이다. 중생은 완전히 본성이 변화는 것이다. 과거의 사람이 죽고 새로운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수행이나 고행이나 깨달음이나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이다. 구원의 이방종교의 특징은 한 개인의 노력을 요구한다. 중생을 통해 받는 구원은 세상사람들이 어떤 것으로 이룰 수 없는 존재인 것으로 우리가 받은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지도 구하지도 못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들어온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전적인 은혜로 일방적으로 주신 것이다. 우리의 주어진 구원은 특별한 구원이다. 유대인의 지도자요 바리새인인 니고데모는 성령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출생하므로 (본질의 변화를 가지므로) 가능한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니고데모의 구원에 대한 이해는 적어도 행위에 따른 순종이거나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의를 이루는 것이나 종교적인 규례나 규정을 따라서 충실하게 살 때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이해를 완전히 거부하신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어떻게 해야 구원 받을 것이냐 가 아니라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인데, 구원의 방법에 관한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에 전환을 요구하신 것이다. 구원은 니고데모가 생각해 왔던 그런 종류가 아니다. 사람으로부터 태어난 사람 혈육을 입고 태어난 사람들이 거기에 더해질수 있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은 근본적으로 지금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인데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마치 사과와 오렌지가 다르듯이 종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마치 오렌지가 사과 되고, 사과가 오렌지 되듯이 종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따라서 구원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어떤 새로운 종으로의 변화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그것은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되는 것인가? 태어나는 것이다 변화가 와야 하는 것이다.


  아마 니고데모는 그날 밤에 절망을 느꼈을 것이며, 이것은 그기 평생을 유대인의 규정에 따라서 말씀을 지킨다고 헌신적으로 노력해 왔지만 그러한 자기의 노력이 이룰 수 없는 곳에 구원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해볼 수 있는 곳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구원은 자기가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애쓴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간절히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 말씀하시는데 성령은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이 동에서 서로 불고 부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이 성령이 신비롭게 역사해서 역사하는 사람만이 거듭나고, 거듭나는 사람만이 곧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구원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을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율법에 매달려 있던 사람들에게는 주어진 사망 선고이었다. 니고데모에게 그날 밤에 절망감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특별히 결정적으로 절망감을 안겨 준 것은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어로 “게네 아우트”로써 부정시제 수동형으로 위로부터 중생되는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지방에서 갔을 때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이 역사하시어 루디아가 그 마음을 열어 청종케 한 지라 라고 했을 때, 루디아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을 열어주신 것이다. 말씀을 들을 때 바로 그 때가 시제가 없는데,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가 없는 부정시제인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하자면,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주시는 그 시간이 언제인지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사도 바울이 설교하고 있는 중의 그 어떤 때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여자의 마음을 갑자기 열어주신 것이다. 그 어떤 때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 열다 라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어떤 힘의 작용이 아니라 자기 밖에서부터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힘에 의해 열려지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있던 중에 그 여자의 마음이 열려진 것이다. 그 말씀을 들을때 그 말씀을 깨닫아 알고 그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는 욕망과 소원이 생긴 것이다.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은 성령이 그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는 것이기 때문인 것처럼 사람이 위로부터 태어나는 사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닌까 과거인지 현재인지 미래인지를 규정할 수 없고 부정시제로서“위로부터”란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 그 사람이 성령에 의해서 중생하게 되는 때,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 이 말씀앞에 절망과 무력감 ,박탈감을 가진 것이다. 그는 그날 더 나은 종교적인 의무감 대문에 예수님을 찾아 오신 것인데, 즉 종교적인 모든 의무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러나, 가르침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오직 거듭나야 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네가 거듭나야 한다”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요한 복음 3장에서는 위로부터 태어나 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에는 구원이란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나님의 은혜로서 거듭남으로서 얻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 중생이 필요한가? 인간의 육체와 깊은 관계가 있다. 사도요한과 사도바울 사이의 육체에 대한 이해가 조금 다르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육체는 인간의 타락성이나 우리 인간을 죄로 이끌어 가는 죄의 원리를 말한다. 그래서 우리 몸속에 죄의 원리를 담고 있는 그릇과 같아서 그 몸을 입고 있는 한, 사람은 죄를 완전히 벗어 버릴수 없다 말한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육체라고 하는 것은 죄의 강한 윤리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사도요한이 말하는 육체는 단순히 육체의 원리 죄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대조된 존재라고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성령의 나라이므로 성령과 관계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자연인들은 성령과 관계가 없는 죄에 종된 사람이다. 그래서 사고 요한이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람이 되어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고 보고 있다.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 중생이 되어야 한다고 사도요한은 말하고 있다. 중생은 한마디로 영적 존재의 출생이라고 말한다. 영적인 사람은 누구인가? 방언해야 하고 신유해야하고 기적해야 하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아니고 중생한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다. 왜냐하면 중생이 곧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한가지 사실은 분명한데, 영적이다 라고 말할 때, 그 영적인 사람은 곧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 중생한 사람이 다 영적인 사람이고 이렇게 되는 사람이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 강림후 그가 설교할 때, 유월절 지내기 위해 모인 모든 사람에게 설교할 때 “너희가 회개할 때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이 말은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 곧 회개하는 사람은 다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 중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순절 계통에서 성령세례를 말하는데 성령세례가 꼭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 믿을 때 받는 성령과는 다른 성령 체험이라고 말한다. 예수 믿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중생도 성령의 능력이고 믿음과 회개도 성령의 능력이고 의롭게 되는 것도 성령의 능력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고 난후에 성령의 세례는 무엇을 가져오는가? 방언을 수반한다. 성령세례를 말하는 것은 오순절 계통에서는 교리적으로 그것이 방언의 체험을 강조하는 것이다.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곧 방언받다는 것이다. 그러닌까 오순절에서는 성령체험이란 중생을 일으키는 성령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중생한 사람들이 방언을 체험하게 하는 성령의 체험이다. 그런식으로 성령세례를 가르치는데, 이 성령세례가 신학적으로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성령세례라는 것은 사실, 성령께서 우리 구원의 경험에 주도적으로 개입하시는 사건을 가르치는 것이지 이미 성령을 받고 중생한 자가 다시 두 번째 축복인 것으로 가르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첫 번째 축복은 성령이 우리에게 중생을 일으키게 하고 회심하게 하고 믿음 갖게 하고 두 번째 축복은 방언하게 하는 성령세례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이 그렇게 매번씩 일정한 구분을 가지고 체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체험의 대상이 아니다. 성령체험이란 말 자체가 온당치 않다. 성령의 체험이 아니고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인격적 하나님의 신이시다.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예수를 믿고 중생할 때 그들이 다 영적인 사람이 되고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고 계시고 세상 끝날 때 까지 떠나지 아니하시고 성령이 그 안에 계시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이 필요성의 첫 번째 필요성은 사도요한의 가르침에 따라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자질이다. 자질은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단순히 선한 사람이 되어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도덕군자를 만들어서 안되고 교회안에서 착한 사람을 양성하는 곳이 되어서는 안되고, 사실 교회는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곳이다. 거듭난 자들의 모임이다. 단순히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착하게 사는 이유는 착하게 살아서 성령 체험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역사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착하게 사는 것이다. 두 번째 중생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 그것을 인지하기 위해서 중생해야 한다. 이 말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자연인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연인은 영적으로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인간 스스로의 한계를 구스인의 피부와  표범의 비유에서와 같이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는 것에 대한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선행을 하고 공적을 쌓아서 구원에 이를수 있다는 것은 큰일 날일이다. “선을 행할수 있으리라”는 말은 악과 선을 대조하는 이유는 사람이 선을 행하여 구원받는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다. 표범은 그 반증을 변할 수 없고 사람은 그 타락한 성품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그 사실 자체가 그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인데 그러나 선을 행할 수 있게 되면 구원받지 못한다. 그 선이 완전한 선도 아니고 누구든지 선을 통해서 구원받도록 하나님이 섭리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선을 행할 수 있는 상태는 성령으로 거듭나고 중생한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괜찮다.


  롬8장 7~8절에서 보듯이 영적으로 라야 분별하는 것이다.“영적이란”성령으로 거듭나야 되는 것이다. 성령에 성령에 의해서 조명되어야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우리가 비록 듣는다고 할지라도 그 복음의 믿음으로 반응할 수 없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되면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있는 것이다.


  알미니안 주의는 요1장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믿음이 중생보다 앞선다고 말한다. 믿어야 중생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믿을수 있다고 사람을 생각하는 이유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성경에 생각하는 것보다 더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한 이해는 아주 부정적이다. 성경이 생각하는 것 만큼이나 진지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못한 탓에 믿음이 중생보다 앞선다고 알미니안 주의는 주장한다. 자유주의신학자들이 갖고 있는 인간이해의 제일 큰 문제는 성경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토록 부정적이고 진지하고 심각하게 인간의 타락성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인간이해를 고상하게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3절에서 믿음은 자유적인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들이 믿는 것이다.


  중생의 두 번째 필연성, 중생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이 변화들의 가시적 변화와 부가시적 변화가 있다. 가시적인 변화에 대한 주의적인 관찰이 필요하다 특히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영적변화이다. 왜냐하면 중생의 기원 시작 중생의 수요자가 하나님이시고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일은 본질적으로 신비적이다.(요3장 7~8절) 그런데, 성령의 사역을 바람으로 묘사하는 이유는 에스겔서 37장에서 온 것이다. 뼈들의 관한 환상에서 뼈들이 사람으로 육체를 입고 일어설 때에 바람같이 하나님이 성령이 역사할 때에 그 골짜기에 흩어져 있던 뼈들이 다시 결합하고 살이 덮이고 사람이 되어 큰 군대가 되었다. 그때에 성령의 사역이 바람과 같이 역사했다고 에스겔 37장에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성령의 사역은 성경에서 언제나 바람과 같이 사역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바람과 같이 성령의 사역이 이루어진다고 말한 것은 그 강조점이 성령의 사역이 신비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성령이 어떤 양식으로 어느 때에 사람의 본성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우리 인간이 직접적으로 분석할 수 없고 관찰할 수 없는 것이다. 눈으로 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언제 거듭났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것이다. 소위 구원파에서 중생은 시간과 날짜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것이다. 중생의 사역은 신비롭기 때문에 누구도 명확하게 언제라고 말할 수 없다. 방금전 부정시제라고 말하한 것과 같다. 어거스틴 이 말하기를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낄수는 있으나 성령의 사역의 깊이를 알 수 없다 라고 말한다. 성령의 역사를 알 수가 있는데 언제 어떻게 역사하는지 사람이 직접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이 바람과 같이 신비롭게 사역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물어보지 아니하시고 동의를 구하지 아니하시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깨서 주권적으로 한사람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역사하신다.


  그리고 그 사람의 본성을 하나님의 자기의 본성으로 바꾸어 버리신다. 새로운 생명을 덧입게 하신다. 우리자신의 구원을 인간의 노력으로부터 출발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다. 주권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해보면 이 구원에 위안과 확신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예를들면, 사도요한이 성경을 기록할 때 성령의 이끌림을 받고 있다고 인식할 수 있었지만, 성령에 이끌림을 받고 있다고 적극적으로 인식하지 못 할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인식하든 못하든간에 그들의 성경기록 모든 사역에 하나님이 감독자로 관여하셨다.  어떻게 어느 부분까지 어떤 양식으로 그 제자들과 성령이 역사하셨는지 본인도 모른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기독교는 신비의 종교다. 계시가 우리들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다.


  둘째는 중생은 그 영향력에 있어서(변화) 중생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중생의 역사가 시작되면 중생이 광범위한 변화를 동반한다. 혁신적인 변화다. 이 중생은 우리의 마음(존재의 중심)에 이다. 우리 이성도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마음의 지배를 받는다. 마음이 원하는 것만 이해하고 마음이 가르키는 것만 보고 마음이 원하는 것만 듣고 마음이 가르키는 것만 보고 듣고 강조한다. 마음이 원하는 것이 곧 감정으로 나타나고 이 마음이 의지하는 곳에 내 인생과 운명도 거기에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이 있는 곳에 네 제물도 있다. 이 마음이 존재의 중심이다. 가장 깊은 곳, 자기 인생의 중추가 어디 있는가는  마음에 있다. 중추가 바뀌지 않으면 그 주변의 것들을 아무리 개선해도 그 개선하는 것이 아무런 효과가 없다.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사람은 아무것도 바꿀수가 없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만다. 그런데 이 중생은 우리 마음에 일어난다. 첫 번째는 신비롭게 사역하고 둘째는 우리 마음에 변화를 일으킨다.


  렘31장 33절을 보면,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을 속에 그 마음에...” 단순히 우리의 기억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기호나 선호도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법이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그 정결한 소원은 자연인에게 절대로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소원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체험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삶의 환경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유물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없고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의 부르심, 성령의 감동, 거기 믿음에 있는 것이다. 우리 마음의 생기는 소원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날마다 말씀을 들을 때 이러한 소원이 생겨나길 사모해야 한다. 중생은 그러한 마음의 변화를 가져 오므로써 어디까지 그 변화를 미치는가 하면 그 변화가 우리의 머리에 있는 과학에 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나중에는 중생의 변화가 그냥 내 마음의 관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가 내 생각의 길까지 바꾼다. 결국에는 사고하는 방식을 바꾼다. 또 의지를 바꾼다. 우리의 정신(지성)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의지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가운데 바르게 온전하게 작동한다. 이렇게 하므로써 중생은 예레미야 31장 33절에 있는 말씀을 정말 아름답게 성취한다.


  이렇게 중생한 사람이 중생하게 되면 근본적으로 마음에 변화가 오고 생각의 변화가 오고 지성과 이성의 변화가 오고 의지의 변화가 오고 그 의지가 무엇을 가져오는가 하면 그 사람의 말도 변화시키고 행동도 변화시키고 외모도 변화시킨다. 얼굴이 박색이라도 걱정할 것이 없다. 그 마음에 신앙이 있으면 그 신앙이 얼굴로 아름다운 빛으로 나타난다. 사람은 겉모습 보다 그 겉모습을 통해 드러나는 신앙이 더 중요하다. 그런 사람은 함께 살면 살수록 더 사랑스럽고 더 다정스럽고 같이 있는 사람이 늘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얼굴은 너무 예쁜데 성격은 완전히 괴팍하다. 그러면 그 잘생긴 것이 때로는 괴롭고 가증스럽다. 사람이 중생하면 우리의 전부를 바꾼다. 비록 새마을 운동을 가진 얼굴도 큰 위안과 기쁨을 주는 사람이야말로 마음이 비단결 같은 중생된 사람의 증거이다. 중생을 하고 나면, 죄악이 끊어진다. 그러한 사고방식의 변화가 있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가 있는 것이다.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반드시 중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언제 중생했는가? 오순절 성령강림때 한 것이 아니고 그 전에 이미 했다. 신비적이기 때문에 언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중생을 일으키시는 자(원 보혜사)가 그들과 함께 있었다. 성령이 오순절 성령강림때 오셨지만 성령의 사역은 예수님이 세례받는 그 때 성령의 사역은 본격적으로 예수님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던 공생애 기간중에 어떤 때에 이미 중생은 한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때 성령이 임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사역을 위한 출발이다. 그래서 이 성령세례가 반드시 중생을 의미한다고 이해하는 것도 너무 제한적이다. 성령에서 세례는 물세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세례는 성령이 임하는 양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령이 어떻게 임하는가? 그들에게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으로 충만하게 임했다. 그래서 성령이 이끄시는데로 그들이 말하고 행동하고 사역했다. 그런데 세례라고 쓴 것은 그 세례식에서 물이 부어지는 양상을 통해서 세례가 어떤 모양으로 그들에게 임할것인가를 보여주는 형용사적으로 사용했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의 세례은 물을 완전히 뒤집어 쓴 세례이었다. 그러나 개혁파의 세례는 물을 의식행위로 뿌리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세례라는 말은 마치 무리 우리에게 적시듯이 임함을 표현한 양상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에 의한 중생은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데 그 근본적인 변화가 우리의 삶의 광범위한 외형적인 변화로 반드시 나타난다. 그래서 온 우주가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의 변화를 보고 내 속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중생은 못 속인다. 중생받은 사람은 오랫동안 중생의 증거를 숨기지 못하고 잘 나타나는 것이다. 중생했으면 중생에 합당한 열매들이 있어야 한다. 마음의 변화는 반드시 외면적 행위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다. 로마서 6장 17절에서 “사람이 태어날 때 모두 죄의 종”이다. 따라서 중생은 마음과 지성을 새롭게 하고 의지를 교정하고 이제는 우리의 의지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성령의 지배하심을 받아, 그리고는 우리의 마음의 생각이 깨끗하게 된다.(요3장 5절의 물은 청결함의 모티브이다) 말하자면,  물이 강조하는 것은 청결해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각종 더러운 것 악한 생각들로 가득차 있던 그 마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중생할 때 그 마음의 생각이 깨끗해지는 것이다. 일체의 더럽거나 추하거나 악한 것을 사모하거나 바라보지 않는 것이다. 악한 것을 느끼는 것은 높은 경지에 이른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만 가질수 있는 경지다. 우리 주위에 악한 것을 악하다고 말하는 자도 없고 선한 것을 참으로 선하다고 말 할수 있는 사람도 없다. 백가지의 악을 깨닫는 것보다 한가지의 선을 깨닫는 것이 더 어렵다. 마음이 청결해 지면 선한 것을 선하다고 말할수 있고 무엇이 비로소 무엇이 선 한줄을 안다. 마음의 생각이 깨끗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에서 물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모든 우상들이 다 씻겨져 가는 것을 상징한다. 성령은 새로운 어펙션(affection) 어펙트란 열정, 뜨거움을 말하는데 훨씬 더 감정적인 것에 호소하는 말이다. 의지는 죄에서부터 자유로워진다. 하나님의 뜻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 의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어펙트(열정)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내 마음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강한 반응이다.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새로운 열정이 생기는 것이다. 예수 믿고 선교하고 남을 돕고 헌신하고 남을 섬기는 것을 왜 기뻐하는가? 이것이 중생의 결과이다. 영적인 기호가 달라진 것이다. 과거에 좋아하던 것이 바뀌고 이제는 새로 좋아하는 것이 생기고 열심이 생기는 것이다.


  중생하게 되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생기는데 그 좋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대한 뜨거움이 생긴다는 것이다. 헌신에 열심히 생긴다. 중생이 새로운 열정을 마음에 불러 일으킨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의도한 쪽으로 가도록 마음을 변화시키고 이성을 교정하고 의지를 자유롭게 하고 새로운 열심을 줘서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이 합해서 하나님이 영원 전에 우리를 향해서 그 영광의 성취를 향해서 나도 모르게 그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가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구체적으로 관찰할 수는 없지만 그 모든 작은 변화들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방향으로 내 삶이 갈수 있도록 이끌어 가신다. 그것이 어떻게 역사하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매 순간 나의 삶을 정교하게 이끌어 가신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우리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나니”하셨는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변화를 갖고 오고 이성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의지를 자유롭게 하고 새로운 정열을 주셔서 결국 그 모든 것들이 협력하여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길을 걷도록 이끌어가시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총의 능력이다.


  불가항력적 은혜이란 말을 사용한 사람이 원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인데, 칼빈주의자들이 사용한 것은 강제적으로 사람을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신비롭고 교묘하게 사람들의 의지로 가도록 역사하신다. 왜 이것을 불가항력적 이라고 하냐하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 목적의 사람이 반드시 이루도록 하신다는 의미에서 불가항력적이지, 그 은혜가 우리들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는지 그 양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불가항력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해해서는 안된다. 이 불가항력적 은혜를 설명할 때 하나님이 힘으로 사람들을 제압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의도하는 방향으로 가게 하는데 그 가게 하는 것이 결국 우리가 원하고 의지하는 바에 거슬려서 데려간다고 생각하는 데 그것이 아니다. 이 불가항력적 은혜란 그것에 결과에 관한 말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 자리에 우리들이 있도록 하신다는 의미에서 불가항력적 이라 한다. 그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역사하느냐 물으면 그 역사는 마치 중생과 같아서 신비롭고 아무도 인지하지 못하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막상 그 불가항력적 은혜를 받는 사람은 자신이 자기 의지로 자신의 생각으로 한다고 충분히 느낄만큼 자유롭다. 그러나 충분히 자유로운 그 상황에서 이미 하나님은 은혜로 그들을 이끌어 가시는 그 역사가 그 밑바닥에 있는 것이다. 본인은 모르지만 나중에 이루고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거기에 도달하고 보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결과이다. 결과적으로 알게 된다. 아! 이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이었구나! 하는 것이다. 우리를 이끄시는 결과를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러나 그것을 신비롭게 역사하는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가 하면, 사람의 의지를 변화 시키시고 이성을 새롭게 하게 함으로 정말 그 마음이 자유롭게 되는 것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플랭팅거 신학자는“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는 사람이 인지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미묘하고 신비롭고 따뜻해서 그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이 마치 자신이 자유로운 새처럼 날아가는 길이 자기가 정한 길이라고 생각할 만큼 자유롭게 역사한다.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라고 필연성을 말했다. 중생도 결국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말하는 것은 그 중생이 강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다. 중생은 외적인 증거가 꼭 드러난다.


  중생의 증거는? 첫째는 죄에 대한 변화이다. 죄에 대해 달라진 태도이다.(요일서 2장29절,요일서 3장9절)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난자(중생된)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 일단은 죄에 대해서 달라진 자세(태도)로 중생의 증거를 알 수 있다. 지금까지는 죄를 짓는 것은 자연(nature)이지만 중생하고 나면 죄를 짓는 것이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고 죄짓고 사는 것이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은 채로 죄를 지을 수 없고 죄를 지는 것이 일상생활이 될 수 없다. 중생하지 않은 사람은 죄를 짓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죄를 짓는 것이 일상생활이 되어지는 것이다. 죄짓는 사람은 죄의 영감에 충만해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로 난자들은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말씀을 생각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기가 돌아가야 할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안다. 죽은 고기는 흐르는 물에 그냥 떠내려가지만 성령으로 새롭게 된 자는 그 악한 세월에 묻혀갈 수 없는 것이며 노력하고 거슬리기 위해 발버둥친다. 이것이 중생의 증거다. 죄짓지 못한다는 이 말은 죄를 짓는 일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죄를 짓는 것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가 다르다.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죄인들처럼 짓지 않는다. 죄를 범하는 일이 없을 수 없지만 죄를 범할 때 즉시 회개한다. 요일서 3장 5절을 보시면, 그리스도안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미 죄에 대해서 죽었다라고 한다. 아무도 죄가운데 살지 않는다. 죄가 그 사람의 삶을 설명하는 규정하는 특징적인 원리가 되지 않는다.


  싱클레 퍼거슨 이라는 분이 성령론이란 책을 썼는데, 나의 멘토인데, 요일서 3장 5절 중생한 자가 죄에 대해 죽었고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에 대해 이것은 현실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으로 예수 믿고 중생하고 이 사람들이 영광에 들어가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이라는 관점에서 사도요한이 말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완전한 상태에 들어간 그들은 죄를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뜻에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는가? 이들은 장차 완전히 죄를 짓지 못하는 자들이 될 것이고 그러한 자들로서 오늘 죄와 다툰다 라고 설명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는 죄를 짓지 못하는 불가능 사람으로 거듭난 것이다. 지금은 그 죄와 계속해서 다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죄와 다투면서 죄와 이기기를 생활화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중생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고 의지가 자유롭게 되고 우리 속에 새로운 열정이 찾아왔기 때문에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죄를 짓지 말라고 명령할 때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할 수 있는 자유도 있고 의지도 있고 능력도 있고 성령의 감동도 있으므로 죄와 다투기를 힘써야 한다. 죄와 다투기를 힘쓸 때, 우리는 이미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자들이다. 이러므로 중생을 드러내는 자들이다.


(6강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참으로 감사,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가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부르지도 않고 주님을 떠나 있을 그 때에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 중생케 하시고 새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듣게 하시고 천국의 영광을 알게 하시고 사모하게 하시고 새로운 것을 심게 하시고 나라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놀라운 은사를 부어 주시니 주여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오늘 이 글래스에 참석한 모든 종들에게 오늘 이 성령의 과목을 가르치니 관념의 지식에 머무르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신앙이 새롭게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정말 새로운 용기와 도전과 힘이 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다음 주에 그 동안 우리가 배운 것을 한번 확인하고자 합니다. 주님 생각나게 하시고 모든 사람이 다 기쁨으로 이 시험을 잘 볼 수 있도록 주님,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다음은 11부. "믿음과 회개(돌이킴)1" 입니다. coming soon ......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교묘해지는 신천지 위장교회
"교단 로고 달고, 목사 안수받고..."



이단 신천지의 교묘한 전략인 위장교회가 점차 늘고 있다. 위장교회는 일반교회와 쉽게 구분이 되지 않아 교인들이 현혹되는 경우가 많다.

서울의 한 교회.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를 지닌 예장합동총회 소속 교회임을 알리는 교단 로고가 교회 입구에 표시돼 있다. 또 다른 교회는 최근에 교회 간판을 바꿔 달았다. 불과 몇 주 전까지 예장합동 로고를 교회 간판에 달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교회는 예장합동 소속 교회가 아닌 신천지 위장교회라고 예장합동총회 이단대책위원회가 지난 달 30일 이단대책 세미나에서 밝혔다.

교회가 이사를 나간 자리에 들어와 일반 교회인 척을 하거나, 정통 교단의 로고를 도용하는 위장교회가 최근 늘고 있다. 특히 군소신학교를 통해 목사 자격을 갖춘 뒤 위장교회를 세울 경우에는 밝혀내기가 쉽지 않다.

위장교회가 늘고 있는 이유는 최근 많은 교회들이 신천지 위장교인들을 경계하면서 신천지가 위장교회 전략에 관심을 보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구리이단상담소장인 신현욱 전도사는 "신천지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 위장교회"라면서 "신천지가 올해 3백개 위장교회를 세우겠다고 했는데, 거의 그 수준에 육박할 것"이라고 말했다.

늘어나는 위장교회로부터 교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선 신천지의 교육내용이 무엇인지 교인들이 분별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했다.

광주상담소장인 강신유 목사는 "신천지를 조심하라고 강조해도 빠져드는 사람이 줄지 않는 이유는 신천지가 미혹하는 내용을 모르기 때문"이라면서 "신천지의 교육 내용, 미혹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교인들이 알고, 분별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말했다.

또 각 지역에서 확인한 신천지 위장교회의 이름과 주소 등 관련정보를 모아 지역 교인들에게 계속 알려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예장합동총회는 세미나에 앞서 이단대책 결의대회를 열고 신천지 위장교회에 대해 강력 대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들은 결의문을 통해 "교단의 교회명칭과 로고를 사용할 경우, 엄정하게 법적 대응에 나서고, 그 피해보상을 철저히 요구할 것"을 결의했다.

또 총회 산하 신학교에 이단연구 학과를 신설해 이단 전문인을 양성하고 이단연구소를 설립해 근본적이고 체계적인 대책마련에 나서겠다는 의지도 표명했다.

예장합동 이대위는 현재 파악된 150여곳의 신천지 위장교회 명단과 주소를 법률적 검토를 거쳐 조만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CBS노컷뉴스 천수연 기자
ⓒ CBS 크리스천노컷뉴스
출처: USA아멘넷


 

 
모든 것이 어려워 보일 때가 있다
두렵고 힘들고 어지러운 인생에서
패배자 마냥 주저 앉고만 싶은 그런 순간들이 있다.
급해지지 말자 잠깐 한숨 좀 돌리고 
생각 좀 가다듬고
좋은친구들을 만나면서
잠깐만 쉬어 가도록 하자
 인생에의 쉼표 End가 아닌 
And를 만들어 내는 희망이므로...
(담아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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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자기 점검 수칙


 01. 태초에 하나님은 목사를 만드시지 않고 사람을 만드셨다.

      그러므로 목사가 되려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

02. 교인들은 목사가 안수 받는 순간부터 목사를 인간 아무개가 아닌 목사로 본다.

     그러므로 목사는 죽을 때까지 목사답게 살아야 한다.

03. 목사의 주요 역할은 교인들이 주님의 은혜를 입게끔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목사 자신이 누구보다도 성결해야 한다.

04. 참된 목사가 되기 원한다면

     우리 사회와 교회의 온갖 병리에 물든 눈을 미련 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05. 목사는 구도자다. 구도자는 고독해야 한다.

     고독은 진리를 위한 자발적인 자기 격리이다.

     그래서 고독 속에서만 구도는 깊이를 더해간다.

06. 목사의 승부는 이 세상에서 나지 않는다.

     목사의 승부는 코끝에서 호흡이 멎는 순간 하나님 앞에 선다.

07.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당신의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인해 도로 흙이 되었다.

     설교는 흙에 하나님 생기를 불어넣어 다시 생령으로 살게 하는 숨길이다.

08. 설교할 때 교인들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지 않으면

     설교는 단순한 공기의 진동으로 사라져버린다.

09. 설교 원고를 보지 않고 교인들과 눈을 맞추며 설교하는 것은

     교인에 대한 설교자의 예의이다.

10. 어떤 상황이나 사물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단어는 하나뿐이다.

    설교자는 그 한 단어를 찾기 위해 밤을 지새울 수도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언어와 단어를 만드신 로고스이기 때문이다.

11. 저가 설교에 부족함을 느껴도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라.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단 한 사람에게라도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주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었다면 그런 설교자의 부족함은 성령님께서 온전하게 메워 주신다.

12. 설교의 원천은 성경과 설교자의 삶의 자리이다.

     그러므로 삶의 자리가 다른 타인의 설교를 흉내 내려는 것은 금물이다.

13. 교회를 개척하기 원한다면 또 하나의 교회를 개척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점검해야 한다. 자기 야망이나 뜻을 구현하기 위함이라면

     교인이 많을수록 종교 장사꾼이 될 뿐이지만,  소명을 좇아 자신을 던지기 위함이라

     면, 교인이 단 한 병이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성공한 목회자가 될 것이다.

14. 많은 목사가 그렇게 하듯,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사람을 버리는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목사의 입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15. 목사는 자신이 목회하는 교회 모든 교인의 목사이어야 한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모든 교인에게 똑같은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위한 파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16. 교인에 따라서는 정이 더 가고 더 사랑스러운 교인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도 스스로 그들과의 거리를 침범하지 않도록 절제하라.

17. 때로는 거리끼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수 있다.

     그 때에도 그 거리보다 멀어져서는 안 된다.

     그 교인이 자기 목회지의 교인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믿으시고 그를 맡기셨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8. 언제나 비판의 소리에 열린 귀를 가져야 한다.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될 때에는 지체 없이 사과하라.

     목사는 모든 교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을 의미하지 않음을 망각하지 말라.

19. 교구 목사가 자기 교구 교인의 이름을 모두 알지 못한다면

     적어도 그 교구 교인 모두의 목사가 될 수는 없다.

20. 목사는 예배를 비롯한 모든 행사를 인도하고 주관하고 책임지는 존재다.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빠짐없이 준비하고 연습해야 할 것은 몇 번이고 연습하라.

21. 교인과 전화할 때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상대를 전화로 연결하지 말라.

     목사는 교인을 섬기는 사람이지 기업체 사장이 아니다.

     자신보다 연장자가 사무실을 찾아왔다가 돌아갈 때에는

     반드시 문밖까지 따라 나가 인사를 드려라.

22. 심방예배를 드릴 때에도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듯 경건하게 인도하라.

     예배는 어디서나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예의임을 교인에게 일깨워주기 위함이다.

23. 자기 목회지에서 받는 봉급을 족하게 여기라.

     자신의 요料를 족한 줄로 여기지 않는 목사의 섬김과 봉사는

     결국 교인의 주머니를 노리는 미끼에 지나지 않는다.

24. 목사의 재산은 결코 예금통장이 아니다.

     목사의재산은 무엇이든 주님께서 주신것을 교인과더불어 나누는 공생심共生心이다.

25. 무엇보다도 항상 청결한 몸과 마음가짐으로 교인들을 대하라.

     교인들에 대해 그보다 더 바른 예의는 없다.

26. 교역자 자신이 섬기는 교회가 성경적으로 보이지 않을 때,

     담임목사나 장로 등이 말씀에서 벗어나 있다고 여겨질때, 그들을 비판하는 일에

     정열을 쏟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자신에 대해 더욱 엄격하라.

27. 목사가 먼저 하나님을 진실 되게 믿으면 세상은 반드시 달라질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라는

    샤를르 푸코의 말은 교인 이전에 먼저 목사가 마음에 새겨야 할 말이다.

28.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것이 목회의 전부가 아니다.

     목회는 주님 안에서 교인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성장 과정의 상처가 주님의 사랑으로 치유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

     치유 받지 못한 상처는 더불어 사는 사람에게 무서운 흉기가 되기 때문이다.

29. 현재 자신이 좋은남편(아내)인지 좋은 아버지(어머니)인지 좋은 자식인지 점검하라.

     목사의 가정은 교인들이 들여다보는 진열장이다.

30. 목사가 자신의 외모에 대해 열등감을 지니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이 타인도 존중하는 법이다.

31. 목사는 산 속에 유리된 고립인이 아니라 세상에서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속의 구도자이기에 이 세상 누구보다 앞장서서 법을 지켜야 한다.

32. 자신이 꿈꾸던 예배당 건축을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자신의 설교에 은혜 받았다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갈 때,

     사람들이 자신을 예수님 대하듯 할 때,

     그때 자신이 영적 패륜의 문턱 위에 서 있을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33. 목사도 때가 되면 예외 없이 죽음으로 퇴장한다.

     그러나 죽음의 퇴장은 새로운 등장이다. 자신이 살아생전 야망의 노예였는지

     아니면 진리의 사람이었는지 죽음의 퇴장과 동시에 밝혀지기 마련이므로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부터 죽음의 퇴장을 준비하라.

 

이재철 목사의 자기 점검 수칙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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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이시여,

    현충탑 솔밭 오솔길에 
    향내가 그윽하게 퍼지면
    그리움 때문에
    더욱 눈물이 납니다,

    님이시여, 
    이제 미움과 서러움 
    모두 잊으시고 
    어머니의 한맺힌 한숨과 
    당신을 그리는 눈물이 
    고여있는 이땅
    조국의 수호신이 되시어 
    길이길이 영원하소서...

    님이시여,
    피 묻은 사연일랑 
    아랑곳 말고
    전우여
    넋이여 편안히 잠드오.


    편집: www.vietv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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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바라본 우주의 대 파노라마

 

 

 

 

 

 

 

 

 

 

 

 

 

 

 

 

 

 

 

 

 

 

 

 

 

 

 

 

 

 

 

 

 

 

 

 

 

 

 

 

 

 

 

 

 

 

 

 

 

 

 

 

 

 

 

 

 

 

 

 

 

 

 

 

 

 

 

 

 

 

 

 

 

 

 

 

 

 

 

 

 

 

 

 

 

 

 

 

 

 

 

 

 

 

 

 

 

 

 

 

 

 

 

 

 

 

 

 

 

 

 

 

 

 

 

 

 

 

 

 

 

 

 

 

 

 

 

 

 

 

 

 

 

 

 

 

 

 

 

 

 

 

 

 

 

 

 

 

 

 

 

 

 

 

 

 

 

 

 

 

 

 

 

 

 

 

 

 

 

 

 

 

 

 

 

 

 

 

 

 

 

 

 

 

 

 

 

 

 

 

 

 

 

 

 

 

 

 

 

 

 

 

 

 

 

 

 

 

 

 

 

 

 

 

 

 

 

 

 

 

 

 

 

 

 

 

 

 

 

 

 

 

 

 

 

 

 

 

 

 

 

 

 

 

 

 

 

 

 

 

 

 

 

 

 

 

 

 

 

 

 

 

 

 

 

 

- 잠시 마음의 여유를 새롭게 가져보는 좋은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

                       
대 우주의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형언할수 없는 경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티끌보다도 더 작은 우리들의 작은 존재를
 다시한번 일깨우기도 하고

영원세계에 번개처럼 지나갈
인생, 삶의 숙제는 무엇인가
다시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북]김정은 원수, 제7차소년단 대회 참석해 축하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3  
 
                [북]김정은 원수, 제7차소년단대회 참석해 축하
[평양=민족통신 종합]북녘 언론들은 6일 열린 제7차소년단 대회에 대해 대서특필로 다뤘다. 이날 평양의 중심부에 위치한 4.25문화회관은 조선소년단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 소년단원들이 앞날의 강성조선을 떠메고나갈 유능한 혁명인재,백두산대국의 기둥감으로 억세게 자라나도록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끝없이 안겨주는 김정은 원수에 대한 뜨거운 감사와 흠모의 정으로 세차게 끓어번졌다고   김 정 은원수님에 대한 열화같은 감사와 흠모의 정으로 세차게 끓어번지고 있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전국 각지의 소년단 조직들에서 추천된 모범적인 소년단대표들과 학생소년지도일꾼들, 관계부문 일꾼들이 참가한 이날 대회장 좌우, 뒷 벽에는  《경애하는 김 정 은장군님께 끝없이 충직한 소년근위대가 되자!》,《사회주의조국을 위하여 항상 준비하자!》라는 구호들이 나붙어 있다.
 
북녘의 최고지도자, 김정은 원수가 참석한 이날 제7차소년단 행사에 관련된 사진들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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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말은 상처를 치유한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세 가지가 있다. 그것은 잃어버린 기회와
시위를 떠난 화살과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중 가장 무서운 것이 말이다.
격려와 기쁨의 말은
사람에게 용기와 행복을 주지만
저주와 비난의 말은
한 사람의 신용과 명예를 일시에 무너뜨린다.

개구리가 뱀에게 발각돼 잡아먹히는 것은
시끄러운 울음소리 때문이다. 꿩의 울음소리는
사냥꾼의 표적이 된다.물고기는 입으로 낚인다.

잘못 쏟아진 말은 항상 재앙을 부른다.
목소리가 큰 사람은 허풍과 과장이 많고
애매하게 말하는 사람은 거짓이 많다.
수다를 떠는 사람은 진실성이 약하다.
과격하게 말하는 사람은 억지가 많다.

사랑의 말은 상처를 치유한다.
그러나 부주의한 말은 분쟁을 만든다.
격려와 칭찬은 주변을 환하게 밝힌다.
말은 곧 그 사람의 인격이다.

말은 나뭇잎과 같다.
나뭇잎이 너무 무성한 나무는 열매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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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을 읽다가 의문이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로마서 1장 28~32절까 내용의 해석을 요구하시는 분의 메일이 왔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죄에 대해 원어 적으로 해석을 원하시는 모양인데 죄송하지만 너무나 많은 양의 지면을 할애해야 된다. 일 년을 설교를 해도 모자랄 정도이기 때문에 책을 몇 권으로 펴야할 만큼 엄청난 내용이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죄의 내용 중에 ‘모든 불의’란 의미는 몇 편의 설교를 해도 모자랄 정도로 엄청난 해석의 지면을 사용해야 된다. 그렇다고 한 마디로 축약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기 전에 먼저 인간 구조를 생각해야 된다. 사람은 혼과 영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구조가 무너진 상태가 바로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즉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죽었다고 하는 상태를 언급하는 것이다.

 

   이렇게 죽은 상태가 바로 죄의 삯이다. 이런 상태에서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불의”라고 보면 된다. 왜냐하면 혼과 영과 몸이 하나가 된 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창조의 목적인데 여기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신데 의라는 자체라는 존재로써 우리에게 의롭게 살아가도록 만들어 놓으셨다. 그런데 이것을 싫어하는 인간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

 

   “추악”도 마찬가지 사람은 누구든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존재는 혼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들도 영으로 살아가야만 된다. 그런데 혼이 영과 몸을 지배하여 영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없다. 이것이 추악한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은 사람들이 깨끗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주 추악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탐욕”은 사람의 혼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탐욕인데 골로새서 3:5~6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상의 모든 신들이 우리 눈에만 보이는 그런 형상이 아니라 바로 내 배 속에 가득 차 있는 신들이 내 안에 꿈틀거리고 있다면 얼마나 추악한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니 악의가 가득 차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멋쟁이 신사처럼 요조숙녀처럼 차림을 갖추어도 그 속에 끊임없는 추악과 악의가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절에 다녀도 고행을 하는 수도사가 된다고 할지라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신성한 옷을 입은 성직자라고 할지라도 추악함이 속에 꿈틀거리는 것을 막아보려고 사막이나 산에 가서 고행을 한다. 그러나 속세에 돌아오면 그 어느 누구도 속세의 사람과 달라지지 않는다 것을 주의해야 한다.

 

   대선배이시고 영성운동가이신 엄두섭 목사님께서 빛과 소금이란 월간지에 언급하기를 자신의 영성수도원에서 기도와 영성으로 무장되었기에 충무로나 명동에 나가 길에 걸어 다니면서 음욕이 안 일어날 줄 알았지만 아름다운 아가씨가 지나가는 데 자꾸 눈이 그리로 가고 그 모습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 글을 쓰는 필자나 읽는 독자들도 더했으면 더 했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시기”는 그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와 비교하게 되어 있고 차이를 느끼고 살아간다. 시기는 바로 자신의 열등감에서 시작된다. 왜 사람들은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사람의 구조상 열등의식을 갖게 되어 있다. 그래서 열등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나중에 공격형의 사람으로 돌변하게 된다.

 

   “살인”이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아는 것 같지만 너무나 모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을 뺏는 것만이 살인인 줄 안다. 말 한 마디에 사람을 살리고 죽이고 있다. 무관심도 사람을 죽인다. 성경에 나오는 살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칼인데 그 칼을 들고 혼으로 설교하면서 협박하고 그 칼로 무수한 영혼들을 난도질하여 처참하게 죽이고 있다.

 

   “분쟁”은 이미 사람의 혼과 영과 몸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본성 자체가 분쟁을 밥 먹듯이 행하게 되어 있다. 아무리 교회 안이라고 할지라도 분쟁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마10:34~36과 누가복음 12:49~53에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중 하나는 불을 던지러, 분쟁을 일으키려 오셨다고 피력하고 있다.

“사기”는 사람을 속이는 것이지요. 사람만 속이면 좋겠는데 하나님마저 속이고 있는 실정이다. 사기 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일반적으로 사람을 속이는 것이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 있다. 부모를, 형제를, 친척들을 속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빌미로 성도들을 속이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악독이 가득한 자” 위에 내용들을 알게 되면 악독이 무엇인지 잘 알 것이다. 사람은 독을 뿜어내고 살아가고 있다. 과학적인 실험으로도 증명되었듯이 사람들을 화를 내게 한 후 입 안에 분비물인 침을 검사했더니 수십 마리의 쥐를 죽일 수 있는 분비물이 첨가되어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이 사람은 독을 항상 품고 다니는 존재다.

“수군수군하는 자”자기의 생각과 같은 자들끼리 서로 주고받는 대화들이 수군수군하게 되어 있다. 마음만 맞으면 이런 대화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옛 자아와 옛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며 마귀 사탄과 대화하는 것이 바로 수군수군하는 것이다. 나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사람을 찾고 있다면 수군수군하는 심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비방하는 자”도 마찬가지 세상에서 잘못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하며 비방하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다. 이와 같이 내 안에 숨어 있는 옛 자아가 새 사람이 된 나에게 비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가지고 어떻게 예수를 믿느냐? 하며 끊임없이 비방하고 있다. 또한 자신이 갖고 편견으로 얼마나 비방하고 평가하며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해대는지 잘 알 것이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가 바로 수군수군하는 자들이며 비방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된 죄악을 과감하게 행하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골라서 하고 있다면 하나님을 믿기 믿어도 미워하는 존재들이다. 나보다 남을 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 질투하며 자신으 처지를 원망하고 있다면 하나님을 미워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내용들이 성경 안에 얼마든지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언급하려면 지면이 모자랄 정도가 아니다.

 

  “능욕하는 자”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며 조롱하는 것도 능욕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새 사람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존재가 바로 내 안에 숨어있는 옛 자아들이다. 이런 내용들을 언급하는 주석이나 성경지침서들이 나와야 된다. 새 사람으로서 역할을 하지 않고 옛 자아가 용트림하여 옛 사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능욕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교만한 자”도 마찬가지 세상 사람들 앞에서 거들먹거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비하하거나 열등의식을 갖게 하는 모든 것이 바로 옛 자아가 새 사람을 겨냥하여 손가락하고 야유를 퍼붓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작품이며 분신인 형상에다 오물을 뿌리는 짓이다.

 

   “자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 없이 살아도 아무 지장이 없고 혼과 영과 몸이 서로 분리되어 죽어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안 죽었다고 우기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내 안에 있는 옛 자아다. 이런 자들이 내가 예수님을 믿어 줄게, 하나님께 기도 좀 해주지, 찬양 열심히 해 줄게 식으로 하는 종교인들이 하는 행위가 바로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있는 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 글을 쓰는 저 자신도 이 글을 쓰면서 제 자랑을 들어낼까 생각이 든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자랑을 하게 되어 있으며 심지어 자신의 병까지 자신의 자격지심, 열등의식까지 자랑하고 있다. 자신의 좋은 점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단점까지도 자랑하는 것이 겸손으로 착각하고 있다.

 

   “악을 도모하는 자”는 시편 1:1에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세상에 살아가면서 내 주변에 이런 자들과 함께 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이다. 필자도 그렇게 알았다. 그런데 악인이나 죄인, 그리고 오만한 자가 내 안에 숨어있는 옛 자아들이며 옛 사람들이다.

 

  “부모를 거역하는 자”도 우리 육신의 부모가 아무리 무식한 분이라 할지라도 부모의 말을 거역하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나의 존재를 만들어주신 하나님을 부모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고 있는지, 원래 우리는 순종을 잘하는 존재가 아니라 불순종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불순종을 밥 먹듯이 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철저하게 길들어지지 않으면 순종을 잘할 수 없다. 이렇게 우매한 우리들을 하나님께로부터 길들어지는 상태가 바로 온유한 자이다. 얼굴의 인상이나 성품이 온유하다고 해서 온유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잡힌 바된 상태가 되지 않으면 온유해 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온유한 자가 복이 있는 것이다.

 

   배약하는 자나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 모두가 하나님을 배신하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저버릴 수 있는 존재라고 한다면 베드로, 가롯 유다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 하루에도 몇 번씩 수도 없이 하나님을 저버리는 짓을 자행하고 있다. 자기 자신에게 불리한 상태가 다가온다면 도망할 궁리부터 하는 것이 나타나면 그런 존재들이 배약하며 무정하며 무자비한 존재들이다.

 

   이 같은 행하는 자들을 사형에 해당한다고 언급했는데 죽음이 무엇인가? 현재 살아있는 목숨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하나님께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며 내 혼과 몸과 영이 서로 어긋나 따로 국밥처럼 놀아나는 것이 죽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며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을 부추겨 이렇게 살아가면 천국보다 더 좋은 곳이 있다고 꼬드기고 있다.

 

   이 보다 더 상세한 답변을 요구하실 것이지만 설명하면 더욱 어려워지며 수많은 설명으로 인해 더 헷갈릴 수 있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읽다가 의문이 나지 않는다면 말씀을 자기 중심대로 읽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필자도 끊임없이 말씀을 대하는 것은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신학교를 나왔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높은 학력을 얻기 위해 열공을 해도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천천히 주님의 인도함을 받는 것이 정확하다.

 

글: 이준호 목사/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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