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시간 끝나고 내 작은 숨이 멈춰도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 영원하리라
주 말씀 내게 다가와 그 은혜 깨닫게 될때
나 주를 찬양하리 그 사랑 찬양하리




출처: USA 아멘넷/누지문서

성령의 세례(침례)와 충만은 어떻게 다른가 
박일민 교수(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장·조직신학)

예루살렘 교회의 파송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 사도께서는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성령받기를 기도하여 성령이 임하게 하신 일이 있다(행 8:14-17) 그리고 사도 바울께서도 에베소에 있는 제자들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물음에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답하는 것을 듣고는, 그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 후, 그들에게 안수하여 성령이 임하시게 함으로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하신 일이 있다(행 19:2-8).
그렇다면 성령을 받는 것과 세례를 받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충만함은 또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살펴보자.

1. 성령과 세례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자들이 죄를 씻음 받고 의인이 됨으로서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표하고 인치는 의식이다. 그래서 세례는 물을 사용하여 죄 씻음을 표시한다. 그러나 사람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믿음을 가지고 신앙고백을 하거나 거짓으로 믿음을 고백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물세례는 진정한 믿음에서 나온 구원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때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물세례 이외에 성령의 세례를 말하기도 한다.

성령의 세례는 모든 것을 정확히 통달하고 계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베풀어지는 세례이다. 따라서 물세례에서 있을 수도 있는 오해나 거짓이 있을 수 없다. 성령께서는 사람에게 임하시어, 믿음의 내용을 확증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믿어지게 하신다. 또 이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성도의 마음속이나 밖에서 특별한 능력이나 현상이 나타나게 하시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 임하셨다는 표현을 한 가지 의미로만 생각할 수 없다. 성령이 임하셨다는 표현은 문맥에 따라 중생케 하시는 은혜를 베푸심, 중생을 확증하는 증거를 보여주심, 중생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심, 중생의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고 섬겨지도록 하심 등의 의미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임하심은 성령의 세례나 성령의 충만이라는 말로 설명되기도 하므로, 성령의 세례와 충만에 대해 각각 살펴보기로 하자.

2. 성령의 세례

성령의 세례는 물세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물세례는 성령의 세례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가르쳐주는 예표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신 말씀이나(행 1:5), 세례 요한께서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 1:8)고 하신 말씀에서 잘 드러난다.

물세례를 살펴보면, 세례는 다음과 같은 특성들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례는 예수 믿는 사실을 시인하는 사람에게 맨 처음으로 행해지는 의식이다(최초성). 한 번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 효력이 일생동안 계속 유지되기 때문에, 반복해서 다시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단회성, 지속성) 세례는 죄 씻음 받았음을 표하고 인치는 의식이다(정결성).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세례를 받는다(보편성). 세례를 주라는 명령은 있으나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이 없는 것을 보면, 세례는 사람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성질을 가진다(하나님의 주권성).

물세례에 나타난 특성들은 성령의 세례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사도 베드로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고낼료가 믿게 된 사실을 말씀하면서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행 11:15,16)고 하셨다. 이것은 자신이나 고낼료에게 있어서 성령의 세례가 최초성을 가지고 있음을 설명한 것이었다.

사도 바울께서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행 22:16)고 하신 말씀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고 하신 말씀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성령의 세례에 정결성이 있음을 본다. 또 사도 바울께서는 고전 12:13에서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고 하심으로서, 성령 세례의 보편성에 대해 말씀했다. 우리는 성경에 성령의 세례는 받으라는 명령이 없는 사실과, 한 번 성령의 세례를 받았던 사람이 다시 받았던 예도 없었던 사실을 통해, 성령의 세례가 하나님의 주권성과 단회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 중에서 이러한 특성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회심과 중생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세례란, 죄인을 회심시켜 중생케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3. 성령의 충만

성경에는 브사렐(출 31:3), 여호수아(신 34:9), 세례 요한(눅 1:15), 엘리사벳(눅 1:41), 사가랴(눅 1:67), 오순절에 다락방에 모였던 제자들(행 2:4), 베드로(행 4:8), 바울(행 9:17), 스데반(행 6:5), 바나바(행 11:24) 등 성령에 충만했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브사렐의 경우는 성령께서 그에게 회막을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주셨음을 의미하기에 성령의 일반사역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다른 경우들은 모두 영적인 의미, 즉 성령의 특별사역과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은 일반적으로 성령의 특별사역과의 관계에서 사용되는 말이 되었다.

성령의 세례는 죄 씻음을 인치려고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은 두 가지의 목적, 즉 도덕적 개선이 있는 생활과 효과적인 사역의 감당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성령에 충만한 생활이란 어떤 이적적인 현상을 경험하는 생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의 충만이란, 성령에 사로잡혀서 성령께서 원하시는 대로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사는 생활, 즉 날마다 죄를 멀리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거룩하게 사는 것이 그 핵심적인 의미이다.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도 도덕적인 면에서는 많은 결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더욱 거룩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전 3:1-4) 성령에 충만한 사람에게서는 이적적인 현상들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적적인 현상은 성령 충만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라, 단지 부수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본질적인 요소는 도덕적인 변화, 즉 죄를 멀리하고 더욱 거룩해져 가는 성화(聖化)의 삶이다. 스데반과 바나바의 성령 충만 경우가 이 사실을 잘 말해준다.

성령의 충만은 특별한 사역이나 봉사를 효과적으로 감당케 하기 위한 목적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사도 베드로는 성령에 충만했기 때문에, 적개심과 성경 지식으로 가득한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 앞에서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의 용기와 성경지식으로 담대하게 복음의 진리를 말할 수 있었다(행 4:8). 사도 바울은 성령에 충만했기 때문에, 지혜가 뛰어난 총독 서기오 바울 앞에서 예언을 하고, 그를 믿게 만들었다(행 13:9).

엘리사벳은 성령에 충만했기 때문에, 마리아의 배 안에 있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언을 할 수 있었다(눅 1:41). 성령에 충만하게 되면, 누구라도 지혜와 용기와 능력 등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사역(봉사)에 효과적으로 임할 수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사도 바울께서는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명령하셨다(엡 5:18).

성령의 충만은 모든 성도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이 동일한 수준의 충만함에 도달해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람의 경우에도, 그 충만함의 정도가 시간이나 장소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때로는 성령이 충만했던 사람이 충만함에서 멀어진 나머지, 성령을 소멸하고 성령을 근심케 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 그러기에 성령의 충만은 단회적이고 지속적이며 보편적인 성령의 세례와는 달리, 반복적이고 일시적이며 개별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은 여러 면에서 성령의 세례와 구별이 되어야 한다. 죄 씻음의 인침인가 성화 또는 사역의 강화인가, 단회적인가 지속적인가, 보편적인가 개별적인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인가 사람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는 역사인가 하는 등에서 서로 뚜렷하게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4. 성령 충만케 되는 방법

성령의 충만을 명령하셨다는 것은, 성령 충만이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일방적으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편에서도 힘써야 할 부분이 있음을 의미한다. 성령의 충만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 없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이므로 성령을 소멸하거나(살전 5:19) 근심케 하지 않고(엡 4:30),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생활하는 것이 중요한 요소이다(고후 12:18, 갈 5:16).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성령의 충만을 위해, 악한 세월을 따라 살지 않고 지혜롭게 분별하여 세월을 아끼는 것, 주의 뜻을 분별하는 것, 술 취하는 것 같이 어떤 것에 빠져 끌려 다니지 않는 것, 신령한 찬송을 부르는 것, 범사에 감사하는 것, 피차에 복종하는 것 등이 필요하다고 말씀했다(엡 5:15-21).

뿐만 아니라, 성령의 충만을 위해서는 기도를 빼놓을 수 없다. 오순절에 다락방에 모여 간절히 기도했던 제자들의 경우가 이를 잘 설명해준다(행1:14). 성령의 충만을 위해 힘써야 할 기도는 특히 회개의 기도이다.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고 있는 죄의 담을 헐어내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거하시면서 우리를 지배하시도록 하는 것이므로, 무엇보다 먼저 힘써야 할 우선적인 기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말세에 남종과 여종을 포함한 만민에게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실 것을 예언하셨다(욜 2:28). 그 예언대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아 회심하고 중생하여 주께로 돌아오고 있다. 또 성령의 충만함으로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 살면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거룩한 사람이 되고, 주어진 사명과 봉사의 사역을 효과적으로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은 그 정도에 있어서 발전이 있을 수도 있고 소멸이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성령에 충만한 삶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항상 깨어서 주의 뜻을 지혜롭게 분별하여 실천에 옮기려고 하는 노력을 기우려야 할 것이요, 아울러 무릎 꿇어 죄를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을 간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쉬지 않아야 할 것이다

 출처: 안개꽃




커피향 같은 내 사랑
                          최송연

바람이 세게 불어오면
좋겠네 
커피향 같은 내 사랑
바람결 타고 오시려나

안개비가 흘러내리면
좋겠네
안개비 타고 오시는 님
내 창문 두드리시려나

눈만 뜨면 찾게 되는 
커피 향은 그리움인가

눈뜰 때나 꿈결에서나
사모하는 주님
커피향 같은 내 사랑
온 맘 다해 그리워 하네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탄 고백  (11) 2012.12.25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5) 2012.12.21
눈꽃  (0) 2012.12.10
작은 새의 기도  (0) 2012.12.01
연모(戀 慕)  (2) 2012.11.23



묵상(Meditation)


예수님이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나의 말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누가복음 21:33) 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곧장
통하는 길을 보여 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과
가슴을 변화시키고 우리들을 하나님
왕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적인 생명"(요한복음 6:63)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 묵상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각에서 마음으로
내려가게 하여 마음속에 성령이 거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또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의 말씀에 가까이
있도록 하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성만찬(Communion) 

 

세상은 잊기 위해 마시지만,

성도는 기억하기 위해 마신다

The world drinks to forget;
the Christian drinks to remember.
- Steve Brown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고전11:26 문맥보기)

 
 

'짧은 글 긴 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혜와 빛  (0) 2013.01.03
새해 좌우명이 될만한 좋은 글  (0) 2013.01.02
당신은 잘하고 있습니다  (0) 2012.12.04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2) 2012.11.17
부활하신 주님  (0) 2012.11.14



    십자가 아래 서서 
    (Standing under the Cross)


    세상의 온갖 재난에 직면해도 위로 머리를 쳐들고
    자세를 곧게 하는 것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
    취해야 할 태도입니다 최후의 심판의 날을

    생각하고 느끼게 하고도 남을 만한 일들이

    매일의 삶 속에서 일어 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유혹을 저항할 수 있으며
    또한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
    (누가복음 21:33)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여 우리의 영적인 바탕을
     잃어버리지 않고 이 세상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십자가 아래에
    서 있었던 예수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굳건히 서십시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중에 재림하실 그 날을 소망하며
우리 구주 예수님의 성탄의 의의를 기념하고 축하하고
그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는 모든 성도들과 공유하고
싶은 찬양곡을 하나 올립니다.



출처: USA 아멘넷게시판/교제

'찬양의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My Savior's Love  (0) 2013.01.01
내 삶의 시간 끝나고  (0) 2012.12.13
왕의_왕(유대_땅_언덕에)  (5) 2012.12.10
헨델의 할렐루야-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0) 2012.12.07
Bleesed Be Your Name(Worship Video /Iyrics)  (1) 2012.11.29

진화론자들은 지구의 나이가 막 40억 년 정도라고 하는데
실제로 지구의 나이는 대략 몇 살 인가요?

 답변

지구의 나이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변화들을 측정해서 과거를 추정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화론적 가정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지구의 나이는 젊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주 자체가 질서도가 매우 높은 상태이기 때문에 태양계도 오랜 시간이 지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나이를 추정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방사선 동위원소의 변화를 측정하는 방법입니다. 동위원소의 반감기가 일정하기 때문에 동위원소의 변화로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암석 중에 헬륨의 변화를 측정하는 방법입니다. 헬륨은 계속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헬륨 량은 감소하기 때문에, 그 원리를 이용하여 연대를 계산하는 것입니다.

1. 방사선 동위원소를 사용한 측정결과

1) 암석에 있는 우라늄-납 등과 같은 반감기가 긴 동위원소를 이용하여 측정하면 수억 년의 기간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측정결과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실제로 형성되지 얼마 안 되는 화산암 등이 매우 긴 연대를 보여줍니다.

- 암석이 오래전에 형성된 것과 그 다음에 형성된 것들의 연대가 바뀌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 같은 암석을 긴 연대 결과를 보이는 여러 가지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을 하면, 그 결과들이 서로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 과거 방사성 붕괴가 급격히 일어났다는 다른 증거들을 감안하면, 방사성 붕괴가 서서히 오랜 시간 일정하게 일어났다는 가정에서 측정한 결과들의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 C14과 같은 반감기가 5,000여년 되는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하여 측정하면, 수억 년에 해당되는 암석에 있는 나무 등을 측정하면 수만 년 이내로 측정됩니다.

따라서 방사선 동위원소를 이용하여 지구의 연대를 측정하는 것은 과거 방사성 붕괴가 급격히 일어난 사건(노아 시대 대홍수 사건 등)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무조건 길게 나올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신빙성이 많이 떨어지게 됩니다.

2. 화강암 중 지르콘 헬륨 양을 측정하여 암석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 지르콘 내 헬륨 손실률은 지구가 6천년이 되었다는 모델에 더 잘 맞음 (즉, 지구 연대가 6천여 년 되었음)

결론

1. 과학적인 방법으로 지구 연대를 측정하는 것은 현재의 변화로 과거를 측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에 큰 변화가 없이 지금과 유사한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가정이 있습니다. 방사성 동위원소의 반감기도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과거의 격변적 상황을 보여주는 퇴적암층을 볼 때 오래된 연대를 보여주는 방사성 동위원소 측정에 의한 결과는 신뢰하기 힘듭니다.

2. C14, 헬륨 손실률 등은 수만 년 내지, 수천 년의 지구 연대를 보여주고 있는데, 과거의 격변이 연대를 길게 해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런 연대 측정결과를 볼 때 지구 연대는 과학적으로도 길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지구의 나이는 성경적으로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창조 6일의 기간과 족장들의 족보를 계산하면 창조 연대가 BC 연대로 계산됩니다. 약간의 오차는 있을 수밖에 없지만 (예를 들어, 족장들의 나이는 연 기준이고, 월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성경에 의하면 지구는 BC 4175년 (오차범위 25년)에 창조되었습니다. 이 연대는 표준 이집트 연대와 비교하면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집트 연대를 더 근거가 있는 앗수르 연대기 등으로 조정해서 보면 성경연대와 이집트 연대는 모순되지 않습니다.


이은일 교수 드림

 

크리스챤큐앤에이

이정숙 2012/12/13 10:26 Modify/Delete Reply

무한대 편재, 무한소 편재 가능한 주 하나님의 절대적 시간으로는
7일(6일 천지창조+1일 안식)을 기준으로 하고 있고 지구는 아직
7천년이 안된 나이인데 우주 멀리 있는 별의 빛이 지구에 도달하는
것을 몇억 광년으로 계산하는 유한한 인간의 상대적 시간개념으로는
탄력성이 아주 좋은 고무줄 나이일 것 같습니다. ㅎㅎ
시공간적 차원의 한계안에서 인지하는 인간 뇌의 미스테리를
인간의 뇌로는 풀 수 없고 뇌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풀어주셔야
풀 수 있지 않을지..저는 그냥 7이라는 숫자에 의미를 두려고 합니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 아침에 앞서 저녁이 먼저 언급되고 있는
까닭은 빛이 비추어 낮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계속 어두움만 있었던
저녁상태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저녁을 하루의 시작으로 셈하고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날 - 날에 대한 히브리어 '욥'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우주창조의
연대 및 시간적 길이가 정해지는데, 여기에는 전통적으로 다음 세 학설이 있다.

(1)'날'은 곧 한 시대를 가리킨다는 학설이다(Day-Age Theory :요세푸스,
이레니우스, 오리겐). 그러므로 이들은 5,8,13절의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말이 하나의 상징적 표현으로서, 한 시대의 끝과 다른 한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주장의 근거는 창조주 하나님에게는 시간적 요소가 초월되어 있다는
점이다(시 90:4; 벧후 3:8). 그러나 이 학설에는 두가지 난제가 있다.

첫째, 창 1장의 주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출 20:8-11의 안식일 계명
문제에 위반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분명히 안식일 계명에 나타난
창조의 6일은 문자적 6일이요, 장구한 6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일 창세기의 1일이 오늘날과 같은 하루가
아니라면 제7일의 안식일 문제를 설명할 길이 없다.

둘째, 성경의 분명한 어법으로 표현된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5,8,14,19절)라는 말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한 시대의 교체로
보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점이다.

(2) '욥'을 문자 그대로 24시간으로 보는 학설이다(루터, 칼빈, 뻘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 해석상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원어의 일차적인 뜻을 따라야 한다. 둘째, 실제적인 제7일을 안식일로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면 다른 6일도 당연히 같은 24시간을 가진
하루이어야 한다. 세째, 창조 사역에 있어서 마지막 3일은 분명히
오늘날과 같은 태양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24시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최초의 3일도 같아야 되지 않겠는가?라는
주장이다.

(3) '욥'의 기간이 서로 다르다고 보는 절충적인 학설이다
(어거스틴, 바빙크),

즉 태양이 창조된 제4일 이전의 3일은 오늘날의 하루와 다른 장구한
기간으로, 그리고 이어지는 3일은 24시간으로 보는 견해이다.
이 세 가지 학설은 각기 나름대로의 타당성과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어느 학설을 완전히 수용하거나 혹은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두번째 학설이 보수적인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다.]

과학이 주장하는 지구의 나이와 성경적 수치에 근거 계산되어
나온 지구의 나이가 왜 차이가 나는가라는 주제로 되어지는
토론들을 읽어보면 크게 두가지로 나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현대과학이 의존하고 있는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이
비교적 정확하다는 전제하에 과학적 주장과 함께 갈 수 있도록
7일 창조론을 그에 맞추어 해석하는 견해입니다.

예를 들어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신 그 시점으로부터 하늘의 해 달 별들을 창조하시고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let them serve as signs to mark seasons and days and years >
하신 네째 날까지의 시간의 개념,단위는 오늘날의 하루 24시,
일년 12월 같은 개념이나 단위로 한정되어질 수 없다.

즉 혼돈하고 공허하였던 태초의 땅이 세째 날 형태를 가진
모습으로 나타나기까지의 3일은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을 수 있는 시간의 주관자 하나님의 연대상으로는
3일일지라도 인간적 시간 개념의 연대상으로는 상대적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과학적 연대측정이 맞다는 전제하에 성경적 연대를
조정할 것이 아니라 성경적 연대(만년 이하)가 맞다는
전제하에 과학적 연대측정의 문제점을 인지시켜 과학적 연대를
조정하고자 하는 견해이고 주로 창조과학회 분들의 견해같습니다.

방사성 탄소연대측정에 대한 부정적 견해
http://cafe.daum.net/ntot66/Rwr/239?docid=2LP7|Rwr|239|20091220000119&q=%B9%E6%BB%E7%BC%BA%20%C5%BA%BC%D2%20%BF%AC%B4%EB%20%C3%F8%C1%A4%20%BF%C0%B7%F9

http://blog.daum.net/gdybcho/1738178

방사성 탄소연대측정에 대한 긍정적 견해

http://binote.com/1908

 

 

 



 

 

똑바로 서기(Standing Erect) 

 

 

예수님은 종말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에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이며 땅에서는 성난 바다와

파도 소리에 놀라 민족들이 불안에 떨 것이다

 

사람들이 세상에 닥쳐올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 기절할 것이니
이것은 천체가 뒤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 사람들이 내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볼 것이다"

(누가복음 21:25~28)

 

이미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말씀을 통하여 내면 깊숙이에서
들은 사람들은 세상의 절망과 위대한
구원의 일들을 날마다 봅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이런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너희는 일어나 머리를 들어라 너희 구원이
가까웠다"(누가복음 21:28)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는 커다란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어지러워 넘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보다 우리는 똑바로 서서 팔을 쭉 펴서
주를 환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시냇가

이제 여호와께서 그의 종을 머물게 하신 그 장소를 좀 자세히 살펴봅시다. 바로 "그릿 시냇�"입니다.

아하, 그곳은 강이 아니라 시냇가였습니다. 당장이라도 물이 말라버릴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들을, 혹은 그의 백성들까지도, 풍요와 사치가운데 두시는 경우가 매우 희귀합니다.

이세상의 것들로 포식하게 되면 그것들을 주신 하나님께로부터 마음의 멀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시험대에 오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질적인 해를 입을 때에 나타내는 반응에서 참그리스도인과 세상적인 사람과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법입니다.

세상적인 사람은 경제적인 어려움에 완전히 짓눌려서 자살을 감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의 전부가 사라져 버렸고 이제는 삶의 의욕이 주는 것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심하게 흔들리고 잠시 깊은 고뇌 속에 괴로워하지만 다시 자세를 가다듬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나의 분깃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강대신 시내를 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은 물이 흐르지만 내일이면 말라버릴 수 있는 그런 시내 말입니다.

왜요?받는 복에 안주하지 말고 그 복을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할 것을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장 많이 실패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 아닙니까?

선물을 주시는 분은 뒤로 제쳐두고 선물에만 마음이 빠지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강을 맡기지 않으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닙니까?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라고 말씀합니다(신 32:15)

이와 동일한 악한 성향이 우리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강을 주시면 좋을텐데 일부러 강대신 시내를 주셔서 우리를 심하게 다루신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너무 모르고 하는 투정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자녀를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데, 어린아이들의 손에 위험한 칼을 들려주시겠습니까?

그런데 그런곳에서 선지자가 어찌 목숨을 연명하겠습니까? 대체 어디서 음식을 구해야 합니까?

아하, 그가 쓸 것을 하나님이 직접공급하실 겁니다.

“그 시냇물을 마시라”(4절)

아합과 그의 우상숭배자들이 어찌 되든 엘리야는 망하지 않습니다.

최악의 시간에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그의 강하신 능력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사33:16)

기약도 없이 시냇가에 거하라는 명령이 상식적으로 얼마나 어처구니없어 보이는지 모릅니다.

예 그렇습니다.하지만 이 명령을 주신분이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가타부타해서는 안되고 오로지 순종할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는 자기의 눈과 이성과 모든 현상적인 조건에 어긋나는 여호와의 조치에 순종하고, 여호와 한분을 신뢰하고 참고 그를 기다린 것입니다.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4절)

“거기서”라는 단어를 주목하십시오.

선지자는 몸을 숨기기에 적당한 다른 곳을 원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쓸 것을 공급하실 것이니 반드시 그릿 시냇가로 가야 했습니다.

그러니 내가 과연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하신(그의 말씀으로나 섭리를 통해서)곳에 있는가?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모릅니다.

내가 거기에 있다면, 하나님이 분명 나의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께 등을 돌리고 먼 나라로 가 있는 것이라면, 분명 그 탕자처럼 주리고 목마름을 당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와 동일한 원리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앞에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가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만나를 공급받기 위해서는 구름기둥을 따라가야 했던 것처럼, 우리의 영혼이 물을 마시고 우리의 영적 삶이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곳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생애 중에서 -

 

포도나무선교회

'아더 핑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십계명 서론  (0) 2013.05.08
중생의 필요성  (0) 2013.04.28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우리의 태도  (0) 2013.04.13
현대교회를 장악한 거짓복음  (0) 2013.01.27
믿음의 눈(The Eye of Faith)  (0) 2012.12.22

격려는 서로가 서로를 책임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상호책임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과격한 사람의 간섭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높은 기대치를 유지하게 하는

고단수의 격려와 같다. 인생에는

우리를 실망시키고 맥 빠지게 하는 일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일정한 양의 격려가 필요하다.

우리는 각자 우리가 성공할 때 박수쳐주고

실패할 때 손잡아 일으켜줄 수 있는 믿음의 동지가 필요하다.


제임스 브라이언 스미스의 [선하고 아름다운 공동체] 중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난이나 조소가 아닙니다.

바쁜 일상 속에 살아가는 서로를 향한

따뜻한 시선이 필요합니다.

격려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축복할 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슴에 살아갈 용기를 주는 것은 격려입니다.
 

격려는 상대방에게 힘을 불어넣는 일이지만

나도 함께 힘을 얻는 기회입니다.



'새벽종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인의 자기 경계  (0) 2012.12.27
가장 억울했던 분을 기억하라  (2) 2012.12.19
멈춰있는 당신에게  (0) 2012.12.17
하루는 작은 일평생  (0) 2012.12.16
성공의 위험  (0) 2012.11.22

티와 들보

(마 7:1)“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2)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4)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5)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본문에서 주님은 판단에 근거한 평가를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평가하는 것을 피하거나, 모든 형태의 판단을 금하거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별력이나 지혜를 사용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믿는 이들에게 판단하고 분별하고 구별할 것을 명령합니다(고전 6:1-8; 5:9-13; 14:29; 고후 6:14; 딤전 3:1-13; 살전 5:14). 세상은 거짓 그리스도인들과 심지어 사단의 사역자들로 가득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깨어있어야 하고 "영들을 시험해야"합니다(요일 4:1)

주님은 정죄 문제에 관하여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흔히 남을 정죄하는 이 성향을 피하려 애쓰면서 반대편 극단으로 돌아가 다시 잘못된 입장을 취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와 같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균형 잡힌 삶의 하나입니다. 믿음으로 걷는 것은 칼날 위를 걷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에 대하여 많은 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편이나 저편으로 넘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편이나 저편의 오류를 피하여 계속해서 진리의 중심을 붙들어야만 합니다. 그리하여 이것이 분별하거나 판단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리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이 남을 정죄하는 무서운 위험과 최종적인 의미에서 심판을 선언하는 무서운 위험을 경고하고 있음을 알려야 하겠습니다.

이에 대한 예증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고찰하는 것입니다. 이 신상설교에서 우리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내내 마음에 두셨습니다. 주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율법관과 생활 방식에서 바리새인들처럼 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잘못 해석했습니다. 그들은 구제할 때 자랑하며 과시했습니다. 그들은 길모퉁이에서 기도하는 것과 성구함을 넓히는 것에서 과시적(誇示的)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금식 중임을 널리 알렸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이 세상사에 관한 견해에 있어서 금전만능주의적이고 유물론적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특별한 점에서도 그들을 마음에 두셨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누가복음 18:9-14에서 보여주신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장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시여, 저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더욱이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크게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이 태도가 바리새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애써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 태도는 초대교회를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하나님의 교회를 계속하여 괴롭혀 왔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를 괴롭히는 것도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 주제에 접근할 때 이 점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요 8:7). 산상설교 중에서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이 말씀보다 더 우리에게 정죄감을 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 모두는 얼마나 죄가 많은지요! 이것은 우리의 모든 삶을 망치고 우리로부터 행복을 빼앗아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얼마나 황폐케 했으며 지금도 황폐케 하고 있는지요! 이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 대한 말씀입니다. 이 주제는 고통스럽지만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설교가 우리에게 와서 말씀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이곳에서 상기시켜 주듯이, 우리는 우리의 책임으로 이것을 무시합니다. 비록 이 주제가 고통스럽겠지만 너무나 중요하므로 필히 계속해서 더 분석해야 할 것입니다.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은 단지 상처를 무시하거나 또는 상처 부위만을 피상적으로 치료해서는 안됩니다. 올바른 치료법은 그 상처를 탐침(probe)으로 조사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깨끗해지고 정결해지고 건강해지려면 반드시 탐침을 대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깨끗해지기 위하여 이 상처를, 혼속에 썩고 있는 이 창(瘡)을 탐침으로 조사합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시는 이 위험은 어떤 위험입니까?

우선 이 영은 어떤 점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영의 일종이라 하겠습니다. 정죄하는 이 영은 어떤 영입니까? 이 영은 스스로 의롭다하는 영입니다. 그 배후에는 항상 자아(自我)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영은 항상 자기의(自己義)의 나타냄이요, 우월감이요, 다른 사람들은 틀리고 우리는 모두 옳다는 감정입니다. 그리고 이 영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게 만듭니다. 이 영은 항상 경멸하는 태도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영입니다. 이러한 것에 곁들여서 이 영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며 경멸적으로 대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 바리새인들을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바리새인의 영을 갖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영의 핵심부는 혹평적 성향인 것 같습니다. 비평적인 것과 혹평적인 것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참된 비평은 뛰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참된 비평은 거의 없습니다. 문학이나 미술이나 음악이나 기타 어떠한 것이든지 참된 비평은 인간 정신의 최고의 활동 중 하나입니다. 참된 의미에서의 비평은 결코 파괴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건설적입니다. 그것은 감상입니다. 비평을 하는 것과 혹평적인 것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서 사용하신 용어의 의미에서 판단하는 죄를 범하는 사람은 바로 혹평적인 사람으로서, 비평을 위한 비평을 기뻐하며 그것을 즐기는 사람을 뜻합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사람은 결점을 발견하기를 기대하고, 실제로 결점을 발견하기를 바라며 비평을 요청 받은 일에 접근하는 사람임을 분명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주님께로부터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모습 그대로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만날 것이며,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요한이 표현한대로 우리가 그 때에 부끄럽지 않기를 원한다면, 지금 주의합시다(요일 2:28). 만일 우리가 심판날에 담대함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생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우리가 판단하는 바로 그 판단으로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며,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으며,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하늘에 가게 될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곳 이생에서, 그리고 이생 후에 이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명백한 성경의 가르침이요, 우리 주님께서 산상설교의 이 대목에서 첫 번째 말씀으로 요약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판단받지 아니하도록 판단하지 말라." 이 말씀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너희에게 불친절한 말을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너희도 그들에 대하여 절대로 불친절한 말을 해서는 안된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그것은 옳으며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훨씬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자신을 심판에 노출시키고 있으며, 장차 이러한 일들에 대해 답변을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잃지는 않지만 분명히 무언가는 잃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제시하신 바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두 번째 이유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 이유는 두 번째 절에 있습니다. "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재는 그 척도로 너희가 도로 재어질 것이니라." 우리는 이것을 한 원리의 형태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판단을 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판단을 낳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 자신에 대한 판단의 표준을 정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재는 그 척도로 너희가 도로 재어질 것이니라".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거니와, 이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사람은 항상 '앙갚음을 당한다'고들 말합니다. 이는 더할 나위 없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면밀하게 살피고 조사하여 그들 속에 있는 사소한 결함에 대해 말했던 사람들이 거꾸로 그들에 의해 자신들이 판단을 받을 때에 흔히 크게 놀랍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는 판단을 이해할 수 없지만 자신들의 기준과 자신들의 척도로 판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술을 여기서 그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필히 더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실지로 선언하시는 바는 하나님께서 친히, 제가 앞에서 설명해 온 이 판단으로, 우리 자신의 표준에 따라 우리를 판단하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해석에 대한 몇 가지 성경의 권위를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12장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을 봅시다. 거기서 주님은 "알지 못하고 채찍 맞을 일을 한 사람은 적게 맞으리라. 누구든지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사람들이 많이 맡긴 자에게는 그들이 더 많이 달라고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2:48). 다음으로 로마서 2:1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오 사람아, 판단하는 네가 누구이든지 변명하지 못할 것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 스스로를 정죄함이니, 이는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여기서 바울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으로 너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 네가 알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네가 만일 옳은 것을 행하지 않는다면 네 자신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이것에 대한 가장 명백한 말씀은 야고보서 3:1에 주어졌을 것입니다.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한 구절이지만, 야고보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롭다함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야고보서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자주 무시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야고보가 이 특정한 문제에 관해 어떻게 말씀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내 형제들아, 많이 선생이 되지 말지니, 우리가 더 큰 정죄를 받을 줄 앎이라". 달리 말하면, 만일 여러분이 권위자인체 한다면, 만일 여러분이 선생이 된다면, 그래서 여러분이 선생으로 권위자로 행동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권위에 의해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장하는 바로 그 주장에 의하여 여러분은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권위자로 자청하십니까? 좋습니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판단에 따라 여러분에게 적용될 바로 그 표준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구절에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판단받지 아니하도록 판단하지 말라. 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재는 그 척도로 너희가 도로 재어질 것이니라." 이 말씀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놀라운 진술의 하나입니다. 내가 성경에 대해 뛰어난 지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합니까? 만약 그렇게 주장한다면 나는 내가 주장하는 그 지식의 관점에서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나는 이 일들에 관하여 실지로 잘 알고 있는 종이다'라고 주장합니까? 그렇다면 내가 매를 많이 맞는다고 해서 결코 놀라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에 권위자로 자처한다면, 바로 그 표준에 따라 판단을 받을 경우 우리는 불평을 할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공평하고, 지극히 정당한 것입니다. 우리는 불평할 어떠한 근거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지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지식을 갖고 있다면, 필히 이 지식에 맞는 삶을 삶으로 이 지식을 보여줘야 합니다. 내가 주장한 그 주장에 의해 나 자신이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유심히 살피는 일에 용의주도하다면, 바로 그 표준이 내게로 돌아올 것이며, 나는 전혀 불평할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불평한다면 내게 이런 반론이 주어질 것입니다. '너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너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그것을 실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경우에 대해서는 왜 실행하지 않느냐?'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매우 놀랍고 두려운 생각입니다. 내가 알기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이 죄악스러운 습관으로부터, 그리고 그같이 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더럽고 추악한 영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주님께서 주시는 마지막 이유로 인도합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3∼5 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생각하지 못하느냐? 보라, 너 자신의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도 어찌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하여금 네 눈에서 티를 빼내게 하라, 하겠느냐? 너 위선자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 던져 버리라. 그래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어 던져 버리리라." 이같은 풍자가 일찍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보다 더 완전한 반어법의 실예가 일찍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얼마나 값진 것인지요. 이같은 방식의 논증을 많은 원리의 형태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세 번째 이유로 우리가 판단할 능력이 없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결코 판단을 시도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이 이러하기 때문에 판단할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판단을 받을 것이고, 판단의 표준을 우리가 결정한다는 사실을 필히 기억해야 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주님은 '잠깐 멈추어라, 너희는 판단할 능력이 없으므로 판단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을 이렇게 증명하십니다. 주님은 우선 우리가 의나 참된 판단에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음을 지적하십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관심을 두었다면, 그것을 우리 안에서 처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지로 진리와 의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라고 자신을 설득하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불공평하기를 원치 않으며 비판하기를 원치 않으며, 오직 진리에 관심을 두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너희가 진실로 진리에 관심을 두었다면 너희 자신을 판단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의 관심은 실지로 진리에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공평한 논증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유일한 관심사가 의와 진리에 있으며 인신 공격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비판적인 것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비판적일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예술가는 항상 자신에 대하여 가장 가혹한 비평가입니다. 그것이 어떠한 직업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노래이든, 연극이든, 그림이든, 기타 어떤 것이든, 참으로 위대한 예술가와 참된 비평가는 다른 사람들의 작품에 대한 것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객관적 표준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는 객관적 표준을 갖고 있지 않다. 너희는 진리와 의에 관심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항상 그랬듯이 너희 자신은 눈감아주고 다른 사람들만 비판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나아가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이 이같은 원리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사람들에만 관심을 갖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혹평의 영은 원리보다는 인신 공격에 관심을 갖는 영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것은 우리 중 많은 사람들에게 문제거리입니다. 우리는 실지로 특정한 주제나 원리가 아니라 우리가 비판하고 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원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악을 제거하기보다는 그 사람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혹평의 영은 우리로 참된 판단을 할 수 없게 합니다. 만약 편견이 있다면, 만약 사적인 감정과 개인 의사가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참된 심문관이 아닙니다. 율법조차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배심원중 한 사람과 재판받고 있는 사람이 어떤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면 그 배심원은 자격을 박탈당합니다. 배심원에게 요구되는 것은 공평입니다. 절대로 편견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절대로 사적인 것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편파적이지 않은 객관적인 재판이어야 합니다. 바른 재판이 되려면 사전에 반드시 사적인 요소가 완전히 제거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일에 적용할 때, 우리는 우리가 개인이나 인신 공격에 너무나 관심을 갖기 때문에 전혀 판단할 능력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주님께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판단에는 이처럼 숨은 동기가 너무나 잦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과 그의 행동을 구별하는데 너무나 자주 실패합니다.

주님의 분석을 따라가 보기로 합시다. 주님의 다음 논증은 4절에 있습니다. "보라, 너 자신의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도 어찌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하여금 네 눈에서 티를 빼내게 하라, 하겠느냐?" 이 말씀은 최고의 풍자입니다. 주님은 우리 자신의 상태가 다른 사람들을 돕는데 전혀 무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그들의 허물에 큰 관심을 갖는 체하고 그들의 유익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애씁니다. 우리는 그들 속에 있는 이 사소한 결점으로 괴로워하며 이 티를 제거하고 싶어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 티를 제거하는 일이 너무 섬세한 과정이기 때문에 너희가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눈 속에 있는 이 들보가 여러분을 그렇게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것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매우 통렬한 비평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그 비평에는 눈먼 사람이 다른 눈먼 사람을 인도하려고 애쓰는 것이 매우 우스꽝스런 일이지만 그보다 훨씬 더 우스꽝스러운 일은 눈먼 안과의사라고 쓰여있습니다. 눈먼 안과의사가 다른 사람의 눈에서 티를 빼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눈먼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아무 쓸모가 없다면 눈먼 안과의사는 얼마나 더 쓸모가 없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바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관심을 가지는 체하는 사람의 민감한 눈에서 작은 알갱이의 티를 빼낼 수 있을 만큼 분명히 볼 수 있기를 원한다면, 여러분 자신의 눈이 완전히 맑은지를 확인하십시오. 여러분의 눈 속에 있는 들보에 의해 눈이 멀어 있는 한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없습니다.

끝으로, 주님은 실제로 우리를 위선자라고 정죄하고 계십니다.

"너 위선자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 던져 버리라. 그래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어 던져 버리리라". 얼마나 정확한 말씀입니까? 문제의 진상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실제로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정죄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척합니다. 우리는 이 결점을 발견하는데 매우 고통스러운 척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님께서 이미 보여주신 바와 같이 (이것은 무서운 부분입니다) 사실은 그 결점을 발견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것은 위선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칭 친구인 것처럼 찾아가서는 '이런 결점이 당신 속에 있다니, 매우 부끄럽군요'라고 말합니다. 이같은 행동에 의해 흔히 나타나는 악의와, 이러한 사람이 흔히 즐기는 쾌감은 어떠한 것인지요!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돕고 싶다면, 너희가 이 문제에 순수하며 참되다면, 너희 자신에게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첫째 -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 던져버려라. 그래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어 던져버리리라."

이것을 이같이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진실로 다른 사람을 돕고 싶다면, 그리고 그들에게서 결점과 허물과 연약함과 약점을 제거하고 싶다면, 먼저 여러분의 영과 여러분의 태도 전체가 잘못되었음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판단과 혹평과 비판의 영은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미세한 티와 대조해 볼 때 실지로는 들보와 같습니다. 주님은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너희의 이 판단하는 영보다 더 무서운 형태의 죄는 없다는 것을 알아라. 그것은 들보와 같다. 다른 사람이 불륜과 부도덕과 정욕의 죄에 빠지거나, 여기 저기에서 작은 과실을 저지를 수도 있다. 그러나 너희 속에 있는 마치 들보와 같은 이 영과 비교할 때, 그것은 단지 눈에 있는 작은 티일 뿐이다. 너희 자신의 영에서부터 시작하라." 주님께서 바꾸어서 이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 자신을 온전히 정직하게 직시하라. 자신에 관한 진실을 인정하라!"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어떻게 실제적으로 행해야 합니까? 매일 고린도 전서 13장을 읽으십시오, 매일 우리 주님의 말씀을 읽으십시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를 살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의 진실에 대하여 직시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에 관하여 한 말을 앉아서 분석해 보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의미하는 바가 실지로 무엇인가를 자문해 보십시오. 이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괴로운 과정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과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선언을 정직하고 참되게 살핀다면, 우리는 눈에서 들보를 빼내는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 우리는 충분히 겸손해져서 비판과 혹평의 영에서 완전히 해방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논리의 표본입니까! 사람이 진정 참되게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면 결코 누구도 잘못된 방법으로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정죄하고 자기 손을 씻고 자기를 깨끗케 하고자 애쓰는 일에 모든 시간을 사용합니다. 비평과 혹평의 영을 제거하는 한 가지 길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먼지와 같이 낮추어, 그 결과 우리의 눈에서 들보를 제거하며, 필연적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도우며 그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를 빼낼 수 있는 적합한 상태가 될 것입니다.

눈에서 티를 빼내는 과정은 매우 어려운 수술입니다. 눈보다 더 민감한 기관은 없습니다. 손가락이 눈에 닿자마자 눈은 닫힙니다. 눈은 너무나 예민합니다. 눈을 치료하는데 무엇보다 먼저 요구되는 것은 동정과 인내와 침착과 냉정입니다. 이것들이 요구됨은 수술의 섬세함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영적 영역으로 옮기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혼을 다루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사람 속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손대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 작은 티를 빼낼 수 있을까요? 이 점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겸손해야 하고, 동정심이 있어야 하며, 자신의 죄와 자신의 가치 없음을 깊이 인식하여, 그 결과 다른 사람 속에서 그것을 발견할 때 정죄하기는 커녕 슬피 울고 싶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동정과 연민으로 가득합니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돕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제거하는 것을 심히 기뻐하여 그도 동일한 기쁨과 즐거움을 갖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맑은 시력을 가진 후에야 비로소 영적 안과의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직시하고, 이 들보를 제거하며, 우리 자신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겸손하고 이해하며 동정적이고 관대하며 사랑이 넘치는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바, 다른 이에게"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수" 있으며, 그것에 의해 그를 도울 수 있습니다(엡 4:15). 이 일은 삶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마지막 일들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감사하옵게도,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에게 이것을 말할 때, 여러분은 그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뿐 아니라, 그 일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동일한 진리를 말하지만, 여러분으로 하여금 즉시 자신을 방어하도록 이끌고, 그렇게 하여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도록 이끄는 태도로 말합니다. 그 까닭은 그들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야고보서를 인용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각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할지니라."(약 1:19).

이상 말씀드린 세 가지 이유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갈보리와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에 비추어서 이러한 진리를 대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이생에서 징계를 피하고 싶다면, 그리고 - 이것이 성경의 말씀이거니와 - 오는 세상에서 손실의 괴로움을 피하고 싶다면, 먼저 여러분 자신을 판단하는 것 외에는 판단하지 마십시오.

- 산상설교 중에서-

 

포도나무선교회

'로이드 존스 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적 판단과 식별  (0) 2012.12.27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0) 2012.12.20
영들을 시험하는 방법  (0) 2012.12.05
우리를 굳세게 하는 것은 진리 뿐이다  (0) 2012.12.03
17.아담의 후손과 원죄  (0) 2012.11.27


왕의_왕 (옹기장이)

 
유대_땅_언덕에 (양준모)
 
 


'찬양의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삶의 시간 끝나고  (0) 2012.12.13
Glorious Day(Living He Loved me)  (0) 2012.12.11
헨델의 할렐루야-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0) 2012.12.07
Bleesed Be Your Name(Worship Video /Iyrics)  (1) 2012.11.29
목양연가 Praising  (14) 2012.11.26
  
눈꽃 /최송연
하얀 새의 깃털처럼 부드러운 너 뾰족한 가시 탓하지 않고 살포시 그 위에 내려앉네 너의 그 부드러움은 뾰족해서 시린 가슴도 넉넉히 감싸줄 수 있으리 하얀 이슬 머금어 깨끗한 너 시궁창 더럽다 탓하지 않고 그 위에도 사르르 찾아주네 너의 그 깨끗함이 더럽고 추한 만상(萬象) 모두 덮고 남을 수 있으리니 순결한 주의 사랑 나타내는 네가 있어 온 누리엔 새하얀 눈꽃이 피네



외면적(표면적), 입술만으로가 아닌,
진실과 순결로 무장된 성도의 나가야 할 길을
쏟아지는 하얀 눈꽃에 비유해 본 것입니다.^^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님이 오신 12월이면...  (5) 2012.12.21
커피향 같은 내 사랑  (0) 2012.12.12
작은 새의 기도  (0) 2012.12.01
연모(戀 慕)  (2) 2012.11.23
위장된 겸손  (0) 2012.11.14

 

 

 한 해의 끝자락에서...

 

 

기대한 만큼 채워지지 않는다고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믿음과 희망을 갖고 최선을 다하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더 사랑하지 못한다고 애태우지 마십시오.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지금 슬픔에 젖어 있다면
더 많은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고 자신을 탓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흘리는 눈물,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누군가를 완전히 용서하지 못한다고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아파하면서 용서를 생각하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모든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고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날마다 마음을 비우면서 괴로워하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젊은 날같이 힘차게 못 걷는다고 내 발걸음을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지금 내 모습을 그대로 부지런히 걸어가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담아온 글

 

 



'좋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보일 때  (0) 2012.12.19
표현하는 사랑이 아름답습니다!  (0) 2012.12.13
마리모 이야기- 감동 스토리  (1) 2012.12.09
분명한 것과 희미한 것  (0) 2012.11.27
내 마음에 담겨진 당신  (0) 2012.11.27

'Amazing Na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환상적인 일출 모음  (0) 2012.12.30
Planet Earth  (0) 2012.12.14
살아숨쉬는 자연  (0) 2012.12.08
경이로운 자연  (1) 2012.12.08
The Birds of Paradise  (0) 2012.12.05

'좋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표현하는 사랑이 아름답습니다!  (0) 2012.12.13
한 해의 끝자락에서...  (0) 2012.12.10
분명한 것과 희미한 것  (0) 2012.11.27
내 마음에 담겨진 당신  (0) 2012.11.27
깨져도 아름다울 수 있는 것  (0) 2012.11.21

  

 

 

준비된 상태에서 살아가기(Living in a State of Preparedness)

 

무엇이던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열린 마음과 믿음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준비된 상태에서 살아야 종말의 시대를
소망과 기쁨 가운데 살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과 같이 우리는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의 원수인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기"(베드로전서 5:8)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하고 술 취하고
인생살이 걱정하다가 마음이 둔해져서
뜻밖에 그날이 너희에게 덫과 같이 덮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들을 겪지 않고
내 앞에 설 수 있도록 언제나 정신차리고 기도하여라"
(누가복음 21:34~36)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 때에 따라야 할 말씀입니다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한국교회의 무속적 현상과 그 극복(1)

한국교회가 비복음적, 반복음적인 무속적 현상을 문제로 의식하고 있지 않거나 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묵인 내지 허용해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심각한 것이고 비판을 받아야 한다.

<연재순서>

Ⅰ. 서론
Ⅱ. 한국교회에 내재하는 무속적 현상들
1. 긍정적인 현상들

1) 새벽기도회 2) 성미 3) 각종헌금4) 주일성수와 헌신적 봉사 5) 번영신앙

2. 부정적 현상들
1) 교회 안에서 사용되는 용어들 2) 일천번제 3) 각종 작정기도회와 특별집회 4) 교패와 십자가 장식들
5) 경품행사 6) 공인(公人)들의 공적(公的)인 기도7) 기도원운동 8) 가계에 흐르는 저주

Ⅲ. 무속적 현상의 극복을 위한 대안
1, 성경적 신관, 세계관의 확립
2. 신앙고백서를 통한 신자양육
3. 성례전의 회복과 권징의 시행

Ⅳ. 결론

1. 서론

한국에 기독교가 전해진 것이 120년 남짓이다. 그 시간 속에서 한국교회는 엄청난 양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다. 안팎의 걸림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잘 극복하고 오늘의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성장의 이면에는 돌아보아야 하고, 반드시 개혁해야만 하는 요소들이 있다.

특별히 불교와 유교, 그리고 무속종교가 한국인이 가치관과 생활습관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회가 이 땅에 들어왔다. 서로 세계관과 가치관이 다른 종교이기 때문에 신앙적, 문화적 충돌은 필연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 그것이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라는 아픔의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어려운 환경들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이질화 현상이 기독교와 토속 종교의 혼합적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어떤 종교적 색채가 강한가에 따라서 종교로서의 명칭을 붙이게 되겠지만, 본질적인 면에서 많은 변질이 동반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토착화신학이라는 방법론을 통해서, ‘기독교’와 ‘한국이라는 토양의 전통적 종교’의 조화를 추구하는 노력이 교파에 따라서는 이미 선교 초기에 있었지만, 해방 이후에는 1960년대 감리교회의 윤성범을 중심으로 크게 대두되기도 했다. 그리고 토착화신학의 여파는 현재까지도 일부 신학자들과 교회들에 의해서 적용되고 있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도 있다. 이처럼 토착화라는 신학적 방법론이 적극적으로 개발되고, 또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환경은,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뿌리 내리는 과정에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요소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어느 문화이든 그 이면에 종교적 배경을 갖고 있다. 그리고 종교적 이념이나 의식은 문화를 통해서 그 사회를 지배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할 때, 한국이라는 문화(사회)에 기독교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기독교회의 신앙이 한국적인 것으로 변질되거나 변질될 요소를 포함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무속적)이 만들어 낸 문화 혹은 의식, 전통, 관습 등과 같은 것들이 기독교회의 신앙에 포함될 수밖에 없음도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이러한 현상은 한국기독교회의 무속화를 낳게 하고, 결국 기독교회의 신앙이 변질, 왜곡되는 현상을 동반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현재의 한국교회에서 너무나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은 다양한 종교적 형태와 표현을 동반하는데, 대개의 경우는 무속신앙적인 요소들이 기독교로 포장된 것이다. 특히 부흥회, 기도원, 심지어는 교회 내에서도 생각 없이 행해지는 집회, 기도회, 행사 등에서 무속적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신자들이나 지도자들 자신이 그러한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기독교회의 신앙으로 받아들이거나 강조하고 있다는 점도 큰 문제다.

한편 이러한 요소들은 한국교회의 양적인 성장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교회의 양적인 성장을 지향하는 일부 지도자들과 그러한 신앙에 매료된 신자들이 추구하는 내용은 다분히 무속적인 내용을 동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병적인 요소를 분별력 없이 목회와 전도의 방법이나 도구로 사용한다면, 한국교회는 중세 말기의 기독교회가 처했던 것처럼 신앙의 무속화가 불 보듯 뻔하다는 사실 때문에 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기독교적인 모양과 분위기로 포장된 무속적 신앙의 현상을 정리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성경적 대안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려고 한다. 한국교회의 성장에 큰 공헌을 한 한국교회 안의 무속적 신앙의 현상은 지금 와서 오히려 심각한 장애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고, 그것을 극복하고 진정한 성장을 이룰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국기독교회 안에 만연해 가고 있는 무속적 현상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하는 것도 이 글의 목적이다.


Ⅱ. 한국교회에 내재하는 무속적 현상들

한 사회는 그 사회가 갖고 있는 세계관에 의해서 어떤 신관(神觀)과 사회적 가치관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즉 한국이라는 사회에는 다신론적, 자연신론적, 혼합주의적 신관을 바탕으로 하는 샤머니즘(Shamanism)이 지배하고 있다. 이런 신관은 우리 역사와 사회와 사람들의 삶을 지배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부로부터 들어온 기독교회는 전혀 다른 신관과 가치관을 갖고 있기에 그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충돌의 고통을 겪으면서 한편으로는 이해와 수용, 그리고 적당한 타협을 통해 혼합된 형태의 신앙적 현상들을 동반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자연스럽게 무속적 양태를 갖게 되었으며, 한국교회 안에 자연스럽게 수용되었다.

전통적으로 갖고 있었던 무속적 신관과 가치관이 기독교회의 신앙형성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전제할 때,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볼 수 있다.1) 긍정적이라는 표현은 무속적 신앙의 요소가 기독교 신앙형성과 성장에 일조(一助)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영향력을 통해서 형성된 신앙적 측면들을 어떻게 성경적 신앙과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시키지 않는 가운데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과제인 것도 사실이다.

한편, 부정적인 면은 한국교회에 있어서 종교개혁의 차원에서 평가하고 개혁해 나가야 할 내용들이며, 한국교 안에 있는 비복음적 내지는 반복음적인 요소들로서 반드시 개혁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교회가 그것을 문제로 의식하고 있지 않거나 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묵인 내지 허용해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심각한 것이고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비록 부정적인 면이긴 하지만, 그것들은 한국교회가 외형적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매우 크게 기여한 것들로서 한국교회 안에서 확실하게 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요소들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것을 부정하거나 문제 의식화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충분히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를 성경의 가르침 위에 바르게 세우지 못한다면, 한국교회는 결코 순결하게 유지될 수 없을 것이고, 어는 순간 모두 휩쓸려 어디론가 사라질 것이기에(마 7:24-27), 지금 개혁해 바로 세워야만 한다는 사명의식으로 이 문제를 접근해 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무의식적으로 혹은 분별하지 못한 채 그것을 사용한다면 자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_____________________


1) 필자의 긍정적이라는 표현에 오해가 없기를 바라면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임을 밝혀둔다. 여기서 사용된 긍정적이라는 것은 한국인의 무속적 정서와 가치관이 교회 안에서 신앙적 내용과 조화를 이루어 기독교회의 성장과 신앙의식에 널리 영향을 주었다는 제한적 의미에서 사용한 것일 뿐이다.





이종전/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역사신학
크리스천인사이드 제49호 2012년 10월 2일 10면/출처: 개혁주의마을



죄는 하나의 세력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 (sin, 罪)란,
"과녁을 빗나가다"는 뜻으로 ‘άμαρτία’(하마르티아)입니다.
무엇보다 사람의 본분에서 벗어나는 것이고(전도서12:13)
성경과 진리의 영이라는 과녁을 이탈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변함없이 적대하시는 하나님은, 그 의로움과
그 완전한 공의라는 속성 때문에 죄를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세상 죄는 어린양(예수님)의 어깨위에 지워졌으며(요1:29)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그 십자가에 쏟아졌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피 아래에서만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행4:12)

죄가 실재(實在)하듯 지옥도 사실이며 심판도 사실입니다.
(히9:27. 계20:10. 계21:8. 롬3:23. 롬6:23. 요일1:19)
죄와 지옥과 심판은 서로 별개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죄는 무엇을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죄는 윤리나 도덕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나타난 죄의 여러 현상보다 더 깊고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죄는 아버지를 등지고 나가는 탕자와 같습니다.
죄는 만왕의 왕께 반역하는 태도입니다.
창조주이신 만주의 주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 근원이 되시는 분을 일부러 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원수되는 것입니다.

 

죄는 자기 중심적인 마음과 생각이며 삶의 태도입니다.
죄는 항상 육체적이며 동물적이며 본능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지만 신적 형상을 잃고
(본능과 탐심만이 생명을 추동[推動]하는) 짐승이 된 것입니다.
죄는 늘 육체-중심적이며 물질적이며 권력적입니다.
항상 외모-지상주의적이며 쾌락적이며 이기주의적입니다. 죄는
개인-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국가-이기주의로 나타납니다.

 

죄는 항상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창세기 3:6) 특징이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한
육체적 욕구와 에너지로 움직여지는 모든 가치들입니다.


(요일2:16)의 말씀은 (창세기3:6절)과 하나가 됩니다.
인간의 삶 그 자체가 거의 전부 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는 그 자체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죄는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나지만
그 본질은 하나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절~5절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갈라디아서 5장 19~21에서 열거되는 것들입니다.

또,  보이지 않는- 영이신 전능자 앞에서
보이는 사람(목사나 교주)을 높이 세우는 것은
아론의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것(창32)와 똑같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목사나 이단 사이비 교주들은 우상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을 믿음의 본보기로 추겨 세우고
설교의 례[例]와 간증의 본보기로 삼는 행위 역시
육체의 소욕을 좇는 것이며, 변장술로 은폐한 죄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살고
자기 육신의 사고 방식대로 생각하는 것
그것이 죄입니다. (롬8:6. 롬8:7. 롬8:13.
-요14:17. 롬8:5. 고전2:12. 요3:6. 요6:63)

죄는 하나의 세력입니다.


욕심, 시기, 미움, 증오등과 같이, 악의 힘, 어둠의 힘이고,
타오르는 열정입니다.죄는 지옥이 지옥되게 하는 원소이며
지옥을 불 타오르게 하는 에너지원(源)입니다.(약3:6)

자료ⓒ창골산 봉서방           


 



하나로 붙들어 놓기(Keeping it Together)

 

세상 사람들과 일들이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끊임없이 동요하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하나로 붙들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너희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인내하면 너희 자신을 구할 것이다"
(누가복음 21:18~19)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더 친밀하게 아신다는 것을
우리가 믿을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 남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함께 붙들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믿을 때, 우리는 우리 영혼을 하나로
붙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 몸의 각 부분 부분이,
심지어는 머리카락 하나하나도
하나님의 신성한 포옹 속에서 안전하다는 것을
우리가 믿을 때에만,
우리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영적인 삶을 살 때,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 옮긴 글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중에서



 

'Amazing Na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Planet Earth  (0) 2012.12.14
Power of Mother Nature 1080p HD  (0) 2012.12.09
경이로운 자연  (1) 2012.12.08
The Birds of Paradise  (0) 2012.12.05
정말 시원해요~^^  (0) 2012.08.19













































































아라비아에서 보낸 삼 년

선層옐� 46호 게재 / 성경본문 바로읽기(13) / 길성남 교수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뒤 사도 바울은 아라비아로 갔고, 거기서 3년 동안 체류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7절에서 그는 자신이 회심한 후에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고 분명히 진술합니다. 그러나 아라비아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거기서 조용히 칩거하면서 깊은 기도와 묵상을 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최근에 어느 주석학자는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모든 인간적인 접촉을 끊고 하나님과 홀로 시간을 보냈다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그는 이렇게 진술합니다.

이것은 새롭게 개종한 유대 바리새인이며 기독교 박해자로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바울은 회심한 상태였다. 그는 자신에게 계시된 복음의 진리에 비추어 기독교에 대해 자신이 이전에 견지했던 입장을 반성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 모든 기간 동안 바울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자신이 정통해 있던 구약과의 관련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생각했을 것이다(그랜트 오스본[편], 「에베소서」[성서유니온선교회, 2006], 73).

말하자면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보낸 3년은 본격적인 복음 사역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던 셈입니다. 사역을 하기 전에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보냈고,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기도와 묵상과 성경연구로 사역을 준비했다고 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사도 바울이 체류한 ‘아라비아’를 시내 반도에 있는 아라비아와 동일한 곳으로 생각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 25절에서 ‘아라비아’라는 지명이 다시 등장하는데, 이 본문에서 바울은 아라비아 시내 산이 있는 곳이라고 명시합니다. 회심한 뒤에 바울이 간 곳이 시내 산이 있는 아라비아 사막이라면 그곳에서 그가 3년 동안 기도하고 묵상했다는 것은 거의 확실해보입니다. 광야나 사막에서는 기도와 묵상 이외에 다른 일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성경의 다른 증거와 부합되지 않는다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9장 19-20절에서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쌔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라고 말합니다. 사울(바울)은 회심한 후에 다른 준비 없이 ‘즉시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전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이심을 깨닫고 확신하는 일은 눈이 먼 상태로 보낸 3일로도 충분했을 것입니다(행 9:9).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과정에서, 또는 핍박하기 전에 복음의 내용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을 정통 유대인이라면 결코 수용할 수 없는 불온하고 심지어 참람한 것이라고 판단하여 그리스도인들을 강력하게 핍박했습니다. 그러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을 했고 그리스도인들이 전하는 복음이 참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인생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제 그가 할 일은 너무나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께서 승인하신 복음을 만민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멸하는 자가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더구나 다메섹 체험은 단순한 ‘회심’(conversion)이 아니라 ‘부르심’(calling)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 자신이 고백하듯이 그 부르심의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는 데 있었습니다(갈 1:16). 따라서 바울이 다메섹에 머무는 며칠 동안 ‘즉시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한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시 순종한 행동이었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그가 멀리 시내 반도에 있는 아라비아까지 가서 새삼스럽게 3년 동안 기도와 묵상을 하면서 사역을 준비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아라비아에 간 목적 달리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라비아에 갔다고 할 때 ‘아라비아’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광야나 사막 지대라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F. F. 브루스와 리처드 롱게네커를 포함한 많은 성경학자들은 바울이 3년 동안 체류한 ‘아라비아’가 시내 반도에 있는 아라비아 사막이나 광야가 아니라 아라비아의 나바티아(Nabatea) 왕국을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이 왕국은 다메섹 동남부에서 시내 반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데가볼리 성들의 일부와 거라사 등이 이 왕국에 속해 있었고, 남부의 페트라(Petra)와 북부의 보스트라(Bostra)가 이 왕국의 주요 도시였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나바티아 왕국이 아라비아에 포함되어 있다고 증언했습니다. 로마 시대에 나바티아 왕국은 아라비아의 나바티아로 알려졌습니다. 회심 후 바울은 시내 반도에 있는 아라비아 사막이 아니라 다메섹의 동남부에 있는 아라비아의 나바티아 왕국에 가서 그곳에 형성된 유대인 공동체를 중심으로 3년 동안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고린도후서 11장 32-33절에 기록된 바울 자신의 증언에서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쌔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이 사건은, 거의 모든 성경학자들이 옳게 지적하고 있는 대로, 사도행전 9장 23-25절에 기록된 사건과 동일합니다. 이 본문에서 누가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내리니라.” 두 사건은 모두 다메섹에서 일어났고, 두 사건에서 모두 사울(바울)이 광주리를 타고 성벽을 내려가 탈출합니다. 물론 다른 점도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본문에서는 아레다 왕의 방백이 사울(바울)을 잡으려 한 반면, 사도행전 본문에서는 유대인들이 사울(바울) 죽이기를 공모했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아라비아와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이 사울(바울)을 죽이기로 공모하고 아레다 왕의 방백에게 도움을 청했을 것입니다. 또는 바울이 아라비아(나바티아 왕국)에서 3년에 걸쳐 유대인들뿐 아니라 나바티아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여 문제를 일으켰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로 전하는 것에 분개한 유대인들과 협력하여 나바티아인들이 바울을 체포할 목적으로 다메섹 성을 지켰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본문에서 ‘여러 날’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표현은 사실상 오랜 기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많은 날’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바울이 광주리를 타고 다메섹 성에서 탈출한 사건은 그가 아라비아에서 3년 동안 복음을 전하다가 그곳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와 나바티아 사람들의 반발에 부딪혀 다메섹으로 돌아온 직후에 일어났습니다. 다메섹까지 바울을 추격한 유대인들과 나바티아인들은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과 공모하고 그 지역을 총괄하던 아레다 왕의 방백의 지휘 아래 바울을 체포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바울은 다메섹에 있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을 받아 밤에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도망한 것입니다.    

바울이 나바티아 왕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은, 고린도후서 본문에 나오는 ‘아레다’ 왕이라는 표현에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레다 왕은 주전 9년부터 주후 40년까지 나바티아 왕국을 통치한 아레다 4세(Aretas IV)입니다(그는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의 장인이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헤롯은 아레다 왕의 딸을 버리고 자기 형제의 아내이자 조카딸인 헤로디아와 결혼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34-39/40년 사이에 아레다 왕이 다메섹을 통치했다고 주장합니다. 이 기간에 바울이 아레다 왕의 방백의 손을 피해 다메섹 성을 탈출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34-62년 사이에 주조한 로마 동전이 다메섹 지역에서 출토되지 않았다는 다소 빈약한 증거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 기간에 다메섹이 로마의 통치를 받았을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당시에 다메섹에 많은 나바티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어서 아레다 왕의 영향이 다메섹까지 미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레다 왕은 다메섹에 있는 나바티아인 공동체의 지도자를 방백으로 세웠을 것입니다. 바로 이 방백이 유대인들과 나바티아인들과 함께  바울을 체포하려 한 것입니다.

성경의 여러 증거(갈 1:17; 고후 11:32-33; 행 9:19-20, 23-25)를 이렇게 이해하면, 바울은 회심 후에 아라비아의 나바티아 왕국에 갔으며, 그곳에서 3년 동안 깊은 기도와 묵상과 성경연구를 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물론 바울은 그곳에서 3년 내내 복음을 전파하는 일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 전파와 함께 정기적으로 기도와 묵상도 했을 것이고, 성경 연구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 복음에 대한 이해와 확신이 더욱 깊어졌을 것이고, 그 결과 복음을 더욱 힘 있게 전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라비아의 나바티아 왕국에서 그가 주로 한 일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열심히 복음을 전파할수록 유대인들과 나바티아인들의 반대도 극렬해졌을 것이고, 결국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아라비아에서 사람들과의 접촉을 끊고 조용히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을 했다면 반대에 직면하지 않았을 것이고, 아레다 왕의 방백이나 유대인들이 그를 체포하거나 죽일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사역을 위한 준비 없이 즉시 다메섹에서, 그리고 아라비아(나바티아 왕국)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에도 복음 사역을 위해 따로 준비할 필요 없다고 주장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는 특별합니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전통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그리고 다메섹 도상의 체험을 통해 구약의 가르침과 유대교의 전통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지닌 의미를 극적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눈을 가리고 있던 ‘수건’을 하나님께서 벗겨주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빛을 그의 마음에 비추어주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바울은 이미 준비된 그릇이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3년 동안 체류한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신실하게, 그리고 즉각적으로 응답한 점입니다. 그가 상황이나 조건을 따지지 않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이방지역에 들어가서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지경까지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한 것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바울의 이런 모습은 종교적 관용을 미덕으로 예찬하고 기독교 복음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시대에 모든 기독교 사역자들이 따라야 할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음호에)

http://cafe.daum.net/ktsackr/YRrg/16?docid=1F7Ec|YRrg|16|20090527093928&q=%BB%E7%BF%EF%20%BE%C6%B6%F3%BA%F1%BE%C6%20%BA%B9%C0%BD%C0%FC%C7%D1%20%B1%D9%B0%C5



      

      


  

    사람을 덮치는 고난, 이른바 불운이나 재난은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 안에 두기만 한다면
그것은 사람을 건드리는 만큼 하나님을 건드리고
사람을 거스르는 만큼 하나님을 거스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예비해 두신
선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시기만 한다면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겪으시는 고난
그분에게 닥친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기만 한다면
그 고난은 자연스럽게 신적인 것이 됩니다.

수치가 존경으로 바뀌고, 쓴맛이 단맛으로 바뀌며
가장 깊은 어둠이 가장 밝은 빛으로 바뀝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제 맛을 얻어 신성해집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하나님을 닮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 외에는
어떠한 것도 구하지 않습니다
그에게서는 하나님의 맛 외에 아무 맛도 나지 않습니다.

그는 가장 감미로운 순간은 물론이고
모든 쓰라린 순간에도 하나님을 붙잡습니다.
   (-마이스터 엑카르트-)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강력한 변증이다.
사람들은 설교를 듣기보다는 눈으로 보고자 한다.
만일 우리가 예수께 속했다면,
우리는 그분처럼 살아야 한다.
(p241. 예수닮기/레슬리 플린/말씀사)

믿음은 '앎'이 아니라 '삶' 이다.
(이재철 목사/참으로 신실하게, p16)

은혜안에 자라간다는 것 은혜안에 자라간다는 것은
이 구주의 모습, 그분의 인자하시고 영광스러운
특징의 모습이 점점 더 우리의 특징, 태도,
그리고 우리의 행동 안에 있는 것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임스 페커/은혜를 아는 지식 /p150)

고로 준열한 성경 말씀의 의미는
자아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 대해 사는 것 -
“자신의 정당한 세상적 계획과 희망 일체에 대해 죽는 것,
하나님 음성이 안 들리게 하는 소리라면
아무리 듣지 좋아도 거기에 대해 죽는 것”-이었다.
(에이미 카마이클, p.82/엘리자베스 엘리엇/복있는 사람)

하나님께로 가는 길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버림으로써 얻고
낮아짐으로서 높아지고 비움으로써 채워지고
죽음으로써 살고 부정으로써 긍정에 이르는
자기비움의 길입니다.

 

(펌 글입니다)

'은혜의 단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하는 자들아  (0) 2012.12.18
사랑할 사람만 있으면 산다  (0) 2012.12.16
당신은 내게 참 특별한 사람입니다  (0) 2012.12.05
강한 용사  (0) 2012.11.29
내가 너를 고난의 용광로 속에서...  (0) 2012.11.24

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앞으로 회원교단들의 결정과 관계없이 이단 규정이나 이단 해제를 자유롭게 하기로 했다.

한기총은 4일 실행위원회를 열어 특정단체를 이단으로 규정하거나 이단을 해제하는 일을 한기총 회원교단의 입장과 관계없이 자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결의했다.

이는 현재 예장합동총회 등으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된 '다락방 전도운동'이 회원교단인 예장개혁총회 교단에 흡수되어 있는 상태에서 자칫 합동교단의 결정과는 별개로 이단을 해제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해석돼 논란이 일 전망이다.

CBS TV보도부 박성석 기자
ⓒ CBS 크리스천노컷뉴스




1. 서론

        현 한국교회는 위기에 있다. 80 년대의 풍성한 은혜의 시대를 보내고 이제 교회의 존립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큰 도시의 대형교회들을 제외하면 태만의 소형교회들은 여러 모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모습은 최근 주 5일 근무제의 실시를 앞두고 그 분명한 대안을 갖지 못하면서 더욱더 흔들리고 있다. 참고로 안명준, “주 5일 근무와 한국교회의 새로운 도약,” 크리스천투데이 신문 11월 9일,
http://www.chtoday.com/new/template/news_view.htm?code=oc&id=158
본 논문의 목적은 현재 크게 두드러진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에 대하여 신학적 관점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중요 내용의 범위는 한국교회의 신학적인 문제점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 문제점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책은 다루지 않았다.

I.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

        최근 미국의 한 기독신문사는 목회자들이 생각하는 교회의 문제점들을 조사하였다. “목회자 '지나친 성장주의' 갱신대상 1호: 종교 개혁절 교회갱신 설문조사 66%응답.
미주 목회자들이 가장 경계하는 교회의 문제점으로 '지나친 교회성장주의'를 꼽아 관심을 모은다. 이는 미주크리스천신문(발행인: 장영춘 목사)가 최근 종교개혁 484주년을 맞아 미주교회 목회자 1백명을 대상으로 교회갱신을 위한 구체적인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나타난 것으로 전체 응답자의 66%가 '지나친 교회성장주의'를 교회갱신 목록 제1호로 꼽았다. 두 번째로 많았던 응답은 목회자의 세속화와 성직자 탈선 등과 같은 '목회자 자질 문제'(18%)였으며, 그 다음은 '윤리의식의 실종'(14%)이었다. 교회가 바람직한 냠린�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라는 질문에는 '성경으로 돌아가자'(58%)가 가장 많은 응답을 보였으며 '목회자의 각성과 개혁'(37%)도 꽤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밖에 '교단에서 안수조건 및 기준 강화', '대형 교회주의 지양', '평신도 바로 세우기' 등의 의견이 제기됐다. 미주크리스천신문이 목회자들에게 설문한 내용은 △오늘날 교회들의 잘못된 점들은 무엇인가? △교회들이 잘못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른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등이었으며 서부와 동부의 목회자들을 무작위로 선정, 설문 대상을 뽑았다.“ http://www.Christiantoday.com에서 인용.
물론 미국이었지만 우리 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문제점으로 삼는 주된 것들은 지나친 교회성장주의, 목회자들의 세속화와 탈선, 그리고 윤리의식의 실종으로 보았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에 대한 참고로 기독교신문 취재팀 편, 『한국교회의 허와 실』, 1, 2, 3, (서울: 쿰란출판사, 1993); 김명혁, 『한국교회 쟁점진단』, (서울: 규장, 1998); 강원돈, 2000년을 맞는 한국교회의 개혁과제, http://www.socialethics.org. 여기서 강원돈 교수는 한국 기독교의 문제점으로 근본주의, 물량적 성공주의, 개교회주의, 교파주의, 사회윤리 문제와 선교의 과제에 대해 닫힌 정치적 신학,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삶의 현실로부터 유리된 신학적 담론형성에서 교회의 에큐메니칼한 현존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본다.  손봉호, 홍치모, 김영우, “종교개혁과 현 한국교회개혁의 방향”, 『총신대보』, 2001년 11월 8일(화) 제 242호, http://csdb.net/all.htm; 채 수 일, “한국교회에 대한 신학적 비판,”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월례포럼 (2001. 6. 25), http://www.minjungtheology.net/forum/f2001-06-csi.htm. 여기서 그는 다음과 같이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말한다. “오늘 한국교회의 개혁이 문제되는 방향은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목회자와 신자의 도덕성에 관계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구와 제도로서의 교회에 관계된 것이다. 성직자와 신자의 각종 스캔들에서부터 지도층 인사들의 선거에서의 금품수수, 각종 신학교의 난립과 명분 없는 교파 분열, 재산권과 교권을 중심으로 한 다툼, 대형교회의 세습, 교회의 양극화 등은 당사자의 개인적 비리를 넘어 기독교와 한국교회 자체의 이미지는 물론 종교로서의 공신력을 크게 실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제도로서의 한국교회의 문제로서는 친미 반공주의, 정치-경제 권력과의 유착, 교회 안의 성차별과 성폭력, 권위주의적 성직자 중심주의, 대형교회 재정운영의 불투명성, 무분별하고 전투적인 해외선교 행태 등이 비판의 표적에 들어올 것이다.”
한국교회의 신학적인 문제점들 가운데 먼저 극단적 이원론을 먼저 다루려고 한다.

   1) 극단적 이원론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로 먼저 극단적 이원론을 들을 수 있다. 이원론(dualism)은 일반적으로 근본적인 실재를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것으로 주장하는 이론이다. 손봉호 교수는 이원론에 대한 정의로 “일반적으로 현실 전체, 혹은 어떤 특정한 현실의 근본적인 기원을 서로 동등한 두 가지의 원칙에서 찾으려는 견해를 말한다”라고 한다. 손봉호, “이원론,” 『신학사전』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84).
이원론이라는 용어는 영국의 동양학자 토마스 하이드 (Thomas Hyde)가 『고대 페르시아인의 종교의 역사』(Historia religionis Veterum Persarum, 1700)라는 책에서 선의 원리와 악의 원리가 영구히 대립하는 종교체계를 이 말로 부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형태는 플라톤의 이데아계(영지계)와 감성계(현상계)에서 잘 나타난다. 그의 작품 Timaeus은 기독교에 큰 영향을 줬다. 이 책은 우주론에 대한 요약으로, 그는 세상은 Demiurge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며, 혼돈된 물질 위에 형상의 패턴을 인쇄했다고 한다. 플라톤은 주장하기를 학문은 일시적인 것, 유한한 것, 항상 변하는 것,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닌 것을 다루기 때문에 그것은 정확하게 진실이 될 수 없으며, 보이는 세계는 영원하고 참된 것의 하나의 복사요, 하나의 상(像)이다라고 한다. "He pointed out that science cannot be accurately true since it deals with the
temporal, the finite, the forever changing, never with the eternal. But yet the
visible world is a copy, an image, of what is eternal and true." Hamilton and Huntington Cairns, "Introduction," in Timaues, The Collected Dialogue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3), p. 1151.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플라톤의 사상이 유한과 무한의 차이를(the difference between the finite and the infinite) 말하고 있다. 이 사상은 서구의 철학사를 흘러서 교부들과 쯔빙글리, 칼빈, 그리고 키에르케고르, 그리고 칼 바르트에서 변증신학으로 꽃을 피운다. 유한과 무한의(infinite, unlimited) 관계를 말한 내용은 Philebus 15b-17b.
그는 이원론 사상을 설명하기를 보이는 것들은 복사나 유사한 것이지, 그 자체가 영원한 것들이 아니다(All visible things are the copy and likeness, not the eternal things themselves, Timaeus 29c)라고 한다.
        결국 플라톤은 철저한 이원론(실제와 현상, 이데아와 감각적인 대상, 이성과 지각, 영혼과 육신)에서 전자가 후자 보다 더 우월하다. 그의 사상은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요 신학자였던 필로를 통하여 클레멘트, 오리겐 문제가 되는 그의 성자의 종속론적 삼위일체, 영혼의 선재, 우주적 타락, 성육신 교리 등은 모두 플라톤의 영향이다.
, 어거스틴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플라톤의 영향도 제법 크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해석, 지식의 궁극 목표는 지복이라고 하는 가르침, 이데아들과 영원한 진리들은 항존한다고 하는 일, 그리고 인간의 지식은 신적 정신에 의한 조명이라고 하는 설명 등에서 플라톤의 영향을 찾아 볼 수 있다.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플라톤은 영혼의 불멸성을 주장하는데 후에 기독교 신학자들이 플라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 특히 해석적 관점에서 볼 때 알렉산드리아학파와 교부들은 플라톤의 이원론에 근거하여 성경을 알레고리 방법으로 해석했다. 안명준, 『칼빈의 성경해석학』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7), 23-35.

        서구 철학에서는 이원론이 대표적으로 데카르트의 정신과 물체에 대한 그의 이해에서 철저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종교에서는 빛과 어두움, 선과 악에서 나타난다. 기독교의 여러 개념들이 이원론적 대립의 구도로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 육과 영,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나라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있다고 하여 기독교를 이원론의 종교라고 볼 수는 없다. 손봉호 교수는 기독교는 이원론을 주장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사상은 이원론의 유혹을 물리치는 강한 무기라고 말한다. 손봉호. 이원론.

        초기 한국교회는 경건하고 헌신된 선교사들을 통하여 건전한 신학과 경건한 신앙을  받게 되었다. 참고로 박응규, "일체하 한국 교회의 종말론 형성에 관한 연구," 『역사신학 논총』, 제 2집 2000, p. 183;  이 덕 주,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 6 호; 장동민,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에 대한 논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 6 호.
이들을 통하여 신학교가 세워지고 목회자가 배출되면서 한국교회는 일제의 핍박과 6 25 전쟁의 아픔을 이겨내었다. 80년대 한국은 고속 경제성장으로 인해 교회는 물질적 풍성함을 누리게 되었다. 격동기의 시련 과정을 통하여 한국교회는 민족적 고통과 정치적 억압의 시대에 세상과 내세라는 도식의 이원론으로 빠져들었고, 경제적 풍성함과 사회적, 윤리적 자유의 시대를 맞이해서는 교회와 세상이라는 도식의 이원론으로 빠져들고 있다. 전자의 구도에서는 기도와 기도원 그리고 치료의 은사와 신비주의의 강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후자의 구도에서는 지상 교회 내에서 특별은총의 충만함을 강조하였고, 일반은총의 영역으로서 세상에서는 특별은혜의 적용이 미약하였다. 전자의 경우 초월적이며 종말론적 이원론이 강했지만, 후자는 점차적으로 영역적 이원론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결국 수직적 신앙의 형태에서 수평적인 신앙의 형태로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모습은 한국교회의 개인의 구원을 중시한 보수적인 신앙과 사회구원을 주장한 진보적 신앙이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는 그 방식에서 분명하게 나타났으며, 교회가 외형적 모습을 중시하며 그 숫자적으로 많은 성장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목회신학에서 잘 나타난다. 따라서 한국목회자들의 책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극단적 이원론적 사고의 수정 없이는 참된 목회나 성도들의 교육이 이루어 질 수 없다. 한국교회는 극단적 이원론으로 인해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의 종말론적인 실현을 이 땅위에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는 천국이지만 교회 밖에서는 비 천국인 장소로 인식하고 기독교인들이 삶의 모범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를 지나치게 이원론적으로 강조한 결과 성도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적응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 즉 성도들은 자신이 출석하는 지역교회에 지나치게 비중을 둠으로써 그들이 사회에서 균형 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이원화 문제에 대한 참고로 홍성국, “현대 한국 기독교회의 이중성,” 『복음과 신학』 4 (2001), 9-28; 신현수,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믿음과 행위 문제,” 『복음과 신학』 4 (2001), 63-84.


2) 로마 카톨릭교회로 복귀하는 현상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문제점 중에 하나가 바로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로 복귀하는 현상이다. 모든 교회가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강조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에서 조금씩 이탈하는 모습을 많은 면에서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논하기 전에 먼저 로마 카톨릭교회가 교회의 본질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키프리안은 성례전을 강조하면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동일시하는 유형적 조직체로서 로마 카톨릭교회의 교회론에 기초석을 놓았다.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윌리엄 워커, 『기독교회사』 (서울: 한국기독교문화원, 1987), 63.
그리고 주교로부터 분리되는 자는 교회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폴 스티븐스, 『21세기를 위한 평신도 신학』 (서울: IVP, 2001), 52.
심지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라고 말하였다. 어거스틴은 도나투스와 논쟁을 통하여  교회의 본질을 강조하였다. 특히 예정론의 입장에서 교회를 택함 받은 자들의 단체 곧 하나님의 영을 받음으로 참된 사랑이라는 성품을 갖춘 성도의 무리로 생각하였다. 중세시대에 교회와 국가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위한 두 권세로 보았으며, 교회를 더 상위에 두었다. 후에 그레고리 2세는 성직자들의 권위를 강화시키고 로마 교회의 교황의 권위를 더 강화시켰다. 성직자들은 평신도와 분리된 계급으로 주장하였다. 그들만이 성도들의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교회 안에서 실행하였다. 로마교회는 자신들의 교회가 지상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로 착각하고 조직화된 교회를 강조하였다. 결국 중세 로마카톨릭교회는 구원을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큰 역할을 둠으로써 교회와 성직자들의 권위 강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관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중세시대의 교회는 근본적으로 성직자들의 독점적 영역이었다. 그들은 교회 사역의 주인으로서 실질적인 권위를 가졌고, 말씀의 권위 보다는 전통과 기구적인 제도 그리고 외형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독재적이며 카리스마적인 목회자들이 큰 교회를 맡고 있다. 장성우, 1992년 이후의 한국교회 권위적 구조의 문제점 분석비판-체제이론의 Feedback을 중심으로, http://www.kccs.pe.kr/thesis09.htm
지나친 카리스마의 남용은 많은 문제점을 야기 시킨다. 그런 지도자들의 권위는 로마 교황의 권세와 견줄 만 하다. 이런 목회자들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권위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의 권위는 사라지고,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소멸할 것이다. 한스 큉은 성령은 로마 교회와 사제들에게 제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에드먼트 클라우니, 『교회』 (서울: IVP, 1998),  63.
마찬가지로 인간의 권위가 앞세워진 유형교회에서 성령의 생명력 있는 역사는 자리를 잡지 못할 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말씀의 권위 즉 복음의 권위를 바르게 시행해야 할 것이다.
        권위적이며 독재적인 목회자들은 교회의 내면적이며 영적인 면을 강조하기 보다는 외형적인 요소와 조직과 행정 등 제도적인 요소들을 강조한다. 외형적인 요소의 강조는 결과적으로 인간적인 행위가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만든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이런 행위와 외형적인 노력에 신경을 더 쓰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오직 은혜를 강조하며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개혁자들의 정신과는 달리 인간의 외형적 행위에 강조가 심해지는 한국교회의 모습은 중세의 로마 교회를 연상케 한다. 중세에 로마 카톨릭교회가 형식과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것들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의 개념에서 영향을 받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때문이었다. 그의 신학의 중심사상인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라는 말은 로마카톨릭신학의 핵심이 되었다. 그는 어거스틴의 은총론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인간의 회심의 원동력이라고 말했으나 은혜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후에 공로 사상을 제공해 주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구원을 말씀과 은혜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중세의 로마 카톨릭교회의 문제점들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나타난다. 바로 이런 인간의 열심과 봉사를 강조함으로써 그런 외형적인 요소들을 신앙의 열매와 기준으로 삼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세속의 문화와 물질주의에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인위적인 교회의 행사와 외형적인 행위의 표출을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개혁자들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로마 카톨릭교회는 베드로의 후계권을 주장함으로써 비역사적이며 비성경적인 교황권의 강화로 인하여 개혁자들에 의해서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대형교회에서 담임 목사가 자신의 아들에게 변칙적인 방법으로 물려주는 후계 문제는 교회론의 심각한 변질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로마 교회가 주장하는 베드로의 후계권을 신학적을 비판하였던 개혁자들의 소리가 오늘날 우리에게 들리지 않고 있다.


3) 교회의 외형적 대형화

        한국교회의 문제점들 가운데 하나로 교회의 외형적 대형화를 지적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국의 모든 대형교회들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라는 것은 아니다. 큰 교회로서 말씀을 올바르게 전파하고, 성례전과 치리를 바르게 시행하며, 그리고 평신도에 대한 철저한 제자훈련을 통하여 성경적인 교회를 이룩하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국교회는 세속적이며 또 인위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외형적으로 대형화하려는 지속적인 시도가 있어 왔다. 말씀의 굳건한 기초 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형제에 대한 관심이 없이 거대한 외형적 조직체로서 대형교회의 모습은 미래 한국 개신교의 장래에 심히 우려되는 바이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의 대형교회들은 여러 모양으로 많은 문제점을 표출하고 있다. 이 모습들은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며 한국사회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대형교회의 출현은 먼저 목회자들이 외형적 성장에만 치중한 목회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목회자들이 지나치게 교회를 외형적인 성장에 목표를 둔 것이다, 특히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의 영향으로 성장한 어떤 초 대형교회는 많은 목회자들의 꿈이 되었다. 그래서 학자들 가운데서는 오늘날 한국교회에 교회성장이라는 새로운 신화가 존재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교회 성장이론의 대가인 맥가브랜(Donald A. McGavran)의 교회 성장이론 역시 한국교회의 대형화에 이론적 영향을 주었다. 한국교회의 성장위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은 참고로 Myung Jun Ahn, "Current Theological Issues in Korea," Theological Forum Reformed Ecumenical Council, vol. 26 (1998): 23-26. 인터넷 참고는 http://www.gospelcom.net/rec/TFDec98.html. 교회성장에 관한 연구를 위한 참고로 전호진, “한국교회의 성장과 해외선교”,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4호, 자료 인용 http://user.chollian.net/~ikch0102.


이런 영향들은 결국 교회의 본질에 대한 목회자들의 인식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교회의 본질적이며 영적인 면보다는 외형적이며 형식적인 면에 더 많은 강조를 두게 되어 결국 초 대형교회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대형화는 결국 미국의 상업주의와 실용주의 철학이 스며들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결국 한국 초대 교회의 순수했던 모습과 개혁자들이 주장했던 올바른 교회의 본질에서 멀어지고 있다.
        이런 대형교회로 인하여 가장 심한 피해를 입은 곳은 다름 아닌 주변의 소형교회들이다. 대형교회는 주변의 소형 교회의 생존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대형교회는 카리스마적인 당 회장과 함께 최신의 모든 시설을 갖추며, 교회 프로그램의 풍성함, 전문 교육자를 통한 봉사, 그리고 교회 버스운영을 통하여 많은 성도들을 예배당으로 끌어 모았다. 이런 결과가 나약한 교회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많은 초년의 교역자들에게 목회에 대한 희망을 꺾어 버리게 하였고, 기독교 공동체의 일치성에 크게 손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따라서 대형교회의 출현으로 한국 교회의 생태계에 지각 변동이 왔으며 수백 명의 목회자들과 수천 명의 장로와 권사들이 함께 모여 봉사하는 초 대형교회가 있게 되었다.
        많은 대도시의 대형교회들의 경우에 수만 명의 회원을 가지며, 거액의 헌금이 모이며, 사회적 유명인사들이 교회를 매워가면서 교회의 문제점은 바로 담임 목회자의 힘있는 모습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대형교회가 보여준 문제점은 재벌 기업을 닮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형교회 목사들은 재벌 기업의 왕 회장처럼 행세를 한다고 한다. 겸손하고 섬기는 종의 모습은 사라지고 지배하고 명령하는 권위적 변형된 성직자의 모습은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바로 루터가 이런 잘못된 로마 카톨릭교회의 성직자들의 문제점들을 바로 고쳤던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얼마 전 한국의 어떤 대기업에서 누가 왕 회장의 후계자가 되느냐가 온 여론을 시끄럽게 뒤흔들었다. 이런 현상이 서울의 몇몇 대형교회에서 최근에 시끄럽게 기독교계와 일반 매스컴에 공개되었다. 교회의 담임목사의 아들이 대를 있는 세습문제의 부작용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런 절차는 아들의 목회철학과 인격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없이 또 교인들의 동의가 합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위로부터 내려오는 강한 카리스마로 처리하게 된다. 어떤 학자들은 몇몇 대형교회에서 나타나는 목회자 세습이 한국교회의 물량주의와 잘못된 소유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고 비판한다.
        이제 기존의 대형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의 성장과 발전에 급급하지 말고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겸허하게 욕심을 버리고 모든 교회의 권세를 주님께 맡겨야 한다. 우리 모두는 기존의 대형교회를 검증하고 감시하고 비판하지 못한 책임을 느껴야하지 않을까? 이것은 대형교회에 대한 간섭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공동체를 회복하는데 있어서 절실한 과제이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구성된 유기체로서 교회에 대한 사랑이다.
        성도들이 대형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특별한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어려운 교회에 대한 책임과 가난한 이웃에 대한 구제와 봉사 그리고 부패한 사회 속에서 참된 성도의 삶을 실천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군사의 훈련장으로 삼아야 한다. 대형교회의 목회자가 사회에서 명예와 권위를 입는 것이 아닌 철저한 자기 반성과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나누며, 자신의 사사로운 생각을 버리며 주님의 참된 뜻을 실현하는 종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4) 개 교회주의        

        한국 교회는 그 저변에 개 교회주의라는 사상으로 교회의 성장 신화를 이룩해 왔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지나친 잘못된 개 교회주의를 해체하고 기독교의 보편성과 통일성을 추구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갖게 되었다.
        개 교회주의란 무엇인가? 주님의 교회로서 보편성과 통일성 그리고 우주적인 참된교회를 추구하지 않고 오직 유형적 교회로서 지 교회의 외형적 성장만을 목표로 두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런 한국교회의 개 교회주의가 나타난 배경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네비우스 방법의 부정적인 면이 바로 개 교회주의를 낳았다고 한다. 강원돈, 2000년을 맞는 한국교회의 개혁과제.
초기 한국교회가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위하여 사용된 이런 네비우스 방법은 개 교회의 발전에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본다. 이런 면은 물론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자신의 교회만의 독립과 성장이 지상명령이나 되듯이 지나치게 될 때 타 교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 개 교회주의는 잘못된 교파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자신이 속한 교단의 강조와 타 교단에 대한 지나친 경쟁으로 기독교의 공동체 의식이 사라졌다. 이런 문제는 노회나 총회에서 타교단과의 교회의 통일과 협력을 이룩하지 못한 결과이다. 김남식은 교회의 일치에 부족과 경제적인 면에서 너무 집착한 점을 네비우스 선교 방법의 약점으로 지적한다. 김남식. 간하배, 『한국장로교 신학사상사특별 좌담회』, (서울:베다니, 1997), 176.
외국과는 달리 한국처럼 교파의 벽이 높아서 그 누구도 그것을 허물지 못할 정도이다. 이런 개 교회주의는 자신의 교회만을 성장시키려는 세속적 사고에 집착할 때 더욱더 심하다. 교인의 숫자만 많고, 건물을 크게 짓고, 헌금이 풍성한 그런 교회관을 목표로 할 때 발생한다.         이런 교회관으로 성장한 교회는 총회나 어떤 단체의 의견도 듣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들의 교회가 하나의 큰 독자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이런 교회는 기존의 교회의 법을 어기고 비상식적이며 비윤리적으로 방법으로 교회를 움직이게 한다. 이런 사상에는 교회의 종말론적이며 보편적 교회관이 사라지게 된다. 개 교회주의의 심각한 원인 중에 근본적인 것은 지나친 무자격 목회자의 과잉 배출이다. 현 한국과 미주의 각 교단 신학교와 신학대학원에서 졸업하는 신학생은 정확한 통계를 알 수 없지만 상상을 초월한다. 따라서 많은 목회자들이 서로 경쟁을 심하게 해야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어떤 학자들은 그 나라의 젋은 종교인들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나라가 부정적인 면도 많이 나타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 이유는 사회적 활동과 봉사를 한창 할 나이에 비생산적이며 정적인 삶에 많은 에너지를 쓰기 때문에 국가적 손실이 많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티베트와 같이 승려가 많은 나라가 대표적이라고 말한다.
        한국의 개 교회주의 문제점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첫 번째 개 교회주의는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시킨다. 주위의 주님의 형제 교회들을 같은 공동체로 보지 못하고 교회들을 지나치게 경쟁적으로 보며 교회의 통일성과 협력을 파괴 시킨다. 이런 결과는 이단을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게 하며, 기독교가 감당하는 사명을 효과적으로 실천하지 못하게 한다.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순교자의 피로 탄생한 기독교 교회의 권위를 추락시킨다.
        두 번째 지나친 개 교회주의는 독선과 아집으로 빠져 극단적으로 흐를 때는 이단으로 되기 쉽다. 특히 개 교회주의 속에서 강한 카리스마가 교회에 미칠 때는 이미 노회와 총회 그리고 교계의 올바른 조언을 더 이상 듣지 않는다. 지난 과거를 보면 이단들이 어떻게 거대한 모습으로 형성되었는지 고찰하면 이런 개 교회주의는 심각한 문제이다.
        세 번째 개 교회주의는 성도들을 교회에만 묶어 놓아서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 그리고 봉사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못하게 한다. 성도의 신앙 생활의 영역이 교회 영역에 한정되어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하지 못하고 지역적이며 현세적이며 형태적으로 흐르게 한다. 개 교회주의의 사고는 하나님에 대한 봉사가 오직 개 교회에만 국한되어 아브라함 카이퍼가 주장한 사회, 문화, 정치, 경제, 교육 등등에서 하나님의 영역 주권의 실현을 보지 못하게 한다. 자신의 대형교회를 사임하고 학교를 빌려서 예배를 드리는 김동호 목사  는 한 일간지에 이렇게 말한다. “그 동안 한국 교회는 너무 교회만을 위해 살아 왔어요, 그러다 보니 교회 일만 열심히 하고 사회에는 적응하지 못하는 이상한 종교인도 생겼지요, 건실한 사회인, 특히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사는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교회의 역할을 집중해야 합니다.“ 중앙일보 2002년 01월 10일.
그의 말은 한국교회 성도들이 개 교회주의에 묶여 사회에서 문화적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말이다.
        

5) 한국교회의 무속적 요소들

        현재 21세기의 한국사회는 무속으로 어울려진 희귀한 문화현상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세계적인 예술인 백남준의 예술이 샤마니즘과 통한다는 논의가 일고 있다. 동아일보 2002년 3월 21일. 기사 제목 "백남준 예술세계는 샤머니즘과 통한다".
http://www.donga.com/fbin/output?f=todaynews&n=200203210331&main=1
ꡒ첨단 미디어아트는 한국의 원초적인 샤머니즘과 통한다. 비디오아트와 같은 미디어아트는 가상과 현실 사이에 새로운 교류의 공간을 마련한다. 샤머니즘에서 무당은 죽은 자와 산 자의 세계, 저승과 이승, 초월 공간과 현실 공간을 매개하는 일종의 미디어 역할을 한다. 백남준(사진)의 비디오아트도 이같은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우리사회는 무속이 마치 오늘날 미풍양속인 것처럼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로 우리의 시선을 속이고 있다. 이런 모습들은 국제 회의 및 제 의식 그리고 대중매체를 통한 전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몇 년 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주최한 샤마니즘 국제대회에서 학자들이 샤만 유산의 마지막 발견이 한국이 있음을 직시하면서 한국의 샤마니즘의 보존을 위한 연구가 심도 있게 발표되었다. 『샤만유산의 발견』, Unpublished Paper,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1998년. 샤만니즘에 대한연구로  Mircea Eliade, Shammanism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6).
과거 역사 속에서 무속으로 종교화된 한민족 삶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새로운 문화를 입고 서서히 부활하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은 한국의 사회 단체들의 행사에서 진혼굿이 자연스럽게 수행한다고 한다. 또 최근에는 일간지들이 미신을 조장하는 무속광고를 여과 없이 자유롭게 싣는다. 심지어 휴대전화나 무선 인터넷 서비스를 통한 무속인들의 활동은 어떤 상담자 보다도 인기가 대단하다. 서울 강남의 어떤 동네는 무속왕국으로서 심지어 신 세대까지 무속인들이 공략하는 모습이 매스컴으로 통하여 방송되었다. 무속이 판치는 한국사회에서 교회는 미신을 타파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진리를 바라보게 하며, 참된 하나님을 믿도록 역할을 할 시대가 되었다.
        샤마니즘(Shamanism)에서 샤만이란 말은 시베리아의 퉁그스족의 언어인 saman(주술사)에서 유래했는데 무녀 예언자 및 의사를 뜻한다. 만주족의 살만과 인도의 sramana(산스크리트어로 승려)은 동일 계열의 어원으로 알려졌다. 샤만의 역할은 병마를 축출하고 재난과 불행을 예방하는데 주목적이 있다. 결국 현재적인 실리 본위의 원시적 종교형태이다. 한국 무속의 기원이 언제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주 오랜 고대사회 때부터 한민족의 주요한 신앙형태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학자들에 의하면 국조 단군이 무당이라는 설도 있다. 무속이 문헌상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삼국시대로서, 김대문에 의하면 신라 2대왕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은 왕호(王號)이자 무칭(巫稱)을 의미하며, 이 외에도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단편적으로 백재, 고려의 왕들이 무당을 이용한 기록이 있다. 샤마니즘, 『두산백과사전』.
이와 같이 한민족의 오랜 역사를 가진 무속은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한때 멸종한 듯 하다가 최근에 한국의 불황과 직업의 불안정 속에서 대다수 사람들과 특히 신세대 젊은이들 속에서 그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런 무속이 난무하는 시대 속에서 이런 무속적 요소들로부터 자유로운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와 무속에 관한 연구로 신경하, 무속 현상에 대한 목회적 대응, 『기독교사상』, 1996, 12월, 61-68.; 노치준, 한국 기독교와 기복신앙, 『전통과 현대』, 1998, 가을호, 134-151.

이런 요소는 전도에서 나타난다. 전도에 있어서 기독교를 기복적인 종교로 오해시켜서는 안된다. 예수 믿고 복 받읍시다 라는 말을 흔히 듣는데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마치 기독교가 물질적인 축복을 제공하는 샤마니즘적종교로 인식되기 쉽다. 성경이 말하는 내용은 예수를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어 이웃과 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호의 무속적인 위험은 예수를 믿는 것이 물질적인 축복과 정비례한다라는 믿음이다. 예수를 잘 믿으며 잘 살고 내 영혼이 매사에 잘된다는 의미로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신앙은 현세 중심적 기복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축복을 강조하는 신앙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따라오는 영혼의 투쟁, 질병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 가난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찾아 볼 수 없다. 영적이며 종말론적인 신앙을 강조한 바울의 경우는 이런 모습들이 오히려 더 많이 나타난다.
        어떤 교회들은 성령의 역사와 샤마니즘적 형태와 차이점이 힘들다. 성령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으로서 인격적이시며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카리스마를 강조하는 교회에서는 주로 성령은 병을 고치며 신비한 은사를 제공하는 영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분으로만 이해한다. 무당의 역할이 병든 자를 고치는 주된 임무와 마찬가지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병 고치는 일에만 제한 시킨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령이 오셔서 이 세상에서 역사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제한하는 것이 된다. 이런 성령 하나님의 제한은 성령의 충만함이 인격적이며 형제를 사랑하고 사회를 위한 봉사로 이어지는 것을 망각하게 한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을 기복적 신앙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많다. 이런 배경은 목회자가 건전한 신학을 알지 못하는데서 기원한다. 만일 어떤 성도가 교회에서 물질적 드림이나 봉사의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물질적 축복이 자신을 위하여 임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기복신앙에 가깝다. 아무 조건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참된 헌신이다. 어떤 대가를 기대하면서 자연에 속한 물질을 드린다면 로마 카톨릭교회의 실수를 다시 한번 하는 것이요 제물을 통하여 현세에서 복을 얻으려는 무속적 기복신앙이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과 봉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일이다.

6) 목회자의 윤리의 실종

        한국의 많은 목회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기도, 그리고 설교와 심방을 통하여 나타난 그들의 삶에 대하여 존경을 많이 받아 왔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최근 몇 년 사이에 지면에 쓰기 민망할 정도의 목회자의 윤리적 붕괴를 맞이하고 있다.
        기독교는 성경을 기반으로 하는 최고의 윤리적인 종교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지도자로서 윤리의 모범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목회자 가운데 하나님의 선택의 도구로 자신의 사명을 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최근 언론이 나타난 목회자의 윤리적 문제와 관련된 대표적인 사례를 보면 목회자의 윤리의 심각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몇 년 전 부천에서 자신의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다고 자신이 사는 이웃집들에 방화를 저질은 목회자가 있었으며,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돈에 노예가 되어 노름에서 번 돈을 주지 않는다고 채무자의 손을 자동차 바퀴로 밟은 목회자가 있었고, 산업금융채권 위조단을 만들어서 개척교회를 세우며 좋은 일에 쓰겠다고 말한 모 신학교의 부학장이 있었으며, 몇몇 목회자들로 만으로 구성된 교회가 돈의 사용에 문제를 삼아 자기들의 공동체에 속한 한 목회자의 아내를 집단 살해하고 오랫동안 시신을 부활시키려고 소동을 일으킨 목회자들이 있었으며, 평소 지역 주민에게 존경받고 참신했던 목회자가 빛을 갚기 위해 외설적인 비디오를 제작하여 판매하려다가 적발된 일이 있었다. 이런 일들은 목회자 윤리의 전형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먼저 목회자의 윤리의 심각성은 바로 성적 타락에서 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람들은 오늘날의 시대를 감각의 시대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 감성의 시대라고도 불리 운다. 대표적으로 감각적 성의 드러남이 현대사회에 두드러진 특징이다. 한가지 예를 들면 결혼전 성 경험은 해마다 그 숫자가 올라가고 있다. 국내 모 대학생들의 순결의식 조사에서 절반 이상이 혼전순결을 안 지켜도 문제가 없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학생이 여학생보다도 성욕이 강하다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이 더 많이 나왔다. 이런 조사에서 보듯이 이제 젊은이들 사이에 성 윤리는 무너지고 있다. 젊은이들 가운데 인생을 쾌락적으로 즐기고 보자 라는 사고로 전환 되고있다. 많은 인터넷 음란사이트들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 무작위로 수시로 많은 사람들에게 매일 공격적으로 이 메일로 전송하고 있다. 심지어 청소년들의 이 메일까지 보내고 있다. 바로 성적인 탈선의 문제는 이제 목회자들에게 예외가 될 수 없게 되었다. 기독교여성상담소에 따르면 98년 7월부터 2000년 10월까지 교회 내 성폭력 건은 51건이었으며, 이중 목회자 관련 성폭력은 46건으로 나타났다. http://www.8275.org/article/
한국성폭력상담소 99년 통계에서도 성직자 관련 성폭력 신고 건은 모두 32건이다. http://www.sisters.or.kr/
하지만 감추어지고 알려지지 않는 성폭력의 특성을 고려할 때 목회자의 이성문제는 위험수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이성문제로 교회에서 사임을 강요당하거나, 교회를 떠나는 일이 이제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성적타락은 목회자들에게 치명적인 것으로 성 개방 시대에 목회자의 윤리 의식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검증 그리고 철저한 책임이 요구되고 있다.
        최근 미국의 복음주의 학자가 한국에서 열린 세계 복음주의 신학회에서 발표하는 내용 중에 미국의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 역시 고액의 사례비를 받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Richard C. Gamble,  "Reformed Theology and its Relevance to Evangelical Theology," Unpublished Paper, International Conference on Evangelical Theology, Korea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2001. 44.
최근의 한 언론에서 보도 된 바에 의하면 한국의 어는 초대형 교회의 목회자는 연 1억 정도의 십일조를 교회에 헌금한다고 한다. 동아일보  2001년 6월 7일.
요즘 한국의 어떤 목회자들은 교회를 조용한 사임을 조건으로 또는 퇴임하는 조건으로 거액을 협상하는 실정이다. 교회 재정과 관련하여 어떤 목회자들은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교회의 공금을 개인적인 용도로 자기가 사용하고 심지어 성도들의 헌금까지 부당한 방법으로 이용한다고 한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을 유혹하는 또 다른 것은 명예에 대한 시험이다.  무슨 협의회 회장이니 노회장이니 총회장이니 하는 명예의 타이틀에 목매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다. 그 명예의 직함 보다는 섬기는 리더로서, 봉사하는 종으로서 그 사역을 모든 사람들의 추천과 자신의 헌신된 마음으로 그런 일을 한다면 너무나 아름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명예가 걸린 일에 서로 하려고 세상적인 방법을 쓰고, 그것도 돈을 뿌리며, 상대 후보와 깨끗하지 못한 경쟁을 통하여 선거에 이기려는 현상은 목회자의 윤리에 심각한 병리가 있는 것이다. 최근 어떤 교단에서는 제비뽑기를 통하여 총회장을 선출하였다. 이것은 학자들이 오래 전에 주장해 왔던 것으로 한국교회의 장래를 희망적으로 이끌 수 있는 좋은 사건이다. 국민일보 2002년 1월 3일.

        최근 한국 교회는 목회자들이 지나치게 권위를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목회자들 역시 개 교회에서 지나친 자신의 카리스마를 강조하지 말고 평신도에 대한 배려와 그들이 개 교회에서 받은바 은사를 충분하게 사용하여 주님의 교회를 바르게 성장하는데 도와주어야 한다. 교회는 목회자의 왕적인 기능을 감당하는 기관이 아니다. 손봉호 교수는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대부분 목에 힘을 너무 준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렇지 않은 분은 많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목회자의 윤리에 대하여 몇 가지의 좋은 조언을 한국교회에 남겼다. 손봉호 교수가 제안하는 목회자 윤리강령, 『디지털 성결』, 제316호 2001년 3월 10일.
“말과 행동에 거짓이 없으며, 감정적이고 야비하고 저속한 말을 하지 말며, 일 처리를 공명정대하고 합리적으로 하며, 편견, 편애, 과장, 왜곡을 피해야 한다. 소득과 소비에 있어 절제하고 검소하며, 자격 없이 명예, 지위, 권리의 획득을 시도하지 않으며, 가정에 충실하고 이성문제로 어떤 오해도 야기하지 말아야 한다, 기호와 취미활동에 지나치게 탐닉하지 않으며,타 종교인에 공정하고 예의를 지키고, 공익을 위한 사회적 활동은 하지만 파당적 정치활동에 관여하지 않는다.”  http://www.kehcnews.co.kr/news/2001/316/인물손봉호.htm
한국복음주의 협의회와 한국기독교총연맹에 의하여 공식으로 결정된 목회자 윤리 강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대로 살도록 지도하는 사명을 받았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알아야 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는데 있어서 모든 성도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 지키지 않는 가르침은 위선이요, 성도들의 성화와 복음전파에 큰 방해가 된다.”
        
3.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의 극복을 위한 과제

         한국교회는 잘못된 극단적 이원론의 세계관을 버리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 사상을 강조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위에서 분리되어 내세에 가는 곳이 아니라 바로 이 땅위에서 종말론적으로 실현되어가는 과정임을 교회에서 주장해야 한다. 이 세상을 도피하거나 적당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 문화의 변혁자로서 사는 크리스천의 삶을 말해야 한다. 제임스 사이어,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서울: IVP, 1986).

 잘못된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이제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되며, 오직 주님의 권위, 말씀의 권위, 성령님의 권위가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지나친 목회자의 카리스마와 맹목적 권위를 강조하기 보다는 목회자의 참된 기능과 평신도들의 은사에 맞는 교회의 참여가 요구된다. 이렇게 될 때 한국교회는 오늘날의 문제점들을 극복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지금과 같은 모습의 대형교회를 선호하고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 대형교회가 참다운 교회의 모습을 되찾고 올바른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감시와 철저한 비판이 필요하다. 이런 사역을 통하여 약화되어 가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성령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과거 한국 교회는 개 교회주의의 긍정적인 면을 통하여 교회에 대한 사랑과 기도 헌신과 봉사를 통하여 교회를 성장시켰다. 그러나 지금의 시점에서 개 교회주의는 기독교의 연합성과 통일성을 간과하여 지나치게 세속적인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이런 잘못된 개 교회주의 사고를 과감하게 떨쳐 버리고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라는 사고의 실현화가 요구되고 있다. 이런 일을 통하여 한국 교회는 올바른 말씀의 적용과 성령이 하나로 매는 역사를 통하여 새롭고 건전하게 성숙해 질 것이다.

한국교회는 샤마니즘의 요소들을 스스로 버릴 때가 되었다. 과거 경제적 어려운 시대에 기복적 물질의 풍성함에 대한 강조는 사람들이 받아 들였다. 그러나 기복적인 강조는 기독교의 본질을 흐리게 한다. 한국교회는 성경적인 축복을 바르게 가르켜야 한다.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예배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올바른 신학을 가르켜야 한다. 또 현세 중심적 구원의 축복은 이제 수정되어야 한다. 참된 축복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어지는 것이지 현세에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완성된 천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젠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자신을 돌아보고 올바른 목회자 윤리에 대한 의식이 먼저 새롭게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목회자는 신앙과 윤리가 조화를 이루어 타의 모범을 보이며, 지나치게 비 성경적인 권위주의를 탈피해야 하며, 주의 종으로서 청지기 의식을 가지며, 영성 뿐만 아니라 전인격의 수양도 필요하다.

 

복음 전파에 헌신한 바울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윤리가 무너져 가는 이 시대 속에서 목회자의 윤리의 회복을 위한 성령의 역사를 기대해 본다.

4. 결론

한국교회의 여러 신학적 문제점은 다양한 한국적 상황에서 형성되었다.

또 현대의 세속적 사상에 의해서 교회가 변질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국교회 역시 중세의 로마 카톨릭교회의 전철을 많이 닮아 가는 현상은 한국 교회가 성경에서 점점 벗어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한국교회는 성경의 권위가 실시되며 신학과 목회가 성경으로 검증 받아 참된 교회를 위한 올바른 신학의 모습을 되찾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은 이제 그 극복의 과제를 남겨 두고 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이지명 님





오른쪽 밑 톱니바퀴를 누르시면 고해상도로 보실수있습니다 ^^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딜리버러스 앙상블 (Deliverus Ensemble)은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폐와 다운증으로 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정규를 비롯하여 그 때까지 악기 다룰줄 몰랐던 대부분의 세운돌 자녀들이 부모님들과 함께 기도하면서 믿음으로 악기를 선택하게 된 것은 바로 2008년 12월 31일 저녁이었고, 처음으로 연습을 시작한 것은 2009년 1월 1일부터였습니다. 정말로 미약한 시작, 그 자체였습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도저히 믿겨지지 않을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개인레슨도 없이 각자가 기도하며 연습하는 가운데 악기 다루는 능력이 하루가 다르게 일제히성장하더니, 일 년이 채 되기도 전인 2009년 8월에는 음악 선교를 하게 되었고, 일 년이 조금 넘은 2010년 3월에는 하이든 작곡의 천지창조 중에서 "The Heavens are Telling," 바하 칸타타 중에서 "My Heart ever Faithful," Pachelbel의 "Canon in D," 그리고 1년 6개월만에 베르디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시벨리우스의 "Finlandia" 같은 곡들도 연주할 수 있는 수준으로 하나님께서 성장시켜 주신 것입니다.

요즈음은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악기 연주를 통하여 "하나님의 선함과 신실하심, 놀라운 능력과 사랑"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출처: USA아멘넷 게시판/공부합시다

'찬양의 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Glorious Day(Living He Loved me)  (0) 2012.12.11
왕의_왕(유대_땅_언덕에)  (5) 2012.12.10
Bleesed Be Your Name(Worship Video /Iyrics)  (1) 2012.11.29
목양연가 Praising  (14) 2012.11.26
Thank You - With Lyrics  (0) 2012.11.20

 

거짓 선지자에게 대한 경계 스데반의 한절 묵상

2012/12/05 06:32

 

 

마태복음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예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에 대한 '특징을' 분명하게 하셨다. 그들은 '악한 일'들을 하는 자들인데 그 '악한 일'이 다름 아닌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은 이러한 일들을 행하며 주님을 위해 일한다고 부르짖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일을 하였다고 말씀하신다. 

 

필자는 거짓 선지자들의 '불법'이 무엇이었을지를 고민하였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은 그들의 '불법'은 다름 아닌 '예언', '귀신 내어쫓음', '많은 기적을 베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1절에서 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21절).  

만일 이 구절을 거짓 선지자와 관련해서 적용한다면 믿음과 순종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지 않은 예언,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은 귀신 내어 쫓음, 주의 능력으로 행함이 아닌 기적 행함으로 군중을 미혹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방법이 성경에 많이 있지만 주 예수님께서 친히 알려주신 가장 쉬운 방법은 거짓 예언, 귀신 내어쫓음, 많은 기적을 베푸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거짓 선지자의 행위를 주 예수께서 위 세 가지로 요약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언한다고 하는 자들, 귀신을 내어쫓는다는 자들, 많은 신유 및 기적들을 베푼다고 하는 자들이 있으면 일단 주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무조건 경계하라. 그 이유는 주의 백성이 바른 신앙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예언이나 신유나 귀신 내어쫓는 요소는 전혀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를 믿는 믿음 가운데 성령의 능력으로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거룩하여지는데 온 맘을 기울이도록 하라. 그것이 성도의 본분이다. 

 

[출처] 거짓 선지자에게 대한 경계|작성자 스데반 황/ 생명수 쉼터/한아름

  • 대한기독교 장막성전(유재열)

    한국기독교가 100년이상을 지내오면서 이단을 이끌어온 교주 중 가장 나이가 어린 교주를 꼽으라면 대한기독교장막성전에 유재열(柳在烈)을 들 수가 있다. 그는 17세의 ‘어린 종’으로 이 집단을 이끌어온 장본인이다. 전성기때에는 말세 심판의 피난처로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막계리 청계산 저수지 가 있는 곳에 박태선의 제2의 신앙촌 크기로 장막성전이 큰 집단으로 형성돼 있기도 했다. 7천사, 25장로, 48집사, 72문도 등의 조직을 형성하고 수천명의 교인들을 이끌던 어린 종 유재열 교주의 행각을 알아보자 !

    교주 유재열은 1949년 2월 충북 청주시에서 아버지 유인구씨와 어머니 신종순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유인구씨는 6·25때 공산당에 동조하여 활동하다가 50년 10월 28일에 특별조치법위반혐의로 징역 15년 형을 받고 복역한바 있기도 하다.

    교주 유재열은 1964년 서울 영등포구 상도동 사자암이라는 절아래에서 신비주의 집단인 호생기도원을 다녔다고 한다. 호생기도원에서 교주를 “주님, 아버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보고 크게 마음이 동요된 것 같기도 하다. 유재열의 부모가 이곳에 열심있는 신도였다. 교주 유재열은 성남고 기계체조 선수로서 일본원정을 다닐만큼 재능있는 선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호생기도원에서 방언을 하는데 중국어(?)방언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은사를 받으면 일본어 방언을 받을 것 같아 열심히 호생기도원에 다녔다고 한다.

    1965년 1월 유재열이 친구들과 함께 호생기도원을 가는 도중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져서 놀라 무릎을 꿇자 어둠속에서 예수님의 환상이 나타나셨는데 예수님의 머리위에는 무지개가 있고 일곱 별이 떠있었으며 한 손에는 어린양 한 마리를 안고 계시더라는 것이다. 이때 유재열이 “사람이 나타났다”고 외치자 같이 동행했던 친구들이 무슨 소리냐고 물으며 어리둥절해 했다. 그때 유재열이 “흰 강아지를 사람이 안았다”며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그순간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사랑하는 아들아 내 아들아… 내가 네게 큰일을 맡기겠노라”는 말씀이 들렸다고 한다.

    그후 호생기도원을 더욱 열심히 다녔으며 학교를 중퇴하라는 계시를 받고 학교를 그만두고 기도생활만 열심히 하여 방언, 강필(降筆), 통변 등의 계시의 은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때 호생기도원 교주 김종규의 여신도 추행사건이 일어나 그 일로 교주를 추방하였다. 그런 뒤 장막성전이 만들어졌고 자신들 나름대로 교리를 내놓기도 했다.

    중요한 교리로는 특이하게 ‘일곱천사’가 있고 그 일곱천사가 과천장막성전에 있어야 될 이유를 “또 이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일곱재앙을 가진 일곱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계 15:5-6) 라는 성경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어린종 유재열이 만국을 다스릴 철장권세를 가졌다고 주장하며 또 어린종은 예루살렘성 교회에 다니면서 불의와 불법으로 인하여 탄식하는 자들의 이마에 인치는 사명을 맡았으며 이 인맞은 자만이 14만 4천의 반열에 들어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성교회의 목사는 믿음이 교만해져 자멸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따르는 양떼들은 거짓된 인도로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장막성전에서는 계급별로 뺏지를 달았다. 7천사는 은색, 24장로는 흰색, 48집사는 붉은색, 72문도는 푸른색, 일반 신도는 검정색 뺏지를 달고 다녔고 제사장 모세 장로는 은색에 하얀색 바탕을 한 뺏지를 달고 다녔다고 한다.

    이곳에 신령한 예배 시간이 있는데 흔히 무당 초혼의 초혼 의식과 같이 각종 영들을 불러 들이는 예배 의식이다. ‘사무엘’ 정창래가 방언을 하면 어린종 유재열이 방언 통역을 한다. 신령을 불러 들이는 순서에서 가령 ‘모세의 영’을 불러 들이려 한다면 방언하는 자가 “모세스 모세스. 따따따”하면 모세의 영이 임하여 방언이 터진다는 것이다.

    장막성전의 분파로서는 재림예수를 자처하는 ‘천국복음전도회 교주 구인회’, ‘신천지안양교회/무료 성경신학원의 이만희’ 등이 있다.


+ Recent posts