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애, 씨앗을 뿌리는 시기
(Our Lives, Sowing Times)


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짧은 생애는
씨앗을 뿌리는 시기입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이세상에서
우리가 살아온 것은 모두 허사일 것입니다
 
우리 생애의 기쁨과 아픔이 모두 헛된 일이며
또 썩어질 우리의 육신과 함께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면,
어떻게 우리는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우리를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이, 우리에게 나타나셨던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입으셨던 것과 똑같은 그 육신이,
그대로 멸망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이 세상에서의 생애란 부활한 육신의 씨앗을 심는 시기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몸은 묻히면 썩지만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천한 몸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아나며
영의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고린도전서15:42~44)

우리가 이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놀라운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매순간을 영원의 씨앗으로 여기고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음을 알게 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선택의 전개 / 존 칼빈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요13:18)"

바로 이 상황 -제자들이 끝까지 견뎌낼 것이라는 점- 을 예수님은 제자들이 택함을 받은 덕으로 돌리십니다. 인간의 미덕은 너무 약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손으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산들바람만 불어도 매번 흔들리며 약한 공격에도 쓰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이들을 다스리시므로 사탄이 사용할 수 있는 그 어떤 장치도 그들이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끝까지 견디는 것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인내뿐만 아니라 그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경건의 시작도 선택의 덕으로 돌리...십니다.

어떻게 해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게 됩니까? 그것은 그 사람이 선택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진보를 이루며 선하고 거룩한 삶을 지속적으로 영위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으로 시작된 역사를 완성 시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변치 않기 때문이 아니면 어디에서 비롯된 일입니까? 요컨대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와 불신자들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 입니다. 전자는 양자의 영에 의해 구원으로 인도되는 반면 후자는 아무런 통제를 받지 않는 육체대로 인해 멸망으로 치닫습니다. 그렇치 않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을 것입니다. "너희는 각자가 어떤 사람이 될지 깨달으라."그러나 신자들이 어느 것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가룟 유다와 다른 것은 자신의 미덕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인정하도록 예수님은 그들이 세움 받은 기초인 값없는 은혜로 그들 앞에 그러한 선택을 제시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모든 부분은 선택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읍시다.

포도나무선교회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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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성전을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거의 20만 명이나 되는 인원이 7년 반 동안 건축한 솔로몬 성전은 그 크기가 길이 60 규빗, 너비가 20 규빗, 높이가 30 규빗입니다. 1 규빗이 45 센티미터니까 대충 생각해보면 길쭉하면서 높이가 높은 아담한 4~5층짜리 빌딩 사이즈입니다. 그리고 그 입구에 폭 20 규빗, 길이 10 규빗 되는 높다란 낭실(현관)이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두는 너비, 길이, 높이가 각각 20 규빗 되는 정육면체 모양의 내소가 있습니다. 성전 안에 또 성전이 들어있는 모양새입니다. 그리고 내소 안에는 높이 10 규빗 되는 크기(사람 키의 3배 가까운)의 커다란 그룹천사 둘이 지킵니다. 온갖 장식들과 값비싼 백향목과 전나무의 목재와 빛나는 황금으로 싸여 있습니다. 내소 안이 마치 보물창고와 같이 화려하고 온갖 보화들로 가득한 셈입니다.

솔로몬은 놋 세공의 뛰어난 장인인 히람을 두로에서 초빙하여 성전의 온갖 기물을 만들게 합니다. 야긴과 보아스로 알려진 두 기둥은 높이 18규빗(8미터가 약간 넘음)에다가 다시 그 위에 얹은 5규빗 높이의 머리 부분을 더하면 그 높이는 모두 10미터가 넘고, 기둥의 굵기는 성인 서너 사람이 둘러서야 할 정도로 거대한 놋 기둥입니다.
물을 담는 바다는 직경이 4.5 미터나 되는 엄청나게 거대한 솥 모양으로 그 두께는 사람의 손 넓이나 되고 그 아래에는 열두 마리의 소가 둘러서서 받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 바다에는 물을 440 톤이나 담을 수 있습니다.
그 앞에는 다시 사람 키만큼이나 되는 높이의 바퀴 달린 받침대 10개를 만들고 880리터가 담기는 물두멍을 열 개를 만듭니다.

이 모든 것이 놋입니다. 사용된 놋이 얼마나 많았던지 놋의 중량을 측량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업이 발달된 오늘날도 놋(청동:구리+주석, 황동:구리+아연)이 비싼데 당시 놋으로 이 엄청난 기구를 다 만들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몇 년 전 솔로몬 당시의 놋 제련소터가 발견되었다지요.

하나님은 왜 이토록 엄청난 황금과 놋, 온갖 귀한 것으로 아름다운 성전을 짓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먼저 존귀하고 엄위하신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준비하여 주님을 맞이하며 주님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요?

둘째, 하나님의 전은 하늘보좌, 하늘나라의 아름다움을 조금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가게 될 하늘나라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집은 솔로몬성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고 굉장한 곳입니다. 다윗은 악인의 장막에서의 천 날 보다 하나님의 전 문지기로의 하루가 더욱 낫다고 하였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성전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 보다 하나님의 성전이 된 우리의 마음과 몸이 아름다운 것을 더욱 원하십니다.
우리는 마음과 몸을 아름다운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은 우리 몸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루아침에 요란하게 깨어지고 다듬어지는 것이 아니라 7년 동안 돌 다듬는 소리, 철연장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듯이 평생을 두고 은밀하고 조용하게 맞추어져가는 성전입니다.
인간들이 만든 백향목과 황금과 놋으로 된 온갖 장식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로 아름답게 이루어져가는 성전입니다.

넷째,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아름다움과 부요함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와 교회를 아름답게 세우기를 원하시며 이를 위하여 히람을 보내셨던 것 같이 돕는 자를 보내시고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성령으로 깨우치고 인도하시며, 인내와 온유, 사랑으로 열매 맺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대하며 힘쓰십시오. 당신을 성전 삼으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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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몸을 존중하고, 소중히 다루기 (Having Reverence and Respect for the Body)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몸을 사용하며, 또 잘못 사용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 속으로 그의 육신과 함께 들어올려지신 것을 통하여 우리의 몸과 다른 사람들의 몸 또한 존중하고 소중히 다룰 것을 우리들에게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의 몸을 신성한 장소로 만들고 그 곳을 거하시는 장소, 성령의 전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몸도 사랑으로 돌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상처를 감싸고 몸의 치유를 위하여 노력할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보장된 인간의 몸의 존귀함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정확한 의미로는, 아리우스주의는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였던 아리우스(Ar-ius)의 기독론을 말한다.

이 이론은 325년 제1차 니케아 회의에서, 또한 381년 제1차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정죄되었다.

이 견해와 이어지는 논의들은 반 세기 이상 전 로마 제국을 흔들었으며, 더욱 나쁜 것은 교회를 분열시켰다는 것이다.

아리우스의 견해는 얼마 안되는 그의 저작의 단편들과 그의 반대자들의 저서들을 통하여 재구성될 수 있을 뿐이다.

그의 논증을 요약해 보면, 유일하신 아버지 하나님만이 완전하시고, 태어나지 않으시고, 영원한 통일체(Monad)이시기 때문에, "독생하신 아들"은 어떤 의미에서든지

그 통일체에서 나온 종속적이고 열등한 존재라는 것이다.

아들, 혹은 로고스의 이 열등함과 종속성은 "아들이 존재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는 아리안주의의 공식으로 잘 표현될 수 있다.

아리우스는 아들을 다른 피조물과 같은 무상한 한 피조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아들이 본질적으로 신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로고스는 완전히 하나님도 아니고 완전히 피조물도 아닌 일종의 중간적 존재로 간주되었다.

반아리안주의자는 이 이론은 구원을 반신, 반피조물에게로 돌린다고 믿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하여 회의를 소집하였다.

대단히긴, 그리고 때로는 다툼을 동반한 토론 끝에 다수가 동의하는 신조가 만들어졌다.

그 신조는,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 혹은 존재를 가지신(HOMOOUSION)" 분이시며,"참된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참된 하나님"이시라고 언명하였다.

엄격한 아리우스주의자들은 아들이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동일본질(HOMOOUSION)'이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신조에는 "아들이 없었던 때가 있었다"고 말하거나 "영원하신 아들은 피조물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저주(anathema)가 붙어 있었다.

아리우스와 두 동료는 이 신조에 서명하기를 거부하므로 출교되었고, 황제에 의하여 추방당하였다.

몇 년 후,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들 때문에 아리안주의의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336년에 이르러는 아리우스는 교회와 교회의 정통적인 지도자들과의 친교를 회복하였으며,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추방당하였다.

아리우스주의자는 자기들의 기독론적 입장을 다음의 세 가지로 발전시켰다:

(1) 아노모이안(Anomoean): "비유사"라는 뜻의 헬라어에서 온 말로서 아들이 아버지와 같지 않다고 주장,

(2) 호모이안(Homoean): "유사하다"는 뜻으로, 아들이 아버지와 유사하다고 주장,

(3) 유사본질(Homoiousian): "본질에 있어서 같다"는 뜻으로, 아들이 그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는 아버지와 같지만 존재에 있어서는 같지 않다고 주장한다.

아리안주의 황제인 콘스탄티우스가 죽은 후 아타나시우스는유사본질주의자(Homoiousian)와 동일본질(Homoousion)을 주장하는 정통주의자들을 화해시킬 수 있었고

, 이는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한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그 절정에 달하였다.

"아리우스주의"라는 말은 역사적 상황에서 생겨난 다른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그 의미가 일반화 되어 로고스를 성부에 종속시키는 제 기독론을 가리키게 되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가시떨기 밭

 

마가복음 4:18-19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에 한 동안 그 말씀을 잘 따른다. 그러나 세상 염려가 들어오면 그들의 마음에는 말씀을 위한 여유가 사라진다. 또는 재물에 대한 탐욕이 들 때, 그리고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게 될 때 그들이 마음으로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새 그 흔적마저 남지 않는다.

 

“누구든지 내 입장이 되어 보면 어쩔 수 없을 거야.” “이런 상황에서 염려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거야.” “그렇게 좋은 것을 어떻게 내려놓으라는 것이지. 나는 할 수 없어.” 이러한 변명들이 마음속에 자리 잡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말씀은 더 이상 그 사람의 마음 밭에 뿌리를 내릴 수 없게 된다.

 

자아 연민은 하나님의 말씀이 결실을 맺지 못하도록 하는 주범이다. 자아 연민은 우리 안의 성령을 소멸한다. 자아 연민은 나의 모든 관심이 주님과 말씀이 아니라 오직 내 자신을 향해 집중하도록 만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만일 나를 보는 대신에 너의 문제를 보기 시작하면 나의 말씀은 네 마음속에서 질식할 것이다.”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하나님을 보는 대신에 나의 문제를 보게 만든다. 문제를 보며 두려움과 염려에 빠지게 만들면서 우리 마음속에 뿌려진 하나님의 말씀이 질식되도록 한다. 사탄은 만일 그가 당신의 눈을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문제들을 보게 하는데 성공하면 당신의 신앙생활이 무너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성경이 얼마나 자주 염려하지 않기를 경고하는지 당신은 알고 있는가? 주님은 우리의 염려를 주께 내려놓고 주를 의지하라고 부탁하신다. 또한 염려 대신에 그 상황에서 주님께 순종하기를 힘쓰다 보면 어느새 염려의 상황들을 해결해 놓으신다.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결실하지 못하도록 막는 가시들을 주의하라.

 

 

생명수나무 쉼터/한아름 


성령의 검을 가지라

 

에베소서 6 17

17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de,xasqe kai. th.n ma,cairan tou/ pneu,matoj( o[ evstin r`h/ma qeou/Å)

 

바울 당시의 로마 군사에게는 다섯 가지 종류의 칼이 있었습니다. 먼저 큰 칼이 있는데 그 칼은 주로 두 손으로 사용하는 칼이었습니다. 로마 병사는 그 칼을 주로 등에 차고 다니다가 원수가 나타나면 두 손으로 그 칼을 들고 공격하였습니다. 주로 상대의 방패를 내리치거나 또는 말이나 수레를 탄 적을 향하여 공격할 때 큰 칼을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작은 손 칼이 있었는데 우리 나라 말로는 단도라고 합니다. 그 칼은 한쪽 면에만 날이 있거나 또는 앞 부분에 날이 있는 단도였습니다. 로마 군사들은 그 칼을 사용하여 땅을 파기도 하고 과일을 잘라 먹기도 하며 짐승을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종류 칼이 더 있었는데 길이와 두께가 달랐습니다. 이러한 칼 들은 원수를 죽이기보다는 여행할 때 필요한 장비로 쓰였습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검이라고 말한 마카이라라는 칼은 매우 독특한 칼입니다. 이 칼은 원수를 반드시 죽이려 할 때 사용하던 특수용 칼이었습니다. 이 칼은 많은 연구 끝에 만들어 진 칼로서 약 50 센치, 즉 성경 표현으로 일 규빗의 길이가 되었습니다. 손가락에서부터 팔꿈치까지 정도의 길이입니다. 이 칼은 특공대들이 사용하였고 그 칼의 특징은 좌우에 날 선 검이었습니다. , 본문의 검은 마카이라는 칼이며 좌우에 날선 검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칼로 어떻게 적을 공격합니까? 이 칼은 칼자루를 잡을 때 일반 칼과 반대로 잡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내리칩니다. 또는 칼 날을 정면으로 하여 찌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이 검은 복부를 공격하는데 사용됩니다. 복부를 찌를 때는 주로 칼자루까지 몸 속 깊숙이 꽂게 되어 있습니다. 원수의 복부에 칼을 꽂으면 약 10 30초 가량 기다린 후에 그 칼을 끄집어내는데 그때 돌리면서 잡아 당깁니다. 그러면 적의 창자 및 간, 내장 등이 칼에 딸려 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그 칼이 한번 꽂혔다 빠지면 적군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칼이 바로 이 마카이라 검입니다.

 

이 칼을 사용한 예가 사사기 3장에 잘 나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를 통하여 모압 왕 에글론에게 공물을 바칠 때에 에훗이 길이가 한 규빗 되는 좌우에 날선 칼을 만들어 그의 오른쪽 허벅지 옷 속에 차고 공물을 모압 왕 에글론에게 바쳤는데 에글론은 매우 비둔한 자였더라. 에훗이 공물 바치기를 마친 후에 공물을 메고 온 자들을 보내고 자기는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부터 돌아와서 이르되 왕이여 내가 은밀한 일을 왕에게 아뢰려 하나이다 하니 왕이 명령하여 조용히 하라 하매 모셔 선 자들이 다 물러간지라. 에훗이 그에게로 들어가니 왕은 서늘한 다락방에 홀로 앉아 있는 중이라 에훗이 이르되 내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왕에게 아뢸 일이 있나이다 하매 왕이 그의 좌석에서 일어나니 에훗이 왼손을 뻗쳐 그의 오른쪽 허벅지 위에서 칼을 빼어 왕의 몸을 찌르매 칼자루도 날을 따라 들어가서 그 끝이 등 뒤까지 나갔고 그가 칼을 그의 몸에서 빼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기름이 칼날에 엉겼더라( 3:15-22).

 

아무튼 신자의 공격 무기중 원수 마귀에게 가장 큰 치명타를 주는 것이 바로 마카이라, 곧 한 규빗의 좌우의 날선 검인 성령의 검입니다. 이 검은 성령이 사용하시는 한 규빗의 좌우에 날선 검인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이 검으로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을 반드시 비참하게 제거하십니다. 사탄의 깊은 내장까지 도려내십니다.

 

그런데 본문은 성경의 검을 흐레이마 쎄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이라고 쓴 헬라어는 아주 정교하게 선택된 단어로서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 즉 객관적인 말씀. 주 예수 그리스도, 기록된 성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하여 로고스가 우리 각 개인에게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 될 때 사용되는 레이마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 성령의 검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성령이 역사 하셔서 우리 각자에게 적용되는 말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때 성령의 말씀은 원수 마귀를 죽이는 엄청난 무기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검은 영적 전쟁에서 적군 마귀를 향하여 치명적인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성령의 검이 무엇인지를 요한복음 14 26절에서 알려 주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4:26).

, 성령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 안에서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말씀이 바로 우리 각자에게 성령의 검인 것입니다. 성령의 검은 특히 말씀을 증거하는 목사에게 가장 필요한 영적 무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모두에게 꼭 필요한 영적 무기가 있다면 바로 성령의 검입니다. 여기서 너무나 중요한 사실은 성령의 검이 우리 가운데 있으려면 먼저 로고스를 아셔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잘 알아야 하고 성경을 잘 알아야 성령의 검을 휘두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로마 병사는 이 마카이라는 검을 언제나 허리띠에 차고 다녔습니다. 또는 사사 에훗처럼 바지 옆에 차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어찌하든 허리띠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 성령의 검은 진리의 허리띠인 성경과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 및 복음을 알지 못하는 자는 결코 성령의 검을 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 레마는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어떤 특별한 만남에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나에게 기억나면서 그 순간에 적용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 로고스를 내게 적용시키는 분은 성령이시며 적용된 그 말씀은 성령의 검이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그 말씀에 힘입어 의지하고 순종하면 반드시 사탄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님의 음성이 들리면 곧바로 순종하기 바랍니다. 그 음성은 성령의 좌우에 날선 검이며 바로 그 검으로 어둠의 원수를 찌를 때 엄청난 승리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성령의 검이 주어질 때 불순종하면 그때는 적에게 당하게 되어 매우 비참하게 됩니다.

 

제 인생에 이러한 경험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주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이 강력하게 기억났습니다. 그러나 그 음성을 무시하고 제 맘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바로 사탄의 공격에 무너지게 되면서 결국 엄청난 치욕과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어떤 상황에서는 그 반대로 주님의 말씀이 생각날 때 순종하며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그 순간에는 큰 손해를 입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검을 휘두르고 나면 당장 평강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탄의 역사가 물러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후 내 개인 및 가정을 비롯한 주변 전체에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검은 짧습니다. 복잡하지 않습니다. 어떤 짧은 말씀으로 내 마음 속에 계속 임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음성을 또는 그 강한 생각을 성경에 즉시 비추어 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음성이 성령의 검인지 아닌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성령의 검이면 주저없이 검을 들어 적을 내리치기 바랍니다. , 그 음성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백전 백승이며, 적의 급소를 정확하게 공격하는 백발백중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설교하는 목사님의 음성이 여러분 각자의 마음에 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바로 그 말씀이 여러분의 성령의 검입니다. 그 많은 성경의 내용중, 여러분 개인에게 주시는 성령의 검은 때와 상황에 따라 각각 다릅니다. 똑같은 설교를 들어도 각자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검은 특이하며 각각 다르게 임합니다. 그 검을 받으면 놓치지 말고 마음에 품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검을 항상 가지고 다니다가 적군을 치기 바랍니다. 그 말씀은 원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성령의 검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님 자신도 성령의 검으로 마귀와 싸우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밤낮으로 금식하며 주리셨을 때 마귀가 와서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아주 간교한 유혹이며 엄청난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으로부터 말씀을 끄집어내셔서 그 상황에 맞는 말씀으로 변화시켜 마귀를 대적하셨습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4:3-11).

, 예수님께서도 기록된 말씀 중에서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그의 상황 가운데 주시는 말씀으로 사탄을 공격하는 검으로 사용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무나 신기한 것은 본문의 마카이라 검에 대하여 신약은 더욱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1 16절을 보면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성령의 검이 예수님으로부터 친히 나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데, 이는 로고스로부터 성령의 검 레이마가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계시록 2장에는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2:12)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 예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심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주의 복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지혜를 주십니다. 이 성령의 검의 주인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성령의 검을 항상 차고 다니는 사람은 그 말씀으로 자신의 모든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깨어 근신할 수 있으며 적에게 공격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특별히 성령의 검을 그 입으로부터 내어 놓는 하나님의 종은 듣는 이들의 마음을 회개하게 하고 태양같은 주님의 권세 앞에 두려워 떨게 만듭니다. 그러한 주의 종은 그에게 주어진 성령의 검을 통해 청중의 마음 안에 숨겨진 모든 죄악들을 밝히 드러냅니다. 마치 내장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사람들의 더러운 죄악들을 드러냅니다. 그렇게 한 후에 회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에 히브리서 4장은 성령의 검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4:12-13).

 

사도행전 2장을 보면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설교할 때 성령의 검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2:37).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의 검은 원수 마귀를 제거하고 죽일 수 있는 유일한 공격용 무기입니다. 이 무기가 없으면 우리는 실제로 사탄에게 조롱과 시달림을 당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사탄은 죽지 않고 계속 공격하고 또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검으로 사탄의 공격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사탄은 그 상황에 관한한 완전하게 패배하기 때문에 한 동안 다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성령의 검을 자유롭게 구사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하는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

 

첫째, 말씀을 깊게 묵상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 읽는 시간과 그 말씀을 개인적으로 묵상하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새벽 또는 아침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그 하루를 위해 성령의 검을 취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또는 밤에 잠들기 전에 성경을 읽고 마음에 새기는 것도 하루를 주님과 함께 정리하며 성령의 검을 예리하게 준비하는 작업입니다.

 

둘째, 말씀을 암송해야 합니다. 토씨 하나까지 외는 것은 매우 힘듭니다. 또한 성경 번역도 많아졌기 때문에 그럴 필요도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말씀이 어떤 성경, 어떤 장, 어떤 절에 있는지 알 만큼 성경을 잘 아는 것은 특별한 상황에서 원수 마귀를 만났을 때 엄청난 도움을 줍니다.

 

인생이란 삶의 위기가 왔을 때 어떻게 해결하는냐에 그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지금은 다 평탄한 것 같지만 건강을 잃거나 사업이 어려워지거나 사람 관계가 너무나 힘든 상황이 올 때 성령의 검이 없는 자는 사탄에게 져서 매우 비참하게 되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평소에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하던 사람은 위기가 왔을 때 성령의 검을 휘두르며 하나님의 크신 승리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 예로 다니엘을 봅시다. 다니엘서 2장을 보면 느브갓네살 왕이 바벨론의 모든 박사와 지혜자들을 다 멸하라고 명합니다. 따라서 모든 박사들과 지혜자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친구 셋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그 상황에 적용합니다. 그는 친구 셋과 함께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느브갓네살의 꿈의 비밀을 알아내어 그 해석을 알려줍니다. 결국 가장 열악한 상황을 도리어 하나님을 알리는 최고의 기회로 만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귀의 가장 강한 공격에 승리하여 최고의 승리를 얻어낸 것입니다. 다니엘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묵상하며 살다가 위기 때에 주의 말씀을 적용하여 승리한 것입니다. .    

 

셋째, 말씀을 향한 갈급함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향한 사모함과 갈급함이 없으면 우리의 신앙은 절대로 자라날 수 없습니다. 시편 119편을 보니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119:130-131)라고 노래합니다. 우리는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함같이 우리 주 예수님의 생명수를 갈급해 해야 합니다. 만일 이러한 갈급함이 없으면 우리의 마음이 이미 강퍅하여진 것을 인정하고 간절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한 후 말씀을 향한 갈급함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하여 십자가의 복음을 정확하게 붙든 분들과 함께 성경 공부를 해야 합니다. 성경 공부란 두 가지인데 성경을 여러번 반복하여 통독하는 것이 있고, 또한 복음을 정확하게 붙든 주의 종을 통해 설교를 듣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세월이 지나면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의 로고스가 체계적으로 우리의 마음과 삶에 임하게 됩니다. 그러한 훈련이 되면 수시로 성령의 검을 사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됩니다. 성령의 검을 휘둘러 영적인 승리를 얻은 체험을 얻게 되면 다른 성도분들과 함께 자신이 체험한 성령의 검을 서로 나눠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교회 공동체가 더욱 말씀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한국에 와 보니 이 시대에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은 영적으로 쉬운 싸움이 아닌 것을 발견합니다. 사회 곳곳에 우상과 미신이 판을 치고 있고 점쟁이들과 무당들이 더욱 기승을 얻고 있습니다. 대기업 같은 경우도 돼지 머리 놓고 고사 지내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며 그 일에 동참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고 싫어합니다. 또한 고위 공무원일수록 부정부패가 심하며 또한 사회 전반에 걸쳐 비리가 만연하여 있습니다. 위로 갈수록 부정부패가 있으니 함께 하지 않으면 승진하지 못하는 등의 손해를 보거나 대인 관계가 깨지는 일이 허다합니다. 지나친 사치와 과소비로 사람들은 정신이 없고, 노인들은 건강하고 돈은 있는데 할 일이 없으니 더 많은 죄악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또한 자녀 교육이 우상화되어 있는 점, 나아가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심각한 음란과 음행, 간음, 간통등은 가정을 무너뜨리고 이혼을 합법화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물건이든 짝뚱이 많아서 속는 일이 많고 어디서나 믿고 살 수 없는 음식, 상품, 물건들이 없습니다. , 신용을 잃은 사회가 되었습니다.

 

교회도 이제 더 이상 참 교회가 많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거룩한 공동체가 교회인데, 이미 여러 교회들이 마귀에게 무너져서 오히려 세상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교회는 더 이상 정직과 진리와 거룩의 대명사가 아니라 세상 복을 얻기 위해 교양과 정직과 상식을 잃은 광신자들의 모임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교회가 세상 복을 추구하느라 복음과 성령의 검을 잃고 어둠과의 싸움을 포기하였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 때나 종교 개혁이 있던 시대, 또한 청교도 시대에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정직과 거룩의 대명사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성령의 검을 힘차게 휘둘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삶이 바로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나타나 어둠과 더러움을 차단하였던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장래는 교회에 달려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장래가 의인 10사람이 없어서 멸망한 것처럼, 요나가 탔던 배가 요나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그 많은 사람이 풍랑의 위기에 처하여졌던 것처럼, 현재 한국의 장래는 북한의 핵 개발도 아니고 미국, 중국, 일본과의 대교 정책도 아니라, 한국 교회에 달려 있습니다. , 우리가 성령의 검을 휘두르면 대한 민국이 멸망하지 않고 계속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도구가 될 것이지만, 교회가 배도하여 세상과 같아지면 이 땅에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예배와 함께 새롭게 시작하기 바랍니다. 성령의 검의 위력을 믿기 바랍니다. 성령의 검의 위력은 그 험한 십자가의 보혈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에 집중해야 합니다. 또한 성령의 검을 휘두를 수 있도록 성경을 자주, 많이, 깊게 읽기 바랍니다. 함께 성경을 읽고 깨달은 바를 나누기 바랍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외치는 주의 종의 설교를 사모하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강퍅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음과 같은 그러한 사모함이 없다면 이 시간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그러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 성령의 검을 차기로 결정하기 바랍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검이 주어질 때 곧바로 휘두르는 것입니다. , 신속하게 순종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참으로 게으르고 악한 군사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원수 마귀가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성령의 검을 휘두드기를 거절하는 죄성이 실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성을 십자가에 못박기로 다짐합시다. 성령의 검이 주어질 때 곧바로 순종하겠노라고 결단합시다. 이러한 결단과 함께 성령의 검, 즉 레이마 세우, 하나님의 말씀을 취하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데반 황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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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신약 성경을 읽다보면 “영광”이라는 말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눅 2:20)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눅 9:31)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상기 구절의 영광이 각기 다른 의미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광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어떻게 구분해야하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 영광(榮光)은 하나님만의 광채

  먼저 아셔야 할 것은 “영광”이라는 용어는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역사에만 적용됩니다. 그 의미는 쉽게 말해 하나님께 도저히 가까이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함이나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찬란한 광채가 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간혹 인간이나 물건에도 영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앞뒤 문맥만 잘 살피면 금방 하나님의 영광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영광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예를 구약과 신약에 각각 하나씩 들어보겠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을 때에 그분의 영광의 광채가 그 얼굴에 반사되어서 백성들이 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출 34:30) 또 예수님이 베드로를 비롯해 제자 셋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랐을 때입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 17:1,2)

 

하나님의 영광은 빛으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 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며.”(사 4:5) 구름과 연기와 화염의 빛을 “그 모든 영광”이라고 합니다. 구름이나 연기로도 그 영광을 드러내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영광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실제로 느꼈을 때의 인간 인식의 총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분의 실체가 임재하면 그 앞에 설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은 더럽고 추한 것과는 절대 공존할 수 없는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불’이라는 표현도 사실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이 죽지 않고도 당신을 인식할 수 있는 형태나 상황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18,19)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자 원했지만 직접 그분을 보고 살 자가 없기에 바위틈에 숨게 하고 당신의 모든 선한 형상으로 모세 앞에 지나게 했습니다. 모세가 본 것은 얼굴이 아니라 그분의 등이었습니다.(23절) 말하자면 인간이 본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모든 선한 형상입니다. 그분의 얼굴이 아니라 등입니다.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에 모세의 얼굴에 반사된 광채도 단순히 그분을 인식토록 만든 수단으로써 빛이 동원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 나타나시든 하나님이 당신을 드러내고 싶으면 인간이 그분의 임재를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게끔 하십니다. 그래서 A. Richardson 이라는 신학자는 “영광이란 하나님의 지상(地上) 임재(臨在)를, 주로 빛으로 나타나는, 인간이 인식한 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용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Bengel은 더 명료하게 “영광은 하나님의 신성이 드러나는 것이다”(The Glory is the Divinty manifests.)라고 정의했습니다.

 

영광은 바로 하나님 자신

 

그러나 영광을 단지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할 수 있는 빛 같은 물리적 현상에만 제한시켜 이해해선 많이 부족합니다. 영광은 그분의 속성 전체를 망라한다고 봐야 합니다. 쉽게 비유하면 이러합니다. 아주 의로운 사람이나 특정 분야의 최고 전문가를 만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우리말로 ‘아우라’라고 표현하듯이 왠지 모르게 뒤에서 빛이 나는 것 같고 큰 권위가 느껴집니다. 실제로 빛이 나거나 물리적 힘이 작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쌓아온 그 모든 성품이나 실력, 나아가 그 인격체 자체가 아우라인 것입니다.

 

사람에게서도 이러할진대 정말로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분과 교제, 동행한 체험이 있다면 그분에게서 느끼는 아우라는 인간의 언어로는 도무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영광이라는 한 단어로 밖에는 말입니다. 영광은 그분의 임재는 물론 동행하심을 직접 겪고 난 이후에 그분 전체를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래서 영광은 하나님에게만 속하지만 곧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간섭하셔서 그들로 당신을 알게 했던 그 모든 신앙체험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렘 2:11)

 

이스라엘이 당신께서 간섭하신 내용을 제대로 안다면 도무지 우상을 숭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시 8:1)

 

하늘 위에 영광을 두셨으니 하늘의 별빛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쉽게 설명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동일 내용을 평행구절로 반복하는 것은 히브리어의 대표적 수사법입니다. “주의 이름”과 ”주의 영광“은 동의어입니다. 주의 이름 즉, 그분의 모든 속성을 온 땅과 온 하늘, 우주 만물에 드러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 6:13) 여기서 영광은 그분의 그분다우심, 그분의 모든 속성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지지 않는다.(immortal)”(롬 1:23)고 형용했습니다.

 

요컨대 영광은 하나님 당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서 고귀한 성품, 권세, 힘 등이 다 없어져도 여전히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당신의 품성, 권위, 능력 등이 다 합쳐져서 겉으로 드러나는 아우라 즉, 영광이 사라지면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Calvin은 “우리가 그분을 알 때 그분의 영광을 본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은?

 

비록 영광이 하나님 당신이라고 말할 수 있어도 구체적으로는 인간이 인식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반드시 빛, 구름, 연기 같이 물리적 양상을 갖출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종교적 관념으로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의 백성과 당신 사이에서 반드시 지정의적 반응이 수반되는 영적 교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그분의 영광을 맛보면 반드시 1) 그분의 그분다우심에 대한 경외감과, 2) 피조물인 인간으로서 그분 앞에 서게 되는 겸비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광을 보고 지각할 수 있는 경로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창조와 그 피조물에 드러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 1:20)

 

아름답고 위대한 자연을 바라볼 때에 분명히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또 그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운행되는 모습을 볼 때에 그분의 숨결을 들을 수 있습니다. 창조와 창조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만드신 후에 심히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의 뜻대로 완벽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인간은 당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는데, 당신의 영광스런 속성을 인간에게도 부여했다는 뜻입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 1:17)

 

하나님에게만 적용될 영광을 인간도 일부 갖고 있기에 인간을 숭배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과 영으로 교통할 수 있고 이 땅을 그분 대신에 다스려야 할 책임을 맡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할 수 있는 둘째 대상은 예수님과 그 십자가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9,14,17)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다 드러내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어 죄인을 구속하는 사역을 완성하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표현합니다. 외적으로는 비천한 모습으로 죽으셨기에 찬란한 광채가 나는 상태와는 전혀 반대이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이 온전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시더라도 죄인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구원하시겠다는 뜻은 도무지 인간의 생각과 다른 오직 그분만의 성품이기에 영광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그 구원의 은혜를 맛본 자는 그분에 대한 경외감과 자신에 대한 겸비함을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는”(눅 24:26)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스승의 참혹했던 십자가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자 부활하신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풀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또 그래서 예수님은 죽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1)라고 시작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은 바로 예수님의 재림 때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눅 21:2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의 시련을 견뎌낸 성도들에게는 독생자의 영광으로 덧입히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1)

 

천국에서 부활한 성도는 영광스런 육체를 입게 될 것입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골 3:4) 부활한 성도도 주님과 함께 강림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창조와 재림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 십자가는 성령의 간섭으로 신자의 영이 거듭나야 비로소 그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신자 속에 내주하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영과 교통함으로써 그분의 영광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런 자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며, 찬양과 예배를 드리는 중에, 아니 평소에도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는 중에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하나님이 바로 내 앞에 서있다는 인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삶과 인생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 위대한 능력, 신비한 섭리, 완전하신 인도, 또 장래에 보여주실 비전 등을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절로 그 자리에 무릎 꿇고 엎드리게 됩니다. 외적 예배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심령이 완전히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또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 자신의 심령과 삶에 가득 채워지기를 소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 뜻대로 순종하여 그분의 일에 쓰임 받고 싶어지며 실제로 그렇게 실천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사역에 함께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신자가 그에 합당한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온전하고도 절대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자연히 그분에 대한 경외와 소망과 믿음과 사랑이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장하게 됩니다.

 

반드시 거창한 종교적 의식이나 업적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은 그분의 뜻이 세상에 구현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했듯이 사탄의 미혹된 영혼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여 죄에서 구원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뿐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보려고만 해도, 하나님 외의 어떤 다른 존재나 대상을 경배해선 안 됩니다. 특별히 사람들과 자신을 높이는 그 어떤 것이라도 완전히 제거되기 전까지는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언제나 질투의 하나님으로 다가옵니다.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니라.”(출 34:14)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당신만의 십자가 사랑으로 사랑하셨기에 절대적 배타적 사랑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신자는 무엇을 먹든 마시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 요리 문답 1항대로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영광의 구체적 예들

 

지금껏 설명 드린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근본 개념을 갖고서 질의하신 세 구절의 구체적 의미를 살펴봅시다.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눅 2:20)

 

본문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온전히 실감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객관적 사실만 수긍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놀라운 권세를 보고 들으면서 그 분을 향한 경외심으로 충만해졌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목자들은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했습니다. 또 천사가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며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나아가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라고 찬송했습니다. 그래서 그 천사들의 말대로 베들레헴에 가서 보니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낳아 강보에 안고 있음을 목도했습니다.(2:8-19) 이 모두가 환상이나 공상이 아니라 실제 체험이었을 뿐 아니라 그러는 와중에 너무나 놀라운 하나님의 권세에 온전히 붙들려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밤중에 천사가 나타나서 찬란한 빛 가운데서 메시아 탄생에 대한 예언을 합니다. 또 그 예언을 보증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천군이 내려와 웅장한 찬양을 합니다. 헨델의 메시아 합창곡보다 더 장엄하고 경건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또 그 예언대로 실제로 일어났으며 아기 예수를 보는 순간 틀림없이 천사의 예언대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평강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에게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올려 드릴, 즉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려드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눅 9:31) 본문의 영광도 같은 의미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기도할 때에 실제로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휘어져 광채가 나더니 무든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29,30절)였습니다. 성경에 구체적 묘사가 없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세 제자가 본 것은 천국의 영광이었습니다. 지상세계와 전혀 다른 광채와 위엄이 아름답게 눈앞에 펼쳐졌던 것입니다.

 

변화산 기사의 첫 머리는 “이 말씀을 하신 후에 팔일 쯤 되어”(28절)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대로 실현되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려고 산에 올라갔다는 뜻입니다. 바로 앞에 있는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27절)라는 말씀입니다. 제자 중 일부가 죽기 전에 천국의 영광을 볼 수 있다고 말했으니 세 제자가 본 것은 실제 천국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장엄했으면 베드로가 산 밑으로 내려가기 싫다고 말했을까요?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한 내용입니다. 그 기도의 시작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영광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제자들도 동일한 사역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이 진리의 영인 성령을 통해 복음의 비밀 깨닫게 되고, 또 성삼위 하나님이 하나가 된 것 같이 하나가 되며, 비록 세상에서 미움을 받으나 진리로 이겨내며, 하나님이 당신을 세상에 보낸 것 같이 저들도 세상으로 보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신 것입니다. 또 세상 사람들이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제자들을 볼 때에 아버지의 이름과 당신의 십자가 사랑을 알게 해달라고 하면서 기도를 마쳤습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3-26)

 

요컨대, 하나님의 영광은 당신께서 인간 앞에 당신다우심을 직접 나타내실 때에 인간이 보고 듣고 느끼게 되는 장엄함과 거룩함을 말합니다. 그분의 현현(顯現)은 천사나 빛과 구름 같은 가시적 매개체를 통해, 혹은 말씀과 기도 같은 신자와의 불가시적인 영적교통을 통해 드러납니다.

 

어떤 경로가 되었던 그분을 실제로 만나 그분의 마음을 읽게 된 신자는 그분을 향한 사랑과 소망으로 충만해집니다. 또 마땅한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며 그분 뜻대로 순종하게 됩니다. 이것 외의 어떤 반응도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분의 영광을 실제로 본 것도 아닙니다.

 

10/30/2012

http://cafe.daum.net/aspire7/ElV1/74?docid=3982056241&q=%C7%CF%B3%AA%B4%D4%C0%C7+%BF%B5%B1%A4%C0%CC%B6%F5/개혁주의마을/이지명

열왕기 저자는 솔로몬의 일천번제, 지혜로운 재판 이야기에 이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솔로몬 왕에게 얼마나 복을 주셨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수가 해변 모래같이 늘어나고 평화와 번영, 부요와 강성의 꿈이 펼쳐집니다. 모든 주변의 나라들이 솔로몬의 지혜와 힘 앞에 엎드리고 부족함이 없는 풍성함을 누립니다. 두로왕 히람과 같은 돕는 자들이 나타나서 부왕 다윗의 필생의 꿈이었던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역사가 시작됩니다.

솔로몬 왕은 나무 베는 벌목공 3만을 동원합니다. 운반인부 7만 명과 돌 캐는 채석인부 8만이 동원됩니다. 감독하는 관리가 3천300입니다. 도합 18만이 넘는 인원이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대공사에 동원됩니다. 그리고 7년 6개월에 걸친 대역사 끝에 화려한 솔로몬의 성전이 완공됩니다. 하나님의 전은 돌로 건축된 다음 백향목과 잣나무 재목으로 입혀지고 황금으로 화려하게 입혀지고 장식됩니다. 그야말로 꿈같이 아름답고 멋진 여호와의 성전이 완성됩니다.

그런데 이어서 솔로몬이 자신의 궁전을 건축하였다는 이야기가 기록됩니다. 열왕기 저자는 아무 비평 없이 건축기간과 건축규모를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열왕기 저자의 의도를 헤아려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솔로몬의 궁전 건축은 우선 건축기간이 13년으로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소요된 기간의 거의 두 배에 달합니다. 궁전의 높이는 하나님의 성전과 똑 같은데 넓이는 4 배가 넘습니다. 거기다 성전보다 좀 더 큰 규모의 낭실과 전을 3 개를 더 건축합니다. 결국 왕궁의 건축규모가 하나님의 전 건축규모의 일곱 배가 넘습니다. 그런데 그 건축의 수준이 여호와의 전과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면서 솔로몬이 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데 필요한 왕궁을 아울러 짓는 것을 누가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도가 지나쳤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 보다 훨씬 큰, 일곱 배나 더 큰 화려한 궁전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앞에 하나님의 전이 오히려 초라해지지 않았겠습니까? 열왕기 저자는 이 사실을 수치(數値)로 나타냄으로써 여기에 또 하나의 이스라엘 역사의 비극의 씨앗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전은 돌과 백향목과 전나무로 건축되고 온갖 기명과 기구, 천사들의 모양과 종려와 꽃 등, 장식들이 황금으로 덮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아름답게 건축하고 황금과 온갖 보석으로 꾸미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보물이나 황금 같은 그런 것들을 좋아하셔서일까요? 하나님이 그런 것들이 필요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네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하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나라의 모형입니다. 영원한 하늘아버지 하나님의 집의 모형입니다. 나의 가장 귀한 보물을 그곳에 두고 하나님의 전을 아름답고 귀하게 치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주님을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이요, 이 세상 떠날 때 내가 마음을 둔 곳, 하늘나라 아버지의 집으로 가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황금으로 치장하고 온갖 귀한 보석으로 꾸미도록 하신 것은 영원을 향한 사모의 마음, 소망의 마음을 이렇게 가지도록 하려 하신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자신의 왕궁을 더 크고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하나님의 전과 같은 화려한 왕궁, 하나님의 전 보다 일곱 배나 더 큰 어마어마한 왕궁, 장가 든 바로의 딸을 위하여 아름답게 꾸민 왕궁......, 과연 솔로몬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였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잘못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 보다 자신을 더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집 보다 자기 집을 더 크게 짓고, 하늘나라 보다 자신을 더 위하여 보물을 쌓아두고 이 땅에 미련을 두는 잘못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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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 부활의 씨앗
(Our Mortal Bodies, Seeds for the Resurrection)


우리의 육신-살과 뼈-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짐승은 다 같은 곳으로 가게 되는데
모두 흙에서 났으므로 흙으로 돌아갑니다"(전도서3: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새 육신을 받을 때,
우리가 우리의 육신 안에서 산 것들은 모두 존중될 것입니다
 
부활할 때에 우리는 어떤 육신을 가질까요?
바울은 썩어질 우리의 육신을 부활의 씨앗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뿌리는 것은 형체를 갖춘 식물이 아니라 밀이나
그 밖의 다른 씨앗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가 원하시는 대로
그 씨앗 하나하나에게 본래의 형체를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5:36~38)
우리의 썩어 질 육신이 독특한 것처럼, 부활할 때에
우리 육신도 독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개성에 따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며, 또 우리와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가 우리들에게 찬란히 빛나는
육신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행복헌장 10 계명



1.운동을 하라
일주일 3회,30분씩이면 충분하다.




2.좋았던 일을 떠올려 보라.
하루를 마무리할때마다 감사해야 할 일
다섯가지를 생각하라.




3.대화를 나누라
배우자나 가장 친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라.




4.식물을 가꾸라
작은화분도 좋다.죽이지만 말라




5.TV시청을 줄여라




6.미소를 지으라
하루에 한 번은 낯선 사람에게
미소를 짓거나 인사를 하라




7.친구에게 전화하라
친구나 지인들에게 연락해서
만날 약속을 하라.




8.하루에 한번은 유쾌하게 웃어라




9.매일 자신에게 작은 선물을 하라
그 선물을 즐기는 시간을 가져라




10. 매일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라









 
♡ 행복헌장 10계명♡ 

1.맞장구를 쳐주자.
아무리 신나는 장구도 맞장구만 못하다.
상대방을 인정하고 높여주는
맞장구는 멋진 인간관계를 만들어준다. 

2.분위기에 맞는 말을 하자.
때와 장소와 분위기에 맞는 말을 해야 한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 라고 하였다.

3.자존심 상하는 말을 쓰지 말자.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들으면 적개심이 생긴다.
생각 없이 불쑥 나온 말이 
상대방의 가슴에 상처로 남을 수 있다.

4.정감 있게 말하자.
말을 할 때에한 음정 낮추어서 
말을 하게 되면 정감 있게 들릴 것이다.
정감 어린 말의 습관은 분위기를 만든다.

5.상대방에게 말할 기회를 주어라.
대화는 주고받는 것이지 혼자 떠드는 것이 아니다.
말을 잘 하는 것은 혼자 떠드는
것이 아니라 들어주는 것이다.

6.같은 소리를 두 번 이상 반복하지 말자.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계속 반복하게 되면
신경질이 나고 기분이 상하게 된다.
한 두 번이면 족하다.

7.칭찬의 말을 세 번 이상 하자
. 바보 온달도 평강공주의 칭찬이 
없었더라면 바보로 끝났을 것이다.
좋은 칭찬은 마음에 행복감을 느끼게 한다.

8.좋은 말만 골라서 사용하자.
말이 씨가 된다고 한다.
어떤 말을 쓰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장래가 어떻게 될까 
가히 짐작할 수 있다.

9.유머의 소재를 스스로 개발하자.
유머로 남을 웃길 줄 아는 사람은 재벌,
자기가 웃을 줄 아는 사람은 부자다.
웃음꽃보다 값지고 아름다운 꽃은 없다.

10.알아주는 말을 해 보자.
아무리 나를 몰라주어도 아내(남편)만큼은 알아주기를 원한다.
알아주는 말에 힘이 생기고 몰라주는 말에 가슴이 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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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의 상처(Wounds Becoiming of Glory)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육신의 부활에 대한
우리 믿음의 기초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의 육신은 우리 영혼의 감옥이며
그리고 영적인 생활은 이 감옥으로부터 탈출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는 영적인 생활과
육적인 생활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육신은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성전" 이며(고린도전서 6:19),
따라서 그것은 신성한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부활은 우리가 육신 안으로 산 것들이
헛되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함께 우리의 영원한 생명 안에서
들어 올려질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한 몸에 그 고통의 자국이 있는 것처럼,
부활하는 우리의 몸에도 고통의 자국이 남을 것입니다
우리의 상처는 부활할 때, 영광의 표식이 될 것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모든 교회가 예외 없이 예배의 마지막 순서에 목사가 하는 축도로 예배를 종료한다.
그런데, 현재 행해지고 있는 축도는 그 방법에 있어서 두 가지로 대별된다.

그 하나는 순서를 맡은 목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된 기도문 (축도자의 간구) 후에 ‘있을찌어다’ 또는 '축원합니다'하고 명령형식으로 선포하는 형식이다.

다른 하나는 순서를 맡은 목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된 기도문 (축도자의 간구)을 간구한 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축원합니다로 끝마치는 축도다.

일반적으로 상기의 두 경우 중에서 첫 번 째의 방식을 취하는 목사들이 대부분이다.

두 번째 방식으로 축도를 하는 교회나 목사는 그 숫자가 적다.
적다기 보다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희귀한 형편이다.

그렇다면, 이 두 방법 중 어느 방법이 성경적일까?
내 생각으로는 두 번째 방법, 즉 축도의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또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축도 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의견이다.

이것은 목사 개인의 권위를 무시한다거나 불인정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축도도 엄연히 기도의 한 형태이므로, 반드시 <주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려져야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믿는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하는 방법-주님의 이름을 뺀 축도-은 축복권이 목사에게 있는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으므로 시급히 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약성경 민수기 같은 곳에서는 ‘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고 약속하셨고, 대상 23: 13에서는 ‘영원토록 그 이름을 받들어 축복하였다고’ 증명하고 있다.
요 14:13-14에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는 신구약을 통하여 야훼의 이름이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을 빌 수 있게 되어 있고, 그 기도에 응하여 하나님은 복을 내려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의 민족 지도자로 선택된 모세에게도 허락된 바 없는 엄청난 권한을 목사들은 임의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겨우 하나님의 이름을 빌어서 복을 내려 주십사고 부탁하는 처지에 있는 인간이 마치 복을 내려 주는 권한이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를 빼앗는 월권행위인 것이다.

내가 출석하는 교회의 교역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축도를 드릴 때, 언제나 <주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린다.

그리고, 설교 중에도 축원을 할 경우에는 예외 없이 <주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린다.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권한과 능력이 있으신 분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도를 받을 때마다 아멘이 절로 나온다.

축도 때에 올려 드리는 모든 아름답고 귀하고 좋은 복들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내게 확실히 응답될 것을 생각하면 그 축도가 한없이 은혜가 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지 않고 ‘있을찌어다’하고 끝나는 축도를 받을 때의 허전함과 무례함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비는 목사의 축도를 받고 있으면 복은 고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고 유린하고 농단하는 죄에 대하여 책망을 들을 것을 생각하니 내가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고 불안할 정도다.

우리나라 말의 어감상 ‘있을찌어다’ 또는 '축원합니다'하는 표현은 신이 사람들에게 또는 임금이나 왕이 백성들에게 또는 주인이 하인들에게 내리는 극하칭(極下稱) 명령형이어서 최상의 권위의식과 거드름이 잔뜩 묻어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없이, <있을찌어다><축원합니다>의 말 속에는 자기의 우월감이 짙게 배어나고,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권위가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말을 할 때에는 일부러 무게를 잡고 목에 잔뜩 힘을 주어야 하기에 듣기에 민망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다.

축도의 내용이 아무리 훌륭한 내용과 간절함일지라도 잘 못 드려지는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도 못하고, 하나님과는 무관한 것이니 무익하고도 무용한 것일 뿐이다.

우리의 기도가 위대한 것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이 세상의 주인 되신 하나님이 들으시고 이루어 주신다는 믿음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내 생각으로는 가장 심각한 고난과 순교를 당하는 것이 축도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교회마다, 수많은 목사들로부터 예배시간마다 하나님의 이름이 훼손되며 짓밟힘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축도를 할 때, 하나님의 이름 대신 목사 개인의 권위를 내 세우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범했던 것과 동일한 범죄의 연결선상에 있음도 알아야 한다.

아담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유혹 때문에 선악과를 따 먹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 곧 그것은 <하나님이 되고자>한 것이다.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계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임권이 없는데도 <네게 복이 있을찌어다>하고 말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역할을 대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실체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대표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신다.

그래서 십계명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고 했음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추시고, 겸비하고 겸손히 무릎 꿇는 사람을 존귀하게 높여 주심을 알아야 한다.




축도도 하나의 기도다.

그러므로 반드시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기도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사들의 축복권을 인정할 경우, 축복권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목사가 '복이 있을지어다'하는 명을 받들어 복을 내려야 하는 입장이 되어 버리니 심각하다는 것이다.

출처: USA아멘넷/박종욱

한국교회 성령운동 무엇이 문제인가 / 박영돈 교수 |박영돈 목사님
새언약 | 조회 92 |추천 0 |2013.02.17. 12:05 http://cafe.daum.net/waterbloodholyspirit/MFfy/53

지금도 방언은 존재하는가


성경적인 방언관을 정립하는 데 가장 큰 거침돌로 작용하는 것이 신학적인 전통과 방언에 대한 체험이다. 한편에서는 ‘은사중지론’이라는 잣대로 성경을 재단해 버리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경험의 틀에 꿰맞추기 위해 성경을 조작해 버린다. 어떤 전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성경 해석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자신의 해석을 은밀히 주관하는 전제가 무엇인지를 냉철하게 직시해야 하며 그것을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점검해보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대개 우리가 자라온 신앙적인 배경과 전통 그리고 배워온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 방언에 대해 서로 다른 선입견을 갖게 된다. 오순절 교회의 배경을 가진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방언에 대해 긍정적인 반면, 보수적인 신학 교육을 받은 이들은 은사중지론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아주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랐고 오랫동안 보수 신학을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필자의 박사 학위 논문을 지도한 교수는 바로 워필드를 뒤이어 은사중지론을 철통같이 고수했던 개핀 교수였다.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은사중지론이 필자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신빙성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말씀의 능력이 신학적인 전통을 세뇌하는 마력에서부터 필자를 자유하게 한 것이다.


우리는 신학적인 전통이나 경험이라는 전제에 의해 휘둘리기를 거부하고 성경 자체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들으려는 진지한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김동수 교수는 방언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은사인 방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영적인 일은 자신이 꼭 체험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영적인 세계, 즉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있다. 만약 자신이 체험한 것만 바로 해석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성경 말씀을 거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방언에 대한 말씀을 바로 해석하는 데 꼭 그에 대한 체험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방언을 체험하는 것이 그 실체를 파악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관에 치우치게 하여 냉철한 판단을 흐리게 할 수도 있다.


반면에 방언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오히려 성경 말씀을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균형 감각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방언 체험이 없는 이들은 대부분 방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에 사로잡히게 된다. 많은 경우 ‘경험’뿐 아니라 ‘무경험’도 성경 해석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방언 체험의 유무가 방언에 대한 평가와 일치한다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이제는 이 불행한 연결고리를 끊을 때가 되었다. 그래야만 양극화를 극복하고 방언에 대한 원만한 일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방언을 하는 이나 못하는 이나 자신들의 ‘경험’ 또는 ‘무경험’이 성경 해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성경의 어디에도 방언이 사라졌다는 확실한 증거를 발견할 수 없다. 방언은 계시의 방편으로서 성경적인 계시가 종결됨과 더불어 사라졌다는 주장은 성경적인 지지 기반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방언은 사람이 하나님께 신비한 언어로 기도하는 것이지, 예언처럼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 특성상 방언은 계시의 통로가 될 수 없다. 방언이 통역된다고 해도 그것은 단순한 기도의 내용일 뿐이지 결코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신 말씀이 될 수는 없다. 또한 방언이 그쳤다는 말씀을 성경에서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방언과 예언도 그친다는 바울의 말(고전 13:8-12 참조)을 성경이 완성되면 방언도 그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바울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신학적인 의미를 주입하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바울이 말한 “온전한 것이 올 때”는 그 말씀의 문맥과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러므로 방언이 존재하느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 다만 오늘날 나타나는 방언이라는 현상이 초대교회의 방언과 질적으로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먼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방언은 오늘날 교인들이 하는 방언과는 사뭇 다른 특성을 띠었다. 사도행전 2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오순절에 제자들이 했던 방언은 ‘외국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에 따라 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난 지방의 언어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다. 이를 보건대 오순절에 제자들이 체험한 방언은 배우지 않은 언어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말하는 현상이었다.


이런 유의 방언을 지금도 하는 경우가 있다는 보도를 종종 접한다. 대천덕 신부의 글에 의하면 한 청년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몇 개 국어로 유창하게 외국인과 대화를 했다고 한다. 어떤 목사의 부인은 집회에서 자신이 전혀 배우지 않은 헬라어로 말할 수 있게 되어 거기에 참석했던 그리스 여성 두 명을 주님께로 인도했다고 증언하였다. 또 선교사들이 선교 현장에서 습득하지 않은 토착어가 갑자기 입에서 터져 나와 설교했다는 말을 간혹 듣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배우지 않은 외국어로 전도하거나 설교하는 것이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제자들의 방언과 꼭 같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제자들의 방언이 찬양과 함께 선포의 성격도 띠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사람들을 향한 설교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습득하지 않은 언어를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기사는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관적인 역사와 비상한 섭리를 우리의 신학적인 편견으로 제한하기보다는 그 가능성을 항상 열어 두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런 외국어 방언은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처럼 모든 신자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다. 그 방언은 성령이 이 땅에 강림하시는 특별한 이벤트를 장식하는 표적의 성격을 띠었을 뿐 아니라 구원의 복된 소식이 만방에 전파될 새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섭리적 표증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교회가 이 세상을 향하여 선교 사역을 출범했다는 것을 알리는 특별한 표증이기도 하다. 그러하기에 오순절 후에도 그런 방언이 보편적인 현상으로 반복되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방언은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방언의 유형에 가깝다. 고린도전서 12-14장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이 방언의 특성은 특정한 지방의 언어나 외국어가 아니라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일종의 신비한 언어라는 점이다. 통역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방언을 하는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으로만 기도하면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전 14:14)라고 하였다. 여기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심령이 아니라 ‘생각’ 또는 ‘이성’을 뜻한다. 즉, 이해하는 마음의 기능을 의미한다. 그래서 방언으로 기도하면 그 기도하는 내용을 자신의 마음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성경적인 증거를 통해 볼 때 이 방언은 우리의 이해와 인식을 초월하여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비한 기도의 언어 또는 영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외에는 고린도 교회의 방언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다. 그때의 방언이 어떤 말의 형태로 나타났는지, 어떤 음률과 강세를 띠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 소리가 단음절로 끊어졌는지 연음으로 유연하게 이어졌는지 아무도 들어본 사람이 없다. 녹음된 것도 없다. 그렇기에 지금 사람들이 하는 방언이 고린도 교인들의 방언과 동일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물론 방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언어이기에 그 진실성 여부를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무조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온다고 해서 그것을 다 방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요즘 소위 방언이라고 말하는 현상 중에는 의심쩍은 것들이 적잖다. 성령의 역사라고 볼 수 없는 것들이 더러 있다. 그러므로 각별한 주의와 냉철한 분별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이 극단적으로 주장하듯 지금 사람들이 하는 방언을 다 마귀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마귀는 성령의 역사를 모방하는 명수이기에 얼마든지 은사의 모조품을 생산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가 아는 어떤 장로의 부인은 한 기도원에서 방언을 받은 후 귀신들림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 한동안 고생하다가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하자 방언도 같이 사라졌다.


또한 몰몬교 같은 이단이나 타종교에도 방언과 유사한 종교 체험이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는 방언을 무조건 마귀적이고 인위적인 현상이라고 보아서는 안 되겠지만, 그것들을 모두 성령의 역사로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 또한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방언이 과연 성령의 은사인지 성경을 통하여 그리고 영적 지도자와의 상담을 통하여 면밀히 점검해 보는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



방언에 대한 잘못된 견해


앞에서 지적했듯이 방언은 모두가 다 받아야 하는 은사라는 주장만큼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없다. 다른 은사는 선택적이지만 방언만은 예외적으로 모든 신자에게 필수적이라는 견해는 왜곡된 성경 해석이 아니고는 도저히 성경에서 발견할 수 없는 사상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에게 각기 다른 은사를 주시어 ‘다양성 가운데 통일성’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분명히 상충되는 것이다. 은사는 모두 선별적인데 방언의 은사만은 필수적이라면 방언은 더 이상 은사로서의 기본적인 특성을 상실한 것이며, 은사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도 없다.


만약 방언을 모든 신자가 다 받는 것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라면 왜 실제 많은 교인들이 방언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 중에서 방언을 부인하고 구하지 않는 이들은 못 받는다고 쳐도 방언을 간절히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이들은 왜 그런가? 은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주어지는 선물이다. 사도나 선지자나 교사와 같은 직분과 은사는 스스로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서 된 것이다. 모두 순수한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물론 어떤 은사는 받는 자의 소원과 간구에 따라 주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선물을 주시면서 애타게 구해도 받지 못할 정도로 애먹이신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만약 방언이 모든 신자에게 주시기로 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구하기 전에라도 자연스럽게 주어지며, 구하면 필히 주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방언을 구해도 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이것은 방언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기로 하신 선물이 아닌 것을 한사코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또 방언을 더 이상 하나님이 기꺼이 주시는 선물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방언을 달라고 하나님께 결사적으로 매달리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인위적으로 방언을 유도해 내려고까지 하는 것은 그 선물을 뺏으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잘못된 가르침이 교회에 미치는 폐해는 엄청나다. 교인들 모두가 방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은사 체험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그것을 완전히 획일화해 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자신이 경험한 것을 다른 이도 반드시 경험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대단한 무례를 범하는 것이다.


비록 다른 이들도 자신이 누리는 은혜를 동일하게 경험하기를 원하는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런 행위는 자신의 잘못된 확신을 따라 다른 이들을 강압하려는 교만의 발로다. 그러므로 이런 가르침은 필연적으로 영적인 우월 의식을 낳고, 그 반대급부로 영적인 열등 의식과 소외감을 불러일으키며, 급기야는 그로 인한 갈등과 혼란을 조장한다.


이런 문제는 실제 교회 현장에서 더 역력히 드러난다. 방언이 모든 신자의 영적인 성숙에 필수적이라는 가르침은 자연히 방언을 못 하는 교인들을 영적으로 미성숙하거나 열등한 신자로 강등시킨다. 신앙의 성숙을 위해 꼭 필요한 은혜의 통로가 없으니 어떻게 영적인 충만함을 누릴 수 있겠는가?


모든 신자에게 필히 있어야 할 은사이기에 강권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며, 그렇게 방언을 받게 하는 집회가 유행병처럼 번져간다. 그런 집회에서는 은사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주어지는 순수한 선물이라는 진리는 묵살되어 버리고 방언을 꼭 받게 하려는 인간의 강권이 은사를 기꺼이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압도해 버린다. 마치 방언이 인간에 의해 유도될 수 있는 것처럼 방언 전도사들은 가는 곳마다 방언의 돌풍을 일으키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 선물을 안겨 준다.


일단 한 사람만 방언을 받게 하면 다른 이들의 시기심이 자극되어 방언하는 이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고 한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내려주시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이런 현상은 인간의 부패한 시기심을 자극하여 열심을 부치기는 방언 전도사들에 의해 촉발되고 조작되는 일종의 영적인 집단 흥분 상태를 방불하게 한다. 이것을 은사를 나눠 주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보기에는 의심쩍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방언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에서 주축을 이루는 것은 공중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마구 해 대는 것을 삼가라는 권면이다. 그런데 모든 교인들을 모아놓고 강권해서 방언을 받게 하고 모두 방언으로 말하게 하는 것은 바울의 간곡한 권면을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처사다.


성경 어디에도 인간이 주동하여 다른 이들에게 방언을 받게 부추기고 강권한 예나 그런 행위를 권장한 말씀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엄연히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주권을 침범하는 소행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렇게 성경 말씀을 도외시하고 성령의 순리적인 역사하심에 배치되는 행위를 통해 미혹의 영이 은밀히 역사하기 쉽다.


그런 집회의 진정성은 그 열매로 드러난다. 집회에 모인 교인들이 모두 방언받기를 강권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끝내 방언이 터지지 않는 사태가 항상 발생한다. 그렇게 되면 방언을 받지 못한 이들은 공개적으로 모든 교우들 앞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처절히 소외당하는 비애를 맛보게 된다.


그들은 모든 신자에게 예비된 하늘의 선물이 자신들만 비켜가는 것을 체험하면서 자신의 믿음과 구원을 의심하게 되고 자신들에게만 싸늘하게 등을 돌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야속함을 느낀다. 이런 집회는 어떤 이들에게는 흥분과 기쁨을 안겨주지만, 다른 교인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회의를 안겨 줄 수 있다.


자신의 일시적인 희열과 감정적인 도취를 맛보는 대가로 다른 형제들이 큰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김우현 씨는 방언이 작고 소외된 이들을 세우는 귀한 은사라고 했는데, 이런 식으로 방언을 받게 하는 집회에서는 도리어 방언이 우리 주위의 작고 소외된 이들을 더 소외시키고 짓밟을 수 있다.


방언 집회가 성행하며 방언 전도사들이 맹활약을 하면서 이런 피해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성경은 공중에서 방언을 마구 해대는 것을 철저히 금하였다. 방언 집회를 인도하는 이들은 이 성경 말씀을 거스르면서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있다는 커다란 착각과 모순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런 비판에 대해 방언 집회로 인한 좋은 열매까지 싸잡아 무시해 버리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방언 집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체험하고 그들의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보이는 현상과 실제는 매우 다를 수 있다.


방언 체험의 경우가 특별히 그렇다. 왜냐하면 방언은 그 특성상 가장 전시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기이한 현상과 센세이션과 표적을 동반하기에 그 당시에는 굉장한 부흥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시간을 두고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런 집회에서 방언받은 이들의 삶에 얼마나 지속적인 변화가 나타나는지 조사해 보았는가? 그런 변화의 열매가 있다면 감사한 일이다. 물론 그런 열매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방언은 사람들에게 일시적인 열심과 흥분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들의 삶과 신앙에 근본적인 변화는 일으키지 못한다. 꾸준히 말씀에 따라 성령과 동행하는 신앙 훈련을 대신하는 임시변통의 은혜 체험으로 그치고 만다.


김우현 씨의 글에는 방언이 단숨에 하늘 문을 열어 충만한 영적 세계로 도약시키는 마술과 같은 은혜로 과대선전되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 이들로 하여금 방언 체험이 금방이라도 자신들에게 놀라운 변화와 부흥을 가져다줄 것 같은 기대에 사로잡히게 한다.


끝없는 영적인 침체와 방황에서 헤어날 수 있는 빠르고 쉬운 비결을 찾는 수많은 교인들의 귀를 솔깃하게 한다. 부진한 목회의 돌파구를 찾기에 여념없는 목사들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하다. 신비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에 쉽게 매료되고 흥분과 감흥을 체험하고 믿음의 가시적인 증거와 표적이 있어야만 신앙을 지탱하고 열심을 내는, 영적으로 미성숙한 교인들을 끌기에는 방언보다 효과적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경적이기를 따지기보다 얼마나 개인과 교회에 실제적인 효과와 유익이 있느냐를 먼저 계산하는 이 시대의 실용주의 가치관과 이런 대중의 심리와 관심을 잘 이용하여 그들을 선동하는 포퓰리즘과 영적 현상을 대중화하여 큰 이익을 챙기는 기독교 상업주의가 한국 교회에 방언 열풍을 몰고 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방언이 지금 한국 교회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부흥 코드’라고 보는 견해는 지극히 피상적이면서도 근시안적인 생각이다. 침체한 한국 교회가 다시 새로워지며 부흥하기 위한 색다른 비결은 없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돌아가는 것 외에 다른 충족한 대안이 있을 수 없다.



방언에 대한 균형 잡힌 견해


방언을 과대평가해서는 안 되지만 방언을 평가절하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방언은 하나님의 귀한 은사다(고전 12:4-28 참조). 방언을 성경적인 지침에 따라 올바르게 사용하면 개인의 영적인 성숙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고전 14:4 참조) 그로 인해 공동체의 성숙에도 간접적으로 기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방언의 남용은 교회를 허물지만 방언의 선용은 교회를 세운다. 하나님이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방언으로 기도함으로 영이 새로워지고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함이 깊어지고 풍성해지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하고 진실한 신앙 인격자와, 형제들과 교회를 위해 열심히 간구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건전한 방언의 은사를 받았는가는 이런 성령의 열매를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 겸손하고 온유하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이들은 자신의 은사를 조금이라도 과시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도 다 자신과 같은 은사를 체험해야 한다고 강권하며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 자신이 방언함으로 인해 다른 이들이 위축되며 혼란스러워할까 우려하여 공중에서 방언하는 것을 절제한다. 방언하는 이들 중에 이렇게 겸손하고 훌륭한 교인들도 많다. 이들처럼만 한다면 방언으로 인해 무슨 문제 될 것이 있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방언의 은사는 교회에 큰 축복이 될 것이다.


이런 자세가 바로 바울이 가르친 바이다. 방언은 많은 은사들 중에 하나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주권적인 뜻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주어지지만, 어떤 이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또한 방언하는 이가 더 영적으로 성장하고 충만하기 쉽다고 말할 수 없다.


뉴욕에 있는 어느 한인 순복음 교회 집사가 필자가 잘 아는 목사를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 집사는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서 많은 집사들 중에 유일하게 방언을 못한다고 했다. 그러니 그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기에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방언을 구했음에도 하나님이 방언을 안 주시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무척이나 답답해하며 그런 하나님을 향해 서운한 감정을 내비치기까지 하였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장로교 목사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의 안타까운 사정을 들은 목사는 이렇게 조언해 주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떤 사람은 방언이 꼭 있어야 신앙 생활을 잘할 수 있을 것이기에 방언을 주시지만, 집사님은 방언의 은사가 없어도 기도와 경건 생활을 잘하실 수 있을 것 같기에 방언을 안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집사는 이 말을 듣고 큰 위로를 받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 단순한 말 한마디에 지혜와 진리가 담겨 있다. 우리를 너무도 잘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기질과 성향과 사명과 상황에 꼭 필요하고 알맞은 은사를 주신다. 그분의 자녀들에게 최상의 은혜를 주기 원하신다. 어떤 이에게는 방언의 은사가 없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보시기에 그 은사를 안 주실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는 최상의 은혜다.


그러므로 방언의 은사가 영적인 성숙에 꼭 필요한 은사이기에 방언을 못하면 뭔가 영적으로 부족하고 열등한 신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방언을 유창하게 하면서도 영적으로 미성숙하고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들이 많은 반면에, 방언을 못 하면서도 성령으로 충만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한 신앙 인격을 소유한 이들도 많다.


교회 역사 속에 수많은 신앙의 위인들이 방언을 하지 못했지만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탁월한 영성과 신앙의 발자취를 남겼다. 아우구스티누스, 성 프란체스코, 칼뱅, 루터, 조나단 에드워즈, 스펄전, 빌리 그레이엄 같은 이들이 그랬고, 한국 교회에서도 주기철, 손양원, 박윤선, 한경직 등 수많은 훌륭한 목사들과 교우들이 그 사실을 증명해준다. 그러므로 방언 체험의 유무는 결코 신앙 성숙이나 영적인 충만함의 척도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방언의 유익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이성적인 인식과 이해의 한계를 초월하여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누린다는 점이다(고전 14:14-18 참조). 그로 인해 우리의 영이 새로워지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믿음의 확신이 없는 이들이 방언을 체험함으로 자신 안에 성령이 거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수도 있다.


동시에 신앙의 열심이 자극된다. 기도를 잘 안 하던 이들, 5분만 기도해도 기도할 것이 없던 이들이 기도를 자주, 오래 하게 되며 그로 인해 그들의 영이 새로워지기도 한다. 그러니 기도를 10분도 못하는 교인들은 방언이라도 받아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반문이 제기될 만하다. 거기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따르는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기도를 안 하던 이가 방언을 체험한 후 방언으로는 기도하지만 여전히 생각과 이성을 통해 기도하는 데는 전혀 진보가 없을 수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방언으로만 기도하면 마음(생각, 이성)이 열매 맺지 못한다고 했다(고전 14:14 참조). 생각 없이 기도하게 되어 하나님과의 이지적인 관계가 성숙하지 못한다.


방언을 말하는 신비한 현상에 탐닉하여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하며 정작 중요한 일은 소홀히 할 수 있다. 또한 방언 체험은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반면에, 항상 그런 표적과 증거가 있어야만 하나님의 임재를 믿는 영적인 미성숙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역기능을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방언의 실제적인 유익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여 방언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오랫동안 방언을 해 온 어느 목사의 솔직한 고백을 들어볼 만하다.


“나는 방언을 30년 넘게 하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런 방언이 100퍼센트 하나님이 주신 은사인지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내 마음이 주께로 향해 있다는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 사실이 방언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방언하는 이들 중에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중에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황홀경을 체험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지에까지 이른 이들은 실제로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대부분은 방언으로 기도하지만 자신에게 실제로 무슨 유익이 있는지 잘 모르며 시간만 많이 소비하는 것 같아 방언을 그렇게 즐겨 하지 않는다. 방언 집회에서 방언과 같은 현상을 처음 체험했을 때는 열광했던 이들도 별 효력이 없으니 차츰 열심이 식어지고 방언 말하기를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방언하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권면은 자신의 방언이 과연 성령이 주신 은사인지 냉철하게 분별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은사를 주신 뜻대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유용한 방편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적인 지침을 따라 공중 예배에서 방언하는 것을 삼가며, 이 은사로 인해 영적인 우월 의식에 빠져 다른 이들도 방언을 해야 한다고 강권하는 무례함을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동시에 방언을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누림으로써 은혜가 충만하여 교우들에게 영적인 감화력을 미치며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겸손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 그들이 누리는 방언의 은사가 더 빛을 발하게 되며 다른 교우들도 그런 은혜 체험을 사모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방언을 못하는 이들은 신학적인 편견과 교만한 아집을 내려놓고 성경이 방언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진지하게 들으려는 겸손하고 진실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방언은 하나님이 교회에 내려주신 귀한 은사라는 점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


오늘날 나타나는 방언 현상이 다 성령의 은사인지 조심스럽게 분별해야 하지만, 교인들이 하는 방언을 다 싸잡아 마귀적이고 인위적인 것이라 매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바울은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39)라고 했다. 방언의 은사 자체를 멸시하고 평가절하하거나 방언하는 이들을 광신자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이 성경 말씀을 따라 방언의 은사를 잘 분별하여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선도해 주어야 한다. 그들의 은사 체험을 존중하며, 제대로 기도 생활을 하지 못하는 교인들은 그들이 누리는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제를 보고 부끄러워하며 도전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성경 말씀으로 돌아와 서로 화합할 때 방언의 은사는 교회에 더 이상 갈등의 요인이 아니라 축복의 방편이 될 것이다. 방언 열풍을 통하여 한국 교회를 뒤흔드는 사탄의 역사는 물러가고 화평하게 하는 성령의 미풍이 한국 교회를 부드럽게 감싸안을 것이다.



-박영돈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한국교회 성령운동, 무엇이 문제인가’(IVP)에서

삼상13 장에 보면 아직 다윗이 출생하기도 전에 요나단은 블레셋을 이긴 장수였는데 나이차이가 많은 것 같습니다. 통상 우리는 두사람의 관계가 막역한 친구사이라 하는데 신앙적인 친구겠지요?
제가 볼 때는 대략 30세정도는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요. 귀중한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답변

다윗과 요나단의 나이 치이는 얼마정도입니까? 30살 정도 차이가 난다면 통상 우리는 두 사람의 관계가 막역한 친구사이라 하는데 신앙적인 친구겠지요?


두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나이, 하나는 관계의 성격.

첫째, 나이문제: 성경이 서로의 나이를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으니까 궁금한 생각이 들죠. 사울의 나이를 언급한 사무엘상 13:1은 히브리어 본문이 훼손되어서 사울의 나이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사울이 한 살에 왕이 되어 이년을 다스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한글성경은 40세에 왕이 되었다고 했고, 가장 일반적인 현대 영어번역(New International Version)은 칠십인 역 루키안 역본을 따라서 30세에 왕이 되었다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은 사울이 약 40년을 통치했다고 본다면 70세 혹은 80세 조금 넘어서 죽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 요나단은 군대의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때 나이가 20내지 30세는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요나단도 50세 혹은 60세에 죽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 다윗의 나이가 30세였기 때문에 20년의 간격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James Jordan은 그의 특강에서 두 사람이 30년 정도 나이 차이가 난다고 했습니다.

 

둘째, 관계의 성격: 사실 다윗은 아버지뻘의 친구를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막역한 친구관계였지만 단순한 믿음의 친구로 보아서도 안됩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가 모범적인 우정으로 제시되고, 그들의 우정을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 이 둘의 관계가 보여주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조금 더 말씀드리면 이 관계의 중요한 점은 정통성 없는 왕위 계승자였던 다윗이 어떻게 해서 왕이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미 기름부음받은 메시야였고 요나단은 그것을 알았는지는 몰라도 자신의 마음에 합한 왕을 그 백성에게 주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어렵게 만들면서까지 자기에게 돌아올 왕관을 다윗에게 돌린 요나단의 행위는 메시야가 오는 길을 여는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요나단의 우정은 자기보다 어리고 신분이 비천한 다윗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순종할 메시야의 조상에 대한 사랑과 배려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을 통하여 인류에 대한 구원계획을 점차 이루어가셨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둘의 관계는 우정에 대한 단순한 모범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동성애적 관계는 더 더욱 아닙니다.

재미있는 해석이죠?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최병규교수

크리스챤큐앤에이/개혁주의마을/Grace


 

안상홍 증인회(하나님의 교회) 안식교 등에서는 '안식일을 부인하고 성경에도 없는 일요일 예배를 성경에 기록된 말씀인 것처럼 덧붙여서 가르치는 이들은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이 우매한 것인가를 밝히는 자료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1. '안식일' 의미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엿새 동안에 마치고 칠일 째에 안식하시고(2:1-3), 모세에게 주신 십계명 4 계명으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성별 하신 데서 비롯되었다(16:26,20:8,31:13-17;5:12,B.C.1446년경). 하나님께서 엿새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안식하신 일곱째 날로 오늘날의 토요일이다.

 

2. 이루어지지 못한 안식일

하나님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게 하려 하셨다(2:8).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낙원에서 쫓겨나

얼굴에 땀이 흐르도록 일을 해야 있게 되었다(3:19). 그리고 노아를 통하여(7:1), 아브라함을 통하여(17:1-8), 모세를 통하여(3:1-10), 여호수아를 통하여(1:3-9) 안식에 참여할 기회를 여러 주셨으나 계속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범죄로(13:17;20:12-16) 하나님께서 노하셔서 "저희는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95:11;3:11) 선포를 하시기에 이르렀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이 성일이라 더럽히지 말고 쉬어 평안하심을 원하셨는데(31:13-17)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훼손하였으며, 예수님 당시에도 성경에도 없는 39가지 안식일 금법을 만들어 사람들을 안식일의 노예로 만들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2:27)

예수님의 깨우치심이 이것에 연유한 것이다. 안식일은 사람들에게 부담과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과 온전한 쉼을 누리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이란 것이다.

 

3. 안식일을 완성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5:17).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안식일은 B.C. 5년경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땅에 오셔서 안식일의 주인이 되심으로 폐지되었다고 보아야 것이다(2:27,28). 이는 B.C.793년경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이미 예고되어졌던 일이기도(2:11). 하나님께서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5:14) 명령을 하셨는데도, 안식일을 피하여 병자를 고치셨다면 바리새인의 비난을 피할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38 병자를 고치시거나(5:5-9), 마른 사람을 고치신 (3:3-5) 많은 일을 안식일에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안식일의 완성자이기 때문이다(12:8;2:28;6:5).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들의 값을 지불하셔서 우리들의 안식을 가로막고 있던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다(27:32-46;15:24-34;23:33-45;19;18-30).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안식을 가로막고 있던 사단의 세력을 무너뜨렸다(28:1-6;16:2-6;24:1-6;20:1-1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신 것은 안식일의 완성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안식에의 초청 거부를 거두시고(95:11;3:11),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하시며 안식에 참여하라고 초청하신다. 이제 누구든지 주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참여할 있게 되었다.

 

4. 예배하는 날이 주일(일요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신 장사 된지 삼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신 날이 안식 (20:7)이.

날은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의 (1;10)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신 것은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신 것이다(14:9). 따라서 날을 기념하여 주일에 예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교부 저스틴(Justine) 자신의 저술에서 주일이 신자들의 예배일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였다.

첫째, 주일은 주의 날로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어둠에 빛을 던지신 날이기 때문이다.

둘째, 주일은 주님의 부활을 계속적으로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셋째, 주일은 일곱 번째 날인 안식일이 갖지 못한 '영적 신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다.

초대 교회에서는 지금의 토요일 저녁에 예배하였다. 당시의 유대력에 의하면 일요일은 현재의 토요일 저녁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 안식일 다음 시간을 그리스도인들의 모임 시간으로 삼았고 이는 유대교 안식일인 토요일과 불과 시간 정도의 차이 밖에 나지 않았으므로 신자들이 주일과 안식일 예배에 대한 거리감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트라얀(Trajan, 98-117) 황제의 박해 '제국내의 모든 야간 종교 집회가 불법이 되었기 때문에' 주의 만찬을 위한 초기 신자들의 주일 모임은 다음날인 일요일로 옮겨졌다.

주님과 가장 먼저 영적 교제를 갖기 위해 해가 뜨는 시간이나 전에 예배하였다. 변화는 안식일과 주일이 적어도 날에 있었던 관습을 깨는 사건이 되었다.

처음에는 예배하는 날이 유대인의 토요일과 이방인의 일요일로 공존하였다. 그러다 보니 문제로 갈등이 있었다(14:5,6). 바울은 안식일 문제로 폄론하지 말라고 하였다(2:16). 안식일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2:17).

구약의 유월절 만찬이(대하30:15-17) 신약의 성찬예식으로 대치되듯이(6:53), 구약의 짐승의 피가(3:2;13:11) 신약의 그리스도의 피로 대치되듯이(1:7), 구약의 '안식일' 신약의 '주일' 대치하여 완성된 것이다.

 

5. 주일(일요일) 예배한 기록

1) 주후 98~118년경 사도 요한의 직계 제자이며 안디옥 교회 감독 이그나티우스(Ignatius)

'마그네시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 : "이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님의 날에 의해 살게 되었습니다."

 

2) 주후 100년경 기록된 기독교 예배 지침서인 디다케(Didache) 기록 :

"'주의 ' 특별한 날이므로 주의 날마다 함께 모여 떡을 떼며 감사를 돌릴 것입니다."

 

3) 주후 70~130년에 기록된 위경으로 분류된 프슈도 바나바(Barnabas) 편지 :

"여덟째 (*일요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인 천년왕국의 안식 후에 마지막 영광을 바라본다."

 

4) 주후 165년경 순교한 교부 저스틴(Justine) 1 변증서 :

그리고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날마다 도시에 사는 사람이나 시골에 사는 사람이나 곳에 모입니다."

 

5) 주후 165년경에 사망한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 Martyr) 기록 :

일요일이라는 날에 모이는 기독교 집회의 예배 순서를 기록하고 있었다.

" 순서는 성경봉독, 설교, 기도, 주의 만찬 의식과 봉헌이 있었다."

 

6) 주후 170년경 고린도 감독 디오니시우스(Dionysius) 로마 감독 소테르(Soter)에게 보낸 편지 :

우리는 주의 거룩한 날을 지켰습니다. 날에 당신의 서신을 읽었습니다."

 

7) 주후 215년경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클레멘스(Clemens) 일요일 준수를 지지하는 글을 남겼다.

 

8) 초대 교회의 교부 터틀리안(Tertullianus)

당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위정자들과 일반 이교도들에게 호소하기를,

"태양과 일요일을 가지고 우리를 비난하는 그대들은 우리와 친근해야만 한다. 우리도 그대들의 '사투른 '(Saturn. *농사의 ) 그대들의 쉬는 날들(*토요일) 결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9) 초기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신학자 그리스 교부 오리게네스 (origenes 185~254) :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날이 주님의 날이기 때문에 주님의 날을 항상 지키고 있는 것이다."

 

10) 주후 253년경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주교인 키프리아누스(Cyprianus)

난지 8일만에 행하는 유대교의 할례 관습을 기독교의 주일 준수를 예시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11) 4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인 페트로스(Petros) :

"주일을 기쁨의 날로 지킨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날에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12) 주후 321 3 7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Constantine, 주후 274~337) 일요일을 휴일로 하는 칙령 :

모든 재판관과 시민 그리고 기술자들은 존엄한 태양의 날에 쉬어야 한다."

 

13) 주후 386 로마의 황제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치리 379~395) 휴식령 :

"우리 선조들이 주일이라고 옳게 불렀던 일요일에는 모든 기소와 소송에 관한 처리와 업무를 일체 중지할 것이다."

 

6. '안식일' '주일' 비교

< >       < >                                                    < >

1.     구약( 언약)                                         시대 신약( 언약) 시대

2.     일곱째 (23:3)                                   안식 첫날(20:7)

3.     토요일(Saturday)                                   일요일(Sunday)

4.     여호와의 (31:13)                              주의 (1:10)

5. 예배자  이스라엘 자손(5:3)                              주의 이름을 부르는 (2:21)

6.     짐승의 피로 제사함(17:1,6; 9:22)       그리스도의 피로 예배함(9:12;20:7)

7.     창조하신 하나님(20:8-11)                    부활하신 예수님(20:19)

               창조의 완성(2:2)                                  구원의 완성(2:8)

               육체적 안식(2:3)                                  영적 안식(4:10)

               애굽의 종에서 구원받음(5:15)               죄의 종에서 구원받음(6:6)

8.     처음 하늘과 처음 (21:1)                     하늘과 (21:1)

               안식의 미완성(4:8)                               안식의 완성(4:3)

               안식에의 거부(95:11)                           안식에의 초대(11:28)

               의문의 묵은 (7:6; 고후3:6)                 영의 새로운 (7:6; 고후3:6)

               장래 일의 그림자(3:17)                         형상(10:1)

9. 할    몽학 선생의 역할(3:24)                         몽학 선생이 필요 없음(3:25)

               안식일은 폐하여 것임(2:11)               예수님이 안식을



출처: 개혁주의마을/이지명

 

죄죽임의 교리, 죄의 본질과 세력과 미혹 - 존 오웬 -

글쓴이: 하우톨    03.12.19    http://cafe.daum.net/heavenladder/1wm/89

 

 

< 죄와 유혹 > 존 오웬

서문 - 제임스 패커

오웬은 청교도들 중 가장 경건한 사람으로서, 오웬의 장례식에서 그의 친구의 한 사람이었던 데이비드 클락슨은 " 거룩함은 그의 모든 업적들에게 신적 광채를 더해 주었습니다" 고 설교했습니다.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오웬은 그의 설교를 통해 " 겸손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생각을 하는 것이요, 그 다음에는 자신에 대해 합당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의 위대하심과 영광과 거룩하심과 능력과 위엄과 권위를 생각해야 하며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천하고 가련하고 악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고 설교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인의 생활은 점진적으로 발전해 가는 성화의 약속입니다. " 성화는 하나님이 영이 신자의 영혼에 직접적으로 행하시어 인간의 본성에서 죄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 주시며 인간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하시어 인간으로 하여금 신령하고 계속적인 은혜의 원리에 따라 하나님께 복종하게 하시는 사역입니다....간단하게 말하자면 성화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본성을 보편적으로 개혁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화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거룩함이 뒤따릅니다. 그것은 이 사역의 결과요 열매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새로이 이루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포함하므로 은혜의 언약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순종 안에 존재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거룩함이란 " 우리 영혼 안에 복음이 심기어지고 기록되고 실현되는 것...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서 은혜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의 성장이란 그 말씀에 더욱 일치하는 것입니다" 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면에서 성화는 중생에 의해 우리 안에 심기운 새로운 능력들과 기호들을 소생시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성화는 죄를 죽이는 것입니다.
죄는 점진적이고 계속적으로 약화시키는 것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기독교인의 생활의 내면 상태에 관한 오웬의 전반적인 견해는 다음의 세 책에 잘 나와 있습니다.
<내면의 죄>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을 놓고 죄와 은혜가 서로 상충하는 것을 한편의 드라마로 볼 수 있게 하는 책입니다. <유혹>은 상기의 책과 비슷한 구성으로 되어 있으나 보다 더 자세한 설명을 곁들인 책입니다. <죄를 죽이는 것>은 은혜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고차원적인 방안을 제시한 책입니다.
오웬의 이들 세 저서는 모두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오웬은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이를 다시 삶에 적용하였으며, 자신이 제시하는 모든 점에 대해 성경으로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이 세 가지 책은 모두 영적으로 매우 깊은 책입니다. 인간의 심령에 대한 오웬의 통찰에는 초인적인 신비로움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한 그의 통찰을 얼핏 보기에는 특색이 없고 개괄적인 표현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 이 점이 바로 그의 능력의 특징입니다.

앤드류 톰슨은 <유혹>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 책은 구구 절절 독자들의 마음에 빛을 비추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마치 그 책이 그들 각각을 위해 쓰여진 듯이 느껴진다." 고 했습니다. 약 백년 전 유명한 랍비인 던칸은 제자들에게 <내면의 죄>를 읽으라고 하면서 "그러나 칼을 준비하라"고 부언했습니다.

~ 내면에 거하는 죄 ~

"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 (롬 7:21 )

1. 죄의 본질

죄는 인간의 마음에 있다는 교리는 기독교 교리의 기본이 됩니다.
이 진리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을 알고 거룩한 계시에 의해 살아가는 사람들만 소유하는 특별한 것입니다.

(1) 죄의 법은 마음 안에 거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내면에 거하는 죄를 '법'이라고 햇습니다.
자신의 본질에 합당한 행위를 하도록 강요하고, 그러한 마음을 내키게 하는 강력히 내재하는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가장 적게 느낄 때가 사실은 죄가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입니다.
(2)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의 죄를 알아야 합니다.
(3) 믿는 사람들은 선을 행하기 원할때에 자신의 내면에 이 법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4) 내면에 있는 죄의 상태와 행위를 관찰하십시오.
죄의 원리는 마음 안에 있으며 죄의 현주소는 마음입니다.

2. 죄의 세력

(1) 죄는 증오심입니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증오심입니다. 죄의 본질이 증오심이므로 발견할 수 있으며, 유일한 대책은 증오심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입니다.
첫째, 죄는 하나님에 대한 보편적인 증오심입니다.
둘째, 영혼을 대적하는 죄의 증오심은 보편적입니다.
세째, 죄의 증오심의 세력은 지속적입니다.

(2)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항입니다.
사단은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여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지 않은 채 하나님을 섬기게 합니다. 우리의 생활에서 죄를 내버려두면, 그것은 자라나서 양심을 마비시키고 소경이 되게 합니다.
우리가 죄를 정복하지 않으면 오히려 죄에 정복당하고 맙니다.

첫째, 마음의 경향을 하나님께 고정시키라
우리는 개인적인 의무나 공적인 의무를 행함에 있어서 일관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순종하는 데에 조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반감의 사역이 시작되지 못하게 하라.
최초의 싸움에서 그것들을 공격하지 못하면, 나중에는 그것들이 승리할 것입니다.
세째, 비록 죄가 역사하더라도 이기지 못하게 하라.
네째, 우리의 본성 안에서 죄가 영적 생명에 대해 갖는 반감을 의식하고 겸손하게 사십시오.
다섯째, 신령한 것들의 아름다움 및 탁월함과 더불어 이 마음을 소유하려고 노력하십시오.

(3) 죄는 하나님께 대한 대적 행위입니다.
첫째, 죄는 정욕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마음은 악을 행하려는 은밀한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리석고 죄악 된 상상들에 의해서 예기치 않게 죄가 영혼으로 분출해 들어올 때에, 우리는 자신의 소유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악한 생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 중에 영혼 안에 침입하는 죄보다 더 큰 짐은 없습니다.
이러한 죄의 침입은 의지의 동의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무의식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악의 유입의 원천은 의지의 타락입니다.
정욕은 실질적인 접촉 속에서 악을 인정하며, 계속 마음을 침입하고 공격합니다.

둘째, 죄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웁니다.
죄는 감정들을 혼란하게 만들며, 그것들로 하여금 연합하여 정신을 대적하게 만듦으로써 전쟁을 수행합니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먼저 우리는 위대하시고 영광 중에 거하시고 거룩하시며 능력이 있으시고 위엄이 있으시며 권위가 있으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는 비천하고 죄악 되고 비참한 상태에 있는 우리 자신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악이 있음을 인식하는 사람만이 유익하고 열매를 맺는 견고한 신앙과 순종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세째, 죄는 영혼을 사로잡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우리는 죄에 사로잡힘과 관련하여 네 가지 사실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죄의 세력은 우리를 노예 상태로 이끌어갑니다.
그 다음, 죄는 사람들을 사로잡는 일에 크게 성공을 거둠니다.
물론 사람들이 노예 상태로 전락하는 데는 많은 단계가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사로잡힘은 견디기에 비참하고 불행한 상태입니다.
사람이 싫어하는 상황에 억지로 끌려 들어갈 때에 그의 멍에는 그를 세게 조입니다. 그것은 심지어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로잡힘이란 기독교인만이 처하는 특별한 상태입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은 결코 죄의 법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그들은 한 두 가지 특별한 죄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이것은 범죄를 원하지 않는 신자들의 사로잡힘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죄를 미워하기를 원합니다.

네째, 죄는 광기를 발합니다.
죄의 격노함과 광기는 비록 일시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법을 거부하게 만듭니다.
그 때에 그리스도의 현존 의식이 상실됩니다.
이러한 광기에는 종종 무모함과 담대함이 따릅니다.
일관성이 있는 판단 능력은 그것이 발휘하는 영향력과 함께 소멸됩니다.

3. 죄의 미혹

(1) 정신에 대한 죄의 유혹
죄는 정신을 미혹합니다. 유혹이 정신에 영향을 주면, 범죄의 기회는 배가됩니다
정신이 어떤 행동의 방침이나 대상에 고정되어 있으면,의지와 감정은 정신이 하는 대로 따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죄 속에 감정들이 뒤얽혀 괴로울 때에 가장 위험한 상황은 정신의 유혹입니다. 모든 죄의 책임은 오직 죄인에게 있습니다.
죄의 주된 목적은 우리의 정신을 분산시키고 산란하게 하여 신자로서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정신은 두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첫째는 순종하며, 모든 악한 유혹을 깨어 지킬 수 있는 정신 상태와 자세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에 따라 요구하시는 모든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수행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두려움과 여호와에 대한 경외심은 동일한 것입니다.
죄는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떠나게 만든 후에 은밀하게 영혼을 공격하여 서서히 죄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첫째, 죄는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강조함으로써 정신을 어지럽힌다.
확실한 죄사함이라는 교리를 빙자하여 은밀하게 죄에 대한 방심을 심어줍니다.
신앙의 지혜와 능력은 그러한 속임을 대적합니다.
복음의 지혜와 은혜의 위대한 효과는 우리의 마음을 항상 겸손하고 죄를 혐오하며 자기 낮춤의 상태로 유지해 줍니다.

둘째, 죄는 정신을 미혹하여 세상 사람들의 올바른 상태와 처지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죄 자체에 대한 진정한 자책감이 없는 영혼은 강퍅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2) 유혹을 약화시키는 묵상과 기도

영혼으로 하여금 항상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거룩한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 정신의 의무입니다.

첫째,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및 그의 탁월하심, 영광, 위엄, 사랑, 선하심 등에 대해 생각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겸손하고 의지하는 심령으로 하나님께 직접 이야기하듯이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정신을 집중시키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들을 합당한 방법으로 차례로 이끌어냅니다. 이것은 영혼에 영향을 주어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찬미와 하나님 안에서의 즐거움을 발휘하게 할 것인 바,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들입니다. 기도하거나 찬송하기를 원할 때에는 하나님과 더불어 이야기하면서 묵상하십시오.

둘째,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 정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지시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그것에 의해 당신의 마음이 감화를 받도록 노력하십시오.

세째, 자주 묵상하십시오.
이 의무는 모든 죄의 은밀한 역사와 활동들을 드러내주며, 그것에 함축된 위험을 인식해 줍니다.

네째, 자주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효과는 죄악에 대한 깊고 풍만한 의식과, 죄를 미워하는 새로운 감정을 줍니다. 우리 앞에 죄를 제시하고, 그 사악함과 가증함과 심각함을 알게 하여 우리로 그것을 버리게 하는 것이 기도의 목적입니다(사30:22). 하나님께 죄 사함을 간구하는 사람은 자기 영혼에게 그것을 미워하라고 요구합니다(호 14:2-3)
그리하여 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심판을 받습니다.
그것은 또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며 심판하신다는 것을 영혼에게 확증해 줍니다. 기도는 영혼으로 하여금 죄를 민감하게 대적하게 하므로 기도하는 영혼은 한 순간이라도 은밀하게 죄의 인정을 받거나 매수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는 신자의 내면에 거하는 죄를 약화시킵니다. 기도는 죄를 대적하는 힘과 능력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기도와 묵상은 죄의 온갖 거짓된 작용을 좌절시키며, 죄에 대한 모든 싸움에서 항상 하나님과 연합합니다. 신자의 영혼이 이유없이 피곤하거나 권태로 인해 병드는 것은 죄악된 질병이 그 영혼 안에 머물러 있다는 확실한 징조입니다.
정신이 기도나 묵상이 아닌 일을 곰곰이 생각해야 하며, 또한 그것이 타당한 일이라고 주장할 때 발생합니다.

죄는 육체의 피곤함을 이용하며 죄의 유혹은 생활 속에서의 절박한 상황에 대하여 거짓된 주장을 합니다. 특별한 의무들은 쉽사리 일반적인 기도의 실천을 제거해 버립니다. 또한 죄는 보충 의무들을 주장하며 어떤 특별한 의무에 집착 시킴으로써 우리의 정신을 분산시키며 거짓 약속과 목적으로 영혼을 먹입니다.

영혼을 돌보고 보호하는 주된 의무는 정신에 있습니다.
정신이 그 의무를 행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것은 파수꾼이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이로써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견고함의 참된 본질은 첫째는 하나님에게 완전히 매달리는 것이요, 둘째는 날마다 새롭고 소생하는 마음으로 모든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요, 세째는 그러한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으려는 결심입니다.

(3) 특별한 의무에만 정신을 집중하지 않는 방법

정신이 분산되고 부패하고 연약해지고 자신의 역할을 태만히 한다면,영혼 전체가 그 영향을 받습니다. 죄가 유혹에 의해서 우리의 정신에 영향을 줄 때, 우리는 말씀의 생명과 능력과 감각과 감명을 상실합니다. 이것은 지극히 심각한 일이며, 우리 영혼의 큰 염려의 원인입니다.

첫째, 죄는 정신에게 개개의 특별 의무는 피하고 일반적인 것들만 다루라고 권면합니다.
둘째, 정신은 은밀하게 범죄하면서도 의무를 행하는 데서 만족을 느낍니다.
세째, 정신은 종종 형식적으로 의무를 이행합니다.
네째, 죄는 정신의 부지런함을 유지하지 못하게 합니다.
죄가 성공하면 영적 나태함을 낳는다. “깨어 있으라”는 성경의 명령은 이러한 위험에 대한 경고입니다. 놀라지 않고 미혹을 받지 않기 위해서 지극히 부지런해야 합니다. 영적 나태함의 특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부주의하며, 자신의 의무를 행하기 위한 자극을 받을 때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을 보호하고 자기 일을 완수하려는 시도를 하지만 연약하고 무익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도덕적인 불굴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다섯째, 죄는 불시에 습격하여 정신을 유혹하고 분산시킵니다.
우리는 죄와 협상하기 위해서 지혜를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예기치 않은 공격으로 영혼을 놀라게 할 뿐입니다.

여섯째, 죄는 빈번하고 끈질지게 유혹하여 정신을 미혹합니다.

(4) 특별한 의무에 정신을 집중하는 방법
우리가 이러한 의무를 수행하기에 합당한 영혼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수고는 헛된 것입니다.

첫째, 전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
세째,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우리의 지혜와 욕구를 발휘해야 한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의무는 신령한 욕구와 더불어 수행되어야 합니다.
네째,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섯째, 죄에 대한 형벌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섯째, 죄와 대적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일곱째, 그리스도의 보혈과 중보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덟째,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생각해야 합니다.
출처: 생명수 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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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

 
금수현 곡
김말봉 시
송광선 Sop.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나가 구름속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양 나래쉬고 보더라

한 번 구르니 나무끝에 아련하고
두번을 거듭차니 사바가 발 아래라
마음의 일만 근심은 바람이 실어가네

 




교회와신앙

1998-3-1

박일민

 

죄란 무엇인가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박일민  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사람은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또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좋은 사람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매우 적다. 왜 우리는 기대와 현실에는 이처럼 많은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죄가 사람의 본성과 운명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과 관쳬臼㈋�, 죄와 죄의 해결 문제에 최대의 관심을 보인다. 이제 성경의 최대 관심사인 죄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죄의 개념

 죄는 특정한 사람들만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죄에 대한 관심사가 있다. 그러나 동일한 사안을 두고 어떤 사람은 심각한 죄라고 강력하게 비난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죄가 아니라고 태연해 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는 누가 보기에도 분명한 죄를 범하고도 태연해 하거나, 더 큰 악을 막기 위해 부득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죄를 정당화하려는 경우까지도 있다. 각자의 처한 상황이나 이해 관계에 따라서 다양하게 죄를 이해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결과다. 그러나 죄에 대한 성경의 기준은 단 하나다. 그 기준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내용이 고려된다. 

 죄는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 성경은 죄를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죄로 여겨지지 않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로 간주되는 일이 많다. 그래서 시인은 고백하기를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상대적인 관점에서만 죄를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죄"라고 한다(롬 14:23).

 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위반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생각이나 하시는 일은 다 선하다. 죄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르지 않거나, 하나님의 뜻의 표현인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래서 죄는 불법 또는 반역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죄는 도덕적인 것이다. 죄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재난이나 육체의 질병과 다르다. 자연적인 재난이나 육체적인 질병에는 의지가 개입되지 않는다. 그러나 죄는 의지와 연관이 되어 있다. 넓게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죄의 악한 영향을 입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무의식적이고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들에는 죄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거센 비바람에 집이 무너지거나, 어둠 속에서 돌에 걸려 넘어져 무릎에 상처가 난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부실공사로 집이 무너지는 것이나, 고의로 상대방을 밀어 뜨려 다치게 하는 것은 죄이다.

 죄는 의지와 관련되어 있기에 책임을 수반한다. 의지에 따른 행동의 결과는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 사업을 게을리 하면 부도의 책임져야 한다. 공부를 게을리 하면 낙제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울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라도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죄가 져야 할 책임은 죽음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여기서 죄로 말미암은 사망이란 육체적인 사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망에는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육체적인 사망,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두절되는 영적인 사망,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내어 쫓겨나 지옥의 고통 속에서 슬피울며 이를 가는 영원한 사망이 그것이다. 죄의 책임으로서의 사망은 이 세가지 사망을 모두 포함한다.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은 생명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그러기에 다만 죄만을 생각한다. 죄에로만 더욱 깊어진다.

 죄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경은 사람이 속으로 품은 생각까지도 죄로 지적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죄를 범한 것으로 여긴다(마 5:28). 겉으로 형제를 해하는 자만이 아니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한다(마 5:22). 마음으로 악한 생각을 품었지만, 실제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고 하여서 죄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악한 행동을 하기 이전의 동기부터 죄로 여겨진다. 또 아무리 선해 보이는 업적을 이루었거나 그 동기가 선했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이 잘못되어 있으면 역시 죄로 취급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사람이 가진 악한 성향마저도 죄로 여긴다. 사도 바울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고 했다. 이 말씀 속에는 사람의 감정과 육체의 기질도 죄로 취급되어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죄는 중간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죄이면서 동시에 죄가 아닌 것, 또한 죄도 선도 아닌 중간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죄이면 죄이고, 죄가 아니면 선이다. 이것은 마치 천국과 지옥 사이에 중립 지역이 없는 것과 같다. 죄인이 가야 할 곳은 오직 지옥이다. 의인이 가는 곳은 천국뿐이다. 또 다른 장소는 없다. 또 빛과 어두움 사이에 중간자가 있을 수 없는 것과도 같다. 빛이 없는 것이 어두움이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사라지고 만다.

 2. 죄의 종류

 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죄를 종류별로 나누어 보는 것이 좋다. 죄는 먼저 원죄와 자범죄(본죄)로 나누어진다.

 1) 원죄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12)고 했다.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말이다. 이는 모두가 실제로 경험을 통해서 확인하고 있는 바다. 왜 한 사람 예외 없이 모두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사람들에게 본성적으로 죄의 쓴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쓴뿌리를 원죄라고 부른다. 이 죄를 원죄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죄는 우리들 각자가 범한 죄가 아니라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범한 죄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요, 대표자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는 온 인류에게 악영향을 미쳐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만든다. 둘째, 이 죄는 우리가 나기 전부터 선천적으로 가진 죄이기 때문이다. 원죄는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죄가 아니다. 셋째, 모든 자범죄의 원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2) 자범죄

 성경에서 각 개인이 실제적으로 범한 자범죄와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는 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죄인 줄 알면서도 범한 죄가 있다(知識罪). 이 죄는 죄인 줄 모르고 범한 죄보다 죄책이 훨씬 더 가중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눅 12:47~ 48)고 했다.

 죄인 것을 알지 못했기에 범한 죄가 있다(無識罪). 그러나 죄인 것을 몰랐다고 해서 죄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모르고 행했다 하더라도 죄는 죄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몰랐다는 핑계가 소용없음을 깨닫고, 무엇이 죄인지를 알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

 사람이 실수하거나 연약해서 범한 죄가 있다(過失罪, 軟弱罪). 죄인 것을 알면서도 연약하고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범한 죄이다. 연약죄도 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하고 담대하기를 힘써야 한다. 믿음의 장성한 분량은 연약죄를 얼마든지 감소시킬 수 있다.

 죄인 것을 알면서도 고의로 범하는 죄가 있다(故犯罪).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민 15:30)고 한 말씀 중에서, 짐짓 범한 죄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 죄는 고범죄라고 불려진다. 고범죄는 연약죄에 비해서 죄책이 훨씬 더 가중된다. 사도 바울께서는 이러한 죄를 범한 사람은 그 죄가 드러날 때, 먼저 심판에 들어간다고 했다(딤전 5:24). 그러므로 다윗 임금은 고범죄를 범치 않음으로써, 큰 죄과에서 벗어나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시 19:1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속죄제물이 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용서함을 받는다. 그 용서에는 예외가 없다. 무식죄만 아니라 지식죄도 용서를 받는다. 연약죄만 아니라 고범죄도 용서를 받는다. 제아무리 주홍 같은 죄라도 다 양털같이 사함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무리 막중한 죄라도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성경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고 하는 말씀이 있다. 그래서 요한 사도께서는 그러한 죄를 범한 자를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그러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란 과연 무엇인가?

 3) 용서받지 못할 죄(不可赦罪)

 성경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말씀하고 있는 곳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보임이라"(히 6:4~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한 자를 소멸할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한 것을 보거든 구하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이 구절들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성령훼방죄, 다시 타락한 죄, 짐짓 범한 죄, 사망에 이르는 죄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표현들을 잘 비교해 보면 무엇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지가 밝혀진다.

 "한 번 비췸을 얻고 …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라는 표현과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전혀 기독교 밖에 있는 자들의 죄가 아니다. 상당한 체험과 지식을 가진 자들이 범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또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는 표현과 "성령을 거역하면"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성령의 역사와 관련이 되어 있다. 또 "짐짓 죄를 범한 즉"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고의적인 죄이다. 그리고 "구하라 하지 않노라"하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회개와 무관한 죄이다. 따라서 용서받지 못할 죄란, 실상은 구원을 받지 못했으면서도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인 줄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그 역사를 방해하면서,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죄라고 할 수가 있다.

 대부분의 경건한 성도들에게는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상당히 심각하다고 여겨지는 죄를 범하고 나면, 이것이 바로 혹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닌가 하여서 고민을 한다. 경건의 성숙도가 더한 사람일수록 작은 죄에도 불구하고 그 고민은 더 심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용서받아지지 못할 죄가 없다. 그러므로 죄가 생각나거든 고민하지 말고 즉시 회개를 해야 한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함부로 어떤 특정한 행위를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정죄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성급한 생각 때문에 죄인을 회개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방해하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주님을 맹세코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도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셨다. 뿐만 아니라 회개한 베드로는 범죄하기 이전보다 더 신중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졌다.

 3. 죄의 판단기준과 율법

 성경은 죄를 불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법이 없으면 불법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죄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설명은 죄를 가능하게 하는 법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1) 율법의 개념

 나라들마다 법을 가지고 있다. 날이 갈수록 그 법은 더 많아지고 있다. 또 국제간에도 법이 생겨난다. 그런데 법은 그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강제력을 부여하여서 그 의지를 반드시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삼고 있다. 하나님의 법도 이와 같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반드시 그 의지가 반영되도록 요구한다. 따라서 율법의 요구에 대한 불순종은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불순종이 된다. 이 불순종이 바로 죄다. 성경은 빈번하게 죄를 불법, 법에 어긋남, 빗나감 등으로 표현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2) 율법의 종류

 하나님의 율법에는 문서의 형태로 기록되지 않은 불문법(不文法)과 문서의 형태로 기록되어진 성문법(成文法)이 있다.

 불문법에는 자연법과 도덕법이 있다. 자연법이란 자연계나 사람의 본성 속에 주어져 있는 자연의 법칙을 말한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은 기쁨의 단을 거둔다. 좀더 졸고 자자고 하는 사람에게는 빈궁이 찾아든다. 열심히 연구하고 지능을 개발한 사람은 많은 지식을 깨닫게 된다. 이 모두가 자연법에 해당된다. 도덕법이란 사람의 양심에 새겨진 법을 가르킨다. 사람의 양심에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잘 반영되어 있다. 자연이나 양심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죄가 된다.

 성문법은 문서, 즉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법을 가리킨다. 성경은 그 전체가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율법 형식을 가진 부분만을 제한해서 본다면, 하나님의 법은 세 가지로 구분이 되어진다. 기본법과 의식법과 시민법이다. 기본법은 십계명을 가리킨다. 십계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이다. 십계명은 그 공포나 보관 방법이 다른 법들과는 달리 매우 독특했다. 그래서 황금률이라고도 부르게 된다. 우리는 십계명을 대할 때, 단지 문자적으로만 대할 것이 아니라 최소한 다음 몇 가지 원리들에 더 유의를 해야 한다.

 순서의 원리: 먼저 주신 계명은 나중에 주신 계명보다 우선해서 지켜져야 한다. 만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지만, 이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 장애가 되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일은 당연히 없어야 한다. 그러나 죄악된 세상에서는 가끔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때 고려되는 것이 순서의 원리이다.

 대표의 원리: 십계명은 문자대로 지켜야 한다. 그러나 그 문자 안에는 대표의 원리가 들어 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아버지와 어머니만을 공경하라는 말이 아니다. 부모라는 말에는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삼촌, 고모, 이모 등 웃어른을 대표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도 살인의 결과만 금한 것이 아니다. 살인 계획이나 분노, 미움, 모욕 등의 감정, 그리고 살인의 수단이나 과정까지 금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칭의 원리: 십계명은 그 문자적인 내용과 대칭 되는 의미까지를 고려해서 지켜야 한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은 안식일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에는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라는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네 이웃을 해하지 말라는 계명에도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칭적 의미인 네 이웃을 내몸 같이 사랑하라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살인이나 거짓 증거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거나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된다.

 성문법에는 십계명 이외에도 의식법이 있다. 의식법은 제사의 종류, 절차, 재료, 방식, 출애굽 당시의 진행 방식, 위치, 역할, 할례와 유월절 의식, 절기를 지키는 시기나 절차 등에 관한 법이다. 이 모든 의식법들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의식법을 지키지 않으면 죄가 된다. 의식법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말미암는 사건들을 예표한다. 따라서 의식법은 실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되어졌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금의 우리는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이 법을 지키고 있다(히 8:6~7).

 시민법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회 생활에서 지켜야 했던 법, 즉 재산의 분배나 가정 생활이나 범죄의 형량, 또는 병든 자의 격리와 회복자의 수용 절차 등에 관한 법이다. 시민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법에도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법의 위반도 역시 죄가 된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이 다른 형편에까지 시민법을 문자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따라서 그 원리만을 살리는 것으로도 족할 것이다.

 3) 율법의 기능과 역할

 율법은 은혜 아래 있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종교 개혁자들 이후로 다음 세 가지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

 첫째,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보여준다. 율법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또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 가시는지 하는 것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 원하면, 그리고 하나님의 솜씨인 피조물들 또는 하나님이 일하신 흔적인 역사를 바로 알기 원하면, 율법을 깊이 연구해야 한다.

 둘째,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준다. 율법은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된다. 그리고 죄의 결과가 죽음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해준다. 또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의 어리석음도 보여준다. 동시에 율법은 무엇이 우리의 살 길인지를 찾게 해준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인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부른다(갈 3:24).

 셋째, 율법은 구원받는 자의 삶의 표준이 되어 준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이제 사나 죽으나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인가. 율법은 바로 그 방법을 제시해 준다. 그러므로 율법은 은혜를 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은혜의 완성이 된다.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자원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여서, 율법과 상관이 없이 우리의 마음대로 살아도 무방하다고 하는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심령을 찾으신다. 상한 심령이 되기 위해서는 죄를 알아야 한다. 죄를 알기 위해서는 율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 앎은 단순히 지식적인 이해나 암기가 아니다. 가슴을 찢는 앎이다. 우리에게는 늘 다윗과 같은 기도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은 찢어진 가슴을 싸 메시고, 애통하는 마음을 복되게 여겨서 위로와 평안의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마 5:4).
(월간 <교회와신앙> 1998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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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3:16-28)


오늘 성경말씀은 너무나도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인데 이걸로 횡설수설 좀 해볼까 합니다. ‘일천번제’ 바로 다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솔로몬의 지혜가 솔로몬이 원래 가졌던 지혜가 아니라 일천번제를 드린 다음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였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열왕기 저자의 의도일 것입니다.

창기 두 여자가 한 집에서 각각 아들을 낳았는데 한 여자가 잠자다가 자기 아들을 깔아서 죽이고 다른 여자의 아들과 바꿔치기 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다투다가 솔로몬 왕 앞에 나와 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으로 다스려지는 이스라엘에서 창기라면 가장 비천한 죄인의 신분인데 감히(?) 왕 앞에 나와 재판을 받습니다. 우리도 신분의 고하나 귀천과 관계없이 이와 같이 누구든지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요즘 세상 같으면 DNA검사로 간단히 판별할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게 있었을 리 만무하지요. 그런데 우리 잘 아는 바와 같이 솔로몬은 칼을 가져오게 한 다음 아기를 둘로 갈라서 두 여자에게 나누어주라는 판결로 진짜 어머니를 알아내는 재판을 합니다. 그리고 이 지혜로운 판결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솔로몬에게 있는 하나님의 지혜에 두려워 떨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다음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는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그리고 그가 누린 막강한 권세와 평화와 부귀영화가 부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솔로몬의 재판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메시지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1. 솔로몬을 통하여 전지하신 심판의 하나님을 보여 주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끔찍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주가 되려면 전지(全知)하셔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넓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다 아시고 판단하시지 못 한다면 하나님은 심판주가 될 수 없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악(惡)이 지배하고 악행(evil doing)과 범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매우 유용한 도구와 무기가 될 것입니다. 착한 자는 당하기만 할 것이고 나쁘고 교활하고 못 된 자들은 항상 빼앗아서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억울한 일은 보상받지 못 하고 악한 자들은 처벌받지 않을 것입니다. 이사야서 40장 27절은 말씀합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하나님이 너의 사정을 모르시고 너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못 하실 거라고 하느냐? 하나님의 명철은 한이 없으시다.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신다.”

2. 심판은 칼로 나누어 하는 것이다.
솔로몬 왕은 칼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심판은 칼로 하는 것입니다. 칼로 쪼개고 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합니다(히 4:12). 주님의 입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옵니다(계1:16).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 그 터럭의 3분의 1은 성 안에서 불태우고 3분의 1은 성 밖에서 칼로 치고, 3분의 1은 공중에 뿌려 흩어라, 내가 그 뒤를 따라 칼을 빼리라.” 마지막 날에는 악인과 선인이 나누어질 것입니다. 좌편과 우편으로 나뉘어질 것입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자와 그렇지 못 한 자들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은 피할 자가 없습니다.
 
3.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지혜와 다르다.
솔로몬이 칼로 아기를 나누라고 명령하였을 때 주변의 신하들이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였을까요? 혹시 왕이 미쳤다고,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요?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8-9).”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이 세상의 지혜로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우고 어린아이들에게는 열려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4. 사랑이 이긴다.
솔로몬의 재판에서 아기의 진짜 어머니는 사랑으로 이겼습니다(승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이깁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믿음, 소망, 사랑, 세 가지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 말씀합니다. 주님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 없는 자는 이기지 못 할 것이며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 할 것입니다.

5. 참된 사랑을 보여줍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자신의 좋아하는 감정과 착각합니다. 좋아해서 만나고 결혼했다가 싫어지면 갈라서고 병이 들거나 화상이라도 입어 모습이 달라지면 떠나갑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신의 필요에 따라 상대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자기를 위한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를 위한 사랑, 상대중심의 사랑입니다.
진짜 어머니인 여자는 칼로 아기를 쪼개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닌 여자에게는 자기의 요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아기가 살든지 죽든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진짜 어머니의 사랑은 아기를 향한 사랑이었고, 거짓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위한 사랑, 아니 이기심이었던 것입니다.

6. 하나님의 사랑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하여 인간을 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또 말씀하기를 우리는 사나 죽으나,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을 위하여 우리 인간을 지으셨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중심이거나 이기심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을 위한 사랑, 하나님 중심의 사랑이었다면 인간이 범죄하여 죄인이 되고 진노의 자녀가 된 순간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에게서 돌아섰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대로 죄인들을 싹 쓸어버리고 다시 지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이 된 인간을 포기하거나 내버리지 못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긍휼로 불타는 듯 하였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사랑입니다.

7. 진퇴양난, 절체절명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구원의 방법
자, 오늘 말씀은 솔로몬왕이 칼로 아기를 자르라 하였지만, 좀 바꾸어서 그 창기 두 여자가 아들을 놓고 양쪽에서 잡아당기기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서로가 죽어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진짜 어머니는 압니다. 자기가 아들을 놓아버린다면 저 무지한 여자가 오늘밤에 그 아들을 깔아뭉개서 죽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어도 뺏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저 여자는 아기가 찢어져도 안 놓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손을 놓는다면 아들은 저 여자에게 깔려죽을 것이고, 안 놓는다면 이 자리에서 찢겨서 죽을 것입니다. 아들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이라면 이 경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아들은 죽는 수밖에 아무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을 절망이라고 합니다.
우리 죄인들이 그랬습니다. 사단의 손아귀, 사망의 권세에 붙잡혀 끄집어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그 죽음의 자리에, 십자가에 대신 내어주셨습니다.
십자가, 그것은 솔로몬의 칼 보다도 더욱 기이한, 천사도 경악한 기이한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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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탄에 대해

 

 

1. 사탄의 존재

 

사탄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일차적 증거는 어떤 체험이나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성경 말씀이다. 신약과 구약은 사탄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확증한다. 창세기 3장에서 뱀에 관해 논할 때, 이 뱀은 사탄으로 인정되며, 뱀에 대한 저주는 곧 사탄에 대한 저주로 간주된다(창3:15). 사탄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곳은 욥기2:1인데, 거기서 사탄은 욥을 하나님 앞에서 참소한다. 역대상21:2에서는 사탄이 다윗을 부추겨 이스라엘 민족의 인구 조사를 하게 한다. 스가랴3:1,2에서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참소한다.

 

사탄의 존재에 관한 신약의 증거는 매우 많다. 모든 신약 기자들과 대부분의 신약성경은 사탄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사탄에 관하여 25번이나 언급하셨다. 사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진실성에 의해 궁극적인 뒷받침을 받는다. ‘루시퍼’나 ‘그룹’ 같은 타락 이전의 호칭 외에, 신구약에는 사탄을 지칭하는 용어들이 많은데, 이 용어들은 그의 존재와 악한 본성을 특징적으로 나타내 준다.

 

 

2. 사단의 기원

 

1) 사탄의 원상태

 

사탄은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사였다. 천사가 언제 타락하였는지는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으나 에덴동산에서 뱀의 모습으로 나타난 사탄의 모습으로 보아 창세기3:1 이전에 사탄이 존재했음을 알게 된다. 어떤 사람은 창세기1:2의 혼돈과 흑암을 천사의 타락과 연결시켜 해석하기도 하는데, 천사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창조가 혼돈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고 보고, 천사의 타락 시기를 창세기1:1과 1:2 사이로 생각한다.

 

에스겔 28장에는 사탄의 타락 이전 상태가 기술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높은 지위를 누리던 자였다. 하늘의 찬란한 빛이 그를 두르고 있었다(겔28:13). 그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이라 불렸으며, 하나님 앞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누렸다(겔28:14,16). 이사야는 이 최고위 천사를 가리켜 ‘아침의 아들 계명성’(KJV에는 ‘루시퍼’)이라 부른다(사14:12). 하나님의 으뜸가는 대적(히,Satan)이 된 후, 그는 결코 다시는 이러한 명예로운 이름으로 불리지 못했다. 그러나 타락 이전에 그는 지혜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흠도 전혀 없었다(겔28:12,15).

 

2) 사탄의 타락

 

사탄의 타락은 에스겔 28장과 이사야 14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죄로 인하여 사탄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다(겔28:16). 사탄이 몰락한 이유는 그의 교만 때문이었다.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마음이 높아졌으며, 그 지혜가 그를 부패하게 만들었다(28:17). 이 언급으로 미루어 사탄은 교만에 빠질 만큼 특별히 높은 지위를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사야14:12-14에서도 죄로 인해 그가 몰락하였음을 증거한다. 그는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했으며, 다른 천사들을 넘어 하나님의 보좌 위에 자기 보좌를 놓고 싶어 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자’처럼 되고자 하였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하늘에서 내쫓으셨다. 사탄은 자기만 타락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하는 일에 다른 천사들까지 미혹하여 같이 타락하게 하여 악령, 귀신들(demons)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3) 사탄의 도덕적 책임

 

사탄은 하나님께 대해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고 있는 인격체이다(욥1:7). 그는 아무 거침없이 자행자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종속되며 그에 의해 규제당하는 피조물이다.

 

 

3. 사탄의 호칭과 하는 일

 

1) 사탄의 호칭

 

 

 

2) 사탄이 하는 일

 

하나님께 죄를 범함으로써 본래의 지위에서 쫓겨나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된(엡2:2) 사탄은 인간을 범죄케 유혹하며(창3:1, 마4:1), 악령을 부려 세상에서 활동하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들을 타락하게 한다(엡6:12). 사탄은 사람들에게 경배 받고자 하며(눅4:6-8, 계16:13), 하나님의 백성을 훼방할 뿐만 아니라(살전2:18, 대상21:1) 하나님의 사업을 거스른다(계12:4, 마13:19). 이적을 행하여 성도들을 미혹하며(마24:24, 살후2:9).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고후11:14) 만국 백성을 미혹한다(계20:3). 정신적, 육체적인 질병을 가져와 사람에게 고통을 주며(욥2:7, 행10:38), 사람들의 마음을 조종하여 온갖 범죄와 악을 유발하게 한다(대상21:1, 눅22:3,31, 요13:2, 행5:3, 고전7:5, 고후2:10,11, 엡4:26,27, 계12:9).

 

 

4. 사탄의 인격성

 

1) 사탄은 인격적 속성을 갖고 있다.

 

성경은 사탄에 관해 논의할 때 세 가지 인격적 특징들을 언급한다. 사탄은 ‘지성’을 갖고 있다. 사탄은 모략을 꾸미며 교활하게 일을 처리한다(엡6:11). 그의 기만 행위는 그에게 사람들을 그럴 듯하게 속일만한 사고 능력과 행동 계획이 있음을 나타낸다(계12:9). 사탄의 풍부한 성경 지식과 능란한 인용 기술은 그의 지성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가 된다(마4:5,6).

 

사탄은 ‘감정’도 가지고 있다. 이는 자신을 하나님보다 높이려는 그의 야심에서 찾아볼 수 있다(사14:12-17). 사탄은 새 개종자들의 자만심을 통하여 그들을 넘어뜨리기 원한다(딤전3:6). 그는 자신이 지상에 잠시밖에 머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불타는 분노’(헬, thumon)를 발한다(계12:12).

 

또한 사탄은 ‘의지’도 갖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유혹하여 죄에 빠뜨리고자 하였다(마4:3). 베드로를 타락하게 하려고 하였으며(눅22:31),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방해하려고 하였다(마16:23). 사탄의 의지는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야심에 가장 명백히 나타나 있다(사14:13,14).

 

2) 사탄은 인격적 행동을 한다.

 

사탄은 말하고(욥1:9,10), 그리스도를 유혹하며(마4:3), 계획을 짜고(엡6:11), 신자들을 참소한다(계12:10). 무엇보다도, 사탄은 속임수를 쓰고 그리스도인들을 파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신자들에 대한 그의 의도와 적대감은 베드로전서5:8에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거기서 사탄은 누군가를 삼키려는 의도로 계속 나아가는 사나운 사자로 표현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계속 율법적인 비난을 가한다(계12:9,10). 그는 신자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모략을 꾸민다(헬, methodeia, 엡6:11). 이 모든 요소들은 사탄이 인격체임을 보여준다.

 

 

5. 사단의 주소(거처)

 

► 사탄은 하늘에 거한다(엡6:11-12).

► 사탄은 지상을 여기저기 다닌다(벧전5:8).

► 사탄은 사람의 심령 속에 들어가기도 한다(요13:27).

► 사탄은 사람 마음에 악한 생각을 넣기도 한다(요13:2).

 

 

6. 사단에 대한 심판

 

1) 사탄은 원래의 높은 지위에서 떨어졌다.

 

기름부음 받은 그룹으로서, 사탄은 전체의 삼분의 일에 달하는 천사들을 이끌고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나왔다(겔28:16,17, 계12:4).

 

2) 사탄의 궁극적 패배는 에덴에서 이미 선언되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통고하시길, 그가 작은 승리를 거둘 터이나(“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요”)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 큰 승리를 얻을 것이라(“그는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3:15).

 

3) 사탄은 십자가로 인해 무력해질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성을 입으시고 대속의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사탄을 격파하시고 더 이상 사탄이 신자에게 힘을 쓰지 못하게 하셨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죽음의 권세를 행사하지만, 그 권세는 그리스도로 인해 깨졌다(히2:14).

 

4) 사탄은 환난 기간 동안 하늘에서 쫓겨날 것이다.

 

하늘에서 쫓겨나는 것(계12:13)은 심판의 행위이며 이 하늘은 아마도 별이 있는 하늘로서 두 번째 하늘(하나님이 계신 곳이 아닌)일 것이다.

 

5) 사탄은 1,000년 동안 무저갱에 갇힐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승리의 재림을 하실 때, 사탄은 1,000년 동안 무저갱에 갇혀 지상에서 천년 왕국이 지속되는 동안에 더 이상 사람들을 속일 수 없을 것이다(계20:2,3).

 

6) 사탄은 궁극적으로 불 못에 던져질 것이다.

 

천년 왕국이 끝날 때, 사탄은 놓임 받아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여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키지만, 결국 패망하여 마침내 영원히 타는 불 못에 던져질 것이다(마25:41, 계20:7-10).

 

 

 

● 귀신에 대해

 

 

1. 귀신의 기원

 

귀신의 기원에 관한 학설은 여러 가지가 있고, 많은 이단, 사이비, 적그리스도 세력들이 그릇된 이론을 끌어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다. 모든 판단의 기준은 성경이다. 성경에 비추어 대표적인 이론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1) 세상을 떠난 악한 사람들의 영

 

이러한 견해는 피로(Philo), 요세푸스 등의 유대인 학자들과 몇몇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 고대 헬라인들이 믿고 있었다. 성경에는 악한 사람들의 영이 죽은 후 하데스(지옥)로 간다고 언급되어 있으므로 이 견해는 거짓되다(눅16:23).

 

2) 아담 이전의 영

 

이 견해는 ‘간격 이론’(gap theory)에 근거하고 있는데, 간격 이론이란 창1:1과 1:2 사이에 오랜 간격이 있다는 주장이다. 즉, 창1:1에서 원초적 창조가 일어났는데, 처음 창조된 인류가 범죄함으로 인해 1:2의 혼돈이 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3 이하는 재창조에 관한 기록이 된다. 이 이론에 의하면, 처음 창조되었다가 타락한 인류의 영들이 곧 현재 귀신의 영이다. 이 견해의 문제점은 창1장과 2장 이전의 인류 창조를 전제한다는 것인데, 그러한 견해는 성경의 뒷받침을 받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롬5:12에 명확히 언급하기를, 세상에 죄와 죽음이 들어온 것은 아담 이전의 피조물 때문이 아니라 바로 아담 때문이라고 하였다.

 

3) 천사와 여인들의 후손

 

이 이론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다는 창6:2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이론에 의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로서, 그들이 땅에 내려와 인간 여자들과 관계를 맺어 낳은 아들들 곧 네피림(창6:4)이 귀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라는 주장부터 문제이다. ‘아내를 삼았다’는 구절은 일상적 혼인관계를 가리키기 때문에 비자연적인 성적 결합이나 부정한 성행위를 나타낸다고 보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네피림들이 귀신이라는 암시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영웅’ 혹은 ‘사나운 전사’로 보는 편이 합당하다.

 

4) 타락하였으나 옥에 갇히지 않은 천사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주장한 이 이론이 가장 신빙성이 높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을 대적한 루시퍼가 그의 높은 자리에서 내쫓길 때, 그는 수많은 부하 천사들을 끌고 나왔다고 한다. 현재 사탄이라 불리는 루시퍼는 ‘귀신의 왕’이다(마12:24). 마25:41에서는 ‘마귀와 그의 천사들’이 언급되는데, 그 천사들이 곧 귀신들이다. 이와 유사하게 계12:7에도 ‘용과 그의 천사들’이란 언급이 나온다.

성경은 타락한 천사들 가운데 두 부류가 있음을 지적한다. 한 부류는 세상에서 자유로이 활동하는 귀신들이다. 다른 타락한 천사들은 옥에 갇혀 있다. 어떤 천사들은 타르타루스(tartarus, 벧후2:4에서 ‘지옥’으로 번역됨)에 갇혀 있는데, 그들은 엄청난 대죄를 저지른 자들이다(일부 학자들은 창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로 간주하면서 이 죄를 그들의 간음과 연결시킨다). 유다서 6절도 동일한 결박을 언급한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타락한 천사들은 구덩이 안에 갇혀 있다(눅8:31, 계9:2). 그들은 너무나 타락하고 해로워서 땅 위에 떠돌도록 놓아 둘 수 없는 자들이다. 계9장에 의하면, 이 귀신들은 환난 때에 결박에서 풀려나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지 않은 자들을 괴롭힐 것이다(계9:3-11).

 

 

2. 귀신의 특성

 

1) 귀신은 영적 존재이다.

 

귀신은 육체를 지니고 있지 않은 영적인 존재이다(마8:16, 눅10:17,20).

 

2) 귀신은 편재하지 않는다.

 

귀신은 한 순간에 한 지점에만 있을 수 있다. 귀신들은 가다라 지방의 두 남자 안에 거하다가, 거기서 쫓겨나자 돼지들 안에 들어갔다. 모든 경우에 귀신들은 한 군데에만 머물렀다(마8:28-34).

 

3) 귀신은 지성을 갖고 있지만 전지하지는 않다.

 

귀신들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챘으며(막1:24), 자신들의 궁극적 운명도 알고 있었다(마8:29). 바울은 ‘귀신의 가르침’에 관해 언급하면서, 귀신들이 자기네 사신들을 통하여 거짓된 가르침을 전파한다고 지적하였다(딤전4:1). 그러나 귀신은 결코 전지하지 못하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도 하나님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전지하시다.

 

4) 귀신은 강력하나 전능하지 않다.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남자는 그 안의 귀신으로 인해 고랑과 쇠사슬을 깨뜨릴 수 있었다. 그의 유별난 힘 때문에 아무도 그를 묶을 수가 없었다(막5:3,4). 소년 안에 들어간 귀신은 그를 물과 불에 던짐으로써 자살하게 만들려 하였다(막9:22). 귀신은 소년을 벙어리로 만들었으며(막9:32), 소녀를 잔인하게 압박하였다(마15:22). 그러나 귀신들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었다(요10:21).

 

 

3. 귀신의 활동

 

1) 귀신은 질별을 일으킨다.

 

누가복음13:11에서는 한 여인이 ‘영으로 인해’ 꼬부라진 병에 걸렸다고 언급한다. 나아가 눅13:16에서는 이 여인이 ‘십 팔년 동안 사탄에 매인 바’ 되었다고 증거한다. 때때로 정신적 질병은 귀신의 활동과 연관되어진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신병에 대한 진단을 내릴 때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탄이나 귀신에 의한 질병은 오직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만 가능하다(욥1:12, 2:6, 참고 고후12:7-10).

 

2) 귀신은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

 

사탄은 처음에 진리를 왜곡하고 하나님에 대한 하와의 생각을 바꿈으로써 하와를 속여 죄를 짓게 하였다(창3:1-5). 사탄과 그의 귀신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함으로써 계속해서 그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쳐 왔다(고후4:4). 이는 사탄이 사고 혹은 논리의 능력이 있음을 증거한다. 물론 위의 구절은 불신자들에 대한 언급이지만, 사탄은 신자들의 생각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후11:3). 그는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사탄은 신자들이 그리스도께 일편단심으로 헌신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야고보서3:15에서는 세상적 지혜는 귀신의 것이며 사람을 질시와 분쟁으로 이끈다고 가르친다.

 

마음이 귀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면 생각을 모두 그리스도께 바쳐야 한다(고후10:5). 유사한 권면이 빌립보서4;6-8에도 나온다. 모든 문제를 기도로 하나님께 맡기고 참되고 명예롭고 올바르고 순결한 것들만 묵상하면 신자들은 마음을 지킬 수 있다.

 

3) 귀신은 사람들을 속인다.

 

바울은 아직 어린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고난과 핍박 가운데 사탄의 꾀임에 넘어가 죄를 짓지나 않을까 걱정하였다(살전3:5).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기쁨으로 복음을 영접하였으나 사탄의 맹공에 밀려 소망을 잃을 수도 있었다.

 

사탄은 그의 사자들을 통하여 불신자들 안에서 역사하기도 한다. 바울은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이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다고 증거한다(엡2:2). 문맥상으로 볼 때, 이는 사탄이 불신자들을 꾀어 육신의 정욕과 마음의 소욕에 따라 살도록 만든다는 뜻이다. 마태복음13:19에서는 사탄의 또 다른 속임수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사탄은 불신자들이 말씀을 들을 때 이를 낚아채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다.

 

4) 귀신은 열국을 속인다.

 

귀신들은 결국 세계 각국을 모아 그리스도께 반기를 들게 할 것이다. 귀신들은 열국으로 하여금 재림하시는 메시아와 전쟁을 벌이도록 꾀하기 위해 기적을 행하며 미혹할 것이다(계16:14).

 

 

4. 귀신 들림에 대해

 

1) 정의

 

찰스 라이리는 귀신 들림(demon possession)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귀신들림은 귀신이 어떤 사람 안에 거하면서 마음과 육신을 혼미케 하여 그에 대해 직접적인 영향력과 조종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귀신 들림은 귀신의 영향력이나 그 사람에 대한 귀신의 활동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후자의 경우는 귀신의 역사가 바깥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귀신 들림의 경우에는 안에서부터 일어난다. 이러한 정의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결코 귀신 들릴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 안에는 성령이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도 극심한 귀신의 공격 표적이 될 때는 마치 귀신 들린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2) 귀신 들림의 사실성

 

그리스도께서 잠시 지상에 머무르실 동안 귀신의 활동이 격렬해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귀신에 들렸는데,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의 메시아 되심을 반대하기 위해서였다. 복음서에는 귀신 들린 사람들에 관한 기록이 많이 있다(마4:24, 8:16,28,33, 12:22, 15:22, 막1:32, 5:15,16,18, 눅8:36, 요10:21). 순교자 저스틴이나 터툴리안 같은 초기 교회 지도자들과 ‘헤르마스의 목자서’ 기자도 귀신 들림에 관해 언급하였다.

 

3) 귀신 들림의 특성

 

귀신이 들리면 도덕적 성품과 영적 성향이 달라지기 때문에 분명히 드러난다. 종종 전혀 다른 음성과 교육 수준을 나타내고, 어떤 경우에는 외국어가 튀어나오기도 하는데, 이것들은 귀신 들린 자의 성품이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사람을 통하여 말하는 귀신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즉각 알아차렸는데(막1:23,24), 이는 귀신이 초자연적 지식과 지성적 능력을 갖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귀신 들림의 또 다른 증상은 거라사 지방의 남자에게서 볼 수 있듯이 쇠사슬과 고랑을 부술 만한 초자연적인 육체의 힘과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막5:3,4).

 

 

5. 귀신에 대한 심판

 

1) 십자가를 통해 귀신의 힘은 정복되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사탄과 그의 귀신들을 정복하시고, 전쟁 노획물을 전시하는 승전 장군처럼 그들을 대중의 구경거리로 만드셨다(골2:15).

 

2) 그리스도의 재림 때 귀신들은 불 못에 던져질 것이다.

[출처] 사탄과 귀신|작성자 미토



암 선고받은 아버지, 의사의 '오진'이 고마운 까닭

야윈 나의 영웅, 그래도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13.02.14 18:46l최종 업데이트 13.02.14 18:46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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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고향에서 이사시킨 다음해인 2008년 설날 아침의 아버지. 불과 5년 전이지만 90세의 지금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습입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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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0년 11월, 가을걷이를 모두 마친 고향 부모님을 서울로 모셔왔습니다. 저희 부부는 제가 헤이리로 이사한 다음 해인 2007년에 연세가 많은 부모님을 고향에서 저희 집이 가까운, 하지만 고향처럼 뒤에 산이 있고 앞에 들이 있는 금산리로 이사를 오시게 했습니다.

그랬지만, 부모님은 84년을 사셨던 향수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다시 이사가셨지요.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습니다. 이후 40여 년이 넘는 시간동안 가까이서 부모님을 모셔본 적이 없는 저는 기간의 아쉬움을 덜고 싶었습니다. 물론 그 욕심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무산됐습니다. 부모님께서 고향으로 되돌아가시고는 매년 농사일이 완전히 끝나는 겨울 초입에 서울로 다시 모셔서 겨울을 손자손녀들과 함께 나도록 하고 있습니다.

2010년 겨울의 어느 날, 서울로 오신 지 한참 된 아버지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시골에서 넘어진 적이 있다. 한 달 전쯤인데 지금도 헛배가 부르고 허리가 불편하구나."

즉시 아버지를 병원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의사는 허리보다 복부팽만에 주목하고 정밀검진을 위해 입원을 권했습니다. 외래검진을 위한 가벼운 병원 방문일 것이라 여겼던 아버지와 아내는 적지 않게 당황했습니다. 의사는 내시경으로 위와 장을 샅샅이 살폈습니다.

암 선고받은 아버지 "나는 괜찮아, 너나 조심해"

다음날 아침, 회진 의사가 아내를 따로 불러 아버지의 증세를 '위암'이라 통보했습니다. 어느 정도 진전된 상태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전날 찍은 내시경 사진을 정밀 판독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당황한 목소리로 제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저는 아내의 전화를 받는 동안 평생 처음으로 다리가 저절로 떨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내시경 검사 후 아버지의 배는 점점 더 불러왔습니다. 당황해하는 가족에게 의사는 복강에 복수가 찼다고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내가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어보라고 전화기를 아버지에게 넘겼습니다. 아무 말도 꺼낼 수 없는 제게 아버지가 먼저 말을 했습니다.

"안수야, 빨리 나가야 할 텐데 검사한다고 의사 선상님이 못 나가게 하는구나. 나는 괜찮으니 너나 조심해라."

의사와 간호원, 아들과 며느리는 다 아는데 본인만 아무 정황을 알지 못한 채 '나는 괜찮다'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전화기를 내려놨습니다. 그리고 서재의 문을 잠그고 '응응' 소리 내 울었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도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후에 아내에게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담당 의사가 다시 병실을 방문했는데 예정됐던 골밀도 검사를 취소하고 위 내시경 검사를 다시 해야 한다고 해요. 그리고 의사가 당신을 만나고 싶어해요."

다음 날 저는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갔습니다. 두 번째의 위내시경 촬영을 막 마친 아버지의 모습은 불과 며칠 전에 뵜던 그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불룩한 배 때문에 다른 부위의 뼈는 더욱 두드러지고 얼굴에는 핏기라곤 보이지 않았습니다. 며느리의 팔에 의지해 화장실로 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 어디에도 옛날 80kg의 쌀자루를 번쩍번쩍 들어 올리시던 그 영웅의 모습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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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약이 섞여서 투약되고 있는 링거팩이 주렁주렁 달린 링거 폴을 끌고, 왼손은 며느리의 부축을 받은 채 화장실을 향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어린 저에게 영웅 같았던 아버지의 모습은 찾을 길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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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사께서 아들이 왔다는 간호사의 통보를 받고 다시 병실을 방문했습니다. 그분은 2년 차 전공의(레지던트)였습니다. 아버지가 여의사를 보자 더욱 기운을 차려 말했습니다.

"이 의사 선상님이 얼마나 친절하고 좋은지. 내게 참 잘해주어."

아버지의 말씀에 의사는 겸연쩍은 웃음을 웃으면서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곧 건강해지실 겁니다."

그리고 곧 저를 병실 밖으로 불러냈습니다.

"제가 아드님을 뵙고자 한 것은 이 서류에 사인을 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에 대한 병의 처지에 관한 책임에 사인할 권한이 없습니다."

제가 서명을 해야 할 서류는 아버지의 진료와 치료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결과에 대해 병원 측에서는 전혀 책임이 없다는 서류였습니다. 저는 그 서류에 묵묵히 사인을 했습니다. 수십 년 한 식구로 살아온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치료 결과를 보증할 서류에 사인조차할 자격이 없다는 사실은 저의 상식에 반하는 완전히 새로운 내용이었습니다. 병원에서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그리고 부부 사이조차 남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게 슬펐습니다.

남은 시간은 6개월, 환자에게도 여생 정리할 시간을 드리세요

아버지의 말씀대로 그 여의사는 참 친절했습니다. 환자의 입장에서 또한 환자의 가족 입장을 고려한 의문들을 소상하게 설명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사실 아버님에 해한 예후(豫後)를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검사 결과로는 빠르면 6개월, 길면 2년에서 5년 정도 생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연세도 있으시기 때문에 수술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환자에게는 언제 알려드려야 할지에 대해 가족들과 상의해보세요. 당사자도 자연스럽게 현재의 상태를 아시고 천천히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시는 것이 더 바람직합니다. 아버님께서 가능하면 편안하게 생을 마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가족의 할 일입니다."

병원 복도 창가에 서서 의사의 설명을 듣는 동안 병원 바깥의 한 나무를 줄곧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12월 그 나무는 모든 잎을 떨어뜨리고 앙상한 가지만을 드러내놓고 있었습니다. 마치 아버지의 뼈마디들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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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가 앙상한 모습에 혈관만 거미줄 같이 두드러진 모습은 창밖의 겨울나무가지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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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후 한 나절 동안 아버지의 병실을 지켰습니다. 몇 시간 뒤에 담당 전문의가 오셨습니다. 몇 번 아버지의 배를 눌러보시고 제게 함께 나가자고 했습니다. 의사는 진료실로 가서 컴퓨터 모니터에 아버지의 위 내시경 사진과 단층 촬영사진을 띄우고 아버지의 뱃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위 내벽 곳곳에 혈종이 보입니다. 문제는 이 암조직들이 복벽으로 전이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그것에 대한 정밀한 판단을 위해 월요일에 PET-CT(양전자 컴퓨터 단층촬영기)촬영을 할 예정입니다. 사실 넘어지신 것도, 허리가 아픈 것도, 배가 부른 것도 모두 복수가 원인일 수 있습니다. 일정한 시점이 지나면 식사를 하실 수 없기 때문에 식사를 위해 장을 뚫어서 식도를 만드는 수술을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의사의 시선이 모니터에서 제게로 옮겨왔습니다. 저는 그 시선을 비키며 혼자말로 말했습니다.

"옆구리에 구멍을 뚫고 어찌 병실 밖을 나갈 수 있겠는가..."

이 담당의사의 자세하고도 친절한 설명은 6개월이 될지 혹은 5년이 될지 모를,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그 나날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될지에 대한 고민조차 할 필요가 없겠다는 절망을 안겨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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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이 병원을 살아서 나갈 수도 없겠다는 생각에 며느리가 잡은 아버지의 손위에 저도 손을 대어보았습니다. 도드라진 정맥 속 피조차 식은 듯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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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둘째딸 주리가 어머니를 어버지 병실로 모셔갔습니다.

"벌떡 일어나 오지 않고 여기 누워서 뭣하고 있어? 야들이 귀찮게..."

영문을 모르는 어머니는 몸을 일으키기도 어려운 남편을 보자마다 되레 타박만 했습니다. 입원 후 닷새 동안 집에서 했던 모든 걱정은 숨긴 채...

"그래 말이야. 의사 선상님이 안 보내주니 난들 어쩌겠나."

아버지가 손녀에게 미안한 시선을 보냈습니다.

"칼로 옆구리를 도려냈으면 좋겠구나"

월요일이 됐습니다. 다시 모든 검사실은 재가동되고, 아버지는 예정대로 PET-CT 촬영을 했습니다. 근무 중인 아내를 대신해 오전에는 조카 재윤이가 병실을 지켰습니다. 오후에는 등에 욕창이 생긴 아버지를 위해 오랫동안 침대생활을 한 남편을 몇 시간씩 문질러 욕창 없이 간병한 경험이 있는 아내의 지인에게 간병을 부탁했습니다. 늦은 오후, 여의사가 PET-CT 촬영의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위 부위에는 빨간 반점이 보이는데 다른 부위는 안 보입니다. 암세포 부위는 빨갛게 표시가 되는데..."

이것이 희소식인지를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아마 가족들이 불필요한 희망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인 듯했습니다. 그리고 칼슘제제와 비타민 제제를 투약하기 시작했고, 진통제도 함께 투약 중이라고 알려줬습니다.

다음날 오전, 복수천자(腹水穿刺)를 시행했고 내일은 위 세포를 채취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심한 옆구리 통증을 호소했습니다.

"칼로 옆구리를 도려냈으면 좋겠구나."

웬만해서는 아프다는 말씀조차 꺼내지 않는 아버지셨습니다. 다음날, 체중은 훨씬 빠진 모습이 역력했고 진통제 투입량을 늘렸습니다. 아버지 병의 위중함과는 관계없이 여전히 제각기 바쁜 가족들이 속으로 야속했습니다. 당장 자신의 일들을 그만둘 수 없는 형편이 슬펐습니다. 지인들의 도움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돼 정식으로 간병인을 고용했습니다.

아버지도 자신의 병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어느 정도 눈치채신 듯했습니다. 그런 아버지께 '복수검사'의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퇴원이 늦어지지만 검사결과만 나오면 곧 퇴원하게 될 것이라고 책임 없는 말을 하며 안도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미덥지 않았던 아버지는 가족이 없는 사이에 친절한 그 여의사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내 병이 나쁜 병입니까? 자꾸 검사하는 것을 보니..."

여의사는 병실을 나오면서 환자 본인에게 사실을 어떻게 알려야 할지를 고민해보라고 재차 귀띔했습니다.

"아버님, 병원의 한 끼 식사비는 500원이에요"

오후 3시 30분, 그 여의사가 상반된 결과를 전했습니다.

"영상의학과에서는 암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조직검사실에서는 암이 아니라 오래된 조직이 뭉친 궤양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구의 여동생, 명숙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시어머니가 아버지와 연세가 같아요. 아버지의 병환을 시어머님께 알려드렸더니 계속 울기만하세요."

여동생에게는 아버지의 병세를 그대로 알려준 터였습니다.

여동생의 시어머님도 노환으로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중이셨습니다. 늘 고된 농사일만 하시는 사돈에게 각별한 마음으로 수시로 고기와 반찬을 만들어 보내시던 분이셨고 아버지는 그런 사돈을 위해 생산한 농작물 중에 특별히 좋은 것을 골라 보내드리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병원의 식사비를 무척 부담스러워하셨습니다. 식사가 들어오자 며느리에게 병원식사의 한 끼가 얼마쯤인지를 물었습니다. 아내는 500원이라고 거짓으로 답했습니다. 아버지는 그제야 안도하는 표정으로 수저를 들었습니다.

다음날 의사는 '간경화'일 가능성이 있다고 알려줬습니다. 그리고 5일 뒤 병원 측은 '간경화로 인한 합병증'과 '식도정맥류'로 최종 결론을 내렸습니다. 12월 1일에 외래로 들어가셨던 아버지는 바로 입원하셨고, 입원한 지 꼭 보름 만에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병원 측 의료진 누구도 '오진(誤診)'이었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고 우리 가족 누구도 '오진'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병실을 나오면서 아버지는 그 친절했던 여의사에게 90도로 허리 굽혀 인사를 했습니다.

"이렇게 병을 시원하게 낫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늙은이가 다시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도 90도로 허리 굽혀 인사드렸습니다. "... 참 고맙습니다." 이 말 앞에는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말이 있었습니다.

'오진해주셔서.'

3년 전 이 '오진'은 부모님에 대한 우리 가족의 태도를 완전히 바꿔놨습니다. 올 겨울에는 부모님뿐만 아니라 장모님도 함께 모셔왔습니다. 서울의 좁은 전셋집에 아내와 아들과 딸 그리고 세 노인이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치매를 앓고 계신 장모님은 정신이 들 때마다 같은 소리를 반복하십니다.

"완전히 양로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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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인 장모님은 정신이 맑아지면 두 사돈을 보고 얼굴에 희색을 띄면서 혼잣말을 하십니다. "집이 완전히 양로원이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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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매운 것을 통 못 드시는 시아버지를 위해 매생이 굴국을 끓이기도 하고 흑임자죽을 끓이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 일찍 퇴근한 아내는 집에만 계신 세 노인들을 모시고 지척인 남산으로 나들이를 했습니다. 세 분은 짧은 거리조차 힘겨워하셨습니다. 주저앉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남산자락에도 닿지 못하고 되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큰 행복입니다. 병원에서 말하던 6개월을 넘긴 지는 이미 오래고 5년도 거뜬할 것입니다. 옆구리를 뚫어 장에 고무호스를 연결하지 않은 것만도 얼마나 고마운지... 생각할수록 그 '오진'이 고맙기만 합니다.

아무리 빨라도 늦은 것이 후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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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산책길에 결국 남산 자락에도 닿지 못했습니다. 50m마다 교대로 주저앉는 세 노인의 소진된 기력 탓에...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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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제일 귀하게 여기는 것은 땅이고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하늘입니다. 그리고 제일 존경하는 직업은 농부입니다. 아버지가 농부이기 때문이고 그 농부인 아버지가 땅을 제일 귀하게 여기고 하늘을 제일 무서워하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행을 바라지 않습니다. 농부 아버지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땅의 원칙을 어떤 유혹에도 흔들림 없이 믿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매 끼니마다 밥그릇에 밥 한 알도 남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가 어릴 적 아버지가 탈곡이 끝나고도 마당에서 벼 알곡 하나하나를 손바닥에 주워담는 모습을 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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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 고향을 방문했을 때 부엌문 옆 벽에 걸린 벼이삭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벼 알곡 하나하나를 진주알만큼이나 소중히 여겼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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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빨라도 늦은 게 후회입니다. 특히 부모님에 관한 한은 그 후회를 만회할 길이 없습니다.

세상을 떠신 뒤의 구슬픈 곡(哭)보다 살아계실 때의 따뜻한 말 한마디, 상다리 휘어지는 제사상보다 살아계실 때의 더운밥 한 그릇이 더욱 효자라는 것을 새삼 상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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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부모님께 용돈을 드릴 수 없습니다. 고향에서 몇 자락의 밭농사, 논농사를 거두어서 바꾼 돈을 오히려 저희에게 줍니다. 은행 빚부터 갚으라고……. 2008년의 새해 세배에서도 아버지는 쉰이 넘은 며느리에게 세뱃돈을 건넸습니다. 그 돈은 고추 몇 근, 깨 몇 되와 같은 것입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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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부활(The Hidden Resurrection)


예수님의 부활은 숨은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반대자들을 당황시키기 위하여,
승리의 성명서를 내기 위하여, 또는 그를 십자가에
처형한 사람들에게 그분이 옳았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신성한 사랑은
죽음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표식으로써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에게 자신들을 내어 맡긴 모든 제자들에게
그분의 사명이 완수되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함께 사역한 제자들에게 그와 함께 하는
새 생명으로 모든 사람들을 불러들이라는
신성한 임무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이름을 부른 사람들, 그분과 함께 빵을 뗀 사람들,
그리고 그분이 평화의 말씀을 전한 사람들만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죽음의 족쇄에서
해방시킨 것은 바로 이 숨은 사건이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들어올려지기
(Waiting to be Lifted Up With Christ)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과 우리의 부활을 기다리는 것은
하나요 같은 것입니다. 재림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 중에 우리의 죽은 육신을 그와 함께 일으켜
세우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은 우리 믿음의 중심입니다
우리가 사랑받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사랑받고 계시다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부활도 예수님의 부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점에 관하여 매우 확고부동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전도와 여러분의 믿음은
헛되고 맙니다"(고린도전서 15:13~14)

참으로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과의 영원한 생명 안으로 우리를 들어올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우리의 생명은 예수님과 우리의 부활이
같은 것이라고 할 때 그 완전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것이 이 세상뿐이라면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불쌍한 사람들입니다"(고린도전서 15:19)

우리는 불쌍히 여김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 세상에서의
짧고 제한된 인생의 범위를 넘어 먼 곳까지도 볼 수 있으며,
또 우리가 지금 육신으로 살고 있는 어떠한 것도
헛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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