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전체보기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때가 있다이미지 전체보기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때가 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사람한테서 하늘 냄새를 맡아 본 적이 있는가? 스스로 하늘 냄새를 지닌 사람만이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이런 경험은 없는가? 텃밭에서 이슬이 내려 앉은 애 호박을 보았을 때 친구한테 따서 보내주고 싶은 그런 생각 말이다. 혹은 들길이나 산길을 거닐다가 청초하게 피어있는 들꽃과 마주쳤을 때 그 아름다움의 설레임을, 친구에게 전해 주고 싶은 그런 경험은 없는가? 이런 마음을 지닌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영혼의 그림자처럼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은 친구일 것이다. 좋은 친구는 인생에서 가장 큰 보배이다 친구를 통해서 삶의 바탕을 가꾸라. - 좋은생각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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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억울했던 분을 생각하라

살다보면 억울한 일을 겪을 때가 적지 않다.
억울한 일은 직장에서도 일어나고
길거리에서 집안에서, 심지어 교회와 노회와 총회와
기독교 단체 안에서 생기기도 한다.
그리고 그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홧병을 얻어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그러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모든 것을 아시고 마침내는 잘잘못을 가려 주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할 수 있는 대로 억울함을 밝히고 풀도록 끝까지 힘쓰되
그 억울함이 나의 삶을 삼켜버리지 않도록
내 마음과 생각과 말과 행동을 잘 다스리면 좋지 않겠는가?
-박동현 목사의 글 ‘억울한 일을 겪을 때’에서-

정말 너무 억울한 일을 겪으면
여간한 믿음이 아니고서는 무엇보다도
정서적으로 이를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어떡합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하게 목숨을 잃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서
이 일을 풀어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에 앞서, 나도 혹 남을 억울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억울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그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서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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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침례), 자유로 가는 길(The Way to Freedom)

 

부모들이 자녀들로 하여금
세례(침례)를 받게 할 때,
그들은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예수님의 형제 자매로서 성장하며
삶을 살아가고, 그리고 성령에 의하여
인도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출생을 통하여 아이는 부모에게 맡겨집니다
세례(침례)를 통하여 아이는 하나님께 맡겨집니다

세례(침례) 때에 부모들은 그들의 부모 됨은
하나님의 부모 됨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것과
아버지 됨과 어머니 됨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침례)는 부모들을 아이들이
자기의 소유물이라는 생각으로부터 해방시켜 줍니다

아이들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돌보아 주기 위하여
부모들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아이들을 귀빈으로서 집으로 환영하고
그들에게 육체적, 정서적 그리고 영적인 자유를 주어서,
그들 자신도 집을 떠나 부모가
될 수 있게 하는 것이 부모가 할 일입니다

이와 같이 세례(침례)는 부모들에게
부모가 할 일을 일깨워 주며,
또한 세례는 아이들을 자유의 길로 해방시켜 줍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사랑하는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위에,

너희자신을 세우며

 

성령님안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너희자신을 지키며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유다서 20,21절 에서,,

       

                                        자막제작 : http://cafe.daum.net/



       

       

       세례(침례)는 하나의 통과 의식입니다
      유대인은 대탈출을 감행하여 홍해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갔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고통과 죽음을 지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집으로 탈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세례(침례)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우리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고 계십니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침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겠느냐?"
      (마가복음 10:38)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세례(침례)를 가리켜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침례)(로마서6:4)라고
      불렀습니다.

       

      세례(침례)를 받는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노예에서 해방으로,
      그리고 죽음에서 새 생명으로 가는 여정을
      통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 있는 그리고
      예수님을 통한 생명에 대한 헌신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당신과 하나님의 관계는 일회적인 관계가 아니다.
      당신을 붙잡고 있는 그 손은 때로는 당신을 끌어올리고

      때로는 지체시키고, 때로는 멈춰 세운다.
      하나님은 당신을 ‘걷게 하시고’ 또 당신을 ‘멈춰 세우시지만’
      절대로 당신을 포기하지는 않으신다.


      토미 테니의 ‘돌이킴’ 중에서

      우리는 때론 신앙의 정체를 경험합니다.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막막함과 주님의 얼굴조차

      가리워진 듯한 두려움에 방황하며 몸부림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멈춰버린 그 때에도 주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원하는 길을 따라 헤매다
      주님의 정지신호를 놓쳤을 뿐입니다.
      주님과 함께 걷고 함께 쉬고 다시 함께 걸어가십시오.
      멈춰 있는 지금 새로운 힘과 능력으로

      다시 걷게 하실 주님을 찬양합니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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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태복음 6장 6절 ]

      <한글> ①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영어> ①But thou, when thou prayest, enter into thy closet, and when thou hast shut thy door, pray to thy Father which is in secret; and thy Father which seeth in secret shall reward thee openly.

      (헬라어> ①su;< dev, o{tan proseuvch/, ei[selqe eij" to;< tamiei'ovn< sou, kai; kleivsa" th;n< quvran< sou, provseuxai tw'/< patriv< sou tw'/ ejn tw'/ kruptw'/: kai; oJ< pathvr< sou oJ blevpwn ejn tw'/ kruptw'/ ajpodwvsei soi ejn< tw/'< fanerw/'.

       

       [문장 분석]

       

      [제1 문장]

       [싀] [데]  [탄]  [프로-ㅎ케-]  [이셀세-]   [이스] [토]   [타미이온]  [수-]  [카이]  [클이사스]

      su;< dev, o{tan proseuvch/, ei[selqe eij" to;< tamiei'ovn< sou, kai; kleivsa"

       [테-ㄴ][롼]  [수-]  [프슉-사이]   [토-]  [파트]    [수-]   [토-]     [엔]    [토-] [크륍-]

      th;n< quvran< sou, provseuxai tw'/< patriv< sou tw'/ ejn tw'/ kruptw'/: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    

      But thou, when thou prayest, enter into thy closet, and when thou hast shut thy door, pray to thy Father which is in secret

      품사약어표

      부사절[때]

      주 절-I

      주어

      접속사

      동사

      주어

      동사

      부사구[장소]

      su;

      dev

      o{tan

      proseuvch/

      su;

      ei[selqe

      eij"

      to; tamiei'ovn

      sou

      너는

      [그러나]

      때에

      기도

      [너는]

      들어가

      골방

      thou

      But

      when prayest thou enter into into closet thy

      대인주

      동가현중단2

      대인주

      동명과능단2

      전목

      관+명목중단

      대인소

       

       

       

      proseuvcomai

       

      eijsevrcomai

       

      tamiei'on

       

       

       

       

      [프로-ㅎ코 마이]

       

      [에 ㄹ ㅎ코 마이]

       

      [타미이온]

       

       

      주 절-II

      주 절-III

      접속사

      주어

      동사

      목적어

      주어

      동사

      간접목적어

      kai;

      su;

      kleivsa"

      th;n quvran

      sou

      su;

      provseuxai

      tw' patriv

      sou

      tw'/

      ejn

      tw'/ kruptw'/

      [그리고]

      너는

      닫고

      문을

      [너의]

      [너는]

      기도하라

      아버지께

      [~바]

      중에 계신

      은밀한

      and

      thou

      when - shut

      door

      thy

      thou pray to Father thy which is in secret

      대인주

      동령과능주남단2

      관+명목女단

      대인소2

      대인주

      동명과디단2

      관+명여남단

      대인소

      관여남단

      전여

      관+형여중단

       

       

      kleivw

      quvra

      su;

       

      proseuvcomai

      pathvr

      su;

      oJ

       

      kruptov"

       

       

      [클이오-]

      [롸]

      [싀]

       

      [프로-ㅎ코 마이]

      [파테-ㄹ]

      [싀]

      [호]

       

      [크륍스]

       

       

       [제2 문장]

       [ 이][호]  [파-ㄹ] [수-]  [호] [블포-ㄴ] [엔]  [토-] [크륍 -]   [아포 -세이][소이] [엔]  [토-] [ㅎ파 네-]

      kai; oJ< pathvr< sou oJ blevpwn ejn tw'/ kruptw'/ ajpodwvsei soi ejn< tw/'< fanerw/'.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and thy Father which seeth in secret shall reward thee openly.

      품사약어표

      접속사

      주어부

      술어부

      주어

      동사

      부사구

      동사

      간접목적어

      부사구

      kai;

      oJ pathvr

      sou

      oJ

      blevpwn

      ejn

      tw'/ kruptw'/

      ajpodwvsei

      soi

      ejn

      tw/' fanerw/'

      아버지가

      네/[너의]

      [바]

      보시는

      중에

      은밀한

      갚으시리라

      [네게]

      [으로]

      [들어내심]

      and Father thy which seeth in secret shall reward thee openly

      관+명주남단

      대인소단2

      관주남단

      동분현능주남단

      전여

      관+형여중단

      동직래능단3

      대인여단2

      전여

      관+형여중단

       

       

      suv

       

      blevpw

       

      kruptov"

      ajpodivdwmi

      suv

       

      fanerov"

       

       

      [싀]

       

      [블 포-]

       

      [크륍 스]

      [아포 도-미]

      [싀]

       

      [ㅎ파 네 스]

       

       

      [ 주석 ]

       

      ㅇ네 골방에 들어가 - '골방'의 원어 '타미에이온'(타메이온)은 '자르다'는  뜻의 '템노'와 '청지기'란 뜻의 '타미아스'의 합성어로서 세상 모든 것과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과만 내밀(內密)한 대화를 나눌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저장실(store room), 내실(inner room), 침실(bed room, 사 26:20)등을 가지고 있다. 골방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 드리던 장소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엘리사의 침실과 비숫한 곳이었던 것 같다(왕하 4:33). 여기서 골방은 바리새인들이 기도의 장소로 선택하였던 '회당과 큰 거리 어귀'와 뚜렷이 대조되고 있다.
      ㅇ문을 닫고 - 사 26:20에는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간 숨을지어다'란 말씀이 있는데, 본문은 분명히 이 예언의 말씀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사야가 이 예언을 베풀 때는 분명 마지막 심판날의 무서운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아마 제자들이 이런 심판날을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기도하
      되, 이를 관습화하기 원하셨던 것같다. 여하튼 자신의 방문을 닫는다는 것은 잠시나마, 오직 자신과 하나님 이외에는 어떠한 제 3자의 개입을 불허(不許)한다는 뜻인 동시에 순결한 영혼의 교제만이 있을 뿐임을 시사한다.
      ㅇ은밀한 중에...기도하라...갚으시리라 -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 앞에 아무런 숨김없이 간구하는 자에게 그 기도의 자리에 함께 하셔서, 모든 것을 듣고 계셨던 그 하나님께서 모두 '갚으실'(4절)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품성을 온전히 반영한 약속이다.  

       

      [해석] 

       

      6절은 참된 기도 자세의 전형을 보여준다. 

      골방은 하나님의 청지기가 그 주인 되신 하나님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듯

      세상적인 모든 것과 단절한 상태에서 하나님과 은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곳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말은 단순한 기도의 장소를 지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상징적으로 참된 기도의 방식과 의미를 지침해 주는 말로 이해할 수 있겠다.

       

      실로 참된 기도는 세상의 안목에 구애됨 없이

      기도자와 그 기도의 유일한 대상이신 하나님과의 은밀한 만남과 인격적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출처: 개혁주의마을/이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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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일보 그 기자(이태형기자)와 그 목사(김석년목사)를 경계하며

       

      【국민일보 그 기자(이태형기자)와 그 목사(김석년목사)】

       

      ◈이단 동성연애자 헨리나우웬(이단 카톨릭)사제는 행복한가?

      김석년목사(서초성결교회:서초구 반포동)의말과 이단이며 동성연애자인 헨리 나우웬의 행복

       

      어떤점에서는 이단 동성연애자 헨리나우웬을 행복한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하면서 혼돈에 빠지는 크리스천이 있는 듯 하다.
       
      왜냐하면 김석년목사같은 종교인은 나우웬을 통해서 참다운 인생의 성공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국민일보 이태형기자와 자랑스럽게 인터뷰하는 모습을볼때,그런착각을 느낄수도 있을듯하다.그것을 좋다고 인터뷰하는 이태형기자도..
      (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read.asp?page=1&gCode=area&arcid=0004213328&code=23111111

       

      그러나 진정 예수를 따르는 목회자와 성도들과 참된 예수님의 몸된 교회는
      【예수 외에도 구원이 있다는 보편구원론자이며 동성연애, Gay 인 헨리 나우웬】은

       

      ①◈행복하지 않을 뿐더러,
      ②◈지금 지옥에서 엄청나게 고통을 당하며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③◈그리고 목사나 광명의 천사의 가면을 쓰고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지옥 인도자'들의 롤모델이기 때문에
      ④◈이단 헨리 나우웬이나,그를통하여 참다운 인생의 성공을 발견했다는 ★김석년목사와 그를인터뷰하는 기자들의부류를 조심해야할것이라고 많은크리스찬들이 언급하고있다고전해진다

      ⑤■ 동성연애자 나우웬을통해 인생의 성공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하는 고백은 →김석년목사(서초교회:서초구 반포동 소재)의 고백(http://missionlife.kukinews.com/article/read.asp?page=1&gCode=area&arcid=0004214565&code=23111111)일 뿐이지,
      ⑥■예수님의 참된 목회자들은 이단을 경계하면서, '동성연애자 헨리 나우웬은 성공한 인생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Gay(동성연애자) 사제'라고 경계한다.
      ⑦■이것이 김석년목사와 예수님의 참된 목회자들의 차이점이다.

       

      한국사회와 한국교회,공공의유익위해 이글을 공표합니다

       

      ⓐ국민일보는 단순한 일간지이며 이태형기자는 월급쟁이 기자일 뿐이다.기독교의탈을쓰고 카톨릭사제를 홍보하는것을 경계하며
      ⓑ더이상 성경적 복음주의 기독교신문이아닌→기독교의 탈을 쓴 국민일보 불매운동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그리고 전국적으로

                                                                      대대적으로 할 수있음을 밝혀둔다.

       

      국민일보 이태형종교기자는 국민일보 '한마당'이라는 기고란에 '나우웬의 벤치'(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3684304&code=11171211)라는 아티클을 쓰며 이단 카톨릭 동성연애 사제 헨리 나우웬을 은근히 좋은 각도로 홍보하고 있다고 많은 목사님들이 염려하며 지적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또한 국민일보 이태형종교기자와 김석년목사는 얼마나 친밀한 관계인지, 이단 동성연애(Gay) 카톨릭 사제 헨리 나우웬의 영성을 추구하는 바에 있어서 아름다운 동행을 하는 관계인지는 몰라도,, 이태형기자는 아티클을 쓸 때도 "서초교회 김석년 목사는 “목회는 하나님이 ‘봐 주셔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봐 주시는 만큼’ 목회하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이 봐 주시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항복해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다시 ‘하나님이 봐 주신다’고 느껴지면 ‘다시 목회를 하면 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라고 인용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동행인듯 하다고 많은 성경적 목사들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보면 김석년목사는 동성연애자 이단 카톨릭 사제 헨리 나우웬을 통해서 참다운 인생의 성공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한 것이 시간이 지나가면 하나님이 봐주신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닌지 많은 목사님들이 실소를 금치 못한다고 많은 성도들이 언급한다고 전해진다.

       

       

                †한국교회이단연구소

      참고사이트: http://cafe.naver.com/joelarmy   http://cafe.daum.net/fgbc

       

       

       

       

       

       

       

       

       

       

       

       

      * 본 기사와 글들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마지막 배도 시대에 미혹의 영을 경계하고자 소개한 것임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사단도 광명의 천사를 가장하여 역사합니다. 기독교의 탈을 쓰고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이 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76. 은혜로 구원하시는 하나님 우리 예수님   

      시편 130편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시편 130편은 15개의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 중에 11번째 노래이다. 이 노래들은 일반적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에 의하여 불린 노래라고 한다. 예루살렘은 산 위에 위치하였으며 따라서 순례자들은 산을 올라가야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주장은 이 노래들은 바벨론에서 포로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부른 노래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올라가는”(Ascent)이라는 용어와 함께 15개의 시편은 이스라엘 남자들이 여인의 뜰에서 성전에 가까운 뜰로 가려면 15번의 발걸음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이라고 지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에 대하여 추측할 필요가 없고 단지 올라가는”(Ascent)이란 의미를 죄로 인한 절망의 늪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의 기쁨으로 옮기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

       

      시편 130편은 마치 예수님의 복음이 선포하듯이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하심이 은혜로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선포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죄와 그 죄의 결과 때문에 하나님께 울부짖고 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3절). 그는 자신의 죄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얼마나 흉악한 것인가를 의식하면서 하나님의 공의가 아닌 자비를 구하고 있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4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 얻을 수 있다는 복음은 불법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참 복음을 거절해왔다. 내 노력이 없이 구원을 얻는다면 내가 맘대로 죄를 지어도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바울은 이러한 오해를 로마서에서 다루고 있다(롬 6:15). 중요한 내용은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의 구원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이끈다는 사실이다(참조: 잠 1:7).

       

      여기서 성경에서 말하는 경외함(FEAR)에 대하여 요약해 보자. 각 영어 문자에서 그 의미를 요약해 볼 수 있겠다.

      (FEAR)

      F: Faith in Christ.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오직 주님과 그의 말씀만을 믿는 것이다.

      E: Enjoyment : 웨스트 소요리 문답 1문 1답을 보면 사람의 제일가는 본분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가는 본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주님과 바른 관계가 맺어졌다는 뜻이다.

      A: Active Obedience : 우리가 만일 정말로 구원 받았다면 우리는 자비하신 하나님께 모독이 되는 행동을 피할 것이다.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순종하길 원할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소원을 우리 마음속에 넣으셨기 때문이다.

      R: Reverential Awe : 우리는 전능하시고 자비가 많으신 창조주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길 원한다.

       

      이러한 의미로 시편 130편의 기자는 사유함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믿고 있다.

       

      제임스 보이스는 그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전의 시편 130편의 강해 설교로부터 하나님의 용서하심의 4가지 주요 특성을 끄집어내었다.

      첫째, 하나님의 용서는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 제한이 없다. 모든 죄가 다 용서된다.

      둘째, 하나님의 용서는 한번 용서하시면 영원하다. 그 용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위한 용서이다.

      셋째, 하나님의 용서는 구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넷째, 하나님의 용서는 용서 받은 그 사람을 경건한 삶으로 인도한다.

      필자가 한 가지만 더 추가한다면

      하나님의 용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하여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우리는 오직 주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며 우리의 소망을 주님께만 두어야 한다. 이는 오직 예수님께 소망을 두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완전한 구속이 허락되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얼마나 위대한 구세주이신가!

       

      [출처] 76. 은혜로 구원하시는 하나님 우리 예수님|작성자 스데반 황
      생명수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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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에서 타락으로(?) (히 6:4-6)

      1. 히브리서의 배경
      1) 히브리인들은 아브라함 이후부터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하나님의 각별하신 사랑과 관심을 받고 살아온 민족이다.
      2) 그들은 ( 모세 )를 통해서 율법을 받았고, ( 제사장 )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했으며, ( 선지자 )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즉 한번 ( 비췸 )을 얻고 하늘의 ( 은사 )를 맛보았다. 또한 이런 일들은
      ( 성령 )에 참예한 일들이었다.

      3)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 기름부음 )을 받은 자들이 증거하는
      핵심인, 언약대로 오신 메시야를 거부했다. 다만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천사, 모세, 아론 등은 위대하게 보았다.
      (눅 24:44-47)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 율법 )과 선지자의 ( 글 )과 ( 시편 )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 성경 )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 기록 )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외형적인 율법의 행위와 제사제도에만
      집중하며(- 외식 ) 오신 메시야를 거부하는 히브리인들
      (-대표적으로는 바리새인)에게 “화 있을진저”의 저주를
      선언하신 것이다.
      그래서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타락한 자들"이다.

      5) 율법과 제사로 종교의식을 거창하고 화려하게 함으로
      비췸을 얻고 은사를 맛보는 경험을 했다(-성령에 참예했다)고
      할지라도, 정작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깨닫지 못하고
      영접하지 못하므로 결코 ( 구원 )에 이르지 못하고,
      너희를(- 불택자 ) 위해서는 어떠한 회개의 방편도 다시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6) 그러므로 본문은 예수 믿다가 타락하면 얻은 구원을 잃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아예 예수를 믿지 아니한 히브리인들을
      두고 한 말씀이며, 이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온 종교의식에만
      빠져있었기 때문에, 정작 의식이 가리키는 그리스도에게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2. 문제 제기 - 구원을 받았던 자가 구원을 못 받는다?

      (히 6: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1) 본문은 구원을 받았지만 타락하면 다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뜻으로 대부분이 이해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믿음에 거하게 하시고 구원하신 자(- 택자 )가 구원을
      잃어버린다면, ( 십자가 )의 공로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것이며, 또한 하나님과 동등하거나 월등한 존재가
      있다는 ( 이원 )론이나 ( 영지 )주의에 동조할 수밖에
      없게 된다.

      2) “타락한 자들”이란 구원의 증거를 듣고, 보고, 만지고도
      다른 구원(?)의 길을 찾아 떠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떠나가지 않고 예수께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다.

      (요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요일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3. 본문 해석
      “한번 비췸을 얻고”
      (요 1:9-11)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 참 빛은 누구에게나 비추어진다. 문제는 참 빛을 구원의
      빛으로 알지 못하는(- 영접하지 못하는 )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아는(- 영접하는 ) 사람도 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1) 요한복음 6장의 전반부는(6:1-25)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나타내는 ( 표적 )의 사건이며, 후반부(6:26-71)는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표적사건을 ( 해석 )해주시고, 해석의
      ( 결과 )를 보여주시는 말씀이다. 즉 예수께서는 복음서에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 구약 )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말씀을 증거 하시면서 하늘의 비밀을 밝혀주셨다.

      2)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직접 듣고, 보고, 만지고도 그분을
      떠난 사람들은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므로 하늘이 주신
      ( 은사 )이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그분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사람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떠나간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제자들처럼....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1) 이처럼 예수께서 성령을 힘입어 행하시는 모든 표적들을
      직접 본 사람들, 만진 사람들, 즉 성령에 ( 참예 )하였던
      사람들은 허다하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다 믿음이
      있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2) 또한 성령을 통한 오병이어의 표적과 그 떡을 먹었던 수많은
      사람들, 병 고침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표적을 직접 보고 거기(- 성령 )에 참여하고도, 그들은 메시야를
      십자가에 매달으라고 외쳤다.
      (마 27:22)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마 27:23) “저희가 더욱 소리 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3) 구약성경을 통해서 증거 되었던 메시야는 곧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예수였고, 이분은 구약을 ( 해석 )해 주심은 물론,
      구약의 예언대로 ( 표적 )을 일으키시며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셨다.

      (마 11:4-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4)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내세의 능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맛보고도 이들은 떠났다. 이들은 분명히 성령에 ( 참예 )했고,
      하늘의 ( 은사 )를 맛보았고, 참 빛의 ( 비췸 )을 받았었다.

      (요 5:39-42)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 내 )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 내 )게 오기를 ( 원 )하지
      아니하는도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 없음 )을 알았노라]

      -퍼온 글
      By: 교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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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할 사람만 있으면 산다
          90세가 다 된 할아버지가 삶의 의욕을 잃고
          홀로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서울에서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데리고 내려왔다.
           
          방안에 들어서지도 않고, “아버지, 손자 며칠만 데리고 계세요
          ”라는 말만 남기고 그냥 떠나갔다.
          그날부터 할아버지는 손자를 위해 하루 세끼 밥을 짓고,
          반찬을 하고 땔감을 모아 불을 지피고,
          씨를 뿌리고, 채소를 가꾸고, 장을 담그고, 집수리까지 했다.


          어디서 힘이 났는지 할아버지도 모른다.
          이젠 손자를 위해 돈도 필요했다.
          열심히 농작물을 가꾸어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그래야 손자의 학비를 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역할이
          바뀌고부터 젊어진 기분이다.
          시간은 번개처럼 흘렀다.
          하루하루가 바쁘게 지나갔다. 어언 삼년이 흘렀다.
          어느 날 서울의 아들이 다시 왔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두툼한 봉투를 내어 놓았다.
          그날 밤, 아들은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드리고 다음날 새벽,
          손자와 함께 서울로 떠났다.


          그날부터 할아버지는 삶의 의욕을 잃었다.
          끼니도 거르는 채 마냥 방에 누워만 있었다.
          2주일이 지난 후 할아버지는 영면(永眠)하고 말았다.
           
          사랑할 사람이 떠나자 삶의 의욕을 상실한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한다. 사랑받지 못해 소외되어서
          자살을 한다고 말이다.
          아니다. 사랑할 사람이 없으면 죽고 싶다.
          사랑할 사람만 있으면 죽을 이유가 없다.
          사랑해야 하니까!
           
          십자가만 있으면 삶의 의욕이 생겨난다.
          사랑할 사람이 많아 죽었다가도 살아나신 예수님이 아니시던가.

          - 옮긴 글


          
        저작자 표시컨텐츠변경비영리 글: 보경님 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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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는 작은 일평생



        하나님이 주시는 하루는 참으로 귀한 날이다. 하루가 모여서 일 년이 되고 한평생이 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하루는 작은 일평생이다. 날마다 잠에서 깨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새로운 탄생이다. 새로운 아침과 같은 청년기를 거치면 곧 누워 잠자야 하는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다."라고 했다. 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말라 하나님은 어떻게 하루를 사용했는지 결산을 하신다. 그러므로 날마다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며, 하루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한다.
        한승진 선교사의 ‘하루의 삶’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이 공짜이지만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이 값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하루는 보너스요, 최고의 선물입니다. 세상의 보너스를 받고도 기뻐하는데 하루의 삶이 더 주어진다면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할 일입니까? 하루하루의 삶을 값지게, 하나님의 뜻대로 사십시오. 하루가 있다는 것이 희망이요, 기쁨이요, 평안이니까요. 주어진 한 날을 기분대로 무절제하게 사용한다는 것은 하루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무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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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력하지 않고서 사랑받을 수는 있어도
          노력하지 않고서 사랑할 수는 없네.

          사랑한다는 것은
          삶의 무거운 짐을 정면에서 떠맡는 것.

          무엇인가에 의지하고 싶다,
          무엇인가의 보호를 받고 싶다,
          무엇인가를 붙잡고 싶다,
          이러한 것들을 하나하나 내던져 버리고
          홀로 굳건히 서기 위한 노력.

          자기 중심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선
          그 누군가를 사랑할 수가 없네.

          사랑하려고 애쓰는 노력은
          자기 중심적� 생각과 행동으로 부터
          한 걸음씩 벗어나는 일.
          역경에 무너지지 않고
          고통에 쓰러지지 않고
          나의 슬픔을 뛰어넘어 환한 웃음으로
          그를 마주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그리하여 그 사랑으로 더욱더 성숙해지는 일.

          노력하지 않고서 사랑받을 수는 있어도
          노력하지 않고서 사랑할 수는 없네.

           

          = 가토 다이조 / 성숙한 사랑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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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례(침례), 통과 의식
            (Baptism, a Rite of Passage)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내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침례)를 주어라" (마태복음 28:19)
            우리가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과 친교를 맺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서의 생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수단으로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세례(침례)를 주신 것입니다
            세례(침례)를 통하여 우리는 세상을 향해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암흑의 자녀로 남아 있기를 원하지 않으며, 빛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원한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등지기를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 세상 속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세례(침례)를 통하여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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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릴리 바닷가 
           


           갈릴리 바닷가 그 언덕 그 마을
           다니시며 하신 일 너무나 아름다워
           머나 먼 하늘나라 이 땅에 찾아 와
           하늘 비밀 전해준 나의 주 예수님
           하나님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님
           나의 주 예수님 영원히 섬기리


           그 옛날 베다니 그 옛집 그 곳에
           향유 가득 준비한 마리아 있아오니
           언젠가 다시 오실 주님 사모합니다
           하늘 소망 주셨네 나의 주 예수님
           하나님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님
           나의 주 예수님 영원히 섬기리


           *어느 신대원생의 "시"
           -퍼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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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한 창조 질서(The Created order of Sacramesnt)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육신의 옷을 입혔을 때,
          비창조물과 창조물,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
          그리고 신성한 것과 인간적인 것이 합쳐져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은 죽음을 면치 못한 것들이
          모두 영원한 것이 되고, 유한한 것이
          모두 무한한 것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그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창조물은 찬란한 면사포처럼 되었습니다

          이 면사포를 통하여 하나님은 그 얼굴을
          우리들에게 나타내 보이십니다
          이것을 창조 질서의 신성함이라고 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신성합니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랑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바다, 산과 나무, 해, 달, 별, 그리고 온갖 종류의 동물과
          사람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신성한 창문이 되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살아계시는 하나님     
           
                                        
           
          
          나는 주님의 임재를 원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신앙과 관련된 어떠한 것도 원하지 않는다.

          I want the presence of God Himself, or I don't want anything at all to do with religion. - A.W. Tozer
           



           

          3)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 참된 진리(드흐라프)

          2012/01/10 11:41

           3)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

          율법이 언약의 율법이라는 사실은 죄의 지식을 아는데 결정적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좀 더 다룰 필요가 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것은 적어도 율법에 대한 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난다. 하지만 양심의 가책이 죄의 참된 지식을 줄 수 있는가? 양심의 가책만으로는 우리는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으로( 51:17)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한다. 물론 하나님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에 사로잡히게 할 수 있다. 이러한 때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에 의해 하나님 앞에서 죄책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는 벌써 하나님의 은혜가 간섭한 결과로서 우리는 율법을 언약의 율법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종종 하나님이 짓누르고 깨뜨리실 때까지 자신을 책망하는 양심을 붙들고 오래 동안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책망을 받게 되면 그 책망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기 떄문에 우리는 율법을 사랑의 율법으로 보게 된다. 하나님은 사랑의 율법을 수단으로 하여 우리와의 관계를 정상화하신다.  

           

          소위 행위 언약의 율법은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10:28)는 규정이 아니다. , 이 계명을 지키라. 그러면 너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규정이 아니다. 행위 언약이라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는 공로 및 대가 개념이 전혀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언약을 통해 언제나 먼저 사랑을 베푸신다. 하나님은 그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하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규정하셨다. 이 관계에는 어떤 규칙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설정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규칙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 가운데 자라난다. 이와 같이 율법은 언약 율법(covenant-law)이다. 따라서 행위 언약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호의의 언약(covenant of Gods favor)이라고 칭하는 것이 더 낫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명령은 언약을 떠난 자에게 해당한다. 그에게는 다시 스스로 율법을 완성하여 살아나는 수 밖에 다른 길이 없다. 하지만 이 길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옛 언약은 실은 은혜의 언약을 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율법을 통하거나 율법에 의해서는 사람은 저주의 판결을 받게 되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필요로 해야 함을 알려준다. 더욱이 옛 언약은 이스라엘이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설득하기 위해 주어졌다.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아 언약 밖으로 쫓겨나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을 그리스도가 오기까지 옛 언약은 인간의 저주 상태를 가장 확실하게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셨고 우리의 모든 죄악을 대속하셨다. 그는 단지 사람만이 아니라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그 일을 이룰 수 있으셨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에게조차 율법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빠뜨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언약으로써 하나님은 그 율법을 통해 사랑 가운데 먼저 자신을 그의 백성에게 주셨다.  율법의 형태가 법적인 형식을 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의 언약 역시 은혜의 언약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양면을 띄었다. 하나님은 자신을 주시면서도 뒤로 물러나셨다. 자신을 계시하시면서도 베일 뒤에 숨으셨다. 이제 율법은 언약의 율법으로 우리에게 임한다. ,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며 사랑을 요구하는 것으로 우리와 및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규정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빛 가운데 율법을 볼 때 그 율법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깨어지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서 살아가는  삶 전체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 및 그 사랑의 요구를 보여주면서 우리로 하여금 더욱 깨어지게 만든다. 그때에도 여전히 부분적으로 깨어질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무책임하고 무반응적인 삶에 대해 얼마나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겠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의 요구로 나타나는 언약의 법으로써의 율법은 우리 안에 책임을 일깨우고 계속적으로 책임 의식을 갖도록 채촉한다.

           

          우리가 우리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여길 때, 우리의 사랑을 위한 지침과 규칙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놓이게 될 것이다. 언약의 율법으로서의 율법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표현할 것일 뿐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유래되었다. 사랑-율법은 하나님도 복종해야 하는, 하나님을 초월하여 있는 어떤 외적인 기준이 아니다. 또는 사랑-율법은 하나님께서 임의적으로 다른 것을 명령할 수 있는 그런 것도 아니다. 이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발생하여 하나님을 통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율법이 하나님 위에 있지 않고 또한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고백은 스콜라 철학이 게으르게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그러한 신학적인 관건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고백은 오늘날까지 큰 가치가 있다. 이는 율법을 언약의 율법으로 고백하기 때문에 발견되는 가치이다.

           

          우리는 율법을 하나님을 벗어난 어떤 외적인 기준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러할 때 우리는 율법을 신격화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기본적으로 율법주의에서 발견된다. 언약적 율법으로써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규정이다. 그 율법에 따르는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자라난다. 율법을 지키는 데 반드시 포함되는 것은 주의 사랑에 사로잡혀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때 우리가 살면서 염려하게 되는 것은 주의 율법에 어긋나는 어떤 일을 하여 하나님을 실망시킬까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율법주의는 그 목적이 하나님을 위하거나 주님과의 사랑의 교제 가운데 사는 데 있지 않고 율법 자체를 지키는데 있다. 율법주의자들의 최고의 목적은 율법에 일치하여 사는 것이다. 이는 수고로운 일은 될 수 있지만 하나님을 위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피조물을 섬겨서는 안 된다. 심지어 율법마저 섬겨서는 안 된다. 그러할 경우 율법의 기능이 너무 많은 힘을 갖게 되고 사람들은 율법을 오용하게 되고 율법 자체를 향상시키게 된다. 율법주의는 하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모든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을 위해 충성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을 언약의 율법으로 알 때 우리는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할 수 있게 된다.

           

          율법주의의 전형적인 표현은 바리새주의에서 발견된다. 이는 특히 안식일 명령에 대한 자세에서 분명하여진다. 그리스도의 설명에 따르면 율법주의는 사람이 안식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율법을 신성화하여 섬기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율법이 오용되는 정도는 바리새주의에서 발견되는데,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자랑하였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2:27)고 말씀하셨다. 이 의미는 하나님은 언약적 율법 안에서 사람의 삶에 복을 베푸시며 사람은 율법에 따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안식의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청교도의 여러 형태 역시 율법주의에 빠진 것들이 있다. 특히 어떤 청교도 단체 내에서는 안식일에 대한 명령에 초점을 두었다. 여기서 문제는 안식일과 관련한 순종과 섬김이 본질적으로 율법 자체과 관련되어 버린 사실이다. 그러한 율법주의는 언제나 교회 내에서 패배하는 것은 아니다. 종종 사람들은 율법 자체를 지키기 위해 율법에 일치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율법의 노예가 되고 율법은 속박하는 세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율법이 주어진 목적과 상반되게 된다. 그 이유는 은혜로 받은 율법을 하나님과 교제하고 사랑하는 규칙으로 사용할 때 사람은 율법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더욱이 율법을 임의적인 것으로 여기는 생각은 쉽게 극복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전혀 다른 뭔가를 명령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여야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하나님이 사랑 가운데 우리에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기준을 발견하도록 하는데서 하나님의 주권이 칭송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거부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방법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떻게 더 크게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겠는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은 율법이 임의적이어야만 보장 받을 수 있다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전우주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율법을 결코 말할 수 없게 된다. 이 관점에 의하면 전우주적으로 적용되는 율법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법에 묶여 있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는 더 이상 주권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온 우주에 적용되는 율법이 없는 것으로 전제하기 때문에 모든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결정할 필요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는 인간의 마음과 주어진 상황 만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결정할 수 있겠는가?  다른 말로 하면, 그렇게 되면 상황 자체가 율법이 되며 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 자체가 율법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율법이 아니며 도리어 상황과 인간의 사랑을 신성화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인간들은 이러한 주장과 함께 참으로 가장 달갑지 않은 형태의 이상주의에 이르렀다. 인간들은 다양한 관계의 이상들을 형성하여 놓았다. 인간들은 그러한 이상으로부터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율법을 따로 만들었다. 이는 인간은 완전하게 자아 의지적이며 자아 중심적인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종종 인간이 만든 율법에서 나온 그러한 행위와 자세를 여러 인간 관계 가운데서 보게 된다. 결혼 관계에서, 가족 공동체 내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람과 소유의 관계 속에서, 집단과 집단의 관계 속에서, 나아가 국가들과의 관계 가운데서조차 인간이 만든 율법을 적용한다. 하지만 사물과 인간의 사랑을 신성화하는 이상주의는 실제로는 불법의 형태일 뿐이다. 물론 이상주의와 함께 많은 불법이 묵인되고 위선이 난무하게 된다! 우리는 이상주의를 통해 사랑은 신이다라는 전제에 이른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8)고 선포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에 복종함으로써 이 결론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생명수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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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서 5,6,7 장은 제사장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 레위 지파에 속한 자들이  세움을 입어  하나님의 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제사장으로 있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최초의 대제사장인  아론과  레위 반열이 아닌 멜기세덱 제사장이 나옵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7:1) 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 레위는 아직 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7:10)

           

          1) 레위 지파인 아론 제사장의 역사와 후계자들

               최초의 아론 제사장은 모세의 기름 부음을 받아 임명되었습니다 40 년간 그 직분을 수행한 후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이 이어 받습니다 (20:25)   그리고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제사장으로 이어받습니다  그후  엘리제사장  사무엘, 사독등  유대교회 제사장들은 레위 족보에서   모세가 장막을 만든 이후 솔로몬이 성전을 재건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제사장 직분을 통하여 제사를 담당하였습니다

           

          2) 이러한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예법으로 간수해 놓은 것

               구약시대에는 양,,염소,비둘기를 제물로 하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희생에 대한 모형으로 구약 제사에 제물로 드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1:29; 36 ) 에서 예수님을 가르켜 "하나님의 어린 양"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라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론의 족보에 들지 않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으로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원히 계신 것 같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3) 완전무결하신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고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히9:12)   구약 시대에는 매번 피를 가지고 들어가야 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히10:10-12)     우리의 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흠없는 피로 온전한 속죄를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고 구원을 받는 것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종결을 지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다 이루었다 하시었습니다 (요19:30)

              히 6:20-7:3 에서 멜기세덱 제사장을 언급하며  예수님은 완전무결하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다  했습니다   이 멜기세덱은  1) 살렘의 왕으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있었습니다   2) 멜기세덱의 이름의 뜻은  평강의 왕, 의의 왕입니다   3) 레위 자손이 아닌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복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 했습니다  스스로 계신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5)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 하였습니다  레위 계통의 불완전한 제사장이 멜기세덱과 같은 제사장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4) 오늘날 교회의 명칭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교회를 보면 다양함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목사를 제사장으로 부르는 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성소에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벧전 2:5, 마27:51)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꿇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목사는 성도들이 다른 길로 가지않도록 가르치고 권면하고 경책함으로  성경 말씀을 영적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목사의 위치는 예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세우셨다 하셨습니다 

          우리의 제사장은 예수님이십니다   주님 나라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이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교리입니다  잘못되면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대제사장되신  예수님,   십자가에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의 피를 흘려주시고 우리 죄를 용서하신  위대하신 이름,  그 사랑과 은혜를 감사합니다 

                                  ( 새벽기도회  목사님 요약설교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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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先) (後) 지식

          선생이나 부모나 선배들이 일러 준 것을
          처음에는 덮어 놓고 믿고 해 본 결과 실
          효를 알게 되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길을 모르면 아는 사람에게 물어서 가는
          데 알고 가는 것이 아니고 믿고 간다.
          혼도 믿음으로 하는 것이지 뿌리째 송두
          리째 어찌 사람을 다 알고 하는가.
          약을
          알고 먹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음식도 믿고 먹지 어찌 다 일일이 실험
          해 보고 먹는가. 진실하고 존경할 만한
          분들이 열심히 권해서 해 보면 그대로
          되는 것이 많다. 인삼 같은 것은 효과를
          본 많은 사람들의 증언과 증거 때문에
          먹는다.


          예수 믿는 것도 수천 년 동안 너무도 존
          경스럽고 진실한 분들이 너무도 열심히
          죽으면서까지, 그렇게 많은 분들이 권해
          서 믿어 보면 과연 사실인 것을 후에 알
          수가 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하나님 손으로 지으신 만물의 신성함 (The Sacredness of God's Handiwork)
          우리는 천지 만물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천지 만물이란 '물건들' 이 가득 찬 장소로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또 우리가 원하는 모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 물건들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을 뜻하는 것일까요?
          또는 천지 만물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신성한 실제로서, 
          즉 하나님이 신의 무한한 아름다움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신성한 장소라고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가 천지 만물을 이용만 하는 경우, 
          우리는 마치 천지 만물의 소유자인 것처럼 
          접근하기 때문에 그 신성함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만물이
          우리를 창조하신 바로 그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또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나타 나셔서 우리들에게 예배와 경배드리기를 요구하는 장소라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손수 지으신 만물의 신성함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표현하는 사랑이 아름답습니다...♠




          사랑한다고 말합시다
          말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당신의
          마음을 알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않고
          당신은 누구도 당신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고 투정하겠죠
          때론 사랑한다고 표현합시다





          아주깊이 표현하여 사랑하는
          마음을 확실히 전달합시다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지도 않고
          당신은 누구도 당신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고 근심하겠죠





          무엇을 의식할 필요도
          누구를 경계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기에
          아름답게 표현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랑 한다고 말합시다





          말하는 사람만이 사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표현합시다





          표현하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랑을 이룰 수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
          말하고 표현하는 사랑이
          아름답습니다


          -좋은글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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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기십자가라는 교리로 창시자와 다수의 여신도간 자행되는 성추문이 공개돼 파장.

          8일SBS 그것이 알고싶다, 창기십자가 교리에 의해 폐쇄된 공간에서 성적 유린을 당하는 신도들의 이야기 방송.

          2009년 2월 한 여인: "자신이 하나님이라 믿었던 한 남자로부터 수년간 성적 유린을 당했으며 자신 말고도 많은 여성이 같은 일을 겪었다" "여기에는 어른들은 물론 어린 아이들까지 포함됐다" "종교단체의 창시자를 주님, 하나님으로 추앙하며 공동체 생활을 했다" "신도들은 창시자를 여보, 신랑, 낭군님으로 불러"

          창기 십자가 교리: 인간의 십계 중 제7계명(간음하지 말라)의 죄에서 벗어날 길 없는 창기와 같은 존재로 색욕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기에 구세주가 색욕의 함정으로 들어가 창기를 취하고 죄인이 됨으로써 인류를 구원한다

          창기십자가에서 탈퇴한 교인들은 하나같이 사이비라고 지탄했지만 창기십자가 교인들은 탈퇴 신도들의 주장을 음해라고 주장.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 "이 종교단체는 폐쇄적인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어 그 안에서 제2, 3의 피해자가 나올 수 있다" "창기십자가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이 이성적 판단능력을 갖기 전 창기십자가의 교리에 따라 희생당하고 있다" "실제 모 예능학교라는 창기십자가 대안학교에서는 일반 교육과정과 달리 창기십자가 교리 교육이 이뤄지고 있어"

          .......

          "신도들은 창시자를 여보, 신랑, 낭군님으로 불러"

          ...........

          돌나라 한농 박명호 교주 창기 십자가 한농 복구회

          ...........

          .............

          돌나라 한농 박명호 교주 창기 십자가 sbs 그것이 알고 싶다

          ............

          창기 십자가 자체 제작 선전 영상 1

          창기 십자가 자체 제작 선전 영상 2

          ..............



          돌나라 탈퇴 여성, "교주의 성 노리개였다"
          회원들 명예훼손으로 고소…재판부 "성관계 폭로, 공공의 이익 위한 진실한 사실"

           

          "나는 철저하게 그 사람 만족감을 채우기 위한 노리개였어. (...) 어차피 망한 인생 마지막으로 좋은 일이나 하려고 마음먹었어. 이제 다시는 나처럼 처녀성 뺏기고 몸을 수없이 짓밟히고 병에 걸리고 아픈 상처를 가진 동생들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마지막으로 내 얘기를 너희에게 남긴다. 너희는 나처럼 되지 마."


          2009년 2월 27일, 돌나라 공동체를 탈퇴한 이수진 씨(가명)가 교주인 석선 박 아무개 씨로부터 수백 차례 성폭행당했다는 사실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지금도 돌나라에 남아 있는 동생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글이었다.


          탈퇴 여성, 돌나라 교주에게 18세부터 유린

          이 씨는 1987년경 부모를 따라 돌나라에 가입했다. 1996년부터 2003년까지는 돌나라에서 생활했고, 이곳에 있는 동안 이 씨는 주님으로 따르던 박 씨에게 성적 유린을 당했다.

          ▲ 돌나라 여신도들은 석선 박 씨를 '여보', '낭군', '신랑' 등으로 불렀다. (사진 제공 안티 돌나라 회원)
          이 씨가 블로그에 올린 글을 보면, 박 씨는 치밀했다. 처음에는 이 씨가 '하나님의 아내'이며 '신부'라는 것을 강조했고, 하나님이 이 씨를 특별히 점지했다고 말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않도록 교육했다. 박 씨는 이 씨에게 아기 예수를 낳아야 한다고 말하며 스킨십의 강도를 높여 갔다. 아빠처럼 포옹하고 볼에 뽀뽀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손을 잡고 키스까지 했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1년 정도 사전 작업을 한 박 씨는 1998년 7월 16일에 좀 더 노골화한 방식으로 이 씨에 접근했다. 이 씨에게 아랫도리를 벗으라고 했고, 머뭇거리자 자기에게 했던 말이 다 거짓이냐며 독촉했다. 박 씨를 하나님으로 믿었던 이 씨가 옷을 벗자, 박 씨는 그의 음부를 만지며 합격이라고 말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쳤듯이 이 씨 또한 박 씨에 대한 믿음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달 뒤인 8월 24일, 박 씨는 당시 18세이던 이 씨와 성관계를 시도했다. 이때도 박 씨는 자신이 희생하여 이 씨를 받아 주는 것처럼 말했고, 관계를 맺고 난 후에는 무릎 꿇고 기도하며 이 씨에게 말씀을 주입했다. 이후로는 걷잡을 수 없이 이 씨를 짓밟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새벽 예배나 안식일, 심지어 생리 기간에도, 가정집·자동차·기도실 등에서 이 씨를 불러들여 관계를 맺었다.


          이 씨는 너무 아프고 힘들었지만 사람들에게 숨겨야 했다. 혹여나 들킬까 봐 항상 긴장했고 불안에 떨었다. 이 씨는 박 씨와 있던 일을 기록했다. 관계를 맺은 횟수는 224회 정도가 됐다. 미처 기록하지 못한 관계도 많았다. 그는 처참했다. 창녀가 된 느낌도 들었다.


          돌나라 측 명예훼손으로 탈퇴 여성 고소


          이 씨는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박 씨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여성이 자신만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이미 돌나라 안에는 박 씨의 이성 문제에 관해 소문이 파다했다. 이 씨는 그 가운데 자신이 알고 있는 14명의 이름을 공개했다. 박 씨에게 전해 듣거나 당사자들에게 직접 들은 사람들의 명단이었다.

          ▲ 돌나라 여신도가 박 씨의 별장에 방문하여 큰절을 하고 관계를 맺는 장면이 CCTV 동영상에 담겼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동영상 캡처)
          이 씨는 나중에 박 씨와 여신도가 성관계를 맺는 CCTV 동영상 자료도 확보했다. 그 영상에는 이 씨가 이름을 공개한 여신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 씨의 별장에 방문한 여신도들은 박 씨와 관계를 맺기 전에 큰절을 했고, 방 청소도 했다. 그 모든 과정은 처음이 아닌 듯 자연스러웠다.


          돌나라 측으로 거센 항의를 받은 이 씨는 언급된 실명을 삭제하고 2009년 4월 10일에 해명 글을 올렸다. 이 씨는 "나같이 불쌍한 동생들이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며 "최소한 나처럼 당하면서 당하는 줄도 모르는 동생들, 평범한 부부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나처럼 무지해서 당하지 않기를 정말 바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름이 언급된 여신도 중 2명이 이 씨를 허위 사실로 인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이 씨는 패소하여 그들에게 각각 200만 원씩을 손해배상해야 했다. 그리고 2010년 5월 13일, 5명의 여신도가 같은 내용으로 이 씨를 고소했다.


          1심 재판을 맡은 수원지방법원 오산시 법원(판사 윤진영)은 이전 사건과 마찬가지로 200만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앞서 재판과 달리 허위 사실로 인한 명예훼손은 아니었지만, 원고들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할 만한 구체적인 사실을 적시했다는 점에서 불법 행위로 판단했다. 게다가 이 씨의 주장이 객관적 진실이라는 사실로 인정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2심 재판부, 이 씨 블로그 글 "위법성 없다"


          2심에서는 판결이 뒤집혔다. 수원지방법원제2민사부(재판장 김광진)는 2012년 10월 12일 판결 선고에서 여신도들이 박 씨와 성관계를 맺었다고 말한 이 씨의 글이 "공공의 이익에 관하여 진실한 사실을 적시한 것"이라며 "위법성이 없다"고 판결했다.


          회원들이 박 씨를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씨의 글은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더 이상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작성된 것"이라고 재판부가 인정한 것이다.


          이 외에도 재판부는
          △ 글의 주된 취지가 원고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 돌나라 내에서 발생하는 성 문제에 대해 경각심을 일으켜 추가 피해를 막으려 한 점
          △ 이 씨가 주로 밝히고자 한 내용은 돌나라 교주인 박 씨가 여신도들에게 행한 부적절한 행동과 관련됐다는 점
          △ 박 씨의 행적에 대해 거의 알려진 바가 없던 상황에서 이에 대해 의혹 및 문제 제기가 필요했을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이유로 들어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가 이러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회원들의 낭군이자 남편으로 여겨진 박 씨가 신부인 여신도들과 성관계를 맺은 점과 이러한 관계를 합리화하는 '창기 십자가' 교리가 단체 내부에 존재한다는 점이 '진실한 사실'로 인정됐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박 씨는 인류가 색욕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색욕의 함정에 대신 들어가 창녀를 취하고 죄인이 됨으로써 인류를 구원한다는 창기 십자가 사상을 만들어, 회원들에게 이에 대해 설교하고, 자신과의 성관계를 구원의 일환으로 설파하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씨가 제출한 CCTV 영상 캡쳐가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했다.


          하지만 여신도들은 2심 결정을 불복하고 대법원에 상고했다. 돌나라 측 법무 담당자는 <뉴스앤조이>와 통화에서 "증거자료로 제출된 것 중에 명백한 허위 사실이 들어 있다"며 이 씨 측이 제출한 사진 자료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진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은 피했다. 창기 십자가론에 대해서도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며 언급하지 않았다.

          |출처/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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