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담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참된 진리(드흐라프)

3) 아담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실을 고백한 후 그 즉시 하나님이 아담과 맺은 언약을 다룰 필요가 있다. 창세기 2장과 3장에서는 문자적으로 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곳에서 언약 체결을 본다. , 사람은 생명 나무를 통해 언약의 약속의 인침(sealing)을 받으며, 반면에 선과 악을 아는 나무를 취할 경우 언약을 깨뜨리게 되면서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된다. 창세기 1장에서 3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1장은 오직 하나님이 사용되지만 2장과 3장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그 이름에 의해 언약이 체결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성경이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 이름을 사용한 것은 그때에 언약이 체결되었음을 우리에게 확신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게 될 때 호세아 6 7절의 증거가 따로 필요없게 된다. 또한 그 구절은 언약 체결의 근거로 사용하기에 의심적인 부분이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6:7)라는 내용이 일반 사람처럼 언약을 어기고라고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담과 세운 언약을 믿음으로 알아 그 사실을 말할 필요가 있다. , 우리는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예비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언약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가운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시작하셨다. 하나님이 그 언약을 체결할 어떤 의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독립적인 두 양측이 함께 언약을 세운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을 참여시키기 위해 언약을 야기하셨다.

 

그 언약은 하나님의 호의에서 나온 주권적인 언약이었다. 우리는 먼지와 재 밖에 되지 않는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언약을 준비하셨다는 사실에 또다시 깜짝 놀라게 된다. 한편, 하나님은 사람과 언약하기 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시고 반면에 그를 지극히 높임으로써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수 있는 상대로 삼아주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언약 안에서 사람을 친구로서 대해 주셨으며 그 둘은 서로 친밀한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인간이 지어진 목적이었다. 하나님은 단지 주권적인 권위로 다스릴 수 있는 피조물을 원하였던 것이 아니었다. , 로보트처럼 완벽하게 조정되는 피조물을 원하였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그러한 피조물을 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피조물과 이러한 관계를 가지시려면 반드시 언약이 있어야 한다. 언약을 체결함이 없이는 모든 권한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게 되고 사람은 복종만 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께만 공의가 있을 것이고 사람은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상태로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약속을 주심으로써 인간에게 권리를 허락하셨다. 이에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는 즉시 그 약속으로 하나님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한편,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룰 책임을 지게 되었다. 이후로 쌍방은 권리와 의무를 갖게 되었다. 이에 언약의 율법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를 결정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사람을 아무렇게나 임의로 대하실 수 없었으며,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직 이러한 상태에서 상호 사랑의 관계가 가능하였다. 이제 쌍방은 그들의 삶의 비밀스러운 일들마저 나눌 수 있었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25:14).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가 언약의 율법 아래 있게 된 사실과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게 된 사실은 하나님의 주권을 전혀 약화시키지 않는다. 결국 하나님은 주의 주권적인 결정에 의해 자신과 사람과의 관계를 율법에 묶으셨던 것이다. 하나님 자신은 율법을 초월하시지만, 주의 주권적인 경륜 가운데 사람과의 관계를 율법 안에 가두셨다. 더욱이 하나님이 주권적인 계획 안에서 우리와의 관계를 스스로 율법에 묶으신 후로는 그 관계만이 하나님께 합법적인 관계가 되었다. 우리는 이 관계를 믿음으로 깨닫고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관계에 있을지라도 동시에 언약의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항상 갖게 된다. 이제 하나님은 사람에게 훨씬 더 가까이 내려오셔서 사람과의 관계를 율법에 묶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언약의 발단이 일방적인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 시작되었을지라도 언약은 사람이 하나님이 형상으로 지어진 것과 연결된다. 실제로 우리는 언약과 하나님의 형상을 따로 말해야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실은 언약의 체결과 관련되어 있었다. 물론 사람의 창조가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언약 체결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것은 언약이 하나님의 마음 속에 이미 있었다는 뜻이다. ,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 지어졌기에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로 언약의 율법을 받은 후에 그 율법을 따름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아담과의 언약 체결은 일방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을지라도 그 언약 체결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행위였다. 그럼에도 언약을 통한 관계는 그 언약이 체결되는 순간부터 쌍방이 그 언약에 따라 각각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관계가 되었다. 더욱이 쌍방의 언약 관계는 언약의 율법에 의해 서로 묶이게 되었다.

생명수 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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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심으로
나를 더욱 더 주님의 형상과 닮게 하시기 위해,
나의 모난 부분들을 깎으실 때
하나님은 그것을 ‘사랑’이라 부르시지만,
나는 그것을 ‘고난’이라 부릅니다.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심으로
나를 아버지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
낮은 마음과 넓은 마음을 갖게 하시려고
좁은 길로 인도하시는 것
하나님은 그것을 ‘은혜’라 부르시지만,
나는 그것을 ‘연단’이라 부릅니다.

사탄이 나와 하나님의 관계를 질투하여
나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기 위하여
나에게 물질의 부함과 세상의 즐거움을
풍족히 불어 넣어 주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시험’이라 부르시지만,
나는 그것을 ‘축복’이라 부릅니다.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시선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바라보기에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채 그렇게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오해하고
잘못 받아들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하나님의 기준으로,

아버지의 계획하심과 뜻하심을
깨달을 수 있도록
주님에게 아버지의 지혜를 구하고,
나의 아둔하고 어두워진 눈을 밝혀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간혹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마음이 무너질 때도 있겠지만
그분은 이해 할 대상이 아니라
믿어야 할 대상이기에
늘 하나님과의 시선 맞추기를 게을리하지 않기를...


좋은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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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신유: 복음의 필수 부분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처음부터 전인(The whole man)에 대한 신유는 중요한 부분으로 인정해 왔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선포하라 명령하신 복음의 한 부분이다. 하나님의 성회 근본진리의 선언에 있는 하나님의 성회 헌법 제12항은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신유는 복음의 필수부분이다. 질병에서 놓임 받는 것은 속죄 안에서 제공되는 것이며 모든 신자들이 누리는 특권이다.(사53:4-5, 마8:16-17, 약5:14-16). 이 선언에 포함된 모든 사실과 양상을 여기에서 모두 다루는 것이나, 이에 관하여 제기되는 모든 문제에 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 성명이 성경적으로 건전한 것임을 보이고저 한다.

복음의 필수부분

예수와 제자들의 사역을 관할해 볼 때 신유는 과외로 행하는 어떤 일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신유는 예수가 아버지를 나타내시는 자로, 약속된 메시야로 그리고 죄에서 구원하실 자로 오신 것을 증거하는 중요한 요소였다.(요10:37, 28). 성경은 예수의 신유의 사역과 그의 구원하며 용서하시는 사역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그의 치유하시는 능력은 실제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그의 권위에 대한 증거이다.(막2:5-12). 반복적으로 그의 치유의 기적은 그가 복음을 전하는 것과 병행하며 똑같은 동정을 보여준다.(마4:23, 9:35-36)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온 것은 그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병고침을 받기 위함이었다.(눅5:15, 6:17-18) 그는 아무도 거저 보내지 아니하시고(마12:15,14:14) 그에게 나온 모든 사람들의 질병과 기형된 것과 불구된 것과 상처받은 것을 고쳐주셨다.(마15:30,31, 21:14) 그는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으셨으며 귀신이 일으키는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마4:24) 예수는 질병이 자주 죄의 결과임을 인정하셨고(요5:14), 또는 사단의 활동에 의한 것임을 인정하셨다.(눅13:16) 그러나 또한 예수는 질병이 항상 죄의 직접적인 결과만은 아님을 인정하셨다.(요9:2,3) 이것은 때때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막2:12)

치유의 기적은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셔서 하게 하신 사역 중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요9L2,3) 이것은 치료하시는 주 혹은 위대한 의사로서 하나님의 계시한 구약과도 일치한다.(출15:26, 시103:3, 여기서 이 두 경우에 사용된 히브리 분사들은 그것이 치료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임을 가리킨다.) 예수는 신유가 여전히 하나님의 본질과 계획의 중요한 부분임을 보이셨다.
치유는 또한 예수를 약속된 메시야와 구세주로서 확인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 위대한 의사로서 예수는 이사야53:4의 예언은 성취하셨는데 이 구절은 히브리어를 보면 매우 강조적이다. 즉 “그는 진실로 우리의 아픔을 자신이 짊어지셨고 (들어서 가져 가셨고), 우리의 고통을(무거운 짐으로서) 옮기셨다.” (여기서 ‘질고’라는 말은 아픔이나 질병과 같은 단어이며 ‘슬픔’이라는 말은 욥33:19에서 사용된 육체적 고통과 같은 단어이다.)
마태는 이를 예수의 치유사역에 구체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아픔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다.”(마8:17을 문자적으로 직역한 것임). 이사야는 이것을 예수의 구속사역과 연계시키고 있다.(사53:5) 그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위한 것이며 우리를 하나님과의 화평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즉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의 문맥과 벧전 2:24,25의 적용은 특히 치유 혹은 죄로부터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 53:4의 육체적 아픔에 대한 강조점을 볼 때 이 문장은 우리의 죄나 제멋대로 행한 것에 대한 영적 및 육체적 결과로부터 치유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예수가 바로 약속된 메시야인지 아닌지 혹은 자신처럼 메시야 앞에 보냄을 받은 자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때 예수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며 기적을 행하는 메시야적인 사역에 주의를 환기시킴으로써 대답을 대신하셨다. 치유는 복음의 필수 부분이며 중요한 증거였다.(사61:1,2, 눅4:18, 7:19-23). 신유는 계속해서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복음의 필수 부분이었다. 예수는 12제자와 70명의 제자들을 보내어 복음을 전파하며 아픈 사람을 고치게 하셨다.(눅9:2, 10:9) 오순절 이후 많은 기사와 이적이 사도들에 의해서 행해졌다.(행2:43) 누가는 사도행전을 예수께서 사도들과 성령이 충만한 교회를 통하여 행하시고 가르치신 것의 장으로 취급하였다.(행1:1,8 2:4)
그러나 기적은 사도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예수의 약속은 그의 이름으로 구하는(다시말하면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본질과 목적에 맞게 구하는) 모든 신자들에 대한 것이었다.(요14:12-14) 하나님은 빌립과 같은 집사를 사용하셔서 복음을 전하며 치유하게 하였고(행8:5-7), 아나니아와 같은 무명의 제자를 통하여 사울(바울)을 치유하게 하셨다.(행9:12-18) 마가는 신자들의 사역에서 치유를 지지하고 있다.(막6:13, 9:38,39, 16:15-18) 신유의 은사는 교회를 세우고, 덕을 세우기 위한 성령의 나타남 중에 포함되며(고전12:7),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증거하는 것과도 관련된다.(고전12:3)

율법 아래서는 제사장이 관심의 대상인데 그 사역은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을 가리킨다. 이 위대한 대제사장은 무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다.(히4:14,15) 제사장은 희생제물의 피를 뿌림으로써 사람들의 죄를 속한다. 히브리어 성경 안에 나타난 속죄에 대하여 조사한 결과 대부분의 경우에 그것은 구속과 회복을 위하여 지불하는 몸값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우리를 위해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를 흘리셨는데 속죄는 바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를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문자적으로 속죄소)로 세우셨다.(롬3:25)
속죄소(Mercy seat)에 대한 말씀은 레위기 16장에 거슬러 올라가는데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속죄제물의 피를 속죄소에 뿌리기 위하여 들어갔다. 속죄소는 법궤의 꼭대기에 놓여 있는 금으로 입힌 부분이다. 법궤안에 십계명을 적은 돌판이 있는데 이 계명은 바로 사람들이 어긴 하나님의 법이었다. 율법을 어기면 심판을 초래하고 결국 죽음을 맛보게 된다. 그러나 죄없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보시고 자비와 축복을 주실 수 있다. 속죄의 원래 목적은 죄를 깨끗이 씻는 것이었다.(레16:30, 롬5:11 여기서 “속죄”라는 말은 롬11:15이나 고후15:18,19에서 “화목”이란 단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의 축복과 호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죄의 결과와 벌에서 속죄를 통하여 면제되는 것이 자명한 일이다. 고라와 다
단과 아비람의 반역에 대한 심판을 사람들이 불평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염병을 보내셨다. 그때 모세는 아론을 회중 가운데로 보내여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더니 그 전염병이 그치게 되었다.(민16:47,48) 우리는 또한 이스라엘의 수효를 계수할 때 그들의 구속과 그들에게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속전으로 반세겔을 내야 했음을 읽을 수 있다.(출30:12,15) 이와같이 속죄를 아픈 것을 포함한 죄의 결과를 위하여 제공되었다.

성경은 사람이 자신의 구속을 위하여 값을 지불할 수 없다고 명확히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속죄를 제공하셨다.(롬3:25, 시65:3, 78:38, 79:9, 롬3:21-28) 이 속죄는 죄뿐만 아니라 죄의 결과를 위하여 제공되었음이 호세아에 의하여 묘사되고 있는데 호세아는 그의 아내가 노예시장에 팔리게 되었을 때 상당한 값을 지불하고 그의 아내를 도로 샀다.(호3:1-5, 13:4, 14:4) 이것은 구리뱀 사건에 의하여 더욱 설명되고 있다. 즉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살기 위하여 바라보는 것뿐이었다.(민21:9) 이 모든 것은 갈보리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요3:14-16) 거기서 예수께서 전인(Whole man)을 위하여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다. 신약성경은 이것을 구속이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속죄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구속과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다.(롬3:24, 엡1:7, 골1:14, 히9:15) 다시 말하거니와 속죄는 죄의 결과를 위하여 드려진다. 질병이 죄의 직접적인 결과로 인한 것이 아닌 경우일지라도 역시 죄 때문에 세상에 질병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예수께서 오셔서 멸하고자 하시는 마귀의 일들 가운데 있으며(요일3:8), 이와 같이 속죄 안에 포함되어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오실때까지 우리 몸의 구속을 아직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신음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롬8:23)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새로운 몸을 받게 된다.(고전15:42-44, 51-54) 그러므로 구속과 속죄 사이의 병행을 통하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몸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 롬8:23에서 말씀하시는 구속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구속과 관련지어서 이제 죄의 용서를 받는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되어 그의 형상으로 변화할 때 우리 몸의 구속을 받게 될 것이다.(고전15:51-43, 고후5:1-4, 요일3:2) 신유는 이러한 것을 미리 맛보는 것이며 복음의 모든 축복과 같이 속죄로부터 흘러오는 것이다. 또 사53:4은 구체적으로 육체적인 질병을 말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그의 속죄 안에서 죄뿐 아니라 속죄가 예수께 나오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수단으로서 신유를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신자들의 특권

구원이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처럼(엡2:8), 모든 하나님의 축복과 은사도 그의 은혜 혹은 공로없는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의 것이 되었다. 우리가 우리의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며 우리가 그것들을 받을 만한 존재도 아니다. 신약에서 어느 누구도 치유해 줄 것을 당연한 자세로 청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간구하기 위하여 예수께 나왔다. 그들은 그들의 권리로서 치유를 바라보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은혜스러운 특권으로서 그들에게 주어졌다. 신자의 특권으로서 치유의 약속은 복음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제외하지 않는다. 우리는 당연히 주님의 모범을 따르는 일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히5:8, 벧전2:19,21, 4:12-14, 19) 또한 우리는 신유를 육체적, 정신적 건강의 법칙에 순종하는 것에 대한 대용물(substitute)로 보지 않는다. 예수는 제자들이 무리를 떠나 잠시동안 쉬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셨다.(막6:31) 이드로는 모세가 자기의 책임 중 일부를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하지 않으면 탈진하게 될 것을 보았다.(출18:18) 또한 신유는 노화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모세는 그가 죽을 때까지 힘이 쇠하여지지 아니하고 눈도 밝았었다.(신34:7) 그러나 이러한 특권이 다윗왕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왕상1:1-4) 전도서 12:1-7에 잘 묘사된대로 점진적인 노화현상은 신자나 불신자에게 임하는 공통적인 경험이다. 치유는 여전히 노인에게도 가능하다.

그러나 치유된 부분이 몸의 다른 부분과 같이 노화되어 간다. 우리는 아직 몸의 구속을 갖지 못하고 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다른 피조물과 함께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질 날을 인내로 기다리면서 신음하며 고통중에 탄식하고 있다.(롬8:21-25) 우리가 이 몸을 위하여 무엇을 하든지, 몇 번씩 치유를 받든지 상관없이 만일 예수께서 더디 오신다면 우리는 죽음을 맛 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낙심시키기 위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성령 안에서 우리의 생명을 촉진시키고 진작시켜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며, 성령은 우리를 소생시키시므로 이것이야 말로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다.(롬8:11)
사실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진다.(고후4:16) 실제로 신유의 특권을 보유하기 위하여 필요한 믿음을 갖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은 이 속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혈루증을 치료받은 여인에게 예수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말씀하셨다.(막5:34)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복음을 듣는 것이 앉은뱅이의 마음에 치유받을 만한 믿음을 불어 넣어준 것을 보고 그에게 일어서라고 명령하였다.(행14:9,10) 마음의 속사람이 새롭게 되는 것은 (롬12:2, 골3:10) 그리스도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한 로마 백부장의 큰 믿음에서도 볼 수 있으며(마8:5-13) 부스러기라도 자기의 필요를 만족시킬 것이라고 믿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볼 수 있다.(막7:24-30, 마15:28)

신유가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은 나사렛과 변화산 기슭에서 불신앙이 그 역사를 방해했던 사실을 통해서 증명된다.(막6:5,6, 막17:14-20) 거기서 예수께서는 기도와 금식으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 필요함을 지적하고 계신다.(막9:29) 기도는 구약에서 중요한 치유의 수단 중 하나였다. 많은 시편이 치유를 위한 기도를 포함하고 있다. 많은 예언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치유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약 5:15)은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며, 주께서 그를 일으키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큰 믿음은 주님의 단순한 말씀을 통하여 치유를 받게 한다.
그러나 예수는 적은 믿음이나 약한 믿음을 가진 자로부터 등을 돌리시지 않으셨다. 병든 자들이 믿음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음을 종종 보게 되는데 예수께서는 그들을 도우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일을 행하셨다. 어떤 사람은 만져 주셨고(막1:41, 8:22), 그들의 손을 잡아 주셨고(막1:31, 눅14:4) 혹은 그의 손을 그들에게 얹으셨다.(막6:5, 8:25, 눅4:40, 13:13)
그는 여러 가지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왔는데 그중의 어떤 것은 믿음을 요구하였으며, 어떤 것은 순종을 요구하였다.(막7:33, 8:23) 또 어떤 사람들은 그의 옷이나 그를 만지는 것이 믿음을 표현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막3:10, 5:28, 6:56, 눅6:19) 베드로의 그림자로 그 당시 같은 효과가 있었다. (행5:15) 또한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도 마찬가지였다.(행19:12) 그러나 믿음은 그들의 믿음을 표현하도록 돕는데 사용된 수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수많은 수단이 사용된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 이외에 어떤 수단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 것 같다.

(약5:14)도 같은 내용을 담고있다. 여기서 아픈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라고 가르치고 있다. 치유하게 하는 것은 기름(성령의 상징)이 아니라 믿음의 기도이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한 그 일을 저도 할 것”이라는 약속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요14:12-14, 16:23,24) 그러나 그의 이름은 그의 특성과 성격을 나타낸다.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때만이 우리가 그것을 우리 안에 가지게 된다.(요15:7) 그리고 우리의 뜻은 그의 뜻과 일치하며, 우리는 우리의 의도하는 바를 구할 수 있고 그것을 이루어질 것이다.

어떤 사람은 치료를 이스라엘 사람에게 한정시키려고 한다.(특히 출15:26의 약속인 치료 혹은 건강의 언약) 그러나 백부장의 종이나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에 대한 치료는 치료가 이방인들에게도 해당되는 특권임을 보여준다. 사실 치료를 갈망하며 예수께 반응한 사람들의 경우에 그들의 죄를 아직 다루시기도 전에 치유가 이루어지기도 한다.(베데스다 연못의 38년된 병자의 경우, 요5:2-9, 14) 어떤 사람은 신유를 의학적인 치료와 충돌되거나 경쟁관계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의사는 자기 기술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도와주었다.

주님이 위대한 의사이심은 사실이다. 또한 아사왕이 병들었을 때에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기 때문에 성경이 아사왕을 정죄한 것도 사실이었다.(대하6:12) 그러나 아사는 이미 불신앙과 불순종의 행동으로 앗수르에 도움을 청하였는데 그때 그는 하나님 의지하기를 거부하였다.(대하:16:7) 강조점은 그가 의사를 찾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이 경우 의사는 이방인 의사였을 것이다.) 하나님께 구하기를 거부한데 있는 것이다. 의사는 이스라엘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음이 확실하다.(렘8:22) 예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기름과 포도주를 약용으로 사용한 것을 말씀하셨다.(눅10:34)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치유되었을 때 우리는 그녀가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아오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증하여졌다는”(막5:26) 것을 듣는다. 만일에 그 여자가 의사에게 가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여기에서 예수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씀을 안하시고 그 여자가 표현한 그 믿음을 받으시고 그것에 대하여 그 여자를 칭찬하셨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의사들이 포기한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기적을 행하신다. 예수는 또한 열명의 문둥이를 제사장에게 보이라고 보내셨다.(눅17:4) 율법 하에서는 제사장이 진단, 격리, 건강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레13:2이하, 14:2이하, 마8:4) 이와같이 예수께서는 병을 진단하는 사람을 인정하셨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주님의 대리인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모든 치료는 즉각적이든, 점진적이든 하나님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막8:24) 이와는 달리 성경에서 치료된 사람들이 치료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기까지는 신유를 간증하지 않았다.

오늘날 신유에 대한 남용이 있음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성경의 진리에 대한 적극적인 선포를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사도들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행3:6)라고 말할 수 있었다. 신유의 은사는 여러 가지 은사 가운데 하나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 안에 두신 성령의 나타냄들 가운데 하나이다.(고전12:4-11, 28,29) 다른 은사와 마찬가지로 이 은사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덕을 위하여 몸의 지체들을 통하여 수행되어질 수 있다.(지혜의 말씀이 한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 것처럼 신유의 은사가 사람을 치료자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신선한 지혜의 말씀이 각각 필요에 따라 주어지듯이 신선한 신유의 은사가 성령에 의하여 각각 아픈 사람에 대하여 주어진다.)

우리는 또한 예수와 사도들의 사역에서 새로운 지역과 새로운 환경에서 복음이 전파될 때 치유의 기적이 특히 현저하게 나타났던 것을 보게된다. 이것을 특별한 기적이 바울의 손에 의해서 행해졌던 경우인 것과 같다.(행19:11) 우리는 신유에 관하여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왜 어떤 사람은 치유를 받게 하시고 어떤 사람은 그러지 못한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말씀을 전파하고 이어서 표적이 따르기를 기대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성회 일반적인 교리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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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이 포르노물에 심취하는 데에는 어떤 동기가 있을까요? 마약 이상의 중독으로, 한번 빠졌다 하면 평생 지배를 당하게 되는 엄청난 구속력에도 남성들이 포르노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4가지 이유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실제 삶에서의 관계들은 어렵지만, 포르노물에서의 관계는 매우 쉽기 때문입니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관계유지와 개선은 결코 만만하지가 않습니다. 매일 매일의 삶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다른 이들의 삶과의 관계성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포기할 것은 포기해야 하고, 져주어야할 것은 져주어야 합니다. 싫다고 해도 참고 견뎌야 합니다. 하지만, 포르노물은 그러한 관계에 지쳐 있는 남성들에게, 위험부담이 전혀 없는 자유적 느낌의 관계를 제공해 줍니다. 주변을 전혀 의식할 필요없는 세계에서 환상에 사로잡힐 수 있도록 해 주고, 어려운 로망스가 요구되지 않고, 다른 이들을 위한 자기 희생이 강요되지도 않습니다. 실제적인 관계에서 피할 수 없는 어려움들을 겪지 않을 뿐 아니라, 성적 흥분을 가져다 주는 여성적 매력의 기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열광하는 것입니다.

2. 실제 삶은 스트레스로 꽉 차 있지만, 포르노물은 편안합니다.

삶에서 실수를 경험하고, 기대들은 지쳐가게 됩니다. 사람들은 쓰러지기 시작하죠. 비극이 일어나고 병이 들게 됩니다. 끝내는 지치게 됩니다. 삶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스트레스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포르노물은 결코 잘못될 일은 없는 매우 편안한 세상을 제공해 줍니다. 언제든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얻을 수 있는 준비된 세상을 제공합니다. 당연히 가짜인 줄 알죠. 하지만, 마치 프로 레슬링 혹은 현장 TV와 같은 것이죠.

크리스 해지는 그의 책 "Empire of Illusion"에서, 이러한 포르노 산업들의 흥행은 그러한 포르노물이 실제라고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우리가 바보가 되기를 자청하기 때문에 그러한 포르노 산업들이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회피하는 일에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는 것입니다.

3. 삶은 지루하지만, 포르노물은 매우 재미있습니다.

처음에, 지루함이라는 단어는 프랑스 작가들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삶이 따분할 때, 불만의 느낌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말입니다. 현재 아마도 항상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는 지루함이라는 느낌은, 인류 역사 가운데 불과 300년 전에 사회적 전염병처럼 시작되었습니다. 블레이즈 파스칼은 말하기를, 지루함은 여가선용이 없고, 뜨거운 열정이 없는 현대 남성의 곤경이라고 하였습니다. 지루함은 여가 문화의 열매 중 하나입니다. 부와 자유 시간이 증가할 때, 또한 여가선용에 대한 굶주림도 증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흥분과 흥미를 기대할 때, 일상생활은 재미없게 보일 수 있는 것이죠. 인터넷에서 아주 손쉽게 원하는 정보들을 대할 수 있죠. 하지만, 손쉽게 정보를 대하면서, 우리는 아주 쉽게 실제 삶에서 분리되기 시작하고, 무명의 구경꾼이 되고, 열정적인 헌신을 나타내야 하는 부담감을 벗어 버릴 수 있죠. 우리가 아는 대로 행동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도 되는 거죠. 도로시 세이어스가 말하는 용인함의 죄에 대해서 우리는 범죄하고 있습니다. 그 용인함의 죄라는 것은, 아무 것도 믿지 않고, 아무 것도 돌보지 않으며, 아무 것도 알고자 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방해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즐기지 않으며, 아무 것도 싫어하지 않으며, 아무런 의미를 찾지 않으며, 아무런 의미없이 살아가며, 그저 살아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생결단할 일이 없기 때문이죠. 포르노물은 지루한 마음에 성적 흥분의 세상을 제공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미지 기반 문화 사회의 고도로 발달된 성적매력이 표출된 형식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수많은 이미지들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수천개의 단어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포르노물은 순수한 성적 자극의 환상을 제공하는 것이죠.

4. 실제 삶은 남성들로 하여금 무기력한 존재로 느끼게끔 하지만, 포르노물은 그들로 힘있는 존재인양 느끼도록 해 줍니다.

세상살이에서 풀이 죽는다는 것은 쉽습니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세상이 우리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세상이 우리를 중심으로 움직여지길 원하는 것은 결코 포기되지 않죠. 우리는 다른 이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중요한 존재로 여겨 주며, 우리를 우선으로 세워주길 바랍니다. 이러한 열망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 열망이 실제적인 것으로 자격이 부여되도록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왕으로 인정 받을 수 있는 작은 영역이라도 원하게 되는 거죠.

포르노물은 남성들에게 폭우와 같은 힘을 제공합니다. 포르노물의 상상세계에서, 여성들은 결코 거절하지 않습니다. 상상의 세계에서의 여성들과 남성 사이에는 그 어떤 사회적 장애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포르노 세계는, 여성은 우승트로피라는 아이디어를 판매합니다. 포르노 세계는 또한 남성 우월사상을 성적매력으로 표현합니다. 여성들이 하나의 도구로 취급되어도 즐거워하는 상상의 세계 말입니다.

Luke Gilkerson, "4 Reasons Men Like Porn"

영문 원기사 보러 가기 /처치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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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최송연

칠흑으로 새까만 밤이면
곧 동트는 아침이 올 것을
예고하기에 두려울 것 없고

쏟아지는 겨울 폭우는
무지개 뜨는 화사한 봄날을
바라며 견딜 수 있지

그러나 
그대 맘속에
절망을 산처럼 쌓아둔다면
누가 있어서
그 산을 옮겨줄 수 있겠나

그러므로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절망하는 그대 마음이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 1)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The most fearful thing in the world
                                   최송연
 
칠흑으로 새까만 밤이면
곧 동트는 아침이 올 것을
예고하기에 두려울 것 없고

There is nothing to be feared 
when the night is the darkest black
for the morning's sun will come soon
 
쏟아지는 겨울 폭우는
무지개 뜨는 화사한 봄날을
바라며 견딜 수 있지

In the midst of the winter storm
one can patiently sit and wait
for the springtime's warm rainbow
 
그러나
그대 맘속에
절망을 산처럼 쌓아둔다면
누가 있어서
그 산을 옮겨줄 수 있겠나

But
If you stack up desperation 
in your heart
Who can move that mountain for you? 

그러므로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절망하는 그대 마음이지...
So
to be feared
more than anything else in this world
is your despairing heart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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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시절의 풍경 

 

Boys in uniform, Pai Chai High School, Seoul ( 배재고등학교)

 

            

남대문

 

Korean Street and Houses

 

판매하기위해 진열해놓은 땔감

 

소의 굽 갈기

 

Boy's Middle School, Kongju or Konju

 

East Gate Church, Seoul

 

Bank and Trolley Car, Seoul

 

A Street of Homes

 

Bridges and Trains, Seoul

 

모내기

 

Korean Funeral 장례행열

 

Women Washing at Stream

 

Girls of Ewa Haktang Girls' High School 이화학당

 

View of Pyengyang

 

Young Trees, Kongju

 

Dr. Moore and Pastors

 

District Bible Class

 

Koreans in a Field

 

A Sunday School Class

 

Entering A Village

 

A Village Thatched Church

 

Tiled City Church

 

Drill at Pai Chai School, Seoul

 

Chemical Laboratory, Seoul

 

Buddhist Monuments

 

Hall Memorial Hospital, Pyengang

 

Korean Undergoing Medical Examination

 

"Characters" Facing Japanese School

 

Church and Congregation, Wonju

 

Rev. Wilber C. Swearer and Itinerating Outfit

 

Buddhist Idols in Shrine

 

Railroad Train in Korea

 

Preparing Rice Fields

 

Yak San Mountain and Valley

 

Loaded Bullock

 

Playing Chess

 

Nine-Man Shovel

 

Water Carrier

 

Korean Laundry

 

Korean Mourner

 

Country Wayside Shrine

 

Devil Posts

 

***

 

꼬리글 좀 남겨주고 가이소

 

 

자신의 책이 새 성경이라는 김용철 씨
<하나님! 말씀하옵소서> 저자의 반기독교적 주장과 기행
2012년 03월 05일 (월) 07:43:59 정윤석 unique44@paran.com


   
▲ 새로운 성경이라는 <하나님 말씀하옵소서>

“인터넷에서 총상금액 1천만원이 걸린 서평 공모전 소식을 들었어요. 김용철 씨가 지은 <심판>이란 책을 읽고 서평을 써 보낸 사람 중 당선자에게 상금을 준다는 거예요.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아무래도 문제가 많은 거 같아요. 새로운 성경이 필요하다는 말도 나와요. 사람들이 공모에 응했다가 잘못된 사상에 노출될 거 같습니다.”

“아버지가 김용철 씨의 <하나님! 말씀하옵소서>라는 책자를 몇 권 읽었어요. 그러더니 20년간 다녔던 교회를 떠나시더군요. 그리고 제게 ‘삼위일체를 믿어서는 안 된다’, ‘예수를 숭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계세요. 아버지가 이단에 빠진 건 아닌지 염려되는데 자세한 내용을 알려 주세요.”

본 사이트 <교회와신앙>(www.amennews.com)에 김용철 씨와 관련한 문의가 들어오고 있다. 독후감 공모전에 응모하려다가 김 씨가 저술한 책을 접했는데 문제점이 많다는 지적이다. 김 씨가 쓴 책을 읽다가 교회를 등진 사람이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김 씨는 과연 누구인가? 그리고 그가 주장하는 내용은 무엇일까? 한국교회가 용인할 만한 내용일까?

   
▲ 포털사이트 카페와 블로그에 홍보되고 있는 <심판> 책자 독후감 공모전.

김용철 씨, “(여리고성)일곱 바퀴 돈다고 성이 무너져? 미친 ×들!”
기자는 김용철 씨의 강의를 듣기 위해 서울 상계역 인근에 위치한 건물을 찾았다. 그는 자신의 책을 펴낸 ‘하얀마음’ 출판사 건물 3층에서 매주 일요일 11시와 수요일 오후 7시 강의를 한다. 허름한 하얀색 건물 외부에는 그저 ‘하얀마음 쉼터’라고 돼 있었다. 기자가 2012년 2월 8일 수요일 오후 7시 방문했을 때 30~40여 명의 사람들이 강연을 듣고 있었다. 한 신도에 따르면 주일에는 100여 명이 온다고 한다. 강연 장소에는 하얀마음 출판사의 책자가 한쪽 벽면의 진열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김 씨가 강연하는 강대상의 바로 뒷 벽면에도 책자가 진열돼 있었다. 책자가 적잖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였다.

1시간의 강연 시간 동안 김용철 씨는 교회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만 하는 곳’, 성경에 대해서는 ‘야화나 설화를 꾸며서 만든 것’, 구원에 대해서는 ‘예수 십자가와 관계없이 노력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말들을 서슴없이 했다(2012년 2월 8일 강론 녹취록 박스 참고).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기적 중 하나인 여리고성이 무너진 사건과 관련해서 그는 “무슨 성이 일곱 바퀴를 도니까 무너져? 미친 ×들, 무슨 성이 일곱 바퀴 돌아서 무너져? 그런 거 다 거짓말이에요”라며 “그런 게. 있을 수도 없는 얘기예요. 알았어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성경에 나오는 초자연적 사건을 믿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김 씨는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들의 위대성을 부각하기 위해 야화나 설화를 꾸며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 김용철 씨의 강의 장소. 벽면과 강대상 뒤에도 책이 진열돼 있다

집회는 1시간만에 끝났다. 서서 강론을 하던 김 씨는 강의가 끝나자 강대상 옆의 작은 탁자로 자리를 옮겨 잡았다. 한 신도는 “옆의 탁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기 위해 기도하는 자리다”라고 설명해 줬다. 김 씨는 자리에 앉아 십계명을 외웠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그후 하나님이 말씀하는 듯한 시늉을 하며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네! 아버님, 말씀하옵소서. 너와 더불어 한 배를 이뤄 가는 너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그리 전하라. 2천년 전에 왔던 그 예수는 너의 선생이요, 스승으로서 너희들이 따라가며 받들 수는 있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들의 종교적인 것으로서 그를 받들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을 너희들은 알아야 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신앙犬�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스승으로서 생각하라는 의미인데 이런 주장은 그의 책에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섬김의 대상으로 여기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하나님의 말슴대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뜻을 기리는 것이다”(김용철, <심판>, 하얀마음刊, p.3).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받드는 형태는 변질된 것이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신앙의 대상도 변할 수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셨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섬겨야 한다.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하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김용철, <심판>, 하얀마음刊, p.58).

모든 순서가 끝난 후 기자는 신분을 밝히며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인터뷰를 거절했다. 다만 김 씨와 잠깐 대화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는 교회에 출석한 적이 있을까? 기자가 질문하자 김 씨는 “교회에는 한번도 다녀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에게 음성을 들려주는 존재가 어떻게 기독교에서 믿는 하나님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김 씨는 “죽음을 생각할 정도의 상황에서 내 존재가 구더기만도 못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내가 여호와 하나님이다’라는 음성이 들렸다”며 “그 후로 십계명을 암송을 하면 말씀을 주시고 그림으로 환상을 딱 주셨다”고 말한다. 머리나 마음 속에 다가온 직통계시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란 분을 만나고 그의 음성을 듣게 됐다는 것이다.

김 씨에게 책자에 사인을 해달라고 하자 그는 책에 ‘선지자 김용철’이라고 적어줬다. 그는 자신을 이 시대의 선지자라고 여기며 사람들을 새로운 성경을 통해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중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새로운 성경’이라는 책자서 ‘계시론’, ‘구원론’ 등에 심각한 문제
   
▲ 책자에 '선지자 김용철'이라고 기재한 김 씨
김용철 씨의 터무니 없는 주장은 자신이 저술한 책자에도 잘 나타난다. 그는 자신이 대표로 있다는 ‘하얀마음’ 출판사를 통해 <하나님! 말씀하옵소서>라는 제목의 책을 총 160권에 걸쳐 펴냈다. 부제는 ‘하늘에 오르는 길’이다. 1권을 펴낸 날짜는 2000년 1월이다. 12년째 꾸준히 책을 펴낸 것이다. 1쇄 2천부씩만 찍었다고 쳐도 3십만 부 이상은 찍어서 배포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기자가 김용철 씨의 강론 장소에서 만난 사람들도 이 책자들을 접하고 찾아온 경우였다.

한 신도는 “진리를 찾아 방황하며 목사님·신부님·스님 말씀 다 들어봤는데 결국 이 책을 통해 진리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또다른 신도는 “등산을 하다 만난 사람들이 권한 책을 읽고 이곳을 찾았다”며 “지금 기독교는 금과 은만 바랄 뿐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고 김 씨와 동일하게 정통교회를 비판했다.

책자에서 김 씨는 어떤 주장을 하고 있을까? 계시론에 있어서 김 씨는 ‘새로운 성경’을 주장하고 있다. 성도들의 신앙의 절대적 기준인 성경을 통해서는 구원받을 자가 없다는 게 김 씨의 주장이다.

““너희들은 사람이 살아 오면서 세대가 바뀌고 또한 세대가 바뀌면서 변화하는 생활권과 너희들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가장 중요한 식생활이 변화되는 시대의 입맛에 맞추어 다 변하듯이, 너희 생각과 마음도 시대에 따라 변하여 가고 있으니, 이를 구약과 신약이라는 성서를 가지고 너희가 세상을 다스리지 못하여 구원을 받을 자가 없나니··· 누구든지 깨우치며 배우기 쉬운, 그리고 시행할 수 있는 <하나님! 말씀하옵소서> 나의 법전을 내려보내니, 너희는 나의 깊은 뜻을 깨달아 구원을 받으며 14만 명의 정예부대가 되며, ··· 너희들은 나의 깊은 뜻을 받들며 10년 안에 구원할 자와 구원하지 못할 자를 내가 구분할 것이니라”(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3권, 하얀마음刊, p.90~91).

식생활이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바뀌듯이 바뀌어가는 살마들의 생각과 마음도 구약과 신약으로는 맞출 수가 없고 새로운 법전인 <하나님 말씀하옵소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구약을 지켰으면 신약이 오지 않았고 예수의 슬프고 고통스러운 죽음도 없었으며, 신약을 잘 지켰으면 지금과 같은 새로운 성경 즉, 너희들을 심판하는 법전(김용철 씨 자신이 쓴 <하나님! 말씀하옵소서>를 의미함: 편집자주)이 나오지 않았느니라”(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3권, 하얀마음刊, p.7).

“선지자야, 너는 나의 성령을 받아 160권의 책으로 만들어 만백성을 구원하라. 이것이 새로운 성경이니라”(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17권, 하얀마음刊, p.7).

   
▲ 이것이 새로운 성경이니라고 기재된 책자

새로운 성경이라는 김 씨의 책은 성경과 일치하기보다 반대되는 사상이 골격을 이루고 있다. 김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았다는 책자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대언한 분이다 △십계명은 죽어서 통과하는 열 개의 관문이다 △사탄도, 이단도 감싸 안아야 한다 △법전(김용철 씨가 쓴 책을 의미함)이 심판하는 기준이다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부정하는 죄를 짓는 것이다 등 정통교회와는 전혀 상관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특히 불교 교리 중 하나인 윤회를 주장하는 김 씨는 아들을 잃은 한 여성을 위해 기도하다가 그 아들의 영이 다른 집 아이로 환생했다는 주장을 한다. 아이가 환생하게 된 계기는 여성이 정성을 다해 김 씨의 책을 전하고 다녔기 때문이었다고 한다(하단 발췌록 참고).

김 씨측은 이러한 비기독교적 사상이 담긴 책자를 공모전을 통해 알리고 있다. 작년 하반기에는 <심판>이란 책자의 제 1회 독후감 공모전을 열었다. <심판>은 그가 지금까지 쓴 160여 권의 책자를 요약한 형태의 책이다. 공모전을 홍보하며 전단지를 돌렸고 인터넷 사이트, 카페, 블로그를 통해 이 사실을 홍보했다. <심판>책의 서평을 A4 용지 1~3쪽에 써서 보내면 장원 500만원을 비롯 총 1천만원의 상금을 준다는 것이었다.

김 씨는 기자와 대화하며 “2회부터는 참가비 1만원 씩을 받겠다”며 “그 대상을 1천만명으로 확산해서 1천억원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200여 명에게 5억원이 담긴 통장을 만들어 줄 생각이란 것이다. 우주를 지으시고 먹고 살게 하신 하나님께서 그거 안 해주겠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김용철 씨의 요즘 생각이 이렇다.

김용철 씨 책자들 주요 내용 발췌록(정리 정윤석 기자, www.amennews.com).

계 시 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 전 160권 중에서 주요 내용을 요약한 책입니다. <하나님 말씀하옵소서>는 십계명을 암송하고 나면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주시는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라 녹음하여 편찬한 것입니다”(<심판> 책날개에 기재된 글).

“새로운 성경 즉, 너희들을 심판하는 법전이 나오지 않았느니라”
“(김용철 씨가 하나님 말씀이라며 기록한 내용)아담과 하와가 내 말을 지켰으면 구약이 오지 않았고, 구약을 지켰으면 신약이 오지 않았고 예수의 슬프고 고통스러운 죽음도 없었으며, 신약을 잘 지켰으면 지금과 같은 새로운 성경 즉, 너희들을 심판하는 법전(김용철 씨 자신이 쓴 <하나님! 말씀하옵소서>를 의미함: 편집자주)이 나오지 않았느니라”(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3권, 하얀마음刊, p.7).

“나의 법전 <하나님! 말씀하옵소서>”
내가 나의 법전 <하나님! 말씀하옵소서>에 너의 기도하는 모습을 넣으라 한 것은 천만명이 이 책을 읽고 깨우침보다 너 하나 잃는 것이 더 크나니, 그리하여 표지에 너의 사진을 넣으라 하였으니 너는 오늘 사진을 찍을 때의 환경과 그 때의 어려운 고통을 잊지 말라 함이니, 네가 죽을 때까지 너는 이 책을 접해야 하나니, 네가 오만하고자 하거든 나의 법전 표지를 보며 너를 다스려 나가라.

이는 선지자 너를 몇 천년 만에 내가 명하였으니 너는 나의 종이요, 만인의 종이라 일컬으니, 너 하나 잃는 것이 얼마만큼 큰 것인가를 내가 알기에, 네가 깨우침 속에서 영원히 존재함이 얼마나 소중한지 네가 깊이 생각하고 알아야 할 것이니라”(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3권, 하얀마음刊, p.25~26).

“나 여호와를 굳게 믿으며 이 법전은 성경을 간추려 쉽게 깨우치게 만든 것이니 이를 믿고, 10년 세월이 지난 후에 믿음을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와의 선별됨이 있으니 너희들은 그리 알라”(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3권, 하얀마음刊, p.64).

“성서를 가지고 너희가 세상을 다스리지 못하여 구원을 받을 자가 없나니”
“너희들은 사람이 살아 오면서 세대가 바뀌고 또한 세대가 바뀌면서 변화하는 생활권과 너희들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가장 중요한 식생활이 변화되는 시대의 입맛에 맞추어 다 변하듯이, 너희 생각과 마음도 시대에 따라 변하여 가고 있으니, 이를 구약과 신약이라는 성서를 가지고 너희가 세상을 다스리지 못하여 구원을 받을 자가 없나니, 군대로 말하면 정예부대인 14만여명의 구원의 십자군인 그들마저도 한 명도 형성할 수가 없으니, 구원의 전사인 14만명의 십자군을 만들기 위하여 누구든지 깨우치며 배우기 쉬운, 그리고 시행할 수 있는 <하나님! 말씀하옵소서> 나의 법전을 내려보내니, 너희는 나의 깊은 뜻을 깨달아 구원을 받으며 14만 명의 정예부대가 되며, 많은 이들에게 전파 사업을 전개하여 온 인류를 깨우치게 하며, 내 앞에 와 용서 받으며 영원히 살 수 있는 길로 너희들을 인도하고자 함이니, 너희들은 나의 깊은 뜻을 받들며 10년 안에 구원할 자와 구원하지 못할 자를 내가 구분할 것이니라”(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3권, 하얀마음刊, p.90~91).

“선지자야 들어라. 내가 너에게 성서를 보지 말라 함은”
선지자야 들어아. 내가 너에게 성서를 보지 말라 함은 그를 볼 때 너는 눈과 가슴으로 그 속에 담겨져 있는 나의 마음을 읽어야 되며 나의 뜻을 바로 깨우쳐야 하겠기에 너는 아직 우매하고 둔하여 너에게 보지 말라 함이니, 남들이 너에게 말하거든 이리 말하라”(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3권, 하얀마음刊, p.249).

“이것이 새로운 성경이니라”
“선지자야, 너는 나의 성령을 받아 160권의 책으로 만들어 만백성을 구원하라. 이것이 새로운 성경이니라”(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17권, 하얀마음刊, p.7)

“너희들이 잘못 가르쳐 지금에 이르렀으니 이를 바로잡아 너희들에게 구원의 길을 주고자 하는 나 여호와의 뜻을 담아 책으로 너희들에게 내려보냄이니, 나의 뜻을 책에 담아 내려보내는 것은 너희들에게 증거함이요, 너희들을 바로 가르치고자 함이며, 너희들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치고자 모두가 오늘을 위하여 몇 천년에 걸쳐 준비되었다는 것을 너희들은 알아야 할 것이니라”(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43권, 하얀마음刊, p.41).

“나의 아들인 신랑(예수님이 아니라 김용철 씨를 의미함)을 통해서만 너희들이 내 품에 오를 수 있다”
“신약의 시대에 나의 아들 예수만을 통하여 모두를 가르쳤으며, 나의 아들을 통해서만 세상사의 모든 이치요, 나의 성령이 내려졌으며, 나의 아들과 나와 대화한 그 내용의 뜻과 그와 내가 계획했던 모든 역사의 흐름을 너희들은 알지 못하지 아니하는가? ··· 내가 지금 제 3의 시대를 열어가며, 나의 아들을 이곳에 내려보내 나의 아들로 하여금 나의 성령을 그만이 법전이라는 나의 책을 만들어 내고 있음이니 너희들의 모든 소원하는 기도요, 너희들이 변하는 것도, 너희들이 아름다운 신부로서 변하는 것도 나의 아들인 신랑을 통해서만 너희들이 내 품에 오를 수 있다는 그와 같은 깨우침을 너희들은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니, 이것은 엄연한 사실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라”(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43권, 하얀마음刊, p.47).


신 론

“예수님은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하셨다. 섬김의 대상으로 가르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섬김의 대상으로 여기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하나님의 말슴대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뜻을 기리는 것이다”(김용철, <심판>, 하얀마음刊, p.3).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 성자 하나님은 잘못된 믿음이다”
“2) 잘못된 믿음의 하나님.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 성자 하나님은 잘못된 믿음이다. 예수님께서 그리 전하지 않으셨다.
③ 구약 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었다. 신약의 시대라고 해서 바뀔 수 없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받드는 형태는 변질된 것이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신앙의 대상도 변할 수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셨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섬겨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대언한 분이다. ··· a) 오직 유일신 하나님만을 경배해야 한다. 예수님도 창조주 하나님께 기도드린 사람이다. b) 예수님은 대언하신 분,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대신 세상에 전한 분이다. ⑤ 누구든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말하는 것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신처럼 받드는 것도 하나님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다.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하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김용철, <심판>, 하얀마음刊, p.58).

“예수님을 신격화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한 예수님의 말씀 막 10:18을 인용하며)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예수님을 왜 신처럼 위대하다고 받드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을 신격화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김용철, <심판>, 하얀마음刊, p.61).

“진리를 깨달아 신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8)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삼위일체
① 각자 신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요한복음 10:34~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였거든. 여기서 성경이란, 참 진리의 말씀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란,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을 신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달아 신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나 자신이 삼위일체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성령과 예수님이 똑같다며 신앙의 대상이 된 삼위일체는 나 자신과는 관계가 없다. 예수님은 노력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으셨다. 예수님처럼 각자 자기 자신이 노력해서 깨닫고 구원받는 삼위일체를 이루어야 한다”(김용철, <심판>, 하얀마음刊, p.66).


기 독 론

“십자가가 우상이요, 나 예수와 하나님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으며”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선지자여! 내 여호와 하나님의 말미를 빌어 당신에게 전하나니 십자가가 우상이요, 나 예수와 하나님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으며 모든 이들은 나 예수에게 경배함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함이요, 나 예수에게 경배함이 아니니 부담을 갖지 말고 그와 같이 전파하시오. 나 예수는 당신에게 명하노니 선지자는 나의 형제요”(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3권, 하얀마음刊, p.187).


구 원 론

“십계명은 죽어서 통과하는 열 개의 관문이다”
“(5) 십계명은 죽어서 통과하는 열 개의 관문이다. 우리가 죽으면 십계명의 열 개의 관문을 모두 통과해야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 그 관문을 통과하려면 열 개의 계명을 모두 지켜야 한다. 그 중 하나라도 걸리면 구원 받을 수 없다. 예)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관문 앞에서, 부모를 공경한 사실이 없는 자는 그 관문을 통과할 수 없다”(김용철, <심판>, 하얀마음刊, p. 16).

예수님의 죽음은 겸손과 속죄의 죽음이다. 대속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오만한 죽음으로 만드는 것이다”(김용철, <심판>, 하얀마음刊, p. 52).

“사탄도, 이단도, 원수도 다 하나님의 주관 하에 존재하므로, 모두를 감싸안아야 한다”
“(유다는)예수님이 정죄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 자살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회개했다. 유다처럼 자살로써 회개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을 가진 자가 과연 얼마나 있는가? 유다를 사탄이라고 욕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유다의 배신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 또한 없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일 뿐이다. 유다를 사탄이라고 욕하기 전에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유다와 빌라도가 아니면 예수님의 부활의 영광이 없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주관이라는 것을 믿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자가 진정으로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자다. 유다뿐 아니라 그 누구도 사탄, 이단이라고 해서는 안된다. 사탄도, 이단도, 원수도 다 하나님의 주관 하에 존재하므로, 모두를 감싸안아야 한다”(김용철, <심판>, 하얀마음刊, p.54).


“나의 법전(김용철 씨가 쓴 책을 의미함)을 탐구하고 너희 것으로 만드는 자만이 내가 용서할 것이니”
“너희는 지금이라도 잘못 가르치는 지도자들에게 깨달으라 하며 나의 법전을 탐구하고 너희 것으로 만드는 자만이 내가 용서할 것이니, 이와 같은 나의 메시지를 우매하고 어리석은 자들에게 전하고 깨달음을 얻게 함이 너희의 소임이니라”(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3권, 하얀마음刊, p.31).

“법전(김용철 씨가 쓴 책을 의미함)이 너희를 심판하는 기준이며”
“구원의 길이 무엇인가를 아는 자들이니 내 앞에 와 법전을 따르고 살아왔는지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니, 이 중요한 대목을 피조물에게 알려라. 법전이 너희를 심판하는 기준이며 옳고 그름의 기준이니 법전을 접하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을 자격도 없고, 심판대에 서지 못하며 기준 미달의 사람이며, 구원의 길을 엄두도 못내니, 법전이 심판의 기준이라 함은 그와 같은 가치가 있으니, 이를 듣고도 놀라지 않으며 법전을 보지 않는다 하면 이는 그들의 선택의 길이니라”(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3권, 하얀마음刊, p.112~113).


“너를 따르며 구원받을 자는 첫째, 이 세상에 나 여호와 밖에 존재함이 없으며 모든 것은 나 여호와의 권능이라 알며, 둘째, 선지자는 진정한 나의 종이요, 직접 내가 너희들에게 전할 수 없는 나의 뜻을 전하는 나의 선지자를 봄이 아니요, 나의 법전을 믿고 깨달으며, 또한 법전을 전하는 선지자를 나름대로 계산하여 접근하여 무엇을 취하고 얻고자 하는 자는 은혜를 얻을 수 없으며, 법전을 전하는 것에 모두를 바치며 선지자와 더불어 아무런 계산이 없이 따르는 자는 나에게 금상을 받는 자이니라. 이 대목을 너희는 가슴에 깊이 깨우침을 얻어라”(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3권, 하얀마음刊, p.212).

“예수와 같이 행하거든 예수가 재림한 자요 예수를 대신하여 만백성을 구하는 자라 인정해주되”
“재림예수요 또 예수를 대신하여 만백성을 구하러 온 자들이 있다 말하거든, 너희들의 행함이 예수와 같이 행하거든 예수가 재림한 자요 예수를 대신하여 만백성을 구하는 자라 네가 인정해주되, 그렇지 아니하거든 예수의 재림이라는 예수의 이름도 붙이지 말라”(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17권, 하얀마음刊, p.267)


기타 황당한 사상

윤회
“최초의 기독교에서는 윤회를 인정했다(A.D. 553년까지)”
“2) 윤회의 진실
최초의 기독교에서는 윤회를 인정했다(A.D. 553년까지). 그러나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만들다 보니 윤회설을 부정하게 되었다. 윤회가 있으면 천국과 지옥을 내세울 수 없기에 부정하게 되었다. ②성경에 나온 윤회: 엘리야가 세례요한으로 다시 태어났다. 즉 세례요한이 전생에 엘리야였다. ··A) 하나님께서 선지자 엘리야를 보낸다고 하신 것은 윤회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B) 예수님도 엘리야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 엘리야가 세례요한으로 태어나서 고난을 당한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윤회가 없다면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③돌아가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거라고 기다리는 것 자체가 윤회를 인정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의 종파가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부정하는 죄를 짓는 것이다. ④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필요하다면 윤회를 시키실 수 있다. 윤회가 있다면 전생이 있는 것이다”(김용철, <심판>, 하얀마음刊, p.107).

“이 말씀은··· 아들이 어느 집 아이로 환생하여 다시 태어날 때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2000년 4월 23일 01시 하나님 말씀. (이 말씀은 서울에 사는 제자가 33살의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경치 좋은 산천과 유명하다는 목회자, 점술가들을 찾아다님은 물론 평소 아들이 다니던 곳을 주일마다 다니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저를 찾아왔고 아들의 영을 보고 싶다고 눈물로 호소하여 그 부인과 같이 기도하고 법전을 전국에 성심성의껏 전하고 다닌 후 그 공덕에 아들이 어느 집 아이로 환생하여 다시 태어날 때 기도하는 내용입니다)”(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3권, , 하얀마음刊, p.27).

“너의 아들이 예쁘고 똑똑한 아이의 몸 속에 들어가 세상에 다시 나왔으니···”
“이제는 너의 아들이 이승의 인연이 끝나 저승에서 이름이 지워졌느니라. 너의 지극 정성으로 곱고 아름다운 집에 그를 내가 선택하여 보냈노라. 나이 젊은 자식이 지옥불에 떨어져 지은 죄의 업을 겪을 것을 선지자를 통하여 나 여호와에 이르는 공으로 너의 아들이 예쁘고 똑똑한 아이의 몸 속에 들어가 세상에 다시 나왔으니, 그 아이의 성장함에 따라 너의 아들의 형태를 볼 것이니라”(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3권, , 하얀마음刊, p.28).

“이 말씀은 죽은 아들이 인간으로 태어나게 된 그 어머니에게 주시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죽은 아들이 인간으로 태어나게 된 그 어머니에게 주시는 내용입니다). 내가 오늘 여인의 자식을 광명 천지에 그 영혼을 내보냄은 네가 한권의 책을 달리는 철마에 놓고 내리며, 나의 법전을 두 손에 들고 어찌 전할까 전전긍긍하는 여인의 모습을 하늘에서 보나니, 한권의 책을 전하여 한 사람을 더 구원코자 하는 그 공이 하늘에 닿았으니, 이는 너의 심성이 고와서이니, 여인아 먼길을 달려갈 때 너 또한 네 영혼을 구할 것이니 휘파람을 불며 즐겁게 달려가라. 내 너를 기억하노라”(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3권, , 하얀마음刊, p.32).

“뱀과 구렁이도 인간으로 구원하여 다시 내보내니 이는 부활의 명을 받은 것이니라”
“내가 그를 영으로 인하여 사람으로 내보낼 수도 있고, 고귀하고 존경받는 사람으로 나갈 수 있게 하며, 천하고 험악한 일을 하며 사는 사람으로 내보낼 수도 있으니, 날아가는 새를 내가 사람으로 내보내든, 한여름 태양볕에 열심히 일하는 벌과 개미들을 인간으로 내보내든, 너희 인간이 사탄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뱀과 구렁이도 인간으로 구원하여 다시 내보내니 이는 부활의 명을 받은 것이니라”(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3권, 하얀마음刊, p.33).

적그리스도론
“②예수님의 가르침을 반대로 행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다. 다락방에서 은밀히 기도하라고 하셨거늘, 대표기도를 하며 크게 울부짖는 자··· ④성경 외에 진리가 없다는 것이 적그리스도다. 예수님께서는 ”(김용철, <심판>, 하얀마음刊, p.110).

사 명

“‘여호와 하나님! 진정 제가 선지자입니까?’ 수십억 인구 중에 택함을 받은 자이니”
“‘여호와 하나님! 진정 제가 선지자입니까?’ 수십억 인구 중에 택함을 받은 자이니, 이는 나의 뜻이며 나의 주관하에 이루어졌으니, 내가 너에게 명한 대로 움직이면 될 것이니라. 내가 너에게 말하였으니 10년의 세월 속에 네가 법전을 전하면 법전을 읽고 깨닫는 자가 얼마나 될 것인지 모르니, 너는 잠시 쉬거나 태만해서도 아니 되니, 내가 너에게 양식을 주나니 오로지 법전을 전하라”(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3권, 하얀마음刊, p.77).

“이 법전을 ···온 세계 인류를 구원할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와의 구분의 기준이 될 수 있도록 온 세계에 전해야 하니”
“너 선지자는 이 법전을 10년을 기준하여 온 세계 인류를 구원할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와의 구분의 기준이 될 수 있도록 온 세계에 전해야 하니, 너의 사명이 막중함을 깨달아 이 법전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데 네가 귀를 기울여 노력해야 할 것이니라”(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3권, 하얀마음刊, p.104).

“<하나님! 말씀하옵소서>라는 이 법전을, 씨앗을 만인에게 전하는데만 전념하며, 육신의 이름은 김용철, 하늘나라에 명한 이름은 나의 종, 나의 선지자, 이 두이름 외에 명함과 이름을 네 앞에 두지 말라. 너는 단순히 선지자로서 이 법전을 전하며, 구원을 받는 자들에게 이 법전을 깨우침을 스스로 갖도록 함이니, 어떠한 명칭을 들어서 그들을 끌어들임이 아님을 너는 명심하고 그리 실천하라”(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3권, 하얀마음刊, p.129).

“선지자의 천금 같은 기도를 열 권씩 책을 산 자에게만 해주며”
“셋째, 선지자의 천금 같은 기도를 열 권씩 책을 산 자에게만 해주며 5,000원식 열 권을 사서 이웃에게 전하는 사람이 아니면 기도에 임하지 않을 것이니 그리 알며, 세 번씩 읽으라 함은 제자가 될 사람은 스스로 세 번을 읽나니 몇 번 읽으라 읽지 말라 말하지 말며, 세 번 읽었다 하는 자만이 너의 제자요 식구니 그리 알며”(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3권, 하얀마음刊, p.201).

“나의 법전이요, 내가 내리는 성령이요, 나의 아들이 강론하는 나의 성령의 가르침이 종교의 혁명으로서 지금 씨앗이 이루어질 것이며, 그는 혁신과 혁명이 지금 시작되어 그들이 다 쓰러질 날이 머지 않았음을 알라”(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43권, 하얀마음刊, p.75).

“정독하여 내려가면 너희들의 죄가 가벼워짐을 알 것이며, 죄 사하는 길을 알 것이며”
“지금 당장 나의 법전을 기록하여 세상에 내보내는 나의 아들에게 와, 그 아들이 나의 성령을 들어 강론하는 것을 들으며, 그들이 너희들에게 전해주는 그 법전을 받아 너희들이 생명보다 더 소중한 마음으로 정독하여 내려가면 너희들의 죄가 가벼워짐을 알 것이며, 죄 사하는 길을 알 것이며, 너희들 스스로 위대한 안식처를 찾을 수 있음을 알라”(김용철, <하나님! 말씀하옵소서>43권, 하얀마음刊, p.53).

 

 

2012년 2월 8일 수요일 강론 녹취록(정리 정윤석 기자).

“예수님의 뜻이나 아버지의 뜻을 거역만 하는 게 교회란 말이죠”
교회라는 곳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고 예수님과 하나님을 받들기보다 대드는 일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부자 되지 말라고 했는데 만날 부자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요. 그렇죠? 공부는 하지 않고 만날 노는 자식, 서울대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떡 갖다 붙이고 하나님 도와 달라고. 항상 하는 얘기이지만 하나님도 답답하다는 거예요. 이런 슬픈, 썩고 썩은 무덤처럼 냄새나는 곳이 교회란 말이에요. 그런 것들을 우리가 깨우쳐 주자는 것이죠. ··· 정말 예수님의 뜻이나 아버지의 뜻을 거역만 하는 게 교회란 말이죠.”


“(여리고성과 관련한 얘기를 하며)무슨 성이 일곱 바퀴를 도니까 무너져? 미친 ×들”
“(여리고성과 관련한 얘기를 하며)무슨 성이 일곱 바퀴를 도니까 무너져? 미친 ×들, 무슨 성이 일곱 바퀴 돌아서 무너져? 그런 거 다 거짓말이에요. 그런 게. 있을 수도 없는 얘기예요 성경에. 알았어요? 그것은 야화나 설화를 꾸며서 만든거지.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들의 위대성 위해 만든, 다 꾸민 거란 말이에요. 아시겠습니까? 잘 들으셔야 해요.

예수님이 성령? 그것이 다 자기들 민족, 예수님이나 석가나, 공자, 맹자, 성인들은 다 육을 갖고 피를 가진, 똑같은 사람은 사람이에요 여러분. 똑같은 사람이에요. ···다만 그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자식으로 거듭나는 것이 다를 뿐 똑같은 사람이야. ··· 똥싸고 먹고 죽으면 그게 사람이지, 무슨 신이냐고? ··· 예수님도 마찬가지야. 우리 나라에도 있잖아. 왜? 무슨 알에서 나왔다고. 어떻게 알에서 사람이 나와. 그렇죠? 그게 다 전설이나 야화를 우상화 시켜서 만든 거예요. 이스라엘 민족들이 우상화시켜서 만든 것을! 나는 미치겠어.”

“모든 세상의 모든 종파들의 끝이, 그 마지막 끝이 바로 이 새로운 성경입니다”
“이 세상에 수없이 많은 종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믿음의 끝이 바로 새로운 성경(자신이 쓴 <하나님! 말씀하옵소서>를 의미한다: 편집자주)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세상의 모든 종파들의 끝이, 그 마지막 끝이 바로 이 새로운 성경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공부하고 이것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같이 저와 토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위대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버지께서 마지막 시대라 하고 말씀하는 것을 잘 들으셔야 해요. 그리고 한번이라도 제가 이단이든, 사탄이든 여러분들이 평가할 것 없어요. 여러분들이 1시간, 2시간, 1년이든, 2년이든, 여러분들이 공부하면서 내가 얼마만큼 하얀, 아름다운 마음으로 변화됐느냐를 그걸로 평가하면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선한 모습으로 바뀌어진다면 모든 종교나, 종파나 교육을 받아오면서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서 그 모두를 정립하고 다른 사람이 새로운 모든 종파의 마지막 단계에 종교이기 때문에 모든 종교의 끝이 된다, 모든 종교의 끝인 여기에 여러분들이 와서 공부를 한다는 거예요.”

“저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라는 곳을 떠나서 정말 하나님께 목숨을 바쳐 이곳에 온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교회라는 곳을 떠나서 정말 하나님께 목숨을 바쳐 이곳에 온 것을,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싫어서, 예수님이 싫어서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에 온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싫어서, 하나님이 싫어서도 아니고 다만 잘못 이끌어가는 그 속에서 진정한 아버지의 뜻을 알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여기에 온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여러분들은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거듭나는 역사를 꼭 이루셔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구원받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그 고통속에서 처참히 돌아가신 것은 그것은 내가 구원받는 것과, 거듭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꼭 기억해 주시고 여러분들이 거듭나는 것이든, 구원의 길이든, 그것은 여러분들이 변화되는 노력에서만이 그 모든 대가를 거둘 수 있다는 것, 내가 노력에서만이 모든 그 결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변화되는 데 여러분 최선의 노력을 다 해주시길 바랍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                                                        

 

                                                          백창우

이렇게 아무런 꿈도 없이 살아 갈 수는 없지 가문 가슴에 어둡고 막막한 가슴에 푸른 하늘 열릴날이 있을거야 고운 아침 맞을 날이 있을거야 길이 없다고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대 그 자리에 머물지 말렴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그 길 위로 희망의 별 오를테니 길을 가는 사람만이 볼수 있지 길을 가는 사람만이 닿을수 있지 걸어가렴 어느날 그대 마음에 난 길 위로 그대 꿈꾸던 세상의 음악 울릴테니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이제부터 걸어갈 길 사이에 겨울나무처럼 그대는 고단하게 서 있지만 길은 끝나지 않았어 끝이라고 생각될 때 그때가 바로 다시 시작해야 될 때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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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구분

 우리는 보통 유대인이면 다 아브라함의 자손 이삭의 후손 야곱의 자손들이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상을 알고 보면 본래부터 유대인 혈통인 세파르딤(Sephardim)에 속하는 유대인들은 그리 많지 않고 거의 90 % 이상이 유대교로 개종한 아슈케나짐이라 불려지는 유대인들이다.
세파르딤(Sephardim)에 속하는 유대인들은 한 동안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자손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일찍이 이베리아 반도에 이주한 세파르딤은 중세에는 세계에 흩어져서 살고 있는 모든 유대인들의 약 반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라디노어(語)를 사용하고 이슬람문화와 동?漫� 가장 활동적이었다. 1492년 에스파냐에서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을 거부한 유대인에 대해 추방령이 내려졌으며(공식으로는 1968년까지 존속) 약 25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그리고 오스만투르크로 이주했다. 오스만투르크에서는 유대인들을 환영했기 때문에 테살로니키(지금의 테살로니케)는 세파르딤의 중심지가 되었다. 개종한 유대인(콘베르소 또는 마라노)도 유대교를 버릴 수 없어서 <숨어서 사는 유대인> 생활을 했으며 16세기에 포르투갈을 거쳐서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세파르딤의 이주는 그 뒤 영국·미국·보르도·함부르크로 퍼져나갔다. 중세 이후 유대인은 둘로 나뉘어 각각 아슈케나짐과 세파르딤으로 불렸다. 수적으로는 소수여서 제 2 차세계대전 전에는 유대인 총인구 1650만 명 가운데에서 세파르딤은 불과 150만 명 정도였다. 나치스는 네덜란드에서 아슈케나짐과 세파르딤에게 차별을 두어 처우했다.

지식인, 숙련노동자들이 대부분인 서유럽계(동구 및 독일계가 주류) 유대인들(Ashkenazim, 아슈케나짐)은 건국 초기부터 정치, 경제, 군사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데 반해 미숙련 노동자로 이루어진 아프리카, 중동계 유대인들(Sephardim, 세파르딤)은 사회구조의 하층을 형성하여 유대인 사회 내에서 갈등의 씨앗이 되었지만 건국 이스라엘에서 새로이 태어난 세대들(Sabra, 사브라)들이 사회의 주류로 등장함에 따라 많이 해소되고 있다.

세계 각 지역에 흩어진 독일계 유대인과 그들의 자손 및 전통·문화의 총체를 의미하는 말. 본래 라인지방의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에서 전이되었다. 단혼가족(單婚家族)을 구성하며 이디시어를 사용한다. 중세 이후의 유대인 세계는 아슈케나짐과 세파라딤(sefaradim)으로 분리되었다. 이 분리는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수석랍비(유대교의 성직자)를 2명 두고 있는 것으로 상징된다.

아슈케나짐의 종교적 태도는 근본주의적·엄격주의적 경향을 나타내며 순교의 성스러운 전통을 지키고 있다. 15∼16세기에 서유럽에서 동유럽으로 이주함과 동시에 그들의 중심지도 보헤미아· 모라비아· 폴란드· 리투아니아로 옮겨졌다. 17세기 이후 동유럽에서의 학살·박해의 결과로 이주자들이 서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유럽·오스트레일리아·남아프리카·미국에서 세파라딤보다 우세해졌다. 제 2 차 세계대전 전에는 전 세계 유대인 1650만 가운데 90%는 아슈케나짐이었다.

유대인이란 말은 대체로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 민족적인 의미에서는 혈연 또는 개종을 통해 고대 히브리인의 후예가 된 유대 민족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민족적인 의미를 다룬다.

어원은 유대인을 가리키는 명칭인 그리스어의 Iudaios , 라틴어의 Judaeus, 프랑스어의 Juif, 독일어의 Jude, 영어의 Jew, 스페인어의 Judio, 러시아어의 Zhid 등은 모두 고대 히브리인의 12지파 중 하나인 '유다(예후다)' 지파에서 왔다. 고대 히브리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되었을 때 유다 지파가 다수였던 남쪽 왕국이 유다 왕국이 되었는데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 후 뿔뿔이 흩어져 명맥이 끊긴데 반해 유다 왕국의 후예들은 유대교를 계속 지켜와 유대인들의 조상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이들 명칭 중 일부는 경멸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져 다른 명칭이 쓰이기도 한다. '히브리'가 어원인 러시아어의 Yevrey(Еврей)가 일례이다.

유대인의 역사


구약성경에 의하면 고대 이스라엘인 또는 고대 히브리인은 아브라함의 후예로 카나안 땅에서 사울을 초대 왕으로 고대 히브리 왕국을 세웠다. 2대 다윗 왕은 예루살렘을 정복, 왕국의 수도로 삼고 그의 아들 3대 솔로몬왕이 여기에 유대교 성전을 건축하였다. 하지만 솔로몬 사후 북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의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어 이스라엘은 BC. 721년 아시리아의 살만에셀 5세에게 멸망하고 유다는 BC 586년 신(新)바빌로니아에 멸망하였다. 유다의 엘리트는 바빌론으로 끌려가나(바빌론 유수) 이후 바빌로니아가 페르시아에 망한 뒤 그중 일부가 유다 땅에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고 유대인의 명목을 이었다. 보통 구약성경에 포함되는 기록은 이때까지의 역사가 배경이다.

그후 유대인들의 땅은 페르시아가 알렉산더에게 정복당한 후 시리아 지역에서 알렉산더의 제국을 승계 셀류크스(Seleucid)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셀류크스 왕조의 안티오크스 4세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의 유대교 성전을 제우스 신전으로 바꾸려 하자 유대교 정통파들은 마카비 가문(Maccabees)의 지도로 반란을 일으켜 독립된 유대인 왕국을 세웠다. 이를 하스몬 왕조(Hasmonaean Dynasty)라 하는데 BC 165년부터 BC 63년까지 계속되었다. 그후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유대(Judaea) 주로 편입되었다. AD 66년 유대인들은 유대 땅을 다스리던 로마 지배자들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으나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 플라비우스 황제는 이를 철저히 진압하고 성전을 파괴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그들 땅에서 유대교를 믿도록 허용했다.

AD 2세기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에는 율리우스 세베루스가 바르 코흐바(bar Kokhba)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유대 땅을(이후 이 지방은 팔레스티나 지방으로 불리운다) 파괴했으며 135년 이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유대 땅의 유대인들은 대다수 노예로 팔리거나 로마의 시민으로 동화되었다. 이렇게 뿔뿔이 흩어진 것을 두고 디아스포라라고 한다. 로마 시대의 유대인들 상당수는 헬레니즘 및 로마 시대에 알렉산드리아와 소아시아 등지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이들로 생각된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 전역에 살았으며 이슬람교가 성장하면서는 일부가 인도와 중국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유대인 중 일부는 지중해 연안 외의 지역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이들의 후손인데 카자르인(Khazars), 에돔인(Edomites), 에티오피아인, 아랍인 등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일이 많았다.


유대인의 분파


흔히 사용하는 아슈케나짐(Ashkenazim)와 세파르딤(Sephardim)의 구분은 종교적 차이와 민족적 차이를 다 포함한다. 어떤 학자들은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은 팔레스티나 유대교 전통을 따른 이들의 후손이며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식 유대교 전통을 따른 이들의 후손이라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유대 민족의 4대 분파는 다음과 같다.

아슈케나짐 - 독일과 프랑스에서 살다가 동유럽으로 이주하였다.
세파르딤 -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살았다.
동방 유대인 (Oriental Jews) -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살다가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등지에도 퍼졌다. 이들은 세파르딤 유대인들과 종교 의례가 거의 같아 보통 세파르딤이라 부르기도 한다.
예멘 유대인 (Yemenite Jews) - '테이마님(Teimanim)'이라고도 한다. 동방 유대인이었는데 지리적·사회적으로 다른 유대인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특이한 예배식과 의례가 발전하였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소수 분파가 있다.

에티오피아 유대인 - '팔라샤(Falasha)' 또는 '베타 이스라엘(Beta Israel)'이라고도 불린다.
베네 이스라엘 - 인도의 뭄바이(봄베이)에 살았다.
코친 유대인 - 이들도 인도에 살았다.
로마니오트 (Romaniotes) - 헬레니즘 시대부터 현재까지 발칸 반도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다. 전세계에 6천명 정도 있다.
아슈케나짐는 전통적으로 이디슈어를, 세파르딤은 라디노어(유대 포르투갈어)를 사용했다. 동방 유대인은 대부분 아랍어를 사용했으나 아람어, 페르시아어(파르시어)를 사용하는 이들도 있었다.

스페인의 종교재판(Spanish Inquisition) 이후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흩어져 유럽에 이주, 아슈케나짐와 동화되거나 중동으로 이주, 동방 유대인들과 동화되었다.

오늘날 유대인의 80% 정도가 아슈케나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동방 유대인이다.

유대인 하위 집단에는 '그루짐(Gruzim)' 즉 카프카스 그루지야 지방의 유대인, '유후림(Juhurim)' 즉 코카서스 동부 다게스탄의 산악 유대인, '마크레빔(Maghrebim)' 즉 북아프리카 유대인, '아바유다야(Abayudaya)' 즉 우간다 유대인 등이 있다.

오늘날의 유대인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전세계의 유대인 인구가 1천8백만 정도였으나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Holocaust)로 1천2백만 정도로 줄어들었다. 오늘날 전세계 134개국에 1천4백만 정도가 살고 있다. 미국에 5백80만, 이스라엘에 5백만 정도가 살고 있다. 그밖에 캐나다, 헝가리, 우크라이나, 프랑스, 아르헨티나, 러시아, 독일 등에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다. 유럽의 유대인 인구는 2백40만, 라틴 아메리카는 5십만 이상으로 추정된다.

1948년 5월 14일 설립된 이스라엘 공화국은 유대인이면 누구나 시민권을 발급할 수 있게 허용한다. 이는 귀환법 또는 귀향법(the Law of Return)이라고 한다. 이 법률상 조부모 중 유대인이 있거나 유대교로 개종한 이들 모두 유대인으로 간주된다. 또 유대인 이민자들과 가족관계인 비(非)유대인들에게도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다. 이스라엘의 귀환법이 유대교에서 전통적으로 따르는 유대인의 정의보다 일부러 더 광범위하게 정의한 이유는 유대인의 친척들도 외부에서는 유대인으로 여겨 반유대주의의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대인이 다수민족인 국가는 이스라엘 뿐이다. 유럽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은 곳은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로 1백만에서 1백50만 정도가 있다고 추산된다. 유럽에서 유대인 인구가 가장 빨리 증가하고 있는 국가는 독일로 특히 동유럽에서 많이 이주해 온다고 한다.

 

출처 : 에스라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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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종교도 없는 곳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이미 기존의 여러 종교들을 활발하게 믿고 있는 곳에 들어갔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수많은 신들의 이름과 종교 예식에 관한 기록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 중에서 이러한 신이 어떤 신인지 아는 성도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수많은 종교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가나안 종교에 대해서 크게 경계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종교를 극복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의 이야기에서 이러한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퓐� 우리는 먼저 근동, 특히 가나안 사람들이 믿었던 신들과 그들의 종교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을 이해하게 되면 성경에 나오는 많은 부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신들에 대한 이야기는 1929년에 발굴된 라스솨마라의 서판에 기록된 것을 기초로 한 것입니다. 

 

1. 엘(El)

가나안 종교는 다신론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라스솨마라 서판에 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가나안 신중에 최고의 신은 "엘"(EL)이었습니다. 엘은 모든 신들의 아버지였으며, 북방에서 신들이 모여 총회를 열 때에 그 회의를 주관하는 의장 역할을 했습니다. 가나안 신화에 있어서 "북방"은 헬라 신화에 있어서 "올림푸스(Olympus) 산"과 같은 신들의 집합소였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북방"을 신비에 쌓인 신들의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엘"이란 단어가 많이 등장하는 데(이스라엘, 미가엘 등), 이 말은 하나님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용어였습니다. 

  

2. 아세라 여신  

우가리트 문헌에 의하면 이러한 "엘" 신의 아내는 "아세라"라고 부르는 여신이었습니다. 우가리트 문헌에는 아세라 여신을 "아쉐라트"(Asherat), 또는 엘신의 여성 명사인 "엘랏"(Elat)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이 이름을 "아세라 목상", 또는 "아세라 상"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헬라어, 라틴어, 영문 성경에서는 아세라를 그냥 "나무기둥"이라고도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번역한 이유는 당시 신당에 세웠던 나무 기둥이 아세라 여신을 상징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라스솨마라 서판의 기록을 보면 아세라 여신은 나무 가지가 무성한 것같이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여신"이었습니다.

 

3. 바알(Baal)   

다음에 중요한 신은 바알이었습니다. 바알은 구약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오는 신의 이름입니다. 바알이란 말은 우리말로 하면 "주인"(Lord)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알은 신의 우두머리인 엘 신의 아들이었으며, 또한 후계자였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이 북방 하늘에 있는 높은 산에 보좌를 베풀고 가나안 신들을 다스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을 가리켜 "하늘의 주"(The Lord of heavens)라고 불렀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이 하늘의 비와, 땅의 폭풍을 주관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천둥소리를 바알의 음성이라고 믿었습니다. 라스솨마라 석비에는 바알의 그림이 하나 있는데, 그 그림에서 바알은 오른 손에 창을 들고, 왼손으로 벼락을 잡고 내려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와 구름을 주관하는 바알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우가릿 문헌) 바알이 세상에 "풍요와 번영"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주인 바알에게도 대적이 있었습니다. 바알에게 있어서 가장 큰 대적은 "못"(Mot)이라는 신이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있어서 못은 불행의 신, 또는 죽음의 신으로 알려졌습니다. 후에 못은 바알과 싸워 승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전쟁에서 바알을 죽이고 7년 동안 신의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땅에는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7년 후에 바알의 누이이며 애인이었던 아낫(Anath)이 못과 싸워 승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의 신인 아낫은 승리한 후에 바알의 시체를 찾아 다시 살려냈으며, 못은 죽여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바알은 다시 살아나게 되어 다시 세상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에 세상에는 7년 동안 큰 풍년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참고해 보면 가나안 사람에게 있어서 바알은 신들의 왕으로서 악과 싸우는 정의의 신이었습니다. 또한 구약 성경을 보면 바알은 "다곤 신의 아들"이라고 불려지기도 했습니다. (삼상 5:1-, 삿 16:23)을 보면 다곤 신은 곡물을 주관하는 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블레셋 땅인 아스돗과 가사에는 그를 숭배하던 산당이 있었습니다.

 

4. 아낫(Anath)과 아스다롯(Ashtaroth, 또는 Astarte)  

가나안 사람들이 숭배하는 신들은 사람들과 같이 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섬기던 신중에는 3대 여신이 있습니다. 이 3대 여신의 이름은 아세라와 아낫과 아스다롯이었습니다. 이미 앞에서 생각한 것처럼 아세라는 엘신의 아내로서 모든 신들의 어머니 였습니다. 그리고 아낫 여신은 바알 신의 누이인 동시에 애인이었습니다. 아낫은 전쟁의 신인 동시에 성(sex)를 주관하는 여신이었습니다. 또한 아스다롯은 저녁별의 여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렘 44:19)을 보면 이스라엘 여인들이 "하늘의 여신"에게 분향하고 제사드렸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 곳에서 언급하고 있는 하늘의 여신이 바로 아스다롯이었습니다. 아스다롯도 아낫과 같이 전쟁과 성을 주관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여신은 서로 혼동되어 숭배되기도 했습니다.

 

이 3대 여신은 가나안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적인 여인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세라 여신은 한 남편의 아내인 동시에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낫은 젊은 여성의 정열과 흥분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아스다롯은 별과 같은 여성의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에는 아낫 여신의 이름이 포함된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삿 3:31)을 보면 이스라엘의 사시였던 삼갈의 아버지의 이름이 "아낫"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아낫 여신은 가나안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널리 알려지고 숭배된 신이었습니다. 아낫은 일명 "쿠두슈"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거룩한 자"라는 말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아낫 여신에게 바쳐진 남성을 "카데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 말을 "미동", 또는"남색하는 자"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왕상 14;24, 15:12, 22:46, 왕하 23:76 참조).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낫 여신을 위해 여호와의 전 가운데 "미동의 집"을 두었습니다. (왕하 23:7)을 보면 이스라엘 여인들이 이 곳에서 아세라를 위해 휘장을 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 못(Mot)과 얌(Yam) (일명 리워야단)  

성경에 등장하는 악한 영은 사단, 또는 마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종교에서 악한 신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못이라는 신이었습니다. 못은 바알 신의 주된 원수였으며 불행과 죽음을 주관하는 신이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못 신이 지하세계나 광야의 황무한 땅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신의 다른 이름이 있는데, 그것은 "호론"이었습니다. (수 10:10-11)을 보면 기브온 전쟁 때에 전쟁터였던 곳 중에 "벧호론"이란 곳이 있었습니다. 이 벧호론이란 말은 "호론의 집"이란 말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벧엘이란 말이 나오는 데, 이 말은 엘, 즉 하나님의 집이란 말입니다. 벧엘이 하나님의 성소와 깊은 관게가 있듯이, 사람들은 벧호론 역시 호론 신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벧호론에 호론 신을 섬기는 제단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종교에서 못 외에 또 다른 악한 신이 있었습니다. 그 신은 "얌"(Yam), 또는 "리워야단"(Leviathan, Lotan)이라고 부르는 신이었습니다. "얌", 또는 "리워야단"은 그리이스 신화의 포세이돈과 같은 바다의 신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얌, 또는 리워야단이 머리가 일곱 개 달린 괴물로서 깊은 바다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리워야단의 이름이 종종 나타나고 있습니다(시 74:14, 104:26, 욥 41:1, 사 27:1 참조). 우리 말 성경에는 이 신의 이름을 "악어"로 번역하고, 각주에 원문대로 "리워야단"이라는 설명을 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 27:1)에는 이 괴물을 원문대로 "리워야단"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동안 얌을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동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의 발달로 인해 우가리트 서판에서 얌의 이름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록을 통해 얌이 그들이 섬기던 해양 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시인들은 종종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찬양할 때에 특별히 "리워야단을 멸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리워야단이 매우 큰 힘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신을 멸하셨다는 말은 그만큼 하나님의 능력이 크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얌과  리워야단 역시 바알의 강력한 원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6. 몰렉(Molech) 또는 밀곰(Milcom)  

성경에 기록된 또 다른 심은 "몰렉"이라는 신입니다. (왕상 11:5,33)을 보면 몰렉은 밀곰이라고도 불리는 암몬 사람들이 섬기던 민족 신이었습니다. 유프라테스 강의 중류 지역인 Mari에서 발굴된 서판의 기록을 보면, 주전 1800년경에 몰렉이 이 지역에서도 숭배되고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앗수르 왕은 주전 722년에 이스라엘을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유프라테스 강이 있는 지역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그리고 앗수르 왕은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을 데려다가 이스라엘에 정착하여 살게 했습니다. 이때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가져온 신은 "아드람 멜렉"과 아남멜렉이었습니다. 아드람 멜렉은 영광스러운 왕이란 뜻으로 태양을 상징했으며, 아남멜렉은 별, 특히 토성을 상징하는 신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신의 이름이 태양과 별을 상징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이 신이 태양의 파괴력과 별의 보호하는 힘을 가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사람들은 이 신에게 자기 자녀를 불에 태워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몰렉 신과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아드람멜렉이나 아남멜렉이 변형된 몰렉신이었거나, 아니면 몰렉의 또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왕하 21:6, 겔 16:20, 렘 7:31 참조) 이 신에게 제물로 드리기 위해서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했다는 기록이 종종 언급되어 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4세에서 12세까지의 어린아이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드린 수백 개의 납골단지를 발견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무지한 일로 인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 신을 숭배하는 일을 엄히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이 신을 섬기곤 했습니다(레 18:21, 20:1-5). 성경을 보면 솔로몬이 몰렉을 위해 신당을 지었으며, 아하스와 므낫세는 자기 자녀들을 몰렉에게 제물로 드렸습니다(왕하 16:3, 21:6). 한 때 요시아 왕은 이러한 몰렉 숭배를 엄히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유다 말기에 갈수록 몰렉 숭배는 점점 더 성행했습니다(렘 7:31, 겔 16:20-21, 23:3,39). (삿 11:24)에 보면 사사 입다가 암몬 왕에게 "너희 신 그모스"라고 말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입다가 말한 "그모스"가 바로 몰렉을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암몬 사람들은 몰렉을 "그모스"라고 부르면서 자기의 민족 신을 삼았습니다. 그들이 어린아이를 몰렉에게 제물로 드린 것은 서원에 대한 증표로 드린 것이었습니다.   

 

7. 가나안 사람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한 이유  

가나안 사람들은 이와 같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숭배했습니다. 그들이 이 신들을 숭배한 이유는 "땅의 풍성한 수확"을 얻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땅 속에 양분이 있으며, 그것이 식물을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가나안 사람들은 식물이 자라고 열매를 맺는 일을 종교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적인 힘이 땅 속에 내재하고 있으며, 그 힘이 땅을 비옥하게 하고 곡식을 자라게 하며 열매를 맺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의 가나안 농부들은 이러한 힘이 바알 신과 아세라 신의 성적 결합을 통해서 생겨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전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성적으로 자극하기 위해서 성적 흥분을 자극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바알과 아세라를 흥분시키기 위해서 신전에서 음란한 제사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돕기 위해서 신전 안에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과 성 관계를 맺는 소위 거룩한 창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과 성 관계를 맺음으로 바알과 아세라가 성적으로 흥분하도록 자극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바알과 아세라가 성적으로 결합을 하게 되면 비가 내려 땅을 적시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곡식이 자라 고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하늘의 신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의 전통 무속 종교 역시 비슷합니다. 무속 종교의 경우에는 무당을 통해서 굿을 하면 귀신을 달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가나안 사람들은 가뭄이 계속되고 비가 오지 않으면 물통을 지고 나무에 올라가서  땅에 붓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신들이 이러한 일을 보고 하늘에서 비를 내려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식은 풍년을 비는 제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일은 모두 자신들의 노력으로 신을 설득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행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풍습들을 보면서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은 바알을 비를 내려주고 풍년이 들게 해주는 땅의 주인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땅에 들어가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 신에게 제사를 드려 많은 수확을 거두고 싶은 유혹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와 바알을 함께 섬기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원주민들이 그 땅에 흉년이 들게 되면 그 이유를 바알을 섬기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의 탓으로 돌릴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바알을 섬기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주민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가나안 종교의 유혹과 위협에서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무속 종교와 불교와 유교에 뿌리 박힌 우리 나라에서 기독교를 믿는 것과 같았습니다. 옛날에도 우리 나라에서 기독교를 믿게 되면, 가문에서 쫓겨나고, 호적에서 그 이름이 말살되기도 했습니다.  

 

8. 가나안 종교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  

그러면 하나님은 이러한 가나안 종교에 대해 어떤 명령을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이러한 종교와 타협하는 일을 단호하게 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명하게 바알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한 후에 죽기 전에 모든 백성을 모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오늘날 너희가 섬길 자를 택하라!"(수 24:16-28)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모든 백성들 앞에서 모든 백성이 다른 신을 섬긴다 해도 자신과 자기 가족만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를 믿는 신앙과 바알 신앙은 결코 함께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가나안 종교를 금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이러한 가나안 종교는 신관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전능하신 창조주로 알지 않고, 사람들과 비슷하거나 조금 우월한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사람들과 비슷하게 시기하고 다투며, 음란하고 이기적인 존재로 보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제단에서 온갖 음란한 행위를 자행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가나안 종교를 강하게 배격하셨습니다. 둘째로 가나안 종교는 비윤리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생각한 것처럼 가나안 사람들은 몰렉 신에게 자기 자녀를 불에 태워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러한 인신 제사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가혹하고 잔인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종교의 이름을 걸고 이러한 잔인한 행위를 행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또한 가나안 종교는 앞에서 생각한 것처럼 성적으로 매우 문란하고 음란한 종교였습니다. 그들은 공개적으로 신전에서 성 관계를 가졌으며, 또 이를 격려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본 아낫은 바알의 누이인 동시에 그의 애인이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가나안 종교가 성적으로 문란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보면 곳곳에서 선지자들이 이러한 문란한 행동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이러한 가나안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우상을 버리고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서 창조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세상에 나타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은 가나안 사람들이 믿는 난잡하고 문란한 신과는 전혀 다른 분이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섬기고 믿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당시 사람들에게 혁명적인 종교였습니다. 가나안 인들은 많은 신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에 참 신은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신들을 사람과 비슷한 존재로서 사람들처럼 싸우고 질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람들과는 다른 초월적인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를 원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신들이 남성과 여성으로 되어 있으며, 문란한 성 관계를 갖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시며 부정을 용납하지 않는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세상에 증거 할 책임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책임을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이방 종교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인들이 믿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크리스챤을 통해서 살아 계신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챤들은 삶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해야 할 책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성도들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말씀을 따라 살면 이러한 일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성도들이 성령 충만을 구하지 않고 말씀을 무시하면 세상에 짓밟힐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맛을 잃은 소금은 쓸데가 없으며,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짓밟힐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챤들은 복음을 효과적으로 증거하기 위해서 성령 충만을 구하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여호수아가 했던 다음과 같은 고백은 오늘날의 성도들이 깊이 명심해야 할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심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이 섬기는 신이든지 너희가 섬길 신을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출처 : http://biblenara.org/onbible/onbible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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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위해 순교한 R.J.토마스


한국교회 위해 순교한 토마스

“1866년 9월 5일, 27세의 꽃다운 젊은 나이의 한 젊은이가 창에 맞아 죽어가면서 자신을 찌른 이에게 성경책 한 권을 건네며 받길 권하였다.” 이 사건은 로버트 토마스가 평양 대동강 쑥섬 모래사장에서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한 한 장면이다. 과연 140여 년 전에 평양 대동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당시는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상황 하에서 오로지 성경책을 전하기 위하여 미상선 제너럴 셔어먼호를 타고 입국한 토마스는 한국교회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함으로 순교하였고, 그의 핏방울은 헛되지 않았고, 때가 되매 한국교회를 세우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다.

후일에 그로부터 장사포에서 성경을 받은 홍신길 소년, 석호경에서 성경을 받은 김영섭, 김종권, 등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만경대에서 성경을 받은 최치량은 후일 강서와 평양교회 창립자가 되었고, 토마스 선교사를 죽이려던 박춘권은 안주교회의 영수가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복음을 위하여 하시는 일은 다 이해할 수 없다. 당시에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이런 일이!”라고 탄식할 때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일을 통해 복음의 피가 흐르고 흘러 불신영혼들을 구원하는 능력이 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토마스의 생애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는 1839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 레드너셔주 라이더에서 영국 회중교회 목사인 로버트 토마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토마스 저매인은 1853년 14세에 크란도버리 컬리지에 입학하여 라틴어, 불어, 헬라어 등을 공부하였고, 다시 뉴컬리지 신학부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면서 목사의 길을 준비하였다. 시골에서 목회하시는 아버지에게 가급적 부담을 피하기 위하여 돈을 아껴 생활하므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휴학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곧 복학하여 그 학교를 졸업하고 의과대학을 2년간 공부하였다.

그가 어떻게 회심했는지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로버트 토마스가 목회하였던 웨일즈 레드너셔 라이더 지역에는 부흥이 일어났고 있었으며, 우리의 주인공 토마스가 9세 미만이었는데, 그때 회심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부흥에 대해서 교회사가 존 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는데,

“교회는 부흥하여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웨일즈어로 올리는 경배와 찬양은 라이더 전역에 퍼져 가고 있으며,”라고 하였다.

토마스의 성격은 매우 도전적이었다. 따라서 그는 성실하게 의학공부를 마쳤지만, 이때에 인간의 육신 뿐 아니라 영혼에 관심을 갖고 고민도 하였다. 그는 매우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므로 의사직을 포기하고 일단 잉글랜드 온들(Oundle)에서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사실 그가 의사였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하나님은 만남의 복을 통해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온들에서 그는 자신을 초청한 학교의 교장, 앨프레드 뉴스를 만나는데, 그는 온들 회중교회 담임목사였다. 본래 앨프레드는 중국선교에 관심을 갖고 준비하였지만, 23세에 호머튼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선교사직을 포기하고 목회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었다. 토마스는 바로 그를 통해 중국을 알게 되었고, 심령에 부흥이 일어나 선교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결정적으로 중국선교에 헌신하게 한 인물은 중국선교를 하다가 잠시 귀국했던 록하트(Lockhart)였다. 그는 당시 20대 미혼으로 중국 마카오에서 의료선교를 하였던 분으로 1858년 영국에 돌아와 그 다음해 10월 뉴칼리지에서 설교하러 갔다가 토마스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토마스를 중국선교사로 헌신케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분은 그가 런던에 있을 때 다녔던 웨스트민스터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사무엘 마틴이었다. 그는 자신이 선교사로 헌신했으나 건강상 그 사명을 감당치 못해 보내는 선교사로서 해외에서 선교하는 이들을 힘껏 도왔던 것이다.

토마스가 중국선교를 준비하고 있을 때, 이미 런던선교회(LMS)는 근대선교의 아버지인 윌리암 캐리를 인도에 첫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1807년에 모리슨을 중국에 파송하였다. 토마스는 1861년 4월 25일, 런던선교회에 중국선교사로 가고자 지원하는 편지를 보냈다. 당시 런던선교회는 중국을 집중해서 복음으로 공략하기 위한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중국선교를 위한 열정의 글을 보면,

“저희 희망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부인하는 정신으로 사역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3년 전에 헌신한 이후로 신중하고 진지하게 기도해 왔으며, 이방인의 개종으로 우상 숭배가 몰락하는 선교사역을 진지하게 갈망하는 선교사가 될 것입니다.”

그는 1863년 뉴컬리지를 졸업하고, 그해 5월 29일, 캐롤라인(Caroline Godfrey)와 결혼했는데 토마스는 24세, 그의 부인은 26세였다. 그리고 이들은 주의 은혜로 평생 해로하며 행복하게 사길 기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6월 4일, 아버가번니(Abergavenny) 하노버교회 예배당에서 목사안수식과 선교사 파송식을 동시에 하였다. 그리고 7월 21일 아내와 함께 그라베센드에서 폴리마이스호를 타고 중국을 향했다.

중국선교사로 출발
그 배 안에는 런던선교회로부터 북경 기독교병원 감독으로 임명받은 다젼 선교사 부부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에서 파송을 받은 윌리암슨 선교사 부부가 동승하였다. 윌리암슨은 지난 1855년 런던선교회로부터 중국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활동하다가 안식년을 마치고 이번에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로부터 지푸(오늘날 연태) 지부 총무로 파송을 받아 가는 도중이었다. 토마스 부부는 그 틈에 끼어 선교에 대한 벅찬 기대를 가지고 대서양을 가로지르고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항해하는 가운데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사역을 위해 기도로 준비하면서 갔다.

긴 4개월의 항해를 마치고 1863년 12월 초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본국의 런던선교회에 편지하길, 중국에 무사하게 도착했다는 것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내용이었다. 중국 상해에 도착한 토마스 부부는 기후와 문화, 음식, 언어 등 모든 것이 힘들었다. 하지만, 선교사로서 감당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견디었지만, 문제는 임신한 그의 아내 캐롤라인이었다.

음식도 맞지 않고, 문화 적응도 힘들고, 다른 곳에서 남편만 뒷바라지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토마스가 런던선교회 본부가 있던 내륙도시 항구로 출장간 사이 이웃 미국 선교사 부인의 갑작스런 죽음에 그녀는 충격을 받아 하혈하면서 유산이 되었다. 게다가 그녀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그만 1864년 3월 24일 소천하고 말았다. 이것은 토마스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런던선교회에 보내는 토마스의 편지에 기록하길,

“이 사건으로 나는 완전히 실의에 빠졌습니다. 나는 완전히 상심하였습니다. 더 이상은 쓸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을 상세하게 이야기하려고 하니 슬픔이 또다시 복받쳐 오릅니다.”

하지만 그는 심기일전하여 재기하기 위해 노력을 다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선교할 축복을 허락하지 아니한 것으로 판단하고 1864년 12월 7일, 런던선교회에 사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그는 산동성 지푸(오늘날의 연태)에 있는 윌리암슨를 만나러 갔다. 하지만 특별한 묘안이 없었고, 자신의 생활을 하기 위해 지푸 세관 통역관으로 취직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성령께서 다시 선교의 사명감으로 불타오르게 하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이같이 지속적인 부흥을 주시어 일하게 하신다.

한국방문
토마스는 통역관 시절, 외국인과의 교제를 통해 중국어, 몽골어, 러시아어를 습득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에 전혀 예상치 못한 두 사람, 한국에서 온 김자평과 최선일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천주교 신자로서 사업관계로 지푸에 온 것이다. 이들을 통해 한국 상황을 전달 받았고, 당시 쇄국정책으로 한국에는 입국하지 못한다는 것과 천주교 박해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한국에 관심을 갖고 선교사역을 준비하여 첫 번째 한국방문을 시도 하였다.

이때 윌리암슨은 한문성경을 후원하여 주었고, 중국인 우문태의 배를 타고 김자평과 최일선의 안내로 1865년 9월 4일, 지푸를 출발, 황해도 창린도 자라리 근처 포구에 정박하였다. 이때 토마스는 한문성경만 사람들에게 배포하고 아무 소득 없이 돌아왔으나, 단지 한 가지 배운 사실은 한국의 박해상황의 경험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종교서적을 구입하는 사람은 참수 혹은 최소한 벌금과 투옥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정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데,

“배에 타고 있던 한 영국인이 모래사장에 종이 뭉치 하나를 던지고 남해를 행해 달아났다. 그 종이 뭉치 속에는 종이 한 묶음과 16권의 금서와 서양달력이 있었다.”

한국적 상황을 인식하고 철수한 토마스는 다음 기회를 엿봐야 했다. 마침 천진에 머물고 있었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어먼호가 많은 상품을 실고 두 번째로 한국을 향해 떠나게 되었다. 이때 토마스는 이 배의 안내원으로 부탁을 받았고, 토마스는 윌리암슨로 부터 많은 성경을 후원받아 함께 승선하였다. 그리고 셔어먼호는 1866년 8월 대동강 입국에 진입하였다. 평안도 감사는 문청관을 보내 입항한 이유를 물었다. 당연 통상문제였기에 감사는 이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상선은 이를 묵살하고 평양시 대동강 하구 보산까지 들어갔다. 마침 여름 장마철이라 대동강은 폭우로 홍수가 나고 만조가 되어 배는 포리에 정박하였을 때, 이 배에 몰려온 사람들에게 성경책 500권을 배포하였고, 계속 배는 만경대까지 입항하였다. 이곳은 평양성에서 10리 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다. 여기서도 토마스는 열심히 성경을 배포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의 순교
그런데 함께 동승했던 중국인 이현익이 관원들에게 붙잡혀 선원들은 총을 난사하였고, 평양성 관군들은 이에 대응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이현익이 구출되었지만, 셔어먼호와 관군 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사태를 평양감사 박규수는 조정에 보고하였으며, 조정에서 고종은 셔어먼호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배는 퇴조가 되어 진흙에 걸려 오갈 수 없도록 좌초된 상황이었다.

관군은 불화살을 셔어먼호에 날리고, 배는 불타기 시작하였으며 선원들은 강으로 뛰어 들기 시작하였다. 배에서 뛰쳐나오는 선원들은 관군들이 휘두른 곤봉에 맞거나 창으로, 칼로 살해당했으며, 토마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토마스는 1866년 9월 5일, 27세 약관의 나이에 대동강 쑥섬 모래사장에서 자신의 고귀한 육체를 주의 복음을 위해 아름답게 순교의 제물로 드렸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약 두어 달 후에 메도스회사가 미국 전권공사인 벌링게임에게 편지하길,

“교역차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방문자들을 모두 죽인 조선 정부의 행동은 서양인의 시각에서 볼 때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례를 무릎쓰고 각하께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보냅니다.”

비록 그가 선교의 꿈을 모두 펼치지도 못하고 젊은 나이에 순교의 제물이 되었지만, 그의 피는 헛되지 않았으니 당시 11세였던 최치량은 숙부와 함께 구경하러 갔다가 토마스 선교사가 뿌린 성경 3권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고, 그때 20세였던 이신행은 한 권을 얻었고, 그녀는 평양 최초의 여교인이 되었다. 그녀의 아들인 이덕환은 오랫동안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로 시무하였다. 당시 토마스는 수많은 성경을 배포하였는데, 정부에서 그 모든 성경을 몰수하라는 명령으로 성경을 소지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태워버리든지, 강에 던지든지 하였다.

그러나 영문주사로 있던 박영식은 사람들이 버린 성경을 수집하여 평양 대동문 안에 있던 자기 집 벽지로 사용하였다. 최치량은 박영식의 집을 사서 여관으로 개조, 마포삼열과 한석진을 투숙시키기도 하였다. 이들의 전도로 최치량은 평양 최초의 교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마포삼열 선교사가 평양에 선교하러 올 때, 토마스의 성경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고 한다. 이미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도록 토마스를 통해 준비시켜 주셨던 게다.

우리 주님은 토마스의 순교를 받으시고, 마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었을 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그의 순교로 인해 한국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통해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시기로 섭리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진리이다. 오늘날에도 주님은 당신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한 알의 밀알로 썩어져 죽는 이들을 통해 역사하신다. 지금은 이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없지만, 훗날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깨닫게 되리라.

한국의 초기 역사를 보라.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가 무리한 선교여행을 마치고 부산에서 천연두에 감염되어 소천 하므로 호주장로교 선교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캐나다 독립선교사인 윌리암 맥켄지의 소천으로 캐나다 장로교선교부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외에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어린 자식을 땅에 묻고, 부인과 자신이 순교함으로 이 땅에 복음이 힘차게 전파되었고, 오늘날 교회가 아름답게 세워져 그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토마스는 비록 평양 대동강 쑥섬에서 관원의 창에 맞아 순교함으로 젊은 나이에 주님 품으로 갔지만, 그는 첫째, 도전의 사람이었다. 그는 본래 의사였으나 복음을 위해 과감히 의사직을 포기하고 목사가 되었으며, 중국에서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졌으나 다시금 본래의 사명을 깨닫고 한국에 복음을 들고 나섰던 것이다. 이는 그의 도전적인 성격을 반영해 주는 것이리라. 분명히 성령님이 그의 영혼가운데 부흥을 일으키어 그가 다시 영적 힘을 얻어 성경을 가지고 한국을 행해 출발했던 것이리라.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갈지라도 주의 영이 함께 하면 두려움이 물러가는 것을 배운다.

둘째, 그는 열정의 사람이었다. 성경을 들고 첫 번째 한국에 방문했을 때도 사람들에게 성경을 나눠주면서 전도하였다. 물론 이때 그는 한국인들이 자신들을 거부하고, 성경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이 복음을 위해 다시 방문을 한 게다. 두 번째 평양에 방문하였을 때도 그는 부지런히 윌리암슨이 후원한 성경을 열정적으로 나눠주었다. 그때 성경을 받은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신자가 되었다. 그런 열정은 희생으로 표출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성경을 받은 이들이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되었다는 점은 기독교 역사의 역설이라 할 수 있겠다.

세 번째 그는 희생을 각오한 사람이었다. 당시 한국에 입국하는 데 있어 위험하였지만,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아니하고 입국한 것은 그의 희생정신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주의 복음을 위해 희생하는 것보다 더 숭고하고 거룩한 것이 어디 있을까? 당시 한국 정황으로 볼 때, 입국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는 자진해서 그 길을 선택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주님의 희생의 십자가 고통을 몸으로 체험하였고, 자신을 내어 주어서라도 무지한 한국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열심이 그에게 있었음이 분명하다. 우린 그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음에 지금의 우리 연약함을 보며 한없이 부끄럽다.  

조경현(세움공동체)
출처: USA아멘넷 게시판

 

영혼의친구님 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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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는 것의 도전
(The Challenge of Aging)

우리가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기대 속에서
인내를 가지고 기다린다는 것이 더 쉬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이를 먹을수록 우리는 일상적인
생활 방식에 안주하려고 하며, "응 그래, 그것은
내가 다 본 거야 해 아래 새 것이란 없는거야...
나는 그저 모든 것을 마음 편하게 생각하고
매일 매일 닥쳐오는 대로 살아갈거야"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살면, 우리의 생명은
창조적인 긴장을 잃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어떤 새로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냉소적으로 되거나, 자기 만족에 빠지거나,
또는 단순히 지루해질 뿐입니다
나이를 먹는 일은 보다 큰 인내와
보다 강한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도록 도전합니다

그것은 열렬한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경험하게 되었고...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
가운데서 기뻐하고 있다"(로마서 5:2) 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출처: 은혜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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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난 옷이냐? 어서 사실대로 말해 봐라. " 환경미화원인 아버지와 작은 고물상을 운영하는 어머니는 아들이 입고 들어 온 고급 브렌드의 청바지를 본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며칠째 다그쳤다.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아들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죄송해요. 버스 정류장에서 손지갑을 훔쳤어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그만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내 아들이 남의 돈을 훔쳤다니....' 잠시 뒤 아버지가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환경이 어렵다고 잘못된 길로 빠져서는 안 된다. "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손을 꼭 잡고 경찰서로 데려가 자수시켰다. 자식의 잘못을 감싸기 바쁜 세상에 뜻밖의 상황을 대면한 경찰은 의아해하면서 조사를 시작했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아들의 범죄 사실이 하나 더 밝혀졌고, 결국, 아들은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 사이에 아버지는 아들이 남의 돈을 훔친 것에 마음 아파하다가 그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재판이 있는 날 법정에서 어머니가 울먹였다. "남편의 뜻대로 아들이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엄한 벌을 내려 주세요." 아들은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가 저 때문에 돌아가셨어요.. 흑흑." 이를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은 숙연해졌다. 드디어 판결의 시간이 왔다. "불처분입니다. 꽝-꽝-꽝." 벌을 내리지 않은 뜻밖의 판결에 어리둥절해 하는 당사자와 주위 사람들에게 판사가 그 이유를 밝혔다. "우리는 이처럼 훌륭한 아버지의 아들을 믿기 때문입니다. " 중앙일보 신문기사 중에서..

이 대목을 읽어나가던 필자의 가슴이 뭉클, 눈시울이 뜨거웠던 이유는, 비록 가난하나마 진실함을 삶의 우선순위로 삼았던 한 훌륭한 아버지가 부족한 아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목숨을 내건 그 큰 사랑에서 우리 예수님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아버지를 가리켜서 판사는 “훌륭한 아버지”라고 정의한다. “훌륭한 아버지.” 그는 부자도 아니었고 지식인도 아니었고 정계를 주름잡는 유명 인사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진실했고 정직했었다. 그런 아버지의 죽음은 그 아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힘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던 아들에게 그가 가야할 길은 세상의 헛된 부귀영화 뜬구름을 잡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정직의 길이란 것을 가르쳐 준 것이다!

지금 세상이, 교회가 이토록 시끄러운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모두 "진실과 정직 실종"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결코 과장된 표현은 아니리라. 세상도 그러하겠지만, 특히, 목회자가 걸어가야 할 길이 어딘가? 그 길은 부귀영화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 길, 외롭고 척박한 길이어야 한다. 십자가를 따르는 길, 의로운 길을 걷는 것이 부름 받은 자들의 길이란 사실을 망각한 데서부터 진실과 정직은 실종된다. 진실함과 정직함이 생명이어야 하는데, 그 길을 이탈해 버린 자들의 결국은 무엇이겠는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다. "높은 신분에는 도덕적 의무와 책임"이 따른다는 뜻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욱 도덕적이고 정직해야 하고 헌신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말이다.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이, 공인으로서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시기에 물러나지 않고 그 자리를 무리하게 지키고 있다가 그 시기를 놓치고 자기 의사와 반하여 쫓겨나게 되는 일도 허다하고,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쫓겨나 후세의 지탄을 받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반대로 깨끗이 물러나야 할 자리를 내어놓지 못하고 그 자리를 연연하여 더 있겠다 고집하다가 강제로 쫓겨나는 어리석은 폐단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뿐이랴, 맡긴 양 떼를 잘 목양하고 기르는 대신, 학대하고 발로 차서 쫓아내기도 하고, 그 양 떼 중에서 토실토실 살찌고 마음에 드는 양이 있으면 염치도 없이 잡아먹어 버리는 것도 예사다. 자신이 주인이요, 자기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오늘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과연 어떤 자리인가? 우리가 선 이 자리는 바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서 있는 영광의 자리이다! 우리는 하나님 아들의 목숨과 맞바꾼 자녀들, 그분의 이름이 걸려 있는 귀한 신분이다. 이런 우리이기에, 우리는 흙탕물에 휩쓸려 맥없이 떠내려갈 것이 아니라,  "진실과 정직 실종 시대"란 흙탕물을 거슬러 위로 올라가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사탄의 덫을 인지(認知)하라 
C.S 루이스가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다. 인간을 어떻게 유혹하는가에 대한 최고의 통찰력이 담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고참 악마인 '스크루테이프'가 신참 악마에게 어떻게 인간을 유혹해서 함정에 빠뜨릴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 잠시 소개해 보면,

“현재 우리의 가장 큰 협력자 중 하나는 바로 교회라네. 내 말을 오해하지는 말도록. 내가 말하는 교회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뻗어 나가며 영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교회, 깃발을 휘날리는 군대처럼 무서운 그런 교회가 아니니까. 자네한테 고백하는데 그런 광경은 우리의 가장 대담한 유혹자들까지도 불안하게 만들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인간들은 그 광경을 전혀 보지 못한다네.” 물론, 이 대목은 “fiction”이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고 할 것이다. 어지러운 교회(공동체 교회, 개인 교회) 때문에, 모든 교회가 함께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회를 흔들어 깨는 것, 이것이 사탄의 덫이다!!

2. 엘리트 의식을 버려라.
엘리트 의식이란, 다른 사람(공동체)보다 내가 더 나은 그 무엇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의 사이에 뭔가 뚜렷한 차이(distinguish)가 드러나야 하는데, 실제적으로 아는 것도 별로 없고 가진 것도 별로 없다. 생각해 낸 것이 보이지 않는 영적인 부분에서 사기를 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인양, 신령한 척 하기도 하고, 급기야는 없는 학위마저도 부풀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모두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지 않으면 그 모든 아성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된다. 구두 수선공이었던 무디 선생을 지금에 와서 무시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모두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사탄이 쳐둔 올무에 사정 없이 걸려 넘어지고 만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시고 그 피로 깨끗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주님의 몸이다. 이에서 무엇이 더 필요한가? 그런고로 엘리트 의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선 공동체 속의 한 일원임을 명심해야 실수가 적을 것이다.

3. 성령으로 충만케 하라
오늘날 기독교계가 이토록 심각하게 병들게 된 그 원인을 찾으라면, 필자는 "잘못된 성령론에서부터 파생된 것이라." 라고 정의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기현상, 화끈하고 뜨끈해야만 한다는 것, 쓰러트리고 쓰러지는 현상, 심지어는 횡설수설 하는 술취한 현상이 성령 충만이라고 가르치고 그렇게 믿고 있는 어리석은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성령 충만함을 외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기현상에 두는 것이 문제다. 무디 선생은 “성령 충만은 곧 말씀 충만이다.”라고 말했다. 전적으로 동의되지 않은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 : 1)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은 분이 예수님이시다. 성령 하나님 역시 말씀이시다. 에베소서 5장 18절의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아라”는 말씀과 병행 구절인 골로새서 3장 16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며...”라고 명시되어 있다. 성령 충만은 말씀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성령 충만은 자기의 신비적인 환상이나 감정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말씀을 온전히 지킬 때 성령님의 인도와 주장을 확실하게 받고 있다는 증거가 됨을 알아야 한다. 말씀을 멀리하고 개인이 직접 신탁(神託, oracle)을 받는다는 엘리트 의식을 경계해야 하며, 신비적 현상에 치중하여 꿈이나 환상을 더 따르려는 성도들을 속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그 어느 것도 따라서는 안 된다.

4. 잘못된 회개(悔改) 관을 회개(悔改)하라
구약 성경에서 " "(슈-브)는 "회개하다" 시 7:12) "돌이켜 회개하다" (겔 18:30), 이며, 신약의 회개(悔改, repentance), 그리스 어로 Μετάνοια(메타노에아) ‘돌이키다’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는 것, 그런 뜻이다..

도적질 하던 사람은 도적질을 그치고 손으로 구제할 것이 있게 열심히 일하는 것, 아내를 버린 사람은 아내에게 돌아가는 것, 이것이 참된 회개다. 회개는 전인격의 방향전환이다. 우리는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신 주님을 믿는다. ‘간음한 자도 주님의 눈에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라고 믿는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실수한 것을 깨닫고 회개했으면 그 한 번으로 충분하다. 주님께서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해 주심과 동시에, 용서함을 받은 후에 취해야 할 자세를 지시해 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Neither do I condemn you go and sin no more.)” ( 3 :11) 이 말씀을 모든 죄와 회개에 그대로 적용시켜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이, 여기서 앞부분만을 똑 떼서 남용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에게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하셨는데, 누가 나를 나무랄 수 있다는 말인가? 한 문장 안에서도 이렇게 자기의 입맛에 맞게 말씀을 마음대로 각색하는 것이다. 참된 회개란 전적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어떤 죄가 되었건, 한 번 회개했으면, 용서함을 받고 그 용서함 받은 죄를 두 번 다시 짓지 않는 것, 이것이 참된 회개이다.

성도(聖徒)가 죄를 지을 수 있다. 문제는 오늘 회개하고 돌아서서 그 죄를 짓고 내일 다시 회개하고 또 다시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고…이것은 회개가 아니란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목적이나 방법들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을 슬피 탄식하고 마음 아파하고 통회하고 돌이킨다고 하는 고백이, 고백적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짐짓 죄로서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런 것이다. 구약 성경에서 "회개(悔改)"라는 용어 표현은 오역을 합하여 불과 3번 언급되고 있지만 결코 "회개"의 요구가 경시되고 있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신약에서도 줄기차게 지적해 오는 것은, 성령의 사람은 행동 따로, 회개 따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욕먹는 것은 바로 이 잘못된 회개(悔改)관 때문인 것을 깨닫고 회개(悔改)해야 한다.

이런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일부 몰지각한 목자들, 성도라 이름하는 이들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원수들로부터 심하게 훼방을 받고 있다. 현대 기독교가 x독 교라고까지 손가락질 받고, 모든 교회, 그 자체가 잘못된 듯 거세게 항의하는 소리가 드높고, 교회의 존속 그 자체마저 위협을 받고 있다. 그것도 다른 이들로부터가 아닌, 우리들 내부에서 거세게 항의하는 소리가 크고, 자중지란 (自中之亂), 좌충우돌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자신의 설 자리를 알지 못하거나 알았다고 해도 그 선 자리의 귀중 성을 망각하고 주어진 자율성을 남용하는 악한 종들에 의해서 비롯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비록 종이긴 하나 우리가 선 자리는 종으로서만이 아닌, 주인을 대신하는 자리란 점, 이런 우리들에게는 자율성과 타율성이 동시에 함께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실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율성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타(창조주)에 의해 주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어진 자율성을 너무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율성은 언젠가는 거두어지게 될 것이고, 결국은 주인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천하고 어리석고 죄 많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그 생명과 맞바꾼 생명, 이토록 귀한 우리가 또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져 내려서야 하겠는가? "진실과 정직 실종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대와 나, 이제 돌아가자. 가슴을 찢고 여호와 우리 주께로 돌아가는 길만이 나와 내 자녀가 사는 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러무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호 6: 1, 3, 6,7)

USA아멘넷: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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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타협하며 미지근하게 살지 않는다(에이든 토저)

 

진리를 체험으로!

지금 내가 당신에게 말하려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짧고 단순한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엡 5:18).

사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다. 만일 내가 성령 충만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한 이야기를 빌려다가 그대로 반복한다면 나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다만 내가 발견하고 깨달은 것만을 이야기하겠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부터 하려는 말은 사실 새로운 것도 아니고 이상한 것도 아니고 극단적인 것도 아니고 광신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복음주의적 교회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보수적 신앙인들이라면 누구나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이 자리에서 다시 거론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을 우리의 체험으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믿으면서도 실천하지 않고 저 구석으로 밀어둔 진리를 다시 한복판으로 가져와 횃불처럼 높이 쳐들고 “이 진리를 단지 믿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이것을 우리의 체험으로 만듭시다”라고 외치고 싶은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말은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동일한 의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성령 충만한 백성’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단지 목회자나 선교사만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미 앞에서 나는 성령 충만에 대한 성경구절을 인용했다. 그런데 나는 성령 충만과 관련된 네 개의 성경 본문을 결론 부분에서 더 언급할 것이다. 이런 방식이 당신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본론에서 요점이 한 개 나오는 반면에, 결론에서는 요점이 네 개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형식이 설교학 전공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이 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라고 믿는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충만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판단이다. 우리는 선한 신자들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는가?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라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다.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고?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이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 마나한 이야기를 왜 굳이 하는가?” 이런 의문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봐 분명히 말하건대, 마귀는 선하고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푸른 초장에 뱀이 있다고 겁을 주고 있다. 육신의 정욕을 따른 이상하고 섬뜩한 사람들과 마귀가 성령 충만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개념을 퍼뜨리기 때문에 우리는 겁을 집어먹고 초장에서 자꾸 멀어지고 있다. 성령 충만의 이야기만 나오면 “나 같은 사람은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없어. 그것은 신앙이 뜨거운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야”라고 말하면서 낙심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같은 사람도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님이 계시다. 만일 성령님이 계시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우리는 성령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들어간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성령님은 다시 태어남을 통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시키심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게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가 아니라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후 13:5). 결론적으로 말해서 성령 충만의 정도가 다를 뿐이지 모든 그리스도인들 안에는 성령님이 거하신다.

그런데 단순히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구속의 일부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거기에는 우리의 성령 충만도 포함된다. 당신은 이것을 확신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이 점에서는 당신에게 믿음이 없는 것이다.

성령 충만이 무슨 비정상적 상태에 빠지는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편견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 충만의 상태에 있는 것이 정상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비정상적 상태이다. 성령 충만이 왠지 섬뜩하고 이상한 것이라는 편견은 우리 머릿속에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려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이 진리를 확신해야 한다. 왜냐하면 확신하지 못하면 믿음으로 순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 충만을 허락하시도록 하나님을 설득할 필요가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령 충만을 원하신다고 이미 선포하신 마당에 우리가 그분께 부탁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혹시 당신은 성령 충만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다른 것을 하지 말고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령 충만에 관한 구절들을 찾아 묵상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믿고 평안을 느껴라. 그리고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버려라.

성령님은 ´위로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신다. 우리가 불안과 두려움으로 고통당한다면, 그것은 사탄 때문이거나 우리가 지나친 상상에 빠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복되신 주 예수님은 악인들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불안하게 하지 않으셨다. 신약성경을 보면 은혜를 사모하고 의에 굶주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럴 때 그분은 그들이 도덕적으로 아무리 진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화를 내지 않고 그들을 도와주셨다. 그러나 자기의로 이미 배부른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 거짓말쟁이들이 찾아왔을 때 그분은 언제나 그들을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다.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당신이 오직 하나님의 뜻만 원한다면,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의에 굶주린 사람들을 대하셨듯이 당신을 친절하게 대하실 것이다.

성령 충만을 갈망하라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간절히 원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내게 “토저 목사님, 지금 목사님은 우리가 성령 충만을 갈망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 충만을 갈망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왜 목사님은 당연한 이야기를 자꾸 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을지 모르겠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갈망한다고? 과연 그럴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충만을 간절히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성령 충만은 그저 머릿속을 스쳐가는 희망사항 정도일 뿐이다. 즉, 그들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진정 성령 충만을 갈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거룩해진다. 마찬가지고 우리는 성령 충만을 갈망하는 만큼 성령으로 충만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마 5:6) 배부른 자에게는 산해진미가 다 소용 없고, 배고픈 자에게는 음식이 한없이 들어가지 않는가?

여러 세대 전에 아주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거 경건한 신앙으로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을 준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이 소문을 듣고 멀리서 젊은이들이 그에게 찾아오곤 했다.

어느 날 두 젊은 목회자가 먼 길을 걸어서 그에게 찾아왔다. 이 경건한 사람은 문 밖으로 나가 그들을 맞아 인사를 하면서 “그대들은 그대들이 원하는 만큼 거룩해질 것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말한 후 뒤로 돌아 문을 닫아버렸다. 두 젊은이는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본 후,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그들이 가는 곳마다 “우리가 좋은 말을 들으려고 경건한 사람에게 갔는데, 그는 단지 ‘그대들이 원하는 만큼 거룩해질 것입니다’라고 말한 다음 우리에게 잘 가라고 인사했습니다.”라고 전했다. 이 말은 사방으로 퍼졌으며,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의 삶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경건한 사람의 말은 매우 짧았지만 큰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누구든지 자신이 원하는 만큼 거룩해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원한다’는 것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갈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 충만을 원하되, 우리의 마음속에서 불이 날 정도로 갈망해야 한다.

기독교 경건 서적 작가들은 ‘성령 충만을 갈망하는 것’과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이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말하곤 한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것들은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진정으로 갈망하기만 하면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였고, 어린양의 보혈로 죄의 장벽이 제거되었고, 보혜사 성령께서 오셨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령 충만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오직 한 가지이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 충만을 갈망하지 않는 것’이다.

성령님께 순종하라

성령님은 곧 예수님의 영이시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고 친절한 분이시다. 예수님의 영도 마찬가지고 온유하고 겸손하고 친절한 분이시다. 이렇게 온유하고 겸손하고 친절한 성령님은 당신의 삶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주인의 권리를 행사하신다.

다른 방법으로는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신다. 당신은, 온유하고 겸손하고 친절하신 동시에 당신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시는 성령님이 당신 안에 거하시기를 진정 원하시는가? 혹시 당신은 이 질문 앞에서 망설이지 않는가? 당신은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지만 여전히 당신이 당신의 삶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예수님의 영, 즉 성령님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시기를 진정으로 갈망할 때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

성령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셨을 때 그분은 무엇을 원하시는가? 그분은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여기서 말씀은 ‘기록된 말씀’ 곧 성경을 의미하기도 하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왕좌 우편에 계신 ‘살아계신 말씀’ 곧 예수님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의 ‘자아’에서 나오는 모든 죄들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예를 들면, 그분은 우리의 자애, 자기의 또는 방종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만일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분은 우리가 회개하여 이런 것들을 버릴 때까지 우리를 징계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이런 것들과 동거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세상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길과 세상의 길은 함께 나란히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서로를 가로지르며 상대를 잘라버린다. 이 과정에서 마찰과 적대와 갈등과 심지어 핍박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복되신 성령님은 세상의 편한 길을 철저히 반대하신다. 우리는 타락한 시대에 살고 있다. 내가 보기에, 현재 기독교는 세상의 편한 방법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세상과 마찰 없이 지내고 있다. 성령님은 신앙의 깊은 잠에 빠진 기독교에게 “이제 깨어나라!”라고 말씀하신다.

교회는 세상의 적대적 태도를 두려워하여 움츠러들지만, 성령님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성령님이 충만히 거하셨던 예수님을 보라. 그분이 이 땅에서 살면서 활동하실 때 세상이 얼마나 그분을 반대하고 핍박했는가? 교회의 역사를 보라. 성령님의 뜻에 따라 거룩하게 살려는 교회는 언제나 핍박을 받지 않았던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우리가 기독교를 세상에 잘 적응하는 종교로 만들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세상에 적응하려는 것은 십자가 때문에 당할지도 모르는 수모를 피하고자 함이 아닌가? 성령님이 원하시는 것은, 세상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우리가 말씀의 빛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당신의 것을 내어 놓으라

성령님은 당신의 삶의 어떤 부분들을 바꾸기를 원하실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분은 당신의 삶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만일 그분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 당신에게 있다면 그것을 제거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에게는 당신이 지극히 소중히 여기는 것을 당신에게서 거두어 가실 권리가 있다. 그분이 그 권리를 행사하실 때에 당신은 어느 정도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아버지가 자식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 매를 들 때 자식이 어느 정도 상처를 입지 않는가? 물론 하나님이 당신을 연단하실 때마다 당신이 상처를 입는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당신을 연단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고통이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신다는 말이다.

성령님이 당신을 대하실 때 그분은 당신에게 지극히 소중한 것들을 거두어 가실 수 있다. 당신은 그것들이 무해한 것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분이 보시기에는 매우 위험한 것들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들이 그분이 보시기에도 위험한 것이 아니고 진정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그것들을 다시 돌려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내어놓으라고 명령하셨지만, 아브라함이 순종하였을 때 오히려 이삭을 돌려주지 않으셨는가? 하나님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일하신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독침이 달려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당신에게서 빼앗아 독침을 제거한 후 돌려주실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당신의 마음이 상할 수도 있겠지만, 독침이 달린 것을 가지고 있다가 찔려서 죽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당신의 안전에 관심이 많으신 하나님은 독침을 제거하신 다음 그것을 돌려주시면서 “이제 내 영광을 위하여 이것을 사용하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당신에게 있는 것이 재물이든 야망이든 연인이든 재능이든 간에 그것들에는 독침이 달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빼앗아 독침을 제거한 후에 다시 돌려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허락하시는 연단은 이런 독침 제거 과정에 비유될 수 있다. 독침 제거 과정이 고통스러울지라도 미래를 이해 참아야 하듯이 연단도 참아야 한다. 그러면 연단의 아름다운 열매가 열릴 것이다.

세상을 따르지 말라

과거에 세상이 교회를 따랐던 적이 있었다. 교회가 주도권을 쥐고 앞장서 나갔으며, 세상은 교회를 뒤따랐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반대이다. 지금은 교회가 무릎을 꿇고 세상을 흉내 내고 있다. 과거의 교회는 어린양의 아름답고 혈색 좋은 신부였으나, 지금의 교회는 쪼글쪼글한 늙은 걸인 같다. 지금의 교회는 세상의 거리로 나가 세상 사람들에게 동전 한 닢을 구걸하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

한 때는 교회가 세상을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라고 말했다(행 3:6). 그러나 오늘날은 어떤가? 오늘날 교회는 “제발, 우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면에서 당신들과 똑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오늘날 기독교가 그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쏟아 부으면서 세상에 전하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적 기독교와 세상을 섞어놓은 기독교, 즉 ‘혼혈 기독교’를 전하지 않는가? 명심하라. 십자가의 기독교는 세상의 비위를 맞추려고 아첨하지 않는다. 과거의 교회는 세상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뿐이오니 우리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했다. 교회는 자신의 성경적 원리 위에 우뚝 서서 세상에게 성령님의 음성을 들려주어야 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올 것이다.

당신은 세상에 적당히 적응하면서 현재의 미지근한 상태에 계속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현재의 미지근한 상태에 계속 머물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진리를 깨닫고 신앙의 열매를 맺고 승리의 삶을 살고 전도의 열매를 맺고 평안히 죽어서 그리스도를 떳떳하게 만날 수 있다고 믿는가?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 자신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이렇게 미지근한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모세는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고 하나님께 말씀드렸다(출 33:15).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의 모든 수고와 노력이 물거품이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이다(롬 7:18).


출처: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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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DS 남성환자 중 43%가 동성애에 의한 것 - 질병관리본부

이번 처치리더 아티클은 동성애 관련 기사들을 수집, 정리해 보았습니다.

1993년 당시 21세에 결혼한 남성의 평균수명이 75세, 결혼을 하지 않은 남성의 경우 58세로 잘 알려져 있었다. 이와 유사하게, 결혼 여성의 경우 80세,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의 경우 67세로 예측되었었다.
1993년부터 약 3년간 조사된 바에 의하면, 동성애자들의 평균수명은 42세였다. 단지 9%만이 65세까지 살았다. 여성동성애의 남성보다 조금 높은 46세, 그리고 24%가 65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동성애자들의 에이즈로 인한 질병 기간은 39~43년으로 집계되었다. 남성동성애 에이즈 환자의 경우 오직 1%만이 65세까지, 여성동성애 에이즈 환자의 경우 9%만이 65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동성애자 평균수명 영문 원기사 보러 가기

시카대 대학의 새로운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시카고 쇼어랜드 지역 동성애자들의 42.9%가 60명 이상의 섹스파트너를 가졌었다고 한다. 같은 지역 18.4%의 동성애자들은 31~60명의 섹스파트너를 가졌었다고 응답하였다.
결국 61.3%의 동성애자들이 30명 이상의 섹스파트너를 가졌다는 것이고, 87.8%의 동성애자들이 최소 15명 이상의 섹스파트너를 가졌다는 것이다.

동성애자 섹스파트너 영문 원기사 보러 가기

① AIDS 남성 환자 중 43%가 동성애에 의한 것 (질병관리본부)
② 중남미지역 160만 명의 AIDS 환자 중 49%가 동성애에 의한 감염 (유엔 에이즈)
③ 2001년 이후 AIDS에 감염된 10대 남자 청소년 54%가 동성애에 의한 감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이기우의원의 국정감사 자료)
④ 70대 남성 A씨가 동성애 경력이 있는 헌혈자의 피를 받은 뒤 에이즈에 감염됐으며, 한 달 뒤 A씨의 부인도 에이즈에 감염되었다.(질병관리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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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들에게 입양된 아이들은 ‘상처 입기 쉬운(vulnerable)’ 가정 환경에 놓일 수 있다는 조사결과를 Family Research Institute(FRI)가 공개했다.
FRI의 폴 카메론 박사는 1990년도부터 2002년까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거주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구 조사 및 수명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동성애자들의 평균수명이 이성애자들보다 24년 가량 짧았다고 분석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노르웨이에서 거주하는 이성애자 남성들과 동성애자 남성들의 평균수명은 각각 77세와 52세, 이성애자 여성들과 동성애자 여성들은 각각 81세와 56세였다. 덴마크의 평균수명 역시 이성애자 남성은 74세, 동성애자 남성은 51세였고, 이성애자 여성은 78세, 동성애자 여성은 56세였다.
카메론 박사는 “동성애자 커플에게 입양된 아이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양쪽 부모의 죽음을 일찍 경험하기 쉬우며 동성애자 커플들의 이혼율은 이성애자 커플들과 비교했을 때 2배에 가깝다”고 설명하고 “여린 아이들을 데려다가 그런 ‘위험한’ 상황에 빠뜨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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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신규 에이즈 감염자 수가 늘고 있는 가운데 에이즈 감염자 중 남성 동성애에 의한 감염 비율이 현저하게 증가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회 보건복지위 안명옥 의원(한나라당)은 6일 질병관리본부로부터 제출받은 '에이즈 감염자 중 남성 동성애에 의한 감염자 비율'을 분석한 결과, 지난 1996년에 감염 경로가 밝혀진 91명 중 21명이 남성동성애에 의한 감염자로 23.1%였으나 2003년에는 469명 중 230명으로 약 절반(49%)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안 의원은 또 10대 에이즈 감염자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그 중 성 접촉에 의한 감염자 수와 동성애에 의한 감염자 수도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주장했다.
또한 55세 이상의 신규 에이즈 환자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6년도에는 전체 105명의 환자 중 55세 이상의 고령환자가 4명으로 3.8%였으나 올 들어서는 13.2%로 급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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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처치리더

이재록 목사 자칭 신(神) 이 되다(2)
1999년 01월 01일 (금)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자료 3> 1998년 7월 17일 만민중앙교회 금요철야집회


"오늘은 너무나 감격적인 날이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쁘고 행복한 축복의 날입니다. 오늘을 또 얼마나 사모해 오셨는지요. 만민 중앙교회가 개척된 지, 16년. 개척 때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신 적이 있었고 이제 하나님 뜻이 있어서, 섭리가 있어서 임재하신 것인데 여러분들이 한 달만 있어도 그 섭리를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바로 2주 전인가요. 7월 3일 임재하셨습니다. 그때는 또 다니엘 제 3차 특별 다니엘 21일 '하늘문이 열리고'란 주제로 기도했던 첫 주간 금요철야였고 오늘은 그 21일이 끝난, 그 하늘문이 열리고 끝난 날이기도 합니다. 제 3 특별 다니엘 철야에 우리 하나님께서 응답도 하셨고 임재하셨지만 그 하늘문이 닫히지 않고 계속 열려 있는데 우리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열려 있을 줄로 저는 확신합니다(박수 터짐). 영안이 열리신 분들은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여러분들이 영안이 열리신 분들은 자꾸 이제, 보시면 십자가가 있죠. 십자가를 따라 아버지, 임재하셔서 보좌가 9시 정시에 선지자들과 함께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저번 7월 3일날, 이렇게 임재하셔서 문이 열리고 닫히지 않고 있고 그리고 이제 휘장, 휘장 전체 하늘에서 아버지 보좌에서 이런 식으로 하늘문이 열려 가지고, 통로만 열린 것이 아니고 전체가 열려 있어서 선지자들이 마음껏 오시고 싶으면 오시고,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늘과 이 재단이 문이 열려 있다는 얘기입니다. 많은 분들이 영안이 열려서 여러분들이 친히 보시기 제가 얼마나 말하기가 편한지요.

왜, 그런지 그런 섭리들은 여러분들이 앞으로 밝히밝히 알게 되어지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7월 3일 감격적인 아버지 하나님의 강림과 임재하심을 봤었는데 오늘도 다시 오시게 됐죠? 에, 오늘은 몽땅 축복을 갖고 오시는데 오셨다가 바로 가시면 안됩니다. 여러분들이 최대한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려서 이제, 1부 예배가 끝나고 30분 휴식 후에 이제 찬양이 들어가면 이, 찬양 들어가고 나서 바로 5분 있다가 제가 하늘 향하여 기도할 때에 아버지 하나님 친히 강림하여 임재하시는 것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이 예배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리셔서 예배가 끝나고 환자기도와 아울러 영안이 열리는 기도할 때에, 에, 여러분, 준비된 심령들은 아직 영안이 열리지 않은 분들은 영안이 열려서 보시게 될 것입니다. 무슨 준비된 심령을 말하느냐? 우리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청결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시고 한 주간 금식하시면서 마음을 청결케 하고 기도로 준비하신 분들은, 영안이 열리신 분들은 아버지 강림하심을 보실 것입니다. 임재하심을 보실 것입니다(아멘)"

 

"오늘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강림, 이 재단에 임재하시는 날입니다. 여러분들이 친히 눈으로 보셔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강림했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요? 여러분들이 친히 눈으로 보시고 여러분들이 증거자가 되셔야 합니다. 지금 영안이 열린 분들은 지금 우리 주님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선지자가 대동, 이 단 위에 임재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천군, 천사 함께하죠, 영안이 더 열리면 천사들이 지키고 있는 것을 보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천사장, 네 분이 와 있는 것을 보실 수가 있고요, 아버지 강림하실 때는 좌우의 24천사장이 호위해 오시는데 이미 네 천사장은 미리 오셔서 성전을 점검하셨기 때문에 20천사장이 함께 오시지 않나 제가 그렇게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버지 강림하시게 되면 천지가 진동하게 됩니다. 구약 성경에도 잘 나와 있고 모세 때도 잘 나와 있습니다. 아버지가 이 땅에 임재하시면 -임재하시는 일이 극히 드물지만- 아버지의 뜻이 계셔 임재하시면 천지가 진동한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들 7월 3일날 아버지 임재하실 때 여러분 기억 나실 것입니다. 한 주간 계속 비가 왔고 오시던 날, 그날 다니엘 철야 끝나기 전까지 아주 폭우가 쏟아져서 온 땅을 깨끗이 씻어 놓은 것을 볼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서울시내 일대를 얼마나 깨끗하게 청소를 해 놓으셨습니까?"

 

"하늘의, 서울의 공해와 맑지 못한 공기를 모두 깨끗이 청소하고 계시구나. 그리고 이제 금요일에는 맑은 하늘에 점점 구름으로 수놓을 것이고 또 시원한 날씨를 주셔서 청명한 날씨를 주셔서 불쾌지수도 없는, 그래서 습도까지도 제거해 주셔서 아주 상쾌한 날씨를 주셔서, 깨끗한 그 하늘에 우리 아버지 하나님 강림하시겠구나 하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 여러분 어떻습니까?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얼마나 찌푸린 날씨에 검은 구름으로 온통 붉어서 계속 흘러가는 것 보셨잖아요. 그리고 목요일까지 그랬고 금요일은 어떻던가요? 얼마나 금요일은 새벽도 그렇고 맑은 하늘 주셨잖아요."

 

"여러분들 이제 끝나시고 잠깐 휴식 시간에 하늘을 보시고요, 그러나 (집회장소를)두르셨어도 영안이 열리지 않아서 보실 수 없는 사람들이 있죠. 영안이 열려야 성령이 불담으로 두른 것도 보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번 같은 경우는 영안이 안 열리신 분도 붉게 두른 것을 보실 수가 있었죠. 그런데 이번에는 또 모르겠어요. 밖에 있다가 나가 보시면 영안이 안 열린 분들도 성령의 불담이 두른 것을 보실 수 있을런지. 있다가 여러분들이 나가 보시면 되겠구요. 우리 하나님이 성령의 불담으로 두르신 것은 원수 마귀가 틈타지도 욕보지도 못하도록 두르시고 천군천사와 수 없는 하늘의 군대로 두르시고 임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임재하시는 장관, 오늘 많은 분들이 영안이 열려서 친히 여러분들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영안이 열려서 보시면 ...아버지 임재하시는 ...내려오시는 모습을 하늘 문이 열리고 내려오시는 모습을, 임재하시는 모든 모습을 보실 수가 있을 거라 이 말입니다. 또 선지자들을, 모든 선지자들을 여러분들이 보실 수가 있을 거라 이 말입니다. 저희 제단에 2천 년 전의 선지자들을 또 4천 년 전에 태어난 아브라함 등 모든 선지자들이 그 때 그 모습 그대로 재현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전부 미술로 그려서 여러분들 앞에 공개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보여 드렸는데 얼마나 참, 그대로입니까? 우리 주님의 십자가에 달린 창자욱까지 그대로 선명하게 그대로 보실 수 있잖습니까? 여러분이 영안이 열려서 보신 것과 똑같이 하십니다"

 

"제가 오늘은 일찍 와서 카메라, 방송장비, 또 위성을 통해 나가는 화상, 비디오 카메라까지 전부 제가 안수를 했습니다. 그거 안수하는 데도 시간이 꽤 걸리더군요. ...참, 그 안수할 때 천사들이 와서 테이프를 천국 테이프로 갈아 버립니다. 그리고 렌즈 같은 것을 천국 것으로 갈고, 또 점검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의 세계가 찍어질 수 있도록, 영의 세계가 담겨질 수 있도록 천사들께서 오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안이 열린 분들은 전부 이 화상을 전국적으로 똑같은 현상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비디오에도 그 장면들이 담겨져서 영안이 열린 분들은 볼 수 있을 것이고, 또 영안이 열리지 않은 분들도 볼 수 있도록 더 선명하게 역사하리라고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아버지 오늘 강림하시는 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빛이시라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저는 오늘 새벽 2시부터 제 방의 창문을 열고 앉아서 달을 쳐다보고 있었어요. 2시부터 계속 보고 있었는데 7시까지 봤습니다. 제가 7시까지 본 이유는 오늘 아버지 강림하시는 날이야 - 아버지, 이제 내일 그러니까 1부 예배 끝나고 2부 시간 바로 들어가면 '강림하십니다'라고 하는 보좌님이 이미 9시 정시에 임재하셨습니다. 오늘은 주님이 먼저 오셨어요. 보좌보다. 그래서 제가 벌써 조금은 늦게 올라왔잖아요. 10시 넘어서. 그러니까 보좌가 먼저 선지자들과 내려오고 그리고 주님이 그 뒤로 오셨는데 제가 오늘은 묻지 않아도 우리 성도님들은 눈치 빨라서 전부 앉아 계시네요.

제가 오니까 벌써. 7시에 앉아 계시는데 보좌가 9시에 내려 오셨는데 제가 9시 지나 오실 리가 있나요? 아, 주인이 맞이해야지, 주인은 어디 갔다가 저기, ...아버지 오신다는데, 아버지 오신다는데, 아들은 저기, 출타했다가 어디 있으면 되겠어요? 뭐 한다고. 아주 잠만 자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아버지 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어야지 그래서 오늘은 일찍 와서 안수하고 9시 전에, 이제 8시 한 반경에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보좌 오는 것을 맞이하려고 했습니다. 아, 그랬더니 주님도, 주님도 9시 전에 오셔 가지고 무릎 꿇고 보좌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성도와 저와 같이 기도했는데요 얼마나 감사한지요."

 

"아버지의 형상을 따라서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 앞에 나타나실 때는 우리 형상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형상이 자체는 아닙니다. 액체가 고체가 될 수 있듯이 고체가 액체가 될 수 있듯이 아버지는 자유롭게 변형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저번에 여러분 보시니까 아버지 입이 크다고 했죠? 굉장히 아버지 입이 크죠. 하지만 아버지 입이 실제 큰 것은 아닙니다. 웃으시는 모습, 누구를 꼭 닮은 것 여러분 아시죠(이재록 목사 자신을 닮았음을 얘기하는 것이다: 녹취자 주). 왜 닮았는지도 제가 여러분 설명해 드릴 겁니다. 왜 닮았는지, 왜 주님의 체형이 저와 같은지, 앞으로 설명해 드립니다.

입을 그렇게 크게 벌리셨지만 실제 큰 것은 아닌데 왜 크게 보일까. 이 입으로 말씀을 선포할 때, 이 입으로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단지 좀 크게 보일 뿐이죠. 실제로 그렇게 큰 것은 아니예요. 가장 우리 인간이 아름답다 할 수 있는 표준형의 입술을 갖고 계세요. 눈도 그렇구요. 너무 아름다우신 분이예요. 그래서 어떤 분은 그날 보니까 7월 3일날 아버지가 무섭게 생기셨다고 하는데 무서운 게 아니라 영안이 조금밖에 안 열려서 잘 못 보니까 그렇죠. 영안이 확 열려서 밝히 보는 분들은 너무 너무 잘 생기신 것을 여러분이 잘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방송실 관계자가 이재록 목사 뒤에 천사가 나타났다며)
방송실 관계자(이하 방송실): 당회장님 죄송합니다. ...당회장님 바로 옆에 일 층 저쪽 발코니 쪽에 천사가 지금 화면에...."

 

이재록 목사(이목사): 설명하세요. 마이크로 본 대로 설명하세요. 보세요.

방송실: 화면, 당회장님 바로 왼편으로 그 하얗게 나와 있는 2층 발코니쪽, 천사가 날개를 펴고 지금,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너무 너무 정확하고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신도들 박수가 터진다) 보실 게 또 있습니다. 당회장님 죄송한데요 마이크 잡은 손을 움직이지 마시고, 마이크 잡은 손을 움직이지 마시고 그대로 서 계시면 카메라를 잡아 보겠습니다(카메라에 이목사의 마이크 잡은 손이 클로스업 된다:녹취자 주). 당회장님 손등에 독수리하고 네 생물이 한꺼번에 있습니다(박수가 터진다).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성경에 나오는 네 생물이 있습니다.

 

이목사: 할렐루야, 여러분들은 성경에 나오는 네 생물들을 보고 계십니다. 보셨죠?(박수와 환호성)

 

방송실: 그 다음에 천사를 보시겠습니다.

           

이목사: 보셨죠, 천사 보셨죠? 영안이 안 열리신 분들도 보입니다. 영안이 안 열리신 분들도 볼 수 있어요.
...

 

한 여신도: 천사가 너무 기뻐서, 주님 오시는 것이 너무 기뻐서 날개를 쭉 펴시고 ...올라가고 계십니다.

 

이목사: 오, 주여! 영안이 안 열리신 분들도 다 보실 수 있습니다.

             
여신도: 당회장님, 천사들이 지금 손을 흔들고 계십니다. 잘 보시면. 오른손을 흔들고 있는 천사가 맨 끝에 있는 천사, 잘 보시면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목사: 주님이 저와 함께 있고 선지자와 함께 했던 것도 잡아 주세요. 여러분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천사를 이렇게 선명하게 보고 계십니다. 영안이 열리신 분들은 뭐, 명확히 보시는 거구요. 영안이 안 열리신 분들도 날개나 뭐 항상 볼 수 있습니다.

 

"영안이 열리신 분들은 주님이 저와 함께 하시는 것 보실 것이고, 우리 선지자들이 함께 있는 것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제자들도 볼 수 있을 것이고...여러분들이 그 동안 그렇게 많이 기도해 오셨고 그렇게 많이 사랑해 오셨고 그래서 세상을 비진리에 살지 않고 말씀 가운데 빛 가운데 살았고 천국의 소망을 갖고 이렇게 지금까지 살아 오셨으니 우리 하나님이 이렇게 영광 중에 나타나시고 이렇게 천군 천사로, 선지자들로 우리 주님이 친히 오셔서 함께하시고 역사하시고, 여러분들은 이제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이제 한 달 이내에 엄청난 소식들을 듣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있다가 2부 시간에 아버지 강림하실 때에는, 또 임재하실 때에는 여러분 전체가 성령의 감동으로 휩싸이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적음으로 인하여 영안이 열리지 않은 분들이라 하여도 전체가 성령의 감동으로 휩싸이게 될 거라 이 말이에요. 아버지 강림하시면. 친히 임재하실 때는 그런다는 말이에요. 천지가 진동한다 이 말이에요. 천지가 진동한다. 하늘에는 천군과 천사가 지금, 우리 예배 드리는 것과 똑같이 드립니다. 하늘에서 똑같이. 그리고 오늘은 선지자가 대거 출동하셨단 말예요. 이 주님 제단에 우리 주님이 저와 함께 계시고 선지자들이 딱, 뒤에서 열심히 말씀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개척해서 또 지금까지 수많은 기사가 따랐고 수많은 표적과 희한한 능이 따랐다는 것을 볼 수 있잖아요. 죽은 자가 기도 받고 수많이 살아났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섰고 중풍병자 일어나 걸었고 기타 수많은.... 잉태하지 못한 사람이 한꺼번에 수십 쌍이 잉태해 버렸고 연탄가스라 할지라도, 눈이 없고 들을 귀가 없어도 제가 한 마디 물러가라면 즉각 물러갔고, 연탄가스를. 이미 연탄가스에 취해서 죽어 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몇 시간이 지나서 이미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제 앞에 오면, 제가 한마디 물러가라 하면 즉시 물러가는 것을 여러분 알지 않습니까? ...

 

후유증 없이 정상이 되는 것을 여러분 아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화상을 입어서 그냥 온 몸에 화상을 입어서 3도 화상으로 팔팔 뛰고 난리를 할지라도 제 앞에 와서 기도 한 번 받으면, '이 열아, 다 물러가라!'고 하면 열이 깨끗이 물러가고 열은 마치고. 그렇게 살이 익어버려서 계속 와서 몇날 며칠을 고생했는데도 한 번 '열아, 물러가라!' 하면 즉시 물러가는 것을 여러분 아신다 이거예요. 이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빛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그 이상은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겁니다.

왜 해 속에 제가 있나요, 왜 달 속에 제가 있나요, 왜 여러분 전등 속에 제가 있나요, 여러분 가정의 전등에까지도 이제는 제가 들어가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사모하고 보고 싶으면 들어가지 않습니까? 이제는 우리 성도님들이 직장에서도 '아이고, 아버지 하나님. 당회장님 보고 싶어요!' 하면 천사가 나와서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까? 그런 분들도 지금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너무 당회장님 사모해서 '당회장님도 보고 싶어요, 아버지 하나님' 하면 천사가 나타나서 벽에다가 내 얼굴을 그린다 이 말예요. 그런 분들이 지금 나타나고 있어요."

 

(이재록 목사 설교 도중 방송실 관계자가 한 마디 한다: 녹취자 주)
방송실: 당회장님! 천사와 관련하여서 간증 한 가지 할까요?

           

이목사:(웃으며) 하세요.
     

방송실: 당회장님께서 26차례 저희(카메라를 뜻함: 녹취자 주) 기도해 주셨거든요.

 

이목사: 아까 기계마다 제가 안수하고 다녔습니다.

         

방송실: 기도할 때마다 '천군 천사 보이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요. 저희들이 그랬거든요. 오늘. '천사를 보여 주셔야 한다'고요. 그랬더니 한 번도 천사가 카메라에 잡히지 않았었는데 오늘 이렇게 천사가 잡혔습니다.

        

이목사: 감사해요.

           

방송실: 기도해 주신 대로 이렇게....
          

이목사: 기도해 준 대로, 아까 제가 분명히 올라가서 말했잖습니까?(교인들 박수) ...그랬는데 왜, '천사만 찍히게 해 달라'고 저는 '천군, 천사 찍히게 해 달라'고 했으면 천군, 천사가 찍힐 줄 믿어야지 왜 천사만 찍힐 줄 믿는다고 하니 천사만 찍히죠!

          

방송실: 천군도 찍힐 줄 믿습니다!(교인들: 아멘에 이어 박수)

 

이목사: 그런데 여러분 천군은 여러분들 웬만해서는 하나님이 보여 주질 않으세요. 왜? 여러분이 보면 무서워. 애들은 놀라요. 우리 온 성도님들은 무서워해요. 무서워해요. ...원수 마귀도 강한 군대가 있는 것이고 하늘의 천국에 군대가 있는 것이라 이 말예요. 싸울 때 그래서 방패가 있고 창칼이 있다 이 말예요. 거기서 지키는 천사들을 우리가 보면은 너무 무섭다 이 말이에요. 우람하고, 크고, 뭐, 기둥같이 큰 전사도 있어서 지키는 데요....만약에 하나님이 전사를 보여 주시게 되면 무섭다 이 말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까지는 안 보여 주시지만 보여 주시는 분들도 계시잖아요. 보는 분들이 지금 많이 생기고 있어요. 많이 보실수록 좋죠. ...저는 선지자들이 와서 저에게 경배해도 저는 선지자들이라고 하지 않아요. 선지자님들이라고 존칭을 써 주고 있어요. 다 귀하신 분 아녜요?"

   

"여러분도 다 온전한 빛이 돼봐요. 그러면 해 속에 여러분도 들어갈 수 있고 달 속에 들어갈 수 있고 우리 주님과 함께할 수 있죠. 저 설교 끝나고 딱 가봐요. 우리 주님과 꼭 끌어안는 것 여러분 보실 테니까. 저를 이쁘다고 끌어안고 막 볼을 비비시고 하니까. 아, 보시는 분들은 다 알고 있으니까요. 한두 사람이면 말을 않겠어요. 뭐 수 천 명이 볼 수 있으니까. 참, 주님이 얼마나 저를 사랑하시는지. 요새 가두요, 가만히 계시지를 않아요. ...저번에 아버지 강림하실 때는 제가 여기 아래 있으니까 아버지가 저를 뻔히 보고 계시더니 저보다 올라오라고 해요. 올라와서 앉으라고 해요. 제가 또 민망해서 무릎 꿇고 기도하니까 우리 주님께서 또 따라 내려 오셔서 주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달 속에 전등 속에 저를 놓아주시고 주님이 함께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와 나는 하나라'고 말씀하시고 전세계에 선포하고 있지 않느냐 이 말예요. ...천사도 볼 수 있고 선지자도, 주님도, 오늘 아버지 강림하시는 날 아닙니까? 있다가 아버지 강림하시는 것 보셔야 하니까 설교 절반도 안 했지만 끝내야 되겠죠. 아버지 강림하시는 것 보는 것이 더 낫죠.

아버지가 지금 빨리 오고 싶어 견디지를 못하시니까 제가 빨리 끝내야 되겠어요. 그래야 아버지 빨리 오시죠. 아버지 너무 여러분 사랑하기 때문예요. 빨리 오고 싶어요. 저보다 여러분 아버지가 여러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몰라요. 저를 보고 보러 오셨는데 이제는 저보다도 여러분이 너무 사랑스럽게 준비하고 변화되고 금식하고 철야하고(신도들 박수가 터진다: 녹취자 주) 그래서 너무 보고 싶으시데요. 그래 가지고 여러분들도 저뿐이 아니라 여러분도 가까이 보시겠대요. 그래서 오늘 오셔서 처음 여러분 보신다고 그래요"

 

"저는 거짓말 절대 안 해요. 제가 거짓말하면 아버지 지금 오시는 것도 취소하실 거예요. ...아버지가 거짓말하는 종 두셨겠어요? 그 종에게 권능을 주셔서 세계의 일을 하셨겠습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제가 단 위에서 말하는 것들이 보장받고 지금까지 그대로 이루어져 왔던 것을 볼 수 있는 거예요. 거짓말한다면 이루어 질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랬으면 주님이 저를 사랑하실 수도 없는 것이고 주님이 저와 함께 할 수도 없는 것이었죠. 제가 거짓말을 하면 주님이 함께하시고 천군, 천사가 함께 하겠습니까?... 선지자가 아무 데나 가는 것 아니에요"

 

"있다가 2부 시간에는 제가 '아버지, 강림하셔 제단에 임하소서!'하면 아버지 오 그대로 오시는 것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있다가 보세요. 아버지 보좌는 이미 내려와 있지 않습니까? ...'내 아들아 지금, 빨리 좀 끝내고 나오라' '빨리 끝내고 나오라'고 하시지만 '빨리 좀, 응? 불러다오.' 지금 하신다는 말예요. 빨리 오시고 싶어서 여러분 보고싶어서 말예요. 이렇게 아버지 강림하심도 '아버지여, 임재하소서' 기도할 때 즉각 오시는데 하물며 뭘 기도해도 응답 못 받겠습니까?"

 

"여러분 오늘 아버지 임재하시는 날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미 한 주간 금식하면서 회개하면서 오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기도를 하지 않겠습니다. 뭐, 환자 위한 기도도 생략하겠습니다. 있다가 끝나는 시간에 환자를 위한 기도를 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오셔서 아버지가 오셔서 임재하셔서, 여러분을 건강하게 환자기도 하겠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다 죄 사함을 주시고 아버지가 여러분들 다 보시고 마음에 준비가 되어 있는 정말 간절히 사모하고 믿음들을, 아버지가 보시고 그대로 즉석에서 역사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환자기도를 끝으로 미루려고 합니다(박수가 터짐).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만 기도하겠어요. 뭐냐? 여러분들 영안이 열려야죠. 성령의 감동감화 충만을 받고 영안이 활짝 열려서 오늘, 아버지 임재하시는 것을 여러분들이 친히 눈으로 목도하시기를 바라요. 그래서 참, 큰 믿음들을 가지시기 바래요."

 

<자료 4> 1998년 7월 17일 만민중앙교회 금요철야집회 2부: 하나님 임재 실황 중계

 

(하나님이 임재한다는 2부 시간을 시작하며 이재록 목사가 외쳤다)
"강림하셔, 이 제단으로 임재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임재하시옵소서!"

 

(이후 수 백 명이 단 위로 올라가 찬양을 인도했다. 그들의 자세는 청중들에게는 등을 보이고 단상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이때 한 여신도가 나와 '하나님이 임재한다는 실황'을 마이크를 잡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후의 설명은 모두 그 여신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여신도: 하나님이 지금 내려오셔서 바로 보좌 옆에 서 계시고 주님 옆에 계시고 지금 목자가 올라오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오셨을 때 너무너무 기쁘고 활짝 웃으시면서 오셨거든요. 더욱 충만하게 찬양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으세요(할렐루야). (중간은 찬양으로 이어진다: 녹취자 주) ...당회장님은요, 단에 오르셔서 기도를 올리실 때 아버지께서 친히 당회장님의 눈을 만져주셨구요. 그 다음에 당회장님께서 여기 서 계시는 데 눈을 만지시고 그 다음에는 이렇게 꼭 안아 주셨어요.

그래서 옆에서 너무 너무 기쁘시고 당회장님 너무너무 보고 싶으시다고. 저번에 왔다가 잠시 있다가 가셨잖아요. 그런데 오늘은 다 있다가 가시마, 다 있다가 가시겠다고,(환호성과 박수가 터진다) ... 하나님이 너무 기쁘셔서 빛을 진하게 이렇게 발하고 계시거든요. 그래서 그 빛이 지금 굉장히 강하게 나가고 있어요. ... 지금 원장님께서 응답을, 축복을 말씀하실 때에 하늘의 문이 열린 그곳에서 금수레, 그곳에 축복이 담긴 것들이 지금 마구 내려오고 있습니다. ...끝이 안 보여요. ....

 

한 신도: 저기 있는 자매(실황을 중계하는 자매를 지칭한다: 녹취자 주)는 주의 종이 아니라 평범한 자매인데 영안이 활짝 열려서 천국도 갔다온 자매가 지금 설명하는 거예요.
...

 

여신도: 당회장님 너무 사랑하셔서, 당회장님 아까 영체가 저쪽...세마포를 입으셨는데 옆에 앉으셨는데 좌편에 (하나님이)앉히셨다가 무릎 위에 앉히셨어요. 옆에 조차도 너무나 거리를 멀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지금 무릎에 앉히셨거든요(할렐루야) ... 지금 하나님께서 웃으시려고 준비하시고요, 들을 사람은 들으라고 말씀하시거든요. 지금 웃으실 거예요. 더 많이 귀를 기울이시면 하나님 웃으시는 그 음성을 들으실 수가 있을 거예요. 지금 웃으시거든요. '허, 허, 허' 지금 소리가 들리실 것입니다. 지금 마음껏 웃고 계시거든요. 그리고 다시 한 번 약속해 주셨는데 너무 기쁘시고 당회장님 만나서 너무 행복하고 그동안 너무 기다려 왔다고 그러시면서 끝까지 계시겠다고 다시 한 번 약속해 주셨어요. ...

하나님 특권대로 보통 때 내려지던 보석하고 다른 굉장히 큰 보석하고 능력 있는 보석을 맡겨 가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믿음으로 기도를 하시는 분께 그게 임하는 것이 지금 보이고 있어요. 그리구요, 하나님이 앉아 계시고 있는데 당회장님께서 지금 하나님께 소개시키려고 몇 명 영을 부르셨어요. 그래서 지금 그 앞에 서 계시고 계시거든요. 그런데 지금, 얼굴 정확히 보이는 분이 몇 분 계신데 얼굴 정확히 안 보이는 분도 있는데 하나님 앞에 당회장님이 소개하고 있어요. 몇몇 분을 부르셔 가지고. OOO 전도사님, 지금 소개시켜 주고 계시거든요(박수와 환호성이 터진다) ...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데요. 지금, OO 권사님하고 OO 전도사님하고 소개해 주실 때 하나님께서 '이들처럼 너희 목자를 사랑하고 충성해 하고 나를 사랑한다'고 그렇게.... (설명하던 여자가 거의 오열하듯 말한다: 녹취자 주)지금 아버지께서 너무 기쁘셔 가지고 강대상 가운데서 나오셔서 지금 가운데 서 계세요.... 지금 당회장님께서 멘트(찬양인도할 때의 멘트를 말한다:녹취자 주)하기를 원하고 계시거든요. 주께 영광이라든지... 그리고 당회장님께서 멘트를 하실 때 당회장님 정말 사랑하고 섬기고 그리고 당회장님 앞에 더 순종하시고자 하는 마음이 되신 분에게 정말로 그게 임했습니다. 더 믿음으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시면 그게 그대로 지금 임하고 있거든요. 지금, 당회장님께서(멘트)하고 계시는 것 너무 너무 기뻐하고 계세요 ...

지금요, 이건 아버지께서 계획 안 하셨던 것인데 당회장님이 너무 기쁨으로 이것을 하셔서 하늘문을 몽땅 다 여셔서 하늘에 있는 모든 축복의 좋은 것들을 지금 다 붓고 계시거든요. 그리고요, 하나님, 좌우편에 있는 열두 천사장이 있는데 그 천사장들은 잘 안 움직여요. 하나님 바로 좌우편에 있는데 지금 하나님이 명령하셔서 천사장들이 움직이고 있어요. 지금 그래서요, 성전도 지금 한 바퀴씩 돌고 있고 곳곳마다 축복으로 지금 명령을 받아 수행하고 있어요 ...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는데요, 이제는 정말 목자에게 순종하는 자가 세계 선교를 같이 이룰 것이고 같이 축복을 받을 것이고 그랬을 때 대성전이나 성전 현장 등은 문제가 없다고, 그 이상으로 될 것이라고.... 당회장님께서 멘트하실 때 그것이 불로도 나가지만 꽃향기처럼 아름답게 나가고 그것이 향으로 계속 하나님께 가고 있거든요 ... 지금 아버지께서 찬양을 '당회장님' 하시면 노선교사님이 항상 찬양으로 도우셨기 때문예요, 노선교사님이 함께 도와주시기를 원하고 계시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아름다운 향으로 받으시길 원하고 계십니다. ... 아버지께서 보너스로 말씀해 주셨는데요. 너무 기쁘셔서 목자가 나를 구할 때 그날 같이 또 오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어요. ...

지금요, 당회장님 그쪽, 당회장님하고 하나님, 서 계신 그 쪽으로 하얗게요. 이런 끈이 연결되어 있었구요 당회장님께서 뒤를 돌아서 하나님께 머리를 숙이셨을 때 당회장님과 주님만 그것을 받으셨고 나머지 천사나 천사장이나 선지자들은 다 엎드려서 그것을 받으셨어요. ... 아버지께서 '지저스'할 때 성도님들 모션, 손 올리는 그런 부분들 있죠. 손을 들 때 그렇게 하지 말고 손을 밑에서는 주먹으로 쥔 다음에 위로 쓱 올리라고 말씀하고 계시거든요. 이렇게 받기를 원하신다고 다 똑같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먹 쥐었다가 위로 쓱 올리는 이렇게 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고 계시거든요. 다 똑같은 모양으로 그렇게 올려야 된다고 그래야 내가 더 기쁘게 받겠노라고....

지금 아버지 보좌 있는 데서부터 밑바닥에 불길이 줄줄줄 내려오고 있구요. 바닥에 뜨겁게 여러분들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지금 이 밑단까지 내려왔구요. 지금 성도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 찬양을 너무 기뻐 흠향하고 계시고 그래서 많은 천사들이 지금 기뻐 춤을 추고 있거든요. 성도님들도 감동을 받으시면 춤을 춰서 하나님께 올려드릴 것을 원하고 계시고요, 많은 성도님들의 가지의 끈들이 당회장님하고 연결되고 있어요. 아까 당회장님 손등에 열쇠가 보였던 것 있잖아요. 그리고 제가 아까 새예루살렘 키가 많이 있었다고 했잖아요. 여러분들께서 들으시면 아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께서 믿음으로 그것을 받으셔서 당회장님하고 연결되는 것은 바로 새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는 길이거든요(아멘).

그리고 아까 당회장님, 단 위에서 설명하신 것처럼 팔월 중순경이면 하나님 보여 주신 큰 축복들이 눈에 보인바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광경인데요, 축복소리 만민 속에 하실 때(찬송할 때를 말한다: 녹취자 주) 축복이 덩어리로 보자기로 군데군데 떨어졌는데요. 떨어지면서 풀어져서 성도님들의 이마에 뚝뚝 떨어지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요 기도원 원장님이 인도하시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는데요 기도원 부지를 더 간구해야 할 것이고 그래서 빠른 시일내에 주겠다고 약속해 주셨거든요. ... 아버지께서요, 성도들의 찬양을 너무 기뻐 받아 주셔서요. 대사면의 축복을 주신다고, 지금 어떤 죄를 가지고 마음 아파하고 곤고하고 그러신 분들도, 지금 이 시간에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도하시고 목자의 기도를 받으면 그 죄를 사해 주신다고 지금 말씀해 주고 계시거든요."

 

(자매의 언급을 따라 이재록 목사가 대사면의 기도를 한다).
이목사: 아바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시 오마 하시오니 감사합니다. 또한 저희들의 허물, 죄 또 용서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시간에 회개한 대로 다 용서해 주옵소서. 아버지, 용서해 주시오니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모든 허물 죄 용서해 주시오니 감사하옵니다. 지금까지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지금까지 다 용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 이렇게 임재하시오니, 저희들에게 이런 큰 축복 주시오니 감사합니다. 아버지, 죄 사함의 큰 축복 주시오니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이목사: 지금 여러분들이 아버지를 뵙고 싶으실 텐데 화면이 지금 너무 안 비춰줘요. 아까 내가 방송실에 들어가서 저번에 오실 때는 화면만 고정시켜 놔 가지고 화상으로 보는 분들 전국에 보는 분들도 이 층에서 다른 성전들이 영안이 안 열린 분들은 전혀 모르니까 답답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성도들 한 번씩 비춰 주고 찬양하는 것 한 번 비춰 주고 그리고 이쪽으로 아버지 보좌에 고정시키라고 했는데 오늘도 우리 아버지를 뵐 수가 없잖아요. 비디오 좀 아버지 보좌 있는 대로 해서 하나님 아버지 지금 계시는 데 보좌 쪽으로 좀 선명하게 비춰주세요. 그리고 여기 양희정 자매님(하나님 재림을 실황 중계하는 자매를 뜻하는 듯하다: 녹취자 주) 설명 좀 해주고요.

 

이목사: 선명하게 비춰 주세요.

         
여신도(양희정): 지금, 일곱 촛대에 가운데가 하나님 보좌, 하나님이 지금 좌정해 계시거든요. 앉아 계시고요. 그리고 그 우편에는 지금 당회장님 있는 쪽 우편은 주님 앉아 계시고요. 그리고 좌편에는 지금, 당회장님 영이 앉아 계십니다. (카메라 방향을 지시하며)조금 더 밑이요. 바닥까지 내려와 있어요. 지금. 윗단 바닥까지 내려와 있구요. 바닥은 에메랄드 같은 보석들로 쫙 덮여 있구요. 그리고 양 옆에 열두 천사장, 쫙, 좌편으로 열두 천사장, 우편으로도 열두 천사장이 쫙 있습니다.

 

이목사: 스물 네 천사장도 있는데 여러분 잘 보세요.

          
여신도: 그리고 네 기둥에는요, 저희 교회를 너무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여 주신 전사들이 큰 기둥 양쪽에 지금 자리해 있고요. 잘 보시면요 기둥에 지금 전사가....

         

이목사: 보입니까?

         

여신도: 기둥만큼 키가 커서 기둥 뒤에 머리가 있구요. 그리고 투구를 쓰고 있어요(신도들 '아멘'한다). 그 다음에 팔은 굉장히, 굉장히 뭐라 그래야 되지. 되게 튼튼하거든요. 그래서 오른편에는 창을 들고 있구요, 왼편에는 방패를 들고 있습니다.
          

방송실 관계자: 지금, 전자봉을 준비해 둔 게 있을 겁니다. 그것으로 좀.

          

이목사: 전자봉으로 좀….

방송실: 전사 모습이 지금 화면에 나온 것이거든요. …레이저 봉으로 비춰 주시면 이해가 좀 빠를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목사: 레이저 봉 누가 갖고 있어요?

이목사: 그리고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은 비추지 말고 비디오를 이렇게 해서 설명을 해야 되겠어요. 아버지 보좌 있는 데는. 레이저 봉으로 비추지 마세요. ...

 

여신도: 예, 지금 전사를 말씀드릴게요. (기둥 부분을 레이저 봉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한다: 녹취자 주)이 부분이 머리입니다. 그리구요. 이렇게 팔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쪽에는 창을 들고 있어요. 이렇게. 이쪽에 방패를 들고 있습니다. 이쪽에 여기 몸이구요. 굉장히 건장해요. 그래서 이렇게 팔을 보면 다 근육도 보여요. 그리고 이렇게 몸이 있구요. 여기에 벨트예요. 벨트 부분. 발이 있는데요. 이렇게 반바지 식으로 로마병정같이 그런 옷을 입고 있고, 다리가 다 보입니다. 여기 지금(신도들 환호성과 박수). 그런데 전사가 여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도 있고 여기도 있고요. 이쪽 기둥, 이쪽 기둥, 네 명이 있습니다. 굉장히 키도 크고요. 그리고 굉장히 눈을 보면 무서워요. 그래서 몸은 움직이지 않지만요 눈을 한 번 확 돌리면요 사방을 다 파악을 해요. 그래서 두루두루 다 살피고 그러니까 우리 교회 다 지키고 있거든요. 하나님께서 특별히 저번 주 주일부터, 월요일 쯤에 보내 주셨어요. 선물로. …

 

방송실: 그러니까 지금 설명하는 기둥이 예전에 베드로 선지자가 있었던 기둥이거든요. 그것을 참작해서 보시면 더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여신도: 눈을 보시면 굉장히 무서워요. 그 만큼 저희 교회 성도들 하나 하나 생각까지 지키고 있는 전사예요. 어느 곳에 있든지 다 지켜주고 계시는 분이예요.
                  

이목사: 보이세요? …아버지 보좌 다시 해서 아버지를 선명하게 성도님들이 볼 있도록 아버지 보좌 쪽으로 가까이 비디오를 비춰, 보좌를 더 가까이. 아버지 계신 곳으로.

                    

여신도: 좀 더 밑에 거든요.

          

이목사: 방송실을….

       

여신도: 촛대 있는데요.
         

한 신도:(기자 옆에 있던 신도) 비춰도 까막눈이어서(보이지 않는다는 뜻임)….

           

여신도: 촛대하고 성경책 있는 쪽을 축복해 주고 계시거든요. 그리고 보통의 경우 선지자들이 뒤쪽에 서 계시는데요. 오늘은 친히 이 앞쪽으로 해서 광경을 목도하려고 앞쪽에 둘러서 앉아 계십니다.

 

이목사: 더 가까이 앉았나요? 멀리 떨어져 보이는데.

   

여신도: 아버지께서요 이렇게 앉으시고 팔을 양쪽에 걸치셨어요. 지금, 지금 이런 모습을 하고 계시거든요. 앉으셔서 팔을 이렇게 걸치시고 편안한 자세로 웃으시면서 저희들을 보고 계세요(이 때 여자가 설명한 하나님이라는 형체의 자세는 소파에 팔을 길게 옆으로 걸치고 앉아 있는 모양이라고 한다: 녹취자 주). 보시기 바랍니다.

  

이목사: 밝히 보세요.

 

여신도: 눈에 굉장히 강한 빛을 보이고 계시고요. 그 다음에 두루 눈동자를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성도들을 다 둘러보고 계시거든요. 그리고서 당회장님과 비슷한 미소를 짓고 계세요(하나님이라는 형체의 웃음이 당회장님의 미소와 비슷하다는 말이었으며 이 말에 신도들은 아멘으로 화답한다: 녹취자 주). 옆에서 주님도 같이 웃고 계십니다. …지금 조금씩 나타나고 있거든요. 형태! 빛으로요. 지금 형태를 눈으로 보일 수 있게 형태로 보여 주고 계세요. 좀 더 밑으로 밑까지 보좌가 임해져 있거든요. 그리고 조금만 더 크게 해서 예, 지금 정확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밑바닥도 너무 너무 화려하고 아름답고 금꽃 보석들이 빽빽이 바닥에 붙혀져, 수놓아져 있거든요… 지금 고개를 이러시고 웃고 계세요. '허허허' 하고 웃고 계세요. ...

 

이목사: 잘 못보신 분 계시면 잘 보신 분들이 옆에서 본 것을 설명해 주세요. 옆에 분들에게.

   

여신도: 조금 더 밑까지 보여 주시면 밑바닥에 보석들이 빽빽이 둘러져 있는 것을 보실 수 있거든요. ... 촛대 바로 위에 사람들 서 있는 데 있죠? 그 쪽이 머리입니다. 아버지 머리이시구요. 지금 우리가 아버지를 뵐려고 있으니까 아버지께서 사진 찍을 때 우리가 예쁘게 준비하는 것처럼 지금, 딱 고정 자세를 취하고 계세요. 7월 3일에 오셨을 때 그때 말씀해 주셨는데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눈을 볼 것이고, 코를 볼 것이고, 입을 볼 것이고 그 다음에 얼굴을 볼 것이라고 이렇게 말씀을 해 주셨어요. 그 다음에 온 몸을 볼 것이라고 이렇게 말씀을 해 주셨거든요. 눈 반짝이는 것 보이세요? 지금 눈 반짝반짝하고 있는데 양쪽에서 그리고 눈동자를 이렇게 약간 당회장님하고 비슷, 너무 흡사해요. 약간 둥글게 이렇게 된 것처럼 이렇게 되어 있고 웃으실 때 그리고 눈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그런 모습이 당회장님하고 너무 흡사합니다. 웃으실 때도 입술도 너무 비슷해요.

형태가 너무 진하게 나타나고 있거든요. 어, 지금 일어나시려고 하세요. (비디오를) 좀더 넓게 잡아 주세요. 지금 일어나셨거든요. 앞으로 지금 나오셔서 가운데 계세요. 지금. 거기 가운데 계세요. 빨간 꽃 가운데 서 계세요. 지금(신도들 박수가 터진다)… 옷이 이렇게 나풀거리는 것을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이렇게. 옷이 이렇게 통옷이라서요. 이렇게 탁 가시면 너무너무 부드러워서 자연스럽게 옷이 약간 나풀거리거든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돌아가서 앉으셨구요. 이제 마무리를 될 것 같아요. 보좌에 가서 앉으셨거든요. ...

 

이목사: 에, 여기 주의 종님들 쪽으로, 단 위는 많이 보는 것 같은데 앞쪽도 그렇구요. 사모하시는 분들, 준비되신 분들도 많이 보신 것 같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 하나님을 본다고 했습니다. 더욱 우리의 마음을 청결케 해서 다시 오마 하셨으니 다음에 또 오실 때에도 또 그때는 전부가 뵐 수 있도록 신부단장, 기름 준비 잘 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 다시 온다고 약속해 주셨는데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박수로 크게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신도들 박수 터짐).

 

(월간<교회와신앙> 1999년 1월호)


1. 유대교

 

1) 유일신 신앙
헬라 정신은 인간의 이성을 통하여 하나님을 찾으려 하였고, 세계와 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설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반대로 하나님을 통하여 인간과 세계와 삶을 판단하려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계시인 성경을 통하여 자신의 모든 뜻을 알리셨다고 믿었다. 그들에게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며 자기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모든 일을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포로 시대 이후 하나님의 초월성을 보존하려고 했다. 그들은 주전 3세기부터 성경을 낭독할 때에 "야훼"라는 이름을 읽지 못하게 하고 "아도나이(주님)"란 말로 대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에는 "야훼"를 "큐리오스"(주님)로 번역하였으며, 아람어로 번역할 때에는(탈굼) "야훼"를 "메므라"(말씀)로 번역하였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른 신들 중에 하나로 전락시키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따라서 대제사장은 제사를 드릴 때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얼버무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게 하였다. 일부는 이러한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을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세키나"(구름)나, 그의 "독사"(영광)를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신이나 음성을 통해서 자신의 택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다고 한다. 그들은 유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지식의 근본으로 삼았으며(잠 1:7),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항상 가르쳤다(신 6:4-9).

 

2) 민족주의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장자"라고 부르셨다(출 4:22-23).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인도해 주셨다. 랍비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가르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일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모든 민족을 향한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들이 우월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인들이 율법에 순종함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게 하려 하셨던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민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특히 예루살렘에만 머무르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스라엘을 떠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스라엘 땅에 큰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리스도 당시에는 두 개의 유명한 학파가 있었다. 하나는 샴마이 학파로서 율법의 모든 주제를 엄격하며 좁은 의미로 해석하며 가르쳤다. 샴마이는 헤롯 대왕 시절에 살았던 인물로 이교도들과 이방인들을 원수로 여겼다. 그의 학파는 이스라엘 민족만을 선민으로 생각하고 다른 모든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저주받은 민족으로 생각하는 극도의 민족주의 정신을 함양시켰다. 또 다른 학파는 힐렐 학파인데 힐렐은 바벨론 태생으로 이교도의 나라에서 살았다. 그는 뒤늦게 예루살렘에 왔는데 그의 정신에는 다소 이교도적인 요소들이 담겨져 있기도 했으며, 일반 율법사들에 비해 다소 온건한 입장을 지녔다. 그는 이방인들이 죄를 짓는 것은 그들이 죄를 짓기 원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풍습을 따른 것뿐이라고 하였다. 어떤 이들은 메시야 시대에는 많은 이방인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교도들과 이방인들도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한 선교 활동을 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속하려면 유대교로 귀화해야 하며,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해야 했다. 힐렐에 따르면 악인들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12달 동안만 고통을 받다가 그 후에는 완전히 파괴되어 없어진다고 한다. 그는 그 당시 허락된 여러 이유들로 아내와 이혼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생각을 하였다(당시에는 아내가 음식을 태웠다는 이유만으로도 이혼할 수 있었다). 힐렐은 사도행전 시대의 유명한 율법 선생이었던 가말리엘의 할아버지였다.

 

3) 율 법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자신들을 연결해 주는 것은 율법, 즉 "토라"라고 생각했다. 토라는 "율법"보다 더 광범위한 용어로서 종교적 가르침, 계시 그리고 교훈까지를 포함한다. 이 용어는 시내 산에서 주어진 모든 계시를 말한다. 이 토라는 하나님께로부터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전체 율법의 핵심적 부분인 십계명
 (2) 일반적으로 토라라고 부르는 모세 오경
 (3) 구약 전체
그들은 구약 전체를 거룩한 율법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구약 중에서도  모세 오경을 가장 중요시하였으며, 이 책은 장차 있을 세계에서도 유효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4) 구전 율법
이스라엘은 율법을 변화하는 환경에 적용시켜야 할 필요를 느꼈으며, 이러한 노력이 신약에서 "조상(장로)들의 유전"(막 7:3-그들은 '미쉬나'를 이렇게 불렀다)이라고 부르는 구전 율법을 발전시키게 하였다. 이 구전 율법은 율법을 보호하는 "울타리"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면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노동"을 구전 율법에서 39가지로 규정해 주고 있다. 이 구전 율법의 목적은 주어진 율법에 순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전 율법이 모세 때에 율법과 함께 하나님께 로 부터 주어진 것이며, 이 율법의 권위를 기록된 율법보다도 더 높이려는 사람도 있다.       

 

4) 구전의 발생과 발전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스 7:6)요,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기로 결심한 자"(스 7:10)였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할 뿐만 아니라,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였다(느 8:8). 그리하여 에스라의 뒤를 이은 서기관들은 율법의 해석을 통해 특별한 관습,의식,교훈을 연관시켰으며, 이것은 뒤에 랍비들에 의해 전승되었다.

 

 (1) 미드라쉬 
랍비들은 문서화된 율법을 해석하고 응용했으며, 이를 통해 복잡한 생활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법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규례들을 만들어냈다. 이 과정을 "다라쉬"(해석)라고 불렀으며, "미드라쉬"(주석)는 성문화된 본문에서 그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을 의미하였다. 이 미드라쉬에는 두 부분이 있었다.
 * "할라카"(걷는다)는 시민법과 종교법에 관한 규례로 되어있다. 여기서는 사람이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율법을 따라 걸어갈 것인가(할라크)를 가르쳐 준다. 다시 말해서 할라카는 구약 성경의 율법을 해석한 일종의 주석으로서 유대교의 구전, 즉 성문화되지 아니한 율법이었다.
 * "학가다"(말하다)는 율법과 관계없는 랍비 문학이다. 이는 구약의 설화를 발전시킨 것으로서 많은 전설과 민속문화들로 되어있다. 미드라쉬는 스룹바벨의 성전이 파괴되기 전에는 랍비들의 관심사였으며, 그 이후로는 그들의 점유물이 되었다.      

      

 (2) 미쉬나
랍비들은 구전과 함께 성문화된 율법을 연구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일을 했다. 이 연구 과정, 즉 구전과 성문화된 율법을 반복하는 것을 "솨나"(암송)라고 불렀으며, 이것을 "미쉬나"라고 불렀다. 미쉬나란 "그 이전 세기들 동안에 랍비들이 토론하고 결정한 것들을 조직적, 즉 주제별로 분류하여 정리한 일종의 법전"이다. 미쉬나는 주후 70년 성전이 파괴된 후에 요하난 벤 자카이와 얌미나에 있는 그의 제자들에 의해 성립되었다. 그후 2세기 초에 랍비 아키바는 할라카를 보다 치밀한 형태로 만들도록 지시했고, 그의 제자인 랍비 메이어가 다시 세밀하게 정리하고 불분명한 부분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200 직후에 사망한 랍비 유다(족장)가 미쉬나의 마지막 교정본을 만들었다. 미쉬나는 주로 그의 업적의 결과였다. 현재 미쉬나는 주제에 따라 여섯 분야로 나뉘어 있으며, 각 분야는 많은 소책자(전체적으로 63개)로 구성되었다. 그 연대는 대략 200-230년으로 추정한다. 미쉬나는 구약 성경 다음으로 가는 유대 문학의 기본 작품이며 탈무드의 기초가 되었다.

 

 (3) 탈무드
"탈무드"(배움)는 미쉬나로 구성된 편집물, 혹은 전통적인 율법을 인수한 것이다. 여기에 유대교의 학파들에게 제기된 토론과 전통들("게마라"="완성")이 추가되어 있다. 탈무드에는 "팔레스틴 탈무드"와 "바벨론 탈무드"의 두 종류가 있다. 일반적으로 탈무드라고 할 때에는 바벨론 탈무드를 말하며 이는 그 내용에 있어서 팔레스틴 탈무드보다 더 충실하다. 이것이 오늘날의 형태로 되기 위해서는 500년까지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들은 이러한 율법을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것이며,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비록 메시야 시대에 새 율법이 주어질 것이라는 의견이 제시되기는 하였지만, 그들에겐 이 율법은 죽기까지 순종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2. 유대교의 분파

 

1) 바리새파(초자연주의자)
바리새파는 하시딤(경건한 사람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그 뜻이 "분리자"란 말답게 대다수의 정치 종교적인 태도에서 분리되었다. 이들은 의식상 부정을 가져올 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엄격하게 피했다. 제사의 정결 문제나 음식 먹는 법, 안식일 계명 등에 대해 특별한 주의를 하였다. 다니엘은 하시딤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그들은 항상 소집단이었으며, 헤롯왕 시대에는 6,000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바리새파는 율법의 용감한 수호자로서 헬레니즘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담당했다. 그들의 율법은 613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248개는 긍정적이며 365개는 부정적인 것이다. 이것에 다른 많는 보조적인 명령들이 추가되었는데, 이 원칙은 아무도 깨뜨릴 수 없었다(안식일 조항만도 39개나 되었다.).

 

또한 이들은 기록된 토라, 즉 모세 오경과 마찬가지로 구전 토라, 즉 미쉬나(2세기경 랍비 유다 하나시가 편집함)도 똑같은 권위를 부여했다. 바리새파 안에는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샴마이 학파와 좀 더 부드럽게 해석하는 힐렐 학파가 있었다. 따라서 복음서 가운데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한 손가락도 짐에 대지 않는(눅 11:46) 율법사들은 샴마이 추종자로 보인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뒤에 국민생활의 재건을 위해 주도적역할을 한 것은 힐렐 학파의 요하난 벤 자카이였다.

 

2) 사두개파(자연주의자)
'사두개'란 말은 "의로운"이란 뜻의 "싸디킴"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 기원은 솔로몬의 제사장인 '사독'(삼하 8:17) 이라고 한다. 바리새인들이 중류 계층인 반면 사두개인들은 부유한 귀족층과 예루살렘에서 막강한 세력을 가진 제사장 계급을 대표하는 단체였다. 이들은 동료들에게도 이방인을 대하듯 무례히 행하며 자신들의 교사들과 논쟁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지만 일반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들은 기록된 토라의 권위를 인정했으나 구전 율법의 권위는 인정치 않았다. 바리새파에게 율법이 신앙의 중심이라면 사두개파에게는 율법이 신앙의 왜곡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헬라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아서 유대인들의 미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들은 부활, 천사, 마귀에 대한 교리를 부인했으며, 성공과 역경은 인간 행동의 결과라고 믿었다.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교리 비교>

    구                분

    바    리    새     파

    사    두    개    파

    역       사       관

    하  나 님 의   예  정

    인 간 의  자 유 의 지

    종       말       론

    영혼 불멸과 육체 부활

    부     활    부    인

    영    적     존   재

    천사와   악마의  존재

    천사와 악마의 존재 부인

    종  교  의    권  위

    구약과   미쉬나(구전)

    모  세  의    오   경

 

3) 엣센파(금욕주의자)
이 말은 "호시오스"(거룩한)라는 말에서 유래했으며, 그들은 흰옷을 즐겨 입었고, 독신을 강조했다. 어떤 그룹에서는 자녀를 갖기 위해 결혼을 허락했으나 대부분 양자를 데려다가 키웠다. 생활은 손씻는 결례, 세례, 기도 등 수도원적 생활을 했다. 율법의 해석에 있어서는 바리새파보다 더 엄격했다. 세례 요한의 생활과 그의 세례 의식 등이 엣센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947년 쿰란의 사해 사본이 발견된 이후 기독교의 고향이 베들레헴이 아니라 쿰란이라는 극단적인 주장이 나올 정도였다. 엣센파의 회원이 되려면 3년 동안의 견습기를 거쳐야 하며, 서약을 한 다음 세례를 받아야 했다. 계급은 크게 다음과 같이 나누어졌다.

 (1) 제사장
 (2) 레위인들
 (3) 이스라엘의 자녀들
 (4) 문의 개종자들(온전 개종자인 의의 개종자와 구별된)

히폴리투스에 따르면 역사의 과정에서 엣센파는 네 개의 파로 분열되었으며, 그 중 잘 알려진 것이 "셀롯당"(열심당)이다. 엣센파의 신학은 약간씩 다르나 다음의 네 가지를 믿었다.

 (1) 유일신(여호와께서 세계의 통치자이시며 모든 선의 근원이라고 믿음)신앙
 (2) 열렬한 율법 연구와 은유적 해석 방법
 (3) 엄격한 안식일 준수
 (4) 육체 부활  

 

4) 열심당
"열심당"을 "시카리이"(자객들)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옷 속에 단검을 숨겨 가지고 다니다가 불만의 대상들을 불시에 찌르고 군중 속으로 숨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세푸스는 (마 27:38)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옆에 달린 강도가 "열심당원"이었다고 말한다. 또 (막 15:7)에 나오는 바라바도 열심당원이었다. 그들은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철저히 거부했으며, 순교를 당하면서도 가이사를 "주"라고 부르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에서 악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살해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대로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하며 로마에 대항하는 외로운 투쟁을 벌였다. 

5) 헤롯당
헤롯당에 대해서는 신약에 기록된 것 이상으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은 종교 분파라기 보다는 헤롯 가문 특히 헤롯 안디바의 친구들이요 지지자들이었다. 4세기의 교부인 에피파니우스는 그들이 헤롯을 메시야로 간주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6) 서기관들
서기관들은 율법 연구의 전문가들로서 세 가지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들은 율법을 보호하고 정당화하기 위하여 율법을 연구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을 교육하였고, 율법을 배운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전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최고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에서 율법의 치리를 맡은 재판관으로 활약하였다.     

7) 산헤드린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종교 및 정치 단체였던 산헤드린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산헤드린은 "대학"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처음에는 헤롯의 통치하에서, 그리고 후에는 로마의 감독을 받으면서 그들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통치 기능을 담당했다. 구성원은 71인의 명망 있는 인사들로 이루어졌으며, 이들 대부분은 사두개파나 바리새인에 속해 있었다. 산헤드린의 의장은 항상 대제사장이었으며(마 26:57, 행 5:17, 24:1), 대제사장 다음으로 높은 지위는 성전의 군관이었다(눅 22:4,52, 행 4:1). 이론적으로 예루살렘 산헤드린(공회)은 모든 유대인들의 영적, 정치적, 법적인 문제를 관장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예루살렘 산헤드린은 하급 법정에서 해결되지 않은 사건들을 듣고 법률적인 결정을 했으며, 모세의 율법을 범한 죄나 신성모독 죄 등에 대해 판단을 하였고, 거짓 선지자를 판별하는 역할도 감당했다. 고소 당한 사람들을 취급하는 진행의 법칙은 공정성을 유지했으며, 가능한 한 고소 당한 사람의 죄를 면해 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재판할 때는 그들의 이러한 법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2. 유대교의 예배 활동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이 되도록 부르셨고, 율법을 인도하는 길과 안내자로 주셨다는 것을 믿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해 주신 일에 대해 감사하였으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율법에 순종하는 종교였다. 그러면 이 율법은 예배생활에 대하여 어떻게 지시하고 있는가 ?

 

1) 성전 예배
성전은 솔로몬 시대 이래로 이스라엘의 삶과 사상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예수님 시대에 이 성전은 헤롯에 의해 복구되었으며, 성전 안에서 무수한 희생이 드려졌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기를 원하시는 장소였다.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는 것으로 알려진 지성소에는 율법의 규례를 따라 정결케 한 대제사장만이 정해진 예복을 입고 들어갈 수 있었다. 이방인들은 단지 "이방인의 뜰"로 불리는 곳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성전에서는 제사장들이 백성들의 죄를 속하고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규례를 따라 제사를 드렸다. 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드리는 사람이나 드리는 제사장이 모두 순수한 동기를 가져야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드려야 했다. 그리고 이 희생 제사에는 기도와 고백이 동반되었으며, 잘못하거나 남에게 해를 입힌 사람은 그것에 합당한 보상을 해야 했다. 일년에 한번 있는 대속죄일은 하나님께서 백성의 일년간의 죄를 속하고 화해하기 위해 주신 규례이며, 이 예식은 대제사장이 집례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통하여 1년에 3번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절기룰 지키도록 명령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고 회상시키기 위해 유월절을 지키게 하셨고, 시내산에서 율법이 주어진 날을 기념하기 위해 오순절을 지키게 하셨으며, 광야 생활과 민족의 형성을 회상시켜 주시기 위해 장막절을 지키게 하셨다(물론 이 절기들은 농경적인 의미들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뿐 아니라 에피파네스 4세로부터 주전 165년에 성전을 회복하고 청결케 한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수전절을 지켰으며(하누카-빚의 절기), 하만에 대한 에스더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부림절을 지켰다. 신년 축제일은 하나님의 창조를 회상시켜 주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심판하시는 날이었다. 이스라엘을 이 날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비로 대해주시도록 기도하였다. 속죄일은 금식과 죄의 고백과 희생 제사가 드려졌다. 이러한 신년 축제일과 속죄일은 모두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용서의 필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시작되었다.        

 

2) 회당 활동
포로 이후 율법의 중요성 및 연구에 대한 필요성으로 인해 회당이 생겼으며, 예수님 당시에는 이미 모든 마을에 회당이 서 있었다. 그들은 이 회당에서 기도와 예배와 율법을 연구하는 일을 하였다. 예배는 기도와 율법 낭독과 설교로 이루어졌으며, 집회는 안식일과 주중 다른 두 날에 모였다. 회당 예배는 성전 예배와는 달리 제사장이 참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평신도적인 성격을 띠었다. 이러한 회당은 유대인들을 종교적이고 율법을 연구하는 사람들로 만들어 주었다.

 

경건한 유대인은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끝냈다. 그들은 일어나고, 잠자리에 들며, 출타하였다가 귀가하거나 손을 닦고 음식을 먹을 때, 또는 출생과 할례, 약혼, 결혼, 질병, 죽음, 장례와 같은 때에도 이에 수반되는 기도를 하였다. 그들은 세상을 죄악된 것으로 생각하여 자신을 세상과 단절시키고, 세상과 사회에 대하여 등을 돌리는 금욕주의적인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모든 세상은 하나님의 작품이며 따라서 이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언약 백성의 표시로서 할례를 받았으며 이를 위해서는 생명까지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혼합된 옷감으로 된 옷을 입지 않았으며, 겉 옷 단에는 옷술을 달았고, 집 문기둥에는 메주자(성구가 기록된 양피지를 담은 용기)를 달았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보호와 율법을 준수할 필요를 깨닫게 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준수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증거하였고, 창조주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였다. 이 날에는 노동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일들이 금지되었으며, 특별한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었으며,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축제의 분위기로 지냈다. 그들은 인간의 시체를 만지는 일이나, 문둥병자들이나 부정한 짐승들과의 접촉과 같이 율법에서 부정한 것으로 규정된 일들은 자신들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이 이러한 일들을 했을 때에는 율법에 따라 정결 예식을 행했다. 그들은 정결을 유지하기 위해 식사법이 준수되었고, 짐승들을 도살하는 데에도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으며, 피는 식용이 금지되었다. 또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접촉하는 것을 부정한 일로 생각하였으며, 따라서 이방에 사는 것보다 이스라엘에 사는 것을 더 좋게 여겼다. 그들은 훌륭한 유대인이 되기 위해서 율법을 알아야 했고 이를 위해 율법을 연구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율법을 연구하는 것을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율법에 무지한 자는 깊은 신앙심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땅에 속한 백성"이나, "율법이 없는 열등한 종족들"이라는 경멸적인 용어들까지 나오게 되었다.

출처 : http://www.biblenar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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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신학은 소위 '칼빈주의'에 속한다. 즉, 개혁주의이다.

하지만 필자는 개혁주의를 믿어야 구원 얻는다는 말에 대해 절대 공감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공간 복음서를 통해 만나 구원하신 자들은 대개 가난하거나 무지하거나 죄 많은 세리들과 창녀들이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바울이 이를 증거한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26-31).

 

개혁주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자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필자는 그들을 "교조주의자들", 또는 "교단주의자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들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 못지 않은 악한 자들이다. 자신들이 신봉하는 '교리'와 다르다고 하여 구원 문제까지 들먹이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도전하는 거만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가 아닌 자들은 '이단'이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어찌 더 악한 말이 있겠는가! 이들 중에는 칼빈주의의 5대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이단'이며 구원을 못 받았다고 확신하는 자들도 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 칼빈의 5대 교리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리치는가? 성경 어디에서 우리의 구원 조건은 그 많은 교리를 정확하고 자세히 다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가? 구원은 성령의 독자적인 역사로서 성령에 의해 거듭나게 될 때 영적 아기처럼 갓태어나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교제를 누리게 되는 것을 말한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 처음부터 생기는 가장 중요한 의식은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한 하나님과 예수님께 갖게 되는 감사이다. 하지만 어찌 영적으로 갓태어난 아이가 칼빈의 5대 교리를 상세하게 다 알 수 있는가? 그렇다면 수년 걸리는 신학 교육을 받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자요 이단이 되는 것인가? 그럴 리 없다.

 

바른 교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지식이 늘었다고 하여 아직 그러한 지식에 이르지 못하거나, 자신들과 다른 이해를 하는 자들을 향하여 서슬이 퍼런 자세로 '이단'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대단히 악하고 무서운 행위이다.

 

구원은 오직 믿음이다. 구원 받은 자들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믿고 교제하면서 그분의 말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배우기 시작한다. 자신은 무서운 죄인이며 오직 구원하실 이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자들이 구원 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겸손하게 의지하여 믿는 자세가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성장하는 과정에 종말론이나 교회론 등... 교리적으로 틀리게 배우거나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처럼 그대로 배우고 깨닫지 못한다고 하여 이단이 되는 것일까?

 

십자가 곁의 강도를 생각해 본다. 평생 무서운 죄만 짓고 살아온 살인자요 강도이다. 그가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 짧은 한 두 시간 내에 개혁주의 교리를 다 배웠을까? 제한 속죄를 깨달았으며 삼위일체를 '정확하게' 간파하였을까? 우리는 구원 받은 자라도 교리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문제가 있고 모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필자는 개혁주의 및 나아가 복음주의 진영(칼빈의 TULIP 을 다 받아들이지는 않는 자들)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녕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보자 되심과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위해 사는 믿음이

있다면 비록 칼빈이 가르친 교리를 다 배우거나 알지 못해도 구원 받았다고 본다.

 

어떤 교리가 더 성경적인지를 따지는 문제와 더 성경적이라고 믿는 교리를 믿고는 '나처럼 믿지 않는자'는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전자는 더 성경적이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문제이지만, 후자는 교만한 교조주의가 되는 바리새인의 길에 서는 것이다. 내 의견과 다르다고 하여 아무나 '이단 정죄' '이단 사냥'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이는 자신의 명예욕과 이권을 따지는 정치꾼들이나 하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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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기
    (Waiting in Expectation)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다릴 때는 
    우리에게 기쁨에 찬 기대가 있습니다
    기대가 없으면 우리의 기다림은 현재에서 수렁에 빠질 수 있습니다 기대를 가지고 기다릴 때, 우리의 온 존재가 기쁨으로 놀라면서 열립니다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정신차리고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잠에서 깰 때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밤이 지나고 낮이 가까웠으니 이제는 악한 생활을 버리고 믿음으로 빛 된 생활을 하십시오"(로마서 1:11~12)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오시라는 것에 대한 기쁨에 넘치는 기대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에는 활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약속이 충족될 것이라는 데 대한 기대 때문에 우리는 지금 걷고 있는 여정에 대하여 모든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 들 샘印


즐건 설날 맞으세여!^^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무궁토록 동일하신 우리 주님과 함께 열어가시는 복된 이 한 해가 되기를~!! 사랑하는 목양연가 식구님들 즐거운 설날 되시고 이 한 해도 주 안에서 모두모두 행복하세여~ 목양연가 섬기미/최송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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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인가 점쟁이인가?


  얼마 전 텔레비전의 한 프로에 오왕근이라는 청년 점술가가 출연하였다.

그는 같이 출연했던 연예인들의 과거와 현재의 문제를 쪽지게처럼 잘 집어내고 그들의 미래를 예언했다.  

모두 그의 신통력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어떤 이를 보면 그의 운이 바닥을 치고 있고 재물이 흩어지며 사람들도 그를 배신하고 떠나는 것이 보인다고 했다.

 

오왕근씨는 17살 때부터 이런 신기가 나타났는데, 하루는 학교에서 한 선생님을 보니 그가 큰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자신도 그런 기이한 체험은 처음이고 그것이 미래를 예시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아 말해주지 못했는데 그 선생님이 자신이 본대로 성수대교에서 대형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 후부터 그는 개인의 운명뿐 아니라 이 사회의 정치, 경제의 미래까지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주식이 언제 오르고 내릴지, 앞으로 어떤 사업을 해야 할지, 어디에 투자해야할지를 예언한다.


  필자는 그를 보면서 요즘 한국교회에서 활개치고 있는 자칭 예언자들이 얼마나 이 점술가와 흡사한지를 새삼 발견케 되었다. 어떤 예언자라는 이들은 기독교라는 탈을 쓴 점쟁이와 다름없다. 자녀들이 어떤 학교에 가야하고 무슨 사업을 해야 하며 심지어 어디로 이사해야 하는지 까지 예언한다.

그러니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나 미래가 불안하고 궁금할 때 점쟁이를 찾아가듯이 이런 예언자들을 찾아다니는 교인들이 꽤 많다.

 

 필자와 상담했던 한 아가씨는 예언하는 신통력이 있다는 여전도사가 자신이 사귀고 있는 청년이 결혼할 대상이 아니니 헤어져야 한다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평소 이 여전도사의 예언을 거의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그녀의 어머니가 한사코 그 청년과 결별할 것을 종용하니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하다고 했다.

 

그 청년이 불신자도 아니고 그리스도인이 혼인해서는 안 될 만한 부적격 사유가 전혀 없는데도 그는 결혼대상에서 완전히 제외된 것이다.

단순히 미래를 미리 내다보는 점괘가 그렇게 나왔기 때문이다.

과연 이러한 예언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일까?


  성경에서 이런 유의 예언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우리의 미래를 알려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미래를 모르게 하셨다.

그래서 내일 일과 염려는 다 주께 맡기고 오늘 하루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원하신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험보다는 우리의 앞날을 미리 아는 안전을 원한다.

 이것은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나 미래를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도록 우리 휘하에 두고 싶은 교만의 발로이며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의 소치이다.


  미래를 미리 안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삶은 불가능해진다.

그와 더불어 믿음의 삶 속에서 누리는 무한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며 그 선택의 책임을 다하는 인간으로 성숙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만약 우리가 원하는 대로 미래를 훤히 내다본다면, 우리는 이미 정해져 어찌 할 수 없는 냉혹한 운명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다.

운명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으니 이제 달리 선택할 자유는 전혀 없다.

 우리의 미래가 탄탄대로임을 안다면 우리는 안일과 나태에 빠질 것이며, 반대로 고통스럽고 암울한 미래가 보인다면 자포자기 한 채 그 불운한 말로를 기다리며 공포와 불안에 떠는 삶을 살 것이다.

 

알려진 미래는 더 이상 우리의 꿈과 비전을 펼칠 수 있는 자유의 전당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꿈을 앗아가고 우리를 가두는 감옥이 된다.

미래가 우리에게 알려질 때 미래는 모든 희망과 믿음과 가능성에 대해 닫힌 냉혹한 운명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자유로운 개척자가 아니라 그 미래에 의해 철저히 억압당하는 비참한 노예로 전락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알지 못하게 하심으로 우리의 자유를 보장해주시고 믿음과 소망의 삶이 가능케 하셨다.

희망찬 미래를 바라보며 사랑의 수고와 책임을 다하는 인간성숙의 기회를 제공하셨다.

 이렇게 미래를 우리 앞에 열린 상태로 놔두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춘 우리의 비전과 갈망에 의해 우리의 미래를 빚어가게 하신 것이다.

미지의 미래가 우리 앞에 하얀 백지처럼 펼쳐 있기에 우리는 그 화폭 위에 우리의 비전과 꿈의 나래를 한껏 펼쳐나간다.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우리에게 숨기심으로 장래에 예비해 두신 풍성한 은혜의 깜짝쇼를 즐기게 하신 것이다. 

 
  미래가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았기에 우리 앞에는 놀라운 자유의 길이 열려있다.

우리가 결혼할 대상은 무한히 많다.

이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고 저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과 결혼하도록 운명론적으로 점지해 두셨다고 생각하기에 그 사람을 꼭 찾아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금지된 미래를 엿보려는 강한 충동을 느낀다.

기도를 통해 계시를 받거나 예언자들의 신통한 예측을 듣기 원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

그러나 그 예정하신 것을 우리가 미리 다 알지 못하도록 예정하셨다. 마치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미래가 결정되기라도 하듯이 우리의 자유를 전혀 침해하지 않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우리의 미래를 예정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책임 있게 우리의 자유를 활용한다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두 사람의 결혼대상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둘 다 좋은 상대이고 호감이 간다고 하자.

실제 이런 상황은 드물겠지만 한 번 가정을 해본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둘 중에 한 사람은 분명 하나님이 정해둔 나의 배필이 아니니 그 사람을 어떻게 해서든 속출해내야 할까? 아무리 기도를 해도 어느 쪽을 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예언자를 찾아가야 하나? 열심히 기도하고 최대한 지혜를 모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가늠해보는 노력이 물론 필요하다.

성령님께서 당신의 마음과 판단을 인도하여 점차 어느 한 쪽에게 더 끌리게 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없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리 애써 봐도 확실한 판단이 서지 않을 때는 두 사람 중 누구를 택하든 그것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이 정해두신 사람을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당신의 미래를 펼쳐갈 수 있는 지혜이다.


  성경에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는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여기에는 전혀 유도리가 없다.

그러나 성경에 계시되지 않은 하나님의 뜻, 예를 들어 어떤 직장을 택하며 누구와 결혼하며 자녀를 몇을 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선택의 자유가 주어졌다.

하나님의 뜻이 꼭 이 직장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못박아버릴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길을 택할 수도 있고 저 길을 택할 수 있도록 우리의 미래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융통성을 허용하신다.

어떤 길을 택하든 하나님을 중심한 삶의 목적과 원리 가운데 내린 선택이라면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정해진 미래로 우리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묶어두지 않으시고 미래를 열어두셨다.

당신은 A와 결혼할 수도 있고 B와 결혼할 수도 있다.

둘 다 하나님이 금하신 결혼대상이 아니라면 누구와 결혼하든 하나님께서 그 결혼을 축복할 것이며 그것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될 것이다.

혹여 A가 하나님이 정하신 배필인데 B와 결혼했기에 내 결혼생활이 불행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깨끗이 떨쳐버려야 한다.

그러나 당신의 자유로운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우선적으로 구하는 가운데 내려진 선택이어야 한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당신의 지혜를 최대한 활용하여 내린 판단에 근거한 선택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알려주시지 않는 미래를 미리 훔쳐보게 하여 하나님이 뜻하신 모든 유익을 앗아가며 자유를 박탈하고 믿음과 소망의 삶을 파괴하는 것은 분명한 마귀의 짓이다.

성경에 기록된 미래에 대한 예언은 모두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는 특별한 목적을 띠고 있다.

이 구속사와 직접 관련이 없는 개인의 사적인 일을 점치듯 예언하는 예를 성경에서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박영돈 교수



합동 '총회 이단·사이비 규정 지침서' 전문 중

제1장 총 칙

제1조(명칭) 본 지침서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이단(사이비) 규정 지침서라고 한다.

제2조(목적) 본 지침서는 이단(사이비)에 대한 규정을 명확하게 함으로 총회 산하 교회와 성도들을 그릇된 교리와 가르침으로부터 보호하고 정통 기독교 진리를 수호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제3조(범위) 본 지침서는 이단(사이비)에 대한 규정 지침으로 서 이단(사이비)에 대한 규정 및 해제에 관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적 차원의 기준을 제시한다.

제4조(정의)

1. 이 단:성경과 역사적 정통교회가 믿는 교리를 변질시키고 바꾼 다른 복음을 말한다.

2. 사이비:이단적 사상에 뿌리를 두고 반사회적, 반윤리적행위를 하는 유사기독교를 말한다.

3. 이단성:이단적, 사이비적 요소가 많아“정도(程度)의 측면”에서 사용할 경우“이단성”이라는 용어로 대체할 수 있다.

제2장 이단 사이비 규정 및 해제 지침

제5조(규정 지침)

1. 성경을 기준으로 한다.
성경을 기준으로 해서 규정하며 사람의 생각을 잣대로 해서는 안된다.

2. 개혁주의 정통 기독교 교리를 기준으로 한다.
정통 보수적인 역사성을 가진 건전한 기독교 교리와 개혁주의 신학 및 신앙에 의거해야 하며 개인의 체험이나 신앙에서 나온 교리나 신학과 신앙은 배제한다.

3. 거룩한 공회인 본 총회가 주체가 되어 규정한다.
역사적으로 신학적 권위와 공신력을 인정받는 공회가 규정하여야 하며 개인이나 사사로운 단체가 규정해서는 안 된다.

4. 연구자는 본 교단의 건전한 신학자로 구성되어야 한다.
연구자는 본 교단의 신학교 조직신학, 구약학, 신약학, 역사학, 실천 신학 교수 및 현장 목회자들로 구성되어야 하며 특별한 경우에는 충원될 수 있다.

5. 피해 상황이 있어야 한다.
교회와 가정과 사회 안팎의 피해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야 한다.

6. 과거, 현재의 활동을 사실하여야 한다.
이단적인 요소가 있는 교리나 주장의 과거와 현재의 활동이 종합적으로 검토되어야 하며 과거에 가르쳤거나 현재도 가르치며 목회하는 지의 여부를 확인한다.

7. 명백한 자료를 근거로 한다.
그들의 교리서, 설교, 성경공부, 강의, 영상, 기사, 서적, 증인 등의 자료를 기초로 한다. 잘못된 정보에 의한 자료가 없는지 엄밀하게 검토하며 타 교단의 자료를 참고한다.

8. 전문가의 포괄적 연구를 참고로 한다.
전문가의 성경적, 교리적, 신학적, 역사적, 교회적, 윤리적, 사회적 조명을 참고로 한다.

9. 본인의 소명이 있어야 한다.
아주 명백하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 여러 자료에 대하여는 본인의 소명기회가 주어져 확인을 할 수 있어야 한다.

10. 본 교단 총회의 결의가 있어야 한다.
본 교단 총회의 적법절차에 따른 결의가 있어야 한다. 자료집은 타 교단의 자료도 참고한다.

11. 하회는 총회의 결의를 따른다.
노회나 교회는 총회의 결의를 준수하여야 한다. 총회가 정한 적법절차에 따라 조사 및 해당 여부를 결정하되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을 따른다.

제6조(해제 지침)

잘못된 보고와 자료에 의한 이단 규정은 재심될 수 있으며 진정으로 회심한 이단은 회복시켜줄 수도 있어야 한다. 성령의 역사로 회개한 경우에는 주의 깊게 살펴보고 공적인 사죄와 신앙고백으로 적법 절차에 따라 해제할 수 있어야 한다.

1. 공인된 상담소의 상담을 통해 치유를 받아야 하고 정상적인 신앙교육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

2. 공적인 사죄가 있어야 하며 공회 앞에서나 언론 매체를 통한 공적인 고백이 있어야 한다.

3. 일시적이거나 형식적인 회심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상당한 회복 기간이 있어야 한다.

4. 평신도는 회심교육을, 현 이단의 교주나 목회자의 경우는 본 교단의 총신에서 규정에 따라 신학 교육을 다시 받아야 한다.

5. 공회 앞에서 변증을 하되 합법적인 절차를 따라야 한다.

6. 본 교단 총회에서 결의한 이단(사이비)에 대한 해제는 반드시 거룩한 공회인 본 교단 총회의 헌의와 결의로만 한다. 본 교단 총회에서 결의한 이단 사이비규정은 그 어떤 경우에도 타 교단이나 기관, 언론, 연합체 등에서도 절대 해제할 수 없다.

7. 총회의 하회는 총회 결의를 따라야 한다. 노회나 교회는 총회의 결의를 준수하여야 한다. 하회는 총회에 준하는 적법절차에 따라 조사 및 해당 여부를 결정하되 본 지침서와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을 따른다.

제3장 이단 규정 기준 및 시행 세칙

제7조(이단 규정 기준)

1. 성경
성경의 가르침을 표준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한 개인의 판단이나 신학적 견해가 이단을 정의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2. 교리와 신학
이단 사이비는 본질적으로 교리적인 문제로서 성경과 역사적 정통교회가 믿는 교리를 변질시키고 다른 복음을 믿는 것을 말한다. 근본적으로는 성경 66권이 이단의 판단 기준이며 근거이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사도신경에 의존하며 신학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의 정통교리를 판단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총회가 따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신앙문답서 등 또한 이단을 판단하는 기준의 근거로 삼는다.

3. 기독교의 근본원리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 하나님의 긍휼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을 포함한 다음과 같은 사항이다.

1) 성경관에 대하여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신자의 삶의 규범이며 동시에 삶의 법칙이다. 그리고 신앙의 근거는 개인 체험이나 특별한 예언에 의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둔다.

2) 하나님의 계시사상에 대하여

자연계시와 초자연(특별)계시로 구분하고 초자연(특별)계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은혜를 베푼 역사적 사건을 뜻한다.

3) 하나님에 대하여

성부, 성자, 성령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은 본체와 능력과 영원성에 있어서 불변하시며 동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는 인류역사의 주권자이시며 창조주요, 섭리의 주요, 구원의 주요, 심판의 주이시다.

4) 인간이해에 대하여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타락이 원죄로 그 후손들에게 전가되어 본질상 전적으로 부패하여 영적으로 무능력한 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얻으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은혜를 입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는 자녀가 되었으나 아직은 온전한 모습이 된 것은 아니다.

5)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 양성을 가지고 있다. 초대교회 영지주의자들처럼 그리스도의 인성을 간과하고 신성만을 강조하거나 반대로 인성만 강조하는 것도 올바르지 않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확실히 믿는다.

6)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을 믿는 것 또한 중요한 기준이다. 고린도전서 15장은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을 확증해 준다.

7)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인류의 유일한 구세주이시다. 예수 외에는 구원받을 만한 그 어떤 이름도 없다(요 3:16; 행 4:10-12; 행 16:31).

8)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로서 속죄제물이 되셨음을 믿는다(요 14:6; 히 4:14-16; 히 9:23-28).

9) 구원에 대하여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인간의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다(롬 1:17; 롬 3:19-31).

10) 교회에 대하여
지상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도들은 그 몸의 각 지체로 공동체를 이룬다. 신자는 지상에 세워진 교회에 속하며 교회가 제시하는 복음적인 사역에 헌신 봉사해야 한다.

11) 종말에 대하여

종말론과 천국사상은 지상의 천국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믿는다.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을 믿으며 그리스도가 오셔서 심판하실 때까지 성도들은 신실한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한다.

12) 성도의 신앙과 삶에 대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언약으로 계시하셨고 성취하셨으며 미래의 것들에 대하여 성취해 가신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하신 것들을 신뢰하며 성취하실 때까지 소망하여 인내하고 기다리며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그 명령을 따라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계속>


[ 고경태 기자 ktyhbg@hanail.net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brentry@hanmail.net
세상의 빛, 시포커스( www.cfocus.co.kr )


제4장
그리스도의 지체 사역

하나님의 성회의 근본진리에 대한 성명의 첫 번째 조항은 성경의 중요성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있는 성경은 하나님에 의하여 축자적으로 영감되었으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이며 무오하고 권위있는 행위와 믿음의 규범이다.”(딤후3:15-17, 벧1:21, 살전2:13) 이러한 원리를 고수하는 교회나 개인은 안전한 기초 위에 있다. 이것으로부터 이탈될 때에는 언제든지 그 결과는 실패일 뿐이다. 모든 사람이 성경을 믿음과 행위의 권위있는 규범으로 여겨야 하지만 특히 부흥운동이 확고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고수하는 것이 중요하다.
부흥이 있을 때에 하나님은 자주 교회에게 무시되고 있는 진리에 대하여 상기시켰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 극단적인 곳으로 나가기가 쉽다. 어떤 사람은 부흥의 교리를 거부할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은 지나친 열심으로 성경의 가르침의 범
위를 넘어가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극단은 해로우며 그리스도의 대의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한다. 부흥의 결과로서 그 동안 강조 되어온 진리 중 “지체사역”(Body ministry)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불행이도 이러한 진리를 잘못 적용하거나,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극단으로 나가는 경우가 있었다.

지체사역의 타당성
지체사역에 관한 진리는 원래 성경적이다. 성경의 여러 구절에서 교회는 사람의 몸과 비교된다. 이러한 사실은 주님과 그리고 동료 신자들과 가지는 살아있으며 친밀한 관계를 설명해준다.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엡5:30) 성경은
몸의 머리됨이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엡4:15, 5:23,32, 골1:18) 몸은 하나이며 그것이 분리되어서는 안된다.(고전12:26, 엡2:16, 4:4) 그러나 몸이 하나인 반면 그 몸은 여러 지체를 가지고 있다.(고전12:14) 그리고 이 지체들은 서로를 돌본다(고전12:25,26) 지체들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사역하며(엡4:15,16) 그것을 보전하며 섬기는 것을 추구한다.
비록 몸의 지체들이 다르며 직분, 사역, 기능에 있어서 다르다 할지라도(롬(12:4) 여전히 몸의 일부이다. 지체들은 하나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고전12:18) 우리가 지체사역에 대하여 말 할 때는 이에 대한 교회의 전 사역을 생각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돕기 위해서 교회에 주신 사람들의 사역을 포함하는데 이들의 사역의 실제이다. 즉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다.”(엡4:7-16참조) 그것은 또한 모든 신자들을 포함하는데 각각의 신자는 성령의 은사나 혹은 영적 사역의 다른 모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어떤 구절에서는 지체 관계에 대한 언급이 빈약하지만 지체사역이 다음과 같은 상호 인격적 기능을 포함하는 것은 명확하다. 즉 위로와 격려하는 것(고후1:4, 살전4:18, 5:11), 권고하는 것(히3:13, 10:25), 기도하는 것(엡6:18), 사랑하는 것(요일93:23), 대접하는 것9벧전 4:9),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봉사하는 것(벧전4:10), 충고하는 것(롬15:14, 골3:16)등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에 관하여 많은 가르침을 제공하고 있지만 개념의 양극화, 강조, 실시 등이 때때로 나타나는 것 같다. 한 극단은 몸의 지체들에 의한 표현과 참여를 제한하는 경향이 있고 반면에 다른 극단은 성령의 참된 움직
임보다는 인간의 개성과 지도에 의존하는 인위적인 참여를 개발하는 경향이 있다.

지체사역을 제한하는 것의 위험성
교회가 마땅히 조심해야 할 위험성들 가운데 하나는 신자들의 사역을 제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몇몇 영역에서 그리스도 몸의 모든 지체들로 하여금 섬기고 표현하도록 격려하는 것을 방치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성령의 나타남을 믿는
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들은 공중 예배 때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 이것은 지체들이 유용한 기능을 완전히 거부당하는 데까지 이르는 극단으로 나갈 수 있다.
어떤 교회에서는 조직을 유지하는 데에만 너무나 많은 정력을 낭비한다. 목사들이 모든 사역을 감당하고 대부분의 지체들은 소극적이다. 장려하는 강조점은 지체들의 영적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너무나 많은 활동들이 세속적인 마음
을 향하여 돌려졌다. 때대로 그냥 계속되는 것 자체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는 경향도 있다. 원대한 프로그램에 고정되는 것은 개인의 창조성을 대신하고, 정통은 현실을 대신하게 된다.

지체사역을 남용하는 것의 위험성
지금은 성령의 바람이 자유롭게 부는 시대이다. 하나님은 그의 주권으로 놀라운 일을 행하고 계신다. 이것은 많은 교회들과 교회의 지체들에게 새 생명을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부흥 이전의 조건을 돌아보면서 영적인 생명력이 없는 것에
대하여 조직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교회 조직에 대한 환멸 때문에 조직된 교회나 교파적인 교회를 피하고 그러한 조직을 한쪽에 젖혀두는 경향이 있다. 가라지를 태우려는 열심 때문에 알곡가지 날리게 된다. 전통은 신성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주류에서 벗어난 소위 지체사역의 접촉을 추구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것들은 이 나라의 이쪽에서 저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태이므로 이러한 변칙적인 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쉽지 않
은 일이다.
예를 들면 어느 지역에서는 조직적인 예배를 위하여 면밀하게 준비하는 것 대신에 소위 지체사역이 기다리는 형태의 모임(waiting-type meeting)을 연습하는 것으로부터 개발되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모든 예
배시에 언어적인 은사가 나타나야 한다고 믿는다. 아직도 어떤 사람은 모임이 있을 때마다 비록 지도자가 그룹 중에서 개인들에게 요청해야 하지만, 성령의 모든 은사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때때로 사람들은 지도자에 의하여 개인들에 관한 소위 예언을 하도록 지시를 받기도 한다.
이러한 지체사역의 다른 형태로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경험과 잘못을 고백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자기들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 극단적으로 직접적인 것이다. 이것은 이 성경적인 민감도 훈
련 기술(sensitivity-training techniques)에 근사한 때가 여러번 있었다. 아마 성경에서 가장 유감스럽게 벗어난 것들 중 하나는 목사의 지도력과 조직 그리고 보다 조직화된 예배를 거부하는 것일 것이다. 하나님의 주신 목회의 은사(엡4:11)를 거부함으로써 이러한 강조점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성경적인 가르침과 성경적인 경험을 유지하도록 도우려는 다른 신자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스스로 떨어져 나가고 있다.

지체사역에 있어서 균형의 필요
잘못된 것을 다루는 일 중에 어려운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진리를 떠났거나, 명확히 부정하는 경우가 아니라 진리의 어느 관점을 부적당하게 혹은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생기는 경우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우려고 시도하는 지도자들은
성령의 사역을 반대하는 것처럼 자칫 오해받기가 쉽다.
문제가 존재하는 곳에서 신자들은 이러한 자세를 보이는데 이러한 자세는 그리스도의 몸의 참된 지체들에게 예상되는 것이다. 바울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 안에서 관용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자의 가치있는 특징이라고 지적하였다.(엡4:1-3). 하나님은 그의 목적에 따라서 교회 안에 목사의 은사를 두셨다.(엡4:11-16).
만일 양이 살아남으려고 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고루 전반적으로 공급하는 곳으로 가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의 양떼는 반항적이고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목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가운데 행동하는 제멋대로 구는 사람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목사-교사 직분에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만일에 소그룹 개념에서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까지 목회사역이 연장될 수 있다면 목사의 역할은 무엇이며, 교사의 역할은 무엇이겠는가? 신약성경은 이러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지도자라고 명확히 가르친다. 그들은 독재자가 아니라 종이다. 그러나 그들은 무시되거나 제가 되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다. 성경은 신자들이 주 안에서 그들 위에 있는 자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친다.(살전 5:12,13, 딤전5:17-19, 히13:7,17) 우리는 교리적인 탈선을 피하기 위하여 도한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순수한 진리가 때때로 남용되어진다. 성경은 항상 모든 관계에서 믿음과 행위에 대한 권위여야 한다. 우리는 몸의 각 지체가 교회성장에 있어서 채워야 할 역할을 가지고 있음을 성경이 가르친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에
따라서 수행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남용이 존재할 때 목사는 사람들이 수행하는 교회 봉사를 조사해야 하며, 이러한 불법 행위를 조장하는 잘못이 있는지 살펴야 한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적절한 가르침을 제공해야 하며 그들의 봉사가 하나님의 말
씀의 가르침과 일치하도록 성경적인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에 제기된 그리스도 몸 안에서의 목회의 정당성 여부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지체들이 교회 안에 두어진, 하나님에 의해서 제정된
지도력의 한계를 넘어서 이러한 일을 수행하는 것이 조장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연합이 항상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빋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를 때까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기”(엡4:3,13) 위하여 모든 부분에 대하여 성실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다라서 살며 기능을 발휘할 때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의 사역을 이루어 드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 운동(movement)으로서 그리스도의 지체 사역의 성경적 기능에 우리 자신들을 새롭게 드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성회 일반적인 교리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


 
      능동적인 기다림(Active Waiting) 기다리는 것은 영적 생활에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기다리는 것은

      헛된 기다림이 아닙니다

       

      이때의 기다림은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기대를 우리의 마음속에

      가지고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강림절 기간에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부활절이 지나면 우리는 성령이 오시는 것을 기다리고,

      예수님의 승천 후에는 영광 속에 올

      그분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항상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발자취를 보았다는

      확신 속에서의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능동적으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리고 참으로 기쁨에 차서 기다리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기다릴 때, 우리는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그분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그분이 오실 때에 그분을 환영하기 위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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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겸 산소주의 생명운동가 이광필(49· 한국예술종합전문학교 교수)가 악플러들의 신상정보를 공개, 논란을 일으킨 투수출신 MC 강병규(40)에게 훈수를 뒀다. '한국 연예인 자살예방 콜센터'를 운영 중이기도 한 이광필은 지난해 자신과 관련한 욕, 비방 등 악성댓글을 단 네티즌 약 1200명을 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 고발해 상당수를 처벌받게 한 '악플러 퇴치전문가'다.

    이광필은 "강병규씨가 악플러들의 인적사항을 트위터를 통해 올린 것을 봤다"면서 "악플은 간접 살인행위다. 따라서 악플러들에 대한 강씨의 분노는 십분 이해한다. 그러나 악플러에 대처할 때는 순리적으로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허위사실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을 경우 명예훼손, 허위사실을 입증하기가 힘들 때는 사실적 명예훼손, 단 한 마디라도 욕설이 들어있다면 모욕죄로 고소고발하는 것"이라면서 " 이미 내가 고발한 악플러 중 상당수가 혐의가 인정돼 사법처리되고 있다. 이들은 다른 연예인들처럼 나 역시 '그러다 말겠지'하고 여유를 부리고 있다가 기소된다는 통지를 받자 부랴부랴 반성문을 제출하고, 사과문을 올리는 등 선처를 요청해오고 있다"고 전했다.

    이광필은 "악플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킬수 있기에 모든 연예인은 악플 발생시 인기하락에 연연하지 말고 강력하고 매우 신속히 고소해야 한다. 그것만이 악플을 차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며 "요즘은 사회적으로도 악플에 대한 우려가 높은 만큼 악플러를 수사당국에 고발해 처벌받게 했다고 해서 인기가 하락하는 일은 결코 없다"고 조언했다.

    특히 "악플러는 사실상 극히 일부로 이들은 어떤 일만 벌어졌다 하면 약속이나 한 듯 하이에나떼처럼 몰려가 인격살인을 저지른다"면서 "모든 사람들이 악플러에게 당당히 맞선다면 악플러들도 더 이상 발붙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광필은 "나도 조만간 악플러들을 인터넷에 공개할 것이다. 하지만 신상정보 전부를 공개하지 않고 그들의 죄상과 어떻게 처벌을 받게 됐는지만 알릴 것"이라며 "강씨의 방법은 악플러들에게 오히려 공격의 빌미를 제공해주는 것이므로 옳지 않았다. 악마를 잡겠다고 스스로 악마가 될 필요는 없다고 본다"고 짚었다..

    - 뉴시스통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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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려 3만 톤에 이르는 엄청난 양의 청어가 떼죽음을 당하는 미스터리한 일이 발생했다.

    지난 5일(현지시간) 아이슬란드 서쪽 스나이펠스네스 반도의 피요르드에서 적어도 수백만 마리의 청어가 떼죽음을 당한 채 발견됐다.

    현지언론이 ‘청어 묵시록’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한 이번 사태는 지난 연말에 이어 두번째로 이번에 죽은 청어의 양만 약 2만 5000~3만 톤으로 추정된다. 가격으로 환산하면 무려 2200만 유로(320억원).

    생물학자인 로버트 스테판손은 “해안가에도 무려 7000톤에 이르는 청어떼가 죽은 채 발견됐다.” 면서 “지난해 12월에 이어 벌써 두번째”라고 밝혔다.

    특히 청어의 떼죽음으로 인한 후폭풍도 만만치 않다. 죽은 청어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수만마리의 새들까지 몰려들고 있으며 수산업이 주력인 지역 경제에 물질적 타격까지 주고 있기 때문. 

    현지 전문가들은 이번 청어 떼죽음의 원인이 인간들의 환경 파괴로 추측하고 있다.

    스테판손 “쓰레기 매립으로 인한 산소 부족 혹은 인근에서 진행된 다리 공사의 영향으로 청어가 떼죽음을 당한 것 같다.” 면서 “보다 자세한 원인은 연구를 통해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넷뉴스팀


    황혼 /최송연
    
    산등성이에
    짧게 남은 저 햇살은
    그 빛 더욱 애잔하고
    길가 풀 한 포기조차 의미 없는 생명 없다는 데
    못다 한 일 많은 인생 해는 어쩌자고 저리도 빨리 서산으로 내닫는가
    아무 소망 없이 날개 접어야만 하는 흑암이라면 그 얼마나 더 두려울 것인가
    밤이 오면 차라리 나는 작은 별이 되겠어 주님 사랑으로 반짝이는 별 말 이야 별은 캄캄할수록 더 밝게 빛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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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다원화는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다. | ▶칼럼

    2013.02.04 13:27

     

    신명기 32: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이 알지 못하던 신들,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 너희의 조상들이 두려워하지 아니하던 것들이로다."

     

    우리에게는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다.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고 말씀하며 영원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모세는 주 여호와 하나님께 받은 계시 가운데 기도 드린다.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귀신들에게 하였으니." 이때 귀신들에게 제사한다는 것은 이방 신들을 의미한다. 타 종교의 신들을 의미한다. 없다가 생기는 "근래에 들어온 새로운 신들"을 의미한다.

     

    뉴욕에서는 목사회가 나뉘었다. WCC 를 지지하는 목사들과 반대하는 목사들이다. 한국 교회와 교단도 나뉘었다. WCC 를 지지하는 교회와 교단, 그리고 반대하는 교회와 교단들이다. 타 종교를 두둔하는 목사들이 많아졌다. 부처의 말을 설교 시간에 인용하고 논어, 맹자, 공자의 말을 인용한다. 특히 가톨릭의 테레사 수녀, 김수환 추기경 등을 언급하는 것을 무슨 멋인줄 안다. 이 땅의 종교들은 서로 합쳐지고 있다. 길은 달라도 목적지는 같다고 하면서 서로 인정하는 추세다. 나아가 뉴에이지의 신 개념이 교회에 깊숙하게 들어오고 있다. 요가 및 관상 기도를 수단으로 하여 중세 교회로 돌아갈 뿐 아니라 힌두교 등과 길이 열리며, 따라서 뉴에이지와 같은 색깔을 띄고 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그러한 추세를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귀신과 나를 함께 섬긴다"고 가장 분노하신다. 이 땅의 교회는 가짜들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한,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영적 순결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생명바쳐 섬기는데 있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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