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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억울했던 분을 생각하라 살다보면 억울한 일을 겪을 때가 적지 않다. 억울한 일은 직장에서도 일어나고 길거리에서 집안에서, 심지어 교회와 노회와 총회와 기독교 단체 안에서 생기기도 한다. 그리고 그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홧병을 얻어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그러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모든 것을 아시고 마침내는 잘잘못을 가려 주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할 수 있는 대로 억울함을 밝히고 풀도록 끝까지 힘쓰되 그 억울함이 나의 삶을 삼켜버리지 않도록 내 마음과 생각과 말과 행동을 잘 다스리면 좋지 않겠는가? -박동현 목사의 글 ‘억울한 일을 겪을 때’에서- 정말 너무 억울한 일을 겪으면 여간한 믿음이 아니고서는 무엇보다도 정서적으로 이를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어떡합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게 목숨을 잃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서 이 일을 풀어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에 앞서, 나도 혹 남을 억울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억울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그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서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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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침례), 자유로 가는 길(The Way to Freedom)
부모들이 자녀들로 하여금
세례(침례)를 받게 할 때,
그들은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예수님의 형제 자매로서 성장하며
삶을 살아가고, 그리고 성령에 의하여
인도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출생을 통하여 아이는 부모에게 맡겨집니다
세례(침례)를 통하여 아이는 하나님께 맡겨집니다
세례(침례) 때에 부모들은 그들의 부모 됨은
하나님의 부모 됨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과
아버지 됨과 어머니 됨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침례)는 부모들을 아이들이
자기의 소유물이라는 생각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아이들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돌보아 주기 위하여
부모들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아이들을 귀빈으로서 집으로 환영하고
그들에게 육체적, 정서적 그리고 영적인 자유를 주어서,
그들 자신도 집을 떠나 부모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이 부모가 할 일입니다
이와 같이 세례(침례)는 부모들에게
부모가 할 일을 일깨워 주며,
또한 세례는 아이들을 자유의 길로 해방시켜 줍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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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침례)는 하나의 통과 의식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고통과 죽음을 지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세례(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그것은 예수님 안에 있는 그리고
-옮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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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6장 6절 ] <한글> ①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②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영어> ①But thou, when thou prayest, enter into thy closet, and when thou hast shut thy door, pray to thy Father which is in secret; ②and thy Father which seeth in secret shall reward thee openly. (헬라어> ①su;< dev, o{tan proseuvch/, ei[selqe eij" to;< tamiei'ovn< sou, kai; kleivsa" th;n< quvran< sou, provseuxai tw'/< patriv< sou tw'/ ejn tw'/ kruptw'/: ②kai; oJ< pathvr< sou oJ blevpwn ejn tw'/ kruptw'/ ajpodwvsei soi ejn< tw/'< fanerw/'. |
[문장 분석]
[제1 문장] |
[싀] [데] [호탄] [프로슈-ㅎ케-] [에이셀세-] [에이스] [토] [타미에이온] [수-] [카이] [클레이사스] |
①su;< dev, o{tan proseuvch/, ei[selqe eij" to;< tamiei'ovn< sou, kai; kleivsa" |
[테-ㄴ][쒸롼] [수-] [프로슉-사이] [토-] [파트뤼] [수-] [토-] [엔] [토-] [크륍토-] |
th;n< quvran< sou, provseuxai tw'/< patriv< sou tw'/ ejn tw'/ kruptw'/: |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 |
But thou, when thou prayest, enter into thy closet, and when thou hast shut thy door, pray to thy Father which is in secret |
부사절[때] |
주 절-I | |||||||
주어 |
접속사 |
동사 |
주어 |
동사 |
부사구[장소] | |||
su; |
dev |
o{tan |
proseuvch/ |
su; |
ei[selqe |
eij" |
to; tamiei'ovn |
sou |
너는 |
[그러나] |
때에 |
기도할 |
[너는] |
들어가 |
에 |
골방 |
네 |
thou |
But |
when | prayest | thou | enter into | into | closet | thy |
대인주 |
접 |
접 |
동가현중단2 |
대인주 |
동명과능단2 |
전목 |
관+명목중단 |
대인소 |
|
|
|
proseuvcomai |
|
eijsevrcomai |
|
tamiei'on |
|
|
|
|
[프로슈-ㅎ코 마이] |
|
[에 세ㄹ ㅎ코 마이] |
|
[타미에이온] |
|
주 절-II |
주 절-III | ||||||||||
접속사 |
주어 |
동사 |
목적어 |
주어 |
동사 |
간접목적어 | |||||
kai; |
su; |
kleivsa" |
th;n quvran |
sou |
su; |
provseuxai |
tw' patriv |
sou |
tw'/ |
ejn |
tw'/ kruptw'/ |
[그리고] |
너는 |
닫고 |
문을 |
[너의] |
[너는] |
기도하라 |
아버지께 |
네 |
[~바] |
중에 계신 |
은밀한 |
and |
thou |
when - shut |
door |
thy |
thou | pray | to Father | thy | which is | in | secret |
접 |
대인주 |
동령과능주남단2 |
관+명목女단 |
대인소2 |
대인주 |
동명과디단2 |
관+명여남단 |
대인소 |
관여남단 |
전여 |
관+형여중단 |
|
|
kleivw |
quvra |
su; |
|
proseuvcomai |
pathvr |
su; |
oJ |
|
kruptov" |
|
|
[클레이오-] |
[씌롸] |
[싀] |
|
[프로슈-ㅎ코 마이] |
[파테-ㄹ] |
[싀] |
[호] |
|
[크륍토스] |
[제2 문장] |
[ 카이][호] [파테-ㄹ] [수-] [호] [블레포-ㄴ] [엔] [토-] [크륍토 -] [아포 도-세이][소이] [엔] [토-] [ㅎ파 네로-] |
②kai; oJ< pathvr< sou oJ blevpwn ejn tw'/ kruptw'/ ajpodwvsei soi ejn< tw/'< fanerw/'. |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
and thy Father which seeth in secret shall reward thee openly. |
접속사 |
주어부 |
술어부 | ||||||||
주어 |
동사 |
부사구 |
동사 |
간접목적어 |
부사구 | |||||
kai; |
oJ pathvr |
sou |
oJ |
blevpwn |
ejn |
tw'/ kruptw'/ |
ajpodwvsei |
soi |
ejn |
tw/' fanerw/' |
또 |
아버지가 |
네/[너의] |
[바] |
보시는 |
중에 |
은밀한 |
갚으시리라 |
[네게] |
[으로] |
[들어내심] |
and | Father | thy | which | seeth | in | secret | shall reward | thee | openly | |
접 |
관+명주남단 |
대인소단2 |
관주남단 |
동분현능주남단 |
전여 |
관+형여중단 |
동직래능단3 |
대인여단2 |
전여 |
관+형여중단 |
|
|
suv |
|
blevpw |
|
kruptov" |
ajpodivdwmi |
suv |
|
fanerov" |
|
|
[싀] |
|
[블 레포-] |
|
[크륍 토 스] |
[아포 디도-미] |
[싀] |
|
[ㅎ파 네 로스] |
[ 주석 ]
ㅇ네 골방에 들어가 - '골방'의 원어 '타미에이온'(타메이온)은 '자르다'는 뜻의 '템노'와 '청지기'란 뜻의 '타미아스'의 합성어로서 세상 모든 것과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과만 내밀(內密)한 대화를 나눌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저장실(store room), 내실(inner room), 침실(bed room, 사 26:20)등을 가지고 있다. 골방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 드리던 장소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엘리사의 침실과 비숫한 곳이었던 것 같다(왕하 4:33). 여기서 골방은 바리새인들이 기도의 장소로 선택하였던 '회당과 큰 거리 어귀'와 뚜렷이 대조되고 있다.
ㅇ문을 닫고 - 사 26:20에는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간 숨을지어다'란 말씀이 있는데, 본문은 분명히 이 예언의 말씀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사야가 이 예언을 베풀 때는 분명 마지막 심판날의 무서운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아마 제자들이 이런 심판날을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기도하
되, 이를 관습화하기 원하셨던 것같다. 여하튼 자신의 방문을 닫는다는 것은 잠시나마, 오직 자신과 하나님 이외에는 어떠한 제 3자의 개입을 불허(不許)한다는 뜻인 동시에 순결한 영혼의 교제만이 있을 뿐임을 시사한다.
ㅇ은밀한 중에...기도하라...갚으시리라 -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 앞에 아무런 숨김없이 간구하는 자에게 그 기도의 자리에 함께 하셔서, 모든 것을 듣고 계셨던 그 하나님께서 모두 '갚으실'(4절)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품성을 온전히 반영한 약속이다.
[해석]
6절은 참된 기도 자세의 전형을 보여준다.
골방은 하나님의 청지기가 그 주인 되신 하나님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듯
세상적인 모든 것과 단절한 상태에서 하나님과 은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곳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말은 단순한 기도의 장소를 지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상징적으로 참된 기도의 방식과 의미를 지침해 주는 말로 이해할 수 있겠다.
실로 참된 기도는 세상의 안목에 구애됨 없이
기도자와 그 기도의 유일한 대상이신 하나님과의 은밀한 만남과 인격적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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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그 기자(이태형기자)와 그 목사(김석년목사)를 경계하며
【국민일보 그 기자(이태형기자)와 그 목사(김석년목사)】
◈이단 동성연애자 헨리나우웬(이단 카톨릭)사제는 행복한가?
김석년목사(서초성결교회:서초구 반포동)의말과 이단이며 동성연애자인 헨리 나우웬의 행복
어떤점에서는 이단 동성연애자 헨리나우웬을 행복한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하면서 혼돈에 빠지는 크리스천이 있는 듯 하다.
왜냐하면 김석년목사같은 종교인은 나우웬을 통해서 참다운 인생의 성공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국민일보 이태형기자와 자랑스럽게 인터뷰하는 모습을볼때,그런착각을 느낄수도 있을듯하다.그것을 좋다고 인터뷰하는 이태형기자도..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read.asp?page=1&gCode=area&arcid=0004213328&code=23111111)
그러나 진정 예수를 따르는 목회자와 성도들과 참된 예수님의 몸된 교회는
【예수 외에도 구원이 있다는 보편구원론자이며 동성연애, Gay 인 헨리 나우웬】은
①◈행복하지 않을 뿐더러,
②◈지금 지옥에서 엄청나게 고통을 당하며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③◈그리고 목사나 광명의 천사의 가면을 쓰고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지옥 인도자'들의 롤모델이기 때문에
④◈이단 헨리 나우웬이나,그를통하여 참다운 인생의 성공을 발견했다는 ★김석년목사와 그를인터뷰하는 기자들의부류를 조심해야할것이라고 많은크리스찬들이 언급하고있다고전해진다
⑤■ 동성연애자 나우웬을통해 인생의 성공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하는 고백은 →김석년목사(서초교회:서초구 반포동 소재)의 고백(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read.asp?page=1&gCode=area&arcid=0004214565&code=23111111)일 뿐이지,
⑥■예수님의 참된 목회자들은 이단을 경계하면서, '동성연애자 헨리 나우웬은 성공한 인생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Gay(동성연애자) 사제'라고 경계한다.
⑦■이것이 김석년목사와 예수님의 참된 목회자들의 차이점이다.
한국사회와 한국교회,공공의유익위해 이글을 공표합니다
ⓐ국민일보는 단순한 일간지이며 이태형기자는 월급쟁이 기자일 뿐이다.기독교의탈을쓰고 카톨릭사제를 홍보하는것을 경계하며
ⓑ더이상 성경적 복음주의 기독교신문이아닌→기독교의 탈을 쓴 국민일보 불매운동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그리고 전국적으로
대대적으로 할 수있음을 밝혀둔다.
국민일보 이태형종교기자는 국민일보 '한마당'이라는 기고란에 '나우웬의 벤치'(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3684304&code=11171211)라는 아티클을 쓰며 이단 카톨릭 동성연애 사제 헨리 나우웬을 은근히 좋은 각도로 홍보하고 있다고 많은 목사님들이 염려하며 지적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또한 국민일보 이태형종교기자와 김석년목사는 얼마나 친밀한 관계인지, 이단 동성연애(Gay) 카톨릭 사제 헨리 나우웬의 영성을 추구하는 바에 있어서 아름다운 동행을 하는 관계인지는 몰라도,, 이태형기자는 아티클을 쓸 때도 "서초교회 김석년 목사는 “목회는 하나님이 ‘봐 주셔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봐 주시는 만큼’ 목회하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이 봐 주시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항복해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다시 ‘하나님이 봐 주신다’고 느껴지면 ‘다시 목회를 하면 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라고 인용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동행인듯 하다고 많은 성경적 목사들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보면 김석년목사는 동성연애자 이단 카톨릭 사제 헨리 나우웬을 통해서 참다운 인생의 성공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한 것이 시간이 지나가면 하나님이 봐주신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닌지 많은 목사님들이 실소를 금치 못한다고 많은 성도들이 언급한다고 전해진다.
†한국교회이단연구소
참고사이트: http://cafe.naver.com/joelarmy http://cafe.daum.net/fgbc
|
* 본 기사와 글들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마지막 배도 시대에 미혹의 영을 경계하고자 소개한 것임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단도 광명의 천사를 가장하여 역사합니다. 기독교의 탈을 쓰고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이 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중국교회세계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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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0편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시편 130편은 15개의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 중에 11번째 노래이다. 이 노래들은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에 의하여 불린 노래라고 한다. 예루살렘은 산 위에 위치하였으며 따라서 순례자들은 산을 올라가야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주장은 이 노래들은 바벨론에서 포로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부른 노래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올라가는”(Ascent)이라는 용어와 함께 15개의 시편은 이스라엘 남자들이 여인의 뜰에서 성전에 가까운 뜰로 가려면 15번의 발걸음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이라고 지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에 대하여 추측할 필요가 없고 단지 “올라가는”(Ascent)이란 의미를 죄로 인한 절망의 늪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의 기쁨으로 옮기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
시편 130편은 마치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하듯이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하심이 은혜로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선포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죄와 그 죄의 결과 때문에 하나님께 울부짖고 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3절). 그는 자신의 죄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얼마나 흉악한 것인가를 의식하면서 하나님의 공의가 아닌 자비를 구하고 있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4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 얻을 수 있다는 복음은 불법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참 복음을 거절해왔다. “내 노력이 없이 구원을 얻는다면 내가 맘대로 죄를 지어도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바울은 이러한 오해를 로마서에서 다루고 있다(롬 6:15). 중요한 내용은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의 구원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이끈다는 사실이다(참조: 잠 1:7).
여기서 성경에서 말하는 경외함(FEAR)에 대하여 요약해 보자. 각 영어 문자에서 그 의미를 요약해 볼 수 있겠다.
(FEAR)
F: Faith in Christ.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오직 주님과 그의 말씀만을 믿는 것이다.
E: Enjoyment : 웨스트 소요리 문답 1문 1답을 보면 “사람의 제일가는 본분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가는 본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주님과 바른 관계가 맺어졌다는 뜻이다.
A: Active Obedience : 우리가 만일 정말로 구원 받았다면 우리는 자비하신 하나님께 모독이 되는 행동을 피할 것이다.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순종하길 원할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소원을 우리 마음속에 넣으셨기 때문이다.
R: Reverential Awe : 우리는 전능하시고 자비가 많으신 창조주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길 원한다.
이러한 의미로 시편 130편의 기자는 사유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믿고 있다.
제임스 보이스는 그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의 시편 130편의 강해 설교로부터 하나님의 용서하심의 4가지 주요 특성을 끄집어내었다.
첫째, 하나님의 용서는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 제한이 없다. 모든 죄가 다 용서된다.
둘째, 하나님의 용서는 한번 용서하시면 영원하다. 그 용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위한 용서이다.
셋째, 하나님의 용서는 구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넷째, 하나님의 용서는 용서 받은 그 사람을 경건한 삶으로 인도한다.
필자가 한 가지만 더 추가한다면
하나님의 용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하여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우리는 오직 주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며 우리의 소망을 주님께만 두어야 한다. 이는 오직 예수님께 소망을 두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완전한 구속이 허락되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얼마나 위대한 구세주이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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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하지 않고서 사랑받을 수는 있어도 노력하지 않고서 사랑할 수는 없네. 사랑한다는 것은 삶의 무거운 짐을 정면에서 떠맡는 것.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싶다, 무엇인가의 보호를 받고 싶다, 무엇인가를 붙잡고 싶다, 이러한 것들을 하나하나 내던져 버리고 홀로 굳건히 서기 위한 노력. 자기 중심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선 그 누군가를 사랑할 수가 없네. 사랑하려고 애쓰는 노력은 자기 중심적� 생각과 행동으로 부터 한 걸음씩 벗어나는 일.
고통에 쓰러지지 않고 나의 슬픔을 뛰어넘어 환한 웃음으로 그를 마주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그리하여 그 사랑으로 더욱더 성숙해지는 일. 노력하지 않고서 사랑받을 수는 있어도 노력하지 않고서 사랑할 수는 없네. = 가토 다이조 / 성숙한 사랑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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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육신의 옷을 입혔을 때, 이와 같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죽음을 면치 못한 것들이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이 면사포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 얼굴을 존재하는 것은 모두 신성합니다 바다, 산과 나무, 해, 달, 별, 그리고 온갖 종류의 동물과 사람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신성한 창문이 되었습니다 -옮긴 글 '자유게시판:김만니(섬김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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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 참된 진리(드흐라프)2012. 12. 14. 17:30
3)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 참된 진리(드흐라프)
2012/01/10 11:41 3)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 율법이 언약의 율법이라는 사실은 죄의 지식을 아는데 결정적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좀 더 다룰 필요가 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것은 적어도 율법에 대한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이 죄의 참된 지식을 줄 수 있는가? 양심의 가책만으로는 우리는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으로”(시 51:17)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한다. 물론 하나님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에 사로잡히게 할 수 있다. 이러한 때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에 의해 하나님 앞에서 죄책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는 벌써 하나님의 은혜가 간섭한 결과로서 우리는 율법을 언약의 율법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종종 하나님이 짓누르고 깨뜨리실 때까지 자신을 책망하는 양심을 붙들고 오래 동안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책망을 받게 되면 그 책망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기 떄문에 우리는 율법을 사랑의 율법으로 보게 된다. 하나님은 사랑의 율법을 수단으로 하여 우리와의 관계를 정상화하신다.
소위 행위 언약의 율법은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28)는 규정이 아니다. 즉, “이 계명을 지키라. 그러면 너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규정이 아니다. 행위 언약이라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는 공로 및 대가 개념이 전혀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을 통해 언제나 먼저 사랑을 베푸신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하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규정하셨다. 이 관계에는 어떤 규칙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설정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규칙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 가운데 자라난다. 이와 같이 율법은 언약 율법(covenant-law)이다. 따라서 “행위 언약”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호의의 언약”(covenant of God’s favor)이라고 칭하는 것이 더 낫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명령은 언약을 떠난 자에게 해당한다. 그에게는 다시 스스로 율법을 완성하여 살아나는 수 밖에 다른 길이 없다. 하지만 이 길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옛 언약은 실은 은혜의 언약을 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율법을 통하거나 율법에 의해서는 사람은 저주의 판결을 받게 되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필요로 해야 함을 알려준다. 더욱이 옛 언약은 이스라엘이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설득하기 위해 주어졌다.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아 언약 밖으로 쫓겨나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그리스도가 오기까지 옛 언약은 인간의 저주 상태를 가장 확실하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셨고 우리의 모든 죄악을 대속하셨다. 그는 단지 사람만이 아니라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그 일을 이룰 수 있으셨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에게조차 율법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빠뜨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언약으로써 하나님은 그 율법을 통해 사랑 가운데 먼저 자신을 그의 백성에게 주셨다. 율법의 형태가 법적인 형식을 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의 언약 역시 은혜의 언약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양면을 띄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주시면서도 뒤로 물러나셨다. 자신을 계시하시면서도 베일 뒤에 숨으셨다. 이제 율법은 언약의 율법으로 우리에게 임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며 사랑을 요구하는 것으로 우리와 및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규정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빛 가운데 율법을 볼 때 그 율법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깨어지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서 살아가는 삶 전체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 및 그 사랑의 요구를 보여주면서 우리로 하여금 더욱 깨어지게 만든다. 그때에도 여전히 부분적으로 깨어질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무책임하고 무반응적인 삶에 대해 얼마나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겠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요구로 나타나는 언약의 법으로써의 율법은 우리 안에 책임을 일깨우고 계속적으로 책임 의식을 갖도록 채촉한다.
우리가 우리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여길 때, 우리의 사랑을 위한 지침과 규칙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놓이게 될 것이다. 언약의 율법으로서의 율법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표현할 것일 뿐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이 ‘사랑-율법’은 하나님도 복종해야 하는, 하나님을 초월하여 있는 어떤 외적인 기준이 아니다. 또는 ‘사랑-율법’은 하나님께서 임의적으로 다른 것을 명령할 수 있는 그런 것도 아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발생하여 하나님을 통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율법이 하나님 위에 있지 않고 또한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고백은 스콜라 철학이 게으르게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그러한 신학적인 관건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고백은 오늘날까지 큰 가치가 있다. 이는 율법을 언약의 율법으로 고백하기 때문에 발견되는 가치이다.
우리는 율법을 하나님을 벗어난 어떤 외적인 기준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러할 때 우리는 율법을 신격화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기본적으로 율법주의에서 발견된다. 언약적 율법으로써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규정이다. 그 율법에 따르는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자라난다. 율법을 지키는 데 반드시 포함되는 것은 주의 사랑에 사로잡혀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때 우리가 살면서 염려하게 되는 것은 주의 율법에 어긋나는 어떤 일을 하여 하나님을 실망시킬까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율법주의는 그 목적이 하나님을 위하거나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 가운데 사는 데 있지 않고 율법 자체를 지키는데 있다. 율법주의자들의 최고의 목적은 율법에 일치하여 사는 것이다. 이는 수고로운 일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위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피조물을 섬겨서는 안 된다. 심지어 율법마저 섬겨서는 안 된다. 그러할 경우 율법의 기능이 너무 많은 힘을 갖게 되고 사람들은 율법을 오용하게 되고 율법 자체를 향상시키게 된다. 율법주의는 하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모든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을 위해 충성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을 언약의 율법으로 알 때 우리는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할 수 있게 된다.
율법주의의 전형적인 표현은 바리새주의에서 발견된다. 이는 특히 안식일 명령에 대한 자세에서 분명하여진다. 그리스도의 설명에 따르면 율법주의는 사람이 안식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율법을 신성화하여 섬기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율법이 오용되는 정도는 바리새주의에서 발견되는데,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자랑하였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막 2:27)고 말씀하셨다. 이 의미는 하나님은 언약적 율법 안에서 사람의 삶에 복을 베푸시며 사람은 율법에 따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안식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청교도의 여러 형태 역시 율법주의에 빠진 것들이 있다. 특히 어떤 청교도 단체 내에서는 안식일에 대한 명령에 초점을 두었다. 여기서 문제는 안식일과 관련한 순종과 섬김이 본질적으로 율법 자체과 관련되어 버린 사실이다. 그러한 율법주의는 언제나 교회 내에서 패배하는 것은 아니다. 종종 사람들은 율법 자체를 지키기 위해 율법에 일치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율법의 노예가 되고 율법은 속박하는 세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율법이 주어진 목적과 상반되게 된다. 그 이유는 은혜로 받은 율법을 하나님과 교제하고 사랑하는 규칙으로 사용할 때 사람은 율법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더욱이 율법을 임의적인 것으로 여기는 생각은 쉽게 극복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전혀 다른 뭔가를 명령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여야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하나님이 사랑 가운데 우리에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기준을 발견하도록 하는데서 하나님의 주권이 칭송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거부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떻게 더 크게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은 율법이 임의적이어야만 보장 받을 수 있다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전우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율법을 결코 말할 수 없게 된다. 이 관점에 의하면 전우주적으로 적용되는 율법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법에 묶여 있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는 더 이상 주권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온 우주에 적용되는 율법이 없는 것으로 전제하기 때문에 모든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결정할 필요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는 인간의 마음과 주어진 상황 만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결정할 수 있겠는가? 다른 말로 하면, 그렇게 되면 상황 자체가 율법이 되며 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 자체가 율법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율법이 아니며 도리어 상황과 인간의 사랑을 신성화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인간들은 이러한 주장과 함께 참으로 가장 달갑지 않은 형태의 이상주의에 이르렀다. 인간들은 다양한 관계의 이상들을 형성하여 놓았다. 인간들은 그러한 이상으로부터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율법을 따로 만들었다. 이는 인간은 완전하게 자아 의지적이며 자아 중심적인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종종 인간이 만든 율법에서 나온 그러한 행위와 자세를 여러 인간 관계 가운데서 보게 된다. 결혼 관계에서, 가족 공동체 내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람과 소유의 관계 속에서, 집단과 집단의 관계 속에서, 나아가 국가들과의 관계 가운데서조차 인간이 만든 율법을 적용한다. 하지만 사물과 인간의 사랑을 신성화하는 이상주의는 실제로는 불법의 형태일 뿐이다. 물론 이상주의와 함께 많은 불법이 묵인되고 위선이 난무하게 된다! 우리는 이상주의를 통해 “사랑은 신이다”라는 전제에 이른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고 선포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에 복종함으로써 이 결론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출처] 3)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작성자 스데반 황 생명수 쉼터/한아름 'S.G. 드흐라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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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기 십자가 교리: 인간의 십계 중 제7계명(간음하지 말라)의 죄에서 벗어날 길 없는 창기와 같은 존재로 색욕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기에 구세주가 색욕의 함정으로 들어가 창기를 취하고 죄인이 됨으로써 인류를 구원한다 창기십자가에서 탈퇴한 교인들은 하나같이 사이비라고 지탄했지만 창기십자가 교인들은 탈퇴 신도들의 주장을 음해라고 주장.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 "이 종교단체는 폐쇄적인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어 그 안에서 제2, 3의 피해자가 나올 수 있다" "창기십자가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이 이성적 판단능력을 갖기 전 창기십자가의 교리에 따라 희생당하고 있다" "실제 모 예능학교라는 창기십자가 대안학교에서는 일반 교육과정과 달리 창기십자가 교리 교육이 이뤄지고 있어" .......
"신도들은 창시자를 여보, 신랑, 낭군님으로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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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나라 한농 박명호 교주 창기 십자가 한농 복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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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사깃꾼에 멍드는 여심-돌나라 탈퇴 여성"나는 교주의 성노리개"2012. 12. 13.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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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씨는 1987년경 부모를 따라 돌나라에 가입했다. 1996년부터 2003년까지는 돌나라에서 생활했고, 이곳에 있는 동안 이 씨는 주님으로 따르던 박 씨에게 성적 유린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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