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개혁’(改革)이란 사전적인 의미(새롭게 뜯어 고침)에 익숙해서, 교회에서 ‘개혁주의’라 하면 기존의 체제를 부인하거나 새롭게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를 봅니다.

그것은 개혁주의 신학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1. 명칭(名稱)의 의의(意義)

‘개혁주의’란 중세 로마교회가 성경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1) 중세 로마교회의 비성경적 교회 운동에 반대하여 일어난 16세기 종교 개혁의 교회를 특징짓는 이름이다.

2) 프로테스탄트 안에서도 루터파 교회나 재침례파 교회에 대하여 구별된 명칭으로 사용된 것이다.

3) 오늘날 칼빈의 5대 교리를 천명하는 신학과 교회들에게 동일시되는 이름이다.

 

2. 개혁주의 신학의 특징(特徵)

개혁주의 신학(Reformed Theology)이란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및 교회 중심적 신학을 가리키며, ‘칼빈주의’라고도 한다.

 

1) 하나님 중심(God-centered)

인간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과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2) 성경중심(Bible-centered)

성경 외의 그 어떤 것도 신앙의 표준일 수 없고 신학의 원천일 수 없다. 개혁주의는 “성경은 성경 자신이 해석한다”(Scripturae scriptura interpretum)는 원리를 고수한다.

3) 교회중심(Church-centered)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적 삶을 추구하며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려고 힘쓴다.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의 완전을 향한 추구를 경시하지 않는데, 이것이 교회개혁운동이다.

 

3. 개혁주의의 원칙(原則)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 성경만이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유일한 권위는 성경에 있다

2)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 구원의 유일한 길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는 것뿐이다.

3) 오직 은총(Sola Gratia) -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다.

4) 오직 믿음(Sola Fide) - 구속의 은혜는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

5)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 모든 업적과 구원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4. 칼빈주의 5대 교리(敎理)

하나님 중심 사상을 기본 원리로 하는 칼빈주의는 5개의 중요한 교리적 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칼빈주의 5대 강령'이라고도 한다.

‘알미니안주의 5대 교리’가 먼저 나오고 이를 반박하기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칼빈주의 5대 교리’이다.

그리고, ‘칼빈주의 5대 교리’는 신앙 전반에 관한 것이 아니고 구원론에 관한 것이다.

 

1) 전적 타락 (Total Depravity)

육체적인 생명만 갖고 있는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2)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누구에게 참된 믿음을 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3) 제한 속죄 (Limited Atonement)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실효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4) 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able Grace)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아니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5) 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Saints)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로 결코 떨어지지 않고 구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5. 개혁주의 기본 교리(敎理)

 

1) 제한속죄 구원론

인간의 전적타락,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 제한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으로 구원론을 요약한다(드르트신경, 1618-1619). 알미니우스의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징계하면서 제한속죄 구원론을 완성하였다.

2)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개혁주의는 창조, 타락으로 인한 징벌,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 마지막 심판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믿는다.

3) 하나님의 예정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작정, 예정 및 선택을 믿는다. 예정론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교리인바 신적 구원의 확실성을 담보해준다.

4) 언약신학

성경을 해석하는 한 체계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에 중점을 둔다. 주로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체계화 되었으며, 성경의 언약을 크게 구속의 언약(하나님과 예수), 행위언약(하나님과 아담), 은혜언약(하나님과 백성)으로 나눈다. 그리고,

(1) 하나님의 영광과 통치          (2) 우상 숭배에 대한 신랄한 비판                  (3) 역사 속에서 이룩되는 하나님의 목적,

(4) 거룩한 신자의 생활             (5) 하나님께 대한 봉사로서의 생활                (6) 설교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

97) 권징과 훈련된 생활             (8) 조직된 교회의 중요성과 목회적 관심        (9) 예배와 생활의 단순성 등을 주목한다.

 

6. 개혁주의 공통 교리서(敎理書)

 

1)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 A.D 200)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교리가 요약된 것이다. 현재의 사도신경은 갈리아에서 5∼6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기초가 되는 로마신경은 2세기 중엽에 만들어졌다. 이단적인 가르침이 발전함에 따라 이 신경이 불신자나 이단자로부터 진정한 그리스도교도를 구별해 내는 <표증>이 된다.

 

2) 니케야신경(Nicene Creed, A.D 325)

니케야 종교회의에서 채택한 신앙 조항으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에 관하여 규정한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를 규정하였고, 381년에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완전한 문서가 만들어졌다. 특히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진 분으로 모든 면에서 완전한 하나님 되심을 강조한 신조이다. 주로 동방 정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다.

 

3) 칼케돈신경(Creed of Chalcedon, A.D 451)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해서 아폴리나리우스, 네스토리우스, 유티케스 등이 주장한 극단적인 그리스도의 단성론과 양성론을 배격하고, 신성이 인성(몸) 안에서 혼합되거나 혼란을 일으키거나 분리되지 않은 채 온전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규정한 신조이다. 극단적인 단성론과 양성론을 모두 배격하고 둘 사이의 조화를 꾀하고자 하였다.

 

4) 아다나시우스신경(The Athanasian Creed, A.D 500)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계승하여 아다나시우스가 만들었다고 전해 오는 문서인데, 실제로는 알려지지 않은 저자가 5세기경에 삼위엘체와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성부도 하나님이고 성자도 하나님이며 성령도 하나님이지만, 세 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만 존재한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나오는 영원한 분이므로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가지신 분이시며, 죄인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재림하시며 최후 심판을 하실 것임을 밝히고 있다.

 

7. 개혁주의 주요 신앙고백서(信仰告白書)

개혁주의자들은 그들의 신학체계가 보다 성경적임을 증명하고, 다른 신학활동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그들이 신학을 교리화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신앙고백이었다. 신앙고백을 성경과 같이 절대화하지는 않으나 신조(信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1) 벨직신앙고백 (Belgic Confession, 1561)

홀란드에서 가이 드브레(Guido de Bres, 1522-67)가 작성한 것으로, 그 내용은 프랑스에서 나온 갈리칸 신앙고백과 매우 유사하며, 유럽 북서부의 저지대 국가들에서 박해받던 성도들을 위해서 쓴 변증서이다. 이 문서는 1619년 도르트 총회에서, 네델란드 교회의 신앙 고백으로 받아들이기로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2)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 1563)

우르시누스(Zacharias Ursinus, 1534-83)와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 1536-87)에 의해서 청소년의 교육을 위한 것으로 작성된 이 문서는, 성찬에 관한 교리는 분명히 개혁주의를 따르고 있지만, 몇 가지 교리는 루터파와 개혁주의의 중간노선을 취하는 것도 있다. 칼빈이 이 문서를 검토한 후 극찬할 만큼, 아주 간단명료하고 경건한 내용이 특징이다. 이 문서는 독일 칼빈주의 신앙 고백에서 가장 탁월한 문서로 손꼽히고, 오늘날에도 개혁주의 교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3) 도르트신경(Canon of Dort, 1618-9)

훌란드 지역에서 발전된 정통 개혁 신앙의 절정기에 작성된 교리의 압권으로, 알미니우스주의의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신조이다. 예정론을 근간으로 한 칼빈주의 5대 교리라고 알려진 구원론에 관련된 다섯 가지 핵심 사항을 채택한 것이다. 논쟁을 거쳐서 나온 문서인 만큼, 16세기에 나온 신조에 비하면 매우 정교하고 체계적이며 논증적이다.

 

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3-8)

칼빈주의 정통 신학의 최고봉에 위치하는 가장 체계적인 문서이다. 한국 장로교회는 이 문서를 성경 다음에 표준 신앙 고백서로서 채택한바 있다. 이 문서의 특징은, 스코틀랜드 언약 신학이 반영되고, 성화와 주일성수에 대한 엄격성이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이중 예정, 자유 의지, 아담의 행위 언약 등도 계속해서 중요한 교리로 인식되고 있다.

 

5)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The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1648)

개혁주의 요리 문답 가운데서 가장 긴 문서로, 장년 교육을 위한 지침서이다. 거의 모든 개혁주의 교리를 다루고 있으며, 주기도문과 십계명도 포함되어 있다.

 

6)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The Westminster, Small Catechism, 1647)

성경 전체적인 가르침을 쉽게 비우도록 만든 신앙 고백과 교리를 포함하는 문답 형식의 교육 도구이다. 특히 소요리 문답은 교회의 다음 세대들을 교육하는 지침서로서 성경에 충실하면서 우리가 믿고 있는바 신앙 고백을 균형감 있게 다루고 있다.

 

7) 제2 헬베틱(스위스) 신앙고백(The Second Helvetic Confession, 1566)

1562년 하인리히 블링거는 개인적인 신앙 고백을 작성하였다가 1565년 12월 팔라틴의 선제후 프레데릭 3세의 요청이 오자, 정통 신앙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알려 주는 문서로 이를 작성하여 베자의 추인을 받고자 제네바로 우송하였다. 이 고백서의 특징은 초대 교회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음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으며,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 다음으로 스위스 개혁파 교회들의 지지를 얻었고,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8) 제네바요리문답(The Geneva Catechism, 1541)

칼빈은 제네바 교회가 신앙고백적인 교회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기독교 강요』 초판(1534)을 중심으로 제1요리문답을 작성했다(1537). 제네바 시의회가 다시 그를 청빙했을 때 그는 권징권이 교회에 있음을 인정해 줄 것과 요리문답을 가르치도록 허용하는 것을 청빙의 조건으로 삼았다. 그는 제네바에 돌아온 후에 곧 바로 제2요리문답을 작성했다(1541-42). 따라서 우리는 요리문답 교육이 복음의 강설과 함께 개혁의 추동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9) 프랑스 갈리칸 신앙고백(Gallican Confession, 1559)

박해받는 프랑스 위그노들이 칼빈이 제네바 신앙 고백을 기초로 하여 약간 수정한 문서이다. 오래 지속된 박해로 인해서 프랑스 위그노들의 힘은 크지 못하였으나, 그러한 악조건 가운데서도 순수하고 깨끗한 신앙의 정신을 따라 가리로 결의한 놀라운 의지가 담겨 있다.

 

10) 스코틀랜드 신앙고백(The Scots Confession, 1560)

스코틀랜드 최초의 신앙 고백으로, 요한 낙스와 다섯 명의 목사들에 의해서 작성되었다. 낙스가 유럽에서 경험한 것들이 반영되었고, 하나님의 창조, 성육신과 예정과 십자가, 불가시적인 교회관, 참된 교회의 세 가지 표지로서 말씀의 선포, 성례의 시행, 권징의 실시를 규정하고 있다.

 

<참고>

 

1. 주요 신학의 비교(比較)

 

1) 개혁주의(改革主義, reformism)

일명 ‘칼빈주의’라고도 하며, 개혁주의는 바울, 어거스틴을 거쳐 16세기 칼빈에 의하여 체계화된 사상운동으로, 하나님의 주권(主權)을 강조하고,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근본적 교리를 믿고 그 위에 신학을 세운다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기독교 유신론이며 가장 순수하고 고상하며 복음주의적인 신학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2) 근본주의(根本主義, fundamentalism)

1850년대 유럽에서 들어오기 시작한 자유주의 신학에 반발하여 기독교의 전통적인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성경의 많은 부분 특히 창조와 기적에 관한 기록을 신화나 설화로서 이해하고자 했는데, 이에 반하여 근본주의 신학에서는 성경은 그 글자까지도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서 기록되었다는 축자영감설을 주장하였다.

 

3) 복음주의(福音主義, evangelicalism)

17세기 이후 독일에서 루터교회의 ‘신앙의 고정화 현상’에 불만하여 생긴 경건주의 운동으로, 그들은 "기독교는 생활이요 체험이다"라는 표어를 가지고 성경의 생활화를 강조하였다. 성경의 무오성(inerrancy)을 주장하고 말씀의 내적 의미와 성화를 강조하여 교회 제도와 교리의 의미를 축소시킨 신학 사상이다. 성경의 윤리적 가르침을 율법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고, 성경의 교훈들에 대한 상황적 해석을 반대하는 배타성이 심하다고 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4) 자유주의(自由主義 liberalism)

신학의 토대를 인간의 경험에 두고, 성경을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쓴 책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보아 성경에 나온 내용이라도 이성에 맞지 않는다면 거부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선재성, 부활 승천 등에 대한 전통적인 교리를 거부하고, 예수의 인성을 강조한다. 또 인간 본성과 역사의 발전에 대하여 매우 낙관적이며 초월대신에 내재 원리를 더 강조하는 인본주의적 신학으로 진화론 등 자연과학 사상을 수용한다.

 

2. 주요 개혁주의 인물의 신학 비교

 

    구 분

     루 터

       칼 빈

   쯔 빙 글 리

 

   국적

 

 

독일

 

프랑스

 

스위스

 

 신학의 중심

 

 

그리스도 중심

 

하나님의 절대적 중심

 

하나님 의지 중심

 

 신학의 출발

 

이 신 득 의

 

만인제사장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

 

 

 

예정 사상

 

이 신 득 의

 

 성 찬 론

 

 

공 재 설

 

영적 임재설

 

기 념 설

 

 국가와의 관계

 

 

교회는 국가에 복종

 

국가와 교회의 분리

민주 헌법, 교권 배격

 

  교회의 정치

 

.

장로 정치






출처: 개혁주의마을/이지명




 오스왈드 챔버스 (Oswald Chambers)

 

 

성경적인 자기 성찰

데살로니가전서 5:23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성령의 신비한 역사는 우리 자신도 알 수 없는 가장 깊은 마음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식 세계를 훨씬 초월하는 가장 깊은 마음의 영역까지

역사하시는 것을 믿는가? 또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보호하실 때 당신의 그 깊은

영역까지 보호하신다는 것을 믿는가? 주님의 보호하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높고 깊은 차원에서 진행된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7).

당신은 이 내용이 당신이 의식할 수 있는 죄악에만 적용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에게 하나님의 더 큰 자비가 임하여 바른 깨달음을 갖게 되기를 기도한다. 그리스도의 피가 깨끗하게 하는 ‘모든 죄’는 당신이 다 헤아릴 수 없는 너무나 크고 깊고 넓은 차원에 속한다.

사실 죄로 인해 인간은 이미 그 마음이 어두워졌다. 따라서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죄를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는데 있다. 성경에서 우리가 죄로부터 정결하게 되었다는

말을 할 때는 우리의 영의 깊이만큼 깊고 높은 차원의 의미가 담겨 있다.

오직 우리 마음속에서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우리는 죄에 대해 온전하게 의식할 수

있게 된다.

온전히 빛 가운데 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충만하게 채우셨던 바로 그 성령으로

당신의 영혼을 충만하게 채우라. 그러면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강한 역사 가운데 우리의 영과 혼과 육이 하나님 보시기에

흠이 없이 보전될 것이다.

[주님은 나의 최고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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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無言)의 향기 최송연 어둡던 내 영혼 주님의 빛 비취셨네 내 영혼에 비친 주의 빛 세상의 어둠을 밝혀주는 소망이게 하소서 삭막하던 내 영혼 주님의 사랑 임하셨네 내 맘속에 임한 주의 사랑 세상의 삭막함을 감싸 안는 향기이게 하소서 주의 은총으로 산 생명 된 영혼 그 생명의 향기 바람결 따라 멀리 퍼지고 꽁꽁 언 땅 헤치고 돋아나는 새순처럼 깨끗한 기상 무언(無言)의 향기 되어 널리 전하여질 수 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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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우리의 태도/ 아더핑크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6).

이 장에서 우리가 어느 정도로 간단하게 생각할 것은 이 책의 처음에서 여러 가지 적은 구분을 하기에 숙고한 위대한 진리를 우리 자신에 실제로 적용하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이 교리의 가치를 더욱 세밀하게 다룰 것이다. 여기에서는 다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이냐 하는데 대한 정의를 하려 한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계시된 진리는 다 우리에게 알릴뿐 아니라 역시 우리를 감동시키기 위함이다.

성경은 우리의 쓸데없는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가르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그의 통치 원리를 설명하는 추상적 법칙 ...이상의 것이니 그것은 경건의 동기를 목적했고 또 그것은 의로운 생활을 추진시키기 위한 것으로 우리에게 알려졌고 또 그것은 우리의 반역하는 마음을 복종시키기 위하여 계시되었다. 하나님의 주권을 진정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무 것도 겸손케 하지 않거나 또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을 겸손케 하며 또 마음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복종시키는데 따라서 우리의 의지는 버리고 주님의 뜻을 깨달아 실천하는데서 우리로 기뻐서 행하게 한다.

주님의 주권이라고 말할 때에는 그의 통치하는 능력을 행사하는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이 책 처음에 있는 장들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주권은 신성을 의미한다. 가장 원만하고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의미하는 것은 기쁨과 맘대로 행하시는 분의 성격과 존재이다. 그런고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주권적인 그 자신을 겨눠보는 것이다. 그것은 위엄스럽게 높은데 계시는 존귀하신 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지닌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관찰은 하나님에 대한 견해에 관한 경험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가진 사람들을 알려주는 성구에서 배울 수 있다.

욥의 경험에 대하여 고찰해 본다면 주님이 친히 말씀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서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고 했다.

욥기 끝에서 욥이 하나님 앞에서 그를 대면하여 볼 때에 어떻게 그가 행했는가?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본다면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라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습 곧 하나님이 놀라게 존엄하심을 계시하신 것을 볼 때에 욥이 자신을 미워했을 뿐 아니라 전능자 앞에서 자기를 낮추었다.

이사야를 보자. 이사야서 6장에서 우리에게 보여 준 광경은 성경에도 그와 같은 것이 별로 없다. 선지자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신 주님을 보았으니 그 위에 스랍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외쳐 말하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했다. 선지자 위에 나타난 이 광경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그 결과는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라고 한 말에서 나타났다. 거룩한 왕의 모습을 볼 때에 이사야는 티끌에 엎드리기 까지 겸손해지고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았다.

다시 한 번 다니엘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말년에 다니엘은 주님이 나타나신 것을 보았다. 그는 당신의 종에게 사람의 모양으로 세마포 옷을 입었고 또 허리에는 정금 띠를 띠었으니 곧 거룩하고 신령한 영광의 상징이다.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고 묘사했다.

그 다음에는 다니엘이 자기와 그와 함께 있은 사람들에게 나타난 이 이상의 결과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이상은 나 다니엘이 홀로 보았고 나와 함께한 사람들은 이 이상을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내가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느니라”(단 10:6-9)라고 하였다.

그런고로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주권적 하나님의 광경은 피조물의 힘이 약해지게 함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창조주 앞에서 티끌과 같이 겸손하게 한다. 그러면 최고의 주권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될까?

1.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

이 시대에 많은 사람이 신령하고 영원한 것들에는 전연 무관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지 모른다. 전쟁터에서도 대중은 저희의 영혼 문제에 대하여는 그렇게 무관심한 태도다. 천국을 멸시하는 것이 더욱 공개적이요, 더욱 야단스럽고 더욱 대담하다. 그 이유는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롬 3:18)고 하는 말씀이다.

또 근대에 와서는 성경의 권위가 그렇게도 저속해졌는가? 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일이 그렇게 적고 그의 규례들을 그렇게도 경시하여 쉽사리 내동댕이쳐 버리는지 모른다. 이 시대에는 하나님이 경외함을 받는 분이라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잠 1:7)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뵈었으니 망하리로다. 사람은 복되다. 하나님의 놀랍고 위대하심과 그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성과 그의 완전하신 의와 그의 불가항력적 권능과 그의 주권적 은혜에 관한 이상을 본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해야 될 사람들 다만 구원받지 못한 즉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면 구원 받은 사람들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들의 구원을 이룩하라고 가르쳤다는 것이 충분한 답변이다. 신자를 가리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보통으로 습관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런 칭호가 거의 다 없어진 것은 다만 어디서 우리가 이탈된 것을 보여주게 할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아직도 기록되어 있는 대로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 103:13)라고 했다.

물론 우리가 경건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이교도 사회에서 저희의 섬기는 신들을 섬길 때에 성행되는 것 같이 우리는 비굴한 경외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는 여호와가 축복하시로 약속하신 그 정신을 의미하는데, 그 정신은 이사야 선지자가 다음의 말씀에서 언급한 것이다.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여호와)가 권고하려니와”(사 66:2)라고 한 말씀이다. 이 정신은 사도 베드로가 생각한 것으로서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벧전 2:17)고 한 말씀에서 증명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처럼 경건 사상을 길러주는 것은 없을 것이다.

2. 전적으로 순종하는 태도

하나님을 발견하면 자신의 미약함과 허무함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자신을 그에게 맡기는 생각이 일어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주권론에 의하여 경건 사상이 추진되며 그 다음에는 이것으로 인하여 순종하여 행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 있는 본래의 악한 성품에 대한 신령한 해독제의 역할을 한다. 필연적으로 인생은 자기는 중요하다. 자기는 위대하다 또 자기는 자족하다는 사상으로 꽉 채워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밝힌 것과 같이 하나님의 왕권을 쳐다 볼 때에 크게 고침을 받는다. 왜냐하면 이것만이 진정으로 사람을 겸손케 한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아니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인생은 자기를 섬기고 기쁘게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주님을 섬기고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살 것이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불경건은 불순종을 낳는다. 교만한 애굽 왕이 말하기를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2)고 하였다.

바로에게 히브리 민족의 하나님은 단지 잡신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여 경외하거나 봉사할 필요가 없는 무능자에 불과했다. 바로가 얼마나 잘못했고 얼마나 그것 때문에 고배를 마셔야 한 것은 그는 미구에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바로가 경외심이 없는 결과로 교만하게 되었고 또 그의 불경건은 신성한 존재의 왕권과 권위에 대하여 무식한 탓이었다.

만일 불경건이 불순종을 낳는다면 진정한 경건은 순종심을 낳고 또 그것을 추진시킬 것이다. 성경은 가장 존귀한 분이 주신 계시요 그의 생각을 알게 하고 그의 뜻을 우리에게 정의해 주시는 것으로 아는 것은 실제상 경건의 첫걸음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 법도를 전능자의 법도로 인정하는 것은 성경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것이 무서운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할 것이다. 성경은 창조주가 친히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우리 영혼에게 말하는 것으로 환영하는 것은 시편기자가 외친 것과 같이 우리도 외치게 할 것이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소서”(시 119:36,133). 한번 그 말씀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났다면 그것은 당신의 말씀에 있는 규례와 법도 가운데서 사람에게 맞는 것으로 선택할 문제가 아니라 사람은 절대적으로 전심으로 그것에 순종하는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3. 온전히 순종하는 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은 모든 불평을 제외한다. 이것은 분명하나 그 사상은 고려할만 하다. 환란과 손실에 대하여 불평을 품는 것은 필연적이다. 우리가 마음이 끌리는 것들을 빼앗긴 때문에 불만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소유물은 무조건 내 것이라는 버릇이 있다. 우리가 어떤 계획을 잘 알고 부지런히 실천시킬 때에 성공할 수 있고 힘써서 일해서 [재산]을 저축한 때에는 그것을 보관하며 즐길 수 있고 또 우리가 행복된 가정의 분위기에서 살고 있을 때에 아무도 합법적으로 침입해서 사랑하는 식구를 구타할 수 있는 세력이 없다. 또 이러한 환경들 가운데에서 실망이나 파산이나 또 사망이 실제로 올 때에는 잘못된 인심이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반항하게 된다.

그러나 은혜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이런 불평은 없고 도리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또 우리가 전연 받아야 될 환란을 받지 않게 함을 알게 된다.

참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은 하나님에게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다루실 권리가 온전히 있는 것을 공공연하게 시인할 것이다. 전능자의 뜻에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대로 우리를 대하실 절대적 권한이 그에게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만일 그가 가난이나 질병이나 가정적 사별을 보내시기로 하거나 심지어 마음이 매우 고통을 당할지라도 세상 모든 것의 심판장에게 잘못하심이 있겠는가 하고 우리는 말해야 될 것이다.

때때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은 신자들에게 육에 속한 마음이 이 세상 순례 생활의 끝까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심중에 충돌이 있을지라도 참으로 이 진리에 굴복한 사람에게는 옛날 거친 게네사렛 호수에게 “잠잠하라”고 말씀하는 주님의 음성이 들릴 것이요 또 그의 속마음에서 노도와 같은 홍수라도 잔잔해 질 것이요 또 순종하는 영혼은 눈물과 신앙으로 가득찬 눈을 들고 이르기를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순종한 사람의 놀라운 실례는 이스라엘의 제사장 엘리의 사적에 의하여 제시된다.

삼상 3장에서 알려진 대로 하나님이 소년 사무엘에게 나타나셔서 그는 엘리의 두 아들이 악행한 것 때문에 죽이려고 하신 것을 그에게 알리셨다. 그 다음 날에 사무엘이 이 소식을 연로한 제사장에게 전달했다. 경건한 부모의 마음에 더욱 무서운 소식이 들림에 대하여는 상상하기 곤란하다. 여하한 경우에서든지 그의 아이가 갑자기 죽을 것이라는 말은 어떤 아버지에게든지 큰 고통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이 젊은 나이에 전연 예기치 않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는다는 것은 반드시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런 비참한 소식을 사무엘에게 들었을 때에 엘리에게 어떤 영향이 미쳤는가? 그때에 그가 어떻게 대답했는가? “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삼상 3:18)라고 대답했고 다른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놀라운 순종이요 뛰어난 순종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힘으로 사람의 마음의 가장 강한 애정을 주관하시고 반역하는 생각을 굴복시켜서 여호와의 주권적 의지를 불평 없이 알게 하는 데에 귀한 실례이다.

똑같이 놀라운 실례가 또 하나 있으니 욥의 생활에서 그것을 보여준다. 잘 알려진 대로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미워한 사람이다. 인간적으로 말해서 일찍이 하나님의 섭리가 임하기를 기대할만 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욥이었다. 얼마동안 그에게 운(運)이 터졌으니 주님이 그에게 칠남 삼녀의 대가족을 허락하셨고 그가 큰 부자가 될 때까지 이 세상 물질로 풍성하게 하셨다. 그러나 갑자기 그의 생애에 액운이 덮여졌다. 그래서 하루 사이에 욥은 재산뿐 아니라 그의 일곱 아들과 세 딸을 다 잃어버렸다. 그의 가축이 다 도둑을 맞았고 그의 자녀들은 다 큰 폭풍에 의하여 살해됐다는 비보에 접했다. 이 소식을 들을 때에 그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그의 놀라운 말을 들어 보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라고 했다.

여기에서 그는 여호와의 주장하시는 뜻에 순종했다. 이것은 곧 그가 당한 환란을 그렇게 되게 하신 분을 더듬어 찾아낸 것이다. 그는 자기의 가축을 도둑질한 스바 사람들의 배후와 그 자녀들을 죽게 한 폭풍의 배후에서 하나님의 손을 봤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그것에 또한 만족했으니 그가 말하기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라고 했으니 이것은 놀라운 순종이요 완전한 순종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을 참으로 인정하므로 우리의 모든 계획을 하나님의 뜻에 보류해두게 한다.

저자는 20세기 초에 영국에서 생긴 한 사건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 빅토리아 여왕이 별세하고 그의 장자 에드워드의 대관식 일자를 1902년 4월로 정했다. 이에 대하여 발송된 모든 초청장에는 즉 “D.V -Deo Volente, 하나님의 뜻이면”라는 이 두 자가 빠졌다. 이 큰 예식에 필요한 만반의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세계 각국의 군왕들은 다 이 초청을 받고 영국 왕의 대관식에 참예하려고 했다. 왕자의 선서문도 다 인쇄하여 비치해 두었다. 그러나 이 저자가 아는 대로는 이 D.V.라는 두 문자는 그 어느 한 문서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가장 훌륭한 예식 차례가 다 예비 되어서 정한 시일에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서 여왕의 장남이 대관하고 에드워드 제 7세라 칭했다. 그러나 그 후에 하나님이 간섭했으므로 사람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오히려 적은 소리가 들려 이르기를 “네가 나를 생각하지 않는구나”라고 했을 때에 왕자는 맹장염으로 병석에 눕게 되니 그의 대관식은 여러 날 동안 연기되었다.

이미 설명한대로 하나님의 주권을 참으로 인정하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계획을 하나님의 뜻에 보류해 두게 된다. 그래서 거룩한 토기장이는 절대권으로 가지시고 진흙을 가지고 당신의 왕권적 임의로 그릇을 만드시는 것을 우리가 믿게 된다. 그것에 의해서 우리는 다음 교훈에 주의하게 된다. “너희 가운데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약 4:13-14)는 교훈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순종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 살든지 저기에 살든지 내가 사는 한계를 정하신 이는 그분이시다(행 17:26). 가난하게 살든지 부하게 살든지 건강하든지 않든지 내가 살 환경도 그분이 결정하신다. 내가 들의 꽃과 같이 소년 시절에 요절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70년을 계속하여 살든지 얼마나 오래 살 것이라고 말하는 이는 그분이시다. 진정으로 이런 교훈은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학교에서 고등 교육으로 얻게 된다. 우리가 이것을 배웠다고 생각할 때에도 재삼 재사의 교훈을 다시 받지 않으면 안될 것을 발견한다.

4. 깊이 감사하고 즐거워하는 태도

마음으로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이 가장 복된 진리를 알아보는 것은 할 수 없이 경외하는 것과 매우 질이 다르다. 이 멸망하고 있는 세상에 대한 철학에 의하면 악 조건을 잘 이용하는 것 이외에 별도리가 없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그 세계관이 훨씬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므로 우리에게 경외심과 전적 순종과 온전한 순종만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시편 기자와 함께 “내 영혼아 영호와를 찬송하라 내게 있는 모든 것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기 위함이라”라고 말하게 한다.

사도 바울도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엡 5:20)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의 심령 상태가 매우 자주 시험을 받는 것이 이 점이다. 우리 각자에게 자행(自行)자지(自止)-제 마음대로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아니 함- 하는 일이 매우 많으니 슬픈 일이다. 모든 것이 우리의 원대로 될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매우 감사함을 돌리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이 우리의 계획과 소원에 반대로 될 때에는 어떻게 하는가?

참 신자가 기차 여행을 할 때에 그의 목적지에 도달한 후에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이 의당 할 일로 안다(그것은 물론 그가 모든 것을 주장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기차의 기관사와 화부와 신호사 등등에도 마땅히 감사해야 된다). 또 사업에 있어서 잘 팔린 주말에 가서는 모든 좋고(세상에서) 또 모든 온전한(영계에서) 은사를 주시는 분에게 감사한다(그것은 또한 그가 모든 고객을 당신의 상점으로 인도했다는 의미이다).

여기까지는 좋고 또 그런 경우에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그와 반대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내가 탄 기차가 연착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다른 기차와 충돌이 되어서 내가 부상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자. 또 내 사업에 수지가 없다거나 점포가 벼락을 맞아서 홀랑 타버렸다거나 도둑을 다 맞았다고 하자. 그때에는 어찌할까? 이 모든 일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을 내가 아직도 보고 있는가?

욥의 경우를 또 한 번 생각해 보자. 손해에 손해가 꼬리를 물고 그의 앞길을 가로 막을 때에 그는 어떻게 했는가? 그의 불행을 괴로워하고 있었는가? 도둑놈들을 욕하였는가? 하나님께 불평을 말했는가?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경배하고 순종하였다. 우리는 모든 것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손을 보는 것을 배울 때 까지는 진정으로 마음이 평안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신앙이 반드시 계속해서 역사해야 된다.

그러면 신앙이란 무엇인가 맹목적 인정인가 치명적 묵인인가 그것과는 퍽 다르다. 신앙은 확실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말하기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한다. 그러니 신앙은 항상 모든 것에 감사하는 것이다. 활동하는 신앙은 “항상 주안에서 기뻐할”것이다(빌 4:4).

이제는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인정된 것에 주의하여 보기로 하자. 그것은 경건과 전적 순종과 온전한 순종과 깊은 감사와 기쁨에 표현되어 있는데 그것이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최고로 또 온전히 예시된 것을 주의해 보자. 모든 일에 있어서 주 예수님은 우리가 좇아가야 될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처음에 말한 제목과 관련하여서도 사실로 그러한가? 경건이라는 말이 그의 비할 수 없는 이름에 관련된 일이 있는가? 경건은 노예적 공포가 아니라 친속적(親屬的) 순종과 존경을 의미하며 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니" 지혜가 육신으로 탄생하신 분과 관련함에서 경건에 대하여 하등의 언급된 것이 없다면 라는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것이 아닌가?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고 하였다. 예수로 하여금 그의 소년 시절에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케 한 것이 경건이 아니고 무엇이었는가?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 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눅 4:16)라는 말씀에서 그가 행하신 것이 경건이 아니었는가?(하나님에게 친속적 복종과 존경).

사단이 예수를 시험하여 자기 앞에 엎드려 경배하라고 할 때에 “기록하였으되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말하게 한 것이 경건이 아닌가? 깨끗함을 받은 문둥병자에게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 하라”(마 8:4)고 말씀하게 한 것이 경건이 아니었는가? 그러면 왜 실례를 더 열거할 필요가 있겠는가?(사 11:1,2).

예수께서는 성부에게 온전하게 순종하였다. 바로 하나님의 형체이신 그로 하여금 심히 낮아져서 종의 형상을 취하시고 순종하실 수 있는 위치에 처하게 하신 그 놀라운 은혜를 망각하지 않아야 한다. 온전한 종으로서 그는 당신의 아버지에게 온전하게 순종하셨다. 얼마나 온전하고 전적인 순종이었는지는 그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고 한 말씀에서 알게 된다. 이 순종의 태도에 대해서는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요 10:17-18).

성자가 성부의 뜻을 절대로 순종하신 일에 대하여는 두 분은 온전히 일치하신다는 것 이외에 할 말이 없다.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고 하셨다. 또 그가 어떻게 그 주장을 충분히 실천하신 것은 성경에 지시된 대로 그의 자취를 주의 깊게 따르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겟세마네 동산에 계신 그의 모습을 보면 성부의 손에 들려 있는 그 쓴 잔은 그의 생각을 보여 준다. 그의 태도에 잘 주의하여 보자. 마음이 겸비하신 그를 배우라.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육신 즉 온전한 사람이 되신 말씀이심을 기억하라. 그는 전신을 떨며 그를 기다리고 있는 육체적 수난을 정관하고 계시며, 그의 거룩한 성품과 육감적 성품은 그를 압박하고 있는 무서운 모욕 때문에 위축되고 있으며 그의 마음은 그에게 임할 무서운 비난 때문에 고통스러우며, 그의 생각은 어두움의 권세와 일대 충돌을 예측하므로 심히 괴로웠고 무엇보다도 최고로 그의 영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떠날 것을 생각하고 공포에 가득차 있었다 (그래서 여기에서 성부에게 자기의 영으로 크게 외치며, 말하자면 피땀을 흘리셨다). 오히려 벅찬 마음으로 그의 복된 입술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들어보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복종이 실천되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순종하신 것이 최고로 예시되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반드시 좇아야 할 모본을 남겨 주셨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모든 것에 있어서 우리와 같이 시험을 당하셨으나 죄는 범하시지 않고 사람의 성품을 지니신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위에서 물어본 대로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뜻에 절대로 순종하신 일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더 대답한다면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는 고귀하심이 비할 데 없다. 그는 모든 면에 있어서 탁월하시다. 주 예수님에게는 꺾어야 될 반역적 의지가 없으시고 그의 마음에는 복속시켜야 할 것은 하나도 없다. 이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예언적 언사에 있어서 그가 말씀하시기를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시 22:6)라고 하시지 않았는가?(벌레에는 반발하는 힘이 없다).

그가 이르기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이다”(요 11:34)라고 하실 수 있는 것은 그에게는 반발하심이 없기 때문이다. 과연 그가 말씀하시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시 40:8)라고 하신 것은 그가 모든 일에 있어서 성부와 온전히 합의되었기 때문이다. 위의 말씀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그의 비할 데 없는 탁월하심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당신의 법을 우리 생각에 두시고 그것을 우리의 마음에 기록하셨으나(히 8:10 참고) 그의 법이 벌써 그리스도의 심중에 있었다.

어떻게 그리스도가 감사하고 기뻐하심에 대한 실례가 마태 11장에 나타나 있다. 여기서 관찰하는 요점들은 첫째로 그의 선구자의 신앙이 약함과(12,13) 다음으로 백성의 불만 즉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이나 요한의 장엄한 소식에도 만족하지 않았다(16,20). 셋째로 우리 주님이 가장 많이 역사하신 성읍들이 회개하지 않았다(21-24).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니이다”(25)라고 하셨다.

눅 10장에 있는 병행 구절은 “이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 하사 가라사대 ……감사하나이다”라는 말씀으로 시작된 점에 주의하라. 여기에 순수하게 순복하신 것이 있다. 여기에 천지를 지으신 분이 있는데 그가 오히려 그의 낮아지신 시대와 또 버림을 받은 마당에서 감사와 기쁨이 충만하여 천지의 주재의 뜻에 순종하셨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되겠는가?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로 한다.

5. 숭경(崇敬)하는 태도

“참된 경배는 위대성을 인정한 경배이며 위대성은 하나님의 주권에 가장 많이 볼 수 있다. 그런고로 이외의 다른 형식으로 사람이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J.B. Moody)고 한 것은 바로 말한 것이다. 거룩하신 왕이 당신의 보좌에 앉아 있을 때에 스랍들도 “그 얼굴을 가리었다”.

하나님의 주권은 잔인하게 독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의로우시므로 불의하게 행하시지 않는다. 여기에 이 진리의 고귀성이 있다. 단순히 하나님의 뜻은 배격할 수 없고 번복할 수 없다는 사실 그 자체만도 우리에게 경외심을 채워 주시나 하나님의 뜻은 다만 착한 것만을 원하신다는 것을 인식할 때에 내 마음에는 기쁨이 차게 된다.

그렇다면 이 장에서 질문한 것에 마지막으로 대답할 것이 있다. 그 질문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 우리의 태도다 어떠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맞게 취해야 된 태도는 경건과 전적 순종과 무조건 복종과 부속함이다. 그럴 뿐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과 주권 자체가 내 성부라고 하는 생각이 내 마음에 충만해서 나로 하여금 그 앞에 엎드려 숭경하게 한다. 언제나 우리는 "아버지여 그래도 당신이 보시기에 이것이 합당하나이다"고 해야 된다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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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가(엘리야의 생애 중에서)-아더 핑크  (0) 2012.12.11

현대의 신자들은 참된 의미에서의 경건(pietas)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현대'를 특징짓는 것들 중 하나가 하비 콕스가 우려했던 것인 '세속주의(secularism)'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세속과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절대화로서, 그것을 초월하는 영성이나, 종교성 같은 '신비'에 대해 폐쇄적인 가치관을 말한다. 그것은 이성이나, 그것을 토대로 한 과학, 그리고 물질문명들을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다. 그런 흐름은 교회의 내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 교회가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보다는 세속적인 가치나 기준에 좌우되는 일이 많으며, 신자 개개인들의 생활에 있어서도 세속적 성공이나 부(富)가 우선이고, 참된 신앙과 애써 따르는 십자가의 길과 같은 덕목들은 부수적인 것처럼 간주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볼 때, 기독교가 참된 정신과 신앙, 경건 혹은 영성을 회복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다. 그것은 기독교가 주님의 말씀에 바르게 서서, 세상 속에서 본래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그렇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현대'가 종교간의 '경쟁'이 문제시되고 있을 정도로 다종교사회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더욱 시급한 일이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그 고유한 특성들을 더 잘 찾아내고, 그것들을 더 잘 발휘해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참 진리와 의미, 그 구원을 전할 수 있고, 믿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20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현대사회는 포스트모던의 사조가 시류를 타고 있다. 그것은 이성 중심의, 물질문명 중심의, 또 개인 중심의 현대문명에 대한 반발이나 비판으로써 대두된 하나의 전반적인 문화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릴 수 있겠으나, 포스트모더니즘이 현대사회의 "세속주의"에 대한 비판적 극복이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종교적으로 볼 때는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즉 새로 대두되는 포스트모던의 종교현상 속에서는 이성이나 체계보다는 "영성"이나 "감성"을 강조하며, "개인"보다는 "공동체적" 삶과 실천을 중시하며, "교리"나 "도덕"보다는 "명상"이나 "영성개발"로써 초월성이나 내면적 깊이를 찾아나가는 데 초점을 두는 경향이다. 물론 그런 시도들이 언제나 바르고 훌륭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일차원적인 세속에 함몰된 현대인들에게 그것을 초월하는 종교적 깊이와 신비를 지시해주고, 그것을 추구해보려는 의도자체는 바람직한 것이다. 현재 기독교내의 신학이나 운동 역시 그런 방향에서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른바 "영성의 신학"이나, 여러 형태의 공동체 운동들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새로운 형태의 신학이나 운동들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성서와 기독교의 전통들 속에서 문제에 대한 답안을 구해보려는 노력일 것이다. 물론 그런 운동들이 성서적, 교회적 근거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겠지만, 전통적인 용어나 개념들 속에 그 답이 있다면, 그것을 채취하는 노력에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우선되는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논문에서는 그런 과제를 주로 개신교의 사상적 기틀을 놓는 데 크게 기여했던 칼빈의 경건 사상을 해석함으로써 이루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의 현대적 의의를 찾아봄으로써, 전통신학의 경건 개념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경건에 대한 전통적 이해

경건(????????)은 칼빈에게서 시작된 개념은 물론 아니다. 그것은 고대 사회로부터 이미 존재해왔던 용어이며 개념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종교와 사회 속에도 존재해서 성서 속에 나타나고 있는 용어이다. 그런 전통을 이어받아 교부들과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에라스무스 등 많은 사람들은 경건의 개념과 의미를 논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 경건에 관한 고대사회와 교회의 전통 모두를 다루기는 어렵다. 단지, 칼빈의 경건을 살펴보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서, 전통적으로 경건이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를 기존의 연구들로부터 간단히 살펴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원래 고대세계는 종적인 체계를 중심으로 한 사회들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정을 가장 기본적으로 했다. 그러므로 사회들의 기초단위가 되는 가정 내에서의 구성원들간의 결속은 매우 중시되었다. 그것은 특히 가장과 가속들 사이를 묶어주는 유대를 중심으로 했으며, 그것은 거의 종교적인 것이었다고 할 정도로 중요했다.

그런 세계 속에서 "경건"은, 우선 부모와 자녀들과의 관계에 관련된 것이었다. 특히 자녀들이 부모를 두려워하고 존경하며, 그리고 따르는 그런 품성이나 태도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건은 가정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국가의 차원으로 확대되었으며, 그래서 그것은 국가와 국왕에 대한 시민의 경외와 충성이라는 덕목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한편 고대사회는 다신교 사회로서 각종 종교들과 제의들이 발달했는데, 그 속에서 경건은 신들에 대한 숭배나 열심 같은 것들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로 통용되던 '경건'을 기독교가 사용했을 때, 그것은 원래의 사회적 의미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한 차원 높은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복종, 헌신 등의 개념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종교개혁자 칼빈도 경건에 관한 그런 전통적인 개념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신명기 설교들 중에서 말했다. "그래서 이교도들은 '경건'이라는 용어를 아버지나 어머니, 그리고 우리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 모두에게 우리가 영예를 돌리는 것에다 적용시켰던 것입니다. 적절하게 말해서, 경건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져야 하는 경외입니다...."

그런 점들을 볼 때, "경건"은 전통적으로, 부모나, 왕, 신과 같은 상위자들에 대한 아랫사람의 존경과 두려움, 순종, 충성, 헌신들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것은 "경건"이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강제적으로 부과하거나 억지로 강요하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고대세계는 그것이 종적인 사회였다고 하더라도, 그 중심에는 상호간의 "선한 믿음", 혹 "신실성"이 자리잡고 있어서, 어떤 이들은 보호자, 양육자로서, 또 어떤 이들은 그를 따르는 자로서 사는 데 큰 갈등이 없었다. 즉 그들 세계에서 경건은 신뢰에 근거한 것으로서, 어느 정도 자발적이고, 또한 기쁨과 보람도 따르는 그런 종류였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경건"은 어떤 선한 관계의 개념으로서, 수직적인 차원에 대한 인정과 더 나가서 적극적인 수용이며, 전통사회가 그것으로써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유지시켜 나가는 필수적인 요소였다고 해석될 수 있다.


칼빈의 경건사상,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인가?!

"경건"은 또한 칼빈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사상들 중의 하나이다. 그는 '경건'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했고, 그것을 통해서 기독교인의 올바른 예배와 종교, 지식, 삶들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우선 칼빈의 경건은 그 이전의 중세기적인 의미에서의 경건과는 매우 다르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쟝 까디에는 "칼빈이 경건의 영역에서 이루었던 혁명을 동시대에 코페르니쿠스가 천문학에서 했던 혁명과 비교할 수 있다"고까지 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였을까? 그의 말을 더 들어본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에는 사람들이 지구를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해서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보았다... 그 천문학자는 정반대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주에 대한 모든 개념이 바뀌어졌다. 그와 마찬가지로, 칼빈은 경건에서, 그것의 습관적인 중심이었던 사람과 그리고 사람의 필요나 성과들을 들어내었고, 그 자리에다 경건의 진정한 중심인 하나님을 다시 모셨다..."

인용문에서 보듯이, 까디에가 주목한 것은 바로 칼빈의 경건에 있어서 신중심적인 성격이었다. 즉 중세에는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었고, 주체였으며, 그 인간의 요구나 필요, 종교적 성취에 따라 하나님이 부수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중심의 종교, 인간중심의 경건을 가지고 있었다면, 칼빈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세계의 중심이고, 그분만이 홀로 주인이며, 사람들은 그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신 중심적 세계관과 종교, 그리고 그에 따른 경건을 주창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에 상응할만한 종교상의 대전환이었다는 시각이다.

사실, 중세적인 관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나 구원은 인간의 종교적 수련이나, 자선, 선행 등 행위를 그 조건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자들의 종교적 수행 등 이른바 '공로'는 자신의 구원에 대한, 그리고 심지어는 가족이나 선조들의 구원에 대한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거기서는 구원을 인간이 공로로써 획득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 결과 구원의 객체인 인간이 오히려 주체로 인식되기까지 하는 오류가 발생했던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의 경건은 참된 의미를 가지기가 어렵다. 실제로 중세기적인 의미에서의 경건은 그런 잘못된 관념으로 인해 의미를 잃고 만 결과를 가져왔다. 바로 그것을 마르틴 루터가 (10년여 동안의) 고통스러운 수도원생활을 통해 체득하고, 깨달았던 것이 아닌가? 루터와 다른 방식이지만, 칼빈 역시 그런 중세기적인 종교관행과 경건이 하나님의 참된 진리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기독교강요] 등 그의 여러 저술들 속에서 분명하게 밝혔다. 그럼으로써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나 구원의 전제가 되는 인간의 종교적 행위나 실천이 아닌 새로운 의미에서, 즉 복음적인, 그리고 성서적인 의미에서 경건을 세워놓았다. 그가 세운 경건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써 가능한 경건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이 경건함으로써 의를 얻고,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 그런 경건이었다. 그래서 인간의 경건에 선행하는,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경건사상이 수립된 것이다. 그래서 경건은 칼빈에게서 인간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 새롭게 전환되었고, 그 점을 주목했던 까디에는 그것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칼빈의 경건사상 속으로 들어가 보자.


경건에 대한 칼빈의 정의

칼빈은 1536년, 자신의 교의학적 주저 [기독교강요] 초판을 발간하면서, 이런 긴 제목을 붙였다. [기독교강요,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경건에 관한 거의 모든 것과 구원의 교리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함. 경건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읽을만한 저작으로 최근에 출간되었음]. 이 긴 제목 중 부제가 되는 부분은 출판업자가 붙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봐서, [기독교강요]의 성격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부제가 지시하는 것은 바로 [기독교강요]가 경건과 구원에 관계된 책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경건"은 "사랑하고", 배워서, "신자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점은 칼빈이 [기독교강요] 초판, (서문형식으로 포함시킨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내는 서한"의) 서두에서 다시 확인되고 있다. "나의 목적은 단지 어떤 초보적인 내용들을 소개함으로써, 종교적인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으로써 참된 경건에 도달하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즉 기독교강요의 목적 자체가 신자들이 참된 경건에 이르도록 기본적인 내용들을 알려주는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경건은 신자들이 교리나 말씀을 배워서, 종교적인 어떤 참된 삶, 또는 덕목이나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칼빈은 경건에 관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칼빈이 경건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1537년 "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i"(신앙지침과 고백서) 안에서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도적으로 피하려는 두려움에 있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공포심을 일으킨다. - 그러나 참된 경건은 오히려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또한 주님으로서 존경하며, 그의 의를 받아들이며, 그분을 거역하기를 죽기보다 무서워하는 그런 순수하고 진정한 열심 가운데 있다. 그리고 그런 열심을 가진 사람들 모두는 그런 하나님을 자신들의 무모한 욕구에 따라 뜯어 맞추려고 하지 않으며, 오직 참된 하나님 그분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알려고 하며, 자신들에게 나타나고 선포되는 그대로 그분을 이해한다."

여기서 보듯이 칼빈이 경건으로써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점이다. 하나는, 경건이, 하나님이 자신의 진정한 주님이라는 것을 믿고, 알고, 그래서 모든 것에 앞서서 바로 그분만을 경외하며 따르는 일(1-1)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런 경건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욕구나 기호에 맞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알려주신 바 그대로 그분을 믿고 이해하는 것(1-2)이다. 이 두 가지 사항은 경건의 개념으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각각 독립적으로 발전시켜 다룰 수 있는 주제들이다. 우리는 그것을 뒤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칼빈의 경건 개념을 보여주는 중요한 곳으로서 또 한 군데를 지적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강요 1559년 판,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 목적을 밝히는 새로 추가된 장이다. 거기서 칼빈은 경건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종교나 경건이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나의 의도는 이렇다. 즉 그분이 이 세상을 한번 창조한 다음에 그것을 자신의 무한하신 능력으로써 유지시켜 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분은 자신의 지혜로써 세상을 다스리시며, 자신의 선함으로써 그것을 지키고 보호해주시며, 특히 인류를 의와 공정함으로써 이끌어 나가며, 자신의 자비로써 그들을 지지하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다. 더 나가서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한다. 즉 그분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지혜나 명철, 혹은 의, 능력, 정직, 또는 진리가 단 한 방울이라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래서 그런 것들은 모두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므로, 그분만이 그런 것들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것들을 전적으로 그분에게서 기대하며, 그분에게서 찾아나가기를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우리는 모든 것을 그분에게 돌리며,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써 그분에게서 받기를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런 은혜들에 대한 느낌만이 선한 교사이고, 우리들에게 경건을 가르쳐주기에 올바른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종교가 나온다. 나는 '경건'을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이 함께 결합된 것으로서, 우리가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선행들을 알면서 자연스럽게 그리로 이끌리게 된다고 정의한다."

다소 긴 인용문이지만, 여기서 언급되는 내용은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경건이 (또한 종교가)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 수가 없다(2-1).

둘째로,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주이며, 모든 것의 주인이자 우리를 다스리시는 주님이며, 지혜와 명철, 의, 정직, 능력, 진리 등 모든 귀한 것들의 원인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점을 믿고, 그분으로부터 그 모든 귀한 것들을 바라고, 얻으며, 그에 대해 그분께 감사하고 영광 돌려야 한다(2-2).

셋째로, 그분의 은혜를 느끼고 아는 것은 경건을 가르쳐 주며, 또 그것으로부터 종교가 파생된 것이다(2-3).

넷째로, 그래서 결론적으로 '경건'은 신자의 그런 느낌과 믿음과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사랑이라는 것이다(2-4).

이 네 가지 점도 각각의 독립적인 주제로 발전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것을 앞의 정의에서 끌어낸 항목들과 함께 살펴보면, 칼빈의 경건 개념으로부터 파생되면서 그것을 구체화시켜주는 주제들은 신앙의 문제(1-1 앞부분, 2-4), 삶의 문제(1-1 뒷부분, 2-2), 인식의 문제(1-2, 2-1), 종교의 문제(2-3, 2-2 뒷부분) 들로 나누어 질 수 있다. 이제 그것들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칼빈의 경건사상의 전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경건의 신앙론적 해석

칼빈에게서 경건은 우선 신앙론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위의 정의들에서 보듯이,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은 무엇보다도 하나님만이 진정한 주님이심을 믿고, 그분만을 경외하는 것이었으며(1-1 앞),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사랑이었다(2-4). 그것은 실제로 신앙 속에서만, 혹은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죄인이 자기중심적인 오류 속에서, 자신이 자신과 세계의 중심이자 주인이었지만, 그러나 신앙을 통해 다시 태어난, 즉 하나님과 바르게 관계가 맺어진 현재는, 하나님이 중심이자 주인이고, 그분만이 존경과 사랑으로 믿고 따를 분이라는 새로운 의식과 삶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신앙은 경건을 일으키는, 혹은 경건의 의식과 삶을 갖게 하는 하나의 극적인 전환과 같은 것이었다. 경건은 그런 신앙 속에서 이루어지며, 또 그것을 통해 지속, 혹은 성장되는 것이었다. 그 이유에서 칼빈은 기독교강요 III권 신앙론을 다루는 자리에서, 경건을 신앙과 관련지어서 다루었던 것이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또한 신앙이라는 용어가 가지는 여러 가지 의미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종종 신앙은 '경건에 관한 거룩하고 순수한 교리'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신앙은 경건에 관한 거룩하고 완전한 교리, 즉 "가르침"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신자들은 신앙을 통해서, 경건을 알게 되고, 경험하게 되고, 그래서 그것의 전부를 배우게 된다는 의미이다. 칼빈이 자신의 회심을 기억하며 고백했던 바도 바로 그 점을 확인시켜준다. "그러므로 내가 참된 경건의 어떤 맛과 지식을 얻게 된 후에는, (비록) 다른 공부들을 완전히 떠날 수가 없어 좀 더 느슨하게 해나갔는데, (경건을) 더 성장시키고 싶은 매우 큰 열망이 마구 솟아올랐다."

칼빈에 따르면, 신앙은 언제나 회개의 원인이 된다. 칼빈은 그런 신앙의 회심을 실제로 경험했고, 그것을 자신의 저술 두 군데서 고백해놓았다. 그중 인용한 시편주석 서문의 고백에 따르면, 회심의 결과로써 경건의 맛과 지식을 얻게 되었고, 또한 그것을 더 성장시키고 싶은 열망에 타올랐다는 것이다. 즉 회심한 뒤에는 이제는 삶의 방향과 관심이 완전히 바뀌어서, 전혀 새로운 관점과 방법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살게 되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것이 바로 경건이라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는 하나님 중심적인 의식과 삶, 즉 죄인이 이제까지의 자기중심적인 교만과 죄로 물든 자신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인이 되는 것, 또 그렇게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칼빈에게 있어서, 신앙인이 경건을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물론 어떤 의무나 억지로써가 아니다. 죄인이 은혜가운데서 새롭게 태어나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은 언제나 감사와 기쁨, 즐거움을 수반한다. 칼빈이 자신의 회심을 전하면서 표현했듯이, 경건에는 어떤 "맛"이 있는데, 그는 그것을 [기독교강요]의 신앙론 중에서 이렇게 잘 표현했다. "그러므로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뿐만 아니라, 그 은혜의 따듯함,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어떤 감미로움을 가지게 해주고, 사람들이 두려움을 가지고 경탄하도록 배워주며,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며, 그의 권능에 복종하게 된다." 여기 나오는, "은혜의 따듯함", "어떤 감미로움" 너무나 크신 능력과 역사에 대해 크게 놀라는 "두려움"과 "경탄", 그런 것들이 "경건"에 따르는, 혹 그것과 함께 일어나는 신앙인의 내적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경건을 신앙론적으로 볼 때, 또 한가지 주목할만한 것이 있다.

칼빈에 의하면, "경건의 첫 단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어서 아버지인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바로 "신앙"이다. 여기서 보듯이,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과 신앙은 모두 아버지 하나님을 알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을 뜻한다. 그 둘은 모두 하나님의 "아버지됨(Paternite, 부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믿으며, 그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양가감정(Ambivalance)을 갖는다. 아버지는 두려운 존재이자 동시에 자상한 존재이다. 칼빈이 이해한 하나님은 바로 그런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은 존엄하고, 초월적인 분이면서, 동시에 자비롭고, 죄인들을 사랑해서 예수 그리스도로서 오신 은혜로운 분이다. 그래서 칼빈은 그런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신자들이 갖는 경건을 "그분을 경외하고, 또 사랑하는 것"이라는 서로 상반된 것으로써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은 하나님을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신앙적인 태도이자 삶으로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바는, 신자가 존엄하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는 그분을 경외하고, 복종하며, 자비와 은혜의 하나님 앞에서는 그분을 무한히 사랑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물론 경건의 그 두 가지 면, "경외"와 "사랑"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아버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고, 사랑하며 경외하는 그런 동시적인(simul)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칼빈의 경건에 대한 신앙적 해석의 요체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고, 그 아버지를 경외하고 사랑하는 바른 관계를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특히 죄인이 자기중심적인 무지와 교만을 떠나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에게서 경건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앙으로 비롯되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인 회심의 체험과 함께 이루어진다. 경건은 그런 은혜를 깨닫고, 감사함으로 주님께 응답하는 자발적이고 기쁨이 있는 신앙인의 존재이자, 삶이다.


경건과 그리스도인의 생활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은 신앙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더나가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교리에 깊이 관계되고 있다. 즉 우리가 정의를 다루면서 보았듯이, 경건은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따르는 것이었으며(1-1 뒤), 그분만을 믿고, 모든 선한 것들을 그분에게서 바라며, 그분께 감사하고 영광돌리는(2-2) 구체적인 삶의 문제였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은 경건을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룩함으로 부름을 받았으므로, 모든 기독교인들의 전 생애는 경건을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 그에게서 경건의 실천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영역에서, 지식, 봉사, 예배, 헌신, 복종, 사랑 등 여러 형태의 실천으로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중 칼빈에게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복종과 사랑이다. 그 두 실천은 앞의 신앙적 해석에서 보았던, 하나님의 아버지됨에 대한 신앙인의 태도와 삶의 두 면모, 즉 경외와 사랑에 상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그 두 가지를 중심으로 경건의 생활적인 면모를 살펴본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를 우리의 아버지로 붙들면서, 그분에게 (돌려야 하는)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으며 경외하는 것은 곧 그분에 대해 복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복종은 그분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은 그분이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또한 "주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복종은 필연적으로,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혹은 원치 않는 자기 자신을 굴복시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에게 복종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뜻과 상반된" 우리의 "모든 욕망들을 길들이고, 굴복시켜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전체 요강"인 "자기부정"에 관계된다.

칼빈에게 있어서, 자기부정은 "우리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그분을 위해서 살고, 그분을 위해서 죽는 것이며, 그분만을 섬기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감각을 비워서, 하나님의 영에 완전히 변화되어,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자기중심적인 교만 속에 살고 있는 죄인이 새롭게 태어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살게 될 때 수반되는 것이 그런 자기부정과 자기부정을 통한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며, 그리고 그것들은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생활의 필수적인 측면으로 보았던 것이다.

또한 칼빈은 경건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앞에서 보았듯이, 경건의 정의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이 함께 합쳐진 것"이었다. 그래서 경건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신자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것으로 간주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거룩을 완성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들도 그것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즉 신자들이 가질 수 있는 어떤 거룩함도, 어떤 찬양이나 예배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비롯돼야 하며, 또한 그 사랑이 있어야 그것들을 온전하게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며, 그것을 통해서 그의 모든 생활과 예배를 완성하는 그런 성격의 것이다.

그런데, 칼빈에 따르면 경건의 표현인 하나님의 사랑은 또한 이웃들에 대한 사랑으로써 증거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칼빈의 관점에서 경건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따르는 것이다. 즉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삶이다. 그런데 칼빈은 제네바교회 교리문답에서 이렇게 썼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우리들 중에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더 나가서 같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형제, 자매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칼빈은 갈라디아서를 주석하면서 그 점을 경건과 관련시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경건, 즉 하나님께 돌려져야 하는 경외와 봉사가 우리의 형제들에게 돌려져야 하는 사랑보다 더 상위의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경건은, 하나님이 안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감각들로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식들이 경건을 증거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식들은 경건을 분명히 증거 해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종종 보듯이, 위선자들보다 더 예식들을 열심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지키는 사람들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 서로 서로가 사랑하도록 권한 형제애를 통해서 우리가 그분에게 가지고 있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증명하도록 하셨다."

이 인용문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경건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하고, 또 증거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칼빈은 경건을 통해, 필연적으로 "이웃사랑"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 그것 역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으로서 "이웃과의 자유로운 사랑의 교제"속에서 모든 것을 나누는 섬김의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경건을 생활이라는 영역에서 실제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특히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자기부정, 그리고 사랑, 더 나가서 이웃사랑으로 나타나야 하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감사가 외부로 표현되고, 증거 되는 성격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이것이 막스 베버가 칼빈 이후의 칼빈주의 속에서 발견했던 이른바 "실천적 삼단논법"(Syllogismus Practicus)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외부적 표시로서 내부를 증명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내부의 경건 때문에 자연스럽게 외부로 드러나서 내부를 알게 되는 그런 방식의 증거를 의미한다. W. 니젤이 잘 보았듯이, 칼빈의 전체 사상 속에는(그리고 우리가 본 이 항목의 인용구들 속에서도), "실천적 삼단논법"의 의미는 들어 있지 않다.


경건과 신 인식론

정의에서 보았듯이, 칼빈은 "(종교나) 경건이 없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2-1)고 했다. 이것은 칼빈의 신 인식론에 있어서 중요한 점을 알려주는 열쇠와 같은 말이다. 칼빈에 따르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connaissance, 또는 지식)은 삶이나 실천과 유리된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우리의 삶과 현실에 관계된 것이다. 그 인용문 앞에서 칼빈은 말한다.

"그런데 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소박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앎으로써 우리에게 관계되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간단히 말해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살아야 하는 바를 알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경건"과 "종교"에 관련시켜 말했다. 즉 바로 뒤를 이어, 그는 "종교나 경건이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즉 논리상의 문제인데, 그 말은 논리적인 비약이고, 그 앞에는 생략된 명제들이 있다는 것이다. 생략된 부분에서 우리는 이런 명제들을 읽어야 칼빈의 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참된 경건과 종교이다. 우리는 그것을 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 행함 속에서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 이 명제를 넣어서 칼빈의 말을 보충해보면 이렇게 된다.

"그런데 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소박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앎으로써 우리에게 관계되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간단히 말해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라고 이해한다(그것은 참된 경건과 종교를 아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 행함 속에서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종교나 경건이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그렇게 본다면, 칼빈의 인식론에 있어서 중요한 점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즉 그에게 있어서 인식으로부터 실천이 나오지만, 그러나 또한 실천으로부터도 인식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것은 칼빈이 약간 뒤에서 시사한 바로써 확인된다. "...우리의 정신은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고서는 그분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에밀 두메르그가 칼빈의 방법을 "연역적 방법과 귀납적 방법, 삼단논법의 방법과 경험론적 방법, 그 둘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은 이유를 갖는다. 챨스 파티 역시 그 점을 칼빈의 교리 여러 곳에서 확인했다. 가령 성령론 같은 곳에서, "칼빈은 기본적으로 논리나 이성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아래 사는 신자의 경험에 호소했다." 또 신 인식론에서도 "칼빈은 하나님 자체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그분이 말씀가운데서 우리와 맺으신 관계를 관심했다. 그와 같이 칼빈은 자신의 신학적 추론의 일관성으로써 뿐만 아니라, 또한 기독교인의 하나님 경험에 대한 자신의 설득력 있는 표현들로써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칼빈은 경험에 대한 호소, 경험을 통한 계시이해와 신 인식의 방법을 열어 놓았고, 또 그것을 중시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는 것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그것 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자 길이었다. 칼빈은 그와 같이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한 바에 따라 살고, 그리고 그렇게 살면서 또한 하나님을 더 잘 알고 이해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는 인식, 혹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적극적으로 작용하면서, 신자의 삶과 이해를 점점 더 완성시켜나가는 그런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신자의 끊임없는 과정은 바로 "성화(sanctification)"인데, 의미상으로 볼 때, 그것 자체가 또한 경건과 다른 것이 아니었다.

신 인식에 있어서 칼빈이 경건을 적용했던 다소 다른 방식 하나를 도외시할 수 없다. 앞의 정의에서 보았듯이, 그는 "(경건한) 사람들 모두는 그런 하나님을 자신들의 무모한 욕구에 따라 뜯어 맞추려고 하지 않으며, 오직 참된 하나님 그분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알려고 하며, 자신들에게 나타나고 선포되는 그대로 그분을 이해한다"(1-2)고 했다. 칼빈은 그 점을 매우 강조했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다시 말한다.

"그러므로 잘 정리된 사람은 우선, 자의적으로 신을 만들어내지 않고, 참되고 유일한 하나님인 그분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분을 자기 마음대로 상상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 자신이 계시하는 바 그대로를 아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리고 조심스럽게 경계함으로써, 이리 저리 헤매고만 다니게 하는 정신나간 모험이나 과욕 때문에 그분이 선포하신 것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일을 하지 않는다."

신 인식에 있어서, 경건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말씀하는 바를 유심히 듣고, 그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게 하는 것이었다. 칼빈에 의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방법이었다. 칼빈은 그런 경건이 없이,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하나님을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자주 비판했다. 그는 신명기 설교 중에서 말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귀를 막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의 벙어리 인형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야 그들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그런 것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선언한 것을 왜곡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경건"이 없이는 하나님을 왜곡하는 것 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교만이나 허영, 자기 중심적인 망상들을 버리는 일이었다. 그것이 바로 자기부정으로서, 앞에서 살펴본 대로, 칼빈이 말하는 경건의 한 다른 모습이다.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복종을 그것보다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 없는 허풍에 너무나 기울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망상에 사로잡히기만 하면 곧 거기에 빠져버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 이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그분께 속할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우리가 사로 잡혀있는 헛된 생각들을 우리 속에서 뿌리뽑아야 합니다."

그런 점들을 볼 때,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은 올바른 신 인식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경건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듣고 받아들이게 하는, 그래서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경건은 하나님을 알 때 실천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경건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을 다시 알게 되는 성격을 가졌다. 그러면서 신자들은 더 올바르고 완전한 인식과 삶을 향해 끊임없는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칼빈이 본 경건한 신자들의 생애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경건과 참된 종교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은 곧 종교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는 경건과 종교를 함께 언급하거나, 혹 서로 바꿔가며 쓰기도 했을 정도로, 그 둘을 밀접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정의에서 보았듯이, 종교는 경건으로부터 파생된 것이었다(2-3). 즉 경건의 결과로 종교가 생긴 것이다.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을 수반한다. 그런 경건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또한 동시에 그들의 종교로도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칼빈에게 있어서 종교란 다름 아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되는 예배였다. "바로 이것이 순수하고 참된 종교이다. 즉 하나님께 대한 생생한 두려움과 결합된 신앙인데, 두려움은 그것 자체에 자발적인 경외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 자체로부터 고유한 그대로의,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율법 안에서 명하고 있는 예배를 이끌어 낸다."

그러므로 종교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서, '창조주이자, 모든 귀한 것들의 주인인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돌리는'(2-3) 일이었다. 그것은 경건으로부터 파생되지만, 동시에 경건의 한 표현이자, 그것의 일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경건은 아버지 하나님을 감사하고, 영광돌리며 경배하도록 하며, 그것은 바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이 볼 때, 사람들은 그 예배를, 종교를 올바르게 수행하고 있지 못했다. 그는 말한다. "...그러나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주 소수만이 하나님을 존경할 뿐, 모든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그를 공경한다. 모든 이들이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보여주지만, 아주 소수만이 마음으로 예배할 뿐이다."

칼빈은 이처럼 형식적인 예배, 왜곡된 종교가 만연된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가 왜곡된 종교나 예배 속에서 특히 강도 높게 비판하는 것은 우상숭배였다. 그는 사람들이 모두 죄와 오류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이 원하는 진정한 예배를 파괴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뇌는 우상숭배 전시관과 같습니다. 각 사람들이 다 우상들을 만들어대고, 각자가 하나님 예배를 왜곡시키고 있으므로, 거기에는 책임자들마저도 없습니다." 칼빈이 우상숭배에 관해 길게 논의하는 곳은 역시 [기독교강요]이다. 그에 따르면,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왜곡시키는 가장 사악한 죄에 속한다. 하나님은 "영"으로서 형상이나 물체로 대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우상으로 대체하면, 무한하신 하나님의 영광은 불경건한 거짓 때문에 훼손된다. 그런 우상숭배는 경건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경건은 하나님 자신이 원하고, 말씀하시는 바를 듣고, 그에 따라 경외하며, 조심스럽게 그분을 알고, 따르고, 예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식과 우상숭배로 왜곡된 종교를 바로 세우는 일은 동시에 경건을 바로 세우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칼빈의 관점에서, 경건을 세우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고, 그렇게 세워진 경건 속에서 비로소 신자는 참된 종교와 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래서 칼빈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올바른 신앙을 갖도록 매우 노력했다. 그런데 그것은 예배와 종교를 개혁하는 일과 함께 일어났다. 즉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시키고, 동시에 그들이 과거 잘못 세워놓았던 종교를 개혁하는 것, 그 두 가지가 칼빈이 전 생애를 바쳐서 했던 일의 전부였다고 할 수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참된 종교를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그 드러나는 영광과 말씀에 따라, 무한하고 존귀하신 모습 그대로를 다시 믿고, 예배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 속에 있는 신앙인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칼빈이 생각하는 참된 종교는 바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그리고 "진리에 부합된" 것이다. 그것은 칼빈이 프랑스에서, 그리고 쥬네브에서 애써 세우고자 했던 교회, 복음적인 종교이다. 여기서 그의 종교개혁을 개괄할 필요는 없겠다. 단지 경건의 문제와 관계해서 본다면, 칼빈은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의 표현인 경건은 종교로 나타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 종교는 다름 아닌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 경배인 예배이다. 그러나 그는 종교가, 그 예배가 동시대에 매우 왜곡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개혁하려고 했다. 참된 종교를 세우는 것은 인간들의 죄와 오류 속에서 손상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회복하는 일이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사랑하는 것, 즉 경건의 실천과 다름이 아니다. 그래서 칼빈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경건이 종교를 세우고, 또 바르게 세우는 것이다. 역으로 종교는 경건을 보여주는 일종의 '거울'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종교를 수행하는 것을, 또는 예배드리는 것을 봐서 그들의 경건의 수준이나 정도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건의 현대적 의의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칼빈의 경건사상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파악되고 해석된다. 그것은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그 점을 칼빈의 경건 사상이 갖는 특징과 현대적 의의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칼빈에게서 있어서 경건은 어떤 바리새적인 행동이나 외양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율법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삶의 모델을 만들어내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철저히 신자의 내면과 삶의 중심에 관계된 것이다. 물론 경건은 외면적이고, 실천적이며, 행동적인 측면을 갖는다. 그리고 그것으로써 판단되고, 평가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신자의 내면상태가 그대로 밖으로 표현된 것으로의 외면이고, 삶의 중심이 다양한 일상사 속으로 확장된 것으로서의 생활이자 실천이다. 칼빈에 따른 삶의 중심으로서의 경건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계시된 바에 따라 알고, 따르며, 예배하는 것이다. 경건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점들을 총괄적으로 표현하는 용어이자, 사상이다.

그러므로 경건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있는 신자의 의식과 태도, 행동들을 포괄하는 삶 전체이다. 그것은 신자가 자신을 넘어서는, 자신의 시야와 지각과 감각을 넘어서는, 즉 초월적인 하나님, 그 전적 타자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전적 타자인 하나님을 수용하며 동시에 타자들인 주변 사람들을 수용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이웃들을 사랑하게 된다. 물론 그 역도 사실이다. 주변의 수많은 타자들을 사랑하면서, 그 모든 이들을 존재케 하신 절대 타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벗어나는 타자를 전혀 볼 줄 몰랐던, 혹 보려고 하지 않았던 자신이 이제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살 줄 알게 되는 신비, 그 신비가 바로 무엇보다도 자기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더 나가서 이기주의적인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타자의 수용은 동시에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즉 자기 속에 함몰되어 있는 자기중심, 자기절대화의 죄와 오류로 얼룩진 자기를 버리거나, 떠나는 자기부정 또는 자기초월의 영성을 의미한다. 영성은 어느 숲 속 나무 곁에 앉아서 침묵과 명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참된 영성은 죄와 허물로 가득 찬 자신을 버리면서, 혹 떠나면서 새로운 자신으로 언제나 거듭나는 그런 자기부정의 영성이다. 그것은 자기의 오류를 인정하고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힘들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바로 그 영성이야말로 오늘날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미래와 희망을 비로소 말할 수 있게 하는 역동적이고, 구원적인 영성이라고 본다. 그 영성은 현재의 자신인 것, 혹 이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놓고, 더 나은, 더 좋은 자신과 세계를 찾아 나서게 하는 초월적, 그리고 세상 변혁적 영성이다.

칼빈의 경건사상은 바로 그런 신비와 영성을 기반으로 한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회복하고, 동시에 수많은 이웃들과 수평적 관계들을 바르게 맺어나가는 입체적이고, 다차원적인 삶을 조직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타자의 빛에서 자신을 보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구현하며, 타자가 잘되면서 자신이 잘되는 길을 모색할 줄 아는 통전적이고, 공동체적인 새로운 인간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경건사상은 오늘날, 자기중심적이고, 일차원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세속주의의 도전으로 인해 진정한 영성과 신비를 상실해가며, 한낱 율법주의와 형식주의 속으로 도피하려는 교회들에게, 그리고 또한 새 길을 찾고자 여러 방향을 두드려보고 있는 포스트모던의 종교운동들에게 문제를 보게 하고, 알게 하고, 그리고 풀어나가게 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저자:이오갑 박사/그리스도신대 교수(조직신학)/http://cafe.daum.net/wordlife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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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내가 
이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다른이의 가슴속에 
좋은 열매를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언어의 나무

날마다 
내가 말을 하고 살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이여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하여 
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우치게 하소서. 


- 좋은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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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께...
 
나는 하나님께 나의 오만을 없애 달라고 청하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NO"라고 말씀하시며,
오만은 내가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포기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다시 하나님께 인내를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NO"라고 말씀하시며, 인내는 고난의 선물이라고,
또 그것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네 스스로 얻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다시 하나님께 행복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시"NO"라고 말씀하시며,
나는 너에게 은총을 줄 뿐이지 행복은 너에게 달려있다고 하셨다.
 
나는 다시 하나님께 영혼을 성숙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하나님 께서는 "NO"라고 말씀하시며, 성장은 네 스스로 하는 것이고
나는 네가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가지를 쳐 줄 뿐이라고 하셨다.
 
나는 다시 하나님께 고통을 덜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NO"라고 말씀하시며,
고통으로 인하여 네가 나에게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여쭈어 보았다
그러자 "YES, YES!" 하시며,
그래서 당신 외아들을 나에게 보내 주셨다고 하셨다.
 
나는 다시 하나님께 나를 사랑하시는 것 만큼
나도 다른 이를 사랑하게 도와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 아! 드디어 ...네가 드디어 바로 그 생각을 하였구나!"
하셨다.
 
<펌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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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으로 끝나는 믿음

마 14:28 베드로가 예수께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하고 소리쳤다.[공동번역]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그 밤, 예수님은 밤중에 바람과 파도에 거슬러 고생하는 제자들에게로 물위로 걸어가십니다. 거기서 주님을 유령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신지를 시험(테스트)합니다.
(*퀴리오스 에이 쉬 에이미: 주여! 만일(it be) 당신이 주시어든(나는 ...이다, 나는 ...있다)출 6:2‘여호와’)

 베드로는 위대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여호와이신 줄을 시험하고 확인하였지만 모든 삶에서도 하나님 되심을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지만,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과 능력의 완전하심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책임지시는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시고 그 능력을 나타내셨건만 그 능력의 중심에서 경험한 증인이었으나 그의 믿음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서 빵은 공급하시는 분(마 14:13-21)인 줄은 알았지만 그 외에 다른 것도 공급하시고 채우시는 분일 줄은(예컨대, 풍랑도 잠재우시는 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그들의 전 삶을 책임지시는 (빵-만나)분인 줄을 모르고 불평불만 한 것처럼.... (그들의 생식(정력) 문제나 입고 자고 하는 전 삶의 문제- 미용, 건강 등도 완전하게 책임지시는 분임을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떡(만나-의식주)에만 국한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혹 전능하시고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잘 못 이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나(일용할 양식-주기도문)는 모든 삶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상징입니다. 만나는 모든 삶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약속이며, 만나는 모든 삶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아직도 예수님(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의 구원자이심은 믿지만 인생 전반의 모든 문제 즉, 물질 의 문제나 건강 뿐 아니라 심지어 나의 취미와 기분까지도 챙기시는 완전한 삶의 주되심을,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과연 예수님을 구주로 믿습니까? 믿는다면 주님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입니까?

 나는 하나님을 믿는가? 하나님의 기적을 믿는가? 주님을 믿는가? 주님의 선물을 믿는가?
혹, 주님은 우리의 죄 문제는 해결해 주셨지만 인생의 다른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분으로 알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은 제한적이신가요? 출애굽 후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는 매일 먹이셨지만 다른 것, 예컨대 삶의 전반에 대하여는 모른 척하셨습니까? 사십년 동안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발과 의복은 어떻게 입히셨으며 사십년간의 광야의 추운 밤 날씨에 난방과 낮의 뜨거운 날씨에 냉방문제는 어떠했습니까? 낮엔 구름으로 덮어 시원하게 하셨고 밤에는 불기둥을 두어 추위를 모르고 지내도록 가장 완벽하게 보호하시고 돌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또한 수많은 짐승들의 먹이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끊임없이 이동하고 하는 동안 어디에서 목초를 구했을까요?  신약성경의 우리 주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던가요?

 오늘 교회는 하나님께 무엇을 기대하며 나아갑니까? 사람들이 구름떼 같이 몰려오는 것입니까? 교회의 건물들이 크고 멋지게 세워져 가는 것입니까? 재정적인 풍요함인가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과 교회의 이름이 알려지는 것인가요? 아님 온갖 은사와 기적이 나타나는 것인가요?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과 믿음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적인 필요와 요구에 응답하시는 분,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도록 때 맞춰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 정도로만 기대하며 마치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섬기는 신께 기도하듯이 그렇게 축복만을 기대하며 왜곡된 신앙행위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출애굽 후에 시내광야 호렙산 밑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해낸 여호와 하나님이다’라고 외치며 섬기는 아론과 및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은 모습입니다. 금송아지 하나님은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교회 안에도 이런 황금으로 치장된 거짓 신들이 하나님으로 둔갑하여 백성들을 미혹합니다. 아론과 같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으로 가르치는 자들이 강단에서 판을 치고 있습니다. 물질을 하나님으로 섬기며 성공과 축복을 하나님의 선물로 둔갑시키며 왜곡시키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혹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그 방면에 경험이 많다거나, 사람의 숫자-많고 적음-와 사람의 재산-가능성과 배경-과 사람의 능력을 의지 하거나 기대하지는 않습니까? 농담반 진담반으로 이런 말을 합니다. ‘암환자 한 명만 고치면 고생 끝’이라 던지 심지어 ‘돈 많은 사람 한 명만 거꾸러뜨리면 목회 성공(?)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목회는 사업이 나 장사도 아니며, 더욱이 한탕주의 투기나 로또복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의 창조주시며, 생명의 주인이시며, 삶의 완전한 소유주시며 절대 주권이 그 분께 있음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사실이냐 아니냐에 있음도 아니며, 가능성이나 배경이나 재산이나 능력이나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며 더더욱 나 자신의 어떠한 조건도 혹은 믿을만한 어떤 사람도 믿음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가운데, 교회요 성전 된 나의 마음 안에 있는 법궤, 임마누엘이신 하나님, 성령으로 임재 해 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거나 왜곡하거나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내가 그 하나님의 자리에 있거나 그 영광을 탐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예수요(죄에서 구원뿐 아니라 모든 삶에서의 구원이심), 그리스도시오(왕-다스리심, 선지자-말씀하시고 가르치심, 제사장-중보자/보호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자녀 됨의 권세)이요 임마누엘(영원히 동거, 동행)이심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여호와’이십니다. 그 분은 말씀(언약)하신 것은 반드시 행하시며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렘 33: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그분은 우리의 전 삶을 완벽하게 책임지시는 분이시며 자녀들이 가장 좋은 것, 최상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그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전 삶을 주님께 올려드리고 믿기만 한다면, 삶의 주권을 왕 되신 주님께 완전히 내어드리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그분의 이름의 뜻입니다.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가장 유일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 몸(body), 하나님의 거처,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함께 사심, 하나님이 나의 주인 되시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 절대주권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삶을 사시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의 소유이며 나의 삶은 누구의 삶이어야 합니까? 가정, 사업, 사역 등 내 삶의 모든 것의 주권에 대하여 심각하고 진실하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맡겼으며 순응하십니까? 기도하고 응답이 없어도 아무것도, 심지어 신용불량자가 되거나 무심한 사람으로 손가락질을 당한다 해도 믿음으로 그분의 주권을 인정할 수 있는지요?

 이것은, 내가 지금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 의 문제이지 하나님의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분은 믿음에만 응답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을 때만, 역사하시고, 믿는 자에게만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과 우리의 사업과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사역을 완전히 경영하시게 하려면 나의 불신앙(부분적인 믿음)을 깨뜨려야 합니다. 만나만이 아닌 풍랑도 잠잠케 하시며(불가능한 환경) 물(바다)위로도 걸을 수 있도록 하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

 “믿음이 적은자여 왜 의심하느냐?”(31)

 성경은,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 4:2)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복음이요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받았음에도 그 말씀을 믿음에 결부시키지 않는다면 아무런 능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믿음대로 되는 이 변할 수 없는 분명한 법칙은 우리의 전 삶에서 역사합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잘못된 믿음이 우리 가운데서 제거돼야 합니다. 물질 문제가 시급하고, 부흥의 문제가 시급한 그리고 수많은 영적 육적 문제로 고민하는 주의 종들과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은 빵 밖에 안주시는 제한적 능력의 하나님이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나는 믿지 않으면서 누구에게 믿음을 증거 할 것이며, 누구에게 그런 제한적인 능력의 하나님(?)을 믿으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매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의 산 증인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사기꾼 거짓말쟁이요. 하나님도 사기꾼 하나님, 무능한 하나님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철저히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가장 강력한 적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인지도 모릅니다. 공허하고 메마른 외침과 생명 없는 거짓 믿음의 행위를 회개하고 살아계신 하나님, 오늘도 나를 통해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손에 자신을 내어 드리십시다. 나의 전 삶이 주님의 삶이됨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인정합시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께 진실로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주 예수님, 주님은 진실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왕이시며 나의 구원이시며 나의 보호자십니다. 주님은 나의 아빠십니다. 주님은 나와 영원토록 함께 계십니다.  주여! 주는 반드시 약속을 이루어주심을 내가 믿습니다. 완전하신 주여 나를 주님께 기꺼이 내어 드립니다. 나의 주님을 사랑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출처: USA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김은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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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임직자들에게

김오동 ㆍ 2013-04-09 (화) 08:36 IP: 218.xxx.87 ㆍ조회: 50      

(이 글은 2013년 4월 9일 대한예수교장로회 경안노회(통합) 제 173회 노회시 목사 임직자들에게 한 권면입니다.)

성경(딤전6:11-12)에 보면 노사도 바울이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오늘 마침내 목사로 임직하여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역하게 될 여러분을 바라보는 마음은 솔직하게 우려와 기대로 착잡합니다. "우려"라고 하는 것은 한국적 현실에서 기독교와 목회자의 신뢰와 위상이 땅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요, "기대"라고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야말로 한국교회가 새롭게 되도록 섬겨나갈 동력이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1. 이제 목사로 임직하게 된 여러분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이 직임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주인은 여러분 자신이 아닙니다. 또는 교계나 교회 안에서 힘깨나 쓰는 어떤 실력자도 물론 아닙니다. 무슨 이념이나 물질 또는 명예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에게만 충성하십시오.
언제 어디서 어떤 경우에도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예!"라고 응답하면서 우리 구주이시며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십시오. 결코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따르십시오.

2. 이제 목사로 임직하게 된 여러분은 목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 직임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고영근 목사님은 목사들에게 먼저 삯군이 되라고 했습니다. 교회로부터 받는 사례비만큼이라도 사역을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현실이 하도 답답해서 하는 말이지 이것이 무슨 최소한의 기준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와 양떼 그리고 사람의 영혼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어라."고 했는데 우리의 목회가 한갓 직업의식이거나, 또는 목회방법이 단지 지식이나 테크닉이 아니라 생명의 목회, 마음의 목회, 사랑의 목회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목회의 본질입니다. 이 본질적 목회를 확인하시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3. 이제 목사로 사역하게 된 여러분에게 몇 가지 실적인 당부를 드립니다.
(1)먼저 몸을 위하여 절제되고 규칙적인 삶과 운동으로 건강을 관리하시고, 여러분의 가정부터 가장 모범적으로 유지하십시오.
(2)다음으로 맘(마음)을 위하여 많은 독서, 꾸준한 연구와 사색을 통하여 깊고 광범한 지식을 축적하십시오. 바울은 디모데에게 "가죽종이에 쓴 책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문명의 이기를 최대한 활용하되 종이책을 더 사랑하고 애용하십시오.
(3)마지막으로 얼을 위하여 영성훈련에 매진하십시오.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말씀으로 기도하며,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 영성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되어 가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목사로 새롭게 출발하는 여러분의 앞길에 일마다 때마다 함께 하실 줄 믿으면서 권면에 대신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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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공의를 기다리는 믿음 

 

잠언 20:22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사람이 죄와 사탄에게 가장 많이 속는 순간은 ‘억울하다’는 마음이 드는 때이다. 이러한 마음이 들면 나를 억울하게 한 그 대상을 향하여 ‘보복’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이때 그 충동에 따라 행동하면 함께 악에 빠지는 것이며 영적 전쟁에서 패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 주의 음성을 듣고 여호와께서 간섭하실 것을 기다리면, 공의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하신다. 공의의 하나님께 우리의 억울함을 맡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악에 물들지 않게 보호하시고 죄의 역사에 말려들지 않게 하신다. 공의의 하나님께 맡겼던 자들은 모든 일들의 결말을 보면서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과 살아계심을 보며 찬송하게 된다. 

 

성경은 언제나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한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 중에 하나는 오늘 잠언 20장 22절처럼 여호와를 기다리는 것이다.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성경에는 억울한 일을 보복했던 경우가 여럿 있다. 시므온과 레위는 누이동생 디나가 당한 일에 대하여 세겜 사람들에게 보복을 하였는데(창 34장)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보복을 매우 싫어하셨다(창 49:5-7). 요압 장군은 자신의 동생 아사헬을 어쩔 수 없이 죽였던 아브넬을 살해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다윗은 요압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고 나아가 하나님의 공동체가 큰 어려움을 겪었다. 헤로디아는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세례요한에게 원한을 품고 그의 목을 베게 한다.  

 

성경은 개인적인 원한을 갚는 것을 주께 맡기라고 말씀하신다. 원한 갚는 일이 주님의 손에 있다고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온전히 악을 제거하는 차원에서 역사하실 수 있다고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주의 공의를 세우기 위하여 공적인 기관을 세우셨다. 교회의 재판 기관, 사회와 나라의 재판 기관이 주님의 공의를 위하여 일할 수 있다.  

 

신기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하였을 때 나타난다. 그렇다. 우리가 당하는 억울한 일들마다 스스로 싸우려 하면 우리의 인생은 원수 갚는 일을 하다가 마칠 것이다. 원수를 스스로 갚는 삶이 바로 비참한 인생을 사는 지름길이요 가장 어리석은 삶이다.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17:13).

억울한 일을 당하였을 때 참으라.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께 아름다운 것이다. 하나님께 칭찬 받는 일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을 믿으며 살아야 한다. 공의를 완전하게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하나님을 신뢰하여야 한다. 그 대신 우리가 할 일은 계속 주의 말씀대로 더욱 복음에 속한 삶을 사는 것이다. 즉 선으로 악을 이기며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을 아는 신자의 삶이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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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교하는 마음만 버려도.. 비교하는 마음만 놓아 버리면 이 자리에서 충분히 평화로울 수 있습니다 모든 바람이나 욕망들도 비교하는 마음에서 나오고, 질투나 자기 비하 또한 비교에서 나옵니다 마음에서 어떤 분별심이 일어나고 판단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거의가 비교에서 나오는 겁니다 또한 그 비교라는 것은 과거의 잔제입니다 지금 이 순간 온전히 나 자신과 대면하고 서 있으면 거기에 그 어떤 비교나 판단이 붙지 않습니다 이 순간에 무슨 비교가 있고, 판단이 있겠어요 오직 이 순간일 뿐! 그저 지금 이대로 온전한 모습이 있을 뿐이지, 좋고 싫은 모습도 아니고, 행복하고 불행한 모습도 아니며, 성공하고 실패한 모습도 아닌 것입니다 누구보다 더 잘나고 싶고, 누구보다 더 아름답고 싶고, 누구보다 더 잘살고 싶고, 누구보다 더 행복하고 싶은 마음들. 우리 마음은 끊임없이 상대를 세워 놓고 상대와 비교하며 살아갑니다 비교 우위를 마치 성공인 양, 행복인 양, 비교 열등을 마치 실패인 양, 불행인 양 그러고 살아가지만, 비교 속에서 행복해지려는 마음은 그런 상대적 행복은 참된 행복이라 할 수 없어요 무언가 내 밖에 다른 대상이 있어야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서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저 나 자신만을 가지고 충분히 평화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나 혼자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상대 행복이 아닌 절대 행복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없어도 누구보다 잘나지 않아도 그런 내 밖의 비교 대상을 세우지 않고 내 마음의 평화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나는 그냥 나 자신이면 됩니다. 누구를 닮을 필요도 없고 누구와 같이 되려고 애쓸 것도 없으며, 누구처럼 되지 못했다고 부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우린 누구나 지금 이 모습 이대로의 나 자신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 옮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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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만한 부활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행 26:8)

이 세상을 떠난 우리 교우들의 영혼에 관하여 생각할 때, 우리는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드리신 잊지 못할 그 기도대로, 그들은 지금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있음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우리가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매우 적게 알지만, 그들이 안식을 누리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만큼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극히 복되도다, 죄와, 근심, 고통이 이제는 없으며, 그들의 구세주와 더불어 안식하도다." 우리의 주된 고통은 그들의 육체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육체를 어둡고 쓸쓸한 무덤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들의 아름다운 얼굴들이 부패하여 그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으며, 육체의 겉모습들이 썩어져 없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손과 발들, 그리고 아름다운 그들의 온갖 모양들이 분해되어 먼지가 되고, 해체되어 철저히 황폐되는 것은 참으로 참기 힘든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눈물 없이 무덤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완전한 사람이셨던 예수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울음을 자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교우들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슬픕니다. 우리는 무덤을 조금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카타콤과 그 지하 납골당을 기뻐한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지금도 계속 슬프게 여기지만, 그렇게 죽는 것을 자연스럽게 느낍니다. 왜냐하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히 9:27)라는 무서운 파문이 우리 인류에게 이미 떨어 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형벌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벌인 죽음을 즐거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교리는 그 슬픔의 원인을 없애도록 의도된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에 대해서 근심하며 고통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영혼에 대하여 더 깊은 관심과 염려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불멸에 관하여 믿음을 갖게 될 때 의로운 영들은 불멸하리라. 믿음으로 모든 두려움과 떨림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부활에 관하여서 동일한 믿음을 갖게 되면 육체에 관한 허무한 모든 슬픔도 지워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외관상 파멸된 것 같이 보이는 육체가 다시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육체가 전멸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먼지 속에 뉘여 둔 그 육체는 잠시 동안 잠자는 것에 불과할 것이며, 천사장의 나팔소리에, 이 땅에서는 알려지지도 않은 속성들을 덧입고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깨어날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전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육체를 벗어난 영들만을 택하신 것이 아니요, 혈과 육을 지니고 있는 남녀들을 택하였습니다. 택한 자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단순히 보다 아름다운 부분인 영혼에 대한 애정뿐 만 아니라, 우리가 열등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부분인 육체까지 포함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책에 택한 자들의 모든 지체들이 헤아린 바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택한 자들의 모든 뼈들을 계수하시며, 그들의 머리털까지도 모두 세십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와 같이 완전한 육체를 입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주님께서는 자신의 신성과 인간의 영혼을 결합시키셨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또한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습니다. 그 사실을 볼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지성과 영 뿐만 아니라 우리의 완전한 인성, 혈과 육을 좋아하신다는 증거를 얻게 됩니다. 더구나 우리의 대속 자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육과 영혼 모두를 완벽하게 대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것은 부분적인 속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되 우리의 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에 대해서도 그러하심을 압니다. 그러므로 벌레가 육체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셨고, 무덤의 감옥으로부터 대속하셨기 때문에 다시 부활할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육체와 영 전부가 이미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크리스천은 단순히 영으로 하나님을 섬길 뿐만 아니라 그의 하늘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바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 몸은 너 회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6:19). 지금까지 계속 성령의 전이 되어왔던 몸이 종국에 파멸되지 않을 것이 확실합니다. 우리의 몸은 광야에 세워졌던 장막처럼 무너질 것 입니다. 하지만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무너뜨린 것입니다. 아니면 같은 기능을 가진 다른 장막을 일으켜 세우기 위함일 것입니다. 장막은 없어지겠지만 그 뒤에 성전이 세워질 것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고후 5:1).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만일 구세주께서 자기 백성들의 몸을 무덤 속에 남겨두신다면, 그것은 죄와 사단에 대한 완전한 승리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일 구세주께서 자기 백성들의 영만을 석방하셨다면, 사단의 모든 일들을 파멸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 입니다. 마지막에는 그리스도의 백성들의 뼈 하나도 아니 뼈 한 조각도 납골당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사망은 단 하나의 승리의 트로피도 보여 줄 수 없을 것입니다. 그의 감옥에 들어있는 인간으로부터 끌어 모은 모든 전리품들이 철저히 약탈당할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만유 중에 뛰어나실 것이며, 물질세계까지 다스리실 것입니다. 또 사망과 무덤을 멸하시며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전적으로 구원하셨으며, 전적으로 의롭게 하셨으며, 전적 구원으로 영광을 받으실 것이므로, 우리는 육과 영 전 인성으로 힘을 다하여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할 것을 생각하는 것은 기쁨입니다. 우리는 죄짓던 손을 높이 들어서 영원토록 찬양할 것입니다. 악한 일들을 바라보던 우리의 눈은 아름다우신 왕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주님을 귀찮게 여기는 마음이 주님을 영원토록 사랑하게 되며, 지금은 주님을 멸시 하는 영이 주님을 영원토록 기뻐하여 하나가 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권에 크게 반역하며, 영에게 거추장스럽던 이 육체도 그리스도께 목소리와 손과 두뇌와 귀와 눈으로 경의를 바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몸의 구속, 곧 양자됨이 성취되는 부활의 때를 기다립니다. 자, 그것이 우리의 소망이며, 우리가 믿으며 어느 정도 즐거워하는 것일지 라도, 때때로 불신의 악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그것이 사실일까? 그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들이 있음을 시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때에는 오늘 본문으로 잡은 질문이 특별히 필요합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오늘 아침, 저는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에게 첫째로, 직면한 어려움을 살펴보도록 요구하겠습니다. 둘째로, 그 어려움을 제거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그렇게 하는 데에는 한 가지 방법뿐이며, 그것은 대단히 간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이 진리의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서 한 두 마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Ⅰ. 그러면 첫 번째 대지로 직면한 어려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잠시라도 부활을 믿는다는 대담하고 확고한 우리의 주장을 철회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려움들을 표면에 드러내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매 시대마다 오류에 빠진 크리스천들이 회의주의자들과 철학적 사고를 하는 자들로 하여금 부활의 교리를 더 잘 받아들이게 하려고 부활의 교리와 거기에 따른 진리들을 쉽게 설명하고, 다른 뜻으로 둘러대려는 많은 시도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습니다. 부활의 교리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면서 그 진리를 말하거나, 죄지은 자의 목소리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할 때, 그 진리를 받아들여 확신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자신은 믿지도 않으면서 말하는 자의 말을 듣고 어느 누가 믿고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쉬운 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바 교리적 내용들을 설명하고, 해석하고, 입증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할 일을 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도 믿지 않는 바를 주장하는 자들이라고 여김 받을 뿐입니다. 그렇게 자르고 심지를 꺼버리는 정책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힘의 근원인 머리털을 스스로 잘라버리며, 우리 자신의 팔을 스스로 부러뜨려 버리는 격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덤 속에 넣어둔 몸이 진실로 부활할 것을 믿으며, 그것이 의미적인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그렇게 말씀 드립니다. 제가 비유를 사용하거나 신비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실제로 죽은 자들의 몸이 무덤으로부터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의로운 사람들의 몸에는 장차 커다란 변화가 생길 것을 인정하며, 실제로 즐거워합니다. 지금 몸을 감싸고 있는 부패성을 지닌 요소들과 모든 조잡한 것들은 모두 없어질 것입니다. 더욱 고상한 환경에 적합한 몸으로 변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육체는 우리의 영혼이나, 보다 하위의 지적 기능들에 적합한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는 우리 본성의 보다 고상한 부분이나 영에 적합한 몸으로 바뀌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 것을 즐거워합니다. 그렇지만 육체는 동일한 육체일 것을 우리가 압니다. 무덤 속에 넣어둔 동일한 몸이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죽는 우리의 몸과 무덤에서 부활하게 될 우리의 몸 사이에는 절대적인 동일성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동일하다고 해서 본질이 절대적으로 동일하다거나 구성요소가 계속 동일하다는 것은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렇게 제한을 두어 말씀 드린다고 해서 앞서 말씀 드린 내용을 번복하거나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더 간단히 말해서 사실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20년 전에 입었던 그 동일한 육체에서 살고 있다고 의식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한 원소도 20년 전의 것은 없다고 듣습니다. 또 그 사실을 의심할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유아 때로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겪는 우리 육체의 모양의 변화는 대단히 큽니다. 하지만 우리는 동일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에 있어서도 그와 똑같음을 인정하십시오. 그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전부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의 몸은 우리가 태어날 때의 몸과 동일한 것입니다~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인정합니다, 몸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동일하지 않은 것이 확실하며, 몸을 구성하는 요소가 모두 변화되었다 할지라도, 몸은 동일한 것으로 남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활할 때의 우리의 몸 은 죽을 때의 우리의 몸과 동일할 것입니다. 하지만 크게 변화된 몸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러한 변화들이 동일성에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자, 지금까지 부활의 교리를 좀 더 쉽게 믿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이러한 설명을 하였지만, 저는 성경에서, 우리가 무덤에 넣어두었던 모든 뼈들과 살과 신경이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앞에서 설명한 대로 몸의 동일성의 교리를 쉽게 받아들이며 믿음을 여러분에게 확실히 말씀 드립니다. 우리의 믿는 바가 철학적이거나 개연적인 것으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런 것과는 거리가 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까?" 라고 말들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묻지 않습니다. 과학적인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그들 좋은 대로 과학적인 것을 요구하도록 놔두십시오. 믿음을 요구하는 우리는 우리의 방식을 고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교리는 인간의 과학을 공격하지 않으며,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그것에 아첨하거나, 그것의 도움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본문의 말들을 사용하며,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하고 말할 때는 과학적 인 근거와는 전혀 다른 근거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 다 죽음에서 부활할 것을 기대합니다. 문자 그대로 무덤에 묻힌 인간의 몸이 부활할 것을 우리는 견고히 믿습니다.

하지만 이 소망은 많은 난해한 어려움들로 자연스럽게 쌓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죽은 자의 몸의 대부분은 부패하였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몸의 대부분은 썩었고 철저히 분해되었습니다. 지금 살아있는 다른 사람들의 몸도 아마 그들의 뒤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방부처리 되어 석화시켜져 있거나, 미라가 되어 있는 시체들을 볼 때는, 모든 몸들이 그런 식으로 보존되어 있다면, 그들의 부활을 믿기가 더 쉽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대의 대리석 석관을 열어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약간의 갈색 가루 외에는 그 안에서 아무것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또 우리가 교회 마당에 있는 무덤을 팔 때는 몇 개의 부셔진 뼈 조각만 발견하게 됩니다. 수천 명의 병사들이 쓰러져 죽어 간고대의 전장을 생각해 봅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많이 흐른 후 그 곳에는 이제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뼈들은 너무나도 완벽하게 녹아서 흙으로 돌아갔고, 어떤 경우에는 나무뿌리와 식물들에 의해서 흡수되어 버렸으며, 또 다른 유기체에 흡수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산다는 것은 참으로 못 믿을 것처럼 보입니다. 더구나, 어떤 시체들은 화학물질에 의해서 분해 되었고, 불태워졌으며, 짐승들이 먹기도 하였고, 심지어 사람들에게 먹히기도 하였습니다~그런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겠습니까? 한 때 살아있던 유기체로 세워졌던 원소들이 이제는 얼마나 널리 흩어져 버렸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한때는 고레스, 한니발, 스키피오, 시저의 몸을 구성하였던 원소들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누가 압니까? 한 때는 어떤 사람의 생명을 구성하였던 원소들이 지금은 극과 극이 먼 것처럼 널리 흩어져 있습니다. 원소 하나는 바람에 불려 사하라 사막을 건너가 있고, 다른 하나는 태평양에 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지구의 모든 원소들이 윤회하고 있는데, 한 때 어떤 사람의 몸의 중요 부위를 구성하였던 요소가 지금 이 시간에는 어디에 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바울의 몸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을 로마로 보냈던 베스도의 몸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을 사형에 처하였던 그 폭군의 몸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누가 감히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시 산다는 것이 못 믿을 것 같다 한들 무엇이 이상합니까?

부활의 교리는 모든 사람, 일부 사람이 아니라, 몇 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부활한다는 것을 가르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어려움은 증대합니다. 한 때는 죽은 아이를 살렸던 엘리야의 부활을 믿는 것은 한층 쉬울 것입니다. 나인 성 문에서 죽은 청년을 살렸고, 죽은 나사로를 살렸고, 병들어 죽은 소녀에게 "달리다굼"하셨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부활할 것이라는 교리는 합리적인 이유를 찾기가 힘이 듭니다. 홍수 이전의 수만의 사람들, 니느웨와 바빌론의 수많은 사람들, 페르샤와 메대의 사람들, 크세르 크세스의 발 앞에 엎드렸던 수백만의 사람들, 알렉산더와 함께 진군하였던 수많은 사람들, 로마인들의 칼 아래 쓰러졌던 셀 수도 없는 수 백만의 사람들, 그들 모두가 부활하게 된다는 것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중국과 같은 나라들에 살다간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6천년 동안 토양을 기름지게 만들어온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파선과 역병, 지진, 무엇보다도 나쁜 유혈 참사와 전쟁으로 사라져간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예외 없이 부활하게 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어느 누구도 영원토록 잠들어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 때 이 땅에서 숨 쉬며 걸어 다녔던 모든 육체들이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오 기괴한 일이군", 누군가 이렇게 말합니다, "못 믿을 면이 많은 일이야". 좋습니다. 제가 그 말에 대해서 논쟁 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그 사실에 대한 좀 더 타당한 이유들을 제시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들 몸들이 지금 있는 곳이 얼마나 이상한 장소인지 기억한다면 놀라움은 더욱 커집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의 몸은 그들이 두 번 다시 들어갈 수 없는 깊은 갱도 속에 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 조수와 파도에 밀려 망망대해의 깊은 동굴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오직 독수리의 눈으로만 알아 볼 수 있는 곳인 길도 없는 먼 사막에 누워있기도 합니다. 또 무너져버린 바위산 밑에 묻혀 있기도 합니다. 사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곳이 어디가 있습니까? 아담의 자손의 먼지가 뒹굴지 않는 곳을 땅 위에서 누가 지적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거리에 불어오는 여름철 바람치고 한때 사람이었던 먼지 알갱이를 휘몰아가지 않는 바람이 있습니까? 바닷가에 밀려와서는 부서지는 파도치고 한 때 사람이었던 물질이 용해되어 포함되어 있지 않은 파도가 있습니까? 그들은 각 나무 아래 누워있고, 그들은 들판을 살찌게 하며, 그들은 실개천을 오염시키기도 하고, 그들은 초장아래 숨어 있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귀환하듯이 흩어졌던 몸들이 분명히 모든 곳으로부터, 모든 곳으로부터 되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심이 분명한 것처럼, 우리의 죽은 사람들도 살아나서, 그들의 두 발로 서며, 엄청나게 많은 군대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상상을 초월한 정도로 기이하게, 그들은 단번에 부활할 것입니다. 아니면 아마도 크게 두 부류로 부활할 것입니다. 아니면 아마도 크게 두 부류로 부활할 것입니다. 계시록 20장 5, 6절에는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천 년의 간격을 두고 이루어질 것으로 명백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문장은 영적인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말씀들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확실합니다. 그 말씀들을 듣고 여러분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그러나 이 천 년의 큰 간격이 있음을 인정하더라도 의인들이 부활할 때 얼마나 많은 무리가 모이겠습니까?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계 7:9). 하나님만이 계수할 수 있는 셀 수도 없는 큰 무리가 갑자기 "티끌과 잠잠한 진흙으로부터" 일어날 것입니다. 일천 년의 간격은 하나님의 보시기 에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며, 곧 끝날 것이고, 다음에는 불의한 자들도 또한 부활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숫자의 무리가 되겠습니까! 그들이 모두 다 어디에 서겠습니까? 땅의 평지들이 그들을 모두 다 수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온 땅을 덮고 산꼭대기까지 덮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대 심판을 하려면 바다를 심판석으로 사용해야 할 지경이 아니겠습니까? 마지막 대 심판을 알리는 천사장의 나팔소리가 선명하고 날카롭게 울리며 그들을 부를 때 그들은 한 순간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공장에서 뼈가 제대로 맞춰지고, 기이한 신체 조직들이 재구성되는 데에는 긴 세월이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수 세기 동안 파괴되어 있던 것을 재건하는 데에도 한 순간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이 세상에 처음 생기게 되었을 때는 기이하게 만들어졌으며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 몸이 죽은 상태에서 회복되는 데에는 눈 깜짝할 사이만이 필요할 것입니다. 사람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의 창조자이시며,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억만 년의 세월도 하나님께는 한 순간에 불과한 것입니다. 한 순간에 지극히 기이한 하나님의 기사들이 성취됩니다. 비할 데 없이 기이한 일입니다! 우리는 놀라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것은 못 믿을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 사실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악인들의 부활은 과거의 상태로의 회복이 될 것이지만, 성도들의 경우에 부활은 지금 우리가 보는 것 보다는 괄목할 만한 향상이 포함될 것입니다. 우리는 땅 속에 뿌리 하나를 심 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황금 수술을 단 아름다운 백합화로 부활합니다. 우리는 화분에 씨 하나를 심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눈부신 색깔을 가진 절묘하게 아름다운 꽃을 내놓습니다~ 우리가 땅 속에 심은 씨앗이나 그러한 꽃들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 얼마나 다릅니까! 그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무덤에 묻혀 있는 몸들도, 많은 씨를 심어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 몸들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싹터서 완전히 성장케 되어 모든 상상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의 놀라움을 더욱 증대시킵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께서 파괴자의 이빨 사이로부터 먹이를 낚아 챌 뿐만 아니라, 벌레의 먹이가 되었거나 재나 먼지가 되었던 몸들도, 자신의 거룩한 형상을 지닌 것으로 부활 시키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너덜너덜해지고 좀먹어 갈기갈기 찢겨진 옷들이 거룩한 말씀 한 마디에 완벽하게 회복되고, 거기다가 세상에서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회고 더 완벽하게 만들어지고, 전에는 없었던 값진 수술들과 수놓은 문형들로 치장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이루어집니다. 그 사실을 기이함 그 자체로 받아들이며,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놀라운 사실 그대로 놔둡시다. 저는 그 사실을 한 순간에 설명하거나, 그 사실을 밝혀내려는 시도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 부활의 사실을 믿는데 많은 어려움들 중의 하나는 이것입니다. 즉, 자연 계 속에서 부활의 사실을 지지해 줄 만한 완벽하게 유사한 것이 명백하게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부활과 얼핏 비슷한 현상들이 있어서 우리가 비교를 할 수는 있습니다만, 전적으로 부활을 논증할 좋은 근거로 쓰일 유사한 것이 자연계에는 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들이 잠을 죽음에 비유하고, 잠에서 깨는 것이 일종의 부활이라고 말들을 해왔습니다. 그러한 상징은 매우 칭찬할 만한 것이지만, 완벽한 유추가 되기에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왜냐하면 잠잘 때에는 생명이 계속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계속 존재하고 있음은 잠자는 그 사람 자신에게도 명백하며, 잠자는 자를 지켜보며,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의 심장이 고통 하는 것을 지켜보는 모든 자들에게도 명백합니다.

그러나 죽었을 때는 몸에 맥박이 뛰지도 않고 몸 안에 생명이 남아있는 다른 흔적들도 없습니다. 잠자는 자의 몸과는 달리 생명이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잠자는 자의 사지가 갈기갈기 떨어지고, 회반죽과 혼합되며, 그것이 먼지가 되고, 그 먼지가 진흙과 부식토와 섞이고, 그런 다음에 여러 분이 부르면 깨어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된다면 유사한 것이라고 부를 만할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잠으로부터 어떤 사람이 깨어나는 것은, 뛰어난 비교는 될 수 있을 것이나 부활을 예언하는 것이나, 부활의 짝이 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는 또 곤충들의 탈바꿈을 부활의 뛰어난 유사로 말하는 것을 자주 듣습니다. 애벌레는 사람의 현재 상태이고, 번데기는 사람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성충, 완전한 곤충은 사람의 부활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들 합니다.

확실히 감탄할 만한 유사성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번데기에는 생명이 있고, 조직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번데기도 완전한 곤충입니다. 어떤 관찰자라도 번데기가 죽은 것이라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번데기를 집어 들고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번데기 속에 앞으로 나타날 모든 것이 들어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완벽한 곤충이 명백하게 그 속에 머물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번데기를 뭉개고, 그 생명의 증액을 모두 말려버리고, 밟아서 흙 속에 쳐 넣고, 그것으로 화학적인 분해과정을 겪도록 하며, 철저히 분해시키고, 그 다음에 여러분이 그것을 다시 불러내어서 나비가 되게 한다면, 여러분은 부활의 유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 연계에서는 아직도 그런 것이 없습니다. 씨앗으로 부활을 비유하는 데에는 저는 흠잡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지극히 교훈적이며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따지자면 결국 유치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씨앗으로 부활을 유추하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씨앗은 땅 속에서 죽게 되지만 적당한 때에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땅 속에 묻힌 씨앗을 죽음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씨가 소생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죽는 것이라고 합니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이란 유기체의 조직들이 원래의 미립자의 원소들로 분해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씨앗도 구성 원소들이 각기 분해되어 생명의 유기적인 조직으로부터 유기적인 기능이 없는 상태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나 생명의 배종은 여전히 남아있고, 분해된 유기적인 조직은 배종의 양분이 되고, 배종은 그 영양분으로부터 다시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몸들에 대해서도 그와 같겠습니까? 죽은 몸에 생명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까? 누가 부패한 몸에서 생명의 배종을 발견하겠습니까? 좀 더 고등한 존재들은 인식할 수 있는 생명의 핵이 몸에 남아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부패한 몸의 어디쯤에 그러한 것이 머물러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뇌 속에 그 것이 있습니까? 두뇌는 몸 중에서 가장 먼저 썩어 없어지는 부분입니다. 해 골은 비어있고 공허합니다. 그것이 심장 속에 있습니까? 심장 또한 대단히 빨리 썩어 없어져 버립니다. 뼈보다는 더 빨리 썩어 없어집니다. 무덤에서 끄집어낸 몸의 어디를 현미경으로 살펴보아도 생명의 어떤 요소를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씨가 묻혀있는 땅을, 여러분이 원하는 때면 언제든지 파헤쳐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씨앗을 묻어둔 곳에서 그 씨앗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분명하다면 그 씨앗은 그 땅에서 싹 터 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몇 백 년 동안 묻혀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의 경우에 있어서는 무덤에 함께 넣어둔 유품도 아마 거의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지난 세대의 사람들보다 장차 올 세대의 사람들은 그를 더욱 더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홍수 이전에 묻혔던 사람들이나, 그 대홍수에 익사한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그들의 유적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밀 알갱이를 고운 가루로 빻아서, 바람결에 날리십시오. 그리고 그 가루에서 살아난 밀밭을 바라보시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때에는 여러분이 완벽한 부활의 유사를 얻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연계에는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활은 부활로서 독자적인 것입니다. 부활에 관하여서 여호와께서 잘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43:19). 우리 주님의 부활과 기적적으로 되살아났던 몇 사람의 부활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역사 속에서 부활의 사실을 증거 할만한 것을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역사 속에서 부활의 증거를 찾고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사실을 믿을 확실한 한 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려움이 있고, 그 한 가지는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이 마른 뼈들이 다시 살 수 있겠습니까? 죽은 자들이 다시 사는 것이 믿을만한 것이겠습니까?

Ⅱ. 그러한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두 번째 대지에서는 그 어려움을 제거하겠다고 서두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공연히 뽐낸 것이 아닙니다. 그 문제는 간단합니다. 본문을 다시 적당히 강조하여서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이렇게 됩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은 못 믿을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하나님, 곧 전능자요 무한자께서 죽은 사람 살리시는 것을 왜 못 믿을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십시오. 그러면 어떤 어려움들도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는 것과, 하나님이 전능하심을 인정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을 말씀하셨음을 인정하십시오. 그러면 믿는 것이 더 이상 어려운 것이 아니요, 필연적 인 것이 됩니다. 불가능과 불신이 둘 다 하나님 앞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믿음의 난제들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 이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불신을 깨뜨리는 무기로써 이성을 들고 나오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의 참된 방어책입니다.

견고한 돌들이 있는데 나무와 짚으로 건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 약속하시고 어떤 진리를 계시하신다면, 제가 그것에 대해서 철학자들에게 물어본 후에, 그분을 믿어야 하겠습니까? 유한한 이성으로 인정할 때에만 이 하나님의 말씀이 참된 진리가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인간의 판단이 궁극적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까?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알 수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계시는 전혀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생각은 우리에게서 멀리 떨쳐버리십시오. 모든 사람은 거짓될지라도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현자라고 칭함 받는 사람들이 우리를 조롱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동요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는 이 말씀에 전적으로 의뢰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는 인간의 지식을 모아놓은 도서관의 모든 책보다 더욱 무게가 나갑니다. 크리스천에게는 하나님께서 가라사대란 말씀이 모든 합리적인 이유를 대신합니다. 우리의 논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라" 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웅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들이 다시 살 것이라고 선포하신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못 믿을 만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전에는 어려움이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기에 너무나 힘겨운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원하신다면, 산적한 난해들을 이성으로 건너지 못할 너무나 어려운 교리로 여기십시오. 그 교리 자체에 분명한 자체 모순과 일관성이 없음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 한 우리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크신 일들을 믿을 기회를 누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의 말씀을 말했을 때는 한 유대인에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그립바에게 변명하고 있었으며, 그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그립바에게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 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하고 말할 좋은 근거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아그립바는 유대인으로서 욥의 간증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 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의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조급하구나". 그는 또한 다윗이 시편 16편에서 말한 간증도 알았습니다, "내 육체도 안전이 거하리니". 그는 또 이사야서 26장 19절의 이사야의 간증도 알았습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

그는 또 다니엘서 12장 2, 3절의 다니엘의 증언도 알았습니다. 그곳에서 선지자 다니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땅의 티끌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또 한 가지 더, 아그립바는 호세아 13장 14절에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증언을 알았습니다.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서도 그렇게 명백하게 부활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한 사실은 아그립바도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크리스천들인 우리에게는 더 온전한 증거가 허락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부활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숨을 가냘프게 쉬면서 죽은 자들을 부활시킬 의도를 자신 없이 선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28절의 문장은 주목할 만한 것입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6장 40절도 그러합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성령께서도 사도들을 통하여 동일한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귀중하고 복된 로마서 8장 11절에서 우리는 바울의 중언을 듣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또 제가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3절 말씀을 여러분에게 지금 읽어드리겠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 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구절은 참으로 부활의 교리가 충만한 말씀입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소망 없는 자들처럼 슬퍼하지 말라고 명령 받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21절에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부활의 교리에 대하여 장엄한 논증을 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일일이 말씀 드릴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의심할 것 없이 성령의 중언은 죽은 자들이 부활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인정한다면, 부활 의 교리를 받아들이고 그 복된 소망을 간직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 주위를 돌아보며, 주께서 우리의 믿음을 위하여 도움이 되도록 정해놓으신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주목해 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세상에는 우리가 직접 경험해보고 관찰해 보지 않으면, 단순히 보고서를 통해서는 믿을 수 없는 기사들이 너무나 많이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전보, 그것은 사람이 발명해 낸 것에 불과하지만, 지금 우리가 죽은 사람의 부활을 믿을 수 없듯이 천 년 전의 사람은 그것을 믿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짐 마차를 부리던 시대의 사람이라면 누가 영국에서 미국까지 전파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믿으려 하겠습니까? 우리 선교사님들이 적도의 여러 나라에서 원주민들에게 얼음의 형성과, 사람들이 얼어붙은 물 위를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 망망대해에서 배들이 빙산으로 둘러싸이는 것, 주위의 모든 물들이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지는 것을 말했을 때, 원주민들은 그런 터무니없는 보고를 믿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우리가 적응하기까지는 모든 것이 기이합니다.

부활도 우리가 관찰해 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믿을 수 없는 기이한 요소를 안고 있습니다~그것이 전부입니다. 부활 후에는 지금 우리가 피조물과 섭리에 익숙한 것처럼 부활도 하나님의 능력의 현시의 하나로 간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할 것과 부활을 영원토록 기이히 여길 것을 저는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나 부활도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지금 피조물을 보고 기이히 여기는 것과 같은 감정으로 느낄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으로 들어간 후에는 하나님의 이 새로운 일에 적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제 태어난 것에 불과하며, 아직도 너무나 적게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들을 다 보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살피며 보내는 짧은 세월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우리가 우리의 왜소함을 벗고 성년이 되었을 때는, 지금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들이 친숙하게 되어 찬양의 주제가 될 것입니다.

부활이 창조보다 더 큰 기사이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없는 데서 말씀으로 세상을 불러내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있으라" 하시니 세상이 있게 되었습니다. 무에서 창조해내는 것이나, 흩어졌던 미립자들을 불러 모아서 이전의 그들의 모습으로 다시 빚는 것이나 똑 같이 너무나도 기이한 것입니다. 두 가지 모두가 전능함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들 두 가지 중에서 굳이 쉬운 것을 하나 택한다면, 부활이 더 쉬운 일입니다. 너무 자주 일어나는 일만 아니라면 모든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의 탄생을 신적 능력의 가장 초월적인 현시로 간주해야 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그러합니다. 인간의 탄생과 우리의 계속적인 존재에 있어서 기사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우 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다만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을 너무나 흔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건대 부활의 일은 우리가 아직 친숙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어색해하는 것뿐 입니다. 너무나 기이한 하나님의 다른 행적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즉, 여러분이 한 번도 보지는 못했지만 믿을 만한 증거를 근거로 받아들인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역사적 진리의 한 부분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부활하여야 할 근거가 되며, 여러분의 부활의 모형이 되며, 여러분의 부활의 전조가 되며, 여러분의 부활의 보증이 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부활할 것이 확실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가능성을 입증하셨습니다. 아니 주님 자신은 사람의 대표자이시기 때문에 부활을 확실하게 입증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심은, 주님께서 대표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부활하신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 고전 15:22). 우리 주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주님의 백성들의 부활에 관한 모든 의심들이 영원토록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요"( 고전 15:16). 그러나 주님께서 사셨기 때문에, 우리도 또한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또한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크리스천으로서 이미 부활과 같은 큰일을 내적으로 체험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내적 본성에 관하여서 여러분이 죽은 데서 부활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소생하였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 있지만 회심하지 않은 자들은 그 일에 관하여서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그 말이 무슨 뜻이냐고 제게 물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에게 그 뜻을 설명해 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험으로 아는 것이지 설명으론 이해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려면 여러분 자신들이 거듭나야 합니다. 그러나 신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죄의 무덤으로부터 부활을 체험하였습니다. 악한 정욕과 불순한 욕망의 부패와 타락으로부터 부활을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이 부활을 여러분 속에 이루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시고, 그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힐 때 그리스도께 이루셨던 것과 필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본성이 소생한 것은 주님께서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지금까지 말씀 드린 모든 것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보편적인 부활의 확실성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하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그 근거를 찾는 것은 헛되며 필요 없는 일입니다.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포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들의 불신을 하나님께 변명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저의 말씀을 듣는 여러분, 만일 여러분 이 하나님의 택한 자중의 하나라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하나님을 믿게 될 것 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이 택한 모든 자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증거를 거절한다면, 여러분은 지금 쓰라린 쓸개즙 가운데 있으며, 은혜가 없으면 그 가운데서 멸망하게 될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복음과 교리는 그 모든 영광으로 사람들에게 공개되어 있으며, 고귀한 자들과 악한 자들로 나누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요 8:47)라고 사도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서 은밀히 택하셨음이 눈에 보이는 증거 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자기에게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를 드러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 요 10:26, 27). 그러므로 이 진리와 다른 그리스도의 진리들이 드러나고, 유지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히 알려져서 사람들 사이를 나누며, 애굽인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나누며,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나누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택함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반면에 믿지 않고 남아있는 자들은 그들이 의도적으로 거절한 그 진리에 의해 정죄 받고, 그들의 죄 가운데서 멸망합니다.

Ⅲ.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대지로, 이 진리와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부활의 진리와 우리와의 첫 번째 관계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이 말씀으로 서로서로 위로하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소중한 자들을 잃었습니다~방금 드린 말씀을 수정하겠습니다~그들은 더 좋은 나라로 들어갔습니다. 뒤에 남겨둔 몸은 잃은 것이 아니라, 이자가 붙는 저축을 하듯이 맡겨놓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별 때문에 슬픕니다. 그러나 소망이 없는 자들처럼 슬퍼하지 마십시오. 왜 우리가 성도들의 장례식에서 항상 슬픈 장송곡을 애달프게 부르며, 검은 상복을 입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제 방식대로 한다면, 저는 저의 운구를 흰 말들로 장례지까지 끌도록 하고, 복장은 상복을 입었지만 기쁨을 표하는 자들이 어깨로 메고 하관식을 하도록 하고 싶습니다. 영광 중으로 들어갔으며, 불멸함을 유업으로 받은 자들에 대해서 우리가 왜 슬퍼해야 합니까? 옛날 청교도들은 성도들이 관을 어깨에 메고, 무덤까지 시편을 노래하면서 걸어갔는데 저는 그것이 좋습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영화롭게 된 자들에 대해서 슬피 운다는 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기쁨의 나팔을 울리십시오!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클라리온으로 승리의 즐거운 음 조를 연주하도록 하십시오. 위대한 정복자께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왕께서 자기의 보좌에 오르셨습니다. "즐거워하라", 하늘로부터 우리의 형제들이 말합니다, "우리와 함께 즐거워하자, 우리는 우리의 안식에 들어왔도다".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계 14:13). 우리가 죽은 자들을 생각할 때 슬픈 기색을 계속 띄지 않을 수 없다 할지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마음으로는 고통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비영적이기 때문입니다. 경건하게 죽은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살아있는 약속을 우리가 노래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영원 무궁히 찬양합시다.

두 번째로는, 우리 자신들도 떠날 것을 기대하며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도록 합시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도 역시 죽어야 합니다. 이 전쟁에 서는 문제가 없습니다. 화살이 한 대 있고 궁수가 한 사람 있습니다. 그 화살은 제 심장을 겨냥하고 있고, 궁수는 필사적으로 그 목표물을 맞히려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잠들어야 할 장소가 있습니다. 아마도 외국의 쓸쓸한 무덤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아마도 여러분의 뼈가 여러분의 선조의 뼈와 나란히 적소에 안치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여러분은 먼지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 어디에 묻히든지 불평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잠시 동안입니다. 그것은 불멸의 길로 가는 중에 잠시 쉬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금생과 내생 사이에 잠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마음을 평안히 가질 뿐만 아니라 기대를 하면서 죽음을 맞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우리가 열망하는 것은 지금의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복된 부활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귀히 여기도록 합시다. 우리의 지체들이 악의 병기가 되도록 하지 말며, 죄로 더럽히지도 맙시다. 크리스천은 탐식이나 술 취함이나, 불결한 행동들로,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기의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고전 3:17). 여러분은 순결하게 지내십시오. 여러분은 세례를 받음으로, 여러분의 몸이 깨끗한 물로 씻음 받았습니다. 그것은 지금 이후로 여러분이 모든 불결한 것으로부터 깨끗해져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서 모든 악한 것들을 제해버리십시오. 천국에서 영원토록 거해야 할 몸들이 지금 이 땅에서 더럽혀져서는 안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준엄한 사상입니다. 경건치 않은 자들도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부활은 불행의 부활이 될 것입니다. 그들의 몸은 죄를 지었으므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 마 10:28). 하나님께서는 몸과 영혼 모두를 영원토록 지속되는 고통 속으로 몰아넣으실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무덤에서 잠자는 것이 그러한 부활~"심판의 부활"보다 무한히 더 나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한 부활을 심판의 부활이라 칭합니다. 다니엘은 그것을 표현하기를,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단 12:2) 부활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무시무시한 부활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부활로부터 피하기를 좋아할 것입니다. 육체를 입지 않고 여러분의 영혼이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로 고통을 받는 것도 충분히 무서운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육체를 입고서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몸과 영혼이 함께 죄를 지었다면 몸과 영혼이 함께 영원토록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예레미 테일러는 아킬리우스 아비올라라는 사람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야기 합니다. 아킬리우스 아비올라라는 사람이 졸도하였는데, 그의 친구들이 그가 죽은 줄로 알고 화장시키려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열기로 몸이 뜨거워지자 그가 깨어났고 자신은 화장 불길에 휩싸여 소망 없이 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구출해달라고 부르짖었지만 헛되었습니다. 그는 구출 받을 수가 없었고,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전신이 일그러지며 마비되었습니다. 모든 죄악 된 몸이 무덤에서 잠자다가 부활하게 될 때에 바로 그와 같은 무시무시한 일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몸은 깨어나서 심판 받고, 정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러한 경우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 영생에 이르는 부활을 얻도록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인간의 욕망에 관한 고찰

갈라디아서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이란 무시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이 곧 육체의 소욕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인간의 욕망이라고 부른다. 인간들은 잠시 자신의 욕망을 감출 수 있다. 그러나 영원히 가둬둘 수는 없다. 잠깐 과거의 죄로 인한 아픔 때문에 그 기억에 의하여 욕망의 소리를 잠재울 수 있다. 그러나 무의식 가운데 있을 때는 반드시 욕망은 인간의 망각과 함께 표면으로 솟아오른다. 이는 마치 물속에 비치볼을 누르고 있으면 잠깐 보이지 않지만, 손을 놓는 순간 물의 표면으로 솟아오르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런지 육체의 욕망은 가장 방심한 때에 가장 엉뚱한 순간에 터져 나올 때가 많다. 

 

세상에서 악인이라고 칭하는 자들은 다름 아닌 자신의 욕망을 무리하게 추구한 자들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면 그들의 욕망은 합당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남에게 ‘피해’가 되면 사람들은 그를 악인이라고 부른다. 이때 그 악인이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유일하게 다른 점은 그의 육체의 욕망이 남들보다 더 강하여 절제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남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죄악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실, 모든 인간들은 기회와 능력이 없어서 그렇지, 기회와 능력이 주어지면 자신의 욕망을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 채우게 되어 있다. 인간들 간에 그 방법이 고상한지 그렇지 않는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 안에서 지복(bliss)을 누리는 것이다. 그 지복은 인간의 영혼이 가장 갈망하는 것을 누릴 때 온다. 따라서 그 지복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지으셨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지복을 누림이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3)라고 기도하셨다. 사실, 주님의 기도 응답은 우리가 지복을 누리는 최상의 상태로 보아도 하자가 없다. 완성된 천국은 다름 아닌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지복을 누리는 상태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복을 누리는 자들만이 ‘비로서’ 더 이상 죄의 욕망을 탐하지 않게 된다. 

 

오늘 본문은 인간의 욕망을 이길 수 있는 단 한 가지를 말한다. 그것은 성령이시다. 이 땅에 사는 한 성도라 할지라도 육체의 욕망은 여전히 있다. 부패한 인간의 본성이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우리는 옛사람의 본성으로 살지 않고 성령으로 살 수 있다. 이는 거듭난 사람이기에 가능하다. 즉, 거듭난 속사람으로 성령 안에서 살 수 있다. 성령으로 사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이다. 따라서 성령으로 살면 자동으로 지복을 누리게 된다. 지복을 누리는 한 육체의 소욕을 즐거워하지 않게 된다.  

 

이로 보건대 삶의 가장 큰 문제는 권태이다. 단조로움이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삶의 단조로움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 이 우주의 가장 큰 기적이라고 말한다. 이 기적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능하다. 바로 성령의 충만이다. 존 파이퍼가 말한 것처럼, 일시적인 쾌락에 노예가 된 심령을 해방시키는 유일한 길은 영원하고 최고로 높은 ‘거룩한 쾌락’을 계속 누리게 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 방법은 오직 예수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의 능력을 맛보는 것이라 하겠다.  

 

인생을 돌아보니 죄의 쾌락에는 일시적 중독성이 있음을 본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기에 주님 안에서의 복음의 약속을 믿을 때, 즉, 성령을 의탁할 때, 중독된 죄마저도 힘을 잃고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이는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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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필요한 논쟁의 무익성

낮은바다 ㆍ 2013-04-07 (일) 19:10 IP: 175.xxx.183 ㆍ조회: 118      

때로는 어떤 논제에 대해 서로 간에 의견을 달리 할 수 있다. 각자 이해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건설적인 논쟁이라면 얼마든지 지속할 수 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을 가지고 상대방을 굴복하고자 한다면 당장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때부터는 자신의 논리를 감정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기 때문이며, 결국은 상대방과의 관계가 정말 악화된다. 그리고 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논쟁은 개인 대 개인으로부터 집단적인데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물론 논쟁으로 인해 어떤 이론을 체계화할 수도 있겠다. 예컨대 성 어거스틴의 교회론은 도나투스와의 논쟁으로부터 다듬어진 이론이며, 종교개혁자 쯔빙글리의 교회론 역시 당시 재세례파와의 논쟁가운데 형성된 이론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에선 논쟁이 긍정적인 역할도 한다.

현대에 들어서 학문의 발전을 위해 학회모임을 갖는다. 물론 비슷한 학문분야에 관심이 있는 이들끼리 모이며, 이에 서로에게 관심 있는 주제를 가지고 발제하며, 평가하면서 그 분야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으므로 학자들에게는 연구동기와 그 연구물을 발표할 수 있는 장이 된다. 이때도 평가자는 긍정적이며, 발전적인 방향에서 평가해 주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리라. 이때 학문이 더 발전방향으로 나간다.

하지만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어떤 논의에 대해서 서로 입장이 다르다. 심지어 동일한 성경구절을 가지고 그 해석의 차이도 있으니까. 또한, 그 어떤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해석하는 이는 이 땅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겸손하게 주님의 말씀을 대해야 하며, 어떤 이들은 성경을 모두 아는 것처럼, 자체하는 것은 매우 교만한 사람임을 자인해야 한다(고전13;12).

필자는 어떤 계기로 불필요한 논쟁의 무익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사실, 목회자로서 감당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상담을 해 오거나 질문해 온다면 목회적 배려가 필요하다고 평소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 겸손하게 말이다. 하지만, 만일 상대방과의 대화 속에서 불필요하다고 판단이 될 때는 그만 두는 것이 서로에게 더 유익하지 않을까 싶다. 교회의 덕을 위해서 말이다(고전14;26). 필자는 그것을 다음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첫째, 상대방을 함정에 빠뜨리려 하면 그만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때부터는 서로에게 유익한 대화가 아닌 논쟁으로 비화되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언제나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자칭 하나님이며, 이는 신성모독죄에 해당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부로 할 순 없었다. 그에게 어떤 권위가 있었으며, 백성들이 그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이때 예수님은 대부분 지혜롭게 답변을 하시기도 하셨지만, 그 자리를 피하기도 하셨다(마12;15).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지, 처음에는 선한 마음으로 대화를 시작하였다가 후에는 논쟁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치열한 감정싸움이 되는 것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따라서 진리가 왜곡되지 않은 이상, 서로의 이해가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중요하리라 본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속히 그 대화를 중지하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둘째, 믿는 자들이라도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나는 목회를 하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체험적으로 느꼈다. 각 지역의 사람들의 정서도 다르다. 예컨대, 전라도 사람들은 착하지만 고집이 있다. 경상도 사람들은 거칠지만 뒤끝은 없다. 이처럼 다르다. 믿는 자들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인격이 고매한 자들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깊다. 알면서도 져주고, 양보한다. 하지만 미숙한 사람은 자기주장대로 하려고 하는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과 사고의 차이가 있음을 기억하고 무익한 논쟁이라면 그만 두는 것이 좋다.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하면서 의견이 달랐다. 바나바는 선교지에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가자고 하였으나 바울은 이에 반대하여 서로 이 두 사람이 헤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행15;36-41). 18세기 웨슬리와 휫필드는 절친한 친구였으나 구원론에 대해 생각이 달라 서로 헤어지기도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는 자라도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구원에 대한 진리에 있어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그 진리는 지켜야 하리라.

셋째, 가르치는 자는 말을 아껴야 한다(약3;1). 설교자나 선생만큼 말을 많이 하는 자들이 없다. 말을 많이 하면 실수하기 마련이다. 나는 말로 대화하기 보다는 글로 대화하는 것을 즐긴다. 나의 멘토였던 옥한흠 목사님도 직접 대면하기 보다는 하고 싶은 말은 이메일로 하라고 종종하셨다. 말을 하면 감정적이 되기 쉽고, 그래서 상대방을 격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은 일단 객관적으로 마음을 전할 수 있고,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실수 없이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마음에 맞지 않은 사람이나 글에 대해선 한 마디 해 주길 원한다. 요즘 페북에 보면, 마음에 맞지 않는 글들이 대단히 많다. 그렇다고 한 마디 툭 올리면 그것이 감정을 상하게 하기 마련이다. 내 마음에 맞지 않아도 좀 절제할 줄 아는 훈련이 필요하며, 개인적으로 문의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특히, 목회자는 말을 아껴야 복음을 전할 때 좀 더 진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말씀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넷째, 상대방을 존중하는 인격이 있어야 한다. 성경에 보면, 말과 관련된 교훈이 대단히 많다. 그만큼 말이 중요하다는 것. 특히 잠언15;23,28절에 보면,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라고 가르친다. 이는 말하기 전에 생각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말하라는 것일 게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는 함부로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자기 상사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런데 진정한 인격자는 자기 부하에게도 상사에게 하듯 하는 것이리라.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이들을 찾아보기가 얼마나 힘든지. 이는 누가 나를 알든지 모르든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한 번 뺏은 말은 되 담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이미 그 말로 상대방의 인격에 금이 갔기에 어떤 면에 있어서는 인격살해를 한 것이다. 가끔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오는 댓글을 보면, 본인도 아닌데 내가 난감하고, 기분이 상하는 글들이 종종 보인다. 그래서 논쟁적인 댓글은 잘 보지 않는 편이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작은 배려가 있다면 논쟁이 아닌 격려, 칭찬으로 이어지리라 생각된다. 그 말 한 마디가, 그 댓글 하나가 상대방을 얼마나 기분 좋게 하고, 격려가 되는지 나는 종종 경험한다.

마지막으로는 상대방을 세워주는 말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입을 준 이유는 먼저, 먹기 위한 기능이 있지만, 지혜로운 말을 하라고 주셨다고 생각한다. 먹는 것은 인간의 일차적인 일이지만, 말은 인격적인 일이다. 그런데 만일, 부정적이고 공격적이고 비판적이고 죽이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골4;6절에 보면, 말을 할 때 소금 치듯 하라고 가르친다. 이는 은혜로운 말을 하라는 것이다. 주변에 친구들이 많은 이들의 특징은 그가 지혜로운 말, 상대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을 하는 사람일 게다. 그러나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사람 주변에는 친구들이 거의 없다. 참, 불쌍한 사람이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면,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함께 살기에 말을 배우고, 상대방을 세워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말은 습관이다. 이왕이면 나도 살고, 상대방도 살리는 말을 한다면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내 주변이 좀 더 천국의 삶을 맛보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논쟁은 득보다는 실이 크다고 본다. 만일 논쟁을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지혜로운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목소리가 크다고 이기는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논리로 이기려고 해서도 안 된다. 때로는 약자를 위해서 져 줄 수 있는 배려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바울이 바로 그런 분이셨다. 우리는 개인과 개인이 대화할 때, 집단과의 대화할 때, 성경이 가르쳐주는 교훈에 따라 말해야 한다. 그런데 이는 하루아침에 익혀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통해 다듬어져야 하리라. 실수함에도 또 다시 그런 실수를 낳지 않도록 힘써야 하리라.

단, 이단과 관련된 논쟁은 좀 더 적극적인 대응과 지적이 필요함을 첨언합니다. 그들은 교활하게 침투하여 이간질, 미혹질, 호리고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기독교 유사 이단들이 더 합니다.  



출처: USA 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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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때 금식기도 하며 얻은 은혜가 많더라구요

40여가지나 되어지는 많은 이유가 구지 다 필요할까요?^^

그 안에 한 가지만이라도 와닿으면... ^^ 

금식기도 해야 할 영적인 40가지 이유들

1. 금식은 기도하는 성도로 만든다. 금식기도 만큼 성도들을 기도하게끔 훈련시키는 좋은 것이 있으랴. 기도가 막히거나 기도생활에 게을렀을 때 금식기도는 깨어 기도하게 하며 영적 잠을 깨어 준다.

2. 예수께서 신랑을 빼앗기면 금식하라고 하셨다. 영적으로 마음속에 주님의 은혜가 없다고 느껴지면 금식을 할 때다.

3. 깊은 회개가 필요할 때는 금식기도가 요구된다.

4. 금식기도를 하면 영적인 것을 좋아하게 된다.

5. 보통기도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금식기도로 얻는 것들이 있다.(마17:17-21)

6. 선교사, 목사, 장로는 사명 감당을 위해 금식기도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행 13:2,14:23)

7. 사탄과의 싸움에서 금식기도가 요구될 적이 있다.

8. 금식기도는 큰 믿음을 산출한다.

9. 금식기도는 인간애가 있는 성품으로 변한다.

10. 금식기도는 방탕자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최고의 길이다.

11. 금식기도는 나쁜 습관을 속히 끊게 해 준다. 술, 담배 등은 7~10일 금식으로 거의 해결된다.

12. 신앙의 퇴보를 막아준다. 보통기도로는 힘들다.

13. 자연과 친해지며 순수해진다.

14. 교만을 제거하는 데는 금식기도가 필요하다.

15. 영적으로 급성장하는 성도가 된다. 금식기도 하는 성도는 금시기도 안하는 성도보다 신앙성숙이 훨씬 빠르다.

16. 노이로제, 정신적 억압 등은 금식기도로 풀어지며, 마음이 단순해진다.

17. 비정상적인 욕망이 정상적으로 바뀌어 진다.

18. 회개와 금식기도로 성령의 세례를 쉽게 받는다. 성령의 은사와 선물을 금식기도로 쉽게 받게 된다.

19. 금식기도는 강렬한 기도를 하게 한다. 금식기도는 강한 기도와 간절한 기도를 하게 한다.

20. 금식기도는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의 용량을 크게 해준다. 스케일이 큰 사람으로 바꾸어지며 넓은 마음의 사람이 된다.

21. 남을 위하여 축복하는 자가 되게 한다. 금식기도는 자기의 축복의 그릇을 쉽게 채우므로 넘치는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남에게 주기를 더 소원한다.

22. 십자가의 사랑을 금식기도로 깊이 깨닫게 하신다.

23. 가정에 금식기도자가 있으면 금식기도의 파장이 가정에 미쳐서 자녀들이 쉽게 금식하게 된다.

24. 바울은 받은 은혜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주 금식기도 하였다.(고후 6:5)

25. 금식기도는 성경을 더 잘 이해하게 되며, 깨달은 말씀이 자기 것이 되어 잘 생각이 난다. 기도 중에 말씀으로 응답받는 적이 많다.

26. 욕심 없는 적은 것으로도 만족하게 된다.

27. 몸으로 지은 죄인 음란과 간음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금식이 요구된다.

28. 부부의 금식기도는 서로의 깊은 사랑과 만족을 주며 이혼예방에 최고다.

29. 사탄이 역사하는 가정의 전도를 위해서는 금식기도가 필요하다.

30. 금시기도는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많은 시간을 절약해 준다.

31. 금식기도는 불신앙이 떠나고 믿음이 적극적인 사람으로 바뀌어 진다.

32. 진짜 하나님께로 오는 징계를 방지한다.

33. 금식기도로 하나님의 재앙이 축복으로 바뀌어 질 수도 있다.(요엘 2:12-14)

34. 금식기도는 자살을 예방한다.

35. 금식기도는 성령의 열매를 잘 맺도록 도와준다.

36. 예수님은 금식기도가 끝나자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가셨다. 금식기도 후에는 자기고 모르게 성령의 권능이 역사하심을 체험한다.

37. 금시기도 후에는 언어의 파워가 있다.

38. 모세는 금식기도 후 광채를 입었다(출 4:28-30).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광채, 말씀의 광채가 금식기도 후에 나타난다.

39. 예수님과 친구가 되어 가까이서 주님과 깊이 사귈 수 있다.

40. 금식기도자는 주님이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자이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금식기도를 한다. 하나님은 금식기도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금식기도] / 조효성


금식기도 해야 할 신체적인 40가지 이유들

1. 과도한 전분의 음식과 설탕의 섭취는 몸에서 알코올로 바꾸어진다. 술에 취해 있는 자가 술을 찾듯 음식중독에 걸려 몸에 ‘습관적 배고픔’이 형성되어 음식에 취해 있어 음식을 찾게 된다. 몸에 꼭 필요한 참 배고픔과 구별되는 정욕적 배고픔이 형성되어 식도락에 빠진다. 3일 금식은 음식의 탐욕에서 벗어난다. 금식 3일째는 위장이 거의 비어 있는 상태가 된다.

2. 병든 육체에 과다한 영양공급은 병을 키운다. 금식은 질병들을 굶기게 한다.

3. 금식은 에너지를 보존한다. 에너지의 보존이 잘 안되면 병자는 회복이 잘 안된다.

4. 15년 이상 장에 달라붙은 숙변은 금식으로 대량 떨어진다. 동물에는 없는 사람만이 갖고 있는 엄청난 숙변이 있음을 알고 나면 인간은 동물보다 더 금식해야함을 안다. 일반 장청소법으로도 숙변은 잘 안 떨어지는 것들이 많다.

5. 주기적인 금식은 금식의 방법과 회수에 따라 다르나 20-40년간의 생명을 장수케 한다.

6. 금식은 심장을 쉬게 한다. 심장이 쉬지 않은 것 같으나 한번 심장박동의 십분의 일의 짧은 시간대 쉬었다가 다시 박동을 반복한다. 심장에 낀 지방질과 막힌 담액질 형성을 분해해 준다.

7. 장속의 영양흡수기관인 융털이 정화되고 건강해져 영양분의 흡수력을 높여준다. 보통 섭취한 음식물의 30% 정도의 영양분을 흡수하는데 비해 사흘 금식기도 후에는 70%까지 흡수율이 증강된다.

8. 질병으로 인한 두통이 아닌, 일반적인 두통은 금식하라는 확실한 신호이다.

9. 금식 중에는 혈관이 넓게 열려져 혈액순환이 잘된다.

10. 카페인, 중금속 등의 유해물질은 배설이 잘 안되고 몸에 축적된다. 금식으로 쉽게 배설된다.

11. 산성체질이 금식으로 다량의 산 물질을 배설하므로 체질이 개선된다.

12. 금식 후에는 자연식이 좋아지며 식생활이 자기 몸에 유익한 음식만을 섭취하게 되 식생활에 변화가 옴.

13. 금식으로 호르몬 분비가 정상화되며 부신피질의 호르몬이 반출되어 질병치료에 도움을 준다.

14. 금식 후에는 불면증이 사라지며 짧은 잠을 자도 깊이 잠을 자게 된다.

15. 백혈구가 증가하여 식균력이 최고 10배까지 증강하여 면역체계가 강화되어 질병을 이기게 된다.

16. 금식 중에는 오히려 위장에 들어가야 할 혈액이 두되에 있으므로 뇌가 정화되어 명석해 지며 생각의 집중력, 암기력, 효율적인 연구 등에 유효하다.

17. 혈액을 깨끗이 한다.

18. 정상적인 장을 갖는다. 오랫동안 금식하지 않는 자중에 대부분 사람들의 장은 음식물이 정체되어 확장되어 있거나 협착되어 있어 변형된 장을 갖고 있다.

19. 소화기관은 금식으로 방학을 맞아 휴식을 취한다.

20. 금식으로 장은 탄력을 회복 해 늘어진 장이 금식으로 인한 수축작용으로 정상위치로 환원된다.

21. 금식과 철저한 보호식의 승리자는 음식에 욕심이 없다. 간단하고 단순한 어떤 음식도 달게 먹게 된다.

22. 밥을 안 먹어도 배고픈 줄 모르고 식욕이 동하지 않아 습관적으로 음식을 먹는 자는 금식기도로 정상적인 식욕을 회복한다.

23. 아무리 변비가 없이 변을 잘 보더라도 장에는 2~3%가 남게 된다. 금식은 배출능력을 강화시켜 배설을 원활히 해준다.

24. 청소년 때 일찍부터 금식으로 몸을 정화하면 암, 고혈압, 당뇨병 등 대부분의 음식과용으로 인한 성인병 등은 예방이 되며 잘 걸리지 않는다.

25. 세포를 정결케하여 자연스럽고 젊어 보이게 해주며, 젊음을 유지한다.

26. 금식기도와 자연식으로 몸을 단련한 사람을 성기능이 강화되어 노년에도 성생활에 지장이 없다. 성을 합리적으로 바로 쓰게 되며 만족감이 증강한다.

27. 금식 초기에는 독소제거로 인한 신진대사의 과정에서 쇠약해지기도 하나 독소가 제거된 후 적적한 음식섭취 후에는 전보다 훨씬 강한 육체가 된다.

28. 입과 몸에 악취가 나는 사람은 금식하라는 신호이다. 특별한 질병으로 인한 악취이외의 대부분의 악취는 금식기도로 제거된다.

29. 마른 사람은 뚱뚱한 사람보다 더 금식해야 한다. 신진대사가 약하기 때문에 마르게 되는 경우가 많다. 2~3주 금식으로 마른 사람들이 금식 후 체중이 는다.

30. 무리하게 살을 빼면 영양불균형으로 인해 부작용을 초래하며, 얼굴에 주름이 많이 생긴다. 금식은 뚱보의 원인인 지방질과 과잉축적된 영양분을 제거해 주므로 안전하게 살을 뺄 수 있다.

31. 나이가 많아질수록 금식을 더 해야 한다. 신진대사가 느려지는 노년에는 신진대사를 왕성하게 해주는 금식으로 노화를 방지해야 한다. 나이 많다고 금식 못할 자는 한 명도 없다. 모세는 80세에 두 번씩이나 40일을 금식했으나, 죽을 때에도 젊은이 못지 않게 건강했다.(신34:7) 예수님의 초림시 금식기도로 주님의 오심을 예비한 안나는 나이 100세가 넘는 고령이지만 교회에서 밤낮 금식기도하였다고 한다.(눅2:36-37)

32. 만성피로가 사라진다.

33. 장이 어린아이 장과 같아진다. 장기금식 후 방귀 냄새가 어린이의 변의 냄새와 같다.

34. 피부가 깨끗해지며, 홍안소년의 얼굴이 되기도 한다.

35. 생리의 주기나 색깔과 양이 정상화된다.

36. 종양 등을 자연스럽게 작게 해주며 제거시켜준다.

37. 금식 후에는 고기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며 고기를 잘 먹으나 양이 많이 줄어든다.

38. 거친 호흡, 불결한 호흡이 금식 2주 내외에 사라지며 그 금식 후에는 어린이의 호흡과 같이 부드럽고 깨끗하게 된다.

39. 음식을 절제하면 모든 것을 절제할 줄 아는 자신감을 얻고 자기 존중감, 높은 자존감을 얻는다.

40.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와 하나님의 성전인 몸을 청소하는 데에는 금식기도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출처: 사모님사모님/지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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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이자 목회자인 릭 워렌(59)의 모습 ⓒ릭워렌 홈페이지

세계적인 기독교 베스트셀러 '목적이 이끄는 삶'을 집필한 릭 워렌 목사의 아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워렌 목사가 세우고 목회 활동을 해왔던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 새들백밸리커뮤니티 교회는 6일 성명을 발표해 매튜 워렌(27)이 전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오랫동안 정신질환은 앓아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워렌 목사는 교회 관계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사고 당일 아내·아들과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왔는데, 아들이 '순간적 절망에 휩쓸려' 자살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날 오후 5시25분경 신고를 받았다고 전했다.

2남 1녀 중 막내인 매튜 워렌은 약 10년 전부터 정신질환으로 괴로움을 호소했다고 한다. 미국 최고의 의사들과 상담전문가들에게 치료를 받아왔고, 수많은 신도들로부터 기도를 받았지만 끝내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워렌 목사는 계속된 치료에도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한 아들이 "난 내가 천국에 갈 것이란 것을 알고 있는데, 왜 지금 죽어서 이 고통을 끝낼 수 없느냐"고 한 말을 잊지 못한다고도 덧붙였다.

미국에서 보통 자살 사건의 경우 검시관이 시신을 부검하는데, 매튜 워렌의 시신도 부검될 것이라고 LA타임스가 전했다.

AP통신에 따르면1980년에 세워져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인 새들백밸리커뮤니티는 캘리포니아주 남부에 여러 지부를 두고 있으며 2만 명에 이르는 신도가 찾는 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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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워렌 목사가 집필한 '목적이 이끄는 삶'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가장 오래 머문 서적 중 하나다. 서평에서는 이 책을 통해 워렌 목사가 삶의 가장 중요한 질문인 '나는 왜 이 땅 위에 존재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보여준다고 돼 있다.

2007년 미국 퍼블리셔스위클리에 따르면 이 책은 56개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적으로 300만 부 이상이 판매됐으며, 2004년 한국에서도 출판돼 큰 인기를 모았다.


출처: 머니 투데이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3040711295808173&outlink=1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  

 

사무엘상 6: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대부분의 설교는 암소에 초점을 맞추어 성도들에게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고 암소처럼 목표를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라고 한다. 혹은 암소의 최후에 초점을 맞추어 암소처럼 하나님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되어 공동체를 살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설교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제 멋대로’의 설교라 하겠다.  

 구속사적 입장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 말씀을 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는 매우 부패한 상태이다. 성경은 언제나 한 사회의 영적 부패를 설명할 때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부패를 묘사한다. 그래서 어리석고 우둔하고 악한 제사장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사무엘상에서도 사회의 영적 부패와 상태를 알리기 위하여 엘리 제사장, 그리고 홉니와 비느하스의 모습이 나온다. 특히 언약궤를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기보다는 언약궤 자체를 우상시하는 영적 지도자들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매우 못마땅하시기에 자신의 영광을 가리시면서 까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블레셋 백성들에게 언약궤를 빼앗기게 하신다. 이는 수천수만 명의 생명을 잃더라도 그들에게 주시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셨던 것이다. 

 한편 블레셋 백성들은 전쟁을 이긴 후 언약궤를 빼앗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서도 승리한 줄 알았다. 자신들이 믿는 다곤 신이 승리를 준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언약궤가 들어온 이후 블레셋에는 재앙이 온다. 그들이 믿는 다곤 신이 매일 자빠져서 팔이 부러지고 목이 부러진다. 이에 어쩔 수 없이 언약궤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주게 된다. 그러나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참 신이며 역사하는 신이며 살아계신 전능자인지 확인하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온 발상이 새끼를 낳은 두 암소에게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끌게 한 것이었다. 그래서 만일 두 암소가 함께 이스라엘을 향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우연이라고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그 사건이 바로 벧세메스의 암소 사건이다.   

 신앙은 실체를 향한 신앙이 있고 그림자를 향한 신앙이 있다. 보이는 것은 그림자이고 보이지 않으시는 인격체는 실체이다. 영원한 실체는 오직 살아계신 여호와 삼위일체 하나님 외에는 없다. 그림자를 향한 신앙은 마침내 허무함으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실체를 향한 신앙은 믿는 대로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보이는 언약궤에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이는 미신이다. 성경책을 들고 다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라는 종교 행위를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반드시 만났다고 볼 수 없다. 십자가 목걸이를 목에 차고 다닌다고 하여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시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러한 미신적 행위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대치해 버린다면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언약궤를 들고 그 언약궤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다고 믿고 전쟁에 나가는 종교적 행위와 똑같다.  

 두 마리 암소는 각각 새끼를 두고 있었다. 두 마리가 본성으로 벧세메스를 향하여 갈 수 없다. 암소의 본성에 의하면 새끼에게로 가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암소를 이끌어 벧세메스로 가게 하신다.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이유 없이 기적을 행하지 않으신다. 왜 기적을 행하신 것일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이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다는 것을 알리시기 위함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아주길 바라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인가? 하나님 그분을 대치하여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이 마음을 더욱 분명하게 하시기 위하여 임마누엘로 이 땅에 오셨다.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셨다. 나아가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속’하셨다. 즉, 우리 대신에 죄 값을 치러주시고 우리를 주의 피로 사셔서 참으로 자유롭게 하셨다는 말이다. 왜 이러한 엄청난 대가를 치르시는가?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과 인격적 교제를 나누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의 마음은 어떠해야 할까? 참된 사랑으로 반응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주를 향한 사랑 가운데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하여 주신 계명에 순종함이 마땅하지 않을까? 우리 하나님께서 맘껏 우리를 축복하시며 사랑하시도록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사랑과 순종을 통하여 깊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아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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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 조세형이 좀도둑질하다가 잡혔는데
뭐? 선교회 사무실 마련하기 위해 그 짓을 했다고?
지난 주에는 교회서 부흥회하고 간증도 하였다고? ~~~
아마 그의 회개는 위장 회심은 아니었고
당시 나름 진심으로 뉘우치고 기독교로 귀의하였지만
속사람이 진정 변하지 못하여 옛사람이 되살아난 것일 게다.

김태촌 조양은 같은 전국구 조폭도 회개하였다고 떠들썩했고
고문전문가 이근안도 회개하였다고 간증하고 다니더니
역시 대형사고들만 쳤다.
수준 낮은 기독교이다.
흉악범이나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더라도
회개하였다고 말하고 눈물 조금 흘린다고
덜컥 설교단에 세우는 무지한 교회들이나
그런 자들을 불러 무언가 위대한 회심의 사례를
보여주고자 의도하는 눈 먼 목사들이나
연예인, 흉악범, 조폭들의 시덥잖은 간증? 무용담을 듣고
즐기는 교인들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관두껑에 목박히기 전까지 그들의 진정성은 재확인되어야 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도 없는데
함부로 그런 자를 회심의 모델로 삼지 말 일이다.

황영익 목사의 facebook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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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의 가장 큰 위성 타이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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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의 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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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성(Uranus)]
천왕성의 실제와 오른쪽의 과장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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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왕성(Nept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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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왕성의 거대한 흑점]



  
 


제비꽃 연정         최송연
 
아직은 이른 봄 
시린 바람 흐르는 들녘에
고개 숙여 다소곳한 너

보드라운 줄기
가녀린 허리로
거센 겨울바람과 싸우려면
많이도 힘들었을 텐데

봄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 하나로
모진 겨울 잘도 견뎌내더니

이제 그 우아한 자태
지고한 향취로 꽃 피워
찾아온 새봄과 하나 되었네

-

"마라나 타!"

 
 
 
 

단어 해석 도우미:
제비 꽃= 성도, 새봄= 다시 오실 주님!^^
 
출처: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지혜자
2013-04-06 03:53
180.xxx.105
별똥별님의 시는....
아름답습니다.
단아합니다.
청초합니다.
순결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이건 아부가 아닙니다요,
느낌이자 사실입니다.ㅎ)
더욱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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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하는 주님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조나단 에드워드)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1:29-31)

사도로부터 이 편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지혜가 크게 논란되는 지역에서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사도가 이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라고 한 것과 같이 말입니다.

고린도는 아덴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여러 세대 동안 세상에서 철학과 학문의 가장 유명한 터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지혜를 폐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신 방식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학식 있는 헬라인들과 유명한 철학자들은 소위 자기들의 모든 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하나님께 속한 일들 가운데서 진리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노력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난 후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여 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복음을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하셨습니다. 사도는 다음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관찰해 볼 수 있습니다.

1. 구속의 일에 수반된 여러 가지의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사람이 자신을 결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을 자랑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2.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이 목적이 이루는 하나님의 방식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곧 사람들이 자기들의 선을 위해 구속의 역사 속에서 오직 절대적이고 직접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면에서 그러합니다.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

첫째로, 그들이 갖고 있는 모든 좋은 것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타락하고 난 뒤 다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가진 모든 좋은 것은 바로 그 네 가지 항목에 들어있습니다. 달리 더 작 나눌 수 없을 정도입니다. 분명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 네 가지 모두가 되십니다. 그러하기에 그리스도 밖에서는 그 네 가지 중 어느 하나도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으니’ 그 안에 모든 합당한 총명의 참된 탁월함이 있습니다. 지혜는 헬라인들이 감탄해 마지않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세상의 참 빛이십니다. 참 지혜가 우리의 지성에 분여 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우리가 ‘의’를 가지는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고,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총 속에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도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해져’(성화 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총명뿐 아니라 탁월한 마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는 우리에게 전가된 의가 되십니다. 우리가 구속함을 받는 것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또한 우리가 모든 비참에서 벗어나는 것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모든 복락과 영광을 받는 것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좋은 것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좋은 것이 하나님을 의지함에 달려있음을 보여 주는 또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셔서 그로 말미암아 이런 은혜를 입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하나님께로서 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되셨으니.’

셋째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그 안에 있는 분깃을 얻고, 그를 통해 우리가 받는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친밀하게 교통하게 하는 믿음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는 우리가 우리의 모든 좋은 것을 위해 성삼위의 각 위를 의지해야 할 필연성이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 달린 존재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주시고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이런 것들이 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달려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을 의존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와 친밀한 교제를 갖는 방편인 믿음을 주시는 이가 성령이십니다.

교 리

‘하나님께서는 이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받으시되, 구속받은 자들이 절대적이고 보편적으로 하나님만 의뢰하도록 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십니다.’

여기서 저는 첫째, 구속받은 자들은 자기들의 모든 좋은 것을 위해 절대적이고 보편적으로 하나님만 의뢰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합니다. 둘째로는,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높임을 받으신다는 점을 보여 주겠습니다.

Ⅰ. 구속받은 자들의 절대적이고도 보편적인 교회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방식의 본질과 방도는 구속받은 자들의 모든 일에 있어서 직접적으로나 즉각적으로나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게끔 하는 데 있습니다. 구속받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합니다. 그들은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을 의뢰합니다.

어떤 존재가 자기의 선을 위해 다른 존재를 의뢰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받은 자들이 자기들의 좋은 것을 위해 하나님을 의뢰하는 방식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좋은 것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모든 선한 것의 원천이십니다. 그리스도에게서 그 모든 것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매개’로 하여 그 모든 좋은 것을 받아 가집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것을 가지며,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주어진 ‘선 자체’이기에 모든 선한 것이 그 안에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자들은 이런 모든 방면에서 자기들의 모든 좋은 것을 위해 직접적이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뢰하게 됩니다.

1.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총체적 은혜

구속받은 자들은 자기들의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좋은 것의 ‘원조’이십니다. 우리는 구속주를 하나님께서 받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구세주를 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니 그 인격에 있어서 하나님께 속하실 뿐 아니라, 중보자로서의 직무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시고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실 일을 맡기사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구세주를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구세주를 받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속하실 이를 주시기도 하시고, 구속하신 이가 사신 것을 제공해 주시고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것이 되시고, 우리가 그에게 인도함을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친밀하게 교제할 믿음을 받아 그 에 분깃을 얻게 된 것도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 놓으신 모든 은택을 우리가 받는 것도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하시고 지옥 불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는 것도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그리고 은총으로 받으사 구속받은 이들을 의롭다 하시는 것도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죄의 지배로부터 우리를 건져 주시고 우리의 더러움에서 우리를 깨끗이 씻어 주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구속받은 이들이 자기들이 모든 탁월한 지혜와 거룩함을 받는 것도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이런 일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데, 그 성령께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시며, 하나님에 의해 보내심을 받습니다. 성령께서도 친히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의 작용과 내재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신적인 것들을 아는 지식과, 거룩한 성향과 모든 은혜가 주어지고 지속됩니다. 사람들의 영혼에 은혜를 나누어주실 때에 방편들이 사용되지만, 우리가 이런 은혜의 방편들을 갖게 도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방편들을 유효하게 만드시는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릇이 훌륭해 보배가 담긴 것이 아니다.

우리의 성경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러 가지의 규례들을 가지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규례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직접적인 감화에 달려있습니다. 복음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사역자들의 모든 충족성이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복음 사역자들의 성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즉각적인 축복과 감화에 달려있습니다.

① 구속받은 자들이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당신의 독생자를 주신 것도 순전히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은혜는 주어진 것의 탁월함에 비례하여 볼 때 대단한 것입니다. 은사는 정말 무한하게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 은사는 무한하게 가치 있으신 분, 즉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받아 가지고 있는 은택에 비추어 볼 때 은혜는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은택은 이중적으로 무한하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한한 자로부터 구원을, 바로 그분 안에서 받았다는 데서 그러하고, 영원한 비참에서 구원받았다는 데서 그러하며, 그리고 우리가 또 영원한 기쁨과 영광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이 은사를 주신 은혜의 처사는 그것을 받은 우리들의 무가치함에 비추어 볼 때, 정말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서 은택을 받기는커녕 그 정반대로 나쁜 것만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은사를 주시는 방식을 감안하여 볼 때도 그 은혜는 위대하며, 우리가 그 선물을 받아 가지는 그 통로가 되는 방편과 방식의 쉬움과 용이함을 생각해도 그 은혜는 역시 위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우리 가운데 거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그를 내어 주시되 육신, 또는 우리 인성을 취하게 하사, 우리와 함께 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죄는 없지만 죄 있는 연약의 모습으로 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는 낮고 환란 중에 있는 우리들에게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영혼을 위한 제물로 죽임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땅히 은혜를 주셔야 하는 의무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타락한 천사들에게 하신 것같이 타락한 인생들을 물리치실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은혜를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가 회개하기 훨씬 전에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만한 매력이 있어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대할 만한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여러 은택들이 이러저러한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은 순전히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고 거룩하심을 받은 자들은 그 은혜를 오직 하나님의 아름다운 선하심의 결과로 돌립니다. 그런 면에서 구속받은 자들은 다른 이들과 구별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이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사람은 이제 타락하기 이전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크게 의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타락 이전에는 온전한 순종의 보상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훨씬 더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존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꼭 필요로 하는 시점에 있습니다. 그 은혜만이 우리에게 영광을 베풀어주고 지옥과 영원한 진노에서 건짐 받게 합니다. 첫 번째 언약 아래서는 의의 상급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의를 주시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어지는 주관적인 은혜를 필요로 하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그 은혜는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해 주고, 우리를 죄책과 무한한 죄의 형벌에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우리가 첫 언약 아래서보다 훨씬 더한 것을 위해 하나님이 선하심에 의지하듯이, 우리는 훨씬 크고 더욱 대가없이 놀랍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존합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의지적인 기뻐하심에 더욱 의지합니다. 우리 첫 조상들은 거룩함을 위하여 하나님께 의존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그 첫 삶으로부터 원의(原義)를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지금과 같은 주권적인 기뻐하심과 선하심의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본시 사람은 거룩하게 지음을 받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들을 거룩하게 지으신 것은 하나님다운 일이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성적인 피조물을 거룩하게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그것은 아마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어긋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타락한 삶들이 거룩하게 될 때, 그것은 순전히 의도적인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 타락한 피조물에게 거룩함을 주시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비참해지기 전보다, 하나님의 은혜에 더 의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의존은 훨씬 더 분명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불충분성과 무능성이 타락하고 모자란 상태에서 훨씬 더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예 나면서부터 죄악적이고 전적으로 오염되고 거룩하게 멀리 벗어나 있기 때문에 거룩을 위해 하나님께 더욱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 에 산출되는 효력도 분명하게 드러나며,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만일 사람이 거룩하였고 언제나 그런 거룩을 유지하는 상태에 있다면, 필연적으로 거룩을 고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간 본성에 절대적인 것으로 그렇게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합당하기 위해 우리는 더욱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가장 먼저 하나님의 불쾌하심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불쾌하심의 표현을 받은 다음에야 하나님의 보시기에 합당한 자로 영접을 받을 것이니 말입니다.

우리는 먼저 비참하고, 후에 행복하기 위해 하나님께 더욱 분명하게 의존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유의 공력을 인정받을 만한 탁월함을 전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피조물의 탁월성 안에 공로와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펴본다 하여도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참다운 탁월함 없이 무한하게 괴이한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며, 전체가 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좋은 것은 전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처음에 우리는 완전히 벌거벗은 상태로 어떤 것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가, 후에 모든 선한 것으로 부요함을 입었으니 말입니다.

②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받습니다. 사람을 구속하신 하나님의 일을 은혜에 속한 일뿐 아니라 놀라운 능력에 속한 것으로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낮고 비참한 깊은 구렁에서 끌어 내사 거룩하고 복된, 높아진 상태로 올려놓는 데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1:19)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구속의 매 단계마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회심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새로운 성품을 주시는 하나님이 능력에 의지합니다. 그것은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라고 했고,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한 일의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2:10)라고 하였습니다.

은혜의 유지도 하나님의 능력 때문

타락한 사람이 새로 지음을 받지 않고는 참된 거룩에 이를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3)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너희를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골 2:12, 13)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단순히 창조하거나 죽은 몸을 살리는 것 이상으로 더욱 영광스러운 능력의 역사입니다. 그것을 통해 도달한 효력이 더욱 크고 탁월합니다. 거룩하고 복된 존재와 회심의 일을 통해 산출되는 영적 생명은 단순하게 존재하고 사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영광스러운 효력입니다. 본래의 상태에서 변화가 이루어졌는데, 그 상태는 죄 가운데 죽은 상태요,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깊은 비참의 상태입니다. 그 상태는 새로 지으심을 받아 도달한 상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이되, 그저 죽어 존재하지 않는 그런 상태보다 훨씬 더 비참한 상태입니다.

우리가 은혜의 상태에서 보호받는 것도 바로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벧전1:5)라고 베드로는 주장합니다. 우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같이 그 은혜가 계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이며, 하나님에 의해 은혜가 유지됩니다. 마치 창공의 빛이 하루종일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새벽에도 낮에도 저녁 석양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은혜의 역사를 위해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그 은혜의 역사를 실행에 옮길 때에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고, 죄를 다스리고 자기의 마음의 부패한 성향을 제어하고 거룩한 원리를 증가시켜 선한 역사로 열매 맺게 하는 데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그리고 은혜의 온전함에 이르기 위해서도,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영혼이 온전히 본받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또한 영혼을 기쁨과 복락으로 채우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습니다. 그리고 몸이 다시 살고 완전한 상태에 이르러 하나님의 나라의 거민으로서 온전하고 복되고 완전해진 영혼의기구가 되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일련의 이러한 행동들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합니다. 피조물을 위한 하나님의 일련의 이러한 행동들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의 가장 영광스러운 효력들이 나타납니다.

사람은 범죄하기 이전의 처음 상태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오죽 더 하겠습니까. 사람은 자신의 많은 일들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능력의 더욱 놀라운 행사에 의지해야 합니다. 처음 범죄하기 전에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의 효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욱더 주목할 만하게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믿음의 길에는 크고 어려운 일과 대적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부패하여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보다 더욱 영광스러운 능력의 효력입니다. 호감을 갖고 있거나 대적하는 세력이 전혀 없는 곳에서 거룩을 주는 것보다 사단의 손에서 영혼을 구출해 내고 흑암의 세력에서 그를 건져내어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은 더욱 영광스러운 능력의 역사입니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재물을 나누느니라”(눅11:21, 22).

그 사람의 마음에 아직도 저항하는 죄가 남아있고 사단이 모든 힘을 동원하여 훼방하는 가운데서 그 영혼을 은혜와 거룩의 상태 속에 붙잡는 것은, 사단이 사람 속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때에 사람을 범죄하지 않게 지키는 경우보다 더욱 영광스런 능력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속받은 자들이 자기들의 모든 선한 것을 위해 하나님께 어떻게 의존하는지를 지적한 바 있습니다. 구속받은 자들이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말입니다.

2. 모든 것을 주신 분에게 모든 것을 의뢰함.

자기들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온 것이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의 원조요, 원천일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의 중보이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지혜, 죄, 용서, 지옥에서 구원받은 것, 참된 위로와 행복, 영원한 생명과 영광은 중보자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이 중보자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그 중보자를 통해 얻게 된 것이었기에 우리는 그 중보자께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모든 좋은 것을 위해 하나님께 의지하는 또 다른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보자를 우리에게 주시고, 중보자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중보자가 구속하여 놓으신 것들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중보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대상인 물과 본질인 샘은 같다.

우리의 복락들은 구속함으로 말미암아 얻게 된 것들입니다. 그 구속은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그 복락들은 하나님께서 구속하여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값을 치르는 분을 주십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값을 받고 사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값을 주고 사시는 분도 되고, 그 값 자체도 되십니다.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7:27)라는 말씀과, 그리고 9장 26절의 “이제 저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라는 성경 말씀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실로 드려진 것은 인성(人性)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인성은 신성(神性)을 가진 인격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인성은 무한한 값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의 좋은 것을 가질 때, 우리는 첫 사람의 최초의 상태와 다른 국면에서 하나님을 의존합니다. 그 때에는 사람이 자기의 의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부분적으로 의존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선한 것을 받기 위하여 의지하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가진 좋은 것을 받는 원천으로 의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당시 첫 사람이 무죄한 상태에서 의존하였던 저가의 의는 진정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자기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그 의는 본래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곧 바로 하나님’만 의지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의지하는 의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義)’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23장 6절에서는 “여호와 우리의 의”라는 명칭으로 예언되었습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는 의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 의는 하나님의 의이기에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구속함을 통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으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통하여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6).

3.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복락의 생명수

구속받은 자들은 자기들의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 ‘안에서’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뿐 아니라, 그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을 내용으로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선이십니다. 구속받은 자들의 선은 대상도 되고 본질 그 자체도 됩니다. 우리가 소유하는 대상으로서의 선이라고 할 때는, 구속받은 자들이 행복하게 소유하고 누리는 외적인 좋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유한 본질적인 선이란 그 영혼 자체 내에 있는 탁월함이나 즐거움입니다. 구속받은 자들은 두 방면 모두에서 자기들의 좋은 것을 다 하나님 안에서 가지는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지만 하나님 자신이 그들 구속받은 자들의 모든 좋은 것입니다.

① 구속받은 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자기들의 ‘객관적인 대상으로서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집니다. 그들 구속받은 자들은 구속을 통해 소유하고 누리게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가장 위대한 선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값을 주시고 사신 모든 선한 것의 총체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업이십니다. 또한 성도들의 영혼의 분깃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부요, 보화요, 그들의 식물이며, 생명이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거처시요, 그들의 장식이며, 면류관이요, 영원한 명예와 영광이십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죽을 때까지 받는 위대한 선이시며, 세상 끝에 부활하게 되어 만나는 위대한 선인 것입니다. 주 하나님은 하늘의 예루살렘의 빛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동산의 가운데로 흐르는 생명수 강이시며’ 그 동산 가운데서 자라는 생명나무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탁월하심과 아름다우심은 성도들이 마음을 언제나 새롭게 하고 위로해 주시며,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의 영원한 잔치상입니다.

구속받은 자들은 다른 것들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또 천사들과 서로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천사들이나 다른 어떤 것들 속에서 즐거워하거나, 또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들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② 구속받은 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그들의 모든 ‘본질적인’ 선을 가지게 됩니다. 본질적인 선은 두겹입니다. 그것은 탁월한 것이기도 하고 즐거운 것이기도 합니다. 구속함을 받은 자들은 이 두 가지를 하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분여 받기도 하고 하나님 안에서 소유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께 참여함을 통하여 영적인 탁월함과 기쁨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탁월함을 전달받아서 탁월하게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아름다우심, 곧 당신의 아름다운 형상을 그들의 영혼에 투영시키기도 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도덕적인 형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벧후1:4).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존재들입니다(히12:10).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기쁨을 전달받음으로써 아름답고 복된 존재들이 됩니다. 마치 달이나 항성들이 태양 빛으로 말미암아 밝게 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영혼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분출시켜 주심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것들에 있어서 구속받은 자들은 하나님과 교통합니다. 곧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참여하고 하나님께 참여합니다.

성도들은 성령의 은사와 성령께서 그들 안에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탁월함과 복락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들은 성령을 힘입어 존재하고 그들의 원리이신 성령 안에 존재합니다. 성령께서는 거주하시는 분이 되셔서 영혼 안에 생명의 원소가 되십니다. 영혼 안에, 영혼에 대하여, 영혼과 함께 일하시는 성령께서는, 물이 샘에서 비롯되듯이 당신 자신을 전달하시고 역사 하심으로써 참된 거룩과 기쁨의 샘이 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속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라는 말씀과 요한복음 7장38, 39절의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라는 구절을 비교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우리를 사신 모든 것의 총체는, 4장에서 말한 샘물이고 7장에서 말한 생명수 강입니다. 구속받은 자들이 하늘에서 받게 될 모든 복락의 초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입니다(계22:1).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은 요한복음 7장 38, 39절에서 생명수의 강으로 설명되는 것이고,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복락의 강수’라고 불리워집니다.

장차 받은 은혜가 더 크다

여기서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충만한 선이 그 내용이 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을 전달받는 것은 성령의 참여하심으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들도 그의 충만하심을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의 기업의 총체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소유하는 적은 성령의 은혜(앞으로 받을 것과 비교할 때 적다는 것임-역자주)를 가리켜 성도들이 받을 기업의 보증이라고 부릅니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라고 기록하였으며, 5장 5절에서는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1장 13절, 14절에서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말합니다.

성령과 선한 것들을 성경에서는 같은 것으로 말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성령께서 영혼을 향하여 모든 좋은 것들을 다 포함하여 주시는 것같이 말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라고 말씀하시며, 누가복음 11장 13절에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사 확보하여 우리에게 주신 복락의 총체요, 복음적 약속들의 주인공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우리로 하여금 …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갈3:13,14)라고 하였으며, 에베소서 1장 13절에서는 ‘약속의 성령’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의 일을 마치시자마자, 당신이 구속하신 모든 이들에게 즉시 건네 주신 바 약속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행2:33)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따라서 구속받은 자들의 모든 거룩과 행복이 다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 거룩과 행복은 다 하나님의 성령의 교통하심과 내주하심과, 역사하심 속에 있습니다. 거룩과 행복은 이 세상과 내세에서 다 성령의 열매로 존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거하시며,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속주(救贖主)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구속주로 말미암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구속자이시며, 구속의 값이 되십니다. 그리고 또한 구속의 값을 주고 사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다 하나님에게서 나오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6)의 성경 구절에서 ‘그에게’라고 번역된 헬러어는 ‘그 안에서’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고전8:6).

Ⅱ. 구속의 역사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방편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십니다. 곧, 구속받은 자들이 그렇게 크고 보편적으로 당신을 의뢰하는 것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씀입니다.

1. 은혜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충만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모든 충만하심을 주목하고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너무나 많기에 그 완전하심과 충만하심을 주목하고 인식할 당위성도 그만큼 커집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더 크게 의뢰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기울이는 관심은 커지게 되며,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주목하여 인식하는 기회는 많아집니다. 그런 논리로 더 나아가서, 성삼위의 격위(格位)들에 속한 신적인 완전하심들을 더욱 크게, 더욱 절대적으로 의뢰하면 할수록, 그 각 격위가 가지신 신적 영광을 관찰하고 인정할 기회를 더욱 많이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더 세심히 관찰하고 한번이라도 더 주목하게 됩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특별하게 주목되고 관찰되도록 우리 마음이 기웁니다. 우리가 그렇게 많이 의지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소홀히 하기가 쉽습니다. 또한 우리가 크게 의지하는 것보다 다른 것에 더 큰 관심을 쓰기란 어려운 법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과 그 완전하심들에 크게 의존되어 있고, 그렇게 많은 방면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크게 의존하고 있으니,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시선에 가장 잘 들어옵니다.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어디로 돌린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충분한 모든 것이 모든 방면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일 때,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을 주목할 기회를 더욱 크게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럴수록 더 많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그만큼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으므로, 피조물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더욱 크게 드러나는 셈입니다. 피조물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신 하나님의 충만하심은 그 만큼 크게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눔은 배은망덕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의 충만함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가진다는 사실은 아름다움과 복됨에 있어서 충만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구속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이 크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과 충만하심을 묵상하고 알게 될 기회도 그만큼 더욱 커지고, 마땅히 그래야 할 당위성도 크게 더해집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절대적이고 즉각적이며 보편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이의 충만하심과 영광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이치에 어긋나고 얼마나 배은망덕한 처사인가요!

2. 아무것도 아닌 사람

이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상대적으로, 아니면 피조물의 영광과 비교하여 생각하면 얼만 위대한 것인지 드러납니다. 피조물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여 있음으로 말미암아, 피조물은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신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무한하신 분임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와 거룩하심은 우리들의 것보다 더욱 무한히 더 위대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과 위대하심을 마무리 크게 의식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차이를 깨닫되 하나님의 영광이 자기의 영광에 비하여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닫는 정도가 아니면, 그는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피조물로부터 영예와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자기를 하나님과 평준한 수준에 놓고서, 아니면 하나님과 다투는 자리에까지 자신을 높인다면, 자기가 마땅하게 처할 위치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를 높이는 것 만큼에 비례하여 하나님을 덜 높이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실 때에 각각의 존재의 처할 위치를 정해 놓으신 것이 틀림없습니다(성경이 하나님의 의중을 계시한 것이라고 우리가 인정할진대). 다시 말하며, 하나님께서 전체를 장악하시어 사람이 자신을 온전히 비게 하시고, 대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되시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게 정해 놓으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른 존재들이 ‘당신 자신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 틀림없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피조물들에 비하여 당신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밝히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을 함축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면 할수록’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은 더욱 적어지는 것입니다.

3. 전부이자 중심이신 하나님

피조물이 범사에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만드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체 영혼을 사로잡아 우리 영혼의 온전한 존중심을 하나님께 향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부분적으로는 다른 것을 의지한다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이 존중심은 그가 의뢰하는 여라 가지 대상에게로 나뉘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선을 위하여 하나님을 부분적으로만 의지하고 나머지는 우리 자신을 의지한다든지, 아니면 다른 것들을 의지한다고 합시다. 아니면, 우리가 우리의 선을 부분적으로는 하나님께 얻고, 나머지 부분의 선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에서, 또 그 나머지는 하나님도 그 다른 존재도 아닌 전혀 다른 존재에서 얻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선(善) 자체와, 우리에게 선을 주는 존재를 한꺼번에 생각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럴 만한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선한 것을 하나님께, 그리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받기 때문입니다. 그 선 자체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받아 가지게 됩니다. 우리의 존경심을 자아내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모든 것은 전부 중심이신 하나님 안에 연합되어 있습니다.

적용

1. 처음부터 끝가지 의뢰하라.

우리는 여기서 구속의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이한 지혜를 관찰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빠져들어 간 허망하고, 비참하고, 낮고, 상실되고, 파멸된 상태를 당신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습니다. 다른 방면들에서와 같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속에서는 특별하게 사람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뢰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사람이 타락하여서 빠져들어 간 죄의 음침한 심연과 비참에서 사람을 건져내시어 높이 드시기를 기뻐하사, 탁월함과 존귀함으로 지극히 높이시고 영광의 복락과 영광의 높은 고지로 영예롭게 하셨지만, 피조물 된 사람이 어느 방면에서도 자랑하고 뽐낼 것을 전혀 갖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모든 영광은 분명하게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절대적이고 순전하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속한 것입니다. 성삼위의 각 위는 이 일에 있어서 동등하게 영광을 받으십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모든 면에 있어서 성삼위의 각 위를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성자로 말미암으며, 성령으로 인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役事) 속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 중에 모든 것으로 나타나십니다. 이 일에 있어서는 그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모든 것 중에 오직 유일하신 분이시라는 게 아주 합당한 진리입니다.

2. 왜 때로는 의지하고, 때로는 의지하지 않는가

어떤 방면에서고 하나님을 그렇게 절대적이고 보편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반대하는 신학이나 교리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고 있는 것이고, 우리의 구속의 의도를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신학 체계는 하나님의 자리에 사람을 가져다 놓는 것이고, 언급된 어떤 방면에서든지, 구속의 일에 속한 어떤 일에서든지 사람을 성부나 성자, 아니면 성령의 자리에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 체계들은 구속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아무리 인정한다 할지라도, 절대적이고 보편적으로 온전히 하나님을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어떤 일들’에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그러나 다른 것들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속주께서 우리를 받아 주시고 은사를 주시는 면에서는 하나님을 의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속주 안에 있는 ‘기업’을 얻기 위해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주신 일이 온전히 하나님에 의하여 되어진 일이라고 절대적으로 인정합니다. 구속의 일을 이루시는 면에서는 아들을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그러나 ‘회개’를 위해 성령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의 주시는 은택을 힘입기 위해서는 성령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은혜의 ‘방편들’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방편이 유익을 주고 성공하기 위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거룩함을 얻고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분적으로 의지합니다. 또 거룩함을 얻고 거룩함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적이고 주권적인 은혜를 위해서는 하나님을 단순하게 의존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호의로 받아 주시는 일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인정합니다. 어떤 합당한 공력이 없이도 그런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면에서 그러합니다. 그러나 어떤 탁월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에 이끌림을 받거나 감동하는 일이 없더라고 그런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단순하게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부분적으로 인정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명을 부지하고, 그로 말미암아 삶의 새로운 차원을 얻게 되었다는 면에서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생명을 얻게 하는 의기 우리 자신 속에 본래부터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옛 언약 아래 있을 때부터 그러하다고 주장합니다.

자기를 낮추면 하나님이 올라간다. 우리가 모든 일을 위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며,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 인한다는 우리의 체계에 위배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복음의 의도와 복음의 율조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복음에 입혀주신 그 영광과 광채를 훼손시키는 것입니다.

3. 믿음의 언어를 발하라.

이리하여 우리는 어째서 믿음이 이 구속의 은총을 받는 방편인지 그 이유를 배울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의 성질에는 이 구속의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아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속의 은총을 누리기 위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것은 아주 지당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믿음이라는 방편을 통해 구속의 일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을 영화롭게 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이 구속의 은총을 받는 이들에게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야말로 합당합니다. 믿음은 구속의 일에 있어서 진실한 것이 무엇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영혼은 자신의 의식과 행동 속에서, 구원 문제 전체에 있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믿음은 사람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입니다. 믿음은 모든 구속의 영광을 오로지 하나님께만 드립니다.

사람이 구원을 얻게 위해서는, 자신을 비우고, 자기가 ‘곤고하고, 가련하며, 비참하고, 눈멀었으며, 벌거벗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겸손은 참된 마음의 위대한 요소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막10:15)라는 성경 말씀처럼 진정으로 구속받은 이는 어린 아이같이 구원을 받습니다. 믿는 영혼은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습니다.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시115:1)라는 말씀이야말로 믿음을 가진 영혼의 언어입니다.

4. 하나님만을 자랑하라.

우리는 하나님만 높이며 모든 구원의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을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그만 바라보며, 자기 자신을 의존하는 것을 죽이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성향을 죽여야 합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힘이나 선함을 의존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행복을 기대하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령을 떠나서 즐거움을 누리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그렇게 해야 행복을 얻는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는 우리에게 하나님 한 분만을 높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고 신뢰함으로써 말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자랑하는 자는 주를 자랑할지니라-역자주)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누가 자기는 회개하였고 거룩함을 입었고 자기 마음에 참된 탁월함과 신령한 아름다움을 부여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자기의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예와 복락을 얻었으며, 영생의 후사가 되었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십시오. 하나님만이 자기를 이 세상의 가장 악한 자들과 다르게 하시고 지옥에서 저주받은 비참한 자와 다르게 하신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많은 위안과 영생의 강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그는 자기의 소망을 이유로 거만해 하지말고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더욱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은 그런 은총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임을 생각하고 하나님만 높여야 합니다. 어느 사람이 거룩함에 있어서 뛰어나며 선한 일에 있어서 넘치는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그것의 영광 중 어느 것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 이 설교는 1731년 7월 8일 보스톤에서 열린 공개 사경회에서 행한 것이며, 설교를 들은 여러 목회자들과 그 밖의 사람들의 요청에 의하여 출간된 것이다. 이 설교는 책으로 출간된 에드워즈의 첫 번째 글이다. )

 

 

포도나무선교회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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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차의 <마지막 신호>, 비성서적인 허황된 망상”

허호익 교수 <현대종교> 11월호서 주장··· 일각에선 “이 시대에 꼭 읽어야 할 책”



허호익 교수가 월간 <현대종교> 11월호에서 ‘데이비드 차’가 쓴 <마지막 신호>(예영커뮤니케이션) 등에 대해 비판했다. <마지막 신호>는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이 시대에 꼭 읽어야 할 책”, “꼭 읽으십시오, 깨어 시대를 준비하는 사람이 됩시다”라는 말로 소개되며 시대를 깨우는 매우 중요한 책인 것처럼 알려지고 있는 책이다. 데이비드 차는 이 책을 통해 유명해졌고 전국 교회에서 간증집회를 하고 그의 간증 동영상이 전파되는 상황이다.


허 교수는 ‘마지막 신호는 허황된 음모와 망상을 계시인 것처럼 주장한다’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마지막 신호>에 대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고 비성서적인 허황된 망상을 주님의 계시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교회론적으로 성서해석과 계시론적으로 이단성을 의심받을 만한 주장이 주를 이루는 책”이라고 혹평했다.


허 교수는 데이비드 차의 <마지막 신호>의 핵심 주제에 대해 △예수회가 배후에서 가톨릭을 조종하고 WCC(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를 끌어들여 세계종교를 통합한다 △유럽연합(EU)과 같은 경제 블럭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세계단일정부를 구성한다 △적그리스도가 등장한 후 모든 사람들을 통제하고 노예화하기 위해 강제로 생체칩을 받게 한다 △이를 거부하는 신자들을 죽일 계획이 마지막 신호다라고 정리했다.


마지막 신호에선 생체칩에 대해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는 666으로 설명하며 ‘마지막 신자’들은 생체칩 받는 것을 거부하고 순교를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허 교수는 “이런 주장들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수십년 동안 인터넷 등에 떠도는 무수한 대중적인 음모론을 취합하고 나열한(것)”이라며 “그것이 마치 현재 진행되고 있는 ‘놀라운 비밀’이요 ‘숨겨진 계획’(7쪽)으로서 ‘주님의 계시’인 것처럼 주장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허 교수는 데이비드 차가 <마지막 신호>에서 “UN은 WFN-IGP라는 세계단일정부 촉진기구를 공식적으로 출범시켜 이제 공개적으로 통합운동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 것에 대해서도 “WFN-IGP는 세계단일정부 촉진 기구가 아니라 세계연방운동 국제정책기구라는 소규모 사설단체다라며 UN과는 무관하다고 지적한다.


또한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로서 세계단일정부가 구성될 것이며, 그것이 마지막 때의 징조다”라는 주장에 대해 허 교수는 성경 마태복음 24장의 말씀을 반론으로 제시했다. 



 데이비드 차의 주장  허호익 교수의 비판
 UN은 WFN-IGP라는 세계단일정부 촉진기구를 공식적으로 출범시켜 이제 공개적으로 통합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WFM-IGP’라는 단체는 ‘세계단일정부 촉진기구’가 아니라 “세계연방운동 국제 정책기구”(world federalist movement, institute of global policy)라는 소규모 사설단체로서 UN과 무관한 임의단체



예수께서 말세의 징조로 ‘단일정부가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는 것이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마 24:7) ‘세계가 분열과 전쟁으로 치닫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왜 세계단일정부를 말세의 징조로 보느냐는 것이다. 허 교수는 말세의 징조로 세계단일정부가 구성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나 성서적으로 맞지 않다고 분석했다.


 데이비드 차의 주장  허호익 교수의 비판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로서 세계단일정부가 구성될 것이며, 그것이 마지막 때의 징조다.  예수께서 말세의 징조 중 하나를 민족과 민족이, 나라와 나라가 하나 되어 ‘단일정부가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마 24:7) ‘세계가 분열과 전쟁으로 치닫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세계단일정부가 구성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나 성서적으로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이외에도 허 교수는 “(데이비드차가)기독교지도자들이 종교통합을 이루기 위해 UPF(Universal Peace Federation)라는 종교통합기구를 통해 매우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추진”하고 있다며 “이 단체가 UN 산하 종교통합 기구”(128쪽)라고 주장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사실상 UPF는 천주평화연합을 지칭하는 2005년 창설한 통일교 산하단체라는 것이 허 교수의 지적이다.


유행하는 생체칩에 대한 해석도 비판했다. 데이비드차는 소위 베리칩이라고도 불리는 생체칩이 적그리스도요, 짐승의 표인 666이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일지라도 생체칩을 받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허 교수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초기의 바코드는 코드인식을 위한 가이드 바를 왼쪽, 가운데, 오른쪽에 만들어 두었는데 이 세 줄은 길이가 길어서 금방 구분되고, 이는 숫자 6에 해당하는 코드이기에 666이라 불리게 되었다. 상품에 바코드가 붙게 되자, 요한계시록의 오른손과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은 자만이 매매할 수 있다는 구절(계13:15~16)과 관련시켜 바코드가 짐승의 표인 666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 국민일보에 칼럼을 기고하는 강덕영 장로 



그러나 바코드가 666이라면 지난 60년 동안 사용한 바코드 500만 개에 해당하는 모든 품목이 666이 되는 것이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선으로 된 바코드보다 더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 굵기가 다른 흑백 막대를 조합한 이미지로 된 QR(Quick Response) 코드로 빠르게 교체되고 있다. 따라서 더 이상 바코드 666타령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요한계시록 본문에는 ‘두 번째 짐승’을 표시하는 “그 수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데, 그 수는 육백육십육”(계13:18 표준새번역)이라고 했다. 따라서 저자가 말하는 바코드나, 슈퍼컴퓨터나, 생체칩은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배제되어야 한다.”


허 교수는 “저자도 인정한 것처럼 생체칩은 의료용, 금융용, 매매용, 미아방지용, 출입제한용, 위치추적용, 보안허가용, 자신보호용, 신분확인용, 범죄예방용(145~146쪽) 등 다방면에 이미 사용되고 있다”며 “생체칩이 666이라면 이미 생체칩을 위의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고 있는 크리스천들은 모두 ‘사단의 아들’이라는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한편 교계 일각에서는 베리칩에 대해 데이비드 차와 마찬가지로 짐승의 표나 수로 해석하는 흐름이 존재하고 있다. 베리칩의 등장을 마지막 시대가 가깝다는 표시로 받아들이며 깨어 기도해야 하고 더욱 주의 오심을 사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강덕영 장로(한국유나이트문화재단 이사장, 갈렙바이블아카데미 이사장)는 국민일보 10월 4일자에 쓴 ‘짐승의 표’(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0005&sCode=0003&arcid=0006497570&code=23111413)라는 칼럼에서 “기독교인들이 이것(베리칩)을 성경적으로 풀어내면 요한계시록에 예시되었던 6.6.6이다”, “6.6.6의 현대적 표현이 바로 베리칩이라고 보는 것이다”라며 “기독교인들이 더 깨어 기도해야 할 때이다”라고 글을 마무리했다.



출처: 기독교포털뉴스 /정윤석기자


소모하는 설교사역



서울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주일 설교사역을 한지가 어언 9년이 되었다.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 교인수가 장년이 30명 정도였다. 젊은 신학도 시절에 많은 교인들 앞에서 설교하리라는 비전을 하나님이 꺼구로 응답해 주신 셈이다. 나 같은 죄인이 한 영혼 앞에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면 감사해야 할텐데, 그 당시 나는 그렇게 작은 인원앞에서 설교하는 것이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설교를 하고 천안에 있는 신학교 사택으로 내려가면서 대형교회 목사와 자신을 비교하며 자기 비애에 빠지곤 하였다. 미국에서 같은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는 몇 만명 앞에서 설교하는데 똑 같이 설교를 준비해서 나는 고작 그 보다 천분의 일도 안되는 인원앞에서 설교를 하느냐고 옆에 있는 아내에게 투덜... 대곤 하였다. 거기다가 내가 그 목사보다는 설교를 훨씬 잘 하는데 왜 나는 이렇게 묻혀 썩고 있느냐는 독한 교만이 나를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위인이었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9년이라는 세월은 이런 야망과 교만에서 서서히 자유하는 연단의 기간이었다고나 할까. 다행히 지금은 교인수에 별로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교인수가 전보다는 좀 늘었지만 여전히 작은 무리들에게 설교하고 있다. 아직도 어떤 때는 내가 마치 허공에 대고 설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허탈함을 느낄 때가 있다. 얼마 안되는 교인들 중에 내 설교를 제대로 소화하고 그 말씀을 심각하게 듣고 말씀대로 살려는 이는 극소수이며, 대부분의 교인들은 아무리 열심히 설교를 준비하고 기도해서 전해도 설교 들으나 듣지 않으나 아무 상관없이 산다.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듣고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이들을 보면 복음 사역은 내 청춘과 함께 모든 것을 소모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말씀을 바르게 전해 교인들을 새롭게 하려는 뜨거운 열정이 식지 않으면서도, 10년이 지나도 도무지 변하지 않는 교인들을 보며 지치고 낙심하지 않는 오래 참음이 설교자들에게는 꼭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연약한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주님이 간혹 말씀에 목말라 하며 말씀대로 살려고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착한 양들을 만나게 하신다. 우리 교회에 매주 녹음한 설교를 3번 다시 듣고 설교 원고까지 받아가 꼼꼼히 읽고 말씀을 온 가족이 나누는 집사가 있다. 그 만큼 말씀을 온전히 체화하여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니 난로 새로워지는 그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런 교인이 목사가 지쳐 탈진할 것 같을 때 큰 위로와 힘이 된다. 대부분 교인들은 목사의 설교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다. 사실 목사는 말씀을 진지하게 듣는 몇 사람을 위해서 설교하는지도 모른다. 회중 가운데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소모하는 것 같은 설교사역은 참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박영돈 목사의 페이스북


29 http://cafe.daum.net/waterbloodholyspirit/HaqA/311


위의 책은 “잃어버린 형제들(개신교인들)”을 “어머니 교회(로마 카톨릭)”로 돌아오게 하려는 로마 카톨릭의 2013년 ‘새로운 복음화 프로그램’에 관한 것이다.

 

이 책이 발간되자, CFR 회원으로 종교 통합에 앞장서고 있는 대표적인 거짓 목자 릭 워렌이 다음과 같은 추천의 글을 올려놓았다.

 

“영혼들을 예수님과 교회(로마 카톨릭)로 돌아오게 하려는 로마 카톨릭의 미션은 오늘날과 같이 도전적인 시대에 매우 중요한 일이라 봅니다. 나는 이 새로운 복음화 프로젝트(개신교인들을 카톨릭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계획)에 전적인 지지를 보냅니다.”

 

기사원문>> Rick Warren Endorses 2013 Book, “Catholics Come Home” – Calls Catholic Evangelization “Critically Important”

 

 

* 예수회는 16세기 로욜라가 창립한 카톨릭 내의 결사 단체로 종교개혁으로 몰락해가는 로마 카톨릭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카톨릭 내에서 교황청의 권력을 옹호하며, 기독교를 핍박·견제(잔멸)하기 위해 세워졌다.

 

최근 예수회가 장악한 로마 바티칸은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를 흡수 통합하여 교황청의 권위 아래 두는 것(종교통합)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역사상 처음으로 예수회 출신 교황이 탄생한 2013년은 이런 로마 바티칸의 계획이 좀 더 적극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잃어버린 형제들(개신교인들)”을 “어머니 교회(로마 카톨릭)”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로마 카톨릭의 ‘새로운 복음화 프로그램’이 발표되었다.

 

한심스러운 것은 개신교를 로마 바티칸에 흡수 통합시키려는 이런 계획에 ‘릭 워렌’과 같은 거짓 목자들이 앞장을 서서 성도들을 이 배도와 미혹의 길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이다.


CFR 회원으로 종교 통합에 앞장서고 있는 대표적인 거짓 목자 릭 워렌

 

  

로마 바티칸은 현재 알파코스, 뜨레스 디아스, 관상기도와 같은 영성프로그램들과 WCC와 같은 단체들을 동원하여 지금도 “잃어버린 형제들(개신교인들)”을 “어머니 교회(로마 카톨릭)”로 돌아오게 하는 일들을 진행시키고 있다.

 

문제는 이 사실에 무지한 한국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이 이런 흐름에 동조하여 자신도 모르게 한국 교회와 성도들을 배도의 길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지는 죄가 아닐지라도 무지의 결과는 참혹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함께 멸망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마 15:14). 


 

- 예레미야 -

출처: 물과피와성령

칼빈에 대하여

 

 1.칼빈과 제네바

 

  존 칼빈은 1509 7 10일 피가르디 지방의 북부에 속하는 교회도시 노용에서 아버지 게라드 코뱅과 어머니 잔느 라 프랑스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 났다.아버지는 이름있는 법률 자문관으로 중상위권의 생활을 누렸으며,이러한 아버지의 덕분으로 칼빈은 귀족의 집에 머물면서 일종의 가정교사 역활을 했다.그러다가 14세가 되어서 드 몽트모 가문의 자녀들과 함께 파리로 유학의 길에 나섰다.

 

 칼빈은 파리의 드 라 마르슈 대학에 입학해서  프랑스와 라틴어를 배우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배웠다. 그러다가 부모의 걱정에 못 이겨서 더 보수적인 드 몽테규 대학으로 옮겼다.여기서 토론술을 배웠다.

 

 1528년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칼빈은 오를레앙의 법과대학에 입학해서  일 년간 머무르다가 부르쥬로 옮겨서 국제 법학자 알키아트의 강의를 들었다. 이 과정에서 칼빈은 오를레앙에서 인문주의를 그리고 부르쥬에서는 개신교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칼빈은 12세된 소년으로서  장차 칼빈의 동역자가 될 베자를 사귀었다.

 

 1531년 아버지의 사망과 더불어서 칼빈은 다시금 파리로 돌아와서 포르테 대학에 들어 갔는데 이곳에서 부데,콥등과 더불어서 인문주의의 모임에 가담 하였다.

 

 1532 23세의 나이에 자신의 최초의 저서인  세네카의관용에 관하여”라는 주석집을 발간 하였다.

 

 이 무렵 칼빈은 이미 파리의 개신교 모임에 가담하고 있었으며,그의 첫 저서가 출판됨과 동시에  왕 프린시스 1세는 개신교도인 휴그노들에게 박해를 가하였다.

 

이러한 사이에  1533  칼빈은  친구인 콥이 성바르브 대학의 교수이자 학장에 취임하는 계기를 맞이해서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주제로서 그의 취임 연설문을 작성해 주었다. 소르본느에서는 이 연설을 국회에 이단으로 제소 하였으며,국회는 이에 동의 했다. 이와 더불어서 1534 1018일 밤에 열광적인 개신교도들이  혐오스럽고 도저히 참을수 없는 교황청 미사의 악덕에 관하여 라는 현수막을 파리 전역과 심지어는 왕실의 정문에  부착함으로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 하였다.

 

 칼빈은 1533년 부터 1534년 사이에 나바르의 여왕인 마가리트의 보호를 받으면서 지냈다. 이 기간동안에 칼빈은 프랑스의 인문주의와 개신교주의의 대가인 르 페브르와 사귀었다.

 

 1534 10월에 칼빈은 고국을 떠나서 스위스에서 은신처를 찾기도  하였다.칼빈은 프랑스의 개신교도 망명잗ㄹ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슈트라크 부르크를 방문하였으며,그곳의 목회자인 부처로 부터 환영을 받았다.그곳에서 바젤로 옮겨 갔으며,거기에서 기독교 강요의 초판을 저술하였다.

 

1) 칼빈의 개혁

 

  파렐은 27세의 칼빈보다도 20세가 더 많았다. 그러나 아직도 젊은 피가 끓은 사람으로서 칼빈과 한 마음이 되기에 충분 했다. 칼빈은 성베드로성당에서 매일같이 바울의 서신들을 가르쳤다.

 

 그러는 사이에 1536 10월 베른은 새로운 점령지역에 대한 개신교와 로마주의 사이의 대토론회를 개최 하였으며,칼빈은 이 자리에서 교부들을 낱낱이 열거 함으로서 로마주의자들을 납작하게 만들었으며,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더불어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듬해 1537 1월에 칼빈은 대의회 앞에서 자신의 개혁안이 담긴 비망록을 전달 하였다. 우리 주님의 거룩한 만찬,공중예배에서의 찬양,어린이의 종교교육,결혼등 4가지 였다.성만찬은 가급적으로 자주 집행하는 것이 좋으나 현재적인 형편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  행하는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불합당한자는 주님의 몸을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출교에 관한 치리를 제정해서 참여치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회중에게는 시편찬송을 적극적으로 권장함과 동시에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순수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간략한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을 작성해서 목회자가 직접 가르치도록 했다. 결혼은 지금까지 악하고 비성경적인  교황청의 법에 의해서 이루어 졌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새로운 규정을 제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칼빈의 새로운 제안은 교회의 행정에 관한 조항으로서 소의회와 대의회를 통과 하였다. 성만찬은 일년에 4차례 집행하며,결혼광고는 예식거행에 앞서서 3주 동안  광고하여야 한다고 규정 하였다.

 

 2) 칼빈에 대한 배척과 칼빈의 이동

 

 제네바 시는 파렐과 칼빈의 가르침에 따라서 종교개혁을 추진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다같이 개혁에 찬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1538 1월에 시의회는 원치않는 사람에게는 성만찬을 베풀지 않는다고 결정하였으며, 2월의 시의회 선거에서는 파렐과 칼빈을 반대하는 4사람이 특별 평의원으로 당선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른 시의 간섭과 더불어서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재세례파와 손을 잡았으며, 파렐과 칼빈은 아리우스주의자 이며,자유방임주의자라고 비난 하였다.베른의회는 제네바를 위시한 전지역을 그들의 손에 넣을려고 하였으며,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연약한 제네바 시의회는 3월에 이르러서 베른의 예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 하였다.

 

 이러한 사태변화 가운데서 꼬로우,파렐,칼빈은 제네바시를 떠날것을 명 받았다.

 

 파렐과 칼빈은 제네바를 떠났으며,칼빈은 허탈감에 빠져서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연구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그간 파렐과 더불어서 3년동안 개혁을 시도 하였던 모든 일이 허사로 끝난데 대한 분노와 갈등을 이겨 내면서 연구와 동시에 프랑스 난민들을 돌보는 목회일에 전념 하였다.

 

 3) 다시 돌아온 칼빈과 그의 개혁

 

 파렐과 칼빈이 떠난 제네바의 상황은 예전보다 좋아지지 않았으며,오히려 악화되는것 같았다. 새로 부임한 목회자를 특별평의원들은 자기의 종같이 부렸으며,모든 가장들에게 교회에 참석토록 하는 의무규정을 부과 하였으며,주의 만찬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도시의 도덕적 수준은 날로 저하되어 갔다. 이렇게 해서 평의원들은 인기가 떨어지고 다음해 선거에서 재당선하지 못했다.

 

 이때로부터 칼빈을 다시 초청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1539 10월 대의회에서 대표자를 보내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칼빈은 윔스국회에 참석중이었기 때문에 답장을 유보한채 번민에 있었다 이 때 파렐릐 충고가 크게 작용 하였다. 파렐은 제네바가 차지하는 지역적인 중요성을 들어서 제네바가 개혁되면 인근 이탈리아,프랑스,스위스의 복음화가 가속화 된다고 강력하게 설득하였다. 칼빈은 3년여 동안 제네바를 떠나 있다가 1541 9 13일 다시금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리고 제네바 교회규범을 제정해서 의회에서 통과 시켰다.이제는 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엄격한 훈련과 경건생활 실천을 위한 각종제도와 이단을 색출해서 처리하는데 이르기까지 칼빈은 정열적으로 개혁을 추진 하였다.

  

2. 제네바의 개혁추진과 칼빈의 신학

 

 칼빈은 제네바에서 소위 말하는 외국인 이었다.이런 그가 제네바에서 개혁을 추진하기는 이루 말할수 없이 힘들었다.다시 돌아온 칼빈을 그들은 조직적으로 괴롭혔으며, 칼빈과 이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마찰이 끊임없이 있었다.뿐만 아니라 제네바로 많은 이단성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칼빈의 개혁을 율법적인 독선이라고 비난 하였다.이들의 출현은 칼빈을 더욱 힘들게 하고 개혁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 하였다. 마치 루터에게서 농민전쟁이 예기치 않는 결과를 초래 하였듯이 칼빈도 이들을 맞이해서 개혁의 새로운 국면을 이루어 간다.

  

1)제네바의 현지인과 자유주의자.

 

 칼빈의 개혁은 이단을 색출하고 처단하는 데에서 다른 사람과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그래서 이단성이 있는것은 정죄 하였으며,자유주의자들을 맞이 해서는 전통신앙과 신학을 고수함으로써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2) 교리적인 문제

 

 칼빈을 괴롭혔던 교리적인 문제는 미카엘 세르베투스 와의 신학적 논쟁과 그에 대한 처형에서 야기 되었다. 칼빈은 그를 처형시킴으로서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비난을 받아 왔지만 그 당시의 상황으로는 어쩔수 없었던 결정이라고 보는 견해가 더 많은 형편이다.

  

 3)훈련을 강조하는 칼빈의 개혁

 

 제네바는 본래적으로 자유스러운 분위기 였고 자유가 강조되는 나라 였다 그래서 오히려 이것이 방종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칼빈은 종교개혁의 제2세대 사람으로서 상당히 문란해 있던 사람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생활규범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부임하자마자 4가지 개혁안을 부르짖었다. 4가지 개혁안 중에서 교인들의 생활규범과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립이 가장 중요하였다.이렇게 해서 어느 정도 질서가 잡혀 가는듯하였으나 칼빈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강하게 요구 하였다.

 

  [1] 생활규범 강조

 

 제네바 시를 이끌어 왔던 사보이 가문의 자유주의자들은 종교개혁과 더불어서 자신들의 방탕한 호기를 펼칠 기회를 맞이 하였다.그래서 이들은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방종에 빠지기 시작 하였다. 이러한 제네바를 바로잡기 위해서  칼빈은 무릅을 쓰고 훈련을 강요하기 시작 하였다.

 

 훈련의 목적은 교회를 오염과 세속화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교인들이 악한 자들과 접촉함으로서 타락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고 범법자들로 회개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에 동참케 하려는데 있었다. 이러한 3중적인 목적을 가지고 훈련을 시키는데 첫단계는 개인적인 권면 둘째 단계는 공중앞에서의 권면 세째단계는 주의 만찬에 참여치 못하게 했다.

 

 엄중한 죄를 지은자는 감독ㅇ나 목사가 개인적으로 출교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전체의 회의를 거쳐서 출교를 명했다 그리고 회개하였을 경우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특히 칼빈은 목회자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평신도들 처럼 엄격한 훈련울 받아야 했다. 목회자는 선발에서 부터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였다. 성경지식과 교인들의 교화능력 여부를 시험을 통해서 알아본 다음에 품행에 대한 심사를 통해서 선생이 될수 있는가를 분석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단 선발되면 후보자를 소회의에 넘기고 소회의는 주민들 앞에서 설교케 한 다음에 주민들은 설교를 통해 어떤 깨달음을 받았다고 보고케 했다. 이렇게 3단계를 거친 심사에서 합격하면 목회자로 세웠다.

 

 이상과 같은 엄격한 생활규범은 생활전반에 걸쳐서 실시 되었다. ,도박,주정,술집출입의 횟수, 방종,사치,분수에 넘치는 접대행위,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분수에 넘치는 의복 착용,음란하거나 비신앙적인 노래등 금지,혹은비난,구금형을 가하였다.심지어는 잔치집의 접시까지 세웠다.

 

 주민들의 교회참석 여부를 감독하는 사람이 파견되었으며,교회법원의 사람들이 가정을 일년에 한차례씩 찾아가서 신앙상태를 점검 하였으며,심지어는 길거리에서 무심코 밷은 말까지도 책임져야 했다.

 

 칼빈의 훈련은 방종에 빠진 제네바를 바로 잡기에 충분 하였다.물론 칼빈도 힘들었지만 이상과 같은 엄격한 규율은 네델란드와 스코틀랜드,그리고 영국의 청교도에 이르기까지 개혁교회의 주된 윤리가 되었으며,현재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는 좋은 전통이다.

 

  [2] 학교 설립

 

 칼빈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소요리문답을 작성해서 어린이들에게 교육시켰으며,모든 목회자들이 책임을 지게 했다.그러나 칼빈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559 65일 제네바 아카데미 라는 학교를 세우고서 유럽의 유명한 교수들을 초빙하였다. 이 학교는 일반학 과정과 신학과정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유럽의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 들었다. 그 가운데 스코틀랜드의 개혁자 요한 녹스가 있었으며,네델란드의 아르미니우스는 베자에게서 신학을 배웠다.

 

 [3] 칼빈의 목회와 그의 최후

 

 제네바에서 칼빈은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목회에 임했었다. 제네바에서 처음으로 발을 들여 놓았던 1536년으로 부터 3년간 의욕에 찬 목회를 감행하다가 슈트라스부르크로 쫒겨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1541년 다시금 제네바로 부임해서 처음14년 동안은 반대자들로부터 어려움을 겪으면서 목회를 했다.그러다가 1555년부터 1564년 사망시까지 최후적으로 9년동안 소신 있는 목회를 할수 있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목회하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월급의 증액을 거부 하였으며,그나마도 구제와 헌금으로 거의 다 바쳐 버렸다.

 

 그는 매일같이 저술활동,설교,강의,교회법원의 회의참석, 목사회의 참석,손님접대,각종 자문등 경건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감당하기 벅찬일을 했다. 그는 종합병원이라고 할수 있을 정도로  많은 병을 지니고 있었다.그가 걸을수 없게 되자 설교단 의자로 옮겨줄것을 부탁 하였다. 1564 2 6  마지막 설교를 하였으며,4 2일 에는 교회로 옮겨가서 베자로 부터 마지막 성찬을 받았다.

 

 그는 1564 425일 자신의 마지막 소원과 증언이 담긴 글을 남겼다.

 

하나님께 대한 송구스러움과 감사로 가득찬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의 부족함,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의 선택,그리스도의 넘치는 공로 등을 부드럽게 표현 하면서 이제는 세상의 모든 논쟁과 다툼을 그치고 저 멀리 하고서 하늘나라를 바라본다고 하였다. 그는 4 26일 소위원회로부터 친구들에게 이르기까지 일일이 다 작별인사를 하였다. 519일에는 목회자들을 다 초청해서 저녁을 나누었다.파렐은 80세가 넘은 나이로서 칼빈의 임종을 보러 왔다.칼빈은 마지막 몇일동안 기도와 시편의 위로의 시를 암송하는 일에 전념하다가 527일 동녁에서 뜨는 해를 받으면서 54년간을 이 세상에서 살다가 조용하게 하는나라로 옮겨갔다.

 

  

 

<칼빈의 사상정리>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속에 있는 구원

 

칼빈은 인간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어떤 가능성도 배제한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능력과 뜻 에 의해서만 인간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한다. 마치 토기장이가 한 그릇은 귀하게, 한 그릇은 천하게 그 뜻대로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 모든 인간 구원의 가능성이 달려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칼빈은 어거스틴의구원받을 자의 예정’을 발전시켜 한 걸음 더욱 나아가 구원받을 자의 예정과 멸망 받을 자의 예정도 말하는이중예정론’을 말한다. 따라서 칼빈에게서 인간의 의지는 노예적이며, 성령이 없으면 자유가 없다. 마치 인간 의지는 두 기사 앞에 놓인 짐승 혹은 말과 같은 존재이므로 성령이 타면 천국으로, 악령이 타면 지옥으로 달려간다. 그러므로 인간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 1%, 인간의 의지 0%로 이루어짐을 말한다.

 

거기에 비해 중세 신학에 영향을 미친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의지 50%, 하나님의 은총 50%를 말하는 신인협조설을 주장하며,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 1%, 인간의 의지 1%를 말하는 복음적 신인협조설을 주장한다.

 

행동주의로 나타나는 성화 신앙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통치를 말하면서도 행동주의적 성화(聖化) 신앙을 강조한다.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 누가 하나님의 예정에 들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행동주의 신앙이 나오게 된다.

 

따라서 칼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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