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예정 교리 ('교회와 신앙고백'에서 발췌) / 김영재 교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뜨이는 것은 제2장 하나님과 삼위일체에 관한 신앙고백에 이어 제3장에서 하나님의 예정에 관하여 신앙을 서술하고 있는 사실이다. 창조와 섭리, 인간의 타락과 죄와 형벌, 그리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람과 맺으신 계약 등에 관하여 진술하는 장들보다도 먼저 논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종교개혁 이후 16세기에 나온 개혁주의 신앙고백에서는 하나님의 예정에 관하여 간략하게 말하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송(doxology)으로 고백하고 있는 데 비하여, 본 신앙고백서에서는 이중 예정, 즉 하나님께서 어떤 이들은 구원으로, 어떤 이들은 멸망으로 예정하셨음을 8개항에 걸쳐 자상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16세기말부터 만연되기 시작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의식한 데서 온 것이다.

 

네덜란드에서는 이 즈음부터 신학과 신앙에 있어서 이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일기 시작했는데, 야곱 아르미니우스(Jacob Arminius, 1560~1609)는 예정 교리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는 누구나 다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만인 구원설과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에 협력해야 한다는 신인협동론을 가르쳤다.

 

  

1610년에 5개장으로 된 아르미니우스파 신조가 나왔다. 이에 개혁교회와 신학자들은 아르미니우스를 반대하고 예정교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네덜란드의 도르트에 종교회의(노회, synod)를 열어 도르트 신조를 내어놓았다. 이 회의에는 유럽 각처에서 이름있는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참석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영국적인 것이라고는 하나 이런 정통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전통을 그대로 보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도르트 종교회의(1618)는 예정, 그리스도의 죽음과 인간의 구원, 인간의 타락과 회심 및 그 방법과, 성도의 견인, 즉 하나님께서 택한 자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끝까지 견디시며 인도하시는 일에 관하여 5개조 93항에 달하는 신조를 작성함으로써 소위 칼빈주의 5대 교리를 내어놓았다. 그런데 도르트 신조는 예정이라는 특정한 교리를 변증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던 만큼, 제 1장에서 예정론을 18개항에 걸쳐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제 3장에서 예정론부터 다루고 있는 것 역시 그 시대의 신학적인 관심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신앙고백서의 균형을 위하여 잘 배열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 이전에 먼저 예정을 하셨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인 귀결이지만, 우리가 인식하는 면에서는 그리스도의 그속의 은혜와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선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설교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설교부터 한다면 잘못인 것과 같다.  

 

예정에 관한 논의는 멀리는 어거스틴에게서, 그리고 가깝게는 칼빈에게서 온 것이지만,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는 예정론을 제 3권 제 21장에, 즉 구원론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언급하고 있음을 본다. 그것은 성경 가운데서 기독교의 교리를 가장 체계 있게 가르치는 로마서의 구성과도 같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은 성도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은혜로 말미암아 된 것으로 알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께만 영광과 감사를 돌리지 않을 수 없다. 

 

로마서에는 하나님의 이중 예정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말씀이 있으므로 그 교리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성경에 없다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9장~1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는 모든 일을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선포하는 식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음을 본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 당시의 신앙고백서들이 예정 문제를 미숙한 듯이 다루고 있는데, 오히려 그것이, 성경이 그 진리에 관하여 말씀하는 것 이상으로 추론하여 체계화하며 강조하는 사변적인 정통주의 시대의 신학자들의 이해보다 더 온건하고 더 성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신앙고백 제 1장 제 6항에서 진술하고 있듯이, 성경이 우리 생활의 세세한 일이나 예배의 형식이나 교회의 제도 등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부분에 관하여 우리는 성경 말씀을 따라 사색하고 추론할 수 있으며, 또한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창세 이전에 품고 게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관하여 추론하는 것은 피조물인 우리 인간에게 허락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해 주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말씀에 의존하여 사색한다고 할 때, 우리는 사색의 대상을 분별해야 하고 그 한계점을 알아야 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하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에 대하여 경외하는 마음과 그 앞에서 겸허한 자세를 가져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정 교리가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께 오는 데 거침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예정의 교리는 언제나 신중히 다루어야 한다. 본 신앙고백서는 제 3장의 마지막 제 8항에서 예정 교리의 난해함과 그 의의 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8. 극히 신비한 이 예정의 교리는 특별한 분별력과 신중성을 가지고 다루어야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그 분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여 실제로 부름을 받은 사실을 확신하며, 영원히 택함을 받은 사실을 확고히 믿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이 교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일 수 있도록 해 주고 진실하게 복음에 순종하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근면하게 해 주며, 그들에게 풍성한 위로를 줄 것이다.  

 

 

김영재 교수의 "교회와 신앙고백" V. 개혁주의 교회의 신앙고백 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74~177p에서 발췌)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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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 전도세미나 2차를 은혜 중에 마무리 단계에 있습니다.

때론 주시는 은혜로, 때론 사단에게 속아 낙심으로...

이번 주일이 9번째 강의였답니다.

강의를  마치고  주님께 죄송한 맘이 자리잡고 있었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쉰들러리스트] 오래 전에 감명 깊게 보았던 영화

갑자기 보고 싶어졌습니다.

 

둘째 아이와 함께 보며 다른 각도의 은혜가 심령과 영을 사로잡았습니다.

1944년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광기가 극에 달했던 점령당한 폴란드의

한마을에서 서류에 맞춰 자신의 성공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자 쉰들러, 

그는  자기의 많은 이익을 위해 그릇 공장을 인수하고 고용한 그의 회계사

스턴를 만나면서 냉혹한 유태인 학살의 현실을 보게되며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을 맞게될

유태인들을 구해내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전 재산을 정리하여

구해 낼 생명리스트를 만들고 마침내 1100명을 구해내는데

이것이 바로 쉰들러리스트 영화 제목.

 

독일이 패망함으로 쉰들러도 고국으로 도망가야 할 신세.

 무일푼인 쉰들러가 유태인들과 작별하는 현장에서 울부짖음이

내 심장을 찢어놓았습니다.

 

"이 뺏지만 팔았어도 한생명을 더 구할 수 있었을텐데"

"이 자동차만 팔았어도 다섯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었을텐데"

 

주님께서 나를 치유하시는 특단이신것 같았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나의 가치를

예수그리스도의 가치로 계산하셨는데  나 역시 내 이익이 아닌

사단의 노예로 전락되어 있는 불쌍한 저들을 예수님의 가치로 보아야 할것입니다.

그리고 쉰들러의 울부짖음이 진정 나의 울부짖음이 되기를 사모해봅니다.

이 풍성한 가을을 소유할 줄 아는 진정한 전도자가 되기를 기도하며...

 

-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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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모(戀慕) 최송연 가을바람 타고 낙엽 우거진 숲을 찾을까 새벽이슬 촉촉한 들녘을 헤매어 볼까 사랑하는 내 님이 그리워 못내 그리워 임 찾아주실 그날까지 주고 가신 하얀 세마포 더럽히지 않은 순백이길 가슴 졸이며 기린처럼 긴 목을 빼고 행여, 나팔소리 들리려나 오늘도 저 하늘만 바라봅니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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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고
비 내리며 바람 불어
캄캄한 세상이어도

임 그리며
사모하는 내 마음은 
늘 푸른 하늘입니다

풀숲의 이슬처럼
영롱한 사랑으로 오십시오                                            
내 영혼 깊은 곳으로

나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는 
정결함으로 불 밝히오리니...



.
고후 11: 2-3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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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에 교회 앞에 포장마차가 하나 있었다. 메추라기를 생으로 팔기도 하고 요리해서 술안주로 팔면서 술도 판다고 했다. 교회 앞에 술집이라니 마음이 불편하긴 했지만 오죽했으면 인구도 적고 그렇다고 관광지도 아닌 시골에 포장마차를 열었을까 싶어 동정의 마음도 일어났다.

             

               어떤 사람이 마을 뒤 산 아래에서 메추라기 농장을 시작했단다. 메추라기의 알을 내서 팔았는데 곧 퇴기가 와서 굉장히 많은 폐메추라기를 처분을 해야 했다. 숫자가 엄청 많아서 그냥 내버릴 수가 없어 알 생산량이 떨어지는 순서대로 메추라기를 잡아 생으로 팔기도 하고 포장마차를 열어 잡은 메추라기를 소비시키고자 한다고 했다. 한 마리당 500원씩에 팔았다. 그 얘기를 직장에 가서 했더니 의외로 메추라기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꽤 되었다. 그리하여 내가 직장 동료들의 심부름으로 생 메추라기를 배달했다.

             

                어느 날 동네 사람으로부터 포장마차 주인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포장마차 주인인 남자는 이 동네 사람으로서 어려서 우리 교회에 잘 다녔다고 했다. 주일학교, 중고등부까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로 나갔다. 이런 일 저런 일 안 해본 일 없이 다 했다. 신앙의 열정은 식었을망정 교회도 가끔 나갔다. 그리하여 직분명은 집사였다.

             

              그는 하는 일마다 성공보다는 실패를 더 많이 했다. 그의 삶은 각박했다. 어찌어찌하다가 이혼도 했다. 아이들이 둘 있는데 고등학생들이었다. 아버지가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10여 년 전에는 우리 동네에서 모래 채취 사업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래 채취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는데 그마저도 그는 실패하여 부도가 났다. 이어서 메추라기 농장을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혼한 후 어떤 여자와 동거를 시작했다. 메추라기 농장은 그가 운영하고 포장마차는 여자가 운영했다.

             

              포장마차를 몇 번 들른 이후 어느 날에 우리 부부는 남자와 만나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목사님이 그에게 권면했다.

            “옛날에 주일학교, 중고등부에 열심히 다녔다던데, 이젠 신앙을 회복하십시오.”

             다음 주일부터 남자는 교회를 나왔다. 마침 메추라기 농장에서 메추라기 잡는 일을 하는 조선족 가족 3명도 교회를 나왔다. 왜 부인은 함께 오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남자는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우리 부부는 그녀에게 전도하려고 몇 번 시도했다. 그녀는 전도를 할 때마다 “지금은 너무 바빠서요”라고 말했다.

             

               어느 날 여자가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동네 사람이 소식을 전해주었다. 우리 부부는 때가 왔구나, 했다. 남편이 “병원으로 찾아가 적극적으로 전도를 합시다”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아파있을 때, 교통사고 등의 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마음이 약해져서 복음을 전하면 마음을 여는 일이 흔히 있다.

             

               어느 날 그녀가 입원해 있다는 병원으로 병문안을 갔다. 우리가 병원에 갔더니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다지 친분이 있는 관계도 아니고, 어찌 보면 생면부지의 관계인데, 메추라기를 몇 번 팔고 산 것 뿐인데 병문안까지 오다니, 그녀는 처음에 감동을 해서 말문을 열지 못했다. 목사님이 복음을 전했다. 다 듣고 난 그녀가 어렵게 입을 열어 말했다.

             

            “목사님,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저인데 병문안까지 찾아와 주시고 좋은 말씀도 전해주셔서 저로서는 참 고맙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허나 이젠 제가 사실을 말씀드려야겠어요. 저는 제 몸에 어른을 모시고 산답니다.”

            우리 부부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몸속에 모신 어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일까?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른이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제 몸속에는 제 주인인 어른이 계세요. 그래서 제가 교회를 나갈 수가 없었던 거예요. 딱히 누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하여간 제 몸속에는 어른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얘기를 들려주었다. 오래 전부터 언니나 친구들이 함께 교회를 다니자고 권했다. 하도 권해서 어느 날 교회를 나갔다. 처음이라 뒷자리에 앉았다.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자기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음 주일에는 좀 더 앞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설교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점점 더 앞자리로 옮겨 앉았다. 다른 사람들이 ‘아멘, 아멘’하는데 왜 그럴까, 무슨 말을 듣고 저렇게 감동을 하는가, 궁금하기도 해서 자기도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싶었다.

             

             

             

                나중에는 맨 앞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자기 귀에는 설교 말씀이 하나도 안 들렸다. 교회를 갔다 오면 반나절은 꿍꿍 앓았다. 온 몸이 몸살이 나고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다. 결국 교회를 더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턴가 자기 몸속에 어떤 존재가 들어앉아 있었다. 자기는 그분을 어른이라고 부른단다.

            그 얘기를 들으며 나는 뒷머리가 쭈뼛했다. 아! 그럴 수도 있구나. 나는 가끔 전도를 하면서 복음을 전해주어도 전혀 듣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려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자가 있고, 이름도 없는 어른을 모신 자도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아니고서는 예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시편 128편 1절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했다. 또한 5절 상반 절에서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라고 했다. 여기서 ‘시온’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 즉 교회를 말한다. 사람이 교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아멘, 아멘’ 할 수 있는 것 또한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은 자가 아니겠는가?

             

               그 후에 그 여자는 전주에 가서 무당집을 차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집사와 무당의 동거라니, 그 남자의 멍에가 허망해 보였다. ‘사랑은 나랏님도 못 말린다’는 속담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기만 하고 있으니 이 어찌 안타깝지 않으랴.

             

                열왕기상 18장에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엘리야가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여 말했다.“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18:21)”

             글/ 양애옥 사모님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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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부터인가 이곳은 나의 일과 속에 한 모퉁이가 되었다 일을 하다가 책을 읽다가 외출에서 돌아와 설레는 마음으로 살며시 엿보는 곳... 오늘은 나의 님들이 무슨 사연들을 쏟아 놓았을까 또 어떤 삶을 살았을까 궁금하고 애잔하나 힘을 얻고마는... 이곳과 친구 하며 사랑스런 님들을 그리워하게 되었네요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지척에 두지는 못했어도 그러나 반갑고 좋은 나의 님들이여... 언제나 내 마음속에 머물기를 기도해 봅니다 - 이화 -

            글: 이화 사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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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렌 커닝햄 목사는

            올해 75세로 1960년 초교파 선교단체인 국제예수전도단(YWAM)을 창설했다.

            마가복음 16장 15절에 따라 ‘젊은이를 일으켜(Youth With A Mission)’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예수전도단은

            현재 전 세계 150여개국에 1000여개 지부가 있으며 2만명이 넘는 스태프들이 일하는 단체로 성장했다.

            지금까지 4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학생이나 자원봉사자, 간사로 훈련받거나 사역해 왔다.

            그는 또한 선교 지원자들의 전문적인 훈련을 위해 하와이 코나에 열방대학도 설립했다.

            ‘하나님 정말 당신이십니까’ ‘벼랑 끝에 서는 용기’ ‘네 신을 벗어라’(예수전도단) 등

            베스트셀러 저자이기도 하다.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3906287&cp=nv

             

             

            YWAM(예수전도단) 창립자인 로렌 커닝햄 목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알파코스에 대한 공신력은 국내외 목회자와 신학자들의 추천에서 잘 드러난다.

            외국의 경우 릭 워렌, 빌 하이벨스, 리처드 포스터, 알리스터 맥그래스, 제임스 패커,

            빌 브라이트, 로렌 커닝햄 등 수많은 이들이 알파에 대한 지지와 찬사를 내놓았다.

             

            한국 교회에서도 조용기 김장환 김삼환 최홍준 고용수 김의원 목사 등 영향력 있는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앞다퉈 극찬하고 있다.

            이동원(지구촌교회)목사는 "전도 폭발이 전도 훈련 그 자체로 한국 교회를 도울 수 있었다면

            알파코스는 성경 공부와 전도를 접목한 새 시대 한국 교회 부흥의 알차가 되리라 믿는다"고 밝혔다.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all&arcid=0921175108&cp=nv

             

             

            “대추수는 끊임없는 기도와 금식을 반드시 요구한다. 캔자스 시에서 마이크 비클이 하고 있는

             중보기도 사역은 대위임 명령의 완성을 위해서 절대 필요한 것이다.”

            -로렌 커닝햄(국제 예수전도단 총재)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8034

             

             

            YWAM 대표 로렌 커닝햄은 아버지로부터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결코 YWAM을 세우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3358279&cp=du

             

             

            DTS(Discipleship Training School )는 12주의 강의와 12주의 전도여행을 통해 이뤄지는

             예수전도단의 가장 기본적인 제자 훈련과정이다.

             묵상,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법, 예배, 중보기도, 영적전쟁, 내적치유, 성경적 세계관,

            전도 및 선교 등이 주 강의내용이다.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06894

             

             

             

            It is a ministry within YWAM but run by and for Catholics.

            Kerygma Teams is a branch of the interconfessional lay - missionary organisation

            YWAM Youth With A Mission.

            Kerygma Teams supports Catholic parishes, renewal movements,

            and groups active in evangelisation, mercy ministries, and training in the Catholic Church

             

            ( 이것은 예수 전도단안에 있으나 카톨릭을 위하여 그리고 카톨릭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다.

            케리마팀은  인터코페션널 래이( 평신도 고해성소)의 지부이다.

            미션을 가진 예수전도단이라는 사역조직이다.

             케리마 팀은 카톨릭의 교구를 지원하고 부흥운동, 복음주의에 속한 그룹들, 구제 사역,

             카톨릭 교회안의 훈련등을 추진한다. )


            Youth With A Mission (YWAM), which now fields more than 12,000 full-time workers in more than 140 countries, was founded in 1960 by Loren Cunningham,

            an ordained Pentecostal pastor of the "Assemblies of God" denomination in the U.S. Cunningham's original aim was to offer young people from various churches the chance to participate in international evangelistic endeavors during their school holidays.  

            ( 예수 전도단은  1960년 오순절 주의 목사인 로렌 커닝햄이 설립하였는데 지금 140개국의 나라에서 12000명의 풀타임 사역자가 현장에서 사역하고 있으며 다양한 모든 교회들의  젊은이들이

            여름 방학 기간 중 국제적인 복음주의의 열정적 집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한다. )

             

            http://blog.daum.net/alphacourse/11296663

             

             

             

            YWAM and Benny Hinn agree to work together!

            Benny Hinn’s new target audience is the youth;

            and who has been involved with the youth more than the missionary organization YWAM.

            They have done a good job in evangelizing in the past but something very different is now taking place.

             

             

            The Head of YWAM on Hinn’s program

             

            On Feb. 4-9, 2002 just a few weeks after the crusade took place here in Hawaii,

            Benny Hinn had Loren Cunningham on his program solidifying the ties

            that he had previously with YWAM through Dawson.

            Previously we watched Joy Dawson with Cunningham as Hinn toured the YWAM base here

            on the Big Island of Hawaii.

             

            http://www.letusreason.org/curren29.htm

             

             

            Joy Dawson Of Youth With A Mission (YWAM)
            Joins Forces With Benny Hinn

            http://www.deceptioninthechurch.com/hinnywam.html

             

             

             

            Youth With A Mission

            Ecumenical (Catholic/Charismatic) Evangelism

            http://www.rapidnet.com/~jbeard/bdm/Psychology/ywam.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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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예수전도단 설립자 오대원 목사 소개 | 은사주의 운동 실태

            푸르름 2010.02.09 17:45   http://blog.daum.net/alphacourse/11297496

             

            자료 1 한국 예수 전도단의 설립자 오 대원과 관상 기도

             오대원 지음/예수전도단/310쪽/

            헨리 나우웬은 홀로 하나님 앞에 있는 시간을 가리켜 비우는 시간이자 채우는 시간이라고 했다. 이 시간은 날마다 내 실상의 모습에 직면하여 나의 '거짓 자아'를 단념하는 시간이다. 거짓 자아를 구성하는 쌍둥이인 욕심과 분노, 그리고 그 밖의 악한 생각, 나쁜 습관, 충동적 행동 등을 다루는 하루 중 유일한 시간이기에, 자신의 굳은 마음을 내려놓는 이 시간은 고투의 시간이다. 나우웬은 이 시간을 '뜨거운 화덕' 또는 '변화의 도가니'라고 표현한다. 너무나 바싹 달라붙는 죄에서 해방되는 회개의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간은 고투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다. 우리는 자신을 비우는 동안 두려움을 몰아내는 그분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진다. 매일 이른 아침은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시간, 내 지친 영혼을 위한 그분의 치유를 받아들이는 시간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고, 우리는 그분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주시할 때 변화가 일어난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면 날마다 변화된다. 묵상을 하는 동안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고, 그분과의 친밀함 속으로 들어가며, 인격이 새로워진다.

            이러한 신비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기에, 이 신비에 들어간 사람들은 이 진리를 세상과 나누라는 부르심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것이 먼저 자신의 개인적인 진리가 되어 삶에 적용될 때에라야 비로소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다. 자신이 먼저 변화되고 진리에 의해 자유케 될 때,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타 종교의 묵상은 정신수양으로서의 요가든, 초월적 명상이든, 찾고자 하는 것이 '자신의 참모습'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묵상 가운데 자신의 '창조주 하나님'을 찾는다. 그분의 임재 안에 들어가 나를 변화시키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길 소원한다.

            토마스 머튼은 이 둘을 잘 대조했다. "하나님은 피조세계를 두셔서 자신의 빛을 사람의 영혼으로 전달하는 투명한 창문이 되게 했다. 날이 밝을 때는 이 창문을 통해 밖의 빛을 볼 수 있다. 밤이 와도 안에 불빛이 없다면 여전히 창문을 통해 밖의 빛을 볼 수가 있다. 하지만 방안에 불을 켜면 밖은 보이지 않고 창유리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빛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전등을 켜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창유리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그것을 또 다른 영적 세계라고 생각한다. 고등종교의 지도자, 특히 붓다와 같은 불교 지도자는 통찰력이 있었으나 그것은 제한적인 것이었다. 그는 창문에 비친 영상들이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의 소원이 투영된 것뿐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창문이며, 창문유리 너머에 빛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하지만, 세계의 주요 종교에서 행하는 명상들은 하나님을 찾는 애절한 표현의 다른 이름임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들은 아직도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며 생명의 의미와 근원을 부지런히 찾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묵상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자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까지 결코 만족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으며 그분이 말씀하실 때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우리 안에 심어 주셨다. 그리고 그 말씀에 응할 때에야 자신의 진정한 존엄성을 획득할 수 있게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있는 곳에서 우리를 만나주신다. 하나님 앞에서 침묵 가운데 기다릴 때,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침묵은 말씀의 집이다. T. S. 엘리엇은 '사순절 첫날(Ash Wednesday)'이라는 시에서 "말씀은 어디 있고, 어디서 울려 퍼질 것인가? 여기는 아니다. 충분한 침묵이 없다"라고 한탄했다. 침묵이란 단순히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는 태도나 자세를 말한다. 효과적인 침묵을 위해 적막을 찾아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그러면 이내 소음은 자신 안에 있지, 밖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평화로운 침묵을 얻으려면 우리 자신을 넘어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막의 교부들에게서 유래된, 침묵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한 젊은 제자가 스승에게 침묵을 발견하는 방법을 물었다.

            "제게 침묵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글쎄, 자네는 그걸 어디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제 속 깊은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만 있다면 소음을 피하리라고 확신하는데, 어렵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제자는 스승이 도와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의 영혼은 늘 고요했으니까.
            "그래, 나도 한때 그랬지. 내 안으로 들어가는 데 수년을 보냈어. 그리고 거기서 침묵을 맛보기도 했지. 그런데 어느 날 내 상상인지 모르지만 예수님이 찾아오셨네. 그리고는 '와서 나를 따르라'는 단순한 말씀을 하셨지. 나는 나갔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지."
            제자는 어리벙벙했다. "하지만 침묵은...?"
            "나는 '위대한 침묵'을 발견했네. 그리고 소음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네!"

            홀로 있는 시간, 주님의 치유 안에서 쉬는 시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모든 말씀에 온 맘 다해 경청하는 침묵의 시간, 이것이 우리의 하루를 시작하는 방법이다. 바쁜 일정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매일 15분 내지 20분만 들어도 좋다. 짧지만 그것은 삶을 바꾸는 시간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은 세상을 향한 그분의 마음을 우리와 나누실 수 있다.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중에서

             

            발췌 : http://catholic.bookcosmos.com/Sub/Board/InfoBook.Asp?Type=T&Gubun=love&Id=2&Sno=9010302&page=05

                     ( 카톨릭 대학 홈페이지 )

             

            (주) 위에 오 대원이 인용하는 헨리 나우엔과 토마스 머튼은 종교 다원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관상기도 운동을 전파하는 카톨릭 신부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구원의 유일한 길이 아니라, 많은 길중의 한 길이라 주장합니다. 불교와 다른 종교들에서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 깨달음은 관상기도를 통하여 만나는 "하나의 하느님"을 만남으로서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모든 종교들에 관상기도 운동을 펼치는 진짜 목적은 결국 모든 종교가 "하나의 하느님"에 이르게 하는데 있습니다. 카톨릭은 복음주의 진영의 에이전트에게 이 운동을 하달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레노바레 운동입니다. 레노바레 운동은 복음주의 진영의 관상기도입니다.

             

             

            자료 2 예수전도단 설립자 오 대원과 치유 운동

             

            치유와 초자연적인 해방의 역사가 고난 받는 교회들을 통해 속속 전달되었다. 70년대에 프란시스 맥너트 목사는 한국을 자주 방문해 교회에 치유 사역을 소개하며 치유 사역이 회복되는 데 힘썼다. 수백명의 개신교 목사들과 카톨릭 신부들이 아침마다 서강 대학교에 모여 치유 세미나를 가졌고 저녁에는 실내 체육관이나 경기장에 모여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치유 집회를 열었다. 나도 여러번 참석했었다. 어느날 저녁 부산에서 열린 모임에서 사람들은 신약 성경에 기록된 거의 모든 종류의 치유를 경험했다. 치유 받은 사람들의 이전 모습을 알고 있던 카톨릭 신부나 개신교 목사가 그들의 치유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하나님은 카톨릭 교인들과 개신교인들이 그들 사이에 오랫동안 존재해왔던 편견을 기꺼이 버리고 화합하는 것을 기뻐하셨다. 교회가 견고해짐으로 그분이 영광을 받으셨다. 우리 역시 크게 기뻐하고 교회가 치유된 것을 노래하고 축하해야 할 일이었다.

             

            발췌 : 오대원 저 묵상하는 그리스도인 178p ( 도서 출판 예수전도단 )

             

            자료 3 오 대원의 약력

             

            본명 : Dauid E. Ross

            1935년 9월 14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출생

            1957년 테네시 킹 대학 졸업

            1960년 유니온 신학대학 졸업

            1961년 남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

            1972년 예수전도단 설립

            1980년 미국 예수전도단과 공식적 통합

             

            자료 4 예수 전도단과 관상 기도

            YWAM(예수전도단) BDTS(독수리제자훈련학교) 강의

             글쓴이 : 성목사
             
            9.8.일부터  월,화 오전 9:30부터 2:00까지  가스펠 휄로쉽 교회에서  모입니다. 국제 예수전도단의 뉴저지 지부(Ywam Acts NJ)는 그동안 저녁 시간에만 운영하던 독수리 제자훈련학교(BEDTS)를 9월부터 오전에도 개강한다. BEDTS는 국제예수전도단 DTS(Discipleship Training School) 전 과정을 현장의 조건에 맞추어 운영하는 14주 훈련 과정이다. 주님께 헌신된 주부들과 직장인들을 모아 국제 예수전도단의 열방대학 강사들을 통한 12주의 주제 강의와 2주의 전도 여행으로 진행된다. 강의 및 예배와 중보, 소그룹 모임 등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성경적 원리원칙을 개인의 삶에 적용하여 맡겨주신 각자의 영역에서 세상문화를 변화시키는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고자 도전하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따라 지역교회를 섬기며 보내는 선교사 또는 가는 선교사로 삶을 살도록 도전하는 훈련학교이다.

            성목사 08-08-24 04:04
             
            뉴저지 와이웸 독수리 제자 훈련학교 오전반

            < 강의내용 >
            Contemplative Prayer( 관상 기도 ) / 하나님 음성 듣는 삶 / 예배 / Father Heart of God / 하나님의 성품 /중보기도 /내적치유/ 용서 /기독교 세계관 / Family Relationship / 잃어버린 영혼 / 도시선교

            < 학교안내 >
            -일정 : 2008년 9월8일 - 11월 25일 (12주간)
                      매주 월, 화요일 9:30 - 2시까지.
            -장소 : 가스펠 휄로쉽교회
                10 Mcdermott Pl. Bergenfield, NJ 07621
            -모집인원 : 40명 선착순
            -등 록 비 : $500(부부 $900), 등록비 $50 별도
                목사님 사모님 장학금 혜택
            -원서교부 : *YWAM ACTS 공식카페에서 다운로드(www.cafe.naver.com/ywamacts)
            *E-Mail(Ywamactsnj@Hotmail.com) 로 원서요청
            -문    의 : 201-787-1114 / 201-978-9235
             
            자료 5 카톨릭과 함께하는 국제 예수 전도단 KERYGMA팀

             

             

             

            ( 게시자 주 )

             

            예수 전도단은 한국 교회뿐 아니라 세계 교회들에 은사주의와 에큐메니칼 운동을 확산 시키는 주역입니다. 이 단체는 모든 은사주의적 프로그램과 문물들을 젊은이들에게 소개하고 이들을 훈련시켜 다시 교회 전체에 파급시키고 있습니다. 한국의 교회들은 이 단체에 의하여 심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자인하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 전도단이 한국과 세계에 전파하는( 함께하는 ) 운동, 프로그램들

             

            1) 프라미스 키퍼스 운동

            2) 알파코스

            3) 관상기도

            4) 에큐메니칼 운동

            5) 신사도 운동

            6) 빈야드 운동

            7) 현대 예배 ( 록, 신디사이저, 열광적 댄스, 자극적 조명과 음향, 파격의 도입 )

            8) 치유 운동

            9) 임파테이션

             

            위와 같은 운동과 프로그램들이 지향하는 두가지 핵심적인 요소는 첫째 현상적 은사에 치중한다는 것이요, 두번째는 에큐메니즘에 대한 강한 모티브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프로그램과 운동을 구상하고 발진시키는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누리에 전파하며 성도들로 하여금 참 복음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에 순종하는 삶의 열매를 맺게하려는 데 집중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 열거되고 있는 것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은사주의화하고 이렇게 은사화된 교회들이 교리에 집착하지 않는 " 하나", 즉 에큐메니즘을 이루려는 본의와 지향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보기에는 매우 매력적이고 역동적이며 소위 즉시적인 은혜의 체험의 장으로 이끌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뜻하는 바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땅에 오심으로 완성되었고 성경에 완전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기록된 말씀대로 사역을 해야 할 것이며 성도들은 이 말씀대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위에 열거되는 운동과 프로그램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은사주의화하기 위하여 성경의 특정 부분을 왜곡하거나 집중 원리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성도들을 서서히, 은근히, 에큐메니즘의 큰 마당으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이 에큐메니즘은 교회의 일치라는 선한 뜻이 아니라, 종교 연합적 에큐메니즘의 장으로 이끌기 위한 대기적 장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정사와 권세를 주관하는 자들은 정치 경제 문화 종교 과학등 모든 분야에서 신세계 질서를 도모하는 뉴에이지적 전략을 펴나가고 있습니다. 종교 분야에서 이들의 목표는 세계의 모든 족속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신념을 초월하는 다원주의적 사상을 갖게하고 종국에는 단일 종교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예언하고 있는 바로 그 " 적그리스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적그리스도의 실체를 예시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이 존재의 실체를 의식하고 분별하지 않으려 한다면 바른 믿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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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릭 조이너의 “과격한 수술” 분별하며 읽기



              필자는 2년 전 적그리스도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상세히 해설한 「밝혀진 적그리스도의 정체」라는 종말론 서적을 출간한 바 있습니다. 성경 예언이 지적하는 그 적그리스도란 무신론자이거나 한 개인적 인물이 아니라 계승되는 여러 사람으로서 바티칸의 로마교황임을 폭로했습니다.  관련기사: < 밝혀진 적그리스도의 정체> < 성전에 앉아 있는 불법의 사람 >


              이 책이 출간된 직후 추천의 글을 써주신 서철원 교수님(전 총신대학 부총장)을 뵙고 함께 식사를 하며 교제의 시간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서 박사님은 나에게 “유 목사님은 세례 요한과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격려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배교는 완성되었습니다.” 나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이냐고 질문했습니다. 서철원 교수님은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카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배교는 완성된 것입니다.” 과연 서철원 박사님은 바른 신학과 진리를 수호하는데 생을 바치고 계시는 개혁 신학계의 거목이셨습니다.

             

              1965년 바티칸 공의회 때의 “비 그리스도교 선언”은 충격 자체였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배교 선언’이었습니다. 타종교와의 화해라는 명분으로 사실상 다른 종교에서의 구원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철원 교수님은 이것을 ‘배교의 완성’으로 간주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공적으로 예수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선언했다면 그것은 배교의 극치이자 배교의 완성입니다. 왜? 예수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사상보다 더 높은 단계의 배교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로마교회는 그 전에도 비성경적 행습과 사상이 가득한 배교교회였습니다.  관련기사: < 배교는 오래 전 시작되었고 지금도 진행중 > 그러나 이 배교교회가 1965년에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선언함으로서 마침내 배교의 절정에 도달했고 배교를 완성한 것입니다. 성경이 로마교회를 음녀의 어미라고 예언하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관련기사: < 요한계시록 17장① > 


              따라서 배교타락교회인 로마 카톨릭과 연합하고 이 음녀교회와의 일치운동에 앞장서는 자는 분명히 거짓 선지자이며 주님의 몸 된 교회에 가장 위험하고 유해한 인물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치명적으로 병들게 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사람이 자기 자신을 중병에 걸려 사망 직전에 있는 교회를 치유하는 의사로 묘사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순진한 양들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나는 속지 않겠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자칭 선지자인 릭 조이너입니다.

             

            말타기사단 차림의 릭 조이너가 주교관을 쓴 카톨릭 고위 사제 바로 옆에 서 있다.


              조이너는 로마 교황에게 예속된 말타기사단의 기사입니다. 말타기사단의 원 조직은 로마 바티칸에 본부가 있습니다. 그것은 카톨릭 교회에 의하여 통제되고 있는 조직입니다. 말타기사단은 분명히 카톨릭 기관이며 교황에 의하여 통제되고 전적으로 교황과 마리아와 로마 카톨릭을 위하여 봉사하는 기관입니다. 그것은 매우 막강하고 대대적인 규모의 조직입니다. 공식적인 웹상의 명칭은 “소비린 밀리터리 말타 오더”(SMOM: Sovereign Military Order of Malta)라고 합니다. 1099년에 예루살렘에서 창설되었고 1113년에 교황에 의하여 승인되었습니다. 조이너는 이제는 꽤 널리 알려진 ‘말타기사단’ 미주 지단의 한 단장입니다. 관련기사: < 릭 조이너의 영적 뿌리 >


              그런데 카톨릭과 야합하는 이런 유해한 인물이 “과격한 수술”이라는 글을 통해 자신을 암 덩어리로 뒤덮여 더 이상 생존이 어려울 정도인 교회를 수술해 고치는 위대한 의사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도둑이 경찰을 자처한 격이죠. 아래는 릭 조이너가 쓴 “과격한 수술”이라는 글 전문입니다.

             

              과격한 수술 (모닝스타저널 19-1 / 모닝스타코리아저널 21호)


              2007년 10월 20일, 나는 예수님께서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대해 과격한 수술을 행하시는 환상을 보았다. 교회는 마치 수술대에 누워있는 한 여성과도 같았다. 교회는 내가 이제까지 보아왔던 것 중 제일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몸 전체에 암이 번져있었고, 온몸은 종양으로 뒤덮여 있었다. 주님은 조심스럽게 교회의 몸을 절개하기 시작하셨다. 암은 확실히 모든 내장과 근육, 모든 뼈 조직에까지 전이되어 있었다. 어떤 종양들은 크기가 매우 컸고, 또 어떤 종양들은 매우 작았다. 아무튼 종양은 몸 전체에서 발견되고 있었다. 암이 너무도 심각한 상태였기에, 나는 과연 교회가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수술을 행하시는 주님은 걱정스런 기색을 조금도 내비치지 않으셨다. 오히려 매우 행복해하셨다.


              나는 주님이 매우 신중한 태도로 교회 안의 모든 내장과 근육과 뼈들을 절개해내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과연 이 정도로 과격한 수술을 받고서도 몸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러자 예수님의 옆에서 수술을 돕고 있던 한 간호사가, 내가 마음속으로만 제기한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해주었다. 마치 내 생각이 큰 소리로 들려진 것만 같았다. “위대한 의사이신 주님의 수술을 받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주님이 아무리 과격한 수술이라도 필요에 따라 마음껏 행하실 수 있으셨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만일 교회의 일부만 수술을 받았더라면 암은 계속해서 번져갔을 것이고, 결국 교회는 결코 치유되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이러한 과격한 수술을 통하여 교회는 치명적인 질병에서 온전히 구원받게 되었다.


              그때 나는 주님이 그토록 행복해하신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 간호사가 대답했다. “드디어 교회가 주님께 수술을 행하시도록 허락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수술 후에 교회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변할 것이며, 주님과 매우 친밀한 자리로 나아갈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수술은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모든 내장, 근육, 뼈, 모든 조직들까지 모조리 절개되고 있었다. 수술대 위에 놓여있는 것이 과연 한때 정말 사람이었을까 싶을 정도로 하나의 덩어리로만 보였다. 교회 안에 아직도 생명이 남아있을 것이라고는 거의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주님은 미소를 지으시면서 수술을 행하고 계셨다. 방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수술의 결과를 기대하며 대단한 확신과 평강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수술실이 이토록 기쁨에 넘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이제껏 거의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나는 그들의 기쁨에 함께 동참하는 일에 애를 먹었다.


              문득 주님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시더니 수술용 메스 하나를 건네주셨다. 그리고는 내가 원한다면 주님을 좀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다. 물론 나는 깜짝 놀라 주님께 말씀드렸다. 어떻게 수술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기술도 없기 때문에, 내가 수술을 행하면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내가 정확하게 대답했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몸 된 교회에 이런 식의 수술을 행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셨다.


              그 후 주님은 핀셋으로 보이는 서로 다른 크기의 수술 도구 두개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주님은 일단 주님이 암을 드러내놓을 테니 나는 핀셋으로 그 암을 끄집어내서 제거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여전히 주저주저하고 있었지만, 주님은 나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계속 불어넣어 주셨다. 주님은 주님의 양손을 나의 양손에 포개어 주셨다. 주님의 평강과 온유의 능력이 내 안에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내 안에 주님이 하라고 하신 일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은 점점 증대되고 있었다.


              이제 나도 주님과 함께 수술을 행하고 있었다. 나는 주님이 드러내시는 암종들을 하나씩 제거해가기 시작했다. 암종들 중 어떤 것들은 정도가 경미했으므로 쉽게 빠져나왔다. 반면 어떤 암종들은 조직이나 내장에 심하게 얽혀있어서, 암종을 떼어내려다가 자칫 내장까지 손상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주님이 내게 주신 수술도구들을 갖다 대기만 하면, 암종은 곧 죽어버렸고, 붙어있던 내장으로부터 쉽게 떨어져 나왔다. 어떤 내장들은 조직보다는 오히려 공기구멍만 훨씬 더 많이 남아있어 마치 스위스치즈처럼 보였다. 과연 이 내장들이 다시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얼마 후 다른 사람들 몇몇이 수술대 위에 놓인 교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도 나와 동일한 수술 작업을 행하고 있었다. 내 안에는 이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는 확신이 점점 커지고는 있었으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은 틀림없었다. 암의 모양은 너무도 혐오스러웠고, 나는 선뜻 이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암이 조금씩 제거되는 모습을 보면서 내 안에는 엄청난 기쁨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암은 마귀의 속성을 드러내주는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기 때문이었다.


              수술을 받으면서 교회는 완전히 산산조각 나기 직전까지 최대한도로 절개되어 있었다. 이제 주님은 암종이 제거된 자리마다 바늘로 꿰매어가기 시작하셨다. 주님은 내장들과 조직들을 매우 정교한 솜씨로 봉합하셨다. 마치 위대한 화가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듯했다. 주님의 기쁨은 얼마나 전염성이 강하던지, 그토록 혐오스런 암종을 제거하는 일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행복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암종들이 아무리 역겨워보여도 괜찮았다.


              교회의 몸 가운데 암이 가장 심각했던 부위는 심장과 폐와 뇌였다. 제일 마지막으로 봉합된 곳도 바로 이 부분들이었다. 각각의 부분들을 하나로 봉합시키는 작업이 종결되자, 마치 꿀과도 같은 금으로 된 물질이 교회의 몸 전체를 부드럽게 감쌌다. 나는 이 물질이 치유의 향유임을 깨달았다. 이 향유는 매우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향유가 발라진 곳마다 더 이상 염증이 남아있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이 향유는 마치 초강력 영양제와도 같았다. 암종이 제거되면서 생긴 작은 구멍들의 조직이 향유가 발라짐과 동시에 신속하게 회복되었다. 마침내 모든 내장들과 몸은 단순히 새로워진 정도가 아니라 이전보다 훨씬 더 월등한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나는 교회가 일단 이 암에서 구원받기만 하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질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몸 안의 조직들과 내장들이 완벽하게 봉합되고 난 후, 주님은 교회의 양손을 봉합하기 시작하셨다. 주님의 봉합기술이 얼마나 탁월하고 완벽하던지, 아무리 과격한 수술을 받았더라도 상처자국이 조금도 남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윽고 교회의 양손은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가장 아름답고 흠이 없는 손이 되었다.


              몸은 점점 예전처럼 다시 사람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교회가 이제 전대미문의 최고의 아름다운 몸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너무나도 완벽하게 이루어진 수술 덕분에 흉터는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내 안에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혹시 수술 후 교회가 깨어난 다음에는 통증이나 기타 고통의 흔적을 느끼게 되는 건 아닐지 궁금해졌다. 그러자 간호사 중 한 명이 나에게 앞으로 통증은 없을 것이라고 대답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 간호사는 이번 수술로 인해 교회는 유사 이래 그 어떤 인간과도 비할 수 없는 탁월한 감수성과 예민함을 영원토록 지니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이 수술은 나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사실 그동안 나는 방안을 둘러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왠지 위를 쳐다보아야한다는 강한 생각이 들었다. 위를 쳐다보자, 하늘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늘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별들과 무수한 은하수들이 있었다. 계속해서 하늘들을 쳐다보는데, 별들과 은하수들 너머에 펼쳐진 영적인 영역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별들 대신에 수없이 많은 생물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생물들은 모두가 밝게 빛을 발산하고 있었고, 생명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생명과 기쁨의 능력이 내 안에 전이되어 오는 것만 같았다. 이런 종류의 체험을 할 경우, 이따금씩 당신은 무언가를 단순히 인식하고 감지하는 것뿐인데도, 그 느낌과 인식이 매우 실제적이고 참될 때가 많다. 나는 이 생물들 대부분이 천사와 같은 존재들임을 알아챘다(그들 중 몇몇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 나는 이들의 존재에 관하여 알아가는 일에 영원을 보내게 될 것이지만, 이를 위해 영원의 때가 되도록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또한 그들도 역시 나에 관해 알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듣기를 원했다.

             

              잠시 후 내 관심은 수술실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거울들을 향해 쏠렸다. 나는 그 거울들이 모두 일방경(one-way mirror)들이라고 느꼈다. 밖에서는 수술실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지만, 안에서는 밖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별안간 나는 거울 너머에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있음을 보게 되었다.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숫자의 사람들이 수술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히브리서에 언급된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히 12:1)이었다. 나는 이전에 다른 영적 체험을 하면서도 그들을 본 적이 있었다. 내가 그들을 쳐다보자, 그들도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인사라도 하는 듯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여줌으로써 그들에게 응수했다. 인사를 주고받으면서 나는 그들과의 강한 유대감을 느꼈다. 내가 그들을 쳐다보면 볼수록 유대감은 점점 증대되었다. 계속해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들의 모습은 점점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이번 역시 아주 놀라운 체험이었다. 방금 전에 목격한 하늘의 천사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는 이 무리들에 대해서도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들도 나에 관해 알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 그들의 관심은 나보다는 오히려 수술하는 장면에 더 쏠려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태도로 인해 나도 다시 한 번 수술대를 돌아다보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이 ‘허다한 증인들’에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관심을 쏟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수술은 이미 종결된 상태였고, 교회는 수술에서 깨어나 영광스런 옷으로 단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회의 모습은 이제껏 내가 보았던 그 누구보다도 훨씬 더 근사했다. 얼굴에서는 아름다움뿐 아니라 강한 힘마저 느껴졌다. 눈빛은 얼마나 강렬하던지, 교회가 나를 바라보았을 때 나는 마치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교회의 존재 자체가 생명의 능력이자, 지적 총명함의 화신처럼 보였다. 교회가 손을 대는 것은 사람이든 사물이든 모두가 치유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교회가 지닌 고요함이야말로 교회로부터 발산되는 생명의 능력에 비해 훨씬 더 매혹적이었다. 교회는 평강, 은혜, 위엄의 화신이기도 했다. 단지 교회를 바라보기만 해도 이상에 묘사된 온갖 언어들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개념으로 바뀌어버린다. 고결함과 고귀함을 지칭하는 온갖 언어들이 있다면, 교회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다.


              나는 교회가 더 이상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교회는 참되고 새로운 피조물이었다. 육신과 영을 동시에 지닌 진정한 의미의 영적 인간이었다. 교회는 오른손에 검을 쥐고 있었고, 왼손에 나팔을 들고 있었다. 당장은 제자리에 서 있었지만, 이제 곧 행진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환상은 여기서 끝이 났다.


              요 약 (SUMMAPY)


              환상들 중에는 그 의미가 너무도 명백하여 달리 해석이 필요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번 환상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환상에 내포된 주된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지금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암에 걸려 거의 힘을 잃고 있다. 암은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성, 거역의 대명사이다. 암은 몸의 나머지 지체들이야 어찌되든 상관없이 에너지를 소진시켜 버린다. 오직 자신의 목적과 필요를 채우는 일에만 급급한 것이 암이다. 수많은 교회들과 사역단체들, 심지어 크리스천들마저 이런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교회를 마치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 자신의 비전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다. 그 결과 진정한 기독교신앙과 교회 본연의 모습은 매우 심각하고 기괴한 형태로 왜곡되어 버렸다. 그러나 교회가 이 일을 통해 주님의 구원을 간구하며 부르짖는다면, 주님은 반드시 우리를 구원해주실 것이다. 그리고 이 일에는 과격한 수술이 동반될 것이다. 교회의 내면에 들어있던 모든 것들이 빛에 노출될 것이다. 이 작업은 매우 힘들겠지만,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가치가 있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이 글은 건성으로 읽으면 아주 유익한 글 같습니다. 글의 주제는 “암덩어리가 온몸에 퍼져 대수술이 필요한 주님의 몸인 교회” 같구요... 그러나 이 글의 진정한 주제는 “암 종양이 전신에 퍼져 생존이 불가능한 지경에 있는 교회를 주님의 위임에 따라 수술하는 위대한 의사 릭 조이너”입니다. 이게 이 글이 의도하는 바입니다.

             

              조이너는 자신이 본 환상을 기술하는 형식을 빌려 자기를 사망 직전의 병든 교회를 수술하는 의사로 묘사했습니다. 즉 릭 조이너는 아주 교묘하게 자신이 특별한 사역자라는 암시를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시더니 수술용 메스 하나를 건네주셨다. 그리고는 내가 원한다면 주님을 좀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다.” 이제 나도 주님과 함께 수술을 행하고 있었다. 주님이 내게 주신 수술도구들을 갖다 대기만 하면, 암종은 곧 죽어버렸고, 붙어있던 내장으로부터 쉽게 떨어져 나왔다. 더욱이 천사들도 자신에 대해 알고 싶어 했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원했다고 썼습니다. 그들도 역시 나에 관해 알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듣기를 원했다.” 굉장하지 않습니까? 조이너는 하늘의 천사들도 사모하는 존재입니다.

             

              조이너가 누구관대 천사들이 그를 알고 싶어 하고 조이너 이야기를 듣기 원한다는 말입니까? 천사도 우리 인간들처럼 내가 누구인지를 소개해야 비로소 나를 알 수 있는 것입니까... 말이 되나요? 만일 그런 천사라면 그는 귀신만도 못한 영입니다. 빌립보의 한 여종 안에 있던 점쟁이 귀신은 바울과 실라를 알아보고 이렇게 소리 질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행 16:17).

             

              성경 어디에도 천사들이 모세나 엘리야, 베드로나 고넬료 등에 나타나서 “우리는 당신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요. 그래서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원해요. 본인 이야기 좀 자세히 해주세요”라고 했다는 구절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천사가 사람에게 그런 요구를 한 사례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조이너는 왜 이런 아리송한 글을 기술했을까요? 무슨 의도로... 이 글의 독자들을 향해 “나는 천사들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고, 천사들이 나의 이야기 듣기를 원하는 그런 존재다”라고 암시를 하려는 것입니다.

             

              릭 조이너는 이 글 속에서 교묘하게 자신의 위상을 높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독자들이 눈치채지 못하고 조이너의 암시에 걸려들고 맙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생각의 지배를 받습니다: “조이너는 위대한 사도요 선지자다! 여러분은 조이너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암시하고 교묘하게 자기를 높이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바로 이런 것이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입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순진한 성도들은 대부분 내용 파악을 못하고 조이너가 슬그머니 제시한 암시에 자신도 모르게 걸려들고 있습니다. 그 결과 조이너를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라고 인식하죠. 미혹의 글에 속은 것입니다. 이 정도는 약과입니다. 릭 조이너는 또 다른 미혹의 글에서 사도 바울을 격하시키고 자신은 바울보다 탁월한 존재로 치켜세우기도 했습니다. 관련기사: < 릭 조이너의 미혹의 글 분별하기 >

             

              이런 문제의 인물이 사도와 선지자를 사칭하며 버젓이 활보하는데도 침묵하고 방관한다면 그것은 악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교회 리더들은 성도들이 미혹을 당하지 않도록 경보를 발해야 합니다. 더욱이 조이너는 음녀교회와 야합하는 바티칸의 좋은 친구입니다. 당연히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할 것입니다.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죄 없다 하지 않으실 것이다. 악에 맞서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악에 동의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악에 맞서 행동에 나서지 않는 것은 악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디트리히 본회퍼)

             

            릭 조이너가 소속된 SMOM(최고군사말타기사단) 단장 앤드류가 교황 베네딕토와 함께 하다(2010년 4월 3일 바티칸).

             

              조이너는 마지막 때의 크리스천들이 마지막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현대의 선지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The Final Quest 빛과 어둠의 영적전쟁 p.58~59). 조이너에 따르면 마치 아이들이 그네들의 부모에게 의지하는 것처럼 신도들이 선지자들을 의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같은 책 p.60). 이런 교훈은 실로 커다란 미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크리스천들이 신사도들과 신선지자(신예언자)들에게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의 크리스천들에게 추종자들을 양산해 내려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 경고 하였습니다(갈 4:17).

             

              영적 지도자들은 자칫 성도들을 조종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조이너는 사도와 선지자를 사칭하며 크리스천들을 조종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도들은 현대의 선지자들에게 복종해야 하며 아이들이 부모에게 의지하는 것처럼 선지자들을 의지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진한 성도들이 기만당하지 않도록 더더욱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한편 “과격한 수술”에서 조이너는 자기와 동일한 수술 작업을 하고 있는 소수의 다른 사람도 엑스트라로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얼마 후 다른 사람들 몇몇이 수술대 위에 놓인 교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도 나와 동일한 수술 작업을 행하고 있었다.” 이 간략한 문구는 자기만 특별한 사역자로 부각시켰다는 지적을 차단하기 위해 치밀하게 마련한 장치입니다. 일종의 연막인 것이죠. 

             

              조이너의 글은 예수님을 나타내는 모양새를 취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 높여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도둑질하거나 나누어 가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홀로 한 분이신 구주 예수님만이 영광과 찬양과 높임을 받으셔야 합니다. 영원히!

             

              나는 조이너가 보았다는 이 “과격한 수술” 환상은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미혹의 영으로부터 왔거나 그게 아니면 자신을 특별한 사역자라고 암시를 줄 목적으로 작가적 상상력을 동원해 쓴 픽션일 가능성이 큽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배교교회와 야합하는 릭 조이너를 암덩어리가 전신에 퍼져 생존이 불가능한 이 시대의 교회를 수술하는 의사라고 말씀하실 리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칼로 수술이 필요한 일차 대상은 카톨릭과의 연합에 앞잡이 역할을 하는 릭 조이너 자신입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로마 카톨릭과의 연합운동에 앞장서는 인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가장 유해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로마 교황에게 예속된 말타기사단원인 조이너가 병든 교회를 치유하는 위대한 의사일 수가 있습니까? 기만당하지 마십시오. 지금 교회에 요청되는 가장 시급한 수술은 음녀교회인 카톨릭과 연합하는 자들을 암세포처럼 교회에서 분리 제거하는 일인 것입니다. 바로 그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몸에서 과격한 수술”을 요구하는 대표적 악성 종양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백성아, 그녀에게서 나오라. 그리하여 그녀의 죄들에 동참자가 되지 말고 그녀의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 KJV). 관련기사: < ‘하나님의 인 인침 받은 무리 > < 분리의 원리 > < 분리의 삶 >


             

             

             

            글/ 유석근 목사

            릭 조이너의 영적 뿌리

             

             

            말타기사단의 상징인 갈라진 십자가

             

             

            조이너는 이제는 꽤 널리 알려진 '말타(Malta/몰타)기사단' 미주 지단의 한 단장이다.

            모닝 스타 홈페이지를 보면, 그는 자신이 왜 말타 기사가 됐는지 이유까지 상세히 밝혔다. 


            http://www.morningstarministries.org/Groups/1000012244/MorningStar_Ministries/About/Q_and_A/Q_and_A.aspx

             

            다음의 '미국 캐롤라이나 수여식'(2010년 5월 20~22일) 항을 들쳐 보면,

            그가 기사단장으로 인준받아 말타 단복을 입고

            흉장을 받는 모습 등의 여러 사진들이 있다. 흰 구레나룻을 기른 사람이 조이너다.

             

            http://www.theknightshospitallers.org/invest_carolinas_2010.php

             

             

            조이너가 기사단장으로 인준받아 단복을 입고 흉장을 받는 모습

             

             

            말타기사단 복장의 릭 조이너

             

             

            말타기사단 차림의 릭 조이너가 주교관을 쓴 카톨릭 고위 사제 바로 옆에 서 있다.

             

             

             주교관(어두관)을 쓴 카톨릭 사제 옆에 자리 잡고 있는 말타기사단 복장의 릭 조이너

             어두관 관련기사: < 계시록 13장의 둘째 짐승① >

             

             

             무릎을 꿇고 충성의 예를 갖추고... 말타 기사 수여식

             


            공식명칭이 '말타최고군단'(SMOM)인 말타기사단은 비슷한 이름과 조직을 가진 13개가 있으나

            진짜는 로마 바티칸에 본부를 두고 있고 카톨맄 교회와 교황의 지배를 받는다.
            1099년 예루살렘에서 창단, 1113년 교황의 공인을 받았고..

            1994년 8월 24일 유엔의 영구 옵저버가 된 국제조직이다.
            흥미롭게도 천주교와 프리메이슨에 같은 이름의 조직/등급이 있다.

            아울러 역시 메이슨의 한 단급인 '성전기사단'(KT)도 비슷한 조직체의 하나이다.


            이들은 교황과 마리아에게 전적인 충성을 바치며 천주교 사상에 철저히 충실하다.

            밥 조운즈의 예언과 권유에 따라 말타기사가 된 조이너는 이 단체의 지단장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크리스천들을 '기사'로 임명해 왔다.

            폴 케인, 바비 코너, 타드 벤틀리 등도 역시 단원으로 의혹시 돼 왔다.  

             

            이런 배경을 지닌 조이너는 자연스럽게 영지주의자(그노스팈), 신비주의자이다.
            http://www.deceptioninthechurch.com/orrel10.html

             


            그의 '최종탐구'(Final Quest / "빛과 어둠의 영적전쟁")

            신비의 산에 오르는 비전을 제시하면서 그 산길로 올라가

            마침내 그리스도 자신을 만난다는 절묘하고 야심찬 영지주의 저작물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기독교 체험을 혁신화할 비밀지식과

             '하나님의 동산', 천사들의 도움으로 맛본 '생명나무' 열매,

            길에서 만난 수많은 신자들과 친구들 등을 거들고 있다.

             

            조이너는 이 책(제9,10쪽)에서 영감과 계시의 4 레벨/단계를 논한다.

            가장 낮은 1단계는 예언적 '인상', 2단계는 사도들이 신약을 기록할 때 사용한 '의식적 조명'(c.i.),

            3단계는 열린환상(오픈비전), 최고/최종단계인 4단계는 '트랜스'(입신)란다.

            이 4단계가 조이너가 꿈과 비전을 "받는" 단계라는데, 어디서 누구에게 '받는'지는 모르지만,

            실로 그의 레벨 내지 수준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결국 자신은 성경기자나 사도들보다 2단계나 수준이 높다는 논리이니, 시건방지고 비성경적이다.

            자신의 영적 레벨이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보다도 더 우월하다는

            조이너의 오만방자(傲慢放恣)한 사상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 성령일까, 악령일까...

             

            조이너는 미주 말타기사단 일파의 한 단장으로서 단원 임명권까지 보유하고 있다.
            이런 사람이 대언가/신사도로 행세한다니,

            더구나 미국이나 한국 교계 일각에서 선지자로 존중받는다니 실로 소름 끼칠 노릇이다!

             

             

            말타기사단 차림의 릭 조이너(오른쪽)와 조지 패롵 목사

             

             

            이 사진은 말타기사단의 호주 시드니 모임의 한 장면 (2010년 6월 20일)

             

             

            말타기사단의 입단의식 

             

            - TLT 에서 발췌한 기사에 사진 자료와 일부 기사를 보충 추가하여 재작성 했음-

             

             

            관련기사: < 말타(Malta) 기사들은 카톨릭 기사단 >

             

             

             

            알이랑 코리아 제사장 나라

            유석근 목사

            cafe.daum.net/ALILANG  

            가져온 곳 : 
            카페 >알이랑 코리아 선교회 - 알이랑민족회복운동
            |
            글쓴이 : 셈의장막재건자| 원글보기
            
            '은혜'(GRACE)라는 단어는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위대한 부요'
            (Great Riches At Christ Expense)라는 
            말의 앞글자의 축약입니다.
            
            그 위대한 부요하심이 우리의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의해 치러진 
            모든 청구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생명과 죽음에 대하여 ...
            마땅히 받으셔야 할 것을 우리가 얻었고,
            반면에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그리스도께서 취하셨습니다."
            
            
            - Rev. Geoffrey Thomas 의 
            '양자됨의 교리'에 대한 강연 중에서.....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은혜의 단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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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n 창세기 제 1장

            ==============================1:1절

            창조는 하나님의 사역에만 한정되어 사용하는 단어로서 무에서 유가 이루어지는 상태를

            말한다(시33:6,히11:3)

            태초에 - ( 베레쉬트). 70인역은 이 말을 요 1:1과 같이 '영원부터'란

            뜻을 지닌 '엔 아르케'로 번역했으나 원래의 뜻은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개시(開始)함로써 시작된 역사적 '시간의 출발점'을 가리킨다. 이는 창세기가 영원 전

            사건을 다루는 깃이 아니라 우주 및 인류가 탄생하는 시점으로부터 시작되는 태고사

            (太古史)에 관한 서술임을 암시한다. 한편 공동 번역은 이 말을 '한 처음에'라고 번역

            했는데여기서'한'은 천지 창조의 단희성을, '처음'은 만물의 출발점을 각각 강조

            하는 말이다.

            하나님 -(,엘로힘).'두려워하다'(,알라) 혹은 '강하다' ,

            란 뜻에서 과생된 말로 곧 '두려워해야 할 강하고 능력있는 자', '경외해야 할 최

            고 존재'란 의미이다. '여호와'란 명칭이 '언약을 지키시는 자', '택한 백성을 구

            속하자'란 의미로 쓰였다면(출 6:3) 이 '엘로힘'이란 명칭은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

            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할 때 쓰였다(출 20:1; 신 6:4; 삼하 22:32). 한편 일부 학자는

            '엘로힘'이 '엘로하'의 복수형인 점을 들어 이를 다신론적(多神論的) 사상의 반영이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록 형태는 복수형이나 실질적으로는 단수로 취급되었다는 점

            에서 오히려 이를 삼위이시나 일체이신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대한 암시

            로 볼 수 있다(26절). 또한 존귀하거나 장엄한 것을 표현할 때 복수형을 쓰는 히브리

            인의 독특한 관습에 따라 이를 장엄 복수형으로 볼 수도 있다.

            천지 - 문자적으로는 '하늘과 땅' 곧 지구를 뜻하나 여기서는 지구를 포함하여 은

            하계가자리잡고 있는 전우주를 가리킨다(2:1).

            창조하시니라( 바라) - 구약에는 '창조하다'란 뜻의 단어가 세 종류 나온

            다. 첫째 여기서 사용된 '바라'는 무에서 유에로의 완전한 신적 창조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순수한 의미의 창조를 가리킨다. 그러나 때로는 특수한 목적으로 여러 재료를

            사용하여 건축하거나 만드는 것을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 둘째, '아사'는

            이미 창조된 물질을 재료로 더욱더 나은 물체를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16, 25, 26절).

            세째, '야찰'은 '아사'와 비슷하나 특별한 목적에 따라 기존사물을 새로

            완벽히 조성하는것을 가리킨다(2:7.9).한편 천지창조를 주제로 하는 본장에서 '바라'.

            '아사','야찰' 등 이 세 단어는 정확한 뜻에 따라 해당 귀절에서 사용되었음 알 수 있

            다. 그 예로 '바라'는 (1)무에서 유에로의 존재 창조를 가리키는 1절 (2)생물에게 생

            명의 근원을 주시는 창조 행위를 가리키는 21절 (3)그전까지 전혀 없었던 영적 존재의

            창조를 가리키는 27절에서만 사용되었음을 확인할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하

            나님의 특별계시의 책인 성경은 정확무오한 단어가 구별되어 사용된 그야말로 일점 일

            획도 오류가 없는 책임을 새삼 인지할 수 있다(마 5:18). 즉 우리는 '바라'뿐 아니라

            모든 성경 원어를 분석, 연구할 때마다 성경은 단어 하나에 이르기까지 영감된 책임을

            새롭게 깨닫는 것이다(성경 총론,성경의 영감).이제 이처럼 중요한 단어인 '창조하다'

            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의미와 그 기사의 정확성을 간추려 보자. (1)하

            나님의창조 활동은 그분의 자유로운 의지에서 기인한 단독 사역이며 (2)하나님의

            창조능력은 제한적이거나 부차적이지 않고 완전한 무에시 유에로의 창조를 가능케 하

            는 새롭고 신비한 성격의 것이다.그리고 (3)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은 모

            든 피조물의 주인으로서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말씀에 의해 만드셨

            다(시33:6-9; 렘10:12).(4)또향 이는 성경기록이 비논리적이거나 비과향적이라는 주

            장을 일소시켜 준다. '창조'라는 개념조차도 무에서 유에로의 창조와 기존물질을

            변형하여 새롭게 제작하는 것과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을 정도로 성경은 합리적인 깃이

            다. 한편 이 '바라'라는 단어는 사 40-66장에도 약 20번이나 언급되면서 인간에게 하

            나님이 어떤 존재인가를 명확히 드러내 주고 있다. 즉 (1)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이시

            며(사42:5;45:7-9) (2)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의 창조자이시고(사 43:1, 15) (3)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분이심과(사 65:17) (4)인류 구원의 주도권을 가지신 분이

            심(사 42:5-9:49:5,6)을 밝혀 주고 있는것이다. 이외에도 다윗의 참회시에도 볼 수

            있듯 하나님은 죄인을 중생케 하시는 새 창조의 근원이심(시 51:10; 고후 5:17)을 기

            억해야 할 것이다.

             

            ================================1:2절

            땅 - 접속사( 웨)와 정관사( 하)가 붙어 있어 직역하면 '그런데 그 땅'이다.

            여기서는 '지구'를 가리킨다.

            혼돈하고 -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지구에 생명체가 살수 있을 정도로 아직은 정돈

            된 상태가 아님을 보여 주는 말이다. 즉 '혼돈'에 해당하는 원어 '토후'

            는 '공허', '헛된 것'(삼상 12:21;사 40:17)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전혀 형체가

            없거나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상태를 의미한다.

            공허하며- 원어 '보후'는 사 34:11; 렘 4:23에서 '공허한'(void)으로 번

            역되었는데 이것 역시 '토우'와 마찬가지로 미처 아무것도 갓춰지지 않는 적막한 상

            태, 무가치한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혼돈하고 공허하였다'란 의미는 지구가 아직

            조화된 모습을 갖추고M지 있지 않고,따라서 아무런 생명체도 살고 있지 않은 무질서하

            고 텅빈 상태였다란 뜻이다. 한편 본절의

            하고...하며는 카오스적인 존재(,was) 상태를 뜻하는 말이지 일부 학자들의 주

            장처럼 거역한 사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변이(變移,become)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흑암이 깊음위에 있고 - 여기서 '흑암'은 단순히 빛에 대칭되는 어두움의 개

            념이 아니라 창조 이전 빛이 없는 상태를포괄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한편 공동 번

            역은 이를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로 번역하였다. 왜냐하면 '깊음'에

            해당하는 원어'테홈'은 때로 '깊은 바다'(시 42:7;겔 31:15)나 지하

            물의 근원지(7:11; 시 78:15)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아마 이는 창조된 원시 형태의

            지구가물 혹은 물 같은 유동체로 덮여있었으며 사면에는 칠흑 같은 어둠만이 있

            었을뿐임을 뜻하는것 같다.

            하나님의 신( 루아흐 엘로힘). - '루아흐'는 때로 '바람'(8:1)

            이나 '숨'(욥9:18)을 가리키기도한다. 그러므로 혹자는 이를 하나님께서 깊은 물의

            표면에불게하신 바람으로 이해하기도하나 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는 어디까지나

            제3위 하나님되시는 '성령'을 가리키는 말로 천지 창조시부터 이미 삼위 하나님께

            서 서로 협력하여 사역하셨음을 암시해 주는 말로 이해하여야 한다(26절). 혹자는

            성령께서 신약 시대에야 비로소 활동하신 것으로오해하고 있는데(행 2:1-4) 성경은

            성령께서 이미구약 시대부터 여러모로활동하였음을 이미 구약 시대부터 여러모로

            활동하였음을 분명히 증거해 준다 (출 35:31; 삿 3:10; 왕하 2:1215; 대상 12:18;

            겔 11:24).

            운행하시니라 - 원뜻은 '알을 품다', 따라서 이 말은 이미 새가 새생명의 탄생을

            열망하며 알을 소중히 감싸 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기의 형상대로 지음 받을 인간

            의 삶의 장소를 조성하시기 위해 깊은 관심으로 포근하고 소중하게 돌보심을 의미한다.

             

            ===================================1:3절

            가라사대( 아마르) - 6일간의 창조 기사에서 10회나 반복 사용된 이 말은

            하나님은 말씀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력이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 공허하지 않고(신 32:47; 사 55:11; 렘 23:2) 그대로 이루

            어진다는 점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은 곧 그분의 능력(power)이요 행위(Action)임

            을 알 수 있다. 한편 창조시부터 말씀으로 역사하신 하나님은 오늘날도 말씀으로 인간

            들을 권고한다는 점에서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며 아울러 하나님의 인격적인 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인격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천지를 창조하신 하

            나님의 그 크신 능력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빛이 있으라 - 하나님의 첫번째 명령은 '빛'과 '존재'(있으라)에 관한 것이었다.

            '빛'은 때로 열(사44:16),불(사31:9),태양(욥 31:26),번개불(욥 27:3)

            등 구체적인 발광체 혹은 발광 현상을 가리키기도 하나 본절의 '빛'은 4일째 창조된

            태양과는 구별되는 에너지원(Energy源)을 가리킨다. 한편 어거스틴(Augustine) 은 여

            기 빛을 신적 은사와 능력을 상징하는 영적인 빛으로 보았다.

             

            ====================================1:4절

            보시기에 좋았더라 - 천지 창조 기사를 다루는 1장에 7회나 언급된 이 말은 하나님

            이 원래 의도하셨던 대로 창조된 여러 피조물에 대해 기쁨으로 승인하는 인준 행위를

            의미한다. 즉 이 말은 심미적 판단에서 나온 우주의 아름다움 이상의 창조의 놀라운

            합목적성과 적합성을 나타낸다(시 104:31). 그러나 이차적으로 이 말은 우주 자체의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좋았더라'(good)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브'는 '위대한'(시 11:2), '놀라운'(욥 37:14), '완벽한'(신 32:4), '아

            름다운'(전 3:11)등의 뜻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이 본래 좋

            은 것으로 인정하신 물질을 바르게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힘써야 한

            다.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 하나님의 천지 창도에는 3차에 걸친 분리 사역이 나타나

            있다. 즉 (1)빛과 어두움(4절) (2)물과 궁창(7절) (3)바다와 땅(9절)의 분리이다. 후

            일 바울은 이 빛과 어두움의 분리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의와 불법의 분리에 적

            용시킴으로써 도덕적, 종교적 성결의 원리로 확대 해석했다(고후 6:14).

             

            ===================================1:5절

            낮이라...밤이라 칭하시니라 -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물에게 이름을 부여한 최초의

            경우이다. 이는 곧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시 74:16)임을 의미하는 동시에

            (1:10) 낮과 밤 양자 사이에는 생동감과 적막, 생명력과 정체 등과 같은 차이점이 있

            음을 나타낸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 아침에 앞서 저녁이 먼저 언급되고 있는 까닭은 빛이

            비추어 낮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계속 어두움만 있었던 저녁상태였기 때문이다. 유대인

            들이 저녁을 하루의 시작으로 셈하고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날 - 날에 대한 히브리어 '욥'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우주 창조의

            연대 및 시간적 길이가 정해지는데, 여기에는 전통적으로 다음 세 학설이 있다. (1)

            '날'은 곧 한 시대를 가리킨다는 학설이다(Day-Age Theory :요세푸스, 이레니우스, 오

            리겐). 그러므로 이들은 5,8,13절의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말이 하나의 상징

            적 표현으로서, 한 시대의 끝과 다른 한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주장의 근거는 창조주 하나님에게는 시간적 요소가 초월되어 있다는 점이다(시

            90:4; 벧후 3:8). 그러나 이 학설에는 두가지 난제가 있다. 첫째, 창 1장의주석이라

            고도 할 수 있는 출 20:8-11의 안식일 계명 문제에 위반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분명

            히 안식일 계명에 나타난 창조의 6일은 여자적6일이요, 장구한 6시대를 말하

            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창세기의 1일이 오늘날과 같은 하루가 아니라

            면 제7일의 안식일 문제를 설명할 길이 없다. 둘째, 성경의 분명한어법으로 표현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5,8,14,19절)라는 말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한 시대의 교

            체로 보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점이다. (2) '욥'을 문자 그대로 24시간으로

            보는 학설이다(루터, 칼빈, 뻘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 해석상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원어의 일차적인 뜻을 따라야 한다. 둘재, 실제적인 제7일을 안식일로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면 다른 6일도 당연히 같은 24시간을 가진 하루이어야 한다. 세

            째, 창조 사역에 있어서 마지막 3일은 분명히 오늘날과 같은 태양으로 말미암은 것이

            기 때문에 24시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최초의 3일도 같아야 되지 않겠는

            가?라는 주장이다. (3) '욥'의 기간이 서로 다르다고 보는 절충적인 학설이

            다(어거스틴, 바빙크), 즉 태양이 창조된 제4일 이전의 3일은 오늘날의 하루와 다른

            장구한 기간으로, 그리고 이어지는 3일은 24시간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세 가지 학설

            은 각기 나름대로의 타당성과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어느 학설을 완전히 수용

            하거나 혹은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두번째 학설이 보수적인 많은 사람

            들의 지지를 받는다.

             

            =================================1:6절

            물 가운데 - 여기서의 물은 지구 표면을 덮고 있던 물(2절)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수분(水分)을 가리킨다.

            궁창( 라키아) - 원어상 의미는 '두들겨 넓게 펼친 판(板)'이란 뜻. 따

            라서 고대 히브리인들의 개념상 '라키아'는 별과달이 붙어 있고, 하늘 위의 물을 받치

            고 있으며, 높은 산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단단한 하늘의 금속판(firmament)을 가리

            킨다(욥 26장, 히브리인들의 궁창 개념).

             

            ================================1:7절

            궁창 아래의 물 - 바다를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물.

            궁창 위의 물 - 구름이 수증기 상태로 대기권 속에 떠 있는 모든 수분, 이것이 응

            집되어 지구상에 떨어지는 것이 곧 비나 눈, 우박이다.

            그대로 되니라 - '그대로'는 '명하신 대로 확실히' 또는 '틀림없이'의 뜻. 천지가

            하나님의 명하신 바대로 창조된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1:8절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 이로써 하나님께서 만드신 '궁창'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

            났다. 한편 '하늘'에 해당하는 원어 '쇠마임'은 '높다'에서 유래한 말로 아

            주 높이 그리고 끊없이 펼쳐져 있는 대기권 전체를 가리킨다(욥 26장, 히브리인들의

            궁창 개념).

             

            =================================1:9절

             

            물이... 뭍이 드러나라 - 이처럼 물과 뭍이 제각기 적절한 위치에 자리를 잡게 됨

            으로써 지구는 마침내 각종 생물이 서식(棲息)할 수 있는 곳으로 그 모습을 갖추게 되

            었다(11,12,20,21절)

             

             

            ===============================1:10절

             

            칭하시고(카라) '선언하다'(렘 34:15), '공포하다'(레 23:21)란 뜻. 즉

            권위를 가지고 공식적으로 언명함을 뜻한다. 고대 셈족 문화권에서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는 주권이나 소유권의 행사를 의미한다. (왕하 23:34;24:17). 따라서 우리는 천지

            를 창조하신 후 방기(放棄)하신 것이 아니라 창조물의 이름을 지어 주는 하나님의 명

            명(命名)행위에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권 주장이 선명하게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존재와 생명의 참된 주인은 오로지 하나님 한분 뿐임을 암시

            한다.

             

            =================================1:11절

            풀과...채소와...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 - 70인역은 '채소의 어린 싹과 과일의 나

            무'로 번역, 2종류의 식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도 가능은 하지만 개역 성경

            과 같이 3종류의 식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각기 종류대로 - 1장에서만도 10회나 사용된(11,12,21,24,25절 등) 이 표현은 창조

            시 모든 생물은 이미 독특하게 구별된 종(種, species)의 형태로 창조되었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 '각기 종류대로'를 뜻하는 히브리어 '레미노'는 '종류'

            (Kind), '종'(species)을 뜻하는 '민'에서 파생된 말인데, 성경에서 이 말은 매

            종류와 까마귀 종류, 개 종류와 고양이 종류 등 제각기 독특하게 구별된 종(種)을 가

            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지 결코 매와 까마귀, 그리고 개와 고양이의 조상으로서 어떤 기

            본적인 소수의 종류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생물학적 변천 과정을

            거쳐 저급한 종에서 고등한 종으로의 발전이나, 종과 종사이의 상태변이를 주장

            하는 진화론( evolution theory) 은 비성서적 견해이다.

             

            ===============================1:12, 13절

            세째 날은 하나님께서 최초로 생명체를 창조하셨다는 의의를 지닌다. 한편 여기서

            '풀'은 이끼류와 같은 은화식물을 대표하는 말로 구분지을

            수 있으나 '열매 맺는 나무'와 더불어 지구상의 모든 식물군을 가리키는 점층법적 표

            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

             

            =================================1:14절

            징조( 오트) - 자연적인 현상 혹은 사건에서 보여지는 '표징'(출 10:2). 이

            런 일이 주로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므로 '이적'(출 4:17)으로도 번역된다. 여기

            서는 천체의 변화란 뜻.

            사시( 모에드) - '지정하다', '고정하다'(히 야아드)에서 기원, '새들의

            이주 시기'(렘 8:7), '축제의 절기'(시 104:19; 슥 8:19)등과 같이 계절의 순환에 다

            라 반복되는 전환의 시기를 가리킨다.

            일자와 연한 - 네째 날 만들어진 태양 및 천체의 운동으로 측정되는 시간의 기본

            단위인 '날'(日)과 '년'(年)이란 뜻.

             

            ================================1:16절

            주관하게 하시고 - 히브리어 '멤솰라'는 '다스리다'(왕상 9:19), '관

            찰하다'(렘 5:28)란 뜻. 즉 큰 광명인 해와 작은 광명인 달이 낮과 밤을 구분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월 성신숭배 사상과 점성술적인 미신에 빠져 있

            던 고대인들에게, 그리고 그러한 경향이 있는 현대인들에게 일월성신은 하나님의 피조

            물일 뿐이며 또한 이들의 역할은 단지 낮과 밤을 구분하며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따라

            일자와 연한을 식별케 하는 데 불과함을 교훈한다.

             

            ================================1:18절

            보시기에 좋았더라 - 하나님께서는 두 광명과 별을 창조하사 낮과 밤 동안 빛을 비

            취게 하셨다. 이것은 식물로 하여금 광합성작용을 일으켜 성장 발육케 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으니 이러한 조화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흡족하였을 것이다.

             

            ================================1:20절

            생물( 네페쉬 하야) - 직역하면 '산 영'(living soul)이란 뜻,여기서

            는 살아 움직이는 동물을 가리킴. 고대 히브리인들은 식물이 부동적이므로 생명을 갖

            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였다. 따라서 동물을 이전에 창조된 식물과는 구분하여 움직이

            며 숨쉬는 것임을 강조하는 용어, 즉 생물이라는 말로 묘사했다.

            번성케 하라 - 히브리어 '쇠라츠'는 '꿈틀거리다', 무수히 많아 우글거리

            는 것이 마치 꿈틀거리는 듯이 보인다는점에서'풍부하다', '무수히 생기다'(출

            8:13)란 뜻으로 발전되었다.

             

            ===============================1:21절

            큰 물고기 - '물고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탄닌'은 '용'(사 51:9), '뱀'

            (사 27:1)등으로도 번역된 단어인데 여기서는 고래, 상어, 악어, 물개 등과 같이 몸집

            이 큰 부류의 수서동물(水棲動物)을 가리킨다.

            날개 있는 모든 새 - '새'에 해당하는 원어 '오프'는 곤충을 포함한 공중을

            날으는 모든 종류의 생명체를 가리킨다(7:14).

             

            ===============================1:22절

            복을 주어 - 기본 뜻은 '무릎 꿇다'(시 95:6). 이 말이 하나님께

            적용될 때에는 '찬송하다'(9:26), 피조물에게 적용될 때에는 '축복하다'(27:33)란 뜻

            이 된다. 여기서 복의 내용은 이어지는 말에서도 드러나듯 풍성케 하는 것인데, '복

            주다'란 말 자체에도 '풍족케 하다'(신 33:11)란 뜻이 있으므로 증식에 대한 내용이

            더욱 강조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 '생육'은 '열매 맺다'라는 뜻으로 풍부한 결실을, '번성'은

            '많을'(7:17) 뿐만 아니라 '크고'(스 10:13) '강한'(대하 11:12)상태를 뜻한다. 이와

            같이 유사한 언어를 반복하여 기술한 것은 하나님이 생물들에게 생명의 보존력과 번식

            력을 축복으로 주심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축복은 오늘날에도 생명체마다 제각

            기 갖고 있는 자기 방어 수단과 독특한 출산 방식으로써 종족을 보존, 번식시키는 것

            에서 잘 드러난다.

            충만하라 - 하나님의 '채워주심'(렘 15:17)으로 '넘칠'(수 3:15)정도로 '가득한'

            (6:13) 상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축복의 신적 기원을 풍부함을 보여 주는 표현이

            다.

             

            ===============================1:24절

            육축(베헤마) - '침묵하다'란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축들이

            인간과 친밀하나 말하지 못함에 착안하여 이 명칭이 부여된 듯하다. 여기서는 집합적

            인 의미로 주로 몸집이 큰 가축을 지칭한다.

            기는 것 - 히브리어 '레메쉬'는 다리가 없거나 많은 다리를 갖고 있어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동물들을 가리킨다. 주로 곤충이나 파충류에 해당됨.

            짐승( 하이) - 생명있는 모든 '생물'(6:19)을 총칭하는 말이기도 하나 여기서

            는 '들짐승'(레 5:2)과 같은 야생 육식 동물을 가리킨다.

             

            =================================1:26절

            우리 - 이 말에 대한 여러 해석은 다음과 같다. (1)하나님께서 자신을 재촉하는 의

            미로 복수형을 사용하셨다. (2)삼위일체에 대한 구약적인 표현이다. (3)하나님이 천사

            들과 의논하심을 가리킨다. (4)히브리인들은 장엄한 것을 나타낼 때 흔히 복수형을 사

            용하므로 강세(强勢)를 나타내는 히브리 문학적 표현이다. 그러나 후대의 발전된 계시

            에 비추어 볼 때 합당한 해석은 두번째 견해, 즉 창조 사역에 나타난 각 위(位) - 성

            부,성자,성령...의 완벽한 협력을 나타낸 말로 보아야 한다.

            형상...모양대로 - '형상'(,첼렘)과 '모양'(데무트). 이 두 단어는

            유사한 단어로서, 비슷한 말을 연속 사용하여 강조의 효과를 나타내는 히브리 수사법

            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굳이 분류하자면 '형상'(image)은 어떤 사물과 그것을 그린

            그림이 서로 닯은 것처럼 인간과 하나님간에 찾아 볼 수 있는 구체적인 닮은 꼴을 가

            리키며 '모양'(likeness)은 추상적인 면에 있어서의 유사성을 가리킨다. 따라서 인간

            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전인(全人)이하나님의 성품의

            영향을 받아 지음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시 8편; 겔28:12). 이러한 사실은 (1)인간

            이 저급한 상태에서 고등한 상태로 진화되었다는 진화론(evolution theory)의 허구성

            을 깨우쳐 주며 (2)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하나님과의 교제 대상으로 인간만이 선택되

            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엡 4:23, 24; 골 3:10). 그러나 창조시 부여된 이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타락시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그러나 끝내 상실되지 아니하고 그 흔적

            은 계속 남아 있어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능케 하는 접촉점(contact point)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이 피조물 중에서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를 능히 깨달을 수 있는

            반면 타락으로 말미암는 인간 비하(卑下, 3:16-19) 역시 얼마나 뼈아픈 비극인가를 새

            삼 깨달을 수 있다.

            사람(,아담) - 창조 사역의 절정은 사람의 창조요, 창조의 면류관 역시 사

            람이다. '사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담'은 이중적인 뜻을 갖고 있다. 첫째는 보통

            명사로서 일반 사람을 가리키며, 둘째는 고유 명사로서 최초의 사람인 아담을 가리킨

            다. 한편 '아담'이란 말의 기원에 대해서는 (1) '붉어진다'에서 유래, 인간의 피부 빛

            을 반영하고 있다는 견해. (2)'빛이난다'란 뜻의 아람어에서 유래, 아담을 빛자는 자

            로 만들었음을 뜻한다는 견해. (3)'데리고 온다', '결합시킨다'는 뜻의 아람어에서 유

            래, 아담이 인류의 조상이며 모든 인류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자임을 뜻한다는 견해.

            (4)'모양'이란 어원에서 유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음을 뜻한다는 견해.

            (5)'땅'에서 유래. 인간이 흙으로 만들어졌음을 반영한다는 견해 등이 있다. 모두 일

            면의 타당성을 지니나 (5)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다스리게 하자 - '주권을 잡다', '지배하다', '세력을 떨치다', '통치하다'라는

            뜻, 즉 인간이 다른 피조물들을 주관할 수 있는 권위와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

            은 고등한 존재로서 다른 피조물들에게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

             

            =================================1:27절

            여자 - 남자와 구별됨을 강조하는 표현(6:19). 본절에서 남자와 더불어 여성의 창

            조를 특별히 언급한 것은 창조시부터 남녀 간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1:28절

            정복하라( 카바쉬) - '발로 밟다'(미 7:19), '복종케 하다'(민 32:22)란

            뜻, 이는 땅을 자신의 것으로 취급하여 마음대로 행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선한 목

            적을 좇아 땅 속에 포함된 광대한 자원을 개발하며 유용하게 이용하라는 문화 명령

            (Cultural Mandate)이다(9장, 강해 하나님의 문화 명령).

             

            =================================1:29,30절

            너희 식물이 되리라 - 최초 인간과 동물에겐 채식만이 허용되었음을 보여 준

            다. 육식은 타락 후 노아 홍수 사건 직후에야 비로소 허용되었다(9:2). 이로 볼

            때 피흘림이 뒤따르는 육식 행위는 결코 하나님의 본래 뜻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원(原) 창조시 허용되지 않았던 육식이 타락 후 허용되었다는 사실은 곧 처음

            낙원의 재(再) 창조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 낙원의

            재 창조는 그리스도의 '피흘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루어지고 있으며

            최종 이루어질 것이다.

             

            ================================1:31절

            심히 좋았더라 -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마무리지어 주는 이 귀절은 지금까지 반복

            되어온 감탄사(10,12,18,21,25절)보다 한층 더 고조된 것으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모

            든 것이 한 치의 오차나 흠도 없이 완벽하고 아름답게 성취되었음을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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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릴리림의 안개꽃| 원글보기
            인생이 남겨준 교훈 50가지 / 레지나 브레트, 클리블랜드  

             


              

            1. 인생은 정당하지 않지만 그래도 살 만하다.

            2. 의심이 드는 순간에는 보폭을 줄여라.

            3. 미워하면서 시간을 허비하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

            4. 그대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다루지 말라. 다른 이들은 그러는 법이 없다

            5. 매달 신용 카드 대금을 다 갚아 버려라.

            6. 말다툼에서 매번 이기려 들지 말라. 의견일치는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하라.

            7. 함께 울라. 혼자 우는 것보다 마음의 병을 고치는 데 더 좋다.

            8. 하나님께 화를 내라. 하나님은 그것도 받아들여 주신다.

            9. 초콜릿을 일단 보면 참을 도리가 없다.

            10. 첫 월급을 타는 순간부터 은퇴 적금을 들라.

             

             

            11. 과거와 평화협정을 맺으라. 그래야 과거가 지금을 엉망으로 만들지 못할 것이다.

            12. 그대가 우는 것을 아이들이 보는 것도 좋다.

            13. 그대 인생을 남과 비교하지 말라. 그들 인생의 여정이 어떤지 그대가 어찌 알랴.

            14. 비밀에 부쳐야 하는 관계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다.

            15. 눈만 깜박거려도 만사가 변할 수 있다. 그러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은 눈을 깜박이지 않으신다.

            16. 연민의 파티만 열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 바쁘게 살고 바쁘게 죽으라.

            17. 오늘 그대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그대는 무엇이든 얻어낼 수 있다.

            18. 작가는 글을 쓴다. 작가가 되고 싶다면 글을 써라.

            19. 이미 늦었다 싶은 때가 바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누리는 시간이다.

            그러나 제2의 시절은 부모가 아닌 바로 그대 자신에게 달려 있다.

            20.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것들에 매달릴 때에는 해답을 구하려 들지 말라.

             

             

            21. 초를 켜고 근사한 종이를 쓰고, 매혹적인 속옷을 입으라. 특별한 일에 인색하게 굴지 말라.

            바로 오늘이 특별한 날이다.

            22. 준비를 단단히 한 다음에는 흐름에 맡겨라.

            23. 지금 상식에서 벗어나라. 자주색 옷을 입기 위해 나이 먹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24. 가장 중요한 섹스 기관은 두뇌이다.

            25. 그대의 행복을 책임질 이는 그대뿐이다.

            26. 재앙이라 불리는 모든 것들에는 이런 말이 따라붙는다.

            “5년 안에 이 일이 일어날까 요?”

            27. 항상 인생을 선택하라.

            28. 누구든 무슨 일이든 용서하라.

            29. 다른 사람이 그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대 소관이 아니다.

            30. 시간은 대부분의 것들을 치유한다. 시간에게 시간을 주어라.

             

             

            31. 상황이 좋든 나쁘든, 변화하게 마련이다.

            32. 그대의 직업은 아픈 그대를 돌보아 주지 않는다.

            친구들이 그대를 보살필 것이다. 친구들과 잘 지내라.

            33. 기적을 믿으라.

            34. 하나님은 그대가 해놓은 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대를 사랑하신다.

            35. 그대를 죽이지 못하는 것들은 무엇이나 그대를 강하게 만든다.

            36. 짧고 굵게 살래? 길고 가늘게 살래? 노인이 죽고 싶다는 말은 거짓이라며?

            37. 그대의 아이들은 단 한 번의 어린 시절을 거칠 뿐이다. 추억을 만들어 주어라.

            38. 시편을 읽으라. 시편은 인간의 모든 감정을 감당해 준다.

            39. 매일 밖으로 나가라. 기적이 어디서나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40. 당면한 문제들을 처박고 그 외의 것들을 볼 수 있다면 불가능은 이미 사라진 것이다.

             

             

            41. 인생을 청강하지 말라. 내 인생에 출석하여 지금 그 대부분을 살라.

            42. 아름답고 즐겁고 유용하지 않은 것들을 다 없애라.

            43. 마지막까지 진실한 건 그대가 받은 사랑이다.

            44. 질투는 시간 낭비이다. 그대는 이미 필요한 것을 다 가지고 있다.

            45. 최상의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46. 그대의 기분이 어떠하든 일어나 옷을 입고 나타나라.

            47. 심호흡은 마음을 가라앉힌다.

            48. 구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49. 양보하라.

            50. 인생을 내 맘대로 할 수는 없어도 선물인 것은 분명하다. /자료ⓒ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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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인(全人) / 안토니 A. 후크마 (‘개혁주의 인간론’ 에서 발췌)

             제 11장. 전인(全人)

             크리리스챤 인간관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우리가 인간을 단일체 즉 전인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종종 별개의, 때로는 분리할 수 있는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어 전체로부터 그 부분들이 추출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래서 크리스챤 서클 가운데서 인간은 “몸”과 “혼” 혹은 “몸”과 “혼”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세속의 학자들이나 크리스챤 신학자들 모두가 점점 더 인간에 대한 이런 식의 이해는 잘못된 것이며 인간은 그의 단일체로 보아져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우리의 관심은 크리스챤 인간관이기에 이것이 정말로 그런 것인가를 보기위해 인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새로이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우리가 제일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성경은 인간을 과학적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더구나 성경은 정확한 과학적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도 않다. 또한 혼, 영, 그리고 마음과 같은 용어를 다소간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확하고도 과학적이며 성경적인 심리학을 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비록 우리가 성경으로부터 정확하고 과학적인 심리학이나 인간론을 끄집어낼 수는 없다 하더라도 성경을 통해서 인간에 대한 많은 중요한 진리들을 배울 수 있다. 사실 이 책의 앞단원들에서 우리는 그렇게 해 왔다.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이 인간에 관해 얘기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는 불가피하게 하나님과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다 성경은 또한 다른 사람들과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에 대해 우리의 관심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성경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구성하는 “부분들”에, 혹은 그의 심리적인 구조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처해 있는 여러 관계들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1. 삼분론인가, 이분론인가?

             

            그러나 때때로 인간은 특별히 어떤 구별된 “부분”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되어 왔다. 이러한 이해 중 하나는 일반적으로 삼분론(trichotomy)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견해는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몸과 혼과 영혼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삼분론의 최초의 주장자들 중의 하나가 이레니우스였다. 그는 비신자들은 단지 혼과 몸만을 갖고 있는 반면에, 신자들은 이에 덧붙여 성령에 의해서 창조된 영혼을 갖게 된다고 가르쳤다.

             

            종종 삼분론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또다른 신학자는 주후 약 310년에서 390년까지 살았던 라오디케아의 아폴리네리우스이다. 대부분의 해석가들이 인간은 몸과 혼과 영혼 혹은 정신(프뉴마 또는 노우스)으로 이루어졌다는 견해와 그리스도께서 취하셨던 인성 중에서 로고스, 혹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인간 영혼을 대신 하셨다는 견해 등이 그에게서 기인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벌카워는 아폴리네리우스가 최초로 삼분론적 의미로 그의 잘못된 기독론을 전개해 나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켈리(J.N.D. Kelly)는 아폴리네리우스가 이분론자였느냐 삼분론자였느냐 하는 문제는 부차적인 중요성을 갖는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삼분론은 19세기에 델리취(Franz Delitzsch), 허드(J.B. Heard), 벡(J.T. Beck) 그리고 오힐러(G.F. Oehler)등에 의해 가르쳐졌다. 보다 최근에 와선 웟치만 니(Watchman Nee), 솔로몬(Charles Solimon, 그는 인간은 몸을 통해서는 환경과, 혼을 통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영혼을 통해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고타드(Bill Gothard)와 같은 저술가들에 의해서 옹호되어 왔다. 삼분론이 또한 구판과 신판의 [스코필드 주석성경]에서도 모두 옹호되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러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 본성에 대한 삼분론자들의 견해를 거절해야 한다.

             

            첫째로 삼분론은 인간의 단일성에 위반되기에 거절되어야 한다. 단어 그 자체가 인간을 세 “부분”으로 쪼개질 수 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삼분론은 두 개의 헬라어 즉 “삼중의”란 의미의 트리카와 “다르다“라는 의미의 템네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둘째로 삼분론이 종종 영혼과 육체 사이에 화해될 수 없는 대립을 전제 하기에 우리는 그것을 거절해야 한다. 실제로 삼분론은 헬라철학 특별히 인간 본성에 대한 삼분론적 이해를 갖고 있었던 플라톤의 견해에서 비롯되었다.

            .....중략.....

             

            그러나 성경은 영혼(혹은 정신)과 육체 사이에 이러한 어떤 날카로운 대립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성경에 따르면 물질은 악하지 아니하며 도리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성경은 결코 인간의 육체를 필요악의 원천으로 평가절하하고 있지 않으며 도리어 그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국면으로 기술하고 있다. 헬라인에게 육체는 사람이 임종시 기쁨으로 표기해 버리는 “영혼의 무덤”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런 개념은 성경과는 완전히 부적합한 견해이다.

             

            또한 삼분론이 성경에서는 아무런 근거도 갖고 있지 않은 영과 혼 사이에 뚜렷한 차이점 두기에 우리는 이를 거절해야 한다. 이 사실은 이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단어들이 성경 가운데서 종종 교체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게 될 때 가장 분명해진다.

            (1) 성경에서 인간은 또한 의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고전7:34), (약2:26).

            (2) 슬픔은 뿐만 아니라 에도 속하는 감정이다: (삼상1:10), (시54:6), (요12:27), (요13:21), (행17:16), (벧후2:8).

            (3)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랑하는 것은 에 기인한다: (눅1:46~47), (막12:30).

            (4) 구원은 모두에 관계된다; (약1:21), (고전5:5).

            (5) 죽는다는 것은 이나 이 떠나가는 것으로 기술된다: (창35:18), (왕상17:21), (마10:28), (시31:5), (마27:50), (눅9:55), (눅23:46), (행7:59).

            (6) 이미 죽은 자들이 때때로 으로 언급되거나 때때로 으로 언급된다: (마10:28), (벧전3:18~20).

             

            삼분론자들은 종종 그들의 견해를 입증하고자 두 개의 신약성경 구절인 히브리서 4:12과 데살로니가전서 5:23에 호소하고 하는데, 이 두 구절의 어느 것도 그들의 견해를 입증치 못하고 있다;

               히브리서 4:12은 아래와 같이 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이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의 통찰력을 기술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이 몸의 관절과 뼈 속에 있는 골수 사이에 어떤 구분을 짓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말씀이 혼이라 불리는 인간 본성의 한 ‘부분’과 영이라 불리는 다른 한 ‘부분’ 사이를 구분짓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이 언어들은 비유적인 언어다. 바로 다음의 말이 저자의 의도를 나타내 주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성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든)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가 우리 행위의 은밀한 동기들을 드러낸다. 사실 이 구절은 많은 점에서 바울의 한 본문과 유사하다;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고전4:5).

             

            그러므로 히브리서 4:12을 인간의 두 개의 구성요소로서의 혼과 영 사이에 심리학적인 차이점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할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다른 한 구절인 데살로니가전서 5:23은 이렇게 되어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먼저 이 구절이 교리상의 진술이 아니라 하나의 기도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바울은 그의 데살로니가 독자들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완전히 성화되고 온전히 하나님에 의해 보존되며 지켜지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기도되고 있는 성화의 총체성이 본문 중에서 두 개의 헬라어 단어로 표현되고 있다. 첫 번째 단어는 홀로텔레이스로 “전체의...”란 의미를 갖고 있는 홀로스와 마지막 혹은 목표란 의미의 텔로스로부터 파생되었으며, 이 들이 합쳐져서 “모든 부분에 있어서 완전한”이란 의미를 갖는다. 데살로니가전서 5:23의 하반절에서 형용사 홀로크레론과 동사 테레데이에(“보전되기를 원하노라”)는 둘 다 단수형을 갖고 있으므로, 본문의 강조점이 전인(全人)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흥미로운 사실이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해 그들 각각의 영과 혼과 몸이 온전히 보전되기를 기도했을 때, 예수께서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눅10:27)고 말씀하셨을 때, 그가 사람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말씀하시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도 분명히 사람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 역시 인간 구조에 대한 삼분론적 견해에 대해서 어떤 근거도 제공치 않고 있는 것이다.(바빙크, 벌콥, 벌카우어, 브루스, 델리취 책 참조)

             

            인간구조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다른 한 견해는 이분론(dichotomy:디코토미)이라 불리는 견해로 이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견해는 삼분론보다 더 훨씬 폭넓게 주장되어 왔다. 우리가 삼분론을 거절하는 것이 이분론을 선택해야만 된다는 의미인가?  수많은 신학자들이 이러한 확신을 긍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벌코프는 "성경에 나타난 인간 본성에 대한 주요한 진술은 분명히 이원론적이다" 라고 믿고 있다.(스트롱, 멀러, 헨리 디이슨, 골든 클락 책 참조)  

            그러나 우리는 삼분론 뿐만 아니라 이분론도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기독교 신자로서 우리는 확실히 고대 헬라인들이 가르쳤던 의미의 이분론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영혼과 육체는 두 개의 구별된 본체, 즉 신적 기원을 갖는 사고하는 영혼과 육체라는 견해를 제시했었다. 육체는 질료라 불리우는 열등한 본체로 구성되어 있기에, 영혼보다 저급한 가치를 갖는다. 임종시 육체는 단순히 분해되어 버리나 이성의 영혼은 만약 그 영혼의 행위의 과정이 올바르고 존경을 받을만했다면 “하늘”로 되돌아가서 영원히 계속적으로 존재한다. 영혼은 본질상 파괴될 수 없으며, 보다 우수한 본체로 생각된 반면에, 육체는 영혼보다 열등하며 죽게 되어 있으며 완전파멸의 운명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헬라의 사고 속에는 육체의 부활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후크마의 종말론, 벌카우어 책 참조)

             

            그러나 분명히 성경에 어긋나는 이러한 헬라인의 이분론적 이해를 차치하고라도 이분론이란 용어를 여전히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분론은 인간에 대한 성경적 견해의 정확한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용어 자체가 부당하다. 이 용어(디코토미)는 두 개의 헬라어 어근 즉 “이중의” 혹은 “둘로”라는 의미의 디케와 “자르다“란 의미의 템네인으로부터 왔다. 그러므로 이 용어는 인간은 두 ”부분“으로 자를 수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현세상에선 인간이 그렇게 나눠질 수 없다.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성경은 인간을 하나의 전체, 하나의 완전, 하나의 단일체로 기술하고 있다.

             

            전인(全人)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성경적 견해를 결정지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인간의 다양한 국면들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되는 용어들을 조사해 보는 일이다. 그러나 그 일에 앞서,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고찰이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

            (1) 이미 말했듯이, 성경의 기본적 관심사는 인간에 대한 심리학적 혹 인류학적인 구조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피할 수 없는 관계성이다.

            (2) 우리는 로빈슨(J.A.T. Robinson)이 이런 용어들에 대한 구약의 용법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한 바를 항상 마음에 명심해야 한다.

                 “어느 부분이든지 어느 순간에나 전체를 대표할 수 있다”

             

            또한 신약의 용법에 대해서는 래드(G.E. Ladd)의 일언을 명심해야 한다.

                 “최근의 학풍은 몸, 혼, 영혼과 같은 인간의 상이하고 분리할 수 있는 기능들이 아니라 전인(全人)을 바라보는

                  상이한 방법들이라는 점을 인정해 왔다.”

             

            이것을 마음에 두고 먼저 구약 용어들을 다룬 뒤에 다음으로 신약에 나타난 용어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2. 구약의 표현들

             

            우선 대부분의 경우 " 혼“(soul)이라 번역되는 히브리어 단어 네페쉬를 살펴보기로 하자. B.D.B. 히브리어 사전은 이 단어에 대해서 열 가지의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중 다음의 것들이 우리의 논제에 중요한 것들이다: ”인간의 내적 존재“, :살아있는 존재”(인간과 동물 모두에 대해서 사용됨), “인간 그 자체”(종종 인칭대명사로 사용됨. 이런 의미에서 총체적 인간을 가리킴), “욕망의 자리”, “감정의 좌소”. 때때로 메쓰(죽은)란 형용사와 붙어서 죽은 자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메쓰라는 단어 없이도 이 단어는(네페쉬) 죽은 자를 가리킨다.

             

            따라서 네페쉬는 전인(全人)을 나타낸다. 야곱(Edmond Jacob)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페쉬는 한 인간의 전체 본성 즉 인간이 무엇을 소유하였는지에 대한 지시용어가 아니라 무엇인가에 대한

                  지시용어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단어의 대한 최상의 번역은 ”인격“(사람)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의 히브리어 단어는 일반적으로 “영”(spirit)으로 번역되는 루아흐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움직이는 공기, 숨, 호흡”이다. 종종 바람으로도 번역된다. B.D.B.는 다음과 같은 류의 아홉가지 의미를 나열하고 있다: “영”, “생기”, “기질”, “인간과 짐승의 몸에 거하는 살아서 숨쉬는 존재의 영”(후자의 유일한 예는: 전3:21), “감정의 자리”, “정신상의 행위의 기관”, “의지의 기관”, 그러므로 루아흐는 의미에 있어서 네페쉬와 중첩된다. 스테세이(D. Stacey)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비추어 인간에 대한 언급이 있게 될 때는 루아흐란 용어가 사용된 가능성이 매우 높다...그러나 다른 사람 혹은 인간의 보통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과 연관되어 정신상의 용어가 필요한 경우에 인간에 대한 언급이 있게 될 때는 네페쉬가 가장 가능성이 높다. 이 두 경우 모두에 전인(全人)이 포함되어 진다.

             

            그러기에 루아흐를 인간의 분리될 수 있는 부분으로 생각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어떤 한 관점으로부터 보여지는 전인으로서 생각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다음으로 보통 “마음”이라 번역되는 히브리어 레브레바브를 살펴보기로 한다. B.D.B.는 아래와 같은 의미들을 포함해, 이 두 단어에 대한 열 개의 의미를 나열하고 있다: “속사람 혹 내적 혼”, “정신”, “의지의 결정“, ”양심“, ”도덕성“, ”인간 자신“, ”욕망의 자리“, ”감정의 자리“, ”용기의 자리“. 마이엔펠트(H. Von Meyenfeldt)는 그의 훌륭한 단어 연구서에서, 레브 혹은 렙하브는 보통 전인(全人)을 나타내며 현저한 종교적 중요성을 가진 단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구약에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생각, 느낌, 의지의 자리를 나타내는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죄의 자리, 영적 갱생의 자리, 그리고 믿음의 자리이기도 하다.

             

            구약용어 이외의 경우에는 마음이란 단어는 그의 존재의 심층에 있는 인간과 그의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인간을 상징한다. 화란 철학자 도이벨트(Herman Dooyeweerd)는 성경에 있어서의 마음을 "인간 전(全) 존재의 종교적 뿌리"라고 말했다. 그가 발전시킨 철학에 따르면 마음은 인간의 모든 종교적, 철학적, 도덕적 활동의 중심부요 원천이다. 앤더슨(Ray Anderson)은 마음을 "주체적 자아의 중심부"라고 불렀으며 그에게 있어서 마음은 "참된 질서 가운데 놓여진 육체와 영혼의 단일체이다-그것은 인간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설펴본 세 개의 구약 용어들을 비록 인간을 조금씩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기는 하나 모두가 그의 단일성과 전체성에 비추어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로빈슨(H. Wheeler Robinson)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마음이 포함하는 영역들을 정확하게 구분짓는다는 것은 단순히 이러한 정확한 구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통 “육체”라고 번역되는 바사르란 단어를 생각하기로 하자. B.D.B.는 아래의 것들을 포함해 여섯 가지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육체”(몸 그 저체에 대해서), “혈연과 혈족”, “하나님 맞은편에 있는 깨어지기 쉽고 죄를 범케되어 있는 인간”, “인류” 브렛시오티스(N.P. Bratsiotis)는 “바사르는 인간 본성의 외적인 육의 측면을 가리키는 단어로 구약에서 가장 자주 사용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바사르가 인간의 외적 측면으로 그리고 네페쉬가 내적 측면으로 구별되고 이해될 때라도, 우리는 이 단어드을 플라톤적 의미의 영혼과 육체의 이원론을 나타내는 것을 결코 생각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바사르와 네페쉬는 하나의 이중적 실체와 깉은 인간 존재의 상이한 측면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의 이중적 본성에 대한 결정적인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이와같이 분명한 인간론의 온전성인 것이다. 그것은 바사르와 네페쉬 모두에 완전히 대립되는 이분론의 어떠한 견해도 배제하며 이 들 사이에 상호유기적인 몸과 마음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Grand Rapids:Eerd-mans 1977)

             

            종종 바사르란 단어는 연약한 인간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볼프(H.W. Wolff)는 자주 "바사르는 인생을 꺠어지기 쉽고 연약한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진술하면서, 이의 한 예로 예레미야 17:5을 제시하고 있다: "사람을 믿으며 육체로 그의 힘을 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때때로 바사르는 단순히 육체적 측면이 아니라 인성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의 모든 것을 가르키고 있다는 점에서 네페쉬와 함께 쓰이기도 한다. 배쓰(Charence B. Bass)는 "몸"을 나타내는 구약의 표현들에 대해 설명하면서

             

            몸과 영혼이 거의 혼용되고 있는데 영혼은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나타내기 위해서, 몸은 유형적인 가시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나타내기 위해서 쓰여진다...몸과 영혼의 이러한 단일성이 몇몇 저술가들로 하여금 구약은 육체적인 몸을 하나의 분별있는 실체로 보는 시각이 결여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그라나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구약은 몸과 영혼을 하나의 단일체를 구성키 위한 기능에 있어서 서로에게 스며드는 동등자로 보고 있다.

             

            그러기에 종종 바사르는 구약에서 비록 강조점이 외형적 측면에 있긴 하지만, 전인(全人)을 나타내기 위해 쓰여지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의 사상 세계는 인간이 두 개의 별개의 본체로 만들어진 것으로 묘사하는 어느 형태의 이분론이나 이원론을 철저히 배격하는 것이다. 로빈슨(H. Wheeler Robinson)이 얘기하듯이 “4개의 용어(네페쉬, 루아흐, 레브, 바사르)들은 단순히 인격체의 단일성의 상이한 측면들을 보여줄 뿐이라는 사실에 최종적 강조점이 내려져야 한다.(The Christian Doctrine of Man, p.27)

             

             

            3. 신약의 표현들

             

            우리가 맨 먼저 살펴볼 신약언어는 네페쉬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케로, 이 단어는 거의 대부분 “혼”이라 번역된다. 안트-깅그리히의 신약 헬라어 사전은 이 단어에 대해 많은 의미들을 나열하고 있는데 그중의 얼마는 다음과 같다:

            “생명의 원리”, “땅의 삶 그 자체”, “인간의 내적 생명의 좌소”(느낌과 감정을 포함하여), “땅의 것들을 초월하는 삶의 자리와 중심”, “생명을 소유하는 것으로 즉 생명을 가진 피조물(복수는 인간들).”

             

            에드워드 슈바이쳐는 프쉬케는 종종 복음서에서 한 인간 전체를 나타내기 위해, 또는 순전한 육체적 삶과는 구별되는 참된 삶을 묘사하기 위해, 죽음을 초월하는 하나님이 주신 존재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슈바이쳐는 계속해서 바울이 자연적 삶과 참된 삶을 가리킬 때 즉 인성을 나타내고자 할 때 프쉬케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프쉬케는 죽음 뒤의 삶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네페쉬와 같이 프쉬케도 종종 전인을 상징한다.

             

            다음으로 루아흐의 헬라어 상당어인 프뉴마를 생각해 보자. 이 단어는 인간을 가리킬 때에는 거의 대부분 “영”이라 번역된다. A-G사전은 아래의 의미들을 포함해 8개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사람의 인성의 한 부분으로서의 영”, “한 인간의 자아”, “정신의 성향이나 상태”.

             

            슈바이쳐는 바울이 인간의 육체적 기능에 대하여 프뉴마를 사용하며, 프뉴마는 종종 프쉬케와 같은 의미를 가지며, 이 단어는 전체로서의 인간을 나타냄으로 육체적인 본성보다는 심적 본성에 더 많은 강세가 주어질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의 종말론을 논하면서 래드(George Ladd)는 우리에게 바울의 사고에 있어서 인간의 영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며 영으로 중생을 경험한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때때로 프뉴마와 인간의 외적 측면에 반하는 내적 차원으로서의 몸을 대조시키고 있다(고후7:1; 롬8:10). 프뉴마가 인간의 자기인식 혹은 자아의식을 기술하기도 한다(고전2:11). 스테세이(W.D. Stacey)는 바울이 프뉴마를 오직 중생한 사람만이 갖고 있는 그 무엇으로 보고 있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날 때로부터 프뉴마를 갖게 되나 크리스챤의 프뉴마는 하나님의 영광의 교제를 통해, 새로운 특성과 새로운 품위를 띠게 된다”(롬8:10)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프뉴마가 죽음 이후의 생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히브리서 12:23을 죽은 성도들을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눅23:46)와 스데반(행7:59)은 그들이 운명할 때, 그들의 “영”을 성부 하나님 혹은 성자 하나님께 의탁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확신컨대 죽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옥에 있는 영들에” 전파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벧전3:19).

             

            그러므로 프뉴마는 거의 프쉬케와 같은 의미를 가지며, 신약에서 종종 이 두 단어는 혼용되고 있다.

             

            .....중략.....

             

            다음으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단어는 레브레바브에 상당하는 헬라어 카르디아로, 이 단어는 보통 "마음"이라 번역된다. A-G는 이 단어의 주요한 의미로 "육체적, 영적, 정신적 생명의 자리"란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인간의 지, 정, 의를 포함하는 인간의 모든 내적 삶의 중심과 원천으로 기술되고 있다. 또한 마음은 성령의 내주하시는 장소라고 표현되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벰(Johannes Behm)은 신약에 나타난 마음이란 표현을 정신적, 영적 삶의 주요기관,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입증해 보이시는 인간 속의 자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마음은 인간의 내적 삶의 중심부요, 감정, 이성, 의지의 원천인 것이다. 마음은 인간의 모든 내적 존재, 즉 인간의 심층부를 의미하며 자아 즉 인성을 상징한다. 카르디아는 인간을 향하여 하나님이 찾으시는 인간 속의 최고의 중심으로서 그 안에 종교적 삶이 뿌리를 박고 있으며,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결정짓는다.

             

            앞에서 우리는 구약에서 나타나는 레브가 죄의 자리, 영적 갱생의 자리, 그리고 믿음의 자리로서의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다는 사실을 주목해 보았다. 카르디아도 이와 똑같다. 여기에 덧붙여 많은 크리스챤의 덕들이 카르디아에 기인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데살로니가후서 3:5과 베드로전서 1:22에서 보면 사랑은 마음과 관계를 맺고 있다. 로마서 6:17과 골로새서 3:22에서 보면 순종은 마음에 연결되어 있다. 용서가 마태복음 11:29에서 마음과 연관되어져 있다. 마태복음 11:29에서 결손이 마음에 관계되어 있으며 마태복음 5:8과 야고보서 4:8에서 마음이 순결의 자리로 묘사되고 있다. 골로새서 3:16에서 감사가 마음에 관계되며 빌립보서 4:7에서는 평강이 마음을 지킨다고 기록되고 있다......

             

            그러기에 여기서 다시 한번 인간의 전인성에 대한 성경적 중요성을 발견케 되는 것이다. 카르디아는 인간의 내적 본질에 있어서의 전인을 상징한다. 마음에서, 믿음의 태도이든, 불신의 태도이든,  순종의 태도이든, 불순종의 태도이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기본적 태도가 결정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비록 구약에는 몸을 나타내는 단어가 없지만 인간의 육체적 측면 즉 인간의 육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바사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신약에는 몸을 나타내는 단어가 두개 있다: 사륵스소마. A-G는 보통 육신이라고 번역되는 사륵스에 대해서 여덟 가지의 의미를 나열하고 있다. 다른 의미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몸", "인간", "인간 본성", "육체적 한계", 삶의 외적 측면", 그리고 "죄의 의지적 도구"(특별히 바울 서신 중에서).

             

            그런데 신약에 있어서 사륵스는 두개의 주요한 의미를 갖는다:

            (1) 인간 존재의 외적이고 육체적인 측면-이런 의미에서 이 단어는 전체로서의 인간과, (2)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려는 타락한 인간 속에 있는 성향으로서의 육신에 대해 사용된다. 바울 서신에 주로 나타나는 두번째 의미에 있어서, 사륵스의 의미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는 "육신의 죄"만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 의미를 제한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사륵스가 전인에 의해서 범해지는 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5:19~21에 나타나는 "육체의 일"에 있어서, 열 다섯 개 중에서 다섯 개만이 육체의 죄이며, 나머지는 "영의 죄"라 일컫는 죄들이다. 즉 증오, 분쟁, 시기, 분냄 등등. 그러기에 심지어 사륵스란 단어가 이상의 두번째 의미에서 사용될 때라도 그것은 전인에 관계된 것이요, 단순히 사람의 한 부분에만 관한 것이 아니다.

             

            이제 일번적으로 "몸"이라 번역되는 소마라는 단어를 살펴보기로 하자. A-G는 다음의 의미들을 포함해서 다섯 개의 의미를 주고 있다:

            "살아있는 몸", "부활체", 그리고 "크리스챤 공동체 혹은 교회".

            배쓰(Clarence B. Bass)도 성경에 있어서의 몸에 관한 그의 글에서 소마란 단어에 대해 다섯 가지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 앞의 하나의 실체로서의 전인", "인간속의 영적인 것들의 소재지", "하나님 나라에 백성될 자로서의 전인", "부활을 위한 매개물", 그리고 "마지막 심판의 수단이 될 영적인 시험 장소."

            그는 아래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기에 분명히 몸은 전인을 나타낼 때 사용되며 중간 상태(즉 죽음과 부활 사이의 상태)의 경우를 제외하곤, 육체적 현존없이 사람이 존재한다는 어떤 형태의 성경적 인간관에 어떤 형태의 성경적 인간관에도 대치되는 것이다. 

             

            이제 인간의 다양한 측면들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된 성경의 표현들에 대한 논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본다: 인간은 단일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육체적인 측면과 정신적 혹은 영적측면을 갖고 있으되 우리는 이 둘을 분리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육체를 갖는 영혼 혹은 “영혼을 갖는” 육체로 이해되어야 한다.(Barth, Church Dogmatics, III / 2, p.350) 인간은 상이한 “부분들”의 복합체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전체성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하며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분명한 가르침이다.(G.C. Berkouwer, C.A. Van Peursen, H. Ridderbos, W.G. Kummel, Robert Jewett 책 참조)

             

             

            4. 영-육 통일체

             

            비록 성경이 인간을 전체로서 보고 있지만, 인간이 육체적인 측면과 비육체적인 측면의 두 측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인정하고 있다. 인간은 육체의 몸을 갖고 있으나, 동시에 하나의 인격체이다. 그는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있는 반면에 또한 그의 몸의 일부인 두뇌를 갖고 있으며 이 마음이 없이는 인간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무언가 잘못되어갈 때, 인간은 때때로 수술이 필요하기도 며 또 어떤 때는 상담이 필요하기도 하다. 인간은 그러나 이 두 측면으로부터 고찰될 수 있는 하나의 인성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의 “두 측면성”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우리는 이미 이분법(dichotomy)이란 용어가 갖는 어려움들을 주목한 바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원론(dualism)을 주장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인간의 단일성에 더 많은 강조를 두어 이원체(duality)를 얘기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벌카워는 “이원체와 이원론은 전혀 같은 것이 아니며...우주적 실존에 있어서 이중의 요소가 반드시 이원론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앤더슨(Anderson)도 존재의 ‘이원체’-이 속에서 변이의 양식이 근본적인 단일체로 형성된다-와 이원론 단일체에 대해 반대적임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인간에 대해서 영-육 통일체라고 말하고 싶다. 이 표현이 갖는 좋은 점은 인간의 단일성을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두 측면을 바르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정신과 두뇌 사이에 관계를 고찰해 봄으로 이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매카이(Donald M. Mackay)는 인간은 나뉠 수 없는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다시 말해서 많은 측면들을 갖는 하나의 단일체로 생각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정신과 두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의미심장한 제언을 하고 있다:

             

            우리는 '정신'과 '두뇌'를 성호작용을 하는 두 종류의 '본체'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정신의 사건과 두뇌의 사건을 두 개의 구별된 사건들로 생각할 필요도 없다. 내게는 정신의 사건과 이에 연관된 두뇌의 사건들을 정신상의 범주만으로, 혹은 육체적인 범주만으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한 사거느이 '내적' 측면과 '외적' 측면으로 또한 같은 연속성을 갖는 사건들로-이러한 이해가 훨씬 풍부한 본성을 나타낸다-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한 듯하다.

            우리는 그것들을(나의 의식상의 경험과 나의 두뇌의 기능들) 하나의 신비로운 단일체가 갖는 두 개의 동등한 실체적 국면들로 생각하고 있다. 이를 밖에서 지켜보는 관찰자는 한 측면 즉 두뇌활동의 육체적인 형태만을 보게될 것이요, 본인 자신은 또 다른 측면 즉 그의 의식적인 경험을 인지하게 된다...이것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 두 측면들을 상호보완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정신과 실체의 합일체의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창조되었고, 또한 그렇게 존재하고 있으며 육체의 부활 뒤에도 그렇게 존재할 것이다. 왜냐하면 온전한 구속이란 인간이 몸이 없이는 완전치 못하기에 육체의 구속을 포함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롬8:23; 고전15:12~57).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의 영광스러운 미래는 육체의 부활과 정화되고 완성된 새 땅을 포함하는 것이다.

             

             

            5. 중간상태

             

            그러나 이제 중대한 문제에 직면케 된다.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 즉 소위 “중간상태”는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사람은 육체 없이는 완전치 못하기에, 그는 부활의 때까지 단순히 존재를 멈춰버리는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가?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무의식 상태로 “존재”하는가? 혹, 그는 죽음 직후에 바로 부활체를 입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일종의 중간의 몸을 받아 있다가 후에 부활체로 대체되는가?

             

            .....중략....

             

            인간의 미래에 대한 성경의 중심적 가르침은 육체의 부활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신약은 분명히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신자들의 상태는 잠정적인 행복의 상태, 즉 현재의 땅의 상태보다는 “훨씬 더 좋은” 상태라고 가르치고 있다(빌1:23). 정말 그렇다면 중간 상태에 있는 신자들의 상황 역시 무존재의 상태나 무의식의 상태일 수는 없는 것이다.

             

            때때로 신약 성경은 단순히 신자들이 계속해서 이러한 잠정적인 행복의 상태에서 존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찐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1:22~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눅23:43).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5:6~8).

             

            위의 빌립보서 구절에서 바울은 “몸에 거할 때와”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를 대비함으로 사람이 더 이상 현재의 육체로 살지 않고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현재의 상태보다 더 좋은 상태임-가능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바울이 “몸 안에 거하는 것”과 “몸 밖에 거하는 것”을 대비시키고 있는 고린도후서의 구절은 이점에 있어서 더욱 중요하다. 만약 바울이 보활 후의 신자의 축복됨을 기술하려고 했다면 그가 “이 몸을 떠나”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신자들이 그 뒤에 새 몸을 “입게 된다”는 사실을 나타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몸을 떠나”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독자들에게 현재의 몸과 부활체 사이의 어떤 관계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상의 두 구절 속에서 바울이 신자들이 더 이상 그들의 현재 육체 안에 거하자 않고 그들의 부활체를 얻기 이전일지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언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또 다른 곳에서는 신약이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계속 존재하는 신자들을 지칭하기 위해 "혼"(프쉬케)이나 "영"(프뉴마)이란 단어를 쓰고 있다. "혼"이란 단어는 아래와 긑은 구절들에서 사용되고 있다:

             

            몸은 죽여도 영혼(프쉬케)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마10:28).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혼(프쉬케)들이 제단 아래 있어(계6:9)

             

            영이란 단어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사용된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프뉴마)들과(히12:22~23).

             

            그(그리스도)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프뉴마)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으로 옥에 있는 (프뉴마)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벧전3:18~20).

             

            이와 같이 어떤 때는 신약이 신자들인 우리가 죽음과 부활 사이에 잠정적인 행복의 상태로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반면에, 또 다른 때에는 신자들의 "혼"이나 "영"이 중간 상태에서 여전히 존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환"과 "영"이란 단어를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러기에 이 구절들은 우리에게 인간이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도 육체의 부활을 가다리며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자 할 뿐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중간상태에 삶에 대해 어떠한 인간론적인 설명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추론하고 그것이 무엇과 같을까를 상상하려고 애쓸 뿐이며, 죽음과 부활 사이의 삶에 대해서 어떠한 분명한 영상을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성경이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기는 하나, 그것을 기술하고 있지는 않다. 벌카워가 말했듯이 중간 상태에 관해 신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바는 다름 아닌 속삭임일 뿐이다.

             

            비록 인간이 지금은 영=육 통일체로 존재하고 있지만 이 통일체가 죽음의 때에는 일시적으로 분리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고린도후서 5:8에서 바울은 분명히 인간은 그들의 현재의 몸을 떠나 존재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와 같은 점이 다음의 두 구절 속에서도 발견되어진다: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3:13).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4:14).

             

            이 본문들은 모두 다 죽음 후 부활 전에 존재하고 있는 "거룩한 자들"(성도들)과 "예수 안에서 잠자는 자들"에 관해 말하고 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던 자들의 부활이 조금 뒤에 데살로나가전서 4:16절에서 언급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같은 16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란 표현이 분명히 죽은 신자들이 부활 전에도 여전히 어떤 상태로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인간의 정상적인 상태는 영-육 통일체로서 하나이다. 부활의 때에 인간은 그러한 통일체로 온전케 회복될 것이요, 그렇게 됨으로 다시 한번 완전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따르면 죽음과 부활 사이의 “때”(시간) 안에, 신자들은 그들의 현재의 몸을 떠나 잠정적인 행복의 상태로 일시적이나마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중간 상태는 미완료의 잠정적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마지막 점검으로서 육체의 부활과 새 땅을 고대하는 것이다.

             

             

            6. 실제적 제안들

             

            본장에서 전개되었듯이 인간을 전인으로 이해함에는 중요한 실제적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로 교회가 전인(全人)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는 말씀의 전파와 가르침에 있어서 교회가 담당하는 사람들의 마음뿐만 아니라 그들의 감정과 의지에도 관심을 잡중해야 한다. 단지 하나님과 성경에 관한 지식적인 정보만을 전달하는 말씀의 전파는 대단히 부적합하다. 듣는 자들이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감화되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주일학교의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성경구절들과 교리에 대한 기계적인 "지식" 그 이상의 것을 주어야 한다. 그들의 가르침이 인간의 모든 측면들을 포함하는 반응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젊은이들을 위한 교회의 프로그램이 신체는 외면한 프로그램이어서는 안된다. 운동과 옥외활동들이 온전한 크리스챤의 삶의 한 국면으로서 권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의 전도와 선교사역에 있어서도 교회는 그들이 전인(全人)을 상대로 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비록 선교의 주 목적이 복음을 전파함으로 사람들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한다는 것이긴 하지만, 교회는 그들의 선교사업의 대상들이 영적 필요뿐만 아니라 육체적 필요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은 영-육 통일체적 존재라는 사실을 명심하여 선교사의 사역을 기술함에 있어서, “영혼구원”과 같은 표현들은 지양해야 하며 선교에 있어서 포괄적인 접근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때때로 “말씀과 봉사의 사역”으로 나타나는 접근방식은 선교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자를 얻는 일에 관심을 두게 할 뿐만 아니라, 농사일과 식이요법, 그리고 건강과 같은 분야에서 종사하고 있는 이러한 개종자들과 그들의 이웃들의 생활여건을 향상시키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그러므로 본국인들의 크리스챤 교육을 위한 학교의 설립과 일상적인 건강진료와 응급건강진료를 위한 의료기관과 병원의 유지 등이 교회의 선교활동의 영역 밖이라고 생각되어서는 안되며, 도리어 그 활동의 본질적인 국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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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학교가 전인(全人)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비록 학교의 주된 목적 중의 하나가 지적인 교훈이긴 하나 교사는 그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이 전인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학교는 정신만을 단련시켜서는 안되며 또한 정서와 의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효과적인 교육은 학생들 속에서 배우는 과목에 대한 사랑 뿐만 아니라 그것 이상을 배우려는 염원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학교는 정신에 대한 관심 뿐만 아니라 신체에 대한 관심도 나타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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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전인의 개념은 가정생활에 대한 함축된 의미를 갖는다. 크리스챤 부모들은 하나님에 관해 그들의 자녀들을 가르치는 일과, 크리스챤의 삶으로 그들을 훈련시키는 일에, 그리고 그들이 뒤쳐질 때 사랑으로 그들을 훈계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부모들은 또한 건전한 식이요법과 적절한 신체 보호와 같은 문제들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오늘날 규칙적인 육체적 운동이 좋은 건강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이 더 널리 인식되고 있다. 그러기에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교훈으로 뿐만 아니라 모범으로 좋은 몸 관리를 가르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전인의 개념은 의학에 대해서도 함축된 의미를 갖는다. 인간이 정신과 육체의 합일체라는 사실을 자각함으로 의학은 최근에 "holistic medicine"(포괄적인 의미의 의학)이라 불리는 접근 방법을 개발해 왔다. holistic medicine은 "자신의 건강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성을 강조하며, 건강 관리를 제공함에 있어서 관련된 모든 사람 가운데서 협력적 관계를 추구해 나가는 건강관리 체계"라고 정의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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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전인(全人)의 개념은 심리학과 상담학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상담가들 역시 인간은 전인(全人)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최근의 심리학적인 연구에 의해 사람의 전인성(wholeness of man)이 새롭게 강조되고 있다-이 강조점은 때때로 “유기체 이론“이라 불린다. 홀(Hall)과 린제이(Lindzey)는 심리학에 있어서 전인에 대한 새로운 강조는 몸과 마음의 이원론과 인간구조 심리학 그리고 행동주의 심리학에 대한 하나의 반향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새로운 강조가 폭넓게 받아들여져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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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담가들 역시 인간은 전인(全人)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자신들 이외에도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을 필요로 하는 문제들을 인지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하며, 필요할 때라면 그들의 피상담자들을 기꺼이 의사들이나 정신과 의사에게 위탁할 수 있어야 한다. 정신상의 문제들이 육체적인 문제들로부터 완전히 구별된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둘의 문제들은 결코 서로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상담가들은 영적인 건강과 정신건강을 여하튼 완전히 구별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전인이기에 영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들은 한 전체(a totality)의 측면들이며, 그러기에 각각의 측면이 서로 영향을 받으며 또한 서로 영향을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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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때로 목회상담자들은 성경구절의 단순한 인용이 교인들로 하여금 어려운 영적 문제들을 풀도록 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을 전인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접근 방법이 아주 부적절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데이빗 베너(David G. Benner)는 그의 글에서 인간의 인격성은 두 개의 부분, 즉 영적인 부분과 심리적인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는 일반적인 통념에 이의를 제기하며 아래와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인간이 갖는 어려움들을 단순히 영적인 문제라고 치부해 버리려는 유혹은, 상담자들을 그 문제의 정신적인 측면과 영적인 측면 모두를 다루도록 최대한 열린 상태로 터놓기 위해서 마땅히 배격되어야 한다. 그 문제의 본질적인 영적 특성만을 취해서 어떤 성경적 진리들을 단순히 제시함으로써 그 문제를 처리해 버린다는 것은 용서가 주어지든 받아들여지든 간에, 용서는 인격의 정신적인 과정들에 의해 전달된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요, 다른 정신적인 요소들도 이런 과정 속에 포함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됨으로 거기에 적합한 다른 테크닉이 필요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스챤 상담자는 그의 피상담자의 문제를 전인(全人)의 문제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는 피상담자를 전인으로 다루어야 할 뿐 아니라 그를 건강하고도 신성한 삶의 표적인 전인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시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안토니 A. 후크마의 ‘개혁주의 인간론’ 제11장. 전인(全人)에서 발췌 p. 337~374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존 오웬은

            어떤 교회가 복음의 순결을 지킬지 아니면 배도할지는 그 교회의 목사에게 많이 달려 있고, 교회는 그 교회의 임명받은 사역자가 흥하느냐 망하느냐에 따라 흥하고 망한다고 하면서 몇 가지 사역자의 중요한 의무를 제시하고 있다.

            (1) 임명된 사역자는 복음의 가르침, 특히 거룩에 관한 가르침을 순결하게 지킬 의무가 있다. 사람들이 일단 거룩에 대해 싫증을 내기 시작하면 그들은 성실하게 하나님의 진리를 갈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오늘날 복음의 모든 가르침이 반대에 직면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사람들이 거룩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2)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모든 뜻을 가르쳐야 한다. 무엇이 유용하고 유익한지, 그리고 자기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의 현재의 영적 상태에 비추어 어떤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을 볼 줄 모르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가 될 자격이 없다.
            (3) 목회자의 의무는 사역과 삶을 통해 자기가 설교하는 그 크고 거룩한 가르침의 능력과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4) 임명받은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의 순결과 거룩 및 순종을 보존하기 위해 지정해 주신 거룩한 훈련과 규율을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이다.

            능력있는 복음의 사역이 회복될 때에야 비로소 교회는 현재의 배도 상태로부터 영광스러운 상태로 변화되어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출처:개혁주의마을

            조엘 비키예비 은총에 대해

             

             

                “대부분의 20세기 학자들은 중생을 위한 예비 은총(preparatory grace)이 청교도가 종교개혁 은총론을 인간 중심적인 율법주의 사상과 거래한 결정적인 증거라고 여겨 폐기처분했다.”고 비키는 진단한다. 물론 긍정적인 평가를 아끼지 않은 학자들도 몇몇 있다.”고 한다.

             

                1. ‘예비 은총은 죄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책과 위험과 속수무책 상태를 확신하게 하도록 하나님이 율법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청교도는 확신에 대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설명하고 죄인들이 반응할 수 있도록 훈계하는 것에 대한 방대한 논의를 생산했다. 즉 스스로를 성찰하고 자신들의 죄를 슬퍼하고 은혜의 수단들을 활발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성경읽기, 설교듣기, 묵상, 기도, 영적인 교제 등등을 강조했다.

             

                2. ‘구원의 믿음의 예비라는 개념에 오해가 없지는 않았다. ‘죄인은 자신의 죄로 죽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어떠한 것도 수행할 수 없는데 어떻게 죄인이 회심을 향하여 준비될 수 있느냐?’는 문제가 대표적인 것이다. 교회사 속에서 특별히 오캄의 영향을 받았던 일부 중세 학자들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를 따라 수행할 수 있는 것을 행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에 합당한 보상으로 회심하게 하는 은총을 베푸실 것이라는 일종의 남루한 거래 개념을 주장했다. 즉 이런 인간의 노력은 주님에게 부합한 일치 공로(congruent merit)’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3. 비키는 예비 은총에 대한 청교도적 개념은 로마 카톨릭이 주장하는 공로 은총(meritorious grace)과 다른 것이며 구원에 인간의 공로가 끼어들 여지를 넉넉히 마련한 펠라기안 사상과도 다르며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성경적인 가르침과 무관한 것이라고 정죄한다. 청교도도 그랬다며.

             

                4. 종교개혁 인물들과 청교도가 고수했던 성경적 가르침은 인간의 영적인 무능력과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이다. 그럼에도 일례로 웨스트민스터 문헌들은 하나님이 구원하는 믿음과 영생에 이르는 회개의 중요한 전조요 인간으로 하여금 율법을 통한 죄 인식에 이르도록 하시는 수단인 성령의 일반 사역을 언급하고 있다. 웨민 고백서는 돌이키지 않은 죄인들이 믿음 없이 은혜의 수단들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없음에도 그 수단들에 대한 그들의 태만함은 더욱 죄악된 것이며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든다.’고 진술한다.

             

               5. 실제로 많은 청교도가 회심을 위한 준비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잃어버린 죄인들이 돌이킬 것을 기대하며 은혜의 수단들 사용을 그들에게 권하였기 때문에 준비주의(preparationism)’ 같은 거북한 호칭도 뒤따랐다. 물론 준비 개념을 과도하게 발전시켜 세간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뉴잉글랜드 청교도가 없지는 않았단다. 비키는 이를 청교도 사상의 계승이 아니라 퇴락의 단면이라고 꼬집는다.

             

               6. 비키는 구원의 믿음을 위한 예비 은총 개념에 대해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 인물들과 청교도 사이에 일종의 통일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청교도 내에서도 교리의 디테일에 있어서는 상이성이 발견된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죽었으며 하나님이 오직 은혜로만 죄인들을 중생케 하는 주체라는 것, 그리고 회심이 죄에 대한 확신과 말씀에 대한 경청의 과정과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는 하나의 목소리를 낸다고 한다. 그리고 실질적인 예비주의 주창자는 청교도가 아니라 로마 카톨릭과 알미니안 옹호자라 역설한다.

             

                7. 비키가 생각하는 예비 은총개념의 긍정적인 측면들은 이렇다. 1) 청교도 예비론은 복음의 자유로운 선포를 지원하고, 2) 철저한 개혁주의 개념이며, 3) 성령의 일반 사역을 강조하고, 4) 죄인들과 율법을 연결하려 하지 율법주의 사상을 두둔하진 않으며, 5) 중생의 신비에 대해서는 여전히 신비로운 그대로 열어두며, 6) 하나님을 창조자와 구세주로 경외하며, 7) 그리스도 예수의 충분성을 보이고, 8) 성경적인 토대 위에 세워진 개념이다.

             

                8. 질의응답 시간에 예비 은총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이 있는지에 대해 여쭈었다. 사용하지 않아도 별 탈 없었을 텐데라는 추정에 근거해서 말이다. 이때 비키는 화란 개혁주의 진영과 청교도 진영 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즉 죄책감 직전--깊은 죄책감--회심--신자의 길 등으로 구분할 때에 화란은 죄책감 직전을 중생의 시점으로 보았지만 청교도는 깊은 죄책감 직후의 회심을 중생 확인할 수 있는 시점으로 강조했다 한다. 당연히 회심 이전에는 하나님의 역사와 은총이 없었냐?”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었고 이에 대한 답변으로 예비 은총이 인간 편에서 획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주어진 것이어서 회심 이전에도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와 역사 강조를 철회하지 않을 수 있었단다.

             

               9. “청교도 내에서 혹시 예비 은총사용을 거절하고 심지어는 공격까지 한 청교도가 있었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간단했다. 없단다...!!! 멀러의 많은 멘트에는 논쟁적인 내용이 없었고 책의 건설적인 조언들로 충만했다. 비키는 꼼꼼하게 받아 적으시는 겸손과 존중의 자세를 취하셨다. 보기에 심히 좋았다. 멀러가 비키를 소개하는 서두에 동료(colleague)라는 호칭을 썼는데 비키는 멀러가 자신의 멘토(mentor)인데 동료는 과분한 것이라며 유쾌한 거절로 응수했다. 그것도 멋졌었다! 오늘 발표된 논문은 분량 면에서 여름에 나올 책의 폭력적인 요약이라 했다. 내년 여름에 청교도 신학의 주목받지 못한, 때때로 가려진 부위를 조명하는 서적을 기다리는 설레임이 하나 생겼다.

             

            Friday, December 7, 2012

             

            출처: http://paul-prodeo.blogspot.kr/2012/12/blog-post_7541.html

             

             

             

                위 글 마지막 문장에 언급된 책이 출판됐나 봅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책에 연중론 수장께서 순중론/연중론 논쟁을 끝내게 할 책이라며 연중론의 희망을 거는 김치국물을 먼저 마시고 계시는 겁니다. “조엘 비키는 연중론자다.” 하고 싶으신 거지요.

             

               

             

             

                그런데 연중론자들이 연중론자라고 주장한 신학자들 가운데 연중론자로 제대로 밝혀냈던 신학자가 단 한 분이라도 있었던가요? 오히려 이른바 순중론자들이, 연중론자들이 연중론자로 주장한 신학자들 여러 사람을 이른바 순중론자로 밝혀냈지요.

             

                “위 조엘 비키 예비 은혜에 대한 글을 독해할 때, 조엘 비키는 연중론자가 아닙니다.” 저 역시 조엘 비키 새로운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연중론자들 독해력 문제, 즉 난독증을 생각하면서 김치국물 먼저 마시는 마음으로 이야기합니다.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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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풀핏|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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