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 재림예수는 이미 ‘흰 구름’ 타고 다시 왔다” - 중국이단 ‘동방번개’, 대대적 광고로 국내활동 개시

“女 재림예수는 이미 ‘흰 구름’ 타고 다시 왔다”
중국이단 ‘동방번개’, 대대적 광고로 국내활동 개시
교회와 신앙 2013년 02월 06일 (수) 23:04:10 전정희

지난해 12월 중국당국은 ‘동방번개’라는 사교집단의 신도 1천여 명을 체포했다. ‘12월 21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종말론에 편승해 사회불안을 부추겼다’는 이유에서다. 중국당국이 특정 집단을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1천명 이상을 체포한 것은 1999년 파룬궁(法輪大法, 창교자 리홍즈) 사건 이후 처음이다. 그렇다면, 이들 사교집단의 국내 영향은 어떨까? 이미 10년 전에 한국에 유입된 파룬궁은 그 영향력이 어느 정도 미미한 편이다. 그러나 최근 10년 동안 중국에서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동방번개는 차원이 다르다. 강력한 카리스마, 뚜렷한 성경해석, 철저한 위장접근, 기성종단 침투…. 파룬궁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동방번개가 앞으로 한국교회에 심각한 도전이 되지 않을까 우려되는 점이다. 동방번개는 흔히 전능교, 동방섬전, 국도복음, 칠영파, 재림구주파, 여그리스도파, 전능한하나님파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만 본 사이트 <교회와신앙>(www.amennews.com)에서는 “동방번개”라는 이름으로 통일하기로 한다. <편집자주>

▲ 2013년 1월 23일자 <조선일보>에 게재된 동방번개 광고

중국의 ‘동방번개’(東方闪电, 똥팡싼띠엔)가 한국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교회’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개시했다. 산간벽지나 대도시를 막론하고 중국교회들을 초토화시키고 있다는 바로 그 중국산 자생이단이다. 2013년 1월 12일자 <조선일보>를 시작으로 <중앙일보>, <동아일보>, <한국경제>, <매일경제> 등 주요 일간지와 무가지 신문들을 통해 대대적으로 광고를 쏟아 붓고 있다. 제목은 “예수님의 재림-전능하신 하나님이 국도(國度)시대에 발표하신 말씀”이다.

내용은 기가 막히다. 두 번째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중국에 재림했으며, 율법시대와 은혜시대를 끝내고 마지막 ‘국도(國度)시대’를 열었다는 것.

동방번개의 주요 경전인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남>(話在肉身顯現)에서 발췌했다는 이들 광고에는 “전능한 하나님은 중국에 은밀히 강림했다”, “‘구주’는 이미 ‘흰 구름’ 타고 다시 돌아왔다”, “말세의 재림예수-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사람에게 영생의 도를 베풀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나타남은 새로운 시대를 가져왔다”는 등 황당한 주장들이 가득하다.

하나님의 두 번째 성육신(成肉身)은 여성!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재림예수-전능하신 하나님’의 새로운 말씀 즉, 하나님이 두 번째 성육신 하셨다는 국도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영생이나 구원은 없다. 하나님이 율법시대에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은혜시대에는 ‘예수’이름으로 다스렸지만, 국도시대에는 ‘말세의 그리스도-전능하신 하나님’ 이름으로 영생의 도를 베풀기 때문이다. 특이한 건, 국도시대에 성육신한 ‘재림예수-전능하신 하나님’이 여자(女子)라는 것이다.

이들은 그동안 재림예수가 여자로 왔다는 자신들의 교리에 대해 많은 공격을 받은 모양이다. 인터넷 홍보사이트 ‘전능하신 하나님교회 말세의 방주’(http://kr.kingdomsalvation.org)에 이를 변호하는 글이 많은 걸 보면 그렇다.

▲ 동방번개 인터넷 홍보사이트 ‘전능하신 하나님교회 말세의 방주’(http://kr.kingdomsalvation.org), <국도복음 간증문답>, 41번 중에서

“우리는 첫 번째 도성육신이 남성이라고 한 예언이 있다 하여 하나님의 두 번째 도성육신이 여성인 것도 예언이 있어야 한다고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성경이 큰가 아니면 하나님이 큰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역사함에 있어서 반드시 성경에 근거해야 하는가? 설마 하나님 자신은 성경을 벗어날 어떠한 권리도 없단 말인가? 하나님이 성경을 떠나서 따로 역사할 수 없단 말인가?’ …하나님의 역사는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습니다”(<국도복음 간증문답>, 41번).

▲ 동방번개 인터넷 홍보사이트 ‘전능하신 하나님교회 말세의 방주’(http://kr.kingdomsalvation.org), <국도복음 간증문답>, 41번 중에서

“오늘 ‘하나님의 두 번째 도성육신이 여성’이란 이 사실에 직면하여…줄곧 성경에서 예언의 근거를 찾는다면, 우리는 그 당시 유대 바리새인의 착오를 아주 쉽게 재범할 것입니다. …먼저 자기의 견해를 버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와 말씀을 고찰해 봅시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바로 말세에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임을 발견할 것이고 또 하나님의 이번 도성육신이 여성인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국도복음 간증문답>, 41번).

재림예수가 중국 땅으로 와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 동방번개 인터넷 홍보사이트 ‘전능하신 하나님교회 말세의 방주’(http://kr.kingdomsalvation.org), <국도복음 간증문답>, 53번 중에서

“우리가 다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번에 말씀이 육신 되어 중국 사람의 형상을 취하셨다 하여 그분이 바로 되돌아온 예수님임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재차 나타나시는 형상이 꼭 예수님의 모양이어야 한다고 규정하지 말아야 합니다”(<국도복음 간증문답>, 53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시님 땅에서 한 무리 이기는 자들을 얻는다고 많은 곳에 하나님이 이미 예언한 적이 있는데, …그러므로 하나님의 두 번째 도성육신이 발붙일 곳은 의심할 바 없이 시님 땅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세에 꼭 이방에서, 중국(시님)에서 역사하시기 마련입니다”(<국도복음 간증문답>, 53번).

“하나님께서 첫 번째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유대에서 구속의 사역을 하시기에 유대인의 형상을 취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말씀이 육신 되어 중국에서 정복의 사역을 하시기에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께서는 중국 사람의 형상을 취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치에 맞는 일입니다. 비록 두 차례 도성육신의 겉모습의 형상은 다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과 주 예수님은 한 분의 영이 오신 것이고 육신은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영은 한 분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국도복음 간증문답>, 53번).

다시 말해 이들에게 성경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근거가 자칭 재림예수라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신천지 ‘추수꾼’과 유사한 방법으로 정통교회 접근…중국 전문가들 “폭력성 경고”

문제는 ‘내부정탐·사전공작’ 등 이들이 흡사 신천지(교주 이만희)의 ‘추수꾼 포교방법’을 그대로 옮긴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만큼 간교한 방법으로 정통교회에 접근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마치 신천지처럼 정통교회 내에 신도들을 몰래 파견, 깊숙이 파고들어 연구하게 하고, 욕심을 채워주는 방식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김종구 중국선교사에 따르면, 동방번개의 <사업핸드북>에는 이들의 포교전략에 관한 세칙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책의 1부는 포교대상인 정통교회의 내부 파악에 대한 세칙과 2부는 포교를 위하여 길을 펴는 일, 즉 ‘사전공작’에 관한 세칙으로 나누어서 세밀하고 철저한 전략과 행동지침들을 기록해 놓고 있다. 내부정탐과 사전공작에 대한 이들의 가르침을 보자.

▲ 김종구, <중국교회 이단 동방번개>, p.81

“‘내부정탐’이란 무엇인가? 내부정탐은 각종 관계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여러 교파와 교회의 내부에 침입하여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내부에 침입하여 그들의 호감과 신임을 얻어 그들의 ‘내부 실정’을 파악하며, 이후 다른 사람들을 소개 받아서 만나고, 포교를 위한 간증 등의 사전 공작을 말한다. 교회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기 위한 기초 작업일 수도 있다”(김종구, <중국교회 이단 동방번개>, p.81).

“‘사전공작’이란 무엇인가? 사전공작은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 후 관념을 돌리도록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즉 간증 전에 그들 안에서 하나님의 일과 어긋나는 관념, 생각, 인식을 한 가지씩 바꾸어 그들의 부족해 하는 진리 부분과 하나님과의 모순되는 관점을 해결하여 그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나님의 일을 고찰하게 하는 과정을 ‘사전공작’이라고 한다”(김종구, <중국교회 이단 동방번개>, p.89).

또한 동방번개는 신천지처럼 전도금지 대상이 있다. 이단들, 이지(理智)를 잃은 사람, 지체장애인, 불신자 등이다. 반면 동방번개의 적극접촉 대상자는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갈망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정통교회의 기존 신자가 동방번개의 유일한 포교대상이라는 말이다.

사전공작에 대한 이들의 세부지침 역시 신천지의 그것(소위 ‘밭갈이’)과 흡사하다.

“사전공작 시 서두를 여는 방식: a. 지상교회의 모습, 황량하고 힘이 없고, 집회에 즐거움이 없으며, 성경을 보아도 계시를 얻지 못하는 일 등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d. 매 시대마다 하나님의 마음에 대하여 논한다. …g. 삼단계 공작에 관하여 직접 말할 수 있으나 말세의 일은 직접 말해서는 안 되며 성경구절을 직접 찾아야 한다”(김종구, <중국교회 이단 동방번개>, p.90).

그러면서도 동방번개는 자신들을 반대하는 교단들의 대응에 대해서는 혹독한 말들로 폄훼한다.

“국도복음(國度福音)이 대륙에서 확장될 때, 성령은 일곱 배로 강화된 영으로 각 종파 가운데서 역사하셨고 하나님께서 많은 표적과 기사도 나타내셨습니다. 각 종파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원하는,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적그리스도와 악한 종들의 통제와 가로막음을 뚫고 나와 끝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음성임을 알고 더욱더 많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회귀하는 흐름을 어떠한 세력도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전능하신 하나님과 전능하신 하나님교회에 대하여’, http://kr.kingdomsalvation.org 중에서).

“게다가 각 종파의 비방과 정죄와 공격으로 갑자기 여기저기서 유언비어가 떠돌았고, 각종 헐뜯음과 욕설과 저주가 난무하였는데,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듯이 갖가지 부정적인 선전들이 온 종교계와 사회에 만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참으로 험난한데다가 국도복음의 확장은 더욱 설상가상입니다. 악마들이 통제하고 있는 이러한 귀신 성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전개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을 오르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니, 사탄의 세력이 아무리 난폭하고 아무리 대적하고 반발해도 허사입니다”(‘전능하신 하나님과 전능하신 하나님교회에 대하여’, http://kr.kingdomsalvation.org 중에서).

이미 동방번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국의 이단 전문가들은 이들의 포교방법에 대해 여러 가지 주의를 촉구하고 있어 한국교회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그들은 “색정을 그들의 영향력을 넓혀가는 수단으로 삼아 수많은 여자 청년들을 선발, 파견하여 용모로 사람을 끌어들여서 그들의 조직에 가입시킨다”는 것이다.

▲ 2006년 12월 15일 열린 ‘제4차 한중기독교교류회 포럼’

중국기독교양회 해외연락부 사성 간사가 지난 2006년 제4회 한중기독교교류회 포럼에 참석해 발표한 <중국의 이단>이라는 논문에 따르면, 사람의 호기심과 작은 이익을 탐내는 심리를 이용해 작은 은혜를 베푸는 수단이 동방번개의 가장 명확한 특징이라고 한다.

“유인: 이제껏 속아온 사람들을 확고한 신도로 만들기 위해 그들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장하고, 명예와 이익이 있는 지위를 조건으로 삼아 속아온 신도들을 변함없이 자신들을 따르게 한다. 그들은 교회에 사람을 파견하여 깊숙하게 파고들어 조사하고 상황을 이해하여 속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데, 비위를 맞추는데 있어서 부족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바로 제공해준다.

사성 간사는 특히 이 논문에서 동방번개의 폭력성에 대해 경고한다.

“협박: 이단은 보통 신도들에게 만약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재앙을 만나거나 지옥에 간다고 협박하고 구원 받지 못하라고 저주하는데, 이것은 심리적으로 이단에 들어간 사람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준다. …동방번개는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 저주를 하는 것 외에도 심판, 징벌, 쳐 죽임, 폭언 등으로 사람들을 위협한다. 동방번개는 심지어 진상을 알고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비밀 누설을 막기 위해서 죽이는 방법을 사용하고, 외부의 사람들이 그들의 신도를 제압하려 하면 그들은 또 독살, 상해를 가하는 수단을 사용한다.”

동방번개는 결국 지방교회(호함파)의 분파

그렇다면 동방번개의 자칭 ‘전능하신 하나님’은 과연 누굴까? 동방번개의 창교자는 한국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지방교회(호함파, 呼喊派) 교주 이상수(윗트니스 리, 李常受)를 열광적으로 따르던 조유산(쨔오웨이산, 趙維山)이라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조유산은 1989년 지방교회를 이탈해 ‘영존하는 근본교회’를 세우고 스스로 ‘권력의 주’라고 사칭했으나, 중국당국의 체포명령이 떨어지자 흑룡강성에서 하남성으로 근거지를 옮겨 ‘참 하나님의교회’로 이름을 바꿨다.

조유산은 조직 중에서 일곱 사람을 선출하여 하나님의 화신(化身)이라 하고 전비(全備), 전영(全榮), 전능(全能), 전권(全權), 전지(全知) 등의 이름을 주고, 자신은 전권이라는 이름을 취했다. 그리고 하남성 낙양 사람 등(鄧)씨 성을 가진 여자에게는 ‘전능’이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그녀가 곧 도성육신(道成肉身)하였다 하여 동방번개파의 교주인 ‘여 그리스도 전능한 신(全能的神)’이 되고 그의 어록을 경전으로 삼는 것이다. 그들의 출판물 중에는 ‘동방에서 발출한 번개’(東方發出的閒電)라는 것도 있다.

동방번개파는 현재 중국에만 수백만 명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아시아권에는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일본, 한국에도 들어와 있고, 미국과 캐나다까지 그 세력이 퍼져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동방번개파의 실제적 교주인 조유산은 2001년 미국으로 도주한 상태다.

▲ 동방번개 인터넷 홍보사이트 ‘전능하신 하나님교회 말세의 방주’(http://kr.kingdomsalvation.org)

이제 한국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한 동방번개는 자신들의 사명이 “세계 각국각방에 있는 하나님의 선민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하고, 하나님의 공개적인 나타나심을 간증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전능하신 하나님교회는 바로 하나님께서 중국에서 만든 표본 모형”이라며 “현재는 하나님께서 중국에 은밀히 강림하여 하신 시점(試点) 사역이 이미 끝났고, 하나님의 큰 일이 이미 이루어졌으며, 하나님께서 세계 각국각방을 향하여 곧 공개적으로 나타나실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말세의 그리스도―전능하신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것이고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이 친히 목양하고 인솔하시는 것”이라며 “큰 붉은 용이 미친 듯이 대적할수록, 하나님의 국도는 더욱 신속하게 확장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현재는 동방번개를 핍박하는 중국당국이‘큰 붉은 용’이지만 곧 동방번개를 이단으로 규정하며 제재하는 모든 정통교회를 향해 전쟁을 선포할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한국교계가 어지러운 때일수록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더욱 힘을 모아 교회를 지켜야할 때다.

출처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531

Verena & Georg Popp
 신비로운 자연의 조각품













The Cracked Eggs 금이 간 달걀







Elephant Rocks 코끼리 바위 Moeraki Boulders 모에라키 둥근 돌 뉴질랜드. Koekohe 해변에서 볼수 있는 모에라키 석구라 부르는 거대한 돌구슬. 지름 1m에서 6m가 넘는 것까지 다양한 크기의 돌구슬들이 해변에 늘어서 있는 모습은 정말 보기드문 장관이다. Golden Boulder 금빛의 둥근 돌 Moeraki Coast 모에라키 해안 Truman Track 트루먼 트랙 Scotts Beach 스콧 해변 Moeraki Boulders 모에라키 해변에 자연이 빚어낸 동그란 모양의 바위덩어리들 Away 멀리 항해




Early Dawn 이른 새벽 Coastal Artwork 해안 아트워크 Dentrecasteaux Surf Dentrecasteaux 서핑 Curio Surf 진품 서핑 Surf and Clouds 파도와 구름 Jasmund Dusk Jasmund의 황혼 Milky Waves 우유 같은 파도 Boulder Universe 둥근 돌 우주 Ocean Art 대양의 예술 Nugget Point 너겟 포인트 Cabo Gata Seafog 카보 가타 바다 안개 Cornati Shelter Cornati 쉼터 Tolminka Canyon Tolminka 캐년 Late Light in Norway 노르웨이에서 늦게 빛 Foggy Cliffs 안개가 절벽으로 Heaphy Track Tranquility 히피 트랙 평온 Franz Josef Glacier Mysthic Shore Mysthic 해변 Vashlovani Glow Vashlovani 발광 Biscaya Sky Biscaya 하늘 Mediterranean Paradise 지중해의 낙원 Stormlight Barren Islands 메마른 섬 Los Roques Tears of the Adria 아드리아의 눈물 Reptilian Rocks II 파충류 바위 2 Mt Redoubt View Last Colors 마지막 색갈 Reptilian Rocks 파충류의 바위 Seven Lakes Valley 세븐 호수 계곡 Finnmark Coast Finnmark 해안
Last Light Mt Stokes 마지막 빛이 산에 멈추다 Verena & Georg Popp Biogarphy

 


 

출처 :Blue Gull 원문보기   글쓴이 : Blue Gull

 

사단의 궤계에 대한 치료책들(Thomas Brooks)

제 1부 영혼으로 죄를 짓게 하는 사단의 계략들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1. 성도는 사단의 궤계에 대해서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1) 고후 2: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2) 계 2: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3) 딤후 2:26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2. 사단이 영혼으로 죄를 짓도록 사용하는 계략들 가운데 낚시 바늘에 싸여 있는 미끼를 던지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 입니까?

 

1) 창 3:4, 5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2) 마 4:8, 9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3. 이러한 계략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습니까?

 

1) 잠 5:8, 롬 12:9

을 그에게서 멀리 하라 그의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2) 욥 20:12-14

그는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아껴서 버리지 아니하고 입천장에 물고 있을지라도

그의 음식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

 

3) 히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4. 사단은 죄를 덕스러운 모양으로 채색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친교라는 이름 아래에서 술 취하게 하거나 방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단의 계책에 대해서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고후 11:14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5. 사단은 죄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물 타기 작전을 펴서 죄에 대해서 심각성과 경계를 늦추도록 합니다. 예를 들어 주일을 어기는 것을 아무 것도 아닌 죄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어떤 경우가 있습니까? (삼상 13:9; 15:15) 그렇다면 대비책은 무엇입니까? 혹은 무엇을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까?

 

1) 고전 5:6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2)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6. 사단은 영혼으로 죄를 짓도록 부추 키고 유혹을 하는데, 성경에 나와 있는 믿음의 인물들도 죄를 지었기 때문에 괜찮다고 유혹합니다. 다윗의 간음죄, 히스기야의 교만, 욥의 인내하지 못하였던 것, 노아가 술 취하였던 것,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정한 것 등등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벧후 2:14) 따라서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하여야 합니까?

 

1) 삼하 12:10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7. 사단은 영혼으로 죄를 짓게 하는데, 하나님은 자비로운 하나님이시니,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유혹합니다. 따라서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반드시 생각하고 기억해야 합니까?

 

1) 호 4:17; 시 81:12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 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

2) 벧후 2:4-6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3) 시 101:1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

 

 

4) 출 34:6, 7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5) 롬 12:1; 요일 2:1, 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적 예배니라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8. 사단은 회개가 매우 쉬운 일이라고 유혹하면서 영혼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부추 킵니다. 따라서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하고 기억해야 합니까?

1) 렘 13:23

2) 렘 31:18

3) 호 14:2

 

9. 사단은 영혼으로 하여금 어떤 특정 경우에 죄에 대해서 담대하게 만들어 죄를 짓도록 유혹합니다. 삼손의 경우 들릴라에게 들어감으로 결국 죄에 빠집니다. (삿 16:1) 이러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무엇을 생각하고 기억해야 합니까?

1) 살전 5:22; 유 23

2) 창 39:10

 

10. 사단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부정하도록 만들고, 결국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해서 죄를 짓도록 유혹합니다. 어떤 경우가 있습니까? (렘 44:16-18) 따라서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하고 기억해야 합니까?

1) 호 4:17; 사 1:5

2) 시 73:17-20

 

11. 사단은 거룩한 길에 있는 성도로 하여금 십자가와 고난들, 때로는 슬픔과 모욕, 질병들을 이용해서 성도로 당황하도록 만들고, 그 다음 편한 길이 있다고 제시하면서 유혹합니다. 이런 계략에 대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히 12:10, 11

2) 사 27:8, 9

3) 시 30:5

4) 계 3:19

5) 출 11:3; 스 1:7-11

6) 욥 23:10

 

12. 사단은 영혼으로 하여금 남과 비교해서 자신은 보다 좋은 상태에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어서 죄를 짓게 합니다. 어떤 경우가 있습니까? (눅 18:11) 따라서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까?

1) 마 7:3, 4

2) 고후 4:4

 

13. 사단은 영혼으로 잘못된 오류를 믿게 해서, 영적으로 느슨하게 만들고, 때로는 악하게 만들어서 죄를 짓도록 만듭니다. 따라서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롬 1:28

2) 살후 2:10-12

3) 잠 23:23

4) 딤후 1:13, 딛 1:9

5) 시 25:9

 

14. 사단은 악한 친구들과 교제하게 하고 악한 사회 속에 있게 하여 죄를 짓도록 만듭니다. 따라서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엡 5:11

2) 시 120:5, 6

 

 

 

제 2부 사단의 전형적인 계략 중의 하나는 성도로 하여금 거룩한 의무와 봉사에서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슥 3:1) 어떤 계략들이 있습니까?

 

 

1. 사단은 성도의 눈에 세상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어서, 거룩한 봉사에 대한 열정을 식어지도록 만드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가롯 유다가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됩니다. 그렇다면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까?

 

1) 잠 23:5; 딤전 6:17

2) 계 2:17

3) 전 5:10

 

2. 사단은 성도가 봉사 할 때, 그 봉사로 인하여 자신에게 위험과 손실이 임할 것 같은 생각을 주어서, 거룩한 의무와 봉사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듭니다. (요 12:42) 이러한 경우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반드시 생각하여야 합니까?

 

1) 딤후 1:12

2) 히 11:36

3) 히 2:3

4) 딤전 6:6

 

3. 사단은 성도에게 봉사하는 것이 어렵고 힘들게 보이게 만들어서 거룩한 의무로부터 떠나게 만듭니다. 따라서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느 2:19-20

2) 마 11:30

3) 히 12:2

 

4. 사단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에 대해서 잘못된 추론을 하도록 만들어서 거룩한 의무로부터 떠나게 만듭니다. (고전 15:58) 따라서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빌 2:12

2) 벧전 2:9

3) 시 119:174

 

5. 사단은 성도의 눈에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는 자들이 가난하고 부족한 모습을 보게 해서 거룩한 의무에서 떠나가도록 만듭니다. 따라서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약 2:5

2) 요 4:13

3) 히 12:2

 

6. 사단은 성도의 눈에 세상의 위대한 예들을 보여주면서 상대적으로 주님의 일이나 길을 가볍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성도로 거룩한 의무를 등지도록 만듭니다.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계 18:4

7. 사단은 성도로 하여금 대 다수의 헛된 생각과 견해를 따라가게 해서 성도로 하여금 거룩한 의무를 버리도록 만듭니다.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출 23:2

2) 고후 10:4-5

3) 엡 3:19

8. 사단은 성도로 하여금 이미 이루어 놓은 봉사로 만족하게 만들어서 거룩한 의무에서 쉬도록 만듭니다.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빌 3:12

 

 

제 3부 사단은 영혼으로 하여금 슬프고, 의심스러운 상태에 처하게 만들고, 또 불안한 상태로 만들어서 그들의 삶을 지옥과 같은 삶으로 만드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1. 사단은 성도로 하여금 죄에 대해서 비정상적으로 골몰하게 만들어서 결국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롬 8:1

2) 롬 6:14

3) 고후 12:9

4) 사 53:5, 6

2. 사단은 은혜에 대해서 잘못된 개념을 갖게 해서 성도들의 삶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요일 5:13

2) 갈 4:6

3. 사단은 연약한 성도에게 당신은 진정한 은혜의 상태가 아니라고 고소하여서 불안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호 14:4

2) 유 14-16

3) 고후 12:2, 7

 

 

 

제 4부 사단은 세상에 지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더욱 부추 키어서 세상에 완전히 빠지게 함으로 그들의 영혼을 멸망시키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1. 사단은 사람들로 자기 일에 바쁘게 만들어서 그 영혼을 멸망시킵니다. (빌 2:21)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롬 1:25

2) 합 2:6, 9-12

3) 느 5:14-19

4) 호 10:1-2

2. 사단은 사람들로 눈에 보이는 즐거움대로 살아가도록 부추 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도록 만드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출 15:9-10

2) 시 2:12; 106:23

 

3. 사단은 배우고 학식이 있는 자들을 유혹하여 자신의 능력을 믿게 하고 그들로 교만하게 만들어서 기독교에 대항하도록 만듭니다.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사 40:13-17

 

4. 사단은 성도로 교만하게 만들어 서로 싸우게 만들어서 망하게 하는 전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요 13:34

2) 갈 5:22; 고후 13:11

3) 창 13:8

4) 고전 11:31

5) 벧전 5:5

 

5. 사단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고, 말씀의 지식의 수단에 대해서 무시하게 만들어서 멸망하도록 만듭니다. 이러한 사단의 전략에 속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1) 마 6:22

2) 살후 1:8

3) 마 22:29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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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부란 그 뜻 늙어보면 안다 기차 여행 중에 옆자리 노인이 하신 말씀을 정리해 보니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젊어서 부부 싸움도 하지만 그 싸움에 상처 남기면 늙어서도 그 흠이 남는 법이여 부부의 외도 평생 상처로 남는 법이고 부부의 불신 평생 불신으로 남는 것이고 사는 동안 서로의 희생은 오래도록 공으로 남지 남과 남이 만났는데 어찌 내 마음 같을까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면 백 년 행복한 것이라고 夫婦란 그 뜻 늙어보면 안다 부부의 정 심은 대로 거둔다 바로 실감 나는 한 치의 오차가 없는 말이다 부부가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면 그 정 세상 하직하던 날까지 그대로 간직하게 된다 부부가 서로 못 믿고 의심 속에 살게 되면 누군가가 임종시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는 말 부부의 인연으로 만났으니 서로 믿고 믿으며 살아야 한다 왜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위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나이 들어 늘그막에 절실하게 느낀다 자식들이 아무리 효도를 잘한다 해도 그 대답은 영감보다 할멈보다 누가 더 잘해 주겠어 잘해 준다든가 그래서 있을 때 잘하라고 그 뼈 있는 말 한 마디를 노랫말에 실었지 있을 때 잘해여 있을 때 잘해여 -詩庭박 태훈의 해학이 있는 아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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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상 치유와 회복 세미나

 

     벤저민 프랭클린의 13가지 덕목

 

벤저민 프랭클린은 피뢰침을 만든 과학자로 유명하지만,

그의 업적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안경을 만들었고, 인쇄기계를 개량했고,

미국의 독립운동에 동참했으며

병원을 설립하는 등 그의 업적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가 죽기 전에 자서전을 지었는데,,,

그의 자서전에

자신은 초등학교 교육도 제대로 못나온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양초 만드는 직공으로 20살이 되든 해에

13가지의 지켜야 할 덕목을 만들었던 내용이랍니다.

 

1. 절제- 배부르게 먹지 말라.

2. 침묵- 필요하지 않은 말은 하지 말라.

3. 규율- 있어야할 자리에 있으라.

4. 결단- 결심한 일은 반드시 실행하라.

5. 절약- 보람이 없는 일에는 돈을 쓰지 말라.

6. 근면- 언제나 유익한 일을 하라.

7. 성실- 깨끗한 것만 생각하고 속임수로 남을 해치지 말라.

8. 정의- 타인의 이익을 빼앗지 말라.

9. 중용- 극단은 가급적 피하라.

10. 청결- 주변에 불결한 흔적을 남기지 말라.

11. 평정- 사소한 일에 평정을 잃지 말라.

12. 순결- 건강과 출산을 위해서만 사랑을 나눠라.

13. 겸손-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본받으라.

 

벤자민 플랭클린의 13가지 생의 원리이며 미덕이다.

이 어휘들은 무거운 단어들이다.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될 상식이다.

이 덕목을 고르게 갖춘다는 것은 쉽지 않다.

 

13가지 덕목들을 일정한 기간을 정해 두고

한 가지씩 순서대로 실천해 보라.

그날그날의 훈련 성취도를 수첩에 기록해보라.

부족한 부분은 그 주간이 넘어가기 전에 보충해보라.

 

만약 이 13가지를 지키려면,

몸과 마음과 영혼의 골짜기를 반드시 통과해야 할 것이다.

 

-  "인생을 사는 지혜 300마당(역사속의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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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교연, 이단옹호언론 조사보고서 채택

2013/02/04 (월) 01:27 ㆍ추천: 20  ㆍ조회: 55      

한국교회연합(대표회장 박위근 목사)이 이단신문과 이단옹호언론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교인들에게 주의를 당부했다.

한국교회연합 바른신앙수호위원회는 지난달 31일 열린 정기총회에서 '이단 신문 및 이단옹호언론 조사보고서'를 발표하고, 이단이 만든 신문사 7곳, 이단옹호언론 7곳을 선정했다.

한교연은 신천지의 천지일보, 베뢰아 김기동 목사의 주일신문, 다락방 류광수 목사의 세계복음화신문 등을 이단이 만든 신문사로 규정했고, 크리스천투데이와 크리스챤신문, 로앤쳐치 등은 이단들의 홍보성 기사를 게재한 이단옹호언론으로 규정했다.

한교연은 또, 현 한기총 대표회장인 홍재철 목사를 친이단적인 인사인 동시에 이단옹호자라고 발표하고, 한국교회가 홍 목사와의 교류를 금지해 줄 것을 촉구했다.

CBS TV보도부 송주열 기자
ⓒ CBS 크리스천노컷뉴스
출처: USA아멘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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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4) 험담과 적절한 대화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왜 개인의 대화와 언어를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교회는 정말로 험담을 죄악이라고 믿는가?

 

네 번째 질문

언어와 대화는 한 사람의 성품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태복음 12:34).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기도를 통하여 어떻게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셨는가 하는 것(누가복음 22:4, 42)을 읽음으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그 분의 독생자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의 모독과 음란한 말은 그들의 마음의 본질을 나타내 줍니다.

입으로 나오는 말은 믿을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말은 칼과 화살과 같은 무기로 표현됩니다 (시편 57:4, 64:3; 예레미아 9:8). 야고보는 혀와 말의 능력을 배의 키나 산불을 일으키는 불꽃으로 표현했습니다 (야고보서 3:2-12). 기독교인은 오늘날 정치적 선전이나 매체 뉴스에서 말의 힘을 관찰합니다.

 

하나님의 성회는 험담이 죄라고 하는 성경말씀에 동의합니다. 성경은 명확하게 그리고 자주 소문을 퍼뜨리는 모든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비난합니다.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레위기 19:1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야고보서1:26).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태복음12:3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말씀에서 험담은 기독교인과 성령 충만한 삶의 말, 생각, 그리고 행위에 완전히 상반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험담이 가져다 주는 공포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며 가장 강력한 도구인 언어와 말을 잔인한 무기로 변화시킵니다. 쓸데없는 말 한마디가 진실에 상처를 주며, 지혜로움을 어리석음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야고보서 3). 험담은 사랑의 반대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3:6; 갈라디아서 5:14, 15). 그것은 도움 대신에 상처를 가져다 줍니다. 그것은 화평 대신에 분노와 다툼을 일으킵니다 (잠언 16:28; 고린도후서 12:20). 그것은 믿음 대신에 배신을 가져옵니다 (잠언 20:19).

 

왜 기독교인들 사이에 험담이 존재할까요?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설교하면서, 그리고 야고보는 혀의 힘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면서, 두 사람 모두 험담은 마귀에게 발판을 마련해 준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지옥의 불과 같습니다 (에베소서 4:25-32; 야고보서 3:6). 그러므로 기독교 교회에 험담이 존재하는 주된 이유는 험담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또한 마귀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험담을 하는 다른 이유들이 있습니다. 슬프게도 어떤 사람은 그것이 일종의 오락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험담은 전형적으로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화의 필요성을 단지 임시동안 만족시켜 줄 뿐이며, 관계는 하나님께서 덕을 세우는 방법을 통하여 충족되도록 계획하신 것을 통하여 이루어 집니다. 비록 사람들이 험담을 나누는 것을 통하여 받아들여지고 또 어떤 그룹에 소속감을 느끼도록 만들어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룹 밖에 있는 사람들을 남용하는 일입니다. 때때로 험담은 노여움의 돌출구가 됩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그들이 노여워하는 사람이나 문제에 대해서보다는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에 대해서 이야기함으로서 그들의 분노를 발산시킵니다. 이 모든 이유들은 주님 안에서 신뢰와 힘을 갖는 사람, 기독교인의 봉사를 사랑으로 감당함으로 기쁨을 갖는 사람의 생활에는 험담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잘못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것이 합법적이거나 허용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항상 적당하거나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은 어떤 강요나 습관이 우리들을 지배하거나, 그것의 힘 아래 우리들이 얽매이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6:12). 기본적으로 진실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건설적이거나, 다른 사람을 북돋아 주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일시적 감정에 의해서 충동적으로 행동해서는 안되며, 다른 사람들에게 적절한 것을 행해야만 합니다 (고린도전서 10:23). 다른 사람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 사려 없이 관여하는 것은 자제심이 결여된 것을 보여줍니다. 다른 사람을 당황하게 하거나, 상처를 주거나, 혹은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어떤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영적으로 성숙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2).우리들은 험담에 관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1)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함으로서 소문을 만들기 시작하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심지어 기도를 요청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그러한 요청을 하는 데 필요한 것만을 말하도록 주의하십시오. 무엇을 암시하는 질문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불미스러운 일을 캐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2) 비밀을 누설하지 마십시오 (잠언 11:13). 만일 당신이 어떤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서 어떤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 오직 목사님이나 혹은 적절하게 행동할 위치에 있는 부모에게만 말하십시오.

(3) 험담을 듣지 마십시오. 험담을 듣지 않겠다는 당신의 의도를 표현하십시오.

(4)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불을 끄는 사람이 되십시오 (잠언 26:20).

 

우리의 어휘는 중요합니다.

말을 하는 가운데 흔히 간과하는 분야는 사려 없는 표현과 조심없는 맹세의 사용입니다. 철저히 모독하려는 의도 없이, 어떤 기독교인은 무슨 말을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지(gee), “단 (darn)” 그리고 “가쉬 (gosh)” 와 같은 말을 사용합니다. 낱말의 어원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말들이 “예수 (Jesus), “댐 (damn), 그리고 “하나님 (God)” 을 의미 없이 말하는 것이라고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개인적으로 부지중에 사용하는 어휘 가운데는 이와 비슷한 어원을 알 수 없는 무의미한 낱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신자들은 그들이 자신을 표현하는데 사용하는 어휘들을 평가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의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반영하는 것이어야만 하며, 또 신자의 생활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섬세하게 증거하는 것이어야만 합니다.

 

관심사:

 

우리는 때때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그리고 특별히 개 교회에서, 왜 그토록 많은 긴장이 있고, 또 화합하지 못하는 때가 많은지 생각을 해 봅니다. 흔히 그러한 어려움은 다른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거나 받아들일까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성급하게 내뱉은 부주의한 말 때문에 생기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아니라 할지라도, “말하기 전에 생각하십시오.” 라고 하는 한 옛 속담은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고 교회의 연합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는 명령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 성령님께서 먼저 말씀하실 수 있는 기회를 가지시게 되며, 또 하는 말을 통하여 덕을 세우며 신자들을 연합시킬 수 있는 기회를 가지시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성령 충만한 신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주님을 위한 전적인 사랑을 반영하는 말을 사용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성령 세례는, 내적 충만과 함께 받는 기도의 언어와 함께, 인간의 표현이 적절하지 못하게 보일 때에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찬양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방법을 제공해 줍니다. 우리들이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들은 험담의 유혹에 깊이 빠지지 않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유익한 말씀입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에베소서 4:29).

 

* 위에 기술한 것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근거한다.



일반적인 교리와 성령세례 및 성령의 은사와 열매에 대한

하나님의 성회 교리 Q/A 에서 발췌

 

    네 마음에 담아라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전 7:02)

    It is better to go to a house of mourning than to go to a house of feasting, for death is the destiny of every man; the living should take this to heart.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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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1475 - 1564)

그 어떤 대리석에도 인체는 이미 포즈를 취하고 있다. 조각가는 단지 그것을 해방시킬 뿐이다.
로마. 이탈리아의 화가,조각가,건축가,시인. 미켈란젤로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세기에 걸쳐 가장 위대한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아 왔다. 수 많은 그의 회화,조각,건축 작품들은 현존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들로 손꼽힌다. 그중 오늘날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임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스스로를 무엇보다도 조각가라고 여겼다. 그는 평생 대리석 조각에 몰두 했으며 단지 일정 기간에 다른 분야의 예술작업을 했을 뿐이다.
미켈란젤로가 생전에 유명해 진 또다른 이유는 그의 예술생애에 대한 기록이 당시나 그 이전의 어느 예술가보다도 훨씬 풍부하게 남겨졌기 때문이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에 훌륭한 전기가 2권이나 출판된 최초의 예술가였다. 그중 하나는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조르조 바사리가 쓴 <예술가 열전 Lives of the Most Eminent Painters,Sculptures & Architects>(1550) 의 마지막 장으로, 이 장에서 바사리는 현존하는 예술가로서 유일하게 다룬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그 이전의 다른 모든 예술가들의 역작을 능가하는 최고봉으로 평가했다. 이같은 찬사에도 충분히 만족하지 못한 미켈란젤로는 조수였던 아스카니오 콘디비를 시켜 별도로 짤막한 책(1553)을 쓰게 했다. 아마도 미켈란젤로의 구두 설명을 기초로 해서 썼을 이 책은 그가 원하는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켈란젤로가 죽은 후 바사리는 <예술가 열전>의 2번째 판(1568)에 반박론을 실었다. 학자들은 콘디비의 권위있는 저술을 선호하지만, 바사리의 생동감 넘치는 문장과 그의 책이 지닌 전반적인 중요성 및 여러 나라 말로 자주 재판되는 등의 이유에서 바사리가 쓴 미켈란젤로의 전기는 가장 일반적인 참고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그가 남긴 수 백통의 편지, 스케치, 시 등의 유품은 생전에 누린 명성으로 당대의 어느 누구 보다도 많이 보전되어 있다. 그러나 이렇듯 엄청난 자료에도 불구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종종 미켈란젤로의 주장만 알려져 있다.
미켈란젤로는 13살에 기를란다이오(Domenico Ghirlandaio)의 제자로 들어갔으나 이듬해 로렌초 디 메디치의 주목을 받으면서 메디치家가 수집한 고대조각들을 자유로이 접하고 이를 통해 조각의 기술을 익혀갔다. 이 시기에 제작한 <센토들의 싸움>과 로마체제 중 제작한 <바쿠스>는 그의 초기 학습과정을 잘 보여준다
1494년 그는 피렌체를 떠나 볼로냐에 잠시 머문 후 로마에 체재하였다. 이 기간 중 제작한 <피에타>와 피렌체로 되돌아가 제작한 <다비드>는 그가 이전기간에 습득한 고전적인 조각기법의 완성을 보여준다.
1500년경 미켈란젤로가 피렌체로 돌아왔을 때 공화정의 피렌체는 그에게 다비드 상을 주문한다. 조각상의 공적인 효과를 잘 알고 있던 피렌체 공화정은 이를 시청 앞에 놓음으로써 나라를 구한 소년 영웅의 역할을 하게 하였다. 미켈란젤로가 구현한 고대 남성 조각의 조형미, 사실과 이상의 조화는 조각으로서 완전할 뿐만 아니라, 새로워진 공화정의 이념으로서도 더 없이 적절하였던 것이다.
교황 줄리오 2세는 1506년 미켈란젤로에게 교황청 안의 시스틴 예배실 천장화를 주문하였다. 교황의 처음 주문은 창문들 사이에 12사도를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장식 모티브를 그려달라는 주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훨씬 거대한 계획을 세워 교황을 설득하고 지금의 천장화를 남겼다. 그는 빛의 창조에서 노아의 홍수에까지 이르는 <천지창조>의 주제를 택하였다. 그는 기존의 건축구조를 바탕으로 하면서, 천장에 이와 연결된 건축구조를 그림으로 만들었다. 9개의 면적에 천지창조이야기를 그리고, 창문 위 삼각형 사이의 큰 공간엔 예언자와 무녀들을 그렸다. 이 장대한 프로그램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빛의 창조, 아담과 이브의 창조와 그들의 원죄, 노아의 타락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의 과정을 보여 준다. 그리고 양쪽의 예언자와 무녀들은 구원자가 오실 것임을 알려준 존재들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의 무덤도 주문하였다. 이 또한 오랜 기간에 걸친 큰 프로젝트였고, 완성되지는 못하였다. 여기서는 이의 부분으로 제작한 일명 노예상 두 점을 보겠다. 16점의 노예상중에서 완성된 것은 현재 루브르에 소장되어있는 1점뿐이며, 미완성 몇 점이 피렌체 아카데미에 소장되어 있다.
1513년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죽고, 죠반니가 레오 10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올라 1515년에 그의 고향 피렌체에 개선장군처럼 입성하였으며, 이후 그의 조카 줄리오 추기경(후의 교황 클레멘테 7세)과 함께 메디치家의 재건을 서두르면서 미켈란젤로에게 메디치가의 가족묘를 주문하였다. 미켈란젤로는 건축과 조각, 회화가 어우러진 묘실을 구상하였으나 완성되지는 못했다.
파르네제가의 교황 바오로 3세(PaoloⅢ: 즉위 1534-49)는 교황이 되자마자 메디치 예배실에 전념하고 있던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불러들여 <최후의 심판>을 주문하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미켈란젤로는 주문내용을 훨씬 뛰어넘는 계획을 세웠다.

시대적 배경
그의 성장기부터 1564년에 죽기까지, 즉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중엽까지 이탈리아 역사는 격변기였다. 평온을 유지하던 피렌체는 1492년 로렌조 디 메디치가 죽자 1494년에 프랑스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1495년엔 메디치家가 피렌체로부터 추방되었다. 그후 공화정이 주도권을 잡았으나 힘은 약하였고, 1512년엔 메디치家의 코지모(Cosimo I di Medici)가 장악하면서 피렌체는 거의 군주 국가가 되었다. 한편 로마의 교황청 국가는 1527년 신성로마제국(현재의 독일)의 침략과 약탈에 위기를 겪는 한편 1517년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으로 카톨릭의 권위마저 흔들렸다. 메디치와 공화정의 집권이 번복되던 피렌체와 로마의 교황청은 위기감을 느낄수록 위안과 과시의 정치를 하게 되었으며 이는 미술주문으로 이어졌다. 미켈란젤로는 이 시대에 공화정과 메디치, 그리고 교황의 가장 큰 주문들을 받아왔으며 그의 작품들은 정치 속에서 예술가가 겪는 보호와 갈등, 그리고 개인의 종교적 구원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준다.

육체미를 추구한 최고의 천재 : 강한 예술적 신념과 자신감으로 그는 점차 '신'같은 존재로 인식. 인체를 해부학적으로 파악했고 웅장하고 힘이 넘침.아무리 작은 근육이라도 정확하게 그리고자했기 때문에 남녀를 불문하고 그가 그린 인체는 씩씩하고 위압적.

강력한 필치와 묘사로 인체의 내면 세계까지 그려내다 : 인간을 창조하는 것. 후기에 이르자 인체의 움직임이나 비율에 대한 고집에서 벗어난 좀더 내적이며 정신적인 것을 찾게 됨.

<피에타상 1498∼99년, 대리석 174 x 195cm 로마, 베드로 성당>
피에타란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말한다. 이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머물던 시절인 25세 때 프랑스인 추기경의 주문으로 제작하였다.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있는 모습은 고딕 조각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런 모습은 흔히 그리스도의 몸이 마리아의 무릎 밖으로 뻗어나와서 조각 작품으로서는 부자연스러운 형태가 된다. 미켈란젤로는 그리스도의 몸을 작게 표현하면서 옷을 이용하여 무릎을 크게 보이게 함으로써 그런 부자연스러움을 조형적으로 없애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조형적인 해결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옷이라는 것은 미켈란젤로에게 중요한 사상적 의미를 가지며, 옷으로 감싼다는 것은 하느님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현실적인 위협으로부터 수호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 작품은 피라밋형의 안정된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미켈란젤로는 이 안정감을 만들기 위해 마리아의 어깨와 치마폭을 좀 더 넓게 잡고 있다.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무릎에 앉혀놓는 자세는 중세부터 내려온 도상인데, 이와 더불어 마리아는 33살의 아들이 있는 어머니이기보다 수태고지를 받던 10대의 소녀 나이이다. 순결한 성처녀 마리아를 강조한 도상이라 할 수 있다.
채색된 조각을 좋아하지 않았던 미켈란젤로는 푸른색이었을 마리아의 옷을 대리석에 의한 형태로만 표현하려 하였다. 그는 대리석으로 구겨진 옷자락의 주름을 만들어 그것을 그리스도를 지키는 하느님의 옷으로 표현하였고, 후광이나 가시와 같은 상징도 마리아의 청순하고 경건한 얼굴과 육체의 표현 속에 담았다.
이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가운데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마리아가 두른 어깨 띠에는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제작(MICHEL. AGELVS. BONAROTVS. FLORENT. FACIEBAT)'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피렌체에 있는 다비드상, 로마 산피에트로대성당에 있는 모세상과 더불어 그의 3대 작품으로 꼽히는데, 그 중에서도 완성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피에타 상은 한 정신병 환자가 휘두른 망치에 손상을 입고 난 뒤 보수되어 방탄 유리 상자 안에 보호되어 있다.

-이은기의 멀티미디어로보는 서양미술사에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1498∼99년> <작가미상, 피에타, 1400년>

<성가족 패널에 유채 지름 120cm>
미켈란젤로의 최초의 조각같이 그려진 마리아의 모습이며 회화보다 조각이 수수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듯 하다. 인물 배치에 있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가족그림과 비교해 볼 때 다른 특징이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전통적인 구성에서는 요셉이 이런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닥에 앉은 성모마리아가 몸을 뒤로 젖혀 요셉이 안고 있는 어린 예수를 어깨 너머로 건네받는 모습에서 주요 인물 세사람이 보다 밀접한 구성체가 성립된다. 특히 허리를 비틀은 마리아의 인체 표현과 특수한 운형 화면을 사용한 구성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다비드 1501∼04년, 대리석 높이 410cm >

두오모 성당 건축 시 성경에 나오는 12 예언자들의 거대한 동상을 세우려던 계획을 대폭 축소하여 도나텔로와 아고스티노 디 두치오가 하나씩 완성하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1464년 두치오에게 한명을 더 조각하게 해 피렌체에서 북서쪽으로 110km 떨어진 카라라 지역에서 돌을 운반해다가 발과 가슴 그리고 옷 주름 정도 작업하다가 그만두니 10년 후쯤 안토니오 로셀리노가 이어서 작업을 진행하지만 신통치 않아 25년동안 성당 작업실에 방치되었고, 그 대리석을 구입하느라 많은 돈을 썼던 두오모 책임자들은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1500년 성당 작업소 기록에 '다비드'라는 제목의 대리석 형상 계획에 차질이 생겨 방치 중이라고 적혀 있다. 1501년 위원회는 완성시킬 예술가로 다빈치,안드레아 산소비노가 물망에 오르지만 당시 26세였던 미켈란젤로는 밀랍으로 작은 모형을 가지고 가 자기가 적임자라고 위원회를 설득시켰다.
1494년 메디치가의 몰락과 더불어 피렌체를 떠났던 그는 1501년 아직은 힘이 미약한 공화정 정부에 맞선 거대한 세력들을 물리치는 힘을 상징하고 싶은 목적으로 '다비드'라는 성경의 영웅을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하게 되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크기만 컸지 두께가 45cm정도로 얇았던 대리석을 가지고 이 기념비적인 입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많은 기술적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한 번만 손을 잘못 움직여도 작품 전체가 망가져 버릴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원석의 크기 때문에 형상의 자세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골리엇의 잘린 머리를 밟고 서 있는 전통적인 다비드의 모습은 도저히 보여줄 수가 없었다.
미켈란젤로는 대작의 전체를 봐가면서 작업을 하는 일은 불가능했고( 게다가 그는 키가 155cm밖에 되지 않음) 어려움이 따랐기에 그는 씻는 것은 고사하고 먹고 마시는 일도 거르면서 작업에 매달려쓴데 일어나서 바로 작업하기 위해 옷을 입은 채로 신발까지 신고 그대로 작없실에서 잔 적도 있었다.
1503년 피렌체의 수호성인인 성요한 축일에 미켈란젤로는 작품을 거의 다 완성하게되고 위원회는 설치 장소 논의에 많은 귀족과 예술까들을 초빙해 논의했던 회의록이 잘 보존되어 그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원래는 두오모 성당의 12m 높이에 설치할 계획이였으나 그 크기와 무게 때문 불가능해 회의 결과 시뇨리아 광장 앞이나 시뇨리아 광장의 돋보이지 않는 장소인 로기아 데이 란치였다. 특히 다빈치가 세 번째 장소를 주장했는데 이 노 예술까는 어쩌면 급성장하고 있는 젊은 예술까에 대한 질투였는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로의 성공을 보면서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짐. 미켈란젤로 역시 다빈치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결코 인정하지 않음) 그러나 대 평의회가 고집을 부려 시뇨리아 광장에 설치하게 되었다. 그 곳에 이미 설치되어 있던 도나텔로의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계속 마무리 작업을 하는데 행정부의 수반이었던 소델리니가 코를 좀 다듬길 요구했지만 그 말을 듣는 척하면서 그냥 들고 있던 대리석 가루를 조금 떨어뜨렸다고 한다. 하지만 소델리니도 그 결과 크게 만족했다고 한다.
다비드가 대중들의 호응을 얻자, 소델리니는 그 옆에 다른 작품들도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하여 헤라클레스와 삼손의 밀랍 모형까지는 제작하지만 '바키오 반디넬리가'는 조각가가 실제 조각을 하여 나란히 서있음으로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그 뒤 1530년대 메디치가 다시 집권하면서 미켈란젤로는 처형 대상에 올라 피렌체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죽은 후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다비드'는 여전히 광장을 지키며 이번에는 메디치 왕조르 상징하는 역할을 맡는다.
1800년대에 들어서자, 시정을 담당하던 관리들은 3백년 동안 비바람과 햇빛과 베키오 광자에서 흘러노오는 오물이 대리석에 스며들면서 상태가 점점 나빠지자, 1813년 보수가 시작되고 전체에 보호액을 발라 비자연적인 흰색을 띠게 된다.
하지만 1843년 코스톨리가 쇠수세미로 작품 표면을 밀어 버리는 바람에 섬세한 디테일이 지워져 버리고 대리석 표면도 심하게 약화되었다. 또한 이탈리아의 통일 운동이 한창이때는 다비드가 어떠한 역경도 고귀하게 이겨내는 '이탈리아 민중들의 정신'을 보여주는 상징물이 되었고 이탈리아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다비드'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질수록 작품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져갔다.
마침내 옮겨야한다는 결정이 내려지지만 16세기 초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어디로 옮겨야 할 지가 문제였다.
석고로 본뜨기를 함으로서 다시 한번 더 작품은 손상되고 1866년 복제품은 바르젤로 미술관에 설치되고 1871년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진품은 보호상자에 갇혀1873년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질 때까지 볼 수 없었으며, 20년 넘도록 논쟁만 계속되고 상자 안에 갇혀 있으므로 곰팡이까지 생겼다. 그 대신 청동으로 제작된 세 번째 '다비드'는 산로렌초 메디치가 무덤에 세우므로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고 이제 광장은 어느새 미켈란젤로 광장이라는 새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1910년 시뇨리아 광장의 같은 자리에 또 하나의 복제 다비드가 설치된다.
매년 백만명이 넘는 관광객들을 아카데미아로 불러들이는 다비드의 위력은 그 육체적인 아름다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작품을 통해 확신과 불안, 초인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그리고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도도함과 소박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조각상은 제작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초월하여 믿음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미켈란젤로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음미해 보기 바란다.
만약 인간 안에 있는 신성한 부분을 통해 누군가의 얼굴과 자세가 확연히 떠올랐다면, 그에 미치지 못하는 모델을 보고 작품을 제작한다 하더라도 신성한 힘이 돌에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그건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죠.

율리우스 2세 묘비에 조각된 작품

<빈사의 노예1. 노예2 1513∼16년, 대리석높이 229cm>
이 작품은 1512년 <시스틴 천장화>가 완성된 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묘비 건립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반항하는 노예>와 한 짝을 이루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조각가로서의 자존심은 대단한 것이어서, 당시 교황과 왕들이 그에게 작품 의뢰를 요구했던 것을 번번이 물리쳤다는 것이 일화로 남아 있다. 이 작품도 원래는 한 후원자를 위해 만들다가 그가 죽은 후 율리우스를 위해 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작품의 "노예"는 곧 죽음에 이를, 그런 상태에 있다. 차가운 대리석으로 제작되었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과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미켈란젤로가 이 작품에 부여한 생명성에 기인한다. 즉 덩어리 속에 한 인물이 감추어져 있다는 믿음으로 작업을 한 것, 삶의 투쟁과 긴장에서 해방되는 이 노예의 마지막 순간을 실제 노예를 앞에 두고 묘사한다는 믿음으로 작업한 것이, 이 작품을 살아있게 만든 것이다조상의 윤곽선에는 대리석 덩어리라는 본래의 형태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조상의 포즈가 복잡한 구성을 가진다 하더라도 본래의 단순하고 안정된 통일성을 획득하고 있다. 피로와 육체의 고단함으로 가득 찼던 지상에서의 고단함을 이제 놓을 수 있게 된 노예의 나른한 표정에서, 죽음으로 향하는 두려움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새로운 세계를 준비하기 위한 휴식으로 진입하기 위해 반쯤 벗은 옷을 이제 막 올리려고 하고 있다.
<모세상1513-1516년 로마, 빈콜리, 산 피에트로 성당>
시스티나 천정화가 완성되고 얼마있지 않아서 당시의 교황 율리우스 II가 사망했는데, 그때 유언에, 1505년에 계약한 바 있는 미켈란젤로의 율리우스 II 묘당을 위해 10,000 두카덴(Dukaten)을 남겨 놓았다. 사실 이 묘당을 위해서 계획하고 추진하던 미켈란젤로의 그간의 노력은 그 시스티나 천정 벽화의 고난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식은 적이 없었다. 그곳에 안치될 상의 하나로 예정된 것이 바로 이 모세상이다. 머리 위의 뿔과 십계의 石板(석판)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 예고자로서의 모세는 그 위엄의 모습을 대리석에서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여기서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여러 예언자 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형태감을 넘어서서, 평생 대리석을 유일한 매체로 삼던 미켈란젤로의 조각가로 서의 본격적인 대결이 그의 응집된 量塊(양괴) 속에서 이 <모세>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영묘의 중앙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걸작품으로 불타는 정열로 거대한 기념비를 시작했는데 시기하던 사람들 때문에 백지화되었다가 몇십년이 지난 후 대폭 축소되어 고령에 접어든 미켈란젤로가 혼열을 기울려 제작했지요.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온 모세가 우상숭배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분노에 찬 눈으로 지켜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며 또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서 힘과 정기가 넘치는 모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조각이 완성 되었을 때 로마의 유태인들은 샤바트(유태교 안식일 ) 때마다 찾아와 경배를 드렸다 한다.


<승리 1520-1525년 피렌체, 베키오광장>
율리우스 2세 묘당을 위한 조각 가운데는 1505년 최초의 계획 이후 여러 번 그 계획이 바뀌거나 축소됨으로써, 제외되거나 방치되거나 새로 계획되는 조각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 가운데에 <승리>의 이름으로 불리는 조각은 같은 시기에 만들다 미완성한 채로 남아 있는 4체의 노예상(수염이 있는 노예, 젊은 노예, 아틀라스 노예, 잠이 깬 노예)과 의미 내용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그 <승리>의 상이 나타내고 있는 상 자체에서 부터다. 노인(老人)을 발 아래 밟고 있는 젊은이의 나체상, 거기에서 그는 단순히 한 노인에 대한 승리가 아니고, 적어도 노인으로 상징되는 내용에 대한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중세(中世) 이래 내려오는 '시간의 할애비'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나타내는 4체의 의인상과 더불어 이를 초극하는 승리를 말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메디치가문의 로렌초 묘비
미켈란젤로는 이 두 조각상을 통하여 인간의 두 유형 즉 행동하는 유형(칼을 들고 있는 줄리아노)과 명상하는 유형(생각하는 자세의 로렌조)을 만들었습니다


<메디치가의줄리앙 부분 1526∼34년, 대리석높이 173cm 피렌체, 성 로렌초 대성당 >
미켈란젤로가 위촉받은 메디치가 묘당은 교황 레오 10 세의 아버지, 로렌초, 로렌초의 동생인 쥴리아노, 그리고 또 레오 10세의 동생인 쥴리아노, 그의 조카 등 로렌초가의 4명의 묘를 안치하는 묘당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로렌초의 상과 그 아래 남녀 한쌍인 <아침과 저녁의 의인상(擬人像)>, 쥴리아노의 상과 그 아래 남녀 한쌍인 <낮과 밤의 의인상>, 그리고 성모자상(메 디치 성모상)이 벽면 건축과 함께 있다. 묘당 자체는 작지만 전체적으로 높은 인상의 공간감을 주고 원 천정으로 덮어져 있다. 대로렌초와 쥴리아노 형제의 두상(頭像)은 대조적인 모습을 띠고 있으며, 생각에 잠긴 듯한 로렌초에 비해서 행동력이 보이는 쥴리아노를 대치시키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들 주요 조각 작품을 위해서는 자기 손으로 전부 완성을 해야겠다는 성의를 편지에서 전하고 있다.
<메디치가의 로렌초>

<피에타 1546-55, 대리석 높이 233cm, 피렌체 두오모성당>
말년의 미켈란젤로는 누구로부터 주문을 받지 않고, 자신을 위한 피에타상들을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그의 나이 70세쯤에 자기무덤에 놓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 또한 미완성이지만 종래의 피에타 도상과는 전혀 다른 이 <피에타>의 구성은 그의 종교관을 짐작케 합니다. 양쪽의 두 마리아가 시체를 부축이고 있지만 시신은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는 듯 미끄러져 내리는 듯하다. 그리고 그의 뒤에 있는 거대한 니코데모는 마치 건물의 도움과 같이 그를 보호하며 얼굴엔 미켈란젤로 자신의 자화상을 새겨놓았다. 니코데모는 원래 예수를 비난한 율법학자들과 같은 유대인이었으나 모험을 무릎쓰고 예수의 무덤을 제공한 사람이다.

<론다니니 피에타 1552-64년, 대리석높이 195cm, 밀라노, 스포르제스코성당>
미켈란젤로가 죽기 며칠 전까지 붙들고 있던 작품이다. 시신은 길게 늘려있고 예수를 부축하여야 할 마리아는 오히려 시신에 얹혀있는 듯 불안정합하다. 죽음이 가까운 시기에 만든 이 작품은 그가 청년기에 만든 바티칸 소장의<피에타>와 너무나 큰 대조를 보인다. 아름다운 균형과 완전한 기법은 모두 사라지고 절절한 간구만이 남았다. 이미 하나님 아들의 시신을 안고 지키고 있는 마리아의 인상으로서도 박약하고, 또 마리아에 안긴 그리스도의 인상도 박약하리만치 그야말로 특이한 자태의 미완성 상이다. 피에타는 무르익던 르네상스 시대가 가고, 종교개혁과 반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을 마감하던 미켈란젤로가 구원을 갈구하는 참 모습일 것이다. 미술의 세계도 조화를 버리고 왜곡과 과장으로 새로운 방향을 찾는 매너리즘으로 향한지 벌써 반세기가 되는 시기이다.
<천지창조1 시스틴 성당 천장화 1508∼12년, 프레스코> <시스틴 예배실> <시스틴성당>
긴쪽 벽면에 보티첼리의《모세의 생애》를 비롯한 구약성서의 내용을 그린 그림과 그 반대 벽면에는 《예수의 생애》 등 신약성서의 내용을 비롯한 도합 12점의 벽화를 좌우의 벽면에 나누어 제작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들 벽화는 보티첼리를 중심으로 D.기를란다요, P.디코시모, L.시뇨렐리, 페루지노, 핀트리코 등이 3개-년에 걸쳐 그렸다. 그 뒤 1508년에는 당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령으로 미켈란젤로에 의해 유명한 천장 그림의 제작이 시작된다.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궁 시스티 나 예배당의 벽화를 의뢰 받았을 때(1508) 성당 옆벽에 이미 15세 기 화가에 의해서 모세전과 그리 스도전의 주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거기에 그는 구약성서 속의 장면 들로써 이를 완결지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그것은 천지창조에서 시작하여 노아의 이야기에 이르는 장면, 그리스도의 탄생과 재림을 예언 하는 사람들, 즉 선지자들과 여자 예언자격인 무녀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선조들의 모습이 이에 해당된다.
그때 율리우스 2세 묘당을 위해 제작을 추진 중에 있었다.
그것이 중단되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이 천정화를 위해 회화의 세계에 들어간 것이다.
그는 천정화를 입구에서 제단쪽 으로 진행하였고 표현형식도 4단 계-천지창조연작, 예언자와 무당 및 구약성서: 그리스도의 조상- 로 나누어 발전시켰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2세로부터 요구되어진 천장벽화의 주문을 거역하고 논쟁을 벌였다. 미켈란젤로는 장식 계획의 확장을 원했고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당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시오"라는 말로 율리우스 2세는 갈등을 끝냈다고 한다.
540평방미터 넓이의 천장 프레스코화를 완성하는 것은 거의 4년이라는 시간이 걸릴 만큼 방대한 작업이었다. 대부분 그림의 주요 장면은 연대기적으로 전개되는데, 미켈란젤로는 작업 당시 이와 반대로 연대기를 거스르며 동쪽에서 서쪽으로 작업했다. 1510년 8월까지는 <술 취한 노아>에서부터 <이브의 창조>까지 천장의 첫 번째 다섯 개의 장면이 완성 되었다. 나머지 네 개의 장면인 <아담의 창조>에서 <빛과 어둠의 창조>까지, 그리고 창문 위의 반달 모양의 공간에 그린 그림들은 1512년 10월에야 완성되었다. 미켈란젤로는 그의 몸에 심각한 무리가 왔다. 갑상선종이 점점 더 커지고 목덜미와 가슴에 통증이 악화되었으며, 신장과 골반이 뒤틀리는 몸의 불균형이 나타났다.
<시스타나 천장 벽화>에는 결코 미켈란젤로가 혼자 생각해 낸 것으로는 볼 수 없는, 매우 지능적으로 고안된 신학적인 내용들이 담겨있다. 그 아홉 개의 주요 장면들은 구약성서의 「창세기」편에 나오는 천지창조 이야기에서부터 노아의 만취까지를 담고 있다. 양쪽에는 구약에 나오는 일곱 명의 <예언자들>과,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했던 다섯 명의 <고대 무녀들>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천장의 반달형 공간에는, 신약의 시작인 「마태복음」에서 열거된 '그리스도의 선조'들이 그려져 있다. 중앙 화면의 구석에 있는 삼각형의 벽면 네 곳에는 신약의 사건과 예형학적으로 관련된 구약성서의 네 장면이 각각 그려져 있다.
미켈란젤로는 수많은 주변 인물들이 살고 있는 하나의 건축학적인 체계 속에 주요 그림들과 인물들을 고정시켰다. 그는 예언자들과 고대의 무녀 사이에 부조 형태의 푸토(벌거벗은 동자상)들이 떠받치고 있는 낮은 주춧대를 설치했다. 그로부터 천장의 구획을 나누어 그림의 경계를 만드는 가름대가 형성된다. 주춧대 위에는 나체의 청년상인 <이뉴디>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아홉 개의 주요 장면들 중, 비교적 작게 그려진 다섯 개의 그림들을 네 명의 이뉴디가 둘러싸고 있다. 그들에 대한 해석은, 주춧대를 떠받치고 있는 <대리석 느낌의 푸토상>이나 원형의 <청동상 느낌의 청년들>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논란이 되고 있다. 바사리는 이뉴디를 황금 시대의 전령으로 보았다. 이와 관련해 푸토들과 이뉴디들은 당시의 시대상을 알레고리화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창조'와 '예언자들과 고대의 무녀', '그리스도의 선조들'과 연결될 수 있다.


<천지창조>
시스틴 천장 벽화를 구성하는 창세기 이야기들은 성당 제단 쪽에서 시작해 입구 쪽으로 주제별로 전개되고 있다. 이 작품은 벽화들 중 가운데 부분에 해당하는 그림에 속하며, 나체상을 뜻하는 4명의 이그누디(Ignudo)를 작은 형태와 큰 형태 교대로 배열하면서 펼쳐진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19절에 해당되는 이야기, 즉 해와 달, 별, 식물을 창조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이는 내용상으로 두 번째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밝은 빛을 품고 해와 달, 별을 창조하는 역동적이며 힘있는 하나님의 비상하는 모습과 더불어, 식물을 창조하는 하나님이 저 멀리 등을 보이며 사라지는 모습이 한 벽화 안에 그려져 있다.
구약에 등장하는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두려우면서도 경이로운 존경심을 함께 불러일으키는 절대적 존재이다. 이 그림 뒤에 나오는 <아담의 창조>에서도 하나님은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거리를 두면서 강력한 추진력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미켈란젤로의 이 천장 벽화에는 여느 화가들이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하나님"이라는 신의 존재를 뛰어난 상상력과 필치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중앙부분의 천지창조관련

<빛과 어둠의 창조>
천정화 중간축(中間軸)의 마지막에 해당되며, 구약성서 순서로는 첫째 장면이 되는 이 그림의 장면은 바로 창세기 1장 45절에 해당되는 하나님의 빛과 어둠의 창조 내용이다. '-하나님의 빛과 어둠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고 어둠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이 내용을 뒷받침이라도 하듯이 담홍색의 옷에 싸인 신령이 두 팔을 들고 위를 쳐다보며 빛과 어둠을 만들고 있는 것이 그려져 있다. 이 가운데의 그림 내용에 일치하고 있는 듯이 사방 귀퉁이에 낮(右下), 아침(右上), 저녁(左上), 밤(左下)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 의인상(擬人像)이 있고, 그 각각 한 쌍씩이 끈으로 메다이용에 연결되어 있다. 미켈란젤로는, 한쪽 팔을 머리 뒤로 가져가서 몸을 옆으로 틀고 있는 <아침>의 상에서 잘 나타나 있는 것처럼 정신적인 상태를 육체적으로 표출할 때 많은 움직임도 보인다.

<해와 달과 초목의 창조>

<하늘과 물의 분리>
하늘에서 물을 분리하는 일은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창조하신 다음 둘째날에 이룬 일이지만, 앞서 말한 그림의 순서로서는 천체(天體)의 창조 다음에 배치하였다. 그 이유는 네 귀퉁이에 물질계의 상징으로 보이는 4원소의 의인상을 함께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 같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물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창세기 1-9, 10) 이런 내용에 그림의 주제를 맞춘 것으로 추측되는 것은 나체상의 상징과 어느 정도 연결시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람, 즉 공기의 상징과 물, 불과 흙의 상징을 이들 속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푸른 옷을 둘러 쓴 여자같은 상은 물(左上)을 나타내고 곱슬머리는 불(右下)이 아닐는지. 두 손을 번쩍 든 하나님은 아래를 보면서 부유하고 있다.

중앙부분 아담과 이브관련

<아담의 창조>
하늘로부터 강렬하게 돌진하는 하나님은 아기 천사들에 둘러싸인 이브를 옆에 끼고, 아담을 향해 검지손가락을 뻗고 있다. 대지에 밀착된 아담은 하나님을 향해 몸을 내밀고 있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아 신의 보호를 받고 있는 이브를 보며 묘한 슬픈 표정을 짓는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설정은 아담의 표정과 육체와 영혼을 부여하는 신의 강렬한 눈빛으로 가늠할 수 있게 된다. 몸이 반쯤 세워진 아담이 하나님에게 생명의 힘을 전해 받으며 짓는 표정에는, 앞으로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어 고통스런 현실 공간으로 떨어지게 됨이 어렴풋이 암시되어 있다. 하나님이 취하고 있는 역동성과 신비함은 아담과의 절묘한 대비로,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절대적 존재로 표현되어 있다. <아담의 창조>는 성당 입구에서 출발하여 구약 이야기가 전개되는 중간 지점에 그려져 있다. 이는 인간과 신이 함께 표현되는 양식을 과감하게 창조적으로 표현하면서,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든 하나님의 창조적 힘과 인간이 만들어지는 감동적인 순간을 뛰어나게 형상화시킨 작품이다.

<이브의 창조>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창세기 2-21, 23). 커다란 망토에 둘러싸인 하나님은 오른손을 들어 그야말로 나무 밑에 자고 있는 아담의 옆구리에서 나오는 듯한 이브를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에서 그가 볼로냐(Bologna)에서 본, 그가 많은 영향을 받은 쿠엘치아(Gacopo della Querciar)의 힘찬 구약성서 부조와의 유사점을 지적받기도 한다. 주위의 나체상은 인체 속에 흐르는 네 가지의 액체 내지 네 가지의 인간의 기본 성격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혈액으로서의 다혈질(右下), 황담즙으로서의 담즙질(右上), 점액으로서의 점액질(左下), 흑 담즙으로서의 우울질(左上) 등으로 지적된다.

<아담과 이브의 유혹과 낙원추방1 2>
여기서는 두 가지의 장면이 동일화면에 나타나고 있다. 중앙의 지혜의 나무를 중심으로, 왼쪽은 나무를 감고 있는 뱀에 유혹되어 이브와 함께 나무 열매를 따려는 아담, 오른쪽에는 천사에 의하여 낙원에서 추방되는 두 남녀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져 있다. 거기에 열매를 따려는 아담의 뻗은 파로가 유혹하는 뱀의 팔, 그리고 천사의 검 (劍)을 피하려는 아담의 뻗은 팔에서 다시 양 면(面)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서 얻은 균 제감과 나무를 이중(二重)으로 감고 있는 여자 얼굴의 뱀과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 천사로 두 부분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오른편의 추방당하는 아담과 이브는 브란카시(Brancasi) 예배당의, 울면서 쫓겨나는 마사치오(Masaccio)의 같은 주제의 상을 방불케 하는 바 없지 않다. 그러나, 젊은 시절 흠모하던 이 작가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깊은 감정이 흐르고 있다.

중앙부분 노아관련

<노아의 번제1 2>
노아의 번제의 주제로 알려진 내용은 홍수에서 구제된 노아가 그의 처와 딸, 그리고 식구들과 더불어 하나님에게 감사의 번제를 올리는 장면으로 창세기 8장 20-21절에 나온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다시는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알려진 바와 같이 미켈란젤로는 이 천정 벽화에서 캇시나 전투 하도(下圖) 이후 처음으로 프레스코 벽화 제작에 임하였고, 힘든 경험을 겪게 되었다. 방주 문 앞에 딸과 처 사이에 서서 하늘을 가리키며 준비를 지시하고 있는 흰 수염의 노아의 모습에는 <도니가의 마돈나>상의 요셉과 닮은 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표현은 후기의 작품에 비하여 딱딱하다. 둘레에는 인간의 네 가지 감각 [후각, 시각(右下), 촉각(右上), 청각(左上), 미각(左下)]이 나체 의인상(擬人像)으로 표시되고 있다.

<노아의 홍수1 2>

<술취한 노아>
'방주에서 돌아온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 셈과 야벳에게 고하매 이들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는 창세기 9장의 이야기 내용이 하나의 화면에 동시에 묘사되었다. 커다란 포도주 통이 놓여 있는 막사 안에 취해 있는 노아와 그 앞에 세 아들이 서 있고, 밖에는 '씨를 뿌리고 거두어 들이는 일에, 덥고 춥거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낮과 밤을 끊이지 않는' 농사를 짓는 노아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림 네 귀퉁이에는 다름 아닌 4계절의 의인상(擬人像)이 그 의미의 내용에 일치시키고 있다. 봄(右下), 여름(右上), 가을(左下), 겨울(左上).




-이은기의 멀티미디어로보는 서양미술사에서-

미켈란젤로의<아담과 이브의 유혹과 낙원 추방> 마사치오의<낙원추방>



<리비아의 무녀> <드로잉>

주제의 좌우(12선지인)

<예레미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미래에의 희망을 강조하면서 살던 선지자 예레미야가 무녀(巫女) 리비아 맞은 편에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앞선 무녀와는 대조적으로 조용히, 그리고 생각에 잠긴, 정적인 포즈를 하고 있는 노인상(老人像)이다. 미켈란젤로는 이 그림에서와 같이 시스티나 천정화에서 여러 가지의 독자적인 해석과 조형적인 표현을 시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 규모와 작업의 범위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범인(凡人)들의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은 그 하나하나의 그림의 내용과 도상(圖像)과 그들이 전하는 사상을, 특유한 인간과 인체의 표현으로 매개하면서, 한편 전체의 구성에 대한 그 나름의 리듬에 한 몫을 담당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물론 형태의 표현만이 아닌 특유의 미적 색채감을 남기고 있다.

<페르시안 무녀(Persian )>

에제치엘(Ezekiel)>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유대왕국 4대 예언자의 한 사람. 구약성서 속의 한 책인 《에제키엘》의 저자. 에스겔이라고도 한다. 에제키엘은 BC 597년 바빌론으로 사로잡혀 간, 많은 유대인 포로들의 신앙지도자로서 신망을 한몸에 지닌 사제(司祭)였다. 포로생활 5년째 되던 날 바빌론의 그발강(江)가에서 야훼 신으로부터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받고,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을 숭배한 죄의 대가로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예언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죄를 회개하지 않았고, BC 587년에 그의 예언은 적중하였다. 그 뒤 절망에 빠진 유대 민족을 위로하고, 하느님의 은혜와 영광이 빛나는 미래를 예언하였다

<에르트리아의 무녀(Erythrean )>
노아의 이야기를 둘러싼 선지자 그룹, 즉 입구에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이 <에리트레아의 巫女>는 이사야와 마주하는 비교적 정적인 표현 세계에 속하고 있다. 미켈란젤로에게서는 육체와 영혼의 표현상의 균열이나, 도상(圖像)내용과 표현 형태 사이의 일치의 초극이라 는 문제가 그의 중요한 한 특징을 이루고 있다. 그런 면의 한 경우를 이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최후의 심판을 말한 에리트레아의 무녀가 비록 책장을 넘기면 서 무시하는 모습에 그의 그 놀랍고도 엄숙한 예언의 기미를 담고 있다고도 하겠으나, 역시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인체의 움직임이 그다지 크지 않은 조용 함이라 하겠다. 뒤의 기대의 박공을 떠메고 있는 장식 조각의 푸토(putto)들이 입구 위의 예언자 군에서 보는 바와 같은 정면성을 넘어서 사선으로 움 직이고, 그에 못지 않는 배경의 어린이의 움직이는 포즈도 이를 깨뜨리지는 않는다.

요엘
구약성서 <요엘서>의 주인공. 거대한 메뚜기 떼가 이스라엘 땅에 재앙을 몰고 왔다. 예언자 요엘은 그것을 심판의 날을 알리는 조짐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묵시적인 언어로 하루 빨리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뒤이어 미래에 대한 환상을 펼쳐보인다. 그 환상 속에서 야훼는 그의 백성이 받은 고통을 보상해 주고 그들의 적을 징벌한다. 요엘의 신상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책이 바빌론 유배지에서 돌아온 기원전 400년에서 350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이 쏟아짐을 예언하는 구절은 성령강림절에 성령의 선물을 예시하는 것으로 신약성서의 <사도행전>에 인용되어 있다.
즈가리야
이스라엘의 예언자. 《즈가리야서》의 저자로, 위로와 소망과 영광의 선지자이다. 바빌론 포로에서 귀환한 백성이 성전(聖殿)을 재건할 때 여러 가지 방해로 중단되면서 백성의 믿음도 흔들리기 시작할 때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무관심과 나태함을 깨우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활동은 자연적으로 성전재건을 주제로 하여 시작되었으며, 성전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 생활이 다시 부흥됨은 물론 이 회개한 민족을 통하여 메시야가 강림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선지자이자 제사장이었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사장임과 동시에 선지자로 파악하는 사상을 발전시켰다.

<델포이의 무녀>
<빛과 어둠의 창조>에서 노아의 이야기들에 이르기까지 9구분으로 된 구약성서 내용의 천정 중심 화면 전 후 좌우에 12체의 선지자, 그리고 무녀가 그 아래 건축적인 틀에 억눌려 있는 그리스도의 선조 그림들보다 훨씬 위풍있게 그려졌다. 그런 예언자의 위치는 입구 바로 위에 있는 선지자 자카리아(Zaccaria)를 비롯하여 첫째 그림, <노아의 만취>를 두고 왼쪽에 <델포이 의 무녀>와 오른쪽에 <선지자 요엘(Gioele)>, 그 다음의 삼각 벽면을 건너서, <노아의 번제>를 두고 왼쪽에 선지자 이사야와 오른쪽의 에리트레아의 무녀와 <에바의 창조> 그림을 두고, 구마의 무녀와 선지자 에제키엘, <하늘과 물의 분리>를 두고, 선지자 다니엘과 페르시카의 무녀, <빛과 어둠의 분리>를 두고, 리비아의 무녀와 선지자 예레미야, 그리고 제단 바로 위에 선지자 요나가 위치하게 된다. <델포이의 무녀>는 후반 이후의 표현이 전체적으로 대담해지고 커지는데 반하여, 균형이 잘 잡힌, 전반의 그림 중에서도 돋보이는 것이다.

<이사야>
메시아를 기다린 선지자 이사야가 정면을 향해 옆을 내려다보면서 앉아 있는 데서 드러난다. 직각에 가까운 팔과 다리의 포즈는 등뒤로 둥글게 윤곽을 주는 망토의 곡선과 함께 이 천정 벽황서 미켈란제로가 여러 번 시도하던 경향으로, 여기서도 반영시키고 있다. 그는 이와 같이 가만히 앉아 있는 좌상에서도 주로 그 포즈나 형태감의 흐름에서 정적인 고전주의를 초극하고 있다. 그런 예를 이 천정화에서는 수없이 헤아린다. 조각가인 그가 그림 세계에서 보여주는 조상적(彫像的)인 것 속에서 나타내고 있는 그와 같은 특수 경향은 그의 예술로 하여금 고전적 이상주의 속에 이미 싹트고 있는 매너리즘적인 특성을, 그것이 나아가서는 과장되는 공간감과 더불어 바로크적인 특성을 지닌 것의 근거로 지적 받기도 한다.

<Cumaean 무녀>

<다니엘>
구약성서 《다니엘서》의 주인공으로, 구약시대의 4대 예언자 중 마지막 인물. 유대 민족이 처음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BC 597) 소년인 다니엘도 같이 연행되었다. 처음에는 궁정에서 시동(侍童)으로 일했으나, 시종일관 조국의 복권을 기원하며 이교(異敎)의 권력과 박해에 대항해 싸웠다. 뒤에 느부갓네살왕의 꿈을 해몽해 준 일로 인하여 명예로운 지위에 올랐으나, 고관들의 질시로 두 친구와 함께 풀무불 속에 던져졌으나 무사하자, 다시 사자 굴에 던져졌는데도 신의 가호를 받아 무사하였다. 흔히 ‘믿음의 용사’ ‘신의 절대적인 가호’의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다.




<리비아의 무녀>
고대의 여자 예언자격인 시빌라(Sibylla)라는 무녀(巫女)들은 열 명 정도가 세계 여러 곳에 살면서 앞으로 닥쳐올 일을 말하였던 것으로, 후에 와서 그리스도나 그의 가르침에 관한 예언으로도 가끔 인용되었다. 여기서는 남자 예언자와 함께 등장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이 예언자 연작에서 다른 부분과는 구별되게, 대개가 책이나 종이 두루마리를 펴고 있거나 들고 있는 포즈를 취하게 함으로써 그 부분의 특성을 뚜렷이 보이고 있다. 여기서도 '그때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모든 일들을 기록한 책을 내놓을 것이다.' 커다란 책을 두 손으로 들고 뒤에서 옆으로의 움직임의 공간을 예상케 하는 이 리비아의 무녀의 그림에서 앞의 예언자 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격렬한 움직임의 '요나'에 가까운 커다란 움직임의 자태를 찾아볼 수 있다. 그가 남긴 이 그림을 위한 습작에는 남성상(男性像)의 데상이 돋보인다.

<요나>
천정화의 입구에 위치한 선지자 자카리아(Zaccaria)와 마주 보며, 안쪽 제단 위의 중요한 벽면에 차지하고 있는 것이 <요나>이다. 조용하고 균형이 잡힌 전자의 그림들이 보여주는 표현의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고 심한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다. 뒷배경의 유동성도 이에 호응하여 한층 더 고조되는 공간을 낳게 한다. 요나는 큰 물고기에게 먹혀 하나님에게 기도 한 결과 3일 만에 그것에서 토해 내어졌다. 그런 뜻에서 부활의 상징이 덧붙기도 한다. 커다란 입의 물고기가 요나 옆에 보인다. 이와 같이 12체의 선지자와 무녀(巫女)의 배치라는 구성이 타에 그 예를 찾을 수 없는 거소가 마찬가지로, 이들 선지 자 내지 무녀를 그리는데서 보여주는 미켈란젤로의 해석이나 의미 부여도 독자적인 데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요나가 있는 천정에 붙은 벽에 바로 최후의 심판 그림이 위치한다.

네모퉁이

<유디스와 Holofernes>
구약성서의 외경(外經) 가운데 하나인 <유딧書>의 주인공. 유딧이라는 미모의 한 유대인 과부가 민족의 위급함을 구하기 위하여, 미모를 이용하여 베툴리아를 완전포위하고 있는 아시리아군의 적진 속에 들어가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죽임으로써, 이스라엘을 구하고 동족에게 용기를 북돋아준다는 교훈적 이야기이다. 가공적인 설화이지만 종교문학적인 기교는 뛰어나다. 마카비 시대 초기에 저자는 바리사이파(派)에 속하는 사람에 의해 헤브라이어(語) 또는 아람어로 쓰여졌다. 가톨릭에서는 이 책을 제2정경(第二正經)으로 채택하였으며, 한국에서도 1977년에 완간한 《공동번역성서》(외경부)에 새로이 번역·수록하였다. 16장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7장은 서론에 해당하고, 8장 이하가 유딧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윗과 골리앗>
고대 이스라엘의 제2대 왕. 이스라(이새)의 아들로서, 소년시절 사무엘이 사울왕(王)의 후계자로 지목하였다. 성장하여 사울왕을 섬기고 페리시테(블리셋)의 거인 골리앗을 돌로 때려죽여 용맹을 떨쳤으나, 사울의 질투로 적대시당하였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인 요나탄의 우정과 보호를 받아, 사울이 죽은 후 BC 1000년 유대의 왕, BC 994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신의 언약궤를 옮기고, 제사제도(祭司制度)를 정하였으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교[猶太敎]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만년에는 자식들 간에 왕위계승의 싸움이 일어나는 등 평온하지 못하였다. 또 하프의 명수였고, 시인으로서도 명성을 떨쳤으며, 구약성서 시편의 상당부분은 다윗이 지은 것이라고 알려졌다. 그의 사적(事績)은 구약성서 《사무엘 상(上)》 l6장 이하와 《열왕기 상》 2장 및 《역대기 상》 11∼29장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교활한 독사>

<하만의 형벌>

아홉 주제의 그림 네 귀퉁이 마다 다양한 포즈의 《Ignudo》를 배치하였고, 아홉가지 그림의 좌우 옆쪽으로는 《12명의 무녀(巫女)와 예언자》를, 삼각형 모양의 요면벽과 반월형 벽면에 그리스도의 선조들의 가족과 조상들을, 그리고 네 모퉁이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관련된 내용의 그림들을 각각 그렸다.

그리스도 조상들

<Achim 과 Eliud> <Manasses와 Amon 그리고 Ezekias>

그리스도 선조 가족들

<Zorobabel의 가족> <어머니 아비아와 어린 Roboam>

<Ozias 가족> <어린 솔로몬과 그의 어머니>

이구누도1 2 3 4 5 6





<최후의 심판 1534∼41년, 프레스코 1450 x 1300cm> 부분도1. 2. 3
세상과 인간의 탄생과 그에 관련된 것들을 거대한 화면에 담아낸 혈기왕성한 37세의 대화가 미켈란젤로는 회갑이 넘어 신이 창조한 세상의 종말을 그리기 위해서 다시 이곳을 찾는다. 1534년부터 7년간에 걸쳐 작업한 이 작품은 391명의 군상이 난무하며 장대한 구도와 복잡한 구성, 그리고 전체적인 움직임에 있어서 흐트러짐이 없는 그의 만년의 대작이다. 성경에 예시된 최후의 날의 그리스도 재림과 그 때 행해지는 심판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천국에 대한 인간의 갈망과 지옥의 공포를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최후의 날에 부활하는 사람들과 심판에 의해 끌어올려지는 선인과 밀려나는 악인은 당당한 심판간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고 있다. 단테가 '신곡'에서 지옥과 연옥, 천국을 묘사하면서 그 곳에서 만난 인물들을 비평하고 평가하여 오랜 역사를 심판하였듯이 미켈란젤로는 그의 벽화에서 그러한 심판을 하였다.
중앙에 있는 예수는 오른손을 들어 심판을 하고 왼손으로는 주위의 착한 자들을 부르고 있다. 곁에는 인자한 성모가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들러싸고 있고, 예수의 발 아래 오른쪽에는 사도 바르톨로메오가 영혼과 육체가 빠져 나간 미켈란젤로의 껍데기를 쥐고 있다. 작가는 덧없는 인생을 살아온 자신의 위치를 그렇게 예언했다. 예수의 오른쪽에 열쇠를 들고 있는 백발의 노인은 성 베드로이고 그 왼쪽은 성 바울이다. 마리아의 왼쪽에는 십자가를 든 성안드레아와 노인 모습의 성 요한이 있다. 글미의 윗부분은 천국에서 만나는 기쁨을 그렸고, 중간 부분에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심판관에게 순교자의 심벌을 각자 보이고 있으며, 하단의 좌측에는 지옥에서 천당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묘사되어 있는가하며 우측은 반대로 천당으로 가는 것을 막고 있는 장면이다. 무거운 죄를 지은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천사들의 부측을 받아야 천당으로 올라갈 수 있다.
이 작품은 '천지창조'를 그리던 때와는 달리 종교개혁으로 전 기독교계가 몸살을 앓고 있던 때라 당시의 비극적인 시대상과 노년에 접어든 미켈란젤로의 비관적인 인생관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벽면전체를 4구역으로 나누어 7년에 걸쳐 위에서부터 1.천사들, 2.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사도들과 순교자들 , 3.천상으로 끌어올려지는 무리와 나팔을 부는 천사들 , 지옥으로 떨어지는 무리들 그리고 맨 아래층에는 4.지옥을, 높이 20m나 되는 벽면에 391명의 다양한 인물군들로 가득 채움.
-미술사가 노성두에서-
1541년 만성절.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이 공개되었다. 교황과 성직자들이 경사스런 행사에 맞추어 시스티나 예배소로 모여들었다. 베드로 대성당 공사가 수십 년 째 완공이 지체되는 바람에 줄곧 여기서 의식을 치러왔으니 새삼스런 걸음은 아니었다. 1512년 이곳의 천장 프레스코를 완성하고 서른 해 남짓. 예순 여섯의 늙은 예술가에게도 감회가 밀려왔다. 이윽고 창문을 가렸던 휘장을 걷어내자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올려보는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최후의 심판 날, 뭇 영혼들의 찬양과 울부짖음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재림 예수가 하늘 복판에 앉았다. 천사와 악마, 꽃다운 생명을 던져서 신앙의 사표가 되었던 순교자와 열두 제자들, 그리고 400명이 넘는 성자와 성녀들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퍼렇게 빛나는 하늘은 어떤 심판의 칼날보다 무섭고 전율스러웠다. 그런데 그림을 뜯어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한순간 일그러지더니 술렁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쥐어짜는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단이다!”

미켈란젤로는 이날 이후 숨을 거둘 때까지 <최후의 심판>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성직자와 교황청 관료들, 예술가와 인문학자들이 모두 한편이 되어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를 두둔하다가 `이처럼 저질스럽고 음란한 장소에서 어떻게 기도와 찬양이 나오느냐'고 막말을 듣기도 했다. 뒤이어 성좌에 오른 네 명의 교황들은 제단 프레스코에 대해서 전혀 호의를 보이지 않았다. 전면 철거냐, 부분 개작이냐를 두고 안팎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성자, 성녀 알몸으로 그려

그림 한 점을 두고 이단의 의혹을 천 가지 이상 꼽아대는 사람도 있었다. 성자들 뒤통수에 후광이 없고 천사가 날개를 달지 않은 것도 시빗거리였다. 예수 얼굴을 수염 없는 애송이로 그려놓았으니 교회의 권위를 어디서 찾느냐는 볼멘 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자와 성녀들을 실낱 하나 걸치지 않은 빨간 알몸으로 벗겨놓은 게 탈이었다. 의전관 체세나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음탕한 그림을 교황 예배소에 버젓이 그려두었으니 자칫 목욕탕이나 술집에 온 줄 착각하겠다고 비아냥대기까지 했다. 심지어 십자가를 모신 제단 바로 위에 악마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걸 보고 이건 예배소에 모인 사람들더러 곧장 지옥불로 직행하라는 이야기라고 수군댔다. 더군다나 명부의 뱃사공 카론이 베드로의 고깃배에 타고 노를 휘두르는 판이니 첫 교황 베드로가 일군 천오백 년 역사의 가톨릭 교회가 그림 속 푸른 바다에서 뱃멀미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24년 시비끝 수정결정

압력을 견디다 못한 바오로 4세는 `그림을 바로 잡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시종장의 전언에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쏘아붙였다. “교황 성하께 먼저 세상을 바로 잡으시라고 전하게. 그러면 그까짓 그림 따위야 저절로 바로 잡힐 테니.” 그러나 뒤를 이은 피우스 4세에게는 그런 발뺌이 통하지 않았다. 교회의 권위는 그림 수정을 결의한다. 1564년 1월 21일 트렌티노 공의회의 결정은 미켈란젤로가 여든 아홉 나이로 숨을 거두기 한 달 전에 내려졌다.

수정 작업을 그의 제자 볼테라가 맡은 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스승의 뜻을 크게 다치지 않고 최소한의 가리개만 씌우는 정도에서 일을 마무리했다. 다만 엉덩이를 흔들어댄다고 비난을 모았던 성녀 카테리나는 본격적으로 손보았다. 성자들의 부끄러운 곳을 덮는 가리개는 회벽을 파내고 젖은 석회를 새로 바른 뒤에 물감을 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볼테라는 이후 `브라게토니'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가리개 귀신'이란 뜻이다.

살가죽에 미켈란젤로 자화상

성 바르톨로메오는 산 채로 살가죽을 벗겨 죽이는 순교를 당했다. 십자가에 매달거나, 돌로 쳐죽이거나, 자루에 넣고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16세기 이탈리아 화가들은 극적 효과를 노리고 가장 참혹한 순교방식을 선호했다. 잔혹 주제가 판치던 17세기에는 심지어 성자를 십자가에 매단 상태에서 인피를 벗겨 내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는 단검으로 발라낸 성자의 껍질에다 자신의 자화상을 새겼다. 이로써 육신의 희미한 그림자 속에 예술의 고귀한 유령이 깃들게 되었다. 최후의 심판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미켈란젤로는 제 얼굴을 그리면서 두 눈을 후벼팠다. 실명의 달콤한 유혹이 그의 붓을 이끌었다. 또 그의 표정은 젖은 걸레처럼 일그러졌다(그림2). 무슨 심사였을까? 성 바르톨로메오 말고도 살껍질을 벗겨서 죽은 인물이 또 있었다. 마르시아스. 반인반수의 괴물이었으나 아폴론의 키타라를 능가하는 피리 솜씨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르네상스 이후 예술의 순교자로 추앙 받았던 신화 속의 존재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도 예술의 순교를 꿈꾸었을까?

'목욕탕에 어울리겠습니다'

시인 아레티노는 탁월한 미술 비평가로 이름을 날렸다. 베네치아 화가 티치아노에게는 간지러운 아부를 서슴지 않았으나 그와 적대관계에 있던 미켈란젤로에게는 주특기인 독설을 쏟아냈다. <최후의 심판>을 보고 나서 1545년 일흔 먹은 미켈란젤로에게 쓴 편지다.

“천사와 성인들은 지극히 고귀한 소재입니다. 그런데 당신 그림을 보면 지상의 진지함이나 천상의 엄숙함을 눈곱만치도 찾을 수 없군요. 알만한 예술가라면 디아나에게 옷을 챙겨주는 거야 말할 것도 없고 베누스도 손으로 가릴 곳을 가리게 하지 않나요? 그런데 기독교인을 자처하는 그대가 예술을 구실 삼아 신앙을 깔보는군요. 순교자와 성스런 처녀들이 창피한 줄 모르고 넋빠진 자세로 저마다 성기를 드러내고 있으니, 설령 유곽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쳐도 도저히 눈뜨고 못 볼 희한한 볼거리가 되겠군요. 이 그림은 교황의 성스러운 예배소보다 고급 목욕탕에 갖다두면 어울리겠습니다.”

( http://namgane.cafe24.com/detail164_4.html )

예수님을 안 믿으면 손해보는 77가지
4 ~ 10 가지

 

♤ 자신을 위하여


4. 예수를 믿으면 매사에 자신감이 생깁니다.

어쩌면 굳이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미 여러분이 수긍을 하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무슨 일이든지 자신감을 갖고 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른 이름은 ‘용기와 힘’ 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용기와 힘의 원천이십니다.

널리 알려진 한 예로 미국 남북전쟁 때 북군을 이끌던 반쪽 대통령 링컨은 남부지역의 산업구조상 노예해방을 반대할 수밖에 없는 남군과의 지루한 전쟁을 치르면서 날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의 엄청난 피를 담보로 하여 지금 저희가 치르는 이 전쟁의 목적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를 늘 깨우치게 해주소서. 피를 흘리고서라도 저희의 뜻을 세움이 옳다 하신다면, 그렇다면 기필코 저희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주소서. 저희는 오로지 하나님의 정의를 이 대륙에서 실현하는 데 쓰임 받는 당신의 도구일 뿐이오이다
‧‧‧.

하나님께서는 산업구조를 앞세운 남부인들의 타산적인 인종차별 실리보다는 실리와 피부색의 편견을 뛰어넘어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구현하고자 한 북군 지도자의 손을 결국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간절히 기도하는 의로운 사람의 편이시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던 남군을 밀어붙이고 북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정의로우심을 굳게 믿고 싸운 신심 독실한 링컨의 자신감이 그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5.
예수를 믿으면 부지런해집니다.

강원도 산골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집안의 농사일을 거들다가 맨손으로 상경하여 온갖 고생을 한 끝에 마침내 우리 나라 최대의 기업을 이루어내는 데 성공한 정주영 회장 같은 이는 평생을 초인적인 근면생활로 일관한 분이라고 합니다. 그분은 고령에 이른 지금도 서울 장안의 누구보다도 새벽 일찍 일어나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고 하지요?

옛 격언에 ‘부지런은 반복(半福)’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부지런하기만 하면 이미 하늘의 복을 절반은 확보한 셈이라는 뜻입니다.

서양에도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더 잡는다!’ 이런 근면의 가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특별히 하는 일도 별로 없으면서 대개 밤늦게 자정 넘겨 잠자리에 들기가 일쑤고, 아침에는 해가 중천에 닿을 때까지 늦잠 자기를 즐깁니다.

원래 인간은 일몰과 함께 일찍 잠자도록 되어 있고, 일출과 함께 일찍 일어나서 일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부지런한 사람이란 저녁에 일찍 잠들고 새벽에는 일찍 일어나 활동을 시작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게으른 사람과 부지런한 사람의 차이, 당장에는 표시가 나지 않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고 나면 그 생애의 성취도에서 현격한 차이가 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부지런한 생활습관은 젊어서부터 몸에 배어야 합니다. ,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나도 부지런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장 좋은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라도 부지런해집니다. 게으른 사람들의 특성은 시간이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제 아무리 게을렀던 사람도 자연히 부지런한 사람이 됩니다. 삶의 목표가 뚜렷해지면서 근면해야 될 이유가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으로 일생을 보다 값있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 됩니다. 그런 사람한테는 새벽기도의 축복도 당장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6.
예수를 믿으면 마음이 넓어집니다.

평생동안 예수를 잘 믿어온 분들의 마음 씀씀이를 보면 하나같이 편협한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마음들이 다 넓습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곤 하지요. 남의 과실이나 부족한 점은 못 본 듯 그냥 슬쩍 넘어가 주고, 남의 본의 아닌 실수로 인해 자신이 피해를 입는 경우라 할지라도 너그럽게 이해해줍니다. 마음이 넓다는 것은 바로 마음이 너그럽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너그럽게 되는 일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식당에 가 보세요. 종업원의 실수에 대해 너그러운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자동차들이 밀리는 거리에 나가 보세요. 이웃 차량의 운전자에게 너그러운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그래서 대학교수도 운전대만 잡으면 입술에 욕설이 묻는다지 않습니까? 각박한 한세상을 살면서 너그러운 마음씨를 지닌다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신실한 기독신앙을 통해 제 마음의 넓이를 무한히 넓혀서 사는 부러운 마음 부자들이 실제로 우리 주위에는 참 많습니다. 성경말씀을 통해 예수정신을 배우고, 기도를 통해 예수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자기수양을 해 왔기에 비로소 그 일이 가능한 것이라고 여겨져 저는 그런 분들을 항상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 예수의 생애 전체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것도 모자라 결국 죄에 찌들고 성급하고 교만하고 옹졸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우리의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목숨까지도 십자가에 내걸어 바치셨습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늘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마음을 넓히는 그 일은 혼자서는 되지 않습니다. 말씀 안에서 공동체적인 삶의 실천을 거듭거듭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그 일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를 믿다 보면 이 세상에는 분노할 일들보다 감사할 일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렇게 감사하면서 세상을 살다 보면 세상 속의 잘못보다는 내 자신 속의 잘못이 훨씬 더 많다는 것도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넓히는 일이란 자신의 본래 모습을 하나씩 몰아내고 대신 그곳에 예수의 말씀과 정신을 차곡차곡 채워 넣는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되려면 예수를 잘 믿는 방법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7.
예수를 믿으면 성격이 밝아집니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선물 가운데 가장 자신 있게 약속할 수 있는, 그래서 가장 확실한 대표적인 은혜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늘 외롭고 어둡고 음울하고 소극적으로 침체되어 있던 사람의 성격이 금세 대낮같이 밝아집니다. 어둑어둑한 음지의 그늘 속에서 마지못해 사는 듯하던 사람이 햇살 바른 양지로 나와 즐거운 마음으로 적극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왜일까요?

첫째, 예수를 믿으면 성경말씀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삶이 얼마나 귀한 하나님의 사랑 아래 주어진 놀라운 은혜인가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사람은 그 깨달음을 통해 족쇄처럼 굳게 채워져 있던 자기 질곡의 굴레를 벗어던지게 됩니다. 지금껏 목표도 목적도 없이 비관적인 삶을 살던 사람이 생명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 찬양하는 밝은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둘째, 예수를 믿으면 교회사회라고 하는 공동체 생활에 몸담게 되는데 그곳은 빈부 차별 없이, 신분 차별 없이, 학벌 차별 없이 대등하고도 평등한 인간 가치의 기준 아래 우애와 포용과 사랑으로 가득한 새로운 세상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셋째, 예수를 믿으면 불평과 불만으로만 가득 차 있던 칙칙한 마음이 깨끗이 비워지고 대신 거기에 무한한 감사와 축복의 맑은 샘물이 가득 고이게 됩니다. 세상을 둘러보나 자기 자신의 형편을 둘러보나 온통 감사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되어 자기 스스로가 깜짝 놀라게 되는데 그것은 마치 앞 못 보던 장님이 어느 날 아침 새롭게 눈을 떠서 세상을 보는 것과 같은 놀라운 감동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훈련이야말로 우리가 믿음생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훈련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선물 중 하나가 바로 이처럼 긍정적인 시각의 지혜인 셈인데 사람이 긍정적인 마음 씀씀이를 갖고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자연히 성격도 따라서 밝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나 사람은 마음의 깊은 상처 한 가지씩을 가지고 세상을 살기가 쉽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성격을 우울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지요. 누구도 이해해 주려 하지 않는 자기만의 그 상처는 예수의 사랑, 예수의 말씀, 예수의 보혈로써만 치유가 가능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할 근원적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8.
예수를 믿으면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 아는 사람을 평할 때 “그 사람 아주 인간이 됐어!” 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칭찬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또 세상을 살다 보면 그 반대의 씁쓸한 경우도 가끔씩 만납니다. 그럴 때 흔히 혼잣말처럼 “그 친구 좀 덜 된 인간 아냐?” 하고 무의식중에 뇌까리게 되지요. 저마다 귀한 인격체로 세상에 태어난 인간을 그렇게 ‘된 사람’ 과 ‘덜 된 사람’으로 쉽사리 이분하는 습관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닐 터이나 복잡한 세상에서 사람과 사람이 서로 엉켜 살다 보면 그처럼 순간적인 감정이나 직관에 의해 서로가 서로를 단순하게 평가하기가 참 쉽습니다.

, 그렇다면 여기서 ‘된 사람’ 은 어떤 사람이며 또 ‘덜 된 사람’ 은 과연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것인지를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물론 되고 덜 되고를 재는 기준은 참으로 여러 각도에서 가능할 수 있겠습니다만, 가장 흔히 적용되는 기준시각이 하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심성을 지닌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범사에 감사,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를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원래 맨몸과 맨손으로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게다가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참으로 연약하고 무능, 무지한 갓난아기로 태어납니다. 스스로 앉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눈을 떠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먹지도 못합니다. 누군가가 하나부터 열까지를 다 챙겨서 보살펴주지 않으면 그냥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것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입니다. 그렇게 태어난 아기는 일차적으로 부모님의 헌신적인 사랑과 보살핌 아래 조금씩 성장을 합니다. 성장을 하는 과정은 물론이려니와 성장을 다 하고 난 후에도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직간접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지만 살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가르쳐주니 지식을 얻게 되고, 누군가가 양식을 생산해주니 밥을 먹습니다. 누군가가 집을 지어 주니 춥지 않게 살 수 있고, 누군가가 차를 만들어주니 차를 타고 다닙니다. 누군가가 병을 고쳐 주니 건강을 유지할 수 있고, 누군가가 수돗물을 대주니 물을 먹고삽니다. 그 모두를 일일이 따져 볼 필요조차 없지요.

생각하면 참으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세상에 고맙지 아니한 것이 정말 단 하나도 없습니다.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고, 피를 나눈 형제나 같은 길을 함께 가는 친구나 옷깃 스치는 이웃이나 또는 이름 모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내게는 한없이 고맙고 또 고마운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감사한 마음을 늘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특히 우리 생명 자체를 비롯해서 그 모든 복잡한 생존 조건을 다 허락해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 섭리를 잊고 살 때는 더욱 많습니다. 그러니 ‘된 사람’ 과 ‘덜 된 사람’ 의 차이가 감사할 줄 아는 심성 여부로 판가름이 날 수밖에 없지요. 예수를 믿으면 그 무엇보다도 가장 첫 번째로 배우게 되는 것이 바로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귀한 심성입니다. 신분이 높아져도 감사를 모르면 ‘된 인간’ 이 아니지요.

9. 예수를 믿으면 효자가 됩니다.

날이 갈수록 사회환경이 번다해지고 세상풍조가 이기적이 되어감으로 인해 우리는 코앞의 일상에 쫓기기 바빠 자칫 우리를 낳아 길러 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잊고 살기가 쉽습니다. 바꿔 말하면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보다 훨씬 더 급하고 재미난 여러 가지 일들이 얼마든지 많은 세상이 되어 있다는 뜻도 되겠습니다.

마음속으로는 부모에게 효도를 좀 해야지 하는 생각은 누구나 갖고 있으나 그 실천율이 낮다는 데 문제가 있겠지요. 불효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고 나는 봅니다. 아예 효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생각은 하면서도 실천을 하지 않으면 그 또한 불효의 범주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경우라 할지라도 한 가지 공통점은 있습니다. 부모가 안 계시면 한 시도 살 수 없을 것 같았던 어릴 적에 비해 사람이 장성하게 되면 부모님의 필요성과 고마움을 어릴 적처럼 그렇게 절실히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점 말입니다. 모든 불효의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 원인의 뿌리를 살펴보면 그것이 일종의 교만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불효자식도 효자가 됩니다. 그 이치는 예수사상에 접근하는 일 자체가 바로 그 교만한 마음을 우선 다소곳이 접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부모를 잘 섬겨야 된다는 이야기가 성경에 말씀으로 이미 쓰여져 있음은 물론이려니와 예수를 믿게 되면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 교만 대신 자기가 받은 모든 은혜를 낱낱이 챙겨 감사할 줄 아는 심성이 자연스럽게 싹트게 마련입니다. 세상의 은혜 가운데 부모님의 은혜만큼 큰 은혜는 달리 없습니다. 효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스스로 부모님을 편안하고 기쁘게 잘 섬기는 일이 있고 그리고 다른 또 하나는 부모님이 소망하시는 대로 우리 자신이 건강하고 훌륭한 사회인으로 잘 성장해 가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 이 두 가지 과제가 순조롭게 잘 풀려 나간다는 사실!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가장 큰 효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자연히 깨우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믿지 않으시는 부모님께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여 그분들의 귀한 생명과 영혼을 구원받도록 해 드리는 일이지요. 믿지 않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스스로 예수를 믿기 시작해서 그 믿음을 부모님께도 심어드릴 수 있게만 된다면,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세상에 그보다 더 귀한 축복, 그보다 더 값진 효도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10. 예수를 믿으면 얼굴이 예뻐집니다.

예수를 믿으면 정말로 얼굴이 예뻐집니다. 얼른 믿어지지 않지요?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근거를 가진 내 지론 중의 하나입니다. 얼굴 표정은 마음에서 나온다는 말, 이미 상식처럼 되었으니 분명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얼굴과 마음과 표정은 각기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뿌리가 하나로 통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마음은 ‘생각’ 과 파이프라인이 직결되어 있습니다. 어쩌다 혼자서 부끄러운 생각을 하거나 겸연쩍은 일을 떠올리게 되면 우선 마음이 두근거리면서 얼굴색이 따라서 빨개지지요? 바로 그것이 손쉽게 예를 들 수 있는 좋은 증거입니다. 얼굴은 얼굴 자체가 따로 독립된 피부장기(皮膚臟器)로 그치는 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 생각, 정신, 사상, 신념 등과 같은 맥을 잇댄 하나의 총체적인 ‘거울’ 이라는 뜻이지요.

예수를 믿으면 우선 늘 좋은 일에 대한 생각, 밝은 미래에 대한 생각, 감사한 인연에 대한 생각, 희망에 찬 삶의 생각, 아름다운 마음 씀씀이에 대한 생각, 긍정적으로 세상을 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누구의 얼굴에나 자연히 밝은 표정이 생기고, 얼굴 근육에 혈액순환이 잘 되어 화사한 생기가 발그스레 돌게 마련입니다. 나이와 상관없습니다. 직업과도 상관없습니다. 학벌이나 재산과도 상관없습니다. 타고난 선천적 외모와도 상관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라도 지금보다는 꼭 열 배 아름다워집니다. 예수는 그 방면에서도 역시 ‘축복’ 의 이름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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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셋이면 새 접시가 뒤집힌다.


여자들이 모이면 말이 많고 시끄럽다는 말이다.

늙어가는 남자의 생각은 시계추의 딩동댕 만큼이나 정확해 졌다.
구렁이 담 넘어가는 걸 넘어,
새벽이면 한잠에서 일어나 어슬렁거리기 시작한다
.

새벽엔 할 일이 없다.
그냥 혼자 일어나 공상에서 생각 속의 헤엄을
수영 공법 무시하고 마음껏 헤엄치며
 놀고 있다.

하얀 백지 위에 놀아볼 생각은 여자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이렇게 다양한 생존 체를 하고 있는질, 잘 모르고 살아왔다
.

여자는 치마를 입고 살아가는 남자보다 약한 것으로만 알고
살았었다
.
그런데 여자를 말하려 하니 왜 이렇게 복잡 다양한지
알 수가 없다
.

여자는 높이 놀고 낮이 논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여자는 시집가기에 따라서 귀해지기도 하고 천해지기도 한다는
말이다
.

여자는 제 고장 장날을 몰라야 팔자가 좋다는 속담도 있다.
여자는 바깥세상 일은 알 것 없이 집안에서 살림이나 해야
행복하다는 말이다
.

여자가 셋이 모이면 시끄럽다는 말은 어느 분의 선견지명인지
몰라도 정확하다
.

어느 장소 어느 모임엘 가도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감각은
남자들을 압도한다
.

요즘은 모든 주도권이 여자에게 있다.
시집을 잘 가나 못 가나 할 것 없이 한 가정에서 우위의 여자를
자주 만나게 된다
.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결정권이 모두가 여자 몫이다
.

남자 마음대로 우겨서 결정했다간 잘하면 본전이요, 잘 못하면
두고두고 꼬집히며
살아야 하는 불쌍한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고도 남자냐 하는 식의 논리는 옛말이 되었다
.

친구 놈 하는 말이 그렇게 살려면 아예 잘난 불알을 떼버리고
살라고 해서 친구는
어떻게 사는가. 들여다봤다니, 그놈 역시
입으로만 떠들어댈 뿐 결정권은 전부다
자기 아내의 몫이었었다.

귓속말로 너 그렇게 불알 자랑하더니만 너도 별수 없구나 하니,
웃으면서 하는 말이
사실 불알 떼 내고 살아가려고 해도 떼다
버릴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

요즘 여자들은 높이 놀고 낮이 논다는 말이 없어진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시집을 잘 가나 못 가나 할 것 없이, 다들 한 가정
에서 남자를 넘어
높이만 놀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여자는 바깥세상을 모르면 행복하단 말은 뒤집힌 것 같다.
세상 밖을 모르는 여자는 맹꽁이로 통하는 세월이 되고 말았다
.
집안에 처박혀 살 여자가 없는 세상이다
.

세상이 여자 판인데 누가 집안에만 처박혀 살겠는가.
백화점을 가도 여자 세상이요, 음식점엘 가도 여자들의 천국이다
.

가끔가다 남자들이 음식점에 와서 하는 말이 주눅이 들어 밥
한 끼도 제대로
못 먹겠다고 하는 세상을 살아간다.

혼자 와서 밥을 먹고 있는 중늙은이를 보고 여자들의 입방아는
이렇게 지저귀고 있었다
. 저 남자 홀아비인가 봐.
집구석에서
여편네한테 밥도 못 얻어먹나 원
.

자기들은 남편 밥상이나 제대로 차려주고 저렇게 세상을 활보
하는 것인지 듣는 귀가
어지럽다고 한다.

그러니 집구석에 처박힌 팔자는 못 나고 갈 곳 없는 외톨이가
아니면 전부들 바깥에서
행복을 찾는 시절을 살아간다고 봐야
할 것 같다
.

왼 만큼 잘 난 남편을 만나지 않고서는 집구석에 처박혀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

맞벌이하지 않고서는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이기도 하다
. 누가
그런 말을 했다
.

여자로 태어난 게 죄지 내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당신 같은 남자는 상대도 않는다고
한 말이 생각난다.

아마 이 집 남자는 그런대로 남자의 행색을 하고 살아가는 반증이기도 하다.
남자 목소리를 제대로 내고 살아가는 집안인 것 같다
.

단 남자를 우대하고 살아가는 묘한 것을 발견한다.
우리 마누라 하는 말이 우리 아들 참 잘 생겼다
.

어쩜 내가 낳아도 저렇게 멋진 남자를 낳았을까!
여보! 당신 내 덕에 행복한 줄 알고 사세요
.
무슨 선심 쓰듯 자기 혼자 일을 다 한양 날 내려 보며 하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 여자도 집안에서 상전이다.

언제 가져갔는지 경제권도, 행복권도, 집안 살림살이 구석구석
모두가 자기 마음대로
휘둘러대니 불알 찬 난 왔다 갔다 시계추
정도의 역할밖에 할 일이 없는 것 같다
.

남편인 날 손 위에 올려놓고 자기 마음대로 주물럭거리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어제는 백만 원짜리 옷을 사 들고 와서는 하는 말이 여보! 이것
얼마 줬을 것 같으냐며
오히려 맞춰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귀가 막혀서 마누라를 바라보며 하는 말이 이 사람아 옷이
있는데 또 옷을 뭣 하러 사
?

이렇게 눈을 흘긴 날 보며 하는 말이 가관이다.
이거 얼마를 줬느냐는 대답을 다시 하라 해서 그것 잘 줘봐야
이십만 원 줬겠다고 하니
아이고, 저 세상 물정도 모르는 양반
이십만 원 줄 테니 어디 가서 사와 보세요. 하면서
퇴박을 놓는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것도 아니요, 처음부터
여자인 마누라의 요술에
걸려 발라당 넘어진 꼴이 된 날 발견한다.

하나하나 꼬집어 뜯으면 집안이 시끄러울 것이니 좋은 게 좋다고 그냥 넘어가자.

그래야 출근길에 인삼차라도 한잔 얻어 마시고, 마누라 눈 질끈
감는 윙크라도 한번 받아보지
그렇지 않고서는 집안의 냉기가
바깥 온도보다 더 차가워질 게 분명한데, 늙은 남자도
살아갈
방법을 연구해야 가정이 편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

며칠 전 댄스 모임엘 가는데 머리 모양은 누굴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빗느냐
?

옷은 왜 그렇게 깔끔 을 뜨느냐
?
신발은 언제 그렇게 고급을 사 신고 다니느냐며
집 밖을 나가면
언제나 당신 가슴속엔 자기가 있다는 생각을 하라는 등등
사각에다
대못을 박는 계산을 하기 시작한다.

그때도 난 큰소릴 치지 않았다.
나가든 말든 신경 써지마. 이렇게 말했다간 뭐요 신경 건드리지 말라 구요
.

그럼 난 뭐요? 이렇게 나올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겨우 한다는 말이 "여보! 내가 언제 당신 외에 옆을 바라보고 살았어
? 
 염려 마 잘 놀다 올게
."

그렇게 말하고 나가는 날 보며 웃는 아내
. 내가 귀여운가 보다.
저 여자 머릿속엔 여우가 몇 마리나 들어 있을까 생각하며

여자의 울타리를 빠져나간다
.

그런데 가는 곳마다 여자 세상이니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여자의 가슴은 풍만하고 아름답다는데, 요즘 여자들의 가슴은
작고 계산적인 것 같다
. 저 계산적인 가슴으로 날 누르고 살아가는 우리 집 여자.
그래도 난 우리 집 여자를 찾아 오늘도 집안으로 들어온다
.



-퍼온 글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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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교류하는 삶의 열매

(The Fruit of Our Communal Life

 

우리 사회는 개인주의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우리가 말하는 것,

또는 우리가 행동하는 것은 모두 우리의 개인적인

성공을 위한 것이라고 믿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개인적인 성공을 위하여

자신의 주의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들과 교통하고 있는 우리들은

영적인 가치를 가진 것은 개인적인 성공에서 오는 결과가 아니라

신앙을 교류하는 삶의 열매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예수님, 즉 그분의 생애,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교회와 교회의 사역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보상을 요구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 낸 생각은 아닙니다

 

이것들은 오랜 세월을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과 선지자들,

예수님과 성도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형성하는 데

각자 역할을 수행한 사람들로부터 우리들에게 전해진 지식입니다

참된 영적 지식은 성도들의 신앙 교류에 속하는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사모님사모님 방에서


    나 철든 다음에야 알았네
    - 대장쟁이 이응한 그게 언제였던가, 무덤가 할미꽃 핀 뒷동산에 올라 끝없이 파란 하늘 솜털같은 구름이 흘러가다가 사라지고 사라지는 걸 넋놓고 바라보며 산너머 저 멀리를 꿈꾸던 그 때가.
    그러나 하늘엔 그 포근하고 아늑한 솜털구름만 피는 게 아니라 공포의 먹구름과 고통의 칼바람도 몰아친다는 걸, 저 인생의 산너머엔 아름다운 꿈이 흐르는 낙원이 아니라 황야와 광야야 거친 바다와 때론 나락같은 벼랑도 있다는 것을
    아, 나는 철이 들어서야 알았지. 그리고 그 분의 손을 잡지 아니하면 단 한 발짝도 뗄 수 없다는 것도 철이 들어서야 알았지. 그제야 알았지... 얼마나 먼 길을 상처투성이로 헤맨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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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에 효과를 나타낸다/ 존 칼빈

우리의 마음이 어둡고 악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이 외부적인 증명만으로도
우리의 믿음을 불러이르키는 데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에 기울어져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에 결코 이를 수
없으며 우둔하여 항상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성령의 조명(照明)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로 보아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인간의 이해력을 훨씬 초월 한다는
것이다.

...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화되고 지원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조명을 받는 것으로 부족하다.

이 문제에 대한 스콜라 철학자들의 생각은 완전히 잘못 잘못되었다. 그들은 지식
에서 오는 단순한 동의를 믿음과 동일시하고 심령의 확신과 확실성을 무시해 버
린다.

그러므로 믿음은 두 방면으로 하나님의 특이한 선물이다. 사람의 지성은 정화되
어 하나님의 진리를 맛볼 수 있게 되며 마음은 그 진리를 확신할 수 있게 된다느
것이다.

성령은 믿음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점진적으로 성장하게 하여, 드디어 우리를
믿음으로 인하여 천국에 가도록 인도하신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
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바울은 말한다(딤후1:14).

우리는 사도가 듣고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는다고(갈3:2) 한 말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성령의 선물이 하나뿐이었다면 바울이 성령을 "믿음의 결과"라고 한 것은
불합리한 말이었을 것이다. 성령은 믿음의 근원이며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여러 가지 선물을 주셔서 그것으로 교회를 장
식하시며 끊임없이 믿음을 더하심으로써 교회를 완전하게 만드신다고 하면서 그
여러 가지 선물을 열거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해 주는 일들을 바울이 믿음이
라고 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믿음을 받지 못하면 아무도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고(요6:65) 하는 것은 심히 모순된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
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사람들이 하늘의 지혜가 얼마나 은밀하고 고상한가를 생
각하지 않기 때문이거나 또는 사람이 얼마나 우둔하여 하나님의 비밀을 지각하
지 못하는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사람들이 믿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확고 불변한 마음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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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란...  


행복 작습니다.

거창하고 큰 것에서 찾지 마세요.
멀리 힘들게 헤매지 마세요.
비록 작지만, 항상 당신 눈앞에 있답니다.

행복 이기적입니다.
자신을 돌보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남의 시선 따위는 무시해 버려요.
스스로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도 도울 수 없답니다.

행복 연습입니다
그냥 주어지는 행운의 복권이 아닙니다.
부지런히 노력하고 연습해야 얻을 수 있는 열매입니다.
가는 길은 만 갈래지만 방법은 하나랍니다.

행복 투자입니다
미래가 아닌 현실을 위해 남김없이 투자하세요.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내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을 온전하게 쓸 수 있어야 한답니다.

행복 공기입니다.
때로는 바람이고 어쩌면 구름입니다.
잡히지 않아도 느낄 수 있고.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답니다.

행복 선물입니다.

어렵지 않게 전달할 수 있는 미소이기도 하고. 
소리없이 건네 줄 수 있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가장 달콤한 포옹이랍니다.
 
행복 소망입니다.

끝없이 전달하고픈 욕망입니다. 
하염없이 주고 싶은 열망입니다.
결국엔 건네주는 축복입니다.

행복 당신입니다.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당신입니다. 
변함없이 사랑하는 당신입니다.
이미 당신입니다.


- 좋은 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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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은 일괄적인 톤으로 한 하나님이 삼위(세 위격)로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는 분명히 특별계시로서 자연에는 계시되지 않고, 인간 이성으로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교리가 아니기에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다 라고 말들 하지만, 필자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처음 받는 그때부터 그 사실이 분명한 사실로 믿어졌다. 이것이야말로 택한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 성령 하나님의 조명 하심이라 믿으며 늘 감사한 마음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분들이 혼동에 처해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다. 삼위일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인정받던 유능한 신학자, 목회자가 이단으로 지목받아 땅에 떨어지기도 하고, 또 극심한 논쟁으로 이어져서 사랑 안에서 하나로 굳게 뭉쳐져야 할 형제 자매가 서로 손가락질 하며 한 치의 양보함 없이 다투기도 하여, 안티와 이단들이 손뼉치며 즐거워하도록 하는, 정말 가슴 아픈 모양새를 연출하기도 한다. 삼위일체 부분을 좀 더 명확하게, 알기 쉽게 설명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은 영혼들을 바로 세워줄 수가 있을 텐데…늘 기도하면서 안타까워하던 중, 오늘 아침, 주께서 “그림자와 실체는 하나이다.” 깨우쳐 주신다. (요 10: 30절 참조)

      그림자와 실체는 엄연히 그 생김새나 모양이 다르고 활동영역도 다르다. 그림자는 빛의 경로 상에 불투명한 물체(object)가 있을 때 빛의 직진성 때문에 물체에 빛이 통과하지 못하여 생기는 어두운 부분을 말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림자와 실체는 하나란 것이다! 즉, 빛과 물체((object), 실체(substance))가 없이는 그림자도 존재할 수 없다. 이 셋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성으로 이해돼야 한다. (또 양태론이라고 몰아가는 분이 계실까 두렵네…ㅠㅠ) 

      필자는 아주 오래전(약 6년 전쯤인 것 같다), 우리 아멘넷 게시판에서 어느 전도사님이란 분과 삼위일체 론에 부딪혀 한 판 설전을 크게 벌렸던 적이 있고, 그때, 아멘넷 운영자 님과 편집위는 필자의 손을 들어준 고마운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전도사님이란 분의 주장인즉슨,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 주(主)시요, 메시아임에는 분명하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성경에 단 한 구절도 “삼위일체란” 말이 없다.” 라고 강하게 우겼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렀기 때문에, 그는 다윗의 자손이요, 아들이긴 해도 하나님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전도사님의 질문이야말로 오늘날 수많은 성도들, 목회자님들의 질문이며, 이 질문에 명쾌한 해답을 주지 못하기에 많은 이단들이 정통교단에서 파생되기도 하고 여호와증인 같은 이단 종파들이 즐겨 인용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과연 그러한가?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는 과연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이다. 이 부분만 제대로 정립된다면 삼위일체가 그리 어려운 교리적 산물만은 아닌, 성경의 핵심 사상인 것을 믿을 수 있고, 예수가 하나님이 되심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결단코 이단으로 넘어가거나 곁길로 빠지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여,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이 하나님”되심, 그리고 정통 교단이 인정하는 삼위일체의 교리에 대해서 확실하게 정립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시는가?

      1. 그리스도의 선재(先在)성.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믿지를 않았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다윗보다 먼저 있는 자라고 분명히 말씀하심으로서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주장하셨다(마22:41-46, 요8:55-59). 그 전도사님은 그때 당시 유대인들과 꼭 같은 우를 범하고 있다. (자손으로만…)

      2.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은 창조 이전에 계신 자로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로고스)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로고스)은 곧 하나님이시라.(요1:1절 말씀)

      3.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나, 복수를 사용하심으로써, 성부, 말씀(성자), 성령을 인정하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7절)” 하나님께서는 유일신이심을 전제로 할 때, 여기에서 우리(We), 라고 하는 복수를 사용하신 것은 성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심을 창세 때부터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주시고 있다.

      4.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란 이름으로 오심은 예언된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아기로 오지만, 그분은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사9:6-7참조)고 표기함으로써, 오실 아기,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라고 예언했다.

      5. 메시야,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 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1:23절 말씀)

      6. 교회(성도)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주시고 샀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20:28절 말씀)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언제 한 번 피를 흘리신 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교회(성도)를 값 주고 사기 (구속)위해서였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은 언제 피를 흘리셨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성도를 사셨음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동일성. 성부 하나님은 육신이 없으신 분으로서 피를 흘리실 수가 없고,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음을 부인할 수 없다.

      7.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이라 증언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도마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 이다(My Lord and my God!(요20:28)." 고백했다.

      8.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who, being in the form of God)이시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 (빌2:5절)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곧, 육신을 입고 계신 동안에는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종의 형체를 입고 있는 동안임을 간과치 말아야 한다.

      9. 예수 그리스도는 홀로 하나이신 주재 시다.
      ”홀로 하나이신 주재 (The Lord God)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유다서 4절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유의 주재 곧 창조주 하나님이 되신다.

      10. 재림하실 주님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디도서 2;13)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 다시(재림)오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다.

      11.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알파와 오메가시요, 처음과 나중이시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계시록 1: 8절) 하나님께서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또 같은 장, 17절 하반절-18절에서는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전에 죽었었노라”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께서 한 번 죽었었고 살아 (부활)나신 적이 있으시고 세세토록 살아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알파와 오메가시요, 처음과 나중인 하나님께서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나신 적이 있으시다. (계2: 8절) 성경의 결론을 맺으시면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22: 13) 천명하셨다. 여기에서 “나”는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정확하게 그 이름을 밝히고 계신다.

      조금 더 내려가서 계22: 16절을 보자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니….” 하셨다. 곧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심을 증명하는 확고부동한 말씀이다.

      12. 성부, 성자, 성령, 이 셋은 하나이다 증거하신다.
      대부분의 말씀이 그러하듯, 요1서 5:7절 말씀은 한글 번역판보다 영어성경이 더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다 “ For there are three who bear witness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Spirit: and these three are one (N.K.V)” 라고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the Father= 성부, the Word=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the Holy Spirit = 성령님. these three are one = 이 셋은 하나이니라. 삼위일체란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안타깝게도 현대 우리나라의 많은 목사님들께서 번역된 한글 성경만 가지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란 성구가 단 한 구절도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연구 부족의 부끄러운 결과일 것이다.

      그림자, 실체, 그리고 빛의 관계성:
      예수님, 그림자, 빛, 이 셋을 따로 떼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 성경은 예수님 한 분을 신약의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실체( 요1:1 ), 빛(요 1: 4), 구약의 율법(오실 이의 그림자, 골 2: 16- 17)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율법)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오실분의 그림자인 율법)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골 2:16-17)

       
      그림자 =율법(율법= 하나님의 말씀)도 예수 그리스도, 실체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 빛(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셋은 떼려야 뗄 수없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설명한 것이다. 때때로 그리스도는 물로서, 바위로서 표현되기도 하나 관계성을 설명하려니까 그림자와 실체 그리고 빛을 연관짓되 성경의 정신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율법은 앞으로 올 좋은 일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실체 그 자체가 아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말씀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 1-9) = 빛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성부 하나님을 가리킬 때도 그분은 빛이라고 말씀하시고 성령님을 가리킬 때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성경은 증거하신다. 그러나 온전히 다른 위격을 소유 하신 분, 한 분 하나님이시다.
       
      "성부라는 이름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하며, 성자라는 이름은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그리고 성령이라는 이름은 성화 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이 모든 작용의 역사자는 유대인의 성경에 나오는 그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성육했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셨다는 것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53-154쪽)"- 번역문
       

      결론적으로, 인간인 우리의 그림자(shadow)가 실체(substance))와 따로 떨어져서 일 할 수도 없고 그림자 그 자체가 생명을 지닐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빛을 통하여 생성되는 그림자와 실체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을 기억해야 한다. (요 10: 30절 참조)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하려 하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한, 결코, 그분의 신비함(mysterious)에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숨겨진 비밀이며 주의 영으로 계시(revelation)해 주시고 성령의 조명 하심을 입은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신비의 비밀이라고 하면 너무 무리한 것일까…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도록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다. 그림자에 생명을 입힐 수도 있고, 말씀이 육신을 입으실 수도 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 분명히 알게 된다면, 삼위일체 론(論)이 이해되지 않을 이유 없고, 성경에서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그 정신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늘에서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아버지, 말씀, 그리고 성령이시니,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그리고 땅에서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 물 그리고 피니 이 셋이 하나로 일치하니라"
       
      "For there are three that bear record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are one. And there are three that bear witness in earth, the Spirit, and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se three agree in one." (1요 5: 7-8)
       
      위 성구는 KJV 의 같은 구절을 필자가 그대로 직역해 본 것입니다. 삼위 일체가 더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주의:

      어떤 사람이 모함하여 말하기를,
      필자가 빛은 하나님, 말씀(예수 그리스도 곧 실체), 성령님은 그림자(예수님의 그림자)라고 설파한다고 몰아가며 비방한다.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 한 분을 설명할 때, 그분이 하나님의 속성을 온전히 갖추신 분이란 것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다.(빌 2: 5)예수님이 빛이시요,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분(실체)시요, 율법(그림자)은 오실 그리스도, 이 셋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란 것이다

       
      성령: 1. 하나님의 성령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 16)" 
      2, 하나님의 영은 곧 그리스도의 영: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사람이 아니라”( 8:9)
       
      이외에도 행 16: 7, 빌 1:19, 벧전 1: 11 = 성령은 그리스도, 곧 예수의 영이심을 증거하심

       
      아래는:
      본 글을 읽고 느낀 점을 진솔하게 밝히신 독자님의 글을 이곳에 옮겨다 놓습니다.^^
       
      (“즉, 빛과 물체((object), 실체(substance))가 없이는 그림자도 존재할 수 없다. 이 셋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성으로 이해돼야 한다. (또 양태론이라고 몰아가는 분이 계실까 두렵네…ㅠㅠ)“

      “즉, 빛과 물체((object), 실체(substance))가 없이는 그림자도 존재할 수 없다”라는 별이 사모님의 칼럼에 발제자의 영성을 신뢰하기에 +10 추천으로 우선 합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언뜻 이해하기에 벅찼습니다. 처음 대하는 “빛과 물체((object), 실�(substance))” 라는 기독교의 중심 교리를 설명 하는 새로운 명제에 걸려 더 이상 읽어 내려 갈수가 없었습니다.

      발제자가 “(또 양태론이라고 몰아가는 분이 계실까 두렵네…ㅠㅠ)”전제를 달아 놓았듯이 의아하게 생각하기에 충분한 명제 임이 틀림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자와 실체”로 설명하는 예가 성경에서 있는지 확인 작업에 들어 갑니다.

      “이런 것들은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골2:17), 율법은 앞으로 올 좋은 일의 그림자에 불과하며 실체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해마다 계속 드리는 똑같은 제사로는 예배 드리러 나오는 사람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히10:1)”

      율법은 그림자에 불과하며 실체 그 자체가 아닙니다. 위와 같이 율법이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예로 성경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음으로, “그림자와 실체”로 “삼위일체” 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에 전혀 무리가 있다 할 수 없다. 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확인 합니다.

      "삼위일체" 를 설명하는 새로운 대 발견이다.
      “휴” 과연 별이 사모님 이시다. 안심 입니다.) - 잠긴동산
       
       

       

      


      믿음은 그것이 살아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영원한 구원에 대한 소망을 불가 불리의 동반자로서 곁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더 적절하게 말한다면 믿음은 그 자체 내에서 소망을 일으키며 생산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진실성을 확신하는 것이 믿음이다.

      곧 그것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우리를 속이거나 빈 말을 할 수 없다는 것
      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들을
      - 그들이 반드시 진실하다고 믿는 그 약속들을- 실현하실 때가 오리라고 기대하
      며 의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간단하게 말하면 소망은 하나님께서 진실하게 약속하셨다고 믿는 일들에
      대한 기대이다. 이와 같이 믿음은 하나님을 진실하다고 믿으며 소망은  하나님의
      진실성이 밝히 나타나는 때를 기다린다.

      즉 믿음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믿으며 소망은 그가 우리에게 대해서 항
      상 아버지가 되시리라고 예상한다.

      믿음은 우리가 영생을 받았다고 믿으며 소망은 영생이 언젠가는 나타나리라고 예
      상한다. 믿음은 소망의 토대로 소망은 믿음에 영향을 주며 힘을 준다.

      하나님의 약속들을 이미 믿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의 약한 믿음은 오래 참는 소망과 기대에 의해서 지지대고
      조성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은 무력해지고 희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이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바른 말이다(롬8:24). 소망은 묵묵히 주를 기다리는 동시에 믿음이 너무 서두르다가 곤두박질
      하여 떨어지지 않도록 제어한다. 소망은 믿음에 힘을 주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
      심하거나 그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도록 한다. 소망은 믿음의 생기를 회복시켜
      지치지 않게 한다. 소망은 종점에 노착할 때까지 믿음을 지탱하여 주어 도중에
      서 심지어 출발점에서도 힘이 빠지지 않도록 한다. 간단히 말하면 소망은 끊임
      없이 믿음을 갱신하고 회복함으로써 믿음에 견인하는 힘을 주는 것이다.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서 소망의 지지가 얼마나 많이 필요한가를 더 잘 알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닥치는 시험의 형태가   얼마나
      많은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첫째로 주께서는 약속하신 일을 연기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너무도 오랫동안 불
      안정한 상태에 두신다. 이런 때에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합2:3)고 한 예언
      자의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 소망의 기능이다.

      어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치는 것을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분명히 노여움
      을 보이신다. 이런 때에 소망이 우리를 도와서 다른 예언자가 말한  대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사8:17)할 필요가   훨씬
      더 절실하다. 또 베드로는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라
      고 말한다(벧후3:3-4) 사실상 육과 세상은 꼭같은 말들을 우리에게 속삭인다 이
      런 때를 위해서 우리는 길이 참는 소망으로 우리의 믿음을 보강해야 한다. 천 년
      을 하루같이 여기리만큼(시90:4, 벧후3:8) 우리의 소망을 영원한 데에 두어야 한
      다.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


       



       



       



       



       



       



       



       



       



       



       



       



       



       



       



       



       



       



       



       



       



       



       



       



       



       



       



       



       



       



       



       



       



       



       



       



       



       



       



       



       



       



       



       



       



       

       

      
      

       

          할미꽃 소회(所懷)
          대장쟁이님도 할미꽃을 좋아 하시네요. 저도 좋아 하는 꽃입니다. 기나긴 겨울을 보내고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이른 봄에 화사한 내세움 자랑 보다 수줍음으로 망자의 무덤에 고개 숙여 핀 꽃을 바라보면 숙연해 집니다.
          어제 할미꽃 꺼내시니 가슴 아린 아픔이 다시 밀려옵니다. 어린 시절 심훈의 상록수를 읽고 독립운동가 이자 영화인 인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짧은 삶에서 소설을 통해 농촌 계몽운동을 기독교인인 채영신을 통해 그가 이루고자한 정의는 무엇인가를 번민하다 기독교인 인 형명가를 꿈꾸었습니다.
          그 꿈으로 인해 제 십대 후반은 집을 떠나 굶주리고 허기진 생활 이었습니다.
          그 후 현실의 꿈이 좌절되어 절망할 때 까뮈의 시지프스 신화처럼 삶이란 신의 형벌로 돌을 굴려 정상을 향해 가다 또 떨어지는 삶이란 아무런 가치도 없어 발전할 수도 없을 뿐 더러 신기루 같은 목적과 수단을 동원한들 가치의 실현이 이루어지기는 커녕 이루어진들 고통뿐인 염세주의자가 되어 신(하나님)이란 성경을 세뇌의 수단으로 삼은 허황된 종교라 허무주의자가 되어 방황하고 다시 하나님을 찾았을 때에도 가시지 않은 허무로 거의 이십대를 보내고... 이십대 후반에 의식화된 크리스찬이 되어 버림받은 사람들이 사는 변두리 개척교회로 향해서 다시 만난 하나님
          그리고 육체적인 고통으로 죽음의 문턱에 머물며 정신병원까지 다니며 원망했던 하나님 하나님을 원망할 자격의 조건이 있다면 저는 원망할 자격이 있다고 절규하던 지난날들...
          그리고 이 시를 쓰던 그리 오래 되지 않던 날 뒤뜰에 주저앉자 또 절규를 했었습니다. ‘하나님 제게 무엇을 원 하십니까 제 고통으로 제게 만족하지 않으십니까 움직이지도 못하는 팔과 어깨허리...경제적인 어려움... '저를 죽여주십시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없이 주저앉은 땅에서 열기를 느꼈습니다. 죽음을 생각하다 고개 들어 바라본 하늘에서 소망을 보았습니다. 이 땅에서 저 하늘까지 믿음으로 연결된 소망을 보았을 때 성경의 구절이 메아리가 되어 노래가 될 때 아름다운 세상을 보았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온몸과 마음이 춤을 출 때 평안을 맛보았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아름다움과 평안 부족함이 없는 평안에서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찬양했습니다.
          공평하신 하나님!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뭉게구름 둥실 둥실 떠가고 구름같이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지난날의 변절과 오늘날의 변절을 떠오르며 제 가슴에 글을 새겼습니다.
          다시 꾸어야 할 꿈 처절하게 원했던 진리로의 자유...
          별똥별님께 댓글을 길게 쓴 날 저녁 제가 한스러워 어리석어 밤늦도록 울고 벼게를 적셔도 변절된 순수한 믿음을 다시 가질 수 있을 까요.
          대장쟁이님 댓글을 읽으며 제 이야기를 어렵게 내려놓습니다. 아직도 간직한 많은 분들을 향한 댓글을 올리지 않았음을 감사하며 이루지 못한 그리스도를 향한 혁명의 나날들 마음에 이미 써진 그리스도의 혁명(복음) ‘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라는 글이 자랑할 것 아무것도 없는 저의 자랑이 될 까봐 누가 될까봐 못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절망은 희망의 다른 말이고 소망은 인고(忍苦)의 고통 넘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근거 다‘ 라는 고백을 하며 대장쟁이님을 향하신 그리스도의 손길을 바라보며 또 감사드립니다. 짐보의 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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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새로운 이야기◈

          미얀마 선교의 선구자인 아도니람 저드슨이

           미국 어느 도시교회의 초청을 받고 강단에섯다.

          사람들은 30년 동안이뤄낸 선교사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기대하며 모여 들었다. 그러나 저드슨 선교사는 주어진

          설교 시간 내내 예수님이 이땅에 왜 오셨는지,

          어떻게 우리들을 구원 하셨는지를 열심히 전하였다.

           

          집회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친구가 말했다,"자네,

          오늘 청중들이 얼마나 실망 했는지 아는가?

          뭔가 선교지의 새로운 소식을 듣고 싶어했는데,

          자네는 늘  듣던 이야기만 하고 말았네.

           

          "저드슨이 대답했다.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보다 더

          흥미롭고 새로운 이야기가 어디 있겠는가?

          아무리 미지에서 온 선교사라 할지라도 전할수 있는

          가장 귀하고 흥미로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을

          청중들은 깨달았을 걸세".

           

          오늘 히브리서 기자도 우리에게 가장 귀하고 새로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선포한다. 그분은 우주의

          통치자 이시며, 우리죄를 구속하신 구주 이시고,

          천사보다 뛰어나신 주님이시다.

           

          그리고 영원히 찬송 받으실 오직 한분이시다.

          그분이 바로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흥미와 신비보다 예수님을 바라보자.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우리의 노래 - 아리랑! 

      ▼ 아리랑의 숨겨진 이야기고개 (1/4)

       

      ▼ 아리랑의 숨겨진 이야기고개 (2/4)

       

      ▼ 아리랑의 숨겨진 이야기고개 (3/4)

       

      ▼ 아리랑의 숨겨진 이야기고개 (4/4)

       

      ▼ 뉴욕 필 아리랑 공연

       

      ▼ 아리랑 (Arirang) - 피아노

       

      ▼ 아리랑(Arirang)-주지훈

       

      ▼ 조선족가수 김미아가 부르는 아리랑

       

      ▼ 나윤선 - 아리랑

       

      ▼ "아리랑"- 리경숙 [李京淑]

       

      ▼ 김연아 아리랑

       

      ▼ 소향 (So Hyang) 새 아리랑

       

      ▼ 아리랑, 유네스코(UNESCO) 등재 확정

       

      ▼ 박근혜의 피아노 연주, '아리랑'

       


      내가 그들에게 마음을 주고 그 속에서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11:19-20)

      경건하지 않은 이들은 신령한 권면을 회피하려 하지만 그들이 원하든 말든 그 능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권면의 주된 용도는 신자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신자 안에서 늘 성령으로 행하시지만 말씀의 도움도 효과적으로 활용하십니다. 그러므로 다음 사실을 불변의 진리로 삼읍시다. 경건한 이들의 모든 힘은 선지자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겔11:19-20) 우리로 하여금 신령한 권면의 순종할 수 있게 하는 은혜를 받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신령한 권면을 사용하고자 하신다면 그러한 섭리에 트집을 잡고 비웃을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령한 권면과 경고에, 경건한 이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유익 외에 다른 유익이 없다 하더라도 그러한 권면과 경고가 완전히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령한 권면이 산자들의 선에 대한 열망에 불을 붙이고 신자들을 무기력에서 일깨우며 죄의 쾌락과 달콤한 감미로움을 파괴하는 효과가 있다면 누가 감히 권면을 쓸데없는 것이라고 비난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신자 안에서 두가지 방식, 즉 내적으로 성령을 통해, 외적으로 말씀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신자들의 지성을 조명하시고 마음을 훈련시켜 의를 실천하게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신자들을 새 피조물로 만드시며, 말씀으로 신자들이 이런 변화를 갈망하도록 자극하십니다. 두 방식 모두에 있어 하나님은 그 방식을 사용하시는 분량에 비례하여 그 손의 능력을 펼치십니다. 반면 말씀은 현재 불신자들의 양심으로 자극하여 심판 날에 그들을 더 변명할 수 없게 만들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자신에게 올 수 없으며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자기에게 나온다.(요6:44-45)고 선언하시면서도 스승의 직분을 도외시하지 않으시고 유익을 얻기 전에 먼저 내적으로 성령의 가르칭을 받아야 하는 이들을 정성으로 초대합니다.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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