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싸이, 장막성전 유재열 사위 맞습니다
2012년 12월 04일 (화) 02:19:53 전정희 gasuri48@amennews.com


   

싸이! 요한계시록! 666!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세 단어가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지난 7월 15일, 가수 싸이(YG엔터테인먼트 소속)가 낸 <6甲>이라는 6집 앨범이 요한계시록의 ‘666’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네티즌들이 제시하는 나름의 근거는 첫째, 앨범 발매일 2012년 7월 15일을 일루미나티(프리메이슨의 상징) 수비학으로 더하면 2+0+1+2+7+1+5=18=(6*6*6)=666이 된다는 것이고, 둘째, 앨범의 포장과 자킷에 일루미나티의 상징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자켓 테마에 일루미나티의 ‘눈’(호루스의 눈)이 있고, 6집에 맞춰서 6을 상징하는 디자인을 했으며, 자켓과 CD디자인에 다산의 신 ‘다곤’이 등장한다는 설명이다.

또한, ‘흠뻑쇼’에서 싸이가 청중들에게 한 멘트 중 “진짜 멋있습니다. 여기가 낙원이라 생각하시는 분은 ‘소리 질러’”라고 외친 것이 호루스의 눈이 다스리는 세상 낙원을 지칭한 것이라고도 설명한다.

이후 “싸이가 요한계시록의 666”이라는 주장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논란이 되고 있는 가운데, ‘싸이와 지구종말론’까지 합세했다. 16세기 프랑스의 의사이자 점성술사인 노스트라다무스가 싸이의 출현과 지구종말론을 예언했다는 주장이 해외 네티즌 사이에서 퍼지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 것이다.

   
▲ 2012년 11월 30일자 <노컷뉴스>, "노스트라다무스가 '싸이 종말론' 예언 충격"

내용인즉 “춤추는 말의 숫자의 원이 9개가 되는 때 고요한 아침으로부터 종말이 올 것”이라고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했는데 한국이 바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이며, 싸이의 뮤직비디오가 유튜브에서 곧 10억의 조회 수에 도달하게 될 것인데 10억이면 0이 9개이라는 것이다. 또한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의 유튜브 조회수 10억 회 돌파 예상일은 12월 21일이라고 한다. ‘2012 지구종말론’과 ‘싸이 종말론’이 한 데 버무려진 모양새다(2009년 02월 19일자, “유행하는 ‘2012년 지구 대재앙’ 예언” 기사 참고).

그래서 난데없이 기자(교회와신앙 www.amennews.com)에게도 최근 “싸이의 종교가 뭐냐?”고 묻는 상담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 혹은 이단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싸이가 신천지냐?”고도 묻는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도대체 그의 종교는 뭘까? 그가 종교를 갖고 있기는 한 걸까? 기자는 며칠 동안 싸이의 소속사인 YG엔터테인먼트에 전화통화를 시도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단, 취재결과 싸이의 장인어른이 장막성전의 교주였던 유재열 씨(64)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가수 싸이의 종교는 알려진 바 없지만, 그가 1960년대 대표적 사이비종교였던 장막성전의 ‘어린 종’ 유재열 교주의 사위라는 말이다. 장막성전은 오늘날 가장 사회적 해악을 끼치고 있는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신천지, 교주 이만희)의 모태가 되는 사이비종교였다(2008년 4월 7일자, “‘해 아래 새 것 없다’ 신천지의 계보” 기사 참고).

그렇다면 이제 싸이의 종교가 더욱 궁금해진다. 혹은 그의 가족들은 종교가 뭘까? 그러나 사실 그분들의 종교가 현재 무엇이든 별로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유재열 교주는 지난 2002년 월간 <현대종교> 심우영 편집장과의 인터뷰(“20년 만에 입을 연 어린 종 유재열, 장막성전의 유재열은 이제 없습니다”)를 끝으로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싸이는 종교인이 아니고 연예인이다.

그러나 쓸데없는 논란확산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싸이측의 입장표명을 기대해 본다.

 

 

 

사랑에 닻을 내리기(Remaining Anchored in Love)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할 때,
우리는 지나치게 대비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공격을 받을 때 무슨 말을 할까,
조사를 받을 때 어떻게 대응할까,
그리고 비난을 받을 때 어떤 변호를 할까 하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바로 이러한 혼란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감을 잃게 하고,
우리의 자아 의식을 약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조금도 걱정하지 말 것이며,
우리가 필요한 말과 지혜를 우리들에게
주시라는 것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준비한 말이
많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닻을 내리고
우리는 누구이며 그리고 왜 우리가
여기에 있는가에 대하여
자신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장이 예수님의 심장과 연결되어 있으면,
말을 해야 할 때에 우리는 항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6) 미움의 본성적 성향

 

교리 문답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질문에 대해 지킬 수 없다. 나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나의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한참 모자르다는 데에는 아무도 반박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마땅히 줄 것을 주는 것을 의를 행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때 오직 위선적인 몇 사람만이 자신들이 의를 행하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미워하는 성향에 대한 문제는 전혀 다른 질문이다. 

 

성경은 인간의 미움의 성향에 대해 자명하게 선포한다. 예를 들어 바울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7)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든 불신자든 모든 사람 안에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설명은 어려울 수 있다. 불신자의 삶 가운데 죄를 저지하는 성령의 영향력이 여전히 나타나는 상황에서 죄를 극복하는데는 반드시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성령의 그러한 수고를 인식하면서 인간들이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나의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고백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마땅히 우리가 본성상 죄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고백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본성이라는 용어는 물론 죄로 타락한 우리의 속성에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잠시라도 죄가 자연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또한 언약의 율법에 따르는 삶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해도 안 된다. 사실, 죄야말로 비정상적이며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더욱이 신앙 고백은 성향이 있다고 말한다. 만일 이 표현이 말이나 생각에까지 적용되지 않고 오직 행위에만 국한된다면 미워하는 성향은 충분히 통제될 수 있다는 생각의 여지를 남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워하는 성향이 나타나는 실제 상태에 대해 아직 언급하지 않았다. 인간의 미움의 성향을 분명히 보기 위해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의 관계를 따로 구별하여 고려해 보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벗어난 영역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능할까? 이 질문은 위의 성경적인 점검에 의해 이미 답변이 된 것 같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하나님을 찾으려는 많은 진지한 노력이 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하나님을 위해 평생 수고하고 봉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의 질문은 과연 그들의 모든 섬김과 추구가 뭔가를 바라지 않고 행하여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보상을 바라고 행한 것이라면 그들의 섬김과 추구는 본질적으로는 사랑이 아니라 교만을 위한 것이거나 또는 이기심에 의한 것이 된다. 물론 사랑 안에도 언제나 자신을 위해 뭔가를 얻으려는 바람이 있다. 그러나 사랑에 의한 바람은 보상이나 지불 개념이 아니다. 또한 사랑에 의해 나타나는 섬김의 열망 역시 우리가 모든 것을 받았다는 확신에 근거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섬기는 것은 자신의 기쁨을 위한 간절함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계속 인류를 끌어당기시고 호소하신다는 사실이다. 순수하게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사람이 뭔가를 추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뭔가를 먼저 시작하셨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일 뿐이다. 만일 아무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면 성경은 다음과 같이 사람을 유죄로 선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1:20). 그렇다면 하나님의 호소와 영향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뜻하는가? 일종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 같은 것이 그 결과가 아닐까? 이때 그들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굴복을 의미하며 사랑의 표현도 굴복으로 하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반응으로 나타난다.

 

믿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유지되고 이끌린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러한 증거를 그들의 여러 종교적인 섬김과 헌신을 통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종교 숭배는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신에 굴복하는 우상 숭배이다. 이러한 숭배는 언제나 말씀의 계시와 언약의 말씀과 언약의 율법을 거절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그들의 숭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노골적인 불순종이다. 반면 참 사랑이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언약을 통해, 언약의 말씀 안에서, 언약의 율법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기로 선택하신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거절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재미난 사실은 본성상 하나님을 미워하는 성향이 인간이 스스로 만든 하나님에 대한 견해를 사랑함으로 계속 가려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때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련하여 인간의 자결권이 분명하여진다. 심지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에 있어서 인간 멋대로 결정하여 행한다. 사람이 그러한 자결권을 더욱 실현할수록 그들은 더욱 그러한 종류의 예배에 자신을 헌신하여 드린다. 이스라엘의 산당에서 드려진 번제는 예루살렘 제단에서 드려진 제사보다 훨씬 더 많았다. 오늘날도 이 세상은 종교적인 헌신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들은 언약의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절하고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그분을 사랑할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 가운데 이제 이웃을 향한 사랑을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이웃 사랑이 존재할 수 있을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여러 모양으로 서로 극진히 사랑하는 모양은 부인할 수 없다. 더욱이 만일 우리가 그들의 이웃 사랑을 순전히 이기심으로 치부한다면 이는 분명히 부당한 처사이다. 그들에게도 이타주의적인 이웃 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웃 사랑은 그들의 관점과 생각에 따라 이웃을 사랑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 믿음이 없이는 사람은 이웃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믿지 않는 자들의 문제는 하나님을 위하는 관점 및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웃을 보지 못하는 점이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이웃을 진정으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잘못되고 결함있는 편견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의 이웃을 참으로 알 수 있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어떤 사람이 잠깐이라도 이웃을 사랑하다가 그 이웃이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을 위하는 것을 알면 미움의 성향이 나타난다. 이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이웃을 향해 곧바로 미워하는 마음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장 강력한 이웃 사랑 안에는 그 만큼 하나님을 대항하는 강한 반감이 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며 힘을 모아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경향이 있다. 만일 이웃을 향한 사랑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서로를 사실과 다르게 알 만 아니라 서로를 우상으로 만들거나 존경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옆으로 밀쳐낸다. 이때 그들은 서로를 참으로 발견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은 깊은 의미에서 볼 때 외로움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그들은 실제로는 영원한 친교를 갖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영원한 교통을 나눌 때만이 그들의 외로운 고독의 상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독은 그들이 서로를 판단할 때나 헤어질 때 끔찍할 정도로 뚜렷하여진다. 이때 그들은 오직 자신 밖에 없다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을 위하는 이웃을 향해 미움을 갖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웃이라는 관계 때문에 그 미움은 억압된다. 이는 이웃이라는 관계는 성령의 역사로 인한 열매이며 또한 성령의 보존하시는 역사로 인해 타락한 인류 가운데 이웃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들의 미움이 억압되는 것이다.    

 

우리는 나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나의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고백을 할 때 내 자신과 관련한 고백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미움의 세력 또는 성향은 우리 안에 잔재하여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의해 억제된다. 종종 우리 자신 안에 남아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은 비록 연약할지라도 미움을 억제하는 유일한 수단인 것 같다. 불신자들의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신자의 세계 안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반감과 이웃을 향한 미움이 종종 터져 나오곤 한다. 인간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미움을 대하며 그리 놀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미움의 성향은 우리 자신 안에 잔재로 남아있는 사랑에 의해 극복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잔재하는 사랑은 뿌리가 잘린 사랑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승리는 전적으로 믿음을 통한 사랑의 결과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성령이 믿음을 통해 우리 안에 사랑을 창조하실 때, 우리는 그 사랑으로 미움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우리 자신을 자랑할 이유가 될 수 없다. 사실, 그 사랑을 만들어내시는 성령은 우리 안에 잔재하는 자연적 사랑을 사용하거나 관계하실 수 없다. 도리어 성령을 통해 만들어지는 사랑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사랑을 죄악된 것으로 정죄하고 그러한 인간적 사랑을 물리친다. 언약의 율법 아래에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오직 심판 밖에 없다. ,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비참에 대한 지식은,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믿음의 지식이다.


'S.G. 드흐라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죄의 형벌  (0) 2013.01.25
2) 요구하는 사랑/참된 진리  (0) 2013.01.20
주권적인 결정  (0) 2013.01.14
중생의 필요성/드흐라프  (0) 2013.01.06
3)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 참된 진리(드흐라프)  (0) 2012.12.14

'Amazing Na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아숨쉬는 자연  (0) 2012.12.08
경이로운 자연  (1) 2012.12.08
정말 시원해요~^^  (0) 2012.08.19
카나다와 미국 중부 하늘에 오로라 현상/자기장도 꼬인 상태  (0) 2011.10.31
환상적인 폭포수!  (0) 2011.09.26

1. 타락한 한국교회


  개신교 역사상 지금의 한국 교회보다 더 타락한 교회는 없었을 것 같다. 교회사 학자 몇 분에게 물어봐도 그런 예를 제시하지 못했다.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성적 스캔들을 일으키고, 수억을 횡령하여 감옥에 들어가고, 교회를 사유재산처럼 자식에게 세습하는 예가 빈번하다.

  어떤 교단의 총회와 한국 개신교를 대표한다고 자처하는 기관이 억대의 돈이 오고가는 선거로 회장을 뽑아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어떤 교단 총회에는 조폭이 동원되고 가스총이 등장하였다.

  세계 어느 나라 개신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행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묵인하는 교회와 총회들이 이렇게 많은 나라도 한국 외에는 없다.

  어느 다른 나라에서도 교인들 목회자의 세습을 절대다수로 찬동한 교회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교회의 도덕적 수준이 사회의 일반적인 도덕적 수준보다 낮은 나라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하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교회가 사람들의 신뢰를 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지난 해 11월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개신교인들을 포함한 시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국교회의 신뢰도를 조사할 결과 17.6%만이 개신교를 신뢰한다고 대답했다.

  개신교인이 인구의 약 19%를 차지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개신교인들 가운데도 개신교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이 상당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2009년 18.4%보다 떨어졌을 뿐 아니라 가톨릭교회 41.4%, 불교 33.5%에 비해서도 월등하게 낮다.

  한 NGO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불신을 받는 집단이 정치인들이고 두 번째로 불신을 받는 사람들이 종교인으로 드러났는데, 그 종교인들 가운데도 기독교 지도자들이 가장 불신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전도를 효과적으로 할 수 없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없다. 1+1=2란 것은 논리적으로 설득시킬 수 있다. 따라서 누가 그것을 주장하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사기꾼이 1+1=라 주장한다 하여 그 사실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1+1=3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보통의 상식이나 지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계시의 종교는 마치 1+1=3이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3위 1체, 예수님의 양성, 부활, 동정녀 탄생 같은 것은 모두 1+1=3이란 것과 같이 이론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다. 2세기 교부 터툴리아누스는 “말이 안되기 때문에 믿는다” (Credo qui absurdum)라는 우명한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고 따라서 하나님의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믿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계시의 종교를 전파하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는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가 아주 중요하다.  거짓말을 잘하고 이기적이라서 믿을 수 없는 사람인지 아니면 “충선된 증인”, 즉 “믿을 만한” (pistos) 중인인지가 중요하다.

  예수님은 “충성된 증인”이었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들이었으며 모든 신자들도 믿을만한 증인이 되어야 복음을 올바로 증거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의 믿음을 얻지 못하는 교회와 교인은 계시에 근거한 복음을 전할 수 없다. 오늘날 한국 교회 교인수가 줄어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한국 교회가 도덕적 권위를 회복하지 못하면 다시 일어설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한국교회는 지금 그 역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일제시대의 신사참배나 6.25 전쟁 때 공산군의 핍박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이 심각한 위기를 맞은 것이다.

  과거의 위기는 외부의 핍박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오히려 교회와 신앙을 정화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가 맞고 있는 위기는 교회 내부에서 부패로 인한 것이고 성경적인 신앙이 변질되는 것이기 때문에 회복을 매우 어렵게 하는 성질의 것이다.  


  교회의 타락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우상숭배로 나타난다.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했을 때는 주위 이방민족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겼다.  주위 이방 나라들과 다른 방법으로 타락하는 경우는 결코 없었고 있을 수도 없다.

  구교가 타락했을 때는 성경의 가르침과 도덕적 원칙을 어겨가며 그 때 세상이 섬기던 우상, 즉 돈과 권력을 추구했다. 한국 교회가 타락하는 것도 한국 사회가 섬기는 우상을 섬기기 때문이다. 세상이 은을 섬길 때 타락한 교회는 금을 섬기는 경우는 없다.


  우상이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바울이 분명히 가르친다 (고전 8:4). 실제로 하나님이 아니거나 하나님보다 더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하나님인 줄 알고 믿는 것이 우상숭배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아무도 자신들이 섬기는 것이 우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 교회 어느 지도자나 교인도 자신이 우상을 섬긴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은 믿을만한 것을 믿는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우상숭배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다. 우상인줄 알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를 들어 한국 교회 대부분은 “우리 교회”란 우상을 섬긴다. 개교회주의가 정도를 넘어서 “우리 교회”가 하나님 보다 더 중요하게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영광에 해가 되더라도 “우리 교회” 성장이나 명예에 이익이 되면 감행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높이는 것이라도 “우리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다른 교회 교인들이 오는 것을 환영하는 것은 누가 봐도 비신사적이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된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양 훔치기” (sheep snatching)나 대형버스가 온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교인 실어 나르는 것을 보고 “교회 장사” 한다고 비웃는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렇게 더럽혀지고 교회 전체의 사역이 큰 방해를 받는데도 불구하고 버젓이 자행된다.  하나님의 영광이나 교회의 명예보다 “우리 교회”의 성장과 영광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착각하지만 주객이 전도되어 하나님 사랑이 교회 사랑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수억 원의 돈을 부정하게 쓰면서 총회장이 되거나 기독교 단체의 대표가 되는 것, 교회를 자식에게 세습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공정하지 못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냉소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 비난과 냉소는 정당하다.

  그런데도 당사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나 교회를 오해해서 그것을 비판한다고 주장한다. 궤변 중에 궤변이다. 하나님 영광과 전체 교회의 명예와 신임도에 큰 해가 되는 것이 자명한데도 그것을 감행하는 것은 명예와 재물이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전파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인데도 자신들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세씁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것이 우상숭배고, 그것은 신사참배보다 훨씬 더 심각한 우상숭배다. 신사참배는 외부 세력의 강압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진심으로 천황을 신으로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아무 압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성직을 매매하며 세습을 감행하는 것은 자발적인 우상숭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우리 교회 우상”이나 성직매매, 세습 등의 배후에 작용하는 것은 “탐심의 우상”이다.  바울사도는 엡5:5와 골 3:5에서 탐심은 우상숭배라 했고 주님도 마6:24에서 재물이 하나님의 자리에 설 수 있음을 경고하셨다.

  한국 교회가 섬기는 우상은 대부분 한국 사회가 섬기는 돈, 명예, 권력의 우상과 같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울처럼 세상적인 이익이나 특권을 배설물로 치부한다면 탐심의 우상숭배가 생겨날 수가 없다. 

 

2. 차세중심적 한국적 세계관


 돈, 권력, 명예는 오늘날 전 세계, 특히 한국인들이 가장 열심히 추구한다. 그것들은 공유가 불가능한 (zero-sum) 가치들이다.  즉 한 사람이 많이 차지하면 다른 사람은 그만큼 적게 가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이들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면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 전 세계에서 경쟁심이 가장 강한 것과 돈, 권력, 명예를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

  한국은 한국인의 이 엄청난 경쟁심 덕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불과 60년 만에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성취하지 못한 두 가지를 거뜬히 이룩했다.  절대빈곤으로부터 탈출했고 민주화를 이룩했다. 2009년에는 OECD의 개발원조위원회 (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의 회원이 됨으로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다.

  60만 명에 이르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Korean Dream을 쫓아 한국에 찾아왔다. 과학기술 수준도 세계에서 7위 정도를 유지하고, 교육수준은 세계에서 가장 높으며, 문맹률은 세계에서 가장 낮다. 문화적으로도 한류가 전 세계에 휩쓸고 싸이가 세계 방방곡곡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인은 매우 불행하다. 영국의 레가툼연구소 (Legatum Institute)가 발표한 2011년도 번영지수 (Prosperity Index)에 의하면 한국의 생활만족도 (Average Life Satisfaction)은 세계 110개국 가운데 104번째인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국민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 당 28.4명으로 OECD 국가들에서 1위이며, 2위인 헝가리의 19.4명과의 차이가 9명이나 된다는 객관적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특히 65세 이상의 노인들의 경우 10만 명당 81.4명이 자살해서 일본의 일본 17.9명, 미국의 14.1명의 거의 5배나 된다.  경제가 아무리 좋아지고 과학기술과 문화가 아무리 발전해도 주민이 불행하면 그 모든 발전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한국인들은 왜 그렇게 불행한가? 그것은 도덕적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경쟁이 아무리 치열해도 그 경쟁이 공정하게만 이뤄지면 억울한 사람이 생겨날 이유가 없다.  그런데 한국에는 경쟁심은 유난히 강한데도 도덕적 수준은 너무 낮아서 경쟁이 공정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질투가 생기고 억울한 사람이 많아지면 불행해질 수 밖에 없다.  국제투명성기구는 2011년 한국의 투명성이 세계에서 43위로 아프리카의 보츠와나 32위보다 11이나 뒤떨어진다 했다.

  

  김승규 전 법무부 장관의 조사에 의하면 지난 2000년 한국에서 위증으로 기소된 사람의 수는 일본의 671배이며, 무고로 기소된 사람은 무려 4151배나 된다 한다.    다른 분야에서는 선진국이나 윤리에 있어서는 후진국이 아니라 야만국에 가깝다. 일본에는 기독교인이 가톨릭을 포함해서 전 인구의 1%정도인데 한국에는 천주교인을 포함하면 27%나 된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는 이렇게 불투명하고 불공정하다.

  이렇게 경쟁심이 강하고 도덕적 수준이 낮은 것은 한국의 세계관 때문일 것이다. 모든 인간 사회는 이런 저란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세계관은 대부분의 경우 그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했던 종교에 의하여 형성된다.


  한국의 세계관은 주로 무속종교와 유교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시간 지배적인 종교로 남아 있었던 것은 불교인데도 불구하고 한국 문화에 끼친 불교의 영향은 그렇게 큰 것 같지 않다.

  세계문화 분류에서 한국은 불교 문화권에 속한 것으로 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유교문화권에 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교가 가장 최근까지 근 500년을 한국의 지배적인 종교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이 가장 크게 남아 있는 것은 그렇게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가장 최근의 지배적인 종교였다는 사실이 유일한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무속신앙의 세계관과 비슷한 요소가 많기 때문에 유교의 영향이 큰 것이 아닌가 한다.


  무속신앙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권을 이룩할 만큼 세계적인 종교의 대열에 끼이지 못하고 유교나 불교 수준의 고등종교가 아니다.  그러므로 무속적 문화권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한국문화의 저변에 흐르면서 엄청나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지금도 행사하고 있는 것은 무속종교란 주장이 일반적이다.

  불교, 유교, 기독교 등 한국에 들어 온 모든 고등종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무속화한 것만 보아도 그 힘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다.  불교 사찰에는 거의 빠짐없이 무속 신앙과 관계있는 칠성각, 산신각 등이 있고 한국 기독교의 기복신앙은 무속 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유교와 무속종교의 공통점은 둘 다 절대 신이나 내세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무속종교도 귀신을 인정하나 무당에 의하여 쫓겨나가거나 복을 가져다 줄 정도일 뿐 자체의 독립적인 의지와 전능한 능력을 가진 절대 신이 아니다.

 

무교는 적극적인 인간중심의 축복기원이 그 핵심이다. 무병장수 (無病長壽), 부귀영화 (富貴榮華), 무사태평 (無事泰平)이 그 이상이다. 그런 축복은 선한 삶, 부지런한 노력의 대가가 아니라 귀신들의 자의적인 호의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으로 우연한 운수의 결과로 본다.

 

  유교도 신이나 내세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공자의 제자 계로 (季路)가 귀신 섬기는 일에 대해서 질문했을 때 공자는 “나는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죽음에 대한 질문에는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죽음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느냐 하고 대답함으로 내세 같은 것에도 관심이 없음을 보여준다.


  한국 무교와 유교는 절대 신이나 내세를 부인하는 철저한 인간중심적, 차세중심적인 (diesseitig) 세계관을 형성해 놓았다. 이런 세계관은 다양한 형태의 한국적 특성을 생산해 놓았다. 그 가운데는 물론 긍정적인 것들이 없지 않다.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한 결과 경의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삶의 모든 가치와 목적은 이 세상에서 이룩해야 하기 때문에 세계 어느 다른 나라보다 더 경쟁심이 강하고 부지런하게 일하는 풍토가 형성되어 있다.  이런 차세중심적 세계관이 없었다면 한국은 오늘날의 것과 같은 경제적 발전을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부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다.  그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매우 뒤떨어진 윤리문화다.  경제, 예술, 과학기술, 스포츠 등 경쟁적인 추구의 대상이 되는 분야는 매우 빨리 발전하고 성공했으나 비경쟁적인 분야는 매우 뒤떨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윤리다.

 

  윤리는 경쟁해서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부당하게 이익을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가능한 것이다. 더 윤리적이 되기 위하여 경쟁하는 사람은 없고, 도덕성에서 1등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없다.

  도덕적이 되면 경제나 정치 등 다른 분야에서 오히려 1등을 놓치는 결과를 가져오기가 쉽다. “정직하면 잘못 산다”는 생각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18세기 독일 철학자 칸트는 ‘신과 내세가 존재해야 건강한 윤리문화가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논리는 복잡하지 않다.  이 세상에서는 실제로 모든 선행이 다 보상을 받고 모든 악이 다 철저하게 보응을 받지 못하므로 완벽한 정의가 이뤄지지 않는다.

  만약 이 세상이 전부라면 구태여 윤리적으로 행동하기 보다는 오히려 기회가 생길 때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악을 행할 유혹을 강하게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세가 있다고 믿으면 이 세상에서 미완된 인과보응이 거기서 완성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도 악을 행하지 않으려고 조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정의가 실현되려면 인과보응을 집행하는 전능한 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세도, 신도 믿지 않으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면서도 악을 행할 유혹을 많이 받을 것이다.

  그리고 절대적인 인격적 신이나 인과보응을 주제하는 우주의 법칙 같은 것을 무시하면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감시자(police within)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을 쉽게 속일 수 있다.  한국의 윤리적 수준이 낮고 특히 정직에 뛰어나지 못한 것은 이런 차세중심적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세계관에서 성취해야 할 삶의 의미는 효경이 말하는 입신양명 (立身揚名)이다.  출세해서 이름을 날리는 것이다.  유명해지는 길은 시대마다 달랐다.  시대에 따라 좋은 가문, 높은 학식, 높은 벼슬자리, 돈 등이 이름을 날리는 수단이었다.

  오늘날에는 돈, 권력, 명예가 한국인의 우상이고, 그 가운데서도 특히 돈이 점점 더 중요하게 되었다.  차세중심적 세계관이 한국 사회로 하여금 돈의 우상을 섬기게 하고 도덕적 수준을 낮게 한다.


  역사상 어느 다른 시대에도 오늘에 만큼 돈이 모든 가치를 주도하고 모든 가치의 표준으로 등극하지는 않았다.  돈은 오늘날 생물학적 생존을 보장해주고 생활의 편의를 제공하는 정도를 넘어 정치적 권력, 사회적 명예, 학문적 성취, 예술적 창조, 운동경기의 승리, 심지어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좋은 대학에 합격하는 것 까지 도와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과거에는 가문, 명예, 존경, 사랑, 인기 등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 돈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어졌다.

  돈은 흔히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이라 하지만, 앞으로 원하는 거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게 한다고 믿기 때문에 돈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말았다.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돈 그 자체를 얻는 것이 사람을 즐겁게 한다.  그래서 돈은 마침내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찬양하는 하나님의 자리에 거뜬히 등극했다.  오늘날의 돈만큼 전 세계가 숭배하고 믿는 우상은 역사상 존재해 본 일이  없다.


  특히 한국인은 전 세계에서 돈을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2008년 4월 8일 일본청소년연구소가 한국, 일본, 미국, 중국의 고교생 1000-1500명씩을  대상으로 의식조사를 한 결과 한국학생의 50.4%는 “부자가 되는 게 성공한 인생”이라고 응답했고, 일본 학생은 33%, 중국 학생은 27%, 미국 학생은 22.1%가 그렇게 응답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선 어떤 수단을 써도 괜찮다”는 것에도 한국 학생23.3%가 동의해서 미국 21.2%, 일본 13.4%, 중국 5.6%보다 높았다.  “돈으로 권력을 살 수 있다”는 것에도 한국 학생은 54.3%나 동의했는데, 미국, 일본, 중국은 30%대였다 한다.


  한국인이 삶에 불만이 많은 것도 돈을 좋아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돈은 공유불가능(zero-sum)한 하급가치의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그렇지 않아도 경쟁심이 유달리 강한 한국인을 더 경쟁적이 되게 하고 질투와 갈등을 더욱 심하게 만들고 있다.

  사랑, 지혜, 지식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다른 사람이 그 때문에 적게 가져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질투와 경쟁을 유발하지 않는다.  그런 공유 가능한 가치는 고급 가치라 할 수 있는 반면에 돈, 권력, 명성 같이 공유 불가능한 가치들은 하급가치일 수밖에 없다.  그런 가치들은 사람을 경쟁적으로 만들고 질투심과 갈등을 조장하며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한국인을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낮은 수준의 도덕이다.  도덕이란 다른 사람에게 직접 혹은 간접으로 해를 끼치지 않도록 행동하는 것인데, 도덕적 수준이 낮다는 것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빈도가 높고 정도가 심하다는 것을 뜻한다. 

  과거에는 사람의 행복과 불행이 자연에 의하여 결정되었지만 현대인은 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  그런데 윤리문화가 뒤떨어져서 사람이 사람에게 해가 되도록 행동하면 해를 입은 사람은 불행할 것이고, 전체 사회의 도덕적 수준이 낮으면 모든 사람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윤리적 질서가 깨어지면 모든 사람이 그 피해자가 되지만 특히 사회적 약자들이 더 큰 피해자가 된다.  교통질서가 무너지면 크고 튼튼한 차를 모는 사람보다는 작고 약한 차를 모는 사람이 더 큰 손해를 보고 자전거를 타거나 � 다니는 사람은 길거리에 나갈 수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비윤리적인 행동은 정의에 어긋나고, 모든 비윤리적인 행위는 약자를 해치는 것이므로 비겁하다 하겠다.


3. 물질주의 극복이 한국 교회의 사명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심각한 한국의 도덕적 상황에 대해서 한국 교회는 마땅히 그 책임을 져야 하고, 그것을 고쳐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동시에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의무인 복음전파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1960년대까지는 한국교회가 한국 사회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상당할 정도로 잘 감당했다.  비록 교회가 분명하게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노력하지는 않았더라도 한국교회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사명을 비교적 잘 감당했으며,  한국 역사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과거 한국 교회가 시대적 사명을 감당한 것은 주로 새로운 것을 도입하는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공헌이었다.  한국 사회에 없었거나 약했던 평등사상, 민주주의, 인권 사상을 도입하는데 크게 이바지 했다.  지금도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새로 시작하는 교회들이 그런 사명을 감당하고 있고 또한 마땅히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것을 도입하는 것보다는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새로 시작하는 것과 고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바 창조의 교리와 십자가의 치유와 관계가 있다. 

  인류는 긴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너무나 많은 쓰레기와 찌꺼기를 생산해 놓아서 질식할 상황에 처해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교회가 감당해야 할 주 활동은 창조적(creative)인 것이 아니라 치유적(curative)인 것이다.

  인류가 섬기는 우상을 폭로하고 제거함으로 병든 세상을 치유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시대적 소명도 한국 사회에 무슨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섬기는 우상을 폭로하고 제거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우상과 더불어 싸우는 종교다.  한국 교회가 진정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영적으로 민감한 눈으로 자신과 이 시대를 관찰하면 세상이 섬기는 우상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겠지만 교회 자체가 우상을 섬기고 있으면 그것을 알 수 없게 된다.  누구도 우상인 줄 알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없다.  우상이 아닌 줄 알고 섬기기 때문에 우상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만이 절대이며 그의 말씀은 진리임을 믿는다면 모든 우상은 그 자체로 거짓일 뿐 아니라 우상숭배는 반드시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믿어야 한다. 그것은 교회와 교인들에게만 부정적일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를 끼치며 사회에도 부정적이다.

  그러므로 우상을 제거하는 것은 곧 세상에도 이익을 주는 것이고, 그것이야 말로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에 할 수 있는 공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세계 교회, 특히 한국교회가 싸워야 할 대상은 이 시대를 가장 병들게 하고 이 시대가 가장 열렬히 섬기는 우상이다. 바로 물질만능주의, 곧 돈의 우상이다.  돈은 아득한 옛날부터 우상으로  등장했고 예수님도 그것이 우상이 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하셨다.

  재물과 하나님을 같이 섬길 수 없다 하심으로 재물이 하나님 자리에 앉을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마6:24).  예수님의 경고들 가운데 거의 절반이 재물을 사랑하는 잘못과 관계된 것이란 주장도 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바울사도가 경고하였다면 (딤전 6:10) 초대교회가 투쟁하던 시대에도 돈은 심각한 우상이었던 것 같다.

 

 돈에 대한 욕망을 부채질하고 정당화하는 제도가 자본주의다.  18세기 네덜란드인 만더비어 (B. Mandeville)가 쓴 <벌의 우화>란 책의 부제가 “사적인 악이 공적인 이익” (Private Vices, Public Benefits)이었다.  인간의 욕망은 그 자체로는 분명히 악이지만 그 악이 결과적으로 공적인 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으로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주장이다.

  사람들이 자기의 사적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면 결과적으로 사회가 윤택해지고 발전함으로 공적인 이익을 가져온다는 논리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증명되었다고도 주장할 수 있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윤택하게 되었는데 공산주의를 택한 사회는 가난해지고 만 것이다.  성경도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열심히 일할 것을 독려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를 옹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그런 것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희년제도를 둔 것,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유무상통한 것,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불가능하다는 예수님의 비유 등 자본주의와 상치되는 가르침도 많이 있다.

  성경이 허락하는 것 같이 보이는 사유재산은 자본주의가 이해하듯이 우리 마음대로 처분하고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하여 이용해야 할 책임의 영역이다.  즉 권리로서의 사유재산이 아니라 책임을 져야 할 정치기 재산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사유재산과 성경이 인정하는 청지기 재산은 구별해야 한다. 


  과거 마르크스주의가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자본주의가 그 견제를 받았고,  그 때문에 자본주의가 극단적으로 치우칠 수 없었다.  누진과세, 독과점 금지 등의 제도를 도입하여 그 약점들을 보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사라진 오늘날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견제할 만 한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제재 받지 않는 모든 세력은 반드시 부패하고 타락한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는 지금 타락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최근 온 세계가 신음하고 있다. 


  경제활동을 돕기 위하여 봉사해야 할 금융기관들이 그 자체가 하나의 산업으로 변신하여 돈으로 돈을 버는 상황으로 변질되고, 거기에 도덕성까지 타락해서 오늘날 전 세계가 신음하는 경제위기를 유발한 것이다. 

  성경의 원칙은 모든 소득은 노동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성경이 이자를 금한 것은 그것을 보여준다. 노동을 통하지 않는 소득은 문자 그대로 불로소득 (不勞所得)이고,  과거 농경사회와 달리 산업사회에서는 불로소득은 대부분 도둑질이다.  재물에 대한 욕망을 지금처럼 방임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오늘의 자본주의는 결국 전 인류에게 큰 불행을 가져오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서버리면 넘어지는 자전거와 같다 한다. 계속해서 성장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세계 경제가 어디까지 계속 자랄 것인가? 그런 성장을 위하여 필요한 원료는 어디서 구할 것이며 이를 위해서 사용할 에너지는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

  날로 심각해지는 자원고갈과 환경오염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미 우리는 과소비와 과 생산을 통하여 우리 후손들이 사용해야 할 자원을 도둑질하고 있으며, 심각하게 오염된 자연을 유산으로 남기고 있다.  이런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으면 환경오염에 의한 인류의 종말은 불가피하고 촉진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교회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것은 오늘의 신이 되어 있는 돈의 우상을 대항하여 교회가 수행하는 투쟁의 연장선에 있다.

  돈의 우상을 제거하여 자본주의의 회포와 타락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 오늘의 교회, 특히 오늘의 한국교회가 담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시대적 소명이다. 이에 성공하지 못하면 교회의 영적 건강은 말할 것도 없고 시민들의 삶도 심각한 위기에 당도할  것이다. 


4. “세계내적 금욕”


  돈의 우상을 제거하고 자본주의를 견제, 수정하려면 교회부터 돈의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야 한다.  돈 때문에 거짓말하고, 총회장 등 기독교 단체의 장이 되기 위하여 돈을 쓰고,  목사가 교회의 돈 수십억 원을 횡령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살피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보다는 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물질주의의 심각성을 비판하고 경고하는 설교가 강단에서 거의 사라졌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기도, 봉사, 헌금이 물질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수단으로 이해하는 설교자와 교인이 한 둘이 아니다.  교회가 돈의 우상을 섬기는데 어떻게 돈의 우상을 제거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한국 교회가 시대적 소명을 조금이라도 감당하려면 가난해져야 한다.  스스로 가난해지지 않고는 물질주의를 비판할 수 없으며, 돈의 우상을 제거할 수 없다.  예수님도, 바울사도도, 위대한 믿음의 용장들도 모두 가난했다. 

  예배당은 검소하고 교인들의 생활방식도 단순해져야 한다.  돈이 있다면 선교와 구제를 위하여 써버려야 한다.  지금도 전 세계 인군의 거의 절반이 하루에 2000원 이하로 생활하고 있고 수많은 어린이들이 굶어 죽고 있다.  그들을 그대로 방치하고 과소비하고 사치하게 사는 것은 죄악이다. 


  역설적이게도 오늘의 자본주의는 개신교의 절제 때문에 생겨났다는 것이 독일의 사회학자 베버 (Max Weber)의 주장이다.  그에 의하여 초대 칼빈주의자들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증거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일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게 번 돈을 가능한 한 쓰지 않고 저축했기 때문에 자본이 축척되고 거기서 자본주의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 주장이 옳은지는 논란꺼리지만 적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개신교는 처음부터 근면과 절제를 매우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베버는 초기 개신교회가  세계내적 금욕 (innerweltliche Askese)을 실천했다고 주장한다.

  수도사들이나 승려들이 속세를 떠나 수도원이나 절에서 수행하는 금욕과 달리 개신교인들은 속세에 살면서 사치를 피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면서 절제했다는 것이다. 그런 전통은 지금도 독일이나 네덜란드 등 북유럽 개신교인들의 삶에서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다.

  영국이나 독일 등 북유럽  국가들에서 음식 맛이 유난히 없는 것도 맛있게 먹는 탐식(gluttony)을 죄악시하는 전통 때문이다.  탐식은 중세 교회의 일곱 가지 죽음에 이르는 죄 (seven deadly sins)에 속한다.  흔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가 미덕이라 주장하지만 오늘날 그렇게 절제하는 독일과 네덜란드의 경제는 비교적 건전하지만 사치하고 과소비하는 이태리나 스페인의 경제는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


  그러나 북유럽국가들도 점점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벗어나고 있고 그들을 그렇게 강하게 만들었던 종교개혁의 전통에서 빠른 속도로 벗어나고 있다.  독일도, 네덜란드도 사치와 쾌락에 서서히 탐닉되고 있다.  전 세계가 쾌락의 자본주의란 말을 타고 쾌락의 미끼만 바라보고 낭떠러지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성경의 경고는 말의 귀를 스쳐 지나가는 동쪽바람 (馬耳東風)에 불과하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특히 한국 교회가 영적으로 다시 일어서서 교회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세계내적 금욕을 실천하지 않고는 다른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비록 물질적인 것에 대한 절제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그것 없이는 어떤 해결이나 개혁도 불가능하다.


  돈의 우상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물질적인 것에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은 명예욕, 권력욕, 쾌락욕 등 다른 욕망에도 절제할 수 있을 것이고 탐심의 우상숭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자발적이든 타율적이든 교회가 가난해지면 철저히 순수하고 헌신된 사람 이외에는 교회의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1960년대 이전 한국 교회가 도덕적으로 비교적 깨끗하고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은 것도 교회가 가난해서 오직 순수하지 못하고 헌신되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도 교회의 지도자가 되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대에 총회나 기독교 단체의 장이 되는 것은 무거운 책임만 지는 것이었지 세속적인 이익은 아무 것도 없었고, 세습은 곧 가난과 고난의 세습이었다.

  그 때문에 한국 교회는 세상의 존경을 받았다.  장기려 박사는 “예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 타인의 모범이 되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자의 생활을 보고 감탄해서 그런 모습이 어디에서 나오는지에 대해 궁금해 했다”고 회고했다. 

  그가 “예전에는”이란 표현을 쓴 것은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함축한다.    비록 기독교와 기독교인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평가가 항상 정확하고 정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장기려 박사, 한경직 목사 같은 분들이 교계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존경을 받는 것을 보면 순수한 신앙과 절제된 삶은 세상에서도 인정받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를 위하여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공헌은 우리 사회가 걸려 있는 돈 중독을 조금이라도 해독하는 것이다.  사회가 돈의 우상 때문에 빈부 격차가 커지고 양극화가 심각해지며,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고 자포자기 하며 냉소적이 된다.

  OECD 국가가운데 네 번째로 갈등지수가 높고 그 때문에 연간 약 300조원의 돈이 낭비된다 한다.  돈의 우상숭배를 제거하거나 약화하지 않고 치열한 경쟁이 공정하게 이뤄지지 않고는 한국은 행복한 나라가 될 수 없다.


  한 사회의 도덕성은 그 사회의 지배적인 종교가 책임져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지배적인 종교는 기독교라 할 수 있다.  신도의 수로는 불교 (인구의 23%)가 가장 큰 종교이지만 사회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에서는 기독교가 지배적인 종교라 할 수 있다.

  한 불교 신문에 의하면 한국의 중요한 직장 70%를 개신교인이 차지하고 있다 한다.  장관, 국회의원, 대학교수 등의 사회지도층에서 기독교인의 숫자가 다른 종교인들보다 더 많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의 도덕성은 기독교가 책임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부터 돈의 우상을 물리쳐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의 :“세계내적 금욕”을 실천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과연 오늘의 한국교회가 세계내적 금욕을 실천하고 돈을 미워할 만한 신앙을 회복할 수 있을까?  지금처럼 세속화되어 있고 타락한 교회가 과연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수정하여 자연과 인류의 생존이 가능하도록 할 의지와 안목을 가질 수 있을까?


5. 자발적 불편운동


  금년부터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자발적 불편운동”을 시작했다.  다른 사람을 불편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더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좀 불편하게 살자는 운동이다. 

   예를 들어 무거운 짐을 들지 않고나 노인이 아니면 지하철이나 건물의 승강기를 타지 않고 계단을 이용하고, 주차장에서는 가장 불편한 곳에 주차하고 교회에서는 가장 불편한 곳에 앉는 것 등이 그 예다. 

  물론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그 정도로는 못하더라도 조금씩이라도 손해를 보는 훈련을 하자는 것이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이라야 큰일에도 충성할 수 있다. 

  작은 것도 양보하지 못하고 희생하지 못하면 큰 것은 전혀 양보할 수 없게 된다.  한국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작은 것부터 조금씩 손해보고 양보하는 연습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6. 강의를 마무리 하면서


  물론 한국의 모든 교회, 모든 지도자가 다 세상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성경의 가르침에 철저히 충실하여 올바로 믿고 살려고 발버둥 치는 교회와 교역자들이 한 둘이 아니다.  한국교회 전체를 도매금으로 매도하지 말라는 충고를 자주 듣고 있으며, 그 충고는 정당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예외를 인정하자 말자 정말 타락한 교회와 지도자들이 가장 먼저 나서서 자신들이 바로 그런 예외라고 착각한다.  이것이 우상숭배자의 가장 전형적인 표식이다.


  그러므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이 7천이나 되었지만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전체의 타락을 개탄하고 비판했다.  자기와 자기 교회는 타락하지 않았으므로 사회가 교회에 대해서 하는 비판은 자신들과는 무관하다는 생각은 무책임하다.


  그리고 기독교는 윤리만 강조하는 종교가 아닌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선한 행위가 아니라 참된 믿음만이 구원의 수단임을 가르친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반드시 올바른 삶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윤리적이라야 성경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이 아니면서도 매우 윤리적인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반드시 윤리적이 되어야 한다. 


  마치 반드시 비가 와야 길이 젖는 것은 아니다. 비 이외의 다른 이유로도 길이 젖을 수 있다. 그러나 비가 오면 반드시 길이 젖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하셨다.


참 믿음만 회복하면 한국 교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이지명 님


영들을 시험하는 방법 / 로이드존스

성경은 양 극단을 포괄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꼭 필요하고 체험도 극히 중요하지만, 진리와 정의(定義), 교의와 교리도 그만큼 필요하며 중요합니다. 우리의 전체적인 입장은 진리와 교리의 토대에 굳게 세워져 있지 않은 체험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들을 시험하며 검증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어떤 이들은 이렇게 시험해 보는 과정을 철저하게 반대합니다. 물론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저 안이하고 나태하며 게을러서, 편하게 읽고 싶어서 반대합니다.

또는 이렇게 영들을 시험하고 검증하는 과정 자체가 영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 따르...

면, 어떤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고찰하며 정의하려고 하는 순간 영적이지 못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에 대한 저의 대답은 성령이 그렇게 명령하며 권고하고 계시기에 우리는 반드시 영들을 시험하고 검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제게는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더 나아가 성경은 우리가 시험해야 하는 이유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슬프게도 세상에는 거짓 선지자(목회자)들이 있으며, 악한 영들이 있고,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만큼 영리하고 교묘한 마귀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성령만 계시다면 영들을 시험하고 검증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곧 ‘거룩한 영’이라는 말 자체가 다른 악한 영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악한 세력들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영들을 어떻게 시험할 수 있을까요? 참된 영인지 거짓된 영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성령의 은사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서, 성령의 은사가 없는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방언을 못하고 이러저러한 일들을 못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 것”이라는 식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특정 은사를 언급하면서 그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합니다.

사도 바울이 “다 방언을 말하는 자겠느냐?”라고 질문하면서 분명한 가르침을 주었는데도 말입니다(고전12:30). 고린도전서 12장은 성령이 나누어 주시는 은사를 밝히기 위해 기록된 장입니다. 바울은 은사를 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도 있다고, 그 자체가 성령이 그 안에 계시다는 본질적인 증거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부분으로 들어가 봅시다. 사역의 특별한 결과물이나 치유의 은사처럼 눈에 보이는 현상을 기준 삼아 성령을 받았는지 여부를 조사하고 시험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런 것을 시험방법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틀림없어요. 이 사람이 무슨 일을 했는지 못 들었습니까? 치유의 소문을 못 들었어요? 그가 이룬 성과를 좀 보세요.” 눈에 보이는 현상만 가지고 시험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입니다. 악한 영들도 기적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제자들에게 악한 영들이 주님처럼 놀라운 일들을 행할 수 있음을 경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열성적이라는 것도 성령이 그 안에 계시다는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악한 영들도 아주 열성적일 때가 많습니다. 크게 흥분했다고 해서 성령이 임하신 것은 아닙니다. 큰 활력이 넘치는 것도 성경의 증거는 아닙니다. 확신과 자신감에 넘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중요한 시금석은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성령 충만하다고 주장하는 사람, 비범한 교사로 자처하는 사람에 대해 가장 먼저 알아보아야 할 점은 그의 가르침이 성경에 일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의 가르침은 사도들의 메시지와 일치합니까? 그의 모든 가르침은 이 말씀에 기초하고 있습니까? 그는 기꺼이 이 말씀에 복종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중요한 시금석입니다.

또 다른 시금석은 성경의 가르침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참된 선지자(목회자)의 변함없는 특징입니다. 거짓 선지자(목회자)는 성경의 가르침을 오히려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말합니다. “아, 그렇지요. 하지만 당신은 율법주의자에 신학자일 뿐입니다. 나는 직접 체험하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성과를 얻었지요.”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태도가 아니라 거의 경멸하는 태도로서, 복음의 길을 벗어난 사람들에게 늘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참된 성령은 항상 그리스도를 높이신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시금석입니다. 그리스도가 항상 중심을 차지하시며 더 우월한 자리를 차지하십니다. 진정한 선지자(목회자)는 자신의 체험이나 환상, 자신이 본 것이나 한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이야기합니다. 모든 이목이 그리스도께 집중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은 그리스도를 높이십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는 항상 균형과 조화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능력이 있고 균형이 잡혀 있으며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성령은 무질서의 영이 아니라 질서의 영이십니다. 교리와 사랑이 전부 필요합니다. 체험과 능력, 지성과 정신을 포함한 전 인격이 포괄되어야 하며, 완벽하게 균형 잡힌 하나의 통일체로 제 역할을 다함으로써 분열이나 경쟁이 다툼 없이 우리 주와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진력하며 그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성령이 여러분 안에 계신지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거짓되고 악한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께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확인하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요일4:1-2)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 님 

'로이드 존스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0) 2012.12.20
티와 들보  (0) 2012.12.10
우리를 굳세게 하는 것은 진리 뿐이다  (0) 2012.12.03
17.아담의 후손과 원죄  (0) 2012.11.27
성령충만한지를 아는 시금석  (0) 2012.11.24

'은혜의 단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할 사람만 있으면 산다  (0) 2012.12.16
하나님께로 가는 길  (0) 2012.12.07
강한 용사  (0) 2012.11.29
내가 너를 고난의 용광로 속에서...  (0) 2012.11.24
마음을 넓혀라  (2) 2012.11.21

에덴 동산과 새 하늘과 새 땅의 차이에 대해 질문하신 분이 있어서 그에 대한 답변을 여러 분과 같이 나누고 싶어서 여기 게재합니다.

------------------------------------------------------------------------------------

에덴 동산은 인간이 창조 받은 원상태로 있던 곳입니다.  그 처음 창조받은 상태는 좋은 것이고 온전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그 상태에 영원히 있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그로부터 더 완전한 상태로 나아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차이는 아마 에덴에서는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는데, 더 높은 상태는 타락 가능성이 없는 것이라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 상태로부터 더 높은 상태, 타락할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로 나아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유일한 조건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인격적이고 온전한 순종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면 주어지는 가장 완전한 상태에로 가기를 원하신 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은 주께 순종해서 그런 상태로 나아 가지 못하고 타락한 상태에로 떨어졌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인간은 무엇을 주장할 수 없는데도, 주님께서는 인간들에게 회복을 약속해 주시고, 구원에 대한 희망을 주시고 영인의 후손을 통햐ㅐ 승리를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전진해 온 사러ㅏㅁ들에게 그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들로 하여금 여기 이 땅에서 이미 에수 님께서 이루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 이들은 주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극치"를 기다리게 되는데, 그 극치에 이른 하나님 나라를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합니다. 영광의 왕국이;라고 하기도 하지요.

 

에댄과 '새하늘과 새 땅'의 차이는

(1) 새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제 더 이상 타락 가능성이 없고, 죄가 있지 않다는 데에  있고,

(2) 그 범위가 에덴은 국지 적이나 새 하늘과 새 땅은 전우주적이라는 데 에 있으며,

(3) 에덴은 하나님의 계획의 실현을 바라 보나 새 하늘과 새 땅은 주께서 역사 가운데서 이루신 구속에 근거하여 무한 히 발전해 나간다는 점에 있습니다.

 

늘 주의 은혜 가운데서 강건하시를 기원합니다.

 

이승구 드림
출처 : http://blog.daum.net/wminb/7127572

'주경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스러운 소망 교의의 중요성  (3) 2013.01.01
멜기세덱  (0) 2012.12.31
타락과 배교는 전혀 다른 문제..  (0) 2012.11.24
계시(啓示)에 대한 이해  (0) 2012.11.20
계시(啓示)에 대하여  (0) 2012.10.14



     

    땅을 딛고 서기(Holding Our Ground)

     

    사회적, 정치적 혼란과 엄청난 인간의 고난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이른바 그들의 비효율성 때문에 비웃음 거리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께 세상의 이 혼란스러운 일들에 대하여 어떻게 좀 해보라고 말해 봐!" 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종교는 현실과 관련이 없는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새롭고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종교가 방해물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당한 것처럼 그의 제자들 또한 박해받고,  체포되며, 고문받으며,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우리들에게 염려하지 말고, 언제나 그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미리부터 변명할 말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라 내가 너희 대적들이 대항하거나 반박할 수 없는 말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겠다"(누가복음 21:15~15)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오는 회의와 냉소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땅을 딛고 설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을 믿으십시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당신은 잘하고 있습니다.

 

걱정... 열 사람이 좋아하는데 한 사람이 미워한다.
해답... 그럴 수 있다.

걱정... 닷새 기분 좋게 일하다가 하루는 힘들다.
해답...그럴 수 있다.

걱정... 열 번 잘하다가 한 번 실수 했다.
해답... 그럴 수 있다.

걱정... 한가지 일은 잘하는 데 다른 일은 서툴다.
해답... 그럴 수 있다.

걱정... 사흘은 마음이 잔잔한데 하루는 흔들린다.
해답... 그럴 수 있다.

다 좋아하는 사람, 다 잘하는 사람,
다 잘되는 사람, 늘 마음이 잔잔한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당신은 잘하고 있습니다.

담아온 글

'짧은 글 긴 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해 좌우명이 될만한 좋은 글  (0) 2013.01.02
성만찬(Communion)  (0) 2012.12.12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2) 2012.11.17
부활하신 주님  (0) 2012.11.14
하루를 뜻있게 보내라  (2) 2012.10.16
이종일님의 질문에 대한 교제님의 답

엡 1:3-4절은 해석 차이가 있는 난해 구절이 아니므로 주석 참고하시기를
주석내용이 너무 길어서 필요한 부분만 발췌하였으니 이해해 주시구요

[(1) 그리스도 안에서(*  엔 크리스�) - 혹자는 본문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J.A. Allan). 그러나 본서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배제할 수가 없다(2:6, Lincoln).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짐을 시사한다(Bruce).

(2) 하늘에 속한(* 엔 토이스 에푸라니오이스)- 본문과 같은
전치사구가 본서에서는 다섯번 나타난다(3 20절;2:6;3:10;6:12).
이것은 본절의 '신령한'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Foulkes, Bruce).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늘의 영역과 연결시키는
구원의 축복이다. 그러나 이 축복은 미래에 맛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속하는 축복이다(Lincoln).

(3) 신령한 복으로(* 엔 율로기아 프뉴마티케) - 여기서 '신령한 복'은
성령의 현존으로 이루어진 결과를  가리킨다(5:19; 골1:9;3:16).
이 복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지상적이며 육적인 축복이
아니라 천상적이며 영적인 복이다(Foulkes, Lincoln, Bruce).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택하사'의 헬라어
'엑셀렉사토'는 '선택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에클레고'의 단순과거
중간태이다. 이것은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택하셨음을 시사한다. 즉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선택이

(1) 하나님 자신을 위한 사역이며
(2)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하에서 이루어졌음을 시사해
주는  표현이다(Wood).

그리스도인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이루어진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됨을 시사한다(Lincoln).
한편 '창세 전에'는 하나님의 선택하심이 영원전에 이루어진
것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공적이나 일시적
환경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에서 비롯된 주권적 은혜임을
시사하며 동시에 '창세 전에'는 그리스도의 선재성(先在性)을
나타낸다(골 1:15-17, Lincoln).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본절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선택하신 목적을 나타낸다. '거룩하고'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순결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을
구별하여 도덕적인 결점이나 죄를 없게 하고 성령의 열매들을
소유하게 하심을 시사하며(갈 5:22, 23) '흠이 없게'는 결함이나 오점이
없는 깨끗한 상태를 가리킨다(5:27).

이런 두 가지 용어는 구약의 희생 제물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LXX 출 29:36, 37; 민 6:14;19:2) 결점이 없는 윤리적 순결성을 의미한다.
이런 윤리적 순결성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 사역을 통해
보여주신 '사랑'안에서 나타난다.]

롬 5장 18-19절은 정죄 사망(영)과 칭의 중생에 대해 비교 언급한
장으로서 선악과 언약 대표자 아담의 불순종과 그 결과, 십자가
언약 대표자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 결과가 서로 댓구를 이루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롬 5:18-19절로 바로 직행하기 전에 바울 서신서에 자주 언급되는
"모든" 이라는 단어가 어떤 전제를 담고 있는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롬 11:32절의 주석을 인용하겠으니 참고해 주시구요

[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 본절은 헬라어 본문에서
접속사 '가르'('왜냐하면')로 시작되어 30, 31절의 결론이 되고 있으며,
5:12-21에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였다는 내용을 매우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다.

하나님이 지향하시는 궁극적 목적은 모든 인간을 긍휼히 여기심이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본서의 전체적인 주제를 상기해 볼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버려두신 것은 그들의 화인 맞은
양심(딤전 4:2)이 각성되어 자신들의 절망적인 상태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게 되고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궁극적 목적을 위해 이방인을 위해서는
이스라엘을 도구로, 이스라엘을 위해서는 이방인을 도구로 사용하신다.
이는 결국 구원의 전체성, 즉  전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만인 구원을 인정하는 구절은 아니다
(25, 26절).

본절의 '모든 사람'은 그 범위가 제한된다. 즉 '순종치 아니하는
모든 사람', '긍휼을 얻을 모든 사람'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NIV:
Consequently, just as the result of one trespass was condemnation for
all men, so also the result of one act of righteousness was justification that brings life for all men.

kJV:
Therefore as by the offence of one judgment came upon all men to condemnation; even so by the righteousness of one the free gift came
upon all men unto justification of life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NIV:For just as through the disobedience of the one man the many were made sinners, so also through the obedience of the one man th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KJV:  For as by one man's disobedience many were made sinners,
so by the obedience of one shall many be made righteous.


위 영어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all man(모든 사람)과
many(많은 사람이 함께 쓰였고 롬 5장 18-19절이  만인 정죄론이나
만인 칭의론을 설명하는 구절이 아니기에 롬 11:32절처럼
"범죄한 모든 사람""순종한(회심) 모든 사람"이라는 전제가 되어져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10년째 하루 한 끼 57세男

10년째 저녁 한 끼만 먹는 일본 외과의 나구모 박사
공복 때 성장호르몬 분비 57세에 혈관 나이는 26세

50대 중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나구모 요시노리 박사. [사진 위즈덤하우스]
10년째 저녁 한 끼만 먹는 ‘1일1식’(一日一食)으로 일본 사회에서 유명해진 외과 의사 나구모 요시노리(57) 박사가 방한했다. ‘소식’(小食)이 건강에 좋다는 점을 알리고, 국내 발간된 자신의 책을 홍보하기 위해서다.

27일 오전 서울 서교호텔에서 만난 나구모 박사는 50대 중반 나이로는 믿기지 않는 ‘젊은 오빠’였다. 키 173㎝에 체중은 10년째 59㎏이라고 한다. 그의 혈관 나이는 실제보다 30년이나 젊은 26세로 측정됐다.

 - 10년째 하루 한 끼 저녁 식사만 하고 있는 이유는 뭔가.

 “공복(空腹) 상태일 때 생명력이 용솟음친다고 믿어서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 속이 비었다는 증거다. 이때 뇌에서 젊음의 호르몬인 성장호르몬이 활발하게 분비된다. 공복시엔 또 지방을 태우는 물질 분비도 왕성해진다. 살을 빼고 젊은 혈관과 피부를 유지하려면 공복감을 느꼈을 때 먹는 것이 중요하다. 식사 시간이 돼서, 남들이 먹으라 한다고 먹어선 안 된다. ‘꼬르륵’ 소리가 나지 않은 상태에서 먹으면 체내 지방을 태울 수 없다.”

 - 건강·장수에 이롭다는 증거가 있나.

 “서구의 노화학자들이 쥐의 음식 섭취량을 40% 줄였더니 수명이 20~30% 늘어났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를 사람에 적용하면 20년 더 오래 산다는 의미다. 인간이 하루 세 끼를 먹은 건 100년도 안 된다.”

 - 모든 이에게 하루 한 끼를 권하나.

 “비만인 남성, 특히 허릿살이 많은 30세 이후 남성과 폐경 후 여성에게 하루 한두 끼 식사를 권장한다. 그러나 성장기 어린이나, 마른 체형의 사람, 임산부, 환자는 하루 세 끼를 반드시 챙겨 먹어야 한다.”

 - 끼니수를 줄여 허기가 심하면.

 “(나의 경우) 1990년 소식을 시작해 10년 간은 하루 세 끼를 먹으며 반찬수를 한 끼 두 가지, 식기 크기를 어린이용으로 줄였다. 그후 2년 간 하루 두 끼를 먹다가 10년 전부터 하루 한 끼를 유지하고 있다. 몸을 충분히 적응시킨 뒤 끼니수를 줄이는 게 효과적이다. 배가 너무 고프면 간식을 먹어도 괜찮다. 하지만 간식거리로 당질(탄수화물) 식품은 곤란하다. 음식이 바로 당질 사이클로 들어가 체내 지방이 연소되지 않는다. 콩, 생선, 견과류 등 단백질 식품이 훌륭한 간식거리다.”

 - 아침을 거르면 일에 지장 받지 않나.

 “음식은 바로 소화돼 에너지원으로 쓰이는 건 아니다. 대부분 몸 안에서 글리코겐·지방으로 바뀐 뒤 에너지로 사용된다. 오전에 필요한 에너지는 전날 저녁에 먹은 음식으로 충당할 수 있다.”

 - 성생활엔 지장이 없나.

 “없다. 오히려 강해진다.”

 - 부인과 자녀가 모두 의사인데, 다같이 소식을 하고 있나.

 “가족이라도 각자 식습관·건강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웃음)”

우리를 굳세게 하는 것은 진리 뿐이다(로이드존스) 

우리를 굳세게 하는 것은 말씀에 대한 깊고 철저한 지식뿐이다.
사도 바울이 로마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하는 ‘신령한 은사’(롬1:11)는 교리를 밝혀주고, 가르치고, 교훈하고, 세워주고, 뿌리가 박히게 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도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고 하였다.

두 어휘를 주목하라. 굳세지 못한 자는 무식한 자이다.

잘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언제나 굳세지 못하기 마련이다.

영적인 방면에서 나비와 같이 하늘거리는 사람들은 교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피상적으로는 알고 있는 것 같으나 깊이까지 파고들어간 적이 없다.
모든 신약의 서신마다 사람들을 굳세게 하고 견고케 하고 뿌리가 내리고 터가 굳어지게 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
그것들은 교리들과 교훈과 가르침과 강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그의 은혜의 말씀”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재미있는 일이 아니라 진리이다.
지식이다.
교리이다.

이 대로마서와 다른 서신들의 진리와 교리들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우리가 그러한 교리들을 알고 진정으로 그 교리들을 활용할 때만이 우리가 굳세게 되고 힘을 내고 요동치 않으며, 이단과 오류를 분별해낼 수 있으며, 복음처럼 행세하는 어떤 것들을 보고 요동하거나 기만을 당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이단들과 거짓된 교훈들과 겉으로 보기에는 훌륭해 보이는 것들로 충만한 오늘 현대보다 더 굳셈을 필요로 했던 때가 없었다!그런 것들을 알고, 그러한 것들의 오류를 분간해 낼 수 있는 오직 유일한 방식은 우리 자신의 성경적 위치를 알고 그 안에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 믿음으로 굳세게 되는 것이다.

영적인 생활에는 지름길이 없다.

교리를 이해하는 것은 한 과정이요, 시간이 걸린다.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이러한 서신들을 급히 읽어 치울 수 없다.
한 시간에 한 장씩 훑어 지나갈 수도 없다.
우리를 참으로 굳세게 하는 것은 말씀에 대한 깊고 철저한 지식 뿐이다.

 

포도나무선교회

'로이드 존스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티와 들보  (0) 2012.12.10
영들을 시험하는 방법  (0) 2012.12.05
17.아담의 후손과 원죄  (0) 2012.11.27
성령충만한지를 아는 시금석  (0) 2012.11.24
로마서 강해(롬1:1)- 하나님의 복음  (0) 2012.10.24

 

 


속상할 때 마음을 다스리는 11가지 방법

''참자''
그렇게 생각하라
 감정관리는 최초의 단계에서 성패가 좌우된다.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화는 일단 참아야 한다
 
 2.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하라
  예를 들어 고객이 속을 상하게 할 때는 고객이란 원래 그런거 
  라고  생각하라
 
3. ''웃긴다''고 생각하라
  세상은 생각할 수록 희극적 요소가 많다 괴로울 때는 심각하게 생각할  
  수록 고뇌의 수렁에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간다 웃긴다고 생각하며 
  문제를 단순화시켜 보라
 
4. ''좋다 까짓 것''이라고 생각하라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는 ''좋다 까짓것''이라고 통 크게 생각하라 
  크게 마음먹으려 들면 바다보다 더 커질 수 있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5.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라고 생각하라
  억지로라도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라.
  나 라도 저럴 수 밖에 없을거야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 저럴 거야 라고 생각하라
 
6. ''내가 왜 너 때문에''라고 생각하라
  당신의 신경을 건드린 사람은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고 있는데 그 
  사람 때문에 당신이 속을 바글바글 끓인다면 억울하지 않은가
  내가 왜 당신 때문에 속을 썩어야 하지? 그렇게 생각하라
 
7. ''시간이 약''임을 확신하라
  지금의 속상한 일도 며칠 지나면 아니 몇 시간만 지나면 별거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라 너무 속이 상할 때는 ''세월이 약''이라는 생
  각에 배짱 두둑이 생각하라
 
8. ''새옹지마''라고 생각하라
  세상만사는 마음먹기에 달렸다 속상한 자극에 연연하지 말고 세상
  만사 새옹지마라고 생각하며 심적자극에서 탈출하려는 의도적인 
  노력을 하라
 
9. 즐거웠던 순간을 회상하라
  괴로운 일에 매달리다 보면 한없이 속을 끓이게 된다. 즐거웠던 
  지난  일을 회상해 보라 기분이 전환 될 수있다
 
10.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라.
  괴로울 때는 조용히 눈을 감고 위에서 언급한 아홉가지 방법을 활
 용하면서 심호흡을 해보라. 그리고 치밀어 오른는 분노는 침을 
 삼키듯 ''꿀꺽''삼켜보라  -퍼온 글


11. 억울한 모함을 받았을 때
주께서 신원해 주심을 바라고 그분의 얼굴을 구한다.^^ -별똥별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Sop 김치경,Ten 김정현♬


개혁신앙과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한국개혁신학회 '개혁신앙과 대부흥운동' 심포지엄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이은선 교수 / 안양대학교 기독교문화학과

들어가는 말

올해는 평양대부흥운동의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이다.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평양대부흥에 대한 학문� 평가 작업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평가 작업 가운데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을 개혁 신앙이라는 신학적인 시각에서 평가하는 작업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평양대부흥운동을 신학적인 시각에서 평가하고자 한다면 평양대부흥운동의 전반적인 진행이 어떤 신학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을 평가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한 평가를 위해서는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적인 성향을 파악하는 것과 함께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난 과정에서 어떤 신학적인 조류들이 영향을 미쳤는지를 평가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평양대부흥운동의 배경으로 학자들은 사경회와 기도운동을 공통적으로 들고 있다. 그리고 대부흥운동의 중요한 양상은 성령의 역사를 통한 죄의 회개와 경건한 삶을 들고 있으며, 중요한 결과들로는 교회의 양적인 성장과 교육열의 고조, 반상의식의 타파, 교회의 조직의 진전과 해외선교를 들고 있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평양대부흥운동의 배경으로 거론되는 사경회와 기도운동, 그리고 중요한 양상인 성령의 역사를 통한 죄의 회개와 거룩한 삶의 모습이 과연 개혁신앙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적인 성향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네 가지 시각이 자리 잡고 있다. 첫째는 전성천 박사가 주장한 견해로서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은 그들의 극단적 보수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구학파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성천 박사는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이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엄격한 교리에 집착하였고, 이러한 엄격한 입장의 고수에서 진보적인 성경관을 가진 김재준과 충돌하면서 한국교회의 분열이 야기되었다고 보았다. 둘째는 한철하 박사가 주장하는 견해로서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은 부흥운동을 찬성하고 목사들의 신학교육의 수준을 낮게 잡는 것을 볼 때에, 신학파라는 것이다. 셋째로 홍치모와 김영재는 한국 초기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구학파를 대표하는 프린스톤 출신들이었지만 부흥운동을 찬성하는 점에서 신파적인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넷째는 박형용박사의 견해로서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적인 입장은 청교도의 유산을 이어받았다는 것이다. 박 형용 박사가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이 청교도들의 신학적인 유산을 이어받았다는 주장은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하나는 엄격한 주일성수신앙이고, 둘째는 성령의 역사를 통한 직접적인 전도를 강조하는 청교도 신앙이라는 사실이다. 박 형용박사는 한국 초기 선교사들이 사경회를 하면서 순회전도를 통해 직접 전도에 힘쓴 것은 청교도 실천신학을 이어받은 것이라 지적한다. 그런데 최근에 김 홍만 교수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였다.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은 청교도들의 회심신학을 이어받아 부흥을 주장하는 구학파라는 것이다.

둘째는 평양대부흥운동을 일으키는데 영향을 미친 신학적인 조류가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는데 영향을 미친 것은 1903년의 원산부흥운동의 시발이 되었던 남감리교회 소속 선교사 하디의 회심이다. 그리고 하디의 뒤를 이어 부흥운동에 가담했던 남감리회 선교사는 저다인, 크램 등 이었으며, 하디의 회심 이후에 스칸디나비아 선교회 소속의 프란손이 입국하여 그에게 부흥회 인도방법을 가르쳤다. 박명수 교수는 프란손이 바로 심슨과 연결되어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영향을 받은 인물일 뿐만 아니라 남감리교 선교사들도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로서 한국교회 부흥운동에 웨슬리안 성결운동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박용규 교수는 ”조나단 에드워즈로 대변되는 개혁파 영적 각성 운동, 맥코믹 신학교 출신들로 대변되는 무디 부흥 운동의 전통, 언더우드의 경건주의 전통, 그리고 남북 감리교회의 전형적인 웨슬리 부흥운동의 전통이 어우러져 거대한 부흥운동의 물줄기를 형성한 것“이라고 종합적으로 평가했다.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평가는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의 유형은 교파를 막론하고 미국의 무디의 학생 자원운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로 경건주의적이고 복음주의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신학사상은 각 교파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무디의 3대 표어인 3R(인간의 전적 타락,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 성령에 의한 중생)을 믿었다. 이러한 근본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각 교파의 특색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을 보수적인 복음주의라고 부르고 있는데, 개혁주의와는 어느 정도 연관을 맺고 있을까?

셋째로 평양대부흥운동의 발생은 한국교회의 성경번역과 보급과 함께 사경회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경회의 진행이 대부흥운동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사경회는 개혁신앙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는가? 넷째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요한 모습 가운데 하나는 성령의 역사를 통한 철저한 회개운동이다. 이러한 철저한 회개 운동은 원산의 하디 회심 이후에 한국교회에 지속되어온 부흥운동의 주요한 모습인데, 이러한 회심은 개혁주의에서 주장하는 중생인가 웨슬리안 성결운동에서 주장하는 성령세례인가?

1. 한국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사상과 부흥운동의 상관관계

첫 번째로 제기된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한국에 파송된 장로교 선교사들의 신학적인 관점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것이 가장 핵심이라고 판단된다. 한국 학계에서 19세기 미국 장로교회의 구학파와 신학파에 대한 일반적인 서술은 무엇인가? 서론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가장 대표적인 견해가 신학파는 부흥운동에 찬성하는 입장을 취하였고, 구학파는 엄격한 칼빈주의 교리를 내세우며 부흥운동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1837년에 분열한 미국장로교회의 구학파와 신학파의 실상을 올바르게 제시하지 못한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김홍만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19세기 미국의 구학파와 신학파는 모두가 부흥운동에 찬성했는데, 구학파는 신학파의 새로운 부흥운동의 방법론의 사용을 반대하고 청교도 회심 신학에 입각한 신파의 부흥운동을 계승하였다고 주장한다.

구학파와 신학파의 부흥에 대한 진정한 견해 차이는 청교도 회심신학에 근거하여 진정한 부흥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여 감정주의에 입각한 부흥주의를 추구하느냐의 차이이다. 구학파는 피니의 부흥운동을 피상적인 회심을 끌어내는 부흥주의라고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청교도 회심 신학을 바탕으로 부흥을 추구했던 18세기의 신파의 전통을 계승했다. 미국에서 18세기에 일어난 제1차 대각성운동에서 회중교회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중심인물로 활동하였고, 장로교에서는 길버트 테넌트를 중심으로 통나무 대학(log college) 출신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1차 대각성운동에서 중심 역할을 한 이러한 인물들이 장로교회 안에서 부흥운동에 반대하며 엄격한 교리를 강조했던 구파와 충돌하면서 뉴브룬스위크 노회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뉴브룬스위크 노회는 목회자들을 육성하기 위해 동부의 하버드 대학교나 예일 대학교를 대신할 새로운 학교로 뉴저지 대학교를 설립하였다. 뉴저지 대학교는 기본적으로 부흥을 지지하는 장로교의 신파의 신학을 교육하기 위하여 설립된 학교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학을 전수하기 위하여 세운 학교이므로 뉴저지 대학교는 3대 교장으로 조나단 에드워즈를 초빙했던 것이다. 뉴저지 대학교가 개명한 프린스톤 대학교의 학생들이 점차로 신학을 지원하는 경향이 줄어들자 장로교 신파의 목회자 육성을 위해 1812년에 설립된 신학교가 프린스톤 신학교였다. 프린스톤 신학교는 18세기 1차 대각성운동의 부흥 신학을 계승하여 신학생들을 양육하고자 설립된 학교였다. 프린스턴 신학교의 제1대 교장이었던 아치발드 알렉산더는 2차 대각성운동 때에 회심한 인물로 신파의 전통을 따르는 유명한 부흥사였다. 그러므로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길버트 테넌트의 전통을 따르는 부흥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에쉬빌 그린과 밀러 등도 이러한 유형의 부흥운동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신파 전통의 부흥운동을 반대하면서 새로운 부흥의 방법을 사용하여 부흥운동을 전개한 사람들이 찰스 피니로 대변되는 신학파였다. 그러므로 신학파는 19세기의 새로운 시대분위기에 발맞추어 인간의 자유의지의 능력을 인정하는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찰스 피니는 감리교에서부터 발전되어 나왔던 새로운 방법들을 채용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감정적인 설교를 하였고, 즉각적인 회심을 주장하였으며, 깊은 죄의 각성에 따른 회심보다는 설득을 중심하였다. 그리고 은혜를 사모하는 자리를 만들어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즉각적인 결단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1837년에 분열되었던 19세기 미국 장로교의 구학파와 신학파의 차이는 부흥운동을 지지하였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부흥운동을 하되 진정한 부흥을 추구하는 기준이 무엇이냐의 문제였다. 부흥을 추구할 진정한 기준으로 18세기의 1차 대각성운동, 더 나아가 영국의 청교도 회심신학의 기준을 따를 것을 주장한 것이 구학파였다. 반면에 부흥을 판단할 기준으로 새로운 측정 방법을 주장한 것이 신학파였다. 그리고 19세기에 이러한 구학파 신학을 대변했던 학교들이 프린스톤 신학교와 시카고에 세워졌던 매코믹 신학교였다.

그런데 1907년까지 한국에 왔던 미국 장로교 선교부의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프린스톤 신학교나 그 프린스톤 신학교의 영향을 받고 있던 맥코믹 출신들이었으므로 그들의 신학은 부흥운동을 지지하면서도 개혁파신학을 지지하는 인물들이었다. 동시에 한국에 온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 19세기 후반에 미국에서 진행되었던 1857-59년까지의 정오기도운동과 무디의 부흥운동와 학생자원운동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부흥운동들도 찰스 피니의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개혁파의 영향을 받은 유형의 것들이었다. 무디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강조하고 성령에 의한 회심을 강조하면서 부흥운동을 일으키면서도 다양한 교파의 사람들과 협력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부흥운동은 다른 교파를 배척하기보다는 협력하는 복음주의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으면서 인간의 철저한 부패 교리를 강조하는 개혁파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무디의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 왔던 장로교 선교사들은 말하자면 복음주의적인 개혁주의자들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교리 중심의 개혁파 부흥운동의 특성은 무엇인가? 개혁파 부흥운동의 특성은 청교도 회심 신학을 이어받으면서 부흥운동이 성령의 부어주심을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는 인식과 함께 기도를 통한 준비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특성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1차 대각성운동에서 출발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회심, 즉 중생의 체험을 부흥운동의 핵심으로 보았다. 그는 회심을 전통적인 청교도 신학의 관점을 따라 율법에 의한 죄의 질책, 자신이 죄인이라는 겸비(humiliation), 회개의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중생이 이러한 준비의 과정을 통해서도 일어나지만 순간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에드워즈는 중생의 회심은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으로 일어나고 즉각적으로 일어난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으므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회심이 일어나며, 이러한 회심 후에는 성화의 삶이 따라온다고 보았다. 에드워즈는 청교도 신학을 수용하여 이러한 회심을 위해서는 성도들의 심령을 살피는 것(searching the heart)과 마음의 종교(heart religion)를 강조하였다. 에드워즈는 중생 체험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에드워즈를 위시한 친부흥주의자들에게 하나의 결정적인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회심의 경험이었다. 이러한 청교도의 회심론에 바탕을 둔 신학사상은 알미니안주의를 수용했지만, 웨슬리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웨슬리도 근본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통한 신생을 강조한 점에서는 동일한 점이 있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통한 인간의 심령의 근본적인 변화를 통한 부흥운동을 주장하였고, 이러한 부흥운동의 전통은 19세기 프린스톤 신학교를 통해 전수되었으며,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무디와도 어느 정도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무디는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강조하면서 성령의 능력에 의한 중생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중생 내지 회심의 경험이 1903년부터 한국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의 핵심적인 사항이라고 판단된다.

2. 평양대부흥운동에 영향을 미쳤던 신학적인 조류들

둘째로 평양대부흥운동에 영향을 미쳤던 신학적 조류들은 무엇인가? 북장로교회에 왔던 선교사들은 대부분 구학파의 신학전통을 따르는 프린스톤과 맥코믹 출신이었다. 프린스톤과 맥코믹은 모두 같은 조류의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교리적으로 칼빈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부흥운동도 찬성하였고, 동시에 다른 교파와 연합하여 복음을 전하려는 복음주의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신학적인 입장은 다른 교파와 연합하여 복음을 전하려는 개방적인 자세를 가진다는 점에서는 복음주의적이었고, 성경의 영감을 주장하며 교리중심적인 설교와 가르침을 통한 회심 체험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경험신학을 추구하는 청교도 신학의 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회심 신앙의 경험을 추구하는 것은 청교도 신학의 유산으로, 이러한 청교도 신학의 유산이 경건주의, 웨슬리안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며 본류로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통해 미국의 구파 전통의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의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전해졌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험 신학을 추구하는 신학전통은 복음주의이면서도 더 근본적으로 개혁주의적이다. 물론 복음주의의 회심 신학을 주장하는 데는 신학적인 색채에 따라 회심 신학을 주장하는 흐름들은 다양할 수 있다. 한국에 들어온 장로교 선교사들은 복음주의적인 개혁주의 신학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면 감리교 선교사들의 신학적 배경은 무엇인가? 이 덕주는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신학”이란 논문에서 부흥운동을 주도한 남감리교 선교사들보다는 북감리회 선교사들의 신학사상을 분석한다. 북감리회의 첫 선교사인 아펜젤러를 비롯하여 감리교 협성신학교 신학교 교수로 활약한 노블(W. A. Noble)과 스웨어러(W. C. Swearer) 등을 배출한 드루신학교는 "감리교의 사관학교"(The West Point of Methodism)라 불릴 정도로 엄격한 신앙훈련으로 유명하여 “학문적 훈련과 기도 생활을 중심으로 한 개인적 경건을 동시에 강조하였다. 드루 신학교의 졸업식의 절정은 애찬식이었는데, 그 시간에 졸업생들은 자신의 종교적 체험에 대해 공개 증언을 하였다." 드루신학교는 학문(이성)과 체험의 조화, 경건주의와 복음주의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원래 개혁교회 출신인 아펜젤러는 '머서스버그 신학'의 본거지였던 프랭클린 마샬 대학 재학 중 개인적인 중생의 체험을 한 후에 감리교회로 이적하고 '경건주의 신학과 신앙의 훈련장'인 드루신학교를 찾았다. 이와 같이 드루 대학 출신의 초기 북감리교 선교사들도 신앙 경험에 대해 열린 자세를 유지하였다. 박 용규 교수도 “북감리교 출신 미국 선교사들도 좀 더 폭이 넓었던 본국의 신학적 분위기보다 복음주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어 부흥운동에 대해 상당히 열려 있었다”고 평가한다.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남감리교 출신의 선교사들은 박 명수 교수의 상세한 분석이 잘 보여주는 바와 같이 대부분 복음주의적인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디는 처음에는 카나다 장로교회의 보수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으면서 무디의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 왔던 독립 선교사였는데 1898년 이후에 남감리교로 옮겨가 1903년에 성령체험을 하고 무디의 영향을 받은 프란손을 통해 무디 스타일의 부흥회인도법을 배워 원산부흥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저다인은 하디와 함께 1902년부터 1906년까지 원산에서 일했으며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여 함흥과 목표의 장로교회의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하디가 1904년 안식년을 떠난 후에 송도에서 부흥회를 인도했던 크램(W. G. Cram)은 1898년 웨슬리안 계통의 에즈베리 대학은 졸업하였고 웨슬리의 전통적인 부흥운동, 즉 중생과 성령의 능력을 강조했다. 서울 잣골에서 사역했던 무스(J. R. Moose)도 성결운동가였다. 이와 같이 남감리회 소속 선교사들은 한국에 와서 성령체험을 했거나 미국에서 성결운동에 영향을 받은 전형적인 웨슬리안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후예들이었다.

그러므로 박명수 교수도 한국의 초기 교회의 모습을 복음주의라고 정의하면서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를 미국 복음주의의 경험적 성격이라고 강조한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자신의 출신 교파에 따른 교리적인 차이점은 있지만, 성령의 역사를 통한 체험 신앙의 추구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1903년부터 1907년까지의 부흥운동의 공통점이다. 이 덕주는 감리교 선교사들과 장로교 선교사들의 공통적인 요소로 경건주의의 들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경건주의(pietism) 신앙은 웨슬리를 통해 경건주의에 맥이 닿아 있는 감리교 선교사들뿐 아니라 장로교 선교사들에게서도 발견되는 현상이었다. 초기 한국 개신교 선교사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경건주의 색채가 강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한 중생의 체험과 기도와 성경공부를 중심한 신앙훈련, 그리고 선교와 사회구제로 연결되는 윤리적 실천 등으로 정리될 수 있는 경건주의 신앙 요소는 선교사들에 의해 촉발된 초기 부흥운동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18세기 '뉴잉글랜드 신학'이 감리교 운동과 연결된 종교각성운동이란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었듯 한국의 초기 부흥운동도 종교각성운동의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초기 부흥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1903년의 원산 부흥운동이 하디(R. A. Hardie) 선교사의 개인적 회개와 중생의 체험에서 시작되어 집단적인 회개운동으로 발전된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때부터 시작된 부흥운동은 하나님의 임재와 윤리적 갱신이라는 경건주의 신앙 분위기 속에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경건주의와 복음주의, 웨슬리안 성결운동, 개혁주의의 신학 사상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령의 역사를 통한 회심을 강조하는 신학적인 공통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각 교파에 따른 교리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성령의 역사를 통한 신앙의 체험을 강조하는 공통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3. 사경회와 부흥운동의 연관성

셋째로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경회는 한국에서 어떻게 생겨났으며, 사경회와 성경 번역과 보급은 어떤 관계에 있으며, 이러한 사경회는 부흥운동 발생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한국 교회의 사경회는 네비우스 선교방식에서 생겨났다. 네비우스 선교 운동의 중요한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로 네비우스는 중국선교에서 현지인들을 고용하여 복음을 전하는 옛 방법을 비판하고 자급, 자전, 자치를 주장하였다. 그가 이렇게 자급, 자전, 자치를 주장하면서 옛 방식에 의한 신도들의 신앙양태를 청교도 회심 이론인 마음의 탐구와 위선자 이론에 입각하여 분석하여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둘째로 그는 선교지 현실에 맞는 교회 조직과 교회 건물을 짓는 것을 주장하였다. 셋째로 그는 선교사들의 순회전도와 함께 교회 지도자 육성을 위한 성경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원칙은 네비우스가 1890년 6월에 한국에 와서 한국 선교사들과 두 주간 동안 세미나를 가진 후에 언더우드와 곽 안련이 정리한 내용에 잘 나타나 있으며, 1893년 1월에 장로교 선교부 공의회에서 채택한 10개 항에도 반영되어 있다.

네비우스는 특히 중국에서 주일 오전과 오후를 위한 경건회의 형태(form of exercise)를 네 부분으로 구성하여 실시하였다. 첫째는 모든 사람이 참석하기를 요망하는 비공식의 주일학교(informal Sunday school)이다. 참가한 모든 사람들은 인도자와 그 아래 있는 사람들의 지도 아래 개인적인 공부를 하는데, 중국어 문자를 배우거나 성경 구절을 외우며, 성경 이야기를 말하거나 혹은 요리문답 혹은 성경문제집을 공부한다. 둘째로 우리는 훨씬 더 공식적인 예배(formal service of worship)를 드린다. 이 예배는 찬송과 강해나 권면을 깃들인 성경봉독과 기도로 구성되어 있는데, 45분을 넘지 않는다. 셋째로 성경 이야기 경건회(Scripture Story Exercise)가 있다. 이것은 사람들을 지정하여 연속적으로 이야기하여,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그 이야기에서 교훈과 의무를 끌어낸다. 넷째는 시간이 있으면, 요리문단 경건회(Catechical Exercise)를 가진다. 이것은 이미 배운 것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도록 계획되어 있다. 주기도문, 십계명, 선택된 성경 구절, 성경의 어떤 책, 혹은 자선의 의무 같은 주제들을 다룬다. 네비우스는 자신이 사역하던 중국 산둥에서 봄과 가을에는 순회전도를 하였고 겨울과 여름에는 학생들을 모아서 교육하였다. 초신자들을 40명 전도 선발하여 반으로 편성하여 교육하였으며, 이들에게 최소한의 비용만을 지불하고, 나머지는 스스로 부담하도록 하였다. 네비우스의 경건회의 방식 가운데 첫째와 둘째는 그대로 한국에서 시행되었으며, 여름과 겨울의 사경회도 그대로 도입되었다.

한국에서는 이미 1888년 스크랜튼 부인이나 언더우드에 의해 사경회가 실시되었는데, 네비우스 방식이 채택된 후에는 좀 더 체계적으로 시행되었다. 스크랜톤 부인은 1888년 1월 이화학당에서 처음으로 어린 처녀 12명과 부인 3명이 모여 성경을 공부하여 사경회를 시작하였다. 언더우드는 1888년 12월부터 그의 사랑에서 여덟 명의 청년들에게 기독교 교리와 함께 성경공부를 가르쳤는데, 선교부에 이를 ‘단기 신학 교습’이라고 보고했다. 1888년 새문안교회 주일예배에 50명이 참석할 정도로 성장하고 한국의 전역에서 복음이 확장되어 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언더우드는 한 해가 지나기 전에 몇몇 한국인 사역자들을 집중적으로 양육할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막 한 해(1888년)가 끝나기 직전에 8명의 한국인 사역자들이 자신들의 고향과 사역으로 돌아가기 전 교육을 받고 성령의 권능을 힘입도록 기도하기 위해 서울에 모여 함께 한 달을 보냈다.” 언더우드는 자신의 집에서 한 달 동안 집중적으로 한국인 사역자들을 교육시켰는데, 이것이 후대 사경회의 모체가 되었다. 언더우드는 1887년 9월에 서울을 방문한 로스를 통해 이미 만주에서 시행되고 있던 네비우스의 방식을 듣고 난 뒤에 이러한 사경회를 실시하였다. 1890년 언더우드는 서울에서 사경회를 개최하여 한국인 7명을 한 달 동안 훈련시켰다. 언더우드의 집 남서쪽에 있는 작은 방에서 열린 첫 사경회에 참석한 이들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서울 출신이 세 명이었고, 북부 출신과 황해도 출신이 각각 두 사람이었다. 그 다음 해에는 사경회 참석자가 전 해보다 배 이상이 늘어난 18명이었다. 그 중에서 경성의 서상윤, 홍정후, 의주의 한석진, 송석준, 구성의 김권근, 양순백, 문화의 우종서, 해주의 최명오, 장연의 서경조, 비성의 김병갑 등 한국교회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한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경회는 처음에는 서울에서만 시행되다가 1893년부터는 여러 지역에서 개별적인 사경회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경회가 가능한 것은 로스와 네비우스의 선교정책에 따라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주일학교 활동과 연결되어 오전에는 성경교육을 실시하였다. 한국교회에서 성경번역은 양반들인 지식인들이 아니라 대중들(common people)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한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번역할 때에 “오직 대중에게 적합한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므로 만주에서 번역된 성경은 완전히 한글만을 사용하여 성경을 번역하였다. 일본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양반출신 이수정은 현토성경을 만들기도 하였고, 국한문혼용체의 성경번역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서울 표준어에 맞추어 새롭게 성경번역을 시도할 때에도 일반 대중을 목표로 하여 한글만을 사용하여 성경을 번역하였다. 이렇게 한글로만 번역된 성경은 일반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대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주일에 시행되는 성경공부와 특별한 시기에 사경회를 열 수 있는 좋은 통로를 제공하였다. 이렇게 대중에게 적합한 언어로 번역된 성경은 국내에 선교사가 없는 상황에서도 상당량이 보급되어 언더우드는 “씨를 뿌리러 왔으나 열매를 거두고 있다”고 고백하였다. 이와 같이 성경이 보급되고 한국성도들이 성경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한국기독교인들을 “성경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였다. 한국교회는 이렇게 성경을 번역하였고, 이러한 성경이 한국교회의 부흥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한국교회에 성경이 번역되어 사용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네비우스의 선교방식이다.

한국의 부흥운동의 주요한 원인으로 순 한글로 번역된 성경을 사용하여 실시한 성경공부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성경 공부는 두 가지 형태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개교회에서 진행된 성경공부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교회들이 연합하여 모여 진행했던 성경사경회가 있었다. 개교회에서 진행된 성경 공부는 매주 시행되었다. 이 시기에 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에서는 주일 오전에는 성경 공부를 하고 오후에 정기 예배를 드렸다.

1898년 연례 보고서에서 마펫과 그라함 리는 평양교회들에서 “두 개의 정식 주일 오후 예배, 성경 연구를 위한 5개의 아침 모임들, 두 개는 도시 밖에서, 두 개는 도시 안에서, 하나는 강 건너에서, 여성들을 위한 수요일 오후 성경 공부반, 하나는 도시 안에 있고 하나는 밖에 있다. 토요일 오후에는 성경 교사들을 위한 반이 있다. 마지막으로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교회의 정식으로 임명된 직분자들인 지도자들, 집사들, 그리고 선교사들의 지도 아래 수요일 저녁 기도회가 열린다”고 서술한다. 선천에서 1902년에 성경 연구를 위한 아침 회중은 연령에 따른 반들로 나누어진다. 고린도전서를 연구하는 동안에 전체 학교는 동일한 교제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남자들과 청년들이 고린도 후서를 공부하는 동안에, 여성들과 소녀들과 소년들은 마가복음을 공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지금 함께 마태복음 공부를 시작하고 있으며, 9개 등급의 반을 가지고 있다. 교사들의 모임은 매주 금요일 밤에 열린다. 이것은 다음 겨울의 성경 연구와 연관하여, 주일학교 교사들을 위해 하루에 한 시간 수업의 정규 사경회반을 가질 계획을 가지고 있다. 1902년에 평양의 교회들의 주일 아침 성경 공부반들은 다양한 채플들과 사랑방들을 흘러넘칠 정도로 많아져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다른 반들이 조직될 것이다. Chase 양은 선천에 도착한 직후에 교도 자매들에게 지적인 방식으로 복음을 제시하는 방법을 알기를 열망하는 것을 발견하여 한 주일에 세례자와 학습자들을 위한 두 개 반을 열었다. 지속적인 참고서인 성경과 함께, 그들은 “천국에 대한 안내”(Guide to Heaven)이란 논문을 연구하였으며, 이러한 특별한 작품으로 그들을 도와줄 본문들이 날마다 교육되었다. 이와 같이 당시에 교회에서 오전에 모여 성경공부를 하면서 전도훈련도 실시하였다.

그리고 선교 지부가 있는 중심 지역에 영수와 조사와 같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모아 사경회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사경회의 중요한 목적은 교회 지도자들의 육성과 함께 전도활동이었다. 1898년의 연례보고서에서 “조사들과 영수들을 위한 겨울 사경회들의 특징은 교회의 영적 성장을 위해 매우 중요한 열렬한 복음전도 정신이다. 사경회가 열리는 동안 토요일 하루는 모든 참석자들이 도시 안과 주변에서 전도 활동에 전념한다. 일부는 도시 문들까지 갔고, 일부는 주요 거리들로 일부는 그들이 전도하고 책을 팔았던 근처 마을들까지 갔다.” 그리고 이러한 사경회에서 조성된 이러한 전도 정신은 지방 교회들로 확산되어, 신자들의 많은 새로운 그룹을 형성하였다. 이와 같이 이미 1898년에도 사경회는 평양에서 개최된 사경회에서 전도정신을 육성하여 지방으로까지 확산시켜 교회를 확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자들을 위한 사경회가 1898년 4월에 처음으로 열렸다.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평양교회들의 도움으로 해결되어 24명이 참여하였다. 두 시간 반의 찬송 이외에 세 개의 반을 운영하였다. 베어드는 아침 기도를 인도하고 누가복음을, 다음에 리 부인이 마가복음을, 오후에 베어드 부인이 구약을 가르쳤다. 이러한 공부에는 평양 여성들까지 60여명이 참여하였고 “참석했던 지방 여인들은 기쁨에 가득 차서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들의 이웃들에게 복음의 전파를 위한 열정으로 타올랐다.” 그리고 1월의 겨울 사경회가 끝난 후에 매일 사경회를 해 달라는 요청으로 특별사경회가 열렸는데 7명에서 20명이 참석했는데, 이 반도 “복음전파 사역에서 가치있는 요소가 되었다.”

1898년의 17개의 성경 공부반이 1899년에는 52개의 사경회가 열렸다. 25개는 선교사들이 참석하였고 27개는 한국인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4개의 대표적인 사경회는 평양에서 열렸는데, 남자반이 두 개이고 여자반이 두 개다. 11월에 열리는 이러한 여성반들은 그들이 성경 연구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연초에 평균 250명 정도가 참석하는 남자 사경회 반은 너무 커서 세 반으로 분반한다. 첫째 반은 로마서와 325년까지의 교회사를 공부했고, 둘째 반은 고린도 전서와 요한복음을, 셋째 반은 사도행전, 누가복음과 성례, 안식일 준수, 십일조 등등의 다른 특별한 문제들을 연구하였다.

여성들을 위한 봄 사경회는 4월 7일에 시작해서 18일까지 지속되는데, 50명의 여성들이 참석하였다. 이 여성반들은 둘로 분반하는데, 주제는 야고보와 마가와 누가복음이다. 여름반은 조사들과 지도자들이 모인다. 이 반에서는 구약의 교훈, 교회사, 신약성경 주석, 성경 연구 방법, 위생과 소요리문답을 다루었다. 1899년 2월에 휘트모아(Whittemore)가 그라함 리의 도움을 받으며 선천에서 12일 동안 사경회를 열었는데 269명이 등록하여 평균 200명이 참석하였으며, 남녀가 같이 참석하였다. 이들은 하루 저녁에 선교사 지시없이 자발적으로 단체로 길거리에 나가서 복음을 전했다. 1902년의 지방에서 열린 사경회도 복음서의 내용을 가르치며, 가끔씩 주제 연구들이 사용되었다. 모든 방문된 곳에서, 여성들에게 복음을 조직적으로 제시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과 관련된 소책자를 연구하는 시간이 할애되었다.

이러한 사경회 제도에 대하여 1904년의 연례 보고서에는 “우리들의 사경회”라는 제목으로 전체적인 내용이 개괄되어 있다. “전체 교회의 교육, 즉 청년과 노인, 식자와 무식자 등 모든 교인들의 교육은 성경을 주교재로 사용하는 사경회를 통해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다.” 사경회의 목적은 성경 공부이지만, 기도, 회의, 그리고 실질적인 복음 전도도 이 사역의 중요한 부분이다. 사경회 방식은 새벽에 기도와 찬양으로 예배를 드리고, 아침 식사 후에 30분 동안 경건회를 가지며, 그 후에 반으로 나누어 성경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다른 성경 공부 시간과 찬양을 가르치는 시간이 있으며, 종종 오후 시간의 일부는 축호 전도를 위해 사용된다. 저녁에는 모두 연합하여 부흥회나 전도 집회를 갖는다. 성경공부 방식은 주제별, 권별 성경 공부 혹은 한 절씩 주석석으로 책을 정리하는 방법들 다양한 방식이 도입되고 있으며, 마지막 방식이 가장 인기가 있다. 한국인은 천성적으로 공부하고 가르치기를 좋아하므로, 이 방법은 한국인의 알려진 특징을 제대로 활동하는 것이다. 사경회의 목적은 무엇이고 어떤 선교 이론에 근거하고 있는가? 성경을 배우는 목적은 배우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하여 전도는 더욱 권세를 가지며, 생활 속에서 실천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신앙은 성경적 근거를 가집니다. 사경회는 평신도와 지도자, 조사, 선교사 간의 상호이해를 가져왔으며, 교회의 남녀를 하나님의 말씀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군인으로 만들며, 교회 전체가 전도부대가 되게 하고, 진정한 지도자의 자질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케언즈(Carl Kearns)는 선천에서 일 년을 보내서 쓴 보고서에서 “한국의 북한 지역에서 격렬한 각성(rude awakening)이 있었는데, 바로 종교적 각성과 근대적 삶을 위한 각성입니다”라고 서술하면서 “전쟁으로 인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선천 교회는 중단없는 한 해를 보냈다”고 기술하였다. 의주에서는 “불신자 이웃에게 날마다 복음을 전하거나, 더 멀리 있는 미전도 지역 전도를 위한 국내 전도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 더 많은 개인적인 일을 하고자 하는 열망이 일어나” 날연보를 하였다. 이것은 11월의 어느 사경회에서 350일을 연보하면서 시작되었는데, 3개월 동안 평안북도 전역에서 3000일 가량의 자비량 전도가 행해졌다. 날연보는 “자기 집을 떠나 불신자 마을에 가서 자신의 비용으로 정한 날 동안 그곳에서 특별한 복음 전도자의 일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경회를 통하여 성도들은 성경을 통해 복음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성경대로 살아가야할 삶을 배웠다. 여기서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비롯한 교회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경회를 통하여 한국인 교회 지도자들이 육성되었다. 이러한 사경회를 통하여 한국이 조사들이 육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이 교사로서 모든 사역을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한국인들이 지도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경회는 한국교회에 성경의 내용의 철저한 교육, 성경의 교훈에 따른 신앙생활, 복음 전도, 기도의 훈련, 한국 지도자 육성을 통하여 교회 부흥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전도활동은 성경말씀을 통한 개인전도의 실천이었다. 박형용은 이러한 전도활동이 대중집회보다는 개인전도와 요리문답교육에 힘썼던 청교도 목회와 전도의 실천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사경회에서 성령충만을 받기 위하여 꾸준하게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경회는 부흥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사경회는 성경공부와 기도회, 전도활동이 종합되어 있으며, 특히 성경공부를 통해 성경 내용과 함께 체계적인 전도법을 배워 전도하여 부흥을 준비하였다. 네비우스는 설교보다 교육에 역점을 두었는데, 이것은 형식주의를 조장하고 위선적인 교인들을 양산하여 교회의 성장과 진보를 방해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을 잘 가르쳐 참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을 육성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이 사경회는 네비우스의 원리를 따라 청교도의 회심신학을 따라 교육과 전도가 병행되어 개혁주의 원리가 시행되었다.

사경회는 이와 동시에 강력한 기도 운동을 통하여 부흥을 준비하였다. 선교지 교회의 특성이겠지만, 한국 교회의 사경회에서 성경의 교육과 함께 기도운동이 강력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기도운동은 한국민족의 특성과 연관되어 설명되기도 한다. 기도회는 한국의 전통적인 샤머니즘의 기도 습관이 기독교와 만나 기독교의 경건으로 변화된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미 옥성득 교수는 샤머니즘과 도교의 영성이 한국 기도전통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사경회는 새벽기도와 함께 시작되었다. 새벽기도가 한국에서 언제 시작되었느냐에 대해 여러 가지 논의가 있었는데, 최근에 옥성득 교수는 새벽기도회가 이미 1898년에 열렸던 사경회에서 한국인 신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장로교의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이미 1898년 여성성경반에서 베어드가 아침 기도회(morning prayer)를 인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xxii) 번하이즐은 1901년에 황해도 사경회를 인도할 때 사람들이 새벽 4시에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1902년의 선천 보고서에는 “매우 이른 아침의 첫 번째 소리들은 기도와 찬송의 봉헌(oblation)이다. 많은 사람들이 해가 뜨기 전에(before sunrise) 예배(devotion)를 위해 교회에 왔다. 이것은 북쪽 지방에서 일반적인 관습(common custom)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하늘 아버지로 나온 모든 말들에 절대적인(implicit) 신앙과 어린 아이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북쪽 지방에서 새벽기도는 일반적인 관습이 될 정도로 퍼져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1906년 9월의 존스톤 목사의 소개로 통성기도가 한국교회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국교회에 의해 시작된 새로운 기도회가 바로 수요기도회이다. 언더우드는 1886년 1월부터 주일 저녁예배를 부흥회 성격을 띤 주중 기도회로 확대하였다. 이 주중 저녁 기도회에 소수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기도회가 발전하여 수요예배로 정착되어 갔다. 물론 주간에 모이는 기도 모임도 개최되었다. 1898년 평양에서는 주일 저녁에 3개 예배가 한국인의 인도로 드려지고, 주중 낮기도 모임(week day prayer meeting)이 4개 모였다. 이러한 한국인들의 다양한 기도 모임은 1857-9년에 걸쳐 일어났던 정오기도운동을 체험한 선교사들이 다양하게 전개한 기도회와 한국인 특유의 심성이 결합되어 발생하여 교회 부흥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4. 성령의 역사를 통한 회개의 성격

넷째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가장 중요한 양상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강력한 회개 운동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령의 역사에 의한 회개 운동은 이미 1903년 하디에 의해 시작된 원산 부흥운동에서부터 시작되어 평양대부흥운동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에 의한 회개의 양상에 대해 감리교 선교사들은 성령 세례라고 말하고 있고, 장로교 선교사들은 성령의 부으심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물론 장로교 선교사들도 가끔씩 성령세례라는 용어도 사용한다. 당시에 선교사들이 전했던 공통적인 메시지는 죄, 회개, 구원, 성령으로 충만한 성결한 삶, 전도 같은 주제들이었다. 이러한 주제들은 19세기 후반 미국 복음주의가 전한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성령세례는 중생과 구별되는 웨슬리안 성결운동에서 말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 아니면 성령세례와 중생(회심)은 동일한 것인가?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 동안의 남감리교 선교사들과 북장로교 선교사가 참여한 기도회에서 일어났던 하디의 성령의 체험과 회개를 통한 회심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스코틀랜드의 혈통을 이어받은 하디는 1890년에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에 1888년에 YMCA의 후원으로 한국에 파송되었던 게일(James S. Gale)의 초청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는 토론톤 YMCA의 후원을 받아 한국에 파송되어 8년 동안 활동하였고, 계약 기간이 끝난 후에는 의료 선교사를 찾던 남감리교로 옮겨가 남감리교 선교사가 되었다. 그러므로 하디는 1903년 당시에 남감리회 소속의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 사실에 대해 이 덕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캐나다 출신 초기 한국 선교사들의 신학도 보수적이었다. 게일(J. S. Gale)·하디(R. A. Hardie)·펜윅(M. C. Fenwick)·에비슨(O. R. Avison) 등을 파송한 기독청년회(YMCA)와 이들의 선교 동기를 부여한 학생자원운동의 신학 입장은 1846년 런던에서 결성된 반(反) 퓨지주의(Puseyism) '복음주의 연맹'(Evangelical Alliance)에서 발표한〈교리적 근본〉(Doctrinal Basis)에 잘 나타나 있다. 게일을 비롯한 캐나다 출신 선교사들은 성경의 영감(靈感)과 절대성, 인간의 전적 타락, 신앙의인(信仰義認), 영혼의 불멸과 육신의 부활, 그리스도의 심판 등 보수적 '복음주의 원리'를 담고 있는 이 신앙고백을 공개적으로 밝혀야 했다.

그러므로 하디가 YMCA의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앙을 가졌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사경회를 인도하다가 성령 체험을 한 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자신의 체험에 대해 “아버지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서 우리에게 부어 주셨습니다”라는 사도행전 2장 33절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사역이 확장되지 않아서 특별히 자기반성과 자기비판을 하며 보낸 해였지만,” “치리를 소홀리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다음 해 보고서에서는 “성령께서 제게 임했을 때”라고 묘사하고, “성령충만의 실재를 경험”했다고 말한다. 그는 같은 보고서에서 “성령 세례를 받자마자” 강원도 지경대에서의 3년간의 실패가 육신의 노력 때문이었다고 설명하고, 그곳에서 열린 사경회에서 기존의 거의 모든 사람들과 신입 회원 여러 명이 회심하였고, 그것을 “성령의 능력이 은혜롭게 부어짐을 통해” 자신들이 기도해 온 일이 영화롭게 이루어졌다고 기술한다. 이러한 설명의 내용을 볼 때, 하디는 치리를 엄격하게 하고 자신을 살피는 청교도적인 특색을 나타내는 가운데 자신의 성령의 체험을 성령세례라고 설명하면서 동시에 성령충만을 경험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하디는 이미 세례를 받았으므로 그가 말하는 성령세례는 참된 회심의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경회에 대해 메리 놀스는 “이 기간은 마음을 살피면서 하나님께 더 나아가는 기간”이었는데, “우리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축복이 우리 위에 부어졌습니다 --- 원산에서 부흥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프란손이 떠난 후에 하디가 인도한 집회에 대해서 “성령께서는 탐조등으로 우리교회를 철저히 살펴보시면서 “성전을 정화시키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빛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침투하여 그들의 감추어진 교만, 악의, 사기 등 갖가지 죄를 보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실제적인 구원을 가지지 못했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집회가 끝나기 전에 자기가 참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태어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깊은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몇몇 사람들은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케이블은 하디가 제물포에서 열었던 부흥회에서 “말씀 선포가 성령의 큰 능력과 임재 속에서 행해져서, 죄의 무시무시한 힘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예수의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집회에서 사람들은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였으며,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싶다는 깊고 간절한 소망을 표현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성령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것이 우리 사역 전체에 임할 대부흥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확신한다.” 크램은 1905년 송도에서의 부흥에 대해 설명하면서 “모든 설교에서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개인적인 자각의 문제라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했으며 거듭남과 성령의 증거와 관련된 교리를 분명하게 제시했다”고 설명한다. 그러자 죄에 대한 뉘우침이 사람들을 사로잡는 “옛 시대의 부흥”이 임했다. 그는 “불신자의 마음이 구세주의 얼굴 빛을 발견하는데 여러 해의 훈련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죄를 뉘우치게 하심은 확실하고, 그 분이 모든 진리 가운데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했으며 우리는 그러한 인도를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한국교회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부흥의 계절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러한 설명에서 드러나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죄인들의 죄에 대한 회개가 일어나며,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통한 회개를 통한 회심이 그들에게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러한 성령의 체험들을 성령세례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회심의 특별한 의미로 성령세례를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크램에게서 즉각적인 회심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디를 비롯한 남감리교 선교사들의 성령세례가 성결의 능력을 체험하는 경험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설명들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통해 죄를 회개하여 진정으로 거듭하는 회심의 체험과 그로 인한 성령충만의 경험을 성령세례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청교도들의 회심 신학을 가지고 진정한 회심자를 얻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진정한 회심자를 얻기 위해 복음전도 사역을 강력하게 진행하면서 철저한 교리교육을 바탕으로 한 원입교인을 위한 학습 교육과 세례교육을 통하여 참된 회심을 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자 하였다. 그리고 원입교인들부터 안식일을 철저하게 준수하도록 지도하고 엄격한 교회 치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들을 주일학교 교육과 사경회를 통해 교육하고 그러한 내용을 담은 소책자들을 저술하여 교육시켰다. 그러므로 장로교 선교사들은 청교도 유산으로부터 영혼을 깨워 회심자를 얻으려고 복음전도 사역을 시행하였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이러한 교리중심의 복음 전도 사역과 6개월에서 2년에 걸친 학습 교육을 통해 참된 회심자를 얻고 그들을 통해 참된 부흥이 일어나기를 소망하였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성급하고 믿으려고 생각 없는 결정의 경우에 생각할 시간을 가지도록 추천하였다.

사무엘 마펫은 20주년을 기념하는 논문에서 복음전도의 이러한 규정을 확정하였다. 복음전도 사역의 요소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① 죄, 그리고 처벌, 죄의 결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설명하는 것 ② 회개의 실재와 진실한 회심자에 대한 사죄의 선언을 설명하는 것 ③ 성령의 중생하는 사역의 실재, 구원의 하나이자 유일한 길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앙의 실재- 초자연적인 것을 가르치는 것 ④ 한국인들이 하나님의 실재, 용서와 구원을 위하여 그 분에게 오는 어떤 사람이라도 구원하시는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심원한 확신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는 여기서 중생을 통한 영혼 구원에 초점을 맞추는 선교정책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는 선교 정책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성경 말씀의 능력이라는 확신을 강력하게 피력하였다. 그는 심지어 개혁도, 개화도 기독교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구원이 복음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선교사는 강한 믿음을 가져야 하고, 선교사 자신의 영적인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5가지 원칙을 정한 후에 방법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를 수 있으나, 그는 개인적인 접촉을 하는 사랑방 전도를 선호한다. 그는 전도와 회심을 위해 성경을 사용할 것과 세례문답교육, 지속적인 복음전도 정신 주입, 사경회, 마지막으로 훈련된 조사, 전도인, 그리고 목회자의 개발을 제시한다. 그는 특히 성경을 설명하는 도구나 성경 공부로 이끌기 위해 소책자를 사용해야 하는데, 네비우스의 예수교문답, 구세론, 장원량우상론, 천로지남을 사용하고, 글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존스 여사가 집필한 초학언문을 활동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장로교 선교사들은 청교도 회심신학에 입각한 부흥을 추구하였으며, 평양대부흥운동 이전에도 영적 각성에 대한 여러 건의 보고가 있었다. 평양교회가 영적으로 깨어나기 시작한 것은 청일전쟁 직후였다. 전쟁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영적 각성의 움직임이 북부 전역에 확산되면서 평양은 한국 교회를 이끌어가는 중심부가 되었다. 기포드는 이와 같은 평양의 급속한 확장을 “놀라운 전진 운동”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렇게 점진적인 영적 각성의 분위기 속에서 1901년에 열린 사경회에 대해 사경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여(filled with the power of Holy Spirit)” 이러한 그룹들을 효과적으로 계속하여 가르치고 성경 지식에서 교회의 무지한 사람들을 급속도로 발전시킨다고 설명한다. 1902년에 열린 여러 사경회들은 성경 연구에 대한 전반적인 관심과 모든 곳에서 성경 진리의 더 나은 이해는 이 사역의 포괄적이고 영적인 영향력을 증언하고 있다. 1902년에 12월 17일부터 31일까지 열린 남자들을 위한 겨울 사경회에는 713명이 등록하였는데, 이러한 성경 공부에서 성경의 각권들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사역과 주제 별 연구가 취급되었다. 이 보고서를 종합하면서 하나님이 문을 여셨으며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기회라는 서술로 끝을 맺고 있다.

북장로교 선교사들의 사역 속에서 공식적으로 보고된 첫 번째 부흥은 1903년 2월 부산 선교부의 보고였다. 이 선교부 소속의 사이드보담(R. H. Sidebotham) 선교사는 1890년 선교 시작부터 1902년까지 만족스러운 숫자적이고 영적인 성장이 없다가 1903년에 들어서 사람들이 기도회와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면서 부흥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보고하였다. 1903년 2월에 웰본(Arthur Welbon) 선교사는 배천에서 10일 동안 진행된 사경회에서 강한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사람들이 죄로 인한 괴로움과 슬픔의 눈물을 흘렸으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고, 죄에 대한 분명하고 무서운 결과를 깨닫는 새롭고 놀라운 체험을 했다고 보고했다. 그는 1903년 12월에 강원도 순회 전도 결과에 대해 복음이 들어간지 3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영적 각성이 일어나서 마을마다 주일을 엄격하게 지키고 복음의 빛에 충성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평양선교부는 1902년 이래 매년 1월에 신년 성경공부반을 개설했는데, 1904년에 성경공부반 참석자들이 오전에 성경을 공부하고 오후에는 가가호호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이로 인해 저녁 집회에 수백 명의 불신자들이 참석하여 복음을 듣고 도시 전체가 복음에 대한 응답이 고조되어 이 해 선교역사상 가장 많은 1436명이 회심했으며, 이러한 영적 움직임이 계속될 것이라고 하여 부흥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1904년 겨울 상인들을 위한 사경회에서 우리가 교회에서 경험했던 가장 큰 각성(greatest awakening)이 일어나, 이것은 절망감을 변화시키고 커다란 영적인 고양을 가져왔던 영향력의 절정이어서, 교회는 전보다 훨씬 더 견고한 토대 위에 서게 되었다. 이 사경회 2일째 날에는 2000명이 참석했으며, 자리가 비좁아 수백명이 돌아갔고, 기독교인들은 불신자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3일째 되는 날에는 75명이 일어나(rose) 기독교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 집회는 러일전쟁으로 중단되었는데, 관리, 장교, 하층관리, 학자들, 상인들, 예술가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여 크게 감동을 받았다(greatly impressed).

이렇게 장로교와 감리교가 같이 부흥을 경험하는 가운데 복음주의 선교공의회에서 1905년 말에 1906년의 신년부흥회를 개최하는데, 교회 내의 사람들의 영적인 각성을 목적으로 할 것을 주문한다. 사역이 깊어지면 널리 퍼지는 일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이 부흥회에서는 성경공부반을 진행하더라도, 머리보다는 마음을 가르칠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할 것을 권장한다. 즉 죄, 회개, 고백, 죄의 용서, 구원의 확신같은 교리를 제시하고, 교인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귀중한 선물을 실제로 소유했는지 여부를 확인하도록 인도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가운데 1906년 신년 사경회 겸 부흥회가 열려 죄의 고백을 동반하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고, 그 절정으로 1907년 1월 14일과 15일에 걸쳐 평양대부흥이 일어났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날 때, 장로교 선교사들이 이것이 지나친 감정의 고조로 이어지지 않도록 중간에 찬송을 부르며 진정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평양의 대부흥은 단순한 감정의 고조가 아니라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일어난 회개운동이었다. 이것은 단순하게 평양 장대현 교회의 역사로 끝나지 않고 평양시내의 여러 학교들로 확산되었고, 이 부흥운동을 감정의 고조라고 비판하던 이은승의 남산현교회로도 확산되어 갔다. 그 후에 이 부흥운동을 1월에서 6월에 걸쳐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와 중국으로도 확산되었다. 그러므로 이 부흥운동을 철저하게 성령의 역사 가운데 일어난 죄의 회개운동이었다. 그리고 이 부흥운동에 대하여 1908년에 이 길함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를 방문하여 부흥운동에 대해 이야기했던 하밀 박사(H. M. Hamill, D. D.)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한 가지 일은 감정적인 것이 당신의 종교에서 강조되는 것을 믿지 않거나 허용하지 않는 당신 자신 같은 냉정하고, 차분한 장로교도들이 여러 주일 동안 인간의 감정의 그렇게 거대한 격동의 특징을 나타내는 집회를 인도했고 참석했느냐 하는 것”이라고 질문하였다. 이 질문에 대해 이 길함은 회상에 잠기는 엄숙한 표정으로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어느 것도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이 우리의 관습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말할 때 당신은 옳다. 그러나 당신은 ‘인간적인 것으로’ 이것을 말할 때 잘못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초자연적으로(supernaturally) 왔으며, 우리가 그것을 통제하고자 원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를 일상적인 조건들 하에서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죄의 고백들을 통하여 그들은 중생의 체험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부흥운동은 인간들이 어떤 목적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였다. 감리교의 부흥운동을 개관하는 레너드의 글은 이러한 점들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평양에서 장로교에서 부흥운동이 먼저 일어났을 때 남산현 교회의 이 은승목사가 죄를 고백하는 부흥운동을 반대하였으나, 결국의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부흥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다른 여러 사례들에서 반대자들의 강력한 반대 속에서도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를 통해 회개의 역사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흥운동과 회개운동은 미국의 변경의 캠프 집회와 같이 불신자들을 모아 놓고 감정적인 설교를 하여 그들의 회심을 유도했던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리고 찰스 피니의 인간의 의지의 능력을 강조하던 부흥운동과도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그러므로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은 청교도 회심신학을 토대로 사역을 해 온 장로교회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통해 진정한 회개를 통한 회심을 체험한 것으로 판단되며, 이것은 1903년부터 원산부흥과도 공통점을 가지는 것이다.

나가는 말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은 1903년 하디의 성령체험을 통한 회심으로부터 일어난 원산부흥운동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의 정점이었다. 이러한 평양대부흥운동은 개혁신앙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잠정적인 답변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평양대부흥운동은 죄의 질책, 겸비, 회개를 통한 진정한 회심을 추구하던 청교도 신학을 이어받은 18세기 미국1차 대각성운동의 신파의 정통을 이어받은 19세기 2차 대각성운동의 구학파 전통을 가지고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의 수고의 결실로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평양대부흥운동은 근본적으로 청교도 회심신학을 토대로 하여 일어난 부흥운동이었다. 청교도 회심신학을 토대로 진정한 회심을 통한 부흥을 추구했던 구학파 전통을 가진 프린스톤 신학교와 맥코믹 신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된 북장로교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선교활동은 그들의 주일학교 교육, 사경회 교육, 학습교인 교육, 세례문답교육, 그리고 소책자들의 저술에 반영되어 나타났다. 그들은 이러한 다양한 활동에서 인간의 죄의 심각성과 죄의 두려움, 그러한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할 필요성과 궁극적으로 성령의 역사로 인한 회심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열매를 맺어 1903년부터 부분적인 영적 각성과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하다가 1905년의 장감연합의 복음주의 연합공의회를 결성하여 전국적인 부흥회를 개최한 후에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물론 1903년의 원산의 감리교의 부흥운동은 보수적인 남감리회 출신 선교사들을 통하여 진행되었다. 이들도 근본적으로 자신들을 살피며 엄격한 치리를 시행하는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통한 회개의 열매를 맺게 되었다. 그들은 이러한 활동을 성령의 세례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성령세례는 중생과 구별되는 제2의 축복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오히려 진정으로 거듭나는 중생 내지는 회심으로 보인다. 그리고 평양대부흥운동 당시의 성령의 역사를 통한 강력한 회개 운동도 진정한 회심의 역사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통한 회개운동으로 전개된 1903년부터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까지의 핵심적인 양상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진정한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면에서 동일한 측면이 있다. 물론 그 성령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그러한 역사가 일어나는 배경이 되는 각 교파의 교리의 차이는 존재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부흥운동이 성령의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는 면에서 동일하고, 그러한 성령의 역사가 회개의 양상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도 동일성은 있다. 이러한 면에서 양 교단의 협력을 통한 복음주의적인 성격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 체험적인 신앙을 추구한 점에서는 통일성이 있다.

'자유게시판:김만니(섬김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증거의 기회(Opportunities th Witness)
 

 

 

예수님은 우리가 현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현 시대를 종말의 시대ㅡ
예수님을 위하여, 그리고 예수님의 왕국을 위하여
증거할 수 있는 무한한 기회가 제공되는 시대ㅡ와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재해
그리고 매일 매일 많은 사람들에게 들이닥치는
온갖 비극들이 우리를 절망으로 인도하며,
우리는 자신들이 환경의 어쩔 수 없는
희생물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사건들을
근본적으로 다른 각도에서 보십니다

그는 이러한 사건들을 증거를 위한 기회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일깨워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에 대한
살아 있는 증인이 되기 위하여 이 세상에 보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은 우리들이 우리의 실시적인
세상적 존재를 넘어서 우리들에게 약속된
영원한 생명을 바라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옮긴 글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사랑에 닻을 내리기(Reming Anchred in Love)  (1) 2012.12.06
땅을 딛고 서기(Holding Our Ground)  (0) 2012.12.04
종말의 시대 살아가기(Living in the End-Time)  (0) 2012.12.02
축복을 선택하기(Choosing the Blessing)  (0) 2012.11.30
서로서로를 축복하기(Blessing One Another)  (1) 2012.11.28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

(히 11: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초대 교부 중에 크리소스톰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로마 황제가 그에게 예수그리스도를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못한다고 맞섰습니다. 결국 그는 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되었습니다. 황제가 신하에게 말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을 독방에 집어넣어라. 아무와도 대화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러자 그 신하가 대답했습니다. "황제님, 크리소스톰은 기독교인입니다."
그 말에 황제는 화를 내며 "기독교인이라는 게 어쨌단 말이냐!
빨리 집어넣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신하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황제님은 모르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만일 그 사람을 감옥에 혼자 가두어
놓으면 기도하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오히려 기뻐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와서 같이 이야기한답니다. 그래서 싱글벙글 웃으면서 하루 종일 중얼대지요.
그러니까 혼자 두게 되면 오히려 그에게 잘해주는 셈이 되지요."

황제는 더욱 화가 났습니다. "그러면 그를 극악무도한 죄인들이 있는
감옥에 집어넣어라." 신하는 또 다시 고개를 흔들며 말했습니다.
"그것은 더더욱 안 됩니다. 그는 오히려 전도할 기회를 얻었다고
매우 좋아할 것입니다. 그 극악무도한 죄인들이 그를 통해 기독교인이
되면 어쩌시렵니까?"

극도로 화가 난 황제가 소리쳤습니다. "그러면 그놈을 내어다 목을 쳐라."
그러자 신하는 더욱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황제님,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저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상급은 순교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저자들 중에
목 베임을 당하려 나올 때 우는 사람을 볼 수 없지요. 오히려 얼굴에 광채가
나고 기뻐합니다."

황제는 기가 막혀서 "그러면 그를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이냐?"
신하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라서 말하지 못하고 물러갔습니다.

참으로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임을 이 이야기를
통하여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오늘도 오직 믿음으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이 되어 힘 있게
살아가시기를...

작성자 미토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바른신학의 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원에서 타락으로(?)  (3) 2012.12.16
히브리서 주석  (0) 2012.12.03
율법은 페지가 아니라 변혁완성 되었다  (0) 2012.11.26
아리우스 논쟁과 니케아회의  (0) 2012.10.16
믿음으로 세워진 율법(2)  (0) 2012.09.25

 

 

이미지 전체보기

     

    이미지 전체보기[Lin Hai]
    중국 출신의 뉴에이지 음악가 린하이 그의 이름은 국내에 첫선을 보인 음반"월광의 추억"으로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음악가이다. 린하이는 1969년 중국 복건성 출신으로 작곡가인 아버지 밑에서 네살때 부터 피어노를 배우기 시작한다.

    중국의 명문 중앙음악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밴클라이번 콩쿠르의 결선까지 진출하는 등 뛰어난 실력을 보인 클래식 피아니스트 출신이다.
    틈틈이 재즈에도 관심을 보여 왔던 그는 클래식 연주자에서 뉴에이지 음악가로 변신하는 모험을 감행 했고, 1992년부터 중국과 대만에서 연주회를 갖는 한편 영화음악과 TV드라마 음악을 작곡하는등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세계 음악계에 과감히 출사표를 던진 젊은 Pianist 'Lin Hai' (林海) 는 중국 음악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대변하는 대표적 Artist 이다. 이른바 '양안(兩岸)'-중국과 대만-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작곡가겸 Pianist 인 Lin Hai. 그는 Classic 과 Jazz 그리고 동양적 정서에 기초를 둔 독특한 Style 의 New Age Musician 으로 My Ocean, Reminiscences Of Beijing, Sun East, Moon West, Cat 등 일련의 Album 을 발표하며 동양적 New Age Music 의 전형을 마련하였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특히, 2002년 발표한 'Moonlight Frontier'가 크게 Hit 함과 동시에 대만의 'Golden Melody Awards' 에서 'Year Of The Best Perform Album' 으로 선정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양안 최고의 Musician 으로서의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종말의 시대 살아가기(Living in the End-Time)
    우리는 종말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모든 창조물이 곧 끝장이 날 것이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가
    이미 우리들에게 나타나고 있음을 뜻합니다

    전쟁, 혁명, 민족과 민족간의 싸움, 지진, 전염병,
    기근 그리고 박해, 이러한 것들이
    모두 종말의 징조입니다(누가복음 21:9~12 참조)

    예수님은 세상의 이러한 일들을 보시고,
    이 세상은 우리가 거주할 마지막 장소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기 위하여 오실 것이라는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너희는 일어나 머리를 들어라
    너희 구원이 가까웠다"(누가복음 21:28)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무서운 일들이
    우리의 최후의 구원을 준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신앙!

    전규성 ㆍ 2012-11-29 (목) 13:44 IP: 175.xxx.128 ㆍ조회: 236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신앙!

    갈 2: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19. 말씀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갈 2:20. 말씀입니다.
    갈 2:19. 말씀과 갈 2:20. 두 말씀은 분리하여
    해석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렇게 연관 지어 해석하여야 합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히 7:18-19.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새 계명이 주어짐으로 전엣 계명이 기능을 잃었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갈 2:20. 말씀하신 바를 올바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샬-롬!

    =============================================================================================
    별똥별/최송연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 2: 15)=개혁개정
    “by abolishing in his flesh the law with its commandments and regulations. His purpose was to create in himself one new man out of the two, thus making peace,” (엡2: 15)= NIV

    “원수 된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5) = 개역한글
    “Having abolished in his flesh the enmity, even the law of commandments contained in ordinances; for to make in himself of twain one new man, so making peace” (엡 2: 15)= KJV

    법조문은 판사의 능력 안에서 해결되었고 그 육체로 완성된 것이라고 봄. 인간(죄인)이 법조문(율법, 계명)을 지켜서 사면(용서)받을 수 없으니, 사면받은 인간(죄인) 편에서는 자유함을 얻는데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않게 된 법조문이나 그분(예수 그리스도)편에서는 십자가로 완성시킨 계명으로서 영원히( 그 나라가 임하기까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 완전무결, 무흠하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인하면 안되는 것은 성경은 한 두 구절로 그 뜻을 들어내려하면 문제가 되고, 통전적이고 유기적ㅡ 문맥의 전 후 좌우를 살펴서 그리스도의 뜻을 온전히 들어내려 할 때,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랑을 밝히 깨닫게 됨.

    은혜( Grace) 역시 같은 맥락임: 뜻= 값없이 그저 주는 것. 은혜를 입은 쪽에서는 값없이 거저 받은 선물(구원)이나 그 은혜를 베푸신 자(그리스도)편에서는 십자가 형틀이라고 하는 무지막지한 고통을 댓가로 지불하고 쟁취한 것임.

    따라서 죄인이 율법을 지켜서 온전하게 되려고 하는 율법주의자가 되어서도 안되고 오직 그 은혜로 구원받는 것은 명심할 것이나,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몽학 선생'으로서 지금도 그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고 있음을 성경이 말하고 있는 부분을 인간이성으로서 재단하려고 하지 말아야 함. 주님의 말씀은 더하거나 빼거나(가감)할 수 없음. 계시록 참조.

    성경을 토대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율법(계명)은 온전케 된 (개혁 된 )된 것으로서 모든 인간에게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속의 은총이 얼마나 놀라운 것임을 들어내고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갈 수 있도록 이끄는 몽학 선생(갈 3: 24-)이라고 성경에서 밝히  말씀하고 있음.

    율법폐기론을 더 이상 받쳐줄만한 성경적 근거가 미약합니다, 전규성 님. 이제 그만 하심이 어떻겠는지요? 정신이 산만해져서요. 하시고자 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이해는 합니다만...아멘넷 게시판에 은혜의 말씀, 복음의 장으로 가꾸어 가도록 우리 모두 힘을 합칩시다.

    오늘날 영성 개념의 문제와 성경적 경건의 길 (1) | 신학이야기

    이승구 2005.07.17 23:09   http://blog.daum.net/wminb/2029310

     

     

     

    요즈음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이나 교회가 소위 “영성”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영성 수련”이나 “영성 훈련”에 관심을 가지는 일이 많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 나가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개인과 교회 전체가 노력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만, 영성 개념이나 이로부터 유래하는 영성 수련이나 영성 훈련의 문제점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사방에서 제시되는 다양한 방법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낳지 않을 수 없다.


         1. 오늘날 “영성” 개념의 문제점들


    일반적으로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은 요즈음 기독교계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 대한 지적으로부터 우리의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예를 들자면,  이미 오래 전에 프란시스 쉐이퍼 같은 분도 자신의 중요한 경험을 언급하는 “참된 영성”(True Spirituality)이라는 제목의 책을 쓰고 제시하기도 했었고,1) 많은 이들이 이런 용례를 따라서 이 용어를 사용한다.  복음주의권에서 “영성”이라는 말을 긍정적으로 사용하는데 선구적인 작업을 한 사람은 오랫동안 고든-콘웰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쳤고 복음주의권에서 처음으로 영성 신학의 매뉴얼을 제시했던 리쳐드 러브레이스일 것이고,2) 가장 큰 기여를 하신 분이 아마 캐나다의 리젠트 컬리쥐의 초대 영성 신학 교수였던 제임스 휴스톤일 것이다.3) 그를 이어서 영성 신학을 강의한 유진 피터슨과4) 폴 스티븐스가5) 아마 복음주의권에서 영성이라는 말을 긍정적으로 사용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일 것이다.6)


         1-1.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이 “영성”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상당히 주의하면서 사용해야 할 용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용어는 우리 기독교인들만이 사용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20세기말 가르쳐서 “영성의 시대”라고 하는 말이 비기독교권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7) 세속화되는 서구 사회 속에서 20세기 말에 세속적인 삶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영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 그들이 말한 의미는 우리들이 복음주의 권에서 성령님께 온전히 의존하는 그런 모습을 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이 세상의 세속적인 삶 이상의 것을 찾는 모든 시도들을 가르쳐서 영적인 시도들이라고 하는 의미였었다. 그리하여 인도의 힌두교적 사상들도 영적인 것이며 영성의 한 측면으로 언급되었고,8) 요가에 대한 관심이 높으며,9) 불교의 영성 등에 대한 관심은 매우 높다. 여성의 영성을 말하는 한 홈페이지는 불교도들이 그들의 관점에서 영성 훈련하는 내용과 그런 관점에서의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을 정도이다.10) 심지어 이슬람에서도 영적 생활 등에 대한 논의가 강조되고 있고,11) 천도교에서도 영성을 말하는 일이 있다.12) 미국에서는 미국 원주민들의 영성을 다루는 홈페이지도 있고,13) 호주의 원주민들의 영성을 다루는 홈페이지도 있다.14) 그리하여 결국 “세계 영성”(world spirituality)을 말하고 그 안에서 다양한 종교의 영성을 언급하는 일이 있다.15)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하지 않고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올 수 있는 오해는 무수하다. 도대체 이 세상에서는 특별히 기독교적인 영성만을 영성이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게이들의 영성,16) 레즈비언의 영성17) 등등의 말도 흔히 우리 주변에 나타나고 있다.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여신을 추구하는 영성에 대한 관심을 강하게 가지기도 한다.18) 이런 것들과 관련해서 오늘 날에는 소위 뉴-에이지적 영성에 대한 강조가 가장 특징적인 것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19) 그들은 영성을 매우 강조하며, 우리가 영적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될 때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영성적인 모습을 지닌 한 표현이 그들이 말하는 어머니 신(母神)인 이 땅을 잘 보호 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와 연관하여 지구 영성(earth spirituality)과 마술(witchcraft)을 연관시키는 홈페이지도 있다.20) 그러므로 이런 뉴-에이지적인 영성과 우리가 이야기 하는 영성은 전혀 다른 것이다. 모든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의미의 영성은 참된 영성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 사람들은 영성이라는 단어를 왜 당신들만 독점하려고 하느냐고 당신들은 배타적 영성 이해를 가졌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이라는 말을 그냥 사용할 때 문제가 새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 님 





    왼쪽에서부터 파렐, 칼빈, 베자, 낙스..

    제네바 바스티옹 공원의 종교개혁기념비



    출처:개혁주의마을/좁은길을걸으며 님

     

     

     

     

    작은 새의 기도

                           최송연

     

    내 영혼에

    당신의 불을 밝혀주소서
    불어치는 모진 폭풍 
    너무 거칠고 캄캄하여
    주의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내 마음에

    당신 사랑으로 넘치게 하소서
    동족의 비방하는 돌팔매질
    너무 강팍하고 드세어  
    여린 날개 접지 않기를...  

     

    날마다

    주의 맑은 호수로 나아가

    그 물 마시기 나 원하네

    그 피로 씻은 영혼

    바람에도 오염되지 않기를...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커피향 같은 내 사랑  (0) 2012.12.12
          눈꽃  (0) 2012.12.10
          연모(戀 慕)  (2) 2012.11.23
          위장된 겸손  (0) 2012.11.14
          나누면서 살아요, 우리  (0) 2012.10.2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