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도운동 등 다양한 예언운동은 비성경적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있다고 주장하며, 일단의 사람들이‘사도협의회’라는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에 대해서 1세기의 사도들이 과연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나아가서 그 사도들을 불러서 위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태도를 취하실까?”
한국성경신학회 소속 장로교 신학자들이 피터 와그너로 대변되는 신사도운동 등 다양한 예언운동은 비성경적인 ‘불건전한 신앙운동’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날도 사도가 있다’ 주장하는 것, 가장 심각

지난 2일 서울 신반포중앙교회에서 열린 ‘한국성경신학회 신앙세미나’에서 발제에 나선 이승구 교수(합신대)와 최병규 박사(고신 유사기독교연구소 소장)는 ‘오늘날에도 직통계시가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비진리성을 한 목소리로 고발했다.

특히 이승구 교수는 예언운동의 문제점을 장로교 곧 개혁파 신학의 입장에서 ‘일반적 문제점’, ‘근원적 문제점’, ‘좀 더 심각한 문제’로 나눠 조목조목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일반적인 문제점으로 △에베소서 4장 11절에 있지도 않은 ‘중보자’를 목사ㆍ교사ㆍ예언자ㆍ사도와 함께 교회의 5대 직분으로 언급하거나 △에베소서 1장17절의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목회자와 소위 예언자에게 제한시키는 등의 ‘결코 성경적이지 않은 성경해석의 자의성’을 꼽았다.

근원적인 문제점으로는 ‘오늘날에도 예언자들이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가 직접적으로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을, 좀 더 심각한 문제로는 ‘초대교회 사도들과 비교해 어느 정도의 차이는 인정하지만 오늘날도 사도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꼽았다.

장로교 신학의 입장에서 이들의 주장은 ‘비성경적’

이 교수는 이어 이들 문제점에 대해 장로교 신학 곧 개혁파 신학의 관점에서 하나하나 반박했다.

성경의 자의적 해석과 관련 이 교수는 “이들은 ‘성경적’이란 말을 사용하지만 실제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성경적이지 못하다”면서 “교회의 직분을 말할 때 성경 본문에 없는 ’중보자‘를 삽입하거나,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목회자와 소위 예언자들에게 제한시키는 것 등이 대표적”이라고 말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직통계시가 예언자에게 임한다’는 주장과 관련 이 교수는 “개혁파 신학에서는 오늘날에는 선지자(예언자)가 없고,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성경에 의존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다”며 “그러므로 장로교 신학의 입장에서는 이들의 주장을 비성경적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특히 이 교수는 “이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에 대해 ‘이 시대에는 예언의 양상이 많이 변했다’, ‘이 시대의 예언은 조건적이다’라고 말한다”면서 “‘구약시대 참 선지자의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졌지만 이 시대에는 참 선지자의 예언도 꼭 성취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이들의 논의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당신이 선포하신 말씀을 바꾸신다’는 표현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과연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되물었다.

사도시대의 교회와 우리 시대의 교회 구별해야

‘오늘날도 사도가 있다’는 주장과 관련 이 교수는 이들이 사도시대와 우리 시대의 구별을 하지 않는 점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이 교수는 “사도시대의 교회는 사도들이 생존해 있던 교회인데 반해 우리 시대는 아니라는 점, 사도시대의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가 여전히 주어지던 시대였던 데 반해 우리 시대는 주의 재림 때까지 더 이상 새로운 게시가 없는 시대라는 점, 사도시대의 이적과 기사들은 사도들을 통해 주시는 계시를 확증해 주는 사도적 이적인 데 반해 우리 시대의 이적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다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교수는 “피터 와그너 등은 이런 차이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면서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비판에 대해서 자신이 일으키고 있는 성령운동을 훼방하는 ‘집단 종교의 영’으로 규정한 뒤 배후에 마귀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이 교수는 “우리들 시대에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에 충실하지 아니한 가르침들이 난무하며 그것이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영적인 어두움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며 안타까움을 피력했다.
출처 : 뉴스미션

칭의와 선행의 관계

-루터의 '선행에 관하여'(1520)를 중심으로-


1. 시작하는 말


올해는 루터 서거 450년 주년되는 뜻깊은 해로 독일에서 "루터의 해 '96(LUTHER-JAHR '96)"이라는 표제 아래 대대적인 행사가 있었다. "루터 도시(Lutherstadt)"라는 별명을 가진 비텐베르크(Wittenberg)를 위시하여 루터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여러 도시들을 관광할 수 있는 상품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필자가 지난 7월 11일부터 15일까지 3번째의 루터 유적지 방문에서 이번의 루터 전시회는 신학적인 측면보다 오히려 루터의 인간적인 측면을 더욱 부각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루터를 이제까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굴레에서 신학적으로 해방한 인물로 보는 입장에서 더 나아가 루터를 새롭게 발견하고자하는 시도라고 보여졌다.

그 가운데 루터가 라틴어 학교를 다녔던 아이제나흐(Eisenach)에 있는 루터 하우스(Luther Haus)의 "목사 사택 기록(Pfarrhausarchiv)" 전시회는 성직자들의 결혼이 금지되었던 카톨릭의 세계에 성직자도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선물을 준 루터의 업적으로 16세기부터 현대까지 목사 사택의 생활상을 자세히 알려주는 흥미있는 전시회였다. 비텐베르크에 있는 루터 홀(Luther Halle)에서는 "루터와 백조"라는 제목의 특별 전시회가 있었는데 이것은 "후에 백조가 나타나서 교회를 개혁하리라"는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 후스(Johannes Hus, 약 1370-1415)의 예언이 루터의 출현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 교회 개혁의 중심 사상은 바로 칭의론(Rechtsfertigungslehre)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3가지의 '오직'(sola)을 통해서 가능하다: "오직 은총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 3가지의 '오직'으로 루터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과"라는 신앙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은총과 공로, 믿음과 행위 그리고 그리스도와 교회. 루터의 이런 사상은 오늘 우리에게도 전승되어 우리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신앙에 대한 강조는 자칫 행위는 불필요하며 구원에 있어서 전혀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런 문제에 대한 답변이 바로 루터가 1520년에 쓴 글인 '선행에 관하여(Von guten Werken)'라는 설교이다.

본 소고는 루터의 이 설교를 중심으로 신앙과 선행의 문제를 접근하고자 한다. 이 글은 또한 오늘 한국 개신교에서도 계속 대두되는 신앙과 행위의 문제에 대한 좋은 답변이 되리라고 여겨진다. 루터의 명제인 '오직 믿음'을 그 당시의 종교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이 문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문제에 부딪히게 됨은 당연하다. 이러한 전이해가 없이 개신교인들에게 항상 용서해주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만 부각된다면 죄에 대한 아픔도 없이 언제나 죄를 범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죄를 범해도 주일날 교회에 가서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해주신다는 잘못되고 안이한 생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개와 믿음을 감정적으로만 이해하는데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요즘은 부흥회 때도 회개를 강조하지 않지만 부흥회 때에 울고 짜고 기도하면 용서를 받고 믿음이 생긴다고 알고 있다. 과연 루터가 이렇게 아무 생각없이 계속 죄를 범한 인간을 간단히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을 말하려고 했을까 아니면 신앙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어떤 감추어진 면이 있었을까? 이러한 문제에 대한 루터의 견해를 알기 위해 이 글에서는 루터의 칭의 이해 그리고 선행과 신앙의 관계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다루려고 한다.


2. '선행에 관하여'(1520)의 배경과 구성


2.1. '선행에 관하여'(1520)가 나오게된 배경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루터의 사상은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468년 사망)의 금속활자의 발명으로 인쇄가 예전보다 훨씬 쉬어지자 팜플렛(Flugschriften)을 통하여 급속도로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성서신학 교수로서 대학의 강단에서 뿐만 아니라 비텐베르크 시교회(市敎會, Stadtkirche)의 설교자로서 매주일 설교한 목회자이기도 했다. 루터의 설교는 평신도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게 되었고 특히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라는 루터의 주장은 이제까지 행위를 통하여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신자들의 인식에 많은 변화와 혼돈을 초래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 선행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루터가 선행을 업신여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루터는 이에 대해 어떻게 선행이 행해져야 되며 어떻게 이것이 인식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설명해야할 인식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선행에 관하여(Von den guten Werken, 1520)'라는 설교가 나오게 되었다.

루터는 이 글을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Kurfürst Friedirch)의 비서이며 궁중 설교자인 슈팔라틴(Spalatin)의 권고로 프리드리히의 동생인 작센의 제후 요한(Herzog Johann)에게 헌정하였다. 루터는 1520년 3월 25일 슈팔라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것은 설교라기 보다는 작은 책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이제까지 쓴 책 가운데 "최고의 책"이 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루터는 이 글을 1520년 2월 26일부터 쓰기 시작했으며, 1520년 5월말 혹은 6월초에 비텐베르크에 있는 멜리호르 로터 2세(Melchior Lotter d.J.) 출판사에서 초판이 발행되었다.


루터는 이 글을 신학자들을 위해 쓴 글이 아니라 평신도를 위하여 썼다. 그러므로 그는 이 글을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썼다. 그는 평신도들이 신앙에 대하여 오도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이를 바로 잡아 주고자 했으며, 또한 자신이 배우지 못한 평신도들을 위해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설교하고 글을 쓴 것에 대하여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그는 그 당시 라틴어로 설교하고 글을 쓴 성직자와 비교해볼 때 민중의 편에 선 목회자요 교육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2. '선행에 관하여'의 구성


루터의 '선행에 관하여'라는 설교를 뢰베니치(W. v. Loewenich)는 복음주의적 윤리의 가장 아름다운 진술이라고 평가하였다. 이 설교를 통해 루터는 자신의 새로운 윤리의 근본을 제공하고 있다. 이 설교는 선행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하여 모세의 십계명을 해설하고 있다. 우리는 루터가 십계명의 분류를 우리와는 달리 제1,2계명을 제1계명으로 그리고 제10계명을 제9,10계명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글에서는 루터의 분류법을 그대로 따르기로 하겠다.


이 글은 십계명에 의거하여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모세의 첫째 돌판(제1계명부터 제3계명까지)에 관해서, 제2부는 둘째 돌판(제4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에 대한 해설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 제1계명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과 우상 숭배를 하지 말라는 것에 관하여 1-17항목에 이르는 설명을 하고 있다. 특히 제1항과 2항은 이 책의 요지라 할 수 있다. 1. 선행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금하셨던 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었으로 우리는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 2. 첫째되며 최고의 선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기도, 금식 그리고 종교 재단을 설립하는 것과 같은 종교적인 선행이나 사람들 가운데서 선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라고 묻겠지만 우리는 이런 선행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알 수 없으며 이런 것들은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 야웨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제2계명에 관하여 18-31항에 걸쳐서 해설하고 있으며 제2계명에 해당되는 4가지 선행을 언급하고 있다. 첫째 선행은 하나님을 은총을 찬양하는 일이다(제21항). 둘째 선행은 일시적인 존경과 영광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다(제21-24항). 셋째 선행은 모든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제25항). 넷째 선행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든지, 저주하든지, 거짓말 하거나 속이거나 마술하거나 다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지 않은 것이다(제28항). 제3계명인 안식일 성수에 대한 계명에 대한 설명은 1-25항으로 이루어져 있고 예배(제1항), 미사(제2항), 설교(제3항), 기도(제3-16항), 안식일 성수의 영적인 의미(제17-18항), 금식(제19-23항)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2부: 제4계명인 부모를 공경하는 것에 관하여 4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는 것(제1-6항), 둘째, 교회를 섬기는 것(제7-11항), 셋째, 세속 권위에 순종하는 것(제12-17항), 넷째, 상관에게 순종하는 것(제18-19항) 그리고 결론(제20-21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머지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 비교적 짧막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부정적인 금지보다는 긍정적인 내용으로 바꾸어 말하고 있다. 제5계명인 살인금지의 계명은 원수에 대해서 갖고 있는 악한 마음 대신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자비로 온유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으로, 제6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순결과 깨끗함을 지키는 것으로, 제7계명인 도적질하지 말라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로부터 물질에 대한 관대함(Freigebigkeit)으로, 즉 인간이 물질에 얽매이지 않고 물질에 자신의 신뢰를 두지 않는 것으로, 제8계명인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진리와 복음을 위한 경주가 교황, 감독, 군주 그리고 왕에 대하여 요구되어짐으로 해석하고 있다. 제9계명과 10계명에 대하여 루터는 아주 짧막하게 이웃의 것에 해를 입히지 말라고 언급한다.

3. 루터의 칭의에 관한 이해


3.1. iustitia Dei


루터에게 있어서 신앙(fides)과 하나님의 의(iustitia Dei)는 톱니바퀴 처럼 맞물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앙은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통로이며 하나님의 의는 신앙을 통해서만 전달되어 진다. 루터가 신앙이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통로임을 깨닫게 되기까지 그는 어거스틴 은자회 수도원에서 구원에 대한 절망으로 인한 자기 자신과의 투쟁(Anfechtung), 옥캄주의와의 결별 그리고 성서 연구에의 몰두라는 오랜 세월을 보내게 된다. 루터는 근대의 방법(via moderna)으로 대표되는 옥캄(Wilhelm von Ockham, 1285-1347)의 가르침에 충실한 수도사였다. 옥캄은 "인간 안에 있는 힘으로 선행을 할 수 있다(facere quod in se est)"라는 명제 아래 이미 고대 교회에서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사이의 논쟁에서 펠라기우스가 패배한 논제를 다시 끌여들었던 것이다. 루터는 수도원에서 옥캄이 가르친대로 구원에 이르기 위해 선을 쌓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는 수도사에게 요구되어지는 두가지의 선, 즉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완전한 사랑을 성취할 수 없음을 깨닫고 절망 속에 잠기게 되었다. 그가 끊임없이 자신과 투쟁하였던 것은 자기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려는 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무력함에 대하여 절망하고 있었을 때 그를 더욱 절망 속에 빠뜨린 것은 어거스틴의 예정론에 관한 글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멸망으로 예정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가 성서를 통해 구원관에 대한 확신이 서기까지 그는 불안과 번민 가운데 지냈던 것이다. 왜냐하면성서가 말하는 구원의 의미를 깨닫기 전까지 그가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의 행위를 중요시여긴 바로 그 당시 교회의 가르침과 신학을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이점에 있어서 루터는 중세 후기에 속한 사람이었다.


루터에게 언제나 의문으로 남아 있었던 것은 롬 1:17에 나오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였다. 그는 하나님은 인간이 지킬 수 없는 구약의 율법이라는 의를 주셨는데 복음에도 하나님의 의를 주셨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하나님에 대해 루터는 미워한다고 표현하였다. 루터는 성서를 "복음"으로서가 아닌 "율법"으로 읽었던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인간 스스로가 하나님처럼 의롭게 되어야할 의로 이해하였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에서 "하나님의"에 해당되는 속격을 하나님의 속성에 도달해야하는 주격적인 속격(genitivus subjectivus)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이 의는 인간이 능동적으로 성취해야 할 의이다. 이 의에 의하면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죄인과 불의한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의이다.


루터는 이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낮이고 밤이고 오랫동안 씨름하였으며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특성(Qualität)으로서의 이 의로 여기던 이제까지의 관념을 깨고 "하나님의"라는 속격을 목적격적인 속격(genitivus objectivus)으로, 하나님에 대한 의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의는 인간이 능동적으로 성취하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덥입혀주는 수동적인 의이다. 이 의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는 선물이며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이다. 루터는 이 사실을 깨달은 다음 자신의 심경을 마치 새로 태어난 것 같으며 낙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고 그가 죽기 1년전인 1545년 출판된 그의 라틴어 저작 전집의 제1권의 머리말에서 술회하고 있다.


3.2. justificatio et justificare


루터에게 있어서 justificatio와 justificare는 하나가 아니다. 의롭게 여긴다는 동사인 justificare는 루터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루터는 이 말을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의해 인간이 정당하다고 선언(die Für-Gerecht-Erklärung)을 받음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로 무죄 판결을 받아 새롭게 변화된 사건(Geschehen)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의 의를 선물하심으로 이 의를 통하여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자신의 선행의 실행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의로 여겨진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루터는 "낯선 의(iustitia aliena)"라고 한다. 의롭게 된 것이란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하나님이 은혜로 죄를 더 이상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의는 인간 "밖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 의는 오직 신앙을 통하여 가능하다. 이 신앙과 더불어 그리스도가 인간 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리하여 이 의는 하나님이 인간과 교통하게 된 유일한 통로가 된다. 이로써 루터는 중세 신비주의, 특히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327년 사망)의 입장인 그리스도가 인간 안에서 탄생한다는 것과 확실한 결별을 나타내고 있다.


루터는 롬 3:4을 다루면서 우리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 하나님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게 여겨지게 된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또한 롬 4:7에 대한 해석이기도 하다.


루터는 의롭게 됨이라는 명사인 iustificatio는 두 가지 이유에서 불가능하다고 본다. 첫째, 어떤 사람도 마음에서 나온 순수한 헌신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 인간은 선한 행위를 하려고 하지만 그 자신이 선하지 않으며 그의 마음은 순수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분열되어 있고 죄에 얽매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합당한 선한 행위를 하려면 인간은 일치되어 있고 하나님을 향해 완전히 열려 있어야만 할 것이다. 둘째, 인간이 은총의 도움으로 순수하고 완전한 헌신을 이룬다고 할지라도 윤리적으로 완전한 의는 하나님에게 있어서 구원의 수단으로 참작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왕이 베푸는 것과 같은 은총에 속한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선물로 주신다. 그러므로 iustificatio는 이 땅에서 완성되지 않은채 심판 날에야 완성된다. 이것은 종말에 실현될 희망 속에 남겨져 있다.


4. 루터에 있어서 신앙과 선행의 관계


4.1. 최고의 선행으로서 신앙


신앙과 행위라는 주제는 오직 은총으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설교된 이후부터 불가피하게 대두된다. 루터는 이에 대한 답변을 '선행에 관하여'라는 설교에서 십계명을 해석함으로써 얻어낸다. 이 설교는 신앙과 선행에 관한 새로운 관계 정립이다. 루터는 이 설교의 서두를 하나님이 명령하신 계명을 지키는 것 외에는 더 나은 어떤 선행이 없다는 것으로 장식하고 있다. 이것은 선행이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임을 명시한 복음서의 내용(마 19:17)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선행이란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루터는 역설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첫째되며 최상의, 가장 귀한 선행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우리는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된다. 루터에게는 왜 신앙이 최고의 선행이 되는 것일까?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십계명 그리고 주기도문이 내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 내적 연관의 근본이 바로 신앙에 있음을 갈파하였다. 그러므로 신앙 외에는 어떤 선행도 존재하지 않는다. 루터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십계명의 제1계명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신앙이란 선한 마음과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갖는 것이다. 제1계명이 지켜지고 있지 않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이 계명이 가장 근본적인 계명이며 구원에 이르는 계명인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신앙을 외형적이고 종교적인 것에서 쁹고 있으며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금식, 기도, 교회 안에서 구제하는 행위등을 통하여 선행을 쌓아 의에 이르려고 하지만 이런 일들은 거짓되고 위선적이며 바리새적이고 비신앙적인 선한 행위이다. 이것이 비신앙적인 선한 행위인 것은 그 근본이 하나님에게 있지 않고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십계명의 제1계명을 범한 행위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십계명의 제1계명은 바로 주기도문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이것은 제1계명의 말씀이며 이 신앙에 대한 간구이다. 이것은 은혜로우신 하나님과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우리의 아버지로 모신다는 것이며 여기에 어떠한 다른 것이 끼어들어 갈 수 없는 것이다.


제1계명으로부터 야웨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제2계명의 선행이 흘러 나오게 된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그의 은총을 고백하고 오직 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주기도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찬양을 받게 되고 존귀와 영광을 받게되는 것이며 모든 곤경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신앙이다. 다음으로 제3계명이 뒤따른다: 기도와 설교를 들음으로써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고찰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여기에 고행과 자신의 육신을 억제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제3계명은 주기도문의 "나라이 임하옵시며"와 연관되어 있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일에서 휴식을 취하고 우리 안에 오직 하나님께 대한 행위만 있도록 하며, 눅 17:21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자신의 나라를 다스리는 안식일과 휴일이 올바로 지켜지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주기도문의 4번째 간구인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모세의 둘째 돌판에 새겨진 나머지 7개의 계명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둘째 돌판에 있는 7개의 계명들을 따르고 지키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이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이웃에 대해 행위로서 신앙을 실천하는 것이다.

결국 루터에게 있어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선행 의인은 인간 스스로 노력한 힘으로 구원에 도달하려는 우상 숭배로 여겨진다. 루터에게 있어서 신앙은 모든 선한 행위의 원천이며 근거가 된다. 선행은 신앙과 연관되어야 한다. 신앙과 연관되어 있지 않은 선행은 선행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루터에게 있어서 신앙은 모든 행위의 "주된 행위(Hauptwerk)"이다. 그렇다면 신앙은 이미 행위를 내포하고 있게 된다. 이에 대해 루터는 1522년 독일어로 번역된 신약 성서 로마서 서문에서 신앙과 행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믿음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 역사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나게 하며(요 1장) 옛 아담을 죽이고 우리를 마음, 기질, 감각, 그리고 모든 힘에서부터 전혀 다른 인간으로 만들며, 성령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오! 믿음은 살아있고, 굳세고, 강력한 것이다. 믿음이 선한 일을 끊임없이 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믿음은 선한 행위들이 행해져야 될 것인지 아닌지를 묻지 않고, 오히려 이미 선한 행위들을 했으며 언제나 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4.2. 선행에 대한 두 가지 구분


루터에게 있어서 선행은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이것은 십계명이 하나님에 대한 것과 인간에게 대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4.2.1. 하나님께 대한 신앙 선행


하나님께 대한 신앙 선행은 인간의 구원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다.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제시한 95개 조항도 인간의 죄의 해결을 위한 종교적인 행위인 고해 성사의 세번째 단계인 소위 "선행의 보속(satisfactio operis)"에 대한 논쟁이었다. 루터 당시는 신앙이 쇠약해진 시대가 아니라 사람들의 종교적인 관심이 최고조로 달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앙적인 행위에 열심을 냈던 것은 사실이다. 루터가 태어났던 중세 후기를 가리켜 괴팅엔(Göttingen) 대학교 신학부의 교회사 교수인 묄러(B. Moeller)는 "중세 후기는 교회화의 최고조의 시대이다"라고 평가하였다. 그 당시 사람들이 신앙의 문제로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영원한 구원이었다.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 애쓰는 것 중의 하나는 종교적인 행위이다. 이 종교적인 행위를 루터 당시의 카톨릭 교회는 제1계명을 지키는 선행으로 가르쳤다. 찬송부르는 일, 미사 참석, 아침 기도회와 저녁 기도회를 지키는 일, 매일 정해진 기도 시간을 지키는 일, 종교 재단을 세우는데 헌금하는 일, 교회, 교회의 제단 그리고 수도원들을 꾸미는 일, 로마와 성자들의 유적지를 순례하는 일 등이 신앙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인 행위는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불완전한 사랑의 표현으로 보였다. 이것을 남녀 간의 사랑을 비유로 들어 말하는데 상대방이 서로 진심으로 사랑할 때는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지만 상대방에 대하여 의심하게 되면 크고 작은 모든 일에 있어서 상대방을 여러 면에서 조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종교적인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무마해보려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오늘 한국의 개신교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는 종교적인 행위의 열심이 구원을 이루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지 저으기 의심스럽다.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게 된 것도 신앙적인 행위로 구원을 받으려는 것을 주로 공격의 표적으로 삼은 것이다. 루터는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철학이나 윤리의 범주가 아닌 신학적인 입장에서 이야기 한 것이다. 루터는 이러한 종교적인 선행은 결국 우상 숭배에 해당된다고 보았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닌 인간의 공로가 우선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십계명의 제1계명을 범하는 행위이다.


루터는 기도, 금식 등 종교적인 선행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다는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인간의 직업 상의 일, 휴식, 먹고 마시는 일, 잠자는 일 등 일상의 생활 또한 선한 행위 임을 주장한다. 선한 행위다, 선한 행위가 아니다는 인간이 정해 놓은 것이요, 하나님에게는 이런 차별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루터는 세속의 일과 종교적인 선행의 구분을 철폐하고 모든 행위가 차별없이 선한 것임을 천명하였다.


4.2.2.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윤리적 선행


루터에게 있어서 선행은 하나님과 관계된 영역 뿐만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에서 언급되어진 것으로 기독자의 윤리 문제를 다루게 된다. 루터는 십계명의 제4계명부터 제10계명을 지키는 것에서 인간의 윤리적인 선행의 내용들을 언급하고 있다. 제4계명에서 루터는 부모와 지식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엄하게 가르치고 있다. 루터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 사랑의 관계가 성립되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제4계명에서 세속의 권위와 교회의 성직자들의 해악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사치, 매춘 그리고 고리대금업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루터는 다른 계명들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면서 언제나 이러한 계명이 신앙과 관련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루터에게 있어서 인간이 윤리적 행위를 할 수 있는 근원은 신앙에서 나와야 한다. 신앙으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은 후에 인간은 새로운 인간이 된다. 이 사람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자연적으로 맺는 것처럼 선한 행실을 하게 된다. 이 사람이 선한 행실을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루터는 인간의 윤리적인 선행의 한 부분을 시민적 정의(iustitia civilis)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의 도덕적 가능성을 협소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 시민적 정의는 인간 사이의 도덕적이고 시민적이며 외적이고 정치적인 의이다. 우리는 이것을 완전무결하게 이룰 수 없다. 이 의는 아리스토텔레스나 치체로(Cicero)가 가르친 정치적인 덕의 총괄이다. 이러한 의는 이방인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데 국민들의 질서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 하나님은 이 의의 영역을 허락하셨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의는 사람들 앞에서 유효하며 영광을 가지고 있지 하나님 앞에서 유효한 것이 아니다. 루터는 여기에서 신학적인 의와 정치적인 의 사이를 구별하고 있다. 세속에서 재판관으로부터 의롭다고 선고를 받는 정치적인 의는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고를 받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인 의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의 심판 앞에서 인간을 전혀 도울 수 없다. 이 의는 가면이요 위선이요 거짓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진실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외적인 행동은 시민적으로 정치적으로 가능하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모신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언제나 영웅적인 덕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루터는 윤리적인 행위가 신앙인에게 불가피하게 따르게 됨을 주장하고 있다. 신앙인이 윤리적으로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능력에서가 아닌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이해된다. 성령은 인간 안에서 선행을 하게 하는 원동력의 역할을 하며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사람의 마음에 불어 넣는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이 성령의 활동 때문에 강제적이 아닌 자율적으로 선행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루터에게 있어서 선행을 하지 않는 것은 바로 신앙이 없다는 것이다. 삶은 신앙의 훈련으로서 나타나게 되므로 행위는 신앙의 모습이다.


5. 끝맺는 말


루터의 '선행에 관하여'는 선행이 무엇이라고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신앙이 무엇인가를 변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참 신앙이 무엇임을 변증하기 위해 행위의 근본이 되는 십계명에 대하여 해설하고 있다. 루터는 신앙과 선행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제시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최고의 선행임을 천명함으로써 세속적인 일들과 성스러운 일들 사이의 차이를 허물어 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 안에서 선행의 차이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선행이 신앙에 종속되어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루터에게 있어서 신앙에 우선하지 않는 모든 행위는 죽은 것이며 이 행위로 구원에 도달하려는 것은 우상 숭배에 해당된다. 신앙은 행위를 가능케하는 원천이 되는데 그것은 인간에게 그런 능력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설교는 무엇보다도 먼저 믿음의 열매로서 선한 행위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선한 행위가 결코 인간을 의롭게 할 수 없으며 이러한 행위는 오직 하나님의 행위임을 주장하고 있다. 인간이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첫 번째 창조가 아닌 두 번째 창조인 거듭남(regeneratio)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루터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자유의지를 부정함으로, 그에게서 신인협동(神人協同)을 전혀 쁹아볼 수 없다.


루터에게 있어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신앙적인 선행을 통하여 구원을 받으려는 당시의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구원관에 대한 반박의 역사적인 배경에서 먼저 조명해야 할 것이다. 루터는 선행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선행이 신앙과 은총보다 선두에 있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선행과 신앙의 문제는 경건주의자들에 의해 다시 제기되었으며, 경건주의자들은 살아 있는 믿음에 관한 루터의 가르침을 다시 주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그들이 강조한 것은 루터와 달랐다: 경건주의자들에게는, - 루터가 원했던 것처럼 - 신자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신뢰하여 그의 전체로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믿음 자체보다, 생동력을 가진 선행이 더 중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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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3 (토마스 왓슨)

 

 

제 3장 왜 모든 것이 선을 이루는가

1. 모든 것이 선을 이루는 큰 이유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친밀하고 친근한 관심을 가지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렘 32:38) 이 계약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님 백성에게 선을 이루며 틀림없이 이룬다.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시로다”(시 50:7)
“네 하나님”, 이 말은 성경에서 가장 달콤한 말이며, 가장 뛰어난 관계를 함축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 이런 관계가 있을 수 없다면, 따라서 모든 것이 그들에게 선을 이루지는 않는다. “나는 네 하나님이라”는 이 표현은 다음과 같은 뜻을 담고 있다.
1) 의원과 환자의 관계 : “나는 네 의원이다.”
하나님은 솜씨 좋은 의원이시다. 그분은 무엇이 가장 좋은지 아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상이한 기질을 관찰하시며 가장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 어떤 기질은 친절한 성향에 속하여 자비에 이끌린다. 어떤 기질은 거세고 억세며 복잡하다. 이런 기질은 하나님은 좀 더 강력하게 다루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똑같이 다루지 않으신다. 강한 자에게는 시련을 주시고 약한 자에게는 강심제를 주신다.
하나님은 신실한 의원이시며, 따라서 모든 것을 가장 좋은 것이 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는 것은 주시지 않더라도 필요한 것은 주실 것이다. 의원은 환자의 취향을 맞추기 위하여 애쓰지 않고 병을 고치려고 애쓴다. 우리는 아주 쓰라린 시험이 닥치는 것을 불평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의원이심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의 기분을 맞추기보다 우리를 치유하려고 애쓰신다. 하나님이 자녀를 가혹하게 다루실지라도 그들은 안전하며 치유를 받는다.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 8:16)
2) “네 하나님”이라는 말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함축한다.
아버지는 자녀를 사랑한다. 그러므로 웃음을 보이거나 매를 때리거나 그것은 자녀의 유익을 위함이다. 나는 네 하나님, 네 아버지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직 네 선을 위하여 행한다.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신 8:5) 하나님의 징계는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개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녀를 해칠 수 없으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유한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3) 아버지가 자녀의 파멸을 추구한다면, 그에게서 나온 자녀가 그의 형상을 담고 있겠는가? 그의 모든 배려와 계획은 자녀를 위한 것이다. 그가 자녀 말고 누구에게 유업을 주겠는가? 하나님은 온유한 마음을 가지신 “자비의 아버지”(고후 1:3) 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자비와 인자를 피조물에게 베푸신다.
하나님은 영원한 아버지이시다 (사 9:6) 그분은 영원부터 우리의 아버지이셨다. 우리가 자녀이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영원까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실 것이다. 아버지는 사는 동안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으면 자녀는 해를 입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어 아버지 역할을 그만두는 일이 없으실 것이다. 당신이 신자라면 결코 죽지 않으시는 아버지가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아버지이시라면, 당신은 결코 파멸될 수 없다. 모든 것이 당신에게 선을 이룬다.
3) “네 하나님”이라는 말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함축한다.
이는 친밀하고 달콤한 관계이다. 남편은 배우자의 선을 추구한다. 남편이 아내를 파멸시키려 드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엡 5:29)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에는 혼인 관계가 있다.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사 54:5) 하나님은 그 백성을 전적으로 사랑하신다. 그분은 손바닥에 그들을 새기신다. (사 49:16) 그분은 마음의 인처럼 그들을 품으신다. (아 8:6) 그분의 그들의 속량물로 나라들을 주실 것이다 (사 43:3)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얼마나 친근한지를 보여 준다. 하나님이 마음으로 사랑으로 가득하신 남편이라면, 배우자의 선을 추구하실 것이다. 그분은 상처를 싸매시든지 아니하면 그것을 최선의 것으로 바꾸실 것이다.
4) “네 하나님”이라는 말은 친구 관계를 함축한다.
“이는 나의 친구이다”(아 5:16)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듯이, 친구는 자신의 절반이다. 그는 친구에게 선을 끼치기를 간절히 바라고 힘쓴다. 그는 친구의 안녕을 자신의 안녕으로 여기고 증진시킨다. 요나단은 친구 다윗을 위하여 감히 왕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삼상 19:4) 하나님은 우리의 친구이시며 따라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이 되게 하실 것이다. 거짓 친구가 있다. 그리스도는 친구에게 배반당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은 최고의 친구이시다.
그분은 신실한 친구이시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신 7:9) 그분은 사랑에 신실하시다. 그분은 품속에 계신 아들을 내어주셨을 때 우리에게 자신의 마음을 주셨다. 여기 비할 데 없는 사랑의 모범이 있었다. 그분은 약속에 신실하시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약속하신 것인데”(딛 1:2) 그분은 약속을 변경하실 수 있지만 그것을 깨뜨리실 수는 없다. 그분은 행하시는 일에서 신실하시다. 그분은 고통을 주실 때 신실하시다.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음 이니 이다.”(시 119:75) 그분은 우리를 은처럼 체질하고 단련하고 계신다.(시 66:10)
하나님은 변할 수 없는 친구이시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 친구는 종종 위기 대 넘어진다. 여자가 꽃을 다루듯이 많은 사람은 친구를 다룬다. 꽃이 신선할 때 여자는 꽃을 품속에 두지만, 시들기 시작하면 내팽개친다. 혹은 여행자가 해시계를 대하는 것과 같다. 만일 해가 해시계에 비치면 여행자는 길에서 나와 시계를 본다. 그러나 해가 비치지 않으면 여행자는 그것을 지나치며 결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이와 같이, 사람이 번영할 때라면, 친구들이 쳐다본다. 그러나 역경의 구름이 끼면 그들은 가까이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친구이시다. 그분은 “내가 과연 너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다윗이 죽음의 그늘에서 걸었지만, 곁에 친구가 계심을 알았다.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시 23:4)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서 결코 자신의 사랑을 거두시지 않으신다. “(그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하나님은 그런 친구이시므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이 되게 하신다. 친구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친구는 없다.
5) “네 하나님”이라는 말은 좀 더 가까운 관계를 함축한다.
즉 머리와 지체의 관계이다.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에는 신비로운 연합이 있다. 그는 “교회의 머리”라 불리신다. (엡 5:23) 머리가 몸의 유익을 구하지 않겠는가? 머리는 몸을 인도하며 몸과 공감하며 영혼의 샘이 되며 몸에 영향을 주고 위로를 공급한다. 머리의 모든 부분은 몸의 유익을 위하여 있다. 눈은 망루처럼 있어서 몸에 다가올 위험을 탐색하고 막기 위하여 보초를 선다. 혀는 맛보는 자이며 웅변가이다. 몸이 작은 우주라면 머리는 이 세계의 태양이다. 이 태양으로부터 이성의 빛이 나온다. 머리는 몸의 유익을 위하여 있다. 그리스도와 성도는 하나의 신비한 몸을 이룬다. 우리의 머리는 하늘에 계시며, 분명 그분은 몸이 상하게 하지 않으시고 몸의 안전을 도모하신다. 그리고 신비한 몸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것이 협력하게 하신다.

2. 모든 것이 성도의 유익을 위하여 협력한다는 명제에 담긴

1) 모든 것이 선을 이룬다면, 거기에 섭리가 있음을 배운다.
사물들은 저절로 선을 위하여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이 선을 이루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사건과 쟁점을 처리하시는 위대한 분이다. 그분은 모든 것을 움직이게 하신다
.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 103:19) 이는 그의 섭리적 왕국을 뜻한다. 세상에 있는 것은 제2원인, 사람들의 계획, 별들과 행성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는다.
섭리에는 세 가지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예지, 하나님의 결정, 모든 것을 그 시대와 사건에 일어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사물이 세상에서 어떤 것을 이루든, 하나님이 사물들을 움직이게 하신다. 우리는 에스겔 1장에서 바퀴에 관하여 읽는다. 바퀴에 눈이 있고 바퀴가 움직인다. 바퀴는 전우주이며, 바퀴의 눈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바퀴의 움직임은 아래 이 땅의 모든 것을 돌아가게 하는 섭리의 손이다. 어떤 사람들이 우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섭리의 결과이다.
2) 하나님의 모든 자녀의 행복한 상황을 주목하라.
가장 좋은 것이든 가장 나쁜 것이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선을 이룬다.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시 112:4) 아무리 깜깜하고 구름 낀 하나님의 섭리라도 정직한 자에게 햇살을 비춘다. 참된 신자는 얼마나 복된 상황에 있는가! 그는 죽을 때 하나님께 간다.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모든 것이 그에게 선을 이룰 것이다. 고통도 그에게 유익이 된다. 불이 황금에게 무슨 해를 끼치는가? 키가 밀에게 무슨 해를 끼치는가? 키는 밀과 가라지를 분리시킬 뿐이다. 거머리가 몸에 무슨 해를 끼치는가? 거머리는 나쁜 피를 빨아먹을 따름이다. 하나님은 쓰레기를 치우기 위하여 막대기를 사용하실 뿐이다.
고통은 여러 번의 말씀으로 하지 못하는 일을 이룬다. 고통은
“귀를 열어 교훈을 한다.”(욥 36:10) 하나님이 괴롭게 하실 때 사람들은 하늘을 우러러 본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치는 것은 음악가가 바이올린을 켜서 아름다운 소리가 나오게 하는 것과 같다. 고통이 성도에게 얼마나 큰 선을 가져다주는가! 성도는 매 맞고 부서질 때 가장 달콤한 향기를 낸다. 고통의 뿌리는 쓰지만 열매는 달콤하다.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11)
고난은 하늘로 가는 대로이다. 고통은 냉혹하고 힘들지만 최고의 길이다. 궁핍은 우리의 죄를 굶겨 죽인다. 질병은 은혜를 더욱 유익하게 만들 것이다.(고후 4:16) 책망은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시기”(벧전 4:14) 때문에 받는다. 죽음은 눈물의 병을 막고 낙원의 문을 열 것이다. 신자의 죽는 날은 영광으로 올라가는 날이다. 그래서 성도는 재산 목록에 고통을 포함시킨다. (히 11:26) 테미스토클레스는 조국에서 추방당한 후 이집트 왕의 호의를 받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추방당하지 않았더라면 멸망했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고통을 받지 않았다면 멸망했을 것이다. 나의 건강과 재산을 잃지 않았다면 나의 영혼을 잃었을 것이다.”
3) 그러므로 여기서 경건한 자가 되는 것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보라.
모든 것이 선을 이룰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신앙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보다 더 우리를 선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신앙은 모든 것을 황금으로 만드는 진짜 현자의 돌이다. 신앙의 가장 시큼한 부분, 즉 고통스러운 부분을 택하라. 거기에 위로가 있다. 하나님은 기쁨으로 고난을 누그러뜨리신다. 그분은 설탕으로 쓴 쑥을 감미롭게 하신다. 이것은 우리를 얼마나 경건하게 하는가!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 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실패자가 된 사람은 없다. 이로써 당신에게 유익이 찾아올 것이다. 풍부한 선, 은혜의 달콤한 증류수, 숨겨둔 만나, 모든 것이 선을 이룬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목 하라. 그분의 이익을 도모하라.
4) 불의한 자의 비참한 처지를 주목하라.
경건한 자에게는 악한 것이 선을 이룬다. 악한 자에게는 선한 것이 해를 끼친다.
(1) 현세의 좋은 것이 불의한 자에게 해를 끼친다.
세네카가 말하듯이, 부와 번영이 유익이 되지 아니하고 올무가 된다. 미갈을 올무로 다윗에게 주었듯이 세상의 것들은 불의한 자에게 올무로 주어졌다. (삼상 18:21) 독수리는 향수 냄새를 맡으면 병이 난다고 한다. 그처럼 불의한 자는 번영의 달콤한 향수 냄새를 맡고 병을 얻는다. 그들의 자비는 개에게 던진 독이 든 떡과 같다. 그들의 상은 사치스러운 식사가 차려져 있으나, 미끼에는 낚시 바늘이 있는 법이다.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시 69:22) 그들의 모든 즐거움은 하나님의 진노의 소스가 뿌려진 이스라엘의 메추라기와 같다. (민 11:33) 교만과 허영은 번영의 쌍둥이 형제이다. “네가 살찌고”(신 32:15) 그런 다음 그는 하나님을 버렸다. 부는 거미줄과 같아 유익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독사의 알처럼 해롭다.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되도록 지키는 것이라.”(전 5:13)
불의한 자들이 당하는 일반적인 비참함은 그들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끄는 자석이 아니라 그들을 지옥 깊이 빠뜨리는 바위이다. (딤전 6:9) 그들의 맛있는 음식은 하만의 잔치와 같다. 그들의 거창한 잔치가 다 끝나면 청구서에는 죽음이 적힌다. 그리고 그들은 지옥에서 그 값을 치러야 한다.
(2) 영적으로 선한 일이 불의한 자에게 해를 끼친다. 그들은 천상의 복이라는 꽃에서 독을 빤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그들에게 해를 끼친다. 바람이 불어도 어떤 배는 그 바람에 밀려 포구에 이르고 다른 배는 바위에 부딪힌다. 사역의 숨결은 선한 자를 하늘에 이르게 하지만 속된 죄인은 지옥에 이르게 한다. 그 입에 생명의 말씀이 있는 자들이 많은 사람에게 죽음의 향기가 된다.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사 6:10). 선지자는 슬픈 메시지를 받아 장례식 설교를 전했다. 불의한 자는 설교를 듣고 더욱 나쁘게 된다.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암 5:10). 죄인은 죄를 지으면서 더욱 결연한 태도를 취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더라도 그들은 자신이 계획한 바를 행하려 한다.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렘 44:16). 전한 말씀은 치유하지 아니하고 마음을 강퍅하게 한다. 사람이 설교를 듣고 지옥에 떨어진다면 그 얼마나 두려운가!
기도가 그들에게 해를 끼친다.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잠 15:8). 불의한 자는 매우 완고하다. 그는 기도를 아니 해도 범죄하고 기도를 해도 범죄 한다. “그 기도가 죄로 변케 하시며”(시 109:7). 사람이 먹는 모든 것이 나쁜 체액이 되고 몸에 병을 일으킨다고 하면, 서글픈 심판이다. 불의한 자도 마찬가지이다. 그에게 유익을 끼쳐야 하는 기도인데도 오히려 그에게 해를 끼친다. 그는 죄를 대적하여 기도하고 기도를 대적하여 죄를 짓는다. 그의 활동은 무신론으로 오염되고 위선으로 더럽혀진다. 하나님은 그 활동을 싫어하신다.
성찬이 그들에게 해를 끼친다.
“너희가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게 참예치 못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고전 10:21,22). 어떤 신앙 고백자는 우상 잔치에 계속 참여하면서도 주의 상에 오곤 했다. 사도는 말한다.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세속적인 사람들은 죄로 잔치를 벌인다. 하지만 그들은 주의 상에 참여하러 나올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노여워하시게 하는 것이다. 죄인에게는 그 잔에 죽음이 있어서, 그가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신다. (고전 11:29) 그래서 성찬은 참회하지 않는 죄인에게는 해를 끼친다. 빵조각을 먹은 후, 마귀가 들어온다.
그리스도께서 절망적인 죄인에게 해를 끼치신다. 그분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벧전 2:8)이시다. 그분은 인간 마음의 부패함을 통하여 그리되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분을 믿기보다 그분께 죄를 짓기 때문이다. 태양은 순수하고 유쾌한 본성을 갖고 있지만 아픈 눈에는 해롭다.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의 흥함뿐만 아니라 패함을 위하여 세움을 입으셨다. (눅 2:34) 죄인은 구세주에게 걸려 넘어지며 생명나무에서 사망을 딴다. 화학 기름이 어떤 환자는 회복시키지만 어떤 환자는 파멸사키는 것같이, 그리스도의 피도 어떤 이에게는 약이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정죄가 된다. 여기 죄 가운데서 살다가 죽는 자의 비할 데 없는 비참함이 있다. 가장 좋은 것이 그들에게 해를 끼치며, 심지어 강심제를 먹고도 그들은 죽는다.
5) 여기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을 돌이켜 성도의 유익이 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보라.
하나님은 그분의 화학품을 써서 불순물 찌꺼기에서 황금을 추출하실 수 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롬 11:33). 이는 그 지혜의 놀라움을 드러내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다. 주님은 요셉의 감옥을 승지의 한 계단으로 만드셨다. 요나가 구원받을 길이 없었지만, 물고기에게 삼키워서 구원받았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미워하게 하셨고(시 106:41) 이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수단이었다. 사도 바울은 쇠사슬에 매였지만, 그를 맨 쇠사슬은 복음을 전파하는 수단이었다. (빌 1:12) 하나님은 궁핍을 통하여 부요케 하신다. 그분은 재산이 달아나게 하여 은혜가 늘어나게 하신다. 피조물이 우리로부터 멀어질 때 그리스도는 우리 가까이 다가오실 것이다.
하나님은 묘하게 일하신다. 그분은 혼란 가운데서 질서를, 부조화 가운데서 조화를 이끌어 내신다. 그분은 자주 부정한 자를 쓰셔서 의로운 일을 행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욥 9:4). 그분은 사람의 분노에서 자신의 영광을 거두실 수 있다. (시 76:10) 불의한 자가 자신이 의도한 해를 끼치지 못하게 되거나 자신의 의도하지 않은 선을 행하게 된다.
종종 하나님은 희망이 거의 없을 때 도움을 주시며, 자기 백성의 생각에는 망하는 방식으로 오히려 그 백성을 구원하신다. 그분은 대제사장의 악의와 유다의 배반을 사용하여 세상을 구속하신다. 경솔한 열정 때문에 우리는 일어나는 일을 탓하기 쉽다. 마치 글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철학을 비난하거나 눈먼 사람이 풍경을 탓하는 것처럼 말이다
.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욥 11:12) 지각없는 동물은 섭리를 비방할 것이며 하나님의 지혜를 이성을 가로막는 장벽이라고 부를 것이다.
하나님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그 길은 헤아리기보다 감탄해야 하는 것이다. 긍휼과 놀라움이 없는 하나님의 섭리는 없다. 가장 역행하는 시절이 그 백성에게 유익되게 하는 그 지혜는 얼마나 엄청나고 무한한가!
6)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외적인 시련과 당장 닥친 일에 실망할 이유가 지극히 적음을 배우라.
우리에게 선을 끼치는 것에 실망하다니 말이 되는가!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불신이나 초조함이라는 죄에 가장 잘 빠진다. 그들은 불신 가운데 비틀거리거나 초조 가운데 안달하기 쉽다. 사람들이 불만과 초조로 하나님을 거슬러 달아날 때, 이는 그들이 이 본문(롬 8:28) 을 믿지 않는 표시이다. 불만은 감사치 않는 죄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난보다 긍휼을 더 많이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만은 불합리한 죄이다. 왜냐하면 고난이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불만은 우리를 범죄케 하는 죄이다.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시 37:8). 안달하는 자는 악을 행하기 쉬울 것이다. 안달하는 요나는 범죄 하는 요나였다. (욘 4:9)
마귀는 열정과 불만의 숯에 바람을 보내며, 그 불로 몸을 데운다. 이 화난 독사를 우리 품에서 키우지 말자. 이 본문을 듣고 인내를 키우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에게 선을 이루는 것을 불평해야 되겠는가? 한 사람이 친구에게 돈주머니를 던졌는데 돈주머니가 그의 머리를 스쳤다고 해도, 친구는 그렇게 해서 돈주머니를 받았기 때문에 그다지 기분 나빠하지 않을 것이다. 그처럼 주님은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지만, 이는 우리를 부요케 한다. 이 고난은 우리에게 큰 영광을 이루는데 우리가 불평해야 하겠는가?
7) 여기서 성취된 성경 말씀을 보라.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선을 행하시나”(시 73:1).
우리는 견디기 힘든 섭리를 보고, 주님이 그 백성에게 재를 뒤집어씌우시는 것을 보고, “(그들을) 쑥으로 취하게 하시는”(애 3:15)것을 볼 때, 하나님의 사랑에 의심이 들어 하나님이 그 백성을 호되게 하신다고 말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선을 행하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돌이켜 선이 되게 하는 그분은 선한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분은 죄를 없이하고 은혜를 일으키시니 선한 분이 아닌가? “우리가……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고난의 깊은 것은 우리를 정죄의 깊음에서 건지기 위함이다. 언제나 하나님을 옳으시다 하자. 우리의 외적인 형편이 점점 나빠질 때 “하지만 하나님은 선하시도다”하고 말하자.
8) 성도가 어떤 이유로 감사의 활동에 자주 참여해야 하는지 살펴보라.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불완전하다. 그들은 간구는 많이 하지만 감사는 별로 하지 않는다. 사도는 말한다.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 5:18). 왜 그래야 하는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이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의원이 쓴 약을 주어 괴롭게 할지라도 우리가 그에게 감사하는 것은, 우리를 낫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선을 베푸는 자라면 누구에게든 감사한다. 그러니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에게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을 사랑하신다.
욥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가져가셨을 때 감사했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 1:21) 많은 사람은 하나님이 주실 때 감사할 것이다. 욥은 하나님이 가져가실 때 감사한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 거기서 선을 이루실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찬양의 상질물인 수금을 손에 들고 있는 성도에 관하여 읽는다. (계 14:2) 우리는 눈물이 가득하고 입에 불평이 있는 그리스도인을 많이 만난다. 그러나 손에 수금을 들고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다. 고난 가운데 감사하는 것은 성도에게만 있는 일이다. 모든 새가 봄에 노래할 수 있지만, 지독히 추운 겨울에 노래하는 새도 더러 있을 것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잘살 때에는 감사할 수 있지만, 참된 성도는 역경에도 감사할 수 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해가 뜰 때뿐만 아니라 해가 질 때도 하나님을 찬양한다. 우리는 지독히 어려운 일에 떨어질 때도 감사의 찬양을 드릴 수 있으니,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자. 우리를 친구로 삼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자.
9) 가장 나쁜 일이 신자에게 선을 이룬다면 가장 좋은 것, 즉 그리스도와 천국은 어떠하겠는지 생각하라.
이런 것들은 얼마나 많이 선을 이루겠는가! 만일 십자가에 그토록 많은 유익이 있다면 면류관은 어떠하겠는가! 만일 골고다에서 그렇게 귀한 포도송이가 자란다면, 가나안에서는 그 열매가 얼마나 달콤하겠는가! 마라의 물에 단 것이 있다면, 낙원의 포도주는 어떠하겠는가! 하나님의 막대기 끝에 꿀이 있다면, 그 황금 홀 끝에는 어떠하겠는가! 고난의 떡이 그토록 맛있다면 만나는 어떠하겠는가! 천상의 음식은 어떠하겠는가! 하나님의 치고 때리심이 선을 이룬다면, 그 얼굴의 웃음은 어떠하겠는가! 시험과 고난이 즐거움을 갖고 있다면 영광은 어떠하겠는가! 악에서 그렇게 많은 선이 나온다면, 악이 없는 선은 어떠하겠는가! 만일 하나님의 징계의 긍휼이 그렇게 위대하면 그분의 상급의 긍휼은 어떠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말로 서로 위로하라.
10)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이 되게 하신다면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는 것은 얼마나 정당한 일인지 생각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천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찬가를 부른다. 그러면 천사보다 더 많은 것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지극히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본성을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셔서 우리를 천사보다 존귀케 하셨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지 천사를 위하여 죽지 않으셨다. 주님은 그 복의 창고에서 우리에게 주셨을 뿐만 아니라 언약의 복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신을 주셨다. 그분은 우리의 안녕을 이루려고 애쓰시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에게 선을 이루게 하신다. 우리의 구원을 위한 계획은 거저 주시는 은혜로 세워졌다. 하나님이 우리의 유익을 구하신다면,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질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그분은 그 완전에서 무한하시므로 우리에게 받아 그 완전을 늘리실 수 없다.

대답. 참으로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지만, 복음주의적 의미에서는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것으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높이고 경외하는 생각을 품게 할 때, 하나님은 이를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보신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욕하게 만들 때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우리는 세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진척시킬 수 있겠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삼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최종의 목적으로 삼을 때이다. 모든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고 모든 지류가 중심부에서 만나듯이, 우리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그 안에서 끝난다.
둘째, 우리는 은혜 가운데 열매를 맺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진척시킨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요 15:8). 열매 없음은 하나님께 불명예를 끼치는 것이다. 우리는 백합처럼 아름답게 자라고 백향목처럼 크게 자라고 포도나무처럼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셋째, 우리는 행하는 모든 것의 칭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스웨덴 왕의 탁월하고 겸손한 연설이 그러했다. 그는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자신에게 돌려 일을 행하기도 전에 물러나지 않을까 두렵다는 말을 했다. 누에가 공들여 작품을 만들 때 자신은 명주실 아래 숨어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을 때 자신은 생각하지 않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사도 바울은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 하였으나”(고전 15:10)하고 말했다. 이 연설이 교만으로 가득 찬 것처럼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자신의 머리에서 면류관을 벗어 은혜를 거저 주시는 분의 머리에 두었다.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콘스탄티누스는 문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써 두곤 했다. 그처럼 우리는 우리가 한 일 위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써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고 유명하게 만들기 위하여 힘쓰자. 하나님이 우리의 선을 추구하신다면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추구하자. 하나님이 모든 것으로 우리의 덕을 이루게 하신다면 우리는 모든 것에 그분을 높이자. 본문에 언급된 특권을 생각하며 더욱 그리하자.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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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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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속보★ 신종사기알려드립니다.

오늘 일본정부가 국민들을 상대로 독도여론조사를 하였는데
61%가 독도는 일본땅이라고 하였다네요.
이 기회를 빌미삼아 전화가 걸려와 여론조사를 한다며

["독도는 누가 뭐래도 한국땅"] "맞으면 1번 버튼을
틀리면 2번 버튼을 눌러주세요!"라는 멘트가 나오면
누구든지 무심코 1번 버튼을 누르게 됩니다.

그런데 1번 버튼을 누르는 순간 250.000원의 통화료가 바로 결제되어 버린답니다.
아주기막힌신종사기랍니다.
국민의 애국심을 이용한 못된 사기이니 꼭 조심하십시오
★복사해서 주위분들께 속히 전달해 주세요. KBS ★

★긴급속보2★

6시38분 북한폭탄발사 시민62명 사망 영상보기 클릭하지 마세요 신종 사기전화입니다
절대로 보지 마세요
복사해서 지인들에게 알려주세요
경찰에서 사기스미싱입니다. 소액결제 250,000원주의 요망

1970년대, 천문학자들은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사이에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이 비스듬한 일직선상에 놓인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러한 외행성의 배열은 175년에나 한 번 생기는 드문 현상인데 이 절호의 기회에 외행성들을 한꺼번에 탐사할 수 있도록 하자 하여 계획된 것이 보이저(Voyager) 1호와 2호 탐사선이다.

1977년, 보이저 2호가 약간 먼저 8월 22일에, 보이저 1호가 9월 5일에 발사되었다. 발사는 약간 늦었지만 목성에 도달한 시기는 직항로를 택한 보이저 1호가 79년 3월 5일, 보이저 2호는 79년 7월 9일이었다. 다시 토성에는 보이저 1호가 80년 11월 12일, 보이저 2호는 훨씬 늦은 81년 8월 25일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보이저 1호는 계속하여 빠른 속도로 태양계 바깥을 향하여 항진하였고, 보다 속도를 늦춘 보이저 2호는 토성을 거친 다음 86년 1월 24일에는 천왕성, 89년 8월 25일에는 해왕성까지 답사하게 된다.

보이저 탐사선들이 지구를 떠난 지 13년째 된 1990년 2월초, 보이저 1호는 시속 약 18km의 속도로 지구로부터 64억 km 떨어진 명왕성 궤도를 지나게 된다. 이제 배터리도 거의 다 닳은 보이저 1호에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 박사는 동료과학자들의 회의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전파신호를 보내 카메라를 지구 쪽으로 돌려 사진을 찍어 전송하라고 지시한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으나 몇 달 후 기적 같은 일이 발생한다. 실현가능성이 없을 것 같은 이 명령에 따라 보이저 1호가 카메라를 지구 쪽으로 돌려, 1990년 3월부터 5월까지, 태양계의 가족들, 아득히 먼 곳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금성과 지구, 목성과 토성, 그리고 천왕성과 해왕성 등 수십 장의 사진을 찍어 전송해 온 것이다.

보이저 1호가 전송해온 사진들 속에 지구는 우주공간 광선의 줄 속에 조그만 점으로 외롭게 빛나고 있었고, 칼 세이건 박사는 이를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고 말했다. 태양계 탐사임무를 마치고 태양계를 벗어나 광대무변한 우주공간을 달리는 보이저 1호의 충실한 명령수행은 많은 과학자들의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칼 세이건 박사는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에서 이렇게 적었다.
“우주공간에 외로이 떠있는 한 점을 보라. 우리는 여기 있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사랑하는 남녀, 어머니와 아버지, 성자와 죄인 등 모든 인류가 여기에, 이 햇빛 속에 떠도는 티끌과 같은 작은 천체에 살았던 것이다. 바로 이 한 점, 지구 위에 아름다운 시와 음악과 사랑이 있는가 하면 전쟁과 기근, 증오와 잔인한 행위가 그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 속에 환경을 파괴하고 하늘을 찌를 듯 한 콘크리트 건물로 아성을 쌓고 우중충한 시멘트벽에 갇혀 불안한 삶을 살아간다.”

보이저 1호가 보내온 지구의 사진 ‘창백한 푸른 점’....... 우주의 티끌 같은 그 지구 위의 인간의 존재가 무엇이란 말인가? 수 천 년 인류역사, 지구 위에 그 조그만 인간들이 쌓아올린 문명과 예술, 인간들이 울고 웃고 싸우는 욕망과 확신과 다툼, 애증 따위가 다 무엇이란 말인가?
.
보이저 우주선들이 발사된 지 36년이 지난 2013년 9월, 미국항공우주국은 보이저 1호가 지구로부터 약 188억 km 떨어진 태양계와 외부 우주의 경계 '헬리오포즈(heliopause)'에 진입했다고 발표했다. 188억 km는 지구-태양 거리의 약 125배 거리이며 명왕성까지 거리의 3배가 넘는 거리이다. 이 헬리오즈 구역은 태양으로부터 불어나간 태양풍이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 하고 멈추는 곳으로, 따라서 플라즈마 입자들이 거대한 거품이나 풍선처럼 태양계를 둘러싼 모양이 된다고 여겨진다.

그간 과학자들은 이곳만 지나면 곧장 외부 우주, 성간공간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예측했으나 보이저 1호에 의하면 태양의 자기장이 외부 우주의 자기장과 연결되면서 태양계의 입자들이 바깥으로 나가고 성간우주의 입자들이 안으로 들어오는 현상이 관측됐다. 아무튼 이제 보이저 1호 우주선은 앞으로 수개월 내지 1, 2년 내에 헬리오즈 공간을 지나 성간우주 공간으로 나갈 것으로 보인다.

보이저 1호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지금 188억 km 떨어진 보이저 1호의 무선신호가 지구에 닿는 데는 17시간이 걸린다. 보이저 1호가 탑재한 70년대 컴퓨터의 용량은 오늘날 표준 스마트폰의 27만분의 1수준에 불과하다. 보이저호의 동력은 플루토늄 핵연료에 의존하는데 2020년쯤에는 바닥날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는 희미한 무선신호마저 끊어지고 보이저 1호는 망망한 우주공간을 시속 6만 km 속도(초속 16.7 km, 음속의 50 배, 총알속도의 약 20 배)로 무작정 날아갈 것이다.

보이저 1호와 2호는 우리말을 포함하여 세계 55개 언어의 인사말, 지구의 위치를 보여주는 그림, 지구의 소리를 담은 지름 30cm의 황금 레코드를 싣고 날아가고 있다. 혹 있을지 모를 외계 생명체, 외계 문명을 향한 메시지인 셈이다.

보이저 1호가 언제 다른 별에 도착하게 될까? 음속의 50배, 총알속도 20배의 엄청난 속도에도 불구하고 보이저 1호가 188억 km를 날아가는데 36년이 걸렸다. 1년에 5억 2222만 km를 날아간 셈이다.
1광년의 거리는 9조 4600억 km이다. 보이저 1호가 1광년을 날아가려면 1만 8천 115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된다.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항성인 켄타우루스자리의 프록시마별까지는 4.3 광년거리이니 약 7만 8천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된다.
그러나 보이저 우주선들이 프록시마별 방향으로 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른 별을 만날 때까지는 아마도 수십만 년을 아무것도 없는 우주공간을 날아가게 될 것이다.

보이저 1호, 보이저 2호가 수십만 년, 수백만 년을 날아서 어디엔가 닿는다면 그 별은 어디일까? 수백만 년을 달려 수십 광년을 날아갔어도 거기는 지름 십만 광년의 거대한 은하계 수천억 개의 별 가운데서 가장 가까운 이웃 별 중의 하나일 것이고, 은하계 한 귀퉁이를 벗어나지 못 하였을 것이다. 은하계는 지름이 10만 광년에 달하므로 만일 보이저 1호의 속도로 은하계를 횡단하려면 18억 년이 걸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보이저 1호나 보이저 2호는 누군가가 붙잡아서 안전하게 착륙시키지 않는 이상 제 힘으로는 착륙할 수가 없다. 그리고 관성으로 날아가는 보이저 1호가 마치 안개처럼, 구름처럼 빼곡한 은하수의 별들을 요리조리 피하여 날아갈 수도 없다. 그러므로 보이저 1호 우주선은 언젠가 어느 별에 닿게 될 것이고 보이저 1호 우주선이 어느 별에 도달한다는 것은 그 별에 충돌하여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뜻이 된다. 지구의 인사말이 담긴 녹음테이프와 그림과 레코드를 싣고 수십만 년, 수백만 년, 혹은 수천만 년, 수억 년을 달려갔는데도 맞아주는 이 없이 이름 없는 어느 별에 유성처럼 떨어져 처참하게 박살나야 하는 것이 보이저 우주선들의 슬픈 운명이다. 그게 언제일는지도 알 수 없다.

보이저 1호가 18억 년을 달려야 횡단할 수 있는 은하계와 같은 성운들이 1,000억 개나 된단다, 저 끝없이 아득한 우주공간에는.
그리고 우리는 100년도 못 살고 지구를 떠날 것이다, 보이저 1호 보다 더 빨리.
아직 보이저 1호가 태양계 언저리도 못 벗어나고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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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유명한 말을 남긴 사람은 칼 하인리히 마르크스(1818~1883)다. 그는 지배 계급이 종교를 '아편'처럼 이용하여 피지배 계급이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여 이용하려고 꾸며낸 것으로 종교가 단지 정신적인 욕구 해소의 역할만을 할 뿐이라는 의미에서 종교를 아편에 비유했던 것이다.
 
과연 그의 말대로 종교는 아편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다 허황되다 할 수 있는 것이, 그들은 인간이 신을 만들어서 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에서 제외된다. 무엇 때문인가? 엄밀히 따져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을 섬기는 산 생명의 길이며, 인간이 신(神)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神)이 인간을 찾아오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해가 잘 안 되는가?

어쨋거나, 마르크스의 말을 그대로 신앙하여 자신의 정치 세계를 쌓아올렸던 ‘레닌’과 그를 추종하던 공산 세력은 철저하게 망했다. 그가 숭상하던 공산 세계의 체계는 인간의 영혼 속에서 신을 죽인 대신, 인간의 두뇌를 로봇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시켜버렸다는 것을 공산 세계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 러시아인들은 조금씩 배워나가고 있다. 나는, 뒤늦게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국민의 분노가 하늘 찌르는 듯, 레닌 동상을 향해 침을 뱉고 돌을 던지고 끝내는 무너트리며 울부짖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고 그들이 레닌을 두 번 죽이는 그 처절한 역사의 현장에서 직접 목격한 산 증인이다. 인간의 영혼 속에서 하나님을 말살시켜버리자는 사상은 이렇듯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의 사상을 모든 사람의 머리에서 온전히 사라지게 하지 못하는 것은 칼 마르크스의 사상 체계는 그만큼 깊고 매력적인 사상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들은 '칼 마르크스'를 철저한 무신론자 정도로 치부하지만 실상 그는 무신론자라기보다는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로 볼 수 있다. 엄밀히 따지면 그를 ‘휴머니즘적 유물론’을 탄생시킨 교주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고 그의 사상은 설득력 또한 강렬하기에 어쩌면 세상 종말까지 사람들, 소위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사고를 뒤흔들어놓을 수도 있는 ‘악마적 사고의 씨앗’이라고 보는 것이다.(이것은 단지 필자의 견해로서 객관성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 반대자님들은 너무 열받지 마시길...^^) 

이런 시점에 아멘넷의 오랜 독자이며 합리주의를 지향한다는 한 분의 입에서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망발(지송~^^)이 나왔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그분의 말을 누구 하나 반박하는 사람이 없더란 것이다. 아니 오히려 모두 재미있다는 듯, 희희낙락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거의 기절할 뻔하였다.

하나님의 아들딸이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고 자타가 인정하는 우리가 어떻게 하다가 이토록 변질하기까지 되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야 많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신앙생활을 한다고는 하지만 개인의 삶이나 정신세계, 영혼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다음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의 방종과 부도덕한 삶, 종교 사기꾼들의 가짜 성령행전을 바라보게 된 영혼들이 그들에게서 입은 상처가 너무도 깊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제대로 된 이유를 꼽자면, 그것은 자신의 나태함(안일함)이 산출해낸 부산물일 뿐이다. 이런 변절자들의 일이 처처에 일어나는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이미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세적 예언이 성취되고 있는 것이며, 이런 것들이 모두 말세적 한 징조임을 성경이 말씀해주고 경계를 높여주고 있건만, "딱딱하다, 고리타분하다." 등등...이유를 대면서 성경은 읽어보려고조차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란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성경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통독하여 읽어본 사람이라면 사실 이런 일은 전혀 놀랄 일만도 아니란 것이다. 말세에는 저 배도하는 자가 반드시 일어나야 하고 그런 자들이 횡행하는 속에서 성도는 참된 믿음을 지켜야만 그 믿음이 진주처럼 빛나는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가짜들은 이미 예정된 길을 걷고 있을 뿐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수많은 책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성경인가? 우리 함께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1)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지금까지 쓰여진 책 중 가장 놀라운 책이라고 한결 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사실, 성경이 놀라운 것은 나라와 직업이 다른 40 여명이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의 3개 언어로 1, 500년이라는 긴 기간에 걸쳐 쓰여졌다. 다양성 속에서 그 위대한 주제와 중심 인물이 한결 같이 예수 그리스도란 점이 일치된다는 점이 놀랍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신 구약 66권 속에서 하고자 하는 그 정의, 그 뜻이 한 치도 어그러짐 없이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는 점, 일관성, 연속성, 그리고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은 인간 이성의 한계로서는 도저히 꾸며댈 수가 없는 경이로움이 숨쉬는 책이 성경이다.

그 이유가 바로, 성경의 저자는 여느 인간이 아닌 하나님 자신이라고 천명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 16)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성령)께서 이것들을 모으셨다고 하는 것이다.

“성경은 오직 성령의 감동 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니라.” (벧후 1: 21) 이 말씀이 그러하지 않다고 비방하는 사람은 많으나 그것을 증명하고 입증해 낸 사람은 지금껏 아무도 없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고로,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 그 자신이심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2) 성경의 주제는 무엇인가?

무슨 책이든지 그 책에는 흐름의 주제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초등학생이 읽는 어린이 동화책 한 권 속에서, 이솝 이야기 속에서도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흐름의 주제가 분명히 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그 주제가 없을 수 있겠는가? 그 주제가 선명히 들어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성경의 핵심, 곧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 5: 39)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의 흐름은 예수 그리스도, 삼위일체 하나님 되심을 증거하는 책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성경에서 삼위일체란 말이 없다라고 주장하고 목사님들이(모국어 번역문으로 된 성경만을 읽을 때) 그렇게 믿고 또 그렇게 가르친다. 그러하기에 이런 목사님들의 말을 인용하여 이단들, 반기련 소속 첩자들이 성도들을 미혹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삼위일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변적 교리가 아니다.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모든 형태의 이단은 삼위일체에 대한 공격인 것이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의 본질,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자기 계시, 성령 안에서의 그 근거와 원리를 가질 때에야 주장될 수 있는 것들이다" 여기서 바빙크는 본체론적 삼위일체를 말한다. 이것은 중요하다. 모든 비기독교적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체로서 우주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모든 이단들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시 공간적 실존을 전체로서 우주의 다른 측면으로 도입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여기에 고대의 이단과 현대의 이단의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본체론적 삼위일체(the ontological Trinity), 즉 피조된 우주와의 관계를 떠나서 그 자체 안에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the Trinity as it exists in itself)가 그 스스로 온전하며, 그 안에 단일성과 복수성의 동등한 궁극성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삼위일체의 이 높고 고귀한 교리에 이르게 된 것은 오래고도 힘든 노정을 통해서였다.

삼위일체 교리사의 첫 시기, A.D. 1-325은 역사의 그리스도가 신성의 제2위이심을 밝히려는 노력의 시기였다고 특징지울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경배하였을 때, 그들은 다신론자들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지주의자들의 로고스와 동일시하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 일종의 중간적 존재로 여기려고 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영원과 시간의 통일성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희랍 사상은 하나님을 말없는 심연으로, 이 세상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것으로 여기어 그렇게 말했고, 로고스에 대해서는 우주 안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말하였었다. 자연스럽게 이런 형태의 사변은 하나님이 자충족적 존재되심에 반하는 것이었다.”- 코넬리우스 반틸의 [개혁주의 신학 서론] 중에서

3) 마지막으로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 무엇인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드렸고, 성경의 핵심, 곧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드렸다. 이제는 성경을 기록한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시고 성령님께서 그 책을 모아다가 우리(인간)손에 들려주신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은 삶의 잣대로, 생활규범으로 말들을 하지만, 축약하면 “인간 구원”이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또 무엇인가? 구원론을 잠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구원((救援)의 뜻: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구원’은 각각 ‘예수-아’와 ‘소-테-리아’인데, 보편적으로는 임박한 악과 위험으로부터 구출해 낸다는 뜻이다. 신약에서는 그 의미를 좁혀 ‘죄로 말미암아 오는 형벌과 죄의 권세와 죄 된 생활에서 구해 내는 것을 가리키며 그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구원, ‘소테리아’는 신약성경에만 약 150회 정도 나온다. (막3:4, 행27:20참조)

2. ‘쏘테리아’의 원형 동사는 영원한 의미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과 육체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질병을 고치는, 다시 말해 구원이란: 영과 육이 질병과 진노로부터 동시에 구원을 받는 것을 의미함 (롬5:9절 참조).

3. 마지막으로 ‘소테리아’는 종말적인 점인데 그 완전한 성취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재림하실 때 비로소 실현을 보게 될 것이다 (롬13:11,고전5:5, 히9:28절 등, 참조).

기본 구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절 말씀), (요 5:24, 요1서5:12, 요3:36, 요10:28-29 절을 읽고 참조)
**믿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은 = 영원히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기본 구원론이며, 한번 구원, 영원 구원의 법칙이 성립 된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자가 죄를 지으면 구원을 잃게 되는가? 아니면 죄와는 상관없이 영원 구원인가? 하는 것이 주요 쟁점으로 남게 된다. 여기에 대한 답변을 하기 전, 우리는 먼저 그가 진실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인가? 거듭나지 못한 사람, 교회의 마당만 밟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부터 연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성도)가 교회의 어떤 직위나 직분에 상관없이 반드시 거듭난 성도가 되어야만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 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친히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기에 성도라면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중생: (重生, born again) 중생이란 ‘파링게네시아’인데 그 뜻은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거듭난 성도가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여러 가지 욕심과 미혹에 이끌려 (이때도 반드시 고의성이 없고, 실수라야만 하며 짐짓 죄나 고의적인 죄는 거듭난 성도의 할 일이 아니다.)죄를 지을 수도 있다. 그것은 이미 목욕한 사람이 발을 씻는 것,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기도를 올리고 그 죄에서 돌이켜 다시는 그런 범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는다.(요13:6-9절 참조 )

결론적으로,
“종교는 민중의 아편”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종교 그 자체만으로는 인간에게 구원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과 내가 잠시 살펴본 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기에 생명을 살리는 책이다. 생명과 아편은 동일시 될 수도 없고 동일시 되어서도 안된다. 인간이 살아나갈 수 있는 생명의 양식은 오직 성경 말씀 한 권만이 유일무이한 책이다 ㅁ

우리가 주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면, 신학 책을 읽는데 할애하는 시간에 비례해서 성경을 읽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도록 해야 하고, 인터넷상에 떠도는 많은 설교자의 설교를 청취하는데 보내는 시간보다 성경을 읽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성경을 읽어야 하는 것은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에게 필수다. 자기 자신이 직접 하루에 한 장이라도 성경을 읽어야 산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영혼의 금서(金書)인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내 마음속에 담아야 한다. 말세에 성도가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은 오직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성경을 많이 읽고 그 말씀이 내 속에서 살아 역사 하는 사람만이 마지막 때는 살아남을 수가 있을 것이다!! 성경은 우리를 흔들리지 않게 늘 중심을 잡아 주고, 마지막 환난 날, 그리고 극심한 일상 속의 환난 속에서도 그 말씀이 나를 지켜주신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계 3: 10-11)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 14-17)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브리서 4장12절 말씀)

USA 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즐거운 추석이네요


사랑하는 목양연가 식구님들

오늘은 한가위 
우리 고유의 명절 추석이네요.
드높은 가을 하늘의 청량함처럼 여러분 가정과 하시는 사업, 개인에게 보름달처럼 둥그런 주님의 은총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 모두를 사랑하며,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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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 / 안토니 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발췌(155~185p, 기독교문서선교회, 류호준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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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름 주: 아래 '하나로'님의 글은 안토니 후크마(저자)가 설명하고자 하는 본 뜻을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로님은 중생의 7가지 소제목 중에 7번을 이 글의 결론인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그런가요? 저자가 넓은 의미의 중생을 지지한 것도 아니고 그쪽을 포커스한 것도 아닙니다. 저자는 최근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좁은 의미의 중생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단지 초기 개혁신학의 신학자들이(칼빈을 비롯) 중생을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의미보다 훨씬 넓은 의미로 사용하였던 것처럼 7번 소제목을 통해 넓은 의미의 중생을 설명한 것입니다. 저자는 이미 중생에 대한 의미를 1~5번을 통해 자세히 설명하였고 6번을 통해 중생과 다른 교리와의 관계를 설명한 것이고 7번에서 중생과 말씀과의 관계, 설교자의 할 일, 즉 중생과 연관해서 신자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할 지를 설명한 것입니다. 저자가 넓은 의미의 중생을 지지한다면 하나로님 같으면 중생의 본질 등.. 이렇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연중론을 의식해서 그런지 하나로님은 잘못 독해를 하고 계십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다시한번 읽어보세요. 연중론에서 주장하는 것이 안토니 후크마가 이야기하는 넓은 의미의 중생과 같은 해석이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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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7장  중생

 

1. 세 가지 의미에서의 중생

2. 인간 부패성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3. 중생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4. 중생의 본질

5. "저항할 수 없는 은혜"

6. 중생과 다른 교리와의 관계

7. 중생과 설교자

  

제8장  돌이킴

제9장  회개

제10장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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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중생

 

1. 세 가지 의미에서의 중생

  

성경은 세가지 서로 다른 의미에서 중생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 연관을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1) 중생이란 새로운 영적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심기워지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의미에서의 중생이다.(요3:3, 5)

 

(2) 심겨진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낼 때를 가리켜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약1:18; 벧전1:23)

 

(3)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최종적인 완성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마19:28)

................... 

본장에서 나는 위에서  언급된 의미들 중 첫 두가지의 의미들만을 다룰 것이다. 초기 개혁신학에 있어서는 중생이란 단어가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의미보다 휠씬 넓은 의미로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예를들어 칼빈은 중생을 우리가 전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돌이킴과 성화를 포함하여-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1561년 벨직고백서도 중생을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대부분의 17세기 신학자들 역시 중생을 돌이킴(conversion: 회심, 개종으로 구체적으로 번역함: 제8장 참조)과 동일시 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좁은 의미의 중생(위의 (1)의 의미)과 넓은 의미의 중생(위의 (2)에 해당)을 구별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다시말해서 성령에 의해 새로운 생명이 심기워지는 것돌이킴

통하여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과의 구별이다.

 

나는 일차적으로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의 의미를 다루려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라볼 때 중생이란 성령의 사역이라 정의할 수 있으며 이 사역을 통하여 성령께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시사 그들로 하여금 전에는 영적으로 죽었으나 이제는 영적으로 살아나게 하여 죄를 기꺼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며, 주님을 섬기도록 하게 하신다. 성경은 세가지 서로 다른 의미에서 중생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 연관을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1) 중생이란 새로운 영적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심기워지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의미에서의 중생이다.(요3:3, 5)

 

(2) 심겨진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낼 때를 가리켜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약1:18; 벧전1:23)

 

(3)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최종적인 완성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마19:28)

 

 

 

2. 인간 부패성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159p 7줄)  중생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역사하는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3. 중생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162p 마지막줄) 이러한 신생에 있어서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주권적 사역에 의존하는 것이다.

    (165p 6줄~) 중생은 성령의 정결케 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활동의 열매이며, 이 열매는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  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새로운 창조세계의 한 부분인 것을 의미한다.

  

    (168p 6줄~) 중생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해서 정리해 보자: 중생은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의 전적인 변화이며,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에 의해 역사되며 우리는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본성의 내면적 새로워짐을 말하는데,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열매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일어난다.

 

이상과 같은 주석학적 연구에 기초를 두고 우리는 다음과 같이 힘있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한 의미의 중생은(새로운 영적 생명의 심겨짐)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협력하여 일어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유일한 행위자이시다. 즉 중생은 "단일적"(monergistic)인 하나님만의 일이지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협력하는 "신인협력적"(synergistic) 행위가 아니다. 요한복음서와 서신서에서 보았듯이 중생을 묘사하는 동사는 수동형이었다: "gennethe", "gennethenai", gegennetai", "gegennemenos". 일찍이 에베소서 2:5에서 우리는 매우 독특한 문구를 본 일이 있었다: "우리가 범죄함 가운데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도다." 보시다시피 죽었던 자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살릴 수 있겠는가? 죽은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협력하여 자기 자신들을 희생시킬 수 있는가? 중생에 있어서 인간은 수동적이고 하나님만이 일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중생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우리는 구원론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전적 주권을 배운다: 우리가 구원얻는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일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모든 찬양을 드리자!

 

 

4. 중생의 본질

 

중생은 매우 신비스럽다. 첫째로 그 정의가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사람이 중생을 관찰하거나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중생의 결과들을 관찰할 뿐이다. 새 생명의 이식이라는 좁은 의미로 중생을 이해하는 일에서 우리는 언제 중생이 일어나는지 확증할 수 없다; 자기 자신에게는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더욱이 중생이 일어났다는 확실한 증거들을 잡기란 어렵기 때문에 추측할 뿐이다.

 

중생의 본질에 관해 세 가지로 언급하려 한다:

 

(1) 중생은 갑작스런 변화이다:

점진적인 성화처럼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다.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변화라면 어찌 점진적일 수가 있겠는가? 다시금 에베소서 2장 5절을 생각해 보자. 중생은 죽은 죄인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다.”는 구절의 동사는(synezoopoiesen) 부정시제로서 순간적 동작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는 루디아의 개종이 기록돼 있는데, ‘루디아가 바울의 메시지를 듣고 주께서 그녀의 마음 문을 여셨다.’고 했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분명히 중생을 가르킨다. ‘연다’(dienoixen)는 동사 역시 부정시제이다. 언제 중생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순간적임에는 틀림없다. 죽음과 생명 사이에는 중간지대가 없기 때문이다.

 

(2) 중생은 초자연적인 변화이다:  

.............

이것이 중생이다. 즉 새로운 피조물, 죽은 자로부터 일어남, 다시 살아남 등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성경 안에 선포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도움 없이 우리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것이다. 이 중생은 외적인 가르침, 도덕적 설득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께서 시작은 하시되 거듭나고 돌이키는 것은 사람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도 맞지 않다. 중생은 전적으로 초자연적 역사이다.

 

(3) 중생은 근본적(radieal) 변화이다: 

‘근본적’(radieal)dlfks 영어는 라틴어 ‘우리’(radix)에서 유래됐는데, 중생은 우리 본성의 뿌리부터 변화됨을 뜻한다.

............

그러므로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에 있어서 인간은 능동적이 아니라 수동적이다.

 

 

5.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중생은 일방적이지 상호협력적인 사역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협력하여 이루어 나가는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혼자만의 사역이다. 인간의 타락한 자연상태, 유효적인 부르심, 사림을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 등을 고찰해 보면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진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은혜는 참으로 거절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사실이다.

 

 

6. 중생과 다른 교리와의 관계

 

(1) 중생과 효력적 부르심과의 관계: 어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중생과 효력적 부르심과를 구별하기를 원한다. 예를 들어 루이스 벌코프는 효력적 부르심은 좁은 의미의 중생을 뒤따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죤 머레이는 효력적 부르심이 중생을 선행한다고 주장하였다.

 

나는 협의의 중생을 효력적 부르심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려 한다. 이미 17세기의 신학이 이 두 가지를 동일하게 취급하였다. 최근의 학자드로는 스트롱(Augustus Hopkins Strong)과 바빙크를 들 수 있다. 효력있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으로 이 사역을 통하여 복음초청을 듣는 자들이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생과 별다를 바가 없다. 이 두 가지 용어는 결국 서로 다른 비유를 통하여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의 변화를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이 변화란 곧 새 생명의 부여(중생) 혹은 믿음으로 복음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음(효력적 부르심)을 말한다.

 

이 두 가지는 영적 성장으로 인도하는 새로운 출발이라는 점에서 서로 대응하고 있다. 중생은 돌이킴으로 발전하여 순종과 헌신의 삶으로 인도된다. 앞에서 본 바처럼, 효력적 부르심은 독특한 삶으로 우리를 불러낸다: 그리스도와의 삶, 거룩과 자유와 평화의 삶으로.

 

(2) 중생과 돌이킴과의 관계: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은 돌이킴(회심, 개종)과 동일시될 수 없고 구별되어야 한다. 중생은 돌이킴에 이르게 된다(즉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다시 말해서 돌이킴은 중생이 일어났다는 외형적 증거라 할 수 있다.

............

루디아의 경우에서처럼, 생과 돌이킴은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나 원인적인 측면에서 볼 때 중생이 돌이킴보다 "앞선다" 하나님께서 새 생명을 주신 후에야 비로소 사람은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할 수 있다.

비유를 들자면 수도꼭지를 틀면 수도물이 나온는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수도꼭지를 트는 것과 물이 나오는 것은 동시적이나 구태여 순서를 따지자면 수도꼭지를 트는 것이 먼저이고 그후에 물이 나온다. 그러므로 요한일서에서 본 것처럼 중생은 우리의 새로운 삶의 방향에서 나타나고 느껴지게 된다.................

 

(3) 중생과 성화의 관계: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이 두 가지는 동일하다. 앞으로 보겠지만, 성화는 단회적(definitive)이다. 단회적 성화는 한 순간에 일어난다.................. 중생은 과정이 아니라 한 기점이다. 그러나 성결과 순종안에서 성장의 삶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성장은 성화의 많은 축복들 중의 하나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생은 점진적 성화의 첫번째 단계이다.

 

(4) 중생과 세례와의 관계: 

  

 

7. 중생과 설교자

 

(181p) 이제 우리는 한가지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위에서 본 바처럼, 중생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며 결코 사람의 사역이 아니라면, 설교자는 중생에 관해 어떻게 설교할 수 있겠는가?  물론 교인들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설교해야 할 것이다(요3:7). 그러나 그들 스스로 중생할 수 있다고 권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스스로 중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거듭남을 받아야 한다고만 외칠수도 없다. 성령께서만이 거듭남을 부여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중생의 교리를 어떠한 식으로 다루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나는 중생과 말씀과의 관계를 지적하려고 한다. 중생은 일반적으로 설교시나, 성경을 가르침받는 동안, 성경을 읽을 때 등에 일어난다. 사도행전 16;14에서 본 것처럼 루디아가 중생하게 된 것은 그가 바울의 복음 메시지를 듣고 있을 때였다.

 

다음으로 야고보서 1:18을  보자: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우리로 그의 피조물 중에 첫열매가 되게 하심이라." 여기에 사용된 "아포케인"이란 동사는 "출생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출생시키다"라는 뜻이다. 15절에도 사용된 바가 있는데 그곳에서 야고보는 죄가 성장하면 죽음을 낳게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의 근원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17절) 우리에게 새로운 출생-우리가 새로운 영적 생명을 받았다는 증거-을 주심으로써 그의 넘치는 자비를 보여주셨다.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신생은 좁은 의미의 중생(새 생명의 부여)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중생, 다시 말해서 돌이킴을 통해 나타나게 된 새생활의 첫번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야고보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넓은 의미의 중생은 진리의 말씀, 성경을 통하여 우리 안에 일어나게 된다.

 

베드로가 이와 비슷한 언급을 하고 있다.

벧전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동사 "아나게나오"는 다시 "출생하다" 혹은 "다시 태어나도록 하다"라는 뜻이다. 본장의 3절(중생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서처럼 본절에서의 의미도 일반적으로 두번째 의미로 이해되었고 NIV도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다고 베드로는 그의 독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25절을 통해 보면 베드로가 언급하고 있는 말씀은 설교된 말씀임에 틀림없다. 넓은 의미의 중생은 성경을 통한 설교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돌트 신경에는 복음을 가리켜 "중생의 씨앗"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직접적으로 , 철저하게 우리 안에 좁은 의미의 중생을 일으키시긴 하지만, 그러한 새로운 영적 생명의 최초의 외적 표출은 말씀을-그것이 전파된 말씀이든, 가르쳐진 말씀이든, 읽혀진 말씀이든 상관없이-통해서 존재하게 된다. 새로운 영적 생명은 하나님에 의해 즉각적으로 부여된다. 그러나 새로운 출생은 말씀을 통하여 차후적으로 일어난다.

 

중생에 관한한 설교자의 의무는 무엇인가? 그는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그러한 설교와 가르침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184p 9줄) 믿음을 가진 신자들에 대해서 갖는 설교자의 의무와 특권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경험했던 기적적인 신생의 놀라운 측면들을 기억하고 상기하도록 하는 것이다.............

 

(184p 15줄) 설교자는 중생에 관한 성경의 온전한 가르침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잘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중생이란 새 생명(삶)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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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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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인재의 7가지 욕구

최근 《1001가지 직원보상 방법》의 저자로 유명한 밥 넬슨이 욕구단계이론을 종업원 관리에 유용하도록 새롭게 정리했다. 이른바 ‘직원의 욕구 7단계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밥 넬슨이 말하는 직원의 동기를 유도하는 방법을 살펴보자.

직원의 욕구 제1단계는 일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욕구다. 관리자가 이 단계에 있는 종업원에게 동기를 부여하려면, 말 그대로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끼게 해줘야 한다. 이를테면 자신이 하는 일이 회사의 목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큰 그림을 그리도록 도와줌으로써 종업원이 자기 일에 긍지를 느끼고, 조직의 한 일원으로 행동하도록 이끌어주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2단계는 신뢰와 기대에 대한 욕구다. 이 단계에 있는 종업원에게는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항상 믿음과 신뢰,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종업원에 대한 신뢰와 기대는 상사의 재량에 따라 ‘주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닌, 종업원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진 권리’에 해당한다는 점을 관리자가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업원들이 실수를 한 경우에도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제3단계는, 커뮤니케이션과 정보에 대한 욕구다. 종업원들은 업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질문을 하고 이에 대한 답변을 듣기를 원한다. 따라서 유능한 관리자는 이를 잘 파악하고 부서와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종업원에게 수시로 설명해줘야 한다.

제4단계는 칭찬과 인정에 대한 욕구다. 전체 종업원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포상할 것인지,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상사가 개인에게 칭찬할 것인지를 사안을 잘 파악해 알맞은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제5단계로는 업무에 대한 자율과 유연함에 대한 욕구다. 이 단계에 있는 종업원은 업무 수행과정에서 자율권을 보장 받기를 원한다. 따라서 관리자는 이 단계에 있는 종업원들에게 업무의 자율권을 최대한 보장하며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제6단계는 참여와 격려에 대한 욕구다. 종업원은 업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기를 원하고, 그 결과 회사로부터 격려 받기를 원한다. 따라서 이 경우 관리자는 종업원이 비록 우습고 하찮은 제안을 하더라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아이디어나 의견도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제7단계는 배움과 도전에 대한 기회, 성장에 대한 욕구다. 종업원은 스스로 학습하고 계속해서 성장하려는 욕구를 갖고 있다. 이 단계에서 관리자는 종업원들에게 보다 많은 책임을 부여해야 하고 이를 통해 종업원 스스로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최근 미국인사관리협회의 연구에 따르면, 종업원들의 사기를 높이는 수단으로는 돈도 물론 있겠지만 위에서 말한 동기들을 ‘단계별로 맞춤식’으로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한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인사전문가가 종업원의 사기를 올리는 데 돈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꼽고 있지만 똑같은 금전적 인센티브가 일 잘하는 종업원에게는 약이 되나 일 못하는 종업원에게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전적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된 선진기업들의 경우 비금전적인 지원도 다양하게 활용하고 있다. 이것은 특히 핵심인재를 지속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방편으로도 많이 활용된다. 왜냐하면 핵심인재의 경우 이직의 이유가 돈보다는 대개 상사와의 갈등에서 발생하는 신뢰와 믿음의 부족, 그리고 자신의 기여에 대한 회의와 개인적인 성장에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다.

출처:엑설런스코리아/
배성오(삼성경제연구소 인사조정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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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워셔(Paul Washer) 목사의 설교 : 설교 중생인가 결단인가.

 
폴워셔(Paul Washer) 목사의 설교 : 설교 중생인가 결단인가.

 

원제 : 중생 vs. 결단주의식 전도의 우상 (Regeneration vs. The Idolatry of Decisional Evangelism)

 

폴 워셔

번역 : 존시백(양무리 카페 회원 ID 명)

 

로마서 <?xml:namespace prefix = st1 />1:16을 보면 우리는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어떤 사람들은 사도,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달할 임무를 띤 그가 이런 말을 해야 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육신은 복음을 부끄러워할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은 그의 문화에서 신봉하는, 거룩하다고 믿어지는 모든 것과 대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

바울은 당시 문화에 적응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문화와 협상하여 메시지를 문화에 맞게 각색하고 재조합 하려는 시도, 다시 말해 오늘날 복음주의권에서 그토록 두드러지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은 최악의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유대 문화에서 저주인 십자가에서 죽은 한 나사렛인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헬라인들에게 복음은 최악의 부조리였습니다. 외딴 곳에서 온 이 유대인이 육신을 입은 진짜 하나님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성령께서 개입하셔서 듣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시지 않는다면 입을 열어 복음을 말할 때마다 반드시 배척 당하고 조롱 당할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여러분도 알아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복음을 합당하게 전한다면 그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이며, 그 수치스러움을 덜기 위한 노력을 한다면 당신은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 살았던 인물들의 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젊은 플리니(Pliny the Younger)의 기록입니다. 고문 받는 두 노예 소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조사해보니 터무니없고 도착적인 미신만 발견할 수 있을 뿐이었다.

마르쿠스 미누시우스 펠릭스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그들의 의식은 범죄를 저지르고 십자가라는 죽음의 나무에 달린 한 남자에게 집중되어 있다라고 조롱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참된 종교를 파괴할 역겨운 망상, 무감각하고 미친 미신을 내세운다라고 말합니다.

 

듣기 싫은 말일지도 모르지만 복음주의 교회들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현대 교회 성장 전략들은 제가 방금 읽은 이 일들을 피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에는 자기 부인이 기독교 신앙에서 돌아서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하면 좋겠느냐고 묻는 남자의 질문에 대한 아폴로의 신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라. 계속해서 헛된 망상을 하고, 재판관들의 옳은 판결로 정죄 받고 청춘기에 철에 묶여 최악의 죽음으로 처형된, 망상 속에 죽어간 한 신에 대해 슬퍼하며 노래하도록 내버려두라.

 

고대의 볼테르와 같은 사람이었던 루키아누스는 그의 작품 <페레그리누스의 죽음 De Morte Peregrini>에서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의 신들을 거부하고 대신 십자가에 달린 궤변가를 숭배하며 그의 법에 따라 사는 가련한 악마들이라고 조롱합니다.

 

오리게네스의 <켈수스에 대항하여 Contral Celsum>에서 켈수스는 선언합니다. 어린 아이를 잠재우기 위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술 취한 노파라도 그런 터무니없는 일들을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원색적인 복음은 마찬가지로 불쾌하게 여겨집니다. 상대주의, 다원주의, 인본주의 등 우리 문화의 모든 주의들에 대해 복음은 여전히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잠시만 살펴봅시다.

우리는 상대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절대적 확신 위에 세워진 신앙 체계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찾는 사람을 칭송하는 위선을 보이면서도 정작 진리를 찾았다고 믿는 사람에 대해서는 공개처형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암흑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자연인은 타락한 피조물이며 도덕적으로 부패했고 스스로 지옥을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하며, 하나님의 법이 자신을 점검하고 악을 제한하기 때문에 그것을 미워합니다. 진리가 자기 상태를 드러내고 남아 있는 양심을 괴롭게 하기 때문에 그것을 미워합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진리, 특히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가능한 한 멀리 밀어내고 싶어합니다. 진리를 억누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할 것이며, 그리하여 심지어는 마치 진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혹은 존재하더라도 알 수 없거나 우리 삶에는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기까지 합니다.

 

복음에 대해 다음을 알아야 합니다. 숨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결코 지성이 아니라 의지가 문제입니다. 저는 성경이 무신론에 어떤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거짓말을 하고 하나님을 미워하여 마음에서 진리를 밀어내는 자들이 있으나 무신론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1:21). 달려드는 소를 피하기 위해 모래 속에 머리를 숨긴 사람처럼, 현대인은 양심을 잠재우고 그가 이미 알고 있는 다가올 심판에 대한 생각을 밀어내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의로우신 하나님과 도덕적 절대성들을 부인합니다.

 

상대주의와 그 문화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은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피하고 싶어하는 바로 그 일을 복음이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스스로 부과한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타락상과 반역을 깨닫고, 자신에 대한 자치권을 거부하고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만듭니다.

 

우리는 또한 모든 것을 진리라고 선언함으로써 진리를 끝장내는 신념 체계인 다원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모든 것이 진리일 때, 즉 정반대로 모순되는 진술이 모두 진리라고 명명될 때 진리는 죽습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제 말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만 기독교 신앙의 처음 몇 세기 동안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라고 낙인 찍히고 박해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가 될 것입니다. 이 나라에서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것이 여러분이 감옥에 가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둘러싼 문화는 유신론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신의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었고 종교는 급속히 발전하는 사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신에게 관대했을 뿐 아니라 신들을 마치 야구 카드처럼 바꾸고 공유했습니다. 기독교가 나타나 손으로 만든 신들은 결코 신이 아니라고 선언하기 전까지 전체 종교 세계는 잘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시저와 그에 대한 숭배를 부인하고, 다른 소위 신들에게 무릎 꿇기를 거부하였으며 예수님만이 만유의 주님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신론자라고 불렸습니다. 온 세상이 그 엄청난 오만함을 보고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노를 발했습니다. 관용을 용납하지 않는 그들은 참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한 번 살펴 보십시오. 이 말들, 엄청난 오만함을 보십시오. 똑 같은 시나리오가 오늘날 우리 세계에도 넘쳐납니다. 사람들은 종교와 도덕에 관한 견해들은 그것들이 아무리 근본적으로 다르고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모두 다 진리라는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말을 합니다. 가장 놀라운 사실은 언론매체와 학계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으로 인해 이 견해가 순식간에 다수의 견해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원주의는 문제를 해결하지도, 병을 치료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환자를 마취시켜 더 이상 느끼거나 생각하지 못하게 할 뿐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을 잠에서 깨우고, 그런 비논리적 입장에 의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수치입니다. 복음은 어떤 결론에 도달할 것을 강요합니다. 두 견해 사이에서 망설이기를 얼마 동안이나 하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주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바알이 주님이라면 그를 따르십시오. 참된 복음은 철저히 배타적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복음주의자들 앞에서 해야 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복음이 철저히 배타적이라는 이야기를 복음주의자들에게 해야 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유일한 길로서의 그리스도를 포기하기 시작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참된 복음은 철저히 배타적입니다. 예수님은 한 길(one way)이 아니라 유일한 길(the way)이며, 다른 길들은 전혀 길이 아닙니다. 주의해서 들으십시오. 이것이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좀 더 관용적인 에큐메니컬주의로 한 발짝 조금만 내밀어 정관사 the를 부정관사 a로 바꾼다면 수치스러움이 제거되고 세상과 교회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이 이해되십니까? 우리가 단순히 야훼는 한 신이다라고 이야기 한다면 아무런 박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단순히 예수는 한 구원자이다라고 이야기한다면 저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 나가게 될 것입니다. 이해 되십니까? 우리가 그저 그는 우리의 구원자 이시다 라고 이야기하기만 하면 모든 수치가 제거될 것입니다. 너희에게는 너희의 구원자가 있고 우리에게는 우리의 구원자가 있다. 너희에게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런 언쟁도 없을 것이다. 너희 길이 그렇다면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 우리가 이렇게만 한다면 결코 아무 박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는 순간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고,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그리스도는 부정되고 세상에는 구세주가 없어집니다.

 

우리는 인본주의의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인류는 양심과 문화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기 위해 싸워왔습니다. 참되신 한 분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제단을 모두 다 부숴버리고 종교적 광신자의 열정으로 자신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것을 세속주의가 종교적 사고에 저항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속주의자는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종종 자신의 종교에 어떤 그리스도인들보다도 더 광신적이 됩니다.

 

인간은 자신을 모든 일의 중심과 척도와 목표로 만들어 왔습니다.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찬양하고, 자존감에 경의를 표할 것을 요구하며, 자아실현을 최고의 선으로 격상시킵니다. 이런 것이 기독교에 스며들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신다면 긍정의 힘이라는 책을 아직 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정확히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의 찌꺼기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자기 주변의 도덕적 혼돈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해 사회를(최소한 자신에게 계몽 받지 못한 사회의 한 부분을) 비난합니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양심의 증언이 옳을 수도 있다거나 세상에 있는 거의 무한대의 다양한 병폐들에 대해 자신이 책임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에게 복음은 수치입니다. 복음이 자신에 대한 망상을 폭로하고 그의 타락상과 범죄를 입증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첫 번째 필수적인 역사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참된 복음 설교를 그토록 혐오하는 이유입니다. 참된 복음은 인간들의 잔치를 망쳐놓고, 거짓을 드러내며, 임금님은 옷을 입지 않았다고 지적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에게 거치는 돌과 미련한 것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복음은 수치일 뿐 아니라 수치여야 합니다. 옛 부흥사 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땅에 거했던 가장 거룩하신 분과 잘 지내지 못한 세상이 어찌 우리와 잘 지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수치가 되어야 합니다. 수치가 되기 위해 광신자의 무리처럼 될 필요도 없고 온갖 미친 일들을 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는 만유의 주님이시다! 라는 이 한 가지 선언에 신실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메시지에서 수치스러운 것을 제거하려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구원의 능력을 헛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복음이 수치스러울 뿐 아니라 수치스러워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복음의 미련한 것을 통해 하나님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폐하시고, 가장 위대한 지성들의 지능을 좌절시키시며, 모든 사람의 교만을 낮추기로 하셨습니다. 아무 육체도 그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며 오직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고전1:31) 하려 함입니다.

 

바울의 복음은 당시의 종교, 철학, 문화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그것들에게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정치적인 전쟁, 군사적인 전쟁이 아니라 진리에 관한 영적 전쟁입니다. 복음은 세상과의 휴전이나 협정을 거부하고 오직 문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에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 마음의 모든 생각까지도 그리스도께 사로잡혀야 합니다. 바울의 본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의 복음을 오늘날의 사조나 육적인 인간의 욕망에 순응시키고자 하는 모든 유혹을 떨쳐버리기 위해 주의해야 합니다.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역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사역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성경적이지 않은 사역들입니다. 자라나는 선교사들인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역은 인류학자나 사회학자, 새로운 문화 사조의 전문가들이 아니라 성경 해석자나 신학자, 성경 연구가들에 의해 규정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이라는 신성한 문서에 따라 사역과 전도를 하는 것이며 월 스트리트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타락한 세상 혹은 육적인 교인들에게 더 호소력 있게 만들기 위해 복음의 거치는 것에 물을 타거나 복음의 혁신적 요구를 부드럽게 만들 권리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의 교회들은 복음을 재포장하고, 그 거치는 것을 제거하며, 육적인 사람에게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 복음의 날을 무디게 함으로써 복음을 좀 더 구도자 친화적(seeker- friendly)으로 만들려는 전략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seeker-friendly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찾으시는 분(seeker)은 오직 한 분이시며 그분은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와 메시지를 순응시키려거든 하나님께 순응시킵시다. 교회와 사역을 세우려거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열정과 그의 위엄을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소망 위에 세웁시다.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던지 맞섭시다. 우리는 땅의 영광이 아닌 하늘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설교에 앞서 한 가지 더 지적하겠습니다. 우리의 메시지는 수치스러울 뿐 아니라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믿을 수 없는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논증했듯 바울의 육신에는 그가 전하는 복음을 부끄러워할 온갖 이유가 있었지만 아직 하나가 더 남아있습니다. 복음은 결코 믿을 수 없는 메시지이며 세상의 지혜에게는 바보 같은 소리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때때로 누군가 우리의 메시지를 믿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충격적인 일인지를 잊곤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복음은 너무나 억지스럽습니다. 복음이 로마 제국 전체에 퍼졌다는 것이 복음의 초자연적 성격을 증명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구약성경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리스 철학이나 이교의 미신에 뿌리 내린 이방인들이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에 대한 메시지를 믿도록 만들었단 말입니까?

 

그는 의심스러운 환경, 즉 로마 제국에서 가장 멸시 받는 지역 중 하나에서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며, 처녀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직업은 목수였고, 공식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순회 종교 교사였으나 복음은 그가 그리스 철학자와 고대 로마의 현인들의 지혜를 합친 것보다 더 뛰어났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가난하였고 머리 둘 곳도 없었으나 복음은 그가 삼 년 동안 말씀으로 수 천명을 먹이셨고, 온갖 질병을 고치셨으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기까지 하셨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신성모독자이자 국가의 적으로서 예루살렘 바깥에서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복음은 그의 죽음이 모든 인류 역사의 중추적 사건이며 죄로부터 구원 받고 하나님과 화해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무덤에 장사되었지만 복음은 그가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 자기를 따르는 많은 자들에게 나타나셨으며 40일 후에는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복음은 자기 백성들에게 미친 신성모독자로 거절 당하고 국가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힘 당한 한 가난한 유대인 목수가 이제 세상의 구세주이시며, 주의 주이자 왕의 왕이시며, 시저를 포함하여 모든 무릎이 그의 이름 앞에 꿇어야 할 분이라고 주장합니다. 바울의 시대에 이 메시지를 믿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이었을지 아시겠습니까?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누가 이런 메시지를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안에서 일하시기로 작정하지 않으셨다면 복음은 로마 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예루살렘 바깥과 세상의 온 나라까지 결코 전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조직을 관리하는 능력이나 설교자의 유창함 또는 변증 능력에 의지했다면 그 메시지는 태어나자마자 사라졌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선교전략들과 월 스트리트에서 빌어온 똑똑한 마케팅 계획들은 복음이라는 어리석은 거치는 돌의 진보를 조금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마틴 헹겔은 십자가의 오랜 수치에 대해 기록했습니다. 한 분 유일하신 하나님의 한 분 선재하신 아들, 창조시의 중보자이며 세상의 구원자인 그 분이 최근 외딴 갈릴리에 유대인이라는 미천한 민족으로 나타나셨을 뿐 아니라, 심지어 십자가에서 평범한 범죄자로서의 죽음을 맞았다고 믿는 것은 완전히 미쳤음을 보여주는 표지이다!

 

이 진리는 복음을 선포하는 우리에게 격려와 경고를 함께 줍니다. 첫째, 단순하고 신실하게 복음을 선포할 때 세상에서 끊임없이 복음의 진보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격려를 줍니다. 둘째, 휘황찬란함, 달변, 똑똑한 교회성장전략을 통해 복음의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거짓말에 굴복하지 말라는 경고를 줍니다. 이런 것들은 회심이라는 불가능한 일을 일어나게 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희망 찬 절망을 품고 복음을 진보시키는 성경적 방법, 즉 우리가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믿고 영광스러워하는 메시지를 담대하고 명확하게 선포하는 일에만 자신을 투신해야 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불신앙과 회의론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희망 없는 신화라고 조롱 당하고, 사람들은 우리를 편협한 고집쟁이나 종교적 책략에 속아넘어간 저능한 희생자들로 묘사합니다. 그런 공격은 종종 우리를 방어적으로 만들고 우리는 변증을 통해 반격하고, 우리의 입장과 적실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저는 변증을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식의 훈련이 매우 도움이 되고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능력은 여전히 복음의 선포에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죽은 자를 살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도록 설득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 그리고 사람의 지혜나 지적인 전문기술이 아닌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을 통해 역사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만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복음이 믿을 수 없는 메시지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롭고 강력한 역사가 없다면 우리는 사람들이 믿기는 고사하고 우리 말을 들어주기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우리의 선포가 얼마나 희망 없는 일인지요! 선포자가 얼마나 하나님께 의존적인 존재인지요!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시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전도는 바보 같은 일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실하게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은 바로 그 일을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에스겔 37:1~10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저는 방금 사람의 회심을 묘사하였습니다. 선포하러 나갈 때면 언제나 여러분은 에스겔입니다. 언제나 죽은 뼈들의 골짜기에 서서 그것들이 매우 말랐음을 봅니다. 에스겔의 시대에는 생명 없는 뼈에 생명을 불어넣는 기술이 없었습니다. 이 뼈들의 골수는 완전히 말라버려 단지 먼지와 같을 뿐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기술도, 어떤 설득도, 어떤 능력도,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이 뼈들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지금 그것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전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죽었을 뿐 아니라 죄에 메여 있습니다. 그들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생명일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들은 눈 멀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모든 조각을 제한하고 결박하려고 능력껏 모든 일을 합니다. 양심이 더 이상 그들에게 말하지 않도록 정지시키기 위해 모든 능력을 다 합니다. 무릎 꿇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느니 차라리 영원토록 마귀의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가서 전도 기술을 배워 사용해 보십시오. 기나긴 강단 초청을 하고, 온갖 종류의 감상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그들의 열정과 감정을 조종해 보십시오. 당신에게 남는 것은 배나 지옥 자식이 된 한 무리의 사람들뿐일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 받는 길은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골짜기 한가운데서 에스겔과 같은 사람이 한 발짝 걸어 나와 하나님께서 복 주기로 약속하신 유일한 메시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를 모집할 때, 아니면 후보자를 면접할 때 우리는 한 가지를 바랍니다. 사역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 죽은 자는 살아날 수 없고 세상은 무로부터 나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은 회심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 자신이 전쟁에 나가면서 몇 개의 무기밖에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 무기들-복음의 선포, 중보기도, 자아 사랑에 대한 희생적 죽음-이 강력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보내 주십시오. 이 세상에서 복음이 진보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육신의 수단에 의지하면 할수록, 교회가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흥미를 끌기 위한 최신의 방법을 찾아 성장하려는 시도를 하면 할수록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현대 사회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소망 때문에 스스로를 원수들 사이에 있는 바보로 보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교회는 예수 놀이공원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육적인 수단들을 사용한다면 육적인 수단들을 사용해서 그들을 붙잡아둬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 나오라고 하는 기본적인 초청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현대의 표준적인 초청문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인생에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당신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십니까?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 당신 마음에 예수님이 들어오시도록 기도로 요청하고 싶습니까? 기도할 때 그분이 들어오셨습니까? 당신은 진지했나요? 당신은 이제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것은 현대 복음주의계에서 너무나 신성한 금송아지로 여겨지기 때문에 저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로 인해 마음이 상합니다. 저는 이것이 성경적인 언어들도 아니며 기독교 역사의 대부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임을 확실히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 문구가 없이는 전도를 하지 못합니다만 이것은 성경적이지도, 역사적이지도 않으며 우리가 비판하고 있는 바로 그 상태로 우리를 이끌었습니다. 많은 미국인들이 자신이 거듭났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가장 큰 전도의 현장은 교회 건물 안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참된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참으로 회심한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건물 안에 입니다. 폴 형제, 우리에겐 많은 교회들이 있어요 라고들 말합니다. 아니요. 우리는 아름다운 마당 위에 세워진 수많은 멋진 벽돌 건물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그곳에서 떠났으며 그 문에는 이가봇(영광이 없음이라는 히브리어)이라고 씌어있습니다.

 

이 초청문구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인생에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많은 경우 예수님이 그 사람을 위해 하실 수 있는 일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그들의 인생과 결혼, 재정, 자존감을 교정합니다. 죄인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는 그들이 자아 중심적이고, 자율적이며, 자기의 일을 하고 싶어하며, 자신의 꿈을 갖고 있고,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걸어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인생에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가 말합니다. ,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구요? 환상적이군요. 나도 나를 사랑해요! 이건 놀라워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한단 말이죠? 그건 불가능한 말 같네요. 누가 그런 큰 사랑을 가질 수 있겠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내 인생에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신다구요? 나도 내 인생에 놀라운 계획을 갖고 있어요! 내가 예수를 받아들이면 그가 내 모든 놀라운 계획들을 도와줄 것이고 나는 당장 최고의 인생을 살 수 있단 말이죠? 맞아요!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을 선택하겠어요. 당신은 그 두 가지를 가졌나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말할 것입니다. 폴 형제, 우리는 그런 의미로 말하지 않아요. 하지만 결과가 이렇습니다. , 당신 참 고약하네요. 비꼬기만 하는군요. , 그렇습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이 나라가 실제론 그렇지 않으면서 자신이 구원 받았다고 믿는다는 사실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무엇이 문제인지 지적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심지어 복음을 올바르게 전하고 난 후에도 이어서 성경적이지도, 역사적이지도 않은 이런 초청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적절한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게 하고 난 후에는 마치 교황처럼 그들이 구원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그들은 종교 지도자들의 그런 종교적 거짓말을 믿습니다. 훗날 그들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가 그들에게 다가와 복음을 전하려 할 때 그들은 듣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종교적 거짓말이 그토록 큰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질문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십니까? 이 질문은 종종 그다지 심각하지 않게 제시됩니다. 다음과 같이요. 어이, 당신은 우리 모두가 죄인인 걸 알지요? 그렇죠? 만일 그 사람이 , 나는 내가 죄인임을 알아요라고 대답하면 그 다음 질문은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입니다. , 가고 싶어요. 그럼 당신의 마음에 예수님이 들어오시도록 기도로 요청하시겠어요? 단지 5분이면 됩니다. 겨우 5분이라구요? , 성경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10:9).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3:20).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이 그렇게 말하니까요. 5분이면 되나요? 5분입니다. 좋아요.

 

그 사람이 기도하거나 혹은 전도자에게 인도 받아 기도하고 난 후에는 그는 자신이 진지했다면 예수님은 분명히 그들의 마음에 들어오셨다고 보장을 받습니다.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며, 만일 들어오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들이 진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보다는 과거 오래 전에 했던 결단의 진실성에 더 의지해 자신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알고 계십니까? 종종 몇 분 동안의 상담 후에 그들은 즉각 교회 앞에 세워져 하나님의 가족으로 환영 받습니다. 제가 틀렸다고 말하시겠지요. 저는 그런 장면을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앞으로 나와 단체 상담을 위해 훈련 받은 상담자들에게 넘겨집니다. 초청이 진행되는 동안 오분 내지 십분 동안 이야기하고 즉각 교회 앞에 세워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형제와 자매들입니다. 그들 중 대부분에게는 그것이 마지막 회심 상담입니다.

 

그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만일 그들이 성장하지 않거나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면 다시 데려옵니다. 그들이 기도했던 그 날로 돌아가 그들의 결단의 진지성에 대한 질문을 받습니다. 구원을 의심하며 목사를 찾아온 사람들을 그 날로 다시 데리고 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당신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기도한 일이 있나요? . 진지했나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건 마귀의 방해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결코 성장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제자도가 부족하거나 육적인 그리스도인 교리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으로 간주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수련회에서는 그곳에서 결신한 사람의 60%가 한 번도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이 병폐에 대해 그들은 제자훈련을 더 잘 해야 한다는 대책을 내놓았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의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습니다! 당신이 그들을 훈련시키든 그렇지 않든 그들은 예수님을 따릅니다.

 

우리는 제자도를 행해야 합니다. 과거 70년대에는 개인적 제자도가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교회의 앞문으로 들어오는 사람 수만큼 많은 사람들이 뒷문으로 빠져 나가는데 그것은 우리가 개인적 제자도를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올바르게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회심하지 않은 사람을 회심했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간 이유는 한 번도 우리에게 속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회심에 5분을 사용하고는 염소를 제자훈련 시켜 양을 만드느라 50년을 보냅니다.

 

제가 분을 잘 내는 사람이라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화가 난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 정치가가 문제가 아니라 복음주의 전도자가 문제입니다.

 

열매가 없다는 사실과 극도의 세속성으로 인해 그들의 회심이 혹시라도 의심을 받게 되면 그들은 다시 한 번 자신이 한 기도의 진실성과 종교 지도자들의 확증에 기대어 자기들의 절망적인 구원을 방어합니다. 만일 상담을 한다면 침체 상태로부터 돌이켜 다시 주님을 섬기기 시작하라는 권고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회심의 확실성에 대해서는 결코 시험 받지도, 의심 받지도 않습니다.

 

어린이 전도를 예로 들겠습니다. 저는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방학 중 성경학교의 98%에는 제 자녀를 참가시키지 않겠습니다. 이유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한데 모여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들을 듣고 이어서 너희 중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지?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사탄 숭배의 영향을 받아 등에 사탄의 상징을 인쇄한 가죽 재킷을 입고 뒷줄에 앉아 있는 아이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아이들은 일어나 말할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해요. 너희 중에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니? 저요! 이 기도를 할 사람? 저요. 그리고는 침례를 받으러 줄줄이 끌려가는데 많은 경우 그들이 그 시간을 정말로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파티장에서와 같은 옷을 입힙니다. 그들이 부모에게 반항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그들은 실제로 반항하며 커다란 부도덕과 죄 속에서 살아갑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25세나 30세쯤 되었을 때 도덕적인 삶이 더 낫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어그러진 일들을 바로잡기로 결심하고는 삶을 재헌신하고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나가길 지속합니다. 그들의 도덕성은 자기 양심을 흐리게 하고 지옥으로 직행하도록 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도덕성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린 친구들이 길을 떠나 방황하며 여자 친구와 자고, 마약을 하거나 팔고, 다른 모든 일들을 행하기 시작할 때 그의 부모나 목사가 찾아와 말합니다. 너는 그리스도인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살기를 그만둬야 해. 다음과 같이 말하지는 않습니다. 너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고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어. 그리고 잠시 동안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믿음에서 돌아섰구나. 그것은 네가 한 번도 그리스도를 몰랐으며 처음부터 사악한 자였음을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어.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거라! 이것이 차이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성경적 대안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인생에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이 현대판 주문을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선언으로 대치하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은 창조자시며, 만물을 유지하는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경배와 순종을 받으실 분입니다. 출애굽기에서의 하나님의 선언을 들어보십시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34:6-7).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가장 위대한 계시 중 하나입니다. 모세는 바위 사이에 숨었고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모세에게 드러내셨습니다. 모세의 반응을 보십시오. 모세가 급히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34:8).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의 인생에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 말하는 대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말해 주십시오. 만일 당신이 그들 자신이 만들어낸 형태의 신을 제시한다면 그들은 분명 받아들일 것이지만 그 신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말해 주십시오. 그들 앞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그들의 인생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게 되어야 함을 말해주십시오. 하나님은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믿으십시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흥분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실 수 있는 일에 대해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입니까?

 

다른 질문을 살펴봅시다. 당신이 죄인임을 아십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에 이토록 놀라운 일을 하셨다는 복음을 들었으니 한 때 사랑했던 죄를 이제는 미워하십니까? 마귀에게 가서 자신이 죄인인지 아느냐고 물어보십시오. 그렇지. 그것도 아주 대단한 죄인이지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래요. 나는 내가 죄인임을 알아요. 그들이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까? 마치 나는 하나님을 영접했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자신이 영접한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것이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죄인이예요 라고 하는 말도 다른 의미일 수 있습니다. 나는 나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아요 라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 성경을 사용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꿰뚫는 검을 사용하셔서 그 말의 참된 의미를 가르치십니다.

 

수 년 전 제가 설교할 때 그곳에는 한 여성이 인도하는 모든 면에서 준비된 상담자들이 있었는데 이 여성은 저를 전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밤 제가 설교할 때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었습니다. 왼쪽에서 울음이 시작해 전체 강당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사람들이 울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거의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마치기도 전에 한 소녀가 달려나와 울기 시작했습니다. 상담자들을 바라보자 그 인도자는 나를 쳐다보며 마치 뭔가 좀 해보세요 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가만 있으라는 손짓을 하고 설교를 계속해 나갔습니다. 설교를 마무리한 후 그녀는 앞으로 걸어 나왔고 저는 그녀가 저에게 따지려 하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밑으로 내려가 그녀 곁에 서자 뭔가 좀 해보세요 라고 했고 저는 손을 내저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나를 쳐다보고는 뭔가 조치를 취하려 했고 저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습니다. 자매님, 하나님의 법궤에 손 대지 마십시오. 죄에 대해 이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찢으시는 영혼을 위로하지 마십시오. 그들을 하나님께 맡겨 드리세요.

 

문제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아셨을 겁니다. 당신이 죄인임을 아십니까? 하지만 친애하는 여러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역사하기 시작하셔서 하나님이 죄를 보시는 방식대로 여러분도 죄를 바라보기 시작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것처럼 여러분도 죄를 미워하는 그런 신성한 태도의 씨앗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죄를 자랑하던 것이 부끄러움으로 변화하였습니까? 하나님이 무언가를 행하고 계십니까?

 

이번에는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당신은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 아니요, 나는 차라리 지옥에 가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신 일이 있습니까? 저는 몇 사람 봤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 천국에 가고 싶어요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이해하십시오.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가고 싶어하지만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기를 원하지는 않습니다. 질문은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가 아니라 하나님을 원하십니까?여야 합니다. 정치 이론과 선거는 모두다 유토피아에 관한 것입니다. 모두 다 사람이 살기에 멋진 곳을 만드는 일에 관한 것들입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곳을 바랍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죄인들을 향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 인생에 무언가를 행하셨습니까? 그리스도를 조금이라도 귀히 여기고 있습니까? 당신의 인생 내내 하나님을 모르는 체했고, 미워했고, 냉담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십니까? 그분을 따르고, 찾고, 알고, 그분 안에서 기뻐하고자 하는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까?

 

몇몇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모든 질문들에 예라고 대답하면 이어서 질문을 받습니다. 예수님께 당신 마음에 들어오시라고 기도로 구하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그렇게 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이런 공식 혹은 언어가 없다는 사실에 곤혹스러움을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마가복음 1장은 다음과 같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마음에 나를 영접할 사람이 누구인가? 오순절에 일어난 일은 다음과 같지 않습니다. 좋습니다. 거기 손 드셨습니다. 거기 손 드셨습니다. 지금 앞으로 나오실 분이 계십니까? 모두 앞으로 나오십시오. 모든 사람이 보고 있습니다.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이제 저와 함께 이 기도를 합시다.

 

폴 형제, 지금 비웃고 있군요? , 그렇습니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런 방법을 통해 구원 받았단 말입니다. 그런 방법을 통해가 아니라 그런 방법에도 불구하고 구원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폴 형제, 다음과 같은 놀라운 구절들이 있잖아요. 좋습니다. 한 번 살펴봅시다. 영접하는 자…” (1:12). 정말로 이 구절이 영접기도를 의미한다고 믿고 계십니까? 정말로 이 구절이 기도하기가 편치 않다면 나를 따라서 기도하십시오 라는 의미라고 믿고 계십니까? 그런 의미입니까? 생각해 봅시다. 그런 말을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한 전도자가 심지어 기도를 따라 하는 것 조차도 원치 않는 사람을 향해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이 말씀만 드리지요. 내가 말할 테니 그것이 당신이 하나님께 하고 싶은 말이거든 내 손을 꽉 잡으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세요.

 

영접한다는 말은 요한복음의 신학이라는 문맥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계속되는 교제에 자신의 인생을 여는 것을 의미합니다(17:3). 자기 삶의 실체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혹은 그를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6:53,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 자신에 대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대해,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믿는 믿음으로 그들은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순간, 믿음의 순간에 그들은 자기 삶을 예수님께 엽니다. 그들이 특정 수준의 진실성을 가지고 영접 기도를 했다는 것은 참된 증거가 전혀 아닙니다. 마음은 사악하여 속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마음의 진실성의 정도를 어떻게 정의하시겠습니까? 신약성경 전체에 증거가 있는데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어 구원에 이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믿은 증거는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하지만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여러분의 삶은 점점 더 그분과의 교제에 열리게 될 것입니다. 예방주사를 놓듯이 복음으로 초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회개와 믿음으로 초청합니다. 만일 그 순간에 그들이 참되게 회개하고 믿는다면 그들은 그 순간 구원 받습니다. 하지만 그 증거는 기도의 진실성 이상의 것입니다. 그 증거는 그들의 삶 속에서 성화를 통해 하나님이 끊임없이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10:9-10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마음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겠습니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중심 혹은 핵심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좌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남은 생애에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마음에 예수님을 영접하시겠습니까?라는 말을 살펴봅시다.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마음에 믿으라는 말을 우리는 마음에 그가 들어오시도록 요청하시겠습니까?라는 말로 바꾸었습니다. 마음에 믿으라는 말은 당신 존재의 중심 혹은 핵심으로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비밀의 방을 열고 그를 들어오시라고 요청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성경의 증언이자 모든 건전한 복음주의적 학자들의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시인[고백]하는 것을 참된 회심의 필요조건인 것처럼 말하는 것일까요? 본문을 다시 살펴봅시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로마서 전체를 통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하는 바울이 여기서는 왜 시인하는 것을 추가할까요? 바울은 오직 믿음의 교리를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공적인 시인이 마음으로 믿은 것을 보여주는 증거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참으로 회심한 사람은 말과 행실을 통해 그리스도를 공적으로 시인할 것입니다. 이것은 회심 했다고 추정되는 그 밤에 교회 앞에 서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 일입니다.

 

참으로 회심한 사람은 말과 행실로 그리스도를 시인할 것입니다. 제가 말과 행실이라는 말을 추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7:21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나를 주로 시인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행위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은혜를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제 말은 구원에 관한 잃어버린 교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중생이라는 교리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실 때 그분은 사람의 마음을 소생[중생]시키시고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십니다. 그가 새로운 피조물처럼 살아가게 되리라는 것이 중생의 증거입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를 시인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에 참으로 믿은 사람의 삶의 특징은 말과 행실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성경적인 고백을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의 믿음이 진정한 구원하는 믿음이라는 사실을 그의 입을 통해 듣고 그의 삶을 통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잠시 문화적인 관점에서 살펴봅시다. 우리가 1세기 로마 제국의 20여명 모인 교회라고 합시다. 로마서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들 중 일부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양과 같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20명이 건설 현장에서 일한다고 가정합시다. 로마의 어떤 건물을 짓느라 일하고 있고, 아무 문제 없는 아름다운 날의 점심 시간입니다. 우리는 봄 날의 잔디밭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갑자기 북 소리가 들려옵니다. 눈을 들어보니 군인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작은 향로와 불이 얹어진 작은 제단을 가져오고 있고 우리는 겁에 질립니다. 모든 건설 인부들이 그들의 발 앞에 모여드는데 대부분은 불신자입니다. 우리는 그들 사이에 있는 작은 교회입니다. 군인들이 우리 모두를 불러모으며 이리 와서 시저에게 경의를 표하라라고 말합니다. 불신자인 첫 번째 인부가 나가 약간의 향을 취해 불에 던지고 시저는 주님이시다라고 말하고는 최대한 행복한 표정으로 물러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지나 드디어 우리 그리스도인들 중 첫 번째 사람의 차례가 됩니다. 그가 걸어나가고 군인은 시저에게 경의를 표하라라고 하며 창으로 찌릅니다. 예수는 주님이시다. 그리고는 죽습니다. 다음 사람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라고 하고 죽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사람. 우리는 바울이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 진리, 참으로 믿는다면 생명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그리스도를 시인할 것이라는 그 진리를 붙잡았습니다. 미국 교회에서 우리는 그 아름다운 진리를 한 무리의 사람들 앞에서 짤막한 기도를 하면, 당신이 진지했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구원을 보장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축소시켰습니다. 그것은 이 구절이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부르는 순간 그는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증거는 영접기도를 하는 인생의 한 순간 그들이 진지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구원의 증거는 참된 회개가 있는가? 믿음이 있는가? 복음의 은혜가 그들의 삶과 성장에 지속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신칭의의 증거는 성령님을 통한 계속되는 성화의 사역입니다.

 

3:20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첫째, 이 구절은 복음 초청의 문맥이 아닙니다. 그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스도는 죄인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도 그런 말이 없습니다. 정도에서 벗어난 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문맥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전도자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폴 형제, 나도 알아요. 하지만 효과가 있다구요.

 

둘째, 이 구절이 명확하게 회심이나 마음을 여는 것에 대해 다루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에게 만일 그들이 마음을 열면 예수님이 들어오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데 이 구절을 사용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입니다. 반면에 회심과 마음을 여는 것 모두를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행16:14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왜 이 구절은 결코 사용하지 않습니까?

 

셋째, 단순히 삶을 열도록 초청하는 대신 죄인들이 자신을 시험하고 그 순간 주님이 무엇을 하실는지 살펴보도록 사랑으로 돕는 것 또한 합당한 일 아니겠습니까? 오늘 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에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느껴지십니까? 하나님의 일들 가운데 복음에 대해 더 이해하게 되셨습니까? 성경의 진리와 제자도의 요구 가운데 그리스도의 위격에 대해 점점 더 마음을 열고 있습니까? 당신이 들은 일들에 대해 반응하고, 당신의 죄된 삶 가운데에서 자아를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만 신뢰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습니까?

 

넷째, 설사 우리가 이 구절을 전도에 사용한다 하더라도 누군가 삶을 그리스도께 열었다는 증거는 마찬가지로 지속되는 교제일 것입니다. 문을 열면 그와 더불어 먹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삶을 참으로 그리스도께 열었다는 증거는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교제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설교로 인해 그리스도와 아무런 교제도 없고, 경건의 소망도 없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으면서도 그들이 한 때 교회에서 예수님을 기도로 초청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회심했다고 믿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이건 사실입니다.

 

이제 45초 남았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 중 하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알라스카 남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들으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25명 정도가 모여 있는 설교단에 제가 올라갔을 때 어떤 키 큰 사람이 걸어 들어왔는데 그는 제가 만난 가장 슬퍼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제일 앞줄에 앉았습니다. 저는 즉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고 난 후 전 아래로 내려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는 봉투를 하나 꺼내어 저에게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지금 의사를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3주 안에 죽는다는군요.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평생 숲 속에서 소를 방목하며 살았습니다. 거기 가려면 산을 넘거나 수상 비행기를 타야 합니다. 나는 평생 교회를 가본 일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은 일도 없구요. 하지만 언젠가 누군가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었고,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정말로 믿습니다. 내 평생 아무 것도 두려워해 본 일이 없는데 내가 죽을 것이라니 두렵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지난 45분간 저는 복음, 즉 하나님이 죄인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전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셨습니까? . 대부분의 전도자들은 이 순간 무엇을 했을까요? 예수님이 당신의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기도로 요청하시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폴 형제, 나는 이해했어요. 누구라도 이해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게 다예요? 이제 이해했으니 기도를 한다. 그게 다인가요? 저는 회개와 믿음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분 후 그는 저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이해가 안가요. 저는 말했습니다. 보세요. 당신이 살 날은 3주가 남았고, 저는 내일 아침 떠나야 합니다. 제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고 당신이 죽을 때까지 3주간 함께 있겠습니다. 당신이 구원 받거나, 아니면 죽어서 지옥에 가겠지요. 이제 시작합시다.

 

주목하십시오. 전도자가 되는 것을 생각하고 계신다면 여러분이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설교하리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나오는 사람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우선순위에 두고 상담해 주십시오. 결단하는 이가 많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그저 결단일 뿐 회심이 아닙니다. 다음 주일에 교회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레오나르도 레이븐힐이 종종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수 많은 교회들에서 한 번만 설교하는 이유를 이제 이해하실 겁니다

 

저는 그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 성경을 살펴봅시다. 우리는 한 시간 동안 그리스도가 형상화 될 때까지 구약과 신약 성경 전체를 계속해 살펴보았습니다. 좀 더 기도하고, 좀 더 읽고, 또 한 시간이 갔습니다. 시간이 늦었을 때 제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기 머물겠습니다. 이 사람은 죽어갑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인 요3:16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다리에 제 성경과 그의 큰 손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 구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여러 번 읽지 않았나요. 제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당신의 생명이 여기 달려 있습니다. 그 큰 노인은 아래를 내려보며 계속 했습니다. 좋아요. 하나님이세상을이처럼사랑하사독생자를 주셨으니!...나는 구원 받았어.나는 구원 받았어내 모든 죄가 사라졌어! 내 손이깨끗해. 나에겐 영생이 있어영생이 있어나는 천국에 갈꺼야! 제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그걸 아시나요? 전에 이 구절을 읽어본 일이 없단 말이요?라고 그가 말했습니다.

 

차이가 뭔지 아시겠습니까? 사람들은 저에게 제가 복음전도에 반대하냐고 묻습니다. 예이기도 하고 아니오 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는 식의 복음전도에 반대합니다. 그것을 증오합니다. 그런 전도는 사람들에게 달려들어 작은 표딱지를 붙들고는 관청에 앉아 면허갱신을 위해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표를 붙들고 천국에 가십시오. 우리가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르심 받은 자들입니다. 저는 설교할 때 강단 초청 같은 일은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 이제 끝났습니다. 하나님이 당신 마음을 만지신다면 저에게 나오십시오. 우리는 여기에 밤새 앉아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 어떻게 할까요? , 당신은 구원 받았어요. 구원 받았어요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잘 들으세요. 만일 오늘 밤 당신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증거가 나타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참으로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렀다면 당신은 구원을 향해 계속해서 회개할 것이고 회개 가운데 자라날 것입니다. 당신이 참으로 믿었다면 계속해서 믿을 것입니다. 이건 예방주사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10년 뒤 경건치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 어떤 사람이 다가가 복음을 전할 때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 걱정 마쇼.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하지 않소. 설교자 양반, 내 걱정 마쇼. 나 옛날에 다 했어. 뭘 했다는 말인가요? 예방 주사를 맞았단 말입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을 위해 수고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식사하러 가게 하십시오. 수고하고 기도하십시오. 복음의 다양한 약속들과 다양한 경고들을 가지고 그들과 상담하십시오. 저는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마치 진드기 한 마리가 세상이라는 바위를 향해 머리를 부딪히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 없이 결단으로 인도되는 것에 신물이 나고 지쳤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보다는 결단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면서도 자신이 구원 받았다고 믿습니다. 어떤 복음주의 지도자가 그렇게 말해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제 거의 완전하게 복음을 듣는 일로부터 단절되었습니다. 그만 하십시오! 그만 하십시오

 

<양무리 마을>

[출처] 폴워셔(Paul Washer) 목사의 설교 : 설교중생인가 결단인가. (비공개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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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대하여 / 토마스 왓슨의 '묵상'에서 발췌


                                          [기도에 대하여]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엡 6:18)



  경건한 사람이란 곧 기도하는 사람이다.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시32:6)고 하였다. 은혜가 부어지면 곧바로 기도는 쏟아져 나온다. 기도는 영혼과 하늘나라 사이의 교통이다. 하나님은 그의 성령에 의해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우리는 기도에 의해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영적인 기도는 믿음의 기도를 말한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마21:22)고 하였다. 어째서 그 많은 기도가 난파를 당하는가 하면, 그 기도들이 불신앙의 바위에 부딪혀 깨어지기 때문이다. 믿음 없이 기도한다는 것은 총알 없이 사격하는 것과 같다.

  영적인 기도는 거룩한 기도를 말한다. 그런고로 거룩한 손을 들어서 기도하라(딤전2:8). 기도는 순결한 마음의 제단 위에서 드려야 한다. 죄짓는 삶은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하나님의 귀를 막아버린다. 죄는 기도하는 입을 막아버리며, 도둑이 길손에게 하듯 기도자의 입에 말 못하도록 재갈을 물린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66:18)고 하였다. 죄에 대항하여 기도드리고, 그러고 나서 기도에 대항하여 죄짓는다면 이는 얼빠진 것이다.

  영적인 기도는 겸손한 기도를 말한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시10:17)라고 하였다. 기도는 일종의 자선을 요청하는 것이며, 그래서 겸허함을 필요로 한다. 불쌍하고 아무 것도 아닌 자가 창조주 발 앞에 엎드리는 것은 보기에 어여쁘다.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창 18:27)라고 하였다. 보다 낮은 위치로 마음이 내려갈수록, 보다 높은 위치로 기도는 올라간다. 깨어진 표현이라도 깨어진 마음에서 우러나오면, 그 기도를 하나님은 받으신다.

 영적인 기도는 영적인 목적을 가지고 드리는 기도이다. 영적인 기도와 세속적인 욕망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있다. 위선자의 목적은 세속적이다. 그는 기도를 해도 한눈을 팔면서 한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영적 부족감이 아니라 육욕이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4:3)고 하였다. 죄인은 은혜보다 양식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한다. 이런 기도를 하나님은 기도로 이해하시지 않고, 울부짖음으로 이해하신다.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포도주를 인하며 모이며”(호7:14)라고 하였다. 진실한 목표가 없는 기도들에겐 진실한 응답이 없다. 경건한 사람은 은혜의 재고를 늘리기 위해 기도의 무역업에 종사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귀를 즐겁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녹게 하며, 하나님의 손을 펴게 한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영혼을 거절하지 못하신다.

  하나님을 찾겠다고 마음에 다짐하기가 때로는 얼마나 어려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때보다 더 기꺼이 십자가로 나아가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뇌 가운데 몸부림쳐 기도하셨다(눅 22:44). 많은 사람이 기도할 때 고뇌 가운데 몸부림쳐 기도하기보다 되레 무기력 가운데 심드렁하게 기도한다. 세상일에 관해서라면, 그들은 온통 불덩이가 된다. 기도할라치면, 그들은 온통 얼음장이 된다.

  성도들의 기도의 공동출자는 경건한 자에게 유익이 되도록 작용한다.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행 12:5-7)고 하였다. 천사가 베드로를 감옥에서 끌어냈지만 천사를 이끌어낸 장본은 기도였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약 5:15)고 하였다. 시들한 기도는 시들한 구혼자처럼 일을 진척시키지 못한다. 열정 없는 기도는 불 없이 드리는 제사와 같다. 기도를 가리켜 “심정을 통한 것”이라 불러, 그 열렬함을 나타내고 있다(삼상 1:15). 형식적인 기도는 기도를 질식시킨다.

  당신의 마음을 기도에 집중하고 싶거든 당신의 눈을 고정시키라.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 123:1)라고 하였다. 많은 허영심이 눈을 통해 들어온다. 기도할 때 눈이 갈팡질팡하면, 마음도 갈팡질팡한다. 사랑은 생각들을 한곳에 고정시켜 주는 유력한 막후 해결사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의 생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뗄 수 없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생각이 온통 세상에 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할수록, 그만큼 우리의 마음도 더욱 기도로 하나님께 전심전념할 것이다. 기도하지 않을 때 제멋대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기도할 때 바른 생각으로 회귀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기도하기를 그치는 사람은 하나님 두려워하기를 그치는 사람이다.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폐하여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욥 15:4)라고 하였다. 기도를 그만둔 사람은 아무 악행이든지 범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사울은 하나님께 물어보기를 포기하더니 엔돌의 무당에게 찾아갔다.

  믿음은 기도의 호흡이다. 기도할 때 믿음이 호흡하지 않으면 기도는 죽는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약 1:6)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고 하였다. 믿음이 없는 기도는 지껄이는 것이지,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기도의 손을 잡아주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 믿음이 없는 기도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히 3:19)고 한 말씀은 기도에도 해당된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기도가 하늘나라에 올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기도에 대하여 / 토마스 왓슨의 '묵상'에서 발췌 (113-117p)


출처: 생명나무 쉼터  http://blog.daum.net/7gnak/15721167 /믿음은님



지방교회 주장에 대하여 읽다보면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선생님께서 오시안더의 주장에대하여 분개하고, 몇장에 걸쳐 반박하여 나가시는데, 오시안더의 주장들이 오늘날의 지방교회 주장과 거의 흡사하다는 것입니다.

여기  기독교 강요에서 오시안더에 관한 내용  일부를 발취하였사오니 오시안더의 주장들이 지방교회 주장과 얼마나 정확히 일치하는지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오시안더가 본질적 의라는 괴물을 소개하여 칭의의 교리를 깊은 안개로 휩싸이게 만들어서 경건한 사람들을 어둡게 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생하게 누리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리고 있으므로 다른 문제들을 거론하기 전에 먼저 이 정신 나간 몽상을 반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로 그의 사색은 순전히 허망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성경에서 여러가지 증거들을 수집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이시고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와 하나임을 증명하는데, 사실 이점은 증거가 필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연합의 끈을 보지 못하고 스스로 속이고 마는 것이다. 그가 당면한 모든 난제들을 우리는 쉽게 해결할 수가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의 은밀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본질을 사람 속에다 주입시키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마니교(Manìchaeìsm)의 사고와 유사한 사고를 형성시키고 여기에 자기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허구를 붙여 놓았다 즉,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타락 이전에 이미 인간 본성의 원형을 입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간결하게 다루기를 원하므로 지금 우리가 다루는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살피기로 하겠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라고 말한다. 이는 우리도 동의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본질이 우리의 본질과 뒤섞여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는 자기 스스로 속고 있는 다음과 같은 논리에 이 원리를 잘못 적용시키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이신 것은 그가 영원하신 하나님이사요 의의 근원이 시요 하나님의 의 자체이시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본래의 계획대로라면 다른 곳으로 미루어야 할 내용을 여기서 잠시 언급하고 지나가도 독자들께서는 양해해 주리라 믿는다.

오시안더는 본질적인 의라는 용어가 다른 뜻이 아니고 그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견해에 부응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변명하지만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순종하심과 희생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얻어진 의로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질과 그리스도의 풍성 모두를 주입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서 본질적으로 의로운 자들이라는 식의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아버지와 성령께서도 우리 속에 거하신다고 그렇게 열렬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삼위(三位)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오시안더가 그 사실을 아주 심하게 왜곡시켰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그 거하심의 방식을 생각했어야 옳았올 것이다.  즉, 아버지와 성령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며 신성의 충만하심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있으니( 2: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신성의 전부를 소유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했어야 옳았다. 그러므로 그가 아버지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올 별도로 제시하는 것은 오로지 단순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올 꾀어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나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본질의 혼합을 주장한다. 곧 하나님께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우리 속에 주입시키셔서 - 우리를 자기 자신의 일부로 만드신다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사실에 대해서도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자라나고 그분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시며 우리가 그의 지체들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그는 그리스도의 본질이 우리의 본질과 혼합되지 않고서는 그것이 거의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말했지만 그는 아버지와 성령의 문제를 다루는 가운데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즉 우리가 중보자의 은혜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도 아니요 또한 그 중보자 안에서 의가 단순하게 혹은 안전하게 우리에게 주어지는것도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이 그의 본질 속에서 우리와 연합되실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실 때에 그의 본질을 접속시키심으로 우리의 것이 되시는데 이는 그가 사람으로서 우리의 머리가 되신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고 동시에 그 신성의 본질이 우리 속에 주입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고만 말하고 그쳤더라면, 그의 몽상과도 같은 그릇된 사상이 덜 해를 끼쳤올 것이고 그 오류로 인하여 그런 큰 논쟁이 일어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시안더가 제시하는 이 원리는 마치 오징어와도 같아서 검고 탁한 피를 내뿜어 그 많은 꼬리들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유일하게 충만한 확신올 주는 그 의를 빼앗기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빼앗기도록 내버려 두려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을 강력하게 배격해야 마땅할 것이다.

 개혁주의마을/

"내용이 뭐길래?"

전세계 네티즌 울린 TV광고!

↓ 먼저 아래 영상부터 보시죠

TrueMove H: The Thai Mobile Advert That Has Everyone Weeping


↓ 내용은 이러합니다

"이리 나와! 이 도둑놈아! 도대체 뭘 훔친거야?"
약국 주인 아주머니는 예닐곱살로 보이는
 까까머리 소년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호되게 야단을 쳤다.
"어머니에게 약을 가져다 드릴려구요…"
고개를 푹 숙인 소년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깐만요!"
바로 그 순간 근처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아저씨가 끼여 들었다.
"얘야, 어머니가 아프시니?"
소년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소년의 사정을 눈치 챈 아저씨는 아무말 없이 약값을 대신 치뤘다.
그리고 소년과 비슷한 또래인 딸 '스위티'에게 야채스프를 가져 오라고 시켰다.
잠시 아저씨와 눈을 맞춘 소년은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약과 스프가 담긴 비닐봉투를 받아 들고 집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30년 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제 노인이 된 그는 딸 '스위티'와 함께
예전의 그 자리에서 여전히 음식점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형편은 비록 넉넉하지 않았지만 음식을 구걸하는 거지들을 문전박대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저씨는 가게에서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응급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로 옮겨진 '노인'과 그 곁을 지키는 딸 '스위티'.
간호사는 딸에게 아버지의 병원비를 청구한다. 무려 2700만원.
병원비 마련에 노심초사하던 스위티는 결국 가게를 급매로 내놓는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온 스위티는 아버지 침상 곁을 지키며 잠에 든다.
그 때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침상 위에 살포시 놓여있는 병원비 청구서에는
병원비가 '0'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청구서 뒤에는 조그만 메모지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당신 아버지의 병원비는 이미 30년 전에 지불됐습니다.
세 통의 진통제와 야채스프와 함께…"

그 때 딸 스위티의 머릿 속에 스쳐지나가는 장면 하나.
30년 전 약을 훔치다 붙잡혀 구박을 받던 한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때 그 소년이 어엿한 의사로 성장해 바로 아버지의 주치의를 맡고 있었던 것.
의사는 지극정성으로 아버지를 돌봤다.
"베푸는 것이 가장 최선의 소통 방법입니다"라는
자막과 함께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이 이야기는 태국의 이동통신 회사인
 'True Move H'의 3분짜리 광고영상의 내용을 옮긴 것이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16일(현지시간) 이 광고영상을 소개하며
"전세게 네티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며 화제가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이 영상은 유튜브에도 올라와 약 350만명 시청했으며
네티즌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영상을 본 네티즌들은
 "이동통신 회사가 '소통'을 광고 주제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인데
 '나눔과 보은'을 소재로 삼은 것이 특히 네티즌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 내용을 알고 다시한번 감상해볼까요!


"선생님이여 율법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마태복음 22:36~40 -


마르크스

1) 사회 정치적 무신론

헤겔의 좌파에 속하면서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받아 사회정치적 무신론을 주창한 사람이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 였다.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기독교인으로 교육을 받은 후 무신론자로 그의 생애를 마쳤다.

마르크스는 1818 년 5월 프로이센령 라인주의 트리어에서 부유한 유태계 독인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로 자유주의적 사상의 소유자였다. 트리어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본 대학, 이어 베를린 대학에 진학하여 법학, 역사학, 철학, 특히 당시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헤겔 철학을 배웠다. 1841년 그가 23세 때 마르크스는 베를린에서 부르노 바우어가 이끄는 ‘베를린의 청년 헤겔파’에 속하여 역사, 철학, 문학을 공부하며 무신론으로 기울어졌다. 1842년 바우어가 그의 과격한 신학적 입장 때문에 교수에서 해직되고 그의 사상의 출판이 금지되자 ‘베를린의 청년 헤겔파’는 이제 종교적 비판에서 사회 정치적 비판으로 그 관심을 옮겼다. 포이어바흐의 인본주의적 무신론으로부터
마르크스의 정치적 무신론이 태동된 것이었다. 마르크스 자신도 프러시아 정부의 압박을 받아 1843년 독일을 떠나 파리에 가서 생활하는데 그는 거기서 사회주의적 혁명사상에 접하면서 무신론적 사회주의자와 무신론적 공산주의자로 등장했다. 마르크스에 있어서 그의 무신론은 그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설립하는 데 이념적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2) 변증법적 물질주의

마르크스가 헤겔의 영향을 받아 세계 역사를 변증법적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게 되었으나 그는 결국 헤겔의 사상체계의 중심을 이루는 변증법적 관념론을 거절하고 포이어바흐의 변증법적 물질주의를 택했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를 따라 인간을 의식의 존재로 보기 전에 육체적 및 물질적 존재로 보았다. 그의 세계는 추상적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적 세계였다. 따라서 그는 종교의 출발점을 인간과 현세의 실제적 사건들로 삼았고, 신을 인간이 만들어 낸 돌출물로 보았다.

3) 인간의 역사성

마르크스는 한 걸음 나아가 포이어바흐의 종교비판을 한층 더 심화시켰다. 포이어바흐도 인간의 역사성과 사회성과 실제성을 중요시하기는 했지만 마르크스는 이를 한층 더 심화시켰다. 포이어바흐가 인간을 인류 전체에 속한 우주적 존재로 보면서도 철두철미하게 역사적 존재로 분석하지 않은데 비해, 마르크스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역사적 발전의 틀 안에서 그리고 특수한 역사적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이해하려고 했다.

포이어바흐가 인간을 공동체적 및 사회적 존재로 보면서도 철두철미하게 사회학적 콘텍스트의 관점에서 분석하지 않은 데 비해, 마르크스는 인간을 사회학적 처지의 관점에서 분석했다.

포이어바흐가 계몽과 새로운 인식을 통한 인간해방과 사회개조를 주창하면서도 철두철미하게 실제적인 비판 내지 혁명 활동을 격려하지 않은데 비해, 마르크스는 인간해방을 위한 실제적인 정치활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사회 개조가 밑으로부터 사회를 개조시키는 혁명운동의 결과로 성취된다고 분석하고 노동계급이 실제적 정치투쟁에 가담할것을 요구했다. 착취 받는 무산계급이 착취하는 유산계급을 향해 정치적 계급투쟁과 사회주의적 혁명운동을 일으키는 길만이 인간해방과 사회 구조를 가져오는 길이라고 했다.

4) 공산주의 사회의 이상:사회, 경제, 정치적 인본주의

마르크스는 그의 초기 작품에서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받아 인도주의적 이상을 많이 언급했으나, 그의 후기 작품 특히 그의‘자본론’에서는 사회, 경제, 정치적 이상을 보다 많이 언급했다. 후기 작품에서도 인도주의적 요소가 그대로 남아 있기는 했으나, 그는 모든 인간이 참으로 인간다워지기 위해서는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모순이 제거되고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그대로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인도주의적 사회야말로 마르크스가 제시한 노동계급의 철폐와 사유재산의 철폐와 독재적 지배계급의 철폐로 이루어지는 혁명의 목표이며 계급 없는 공산주의 사회의 이상이었다. 그것은 정부도 종교도 사라져 버린 사회이며 사회 민주주의적 인도주의가 성취된 사회이다. 우리는 여기 마르크스에서 현대 정치신학이 그 궁극적 관심을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그를 규정하는 근본 요인이며 그를 해석하는 근본 틀로서의 역사적(사회, 경제, 정치적) 구조에 두는 사회, 경제, 정치사적 가치 기준이 이미 마련된 것을 보게 된다.
펌글/잠긴동산님


당신은 이세상에 필요한 사람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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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추절 한가위의 유래:


 

추석(음력 8월15일)
삶이 아무리 어렵고 힘겨워도 이날만큼은예쁜 옷 입고 결실의 느낌을 만끽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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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래

추석을 '한가위'라고도 해요.
'한'이란 크다는 뜻이고,  '가위'는 '가운데'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8월의 한가운데 있는 큰 날이란 뜻이지요

가위'란 신라 때 길쌈놀이인 '가배'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48c0de76ee6b8

신라 유리 왕 때 여자들을 두 패로 갈라서 베를 짰는데 한 달 뒤 결과를 봐서 승패를 결정했습니다

진 편은 이긴 편에게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잔치로 갚음을 했는데 여기서 '가배'란 말이 나왔고 나중에 '가위'란 말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 후로 한가윗날 베를 짜는 풍습은 오랫동안 지켜져 내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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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습

추석은 옛날부터 설날과 단오와 함께3대 명절로 꼽혔습니다.
새로 나온 과일과 곡식으로 상을 차려  차례를 지내고 산소에 성묘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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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일로 바빴던 일가 친척들이 모처럼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눠 먹고 놀이도 했습니다.
특히 시집간 딸이 친정 어머니와 중간에서 만나 가져온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회포를 푸는 중로상봉을 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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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은 풍성함을 감사하고 나누는 날이라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떡을 빚어 나눠 먹었습니다.
그래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란'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오솔길사랑방

놀이

전국적으로 여러 가지 놀이가 있습니다.
호남 남해안 일대의 강강술래, 전국적인 소먹이 놀이, 소싸움, 닭싸움, 소놀이, 거북놀이, 줄다리기, 가마싸움 등은 풍년을 축하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언제부터 생겼는지 불꽃놀이를 많이들 합니다.

음식

추석, 하면 뭐니 해도 송편입니다.
멥쌀가루를 뜨거운 물에 반죽해서 속에 깨나  팥, 콩, 밤 등을 넣어 반달 모양으로 빚습니다.
쪄서 찬물에 헹군 다음 참기름을 고루 바르면 완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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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전날 온 가족이 모여 송편을 만들죠.
송편을 예쁘게 빚으면 예쁜 아기를 낳는다고 해서 정성을 다해 빚습니다.
이 때는 추수가 끝나 새로 난 곡식과 과일 등이 풍성해 다양한 햇 음식을 먹습니다.

음식의 종류로는
송편, 토란탕, 닭찜, 배숙, 햇밤, 송이 회, 송이버섯 탕, 송이산적, 송이밥, 화양 적, 청포묵 전, 감자전,  모듬나물 부침, 삼색 전, 느타리버섯산적, 녹두부침 등이 있습니다.


 출처=Daum♡우받세♡

제10장
안수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견해

하나님의 성회의 안수에 대한 견해는 성경의 원리에 기초를 두며 복음주의적인 견해와 일치한다.
다음과 같은 특징은 하나님의 성회 견해에 포함된다.

안수는 공적인 의식으로 정의될 수 있는데, 이 공적인 의식에 의해서 교단은 하나님의 성회에서 사역하고자 하는 사람의 소명과 임무와 자격을 인정하며, 교단의 축복과, 교제와 기회를 베풀고, 그의 헌신과 성실과 충성을 받아들이며, 성공적인 생애와 사역을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주심을 기원한다.
안수식은 성직적인 것보다는 영적이며 기능적인 것으로 거행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미리 부르시고 임무를 맡기신 사실에 대한 공적인 인정으로서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동등하다. 그러나 목사는
특별한 전임봉사와 지도력을 위하여 따로 세운 자이다. 필요한 경우에 평신도가 주정부가 안수받은 목사를 요구하는 것을 제외하고, 목회의 모든 기능을 행할 수 있다.

안수는 6가지 기본적인 자격에 대하여 지원자를 세밀히 조사한 후에만 이행할 수 있다.
1. 그의 기독교 경험의 순수성
2. 그의 영적, 도덕적, 감정적, 그리고 사회적인 성숙도의 충분성
3. 그의 소명에 대한 진실성
4. 그의 교리에 대한 정확성
5. 그의 준비와 실제적인 능력의 적합성
6. 교단의 정책과 프로그램에 대한 그의 의무의 수락 정도

목회를 위한 권위와 능력은 안수식을 거행하는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직접 전달된다. 안수식을 거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특정한 사람이나 그룹이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안수식에 참여하는 사람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도구일 뿐이다. 역사적인 사도직의 계승보다는 그리스도와의 즉각적인 영적 관계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교회의 살아계신 주께서 오늘 날 그의 몸 안에서 직접적이고 역동적으로 임명하고 계신다.
안수는 지역교회의 차원을 벗어나 전 교회에 대한 관심 가운데 행해진다. 이것은 목회 영역에 있어 국제적이었던 사도들이 다섯 개의 신약적 안수식을 개별적으로 관장하였던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회 안수식은 더불어 총회장에 의해 지역총회 차원에서 거행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회 본부총회의 실행위원회에 의해서 인준되며 총회장과 총회 총무에 의해서 서명된다. 또한 각각의 신약교회 의식에 목사들이 참여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성회 안수식에도 실행위원들과 다른 선배목사들이 손을 얹고 기도하는 일에 관여한다.
하나님의 성회는 형식적인 의식보다는 안수식의 영적인 질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대표적인 하나님의 성회 안수식은 금식과 기도 그리고 손을 얹는 것, 설교, 책임, 신약교회의 안수식에서 보이는 다른 요소들을 포함한다.
안수는 딤전 3:1-7과 딛1:5-9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교회에 주신 복음선포 유형의 사역 중 한 조건을 구비한 남자와 여자에게 가능하다. 이것은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감독과 장로)이다. 청소년 지도자, 음
악 혹은 기독교 교육의 지도자로서 사역의 조건을 구비한 사람들은 기독교 사역자 증명이나 특별한 자격증에 대한 자격은 부여할 수 있으나 기본적인 복음 선포목회 사역의 조건을 구비하지 않는 한 안수를 받을 수 없다. 임시의 사역조건(집사)을 구비한 사람들은 자격증 없이 종신 봉사자로 임명된다.

안수의 유익

1. 목사에 대한 유익
첫 번째 유익은 영적, 도덕적, 감정적, 사회적, 지적 그리고 목회적 성숙도의 높은 차원을 나타내주는 목표로서 작용한다. 이것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안수받은 목사는 이러한 모든 영역에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직업적으로 계속 성장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유익은 자신의 기독교 경험의 순수성, 자신의 영적, 도덕적, 감정적 그리고 사회적 성숙도, 자신의 소명에 대한 진실성, 교리에 대한 정확성, 준비와 실제적인 능력의 타당성, 교단의 정책과 프로그램에 대한 자신의 의무의 수락 정도 등에 대해 협력하여 판단할 수 있는 기회가 안수를 통하여 제공된다.

세 번째 유익은 안수로 인하여 두 번째 유익에서 언급된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개인적 그리고 직업적 성숙도와 유효성에 대한 목표이며 시험이며 증언이 된다.

네 번째 유익은 하나님의 성회 교단에서 목회할 수 있는 기회를 안수를 통하여 얻게 되는 것이다. 안수는 목사, 복음전도자, 행정가, 교사, 기관목사(Chaplaincy) 그리고 다른 사역에 있어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중요한 열쇠이다.
따라서 교단 내에서의 사역은 자신의 사역의 열매가 보호될 것이라는 합리적인 보증을 제공한다.

다섯 번째 유익은 안수가 장례식, 결혼식 그리고 마을, 주 혹은 연방의 위원회나 기관에서 봉사하는 특정한 기능에 대한 요구사항을 만족시키는 자격을 부여한다.

여섯 번째 유익은 안수가 목사로 하여금 교단의 생활에 완전히 참여할 수 있게 한다. 즉 정책과 프로그램의 형성을 도우며 지원하고, 교리를 가다듬으며 직분을 맡는다. 그리고 그 외에 일반적이거나 특수한 유익이 많이 있다.

2. 교단에 대한 유익

첫째 유익, 교단의 사역이 순수한 기독교 경험과 자신의 소명에 확신을 가지고 효과적인 사역을 위하여 영적, 도덕적, 감정적, 사회적으로 충분히 성숙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포함하도록 보장함으로써 교단에 유익이 된다.

둘째 유익, 안수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성경내용과 교리에 대하여 충분하고 정확한 이해를 하고 있는 사역을 보장하기 위한 검문소 역할을 함으로써 부조화를 방지하기 때문에 교단에 이익을 준다.
마지막으로 교단의 목사들이 하나님의 성회의 정책과 프로그램에 대한 수준 이상의 지식과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게 됨으로써 교단에 유익하다.

안수를 위한 자격
딤전 3:1-7과 딛1:5-9에서 말씀하는 감독에 대한 자격은 하나님의 성회 총회헌법과 조례에서 취급하는 자격과 더불어 오늘날 모든 목사들에 대한 기준이다.
이에 덧붙여 다음의 특징들은 안수 목사를 위하여 추천되는 것이다.

1. 영적 특징
다음의 영적 특징은 대부분의 생산적인 사역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이다. 경건한 영, 사랑(하나님과 사역과 사람에 대하여, 살전1:3, 딤전6:11,12, 요일3:16), 믿음(롬(12:3-8, 고후3:5,6, 5:18-20, 엡3:7, 4:11, 골1:23-29, 살전1:3), 겸손(잠15:33, 롬12:3) 확신(유3), 헌신(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맡김), 봉사의 영(섬기고자 하는 자세, 사람들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성장하며 잘 되기를 갈망함), 충성(고전4:1,2, 시간 관리하는 면에서, 영적 준비성에 있어서,
사업의 일 등에 있어서).

2. 도덕적 특성
다음과 같은 도덕적 특징은 대부분의 생산적 사역에 있어서 기본적인 것이다. 성실성(기본적 정직성과 인격의 온전함, 영적인 정직(시51:6), 지적인 정직, 설교와 매일 부딪치는 일에 있어서 정직성 및 도덕적 순수성(사52:11, 갈12:10,
2:11-14, 딤전6:11-14, 딤후1:7,9).

3. 감정적 특성
사역에 있어서 비능률과 실패는 건강이 나쁘거나, 도덕적 탈선이나 훈련, 교육 혹은 재능의 부족 때문인 경우보다 감정과 인격의 결함에 기인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므로 설교자가 감정적으로 건전하고 자아이해에 있어서 아주 성숙해야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만일에 해결하지 못한 감정의 문제나 극심한 기분의 진폭, 성격적 갈등, 혹은 강박관념이 있으면 그것은 그의 모든 개인적인 관계에 있어서 자세 뿐 아니라 강대상에서의 자세에 크게 악영향을 줄 것이다. 적어도 다음 일곱가지 인격의 감정적 특징은 목사에게 중요하다. 성화된 기질(갈5:22,23), 균형감각(유머어와 진지함 사이의 균형), 정열, 현실주의 미적 감각(발4:8, 딛1:15), 동정(롬12:15, 히5:1), 인내(롬5:1-5, 벧후1:5-8)

4. 지적특성
다음과 같은 지적 특징은 목사들에게 중요하다. 면학성, 조직력(합리적으로 잘 조직할 것), 절제성(급진적인 극단에 비하여, 고전9:25, 갈5:23, 빌4:5, 딛1:8, 벧후1:6), 논리성, 상상력, 집중력, 기억력(요14:26) 및 지혜(약1:5)

5. 사회적 특징
목사들에게 필요한 사회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사교성, 인간성에 대한 지식, 편견이 없을 것, 협동적 자세, 융화적 성질, 권위에 대한 존경, 가르침 받을 수 있는 성질 및 충성심(가정, 교회, 교단, 동료 및 친구에 대하여)

6. 실제적인 특성
목사가 사역의 기능을 능숙하게 수행할 수 있는 실질적인 능력을 개발하는 것은 생산적인 사역에 있어서 기본적이다. 목사가 자신의 두뇌를 계발시키기 위하여 성경과 신학을 연구하는 것은 중요하나, 자기의 입과 손을 계발하기 위하여 실천신학을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다. 목사는 설교와 교육, 예배, 의식집행, 목회적 돌봄 및 행정들의 기능에 필요한 영적이며 실제적인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안수의 과정
하나님의 성회의 안수는 질서정연한 과정을 밟는데 그 과정은 규정된 중요 서류 심사, 목회적 차원의 승진(인정받은 전도사로서 2년이상 목회에 종사한 후에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다.:역자주), 시험, 안수식으로 되어있다.

1. 조직체로서의 구조와 안수
목사 안수에 관련된 교단 내의 중요한 사람들은 그의 담임목사, 지방회장, 지방회 임원회, 지역총회 총회장, 그리고 지역 총회 실해위원회 등이다. 담임목사는 지원자를 영적으로 돌보며, 사역을 위해 훈련시키며, 실행위원회나 고시위원회에 추천하는자로서 이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된다. 지역총회 안수위원회는 지원자를 최종적으로 심사하며, 지역총회 총회장과 실행위원회들은 그를 안수한다.
하나님의 성회 본부총회 실행위원회는 지역총회에서 이루어진 안수를 인준하
며, 본부총회 행정위원회는 안수증서에 서명과 인을 침으로써 안수에 대하여 증인이 된다.

2. 안수절차
하나님의 성회에서 안수받고자 하는 사람은 담임목사와 상의한 후에 담임목사로부터 지방회장 앞으로 보내는 추천장을 받아야 한다. 지방회장은 지원자에게 지역총회의 추가 자격을 위한 신청서를 기입하도록 배려하고, 지방회 임원회는 이를 심사한다. 그들의 인준을 받게 되면, 지역총회는 그에게 초기 자격(initial credential)을 부여한다. 그는 적어도 2년이상 전도사 수준에서 인정할만한 사역을 유지해야하며, 안수 받기 전에 적어도 23세 이상이어야 한다. 그것은 인격
적으로, 직업적으로 그의 성숙도를 보장하기 위함이다.(초신자는 안된다. 딤전3:6) 안수를 위한 신청서가 지방회장 앞으로 제출되면 다시 지방회 임원회는 그를 심사한다. 여기서 인준이 되면 지역총회의 안수위원회의 면접이 허락되는데
거기서 다시 그를 심사하게 된다. 여기서 인준되면 지역총회에서 안수를 받게 되고 본부총회로부터 안수증서를 받게 된다. 이 자격증서(credential)는 매년마다 목사가 질문서에 기입하므로써 갱신되는데, 이 질문서는 지역총회와 본부총회가 보관한다.

3. 안수를 위한 고시
지방회 임원회나 지역총회 안수 위원회는 필기시험과 구두면접을 통해 다음 사항에 의거하여 지원자를 심사한다.

1) 기독교 경험의 순수성
2) 사역에 대한 소명의 진실성
3) 영적, 도덕적, 감정적, 사회적인 성숙도의 충분성
4) 성경내용과 교리에 대한 이해의 충분성과 적합성
5) 그의 준비와 실제적인 능력의 적합성
6) 교단의 정책과 프로그램에 대한 의무와 지식의 정도

4. 안수식
하나님의 성회는 형식적인 예식보다는 안수식의 영적인 질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성례전주의자들이 믿는 것처럼 우리의 말과 손에 의하여 초자연적인 은혜와 능력이 전달된다고 믿지는 않지만, 우리가 안수받는 사람 위에 손을 얹고 기도함으로써 그의 사역을 완수하는데 필요한 은혜와 능력을 그리스도께서 주실 수 있으며,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이와같이 안수식은 안수받는 자가 부르심을 받아 임무를 받았으며 성숙한 사역을 위한 자격이 있음을 공적으로 알리는 것 외에, 목사가 자기의 생애를 완전히 헌신하며, 봉사를 위한 최상의 은혜와 능력을 받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적 경험의 기회를 제공한다.

안수의 책임들
순수한 복음사역에 대한 안수는 관계되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책임있는 단계이다. 엄숙한 책임이 안수하는 교단에게 주어지며, 안수받는 목사에게와 안수받는 자가 섬기게 되는 당사자들에게 주어진다.

1. 교단의 책임
6가지 심사해야 할 사항에 나타난 바대로 성경적인 자격에 상당히 적합한 목사만을 안수하는 것은 교단의 책임이다. 그 안수 받은 목사들 가운데 개인적인 경건생활과 목회적인 숙련도에 있어서 수준을 높이도록 권하는 것도 교단의 책임이다. 그 안수받은 목사들 가운데 영적, 도덕적, 감정적, 사회적, 지적, 직업적인 성장을 위한 수단을 제공하는 것은 교단의 책임이다. 열매가 풍성한 사역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교단의 책임이다.

2. 목사의 책임
6가지 심사기준에 나타난 바대로 성경적인 자격에 대하여 주님의 도우심을 힘 입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자격을 획득하는 것은 목사의 책임이다. 주님께서 그를 도와 획득할 수 있게 하시는 최고 수준의 개인적 경건생활과 목회의 숙련도를 유지하는 것은 목사의 책임이다. 스스로 점검하며 계속적인 성장의 자극제로서 매년 안수질문서를 기입할 때 마다 안수의 정의, 성경적인 자격, 심사의 6가지 기준을 재검토하는 것이 좋다. 자기가 사여하는 사람들과 교단에게 그리고 주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는 봉사가 되게 하기 위하여 헌신과 사랑, 믿음, 기름부음 및 충성으로써 사역의 기회에 들어가는 것은 목사의 책임이다.

3. 사역 대상자들의 책임
한 목사가 사역하는 대상자들의 책임은 다음과 같다.
1) 그를 하나님의 사자로 받아들이라.(눅10:16, 고전4:21, 갈4:14)
2) 그를 위해 기도하라(롬15:30, 고후1:11, 엡6:18,19, 히13:18)
3) 그를 사랑하며 존경하라(고후8:7, 살전3:6, 5:12,13)
4) 그를 따르며 복종하라(고전11:1, 16:16, 빌3:17, 히13:7,17)
5) 그를 재정적으로 관대하게 지원하라(고전9:7-14, 갈6:6, 딤전5:17,18)

안수사역의 질을 높이기
복음사역보다 더 가치있고 귀한 목적을 지닌 직업은 없다. 안수는 성숙에 대한 목표이며, 시험이며, 증거일 뿐 아니라 생활과 사역에 있어서 능력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몇 가지 점에 있어서 집중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다음의 제안은 안수받기 위한 과정 및 그 후의 일들을 통해 사역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만들어 졌다.

1. 처음으로 자격(credential)을 받는 사람은 안수에 관한 본부총회 정책방침서(position paper)의 사본을 받게 되는데 안수를 진척시키면서 주의 깊게 읽어 보아야 한다.

2. 자격 심의 위원회(credential committee)는 맡은 바 일을 진지하게 수행하여야 한다. 그들은 누가 안수를 받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성령의 음성에 민감해야 한다.(행13:2, 14:26, 20:28) 그들은 높은 질적 수준을 유지해야 하며, 의
문이 가는 지원자에 대하여 일년 혹은 그 이상 마지못해 유예기간을 연장해 주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기독교 사역증명이나 모든 승진에 대한 지원자들을 이 책에서 반복해서 다룬 6가지 점에 대하여 세심하게 조사하여야 한다.

3. 인격, 감정문제, 인간관계에 대한 견해, 영적 및 실제적인 일등에 한 광범위한 설문서를 개발하여 실해위원이 자격이나 승진의 기회를 찾는 사람들에 대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해야한다. 이러한 설문서는 실행위원이나, 자격 심사위원 혹
은 위촉된 지방회 상담자가 상담시간의 기본적인 자료로 사용할 수 있다. 이러한 설문서는 위원회에 의해 장점, 단점, 추천 등의 메모를 기입할 수 있는 여백을 지닌 목사의 서류철에 있어서 작업표가 되기도 한다. 이것은 지원자가 안수를 받을 때까지 보다 나은 분석, 지속성 그리고 사후관리에 기여한다. 이것은 지원자가 안수 받을 때까지 비밀로 보관하며 그 후에는 파기한다.

4. 안수가 예상되는 목사에게 그의 수습기간에 교리에 대한 신조 및 사역의 기능에 대하여 쓸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지방회장과 지방회 임원회가 읽고 지원자가 안수받을 때까지 서류철에 보관하였다가 본인에게 돌려준다. 위에서 언급한 신조와 설문서는 지원자가 자신을 이해하며 자신의 믿는 것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능력을 획득하는 것을 돕는 일에 사용된다. 또한 이것들은 자격 심사위원회로 하여금 지원자의 인격, 믿음, 장점 및 필요한 것에 대한 통찰력을 갖게 한다. 이것들은 지원자가 합격해야하는 시험으로서가 아니라 지원자의 상담과 성장을 위하여 사용된다.

5. 담임목사와 지방회장과 지방회 임원의 일을 보충하며, 지방회 차원의 목회상담에 임할 때까지 철해둔다. 목회 상담은 반드시 깊이 있고 장시간 상담하는데 필요한 전문적으로 숙련된 상담자일 필요는 없다. 성숙한 목사들이 돌아가면서 상담을 해줄 수 있으며, 퇴직한 목사나 현역 목사들을 이 일에 임명할 수 있다.
이런 원로목사들은 다년간 경험을 통해 우수한 상담을 제공할 수 있으며 수수료를 받을 수 있다면 약간의 보수를 받으면서 이 사역을 계속할 수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목사들에게 매우 긴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특히 젊은 목사와 그 동료들이 그들의 생활과 사역에 대한 도움의 필요성을 인정함에 따라 더욱 긴요해지고 있다. 이러한 사역은 실행위원의 짐을 덜어주며, 젊은 설교자들에게 개인적, 가정적, 사역적인 성장을 이룩하는데 도움이 되고, 성회 내에서 조화와 진보를 증가시키는 일에 도움이 된다.

6. 안수식을 진실로 중요한 영적 경험이 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초대교회에서 금식과 기도가 표준 과정이었음을 안다. 우리는 손을 얹는 외적인 상징에 머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안수식에서 금식과 기도의 영적인 경험이 있어야 한다.(행13:3)

7. 기본적이며 지속적인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 우리는 안수를 위해 공식적인 학문이나 학위를 요구하지 않으나(1951년 총회에서 의결) 교단은 사역을 위한 교육의 중요성을 확실히 해야 한다. 오늘날 대부분 안수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회 성경대학 졸업생들이다. 정규 신학교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들은 연장교육, 통신교육, 강습소, 세미나 및 독서 프로그램 등을 통하여 공부할 것이 요청된다.(딤후2:15)

8. 모든 기회를 통해 (하나님의 성회 성경대학, 신학교, 강습소 등) 실질적인 영적, 도덕적, 윤리적, 감정적, 사회적, 지적 및 실제적인 일을 강조한다.

9. 하나님의 성회 성경대학과 신학교는 인격적으로 성숙하며 감정적, 사회적, 영적 생활에 있어서 성숙하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을 행정요원과 교수요원으로 채용해야 한다. 또한 이 사람들은 성경의 거룩함, 오순절적 특성, 교리 그리고 하나님의 성회의 정책과 프로그램 등에 헌신되어야 하며, 목회사역의 성공, 계속적인 기름부음, 사역에서의 활동성 그리고 목회에 있어서 절대로 필요한 주제들에 대한인지 등이 입증된 사람이어야 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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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존 칼빈의 <기독교 강요(상)>(완결판, 크리스챤다이제스트)를 풀어서 요약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경건의 관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경건의 토대가 됩니다. 반대로, 신앙이나 경건이 없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식’이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구속주로 이해하는 지식이 아니라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을 경우 자연 질서를 통해 깨닫게 될 지식을 의미합니다. [주: 그러므로 여기서는 구속주 그리스도가 아닌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경건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타락 이후 인류는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구원의 주인으로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창조주이자 선하신 분으로 아는 것과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주로 아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자연 속에서나 성경 속에서 하나님은 먼저 자신을 창조주로 보여주신 후에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주로 나타나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먼저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히 어렴풋하게 어떤 신적 절대자가 존재한다고 아는 것과는 다른 지식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모든 선의 유일한 근원이시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진리, 의, 선 등의 모든 것이 근원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만 이런 것들을 구하고 그분께만 감사를 드리게 하는 지식입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이 베푸시는 온갖 유익들을 아는 데서 생겨나는 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그를 향한 사랑이 하나로 결합된 상태”(46쪽)를 말합니다. [주: 즉 칼빈에게 ‘경건’은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두려움과 사랑이라는 정서가 함께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모든 선의 궁극적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기꺼이 하나님께 복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만 완전한 행복을 구할 수 있다는 지식이 경건과 복종, 헌신의 기초가 됩니다.


(2)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은 신뢰와 경외로 이어짐

에피쿠로스(Epicurus)와 같은 철학자들은 우리 자신과는 무관한 존재로서의 신에 대해 질문하고 사색합니다. 하지만 그 신이 우리와 무관하다면 그런 신을 알고 고백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반드시 우리 자신과 깊이 관계가 있는 지식이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경외가 생겨나게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를 안내하고 가르쳐서 하나님께만 선을 구하고 받은 모든 선에 대한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게 합니다. 셋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지배하는 법이 되게 하여 우리 삶을 하나님께 드리게 합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은 자기 뜻대로 하나님을 만들어 내지 않고 하나님 자신 그대로를 붙잡으려 하며 그분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자신을 모두 맡기며 그로 인해 평안을 누립니다. 하나님을 의로우신 재판장으로 보며 두려워하지만, 구속의 길이 전혀 없는 것처럼 지나치게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악인을 벌하는 분으로 보는 동시에 또한 경건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으로 바라보는 것”(48쪽)입니다. 경건한 자가 죄를 범하지 않으려 하는 동기는 단순히 지옥에 대한 형벌을 피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높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지옥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거스른다는 것만으로도 끔찍스러워 견딜 수 없는 심정일 것”(48쪽)입니다.

하지만 예식이 화려한 곳일수록 하나님을 진정으로 공경하는 사람을 찾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출처 : 크리에티브커먼즈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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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보혈의피| 원글보기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 8 >  
글쓴이 : 관리자    


“어지러운 세상 중에…”


0037. “내 백성아 그녀에게서 나오라”
        (요한계시록 18:4 ‘거기서’가 아님)  

전대미문의 로마의 잔인성으로 인하여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를 로마로 부르지 못하고 ‘바벨론’으로 불렀다. 요한계시록 14~18장에 집중적으로 언급되어 있는 이 바벨론의 비밀에 대한 무지가 실은 엄청난 위력의 재앙을 교회와 국가로 불러들이고 있다. 종교의 탈을 쓰고 정치, 경제 세력 확장을 꾸준히 이루어온, 인류역사상 가장 스캔들 거리인 이 조직체에 대한 어두움이 온 세상을 파멸의 길로 몰아가고 있는 중이다. 독일의 튀빙겐대학의 로마카톨릭 신학부의 실천신학 교수 글라이나헤르(Gleinacher)가 마가복음 10:24~44을 인용,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Der Spiegel, 1991, #50)에 기고한 글에서 ‘로마카톨릭교회는 우리의 인간사회에 남아있는 최후의 전체주의 조직 중 하나이다’라고 언급한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배도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1)초대교부들의 신약의 바벨론을 로마로 보았고 2)개혁자들이 또한 그러하였고 3)성경사전들이 그렇게 단정하고 있으며 4)로마교황이 공인한 천주교의 공인 성경으로서 현재 시중에서 구입이 가능한 The Official Catholic Bible (ISBN 0-529-06811-7)이나, Catholic Study Bible (Oxford Univ. Press)의 계시록 14~18장에 언급된 바벨론에 대한 각주해석이 모두 『로마』임을 저들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다.
1986년 로마교황청은 성『프란시스』의 고향 이태리의 아씨씨에서 12개 종교의 대표들을 초청 ‘평화의 이름안에서’(단 8:25 참조) 첫 모임을, 1992년에 두 번째, 2002년 1월에 세 번째로 모였다(New York Times, Jan. 25, 2002). 살후 2장에 언급된 배도의 주역 저 “죄의 사람”(살후 2:3 kjv)은 뉴에이지 운동을 주도, 종교통합을 시도하고 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UR)에서 불러내신 하나님께서는 UN 산하의 종교통합 기구인 우르(UR-United Religions)에서 오늘도 자기 백성들을 불러내고 계시며, 이 적그리스도의 체제는 ‘새 세계’질서(NWO)아래, 즉 ‘단일세계정부/단일경제’로 세상을 몰아가고 있는 중이다. (*『짐승 위에 탄 여자』- 로마카톨릭교회와 종말 - 요한계시록 17-18장에 나타난 이 여인은 도데체 누구인가? / Dave Hunt 저 정태윤 역 420pp / $40 / 품절된 책이나 역자에게 조금 남아있어 새생명말씀사 604-936-0691나 아래 빅토리아 주소에서 9월말까지 1차 주문 접수 중, 책은 미국에서 직송예정)

0038. 그리스도냐? 벨리알이냐?

‘한국복음주의협의회’사람들이나 무슨 ‘4인방’인가 하는 사람들이 실은 ‘신복음주의자’들이다. 배도의 지름길에 들어서서 자신들의 위치를 깨닫지도 못하고 온갖 조무래기 이단들을 다 나열하면서도 ‘가장 거대한 이단’ 천주교는 늘 이단 목록에서 빼 놓음으로써 양(羊)들로 하여금 천주교를 정통으로 보게끔 오도하는 이적(利敵, ‘적을 이롭게 하는’)행위를 하고 있다. 영국 성공회 39개 종교강령에 1년에 네 차례 로마교황의 수장권(Supremacy)을 논박하는 설교를 하도록 규정한 교회법 제1조를 목회자들이 스스로 어김으로써 직무유기죄를 짓고 있으며, 향(向)로마 지도자들인 John Stott / J. I. Packer 같은 지도자들 아래서 1200여명의 성공회 사제들이 집단으로 천주교로 넘어가는 배도가 일어났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에큐메니즘』이란 깃발 아래 로마카톨릭교회라는 종교의 얼굴을 가지고 가이사의 정치세력을 구축해온 두 얼굴의 집단, ‘로마 교황청’이란 ‘초대형 이단’ 집단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객관적으로 인정된’ 유명한(?) 소경들이 많이 있다. 저들은 좁은 길, 고난의 길을 멸시하며, 낮아진 소수의 무리와 고독한 길을 비웃으면서, 넓은 길, ‘부흥이란 이름의 배도’의 가도를 달린다. 이‘가련한 잡종’같은‘나이브’한 기독교계 지도자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5번이나 “어찌?”(고후6.14-16)로 경고하고 두 번이나 “저주”를 선언하고 있다(갈 1장).

0039.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고후 5:15)

시사주간지 타임이 이 세대를 두고 ‘하나님을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바쁜 저주받은 세대’라고 평한 적이 있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는 자는 항상 자신을 기쁘게 하고 자기를 섬기며 자기를 위해 살기 위해 자가발전에 동력원이 되는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맘몬(돈)을 자신의 신으로 섬기게 된다. 누가15:11~32의 ‘두 탕자’처럼 자기애(自己愛)와 자기의(自己義)로 가득한 의지는 자기 이익을 주장하고 추구하는데 목숨을 건다. 이 얼마나 서글프고 역겨운 현실인가. ‘너는 누구를 기쁘게 하고 있는가?’고 주님 물으신다. 스펄젼 목사님이 “영국국교회에서 가장 고귀한 인물”로 평한 라일(J.C. Ryle, 1816~1900)주교의 권고는 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신앙에서 열심이란 세상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증진하려는 불타는 열망이다. 그것은 어떤 사람도 자연적으로는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성령께서 신자들이 회심할 때 각 신자들의 마음에 불어넣으시는 열망이다. …… 그는 오직 한 가지 일만 보며, 한 가지 일만 신경쓰고, 한 가지 일을 위해 살고, 한 가지 일만 받아들인다. 그 한 가지 일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살든지 죽든지, 건강하든지 병들었든지, 부유하든지 가난하든지, 사람들을 기쁘게 하든지 화나게 하든지, 자신이 현명하다고 생각되든지 어리석다고 생각되든지, 비난을 받든지 칭찬을 받든지, 영광을 얻든지 수치를 당하든지, 이 열심 있는 사람은 다른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는 한 가지 일만을 위해 열심을 내는데 그 한 가지 일이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촉진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열심으로 인해 소진되어 버린다 할지라도 그는 괘념치 않고 만족한다. 그는 등잔과도 같이 자신이 타 버리도록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타다 소진된다 해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일을 수행할 뿐이라고 생각한다......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신앙의 ’열심’이다”

못박힌 손발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찬송가147/주 달려 죽은 십자가③)

 구영재 선교사 [KOO,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Canada]/진설병





성령과 조명 /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 발췌

 
제 5장   성령과 조명(照明)

앞 장에서 우리는 계시가 모든 지식의 근원임을 보았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의 두 가지 종류의 계시를 주셨다. 일반 계시는 창조된 세상의 모든 부문에서 볼 수 있고, 특별 계시는 성경이다. 이 두 계시가 모든 지식의 근원이다. 일반 계시가 한 근원이긴 하지만 성경 없이는 올바로 분별하기 어렵다. 우리는 성경이 성령의 포괄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속적인 음성이요, 오류가 없다는 사실까지 밝혔다. 만일 누구나 참 지식 가지기를 원한다면 이 두 계시에 가야 하고, 거기서 그는 그 마음에 확실한 것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은 진리가 정확하게 기록된 외적, 객관적 계시를 가지는 것으로 충분치 않음을 암시한 적이 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이전, 아담과 하와의 무죄 시에는 이것으로 충족하였다. 그러나 일단 죄가 세상에 들어오자, 일반·특별 두 계시로도 참 지식을 주기에 미흡하게 되었다. 이 두 계시가 자체로서 불충분함도 아니요, 어떤 점에 모자람이 있어서도 아니다. 일반 계시에 관한 한, 창조된 세계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분명히 보인다(롬1:20). 특별 계시에 관한 한,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 원어에 있어서 모든 말이 일점일획까지 정확한 성경을 주셨다. 계시들은 완전하고, 분명하고, 평이하다. 결함은 거기에 있지 않다. 그것들은 사람에게 절대적 지식을 제공하기에 온전히 충족하다.

그러나 결함은 사람에게 있다. 본 장에서는 사람이 성경을 바로 읽을 수 있도록 눈을 주시고 마음을 조명하심이 어떻게 성령의 일인지를 보겠다.

처음에 인간의 영적 조명의 필요성을 살피고, 다음에 성령께서 그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하신 분임을 살펴야겠다.


1. 인간의 암매(暗昧)

신약 성경은 자연인이 두더지처럼 암매하여서 그 크고 분명한 진리가 사도에 의하여 제시되어도 깨닫지 못함을 암시한다. 누가는 루디아가 다른 여인들과 함께 강가에서 바울의 전도를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여시사 바울의 말한 것을 청종케 하셨다(행16:14)고 말한다. 여기에 분명히 내포된 것은 그가 처음에 들었을 때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그의 마음은 영적으로 무디었다. 이방 에베소 인에 대한 바울의 묘사를 빌린다면 그 여자의 총명은 어두워져 있었다(엡4:18). 그가 그 말하는 헬라어는 알아들었으나 그 말의 참 의미는 몰랐다. 그러나 주께서 그 마음을 여시매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주 없이는 그에게 영적 총명이 없었다. 그 여인은 소경이었다.

바울은 영혼의 암매를 마음에 드리운 베일로 묘사한다(고호3:12-18). 회개치 아니한 유대인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그는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하였다. 모세의 기록들이 그들에게 읽혀질 때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모세의 글이 어려워서가 아니요, 그들의 마음에 수건이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 수건은 그들이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니, 바울은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16절)고 했다. 그러면 그들이 이해하리라는 의미이다.

자연인에게 영적인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음을 가장 분명히 보여 주는 성경 말씀은 아마도 고린도전서 1장과 2장일 것이다. 거기서 바울은 버림받은 자들은 복음을 들어도 그것을 헛소리로 여긴다고 하였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고전1:18) 자연인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이해할 수 있다면 지혜 있는 자와 문벌 좋은 자와 능한 자가 많이 그리스도인이 되리라.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 영리한 사람들이 기독교를 영접하지 않는 이유는, IQ에 상관없이 거듭나지 않고는 모든 마음이 어두워진 때문이다. 바울도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고전2:14)라고 분명한 말로 밝힌다. 그는 지둔(遲鈍)한 자연인 혹은 무식한 또는 교양 없는 자연인이라 하지 않고 단순히 자연인이라고 말했다. 타고난 지능에 상관없이 육에 속한 사람은 단순히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않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미련한 것으로 여기며 창조의 기사를 분명한 과학적 사실과 모순된다 하여 저버리며 아담과 하와 및 뱀의 역사를 한낱 동화로 생각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신약 성경의 주장도 후대 교회의 미련한 저자가 좀 더 알지 못하여서 그렇다고 판단해 버린다. 대속의 역사도 그에겐 어리석게 보인다. 예정과 인간의 책임은 분명한 모순이다. 전능하시며 또한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를 예상하신 것은 그에게 불합리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미련하게 여기므로(고전2:14)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은 자가 된다(롬1:22). 바울은 이 가르침을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라고 강력히 재 확언했다. 그가 그런 것들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울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일은 영적으로 분변(分辨)되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자만이 알 수 있고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성경이 자연인은 전적으로 암매하다고 말한다 해서 거듭난 자는 그 반대로 완전히 밝은 눈을 가졌다고 추단해서는 안 된다. 시편 기자는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 하였다. 구약에는 놀라운 것들이 있다. 그것들이 시편 기자 앞에 있었다. 그는 율법에 더하여 어떤 것을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앞에 있는 그것을 볼 수가 없어서 이 “놀라운 것들”을 볼 수 있도록 자기의 영적 눈을 열어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요컨대 다윗은 거듭났을지라도 영적으로 일부분 암매하였다.

신약 성경도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부분적인 암매를 암시한다. 누가는 승천 전의 사건을 얘기하는 가운데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구약 성경의 예언에 관하여 말씀하실 때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눅24:45)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기 전에는 그들이 성경을 백 번을 읽었을지라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의 마음은 닫혀 있었다.

.... 중략....

이와 같이, 성경의 틀림없는 교훈은 하나님의 이중의 계시 곧 창조된 세계와 성경에서 지혜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계시들은 명백하다. 그러나 죄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다. 성령이 그 안에서 성화의 역사를 시작하심으로써 거듭난 자는 최소한 이 진리들의 근본은 이해할 수 있지만 자연인은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그것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계시에서 이 진리들을 마땅히 볼 수 있어야 할터인데 그러지 못한다. 구름 없는 한낮에 한 사람을 밖으로 데려 나가서 빛나는 해를 보게 한 다음 그에게 무엇을 보았는지 물어보라. 만일 그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말하면 그는 틀림없이 시각 장애인이어서 안과의에게 갈 필요가 있다. 같은 이치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간의 죄,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심을 쉽게 증거해 주는 명쾌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사람 앞에 내놓고 그 진리들을 보는지 물어보라. 만일 그가 “그것들은 진리로 볼 수 없소. 옛날 얘기요. 사람의 상상으로 지어낸 다만 무식자만이 믿는 뻔한 헛소리요.”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도 역시 전적으로 소경임을 알 수 있다. 그는 한 가지도 볼 수 없다. 성경은 그 이상 쉬울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마치 해처럼 빛나기 때문에, 마땅히 볼 수 있어야 함에도 만일 그 진리를 보지 못한다면 이는 반드시 그가 영적 소경인 탓이다. 성경이 말한 대로 육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일을 받지 못한다. 베일이 그의 마음을 가리고 그의 눈이 닫혀 있기 때문이다.


2. 성령의 조명

그러므로 참 지식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분명한 계시를 가지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사람이 또한 볼 수 있어야 한다. 성령이 개입하는 것도 바로 이 점에서다. 그는 사람에게 오류 없는 책을 주실 뿐 아니라 그 책을 읽을 눈도 주신다.

이미 언급한 몇 구절은 사람의 영안(靈眼)을 여는 것이 사람의 일이 아니요 하나님의 행위임을 명시한다. 시편 기자는 스스로 자기 눈을 열 수 없는 무능력을 느끼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이르기를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라고 하였다.

.... 중략....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2:4,5)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 일에 있어서는 바울이나 그 누가 신앙이나 신앙에 필요한 지식을 수사나, 웅변, 논리 등으로써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오는 것이다. 그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스런 방법으로 마음에 찾아 오시며 복음의 진리를 저항할 수 없이 확신시키어서 믿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의 믿음은 사람의 지혜와 같이 속절없는 것 위에 서지 않고 성령의 능력에 서 있다.

.... 중략....

이제 이를 종합하면 성령께서 사람들의 생명 속에 오실 때 그는 그들을 조명하며, 지식을 주고 가르치며, 그들의 눈을 여시고 가려진 마음의 수건을 벗기시며 마음을 유화(柔和)시키사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알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가 없이는 사람은 계시의 진리에 암매하며, 오직 성령과 능력이 나타날 때 사람은 모든 것을 알게 된다.

성령이 은밀한 계시, 새 계시를 사람에게 줌으로써 그를 조명하지는 않는다. 성경이 완성된 후로는 계시가 더 없었다. 특별계시는 신약으로 종결되었다. 더구나 새 계시를 주는 일은 마치 하늘에 태양 둘을 둠으로써 소경으로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처럼 무익하다. 성령께서는 지식의 내용을 첨가함으로써 사람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마음에 신비하게 역사하여 이미 주어진 계시를 볼 수 있게 하신다. 시편 기자는 또 다른 법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 앞에 이미 있는 율법을 보도록 눈을 뜨게 하여 줄 것을 구하였다. 회개치 않은 유대인들에게는 모세의 계시 위에 다른 계시가 더 필요한 것이 아니요 다만 그들의 마음의 베일을 벗기는 것이 필요하였다. 에베소인들에게는 다른 복음이 필요치 않고 바울이 이미 그들에게 가르쳤던 복음을 보지 못하게 막는 어둠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살전1:5)고 쓸 때 그가 새로운 메시지를 주었다 하지 않고 옛것을 새로운 방법으로 주었다고 말한다. 같은 모양으로 고린도 교인들이 다른 지혜 있는 자도 이해 못한 복음을 깨달은 것은 어떤 새 계시를 받은 때문이 아니고 이전의 계시가 “성령과 능력이 나타남”으로 임하였기 때문이다.

이 조명은 주의 천사가 발람의 길 앞에 섰을 때 그의 눈에 열린 것에 비할 수 있으니 천사는 거기 있었고 나귀는 그를 볼 수 있었으나 발람은 볼 수 없었다. 발람으로 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또 다른 천사를 보내야 했던 것이 아니고 다만 그의 눈을 열어 줌으로써 그는 이미 거기 있던 천사를 보게 하기만 하면 되었다.

또한 이 조명은 망원경의 효과에 비할 수도 있겠다. 사람은 이것 없이는 무한의 거리에 있는 저 별들을 볼 수 없다. 그렇지만 별들은 거기에 있다. 그가 필요한 것은 곧장 자기 앞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새 눈인 망원경이다. 망원경은 그 앞에 새로운 물체를 놓아 주는 것이 아니요 이미 거기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성령의 조명도 이와 같다. 성령은 사람의 영안을 열어 이미 그 앞에 있는 계시를 보게 한다. 만일 그가 단 한 계시도 볼 수 없다면 천의 계시로도 그로 보게 하는 데는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조명은 어떤 새 지식의 부여가 아니라 사람 앞에 분명히 놓여진 것을 볼 수 있도록 그 눈을 열어 주는 것이다.


결론

이 사실들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수수께끼로 남았을 것을 설명하여 준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데, 만일 기독교가 그처럼 좋고 이 세상과 내세에 최대의 유익을 끼치며 그처럼 논리적이요, 그것이 모든 참 지식의 근원이라면 왜 더 많은 사람이 믿지 않는가? 왜 교회가 대학 출신과 전문가들로 구성되지 않았는가? 왜 높은 교육을 받은 자들이 교회로 많이 모여들지 않는가?

몰론 대답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인간의 지혜에 달려 있지 않고 영적 맹목자로 하여금 보게 하시는 성령의 조명의 역사에 달려 있다는 데 있다.

같은 이유로 때로는 어떤 엉뚱한 사람들도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우리는 때때로 인간적인 견지에서 사람을 보고 속으로 판단하기를 “저 사람은 소망이 없어, 너무 완고해서 신자가 되지 못할 거야, 그는 무관심하고 죄 중에 빠져 냉담할 뿐이야, 욕지거리를 지독히 하고 생활은 추문투성인 걸” 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런 사람이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생전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완악한 죄인이 눈에 눈물이 어리어 그리스도에게 나온다. 들국화가 코끼리 발에 짓눌려지지 않을 수 없듯이 그가 복음의 부름에 귀를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사람에게가 아니고 성령께 의존하는 까닭이다. 천재든지 강퍅한 죄수든지 차이가 없다. 오직 성령이 그의 마음속에서 일하시면 그의 마음은 부드럽게 녹아지고, 혹은 에스겔이 말한 대로 돌 같은 마음이 살같이 된다(겔11:19).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면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가 상대할 사람을 조명하여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노력은 무효하다. 우리가 회개치 않은 친구를 가장 웅변적이고 인기 있는 설교자의 말을 듣게 할 수도 있고, 그와 함께 논리적인 변론을 할 수도 있으며(기독교는 찬란한 논리를 가졌다.) 아주 교묘하고 불쾌감을 주지 않는 요령 있는 방법으로 그에게 접근할 수도 있으며 또 한 숨이 다할 때까지 담론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성령께서 그의 눈을 열어 그의 마음에서 수건을 벗기고 그로 진리를 보고 믿게 하시지 않으면 이 모두가 수포로 돌아간다. 이와 같이 영혼을 얻는 데 첫째 조건은, 성령께서 그 회개치 않는 자의 마음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하는 일이다. 한번 그것이 일어나기만 하면 비록 우리가 서툴고 미련함이 있다 할지라도 그가 이해치 못하게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영혼을 얻으려다 낙심하게 되는 대부분의 원인은 우리가 전도지를 전해 주며 복음을 증거할 때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의 생명 안에 성령의 조명의 역사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 사실에 있다.

우리 자신의 지식에 관해서도 우리는 성령을 구해야 한다. 바울이 편지한 에베소인들이 이미 그리스도인들이었음을 기억하자. 그들은 바울이 그 영광스러운 제 1장을 써서 그들에게 그들의 믿음의 터가 영원하고 예정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있음을 전달받아 이를 아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는 같은 장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허락하시사 그들의 깨닫는 눈이 밝아져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를 알도록 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였다(엡1:17-19).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로 아직 우리 눈에 상당한 몽롱함이 있고(어떤 이는 다른 이보다 많이), 아직도 암매로부터 자유치 못하며, 마땅히 보아야 할 때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지혜와 계시의 영이 오사 우리로 계시의 큰 진리들을 더 볼 수 있도록 우리 눈을 조명하시기를 항상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전장과 본 장의 결론으로, 기독교는 모든 참 지식의 비결을 가지고 있다. 이 비결은 성령의 이중(二重)의 역사에 달려 있다. 그것은 성경, 곧 모든 지식의 근원이며, 또한 자연 계시를 정확히 설명해 주는 데 근원이 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달려 있으며, 또한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조명해 주심에 달려 있다. 만일 사람이 성령의 이런 역사에 의지하면 그는 철인(哲人)들이 만대에 걸쳐 탐구한 것 이상의 참 지식을 얻을 것이며 그래서 그는 만족할 것이다.


에드윈 H. 파머의 “감동적인 성경적 성령론“에서 발췌(91~104p)/믿음은님

아담에게 진정한 은신처를 가르쳐 주신 하나님(호라티우스 보나르)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임재 안에 설 수 있을까? 내 편에서는 행복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편에서는 은혜로이 나를 받아 주시면서 … ."

이것은 죄인이 마음에 품고 있는 질문입니다. 죄인은 그것을 알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자기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죄가 가로놓여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맨 처음 사람 아담은 이 질문을 마음에 품고 있었기 때문에 수치를 가리기 위하여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만들어 입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 잎으로는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그는 곧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부분만 가리는 것으로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습니다. 반드시 완전히 가리는 일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조차도 꿰뚫어 볼 수 없는 것으로 가리는 일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가까이 다가오실수록, 자신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만든 치마가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낙원의 울창한 숲으로 황급히 숨어 버렸습니다.

아담에게 진정한 은신처를 가르쳐 주신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께서 두려워 떨고 있던 아담에게 가까이 다가가셔서 그가 숨어 있는 곳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아담에게 해결책이 될 것을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치를 가리기에 더 나은 것, 그리고 더 나은 은신처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은혜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곧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의 편에 서셔서 죄인의 원수, 즉 옛 뱀을 대적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 여인의 후손, 곧 진정한 은신처가 되는 그 사람(사 32:2)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아담은 안심하고 숲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계시된 은혜 안에서 아무런 두려움이나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롬 5:2). 그는 기쁜 소식을 들었고, 비록 그 소식은 짧은 것이었지만 그 소식을 통해 아담의 담대함은 회복되었고, 아담이 느끼던 공포는 제거되었습니다.

기쁜 소식을 들읍시다. 아담이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해 주신 그 소식을 듣고 믿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기쁜 소식을 들읍시다. 우리에게 믿으라고 계시된 이 기쁜 소식은 사람의 권위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로서 우리 앞에 제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라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그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믿음은 반드시 신적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신 말씀들을 여기에 몇 구절 인용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는 심령이 이 말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연구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미 이런 말씀들을 다 알고 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저 이 말씀을 연구하라는 우리의 초대를 받아들이고 복음을 진술해 놓은 드넓은 말씀의 들판을 우리와 함께 거닐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배워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의 진수를 참으로 알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음으로써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은 가장 진실하고, 가장 단순하며, 가장 탁월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말씀일 뿐만 아니라 영광과 축복에 대한 약속이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의 은혜, 또는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 또는 긍휼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를 들어 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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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할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다(에이든토저)

언제 연합하며, 언제 분할할 것인가? 이 질문에 올바르게 답변하려면 솔로문의지혜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어림짐작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여 ‘연합은 모두 선한 것이며 분열은 모두 나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아주 쉬운 방법이다. 그러나 이처럼 전혀 노력함이 없이 그 문제를 다루는 것은 역사가 제공하는 교훈들을 무시하는 것이며, 인간이 살아갈 표준이 되는 심오한 영적 규례들을 간과하는 것이다.

만일 선한 서람들은 모두 연합에 찬성하며 악한 사람들은 모두 분열에 찬성한다면, 또는 그 반대가 된다면, 모든 일을 판정하기가 쉬울 것이다. 또는 만일 하나님께서는 연합하시며 마귀는 항상 분열한다면, 이 혼란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길을 발견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러나 현재 사태는 그렇지 못하다.

나눌 것을 나누며, 연합할 것을 연합하는 것은 지혜이다. 서로 유사한 것이 없는 요소들을 합하는 것은 - 비록 그 일이 가능하다 해도 - 결코 선한 일이 아니다. 서로 닮은 요소들을 자의적으로 분리하는 것도 역시 선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일이나 학문적인 일뿐만 아니라 도덕적이고 영적인 일에도 적용된다.

최초로 구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 이 구분은 하나님께서 은혜 안에서 자연계에서 행하시는 모든 조처들의 방향을 설정했다. 빛과 어두움은 서로 상반된다. 동일한 장소에 이 두 가지를 소유하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결국 빛도 소유하지 못하고 어두움도 소유하지 못하고 다만 희미함과 어두컴컴함을 소유할 뿐이다.

현제 인간 세상에는 뚜렷한 윤곽들이 거의 없다. 인류는 타락했으며, 죄는 혼돈을 가져왔다. 밀이 가라지와 함께 자라고, 양과 염소가 공존하며, 의인들의 농장과 불의한 사람들의 농장이 나란이 있으며, 술집 옆에 선교센터가 있다.

그러나 앞으로 양과 염소를 구분하며, 밀과 가라지를 나눌 때가 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다시 빛과 어두움을 나누실 것이며, 만물이 그 종류대로 대로 나누일 것이다. 가라지는 가라지와 함께 불에 던지 우고, 밀은 밀과 함께 곡간에 들일 것이다. 희미함은 안개처럼 걷히고 모든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지옥은 항상 지옥으로 보일 거시며, 하늘나라는 신의 성품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본향으로서 드러날 것이다.

우리는 인내하며 그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 동안에 우리 각 사람, 그리고 인간 사회 내에 있는 모든 교회에게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되풀이 된다. 우리는 무엇과 연합하며, 무엇으로 무엇으로부터 분리할 것인가? 여기에 등장하는 것은 공존의 문제가 아니라 연합과 협력의 문제이다. 밀이 가라지와 같은 밭에서 자란다고 해서 이 두 가지가 타화수분하는가? 양들이 염소들 근처에서 풀을 뜯어 먹는다고 해서 그것들이 이종교배를 하는가? 불의한 자들과 의인들이 같은 태양빛을 받고 같은 비를 받는다고 해서 그들이 도덕적인 심오한 차이를 망각하고 서로 결혼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은 흔이 긍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연합을 위한 연합에 불과하지만, 인간들은 결국 형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연합을 갈망하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치르려고 한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천국과 지옥의 혼인을 축하하는 잔치를 준비하기 위해, 그리고 전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근거를 두지 않은 연합의 개념을 지원하기 위해 진리가 죽임을 당한다.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는 교회는 결코 이런 일들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이 타락한 세상에서 연합이란 것은 타협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살 만큼 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대한 충성, 진리에 충실함, 선한 양심의 보존 등이 광산에서 캐낸 금강석이나 오빌의 금보다 더 귀한 보석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보석들을 얻기 위해 재산의 상실, 투옥,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감수한다. 최근에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 보석을 얻으려고 은밀하게 완전한 헌신을 값으로 치르고 고요히,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칭송을 받지도 않은 채 죽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는 알려졌으며, 아버지의 마음에 사랑하는 자가 되었다. 장차 모든 영혼의 비밀들을 밝히는 날이 오면, 이 사람들은 세상에 살았을 때 행한 일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현대의 유행을 거역할 용기가 없으며 당분간 유행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우애를 지껄이며 종교적으로 무의미한 연합을 추종하는 사람들보다 현명한 철학자들이다.

“나누고 정복하라.”는 것이 마키아벨리를 추종하는 정치 지도자들의 슬로건이다. 그러나 사단도 연합하고 정복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독재자가 한 국가를 정복하려면 반드시 그 국가를 통합해야 한다. 선동 정치가들은 국가적인 자존심에 호소하거나, 혹은 과거나 현재에 당한 부당한 일에 대한 복수의 필요성에 호소함으로써 민중을 자기에게로 모아들인다. 그렇게 되면 쉽게 군대를 통제하며 입법기관을 정복하며 완전히 통합할 수가 있지만, 그것은 임시 수용소나 포로 수용소의 통합일 뿐이다. 우리는 금세기에 이러한 일을 여러 차례 보았으며, 장차 지구상의 국가들이 적그리스도 밑에서 연합할 때 다시 한번 그 일을 목격할 것이다.

놀란 양들이 당황하여 절벽에서 달리기 시작할 때에, 각각의 양들은 전체 무리에게서 떨어져 나와야만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그런 때에는 완전한 연합은 모두의 완전한 멸망을 의미할 뿐이다. 지혜로운 양은 자신의 은신처를 찾기 위해서 양떼에서 이탈한다.

서로 닮은 것들의 연합과 서로 다른 것들의 분리에 힘이 있다. 아마도 오늘날 종교계에 필요한 것은 연합이 아니라 현명하고 담대한 분리일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이 평화를 원하고 있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력을 휘두른 뒤에 부흥이 따를 것이라는 식의 평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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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선물이다. 에베소서 2:8-9은 잘 알려진 구절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선물’이란 무엇인가? 웨스트코트(Westcott)는 이것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힘으로서의 믿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는 구절에서 그 ‘것’(that)이 무엇인지가 분명치 않다. ‘것’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대명사는 중성이지만 , ‘믿음’에 해당하는 단어는 여성명사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바울이 마음에 둔 것은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은혜, 믿음, 그리고 구원은 전 과정인 것으로 보인다. 어느 쪽이든지 상관없이, 이 구절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인간의 의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시는 선물이라는 점이다.(빌1:29참조)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6:47). 그러나 예수님은 같은 문맥에서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6:44) 하나님은 죄인을 그리스도께 이끄시며 또한 믿을 수 있는 힘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구주를 이해하거나 그분께 가까이 갈 수 없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베드로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은 일시적이지도 무능력하지도 않다. 그것은 최후까지의 견인을 보장하는 항구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친숙한 말씀인 하박국 2:4에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갈3:11; 히10:38)고 한 것은 믿겠다는 순간적인 결심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일평생의 신뢰를 뜻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3:14의 말씀은 참된 믿음의 지속성 곧 그것의 견고성이 믿음이 있다는 주된 증거가 됨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은 결코 소멸될 수 없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믿음의 선물과 함께 시작하신 구원사역은 훼방을 받아서 중단될 수 없다. 빌립보서 1:6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고전 1:8; 골1:22-23)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 속에는 그분의 뜻에 순응하려는 자발적인 의지와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빌2:13).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은 순종을 수반하는 것이다. 벌코프(Berkhof)는 참된 믿음의 요소로서 다음 세 가지 요소를 지적했다. 진리를 이해하는 지적이 요소((notitia). 진리를 확신하고 인정하는 정적인 요소(assensus). 그리고 진리에 복종하기 위해 뜻을 정하는 의지적인 요소(fiducia). 현대의 대중적인 신학은 notitial와 때로 assensus까지는 인정하지만 fiducia는 제외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믿음에서 순종이 빠진다면, 그것은 완전하지 못한 것이다. 바인(W.E.Vine)도 똑같은 생각을 가졌는데, 그는 믿음의 중요한 요소들로 “견고한 확신 ... 개인적인 복종 ... 그리고 이런 복종에 바탕을 둔 행동”과 같은 것을 꼽았다. 그는 동사 ‘순종하다(peitho)'를 풀이하면서 “peitho와 pisteuo(신뢰하다)는 어원상 긴밀한 관련이 있다. 이 둘의 의미상 차이를 말한다면, 전자는 후자로 말미암아 생기는 순종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3:18-19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순종이 불신의 증거라고 말한다 ...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할 때,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증거를 보인 것이다. ... 신약 성경에서 peitho는 내적인 납득과 그 결과인 믿음의 실재적이고 가시적인 결과를 제시한다.”

 

참된 신자는 순종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죄만은 육체의 잔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완벽하게 순종할 수 없다(고후 7:1; 살전 3:10).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바람은 참된 신자들 속에서 언제나 지속될 것이다(롬 7:18). 믿음은 언제나 순종하는 열망을 낳는다.

 

순종을 빠뜨린 믿음의 개념은 구원의 메시지를 부패시킨다. 바울은 복음을 순종해야할 것을 표현했다(롬 10:16; 살후 1:8). 로마서 6:17에서 그는 심지어 회심까지도 순종으로 특징지었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 마음으로 순종하여” 그가 자신이 복음 전도 사역에서 추구했던 결과는 “말과 일로 순종하는 것”(롬 15:18)이었고, 거듭 거듭 “믿음의 순종”을 강조했다(롬1:5; 16:26).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개념이 순종과 불리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요한복음 3:36에서 “믿는 것”은 “순종하는 것”과 같은 말로 쓰였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사도행전 6:7은 초대 교회에서 구원이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허다한 무리가 이 도에 복종하니라” 순종이 그처럼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에 히브리서 5:9에서는 이들을 같은 말로 다루고 있다.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장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믿음에 관한 위대한 논변인 히브리서 11장은 순종과 믿음을 뗄 수 없는 것으로 가르친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 순종하여”(8절).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우들은 모두 자신들의 믿음을 순종으로 나타냈다. 이 장을 주석할 때, 뛰어난 신학사전은 ‘믿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순종은 참된 믿음의 불가피한 증거이다. 바울은 디도에게 편지할 때, 이 점을 인식했다.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 ...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딛1:15-16). 바울에게 있어서, 그들의 불순종은 믿지 않음을 드러내는 증거였다. 그들의 행동은 말로써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보다 더 큰 소리로 그분을 부인하고 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닌 불신의 특징이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항상 의로운 행실로 구체화되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자들의 즐겨 말한대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구원을 가져오는 믿음은 결코 믿음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스펄전(Spurgeon)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사람이 행위에 근거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할지라도 또한 그것이 없다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똑같이 확신한다.“ 참된 믿음은 항상 순종을 통해 증명된다.

 

믿음(faith)과 충성(faithfulness)는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는 사실상 다른 개념이 아니었다. 실제로 영어성경에서는 같은 단어가 이 두 가지로 번역되기도 했다. 라이트푸트(Lightfoot)는 갈라디아서의 주석을 쓰면서 믿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헬라어 pistis ... 영어 faith는 다음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는 믿음을 뜻하는 신뢰함(trustfulness)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이 의지할 수 있을 만한 마음을 뜻하는 신뢰받을 만한(trustworthiness)이다. 이 두 단어는 문법적으로 같은 말의 능동태와 수동태라는 점에서 또는 논리적으로 같은 행위의 주격과 목적격이라는 점에서 서로 관련될 뿐만 아니라, 그 둘 사이에는 긴밀한 도적적 유사성이 있다. 충성, 지조, 견고함, 확신, 의뢰, 신뢰, 믿음 이 용어들은 ‘믿음’의 수동적 의미와 능동적 의미라는 양극을 이어주는 고리들이다.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이 두 단어들은 많은 경우에 서로 혼용되기 때문에 다소 자의적으로 구분할 때만 간신히 나뉠 수 있을 뿐이다....

 

그와 같은 모든 경우에서 단어나 구절의 자유로운 폭과 심지어는 모호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엄격히 구분하는 것보다 바람직한 일이다. ... 그렇게 하면 과연 문법적인 정확성에 있어서의 손실이 종종 신학적인 깊이에 있어서의 이득으로 보상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충성스러운 사람들의 경우에는 마음의 그 한 가지 특성이 다른 특성들을 수반하고 그 결과 충성스러운 사람은 또 믿을 만한 사람이 되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서도 확고부동한 사람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신뢰하는(믿는) 사람은 또한 충성스러운(순종하는)사람이다. “충성, 지조, 견고함, 확신, 의뢰, 신뢰, 그리고 믿음”은 나눌 수 없이 모두 믿는다는 개념 속에 들어 있다. 의로운 사람은 참된 믿음의 필연적인 결과물이다.(롬10:10)

 

물론 이것이 믿음이 죄 없는 완전함으로 귀결된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참된 신자들은 귀신들린 아이의 아비가 부르짖었던 간구를 이해한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막9:24). 비록 때때로 불완전할지라도 믿는 자들은 순종하기를 소원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이러한 열망이 없는 이른바 ‘믿음’이란 것은 전혀 믿음이 아니다. 순종을 거부하는 마음 상태는 완전히 불신앙일 뿐이다.

 

마태복음 5:3-12에 기록된 팔복은 생각건대 성경의 어떤 다른 구절보다도 참된 믿음의 특성을 잘 보여 준다. 산상설교의 서두에서 우리 주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표면적인 경건보다 월등히 뛰어난 위를 가르쳐 주셨다(마5:20). 그분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 모두에게 이 더 나은 의가 요구된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이 강조하신 자질들은 모든 참된 신자를 구별해 준다. 이런 점에서 그것들은 모든 참된 믿음의 특성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팔복의 첫째 복은 주님이 어떤 사람에 대해 말씀하시는지를 의심할 여지없이 보여준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 이들은 구속받은 백성이고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믿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살펴보자.

 

그것의 기본적인 특성은 겸손 .. 심령의 가난함 곧 영적인 파산 상태를 인식하는 상한 마음이다. 참된 신자들은 자신이 죄인임과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으로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한다(마5:4). 애통하는 자는 온유하게 된다(5절). 그는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6절). 마음이 청결케 되며(7절), 화평케 하는 자가 된다(9절). 궁극적으로 신자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욕을 듣는 자가 된다(10절).

 

이것이 참된 믿음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이다. 그것은 겸손에서 출발하여 순종으로 결심을 맺는다. 참된 믿음이 드러내는 순종은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참된 믿음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더 위대하게 만드는 점이다. 예수님은 참된 의 ..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롬10:6) .. 의 성격을 율법의 문자뿐만 아니라 율법의 정신까지 순종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셨다(마 5:21-48)이런 의는 단지 간음하는 행위를 피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정한 생각을 품지 않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것은 노하는 것을 살인하는 것과 똑같은 비중으로 금한다.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이와 같은 놀라운 말씀으로 참된 의의 진수를 요약하셨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18).

 

물론 이것은 성취 불가능한 기준이다. 예수님은 젊은 부자 관원을 대하신 후 그 청년이 믿지 않고 떠나가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19:23)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깜짝 놀안 그들은 이렇게 여쭈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25절).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구원은 본래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동원할지라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허락이 없이는 믿을 수도 없다(요6:44-45). 인간의 의지로 믿음을 불러일으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은혜스럽게도 하나님은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을 통해 그분께 순종하고 의롭게 사는데 필요한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신다(벧후 1:3).

 

하나님의 기준은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높다. 이런 사실을 이해할 때 사람은 참된 믿음으로 가는 길로 접어든다. 그 길은 심령의 철저한 가난을 깨닫는 것 즉 우리가 영적으로 가난하다는 것을 인식하는데서 나오는 겸손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이 과정은 틀림없이 의로운 순종으로 귀결될 것이다.

 

예수님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특성을 가르쳐 주시고자 할 때 한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루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 어린 아이는 순종적인 겸손의 완벽한 그림으로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대한 살아 있는 교훈이 되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성인의 특권을 계속 주장한다면, 즉 우리가 스스로의 주인이 되려하고 자신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며 자기 삶을 스스로 주장한다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신다. 그러나 우리가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나아와서 어린 아이의 겸손과 그리스도의 권위에 기꺼이 순복하는 자세로 구원을 받는다면 이것이 올바른 태도가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요10:27-28).

누가 진짜 양인가? 따르는 사람들이다. 누가 따르는 사람들인가? 영생을 얻은 사람들이다. 믿음은 순종한다. 불신은 거역한다. 삶의 열매는 그 사람이 신자인지 불신자인지를 드러낸다. 중간 지내는 없다. 진리에 대한 순종이 없이는 단지 몇 가지 사실들을 알고 인정하는 것은 성경적인 의미에서 볼 때 믿는 것이 아니다.

한때 ‘믿음’의 결정을 내렸다는 기억에 매달려 있을 뿐 삶 속에서 믿음이 계속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가 없는 사람들은 성경의 분명하고 엄중한 경고에 주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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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호 목사 “가계저주론 잘못됐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자신의 저서 폐기 처분

2013/09/11 ㆍ추천: 10  ㆍ조회: 216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라는 책을 쓰고, 그동안 적극적으로 가계저주론을 가르쳐왔던 이윤호 목사(꿈의축제교회)가 가계저주로는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예장합신 교단지 <기독교개혁신보>에 기고했다.

이윤호 목사는 글에서 “가계의 저주에 관심을 갖고 사역을 하게 된 배경, 가계의 저주에 대한 오류와 관련된 본인의 반성과 성서적 비판, 가계의 저주에 관한 회개 및 이에 상응하는 결단”을 소개하면서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은 폐기 처분하고, 인세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유니세프에 전액 기부했다고 밝혔다.

자신이 그동안의 가르침에 대해 사과를 표명한 이윤호 목사는 가계저주론을 폐기하기로 결심한 데는 합신교단 관계자들의 충고와 권면이 있었다고 밝혔다.

다음은 이윤호 목사의 글 전문.

가계의 저주에 대한 반성 및 성서적 비판

지난 1996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 미국, 인도네시아에서 선교사와 목사로 활동하며 ‘기독교 치유상담원’을 설립하고 영성치유 상담 및 훈련 사역을 수행하면서 본의 아니게 교계와 지역교회에 심려를 끼쳐 드림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본인은 이 글을 통해 ‘가계의 저주’와 관련하여 본인의 입장을 세 가지 관점에서 피력하고자 합니다: 1) 가계의 저주에 관심을 갖고 사역을 하게 된 배경; 2) 가계의 저주에 대한 오류와 관련된 본인의 반성과 성서적 비판; 3) 가계의 저주에 관한 회개 및 이에 상응하는 결단.

1. 가계의 저주에 관심을 갖고 사역을 하게 된 배경

본인은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일하면서 풀러 선교대학원에서 박사(Ph.D.)과정 중, 논문지도 교수이신 챨스 크래프트 박사로부터 ‘내적치유’ 과목을 수강하게 되었습니다. ‘내적치유’를 심도 있게 공부하면서, 온전한 치유를 위해서는 영혼육의 전인적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문제가 많은 내담자들을 상담하면서 한 개인의 많은 문제들이 가계로부터 왔으며, 많은 문제들이 한 가계에서 반복되는 대물림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메릴린 히키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는 책이 1997년에 베다니 출판사에서 출판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약점은 신학적으로 빈약하고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는’ 구체적인 방법론이 결여된 것입니다. 따라서 베다니 출판사의 요청에 따라 본인은 전술한 메릴린 히키의 책을 보완하기 위해 신학적 작업과 임상적 적용을 위한 구체적 방법론을 담아 1999년에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는 책을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2. 가계의 저주에 대한 오류와 관련된 본인의 반성과 성서적 비판

본인은 ‘가계의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는 책의 저자로서, 이와 관련된 신학과 사역에 대한 자기반성의 관점에서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네 가지로 비판하고자 합니다.

첫째,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는 용어를 잘못 사용하였음을 인정합니다. 이는 우선 성경에는 이런 직접적인 표현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가계의 저주’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여러 신학자들의 권면을 따라 ‘조상의 죄악이 후손들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 혹은 ‘가계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죄악된 성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용어는 다음과 같은 신구약 성경말씀의 지지를 받기 때문입니다(출 20:5; 욥 21:19; 애 5:7; 렘 32:18; 신 5:9; 민 14:18; 사 65:6-7; 레 26:39; 단 9:16)(민 14:33; 사 14:20-21; 시58:3-5; 시 106:6; 행 7:51-52; 마 23:29-32; 눅 11:48-51; 벧전 1:18; 마 18:25, 눅 23:28; 19:41-44).

둘째, ‘신자에게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다’는 가르침은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신자에게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있다’고 잘못 가르쳤음을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참조 롬 8:34)라는 말씀에서 ‘정죄함’(카타크리마)은 영원한 형벌에 처하는 ‘단죄’(斷罪) 또는 ‘저주’와 같은 의미로 하나님의 결정적인 심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은 비록 범죄할 때 ‘책망’과 ‘징계’는 받지만(히 12:5-8), 결코 ‘정죄함’ 곧 ‘저주’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받을 저주를 십자가에서 다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참조 고후 5:14-15,21; 롬 3:25; 벧전 2:24). 또한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요 1:1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롬 8:38-39). 따라서 신자의 신분과 칭의적 관점에서, 본인은 ‘신자들에게 가계에 흐르는 저주는 없다’는 신학을 전적으로 수용합니다.

셋째, ‘신자에게 가계의 저주가 유전된다’라는 가르침은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신자에게 가계의 저주가 유전된다’고 잘못 가르쳤음을 인정합니다. 이는 아담의 자손들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고, 그 ‘원죄’와 자신이 짓는 ‘자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저주는 또한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로 직접 임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4, 20). “아비는 그 자식들을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비를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라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신 24:16). 따라서 각자 자기의 선택에 의해 복을 받기로 하고 저주를 받기도 하는 것이지만, 저주가 유전되는 것은 아닙니다.

넷째,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는 책의 내용은 독자들과 세미나 참석자들에게 자신의 죄와 잘못을 조상에게 탓을 돌리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본인은 이런 가르침을 통해 독자들과 세미나 참석자들에게 한 개인의 모든 불행과 비극적 사건의 원인을 조상에게서 찾거나, ‘가계의 저주’를 통해서 자신의 죄악된 삶을 합리화하는 부작용을 초래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잘되면 제 탓이고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과 같이, 첫 번째 부작용은 한 개인의 모든 불행과 비극적 사건의 원인을 조상에게서 찾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죄나 잘못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를 조상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나아가서 두 번째 부작용은 ‘가계의 저주’를 통해 자신의 습관적 죄악적 삶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가계의 저주’가 오용되고 남용될 때, 본인은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 회피 및 타인에게 책임전가, 죄악된 생활에의 안주, 죄책감 불감증과 회개의 거부 등의 더 큰 후유증을 초래하게 됨을 인정합니다.

3. 가계의 저주에 관한 회개 및 이에 상응하는 결단

본인은 ‘가계에 흐르는 저주’에 대한 교회사적 선행연구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가계의 대물림의 문제가 심각한 내담자들을 돕기 위한 ‘가계의 저주’를 차단하는 가르침과 사역이 임상적 측면에 지나치게 초점을 둔 나머지 개혁주의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혹은 용어적으로 오해의 소지를 많이 초래했다는 합신교단 관계자들의 지적을 겸허하게 수용했습니다. 이에 본인은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하여 합신총회 관계자들의 충정어린 충고와 지도를 따라 다음과 같은 과정을 이미 밟았습니다.

첫째, 본인은 문제의 발단이 된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1999년 판)는 책을 더 이상 인쇄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베다니 출판사도 이에 동의했으며 출판사가 보유한 모든 책을 이미 폐기하였습니다.

둘째, 본인은 ‘가계에 흐르는 저주’에 관한 본인의 오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내용을 기독교개혁신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공개하는 것에 이의가 없음을 통보하였습니다. 또한 본인은 2012년 7월 1일부로 ‘가계의 저주’에 관한 가르침을 중단하고, 앞으로도 합신 교단 관계자들의 지도편달을 받아 정통신학에 입각한 목회와 치유상담사역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준해 지역교회 목회 및 기독교영성치유상담 사역에 전념하겠다고 기사광고를 기독교개혁신보에 2012년 7월에 이미 게재하였습니다.

셋째, 본인이 시무하는 ‘꿈의축제교회’ 주보(2013년 5월 26일자)에 본인의 사상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는 특별광고를 실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2012년 8월에 본인은 소속교단인 한국기독교침례회(이하 ‘한기침’)의 교단 지도자들의 지도편달을 받아 정통신학에 입각한 목회와 치유상담사역에 전념하겠다는 본인의 결심을 ‘한기침’에 이미 피력하였습니다.

넷째, 본인은 베다니 출판사로부터 받은 ‘가계의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는 책 인세 모두를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및 ‘유니세프’에 이미 기부했습니다.

다시 한 번 본인은 ‘가계의 흐르는 저주를 이렇게 끊어라’는 책을 통해 한국교회에 미친 부정적 영향을 인정하고 사과드립니다. 반면에, 본인은 비판과 정죄보다는 진리와 사랑과 인내로서 본인이 향후에 올바른 목회와 사역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합신 교단 관계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김철영 ⓒ 뉴스파워/USA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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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믿음이 중요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또 나름대로 자신의 부족한 믿음 때문에 고민을 하기도 합니다.

믿음에 대한 고민은 특정한 사람들만의 것은 아닙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조차도 의심과 의기소침함에 맞서

지속적인 내면적 믿음의 싸움을 벌이면서 “나는 일주일 이상

그리스도로부터 완전히 떠난 적이 있었다.

하나님에 대해 절망한 나머지 불경스러운 말도 서슴없이

내뱉었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굳건한 사람들도 때로는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대해 의심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열왕기하 6장에는 엘리사를 통한 많은 기적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 기적을 통하여 당시의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를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표현합니다.

그러나 아람이 이스라엘 수도 사마리아를 완전히 포위하여

성 안에 굶주림으로 인하여 아들을 잡아먹는 일이 생겼을 때

이스라엘 왕 여호람은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엘리사에게 돌리며

그를 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고통 받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말할 수 없는 참담함 속에 빠진 여호람 왕을 만난 엘리사는

열왕기하 7장1절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여호람 왕의 한 장관은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7:2)

라는 말을 합니다. 이때 엘리사는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고 말합니다.

사실 엘리사의 말을 믿지 않는다 하여도 여호람 왕에게나,

장관에게는 별다른 대책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처한 형편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며 간절히 기도해야 할 때였습니다. 그

러나 그들은 어려운 고통의 상황에 빠져 믿음을 잃고,

분명한 말씀의 약속에 대해서조차 강력한 불신을 드러내고

불평한 것입니다. 그 다음날 성 밖에서 버림받고 죽음을 기다리던

문둥병자들을 통해 성 안에 구원의 소식이 전해질 때에

백성들의 질서를 위해 성문에 서있던 장관은 사람들에게 밟혀 죽음으로

그에 대한 엘리사의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성 안의 사람들은

전쟁의 위기와 굶주림의 고통에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믿지 않겠다는 태도로 굳어져버리면

어떤 기적도 우리에게 믿음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죄를 지어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를 범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믿어지지 않아서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으려는 죄악된 마음의 태도가

믿음의 길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믿어지지 않는다면 다른 길이 있는가?” “믿기 싫다면

나는 다른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가?”

예수를 믿지 않고 구원받는 길이 있다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길이 있다면,

은혜를 받지 않고 변화되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택하십시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하나님의 예비하심을 믿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 외에 지금 당신의 상황에 진정한 해결책이 있습니까?

믿음 외에 길이 있습니까?

 

열왕기하 6장 24절∼7장 2절



정명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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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신학 근원들

 

지난 2011년 10월 30일(주일)에 열린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전달된 Richard Muller 교수님의 열린교회 특강 전문이다.

1 칼빈의 초기 저작들: 1532-1538

근원들 혹은 출발점을 규명하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일이면서 다소 난해한 일이기도 하다. 칼빈의 신학적 발전에 있어서 근원에 대한 문제는 그의 일반학문, 언어들 및 철학에 대한 교육 그리고 법학에 대한 심화된 연구라는 문헌으로 입증되는 근원들을 고려하고, ‘예기치 못한개혁주의 진영으로 전환하여 제네바 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막대한 노력을 기울이고 수다한 주석들과 설교들과 논문들 및 기독교 강요까지 서술하게 된 사실을 고려할 때에 대단히 흥미로운 분야라 하겠다. 칼빈의 신학 근원들은 특별한 관심을 유발한다.

칼빈이 회심한 시점에 대해서는,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칼빈 자신이 교황적 미신들(papal superstitions)’로 여겼던 것을 버리고 경건하고 배우고자 하는마음의 상태로 돌이키게 된 시점에 대하여는 지속적인 논쟁이 있었으며 다양한 해석들이 등장했다. 칼빈 자신의 설명과 베자(Beza) 및 콜라돈(Colladon)이 저술한 초기 전기들의 면밀한 숙독에 기초할 때 칼빈의 회심은 그가 빠리에서 학부를 공부하기 시작한 이후로 법률공부 끝마치기 전까지, 1529년과 1530년 사이 부르쥬(Bourges)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분명히 선호된다. 이러한 회심시기 추정은 세네카의 『관용론(De Clementia) 주석을 포함한 칼빈의 모든 초기 저작들이 회심 이후에 저술된 것이라는 중요한 결과를 산출하며 카톨릭을 떠난 그의 초기 신학의 재구성이 그의 모든 초기 저작들의 근본적인 테제, 즉 교황적인 미신에서 경건으로 그리고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태도로의 전환을 확립해 주었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 저작들을 중요한 소스로 간주하게 한다.

칼빈의 세네카 주석

칼빈은 법학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1532 2월에는 공인된 변호사가 되었다. 세네카 주석이 출판된 것은 그로부터 2개월이 지난 4월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 주석은 그의 회심 이후에 처음으로 완성한 작품이며, 그것이 다루고 있는 핵심적인 주제가 그의 인문주의 훈련과 법학의 한 측면인 관용에 대한 그의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에 회심 직후에 대한 그의 나중 설명에서 비록 다른 학문들에 대한 열정은 식었지만’ ‘그것들을 한꺼번에 내던진 것은 아니라는 그의 생각도 그 주석은 증거하고 있다. 그 주석의 주제인 관용, 특별히 백성들을 용서하고 아끼는 지혜로운 통치자의 성향인 관용은 한 인문주의 법조인의 직업세계 속으로 포섭될 수 있으며, 또한 주석에서 발견되는 종교적 함의들과 교회의 개혁에 가담한 프랑스 인문주의 학자들의 기소와 핍박이 고조되는 분위기를 고려해 보건대, 그 관용은 새롭게 종교개혁 운동에 가담한 젊은 프랑스 인문주의 학자의 개시적인 화두로 이해함이 좋을 것이다. 주제와 논조 면에서 세네카 주석 자체는 법학을 마감하는 칼빈 자신의 전환기를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칼빈 당시의 전기 작가들의 설명에 따른다면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브르쥬와 그 근처에 있는 리니에르 안에 있는 종교개혁 추종하는 무리에게 설교하고 가르치기 시작한 전환점도 예시하고 있다.

고대 스토아 철학자란 세네카의 신분과 텍스트에 대한 인문주의 주석의 특징에서 충분히 기대되는 것으로서, 칼빈의 글은 미신들과 설화들을 포함한 그리스-로마의 고전적인 문헌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최소한 칼빈이 사례들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세네카의 글을 분석하고 있다는 점만 보더라도 고전 철학을 중요하게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보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칼빈은 자신이 세네카의 글 안에서 발견한 진리와 지혜를 수용하고 있다. 어떤 개념이 이방인적 근원을 가졌다고 해서 거부하는 일은 없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스토아적 이해와 기독교적 이해가 나란히 대비되는 경우들도 이따금씩 있었다. 고대 철학자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칼빈이 초기에 하나님과 우주 및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본성에 관한 진리들이 자연적 질서에 내장되어 있는 계시와 인간의 마음과 양심에 새겨져 있는 신의식 안에 있다고 한 이해와 일치한다.

게다가 우리가 칼빈의 회심 시기를 아마도 부르쥬에서 그가 세네카 주석을 저술하고 있었을 1529년과 1530년 사이로 잡는다면, 그 주석 안에는 회심에 대한 칼빈 자신의 진술들을 보여주는 일부 본문들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겠다. 특별히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자신을 대신관 통할하는 최고의 신관(pontifex maximus)으로 승급시킨 일에 대한 세네카의 설명을 주석하며, 칼빈은 세네카 안에서는 명확하게 발견되지 않는 논점, 즉 로마교회 주교들과 자기 시대의 종교개혁 옹호자들 사이에 문제시된 논점을 발전시킨다.

대주교는 주교단에 의해 선출되곤 하였다. 그러나 도미티우스(Domitius) 집정정치 하에서는 선거권이 백성에게 양도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사장의 직분은 최고 수준의 영광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주교들이 공적이든 사적이든 그들이 그 도시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가졌다는 미신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중독시킨 탓이다. 대주교는 주교들 중에서도 더 주목을 받고 두드러진 자였었다.

종교는 신들에게 영광을 돌리지만 미신은 그들에게 잘못을 행한다는 세네카의 언급을 설명하며, 칼빈은 퀸틸리안(Quintilian) 및 키케로(Cicero)의 유력한 논증을 덧붙이며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한다.

미신은 동정이 관용에 대하여 가지는 것과 동일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잔인함이 관용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성을 불경함이 종교에 대하여 동일하게 가지고 있음과 일반이다. 미신이 명예를 해치는 것처럼 동정도 그러하다. 퀴틸리안은 이렇게 말한다.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과 성실한 사람이 다른 것처럼 미신도 종교와 다르다.’ 키케로도 말한다. ‘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조상들도 미신과 종교를 구분했다.’

칼빈의 회심은 그로 하여금 곧장 미신과 종교를 분리하게 만들었다.

프랑스어 성경 서문 (1534/35)

성경 전체에 대하여 라틴어로 쓰여진 서문과 불어로 신약의 서문처럼 쓰여진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칼빈이 가장 이른 시기에 출판한 신학적 글들이다. 1) 교황적인 미신에서 참된 경건으로 돌이킨 것과 2) 빠리에서 도망쳐 대학에서 전달된 니콜라스 콥(Nicholas Cop)의 종교개혁 강연을 들으러 간 경험과 3) 1534년 미사에 반대하는 벽보를 붙였다고 핍박을 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등에 너무도 분명하게 고무된 칼빈은 확고한 종교개혁 지지를 표명한다. 첫번째 서문은 칼빈이 고대 이방인의 풍요제에 비견되는 것으로서 로마 교황(지금은 로마교회 교황)’과 그 후손들이 자신들의 욕망과 신비를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되 동시에 일반 백성들을 실제로 성장시킬 수 있는 문헌들의 출판은 금하려는 수작들을 비난하고 있다. 두번째 서문에서 칼빈은 그리스도 언약을 더럽히고 은닉하고 부패시킨 자들을 논박했고 그들을 소경이 소경 인도하는 자들로 규정했고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따라 생명과 구원에 이르는 길을 추구하는 모든 자들에게 가르쳐야 할 필요성도 역설했다.

1536년판  『기독교 강요』

칼빈 자신이 기술하고 있듯이 1536년판 『기독교 강요』는 대체로 교리문답 안에 포함되어 있는 믿음의 조항들, 율법, 사도신경, 주기도문, 성례, 기독인의 자유, 교회의 권세 및 국가통치 조항에 대하여 가벼운혹은 심지어 피상적인방식으로 제시한 간결한 편람이다. 이 책은 간결하나 심지어 그런 형태 속에서도 저자의 신중한 약속과 당시 종교 개혁자들이 강조했던 기본적인 믿음의 조항들을 잘 간파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요한 종교개혁 운동의 경과를 도표처럼 명료하게 보여줄 정도는 아니지만 1536년판 『기독교 강요』는 초기에 제네바의 교회개혁 가동시킨 기욤 파렐(Guillaume Farel)의 확신, 즉 젊은 칼빈이 제네바의 교회개혁 운동을 위해 발굴해야 하고 협력해야 할 가치가 있는 동료요 교리 편찬자요 조직가란 그의 확신을 종결시킬 정도로 충분한 것이었다.

1536년판 『기독교 강요』의 몇 가지 특별한 점들을 다음과 같이 언급할 수 있겠다. 첫째, 칼빈은 책의 서문을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에게 드리는 헌사로 대신한다. 그 헌사에서 칼빈은 재세례파 비방을 반박하고 프랑스 종교 개혁자들의 교회를 위하는 성향과 평화적인 의도를 설파했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와의 일치성을 근거로 종교개혁 운동의 정통성과 적법성을 논증했다.

둘째, 1536년판 『기독교 강요』가 길이에 있어서는 루터의 대요리 문답에 가깝지만1536년판 『기독교 강요』의 유력한 모델은 루터의 소요리 문답이다. 특별히 기독인의 자유, 교회의 권세, 국가통치 주제들은 루터가 소요리 문답에 부록으로 첨가하고 대요리 문답에선 사라진 가정의 의무들에 대한 도표(tabula oeconomica)’를 반영하고 있다. 1536년판 『기독교 강요』의 교리문답 구조는 루터의 소요리 문답의 구조와 유사하며, 율법과 믿음과 칭의에 대한 칼빈의 교리들은 쯔빙글리 교리보다 루터 가르침의 흔적을 보여준다. 성례론에 대한 칼빈의 접근법도 비록 루터 자신보다 멜랑톤 입장에서 도출된 것이라 할지라도 강한 루터적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칼빈의 저작과 루터의 저작 사이의 관계성 때문인지, 1536년판 『기독교 강요』는 율법(1, 십계명)에서 믿음과 복음과 교회로 (2, 사도신경) 그리고 기도와 성례로(3-5), 나아가 교회와 국가 안에서의 기독교적 삶(6)으로 전개되는 모델을 가지고 기초적인 기독교 교리를 제시한다. 율법과 믿음과 복음과 교회와 국가라는 기본적인 순서는 『기독교 강요』의 이어지는 모든 판본들 안에 그대로 보존되는 구조이다. 칼빈은 5가지 거짓 성례들을 비난하는 대목에서 루터의 교리문답, 아우그스부르그 고백서멜랑톤의 초기 『신학통론(Loci communes)를 현저하게 극복한다. 그 대목에서 칼빈은 두 개의 진정한 성례들을 고수하고 나머지 견진성사 및 혼인과 참회는 배제하는 입장을 보인 『참종교와 거짓종교 해설(De vera et falsa religione, 1525)에서 보인 쯔빙글리 모델을 분명히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칼빈의 참성례와 거짓성례 구분은 성례의 실행에 있어서 쯔빙글리 입장보다 훨씬 변증적인 입장을 보여준다. 『기독교 강요』의 성례론 부분은 교황적인 미신을 제거하고 경건에 이르는 뚜렷한 경로를 제시하려는 칼빈의 바램에 의존하고 있으며, 파리대학 재학시 발발하고 회심 이후에는 더 격렬해진 프랑스 안에서 이루어진 종교개혁 시도들의 억압에 대한 반발을 증거하는 의분에 찬 변론적 어조로 진술된다.

초기의 교리문답 및 신앙고백 (1537-1538)

칼빈의 사상에 대한 연구의 초점은 주로 『기독교 강요』에 맞추어져 있고, 『기독교 강요』의 최종판이 근대 초기 개혁주의 신학의 발전에 대하여 가지는 중요성 때문에 칼빈의 신학이 형성되던 시기와 밀접하게 결부된 다른 문헌들에 대한 면밀한 탐구에는 소홀함을 보여 왔다. 그러나 신앙을 가르치는 기초적인 모델을 제공하는1536년판 『기독교 강요』에 견줄 수 있는 다른 문헌도 있다. 보다 유명한 『기독교 강요』 외에도 비록 덜 알려지긴 했으나 칼빈의 초기 사상의 중요한 지표를 제공하는 칼빈의 초기 교리문답, 『제네바 교회에서 사용되는 신앙의 가르침과 고백(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y, dont on use en l’Eglise de Geneve, 1537)1538년에 출판된 그것의 라틴어 번역본(Catechismus seu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ecclesiae Genevensis)이 있다. 『신앙의 가르침』 부분은 칼빈이 전적으로 저술한 것으로서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한 확대된 해설이며 그 교리문답 뒤에 덧붙여진 『신앙고백』 부분은 아마도 칼빈과 파렐의 합작임에 분명하다.

칼빈의 교리문답 서론은 그의 근본적인 종교개혁 관심사와 회심을 거듭 언급하고 있다. ‘교황주의 및 그것의 미신적인 요소들에 대한 협오가 제거되고 그 도시의 종교복음의 순수성과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에 교리문답 및 첨부된 신앙고백 목적은 믿음을 견고히 구축하고 공적으로 고백하는 방식으로 제네바의 종교개혁 토대를 확고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지는 신앙 고백서에 분명하게 반영하되 성만찬의 개혁파적 실행은 교황주의 미사끔찍한 불경건 및 미신적 요소들과 대조를 이루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하고 무용한 것으로 느끼게 만든 말씀의 로마 카톨릭적 남용과도 대조를 이루게 하였다. 그 고백서 안에는 미신이 제거되고 배우고자 하는 마음과 경건이 고양된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칼빈의 1536년판 『기독교 강요』의 6개의 장들은 특정한 교리문답 모델에 의존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인 것으로 칼빈의 1537 1538년 교리문답은 33개의 장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율법으로 시작하지 않고 종교와 하나님 지식에 대한 서론적인 논의로 시작하여 인간의 본성, 자유선택, , 삶으로의 회복으로 논의가 전개되며 이 모든 주제들은 율법에 대한 논의보다 선행하고 있다. 율법을 논하고 사도신경 논하기 이전에 칼빈은 믿음, 예정, 칭의, 성화, 회심, 중생, 선행 등에 관한 논의를 제공하되 이 논의들은 1536년판 『기독교 강요』나 루터의 교리문답 안에서는 없었던 것들이다. 교리문답 안에서 거론되는 주요 주제들의 절반이 1536년판 『기독교 강요』에는 없었던 것들이며 1537-1538년에 처음으로 칼빈에 의해 충실한 논의로 제시된 것이었다. 1537-1538년에 저술된 두 문헌들의 논의 흐름을 유지한 채 두 문헌을 결합하면 우리는 1539년과 1559년 사이에 증보된 칼빈의 원숙한 『기독교 강요』의 주제들을 거의 동일한 순서대로 얻게 될 것이다. 『기독교 강요』의 1536년 초판과 그 이듬해에 나온 교리문답 두 문헌을 일괄해서 생각할 때 그것들은 칼빈 신학의 개요를 간략한 형태로 제공하고 있으며 비록 이후에 추가될 정밀한 부분들은 생략되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 사상의 범위 혹은 윤곽을 묘사하고 있다.

 


2. 칼빈의 초기 신학에 있어서의 이슈들과 테제들

종교의 중요성과 하나님을 아는 문제

『기독교 강요』 최종판에 종교와 하나님 지식으로 곧장 돌입하는 대목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칼빈은 1537년 교리문답을 아무리 잔인하고 야만적인 자라도 종교심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칼빈이 고전학 교육을 받았다는 증거를 제공한다. 즉 그 언어는 키케로의 논문 『신들의 본성에 대하여(De natura deorum, 45 BC)를 투영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창조의 고유한 목적이 그 창조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위대함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자인 하나님 사이의 바른 관계성은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경배하는 관계라는 논의로 이동한다. 이후 작품에서 주로 언급되는 주요 주제들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칼빈은 너무도 불경해서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 지식을 부러 잊으려 하는 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인생의 덧없는 본질을 깨달아야 하고 불멸에 대한 깊은 사색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들은 종교성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 각인된 하나님 지식, 즉 그들로 하여금 세상적인 가치에서 천상적인 것으로 주의를 돌리게 하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

칼빈이 첫장에서 예리하게 언급하고 지나간 불경건 혹은 무종교성 문제가 현저한 주목을 받으며 등장하게 된다. 교리문답 첫장에서 칼빈의 관심을 장악했던 것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각인된 지식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종교를 위해 태어난 것이다는 논거는 참종교와 거짓종교구분으로 규정되는 인간의 문제로 곧장 연결된다. 모든 사람들은 종교의 필요성과 종교가 없는 삶의 극단적인 비참을 인정하고 있다. 누구도 자신을 하나님과 분리하려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경건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것을 전혀 무익한 방법으로 달래려고 노력하며 동시에 죄악된 삶으로 이끌린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계신 그대로의 무한한 위대함을 따라 경배하지 않고 자신에게 맞추어진 다른 하나님을 만든다. 그들은 하나님의 그릇된 형상을 숭배하고 부정한 두려움 속에 스스로가 상실될 것을 발견하며 신적인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주님으로 두려워 할 줄 알고 경외하며동시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한다. 이것은 인간에 의해 고안된 경건이나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를 어떠한 자라고 보이신 대로 알며 신자에게 자신을 제시하신 대로 아는 하나님 지식에 의존하고 있다. 칼빈이 제시하다(present)혹은 제공하다(exhibit)단어를 사용할 때에 그것은 하나님의 참된 본성에 대하여 하나님 자신이 선포하신 것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제시하고 제공하신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확히 이런 의미로 사용된 제공하다단어는 칼빈의 초기 성찬론 신학 안에서도 발견된다. 거기에서 그 단어는 그리스도 예수가 성찬에 임재하는 방식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그것은 단순히 보인다는 것 혹은 전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제시하는 것 혹은 제공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는 특별히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받을 수 있도록 그 무언가를 그 사람 앞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 말씀에 제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유효한 것으로서 신자들 앞에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

칼빈을 유명론 지지자로 규정하는 자들 혹은 그의 신학을 20세기의 신 정통주의 렌즈로 이해하는 자들이 직면하는 주요 장애물들 중의 하나는 칼빈이 처음부터 크게 강조하며 그의 신학에 등장한 하나님 지식, 특별히 그가 하나님을 창조자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보내는 서신,’ 1536년판 『기독교 강요』 1537년 『교리문답』 같은 칼빈의 초기 저작에 그러한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나타나는 것은 칼빈에게 있어서 그 지식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칼빈의 사상에 대한 신 정통주의 학자들의 패배를 가리키는1536년판 『기독교 강요』의 주제별 색인은 칼빈의 율법연구 도입부에 있는 주제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인간의 본성을 아는 지식, 그리고 자연법(lex naturalis) 등임을 보여준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안에서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인 지식과 관련된 긍정적인 설명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새겨두신 자연법을 그 지식의 한 국면으로 특화시켜 설명하고 있다.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아는가란 주제를 다루는 교리문답적 논의를 시작할 때 알버트 대제(Albert the Great)가 언급하고 중세후기 신학에서 두루 회자된 하나님은 완전히 이해될 수 없고 다만 포착될 뿐이라는 경구를 떠올리게 하는 신적인 초월성 문제를 가지고 시작한다. ‘하나님의 위엄은 그 자체로 인간의 이해력을 훨씬 초월하여 그 지성에 의해서 완전히 이해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위엄을 탐구하는 것보다 그 위엄의 탁월함을 찬미하는 것이 보다 합당하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출처 문제가 제기된다. 만약 하나님이 완전히 이해될 수 없다면 인간은 어디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숭고한 위엄을 찬미할 수 있는가? 칼빈의 답변은 바로 다음 문장에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의 투영이라 하였고 주님에 대하여 우리가 다른 방식으론 알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탐구하고 그 발자취를 추적해야 한다.’

칼빈은 강조하여 말하기를, 자연의 질서에 대한 이런 경건한 탐구는 신자들의 마음을 신적인 것들에서 계속 구별하는 헛되고 무의미한 사색의 문제가 아니라 경건에 있어서 중차대한 의미를 가진 연습이라 하였다. 자연적 질서에 대한 깊은 사유는 신자에게 완전한 경건을 일으키며 육성하며 강화한다.’ 요약하면, 그런 사유는 주님에 대한 신앙과 올바른 경외에 유익하다. 칼빈은 자연적 질서에 대한 숙려가 신자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며 신적인 속성들에 대한 묵상은 어떻게 참된 경건에 도움을 주는지를 언급하며 논지를 확장한다.

우리는 이 물질적 우주에서 모든 것들의 토대와 근원이 산출되는 우리 하나님의 불멸을 관조하며, 땅의 물질을 창조하고 지금도 그것을 보존하는 그의 능력을 관조하며, 다양성과 혼돈을 하나의 정연한 질서 속으로 모으시고 영원토록 그것을 통치하는 그의 지혜를 관조하며, 그 자체가 창조된 사물과 그 사물이 지속되는 원인이 되는 그의 선하심을 관조하며, 경이로운 방식으로 경건한 자를 지키시고 악한 자에게 보응함을 통하여 보이시는 그의 의로움을 관조하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시고 우리의 불의함을 놀라운 온유로 덮으시는 그의 자비를 관조한다. 우리의 우둔함이 그렇게 눈부신 빛으로 말미암아 더 캄캄해 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우주에서 그것이 제공하는 만큼 하나님이 무엇과 같은 분인지를 풍성하게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과 패역함 때문에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은 일관되게 오독되고 곡해되어 왔으되 심지어 하나님의 지혜가 분명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천상적인 지혜 전체를 뒤집는 극단까지 보인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이 그의 행하신 일들로 말미암아 올바르게 묘사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되 인간의 패역한 기준을 따라서가 아니라 영원한 진리의 규범을 따라서 돌아가야 한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삶과 의로움과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과 자비의 영원하고 궁극적인 출처 혹은 원천(fons)임을 배운다.

죄에서 구원에 이르는 문제를 논외로 접어둔 채,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의 두 가지 출처를 밝히고 있다. 죄인된 인간들이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배워야 하지만 그들의 완고함 때문에 배우지 못하는 첫번째 출처로서 세계의 질서이고, 둘번째 출처는 그 동일한 진리들을 권위 있게 가르치는 성경이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진리를 재껴두지 않으면서 칼빈은 추가하여 말하기를, ‘이 모든 것들이 하늘과 땅 도처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고 할지라도그것들의 궁극적인 중요성은 오직 우리가 스스로 낮아져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과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고 우리를 향하여 당신의 의로움과 선하심과 자비 행하시는 방식을 상고할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칼빈은 성경적 계시와 자연 안에서의 하나님 계시가 대립되는 것처럼 설정하지 않았다. 그는 죄 문제에도 불구하고 자연적인 계시의 중요성과 유용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연적 계시와 성경적 계시를 나란히 두었으며 그들의 관계성을 강조했고 죄문제와 성경적 계시의 필연성을 알았으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대한 진리가 자연적 질서에 나타나 있다는 지점으로 돌아오고 그리고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내적인 수용과 묵상이 없다면 성경적 진리가 비록 자연적 계시의 보조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무용할 것임을 주장했다.

죄 문제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계시적인 광채를 포함한 계시의 두 출처의 이러한 이해는 칼빈의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거기에서 칼빈은 타락 이후에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을 떠남에 대해 언급하고 나서 하나님은 당신의 자비 속에서 자신의 말씀을 바꾸심이 없이인간에게 신령한 것들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그를 추구하고 느끼고 찾고 알아서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도록 하셨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계시는 모든 곳에서와 모든 것에서얻으며 너무도 명백하게 주어져서 어떠한 사람도 무지한 척 할 수 없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과 지혜와 영원함영광은 우주적 질서의 모든 부분에 새겨져 있다. 사도 바울이 확증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세상에 결코 증인이 없도록 하지 않으신다. ‘궁창에 있는 것들로 땅의 중심에 있는 것들까지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모든 인간에게 증거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추구하게 하고 그를 발견한 이후에는 그를 묵상하되 주님은 너무도 선하시고 능하시고 지혜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 주님께 그의 권위에 합당한 경의를 표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자연 전체에 있는 하나님의 증언에 대해 다소 열광적인 언설을 지속한 이후에 칼빈은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존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자신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을 그렇게 오래동안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설명함에 있어서 칼빈은 죄에 빠진 인간의 무감각에 대한 언급에서 자신의 논지를 제한함이 없이 하나님은 자신의 무한한 선하심과 인자함을 보다 충만하게 보이시기 위해 땅의 열방들 중에서 특별히 택하신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목소리를 듣도록 하셨다고 덧붙인다. 반대로 이방인은 비록 세계의 질서에서 그들에게 계시된 내용이 있고 은택의 감추어진 궁극적 수여자가 모든 선의 원천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떠나고 자신들을 위해 우상들, 헛됨과 속임수를 따라 고안된 신들을 만들었다.

칼빈은 어떤 곳에서도 자연적 계시의 가치를 축소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완전히 상실된 가능태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칼빈이 자연적 계시를 독립적인 자연적 혹은 철학적 신학의 기초로 격상시킨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유의미한 계시가 자연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칼빈은 자연적 계시를 유한한 것들의 우주적인 질서의 창조자요 보존자요 통치자인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들에 대한 계시라고 하였다. 칼빈은 이 자연적 계시가 하나님의 구원적 지식과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특별히 밝히지는 않았으며, 자연적인 계시와 구원의 지식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을 구원의 유일한 기초로 이해하는 지식의 근원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창조된 질서와 더불어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들을 아는 지식의 근원도 되며, 죄문제를 고려하면 죄가 일관되게 창조된 질서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진리를 우상적인 것으로 수용하게 하고 우상적인 방식으로 반응하게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모두에 대해서 중요성을 가지는 필연적인 근원이다.

함축적인 의미를 보자면, 성경이 제공하는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자연 안에서도 계시된 하나님과 그의 속성들에 대한 동일한 진리들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함의는 주제를 다루는 칼빈 자신의 방법론적 접근법에 의해 강화된다. 즉 칼빈은 인간적인 지식의 결함과 자연적 계시의 한계와 우상의 문제를 처음부터 경계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 계시의 범위와 특성에 대한 광범위한 찬양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나아가 칼빈은 앞에서 다룬 참종교와 거짓종교 사이의 차이를 배운 신자에게 전달된 교리문답 안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시작하며, 타락과 죄문제를 규명한 이후에 자연에 있었지만 [죄와 타락으로] 제거되고 만 긍정적인 진리에 관한 충실한 논의를 제공하는 신약성경 서문 경우에도 이런 방식으로 시작한다. 칼빈은 이러한 자연적 계시가 다만 인간으로 하여금 핑계치 못하도록 한다는 사실을 신약성경 서문에선 논하지 않았다. 칼빈은 이방인이 자연적 계시를 비우상적 방식으로 수용할 어떠한 가능성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마음에 새겨진 신적인 것들에 대한 인간의 초보적인 이해는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로 보건대, 그는 타락한 인류 전체에게 미친 자연적 계시의 제한적인 영향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인정하되 은혜와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눈이 열린 신자들에 의해서 지각된 자연의 하나님 계시라고 찬양했다.

성경과 전통

칼빈의 초기 『기독교 강요』와 그의 첫번째 교리문답 중 어떠한 것도 신앙과 신학의 규범들에 대한 충분한 진술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리문답 영원한 진리의 규범항목을 따라 만들어진 언급으로 성경 혹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하나님 지식의 유일한 소스라는 사실을 이미 살폈다.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고대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하여진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언급하고 나아가 계시의 역사를 율법과 언약과 그리스도 (메시야) 계시 맥락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분명하게 성경을 기독교 가르침의 궁극적인 규범으로 가정하고 있으며 초기 『기독교 강요』에서 그는 일관되게 성경을 인간적인 전통과 의견에 맞서는 건강한 교리의 토대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들 중 어떠한 것에서도 성경을 규범으로 이해하는 온전한 교리적 체계화 혹은 교리적 진술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고백』 서두에서 그러한 진술을 발견한다.

먼저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신앙과 경건의 규범으로 성경만을 따를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인간적인 의견으로 고안된 어떠한 것도 성경과 혼합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바이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에서 산출된 것 외에는 우리의 영적인 통치권에 대해 다른 어떠한 교리도 용납하지 않음으로 성경에 어떠한 것도 더하거나 감하지 않도록 할 것인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금령을 따라 배웠기 때문이다.

나아가 칼빈은 성경의 올리베탄(Olivetan) 불역본의 라틴어 서문에서 왕정이나 교회의 검열관이 부여하는 특권이 없어도 텍스트의 권위에 의존하여 번역본을 출판할 수 있다는 권리를 주장했다. 성경은 인간에 의해서 새롭게 발명되지 않았으며 그것의 유효성을 얻기 위해 인간적인 증언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고 칼빈은 기록한다. ‘하늘과 땅과 바다의 주인이며 왕중의 왕이신 분의 예언과 영원한 진리가 성경의 권위를 보여주고 있다. 초기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또한 신성에서 성부와 성자의 하나됨과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적인 지혜사용하는 것을 경계하고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우리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배운 것들 외에는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말고 말하지도 말라고 경고한다이와 유사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진리에 관하여 혼란을 느끼는 이들은 성경이 말하는 방식을 배워야한다.

신학의 다른 원천들과 관련된 성경의 권위 및 사용에 관한 칼빈의 초기 입장은 다소 명확하다. 성경에 대한 그의 진술들은 성경을 종교와 신학에 있어서 필수적인 진리의 유일한 근원으로 간주하고 성경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서 연구되고 해석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 중세적 전통의 큰 줄기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칼빈이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문맥에서 이해한 것은 그로 하여금 교회의 이전 전통들을 존중하고 지원하되 특별히 어거스틴 같은 교부들을 주목하게 하였고 초기의 교회 공의회의 결정들을 주목하게 하였지만 그렇다고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여러 오류들과 이단들을 대적하는 데에 지원을 받는 정도였지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 어떤 성명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른 종교 개혁자들 같이 칼빈도 자기 시대에 이루어진 전통의 변화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개혁을 위해 성경을 그러한 오류들과 대립되는 것으로 설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로잔(Lausanne)에서 이루어진 첫번째 강연에서, 칼빈은 자신과 종교개혁 지지자를 묘사할 때 그들이 로마 카톨릭 대적보다 교부들을 더 신중하게 탐독한 자들이며 그러므로 그러한 초기 교회 선생들의 목소리에 올바른 주의를 기울임도 없이 초기교회 권위에 호소하는 로마 카톨릭 학자보다 교부들을 더 존경한 자들로 묘사했다. 비록 교부들은 합당한 관심을 받아야 하지만 우리 주님의 말씀의 권위를 훼손하는그런 차원의 권위를 부여하는 정도까지 높여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사야와 사도 야고보가 명시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에는 오직 왕과 입법자만 있어야 한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만약 교황이 악마적인 교만을 부리며 이 권세를 패하고 그 권세를 자신에게 돌리고자 한다면 그는 적그리스도의 일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부에게 지나치게 높은 권위를 부여하여 적그리스도 기준을 따라그들을 가늠하고 그들로 그리스도 예수의 대적자요 원수가 되게 해서는 안될 것이며 교부들을 읽되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인식하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교회의 초기 인물들과 그들의 사역을 주목하며 그들에게 합당한 경의를 표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교부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겸손과 경외심을 가지고 그 진리를 찾되 최종적인 권위는 오직 하나님께 두었다.

여기에서 칼빈의 교리적 체계화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는 개혁을 초기의 교회가 신실하게 성경을 읽었던 전통 안에 위치시켜 두었으며 그는 또한 오버만(Heiko Oberman)전통 I’이라고 명명한 모델을 고수했다. 교회의 전통은 성경과 동일한 혹은 거의 동일한 지위를 가진 두번째 권위로 여겨서는 안되며 오히려 그것은 성경의 진실한 읽기와 해석에 관계된 문제이다. 게다가 칼빈이 신약성경 서문에서 분명하게 밝힌 것처럼 성경을 읽기 위한 교회적 문맥은 개혁을 반대한 로마 카톨릭 대적들이 규정한 교회적 문맥보다 넓었으며 (더 넓어질 필요가 있으며) 그 문맥이란 교회의 위계질서 및 대학의 신학부 교수진만 해당되는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교육을 받은 일반인도 포함할 정도로 넓었었다.

믿음과 연관된 교리들

구원하는 믿음과 은혜와 칭의에 관한 주제는 칼빈의 1536년판 『기독교 강요』 안에 등장하며 사실 그의 논제식 색인에는 장들 안에 발견되는 주제들 중의 하나로 표기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리에 대해서는 가장 간략한 논의만 있었다. 이 교리가 다른 중요한 교리적 논점들과 다양한 연관성 속에서 보다 명료하게 선언된 것은 교리문답 안에서다. 거기에서 칼빈은 믿음의 정의를 제시하고 믿음을 예정 및 은혜와 먼저 연결하고 그 다음에 칭의 및 성화와 연결하고 그런 다음에 회심과 중생과 선행으로 이동한다. 교리문답 안에서 발견되는 설명의 순서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순서에 따르면 나중에 개혁주의 인물들에 의해 은혜의 집행혹은 구원의 서정으로 규정되는 것들에 해당되는 다른 주제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로마서 8 28-30의 소위 황금사슬주제들을 연결하는 열쇠로서 믿음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일련의 교리들 중 교리문답 첫 장의 제목에서 간단하게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안다는 언급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자비로운 아버지하나님은 복음 안에 그리스도 예수를 제시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고’ ‘인정하는것도 복음에서 비롯되는 것인 반면, 불신과 강퍅함때문에 마음이 어두워진 인류의 보다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거절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그를 맞이하고 그의 부르심을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유효하게 영접된다.

1536년 『기독교 강요』는 선택을 사도신경 주제와 연관시켜 언급하고 유기에 대해서는 단지 이 땅에서의 교회에서 어떠한 사람도 택자와 유기자를 분리할 수 없다는 문맥과 관계하여 매우 간략하게 다루었던 반면, 1537-38년 교리문답은 『기독교 강요』의 나중 판본들에 훨씬 가까운 방식으로 그 문제에 접근한다. 즉 칼빈이 선택과 유기에 대한 교리로의 전환점을 발견한 대목은 바로 복음이 모든 자들을 불러 그리스도 안에 참여할 것을 말하지만 단지 일부만 반응할 뿐이라는 사실에 있다. 일부는 그리스도 부르심을 따르지만 다른 일부는 따르지 않는다는 이 차이신적인 의논의 심오한 비밀에 대한 숙고로 곧장 이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은 주님께서 그의 영원한 선택을 따라 자녀로 예정하고 천상적인 왕국의 상속자로 정하신 자들 안에서만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의 동일한 의논을 따라 제외된 나머지 사람들을 위한 진리의 가장 분명한 선언은 죽음에서 죽음에 이른다는 악취에 의해서다.

 택자들과 유기자들 사이의 이러한 구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의논 이외에 더 소급되는 원인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이러한 개념을 따르면서 칼빈은 신적인 것들의 신비에 대한 인간적인 지식의 한계를 설명하기 위해 교리문답 안에서 가장 긴 장들 중 한 장의 나머지 부분을 할애한다. 왜 하나님은 어떤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다른 이들에겐 그렇지 않는지에 대한 물음은 감추어진 상태로 두어야만 한다고 칼빈은 설명한다. 신적인 신비를 관통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그렇게 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깊은 근심만 만들어 낼 뿐이라고 하였다. 신자들이 해야 할 모든 것은 바로 신비를 수용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판단에서 언제나 의로우며 거룩하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후에 칼빈은 빠져나올 출구가 없는 작정의 미로에 대한 [과도한] 탐구를 경계했다.

신자들은 신비를 불평하고 탐구하는 것보다 인류 전체를 당연한 권리에 의해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하심을 경외해야 한다. 로마서 9장 본문을 떠올리며 칼빈은 자신의 독자들로 하여금 택자는 긍휼의 그릇으로 유기자는 진노의 그릇으로 인정하되 그것이 전적으로 의롭다는 것을 깨닫길 원하였다. 선택과 유기는 서로 합력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바탕을 제공한다. 칼빈은 선택의 확실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다 하였다. 나중에 『기독교 강요』에서 이 주제들을 발전시킬 것을 내다보며, 칼빈은 그리스도 예수를 신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거울로 규정한다. 그리스도 예수는 단순히 거울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는 모든 자들에게 선택의 보증이요 증거도 되신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소유한 모든 자들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소유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더 파고들 필요성이 없다고 하겠다.

믿음의 정의를 논한 초기의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믿음의 두 의미를 보다 명료하게 구분한다. 두 의미는 모두 고유한 것이지만 오직 하나의 의미만이 은혜와 하나님 앞에서의 칭의와 연결된다. 믿음[의 첫번째 의미]은 단순히 사도신경 안에 발견되는 그런 믿음의 조항들을 뜻한다. 이 믿음은 교회가 공통으로 진리라고 확증하는 교회의 교리이다. 그러나 믿음은 신자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내적인 신뢰를 뜻하기도 한다. 그것은 구원과 관계된 믿음의 두번째 의미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를 내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을 누구나 언제든지 받아들일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너무도 확실하여 그것이 행하기로 보증한 것들은 반드시 성취하실 수 있다는 것을 확정하는 마음의 견고한 확신 이외에 다른 어떠한 것도 아니다.’ 교리문답 안에서 발견되는 참믿음의 정의라는 짧은 장은 칼빈의 원숙한 개념을 지향한다. [그 원숙한 개념의] 믿음은 뇌리를 맴돌며 가슴에는 아무런 영향도 못미치는앙상한 하나님 지식 혹은 성경의 민밋한 이해가 아니며, 믿음은 또한 이성을 따라 그럴듯한 것이라고 확인되는 견해 문제도 아니다. 오히려 믿음은 마음의 확고하고 견실한 확신이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복음이 약속한 하나님의 자비 안에 안식하게 되는 그런 것이다. 1536년과 1537-38년 사이에 일어난 개념의 변화는 개념의 초점과 관련되어 있다. 즉 믿음의 개념이 단순한 지적 동의와 궁극적인 의미에서 마음에 즉 의지의 영역에 있는 구원하는 믿음 사이의 구분을 강조하는 강한 주의주의(voluntarism) 성향으로 선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그 안에서 성취되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의 고유한 대상으로 규정한 이후에, 칼빈은 믿음 자체에 대한 언급과 함께 구원의 근원 문제로 돌아간다. 왜 어떤 사람들은 믿고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느냐의 물음이 예정의 문제를 제기하듯, 믿음의 근원에 대한 물음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란 문제를 제기한다. 믿음은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에 속한 것이 아니다. 칼빈은 믿음이 하나님의 탁월하며 고유한선물임에 틀림이 없으며, 믿음은 하나님이 성경에서 약속하신 것들을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을 견고히 확증하며 우리의 마음을 조명하고 영혼의 설득으로 마음을 확고히 세우시는조명적인 성령의 능력 이외에 다른 어떠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약속하신 것을 행하실 것이라는 논점은 1536년판 『기독교 강요』 언사의 반복이며, 교리문답 앞 부분에서 언급된 지성과 의지의 균형은 칼빈이 나중에 이룰 교리적 체계화를 지향하는 논점이다.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의 원숙한 가르침은 칭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 곧장 이어진다.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데 이는 그들에게 어떤 종류의 의로움이 스며들기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의로움을 취하였고 그들 자신의 불법은 그들에게 돌려지지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리스도 의로움의 수용은 죄용서와 동시적인 것이라고 칼빈은 주장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신자들을 위해 자신의 의로움을 전가했기때문에 사도 바울은 행위의 의와 그것을 전복하는 혹은 파기하는 믿음의 의를 구분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칼빈이 비록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를 중재하는 우리의 보증인이 되신다고 간단히 말하기는 하였지만 그리스도 의로움이 어떻게 신자들의 구원에 공로가 되는지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사도신경 해석에서 할 것이라고 칼빈은 밝힌다.

교리문답 안에서 이러한 칭의의 전적인 법정적 설명 다음에는 신자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처럼 그들의 성화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다는 선언이 뒤따른다. 성령의 조명케 하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선물을 얻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간주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에 참여함을 인하여 성화되고 모든 청결함과 순전함에 이른다.’ 성화를 경험함이 없이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속은 자들이다. 그리스도 의로움은 우리가 성화를 맞이함이 없이도 우리가 믿음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에 속하지 않았듯이, 율법에 대한 순종도 인간의 어떤 능력과 대응되지 않는다. 오히려 순종은 율법의 실행을 위한 영적 능력을 요청하고 있다. 파렐 교리와의 유사성이 여기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즉 율법에 대한 순종은 우리의 능력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믿음을 통하여 성취되는 것이라고 파렐은 주장했다.

그러므로 율법은 새로운 기능을 취하게 된다. 즉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마음에 새겨졌기 때문에 한 때 인간의 죄를 정죄만 했던 율법이 신자들의 발걸음을 이끌어 의의 길로 인도하는 빛이 되었다는 것이다. 율법은 악의 길을 출입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의로운 훈련을 제공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멜랑톤의 개념에 수정을 가하며 도출한 칼빈의 제3사용 개념의 섬광을 경험한다.

칼빈이 성화를 마음의 정화와 새로운 순종으로 이해한 것은 그로 하여금 다음 장의 주제인 회심과 중생으로 넘어가게 한다. 여기서는 칼빈이 도입한 용어들이 중요하다. 즉 여기에서 참회(poenitentia)와 중생(regeneratione)은 회개와 함께 조정되어 회심(conversio)으로 규정되기 시작하고 중생은 우리의 부패한 자아의 죽임(mortificatio)과 영적인 살림(vivificatio)으로 구분된다. 이 이중적인 중생, 즉 새로운 삶과 결부되어 육체에 맞서 싸우는 지속적인 전쟁 개념은 파렐의 특징이다. 여기서 그 유형 혹은 모델은 『기독교 강요』 후기 판본에도 계속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칼빈의 사상에 중요한 것이라 하겠다. 『기독교 강요』의 문헌형성 과정에서 추가된 방대한 분량의 자료들을 고려할 때 그 모델을 이후의 판본들 안에서 규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여기서는 가장 기초적인 형태를 따라 진술되어 있다.

회개는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과 결부되어 있으며중생됨 혹은 거듭남이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전제와도 결부되어 있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회심으로 정의되는 회개는 중생에 의존하고 있으며 우리의 삶 전체에 관계된 과정이되 한편으론 죄와 부패의 잔재들을 죽이고 다른 한편으론 인간의 본래적인 상태가 은혜로 회복되게 하는 수단으로 영적인 살림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칼빈은 또한 논의의 순서에서 왜 회개와 중생을 성화 다음에 두었는지 밝히기를, 거듭남 혹은 새로운 피조물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생에서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회개는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는 삶은 구원의 필연적인 부분이다. 중생에서 비롯되는 선행은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받음직한것이다. 선행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온다는 이러한 강조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기초를 결단코 제거하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서 행위에 기초한 의로움의 어떤 형태를 구성하는 것도 아니다. 행위로 말미암는 인간적인 의로움은 율법 아래에서 전적인 완전함이 필히 뒤따르지 않으면 안되는데 칼빈은 인간에 의해서 산출된 행위들 중에 전적으로 완전하고 무흠한 행위는 하나도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의는 우리 자신 바깥에서(extra nos), 즉 하나님에 의해 은혜로 우리에게 전가하신 의의 주체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와야만 한다. 이 교리는 선행의 필요성을 결코 제거하지 않으며 오히려 기독교적 삶에서 가지는 그것의 고유한 중요성을 긍정하고 있다. 신자의 불완전한 의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의로움에 의해 가리워질 때 하나님은 순종하는 인간의 행위를 의롭다고 여기시며 받아들여 주신다.’ 동시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원한 보상을 약속해 주신다.

결론

칼빈의 초기 신학은 (그가 작가에게 합당한 방식이라 주장하는 글쓰기의 특질로서) 명료성과 간결성 때문에 주목할 만하며, 전 생애를 걸쳐 칼빈의 사상에 중요한 내용으로 보존될 일련의 괄목할 만한 주제들을 제공하고 있다. 칼빈의 초기 신학은 그 근본적인 의도에 있어서 성경적인 동시에 전통적인 입장에서 성경 텍스트를 주목하고 교회에서 분명한 지지의 목소리를 추구할 때에는 특별히 교부들을 주목하되 교회를 괴롭히는 진리의 학대가 창궐하기 이전에 저술된 보다 오래된 전통으로 이해한 신학이다. 요약하면, 칼빈의 초기 신학은 그 의도에 있어서 정통적인 동시에 교회적인 것이었다. 교황적인 미신에서의 해방이란 칼빈의 관념과 독자들과 청중들로 하여금 그 미신에서 경건과 배우고자 하는 성향으로 전환되게 만들려는 그의 의도는 칼빈의 초기 저작들 전반을 관통하고 있으며 그 모든 것들을 포괄되는 하나의 공통된 주제이다.

 

출처: 한병수 전도사 블로그  Theologia orthodoxa reformata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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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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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지나간 시절에 우리의 도움이셨던 하나님

          다가올 세월에는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비바람 치는 폭풍의 때에는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영원한 우리의 본향이십니다.

           

          주님의 보좌 그늘 아래서

          우리가 여전히 안전하게 거합니다.

          주님의 팔만으로도

          우리의 방패는 확실합니다.

           

          작은 산들이 질서 있게 서고

          땅의 틀이 잡히기도 전에

          영원부터 당신은 하나님이시며

          영원까지 동일하십니다.

           

          오,

          지나간 시절에 우리의 도움이셨던 하나님

          다가올 세월에는 우리의 소망이십니다.

           

          우리의 삶이 다하기까지

          우리가 영원히 본향에 이르도록

          우리의 인도자가 되소서.

           

                - 아이작 와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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