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지 않는 못자국  
    
    조금만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심하게 성질을 부리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한 자루나 되는 못을 주면서
    화가 날 때마다 뒤뜰 울타리에 박아보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날, 아이는 37개의 못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는 
    조금씩 못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못 박는 것이 힘에 부쳤기 때문에 화를 참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함부로 화를 내며 성질을 부리던 버릇이
    점차 사라지고 인내심이 길러졌습니다.
    아이는 스스로 대견해하며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날부터는 화가 난 자신을
    잘 추슬렀다고 생각할 때마다 
    못을 하나씩 뽑아오라고 시켰습니다.
    
    매일 조금씩 못이 뽑혀나갔고,
    결국 울타리에 박혔던 모든 못이 뽑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그제야 아들의 손을 잡고 뒤뜰의 울타리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 정말 장하구나, 우리 아들, 
    그런데 울타리에 선명한 못 자국이 보이니?
    이 울타리가 예전처럼 말끔해지기는 어려울 것 같구나.
    네가 화가 나서 내뱉는 말들은 이 못 자국처럼 흔적을 남긴단다.
    네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나서 아무리 미안해한들
    그 흔적을 지울 수 없듯이, 
    말로 새긴 상처도 때로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걸 명심해라."       
    
    - 좋은 글 중에서 -
    
    
    
     

'짧은 글 긴 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톨스토이 인생 10훈  (0) 2014.08.09
작은 친절의 결과  (0) 2014.08.03
인생을 배우는 마음  (0) 2014.07.27
내 마음의 등대  (0) 2014.07.18
김치와 인생의 공통점!  (0) 2014.07.09
대적기도가 성경적일까?
< 대적기도, 선포기도는 성경적인가 ? >


많은 크리스천들이 “대적 기도” "선포기도" 라는 용어를 자주쓴다.

적, 그러니까 어떤한 세력이나 힘 따위가 서로 마주 대하여 싸운다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신약성경에서 사탄, 마귀나 귀신, 악한 영에게 대적한다는 것은 모두 개인의 구원에 관련된것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내 마음가운데 들어오는 불신앙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을 지키는 상태안에 거하는 것을 뜻한다.

즉 나의 마음을 하나님 외에것에 사로잡히게하는 모든 것들에서 말씀으로 나의 마음을 지켜내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오해하여 마치 나를 미혹하거나 공격하는 사탄의 나의 몸 외부에서 가만히 있는 나를 찾아와 ...괴롭히는 것처럼 여겨서 외적으로 물리치고 쫒아내야하는 것으로 오해를 한다.

이것은 큰 오해이다.

왜냐하면 사탄이 외부적인 요소라고하면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애초부터 "죄" 나 "악" 이 존재하지 않는 순결한 상태라는 말이되기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본질상 죄인이다.
죄를 주관하는 것은 사탄이다. 그렇다면 .. 내 안에 있는 죄를 주관하는 사탄은 무엇이며 외부에 거하는 사탄은 또다른 사탄인가?.

성경은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성경이 말하는 영적싸움은 육신에 따라 싸우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무너뜨리는 것으로서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것에 있다. 즉 영적전쟁은 개인적인 성화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영적으로 싸움을하는 것을 외적인 요소로 보는 많은 사람들은 "세상"이 즉 "악" 인데 이것에대해 오해를하는 부분이있다.
그것은 세상이 악하기때문에 세상을 멀리해야 한다며 실제로의 삶에서 세상으로 나가지를 못하고 스스로를 계속적으로 세상사람들과 격리시키는 노력을 하게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세상을 그렇게 증거하지 않는다.
성경은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상태가 세상이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에 거하는 것을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에 사는 삶이라고 증거하고있다. 그리고 우리 믿는자들이 오히려 세상으로 나가 그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다.

이 뜻은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세상에 거하는 것이고, 믿으면 세상에 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말해서 세상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나의 마음의 상태가 바로 죄악된 세상이란 뜻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대적해야하는 것은 외부에서 새?처럼 날라오듯이, 혹은 공중에 떠다니는 사탄이 내게로 날라오거나 교회 빌딩으로 다가와서 외적인 공격을 하기때문에 그것을 외적으로 대적을 하며 전쟁을 치루듯하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이렇게 되면 사탄이 외부에 있는 것으로 오해하여 그것을 대적하는 기도를 승리로 이끌고나면 그 순간은 나의 죄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니 엄청난 오해인것이다.

“기도” 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 를 뜻한다.. 즉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와 요청”을 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성경은 대적기도와 선포기도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언급하지 않는것을 알수있다.

영적싸움이란 개인의 구원을 위하여 믿음을 지키는 것이며, 그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령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바로 나의 마음을 지켜내는 영적싸움 그들이 말하는 대적이란 의미다. 그러니까 나의 마음을 지키고 믿음안에 거하게해달라는 기도가 바로 마귀와 대적하는 기도인것이다.

즉 혈과 육의 육체적인 싸움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 뜻을 오해하기때문에 질병에 걸리거나 가난하게되면 사탄의 공격을 받은 것처럼 여기게 되어 그러한 사람을 영적으로 이상하게 여기는 시각을 갖게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며, 귀신을 쫓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경에서의 영적싸움 특히 대적이라는 의미는 개인의 구원에 대한 성화의 과정을 뜻한다는 것이다.

만약 귀신을 쫓음으로서 우리가 가난으로부터 부를 찾게 되고, 질병으로부터 건강을 회복하며, 육체적인 불행과 사고로부터 축복을 불러올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부자가 되어야하며 모두 병에 걸리지 않는 그야말로 수퍼맨? 이 되어야하는 결론에 도달하게되는 것이다.

더더욱 중요한것은 성경에서 귀신을 쫓는 것을 영적싸움이라고 말하고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사탄과 마귀, 귀신의 미혹에 대적하기 위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성령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기도로 요청할 수 있으며, 우리의 질병을 치유할 수 있도록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사탄을 대적하는 기도나 무엇을 선포하는 기도를 한다고 해서 어떠한 신비적 효력이 나타난다는 성경적 근거도 없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그러한 행위를 기도라고 정의하지도 않는다.

기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며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삶에서 기다리는 과정이고 그러한 과정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화의 과정이요 신앙생활의 여정인것이다.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고후 10:3-6)

위에 말씀처럼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이 뜻은 우리가 우리의 몸을 공격하는 사탄을 대적하여 싸움으로 병이 낫고 그 싸움에서 실패하면 병이 낫지 않고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오직 우리가 병이 낫는 것도, 병이들어 사는 것, 이 둘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기도를 오인하여. 자신이 열심으로 혹은 영적으로 민감하여 사탄을 물리치는 기도를할때 주변의 환경이 달라지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데.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뜻하신 일을 어떤 사람의 노력이 하늘에 닿았다고 하여 그분의 마음을 바꾸시는 분이 아니시다.
이땅에 그 어떠한 사람도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대적기도를하여 현재 일어난 상황을 바꾸려고하는 노력은 마치 벽에 그림이 걸려있는데 내자신이 그 그림의 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그 그림을 다른자리에 다시 걸어달라고 요청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행위인 것이다.

우리 인간은 사탄, 마귀나 악한 영들에게 대적할 수 있는 어떤한 능력도 우리 스스로 갖을 수 없으며 그 모든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다.

성경은 말하기를, 주 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지며,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함”으로서 대적할 수 있다고 말한다.(엡 6:10-13)

즉 성경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그 말씀의 공로를 힙입어 우리를 불신앙으로 이끄는 마음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계신 것이다.

성경에서 마귀를 대적한다는 것은 이원론적인 대결구도의 전쟁을 대비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된 전신갑주를 입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고후10:5-6),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성결한 마음을 갖는 것(약4:7-8), 혹은 믿음을 지키는 것(벧전5:9)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말씀에 힘입어,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성화적인 과정이 곧 영적인 싸움이며 그것을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있는 것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벧전 5:8-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일 5:18)

성령안에 거하는 사람은 믿음으로 죄를 물리칠 수 있는 것이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라 하여 우리가 그것을 죄로여겨 멀리하여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영혼들임을 알고 우리가 더더욱 찾아가서 기쁜 소식을 알리는 역할을 해야하는 것이며, 세상이 악하다하여 밖에도 나가지 않고 숨어지내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서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빛과 소금이 되어야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본분인 것이다.

나 외에 세상, 그러니까 내가 살고있는 지금 이 동네, 나라, 지역이 세상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세상이 있는 것이고 그 세상은 믿음안에 거할때 하나님의 나라가 되지만 믿음안에 거하지 않을때에는 그 마음이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내안에 끊임없이 자라나는 불신앙을 대적하여 오직 그 불신앙을 싸워이길 수 있는 말씀을 가까이하고 묵상하며 말씀의 공로에 힘입어 믿음가운데 거해야하는 것이다

 

 

Jean Cummings 님의 글/출처: 개혁주의마을
 


★불편하고 무서운 진실


▼ 무서운 진실 1


http://youtu.be/6X6bxdCs6cA


▼ 무서운 진실 2


http://youtu.be/Vg8jpJxpsHA

▼ 무서운 진실 3


http://youtu.be/jfduHNKMeR4

▼ 무서운 진실 4


http://youtu.be/CtKj66HjjUw

▼ 무서운 진실 5


http://youtu.be/rR8sAcE68VQ


너는 내 앞에서 걸어 완전하라


(창세기 17:1)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래가 몸종 애굽여자 하갈을 남편에게 주어 이스마엘을 낳은 지 13년이 지난 때입니다. 몸종이 낳은 아들이긴 하지만 어쨌든 아브람의 아들이요, 아브람의 86세 노년에 낳아 13년을 키웠으니 정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99세 때 하나님이 다시 오신 것입니다. 86세도 많은 나이인데 99세면...., 양로원에서 일하면서 보니 99세까지 사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지난겨울 할머니 한 분이 100세 못 채우시고 99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그 99세가 되었습니다. 99세가 된 사람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99세가 될 때까지 13년 동안 하나님께서 침묵하셨으니 아브람과 사라가 무슨 희망이 남아 있었겠습니까? 아무래도 이스마엘이 하나님이 주신 씨인가 보다, 하나님이 이스마엘을 통하여 아브람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려는가 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이 운명이라 생각하고, "하나님이라고 별 수 있겠냐, 다 그런 거야." 하며 행복하게(?)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99세 때에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개역한글성경에서 “행하여”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선행을 하라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여기에서 ‘행’은 한자(漢字) ‘갈 행(行)’으로 ‘가라, 걸어라’ 하는 뜻입니다. 여기 뿐 아니라 성경 여러 곳에서 ‘가는 것, 걷는 것’을 “행(行)하는 것‘으로 번역해 놓았기 때문에 해석에 주의를 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영어성경을 보시면 ’walk'라고 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13년이나 침묵하다 오셔서 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꾸중이요 경고의 말씀 같습니다. 과연 아브람이 하나님 앞에서 행하지 아니하고 곁길로 걸어갔던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아브람은 곁길로 갔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아브람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었다면 몸종과 동침하라 한 사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래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엎드려 불경스럽게 (속으로 씨익, 키득키득 웃으며)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래는 90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하나님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고목같이 늙었으니 하나님인들 별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였으니 이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스마엘이나 잘 되게 해 주십시오, 자기들 손으로 스스로 들인 뻐꾸기 새끼 이스마엘이나 키우면서, 그 이스마엘을 후손(그리스도의 계보)으로 믿으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 하였으니 하나님을 우습게 본 것이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아니한 것이요 엉뚱한 그리스도를 믿고 기다리는 셈인 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나 곁길로 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앞에서 걸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지 못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걷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못 해 일을 저질러 행하는 것입니다. 이게 곁길로 가는 것입니다. 아브람과 사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 하여 애굽여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안겼습니다. 하나님을 전능하지 못 한 하나님으로, 곧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여겼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나 인간의 약은 꾀의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너는 내 앞에서 걸으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행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못 이루실 것이 없고 능치 못 한 일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필요한 것도 해드릴 것도 없습니다. 그저 다만 하나님 앞에서 걸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며 지키시며 행하시며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걷는 자가 완전한 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빛 가운데 의심없이 걸어가는 자가 되십시다.


참고: <요한일서 1장 7절>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But if we walk in the light, as he is in the light, we have fellowship with one another, and the blood of Jesus, his Son, purifies us from all sin.
* 보시다시피 요한일서 1장에도 우리말 성경은 “행하면”으로 되어 있으나 영어성경(NIV)는 ‘걸으면, walk)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응한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순종이 어떤 순종이었는지  (0) 2014.08.12
예수 우리 하나님  (0) 2014.08.03
뻐꾸기 둥지  (0) 2014.07.20
그 참혹한 광경의 예표  (0) 2014.07.14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  (0) 2014.07.04
먹으면 되레 배가 고파지는 음식 6가지




술, 스시 롤, 피자...

배가 고플 때는 먹어야 한다. 하지만 먹고 나니 먹기 전보다 더 배를 고프게 하는 음식들이 있다.

내과 전문의이자 체중 조절 전문가인 수 디코티스 박사는 "배고픔은 위와 창자, 뇌, 췌장, 혈액 순환에서 일어나는 많은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라며 "문제는 이러한 과정에서 하이재킹이 쉽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건강ㆍ의료 정보 사이트 '헬스닷컴(Health.com)'이 먹으면 되레 배를 더 고프게 하는 음식 6가지를 소개했다.

짠 스낵=짠 감자 칩을 먹고 난 뒤 바로 단 것이 먹고 싶어지는 이유가 있다. 칩이나 프레첼 등 짠 스낵은 빨리 소화되는 단순 탄수화물로서 인슐린을 급하게 올렸다가 곧바로 떨어지게 만든다. 이때 혀의 미뢰와 뇌는 빨리 반응하는 에너지를 단 음식과 연결시키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짠 음식을 먹은 후에는 단 것이 먹고 싶어진다.

술='알코올과 알코올중독(Alcohol Alcoholism)' 저널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술을 3잔만 마셔도 신체의 렙틴 양을 30%나 떨어뜨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렙틴은 지방 세포에서 분비되는 식욕 억제 단백질이다. 디코티스 박사는 "알코올은 또한 몸속의 글리코겐을 대폭 감소시킴으로써 이를 보충하기 위해 탄수화물을 먹고 싶게 만든다"고 말했다.

MSG=요리할 때 쓰이는 화학조미료의 원료인 MSG(글루탐산나트륨)는 동물실험 결과, 식욕을 40% 증가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비만(Obesity)' 저널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MSG를 섭취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는 사람에 비해 과체중이 될 가능성이 3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디코티스 박사는 "MSG가 시상하부에 해로운 영향을 줌으로써 식욕 억제 단백질인 렙틴 효과가 약화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스시 롤=영양학자인 수산 클레이너 박사는 "스시 롤은 건강에 좋은 생선을 먹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보다는 쌀밥을 훨씬 많이 먹게 된다"고 말한다. 캘리포니아 롤 한 개는 30g이 넘는 탄수화물로 구성돼 있다. 클레이너 박사는 "다른 음식을 먹지 않고 수시 롤만 먹었을 때 섬유질이나 단백질 같은 포만감을 크게 느끼게 하는 성분이 없이 빨리 소화가 되기 때문에 위장은 곧 텅텅 비게 된다"고 말한다.

인공 감미료=디코티스 박사는 "탄산음료나 커피 등에 들어있는 인공 감미료는 뇌세포를 자극해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지만 곧바로 자극이 사라진다"며 "그 결과 하루 종일 단 것을 찾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배고픔을 통제하는 뇌 센터에 영향을 주게 된다.

피자=아무리 큰 피자라도 한 조각만 먹고 그칠 수 없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디코티스 박사는 "많이 판매되는 피자는 보통 흰 밀가루 반죽과 경화유, 가공 치즈, 보존료 등이 혼합된 것으로 혈당 수치와 포만 호르몬의 생산, 그리고 배고픔을 조절하는 뇌 부위에 혼동을 일으킨다"며 "대신에 통곡물 반죽과 살코기와 채소 등을 얹어 집에서 만든 피자는 섬유질과 단백질이 풍부해 먹고 난 뒤 다른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을 덜 들게 한다"고 말한다.

The strangest trees in the world


We are all accustomed to the sight of trees around us and, passing by, we do not pay much attention to them. But our world is full of unusual specimens. Lets view some of these wonderful and bizarre creatures of the natural world.

The strangest trees in the world

The strangest trees in the world

The strangest trees in the world

The strangest trees in the world

The strangest trees in the world

The strangest trees in the world

The strangest trees in the world

The strangest trees in the world

The strangest trees in the world

The strangest trees in the world

The strangest trees in the world

The strangest trees in the world

The strangest trees in the world

The strangest trees in the world

The strangest trees in the world

The strangest trees in the world

The strangest trees in the world

The strangest trees in the world

하늘 시민

메튜 헨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있어도 하늘 시민이다. 우리 집은 세상이 아니라 하늘나라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에 그 곳에 집이 있고 소망이 있다.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들과 함께 시민권을 누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는 하늘에서 오실 구제주를 기다린다.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우리는 주의 재림을 기다린다.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우리는 행복해 하며 영광스럽게 변할 것이다.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또한 성도를 위해 마련된 영광이 있는데 그들은 부활할 때 그 영광을 얻게 된다. 지금의 육신은 연약하나 후에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한다.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라는 말씀으로 부활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하자. 우리에겐 부활을 보장해 주는 성경 말씀이 있고 또 실제 그 일을 이루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이 영광스럽게 나타난 예이며 우리의 부활도 그러할 것이다. 그때 하나님 나라의 모든 대적들은 완전히 패할 것이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그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3:20-21)

가져온 곳 : 
카페 >개혁주의 마을
|
글쓴이 : Jennifer| 원글보기


분별의 은사를 활용하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인 것을 객관적으로 어떻게 알 수 있느냐?라고 묻는 분이 계신다. "너는 이스라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요 3: 10) 니고데모를 향한 우리 주님의 안타까움 섞인 책망의 음성이 생각난다.

"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3: 27)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요 10: 26) 모든 말씀이 살아 역사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건만, 성경 속에 가두어만 두니 내 실생활에 아무런 유익을 가져다줄 수가 없다.

하나님의 음성을 인위적으로 듣자며 충동질하는 "은사 주의"는 분명히 문제다. 성령님의 은사(gift)는 선하고 거룩한 것이나 "은사 주의"를 추구하거나 치닫는 것은 위험하다. 개혁주의가 안전하고 건전해서 좋으나 "하이퍼 칼비니스트", 역시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치우쳐 하나님의 능력마저 제한하기에 위험하다. 성경으로 돌아갈 순 없을까?

억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인위적인 장소를 마련하고 광고하고 떠벌리는 이단적 행위는 근절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현 세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들려오는 모든 소리는 다 사단의 음성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성경을 뛰어넘는 것이기에 문제가 된다. 거짓 영을 분별하도록 가르치지 않고 목사님들 자신이 확실하게 알지 못하여 넘어지고 자빠지는 마지막 때를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스스로 성경을 읽도록 하여야 한다. 성경을 읽으면 주께서 은혜의 길로 인도해 주신다.

누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나 무시로 기도할 때, 혹은 성경을 읽을 때, 주님께서 내게 직접 말씀을 주실 때가 있다. 어느 한 구절이나 몇 구절이 내게 큰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그 말씀이 뚜렷이 각인되기도 한다. 이것을 가리켜, 신학적 용어로는 "성령의 조명 하심"이라고 표현된다. 성령의 조명하심은 기록된 말씀을 넘어가거나 말씀과 충돌되거나 상충하는 일이 결코 없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 안에서 성도를 견인하시고 인도하심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그 음성을 분별/판별하지 못해서 많은 주의 종들이 사탄의 덫에 걸려 넘어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젊었을 적부터 하나님께서 온갖 고생 중에서 당신의 음성을 가려내는 훈련을 시키셨고, 성령님께서 말씀을 주시면, 아래와 같이 말씀의 잣대로 검증된 대언은, 그 정확성에 있어 단 한 번도 그 말씀이 빗나가거나 틀려본 적이 없다. 고로, 하나님의 음성은 반드시 다음과 같은 잣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돼야만 한다. 객관적 증명이 말씀에 있음을 알자.

1. 자기가 기도하거나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정 반대의 생각이 머리에 주입된다.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야 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 : 23절 하반절)".

2. 그 생각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하며 레마/로고스로 머리에 정확히 떠오르거나 입술에서 터져 나온다. 성령님께서 예수님,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기 때문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 26) 예수님께서 약속하셨고 그 약속대로 오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다.

3. 그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이 뜨겁다(때론 너무나 뜨거워서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통곡하지만, 마음은 오히려 큰 감동으로 행복하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24:32절 말씀 )”.

4. 다른 이가 예언 은사적 말씀을 받았을 때에도 예언 은사를 받은 사람이면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같이 마음이 뜨거워진다. (눅 1 : 41-45절) 여기서 예언의 은사란 것도 족집게 식의 예언을 말함이 아니다. 이미 기록된 말씀이 완전 무오한, 흠 없는 예언서다. 그 말씀 중 어느 한 구절이 생각나고 떠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5.항상 선한 말씀이 아니고 때론 책망함과 바르게 함으로 탄식하신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 : 16-17절)”.

양에게 있어서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하듯, 성도가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건만 ‘현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대는 끝났다’ 라고 가르침으로써 성령님의 역할마저 제한시키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신학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과 목회자들에게 만연하게 된 것은 ‘신비주의자들’의 1류급 신자의식이나, 직통 계시 파들의 이단적 행위가 성도들의 삶을 좀먹는 것을 자주 보아온 까닭이기도 하고 또 자신이 성경을 많이 읽지 않고 들은풍월, 혹은 배운 신학 사조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돈독히 함으로써 항상 살아 있는 말씀이 내 속에서 역사 하시도록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또 읽어야 하며,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과 육체를 온전히 주장하시도록 겸손하게 내 마음의 보좌를 내어 드려야 한다. 그리고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말고, 주시는 말씀이 힘들더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결단을 보여야만 한다. 신앙은 결단이요, 순종이며 헌신이다. 이렇게 될 때 현대에도 양은 목자 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으며 그분의 사랑과 보호하심 속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날까지 안전하게 인도하심을 받게 된다.

이렇게 정확히 말씀을 알고 그 말씀에 굳게 서 있게 되면, 데이빗 오워가 거짓 영에 사로잡힌 것을 분별할 수 있다. How?(어떻게?) 그가 하는 말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령님의 사역을 정확하게 알고 대처한다면, 무엇 때문에 옹알이하는 이단자들의 랄랄거리는 소리에 현혹될 것인가? 물이 없어 기갈이 아니요, 양식이 없어 굶주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기갈인 세대가 바로 지금 이 세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암 8: 11-13)


"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마 24: 11),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 마  24: 24),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신명기18:21)

출처: 목양연가 별똥별/최송연의 영성훈련

'최송연의 신앙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장된 욕심  (3) 2014.08.13
예언이란 무엇인가?  (0) 2014.08.02
바이오제네시스(biogenesis), 성령의 사람...  (0) 2014.07.06
혼인 잔치  (0) 2014.06.21
성령의 사람이란...  (2) 2014.06.10


중국 4대 미인이라 함은 각각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의 초상화는 몇 년 전부터 꾸준히 네티즌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간혹, 4명의 미인 중 어느 여인이 가장 아름다운 지를 놓고 네티즌들끼리 실랑이를 벌이기도 합니다.

물고기가 미모에 놀라 헤엄치는 걸 잊고 가라앉았다는 ‘서시’, 또 기러기가 나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지게 만든 ‘왕소군’,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는 ‘초선’ 및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올렸다는 양귀비 등등 중국 4대 미인들의 미모에 얽힌 고사들은 워낙 유명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mi1.jpg

◆ 1) 춘추전국시대의 서시 (西施)

침어(浸魚) -서시(西施)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먹다 "
서시는 춘추말기의 월나라의 여인이다.

어느 날 그녀는 강변에 있었는데 맑고 투명한 강물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 을 비추었다.

수중의 물고기가 수영하는 것을 잊고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래서 서시는 침어(浸魚)라는 칭호 를 얻게 되었다.

서시는 오(吳)나라 부차(夫差)에게 패한 월왕 구천(勾踐)의 충신 범려(範려)가 보복을 위해 그녀에게 예능을 가르쳐서 호색가인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쳤다.

부차는 서시의 미모에 사로잡혀 정치를 돌보지 않게 되어 마침내 월나라에 패망하였다

mi2.jpg

◆ 2) 한나라의 왕소군 (王昭君)

낙안(落雁) -왕소군(王昭君) "기러기가 날개움직이는 것을 잃고 땅으로 떨어지다 "
한(漢)나라 왕소군은 재주와 용모를 갖춘 미인이다.

한나라 원제는 북쪽의 흉노과 화친을 위해 왕소군을 선발하여 선우와 결혼을 하게 하였다.

집을 떠나가는 도중 그녀는 멀리서 날아가고 있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생각이나 금(琴)을 연주하자 한 무리의 기러기가 그 소리를 듣고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에 왕소군은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mi3.jpg

◆ 3) 삼국시대의 초선(貂蟬)

폐월(閉月) -초선(貂蟬) "달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다 "
초선은 삼국지의 초기에 나오는 인물로 한나라 대신 왕윤(王允) 의 양녀인데, 용모가 명월 같았을 뿐 아니라 노래와 춤에 능했다.
어느 날 저녁에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을 때에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리웠다.

왕윤이 말하기를 : "달도 내 딸에 게는 비할 수가 없구나.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 고 하였다.

이 때 부터 초선은 폐월(閉月)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초선은 왕윤의 뜻을 따라 간신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 시키며 옮뮌?죽게 만든후 의로운 목숨을 거둔다

mi4.jpg

◆ 4) 당나라의 양귀비(楊貴妃)

수화(羞花) -양귀비(楊貴妃) "꽃이 부끄러워 잎을 말아올림"
당대(唐代)의 미녀 양옥환(楊玉環)은 당명황(唐明皇)에게 간택되어져 입궁한 후로 하루 종일 우울했다.

어느 날 그녀가 화원에 가서 꽃을 감상하며 우울함을 달래는데 무의식중에 함수화(含羞花)를 건드렸다.

함수화는 바로 잎을 말아 올렸다.

당명황이 그녀의 '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 에 찬탄하고는 그녀를 '절대가인(絶對佳人)'이라고 칭했다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지만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사 40:8)






신조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

 

1. 웨스트민스터 총회

 

(1) 회의의 중요성

 

이 회의는 16세기의 영국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 회의는 회의가 만들어 내 놓은 결정들의 범위나 능력에서 보든지 또는 후대에 끼친 영향면에서 보든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회의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최대 약점은 국교개념을 가지고 교리, 예배, 권징을 통일화시켜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준수하도록 한 점이다.

 

그러나 이는 그 시대가 지닌 약점이었다. 영국에서 종교의 자유사상이 뿌리를 내린 것은 많은 실패와 박해를 거친 이후부터이었다.

 

 

(2) 총회소집

 

1642 10 15일에 신학자 회의를 소집시키려 했으나 무산되고 말았다. 1643 71일 웨스트민스트 사원에서 신학자를 중심으로 하여 소집된 총회에는 151명이 참석했다. 30명은 평신도 사정관이었다. 나머지 121명은 각 지역서 선출된 성직자들이었고 대부분 장로교 소속이었다.

 

(3) 대표들의 구성

 

대표들은 회의의 주동역할을 하면서 장로교 사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교회정치와 권징 면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장로 정치가 채택되었다. 가장 빈번하게 열띤 토론이 벌어진것은 교리나 예배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교회정치에 관한 것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대표들은 네 분파로 나누어 정리해 볼수 있다.

 

감독교회파

 

의회는 4명의 고위 성직자, 즉 제임스, 웃서, 브라유리그, 프라디욱스와 5명의 신학박사, 즉, 파트리 박사, 함몬드, 홀스워즈, 세더슨, 몰리를 대표로 선출했다. 그들은, 절대다수가 청교들이라는 점, 대표들이 목사들에 의하여 선출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평신도들이 섞이지 않았다는 점을 공격했다.

 

장로교회파

 

절대 다수의 수자로 총회를 주도해나간 것은 장로교회파였다. 장로교회 정치의 2대원리는 목회자들의 지위를 모두 동등하게 여기는 것과 목사와 평신도로 혼성된 당회에 의한 교회의 자립행정에 기초를 두고 있다.

 

독립교회파

 

장로교회파에서는 이들을 '불만에 가득한 다섯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주동 인물은 토마스 궁원 박사와 필립 나이 목사였다. 이들은 숫자에서 적었지만 영향력이 크고 학문이 깊었으며 성격이 준엄했다.

 

에라스티안파

 

에라스티안파는 교회의 권징에 대해서 국가가 최종 통치권을 행사할 것과 교회를 국가의 한 부속 기관으로 만들 것을 주장했다.

 

 

(4) 주요인물

 

월리암 트위스 박사. - 학식과 사색이 깊은 타락전 예정론 학파의 고위 칼빈주의자로 인정을 받았다.

 

토마스 풀러 - 그의 평이한 설교는 매우 훌륭했고 그의 강한 논변은 다른 사람들을 능가했으며 매우 경건한 삶을 영위했다.

 

찰스 헐 - 그는 온건주의 칼빈주의자였는데 토마스 플러는 그를 평하길, 그는 매우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요, 학자요, 신사이었기 때문에 자기의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과도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할 수 있었다라고 말한다.

 

요한 화이트 - 의견이 분분하여 다툼이 생기려 할 때 농담으로 분위기를 화해시키는데 크게 공헌한사람이다.

 

알로우스미스 - 소요리문답의 주요 작성자여서 빼놓을수 없다.

 

에드문드 카라이 - 대중적인 설교자였고 장로교회파의 지도자였다.

 

요셈 카알리일, 토마스 콩만, 토마스 궁원 박사, 요수아 호일 박사, 죤라이프푸트,스테반 마샬, 필립나이, 허버트 필머,에드워드 레이놀드스, 프렌시스 루스경, 라자루스사만, 요한셀든, 리챠드 신스, 토마스 영

 

 

(5) 총회의 개회

 

1643 7 1일 토요일 웨스트민스터 대교회에서 상하 양 의원들과 많은 회중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회되었다. 모든 대표들은 다음과 같은 서약을 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분명하게 서약하고 맹세하노니 나는 내가 대표로 참석한 이 총회에서 교리적인 문제에 관한 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일치되는 교리만을 주장하겠으나, 권징에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가장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교회의 평화와 유익에 도움이 된다고 믿어지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6) 예루살렘 회관에서의 총회

 

9월말 혹독한 추위가 밀려오자 총회는 웨스트민스터의 부감독 관할 지역에 있는"예루살렘 회관"으로 그 장소를 옮겼다.

 

 

(7) 헌신을 위한 집회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신학적인 논의를 할 때마다 준비 집회를 먼저 가졌고 정기적으로 또는 필요시마다 의회와 공통으로 당시의 청교도적 경건의 특색을 지닌 집회를 가졌다.

 

우리는 청교도 성직자들이 헌신을 위한 집회에서 보여주었던 열심과 인내를 볼 때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3세기까지의 초대교회 역시 카타콤의 어둠속을 지날 때 이방의 마술과 이방의 아름다움을 혐오했었다. 그들은 주님께서 비하하셨을 때의 모습을 강조하였다. 이점에서는 청교도보다 터툴리안이 더 심했다.

 

 

(8) 회의 기간과 폐회

 

1643 7 1일부터 1649 222일까지 약 5 6개월에 걸쳐 1163회 이상의 정규 모임을 가졌다. 1652 325일 마지막으로 해산될 때까지 매주 목요일에 모임을 가졌고, 마지막 모임때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소집하여 장기 의회의 해산과 함께 끝을 맺었다.

 

 

 

2. 웨스트 민스트 신앙고백

 

 

(1) 39개 신조의 개정

 

10주간 동안을 39개조 신조의 개정작업에 착수했다. 39개 신조 중에서 15개 조항이 개정되거나 성경적 증거들이 보충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영향을 받아가며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이 제정되어 solemn, league,covenont파의 공인을 받았다.

 

(2) 신조의 제정

 

최초로 위원회가 소집된 것은 16448 20일이었다. 164612 4일의 제 752차 회의에서 신앙고백서가 완성되었다. 최초로 인쇄된 것은 1646 12월 또는 1647 1월이었다. 2판은 1647 5월 교회의 권위를 부여받은 내용이 첨가되어 출판되었다.

 

(3) 의회의 역할

 

하원은 '겸손한 충고'의 권고의 글을 1647 5 19일에 시작하여 1648 3 22일에 끝을 맺었다.

 

 

(4) 스코트랜드 총회의 역할

 

이 고백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가장 잘 어울리며 우리 교회의 공인된 교리, 예배, 권징, 정치와 전혀 위배됨이 없다'고 선포했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1649 2 7일에 이를 승인했다.

 

 

3.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분석

 

 

(1) 시상적 배경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화란에서 알마니안주의와 날카로운 대립을 거친 이후의 칼빈주의체계를 성숙한 학문적 형식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그 제정 시기도 고 교회의 감독제도가 시행되던 때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영국 청교도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아일랜드 장로교회의 신조와 매우 흡사하다.

 

 

(2) 의견의 일치

 

그들의 의견일치의 배후에는 세 나라 (영국,스코트랜드, 아일랜드)의 교리적 일치를 추구하려는 기대감도 작용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창조에서 최후심판에 이르는 기독교 신앙의 모든 주요 내용을 33개 장으로 나누어 자연스럽게 취급하고 있다.

 

 

 

(3) 성경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교회의 전통을 성경과 똑같은 신앙의 규범으로 높이는 로마교회사상이나 자연인이 이성의 충족성을 가르치는 합리주의와 맞서서 맨 먼저 성경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바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4) 신론과 기독론

 

모든 정통교회들은 제2장의 '삼위일체에 대하여'와 제 18장의 '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하여'를 니케아 회의의 삼위일체론과 칼케톤 회의의 기독론에 대한 최고의 해설이라고 본다.

 

 

 

(5) 예정론

 

칼빈주의 예정론은 제한 속죄와 일정한 관계가 있다. 문제는 주로 논리적인 통일성에 있다. 제한 속죄는 속죄의 효과 즉 그 실제 적용범위를 말한것이다. 속죄의 절대적 충족성과 무한한 가치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6) 인간론

 

6장부터 제 9장까지는 보편화된 복음적인 개혁교회의 인간론을 새로운 언약론의 형식으로 나타내고 있다. 언약론에서는 언약을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구분하다.

 

 

 

(7) 구원론

 

10장부터 제 18장까지 복음적인 신앙고백서들 중에서 칭의, 양자됨, 성화 구원적 신앙, 선행, 구원의 확신에 관한 내용을 가장 세련되게 설명하고있다.

 

 

 

(8) 교회론

 

25장과 제 26장의 교회론 부분에서는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에 대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구분방식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교회의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선언되었다.

 

 

 

(9) 성례관

 

성례의 일반론특히 제27-29장은 세례와 성찬을 다루는데 있어서 칼빈주의적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 사상은 대륙이나 영국 또는 스코트랜드에 있는 모든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들이 가르치는 것과 똑같다.

 

 

 

(10) 주일관

 

21장의 "예배와 안식일"에 관한 내용은 청교도의 주일관이 최초로 신조에 삽입된 것이었다. 1595년 니콜라스 보운드에 의해 체계화시켰다.

 

 

 

4.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

 

 

 

(1) 준비 작업과 채택

 

웨스트민스터 총회는 신앙고백서와 함께 두 개의 요리문답서도 제정했다. 1647년 가을에 심사와 승인을 받기위해 의회로 보내졌다. 에딘버러 총회는 1648 7 20일 대요리문답을, 7 28일에는 소요리 문답을 각각 승인하면서 두 요리문답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며 공인된 교리, 예배, 권징, 교회정치에 위배된 것이 전혀 없다'고 선언했다.

 

 

 

(2) 일반적 특징

 

두 요리문답은 모두 종래 요리문답의 전통을 탈피했다. 소요리문답에는 '사도들이 제정한 것도 아니요 정경처럼 여길 것도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의 요약이란 점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고 있고 초대교회 때부터 수집되어 왔다는 점에서'라는 말이 첨부되어 있다.

 

 

 

(3) 대요리 문답

 

1647년 한해 동안 내내 총회의 큰 관심거리로 등장하여 문답형식으로 토론되었다.

 

어떤 부분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주석과 보충적인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그러나 십계명에서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과 금하신 것의 종류에만 과도한 주의를 기울이고 그것의 구체적인 설명을 간과해버린 약점을 지니고 있다.

 

(4) 소요리 문답

 

소요리 문답 작성 위원회는 소집책임도 역시 터크니 박사가 맡고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은 가장 최근까지 전해 내려오는 프로테스탄트의 전형적인 세 요리문답서들 중 하나이다. 소요리문답은 사도신경의 역사적인 순서를 논리적인 구조로 바꾸었다

 

이 소요리문답은 장로교회, 회중교회,침례교회에서 사용되고 있다.


아름답고 신비한 궁전들   

 


 

                                                    

                                                     

 

                                      

 


  http://blog.chosun.com/domalgog/7466755  


 
종말의 징조

 


 

 

 

                                              마24:3-14절, 162.167.177장. 말씀연구소 박봉웅 목사. 

 

요즘 지구가 온실화 되어 이상 기온이 빈번하고 지각의 불균형으로 지진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까지도 비인간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일컬어 말세라고 부릅니다. 주의 재림에 대해서 우리는 정확한 해, 달, 시간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크게 어지러운 때에 오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기에 앞서 재림 시에 있을 이러한 어지러움의 징조들을 말씀하심으로써 "늘 깨어서 준비된 마음을 가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알려 주십시오.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님이 임하심과 세상 끝날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이는 마24:3절 이하의 말씀이 종말에 대한 대답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끝에 보여지는 징조를 예언하신 말씀인데 여기서 말하는 주의 임하심은 헬라어로 “파루시아”를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은 영주가 자기 땅에 올 때나 왕이 자기 백성에게 오는 경우에 쓰이는 말로 권위와 능력으로 오심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1.거짓 그리스도가 많은 사람을 미혹합니다.

 4-5절에 보니 미혹하는 일이 많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는 것입니다. 11절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23-26절에 "거짓 그리스도,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타나 이적과 기사를 보이면서 택한 자라도 미혹할 수만 있으면 미혹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요2:18절에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 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 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이렇듯 마지막 때는 거짓 그리스도, 거짓 선지자 즉 거짓 스승, 거짓 영적 지도자들이 많이 나타나서 영적 세계를 혼란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과거 초기에도 많은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기독사상을 혼란시키고 영적 세계를 혼미시키겠지만 근래에 와서 미혹하는 자들이 더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2.국제적인 전쟁의 징조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대답은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다."(7절) 도처에서 내란과 전쟁이 일어나 국지전은 물론 잿더미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방은 화염에 싸이게 되고 사람들은 무더기로 죽어가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인류 역사 이래로 전쟁은 끊임없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끝 날이 가까워 올수록 그 강도는 더욱 격화되어 마침내 그것이 심판의 불덩어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과거 전쟁을 벌여온 괴수들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하여 싸운다고 서로 크게 나팔을 불어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많이 죽인 자 일수록 더욱 금빛 나는 훈장을 어깨가 무겁도록 달아 주면서 그를 평화의 사도라고 크게 찬양하는 참혹한 연극을 벌여 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쟁은 끝 날이 가까워올수록 더욱 가열되어 마침내는 이 땅을 불바다로 만들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한시도 전쟁의 위협과 공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전쟁은 가까이서, 멀리서 늘 되풀이되어 전개되고, 그때마다 인류를 공포와 전율의 도가니로 몰아넣곤 합니다. 역사가 시작되고 지금까지 하루도 멈춘 적 없이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쟁은 세상의 종말에는 더욱 심하여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이 피 흘리는 전쟁이 곳곳에서 일어날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난리는 전쟁, 전투, 다툼, 충돌, 알력을 뜻하는 것으로 세상 끝 날에는 곳곳에서 싸움과 전쟁이 있을 것을 의미합니다.

 

수 년 전에 걸프 전쟁의 원인이 이란이 쿠웨이트를 침공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민족을 대적하고 이념 전쟁보다는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국부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를 공격하여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3.자연계에 고갈의 징조가 나타납니다.

 7절에 "처처에 기근"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기근이 많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기후의 이상 현상으로 곡식이 잘 안 되어 기근이 올 것을 말했습니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기후에 이상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겨울에 홍수가 나기도 하고 더위가 심하여 인명과 동식물이 많이 죽기도 하고 도처에 재난이 심하기도 합니다. 여름에 푹설이 내려 인명피해도 많았습니다. 지금 세계인구 중에 매년 1500만 명이 기근으로 기아들이 생겨 죽어가고 있고, 아프리카․인도 남부 지역 500만이 영양실조에 걸려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앞으로 더욱 기근으로 인하여 식량 부족이 오리라고 예상합니다. 왜냐하면 대기 오염과, 기후의 이변과, 원자무기 실험의 영향과, 인구 폭발과 전쟁 때문입니다. 이는 다 말세의 징조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경제 불황으로 대학을 나온 젊은이들이 일자리가 없어서 길거리를 방황합니다.

 

4.지진이 일어납니다.

 지금 날이 갈수록 점점 지진의 빈도가 자주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진 지역이 아닌데도 지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하 핵폭탄 실험의 영향으로 지진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여하간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것도 말세의 징조입니다.


이 지진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성경은 여러 면으로 증거하고 있는데,

 1)하나님의 현존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시68:7-8절에서 "하나님이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 행진하셨을 때에 “셀라“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시내산은 모세가 기도하던 산으로 여호와가 임재한 산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같은 은혜와도 관계없이 주의 진노가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이제 이 땅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지면 피할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진노를 피하려면 날마다 거룩한 생활로써 주와 더불어 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2)말세에 되어질 심판입니다.

 

계16:19절에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했습니다. 지진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상징한 것처럼 번개와 음성과 뇌성 이 세 가지는 항상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상징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노아 때에는 하늘의 창문을 열고 비를 내리고 땅이 터져 샘이 나오게 하여 전 세계를 심판하셨는데, 말세에는 하늘에서 불(번개와 뇌성)이 내려오고 땅에는 지진이 나와 죄악의 세계를 이렇게 심판하실 것을 시위(侍衛)한 것입니다.

 

5.사회는 쾌락을 사랑합니다.

 

 딤후3:4-5절에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 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와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돈을 사랑하고 나아가 결국 쾌락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1)사람들이 돈을 사랑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의 반대 개념입니다. 자만과 물질, 사랑 이 두 가지는 모든 악의 근본이요 뿌리입니다. 왜 자긍하며 교만해집니까? 그것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자긍은 자기 자랑이요, 호언장담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남을 멸시하고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자기 우월감에서 나옵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죄는 남의 인격을 무시하는 교만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전능자를 비웃는 것입니다. 앗수르의 교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멸시하였고, 슥10:11절의 교만이 바벨론의 패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모압의 교만이 하나님을 진노케 했고(렘 48:29), 애굽의 교만이 패망을 가져왔습니다(렘 30:6). 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입니까? 그의 교만입니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간섭을 싫어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고 했고, "메시야는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눅1:51),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벧전 5:5)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약 4:6)고 하신 것입니다. 2)말세에는 사람들이 감사치 아니하며 절제치 못하는 것입니다.

  

말세에는 사람들이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한다는 것이 현실로 나타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소위 핵가족 시대라고 하여 현대 부부들은 부모를 모시지 않고 독립해 살기를 원하여 자식이 있는 부모들도 홀로 외롭게 살아가는 현실이 사회 문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것은 최대의 배은 망덕이며, 이런 자는 하나님의 은혜나 사람의 후의도 감사치 아니하고 배반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충신을 효자 가운데서 찾았던 것입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것도 말세의 한 징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것을 말세가 되어서 그런다고 체념하지 말고 나의 처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자각하여 바른 생활을 하여 세상에서 빛 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6.불법이 성하며 사랑이 식어집니다.

 

12절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을 때 그 결과는 즉시 이웃에 대한 사랑의 냉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다툼과 미움만이 있는 인간 공동체에 그 어찌 사랑의 싹이 트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분명 종말의 시대에 살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기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헐뜯기를 좋아하며, 나누어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더 가지려 한다면 그것은 종말의 징조임에 분명합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있는가 살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끝까지 이웃을, 형제를 뜨겁게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특징은 따뜻함과 열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성도간의 사랑이 식어지고 왜곡된다면 그것은 도리어 미움이 될 것입니다.

 

7.신자들이 환난을 당하게 됩니다.

 

마24:9절에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    으며 너희를 죽이게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진리대로 사는 사람은 시대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게 마련입니다. 딤후3:12절에 참된 진리는 언제나 세상과 야합하지 않고,  그들을 고발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끝 날이 가까워 올수록 이런 일이 더욱 격화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점차 거짓과 온갖 술수가 만연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진리는 버림을 받고 그것을 순종하는 자 또한 같은 취급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세인들의 박해를 피해 다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컨대 진리의 사람들은 예외 없이 어느 시대에나 그렇게 살다가 갔습니다.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로 헤매며 다녔으며 그러다가 붙잡혀 결박을 당한 채 마침내 돌에 맞아 죽고 톱질을 당하고 칼에 잘려 죽어갔습니다.(히11:36-39). 아니 과거 뿐 아니라 장차 미래에도 이렇듯 진리의 사람들은 또 ,그렇게 죽어갈 것이며, 끝 날이 가까워 올수록 그런 일이 더욱 격심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도 두려워 말고 그런 핍박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달게 받아야 합니다. 사실상 진리를 위한 순교자들의 죽음이야말로, 죄 많은 이 세상을 구원하는 첩경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세계 도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환난을 당하고 있고 또 회교도 국가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기타 자유주의 진영에서도 독재자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이 미움과 핍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교회 내부에서도 배교자들이 일어나 형제를 잡아넣고,

 

형제를 미워하고 교회를 크게 시험 들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오늘날 교회 내부에서 배교자들에 의해서 교회가 비판당하고, 난도질당하고, 사실이 아닌 것을 자기 나름대로 왜곡되게 생각하고, 추측하고, 상상하고, 세상에 교회를 나쁜 모습으로 부각시켜 놓는 일이 비일비재입니다.

 

사회 신문에 교회를 비판 조로 쓴 것은 교회 안에 있는 배교자들의 제공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이 다 말세의 징조인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배교자 노릇하는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핍박도 잘 참고 견디어야 하겠지만 안에서 배교자 노릇을 하여 교회를 스스로 허는 일을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8.말씀을 정리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선고하신 대로 주후 70년에 멸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민족은 세계 각국에 산산히 흩어져 오랜 세월(근 2000년간)이 흐르는 기간에 고국에 돌아와 국권을 회복하며 독립하리라는 것을 도무지 상상도 못했던 막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제 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이스라엘의 독립 운동인 시온주의 운동이 전개되어 오더니, 1945년 영국의 위임 통치를 벗고, 1948년 5월 15일 대통령 와이즈만 박사 영솔하에 옛 왕 다윗을 상징하는 별기(星旗)를 휘날리며 당당히 독립을 선포하고 지금은 유엔의 한 멤버로, 활약하고 있으니,

 

이는 곧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들어맞았습니다. 이제 다만 우리는 임박해 오는 주님의 재림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평상시 신앙생활을 할 때에 주님이 언제 어느 시에 재림하시더라도, 오 주여 ! 어서오시옵소서! 하고 기도할 수 있는 자신 있는 성도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빛과 흑암의 역사

인생을 배우는 마음

    인생을 배우는 마음

    배우는 마음은 언제나 겸손한 마음 그리고 늘 비어 있는 마음입니다. 무엇이나 채워 넣으려고 애쓰는 마음입니다. 배움에 몰두하는 시절은 언제나 희망에 차고 싱싱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배움을 박차버린 시간부터 초조와 불안과 적막이 앞을 가로막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배운다고 그것이 인생을 배우는 것은 아니며, 학문을 안다고 그것이 인생을 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배움의 소재라는 것은 학교에서 하는 교과서에 있거나, 도서관에 쌓인 책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내가 인생에 눈을 뜨고 인생의 온갖 속절을 알게 된 것은, 이 고된 인생길을 걸으면서 였습니다. 공자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사람이 나와 함께 길을 가는데, 그 두 사람이 나의 스승이라. 착한 사람에게서는 그 착함을 배우고, 악한 사람에게는 악함을 보고, 자기의 잘못된 성품을 찾아 뉘우칠 기회를 삼으니, 착하고 악한 사람이 모두 내 스승이다." 라고 했습니다. 배우는 마음을 가졌을 때, 모든 환경이 배움의 소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학도의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보려고만 애쓰는 어리석음을 가졌던, 나의 지난 날이 몹시 후회됩니다. 인생을 배워 끝 없이 깊은 인생을 알아도, 언제나 모자라는 것인데 ... 우리는 묵묵히 머리를 숙이고, 배우는 인생을 살아 보아야 하겠습니다. 배우는 마음은 주체가 확립된 마음이어야 합니다. 즉 자기 인생을 올바르게 세우고 사는 마음입니다. 설 자리에 아직도 서지 못하고, 자기 위치를 바로 정하지 못하고선, 사실 배운다는 것처럼 위대한 일은 없습니다. 익은 곡식은 고개를 숙이는 법입니다. 정말 인생을 바로 배우는 사람은 머리를 숙이고, 겸손과 자기 심화에서, 참된 자기를 키우며 사는 사람입니다. 한 평생 배우고 살자 그리고 바로 배우고, 내 인생을 키워 가자고, 이렇게 홀로 다짐해 봅니다. [좋은 글 중에서]

'짧은 글 긴 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은 친절의 결과  (0) 2014.08.03
지워지지 않는 못자국  (0) 2014.07.31
내 마음의 등대  (0) 2014.07.18
김치와 인생의 공통점!  (0) 2014.07.09
오만한 물고기  (0) 2014.06.21

캘리포니아 주는

전세계에서도 몇 안되는 독특한,

지리적, 지형적, 기후적 여건을 지니고 있습니다.  

 

700마일이 넘는 긴 해안지역,

원시림을 자랑하는 레드우드 지역,

씨에라 네바다를 중심으로 하는 고산지역,

  

모하비를 중심으로 하는 사막지역,

센트럴 밸리를 중심으로 하는 대평원지역과

  

온대와 아열대,

사막기후와 지중해성 기후를 동시에 갖춘,

전세계에서도 유일무이한 지역이 바로 캘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남한 면적의

약 5배에 해당하는 캘리는

또한 많은 많은 샌듄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잘 알려진 곳이

데쓰 밸리의 메스킷 샌듄스와 유레카 샌듄스이지만

  

이외에도

모하비 사막의 켈소 듄스,

데쓰 밸리 인근의 빅 듄스와 듀먼 듄스

  

피스모 비치 부근의

과달루페 듄스(일명 Oceano Dunes)가 있으며,

  

오늘 소개해 드릴

알고도네스 듄스 또한

캘리의 이름난 샌듄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하 sand dunes는 샌듄으로 표기합니다)



01083057_9.jpg

알고도네스 샌듄은

캘리에서 가장 큰 샌듄입니다.


01083057_10.jpg

알고도네스 샌듄은

데쓰 밸리의 유레카나

메스킷 샌듄보다 더 크고 넓습니다.


01083057_11.jpg

알고도네스 듄은

길이가 무려 45마일,

폭의 길이는 6마일이나 됩니다.


01083057_12.jpg

하지만 이곳은

데쓰 밸리의 메스킷 샌듄에 가려

사진사나 여행객에 그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죠.


01083057_13.jpg

알고도네스 샌듄은

임페리얼 카우니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임페리얼 샌듄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합니다.


01083057_14.jpg

 

겨울에서 봄 사이에

알고도네스 샌듄 주변에는

많은 야생화들이 피어나는데

절정기 때는 화려한 보라색 잔치가 벌어집니다.


01083057_15.jpg

그런데

이곳에 어떻게 해서

이처럼 크고 넓은 샌듄이 생긴 것일까요?


01083057_16.jpg

여기에는

지질학자에 따라서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지만

주류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01083500_9.jpg

오래 전부터

콜로라도 강물은

이 지역에서 주기적으로 범람했지요.


01083500_10.jpg

이로 인해 예전에는

지금의 Salton Sea를 포함하는

매우 큰 Cahuilla Lake이라는 호수가 형성되었는데

 

이 호수는

북쪽으로는 팜스프링스까지,

그리고 동쪽으로는 Salton Sea 동쪽의

초컬릿 산맥(Chocolate Mountains)아래까지 물이 차 있었죠.


01083500_11.jpg

세월이 지나

기후가 바뀌기 시작하면서

Cahuilla Lake의 물은 마르기 시작했고,

결국은 지금의 Salton Sea만 남게 되었습니다.


01083500_12.jpg

콜로라도 강이 범람할 때

강바닥에 있던 모래와 실트(silt)가 함께 넘어왔는데

Cahuilla Lake이 마르면서 주변에 모래와 silt가 고스란히 남게 되었죠.

 

여기서 실트는

모래와 진흙, 혹은

모래와 점토의 중간쯤 되는

토양성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01083500_13.jpg

콜로라도 사막과,

소노란 사막의 경계선상에 있는 이곳은

지역 특성상 바람이 많이 부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Cahuilla Lake이 마른 후에 남겨진

모래와 silt가 이곳으로 날아와 쌓이게 되었습니다.


01083500_14.jpg

원래 사막 지역이었던 이곳에

이처럼 바람에 날려온 모래가 쌓여서

오늘날의 거대한 샌듄을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01083500_15.jpg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은

여느 샌듄과 다름없이 평온해 보이지만

 

일단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사막의 폭풍처럼 거센 바람이 불어서

때로는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기도 합니다.


01083500_16.jpg

바람이 얼마나 심하게 불었던지

함께간 여류 사진작가의 CPL 필터가

모래 바람에 깨져서 금이 갈 정도였습니다.

 

또 다른 분은 말하기를

이 바람이 1.4후퇴 이후에

처음겪는 난리같은 바람이라고 하더군요.


01084103_17.jpg


01084103_18.jpg


01084103_19.jpg


01084103_20.jpg


01084103_21.jpg


01084103_22.jpg


01084103_23.jpg


01084103_24.jpg


01084352_25.jpg


01084352_26.jpg


01084352_27.jpg


01084352_28.jpg


01084352_29.jpg


01084352_30.jpg


      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절대적인 하나님(1)

존 칼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자신이 한 사람의 아버지이자 남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모든 인간적인 감정마저 벗어던지고 자기 아들을 죽임으로써 세상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잔혹한 행위를 저지른 수치를 감내하는 일은 아브라함에게는 어렵고 고통스런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또다른 한 가지 사실, 즉 아브라함이 보기에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과 자신의 말씀과 모순되는 행동을 하시는 것으로 보이고 또 하나님이 아들 이삭을 자신의 품속에서 거둬 가실 때 약속된 축복의 소망도 끊어지는 것처럼 생각되었다는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가혹하고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유일한 은혜의 징표가 사라진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더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신의 쇠약한 육체에서 이삭이라는 씨앗을 기대했던 이전 처럼 소망을 통해 소망하기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초월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아브라함은 아들의 죽음 앞에서 아들의 잿더미에서부터 자신에게 축복을 약속할 만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서 유혹의 미로에서 빠져나옵니다.

 

이와 같은 본보기를 자신에게 적용하는 일은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대해 매우 관대하셔서 우리의 믿음을 그토록 엄격하고 예리하게 시험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보편적인 믿음의 시련에 주목하게 할 만한 하나의 본보기를 제시하고자 하였습니다. 금과 은보다 더 귀한 믿음은 아무 시련도 없이 그냥 방치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경험은 우리 모두가 자기 믿음이 분량에 따라 하나님께 시험을 받을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종들로 하여금 육신의 자연적인 감정을 극복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완전한 자기 부인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 그 모든 감각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시험하신다는 점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Jeniffer
종말이야기: 천국과 지옥

기독교적 종말론을 이야기 할 때 개인의 종말과 우주적 종말을 나누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렇게 하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무엇보다도 천국과 지옥과 관련한 논의의 우주적 특성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재림직후에 있을 최후의 심판이후에 인간이 궁극적으로 상속하게 될 것과 연결된 주제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종말과 함께 인간이 가게 될 곳은 어디이며, 그곳이 천국 혹은 지옥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복잡한 질문이 뒤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개인의 종말과 우주적 종말을 나누어 설명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개인의 종말은 죽음에서 시작된다. 개인의 종말로서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에서 성립한다. 육체와 영혼의 분리로서 죽음은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개인의 죽음이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육체는 흙으로 돌아간다. 육체는 정상적인 사망인 경우 무덤에 놓이거나, 화장의 경우 신체의 일부를 구성했던 뼛가루는 공기 중으로나 바다나 혹은 강물에 뿌려지거나, 혹은 바다에서 의도하지 않은 사고로 인해 죽은 후 사체가 수습되지 않아 바다에서 유실되거나 하는 방식으로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은 어떻게 될까? 유교에서 이야기 하듯, 죽은 후 영혼이 살던 집 주변을 3년 정도 떠도는 신세가 되는가? 혹은 이런 착상을 가져다가 악용하여 인간이 본래 수명이 120년인데 다 못 채우고 죽은 경우 나머지 기간 동안 구천을 떠돌다가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 귀신노릇하며 살면서 그 기간을 채우기라도 하는 것인가?

조금 생각을 정리하고 이야기를 계속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죽음과 함께 처하는 상태를 하데스라고 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시점이 하데스의 상태에 들어가는 시점이다. 그리스어 하데스는 히브리어로는 쉐올인데, 국역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음부라고 번역되곤 한다. 그러니까 죽은 자는 음부의 상태에 들어간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음부에는 두 구별된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또한 주의력을 가지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가 파라데이소스이고, 다른 하나가 게헨나이다. 파라데이소스에는 죽은 그리스도인의 영혼이 들어가 안식하는 곳이고, 게헨나는 죽은 비그리스도인의 영혼이 거하는 곳이다. 그러면 영혼은 이곳에 언제 들어가는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인 하이델베르크 신앙교육서는 아주 명쾌하게 죽은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육체로부터 분리되자마자 즉시로 파라데이소스에 들어간다고 고백한다. 비록 동일한 신앙고백서가 불신자의 영혼에 대하여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동일하게 죽음과 함께 즉시 게헨나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죽은 자들의 영혼이 거하는 영원한 상태는 아니다. 이곳에 거하는 기간은 그리스도인의 영혼이나 비그리스도인의 영혼이나 제한되어 있다. 일종의 막간의 기간이라고나 할까. 이곳에 거하는 기간은 개인이 죽은 날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가 재림할 때에 파라데이소스에 있는 영혼이 무덤에 있는 자신의 육체와 연합하여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홀연히 변화하여 부활한 그리스도인과 같은 상태를 누리게 된다. 그 후에 게헨나에 있던 비그리스도인의 영혼이 각각 제 몸과 연합되어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당시에 살아 있던 비그리스도인이 홀연히 변화하여 부활의 몸을 갖게 된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리스도 예수가 친히 재판하는 최후의 심판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니까 인간은 죽음과 함께 영으로 파라데이소스 혹은 게헨나에 들어가 있다가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이 있을 때에 그 상태에서 나와서 육체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기간은 잠정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이유로 중간기 상태 혹은 잠정적인 상태라고 부른다.

그러나 파라데이소스나 게헨나에 거하는 영혼들은 각 상태의 특징에 따라 안식을 취하거나 혹은 죄악으로 인한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안식과 고통은 어떤 의미에서는 나중에 완성된 천국과 지옥에서 경험하게 될 그것과 질적으로 연속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그림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가운데 주어져 있다. 물론 이 비유는 사실관계를 언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예화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력을 가지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의 비유가 그 자체로 거짓된 내용을 끌어들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문맥상 파라데이소스와 게헨나를 설명하려는 것이 초점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후상태라는 그림을 차용하여 설명되어야만 했다는 사실은 간과될 수 없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읽어보면, 나사로가 거하는 곳에는 안식이, 부자가 거하는 곳에는 고통이 하나의 실재로서 경험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혼이 그곳에 들어가게 되면 다시 나와서 활동할 수 있는 여지도 제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죽음과 함께 영혼이 각각 제 갈 곳으로 들어간 후에는 패자부활전과 같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각각 육체를 입고 살아갈 때에만 사후의 삶을 위한 기회를 가질 수 있을 뿐, 사후에는 사후의 삶을 다시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영영 다시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에 살고 있을 때, 이곳에서 복음을 가지고 수고하는 분들이 선포하는 말씀을 주의력을 가지고 듣고, 올바르게 반응하는 길만이 사후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파라데이소스나 게헨나는 독특한 곳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파라데이소스나 게헨나 사이는 건너가거나 혹은 건너오거나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곳은 각각 다른 질서가 지배하는 곳이어서 뒤섞일 수 없는 영역인 것이다. 파라데이소스에는 하나님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주님의 이름을 귀히 여기고 주님의 백성으로 산 삶을 위로하고 안식으로 보상하는 반면에, 게헨나에는 마귀와 그의 졸개들이 그동안 거짓으로 꾀어낸 사람들의 분노와 폭압이 지배할 뿐 자비로운 하나님의 일반은총조차도 제공되지 않아서 목마르고 고통스러운 곳일 뿐이다. 그러니 서로 다른 질서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오가며 삶을 연대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라데이소스와 게헨나는 그 자체로 천국과 지옥은 아니다. 천국과 지옥은 부활한 몸을 가진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혹은 종말론적으로 상속받는 곳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고린도교인들이 오해했던 것처럼 순수한 영으로서 영원히 존속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인간은 부활의 날에 썩을 몸을 벗고 썩지 않을 몸을 입으며, 욕된 몸을 벗고 영광스러운 몸을 갖게 되며, 병약한 몸을 벗고 강한 몸을 갖게 되며, 육신의 소욕이 거하는 몸을 벗고 성령이 완전히 지배하는 몸을 입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부활한 몸은 지금과 연속된 차원을 가지면서 동시에 불연속된 새로운 차원을 갖는 실제적인 몸인 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바로 이런 부활의 몸을 갖고 있는 자들이 상속하게 되는 영원한 삶의 처소를 의미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천국과 지옥은 장소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파라데이소스나 게헨나는 아직 몸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장소라고 할 수는 없고 다만 상태라고만 해도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부활이후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부활한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장소성을 피해갈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천국은 어디인가? 그리고 지옥은 어디에 있게 될 것인가? 성경을 읽어가면서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도인의 부활과 그들이 거할 장소에 대하여는 비교적 분명하게 말하는 반면에, 비그리스도인의 부활의 실체와 거할 장소에 관하여는 그렇게 구체적으로 언급한 곳이 많지가 않다는 사실이다. 이런 성경의 일반적인 특징을 잘 고려하면서 성경이 안내하는 곳까지 따라가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천국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천국(天國)이라는 표현은 사실 마태복음에서 거의 예외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곳에서는 지배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곧 신국(神國)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주요 청중으로 삼고 기록된 성경이라는 사실에서, 신명(神名)과 관련한 유대인의 일반적인 관습을 잠시 기억하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불경하다고 여겼고, 따라서 하나님을 하늘로 부르는 습관이 생겨났다. 이런 견지에서 보자면, 마태복음의 하늘나라라는 표현은 하나님 나라와 같은 표현인 셈이다. 이런 논의를 하는 이유는 결국 성경은 하늘 어딘가에 있는 나라라는 의미로 천국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국은 2000-4000억 개에 이르는 은하 밖의 어느 공간이라든지 혹은 태양계 밖의 어느 특정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으로서 다스리고 인간이 그분의 백성이 되기로 자처하는 곳을 의미하며 그 공간은 여기든 아니면 다른 공간이든 하등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아이잭 뉴턴의 시대만 해도 상대공간과 절대공간이라는 구별을 유지했다. 상대공간을 벗어난 공간이 절대공간이 되고 그곳이 바로 천국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때였다. 쉽게 말하면,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이 자리한 방배동은 서울이라는 상대공간 안에 있고, 서울은 대한민국이라는 상대공간 안에, 대한민국은 아시아란 상대공간 안에, 아시아는 지구라는 상대공간 안에, 지구는 태양계라는 상대공간 안에, 태양계는 다른 은하라는 상대공간 안에, 그 은하는 또 다른 은하의 상대공간 안에 있는 것으로 이어지고, 그 상대공간이 끝나는 지점이 절대공간이 시작되는 지점이고, 그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도 그런 식으로 공간을 생각하지 않는다.

아인스타인을 거쳐 스티브 호킹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은 공간개념을 상대와 절대라는 개념에서 차원개념으로 전환해버렸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이후로 최후의 심판을 받고 인류가 다른 어떤 것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한 이 공간 안에 거하게 된다는 기본적인 생각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공간이 지금 현재 우리가 가진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3차원의 삶만을 열어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의 우주는 무려 9차원 혹은 12차원까지 확장되어 이해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과 함께 부활한 인간의 몸은 3차원은 기본이고 4, 5, 6, 7, 8, 9차원에까지 참여하는 존재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공간개념이 지금 현재의 개념에서는 거의 상상하기 힘들만큼 확장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는 부활의 몸에 상응하는 조건으로 변화되고 또 그렇게 경험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서로 상응하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요한이나 베드로나 바울이나 심지어 예수조차도 한목소리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창조세계가 변화될 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성경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정황이 명확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변화의 하나는 죄가 창조세계에서 제거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세계가 홀연히 새로워지게 된다는 것이다. 베드로나 요한이나 바울이나 예수까지도 한목소리로 만물이 변화되어 그 영광의 극치에 이를 것을 예견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이후로 죄는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물은 홀연히 변화되어 그 영광의 극치를 드러내게 됨으로써 부활한 그리스도인이 살기에 적합한 구조로 상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소가 어디냐가 궁극적인 관심사가 아니라 누가 중심이 되는 세상이냐가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이후 하늘의 예루살렘이 이 땅으로 내려오고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되고, 하나님이 친히 왕이 되어 다스림으로써 사망이나 애곡하는 것이나 눈물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는 곳으로 변화되고, 인간은 그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면서 스스로를 신하와 백성으로 인정하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왕이 되어 자신의 백성인 인간을 다스리는, 인간은 진정한 왕을 모시고 그 왕이 베푸는 영원히 지속하는 은혜를 받아 누리는 상태로 하나님이 창조한 이 우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것, 이것이 성경이 열어 보여주는 천국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이다.

그러면 지옥은 어디인가? 사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그렇게 구체적인 언급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구체적인 장소라는 점과 그 장소에서 마귀와 그 졸개들과 그들을 섬겼던 악한 부활에 참여한 사람들이 영원한 형벌 가운데 거하게 된다는 사실 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성경에 제시되어 있다. 우리는 성경이 인도하는 데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지옥과 관련한 논의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는 지점까지 성실하게 따라가고,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구원을 얻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한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종말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건전한 종말론  (0) 2015.01.18
종말론, 죽음  (0) 2015.01.12
누가의 역사화된 구속사적 종말론  (1) 2014.07.19
혐오스런 종말론  (0) 2014.05.13
총회개혁주의 신학대회 종말론 발제(2)  (0) 2014.04.13

 

 

 


                                           

 

빗속의 추억 만들기

 

 

장대비가 주르륵거리며
쏟아지는 날이면
나는 이 나이가 되어서도
고향 집 처마 밑 넓은 대청마루가,
그리고 울 엄마가 생각나서
그리움에 눈물짓곤 한다.

 

어머니는 이런 날이면
종종 부엌에서
감자 밀가루 수제빗국을
끓여주곤 하셨지

멸치와 다시마를 듬뿍 집어넣고
잘 다려낸 국물에
껍질을 벗겨 굵직굵직하게 썬 감자와
모시조개를 함께 넣고 끓이다가

감자가 다 익을 때쯤이면
곱게 반죽한 밀가루를
손으로 숭숭 뜯어 넣고
다시 한 번 더 보글보글 끓여준다.

 

다 익은 수제비가 동동 ...
물 위로 올라와 뜨게 되면,
곱게 채를 썰어 두었던 애둥이 호박이며
송송 잘게 썬 파와
곱게 다진 마늘을 넣고 소금 간을 해서
한 번 휘~ 저은 다음,
넓은 그릇에 담아 상 위로 올려놓는다.
 
수제빗국이 다 된듯하면
방에서 숙제를 하다말고
언니와 나는 대청 마루로 우르르...

반찬이라곤 깍두기 한 접시뿐이건만
임금님 상의 진수성찬보다 더 맛나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한 숟가락 푹 떠서
후후 불어대면 하이얀 김이 모락모락....


음~

비가 내리고 출출한 날이면
따끈한 감자 수제비 국을 끓여주시던
사랑의 어머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릴 위해
수고하시던 아버지, 두 분 모두
천국으로 가시고 계시지 않는다....

그분들은 더 이상 이곳에 계시지 않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장대비는 여전히 처마 끝을 타고 흘러내리네...

 

빗소리를 들으며,
컴퓨터 앞에 앉아 원고 정리를 하던 나는
갑자기 어머니 아버지 얼굴이 스쳐 지나가며
수제빗국의 그 구수한 향내가 스멀스멀

코끝을 간질이며 등줄기를 타고흐른다.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지만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어머니 아버지...
나는 컴퓨터 파워를 끄고
슬그머니 일어나
앞치마를 주섬주섬 걸치고 부엌으로 향했다.

 

비가 주르룩 거리는 이런 날,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만 있기엔 너무
삭막하지 아니한가?

따끈하고 시원한 국물이 일품인
감자 밀가루 수제빗국을
나도 한 번 준비해 보아야겠다


내 아이들에게
빗속의 추억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언젠가는 나 또한 사라지고
오늘처럼 비 내리는 날이면
내 아이들 역시 감자 밀가루
 수제빗국이라도 숭숭 뜯으며
 이런 나의 사랑을

오래도록 기억해 주길 바라며 ...


: 별똥별/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이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애리조나는

서부 영화의 단골 소재지로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주(state)지만

미연방 가입은 의외로 50개 주 가운데 끝에서 세 번째입니다.

 

저 북쪽 골짜기인

아이다호나, 와이오밍, 몬태나보다

더 늦게 연방에 가입된 지각주(48번째)라고 할 수도 있죠.

 

애리조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그랜드 캐년 국립공원일 것입니다.

그래서 애리조나의 닉네임은 “그랜드 캐년의 주”입니다.

 

하지만 애리조나는

그랜드 캐년외에도 서과로(혹은 싸와로) 국립공원,

그리고 오늘 소개하는 petrified forest national park(PFNP)이 있습니다.

 

목화석, 혹은

규화석 국립공원이라고도 하는 PFNP는

나무가 화석이 된 독특한 국립공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8105552_1.jpg

 

목화석 국립공원은

크게 북쪽의 배드랜즈(Badlands)와

남쪽의 목화석 지대로 나뉘어집니다.

 

여기서 배드랜즈란

황무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바위와 진흙,

혹은 점토같은 성분으로 구성된

퇴적지층의 지형을 의미하는 지질학 용어입니다.

 

18105552_2.jpg

북쪽의 배드랜즈 지형은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하고

오늘은 목화석 지역을 먼저 소개하려 합니다.

 


18105552_3.jpg

목화석, 다시 말해서

나무가 규화되어 목화석이 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규소라는 물질입니다.

 

왜냐하면

나무가 목화석이 되려면

나무를 규화(목화)시키는 규소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18105552_4.jpg

나무가 목화석이 되는 과정은 이렇습니다.

 

지진이나 홍수,

혹은 화산활동에 의해 파묻힌 나무에

규산을 포함한 지하수가 그 나무 조직에 스며들게 되면

 

원래 나무의 성분은 사라지고

나무는 구조와 조직의 원형을 보존한 채로

이산화규소(실리카, silicon dioxide)로 변화하게 되어 목화석이 됩니다.


18105553_5.jpg

 

문제는

나무가 목화석이 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느냐 하는 것인데

 

걸리는 시간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서로 견해의 차이가 있습니다.



18105553_6.jpg

어떤 학자들은

나무가 목화석이 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흘러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또 어떤 학자들은

나무가 목화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18105553_7.jpg

 

영국에 가면

Knaresborough 라는 곳에

Mother Shipton's Cave 라는 동굴이 있습니다.

 

동굴 주변에서는

규소를 포함한 지하수가 흘러나오는데

그 주변에 곰이나 동물인형, 혹은 모자를 걸어놓으면

 

3-5개월 만에

나무가 목화석이 되는 것처럼

이 모자나 인형들이 딱딱한 돌로 변합니다.

 


 

18105553_8.jpg

호주에 가면

물레방아가 목화석이 된

Petrified Water Wheel 이 있는데

 

전문가들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이 물레방아는 만들어진지 100년도 되지 않았다 합니다.

 


18105906_9.jpg

위의 두 예로 보건데

나무가 목화석이 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짧게는 수 십년, 길어도 100년이 채 안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만

 

나무가 목화(혹은 규화)되는데

걸리는 시간은 의외로 짧을 수도 있다는 것이죠.

 


18105906_10.jpg

 

그럼 목화석 국립공원(PFNP)에 있는

목화석들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18105906_11.jpg

 

지질학자들이나

고생물 학자들 가운데는

 

나무가 규화(목화)되는데는

무조건 수십 만년의 세월이 흘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만약 이들이 위에서 예를 든

두 가지 실례를 알고도 이렇게 주장한다면

그들은 어리석거나 맹목적인 학자들일 것입니다.



18105906_12.jpg

이러한 주장의 견해가

PFNP의 안내판에 실려 있는데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PFNP의 목화석 형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부터 약 2억 2,500만년 전,

트라이아스(Triassic)시대에 이곳은

비가 오면 벌람하는 범람원지대였다고 말합니다.

 


18105906_13.jpg

주기적인 범람으로

쓰러진 나무들은 침적토(silt) 의해 퇴적되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규소가 포함된 물이 나무에 스며들어

나무가 규화(목화)되었다고 설명합니다.


18105906_14.jpg

그런데

이들의 주장에 한 가지 맹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곳에

공룡의 화석도 함께 많이 발견되는데

왜 이 범람원에 공룡의 화석이 발견되는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8105906_15.jpg

나무는 움직일 수 없지만

공룡은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비가 오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높은 곳으로 피합니다.


18105906_16.jpg

이곳에

공룡의 화석이 있다는 것은

주기적인 범람에 의한 홍수라기 보다는

 

공룡이 미처

피하기도 전에 휩쓸릴 정도의

노아의 홍수같은 거대한 홍수(Catastrophe)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8110305_17.jpg

 

그 거대한

홍수(The Flood)에 의해,

 

미처 피하지 못했거나

혹은 다른 곳에서 떠밀려온

공룡과 나무들이 비교적 지대가 높은 이곳에 걸리면서

 

홍수로 인한 모래와

silt와 셰일이 퇴적될 때 함께 퇴적된 것입니다.



18110305_18.jpg

나무는 일반적으로

시간이 지나면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어 썩게됩니다.

 

공룡이나 사람도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나면 살뿐 아니라 뼈도 분해됩니다.


18110305_19.jpg

 

경주의 천마총이나 고분을 보면

천년도 채 안되어 사람의 뼈조차도 분해되어 흙이 된 것을 보게됩니다.

 

공룡이 화석이 되었다는 것은

공룡이 피할 틈도없이 죽어서 퇴적되었거나,

아니면 죽은 후에 썩을 겨를도 없이 퇴적된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미생물에 의해 공룡의 모든 것이 분해되었을 것입니다.



18110305_20.jpg

나무가 목화석이 되려면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조건의 문제입니다.


18110305_21.jpg

 

다시 말하면,

나무가 얼마나 빨리 매몰되고 퇴적되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규소가

얼마나 빨리 나무에 스며들었느냐 하는 것이

 

나무가 목화석으로 바뀌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18110305_22.jpg

PFNP의

Jasper Forest에 흩어져 있는

목화석들의 모습입니다.


18110305_23.jpg

Crystal Forest에 흩어져 있는

목화석들의 모습입니다.


18110305_24.jpg

사진에 보이는 건물은

무지개 숲 박물관(Rainbow Forest Museum)입니다.

 

이 박물관 주변에

Giant Logs, Long Logs와

Agata House와 선물가게 등

쉴곳과 볼거리들이 널려 있습니다.


18110525_25.jpg

 

사진과 글 : 주안(POWER 21)

blog.koreadaily.com/power21




'Amazing Na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괴상하게 생긴 나무들  (0) 2014.07.30
모래 폭풍 부는 샌듄 위에서  (0) 2014.07.27
참 아름다운 주님의 세계  (0) 2014.07.24
허블망원경에서 본 우주의 놀라운 광경 외  (0) 2014.07.19
빅토리아 폭포  (0) 2014.07.16

성령 하나님에 대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사도신경 강해)의 가르침입니다.
*성령강림절(맥추감사절, 6월 8일)에 저희 교회에서 주일 오전에 설교한 내용입니다.

제20주(53문) 욜 2:28-32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성령에 대한 신앙고백

사도신경의 세 번째 부분은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우리는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오해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나는 성령을 믿으며’라는 말 다음에 나오는 내용들을 성령에 대한 신앙고백과 다른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성령을 믿으며’ 다음에 나오는 조항들은 성령에 관한 고백의 구체적...인 조항이다. 즉 교회, 신자들의 교제, 사죄, 부활, 영생은 성령이 하시는 일들이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성도들의 실제 생활과 연관된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를 그리고 성자 하나님은 우리의 구속을 주관하셨는데,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성화를 주관하신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교회에 속하며 서로 교제하고 죄 사함을 받으며 죽음에서 살아나며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따라서 성령은 우리의 칭의를 이끄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성화를 가능하게 하신다. 필시 성령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시면 성부 하나님이 구원을 작정하시고 성자 하나님이 구원을 성취하신 일이 우리 개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령은 어떤 분이신가? 고대에는 성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현대에 이르러서는 성령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는 성자 하나님에 대한 것만큼이나 오해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성령님은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으로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성령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권능이나 힘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극단적인 혼합주의적 신비주의의 입장을 가지고 있어서 초자연적인 이적과 심리적 황홀경을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실 때에는 강력한 체험을 수반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성부 하나님이 계시며, 성자 하나님이 계시는데, 성령 하나님도 계신다. 한 분 하나님은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함께 세상을 만드셨고 우리를 선택하셨으며 우리를 구원하셨다. 참으로 세 분의 하나님은 함께 존재하시며 일하시는데, 그분들은 어떠한 충돌이나 모순도 없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신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모양으로 계시지 않았다. 즉 성부시대, 성자시대, 성령시대로 구분할 수 없다. 세 분은 한 분으로서, 한 분이시면서 동시에 세 분으로 존재하신다.

예수님의 약속

요한복음 13-17장에는 예수님의 긴 설교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고별강화’(farewell discourse)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모아 놓고 매우 중요한 말씀을 주셨다. 특히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예수님은 이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시지 않겠지만 그분의 영이신 성령께서 세상에 오셔서 그분이 계시는 것과 똑같게 하시고 그분의 일을 대신하심으로써 그분이 여전히 세상에 현존하시게끔 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별강화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작별인사가 아니라 오히려 영원히 그들 가운데 계시겠다는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예수님의 약속대로 그분이 하늘로 올라가신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령님이 내려오셨다. 성령께서 내려오심으로 구속사의 진전이 급격하게 진행되었는데, 복음이 활발하게 전파되었고, 교회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다.

이제 성령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일에 대하여 자세히 다루어야겠는데, 그 이전에 집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그분이 이 땅에 계시지 않았는가하는 점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이 땅에 계셨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는 성자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태어나시기 전에도 이 세상에 계셨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다만 성령 하나님이 이 땅에 ‘공식적으로’ 오심으로써 그분의 활동이 더욱 왕성해졌다. 이는 성자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심으로 구속사역이 구체화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맥추절과 성령강림절

구약의 3대 절기가 있다. 그것은 유월절(무교절)과 맥추절(오순절, 칠칠절)과 수장절(초막절)이다. 유월절(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탈출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이날에 그들은 첫 열매를 먹으며 감사하였다. 맥추절(여름)은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오순절)에 지켰다. 이때에 그들은 처음으로 제대로 익은 열매를 먹을 수 있었다. 수장절(가을)은 그들이 광야에서 장막을 치고 지내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이 시기에 그들은 추수를 모두 마치고 한 해의 풍성한 소출을 걷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겨울에 안식하였다. 따라서 구약의 3대 절기의 요점은 봄(유월절), 여름(맥추절), 가을(초막절)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절기들은 신약시대에 이르러서 구속사적으로 성취되었다. 유월절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절기이다. 맥추절은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교회가 설립되어 본격적인 영적 추수가 시작되는 것을 알리고 사명을 불어넣어주는 절기이다. 초막절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한 완전한 추수와 영원한 안식을 예시한다. 그러므로 구약의 3대 절기는 구약시대에 한정되거나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민족적 명절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약시대에도 모든 세대가 인류의 마지막 날까지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 절기들을 영원히 지켜야 한다고 명령하신 의미이다(참고. 출 23:14, 17).

이제 이 절기들 가운데 맥추절에 대하여 알아보자. 맥추절은 밀과 보리를 추수한 것을 감사하는 날이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이 날은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라고 해서 오순절 혹은 칠칠절이라고 불렸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이르러 맥추절에 성령님이 강림하셨다. 따라서 구약의 맥추절은 밀과 보리를 추수하는 것을 기념하였지만 신약의 성령강림절은 성령의 오심으로 영적인 추수가 시작되는 것을 선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교회가 시작되고 본격적인 영적 추수가 시작된 것이다. 이처럼 구약의 맥추절과 신약의 성령강림절은 같은 것이므로 신약의 교회는 성령강림절을 맥추절의 성취의 날로 지켜야 한다.

요엘의 계시와 베드로의 해석

오순절에 성령 하나님이 엄청난 현상과 함께 강림하셨다(참고. 행 2:1-13). 베드로는 이 일에 대하여 설교하면서, 성령님의 강림을 요엘의 계시의 성취로 해석하였다(참고. 행 2:14-41). 그는 하나님이 맥추절을 통하여 예시하셨고 요엘을 통하여 계시하신 일이 드디어 오순절에 이루어졌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강림을 우발적이거나 즉흥적인 사건으로 볼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구속사적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오랫동안 준비하셨으며 예수님은 이 일을 구체적으로 예언하셨고 드디어 때가 되어서 이 일이 이루어졌다.

요엘 2:28-32에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시겠다는 약속이 나온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성령은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임하셔서 다양한 표징들을 보이신다. 여기서 환상과 꿈과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다양한 방식이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말씀을 주셨지만 신약시대에 하나님은 거듭난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신다.

성령의 강림은 종말의 날의 도래이다. 그리고 종말의 날은 구원과 심판의 날이다. 이것은 요엘 2:30-32에 기록된 것과 같다.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이제 성령께서 임하심으로 종말론적인 구원과 심판이 본격적으로 시행될 것이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너무나 많고 다양하다. 우리의 지식과 감정으로 성령 하나님의 사역을 제한하거나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성령님의 기본적인 사역은 다음과 같다.

1. 성령은 나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셨고 우리에게 아무런 선한 요소가 없었지만 그분의 사랑 가운데 성령을 주셨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 1:21-22).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계신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 안에 성령께서 계신다. 이에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참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의 몸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바울은 이어서 말한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이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이다.

2. 성령은 나를 그리스도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게 하신다.

성령은 참된 믿음으로 나를 그리스도와 그분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게 하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 16:13-14). 이것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보여준다.

성령은 스스로 말씀하지 않으신다. 성령은 성자의 이름으로 보내어지신 분인데, 성자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성자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성자의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성령은 성자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성령은 성자를 증언하시는데, 성자께서 죽으신 일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일과 하늘로 올라가시는 일과 다시 오실 일을 말씀하신다. 따라서 성령을 말할 때에는 성자를 말해야 한다. 성자를 제외하고 성령을 말할 수 없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영이다. 즉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실로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를 알고 예수님의 구속을 깨닫는 것은 성령께서 역사하신 결과이다.

3. 성령은 나를 위로하신다.

신약의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구약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는 사도들과 신실한 제자들이 커다란 위험과 두려움에 직면해 있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그들 앞에는 ‘간혹’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게 적대적이었으며 위협적이었다. 사실상 그들에게 안전한 장소는 없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했던 그들은 위험 앞에서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딘가에 숨어 있지 않았으며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성령 하나님은 그들을 강하게 하시고 담대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 16:22).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에 근심했지만 예수님은 성령께서 오시면 그들이 예수님을 다시 보는 것과 같이 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마음이 기쁠 것이며 그들의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기쁨을 주신다. 그분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방식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고 예측할 수도 없다. 하지만 분명히 그분은 기쁨을 주신다.

4. 성령은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신다.

요한복음 14:16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예수님은 성령님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베드로전서 4:14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는 자들은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 위에 ‘영광의 영’이신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나를 떠난다. 세상의 재물과 영화도 나를 떠난다. 그러나 우리를 떠나지 않는 유일한 분이 있는데 바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 우리는 종종 주님을 버리려고 하지만 주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우리의 구원의 보증(견인)은 우리 자신의 의지와 행실과 신실함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오로지 성령 하나님의 언약에 있다. 비록 우리가 타락하고 믿음의 많은 부분을 상실할 수는 있겠지만 완전히 타락하고 믿음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를 보존하신다.

 

귀가 얇은 사람들 /정인수 목사 



우리말에 ‘귀가 얇다’라는 재미있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그 말에 귀가 팔랑이고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말한다. 목회를 하면서 교회를 허무는 작은 여우 중에 하나는 교우들이 귀가 얇아 쓸데없는 말, 부정적인 말을 어디서 주어 듣고 그로 인해 쉽게 시험을 받는 사람들이다.

인체의 신비 중 가장 큰 신비는 귀의 존재이다. 귀의 가장 주된 기능은 소리를 듣기 위함이다. 어떤 곳에서 소리가 나면 그 소리는 공기를 타고 귀에 닿게 된다. 귀를 자세히 보면 소리를 모으기 쉬운 모양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오묘한 신비가 아닐 수 없다. 소리가 일단 귀에 접수되면 그 귀의 고막 진동을 통해서 청신경을 타고 뇌의 청각 중추에 전달된다. 거기서 소리의 판단이 내려진다.

귀는 두 개로 창조되었다. 이 귀가 둘인 것은 소리가 난 방향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즉 두 개의 귀로 되었기에 스테레오로 들리는 것이다. 귀가 하나 밖에 없다면 소리의 방향을 알 수 없다. 귀는 눈과는 대조적으로 늘 24시간 들리게 되어 있다. 눈은 무서운 형상이나 원치 않는 장면은 감을 수 있지만 귀는 계속 틀어 놓을 수밖에 없다. 귀는 늘 열어져 있기 때문에 이런 소리 저런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소리들이 난무한다. 그래서 열린 귀로 이런 소리 저런 이야기를 다 접수하곤 한다.

목회를 하면서 교회만큼 많은 이야기가 흐르는 곳이 없다고 본다. 수많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교회에서 만큼 들을 수 있는 곳이 없다. 문제는 그 흐르는 이야기 중 적지 않은 것들은 들을 필요조차 없는 것들이 많다.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오류의 이야기, 혹은 중상모략의 이야기, 쓸데없는 비방의 이야기 등 거짓 정보가 흘러 다닌다. 요즘에 인터넷에도 보면 흑색선전, 가십, 그리고 거짓말이 우후죽순 격으로 난무하고 있다. 아울러 음란 메일, 마구잡이 공격, 그리고 엉터리 정보들이 검증 과정 없이 인터넷에 쓰레기처럼 돌아다니고 있다. 종종 나에 관한 가십도 몇 사람을 걸쳐 들을 때가 있다.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핏’ 웃으며 무시하기도 한다. 문제는 사람들은 어이가 없게 그러한 잘못된 정보에 귀가 솔깃하거나 쉽게 마음을 준다. 인간의 타락한 죄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귀가 얇다’라는 이 속담은 진짜 귀가 얇은 형상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남의 이야기에 솔깃하여 자신의 줏대가 쉽게 흔들리는 그런 사람을 가리킨다. 목회를 하면서 제일 안타까운 교인들 중 하나는 이런 류의 교인들이다. 귀가 얇아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쉽게 줏대가 흔들린다. 어느 날 보면 교인이 삐져 있다. 시험을 심하게 받고 있다. 넌즈시 그 이유를 알아보면 남의 헛된 이야기를 듣고 나에 대해 일방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교인들은 그러한 허위 정보에 대한 진위 여부조차도 알아보지도 않고 그저 심각한 오해를 계속 하고 있다. 그런 교인들을 찾아다니며 일일이 변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언제부터 인가 그런 오해의 문제를 기도로 해결하는 것이 낫다는 지혜를 갖게 되었다. '교인은 오해할 권리가 있다. 그렇지만 목회자는 변명할 책임도 없다. 오직 하나님은 아신다'라는 목회 자세를 갖게 되었다.

문제는 허위와 거짓 정보를 흘리고 다니는 사람도 문제이지만 그러한 이야기에 쉽게 흔들리는 그 사람들의 인격과 판단력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교회란 관계의 공동체이다. 무수한 관계들이 교차되고 세워져 나간다. 그 관계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세워진 순수하고 깨끗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의 인격적인 존경과 신뢰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귀가 얇은 사람들은 인생에 있어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분별력과 예지가 현저히 떨어진다. 자신의 철학도 부재된 상태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제는 관계의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귀가 얇아 모든 들리는 이야기를 판단으로 사람을 대할 때 그것은 바로 인간관계에 심각한 장애를 초래한다.

신앙의 줏대, 인간관계의 줏대를 새롭게 세워 보자. 귀가 두꺼워진 사람이 되어 보자. 신앙의 사람들은 관계에 있어서도 늘 변함없고 늘 성실하다.


출처:USA 아멘넷

날도 더운데 웃고 가세요!

 

 

 

 

 

'웃으며 삽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  (0) 2014.08.21
살기 싫은 사람.ㅋㅋ  (0) 2014.08.17
아빠가 아기 보면 안되는 이유.ㅋㅋ  (0) 2014.07.23
개 팔자가 상 팔자...ㅋㅋ  (0) 2014.07.21
천국 시계  (0) 2014.07.16

“유병언 사망 후, 구원파 내 재산싸움 치열할 것”

2014/07/23 ㆍ추천: 0      

구원파 교주 유병언의 사체가 발견돼 경찰이 그의 사망을 확인한 가운데, 구원파 신도들의 향후 움직임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이단 전문가들은 구원파 내부 세력다툼으로 인한 내홍이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구원파 교주 유병언의 사망 소식에 구원파 교인들은 이같은 사실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다. 구원파 수장의 죽음으로 신도들의 더 많은 탈퇴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구원파 “유병언 죽음 믿을 수 없다”

유병언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현재 구원파는 유병언의 이 같은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구원파 측은 22일 “발견된 변사체가 유병언이 아닌 것으로 보이고, 마지막 생사 확인 시점 역시 불일치한다. 또 술을 마시지 않는데 술병이 놓여있다는 게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

오히려 “유병언으로 보기 어려운 정황이 다수 발견되는데도 DNA 확인 내용이 보도되고 있다. 수사당국이 의도를 갖고 언론에 내용을 흘린 게 아닌가 싶다”고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구원파 신도들의 이 같은 반응은 유병언의 사망이 그들에게는 믿고 싶지 않을만큼 큰 충격이기에 당연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전 구원파 신도로 유병언의 곁에서 통역 역할을 했던 정동섭 교수(사이비종교피해대책연맹 총재)는 본지와의 전화통화에서 “신도들이 유병언의 죽음을 못믿겠다는 반응은 구원파로서는 정상적인 반응이다. 결코 죽었다고 믿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 역시 그가 죽었다고 믿기지 않는다. 유병언이 살아서 처벌되고 법정에서 범죄사실에 대해 증언해주길 바랐는데 죽음으로 허망하게 나오니 허탈하다”고 전했다.

“후계자 없어 세력다툼 있을 듯…신도들 탈퇴 줄이어”

유병언의 사망으로 차후 구원파 내부 혼란도 예상된다.

박형택 목사(예장합신 이대위 전문위원)는 본지 인터뷰에서 “유병언이 죽기 전 후계자 양성을 못했다. 보통은 자식들이 하는데, 현재 자식들도 피해다니는 입장이라 내부 혼란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박 목사는 “구원파 안에서는 재산을 둘러싼 자기들끼리의 세력다툼이 있을 것이다. 많은 재산들이 차명으로 돼 있어 자기 소유를 주장하는 이들이 생기고 힘있는 자들이 재산싸움을 계속하면서 와해되고 지리멸렬 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신도들은 탈퇴하거나 박옥수 또는 이요한 등 다른 구원파 계파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정동섭 교수는 “현재도 신도들이 많이 탈퇴한 상태다. 하지만 강경파 조직원들은 구원파 사업 각 계열사에서 일하며 생계가 걸려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생활 자체가 어려워지면 위기를 극복하려고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윤화미 ⓒ 뉴스미션

출처: USA아멘넷
John은 구원 받았을까요?

신앙인

엊그제 집 앞 잔듸를 청소하다가
앞집에 사는 Betty 할머니가
남편인 John이 작년 크리스마스 이틀전에 죽었다고 알려주었다

충격…평소에 John이 몸이 안좋아서 집밖에 나오지 않는것은 알았지만
작년에 죽었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내 마음속에  John의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하나님 John은 구원 받았을까요?”

지금부터 1년전 어느날
나는 아침에 하나님과 교제를 하고 있었다
앞집의 유태인 부부인 John과 Betty의 전도를 위해서
늘 하던대로 기도 하고 있었고 모든 중보기도가 다 끝나고
하나님께 물어봤다
“오늘은 뭐하지요?”
그때 하나님이 보여준 말씀이
이사야 49장 1-6 절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6절을 읽고 묵상하던중에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평소에 눈에 띄지 않던 단어 …
”매우 쉬운 일이라” 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확신으로 다가왔다

그 이후  나는 예수님을  앞집에 전도를하기 위해서
유태인들이 크리스쳔이 된 간증 수기가 된 책을 구입했고
오랬만에 날씨가 좋아서 집앞 잔듸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는 John에게  
그책을 예쁘게 포장해서 주었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 John과 Betty의 태도가 변했다
평소에 인사도 잘하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갑자기 눈이 마주치면 그냥 딴데를 보고 무시하고 …

나는 집사람에게 많은 질타를 받았다
“왜? 시키지 않은 짓은 했어?  하나님의 일은 다 시간이 있고 때가 있는데….”
나도 말했다
“내가 하고싶어서 했나… 하나님이 쉽다고 했으니까 했지”
그리고 그것때문에 몇번 말타툼이 오가고 했다

그런데 John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집사람이 말했다 …
“잘했어 ..당신이 마지막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되서 전도한거야”
나는 말했다 “하지만 과연 John이 그책을 읽고 예수님을 영접했을까?
아님.. 그 책을 쓰레기 통에 집어 넣었을까? 죽기전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떠올렸을까?”
그건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것은
전도는우리가 생각하는것 처럼 어려운일이 아니다
꼭 전도훈련을 받아야 하는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성경에 나온대로 “매우 쉬운 일이다”
그리고 결과는 하나님에 맏기면 된다

그리고 이사야 49:6 말씀이 얼마나 위대한줄 나중에 알았다
신학을 하신분들은 금방아시겠지만
이 말씀을 랍비들은 메시야가 온다는 말씀으로 해석하는데
“이방의 빛을 삼아”  구원을 베푸다는  구절을 해석하지 못한다고 한다
바로 이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뿐만아니라 이방인인 나에게도 구을 베풀어서
이 머나먼 미국땅에 와서 앞집의 유대인에게 전도를 하게 하셨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다시 그 말씀을 묵상해 본다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출처: USA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

월든 호숫가에서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월든(Walden/1854년)과 1849년 멕시코전쟁과 노예제 반대운동, 그리고 인두세 납부 거부로 투옥당한 경험을 바탕으로 "시민 불복종 (On the Duty of Civil Disobendience)"을 저술했는데, 후일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터킹 목사는 이 책에 영향을 받아 비폭력 저항운동을 했다고 고백했으며 현대 시민운동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타계한지 160여년이 지났지만....오늘날에도 미국 최고의 사상가로 꼽히고 있고 19세기 전 세계의 많은 시인묵객들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대표적인 문학가로 평가받고 있다.

1922년, 소로우의 숨결이 남아 있는 월든호수는 관광지가 되었고 이 곳을 Walden Pond State Reservation으로 지정하고 숲과 자연을 즐기며 호수에서 수영과 보트, 낚시, 등을 할 수 있게 하였다.

하버드대가 있는 교육의 도시 보스톤에서 30~40분 거리에 있는 메사츄세츠 주의 콩코드에 자리하고 있는 Walden Pond...

데이빗 소로우의 체취가 아직도 배어날 것 같은 월든 호수 -

대중 보다는 개인을...
이성 보다는 감성을...
사회 보다는 자연을 사랑했던 소로우...

생각보다 호수가 작아서 Lake라고 하지 않고 Pond 라고 불리는 이 곳.....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정신이 흐르고 있는 월든 호수

 

 

232E344753A731B518FF6B

호숫가 산책로에서 바라본 월든 호수

- 맑은 영혼을 가졌던 소로우 처럼 호숫물이 너무도 맑다.

 

 

240C6A4953A731CE162EFB

역사적 보존지구로 선정하여 관리되고 있는 월든호수

 

 

231FD84753A731AD270F0C

 산책로 중간에 마련되어 있는 피크닉 공간들...

 

 

2421ED4753A731B924D24F

월든 호수를 끼고 호젓하게 나있는 산책로

-소로우가 매일 걸으며 사색에 잠기던 아주 자그마한 소로(小路)였던 이 길은 지금

크게 넓어져 있고 안전을 위해 나무로 된 가드레일이 설치되어 있다.

 

 

261FE94753A731BD27DFC3

 월든호수내의 안내판

- 다른 공원처럼 호수 곳곳에 피크닉 장소들이 마련되어 있다. 

 

 

210AC54953A731D218FC92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월든 호수

-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수영을 하거나 피크닉을 하는 유원지가 되어 있음이 안타깝다.

 

※ 소로우의 정신을 따르는 <자연주의자>들이 현재와 같은 호수의 유원지화를

      오히려 옹호하고 있다고 하니 다소 의외이다. 아마도 소로우의 정신이 흐르는

호수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즐기고 사색을 하면서  소로우를  생각하고

기리기를 바라며 그 정신을 이어받기를 원해서 일듯 하다.

 

 

26152D4953A731D70F3427

 황혼이 깔리기 시작하는 평일 오후인데도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수영을 즐기고 있다.

 

 

235A945053A73C2C08210A

산책로 풍경

- 소로우가 깊은 사색에 빠져 걷던 호젓한 이 길이 이제는 벌거 벗고 다니는

많은 수영객들로 붐비고, 한 때의 기분전환을 위한 유희와 오락,

그리고 휴식을 위한 나들이 길이 되어 있음이 마음 아프다.

 

 

276A434853A731E214AE99

월든호수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는 아이들...

- 소로우의 고뇌와 사색의 깊이를 모르는 아이들이 비누 방울에 환호하고 있다.

 

 

22175010_1.jpg

바람에 이는 나뭇잎 하나도 예사롭게 보지 않았던 소로우...

곳곳에 소로우의 숨결이 배어 있다.

 

2766CD4253A73E120BC794

깊은 사색이 내려 앉는 월든 호수 - 언제나 내 마음의 고향이다.




거짓 선지자가 전하는 메시지의 특징 / 로이드존스

 

 

"거짓 선지자는 그의 복음에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거짓 선지자는 좁은 문을 들어가며 좁을 길을 걸어가야 할 절대 필연성을 강조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나아가서 그는 거짓 선지자들이 설교 시에 침묵하는 진리들이 무엇인지를 폭로하였는데 그것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어떤 모양으로 정체를 드러내는가?
거짓 선지자의 메시지에는 말씀이 거의 없다.
그의 메시지는 항상 모호하고 일반적인 성격을 띤다.
그의 메시지는 교리를 특수화하여 하나하나 상세하게 열거하지 않는다.
그는 교리적 설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설교는 항상 매우 모호하다."

"성경 말씀은 귀에 걸면 귀걸이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말이 나오게 된 이유는 거짓 선지자들의 일관성이 없고 모호한 설교 덕분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설혹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성경을 조화있게
그리고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는 하늘의 빛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뱀의 혀가 둘로 갈라져있는 것처럼 한 입으로 두 말을 합니다.
어떤 때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설교하다가
어떤 때는 "행함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혼란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의 설교의 특징입니다.
이와 같은 전제를 말한 후 로이드 존스는 짓 선지자의 메시지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꼽았습니다.

 

1)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결과 의와 공의와 진노에 대해서는 매우 드물게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말하나 그 밖의 것들은 말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들이 모두 관계를 맺고 있는 이 거룩하고 존귀한 분에 대해 설교할 때 아무도 두려워 떨게 하는 일이 없다.
그는 대체로 하나님에 대한 진리 하나만을 강조하는데 곧 사랑이다." 

 

2) 거짓 선지자는 심판과 지옥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가 결코 강조하지 않는 또 다른 교리는 후 심판과 버림받은 자들의 영원한 운명이다.
유감스럽게도 지난 반세기동안 최후 심판에 대한 설교는 많지 않았다.
그렇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와 같은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는다." 

 

3) "거짓 선지자는 죄의 사악성을 강조하지 않는다.

죄가 그리 중대한 문제가 아니라고 암시한다.
그는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4) 거짓 선지자는 회개의 필요성에 대해 침묵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회개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의 교훈에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매우 큰문과 천국으로 인도하는 매우 넓은 길이 있다.
여러분은 자신의 죄성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진다.
여러분의 마음이 검은 것을 심각하게 여길 필요가 없어진다.
여러분은 그저 믿는다고 하기만 하면 다.

하지만 청교도나 웨슬레나 조지 휫필드나 기타 위인들의 전도는 전혀 달랐다.
그들의 전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심판을 두려워하게 했고, 가끔 영혼들로 하여금 며칠 , 몇 주, 몇 개월간이나 고뇌하게 했다."

 

5) 거짓 선지자는 성결한 생활에 대해 침묵합니다.

" 거짓 선지자는 산상수훈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산상설교를 실천하지 않고 이 설교에 귀만 기울인다면 우리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거짓된 가르침은 참된 성결, 성경적 성결에 관심이 없다. "

 

6) 거짓 선지자는 자기 기만의 위험성에 대해 침묵합니다.

" 거짓 선지자들은 안이한 구원과 안이한 생활 유형을 항상 제안한다. 그들은 자기 검토를 방해한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검토해 보라고 말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항상 ' 예수를 바라봐야 ' 하고 여러분의 죄를 찾기 위해 자신을 보면 안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을 검토하고 '자신을 시험해보고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라! (고후13:5)고 한 산상설교의 이 마지막 대목을 똑바로 보라는 권면을 훼방놓는다

그들은 청교도들과 18세기의 위대한 지도자들 곧 웨슬리나 휫필드,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들이 가르친 가기 검토와 죄의 의제 과정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안이한 구원과 안이한 기독교 생활을 추천한다. " 

이것이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정통 교단에 속해있고 아무리 큰 교회를 목회 한다 할지라도 이와 같은 것을 빠트리고 설교하는 자는 누구든 거짓 선지자입니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믿음은 중생의 결과이다 / 월터 J. 챈트리 ('잃어버린 복음'에서 발췌)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에 의해 다시 살아난 인간 마음의 행동이다.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8-10)

 

하나님께서 부자 청년 안에 새 영을 창조하실 때, 그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그의 책임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 성향을 주시지 않는다면, 즉 하나님이 자비 가운데 그에게 새 마음을 주시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영이 이루시는 거듭남, 즉 중생의 결과이다.

 

회개도 생명의 선물을 받은 사람의 행동이다. 그러므로 회개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5:31)라고 선포했다. 만일 부자청년이 회개했다면 죄 사함을 얻었을 것인데, 그럴 경우 회개 자체가 구주의 선물이다. 죄인이 회개하기 위해서는 주권적 하나님께서 그의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셔야 한다(겔36:26 참조).

 

부자 청년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막10:17)라고 물었다. 예수님은 그에게 그의 재산을 전부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자신을 따르라고 분명히 대답하셨다. 예수님의 대답을 들은 부자 청년은 자기가 영생을 얻기 위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그것은 그가 순종하지 못하도록 주님이 막으셨기 때문이 아니다.(주님은 그렇게 하도록 그에게 촉구하셨다). 그의 외부에 있는 어떤 다른 힘이 그의 회개와 믿음을 방해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의 회개와 믿음을 불가능하게 만든 것은 그의 악한 마음이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막10:21)라고 명령하는 것은 코끼리에게 하늘을 날라고 명령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은 굶주린 사자에게 눈앞에 있는 양을 잡아먹는 대신 시금치를 먹으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다. 부자 청년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슬픈 기색을 띤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가 주님의 말씀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자 청년이 떠난 다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었다.

 

"그렇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저 청년이 내 명령대로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피조물의 본성을 바꾸실 수 있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듯이 하나님은 피조물을 만드셨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어 자신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꾸셔야 그들이 회개하고 믿을 수 있다.

 

예수님은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3:7)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온전히 의지하도록 만든다. 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가능성은 그들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우리 구주(救主)의 교훈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사실 주님은 죽은 사람에게 숨을 쉬고 걸으라고 말씀하신것이다. 부자 청년은 죄와 허물 가운데 죽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주께서 그에게 탐욕의 무덤에서 걸어 나오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그에게 도덕적 생명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그에게 재물을 버리고 자신을 섬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날 복음을 전할 때 주님처럼 우리도 사람들에게 분명히 요구해야 한다.

 

우리가 전도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하고 간청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은혜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그들은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열매를 바라는 소망을 주님 안에 두어야 한다. 전도 대상자의 의지 또는 여타의 정신적 능력에 두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복음전도라는 미련한 것으로 죽은 죄인들을 다시 살리기를 기뻐하신다(고전1:21 참조).

 

 

월터 J. 챈트리의 '잃어버린 복음'에서 발췌(137-141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1. 미국 그랜드 캐년
g1.jpg
  
길이 446킬로미터 , 넓이 6~30킬로미터, 깊이 1600미터의 지구별에서 가장 큰 세계 최대의 협곡 그랜드 캐년. 영국 BBC방송 선정 죽기 전에 가봐야 할 곳 1위이자 미국 사람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관광지 1위.

그랜드 캐년은 더 이상 말이 필요없는 세계적인 관광지이자 미국의 상징이다. 미국 애리조나주 북부의 콜로라도강이 흐르던 곳에 콜로라도 고원의 일부가 융기하여 생긴 대협곡으로 계곡 벽에는 시생대 이후7억 년 동안의 지구 모습을 볼 수 있다. 장구한지구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살아있는 지질학의 교과서라 할 수 있다.


2. 남태평양 프렌치폴리네시아의 보라보라섬
g2.jpg

세상에 그 어떤 자연이 이리도 아름다울 수가 있으랴… 태평양의 진주, 몰디브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를 가진 그야말로 설명하기조차 어려운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보라보라섬.

보라보라는 남태평양 중부 폴리네시아 소시에테제도의 타히티섬 북서쪽에 있는 섬으로 길이 10킬로미터 넓이4킬로미터의 산호섬이다.
남태평양의 정열적인 태양빛을 받은 바다의 투명함은 눈을 믿지않게 할 뿐만 아니라 보이는 그 모든 풍경이 엽서다. 5불생활자들이 로또에 당첨된다면 퍼스트클래스를 타고 반드시 가야 할 곳이 아닐까…  


3.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의 페리토모레노 빙하
g3.jpg

아르헨티나 산타크루스주의 세계자연유산인 로스 글라시아레스 국립공원에는 남미여행의 하이라이트가 있다. 발견자를 기리어 그의 이름을 딴 페리토 모레노 빙하이다. 페리토 모레노 빙하는 극지방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가장 넓은 빙원인 파타고니아 빙원의 일부로 넓이가 4,830미터이고, 높이는 61미터이다.

로스 글라시아레스 국립공원 내에는 대략 200 여개의 작은 빙하 외에도 47개의 주요 빙하가 있다. 웁살라 빙하와 비에드마 빙하는 페리토모레노 빙하보다 면적이 넓다.


4. 세계 양대폭포 이과수와 빅토리아
g4.jpg

#세계최대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스펙타클의 결정판 이과수 폭포. 넓이 4.5킬로미터, 낙차 100미터, 초당 방류량 13,000톤으로 그 규모가 빅토리아와 나이아가라 폭포를 합친 것 보다 크다.

이 엄청난 물의 양은 조용한 밤에는 2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도 들린다.
말 그대로 ‘엄청나게 거대한 물’이라는 현지어 뜻인 이과수가 이름이 된 것이다. 폭포의 80퍼센트는 아르헨티나쪽에 속해 있지만 브라질 쪽에서 감상하는 모습이 더욱 좋다. 총 274개의 폭포 중 ‘악마의 목구멍’이라 불리는 곳이 가장 인기 있다.

g4-1.jpg

#현지어로 '굉음을 내는 연기'라는 뜻의 '모시오아 투냐'라 불리는 빅토리아 폭포.남 아프리카 짐바브웨와 잠비아 공화국의 경계를 흐르는 세계 3대 폭포중의 하나이다.
길이 1.7킬로미터, 낙차 110미터, 초당 방류량 8000톤. 그 모든 것이 메머드 급이다. 1855년 데이비드 리빙스톤 박사에 의해 최초로 발견되어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 폭포라고 했다.

거대한 물줄기와 천길 낭떠러지가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어내는 폭포는 '악마의 폭포'라고도 불린다.


5. 볼리비아 우유니의 소금사막
g5.jpg

페루 마추피추의 잉카 유적과 함께 남미 여행에서 모든 여행자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 바로 볼리비아 우유니의 소금 사막이다. 우유니는 포토시주 서쪽 해발 3,650미터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소금평지로 특히, 우기 때는 푸른 하늘과 구름이 반사되어 하늘과 땅을 구분하기가 힘들만큼 아름다운 호수로 변한다.
또한 밤이 되면 세상의 모든 별이 이 호수에 담겨져 장관을 이룬다.

소금사막은 약 100억 톤의 소금이 추정되는데 실질적으로 추출되는 양은 매년 25,000톤에 불과하니 얼마나대단한 규모인지 짐작이 가능하다.


6. 아이슬란드의 오로라
g6.jpg

대서양의 북극해에 홀로 떠있는 섬나라 아이슬란드는 여름 여행지로도 유명하지만 또한 겨울이 되면 색다른 볼 거리로도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바로 오로라다. 이 단어 하나만으로도 여행자들은 가슴 설래인다.

오로라는 새벽이란 뜻의 라틴어로, 프랑스의 과학자가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여명의 신 ‘에오스’ 이름을 딴 것이다. 지구의 북반구와 남반구에서 볼 수 있는데 아이슬란드에서는 오로라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청녹색의 커튼 형을 볼 수 있다.

오로라는 태양에서 방출된 대전입자의 일부가 지구 자기장에 이끌려 대기로 진입하면서 공기분자와 반응하여 빛을 내는 현상이다.


7. 캐나다 밴프 국립공원
g7.jpg

세상의 아름다운 호수는 다 모여있는 곳. BBC방송 선정 죽기 전에 가봐야 할 50곳 중 11위.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선정한 세계 10대 절경 중의 한곳으로 선정된 루이스 호수가 있는 곳. 바로 캐나디안 로키의 핵심인 밴프 국립공원이다.

1885년 캐나다 최초의 국립공원이 되었다.
만년설산과 푸른 숲, 빙하가 녹아 만들어진 에메랄드 빛 호수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특히 인기 있는 곳은 루이스 호수로 본래의이름은 에메랄드 호수 였는데 후에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딸 이름을 따서 루이스라 바꾸었다.


8. 노르웨이 송네 피오르드
g8.jpg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끝에 위치한 노르웨이. 이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길고 깊으며 아름다운 피오르드인 송네 피오르드가 있다. 구불구불한 송네 피오르드를 일직선으로 펼치면 지구의 반 바퀴를 돈다. 깎아지는 절벽과 산 허리를 돌 때마다 동화 속 같은 새로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빙하의 침식을 받은 급사면이 직접 바다에 빠져 있기 때문에 수심이 깊은 곳은 무려 1,300미터에 이른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작품에 그저 숙연해질 뿐이다.
피오르드란 빙하기 이후 해수면이 상승하여 빙하가 파놓은 계곡에 바닷물이 들어가 만들어진 좁고 긴 모양의 협곡을 말한다.  


9. 러시아 캄차카 반도
g9.jpg

g9-1.jpg

알래스카, 뉴질랜드, 북유럽, 스위스 알프스등 전 세계의 아름다움을 모두 한 곳에 모아 놓은 곳. 태고의 자연을 그대로 간직한 세계 최대의 화산지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곰이 서식하는 불곰의 고향이자 세계최대의 연어 회귀지역. 온갖 동식물이 존재하는 자연의 보고. 이 모든 것이러시아 동쪽 끝에 위치한 세계자연유산 캄차카반도의 모습이다.

우리나라와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가장 생소한 곳이기도 하다. 300여 개의 화산 중에 30여 개가 활화산으로 아직도 용암이 끓고 있다.  


10. 모로코 사하라사막
g10.jpg


아랍어로 ‘불모지’를 뜻하는 말에서 유래된 사하라 사막은 북 아프리카 일대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의 사막이다.
대서양에서 나일강에 이르기 까지 동서방향으로 5,600킬로미터 남북으로 1,700킬로미터에 이른다.

세계에서 가장 광대하고 건조한 지역으로 전 세계 사막면적의 26퍼센트를 차지한다.
서사하라,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모르타니아, 니제르, 수단, 차드등이 사하라와 접해있다.
매년 3월 말이면 모로코에서 사하라 사막 마라톤 대회가 7일간 열리는데 한국에서도 매년 일반인들이 참가하여 완주하고 있다.


11. 그린란드 일루리사트 아이스피오르드
g11.jpg

2004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된 그린란드의 일루리사트 아이스피오르드는 북극 대자연의 경이를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린란드 여행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으로 북극 빙하의 모태이며 남극 밖에서는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빙하이다.

굳이 빙하만을 보는게 아니더라도 일루리사트에서는 사냥, 썰매, 트래킹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고,
재미있는 추위 박물관도 있다. 일루리사트는 ‘빙산’이라는 뜻의 이누이트어이다.

이누이트는 우리가 흔히 에스키모라 부르는 사람들의 정식 명칭이다.
그린란드는 덴마크에선 연중 비행기가 운행하고 아이슬란드에서는 여름 두 달간 운행한다.


12. 홍콩 야경
g12.jpg

자연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 구조물을 통해서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
홍콩 야경에 대해서는 굳이 부연 설명이 없어도 다 아실 듯~



 

 

 

 

 

 

 

 

 

 

 

 

 

'웃으며 삽시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기 싫은 사람.ㅋㅋ  (0) 2014.08.17
어느 것이 본모습이야? ㅋㅋ  (0) 2014.07.25
개 팔자가 상 팔자...ㅋㅋ  (0) 2014.07.21
천국 시계  (0) 2014.07.16
신내림  (0) 2014.07.06
제2강 초임목사와 부목사의 성공 비법

장달윤목사

위쪽의 2. 나의 목회 타이틀 방어 철학

목회란 부르심과 사명감에 의해 출발했지만 그 일은 너무도 힘들고 어려운 십자가의 길이다. 그 길은 고통과 분노와 모욕과 인내와 눈물로 점철된 길이며, 교회 평화와 단합과 성장이란 그것의 결정체이다. 이 길을 걷지 않고는 목회는 성립될 수 없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목회에 관한 복잡하고 광범위한 두툼한 책들이 많이 있지만 필자는 다음 10가지로 목회 관을 정리, 압축한 방어 목회철학을 나의 목회에 나침반을 삼는다.

1) 목회는 끓어오르는 격정적(passionate) 분노와 활화산처럼 용솟음치는 폭발도 억제하고 겟세마네 예수님의 눈물에 동참하는 고통의 직업이다.

2) 목회는 원리와 원칙, 정직과 진실의 삶에 미세한 틈도 보이면 안 되는 직업이다.

3) 목회는 사고 미연에 멀리, 넓게 보는 통찰력이 있어야 하고, 유비무환, 육하원칙에 의해 완벽하게 일을 진행하여야 하는 직업이다.

4) 목회는 고지식하고 독단적인 사고를 초월하여 언제나 상황에 따라 적응하고 즉흥적으로 두 마음을 불변의 한 얼굴로 분장하여 거룩한 모습으로 연기할 수 있어야 하는 직업이다.

5) 목회는 신본주의의 신의 얼굴을 하고 사람중심의 인본주의 사람의 얼굴을 하고 목회를 하는 섬기는 종의 직업이다.

6) 목회는 자신을 녹여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이 되어야 하고, 자신을 불태워 빛을 발하는 촛불이여야 하는 직업이다.

7) 목회는 겸손히 썩는 송장이 되어야 장수하고 혈기왕성하고 고고한 목회자는 단명 하는 직업이다.

8) 목회는 10년 동안 들은 고언(苦言)을 한마디로 정리, 분해하여 10분 만에 사과를 받아낼 수 있는 지혜와 능력과 계산을 가진 자의 직업이다.

9) 목회는 많은 펀치를 맞고도 통증이나 비틀거림이나 충혈을 보이지 않고, 한방의 KO 펀치 파워를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직업이다.

10) 목회는 피를 말리는 고통으로 100번을 생각하며 분노를 감내해야 하고 100번을 생각하여 농축한 핵을 고체(solid) 연료로 저장해 두어야 하는 직업이다.


목회는 이상과 같은 직업임을 알고 이상과 같이 대처하는 것이 나의 목회 타이틀 방어 철학이다.


3. 나의 3인칭 목회철학

정치는 강자를 붙잡아야 승산이 있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줄서기를 좋아한다. 유구한 역사를 보라, 강자 편에 서고 강자와 동맹하고 강자의 비위를 잘 맞추는 자가 승리한다. 그리하여 지금도 정치판을 보면 자기의 정치 신조를 접어두고 강자 편에 줄서기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야 승리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역사의 증거이다. 김영삼은 민정 당을 붙잡고 대권을 쟁취하다.

1000년 역사의 신라는 굴욕과 수모를 무릅쓰고 신라보다 짧은 역사를 가진 고려왕건에게 그냥 나라를 바쳤다. 그것이 죽지 않고 사는 길이고 결국 승자의 길이기에 경순왕은 현명한 단안을 내린 것이다. 지금에 와서 고려가 승자인가? 신라가 승자인가? 패자없는 공동 승자가 아닌가? 김정일도 죽지 않고 현명하게 역사 속에 길이 살아남는 지도자가 되려면 신라의 경순왕처럼 하루빨리 그냥 한국에 바치는 길이 백성을 덜 고생시키고 죽지 않고 공동 승리하는 길인데 저렇게 버티고 승산 없는 몸부림을 치고 있다. 결과는 이미 드러나 있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를 거울삼아 더 훌륭한 역사를 만들려고 하는 데 있다. 정치는 이상이 아니고 현실이다. 미국은 초강대국으로서 부도덕한 나라이다. 그러나 21세기 전반기에 누구도 그의 눈 밖에 나면 덕 될 일이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하는 수 없이 굴욕 외교를 하면서 지금을 살아가는 것이다.

1) 교회 행정도 강자를 중심하여 진행한다.

위로하고 돕는 것은 약자 편에 서서 약자를 위로하여야 하고 행정은 강자를 중심하여 펼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안에는 당회가 있다. 당회 안에도 강자와 약자가 있다. 초단 수 목회자는 손에 잘 잡히고 내 품안에 들어오는 약자를 잡고 일하려 하는데 문제가 발생한다. 고단수 목회자는 잘 잡히지 않는 그를 잡고 일을 시작한다. 그를 인정과 사랑의 불에 달구어 녹여 내 손아귀에 맞게 만들어 잡고 교회 행정을 펼쳐야 교회 공동체가 평탄하게 갈 수 있다. 아마추어들은 쉽게 잡히는 그를 잡고 일을 하다가 실패하게 되는데 실패의 원인이 거기에 있음을 실패 후 은퇴 할 때 쯤 되면 알게 되어 후회 한다. 보이지 않게 강자를 중심하여 행정을 집행한다.

2)교회 공동체의 강자는 누구인가?

교회는 자율적으로 회집된 공동체이다. 그런고로 강자들이 여럿이 있을 수 있는데 전부잡고 가야한다. 어떤 교회는 한 사람만 있고 어떤 교회는 둘도 있고 어떤 교회는 셋도 있으나 대체로 한 사람 아니면 두 사람이다. 그들이 강자이고 그 외에는 줄서는 들러리에 불과하다. 강자가 한명이면 그 한명만 잡으면 되고 둘이면 둘만 잡으면 그 외에 인은 전부 따라온다. 나무도 두세 가지로 벌어져 큰 둥치를 이룬 것도 있지 않은가? 그런 나무들에 많은 가지들은 큰 중심가지에 소리 없이 붙어있으며 그 가지들은 모두가 들러리에 불과하다. 동물들도 소리 없이 왕초를 따라 뭉친다. 그렇다면 교회공동체 안에 강자는 누구인가?

(1) 선임 목회자 배척에 전과자 선수 그가 강자이다.

(2)맥이 없는 것같이 보여도 제일 먼저 기득권(장로 된 자)을 획득하고 수석이란 자의식을 가진 그가 강자이다.

(3) 나의 초빙에 주격 역할을 하였고 맨 먼저 식사 대접하는 그가 강자 이다.

(4) 돈을 많이 갖고 많이 내는 그도 강자이다.

(5)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그도 강자이다.

(6) 교만한 건덕 지를 가진 그도 강자이다.

(7) 권모술수를 잘하는 그도 강자이다.

(8) 할 말 다하는 그도 강자이다.

(9) 자기의 안일만을 위한 기회주의자 이완용도 강자이다.

(10) 그 W 중에 그 W도 강자이고, 그 M의 그 W도 강자이다.


3) 강자 그를 어떻게 다를 것인가?

(1) 강자 중 王 中 王 그을 골라 타고 달린다.

(2) 강자 그를 여왕벌을 만든다.

(3) 강자 그를 회장으로 모시고 나는 월급 사장으로 처신한다.

(4)강자 그를 중앙 기둥으로 세우고 밉더라도 건축위원장을 시킨다.

(5)강자 그를 경호 실장으로 임명하고 잘한다고 공로패를 증여한다.

(6)강자 그를 수석 비서로 옆에 두고 중요한 일은 극비 그와 상의한다.

(7) 강자 그의 意思를 설득하다 안 되면 나의생각보다 우선한다.

(8) 강자 그를 근위 대장을 삼고 훈장을 수여한다.

(9)강자 그를 총참모장으로 앉히고 별을 많이 달아주고 치켜세워준다.

(10)강자 그를 소외시키면 역모 자가 되고 반란, 즉 쿠테타를 일으킨다. 고로 항상 보이지 않게 우대하고 주시하여야한다.

강자 그는 끝나는 날까지 경계의 대상이며 그가 돌변하는 날 목회자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 비굴하게 느껴질 런지 몰라도 그것이 목회인 것을 어찌하랴


USA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


   

한국교회 이단연구가 및 단체들이 1월 10일 서울 신길동 대림감리교회에서 ‘호교단체 신년하례회 및 세미나’를 갖고 다락방, 박윤식, 인터콥 등의 이단성에 대해 토론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최근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 홍재철 목사)의 이단옹호 행각이 도를 넘었다는 데 공감하고, 류광수 다락방의 이단성에 대해 집중 논의했다. 최근 한기총이 다락방에 대해 사실상 이단해제 수순을 밟는 것과 달리 이단연구가들은 류광수 목사의 이단성을 재확인한 것이다.

‘다락방, 왜 이단이라 하는가?’라는 논문을 발표한 한창덕 목사(한교연 바른신앙수호위원회 전문위원)는 “복음의 비밀, 그리스도의 비밀, 영접의 비밀, 언약의 비밀, 삼위일체의 비밀, 임마누엘의 비밀 등 소위 다락방의 ‘비밀 시리즈’ 교리를 면밀히 살펴보면 그 이단성이 다 드러난다”며 “다락방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정통교회의 ‘그리스도’와 다른 개념이며, 다락방에서 말하는 ‘복음’은 정통교회의 그것과 ‘다른 복음’”이라고 지적했다.

다락방에서는 김기동 베뢰아 귀신론과 같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불행, 질병, 가난, 사건·사고, 재앙 등이 다 사단 때문이라고 하며, 사단만 멸망시켜버리면 그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한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단을 멸해버리셨으니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고 하면서 구원파와 같은 논리를 전개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다락방이 베뢰아와 흡사하다는 말을 듣게 된 이유라는 게 한 목사의 지적이다.

“이 주장들만 보아도 류광수 목사가 얼마나 베뢰아 사상에 찌들어 있는지 알 수가 있다. 그런데 그는 베뢰아 사상과 같은 주장을 하면서 귀신을 쫓아내는 성락교회의 김기동 목사와 같은 축사를 하는 대신에 그 자리에 ‘그리스도’를 넣고 그리스도가 현실적인 모든 문제를 해결했으므로 그런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다락방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사단을 꺽은 왕’으로서의 왕이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로서의 선지자이며, ‘인생의 모든 저주와 실패를 전부 해방시켜버리신 분’으로서의 제사장이다.”

   
▲ 한창덕 목사

그러면서 한 목사는 △ 베뢰아 귀신론과 동일한 ‘사탄신학’ △ 예수님의 성육신과 성령의 내주를 같은 것으로 보는 ‘다른 복음’ △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등 정통교회 신앙고백과 ‘다른 그리스도론’ △ 번영신학 △ 신화사상 등을 류광수 씨의 이단성으로 지적했다.

한 목사는 특히 “류광수 목사는 정통교회와 다른 그리스도를 주장하면서 성령의 내주로 인한 성도들의 거듭남을 예수님의 성육신과 같은 개념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지방교회와 같은 신화사상이 되어 ‘천사 동원권’, ‘사단 결박권’ 등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각종 권세를 사람이 하게 된다는 그릇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락방에서는 자기들만의 독특한 그리스도의 삼중직인 ‘그리스도의 비밀’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을 ‘복음의 비밀’이라 하며, 그런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영접의 비밀’이라 하고, 성령의 내주를 성육신과 같은 의미에서 ‘임마누엘의 비밀’이라 하기 때문에 다락방의 이와 같은 주장은 ‘사람이 하나님 된다’라고 하는 지방교회의 ‘신화사상’과 같은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다락방이 이런 신화사상에 근거해 ‘천사 동원권’, ‘사단 결박권’ 등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것을 자기들의 주장과 같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 사람이 하게 된다고 한 이유이다. 그러므로 다락방은 과거에도 그렇지만 지금도 확실히 이단이다.”

한편, 세미나에서는 박윤식의 이단성에 대해 이영호 목사(기장 이대위원장)가, 인터콥의 이단성에 대해 이인규 권사(평신도이단대책협의회 대표)가 각각 논문을 발표했다. 이외에도 세미나에 앞서 진행된 예배에서 참석자들은 이단사이비 척결을 위한 기도회 시간을 가졌다.
출처: 교회와 신앙
전정희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