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선물에 담긴 사랑이야기

아직 돈의 가치를 배우지 못한 한 키 작은 소녀가
보석가게에 들어 갔습니다.
소녀는 윈도우에 장식된 보석을 한참 동안이나 살피고
당당하게 가게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소녀는 주인 아저씨께 방긋 웃고는 자기가 결정한 목걸이를 가르칩니다.
큰 보석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가격이 나가는 보석이었습니다.

‘누구에게 선물할 것인데?’
언니에게 줄 선물이예요. 저는 엄마가 없어서 언니가 저를  키우거든요.
언니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찾고 있었는데 
이 목걸이가 꼭 맘에 들어요.
언니도 좋아할 것 같아요’ ‘그래, 돈은 얼마나 가지고 있지?’
‘제 저금통을 모두 털었어요. 이게 전부예요’

소녀는 저금통을 턴 돈을 손수건에 정성스럽게 싸왔습니다.
소녀는 돈이 담아있는 손수건을 모두 주인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가엽게도 소녀는 가격에 대하여는 전혀 몰랐습니다.
소녀는 사랑하는 언니를 위하여 자기의 전부를
내 놓은 그것 밖에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주인 아저씨는 가격표를 슬그머니 떼고
그 보석을 정성스럽게 포장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 이브에 한 젊은 여인이 가게에 들어서는데
손에는 소녀에게 팔았던 목걸이가 들려 있습니다.
“이 목걸이, 이곳에서 판 물건 맞습니까?
진짜 보석인가요?”
“예. 저희 가게의 물건입니다.
썩 좋은 것은 아니지만 진짜 보석입니다.”
누구에게 팔았는지 기억 하시나요?”
“물론이지요. 이 세상에서 마음이 가장 착한 소녀였지요.
“가격이 얼마지요?
주인이 보석 값을 말하자 그 여인은 몹시도 당황하였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그런 큰 돈이 없었을 텐데요?”
“그 소녀는 누구도 지불 할 수 없는 아주 큰 돈을 냈습니다.
자기가 가진 전부를 냈거든요. “

가게를 나가는 여인에게서도 두 눈에 감격의 눈물이 맺혔습니다.
보석가게 주인아저씨의 눈에서도 사랑함의 벅찬 감사의 눈물이 맺혔습니다.
보석보다 소녀와 언니와 가게 주인 아저씨의 아름다운 사랑이
더 아름답게 빛이 납니다.

세상은 사랑이 있어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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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탄 고백
                                              최송연
                              
                    
    머나먼 
                       태초(太初), 상고에
                       잉태된 거룩한 사랑

                       오직
                       그 사랑 때문에
                       빛나는 영광의 보좌  
                       훌훌 던져버린 임이시여,

                       임의 그 사랑은
                       더럽고 누추한 말구유에
                       누이셔도 좋을 만큼
                       그리도 절절한 사랑이었습니까

                       나를 사랑하는 그 길은
                       기어이
                       십자가로 이어지는 길이었음을
                       어찌 계산하지도 않으셨습니까...

                       목마르다 절규하며
                       갈기갈기 찢겨도
                       포기할 수 없을 만큼
                       그토록 큰 사랑을 
                       무엇 때문에 품으셨습니까

                       임이시여,
                       생명과 생명으로
                       맞바꾸신 성육신의 당신 사랑

                       핏빛으로 얼룩진
                       그 처절한 사랑을
                       차마 더는 외면하지 못해

                       완악한 나
                       이제 마음을 열어
                       나도향 같이 순전한 영으로
                       당신 사랑을 받아들이려 합니다.

                       꺼질줄 모르고 타오르는
                       사랑의 불꽃이여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리

                       나 이제 눈물로 고백합니다
                       나 또한
                       당신만을 사랑하겠노라고...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 2:14)"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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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우리의 양식과 음료

(Jesus, Our Food and Drink)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고,
 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 사건은 특별히 정해진 시기에
그리고 특별히 정해진 장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 성만찬을 가질 때,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빵과 포도주를 드시고, 성령의 권능으로
우리의 양식이 되고 음료가 됩니다

 

실제로 성만찬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육신은
언제든지 그리고 어디에서라도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때때로 우리는 '나도 예수님과 함께
그 곳에 있었더라면 오래 전에
그의 제자가 되었을텐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보다
지금 우리들 가까이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오늘
우리가 일용할 영혼의 양식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사랑하는 목양연가 식구님들~!! 지난 해 베풀어주신 사랑과 관심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캐롤송과 함께 잠시나마 행복하세요! 사랑해요, 축복해요!^^ Merry Christmas and a Happy New Year! 목양연가 섬기미/최송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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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my.tv.sohu.com/u/vw/50411824#0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구원(조나단 에드워드)
    (God's Sovereignty in the Salvation of Men)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케하시느니라”(롬 9 :18).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을 부인한 유대 민족을 생각하고 자기 마음이 심히 걱정되고 슬프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마음으로 바울은 하나님이 택한 유대인과 그렇지 않은 유대인의 차이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 기독교인 사이의 차이를 언급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성경의 다른 어떤 장에서보다 택함 받아 영생에 이르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문제, 곧 그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
    선택의 교리를 확실히 제시하기 위해 구약에서도 여러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이스마엘보다 이삭을 하나님이 택했음을 알려줄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무엇이라 했던가.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맘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롬 9 : 9). 그리고 에서에 앞서 야곱을 하나님이 택했다고 리브가에게 어떻게 말했는가 보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13절에는 말라기에서 인용한 말씀을 적고 있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15절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말이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그리고 17절에는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인용한 구절 중에서 특별히 모세에게 하신 말씀인 15절과 바로에게 하신 말씀인 17절 말씀에 관심을 둔 듯하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라 했다. 이 구절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도 언급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했다는 구절은 이밖에도 자주 언급된다. 바로와 관련한 말씀에서 특히 뒷부분인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케 하시느니라.”에 초점이 맞춰 있다고 보인다.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설교할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사람마다 다르게 다룬다. 어떤 사람에게는 긍휼을 베풀고, 어떤 사람은 완악하게 만든다. 본문 말씀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자식들 중 일부를 강팍케 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이 어떤 적극적인 효율적 수단을 사용해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이 그 심령을 강팍케 하는데 일정한 힘을 가할지는 몰라도 적극적으로 역사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든다고 가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죄를 짓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강팍하게 만드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하나님 영의 강력한 영향력을 철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그 마음이 강팍하게 되고 점차 더 완악해진다. 하나님의 영이 떠남으로써 그 사람을 강팍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볼 때 사람이 패역한 짓을 하면 강팍해진다. 하나님은 자기 말씀과 성찬식을 인간에게 주었는데 인간이 이를 남용하여 스스로 강팍해진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성찬에 잘못 참여한 자 중에 죽음을 맛보는 자도 있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은 또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 말씀하셨다.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이 6 : 10).
    이사야의 말은 그 백성을 보다 나은 상태로 돌이키려고 역설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지나치면 그 백성의 마음이 강팍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강팍하게 하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거짓 선지자의 입에 거짓말하는 영을 붙이는 경우도 있다(열왕기하 18 : 22). 즉 하나님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거짓 선지자들에게 들어가게 한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 시므이에게 다윗을 저주하게 하였다 한다(사무엘하 16 : 10,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을 피해 도망갔을 때 사울 가계의 한 사람인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한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저주하게 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 역자).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한 것이 온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이와는 반대이다. 하나님은 통치자를 분명히 저주하지 말라고 했다(출애굽기 22 : 28 - 너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그러나 이때는 너무나 패역한 때라 시므이로 하여금 다윗을 저주하게 하였고,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함을 나타내는 표시로 이 일을 촉발시킨 것이다.
     
    2. 이렇게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게 다루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그 마음에 달린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케하시느니라.”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전혀 긍휼을 보이시지 않고,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긍휼을 베풀기를 거부하거나 긍휼을 베풀기 싫을 땐 항상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능동적인 자세를 지닌 종이 그 주인의 명령에 순종할 때 주인의 의지에 전혀 반하지 않으며 단지 즐겁고 기쁘게 순종할 뿐이다. 그러나 종은 본문 말씀처럼 자기 의지대로 행한다고 할 수는 없다. 결국 긍휼을 베풀고 말고는 오로지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런 제한이나 구속이나 의무조항도 없는 거룩한 의지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교리를 세울 수 있겠다.
     
    * 교리 : 하나님은 인간을 영원히 구원할 때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신다.
    하나님은 독자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 구원의 문제를 결정하는 주권을 갖고 있다. 하나님은 뜻하기만 하면 어떤 일이든 주권적으로 행할 수 있고, 아무도 하나님이 자신의 권한을 넘어섰다고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갖고 있는 권리를 합당하게 실제적으로 행사하신다. 이와 관련해 이제부터 다음 네 가지 내용을 언급하겠다.
     
    I. 하나님의 주권이란.
    II. 인간을 구원할 때 하나님의 주권.
    III. 인간을 구원할 때 하나님은 실제로 주권을 행사하신다
    IV. 하나님께서 이런 주권을 행사하는 이유
     
    I.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피조물들을 자신의 마음에 따라 그 운명을 정해줄 수 있는 절대적이고 독립된 권리이다. 이에 대해 세부적으로 알아보자. 하나님의 의지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내켜하는 기분이다.
     
    1. (하나님의 주권은)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되어도 거기엔 어느 정도 제약이 따른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한 가지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모든 것들을 고려하여 그 일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지만 그 일을 할 때 두려움이 있을 수 있고, 그 일 자체가 짜증나고 그의 의지에 거슬리는 것일 수 있다. 이렇게 일을 할 때 이것은 단순히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그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없다.
     
    2. 다른 것(존재)의 의지 아래 있지 않다. 종은 주인의 명령을 이행할 수 있고 그것도 기꺼이 즐겁게, 주인의 뜻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기분(마음)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자유롭게 행한다. 하나님의 뜻을 선택한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먹을 고기이고 마실 음료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그들 기분 내키는 대로 임의적 의지로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의지는 보다 우월한 의지의 지시 아래 있기 때문이다.
     
    3. 어떤 의무에 매여 있지 않다.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을 자유롭게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자기 자신의 의지와 기쁨으로 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의 기쁨으로 행하는 자는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자다. 하지만 어떤 의무 아래 놓여있는 사람은 자유롭지 못하다. 묶여있는 셈이다.
     
    이제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해 보자. 하나님은 앞에서 설명한 그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기분에 따라 자기의 모든 피조물의 운명을 정하는 권리를 갖고 있다. 이 권리는 절대적이고 독립된 권리이다. 사람에게도 어떤 것들을 자기 기분에 따라 처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 권리는 절대적이고 무제한적인 권리가 아니다. 사람에게도 자기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권리는 절대적이지 않다. 분명한 한계와 제한이 있다.
    자신이 속한 국가의 법에 어긋나지 않고 하나님의 법에 거슬리지 않는다면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가 있다. 자기 마음대로 재산을 처분할 수 있는 이 권리는 독자적이지 않기 때문에 절대적이지 않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한 독자적인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이 권리는 부분적으로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속하고 전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사람이 갖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한 권리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자기 피조물을 자기 의지대로 다룰 수 있는 절대적이고 무제한적이며 독자적인 권리를 하나님이 갖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II. 인간의 구원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주권이란 어떤 의미인가?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하겠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속성)의 영광에 조금의 손상도 없이 사람의 자식들에게 구원을 부여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기꺼이 원할 때 구원을 부여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의 명예에 조금의 손상도 없이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을 베풀고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을 주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절대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을 부여한다고 선포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약속에 묶여(구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이들에게 절대로 구원을 베풀지 않으리라고 주저없이 선언한다. 즉 성령에 거슬러 범죄한 자에 대해선 구원이 전혀 없다. 성령에 거역한 경우 하나님께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성령을 거스르면 어떤 경우든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이것이 영예로운 진리를 손상치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고, 성령을 거스르는 자에겐 구원이 없다는 사실을) 선포할 때 자신의 주권을 행사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할 것이라고 약속할 의무는 없었다. 성령을 거슬려 죄를 지은 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한다고 선언할 의무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꺼이 이를 선포하셨다(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겠다는 약속과 성령을 거슬리면 구원이 없다는 선언). 이런 구속을 하나님 스스로 기꺼이 만들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약속하고 선포한 이 일과 관련해서 하나님이 지금도 계속 자기 마음대로 구원을 주기도 하고 거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의 성품 중 어떤 것이라도 손상을 입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성품이 손상을 입는다면 하나님은 구원을 베풀고 말고하는 문제에 절대적인 주권을 행사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이 손상을 입게 되면 구원을 결정하는 주권적 사역이 (아무런 권위도 얻지 못한) 자의적인 일에 머물고 말기 때문이다. 구원을 결정하는 문제는 절대적 자유로 할 일인가, 필연적인 일인가 아니면 의무적인 일인가로 귀결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에 조금의 손상이 있어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아니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운 성품에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래서
    Ⅱ-1.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스러운 성품에 조금도 손상을 입히지 않고 사람의 자식들 중 합당한 자에게 구원을 베풀 수 있다.
    물론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한 자들은 제외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구원할 영원한 목적과 계획을 계시하였다. 천사들이 보기에 사람의 자식들을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의 성품과 완전히 어긋나는 일이었다. 타락한 사람의 자식 단 한 명이라도 그 인간을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지닌 영예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의 자식들은 그 자체로 타락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함, 위대함, 공의로움, 진리와 같은 의로운 성품과 일치하는 구원의 방식을 고안해내지 않았다면 인간 구원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하기 힘든 일이란 아무것도 없으며, 자신의 권능과 지혜와 능력이 미치지 않는 것도 없음을 계시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구원의 사역에 쓰시어 순종으로 율법을 완성케 했으므로 이제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을 조금도 손상하지 않고 구원될 수 있게 되었다.
    단,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한 좌들은 제외다. 하나님이 특별히 구원을 베풀지 않겠다고 선언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성품에 거스르지 않는 자는 구원될 수 있다. 하나님이 굳이 누구를 구원하고 말고를 주권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공의와 법과 일치되도록 인간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또 하나님이 지닌 긍휼이라는 성품이 구원을 베풀 만큼 크지 않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가 이들을 죄에서 깨끗케 하는데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나 내세에서 죄는 절대 용서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어떤 현명한 이유들이 있는 것이다. 죄를 지은 자를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에 반한다. 죄를 선포함으로써 엄청난 죄인의 모습을 밝히 알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성품에 아무런 손상도 입히지 않고 그런 죄인을 구할 수 있다. 만약 그가 살인자, 간통자, 위증자나 우상숭배자나 불경스러운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이 하시고자 하면 자신의 영광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 비록 사람들은 오랫동안 죄악에 빠져 있었고, 완악했으며, 가증한 죄를 수천 번이나 지었고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죄악에 있으며 점점 더 중한 죄 아래 있어 갈수록 그 도가 심각한 지경에 이를지라도, 심지어 이들이 위대한 빛 아래 범죄했더라도, 뒤돌아본 자(타락한 자)일지라도, 또 성령이 빈번히 엄중한 경고를 하고 죄를 막으려고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범죄했을지라도, 일반적 섭리의 차원이지만 그 나름대로의 긍휼을 받으면서 저지른 죄악의 위험성이 다른 죄인들보다 훨씬 더 심각할지라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 조금의 손상도 가하지 않고 구원을 베풀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긍휼을 주고자 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푼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자기 성품의 영광이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고 최악의 죄인에게도 긍휼을 베풀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충족된 의이다. 하나님이 지니신 어떤 거룩한 성품도 이 구원의 길을 막지 않으신다. 동시에 그리스도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을 구원해내도 하나님이 지니신 영광된 성품은 전혀 고통 받지 않는다.
     
    1.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함을 조금도 손상하지 않고 죄인을 구원할 수 있다.
    하나님은 무한히 거룩하신 존재다. 천국조차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깨끗하지 않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보다 순결하신 눈으로 악을 보시기 때문에 불의를 그냥 묵과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든 죄를 묵인한다면 그래서 그 죄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이 혐오하고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손상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를 조금도 묵인하지 않고도 아무리 큰 죄인일지라도 구원하실 수 있다. 너무나 오랫동안 복음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무서운 죄짐 아래 있었던 자를 하나님이 구원한다면, 또 빛을 거부하고 해적질하는 자요 불경한 자로 있던 자를 하나님이 구원한다면 이럴 경우에도 이 죄인들의 악함을 조금도 묵인하지 않고 구원의 역사를 이룰 수 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와 불쾌함은 이미 그리스도의 고난에 충분히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혐오하는지를 충분히 입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 그리스도는 바로 그 죄 때문에 죽었다. 이 십자가의 고난 이상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감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없다. 만약 악인 자신이 지옥에 밀려들어가 거기서 최악의 고통을 겪게 된다고 해도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당한 고통보다 더 확실하게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를 나타내주는 것은 아니다.
     
    2. 하나님은 사람의 자식들을 자신의 위엄에 조금의 손상도 입히지 않고 구원하실 수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조롱했어도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이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고도 자신의 위엄에 조금의 손상도 입히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이 아무런 변제도 없이 자신을 모욕한 자를 구원해 준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위엄을 더럽히는 것이 된다. 무한한 하나님의 위엄에 경멸을 받으면 이로 인한 상처가 고쳐지지 않는 한 하나님의 명예가 더럽혀지고 이 경멸은 거룩한 위엄의 명예에 어둠을 덮은 꼴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은 이 상처를 충분히 고치셨다. 경멸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가 죄인을 위한 중재자로 일을 하고 대신 고난을 담당하기 때문에 인간을 정말 죄 없게 해 준다.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최악의 죄인이 천국의 위엄에 가한 상처를 충분히 고친다.
     
    3.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죄인을 구원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로 보면 죄는 반드시 벌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 최고 심판관이고 이 세상을 하나님 공의의 규칙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심판받을 자에게 은총을 주는 것은 재판관이 할 몫이 아니다. 재판관은 오로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공의의 규칙대로 결정해야 한다. 재판관으로서 하나님은 긍휼을 보이시 않지만 주권자로서 하나님은 긍휼을 보이신다. 그러므로 죄인들을 긍휼로 구원할 때 문제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긍휼을 베푸는 것과 심판주로서 엄격한 공의를 적용하는 것이 어떻게 서로 합치하느냐이다.
    이 문제를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해결했다.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죄에 대한 징벌이 온전히 이루어졌고, 이로써 하나님 공의의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지금까지 있었던 가장 큰 죄인의 죄악에 해당하는 징벌을 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심판할 때 엄격한 공의의 규칙을 적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죄인의 죄를 사해줄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그리스도의 고난 외에 더 이상 사람의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로마서 3:25 - 26을 보라.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4. 하나님은 자신의 진리를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고도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죄인은 반드시 사망의 벌을 받는다고 말씀했다. 여기서 사망은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 모두를 뜻한다. 하나님은 반드시 죽게 된다는 위협하는 말씀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최대의 죄인을 구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그 죄값을 이미 치렀기 때문이다.
    사람의 경우도 증인이 있으면 합법적으로 죄를 면하게 되는데, 예수님이 우리의 보증이 되는한, 우리의 죄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그의 고난으로 우리가 받을 징벌을 담당하였다.
    이런 이의가 있을 줄 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먹으면 죽으리라 했고,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벌을 받는다고 했다. 그런데 왜 이와 동일한 진리를 지금 적용하지 않는가?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하겠다. 아담에게 주신 말씀은 죄를 지은 아담 자신에게 국한한 말씀이 아니다. 아담은 자기 후손도 그들이 죄를 지었든 짓지 않았든 다 하나님의 말씀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 안에서, 그를 보증인으로 죄를 지었다면 ‘너희가 먹으면’이라는 말씀은 ‘너희가 자체적으로 또는 너희 보증인 안에서 먹으면’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죽으리라’는 말씀 역시 ‘자체적으로 또 너희 보증인 안에서 죽으리라’는 의미가 된다. 이사야 42 : 21을 보라.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인하여 기쁨으로 그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케하려 하셨으나”
     
    II-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품의 존귀를 조금도 손상치 않고 어떤 죄인에게라도 그 구원을 거절할 수 있다.
     
    자연 상태에 있는 사람치고 이들에 대해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조금도 손상치 아니하고 구원을 베풀기를 거절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예를 들어 현명하든 그렇지 않든, 또 성품이 선량하든 악질이든, 비열한 부모를 두었든 존귀한 부모를 두었든, 즉 악한 부모나 거룩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든, 도덕적이든 비도덕적이든, 또 그 자가 얼마나 많은 선행을 하고 경건하고 수많은 기도를 하여 구원될 만한 자이든, 아니면 저주받을까봐 걱정하고 고통을 받았든, 아니 그가 어떤 상황에 있든 하나님은 자신의 완전함을 이루는 요소 중 어떤 것도 조금의 훼파됨 없이 이 자의 구원을 부인할 수 있다. 하나님이 그 누군가를 구원하지 않기로 했다고 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여하한 상황에서도 전혀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1. 하나님은 자신의 의의 영예로움을 손상하지 않고 자연인에 대한 구원을 거부할 수 있다.
    하나님이 구원을 거부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거기에 어떤 불공평함이나 부당함이란 없다. 자연인은 그가 어떤 상황에 있게 되더라도 살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이 그의 구원을 부인하고 그를 지옥에 던질 것이며 이것은 조금도 의롭지 않다거나 불공평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인은 그 자체로 지옥에 합당한 자이기 때문이다. 정당한 심판관이라면 그 자에 합당한 벌을 가하는 것은 전혀 부당한 일이 아니다. 자연인은 저주에 합당하기 때문에 그 짐을 전혀 벗어버릴 수 없다. 속죄될 수가 없다. 이 자는 자신에게 합당한 처벌을 면하기 위해 뭐라도 작당하여 하나님이 처벌을 내리는데 조금의 부담이라도 느끼게 하지 못했다.
     
    2.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된 선하신 성품에 조금의 손상도 입히지 않고 회심하지 않은 자의 구원을 거부할 수 있다.
    죄인들은 자신들을 질책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반대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긍휼에는 합치하지 않는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을 전혀 불쌍히 여겨지지 않고 지옥에 던지는 것이 하나님 긍휼에 불명예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죄인들은 생각하기를 자신들을 지옥에 보내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고 가혹한 일이며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부드러운 성품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긍휼과 선하심을 전혀 상하지 않고도 자연인 중 누구라에게라도 구원을 거부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에 반하는 않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에도 반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저주를 내린다면 긍휼 역시 그 합당한 대상자를 택하여 베풀어지는 것이다. 죄인들은 하나님 긍휼의 본질을 잘못 판단하고 있다. 즉 이들은 하나님이 지닌 긍휼의 속성이 경우에 따라 공의에 상반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의 공의로 드러난다. 로마서 9장 23절 말씀을 보라.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
     
    3.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지 않을지라도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전혀 손상치 못한다.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 자연인에게 구원을 베풀겠다고 말씀으로 맹세하지 않았다. 자연적 상태에 처한 인간은 약속의 자녀들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의 저주에 놓여있는 자다. 만약 이들이 어떤 약속이라도 지니고 있다면 이런 처지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III. 인간을 구원할 때 하나님은 실제로 주권을 행사하신다
    하나님이 주권을 행사하시는 특별한 사례 몇 가지를 살펴보겠다.
    1. 어떤 사람이나 민족을 불려 은혜의 수단들을 주고, 또 어떤 사람이나 민족에게는 주지 않는다.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에 따르면 온갖 은혜의 수단 가운데 구원이 베풀어진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가끔 그다지 실효성이 없어 보이는 방법을 이용해도 그런 불리한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구원을 베풀기도 한다. 하지만 은혜의 수단이 전혀 없으면 하나님이 은총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은혜의 수단들을 부여할 때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신다. 모든 인류는 본성적으로는 하나님께 향할 수 있는 비슷한 환경에 처해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 부여된 은혜의 수단이나 환경에서 각자가 처지는 확연히 서로 구별된다. 미국 오지에서 이교도의 암흑 아래 살고 있는 인디인 야만인들이나 아프리카 대륙 거주자들은 본성적으로는 우리와 함께 하나님께 향할 수 있는 비슷한 상황에 있다. 본성으로 보면 이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소외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이들에게 특별히 짐을 지운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이들과 우리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나게 되지 않았는가! 여기서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을 행사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득한 옛날에 주권을 행사했다. 하나님은 단 하나의 백성만을 약속의 백성으로 택해 은혜의 수단들을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족속들은 이교도의 암흑과 마귀의 압제 하에 넘겨주었다. 이때 이 땅은 수많은 강성한 민족들도 북적거렸다. 당시 이집트인들은 지혜롭기로 유명했다. 앗시리아인과 칼데아인은 덩치가 크고 지혜로우며 힘있는 민족들이었다. 페르시아인들도 힘이 강하고 정치적 전략이 뛰어나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스와 로마 민족 역시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유명한 족속이었는데 이들 족속은 시민 정부의 발전 측면에서 뛰어났고, 전쟁과 평화를 다루는 지혜와 기술이 뛰어났다. 그리스와 로마 족속은 군사력을 이용해 차례로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했다.
    그러나 이들 민족들은 모두 버림받았다. 하나님은 이들 민족들을 택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이교도의 암흑에 이들 민족들을 남겨 비전이 없어 망하게 했다. 그리고 오직 한 족속만을 선택했으니 야곱의 후손들로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은 이들에게 온갖 은혜의 수단들을 주었다. 시편 147 : 19, 20을 보라.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이 민족은 당시의 다른 많은 족속들과 비교하여 규모가 작고 돋보이지 않는 족속이었다. 신명기 7:7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또 이 민족을 택함은 이들이 특별히 의롭기 때문도 아니다. 이들 민족도 다른 민족과 다를 게 없었다. 신명기 9:6을 보라.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택하시는 사랑으로 이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들을 사랑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신명기 7:8보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 즉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마음에 달린 것이라는 말이 된다.
    하나님은 또한 동일한 조상을 두었지만 그 중에서 누구를 자기 백성으로 택하고 어떤 민족들을 버릴지 선택할 때 자신의 주권을 보이셨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비롯한 아브라함의 다른 아들들의 후손들은 버림을 받을 때 이삭의 자식들은 선택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에서의 자식들은 버림을 받았고 야곱의 자식들은 택함을 받았다. 로마서 9:7을 보라.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또 10절에서 13절까지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사도 바울은 이스마엘과 에서보다 이삭과 야곱을 택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까지도 언급하고 있다. 말라기에서 하나님은 각 민족들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 민족은 에서와 야곱의 후손들이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유대인을 버리고 이방인들을 부를 때 자신의 주권을 발휘했다. 육으로는 아브라함의 자녀요,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었으며 유일한 참 하나님을 저들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민족인 유대민족을 버렸고 유대 민족 앞에서 음탕한 이교도들을 택하여 하나님 백성으로 부르셨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고대했고 구세주가 저들의 혈통에서 태어났으나 메시아는 유대민족을 버렸다. 요한1서 1:11을 보라.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 영광된 복음이 전파될 때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지나치시고 그간 이방인이었던 자들을 불러 복음의 특권을 향유하게 하였다. 유대인들은 끊어졌고, 이방인들이 접붙여졌다고 하겠다.(롬 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율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이제 전혀 사랑받지 못했던 이방인이 사랑스러운 자라 불리게 되었다.
    “또 남편있는 자의 자식들보다 홀로된 여인의 자녀가 더 사랑받게 된 것이다.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劬勞)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사 54:1).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은 버림을 받았고, 돌들인 자들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기르신다. 하나님이 존귀히 여겼던 유대민족은 그때부터 오랫동안 버려진 채로 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으니, 참으로 놀랍고 거룩한 징벌이 아닌가. 이제 하나님은 이방 민족 중 몇몇 민족을 확연히 분별해내었으니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 마음에 따른 것이다.
     
    2. 하나님은 특별한 개인에게 유리하도록 자신의 주권을 행사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구원을 필요로 하며 자연 상태에서는 모두가 똑같이 구원에 합당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람 중 일부에게는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엄청나게 유리한 조건을 주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경건하고 종교적인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고,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의 교훈과 여타 교육을 잘 받게 되며, 그 부모들이 경건하여 자식들이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이끌고 자식들을 위해 많은 기도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더 강력한 목회를 하는 교회에 속하게 되어 거기서 보다 많은 하나님의 영의 부음을 받는다. 또 어떤 사람은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성령의 수고와 각성시키는 영향을 받는다. 이는 다 하나님의 주권적 마음에 따른 것이다.
     
    3. 하나님은 가끔 현명하고 위대한 자에게는 구원을 베풀지 않고 저급하고 미천한 자에게 구원을 베풀면서 자기 주권을 행사한다.
    그리스도는 주권적으로 왕족과 귀족들의 집을 지나쳐 오두막에 들어가 거기서 거하면서 그곳의 미천한 거주자들과 교제한다. 하나님이 매일매일 호화롭게 산 부자의 구원을 거부하고 부자의 대문에 앉아 구걸한 거지 나사로에게 구원을 베푼 것도 하나님의 주권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 세상 왕들과 그들의 모든 빛나는 위엄을 경멸한다. 또 하나님은 때때로 지혜있는 자, 이해력이 뛰어난 자, 많이 배운 대학자들을 지나치고 성경의 쉬운 구절과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를 간신히 이해하는 그런 사람에게 구원을 베푼다. 그렇다.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인간치고 부름을 받는 자가 적은 것은 사실이다. 고린도전서 1:26, 27, 28을 보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 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4. 별다른 장점이 없는 자에게 구원을 베풀기도 한다.
    하나님은 때때로 훌륭한 수단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할 때 연약한 방법을 활용하여 놀라운 결과를 낳기도 한다. 하나님은 또 가끔은 경건한 부모의 자녀들에게서 구원을 거둬들기도 하고, 사악한 가정에서 양육된 자에게 구원을 베풀기도 한다. 여로보암 가계의 선한 아비야(Abijah)의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며, 또 사악한 아하즈의 아들이지만 거룩하기만 한 히스기야와 악한 아몬의 아들이면서도 거룩한 성품을 지닌 요시아의 사례가 성경에 나온다. 이와는 반대로 거룩한 다윗의 아들들인 암몬과 압살롬은 악한 자였으며, 선량한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도 악한 자였다. 탁월한 은혜의 수단을 지닌 자 중에서도 버려져 멸망에 처하기도 하고, 은혜의 수단과는 거리가 먼 자들 중에서 구원될 자도 있다.
    이와 같은 원리로 너무나 많은 빛과 성경적 지식을 지니고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거의 모두 버림받았으며, 가난하고 무지한 세리는 구원을 받았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서 매일같이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으며 그리스도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본 자 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떠났고, 사마리아의 여인은 택함을 받았고 또 그리스도가 사마리아를 지나가면서 전한 말씀만 들었던 다른 많은 사마리아인들도 구원을 받았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나안 여인은 택함을 받았다. 이 여인은 유대 족속이 아니요 단지 예수님을 한 번 보기만 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듣고 그리스도가 행하는 기적들을 보았고 또 사도들이 애써 말씀을 전했던 자들은 구원받지 못했다. 하지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지나치듯이 들었던 이방인들은 그들 중 많은 사람은 구원의 소식을 붙잡고 회심했다.
     
    5.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으로 아주 가증스러울 정도로 사악한 자 중에서도 일부를 구원하기도 하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을 구원하지 않기도 한다.
    바리새인들은 유대인 중에서도 아주 엄격한 종파였다. 이들의 종교성은 유별났다. 누가복음 18:11을 보자. 이들은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바리새인들에겐 도덕성이 있었다. 이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자기 모든 소유의 10일조를 냈다. 이들은 종교적이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버림받았고 세리나 창기나 그밖에 공개적으로 악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보다 먼저 하나님 왕국으로 들어갔다(마 21:31).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 자신의 의가 어떠했는지 빌립보서 3:6에서 설명하고 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한 부자 청년은 그리스도께 와서 무릎 꿇고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데, 이 청년은 도덕적인 사람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계명을 지키라고 하자 이 청년은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이 사람은 환경이 좋은 가정에서 자란 것이 분명하고 품행이 방정한 젊은이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여 말한다고 했다. 이 젊은이는 구원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도둑은 바로 십자가 위에서 선택되어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은 가끔 죄인의 괴수와 살인자, 이교도, 불경스러운 자 등에게 긍휼을 보이사 자신의 주권을 보인다. 어떤 경우는 사람이 늙어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부름을 받는 자도 있다. 인생의 대부분을 사탄에게 봉사하며 보냈고 하나님께 예배할 것이 별로 남지 않은 이런 자들 중 일부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베푸는 긍휼의 은총을 받는 것이다.
     
    6. 구원을 찾는 자들 중 누구는 구원을 받고 누구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구원을 찾으면 성경에 나타난 경우나 현실적 경험으로 보는 것처럼 곧 회심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오래도록 구원을 추구하지만 끝내 구원을 얻지 못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사는 동안 겪어야 할 온갖 난관을 극복하도록 도움을 준다. 이런 사람은 사단을 누르고 미혹에서 구원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살면서 만나게 되는 미혹에 그냥 멸망한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온갖 분명한 확신들을 기꺼이 주면서 어떤 자에게는 아예 각성조차 못하게 한다. 어떤 사람은 중간에 미끄러지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어 끝까지 간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의를 신뢰하여 끊어진다. 어떤 자는 살아 있는 동안 자기 삶에 등장하는 장애를 전혀 극복하지 못한다. 엄청난 수고를 하지 않고도 회심하고 구원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엄청난 수고를 하고도 멸망하는 자가 있다.
     
    IV. 이제 하나님께서 왜 사람의 자식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베풀 때 자신의 주권을 이렇게 행사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겠다

    1.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창조하면서 자신의 모든 성품을 발휘하여 그 성품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나타내려고 계획했다.

    창조 시 하나님의 계획은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 자신의 본성이 지닌 핵심적인 영광스러운 점을 발견하는 것이다. 무한한 영광이 빛나야 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며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이해하도록 계획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피조물들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다 이해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제대로 드러내고 자신의 모든 성품이 반영되도록 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만약 하나님이 자신의 성품 중 어떤 것은 영광스럽게 하고 다른 성품은 그렇지 못하게 된다면 이는 결점이 있는 상태이고 그러면 하나님 영광의 구현은 완성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는 구현되는데 하나님의 거룩함은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 지혜의 영광은 그 자체로 구현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지닌 지혜라는 속성이 영광스러운 부분이라면 그 지혜는 거룩한 지혜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함은 구현되는데 지혜는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지닌 거룩함의 영광은 그 모습 그대로 구현되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의 거룩함의 영광에 속한 것은 지혜로운 거룩함이다.
    긍휼과 공의의 덕목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의로운 긍휼이 아니라면, 즉 하나님 공의와 합치하는 긍휼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지닌 긍휼의 영광스러움이 그 자체로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이 지닌 모든 다른 성품의 영광을 반영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이 지닌 긍휼의 일환이다. 주권적 긍휼이다. 이렇듯 하나님의 모든 속성은 서로서로 영광을 반영해 준다.
    하나님의 어떤 성품의 영광도 다른 성품의 구현 없이는 그 자체로 구현될 수 없다. 다른 성품의 영광 없이는 어떤 성품도 결점이 있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성품의 구현도 결함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속성(성품)을 구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선언적 영광은 종종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려진다. 왜냐하면 그 이름이 하나님의 본질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 자신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의미하지 못한다면, 즉 하나님의 어떤 성품도 나타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된 이름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이 지닌 속성 중 하나요 자기 영광의 일부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크고 작고를 막론하고 모든 피조물에 대한 절대적 주권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여기서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위대함과 거룩함이 나타난다. 따라서 자기의 주권을 구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자신의 다른 속성과 마찬가지로 그 주권을 행사하는 데서 구현된다. 하나님은 자기의 권능을 행사하면서 자기 권능을 영화롭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자기 주권을 행사할 때 자기 주권을 영화롭게 한다.
     
    2.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피조물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또 그가 하는 일이 위대하면 위대할수록 하나님의 주권은 더욱 영광스럽게 된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사람보다 열등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보다 더 영광스럽다.
    그리고 천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아직까지는 인간에 대한 주권보다 더 영광스럽다.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피조물이 더 존귀할수록 이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더욱 위대하고 고귀하게 나타난다.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짐승을 통제하는 것보다 인간에게도 더 큰 영예가 된다. 더 나아가 왕족이나 귀족을 지배하는 것이 평민을 지배하는 것보다 더욱 위대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주권은 아주 고귀하고 뛰어난 피조물의 심령에 미칠 때 영광스럽게 나타난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은 이런 고귀하고 뛰어난 자들에게 미치고자 한다. 그리고 그 권세가 또 다른 고귀한 피조물에게로 확대되면 그 존귀는 더욱 위대해질 것이다. 사람이 누구를 지배할 때 단지 그 사람의 일부만을 지배하게 되면 그 사람의 생명과 재산과 그가 지닌 모든 것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것만큼 빛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그 사람의 모든 면에까지 미칠 때 영광스럽게 나타난다. 하나님 자신의 마음에 따라 사람들의 모든 측면을 고려하여 그 운명을 정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은 또 가장 중요한 일에 미칠 때(예컨대 인간 심령의 영원한 상태나 조건을 결정하는 문제) 영광스럽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주권은 물론 어떤 제한이나 경계가 없이 무한히 중요한 일에까지 미친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구현하는 것이 자신의 계획이듯이 인간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행사한다. 인간의 육체와 영혼에 대해서는 물론 영원한 구원과 같은 가장 중요한 문제에까지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된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케하는 것이다.
     
    * 적용
    1. 우리 심령의 영원한 구원이라는 중차대한 문제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구원의 문제와 관련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에 의지할 뿐만 아니라 구원의 문제가 단지 하나님의 의지나 기분에 좌우되기도 한다고 인식해야 한다.
    발끝에서 머리끝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마음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인간이라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우리의 구세주로 삼았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감찰하사 타락한 천사가 아니라 구세주를 보냈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마음(기분)에 따른 것이다. 어떠한 방법을 쓰든 그건 하나님의 주권적 기분이다. 우리에게 성경을 준 것이나 성찬을 준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이다. 이러한 은혜의 수단들을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에게 주고 또 하나님 영으로 우리를 각성케 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나 구원의 은총을 베푸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이러한 자에게 빛이 있으라” 라고 할 때 이것은 무한한 권능과 주권적 은총의 말씀이다.
     
    2. 내가 최대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경외롭고 절대적인 주권을 찬양하겠다.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은 뛰어난 인간의 심령에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그의 영원한 구원을 비롯한 그 인간의 전부에 대하여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속성 중 유독 돋보이는 속성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위대성과 하나님이 우리 인간보다 훨씬 더 고귀하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이 주권이 하나님을 크게 영광스럽게 한다고 성경에서는 말한다. 신명기 32:39을 보라.
    “나 곧 내가 그인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시편 115:3을 보라.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다니엘 4 :34-35을 보라.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을 구원함에 행사하는 주권으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고 영광을 돌렸다. 마태복음 11:2 -26을 보라.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하나님의 주권에 영광을 돌리자.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과 비교하여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권세와 주권은 크니 그 종으로서 마땅히 겸허히 존경과 존귀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제한이 없으니 최대로 겸손하게 최대로 존경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 뜻하는 대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 이런 분에 대한 겸양과 존경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3. 구원의 상태에 들어선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이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 덕분으로 돌리고 자신을 다른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구별하신 하나님께 모든 찬양을 드리게 된다.
    거룩함이 하나님 안에 있지 않으면 거룩하다는 이유만으로 영광스러워지지는 않는다. 고린도전서 1:29-31을 보라.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구원을 받은 자들이 지닌 거룩함이나 안전하고 행복한 현 상태와 조건이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과는 확연히 다른데 이것이 타고난 차이 때문이라거나 자기들의 힘이나 의로움 때문이라고 조금이라도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를 높일 만한 이유가 조금도 없다. 하나님을 높여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을 택하여 사랑을 주고 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아니 창세 이전부터 이들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높여야 한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이 아닌 이들을 사랑하여 택한 이유를 묻는다면, 아니 그 이유를 하나님으로부터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건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다.
    택함 받은 자들은 성자 예수님을 찬양해야 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택할 백성의 이름을 가슴에 지니고 계셨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 의로움과 권능을 받는다. 택함 받은 자는 성령님을 찬양해야 한다.
    성령님은 이들을 암흑 속에서 주권적으로 불려 경이로운 빛으로 인도했다. 또 성령님 스스로 즉각적이고 자유로운 활동으로 이들이 악을 이해하고 죄악의 위험을 알게 했다. 동시에 자기 자신의 의를 내세우지 못하도록 하며 이들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게 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향유할 수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부요함을 알게 했다.
    성령님은 이들을 성화시키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이 얼마나 악한지 이야기를 듣거나 악한 사람을 보게 될 때 자기 자신들도 한때 얼마나 악했는지 또 하나님을 얼마나 화나게 만들었는지, 그래서 죄악 속에 영원히 멸망에 처해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들이 저들과 다르게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임을 안다.
    고린도전서 6:10에 많은 종류의 죄인들이 열거되어 있다. fornicator(간음자), idolater(우상숭배자), adulterer(간부), effeminate(나약한, 여자같은), abusers of themselves with mankind(세상사람과 어울려 자신을 방탕히 하는 자 - 남색하는 자).<고린도전서 6 : 10 원문 -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오히려 9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전략 -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로 됨.
    그리고 11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도 더 크고, 하나님을 사랑할 이유도 더 많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단지 자신의 주권적 기분으로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긍휼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4. 그러므로 우리는 왜 하나님의 은총을 찬미해야 하는지를 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겸비하셔서 우리와 언약 관계를 맺어주셨는데, 하나님은 본래 우리를 지배하시는 우리의 절대소유주로서 하고자 하신다면 우리와 함께하시지만 우리에게 그렇게 해야 할 의무는 없으시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절대주권을 포기하고, 신자들에 대한 섭리에 있어 주권을 행사하시지 않는다면, 신자가 더 풍성한 위로를 받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은 신자에게 종속당하게 된다.
    하나님이 흙 속에 뒹구는 벌레같은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우리에게 (스스로) 묶여 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하나님이 얼마나 놀랍게 자신을 낮추시는 것인가! 하나님은 자신의 말로, 약속으로 자신을 구속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만으로 만족하시 않았다. 히브리서 6:13 이하 구절에 언급된 내용을 보면 하나님은 맹세하여 자신을 구속하는데 이것이 우리에게는 더욱 강력한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 6:13-20).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힘써 순종하자.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특히 우리에게 가장 중차대한 문제인 우리 자신의 영생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한다.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아 그것이 장애물이 되어 거기에 걸려 넘어져 멸망했다. 우리가 하나님 주권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과 다툰다면 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파멸이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절대적 주권자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케하듯이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 심령에 임한다.
     
    5. 마지막으로 억측(presumption)과 낙담(discouragement)이라는 두 가지 극단적인 방법으로 구원을 추구하는 자들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교리를 적용해 보겠다. 먼저 하나님의 긍휼을 값싸게 얻을 수 있다고 억측하여 죄악에 있는 자신을 위로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의 긍휼은 무한하기 때문에 당장 구원을 찾는 일을 늦추고 나중에 찾아도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또 그런 설교를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이 풍부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주권적이기 때문에 하나님 마음에 따라 그를 구원할지 말지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당신이 구원을 나중으로 연기한다 하더라도 구원은 하나님의 마음에 달린 것이지 당신 힘으로 정할 수 없다. 따라서 구원에 관한 한 당신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구원을 찾을 때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최선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오늘날에도 들린다.
    “오늘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면 당신 마음을 강팍하게 하지 말라.”
    그리고 또 낙담을 조심하라. 절망적인 생각이 드는 것을 조심하라. 당신은 엄청난 죄인이기 때문에, 또 너무나 오래도록 죄악 속에 있었고 뒤돌아보았으며 성령을 거부했기 때문에 절망적이기 쉽다. 명심할 것은 당신이 처한 현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당신이 너무나 중한 죄인임을 인정하되, 당신이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하지만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해도 당신이 더럽힌 하나님의 영예로운 거룩함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당신이 모욕한 하나님의 영예로운 위엄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으며, 또 당신이 대적으로 삼았던 하나님의 영예로운 공의와 하나님의 진리와 그 밖의 여러 가지 속성들의 영예가 손상을 입지 않는다. 당신이 어떤 죄인인지 인정하라. 하나님은 원하기만 하면 당신을 구원하여 하나님 자신을 영화롭게 하신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가장 인간적이면서 가장 신성한 행동
    (The Most Human and Most Divine Gesture)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시는 길에서 만난 두 제자는
    예수님이 빵을 떼실 때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빵을 떼는 것보다 더 일반적이고 평범한 행동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빵을 뗀다는 것은 인간의 모든 행동중 가장 인간적인 행동일 것입니다

    그것은 환대, 우정, 관심, 그리고 함께 있고자 하는 바람을 나타냅니다
    빵을 들어서 축복하고 떼어서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주는 행위는
    단합과 공동체, 그리고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특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은 가장 인간적이며 또한 가장 신성한 것이었습니다

    매일 매일 빵을 나누는 이 가장 영적인 행동을 통하여 신비스럽게도
    우리들은 하나님이 우리들 가운데 함께 계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인간적일 때, 가장 가까이에 계십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아래 글은 천국상급에 대한 류재룡님의 글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혼동하는 것 중 하나는 구원과 상급을 같이 보는 것이다. 신자들이 은혜로 구원을 얻었는데 또 무슨 상급이 주어진다는 말이냐? 상급을 주장하다 보면 자기 행위에 대한 자기 의를 과시하게 되고 이는 곧 바리새인처럼 율법주의가 되고 로마 카톨릭의 공로 사상에 빠지게 된다고 주장한다. 특히 중세 로마 카톨릭의 타락을 목격한 종교 개혁자들은 로마 카톨릭의 공로 사상을 강하게 배격하였다. 여기에 영향을 받은 개신교에서 특히 개혁주의 일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개인의 행위에 주어지는 보상까지도 무시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의 공로 사상을 배격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신자의 선행에 주어지는 상급을 분명히 제시한 성경 말씀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또 다른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구원과 상급을 구분하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다. 또 상급을 강조하다 보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고, 상급은 자기 행위에 대한 공로로 받는 것이라는 주장을 할 수 있다. 이것 역시 잘못된 사상이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이다. 상급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인간의 행위에 수반되어 주시는 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의 핍박과 환난 중에도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상급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현실을 감당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상급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보상인 동시에 인간이 상받을 공로가 있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상급문제는 성경 전반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과의 관계에 대한 바른 정리가 필요할 것이다.  이 양자의 관계는 신약 시대 이래로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논쟁 되어온 해묵은 문제이다.1) 즉 하나님의 절대 주권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인간의 책임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선택권을 부여하여 인간의 책임을 강조한다면 하나님의 주권은 매우 제한적이 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부 학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역할 분담하여 50:50 또는 90:10과 같이 구분하여 설명하려 한다.2) 그러나 이는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계시며 동시에 인간도 전적 책임을 진다고 말한다.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도 일하시며 인간도 일한다고 가르친다. 즉 100% 하나님의 주권이요, 100% 인간의 책임이라고 해야 정확한 이해라 할 수 있다.3)

    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과의 관계는 상급 문제(賞給問題)에 있어서도 분명한 입장 차이를 보여 준다. 상급의 은혜성과 인간의 선행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의 상호 모순되는 듯한 성경의 상급 교리를 바로 이해하는데 본 논문의 목적이 있다. 이렇게 함으로 상급교리에 대한 양 극단의 공로 사상과 상급 무시 사상을 배격하고 상급 교리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며 이 땅에서 천국 백성으로서의 삶을 바르게 영위해 갈 수 있다.

    천국 상급을 연구하기 위해 먼저 상급에 대한 구약과 신약의 강조점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상급 교훈은 유대주의나 로마 카톨릭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그 바탕을 두고 있음을 제시할 것이다.

    다음에 이러한 성경의 상급 교훈을 유대주의자와 로마 카톨릭은 어떻게 왜곡시켰으며 종교 개혁자들은 어떤 입장을 취하였는가 그리고 상급에 대한 최근 개혁주의자들의 견해는 어떠한가를 역사적으로 살펴보게 될 것이다.


    다음에 천국 상급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 그 다양한 내용들을 상급과 신자의 선행과의 관계, 상급의 은혜성, 상급의 동기와 목적, 천국상급의 등급과 그 내용이라는 제목으로 차례로 고찰해 볼 것이다.

    이 연구를 위해 신, 구약 성경을 최고의 참고서로 채택하여 개혁주의적 성경 해석의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할 것이다. 또한 상급에 대한 다양한 입장들을 문헌적 고찰을 통하여 밝히게 될 것이다.

    II. 상급에 대한 성경적 개념


    1. 구원과 상급의 구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과 상급을 구분하지 못하고 상급에 대한 이해를 바로 하지 못하고 공로사상에 빠지거나 상급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구원과 상급을 성경적으로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에 대하여 성경 에베소서 2장 8-9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받은 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이지 인간의 행위는 털끝만큼도 상관이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았지 우리의 노력으로 구원받은 것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우리의 구원은 영원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깨닫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든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신자는 죄로 말미암은 영원한 형벌의 심판을 이제 받지 않는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다 감당하셨기 때문이다(벧전 2:22-2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가 구원받은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행위의 문제가 대두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 행위에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된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전 5:10).

    우리의 행함에 대한 심판이 있고 그 결과에 따른 상급이 주어지는 것이다.''..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 4:5).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사람에게는 두 가지 심판이 있다. 하나는 정죄의 심판이고 다음은 상급의 심판이다. 첫 번째 심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을 심판을 대신 받으셨으므로 우리가 앞으로 심판받지 않는다.  우리가 앞으로 받을 심판대는 행위 따라 상급을 주시는 상급 심판이다.''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계 21:12).

    ''이방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 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 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계 11:18).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소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10장 41-42절). 하나님은 그 백성 각자에게 그들이 일한 대로 상을 주실 것이다(계 22: 12).

    구원과 상급의 또 다른 구분은 구원은 기초에 해당되는 것이고 상급은 열매에 해당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린도전서 3장10-15절에 보면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 둔 구원이다. 금, 은, 보석으로 집을 지은 자가 있고 나무나 풀, 짚으로 집을 짓는 자가 있다. 그 집을 지은 행위에 대한 심판은 불로서 한다고 하였다. 불이나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불타고 없어지면 해를 받는데 이런 사람은 ''구원은 얻되 불 가운데서 얻는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집짓는 재료를 가리켜 공력이라고 하였다.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공력 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고전 3:13一15).

    여기서 공력은 우리의 믿음의 행위를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구원은 얻지만 믿음의 행위가 없으면 상급을 얻지 못하고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위하여 달음질하는 것이 아니라 상급을 위하여 달음질하고 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을 얻는 자는 하나인 줄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우리 성도는 구원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상급을 위하여 맡은 일에 충성을 하여야 한다.

    이제 성경에 나타난 상급을 연구하기 위해 상급에 대한 성경적 용어를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성경의 상급 사상을 고찰하도록 한다.


    2. 구약에 나타난 상급

    1) 구약의 상급용어

    (1) 사칼(ר

       

     

     

    연약함과 신뢰의 장소
    (A Place of Vulnerability and Trust)

     

    우리가 한 식탁에 들러앉아 같은 빵을 떼고
    같은 잔에서 마실 때,
    우리는 서로에 대한 모든 경계를 풉니다

    총을 어깨에 둘러멘 채, 또는 권총을 허리에 찬 채로
    평화롭게 음식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빵을 나눌 때는 우리가 가진 무기ㅡ
    실제 무기이든 또는 마음의 무기이든ㅡ를
    현관에 두고 서로의 연약함을 보이며,
    그리고 신뢰하는 장소로 들어옵니다

    성만찬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 장소가 연약한 하나님이
    연약한 인간을 평화로운 식사에 함께 오도록
    초대하는 장소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빵을 떼어 다른 사람에게 줄 때,
    우리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성도의 심판  

    고후 5:1-10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대부분의 세상 종교에서는 인간이 죽은 후 하나님 앞의 심판대에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보기
    전까지는 내가 지옥으로 갈지, 천국으로 갈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슬람의 경우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하나님의 저울 위에서 선행이
    악행보다 많아야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캐톨릭의 경우도
    그 누구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 앞의 심판대에 가
    보아야 그들의 선행으로 천국에 들어갈지, 아니면 지옥에 들어갈 지 알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지옥으로 가게 될지 아니면 천국으로 가게 될지 그
    결정은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맺는지 아니면 맺지 않는지에 따라 이미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이 땅에서 복음을 통해 인격적 관계를 맺게 되는 사람들은
    이미 심판에서 옮겨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선포합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2-24).

    그러므로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은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당하게 될 때 지옥과 천국을 결정하는
    심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한편,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는 자들은 자신들의 지은 죄 값을 치르기
    위해 고통을 받는 장소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인이든 불신자든 죽음을 지난 후에는 그들에게 똑같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의 부활 사건이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행24:15)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영생의
    부활로 부활하고, 불신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옵니다. 다니엘 선지자는
    마지막 때에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부활을 말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영광의 영생으로 부활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영원한 수치로 부활하는 자들이 있을 것을 말합니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12:1-3).

    또한 성경은 두 종류의 마지막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에
    대한 심판으로서 그리스도의 심판이 있고 불신자를 향한 심판으로써
    하나님의 흰 보좌 심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에 대해서는 고린도후서5:10절이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한편 믿지 않는 자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흰보좌 심판은 계시록
    20:11-15절에 나와 있습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계20:11-15).

    그러면 다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에 대해
    살펴 보길 원합니다. 로마서14:8-12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심판에 대해
    바울이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바울을 통해
    주신 계시처럼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이 땅에서의 우리의
    모든 삶에 대해 직고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행한 모든 행위의 마음
    속 깊은 동기와 의도까지 정확하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 당시에 심판대는 운동 경기 시합과 연결되는 개념이었습니다.
    경기나 운동이 끝날 때 판정의 권위를 부여 받은 심판자가, 또는 판정이
    매우 어려운 때는 황제 자신이 경기 장에 있는 보좌에서 심판을 했습니다.
    승리한 사람은 보좌로 나아와 상을 받았는데 일반적으로 나뭇 잎으로
    만든 관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우 우리 각자는 그리스도를 심판자로 하여 그 분 앞에서
    서서 상을 받거나 상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상급은
    단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상을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자신이 행한대로 각각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때 그리스도인의 심판은 그 사람이 구원을 받을 것인지 아닌지,
    천국행인지 지옥행인지에 대한 심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어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맺어진 사람들은 구원과 영생을 이미 얻었으며,
    한번 얻은 영생과 구원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잃어 버릴 수가
    없습니다. 신자들은 그들의 구원에 있어서 영원토록 안전합니다.
    그 증거로 에베소서4:26절은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심판은
    천국과 지옥의 심판이 아니라 상을 받을 것인지 못 받을 것인지의
    심판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많은 성도들이 상을 받지 못함으로
    인해 부끄러움을 느낄 것을 알려줍니다. 요한일서2:28절은 신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실제로 어떤 성도들은 상을 받지 못하는 한편,
    다른 성도들은 큰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실 성도들은 믿음의 행위나 봉사나 마음의 동기에 있어서 큰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공의로우심 가운데 각 성도에게 가장
    공의하게 상을 내리실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요한이서 8절은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우리는 하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영원히 거하는 것이 우리 각자에게 가장 큰
    기쁨이지 상급 그 자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우리의 즐거움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사실 때문에 영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내 영혼이 은총입어”는 정확하게 맞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하늘 나라에서의 영원한 즐거움과 상을 잃을 때의 비참과
    부끄러움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비참하고 부끄러우면서
    영원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이에 대해 허만 호이트
    라는 분이 가장 멋진 비유로 설명한 것 같습니다.

    그 분은 졸업식을 예로 듭니다. 졸업식에서 모든 학생이 졸업하면서
    마음이 다 즐겁고 가볍기만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이 상을 받는
    것을 보면서 더 열심히 성실하게 학교 생활을 하지 못한 점에
    아쉬움이 남으며 또한 최선을 다하지 못한 학교 생활에 후회를 합니다.
    그럼에도 고통이나 비참에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상을 받는 학생들을
    향하여 증오와 미움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졸업의 기쁨보다
    상을 받지 못한 슬픔이 더 크다면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거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그리스도의 심판을 통해 상을 받거나 잃을 때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와 있지만 이 세상에서 주께서 주실 상을 바라보며
    최선을 다하지 못한 점에 못내 아쉬움을 갖추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심판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3:11-15절에 신자에 대한 심판의 그림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곳에는 어떤 자질로 건물을 짓는지를 심판과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11.이닦아둔것외에능히다른터를닦아둘자가없으니이터는곧예수그리스도라
    12.만일누구든지금이나은이나보석이나나무나풀이나짚으로이터위에세우면
    13.각사람의공적이나타날터인데그날이공적을밝히리니이는불로나타내고
    그불이각사람의공적이어떠한것을시험할것임이라
    14.만일누구든지그위에세운공적이그대로있으면상을받고15.누구든지그
    공적이불타면해를받으리니그러나자신은구원을받되불가운데서받은것
    같으리라

    중요한 점은 건물을 짓는 자질이 불에 타는 것과 불에 타지 않는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에 타는 것은 나무, 풀, 지푸라기가 있습니다.
    반면 불에 타지 않는 것은 은이나 금이나 보석입니다. 그렇다면 불에
    타지 않는 재료들은 무엇을 의미하며, 불에 타는 재료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불에 타지 않는 재료들은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열매들로서 소위 성령의 열매 내지 성령으로 인하여 내 삶 가운데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는 영향력들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높이려는
    동기를 가지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든 것들이 불에 타지 않는
    재질들입니다. 반면에 불에 타는 것들은 자신 또는 인간들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것들로서 이기적인 동기, 교만한 동기, 우월해지려는 동기
    가운데 수고한 것을 말합니다.

    특히 본문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불로 나타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위배되는 모든 것은 다 타고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헛수고지요. 갈라디아서6장을 보면 불에 타지 않는 재료와
    불에 타는 재료를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6:6).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주의 불을
    지나는 공적을 쌓으려면 오직 성령에 따라 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은 세 가지 면에 대해 내려질
    것을 말합니다. 첫째는 행위입니다. 재능과 은사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귀하게 여겼는지, 모든 관계 속에서 주께서
    명하신 책임을 제대로 감당했는지를 봅니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얼마나 기도를 했는지는 주께서 귀하게 평가하시는 행위에
    해당합니다.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다”(시62:12).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 또한 바울 사도가 말합니다.
    에베소서6:7-8절입니다.

    6.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이로 보건대, 우리의 행위에 대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은 분명합니다.

    또한 주님의 심판은 우리의 생각을 포함합니다. 주께서는 우리의 깊은
    마음의 동기를 정확하게 아시기 때문에 그 동기와 생각을 보십니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17:10). 또한 고린도전서4:5절에는,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고전4:5).
    계시록을 보면 주께서 말씀하시길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동기와
    마음이 심판의 대상입니다.

    셋째는 말입니다. 말은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을
    살리고 영생을 주는 도구로도 사용되지만, 공동체와 나라와 세상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약3:6-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6.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7.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사실 말은 행동에 포함될 수 있는 것입니다.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뱉는 말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들을 나타내는지 알려 주시면서 말에
    대해 심판하실 것을 분명하게 하였습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따라서 우리는 한 마디를
    할 때도 주님 앞에서 주의 심판을 생각하며 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25-32).

    이제 마지막으로 상급과 면류관에 대해 상고해 봅시다. 성경은 면류관에
    대해 말씀합니다. 면류관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무엇을 이루었는지에 따라 여러 다른 종류의 상이 주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을 많이 전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교로 멀리가서 수고하는
    사람도 있지만, 학생들과 이웃를 향해 중보 기도로 영혼 구원의 사역을
    맡는 자들도 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 카이퍼처럼 모든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한 일들은 무한하게 다양하며 또한 수고한 사람의 정성과 마음 자세가
    다 다르기 때문에 면류관에도 여러 종류가 있고 상급도 다양한 것으로
    보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어려운 환난을 인내한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특히 죽음의 지경까지 견딘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야고보서1:11절의
    말씀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또한 계시록2:10절이 말합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한편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성스럽게 양들을 먹이는 자들에게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벧전5:4). 복음을 위한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삶을 절제하면서 온전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썩지 않는
    면류관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9:23-27).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며 주께 순종하는 의로운 삶을 사는 모든
    자들에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딤후4:8).
    이 외에도 감추었던 만나, 흰돌 등, 많은 상급들과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계시록4장을 보면,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4:10-11)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십사 장로들이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린다는 것은 주께서
    그들에게 상급으로 주신 모든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이 내용은 대단히 중요한 점을 말씀하는데,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상급은 결국 우리가 주님을 예배하고 영광을 돌림으로써
    하나님께서 한없는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상급을 받는 자들의 마음 속 가장 깊은 동기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있다는 점입니다. 만일 상급이 자기를 위한 영광을 구하는 동기에게
    추구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실 상급을 받기에 부적절한
    마음의 동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무엇을 하든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할 때, 심지어 주께서 주시는
    모든 축복과 상급 마저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는 진심이 있을
    때만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영화롭게 하심과 더불어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함을
    얻은 이후에 그의 인생의 목표는 상급이었습니다. 빌리보서3:12-14절에서
    그는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가 상급을 추구함은 주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11장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주께서 주실 상을 바라며 나아가고
    그리고 그 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마음을 가질 때 주께
    무한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문제, 지옥의 문제, 하나님의
    흰보좌 심판을 통과한 우리들은 단 한가지를 목표로 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그것은 주께서 주실 상급을 향해 달려야 합니다. 모든 동기도,
    우리의 에너지도, 인생도, 주님 앞에 서게 될 심판대를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느날 갑자기 우리는 주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공의로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가에 의해 우리의
    영원한 영광이 결정날 것입니다.

    이 귀한 진리를 마음 속에 두시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해
    그리고 그분께서 주실 상급을 바라보면서 남은 여생을 달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USA아멘넷 게시판/교제




    1. 먼저 손 내밀어라.
      사람들은 먼저 다가서지 않으며 상대방이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친구를 사귀고 싶으면 먼저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하라.
      용기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고 먼저 다가서는 자만이 친구를 얻는다.

    2. 호감을 가져라.
      사람은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사람은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진다.
      호감과 관심을 받고 싶으면 상대방에게 호감과 관심을 가져라.

    3. 통(通)하라.
      인간관계는 커뮤니케이션 관계며 커뮤니케이션은 통하는 것이다.
      대화중에 말, 생각, 감정이 진심으로 통해야 서로 통하는 사이가 된다.
      공감하라!
      상대방의 말을 집중하여 경청하고 상대방을 수용, 이해, 인정, 지지하라.

    4. 따뜻한 말을 하라.
      상대방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말을 하라.
      상대방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말을 하라.
      사랑과 애정이 담긴 말로 상대방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라.

    5. 상처주지 마라.
      상대방을 비판, 비난하지 마라.
      상대방에게 책임과 잘못을 전가(轉嫁)하지 마라.
      상대방의 감정과 자존심에 상처를 주지 마라.

    6. 속을 보여 줘라.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모르면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면 친해지지 않는다.
      솔직하게 생각, 감정을 표현하고 속을 보여 줘라.
      때로는 비밀도 공유하라.

    7. 많이 웃고, 많이 웃겨라.
      사람들은 잘 웃는 사람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잘 웃기는 사람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밝고 유쾌한 사람을 좋아하니 자주 웃고, 자주 웃겨라.

    8. 챙겨 줘라.
      상대방의 일을 내 일처럼 생각하라.
      상대방의 애경사(愛敬事)를 내 애경사처럼 생각하라.
      상대방에게 필요한 일, 도움이 되는 일을 미리 잘 챙겨 줘라.

    9. 참고 이해하고 용서하라.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참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참고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참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10. 먼저 등(背) 돌리지 마라.
      인간관계가 쉽게 친해지지 않는다고 먼저 등 돌리지 마라.
      별 볼일 없다고 먼저 등 돌리지 마라.
      섭섭하다고 먼저 등 돌리지 마라.
      한 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하고 절대로 먼저 등 돌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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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 방향설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에 대한 전적 순종과 고난 그리고 죽음 부활을 통하여 우리들의 죄와 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리스도의 이런 구원 사역도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과 삶에 적용되어 질 때 비로소 그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 구원 사역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다루는 것이 구원론이다.

    본 책에서 다루는 신학의 입장은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 전통에 의한 복음주의 노선이다. 개혁주의 구원론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특성을 갖고 있다.
    1) 누가 죄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는가를 결정하는 요인은 인간의 결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이다.
    2) 구원의 뿌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두고 있으며 인간의 공로를 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영생을 주시고자 그의 백성을 택하신 것에 있다.
    3)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는 그의 택한 백성(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택함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부여되어지는 보편적이 아니라 특별한 은혜인 것이다.
    4)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유효하며 또한 유기될 수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한 자들이 그들의 구원을 상실하도록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5) 구원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되기 위하여서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성령의 역사이다.

    1. 역설의 의미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대한 전적주권을 갖고 계시며 우리의 삶을 그의 뜻에 따라 인도 하신다는 사실과 한편 우리는 우리의 삶을 결정해야하며 그 결정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인간의 책임성을 하나로 일치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사실을 모두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하여서는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엡 1:11)에서 볼 수가 있고
    인간의 책임성에 대해서는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이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 3:36)에서 가르치고 있다.
    한편 다음의 두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두 성경적 진리를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인자는 이미 예정된 대로 가거니와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눅 22: 22)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니” (행 2:23)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미리 작정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그를 죽인 자는 그들의 악행에 대한 응분의 책임이 주어졌던 것이다.

    2. 상관관계들

    구원론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죄로부터 구속하셨는가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구원론이 신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결국에 가서는 구원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이루게 될 것이다.

    구원론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교리인 기독론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믿는 자만이 성경적인 구원론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했던 아리우스에 대항하여 아타나시우스는 “내가 나의 구속주로 믿는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다”라고 강력하게 말한 것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구원론은 또한 기독교 인간학 혹은 인간론과 관계가 깊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인간이 구원에 이룰 수 있는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인간의 본성은 타락으로 인해 전적으로 부패해져 있으며(그래서 인간은 본질상 죄로 죽은 자들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로 인해 중생되어지며 새 영을 힘입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개력주의 혹은 칼빈주의적인 구원론을 굳게 믿는 자이다.

    구원론은 성령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령은 우리를 중생케 하시며 거룩하게 하시며 믿음 안에서 인내하게 하신다. 다시 말하면 구원론에서 다루어지는 모든 과정 전체에서 구원을 성령이 우리의 삶에 적용시키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구원론과 종말론(마지막 이들에 관한 교리)도 밀접한 관계에 있다. 먼저 우리는 시작된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으로 구분지어야 한다.
    시작된 종말론이라 함은 신자들이 종말론적인 추복들을 현세적으로 향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마지막 날들이 시작되었기에 구원의 축복들을 이미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그랬다.
    미래적 종말론이란 다가올 종말론적인 사건들에 관한 교리를 말한다. 이생에서 얻고 있는 구원의 축복들은 우리가 다가올 세상에서 얻기를 대망하고 있는 더 큰 축복들의 전조일 뿐이다.

    2장 구원의 순서에 관한 문제

    구원의 교리를 잘 이해하려면 구원의 축복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용함에 있어 어떤 순서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1. 세 가지의 다른 접근 방식들

    1) 죤 머레이(John Murray)는 그의 저서 <성취된 그리고 적용된 구속>이라는 책에서 “구원적용의 다양한 과정이 어떤 순서에 따라 진행되고 있으며 그 순서는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계획과 그의 지혜 그리고 은혜에 의해 제정되었다고 믿을 만한 충분하고도 결정적인 이유들이 성경에 나타나 있다”고 했다.
    머레이는 로마서 8:23로부터 부르심(calling), 의롭게하심(justification), 영화롭게하심(glorification)이란 구원의 순서를 추출하고 있다. 이 순서를 근간으로 하여 머레이는 다음과 같이 성경적인 구원의 순서를 정리한 것이 특징이다. 즉 부르심, 중생, 믿음과 회개, 칭의, 양자삼으심, 성화, 견인, 그리고 영화라고 정리했다.

    2)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는 중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그의 저서 <조직신학>에서 성경은 이와 같은 형태의 구원의 순서를 뚜렷이 밝히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시 구원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기는 하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즉 부르심, 중생, 돌이킴(회개와 믿음을 포함), 칭의, 성화, 견인, 그리고 영화, 라고 정리했다.

    3) 다른 한 극단적인 예가 벌카우어(G.C.Berkouwer)의 경우이다. 그는 구원의 순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성경에서 구원의 고정된 순서를 추출할 수 없다고 하며 그는 믿음은 구원의 여정 속에 있는 하나의 구분점이 되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전 생애에 널리 편만해져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는 “구원의 순서”라기 보다는 “구원의 길”이란 표현을 더 좋아한다.

    2. 어려운 문제들

    구원의 순서를 정하려고 할 때 우리가 당면하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있다.
    1) 구원의 순서를 설정하는 데에 사용되는 용어들이 조직신학에서 사용되는 용어와는 다르게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2) 구원의 과정 속에 나타나는 다양한 단계들의 순서가 항상 똑같이 않다.
    3) 믿음이 구원의 순서에 나타나는 여러 관계 중 하나의 단계라고 생각되어서는 안된다. 믿음은 신자의 일평생 삶을 통해서 수행되어지는 것이다.
    4) 칭의와 성화는 성도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연속의 과정이 아니라 동시에 나타나는 사건들이다.
    5) 구원의 순서는 완전한 것이 아니다.

    3. 우리가 구원의 순서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가?

    연속적인 단계로 나눠질 수 없는 하나님의 단일 사역에 대해서 어떠한 연대적인 순서를 정하려는 시도인 구원의 순서란 개념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가 그것들을 하나씩 다루더라도 그것들은 결코 분리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소위 칭의와 성화를 구분해서 토의하지만 이 둘이 언제나 항상 함께 일어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연속적인 단계를 갖는다는 구원의 순서에 대해서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사역 즉 다양한 국면을 구별해 볼 수 있는 구원의 길에 혹은 구원의 방법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4. 함축된 의미들

    구원의 과정에 대한 이해가 우리의 신학에 대하여 갖는 함축성은 무엇인가?
    1) 중생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처음에 일어나지만 그것이 주는 여파는 신자가 거듭난 삶을 살아가는 동안 계속되어 진다. 또한 믿음과 회개가 시초에 일어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역에 걸쳐 지속적으로 수행되어져야 한다. 또한 칭의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자마자 일어나지만 칭의가 수반하는 혜택들의 소유를 위한 일평생의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성화는 신자의 일평생에 걸처 지속되며 죽기 전까지 완료되지는 않는다. 믿음 가운데서 인내 역시 일평생의 행위이다.

    2) 구원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국면들은 동시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상호적이다. 중생은 반드시 믿음과 회개로 나타나게 마련이며 또한 성화의 시작이기도 하다.
    3) 성화가 영화롭게 되는 것은 종말론에 속한 것이기에 현재의 삶 가운데 종결되어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는 자는 그가 이 생애 있는 한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의 긴장 가운데 있는 자들이다.  즉 이미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는 하나 아직은 온전한 자가 아니다.

    정리를 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에 나타나는 영적인 성장은 하나의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다. 이러한 성장이 반드시 위기 혹은 절정의 경험의 형태를 이룰 필요는 없지만 성장 자체는 있어야 한다. 성경은 이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베드로는 갓 개종한 자들에게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것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밷전 2:2)
    바울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함으로 범사에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찌라”(엡 4:15)

    그렇다면 구원 과정의  다양한 국면들이 연속되는 단계들이 아니라 동시적인 사건들임을 인식함과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더 풍성한 이해와 구원의 희열을 갖게 될 때까지 계속적으로 자라나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3장 성령의 역사

    1. 구원의 과정 속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의하면 성령은 구원의 적용을 이루시는 유일한 동인이다. 바을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서라고 가르치고 있다.(딛 3:5)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영생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요 6:63)
     구원의 과정 속에서 성령의 주된 역할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는 것이다. 바을은 우리가 다 한 영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느니라.(고전 12:13)고 했다.
     구원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모든 주요 요소들이 성령에 의해서 발생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중생 혹은 신생은 성령의 사역이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 (요 3:5)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신자들인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이다. 바울은 “너희는 양자됨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고 했다.

    2. 성령의 은사들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할 때 이 둘은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를 구분 짓는 일반적인 방법은 기적적인 은사와 비기적적인 은사와의 구분이다. 비기적적인 은사에는 가르침의 은사 다스림의 은사 구제와 긍휼을 베푸는 은사들이 있으며(롬 12:6-8) 기적적인 은사에는 병고치는 은사(고전 12:9) 기적을 행하는 은사(고전 12:10) 각종 방언을 말하는 은사(고전 12:10)가 있다.
     
     바울은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복리에 필요한 것은  가르침과 다스림의 능력과 같은 비기적직인 은사들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예언의 은사가 방언의 은사보다 결정적인 우위에 있다고 했다.(고전 14:1-5, 12, 18-19) 바울은 목회서신 어디에도 교회 직분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격에 대하여 방언이나 병 고치는 은사에 대하여 말 한 마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가 두드러지게 언급하고 있는 것은 가르침과 다스림의 은사들이다.

    3. 교회의 치료사역

     이상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병 고침의 은사를 포함한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들이 오늘날 교회 속에서 더 이상 기대되어서는 안될 듯하다. 이 논리는 신약성경의 저자들에 의한 주장도 아니요 오직 신약성경의 여러 자료들로부터 추론된 결론이다. 그러나 지금도 때를 따라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기도를 기적적인 방법으로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교회의 치료사역에 대하여 다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치료는 교회의 정상적인 사역의 일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치료라 함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나는 치료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중요하긴 하지만 그 기도가 반드시 병고침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들째, 이러한 치료사역은 의학적인 전문가들의 도움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수용하는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기도해야 할 병고침은 단순히 육체적인 병고침 그 이상이어야 한다. 그들의 치유는 영적이며 정서적인 치유와 근심의 제거 및 파기된 가족관계의 회복등이 포함 되어야 한다.

    4. 성령의 열매

     갈라디어서 5장에서 바울은 성령의 열매에 관하여 얘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새롭게 발견한 자유의 열쇠는 성령임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요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야 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쫓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갈라디어서 5:22에서 열매를 가르치는 단어를 단수로 쓰고 있다. 여기서 대조되는 것은 육체의 일들과의 대조이다. 육체의 일들이 많음에 비교하여 성령의 열매는 하나이다. 여기서 바울은 육신적인 탐욕은 단일성이 결여된 반면에 성령 안에 거하는 삶은 조화와 통일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성령의 열매를 과실이라 부름은 열매가 자라난다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성령의 열매가 성숙하여 익게 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고 영적인 성장의 지속적인 과정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향한 복합적인 열매이다.

    5.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함은 중생과 동일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는 중생 이후의 경험으로서 성령세례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성령 충만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은 신자들은 언제라도 특별한 임무를 감당키 위하여 성령 충만을 언제라도 요구할 수 있고 그리고 우리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여야 한다.
    성령 충만의  결과는 예배와 교제에서 나타나야 한다.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한다는 뜻은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이고 성령의 힘 안에서 사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메일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4장 그리스도와 연합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속에 내주하실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될 때 비로소 구원에 이르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을 때만이 우리가 구원 받은 자로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1.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뿌리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그의 백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뿌리를 하나님의 택정하심에 두고 있다.

    2.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근거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 근거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두고 있다. 우리는 예수께서 탄생하기 전에 천사가 나타나 요셉에게 전한 바를 기억하고 있다. “그를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임이니라.”(마 1:21)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함을 입은 자들이 있으니 그의 양이라 일컬음을 받는 그들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그의 목숨을 내어 놓으셨다.(엡 1:4)

    3.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

     1) 우리는 제일 먼저 중생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진다. 거듭남이라고 불려지는 중생의 의미는 성영께서 먼저 우리를 그리스도와 산 연합에 이르게 하시고 그럼으로 한 때는 죽었던 우리를 이제 영적으로 새롭게 살리셨다.
     2)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이 연합을 소유케 되며 이 연합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3)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 칭의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온전한 속죄와 의를 부여하심으로 그들의 모든 죄가 용서함 받으며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온전히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을 말한다.
     4)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거룩하게 된다. 점진적 의미의 성화는 성령께서 믿는 자의 삶을 점진적으로 새롭게 하는 것이다.
     5)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통해 믿음의 삶을 견디어 낸다. 성경은 참다운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보존하시되 그들로 하여금 끝까지 믿음의 삶을 견디어 낼 수 있도록 보존하신다. 이것을 견인의 축복이라고 한다.
     6)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다. 롬 14:8 절에서 우리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7)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남을 받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믿는 자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살아남을 받은 자들이다.
     8)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영화롭게 되어 질 것이다. 골 3:4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말하고 있다.

    4. 그리스도와 연합의 중요성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단순히 개인적인 의미로만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물론 개개인의 갱신을 가져오긴 하나 그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궁국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전 우주의 새롭게 됨과 새로운 창조를 포함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교리는 그리스도 사역의 두 개의 중요한 측면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준다. 아마 법적인 측면과 역동적인 측면일 것이다.
    터틀리안이나 안셈과 같은 신학자들로 대표되는 서방측 기독교회는 그리스도 사역의 법적 근거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죄책을 강조한다. 이 죄책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속죄를 통하여 제거하셨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죄책에 대하여 만족을 성취하였다.
    한편 이레니우스와 아타나시우스와 같은 신학자로 대변되는 동방교회는 그리스도 사역의 생동적 혹은 삶을 같이하는 측면을 강조했다. 이들이 강조하는 죄의 측면은 오염인데 이 오몀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하여 우리와 연합함으로 제거하였다.
    서방교회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중심적 혜택은 죄를 용서 받는 것이며 동방교회에서는 영원한 생명이었다.  

    5장 복음의 초청

     복음의 초청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사람들에게 제의하는 일 회개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초청하여 그들로 하여금 죄의 용서와 영생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1. 복음초청은 듣는 사람 모두를 초대한다.

     복음 초청의 특성들은 무엇인가? 첫째는 복음 초청이란 일반적이며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듣는 자 모두에게 전달된 초대라는 것이다. 이 점은 혼인 잔치 비유(마 22:1-14)와 대 잔치 비유(눅 14:16-24)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이 두 비유는 각각 복음 초청을 설명하는 비유이다. 처음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옛 언약 백성인 유대인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선지자들 제사장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왕들을 통해 일찍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나 이제 와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의해 다시 한 번 부르심을 받고 있으나 두 비유에서 먼저 초대된 이들 모두가 오기를 거절하였다. 그럼 나중에 초청받은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들은 유대인은 유대인이로되 첫 번쩨 그룹에 끼지 않은 사람들 _ 세리들, 죄인들 - 을 가르키는 것 같았다. 이 둘째 그룹의 사람들은 기꺼이 잔치에 나온다. 단지 누가복음서에만 언급되고 있는 세 번 째 그룹의 사람들(길과 산을가에 있는 사람들)은 후일에 교회가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완수하게 될 즈음에 복음을 듣게 될 이방인들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자신들의 죄된 상태를 인정하는 자만이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지만 복음초청은 자신들의 상태를 깨닫든지 못 깨닫든지 상관없이 모든 자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2. 복음 초청은 진지하게 의도되었다.

     훅스마에 의하면 복음이 진지하게 사람들에게 제의되었다(듣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에 이르도록) 는 주장은 제한 속죄 교리와 상충되고 있다고 한다. 정말 구원에 이르게 되는 복음의 진지한 제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속죄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고백하며 그리스도께서 오직 택정함을 받은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러나 반면에 그들은 또한 하나님께서 진실된 마음으로 그리고 좋은 의도로 구원을 모든 사람들에게 제의하신다는 것도 주장한다.

     하나님은 결코 참회치 않는 죄인들이 죽는 것을 기뻐하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오히려 그들이 악한 길에서 떠나 살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3. 좋은 의미로 의도된 복음제시와 돌트신경

     이상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개혁주의 신조들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돌트신경에는 이 문제에 관해 두 가지 조항이 관련되어 있는데 첫 번째 조항은 제 2장 5조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 복음의 약속이다. 이 약속은 회개하고 믿으라는 명령과 함께 모든 백성들과 나라들에게 아무런 차별과 차이없이 선언되고 선포되어야만 한다. 바로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의 선한 기쁨 안에서 복음을 보낸다.

    4. 합리적 해결을 위하여

     1) 하나님은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사람들이 진심으로 원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받기에 충분한 은혜를 주실 것이다.
     2) 훅스마와 초칼빈주의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셩경이 분명히 선택과 유기에 대해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전달된 모든 사람이 구원얻기를 바라신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들은 자들 중 오직 선택된 자들만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를 원하셨다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6 장 효력있는 부르심

     복음 초청에 대한 응답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어거스틴(354-430)과 그의 신학적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이 복음 초청을 받아들이는 이유를 궁국적으로 인간의 의지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고 명백히 하였다. 이 어거스틴의 전통은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이어졌다. 여기서 사람은 본성상 복음의 초청에 대해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할 수 없다 사람은 모두 원죄라 불리우는 죄된 상태와 조건 아래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 원죄는 철저한 부패성과 영적 무능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적 무능력 때문에 중생치 못한 사람은 성령의 특별한 사역 없이는 자기 삶의 근본적 방향을 죄된 자기사랑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으로 바꿀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듣는 자의 마음을 여시어 믿게 하시지 않는 이상 사람은 결코 복음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을 여시는 일을 가리켜 신학자들은 내면적 부르심 혹은 효력있는 부르심이라 불러왔다. 전에 공부한 복음 초청을 외적 소명이라 하면 이런 종류의 부르심은 내적 소명이라 부르기도 한다.

    1. 효력있는 부르심에 관한 성경적 기반

     타락한 인간이 본성상 어떠한 가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잠시 생각해 보자. 성령의 특별한 사역 없이도 복음 초청에 대해 믿음과 회개로 반응할 수 있는 존재들인가? 성경은 분명히 그렇지 못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고전 2:14, 롬 8:7, 엡 2:1-2, 요 3:3, 5, )
    따라서 성경에서 효력있는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능히 우리로 하여금 복음 초청에 대해 “네”라고 응답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유효적 부르심이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복음의 초청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와 믿음과 순종의 마음으로 그 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다.

    2. 효력적 부르심의 목표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부르심을 입었다. (고전 1:9)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딤전 6:12)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로 (살전 2:12) 그리고 거룩한 삶에로 (살전 4:7, 딤후 1:9)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경건한 고난의 모범이 되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벧전 2:21)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갈 5:13) 와 화평(골 3:15)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효력있는 부르심은 우리로 하여금 특별한 삶 즉 지금의 악한 세상과는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분리하도록 하는 다른 종류의 삶을 살도록 촉구한다. 이러한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부지런한 참여를 요구한다. 효력있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의 열매이긴 하지만 우리의 전적인 책임성을 요구한다.

    3.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유효적 소명

     어거스틴의 교리에 의하면 “그러므로 복음이 선포될 때 어떤 이는 믿고 또 다른 이는 믿지 않는다. 믿는 자는 외부로부터 들려오는 설교자의 목소리를 듣은 것이 아니라 실상은 내부로부터 들려오는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배우는 것이다. 반면에 믿지 않는 자들은 귀로는 듣되 내적으로는 듣지도 배우지도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전자에게는 믿을 수 있는 것이 주어졌으나 후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 분께서 친히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도다“ (요 6:44)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칼빈도 효력있는 부르심을 가르쳤는데 그는 그것을  “내면으로 향하는 부르심”이라 불렀다.

     그러면 복음의 부르심과 유효적 부르심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가? 이 둘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복음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이 회개와 믿음으로 응답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효력적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무두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러 돌아온다.
    헤르만 바빙크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외적(혹은 복음의) 부르심을 통하여 전파되게끔 하시는 말씀이나 내적(혹은 효력있는 ) 부르심을 통하여 성경에 의해 듣는 자들의 마음 속에 기록하시는 말씀이나 동일한 한 말씀이다.”

    4. 반대 의견들에 대한 고찰

     1) 이 교리는 복음 전도열과 선교열을 식게 만든다는 주장이다.
     2) 믿지 않는 자들이 이 교리를 도구로 삼아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를 변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불신앙을 하나님 탓으로 돌릴 수도 있다.
     3) 유효적 부르심에 관한 교리는 앞서 논의한 바 있는 하나님의 주권성과 인간의 책임성 간의 역설을 무시하는 결과를 빗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본성의 상태는 어떤가?
    우리는 잃어버린 바 된 죄인들이다. 우리는 죄 가운데 죽은 자들이다. 죄 안에서  죽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살아 날 수 없다. 죄 가운데 죽은 우리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귀들은 복음의 부르심에 귀가 먹었고 우리의 눈들은 복음의 빛에 대해 멀어 있다. 우리에게는 기적이 필요하다. 이 기적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놀라운 은총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영적 암흑에서 그 분의 기이한 빛 가운데로 효력적으로 부르실 때에만 일어날 수 있다.
     
    7장 중생

     중생(거듭남) 혹은 신생이라고도 한다. 이 생명은 하나님이 하사하신 선물이다. 중생은 구원의 과정 중 첫 출발을 장식하기에 더욱 중요한 주제이다.

    1. 세 가지 의미에서의 중생

     1) 중생이란 새로운 영적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심기워 지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의밍에서의 중생이다. (요 3:3,5)
     2) 심겨진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날 때를 가리켜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 (약 1:18, 벧전 1:23)
     3)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최종적인 완성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 (마 19:28)

     좁은 의미의 중생의 의미가 중요하다. 즉 성령께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며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사 그들로 하여금 전에는 영적으로 죽었으나 이제는 영적으로 살아나게 하여 죄를 기꺼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며 주님을 섬기게 하신다.

    2. 인간 부패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중생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인간의 부패성에 관한 이해에 거의 매달려 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철저하게 부패하였다는 사실은 신약 성경에서 잘 가르처 주고 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너희는 죽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도다. (엡 2:1, 4-5)

    3. 중생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며 비로서 그때에야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들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신 30:6에서는 우리의 영적인 갱신을 마음의 할례라고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의 안들을 깨끗하게 하셔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신약 성경에는 중생에 대하여 더 많은 가르침을 준다. 요한복음 3장에 니고대모의 가르침은 중생에 대한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다시 태어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3:3) 다시 태어나야 하는데 이 새로운 출생은 위로부터의 출생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믿음 뒤에는 그들을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행위가 있다.
     중생을 요약하면 중생은 영적인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의 전적인 변화이며 성령에 의해 역사되며 우리는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이는 우리 본성의 내면적 새로워짐을 맗라는데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의 열매이며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하여 일어난다.

    4. 중생의 본질

     1) 중생은 갑작스런 변화이다.
     2) 중생은 초자연적인 변화이다.
     3) 중생은 근본적인 변화이다.
        a) 중생은 새로운 영적 생명의 이식을 의미한다.
        b) 중생은 한 인격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는 변화이다.
        c) 중생은 의식 밑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5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칼빈주의자들은 소위 “불가항력적 은혜”를 믿는다. 이 문구는 소위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지칭하는 TULIP(튜립)의 네 번째 약어이다. 이 의미는 중생은 일방적이지 상호협력적 사역이 아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협력하여 이루어 나가는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혼자만의 사역이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은혜는 참으로 거절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것이다.

    6. 중생과 다른 교리와의 관계

     1) 중생과 효력적 부르심과의 관계 : 협의의 중생을 효력적 부르심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려 한다. 이미 17세기 신학이 이 두 가지를 동일하게 취급하였다. 효력있는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으로 회개외 믿음을 통하여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기에 중생과 별다름이 없다.
     2) 중생과 돌이킴과의 관계 :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은 돌이킴(회심, 개종)과 동일시될 수 없고 구별되어야 한다. 중생은 돌이킴에 이르게 된다.(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다시 말하면 돌이킴은 중생이 일어났다는 외형적 증거라  할 수 있다. 즉 중생이 돌이킴보다 앞선다. 루디아성 자주 장사의 돌이킴이 그 예이다.
     3) 중생과 성화의 관계 : 일반적으로 성화는 평생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러면 중생은 성화의 출발점이라 말할 수 있다. 중생은 사회적 측면을 갖고 있다. 즉 “거듭난다”는 말은 개인주의적 의미로 “개인 구원”을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
     4) 중생과 세례와의 관계 : 세례는 죄의 용서를 부여하는 방법이다. 세례는 믿음을 강하게 하고 세례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사역이다. (딤 3:5)
    그러나 세례를 통해 받은 중생도 다시 상실될 수 있다고 로마 카토릭교와 루터교들은 말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입장은 세례는 우리의 중생에 대한 증표와 인이라고 생각한다. 신약은 세례를 통해 세례 받은 자에게 은혜의 언약 또 그가 그리스도께 접붙임바 되었다는 사실, 중생했고 죄를 용서받았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렸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생명 가운데 걷게 된다는 증표와 도장으로 주어진다.

    8장 돌이킴(Conversion)

    1. 돌이킴이란 무엇인가?

     돌이킴이란 거듭난 사람이 의식적인 행동을 통하여 회개와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라 정의한다.  돌이킴은 두 가지의 돌아섬을 의미한다. 하나는 죄로부터의 돌아섬이며 또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섬김에로의 돌아섬이다.

    2. 돌이킴 : 하나님과 사람의 일
     
     돌이킴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역이다. 비록 돌이킴이 거듭남의 외형적 증거이긴 하지만 거듭남을 통하여 심겨진 새로운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의존함으로만 계속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을 통하여 얻게된 새 생명은 우리가 그 분과 계속적으로 연합하여 있는 한 나타나게 된다고 가르치셨다.

     좁은 의미에 있어서 돌이킴을 거듭남(중생)으로부터 구별짓는다면 돌이킴은 사람의 사역이라 할 수 있다. 사실상 신구약을 통하여 돌이킴은 하나님의 사역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사역으로 종종 묘사되곤 한다.
     사례를 찾아보면 구약에서는 사 45:22, 겔 33:11을 생각하고 신약에서는 행 2:38, 행 16:31,롬 10“9에서 찾아 볼 수있다.

    3. 여러 가지 형태의 돌이킴

     진정한 돌이킴은 단회적 사건이다. 그 예는 성경에 많이 있다. 나아만(왕하 5;15) 므낫세(대하 33:12-13) 삭개오(눅 19:8-9), 오순절의 삼천명(행 2:1), 사울(행 9:1-19), 고넬료(행 10:44-48), 루디아(행 16:14), 빌립보 감옥의 옥사장(행16:29-34)

     성경은 가끔 소위 민족적 개종에 대하여 언급한다. 즉 전체 국가가 주님께로 돌아오는 때를 가르킨다. 그 예로 여호수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만을 섬기고 그에게 복종하기로 한 경우(수 24:14-27) 히스기야 시대(대하 29:10-36), 요시야 당시 (왕하 23:1-3) 또한 요나의 설교에 따라 니느웨 사람들의 개종(욘 3;1-10)을 들 수 있다.

     일시적 개종도 있다. 진정한 회심이 아니라 잠정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경우이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바위틈에 떨어진 씨를 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개종으로 제 2의 회심을 말할 수 있다. 다윗의 회심이 이렇다. 시 51편은 그의 제 2의 회심을 기록하고 있다. 요한 계시록에는 소아시아 7교회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5)고 말씀하신다.

    4. 돌이킴 형태의 다양한 변형들

     돌이킴이 한 사람의 전 인격이 관영되는 일이긴 하여도 주로 지 정 의에 관계하고 있다.
     주로 지성적인 개종의 좋은 예가 루이스(C. S. Lewis)의 경우이다. 그는 지적인 문제들과 회의들과 씨름하였으나 결국 하나님께 항복하고 말았다.
     의지적인 개종의 예로는 어거스틴(Augustine)을 들 수 있다. 그는 자기의 죄에 대하여 고민하고 갈등하였으나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던 그가 로마서 13:14을 읽고 그리스도 안에서 극복할 힘을 얻게 된다.
     감성적인 개종의 예로는 존 번연(John Bunyan)을 둘 수 있다. 그는 자기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심한 내면적 정서적 갈등과 고통의 세월을 보낸 후 최종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함으로 영혼의 평안을 가졌다.

    9장 회개

     마태복음에는 자기들의 죄에 대하여 슬퍼한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 사람은 자기의 주님을 부끄럽게도 부인했던 베드로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은 삼십 냥에 자기의 주인을 배반한 유다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다. 죄의 용서함과 회복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 베드로의 회개는 참된 것이었지만 유다의 회개는 그렇지 못하였다.

    1. 회개의 중요성

     한 마디로 바울 사역의 목표는 사람들을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 회개의 선포는 예수의 고난과 부활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 계시록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회개를 촉구하는 엄한 음성이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 3:19)

    2. 회개와 믿음의 관계

     회개가 먼저인가? 믿음이 먼저인가? 신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어떤 이는 회개가 믿음에 앞선다고 하고 어떤 이는 반대로 이야기 한다. 칼빈은 분명히 이야기 한다. “회개는 끈임 없이 믿음을 뒤따라야 할 뿐 아니라 믿음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고 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중생(거듭남)으로부터 나오며 돌이킴(회심, 개종)의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했다.

    3. 단어 연구

     회개의 구약 히브리어는 “니함”과 “수브“가 있다. ”니함“은 유감스럽게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 잘못에 대하여 회개하다 라는 뜻이 있다. ”수브“는 돌이킨다. 반대 방향으로 가다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오순절에 베드로가 외쳤던 회개는 예수를 향한 유대인들의 판단을 뒤집으라는 외침이었다. 아덴 사람들을 향한 바울의 회개는 하나님에 관한 그들의 관념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 분 안에서 삶을 가지라는 호소이었다.

    4. 회개의 개념

     회개란 중생한 사람이 온전한 삶의 변화를 통해서 새로운 사고와 감정과 의지를 반영하면서 죄로부터 돌아서서 나님을 향하는 의식적인 돌아섬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회개는 단일적인 경험이다. 즉 회개는 여러 부분들로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회개는 다음과 같은 측면들로 구별될 수 있다.
     1) 지적인 측면 : 참된 회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거룩함과 존엄성을 아는 지식을 포함한다.
     2) 감정적인 측면 : 단지 죄의 결과들에 대해서만 아니라 죄 그 자체에 대한 가슴저리는 슬픔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바울은 “경건한 슬픔”이라고 불렀다.
     3) 의지적인 측면 : 죄로부터의 내면적인 돌아섬과 용서를 추구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목적과 동기의 변화도 있어야 한다. 내면적인 변화는 반드시 외형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감사한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5. 회개 : 하나님과 사람의 일

     성경은 회개룰 가리켜 하나님의 사역인 동시에 인간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미 회개를 사람의 일로 묘사하고 있는 구절들을 보아왔다.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사 55:7 겔 33:11 마 4:17 행 3:19) 그러나 행 11:18에서는 히개가 하나님의 사역으로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6. 회개는 한평생 계속 지속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르라고 요구하신  그리스도의 요청은 우리가 마땅히 평생토록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바울도 그의 독자들에게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롬 12:2)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우리가 한 평생 이루어 나가야 할 사명이며 도전을 말한다.

     회개가 평생의 작업이라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1) 그리스도인 생활의 초반부에 있는 처음 회개와 그의 평생토록 이어지는 회개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2) 평생에 이르는 의미에서의 회개가 근본적으로 성화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3) 회개는 결코 우리에 의해서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0장 믿음

    1. 믿음의 중요성

     신약에서 믿음으로 사용된 명사와 동사는 약 240번 나온다. 믿음은 회개와 함께 돌이킴의 본질적 측면에서 구원의 필수 요건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유별난 행위로(요 6:29)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도록 명하신 일이다.(요일 13:23)

    2. 여러 성경 저자들에 의해 묘사되고 있는 믿음

     믿음은 신약시대 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중심이었다. 일명 “어머니의 약속”으로 불리는 창 3:15에서 최초의 은혜언약의 계시는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믿음의 응답을 촉구하고 있다. 히브리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아벨을 하나님께 믿음으로 보다 나은 제사를 드렸고(히 11:4) 믿음으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5절) 그리고 믿음으로 노아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7절)

     족장 시대를 보면 아브라함이 구약에서 뛰어난 믿음의 본으로 나타나기에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고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며 (롬 4:1-3) 모든 믿는 자는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갈 3:7) 가르친다. 사라 이삭 야곱 이런 모든 자들도 믿음으로 살았다.

     요한복음에서 믿음은 거의 백번 정도 나온다. 여기서 강조점은 이적적인 신앙이 아니라 구원하는 신앙이다. 요 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다.

    3. 신약의 다른 부분에서 언급된 믿음

     히 11:1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다”라고 표현했다.
    믿음은 신약에서 수많은 현저한 특징들로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으로 묘사되고 또한 믿음은 그리스도를 먹는 일로 묘사된다. 한편 믿음은 그리tm도 안에 있음을 말하기도 한다.

    4. 칼빈의 견해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 특히 그 분의 자비를 아는 지식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칼빈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확고하고 분명한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겂없이 주어진 진리에 기초한 것으로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생각에 계시되었고 우리의 마음에 인쳐진 것이다.”라도 표현했다.

    칼빈은 믿음을
     1)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
     2) 전혀 알지 못하거나 반쯤 아는 진리들에 대한 단순한 찬동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확실하게 앎이며
     3) 의심에 반대하는 견고한 확신이나 신뢰가 그것이다.
     4) 믿음에 대한 어떠한 공로도 모두 반대한다.

    5. 믿음의 개념

     믿음은 여러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구분될 수 있다.
     1) 지식이다. 우리가 알지 못한 자나 잘못알고 있는 자를 우리는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분명하다. 성경은 지식이 없이는 참된 믿음이 있을 수 없다고 분명히 가르친다.
     2) 찬동이다. 찬동이란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들을 참되다고 확고히 받앙들이는 행위를 뜻한다.
     3) 신뢰이다. 믿음은 자신을 보지 아니하고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신뢰에는 순종이 포함된다는 것을 첨가시켜야 한다.

    6. 믿음의 중심적 신비

     믿음의 중심적 신비라는 의미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에 또다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역설이 있다.

     1)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믿음
     믿음은 하나님의 선택의 열매이다.
     믿음은 중생의 결과이다.
     믿음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이다.
     예수님은 믿음의 창시자이다.
     하나님은 믿음을 주시는 분이시다.

     2) 인간의 행위로서의 믿음
     가장 평범한 믿음은 인간이 복음에 대한 반응으로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것을 살피는 것이다.

    7. 구원의 확신

     구원의 확신에 대한 로마교회의 부정적 태도는 결국 복음의 핵심을 건드리는 문제였기 때문에 개혁자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로마교회의 가르침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여기에 포함된 근본 문제는 인간이 은혜로만 구원을 얻느냐 아니면 부분적으로 자신의 구원이 공적이 되는 선행에 좌우되느냐 하는 것이다. 후자가 사실이라면 누구도 구원을 확신할 수가 없다. 그러나 개혁주의자들의 가르침처럼 전자가 사실이라면 누구도 구원을 확신할 수가 있다.

    11장 칭의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 당시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그가 갖고 있던 죄의식을 벗어버리기 위하여 딱딱한 마루 바닥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손과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갖은 고생을 했지만 죄의 고을은 깊어만 가더란 것이다.
     그가 시편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의”가 자주 언급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형벌적인 의로 죄인들을 멸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루터는 자신이 죄인임을 실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로마서를 읽으며 1장 16-17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서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생각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란 죄인들을 벌하기 위한 하나님의 형벌적인 의가 아니라 오히려 필요한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로움으로 죄인이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이는 흠없는 완전한 의로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셨고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루터는 더 이상 자신의 선행으로 평안의 기준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제서야 자신을 떠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었고 두려움 없이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다고 한다.

     칼빈도 이와 비슷하게 칭의의 교리를 종교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받아드렸다.

    1. 칭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창 15:6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한다. 수많은 씨의 약속이 그로 인해 땅의 모든 백성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한 자의 출생의 약속이 포함되었음이 틀림이 없기에 (창 12:3) 여기에 아브람의 믿음은 오실자인 메시야를 믿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이 믿음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의롭다 여기셨는데 즉 믿음으로 아브람은 의롭게 되었다.
     롬 4:3, 갈 3:6에서 믿는 자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을 제시하고 있고 야고보도 약 2:23에서 창 15:6을 인용하고 있다.

     믿음에 의한 칭의의 교리는 다음의 것을 알 수가 있다.
     1) 이 교리는 구약에 기원하고 있다. (롬 3:21)
     2) 이 칭의는 믿음에 의한 것이다. (롬 3:22)
     3) 칭의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다. (롬 3:24)

    2. 칭의에 대한 로마교회(카토릭)의 견해

     16세기 로마교회는 루터와 칼빈에 의한 개신교회의 칭의에 대한 가르침에 날카롭게 반대했다. 이를 반대한 내둉이 트랜트 종교회의 6회기애서 나온 규범과 칙령들 속에 포함되었다. 이 6회기는 1546년 6월 21일부터 1547년 1월 13일 까지였다. 1547년 후기에 칼빈은 이 의사롤 논평을 책으로 출판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트렌트 신조에 의거한 로마교회 신학에서 칭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신자에게 전가시킨 선포적 행위로써 보다는 인간의 영적이며 도덕적인 본질에 변화를 주는 은혜의 주입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로마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만을 통해서 인간이 의롭게 된다는 것을 명백하게 부인한다.
     2) 그러므로 믿음은 칭의에 있어서 중심적 의미가 아니라 부차적이다. 성경은 롬 3:23에서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다. 반면 트렌트 신조는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의미는 있으나 그 강조가 아주 약하다고 했다.
     3) 칭의의 은혜는 한 번 받으면 다시 잃지 않는다. 롬 8:30에서 하나님께서 의롭게 한 자를 또한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트렌트 신조는 이것에 반대하여 칭의를 잃어버릴 수 있다고 한다.
     4) 칭의로 받은 의 또는 의로움은 향상될 수 있다고 한다. 트렌트 신조는 신자가 칭의로 받은 의를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의 전가로 보지않고 신자의 신행을 통해 증감될 수 있는 우리 속의 주관적 자질로 보는 것이 분명하다.
     5) 칭의는 신자들로 하여금 영생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공로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의 가장 강력한 주장은 어느 누구도 그 자신의 공로에 의해서 영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종교개혁자들이 칭의에 대한 로마 카토릭의 개념을 왜 그렇게 맹렬하게 반대했는지를 명백히 알 수가 있다.

    3. 개혁주의 고백서들에 나타난 칭의

     16, 17세기의 개혁주의 고백서들은 종교개혁 개신고의 칼빈주의파의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 특히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과 벨직 고백서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표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다음 주제 칭의의 개념에서 정리하고자 한다.

    4. 칭의의 개념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법적인 하나님의 행위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믿는 죄인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에게 양도되고 그들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시며 그들을 자기의 자녀로 입적시키며 또한 그들에게 영생을 누릴 권리를 주는 것이다.

     칭의의 교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 “하나님의 진노의 실상”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관계하고 있는 그 하나님은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이기에 우리의 죄에 대하여 진노하실 수밖에 없다.
     2) 칭의는 하나님의 “선언적” 혹은 “법적인” 행위이지 어떤 과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 혹은 선고하시는데 우리 자신들이 사실 어떤 존재냐는 것에 의거하지 않고 우리의 착한 행실 때문이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해서 하신다. 이 복은 전적으로 무조건적이다. 이 선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이다.(골 1:22)
     3)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 우리 자신들의 선한 행위로는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다.(롬 3:28)
     4) 칭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서 우리의 소유가 될 수 있기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5) 칭의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사야 53장에서 가르치고 있듯이 이 장을 우리는 “구약의 복음”이라고 부른다. 그 장에서 주께서 그(고난받는 종으로서 행 8:35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이다)에게 우리 모두의 죄악을 담당시키셨다.(6절)는 것과 이 종이 많은 사람의 죄를 떠맡았다.(12절) 고 했다. 베드로는 이 선지자의 말씀을 자기의 말처럼 그대로 되플이 하여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증언했다. (벧전 2:24)
     6) 칭의는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을 포함한다.
     7) 칭의에서는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함께 나타난다.
     8) 칭의는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을 다 가지고 있다. 소극적인 면에서 칭의는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를 의미한다. 적극적인 면에서 칭의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입적되는 것과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권리를 받게 되는 것을 포함한다.
     9) 칭의는 종말론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심판의 날 우리에게 선고하실 판결을 현재로 옮겨온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 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어졌기 때문이다.(요 5:24)
     10) 칭의가 성화로부터 절대 분리되어서는 안 되지만 이 두 복은 서로 구별된다. 고전 1:30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의롭다고 하신 사람을 반드시 성화도 시킨다. 그리고 칭의와 성화는 함께 발생하지만 그것들은 서로 주의 깊게 구별되어져야 한다. 즉 칭의는 죄에 대한 책임을 제거하는 반면 성화는 죄로 인한 오염을 방지한다. 칭의는 신자의 밖에서 일어나며 성화는 신자의 안에서 일어난다. 칭의는 평생에 단 한 번 일어나며 성화는 생애에 걸쳐서 계속되는 과정이며 현생이 끝나기 까지 완성되지 않는다.

    12장 성화

     하나님은 그 자신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의 형상대로 창조한 우리들에게도 역시 거룩해지기를 바라신다. 우리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성화라고 한다.
     레 19:2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벧전 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1. 정의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죄의 오염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의 본성 전체를 새롭게 하시어서 우리가 주님을 즐겁게 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를 성화라고 정의한다. 성화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은 전에 우리가 소유했던 것과 전적으로 다른 어떤 능력과 재능을 우리에게 부여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을 죄된 방법대신 올바른 방면으로 사용하도록 역사하신다.

    2. 거룩의 성경적 의미

     거룩이라는 단어의 근본적인 의미는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 즉 어떤 영역이나 범주 속에 있는 일반적이고 세석적인 사물이나 사람으로부터의 구별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와 함께 연합되었기 때문에 거룩하게 되어졌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가운데 우리의 성화는 진보한다. (고전 1:30)

     종교개혁 속에서 선언된 가장 중요한 진리는 이신칭의였다. 고로 우리는 믿음에 의하여 성화된다고 하는 점도 역시 동등한 진리이다.

     신앙 속에서 성화의 방편은 무엇인가?
     1)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을 계속 유지한다.
     2)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3)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를 극복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움켜 잡는다.
     4) 믿음은 수용하는 기능일 뿐만 아니라 작동하는 능력이다. 그 자체의 본성 때문에 믿음은 영적인 열매를 산출한다.

    3. 성화의 모형

     성화의 모형은 하나님을 닮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시다.(요 14:8-9, 고후 4:4, 골 1:15, 히 1:3) 그래서 우리는 성화의 모형이 그리스도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성화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에 일치되도록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과 같이 또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인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과정 중에 있다. 이 과정을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와 우리의 능동적인 노력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1) 하나님의 역사 : 성경은 성화시키는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시켜 자지의 형상대로 회복시킨다고 가르친다.
     2) 우리의 능동적인 능력 :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위해서 노력해야 할 책임이 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본에 따라서 더욱더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 위해서 분투해야 한다. 하나님 형상의 회복은 직설법인 동시에 명령법이다.

    4. 성화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

     성화는 하나님의 사역이며 또한 그의 백성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성화의 사역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공히 담당하신다고 묘사한다.
     예수님은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요 17:17)라고 성부께 기도하셨다. 이 구절은 성부가 성화의 주체임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도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교회를 깨끗하게 하시는 성화의 주체자로 계시되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 --- (벧전 1:2)

    5. 즉각적이고 점진적인 성화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즉각적인 행위인 동시에 단번에 완성되는 칭의와 구별하여 성화를 신자의 전 생애를 거쳐 계속되는 것으로 구별하였다.
     성화는 즉각적인 동시에 점진적인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각적인 의미는 성화는 우리를 죄에서 죽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시키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의미한다. 점진적인 의미는 성화는 계속 시롭게 하시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에로 변화시키며 우리를 계속 은총가운데 성장하도록 하시며 우리의 거룩이 완전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인식되어져야 한다.

    6. 성화의 사회성

     가끔 성화는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착오이다. 성화는 중요한 사회적 공동체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개체적으로 성화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의 일원으로 성화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롬 12:4-5) 성화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분리된 개인에게 관계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요구를 포함한다고 가르친다.
     결론적으로 사회적 관심없이 성화는 완성되지 않는다. 성화는 우리가 법률 정치적 행위 그리고 매개체의 사용을 통하여 전 분야에 정의가 시행되도록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7. 성화의 목적

     성화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다. 우리가 영광스런 신적 사역에 대하여 이야기 함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미래 행복이 아니라 단지 위대하신 우리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성화의 가장 가까운 목적은 하나님 백성의 완전이다. 이 완전은 하나님 형상의 역사에 있어서 최종 단계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우리의 성화가 완전해졌을 때 우리는 전적으로 영화로우신 그리스도와 같이 될 것이다. 그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면하여 볼 수 있을 뿐 아리라 영원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며 살게 될 것이다.

    13장 참 신자들의 견인

     요 10:28은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고 말씀하신다. 이는 우리를 끝까지 안전하게 지키신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결단코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습니다.는 의미라고 설명할 수가 있다.

    1. 견인의 개념

     참된 신앙을 소유한 성도들은 믿음을 전적으로 잃어버릴 수가 없다. 참 신앙을 가진 성도가 그 신앙을 언젠가 잃어버릴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개혁 신학에서는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참 신자는 그들의 능력 때문에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인내하기 때문이다.
     참 신자들은 그들의 구원을 잃을 수 없으며 구원받지 않는 상태에서 사망할 수도 없다. 더욱 이 고백은 성도들의 은혜의 상태 속에서 꾸준히 견인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이 교리의 성경적 근거

     1) 복음서에 있는 구절들
     눅 22:31-32, 요 5:24, 요 6:39, 요 10:27-28,

     2) 서신에 있는 구절들
     롬 8:29-30, 고전 1:8-9, 엡 4:30, 빌 1:4-6, 딤후 4:18, 히 7:23-24, 밷전 1:3-5

    3. 견인교리에 대한 이의

     1) 견인교리는 나태와 방종으로 인도한다.
     성경은 이런 방종에 대하여 경고한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전 10:12)

     2) 견인교리는 성경과 상충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3 가지의 성구들을 묶어서 예증으로 제시한다.
    ① 믿음을 지속하라는 권면
    ② 배교에 대한 경고
    ③ 실제적인 배교의 경우들

    4. 견인에 관한 돌트 신조

     참 신자의 견인교리를 설명하는 개신교 신조에 있어서 돌트 신조(1618-19)보다 더 훌륭하고 완전한 진술은 없다. 중요한 50개의 교리의 요점을 보여주고 있는 이들 진술들은 명백하고 짜임새가 있다.
     처음 두 조항은 연약하기 때문에 매일 범죄하는 신자의 성향에 대하여 설명한다.
     3조는 신자 자신의 능력에 방임해 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가 없음을 진술한다.
     4조는 만일 참 신자가 깨어있거나 기도하지 않는다면 진실로 심각한 죄 속에 빠질 수 있음을 지시한다.
     7조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심각한 죄에 빠진 그의 백성들을 회개시켜 확실하고도 효과있게 새롭게 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8조는 하나님의 백성의 견인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음을 논증한다.

     그러나 돌트 신조는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어떻게 살든지 관계없이 항상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에는 반대하고 있다. 12조와 13조는 다음의 사실을 분명히 확정한다. 즉 하나님에 의한 성도 견인의 보증은 생활의 부주의함이나 도덕적인 방종을 야기시키기는 커녕 실제로 경건을 위한 자극이 된다.

    5.결론적 고찰

     하나님은 그의 능력으로 자기의 백성들이 자기에게서 떠나 타락하지 않도록 지키시며 그리스도는 누가 자기의 손에서 자기의 양을 빼앗아 가도록 허락하지 않으시며 그리고 성령은 구속의 날까지 그들에게 인치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그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심으로 두리를 안전하게 지키신다. 결론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붙드는데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심에 의존한다.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D3IK/36?docid=1QfVM|D3IK|36|20121128084115&q=%B0%B3%C7%F5%C1%D6%C0%C7%20%B1%B8%BF%F8%B7%D0


    출처: USA아멘넷 게시판/ 허참

    박일민 칼빈대학교 교수(조직신학)

     

    최근 우리는 주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거나 영서(靈書)를 받았다는 사람들을 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만나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과연 사실일까 하는 의구심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음성을 꼭 들어야 하는가, 그리고 들어야 한다면 어떻게 하면 들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음성은 왜 들어야 하는가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다. 그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신앙의 핵심이 하나님을 아는 데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했다(전 12:13).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명령을 잘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앎은 일반적인 인생경험이나 세속적인 학문연구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은 신령한 일에 속한다. 그런데 신령한 것은 오직 신령한 것으로라야만 알 수가 있다(고전 2:13, 14). 따라서 우리는 신령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 자신과 자신의 명령에 관해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어야만 신령한 것들을 분명하고 자세하게 알 수가 있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진리에서부터 시작되어야만, 참된 신앙생활과 사람다운 삶이 가능할 수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만 알고, 서로 수군거리고 있던 유대인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자기에게로 나아와 영생을 얻을 수가 없다고 하셨다(요 6:44). 그리고는 이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는 사람이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듣고 배운 사람이라고 덧붙이셨다(45). 이 말씀은 신앙의 핵심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가르쳐 준다.

     

    둘째, 사람은 생활 속에서 알고 싶은 것에 부딪히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론적인 지식에서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과 관련해서도 그 아는 것이 매우 제한되어 있다.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다. 과거나 현재의 일도 물론이지만, 미래의 일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여러 가지의 갈래 길에 부딪쳐서 어느 길을 선택을 해야 할지를 몰라 주저해 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 그냥 지나치려 하지를 않고, 그것을 알아내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다가는 자기 스스로 알아내기 어려울 때에는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의 심리 때문에, 사람이 사는 곳에는 점술가들의 신통력을 의지하려는 일이 거의 자취를 감추지 않아 왔다. 이러한 현상은 과학문명이 발달했다는 오늘날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더 성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

     

    사람의 본성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미신을 죄로 여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우리는 그 구체적인 증거들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성경적 사례들
    성경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등장하는 사례들을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직접 음성으로 들은 경우: 아담, 족장들, 모세, 선지자들, 사도들 등.
    꿈으로 들은 경우: 야곱, 요셉, 아비멜렉, 솔로몬 등.
    환상으로 들은 경우: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요한 등.
    우림 둠밈으로 들은 경우: 출 28:  30, 민 27:21의 엘르아살, 신 33:8 등.
    제비뽑기로 들은 경우: 사울, 요나, 맛디아 등.
    글자로 들은 경우: 모세, 다니엘, 벨사살 등.
    하나님 사자의 나타남을 통해서 들은 경우: 아브라함, 마노아, 이사야 등
    천사를 통해서 들은 경우: 요셉, 마리아, 동방박사 등.
    상징물을 통해서 들은 경우: 모세(불), 욥(폭풍), 엘리야(세미한 바람), 광야 이스라엘 백성 (불기둥 또는 구름기둥).  

     

    우리들 주변에도 성경에 나오는 족장들이나 선지자들, 또는 사도들처럼 영적 음성이나 환상, 꿈, 또는 글씨 등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보거나 들었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 같으시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를 만난다고 해서 조금도 놀라거나 이상해 할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할 때, 매우 조심하여 신중한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타난 많은 거짓 선지자들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사탄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바라는 심리를 교묘하게 악용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사탄은 얼마든지 하나님의 음성을 가장하여서, 아직 성숙한 단계에 이르지 못한 성도들을 미혹하여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거나 죄를 범하게 하는 무서운 결과를 생겨나게 할 수 있다.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또 반드시 들어야 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다가 불건전한 신비주의에 빠지는 경우도 적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할 때에, 다음 몇 가지 내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사례들은 대부분 특별계시의 수단으로 이용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필요한 지식을 친히 사람들에게 계시하여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에 이르는 길을 계시하실 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여러 가지 방법들을 다양하게 이용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례들로 나타난 것들은 구원에 필요한 지식을 전달해주기 위한 특별계시의 수단으로 이용이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이후로는 구원에 관한 지식들이 온전하게 다 밝혀졌다. 구원에 이르는 새로운 방법을 찾기 위해서 더 이상의 하나님 음성을 들어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오심은 모든 날의 마지막에 우리에게 밝히 말씀하심이요(히 1:2),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이루심이요(요 19:30), 또 마침이었다(마 5: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만일 성경에 계시된 것 이외의 또 다른 구원의 진리를 보거나 들었다면, 그것은 원수가 몰래 뿌려놓은 가라지 즉 거짓된 것이요, 적그리스도에 불과하다.

     

    우리는 구원에 관한 것이라면, 성경 이외의 무엇을 들으려고 하는 호기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만일 성경 이외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면 단호히 물리쳐야 한다. 우리에게는 오직 이미 계시된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한 성령의 조명하심과 성경의 진리를 실천하기 위한 지혜가 필요할 따름이다. 그러면 이와 관련된 하나님의 음성은 어떻게 하면 들을 수가 있는가.

     

    하나님의 음성은 주로 성경을 읽거나 묵상하는 중에 들려진다.
    성경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음성이다. 그러므로 살아 있고 또 운동력도 가지고 있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좌우에 날이 예리하게 선 칼에 찔리는 것과 같이 그 마음과 생각에서 찔림을 받는다(히 4:12). 또 구원에 필요한 진리만 아니라, 모든 생활에 필요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으로 교육을 받는다(딤후 3:16). 왜냐하면 성경을 읽거나 묵상하는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임하셔서 그들이 잊고 있었던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몰랐던 것을 밝히 드러내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내가 걸어가야 할 발자국을 비춰주는 등불이요, 나를 둘러싸고 있는 불확실성을 벗겨주는 빛이라고 하는 것이다(시 119:105).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한 해답도, 그 대부분은 이미 성경을 통해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 속에 들어 있다. 예를 들어,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가출이나 이혼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고리대금업이나 주일출근은 해도 좋을까 하는 등에 대한 해답을 기대한다면,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하게 듣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은 설교자를 통해서 들린다.
    하나님의 음성은 많은 경우에 성경을 풀어 전해주는 설교자를 통해서 들린다. 하나님께서는 성경대로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말씀을 옛날 선지자나 사도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친히 설교자들의 입에도 넣어 주시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죽은 이후에 가서야 아직 살아 있는 다섯 형제들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부자에 관한 말씀이 있다. 그는 그의 기대와는 달리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저희에게 들을지니라" 하는 말씀을 들었다(눅 16:29).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씀을 풀어서 전해주는 설교자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임을 잘 알 수가 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는 나팔과 같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오직 하나님의 충실한 나팔이 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원하는 사람은 당연히 그 설교에 귀를 기울이되,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음성을 들으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들을 수 있는 귀만 준비한다면, 우리는 설교를 듣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얼마든지 들을 수가 있다.

     

    하나님의 음성은 기도와 묵상하는 중에 들린다.
    기도는 주로 우리의 감사를 하나님께 돌려 드리고, 죄의 용서와 우리에게 필요한 간구의 내용을 아뢰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기도는 일방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는 형식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시는 것도 포함을 하는 쌍방적인 형식이 더 바람직하다.

     

    우리가 기도하는 중에는 시내산의 모세나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에게 들렸던 것과 같은 음성이나, 베드로나 요한이 보았던 환상, 또는 다니엘이 보았던 벽에 새겨진 글씨가 없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큰 소리를 지르며 외치는 기도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때로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감동으로 임하여 주시기를 조용하게 기다리는 자세를 가질 필요도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시라면 이런 경우에 과연 어떻게 말씀을 하실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 그러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마음이 뜨거워졌을 때와 같은(눅 24:32), 감동의 형식으로 임하는 하나님 음성이 들릴 수 있다.

     

    다윗 임금은 묵상 중에도 이러한 경험을 했다. 그는 뜨거워진 마음으로 자신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여호와께서 알게 하여 주시기를 묵상하며 기다렸다(시 39:3-4).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밑에서 묵상을 하다가 예수님께로부터 그가 묵상을 하고 있던 내용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알게 되는 응답을 받았었다(요 1:50). 묵상을 즐기는 사람은 그 행사가 다 형통하여지는 복을 누리게 된다고 한 시인의 노래는 바로 이러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하다(시 1:2-3).

     

    하나님의 음성은 섭리적 사건들 중에서도 들린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쁘신 뜻과 목적을 따라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졸거나 주무시는 일이 없이 항상 다스리고 계신다. 우리는 이것을 섭리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하심 속에는 사람들을 향하는 소리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깃들여 있다.

     

    자연계에는 부지런히 일을 해야 수고의 떡을 먹는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어 있다. 각종 재난들 속에는 주님 재림의 때가 가까웠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어 있다. 인류의 역사 속에는 의롭게 살아야 명예를 얻는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어 있다. 불의는 분쟁과 전쟁을 낳고야 만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어 있다. 우리의 양심 속에는 하나님 안에서라야 인간의 참된 행복이 있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어 있다. 때로는 우리의 나아가는 길이 형통하거나 막히는 행사 속에, 또는 이웃과의 만남이나 대화 속에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어 있다. 아니 우리들 주변 사방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 즉 하나님의 음성이 가득히 넘쳐흐르고 있다(롬 1:10~21).

     

    하나님의 음성이 과연 어떤 식으로 들려오고 있는가 하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 음성을 들으려고 하는 우리의 자세가 문제이다. 들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흐르는 물이나 지저귀는 새, 터지는 화산, 나라와 민족의 흥망성쇠, 이웃의 운명 등에 스며져 있는 하나님의 섭리하심 속에서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언어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지만(시 19:4), 하늘을 보면서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신 글을 읽었고, 해와 달을 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했다(시 8:3). 우리도 시인처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

     

    사람, 특히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의 본분을 다할 수 있고, 올바른 성도의 삶을 살 수가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경우들처럼, 반드시 신기한 소리나 환상이나 글씨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 등장하는 사례들은 대부분 특별계시의 수단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경 자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설교자의 메시지나 기도와 묵상,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서도 계속해서 넘쳐나게 들려오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마음의 귀를 활짝 열어 놓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문 밖에서 우리에게 많은 음성을 들려주려고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의 음성이 그리울 때는, "주 예수 대문 밖에 기다려 섰으나, 문 굳게 닫아두니 참 나의 수치라"고 부르는 찬송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겨 보자.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출처> USA아멘넷 게시판. 기다림


    [판례]종교적 표현의 자유와 명예훼손의 여부

    대법원 2010.9.9.선고 2008다84236판결

    [판결요지]
    우리 헌법 제20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종교의 자유에는 자기가 신봉하는 종교를 선전하고 새로운 신자를 규합하기 위한 선교의 자유가 포함되고, 선교의 자유에는 다른 종교를 비판하거나 다른 종교의 신자에 대하여 개종을 권고하는 자유도 포함되는바, 종교적 선전과 타 종교에 대한 비판 등은 동시에 표현의 자유의 보호대상이 되는 것이기는 하나, 이 경우 종교의 자유에 관한 헌법 제20조 제1항은 표현의 자유에 관한 헌법 제21조 제1항에 대하여 특별규정의 성격을 갖는다 할 것이므로, 종교적 목적을 위한 언론·출판의 경우에는 다른 일반적인 언론·출판에 비하여 고도의 보장을 받게 되고,

    특히 그 언론·출판의 목적이 다른 종교나 종교집단에 대한 신앙교리 논쟁으로서 같은 종파에 속하는 신자들에게 비판하고자 하는 내용을 알리고 아울러 다른 종파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신앙교리 내용과 반대종파에 대한 비판의 내용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면 그와 같은 비판할 권리는 최대한 보장받아야 하며, 그로 인하여 타인의 명예 등 인격권을 침해하는 경우에 종교의 자유 보장과 개인의 명예 보호라는 두 법익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는 그 비판행위로 얻어지는 이익, 가치와 공표가 이루어진 범위의 광협, 그 표현방법 등 그 비판행위 자체에 관한 제반 사정을 감안함과 동시에 그 비판에 의하여 훼손되거나 훼손될 수 있는 타인의 명예 침해의 정도를 비교 고려하여 결정하여야 한다.
    2010-09-15 14:08:44
    (자료출처 http://inchullee.com/jboard/?p=detail&code=def&id=59&page=1)

    http://cnn.com/video/data/2.0/video/us/2012/01/11/pkg-moos-savor-the-twinkie.cnn.html


    USA아멘넷 게시판/JuNick님

    박정희는 신격화, 박근혜는 1억대 굿
    탄신제 참배객들, '반신반인'·'각하' 숭배…목회자들, '우상화' 지적
    2012년 12월 12일 (수) 13:13:37 임안섭 ( 메일보내기 )

       
     
     

    ▲ 지난 11월 14일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탄신제에서 참석자들이 박 전 대통령을 '반신반인'으로 추앙하고,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당선을 기원해서 논란을 빚었다. 사진은 박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영정 앞에서 절하고 있는 참가자들. ('뉴스타파' 34회 방송 갈무리)

     
     
    박정희 전 대통령을 우상화하는 탄신제와 굿판 사진이 인터넷에 확산되고 있다. 지난 11월 열린 박 전 대통령 탄신제에서 참석자들은 박 대통령을 '반신반인'으로 추앙하고,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당선을 기원해서 논란을 빚었다. 특히 박근혜 후보는 정수장학회 문제 해결을 위해 1억 5000만 원짜리 굿을 벌였다는 의혹까지 받고 있다.

    탄신제는 사단법인 '박정희 대통령 생가보존회'가 박 전 대통령 탄생일인 11월 14일 생일상을 올리며 매년 개최해 온 제사다. 탄신이 '임금·성인이 난 날'을 뜻하고 있어서, 박 전 대통령을 신화화하고 미화한다고 평가되는 행사이기도 하다. 탄신제 사진에서는 참가자들이 박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영정 앞에서 제례를 행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박정희 탄신제가 경북 구미에서 열렸다. 참가자들 대부분이 박정희·육영수를좋아하는 사람들의부산·경남모임, 봉화희망포럼, 민족중흥회 등에서 온 이들과 한국전쟁 참전 국가 유공자들이었다. 이들은 박 전 대통령과 육 여사 영정 앞에 엎드려 절했다. 행사에 참가한 할머니들은 박정희 동상을 바라보며 두 손 모아 소원을 빌었다. 매번 탄신제에 온다고 한 이들 중 대구 사는 62세 여성은 "그분은 나라에 다시 없는 분이고, 신이잖아요. 집에서도 빈소 모셔 놓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그녀는 "박 전 대통령과 육 여사를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며 훌쩍였다. 또한 한 참배객은 박 전 대통령 생가에서 펼쳐진 숭모제에서 과거로 회귀한 듯 박 전 대통령 영정을 향해 '각하'로 부르며 "(박근혜 후보를) 대통령 만들어 달라"고 기원했다.

    11월 16일 방송된 팟캐스트 '뉴스타파' 34회에서 김관용 경북도지사와 남유진 구미시장을 비롯해 새누리당 정치인들이 탄신제 행사에 참석해 박 전 대통령을 찬양하고 박 후보를 지지하는 발언을 보도했다. 남유진 구미시장은 "피와 땀을 마을과 조국에 헌신한 반인반신의 지도자는 이제 위대한 업적으로 남아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고 박 전 대통령을 치켜세웠다. 심학봉 새누리당 국회의원은 "금오산에는 전설이 있다. 금오산에는 두 명의 대통령이 난다고 했다. 그 전설이 꼭 이루어지도록 여러분들이 지켜줘야 한다"며 에둘러 박 후보를 지지하기도 했다. 한편 박 후보는 매년 행사에 참석했는데, 아버지 탄신을 축하하는 꽃바구니만 보냈다.

    이에 대해 기독교계 학자와 목회자들은 비판하는 쪽과 답변을 꺼리는 입장으로 갈렸다. 정재영 교수(실천신대 종교사회학)는 "맹신자나 광신자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대통령이라도 왕으로 여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국장 이훈삼 목사는 "사람을 추모하는 것에 대해서는 뭐라 할 수는 없는데, 무엇을 추모하느냐가 중요하다"며 "역사를 바로 세우고 유신을 청산해야 하는데 박정희·육영수를 숭모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도 맞지 않다"고 전했다. 한국교회연합 대표회장 김요셉 목사도 "개인적으로 대통령이 되고자 나온 사람이 굿판에 엎드려 절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종교 단체도 아니고 누군가를 숭모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홍재철 목사는 "(박근혜 후보가) 기독교인이 아니고, 자기 나름의 종교관이 있기 때문에 할 얘기가 없다"며, 박 전 대통령 신격화와 우상화 논란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뉴라이트기독교연합 대표회장 엄기호 목사는 박정희 탄신제에 대한 분명한 입장은 밝히지 않고 "기독교인이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얘기하며 말을 끊었다.

     

    임안섭 기자 / 한국 <뉴스앤조이>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예수님
    (Jesus Gives Himself to Us)

     친구를 식사에 초대할 때 우리는
    육신을 위한 음식 대접 이상의 것을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우정과 동료 의식으로 대하고
    즐거운 대화를 하며, 또한 친밀함과
    가까움을 표시합니다

     우리가 "드세요,, 좀더 드세요..사양하지 마세요..
    한 잔 더 드세요..."라고 말할 때
    우리는 손님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할 뿐 아니라,
    또한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영적인 결속이 자라서 우리는 서로를 위한 양식과 음료가 됩니다
    예수님이 성만찬에서 그 자신을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내어 주셨을 때,
    영적인 결합은 가장 완전하고 온전한 방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몸과 피를 우리들에게 내어 줌으로써,
    예수님은 그분이 할 수 있는 가장 친밀한 친교를
    우리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신성한 친교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이 구절에서 욥은 무엇을 나타내고자 했을까요? 분명한 사실은 욥의 말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비유를 적용하면, 이제 자기의(自己義)로 말미암은 불신앙의 안개가 걷혔으며, 믿음이 하나님의 존재를 살아있는 영광스러운 실체로 이해하였습니다. "내 눈이 항상 주를 향함은"(시편 25:15).

    욥의 믿음은 계속해서 실행 가운데 있었습니다. 성경은 모세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을 보는 것 같이 하여 견디어 냈으며"라고 합니다(히 11:27).

    곧, 모세의 마음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점유된 믿음을 통하여 격려를 받았습니다.

    성경은 자주 믿음을 육체적 시각으로 비유해서 표현합니다.

    우리 주님은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하여 "너희 아버지 아브라함은 나의 날 보기를 기뻐하다가, 보고 반가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56).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시고 높아지신 날을 즐거이 기다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가서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하라는 사역을 위임받았습니다(행 26:18).

    달리 말하면,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말씀을 선포함으로 그들을 회심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을 벗어난 몇몇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바울은 "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인들아, 누가 너희를 미혹하여 진리에 순종치 못하게 하더냐? 너희 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눈 앞에 명백히 제시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썼습니다(갈 3:1).

    이제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성경기록이 믿음을 육체적 시각의 개념으로 말할 때 그 성경기록의 저자는 적절하고 적합한 비유를 이용한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성경기록의 저자는 처음에 놀라운 시각 기관인 눈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분께서는 그리스도인이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는데 있어서 매우 주요한 역할을 하는 보이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눈을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사실을 분별하는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물질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영적 세계 안에 있는 어떤 위대한 실제를 희미하게 보여줍니다.

    이러한 점에서 얼마든지 주시하고 묵상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몸의 눈이 마음의 믿음을 상징하는 한 가지 예표로 제한해야 합니다.

    1. 눈은 수동적인 기관입니다.

    눈은 스스로 빛을 비추거나, 바라보는 대상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합니다. 눈이 해, 달, 별을 바라보며 무엇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나눌 수 없습니다. 눈은 아무 것도 더하지 못하며, 단지 마음 안에(망막에, 그러면 뇌에 전달됩니다.) 상(像)을 남기거나 비출 뿐입니다.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믿음은 아무 것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 안에서 붙들고 있는 것에 아무 것도 주지 못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혼의 시각에 비쳐지는 대로 단순히 받거나 또는 마음 안에 취합니다.

    과연 불 뱀에 물린 이스라엘 사람들이 놋 뱀을 바라보고 치유되었을 때, 놋 뱀과 무엇을 나누었을까요? 우리는 아무 것도 그리스도에게 더하지 못하며, 다만 그분을 바라보며 구원을 받습니다(이사야 45:22).

    2. 눈은 인도하는 기관입니다.

    낮에 빛이 있을 때 눈을 뜬 사람은 자기 길을 볼 수 있으며, 눈 먼 사람이나 밤길을 걷는 사람처럼 도랑에 빠지거나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

    "사악한 자들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들은 심지어 어디에 걸려 넘어지는지도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의인들의 행로는 빛나는 광채 같아서 점점 더 빛나 완전한 낮에 이르느니라"(잠언 4:19,18).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 관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함이라"라고 말합니다(고후 5:7).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믿음이 우리의 본(本)이신 분을 봄으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로를 달릴 수 있습니다.

    3. 눈은 매우 빨리 기능을 하는 기관으로서, 아주 멀리 있는 것들도 봅니다.

    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땅위에 있는 것들에서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산을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땅의 것들과 가장 높이 떠 있는 별을 동시에 볼 수 있으며, 넓디넓은 온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시력은 얼마나 놀라운지요! 동일하게 믿음의 권능도 놀라운 것입니다.

    실로 믿음이란 시각이 예민한 은혜로서, 조상들의 믿음이 행했듯이, 아주 멀리 있는 것도 봅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약속된 것들을 보았습니다(히 11:13).

    그와 같이, 믿음은 순간적으로 영원 과거를 뒤돌아보며 땅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영존하는 근원과 그 역사를 볼 수 있으며, 동시에 장차 올 영원을 향해 돌아서서 휘장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감춰진 영광들을 봅니다.

    4. 눈은 비록 작지만 성능이 매우 뛰어난 기관입니다.

    낮에 빛이 있을 때 눈을 뜬 사람은 자기 시야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뒤에 있는 것을 돌아보거나 앞에 있는 것들을 볼 수 있으며, 샘물을 들여다보거나 깊은 골짜기 아래의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멀리 하늘의 천체(天體)를 바라 볼 수 있습니다.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광대한 범위 안에 있는 모든 것에까지 미칩니다.

    믿음은 먼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알게 하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깨닫게 합니다. 믿음은 지옥을 들여다보며, 하늘들을 관통해 봅니다. 믿음은 주변 세상의 온갖 허탄한 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믿음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조금 밖에 취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땅에 속한 예시가 영적인 진리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곧, 유아(乳兒)의 눈은 빛을 보고 외부의 물체를 지각하지만, 계속해서 시각이 자랄 동안에는 많은 연약함과 혼란을 겪게 됩니다.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

    처음에 영적 지식의 빛은 매우 희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기는 멀리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비들 안으로 더 깊게 자라게 되며, 마침내 열려진 비전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5. 눈은 매우 확신을 주는 기능입니다.

    눈은 다섯 가지 육체적 감각(五感) 중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면 얼마나 확실한지요!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사물을 단지 정신적인 착각이라고 확신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바른 마음을 가진 자들은 누구도 그들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늘에서 해가 빛나는 것을 보면 낮이라는 것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바로

    그 본질에서 수많은 확신을 가져오는 은혜입니다.

    "믿음은 소망하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서(證書)니"(히 11:1).

    회의론자들은 성경에 관한 하나님의 영감을 부인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그 진리의 초자연적인 아름다움들을 바라볼 때 그 문제는 영단 번에 해결됩니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꾸며낸 한 경건한 사람으로 간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도가 일단 진정으로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면, "내가 알기에 내 구속자께서 살아계시니"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6. 눈은 자취를 남기는 기관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 마음에 자취를 남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종종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며"라고 기도드릴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이유이며(시편 119:37),

    대언자가 왜 "내 눈이 내 마음을 상하게 하였도다"라고 선언하였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애가 3:51).

    계속해서 몇 분 동안 해를 바라보면, 해로부터 눈을 돌리거나 눈을 감을지라도, 해의 자취는 눈에 남습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믿음은 마음에 의(義)의 태양이신 분의 자취를 남깁니다.

    "그들이 그분을 바라보고 빛을 받게 되었으며 그들의 얼굴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였도다."(시편 34:5).

    고린도후서 3:18은 이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듯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나니, 곧 주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권능이 자기 백성들의 몸을 죽을 것에서 생명으로, 천한 것에서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처럼, 지금 성령님께서는 도덕적으로 변화시키는 권능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품에 역사하고 계시며, 믿음을 실행으로 옮기심으로 자녀들이 점점 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7. 눈은 놀라운 기관입니다.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데 유능한 사람들은 이 특별한 지체가 인간의 몸 중에서 가장 기묘하고 진기한 부분이라고 주장합니다.

    창조자의 지혜와 권능의 많은 부분이 보는 기능을 형성하는 가운데 발견됩니다. 그와 같이 믿음은 영혼 안에 기묘하고 놀랍게 역사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의 지혜와 권능의 많은 부분이 새로운 피조물의 그 어느 부분보다도 믿음의은혜가 형성되는 가운데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믿음의 행위를 권능으로 성취하사"라고 말합니다(살후 1:11).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을 때 임했던 위대하고 전능하신 그 뛰어난 권능이 동일하게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 위에와 안에 역사하고 있습니다(엡 1:19).

    8. 몸의 눈은 매우 예민한 기관입니다.

    눈은 빨리 다치고 쉽게 해를 입습니다. 아주 작은 재 하나가 고통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눈을 회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눈물을 흘림으로 눈 안에 들어온 먼지나 티끌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믿음은 가장 섬세한 은혜로서, 깨끗한 양심 안에서 가장 잘 자랍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순수한 양심에 믿음의 신비를 간직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딤전 3:9).

    생기 넘치는 믿음의 역사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는 마음 안에 들어온 죄의 먼지나 세상의 허탄한 것에 의해 쉽게 손상됩니다.

    참된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죄로 인해 상처를 입었을 경우, 스스로 경건한 슬픔의 길로 그 죄를 배출합니다.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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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워셔 목사님 -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는 것의 노예|≫ 폴워셔 목사님 ≪
    전도 | 조회 2462 |추천 0 |2011.01.12. 23:38 http://cafe.daum.net/waitingforjesus/LeTc/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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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만찬, 친교의 성례전(Encharist, the Sacrament)

     

    세례는 성만찬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성만찬은 예수님이 우리들과 친밀하고
    영원한 친교 속으로 들어오시는 성례전입니다

     

    그것은 양식과 음료의 성례전입니다
    그것은 매일 매일의 양육을 위한 성례전입니다

     

    세례가 일생에 한번 있는 일이라면,
    성만찬은 한 달에 한 번, 한 주일에 한 번,
    또는 매일 매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명과 죽음을 기억하도록
    우리에게 성만찬을 주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생각하게 하는
    단순한 기억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몸의 지체가 되게 하는 기억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빵을 떼어 "이것은 내 몸이다" 라고 말씀하셨으며,
    잔을 들고 "이것은 내 피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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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최송연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난 생각하게 되네...


                                         못다한 충성

                                         베풀지 못한 사랑

                                         좁은 마음

                                         외면해 버린 충고


                                        이 모든 것들이

                                        그냥 지나쳐버리기엔...

                                        하늘을 향해 너무 부끄럽지 않으냐고...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난 기도하게 되네...


                                        충성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것임을...

                                        가난한 이웃은 항상

                                        내 곁에 있는 것이 아님을


                                        내게 아픔을 주는 이의 껍질 속엔

                                        크나큰 상처가 있음을...


                                        비록 힘이 드는 말씀일지라도

                                        모두 나를 살리기 위한 충고임을                                   

                                        깨닫게 해 달라고...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난 간절히 소원하네...


                                       자신을 값없이 내어주신

                                       주님을 닮고 싶노라고....

                                  



     

    *오래전 극동방송에서 채택된 기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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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침례), 헌신의 길

      (Baptism, the Way to Commitment)

       

      세례(침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로 가는 길이며,
      또 공동체 생활로 가는 길입니다

       

      이러한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헌신이 필요합니다

       

      이 성례전에는 마력적이거나 또는

      반사적인 요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군가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세례(침례)를 줍니다"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머리 위에 물을 부을 때,
      우리의 몸을 물 속에 담글 때,


      오직 우리가 세례(침례)를 받은 사람으로서
      우리의 존재에 대한 영적인 진리를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구하고 또 구할 때에만,
      세례(침례)는 영속적인 중요성을 갖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례(침례)는 세례(침례)를 받은
      아이의 부모는 물론, 세례(침례)를 받은

       당사자들에게 끊임없이 이 암흑의 세상에서

      빛을 선택하고 또한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사회에서 생명을 선택할 것을 요구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연필 같은 사람이 되라 "연필에는 다섯 가지 특징이 있어. 그걸 네 것으로 할 수 있다면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게야. 첫 번째 특징은 말이다, 네가 장차 커서 큰일을 하게 될 수도 있겠지? 그때 연필을 이끄는 손과 같은 존재가 네게 있음을 알려주는 거란다. 명심하렴. 우리는 그 존재를 신이라고 부르지. 그분은 언제나 너를 당신 뜻대로 인도하신단다. 두 번째는 가끔은 쓰던 걸 멈추고 연필을 깎아야 할 때도 있다는 사실이야. 당장은 좀 아파도 심을 더 예리하게 쓸 수 있지. 너도 그렇게 고통과 슬픔을 견뎌내는 법을 배워야 해. 그래야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게야. 세 번째는 실수를 지울 수 있도록 지우개가 달려 있다는 점이란다. 잘못된 걸 바로잡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오히려 우리가 옳은 길을 걷도록 이끌어 주지. 네 번째는 연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외피를 감싼 나무가 아니라 그 안에 든 심이라는 거야. 그러니 늘 네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렴.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연필이 항상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이야. 마찬가지로 네가 살면서 행하는 모든 일 역시 흔적을 남긴다는 걸 명심하렴. 우리는 스스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늘 의식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란다."
      파울로 코엘료의 '흐르는 강물처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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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일민 교수(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장·조직신학)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성도들은 흔히 성령훼방죄에 대한 문제에 부딪쳐, 내가 정말 성령훼방죄를 범한 것은 아닐까 해서 심각한 고민을 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교회 안에서 생겨난 어떤 일을 두고 그것이 성령훼방죄에 해당된다느니 안 된다느니 하여 서로 격한 논쟁을 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 할 때도 있다. 또 어떤 사람에게 성령훼방죄를 범한 사람이라는 판정이 주어지면, 그 사람은 자기 스스로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참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처지에 빠지고 마는 것을 보기도 한다.

    성령훼방죄란 어떤 죄이며, 우리는 성령훼방죄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자.

     

    1. 성령훼방죄의 다른 이름들
    성령훼방죄란 말은 예수님의 말씀에서부터 생겨났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는 예수님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었기 때문이라고 비난을 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하시면서, 성령훼방죄를 언급하셨다(마 12:31, 32).

     

    예수님께서 다른 모든 죄들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유일하게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성령훼방죄를 히브리서의 저자는 ‘다시는 회개로 새롭게 될 수 없는 죄’ 또는 ‘짐짓 범한 죄’라고 표현하면서,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나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이 타락하여 범한 죄 또는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사람이 범한 죄라고 말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 27).

     

    한편, 사도 요한께서는 성령훼방죄처럼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해 말씀하면서, ‘사망에 이르는 죄’ 그러므로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는 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예수님이나 히브리서의 저자, 그리고 사도 요한의 말씀은 모두 동일한 죄를 말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성령훼방죄나 용서받을 수 없는 죄(不可赦罪), 새롭게 될 수 없는 죄, 짐짓 범한 죄, 사망에 이르는 죄는 동일한 하나의 죄를 각기 다른 시각에서 부르는 이름들이라고 할 수 있다.

     

    2. 성령훼방죄의 내용

    성령훼방죄와 관련된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성령훼방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 죄이다.

     

    1) 구원받은 성도의 죄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죄가 용서함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사 53: 롬 5:18,19). 그리스도께서 용서해주시려고 했던 죄는 사람들이 범한 모든 죄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어떠한 형태의 죄를 범했는가 하는 것과 상관없이 모든 죄들을 다 용서받는다. 그 결과 성도는 아무도 정죄할 수 없는 의인이 되어(롬 8:34), 죄와 사망의 법에서 영원히 해방을 받는 온전히 거룩한 사람이 된다(히10:14). 성경은 예수 믿는 사람을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이라고 한다(요 5:24). 영원한 생명이란 결코 취소되는 일이 없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한번 구원받은 성도는 결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다. 또 구원받은 성도에게는 천국의 삶이 주어진다(마 18:3). 그런데 천국은 죄가 없는 곳이다. 따라서 성도는 사망에 이르는 죄,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즉 성령훼방죄를 범하지 않는다.

     

    2) 불신자의 죄가 아니다
    성령훼방죄는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본 사람’,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사람’이 범하는 죄이다. 이런 사람은 전혀 예수를 모르는 불신자가 아니다. 상당한 시간동안 교회생활이나 성경공부를 통해서 무엇이 성령의 생각이고 무엇이 성령의 사역인지를 분별할만한 능력을 얻은 사람이다. 교회 안에는 알곡들 속에 섞여 있는 가라지 같은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는 구원받은 성도가 아니면서도 마치 성도이기라도 한 것처럼 행세를 하거나 스스로 자신이 성도인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성령훼방죄는 참 성도나 전혀 불신자들이 범하는 죄가 아니라, 바로 이런 가라지 같은 사람들이 범하는 죄이다.

     

    3) 고의적인 죄이다
    사람은 무지함이나 부주의함 때문에 성령을 훼방할 수 있다. 사도 바울께서는 자신이 과거에 ‘훼방자’이었음을 고백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알지 못했기에 범한’ 죄이었다고 하셨다. 그런데 사도 바울께서는 바로 이어 말씀하시기를, 자신은 도리어 긍휼을 입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한 주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셨다(딤전 1:13,14).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의 훼방죄는 용서를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 성령훼방죄는 부지함이나 부주의함 때문에 범한 죄가 아니라,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임이 분명하다.

     

    4) 성령을 대상으로 한 죄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령훼방죄를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죄와 분명하게 구분하셨다. 그리고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고 하셨다(막 3:28-29). 훼방이란 해치거나 방해를 하는 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령훼방죄는 성령 하나님이나 그의 사역을 상대로 방해를 하는 말이나 행동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5) 구체적인 사례를 말하기가 어려운 죄이다
    어떤 경우가 성령훼방죄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크고 중해 보이는 죄라 하더라도 하나님께는 용서 못하실 죄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죄가 아무리 막중할지라도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는 은혜로운 분이시다. 믿음의 선진들이 범했던 맹세코 예수님을 부인했던 죄,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복음전파를 방해하고 교회를 핍박했던 죄, 의도적인 간음에 살인을 더했던 죄,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사명을 피해 다른 곳으로 도망했던 죄 등 모든 죄가 다 용서를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보고 그것이야말로 성령훼방죄 임에 틀림이 없다는 속단을 내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로서는 그 사람이 장차 베드로, 바울, 다윗, 요나처럼 회개하게 될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이다
    죄를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과 회개를 통해서 임하여진다(행 3:19). 회개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여서 어떠한 죄라도 용서받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면,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된다(롬 2:5). 그러므로 성령훼방죄, 즉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라고 할 수 있다.

     

    3. 성령훼방죄에 대한 태도
    성도는 성령훼방죄가 다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임을 알고, 성령훼방죄에 대해 신중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 불신자나 경건하게 살아보려는 의욕이 없는 사람에게는 성령훼방죄에 대한 의식이나 두려움이 없다.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의인일수록 죄의식이 강하고, 성령훼방죄에 대한 두려움도 심하다. 그러나 성도는 모든 죄를 용서받았기에 다시는 정죄 받을 일이 없는 의인이다. 따라서 성도는 성령훼방죄의 두려움에 지나치게 눌려 있을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훼방죄에 대한 자유함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성령훼방죄에 대한 두려움으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떨어뜨리고 좌절 속에서 영생의 길로부터 멀어지게 하려는 마귀의 경건을 가장한 간교한 속임수에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한편, 성령훼방죄는 소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나타나는 죄임을 기억하고, 성도는 자신이 참으로 구원받은 성도인지 아니면 성도라는 이름만 가진 사람인지를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성도는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신(빌 2:12) 사도 바울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만일 성령훼방죄로 여겨질만한 일이 생각나면, 미루지 말고 즉시로 회개하여 바른 길로 돌아 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에서가 영원히 축복의 기업을 놓치고 말았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히 12:17).

    성령훼방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 사망에 이르는 죄, 짐짓 범하는 죄 등으로도 불리는 참으로 무서운 죄이다. 그러나 이 죄는 구원받은 성도의 죄가 아니다. 성도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인 것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이다. 또 그 구체적인 사례를 말하기가 매우 어려운 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어떤 행위에 성령훼방죄라는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신중한 자세로 자기 자신을 살피는 기회를 삼아야 한다. 그리고 만일 자신의 죄가 깨달아질 때에는 지나친 두려움에 짓눌리지 말고, 기꺼운 마음으로 회개하여 의인이 누리는 평안을 가져야 한다

     출처: 안개꽃




    세레(침례), 공동체로서의 길
    (The Way to Community)

    세례는 영적인 자유로 가는 길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공동체로 가는 길입니다

    어른이든 아이든,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그 사람을 믿음의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위로부터 거듭 태어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도록 소명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몸인 영적 공동체의
    한 지체로서 모두 함께 속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세례를 줄 때,
    우리는 그들을 하나님의 가족으로 환영하고,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와 닮은 삶으로
    온전히 성숙되도록 그들을 지도하고,
    지지하고, 다듬어 줍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성화에 대해서 검색하다가 좋은 글이 하나 있어서 펌하여 올립니다.
    소요리 문답이나 신앙고백서를 언급한 것을 보니 김효성 목사님은
    개혁주의 목사님신 것 같은데 특정 부분에 있어서 소이한 차이는 설령
    있을지라도 이 정도면 교단 교파를 초월하여 비교적 무난하게 수용될
    수 있을 성화론으로 여겨져서(제 개인적인 생각에)성화론에 관심있는
    분들께 한번쯤 참고하시라고 올립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세 단계로 되어 있다.
    구원의 과거적 단계는 중생과 칭의(稱義)이며 그것은 예수 믿는 자들에게 이미
    이루어졌다. 구원의 현재적 단계는 성화(聖化)이며 그것은 예수 믿는 자들 속에서
    지금 진행 중이다. 구원의 미래적 단계, 곧 구원의 완성은 영화(榮化)이다.

    성화의 본질

    성화(聖化, 거룩하여짐; sanctification)가 무엇인가? 성화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重生) 의롭다 하심을 받은(稱義) 자들이 그 인격과
    삶에 있어서 실제로 거룩해지는 과정을 가리킨다. 소요리문답 제35문답,
    “성화란 하나님의 값없으신 은혜의 일인데, 그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전인(全人)이 새로워지고, 죄에 대해 점점 더 죽고 의에 대해 살 수 있게
    됩니다.”

    전인(全人)의 실제적 변화

    성화는 전인(全人)이 새로워지는 것, 즉 영육 전체, 지정의(知情意)의 전 인격,
    전 생활이 죄에 대해 점점 더 죽고 의에 대해 사는 것이다. 죄는 죄책과
    부패성으로 구성된다. 칭의는 우리의 죄책이 법적으로 제거되는 것이지만,
    성화는 칭의에 근거하여 우리의 부패성이 실제로 극복되는 과정이다.
    또 칭의는 객관적인 사건이지만, 성화는 내면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인격과
    삶의 변화의 문제이다. 성화는 사람의 인격과 삶의 실제적 변화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 위에서 이루시고 성령께서 적용하신
    법적 의(義)를 성도들이 인격과 삶에서 실제로 나타내는 것이다.
    성도들은 법적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거룩해졌다. 그러므로 그들은
    실제로도 의롭고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 내용은 지식과
    도덕성이다. 사람은 범죄함으로 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었다.
    그러나 그는 구원을 통해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평생의
    성화의 정도는 별로 크지 않은 듯하지만, 지식과 깨달음의 차원에서 그것은
    상당히 진전된다. 성도들은 일생의 성화 과정을 통해 무엇보다 자신의 죄악성과
    무능함,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을 깨닫는다. 물론 그는 그것과
    함께 거룩함과 의로움, 선함과 사랑과 진실함 등의 도덕성에 있어서도 상당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레위기 11:4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9:2 등).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 .”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에베소서 4:22-24, “(받았으니) 곧 옛
    생활방식에 관하여 너희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참된 의와 거룩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이라”(원문 직역).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베드로전서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성화는 성경에서 때때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에베소서 4:13, 15,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에베소서 5: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예물과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셨음같이 너희도 사랑으로
    행하라”(원문 직역). 골로새서 3:13, “피차 용서하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베드로전서 2:21,
    “그리스도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점진적이며 불완전함

    성화는 점진적이다. 중생은 영적 출생이며 성화는 영적 성장이다.
    사람이 출생한 후 자라듯이, 성도는 영적으로 중생한 후에 점점 성화된다.
    중생(重生)과 회개와 칭의는 단회적(單回的)이며 즉각적이지만,
    성화는 중생에서 시작되어 일평생 동안 계속되는 점진적 과정이다.
    야곱의 생애를 흔히 성화에 비교하듯이, 성도의 일생은 성화의 훈련 과정이다.
    채소가 자라려면 단지 수개월이 필요하나 참나무는 백 년이 필요하듯이,
    성도들의 성화는 오랜 기간과 많은 훈련들이 필요하다. 구원받은 성도가
    점점 더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지만, 성화는 매우 더디어 보인다.

    또한 성화는 지상에서 불완전하다. 육신의 죄악성은 죽을 때까지 완전히
    극복되지 않는다. 이것은 성경이 증거하며 경험이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성도의 구원은 이런 불완전한 성화에 의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완전한 단번 속죄의 의(義)에 의존한다. 성도의 성화가 아무리
    높은 단계에 도달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이루어주신
    의(義)에 미치지 못한다. 성도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의 때문에 완전하며 성도는 최종적 영화의 단계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성도는 죽을 때 그 영혼이 거룩함에 있어서 완전케 되어 즉시 영광의
    천국에 들어간다. 그것은 성도가 죽을 때 그 영이 즉시 천국에 들어갈
    것을 가르친 성경의 여러 구절들(눅 23:43; 고후 5:8; 빌 1:23 등)에
    당연히 내포된 진리이다. 거룩한 영이 아니고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2:23은 천국에 올라간 영들을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라고 불렀다.

    소요리문답 [제37문] 신자들은 죽을 때 그리스도로부터 어떤 혜택을 받습니까?
    [답] 신자들은 죽을 때 그 영혼들이 거룩함에 있어서 완전케 되어 즉시
    영광에 들어가고, 그 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으므로 부활
    때까지 그 무덤들에서 안식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이 성도가 지상에서 완전 성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과 경험에 배치된다. 마태복음 6:12, 13,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로마서 7:7-26,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 . . .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갈라디아서 5:17, “이는 육신은 성령을 거스려 욕심을 내고 성령은
    육신을 거스리며,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함이니라”(원문 직역).

    다음 성경구절들은 잘 해석해야 한다. 마태복음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바를 보일 뿐이다. 야고보서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135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여기의 온전함은 완전 무죄가 아니고,
    영적 성숙함을 의미한다. 노아나 욥 등도 완전 무죄한 자들이 아니었다.

    요한일서 3:6, 8,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범죄치 아니하나니’
    136)라는 말은 중생한 성도가 계속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중생한 성도가 계속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까닭은 하나님의 씨
    곧 새 생명의 원리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요일 3:9).

    성화해야 할 이유

    성도는 왜 성화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성화되어야 할 근본적인 이유는
    성화가 구원의 당연한 열매이기 때문이다. 갓난아기가 자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정상적인 일이다. 기형아가 아니라면, 아기는 자라게 마련이다.
    영적으로도 똑같다. 성화는 반드시 중생, 회개, 칭의를 따른다.
    각 사람의 성화의 정도는 다를지라도 성화 없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실패치 않는 구원이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이기는 자’라는 말은 성도들 가운데 이기는
    자가 있고 지는 자가 있음을 의미하는가? 중생하고 칭의함을 받은 자들
    가운데 성화에 실패하는 자가 있을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참으로
    중생한 자, 참으로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세상을 이길 것이다.
    요한일서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35-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리라.”

    성도가 성화되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너무 큰 은혜,
    즉 너무 귀하고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의 목표는 그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여 이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죄 짓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고 그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만 행하는 것이다.

    로마서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로마서 12:1, 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린도전서 6:19, 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후서 5:14, 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 성화는 필수적 과정이므로 성도는 자신의 성화를 위해 분발해야 한다.

    성화의 방법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됨

    성화는 하나님의 전적인, 값없으신 은혜요 그의 하나님의 초자연적 활동이다.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5:23, 24,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 . . .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히브리서 13:20, 21, “영원한 언약의 피로 말미암은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특히, 성령께서는 택자들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이제 중생시킨
    성도들 속에 거하신다. 에스겔 36: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성령께서는
    성도들 속에 계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것을 믿고
    행하게 도우신다. 요한복음 14:16, 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παρά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 위로자, 권면자)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 성령은 또한
    그들을 도우신다. 성도들은 계속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로마서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13, 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22, 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친절]와
    양선[선함]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에베소서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사람편에서의 성실한 노력이 필요함

    성화는 사람의 성실한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의 선행의 능력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인격적 존재로 취급하신다. 사람은 중생에서 전적으로
    수동적이며 소극적이었지만, 성화에서는 능동적, 자발적, 협력적이어야 한다.
    성화에서 인간의 성실한 노력은 성도의 당연한 의무와 책임이다.

    빌립보서 2:12-13,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매튜 풀(Matthew Poole)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
    ‘우리는 구원의 일에 있어서 게으르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일함으로써
    그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은 구원의 공로나 값이 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주께서 풍성하게
    완성하신 것을 적용하는 것이며, 구원의 원인이나 근거가 아니고 단지
    우리가 구원에 참여하는 과정과 수단일 뿐이다’
    (Com- mentary on the Holy Bible, III, 691).

    로마서 6:12-13,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
    로마서 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 . .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고린도후서 7:1,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데살로니가전서 4:1-3,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더욱 많이 힘쓰라. .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베드로후서 1:5-10,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 . .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성화의 수단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화를 위해 몇 가지 수단들을 주셨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와 기도, 및 하나님의 섭리적 지도 등이다.

    첫째로, 성화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이다.
    골로새서 1:28-29,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이 여기에 있다.
    디모데후서 3:15-17,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우리의 성화를 위해 유익한 책이다.

    둘째로, 성화의 또 하나의 수단은 성례이다. 바르게 집행된 성례는 말씀
    속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증거하고 기억케 하기 때문에,
    그것은 그 의식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큰 은혜와 유익을 준다.

    셋째로, 성화의 또 하나의 수단은 기도이다. 기도는 하나님께 영적 도움과
    능력을 받을 수 있는 합법적 수단이다.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성도의 기도 제목들 가운데 영적 성장,
    곧 성화는 매우 중요한, 기본적 제목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

    넷째로, 그 외에도 하나님의 여러 가지 섭리적 훈련과 지도는 성도의
    성화를 위한 수단들이다. 예를 들어, 직업 현장에서의 훈련, 시험과 유혹,
    고난 등이 그러하다. 그것들은 다 성도를 겸손케 하고 성결케 하는
    수단들이다. 베드로전서 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시편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성도는 이러한
    수단들을 성실히 사용함으로 영적으로 점점 더 자라며 거룩해져야 한다.

    성화와 상(賞)

    선행은 구원의 목표인 동시에 성화의 당연한 열매이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에베소서 5:9, “빛의 열매
    [성령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성경은 선행에 대한 상(미스도스)에 관해 많이 말씀한다. 예수께서는
    상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6:3-4,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10:41-42,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상(賞)은 각각 다를 것

    상(賞)은 선행과 봉사의 정도에 따라 각각 다를 것이다. 다니엘 12: 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마태복음 5:11 -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9:16-17,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마태복음 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태복음 25:19-21,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요한계시록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특히,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에게 각각 수고하고 충성한 만큼의
    상이 약속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3:8, 14,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린도전서 3:12-15의 말씀은 종종 오해된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이 말씀은 일반 성도의
    성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목사의 사역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금과 은과 보석은 바른 성경적 교훈을 말하고, 나무나 풀이나 짚은
    그릇된 인간적 교훈을 말한다. 이 말씀의 요지는, 목사가 바른
    교훈으로 사역하면 마지막 날 상을 받을 것이지만, 목사가 바른
    교훈으로 사역하지 않으면 자신은 구원 받을지 모르나 자기의 교훈을
    받던 자들의 멸망으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는 것이다.

    상(賞)은 하나님의 은혜임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께 상을 받을 만한 공로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의 선행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서 나오지
    않고 오직 성령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포도나무 비유에서, 주께서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5:5). 또 사도
    바울은 주를 위해 많은 고난을 받았고 역사상 아마 가장 귀하게 쓰임
    받은 종이었지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했다(고전 15:10). 또 사도 요한이 본 천국의 환상 중에 24장로들은
    보좌에 앉으신 영원하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자기들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계 4:10-11).

    더욱이, 우리의 선행이 하나님께 상을 받을 만한 공로가 되지 못하는
    까닭은 그것이 하나님의 도덕적 기준에 비추어볼 때 여전히 부족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는 여전히 예수님의 보혈 공로밖에 없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4은 진술하기를, “그들의 순종에 있어서 이 세상에서
    가능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자들이라도 공로를 쌓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이상을 할 수 있기는커녕, 그들이 의무상 해야 할 만큼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께 상을 받을 만한 공로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이 주실 상도 그의 은혜이다. 주의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도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해야 마땅한 자들이다(눅 17:10)]



    출처: USA아멘넷 게시판/교제



    사단은 언제나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모두 믿는 것을
    훼방하고 거짓으로 호도하여 성도의 일한대로 받는 상과 믿음으로
    받는 구원을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게 하여 마치 성도들은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처럼 또는  주 하나님께서 행위구원 보상론을
    성경에 계시한 것처럼 호도합니다.

    성경적인 심판론은 성경말씀으로 증거되고 변론되나 인본적인
    심판론은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는 공의의 상급심판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인간적 바램에서 나온 논리로 점철될 뿐이라는 차이가
    있지요.

    성경사전에 성도가 받는 심판은 다음과 같이 언급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그를 믿는 자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으며
    사망과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말씀이다(롬8:1-2)
    그런데 성경 곳곳에서 성도들도 심판을 받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마 25:14-30,31-46/눅 19:12-28/고전 3:12-15/고후 5:10/롬 14:10
    벧전 1:17/계 20:12)

    그것은 불신자들이 받는 정죄와 영원한 형벌에 대한 심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롬 8:1-2) 성도 자신에게 맡겨주신 재능,시간, 물질,은사
    기회, 책임등을 어떻게 사용하였느냐에 따라서 칭찬가 책망등
    보상(상급)이 따르는 심판을 말하는 것이다 (마 12:36/롬 14:10
    엡 6:8/골 3: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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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 인터뷰 영상 - 폴 워셔 목사님의 구원 간증|≫ 폴워셔 목사님 ≪
    전도 | 조회 669 |추천 1 |2010.12.25. 18:52 http://cafe.daum.net/waitingforjesus/LeTc/76 

     

     

    폴 워셔 목사님과 어머니의 구원 간증 영상입니다. 많은 은혜 받으세요.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 마틴 로이드 존스



    내가 율법이나 대언자들을 파괴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요 성취하러 왔노라.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절대로 없어지지 아니하고 모두 성취되리라.
    (마 5:17,18)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율법을 성취하시는가? 이 질문은 너무나 놀라운 것으로 우리를 경배와 숭배로 이끕니다. 주님은 율법 아래 나셨습니다. "정확한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하셨습니다(갈 4:4).
    우리의 제한된 마음으로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지만, 이 말씀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율법 아래 나셨다는 성육신에 관한 중요한 진리 중 하나입니다.
    주님은 영원히 율법 위에 계시지만,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고, 율법을 지키셔야만 했던 분으로 율법 아래 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율법 아래 두셨을 때 만큼 분명하게 거룩한 율법의 어길 수 없는 절대적인 특성을 보여 주신 적은 없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개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복음서를 읽으면 이 개념이 얼마나 완전하게 참된 것인가를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하셨는가를 주목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빠짐없이 순종하셨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율법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시고, 그들에게 설명해 주셔서, 계속해서 율법을 확증하시고 율법에 복종해야 하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주장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생애의 마지막 때에 '아무도 자신에게서 어떤 잘못도 발견할 수 없으며 자신에 대해 어떤 고소도 할 수 없다' 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자신에 대해 고소를 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율법 앞에서 그분을 고발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율법을 충분히 성취하신 삶을 사셨고 완전하게 율법에 복종하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어떠한 작은 항목도, 일 점 일 획도, 범하거나 성취하는데 실패하신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탄생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삶에서 율법 아래 복종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의 전(全) 믿음의 중심인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묻게됩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만일 율법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지 못하면,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를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거듭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복음주의의 본질은 십자가에 대하여 말할 뿐 아니라 십자가의 참된 교리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해서 말하는 자들이 있지만, 그들은 순전히 감상적인 태도로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께서 친히 꾸짖으셨던, 이른 바 십자가의 비극을 생각하며 슬피 울던 예루살렘의 딸들과 같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우리에게 일종의 도덕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전(全) 목적이 우리의 굳은 마음을 깨뜨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의 의미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목적은 우리 안에서 연민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며,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일반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궁극적으로 오직 율법의 관점에서만 이해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일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죄를 위하여 친히 자신의 거룩한 몸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 정한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정죄하며, 율법이 선고하는 판결은 사형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짓고 그분의 거룩한 율법을 깨뜨린 모든 사람에게 필히 사형을 선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가 율법이나 대언자들을 파괴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요 성취하러 왔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을 성취하는 방법 중 한 가지는 죄의 형벌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이 형벌은 죽음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분께서 죽으신 이유입니다. 율법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과 형벌을 따로 따로 두실 수 없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심에 있어서 그분께서 법령으로 정하신 형벌을 집행하지 않기로 하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과 그분께서 말씀하신 것을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죄는 반드시 죽음으로 처벌받아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며, 여러분과 제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형벌이 그같이 죽음으로(역자주:그리스도의 죽음) 집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의 형벌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법은 완전무결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갈보리 언덕 십자가 위에 있는 거룩하며 흠없고 점없는 자신의 아들의 몸으로 죄를 처벌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율법을 성취하고 계십니다. 만약 여러분이 율법의 성취라는 엄밀한 관점에서 십자가와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죽음을 해석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십자가 위의 죽음에 관한 성경적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또한 주님께서 가장 이상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곧 죄로 인한 형벌을 친히 자기 안에 와 자기 위에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죽으심으로, 구약성경의 모든 예표를 성취하신 것을 봅니다. 레위기와 민수기를 읽어 보십시오. 태운 헌물과 희생물들에 관한 모든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장막과 성전 의식과 희생단과 씻는 물두멍 등에 관한 모든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이 상세한 말씀들로 돌아가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이 모든 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차린 빵(shewbread)과 대제사장과 기구(vessel)와 기타 이 모든 것들은 다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것들을 가지고 행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히 최종적으로 성취되어질 것들의 그림자요, 예표요, 대언에 불과할 뿐입니다. 주님은 실로 이 예표들 하나 하나를 문자적으로 성취하시고 수행하시고 실행하셨습니다. 혹자는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질지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세부사항을 발견할 수 있는 책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원리가 되는 위대한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죽음과 행하신 모든 것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예표와 그림자의 완전무결한 성취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대제사장이시며, 주님은 헌물(offering)이시며, 주님은 희생물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피를 하늘에 드리심으로 의식법의 전 항목을 그분 안에서 성취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대언자들을 파괴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파괴하러 온 것이 아니요 성취하러 왔노라" 주님께서는 죽으심과 부활과 그리고 자신을 하늘에 드리심으로 이 모든 것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주님께서 성령에 의하여 우리 안에서와 우리를 통하여 율법을 성취하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로마서 8:2-4절에 있는 사도 바울의 논거(論據)입니다. 바울은 매우 분명하게 이것이 왜 주님께서 죽으셨는가에 대한 이유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약하여 할 수 없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 죄 때문에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느니라. 이는 육신을 좇아 걷지 않고 성령을 좇아 걷는 우리에게 율법의 의가 성취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가장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는 여기서 두 가지 방법을 함께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주님이 친히 율법을 성취하신 방법과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율법을 성취하시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우리 주님께서 마태복음 5 장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바입니다. 그분은 율법의 의(義)를 성취하십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성취해야 합니다. 둘은 함께 역사합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우리 안에서 율법을 성취하며,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을 사랑하는 마음과 율법으로 사는 권능을 주십니다. "육신적인 생각이 하나님께 대적이 됨이니,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치 아니할 뿐 아니라, 실로 할 수도 없느니라"라고 사도 바울은 같은 로마서 8 장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받은 우리는 이와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대적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율법에 복종합니다.
    자연인은 하나님을 미워하며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율법에 복종합니다.
    그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며 또한 그렇게 되는 권능을 받았습니다. "육신을 좇아 걷지 않고 성령을 좇아 걷는 우리에게 율법의 의가 성취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을 다음과 같이 보십시오. 대언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실상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새언약을 맺고자 한다. 새 언약과 옛 언약과의 차이는 이같으니, 내 법을 너희의 생각과 마음에 쓸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내 법을 너희 밖에 있는 돌판에 쓰지 않고 육체의 마음 판에 쓰겠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을 8장에서 다룹니다. 그는 8 장에서 새 언약, 곧 새로운 관계를 자랑합니다. 왜냐하면 새 언약 아래에서 율법은 우리 밖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율법을 성취하는데 열심이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율법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 질문을 하나 드림으로 이 모든 것을 요약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율법과 대언자들에 관한 입장은 무엇입니까? 저는 이미 대언자들의 대언이 어떻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성취되었는가를 보여드렸습니다. 하지만 아직 성취되어야 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율법은 어떻습니까? 제가 보여드린 바와 같이 의식법(儀式法)에 관해서는 이미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곳 지상에 계실 때 그분의 삶에서 의식법을 준수하셨고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준수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으로 의식법은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이것의 확증으로, 후에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분께서 죽으실 때, 이미 성전의 휘장이 둘로 찢어졌고, 마지막으로 성전과 성전에 속한 것들이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단이시며, 희생물이시며, 씻는 물두멍이시며, 향이시며, 그밖에 모든 것 되심을 보지 못한다면, 나는 아직 레위기의 율법 조항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분께서 나의 태운 헌물이요, 나의 희생물이요, 나의 모든 것임을 보지 못한다면, 이 모든 의식법은 아직도 내게 적용되고 있으며, 내가 그것을 이행하지 못할 경우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고 실현된 것을 보며, 그분을 믿고 그분께 나 자신을 복종시킴으로 이 모든 것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식법에 관한 입장입니다.

    시민법은 어떻습니까? 시민법은 본래 특별히 하나님의 신정국(神政國)으로서 그 당시 특별한 상황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더 이상 신정국가(神政國家)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님께서 사역의 말기에 유대인들을 향하여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나님의 왕국을 너희에게서 빼앗아, 그 왕국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시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이는 마태복음 21:43의 말씀으로, 대언과 관련하여 전(全) 성경에서 가장 중대하고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9,10 에서 새로운 민족이 교회임을 매우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이제 더 이상 신정국가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시민법 역시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도덕법이 남았습니다. 도덕법과 관련한 입장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기서 영원하고 영구한 것, 곧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항상 존속해야 하는 관계를 세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첫째가는 큰 명령이라고 칭하신 것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 명령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 명령은 단지 신정국가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명령은 온 인류를 위한 것입니다. 둘째 명령은 "그와 같은 것으로서,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명령도 역시 이스라엘 신정국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명령은 단순히 옛 의식법이 아니었습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께 대한 영원한 상태요, 그분께 대한 우리의 영구한 관계의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도덕법은 - 신약성경에 의해 해석된 바와 같이 - 지금까지 존속해 왔듯이 지금도 존속하고 있으며, 시간의 끝까지 그리고 우리가 완전하게 될 때까지 존속할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에서 사도는 서신서를 읽는이들에게 그리스도인들 안에 있는 죄는 여전히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의 깊게 상기시켰습니다. 요한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우리는 여전히 율법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봅니다. 왜냐하면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 3:4). 율법은 아직 거기에 있습니다. 비록 내가 그리스도인일지라도, 비록 내가 유대인이 아니었을지라도, 이방인일지라도, 죄를 범할 때 나는 율법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덕법은 여전히 우리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현재 입장입니다.

    미래에 관하여 저는 단지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궁극적으로 왕국이 온 땅에 미칠 것입니다. 다니엘서 2장에서 말하는 돌이 온 세계를 가득 채울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왕국들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왕국"이 될 것입니다. 이 과정이 지금 진행중이며, 마침내는 성취될 것입니다. 율법과 대언자의 일점 일획도 빠짐없이 완전히 실행될 것입니다. 율법을 깨뜨린 자는 궁극적으로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결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끝내 뉘우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서 죽는 자들은 율법의 정죄 아래 있습니다. 맨 마지막에 그들에게 내려질 선고는 "저주 받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존하는 불에 들어가라" 가 될 것입니다. 그들을 그와 같이 정죄하는 것은 율법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은 모든 점에서 완전히 실현될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제시된 것을 이용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의(義)의 표현인 율법의 정죄 아래 거할 것입니다.

    마지막 질문은 필히 이것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율법에 대한 관계는 무엇인가?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 행위 언약이라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3 장이 논증하는 전부입니다.
    구원은 그가 율법을 지키는 것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저주에서 구출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신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서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생활의 규칙으로서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율법과 은혜와의 관계에 관해서 마음이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을 이렇게 말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 그릇된 견해를 가지려 하며, 율법을 은혜에 반대되는 무엇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 때 율법의 언약이 있었다는 의미에서 율법은 은혜와 반대될 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은혜 언약 아래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율법을 은혜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는, 그리고 홀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율법은 결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내가 지금 너희에게 율법을 준다. 너희가 이 율법을 지키면 율법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율법을 지킴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여진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요구의 참 특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리고 죄의 심히 죄됨을 보여주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약속이 주어진 후 430 년 후에 온 것입니다. 율법은 어떤 의미에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의로와 질 수 없다는 점과 우리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점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 속에 많은 대언과 많은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은 은혜로 충만하여 나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율법과 관련한 모든 희생물과 의식(儀式)도 역시 동일한 일을 행하도록 계획된 것임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구약 성경의 비평가들은 이러한 태운 헌물과 의식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며, 그러한 것들은 단지 유대인과 다른 이들이 사용한 것으로 비교종교의 관점에서만 설명될 수 있는 이교도 의식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신약 복음을 실지로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모든 예식과 의식은 하나님께서 상세하게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산으로 부르시고 "너는 삼가 모든 것을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만들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율법에 관한 이러한 모든 관점들이 단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율법에 관한 거짓 견해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합니다. 동시에 사람들은 은혜에 관하여 거짓된 견해를 갖습니다.
    그들은 은혜는 율법과 별개의 것이며 율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소위 도덕율폐기론(Antinomianism)으로서, 죄악되고 게으르며 나태한 형태의 영적 삶을 살기 위하여 은혜의 교리를 남용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나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행하든 나는 율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고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며 "은혜가 넘치게 하려고, 죄 안에 거하겠느뇨?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은혜에 관하여 전적으로 잘못된 거짓 견해입니다. 은혜의 전 목적은, 어떤 의미에서, 단지 우리로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문제점은 우리가 자주 이 점에서 거룩에 관한 거짓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과 성화(sanctification)를 받아야 할 체험으로 간주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거룩은 의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받았다고 말하는) 소위 은혜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한다면, 여러분은 은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심리적인 체험을 경험했는지는 몰라도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은 아닙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은혜란 사람을 율법의 저주에서 구하며, 그로 하여금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셨던 것처럼 의롭게 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나는 그분의 명령을 지키기를 열망합니다. "나의 명령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 두 가지를 분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는 감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거룩은 체험이 아닙니다. 우리로 반드시 율법을 사랑하도록 인도하며 이 율법을 지키기를 열망케 하는 이 새 마음과 입장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분의 권능으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성취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19절에서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이 명령 중 하나를 어기고 또 그와 같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는 누구든지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것들을 행하고 가르치는 자는 하늘의 왕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죽으시기까지 삼 년의 짧은 기간 동안 주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영원히 영존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7 장에서 주님은 이를 다시 강조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서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주님, 주님, 하고 말하는 자마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시는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요? 십계명과 도덕법입니다. 십계명과 도덕법은 결코 폐기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대속하시고,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정결케 하사 선한 일들에 열심인 특유의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디도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 의가 성경기록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하지 않고서는 어떤 경우에 라도 너희가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주제는 여러 가지 점에서 어려운 것이였고, 동시에 영광스러운 진리에 관여되어 왔습니다. 여러분은 율법과 대언자를 보고, 이것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을 보며, 율법에 관한 보다 깊은 견해를 주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관점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여러분은 십자가 위에서 집행된 것이 하나님의 율법이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처형하셨다는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속죄의 대속 교리는 그가 율법을 완전히 실행하셨음을 강조합니다. 주님은 완전무결하게, 능동적으로, 수동적으로, 소극적으로, 적극적으로 친히 율법에 복종하셨습니다. 모든 예표는 그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아직 남아있는 대언도 분명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구속 사역의 결과는 하나님을 거스려 율법을 깨뜨리고 있는 우리 비참한 반역자들에게 용서를 주는 것 뿐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 [곧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 참으로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 거룩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 놀라운 감정이나 체험을 경험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살며, 모든 점에서 그분을 닮은 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로] -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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