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반대 설교하면 손해배상 책임”
차별금지법안 3건 국회 법사위에 계류 중 교계 대응 필요


지난 2007년 법무부가 차별금지법안에 ‘성적 지향’ 즉, 동성애를 포함시켜려고 하다가 교계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는데, 이번에는 국회에서 차별금지법안이 발의된 것으로 확인돼 한국 교회의 대응이 시급한 상황이다.

뉴스파워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차별금지법안은 세 건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제1법안은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 등 10인이 지난 해 11월 16일 발의했다. 제2법안은 지난 2월 12일 민주통합당 김한길 의원 등 51인이 발의했다. 제3법안은 지난 2월 20일 민주통합당 최원식 의원 등 12인이 발의했다. 발의한 법안 내용은 각각 다르지만 73명이 차별금지법안 발의에 참여한 것이다.

통합진보당 김재연 의원이 대표 발의한 차별금지법안에는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전과’,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등이 논란이 될만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민주통합당 김한길 의원이 대표 발의한 차별금지법안도 김재연 의원의 법안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전과, 성적 지향, 성 정체성 등을 담고 있다.

민주당 최원식 의원이 대표발의한 차별금지법안에는 ‘사상’과 ‘종교’ 등은 빠져 있다. 그러나 정치적 견해, 성적 평등,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전과 등이 포함돼 있다.

차별금지법안은 현재 국회 소관위원회인 법제사법위원회에 접수되어 심사 중에 있다. 법제사법위원회 차별금지법안 소위원회가 새누리당 5명, 야당 의원 5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법제사법위원회의 심사가 끝난 뒤에는 국회 본회의에서 심사하고, 각 심사에서 위원회 또는 본회의의 의결을 통해 법안이 된다.

동성애 합법화를 반대해온 교계는 지난 2007년 법무부가 추진한 것과는 다르게 입법기관인 국회에서 추진하고 있어서 법사위원회의 법안 심사가 단기간내에 통과될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으로 에상하고 총력을 다해 저지하기로 했다.

교계 대책위는 법안 발의에 참여한 73명의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해당 지역구 기독교연합회와 긴밀하게 공조해 국회의원들에게 항의 전화를 하고, 낙선운동까지 벌이겠다는 입장을 강력하게 표명하도록 요청할 계획이다. 또한 기독교 뿐만 아니라 불교, 천주교, 유교 등 종교계와 시민단체들과도 연대해 반드시 막겠다는 입장이다.

차별금지법안을 막기 위해 교계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 9일 오후 전용태 변호사, 경수근 변호사를 비롯한 기독 변호사들과 연세대 법학과 이화숙 교수, 동성애 합법화 반대운동에 앞장서온 이용희 교수(가천대) 등 관계자들이 모여 모임을 갖고 대책을 논의했다. 또한 한국교회언론회, 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세계성시화운동본부, 바른성국민연합 등 단체들도 적극 나섰다.

동성애를 합법화할 경우 동성애를 반대하는 설교를 못하게 된다. 특히 동성애 반대 설교를 할 경우 손해배상 책임과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시정명령과 이행강제금 부과, 교회와 목사가 양벌을 받게 되어 있다.

김한길 의원이 대표 발의한 차별금지법안에는 “국가인권위원회는 그 정한 기간 내에 시정 명령의 내용을 이행하지 아니한 자에 대하여 3천만원 이하의 이행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차별금지법안을 분석한 경수근 변호사(법무법인 인앤인)는 “차별금지법안을 검토해검토한 결과 헌법 제20조 1항에서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경 변호사는 “ 이 법안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 외부에 표명을 금지함으로써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고 아울러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교계는 동성애 합법화 뿐만 아니라 ‘사상’을 차별금지법안에 포함시킨 것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남북 분단의 냉혹한 현실에서 김일성 주체사상을 주장하고, 교육해도 이를 제재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종교, 전과 등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가령 이슬람의 일부다처제나 폭력과 테러를 합법화하는 이슬람의 가르침에 대해 이를 비판할 경우 법저 제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타 종교인들에게 전도와 선교하다가 자칫 종교 차별금지법에 걸려들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전용태 변호사(세계성시화운동본부 공동총재)는 “동성애자를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는 동의한다. 그러나 이를 법으로 합법화할 필요까지는 없다.”며 “동성애의 합법화는 결국 남자 며느리, 여자 사위를 데려와도 막을 수 없는 악법중에 악법”이라며 한국의 모든 교회들이 눈물 뿌려 기도하고, 국회의원들에게 반대논리를 제출해 이를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차별금지법안 발의자에는 수원중앙침례교회 장로이자 민주당 기독신우회 회장인 김진표 의원을 포함해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국회의원들도 발의자로 참여해 충격을 주고 있다. 이에 대해 교계는 기독 의원들이 법안 내용을 잘 모르고 서명했거나, 아니면 자신의 소신에 따른 것일 수 있다고 보고 기독 의원들에게 법안의 문제점을 알리기로 했다.

김철영 ⓒ 뉴스파워/USA아멘넷



예수, 왜 무엇 때문에 믿으라고 하십니까?

김정한 ㆍ 2014-03-05 (수) 21:52    

내친 김에 하나 더 올려 봤습니다.

예수, 왜 무엇 때문에 믿으라고 하는지? 이제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간에 우리 목사들이 제대로 된 복음진리를 전했는가? 정말로 복음의 기초요 핵심이랄 수 있는 예수님을 성경대로 전했는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부하나님께로써 그리스도 일을 하라는 사명을 받고 제자들 앞에서 십자가로 사명을 완수하신 후 제자들에게 남은 사명(하나님 나라를 땅 끝까지 전하라는)을 명하신 뒤 승천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택민인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듯 죄와 사망의 법아래 흑암에 있는 자들을 해방시키고 하나님께로 하나님나라의 일원이 되도록 하여 기업을 얻을 자녀로 후사로 자라게 하고 세우라고 하신 것과 같다고 봅니다.

그런데 필자의 보기엔 작금의 목사들이 예수님을 전하되 세상에서 출애굽 시키는 구원이 아니라 세상에서 예수를 믿으면 부요한자로 성공자로 만들기 위해 구원하고 불러냈다는 식으로 전하고 설교하지 않는가? 라는 것입니다.  

전자의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을 후사들이 되도록 하게하려면 그것은 반드시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야만 가능한 것이고 그것은 세상에 속해서 살던 자신의 죄성과 행함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거룩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예수를 믿으면 부요한 자가 성공 자가 된다는 메시지는 죄악된 죄인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데 중점을 둔 메시지 대신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 예를 들어가며 저들처럼 되어야 된다 는 것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구약의 인물들을 인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신약의 예수님 중심에서 구약의 인물들 중심이 되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 예수님을 제대로 모른다고 볼 수밖에 없고 성경의 핵심주제,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나라 경륜을 모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목사들은 모름지기 그리스도의 몸으로 장성시켜라 는 엡 4:11-16절의 의미하는 바를 알고 목회를 하여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필자 역시 초창기 성경 말씀에서 목회의 길을 찾지 않고 당시에 번영복음 주창자들에게서 목회의 길을 찾으려 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제라도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하고 싶습니다. 성경으로 돌아가되 예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잘 알았던 사도들에게서 배우자고 하고 싶습니다.

출처: USA아멘넷 게시판

숙박료 1억5천, ‘초호화 잠수함 호텔’ 화제

submarhot132.jpg


별을 향해 떠나는 우주 여행이 아니다. 깊은 바다 속에 설치된 호텔에서 즐기는 수중 여행도 아니다. 대형 잠수함이 호텔로 변신했다. ‘잠수함 호텔’은 영국의 한 회사가 억만장자 고객들을 위해 내놓은 상품으로, 카리브해에서 완벽하고도 낭만적인 휴가를 즐길 수 있다고 홍보된다. 그런데 문제는 ‘가격’이다. 잠수함을 타고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서는 한 명당 약 1억5천만 원을 지불해야 한다. 2박이 기본이다. 연인이 잠수함에서 휴가를 보내려면 수억 원의 비용이 드는 셈이다.

‘잠수함 호텔’이 눈길을 끈다. 전용 요리사가 만드는 최고급 요리와 고급 샴페인, 초대형 평면 TV, 안락하면서도 화려한 침대, 호화스러운 욕실 그리고 수중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넓은 창 등이 잠수함 호텔의 매력이자 장점이다.

잠수함 호텔은 최근 해외 인터넷 등을 통해 소개되면서 눈길을 끌고 있다. 잠수함 호텔의 화려함에 깜짝 놀란 네티즌들은 천문학적인 ‘숙박 비용’을 보고 또 한 번 놀란다.

(사진 : 잠수함 호텔의 모습/보도자료 중에서)

--------------------------------------------------------------------------------------------

13 살 소녀의 트럼펫 연주

'마음을 열어주는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생화 시즌이 시작됐다  (0) 2014.03.26
목련이 필 때  (0) 2014.03.16
블라섬 트레일의 봄풍경  (0) 2014.03.04
세계의 멋지고 재미난 건축물  (0) 2014.03.03
아미쉬 마을의 겨울풍경  (0) 2014.02.26

'Charls Stanly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Can a Saved Person backslide and be Lost?  (0) 2012.10.17

루이스 벌콥의 인간론 요약

신원균 교수

 

. 서 론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언제나 철학과 신학의 가장 난해한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이 문제가 인간의 주목을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악이 가진 힘은 크고 보편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삶 전반에 드리워져 있는 어두운 그림자일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늘 긴장감을 가지고 악의 기원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여 그 해답을 얻기 위해 노력해 왔다. 특히 세상에 있는 도덕적인 악이 그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어떤 이들에게는 악이 삶 그 자체의 일부였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사물의 자연적 구조에서 찾았다.

 

그러나 한편 어떤 학자들은 악은 자율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어서 현재나 과거를 막론하고 인간의 선택에 좌우된다고 생각했다. 이 관점이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진리에 보다 가깝다.

 

인류의 대표인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자신의 의지로 죄를 선택함으로 죄를 선택함으로 죄가 모든 인류에게 전가되었다(2:17; 5:12). 그래서 우리가 짓는 모든 죄들은 공통된 근원 즉,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나온다(7:21-23). 이렇게 전적으로 타락된 우리 인간은 본성적으로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고 모든 악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세상의 죄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으로 명백히 규정하고 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미 범법자로 묘사된다.

 

그러나 현재주의자들은 죄를 단지 동료 인간들의 인권을 침해한 것으로만 생각한다. 그들은 죄가 빈번히 자신들의 반역하는 정신을 충동하여 하나님 앞에서 죄책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죄의 개념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과 인간사이의 윤리적, 도덕적 관계로만 해석되고 있다.

 

이제 루이스 벌콥의 인간론을 중심으로 죄에 대해서 살펴보고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바른 개념과 역사적으로 대두되었던 인간론을 살펴봄을 통해 바른 인간관을 정립해 보고자 한다.

 

. 본 론

1. 성경적 죄의 개념

 

1) 죄는 악의 구체적인 형식이다.

 

모든 악이 죄는 아니다. 죄는 물리적인 악, 곧 어떤 해로운 것 또는 재난 등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죄는 악보다 구체적인 개념이다. 죄는 도덕적 악이다. 성경에서 죄를 지칭하는 데 사용된 대부분의 명칭은 윤리적인 의미를 가진다.

죄는 불시에 인간에게 덮쳐서 인간의 삶에 독을 주고 그의 행복을 파멸을 이끈 재난이 아니라, 인간이 의도적으로 따르기로 선택한 악의 길이요 미증유의 재난을 동반한 길이다. 근본적으로 죄는 우리가 책임을 질 수 없는 연약성, 실수, 불완전성과 같은 수동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이요 그의 율법을 적극적으로 범하는 것으로서 소위 죄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죄는 인간의 자유로운 그러나 악한 선택이다(3:1-6; 48:8; 1:18-32; 요일 3:4).

 

2) 죄는 절대성을 갖는다.

 

윤리적인 범주에서 선과 악의 대비는 절대적이다. 선과 악 사이에 중립 지대는 없다. 선한 도덕적 존재는 단순히 자신의 선을 축소시킴으로써 악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질적인 변화, 곧 죄로 향함으로써 악하게 되는 것이다. 죄는 선의 정도가 적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악을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 행위에 의하여 악으로 규정된다. 성경은 어떤 형태의 중립성도 말하지 않는다. 인간은 옳은 편에 서든지 아니면 그릇된 편에 서든지 양자 택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10:32,33; 12:30; 11:23; 2:10)

 

3) 죄는 언제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과 관련되어 있다.

 

죄란 하나님의 율법에 이루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율법의 가장 중심적인 요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질적인 관점에서 도덕적 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도덕적 악은 그 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악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요, 하나님에 반대되는 것이며,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율법을 끊임없이 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1:32; 2:12-14; 4:15; 2:9; 요일 3:4)

 

4) 죄는 죄책과 부패를 포함한다.

 

죄책은 율법 또는 도덕적 요구를 어긴 행위에 대해서 처벌 또는 정죄를 받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죄책은 인간 안에서 생득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수여자가 법적으로 제정한 것이다. 죄책에 대한 형량을 정하는 것 역시 율법 수여자이다. 죄책은 율법의 정당한 요구를 직접 또는 대속적으로 충족시켜 줌으로써 제거된다. 많은 사람이 죄는 죄책을 포함한다는 견해를 부인하나, 이는 죄에 대해서 처벌이 뒤따를 것을 경고하는 현실적 상황과 부합되지 않으며, 성경의 평범한 진술과 어긋난다(6:12; 3:19; 5:18; 2:3).

 

부패는 모든 신자에게 생득적으로 임하는 것이다. 부패는 죄책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법적인 관계 안에 포함되어 있는 죄책은 직접적인 부패 없이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죄책에는 항상 부패가 따른다. 아담 안에서 죄책을 진 자는 결과적으로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14:4; 17:9; 7:15-20; 8:5-8; 4:17-19)

 

5) 죄는 마음속에 거한다.

죄는 혼의 어느 한 기관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거한다. 죄는 인간의 의지에 기원하지만 의지는 인간의 의지적인 본성 또는 의지적인 행위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말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죄가 세상에 들어왔을 때, 실제적인 의지의 밑바닥에는 마음의 성향이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4:23; 17:9; 15:19,20; 6:45; 3:12)

 

6) 죄는 단순히 외적인 행위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죄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습관과 영혼의 죄악된 상태까지도 가리킨다. 죄악된 상태는 죄악된 습관의 기초가 되고, 이것들은 다시 죄악된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나 거듭되는 죄의 행위는 죄악된 관습을 낳는다. 자연인의 생각과 감정이 육식적인 것으로 불릴 수 있으며 동시에 죄가 되는가에 대해서는 마 5:22,28; 7:7; 5:17,24등을 보면 알 수 있다.

 

2. 죄의 기원에 관한 성경적 근거

 

1)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로 간주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죄악이 세상에 들어왔음을 명백히 선언한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이 죄를 만드신 자로 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악도 불의도 행치 않으신다(34:10). 그는 거룩하시다(6:3). 따라서 그의 안에는 불의가 없다(32:4; 92:16). 그는 악에게 미혹될 수 없으며, 친히 아무도 시험을 하지 않으신다(1:13).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선하게 그리고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그는 적극적으로 죄를 미워하신다(25:16; 5:4; 11:5; 8:17; 16:15).

 

이 모든 말씀을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이 죄를 만드신 자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사물의 본질 안에 이미 내재해 있는 하나님의 필연성으로 생각하는 결정론적인 견해를 거부해야 한다.

 

2) 죄는 천사의 세계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일군의 천사들을 창조하셨다. 이들이 창조주의 손에서 나올 때는 모두 선했었다(1:31). 그러나 천사의 세계에 타락이 있었고, 이때 일군의 천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천사들의 타락을 초래한 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딤전 3:6에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새로 입교한 자를 감독으로 세우지 말라고 권고하면서 그 권고의 이유를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두렵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가능한 추론은 천사를 타락시킨 것은 권능과 권위에 있어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교만의 죄일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그들의 욕망이 바로 그들이 특별히 받았던 시험이라면, 이 사실은 인간이 왜 이 점에서 그토록 크게 유혹을 받는가를 알 수 있다.

 

3) 인류 안에 있는 죄의 기원

 

죄의 기원에 관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은 아담이 낙원에서 범죄함과 더불어 죄기 시작되었다는 것이요, 따라서 죄는 인간의 고의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담이 단순히 하나의 죄를 범했다는 사실에서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최초의 죄로 인해서 아담은 죄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죄는 영원한 부패를 동반했다. 이 부패는 인류의 연대성 때문에 아담뿐만 아니라 모든 그의 후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인류의 조상은 타락함으로써 그의 후손에게 부패한 본성을 물려주었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으로서 범죄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후손의 대표적인 머리로서 범죄했다. 그러므로 그의 죄책도 후손들에게 전해짐으로써 모든 인류의 후손이 죽음의 형벌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5:12).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책을 짊어진 죄인이라고 판단하신다. 그것은 그 방법에 있어서 모든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판단받는 것과 같다(5:18,19)

 

3. 인류의 삶에 나타난 죄

 

1) 원 죄

 

인간은 죄악된 상태와 조건 안에서 태어난다. 이 상태을 신학에서는 원죄라고 부른다. 원죄는 원초의 죄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죄책은 선천적으로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전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죄를 원죄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인류의 원초적인 뿌리로부터 파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생명 안에 현존하는 것으로서, 인간이 모방한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 용어를 죄는 인간 본성의 원초적인 구성 요소에 속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인간을 죄인으로 창조하셨다는 생각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주위해야 한다.

 

원죄는 자유의 상실 곧 자유 의지의 상실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말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자유를 상실했다. 그러나 또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를 상실하지 않았다. 자유로운 동인(動因)을 천부적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곧 인간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지배적인 성향과 성품에 완전히 일치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부여되어 있다.

 

인간은 그가 책임적인 도덕적 행위자가 되는 데 필요한 구조적 기능들을 상실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여전히 이성, 양심, 그리고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에게는 지식을 획득하고 도덕적인 특징과 의무를 느끼고 인식하는 능력이 있으며, 그의 감정?성향 ? 행위는 자발적이어서, 자신에게 적절한 것을 선택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선하고 우호적이며 인애롭고, 정당한 것을 감득(感得)하고 행할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실질적인 자유를 상실했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는 원초적이고 도덕적인 구조적 요소와 조화를 이루면서 최고선의 방향으로 진로를 결정할 수 있는 합리적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억제하기 어려운 편견에 사로잡혀 악을 지향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 인간에게는 영적인 탁월함을 인식하고 사랑하거나, 영적인 일들 곧 구원에 속한 하나님의 일을 추구하고 행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2) 자범죄

 

원죄는 인간의 오염된 자질 또는 상태이다.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서 죄책을 짊어지고 있으며, 그 결과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내적인 부패가 모든 자범죄의 거룩하지 못한 원천이다.

 

자범죄(실제적 죄)’라는 용어는 몸을 통하여 행해진 외적인 행위들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이 단어는 원죄에서 유래하는 모든 의식적인 사유와 의지를 가리킨다. 그것은 인간의 선천적인 본성 및 경향과 구분되는 개별적인 죄의 행위를 가리킨다. 원죄는 하나요, 자범죄는 다양하다.

 

자범죄는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의식적인 의심이나 악한 계획 또는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특별한 의식적인 욕망이나 탐욕 같은 내적인 자질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속임, 도둑질, 간음, 살인 등과 같은 외적인 행위를 가리키기도 한다.

 

4. 죄의 형벌

 

1) 형벌의 본질과 목적

 

형벌이란 율법을 범함으로써 침범당하는 공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율법 수여자가 직접 ?간접적으로 가하는 고통 또는 손실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형벌은 하나님의 의 또는 형벌적 정의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거룩한 자로 주장하시며,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들에게 필연적으로 거룩함과 의를 요구하신다. 형벌은 죄 때문에 자연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가해지는 벌을 말한다. 사실상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적 공의에 기인하는 일종의 빚이다.

 

형벌의 목적은 거룩한 의도는 정의의 수호이다. 율법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서있다. 그러므로 형벌의 목적은 위대한 율법 수여자의 의와 거룩함의 수호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필연적으로 죄에 대항하며, 이와 같은 대항은 죄를 처벌하는 데서 그 모습이 드러난다(32:4; 34:10,11; 62:12; 119:137; 9:24; 벧전 1:17)

 

오늘날 전면에 크게 부각되고 있는 형벌의 목적은 죄인의 처벌을 가차없이 요구하는 형벌적 정의가 없으며, 하나님은 죄인에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사랑하며, 죄인에게 역경을 주시는 것은 다만 그를 교화 시키고 그를 아버지의 집으로 돌이키게 하기 위함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형벌이 교정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의로운 것으로 곧 정의에 입각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이미 교정된 죄인은 더 이상 처벌될 수 없으며, 인간에게 교정의 가능성이 주어져 있다. 결국 사탄에게도 형벌이 있을 수 없으며, 사형이라는 형벌은 폐지되어야만 하고, 영원한 형벌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이 된다. 또 오늘날 보편화된 또 하나의 이론은 어떤 죄인이 범한 비슷한 죄를 다른 사람이 범하는 것을 억제함으로써 사회를 보전하기 위하여 형벌이 가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형벌을 가하실 때 자비롭게 뒤따르는 부수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상 죄인은 언제나 자기 죄 때문에 처벌되며, 이것이 부차적으로 사회를 유익하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이론이 참되다면, 어떤 범법자가 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그를 처벌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죄에서 돌이키게 할 수 없다면 그를 내보내야 한다. 더욱이 형벌을 기꺼이 견디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범죄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2) 죄에 대한 실제적인 형벌

 

성경은 죽음이 죄를 통하여 들어왔으며(5:12),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6:23) 말한다. 죄에 대한 형벌에 육체적인 죽음이 포함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상 여기는 그 이상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영적이 죽음이 있다. 죄는 인간과 하나님을 분리시킨다. 이 같은 분리는 죽음을 의미한다. 살아 계산 하나님과 교제할 때만 인간은 참된 삶을 살 수 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초래된 죽음의 상태 안에서 우리는 죄책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으며, 이 죄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를 통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

 

둘째로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초대되는 삶의 고통도 죄에 대한 형벌의 일부가 된다. 죄는 인간의 삶 전체를 교란시킨다. 인간의 육신적인 삶은 연약성과 질병의 포로가 되어 있으며, 그로 인해 불안과 쓰라린 고통이 초래된다. 그의 정신 생활도 그를 좌절하게 만드는 갖가지 방해거리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오늘날 홍수, 지진, 태풍, 화산 폭발등 이런 사건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길을 읽지 않으며, 그 재난들이 죄에 대한 형벌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같은 사건들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재난들을 개별화 시켜서, 재난이 일어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범한 심각한 죄에 대한 특별한 형벌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하늘에 서 불이 내려와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 사건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죄와 재난의 인과 관계를 무시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못 된다. 우리는 언제나 집단적인 책임 의식을 느껴야 하며, 하나님께서 어느 도시들, 구역들, 그리고 국가들을 재난으로 벌하시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셋째로 육체적인 죽음이다. 몸과 영혼의 분리도 또한 죄의 형벌의 일부이다. 교회의 입장은 언제나, 육체적인 죽음을 포함하여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의 죽음은 죄의 결과인 동시에 죄의 형벌이라는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3:19; 5:12-21; 고전 15:12-23)

 

마지막으로 영원한 죽음이다. 이 죽음은 영적인 죽음의 절정이요, 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속박이 제거되고 죄로 인한 부패가 완성된다. 하나님의 진노가 저주받은 인간에게 임한다. 인간이 생명과 기쁨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완전히 분리된다. 이것이 가장 두려운 의미에 있어서 죽음이다.

 

5. 교리사적 인간론

 

1) 교부시대의 인간론

 

(1) 헬라 교부들의 인간론

 

그들의 죄관과 은혜관에는 이원론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사상보다는, 후년의 펠라기우스 사상에 더 가까운 교리들을 강조함으로써 마침내는, 교리상의 혼란을 빚게 하였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아담이 창조되었다는 것은, 윤리적인 완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의 성질 안에 도덕적 완전의 가능성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아담은 범죄할 수 있었으며, 또 범죄 했다. 그래서 그는 사단과 죽음과 죄악적 부패의 권세 아래 들어갔다.

 

그들은 이 물질적 부패는 인류 안에서 널리 만연 번식하였으나. 그 자체가 죄는 아니며, 또 그것 때문에 인류가 정죄받은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은 원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인류의 연대성을 인정하여, 인류와 아담과 물질적 관련을 시인하였다. 그러나 이 관계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이어지는 것과 같은,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성경을 띤 관계일뿐, 하나님의 직접 창조인 인성의 고등한 이성적인 면에까지 미치는 그런 관계는 아니다. 그것은 의지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지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만 그 효력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죄는 항상 인간의 자유 선택에서 오며, 그것은 허약과 무지의 결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아들이 물질적 부패만을 유전받았기 때문 죄가 있다는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리겐은 일정한 유전적인 부패는 인간이 나면서부터 타고 나온 것이라고 인정하고, 그 이유를 영혼의 출생전 타락에서 찾았다. 이것은 원죄 교리에 매우 가깝다.

 

헬라 교부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보다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크게 중점을 두었다. 중생의 일을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의지와 협력하여 인간 의지로 하여금 악에서 떠나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실 일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 교부들은 자연인이 행할 수 있는 선과, 성령의 능력이 요구하는 선을 분명히 구별하지 못했다.

(2) 서방에서 점진적으로 나타난 다른 견해

 

터틀리안은 헬라 신학의 창조설 대신에 영혼 유전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자기의 유전설과 실재설을 결부시켰는데. 이 실재설이란 하나님께서 육체와 영혼을 가진 보편적 인간성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생식에 의하여 개화하였다고 하는 이론이다. 이 과정에서 있어서도 본성은 그 특질을 잃지 않고 계속하여 모든 점에서, 또는 개인화하는 모든 점에서 이성적 책임적인 활동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래적인 인성의 죄는 모든 개개인의 본성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영아들은 죄가 없다고 말하였으나 아마 이것은 본죄가 없다는 상대적인 의미일 것이고, 자유의지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인간의 능력을 최소한도까지 제한하기는 하였으나 합력적 중생론의 색채를 띤 언어를 가끔 사용하였는데, 이 설에 의하면 하나님과 인간은 중생에서 협력하여 일한다는 것이다.

 

키푸리아누스는 원죄의 죄책은 본죄의 죄책만큼 크지 않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암브로스와 힐라리는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고, 그러므로 죄 속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인간 의지의 전적 타락을 인정하지 아니하여, 결국 합력적 중생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2)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인간관

 

(1) 펠가기우스의 인간관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원상태는 거룩하지도 않고 죄성을 갖지도 않았으며, 선과 악을 행할 수 있는 중성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유의지와 미정적 의지를 가졌는데, 이 양자 중 어느 것이라도 편의한대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죄를 선택할 수 있었어도 이미 숙명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창조 되었기 때문에 죽음 문제만은 임의로 선택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아담의 범죄 타락은, 자기 자신만을 해하였을 뿐, 선을 행할 수 있는 인간본성에는 아무런 상처를 입히지 않았서 죄악적 성질이나, 죄책에 대한 유전같은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원죄와 같은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지금도 아담의 타락 이전과 같은 상태로 출생한다고 하였다. 다만 인간과 아담의 차이는 인간이 자신 이전에 범죄한 악의 사례를 보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죄는 어떤 경우이든지 인간 스스로 선택하여 이루어지며 어느 때에든지 선과 악을 자유로 선택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죄가 보편적이고 하면, 그것은 다만 그릇된 교육과 악한 전레, 또 죄에 젖어든 오랫동안의 습관 때문이라는 것이다.

 

(2) 어거스틴의 인간관

 

어거스틴은 죄 때문에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는데, 이 죄는 필연적으로 악을 수반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죄는 인간에게 주어진 실질적인 악이 아니라, 선의 결핍이라고 보았다. 죄의 근본원리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에 자기를 사랑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인간 배반에서 오는 일반적 결과는, 음욕과 또 이성의 법칙에 반대되는 과도한 육적 욕망이며, 죄와 그 죄가 가져오는 무절제가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간다고 하였다.

 

그는 아담이 후손과 유기적 관계에서 죄와 부패성을 가진 타락한 그의 본성을 후손들에게 전달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인류의 단일성을 언약론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실재론적으로 생학하였다. 온 인류는 아담 안에서 어린 싹으로 존재하였다. 그러므로 또한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다는 것이다.

 

죄의 결과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어떤 영적 선도 행할 수 없으나 의지가 아직도 일정한 본래적 자유를 지고 있어 세속적인 선을 행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이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동기에서 나온 것 뿐이라고 하였다.

 

그는 인간의 갱신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는데(불가항력적 은혜),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강제성을 띠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발적으로 선을 택할 수 있도록 그 의지를 변화시키신다는 의미이다.

 

(3) 반펠라기우스주의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어거스틴주의와 펠라기우스주의의 양극단 사이에서, 그 두 파 사이를 중재하고자 운동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인간을 갱신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가 동등한 요소라고 하였고, 또 하나님께서 인간의 믿음과 순종을 미리 아시고 예정하신다고 주장하므로 양파간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무익한 시도를 했다.

 

이들은 인간의 부패를 부정하지 않았으나, 그 인간 본성은 타락으로 인해서 치명적인 상처을 받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약화 되었거나 병든 것으로 보았다. 타락한 인성은 아직도 자유의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해준다는 것이다. 중생은 그 두 요인이 연합하여 산출한 것이며, 그러나 그 일을 시작하는 것은 인간이요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였다.

 

3) 중세기의 인간론

 

(1) 그레고리의 인간론

 

그레고리는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것은 인간의 허약 때문이라고 해석하였다. 아담이 범한 최초의 죄는 자유행위였으며, 이 행위 때문에 그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고, 영적 맹목과 영적 사망의 노예가 되었고, 이 최초의 죄 때문에 인류는 모두 죄인이 되었고 정죄를 받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죄를 죄책이라기보다는 허약과 질병으로 보았으며, 또 인간의 어떠한 공로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구속의 사역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고 은혜는 인간이 실지로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 인간의 변화는 세례에서 시작되는데. 이 세례는 믿음을 만들어내고, 과거의 죄에 대한 죄책도 말살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지는 다시 새로워지고,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여지며, 그리하여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을만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는 은혜의 불가항력성을 말하고, 또 예정을 확실한 수의 선택자에 대한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계획이라고 말하기는 하였으나, 예정은 결국 예지에 기초한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일정수의 사람들을 구원받데 하

 

신 것은, 그들이 장차 복음을 받으리라는 것을 아신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의 선택이나 타인의 선택을 확실히 알 수는 없다고 하였다.

 

(2) ?쇌크파 논쟁

 

그는 어거스틴의 선택 교리를 통해서 얻은 구원받은 자와 멸망자의 예정을 말하는 이중예정성를 열렬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을 구속하시고 거룩하게 만드는 그런 정도로 제한 시켰고, 또 죄를 허용적 작정의 대상으로만 보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정은 죄를 확실케 한다).

 

그는 예지에 기초를 둔 예정성를 부인하였다. 왜냐하면 이 설은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행위에 따라 결정된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예지는 단순히 예정에 따르며, 또 예정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것 뿐이라고 하였다.

 

그의 교리는 하나님을 죄의 조작자로 만들었다고 비난 받았다. 그의 교리는 A.D. 848년에 메이언스에서 정죄 받고, 그 다음 해는 그 자신이 고형(苦刑)을 받고, 일생동안 금고의 생활을 하였다. 그 결과 논쟁이 계속 일어나게 되었는데, 프루덴티우스, 라트람누스, 레미기우스와 그 외 몇몇 유력한 신학자들은 어거스틴파처럼 이중예정설을 옹호하였고, 한편 라바누스, 라임스의 힌크말은 이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 논쟁은 결국 언어에 대한 싸움에 불과하였다. 이 교리의 옹호자나 반대자도 그 중심에 있어서는 반 어거스틴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동일한 사상을 다르게 표현하였을 뿐이다. 전자는 어거스틴처럼 이중예정을 말하였으나, 유기의 기초를 예지에다 두었으며, 후자는 예정이라는 말을 생명의 선택에만 적용하고, 유기의 기초를 선견에다 두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 같이 성례적 은혜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면서도, 엄격한 예정설이 성례의 영적 가치를 빼앗아, 그것들을 단순한 형식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지 않을까 두려워 하였다.

 

치얼시 회의와 발레스 회의(A.D 853)의 결정은 위의 두 견해들과 전적으로 조화되었는데, 전자는 반대자의 견해를 후자는 옹호하는 자들의 입장을 각각 재생하였다.

 

(3) 안?의 인간론

 

a. 안?의 죄관

안?은 원죄의 교리를 강조하였으나 그 ”(orignal)이라는 말은 인류의 기원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태에 있는 개인의 기원을 의미한다고 역설했다. 비록 원죄는 인간이 본래 타고난 것이 아니고, 인간이 창조된 후에 인간에게 들어온 한 상태라고 하지만 그것은 또한 본래적 죄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유죄하고 부패하여졌으며, 그 죄책과 오염은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유전되어진다고 하였다. 원죄와 본죄의 모든 죄는 죄책을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죄가 자유에서 나온 행위라고 가정하면 어떻게 유아들이 죄가 있고, 그들의 사죄를 위해 유아세례을 베풀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해답을 인간 본성이 창조 이후에 변절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았다. 그는 어거스틴처럼 어린아이들은, 아담이 가졌던 보편적 인간성의 개체화된 부분들로 보고, 그러므로 그들도 아담 안에서 실제적으로 범죄하고, 유죄하며 부패하였다고 보았다.

 

만일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인성은 악변하지 않았을 것이며, 성성(聖性)이 그대로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원죄는, 그 기원을 본성의 죄에다 두고 한편 본죄는 성질상 전혀 개체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안?은 가까운 선조들의 죄도, 인류의 첫 조상의 죄처럼, 그 후손에게 전가되는가 문제를 제기하였으며, 여기에 대한 그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왜냐하면 이 죄들은 아담 안에 있는 공통적인 성질에 범한 것이 아닌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담의 죄는 독특하였으며 그것과 결코 같은 죄는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전 인류를 대표한 한 개인의 범죄였기 때문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 사상은 그 후에 범한 모든 죄들이 비록 개별적인 것이라도, 똑같은 인간 본성에 의하여 범하여지기 때문에 이며, 또 왜 아담의 최초의 죄만이 후손에게 전가되고, 그 후의 죄는 전가되지 않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해답을 주지 못하였다.

 

그는 아담에 있어서 본성의 죄책 즉 원죄는 개인의 죄책에 머무르나, 그 후손에 있어서는 개인의 죄책이 본성의 죄책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주의시켰다. 아담의 인격 안에서 전 인류는 시험을 받았다고 하여 그가 후대의 언약관념에 접근하였다고 하겠다.

 

b. 안?의 자유의지관

 

그는 자유를 범죄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어떤 힘이라고 일반적으로 정의하는 것을 타당치 않다고 선언하였다.

 

안?은 인류 조상의 행위는 분명히 자발적이며, 순수한 자의지의 행위였으나, 진정한 자유의 행위는 아니었다고 하였다. 그들이 범죄한 것은 자유 때문이 아니고, 그들이 분명 자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의 가능성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고 있는 바와는 다르게 행동하려는 힘은, 그들의 자유에 아무것도 가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은 자유가 없이도 임의로 거룩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참 자유와 자발적 능력 자체를 구별하였다. 전자는 상실되었으나, 후자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의지의 참 목적과 목표는 선악간에 어느 것을 택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선을 택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자발적 능력은 하나님께서 다만 의를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셨을 뿐, 결코 다른 것을 위해 주신 것은 아니며 그것의 참된 자유는 성()을 스스로 결정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자유는 하나의 대상, 즉 성(거룩함)만을 택하도록 창조된 것이다. 그러나 이 목적을 받아들이는 것은 반드시 자결정이어야 하며 어떤 외부적인 강요에 의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악을 택하는 능력이 시련을 목적으로 하여 주어졌을 때 그것은 완전한 참된 자유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조리에 맞지 않는 선택의 위험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4) 로마교회의 인간론

 

로마 캐톨릭은 반어거스틴주의와 반펠라기우스주의 사상를 가졌다. 그 중에서도 후자가 점진적으로 세력을 얻었다.

 

원시적 의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 주어진 초자연적인 은혜라는 생각이 점점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에 따르면 본래 인간은 육신과 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두 이질적인 상반되는 성질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서 때때로 선행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이 본성의 원시적인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별한 은사 즉, 원시적 의를 주셨다. 이 본래적인 의는 적극적인 의도 적극적인 불의도 없이 창조된 인간에게 주어진 초자연적인 선물이라는 것이다.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인간은 이 원시적인 의를 상실하였다. 이것은 인간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어떤 자연적인 천성을 잃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과는 별 상관이 없는 초자연적인 은사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죄악으로 가득찬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룩한 상태도 아닌 중립적인 상태로 돌아왔으나, 성질의 구조상 육신과 영혼은 서로 충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그의 모든 후손들의 대표자가 되었으므로 인류는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고 원죄를 짊어지고 이 세상에 오게 되었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원죄가 어떤 적극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뭔가 꼭 있어야 할 것이 결핍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특히 그것을 원시적 공의의 결여라고 말하였다. 이 죄는 인류 조상에게서부터 나온 것으로 보편적이요, 자원적인 것이다. 그것은 현재 인간이 가지고 있는 현세욕이나, 악한 욕망, 정욕들과 동일시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정당한 의미의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로마 캐톨릭 교회는 인간의 영적 무능력과 또 갱신을 위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여야 한다는 관념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이 영적으로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협력해야 한다는 협력 중생논을 채택하였다.

 

4) 종교개혁기의 인간론

 

(1) 개혁자들의 인간론

 

종교 개혁자들은 실재설을 대신하여 언약설을 주장하여 아담의 죄와 그 후손의 죄와의 관계를 더 명백히 정의 하였다. 베자는 아담이 인류의 자연적인 시조일뿐 아니라 언약적 대표였으며 따라서 그의 최초의 범죄는 그의 모든 후손에게 죄책으로 전가된다고 하는 사실을 특히 강조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유죄하기 때문에 또한 부패한 상태에서 출생되는 것이다.

 

개혁자들은 로마 캐톨릭을 반대하여 원죄는 단순한 원시적 공의의 결핍 이상의 무엇이라는 것과, 또 죄로 향하는 그 최초의 단계들로 비록 그것들이 의지의 동의를 받기 전에라도 현실적으로 죄요, 다만 죄가 되게 하는 연료뿐만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것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있게 하고 정죄받게 하는 내재적 죄들이다. 일반적으로 칼빈과 개혁자들은 원죄란 인성의 유전적인 패괘요 부패로서,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하며, 육신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개혁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유력했던 견해는 타락의 결과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져서, 어떠한 영적 선도 행할 수 없으며,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회복을 위해 최소한의 전진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쯔빙글리도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견해였으나, 원죄를 정당한 의미의 죄라기 보다는, 오히려 질병이나 한 상태로 보는 듯하였다. 멜랑톤도 처음에는 생각을 같이 했으나 나중에는 그의 견해를 수정하였다.

 

개혁자들은 전적 부패의 교리를 주장하면서도, 한편 중생하지 못한 자라도 사회적인 대인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세속적인 의는 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적 부패의 교리는 자연히 인간의 갱신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에 귀결된다. 하지만 멜랑톤은 처음에는 루터와 완전히 견해를 같이 했으나, 의지의 속박 교리를 강하게 반대하는 점에서 의지에는 얼마쯤은 구체적인 자유와 영적 자유가 있다 하여 합력중생론을 주장하였다.

 

개혁자들은 엄격한 예정론자였고 루터도 칼빈 처럼 이중예정을 믿었으나 때로는 유기의 교리를 부정하는 경향을 보이거나 혹은 그것을 하나님의 예지에 의존케 하기도 했다. 쯔빙글리는 유기를 효과적 작정이라 주장하였고 멜랑톤은 이 문제에 대해 죄와 중생에서처럼 확고한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가능한 예정의문제를 피하려 했다.

 

종교개혁 이후 아담은 인류의 자연적 머리일 뿐만 아니라, 언약적 머리, 다시 말해서 그의 모든 후손의 도덕적 및 법적 대표자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였다. 그결과로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문자적으로 또는 실제적으로 범죄하였다는 관념은 그들이 대표적으로 아담 안에서 범죄하였다는 사상에 양보하였다.

 

(2) 소씨니안파의 입장

 

이들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급 피조물을 지배하는 인간의 단순한 주도권일 뿐이요, 어떤 도덕적 완전성이나, 성질의 우월성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아담은 적극적인 의나 거룩함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죄의 결과를 그것을 상실할 수가 없었다. 그가 범죄하여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으나, 그의 도덕적인 성질은 해를 입지 않은 채 그 후손에게 전달되었다. 인간이 죽는 것은 아담의 죄 때문이 아니고 가사적(可死的)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담과 같은 상태이나 그들이 보고 듣는 죄의 실례 때문에 다소 더 나쁜 환경 속에 처하게 되었다. 이 환경은 사람들에게 죄로 떨어지는 기회를 더하게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죄를 전적으로 피할 수 있으며 실제적으로 어떤 이들은 피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아실 뿐만 아니라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자들을 용서하시는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유죄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진노하지는 않는다. 인간이 구원을 얻는데 구주나 혹은 하나님의 어떤 비상한 간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3) 쏘우물 학퍄의 입장

 

쏘우물 학파의 아미랄두스는 보편적 및 조건적인 작정과 제한적 및 무조건적인 작정을 구별하였다. 전자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하여 신앙을 조건으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보편적 구원을 주기로 작정하셨고, 후자에서는 아무도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을 아신 때문에 얼마를 영생하도록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신앙과 회개의 필요한 은혜를 주시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이다.

 

또 폴라카에우스는 아담의 죄가 그 후손에게 직접 전가된다는 것을 부인하였다. 인간은 유죄하여, 그것 때문에 부패한 상태로 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성질의 부패를 받았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죄책으로 인간에게 전가되었다는 것이다(간접적 및 결과적 전가)

 

5) 종교개혁 후기의 인간론

 

(1) 웨슬레파 알미안주의

 

원죄는 엄밀한 의미에서 죄라고 불리울 수 없는 성질의 질병이나 부패가 아니라, 참으로 진정한 죄이며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유죄되게 하는 것이라고 그들을 주장하였다. 아담의 죄책은 참으로 그의 후손들에게 전가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원시적 죄책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됨으로 말살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본래 하나님의 은혜와 합력할만한 아무런 능력도 없으며, 인간은 전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하여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였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보편적인 취지에서 모든 사람에게 충분히 능력있는 은혜를 주셨으므로, 인간은 신앙과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최초의 알미안파들과 달리 그들은 인간이 믿고 회개하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거저 주시는 은혜라고 보았다.

 

2) 뉴 잉글랜드에 있어서의 개혁파 견해의 수정

 

죠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과 인간의 타락과의 관계에서 효능의 항목을 제거하고 통상적인 칼빈주의적 어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 중 어떤 이들은 인간이 범죄하는 데는 신적 효능이 분명히 있다고 암시하였다.

 

후대에 티모디 뜨와이트와 테일러와 같은 인사를 대표로 한 뉴 잉글랜드 신학, 혹은 뉴 헤이븐 신학에서는 죄가 세상의 최저 가능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들어오는데 하나님의 섭리와 관계되어 있다고 하는 강한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께서 도덕적 우주를 창조하려는 결정에는 필연적으로 정반대의 것을 선택하려는 힘을 가진 자유로운 도덕적 동인의 창조를 내포하였으며, 그렇게 때문에 죄가 가능하게 되었는데, 그러나 거의 확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 듯 하다. 동시에 죄는 가장 좋은 조직에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죠나단 에드워즈는 의지의 결정적 성경을 좀 지나치게 강조하여 결정론자라는 비난까지 받았다. 인간은 하나님이 그를 창조하셨을 때부터 도덕적 자유를 가졌으며, 현재도 가지고 있다. 죄악이 인간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은 인간이 이 자유를 행사함에서부터 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참 자유를 가지고 있는데, 인간의 의지는 본성의 원시적 구조에 의하여 선과 성의 방향으로 결정 되었다고 한다. 이 참자유는 죄로 인하여 상실 되었다는 것이다. 후대의 뉴 잉글랜드 신학자들은 자유와 책임을 가진 도덕적 존재에는 정반대의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을 갖는 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에드워즈는 실재설을 채용하였다. 나무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듯이 우리는 아담과 밀접하게 상관되어 있으며, 그 결과로 아담의 죄는 우리의 죄이고, 마찬가지로 그 죄가 우리에게 전가되었다고 하였다. 우즈나 타일러 같은 뉴 잉글랜드 신학자들은 폴라카에우스파의 간접적 전가설을 옹호하였다. 인간은 아담과의 자연적인 관계를 통해서, 그에게서 도덕적 부패를 이어받고 이것이 죄책으로 그에게 전가되었으며 이로 인해 정죄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3) 현대의 죄관

 

a. 철학적 죄관

 

라이쁘닛츠는 세상의 악을 윤리적인 것보다는 형이 상학적인 것으로 보고, 피조물의 필요한 제한에서 생긴, 단순하고도 자연적인 결과로 생각하였다. 그에 의하면 현존의 세계는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 안에 죄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죄는 하나님을 원인자로 삼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히 부정 또는 결여라고 보아야 한다. 죄에 대하여 어떤 유효한 원인도 상정할 필요가 없다.

 

피조물은 유한한 존재이므로 죄는 불가피하다. 이 이론에서 죄는 필요 악이 된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필연적으로 유한한 존재요, 죄는 이같은 유한성의 불가피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원인자로 만들지 않으려는 이 이론의 성공을 거둘 수 없다. 왜냐하면 죄가 어떤 유효한 원인도 요구하지 않는 단순한 부정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의 유한성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이론은 도덕적 악과 육체적 악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 이론이 죄를 인간에게 임한 하나의 불행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이론은 악과 죄의 부패에 대한 인간의 의식을 약화시킴으로써 죄 의식을 파괴하고 인간의 도덕적 책임을 박탈해 간다.

 

칸트는 인간 속에 인간으로서는 근절할 수 없는 근본적인 악에의 성향, 즉 근본악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였다. 그는 이 근본악을 일반적으로 원죄라고 부르는 어떤 것과 동일시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는 원죄의 역사적 근거와 물질적 유전의 관념을 반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죄라는 것이 설명을 할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헤겔은 죄를 자의식적 정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발전과정에 필요한 한 단계로 보았다. 인간의 원시적 상태는 천진난만한 무죄의 상태, 곧 짐승과 거의 같은 상태였으며, 이 상태에서 인간은 선과 악을 모르고, 단순히 자연과 일치하여 존재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동물들에게는 자연적일 수 있으나, 인간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고, 비이상적이었다. 인간은 이런 상태에서 떠나, 자의식적 정신을 가져야 하도록 운명지어졌다. 이런 자연적인 상태에서 도덕적인 상태로 옮겨지게 된 것은 지식에 의함이었다. 지식의 나무 열매를 따먹음으로 인간은 축복의 낙원에서 쫓겨났다. 자의식적 생명을 깨달음과, 자아의식이 시작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의 자연적인 욕망을 따르기 시작하였으며, 이 새로 발견된 자아가 이것의 중심이 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이기적이고 악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인간이 자기 발전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한 과정이다.

 

이기주의가 죄악이기는 하나, 인간이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과 그가 추구해야 할 것은 이기주의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후, 그것을 고의로 선택하지 않는 한, 그것을 인간에게 죄로 돌릴수는 없다. 이 이기주의와의 싸움은 덕행으로 향하는 길이다.

 

b. 신학적 죄관

 

슐라이어막허는 죄를 인간의 육감적 성질의 필요한 산물, 즉 영혼과 육체의 물질적 조직과의 관계에서 생긴 결과라고 보았다. 그것은 육욕이 정당한 일울 수행하려는 정신적인 결정력을 방해하며 감성적인 본성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데서 발견된다.

 

그는 죄의 객관적 실재성을 부인하고, 그것을 주관적인 존재, 즉 우리의 의식 내면에 있는 것으로만 보았다. 죄의식, 즉 인간 안에서의 고투의식은 감성적인 본성이 우세하는 동안 신의식이 불충분한데서 생긴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 부족감을 죄로 여기도록 제정하셨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죄이기 때문이 아니라, 구속을 위한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였다. “원죄는 단순히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후천적 습관이며, 그것은 결국은 현재 모든 본죄의 원천이 되었다.

 

칸트의 제자요, 조정학파의 대표자인 쥴리어스 뮬러는 죄를 도덕률에 불순종하는 의지의 자유행위라고 본 칸트의 견해에 동의하였다. 뮬러는 칸트가 말하는 이 근본 악은 출생 때부터 인간 안에 나타나는 것이며, 적어도 의지의 어떠한 의식적 결정보다 우선하며, 또 이것이 없으며 죄도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죄의 기원을 시간 속에서 찾을 수 없었으므로, 그것을 의지의 비 현세적, 혹은 전현세적 결정에서 찾았다. 어떤 이전 존재에서, 이미 선택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은 유죄하게 출생되었고, 또 부패하여졌다는 것이다.

 

릿츌은 죄를 헤겔 처럼 일종의 무지요, 인간의 도덕적 발전에 꼭 필요한 필연적 과정으로 보았다. 슐라이어막허와 같이 인간은 종교적 의식을 통하여서만 죄를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신국을 최고선으로서 찾아야 하나, 그 완전한 선을 알지 못함으로 오히려 그 반대가 된다는 것이다. 본죄(릿츌은 이것만을 유일한 죄로 인정했다)를 범하고는 신국에 갈 수 없다고 하였다. 이상적인 지식이 많아질수록 죄의식도 증가되는데, 이죄의식이 인간을 죄인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지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죄를 벌하지 않으시며,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노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우리의 상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테난트는 죄의 교리를 진화론적 견지에서 전개하였다. 인간의 마음 속의 야수성에서부터 온, 충동이나, 욕망, 특성 등을 죄악적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들은 죄의 소재가 될 뿐이요, 인간이 윤리적인 존재가 되어 가는데, (테난트는 어떻게 그런 의지가 진화의 법칙에 따라야 하는 존재에게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이 의지가 유일한 죄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죄는 개개인의 양심, , 정의의 개념, 또는 도덕률과 신의에 반대되는 사상과, 언어와, 행위를 나타내는 의지의 행동이라 하였다. 인류의 발전의 정도에 따라서, 윤리적 표준이 더 정확하여 지며, 죄의 흉악성도 증가되는 것이다. 테난트는 죄의 보편성을 인정하고, 또 우리의 본성과 환경은, 우리의 보다 나은 자아를 형성해 가는데 엄청나게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하였다.

 

. 결 론

 

모든 사람이 아담과 관계로 인해서 타락한 후 죄의 신분과 상태에서 태어난다. 이것은 아담의 죄의 죄책이 우리에게 전가됨을 뜻한다. 아담이 우리의 대표자로 범죄한 이래, 우리는 아담 안에서 유죄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태어난 상태가 율법에 대한 고의적 위법의 상태라는 점, 그러므로 우리는 본래 형벌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담의 후손들은 아담의 죄책으로 무거운 짐을 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로부터 도덕적 오염을 상속받았다. 그들은 원시적 의를 박탈 당하는 동시에 죄에 대한 적극적 경향을 갖게 되었다. 인간의 그로 인해 전적을 부패 하였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하는 바가 악하여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도 선을 행할 수 없다든다, 또는 절대적으로 진, , 미에 대한 예찬의 감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고유의 부패가 인간성의 모든 부분에 미쳐서 그에게는 영적, , 곧 하나님과 관계된 선이 조금도 없으며 다만 도덕적 왜곡만이 있음을 의미한다.

 

죄인도 자연적인 선, 세속적인 선을 행할 수 있으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려는 참다운 선을 행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죄를 이런 관점에서 보지 않고 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인간과 인간사이에 해가 되는냐 안되느냐에 따라 죄가 정해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죄는 하나님의 요구를 불이행하는 것이 죄라고 하였다. 범법한 죄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거나 혹 순종하는 것이 부족할 때 죄가 되는 것이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밥존스.jpg

 

                                          변승우목사의 신격화와 교주화

 

                                                                                                          이인규

 

변승우목사는 자신이 성경의 다림줄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다림줄이란 무슨 뜻인가? 개역성경에 나오는 다림줄에 대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암 7:7-8)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슥 4: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다림줄은 “Plumb line”이라고 하며, 건축을 할 때에 석수나 벽돌공이 수직을 잡기 위하여 추를 매달은 줄을 가르킨다. 이러한 다림줄은 성경에서 비유적으로 사용되어지는데, 하나님의 공의나 진리적인 기준, 심판을 의미한다.

특히 암7:7-8과 사34:11은 하나님의 공의적인 기준에 의한 심판과 멸망을 뜻한다.

또한 슥4:10의 다림줄을 갖고 있는 스룹바벨은 메시야적인 영광을 갖는 예표적인 인물(학2:21-23)로 표현되었으며, 슥4:6-10이 또한 그러한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하여 변승우목사가 자신이 성경의 다림줄을 갖고 있다는 그 주장 하나만으로도 그는 이단이며 시이비 교주라고 발표되어질 수 있다.

 

- 내 손에는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다림줄이 있다. (변승우, 다림줄 p 103-104)

  

변목사가 성경의 다림줄을 갖고 있는 이유는 바로 다음의 그가 말하는 내용이다

  

- 충격적이지만 진실을 말씀드리자면 대부분의 주석과 신학서적, 대부분의 강해설교집과 성경공부 교재, 그리고 대부분의 설교자들의 설교와 심지어는 대형 교회 목사님들의 설교에 이르기까지 이런 불완전한 과정을 통해서 탄생되었습니다. 즉 거의 대부분의 주석과 강해집과 설교들이 사실상은 다림줄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 눈대중에 불과합니다”(변승우, 다림줄, p.60).

   

“성령께서 책 제목과 내용들을 계시해 주셨다” (변승우,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p.9).

  

그의 결론은 무엇인가? 성경해석의 기준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변승우목사는 자신을 교주화, 신격화하고 있다.

 

(신격화, 자신의 설교는 성경적이라는 주장)

- 제가 전하는 메시지는 교단의 교리에 딱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리보다 더 성경적입니다. 그래서 지금 많은 목회자와 신학생들이 저의 설교를 듣거나 책을 읽고 자신들의 오래된 견해를 바꾸고 있습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변승우, <지혜와 계시의 영>, pp.23-24).

 

(신격화, 변승우책이 천국에 쌓여있다는 예언)

- 천사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계단이 무슨 계단이냐?’고 물었더니 계단이 아니고 그동안 지어오신 변승우 목사님의 책이 차곡차곡 쌓여 궁창입구까지 쌓여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천사들이 제게 하는 말이 ‘이 책을 통하여 거룩해지라’고 했습니다 ”(김OO 집사, 2005년 1월 5일자 입신간증코너).

 

(신격화, 변승우가 성령이라는 간증)

“변승우 목사님이 나팔을 부는 동시에 에스겔서에 나온 것처럼 마른 뼈다귀가 변하여 사람의 형상으로 갖추어 졌습니다”(김OO 집사, 2005년 1월 9일자 입신간증코너).

 

(변승우의 설교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라는 주장)

“목사님의 설교가 계속되고 불을 토하는 듯한 말씀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었습니다. 앉아있기도 힘들 정도로 주님의 임재가 강했고 힘이 빠지고, 뼈 속에서부터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강대상에 서 계신 목사님의 양쪽 어깨에 흰 비둘기가 각각 한 마리씩 앉아있었고 강대상 위로 흰 비둘기들이 계속 날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목사님은 계속 설교하고 계셨는데, 교회 공간에 천사들이 하얗게 움직였고, 어느덧 마귀들의 무리들이 천사들을 공격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변승우, <하늘나라에서 온 이메일>, pp.223-224).

  

(신격화, 마지막 전투에서 하나님이 사용하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주장)

- 지금 하나님께서 목사님의 머리에 새로운 종류의 투구를 씌워주시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End-time) 마지막 전투에 사용하실 사람들에게만 씌워주시는 특별한 투구입니다. 목사님께 투구와 믿음의 방패와 검과 갑옷을 쥐어주시는데, 목사님은 그 검과 투구와 방패와 갑옷을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변승우,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p.11-12).

  

(12명의 천사가 변목사 옆에 있는 주장)

- 변목사님의 새로운 행정 (New Administration)을 위해서, 목사님을 돕기 위해서, 다섯 천사가 새롭게 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변 목사님께서는 지금 새로운 자리에 놓여지셨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 새로운 시대가 임해 있습니다. 변목사님께서는 지금 새로운 단계로의 문턱을 한발짝 막 넘으셨습니다. 목사님의 영적인 영역들이 새롭게 열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변 목사님을 새롭게 위임(recommission)하시고 계십니다. 새로운 위임에 따라서 하늘로 부터의 도움이 내려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변 목사님께로 추가로 다섯의 천사들이 더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변 목사님께 이미 임해있던 일곱 명의 천사에 더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12명의 천사가, 행정 (Administration), 정사와 권세에 의한 통치조직을(Goverment)을 돕게 되며,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실 것입니다. (변승우목사 카페, 신사도 목사의 예언)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성경해석의 은사를 받았다는 주장)

- 이것을 보여주시며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통하다. 이것을 어찌 방언 통변이나 다른 은사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은사를 누구에게 줄까? 미국, 영국, 독일,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사람을 찾다가 너를 발견하고 너에게 이 은사를 주었는데 너는 이 은사로 인해 내게 한 번이라도 감사한 일이 있느냐? 늘 방언 통변이나 신유의 은사를 주지 않는다고 불평만 하지 않았느냐? 내가 다른 작은 은사들을 주고도 감사기도를 받는데 이런 엄청난 은사를 주고도 감사하다는 말은 못 듣고 늘 불평만 들으니 이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변승우,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하나님과 동일한 말을 하는 정확한 성경해석의 은사를 받았다는 주장)

“하나님은 도대체 변 전도사님에게 무슨 은사를 주셨습니까? 무슨 은사를 주셨기에 아홉 가지 은사를 다 체험한 저에게 저렇게 당돌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누가 기록했느냐?” “성경은 선지자와 사도들이 기록했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므로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십니다.” “네 말이 옳다. 나는 이 시대의 많은 나의 종들에게 말씀의 은사를 주었다. 그러나 성경 저자들이 성경을 쓸 때에 임했던 그런 영감을 준 사람은 이 종 하나뿐이다. 나는 그에게 단순히 말씀의 은사가 아니라 성경 저자들이 성경을 쓸 때 가지고 있었던 그런 영감을 주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아라. 이것은 그가 다시 성경을 기록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은 이미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할 것이다. 그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며, 내가 직접 하는 말과 같을 것이다. 그러니 이 은사를 어찌 다른 은사들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변승우,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자신의 설교는 성령이 순간적으로 부어준 영적 비밀이라는 주장)

- 제가 작성한 설교는 대부분 그 주에 한번 설교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영감으로 온 설교들은 부흥회 때나 다른 곳에 가서 또 설교하게 됩니다. 즉 부흥회 때에는 거의 100% 영감으로 온 설교만 하게 됩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대로 제가 지금 나누고자 하는 말씀은 어느 날 새벽 성령님께서 순간적으로 저에게 부어주신 것입니다. 이런 설교는 대개 새롭고 영적인 비밀을 담고 있으며 그리고 매주 중요합니다. (변승우, 대부흥이 오고 있다, 237-238).

 

(성령이 책의 제목과 내용을 가르쳐준다는 주장)

- 사실 저는 주님이 책을 쓰라고 명령하시고 그 내용을 가르쳐주지 않으시면 책을 쓸 능력도, 자신도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이 책 역시 주님의 명령에 의한 것입니다. 어느 날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성령께서 교회 안에 만연되어 있는 ‘종교의 영’에 대항하여 책을 쓰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책 제목을 계시해주시고 어떤 내용들을 담아야 하는지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책은 제목과는 달리 단지 예언에 관한 책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종교의 영에 의해 제일 터부시되고 공격받고 있는 대상이 ‘예언’입니다. 예언은 성령운동을 거부하는 교회뿐 아니라 심지어 성령운동을 하는 일단의 사람들에 의해서까지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의 영을 대적하는 책의 제목으로 성령께서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는 제목을 주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예언에 관한 책이 아니라 종교의 영을 파쇄하기 위한 책입니다”(변승우,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p.9). 

 

 

 




 
 
아무도 미워하지 맙시다



나는 미워하는 사람이 한사람 밖에 없어
"다 좋은데 그 한사람만은 용서 못해"
이런 말은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미워하는 사람,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단 한사람이라도 있다면
당신은 가시 같은 그 한사람 때문에
늘 괴롭고 만족하지도, 감사하지도
자유롭지도 못하니까요.


미워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워라도 해야만 살 것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움과 분노가 오래가면 안됩니다.


잠시만 미워하고 곧 이전의 내게로 돌아와
남김없이 용서하고 모두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래야 참 평안과 기쁨을 만날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동안은
그의 노예로 사는 것이고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면
그의 지배자로 사는 것이 됩니다.


우리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삶을
미움이란 가시로 괴롭히지 맙시다.


좋은 글
 
 
 

 


'짧은 글 긴 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인이 가지고 온 것  (0) 2014.04.01
"솔개" 새 이야기  (3) 2014.03.27
하버드대 합격한 노숙 흑인소녀  (0) 2014.02.19
내가 살아보니까~  (0) 2014.02.11
사랑하는 아들아!  (0) 2014.02.07

그랜드 캐년이

그 이름과도 같이

대협곡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캐년이라면,

 

브라이스 캐년은

섬세한 후두(Hoodoo)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바위기둥의 캐년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가 하면

자이언 캐년은

거대한 바위군으로 이루어진

웅장한 캐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치스(Arches)는

이름 그대로 아치들로 구성된

아름답고 신비한 국립공원입니다.

  

여름에

아치스를 방문한 사람들은

사막처럼 뜨거운 열기에 고생깨나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겨울의 아치스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아치스 국립공원에서 가장 유명한

델리킷 아치(Delicate Arch)의 모습입니다.



아치스 국립공원이라고 해서

아치들로만 가득한 곳은 아니랍니다.



절묘하게 균형잡힌

밸런스 락(Balanced Rock)도 있구요.

 

오른쪽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면

이 바위가 얼마나 큰 지 짐작할 수 있겠죠?



이 녀석은

Turret Arch라는 녀석인데

탱크의 포탑처럼 보여서 터릿 아치라고 불리워집니다.

 

탱크 포탑처럼

보이지 않는다구요?

그럼 아래 사진을 보실까요?



Arches 국립공원의 아치들은

보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이므로

 

이리 저리 옮기면서 보아야

아치들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아치는

거대한 바위에

아치가 동시에 두 개가 있어서

더블 아치(Double Arch)라고 불리워집니다.



이제

Delicate Arch로

하이킹을 떠나 볼까요? 

 

주차장에서

델리킷 아치까지는

편도 약 1.5마일(2.4km)입니다.



델리킷 아치로 가는 길 왼편에

서부 개척자의 캐빈이 보입니다.

 

오하이오 출신의

John Wesley Wolfe라는 사람이

1800년대에 이곳에서 랜치를 운영했는데

이 캐빈은 그 당시에 세워진 건물입니다.



델리킷 아치로 가는

초입 부근의 설경입니다.



주차장에서

델리킷 아치까지의

고도차(Elevation Gain)은

480ft(약146m) 밖에 되지 않지만

 

중간에

바위를 타고 넘어야 하기 때문에

등산의 초보자에게는 약간 힘들 수도 있습니다.



물론 겨울엔

바위들이 눈으로 덮여 있어서

오르 내릴 때 미끄러지기 쉬우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아치스 국립공원의 겨울도

유타의 다른 지역처럼 상당히 춥지만

이곳의 겨울 풍경은 웬지 포근해 보입니다.





저 멀리 뒤에 보이는 산은

라살 산맥(La Sal Mountains)입니다.



눈으로 덮여 있지만

실제로는 바위 언덕길입니다.

 

여름에 이길을 오를 땐

엄청난 더위를 각오해야 합니다.



겨울엔 눈 때문에

길이 잘 보이지 않는데

때로는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가운데

세로로 길게 보이는 것이

바로 Delicate Arch입니다.

 

델리킷 아치가

저렇게 생기지 않았다구요?

네, 저 델리킷 아치는 측면 모습입니다.

 

 

아치의 그림자를 보시면

가운데가 뚫려있는 것을 알 수 있죠.



델리킷 아치가

서서히 석양으로 물들기 시작합니다.



석양의 기울기가 길어질수록

아치의 색감도 더 짙어집니다.



델리킷 아치 뒤로 보이는

라살 산맥도 붉게 물들고 있습니다.

 

라살 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Mount Peale(12,721ft / 3,877m)입니다.

 



델리킷 아치에는 빛이 이미 사라졌고

라살 마운틴의 봉우리에만 겨우 남아 있습니다.



빛이 사라지자,

사진의 초짜들, 혹은 

 

델리킷 아치의

마지막 빛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 떠날 준비를 하고 이제 진짜 고수들만 남았습니다.



해가 떨어진

델리킷 아치의 겨울은 혹독하게 춥습니다.



하지만, 해가 진 후의

마지막 사진 한 장을 얻기 위해서는

모진 추위도 묵묵히 견뎌내어야 합니다.





바로 위의

이 사진을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Amazing Na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Peru 의 마추 픽추 (Machu Picchu)  (0) 2014.04.03
파리아 강가의 칠색산  (0) 2014.03.12
브라이스 캐년의 겨울 운무  (0) 2014.02.14
환상적인 핑크빛의 샌듄  (0) 2014.02.09
캘리포니아 최대의 호수  (0) 2014.01.28



마이클 잭슨 노래에 맞추어
[3분 25 초] 때 [헤드뱅터닝]

L. Berkhof의 종말론 요약

서 론

 

뻘콥은 개인적이건 민족적이건, 인간의 삶에 대해 진지한 반성이 있었던 곳이면 어디서나 인간의 기원과 본질, 그 목적지에 대한 물음이 철학과 종교를 통해 항상 있어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모호하고 불확실한 차원의 것이고, 오직 기독교만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마지막에 될 일들에 대한 정확한 신적 기원의 교리를 가진다는 것을 잘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종말론이 성도의 영화나, 그리스도의 통치의 완성을 다루는 중에, 또 객관적, 주관적 구원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를 소개하고 있는 정도로 축소되어서는 않되고, 종말론이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가 완전한 형태로 지시되는 것인 만큼, 기독교의 원리가 가장 순결한 형태로 표현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이 실재가 축소되지 않고 제대로 다루어져야함을 뻘콥은 지적하면서, 종말론을 이야기 할 때에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계되는 것으로서, 현세대의 종말을 확정지으며, 또한 미래의 영원한 영광을 예고할 그런 사실과 사건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뻘콥은 종말론을 다룸에 있어서 두 부분으로 나눌수있는데, 먼저 일반적 종말론은 보통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이세상의 종말에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로서, 그리스도의 재림 전체적 부활, 최후의 심판, 왕국의 완성, 그리고 경건한 자와 악한 자의 최종적인 상태등을 다루고, 둘째로 개인적 종말론은 육체의 죽음, 영혼의 불멸성, 그리고 중간기 상태를 다룬다고 말하고 있다.

 

 

1부 개인적 종말론

1. 육체적 죽음

1) 육체적 죽음의 본질

뻘콥은 죽음을 육체적 죽음, 영적 죽음, 영원한 죽음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는 육체적 죽음은 마10:28, 눅12:4을 근거로 혼과는 구별되는 몸의 죽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육체란 살아있는 유기체이고, 혼(프쉬케)은 분명 사람의 영(프뉴마) 즉 자연적인 생명의 원리라고 할 수 있는 영적 요소를 말하기 때문이며, 벧전 3:14에서도 육체의 죽음이 혼(프쉬케), 즉 동물적 생명이나, 삶의 끝 혹은 상실이라고 묘사되고 있음을 예로 들고 있다.(마2:20, 막3:4, 눅6:9, 14:26, 요12:25, 13:37, 38, 행15:26,20:24, 전12:7, 창2:7, 요19:30,행7:59, 빌1:23). 또한 이것은 존재와 비존재로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서로 다른 존재의 양태로서만 대립하는 것임을 잘 지적하고 있다.

 

2) 죄와 죽음의 관계

펠라기우스주의자와 소시니주의자들은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치며, 현대 과학도 유기물은 그 속에 부패와 해체의 씨앗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음은 유기체의 법칙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성경은 육신의 죽음을 영적인 죽음의 결과로 제시하고 있으며, 죄에 대한 적극적인 처벌이라는 점을 뻘콥은 지적하고 있다.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시90:7,11)이고, 심판(롬1:32)애며, 정죄(롬5:16)이고, 저주(갈3:13)라는 것이다.

 

3) 신자들의 죽음의 의미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신자들에게 죽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 속에서 영적인 진보와 하나님 나라에 최고의 유익을 끼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들의 죽음은 영혼의 성화를 완성하는 것이며, 완전한 생활의 시작이며, 천국의 문이며, 예수 안에서 잠드는 것이며,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거하게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롬8:11, 살전4:16,17).

 

2. 영혼의 불멸성

1) 불멸성이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상이한 의미들

뻘콥은 불멸성이라는 말이 인간에게 해당될 때에는 하나님의 속성인 절대적인 의미에서 불명성을(딤전6:15,16) 말하는 것이 아니고 계속적 혹은 무궁한 생존으로서의 불멸성을 말하는 것임을 지적하며, 이러한 불멸성은 인간의 영혼을 포함한 모든 영들에게도 해당됨을 말하고 있다. 또한 불멸성이라는 용어가 신학용얼 사용 될 때에는 부패와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한 인간의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고, 특히 종말론적인 용법에서는 죽음과 무관하며, 죽음의 제물이 될 가능성도 없는 인간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2)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일반계시의 증거

진화론, 유물론은 인간의 내세적삶을 의심하며 부인했지만 역사적으로 불멸성에 대한 강하게 존재해 왔고, 형이상학적으로도 단일한 영혼은 해체되거나 분리되지 않음을 추론하였다. 또한 목적론적으로도 인간의 능력이 생전에 결코 충분히 개발될수없음을 보고 미래적 생존을 하나님이 준비하셨음을 말하고 있으며, 도덕적으로도 정의가 최고의 지배자가 되고 현재의 부당함이 시정되는 미래의 한 상태가 있어야함을 말하고 있다.

 

3) 영혼의 불멸성에대한 일반 계시와 특별계시의 증거

(1) 뻘콥은 일반계시 차원에서 진화론과 유물론등이 강하게 반대해 왔지만, 형이상학적으로, 목적론적으로, 도덕적으로 항상 강하게 존재해왔음을 말하고 있다.

(2)구약에서의 불멸성의 교리

구약에서는 창조주와 구속주, 그리고 그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실 언약의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 창조(전3:11), 스올의 교리(시16:10,49:14,15), 죽은 자를 불러내거나 혹은 신접한 자에 대한 빈번한 경고, 죽은 자의 부활 교리, 죽은 후 하나님과 교제하며 누릴 신자들의 복에 대한 구절들에서 증거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시16:9-11, 73:24,25).

(3) 신약의 불멸성의 교리, 의인의 영혼이나 악인의 영혼이 모두 계속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서(마10:28, 마11:21-24), 부활(눅20:35,36), 하나님과 교제하는 신자들의 복된 삶(롬2:7,10)등에서 증거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4)인격의 불멸성에 대한 반대와 그에 대한 현대의 대안들

유물론과 생리학적 심리학이 정신이나 영혼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단순한 두뇌 활동의 산물 혹은 기능일 뿐이라고 말하며, 기관이 사라지면 그 기능도 멈춘다는 것을 근거로 인격의 불멸성을 반대하지만, 뻘콥은 이러한 사고는 두뇌의 기능을 필연적으로 생산적인 기능 이어야 한다는 잘못된 인식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며, 이 기능은 수용적, 혹은 전달적 기능일 수도 있음을 가지고 비판하고 있다.

 

3.중간상태

1) 중간상태에관한 성경의 견해

뻘콥은 성경을 근거로 신자의 영혼은 몸과 분리되면 그리스도 앞으로 가며(고후5:8, 빌1:23, 눅 23:43, 고후 12:3,4, 고후5:1, 히12:23), 악인들은 영원한 고통의 장소인 지옥에(눅 16장) 머물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2) 역사적으로 본 중간상태의 교리

초기에는 예수님이 곧 재판장으로 오실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중간상태는 그리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았으나, 즉시 재림하시지 않는 다는 것이 분명해 진 이후로 중간상태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고 뻘콥은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알렉산드리아학파에서 중간상태에 관한 교리가 영혼의 점진적 정화의 교리로 바뀌어 갔고, 결국 카톨릭의 연옥교리를 마련하였다고 파악하고 있다. 연옥교리와 장소의 개념을 수반하는 중간상태를 주장하는 카톨릭의 견해에 반대하여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으로 다시 돌아갔지만, 어떤 사람들로부터 잘못된 견해들은 계속해서 나타났음을 말하고 있다.

 

3)스올-하데스에 관한 해석의 제시

뻘콥은 스올이나 하데스와 같은 용어들이 항상 동일한 의미로 쓰이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즉 스올이 종종 종종 죽음의 상태나 몸과 영혼의 분리 상태를 지칭하는 추상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는 것이다(마16:18,계1:18, 삼상2:6, 행2:27,31, 계6:8,20:28). 또한 지하세계, 죽음의 상태, 무덤, 지옥 등의 어떤 경우도 동일한 단어로 나타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시49:14, 55:15, 잠15:11, 15:24 눅16:23).

 

4) 죽음뒤의 영혼의 거처에 관한 로마교회의 교리

뻘콥은 먼저 연옥(Purgatory)을 말하고 있는데, 연옥은 완전히 깨끗함을 받지 못한 자, 즉 여전히 소죄(小罪)를 짓고 있어서 그 죄에 합당한 형벌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하늘나라의 최상의 복락과 즐거움으로 들어가기 전에 정결의 과정을 겪는 준비의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로마카톨릭은 땅위에 있는 신자들의 기도나 선행, 특히 미사의 제사에 의해 연옥에 있을 기간이 경감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교황은 연옥에 대해 사면권, 고통감소권, 고통을 끝내게 할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사4:4, 미7:8, 슥9:11, 말3:2,3, 마12:32, 고전3:13-15, 15:29).

그다음 선조림보(The Limbus Patrum)이다. 선조림보는 구약시대 성도들의 영혼이 죽은 후부터 주의 부활하시기까지 머물러 기다리는 장소로 보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이곳에 내려가셨다고 로마카톨릭은 말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로마카톨릭은 유아림보(The Limbus Infantum)를 말하고 있다. 이곳에는 이방인의 자녀든 그리스도인의 자녀든 세례 받지 못하고 죽은 모든 어린이들의 영이 거하는 장소로서, 천국에서는 제외도지만 실제적인 고통을 겪지 않으며, 자연적인 능력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충만한 자연적 행복을 누린다고 로마카톨릭은 말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5) 죽은 후 영혼의 의식적 존재상태

뻘콥은 크게 3가지로 말하고 있다. 먼저 영혼수면설(Psychopannychy)이다. 이것은 죽으면 영혼은 영적인 개체의 존재로 살아 있게 되지만, 무의식적 휴식의 상태로 존재한다(행7:60, 고전15:51, 살전4:13, 시6:5, 30:9, 115:17, 146:4, 전9:10, 사38:18,19, 마7:22, 23, 25:37-39,44, 요5:29, 고후 5:10, 계20:12)는 주장을 펴는데, 아라비아의 작은 종파와 중세시대, 영국의 어빙파, 미국의 여호와의 증인들에 의해서 옹호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멸절설을 말하고 있다. 멸절설이란 인간이 불멸하도록 창조되었지만, 죄 속에서 계속된 영혼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사역에 의해 그 불멸성의 선물을 박탈당하여 궁극적으로 멸망하거나 혹 영원히 의식을 박탈당하여 비존재와 같이 된다는 것이고,

세 번째로 조건적 불멸설은 불멸성이 자연적인 영혼의 은사가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영혼은 궁극적으로 존재할수없게되거나, 모든 의식을 상실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요10:27,28, 17:3, 롬2:7, 6:22,23, 갈6:8, 마7:13,10:28, 요3:16, 롬6:23,8:13, 살후1:9). 이러한 모든 주장은 성경과 다른 주장임을 분명히 뻘콥은 말하고 있다.

 

6. 중간상태는 재시험의 기간이 아님

중간상태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서 기대할 수 있을 법한 것들에 관한 일반적인 사색과,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사역을(벧전3:19, 4:6, 요3:18,36, 막16:15,16, 롬10:9,12, 엡4:18, 벧후2:3,4, 요일4:3) 가급적 포괄적으로 만들려는 욕구에 기초하여 제2시험설(second probation)이 주장되고 있다고 뻘콥은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중간상태에서 어떤 부류의 사람들 혹은 아마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이 구원은 현세에서와 동일한 방식, 곧 구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주어진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뻘콥은 성경은 사후 불신자의 상태를 확정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중간상태의 행위가 아니라 육신을 입었을 때 행한 일들에 근거하여 심판이 행해짐을 말하는 것을(눅16:9-11, 전11:3, 요8:21,24, 벧후2:4,9, 유7-13, 마7:22, 23,10:32,33, 25:34-46, 눅12:47,48, 고후5:9,10, 갈6:7,8, 살후1:8, 히9:27)근거로 분명히 반대하고 있다.

 

 

제2부 일반적 종말론

일반적 종말론에 대해서 뻘콥은 보통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이세상의 종말에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로서, 그리스도의 재림 전체적 부활, 최후의 심판, 왕국의 완성, 그리고 경건한 자와 악한 자의 최종적인 상태등을 다루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1. 그리스도의 재림

공생애 사역이 끝나갈 무렵 예수께서는 자신이 다시 오실 것에 대해서 여러번 말씀하셨고,(마24:30, 25:19,31, 26:64, 요14:3), 천사들과(행1:11) 사도들(행3:20, 살전4:15,16, 살후1:7,10, 딛2:13, 히9:28)을 통해서 예언을 하셨음을 말하면서 구체적으로 재림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1) 재림(파루시아)이전의 대사건들

뻘콥은 재림이전의 일어날 사건들에 대해서 5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첫째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게될것이라는 것과(마24:14, 막13:10, 롬11:25, 마8:11, 13:31,32, 눅2:32, 행15:14, 롬9:24-26, 엡2:11-20) 둘째로, 참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구원받을 것이라는 것(슥12:10,13:1, 고후3:15,16, 롬11:25-29), 셋째로, 큰 대배교와 대환란이 있을 것이라는 것(마24:9-12, 21-24, 막13:9-22, 눅21:22-24, 살후2:3,딤전4:1, 딤후3:1-5), 넷째로 적그리스도의 나타나심, 다섯째로 전쟁과 전쟁의 소문, 기근과 지진, 거지선지자의 미혹, 거짓그리스도 해와달과 별들을 포함하여 무서운 징조(마24:29,30, 막13:24,25, 눅21:25,26)를 말하고 있다.

 

2) 파루시아, 즉 재림 그 자체

이 재림에 있어서 그 시간은 중보자로서 받으신 계시속에는 포함되지 않은 것(마24:36) 잉을 말하며, 재림의 방식은 인격적이고(행1:11,3:20,21, 마24:44, 고전15:22, 빌3:20, 골3:4, 살전2:19, 3:13, 4:15-17, 딤후4:8, 딛2:13, 히9:28), 육체적, 가시적 강림이며(막13:26, 눅21:27, 행1:11, 골3:4, 딛2:13, 히9:28, 계1:7), 갑작스럽고(마24:37-44, 25:1-12, 막13:33-37, 살전5:2,3, 계3;3, 16:15), 영광스럽고 승리에 찬강림(히9:28, 마24:30, 살후1:7, 살전4:16, 3:13, 살후1:10, 고전15:25, 계19:11-16)이 될것임을 말하고 있다.

 

3) 재림의 목적

뻘콥은 재림의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미래의 시대를 여시고 만물에게 영원한 상태를 부여하시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마13:49,50, 16:27, 24:3, 25:14-46, 눅9:26, 19:15, 요5:25-29, 고전4:5, 15:23, 빌3:20,21, 살전4:13-17, 살후1:7,10, 2:7,8, 딤후4:1-8, 벧후3:10-13, 유14,15, 계20:11-15, 22:12)

 

2. 천년왕국에 관한 견해들.

1) 전쳔년설(Premilleialism)

역사적으로 과거에는 이레네우스의 견해 즉 창조시의 6일간과 상응하여 현세대의 기간을 6천년으로 보고, 또 일곱째 날과 상응하여 천년간 지속될 천년 왕국적 복의 기간을 주장하며, 천년의 마지막 때에 마지막 심판이 있을것이며 새로운 창조계가 나타나 거기서 구속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임재속에 영원히 살게될 것이라는 이레네우스의 견해가 지배적이었음을 뻘콥은 말하고 있다.

 

2) 현재의 전천년설

뻘콥은 현재의 전천년설을 다룸에 있어서 그들의 역사관, 종말관 등을 세세히 다루고 있다.

(1) 그들의 역사관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과정속에서 몇 개의 언약에 기초하여 혹은 일곱 개의 다른 세대의 원리에 따라서 인간세계를 다루어 가신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시내산시대,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 ...).

(2) 또 그들의 종말론의 특색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이중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것임을 뻘콥은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재림은 칠년의 간격을 사이에 둔 독립된 두 개의 사건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사건은 파루시아로써 모든 의로운 죽은자들은 일으키심을 받고, 살아있는 성도들은 변형된 성도들을 그리스도께서 공중에서 만나는 것이고, 대환란과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칠년 기간 마지막에 나타나심 즉 주님의 지상강림으로 나누고 있다. 이 강림은 성도들과 함께 하기 위한 것으로, 남아있는 민족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며(마25:32이하), 염소와 양이 분리되고 대환난으로 죽임당한 성도들이 일어날 것이며 적그리스도가 멸망하고 사탄은 천년동안 갇히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적이고 가시적이며 지역적이고 물질적인 유대인의 왕국이 천년왕국이 이 시작되며, 이 왕국에서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 세상은 매우 빨리 회개할 것인데 어떤 사람은 복음에 의해 회개할것이라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적 강림이나 성도들의 복음 보고 생기는 부러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로 위대하고 끔찍한 심판과 같은 전혀 다른 수단에 의해 회개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천년왕국 후 사탄은 잠시 놓여나고 곡과 마곡의 무리가 거룩한 성을 대적하여 모일 것이지만, 그러나 하늘로부터 내리는 불에 삼키우고 사탄은 짐승과 거짓선지자들이 던지움을 받은 무저갱에 떨어지고, 잠시후 죽은 악인들이 부활하여 크고 흰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고(계20:11-15). 그 다음에 새하늘과 새땅이 있게될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3) 끝으로 뻘콥은 예수그리스도의 영적통치만을 기다리거나, 계시록 20장의 천년을 다소 길거나?게 지속되는 불확정적인 기간으로 간주하거나, 그리스도와 다천년동안 다스리는 장소에 대한 문제등을 다루는 전천년설의 변형된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3) 전천년설에 대한 반대

뻘콥은 분명하게 .이 이론이 이스라엘과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관한 예언적 설명의 문자적 해석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성경은 문자적인 의미로만 사용되지는 않았다는 것과, 성경에는 재림연기설(요한과 예수님이 유대인의 신정이 가까움을 선포했지만,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믿지 않았으므로, 그 왕국의 건설을 재림시까지 연기하셨다는 주장)이 전혀 없다는 것, 또 성경은 부활과 마지막 심판, 세계의 종말에 대해 동시적인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마13:37-43, 47-50, 24:29-31, 25:31-46, 요5:25-29, 고전 15:22-26, 빌3:20,21, 살전 4:15,16, 계20:11-15)을 근거로 비판하고 있다.

또 계시록 계20:1-6에 근거하여 1절에 있는 쇠사슬과 2절에 있는 결박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며, 종종 천년을 길고도 불명확한 시간으로 이해하고, 4절의 영혼들을 부활한 성도로 바꾸어 해석하는 것들은 잘못된 것으로, 이 구절들은 언급되고 있는 부류의 사람들(순교한 성도들과 짐승을 경배하지 않은자들)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게 살아서 다스렸다고만 말하고있는 것이며, 또 이 구절들 속에는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들이 땅위에서 다스렸다는 의미는 결코 없으며, 계4:4, 6:9과 연결해서, 이것은 오히려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장면이라고 바른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4) 후천년설

뻘콥은 후천년설이 16세기와 17세기동안에 화란 개혁파신학자들인 코케이우스, 알팅, 두사람의 비트랑가, 다우트레인, 비치우스 호른백, 코엘만, 부라켈등에 의해서 주장되었고, 이들 대부분은 천년왕국이 세상의 종말 곧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복음이 엄청난 효력을 발휘하게되어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풍성한 보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고, 이 황금 시대에는 유대인들도 미증유의 방법으로 이 복에 동참하게될 것으로 생각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또 이들은 전천년설의 두가지 핵심적 개념, 즉 그리스도께서 천년동안 이땅을 다스리시기 위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다는 것과, 그가 오시면 성도들이 부활하여 그와 함게 천년 왕국에서 다스리게된다는 사상을 거부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오늘 날에는 천년왕국은 진보에의해 점차적으로 생겨나게 될 것이며 세계개혁의 정책을 받아들임으로서 이 새로운 세대에 스스로 참여해야만 한다는 주장까지 나타나고 있다.

 

5) 후천년설에대한 반대

뻘콥은 후천년설이 주장하는 세계의 회개에 대한 기대로 성경은 지금세대에서든지 오는 세대에서든지 우리를 인도하지는 않고 있으며, 오히려 종말 바로 직전 시대는 대배교와 환난과 박해의 시대요,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식어지고,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자들은 심한 고난에 빠질 것이며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그들의 고백을 피로써 인칠 수밖에 없는 시대를 증거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마24:6-14, 21, 22, 눅18:8, 21:25-28, 살후2:3-12, 딤후3:1-6, 계13장). 또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오는 세대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간섭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것을 말하고 있음을 들어 후천년설을 반대하고 있다(마24:29-31, 35-44, 히12:26,27, 벧후3:10-13). 그리고 후천년설에는 자연적인 지보와 교육, 사회개혁, 그리고 법률들의 분야에 있어서의 인간의 노력이라는 현대적 개념이 기독교적 정신 전 영역으로 스며든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3. 죽은자의 부활

1) 역사적으로 본 부활교리

뻘콥은 부활교리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많은 오류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먼저 성경에 나와있는대로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마22:23, 행23:8), 또 후메네오와 빌레도와 같이 부활을 순전히 영적인 것으로 취급하며 그것은 이미 지나간 역사상의 사실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딤후2:18)과 영지주의 자인 켈수스(Celsus)를 반대한 오리겐조차도 무덤에 묻혀있는 바로 그 육체가 부활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또 두명의 그레고리, 크리소스톰, 다마스커스의 요한등으로 대표되는 동방교회는 영적인 관점을 취하는 경향을 나타내었으며, 천년왕국 주장자들은 천년왕국 통치의 초기에는 의인의 부활이, 그 말기에는 악한자의 부활이 있을 것으로 오해했으며, 중세에는 환상적이고 거의 무가치한 사색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일찍부터 사도신경을 통해서 이미 육신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분명하게 표현하였으며, 이러한 바른 신앙은 모든 위대한 교회의 신앙고백들로 이어졌음을 말하고 있다.

 

2) 부활에 대한 성경의 증거

구약은 부활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이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를 두고있는 것(출3:6, 마22:29-32, 히11:10, 13-16, 19, 시49:15, 73:24, 25, 잠23:14, 욥19:25-27, 사26:19, 단12:2, 겔37:1-14)임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고, 이것이 신약에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그 지점에서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극치를 이루고 있음을(마22:23-33, 요5:25-29, 6:39, 40,44,54, 11:24, 25, 14:3, 17:24, 고전15장, 살전4:13-16, 고후5:1-10, 계20:4-6, 20:13)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4. 부활의 성격

뻘콥은 성경이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일으키셨다고만 말하는 것을(마22:29, 고후1:9) 증거로 부활이 삼위하나님의 사역임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부활이 보다 구체적으로 성자의 사역이라고 일컬어지며(요5:21,25,28,29, 6:38-40, 44, 54, 살전4:16), 또한 성령님의 사역으로도 지칭됨을(롬8:11)말하고 있다.

두 번째로 부활이 육체적 부활임을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로(고전15:20,23, 골1:18, 계1:5)증거하고 있다(롬8:11, 23, 고전6:13-20, 고전15특히35-49).

세 번째로 뻘콥은 부활을 반대하고, 멸절설과 조건적 멸절설, 악인들이 부활하지 않고 없어진다는 주장을 하는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들에 반대하여 성경을 근거로 악한자의 부활을 변호하고 있다(단12:2, 요5:28,29, 행24:15, 계20:13-15).

네 번째로 의인에게 있어서 부활의 결과는 영원한 생명이고 주권적 공의의 사역으로서 악인의 부활은 죽음이라는 최고의 형벌이 됨을 밝히고 있다(요5:28,29).

 

5. 부활의 시기

뻘콥은 부활의 시기에 관하여 전천년주의자는 성도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사이에는 천년의 간격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성경은 성경은 죽은자의 부활은 재림, 주의 날의 계시, 그리고 이 세상의 종말과 동시에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 다음에 바로 전체적인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살후1:7-10).

그리고 뻘콥은 전천년주의자들의 잘못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로 성경은 죽은자의 부활을 언급하면서 반복적으로 이것을 죽은자로 부터의 부활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전천녀주의자들이 이것을 죽은자 가운데서라고 번역함으로써 아직도 많은 죽은 자들이 무덤에 남아있음을 암시하도록 하였다.

둘째로 전천년주의자들은 더좋은 부활(히11:35)이나 생명의 부활(요5:29), 의인들의 부활(눅14:14), 그리고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살전4:16)과 같은 어떤 특정한 구절에 호소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지 천년의 간격을 두고 서로 분리된 두 번의 부활이 잇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증거가 아니다.

셋째로 전천년주의자들은 고전15:22-24을 통해 그리스도의부활, 신자들의 부활, 악한자의 부활을 추론해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에는 즉각적이 아니라는 개념이 바탕이된 해석이다.

넷째로 전천년주의자들은 계20:4-6에 근거하여 5,절이 첫 번째 부활을 언급하고있기 때문에 두 번째 부활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4-6절은 땅위가 아닌 하늘의 장면이다. 즉 지금 일으키심을 받은 인격이나 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왕노릇하는 영혼들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게 살아서 왕노릇하는 이것을 첫 번째부활이라고 부르고있는 것이다.

 

6. 최후의 심판

1) 역사적으로 본 최후의 심판의 교리

뻘콥은 초대교회의 최후의 심판의 교리는 죽은 자의 부활과 연결되어 육신에 있을 때 행한 일에 따라 심판을 받기 위해 부활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으며, 중세에는 죽은 자의 부활뒤에는 바로 전체적인 심판이 있을 것이며 이것이 사람들에게는 시간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에게도 이러한 견해가 대체적으로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칸트, 쉘링, 폰 하르트만 등은 미래의 심판의 사상을 부인했으며,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이 심판을 현존하는 내재적 과정이라고 간주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2) 최후의 심판의 성격

뻘콥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최후의 심판은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섭리와 동일한바 영적이고, 비가시적이며 무한한 과정으로(신9:5, 시9:16, 37:28, 59:13, 잠11:5, 14:11, 사32:16,17, 애5:7) 간주될 수는 없음을 분명히 하고, 성경을 근거(마25:31-46, 요5:27,29, 행25:24, 롬2:5-11, 히9:27, 10:27, 벧후3:7, 계20:11-15)로 마지막 심판의 분명성을 말하고 있다.

 

7. 심판에대한 잘못된 견해들

뻘콥은 심판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순전히 형이상학적인 심판으로 슐라이에르마허와 다른 독일학자들의 견해인데, 심판을 세상과 교회의 최종적 분리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으로 이해하고 있다.

2) 순전히 내재적인 심판으로 세계의 역사는 세계의 심판이다라는 쉘링의 금언이 진리의 일면을 담고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순전히 내재적이어서 세계의 도덕적질서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3) 심판을 단일한 사건이 아닌 것으로 보는 견해로 전천년주의자들의 개념이다. 이들은 첫째로 파루시아 즉 주님의 강림시에 부활하여 살아있는 성도들이 받는 심판, 둘째 대환난 직후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주의날)때 있을 심판, 셋째 계20:11-15에 묘사된바 크고 희보좌 앞에서 받는 악한 죽은 자들의 심판등을 말하고 있다.

4) 최후의 심판을 불필요하다고 보는 견해이다. 즉 이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잠들면 구원을 받고 죄가운데서 죽으면 멸망을 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8. 심판과 그 조력자들

뻘콥은 하나님의 모든 외부적 사역(opra ad extra)과 마찬가지로 최후의 심판 또한 당연히 삼위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고있으며, 구체적으로 성경은 이 최후의 심판을 특별히 그리스도께 돌리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요5:27, 행10:42, 17:31, 빌2:10, 딤후4:1). 이러한 심판의 권한은 마28:18, 요5:27, 빌2:9,10에 근거해서 볼 때 속죄적 죽음에 대한 보상으로서, 또 그의 높아지심의 한 부분으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영예가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께 주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조력자에 관해서는 마13:41, 42, 24:31, 25:31과 같은 구절에서 추론할 수 있는 바는 이 큰 역사에서 천사들이 그를 도울 것이라는 사실과 시149:5-9, 고전6:2,3, 계20:4을 근거로 성도들은 분명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앉아 심판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9. 심판을 받게될 무리들

뻘콥은 심판을 받게될 무리들은 타락한 천사들(마8:29, 고전6:3, 벧후2:4, 유6)과 모든 사람임을 말하고 있다(전12:14, 시50:4-6, 마12:36,37, 25:32, 롬14:10, 고후5:10, 계20:12). 그러면서 신자들의 죄가 비록 용서받은 죄로서이기는 하겠지만도 하나님 앞에서 역시 드러나리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마12:36, 롬2:16, 고전4:5, 마13:30, 40-43, 49, 25:14-23, 34-40, 46).

 

10. 심판의 시기

뻘콥은 심판은 예수그리스도의 강림(파루시아)에 수반된 사건일 것이며, 죽은자의 부활직후에 있게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 천지의 갱신직전이 될지, 동시적일지, 혹은 그 직후에 일것인지는 성경적 기초위에서 확정하기란 어려우며, 또한 심판날이 정확히 24시간의 하루라고 추론할 필요는 없음을 말하고 있다.

 

11. 심판의 표준

뻘콥은 심판의 표준은 분명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뜻임을 밝히고 있다. 즉 이방인들은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자연의 법에 따라서, 옛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의 계시에 의해서만, 그리고 자연의 빛과 구약의계시 말고도 복음의 빛을 누린 사람들은 그들이 받았던보다 큰 빛에 의해 심판을 받게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지만 천국의 복락과 지옥의 형벌에 있어서는 육체에 있었을 때 행한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임을 말하고 있다(마11:22,24, 눅12:47, 48, 단12:3, 고후9:6).

 

12. 심판의 다양한 부분들

뻘콥은 심판때 하나님께서는 사건의 상태, 즉 마음의 생각과 은밀한 의도를 포함한 사람의 과거생활 전부를 심리하실 것인데, 책을 열어펴는 것이 바로 이것을 상징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책의 비유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관한 언급이라는 것이다(계20:12). 또한 각 사람에 대한 판결은 모두에게 알려져서 하나님의의와 은혜가 찬란하게 빛날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 판결로 인해서 의인은 영원한 복을, 악인에게는 영원한 불행을 초래할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13. 최후의 상태

1) 악인의 최후의 상태

재림론자(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으로 대표되는 멸절론자들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고, 현대 자유주의신학에서는 지옥이라는 말은 대개, 사실상 지상에있는 것이지만, 뻘코은 성경에 근거하여 마18:9의 불의 게헨나, 13:42의 풀무불, 불못(계20:14,25), 옥(벧전3:19), 무저갱(눅8:31), 어두운 구덩이(벧후2:4)등이 장소를 가리키는 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면서 악인은 이곳에 거하게 될것임을 말한다. 결국 악인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은총이 젼혀 없고, 죄가 완전히 지배하는데서 생기는 생활의 끝없는 혼란, 육신과 영혼의 극심한 고통과 고난, 양심의 가책, 고뇌, 절망, 비찬, 이를 갊등의 주관적 형벌들(마8:12, 13:50, 막9:43, 44, 47, 48, 눅16:23,28, 계14:10, 21:8)을 받게 될것임을 말하고 있다(마11:22,24, 눅12:47,48, 계14:11, 20:10, 마18:8, 살후1:9, 계14:11, 20:10)

 

2) 의인의 최후의 상태

신자들의 영원한 상태가 오기 전에 현재의 세상이 사라지고 새로운 창조가 있게될 것인데(마19:28, 행3:21, 히12:27, 베후3:12,13, 계21:1), 시102:26, 27, 히12:26-28에 근거하여 이것은 지금 있는 창조물의 갱신으로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의인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곳에서 거처하게 될것이며, 영생, 즉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게될것임을(마25:46, 롬2:7, 계21:3), 말하면서 이것은 영적인 것 뿐만아니라 몸에 상응하는 어떤 것도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뻘콥은 천국의 기쁨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것인데(단12:3, 고후9:6), 우리의 선한 행위는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받는 은혜의상급의 척도가 됨과,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개인의 즐거움은 완전하고 충만할 것을 말하고 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무엇때문에 성령을 받으려고 하는가?

김정한 ㆍ 2014-03-04 (화) 04:39

어때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는지에 대한 斷想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한 말씀과 그 성령님을 반드시 받아야만 할 것을 명하시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어떤 마음으로 성령을 받으려고 하는 지? 그것이 과연 주님이 원하는 것 때문에 받으려고 하는지 필자는 지나간 저의 개인적 경험과 목회를 돌아보면서 써 보았다.

필자는 주님께서 성령을 받아야 할 것을
1. 주기도가 이루며 이루어지길 위해서 (눅11:1-13)
2. 증인이 되기 위해서(행1:8)
3. 거룩하기 위해서  반드시 성령님이 필요하기에 성령님을 받아야 한다고 본다. (레19:1-2 마5:48  엡4:22-24)

그런데 필자의 지나온 시절을 생각하면 대부분 교인들은 행1:8의 성령님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와 *은사*를 받으려고 성령을 구하였지 않나 생각이다. 한때 성행했던 기도원이나 개교회에 온 부흥사들이 그런 것들을 부추겼고 그 당시 목회자들도 그런 것이 대세였다고 본다.

그런 성령의 외적인 사역을 구하고자 함은 예수님의 증인(μάρτυρός= 순교자 동의어)이 되고자 함이 아니고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는 육신적 본성에 기인되었다고 본다. 이것이 한국교회를 변질시킨 이유중 하나라고 필자는 본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야 할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1.  주님께서 명한 주기도문처럼 자신과 ‘우리’라는 공동체가 해나가야 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그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나가야 하겠기에 성령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고 하셨다고 본다.

2. 또한 증인이 되다가 순교당할 상황에서도 두렴없이 하려면 성령님의 권능이 필요하기에 그랬다고 본다. 교회사를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다가 순교할 수 있던 힘을 성령님께서 주셨기에 순교하였다고 본다.

3.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거룩에로의 명령은 택민에게 (레위기 19:1-2), 제자들에게 (마태5:48) 주셨다. 거룩은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표현하는 가장 적합한 것이라고 본다. 거룩은 곧 하나님이시다. 거룩한 분은 하나님만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은 거룩한 영, 곧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죄인된 우리들을 거룩하게 할 분이 없기에 성령을 받아라고 하였다고 본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교회들에게 하나님을 닮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기 위해서, 그리고 주기도 문에서 가르쳐준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져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기 위해서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한 것이었는데 그런 것에 대한 무지와 번영주의에 부합한 잘못된 욕망으로 성령을 구했다면 지금이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이 돼서 글 올려봤습니다.

출처: USA아멘넷 게시판
     


죽으면 죽으리라.

대장쟁이

페미니스트(여권운동가)들이 보기에 성경은 남자위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남성으로 지칭하고, 출애굽 때도 20세 이상의 남자만 숫자를 세고, 오병이어의 이적기사도 ‘여자와 어린아이’를 빼고 오천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거의 모든 기록이 남자위주로 되어 있어 남녀차별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격한 여권운동가들은 하나님을 남성명사 ‘He'로 쓰지 않고 여성명사 ’She'로 고쳐쓰고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하나님 어머니'로 쓴 성경을 읽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또 다윗부터 요셉까지 순수혈통을 이어 내려왔는데 주님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오셨지 않습니까? 그러니 실속과 알맹이는 여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에게는 명분의 계보를, 여자에게는 생명의 계보를 주셨다 할 것입니다.

에스더라는 이름은 하닷사, “별”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에스더는 룻기와 함께 여성의 이름으로 제목이 붙은 두 권의 성경 중 하나입니다. 룻기는 이방여인의 이야기인 반면 에스더는 이방에 사로잡혀가서 이방인과 피를 섞는 유대인 여자이기 때문에 어쩌면 룻기, 에스더, 모두 스스로를 유일한 선민, 택하신 백성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치욕적이고 숨기고 싶은 부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유대인들만의 구원이 아니라 유대인들을 통하여 온 인류에게 흘러나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일 것입니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정경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논란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함께 하심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성경입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보이지 아니하신다 해도 역사를 주관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하만이라는 사람이 사단의 역할을 맡아서 등장합니다. 그 한 사람 실력자의 계략에 의하여 민족이 진멸당할 위기에 처한 유대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옷을 찢고 애통하여 금식하며 곡읍하며 부르짖고 굵은 베를 입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뿐이었습니다. 마치 죄악 가운데 죽음의 고통 가운데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모르드개는 하닥을 통하여 자세한 연유를 전하며 에스더에게 유대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 간절히 구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누구든지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왕의 안뜰에 나아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홀을 내어 밀어야 살 것인데, 자신은 이미 30일 동안 왕의 부름을 받지 못 하였다.” 하면서 왕에게 나아가기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모르드개는 “네가 왕궁에 있다 하여 모든 유다인 중에서 홀로 화를 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네가 잠잠하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부터 구원을 얻을 것이지만 너와 네 아비집은 멸망할 것이라. 네가 왕후가 된 것이 이때를 위함인지 누가 아느냐?”고 에스더를 질책합니다. 그러자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모든 유다인들로 삼일간 금식하게 해 달라 하고 자신도 시녀들과 함께 삼일 동안 금식한 다음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고 목숨을 건 결심을 합니다.

우리는 에스더의 망설임과 또 목숨을 건 결단을 보면서 에스더의 용기와 믿음을 본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에스더의 이 모습에 나타나는 주님의 모습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 같이 되도록 기도하신 겟세마네를 기억합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주님의 그 처절한 몸부림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만 매질과 조롱과 극심한 십자가의 고통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버림당함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죄인들을 용서하소서.” 하는 부탁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더러운 죄인들을 위하여 부탁을 한다는 것은 더욱 맹렬한 진노를 부를 일이었습니다.

부름 받지 않고 왕의 앞으로 나아가는 것부터 목숨을 건 일이지만 총애를 받는 왕후라 해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무슨 부탁을 한다는 것은 더욱 위험스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삼십일 동안 자신을 부른 적이 없는 왕 앞에 나갔다가 왕이 혹시라도 에스더의 정체를 의심하거나 당돌하고 괘씸하다고 생각하는 날이면 그대로 죽임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의 백성을 심판하는데 네가 감히 밤 놔라, 대추 놔라 하는 거냐.'고 받아들인다면 그 자리에서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에스더는 온 유다인들의 삼일 금식기도를 요청하고 스스로도 삼일동안 금식하고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하고 왕의 앞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유다인들을 위하여 왕에게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왕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중보자, “죽으면 죽으리라.” 목숨을 내어놓고 왕의 앞에 나아가는 에스더의 그 모습은 하나님께서 미리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시행하리라.  (0) 2014.03.12
기가 막히는 반전(反轉)  (0) 2014.03.10
모르드개 같은 사람 없나요?  (0) 2014.03.02
무너진 성벽 쌓기  (0) 2014.02.25
우리가 인을 치나이다  (0) 2014.02.24

해마다 봄이 되면

캘리에는 야생화가 피기 전에

먼저 blossom이 각 과수원마다 피어납니다.

 

올겨울,

혹독한 추위와

겨울폭풍으로 고생한 

 

동부지역의 사람들에게

봄은 아직도 먼나라 얘기 같지만

이곳 캘리에는 벌써 봄이 오고 있습니다.

  

캘리의

봄소식을 알리는 곳은

LA 곳곳에 있는 가든과 식물원들이지만

  

캘리의 진짜 봄소식은

과수원에 피는 온갖 블라섬과

프레즈노의 블라섬 트레일에서 시작됩니다.



일반적인

꽃을 말할 때는

flower로 표기하지만,

 

사과나 배,

아몬드, 체리, 복숭아 등과 같이

과일꽃을 말할 때는 블라섬(blossom)이라 표기합니다.



야생화는

기후와 강우량에 의해

직접적인 영향을 받습니다만

  

과수원은

인위적으로 물을 공급하기 때문에

블라섬 개화는 강수량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블라섬 개화는

오직 기후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지요.

 

겨울동안 기온이 높으면

블라섬의 개화시기는 빨라집니다.



올해 캘리는

100년만의 가뭄에다

겨울같지 않은 따뜻한 날씨가 지속되었습니다. 

 

날씨가 좋다보니

과수원의 나무들도 얼씨구나

봄이 일찍 찾아온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프레즈노의

Blossom Trail 뿐만 아니라

 

Bakersfield의

과수원 단지들도

예년보다 블라섬 개화가

1주일 정도 빨리 찾아왔습니다.



 

아몬드와 체리 블라섬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미 절정에 이르렀고

 

상당수 지역에서는

이미 낙화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내일부터 금요일까지

블라섬 트레일(Blossom Trail)과

베이커스필드 지역에 비소식이 있는데

 

비가 오면

아몬드꽃과 체리꽃은 삽시간에 떨어집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아몬드 꽃을 촬영할 수 있는 기회는

아마도 내일이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내일 비가 오는데

어떻게 촬영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99%, 사진의 초짜임이 틀림없습니다.

 

사진의 초짜와 고수의

구분 방법 가운데 하나는

비올 때 초짜는 출사를 포기하지만,

 

고수는 비오기를 학수고대하다가

비가 오면 카메라를 둘러매고 얼쑤 좋다하면서 총알처럼 뛰쳐 나갑니다.



블라섬 트레일은

지역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과수원의 상태와 개화시기가 다양하기 때문에

 

일반 관광이 아닌

사진촬영이 목적이라면

사진이 잘 나오는 지역의

정확한 위치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엉뚱한 곳에서 시간만 낭비하게 됩니다.



과수원을 촬영할 경우에

과수원의 길이가 길어야 하고.

 

양쪽 라인의 개화 상태가

비슷한 과수원이 사진 촬영에 유리합니다.



또한 튀어나온

잔가지가 없어야

깨끗한 사진을 촬영할 수 있습니다.



낙화한 블라섬은

바닥에 마치 눈이 내린 것과 같은 효과를 줍니다.



멋진 과수원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바닥이 밋밋한 흙바닥보다는

풀이나 잔디같은 녹색이 있는 곳을 찾아야합니다.



아몬드나

체리 블라섬은 멀리서 보면

마치 과수원에 눈이 내린것처럼 하얗게 보입니다.





블라섬 가운데서

사진에 가장 가장 잘 나오는 꽃은 복숭아꽃입니다.



peach blossom은

색상이 화사하고 밝은데다

 

빛을 받을 경우

환상적인 색감을 보여주기 때문에

초보자들도 멋진 사진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복숭아꽃은

아몬드나 체리보다는

개화시기가 약간 늦습니다.

 

그래서

내일 비가온 이후에도

촬영 가능한 블라섬이 바로 peach blossom입니다.



블라섬 구경이나 촬영은

눈도 호강하지만 코도 역시 호강합니다.

그 향긋하고 달콤한 향기가 코를 찌르기 때문이지요.



위의 모든 사진은

2014년 2월 24일에 촬영했습니다.



촬영장소는

Bakersfield, Kingsburg,

그리고 프레즈노의 Blossom Trail 입니다.




 

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의 '산상수훈 강해' 머리말 中에서|
coldblooded | 조회 164 |추천 0 | 2006.02.08. 15:34

 

 

....이처럼 산상수훈에 대한 사회복음적 접근 방법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교회의 선언이 갖는 소위 "정통적" 측면들만의 중시하는 세 가지 잘못된 접근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오류들도 결국은 예수께서 율법적 체계가 아닌 새로운 삶을 촉구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첫 번째 오류는 산상수훈을 율법주의와 동일시하는 복음 설교의 형태에서 발견됩니다. 이 같은 사고 유형에서는 산상수훈이란 단지 구약 율법의 재판으로서 그것을 조금 더 잘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과 갈보리에서 있은 대속의 역사에 배치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산상수훈에 대한 이 같은 오해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크나큰 무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제 2의 율법 부여자 -모세와 같은 - 로 묘사된 것은 사실이지만 비교의 요체는 대부분 대조의 영역에 있습니다. 5장 안에서만 예수께서는 여섯 번씩이나 "...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21,27,,31,33,38,48절)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더 크고 독자적인 권위를 암시하며, 5장의 마지막 자체가 구원의 수단으로서 인간의 의를 내세우려는 모든 노력을 부정하는 가장 반(反) 모세적인 진술, 즉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8)는 말씀으로 종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주의나 구약 율법의 재판이 아닙니다. 이것은 율법주의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어떤 노력도 정죄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 안의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다가가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행할 수 있는 새 생명을 받기 위한 길을 열기 위해서 입니다. 산상수훈을 율법주의와 동일시한다면 이는 주님이 하신 말씀의 심오한 뜻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윤리는 모세의 율법을 넘어서는데 이는 우리를 복음 앞에 무릎 꿇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산상수훈에 대한 또 하나의 거부하는 태도는 거기에 제시된 기준들이 달성 불가능하고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도 없다는 느낌에서 기인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최소한 산상수훈에서 발견되는 엄청나게 높은 기준들을 인식하고는 있으나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불가능한 기준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 또는 그들이 그 같은 기준을 달성하도록 도우시기 위해 그들에게 성령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산상수훈을 이런 식으로 거부해 버린다면 이는 성경을 도저히 정당화될 수 없는 교만한 태도로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자유주의의 오류로서, 자유주의란 자의적으로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은 취하고 어느 한 부분은 버리는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에 대한 이 같은 견해나 자유주의는 성경에 자신을 전적으로 복종시키지 않습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자유주의는 윤리(또는 그것의 한 부분)를 중시하고 복음은 거부하는데 반해 이 같은 형태의 보수주의는 복음만을 중시하고 윤리는 거부한다는 점입니다.

 

성경에 "모든 성경은 ...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라고 하였는 바 이는 산상수훈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중략)

 

아마도 산상수훈에 대한 모든 다양한 이견들을 해결하는 길은 성경을 근거로 하는 이 뉴 스코필드 성경의 이야기에 달려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 시대에 산상수훈을 연구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적어도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산상수훈은 우리에게 거듭남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산상수훈의 기준에 따라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코 산상수훈을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거나 그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떠나서 의로워질 것을 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인간을 정죄하고 그런 다음 그를 십자가 앞으로 맹렬히 몰고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로워질 수 있도록 우리를 그리스도께 데려가는 몽학선생이 바로 율법이라고 말합니다(갈 3:24). 대체로 외형적인 구약의 율법이 몽학선생이라고 한다면, 이 산상수훈의 경우는 더 당연히 몽학선생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산상수훈은 거듭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순수한 의를 요구합니다.

 

둘째, 산상수훈은 다른 모든 성경 말씀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주기 때문에 오늘날도 연구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문학연구나 역사 연구에도 해당하는 사실입니다. 어떤 문서든지 그것을 집필한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충실한 연구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상수훈이 상당한 정도까지 우리를 주 예수와 그의 본성에 깊이 접촉하게 해 준다는 것을 깨달음이 없이 본문에 대한 깊은 이해에 다다르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될 것입니다. 산상수훈을 주시는 주 예수는 산상수훈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단히 주님과 친밀한 접촉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을 받는 길을 알려 주기 때문에 우리가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이 산상수훈의 원칙을 따라서 행복을 찾는 것입니다. 복된 사람으로 불리고 있는 사람들은 가난한 자(오만하지 않은 자), 온유한 자(교만하지 않은 자), 긍휼히 여기는 자(잔인하지 않은 자), 화평하게 하는 자(선동하지 않는 자)등 입니다.

 

마지막으로, 산상수훈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길을 알려주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인 우리가 그것을 연구해야 합니다. 우선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지 않는 한 그를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 그것은 거듭남으로 인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그의 가족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은 특권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고린도후서 2:12-13
12  When I came to Troas to preach the gospel of Christ, even though a door was opened for me in the Lord, 13  my spirit was not at rest because I did not find my brother Titus there. So I took leave of them and went on to Macedonia. 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복음의 확장을 위해서 가장 수고한 인물을 꼽으라고 하면 당연히사도바울이 떠오른다바울은 그야말로 인생 전부를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을 기쁘게 여긴 사람이다복음을 위해서라면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바울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베드로가 안디옥교회에 와서 할례파의 평가가 두려워서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거부하기 시작했을 때, 공석에서 베드로의 위선적인 모습을 폭로했던 바울이었다. ( 2) 그리고 바나바와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된 이유도 제2차 전도여행을 위해서 마가를 데리고 가야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심한 다툼이었는데,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떠나고, 바울은 전도여행을 실라와 함께 떠나게 되었다. ( 15) 그뿐만 아니라, 바울은 행여나 천사가 다른 복음을 제시한다면 그 천사의 머리 위에 저주를 과감히 퍼부을 정도로 복음에 대한 헌신(dedication)이 남다른 정도가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었다

 

다른 사도들이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하더라도 바울만큼은 복음전파라는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사람이었다복음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 바울 그렇게만 알고 있던 우리에게는 여기 고후 2:12-13 엄청나게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가 없다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드로아에 도착했다. 그리고, 주 안에서 문이 열렸다. 복음을 전파할 기회가 열린 것이다황금의 기회를 눈앞에 둔 바울은 복음전파에 전적으로 임했어야 한다. 그런데 13절에 보면 바울의 행동은 예상을 뒤엎는다.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디도는 바울의 전도팀의 일행이었다. 그리고 바울이 아주 아끼는 동역자요, 또한 믿음 안에서 아들과 같은 사람이었다. (디도서 1:4).  그럼에도 바울은 복음에 전념했어야 정상적이다. 최소한 그것이 우리의 예상하는 바이다. 그러나, 바울은심령이 편치 못하여결국 드로아를 떠났다.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편지를 쓰던 바울이다. (고전 9:16)  그런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주님 안에서 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디도가 드로아에 없어서 심령이 편치 못하여서 사역을 거두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너무나도 신선한 충격이다복음과 인간관계에서 바울만큼은 복음을 택하는 것이 나의 예상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바울은 아끼는 형제가 보이지 않아서 염려하는 그런 가운데 그 사역을 고집하지 않았다특히 사역하다 보면 사역에 대한 열정이 더 요구될 때가 있다.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 사역을 더 하기 원하시는 것을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여기 바울의 삶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뭐랄까… “우선순위라고 하기는 좀 위험하지만, 조심스럽게순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비행기에 탑승해서 승무원이 비상시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시범을 보여주고 간단한 비디오로 산소마스크 등을 어떻게 사용하라든지 가르쳐준다거기에서 항상 이렇게 말한다어린아이와 함께 있을 때에는 본인이 먼저 산소마스크를 쓰고, 그다음에 아이를 도우라고다시 말해서,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기쁜 소식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역자는 먼저 본인의 삶 안에 은혜와 평안이 넘쳐야 한다그렇지 않고 일만 고집하다 보면 본인에게도 남에게도 결국 도움을 못 준다바울의 경우, 꼭 그런 원리인지 아닌지 100% 알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이것 만큼은 인정해야 한다: 바울은 자기 마음이 편하지 못한 가운데서 복음전파 사역을 고집하지 않고 사역을 잠시나마 접었다바울정말 배울 것이 많은 것 같다나도 가르치는 (사역자의) 입장에서 자주 서 있게 되는데, 내 마음 가운데 과연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여유와, 충만함, 그리고 인간적인 모습이 있는지 없는지 다시 살펴봐야겠다결국, 복음은이 아니라사람을 살리는것이기 때문이다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이야기의 일환이 아닌가 싶다.

 

얼마나 많은 사역자가 자신의 사역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동역자들, 부교역자나 곁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상처를 입히고도 나는 거룩하고 나는 신령하고 내가 가장 많이 알고등등의 자고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리더쉽을 따르라 강요하고 있는가? 또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도 더욱 효율적인 사역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버리고 있는가?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사역이란 말인가? 사역이 우상화된 사례다. 이 시점에 와서 우리는 바울사도의 사역방법을 다시 한 번 배워보고 우리들의 사역자세도 재검토해 보아야만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 위에 오셔서 감당하신 사역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이지 사람을 희생시키며 그들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히고 죽이려 함이 아니였다는 그 중요한 사실을 우리는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글은 제 아들 QT일기장에 쓴 것을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별똥별/최송연


"하나님의교회 빠지면 평생 종의 굴레"

2014/02/28 (금) 14:10 ㆍ추천: 0      

하나님의교회피해자가족모임(하피모) 회원들이 성남시 분당구 야탑역 일대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이단 '하나님의교회'실체를 알리고 있다.

안상홍증인회로 알려진 이단 ‘하나님의교회’가 세대를 불문하고 빠르게 확산되고 있어 주의가 요구되고 있다.

교주 안상홍을 재림예수로 믿으며 세력을 형성해 왔던 안상홍증인회.

안상홍증인회는 1985년 안상홍 교주가 죽자 측근인 장길자를 '어머니 하나님'으로 세워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하나님의교회’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유월절 등 성경의 절기를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가르치는 등 전형적인 율법주의 이단행태를 띠고 있다.

◈ "14만 4천명 휴거 된다더니...계속 휴거 자격 기준 바꿔가"

'하나님의교회'는 초창기 유월절을 지키는 14만 4천 명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지만, 숫자가 더 늘어나자 계속해서 말을 바꾸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년동안 하나님의교회 소속 교회 당회장(목사)이었던 A씨는 "처음에는 유월절을 지키는 14만 4천명이 죽지않고 천국에 올라간다고 가르쳤지만, 계속 신도들이 늘어나자 안식일을 지키는 14만 4천명이 휴거한다고 말을 바꿔갔다”고 폭로했다.

A씨는 이어 “현재는 내부 동요를 막기위해 60억 세계 인구의 3%인 1억 8천명을 전도해야 휴거가 일어난다고 가르친다”고 말했다.

육체가 죽지않고 하늘에 올라간다는 뜻의 휴거. '하나님의교회'는 지난 1988년과 1992년, 2012년에 휴거 소동을 일으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 '이세상 가족들은 가짜..전도 안하면 저주 받는다' 가르쳐

또, 이세상의 가족들은 가짜며, 전도하지 않을 경우 저주를 받는다고 가르쳐 학업포기와 가출, 이혼 등 가정 파괴를 방조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A씨는 “하나님의교회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것들은 다 변명이고 거짓말이라고 보면된다”며, “하나님의교회에 빠지면 자기 시간도 없이 평생을 율법의 종 생활을 하면서 살 수밖에 없게 된다”고 말했다.

◈ "대재앙 피하려면 유월절 지켜야" 두려움 이용한 포교 나서

이단 '하나님의교회'는 ‘친밀감’과 ‘두려움’을 이용해 포교에 나선다.

우선 친밀감을 통한 포교방법. 하나님의교회 피해자 가족모임(이하 하피모) 회원인 B씨는 “전도대상자들에게 접근할 때는 먼저 좋아하는 운동이나 독서 등 관심사를 파악하고 그 관심사에 최대한 맞춰주면서 친밀감을 형성한다”고 말했다.

이어 “친밀감이 형성됐다고 판단되면 유월절에 대한 소개영상과 하나님의교회와 관련한 홍보자료들을 보여주며 포섭을 마무리한다”고 밝혔다.

두려움을 이용하는 방법은 이렇다. 전쟁이나 지진, 태풍 등을 예를들면서 지구에 대재앙이 임하고 있다며 두려움을 조성한 뒤 이 재앙에서 구원받는 방법은 새언약 유월절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몰아간다.

A씨는 “재앙에 대한 것은 누구나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이용한다”며, “전쟁이 일어나고 지진이 일어날 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하면서 유월절이라는 것을 서서히 보여주게 된다”고 말했다.

◈ 이단전문가들, "하나님의교회 세력 경각심 키워 나가야"

국제위러브유운동본부를 비롯한 '하나님의교회' 산하 단체의 활동에는 참여를 자제해야한다.

하피모의 또다른 회원 C씨는 “이들 단체에서 하는 봉사활동이나 각종 이벤트를 매개로 청년 대학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며 특별한 주의를 당부했다.

이단전문가들은 “한국교회가 이단 신천지에 온통 관심이 쏠려있는 사이 하나님의교회 세력이 크게 성장했다”며, “곳곳에서 사회적 폐혜가 드러나고 있는만큼 지금이라도 하나님의교회에 대한 경각심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CBS노컷뉴스 송주열 기자
ⓒ CBS 크리스천노컷뉴스
USA아멘넷

 

 

고난의 목적 - 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

호라티우스 보나르

 

 

 자기 자신만큼 많은 착각과 실수를 일으키게 하는 대상도 없습니다. "모든 것들 중 가장 거짓되고 지극히 사악한 것" 마음이며, 더구나 ‘죄의 거짓됨과 부패’는 불가사의한 것으로서 찾아낼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의 거짓됨과 죄의 거짓됨이 결합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무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 조금도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죄의 거짓과 부패를 찾으려는 의지조차 없습니다. 그러한 성찰이 가지고 올 결과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죄사함을 받았다는 의식으로 인하여 이러한 거리낌은 상당 부분 해소되기도 합니다. 빛으로 인해 드러난 부패의 정도가 아무리 심각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과의 단절을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확신을 가진 이상, 적어도 우리는 최악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피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어떤 상황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뿌린 피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 번 다시 진노하실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따라서 죄 사함 받은 자의 복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자라면, 적어도 그의 영은 ‘조금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해 아무 것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거리낌이 없으며 솔직하고 정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작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그 일을 뒤로 미루려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충격과 수치를 안겨 줄 수많은 것들을 빛으로 드러나게 할지도 모릅니다. 비록 우리를 정죄에 이르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러한 내적 성찰은 여전히 우리에게 막강한 죄의 영향력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경고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우리에게 붙어 있는 악에 대해 성찰하기를 주저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자신에게 이러한 악이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잘 모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도 매우 피상적으로만 인식하고 있으며, 영과 육의 갈등에 대해서도 생각처럼 맹렬하거나 심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수많은 죄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뿐 아니라 남아 있는 죄의 세력에서도 적절한 방식으로 신속하게 벗어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내면에 잠복해 있는 죄의 깊이에 대해서도 측량해 본 적이 없으며, 자신이 얼마나 가증한 자인지를 밝히려는 시도조차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단지 천국을 향하여 순탄한 여정을 하는 가운데서 이따금씩 ‘우리의 여정이 왜 옛 성도들과 다를까?’라는 의구심을 가질 뿐입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의 부패성을 상당 부분 극복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죽은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우리를 기만하기 위하여 죽은 척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은 줄어들었고, 우리의 성품은 훨씬 나아졌으며, 우리의 영혼은 전보다 평온하고 차분해졌고, 우리의 요새는 든든히 서 있으며, 우리는 ‘결코 요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또한 우리는 어느 정도 자아와 죄를 극복하고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는 소경입니다. 자신에게 완전히 속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를 찾아온 시련은 마치 먹구름과 같이 우리를 휩쓸고, 우박처럼 휘몰아쳐서 우리를 좌절과 실의에 빠뜨렸습니다. 그러자 마치 외부의 소란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옛사람이 다시 살아나 더욱 사나운 기질을 분출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치 하늘의 사방 바람이 풀려나 우리의 깊은 내면에 사정없이 휘몰아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요새와 같은 마음에는 불신이 생기고, 영혼 깊은 곳에서는 도처에서 반역이 고개를 들고, 죽은 것처럼 보였던 정욕이 활개를 칩니다.

 

 우리는 이처럼 놀라운 상황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실로 우리는 하나님이 그렇게 허락하실 때까지 죄의 힘이나 마음속에 있는 악에 대해 무지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방식입니다. 그분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들을 광야로 몰아내셨습니다.

 

 너는 주 네 하나님께서 이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너를 인도하신 그 모든 길을 기억할지니 이것은 그분께서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또 네가 그분의 명령을 지키려 하는지 그렇지 아니한지 알고자 하심이라.”(신 8:2)

 

 하나님은 광야의 시련을 통해 그들을 시험하셨고, 이 시험을 통해 그들이 가진 많은 허물이 드러났습니다. 이전에는 알지 못하였던 숨은 죄가 수없이 드러난 것입니다. 시련이 악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시련은 단지 겨울잠을 자고 있던 뱀처럼 인식하지도 느끼지도 못하였던 존재를 노출시켰을 뿐입니다.

 

 계속해서 마음의 깊은 샘이 터지고, 지옥과 같이 검고 더러운 온갖 것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사막의 바람 가운데서 이집트의 풍성함을 떠올릴 때 그들에게 반역, 불신, 원망, 무신론, 우상 숭배, 고집, 자만심, 쾌락 추구와 같은 것들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시험을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내면에 숨어 있는 악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에 채찍질을 하시면 우리는 곧바로 반기를 듭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육, 옛사람이 큰 상처를 받고 즉시 살아나 이전의 힘을 발휘합니다. 자고 있을 때는 몰랐지만, 그것이 깨어 일어나자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는 그 힘에 전율하게 됩니다.

 

 바다가 요동하는 한, 그 물이 진흙과 오물을 늘 솟구쳐 내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사 57:20). 바다가 잔잔할 때에는 모든 것이 맑고 깨끗하며 청명하고, 푸른 물결만 넘실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면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소용돌이가 치면서 모든 것이 돌변합니다.

 

 성도의 삶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련과 환난이 폭풍처럼 몰아치면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악이 살아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전에 인식하지 못했던 죄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온갖 악을 쏟아 낼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완악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자제력을 잃고 무신론적인 불평과 원망을 쏟아 내면서 그분의 지혜와 사랑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드러냅니다. 그렇게도 분명한 형태로 매 순간 나타났건만 “사랑과 지혜의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하였던 것입니다.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 찬 우리는 그분의 뜻을 좇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토록 심한 징계와 고통을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마치 얼마 동안 하나님에 대해 악한 생각만 할 뿐 좋은 생각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다가 이윽고 평정이 찾아오고 자신의 반역에 대해 수치심과 두려움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근원을 알 수 없는 악의 깊이에 대해 배웁니다. 그리 한편으로는 놀랍고도 불가사의한 우리의 죄성에 대해,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한량없으신 은혜에 대해 더욱 깊은 통찰력을 얻습니다. 또한 보혈의 샘을 더욱 귀히 여기며 다시 한 번 보호하심을 얻기 위해 그분의 의에 호소하게 됩니다.

 

 옛 성도들이 시험을 받을 때 일반적인 죄 외에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던 죄가 드러난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노아가 평생 경건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사치스럽고 관능적이며 향락적인 세계에 홀로 남아 그들의 음란하고도 퇴폐적인 삶을 정죄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유혹에 빠질 수 있는 환경에 처하게 됩니다. 바로 술에 취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용기 있는 신앙의 사람이지만 이집트와 그랄에서 그의 신앙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으며, 두려움으로 인하여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롯은 무법으로 가득한 음란한 소돔에 살면서 그들의 가증함으로 인해 의로운 심령에 큰 상처를 받았으나 소돔의 멸망에서 벗어나자마자 그들과 마찬가지로 술과 욕정에 빠져 들었습니다.

 

 욥은 인내의 사람이었지만 고난을 당할 때에 조급함을 견디지 못하였으며, 모세는 지면에서 가장 온유한 자였으나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자기 입술로 분별없이’ 말하고 말았습니다(시 106:33).

 

 다윗은 이스라엘에서 여호와의 전쟁을 가장 용감하게 수행한 사람 중 한 명으로서, 물맷돌 하나로 골리앗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피해 가들의 아기스 왕을 찾아갔을 때 그의 용기는 사라지고 대적을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미친 척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왕들 앞에서 두려움 없이 심판을 선포하였으며, 하늘을 닫고 여호와의 칼을 휘둘렀으며, 혼자서 수만 명의 군사와 맞선 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 여인의 위협을 두려워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기를 구하였습니다. 에스겔은 경건함과 순종으로 빛나는 성품을 지녔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외로 불순종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는 마음이 특심하였으나 나중에는 그분을 정면으로 부인했습니다. 요한은 온유와 사랑의 면에서 주님과 가장 닮은 성품을 지녔으나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사마리아를 태워 버리자고 구하기도 하였습니다.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시험을 통해 드러난 인간, 특별히 성도의 마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존 베리지(John Berridge)는 자신에 대해 “오 마음이여 마음이여, 너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리석고 불합리한 덩어리, 세상에서 가장 헛되고 간사하며 악하고 어리석은 것이 바로 너로구나”라고 말했습니다.

 

 영혼의 깊은 곳을 휘저으면 깊이 숨은 악과 이기심, 자만심과 못된 성품과 세속적인 것들이 얼마나 많이 쏟아집니까?

 

 욥이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에 대한 순전함과 확신을 견지하면서 인내하였습니까? 그는 계속되는 고통과 시련으로 지쳤지만 절망과 눈물 가운데서도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 시련이 그의 자아의 내면 깊은 곳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끔직한 질병이 그를 거름 더미에 앉히고, 친구들이 그를 조소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몰아세우자, 그의 신앙과 인내는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존재 깊은 곳이 침략을 당하여 시험대 위에 드러나자, 그의 조급함과 불신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날카로운 화살이 그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을 관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하나님은 그를 돌아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병상에까지 이르러야 했으며, 그 실상이 낱낱이 빛으로 드러나야 했던 것입니다.

 

 성도의 마음에서 드러난 모든 죄악 가운데 가장 악하고도 흔한 죄가 하나님에 대한 완악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사실 믿지 않던 시절에 우리의 영혼은 이러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모두 악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강력한 변화의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즉, 그분은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선하게 대하셨는지를 보여 주심으로써 그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신 것입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사랑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지금까지의 불신앙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다시는 하나님에 대해 악한 생각을 품지 않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분을 신뢰할 것이요.” 우리는 어떠한 고난도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로 한 걸음 더 다가서게 할 뿐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징계가 시작되자마자 즉시 우리의 옛 생각이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다루시는지 궁금해 하면서 그분의 사랑과 신실하심에 대해 의심합니다. 또한 그분의 은혜를 붙들고 있는 손이 느슨해지고 때로는 완전히 놓아 버린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마치 시들어 버린 박 넝쿨을 들고 있는 요나와 같습니다. 죽기까지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앞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 그분의 은혜로우신 손길로부터 죄 사람을 받을 때의 그 사랑의 하나님이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 우리의 마음은 배신의 의도를 드러냅니다!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을 섬기려는 의도가 없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우리를 타이르시면서 “네가 분노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라고 물으십니다(요나 4:9).

 이 질문이 우리의 입을 영원히 닫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여러분의 죄를 던져 버리셨는데도 어떻게 화를 내거나 낙담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악한 세상과 앞으로 다가올 진노에서 구원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반석 아래 숨어 있으면서도 화를 냅니까? 여러분은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왕국을 영원한 상속으로 받았는데도 화를 냅니까? 밤이 깊고 새 날이 가까워 멀리 동녘 하늘에 노을이 지고 샛별이 여명을 밝힐 준비를 하는데도 어떻게 화를 낼 수 있습니까?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 / 호라티우스 보나르(지평서원)
고난의 목적-자신에 대한 내적 성찰(99~108p에서 발췌)    


 
    저작권 저촉 검사 프로그램
     
    ☞1. 국내 음악은 여기 클릭☜

    ☞2. 국외 음악은 여기 클릭☜

     

     

    [사 용 법] 1)국내음악이면 국내음악을

    
       국외음악이면 국외음악을  클릭 하시고
    
    2)노래나 음악 제목을 작품란에 써넣은후.....
       작품명 입력시 한글은 띄어쓰기가 없이 입력 합니다. 
       (영문은 띄어쓰기 하여 입력처리)
    
    3)검색을 치시면 아래에 창이 뜹니다.
    
    
    4)그 목록에 그가수 이름이 실려있으면 무조건 저촉되는것
    
    5)반드시 검색 결과 가수이름이 안뜨는 것만 올리세요.
    
    6)팝송및 클레식도 마찬가지 입니다.
    
    
    [*참 고]
     작품명,가수명.. 중 한가지만 알아도 검색 가능..

    
    

     

     

     

     

    저작권법위반 으로 걸렸을 때 대처사항

     
    [인터넷 에서 합의금을 요청할 때 대처방법]
    많은 네티즌들이 법률 회사와 합의를 했다고 하는데, 네티즌들은 저작권 침해에 대해 합의를 할 경우 저작권자가 제시한 증거와 방법적인 문제는 없는지 자세히 알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인터넷에 돌고 있는 정보와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통신비밀 보호법에 따르면 개인과 개인간의 비밀리에 이루어 지는 경우 
    타인의 통신을 감청할 수 없도록 되어 있으며, 감청을 하기 위해서는 
    사법권/수사권을 가진 검찰/경찰만 가능
    따라서, 개인과 개인간에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서비스를 이용한 경우 
    검찰/경찰이 수사를 하지 않고, 저작권 업체가 이용자를 적발할 수 없으며 
    만약 저작권 업체가 이용자를 적발 한다면 통신비밀 보호법을 어기는 사례가 될 수 있으므로, 고소를 하는 당사자가 처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정보 통신 서비스 제공자로부터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제공받은 자는 당해 이용자의 동의가 있거나 다른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 하고는 개인정보 를 제공 받은 목적외의 용도로 이를 이용 하거나 제3자에게 제공 하여서는 안된다고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법률대행 회사라고 하면서, 서비스 업체에게 이용자의 정보를 요구해서, 서비스 업체가 법률회사에 개인정보를 넘겨주는 행위는 불법적인 행위이며 만약, 법률대행 회사라고 주장하며,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는 이용자에게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행위가 발생하면 이것또한 타인의 개인정보 를 취득하는 행위로서 불법적인 행위일 것이다.
     
    셋째, 공유한 화면을 캡처하여 증거라고 주장하는 경우
    화면캡처를 한 경우 누군가 수정이나 편집등 가공할 수 있으므로 피고자의 증언이 없는 한  단순한 화면캡처 자료는 법적인 증거로서의 효력이 발생되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언론에 보도된 바에 다르면, 요즘 저작권 업체도 저작권 보호를 위해 가짜파일을 유통시키고 있을정도로 공유한 파일이 가짜파일 인지 진짜파일 인지 아무도 증명을 할 수 없으며만약, 법률대행업체가 실제로 다운받아서 확인하였다면, 파일을 준 사람과 파일을 받은 사람 모두 똑같은 법을 어겼으므로 고소가 불가능한 상태가 될 수 있을것이다.
     
    넷째, 만약 다운로드 받아간 화면을 캡처하여 증거라고 주장하는 경우
    먼저 이야기를 한 것과 마찬가지로 화면캡처 만으로 증거로서 효력이 없으며 다운로드 받아간 후에 사실을 구체적으로 캡처를 해서 증거로 내밀었을 때... 
    이는 경찰에서도 할 수 없는 함정수사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증거를 내미는 사람(회사)도불법을 저지른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경우, 저작권 법을 어기는 경우, 저작권 법을 통해 보호를 받을 수 없으므로 고소가 불가능할 것이다.
     
    다섯째, 이전 소리바다 사건에서 보았듯이, 
    법적으로 기소가 되어 처벌을 하기 위해서는상세하고 구체적인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단순히 공유만 했다는 것 만으로는 증거가 불충분하여 기각사유에 속한다고 한다.
    따라서, 네티즌들은 스스로 법률회사에 찾아가서 돈을 주고 합의서를 쓰고 도장을 찍기전  
    저작권 행사자가 검찰을 통해 고소를 하여, 
    검찰이나 경찰이 수사를 할때까지 가만히 있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
    검찰이나 경찰이 수사가 시작되면 법적인 절차를 최대한 알아보고 응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개인의 정신적인 고통을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 몇십만원의 돈을 지불할 능력이 어 합의를 한다면, 그것은 본인들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로 생각된다.   (펌)

    가져온 곳 : 
    카페 >너에게로 가는카페
    |
    글쓴이 : 인간문화재| 원글보기


                               1. The Crooked House (Sopot, Poland)

    1-33-Worlds-Top-Strangest-Buildings-mindhouse.jpg

     

                                       2. The Crooked House (Sopot, Poland)

    2-33-Worlds-Top-Strangest-Buildings-crookedhouse.jpg

    3. Stone House (Guimar?es, Portugal) 3-33-Worlds-Top-Strangest-Buildings-stonehouse.jpg

    4. Lotus Temple (Delhi, India)

    4-33-Worlds-Top-Strangest-Buildings-lotus.jpg


                                         5. Cathedral of Brasilia (Brazil)

    5-33-Worlds-Top-Strangest-Buildings-cathedral-brasi.jpg

                                   6. La Pedrera (Barcelona, Spain)

    6-33-Worlds-Top-Strangest-Buildings-la-pedrera.jpg

                                          7. Atomium (Brussels, Belgium)

    7-33-Worlds-Top-Strangest-Buildings-atomium.jpg

                             8. Museum of Contemporary Art (Rio de Janeiro, Brazil)

    8-33-Worlds-Top-Strangest-Buildings-contemporaryartmuseum.jpg

                                     9. Kansas City Library (Missouri, USA)

    9-33-Worlds-Top-Strangest-Buildings-kansascity-library.jpg

                                   10. Low impact woodland house (Wales, UK)

    10-33-Worlds-Top-Strangest-Buildings-woodland.jpg

                                     11. Guggenheim Museum (Bilbao, Spain)

    11-33-Worlds-Top-Strangest-Buildings-guggenheim.jpg

                                  12. Rotating Tower, Dubai, UAE

    12-33-Worlds-Top-Strangest-Buildings-Rotating-Tower-Dubai3.jpg

    12-33-Worlds-Top-Strangest-Buildings-Rotating-Tower-Dubai1.jpg

    13. Habitat 67 (Montreal, Canada)
    13-33-Worlds-Top-Strangest-Buildings-habitat67.jpg

    14. Casa da musica (Porto, Portugal)
    14-33-Worlds-Top-Strangest-Buildings-casa-da-musica.jpg

    15. Olympic Stadium (Montreal, Canada)
    15-33-Worlds-Top-Strangest-Buildings-olympicstadium.jpg

    16. Nautilus House (Mexico City, Mexico)
    16-33-Worlds-Top-Strangest-Buildings-Nautilus-house.jpg

    17. The National Library (Minsk, Belarus)
    17-33-Worlds-Top-Strangest-Buildings-national-library-belarus1.jpg

    17-33-Worlds-Top-Strangest-Buildings-national-library-belarus2.jpg

    18. National Theatre (Beijing, China)
    18-33-Worlds-Top-Strangest-Buildings-national-theatre-beijing.jpg

    19. Conch Shell House, Isla Mujeres, Mexico
    19-33-Worlds-Top-Strangest-Buildings-Conch-Shell-House-Isla-Mujeres1.jpg

    19-33-Worlds-Top-Strangest-Buildings-Conch-Shell-House-Isla-Mujeres3.jpg

    20. House Attack (Viena, Austria)
    20-33-Worlds-Top-Strangest-Buildings-house-attack.jpg

    21. Bibliotheca Alexandrina (Egypt)
    21-33-Worlds-Top-Strangest-Buildings-Bibliotheca-Alexandrina.jpg

    22. Cubic Houses (Kubus woningen)(Rotterdam, Netherlands)
    22-33-Worlds-Top-Strangest-Buildings-cubic-houses.jpg

    22-33-Worlds-Top-Strangest-Buildings-cubic-houses2.jpg

    23. Ideal Palace (France)
    23-33-Worlds-Top-Strangest-Buildings-ideal-palace.jpg

    24. The Church of Hallgrimur, Reykjavik, Iceland
    24-33-Worlds-Top-Strangest-Buildings-caldari.jpg
    25. Eden project (United Kingdom)
    25-33-Worlds-Top-Strangest-Buildings-eden-project.jpg

    26. The Museum of Play (Rochester , USA)
    26-33-Worlds-Top-Strangest-Buildings-museum-of-play.jpg

    27. Atlantis (Dubai, UAE)
    27-33-Worlds-Top-Strangest-Buildings-atlantis-dubai.jpg

    28. Montreal Biosphere (Canada)
    28-33-Worlds-Top-Strangest-Buildings-biosphere.jpg

    29. Wonderworks (Pigeon Forge, TN, USA)
    29-33-Worlds-Top-Strangest-Buildings-wonderworks.jpg

    30. The Basket Building (Ohio, USA)
    30-33-Worlds-Top-Strangest-Buildings-basket-building.jpg

    31. Kunsthaus (Graz, Austria)
    31-33-Worlds-Top-Strangest-Buildings-kunsthaus.jpg

    32. Forest Spiral (Darmstadt, Germany)
    32-33-Worlds-Top-Strangest-Buildings-forest-spiral.jpg

    33. Wooden Gagster House (Archangelsk, Russia)
    33-33-Worlds-Top-Strangest-Buildings-gangsterhouse.jpg

     




    1992년 시한부 종말론의 사상적 배경으로서 한국교회에 가장 큰 오명을 남기는 데 일조했음에도 세대주의 사상은 여전히 한국교회에 뿌리깊게 남아 있습니다. 한국교회 일각에 다시 세대주의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에 본지는 이필찬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bibeschatology)에 올린 글 중 세대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비판한 글 몇 가지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저자인 이필찬 교수는 합동신학대학원(M.Div)를 졸업하고 미국 칼빈신학교(Th.M)를 거쳐, 영국 세인트 앤드류스대학(Ph.D)에서 요한계시록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이고 현재는 요한계시록연구소를 설립, 많은 강연과 저술활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바른 종말론 세우기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송만석장로.gif (송만석 장로)



    KIBI(한이성경연구소, 대표 송만석, Korea Israel Bible Institute)의 대표인 온누리 교회 송만석 장로는 <지금은 예루살렘 시대>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했다. 두란노에서 1999년 초판이 발행된 이후 2011년까지 17쇄를 거듭했다. 여기에서 그의 주장을 간단히 소개하고 분석 평가해 보고자 한다. 그런데 송 장로의 견해는 앞에서 언급한 메시아닉 쥬들의 주장과 매우 유사하다.

     

    송만석 장로는 회복에 관한 말씀을 열거한다(31-34쪽): 사 11:11-12; 43:5-6; 49:12; 렘 3:18; 23:7-8; 30:3; 31:8; 33:24-26; 겔 36:24-25; 39:28; 호 3:4-5; 슥 8:1-8. 그리고 이러한 예언의 말씀들이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19세기 중반에 유대인들이 고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기 시작하여 1948년에 독립국가가 되고 1991년부터는 구소련으로부터 대량으로 귀환하게 된 것과 독립 이후에 50년 동안 전세계의 비난 속에서도 한 국가로서 든든히 성장해 온 것이 말씀의 성취라고 서술하고 있다(34-35쪽).

     

    송만석 장로는 이러한 예언들이 바벨론 포로 귀환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며 1948년 이스라엘 독립과는 관계 없는 것이라는 비판을 의식하여 이에 대한 반박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렘 16:14-15의 말씀을 인용하며 북방 땅과 쫓겨 가서 살았던 모든 나라에서 귀환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출애굽 사건보다 더 큰 사건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면서 앞에서 열거한 이스라엘 회복에 관한 성경의 예언이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이 아니라 금세기에 일어난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주장이라는 증거들을 나열한다.

     

    송 장로의 주장:
    1) 이스라엘 역사상 온 민족이 송두리째 뽑혀서 세계 각처로 흩어져 버린 것은 바벨론 포로 시대가 아니라 예수님의 예언이 이루어진 AD 70년 이후의 일입니다.


    반박: 먼저 흥미로운 것은 송만석 장로가 AD70년의 성전 멸망을 예수님의 예언의 성취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 멸망을 말씀하셨지 이스라엘 온 민족이 송두리째 뽑혀 세계 각처로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은 전혀 없다. 구약에서도 이스라엘이 송두리째 뽑혀서 세계 각처로 흩어져 버리게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이 두 경우에 송두리째는 아니지만 일부가 흩어지고 잡혀가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맞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흩어지게 된 것은 바벨론 포로 사건이 계기가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고토로 돌아 오게 될 것을 선포하게 된 것도 바로 바벨론 포로 사건이 배경이 되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AD 70년 이후 이스라엘 온 민족이 송두리째 뽑혀 흩어지게 된 것은 성경의 본문과 전혀 관계 없다.

     

    송 장로의 주장
    2) 위에서 보았듯이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으로 이주해온 경로를 보면 문자 그대로 동서 남북 전 지구상에서 돌아왔습니다. 단지 바벨론이나 그의 인접 국가들 정도에서 돌아 온 것이 아닙니다.

     

    반박: 세 가지를 지적하고 싶다: (1)구약에서의 표현 방식은 강조를 위해 과장된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다; (2) 구약에서의 북쪽과 땅끝은 세계화된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범위가 아니다; (3) 실제로 바벨론 포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반드시 바벨론 포로로부터 귀환뿐만 아니라 세계 각처로부터 몰려 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겔 36:19에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여러 나라에 헤쳤더니’라고 되어 있어서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송 장로의 주장
    3) 이사야 11장 11절 말씀을 보면 첫 번째 귀환이 아니라 두 번째 귀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박: 우선 사 11:11은 ‘그 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앗수르와 애굽과 바드로스와 구스와 엘람과 시날과 하맛과 바다 섬들에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한다. 만일 이 부분을 문자 그대로 믿으려면 이러한 내용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오늘날의 정황과는 전혀 다르다. 그리고 ‘다시’라는 말은 두 번째 귀환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앞선 출애굽과 히스기야를 통한 구원사역를 배경으로 하나님은 다시 반복해서 앗수르로부터의 구원 사역을 일으키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오늘날의 이스라엘의 회복에 적용하는 것은 본문과 본문의 구약적 문맥을 무시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송 장로의 주장
    4) 스가랴서는 바벨론 포로시대 이후에 쓰여진 선지서입니다. 8:1-8까지의 내용을 보면 각처에서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루살렘 거리에서 노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반박: 슥 8:1-8이 포로 후에 주어진 말씀이라 하더라도 포로 후의 정황에 해당된다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포로 후에 이스라엘의 상황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에게 격려하고 위로하는 말씀으로 이해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 특별히 9절은 대하 15:1-7을 배경으로 하여 성전 재건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고 있다.

     

    송 장로의 주장
    5) 렘 30:24 내용은 이러한 사건이 ‘말일’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바벨론 포로 귀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있습니다.



    반박: 송만적 장로는 종말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오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구약 성경에서 바벨론 포로 귀환 사건은 종말적 사건이다. 종말이란 시간적으로 마지막이란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성취된 순간을 일컫는다. 선지자들이 종말을 내다 보면서 선포했는데 그러한 것들이 포로 귀환을 통해 일차적으로 성취가 되었다. 그래서 스룹바벨은 성전을 건축하고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재건하였으며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적 재건을 위해 힘쓰게 되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 보니 온전한 성취가 이루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바벨론 후에 페르시아와 그리스 그리고 로마 제국에 이르는 대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은 약소국으로 계속 남아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신약 성경 저자들은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재해석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해방이 있다는 말씀을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종말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송 장로의 주장
    7) 누가복음 21장 24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리라’고 하셨습니다. AD 70년 이후 예루살렘은 비잔틴 제국, 페르시아, 십자군, 터키, 영국, 요르단 등 적어도 10개국 이상에 의해 지배를 받다가 1967년 6월, ‘6일 전쟁’으로 이 지역이 이방인의 손에서 유대인들의 손으로 넘어 왔습니다.

     

    반박: 21:24의 말씀은 구약에서 유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패턴을 활용하여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고 있다. 이 패턴이란 구약에서 항상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끝나고 나면 그들의 심판을 위해 도구로 삼았던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을 선포한다(참조 사 10; 13-14; 33; 47; 렘 50-51; 단 9:26-27; 겔 38; 합 1:1-2:3). 그렇다면 눅 21:24은 구약에서 예루살렘 심판의 표현에 대한 인유(引喩, allusion)라고 할 수 있다. 눅 21:24의 문맥은 예루살렘 성전 멸망에 대한 내용이다. 이 성전은 예수님 말씀대로 AD 70년에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다(이것은 송만석 장로도 동의한바 있다). 이 내용을 서술하면서 구약에서의 심판의 패턴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며 자연스럽다. 이것을 2000년 후에 이스라엘의 회복에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다음에는 송만석 장로의 겔 36-37장을 근거로한 이스라엘의 3단계 회복론에 대한 비판을 하겠다.

     

     

    관련 기사

     

    icon_arrow_red.gif 김종철 감독 <제3성전>, 유사 시한부 종말론에 기름붓나?

    icon_arrow_red.gif 바울은 메시아닉 쥬 아냐··· 유대주의 배격

    icon_arrow_red.gif 기독교인들의 시온주의 지지, 잘못된 성경해석 때문

    icon_arrow_red.gif 세대주의자들의 허황한 ‘이스라엘 회복’ 주장

    icon_arrow_red.gif 세대주의의 기원과 문제점

     

     

    대를 이은 온누리교회의 이스라엘 신앙

    http://www.usaamen.net/news/board.php?board=news&command=body&no=7746

     

    - 온누리 이재훈목사 "이스라엘 선교에 대한 오해"

    http://www.usaamen.net/news/board.php?board=news&command=body&no=7592


    - 대체신학이 사라지도록 노력할 것을 결의

    http://www.usaamen.net/news/board.php?board=news&command=body&no=7590

     

     

     

    출처: 세이연 

    송만석 장로의 이스라엘 회복 사상 비판

     

    이필찬 교수 "송 장로 견해, 메시아닉 쥬들의 주장과 매우 유사"

     
    요한계시록연구소 이필찬  |  https://www.facebook.com/bibeschatology 

     

    류광수.PNG

     

     

     류광수 다락방(예장 전도총회)에 대한 연구보고서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

     

    지난해 11월 9일, 한국·미국·일본·유럽 등 세계 각국의 이단연구 전문가 87명이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세이연)를 조직하고 창립총회 및 ‘제1회 세계대회’를 열었다. “어떠한 정치적 외압이나 금권적 유혹도 배제한 신뢰성 있는 이단연구를 통해 한국교회를 보호하겠다”는 설립취지다. 창립멤버들은 특히 “한국교회는 외부적으로 이단들의 공격적인 포교로 위협받고 있으며, 내부적으로는 정통교단 안에 이단들을 변호하고 지지하는 친이단인사들이 있는 실정이다”며 “정통기독교라는 이름 안에서 이단을 옹호하는 친이단성향의 인사, 단체, 언론에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고 강조한바 있다. 만 1년이 지난 시점인 올해 11월 세이연은 “약속한 대로 한국교회를 위한 이단연구보고서를 차례로 발표한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는 그 두 번째인 ‘류광수 다락방’에 대한 것이다.

    최근 교계 일각에서 반복적으로 주장되고 있는 “현재의 류광수 다락방은 이단성 없다”는 주장에 대해 <복음편지>, <현장복음>, <기초멧세지>, <영접의 열두 가지 의미>와 같은 다락방의 최근 양육교재를 근거로 반박할 뿐만 아니라, 지방교회와 흡사한 양태론적 삼위일체와 김기동 베뢰아와 흡사한 귀신론 등의 이단성을 치밀하게 드러낸다. 보고서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편집자주>

    서론
    1. 류광수 다락방의 현재 상황
    2. 류광수 다락방의 조사 목적

    본론
    1. 양태론적 삼위일체와 기독론을 비롯한 여러 이단적인 사상들
    1) 지방교회와 거의 유사한 다락방의 기독론과 양태론(삼위일체의 비밀)
    2)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과 성령의 내주를 동일한 것이라고 하는 주장
    3) 다락방만이 2000년 교회사에서 유일한 복음을 전한다는 배타적인 교회론
    4) ‘그리스도를 누린다’는 지방교회의 용어사용과 그리스도의 삼중직(그리스도의 비밀, 영접의 비밀, 임마누엘의 비밀 등 관련)에 대한 그릇된 견해
    5)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이라는 다락방의 양태론적 교리
    6) 예수의 무죄성에 대한 왜곡된 기독론
    7) 류광수 다락방의 사상에 근거한 비성경적 천사동원권, 사탄결박권

    2. 김기동 베뢰아의 이원론적 귀신론과 유사한 다락방의 귀신론
    1)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한 왜곡
    2) 가계저주론과 유사한 다락방의 조상의 죄
    3) 베뢰아 사상과 동일한 다락방의 사탄배상설
    4) 자신들만이 마지막 시대의 남은 자라는 렘넌트 사상

    결론

     


    서론

    1. 류광수 다락방의 현재 상황

    류광수 다락방(예장 전도총회)은 현재 9개 교단에서 이단 및 이단성 있는 집단으로 발표되었다. 다락방은 고신(1995/45, 1997/47/이단), 통합(1996/81/사이비성), 합동(1996/81/이단), 합신(1996/81/위험한 사상, 참여금지), 기성(1997/52/사이비운동), 기감(1998/23/이단), 고려(1995/45/유사기독교운동, 사이비기독교운동), 개혁, 기침 등 9개 교단에서 이단 및 사이비 단체 등으로 규정하였고, 교단들의 연합체인 한기총의 2004년 이단종합명단에도 포함되어 있다.

    1998년 8월 27일 횃불선교센터에서 열린 공청회에서 류광수 목사는 자신의 문제점에 대해 거의 대부분이 오해이고 실수였다고 변명을 했으며, 수정하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현재에도 달라진 점은 거의 없으며 오히려 몇 가지 문제점은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므로 공청회에서 말한 주장은 급한 불을 끄려는 변명과 거짓말로 보인다. 특히 다락방에 숨어 있는 지방교회(윗트니스 리)의 사상은 예전에는 구체적으로 보고되지 않았던 것으로 심각한 이단성을 보인다. 그 동안 밝혀진 류광수 다락방의 이단성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2. 류광수 다락방의 조사 목적

    류광수 다락방은 1997년 추종 세력을 모아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도총회’라는 교단을 만들었고, 2011년 6월 21일 예장 개혁측(조경삼 목사측)과 합동예배를 드렸다.1) 이 일로 말미암아 예장 개혁측이 조경삼 목사 측과 장세일 목사 측으로 분열되었고, 한국교회의 중요한 9개 교단이 이단으로 규정한 류광수 다락방에게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이 회원권을 부여함으로써 한국교계는 큰 충격과 혼란에 휩싸였다. 이에 세이연은 한국교회 대표적인 연합기관인 한기총에서 류광수 다락방을 사실상 회원으로 받아 들였다는 것은 ‘이단해제를 위한 과정’으로 판단하고,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생각아래 류광수 다락방을 조사하게 되었다. 류광수 다락방에 대하여 지금까지 밝혀진 것뿐 아니라 새로운 이단성을 밝힘으로써 그 정체를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본론

    다락방의 가장 중요한 이단성은 두 가지 방향에서 볼 수 있다. 첫째, 이단 지방교회(위트니스 리)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아 양태론적 삼위일체와 신인양성을 분리하는 왜곡된 기독론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은 류광수 다락방이 교단을 만들어 분리된 이후부터 더욱 더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류광수 다락방은 자신들의 이단적인 주장을 스스로 “2000년 만에 회복한 유일한 복음”이라고 말하며, 이것을 “삼위일체의 비밀, 영접의 비밀, 임마누엘의 비밀”이라고 말한다.

    둘째, 류광수 다락방은 이단 김기동 베뢰아 같은 ‘이원론적 귀신론’ 사상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이 사상은 인간에게 나타나는 모든 저주 즉 질병, 불행, 사고, 심지어 가난까지도 모두 귀신 때문이라고 여기며, 예수를 영접하고 귀신을 쫓아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는 사상이다. 그러한 귀신론은 하나님과 마귀를 동등한 대적관계로 보는 이원론으로서 “마귀를 알아야 예수를 안다”고 주장할 뿐 아니라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마귀를 멸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1. 양태론적 삼위일체와 기독론을 비롯한 여러 이단적인 사상들

    1) 지방교회와 거의 유사한 다락방의 기독론과 양태론(삼위일체의 비밀)
    초대교회의 기독론 중에서 ‘아폴로네리우스’2) 라고 하는 이단적 기독론이 있는데,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분리시켜 예수의 영만을 ‘하나님’으로 보는 견해로서 예수의 인성을 부정하는 사상이다. 다락방의 류광수 씨는 이것을 양태론적으로 예수의 영을 ‘하나님 자신’으로 이해하며, 곧 예수님의 성육신과 성도들안에 성령의 내주를 동일한 개념으로 보는 지방교회 사상을 갖고 있다. 류광수 목사의 주장을 입증하는 <복음편지>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 영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요 1:14).
    (2) 그러므로 그분은 죄가 없고 그 영은 하나님이십니다(고전 15:45).
    (3)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4)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가진 분입니다(마 16:16~19) - 영은 하나님이시고 몸만 사람의 몸을 입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다.”(<복음편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류광수 씨의 <현장복음> 메시지에도 이런 주장이 나타난다.

    “(3) 고전 4:45~50 하나님 - 예수님은 그 영이 하나님이시다.
    (4) 요 1:14 사람 - 예수님의 그 육이 사람이시다.”(<현장복음>, 19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그 영은 하나님인데,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이다. 신약에 참으로 중대한 말이다. 여러분 중심에 정말 주님이 역사를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의 죽음은 참으로 중요하다.”(<현장복음>, 18과 예수께서는 왜 죽어야 하는가?)

    결국 위의 류광수 씨의 가르침을 요약해 보면 하나님 자신이 직접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예수요, 그 분이 다시 성령으로 변하여 오셨다는 양태론적 삼위일체요, ‘하나님=예수의 영’이라는 잘못된 기독론을 말하는 것이다. 류광수 씨의 이러한 내용을 단순한 실수나 착각, 신학적 무지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복음편지> 외에 <현장복음>등의 양육교재 외에도 이러한 기록이 너무 많이 반복되고, 오히려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으며, 그것을 ‘비밀’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지방교회의 창시자 윗트니스 리의 글을 보면 류광수 씨가 주장하는 내용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육신 되신 후에 하나님은 성육신되기 이전과는 달라지셨다. 성육신 이전에 그 분은 다만 하나님이셨지만 그러나 성육신되신 후에 그 분은 사람의 껍질 안에 계신 하나님이셨다”(윗트니스 리, <세부분의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하나님>, 54쪽).

    “그분은 우리와 같이 되셨다. 왜 그런가? 그 목적은 우리를 그 분과 똑같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고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과 똑같은 것이다”(윗트니스 리, <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63쪽).

    “우리 모두가 그분이 다만 영원 안에 감추인 아버지이고, 인간사회에 나타난 아들이실 뿐 아니라, 우리 안에 들어오신 그 영이심을 보아야 한다”(윗트니스 리, <하나님의 경륜 안에 있는 두 가지 비밀>, 21쪽).

    결국 류광수 씨의 다락방이나 지방교회는 하나님이 곧 도성인신하신 예수요, 바로 이 예수가 보혜사로 오신 성령으로 “하나님 = 예수님 = 성령님”이라는 등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은 분명히 양태론적 단일신론으로서 사벨리우스3) 가 주장했던 이단적인 사상이다.

    2)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과 성령의 내주를 동일한 것이라고 하는 주장
    지방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자와 동일하게 영·혼·육으로 분리시킴으로서, 성육신하신 예수를 성령이 내주한 신자와 동일하게 본다. 지방교회의 양태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성령은 곧 성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를 성령(하나님)이 내주한 사람의 첫 샘플로 보는 것이며 이것을 ‘God-man’이라고 부른다.4) 즉, 영이신 하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과 예수와 성령이 신자 안에 내주하는 것을 동일하게 보는데, 그것을 류광수 씨는 ‘삼위일체의 비밀’이라고 주장하며, ‘임마누엘의 비밀’, ‘영접의 비밀’이라고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방교회는 아버지가 곧 아들이며 아들이 곧 영이므로, 그것을 곧 ‘하나님의 실제’ 혹은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류광수 씨도 예수의 성육신과 성도들의 성령의 내주를 동일한 것으로 보며, 지방교회의 용어도 동일하게 사용한다. 류광수 씨의 글을 다락방의 문헌을 통하여 살펴보자.

    “영접이란 말은 성령께서 우리 속에 내주한다. 그러니까 이 말을 이해해야만 영접이란 말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오셨다. 말씀이 육신을 입어 오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뭐라고 말하느냐? → 성령의 내주! 이것을 이해해야 이해되는 말입니다. 주님이 여러분 속에 오셨다는 그 말이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뭘 주셨으니? 권세를 주셨으니….”(류광수, <기본멧세지>, 2쪽, 영접의 열두 가지 의미).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 성부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성자 하나님은 이 땅에 와서 그 말씀을 다 성취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을 입고 오셨는데 그분이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죠? 그런데 하나님이 지금 우리 속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이 뭐라고요? 성령 하나님. 맞지요? 너무 너무 놀라운 구원의 비밀입니다. 당장 여러분이 언약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 성삼위 하나님의 비밀, 성삼위 하나님이 내 속에 오셨습니다. 이 놀라운 구원 때문에,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여러분 속에 이 하나님이 계십니다. 어떻게? 성령 하나님으로, 이것을 보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인 것입니다”(류광수, <기본멧세지>, 영접의 열두 가지 의미).

    “하나님이 우리 속에 아예 오신 것이다.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육이고, 우리의 마음이지 하나님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신다”(류광수, <현장복음>, 2과 - 새로운 생명 (3) 성령의 내주란 무엇인가?).

    종합해 보면, 결국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성령의 내주요, 그 성령이 바로 성부 하나님이 신자 속에 들어오는 것과 같다고 이해할 수 있다. 윗트니스 리의 글을 보아도 동일한 사상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경륜이란 ‘하나님 자신을 사람 속에 공급해 주는’ 하나님 자신의 계획임을 깨달을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이란 오로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 속에 공급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오직 그분 ‘자신’ 만을 우리 속에 공급하시는 것이다”(윗트니스 리, <하나님의 경륜>, 9~10쪽).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들은 누구인가? 자녀들과 아버지는 같은 종류가 아닌가? 요한복음 3장 6절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라고 말한다. 당신과 당신의 부모는 모두 같은 종류, 육신의 종류이다. 6절은 또 말하기를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한다. 이 두 영은 같은 종류이며 또한 같은 근원이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 많은 하나님-사람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또한 우리가 믿고 경배하며 따르는 우리의 주님, 또한 첫 번째 하나님-사람(God-man)이다”(윗트니스 리, <하나님-사람의 생활>, 40쪽).

    지방교회에서는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사람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 자신을 공급하고 분배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한다. 지방교회의 사상은 다락방 류광수가 말하는 사상과 다르지 않고 동일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3) 다락방만이 2000년 교회사에서 유일한 복음을 전한다는 배타적인 교회론
    과거 류광수 다락방의 가장 큰 문제는 다락방만이 유일한 복음을 전한다는 것과 정통교회에는 복음이 없다는 배타성이었다. 이 배타성이 다락방을 이단으로 규정한 중요 이유가 되었다. 예전의 다락방은 노골적으로 기존의 정통교회를 비판한 바 있는데 “기존 교인들은 그리스도를 재 영접을 하여야 한다” 혹은 “한국교회는 98%가 귀신이 들렸다”라는 비난도 하였으며 “다락방만이 초대교회 이후로 유일한 복음을 전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류광수 씨는 지금도 “기존 교인은 임마누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의미를 앞에서 말한 아폴로네리우스적인 기독론과 양태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기독교의 정통신학은 자신이 생각하는 임마누엘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과연 기존의 정통 기독교가 성령의 내주를 부정하거나 성육신을 부정하는가? 그렇다면 왜 다락방에서는 기존 신자들이 임마누엘(하나님이 함께 하신다)을 누리지 못한다고 말할까? 류광수 씨의 기성교회 신자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자.

    “기존 신자들은 사실상 임마누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여러분 개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얼마나 큰 축복인가? 기존 신자는 이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약점이다. 목사님들도 무언가 모르게 이것이 느껴지질 않으면 은혜가 안 되는 것이다”(<복음편지>, 3과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그것을 보면서 교인들이, 중요한 멤버들이 너무나 축복을 참 모르고 있구나?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이 복음 운동이 그 많은 나라 가운데 한국에서, 그 많은 교단 가운데 다락방에서 일어나고 있다”(<복음편지>, 9과 기도는 영적과학이다)라고 하여 마치 류광수 다락방에서만 참 복음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2008년 <교회와신앙>(www.amennews.com)에 보도된 내용을 보면 더욱 분명해지는데, 다락방만이 2000년 만에 회복된 복음을 전한다고 주장한다(2008년 1월 20일자 “다락방이 2천년 만에 복음 회복했다/류광수 목사 이단시비 부른 다락방 특수화 주장 여전” 기사 참고).

    “그래서 2000년 만에 회복된 복음이라고 했더니 어떤 목사님이 제게 시비를 걸었죠. ‘류 목사님 저, 다락방에서는 2000년 만에 복음이 회복되었다고 하는데 그럼 지금까지 전도가 없었습니까?’라고 했어요. 어, 있었죠! 있었는데 성경에 있는 전도는 제가 찾지를 못했어요. 찾으면 수정하겠는데 없어요. 저도, 공부 좀 했는데요,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성경에 있는 완벽한 전도를 찾아내는 게 2000년만이다 이 말이에요. 여러분 이거(출애굽~현재까지를 뜻한다: 녹취자주) 다 합치면 얼맙니까? 4200년이에요! 여러분들이 4200년 만에 나타난 인물들이에요(청중들: 아멘!). 여러분 이거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앞으로 많은 분들이 보고 후회하거나 알게 될 겁니다. 계속 역사가 일어날 겁니다. 교회사를 똑바로 봐야 합니다. 제일 깨닫기 어려운 게 복음입니다. 은혜로 깨닫는 것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는 복음이 2000년 만에 회복된 것이에요.”5)

    계속해서 류광수 씨는 다락방만이 2000년 만에 복음을 회복한다고 말한다.

    “또 복음이 없어져 버렸어요. 그래서 또 완전히 망해 버렸어요. 이래서 복음을 깨달은 인물이 나왔어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고 했어요. 모든 것이 다 회복되었어요. 자 이 때부터 이 때까지(출애굽부터 이사야 7:4 말씀에 이르기까지를 뜻한다: 녹취자 주)가 얼마나 걸렸어요? 2천년이 걸렸어요. 기가 찰 일이죠. 제사장, 선지자가 있는데도 복음이 회복되는데 2000년이 걸렸어요.”6)

    왜 류광수 씨는 다락방을 2000년 만에 회복된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을까? 그의 사상은 2000년 교회사를 통하여 일반 교단에서 가르치지 않는 다른 양태론이며 다른 기독론이기 때문이다.

    “우리 다락방이 뭘 발견했는가? 일반 교단이 지금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시대에 전도를 제대로 하겠다는 답이 있는 단체다. 그래서 다른 것이다. 같다고 보면 안 된다. 그래서 이단이라는 말을 쓰는데, 異 다를 이. 다르기는 다르다. 같지는 않다. 저도 같다고 보지는 않는다. 어느 것이 옳으냐의 문제지, 같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같다면 우리 교단 없애야죠. 같지 않다. 뭔가 다락방은 다르다. 다르고 말고요. 분명 다르다. 다를 이(異)자다. 자꾸 뭔 소리 하지만 아무 상관없어요. 똑같으면 죽어요”(2007년 5월29일 예원교회).

    4) ‘그리스도를 누린다’는 지방교회의 용어사용과 그리스도의 삼중직(그리스도의 비밀, 영접의 비밀, 임마누엘의 비밀 등 관련)에 대한 그릇된 견해

    류광수 씨는 ‘그리스도의 비밀’, 혹은 ‘그리스도를 누려야 한다’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러한 표현은 지방교회 이단이 주로 사용하는 용어 중 하나다. 지방교회는 ‘하나님의 실제’라는 용어도 빈번하게 사용하는데, 류광수 씨에게서도 이 용어가 자주 발견된다. 지방교회가 말하는 ‘그리스도를 누린다’는 것은 양태론적 삼위일체 입장에서 이해하여 그리스도를 성부 하나님의 실제로 보는 것으로 지방교회는 그것을 ‘하나님의 생명’ 혹은 ‘하나님의 실제’, ‘그리스도의 실제’라고도 부른다. 윗트니스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또한 삼일적(三一的)으로 아들 그리스도의 실제화이신 그 영과 함께 살아야 한다. 당신이 ‘오 주 예수 그리스도여’라고 부를 때 당신은 주님을 누린다. 당신이 주님을 누릴 때 즉시 당신 안에 계신 주님은 그 영이시다. 주님은 그 영으로 실제화 되신다. 주님을 더 부를수록 당신은 그리스도의 실제화(實際化)이시며 실제의 영이며 당신 안에 계신 그 영을 더 갖게 된다. 실제란 주로 삼일하나님의 신성한 성분 안에 있는 존재 자체를 가리킨다. 그 영이 하나님의 실제이다”(윗트니스 리, <새예루살렘>, 396쪽).

    “그러므로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은 세 개의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가지의 세 단계’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 아들, 성령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기 위한 ‘한 하나님의 세 방면’이다. 예를 들어 얼음은 물이 되고 물은 수증기가 된다. 즉 ‘한 실체가 세가지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실체가 수증기의 상태에 이를 때에 우리가 호흡하는 데 유용하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소유하신 모든 것은 성령이 받으며, 성령은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그분을 우리 안으로 가져다준다. 하나님은 그분의 삼일성 안에서 설명하고 묘사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많은 예들이 있다”(윗트니스 리, <하나님>, 297쪽).

    그렇다면 다락방 류광수 씨가 주장하는 ‘그리스도를 누린다’라는 용어를 살펴보자. 류광수 씨는 다락방에서 사용하는 이 용어를 차별화하며 ‘비밀’이라는 말로 강조하고 있다. 류광수 씨는 <영접의 열두 가지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접, 이 말은 교회에 오도록 성경 공부하면서 예수 영접을 시키는 단순한 그 얘기가 아니고, 어마어마한 비밀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에 엄청난 비밀이 이루어지고, ‘우리가 영접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엄청난 비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축복을 놓치지 말고 누리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비밀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잘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두 가지입니다. 예수 영접과 예수님의 능력을 누리는 것 이 두 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만 발견해내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전부 다 발견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를 영접하는 ‘비밀’은 성령의 내주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를 누린다는 말은 지방교회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를 누린다는 말과 같은 의미가 된다고 여겨진다. 류광수 씨가 <현장복음>에서 설명하는 ‘그리스도를 누린다’는 말의 뜻을 살펴보자.

    “실제로 누려야 한다. 성경 공부하다가 예수님에 대하여 다 배웠는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에게 누려지는 것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누리느냐? 그것을 배워야 한다. 이 누리는 것이 너무 너무 안 되어 가지고, 5년 믿어도 그대로요, 10년 믿어도 그대로이다. 어떤 면에서는 오래 믿을수록 더 골치 아프다. 문제는 자라지 않는 것이다”(<현장복음>, 27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자).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누린다는 개념이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누린다는 의미로 귀결된다. 류광수 씨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의미는 양태론적인 사고로서 그리스도가 하나님 자신이며 동시에 성자이며 성령이기 때문이다. 류광수 씨는 왕, 선지자, 제사장이라는 예수의 삼중직분을 상당히 강조한다. 정통신학에서도 예수의 삼중직을 말하고 있는데 왜 류광수 씨는 이것을 “특별히 깨달아야만 한다”고 말할까? 그러나 류광수 씨가 말하는 삼중직은 정통교회의 그리스도의 삼중직이 아니라 곧 ‘기름부음’의 삼중직을 뜻하며 지방교회가 말하는 ‘그리스도’라는 개념으로 해석을 하는 것이다. 즉 류광수 씨가 말하는 기름부음은 지방교회와 동일한 의미로서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실제’이며, ‘임마누엘의 비밀’이며, 그리스도를 누리는 비밀이 된다.

    하나님 자신이 예수의 영으로 들어온 것이 곧 ‘그리스도’이고 ‘기름부음’이며 ‘임마누엘’이며, 그것이 곧 ‘성령내주’와 동일한 것이며 그 개념이 곧 다락방의 ‘영접의 비밀’을 뜻하기 때문이다. 메시야(헬라어: 멧시아스, 히브리어: 마쉬아흐)라는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 헬라어로서는 ‘크리스토스’가 된다. 구약에서는 주로 왕, 선지자, 제사장의 직분을 가진 자가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불려졌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임명된 왕도 있었고, 선지자도 있었고, 제사장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직분을 모두 겸한 사람은 예수님 외에 그 누구도 없었다. 그래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크다는 세례요한도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한다(요 1:20).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예언된 ‘그 그리스도’(the Christ)이시며,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약속된 유일한 메시야’라는 것을 명백하게 말해주고 있다.

    다락방을 비판해 온 박진규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윗트니스 리는 <하나님을 누리는 길>이라는 저서에서, 하나님을 누리는 단계를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첫째 단계는 ‘영을 사용하여 기도하는 것’ 이라고 한다. 둘째 단계는 ‘성육신의 원칙을 적용함’ 이라고 했다(79쪽). ‘하나님을 누리는 길을 경건의 비밀’이라고 말하는 윗트니스 리의 이론과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그리스도의 비밀’이라고 하는 류 씨의 이론 사이에는 유사성이 없을까?”

    “윗트니스 리는 ‘왕을 누리려면 왕이 되어야 한다’면서 하나님을 누리는 방법을 두 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그중에 하나가 ‘임마누엘’이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가장 잘 누릴 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는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 그리스도가 되는 길일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리스도를 누리라고 하시지 않는다”(윗트니스 리, <하나님을 누리는 길>, 81쪽).

    5)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이라는 다락방의 양태론적 교리
    지방교회는 “부활의 실제를 영으로 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락방이 지방교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방교회는 성령이라고 말하지 않고 ‘살려주는 영’ 혹은 ‘그 영’이라고 말하며, ‘완결된 영’이라고 주장한다. “예수가 죽고 부활하여 그 영이 되었다는 것을 부활”이라고 하는 것도 동일하다. 이러한 양태론적인 개념을 류광수 씨도 부활이라고 여러 번 언급한다. 윗트니스 리의 글을 우선 살펴보자.

    “그와 같이 완결된 영으로 살아날 때, 이것이 바로 완결된 영의 부활 안에 사는 것이다. 이 부활은 어떤 능력이나 사물이 아니라 한 분의 인격이다. 이것이 ‘예수님 그분은 부활’이라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더욱이 부활의 실제는 삼일 하나님의 최종완결인 그 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결론 - 삼일하나님, 그리스도, 그 영, 부활은 하나임 - 을 갖는다. 우리가 앞의 이 항목을 따라 살 때에 우리는 부활 안에 있다. 이 부활은 한 인격 - 하나님 - 을 가리키는 것이다”(윗트니스 리,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 사람의 합당한 삶, 62쪽).

    류광수 씨의 글에서도 역시 지방교회와 같이 양태론적인 개념의 성령의 내주를 부활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본다. 그가 말하는 <현장복음> 1과에 구원의 확신에 대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복음을 알려면 다음 3가지를 알아야 한다. 복음이란? 성경에는 두 가지로 말한다. - 첫째, 예수는 그리스도다! 둘째, 이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다. 이 말은 지금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 이것을 강조하였다. 초대교회서 사람을 살린 확실한 메시지가 이것이다. 주는 그리스도시며, 지금도 살아계셔서 보혜사 성령으로 여러분을 세밀하게 인도하고 계신다. 부활의 주님이 늘 강조되어야 한다. 부활하셨기 때문이다”(<현장복음>, 1과 구원의 확신).

    류광수 씨는 또 <복음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계획을 총동원하셨다. 그가 성육신하시고(요 1:14), 피 흘리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도 성령으로 간섭하고 계신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원을 잘못 알고 있다”(<복음편지>, 제6과 구원받은 나는 어떻게 변했는가?).

    6) 예수의 무죄성에 대한 왜곡된 기독론
    예수의 무죄성에 대한 다락방의 주장도 결국 그들의 기독론과 양태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의 무죄성은 예수님의 영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죄가 없다는 것과, 예수를 영접한 거듭난 성도들도 그 속에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동일하게 죄가 없다는 것이다. 류광수 씨는 “구원자 예수님의 특성 4가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구원자는 원죄가 없어야 하고, 둘째 자범죄가 없어야 하고, 셋째 그 영이 하나님이어야 하고, 넷째 육은 사람의 몸을 입어야 한다. 류광수 씨의 글을 보자.

    <복음편지> 3과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첫째 “원죄가 없어야 한다. 창 3:15. 여인의 후손, 아담의 후손이 아니어야 됩니다. 아담의 후손은 전부 저주의 영을 다 받았습니다. 여인의 후손, 이 말은 아담의 후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이 말은 원죄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담 이후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전부 저주의 영을 다 받았습니다. 새 생명 안 받으면 빠져 나올 길이 없지요. 천주교에서는 마리아가 원죄가 없다고 그래요. 마리아가 누구의 후손입니까? 아담 후손 아닙니까? 성경 너무 너무 몰라 그래요. 구원에 대한 기초가 안 되어서 그래요.”
    둘째 “자범죄 없어야. 빌라도가 밤새도록 예수의 죄를 찾아도 찾지 못했습니다.”
    셋째 “고전 15:45~50 그 영은 하나님이십니다.”
    넷째 “육은 사람의 몸을 입어야 됩니다. 이 4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구원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분석해 볼 때, 예수님에게 원죄가 없다는 것은 맞지만, 동정녀가 낳았기 때문에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여자의 후손이므로 아담의 후손이 아니라는 뜻인가? 예수는 육신으로는 아담의 후손(눅 3:38)이고 다윗의 후손(마 1:1)이다. 즉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말이 원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의 인성은 전적으로 마리아에게 취한 것이며,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었지만 성령으로 잉태하셨으므로 무죄하게 태어난 것이다. 류광수 씨는 “예수의 영이 하나님이므로 죄가 없다”는 잘못된 양태론적 기독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요한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든 더러움에 물들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 그 어머니로부터 났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성령의 성별을 입어 아담의 타락 이전 때처럼 순결하고 완전한 출생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실히 상기해 두어야만 하겠다. 즉, 성경이 그리스도의 순결에 관하여 우리에게 주의를 환기시킬 때에는 언제나 그것은 그의 진정한 인성에 관한 말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순결하다고 하는 것은 필요치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기독교강요>, 2권 13장 4항).

    칼빈은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났다는 자체로 예수의 무죄성이 입증되는 것이 아니며, 예수의 무죄성은 그 분이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며, 그 분이 곧 성자 하나님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2000년 만에 회복된 유일한 복음이고, 임마누엘의 비밀이라면, 류광수 씨의 복음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영이시기 때문에 예수가 죄가 없다는 주장은 류광수 다락방의 논리대로라면 성령을 받는 성도들도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7) 류광수 다락방의 사상에 근거한 비성경적 천사동원권, 사탄결박권
    지금까지 문제가 되었던 주장이지만 류광수 씨는 과거에 이것을 수정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현재 다락방 교재에는 여전히 그대로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그것은 그의 사상이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성경에서 천사가 사람을 도와주는 내용이 자주 언급된다. 또 정통신학에서도 사탄과 천사의 활동과 역사를 논한다. 그러나 신자가 천사를 동원하는 권세나 사단을 결박하는 권세를 가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류광수 씨가 주장하는 천사동원권이나 사단결박권은 앞의 양태론적 기독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가 공청회에서 다시는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그 순간을 빠져나가려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사탄결박권, 천사동원권이라는 용어에 담겨있는 사상은 신자 안에 양태론적인 삼위일체인 ‘하나님 자신’(그리스도)이 직접 명령을 한다는 뜻으로, 지방교회가 말하는 God-man의 사상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하나님의 자녀에게 임하신 성령의 내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성육신은 삼위일체 중에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참 하나님으로써 참 사람이 되신 사건이다. 그러나 그분이 비록 사람이기는 하셨지만 성자 하나님의 인격으로 오셨기 때문에 두 분이 아니라 한 분 그리스도시요 주로써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써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되신 것이다. 성도들에게 임한 성령의 내주는 예수님의 성육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로서 사람이 하나님 되는 God-man 사상이 아니다. 그러나 다락방에서는 지방교회와 같이 이 둘을 같은 의미로 보기 때문에 각종 ‘비밀’이라 칭하는 교리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며, 그것은 결국 ‘천사동원권’, ‘사탄 결박권’ 등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세를 사람도 행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들은 우리가 믿는 복음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복음이다. 류광수 씨가 주장하는 내용을 그의 현장복음 멧세지 <예수의 이름>에서 찾아보자.

    “여호와 이름을 부르는 것과 예수 이름을 부르는 것과 차이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 올 수 있고, 없고의 차이다.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것을 가리켜 ‘영접’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로 만난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 이름 속에는 하나님을 바로 만나는 그런 효과를 주셨다. 이때 바로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해를 잘해야 된다.”
    “악령을 좇아낼 때,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악한 영아 물러가라!’고 명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더 많이 깨달은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내게 있는 주 예수께서 네게 명령하시니, 나가라!’고 한다. 이게 더 정확한 것이다” (<현장복음>, 예수의 이름).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 하늘권세 땅의 권세를 가지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우리의 배경이다. 그리고 이미 우리 속에는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이 계신다. 바로 그 분의 권위를 의지하고, 예수 이름을 놓고 명령 기도하면 사단은 꼼짝없이 결박당하고 추방당한다”(<현장복음>, 6과 응답받는 기도).

    “이 위대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셨다. 이 예수 이름을 부르면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고, 여러분이 예수 이름을 부를 때, 사탄의 권세는 깨어진다. 어마어마한 역사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라는 이 말이 보통 말이 아니다. 안 되는 것이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 되시는 분이 직접 명하노니! 라는 말이다. 그래서 역사가 막 일어나는 것이다”(<현장복음>, 19과 그리스도의 부활).

    “주의 종들, 특별히 기도하는 종들에게는 예수 이름의 어마어마한 권세가 있다. 그런데 그것을 안 쓴다. 안 쓰면 아무 역사도 안 일어난다. 두 가지는 명령해야 된다. 첫째, 악령을 보고는 달래서 안 된다. 명령해야 된다. 둘째, 천사들을 명령해야 된다. 이렇게 하면 응답이 즉각 온다. 효과가 대단하다. 왜? 권세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현장복음>, 4과 예수의 권세).

    류광수 씨는 천사를 ‘하나님의 종’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심부름하는 종’으로 보고 성도에게 천사동원권있다고 수많은 곳에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신구약에 나타난 천사 관련 성구(현장복음, 5과)들은 성도가 천사를 동원한 경우가 단 한 번도 없고 하나님이 주권으로 보내어 역사한 것이다.

    2. 김기동 베뢰아의 이원론적 귀신론과 유사한 다락방의 귀신론

    다락방에서는 베뢰아 귀신론과 같이 귀신이 자신의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불신자의 사후의 영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한사코 자신들이 김기동 베뢰아 귀신론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그들의 기본적인 주장은 베뢰아의 이원론적 귀신론과 동일한 것임이 드러난다.

    1)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한 왜곡
    다락방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두 성경구절이 있다. 하나는 창세기 3:15이고 또 하나는 요한일서 3:8이다. 창세기에서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원수가 되게 하고 뱀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의 발뒤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요 여자의 후손은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다는 말씀이요, 요한일서에서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신 것이라는 말씀이다. 류광수 씨는 베뢰아의 사상과 같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마귀를 멸하는 것이고 예수를 영접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서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며 이것을 전하는 것이 복음 전파라고 한다. 류광수 씨의 글을 <현장복음> 멧세지에서 살펴보자.

    “요일 3:8에 예수님께서도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다고 했다. 그렇다면 마귀의 일이 무엇인가? 창세기 3장 사건이다. 인간이 하나님 모르도록 해서 죽게 하는 것이다. 그것을 멸하러 오셨다. 예수님이 그 일을 또한 우리에게 맡기셨다. 그래서 마귀의 일을 멸하게 하는 것이 복음 전파이다. 롬10:13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 이름을 부르면 사단의 권세는 깨진다”(<현장복음>, 42과 깨어있을 이유).

    또 전도에 대한 정의를 “전도는 우상숭배자를 건져내는 것입니다”라고 규정한다(<다락방 전도란 무엇인가?>, 세계복음화를 위한 다락방전도훈련원 발행, 14쪽). 이는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온 죽음에서 건져내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손아귀에서 건져내는 것이 곧 전도의 목적임을 알 수 있다.

    김기동 씨의 <신앙문답정선> 제97번을 보자.

    “요한일서 3:8과 요한복음 3:16의 관계 : 하나님의 의도는 마귀를 형벌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마귀를 멸하기 위하여 천지를 지으셨고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셨던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에 앞서 마귀의 형벌계획이 하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다시 말해 타락한 인간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낼 계획이 세워진 것이 아니라 독생자를 보내기 위하여 처음부터 인간이 창조되었음을 알아야합니다”(김기동, <신앙문답정선>, 97번 199쪽).

    위의 내용들을 보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인간의 구원보다 앞서 마귀를 멸하는 것에 더 치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2) 가계저주론과 유사한 다락방의 조상의 죄
    류광수 씨는 원죄와 자범죄 외에 별도로 조상의 죄를 분류하여 가르친다. 즉 소위 조상들의 죄가 유전된다고 하는 가계저주론7) 을 가르치고 있다. 류광수 씨는 원죄와 자범죄 외의 또 다른 죄로서 조상의 죄를 거론하고 있다. 류광수 씨가 원죄와 자범죄 외에 별도로 구별하는 ‘조상의 죄’가 무엇인가? 원죄도 아니고, 자범죄도 아닌 조상들이 지은 모든 죄들이 유전된다는 것이 아닌가?

    또한 류광수 씨는 “예수는 여자가 낳았으므로 죄가 없다”는 주장을 하였는데, 그것은 ① 영이 하나님이므로 죄가 없다 ② 예수는 여자가 낳았으므로 조상죄가 없다는 베뢰아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복음편지>. 기본멧세지 10쪽, 4과 왜 예수만이 길이 되는가? 5과 나는 왜 확신이 없는가?).

    베뢰아 김기동 씨는 아담의 영이 계속 유전된다고 주장하며, 여자의 죄는 유전되지 않는다고 주장을 한다. 그는 예수를 믿으면 원죄와 자범죄와 조상의 죄에서 해방을 받는다고 한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죄에 대한 질병에 대해서 류광수 씨는 <복음편지> 10과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죄로 인한 병은 세 가지 인데 ① 조상의 죄 - 우상숭배는 삼, 사대까지 이르는 병이다(출 20:4, 삼하 12:15). 이름도 밝혀지지 않으며 의술로는 불치병으로 드러나게 된다. ② 원죄 - 창세기 3장 사건이다. 범죄이후로 인간의 소속이다. 그 영이 저주받은 상태에 있으므로 치료가 불가능해 진다. ③ 자범죄로 인한 병(왕하 5:27, 대하 21:12~19, 고전 5:5) 계속 도박을 한다거나, 계속 술을 먹는다거나 그러니 병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중요한 병이 오는 것이다”(<복음편지> 제10과 기도하면 왜 질병이 떠나가는가?).

    김기동 씨의 글을 보자. <베뢰아 원강> 659쪽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러면 범죄는 하와가 먼저 했는데 왜 하와의 죄가 유전되지 않고 아담의 죄가 유전됩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그 후에 하나의 영만 지으셔서 그 영이 유전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담을 통해 계속 한 영이 넝쿨처럼 유전되어 나갑니다. 하와가 먼저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 먹음으로 사단적인 죄를 범했을지라도 이 사단적인 죄가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하와가 주는 실과를 먹음으로 불순종한 아담의 죄가 유전됩니다, 그래서 하와의 죄는 유전되지 않고 하와 한 사람만 사단적인 죄를 범한 것으로 끝납니다”(<베뢰아 원강>, 659쪽).

    류광수 씨는 조상의 죄의 결과로 오는 저주 곧 질병은 3, 4사대까지 이르는 병이며 불치병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불치병은 조상의 죄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불치병이 없어야만 하며, 또한 불치병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걸리는 병이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주장 역시 이원론적 귀신론에 의한 것이요 가계저주론과 같은 맥락에 있는 주장이다.

    3) 베뢰아 사상과 동일한 다락방의 사탄배상설8)
    예수가 오신 목적에 대해서 요일 3:8의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신 것”이라는 내용에 대해서 류광수 씨와 다락방의 양육교재는 수없이 기록하고 있다. 다락방은 과거 사탄배상설이라는 비판을 받았는데 지금도 그러한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것이, 대속을 빚을 진 것이라는 뜻만으로 해석하며, 법대로 죄의 대가를 지불하였다는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류광수 씨의 글을 보자.

    “대속물이라는 말은 뭔가 갚아주는 것 아닙니까? 사탄에게 우리의 실패의 대가를 전부 다 갚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래 놓고 주님이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다락방 류광수는 왜 이단이라고 하는가?>, 142~143).

    “이 확신이 없으면 모든 일이 흔들린다. 그 어떤 일도 이 확신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그것은 돈을 다 지불한 노예가 아직도 그 일터에 있는 것과 같고 빚을 다 갚은 자가 아직도 사기꾼에게 계속 빚 독촉으로 재산을 빼앗기는 것과도 같다”(<현장복음>, 22과, 29과, 1. 구원의 확신).

    위의 글을 보면 류광수 씨는 대속을 사기꾼에게 빚을 진 것으로 해석하면서 사탄에게 빚을 졌고 사탄에게 빚을 갚은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대속(속죄)라는 개념은 류광수 씨가 정의하는 것과 같이 “빚쟁이에게 빚을 갚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기 위하여 주님이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드린 것”이다. 대속(代贖)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어떤 보상행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뜻한다. “죄의 값이 사망”이기 때문에 구약에서는 죄를 전가 받은 짐승이 대신 죽은 것이며 신약에서는 예수가 온전히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드린 것이다. 류광수 씨는 예수님의 구속을 ‘법적인 해결’이라는 말로 베뢰아에서 쓰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다락방의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민병완 교수라는 사람은 류광수 씨의 사단배상설의 주장은 “사탄에게 원수를 갚는다”는 뜻이라고 궁색한 변명까지 한다. 그렇다면 아래 글은 무엇인가? <영접의 열두 가지 의미>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영접은 기도응답의 모든 법적 조건을 갖춘 것입니다”, “예수 영접입니다.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있음을 깨닫고 능력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조건을 다 소유했습니다. 실제로 뭐냐하면 법적인 조건을 다 갖추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법대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것도 법대로 승리하셨습니다. 법대로 모든 죄의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창세기 2:17의 법대로…그렇기 때문에 영접, 이 말을 예사로 생각하시면 안돼요. 영접, 이 말은 내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어 버린 것입니다. 창 3:15을 성취한 것입니다. 법적으로 해결을 해 버렸습니다. 예수 영접하는 자는 기도의 조건을 모두 소유한 것입니다. 나가서 복음 전하는데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을 건져내는 축복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정말로 모든 것을 다 소유했습니다.”

    예수가 마귀를 합법적으로 해결하였다는 주장은 베뢰아의 주장이다.

    “어떤 사람은 ‘마귀가 도전했을 때 당장 하나님이 멸하시면 될 터인데 왜 그렇게 오랫동안 묵인했느냐? 하지만 하나님은 반역하는 천사를 인정해서 묵인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불법을 합법으로 처리하시려고 한 것입니다”(김기동, <마귀론>(상), 66쪽).

    위의 글들은 결국 사단에게 배상을 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낸다는 사단배상설임이 드러난다.

    4) 자신들만이 마지막 시대의 남은 자라는 렘넌트 사상
    다락방에서는 ‘렘넌트’(Remnant, 남은 자)9) 라는 단어를 자신들의 교회에 적용시키고 있다. 다락방에서는 이 렘넌트라는 용어가 청년들에게 사용되는 용어로서 ‘다음 세대’를 뜻한다고 말하지만, 성경에서 렘넌트라는 용어가 그런 뜻으로 사용된 적은 없다. 이 렘넌트라는 단어는 ‘남는 자’라는 뜻의 영어 단어로 이 용어는 안식교와 여호와의 증인들이 사용하였고, 이 단어는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배타적인 의미와 종말적인 심판의 의미가 있는 용어로서 다른 자들은 다 심판을 받지만, 소수의 남는 자들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락방은 ‘남은 자’란 이사야 6:13의 그루터기라고 변명한다. 그러나 그루터기라는 뜻 자체가 소수의 남은 부분인 그루터기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엘리야 시대에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 7천명을 남겨두셨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믿음을 끝까지 지킨 사람들을 말한다. 이 ‘남은 자’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특정교회나 자기 교회를 적용시킨다면, 그것이 아무리 다음 세대를 말한다고 변명해도 위험한 이단적 사상일 수밖에 없다. 마치 요한계시록 7장의 144,000명이 자기 교회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로마서에서는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함과 같으니라.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두시지 아니하였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롬 9:27~29)라고 기록하고 있다.

    렘넌트가 하나님의 남겨두신 믿음의 사람들로서 어느 특정한 집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결론

    본 연구보고서에서 인용한 자료는 <복음편지>, <현장복음>, <기초멧세지>, <영접의 열두 가지 의미>와 같은 다락방의 가장 최근의 양육교재이며, 현재(2012년) 다락방교회인 예원교회와 서울 임마누엘교회의 자료실과 다락방 교회에서 직접 다운을 받아서 인용한 것이다. 그 자료들에는 류광수 씨가 직접 설교한 내용이 녹취되어져 있음으로 인하여, 평소에는 감추어졌던 그 사상이 잘 설명되어 있었다. 오히려 지방교회 사상은 더 노골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다락방은 지방교회의 사상을 그대로 모방하였으며, 그것이 산해원교회(이태화 목사)으로부터 배운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 수가 없으나 그 사상은 유사하다. 그러나 지방교회의 중요 교리인 God-man 사상의 근거가 되는 ① 양태론 ② 아폴로네리우스적인 기독론 ③ 인간론과 비교할 때에 거의 일치하고 있다. 특히 지방교회가 사용하는 특수한 용어 ‘그리스도를 누린다’ 혹은 ‘그리스도의 실제’, ‘임마누엘의 비밀’ 등도 같으며, 특히 부활의 의미를 지방교회가 양태론적으로 해석하여 예수가 성령으로 오는 것으로 주장하는데, 다락방에서도 부활을 예수가 성령으로 오는 것으로 동일하게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귀신론이라고 불렸던 베뢰아의 이원론 사상에서 비롯된 주장들은 수정되거나 바뀌기는커녕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배타적인 교회론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한국의 유수한 9개 교단이 이단으로 공식 규정한 다락방에 대해서 본 세계한인이단대책연합회는 다락방의 이단성을 재확인하며 확실하게 이단임을 공표하는 바이다. 따라서 다락방을 이단성이 없다고 옹호하거나 지지하여 주는 단체들과 인사들에 대해서는 이단옹호자로 규정하고 엄중한 경고와 질책이 따라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다락방을 영입한 교단이나 회원교단으로 가입시킨 단체에 대해서도 이단이나 이단옹호단체로 규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1. 다락방 출판 서적
    <복음편지>, <현장복음>, <기초멧세지>, <영접의 열두 가지 의미> 등 다락방 양육교재
    류광수, <파급단계>
    류광수, <성경적인 다락방 전도>
    허만혁, <다락방 전도란 무엇인가?>, 세계복음화를 위한 다락방전도훈련원, 1996.
    이외에 다락방 서적 다수와 다수의 설교 동영상

    2. 각 교단의 다락방 비판 자료
    박진규, <다락방 류광수 왜 이단이라 하는가>, 경향문화사, 1997
    박용규, <다락방 이단 연구 보고서>, 『신학지남』 282호, 2005.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개혁) 이단대책위원회·신학위원회, “전도총회 류광수 목사에 대한 이단성 심의 보고 및 신학적 문제에 대한 평가”, 2011년 4월 16일
    민남기, <류광수 다락방의 전도는 다른 복음이다>, 2012.
    이영호, <류광수 다락방의 지방교회 사상>, 2012.
    고신총회, “류광수 씨와 다락방 전도학교 보고서”, <교회와신앙>, 1995. 11.
    박진규, “류광수 씨의 다락방교리와 김기동 귀신론과의 유관성”, <교회와신앙>. 1995. 8
    고려총회 신학부 연구보고서, “개혁주의 입장에서 본 다락운동에 나타난 실상”, <교회와신앙>, 1995. 11

    3. 지방교회측 자료
    윗트니스 리, <세부분의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하나님>, 복음서원
    윗트니스 리, <구약의 예표와 신약의 계시에서 본 하나님의 경륜>, 복음서원
    윗트니스 리, <새 예루살렘>, 복음서원
    윗트니스 리,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사람의 합당한 삶>, 복음서원
    윗트니스 리, <하나님의 경륜>, 복음서원
    윗트니스 리, <하나님을 누리는 길>, 복음서원
    워치만 니, <영에 속한 사람들>, 생명의말씀사

    4. 김기동 베뢰아측 자료
    김기동, <베뢰아 원강>, 도서출판 베뢰아, 2005
    김기동, <귀신론>(상,중,하), 도서출판 베뢰아
    김기동 <마귀론>(상,중,하), 도서출판 베뢰아, 1993.
    김기동, <성도가 알아야 할 하나님의 의도>, 도서출판 베뢰아, 2001.
    김기동, <성령을 알자>, 도서출판 베뢰아, 1992.
    김기동. <신앙문답 정선>, 도서출판 베뢰아, 1999.
    천봉재, <한국교회의 새 물결과 김기동 목사>, 새앎출판사, 1995.
    김기동, <내가 체험한 그리스도의 신유와 거룩한 이적>, 도서출판 베뢰아, 2002.
    김기동, <주기도문>, 도서출판 베뢰아, 1996.
    김기동, <영혼을 그늘지게 하는 요소>, 도서출판 베뢰아, 2000.
    김기동, <7대 능력>, 도서출판 베뢰아, 1998.

    5. <교회와신앙> 및 <현대종교>
    “류광수 목사 이단성 검증 공청회”, <교회와신앙>, 1998년 10월호
    “다락방이 2천년 만에 복음 회복했다”, <교회와 신앙> 2008년 1월 20일자
    “오직 전도 명분 다락방 교단창립 순수한 전도 열정인가? 교단분열인가?”, <현대종교>, 1998년 2월호
    “다락방 전도운동의 현장을 찾아가다”, <현대종교>, 1996년 10월호
    엄무환, “다락방 전도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현대종교>, 1996년 9월호
    조찬구, “류광수씨 다락방전도운동 그 겉과 속은 올바른가?”, <현대종교>, 1995년 12월호


    [미주]

    1) 출처: 바이블파워(http://www.biblepower.co.kr) 2011.06.28. (개혁총회의 다락방 전도총회 영입 논란) 작성자 박동일
    2) 아폴리네리우스(Apollinarious는 라오디게아 감독으로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통일성을 인정하지 않고 인격체의 단일성을 주장하다가 예수님의 신성만 인정하고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예수님의 영혼은 하나님이지만 예수님의 육체는 인간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로고스와 인간의 육신이 단일한 성을 가진 혼합체를 형성한다는 것이며 인간에게 있어 지배하는 요소가 영혼인 만큼 그리스도에게 지배적인 단일성은 하나님의 신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단성론(monophysitism)을 주장하여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3) 사벨리우는 이집트 펜타 포리스 출생으로 3세기 신학자이며 아리우스와 같이 양태론적 일위설을 주장한 자이다. 그는 프락세아스, 에피고누스, 노예투스, 클레메니스등과 함께 한 하나님이 세 모양으로 현현한다는 양태론적 삼위일체를 주장한 것이다.
    4) 지방교회에서 주장하는 하나님=에수=성령과 같은 양태론과 사람이 하나님(God-Man)이 될 수 있다는 신화사상은 지방교회의 중요한 사상이다.
    5) 정윤석, <교회와 신앙> 2008년 1월 20일자, “다락방이 2천년 만에 복음 회복했다/류광수 목사 이단시비 부른 다락방 특수화 주장 여전”
    6) Ibid. 류광수 씨의 말
    7) 가계저주론은 멜릴린 히키의<가계의 저주를 끊어라>와 한국의 이윤호선교사의 <가계저주론> 의하여 확산되었는데 이는 과거 조상이 지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저주가 임했는데 그것이 가계를 타고 내려온다는 사상으로 예수를 믿는 자에게도 저주가 내려온다는 주장이다. 한국교계에서 이단성 있는 사상으로 규정되었다.
    8) 사단배상설(satan ransom theory)은 예수님의 피값을 마귀에게 지불하고 마귀에게서 우리를 사오는 것이라는 주장으로서 비성경적 이단설이다. 이것은 초대교회 이단인 마니교(Manichaeism)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리겐이 주장하였다.
    9) 남은 자(the remnant) 사상은 이사야를 비롯해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고하는 가운데 선지자들에 의해서 외쳐진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남겨둔 사람들이 있다는 사상으로서 로마서 9:27과 11:5에 바울 사도가 해석을 하고 있다. “은혜로 택하심을 받아 남은 자”“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 는 사상은 하나님이 범죄한 백성을 다 멸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남기신 자를 말한다. 왕상 19:18의 남겨진 7천명을 남겨두신 사실에서 유래한다.

    출처:세이연

    http://www.youtube.com/watch?v=p7Jwh9oXw0c&feature=player_embedded

     

    위 주소를 클릭하시면 <그리스도인의 성숙>이라는 고 김성수 목사 설교 동영상으로 갑니다.

     

       성령님을 좇아 선한 양심으로 착한 행실이란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는 성화의 삶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를 드러내고자 하는 공염불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은 나를 본받으라.”고 말씀하셨던 바울 사도, 선생된 자 바울 사도께서 교회 감독이나 교회 집사의 자격을 말씀하신 게 공염불이었는지? 속된 말 공염불이라는 말까지 썼습니다.

     

        서울 서머나교회 홈피 교회 소개란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더군요.

     

        서울 서머나 교회는 사람들을 훌륭한 신앙인으로 만들어 세상도 칭찬하는 그런 존재로 변화시켜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회도 아닙니다. 진정한 교회는 사람을 훌륭하게 성숙시켜 사회에 공헌하는 집단이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포함한 이 세상(호 코스모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장렬히 삭제돼야 할 존재이지 그 존재 자체의 영광을 위해 교회를 만드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포함한 이 세상(호 코스모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장렬히 삭제돼야 할 존재이지김성수 목사는 고인이 되셨더라도, 서머나 교회에게 김성수 목사가 장렬히 삭제될 때는 주님께서 오실 때인가 봅니다. 아니면, 서머나교회가 ‘고 김성수 목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장렬히 삭제된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고 김성수 목사 설교 동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던지······. 정말 이렇게 여기고 드리는 예배라면 해괴한 예배는 아니라는 생각, 즉 우상숭배의 예배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개혁주의마을
    하나님의 심판과 백보좌 1, 폴 워셔

     

     

     

    하나님의 심판과 백보좌 2, 폴 워셔

     


    모르드개 같은 사람 없나요?

    대장쟁이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 말씀과 신앙을 두렵고 무겁고 힘 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은 힘들고 두렵고 어렵고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힘들게 듣고 하나님을 어렵게 섬기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은 “항상 기뻐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꿀송이 같습니다. 하나님은 재미 있으시고 유머러스하신 분입니다. 율법 가운데에도 하나님께서는 금방 혼인한 남자는 군대도 빼주고 집에서 아내를 즐겁게(♥) 해 주라고 말씀하시고, 성경 한 가운데에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노골적인의 언어로 쓰인 아가서도 넣어놓으시고, 또 신나고 흥미진진한 드라마 같은 에스더도 넣어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신나게 읽는 책이 에스더가 아닐까 합니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300년 무렵부터 에스더에 나오는 부림절을 가장 신나는 명절로 삼고  있다고 합니다. 아달월,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이른 봄인 2-3월의 음력 14일이 되면 유대인들은 회당에 모여 두루마리로 된 에스더를 읽으며 유대민족을 위기에서 구한 영웅인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기리고 다채롭고 즐거운 행사들을 즐깁니다. 에스더서를 낭독할 때 ‘하만’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사람들은 도구들을 이용해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발을 구르면서 야유를 보낸답니다. 에스더 이야기를 통하여 어린이들에게 목숨을 걸고 자기 민족을 구해낸 에스더의 애국 애족심을 가르치고, 또 만두 같은 크기로 사람 귀 모양의 떡을 만들어 ‘하만의 귀’라는 뜻의 ‘오젠 하만’을 만들어 먹는답니다. 예쁜 공주의상, 카우보이 차림, 옛 로마 호민관의 관복, 색색의 가면 등을 차려 입은 어린 아이들이 온 거리를 누비며 퍼레이드를 벌일 때면 축제는 절정에 이릅니다. '벤 예후다'라는 예루살렘의 중심거리는 울긋불긋한 옷, 머리에 쓴 마스크 등으로 뒤덮이고, 사람마다 플라스틱 망치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머리를 '삑' 소리가 나게 때리고 때린 사람이나 맞은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웃고 즐긴답니다. 그렇게 부림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신나고 즐거운 명절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지만 에스더서의 줄거리 앞부분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페르시아의 황제 아하수에로는 연회를 베풀고 만조백관 앞에서 황후 와스디(Vashti)의 미모를 자랑하기 위하여 그녀에게 출두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황후는 왕의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진노하여 황후를 폐위하고 전국에 영을 내려 후임 황후를 간택하게 되는데 유대인 처녀 에스더가 황후로 선택받게 됩니다. 그 에스더는 부모를 여읜 후 그녀의 사촌오빠 모르드개 밑에서 자랐습니다. 그 후 모르드개는 대궐 문 앞에 앉아 있다가 황제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우연히 알게 되어 에스더를 통하여 황제에게 보고토록 하였고 황제는 화를 면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각의 후손 하만이란 자가 왕의 총애를 받아 하늘을 찌르는 세도를 휘두르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고 절을 합니다. 그러나 유독 모르드개만 그에게 무릎도 꿇지 않고 절도 하지 않습니다. 하만은 화가 나서 모르드개만 아니라 유대인 전체를 진멸할 흉계를 꾸밉니다. 진멸할 대상이 유대민족이라는 것을 숨긴 채 ‘악한 족속’이라고 써서 그 악한 족속을 일시에 진멸하겠다는 계획을 세워 왕의 재가를 받아냅니다. 각 도에 유대민족을 진멸하라고 명령하는 조서가 내려가고 이에 유대민족은 통곡하며 부르짖습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연락하여 왕의 앞에 나가서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거절합니다. 함부로 왕의 앞에 나가면 죽임을 당하는데 에스더가 한 달 넘게 왕의 부름을 받지 못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인지 어찌 아느냐?’고 에스더의 결단을 촉구합니다. 에스더는 유대인들에게 금식을 요청하고 자신도 삼일 동안 금식을 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에스더를 읽으면서 주인공인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비장한 각오에 가장 큰 관심을 갖게 됩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오늘 화를 불러온 모르드개의 뻣뻣한 자세에 대하여 먼저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어찌보면 모르드개는 지나치게 꼿꼿한 태도로 불필요한 박해를 불러일으킨 사람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모르드개는 대궐문에 앉아서 천하를 호령하는 하만에게 허리를 굽히지 않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대궐문에는 왜 나와 앉는단 말입니까? 대궐문에 앉았으면 적당하게 하만에게 허리 굽히는 시늉이라도 하든지, 그게 정 싫으면 대궐문에 나오지 말든지, 꼴보기 싫으면 하만이 올 때는 화장실에 가는 척 피해버리든지 했더라면 쓸데없이 그렇게 엄청난 위기와 화를 불러오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모르드개는 굳이 대궐문 앞에 나와서 화를 자초하고 하만을 피하지도 숙이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이 일로 유대인들이 굵은 베를 입고 애통하며 금식할 때 에스더가 다른 옷을 보내면서 굵은 베를 잠깐 벗어놓고 대궐로 들어오라고 권하였을 때도 이마저도 거절합니다. 참으로 골치 아픈 사람입니다. 깐깐한 고집불통, 대쪽 같은 딸각발이 선비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르드개의 이 같은 고집과 기개와 지조를 사용하셔서 기이한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오늘날 모르드개 같은 그리스도인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눈을 뒤집고 찾아도 없습니다. 왠만하면 티나지 않게, 적당히 타협하고 모나지 않게 처신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요 슬기요 요령인 시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이하고 놀라운 일을 행하고 싶으셔도 모르드개 같은 사람이 없어서 도무지 그럴 기회가 없으신 것 같습니다.
    이 시대에 어디 모르드개 같은 사람 없나요?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가 막히는 반전(反轉)  (0) 2014.03.10
    죽으면 죽으리라.  (0) 2014.03.04
    무너진 성벽 쌓기  (0) 2014.02.25
    우리가 인을 치나이다  (0) 2014.02.24
    서른살 짜리 일본처자가 해냈단다.  (0) 2014.02.13

     

    이재록1.jpg

     

    자료1: 예장통합의 공식자료

     

    1. 이재록(만민중앙교회)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에서 지난 해(99년) 이재록 씨를 이단으로 전격 규정한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먼저 한기총은 한국교회 전체를 대표한다는 위상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재록 씨는 한국교회 전체가 이단으로 규정한 셈이다. 그 다음은 이재록측의 로비가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이씨의 이단성이 그만큼 농도가 짙었음을 반증해준다. 이씨의 이단성은 구원론, 신론, 인간론, 교회론 등 신학 전반에 걸쳐 드러났다. 일부에서는 만민중앙교회가 붕괴될 것으로 내다보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씨측에서는 이를 전면 부인한다. 이렇게 되나, 저렇게 되나 이재록 씨에 의한 최대의 피해자는 이씨의 핵심 신도들일 것이다.

     

    이재록 씨 문제의 개요

    이재록 씨는 서울시 구로구 구로동 851번지 소재 만민중앙교회 담임목사이며, 예수교대한연합성결교회 총회장과 연합성결신학교 이사장이다. 그는 '만민교회' 내지는 '만민성결교회'란 이름으로 많은 지교회들(국내 : 25개 처, 해외 : 11개 처)을 세워 국내는 물론 국외까지 교세를 확장시켜 가고 있다. 만민중앙교회 일부 신도들은 1999년 5월 12일 MBC-TV의 'PD수첩'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이재록 씨에 대한 내용을 방송하자 방송국 주조정실을 점거하여 방송 중단시키는 큰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이씨는 이미 정통기독교에서 수용할 수 없는 이단적 설교를 함으로써 1990년 5월 그가 속했던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 총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된 바 있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로부터도 1999년 4월 30일에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신론의 문제점

    이재록 씨의 신관에는 심각한 이단성이 존재한다. 그는 우선 '하나님의 편재성'에 제한을 가하는 말을 한다. 그는 1998년 7월 3일 설교에서 '하나님이 보좌에서 자기 교회 강단에 강림하신다'고 말했다. 그는 "제가 아버지, 강림하셔 제단에 임하소서 하면 아버지가 그대로 오시는 것 보실 수 있을 거예요. … 아버지가 지금 빨리 오고 싶어 견디지를 못하시니까 제가 빨리 끝내야 되겠어요. 그래야 아버지 빨리 오시죠."라고 말하여 자신이 하나님을 부르면 오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또한 "새예루살렘의 열쇠를 놓고 가셨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1998. 7. 5. 저녁예배).

    하나님은 영이시기에(요 4:24) 물체와 같이 어떤 특정 장소에 제한적으로 존재하시고, 또 제한적인 장소에 머무르시는 분이 아니시다. 또한 그는 하나님을 자기가 마음대로 부르면 오시고, 그렇지 않으면 안 오시는 분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을 인간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로 격하하는 것으로 기독교 신앙에서는 용인될 수 없는 신성모독이라 할 수 있다.

     

    기독론(구원론)의 문제점

    이재록 씨는 자신이 예수님과 하나되었다고 하였다. "해와 달과 별에 나타나는데, …… 달 속에 전등 속에 저를 놓아두시고 주님이 함께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와 나는 하나'라고 말씀하시고 전세계에 선포하고 있지 않느냐 이 말예요. …"(1998. 7. 5. 주일저녁)라고 하여 자신을 예수님과 동일시하고 있다(1998. 10. 1. 금요철야집회). 또한 그는 자신은 "원죄도 자범죄도 없는 깨끗한 피를 가졌기에 죽음이 피해간다"고 주장하였다(1998. 7. 5. 주일저녁).

    이재록 씨는 여기서 더 나아가서 기독교 구원론,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죄 씻음을 받고 그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보편적 진리에 반하여, 마치 자신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자신을 신격화하고 있다.

    "(자신이) 아브라함 등 모든 선지자들과 주님의 제자들을 부르면, 사장이 부르면 오는 전무처럼 나타나는데, …… 그리고 선지자들과 제자들이 자신에게 인사를 한다."(1998. 7. 5. 저녁예배, 1998. 7. 18. 금요철야집회)

    (자신은) "영이 하나님 보좌 좌편에 앉아 있으며"(1998. 7. 8. 주일저녁), "죽고, 사는 권세가 있으며"(1998. 7. 5. 주일저녁), "물위에 걷는 것 외에 66권의 모든 말씀을 이루었다"(1998. 6. 28. 주일 저녁), "하나님이 하나가 되었기에 해와 달과 별에 나타나는데 이는 (자신이) 특허를 냈다"(1998. 6. 28. 주일예배, 1998. 10. 16 금요철야).

    이상의 예에서 보는 것 같이 이씨는 마치 자기가 구세주요, 자기를 통해서 구원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예수님만이 만민의 구세주이심을 부인하는 결과가 되어 기독론과 구원론에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인(간)론의 문제점

    이재록 씨의 "부모로부터 받은 모든 피는 다 쏟아 버렸고, 주님과 같은 죄성이 없는 새 피를 받아 자기는 원죄도 자범죄도 없다"(1998. 7. 5. 주일저녁예배)는,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의 결정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롬 5:12)고 하여,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간은 원죄와 자범죄가 있음은 성경에서(시 14:, 53:), 교회 역사에서 누누이 강조, 지적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만일 인간이 죄가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결과'(요일 1:8, 10)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자신을 원죄도 자범죄도 없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신격화시키는 결과가 되어 기독교 신학의 인론에 중대한 오류가 된다.

     

    성령론의 문제점

    이재록 씨는 성령론에 있어서 성령의 치유의 능력을 자신이 치유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는 '어떤 이들의 [자신의] 간증 책만 읽어도 그대로 막 치료받는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진만 안고 자도 치료받고, 꿈속에 나타나서 자기가 안수해도 치료받는다'고 주장한다. 또 '자신이 기도한 손수건만 만져도 치료된다'는 등의 말을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치병을 하는 것이 아니고, 바울과 요한이 그랬던 것 같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는 것임(행 3:6)을 밝히 보여주고 있다. 치유의 은사는 성령의 은사이지 자신의 책을 읽거나, 사진을 안고 자거나, 손수건을 만져서, 또는 자기가 꿈에 안수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나, 기독교 역사 어느 곳에도 없었던 일로 성령의 신유 사역을 근본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교회론의 문제점

    이재록 씨는 1998년 7월 3일에 자신의 "만민중앙교회에 하나님의 보좌가 내려왔고"(1998. 7. 5. 주일저녁예배), "2천년 전의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이 자기 교회에 나타났다"(1998. 7. 10. 금요철야집회)고 주장한다. "만민중앙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하늘에서도 천군 천사들이 똑같이 예배드린다"(1998. 7. 17. 금요철야집회)고 주장하였다.

    이는 만민중앙교회를 특별히 하나님이 성별하고 사랑하신다는 의미로서 보편적 교회론에 위배되는 주장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one, holy, catholic, apostolic)이다(각종 신조-사도신조, 니케아, 칼케돈, 웨스트민스터 등). 따라서 이 땅에 편재한 하나님의 진리를 보유한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고, 하나님은 특별한 교회에 강림하시거나 어느 특정 교회만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종말론과 내세론의 문제점

    이재록 씨는 종말론에서도 중요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재림을 알려 주셨다. …… 휴거 될 것을 알려 주셨다"([죽음 앞에서 영생을 맛보며] p.198)고 기록했다.

    이는 언제 예수님이 재림하실 지는 인자도 천사도 알지 못한다(마 24:36)고 하였는데, 어떻게 자기에게만 알려 주셨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는 또 말하기를 마지막 심판 때에 자기가 심판장 되시는 하나님 좌편에 앉는다고 말한다. 하나님 우편에는 예수님이 앉으시고 자기는 좌편에 앉아 "심판 날에 주님 옆에서 성도들을 위해 변호해 줄 것"이라고 선포하면서,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은 새예루살렘에 들어가 살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1998. 7. 17. 금요철야예배).

    그러나 신약성경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여 인간은 누구나가 심판에 이른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심판대에 앉을 수 없고, 심판대에 서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씨는 자기가 주님의 좌편에 앉아 성도들을 위해 성도들을 위해 변호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신격화 내지는 예수님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종말에 천하의 모든 인간이 심판대에 설 것이라는 기독교의 종말론에 크게 위배되는 일인 것이다(사도신조). 성경의 어느 곳에도 교회 역사의 어느 곳에도 이런 허무맹랑한 기사나 근거는 없다.

    또한 그는 내세관에서 5단계 천국관을 이야기하면서 믿음을 분량에 따라 상급과 거하는 처소가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우리의 모습은 예수님처럼 누구나가 33세의 모습으로 변화하며 얼굴은 백옥같이 희고 빛나며 백인의 모습이다. 키도 남자는 약 180cm, 여자는 한 뼘 정도 작다. 남자의 머리는 목 바로 위까지의 길이로 똑 같지만, 여자는 상급에 따라 [머리] 길이가 다르며 상급이 클수록 긴 머리이며, 허리까지 내려오는 사람도 있다"([죽음 앞에서 영생을 맛보며], pp.228-229)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전혀 성경에 없는 자신의 독자적 해석으로 기독교 교리에서는 용인될 수 없는 독단적 주장이다.

     

    지나친 신비주의과 신유 은사의 문제점

    이재록 씨는 그의 책 [죽음 앞에서 영생을 맛보며]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하면서 대언자를 주시라고 기도했더니 1982년 5월 하나님은 대언을 통하여 태양이 작렬하는 때에 개척되리라 하였고, 그대로 되어 7월 25일 개척 되었고 하나님은 여종(한정애를 지칭)을 통하여 대언해 주셨으며, 부흥집회 말씀도 대언을 통해 영혼에게 주님이 뜻을 알려주시고 갈 길을 밝히 보여 주셨다.'고 주장하는 등, 지나치게 직통 계시를 강조하여 마치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언제나, 무슨 일이나 계시를 받는 것 같이 말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병자들을 치유 치유한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기독교 신앙을 무속적 신앙으로 오해하게 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에 신비주의 요소와 신유의 은사는 있다. 그리고 그런 것은 오늘에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절제가 필요하다(갈 5:23). 이재록 씨의 지나친 신비주의 경향이나, 치병 강조는 기독교의 근본진리를 훼손할 위험이 있다.

     

    연구 결론

    이상과 같이 이재록 씨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기독교 신학, 기독교 역사에서 살펴볼 때 이단성을 지닌 사람으로 단정치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재록 씨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교인들이 이 유혹에 빠지지 않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예장 통합)

    출처: 세이연



     

     

    콜로라도 스프링스(01)에서 America The Beautiful 공원에 세워진 오벨리스크 사이로 저 멀리 우뚝 솟아있던 산 "Pikes Peak"은 콜로라도 스프링스를 대표하고, 로키산맥 중 다섯 번째로 높은[14,115 feet (4302 m)] 영험한^^ 산입니다. 이 영험한 산의 이름은 Zebulon Montgomery Pike Jr. (January 5, 1779 – April 27, 1813)라는 군인이자 탐험가의 이름을 따 지었습니다. [그는 최초 이 산을 등정한 사람이지만 1806년 11월 24일 극심한 눈보라로 인해 정상 등정에 실패하고 맙니다. 첫 정상 등정자는 의사며, 식물학자며, 역사학자였던 Dr. Edwin James였습니다. 후에 시장(Mayor)인 Stephen H. Long이 1820년 7월 14일에 정상 등정에 성공해  Dr. Edwin James를 기념해 James Peak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곧 Pikes Peak으로 환원되었고 1835년부터 군사지도에는 Pikes Peak이 공식 지명이 되었습니다.]


     


    이후 1858년 이 Pikes Peak 일대에 금맥이 발견되면서 당시 약 10여 만명의 사람들이 이곳 일대로 몰려들게 되었고, 지금의 콜로라도 스프링스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Cripple Creek도 당시 같은 이유로 형성된 중요한 인근 도시임]

    당시 이곳으로 금을 찾아 나섰던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이 유행했었다고 합니다. "Pike's Peak or Bust!(파잌스 픽으로! 그렇지 않으면 파산할 것이요!)"

    당시 금을 찾아 갑부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이러한 기대에 부풀어 지금의 콜로라도 스프링스 일대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1871년 이 일대는 William Jackson Palmer라는 지도자에 의해 공식적으로 콜로라도 스프링스라는 도시로 탄생되게 됩니다.

    1915년에는 [제가 콜로라도 스프링스 (02)와 (02) 추가]에서 말씀드렸던 금광 개발로 갑부가 된 Spencer Penrose와 그의 동료들이 Pikes Peak의 정상까지 자동차 도로를 구상하고 그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됩니다. 사실 이 고속도로는 금을 찾아나섰던 사람들이 이미 통행하며 1889년경에 마차도로로 형성된 도로를 정리하고 포장을 덧 씌움으로 완성된 도로인데요, 지금의 24번 지방도로의 원형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시 이 고속도로 건설의 비용으로 $500,000이 소요되었다고 하니 과히 엄청난 투자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붉은 땅 '콜로라도' + 광천수[Manitou Springs 지역을 비롯하여]가 지금도 솟아나오는 '스프링스' = Colorado Springs. 그곳으로 몰려든 사람들은 아마도 그 붉은 땅과 이 영험한 산에서 마치 광천수가 샘터져 솟아오르듯 금맥이 쏟아져 나와 자신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기를 갈망하며 속속들이 모여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했던 조금은 이상한 빛깔을 띤 이 땅이 사람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다름아닌 Gold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Pikes Peak 주위로 몰려든 이유는 이 영험한 산에서 얻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자신들의 보다 나은 삶을 보장해 줄 '금송아지'^^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열망(Hope and Spirit)을 가진 이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어 형성된 곳이 바로 '콜로라도 스프링스'였던 것입니다.

    워싱턴으로 돌아와 이 Pikes Peak을 살피게 되면서 저는 믿음의 눈으로 다시 산을 오르며 시내산의 모세와 그 아래서 모세를 기다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가 그분과 대면하며 그들의 참된 생명과 삶을 위한 율례를 받아 내려왔던 모세... 하지만 그들의 백성들은 그 아래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일하게 같은 '금송아지'의 Spirit 아래 모여들어 만들어지게 된 이 콜로라도 스프링스를 다시 한번 믿음의 눈으로 내려다 보며... 비록 제가 모세는 아니지만... Pikes Peak정상에 다시 서서 두 손을 높이 들어 콜로라도 스프링스와 제가 살고 있는 워싱턴 D.C.를 향하여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아버지! 이 땅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워싱턴 D.C.와 동부로 부터 시작될 주의 부흥의 화살이 콜로라도 스프링스를 통과하여 평양과 예루살렘으로 날아가게 하옵소서! Pikes Peak의 황금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던 이들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콜로라도 스프링스가... 그들의 금송아지를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참된 하나님으로 깨달아 알고 그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Pikes Peak으로 올라가며 하나님의 율례를 묵상하게 되며, 깨닫게 되며, 배우게 되며 그 정상에서 하나님을 찬미하여 예배하여 이 땅 미국의 부흥과 전 세계의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는 백성들이 되게 하옵소서!"

    -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사2:2-5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미4:1-5

    첫번째 사진은 America The Beautiful Park에서 찍은 Pikes Peak입니다.
    두번째 사진은 Pikes Peak에서 찍은 콜로라도 스프링스 전경입니다. 멀리 아래 콜로라도 스프링스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

     

    1. 종교개혁과 칼빈주의

     

    종교개혁은 유럽사회의 지축을 흔드는 대지진이었다. 로마 카톨릭의 부패와 타락에 반발해 일어난 종교개혁운동은 비단 교회 뿐 아니라 전 유럽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촉진시켰다. 당시엔 교회와 정부 모두 교황의 지배하에 있었던 시기였으므로 교황주의에 대한 부정은 즉시 세속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군주들에 대한 반역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반역은 화란에서부터 점화되었다. 원래 화란은 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라인강 하류의 낮은 지대에 속하는 17개 주로 구성된 나라로서 16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화란의회를 중심으로 공동체로서의 결집력을 자랑했다. 크게는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의 황제 카알 5세(Karl ∨, 1550-1558)의 통치하에 있었고, 작게는 부르군드 공화국에 속했다. 당시 대부분의 주민들은 카톨릭을 신봉했고 개신교는 매우 미미한 세력에 불과해 하나의 이단적 종파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고, 더욱이 칼빈주의는 몇몇 지식인들 그룹에서만 소개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그 파고가 드높아지자 당시 화란의 통치자인 황제 카알 5세는 즉시로 개신교도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이은 필립 2세(Philipp ∥, 1555-1598)는 탄압을 더 가중시켰다. 그는 카톨릭교회에 대한 충성과 신앙만이 절대적인 것으로 선포하는 한편 왕권신수설을 앞세우고 종교개혁의 바람을 잠재우려 했다. 그러나 핍박이 가해질수록 개신교도들의 종교개혁과 정치, 사회, 경제적인 독립에 대한 열망이 더욱 뜨거워져 갔다.

     

    그 기반에는 일찍부터 발달한 화란의 경제력이 깔려 있었다. 특히 화란의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안트워프 등은 중세후반부터 한자동맹에 가입하고 북해 무역을 주도하였고, 신대륙 등의 발견이후 세계무역의 50% 이상을 담당하는 국제무역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당시 화란 내의 도시 수만 200여개에 달했고, 이 도시들에 의해 거두어진 세금은 당시 강대국 스페인이 중남미 식민지국에서 거둬들인 세금보다 무려 7배(은을 기준)나 더 많았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카톨릭의 횡포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는데 그 대안으로 사람들은 칼빈주의를 만나게 되었고 점점 신뢰하게 되었다. 카톨릭의 어두운 커튼이 열리며 칼빈주의라는 새로운 빛이 비추어지자 대세는 개신교로 기울어져 갔다. 드디어 화란은 통치자인 스페인과 결별하기 위해 이른바 독립전쟁을 치루고 1609년에 네덜란드공화국으로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화란의 독립은 유럽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독일의 영주국인 팔쯔 선제후국은 1560년에 칼빈주의의 개혁교회를 국가교회로 삼았으며, 스코틀랜드는 1576년에 존 낙스에 의해 장로교회를 국가교회로 삼았다. 이후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에서 개신교의 확산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확산의 원인으로는 개신교의 관용정책이 뒷받침되고 있었다. 개신교를 수용한 여러 국가나 교회들은 카톨릭과 달리 비록 칼빈주의를 신봉하지 않는다 해도 종교의 자유를 소지할 있도록 종교적 관용정책을 베풀었는데 이것이 많은 점에서 개신교가 급속도록 사람들에게 다가설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으로 평가된다.

     

    이후 새로운 화란은 칼빈주의를 국가의 종교와 국민들의 신앙의 기준으로 받아들였으며 도르트회의를 통해 칼빈주의 5대 강령을 수립하는 등 놀라운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칼빈주의 신학과 영성의 가장 중요한 무대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화란은 아브라함 카이퍼, 루이스 벌콥, 헤르만 바빙크 등 유명한 칼빈주의 신학자들을 배출하여 했을 뿐 아니라 미국을 위시한 전 세계적으로 개혁주의의 본산으로 자리매김을 한 것이다.

     

    칼빈주의 5대 강령(TULIP)

    ①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② 무조건적인 선택(Unconditional Selection)

    ③ 제한적 속죄(Limited Salvation)

    ④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⑤ 성도의 견인(Preservation of Saints)

     

    2. 알미니안주의

     

    16세기 이후 유럽사회는 칼빈이 대세였다. 루터교 등 다른 교파들도 공존했지만 칼빈주의의 득세에 비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칼빈의 바다에 별안간 풍랑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화란 태생의 칼빈주의자이자 베자를 스승으로 둔 아르미니우스(Arminius, 1560-1609)라는 한 인물로 말미암은 것이다.

     

    아르미니우스는 다른 모든 칼빈의 신학적 사상들을 수용했지만 칼빈의 예정설만은 수용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반펠라기안이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한 하나님의 절대예정은 하나님을 죄의 조성자로 보기 때문에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라이덴대학의 교수로 있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인해 같은 대학교수이자 철저한 칼빈주의자인 고마루스에 의해 고소를 당했다.

     

    처음에 이 문제는 상호 중재의 노력으로 수면 아래로 감추어지는 것 같았으나 아르미니우스가 죽고 그를 추종하는 자들에 의해 칼빈주의에 반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가 태동하자 다시 분쟁의 문제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칼빈주의자들은 이들을 교회의 회의에 고소하게 되었고, 아르미니우스의 추종자들은 네덜란드 정부에 자기들의 5대 교리를 작성하여 항의서를 제출하게 된 것이다.

     

    교회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도르트에서 회의를 열었다. 1618년 11월부터 소집된 회의는 1619년 5월까지 무려 154회에 걸쳐 열렸다. 공식적인 구성원만도 네덜란드 정통 칼빈주의자가 128명, 외국의 칼빈주의자 28명, 그리고 아르미니안주의자 13명 등 모두 170여 명에 달했다. 회의는 압도적 다수를 점한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결론을 내었다. 그 내용으로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주장을 이단으로 정죄함과 동시에 알미니안주의에 대항하는 칼빈주의 5대 강령을 채택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칼빈주의와 예정론은 법적으로 승리하였고 반대자들은 모두 사형과 종신형 등에 처하며 패배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곤잘레스는 자기 스스로 칼빈주의자로 자처했고, 영원히 칼빈주의자로 남기를 원했던 아르미니우스는 본인의 사망 이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알미니안주의의 창시자가 되고 이단의 괴수가 되었다고 말했다.

     

    알미니안주의 5대 교리는 다음과 같다. 이는 칼빈주의의 5대 교리를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이다.

    자유의지

    조건적 선택

    보편적 구속

    거부할 수 있는 은총

    은총으로부터의 타락

    가져온 곳 : 
    블로그 >영적 분별력
    |
    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