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충만한 삶이란?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오해되고 있는 '성령 충만' ― 신유, 방언, 예언 등 은사의 올바른 개념을 밝힌다. 


바울 선생님처럼 능력있는 삶을 사신 분도 자신은 열심히 선을 행하려 하나 오히려 원치 않은 악을 행할 때가 많다고 했다(롬7:19). 그래서 비참한 상태에 빠지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이런 모순에 대하여 그는 선한 것이 육신 안에 거하지 않고 죄가 그 안에 거하기 때문이라고 했다(롬 7:20). 바울 선생님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 안에 악을 행하려는 욕구가 있다는 사실은 신약 전편을 통해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바울 선생님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을 제시하였다.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다. 자신의 노력으로 살려는 그리스도인은 무기력하여 패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면 기쁨과 평안, 그리고 감사를 체험하며, 마음 속에 주님께 드리는 찬양이 넘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엡 5:18-20). 지금까지 능력있는 삶을 살았던 모든 신앙의 선배들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성령 충만하였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에 대한 오해

한국의 많은 교인들이 잘못된 성령론에 빠져 있는 것을 볼 때 참으로 걱정스러운 마음 금할 길 없다. 박철수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삼대 병 중의 하나로 '잘못된 성령론'을 들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무슨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거나 병을 낫게 하면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가 하면 제 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비정상적으로 되는 것을 성령 충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령과 성령 충만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성령론에 대해 크게 오해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박철수. 축복의 혁명. 11쪽)

성령 충만에 대한 가장 많은 오해가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을 성령 충만으로 생각하는 경우이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방언이나 신유와 같은 신비로운 은사만을 은사로 생각하고 이러한 은사를 받은 것을 성령 충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성령의 은사는 신비로운 은사만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모든 재능을 말한다"고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경건하지 않은 자들은 명백하게 기록된 성경 말씀을, 은혜롭게 해석한다고 하면서 몇 번을 비비 꼬아서 해석하고, 그러한 해석의 결과에 의하여 신비로운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은 성령 충만하지 못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전남대학의 한 교수님은 광주 시내의 어느 교회에 시무하시는 장로님이다. 어느날 그 분이 출근 버스 안에서 나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그 분이 시무하시는 교회에서 부흥회를 열었는데 강사의 가르침을 받고 많은 교인들이 방언을 하게 되었다. 방언을 받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교회를 섬기는데 사용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결과로 방언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며, 심지어는 구원도 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취급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장로님도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장로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고, 결국 얼마 못가 그 교회를 떠나실 수밖에 없었다.

성경은 분명히 방언이나 신유와 같은 신비로운 은사외에도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위하는 일, 구제하는 일, 다스리는 일, 긍휼을 베푸는 일 등을 은사로 열거하고 있다(롬 12:8). 특히 바울 선생님은 "더욱 큰 은사, 제일 좋은 은사를 너희에게 보이리라"고 말하고 고전 13장에서 그 유명한 "사랑"에 대하여 말함으로 가장 좋은 은사가 "사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비로운 은사만이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확실한 성경의 가르침이다.

 

은사를 받는 것과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은 다르다. 고린도 교회는 온갖 은사를 다 받은 교회였다. 그러나 바울 선생님은 고린도 교회를 어리고 육신에 속한 교회라고 했다(고전 3:1). 왜냐하면 은사는 많았지만 성령의 열매가 없는 교회였기 때문이었다. 성령께서 믿는 자들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교회를 세우게 하기 위해서이다(엡 4:12).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가진 은사를 가지고 서로 자기의 은사가 최고라고 자랑하며 싸우곤 하였다. 그래서 바울 선생님은 이 교회를 어린 아이와 같이 생각한 것이다.

신비한 체험은 매우 값지고 좋은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믿는 자들이 모두 이러한 체험을 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사를 통하여 볼 때 신비 체험은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체험을 한 본인의 신앙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실제로 나는 주변에서 신비 체험을 한 사람들이 더 큰 시험에 빠지고 잘못된 신앙으로 전락하는 것을 많이 보아 왔다. 신비 체험을 한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하게 되고, 체험 중심 신앙으로 전락하며, 그러한 중에 사탄이 주는 체험과 성령께서 주시는 체험을 분별하지 못하고 넘어지고 만 것이다.

 

신비한 체험을 추구하는 신앙은 실패하기 쉽다. 신비한 것은 초자연적인 것인데 이것은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구속사역에 필요할 때에 예외적으로 특별히 주시는 현상이다. 자연법칙은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섭리하시기 위하여 만드신 법칙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연법칙이 수시로 깨어지는 것을 결코 바라시지는 않으신다.

 

기독교인이 방언의 은사를 받는 것은 대단히 감사한 일이며, 방언의 은사는, 잘못 사용되지만 않는다면, 방언을 받은 자의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 한국교회에는 이상하게도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성은 하나님이 주신 가장 좋은 선물이다. 우리는 뜨거운 가슴으로 주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냉철한 머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아야 한다.

 

은사는 교회에는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고전 14:4). 그래서 바울 선생은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고 하였다(고전 14:28). 뿐만 아니라 우리가 순수한 이성적인 깨달음으로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을 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라고 가르쳤다(고전 14:19).

 

방언에도 가짜가 있다. "그 출처로 보아 방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성령이 주시는 방언이며, 다른 하나는 사탄이 주는 방언이다. 저명한 교회의 지도자요 방언을 실제로 체험했던 잭 헤이포드 목사는 솔직이 고백하기를 '교회에서 하는 방언 가운데는 사단의 방언도 있고, 심리적인 방언도 있으며, 동시에 성령의 방언도 있다'고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교회에서 모든 방언을 성령의 역사로 받아 들이기를 꺼려 하고 있다.(옥한흠 편. 현대교회와 성령운동. 138쪽)"

 

실제로 소위 은사 집회라고 하는 어떤 집회에서는 방언을 연습시키기도 한다고 한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가 연습으로 습득될 수 있다는 넌센스가 21세기를 바라보는 현 시점에서도 받아 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방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 다른 종교에도 있다는 다음의 지적을 우리는 음미해 보아야 한다. "의식있는 마음의 통제를 받지 않고 나오는 비자발적인 것은 성령께서 주신 방언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은 힌두교, 몰몬교, 이슬람교에도 있다. (뿐만 아니라) 신비한 경험 중에는 사단에 의한 것도 있다. 사단은 순수한 영적 체험을 모방한다.(존 스토트. 오늘 날의 성령의 사역)"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이 성숙한 후에, 그리고 성령이 주시는 것과 사탄이 주는 것을 충분히 구분할 수 있을 때 방언을 사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올무에 빠질 수도 있다.

 

우리는 영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똑똑하다고 하는 박사들과 대학 교수들이 말도 되지 않는 이단의 가르침에 빠져가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어느 목사님의 말씀 중에, 많은 교인들이 목사님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멘 아멘하다가 심지어는 목사가 기침만 하여도 아멘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다소 과장된 말씀이기는 하지만 대단히 의미가 있는 말씀이다. 목사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라고 해서 무조건 아멘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합당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인지를 판단하여야 한다.

 

예언의 은사는 많이 오해하고 있는 은사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대언자들이다. 개인의 길흉화복을 미리 알고 말해 주는 자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성령 충만하였다고 하는 자 중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빙자한 점쟁이들이 공공연히 활동을 하고 있다. 무슨 사업을 해야 성공하겠느냐, 내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겠느냐 같은 것은 부채신(?)과 같은 잡신에게나 물어야지 거룩하신 하나님께 물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예언'이라고 번역된 이 말의 헬라 원어를 바로 번역하자면 '대신 말하는 것' 즉 '대언'이다.(옥한흠 편. 현대교회와 성령운동. 65-66쪽)" 예언이란 "길이 없는 시대에 길을 찾아서 선포하는 것이다. 나라와 백성과 그 시대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 정치에 길이 없고 남북 통일에 길이 없고 백성들의 살림살이에 뚫고 나갈 길이 없을 때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길을 선포해 주는 것, 그것이 예언이다.(김진홍. 비전있는 교회. 38-39쪽)"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의 살아 있는 성도들은 모두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신유는 아무런 치료도 하지 않고 오직 안수 기도를 하는 것으로만 병을 고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의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그저 기도할 수밖에 없는 질병들이 많았다. 그래서 옛날에는 신유의 은사가 상대적으로 더 많이 필요한 시대였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오지나 덜 개화된 사회에서는 신유의 은사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문명사회에 살면서 의술을 사용하지 않고 신유의 은사만을 바라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의술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도 병든 자를 위하여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하였다(약5:14). 여기에서 기름이란 옛날에 의약품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의미한다. 열심히 공부하여 의과대학에 입학하고, 또 열심히 공부하여 자격을 갖춘 의사가 되는 것이, 현대 사회에서 신유의 은사를 받는 가장 성경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주시는 신유의 은사를 거부할 필요는 없다.

 

초자연적인 체험이나 기적을 추구하는 것도 바람직한 신앙이 아니다. 성경 말씀을 진리로 받아 들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는 전에 설교시간에 어떤 목사님이 쓰신 책에 나온 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피곤하다고 하는 사람에게 기도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더 열심히 기도하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 권면이 지혜로운 권면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몸이 피곤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건강을 위하여 쉬라는 메시지로 받아 들여야 한다. 그리고 쉬어야 한다." 그랬더니 이 말에 반발하는 교우가 있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바에 의하면 철야기도회 때 피곤하여 더 열심히 기도하였더니 피곤이 가셨다는 것이다. 나는 확실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그런 현상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와 같은 특별한 현상을 일반화 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순간에 우리는 살려주시라고 온 힘을 다해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살려 주실 수 있다. 21세기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얼마든지 그러한 기적이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이, 하나님께서는 내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당연히 살려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일부러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면서 '살려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의 자세가 아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사람들을 향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마4:7)"고 하신다.

 

"성경이 보여주는 기적은 우연적인 사건, 하나님이 갑자기 무엇을 일으키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구원과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뜻을 인생들에게 계시해 주시는 표적으로 나타난 것이다.(옥한흠 편. 현대교회와 성령운동. 45쪽)" 초자연적인 체험이나 기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 편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실 때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적을 행하시기 위하여 이적을 행하신 것이 아니고 이적을 통하여 교훈을 주시기 위하여 이적을 행하셨다.

 

예수께서는 표적을 구하는 자들을 향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꾸짖으셨다(마 12:39). 신비 체험을 한 사람들은 그것을 감격으로 간직하여야지 자랑하고 다니는 것은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한다. 바울 선생님은 삼층천에 올라갔다 온 감격에 대하여 15년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고이 간직하였다. 신비 체험은 자신의 신앙에는 도움이 되지만 회중에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비 체험에 대하여 너무 많은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미지의 세계에 대해서 허욕을 가질 때에 마귀가 뛰어들기 쉽기 때문이다. 즉 마귀가 천사로 가장하여 그런 것을 숭상하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믿음에서 떠나게 만든다. … 우리 신자들은 (신비로운 것보다) 성경 말씀으로 녹아져야 한다.(옥한흠 편. 현대교회와 성령운동. 78쪽)" 우리가 관심을 가져도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관심을 가지면 사단의 미혹을 받게 될 것이다.

 

부흥회에 참석하여 설교를 듣고 잠시 기분이 좋았을 때, 좋은 찬송을 들었을 때, 손뼉치며 즐겁게 찬송하다가 기분이 좋은 것을 성령 충만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하면서 이와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서 이러한 종류의 기분을 느꼈을 때 그것이 정말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인지 스스로 분위기에 젖어서 느끼는 것이지 판단해 보아야 한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기쁨이고 감동이지 성령 충만은 아니다.

 


성령 충만이란 무엇인가?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변화된 삶을 사는 것, 인격이 변하는 것,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성령 충만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고 있다(갈 5:22). "다시 말해서 성령 충만의 증거는 성령의 열매에 있지 성령의 은사에 있는 것이 아니다.(존 스토트. 오늘날의 성령의 사역)" 기적을 행하는 사람보다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궂은 일을 잘 하는 사람이 오히려 성령 충만에 가까운 사람의 모습이다.

성령 충만한 결과는 시와 찬미로 화답하고, 찬송하고 감사하며 피차 복종하는 형태로 나타난다(엡 5:18-21). 그 결과로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아비들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않고, 사장의 태도가 달라지고, 종업원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다(엡5:22-6:9). 산 기도를 아무리 많이 다녀도, 봉사를 아무리 잘해도, 방언을 하고, 신유의 은사를 받았어도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못하면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헌금을 많이 낸다고 하더라도 이웃과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 과속 운전할 수 없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신경질적일 수 없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혀로 남의 마음을 찌를 수가 없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 쓸데없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일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보다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하는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얼마나 닮아 가는가에 더 큰 관심을 갖고 계신다. 성령 충만하면 자연스럽게 많은 일을 하게 된다.

 

성령 충만을 받는 방법 

성령 충만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다(엡 5:18). 성령 충만은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도우심을 받으면서 의도적으로 노력하여야 한다. 한국교회는 구원을 값없이, 그저 은혜로 받는 것으로 강조하여 가르치다 보니 많은 성도들이 구원을 위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매일 매일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우리 생활의 전 영역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가 의도적으로 생활의 일부 영역이라도 감춘다면 그 분은 우리를 채우시지 않으신다. 우리는 순간 순간의 삶을 하나님께 예배 드리듯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여야 한다(롬 12:1). 의도적으로, 반복적으로 죄를 짓는 자는 결코 성령 충만할 수 없다. 부득이 지은 죄는 수시로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하여 주님과의 교제가 끊기지 않게 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더러운 그릇을 채우시지 않는다.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한다. 무엇을 '하라' 또는 '하지 말라'는 성령의 말씀을 들을 때 바로 순종해야 한다. 주님은 작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점점 더 큰 일을 맡기신다. 작은 일을 소홀히 하면서 큰 일을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였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기 때문에 다시 영접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단번에 받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성장한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완전히 성령의 지배를 받을 때 성령 충만하였다고 할 수 있다.


맺는 말 

성령 충만은 은밀하고 신비스런 경험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도덕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성령 충만의 목적은 신비로운 일을 하여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증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행 1:8). 성령 받아서 뒤집어졌으면 권능을 얻고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증인의 삶이란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철저하게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성령 충만하면 인격이 변하고 행위가 변한다. 행위가 변하지 않는 삶은 성령 충만한 삶이 아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음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우리의 삶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조인선 / 광주 중부교회 장로, 전남대

 

가져온 곳 : 
카페 >물과피와성령(water and blood and the Holy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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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요셉| 원글보기

참 이스라엘 사람(1:43-51)


  요한복음 135-5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에 제자들을 부르신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일 먼저 35절에부터 42절까지에는 세례요한의 소개로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 다음에는 안드레의 전도를 받고 그의 형인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인 43-51에 보면, 안드레와 베드로의 전도로 빌립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또 그 다음에는 빌립의 전도로 나다나엘이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제자가 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본문에 나오는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 나다나엘이란 사람의 이름은 이 본문에만 한 번 나오고 성경의 다른 곳에는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성경학자들은 이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12제자 중에서 바돌로매라고 하는 제자와 동 일한 인물일 것으로 추정을 합니다(10:2-4). 왜냐하면 사실상 바돌로매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의 실제적인 개인 이름이 아니고 돌로마이라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에서 보면 나다나엘, 즉 바돌로매가 예수님을 처음 만나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믿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건의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먼저 믿게 된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서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하니까, 처음에 나다나엘은 그 말을 곧이듣지 않았습니다. 즉 빌립이 말하기를 성경에 약속되어진 메시아 즉 그리스도를 내가 만났는데, 그분은 요셉의 아들로서 나사렛 사람인 예수다.” 그렇게 말하니까, 나다나엘은 아니,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정색을 하며 반문을 합니다. 그러나 그래도 한번 와서 보라고 권하는 빌립의 말을 듣고 그럴 리가 없지하면서 따라갔던 나다나엘은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그 예수님이 정말로 그리스도란 것을 믿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날부터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제자, 12사도 중에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애초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물었던 것은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갈릴리 지방을 천한 지역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나사렛은 그런 갈릴리 지역 중에서도 아주 작은 마을로서 그런 곳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나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실상 예수님은 엄밀히 따진다면 나사렛 예수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 왕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대부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나사렛 예수라고 멸시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메시아이라고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가서 만나보니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라고 하는 것을 깨닫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처럼 반신반의하며 예수님께 나왔던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고 하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그 날까지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이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이며, 예수님께 오기 전에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까지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처음 보는 나다나엘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안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아시고 사람의 깊은 곳까지 통달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갖고 계신 것을 보여줍니다. 즉 예수님은 그 자신이 하나님으로서 나다나엘의 성품과 인격까지도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자기를 알아보시자 나다나엘은 깜짝 놀랍니다. “아니,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이번에는 더 놀라운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나다나엘아,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 것도 내가 다 보았노라

여기서 나다나엘은 더욱 놀라서 자기 앞에 서있는 이 분이 정말로 메시아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선생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신 것을 제가 이제야 알겠습니다하고 외치게 됩니다. 이러한 나다나엘의 놀라움에 가득찬 외침,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신 것을 내가 믿습니다.”고 한 고백이야말로 성경에서 나오는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 중의 하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 즉 그리스도이십니다. 조금 전만 해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의심을 했던 나다나엘은 이처럼 예수님을 대면하자 그가 누구신지를 깨닫고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로부터 나다나엘은 그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는 영광된 신분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나다나엘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보고 한마디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구약시대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약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를 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오히려 배척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만과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껍데기만 하나님의 백성인 거짓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땅에 가득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스라엘 땅에 와서 너무나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 왜 이리도 없는가 하는 슬픔으로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의 눈앞에 나타난 나다나엘을 보시자마자, 예수님은 그가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보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나다나엘이 보여준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서의 성품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무엇보다도 그것은 간사함이 그 속에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간사함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참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가리켜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셨을 때 이 간사하다는 말은 헬라어로는 돌로스(dolos)’로서, 그 원래의 뜻은 고기를 낚을 때 사용하는 미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러분 중에 낚시를 즐기는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낚시라는 것이 인간들 편에서는 재미있고 고상한 취미인지 몰라도, 물고기들 입장에서 보면 낚시라는 것은 미끼를 던져서 어리숙한 물고기를 유인해 낚아채는 아주 교활한 속임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돌로스라고 하는 단어는 미끼라고 하는 뜻 외에도 교활함, 속임수, 또는 잔꾀라고 하는 의미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이스라엘 사람은 간사함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은 거짓이나 위선, 또는 잔꾀를 부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하는 말입니다. 간사함이 없는 인격, 이것은 참 이스라엘 사람, 즉 참된 하나님 백성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시편 32:2에서 시편기자는 말하기를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간사한 사람입니까? 여기서는 이렇게 말하고 저기서는 저렇게 말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간사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의 면전에서는 간을 내 줄 듯이 친밀하게 굴면서도 뒤로 돌아서서는 흉을 보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그런 사람은 간사한 사람으로 참 이스라엘이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진실히 살기보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행동을 하는 사람, 그런 사람도 간사한 사람입니다. 내가 좀 손해를 볼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얄팍한 잔꾀를 부리는 사람, 그런 사람은 간사한 사람입니다. 약속을 해놓고서도 형편이 달라지면 내가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약속 어기기를 식은 죽 먹듯이 하는 사람, 그런 사람도 간사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될 수가 없고, 진정한 주님의 일군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때때로 잔꾀를 잘 부리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더라도 교회만은 세상과 달라야 하겠는데도, 교회에서도 보면 거짓말할 줄 모르는 진실한 사람보다도 잔꾀를 잘 부리는 사람이 더 인정을 받는 것을 때때로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시는 순간 그의 중심을 보시고 그가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 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다나엘은 간사함이 없었다고 하는 것과 함께 오늘 본문에 살펴보면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가졌던 또 하나의 귀중한 특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보고 빌립이 너를 만나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던 것을 내가 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왜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자 크게 놀라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인정하게 됩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나다나엘이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는 사람임을 예수님께서 알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열대 지방입니다. 그래서 그처럼 더운 지방에 사는 유대인들은 흔히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의 그늘 밑에서 쉬기도 하고, 경건한 사람들은 거기서 말씀을 묵상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고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하신 것은 나다나엘이 빌립의 인도를 받아 예수님께 나오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은 늘 기도하기에 힘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알고 계셨다고 하는 의미도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나다나엘이 사람들이 보든 안 보든 한적한 곳을 골라서 늘 기도하기에 힘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나다나엘을 보고 참 이스라엘이라고 인정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참 이스라엘이 될 수 있습니까? 기도하는 사람이 참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든 안 보든, 아니 오히려 골방과 같은 장소에서 홀로 하나님 앞에서 무릎 꿇는 자세로 기도하는 사람을 예수님은 오늘도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신 데에는 나다나엘이 늘 기도에 힘쓰는 사람인 동시에 자나 깨나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기도하는 사람이었음을 아시고 계셨다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열왕기상 425절에 보면 솔로몬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아래와 무화과 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는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솔로몬 왕 당시에 이스라엘 나라가 태평성대를 누렸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의 민족의 역사는 조용한 날이 없는 역사였습니다. 강대국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지정학적인 이유로 이스라엘 민족은 늘 주변 열강들의 침략을 받으며 전쟁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한때 아주 태평하고 번영하는 그런 시대가 있었는데, 그때가 바로 솔로몬 임금이 통치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솔로몬 임금의 통치 시대가 마치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것과 같은 태평성대였음을 묘사하는 표현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아래와 무화과나무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런 태평성대는 오래 가지를 않습니다. 솔로몬 임금이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며 의지하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번영하고 강대국이 되며 또 태평성대를 누렸지만, 솔로몬이 말기에 우상숭배를 하며 범죄하자 하나님은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분열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점점 더 타락하면서 국력도 약화일로의 길로 걷다가 마침내는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남북 왕조가 다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은 그 이후로 독립국가로 살아본 적이 없이 페르시아나 헬라, 또는 로마 제국 등 강대국의 식민지가 되어서 억압을 당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 과정을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제 메시아가 오셔서, 이스라엘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아무런 전쟁이나 재앙이 없는 태평성대를 다시금 누리게 되기를 고대했습니다. 그러면서 특별히 그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아래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솔로몬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편안히 지냈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그런 평화의 나라, 즉 전쟁도 없고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나오기 바로 직전에도,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고 하는 말은 나다나엘은 늘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고대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이 그처럼 하나님 나라를 향한 진실한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이란 것을 아시고, 그를 가리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가장 큰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오늘 무엇에 대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썩어질 세상과 부패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정말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그런 소원으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이야 어떻게 되어가든 여러분 육신만 편하고 여러분 가정만 복 받기를 바라십니까?

  나다나엘과 같은 참 이스라엘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보든 안 보든, 아니 오히려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골방에 들어가 죄악된 이 세상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할 수 없는 탄식과 슬픔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 하나님,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속히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렇게 간구하는 사람을 가리켜 예수님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오늘 여러분이 예수님 앞으로 나간다면 에수님은 여러분을 보시고 무어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여러분을 보시고 너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구나. 너의 속에는 간사한 것이 없구나하고 인정해 주실 것 같습니까?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인정을 받을 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아직까지도 그런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변화가 되어야만 합니다. 모든 간사함과 거짓됨과 잔꾀를 부리는 옛 습성을 버리고 진실하고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가리켜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구약시대의 야곱이란 인물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 확실합니다. 본문의 50절과 51절에서 보면 나다나엘은 자기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알고 계신 사실에 무척이나 놀랐는데, 여기 대해서 예수님은 네가 이 정도로 놀라느냐?” 하시면서 네가 장차 앞으로는 하늘문이 열리고 천사들이 인자 즉 예수님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되리라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이것은 구약시대 때 야곱이 형님과 아버지를 속여서 축복을 가로채고 나서 자기를 죽이려는 형 에서를 피해 도망을 가다가 벧엘의 들판에서 잠을 자던 중 꿈속에서 사닥다리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던 사건을 빗대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구약시대의 야곱은 사닥다리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았지만 이제 이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참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 위로 하늘문이 열리고 천사들이 왕래하는 더 놀라운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이야말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다리처럼 우리의 유일한 참 중보자가 되시며 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하늘의 비밀과 영광을 보게 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런 놀라운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놀라운 체험을 하며 이런 영광스러운 은혜를 받으려면 우리는 먼저 참 이스라엘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야곱과 같은 옛 사람의 모습으로서는 이런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볼 수도 없고 맛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인 야곱에게는 두개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야곱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은 그가 태어날 때부터 갖게된 육신적인 이름으로서, 이 야곱이라고 하는 이름이 갖고 있는 뜻이 간사하다, 간교하다, 잔꾀를 부린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그 이름대로 간교한 사람이었습니다. 형님을 속여먹고 눈먼 아버지를 속여먹은 사기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야곱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여러 가지 인생의 고난을 통해서 연단을 시키시고, 마침내는 얍복 강가에서 그의 인격을 완전히 변화시키시고야 말았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야곱은 밤새도록 하나님과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부러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보내드리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끝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날로써 그의 이름이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화된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자기 육신의 지혜와 잔꾀로 살아가던 야곱이 이제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진실하게 살아가는 이스라엘이라는 새 사람으로 변화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날 밤에 야곱은 하나님께 얻어맞아서 환도뼈가 부러져, 그 후 일생동안 그는 절름발이로 살게 되었지만, 그것은 영광의 상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간사한 옛 사람이 변해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새 사람이 된 표적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우리 일생에 한번은 하나님과 맞닥뜨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야곱과 같은 우리의 옛 성품이 깨어지고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거듭나야만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늘문이 열리고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 위로 천사들이 왕래하는 것을 목격하는 신령한 세계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참된 일군으로서 우리의 일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들 대부분은 아직도 야곱과 같이 육신적이고 간사한 성품을 계속 가진 채로 주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고자 하는 기회에 하나님을 만나면 됩니다. 우리의 환도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고난을 통해서라도 우리의 간사한 옛 성품이 바뀌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반드시 축복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반드시 받아야 하는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건강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꼭 받아야 할 축복은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간사한 것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라면 환도뼈가 아니라, 목뼈가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축복을 사모해야만 할 줄로 압니다.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은 고난과 환난이 없는 평안함이 축복인 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축복을 간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받아야 할 진정한 축복은 우리의 근본적인 성품의 변화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그런 내면적 성품의 변화를 위해서, 그래서 우리가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쩌면 고난은 우리가 반드시 통과하고 졸업해야 할 인생의 학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고난 없이 옛 사람의 성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제 아무리 세상에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성취할지라도 실패한 인생입니다. 반면에 고난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말씀의 연구와 기도를 통해서든지 그런 근원적인 성품의 변화가 이루어져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 된 사람은 성공한 인생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주님으로부터 나다나엘과 같은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을 보시고 보라. 이는 참이스라엘 사람이로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구나하는 인정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거짓되고 간사한 성품을 하나님께 내어놓으며, “하나님 축복해 주십시요. 이 간사한 성품이 변해서 새 이스라엘이 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만으로 나의 의지를 삼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진실로 기도하는 참 이스라엘이 되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간절히 간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회는 나다나엘과 같은 참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여드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들의 가정이 나다나엘이 하나님께 나아가 홀로 기도했던 그 무화과나무 아래와 같은 곳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가져온 곳 : 
카페 >물과피와성령(water and blood and the Holy Spir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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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boaskorea| 원글보기

 잠행기는 제3시(http://3-rd.net)에 infiltrator라는 필자가 미국 내에 존재하는 '이 세상 어둠 주관자들의 추종자'들이 만들어 놓은 역사적, 문화적 실체물들을 잠행하며 기록한 내용을 올리고 있다. 그의 글을 허락을 받고 이곳에 올린다.

 



2007년 7월 7일 새벽 2시 30분... (^^ 7.7.7)

저희 가족은 조용히 워싱턴 D.C.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일주일간의 잠행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주께서 그곳으로 보내신 이유를 발견하고 확인하며... 다시 저희들의 보금자리로 돌아왔습니다.

Pikes Peak (14,110 Ft) 정상에서 콜로라도 스프링스와 워싱턴 D.C.를 향하여 기도하며...

또한 그 정상에서 바로 뒤를 돌아 평양과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평양과 예루살렘을 향하여 두 손을 높이 드는 순간...

비를 흠뻑 머금은 빽빽한 구름 속에서 주께서 제 눈 앞에 번개로 응답하셨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 정상에서 엎드려 간구하며 목격했던 그 장관을 목도하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은혜의 단비가 그 땅에 임함과 같이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을 갈망하고 있는 척박한 영적가뭄의 대지에 부어주시기를 간구하며 돌아왔습니다.

콜로라도 스프링스 다운타운 America The Beautiful Park에 세워진 오벨리스크와 Pionner Museum에 위치하고 있는 피라밋 조형물을 확인하며...

이 땅 가운데 숨겨진 원수들의 뿌리깊은 Stronghold들의 기저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기도 가운데 보게 하신 것들과 기도 가운데 들려 주신 주의 말씀을 계속해서 조금씩 나누어 가겠습니다.

콜로라도...^^ 붉은 빛을 띠다(에돔)는 스페인어에서 기원한 지명입니다.^^


첫번째 사진은 콜로라도 스프링스 다운타운에 위치한 America The Beautiful Park에 쌍으로 세워져 있는 오벨리스크 사진입니다. 중앙에 위치한 Julie Penrose Fountain이라는 조형물에 대해서도 후에 설명드리겠습니다.

멀리 보이는 산 정상이 Pikes Peak Summit(14,110ft)입니다.


두번째 사진은 콜로라도 스프링스 다운타운에 위치한 Pioneer Museum에 위치한 피라밋 조형입니다. 후에 콜로라도 스프링스 The Seal of Colorado와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빛 가운데로 행하면 예수의 피로 깨끗함을 얻는다?

 빛 안에 있는 사람 VS 어두움에 있는 사람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장 7>

 

 

 

개역개정은 요한일서 17절을 빛 가운데에 행하면, 예수의 피로 깨끗하게 해주실 것이다.”라고 번역했다. 빛 가운데에 행하는 것”을 예수의 피로 깨끗하게 씻김을 받는 것의 조건으로, 깨끗하게 되는 것을 미래의 일로 말이다. 만약 이러한 개역개정의 번역이 맞다면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의문 하나는 예수의 피로 깨끗함을 얻는 데에 있어서 선행되는 조건이 믿음이 아니라 빛 가운데에서 행함이 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빛 가운데에서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요한일서 17절은 예수의 피로 깨끗함을 받는 조건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피로 깨끗함을 받은 자의 현상(모습, 행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구절이다.

 

또한 개역개정은 "깨끗하게 하다"라는 헬라어 단어 "카다리제이(kaqarizei)"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미래형으로 번역을 했지만, 헬라어 원문은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능동태 직설법 3인칭 단수"로 쓰여져 있다. 그러므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가 아니라 "깨끗하게 하고 있다"라고 번역해야 바른 것이다.

 

두 번째 의문, 빛 가운데에 행하는 것의 의미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의로우심”과 같이 행하는 것, 다시 말하여 거짓을 말하지 않고 진리를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말하고 있는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빛 가운데에 행한다는, 짓을 말하지 않고 진리를 따르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이며, 빛 안에 있는 것과 어두움 안에 있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 아래에서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어두움 안에 있는 자 vs 빛 안에 있는 자

 

1.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그를 따르는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두움이 전혀(하나도) 없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실하고, 의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 안에 어두움이 전혀 없으시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도 어두움에 있지 않고 빛 안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의로운 분이시므로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도 신실하며, 의롭습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거짓이 없다,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의롭다는 것은 불의가 없으며 진리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빛 안에서 행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자신은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 “빛 안에 있다”, “구원 받았다고 소리 높여 말할지라도 거짓을 말하고, 진리를 따르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 안에, 빛 안에 있는 것이아니라 어두움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시기에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도 거짓을 말할 수 없고, 진리를 따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로 행한다는 것이며, 빛 안에 있는 것입니다. 빛이신 하나님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은 어두움에 있고, 어두움에 있는 자는 거짓을 말하고 진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2. 자신에게 죄가 없다 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고,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사람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하는 사람은 첫째는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자신이 그동안 어떤 생각을 해왔으며,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는 세상 아무도 몰라도 오직 자신은 정확하고도 확실하게 잘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한 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압니다. 즉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것을 자신은 알고 있는데 범죄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범죄를 알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범죄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3:23, 5:12).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다고 말씀하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범죄한 적이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과 우리 중에 한쪽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한 적이 없다는 우리 말이 맞다면 당연히 하나님은 거짓말쟁입니다. 정말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진리가 안에 없는 사람

우리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저런 실수를 하기는 했지만 고의는 아니었고, 특히나 지옥에 갈만큼, 천국에 가지 못할 만큼 죄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여도, 모든 사람이 불의한 죄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자신이 불의한 존재라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진정으로 깨닫지는 못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 사람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죄와 죄 아닌 것을 구분하는 기준입니다. 의와 불의를 구분하는 그것을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올림픽 100미터 달리기 시합을 하기 위해 운동장에 트랙을 그어야 한다고 합시다. 트랙을 긋는데 100미터 짜리 줄자가 있다면 자기가 그은 선의 맞고 틀림을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줄자가 없다면 맞고 틀림을 알 수 없습니다. ‘진리는 줄자 같은 것입니다. 맞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죄인지 아닌지, 의인지 불의인지를 가늠하는 것을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며,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만약 우리 안에 진리가 있다면 우리가 죄인이며, 불의한 자라는 것을 선명하게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없다면 우리가 지옥에 갈만한 불의한 자라는 것을 알기는 알아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이 지옥에 갈만한 불의한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안에 진리가 없는 사람입니다.

 

 

3.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운 분이시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불의한 것을 정확하게 판단하십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거짓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불의를 정확하게 판단하십니다. 그리고 말씀(로고스, 예수)은 하나님의 ’ 자체이시기 때문에 말씀에서 벗어난 모든 것이 '불의'입니다거짓을 말씀하지 않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범죄한 죄인이라고 말씀하셨고(3:23, 5:12), 불의를 정확하게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우리 모두 불의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14:33:10).

 

 

4. 어두움 안에 있는 자 vs 빛 안에 있는 자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한 죄인임을 인정치 않고, 우리가 불의한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하는 신실하지 않은 자이고, 불의한 존재임을 알지 못하는 진리가 없는 자라면 하나님 안에 있지 않은 것이며, 하나님 안에 있지 않다면 빛 안에 있지 않고 어두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을 깨닫고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다면, 또한 자신이 의롭지 않으며 지옥에 갈만큼 불의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면 어두움에 있지 않고, 빛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있지 않고, 빛 안에 있는 자들은 이미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깨끗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이미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깨끗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미래에 혹은 다른 조건이 충족되면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고 현재에도 계속해서 깨끗하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는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더럽게 하는 모든 불의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여기서 모든 불의라고 하는 것은 앞으로 있게될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범죄한 죄인이라는 것과 불의한 자신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사람은 빛 안에 있기에 예수의 피로 깨끗함 가운데에 있으며, 죄 용서를 받았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5. 오직 성령과 말씀으로

우리는 모두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 안에 임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것과 지옥에 갈만큼 불의한 존재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내가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 자신의 지식과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어떤 지혜로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셔야만 가능 한 일입니다.

                     [스가랴 4:6]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요한복음 16:7,8]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또한 줄자가 없으면 맞고 틀린 것을 알 수 없듯이, 말씀이 우리 안에 진리로서 임해야만이 우리가 불의한 것인지 아닌지, 불의한 존재라면 얼마나 불의한 존재인지를 밝히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말씀을 진리로 임하게 하시는 이 일 또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이 모든 은혜를 입기 위해서 첫째는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믿는 마음으로 읽고, 듣고, 공부하며,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알고, 불의함을 깨닫는 방편은 오직 성령과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방편들을 사용하기만 하면 기계적으로 무조건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구하고 노력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지 않으시면 이 모든 노력이 소용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싶다면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전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옥에 갈만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옥에 보내시는 것이 전혀 불공평하지 아니하고, 당연하고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아직 자신의 신분과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고,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야만 하는 의무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범죄하고 그를 대적한 자들로서 도리어 버림받아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공명정대(公明正大)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개들에게 허락되는 부스러기 은혜를 간구하는 가난한 마음, 거지와 같은 마음,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죽을때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으시더라도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십시다.

 

 

6. 그 은혜에 합당한 감사를

자신이 하나님 앞에 범죄한 죄인임을 깨닫고 고백한 분들은 어두움에서 벗어나 빛 안에 있게 된 상태입니다. 빛 안에 있다는 것은 빛이신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의로움이 전혀 없는 불의한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면 그것은 여러분 안에 말씀이 거하므로 진리를 따르게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이 이처럼 빛 안에 거하게 되고, 진리를 따르게 된 것은 여러분의 공로와 지혜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역사하심과 그 말씀의 임하심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랑 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모든 영광과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어두움에 있지 않고, 빛 안에 거하게 되어 하나님께 죄들을 용서 받고, 모든 불의로부터 깨끗하게 되어 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깨끗하게 된 분들은 하나님의 그 은혜에 합당한 감사를 더욱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를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그의 영광스런 빛 안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그 탁월하심을 전파하는 데에 더욱 열심을 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경이로운 빛에 들어가게 하신 분의 탁월함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9)

 

 

 

 

 

 

 

※ 아래는 헬라어 번역 비교.

    검정색은 개역개정번역이며, 푸른색은 나의 번역.

 

 

 

요한일서 15-10

  

       5절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들어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두움이 하나도 없다."

 

6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만일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과 함께(안에)하고 있다고 말은 하지만 어두움에 머물러 있다면 진리를 따르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

 

       7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러나 하나님이 빛이신 것처럼 우리가 그 빛 안에 거하고 있다면 하나님과 함께(교통)하고 있으며, 그분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케 하고 있다."

 

       8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가 우리 안에 없다는 것이다."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만일 우리의 그 죄들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그 죄들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로부터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10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만일 우리가 죄를 지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없는 것이다."

 

 

 

 

 

* 이미지 출처 :

http://www.infochurch.net/board/user/view.php?board_name=%C0%CC%B9%CC%C1%F6&bbs_no=5279&julgi_name=&keyfield=bbs_title&keyfield=bbs_title¤tPage=1

http://photo.naver.com/view/2009070707542873744?page

가져온 곳 : 
블로그 >좁은 길을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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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학자의 혀| 원글보기


 

소아시아(Asia Minor)는 고고학사에서 현재의 터키와 에게해 연안의 여러 섬들 그리고 이라크의 북부 지역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이 소아시아는 예전에 아나톨리아(Anatolia)라고 불리워졌습니다. 아나톨리아란 고대 그리스어의 아나톨리코스(Anatolikos)에서 온 말로서 "해가 뜨는 곳", 다시 말해 "동쪽"이란 뜻을 갖고 있으며, 유럽에서 볼 때 동쪽에 소아시아가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해가 뜨는 곳... 동쪽 땅이었던 이 아나톨리아(Anatolia)의 중부 지역에 프리지아(Phrygia)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지방 사람들이 즐겨 쓰던 모자에 대한 재미있는 유래 하나를 소개할까 합니다. 프리지아 사람들이 즐겨쓰던 프리지아인의 모자(The Phrygian cap)는 사진 1에 나타나는 주인공이 쓰고 있는 빨간색의 부드러운 고깔모자입니다.

프리지아 사람들은 그 모자에 자유(freedom or liberty)라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이 모자는 어제 제가 올려드렸던 로마의 신 미트라가 쓰고 있던 바로 그 모자입니다. 또한 이 모자는 아나톨리아의 신 아티스(Attis)와 쌍둥이 별자리(라틴어로 'Gemini')의 주인공인 Castor와 Pollux가 즐겨 썼다고 합니다.

로마제국 시대에는 토성(Saturn)의 기원이 되는 사투르누스(Saturnus)에게 제사를 지냈던 12월 17에서 23일까지 이 모자를 쓰고 제사를 지내며 보냈다고 합니다. 또한 이 빨간 모자는 이전 주인에게 해방되었던 노예들이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후에 이것이 [자유]를 상징하는 의미의 근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모자는 또한 혁명의 상징(Revolutionary Icon)이었는데요, 18세기 미국 독립 전쟁기간 동안에는 자유의 막대기(Liberty pole) 꼭대기에 매달아 그 의미인 자유를 상징토록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것은 또한 프랑스 혁명에도 동일하게 채택이 되었고, 현재 프랑스 국가 휘장 또는 동전 속에서 등장하는 마리안네(Marianne)가 이 모자를 쓰고 있다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자유의 여신상은 이 마리안네로부터 힌트를 얻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로마와 파리와 뉴욕을 이 컨셉으로 묶을 수 있겠네요^^] 이것은 또한
웨스트 버지니아: http://en.wikipedia.org/wiki/Image:Flag_of_West_Virginia.svg
뉴저지: http://en.wikipedia.org/wiki/Image:Flag_of_New_Jersey.svg 그리고
뉴욕: http://en.wikipedia.org/wiki/Image:Flag_of_New_York.svg
주 깃발에도 나타납니다.
또한 미 육군: http://en.wikipedia.org/wiki/Image:United_States_Department_of_the_Army_Seal.svg
상원: http://en.wikipedia.org/wiki/Image:Senate_cap.PNG
휘장에도 포함되어져 있습니다.

한가지 더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 다음과 같은 남미 국가의 군인들의 복장이나 국기들에 이 모자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Nicaragua: http://en.wikipedia.org/wiki/Coat_of_arms_of_Nicaragua
소아시아 지방에 사람이 거주하여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 이전 기원전 약 6000~5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발굴된 많은 유적과 유물들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이 지방에 어느 종족이 살았으며 그리고 어떤 부족 국가들이 일어나고 사라졌는지 오늘날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 지방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이미 양탄자를 짜고 토기를 제조하는 기술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인근의 발전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고고학계에서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약 3000년을 전후로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에게해와 그리스 북부 지역을 거쳐 발칸반도에 이르기까지 이주해 갔으며, 청동기시대 (기원전 약 2000년)를 전후로 도시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시기에 아마 히타이트 왕국이 융성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하네요.
철기 전기시대 (기원전 약 1200년경)에 이르러 히타이트문명의 도시들은 북쪽에서 들어온 다른 부족들에 의해 정복되거나 파괴되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으며 기원전 10세이후에는 고대 그리스의 동북부 지역의 프리기아가 소아시아의 패권을 잡은 것으로 여겨지며, 기원전 7~8세기부터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이 소아시아의 에게해 연안에 숱한 식민도시를 건설하므로서 고대 그리스 문명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페르시아제국은 소아시아 내륙으로부터 세력을 확장하여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과 패권을 다투게 되죠.

결국 이런 역사 기록을 통해 살펴볼 때... 아나톨리아 프리지아의 모자가 로마의 미트라에게 씌워짐으로 말미암아... 그 스피릿이 로마로 흘러들어간 것이 거의 확실시 됩니다. 결국 로마 역시 페르시아를 흡수함으로 말미암아... 그 페르시아의 원류였던 프리지아의 신 Attis를 로마의 Mithra로 둔갑시켰던 것입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프리지아의 신 Attis가 a life-death-rebirth deity 즉 생,사,부활의 신임을 확인할 수 있었고, 더불어 이것이 Tammuz(탐무즈), Phoenix(피닉스), Isis(이시스), Osiris(오시리스), Brahma(힌두의 브라마), Mithras(미트라스), Damuzi(담무즈), Inanna(이난나) 등의 전세계 신들과 함께 동일 컨셉인 스피릿의 생사부활의 컨셉으로 역사하고 있음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빨간모자의 진실...

로마의 미트라...
프리지아의 아티스...
페니키아의 피닉스...
이집트의 이시스와 오시리스...
인도의 브라마...
수메르의 담무즈와 이난나...
그 외의 모든 잡신들이 다 한 아비 '우리의 대적'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빨간 모자는 로마를 통해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남미 곳곳에 이미 둥지를 트고 자리를 굳건히 잡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남미의 커넥션을 한참 찾고 있었는데.... 빨간 모자를 통해 그 커넥션의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뉴저지와 뉴욕이 빨간모자로 워싱턴과 로마와 통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미 육군과 미 상원도 빨간 모자를 좋아하는군요...^^

사진 2는 프리지아의 생사부활의 신 아티스입니다. 꼬깔모자를 쓰고 있네요^^



이 글 역시 타 교단의 글이지만 이단 대처에 좋은 글이라 퍼 왔습니다.
이 점 양해 바라오며, 함께 공유하여 한국교회를 힘들게 하는 "이단 대처"에 큰 효과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출처:  교회와신앙, 전정희 기자가 정리, 구춘서 교수의 글)


"목회자들은 이단 문제는 파하는게 상책이라고 한다, 그러나 피하는 게 상책이 아니다.
그러면 이단세력에 대처하는 방안은 무엇인가? "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이단에 대해 반응하면 이들이 와서 집회를 통해 예배를 방해할 것이라고 겁을 먹는다.
또 이단들이 자신들을 법적으로 고소하면 어떡하나 하고 겁을 먹고 있다.
심지어 자신이나 교인들이 이단들과 성경에 대해 논쟁이 벌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겁을 먹고 있다. 결국 이단에 대해서는 멀리하고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자세를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는 한 이단들은 한국교회를 만만하게 보고 기성교회를 대상으로 약탈적 포교활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 (생략)...... ‘이단에 대처해야 하는 한국교회’를 주제로 이날 강의를 진행한 구춘서 교수는 한국교회를 향해 초교파적이고 강도 높은 ‘이단대응’을 주문했다.

구 교수는 먼저 “한국교회를 어렵게 하고 위기로 몰아가는 여러 가지 요인들 가운데 이단문제는 직접적으로 교회의 약화를 가져 온다는 점에서 시급히 대응해야 할 문제”라고 전제하고, 그동안 한국교회는 이단 세력들이 원하는 대로 미온적인 대처로 일관해 왔다고 지적했다.

실제 이단으로 인한 피해를 보지 않은 교회의 목회자는 전혀 관심이 없다가 자기가 피해를 보게 되면 잠깐 관심을 갖지만 이도 전교회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구 교수가 볼 때 이는 목회자들이 이단에 대해 겁을 먹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이단세력들은 가정, 교회 나아가 사회에 대해 무차별적인 피해를 입히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 헌법에 보장된 대로 종교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다.
이들은 공권력을 이용하여 교회를 괴롭히기도 하고, 사회법에 호소하여 자신들의 활동에 참여하는 추종자들에 대해 가족들이나 부모의 간섭을 배제시킨다. 교회의 예배를 방해하기도 하고, 교회 앞에서 집회를 통해 세력을 과시하기도 하고, 목회자나 교인들을 무차별 고소 고발하여 겁박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정치가들이나 행정당국에 봉사와 청소로 이미지를 교묘하게 위장한다.”

구 교수는 “이단문제는 한국교회가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되는 매우 심각한 현안문제가 되었다”며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개교회 목회자만의 노력으로는 안 되고 교회와 노회, 그리고 총회가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또 필요하다면 다른 교단과 연합활동을 통해서라도 이단을 막아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이들 이단 세력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여야 할까? 구 교수는 구체적으로 4 가지를 제안했다.

첫째, 이단과의 싸움은 공정한 게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단들을 대처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귀찮다고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목회의 한 부분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교리나 활동 방법이나 그들의 미혹전략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단들이 이렇게 세력을 키워올 수 있었던 것은 실상 기성교회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 이단들을 대처하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
이단에 동조하고 참여하는 교인들은 치리의 대상임을 알려야 한다.
이는 이단들이 단순히 가정을 파괴하고 반사회적인 집단임을 알려 거리를 두려는 방식보다 더 강도 높은 대응방식이다. 현재 교단에는 당회, 노회, 총회가 치리기관이다.
그런데 이단 문제로 치리당하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이는 우리 교회가 이단 문제에 대해서 권위를 세우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셋째, 이단에 대처하는 길은 이단보다 목회를 더 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단들은 엄청난 물량 공세를 통해 자신들의 이미지를 좋게 하도록 위장한다.
추종자들을 동원하여 대중 집회를 열어 힘을 과시한다. 신분을 속이고 각종 사회단체에 침투하여 신자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미혹해 간다. 정통교회는 교단적으로 일치된 모습으로 이단들에 대처해야 한다. 전국교회가 한 번에 이단경계주일을 지키는 것도 이런 의도에서 기획되고 실시하고 있는 것을 알아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

또한, 이단세력이 정통교회를 공격하는 것 이상으로 교회도 이단들을 공격해야 한다.
이들의 부도덕하고 반사회적인 모습을 널리 알리고, 이들의 허약한 교리체계를 통쾌하게 비판해야 한다.
이들의 추악한 이면을 교인들은 물론 적극적으로 알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

넷째, 이단들이 활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예방활동을 평소에 강화해야 한다.
이단들이 싫어하는 교회로는 이단에 대해 경계하고 정기적으로 교육활동을 하며, 목회자가 이단에 대해 강경한 모습을 보이는 교회이다. 이런 교회에는 들어 왔다가도 철수해 버린다.
따라서 평소에 이런 예방적인 작업을 해야 하며, 교인들에게도 적극적인 경계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교인들이 불만을 갖지 않도록 부지런히 돌아보아 적극적으로 목양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구 교수는 “이단과의 싸움은 불공정 게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 이단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도 이단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들의 비리와 잘못을 널리 알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국의 교회가 한 목소리로 이단 세력의 부도덕함과 이들이 하는 집회에 대해 경계하면서 대응하는 것으로 이들도 고통을 당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 교수는 “지금까지는 이런 활동을 이단으로 인해 피해를 당한 부모나 가족들의 개인적인 차원에서 해 왔지만 이제 교회가 조직적으로 이런 일에 대해 고려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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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 심판의 경건한 모습 (길버트 테넌트)

 

 

“너희로 환난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형벌을 받으리라”(살후 1:6-9)

참으로 두렵고 비참한 광경이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영원의 골짜기로 분별없이 서둘러 가는 많은 가련한 죄인들을 본다. 그들의 현재의 불경한 태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건지 생각조차 해보지 않는다. 그러한 죄를 범하는 그들이 반성을 않는다면 그들은 지옥의 심판대 위에서 견디기 어려운 조사를 당하고 끝내는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는 참담과 비애, 가득 찬 시련에 잠기게 될 것이다. 얼마 후에 그들은 숨을 거두게 된다. 반면에 이성적이고 건전한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 결코 그들이 존재하는 목적과 그들의 본질의 진가를 결코 망각하지 않고 사라져가는 헛된 것들을 모으는 것에 대해 신경을 쓰는 것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잠시 동안에 그들은 영원한 존재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하여 게을러지게 되는 것이다.

최후의 심판의 결정적인 시간을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이렇게 하나님의 가슴속에 묻어둔 비밀로 최후의 심판의 시간을 밝히지 않는 것은 우리의 공포를 깨우치고 우리의 근면을 촉진하고 우리의 인내심을 뒷받침한다는 그러한 이유이다. 우리의 주님의 오실 날을 모르고 있는 이상 우리는 매일 생각을 하고 준비를 해야 하는 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말하기를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리라.”고 했다. 한밤중에 부르짖는 소리가 날 것이니, “보라 신랑이 오도다. 나가서 그를 맞으라. 노아와 롯의 시대에 있었던 일은 주님의 아들의 날에도 있으리니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를 든다.” 무서운 생각 때문에 죄인들은 구원을 청하며 산모의 진통과도 같은 갑작스러운 파괴가 그들에게 닥쳐오며, 지구 위에는 홍수가 쏟아질 것을 생각지 못하고 탐욕에만 빠진 것이다.

심판의 장소는 아마도 모든 사람이 심판의 모습과 공정한 심판을 볼 수 있게 하시기 위해 땅 위에 가까운 중간 지점이 될 것 같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 쓰여 있는바“...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라고 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생명력을 그리스도에 주셔서 그에게 심판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을 주셨으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성을 가지고 생각하고 행동을 하는 인간에게 명확한 인식을 주기 위해서 그리스도라는 한 사람에게 신격과 인격을 동시에 부여하신 것은 참으로 합리적인 일인 것이다. 또한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무한한 지식과 능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최고의 존재인 하나님만이 가지신 권능인 것이다. 어떠한 비밀의 행동도 그 선과 악의 구별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으로는 보실 수가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고유하신 책의 인봉을 떼실 수 있으며 인간과 천사들에게 영원한 대가와 벌을 지우시는 것이다.

죄악성은 이에 의심할 여지없이 드러날 것이며 한층 더 악화된 상태로 나타나 지독한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죄악은 가장 부드러운 동정에 엄격함으로 다스려지게 된다. 그러한 역할은 그를 축복해 주시는 아버지(광명에 찬 영광의 보좌이며 가장 행복한 은혜의 자리인 엄격한 보좌의 중심이신)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어진 자비로운 구주가 담당하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겸양에 가득 찬 그리스도는 인간의 본성을 그의 권력으로 다스리고 인간의 영혼을 영원의 파멸로부터 건져내고 영원한 광명과 영광에 찬 생활을 약속하시기 위해 많은 고통과 불행을 견디셨다. 그러한 피로서 겪으신 많은 고통이 지나간 후 그리스도는 구제할 수조차 없은 죄인들은 영원한 죽음으로 내쫓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이 죄악에 대한 혐오감을 마음속에 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주의 심판관이 되셔서 새로운 하나님의 왕궁 체제를 확실히 이루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고 순종하는 구제주가 최고의 마지막 심판자가 되시는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죽음을 선고하신다. 사도 요한은 계시록 1장 7절에서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라고 밝혔다. 최후의 심판의 권리는 그리스도가 심한 굴욕과 고난의 세월에 대한 대가로서 하나님이 주신 주 예수의 권한임에 틀림없다. 빌립보서 2장 8,9절을 보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라고 했다.

이러한 말씀은 온 세상에 엄숙한 영원의 심판대가 마련되면 그날에 하나님이 마련하신 심판관이 나타날 것이다. 그때는 성경책에 있는 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어머어마하고 거대한 권능으로 충만해 있으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면 주 예수는 하늘에서 불꽃을 감은 천사들과 함께 나타나시리니” 지금 그리스도는 천국에 계시지만 때가 되면 천국으로부터 오실 것이다. “모든 눈이 주님을 지켜보리라.”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내려오실 때는 수많은 천사들에게 호위되어 오실 것이다. 그리고 심판대에서 천국과 지옥의 길로 만인에게 심판할 것이다. 준엄한 상태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던 경건함을 나타내실 것이다.

이러한 거룩한 권세를 가진 천사들은 틀림없이 그 최후의 심판에 정의와 자비의 권력자로 일할 것이다. 그들은 죄인을 심판대로 소환하고 그들에게 곧 판결문을 선언하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즐거이 그들의 행복에 넘친 안식처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주님은 성령의 불꽃 속에서 나타나실 것이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았을 때 산은 두려워서 움직이는 것 같았고 불과 연기로 둘려 쌓였었다. 그리고 불꽃 중에서 들려온 말씀은 온 이스라엘을 놀라게 하셨다.

성경은 그리스도 재림의 기록은 굉장히 화려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리스도가 구세주로서 세상에 오셨을 때는 그리스도의 권능과 영광은 그의 인간미로서 감추어졌었다. 종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빈곤과 멸시로 태어나셨으며 인간들의 숙명적인 질병도 겪으셨다. 그러나 다음에 온 만물을 심판하려 오실 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하신 모양으로 나타나실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위엄을 드러낼 것이다. 하늘은 뒤흔들리고 땅에선 지진으로 인하여서 용암이 휩쓸고 땅 속 깊이 흔들릴 것이다. 삽시간에 하늘과 땅은 온통 성한 데가 없이 될 것이며 천사장이 부른 나팔소리는 죽은 자를 그들이 묻혀 있는 무덤에서 일어나게 하며 바다에서는 무섭게 파도가 치고 하늘에는 천둥이 몰아치며 땅에서는 소름이 끼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며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저주 받은 인간들이 두려운 비명소리를 지르게 된다.

이 최후의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가 권능과 영광에 휩싸여 천사들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경은 죄 많은 자들에게는 보기조차 두려운 광경일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천사장의 호령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우리의 구주께서 변화산에 오르셨을 때 그의 얼굴은 태양같이 빛났었고 입으신 옷은 희고 빛났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가 영광과 위엄에 찬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면 그 화려함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 화려함에 대해서도 사도 요한이 쓴 성경 가운데 인상적인 구절을 잘 보면 짐작이 갈 것이다.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맑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계 1:13-16)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 자신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으로서 동시에 오시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빛과 아름다움 장엄함과 권능은 지금 현재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도, 말로 표현하기도 힘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보좌는 크고 희며 순결하며 권능으로 되어 있다고 하며 거기서 빛과 천둥과 음성이 들려온다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 만일 그리스도가 1900년 전에 이미 권능에 휩싸인 몸으로 계셔 그를 체포하러 왔던 사람이 되돌아가다가 땅에 쓰려져 버렸다면 그의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그리스도가 가장 고귀하고 영광과 권능에 가득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실 최후의 날을 기다릴 수 잇겠는가?

그리스도의 권능을 나타낼 천사장의 나팔소리는 지구의 끝까지 퍼지고 하늘을 울리며 어두컴컴한 동굴을 뒤흔들고 육지와 바다의 구석구석까지 들려가며 죽은 자에게는 그들의 영혼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세상이 창조된 이래의 모든 과거의 사람 중에서 그리스도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공정한 심판을 받고 그때부터 영원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거만했던 독재자, 음흉한 정치가, 주제넘은 영웅들은 모든 지위를 빼앗기고 그들이 가졌던 권력과 힘, 위엄은 모두 잊어버린 채 산을 향해서 보좌에 앉아계시는 구세주에게 도망가게 해달라고 빌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그들이 멸시했던 구세주 앞에 끌려가 꿇어 엎드려 그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엎드려 빌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미 때가 늦은 비참한 애원에는 냉정하실 것이다. 그들이 아직까지 살아있는 몸이라면 그들이 죄에 대해 회개를 하고 자비와 용서를 비는 것도 도움이 됐을 것이나 그들이 죽어진 다음에는 너누 늦은 것이다. 구세주께서는 일어나셔서 회개하지 않는 낯에게는 자비와 구원의 문을 굳게 잠가 버리시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죄 많은 자의 영혼과 육체가 하나로 결합이 되면 그들의 심장은 죄의식과 두려움과 수치로 찢어지는 것 같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두려운 판결소리가 온 만민 앞에서 들릴 때 공포와 당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노하신 심판관은 이미 옛날에 자기 자신을 구세주라 밝히시고 회개하기를 만일에게 종용하신 분이신 것이다. 그들이 불꽃같은 예수의 눈을 바라보고 물소리 같은 음성을 들을 때는 그들의 가슴은 날카로운 고통으로 찢어지는 것 같을 것이다.

궁지 속에 빠져 있는 그들을 동정하거나 도와 줄 사람은 하늘이나 땅 어느 곳에도 없는 것이다. 반면에 크신 하나님과 한때는 사랑을 베푸시고 무한한 노력을 기울이시며 그 사랑을 받아 회개하기를 권유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는 그들에게 냉정하시며 그들의 참회를 비웃으며 모든 천사의 무리와 영광을 얻은 성자들까지도 그들의 파멸에 기쁨을 나타낼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그러나 무서운 승리를 얻게 될 것이다.

모든 산 자와 죽은 자는 불붙는 심판대 위에 놓지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물론 구별을 둔다. “염소는 그 왼편에 양은 오른편에”(마 25:33) 이에 악한 자와 선한 자는 쉽게 구별할 수가 있는 것이니 주제넘은 위선자는 가면을 쓰고 경건한 영혼 가운데 섞을 수도 있고 속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교묘한 거짓은 곧 발견될 수 있으니 곧 선한 자들의 집단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위선자는 한 사람이라도 많은 존귀한 틈으로 침입하게 방임해 두지는 않는다.

그리고 큰 죄뿐만 아니라 작은 죄악도 모두 조사를 받고서 이제는 별 악의가 없다고 인정이 되는 죄악도 조사를 받는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알려주시길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은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두려운 말씀으로 들리겠는가? 많은 죄인들의 죄가 분석되고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선한 자들이 행했던 신앙과 사랑은 자랑스럽게 밝혀질 것이다. 그들이 옳은 일을 위해서 한 숨은 노력과 기도와 눈물과 고통 등 그들의 미덕은 기억되고 경건하게 간주되어 보답을 받을 것이다. “내가 굶주릴 때 너는 음식을 주었고 병들어 감옥에 있을 때 찾아 주었고 헐벗었을 때 그대는 옷을 나에게 주었도다” 그에 대한 작은 사랑의 표시, 심지어 냉수 한 잔마저도 결코 잊지 않고 보답없이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니 이는 하나님에 대한 복종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영광의 보좌로부터 심판하러 오신 왕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 이런 말씀을 듣는 자는 얼마나 행복할까? 이보다 더한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 어디 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어느 누구가 당신을 비난하더라도 당신은 그때에는 하나님의 축복과 인정을 받을 것이다.

“오라, 땅 위에서 나를 저버린 자들에게서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너의 나쁜 친구들로부터 고난을 당하더라도 나는 너를 버리지 않는다. 오라! 나의 날개 아래 있는 죄악과 비참의 세상에서 나의 가슴 안으로 와서 나의 사랑의 기쁨을 맛보라! 와서 너를 위해서 창세적부터 예비해 둔 영광의 나라를 상속 받으라! 오라 너 죄인들에게서 고난을 받아 약해진 영혼아! 오라, 너를 위해 남겨 준 것을 물려주리라!” 영광을 받은 자들은 가슴깊이 스며든 기쁨과 즐거움은 말로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선한 자들의 영광에 가득 찬 문장이 끝난 뒤에 그들은 천사들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려 갈 것이다.

다음에는 죄 있는 자들의 재판이 행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하나님의 율법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경시한 행동이 나타나고 인정이 된 불순하고 속된 이러한 영혼들은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두려운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이니, “너 저주받은 자여! 악마와 그의 무리들을 위해 마련한 영원한 불길 속으로 들어가라! 이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의 말씀인가? 그대는 그대의 재산과 헛된 욕망 속에 쾌락을 즐기며 남에게 아첨을 해왔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됐다. 그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그대와 떨어져 있기를 원했고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알기를 원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종의 무리를 멸시했다. 이제는 그러한 하나님의 종의 무리와는 영원히 떨어져 있게 될 것이다.

심판관이신 그리스도가 판결문을 읽으신 뒤 곧 집행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면 이 불행한 영혼은 심판대에서 끌어내려져 무서운 지옥으로 끌려갈 것이다. 지옥의 불꽃은 불이 붙었다. 하나님에게서 그리고 온화한 성도들과 천사들에게서도 영원히 추방되는 것이다. 또한 빛과 사랑의 행복에 넘친 곳에서 모든 기쁨과 영광에서도 멀어지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리라는 생각은 추호도 가질 수 없었던 어두침침하고 공포에 휩싸인 동굴 속에서 고통을 겪을 것이며 같은 죄인들의 끊임없는 비명소리와 소름이 끼치는 비탄의 소리뿐이다. 하나님의 두렵고 무서운 질책이 그들에게 끊임없이 내릴 것이다. 이 불행한 영혼들의 수치와 당황과 고통, 괴로움은 더 이상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은총의 복음 속에서 하나님의 교훈, 약속, 말씀을 경시할 때는 우리가 이미 수난을 받은 것으로 간주하라는 것이다(요 3:36). 우리가 참회를 하지 않는 이상 곧 집행이 시작될 것이다. 만일 그대가 계속 죄악을 범한다면 주님의 생전에 소돔과 고모라가 겪었던 그 이상의 벌이 그대를 다스릴 것이다. 지옥은 그 입을 벌리고 그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경건했던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그도 역시 공포와 불안으로 떨었을 것이다.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히 12:21),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의 모습을 얼핏 보기만 했지만 그는 공포에 휩싸여, “하나님은 성스럽고 영광이로다”라고 부르짖고는 “나는 도대체 누구냐! 아직 영광을 받지 못했으니”라고 한탄했다. 여러 가지 죄로 비열한 모습을 한 그대는 어떻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심판관 앞에 나설 수 있겠는가? 그의 허리는 온갖 금 은으로 둘려 있고 그의 몸은 찬란한 녹주석같이 빛나고 얼굴은 빛 같으며 그의 눈빛은 등불과도 같으며 팔 다리는 청동이 잘 닦여진 것같이 윤기가 나며 그의 음성은 하나님의 음성과도 같은 것이다.

붉은 예복을 입으신 심판관들이 심판대 위에 선 죄인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공포로 두렵겠는가?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의 구름을 헤치고 내려오셔서 그가 심판대에 찬연히 앉아 계시는 것을 보고 후회를 한대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순간에 우리가 하늘의 천둥소리와 요동치는 소리를 듣고 사방에는 갑자기 무서운 불빛이 번득이고 발밑에는 대지가 우리를 삼키려는 듯이 움직이며 갈라지고 열려진 하늘의 문에서는 태양보다 밝은 광채로 천사들로 에워싸인 그리스도 심판관이 내려오시는 것을 보고서 우리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두려움에 질려 불안에 잠기어서 하나님에게 때늦은 자비와 용서를 울며 애원하겠는가?

그리스도는 그가 오시는 날을 연기까지 하지지만 어리석은 죄인들은 믿으려고도 하지 않고 심판의 날에 대비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내가 말한 갖가지 죄를 짓고 계속 죄악 속에 머무는 모든 불쌍한 심령들은 그대의 죄악을 다스리러 그리스도가 틀림없이 오심을 믿으시기 바란다. 죄인들은 영원히 은혜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추방되어 무섭고 영원한 파멸과 고난에 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엄하신 정의와 저들의 무섭고 끝없는 파멸에 오히려 영광을 내리실 것이다. 형제들이여! 만일 그대들에게 이러한 벌이 내리지 않는다면 나는 어떠한 벌이 그대들을 다스리게 될지 알 수가 없다. 이교도인 빌립도 이러한 형벌의 말씀을 듣고서 공포에 떨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이름과 자비심을 빌어 그대들에게 빨리 다가올 어쩌면 내일 새벽이 기 전에 다가올지도 모르는 그리스도의 심판에 준비하고 마음을 순결하게 하도록 권한다.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에는 “한밤에 커다란 소리가 있으니, 보라! 신랑이 오도다.”라고 적혀 있다. 나는 이로서 여러분에게 최후의 심판의 날에 다가올 죽음에 대비해 빨리 회개하고 기도와 말씀 공부하기를 바란다. “죄인들이여, 회개하라”

나는 우리들이 최후의 심판에 대해 생각하면 우리는 죄악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봉사로 향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제 다시금 겸손하게 행하는 모든 행동은 천국에 똑똑히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기록이 될 것이다.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필수 불가결한 준비 작업으로 여러분이 직접 교회의 봉사자가 되어 있어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피의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죄악으로부터 성스러운 몸이 되시오.

죄인들이여!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관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5,26)

형제들이여! 심장을 죄악의 소용돌이에서 깨끗이 닦아내십시오. 우리의 가슴속에는 얼마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이 있는지, 그대들의 손을 씻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오. 주저하는 자들이여!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시오. -삶은 짧고 영생은 긴 것, 죽음은 가깝고 심판은 문 앞에 있으니 후회하지 않는다면 잠깐 사이에 구원의 기회는 자나가 버릴 것이다. 그대들 중에 죄악과 위기에 대해 확신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에 대해 생각을 하고 기도를 함으로써 귀중한 보석같이 보존을 하고 그러한 확신을 일깨우시오. - 그대에게는 어떤 희생이 오더라도 겸손하게 하나님에게 봉사를 하시오. 진지한 신앙은 보다 큰 대가가 치러지게 될 것이다. 지금의 이러한 고난은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에 비해 비교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퇴폐하고 그릇된 시대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다른 이들에게 거슬리는 것이 되더라도 그대는 그렇게 생각 말라는 것이다. 죄진 자들이여! 내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빌어 바라노니 그대들은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섬기지 말라. 만일 당신이 선한 행동을 진실된 마음으로 행한다면 그리스도가 오시는 날은 당신에게 축복을 내리는 날이 될 것이며 그대는 그 날이 오기를 바라게 될 것이며 “주 예수여! 속히 오서서.”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아멘.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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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한교연, "통합의 한기총 이단 해제 관련자 치리 수용"

2014/03/14 (금) 10:43 ㆍ추천: 0      

예장통합이 최근 한기총의 이단 옹호에 동조한 관련자들의 치리 절차에 나선 가운데, 한국교회연합도 예장통합의 이 같은 결의를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한교연 바수위는 13일 열린 회의에서 예장통합의 한기총 이단 해제 관련자 치리 조치를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한국교회연합(대표회장 한영훈 목사) 바른신앙수호위원회(위원장 황인찬 목사)는 13일 열린 3-1차 회의에서 “예장통합이 한기총 이단대책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3인에 대해 결의한 내용을 그대로 수용, 한교연 회원 교단에 이 같은 사실을 고지한다”고 결의했다.

예장통합 사이비이단대책위원회는 지난 4일, 한기총의 이단 해제 과정에 참여한 통합교단 인사 예영수, 나채운, 신창수 목사 3인에 대해 경고와 권징 고지 등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이 같은 결과를 보고받은 예장통합 임원회 역시 “3명 모두 경고 조치하고, 1명에 대해서는 권징할 수 있음을 고지, 나머지 2명은 추가로 조사해 제99회 총회 시 보고하라”고 주문했다.

예영수 목사 등 3인은 한기총이 평강제일교회 원로 박윤식 목사를 ‘이단성이 없다’고 밝힌 보고서 작성에 검증 위원으로 참여한 바 있다.

윤화미 ⓒ 뉴스미션/USA아멘넷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말씀 한 절 읽지 않고

주님이 나의 왕이라고 찬양하면서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서 스마트폰 놀이라니요..

이렇게 기본이 무너진 시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기본을 지키지 않는 것은

죄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저를 보고 보수적이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저는 보수적인 게 아니라 ‘정상적’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고, 해야 할 것은 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지금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할 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실한 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을 위해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실력은

높은 연봉과 좋은 차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은 하면 제대로 한다 저 사람이 말하면 참말이다“

라는 칭찬이 바로 그의 삶의 실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한국교회가 타락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내는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일하기를 기대하기 전에 제대로 살아가는

삶의 실력을 키우십시오. 진실로 기도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진실로 말씀 보는 사람이 되십시오. 예배에 늦지 마십시오


 

기본을 행하십시오

진실하고 참되게 사십시오

주님이 당신을 사용하실 때 부족함이 없는

삶의 자세가 바른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사랑한다 독사의 자식들아/ 김남국


영적 능력과 기쁨은 하나님과의 계속적인 관계와 행함에 있다 / 프란시스 쉐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 하심을 일단 받은 후에도 우리는 매순간 주님과의 초자연적인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전류가 흐르도록 플러그가 끼워져 있는 전등 같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의 기쁨과 영적 능력이 하나님과의 계속적인 관계에 달려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만큼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주님께 의지하지 않는다면 플러그는 뽑히고 영적 능력과 영적 기쁨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한다. 바울이 기도 중에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 진술하는 것을 상기해 보라. 우리 안에 거하시며 삼위일체 전체의 대리자이신 성령의 교통하심의 실재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계속적인 실재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면 우리는 순간순간의 삶 속에서 그 사실에 따라 행동해야 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마리아는 수태 예고를 들었을 때,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나는 당신의 손에 내 몸을 드립니다.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적극적 수동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갖게 하는 부분에서 그녀는 수동적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의지 안에서는 수동적이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이 그리스도인인 우리 각자에게도 매우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만일 내가 순간순간 자신을 그리스도의 품에 맡기면, 그는 나를 통하여 이 비참하고 손상된 세상에 그분의 열매를 맺으실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분을 의지하여 행동하지 않는다면, 나는 비신앙의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내가 믿음에 따라 행동하지도 않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나를 통해 열매를 맺게 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을 비신앙이라 해야 되지 않을까? 현재의 삶에서 초자연적인 분께 의지하여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는 비신앙 속에서 사는 것이다. 비신앙은 기독교를 단순한 철학으로 변질시킨다. 순간순간 당신이 음식을 먹는 데에 사용하라고 있는 은수저를 나사를 푸는 드라이버로만 사용하기 위해 공구함에 넣어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당신이 우주에는 영적 영역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에 따르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주에 대해 이교도보다 모르는 상태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주의 교회에서 왜 우리가 종종 무미건조함, 비현실성, 그리고 추상적인 느낌을 갖게 되는가? 우리가 믿는다고 여전히 말하는 교리가 한 때 살아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인공 모조품의 박물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비신앙은 바로 유물론자의 의자에 앉아 있는 그리스도인이다. 실존적으로 매 순간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앞에는 두 개의 의자가 있는 것이다. 주어진 순간마다 살아 있는 그리스도께 내 삶을 굴복시키든지 그렇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이 의자가 아니면 저 의자이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머리로 믿는 것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그 믿음에 따라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영성은 주어진 순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가 믿는다고 말한 교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복음주의 교회는 개혁-부흥과 더불어 건설적 혁신을 이루어낼 수 있다.

 

- 프란시스 쉐퍼, 『개혁과 부흥』, pp 116-126

 

 

출처: 청교도의 길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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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친북좌파들이 아주 좋아할 메뉴들입니다.



유타(Utah)주는

캘리포니아와 더불어

아웃도어의 천국이라 일컬어집니다. 

 

우리나라처럼

뚜렷한 사계절을 가지고 있는 유타는

  

일반 사람들은

듣도 보도 못한 신비의 장소들과

오지를 웬만큼 돌아다닌 사람들도 잘 모르는

  

온갖 오지와

다양한 비경을 지니고 있는 관계로,

오지 매니아들과 사진작가들의 선망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파리아 강가에 자리잡은

레인보우 캐년(칠색산)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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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가면

칠색산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하지만 칠색산은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곳 미국에도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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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타의 오지

레인보우 캐년에

바로 미국의 칠색산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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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색산이 있는 곳은

Grand Staircase Escalante National Monument입니다.

이름이 좀 길어서 이곳을 그냥 GSENM이라고 부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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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SENM은

유타에서도 이름난

오지 가운데 한 곳이죠.

 

이곳은 또한

그랜드 캐년과 더불어

지질학의 보고(寶庫)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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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보우 캐년은

맑은 날과 흐린 날에 따라

색감이 확연히 다르게 보입니다.

 

그리고

같은 맑은 날,

혹은 같은 흐린날이라도

빛의 강도에 따라 색상이 달리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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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이곳에도

마을이 형성되어 사람이 살았지만

파리아 강(Paria River)의 잦은 범람으로

 

계속해서 홍수 피해를 입자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 지금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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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곳을 방문해 본 사람은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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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떠났지만

이곳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헐리우드의 영화 관계자들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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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납(Kanab)과

레인보우 캐년이 있는

Paria River Valley 주변에서

만들어진 영화만도 100편이 넘습니다.

 

그만큼 이곳은

아름다운 곳이며

이름난 명소라는 곳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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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아는 사진작가들은 거의 없죠.

 

물론,

제가 데리고 간 사람들은 제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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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

이곳의 풍광은 눈이 부실 정도죠

특히 석양빛에 비취는 칠색산은 환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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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지층마다

일관되게 동일한 색상에

규칙적으로 나 있는 라인은

 

이곳의 지층이

동시대에 형성된 것임을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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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보우 힐의

외부를 덮고 있던

부스러지기 쉬운 바위와 돌과 흙이

 

풍화작용에 의해

조금씩 씻겨 나가면서

아름다운 색과 라인이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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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이 있지만

구름에 살짝 가리게 되면

분위기있는 은은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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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히 흐린날은

평소보다 더 진한 색감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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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멋진 이곳에 가고 싶으세요?

그렇다면 준비를 단단히 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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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칠색산에서

    더 멋진 곳을 보기 위해 가다가

    진흙길에 차가 갇혀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죠.

 

    그래서 일단

    차에서 모두 내렸습니다.

 

②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진흙 때문에 차가 똑바로 나아가지 않고

    옆으로 가면서 점점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타이어 아래의 흙을 퍼내고

    타이어 아래 돌과 나무등 버팀목을 설치했지만 무용지물...

 

③ 바로 이때,

    아무도 없는 외진 이곳에

    저 멀리 미주리(Missouri) 주에서

    갑자기 여기를 어떻게 알고 도움을 주러 오신 분이 있었으니...

 

④ John Steagner와

    그의 wife인 Lajuana의 도움으로

    우리는 악마의 구덩이에서 겨우 벗어 나왔답니다.

 

 

     John & Lajuana

     Steagner 부부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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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내가 시행하리라.

대장쟁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심판은 속히 이루어지며 신속하게 임할 것입니다. 평안하다, 평안하다 할 때 도적같이 임할 것이며 그 심판을 벗어날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하만에게 임하는 심판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하만의 아내 세레스가 하만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거꾸로 그 앞에 엎드러지리이다.” 그 말이 채 마치기도 전에 왕의 내시들이 들이닥쳐 하만을 데리고 에스더의 베푼 잔치자리에 나아가는 모습은 하만이 자신에게 느닷없이 임한 심판의 미끄러운 웅덩이에 신속하게 빠져드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 심판의 웅덩이는 실상 하만이 스스로 판 무덤이요 함정이요 올무였습니다. 하만 스스로 판 함정에 빠진 것입니다. 그 잔해가 자기 머리로 돌아오고 그 포학이 자기 정수리에 내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며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리고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히는 것입니다(시5:10, 시7:15, 잠26:27).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 그 손을 벗어날 자는 없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10:31)” 우리는 또한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보지 아니하며 가난한 자가 영영히 실망치 아니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에 위로를 받습니다. (시9:18)

왕은 사랑스러운 에스더 왕후에게 무엇이든지 해 줄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에스더가 베푼 두 번째 잔치자리에서 술을 마시며 왕은 다시 묻습니다. 세 번째 묻는 것입니다.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 할찌라도 시행하겠노라.” 왕의 마음이 에스더의 소원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하고 애탔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시행”이라는 단어에 눈길이 갑니다. 이 ‘시행’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에스더서에 가장 많이 등장합니다(네 번). 그리고 요한복음 14장에 두 번 연이어 나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한복음 14:13-14)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에서 다시금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에게 구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내게 구하라” 하신 주님의 이 말씀은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지요.

이제 에스더는 드디어 그 소원을 왕에게 아룁니다. “왕이시어, 내 목숨을 내게 주시고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노비로 팔렸더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 에스더는 '내 목숨, 내 민족이 하나요, 나와 내 민족이 함께 죽임을 당하게 되었으니 돌아보소서.' 하고 왕에게 아룁니다. 자신과 유대민족을 같은 목숨, 공동운명체로 묶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형제가 되셨고 우리의 한 생명이 되셨고 우리와 공동운명체가 되셨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주님의 제사를 받지 아니하셨다면, 구원에 실패하셨더라면 우리 죄인들만 영원히 죽는 것이 아니라 주님도 우리와 함께 멸망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 하셨을 것입니다. 왕이 대경실색하여 묻습니다. “뭐라고?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냐?” 왕이 어떤 표정이며 어떤 음성이었을까요? ‘감히 어느 놈이 나의 사랑하는 왕후 에스더를?’ 아마도 왕의 눈에 뵈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에스더가 대답합니다.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너무나도 놀라고 기가 막히고 분노한 왕은 자리를 박차고 잔치자리를 떠납니다. 그의 마음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배신감과 수치심으로 걷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잔치자리를 박차고 왕궁 후원으로 나갔던 왕이 다시 돌아왔을 때 왕의 눈앞에는 하만이 왕후의 앉은 의자에 엎드려 있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하만은 목숨을 살려달라고 에스더를 붙잡고 의자에 엎드린 것이지만 이성을 잃고 눈이 뒤집힌 왕의 눈에는 그것이 왕후를 강간 하려고 하는 모습으로 비치었던 모양입니다. “저놈이 궁중 내 앞에서 왕후를 강간하려는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리가 하만의 얼굴을 쌉니다. 얼굴을 싸는 것은 ‘보기도 싫다, 듣기도 싫다’는 뜻이며 사형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왕후를 죽이려고 한 원수, 저놈에게 내가 속았구나. 저놈을 어떻게 갈아 마셔야 속이 시원할까?’ 왕의 심중은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 왕에게 내시가 말합니다. “저가 모르드개를 달려고 집에다 오십 규빗이나 되는 나무를 세웠나이다.” 왕의 눈은 다시 뒤집힙니다. “뭐라고? 저놈이 내 목숨을 구해준 충신 모르드개를 달려고 했다고? 저놈을 거기에다 매달아라!” 그리고 그 날에 하만의 집을 왕후 에스더에게 붙이고 모르드개에게 하만에게서 거둔 반지를 빼어 줍니다. 실로 통쾌하고 극적인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이 통쾌한 이야기를 읽으며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이같이 시행하사 우리의 대적을 무찌르시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단번에 꺾으시고 우리로 승리하게 하신 것을 믿습니다. 이 모든 일이 십자가에서 단번에 이루어진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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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오시나요 /  최송연
                                 
꼭 오늘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내 눈이 감기기 전
임의 성상 뵈올 수 있다면...

날 위해 훌훌
하늘 보좌 버리신 이여,
그 사랑 날마다 
내겐 애틋한 그리움입니다

언제 오시나요,
나 너무 늙고 둔해져
그리던 임 알아뵙지 못할까
맘 졸이며 키운 사랑
이토록 절절히 농익어가는데...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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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설교와 신학은 세상 지식의 메아리, 메아리일 뿐이다 / 프란시스 쉐퍼

 

 

선지자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선지자는 저 선지자의 말을 듣고 그 메시지를 되풀이한다. 여러분이 듣는 것은 모두가 메아리이다. 마치 속이 텅 빈 판자집 속에 있는 것 같다. 듣는 것은 온통 메아리, 메아리, 메아리, 메아리일 뿐이다. 이 시대의 신학을 공부해 보라. 여러분이 듣는 것이라고는 메아리, 메아리, 메아리, 메아리뿐이다! 무엇이 메아리치는가? 이 사람이 말하는 것, 저 사람이 말하는 것, 유물주의 사회학이 가르치는 것, 유물주의 심리학이 가르치는 것, 유물주의 경제학이 가르치는 것, 유물주의 철학이 가르치는 것이 메아리친다. 그들이 신학적 용어를 써서 그 말들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성수로 적신 것처럼 메아리치고, 메아리치고, 메아리친다.

 

나는 여러분에게 말한다. 오 이세대여, 그리고 동요하고 있는 복음주의 교회들이여, 나는 거듭해서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하는 바이다!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렘23:2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30절).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렘5:31) 이 제사장들은 어떠한가? 이 선지자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주변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을 메아리로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분명히 오늘의 형편과 같다. 우리 세대에 전해지고 있는 신앙에 귀기울여 보면 대개 신앙이 없는 철학자나 사회학자가 말하는 것과 같다. 차이가 있다면 종교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다. 너희를 심판에 이르게 할 것이다.”

 

렘12:10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종교 지도자들이 그 백성들에게 가져온 파멸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신다.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훼파하며 내 분깃을 유린하여 나의 낙토로 황무지를 만들었도다”.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정원을 밟아 파괴하였다. 정원을 황폐시키고 황무지로 만든 것은 종교 지도자들이다. 확실히 그렇다면, 황폐화시키는 자들이 종교 지도자들이라면 우리는 그들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목자의 양무리를 멸하며 흩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23:1) 양무리를 흩어지게 한 자들이 누구인가? 역시 종교지도자들이다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당연한 결과로 인해 너희를 보응하겠다. 절대 기준을 제거한 자유주의는 황무지로 가고 있다. 오늘날의 양무리들은 예레미야 당시의 거짓 예언자들에 의해 흩어졌던 양무리들보다 더욱 흩어지고 있다. 확실히 최대의 죄는 진리를 알고도 고의로 진리를 외면하며, 사람들에게 현대 세속 사상의 메아리인 상대주의를 제시하는 교회에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특한지라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렘23:11) “그들은 간음을 행하며 행악자의 손을 굳게 하여 ---” 이것은 무엇인가? 상황 윤리 아닌가?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은즉 그들은 다 내 앞에서 소돔 사람과 다름이 없고 그 거민은 고모라 사람과 다름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내가 선지자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우리니 이는 사악이 예루살렘 선지자들에게로서 나와서 온 땅에 퍼짐이라 하시니라”(23:13-16)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21절). 그들은 와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였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며 말하였으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 그것은 단지 그들 내부에서 흘러나오며 그들 주변의 사회에서 회자되는 것을 메아리로 되풀이할 뿐인 그들 자신의 말이었다. 그러한 사람들이 와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으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메시지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메시지이다.

 

하나님께서 무엇보다 증오하는 것은, 나의 백성들이 나에게 반역을 했기 때문에 나의 심판 아래 있는데도,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한다고 주장하는 그 선지자들이 평화가 없는데 평화, 평화를 말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6:14). 진지한 것을 가볍게 말하며, 온갖 이차적인 해결책만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면 제사장들, 선지자들, 백성들이 일어나서 그 메시지에 대항한다. “때는 구월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서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여후디가 삼편 사편을 낭독하면 왕이 소도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온 두루마리를 태웠더라(그러나 그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였고). 예레미야는 이 사실을 보고 경악했다! 이것은 우리 시대에 대한 정확한 묘사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성경을 불태우지 않으며, 로마 카톨릭 교회도 한 때 그랬던 것처럼 성경을 금서 목록에 넣지도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석의 형태로 그것을 파괴한다. 즉 그들은 성경을 다루면서 성경을 파괴한다. 역사적, 문법적 해석을 무시함으로써,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역사 속에 있는 명제적 계시인 성경 자체의 관점을 바꿈으로써, 성경의 ”영적“ 부분만이 우리에게 권위를 갖는다고 말함으로써, 그것을 파괴한다.

 

스스로를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여러분에게 나는 말하고 싶다. 만일 여러분이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손상되는 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고 분노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걱정스럽다고,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말로 표현하신 명제적 의사가 그렇게 다루어지는 것을 보고도 슬픔이 차오르지 않고 “당신은 그 결과를 깨닫지 못한단 말이요?” 라고 울부짖지 않는다면, 나는 여러분이 그의 말씀을 사랑하는지 의심스럽다. 우리가 격정이 없이 철학에서, 예술에서, 과학에서, 문학에서, 드라마에서 전투를 하고 있다면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예레미야가 감동되었던 것 같은 감동 없이 우리가 어떻게 싸울 수 있는가? 눈물을 흘리던 그 선지자처럼 눈물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심판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 프란시스 쉐퍼, 『개혁과 부흥』, pp 38-52

 

 

출처: 청교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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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히 죽지 않는 샘

    아주 먼 옛날 어떤 마을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답니다.
    산위의 동굴이 있는데 그 동굴안의 샘물을 먹으면 영원히 죽지않는다는 군요.
    이 소식을 들은 바보 삼형제가 이 샘물을 마시러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 샘물을 먹으러 가려면 한가지 약속이 필요했습니다.
    동굴안에서는 말하면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바보 삼형제는 동굴까지 갔습니다.


    큰 형이 말했습니다.

    "예들아 여기서 말하면 죽어 말하면 안되"하고 죽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둘째가

    "그것봐 말하면 죽잔아"하고 죽었습니다.
    세째가 "나만 살았다" 하고 죽었습니다.

    바보 삼형제가 안오자 동내 사람들이 이 동굴에 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말하면 동굴 안에서는 말하면 안된다는 것을 서로 이야기 했습니다.
    드디어 동굴에 들어갔습니다.

     

    이장 아저씨가 "여러분 여기서 말하면 죽스무니다"
    말하고 죽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이장의 말에 모두 "예" 하고 모두 죽었습니다. 

     


    ♥어느 종말론자의 거짓 믿음

    한참 예수님이 오신다고 날짜를 잡아서 말하는 사람들이 한참일 때의 일이다.
    이제 예수님이 몇 월 몇 일날 오십니다. 라고 종말론자가 외쳤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그럼 당신은 휴거하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그럼 당신 집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그럼 그집은 내게 주세요. 당신은 휴거하면 집이 필요없을것 아닙니까?


    이 사람은 화를 내면서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고통 : 둘만 있는 엘리베이터에서 다른 사람이 지독한 방귀를 터뜨렸을 때


    울화 : 방귀 뀐 자가 마치 자기가 안그런 척 딴전을 부릴 때


    고독 : 방귀 뀐 자가 내리고 그 자의 냄새를 홀로 느껴야 할 때


    억울 : 그 자의 냄새가 가시기도 전에 다른 사람이 올라타 얼굴을 찡그릴 때


    울분 : 엄마 손 잡고 올라 탄 어린이가 나를 가르키며 엄마 저 사람이 방귀 뀌었나봐라고 할 때

    허탈 : 그 엄마가 누구나 다 방귀는 뀔 수 있는거야라며 아이에게 이해를 시키때


    만감교차 : 말을 끝낸 엄마가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씨익 미소 지을 때

     

    첨부이미지


    ♥도끼 가져와


    새로 부임한 목사님이 처음으로 교인 심방을 다니는 중에

    어느 두 노처녀 자매가 사는 집에 도착했다.

     

    그들이 사는 집의 정문은 비만 오면 나무로 된 빗장이 물에 불어서 열기가 힘이 들었다.

    그런 까닭에 비가 오는 날 손님이 올 경우 그들은 손도끼를 가지고 문빗장을 제껴야 했다.

    그래서 그 마을 사람들은 비 오는 날은 뒷문을 사용해야 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신임 목사님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목사님은 그 집의 교인 중 한 자매가 동생에게 이렇게 소리지르는 것을 듣고는

    큰 길로 줄행랑을 쳐야 했다.


    “마르타, 신임 목산데 도끼좀 가져와!”

    얼시구 좋다.gif


    ♥농 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위험한 다리를 한 집사가 건너가고 있었다.


    [하나님, 이 다리를 제발 무사히 건너가게 해 주시면

    이번 주일에 100만원을 헌금하겠습니다.]

     

    무사히 다리를 거의 다 건너게 되자 집사는 다시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하나님, 아무래도 100만원은 좀 너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절반으로 해 주시든지 아니면 그냥 눈감 아주시면 어떻겠는지요?]

     

    마침 그때 다리가 심하게 흔들렸다.
    깜작 놀란 집사는 다급하게 외쳤다.

     

    [아이구 하나님! 농담으로 해 본 말인데 뭘그리 노하십니까?]




    ♥노인의 고해성사


    한 노인이 성당의 고해성사실에 들어갔다.

     

    "신부님, 저는 올해 75세인데 50년동안 결혼생활을 했지요.

    그동안 다른 여자에게 눈길 한번 안줬는데,

    두달전에 18살 아가씨를 만나 외도를 하였답니다."

     

     "두달전이라고 하셨나요?

    그럼 그동안 성당에 한 번도 안나오셨습니까?"

     

     "성당이요? 여긴 오늘 평생 처음 오는거에요. 전 불교신자거든요."


    "그럼 지금 왜 저에게 얘기를 하고 계신가요?"

     

    "동네 사람들에게 다 자랑했는데 신부님에게만 안했거든요.



    ♥믿음의 한계


    어느 부부가 서로 적대관계에 있는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날 부인이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나가서 신부에게 의논하였다.

     

     "신부님, 정말 무서워 죽겠어요.

     내가 계속 교회에 나간다면 남편이 계속 저를 죽이겠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오.. 가엽게도 그런일이 있었군요. 내가 계속 기도를 하겠습니다.

    믿음을 가지세요. 하느님이 당신을 지켜 주실겁니다."

     

    "오, 신부님. 아직까지는 무사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또 무엇이 있지요?"

     

    "저기... 신부님. 어제는 남편이 다른 말을 했어요.

    제가 만약 계속 교회를 다닌다면 신부님을 죽이겠다고 했답니다."

     

    "음... 그래요?

    그렇다면 이제 결심을 해야할 때가 됐군요.
    마을 저편에 있는 회교도 성당에 가보세요."

     

     

     

     ♥마가복음 17장(거짓말)


    작은 교회의 목사가 신도들에게 말했다.

    "다음 주에는 거짓말하는 죄에 대한 설교가 있을텐데,

    마가복음 17장을 읽어오면 이해가 빨리 될거에요."

     

    다음주 목회가 시작되어 목사가 신도들에게 물었다.

     

    "지난 주에 말한 마가복음 17장을 읽으신 분 손 들어보세요."

     

    거의 모든 신도가 손을 들었고, 목사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 이제 거짓말 하는 죄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죠.

    마가복음은 16장까지 있습니다..."

     



    ♥ 2 + 2


    한 회사에서 경리사원을 새로 구하면서 면접을 보았다.

    첫번째 후보는 전직 기자였다.

    면접관이 물었다. "2 + 2 는 뭐죠?"

    기자는 대답했다. "22입니다."

    두번째 후보는 전직 엔지니어였다.

     "2 + 2 는 뭐죠?"

     

    엔지니어는 공학계산기를 꺼내어 계산하고는 보여주었다.

     "3.999에서 4.001 사이입니다."

    세번째 후보는 전직 변호사였다.

    "2 + 2 는 뭐죠?"

    변호사가 대답했다.

    "96년에 일어났던 삼송기업과 엘주기업의 분쟁의 예를 보면 그 결과는 4입니다."

    마지막 후보는 전직 세무공무원이었다.

     "2 + 2 는 뭐죠?"

     

    공무원은 주위의 눈치를 보더니 귓속말로 면접관에게 말했다.

     "얼마를 원해요?"


    ♥신세대와 구세대의 핸드폰

    1. 핸드폰
    10,20대 : 작고 깜찍한 디자인. 최신형만 고집한다.
    30대 : 그냥 쓸만하면 된다. 크기도 모양도 적당하면 된다.
    40대 : 무전기, 냉장고, 벽돌 등등...
    가끔 최신형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사용법을 모른다. -_-;;

    2. 색상
    10,20대 : 다양하다. 금색, 은색은 기본이고 핑크색, 노란색도 있다.
    30대 : 검은색과 금, 은색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40대 : 핸폰은 검은거 밖에 없는줄 안다. 때 안타서 좋아한다.

    3. 사업자
    10,20대 : PCS가 많다. 애인이 있는 경우 017도 가끔 있다.
    30대 : 셀룰러가 조금 더 많다.
    40대 : 011이 많다. 011이 휴대폰이고 나머진 다 삐삐인줄 안다.

    4. 요금제도
    10,20대 : 무조건 기본료 싼거 쓴다.
    30대 : 보통 표준요금이다.
    40대 : 요금제가 있는 줄 모른다. 그냥 다 똑같은줄 안다. 가입할때
    직원의 사탕발림에 속아 비싼거 쓴다.

    5. 연체
    10,20대 : 자주한다. 나우장터에 옷팔고 책팔고 해서 돈 구한다.
    30대 : 가끔 돈 내는거 잊어서 본의 아니게 연체한다.
    40대 : 연체? 절대 없다. 통장에서 돈이 얼마 빠지는지도 관심없다.
    가끔 통신회사의 실수로 이중부과되도 다

    6. 전화걸때
    10,20대 : 공중전화 찾아서 건다.
    30대 : 공중전화 있으면 쓰지만 없으면 그냥 핸폰 쓴다.
    40대 : 무조건 핸폰이다. 공중전화앞에서도 핸폰쓴다. 전화걸 동전도 없다.
    지폐뿐이다.

    7. 소지하는 곳
    10,20대 : 가방이나 청바지 뒷주머니
    30대 : 가방이나 양복 안주머니
    40대 : 허리에 터~억하니 무전기처럼 차고 다닌다.
    경찰관을 연상시킨다.

    8. 다이얼링
    10,20대 : 단축다이얼링을 쓴다.
    30대 : 메모리 불러서 쓴다. 자동 지역번호 정도는 쓸 줄안다.
    40대 : 일단 안경걸친다.

    리고 호주머니에서 수첩꺼내서 그거보고 일일히 다 누른다.

     

 

 

출처: 사모님사모님/죠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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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S.Lewis의 글에 드러나는 (신)플라톤주의

                                                                                                             

                                                                                                            손성은목사(삼일교회, 부산)

 

1.들어가는 글

  C.S.Lewis- 현대교회의 선지자인가? 아니면 현대교회를 와해시키기 위한 트로이의 목마인가? 그의 책 스쿠르테이프의 편지에 보면 간부마귀(Screwtape)가 부하마귀 (Wormwood)에게 어떻게 하면 인간의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게 하며, 구원받은 영혼이라도 어떻게 하면 가능한 한 타락시킬 수 있게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귀띰해 주고 있다. 이런 글을 쓰고 있는 C.S.Lewis가 현대교회를 와해시킬 지도 모르는, “트로이의 목마”일 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에 대한 음해이고 모독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간부마귀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은, 그런 간부마귀의 글을 상상해 내고 있는 C.S.Lewis의 그 생각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임에 분명하다: “An important spiritual law is here involved. I have explained that you can weaken his prayers by diverting his attention from the Enemy Himself to his own states of mind about the Enemy.” 인간(이나 크리스챤)의 입장에서 이 조언을 해석하자면, 하나님(the Enemy) 그 분 자신에게서 관심을 돌려 그 분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마음, 어떤 심리, 어떤 사고를 가지고 있느냐는 우리 인간 자신의 감정과 느낌, 혹은 믿음의 정도 등에 대해서 신경을 쓰도록 유혹하면 인간의 영혼은 약화될 것이라는 것이다. C.S.Lewis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렇게 인간 자신의 감정과 느낌에 주의하지 말고 바로 하나님 그 분에게 초점을 맞춰라고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조언을 루이스 자신이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그의 감정, 곧 신을 향한 열정(Sehnsucht)에 정당한 선 그 이상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가? 그의 하나님 그 분에게서 집중시켜야 할 그것에서 시선을 돌려서 자신의 그런 감정과 느낌에 신경을 지나치게 써서 그의 작품활동들은 하지 않았을까? 어쩜, 이런 비판을 그의 글에 적용시켜서 해부하는 것은 너무 엄격한 일인 지도 모른다. 어쩜, 스쿠르테이프의 또 다른 조언인, 그리스도인간의 분열을 조장하는 그런 유혹에 넘어가게 되는 것인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보다도 그의 글들을 통해서 “은혜”를 받으면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그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저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을 받을 수 있고, 어쩜 비판되어야 할 요소가 다분히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형제”로서 애정과 사랑을 가지고 그의 글을 비평하는 것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도 아니요, 어쩜, 마땅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인지도 모르겠다. 변명이 아니길 스스로에게 바란다.

 

  더욱이나, 그의 글들이 전혀 비판 없이(사실, 어느 정도 비판되고 있는 지 몰라서 하는 얘기이다) 수용되고 있는 현하 한국교회의 상황에서 이런 비판이 하나 정도, 아니, 균형 잡을 만큼 개진되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마땅히 싸워야 할 그 싸움이 아닐까?(고린도후서10:4-5). C.S.Lewis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그 분 앞에서 초라한 미물일 뿐이다. 이 글을 쓰는 본인도, 그리고, C.S.Lewis도… 

 

2. C.S.Lewis와 나

 

 우리 나라에서 C.S.Lewis가 소개된 것은, 필자의 기억으로는, 전 CCC총재였던 김준곤목사가 1970년대에 번역한 “고통의 문제”라는 책부터일 것이다. 아마도 전남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김목사가 문학공부를 하는 중에 그 문학을 신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를 고민했을 터이고, 그러다가 옥스포드대학에서 중세시대의 영문학에 조예가 있었던 영문학교수로 연구생활과 문학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C.S.Lewis에 대해서 듣게 되었을 것은 어쩜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그가 신앙의 회의를 극복하면서 적어내는 기독교변증적인 저서들은 김준곤목사의 신앙에 확신을 심어주는데 일조하였음에 분명하다. 필자가 국내에서 대학생활과 신학수업을 받던 중에는 간혹 외국에서 공부한 분들이 설교 중에나 글을 통해서 C.S.Lewis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를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는 사람들이 없는 것을 보면서 이상하게 여겨 왔었었다. 간혹 Lewis의 글에 이상한 부분이 발견되는 데도 그것을 비판적으로 언급해 주는 사람도 전혀 없었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채로 영국에 오게 된 것이 1997년이니까 바로 다음 해 1998년에 있었던 영국내에서의 C.S.Lewis의 탄생 100주년기념행사들은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었다.

 

  그래서 계획 하나를 세웠다. C.S.Lewis에 대해서 나름대로 연구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앞으로 하게 될 공부와는 별도로 영국에서의 유학의 부산물로 하게 되는 이런 연구는 보람된 것일 것이라고 여겨졌다. 먼저, 그의 책들을 구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책들은 이곳의 채리티 숍이나 헌 책방 같은 곳에서 구하기가 그렇게 어렵지가 않았다. 아이들을 위한 동화(나니아시리즈)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녀들의 영어공부를 위해서 그 책들을 모두 읽게 하였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Out of the Silent Planet, Perlandra(Voyage to Venus), That Hideous Strength]가 있는 것도 발견하였다. 쉬운 것만은 아니었지만, 모두 탐독하였다. 신앙과 관련된 책자들이 있는 것도 발견하였다. Mere Christianity를 읽고 The Problem of Pain등을 읽은 것은 당연하였다. 그 외의 그의 책들(Miracles나 Beyond Christianity 등)을 탐독하고, 그의 자서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의 글들을 이런 저런 주제들을 따라서 편집한 책(예, C.S.Lewis on Scripture)들을 구하고 그의 문학과 신학사상들을 평하고 있는 책자들을 입수하여 읽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수집해 놓은 그의 책, 그에 관한 책들 모두가 50여권이 넘는다.

 

  하지만 궁금하게 여겨왔던 것은, 그의 글들이 “역사적 전통적 칼빈주의신학”의 입장에서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글들에 대해서  거의 찬양일색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이상한 부분이 자꾸만 드러나는 것을 느끼면서 그런 궁금증은 더하여져 갔다. 계속 비판적 관심을 갖고 그의 책들과 관련된 글들을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탄생기념 100주년이 되던 해에 입수하게 된 글이, Tony Baxter란 사람의 “The enigma of C.S.Lewis”라는 글이었다(The Journal of the Christian Research Network, winter 1998, issue 4, pp.30-31). 그의 글의 논지는, 첫째, 복음주의자들과 로마캐톨릭 연합운동에 C.S.Lewis의 글들(Billy Graham의 신학과 함께)이 그 중심축에 놓여 있다는 것, 천주교인들도 개신교인들과 똑같이 C.S.Lewis의 글에 대해서 대환영이라는 것, 그리고 셋째, Christianity Today나 Alpha Course같은 프로그램들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고 애호되고 있는 작가라는 것이 그의 enigma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글은 짧기도 했고, 그렇게 설득력이 없었다. 로마캐톨릭과 개신교의 연합운동 그 자체에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신학적인 설득이었었다.

 

  한 편으로는 C.S.Lewis의 책들을 읽어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신학을 비평하는 자료들을 찾아가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순례였었다. 존번연의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을 흉내내면서도, 천로역정의 “기독도”가 “천국”을 향해서 “순례”를 하는 것과는 달리, C.S.Lewis의 정신적 탐구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The Pilgrim’s Regress”라는 소설은, 일종의 “순례”를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류의 “순례”이고 그 모티브도 다르고 스타일도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존번연의 “순례”는 “장망성”으로부터 “천국”을 향한 직선적 순례라고 한다면, 루이스의 “순례”는 “장망성”으로부터 다시 “장망성”으로 되돌아오는 그러면서 그 “장망성”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순환적 순례라고나 할까….존번연의 순례의 신앙적 의미와는 다른 일종의 인식론적 순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두 개의 순례를 대조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자가 다르기 때문에, 스타일이나 강조점들이 다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본질적”인 어떤 “차이”를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꼭 꼬집어 내어서 표현하기가 어려웠던 셈이다.

 

  그러면서 그의 문학과 신앙활동의 중심모티브로서 작용하는 것 중에 아주 중요한 것이 바로 Joy(즐거움)이고 Sehnsucht(열망)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것은 1974년에 발간되고 다시 1997년에 재발간된 C.S.Carnell이라는 사람의 Bright Shadow of Reality: Spiritual Longing in C.S.Lewis(Wm.B.Eerdmans 출간)라는 책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이상하게 글이 처음에는 예상치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논문쓰려고 한 것이 아닌데, 무어 이리 인용하는 책들이 많아질까?)

 

각설하자.

 

지금도, C.S.Lewis와 관련된 책, Audo/Video 테이프들을 만나게 되면, 누구보다도 반가워하면서 구입을 하고 있는 필자이다. 그러면서, 아래에 제기하는 몇 가지 문제점들로 인해서 그의 책들과 사상들에 대해서 경계해야 할 것을 또한 말하고 싶다. 이런 견해에 이르게 된 일련의 과정을 잠시 먼저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3. C.S.Lewis사상의 비평적 이해를 위한 조감도

 

. 근본주의와 모더니즘의 중간쯤

 

  영문학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그의 문학이론은 “신낭만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30년대쯤에 유행하기 시작했던, <황무지>등의 시로 유명한 T.S.Eliot 등의 “신비평”이론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면서 그 이전의 낭만주의적 견해를 비판적으로 취하여고 하는 것을 보아서 그렇다고 평할 수가 있다. 그의 유럽중세영문학에 대한 관심을 통해서 이런 견해를 가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런 그의 문학이론은 사실 그의 신앙과 신학사상에 깊히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의 신학사상에 초점을 맞춰서 비평하기로 한다.

 

  한 마디로 그의 신학사상은 근본주의도 아니고, 모더니즘(현대주의)도 아니라고 해야겠다. 먼저, 그가 근본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은, 1953년에 Corbin Carnell이라는 사람에게 쓴 요나서에 대한 그의 입장에서 분명해 진다: “…the whole Book of Jonah has to me the air of being a moral romance, a quite different kind of thing from, say, the account of King David or the New Testament narratives, not pegged, like them, into any historical situation”(quoted in Christensen, C.S.Lewis on Scripture, pp.104-5). 요나서는 역사서와는 전혀 다른 일종의 소설이라고 하는 얘기다. 영문학자로서, 성경의 기록을 일종의 문학서로 보는 것은 어쩜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기록을 역사와 무관한 소설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이런 견해는 1959년에 표현된 그의 견해와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는 이때 캠브릿지대학생들에게 행한 강의 중에서 요나서는 유대인의 유머감각을 곁들인 “a fictional story”라고 단언한다(Fern-Seed and Elephants, p.108). 이런 그의 견해는 욥기나 에스더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Lewis on Scripture, pp.106-7).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유주의(modernism)신학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가 성경을 문학으로 보지만, 그렇다고 순전히 인간적인 저작물로만 보는 것이 아니다. 일종의 거룩함과 경건함을 담지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일종의 a sacred text인 셈이다. 이런 입장에 견지해서 그는 불트만의 비신화화신학을 맹렬하게 비판한다. 불트만의 비신화화이론은, “신화”가 무엇인 지에 대해서 정당하게 비판하지 못한 것이라고 C.S.Lewis는 보고 있기 때문이다. “신화”에 대해서 루이스가 어떻게 보고 있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다른 항목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루이스에게 있어서는 최소한 예수의 “신화”는 “신화중의 신화”로서 “사실”이라는 것이다. “신화중의 신화”? ? 참 묘한 표현이다. 하지만, 불트만이 성경에서 기록된 예수의 기적조차 “신화”로 묘사하는 것을 맹렬히 비판하고 있는 것을 보니, 루이스의 예수의 기적이, 그리고 예수라는 인물이 “신화 중의 신화”라는 견해는 무언가 좀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대강 이 정도 해두어야 계속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까?

 

C.S.Lewis는 회심 이후 평생토록 “기적”을 믿어왔다. 그래서 <Miracles>라는 책까지 썼다. 그의 아내 Joy의 죽음 앞에서 이것에 대해서 잠시 회의하는 것처럼 보이는 표현을 그의 책에서 보여주는 바도 있지만, 그의 공식적인 견해는 그래도 여전히 기적을 믿는 초자연주의자였다. 기적이 없다고 하는 자연주의에 반대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초자연주의는 성경적인 초자연주의라고 하기에는 좀 묘하다. 초자연적인 기적의 역사를 믿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환상적 세계”로서의 초자연세계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요정과 귀신들, 영계의 존재들과 인간세계가 어우러져 있는 것이 그의 작품세계이고(나니아의 “환상”세계를 생각해 보라!), 이런 작품세계는 중세의 기사와 영웅들의 세계를 묘사하는 “낭만주의”와도 연결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19세기의 자유주의신학자인 Ritschl이나 Stauss, 그리고 20세기의 Harnack같은 이들을 비판한다. 성경의 초자연주의를 변호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어쩜 자신의 작품세계를 변호하기 위해서 성경의 초자연주의를 옹호하고 있다는 인상을 가짐직 하다.

하여튼 그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그리고 근본주의자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의 견해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비판을 좀 더 들어보자.

 

이런 그의 어중간한 견해에 대해서 비판의 메스를 댄 사람이 있다. 뜻밖에도 그는 “신에게 솔직히”라는 책을 써서 장안의 지가를 올렸던 바로 J.A.Robinson이다. “신에게 솔직히”라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그는 루이스의 바로 사영리식 논리를 비판한다. 사영리식 논리란, 곧 예수의 신성에 대한 논증으로서 사영리전도법을 제창한 빌브라이트가 이용하는 방식인데, 그 논리방식을 제창한 사람들 중에 제기한 사람들 중의 하나가 바로 C.S.Lewis로서 <Mere Christianity>에서이다.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는데, 만일 그런 주장이 거짓이어서 하나님이 아니라면, 예수는 분명히, 미친 사람이든지, 종교사기꾼이라는 것이다. 만일, 예수가 미친 사람이 아니고, 또한 종교사기꾼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자신이 주장한 그 주장대로 하나님이시라는 논리이다. 이런 논리에 대해서 로빈슨주교는 의심의 눈초리를 던진다(로빈슨의 책을 어딘가 두었는데, 찾을 수가 없다. 찾아지면 구체적으로 인용하면서 비판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런 그의 신학적 입장에 대한 조감도에서 요약하는 바는, 그의 신학은 근본주의도, 자유주의도 아닌, 다른 말로 하자면, 근본주의적 입장에서도 비판될 수 있고, 자유주의 입장에서도 비판될 수 있는 그 중도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속해 있었던 영국국교인 성공회의 신학적 입장과 어쩌면 아주 유사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신학적 입장을 “균형잡힌 신학”으로 평가하느냐 아니면, “어중간한 신학”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의 신학적 입장에 대한 평가가 엇갈려질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런 그의 견해를 필자는 “신복음주의”신학으로 규정한다.

 

이런 규정을 좀 더 이해하려면 솔직히 “신복음주의”와 “복음주의”간의 논쟁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 논쟁을 이해하려면 또 다른 글 한 편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선 정말 말 그대로 간단히 몇 자로 스케치해 본다. 먼저, 미국의 신학적 상황 속에서 프린스톤신학교가 좌경화되는 것에 반기를 들고 G. Machen등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운 것이 1930년대. 이것에 대해서 그러한 입장을 “근본주의”로 평가하고는 그들이 평가한 “근본주의”가 지향하고 있는 “복음주의”라는 것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복음주의”라는 뜻으로서의 “신복음주의”를 제창하는 사람은 바로 보스턴제일장로교회의 목사였던 오켕카이다. 그리고 빌리 그래함, 칼 헨리,챨스 풀러 등과 더불어서 풀러신학교를 세운 것이 바로 1940년대. 우리나라로서는 아직 일제시대의 어두움 속에 휩싸여 있던 핍박의 세월이었었다. 옥중성도들의 신앙의 절개를 위해서 목숨을 담보로 싸우고 있었던 그 세월.

 

루이스가 있었던 영국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루이스가 기독교변증가로서 작품활동을 하던 1930어간부터 혜성같이 등장한 설교자가 바로 로이드 존스목사,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Bash Camp로 불리어지는 존 스토트목사의 활동은 나락으로 전락되어가던 영국복음주의교회에 일종의 영양제주사를 놓아주었다고나 할까. 이제 지성인도 보수적인 기독교인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 준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이 당시 미국의 빌리그래함의 전도대회가 런던 등에서 개최가 되고, 영국의 보수적인 신앙인들과의 연계 속에서 활동하기를 원했던 그 당시의 바람들이 결합이 되어서 세워지는 신학교가 바로 “런던바이블칼리지”(1944년개교,현재의 이름은 London School of Theology)이다.    문제는, 이들이 “근본주의”에 대항해서 일어나게 된 “신복음주의운동”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 흐름에서 결국 빠져나오게 되고, 독자적인 노선을 선포하는데(1970 년대 초에 London Theological Seminary설립), 이것을 전후로 해서 존스토트목사와의 대립이 불가피하게 되었던 것은 이미 아는 사람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이런 중에 “신복음주의자들”은 자신의 “신복음주의”라는 신학적 선언에서 “신”자를 빼어버리게 된다. “신”정통주의 등이 지니고 있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염두에 두었던 셈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근본주의”자들로 규정한 그 사람들의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자신들도 채용하게 되면서, “복음주의”라는 용어의 개념에는 큰 혼동이 오게된다. 이런 혼동에는 사실, 미국에서의 “신복음주의자들”의 약진이 야기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G.M.Marsden이 쓴 Reforming Fundamentalism(Wm.Eerdmans, 1987)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는 C.S.Lewis의 신학적 입장은 바로 이런 “신복음주의적 신학적 입장”과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국에서는 “런던바이블칼리지”계열에서는 C.S.Lewis의 입장이 거의 비판없이 소개되고 있고, 로이드 존스목사의 신학입장에 더욱 공감하는 사람들은 C.S.Lewis의 입장에 대해서 약간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예를 들자면, 영국의 C.S.Lewis의 책자들을 소개하는데 앞장섰던 학교가 바로 Wheaton College이다. 1960년대에 루이스가 미국에 대대적으로 소개되는데, 이 학교가 앞장 섰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당시 휫튼 칼리지는, 여전히 19세기말엽의 프린스톤신학과 특별히 B.B. Warfield의 신학을 자신들의 신학적 맨터들로 삼고 있었으면서도 그런 신학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고도 할 수 있는 C.S.Lewis의 신학을 비판없이 수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신학적 분별력이 해이해지는 현상을 이 당시부터 볼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인 비판은 그의 계시론에 관한 것이 될 것이다

 

. 그의 계시론과 (신)플라톤주의

 

루이스는 무엇을 “계시”라고 보는가? 그의 성경에 관한 입장들을 수집해서 책으로 편집한 Christenson에 의하면, 여섯 가지의 유형의 “계시”에 대한 루이스의 견해를 살펴볼 수 있다. Mere Christianity에 의하면, 보편적인 양심, 이방세계에서 개진되어진 선한 소원들, 유대교의 선택, 그리고 성육신, 이 네가지가 소개되고 있고,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는 “열망”(Sehnsucht)라는 것과 the numinous(이것은 어떻게 번역해야 할 지 모르겠는데, R.Otto의 <The idea of Holiness>이라는 책에 자세히 이 개념이 소개되고 있다. 혹자에 의하면, 이 누미누스를 ‘idea’로 이해해서 번역하는 것은 그야말로 Otto의 누미누스를 오해하는 것이라고 비평하기도 한다)라는 것 두 개를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것이 바로 Sehnsucht라는 것이다. 이것은 Mere Christianity에서만 아니라, The Pilgrim’s Regress에도 또 다시 등장하고 있고, 루이스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개념들 중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런 “계시”의 유형에 대한 그의 입장이 보여주는 바는, “성경”을 하나님의 유일하신 자기계시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루이스에게 있어서 성경이란 하나님을 가르키고(pointing) 있는 계시의 여러 방편들 중의 하나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야말로 유일하신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고 하는 바르트의 신학과도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의 계시이해는 우리 인간의 계시에 대한 체험(영적 조명)과 하나님에 대한 계시 그 자체와의 구분을 적절하게 시도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앞의 서론에서 지적한 것 같이, 스쿠르테이프의 자기 부하마귀에게 할 수 있는 조언을 상상해 낼 수는 있었어도 그런 조언을 자기에게까지 적절하게 적용시키지 못했다는 비판을 루이스가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쉬운 일임에 분명하다.

 

이렇게 그가 개진해 온 계시의 유형들을 하나 하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되면 그가 지향했던 입장이 바로 철학적 관념주의(philosophical idealism)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고, 이런 관념주의는 고전적 플라톤주의나 신플라톤주의적인 용어들을 띤 채로 그의 작품들이 표현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플라톤주의는 영국의 정신사를 조그만 고찰하게 되면, 플라톤주의가 영국적 상황에서 개진되었던 캠브릿지 플라톤주의(특별히 17세기의 헨리 모어의 철학)나 18세기의 버클리주교의 관념주의와도 연결된다는 것을 쉽게 간파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가?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그 계시를 이해하게 되고 또한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이 바로 루이스의 “계시론”을 이해하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루이스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할까? 루이스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든 지 하나님의 자유하심 같은 개념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에 유념하길 바란다. 그의 답은, 인간의 마음과 상상력에 남겨져 있는 그 흔적(물론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것이다)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고 또한 하나님께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플라톤주의적인 표현을 통해서 말하자면, 예수란 그에게 있어서 있어서 육체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오신 일종의 플라톤적인 Demiurge이라는 것이다.

 

이런 그의 모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의 중요한 개념인 “Transposition”( or transvaluation)을 살펴보도록 하자. 이것에 대해서는 그가 스쿠르테이프의 편지 후기라고 할 수 있는 <Screwtape Proposes a Toast and Other Pieces>(London: Collins Fount Paperbacks, 1965)에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 책의 설명을 참고해서 간략히 여기에 소개한다.

 

루이스는 영적 세계의 영역이 물질적인 세계의 영역보다 더 중요한 일차적 실재(reality)라고 본다. 이 두 세계는 서로 상응하지만(coinhere), 위계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영적 영역이 상위에 있다는 것이다. 곧 가치가 보다 나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에서부터 플라톤주의의 냄새가 난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상위에 있는 영적 세계의 것(혹은 존재)가 하위의 것인 물질세계로 상위의 가치와 부요함을 상실하지 않은 채로 옮겨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그것이 바로 transposition, 혹은 transvaluation의 문제이다. 루이스는 상위의 영역에 속해 있는 것이 하위의 영역으로 어떤 가치가 <전이>(transposition)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인간의 “상상력”(imagination)이고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바로 “성례”(sacrament)라고 한다. 이런 성례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 나니아시리즈의 마지막 책인 the Last Battle의 마지막 부분(14장)에서 아슬란(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사자의 이름)이 말하기를,”Come further in! Come further up!”와 같은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으로 변형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영적인 것이 자연적으로 변형되는 것이 “성육신”이고, 자연적인 영적인 것으로 변형된 것이 바로 “승천”인 셈이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자연세계란 영적 세계의 그 실재가 희미해진 일종의 상징과 같은 것인데, 그 기원을 바로 영적 실재에 두고 있는 일종의 그림자가 된다. 나니아시리즈의 가장 마지막 책의 가장 마지막 장에서 그가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그림자세계”이다. 자연세계, 물질세계를 이렇게 “그림자세계”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Shadowland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 그림자세계를 벗어나서 further in, further up 해서 “이상세계”인 영적 세계로 나아가도록 권면하고 있는 것이 곧 바로 나니아시리즈의 기본주제인 셈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사상이 바로 고전적 플라톤주의의 아류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단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천국과 지옥을 대비시키고 있는 그의 또 다른 소설, <The Great Divorce>에서 “천국”의 실재를 묘사하기를 “solidity”로 표현하고 있는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천국”과 루이스가 묘사하는 “천국”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런 질문은 루이스의 작품을 이해하는 길일 뿐만 아니라, 바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 시도해 보기를 바란다).

 

 다. 여섯 가지 유형의 계시들

 

 1) 보편적인 양심

 

 서구의 철학사 중에서 헬레니즘을 플라톤주의와 그와 대별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 구분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보편적 관념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플라톤주의와는 달리 오히려 구체적인 개체를 강조한다. 자연주의적 물질주의를 배격하는 루이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혐오할 것은 당연하다. 계시를 수납할 수 있는 인간의 기능을 그는 양심이라고 보고 이런 양심이 문화를 초월해서 인간사회에 보편적이라고 한다. 이런 견해를 그는 그의 책, The Abolition of Man이라는 책에서 개진하는데, 곧 인간의 마음 속에 도덕적으로 선한 그 무엇이 내재해 있다고 믿는다. 그것을 “도”(Tao)라고 한다. 그렇다고 원죄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부인하지 않지만, 문제는, 그것을 마땅할 만큼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 안에 내재하는 그 보편적 도덕적 욕구를 강조한다. Mere Christianity의 아주 중요한 논지가 바로 이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주자학적 논쟁 가운데서 “4단7정논쟁”과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낀다[4단이 무엇이며, 7정이 무엇인가? 이 글을 계속 읽어가기 전에 그것부터 알아보기를 부탁한다. 이황, 기대승, 이이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고, 경기도 지방과 경상도지방의 오랫 숙원을 만나게 되고, 어쩜, 예장신학과 기장신학의 차이의 한민족적 뿌리를 발견할 지도 모른다. 5천원짜리와 천원짜리 지폐의 차이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너무 지나친 얘긴가? ㅎㅎㅎ). 인간 안에 선함을 원하는 것(4단)은 있는데, 그것이 왜 선하지 않은 것(7정)으로 표출되느냐 하는 것으로 유학에서 오랫동안 토론해 왔다. 루이스는, 여기서, 4단의 활동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4단으로서의 보편적 윤리감각이 발현된 결과가 바로 “종교”라고 한다. 그의 종교이론이 성경의 계시에 근거한 종교(기독교)와는 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보편적 양심이 활동해서 “종교”를 발생시킬 가능성에 대한 인정…..이것은 플라톤이 강조하고 있는 동굴 속의 인간이 그림자를 보고는 동굴 밖을 상상하고는 그 동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인정과도 비슷하다. 그런 사람이 “철학자”라고 하는 것인데, 평범한 사람은 벗어나지 못하지만, 특별한 어떤 사람이 “영감”이 (스스로?) 넘쳐서 자신 안, 물질 안, 그림자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참된 실재(reality)로서의 영원한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4단7정논쟁이 있었던 유교 자체 내에서는 “4단7정”이라는 현상을 관찰하고 그것에 대해서 토론하는 것은 가능했었을 런 지 몰라도, “왜” 4단이 7정이 되는가 하는 근원적 분석은 불가능하다. 유교적 틀 자체가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독교의 복음의 틀을 전승받은 루이스인데도, 그런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루이스는 Mere Christianity에서 이런 보편적 도덕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지만, 그 이상을 나가지 못한다. 왜 그런 도덕법을 인간이 달성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책들이 강조되고 있는, 알파코스 같은 프로그램들이 결국은 “이빨빠진 복음”(Teethless Gospel)으로 불려지는 것도 어떰 이런 루이스신학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알파코스에 이빨을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혀만 있으면 안된다. 복음에는 이빨이 있어야 한다.  

 

 2) 이방세계에서 개진되어진 선한 소원들:신화

 

 위에서 언급한 플라톤의 비유에 나오는 동굴 속의 사람들에게 얼른거리는 동굴 벽의 그림자, 곧 이상세계의 흔적이 바로 루이스에게서는 신화이다.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선한 꿈”은 곧 이상세계의 반영으로서의 꿈인 것이다. 루이스는 실로 유럽의 신화들에 대해서 굉장한 매력을 느낀다. 그의 친구인 톨킨(“반지의 제왕”저자)과의 교제를 통해서 이런 지식들은 심화되어진다. 그의 소설이 환타지 소설에 분류되는 것이 이것 때문이다. 루이스는 의외로 “신화”에 긍정적인 기능을 부여한다. 이방종교의 신화는 “거짓된 것”이 아니고 “미완성의 것”이다. 기독교는 “완성된” 신화가 되는 것이다. 그의 소설 The Pilgrim’s Regress를 보면, 이들 이방종교의 신화들도 반쪽 계시를 담지하고 있는 아주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한다. 선택된 유대인들(The Shepahrd)의 계시도 반쪽일 뿐이다. 두 개가 합해져야만 온전한 계시가 된다는 것이 루이스의 견해이다. 이런 “신화”에 대한 긍정적인 견해로 인해서 “예수는 신화중에 신화요, 참된 신화”라는 그의 견해가 나오게 된다. 물론 그에게 있어서 “신화”란 일반적인 용례로 사용되는 “거짓에 근거한” 이야기란 뜻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루이스의 모든 주장들을 오해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는 신화는 거짓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에 근거하고, 실재에 근거한 것인데, 그것을 단지 “희미하게” 반영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신화들 간의 차이는 단지 이 “희미함의 정도”간의 차이이다. 그 중에 가장 희미하지 않은 것이, 가장 실재에 가까운 것이 “기독교”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방종교의 “신화”는 일종의 “형식”이다. 그 형식에 담고 있는 “내용”이 곧 “진리”라고 한다. 모든 종교가 “진리”를 담지하고 있다는 메시지이다. 하지만, “신화중의 신화”인 기독교의 진리가 없이는 그래도 구원이 없다. 이런 구분을 하기 때문에, 그래도 루이스는 (신)복음주의자들에게 안도감을 준다. 타종교에 대한 공박도 없기 때문에, 비판을 해도, 너무나 부드럽게, 섬세하게, 어루만져 주기 때문에, 그래서, 인기가 있는 것이다. 자존심 상하게 하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깨달을 자는 깨달을 진저! 

 

 3)유대교의 선택

 

  이방종교에게 주어진 것이 “신화”라고 한다면,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일까? 율법이다. 십계명이다. 루이스는 이런 계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이방종교의 “신화”와는 다른 또다른 형태의 영적 현실을 담지하고 있는 것이 이런 율법이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신화”이든, “영적 현실의 또 다른 형태”로서의 “율법”이든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유출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계시의 정도에 있어서의 이러한 차이는 바로 신플라톤주의의 “유출”개념과 깊히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개념을 이스라엘의 선택과 연관시켜서 루이스가 자세히 발전시키지는 않는다.

 

 4) 누미너스

 

 루돌프 오토가 쓴, “성(혹은 거룩)의 개념”이란 책에 루이스가 강한 인상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오트는 “거룩”(성)을 “누미너스”로 설명한다. 이것은 인간의 내면 속 깊은 곳에 있는 공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두려움과 외경감을 말한다. 우리가 “신성”을 경험하게 될 때에 이런 두려움의 외경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누미너스”이다. 절간에 들어서면 사천왕상이 서있고 아수라들이 둘러서 있는 그 뭐랄까 으스스한 느낌의 오싹함, 그것이 “누미너스”이다. 명동성당에 들어가서, 촛불이 얼른얼른한 가운데서 오색찬연한 스테인즈글라스를 통해서 비춰지는 현묘하게 흩어지는 빛들의 산란 앞에서 다가오는 그 뭐랄까 말할 수 없는 신비감, 그것이 “누미너스”이다. 저녁무렵 해가 넘어가고 어둠이 깔려오기 직전 그렇게 다가오는 어둠과 더불어 먼산의 하늘끝을 물들이고 있는 그 화려하면서도 장엄한 장미빛의 낙조 앞에서 왠 지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경험을 해 본적이 있는가? 그대는 바로 “누미너스”를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밤하늘의 깜깜한 창공 넘어에서 나의 존재를 묻고, 이 우주의 존재를 물어보는 마음. 아니, 그것도 물어볼 여유가 없도록 압도해 오는 그 어떤 감격을 체험한 적이 없는가? 바로 누미너스를 체험한 것이다.

 

문제는, 이런 누미너스는 구원받은 사람이나 받지 않은 사람이나 공통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오토는 물론 예수를 알게 되는 경험도 이 누미너스로 표현하기 때문에, 언듯 보면, 기독교인의 복음적인 중생체험에 대해서 올바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체험분석은 분명하지가 않다. 이 누미너스와 인간의 죄의 본성에 대한 체험은 분명히 차이가 있는데도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죄의 본성과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체험은 오토의 누미너스체험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공통적인 요소가 있지만, 그 누미너스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체험이다. 중생한 자의 하나님체험은, 중생하지 못한 자도 함께 체험하는 누미너스와는 결코 동일시될 수 없는 “감미로움”이 동반된다. “두려움”만이 아니라, 그 분의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동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중생을 통한 하나님체험에 대한 분석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솔직히 여기선 바로 루이스의 조언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그 분에게서 그 분에 대한 어떤 체험에 대한 관심의 전향은 바로 간부마귀의 부하마귀에게 주는, 인간 영혼의 유혹을 위한 최대전략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주의해야 할 일이다.

 

 참, 이런 누미너스의 체험은, 루이스의 소설 중에서, 가령 예를 들자면, 나니아시리즈 중에서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에서 비버들(beavers)이 여주인공 루시에게 아슬란을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드러난다: “He’s wild, you know. Not like a tame lion.” 아니면, <Voyage to Venus(Perelandra)>라는 소설에서 한 인물을 통해서 말하는, “suppose you struggle through to the good and find that it also is dreadful?”와 같은 구절에서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누미너스가 어떻게 (신)플라톤주의와 연결되는가?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이런 누미너스의 체험이 중생한 자의 것과 비중생자의 것이 서로 구분되지 않고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 일차적이다. 누미너스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일종의 계시가 되는 것이다. 누가 이 계시에 반응할 것인가? 계시의 시여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그 계시에 대해서 반응하는 바로 그 사람이 반응의 여부를 결정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인간 자체 내에 그런 반응의 결정적인 주체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그의 Sehnsucht(열망)이다. 

 

 5) 열망(Sehnsucht)

 

 실상, 우리 안에 있는 영원에의 동경이 바로 이런 Sehnsucht이다. 루이스는 이런 동경심, 일종의 노스탈지어로서 Sehnsucht를 이해한다. 머언 나라로부터 나팔소리가 들리는데 그 나팔소리를 희미하게 듣고는 그 나라에 대해서 동경심을 가지는 것이 바로 이런 “열망”이다. 우리가 이렇게 “열망”, 혹은 “동경심”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영원”세계가 있는 것이라고 증명했었던 사람들이 중세의 신학자들이기도 했었다. 이런 논증을 루이스가 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그는 이런 인간내부에 있는 영원을 향한 갈망을 무지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의 Joy에 대한 이해이다. 그는 자신의 회심의 동기를 이런 Joy로 설정한다. 그래서 그의 책을 <Surprised by Joy>라고 붙였다. 이것은 Joy라는 한 여인과의 우연챦은 만남에 주어지는 Joy와 더불어서 그의 인생이 추구해 온 영원의 추구에 있어서 만나게 되는 우연챦은 Joy를 이중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Sehnsucht란 이런 기쁨(Joy) 자체로부터 오는 기쁨의 메아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기쁨을 맛본 사람이 그 기쁨을 더욱 소망하면서 갈증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기쁨(Joy)에 대한 갈증(Sehnsucht)가 바로 플라톤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브라고 할 수 있는 “에로스”(Eros)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에로스에 대한 설명은 간단하나마, A.Nygren의 책 <아가페 & 에로스>라는 책을 소개하면서 해 두었거니와, 결코 육체적이고 정욕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주지하기 바란다. 그렇기만 하다면, 결코 기독교의 복음에서 제시되는 “아가페”와 결코 혼동되지 않을 것이다. 바로 하나님께부터 주어지는 “아가페”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고, 십자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것처럼 “자기희생적이고 자기부인”의 동기가 작용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가능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서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에로스”는 “아래로부터 위를 향해서 뻗어올라가려고 하고 초월하려는 욕구”라고 할 수 있다. 경건하고, 거룩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것을 동경하는 그 모든, 인간으로부터 발원하는 그 모든 욕구가 바로 “에로스”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거룩을 도모하고, 경건을 소망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욕구가 “에로스”로 말미암은 것인 지, “아가페”로 말미암은 것인 지 헷갈릴 수가 있다(이런 구분에 관한 것은, 실로, 청교도신학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주제인데, 이런 구분에 대해서 탁월했던 사람이 죠나단 에드워드이다. 그의 책 <The Religious Affections>나 <Charity and Its Fruits>라는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여기서 Charity는 “아가페”라는 말의 에드워드 시대의 영어번역이다. Love라는 말로는 번역될 수 없는 것이 “아가페”이다. 그만큼 Love라는 말은 타락했고, 에로스적인 요소를 너무 많이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루이스의 Sehnsucht가 에로스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의 어린이를 위한 동화, 나니아시리즈의 마지막 권 The Last Battle에 나오는 어떤 대목에서, 이 세상을 묘사하면서, Lord Digory가 표현하는 대사를 보면 그것이 분명해진다: “It was only a shadow or a copy of the real Narnia….It’s all in Plato, all in Plato: bless me, what do they teach them at these schools!” Shadowland의 개념이 바로 플라톤주의에서 온 것임이 분명하다. 그 Narnia세계에 대한 동경도 또한 바로 에로스의 발현인 셈이다. 기독교복음의 위장된 에로스의 표출, 곧 Sehnsucht인 것이다.

 

 6) 성육신한 그리스도

 

 앞에서 필자는 루이스의 그리스도는 플라톤철학의 Demeriuge와 같은 존재라고 하였다. 이것은 정신과 물질 사이에 존재하는 신적 존재이다. 물질은 천하기 때문에, 정신이 직접 물질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었다. 바로 이런 중간적인 존재를 통해서 정신세계가 물질세계로 유출되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는, 루이스에게 있어서, 이방종교의 불완전한 신화의 계시와, 유대종교의 불완전한 율법과 규칙들의 계시가 완전히 충분하게 계시된 것이다. 바벨론 신화에 나오는 죽어가는 신의 불완전한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감을 통해서 완전해 져서 참된 신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한 궁극적 실재를 나타내는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신화의 애매모호함과 희미함이 제거되어지고 이제는 하나님이 역사적 실재 속으로 걸어들어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주 정통적인 믿음임에 분명하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다. 영적인 세계로부터 물질적인 세계로의 전이<transposition>와 초자연주의적인 플라톤철학의 핵심구조가 여기서 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표현은 정통적이다. 하지만, 성육신이해의 골간이 되는 그 구조는 플라톤주의적이라는 것이다. 곧, 그의 성육신은 정통적인 신조와 고백들이 표현해 온, 위격간의 통일(hypostatic union), 인간의 육신(살과 피)과 신성(하나님되심)을 취하시게 되는 것(assumption)등으로 이해하지 않고, 인간의 본성이 신성 속으로 삼키워져 버리고 그 인간본성이 신성화되어져 버렸다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기 보다는, 피조물이 완전한 전이를 통해서 순수한 영혼이 되었다고나 해야 할까? 예수는 우리와 똑같다고 하는 의미로서의 인간이 되었다기 보다는, 물질성을 취하여서 그것을 더 놓은 상위의 실제세계로 전이시킴으로 인간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의 참 인간이 아니고 그래서 신적인 존재가 된 인간(divinized man)인 셈이다.

 

  오해하지 말자. 그가 동정녀출생의 역사성을 부인한다든지, 십자가사건의 역사성을 부인한다는 것이 아니다(그의 구속이론은 좀 이상치만). 하지만, 그의 예수에 대한 묘사와 표현들을 음미해 보면, 그는 참된 육체(살과 피)를 가지고 있는 God-man이라기 보다는 잠시 인간세계를 방문해서 일시적으로 인간이 되었다가 다시 하나님이 된 그런 존재이다. 그리스신화에서 등장하는 제우스신이 백조로 현현했다가 다시 제우스신으로 되돌아가는 등의 “신화”의 한 종류라고나 할까? 물론, “신화중의 신화”요, “참신화”라고는 하지만….별로 그 차이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소감이다. 이런 염려가 단순히 기우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아동들에게 보낸 어떤 편지에 의하면, 하나님은 다른 세계들(worlds, 복수임에 유의할 것)에 또 다른 몸들(bodies)가 있음을 믿는다고 하였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Of course there is one thing Aslan has that Jesus has not ? I mean the body of a lion. (But remember, if there are other worlds and they need to be saved and Christ were to save them as he would ? he may really have taken all sorts of bodies in there which we don’t know about.)’ 물론, 가정법이긴 하지만, 이런 가정법이 가능한 그의 사고구조를 필자는 지금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그 외계인을 위해서 과연 예수가 십자가를 다시 지고선 죽으시게 될 것인가? 이런 질문 자체는 잘못된 것이 없다. 루이스의 어린아이들에게 던진 얘기는 바로 이런 질문에 예수가 다시 죽을 수 있고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의 효력에 관한 신학적 의미는 상당히 곡해될 가능성이 커지게 되는 것이다. 이 광대한 우주 가운데에 조그만 한 점 같은 이 땅 위에서의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이 과연 이 광대한 우주를 회복시키기에 충분한 죽음이었는가? 다른 우주에 있을 지도 모를 그 생물들을 위해서 예수는 다시 죽어야만 할 것인가?

 

답해 보기를 바란다.

 

4. 정리 및 결론

 

C.S.Lewis는 신학자가 아니다. 그리고 나 또한 전문적인 신학자가 아니다. 하지만, 루이스는 영적 거인이고 또한 지성적 거인이다. 그렇지만, 나는 난장이에 지나지 않는다. 영적인 측면에서나 지성적인 면에서나. 그런 면에서, 이런 루이스의 신학사상에 대한 비평이 적절한 것일까? 제대로 평가한 것일까? 어쩜 신학자의 글도 아닌 것을 두고, 신학의 잣대를 댄 것이 너무 잔혹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어줍쟎은 신학으로 루이스의 신학을 곡해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급한 마음으로 루이스의 신학을 스케취하느라고 생략한 것들이 몇 가지 있다. 힌트만 주고 넘어간 부분들도 있다. 어쩌면 이런 글로 인해서 그런 의문들이 더 많이 생기고 그의 글을 더욱 구체적으로 읽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를 바란다. 읽어보는 가운데, 더 많은 질문이 생길 수도 있고, 스스로 그 질문들에 대해서 답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루이스의 글을 읽어보는 것이 최고이다. 그러면서도 자부해 보는 것은, 루이스의 글에 대해서 거의 무비판적으로 칭찬일조인 세간의 경향에 이런 비판의 소리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루이스의 글의 또 다른 면을 볼 수도 있게 할 것이니까. 어쩌면 루이스가 이런 비평을 듣고는 기뻐하지 않을까? 자기의 글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혹시라도 보다 올바르게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필자를 보고는 싱긋이 웃어주고 잊지 않을까? 아니면 버럭 화를 내면서, 니가 뭘 안다고 내 글을 폄하하고 있느냐고 책망의 눈길을 보낼까?

 

상상해 본다.

 

오히려 어깨를 툭툭치면서, 루이스가 말하길, “Hello, have you really experienced the Narnia?” 어쩜 슬픔의 눈길이 그의 눈망울에 나에 대해서 어려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의 글의 취지를 오해하고만 있는 내가 불쌍하다는 연민의 그득한 눈망울로. 하지만, 그의 그런 얼굴에 나는 수줍음과 홍조를 띄고는 이렇게 말해 줄 것이다. “Jack, I don’t think I have. However, I think I don’t have to experience it, but I believe in Jesus Christ through whom I could experience all in all. You know, Jesus is my reality.” 그러면 루이스의 입가에는 붉은 홍조가 띄워질 것이다. 자기 말이나 내 말이나 그게 그것 같다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실은 다른데….ㅎㅎㅎ.

 

 

출처:  삼일교회  http://www.samil.org/zbxe/7847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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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기가 막히는 반전(反轉)


대장쟁이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책, 유대인들이나 부림절로 지키면서 읽는 책, 그래서 정경으로 채택되지 못 할 뻔 했던 에스더서에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승리의 모습이 여자인 에스더를 통하여 이처럼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삼일간의 금식을 마친 후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으로 왕의 앞에 나아가는 에스더의 모습에는 인류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드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주님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왕은 에스더를 보고 심히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홀을 에스더에게 내어밉니다. 왕이 금홀을 내어 밀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만일 왕이 에스더를 보고 “심히 사랑스럽지” 아니하였더라면 어찌 되었을까요? 만일 왕이 에스더를 보고 “이 당돌한 것이 감히?”라고 생각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요? 아, 만일 하나님께서 주님을 기뻐하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어찌 되었을까요?

왕은 “심히 사랑스러운” 에스더에게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뇨?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고 말합니다. 자기 앞에서 춤을 춘 살로메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하던 미친 왕 헤롯이 생각납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사랑에 눈 먼’ 왕의 모습에서 또한 우리는 ‘사랑스러운 아들’이 자기 몸으로 드린 화목제물을 받으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눈 먼’ 모습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죄인들이 무엇으로 죄사함을 받았습니까? 무엇으로 하늘나라의 영생을 얻었습니까? 오직 주님의 ‘심히 사랑스러움’ 때문입니다.

그런데 에스더는 그 자리에서 바로 왕에게 하만을 고자질하고 유대인의 사면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왕에게 자신의 베푸는 잔치에 하만과 함께 참석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잔치는 즐거움을 주는 자리입니다. 에스더는 왕에게 잔치를 베풀어줌으로써 왕이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청을 받아들여주기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 동시에 왕으로 하여금 에스더의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게 하면서 그 청을 거절할 수 없도록 하려는 치밀한 계획이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아무튼 빈손으로 나아가 은혜를 베풀어주기만을 바라지 아니하고 왕의 기뻐하는 것을 먼저 드리는 에스더의 모습은 지혜로운 여인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기쁨과 잔치의 화목제물로 드리는 주님의 모습의 예표라 할 것입니다.

에스더는 첫 번째 잔치자리에서 왕에게 청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다음날 잔치에 재차 초청을 합니다. 아마도 처음 베푼 잔치의 기쁨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왕에게 드리는 잔치와 자신과 유대인을 위한 청을 드릴 잔치를 구분하는 현명함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잔치는 단순히 즐거움만의 자리만이 아니라 심판과 연결된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라든지, 임금의 잔치자리 초청(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라든지, 바깥 추운 곳에 내어던지라든지 하는 모든 이야기,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천국혼인잔치는 오직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만이 참예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웃기는 것은 그 잔치자리에 참석할 자격이 없는 원수 하만이 왕과 함께 초청받았다고 으쓱대며 기고만장하는 모습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착각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이러한 전개과정에서 하나님의 한 치도 틀림없는 섭리하심이 진행됩니다. 에스더 왕후의 잔치에 왕과 함께 단 둘이 초청 받았다고 기고만장하여 퇴궐하던 하만은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모르드개에게 머리끝까지 화가 나고, 하만이 집으로 돌아와 아내 세레스에게 이것을 이야기하고, 세레스는 하만에게 높이 오십 규빗의 나무를 세운 다음 왕에게 청하여 모르드개를 매달라 합니다. 그러나 그 날 밤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왕은 잠을 이루지 못 하고 내사들에게 역대일기를 읽도록 하고 그 역대일기에 모르드개가 왕의 암살모의를 밝혀내어 자신의 목숨을 구하였다는 사실, 그러나 모르드개가 아무런 포상을 받지 못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한편 이를 알 길 없는 하만은 그 다음날 모르드개를 나무에 매달아 죽이기를 청하기 위하여 왕의 앞에 나아옵니다. 그리고 자기 꾀에 빠져 욕을 당하게 되는 대반전,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어쩌면 이렇게도 오묘한지요. 하나님의 지혜를 누가 당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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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할 사람은 멀리하라




어떤 사람과 같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서 영향을 받게 된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고유한 영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서 서로의 영적 에너지를 교환하게 된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좋은 교제와 나쁜 교제를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선택이 가능할 때는 그것을 선택해야 한다.

즉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고 피해야 할 사람은 피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에 미래에 영원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피해야 하는가?


첫째, 가르치기 좋아하고 지배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피해야 한다.


어디서나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속이 상한다.

천국에 속한 사람과 지옥에 속한 사람을 분별하는 것은 아주 쉽다.

천국에 속한 이들은 선하며 겸손하다.
지옥에 속한 이들은 악하며 자기가 높아지고 드러나기를 원한다.

그들은 주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말을 하지만
사실은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자기보다 다른 사람이 더 사랑을 받거나 인기도가 높은 것을
견디지 못하고 어떻게하든지 끌어내리려고 온갖 저급한 말로 비방을 일삼는다.

천국의 영은 결코 서로 시기와 다툼이 없고 자신을 드러냄이 없으며
오직 주님만을 높이고 그 앞에 엎드러질 뿐이다.

그러므로 그렇지 않은 영들은 그 특성에 있어서
너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곧 드러나게 된다.


둘째로, 당신을 무시하는 사람에게서 멀어져야 한다.


이상하게도 가까운 사람에게 지속적으로 무시당하고
상처를 받으면서도 그러한 관계를 지속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어떤 이는 자기를 영적으로 이끌어주는 이에게
많은 모욕과 고통과 부담을 겪고 있지만
역시 영적 성숙을 위해서 잘 견디고 있다고 한다.

왜 사람들은 남들에게 무시당하고 혹독한 대접을 받으면
영적으로 성장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은 일종의 자학이다.
흔히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자기의 권리를 빼앗기며
무시당해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나는 많이 보았다.
그것도 오해이며 일종의 자학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토록 비참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의 창조자이며 아버지되신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실 것이다.

당신은 아름다운 사람이며 귀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당신은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과
주의 피로 인하여 구속받은 것에 대하여 긍지를 가져야 한다.
당신은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당신을 억압하고 원치 않는 것을 요구하거나
괴롭히는 이들에게서 당신은 떠나야 한다.

주님께서 당신을 풀어주셨는데
다시 사람에게 얽매여 살 필요는 없다.
무시와 모욕은 악한 영들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불평과 원망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을 피해야 한다.


항상 푸념과 하소연으로 일관하는 사람들 말이다.
이들은 사람을 원망하며 환경을 원망하며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긴다.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며
자신의 억울함을 끝없이 드러내고 싶어한다.

모든 사건은 보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 다르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에게 공부가 되지 않는 일은 없다.

즉 일방적으로 나쁜 일이 있고 일방적으로
좋은 일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보는 사람의 관점과 해석하는 시각에 따라 다른 것이다.

이들은 모든 것을 나쁜 쪽으로만 해석하는 쪽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좋지 않은 것은 이러한 사람들은 반성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반성이 없는 사람은 발전할 수 없다.
어떠한 나쁘게 보이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을 돌아보면 자신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전혀 반성하지 않고
오직 상대방의 잘못과 환경의 어두운 부분만을 계속 바라보고
생각하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어두움을 계속 증가시키는 것이다.

그들을 괴롭혔던 사람들??죽고 망하더라도
그들의 마음에는 결코 평화가 임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진정으로 괴롭히는 것은 상대방들이 아니라
그들의 속에 있는 분노와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주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을 버리고 반성하지 않는 한
사람에게는 진정한 치유와 회복이 없는 것이다.


멀리해야 할 사람을 멀리하고, 가까이 할 사람을 가까이 하라.
그것은 우리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공격적이고 지배하려는 이들에게서 떠나라.
당신을 모욕하며 상처를 주는 이들에게서 떠나라.
부정적이고 어두운 언어를 늘어놓는 이들에게서 떠나라.

주님께 속한 사람은 남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고 섬긴다.
주님께 속한 이들은 항상 감사와 찬송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매사를 긍정적으로 아름다운 시각으로 본다.
그러한 이들과 같이 교제하라.

어떤 이들과 같이 삶을 나누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과 미래와 영원까지 우리에게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글/정원 목사

 

참 소망 / 최송연
生이란 모두 벌거벗은 핏덩이로 태어났기에 주어진 한 세상 헤쳐나간다는 것이 그리 녹록하거나 만만치가 않다네 따사로운 햇살은 한순간뿐이며 늘 시커먼 먹구름이 덮쳐오고 겨우 한고비를 넘겼는가 하면 다시 또 더 큰 태산을 넘어야 하지 넘어야 할 태산, 캄캄한 먹구름, 생의 질곡 속에 아주 엎드러지거나 망하지 않으려면 참 소망이신 그분을 믿는 믿음 외에 무엇이 더 있으랴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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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길자.PNG

 

                                       만들어진 하나님어머니

 

                                                                                                             이인규

 

1985년 임시회의를 통하여 하나님어머니로 조작된 장길자

 

(1) 남편이 있는 장길자와 부인이 있었던 안상홍은 결혼예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하나님의 교회는 장길자가 태초부터 있었던 하나님어머니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하나님아버지라고 하는 안상홍은 왜 이 땅에 와서 황XX이라고 하는 부인과 혼인을 하여 자녀를 낳았고, 하나님어머니라고 하는 장길자는 김XX이라는 남자와 결혼을 하여 자녀를 낳았느냐는 것이다.

왜 자칭 하나님이고 하나님어머니라는 자가 이 땅에 와서 서로 헤어져서 다른 남자와 다른 여자와 혼인을 하여 자녀까지 낳았느냐는 것이 이해가 되는가?

율법과 도덕과 윤리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율법과 도덕과 윤리를 어겨서 각각 자신의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여 자녀를 낳는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더욱 해괴망칙한 것은 안상홍이 부산교회에 있을 때에 장길자는 서울교회 전도사였다. 안상홍과 장길자는 다른 남편과 부인이 있는 상태에서 결혼예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다. 소위 하나님이고 하나님어머니라는 자가 사람들에게 솔선수범의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남편과 부인이 있는 상태에서 결혼예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비상식적인 것을 보여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필자와 공식토론을 요청한 하나님의 교회의 마루치라고 하는 닉네임을 사용한 전도사라는 사람은 안상홍이 장길자와 결혼사진을 찍었다는 것을 분명한 사실로 말하고 있으며, 이것을 영적 혼인이라고 주장하였다.

 

(4-2) 안상홍님께서 엄씨 에게는 질타의 말씀을 하셨고 안상홍님께서 하늘어머니께는 잘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유대인들처럼 자꾸만 엄씨에게 했던 말을 대입하느냐는 겁니다. 안상홍님께서 엄씨는 하늘어머니가 아니라고 하시면 아닌 것이고 안상홍님께서 하늘어머니께는 어머니라고 하시면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마루치)

 

(4-4) 하나님의 교회는 하늘어머니임을 증거하기 위해서 안상홍님께서 남기신 사진을 증거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적인 하나님께서 물질적인 사진을 증거로 제시하시니 해괴하다고 하시면 귀하는 아마 영적인 하나님께서 구약 때 돌판으로 증거하시니 해괴하기도 할 것입니다.(마루치)

 

(4-6) 안상홍님께서는 설교노트에서도 밝히 알려주고 있으며 혼인예복을 입고 사진을 촬영하셔서 자녀들에게 증거로 보여주셨으며 더욱 확실한 것은 안상홍님께서 증거 해주시기 전 1900년전에 예언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니 누가 있어 그 예언을 아니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마루치)

 

(4-8) 육체적인 관계를 자꾸 거론하시는 것을 보니 자기자신이 낳은 자식들도 자기 스스로 보기에도 좀 그렇다는 것인지 좀 의아스럽군요. 똑 같은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게 하시는 군요. 안상홍님께서는 하늘어머니를 알려주시고 증거해주시기 위해서 예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던 것이니 거기에 대해서 왈가왈부 더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음해하는 분들이 자신들의 꼬인 관점 뭐눈에 뭐만보인다는 점에서 보니까 그렇게 왜곡시키고 있을 뿐이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안상홍님께서는 육신적으로 한번 결혼하신 후 다시 결혼하신 적이 없음에도 영적인 내용을 결부시켜 두 번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분별력부터 키운 다음에 말씀하셔야 되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서로사랑하라” 라는 말도 이상하게 들릴 것이니 말입니다.

“각각 배우자들을 버리고” 라니요?? 진실된 사실만을 가지고 말씀하시길 바랍니다. 입만 열면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군요.. “다른 사람과 혼인이라니요?” 라면타령 하시더니 이젠 정신까지!!

예복입고 하늘어머니임을 알리는 사진촬영을 했다고 하여 육신적인 결혼식으로 보다니 희한합니다. (마루치)

 

(4-10) 침례요한이 약대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띤 이유는 성경의 예언을 믿는 자들에게 엘리야로 예언된 사람이 침례 요한임을 알려주기 위함인 것처럼 성령 안상홍님께서는 신부이신 하늘어머니를 알려주시기 위한 증거로 결혼식장에서 사진을 찍었던 것이니 성경의 예언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도 영적인 내용을 육신적으로 결부시켜서 결혼예복입고서 사진 찍었으니 육신적인 결혼이라고 우기시는 분께서 드라마에서 결혼예복입고 사진찍으면 어떻게 보일지 궁금합니다.(마루치)

          

장길자와 안상홍이 거짓으로 드라마 촬영을 하였는가?

드라마 촬영은 현실과 다른 상항을 연출하는 것이며, 안상홍과 장길자는 드라마가 아니라 실제로 결혼했다는 것을 증거로 남기기 위하여 혼인예복을 입고 사진을 찍은 것이다. 여러분들의 남편이, 여러분의 부인이, 다른 여자와 다른 남자와 결혼예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면 여러분은 영적혼인이므로 이해가 간다고 생각하는가?

 

교회의 지도자라는 자와 남편과 자녀가 있는 교회 여자 전도사가 어떻게 결혼예복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가 있으며, 그것이 실제 결혼이 아니라, 단지 영적결혼을 한 증거라고 스스로 자백을 한다는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안상홍도 부인과 자녀가 있었고, 장길자도 다른 남편과 자녀들이 있었다.

 

(2) 안상홍이 직접 쓴 책

 

“새 예루살렘과 신부, 여자들의 수건문제 해석” 이라는 책이 있다.

안상홍씨가 직접 쓴 책이다. 물론 하나님의 교회에서 발간된 책은 아래 내용이 없다. 교인들이 보면 큰 일이 나기 때문이다

 

그 머리말에는 “이 소책자를 발행하게 된 것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말썽꾸러기, 즉 성경을 곡해하고 광신적 행동을 하는 자들을 막기 위함이요, 또는 엄XX의 발행한 책들의 오류를 해명하는 것과 변함없는 우리 하나님의 교회 진리를 대강 증거하기 위함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상홍 생전에 엄모씨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여인이 자신을 새 예루살렘이며 신부라고 주장하는 사건이 있었다. 안상홍씨는 그 여인을 비난하기 위하여 “새 예루살렘과 신부, 여자들의 수건문제 해석”이라는 책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7장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우리 어머니다.

(계21장 1-2절)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엄XX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이 자기라고 정신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 자기들의 주장하는 성경절에 “갈 4:22-26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라한 이 말씀을 가지고 엄수인은 하늘에서 내려온 어머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엄XX은 생각하기를 하갈이 실지로 지상의 예루살렘이 되고 사라가 실지로 하늘 예루살렘에 된 줄로 생각한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4장22-26절을 쓰게 된 것은 아브라함의 가정의 역사가 예언이 되는 것을 해명해 주신 것 뿐이다.

“갈4장24절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였으니”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한 에언으로써 하갈은 시내산에서 받은 모세 율법과 지상의 예루살렘으로 말미암는 육신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하는 것이고 사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세우신 새 언약과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하는 것인바 곧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엄XX은 자기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인데 자기가 지상에 내려왔다고 한다. 갈라디아서 4장 22-24절의 예언대로 사라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인데 그 예루살렘이 엄XX이 되었다면 엄XX은 자기 아들하고 결혼한 셈이 된다. 왜냐하면 사라의 아들이 이삭이요 이삭은 또한 그리스도라고 하였기 때문이다.(갈3:16) 엄XX은 그리스도의 어머니도 되고 그리스도의 신부(아내)도 된 셈이다. 엄XX은 나를 눈 먼 이삭이라고 하면서 자기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 즉 사라라고 하니 결국 이삭, 아들하고 살겠다고 하니 이런 해괴망칙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17-18쪽) (필자 해설 : 하나님의 교회는 이삭을 예수라고 합니다.)

 

지금 장길자가 엄XX 씨와 동일한 방법으로 하늘의 예루살렘이 자신이고, 사라가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나님의 교회 교인들은 안상홍씨가 스스로 해석한 새 예루살렘과 신부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자칭 하나님인 안상홍씨가 새 예루살렘과 신부를 성도라고 한 성경해석이 틀렸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 교회는 소위 하나님이며 재림예수라고 하는 자의 성경해석도 틀렸다고 하는가?

 

16장 자기 혼자만 신부라고 한다

...... 그러면 문제의 신부가 말씀하시기를(계22장17절) 여기 신부는 (계21장9-10절)의 신부의 신부와 같은 것만은 사실이다.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였으니 어린 양의 아내는 성도들이다. (계19장7-8절)을 보면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였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공동번역에는 “그 분의 신부는 몸단장을 끝냈고 하나님의 허락으로 빛나고 깨끗한 모시옷을 입게 되었다 이 고운 모시옷은 성도들의 올바른 행위이다”하였다. 그런고로 그 신부는 (계21장9-10절)의 예언과 같이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을 말하는 것이고 새 예루살렘은 곧 144,000 성도들을 말하는 것이다. 144,000 성도들은 다 신부요, 신부는 새 예루살렘성이다.

 

(3) 현대종교와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재판판결문이 내려졌다.

 

영적 부인 엄XX과 원고 교회의 l분파와 관련된 부분에 대하여 보건대, 을 제 14호증의 1, 2의 각 기재 및 변론 전체의 취지에 의하면, 엄XX이 원고 교회의 전도사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영의 어머니라는 주장을 하다가 제명된 사실, 안상홍 사후에 부산을 중심으로 하는 새언약 유월절 하나님의 교회와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원고 교회 간에 장길자를 영의 어머니라는 지도자로 추대하는 문제로 다툼이 있어 분리된 사실이 있으므로, 결국 위 부분을 허위의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현대종교 판결문)

 

(4) 저와 공식토론한 하나님의 교회 전도사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4-2) 안상홍님께서 엄씨에게는 질타의 말씀을 하셨고 안상홍님께서 하늘어머니께는 잘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유대인들처럼 자꾸만 엄씨에게 했던 말을 대입하느냐는 겁니다. 안상홍님께서 엄씨는 하늘어머니가 아니라고 하시면 아닌 것이고 안상홍님께서 하늘어머니께는 어머니라고 하시면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즉 안상홍의 책은 엄XX을 질타하는 것이고, 장길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엄XX은 가짜 영적부인이었고, 장길자는 진짜 영적부인이었다는 것이다,

 

과연 다를까?

안상홍은 첫째, 신부가 성도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 신부가 엄XX이 될 수 없다면 동일하게 장길자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안상홍은 머릿말에서 이렇게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전국에 계시는 성도 여러분이여 이런 일이 생긴 것은 여러분들의 큰 교육이 되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방자한 자들의 미혹에 걸리지 않도록 각별 조심하셔야 되겠습니다.

 

다음 내용을 잘 살펴 보기 바란다.

 

그 예루살렘이 엄XX이 되었다면 엄XX은 자기 아들하고 결혼한 셈이 된다. 왜냐하면 사라의 아들이 이삭이요 이삭은 또한 그리스도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엄XX은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삭의 어머니)도 되고 그리스도의 신부(안상홍의 아내)도 된 셈이다. 엄XX은 나를 눈 먼 이삭이라고 하면서 자기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 즉 사라라고 하니 결국 이삭, 아들하고 살겠다고 하니 이런 해괴망칙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무슨 뜻인지 잘 읽어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안상홍을 하나님, 이삭, 예수, 성령이라고 한다. 엄XX이 자신이 사라라고 주장하였는데, 사라는 이삭의 어머니였다. 즉 엄XX이 자신을 사라라고 한다면, 안상홍이 이삭이므로 안상홍의 어머니가 된다는 뜻이다. 어떻게 안상홍과 같이 사는 부인이 안상홍의 어머니가 될 수 있느냐. (본문의 아들과 결혼한 셈이 된다, 이삭 아들과 함께 살겠느냐)는 것이다.

안상홍이 직접 쓴 책을 보아도 엄XX과 안상홍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즉 엄XX가 첫번째 영적 부인이었고, 장길자는 두번째 영적부인이 된 것인데, 안상홍 사후에 엄XX의 가짜 하나님어머니 수법을 그대로 도입한 것이다.

 

장길자가 사라라고 한다면 안상홍의 신부도 되고, 이삭인 안상홍의 어머니가 되는가?

 

(5) 장길자가 언제 하나님이 되었는가를 살펴 보면 그대로 들통이 난다,

 

회의록을 보자.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하는 하나님어머니는 태초가 아니라 1985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즉 장길자는 1985년에 하나님어머니로 부르기로 회의를 통하여 결정된 것이다,

 

장길자호칭2.jpg

 

1985년 6월2일의 총회록:

총회장: 그러면 어머니라는 공식명칭과 아울러 교회 외에서는 때와 처지와 형편에 따라서 각자 적절히 부르기 바랍니다

교회에서만 하나님어머니라고 부르는 것뿐이며,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각자 적절히 부르면 된다는 것이다.

 

그 회의록과 법정에서 하나님의 교회 정XX 목사가 증언한 내용을 비교하여 보자.

A: 변호사의 문

그렇다면 안상홍의 생전인 1981년경부터 장길자가 영적인 어머니의 칭호를 받았는가요.

Q: 증인의 답

1981년부터 영적인 어머니의 칭호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A: 변호사의 문

장길자가 언제부터 하나님의 교회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는지요.

Q: 증인의 답

1985년 안상홍의 사망 이후부터입니다.

 

 

출처: 세이연/dsmedic

하나님의 자녀가 고난당할 때
호라티우스 보나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에게 가족의 의미

 
성도들을 가족이라는 이름 외에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그러한 이름들은 가족이면 마땅히 그러해야 할 모든 것들을 다 표현해 주지는 못한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그분의 “양떼”라고 부르시는데, 이는 성도의 편에서는 하나님의 인자하신 보살핌을 느끼게 하고, 하나님의 편에서는 우리들의 연약함을 느끼게 한다. 하나님은 또 자신의 자녀들을 “포도나무”라고도 부르시는데, 이것은 우리의 하나 됨을 나타내면서 또 나무의 원줄기로부터 가지로 순환되는 끊임없는 자양분 공급을 표현한다. 또 하나님은 성도들을 “성전”이라고도 부르시는데, 이는 건물의 튼튼함과 균형 잡힌 설계, 아름다운 외양, 그리고 또 무엇보다도 그 주거 기능과 주께 예배드리기에 적합한 조건들이 갖추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그분은 또 성도들을 “몸”이라 부르기도 하신다. 이는 각 지체들의 적절한 기능 분배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놀라운 일체성과 함께 각 지체가 깨어 움직이는 활동력을 나타내고, 더 나아가 서로 서로 연락되는 가까운 연관성과 상부상조하는 여러 가지 모습들을 나타낸다. 주님은 또 성도들을 “도성”이라고도 부르신다. 이는 위임된 특권, 개인의 권리, 그리고 잘 조직된 정부가 있는 행복한 공동체, 치안과 평화와 사람들이 누리는 부요함과 쾌활한 인사와 서로 서로 사랑으로 사명들을 떠맡는 그러한 공동체를 암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왕국”이라고도 부르시는데, 이것은 사람들의 고귀함과 영광스러운 지위, 존귀함과 영광의 통치권, 그리고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은 상속자로서의 신분을 나타낸다.

 
이렇게 다양하고 표현력이 넘치는 이름들은 다 우리들이 잘 아는 것들이지만, 그 어느 것도 완전하지는 못하다. 이러한 이름들은 마치 어떤 공동체의 외형적인 모습만을 나타내는 이름들처럼 어느 한 부분만 묘사해 주는 이름들일 뿐이다. 이러한 이름들은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내면에 자리 잡은 중심, 즉 영적 존재로서의 우리의 내면세계는 전혀 나타내 주지 못한다. 하나님이 교회 안에서 보시기에 아름답고 따사로우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랑스럽고 사랑할 만 한 그 모든 것들을 나타내 주는 유일한 이름, 그 신비한 이름은 우리 귀에 낯익은 “가족”이라는 이름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회에게 사랑을 쏟아 부어 주시고, 그 사랑이 거침없이 흐르고 순환되는 광경을 교회를 통해서 보기를 기뻐하시며, 또 교회로부터 그 사랑의 물줄기가 바깥으로 흘러나가기를 기대하고 계신다.

 
가족에 대해서 생각하노라면, 머리 속에 즉시 떠오르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주님께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갖고 계시는 특별한 관심을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점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들을 내가 지키었고 멸망의 아들 외에는 그들 중 아무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였으니...”(요 17:12 한글킹제임스성경). 가족 감정이라는 것이 이토록 애틋한 것일까? 식구들 각자의 이름이 너무나 친숙하고 그 얼굴 모습들이 너무나 선명히 마음에 새겨져 있어서 식구 중 누구 하나 아무리 작고 어린 자라도 잠시 못 보면 금새 그리워 못 견디게 되는 법이다. 각자가 앉아 있는 장소, 각자가 차지하고 있는 방, 각자가 아침에 집을 나셨다가 저녁에 귀가하는 시간, 각자의 얼굴 모습과 습관, 그리고 목소리,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마음에 새겨져 있어서 그 누구 한 사람이라도 잠시도 눈에 띄지 않으면 금방 그리워 못 견디게 되는 것이다. 가족 중 한 명이 비워 놓은 자리는 아무도 대신 채워 줄 수가 없다. 다른 사람 누구도 대신 채워 주지 못한 채 그의 빈 자리는 그저 텅 빈 공간으로 남게 된다. 친척이나 동네 이웃이 다녀갔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렇게 그리워지지는 않는다. 그 사람들이 앉아 있던 자리는 금새 다른 사람이 채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구는 그렇지가 않다. 식구가 떠나면 마음이 텅 비고 울적해진다. 만약 죽음이 형제 중 한 사람을 데려가 버리기라도 하면, 만약 죽음이 자매 중 한 사람이나 부모 중 한 분을 데려가 버린다면, 그가 있던 방을 그 누가, 그 무엇이 대신 채워 줄 수 있겠는가? 꽃 한 송이가 시들면 다른 송이가 또 피고, 오히려 더 싱싱하고 더 향기로울 수가 있을 테니 먼저 시든 꽃이야 금방 잊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식구라는 꽃 한 송이가 져 버리면, 그 뒤를 이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식구라는 꽃 한 송이가 떨어지면, 그 곳에는 영원한 빈 자리가 남고 만다. 예수께서 거대한 식구들을 보살피실 때도 이와 똑같은 심정이 아니시겠는가? 한 사람 한 사람 그 낯익은 얼굴들을 하나 하나 헤아려 보신 뒤, 누구 하나도 잃은 자가 없다는 걸 아시고 그분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아버지께서 주신 식구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이라도 없어지면 도저히 견딜 수 없으시다는 듯이 말이다.

 
예수님이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쏟으시는 그 마음은 얼마나 깊은가! 그것은 실로 식구들 각자를 일일이 개인적으로 대해 주시는 특별한 애정이다. 우리들은 이 사실을 깜빡 잊어버리는 바람에 손해를 많이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인간 세상살이 중에서도 우리는 이것을 자칫하면 간과해 버리기가 쉽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 각자에게 개별적으로 대하는 이 감정을 두고 우리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p.24-27

  

 

가족의 표식 - 시련

 
사도 바울이 진정한 아들의 신분을 나타내는 표식으로 고난을 달고 다녔다는 사실은 아주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는 고난을 하나님 가족의 표식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실제로 우리 혈토의 적법성 여부를 이 표식으로 시험하고 있다.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느냐?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징계를 너희가 받지 않는다면 너희는 사생아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7-8 한글킹제임스성경). 이 얼마나 강력한 표현인가! 영감 받은 사도가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쓸 데 없는 소리는 하지 말라고 고함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 말씀 그대로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징계란 우리 출생의 정통성과 영광의 법적 지위를 증명해 주는 가장 중요한 표식들 중 하나이다. 성도에게서 이러한 특성을 찾아볼 수 없다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증거 할 증명서 하나를 상실한 셈이 되어서 자녀로서의 합법성을 의심받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의 출생을 밝히기 위해, 그리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편에서 친권을 인정하실 수 밖에 없는 보증서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이 가족의 표식을 달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 자체가 실로 엄숙한 일이다. 그래서 육이나 혈은 이렇게 생각하기를 꺼린다. 고난을 모면할 길이 없을까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정말 그래야만 하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지만, 다른 도리가 없다. 그것을 기피해 보려고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오히려 기운이 생기기도 한다. 시련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친자식이라고 인정하는 증명서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련 가운데 처해 있을 때, 오히려 기운이 솟아나게 된다. 시련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 삼으셨다는 증명서와 같으니, 이 얼마나 안심이 되는가! p.45-46

  

 

하나님의 연단의 목적은 훈육임  


“아이를 그가 마땅히 가야 할 길로 훈육하라”(잠 22:6)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면하시는 말씀이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에 적용하시는 원칙이기도 하다. 그분은 이 땅에서 자신의 자녀들을 연단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녀들과 가지시는 교제의 참된 특징이다. 성도들을 교육하시겠다는 것이 그분께서 세우신 목표다. 이것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연단이요, 영원한 생을 살기 위한 필수 교육이다.

 
그러므로 이 연단은 너무도 중요하다. 성령을 통하여 연단을 진행하고 게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며,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이 이 연단의 대상이다. 교회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갖추도록 하는 것이 이 연단의 목적이다.  


수많은 아들들을 영광 가운데로 데려오기 위해서 구원의 대장이신 예수님도 먼저 고난을 통해 완전해지셔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연단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셨던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는 도저히 이 연단을 경시할 수도 없고, 의미 없다고 할 수도 없으셨다. 이것을 깨달았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를 경시하지 말고, 책망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5). 이는 지극히 엄한 명령이기에 가볍게 여길 수 없고, 너무나 중요해서 그냥 간과해 버릴 수도 없다.

 
가족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영광의 상속자가 될 준비를 갖추게 하는 과정이다. 이 연단은 우리가 거듭났을 때 즉,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순간에 시작된다. “그가 받으시는 아들마다 매질하시느니라”(히 12:6). 그러나 이 연단의 과정이 반드시 눈에 띄는 것은 아니며, 항상 의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을 갖게”(벧전 1:3)하신 바로 그 날로부터 하나님의 채찍질은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연단은 우리가 생을 마감할 때, 또는 교회가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올라”(살전 4:17)가게 될 때에나 비로소 끝나게 된다. 이는 평생 동안 계속되는 과정이며, 한시도 쉬지 않고 매일 매순간마다 계속된다. 매를 맞고 있구나 하고 항상 눈치 채지는 못하더라도, 연단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p.48-49

  


시험으로 드러나는 성도의 죄악

 
옛 성도들이 시험받았던 경우를 살펴보면, 그들 가운데에서 그냥 보통 죄악이 드러난 것이 아니라, 우리로서는 도저히 예상하기 어려운 죄악까지 드러났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노아는 절제심과 자기 억제력을 죽을 때까지 잃지 않았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많이들 알고 있다. 그는 방탕하고 음란하며 죄악으로 숨이 막히는 세상 가운데 홀로 서서 사람들의 방탕과 음란을 꾸짖으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혹적인 환경에 처하자 그도 넘어지고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노아가 곤드레 만드레 술 취하고 만 것이다.

 
또 아브라함은 어떤가? 그는 믿음과 용기에 있어서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집트와 그랄 지방에 갔을 때, 겁이 난 나머지 믿음은 내팽개쳐 버리고 그만 거짓말을 내뱉고 말았다. 롯은 소돔의 음란과 더러움에 대항해 싸운 인물이었고 의로운 혼을 간직하고 있어 사람들의 가증스러움을 한탄했다. 하지만 그러한 그도 소돔의 멸망으로부터 구해냄을 받자마자 멸망당한 사람들과 똑같이 술 취함과 정욕에 넘어지고 말았다.

 

또 욥은 그 인내심에 있어 특출한 사람이었지만, 시련의 날이 계속되는 동안 그 인내심을 끝내는 저버리고 말았다.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온유했던 모세도 노기를 드러내며 그 입술로 범죄하고 말았다.

 
돌맹이 한 개와 돌팔매 끈 하나만 들고 골리앗을 무찌르러 나아갔을 정도로 용맹했던 다윗마저도 사울왕을 피해 도망하여 가드왕 아키스에게로 갔을 때, 적이 너무 무서워서 미친 사람 행세를 하고야 말았는데, 이 때에 그의 용감성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엘리야는 왕들 앞에서 전혀 떨지 않고 판결문을 큰 소리로 읽었고, 하늘 문을 닫았으며, 수 천 수만의 사람들 가운데서 혼자 하나님의 복수의 칼을 휘둘렀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도 한 여인의 협박에 겁먹고 도망하더니, 생명을 건지려고 모든 것을 팽개치고 말았다.

 
에스겔 또한 그 거룩함과 순종함에 있어 빛나는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을 받고 보내심을 받았을 때, 불순종함으로써 자신의 기록에 먹칠을 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 영이 나를 들어올려 멀리 데리고 가시기에 내가 괴롭고 내 영이 화가 났었으나 주의 손이 내 위에 강하게 임하시더라”(겔 3:14 한글킹제임스성경)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베드로는 열성적인 제자였지만 주님을 부인했다. 요한은 주님께 가장 사랑받은 제자였지만, 사마리아에 하늘로부터 불이 떨어지기를 원했던 장본인이기도 했다.

 
참으로 인간이란 이 정도밖에는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여 그 속이 속속들이 드러날 때 인간의 마음은 - 성도의 마음마저도 - 겨우 이런 정도인 것이다. 존 베릿지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 너, 마음아! 너는 도대체 어떤 존재냐? 바로 천치 덩어리가 아니더냐? 만물 가운데 가장 거짓되고, 간사하고, 악하고, 어리석은 자로다! 몰래 숨어 있던 죄악아! 이기심과 자존심아! 거칠은 성깔, 세속적인 욕망아! 하나님의 매가 영혼 깊은 곳을 치신다고 해서, 어쩌면 그렇게 순식간에 고개를 쳐들고 나온단 말이냐?”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와 정직성을 굳게 잡고 욥은 얼마나 오랫동안 참고 견뎌냈던가! 얻어맞고 또 얻어맞는 고난 가운데 처참하게 땅바닥에 나가떨어져 뻗었어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하지만 그의 내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던 “자아”에는 아직 하나님의 매가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역겨운 질병이 엄습하여 그를 더러운 거름 무더기로 처박았을 때, 그리고 친구들이 덤벼들어 하나님의 정죄를 받은 자로 그를 낙인찍었을 때, 그도 별 수 없이 자신의 믿음과 인내심을 저버리게 되었다. 하나님의 매가 그의 중심을 시험하자, 그는 안달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불신의 물줄기가 마음속으로부터 터져 나오고 만 것이다. 그를 시험하기 위해서는 활을 힘껏 당겨서 마음의 심연까지 깊이깊이 꿰뚫고 들어갈 아주 날카로운 화살이 필요했던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의 질병이 자리 잡고 있는 마음속 깊이까지 찌르고 들어가자 그의 진짜 본성이 마침내 드러나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성도들의 마음속으로부터 고개를 들고 나오는 모든 죄악들 가운데 가장 악하면서도 공통적인 것은 바로 하나님을 불의하신 분으로 여기는 생각이다. 과거에 우리가 불신자였을 때에나 가졌던 생각이다. 그때는 하나님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데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하셨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참으로 좋으시고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결코 홀대 받으실 만한 분이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라는 사실을 알려 주셨다.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헤아릴 수 없이 크신 놀라운 사랑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것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우리의 과거의 불신에 대해 부끄럽게 여겼다. 우리는 그 때, 이제부터는 결단코 하나님을 나쁘게 생각지 않으리라며, “그분이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 분을 신뢰하리라”고 마음먹기도 했다. 고난을 당하면 오히려 더 그분께 매달리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자마자 예전의 생각들이 다시 고개를 든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이렇게 대하신단 말인가?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에 대해 의혹을 품게 된다. 주님의 은혜를 꼭 붙잡고 있던 손이 느슨해지면서 급기야는 그 은혜가 모두 다 달아나 버리고 마는 것이다.

 
우리들은 시들어 버린 박넝쿨 아래에 있었던 요나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회가 날 때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한다. 처음 하나님을 믿었을 때, 그분의 사랑을 맛보았지만, 이제는 그 사랑의 하나님이 전과 같지 않다고 여기고 만다. 마침내 우리 마음 가운데 숨어 있던 배교가 반역을 일으키기 시작하는 것이다! “무조건 하나님을 섬기리라”던 것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사실도 무참히 드러난다.

 
하나님이 우리를 훈계하시며 이렇게 물으신다. “네가 성내는 것이 잘하는 것이냐?”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 입에 그 무슨 말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불법을 용서해 주시고 말끔이 도말해 주셨거늘, 우리가 화를 내거나 낙담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겠는가? 이 악한 현 세상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고, 다가올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셨으며, 우리의 친구 되신 예수님이신 그 큰 바위에 우리를 숨겨 주셨거늘, 그래도 우리가 성을 내는 것이 잘하는 일이겠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하게 소유하고 있고, 그 아들의 왕국을 영원한 유업으로 받았거늘, 우리가 성을 내는 것이 과연 잘하는 짓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제 밤이 다 지나갔고 낮이 가까워져, 저 멀리 동쪽 하늘의 구름자락이 붉게 물들고 태양이 곧 떠오를 때가 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우리가 성이나 내고 있는 것이 정말 잘하는 일이란 말인가? p.85-88

 

 

하나님의 책망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책망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주님께서 주시는 시련은 아무리 작은 음성일지라도 마치 천둥 번개와 지진이나 되는 것처럼 여겨야 한다. 가벼운 시련들의 의미와 용도를 배워야 한다. 아무리 가볍고 일시적인 아픔이나 슬픔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의미심장한 것으로 알고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렇게 하면 많은 고난을 모면할 수가 있다. 또한 가벼운 책망으로도 우리는 좀 더 편하고 쉽게 하나님의 교훈을 배울 수가 있다. 아무리 가벼운 고통일지라도 은총의 향기를 가득 담고 온다. 그런데 그것을 가볍게 여기고 내팽개쳐 버릴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되고 그분의 사랑을 더 많이 알게 되는 계기를 무시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란 말인가? “이 가벼운 십자가를 잘 활용하여라. 그러면 무거운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되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귀를 막고 외면함으로 얼마나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지는 않는가!

 
한편, 가벼운 고통에 대해서 귀를 틀어막고 있었기 때문에 더 무거운 고통을 초래하게 되는 것만은 아니다. 무거운 고통에 대해서조차 우리는 너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보다도 더 무거운 고통을 스스로 초래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안일한 태도로 시련을 극복하려 하는데, 이것은 아주 어리석을 짓이다. 시련을 당하는 순간에는 감정이 격렬하게 복받쳐서 울고불고 야단을 하지만 그것은 그때뿐이고 마음 속으로는 깊이 그 시련의 의미를 새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시련이 곧 또 닥쳐올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시련을 마음 속 깊이 엄숙하게 받아들이는 것과 감정적이 되어 울고불고 하기만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감정을 폭발시키기만 하는 사람들을 보면, 거듭되는 고통과 고통의 막간에는 아주 태평하고 유쾌하게 지내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게 되면 시련자체가 영혼에 큰 손상을 입힐 뿐만 아니라 면역이 생겨 버려 별 효과를 내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또 다른, 훨씬 더 아찔하게 아픈 주먹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가짐이 아주 심각한 상황이라고 여기시게 되면, 시련에 시련이 거듭거듭 꼬리를 물고 쉴 새 없이 닥치게 하시거나, 하나의 고난이 지겹도록 오래 지속되게 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 너의 하나님께서 그 길로 너를 인도하셨을 때 네가 그를 버림으로써 이것을 네 자신에게 자초하지 않았더냐?”(렘 2:17 한글킹제임스성경)는 말씀은 이러한 우리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파도에 파도가 거듭거듭 우리를 덮쳐 오지만,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폭풍을 자초한 결과이다. 파고가 더욱 거세게 높아져서 결국 우리가 거의 압도되어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기 전에 하나님께 즉시 굴복하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에게 복 주시도록 했더라면, 파도는 한 번으로도 족했을 것이고, 하루 해가 지기도 전에 폭풍은 잠잠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위로가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거친 항해를 자초하긴 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고향을 향해 가고 있다. 이 모든 폭풍과 파도들은 가나안을 향해 불어 닥치고 있기에 결국 우리는 그곳으로 밀려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파도치지 않는 잔잔한 바다에 떠 있을 때보다 이따금씩 파도 꼭대기로 높이 치받쳐 올라갔을 때, 우리는 저기 떨어져 있는 영원한 유업의 불빛을 더 밝게 볼 수 있게 된다. 그 불빛이 폭풍의 암흑을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파도가 아무리 사나울지라도 그럴 때마다 본향으로 좀 더 가까이 떠밀려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는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가 있으며, 물결이 세찰수록 우리는 더욱 빠르게 그리운 항구를 향하여 항해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p.94-96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고통을 주시는 의도

 
우리 자신을 “그의 거룩하심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게 하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크신 뜻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했다. 이 표현에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본성에 동참하는 자”(벧후 1:4 한글킹제임스성경)라는 말씀과 상응한다. 이 말씀은 대단히 우리를 높이 올려 주는 복된 무엇인가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목적이 단순히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라고 말했더라면, 아만큼 깊은 의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주님 자신의 거룩함 - 바로 그 분의 본성-에 동참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천사들의 영광보다 훨씬 더 큰 영광이다. 이것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구속받은 자들 -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에게는 대단히 특별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 가운데 포함된 단순한 평안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평안이며, 주님의 주시는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즐거움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이 단순한 거룩함이 아니라 그분 자신의 거룩함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동참자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깊으신 뜻인가!

 
이것만 있어도 다른 모든 것은 내팽개쳐 버려도 될 만한 아주 엄청난 상급이다! 이 훌륭한 상급의 모든 가치를 우리가 깨닫고 우리 마음이 온통 그것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충돌이라는 절차가 남아 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리에게 가장 주고 싶어 하는 복이기 때문에 그것을 전해 주시려면 불가불 몸을 구부리고 우리에게 가까이 접근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님과 어떤 지점에서 딱 만나게 되면 이 충돌은 끝이 난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방법을 사용하시는데, 실은 우리에게도 그게 최상의 방법이다. 우리를 죄로부터 건지기를 원하시고, 우리들 또한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이렇게 하나님과 우리의 뜻이 일치하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는 주님의 목적에 대해서 우리가 뜨거운 열망으로 진실하게 응하게 되다니, 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바로 이 순간에 하나님의 풍성함이 우리의 영혼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이것을 막을 수 없다. 이렇게 되기까지 이형적인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이제는 영광으로 가득 찬,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즐거움이 우리의 거룩해진 영혼을 가득 채우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무거운 것과 쉽게 에워싸는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하자. 그리고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다.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견디시고 수치를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한글킹제임스성경). 고통이 아니고는 그 어떤 것도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지 못한다. 고통은 세차게 휘몰아치는 바람과 같아서, 나무가 더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한다. 고통은 잔디를 깎아 주는 것과 같아서, 뿌리가 더 왕성히 뻗게 하고 잔디 잎이 더 푸르르게 해준다. 고통이란 횃불을 휘휘 내젖는 것과 같아서 불빛이 더 환하게 비치도록 해 주는 것이다. p.105-106

 

 

하나님의 잠자는 성도 깨우기 ; 고난의 의도

 
성령께서 죽음의 깊은 잠에서 우리를 흔들어 깨우신 지가 언제였는가! 우리는 다시는 그토록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한다. 우리를 깨워 주셨던 주님은 우리를 데리러 오실 때까지 우리를 계속 깨어 있게 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더 이상 잠을 자지 못한다.

 
하지만 아직도 상당히 졸릴 대가 있다.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지난 날의 졸음이 자꾸만 다시 엄습해 오는 것이다. 이 세상 것들이 여전히 매혹적으로 보여서 거기에 한눈 팔다 보니 자꾸만 눈이 감기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은 술 취한 듯 하고, 의식은 몽롱하고, 힘이 빠진다. 그래서 우리는 망대에 올라가 보초를 서고 있으면서도 잠에 곯아떨어져서 밤이 다 지나고 아침이 밝아 오는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곯아떨어져 있거나 꾸벅꾸벅 졸고 있는 동안 모든 것이 잘못 돌아가고 만다. 움직임은 둔해지고 생기를 잃는다. 믿음은 희미해지고 사랑은 식어 버리며 열정은 점점 차갑게 가라앉는다. 전에 있었던 싱싱한 활력은 사라져 없어지고, 담대한 용기도 떠나 버린다. 계획을 짜도 온통 허점투성이고 일을 진행해도 졸린 사람이 비틀거리듯 허술하기만 하다. 하나님을 위한 사역은 진전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 자신이 그것에 방해가 된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그것을 질질 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그냥 놔둘 수가 없으시다. 자신의 사역을 위해선, 우리 성도들을 위해서라도 사태가 이런 지경에 놓여 있는 것을 용납하실 수는 없으신 것이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우리가 다시 잠에서 깨어나게 하셔야만 한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않은 빛의 자녀들이요, 낮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늘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인생을 한가롭게 즐기며 흘려버리도록 놔두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런 낭비적인 삶을 하나님은 용납하실 수가 없으시다. 게으르고 김빠진 임무수행, 성의 없는 기도, 별로 꾸짖을 데 없이 반들반들 길이 들어 뭐라고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자세, 하는 말마다 매끄럽고 지혜로운 것 같지만 실상은 깊이가 업고 진실 되지 못해서 무게가 없는 언행, 이런 것들이 성도들에게 엿보인다면 하나님은 참으실 수 없다.

 
이렇게 싸늘하게 죽어 있는 자세를 일컬어 주님께서는 사데 교회를 향해서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네게 임하리니 어느 때에 너에게 올 것인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 3:3)고 하셨다. 또한 그런 미지근한 태도를 지닌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는 “네가 그처럼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내 입에서 토해 내겠노라”(계 3:16)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실 때, 처음에는 아주 살살 깨우신다. 향나무 아래에서 잠자던 엘리야에게 천사가 그랬듯이, 부드러운 손으로 우리를 흔들어 깨우신다. 너무 마음 푹 놓고 깊이 잠들었다 싶으시면, 가벼운 재앙을 보내서 깨우신다. 소란한 소리가 멀리서 귀에 들려오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국가적인 소동일 수도 있고, 기근 소식일 수도 있고, 전쟁일 수도 있고, 또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발생한 역병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런 모든 것들이 아무런 효과가 없을 수도 있다. 전이나 다름없이 우리는 안전하다 생각하고 마냥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여전히 맥 풀려 있고 생기가 돌지 않으면 하나님은 더 가까이 다가오셔서 우리 이웃이나 친척들 가운데 어떤 일을 일으켜 가까운 소리로 들리도록 음성을 약간 높이신다. 그래도 효과가 없으면 이번에는 더욱 가까이 다가오신다. 때가 급한데도 성도들은 여전히 잠자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아주 우리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시는 것이다. 연약한 곳을 매로 때려서 온 몸을 뒤흔들고, 심장이 펄떡 뛰게 하고, 맥박이 빨라지게 하시는 것이다. 비로소 우리 영혼은 수천 발의 화살을 맞은 것처럼 아픔을 느끼며, 그제서야 놀라서 긴 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어쩌다가 이토록 긴 잠에 곯아떨어졌던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잠에서 완전히 깨려면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얻어맞아야 한다. 일단 깼다가도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니 말이다. 그래서 잠을 깨우기도 해야겠지만 또한 깨어 있도록 계속 지키고 있어야 한다. 이 졸음 때문에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고난, 그 찢어지듯 아픈 가슴의 상처는 또 얼마나 큰가! “시온성에서 평안히” 여러 해를 푹 빠져 있던 우리들의 호사스런 삶의 대가는 엄청나게 비싸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삶에 대해 생각하라”는 격언은 사려 깊은 독일인들에게는 아주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죠. 이 격언을 인용하면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불행한 자라고 여겨지는가? 그렇다면, 그대의 인생은 한가한 꿈이 아니라 엄숙한 현실이라네. 그 인생은 그대 자신의 것이라네. 그 인생 전부를 마주 대해야만 한다네. 그러므로 일하게나. 결코 서두르지는 않되, 그렇다고 쉬지도 않는 ‘별’처럼 말일세.”

 
일은 하는 것 같은데 도무지 깨어 있는 사람 같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더러 있다. 말은 사명을 그럭저럭 수행하고는 있지만, 발걸음은 지쳐 있고 힘이 없다. 열정 없이 마지못해 움직인다. 선한 일도 제법 하고, 그럴 듯한 계획들도 많이 세우는가 하면, 훌륭한 말도 깨 한다. 그러면서도 열정적인 삶의 힘찬 맥박은 뛰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열정, 불타는 열정, 활기찬 열정, 이것이 도무지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불태우지도 않거니와 다를 사람들에게 불을 지피지도 않는다. 그들에게는 도무지 ‘별’다운 데가 없고 싸늘하기만 하다. 아마도 곧 날카로운 징계가 내려질지 모르며, 사실 이들에게는 그것이 필요하다.

 
또 어떤 이들은 이따금 생각난 듯이 발작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순간적인 기분에 따라 열을 올리기 때문에, 무슨 짓을 벌일지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 놓고 무엇을 맡길 수가 없다. 자신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성격이 아주 충동적이다. 또 그런 성격을 십자가에 매달아 버리거나 스스로 억제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이렇게 간헐적으로 깨어 있는 것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어떤 때는 소용이 있기도 하다가 또 어떤 때는 아무 소용이 없는 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집을 세우기도 하고 또 무너뜨리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도 ‘별’다운 데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그 들쭉날쭉한 성격을 일관성 있도록 고치고 영적인 변덕을 없애기 위해서는 아주 쓰라리고도 오래 계속되는 고난이 필요하다.

 
이와는 약간 달리 항상 깨어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법석만 떨고 요란한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휘젓고 다니면서 일을 꾸미지 않고는 못 배기며, 여기 저기 뛰어 다녀야 직성이 풀린다. 기질적으로 신경이 예민하고 겁이 많으며 참을성이 없어서 좀 쉬라거나 한 발짝 물러서라고 하면, 크게 제지를 당한 듯 속상해 한다. 이런 사람들은 실상은 자기가 하는 일은 별로 없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한시도 가만있는 것을 못 보기에 그들을 들볶아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 충만과는 거리가 멀다. 외적인 것에만 치중하다 보면 영적 성장 면에서는 손실이 크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모습에는 ‘별’다운 데가 있기는 하다. 잠자는 법 없고 쉴 새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낙 성급하게 허둥대는 바람에 차분히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혜롭지 못하게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그릇된 열성을 털어 버리고 성도라는 이름에 걸맞은 진정한 영적 고요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는 깊은 데를 찌르는 날카로운 채찍이 필요하다. 이들의 진정한 영적 성숙을 위해서는, 아주 뼈저린 징계가 있어야 한다.

 

상 꾸준하게 일하고 또 열정 또한 분명히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과 교제를 나눠 보면 그들 역시 진정으로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일은 많이 하지만 기도는 별로 하지 않기 때문에 머지않아서 그릇에 담긴 기름이 다 떨어지고 만다. 이들은 앞서 예를 든 사람들 보다는 낫지만, 역시 잠에서 더 깨어나야만 한다. 쉬지 않고 일하면서 설쳐대지도 않는다는 점에서는 ‘별’다운 데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들의 불빛이 아직은 미약하다. 어두운 세상에 반사되는 빛이 희미하고 가냘픈 것이다. 이들에겐 좀더 깊은 영적 삶과 경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그들에게도 역시 부딪혀야만 하는 아픈 고통이 마련되어 있다.

 
진정으로 깨어 있다는 것은 위의 예들과는 사뭇 양상이 다르다. 그것은 강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그런 것이다. 어딘지 늘 조용한 분위기를 띠면서도 내면에서 발산되는 위엄이 은은히 감돈다. 불처럼 뜨겁지만 열광적으로 흥분하지는 않으며, 힘이 넘치지만 날뛰지 않는 그런 모습이다. 하는 일이 신속하면서도 결코 허둥대지 않고, 신중하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워하거나 이기적이 아니다. 결단력 있고 두려움이 없으면서도 경솔하지 않으며,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다. 입을 다물고 있는 듯 하지만, 주위 사람들 모두가 그의 영향력을 느낀다. 즐거움과 화평으로 충만하면서도 밖으로 떠벌이는 법이 없다. 따사로움과 사랑이 넘치면서 동시에 또 신실하고 진실된 그런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깨어 있는 삶이다! 아, 그러나 이렇게 온전해 지려면, 얼마나 많은 역경들을 거쳐야 하는지!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하지 않는 육신적인 본성이 고개를 들고 반발한다. 우리 자신을 마땅한 산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해서 초래되는 고난을 또 얼마나 많이 거쳐야 하는지!

 
징계로 우리를 졸음에서 깨워 주셔서 우리는 더욱 활기 넘치고 근면해지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전보다 훨씬 더 많은 기도를 드리게 된다는 점이다. 잠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을 가장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마도 많은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시련만큼 기도를 되살려 주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시련에 부딪히면 우리는 즉각 무릎 끊게 되고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기도하게 된다.

 
번영하던 시절에는 즐길만한 일들이 너무 많았고 몸을 숨길만한 피난처가 여기저기에 있었다. 그러나 고난의 시절에는 우리에게 오직 한 분, 하나님 밖에는 없다. 비통함이 너무 깊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줄 수도 없고, 또 너무 아픈 것이어서 그 누구도 위로해 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 기도를 드린다. 전에는 무슨 특별한 일이나 되는 듯 싶어서 별로 기도를 드리지 않았지만, 이제는 기도가 전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인간의 팔이 부러지면, 기댈 곳은 하나님 밖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전보다 몇 갑절 더 어둡게 느껴지는 이 세상 한 가운데에서 빛이 비치는 곳이라곤 정말이지 우리의 기도실 밖에는 없다. 바깥은 사방이 음침하고, 구름이 온 지면을 덮고 있기 때문이다. 문을 걸어 잠그고 기도드릴 골방만이 밝고 조용하다. 얼마나 열심히, 얼마나 감사한 마음으로 이 기도실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있는가! 기도의 골방은 폭풍우 몰아치는 바다 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행복한 섬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모든 시간을 다 써 버려도 아깝지가 않다. 어쩌다가 피치 못해 여기를 잠시 떠났다가도 다시 이리로 돌아 올 때면, 얼마나 마음이 가뿐한가! 이곳에서 유일한 친구인 하나님과 함께 보내는 조용한 시간들이 그 얼마나 행복한가! 구름은 아직 걷히지 않았고 폭풍우는 아직도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다 잊어버릴 수가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기도가 훨씬 현실감 있게 느껴진다. 기도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하지만, 또 현실적으로 절실히 필요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를 드릴 수 밖에 없고, 기도를 통하여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부르짖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제는 기도가 진짜 간구가 되었고 진짜 간청이 된 것이다. 격식도 없다. 탄원을 올릴 때마다 새로운 생명, 새로운 에너지, 그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많이 쏟아 부어지는지 모른다!

 
이제는 입으로 말하지 않고 마음으로 말한다. 우리 마음의 갈망을 표현하기가 불가능하여 이제는 복바쳐 오르는 것들이 “말할 수 없는”신음뿐이어서, 이 신음소리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귀에 상달된다. 전에는 입은 있으되 마음은 없었지만, 그러나 우리는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는 말씀의 뜻을 알게 된다.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과 가까워진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제는 훨씬 더 의식할 수 있는 현실이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새로운 화제들이 거론된다. 새로운 소망들이 샘솟아 오르고 새로운 바램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완전히 비워진 우리의 마음 앞에 하나님의 풍성한 충만하심이 생생하게 나타난다. 깊은 영적 갈망들이 불타오르고, 우리 마음은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외쳐 부르짖는다. 다윗의 가슴을 기도로 가득 차게 했던 것도 고난들 때문이었다. 요나가 하나님께 큰 소리로 외쳐 부르짖은 것도 물고기 뱃속에서였다. 그리고 므낫세가 기도를 배우게 된 것도 광야의 가시덤불과 바빌론의 압제 가운데서였다.

 
교회여, 주님의 택함 받은 상속자여, 이제 잠에서 깨어나도록 하자!

빛과 낮의 자녀들이여, 이제 모두 일어나자1

긴긴 겨울밤은 거의 끝났다. 이제는 낮의 별이 막 떠오를 때가 되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라”(벧전 4:7), “어찌하여 너희는 자고 있느냐?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라”(눅 22:46). 이제는 이 말씀들에 우리 모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p.107-115

 

 

고난, 우리의 이기심을 깨는 하나님의 방법

 
‘진리’가 마음을 몽땅 점령하고 있어서 진짜 진리이신 “참되신 분”을 깡그리 망각하고, ‘사역’이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상대해야 될 대상을 놓쳐 버리며, 주님의 일이랍시고 거기에만 매달려 있는 바람에 인격적인 그분과의 개인적인 교제의 필요성을 간과해 버리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사람’되심을 아예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하나의 사실로만 간주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기껏해야, 언젠가 주님과 얼굴을 맞대고 앉아 있게 되면, 그때 그분을 개인적으로 상대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자신들에게 영생을 가져다주기 위한 사역을 주님께서 다 이루셨기에, 주님의 “실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다. 우리는 평안을 얻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잘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값을 치르고 이 복을 우리들에게 사 주신 주님이시건만, 주님과 나와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 따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다. 속죄 받았으니 다 되었고, 속죄하신 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아주 조금 밖에 관심이 없다. 주님의 사역이 충복된 것만 중요하고 주님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기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으로부터 가능한 한 모든 은총을 취해 버리고는 주님 혼자 남겨 놓고 떠나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기심이 비슷한 양상의 또 다른 이기적 행동과 생각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교리의 틀이 어떤 것인지는 얼마든지 파헤칠 수 있다. 그들의 구속관부터가 아주 이기적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목적을 어떻게 성취하셨으며 그 영광이 어떻게 드러났던가에 대한 원리를 토대로 삼지 않고 단지 죄인이 어떻게 구원받게 되는가 하는 원리만 토대로 교리의 틀이 짜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기적인견해가 죄인을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빼앗아다가 죄인 자신의 손에 갖다 놓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기적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 아닌가? 그런데도 이 절대적 필요성을 축소하고 그 대신 인간 자신의 의지와 판단이 구원에 매우 중요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획책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기적 교리관을 채택하지 않는 곳도 물론 많다. 그러나 그런 곳 사람들마저도 이러한 이기적 성향이 잠재해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되는데, 이것은 다 인격적 존재로서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데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이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징계를 통해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서만 위로를 얻고 힘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다른 경우보다 더 심하게 다루신다. 살아 계신 주님과 내가 개인적으로 접촉하게 되었다는 것을 더욱 실감하게 되는 때가 고난의 세월 말고 또 언제이겠는가? 고난에 처하게 되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뿐이라고 느끼게 된다. 진리도 귀하다. 그분의 사역도 아주 귀하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그분 “자신”이 가장 귀하다. 다른 것은 못하더라도 주님과 함께 꼭 붙어 있는 일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가 없다. 우리의 고난들을 모두 쏟아 버릴 곳은 오직 그분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기심의 뿌리를 겨냥하여 고난이 닥쳐온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만 의지할 수밖에 없구나 하는 그 복된 필요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내가 아닌 또 다른 나, 훨씬 더 영광스러운 “자아”를 우리 앞에 갖다 놓고 그 새로운 자아가 비참한 나 자신을 흡수해 버리고,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들 자신이 모두 녹아 없어지게 해 주는 것이다. 우리를 그리스도 그분 자신과 가장 친밀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고난 외에 다른 것이 없다. 우리들 자신을 뿌리 째 뽑아 없애는 데 고난만큼 큰 효력을 지닌 것이 없다. 이것이 우리의 이기심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우리의 것이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구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진리를 뛰어 넘어 “진리이신 그분”께로 데려다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p.128-130

 

 

세상을 닮은 성도는...

 

성도들 사이에도 세상을 닮아가는 모습들이 많이 엿보인다. 모슨 일을 하는 동기를 보거나 행실을 보아도 그렇고,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을 보아도 그렇고, 집안을 다스리는 것이나 가족들을 교육하는 것에 온통 세상적인 요소들이 구석구석 배어 있다. 독서나 대화에서도 세상의 냄새를 풍기는 성도들이 많다. 돈 쓰는 것도 세상적 이어서 자신을 위해서는 펑펑 허비하면서 하나님을 향해서는 구두쇠가 된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나 동료 형제들에게 봉사하면서 일하고 수고하고 돈을 쓰고 또 고통을 감수하는 일은 하기 싫어하고, 심지어는 신앙적인 계획이나 선교단체들과 관련된 일에서도 그들은 세상 방식대로 움직인다.

 
한 마디로 모든 처신들이 세상 사람들을 닮아 있어서 세상 것들을 뛰어 넘는 성도들만의 평안과 고요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불안해하고 안달하고 야단법석이다. 세상 냄새는 풀풀 나지만, 하늘나라 향기는 전혀 안 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방식에 대해서 머지않아 자신들이 들어가게 될 썩지 않을 유업에만 늘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아주 요지부동이지만, 하나님 일이라면 뒤로 발을 빼고 겸양한다.  p.132

 

 

고통으로서의 광야생활의 의미

 
“그가 그의 경이로운 일들로 기억되게 하셨으니“(시 111:4 한글킹제임스성경). 그렇다. 그것은 영원히 기억될 일들이다. 그 경이로운 일들을 이루신 의도부터가 기억되도록 하기 위하심이었기에 망각이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것들은 한갓 이야기처럼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가장 경이로운 일들 가운데 하나가 징계다. 징계만은 특별히 기억하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징계는 가치가 있지 않은가? 그 징계가 우리와 연관될 때는 더욱 가치가 높다. 징계만큼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없다. 다른 것은 징계만큼 우리 마음 가운데 그토록 깊이 새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징계는 지난 날 우리가 두려워했고 또 소망했던 모든 것들과 얽히고 설켜 있다.  그래서 그것들은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 영원히 새겨져 있다. 그 어떤 펜을 가지고 써도 고난만큼 지워지지 않게 영혼 속에 써넣을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의 심정을 피력하셨을 때, 바로 이점을 지적해서 말씀하셨다. “주 너의 하나님께서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너를 인도하셨던 모든 길을 너는 기억하라. 이는 너를 겸손하게 하시고 시험하사 네가 주의 계명들을 지키는지 그렇지 않은지 네 마음 속에 있는 것을 알려 하심이니라. 주께서는 너를 겸손하게 하시고 너를 배고프게 하셨으며, 너도 모르고 네 조상도 모르는 만나로 너를 먹이셨으니, 이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너로 알게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옷이 낡아 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어오르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자기 아들을 징계하는 것같이, 주 너의 하나님께서도 너를 징계하시는 것을 네 마음 속에 생각할지니라”(신 8:2-5 한글킹제임스성경)고 말씀하셨다.  


광야에서의 이런 기억들을 이스라엘 백성의 가슴 속에 영원토록 새겨놓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사막을 방황하면서 그분과 가졌던 교제의 은총을 그들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잊어버리기에는 너무나 고귀한 기억들이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다양하게 하나님과 가까이서 홀로 가졌던 사십 년 동안의 교제는 그들에게 하나님에 관해서, 그리고 또 그들 자신에 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기억들은 영원토록 간직해 둘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지명 하나 하나마다 경이로운 광경이 담겨 있었고, 바위 하나 하나마다 거기에 들려 줄 이야기가 서려 있었다. 적들과 위험들, 배고픔과 목마름, 만나와 물, 불평들과 감사의 기도들, 여행과 야영 생활들, 해지지 않던 옷, 쇠와 놋쇠 같이 닳지 않았던 그들의 신발, 부어오르지 않았던 발, 그리고 무엇보다도, 머리 이에 떠돌던 구름들과 그들 한 가운데에 펼쳐졌던 하나님의 성막, 이 모든 것들이 기억되어야 할 장면들이었다. 광야 생활 이전에는 한 번도 이와 같은 놀라운 교제들이 한꺼번에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일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억되어 그들의 자녀들에게, 자녀들의 자녀들에게, 두고 두고 물려 줄 고귀한 유업이 되었던 것이다. p.136-139

 


고난이 무겁지 않은 까닭

 
고난이 죄를 없애고, 죄에 물든 몸가짐과 성격들을 제거할 수 있는 수단이기에, 일생 고난에 처한들 그게 그렇게 길고 무거운 것은 아니다. 죄들 제거하고 더욱 거룩해지며 더욱 경건해지고, 주님의 모습을 더욱 닮아 가게 되는 수단이기에, 일생 겪는 고난이라도 그렇게 길고 무겁지가 않다. p.149

  


성도가 고난당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위로자로 계신다!

 
주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씻는 일에 전능하시듯, 우리를 위로하시는 일에도 전능하시다. 주님은 우리 안에 영으로 거하시며, “위로자”라 불리신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일 외에도 우리의 영혼을 향하여 직접 능력의 손을 뻗어서 낙심하고 고통당하고 있는 그 영혼을 꼭 붙잡아 주시고 힘을 불어 넣어 주신다. 우리의 상한 영혼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에 감싸여 있고, 그 전능하신 손으로 우리를 지탱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 내면에 있는 슬픔의 샘, 바로 그것을 말려 버리신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정말 헤아릴 수 없이 큰 위로를 받게 된다. 고난에 짓눌려서 땅에 엎드려 있을 때야 말로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지 않는가? 우리의 영혼 속으로 직접 다가와서 영혼을 일으켜 세우고 힘을 북돋아 줄 수 있는 그런 도움 말이다. 인간의 위로는 이럴 때 아무 소용이 없다. 친구들이 우리를 위로해 주기 위해 별별 말을 다 해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슬픔의 근원까지 손으로 어루만져 줄 수는 없다. 기진맥진해 있는 육신을 팔로 안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쇠잔해진 영혼을 안아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계시다. 성령께서 우리를 영원한 팔로 감싸 안으셔서 단단히 붙잡아 주신다. 그분이 우리를 붙잡고 계시고, 우리를 위로하시며 마음을 북돋아 주시기에, 우리는 주저앉을 수가 없다. 우리를 어떻게 붙잡아 주는 것이 좋을지, 어떻게 위로하여 기쁘게 해줄 수 있을지, 그 방법을 그분만큼 잘 아시는 분이 어디 있겠는가? p.151-152

 

 

고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셋이나 노아, 또는 아브라함이 걸어가야 했던 그런 순례의 긴 여정이 우리들에게는 남아 있지 않다. 우리의 순례의 길은 그들의 것과 비교해 볼 때 한 뼘 밖에는 안 된다. 우리의 온 생애가 곤비한 날들과 잠 못 이루는 밤들로 가득 차 있다 할지라도, 그 고난의 나들이 며칠 안 되고, 깨어 있어야 할 밤들이 몇 밤 남지 않았다. “우리는 잠시 받는 가벼운 환난” 가운데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짧은 수명도 수명이지만,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이 점이 또한 위로가 된다. 환난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과 승리의 시작이 눈 앞에 있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개인의 고통에서 벗어나 안식하게 된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의 안식과 구원이 함께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가 되면, 우리들 “그리스도의 몸”은 깨어 있든지 잠들어 있든지 영광스런 주님의 몸으로 변모되어 영광된 주님과 함께 영광을 얻게 될 것이요, 영원한 즐거움이 우리들 머리 위에 머물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잠든 사람들을 애도하는 사별의 슬픈 날들을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이 위로는 특히 귀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들어 있는 자들을 주님께서 함께 데리고 오실 테니까 말이다. 주님이 가까이 와 계시다는 사실은 그들과 재회하게 될 날도 머지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이른 저녁에 잠자리에 누운 사람은 온 밤 전체를 잠을 자야 하지만, 아침이 가까워진 시각에 잠든 사람은 채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새벽이 그를 깨울 테니까 말이다. 이 마지막 날들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지금이 벌써 밤 사경 쯤 되었고 해가 떠오를 준비를 이미 하고 있으니 그들은 오래도록 잠자지 않아도 된다. 이 얼마나 큰 위로인가! 사별의 아픔을 얼마나 달래주는가! 상한 영혼을 얼마나 북돋아 주는가!

 
“잠깨어라, 노래하라, 너희 흙 속에 거하는 자들아.”라는 말이 이제는 우리의 매일 매일의 표어다. 우리는 망대 위에 올라서서 한밤중 어두움 속에 비쳐 오는 아침의 첫 햇살을 기다리고 있다. 땅에 귀를 대고 가만히 들어 보면 주님 오시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벌써 오래 전에 약혼했던 신부가 온 마음을 다하여 소망하면서 눈물과 고독 속에서 그토록 여러 세대, 여러 세기 동안 기다려 왔던 젊은 날의 신랑이 이제 곧 신부의 가슴으로 찾아오실 것이다. p.152-153

 

 

출처: 네이버/긍휼의 그릇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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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소금물에서 태어난다

아기가 자라는 엄마 뱃속의 양수는 바닷물과 같다.
소금물이 아니라면 아기는 안전하게 자랄 수 없다.
사람 몸 안에도 소금이 들어 있다.

인체내 혈액의 염분농도는 0.9%이고, 세포의 염분 농도 역시 0.9%이다.
그 0.9%의 소금이 혈액의 산성화를 막아주고 신진대사를 주도한다.

별의별 암이 다 있지만 “심장암”은 없다.
심장에는 암이 생기지 않는다.

심장은 소금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심장을 “염통(鹽桶)”이라고 불렀다.
소금통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음식을 안먹고도 일정기간 동안 살 수 있지만 숨을 쉬지 않거나 소금을 먹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소금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수억만 년 전부터 이땅에 존재해온 바닷물이 “생명의 고향”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인간 생명의 고향인 “엄마의 뱃속” 역시 바닷물(양수)이다.
엄마 뱃속이 바닷물이 아니라면 아기는 자랄 수 없다.

2. 인류의 역사는 소금의 역사

* 샐러리(Salary)의 어원은 소금을 뜻하는 라틴어 ‘Sal'이다.
로마 시대에 공무원의 봉급을 소금으로 지급했는데, 이를 라틴어로 ‘Salarium' 이라고 했다.
이것이 영어의 샐러리 어원이 되었다.

* 군인(Soldior)도 봉급을 소금으로 받았다.
라틴어 ‘Slodior'는 소금으로 봉급을 받는 군인을 뜻한다.

* 샐러드(Salad)도 소금에서 나온 말이다.
채소에 소금을 뿌린 음식을 ‘Salade'라고 했다.

* 실크로드 이전에 이미 ‘Salt Road'가 있었다.
로마제국이 건설한 세계 최초의 무역로인 살라리아 가도(Via Salaria)는 바다로부터 소금을 나르는 소금길이었다.

* 히말라야 고산지대에는 지금도 소금길이 있다.
유목민들이 야크떼를 몰고 목숨을 걸고 수백km 떨어진 소금 호수에 가서 소금을 채취해 시장으로 운반했다.

* 고대 이집트에서는 시신을 소금물에 절인 뒤, 미이라를 만들었다.

3. 소금의 비극, 소금의 누명

“하루에 소금 3g을 줄이면 한해에 9만 2천명의 목숨을 살릴 수있고, 240억 달러의 예산을 절감할 수있다“

지난 1월 캘리포니아 대학교 커스틴 비빈스-도밍고 박사 연구팀의 논문의 요지이다.

어떻게 이런 무지막지한 결론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소금의 비극은 ‘염화나트륨(Nacl)'에서 시작된다.

그들이 말하는 소금은 천일염이나 죽염이 아니라, 정제염 또는 암염이다.

정제염이나 암염은 순도 99%의 염화나트륨 덩어리다.
소금을 염화나트륨으로만 섭취하면 당연히 혈압이 올라간다.

나트륨은 혈압을 올리고 칼슘과 칼륨은 혈압을 내린다.

정제염이나 암염은 염화나트륨만 있고 칼슘이나 칼륨과 같은 미네랄은 거의 없다.

그런데 천일염 쪽으로 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바닷물은 그 자체가 미네랄의 보물 창고다.

바닷물을 말린 천일염 역시 미네랄 덩어리다.
즉 천일염에는 염화나트륨만 있는게 아니라 각종 미네랄이 다양하게 함유되어 있다.

따라서 많이 섭취해도 칼슘, 칼륨, 인, 셀레늄, 망간, 아연 등의 미네랄이 작용하여 몸안에 과다하게 들어온 나트륨을 배설 시키기에 문제가 없다.

특히 한국의 천일염은 세계 최고의 미네랄 함유율을 자랑한다.

프랑스 게랑드 천일염 보다도 미네랄 함량이 3배나 더 높다.
우리나라 서해안 천일염의 연화나트륨 함량은 80-85%이고, 나머지 15-20%는 미네랄 성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소금을 먹고 있는가?
서양사람들과 똑같은 소금을 먹고 있다.
시중의 각종 식품은 거의 대부분 정제염을 사용하고 있다.

잘 알다시피 한국인의 소금 섭취량은 세계 최고 수준.
미네랄이 결핍된 채 염화나트륨만 잔뜩 몸안에 집어 넣고 있으니 비극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염화나트륨 소금에서 ‘미네랄 소금’으로 돌아 간다면, 비극은 막을 내릴 것이고 위와 같은 끔직한 연구결과도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다.

정제염을 쓰는 집에서도 김치만큼은 국산 천일염으로 담근다.

왜 그럴까?
정제염으로 김치를 담그면 얼마 안가서 김치가 물러 터져 버린다.

중국산 천일염을 써도 비슷한 사태가 벌어진다.
그러나 질좋은 국산 천일염 또는 죽염으로 김치를 담그면, 김치가 오래 간다.

한국 천일염은 미네랄이 풍부한 데다 알카리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소금이 신진대사를 주도한다.
사람은 바닷물(소금물)에서 태어난다.

아기가 자라는 엄마 뱃속의 양수는 바닷물과 성분이 비슷하다.
(두산백과사전)

양수의 소금농도=0.9%,
사람 핏속의 소금농도=0.9%,
세포의 소금농도=0.9%,
링거주사액 소금농도=0.9%.
즉 소금농도 0.9%는 생명의 기준이다.

만약 소금 농도가 0.9%에 미치지 못하는 양수에서 자란 아이는 뇌와 뼈, 생식 기능이 선천적으로 약한 체질로 태어나게 된다.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에서는 소금을 이렇게 가르친다.

소금이 몸에 들어오면 위액의 염산이 되어 살균작용이나 소화작용을 돕는다.

또한 소금은 피와 섞여 몸 구석구석을 돌면서 세포 속의 노페물을 새 물질로 바꾸어주어 신진대사를 촉진한다.

이밖에도 소금은 신경이나 근육의 움직임을 조절하기도 한다.

소금은 단순한 염분이 아니라 ‘생명물질’ 이라는 이야기다.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음식을 먹고 분해시켜서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것을 신진대사라고 한다.

신진대사가 멈추면 사람은 죽는다.
그 신진대사를 주도하는 것이 바로 소금이다.

만약 몸 안에 소금이 부족하여 신진대사가 원활하지 못하면 혈액이 산성화 되고, 면역력이 약해져 병들게 된다.

사람이 밥을 먹고 소화를 시킬 수 있는 것도 소금 때문이다.

소금 속의 염소 성분은 위액의 재료가 된다.
만약 소금 섭취량이 부족하면 위액의 농도가 묽어져 소화에 장애가 발생한다.

천일염이나 죽염을 먹으면 소화가 잘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치다.

ㅡ월간 “인산의학


우리 시대는 예레미야 시대와 같고 더 악하다 / 프란시스 쉐퍼

 

 

우리 세대는 굶주려 있다. 사랑에, 미에, 의미에, 항구적인 도덕과 법에 굶주려 있다. “죽음의 재”가 모든 것을 뒤덮고 있다. 예레미야 시대처럼 풍성한 위로자에 대한 가지시 않는 갈증이 있다.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름이여 나를 위로 하여 내 영을 소성시킬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애1;16). 예레미야 시대 유대인들은 위로자를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만족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사람의 존재 목적, 사람의 의의를 잊었기 때문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복음주의와 정통신앙권 안에서는 사람의 목적을 말할 때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라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의 답 가운데 첫 번째 부분을 인용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것으로 끝난다면 종교개혁을 일으킨 사람들이 이해한 성경 교훈의 뜻은 완전히 바뀐다. 성결대로 충실히 대답하려면 소요리문답 제1문의 답을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기는 것이다” 하고 완전하게 인용해야 한다. 이 후반부 답이 인생에 대한 관점 전체를 바꾸어 놓는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을 즐기는 것이기도 하다. 사명을 절실히 수행하는 것은 우리가 창조된 목적과 관련된다. 창조된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고, 그분에게 채우심을 받고, 그로써 삶에 대해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기독교는 어느 방관자에게도 기독교가 염세 교리를 믿는다고 결론 짓도록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긍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존재하시는 하나님, 친히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의 궁극적인 환경이 되는 인격적인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 수 있다는 긍정적인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은 다 종속된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중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기 때문에 궁극적이고 항상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살 수 있다. 우리는 현세와 내세에서 우리 인격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에, 그리고 삶의 모든 부분에 채움을 받을 수 있다.

 

기독교에 대해 파괴적인 지성주의가 존재하긴 하나, 이것이 말하는 지식이란 참된 기독교가 이해하고 있는 지식이 아니다. 전인이 채움을 받아야 한다. 즉, 사람이 기쁨으로 충만하여 살 수 있음을 긍정해야 한다. 주변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만나지만 이들에게서 기독교에서 반드시 얻어야 할 삶의 기쁨을 보지 못한다.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전인이 채움을 받아 가고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

 

예레미야 시대에도 유대인들이 진정한 채움으로 향하는 길에서 등을 돌린 모습을 본다. 그러나 이 옛 유대인들은 탈기독교 세계를 사는 현대인들만큼 악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우상들을 찾아갔으나, 그래도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만큼은 적어도 알고 있었다. 그리스인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자기들의 문화를 건축하였다. 물론 그들의 신은 완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적어도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만큼은 알았다. 물질주의를 전부로 삼고 모든 모든 것을 질량, 에너지, 운동으로 축소시킨 우주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우리 세대밖에 없다.

 

유대인들은 참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들에게로 갔고,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 그리고 그 이후 민족들도 거짓된 신들에게로 갔으나, 그들은 우리 세대만큼 진리에서 멀리 떠나 있지는 않았다. 결론으로 다음 사실을 이해하자. 인격적인 위로자만이 인격적 존재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 오직 한 분이신 창조주, 존재하시는 무한하시고 인격적이신 하나님, 즉 유대-기독교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만이 이 일을 넉넉히 하실 수 있다. 하나님만이 충분한 위로자이시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애1:18). 히브리 성경에서는 “명령”이 아니라 “입”이다. 좀더 포괄적으로,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 하나님께서 인생의 진정한 해답,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방법, 그분과 관계를 맺고 사는 방법을 말씀해 주는 명제적 계시- 에 반역했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예레미야 때의 시대 상황이나 탈기독교 세계의 상황에 처하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명제적 계시를 외면했다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도덕적 심판 아래 놓여 있다. 로마서 1장에서 사람들이 진리를 알고도 거기서 돌아섰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되었다고 바울은 강조한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신다. 그러나 예레미야 시대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돌아섰기 때문에 그분과 분리되게 되었다. 우리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제적 계시로부터 돌아섰기 때문에 우리 역시 충분한 위로자가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도덕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불렀으나 저희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소성시킬 식물을 구하다가 성중에서 기절하였도다”(애1:19). 탈기독교 세계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반응해야 한다. 이 문화가 성경적인 종교개혁 사상의 터 위에 세워졌는데, 우리 바로 앞 세대들이 그 진리를 외면해 왔으므로 다시 진리로 돌아서는 일이 없이는 도시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게 될 것을 자각하는 일이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외면한 문화를 다루고 계시기 때문에 할 말은 “도시에는 죽음이 있다. 도시에는 죽음이 있다!” 하는 오직 한 자기밖에 없었다. 예레미야 시대가 그러했고, 오늘 우리 시대가 또한 그러하다.

 

어떤 죽음인가? 인적이 끊긴 것을 말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의 죽음이다. 인격성이 자취를 감췄다. 비슷하게 무섭고 소름끼치는 고독을 그린 호퍼 같은 미국 화가들이 생각난다.

하나님과 그분의 계시를 토대로 교회와 문화에 진정한 개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도시의 죽음은 점차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이다. 우리 문화가 기독교라는 기반을 내동댕이 친 뒤에도 예전처럼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리석은 생각이다. 충족시킬 수 있는 분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분에게 등을 돌렸으므로, 여러분의 도시에는, 여러분의 문화에는 죽음이 있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 시대에 하나님은 자신의 인격에 기초하여 역사 안에 들어와 일하셨고, 지금도 계속 그렇게 일하신다. 예레미야 시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것은 그냥 군사나 경제상의 이유들 때문만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이들이 자기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에 심판하셨다. 우리 세대도 똑같이 대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특정 교리들을 긍정하는 것을 뜻하지만, 아울러 하나님께서 자신의 책에서 역사의 실재들에 관해 보여오신 교훈에 마음으로 동의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우리의 관점은 하나님의 말씀의 관점이어야 한다. 이 관점을 갖고 있다면 싸구려 해결책들을 내놓지 않을 것이고, 심판이 있다는 사실에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 프란시스 쉐퍼, 『개혁과 부흥』, pp 18-25

 

 

출처: 청교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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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소금)

짐보

(소금)

‘빛과 소금’ 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설교를 숫하게 들어 왔기에
식상(?)한 주제라 성경을 읽을 때도 무심코 지나치는데
어느 날 아침 평상시처럼 개역개정 성경과 KJV 성경을 같이 놓고 읽기 전
성령님의 도움으로 말씀을 깨달고 그 말씀이 가슴 판에 새겨지어
온몸을 움직이는 공급하시는 힘이 되기를 간구하며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놀라운 사랑의 깨우침을 성령님으로부터 받게 되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Ye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have lost his savour, wherewith shall it be salted? it is thenceforth good for nothing, but to be cast out, and to be trodden under foot of men.
마태복음5:13]
salt of the earth 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인데
but if the salt have lost his savour
라고 KJV 는 표현 했을까?
Savour 이라는 뜻은 맛, 풍미, 을 의미하나 ‘향기’로 해석함이 옳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savour 를 향기로 표현 했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For we are unto God a sweet savour of Christ,
in them that are saved, and in them that perish: 고린도후서2:15]

직역하면 “만약 소금이 그의 향기를 잃어버리면”
trodden under foot of men.
사람에게 밟인다 어떻게?
trodden ...짓밟힌 상태
“만약에 소금이 그의 향기를 잃어버리면 사람들에게 무자비 하게 짓밟힌다.”
그때부터(thenceforth)
향기를 잃어버린 그때부터.
찔림을 넘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향기(공의)를 잃어버리면 세상에 짓밟힌다.
누가?
내가
우리가
교회가
세상에서 세상으로...짓밟힌다.
이 얼마나 무서운 표현인가
자신을 뒤돌아보면서 섬뜩했고 두렵기 까지 했다.
주위를 뒤돌아보면
왜 교인이 교회가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는지?
무슨 변명을 한단 말인가...
‘내’ 가 누구인가?
‘가정’이란 무엇인가?
‘교회’ 란 무엇인가?
그것들의 정의에 대하여 성경으로 확증하고 마음으로 확정한
확고한 고백이 없다면
앎이라는 지식적이라 성경의 의가 가슴에 녹은 원동력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배고픈 허기에 응얼거림에 멈춘 상태일 뿐이다.
그럼 소금이란 무엇인가?
성경의 첫 소금이란 단어는 창세기 19:26 절에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롯의 아내는 왜 소금 기둥이 되었나?
롯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말을 어겼다고
소금기둥이 되다니 너무 야박하시니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신가는 의문은
이 구절을 보면서 다시 묵상했다.
성경은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기 때문이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베드로후서2:6-7]

룻의 아내는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누가복음17:29-32]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사람이었다.
한글 성경은 간단하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표현하였는데
[But his wife looked back from behind him,
and she became a pillar of salt. 창세기19:26]
KJV에서는 룻이 중심으로 기록 되어
그의 아내는 룻의 뒤에서 (룻의 뒤에 숨어서) 뒤를 돌아보았기에
소금 기둥으로 변화되었다 기록한다.
무엇이 그녀를 돌아보게 하였을까?
지난날의 룻과 한 소돔의 생활이 어찌 하였든 정들었을 거고
떠나는 마음이 뒤숭숭하고 착잡하였기에
남편의 어깨위로 소돔을 바라보았고 유황불이 떨어지는 소돔을 바라보면서
소금이 되어가는 자신을 보면서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룻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룻과 룻의 아내의 결과를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베드로후서2:9-10]
이렇게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의문은 언약으로 귀착된다.

민수기 18:19 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
소금 언약은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고 맛이 변하지 않는다는 특징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상징했고
언약(Covenant)은
엘 베리트(El Berith 언약의 하나님)에서
히브리어 berith '끊는다‘는
어원으로 brith 할례의 뜻이며 할례의 의미는 ‘언약의 증표’이고
할례는 아이가 태어나서 생후 8일째 행하고
할례를 행치 않는 사람은 ‘언약의 공동체’에서 끊어졌다.
(끊어졌다...
여기서 전기에 충격을 받는 것같이 전류가 온몸에 지나가듯이 쇼크였고
이런 격동은 전율하게 하였다.

-할례는 왜 생후 8일째 하였을까?
일주일이란 기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안식한 날 까지 이며
8일 째는 새로운 날이다.
언약을 이루는 새로운 날 이다.
주님을 맞이하는 새로운 날이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날 이기에-

주께서 이 못난 나를 사랑하시기에 성령님께서 말씀을 풀어주시고
언약을 온 몸에 기억케 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이라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새롭다.)
언약은 당사자들이
짐승을 반으로 쪼개어 마주보게 하고 그 사이를 통과하는 의식으로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의 행함 이었고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은
쪼갠 제물사이를 하나님이 지나가신
제물의 피는 생명의 피를 흘려 피의 언약을 주신 주님을 상징 하였다.
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소망을 누구도 환경도 죽음도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기에
조금만 힘들어도 엄살을 피고 조그만 일들에 불평 말고
상황에 환경에 연연 하지 말고 ‘담대해라’ 는 거다.
이보다 큰 위안이 무엇일까
모세의 언약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면 축복하고 순종하지 않는 다면 징벌하신다는
순종의 언약이다.
이제는 새 언약으로 예레미야가 언급한 하나님의 용서를 따라서
한 언약(렘31:32)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식사 때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22:20]

새 언약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그의 자녀가 맺은 언약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언약이다.
옛 언약이 돌에 새긴 율법으로 몸에 할례를 하는 언약의 표시였지만
새 언약은 마음에 새겨 성령의 세례로 소망을 갖고
성령님이 오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부패와 불순종의 죄를 제거하는
말씀을 가슴 판에 새겨 순종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교제하는
거듭난 자로 새로운 인격체로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은혜라
옛 언약과 새 언약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연속에서
값없이 주신 선물이란 언약이며 은혜라

은혜(Grace)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선하심이라
성가대의 찬송에 감동하였다고
목사의 설교에 감동하였다고
또는 부흥회에서 뜨거워졌다는 “은혜 받았다”
그런 감동과 의미의 차원이 아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였다는 확신과 고백을 동반하나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나 긍휼 감동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의 최대의 베풀음이고 행위이시고 긍휼이며
그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본 보여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고
성령님을 통하여 언약으로 확정한 우리의 소망이다.
단지 성도는 그 은혜의 통로로 소망의 길로 쓰임을 받고
받기를 바랄 뿐 이다.

은혜 받은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기회(Second Chance)이며
'chance' 는 ‘떨어지다’ 라는 의미의 'cad'에서 비롯된 말로
‘cide'와 동족어로 ’chance, 에는 ‘복(福)’ 과 ‘화(禍)’ 를
‘기회(機會)’ 와 ‘위협(威脅)’ 을 상반된 의미를 내포하며
‘-cide ’는 ‘죽임’ 과 ‘살해(자)’의 명사를 만든다.
은혜에서 떨어짐은 화(禍)라 심판에 놓이고
자기 자신을 죽이는 죽임을 뜻하고
은혜란
또 한 번의 기회로
멸망의 길로 가거나 생명의 길로 갈지를 결정하는 일상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결단의 끝없는 동력이며 시간 이라
삶이 공의로워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소금의 역할을 하고자 하는
성령님의 도움심 이다.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For every one shall be salted with fire,
and every sacrifice shall be salted with salt.
Salt is good: but if the salt have lost his saltness,
wherewith will ye season it?
Have salt in yourselves, and have peace one with another
마가복음9:49-50]
소금은 언약이다.
주께서 생명을 바쳐 십자가에서 이루신 언약이다.
그 언약을 잊지 말라고
구약시대에는 마음에 새기고 손목에 매여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였고
언제 어느 때 든 지 잊지 말고
또 자녀에 가르쳐 강론하며 후에 자녀가 묻거든
하나님께 경외하며 은혜의 복을 누리며 오늘 함께 하심을 알게 하려 함이라
가르치신다.
그런 믿음은
우리 세대(世代)와 자녀 세대 그리고 세대를 뛰어넘는 시대(時代)를 바라보아
다음세대에 물려줄 유산이고 현시대를 넘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을 바라보는,
버릇 같은 관습과 전통을 넘어 바라보는,
이것이 믿음을 가진 자들의 위대함이라 담대함이라,
속 좁아 감정에 좌지우지하는 휘둘림이 아니라
옹졸하여 상처주고 시험받는 좀스러움이 아니라
세월을 따라 밴댕이 소갈머리로 변해가는 신앙이 아니라
오늘날 이 말씀을 심장에 새기면
또 속 좁은 나를 뒤집어 놓으시고
은혜에 감사하고 소망을 주심에 감사하면
끝없이 사랑을 베푸셨듯이 그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마음이 되면
마음에 샘솟는 공의의 강물이 흘러 차고 넘쳐 형제자매를 향하고 이웃을 향하여
그것이 나의 힘이 되어 돌아온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And these words, which I command thee this day,
shall be in thine heart: 신명기6:6]

영혼에 도장을 새기듯 성령으로 말씀을 각인(刻印)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6:5]
예수님 말씀처럼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마가복음12:30-31]
이제는 사람마다 성령으로 소금 치듯 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잃지 않게
네 마음의 중심에 언약을 녹여
나와 너의 평안(平安)이 되어라 는.

-------------------------
소금은 녹아야 맛을 냅니다.
맛은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러기에 소금은
나의 욕심 욕망을 녹여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너의 시험과 인내를 녹여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너와 나 사이에 소금을 두고
그리스도의 언약을 두고
내 자신을 녹여 너를 그리스도로 연결하는
너를 녹여 나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이루는
너는 나의 언약의 소망이고
나는 너의 언약의 믿음이고
그러기에 성령님이 언약의 증인 이십니다.

(주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주의 언약을 이루셨듯이
이제 주의 언약을 알게 되었사 오니
우리로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삶으로 십자가에 죽어
언약으로 살게 하여 주소서.
주께서 생명을 바쳐 주의 언약을 이루셨듯이
우리 목숨을 바쳐 주님의 언약을 믿사오니
우리로 세상의 소금이 되게 하여 주소서.
부패한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여
우리로 하여금 썩어가는 세상을 멈추게 하시고
주의 공의가 만국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여 주소서.

그러다 지쳐
눈물 흘리는 자매에게
우리 눈물로 자신을 녹여 위로케 하옵시고
고통이 있는 형제에게
우리 고통을 녹여 인애케 하시여서
우리의 언약을 잊지 않게
우리의 가슴에 언약의 소금을 녹여
숨을 들어 마시고 내 쉴 때 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일상이 되게 하여 주소서.)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골로새서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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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통수보다 뒷통수가 더 밉더라

 

 

결혼전에

사람과의 관계가 어려웠기에

가장 우려했든 것이 결혼후 사람이 지겨워지고 싫어지면

이혼할 수도 없고 어떻할까 고민을 했다

왜냐면

어느 날 문득 웃음짓는 앞집의 까까머리 남학생이

살짝 가슴을 설레이게 하며 가슴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들어온것 보다 더 쉽게 빠져나가기도 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열병처럼 펄펄 뛰다가도그 열병은

바람처럼 사라지기도 하지 않았든가?

그러니 남편이 싫증나지 말라는 법이 없을터

그 때는 빼도박도 못하고 우짤낀가

그런데 결혼이란 미운정과 고운정으로

날실과 씨실을 짜듯이 그렇게 엮여 나갔다

때로는 그리도 살가운 당신이

때로는 남보다 못한 미운 사람이 되기고 하고

그건 또 바람처럼 지나가고 어느 새 그의 손을 잡고 걸어간다

사람이 미우면

앞을 봐도 미웁고 뒤를 봐도 밉다

밥먹는 것도 밉고 웃는 것도 밉다

사람이 미우면 사람의 신체 부위중에 어느 곳이 가장 미울까?

나는 뒷통수라고 생각한다

미울 때는 왜그리 뒷통수가 미울까?

사람이 좋을 때는

이리봐도 좋고 저리 봐도 좋다

그 미웠든 뒷통수까지 좋아보이니

사람이란 동물은 신기한 동물이다

동물의 세계에도 서열싸움이 있고

사랑싸움도 있다

동물들도 앞통수만 보아도 좋고

뒷통수만 보아도 미울까?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나이가 들수록 그 차이가 점점 없어진다는 것이다

어쩌면 감정의 한쪽이 죽어가면서 무덤덤해지는 건지도 모른다

누가 딱히 싫지도 않고

누가 딱히 좋지도 않다

조금 잘나보여도 고만고만하고

못나 보여도 고만고만하다

남편이 혈압을 올리면 서운하고 속상하기는 해도

뒷통수가 미운게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미장원에서 머리를 깍는데

나를 데리러 나온 남편이 들어왔다

아저씨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시는가봐요?

아닌데 세 살 차이밖에 안되는데..

그리고 거울속에 비취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온 얼굴에 주름 가득한 노인네가 보인다

우리는 늘상 마주하는 얼굴이고

얼굴과 얼굴로 말하는게 아니라

마음과 마음으로 대화를 하며 살아가니

그가 그리도 주름진 노인이란걸 놓치고 살아가는 거다

여전히 부부는 토닥토닥

다름이 아니라 틀렸다고 다투면서

때로는 앞통수가 이뻐보이다가

때로는 뒷통수가 미워보이다가

그리 손을 잡고 늙어갈끼다

그리고 하나이 먼저 떠나면

소쩍새처럼 그리도 슬피 울며 살아갈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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