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hy >자살자들, 신발 벗어놓고 문자 남기는 이유

신발-사후세계로 들어간다는 전통문화서 기인

문자-생에 대한 미련과 살고싶은 희망의 표현


지난 8월 1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래섬 인근 선착장에서 중년 남성의 것으로 보이는 신발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진 채 발견됐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24시간 동안 수색을 벌인 끝에 신발이 발견된 선착장 인근 요트로부터 한강 하류 방향으로 약 25m 떨어진 바지선 바닥 아래 수중에서 남성의 시신을 발견했다. 시신은 최근 한 줄기세포 업체의 뇌물 비리와 관련돼 검찰 수사를 받던 김종률 전 민주당 의원이었다. 김 전 의원은 유서에서 2009년 의원직 상실형이 선고된 단국대 관련 배임수재 사건을 거론하며 “지난번 제 사건으로 내내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가 있었고 억울함에 어떻게든 명예 회복의 기회를 얻고 싶었다”고 적었다. 벗어놓은 신발과 유서 등 여러 정황상 이 사건은 시신 부검 없이 자살로 종결됐다.

7월 경남 창원에서는 야간자율학습을 하던 과학고생 오모(16) 군이 건물에서 뛰어내려 숨졌다. 당시 오 군의 학교는 조기졸업 대상자를 선별하기 위한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과학고 학생들은 고교 3년 과정을 2년 만에 끝내고 조기졸업하는 경우가 많은데 경찰은 오 군이 시험에 부담을 느끼고 쉬는 시간에 실험동으로 건너가 투신한 것으로 추정했다. 오 군이 뛰어내린 실험동의 4층 복도에서도 벗어놓은 신발이 발견됐다.

자살 문제 전문가들에 따르면 투신 자살하는 사람들이 신발을 벗어놓는 이유는 서양과 다른 우리 고유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박종익 중앙자살예방센터장 겸 강원대병원 정신과 교수는 “자살자들이 신발을 벗고 투신을 하는 것은 어떤 공간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우리 문화와 연관된다”며 “사후 다른 세계로 간다는 의미에서 신발을 벗는 자살자들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현정 국립중앙의료원 정신과 전문의는 “신발을 벗어놓는 것은 자신이 여기서 죽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행위”라며 “자살자가 주변인들에게 마지막 단서를 남기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신발을 벗어놓는 것 외에 가족들에게 문자메시지 등을 통해 죽음을 알리는 사례도 많다. 1월 경기 용인시의 한 병원 옥상에서 공무원 이모(29) 씨가 스스로 몸을 던져 숨을 거뒀다. 이 씨는 투신 직전 아버지에게 ‘죄송합니다. 못난 아들 이해해 주세요. 행복하세요. 사랑합니다’라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조사됐다. 3월에도 경북지역 한 자율형사립고에 다니던 권모(17) 군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그는 투신하기 3분 전 어머니에게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는데 더 이상 못 버티겠어요’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보냈다.

자살 전 마지막 문자메시지를 통해 죽음의 문턱에서 구조되는 경우도 있다. 5월 2일 서울 영등포경찰서 여의도지구대에 아들 이모(32) 씨가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문자를 남기고 연락 두절됐다는 한 어머니의 다급한 신고가 들어왔다. 휴대전화 위치추적 결과 마포대교 부근에서 신호가 잡혀 인근 지구대 경찰들이 한강 남쪽과 북쪽 둔치를 뒤졌고 수색 시작 1시간 뒤 마포대교 아래서 강을 계속 응시하며 힘없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이 씨를 찾아냈다.

전문가들은 떠나는 이들이 남기는 마지막 문자메시지가 생에 대한 ‘미련’과 살아남고 싶은 마지막 ‘희망’을 드러내는 것이라 분석한다. 안용민 한국자살예방협회장 겸 서울대병원 정신과 교수는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평소에도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여러 표현을 한다”며 “자살자들이 죽을 결심을 하고 보내는 문자메시지도 ‘마지막으로 잡아 달라’는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에서 투신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혹시라도 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육지 쪽을 향해 뛰어내린다고 한다”며 “자살자들은 90% 이상 언제든 마음을 돌릴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인데 문자메시지도 그런 미련이 드러나는 행위”라고 말했다.

김대종 기자 bigpaper@munhwa.com




입술의 30초가 가슴의 30년이 된다.



사람들은 귀 때문에 망하는 사람보다
입 때문에 망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은
뒤에서도 하지 마라!!~★★
뒷말은 가장 나쁘다.
구시렁거리지 마라!!~☆☆



말을 독점하면 적이 많아진다.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들을수록 내편이 많아진다.

목소리의 톤이
높아질수록 뜻은 왜곡된다.
흥분하지 마라!!~☆☆
낮은 목소리가 힘이 있다.



귀를 훔치지 말고
가슴을 흔드는 말을 하라!!~★★
듣기 좋은 소리보다
마음에 남는 말을 하라!!~☆☆

내가 하고 싶은 말보다
상대방이 듣고 싶은 말을 해라!!~★★
하기 쉬운 말보다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 해라!!~☆☆



칭찬에 발이 달려 있다면
험담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나의 말은 반드시 전달된다.
허물은 덮고 칭찬은 자주 해라!!~★★

뻔한 이야기 보다
펀(fun)한 이야기를 해라!!~☆☆
디즈니만큼 재미있게 해라!!~★★



혀 로만 말하지 말고
눈과 표정으로 해라!!~☆☆
비언어적 요소가
언어적 요소보다 힘이 있다.

입술의 30초가
가슴의 30년이 된다.
나의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

혀를 다스리는 것은 나지만
내 뱉어진 말이 나를 다스린다.
함부로 말하지 말고
한 번 말한 것은 책임을 져라!!~☆☆★★

-*◎좋은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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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D.M.로이드존스]

글쓴이: 이종인   02.11.08   http://cafe.daum.net/CPI2002/7HFj/38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

1. 예정론 연구의 필연성(필요성)

창조의 교리를 상고하기에 앞서 우리가 먼저 상고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하라고 우리에게 지시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우리에게 말씀하기 전에 하나님의 모든 활동의 특성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역사를 행하시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정확하게 상고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역사를 행하시는 방법을 먼저 상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기초가 되고 특징이 되는 몇 가지 중대한 원칙들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이야기해서,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인간의 창조를 시작하기 전에 특정한 일들을 생각하셨고, 의도하셨고, 결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고 순서가 이른 곳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실제의 창조에서 어떤 일을 행하시기 전에, 하나님의 영원한 의향과 계획 중에 특정한 일들이 결정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 있어 이 교리는 우리의 지력의 범위를 초월하는 삼위일체의 교리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삼위일체의 교리에서 본 바와 같이 단지 어렵다는 이유로 이 교리를 피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을 격려하기 위해 약속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약속은 이렇습니다: 즉 이 기본적이고 예비적인 교리들이 극히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영원자의 생각을 다루고 있고, 우리의 유한한 이해력과 우리의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지력의 범위를 넘는 일을 상고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인간에 대한 교리와 창조와 구원에 대한 교리는 당연히 훨씬 쉽다는 것입니다.

1) 성경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임.
이 교리에 여러분의 주의를 요구하는 나의 첫 번째 이유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이 교리가 성경에 계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분명히 우리는 이 교리를 상고하고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 전도의 진정한 문제가 하나님의 교리에 우리가 충분한 시간을 들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관적인 경험과 주관적인 구원에 너무 흥미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에 대한 이 중대한 교리를 망각합니다. 그리고 이 점이 우리의 많은 불행과 문제들의 원인입니다. 우리가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해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 경배하게 됩니다.

2) 오류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임.
우리가 이 교리를 상고해야 하는 또 한가지 이유는 이 교리가 우리를 많은 오류로부터 지켜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세월에 걸쳐 사람들을 타락시킨 대부분의 오류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마땅히 깨달아야 하는 만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3) 가장 큰 위로의 교리이기 때문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교리에 주의를 요구하는 마지막 이유는 이 특별한 교리보다 더 큰 위로를 주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시간의 세계를 지나가고 있는 보잘것없는 피조물에 불과한 나의 배우에 이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이라는 교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더 큰 위안을 주는 것이 없다고 주저하지 않고 말합니다.

2. 이 교리에 접근하는 자세
1) 편견과 모든 종류의 파벌 정신을 제거하는 일.
2) 부정적인 명제 : 철학적으로 이 주제에 접근해서는 안됨.
3) 긍정적인 명제 : 겸손하게 접근해야 함.
우리는 이 주제에 겸손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또한 경외감을 가지고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주제에 믿음으로 그리고 우리의 한계를 기꺼이 인정함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접근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찾고 탐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린이와 같은 심령을 가지고 나아가서 우리에게 계시되는 것을 받아 들어야 합니다. 덧붙여 말한다면, 성경의 계시를 넘는 질문들을 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은 성경에 계시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 기꺼이 질문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주어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나는 그 이상을 알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계시로 만족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 심원한 교리에 접근해야 합니다.

3. 진술
1. 첫 번째 원칙 : 하나님께서는 영원부터 자신의 피조물들에 대한 불변의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부정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어떤 일이든지 마음 내킴이 없이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활동에는 절대로 불확실한 일이 없습니다. 이 말을 다른 형태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뒷궁리 하시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전지하시고 편재하시다고 동의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뒷궁리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우발적이거나 우연적이거나 불확실거나 뜻밖의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에 대해, 인간들에 대해, 구원에 대해, 이 세상의 전체 생활에 대해, 이 세상의 종말에 대해, 궁극적인 운명에 대해 명확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성취하신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의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일은 확고하고 확실하고 불변적이고 절대적입니다.

2. 두 번째 원칙 : 하나님의 계획은 일어나는 모든 일과 모든 종류의 사건들을 포함하고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특정한 결과들을 결정하셨다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그 결과에 이르게 하는 모든 일도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시점에 창조를 결정하셨고, 시간에 따라 어떤 시점에 세상의 종말이 일어나도록 결정하셨다고 믿는다면, 만일 종말이 확실히 결정되었다면, 그 종말로 인도하는 모든 일도 결정되어야 합니다.
만일 모든 일이 하나님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 일들에는 필연적으로 자유로운 활동, 자유롭게 자발적인 행위자들의 자발적인 활동들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진술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엡1:10-11).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16:33).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19:29).
한 마리의 참새가 땅에 떨어져 죽습니다. 여러분은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는 말씀에 이어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10:30)라고 말씀하십니다. 전혀 우연적인 것으로 보이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들이 하나님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입니다.

악한 일들도 하나님의 예정안에 있는 것임.
더 비범하고 인상적인 일이 있습니다. 성경은 심지어 죄악된 행동들도 하나님의 지배안에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예수살렘에서 한 설교를 들어보십시오 : "그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행2:23). 그 다음에 베드로는 사도행전 4:27-28절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나타냅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이들의 무서운 죄도 하나님의 의도에 의해 미리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예 :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45:8).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의 원인이 아니심.
하나님께서는 어떤 의미에 있어서도 그리고 절대로 악의 원인이 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한 행위자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허용하시고, 그 다음에 자신의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그 악을 압도하십니다. 죄의 발생을 허용는 하나님의 결정은 죄를 제한하고 죄가 한정되는 정확한 방향과 죄가 지향하는 정확한 결과를 결정하여 죄의 결과들을 선으로 바꿉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명백하게 우리를 가르칩니다.
요셉의 예 :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나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가룟유다의 예 : 유다의 해동은 자유롭고 자발적이었음에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의 일부분이었던 것입니다.

3. 세 번째 원칙 : 하나님의 모든 결정들은 무조건적이고 주권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결정들은 결코 인간의 행동들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결정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행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지식에 비추어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결정들은 완전히 무조건적입니다. 하나님의 결정들은 하나님 자신의 뜻과 하나님 자신의 거룩하심 외에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습니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 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단4:35).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11:25-26).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5). 나는 여러분에게 에베소서의 첫 장 상반부를 주의 깊게 공부하라고 추천합니다. 그곳에서 말씀하는 바를 자세히 관찰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항상 "그 기쁘신 뜻대로" 이루어 진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완전히 은혜입니다.
이 교리가 로마서 중에서도 심원하고 중대한 9장에서 가장 명확하게 진술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특별히 11절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바울의 논증은 하나님께서 형이 동생을 섬기도록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 중 아무도 아직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롬9:13)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질문1 : 하나님의 결정은 사람의 행위에 의존하는가?
여러분은 이렇게 질문할지 모릅니다 : "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셨을까요? 그들이 행한 일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그들이 임신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는 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행위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으로 주권적입니다. 바울의 말을 다시 들어봅시다. :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9:14).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불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금하십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었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사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9:15-18).

4. 네 번째 원칙 : 하나님의 결정들은 효과적이라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인 주님이시고 전지전증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들은 절대로 실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결심하시고 결정하신 일은 무오하게 성취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께서 결심하시고 정하신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 무엇도 좌절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결정들은 모든 일들에서 하나님의 가장 지혜로우시고, 인자하시고, 거룩하신 본성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나는 이점에 대해 논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이야기해서 하나님에게는 모순이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질문2 : 하나님께서는 왜 악을 허용하시는가?
서론에서 내가 여러분에게 경고한 바와 같이, 이 땅에서 유한하고 죄악된 심령을 가지고 살고 있는 여러분과 나는 문제들에 봉착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죄를 허용하기로 결정하셨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한 가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죄를 허용하기로 결정하셨다는 사실을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허용하지 않으셨다고 죄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모릅니다. 그러나 영광중에 하나님을 마주 뵈올 때, 우리는 그 모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 것입니다.

두가지 단언
두가지 우리가 확신할 수 있고 단언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죄의 원인이 아니십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합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1:13).
둘째로, 하나님의 목적은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의 피조물들의 행동방식 및 본성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다른 말로 이야기 해서 비록 우리는 조화시킬 수 없지만 궁극적인 조화가 있습니다.

질문3 : 하나님께서 정하신다면 우리의 행위에는 책임이 없지않은가?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결정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행하는 일에 우리가 책임이 있다고 하실 수 있을까요? 여기 대답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해서는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 지라도 무슨 말하리요"(롬9:20-23).
여러분은 물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어떻게 이 두가지 사실을 조화시킵니까?" 나는 조화시킬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내가 아는 것은 성경이 이 두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어떤 의미에 있어 자유로운 행위자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영원한 결정들이 모든 일을 지배한다는 사실입니다.

5. 마지막 원칙 : 인간들과 천사들의 구원, 그리고 특별히 인간과 천사들 중 일부의 구원이 창세 이전에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내어?지 아니하리라" (요6:3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4).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13:48).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2:13).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1:9).

질문4 : 예정하심은 불공평이 아니냐?
"나는 이해 못하겠다. 그 말은 내가 보기에 모순되고 불공정한 것 같다. 만일 당신이 나에게 이 결정들이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불공평한 것같다"라고 질문한다면, . 질문자에게 바울은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롬9:19)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어서 "이 사람이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해서는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 지라도 무슨 말하리요"(롬9:20-23). 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대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경의 대답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생각에 싸움을 걸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지, 얼마나 유한한지, 타락의 결과로 얼마나 죄악되었는지 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영광에 이를 때까지 궁극적인 깨달음을 유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일관되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원한 결정에 대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결심하시고 결정하신 바에 대해 명백하고 명확하게 여러분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시간에 속한 이곳에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의 전부입니다.
특히 무엇보다 여러분이 해야 할 것은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렇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결정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 대해 결정하신 것은 정확하고 안전하고 확실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무엇도 누구라고 하나님의 손에서 여러분을 빼앗거나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보류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엄 앞에 허리를 굽힙시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앞에 낮아 집시다.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주시기를 기뻐하신 계시에 복종합시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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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온글:어지러운 세상중에..(칼 바르트 신학의 악한 열매..)

진 설 병 ㆍ 2013-09-11 (수) 13:39 IP: 173.xxx.135 ㆍ조회: 55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7>  
글쓴이 : 관리자    


“어지러운 세상 중에…”


0032. 칼 바르트 신학의 악(惡)한 열매인 스위스개혁교회의 70%가 강제로 문을 닫게 되는 배도의 현장  

에큐메니칼 운동 50주년. 80년도 초에 전 스위스 개혁교회의 주일학교를 폐지시킨 후 18 년, 젊은 층이 없는 교회로 변형, 300~500명을 수용하는 교회의 주일출석은 25~40명 정도, 드디어 70% ‘폐교회’조치가 내려진 공고와 그 골자는 아래와 같다.
 1) 가까운 이웃 교회들끼리 통합, 70%를 ‘폐교회’조치함. 이곳 로잔의 경우 18교회 중 12교회가 문을 닫게 됨.
 2) 모든 교역자는 일괄사표를 제출, 1993년 3월에 재임명 받으며 일부는 해고조치됨 (목사는 국가 공무원임).
 3) 전 세계 그리스도의 교회의 ‘주의 만찬’이 천주교의 ‘미사’로 바뀌는 현상. 목사 왈, “어떠한 신조나 믿음(종교)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떡과 잔에 참여하시기를...”로 바뀌면서 PK와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음. - 온 세계 ‘교단소속’ 교역자들에게 임할 재앙이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스위스 개혁교회를 텅 비게 만든 스위스 개혁교회 목사『칼 바르트』(Karl Bart, 1886 ~ 1968)신학은 인본주의 철학으로 유럽 교회들을 공동묘지로 조성했을 뿐 아니라 WCC신학(종교다원주의)의 토대를 제공하였으며, 북미에서는 신(Neo-)복음주의를 태동시킴으로써 북미와 세계 기독교 신학교 및 교회들을 초토화시켰다.
칼 바르트는 성령님의 보증을 혐오,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확실성, 확신, 보증’을 거부함으로써 로마카톨릭교회의 트렌트공회의 교회법 (아래 0033 ‘짐승 위에 탄 여자’참조)에 동조함. ‘만인구원론자’칼 바르트의 신학은 제수이트(Jesuit, 예수회) 출신인 로마교황 요한 23세로부터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칭송을 받았으며, 곧이어 제2바티칸 공회(1962~65)가 개최되었다. (『루터』,『쯔빙글리』,『깔뱅』,『틴데일』등등의 개혁자들을 칭찬한 로마교황이 있었던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철학자, 신학자들의 하나님’으로 바꾸어놓고 불트만, 몰트만, 쿨만 등등의 학자숭상죄(Scholaralatry)에 빠져있는 유행병환자들도 많거니와 자칭 복음주의자들이라는 보수작업이 필요한 보수주의 신학자들도 많다. 수정교회(Crystal Cathedral)를 로마교황청에 넘겨준 로버트 슐러 목사가 바로 ‘개혁교회’ 목사가 아닌가!

0033. “짐승 위에 탄 여자”  
(로마 카톨릭 교회와 종말, Dave Hunt 지음/정태윤 역, 420pp - 이미 서점가에서는 품절된 책. 계시록 17,18장 중심으로 천주교의 뿌리로부터 인류의 종말까지 전반을 상세히 다룬 책. 역자에게 소량의 책이 보관되어 있어 필요한 분은 Pay to KOO, $40 수표 동봉하여 아래 빅토리아 주소로 신청가능하며 책은 미국에서 직송됨. 영문판(A Woman Rides the Beast), DVD, 스페인어판 구입은 www.chick.com을 통해 구입가능함)

물론 카톨릭 교회도 구원을 설교하고는 있다. 그러나 그 설교는 성경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설교이고 복음주의자들이 믿고 있는 구원과는 정반대의 설교이다. 그들의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의 완성된 사역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복종을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이다. 카톨릭 신자들 중에서 구원의 확신을 갖고 죽으면 곧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자는 없다. 그런 확신을 말한다는 것은 곧 로마로부터 자동적인 파문과 저주를 초래하는 말이 된다:

만약 누구든지......속죄를 얻기 위해서......주저함이 없이 확신을 가지고......용서를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let him be anathema! - Council of Trent, Six. ⅩⅥ. 13).
만약 누구든지......신자(信者) 견인(堅忍)(즉 성경이 약속한 대로 자신이 영원히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을 확신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Council of Trent, Six. ⅩⅥ. 16).

로마 카톨릭 교회는 구원을 위해 필요한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이미 이루어버린 것이 결코 아니며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단순한 믿음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는 절대 요지부동이다. 그들은 구원이란 행위와 의식과 교회에서 지정하는 고난을 일생 동안 수행하며, 심지어는 연옥에까지 가서도 계속해야만 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만약 누구든지 칭의의 은혜를 받은 후에 회개한 자들에게는 죄책이 면해졌으며 영원한 형벌의 빚이 탕감되었다고 말하며, 하늘 문들이 열리기 전에 이 세상에서나 연옥에서 갚아야 할 벌들이 다 소멸되었다고 말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어다.

트렌트 공회는 물론 “회개한 죄인”이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있다. 이 말은 성서적인 것으로 들리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미혹을 당한다. 그들의 말은 복음주의자들과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들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트렌트 공회는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은 “회개한 죄인”은 이 땅에서나 혹은 연옥에서 혹은 양쪽에서 다 죄의 깨끗함(to be purged)을 받기 위해서 여전히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리야말로 십자가 위에서 죄인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충분성을 부인하는 행위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저주한 거짓 복음이다(갈 1:8).

0034. 예수님을 ‘프리메이슨’ 두목으로 만들어 놓은 NIV 성경



마귀, 우상에게는 ‘경배하다’(worship)란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예수님께는 이 단어를 고의적으로 모두 제거한 성경이 ‘New’가 붙은 영어성경들이다. ‘NIV’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이 숫제 프리메이슨 두목이 되어있다. 신약에 다섯 번 인용된 예수님을 지칭한 ‘모퉁이의 머릿돌’을 모두 ‘관석’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 ‘관석’이란 단어는 프리메이슨 조직의 계급용어로 이 조직의 최고위 지위인 33급 멤버의 심볼로서 ‘피라미드’나 ‘오벨리스크’의 맨위의 뚜껑을 닫는 돌을 의미한다(미화 1불짜리 지폐 뒷면의 그림참조).

                     



루시퍼(사14.12), 갈보리(눅23.33)등을 삭제하고, 단 한번 언급된 개혁(Reformation)이란 단어를 제거, 종교개혁 자체를 부인하면서 어떠한 종류의 사본에도 없는 ‘New Order’란 단어로 대신한 NIV 성경(히9:10). 이호와이레(창22.14), 여호와닛시(출17.15), 여호와살롬(삿6.24)을 제거하고, 골리앗을 엘하난이 죽였다고 거짓말하며(삼하21.19), 구약에 33번 언급된 지옥(hell)이란 단어를 100%제거, 신약에서는 48% 제거한 NIV성경. ‘독생자’예수를 외아들 (독자, 피조물, 뉴에이지 예수 - 요1:18/3:16/3:18/요일4:9등)로 둔갑시켜, 예수님을 프리메이슨 두목으로 만들어 놓았으며(마21:42, 막12:10, 눅20:17, 행4:11, 밷전2:7), 사단, 마귀, 우상, 짐승에게는 경배(worship)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예수님을 경배하는 구절에 와서는 고의적으로 경배란 단어를 제거시킨 NIV성경 및 ‘New’성경들. 이러한 성경을 ‘선호도가 가장 높은 NIV성경’운운하는 교계신문의 무지함과 한심함. 배도를 합리화하기 위한 가공할 음모들이 성경의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는데도 눈이 가려져 보지를 못하고 있다. 또 알고서도 바꿀 생가조차도 안하는 지도자들은 더더욱 무섭다. 독한 사람들이다. “모두 설교는 하나 실천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All preach, no practice) 라는 말이 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이니 “개혁신앙”이니 하는 말이 입에 붙었다. 하나님께 영광도 안되고, 아무리 ‘개혁신앙’을 부르짖어도 개혁이 불가능한 것은 개혁자들이 생명을 내어놓고 건네준 생명의 말씀, 즉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선물인 하나님의 말씀, 바른 성경을 버렸기 때문이다.

0035. 성경코너가 사라진 책방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좋은 성경은 자취를 감추었으며 신학교 등지에 내려진 ‘애굽의 재앙들’로 인해 ‘말씀의 기갈’시대를 이미 경험하고 있다. 세상 끝에 되어질 일들을 자상하게 제자들에게 설명해주시는 주님(마24장), 그 때를 ‘아들도 모르고’(마24:36)라고 거짓말하고 있는 현대판 성경들. 말씀에 더하고(+), 빼고(-), 변개 조작하는 일들이 성서공회의 거짓 서기관들에 의해 자유자재로 행해지고 있는 현실. 루터, 틴데일, 쯔빙글리, 깔뱅(Olivetan), 흠정역(AV/KJV) 등 개혁자들의 성경에는 없는 ‘아들도 모르고’는 누가 더했고(+), 그리고 내(my) 아버지만 아시나니’의 ‘내’는 또 누가 제거(-)하였는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역을 격하시키고 인간 예수, 뉴에이지 예수로 둔갑시키고 있는 음모가 온 현대판 성경에 깔려있다(마가 13:32에는 ‘아들도 모르고’가 있어야 되는 이유).

0036. CEV (Contemporary English Version, 1995- ) 성경      

미국, 캐나다 성서공회 간행 표준성경인 CEV 성경에는 grace, -ly(200), gospel(95), judgment(285), justification / justify(14), redeem / redemption(60), repent / -ance(69), righteous / -ness(510), salvation(150), sanctification / sanctify(71), tribulation(22) 등 신학적으로 중요한 50여개의 단어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괄호안은 영문판 흠정역 AV/KJV성경에 나오는 횟수). 적그리스도(Antichrist)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적(들, the Enemy of Christ / an enemy of Christ / many of Christ’s enemies / the enemies of Christ)으로 둔갑시켜놓고 잠적해 버렸다. 영어권에서 사역하는 교역자들에게 제일 화급한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올바른 성경을 찾아 쥐어주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죽으신 구주밖에는 자랑을 말게 하소서
   보혈의 공로 입어서 교만한 맘을 버리네
        (찬 147 주 달려 죽은 십자가②)

 구영재 선교사 [KOO,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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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흐르는 가을 향기. / 최송연 꽉 막혔던 가슴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나니 이제야 실바람 흐르는 가을을 조금 느낄 수 있어서 정말 좋네 바람을 휘감아도는 가을 노래 향긋한 빛깔로 물들여지는 나뭇잎 내 마음에도 수채화처럼 고운 가을이 빈 공간을 따라 채워지기 시작한다 가슴에 흐르는 이 가을 향기 따라 내 사랑 그분이 오신다면 좋겠는데....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계 22: 20절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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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부에는

사진사들에게 유명한 곳이지만

일반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비경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Zebra Slot,

웨이브(Coyote Buttes North)나

서브웨이(The Subway), 와잍 파킷(White Pocket),

 

그랜드 캐년의

하바수 폭포(Havasu Falls),

리본 폭포(Ribbon Falls), 토로윕(Toroweap)

 

파웰 호수의

Alstrom Point나

캐년랜즈의 Elephant Rock,

Grosvenor Arch나 Sunset Arch 등이죠.

 

위에 언급한 장소들은

덜컹거리는 비포장 길 수십 마일 가거나,

혹은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먼 거리를 이동하는,

 

일반 차량으로는

접근이 매우 어렵거나

혹은 길을 찾기가 좀처럼 쉽지 않아서

 

매니아가 아닌

일반 사람들이 가기엔

엄두가 나지 않는 곳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소개해 드릴

블루 캐년(Blue Canyon)도

바로 이와같은 장소 가운데 한 곳입니다



10081100_1.jpg

블루 캐년은

애리조나의 북동쪽에 있는

오지의 비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블루캐년은

몇 년 전에 127 Hours 라는

영화에 나왔던 블루 존 캐년과는 다른 곳입니다.

 

블루 존 캐년이 유타에 있다면

블루 캐년은 애리조나에 있습니다.

 

블루 존 캐년이

슬랏 캐년, 혹은 벅스킨 걸치와 비슷하다면

블루 캐년은 행스빌에 있는 고블린과 유사하게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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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캐년은

호피(Hopi) 사람들의

영토(reservation) 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호피 사람들은

고대 아나사지(Anasazi)의 후손들로 알려진

푸에블로(Pueblo)의 후손들과 동일인들로 알려져 있습니다(호피 사람들의 주장).

 

이들은

나바호(Navajo) 사람들처럼

포 코너(Four Corner) 주변에 흩어져 살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부족끼리인

이들 사이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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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피 사람들이

농경생활 위주의 원주민이었다면

나바호 사람들은 농경과 수렵을 겸하고 있었고,

 

게다가, 나바호 사람들은

뉴멕시코주가 멕시코의 영토였을 무렵,

 

멕시코인들과 빈번하게 전투를 치루었기 때문에

나바호의 전투력은 호피 사람들의 전투력보다 뛰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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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군사력에 밀린 호피 사람들은

나바호(Navajo)와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조금씩, 조금씩 그들의 땅을 빼앗기기 시작했죠.


10081100_5.jpg

그 결과

호피 땅은 쪼그라 들었으며,

 

현재, 블루 캐년이 있는

 Moenkopi Wash를 비롯한

대부분의 호피 땅은 나바호 땅에 의해 섬처럼 둘러 쌓여 있습니다.


10082101_31.jpg

북아메리카에 살았던

대부분의 인디언들에게

18-19세기의 백인들과 미연방 정부는

그들의 땅을 빼앗고, 가족을 죽인 원수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호피 사람들에게

백인과 미연방 정부는

생명의 은인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10082427_32.jpg

왜냐하면,

만약, 연방정부가 없었다면

호피 사람들은 나바호 부족들에게

자기들이 조상대대로 살아왔던 땅을 침략당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호피 부족은

지금은 그 이름만 남긴 채,

북아메리카에서 명멸해 갔던 수많은 인디언처럼

호피의 후손은 더 이상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10081100_6.jpg

현재 호피 사람들은

애리조나 264번 길의 Oraibi,

Second Mesa를 중심으로 흩어져 살고 있으며

2012년 현재 인구는 약 18,000 여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호피 사람의 인구 수는

30만 여명인 나바호에 비하면

불과 약 17분의 1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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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캐년으로 진입하는 길은

두 군데가 있는데 하나는 160번 길이고

다른 하나는 Coal Mine Canyon 부근의 264번 길입니다.

 

264번 길은

160번 길보다 더 험하고

입구를 제대로 찾기가 쉽지 않아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160번 길로 진입합니다.


10081100_8.jpg

 

대부분의

Native American(인디언)이 그러하듯이

호피 사람들도 자기네들의 땅을 신성시하기 때문에

 

이방인,

혹은 외부인들이

자기들의 영토 내부로

들어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10081156_9.jpg

블루 캐년으로 가는

이정표가 전혀없는 것은

그들이 신성시하는 땅 안으로

외부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진사들의 버킷 리스트에는

블루 캐년이 항상 앞 순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10081156_10.jpg

 

블루 캐년의 형태는

Badlands와 후두(Hoodoo),

 

Cross line,

pinnacle과 red와

white의 침식된 지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0081156_11.jpg

블루 캐년의 독특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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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에서 보는 바,

후두들이 떨어지는 이유는

 

위에 있는 브라운 색의 후두와

아래쪽 회색 바위가 풍화에 견디는 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10081156_13.jpg

 

블루 캐년에 생긴 지층(stratum)은

오늘날 대다수의 지질학자들이 인정하는

혼탁류(Turbidity Current)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혼탁류란

급격한 물의 흐름에 따라,

그 물의 힘에 의해 퇴적물이 이동하는 현상을 말하는데

 

퇴적지층은

오랜 기간 동안에

천천히 형성되는 것도 있지만

혼탁류에 의해 아주 짧은 시간에 형성되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블루 캐년은

지질학적 현상으로 볼 때,

 

브라운 색과 회색이

일정하고도 규칙적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이것은 두 성분이

혼탁류에 의해 급격하게

분리되어 생긴 것을 의미합니다.

 

위의 사진에서 생긴 지층이

만일 오랜 세월에 의해 형성되었다면

바람과 비에 의해서 규칙적인 모양이 모두 사라지고

바람과 비에 의해 파이고 손상된 불규칙한 모습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층이 순식간에 생기고,

그 위에 다른 지층이 곧바로 덮였기 때문에

블루 캐년은 규칙적인 지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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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탁류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위의 지층과 아래 지층을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형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거의 동시간대에 형성시킨다는 것입니다.

 

위의 사진은

회색 지층과 브라운 지층이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쌓여진 것이 아니라

 

홍수에 의해 형성되는

급격한 혼탁류(Turbidity Current)에 의해

아래 위가 동시간대에 형성된 것을 보여줍니다.


10081156_15.jpg

그럼, 어떻게 해서

이렇게 서로 다른 색상이

동시에 생기게 되었을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혼탁류에 의해 발생하는

지층의 특성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10081156_16.jpg

거대한 혼탁류가

어느 지점을 통과할 경우에

주변에 있던 흙과 모래와 자갈 등,

 

퇴적이 될 만한 모든 성분들은

같은 구성원들끼리 모이면서 퇴적이 형성됩니다.

 

예컨대,

굵은 모래는 굵은 모래끼리,

흙은 흙끼리, 돌이나 자갈들은 그들끼리 모이게 되죠.

 

그 이유는,

물의 흐름에 따라

입자가 움직이는 속도와

거리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10081415_17.jpg


 

위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아래 회색은 실트(silt)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위의 브라운 색의 바위는 실트보다 더 단단한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이 두 성분은

혼탁류에 의해 퇴적될 때,

입자의 무게나 크기가 서로 달랐기 때문에

비록 동시에 형성되었지만, 위치는 서로 다르게 퇴적되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설명하자면

혼탁류는 위의 지층과 아래 지층을

 

동시에 퇴적시킨다는 사실이

여러 지질학자들에 의해 실험으로 증명되었다는 것입니다.


10081415_18.jpg

위의 브라운 칼라와

아래 회색의 실트 부분에

풍화와 침식이 이루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약한 실트 부분이

먼저 깎여 나가게 됩니다.


10081415_19.jpg

그러면,

위의 사진을 보면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목부분과 아랫부분은

같은 실트로 이루어져 있는데

왜 목부분만 먼저 잘려 나갔느냐고...

 

그 이유는,

목부분의 실트가

비에 의해 깍이면서

 

아랫부분으로

흘러 내려가는 동시에

아랫부분의 실트와 합쳐졌기 때문에,

 

목부분이

아랫부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려나간 것처럼 보이게 된 것입니다.

.


10081415_20.jpg

위의 사진을 보면

빗물에 의해 깎여진 것을 볼 수 있으며,

바람의 방향에 의해 풍화된 결을 볼 수 있습니다.


10081415_21.jpg

이렇게 하여

목 주변의 약한 부분이

풍화에 의해 침식이 되면

 

아래 사진과 같이

윗부분의 단단한 바위가

땅으로 굴러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10081415_22.jpg

풍화작용에 의해

윗부분에 있던 바위가

아래로 굴러 떨어진 모습입니다.


10081415_23.jpg

블루 캐년은 지역 특성상

바람이 매우 강할 뿐만 아니라,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운 관계로

현재도 빠르게 침식작용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0081415_24.jpg

1년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후두가 땅으로 굴러 떨어지고,

오랫동안 붙어 있을 것 같았던 후두도 이내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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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언젠가는 모든 후두가 떨어져서

이곳에 더 이상 후두가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르겠죠?


10081645_26.jpg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입니다.

지금도 땅에 묻혀 있던 새로운 후두들이

풍화작용에 의해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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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을 보면

옛날 TV에서 보았던

스머프가 생각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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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보지 못한

오지의 비경을 보고 싶으세요?

그렇다면 블루 캐년을 방문해 보세요.

 

참으로 오묘하고

신기한 광경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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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360도 리더가 되는 법   

   

리더십의 행사는 선택의 문제이지, 현재 차지하고 있는 지위의 문제가 아니다.

조직의 어느 위치에 있든지 간에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사람은 '360도 리더'가 될 수 있다. 윗사람은 물론 대등한 직급의 동료, 아랫사람, 이 모두에게 리더십을 발휘하는 법을 터득하는데 성공한 사람이다. 말하자면 자신을 중심으로 조직의 위, 아래, 수평 즉, 모든 방법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법을 터특한 사람들이 '360도 리더'이다. 리더십의 대가 답게 존 맥스웰의 멋진 개념과 실천법에 주목하기 바란다.

<360도 리더가 되는 법>

1. 힘든 일을 맡는다.
"일터에서든 삶에서든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한다. 사람들은 문제를 싫어하고 금세 진저리를 친다. 그리고 거기서 빠져나올 수만 있다면 뭐든 한다. 이 때문에 문제해결능력이 있으면 리더십을 가지고 남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거나, 사람들에게 문제해결 방법을 가르쳐줄 수 있다면 말이다. 사람들은 늘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문제해결능력은 언제나 필요하다."

2. 응분의 대가를 치른다.
"사람은 모름지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삶의 모든 것에는 응분의 대가가 따르게 마련이며, 우리는 그로 인한 보상이 대가를 치를 만큼 가치가 있는가를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3. 음지에서 무명으로 일한다.
음지에서 무명으로 일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은 중간 리더에게 무척 중요한 일이다. 개인의 성실성에 대한 시험이기 때문이다.

4. 다루기 힘든 사람과 더불어 성공한다.
까다로운 사람과 함께 일하는 방법은 공통점을 찾으면서 상대방과 인간관계를 맺으면 된다.
자기 입장을 강요하지 않고 상대의 입장에서 보려고 노력한다.

5. 스스로 위험을 감수한다.
매사에 안전제일주의로 행동하면서 남의 눈길을 끌기는 힘든다. 중간리더가 만일 모험을 해야 한다면 스스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므로 현명하게 처신하되 고루한 안전제일주의를 고수하지는 마라.

6. 잘못을 인정하며 결코 변명하지 않는다.
"지위가 올라갈수록,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7. 기대치 이상을 달성한다.
조직의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치는 높다. 그리고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말단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치는 대체로 낮다. 하지만
조직의 중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치는 들쭉날쭉 뒤섞여 있다. 그러므로 기대치 이상을 달성하며 이목을 끌 수 있고 때로는 '횡재'라 해도 좋을 큰 보상을 받기도 한다.

8. 맨 먼저 나서서 돕는 사람이다.
-
최초로 나서는 사람은 영웅이 되고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
-두 번째 사람은 보조자 정도로 생각되고 보통보다 조금 훌륭한 사람 정도로 간주된다.
-세 번째 사람부터는 일괄적으로 추종자로 간주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된다.

9. '자기 일이 아닌' 임무도 수행한다.
'자기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을 거부하는 아랫사람만큼 윗사람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도 없다. 내가 아는 많은 톱 리더들은 그런 순간 그 사람을 완전히 일이 없는 상태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하였다. '큰 그림의 법칙'을 기억하라. "자신이 맡은 역할보다는 목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10. 맡은 일에 책임을 진다.
나는 책임감의 부족이 해고 사유가 된다고 생각한다. 아랫사람이 맡은 일을 완수하지 못하면 나는 당연히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스스로 책임을 진다면, 그들은 도와가며 함께 일할 의사가 있다. 주인의식과 배우려는 자세를 갖고 있으면 업무능력은 개선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을 완수하지 못했는데 책임감도 없다면, 개선의 여지가 없다. 그 자리를 대신할 다른 사람을 찾아보아야 한다. J. C. 페니는 "평균 이상으로 일에 매달릴 생각이 없다면 최고의 자리를  넘보아선 안된다"고 단언하였다. 나는 최고의 자리는 커녕 중간 리더의 자리도 넘볼 수 없다고 덧붙이고 싶다.

* 출처: 존 맥스웰, <360도 리더>, pp.170-180.
 
경상도 사는 분이 아니면 무슨 말인지 모를 수 있음...ㅋㅋㅋㅋ

(방긋) 경상도 선생님

경상도 출신 초등학교 교사가 서울로 발령을 받았다.
첫 수업이 시작되어?
"연못 속의 작은 생물들"이란?단원을 가르치게 되었다.

생물들의 그림을 보여주며?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못 속에 작은 생물들이?억수로?많제~~, 그쟈?"?

아이들이 의아한 표정으로?선생님을 바라보며, "선생님!, 억수로가 무슨 말입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님은 그것도 모르나???,

"쌔-삐맀~따?는 뜻 아이가~?"?

아이들이 또 눈을 깜빡거리며"선생님~!!,
쌔-삐맀따는 말은 무슨 뜻인데요?"

선생님은 약간 화가났습니다?

"그것은?수두룩 빽빽!!하다는 뜻이야"?
다시말해서?
"항~거석 있다?는 말이다."?

그래도 이해를 못한 아이들은?
선생님께 다시 물었다.

"선생님, 수두룩 빽빽과 항거석은 또 무슨 말입니까?"

그렇게 설명을 자세하게?
해 주었는데도?
아이들이 이해를 못하자?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이~~ 바보들아~!!?
연못속에 작은 생물들이 "천지빼가리"?있다!!
이 말 아이가!!??"
쬐매한 못에 생물들이 쌔비맀다카이....야~~ 서울아덜.. 진~짜 티미하네??애구 ㅠㅠ? 속 디지버진다...



"한기총, 이단해제 성격 기관 아냐" 한기총의 179인 교수들에 대한 소송 대책위원회, 기자회견 열어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홍재철 목사, 이하 한기총)의 다락방 이단 해제 결정에 반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던 신학자들에게 무더기 고소로 맞대응한 한기총에 대해 ‘한기총의 179인 교수들에 대한 소송 대책위원회’(위원장 허호익 교수)는 7일 신반포중앙교회(담임 김성봉 목사)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기존의 입장을 확인하며 "한기총의 이단해제가 심각한 한국교회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는 ‘최근 한기총의 다락방 류광수 이단해제 대한 신학대 교수 201인의 의견’을 발표하면서 “한기총은 류광수 다락방에 대한 한국교회의 이단 결정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또한 한기총은 연합기관으로서 “이단을 결정하거나 해제할 수 있는 성격의 기관이 아니다.”며 “다락방 류광수에 대한 이단해제 발표를 즉각 취소하고, 그렇게 한 것에 대해서 한국교회 앞에 사과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한기총은 한국교회의 연합기관으로서 “본래의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며 한국교회의 바른 신학과 신앙을 계승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한다.”며 최근 한기총의 이단해제나 이단주장 행보와 같은 일을 계속할 경우에는 “한국교회를 혼란으로 몰아넣을 것이 자명하며, 이로 인한 한국교회와 사회의 폐해는 더욱 심각한 수준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허호익 교수(대전신학대학교)는 소송 대책위원회의 향후 활동에 대해서 “오늘 발표한 호소문을 가능한 많이 한국교회에 알릴 것이고, 필요하다면 일반언론에게도 공개할 생각이다.”면서 “그리고 한기총에서 나온 34교단의 대표자들에게도 호소문을 전달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또한 “이번 소송을 기록으로도 남길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백서를 만들어 후대에도 남길려고 한다.”면서 “설사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 대법원에서 패소하더라도 한국교회사는 우리들의 정당성을 기억해줄 것이다.”고 말했다. 박용규 교수(총신대학교)는 일각에서 제기된 의혹처럼 “본인의 동의도 받지 않고 성명서에 이름을 올린 적은 결코 없다.”고 강조하면서 “성명서에 참여한 교수들 중에서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한 일도 없으며, 이 일에 동참하는 전국의 주요 신학교 교수들은 7일 현재 201명으로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한국교회 역사상 신학교수들이 이렇게 함께 한 일은 없을 것”이라며 “한국교회의 갱신에 본보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바른 신학과 갱신에 많은 신학자들이 앞장서고 있음을 기억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허호익 교수는 이단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교단에서 이단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함이다.”며 “각 교단 총회에 헌의가 들어오면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가 조사하게 되고, 그 결과를 가지고 총회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해당 총회가 규정한 이단을 해지하지 않는 이상, 제3자 해지하겠다고 해서 그것이 이단 규정이 풀리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한기총이 하고 있는 일도 마찬가지이다.”고 말했다. 탁지일 교수(부산장신대학교)는 “한기총이 이단 규정을 할 수 있는 대표성을 가지고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면서 한기총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위원들의 전력도 문제 삼았다. 이어 “한국교회 전체가 규정한 이단을 해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말하면서 “통일교나 전도관과 관련이 깊은 단체들을 이단해제하려고 하는 것 자체에서 한기총의 성격이 드러난다고 본다.”고 밝혔다. 다음은 이날 발표된 호소문 전문, 한국교회에 드리는 호소문 존경하는 전국 교회 목회자 성도님 여러분! 오늘날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세계가 인정할 만큼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이런 한국의 자랑스런 위상의 배후에는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 사회와 민족을 선도했던 영광스런 한국교회, 그리고 사회 각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온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 이단문제가 위험수위를 넘어섰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과거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교회가 지금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전에 없이 양적으로 질적으로 교세가 감소하고 있고, 세계선교열도 급속하게 식어 가고 있으며, 각 교단의 신학교마저 입학지원자가 급격하게 감소하는 등 위기를 만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보다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한국교회를 엄청난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는 무섭게 발흥하는 이단세력입니다. 100개가 넘는 각종 이단들에게 넘어간 교인들의 수가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교회가 심각한 피해를 입고 가정이 깨어지고 이단에 빠져 가출하는 자녀들이 속출하는 등 여러 사회적인 물의를 빚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이단과 잘못된 사이비 신앙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이것은 성경과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교회가 견지해온 타협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이 일을 위해 교회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단 세력의 발흥 앞에 한국교회가 하나되어 대처해야 할 이 같은 오늘날의 위기 상황에서 한국교회의 연합기관인 한기총이 지난 수년간 앞장서서 이단을 해지하여 온 것은 한국교회의 소중한 신앙적 전통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기총의 이단해제가 심각한 한국교회 혼란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미 수년 전부터 한기총이 한국교회가 이단 혹은 이단성이 있다고 하는 집단을 영입한 교단을 회원으로 인정하더니 급기야는 2013년 1월 14일에는 통합 합동 고신 기감 기성 예성 등을 비롯한 한국의 주요 교단이 이단 혹은 이단성이 있다고 결정한 류광수 다락방(현 세계복음화전도협회)이 이단성이 없다고 이단해지를 결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한국의 주요 교단의 이단 혹은 이단성 결정을 무시하는 행위이며, 가뜩이나 이단의 발흥으로 위기를 만난 한국교회를 더 한층 혼란으로 몰아넣는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한기총의 이단해지 등의 문제를 제기하여 온 주요 교단으로 이루어진 ‘한기총정상화를 위한 대책위원회’가 2013년 3월 29일 한기총에서 탈퇴하여 ‘한국교회연합’을 결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2013년 8월 현재 예장통합, 기성, 예성, 대신, 기하성(여의도), 백석 등 34개 교단이 한기총을 탈퇴하여 한국교회연합에 가입하였으며, 100여개의 교단과 기독교단체가 가입된 일본복음주의동맹 총회도 지난 6월 한기총과의 선교협약을 파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한기총의 이단해제 행보가 주요 교단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 신학자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기총의 이단해제는 한국신학계는 물론 일반 목회자들과 성도 모두에게 전에 없는 혼란을 가져다 줄 것이 명약관화합니다. 한국교회와 소속 교단을 이단으로부터 보호하고 신학생들의 신앙과 신학 교육 책임을 맡아 그들을 바른 신학 방향으로 계도하고 선도해야 할 소중한 책임을 맡은 신학교수로서 우리 172인 일동은 자신이 속한 교단은 물론 전체 한국교회가 바른 신학을 지키고,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선도하고 계몽하고 지도해야 할 책임을 더 깊이 통감합니다. 이에 한국교회와 소속 교단의 바른 신학과 신앙을 깊이 염려하는 전국 25개 신학대학 교수 172인은 2013년 6월 14일 의견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어 한국신학계를 대표하는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한국기독교학회, 한국장로교신학회, 한국성경신학회,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한국교회사학회 등 6개 학회도 동일한 마음으로 최근 한기총의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였습니다. 하지만 한기총은 한국교회의 바른 신학과 신앙계승, 신학적 정화와 개혁이라는 공익을 위해 신앙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학문의 자유라는 법정신에 따라 성명서를 발표한 172인 교수들과 전국 6개 신학회의 충정어린 의견서를 무시하고 이단해지 결정을 취소하거나 한국교회에 사과하기는 커녕 2013년 8월 1일 의견서에 동참한 172명의 교수들은 물론 그들이 소속된 25개 신학대학교 재단과 6개 학회를 대상으로 사상 유례가 없는 10억 민사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전국 6개 학회와 172인 교수 그리고 172인 교수들이 소속된 학교 법인에까지 소송을 제기한 것은 앞으로 신학교수들이 이단해지 활동에 관한 어떤 비판도 하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하고, 법인에 대해 소송 부담을 주어 소속된 동참 교수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그들을 이탈시켜 성명서를 무력화시키려는 불순한 의도로 밖에 해석이 안됩니다. 한국교회의 기도와 관심이 필요합니다! 전국의 주요 신학대학 172명의 교수 일동은 한기총의 소송 제기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법정 소송에 의연하게 대처하면서 무서운 이단의 도전 속에 있는 한국교회를 보호하고 지키는 일에 계속해서 힘쓸 것입니다. 대학 당국에서도 저희 172인 교수 일동의 한국교회를 위한 충정을 이해하고 신뢰와 성원을 보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172인 교수 일동은 각 소속 대학에서 충실하게 교수 사역을 감당하며 교단과 전체 한국교회의 바른 신학과 신앙 계승, 개혁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한기총의 최근 행태의 심각성을 다시 한 번 깊이 인식하시고 한국교회를 유린하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무수한 이단들이 무너지고 이단에 빠진 성도들이 가정과 교회로 돌아 올 수 있도록 그리고 이단을 옹호하는 세력들이 회개하고 돌아설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저희 172인 교수들과 한국의 6개 신학회가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는 귀한 사명을 겸손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무엇보다도 이번 소송을 통해서 반드시 진리가 승리하고 한국교회의 개혁과 갱신의 역사가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전국교회 목회자 신학생 성도 여러분들께서 계속해서 기도해 주실 것을 특별히 부탁드립니다. 성 삼위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섬기시는 여러분의 교회, 기관, 가정에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2013년 9월 7일 전국 신학대학 교수 172인 일동 전국 6개 신학회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한국기독교학회, 한국장로교신학회, 한국성경신학회, 한국교 회사학회,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김준수 ⓒ 뉴스파워 출처: USA 아멘넷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 로키산맥 해발 3,000미터 높이에 수목 한계선인 지대가 있습니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으로 인해 곧게 자라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한 채 있어야 합니다. 이 나무들은 열악한 조건이지만 생존을 위해 무서운 인내를 발휘하며 지냅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가장 공명이 잘되는 명품 바이올린은 바로 이 '무릎을 꿇고 있는 나무' 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인생의 절묘한 선율을 내는 사람은 아무런 고난 없이 좋은 조건에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 온갖 역경과 아픔을 겪어온 사람, 역경 속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사람, 용기와 겸손을 겸비한 사람입니다 달빛님 방의 좋은 글을 모셔다 신앙면으로 조금 수정보완 하였습니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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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의 8세 소녀가 강제 결혼 뒤 첫날밤을 치르고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충격이 일고 있다.

예멘 북서지역세 살던 소녀 라완은 40대 남성과 강제로 결혼해 첫날밤을 보낸 뒤 사망한 채 발견됐다.

이 사건을 폭로한 현지 시민단체들은 라완이 심한 장기손상으로 인한 출혈로 사망했으며, 이 소녀의 가족들을 체포해 법의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이번 사건이 일부 빈민가에서 어린 딸을 나이 많은 남자에게 강제로 시집보내는 관행을 없앨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예멘에서는 어린 소녀의 결혼 풍습이 공공연하게 이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0년 현지 인권단체의 조사에 따르면 예멘에서 15세 이전에 결혼하는 여성의 비율은 약 25%에 달한다.

또 어린 신부가 순종적이면서 유혹에 덜 흔들리는 정숙함을 가졌으며, 아이를 더 많이 낳을 수 있다는 관념 역시 이 같은 풍습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0년 9월 12세 소녀 신부가 출산 도중 숨지는 사건 등은 예멘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충격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이에 세계 최대의 어린이보호단체 등은 이를 막기 위한 법적 장치를 구비해야 한다며 예멘 정부를 압박해 왔지만 사실상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예멘 정부는 과거 법적으로 결혼이 가능한 연령을 최소 15세로 지정했지만, 1990년대에 들어 딸의 결혼 시기는 부모가 직접 결정해야 한다며 법률을 무효화했다.

한편 어린 소녀의 인권이 짓밟히는 곳은 비단 예멘뿐만이 아니다. 어린이인권보호단체의 조사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에는 5700만 명이 넘는 어린 신부들이 있으며, 인도 소녀들이 이중 46%를 차지한다.

의학 전문가들은 15세 이전에 결혼하는 여성은 20대 여성에 비해 출산 도중 사망할 확률이 5배나 더 높다고 지적하고 있다.

사진=자료사진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절제가 안 되네.^^

       

      며느리 보신 사모님들은 제 마음을 이해하실려나~~~?? 뭐든지 주고싶고 보고 싶기도하고 그러면서도 요즘 시대에 맞춰 표를 내도 않되고 오직 그 아이가 편한쪽으로 봐줘야하고 그러다가도 그리웁고 ~~
      에구 예비 며느리만 이쁜게 아니라 사돈 부모님까지 어찌 그리 신경이 쓰이는지~~~ 엄마 권사님이 바느질하는 직업을 갖은지라 혹시나 손가락에 관절있을까봐, 아버지 집사님이 운전하시면서 허리 아플까봐 어찌나 신경이 쓰이는지~~
      꽤 값나간다는 침을 주문해서 우리 아들한테 갖다드리라고 했더니 "어머니 감사합니다 이 다음에 효주가 어머니한테 잘 할거예요" "야 난 내가 해주니까 넘 행복한데 그런 소리 말아라" 결혼하면 주일날 아침에 와서 밥먹고 예배드리고 가라 토요일날 이곳에서 자면 내가 부지런한 성격이라 불편할 거다" "그래도 돼요?" "당연하지"
      어차피 내가 은퇴하기까지는 울 아들이 교회에서 지휘하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 일찍 와야하는 입장인지라 미안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그대신 집 근처에 교회를 정해놓고 주일 낮 외에는 신앙생활 마음놓고 하라고 했네요
      지금 그 아이들이 주일날 오면 잠시라도 자기들만의 공간에서 쉴수 있는 방 꾸미느라고 이것 저것 처분하고 버리고 나눔하고 있습니다 이제 나의 아들이 나의 아들로만 살수 있는 기간이 얼마 않남았네요
      결혼하면 한 아이의 남편으로 그 부모님들의 아들로 또 자녀가 태어나면 그 아이들의 아빠로~~~ 다 내려놓고 그 아이들이 믿음 안에서 행복한 가정이 이뤄지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신 몇 몇 사모님들이 절더러 절제하라고 하시네요^&^

       

      글: 기대사 사모님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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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그리스도인의 자가 진단법 7가지(에이든 토저)  

  1)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히고 조그마한 흥분이라도 다 잠재우고 마음속에서 흘러 나오는 세미한 욕구의 소리를 듣기만 하면 된다. 스스로에게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물어 보라. 틀에 박힌 진부한 답을 하지 말라. 정말 원하는 것을 솔직히 말하라. 그러면 당신은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2)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강요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 말고, 당신이 자발적으로 원해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생각들은 '우리 마음의 은밀한 보물' 주위에 모여들기 마련이다. 우리의 생각들을 끌어당기는 바로 그 보물이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게 되어 있다(마6:21)

 3) 나는 돈을 어떻게 쓰는가?
이 질문에 답을 하면서 우리는 의무적으로 돈을 지출해야하는 것들을? 놓고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세금을 내거나 가족과 자신을 위한 생필품을 사기 위해 지출하는 돈은 여기서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에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거의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의 뜻대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생겼을 때, 그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낸다.

 4) 나는 여가를 어떻게 보내는가?
우리 시간의 많은 부분이 문명화 된 삶을 영위하고 지속하는 데 소요되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어느 정도의 자유 시간이 주어진다. 바로 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드러낸다.
여가가 생기면 대부분??사람들은 테리비전을 보거나 장기를 두거나 언론이 전하는 저속한 기사를 읽거나 수다를 떤다.
나는 자유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 준다.

 5) 나는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는가?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고하니"(행4:23).
우리가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때 찾아가는 곳이 곧 우리가 어떤 사람임을 말해준다.

6) 나는 누구를 존경하고 어떤 것에 열광하는가?
대부분의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여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속으로는 이 세상을 너무 흠모하는 것 같다. 우리가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속으로 동경하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면,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 주변의 이교도 국가들을 동경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양자로 받아들여진 영광, 하나님과의 언약, 율법, 복에 대한 약속, 믿음의 조상들을 모두 잊어 버렸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이스라엘만을 비난할 수 있는가? 우리도 그들과 똑같지 않은가?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살펴야 한다.

 7) 나는 무엇을 보고 웃는가?
마땅히 존중해야 할 하나님의 지혜를 존중하는 사람은 '웃는 것' 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머는 우리의 본성을 이루고 있는 여러가지 중요한 속성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유머 감각이 부족한 사람은 그만큼 건강한 인간성을 상실하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유머 감각과 '경솔한 웃음'은 다르다. 경솔하게 웃음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될 것들도 있다. 예를 들면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죽음, 출생, 그리고 사랑 같은 것들을 경솔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기도, 성경, 의, 인간들의 큰 슬픔과 고통 및, 그리스도께서 피의 대가를 지불하고 사신 교회를 가지고 농담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짧은 시간이라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된 이야기를 가지고 농담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 자신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몇가지 질문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이것들 외에도 다른 질문들을 생각해낼 것이다. 

   


종말의 때를 가늠해보는 것들(지금은 어느 때인가?)

김정한 ㆍ 2013-09-09 (월) 22:46 IP: 1.xxx.17 ㆍ조회: 15      

종말의 때를 예상하는 시나리오들

현재의 한국교회는 주님의 오실 날(휴거)에 대한 관심이 지나친 쪽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너무 무관심한 쪽도 있는 것 같아 종말의 때를 가늠해보는 데 다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필자의 생각을 써 본다. 물론 이 글은 개인적인 견해기에 얼마든지 다르게 말할 분도 계실 것이다. 필자는 논쟁을 유발하려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입장과 비교하여 보라고 쓴 글임을 밝힌다.

지난번의 글(725)에서 때를 알게 하는데 필요한 4대 요소에 대해 그 네 가지 요소가  
1. 이스라엘, 2. 적그리스도, 3. 교회의 배도, 그리고 4. 666 시스템이라고 했고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해야 보아야 할 요소가 이스라엘이며, 적그리스도출현은 7년 환란 기에 출발점이기 때문에 그가 언제 어떤 식으로 출현하는가를 보아야 할 것이며, 그것과 발맞추어 나타나는 것이 음녀교회이기에 작금 교회들이 어떻게 배도하여 음녀교회로 가고 있는가를 살펴봐야 하고, 마지막은 666 표 혹은 시스템인데 이것이 어떤 세력에 의해 어느 정도 진행되어 가는지를 살려본다면 주님 오실 때를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다고 했다.

이번 글은 이 네 가지 요소의 진행이 어떤 정도인지에 대해 알아보자. 물론 이것도 필자의 생각이기에 잘못 볼 수도 있다. (필자는 종말연구가가 아니고 일반 목회하는 목사다)

먼저 1. 이스라엘
주님의 재림에 시각에 대한 이스라엘에게 일어나야 할 것들은 먼저 흩어졌던 자들이 모여 건국하여 독립을 얻어야 하고,  그 다음은 수도였던 시온(예루살렘)을 차지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무너진 성전을 다시 건출할  제 3성전을 건축하여 제사를 드리는 것일 것이다. 그 년도를 보면 1948에 이스라엘 독립 , 예루살렘 점령이 1967년에 이루어졌고  성전건축은 아직 준비 중인 상태에 있다.

주님의 재림과 직결되어 있는 것은 제 3성전 건축일 것인데 앞으로 어떤 경로로 건축될까? 를 예상한다면

(1)적대 세력인 이슬람의 완전무력화 된 후에 아니면
(2)이슬람의 화해무드에서 묵인 하에 되어 진다고 볼 때

(1)의 사건 이슬람의 완전 무력화가 되려면?
아마도 그것은 아랍권 특히 러시아와 밀접한 이란을 초토화해서 아랍권을 제압해야 하는데 그 시기는?
* 참고로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한다는 뉴스는 2005년 이후 매년 뉴스였다. 특히 2010년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2) 이슬람과 화해무드에서 아랍권의 묵인 하에 성전이 건축되어진다는 것인데 그런 평화기가 언제쯤 올 것인가?
* 참고로 아랍권과 평화협정은 일부 이루었고 지금도 이루어가고 있다. (이집트와 요르단과는 완료, 시리아, 팔레스틴과는 협상중) 물론 환난전 휴거론 자들은 이 성전 건축 이전에 방인의 때가 차면 휴거 사건이 있다고 믿는다.


2. 두 번 째 요소, 적그리스도(안티그리스도)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활동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필수 요소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는 누구며 단 9장에 나오는 언약(평화협정)을 누구와 굳게 세운다는 말인가?

1)출현 시기
ㄱ, 일반적으로 환란 기를 수습할 위대한 메시야 지도자로 출현
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평화협상의 중재자며 평화의 보증자로 출현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환란 기에 얼마나 근접한 시점인가? 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중재자며 보증 자가 될 여건인 결정적인 전쟁이 언제 어떤 것인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 참고로 어떤 분은 지금 몇 째인의 시기(혹 몇 째나팔의 시기)라고 하는데 그것은 근거가 희박한 것이고 아직 이스라엘과 결정적인 언약을 맺게 중재할 자가 나타날 때는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혹자는 적그리스도가 될 후보군에 대해서 이미 성급하게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교황, 영국왕실, 통합유럽의 대통령, 미국의 대통령 등) 두고 볼 일이다.


3. 세 번째 요소 NWO(세계단일정부)
NWO의 세력은 성경으로 봤을 때 적그리스도의 몸통이 되어 환란 기에 세계를 꾸려갈 자들인데, 놀랍게도 NWO 세력들이 등장하여 이미 세계 정치 경제, 문화 종교를 하나로 묶는 일을 시작했고 지금도 열심히 진행해 나가고 있다. 그래서 환란 기 때는 세계를 666체제로 만들고 저들의 통치를 세계가 따르도록 할 것이다. 그때 활용되는 것이 666표일 것인데 베리칩이 666표인가에 대한 것이 뜨겁다.

NWO 세력들이 하려고 하는 것들
1)정치-UN, 2)경제-FTA, 3)문화-New Age, 4) 종교-WCC(UR)
* 참고로 NWO세력은 각계로 침투하여 세계를 하나로 묶는 일을 이제는 들어내 놓고 활동하고 있다.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천주교 제수이트) 이것들에 대한 것은 시중에 많은 책과 알리는 자들이 있으므로 생략하겠다.


4. 네 번째 요소 음녀교회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교회 중에 음녀교회가 적그리스도(짐승)와 연합할 것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데 현재 상황은 WCC를 숙주삼고 천주교 제수이트(예수회), 와 개신교의 지도자 중에 프리메이슨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타종교와도 세계 평화공존을 근거로 하나로 만들어 가고 있고, 개신교도 그렇게 하고 있다.


결론
주님의 재림 사건은 이처럼 종합적인 상황가운데 일어날 것이라고 본다면, 성경에 기록된 것을 가지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을 봐야 할 것이라고 본다. 개인적인 체험에 근거로 한 말과 성경의 숫자에 대한 풀이 등,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연현상과 국지적인 사건에 너무 큰 비중을 두고 예측하는 것 등은 위험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에 대해 너무 민감하다가는 미혹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 때의 참된 신앙은

주님의 나라는 이미(Already) 진행되어지고 있고, 아직(Yet)인 상태인 것이다. 문제는 각자 안에 예수님으로 인해 거듭난 속사람이 얼마나 주님의 형상으로 건축되어지고 있고, 주님의 사명을 현실 속에서 광염(光鹽)으로 나타나지고 있는 것을 스스로 점검하는 일일 것이다. 주님의 오실 날(주님 앞에 서는 날) 자신이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가장 귀한 종말의 때에 신앙관이라고 본다.

출처:USA아멘넷 게시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가  완성되기까지
튤립 교육 선교회 김명도 교수
www.tulipministries.com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WCF)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기독교 교파마다 각기 그들이 인정하고 따르는 신앙고백서가 있다. 오늘 전 세계를 통해서 장로교파는  예외 없이 모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를 따라서 헌법을 정한다. 헌법이란 교회의 정치, 교리, 권징, 예배, 행정 등을 말한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서 의 가르침을 잘 알아 두는 일이 중요한데 실제에 있어서는 심지어 목회 일선의 목자들까지도 WCF 내용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교리상의 오류를 범하기도 하고 오류를 도입하기도 하는 것이 예사다. 이런 일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타락시키고 성도들의 구원의 길을 막아 버린다.  “성경대로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 (갈라디아 1:8-9)”  오늘의 기독교계의 문제는 <불순종>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싫어한다.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인간의 주권을 내세운다(human autonomy). 


        역사를 보면, 1300-1400년대는 문예부흥으로, 1500년대는 종교개혁으로 특징 지을 수 있고, 1600년대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정, 1700년대는 독일의 이성주의, 1800년대는 합리주의 (Rationalism) 와 사이비 종파들의 출현, 1900년대는 뉴에이지와 포스트모더니즘, 2000년대는 신 이교도주의 (新 異敎徒主義, Neo-Paganism) 로 특징 지을 수 있다. 20세기 후반에서부터는 완전히 사탄이 활보하는 시대로 변한 것이다. 이것은 New Age 사상을 잉태한 Postmodernism, 그리고 이교도주의 (異敎徒主義) 로 이어 지고 이는 다시 <신사상 (New Thought) 철학> 으로 이어 진다. 


        신사상 (New Thought)의 대표는 바로 Christian Science, Scientology, Church Universal and Triumphant, Eckankar. Jesus Seminar 등이다.   이런 철학의 필연적인 귀결은 상대주의(Relativism), 개인주의(Individualism), 주관주의(Subjectivism), 감정주의(Emotionalism), 사유주의(Privatism) 등인데 성경은 이런 사상을 배격한다.  물론 이런 사상의 뒤에는 무서운 사탄이 도사리고 있고 사단은 “의의 일꾼으로, 혹은  광명의 천사” 로 위장한 인간을 동원하여 그의 사역을 성공적으로 펴 나가고 있다.  그래서 많은 교회를 넘어트린다. C.S.Lewis 의 Screwtape Letters 를 보라, 그러나 중생한 사람들로만 구성된 “무형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 한다 (마태복음 16장). 여기서 C.S.Lewis 의 저서를 인용했다하여 필자가 그의 신학을 모두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신학은 경계해야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를 이해하려면 그 당시의 영국의 사회, 정치, 종교를 알아야 한다.  영국의 Elizabeth 여왕이 1603년에 죽게 되자 왕실은 스콧틀란드의 James 6세를 James I 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영국을 통치하는 왕위에 등극하게 하였다. 그는 현명하여 1611년에 학자들 50명으로 하여금 성경을 번역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King James Version (영국에서는 Authorized Version 이라고 함)을 만든 분이다.  그는 천주교의 사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전에 Henry VIII 는 본부인이던 Catherine (형수)을 버리고 새로운 묘령의 연인 Ann Boleyn 과 결혼하려고 했는데 천주교 교황이 반대했다. 그는 천주교와 관계를 단절하고 영국 국교인 Anglican Church을 이끌어갔다. 그는 Cambridge 대학 교수였던 Thomas Cranmer 를 Canterbury 대주교 (Archbishop of Canterbury) 로 임명하고 그 대주교인 Thomas Cranmer 에게 이혼과 결혼을 허락받았다. 천주교와 결별하고 예배형식을 개편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다분히 천주교의 형식을 따르고  있었다.  영국 국교의 감독들은 아름다운 예복을 입고, 의식 중심으로 (ritual-oriented) 예배를 인도하였고, 말씀 중심보다는 모든 것이 <의식 중심, Ritual-oriented) 이었다. 


       이를 못 마땅히 여기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다. 영국 국교의 가르침이나 예배형식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Nonconformist 혹은 Separatist, 혹은 Puritan 들이라고 불렀다. Puritan 이라는 말은 성경대로 깨끗한 예배를 드리자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물론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온 후에  그들의 경건한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빈정대는 말로, “교만한 사람, 잘난척하는 사람" 이라는 별명으로 변하기도 했지만, 당초의 Puritan은 그렇게 영국의 국교에 반항하여 예배를 신약성경대로 간소하게 바로 드리자는 무리가 생겨났고 세월이 갈수록 그 수가 늘어만 갔다. 
       
        영국 의회에 이런 청교도들의 목소리가 반영되기 시작했고, 영국의 상하 양원 모두 영국 국교의 예배형식을 수정하기를 원하여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을 물색하여 저명한 인사들로 하여금 영국의 예배 제도를 수정하는 자문을 구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출발한 것이 나중에는 전혀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처음에 이들은 영국국교의 The Thirty Nine Article (39개조 신조)을 수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후 Scotland의 대표 6명이 참석하므로 인하여 그 수정작업보다 성경에서 교훈하는바 믿는 도리와 교회 정치, 예배 형식등을 포함하는 신앙고백서를 새로 만들기로 합의했다. 


       그래서 James I세가 죽은 후 그 뒤를 이은 Charles I 가 새로운 신앙고백을 만드는 일을 적극 반대, 만류하였으나 의회가 왕에게 협조하기를 거부하자, Charles I는 기병대를 동원하여 의사당을 포위하였고, 의회는 Oliver Cromwell 을 수령으로 하는 <의회군대>를 만들어서 영국 왕의 군사 (Royal Army)와 의회군사 (Parliamentary Army)와의 싸움이 일어났다. 지금도 영국 London 에 가보면, Westminster Abbey 앞에 세워진  말을 타고 있는 Oliver Cromwell 의 늠늠한 동상을 볼 수 있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1643년부터 1649년까지 London의 Westminster Abbey (웨스트민스터 사원)와 St. Magdalene Church에서 주야로 150명이 넘는 대표자들이 모여서 열심히 설전을 벌리며, 기도하며 성경을 펄쳐놓고 하나씩 하나씩 일을 처리해 나가 1647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전문 33장) 와 대요리문답 및 소요리문답 등 세 가지 문서를 완성하였다.  원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를 중심으로 만든 것은 대요리문답 (Larger Catechism, (전 196문)이었지만 무식한 자들을 위해서 쉽게 별도로 특별히  만든 것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소요리문답 (Shorter Catechism 전 107문) 이다. 사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를 만든 분과위원회의 일은 이로서 1647년에 끝났으므로 스콧틀란드 대표들은 모두 본국으로 귀환하고 남은 사람들은  그 후부터 1649년까지는 주로 목사후보생들에게 목사 고시를 치루는 일에 시간을 보냈다. 


       1993년 9월 23일은 이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를 만들기 위해서 대표들이 처음으로 소집된지 꼭 350주년 되는 날이었다. 그래서 NAPARC (North American Presbyterian and Reformed Council 북미주 보수 장로교단민 개혁교단 협의회) 주관으로 이 역사적인 행사를 기념하는 축제로 영국 London에 있는 Westminster Abbey (웨스트민스터 사원) 과 이웃 Westminster Chapel (D. Martyn Lloyed-Jones 목사가 목회하던 유서 깊은 교회당)에서  전 세계에서 모인 개혁주의 신학자들, 신학교 교수들, 목회자들, 신학생등 300여명이 모여서 대대적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정 350주년 기념 국제 학술대회>를  개최한바 있었고 이 사실은 영국 London에 있는 뉴스 미디아에서도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일주간 날마다 메디아의 뉴스의 초점은 바로 우리 학술대회 소식이었다.
당시 NAPARC 의 부회장이던 필자는  이 국제 학술대회의 사회를 보게 되어 유명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강연을 도왔다.  일주간에 결친 학술대회는 대부분 Westminster Chapel에서 열려서 그 유명한 로이드 존스목사님이 설교하던 그 강대상에서 사회를 보던 그때 감격이 지금도 어제 일인듯 새롭다. 그때 강의한 여러 세계적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강의내용은 우리 NAPARC 의 중진 위원이던 John Carson (Erskine Theological Seminary 교회사 교수) 와 David Hall (필자보다 신학교 3년 선배, 현재 미국 Virginia 주 Vienna 에서 목회중 PCA 소속 목사) 두 사람의 공저로 간행한 To Glorify and Enjoy God 이란 책에 모두 수록되어있다. 이 책의 초두에는 그 당시 <학술대회> 를 위해서 활동했던 임원들의 명단도 들어있다. 이 책은 개혁주의 서적만 출판하는 영국 Scotland, Edinburgh의 Banner of Truth Trust  출판사에서 1994년에 나왔는데 값은 $33 이며 amazon에서 구입 가능하다.
우리 일행은 그 행사를 마치고 장로교의 뿌리인 Scotland 를 둘러볼 기회를 가졌으며 장로교의 아버지인 John Knox 가 목회하던 Edinburgh 에 소재한 St. Giles Church에서 성찬식에 참석하고, Scotland 의 언약파 (Covenanters) 회원 목사 120명이 교수형으로 순교한 Grass Market 을 돌아보며 많은 것을 배우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 때 영국 론돈에서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정 350주년 기념 국제 학술대회> 의 감격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  


이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정과정에서 그 연대표를 여기에 적어본다:
1603 Elizabeth여왕이 죽고 James I 가 등극.
1611 KJV 성경 출현
1620 청교도들이 Speedwell 호 배를 타고  영국 Wales 서남단에 있는 Plymouth항을 떠나 신대륙(미국) 으로 떠났다가 도중에 배가 고장이 생겨 화란의  Amsterdam 에 기항하여 배를 Mayflower 호로 바꾸어 타고 다시 미국으로 행해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 Massachusetts 주 Cape Cod 에 있는 Provincetown에 도착하였으나 얼마 후에 미국 본토인 Boston근처 Plymouth Rock에 정박하다. Pilgrim Fathers 들이 처음 도착한 지점을 후에 Provincetown (섭리의 고을) 이라고 명명하고 후에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은 화강암으로 된 Pilgrims Monument 를 만들었다. Cape Cod 맨끝 북단에 위치한 Provincetown 의 이 Monument 에 올라가면 멀리 Boston 까지도 시야에 들어온다. 승강기가 없어서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1625 James I 가 죽고 Charles I 가 등극
1629 3월에 Charles I 가 영국 의회를 해산
1633 William Laud가 영국 Canterbury 사원의 주교 (Archbishop of Canterbury)가 됨.
      Laud 추기경은 소위 Wicked Bible 이라는 불리는 KJV 에 인쇄공이 실수하여
      출애급기 20:14 절에 “not" 이라는 말을 누락하여 그 벌금으로 1600년대 당시
      돈으로 300 파운드를 지불케 한 분으로 유명하다 (F.F.Bruce, The Books and
      the Parchment [Fleming H. Revell, 1962], p.177.)
1637 영국 Charles I 왕이 스콧틀랜드 교회에 기도서 (Book of Prayer)를 사용하도록 강요하다
1638 2월28일 National Covenant  서명
     11월과 12월에 Glasgow에서 스?틀란드 교회 총회 소집
1639 감독들과 대항하는  제1차 민란
1640 의회가 잠시 모임. 이에 반항하는 감독들의 제2차 민란. 

       스?틀란드 군대가 론돈에 진입하여 진압작전에 참여.
     11월에 의회가 정상으로 열림
1643 6월12일  영국 국교의 잘못을 의논하기 위하여 유능한 목사들을 소집하기로 결정하다.
     6월22일  왕의 의회 활동 금지 명령
     7월1일   왕의 명을 어기고 의회가 회의를 소집하다
     7월12일부터 10월12일, 영국 국교의 신조인 39개 신조의 첫 15개항목을 수정작업
        시작
     8월17일  스콧틀란드의 스콧틀란드 언약파의 헌장을 승인함
     9월15일  스콧틀란드 대의원들이  회의 참가차 의회에 도착
     9월25일  스콧틀란드 언약파들의 헌장을 승인하기로 영국 하원이 가결
    10월12일  의회가 교회정치를 연구하라고 대의원들에게 지시. 39개 신조 수정작업 완료
    10월15일  스콧틀란드 언약파들의 헌장을 영국 상원이 승인가결 채택
    10월17일  교회 정치를 토론 시작
1644 4월22일  안수문제를 다룬 예배모범을 영국 의회에 제출
     5월24일  예배모법에 관하여 폭넓은 토론 시작
     8월20일  신앙고백서 제정 위원회를 정식으로 임명하다
    11월 8일  교회 정치를 의회에 제출하다
    12월27일  예배모범을 의회에 제출
1645 1월 3일  영국 하원이 예배모범 (Regulative Principles of Worship) 을 승인하다
               여러 안이 있었으나 Mr. Rough 의 안을 반대 없이 승인하다.
     1월23일  장로교 정치체제 찬성 결의안이 하원을 통과하다
     2월 7일  요리문답 위원회가 발족하다
     5월12일  신앙고백서 제정위원회 위원들의 보고
     7월 7일  대의원들이 교회 정치를 최종 열람하다
1646  4월27일  Charles I 가 Scotland의 Newark로 피신함
      7월19일  대의원들의 의장이던 William Twisse가 죽고, 후임에 Charles Herle 피선
     12월 4일  신앙고백서 (증거 구절 없는) 하원에 제출
1647  4월15일  대요리문 답서 에 관한 토론 시작
      4월26일  신앙고백서 (증거구절 포함)을 영국 하원에 제출
      5월11일  여러 분과위원들이 신앙고백서를 열람한 후 신앙고백서를 인쇄소에 보내다
      8월 5일  소요리문답서 에 관한 토론을 시작하다
      8월27일  스콧틀란드 교회 교단 (Church of Scotland) 에서 신앙고백서를 승인하다
     10월15일  대요리문답서 가 완성되어 영국 의회에 제출되다
     11월11일  Charles I가 Isle of Wright 이란 섬, Carisbrooke 성으로 피신.
     11월25일  소요리문답서 를 영국 하원에 제출하다
1648  3월22일  영국 하원이 신앙고백서를 승인하다
      4월14일  대소요리문답서 (성경증거구절포함)을 최종 완성하여 영국 의회에 제출하다
      6월20일  영국 상원이 신앙고백서를 승인하다
      7월24일  영국 하원이 대요리문답서 를 승인하다 (상원에서는 승인을 받은 적이 없다)
      9월25일  영국 의회가 소요리문답서 를 승인하다.
1649  1월20일  Charles I 을 재판
      1월30일  Charles I 론돈시내 (지금의 수상관저 Downing 10번지 건너편) 에서 참형(斬刑) 당함
      2월22일  번호를 붙여서 모인 마지막 전체 모임.  폐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서를 만들기 위하여 대의원들이 모인 마지막 날)

              이날 이후, 거기에 모인 대의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와 대,소요리문답서 작성의 임무를 모두 마쳤으므로,  목사후보생들의 목사 고시를 위해서 얼마동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때 벌써 Scotland에서 왔던 대표단이나 론돈 근처의 대의원 대부분은 귀가한 후였다.
1652  3월25일  목사 고시를 위해서 대의원들이 모인 마지막 모임.


              이와 같이 당초에 영국국교의 예배형식을 수정하기 위하여 영국 의회가 자문을 구할 목적으로 유식하고 신령한 목사님들을 모시고 의견을 듣고 자문을  구하자던 목적이 급기야는 기독교 역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특히 장로교 교리의 금자탑 격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 와 그 신앙고백서에 입각한 대요리문답서 및 소리문답서 를 만드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모두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역사한 결과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WCF 는 세계 어디를 가도 장로교의  신조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신조를 사용하는 교회나 성도는 결코 WCF 를 성경과 대등 시 하거나 성경의 권위위에 놓는 일이 없으며, 성경이 항상 유일한 권위를 갖는다 (Sola Scriptura).  사람이 만든 것은 무엇이든, 아무리 훌륭한 학자가 만든 것이라도 반드시 오류가 있게 마련이다. 성경만이 오류가 없이 원본(autograph)에 있어서 무오하고 (無誤,infallible) 하고 정확(正確, inerrant) 하다.   이와 반하여 이단들의 특징은 교주(敎主) 의 경전을 성경과 대등시하거나 성경보다 위에 놓는다.  이것은 극히 잘못된 것이다. 이단들은 항상 교주 중심이다.


        원래 임명된 목사들만은 121명으로 (이들을 Westminster Divines 라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영국 청교도들이었다.  그밖에도 스콧틀란드에서 Alexander Henderson과 George Gillespie 등을 비롯한 6명이 참석했고 (이들은 투표권은 없고 참관자들임), 평신도 30명이 있었는데 이 30명중 10명은 상원 의원이고 20명은 하원 의원이었다. 그러나 성공회소속 목사들은 대부분 불참이어서 실제로 매일 회무에 참석한 인원수는 70명에서 80명 사이 였다.  이들은 1643년 7월1일에 처음 모인이후 1649년 2월22일 까지 성실하게 오직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목적으로 임무를 잘 수행했다.  


       이들 대의원들은 대부분 Cambridge 와 Oxford 교수 출신들이어서 당대에 누구보다도 유식한 사람들이며, 동시에 인격이 고매한 분들이었다. 여기에 모인 참석자들은 모두 당대의 쟁쟁한 학자들이며 참으로 <성경대로 사는 사람들> 로서 신앙을 위하여 목숨도 바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었다. 오늘의 각종 총회, 노회, 대회나 교회협의회 등과는 성격이 아주 다르다.  오늘의 회의에서는  불법이 위험수위에 달했고, 욕설과 폭력이 회의 장소에서 난무해도 그것이  회의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묵인한다. 안건을 처리할 때도 본인에게 유리하면 “하나님의 뜻” 이라고 하고, 본인에게 불리하면 “사탄의 역사” 라고 매도한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회원들은 이와는 아주 정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신앙과 교리에 투철한 분들이었다. 이 신앙고백서가 탄생한 영국에서 조차 오늘날 이런 신실한 학자/목사 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로므모 책을 구입할 때도 17세기 18세기의 영국 Scotland 나 Holland 학자들이 쓴 책들을 구입하면 틀림없을 것이다. 계몽주의는 프랑스에서 Rousseau, Montesquieu, Voltaire 같은 사람들에게서 시작되었고 자유주의 종교사학파
(Religionsgeschichtliche Schule) 는 독일에서 시작되어 기독교의 교리를 무너트렸다.

     이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정에 동참한 학자들은 대부분 신학교 교수들이었는데 그중 특히 몇 사람을 간추려 본다면, Cambridge 대학교의 Queen's College 교수 Herbert Palmer; Oxford 대학교 신학교수부장이었던 Joshua Hoyle;  Oxford 대학교 Magdalene 대학의 신학교수 Thomas Goodwin; Cambridge 대학교의 신학교수 John Arrowsmith 및 그의 후계자인 Anthony Tuckney; Cambridge 대학교의 신학교수 Richard Vines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회의에 참석한 참석자 중에서 Cambridge대학 졸업생이 68명, Oxford 대학 졸업생이 48명이었다. 정식으로 임명된 대의원의 목사수가 121명이라면 Oxford대학과 Cambridge 대학 출신들 116명을 빼면 목사들중 겨우 5명만이 다른 곳에서 공부한 분들이었다. 


     놀라운 것은 이들 대의원들은 회의 전체 기간을 통해서 모일 때 마다 다음과 같은 선서를 되풀이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한번 선서하고도 그것을 무시하거나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며 이 문서야말로 참으로 <장차 하나님의 교회에 책임을 져야 할 중대사> 임으로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신념에서였다.  아무도 이에 이의(異意)를 제기하는 분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매번 회의를 하기에 앞서 기도하고 설교하고 Sola Scriptura 개념을 새롭게 인식시킨 후 회무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이는 이들의 모임의 성격이 성경말씀에 입각한 믿음의 도리와, 교회정치, 그리고 예배모범을 만들자는데 모두 마음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대표자들 중에는 Erastians  (에라스도 주의자들) 도 있었고 Episcopalian (성공회) 사람들, 청교도(Puritans)들도 있었는데 Erastians 들은 <교회는 국가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고 하여 충돌하였으나 성경구절에는 순복하였고, Episcopalians 는 대부분 임명은 받았으나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드믈었다. 그래서 매일 회무에 참석하는 인원은 많아야 80명을 넘지 못했고 보통 60-70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 필자가 1993년 9월 말에 영국 London Wesminster Abbey 바로 옆에 있는 Magdalene Chapel 에 들어가 보아도 80명도 들어갈 수 없으리만큼 방이 협소했다. 여기서 의장 William Twisse 목사의 사회로 장장 4년간 역사적 신앙고백서 제정을 위해서 기도하고 토론하고 문구를 쓰고 또 기도하고 선서하고 또 성경과 대조해 보고 최종 결론을 지었다. 


    그럼 이제 이들이 서약한 그 서약의 전문을 보자.  원문으로 다음과 같다. 괄호안의 번역문을 참고할 것.
   I do seriously and solemnly declare, in the presence of Almighty God, that in this Assembly, whereof I am a member, I will not maintain anything in matter of doctrine, but what I think in my conscience to be truth; or, in point of discipline, but what I shall conceive to conduce most to the glory of God, and the good and peace of his church"  -A.W. Mitchell. A History of the Westminster Assembly of Divines. Philadelphia: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1841, p. 29.-
  (본 회원은 본 회의의 한 성원으로서, 본 회의에서,  교리 면 에서는 본인이 양심으로 판단하여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을 것과, 또 행위문제에 있어서는 가장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며 하나님의 교회의 유익과 화명이 된다고 생각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을 것을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고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밋철 저, 웨스트민스터 성회 역사, 필라델피아: 장로교 출판부 간행, 1841년, 제29면.-
        오늘의 교계에서는 신앙고백이 없어졌고, 신조도 사라졌다. 일정한 신앙노선이 없이 무엇이든 expediency (便宜) 중심으로 교회가 편 한대로, 성도들이 편 한대로 믿으며 또한 하나님중심과 말씀중심과 성경중심의 WCF 사상과는 달리 무엇이든 본인에게 기분 좋은 대로 믿고 행한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배도 <오락중심> 으로 흘러간다. 소위 “열린예배”로 예배를 대신하기도 한다.  그래도 총회나 노회가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고 내버려둔다. 미국의 정통장로교단 (OPC) 같으면 그렇게 목회하는 목사를 당장 파면한다. 성도의 신앙생활도 인간 중심일뿐, 성경의 가르침은 전혀 따르지 않고 있다. “개혁주의”를 믿는다고 주보에 큼직하게 적혀 있어서 그 교회 예배에 참석해 보면 개혁주의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목사가 목회를 하고 있으며 당회의 장로들은 더 할 나위 없이 성경에 무식하다.  


     이러한 경향은 이단들이 교회에 침입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오늘의 이런 신앙풍토와 WCF 기초위원들의 신앙을 비교하면 부끄러울 정도이다.  <주님 재림 직전에 있을 가장 큰 징조는 사람들이 성경적인 믿음을 떠나고 사단의 가르침을 진실인줄 알고 추종하는 속임수 (Delusion)> 이다. 다시 말하면, <배도 apostasy> 이다 (딤전 4:1, 마태 24:24, 살후 2:1-12, 딤후 4:1-6, 계 13:13, 계 11:1-10).  주님 재림할 때 이 세상에서 <성경적인 믿음> 을 가지고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될 것을 주님은 예언하셨다 (눅 18:8). 믿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 즉 ‘성경적 믿음“ 자체가 없어진다는 것이 눅 18:8의 말씀이다.


      누가복음 18:8에서는  “믿음” (he pistis)를 말하고 있다.  “믿음” 이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 Greek feminine  definite article 인  “he" 가 붙어 있음을 눈여겨보라.  오늘의 교회는 하나씩 둘씩 WCF에서 말하는 신조에서 떠나고 있다. 이제 교회마다 모든 참다운 성도는 WCF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를 바로 공부하여 무너져가는 기독교계를 바로 잡자.  개혁주의 신앙으로 돌아오자.  본 <튤립 교육 선교회> 는 오늘 무너져 가는 기독교 교계를 역사적인 신앙고백에 입각하여 개혁주의 신앙으로 바로 잡고저 문자 그대로 교육 하는 선교기관이다.  -끝-


글쓴이: 김명도 교수 (튤립 신학 연구원 원장, 나성 칼빈 신하교 대학원 원장, 
           NAPARC  제20대 회장 역임). www.tulipministri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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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과 미신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가서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하고
      소원을 비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보다
      훨씬 진지합니다.
        그 사람들은 무당이 써주는 부적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것보다
        더 소중히 여깁니다.
        서울 장안에서 용하다고 소문난 무당을 찾아가서
        굿을 한번 하기 위해서 그 사람들이
        지불하는 액수를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바치는 헌금 액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가리켜서
        '신앙인'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무당 앞에서 아무리 진지하고
        아무리 거액을 헌금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가리켜
        '미신을 쫓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미신과 신앙의 차이는 무엇이겠습니까?
        미신은 내게 있는 돈이나 재물이나 달란트나
        그 무엇이든 간에 나의 소유로
        신을 달래고 어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는 켤코 변화되지 않습니다.
        오직 신을 변화시켜서 나의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미신입니다.
        반면에 절대자이신 신을 인간이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 신 앞에서 날마다
        내가 변화되어 가는 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미신의 진정한 차이점은
        바로 <나의변화> 유무에 있습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당에
        나와 있다고 할지라도
        삼위일체 하나님 되신 그분을
        나의 돈이나 재능, 열심으로 달래고 얼러서
        내 목적을 성취하려 한다면,
        그것은 미신을 좆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날이면 날마다 그분의 말씀 앞에서
        내가 바뀌어 간다면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은혜의 단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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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전한 메시지를 올려봤습니다.

      이기는 자가 되라. 계21:7

      오늘은 이기는 자들이 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요즘 야구 좋아하는 사람들은 미국에 가서 활약하고 있는 추신수선수와 류현진선수 경기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산다고 합니다. 야구는 미국 사람들이 최고로 좋아하는 경기라서 세계에서 야구를 제일 잘하는 선수들을 다 뽑아다 프로 야구팀을 만들어 경기를 하고 있는데 한국선수들이 그런 선수들 가운데서도 아주 잘하고 있어 기분이 좋다고 합니다.

      야구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골프. 이게 또 그렇게 재미가 있다네요. 그런데 한국 여자선수들이 미국에 골프경기에서 항상 10위권에 드는 선수들만 해서 두세 명이 꼭 있다는 겁니다. 한국 여자들 정말 대단합니다. 그간에 남성들에게 눌렸는데 좀 풀어놓으니까. 이번에 대통령이 된 박근혜 그대로만 잘만 하면 훌륭한 대통령이 될 것 같아요. 금년에는 박인비란 여자선수가 메이저 대회를 세 번이나 연속으로 제패를 했다고 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티비프로에 나와서 상금으로 100억이 좀 넘게 벌었다고 떨어놨다고 합니다.

      여러분, 요즘은 운동을 잘하면 재벌급처럼 돈을 모을 수 있다고 합니다. 김연아선수 알잖아요. 얼음위에서 하는 피겨스케이팅이라고 그 김연아선수가 한해에만 156억을 벌었다네요. 히야~. 그래서 선수들이 죽어라 훈련하는가 봐요.

      여러분, 그런 상금 한 푼 없는 경기에서도 이기면 기분 좋잖아요. 우리 목사님들 노회대항 축구 시합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열심히 뜁니다. 결승전까지 올라가려면 세 경기를 뛰어야 하는데 그렇게 세 경기를 열심히 뛰다보면 그 다음주일까지는 경기 후유증에 아주 힘들답니다. 그렇게 힘들게 뛰어 우승을 하면 상이 있느냐? 하나도 없어요. 축구 배구 족구 고리던지기 윷놀이 계주 그렇게 6경기 종합점수를 내서 일등에게만 우승 트로피 하나 달랑 주는데도 이기려고 한 달 전부터 연습을 한 다네요.

      여러분, 성경도 우리 그리스도인들 보고 이기는 자가 되라. 승리하라고 수십번을 말하고 있어요. 계시록에서만 무려 열 두 번이 나와요. 한번 주보를 보실래요. 칸이 적어 다 쓰지 못하고 몇 구절만 적어놨어요. 같이 읽어봅시다.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먹게 하리라 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아멘 할렐루야.

      신앙경기에서 이기면요. 하나님의 자녀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는 거예요. 성경이 뭐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보좌에 함께 앉은 것같이 우리도 그렇게 된다고 3장 21절에 말하고 있잖아요.

      신앙생활을 잘하면 하늘나라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복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창세기 아브라함에 어떤 복을 주신다고 했어요 ?
      창12장 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아멘 할렐루야!

      여러분, 하나님아버지는 우리를 복 주시려고 창조하신 분이고, 복 주시려고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분이고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그런데 그걸 방해하는 세 가지 방해세력이 있어요. 이것들을 이기지 못하고 패하면 아무 것도 얻을 수가 없어요. 선수들 보세요? 시합에서 지면 그것도 한일전에서 지면 그간에 수고하고 땀 흘리며 훈련한 것들 알아주는 사람이 없고요. 나중에 뭐 저런 선수를 내보냈어! 하며 도리어 부끄러움만 당하는 거예요.
      어제 그저껜가요. 홍명보선수가 감독이 되어 아이티와 A매치를 했나 봐요. 그런데 한국 팀이 그전까지 4번을 싸워 한 번도 승리하지 못해서 말이 많았나 봐요. 그런 부담스런 감독 자리를 맡았으니 얼마나 심적으로 부담감이 있었겠어요. 그래서 감독과 선수도 똘똘 뭉쳐 해보자 그랬나 봐요.

      여러분, 우리는 운동 같은 것을 하지 않아서 운동선수는 아니지만 신앙경기를 하는 선수입니다. 그러니 신앙경기에서 만큼은 반드시 승리하여야 하여야 합니다. 꼭 승리하기기 바랍니다. 우리 옆 사람에게 ‘신앙경기에서만큼은 승리합시다.’

      그러면 신앙경기에 3대 대적은 누구냐?
      1. 첫째가 따라합시다. 사단마귀 세력들. (뭐라고요?) 사단마귀 세력들. 이 사단마귀 세력들도 하나님 흉내 내려고 사단마귀가 왕이고요, 그 다음 악한 영들 단계별로 쭉 조직이 되어 있어 교회를 대적하고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을 공격해옵니다.
      그런데 이 사단마귀 세력은 하늘나라에서 타락한 천사들이기에 우리 인간들보다 고단수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적에 대해 알면 백전백승하지만 적에 대해 모르면 번번이 패배를 당하게 될 만큼 이놈들의 속임수는 바둑으로 치자면 백단, 천 단 쯤 됩니다.
      제가 우리 안한택 집사님과 바둑을 두어봤습니다. 제가 하수라서 6점을 놓고요. 그런데 한참 두다보니 두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어요. 서로 상대방 수를 짐작해야 내가 이렇게 놓으면 상대방은 이렇게 놓겠지 그래야 바둑 뒤는 재미가 있는데 너무 고수라 도무지 상대방 수를 알 수가 없잖아요.

      여러분, 마귀는 우리 사람을 죽이고 망하게 하는 수가 백가지 천 가지가 넘어요. 내가 이렇게 막으면 저렇게 공격하는 그런 수, 말이에요. 사업을 하다가 쫄딱 망하게 하는 수, 헛된 속임수에 빠져 망하게 하는 수, 도박이나 알콜 중독에 빠져 패가망신하게 하는 수, 마약에 빠지게 하는 수, 학생들 ㅡ 게임 중독에 빠지게 하는 것, 일진회 등 폭력서클에 빠지게 하는 것, 자살 충동질하는 수법, 교통사고가 나게 하는 것들, 화재사고가 나는 것들, 각종 질병을 주는 것들, 눈이 흘려져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뇌물, 성 접대 받다가 망하게 하는 것들 마귀가 사람을 망치는 방법이 백가지 천 가지가 뭐예요, 만 가지도 넘을 수 있어요.

      이걸 다 막으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봐요? 막아지나. 이건 막을 수 없는 거예요. 권력의 힘으로 막는다고요? 중앙정보부 청와대 경호팀이 겹겹이 쌓여 있는데서요. 박대통령 총맡어 죽었잖아요. 돈의 힘으로 막는다고요? 현대 정몽준씨가 돈이 없어 뛰어내렸겠어요? 이건희 삼성회장 따님이 자살했겠어요?
      권력으로도 돈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것이 마귀의 공격입니다. 마귀 공격은 눈에 보이지 않게 그 어떤 곳에도 뚫고 나가기에 막을 길이 없어요. 요즘 일본에 원자력발전소에서 흘러내리는 핵물질 때문에 일본정부가 아주 곤경에 빠졌다고 합니다. 전에 쏘련 체르노빌에서 사고 났을 때도 엄청난 사람이 죽고 유전자가 변형이 되어 이상한 모습이 되어버린 것이 인터넷을 통해서 볼 수 있는데 일본에서는 그 보다 최소 11배가 강한 사고가 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걸 사람들이 동요할까봐 제대로 발표를 못하고 있다나 봐요 그런데 문제는 아직 이걸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차단할 방법이 없다나 봐요. 앞으로 혹시 이것은 차단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지 몰라도 마귀는 영물이기에 막질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단마귀 세력을 완벽하게 막아주며 보호하실 분이 딱 한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할렐루야!
      방글라데시에서 선교사역 하시는 앤드류선교사님 간증이 마침 올려져 있어 소개합니다. 한 남자가 선교사님을 향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는 겁니다. 선교사님은 순간적으로 "아 여기서 주님 곁에 가는가보다 "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앤드류 선교사님은 당당히 암살자를 쳐다보며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점점 떨더니 겁에 질려 도망가 버리더란 것입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뒤에 전화벨이 울리더란 것입니다. 수화기를 드는 순간 방금 자기를 죽이러 왔던 사람이란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 차릴 수 있었답니다. 상대방이 말하길 "무슬림 지도자들이 당신을 죽이면 거액을 주겠다고 약속했다면서" ‘그래서 죽이려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데 손에서 팔에서 힘이 쭉 빠지더’란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손을 움직일 수가 없다면서 당신네 신이 노한 것을 풀어줄 수 없겠냐고 그러드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보호해 그런 생각이 들고, 이 사람 전도하라는 가보다 그래서 전화에 대고 기도해주었더니 한 30분쯤 지나서 선교사님 사무실에 와서 전도를 받고 선교사님의 동역자가 되었다는 간증을 읽어보았습니다.

      여러분, 마귀 역사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보혈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역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보혈공로 의지하는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 도리어 마귀세력이 부서지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것이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골로새서 2장 15절 주보에 있으니 한 번 읽어봅시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이것을 새 번역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권세를 짓밟아 십자가로 승리하셔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라고
      ♪예수 이겼네 예수 이겼네 예수 사단을 이겼네. 예수 이겼네 예수 이겼네 예수 사단을 이겼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예수 사단을 이겼네 할렐루야, 할렐루야 예수 사단을 이겼네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권세. 여러분이 예수님을 진심으로 영접했다면 예수님의 보혈이 여러분들에게 흐르고 있습니다. 원수 마귀의 공격이다 싶으면 ‘이 원수 마귀야, 내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흐르고 있다. 라고 당당히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 이겨야 할 것은 자기를 이겨야 합니다. (뭣을 이겨야 한다고요?) 자기.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는 자기 겉 사람의 본성. 예를 들면 자기에게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본성,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본성, 남이 잘되면 못 봐주는 시기하는 본성, 자기 잘못을 지적당하면 기분 나빠하는 본성, 그러면서도 남 잘못은 꼭 지적하고 마는 본성, 강한 사람 앞에서는 꼼짝 못하고 약한 사람 앞에서는 큰 소리 치는 본성. 좋은 것을 보면 훔쳐서라도 갖고 싶은 본성. 셀 수도 없이 많잖아요. 바로 이러한 육의 본성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합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상대방 골은 막아내고 내 꼴은 성공시켜야 승리합니다. 신앙생활을 운동시합으로 치자면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은 여러분을 지키는 수비하는 보호막이라면 자기본성을 이기는 것은 우리가 공격하는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수비를 잘 했다고 해서 승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을 해서 점수를 내야 이기는 것입니다. 수비를 잘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승리하라고 우리들이 마귀 공격을 받을 때 예수 이름으로 예수님의 보혈피를 사용하여 막아내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냥 값없이 무료로 언제든지 사용하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타고난 결함 육신의 본성을 고치는 것은 그냥 되지 않고 애통한 심령으로 하는 회개와 계속되는 좌절과 결심을 반복하면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기 부정의 과정이 부단히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내 속사람이 자라서 예수님의 모습이 조금씩 나타나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번에 초생 달부터 환해지는 보름달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점수가 되고 그게 하늘의 상급 받을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16:32 이런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이기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성령님의 감동을 구하며 성령님의 은혜 속에 사는 길입니다. 성경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라고 했으니 성령을 좇아 살면 우리의 육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하나님 앞에서 사는 코람데오 훈련을 해보자고 한 것입니다. 지난주에 설교 제목이 무엇이었지요? 인생의 두 갈래 길 써 보라니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초대교회 성도들도 처음에는 다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늘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고 늘 성령에 충만했기에 고난과 핍박을 이기고 승리한 것입니다.

      3. 세 번 째 이길 것은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뭣을 이겨야 한다고요) 세상. 세상을 어떻게 이기느냐 믿음가지고 이겨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을 읽읍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우리 믿음이 자라서 견고해지면 그때는 세상의 그 어떤 핍박도 유혹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의 위인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간절한 소망은 우리들이 여기까지 이르는 자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25장에서 말하는 주님의 신부들이 될 사람들이고 착하고 충성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휴거가 되려면 이런 목표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결론
      세상에서 주는 상 그게 큰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상급과는 게임이 안 되는 것입니다. 축구를 좀 잘한다고 야구를 잘한고, 골프를 잘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주는 상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요?
      여러분들, 우리들은 이런 엄청난 상을 내건 신앙경기에 하나님에게로부터 부름 받고 출전한 자들인 것입니다. 진정한 기독교신앙은 이것을 알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 때 이렇게 불러주신 하나님이 너무 고맙고 감사한 것이고, 자발적으로 충성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이 다 그런 성도가 되기를 예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USA 아멘넷 게시판/김정한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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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말들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말 중에 대부분은
      남의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것도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아픈 곳을 말하면서
      그 말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며
      자기를 드러내려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할 뿐입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은
      말을 하지않고 생각을 합니다.


      생각이 없는 사람은
      여러 이야기를 생각 없이 합니다.

      자신이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확실한 이야기도 아닌 추측을 가지고
      말을 만들기도 합니다.

      사랑의 말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삶의 힘을 돋구어 주는 그런 말을 나눈다면
      얼마나 우리의 삶이 풍요롭고 행복할까

      사람들은 드러내는 말 보다는
      밝은 미소로, 침묵으로
      조용한 물이 깊은 것처럼
      깊이 있는 말로 사랑과 감동을 전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요



      = 좋은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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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0.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구원은?

       

       

       

      박일민 교수(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장·조직신학)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고 하신 사도 바울께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과 함께, 주의 이름을 전파하는 사람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표현하기 위하여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라고 하신 바 있다.

      구원에 있어서 복음을 듣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전하는 복음을 듣지(받아들이지) 않아서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전하는 복음이 없었기 때문에 들으려 해도 들을 수 없었던 사람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들이 들을 수조차 없었는데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너무나 억울한 일이 되지 않을까.

      여기에 해당하는 사례는 영아들과 복음이 아직 들어가지 못한 시대나 지역에 살았던 성인들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제 그 경우를 각각 살펴보기로 하자.

       

      1. 영아(嬰兒)의 경우


      1) 영아의 상태

      우리는 보통 생후 1세~2세 아이들을 영아라고 부른다. 그러나 구원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영아나 유아를 나이가 아닌 영적 상태로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육체적 나이로는 소년이나 청년에 해당하면서도 영적으로는 영아와 다를 바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나이와는 상관없이, 자아의식을 가지기 이전의 상태를 가리켜 영아라고 해보자. 자아의식이 생기기 전이라는 것은 의식적인 자범죄를 범하기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영아도 성장하면 성인이 되고, 자아의식에 따라 자범죄를 범하거나 복음을 들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살아 있는 영아의 구원 문제는 별도로 취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성인이 되기 전에, 즉 자범죄를 범하지 않은 영아의 상태로 죽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복음을 듣거나 믿을 수 있는 기회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그러기에 그 영아의 구원 문제가 별도의 관심사로 등장하게 된다.

       

      2) 영아 구원의 가능성
      우리는 성경에서 영아의 구원 여부에 대한 단정적인 언급을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영아의 구원에 관한 내용을 확실하게 결정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성경에는 영아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교훈을 하시면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2)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육체적 상태의 어린 아이가 아니라, 그 마음이 어린 아이와 같은 상태를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교훈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천국의 교훈을 위해 어린 아이를 예로 드셨다는 사실을 통해, 어린 아이도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을 것, 즉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사도 바울께서도 구원에 관한 대표적 원리를 밝히시면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고 하셨다. 여기서 ‘네 집’이라는 말씀은 어린 아이도 포함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반적인 가족 구성으로 볼 때, 가정에는 어린 아이가 있는 것이 보통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고 온 집과 더불어 세례를 받았던 빌립보의 루디아(행 16:15)나, 고린도의 회당장 그리스보(행 18:8)의 집에도 어린 아이가 있었을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천국의 아름다운 모습을 소개하면서, “그 때엘··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 11:8)고 했다. 이 말씀은 천국의 평화로운 광경을 소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어린 아이가 등장한 것을 보면, 천국에는 어린 아이도 있을 수 있는 가능성, 즉 어린 아이도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전날,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름으로 죽음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는 순결한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예표하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첫 번 유월절에서 구원받은 것은 어른들만이 아니었다. 그 중에는 분명 어린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월절 사건에서 어린 아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된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할례 의식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증거를 가졌다. 이 할례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음을 표하고 인치는 신약시대의 세례에 대한 예표이었다. 그런데 그 할례는 어른에게만이 아니라, 주로 태어난 지 8일되는 어린 아이들에게 행했다. 그러므로 할례 의식은 어린 아이도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강력하게 암시해준다.

       

      3) 영아 구원의 범위
      앞의 여러 사례들에서 보는 것처럼, 영아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면, 그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영아 상태로 죽은 모든 어린 아이가 다 구원을 받을까, 아니면 믿음의 부모를 둔 아이들만 구원을 받을까.

      자범죄를 범하기 전에 죽었다는 점만을 고려해보면, 모든 영아들이 다 구원받았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자범죄의 유무 여부로 구원을 결정하지 않는다. 자범죄가 없는 사람이라도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했다. 그러므로 영아 상태로 죽은 자들이 모두 구원받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적절치 못하다고 보아야 한다.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에서처럼, 부모의 믿음이 온 가족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가족 구원의 의미를 고려해 보면, 믿는 부모의 자녀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구원이 오직 자기 자신의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교훈한다(겔 18:4, 20). 이것은 부모를 포함한 다른 어떤 사람의 믿음이라도 영아의 구원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모가 믿으면 자녀가 자동으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적절하지 못하다.

      우리는 영아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는 있으나, 그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장 3절에 밝힌 것처럼, 영아 때 죽은 아이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계획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고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4) 영아 구원의 방법
      영아에게는 아직 자아의식이 없다. 따라서 영아는 스스로의 판단이나 결정에 따라 복음을 듣거나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만일 영아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면, 그들은 과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자범죄가 없는 영아라도, 원죄가 있기에 반드시 거듭나야 할 필요가 있다. 거듭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자신의 기쁘신 뜻에 의해 성인들의 일반적인 체험과는 다른 방법, 그러기에 성인들에게는 신비롭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방법으로 영아들에게 복음을 듣게 하시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케 하실 것으로 여겨진다.

       

      2. 성인의 경우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지기 전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처럼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채 죽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그들은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믿지 못했다는 점에서만 보면, 그들의 상황은 영아들과 똑같다. 그러나 그들은 원죄만이 아니라 자범죄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영아들과 다르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시려고 하신다면 길가의 돌들로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고(눅 3:8), 죄인을 마술처럼 신기하게 구원해 내실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그렇게 사용하려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하신 의도와 반대되는 방식으로는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는 달리 자신의 능력을 항상 오직 자신의 선하신 의도에 맞도록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죄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되기 원하신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다(롬 6:23).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해주어야만 하는 의무를 가진 분이 아니셨다. 그러나 자신의 선하고 기쁘신 뜻에 따라 죄인을 구원하려고 계획하셨고, 그 계획의 결과 죄에 대한 죽음의 대가를 치르셔야 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게 하실 때에 일정한 방법을 지정해 놓으셨다. 그것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고전 1:21), 즉 복음을 들음으로서 믿음에 이르게 되는 방법이다. 복음을 듣는 것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 수단이 없으면, 그 결과인 구원도 있을 수 없다.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이 수단을 허락받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수단으로 말미암는 결과인 구원도 허락받지 못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허락받지 못한 것 때문에,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멸망의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밀어 넣으시거나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멸망에 이른 것은 하등의 불평이 있을 수 없는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온 인류가 다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어떤 자를 구원해주신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결과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들은 사람은 듣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불평을 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감사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자기의 양심에 따라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구원은 양심에 의한 방법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 양심에 비추어 죄가 없어 구원받을만한 사람이란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예외를 만들어 내고 싶다면, 영아들의 경우처럼 성령의 뜻에 맡기고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들어보지 못하고 죽은 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아쉬움이나 불공평으로 인한 원망을 가지기 쉽다. 이러한 생각은 근시안으로 우리 눈앞의 것만을 보는 데서 생겨나는 오해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죄와 구원의 문제를 넓고 멀리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어찌 나에게는 이 시대 이 지역에 살면서 복음을 들어 구원에 이르는 기회를 허락하여 주셨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불공평하게 보이는 조건 속에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를 찾아 감사하며 찬송할 수 있어야 한다.

      가져온 곳 : 
      카페 >행복†충전소
      |
      글쓴이 : DMpastor| 원글보기


      길진리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3>  
      글쓴이 : 관리자    


      “어지러운 세상 중에…”


      0011. US 시대에서 UN으로
      US시대에서 지금은 UN주도의 세상으로 움직이고 있는 중이다. 『새세계질서』(NWO-New World Order)를 통한 ‘세계정부’수립을 위해 UN이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는 4대강령은 아래와 같다.
       1) 인간의 정신에서 개체(개성)주의 제거
       2) 가정관습에 대한 전통을 파괴
       3) 국가에 대한 충성심 제거
       4) 모든 종교의 교리제거
      이를 달성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뉴에이지』교육의 4가지 거짓말이 심어지고 있다.
       1) 죄(罪)의 교리 부인
       2)『그리스도』의 보혈로 이룬 대속부인
       3) 천국과 지옥 부인 (NIV 성경의 구약에서 ‘지옥’(Hell)이란 단어 100%, 신약에서는 48% 제거)
       4) 예수안에만 있는 구원을 부인

      『파시스트』무쏠리니(B. Mussolini, 1883-1945)가 『몬테쏘리』협회 총재였던 『몬테쏘리』 교육에서부터 『뉴에이지』사상은 아이들의 머리에 주입된다. UN 산하의 교육기관으로 알려진 UNICEF의 슬로건 중에는 “모든 아이는 우리의 아이다”(Every Child is Our Child)라는 구호가 있다. 독일 나치는 초등학생부터 시작하여 대학생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나치화 하는데 성공하였다. 히틀러는 공공연하게 “당신의 아이는 이미 우리에게 속한다”(“Your children belong to us already......” - Adolf Hitler, Nov. 6, 1933/William Shirer, The Rise and Fall of the Third Reich)고 장담하였다.

      0012. 뉴에이지 교육의 대부 존 듀이
      근대 미국교육의 아버지로 불리는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는 뉴에이지 교육의 개념을 미리 간파하였다. 그는 “만일 학교가 아이들을 아침 7시 반에서 오후 3시 반까지 잡아둘 수 있다면, 그리고 그 후부터 저녁 6시까지는 ‘스포츠’등으로 소일하게 하고, 온 저녁을 학교숙제로 바쁘게 만들어, 하루에 자녀들이 부모들과 지내는 시간이 30분이 안되도록 아이들을 잡아둘 수 있다면, 한 세대가 가기 전에 학교는 그들의 부모와 그들의 종교적 영향에서 아이들을 떼내어 놓을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우리의 자녀는 우리가 바라는 소원 안에 머물고 있는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0013. 예배가 카니발인가? (1996년 9월)
      국민일보 하단 전면광고에는 빈야드운동이 요란하다. 『빛과 소금』(7월)은 커버스토리로 PK운동을 소개, 교계신문잡지가 이단들을 적극 선전하고 있는 어지러운 영적혼란기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예배는 축제’라고 말하는 무리들이 늘어나고 있다. 축제, 즉 카니발(‘바알의 제사장’이라는 뜻)은 paganism의 산물로서 저들은 찬송을 제거하고 노래로 분위기를 조성한다. 놀라운 기만이다. 인류최초의 살인, 즉 형이 아우를 죽이는 살인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현장에서 일어났음을 기억하시라. ‘예배는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지 축제가 아니다’.
      영국국교가 지옥을 부인하게 이르렀고, 스위스의 복음주의 목사라는 자가 그리스도 교회에서 ‘호모’들의 결혼식을 주례한다. 영국불교협회장 불교승려가 세계 3대 대학교회 중 하나인 『케임브리지』대학교회(King’s College Chapel)에서 주일대예배설교를 하더니 이제는 『무슬림』 사제가 강단에 섰다. 미감리교, 장로교단에서는 ‘게이, 레즈비언’들의 목사안수와 이혼이 공공연하다. 1984년 미감리교 여성분과위원회는 ‘어디에나 계시는 우리 어머니/아버지…”로 시작되는 주기도문을 제정, 출판까지 하였다 (‘Women and Worship’ Harper & Row, 1984).
      연합성서공회(UBS) 산하의 미국성서공회(ABS)에는 이사, 상임위원, 재정/행정운영위원으로서, 부회장자리를 점령하고있는 천주교신부 R.J. Robbins를 위시한 천주교도들이 진을 치고있다(ABS Record, May 1996). 영국천주교회의 ‘원닝’추기경이 1995년 스코틀랜드 장로교단총회에서 연설, 우리의 교단총회에도 저들이 서겠다는 날이 올 것이 아닌가? ‘복음적’(Evangelical)이란 단어가 이제 그 의미를 상실해가고 있는 요즈음, 지난 4월 80여명의 복음주의자들은 하버드대학 교정의 Harvard Square에 모여 ‘케임브리지 선언’을 발표, 개혁자들이 부르짖은 5대원칙 - scripture Alone, Christ Alone, Grace Alone, Faith Alone, and Glory to God Alone - 을 재확인하였다.

      0014. “이와 같이 부정적이고 치명적인 카톨릭교회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변화들에는 긍정적인 요소들이 있다… 그러므로 저자는 카톨릭교회안에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교리상의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개신교회와 카톨릭 교회가 일치로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불편하고 경솔한 열심은 피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목회와 신학』(1995.7. 276쪽)에 게재된 어느 신학교수의 책에 대한 평이다.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양 진영에 둥우리를 까는 자들이 두뇌는 있어 교수가 되어 신학교를 점령하고 있고, 이들로부터 배운 신학생들이 목회전선에서는 천주교에 대하여는 아예 벙어리들이 된다. 로마교황이 한국을 두 번 다녀간 후, 기독교에서 천주교로 넘어간 사람들 등 200만의 신도가 불었다는 천주교회. 교황이 10번 다녀가면 우리의 교회에 몇 명이 남을 것인지 .....   (민족복음화 여의도대회를 아무리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이들은 7세만 되면 강제로 천주교학교로 끌려가서 천주교교육을 받았고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의 십일조가 자동으로 천주교로 들어갔던 프랑스의 『위그노』교도들이 당했던 고난은 우리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현상유지에 배부른 정신적 빈곤자들이 영적지도자로 자처하고 있는 곳은 차마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어두운 곳이다.. ‘복음을 전하라’ 그리고 ‘이단을 폭로하라’ -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늘 함께 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러하였고,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마태23.33), 헤롯을 향하여는 “저 여우에게...”라고 맞섰던 예수님, 이단 경계를 가르쳐 온 사도들의 메시지… 개혁자들. 복음의 양면성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사랑만 읊조리는 자들을 경계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 기독교와 천주교가 언젠가는 일치가 필요한 관계로 보는 어리석은 ‘탕자’신학자들을 통해 배도가 교회 안에서 고개를 들게 되어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태5.37)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6.26)

      0015. 인류의 조상 원숭이, 원숭이의 조상 인류? (1996년 11월)
      로마교황이 다윈의 진화론을 지지하고 나섰으며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발간되는 일간지 IL GIORNALE는 “교황 왈 인간은 원숭이들로부터 유래되었을지도 모른다”(“The Pope Says We May Descend From Monkeys”)라는 헤드라인을 개재하였다. 이중정책에 명수들이라 늘 피할 길을 두고 일을 벌이는 자들이라 이들과의 논쟁은 무의미하다.
      1633년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그를 종교재판에 회부하였던 로마교황청은 그로부터 360년이 지난 1992년에 정식으로 갈릴레오에게 사과, 아일랜드의 어느 목사는 ‘이제는 지구가 돌아도 좋다는 교황의 허락을 받았다’고 촌평.
      1990년에 천주교에서 발간한 주석서 New Jerome Biblical Commentary는 역사적 기독교의 기본교리들을 공격, 기독교는 인간이 만든 종교로써 성경은 오류와 공상, 신화, 전설 등으로 가득 차 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구속사역에 대한 교리까지도 부인하고 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바쁜 때나 틈 날 때
      예수 친히 하신 말씀 날 더 귀히 여겨라
      (찬366 어지러운 세상 중에 ③)

      구영재 선교사  [P.O. Box 8844 Victoria, BC V8W 3Z1]



       

       

        

         

         

         

        해변의 묘지
         
          폴 발레리
               
          비둘기들 노니는 저 고요한 지붕은
          철썩인다 소나무들 사이에서, 무덤들 사이에서.
          공정한 것 정오는 저기에서 화염으로 합성한다
          바다를, 쉼없이 되살아나는 바다를!
          신들의 정적에 오랜 시선을 보냄은
          오 사유 다음에 찾아드는 보답이로다!
         
          섬세한 섬광은 얼마나 순수한 솜씨로 다듬어내는가
          지각할 길 없는 거품의 무수한 금강석을,
          그리고 이 무슨 평화가 수태되려는 듯이 보이는가!
          심연 위에서 태양이 쉴 때,
          영원한 원인이 낳은 순수한 작품들,
          시간은 반짝이고 꿈은 지식이로다.
         
          견실한 보고, 미네르바의 간소한 사원,
          정적의 더미, 눈에 보이는 저장고,
          솟구쳐오르는 물, 불꽃의 베일 아래
          하많은 잠을 네 속에 간직한 눈,
          오 나의 침묵이여!…… 영혼 속의 신전,
          허나 수천의 기와 물결치는 황금 꼭대기, 지붕!
         
          단 한 숨결 속에 요약되는 시간의 신전,
          이 순수경에 올라 나는 내 바다의
          시선에 온통 둘러싸여 익숙해진다.
          또한 신에게 바치는 내 지고의 제물인 양,
          잔잔한 반짝임은 심연 위에
          극도의 경멸을 뿌린다.
         
          과일이 향락으로 용해되듯이,
          과일의 형태가 사라지는 입 안에서
          과일의 부재가 더없는 맛으로 바뀌듯이,
          나는 여기 내 미래의 향연을 들이마시고,
          천공은 노래한다, 소진한 영혼에게,
          웅성거림 높아가는 기슭의 변모를.
         
          아름다운 하늘, 참다운 하늘이여, 보라 변해 가는 나를!
          그토록 큰 교만 뒤에, 그토록 기이한,
          그러나 힘에 넘치는 무위의 나태 뒤에,
          나는 이 빛나는 공간에 몸을 내맡기니,
          죽은 자들의 집 위로 내 그림자가 지나간다
          그 가여린 움직임에 나를 순응시키며.
         
          지일(至日)의 횃불에 노정된 영혼,
          나는 너를 응시한다, 연민도 없이
          화살을 퍼붓는 빛의 찬미할 정의여!
          나는 순수한 너를 네 제일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스스로를 응시하라!……그러나 빛을 돌려주는 것은
          그림자의 음울한 반면을 전제한다.
         
          오 나 하나만을 위하여, 나 홀로, 내 자신 속에,
          마음 곁에, 시의 원천에서,
          허공과 순수한 도래 사이에서, 나는
          기다린다, 내재하는 내 위대함의 반향을,
          항상 미래에 오는 공허함 영혼 속에 울리는
          가혹하고 음울하며 반향도 드높은 저수조를!
         
          그대는 아는가, 녹음의 가짜 포로여,
          이 여윈 철책을 먹어드는 만(灣)이여,
          내 감겨진 눈 위에 반짝이는 눈부신 비밀이여,
          어떤 육체가 그 나태한 종말로 나를 끌어넣으며
          무슨 이마가 이 백골의 땅에 육체를 끌어당기는가를?
          여기서 하나의 번득임이 나의 부재자들을 생각한다.
         
          닫히고, 신성하고, 물질 없는 불로 가득 찬,
          빛에 바쳐진 대지의 단편,
          불꽃들에 지배되고, 황금과 돌과 침침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이곳, 이토록 많은
          대리석이 망령들 위에서 떠는 이곳이 나는 좋아.
          여기선 충실한 바다가 나의 무덤들 위에 잠잔다!
         
          찬란한 암케여, 우상숭배의 무리를 내쫓으라!
          내가 목자의 미소를 띄우고 외로이
          고요한 무덤의 하얀 양떼를,
          신비로운 양들을 오래도록 방목할 때,
          그들에게서 멀리하라 사려 깊은 비둘기들을,
         
          여기에 이르면, 미래는 나태이다.
          정결한 곤충은 건조함을 긁어대고,
          만상은 불타고 해체되어, 대기 속
          그 어떤 알지 못할 엄숙한 정기에 흡수된다……
          삶은 부재에 취해있어 가이없고,
          고초는 감미로우며, 정신은 맑도다.
         
          감춰진 사자(死者)들은 바야흐로 이 대지 속에 있고,
          대지는 사자들을 덥혀주며 그들의 신비를 말리운다.
          저 하늘 높은 곳의 정오, 적연부동의 정오는
          자신 안에서 스스로를 사유하고 스스로에 합치한다.
          완벽한 두뇌여, 완전한 왕관이여,
          나는 네 속의 은밀한 변화이다.
         
          너의 공포를 저지하는 것은 오직 나뿐!
          이 내 뉘우침도, 내 의혹도, 속박도
          모두가 네 거대한 금강석의 결함이어라……
          허나 대리석으로 무겁게 짓눌린 사자들의 밤에,
          나무뿌리에 감긴 몽롱한 사람들은
          이미 서서히 네 편이 되어버렸다
         
          사자들은 두터운 부재 속에 용해되었고,
          붉은 진흙은 하얀 종족을 삼켜버렸으며,
          살아가는 천부의 힘은 꽃 속으로 옮겨갔도다!
          어디 있는가 사자들의 그 친밀한 언어들은,
          고유한 기술은, 특이한 혼은?
          눈물이 솟아나던 곳에서 애벌레가 기어간다.
         
          간지 소녀들의 날카로운 외침,
          눈, 이빨, 눈물 젖은 눈시울,
          불과 희롱하는 어여쁜 젖가슴,
          굴복하는 입술에 반짝이듯 빛나는 피,
          마지막 선물, 그것을 지키려는 손가락들,
          이 모두 땅 밑으로 들어가고 작용에 회귀한다.
         
          또한 그대, 위대한 영혼이여, 그대는 바라는가
          육체의 눈에 파도와 황금이 만들어내는,
          이 거짓의 색체도 없을 덧없는 꿈을?
          그대 노래하려나 그대 한줄기 연기로 화할 때에도?
          가려므나! 일체는 사라진다! 내 존재는 구멍나고,
          성스런 초조도 역시 사라진다!
         
          깡마르고 금빛 도금한 검푸른 불멸이여,
          죽음을 어머니의 젖가슴으로 만드는,
          끔찍하게 월계관 쓴 위안부여,
          아름다운 거짓말 겸 경건한 책략이여!
          뉘라서 모르리, 어느 누가 부인하지 않으리,
          이 텅빈 두개골과 이 영원한 홍소(哄笑)를!
         
          땅밑에 누워 있는 조상들이여, 주민 없는 머리들이여,
          가래삽으로 퍼올린 하많은 흙의 무게 아래
          흙이 되어 우리네 발걸음을 혼동하는구나.
          참으로 갉아먹는 자, 부인할 길 없는 구더기는
          묘지의 석판 아래 잠자는 당신들을 위해 있지 않도다
          생명을 먹고 살며, 나를 떠나지 않도다.
         
          자기에 대한 사랑일까 아니면 미움일까?
          구더기의 감춰진 이빨은 나에게 바짝 가까워서
          그 무슨 이름이라도 어울릴 수 있으리!
          무슨 상관이랴! 구더기는 보고 원하고 꿈꾸고 만진다!
          내 육체가 그의 마음에 들어, 나는  침상에서까지
          이 생물에 소속되어 살아간다!
         
          제논! 잔인한 제논이여! 엘레아의 제논이여!
          그대는 나래 돋친 화살로 나를 꿰뚫었어라
          진동하며 나르고 또 날지 않는 화살로!
          화살 소리는 나를 낳고 화살은 나를 죽이는도다!
          아! 태양이여…… 이 무슨 거북이의 그림자인가
          영혼에게는, 큰 걸음으로 달리면서 꼼짝도 않는 아킬레스여!
         
          아니, 아니야!…… 일어서라! 이어지는 시대 속에!
          부셔버려라, 내 육체여, 생각에 잠긴 이 형태를!
          마셔라, 내 가슴이여, 바람의 탄생을!
          신선한 기운이 바다에서 솟구쳐 올라
          나에게 내 혼을 되돌려준다…… 오 엄청난 힘이여!
          파도 속에 달려가 싱그럽게 용솟음치세!
          그래! 일렁이는 헛소리를 부여받은 대해(大海)여,
          아롱진 표범의 가죽이여, 태양이 비추이는
          천만 가지 환영으로 구멍 뚫린 외투여,
          짙푸른 너의 살에 취해,
          정적과 닮은 법석 속에서
          너의 번뜩이는 꼬리를 물고 사납게 몰아치는 히드라여,
         
          바람이 인다!……살려고 애써야 한다!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
          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거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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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애가(哀歌) 최송연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눈물짓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니 슬픈게 아니지 진정 슬픈 것은 여름 내내 수고했으나 가을에 거두어 드릴 열매 한 톨이 없다는 것이며 그보다 더 슬픈 것은 만물의 마지막인 겨울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지 (벧전 4: 7절 참조)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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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모라서 행복합니다 설흔/허영애(새벽이슬^^) 가난한 집 농부의 딸로 태어나 부유한 환경으로 보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주님은 내게 어부의 며느리로 보내셨다 희망의 지팡이와 노력의 보따리를 갖고 살라고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더 좋은 믿음의 명문가정에 보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주님은 내게 층층시하 아흔 넘은 조모와 홀 시어머님 오남매의 맏며느리로 불신가정에 보내셨다 눈물로 씨앗 뿌려 예수사랑 전파하라고 공부에 목을 매어도 아들이 우선인 어린시절 주경야독하며 인내와 끈기를 기르게 하시었다 내 자녀만은 맘껏 배울 수 있는 환경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주님은 내게 그 모든 염려 주님이 책임지신다고 지천명의 나이가 다가옴에 부교역자 생활 청산하고 담임으로 청빙받아 가길 눈물로 기도했다 그러나, 주님은 내게 한 번도 기도해보지 않은 개척을 시키셨다 말없이 사랑하고 빛없이 희생하라고 굴이 진주를 만들 듯 끝까지 참아야 열매를 거두기에 외롭고 곤고한 길 힘들어 하는 남편목사님 손잡아 주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하신다 새벽마다 무릎 꿇고 몇 안되는 성도들 이름 불러가며 주일성수 하길 기도했다 그러나, 주님은 내게 기도로 그 영혼의 문을 하나님 앞에 열어놓으라 하신다 바쁘고 힘겹게 살아가는 일과 속에서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친구와 가족과 교우들의 정을 느끼게 하시며 하나님의 사랑을 질병과 고난 속에서 경험하게 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떠날 수 없는 자리 다시 돌아 올수 밖에 없는 자리 머물 수밖에 없는 자리 지극한 은혜를 깨닫게 하시는 자리 오늘도 난, 사모여서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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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파 목회자 탈퇴 러시..무슨일이?
        "헌금 할당 부담과 교리 허구성 깨달아 탈퇴"

        2013/09/04 ㆍ추천: 0  ㆍ조회: 52      

        기쁜소식선교회로 활동하는 이단인 속칭 구원파에서 탈퇴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단 구원파 측은 최근 구원파 탈퇴 교회를 다시 점거하는 과정에서 탈퇴자들을 폭행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6월 광양의 한 교회 CCTV에 잡힌 모습. 사람들이 사다리를 동원해 교회 진입을 시도하고있다.

        지난 6월 전남 광양에 위치한 한 교회의 예배당 모습을 촬영한 CCTV 화면 모습.

        사람들이 사다리를 가지고 예배당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결국 닫힌 예배당 문을 열었고, 이내 200여명의 사람들이 교회에 진입했다.

        이 과정에서 몸싸움도 벌어졌다.

        사실확인 결과 이 장면은 구원파측 신도들이 구원파에서 탈퇴한 교회를 점거하기위해 교회 진입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구원파 소속이던 강진성도교회와 광양침례교회가 기쁜소식선교회 즉, 구원파를 이탈하면서 비롯됐다는 시각이다.

        탈퇴한 두 교회는 각각 지난 4월과 5월에 구원파를 탈퇴했지만, 구원파 측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극기야 폭력까지 사용해 교회를 강제 점거했다고 주장했다.

        구원파 탈퇴자 A씨는 “박옥수 목사와 탈퇴에 관한 이야기를 마친 다음날 200명이 와서
        예배당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서 교회를 점령했다"며, "이과정에서 많은 신도들이 폭행을 당했다"고 말했다.

        A씨는 이어 "최근 구원파 내 30여 개 교회 목회자들이 동시에 탈퇴하는 일이 발생했다"고 폭로했다.

        탈퇴자 대부분은 수시로 지교회에 할당하는 헌금에 대한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구원파 교리의 허구성을 깨닫게 되면서 탈퇴를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구원파 탈퇴자 A씨는 "국내에 180여개 지교회가 있는 데 구원파 본부에서는 각종 행사가 있을 때마다 티켓을 강매하고, 교인수 기준으로 헌금을 할당한다"며, "교인들은 빚까지 내 헌금을 채우는 실정이다"고 말했다.

        사이비종교피해대책연맹(대표 정동섭 교수)은 지난 3일 서울 연동교회 다사랑카페에서 구원파의 불법성에 대한 폭로 기자회견을 갖고, 구원파 탈퇴교회 강제 점거 사건에 대한 구원파측의 해명을 촉구했다.

        사이비종교피해대책연맹은 이날 성명서를 발표하고, “박옥수 목사가 막가파식 구원교리로 신도들을 현혹해 전형적인 사이비 종교의 양상으로 변질되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구원파 신도 의문사 사건 등 박옥수 목사가 각종 의혹에 대해서도 솔직히 해명하라”고 촉구했다.

        한편, 교회를 점거당한 구원파 탈퇴자들은 현재 교회 점거에 나선 150여명의 구원파 신도들을 폭력행위 등에 관한 혐의로 고소한 상태이다.

        CBS노컷뉴스 송주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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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USA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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